오늘 우리를 위하여 오신 참 빛 되신 주님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2:10, 11)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9)

 

 

※ 오늘 부를 찬송가는 순서대로 찬115, ‘기쁘다 구주 오셨네’, 찬125, ‘천사들의 노래가’입니다.

 

 

오늘은 성탄절 당일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먼저 1225일이 성탄절이 된 유래와 그 의미를 살핀 후, 이어서 오늘 본문을 살피고자 합니다.

 

 

우선 왜 1225일인가입니다. 정말 그날 주님이 태어나셨을까요?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날짜는 나오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1225일은 초대 교회 이후 형성된 전통적 기념일일 뿐입니다.

 

여기에는 로마 문화적 배경이 있는데요, 로마에는 ‘동지’(冬至) 전후에 열리던 ‘무적의 태양(Sol Invictus) 축제라는 게 있었습니다. ‘동지’는 어둠이 가장 깊은 날이지만, 이날을 기점으로 다시 낮, 곧 빛이 길어지는 날이지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빛이 어둠을 이기는 시점으로 본 것입니다. 주님을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1:9)으로 본 초대 교회는 그래서 동지의 이런 상징을 ‘세상의 빛으로 오신 주님’과 연결한 것입니다. 즉, ‘동지’의 특징과 로마의 ‘축제’라는 상징을 차용, 이날을 주님 오신 성탄절로 삼은 것이지요. 날짜의 정확성보다 의미의 정확성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주님 오신 그 실제 시기를 짐작할 때도 12월 설은 좀 무리가 있는데요, 그 이유는,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2:8)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유대 지역에서 12월은 우기, 한랭기이며, 밤에 들에서 양을 치는 것은 봄에서 가을 사이가 일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때만 특별히 당시 호적 명령으로 대규모 이동도 있었고요. 이런 현실적 이유로 주님의 탄생을 12월, 그것도 25일로 보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하는 것입니다.

 

주님 탄생의 그 가장 유력한 시기를 유대 절기와 연결지어 생각할 때, 학자들과 신학자들이 가장 주목하는 절기는 바로 ‘초막절(Sukkot, 티쉬리월 / 9-10)인데요, 왜냐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14)라는 말씀에서 이 ‘거하시매’라는 말이 바로 ‘장막을 치다, 초막을 세우다’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초막절은 바로 하나님이 백성과 함께 거하심, 곧 ‘임마누엘’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계심을 선포하는 절기이지요. 이 절기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하는 ‘강생’(降生, 신이 인간으로 태어남)의 핵심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또한 이 절기는 ‘빛의 절기’이기도 합니다. 이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거대한 등불 점화가 있기 때문인데, 이는 ‘나는 세상의 빛(8:12)이라 하시는 주님의 선언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초막절에 오셨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견해가 매우 강하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실제 역사 연대기보다 섭리의 질서입니다. 주님의 강생은 자연의 한 날이 아니라 인류의 영적 밤의 한가운데에 비추어진 ‘새 날’이기 때문이지요.

 

결론적으로, 1225일은 역사의 어떤 한 날짜라기보다는 인류의 ‘어둠이 가장 깊을 때 오신 빛’이라는 상응적 표지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특정 날짜보다, 인류가 가장 어두워진 ‘’에 오신 것이지요.

 

참고로, 이 ‘어둡다’는 것은 어떤 한 시대가 주님의 선과 진리에 대해 완전히 깜깜한 상태를 말합니다. 교회 밖 세상인 로마는 그때가 가장 찬란한 시절이었지만, 정작 교회 안은 그때가 가장 어두운 때였습니다. 주님이 누구시며, 언제, 왜 오시는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고, 또 관심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적으로 ‘새 교회’는 항상 이전 교회의 종말의 때에 일어납니다. 가인 계보의 라멕 때가 그랬고, 셋 계보의 라멕 때가 그랬지요. 태고 교회에서 고대 교회로, 고대 교회에서 유대 교회로, 그리고 유대 교회에서 기독 교회로 이어져 온 이 교회 시대마다 이런 종말과 일어남은 반복되었고, 그것이 주님의 오심, 곧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의 강생, 주님의 초림으로 지금 유대 교회에서 기독 교회로 새 교회 시대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지난 2천 년을 이어온 현 기독 교회는 말씀의 속뜻으로 오시는 주님의 재림으로 종말을 고하고, 지금은 이후 영원한 ‘새 교회’로 옮겨 가고 있는 중이며, 주님 초림 당시에 침례 요한을 통해 그 준비를 하셨다면, 주님 재림의 지금은 스베덴보리를 통해 그 준비를 하신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2:10, 11)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신다면, 보통은 하나님은 신이시므로 그 권능과 위엄을 떠올립니다. 과거 세상을 호령한 왕과 황제들, 영웅들의 개선이 그랬으니까요. 그러나 성탄의 주님은 가장 연약한 모습, 말도 못 하는 아기로 오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겸손의 상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삶 안으로 실제로 들어오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참 역설적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께서 이토록 조용히, 심지어 들에서 밤에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을 상대로 참 초라하게, 그것도 여관에 빈방이 없어 마구간에서 태어나 말 구유에 누이시다니요! 주님의 방식은 참 다릅니다. 세상 방식과 정말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주님이 부여하신 쓰임새의 삶을 살 때 주님이 일하시는 이런 방식을 반드시 따라야 하겠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경하러 오셨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인간 안에서 다시 시작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성육신은 인간 안에서 하늘과 땅을 다시 연결하시는 사건, 즉. 외적 역사보다 내적 탄생이며, 또한 빛은 지식이 아니라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을 다음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성탄은 ‘하늘과 땅이 다시 이어진 날’

 

천사는 말합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2:11)

 

이 말씀은 단지 한 아기의 출생을 알리는 소식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끊겨가던 하늘과 인간의 연결이 다시 열렸다는 선언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자기를 지은 창조주와 늘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어야만 존속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왜 태어났는지도 모른 채 그저 자기 잘난 맛으로 사는 줄 알지만 말입니다. 존속이란 존재를 유지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께서는 우리를 지으신 후 나 몰라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늘 순간순간 존속할 수 있도록 우리로 하여금 자신과 연결되어 자신의 생명을 공급받아 살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마치 가지가 포도나무에 연결되어 있어야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처럼 말입니다.

 

창조주이신 주님과 연결된다는 것은 주님의 성품, 곧 그 신성과 연결된다는 말이며, 이는 곧 그분의 선과 진리로 연결되는 걸 말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세상은 그 반대인 악과 거짓으로 정반대의 길을 걸었고, 그 결과 세상에는, 그리고 우리 안에는 더 이상 주님의 신성이 남아있지 않게 되어 인류의 생명 유지 장치가 곧 ‘삐...’ 소리를 낼 단계까지 오게 된 것이지요.

 

이때입니다. 주님이 우리 중에 한 아기로 오신 때가 말입니다. ‘너희를 위하여’라는 말은 창조주이신 주님과의 연결이 끊어질락 말락 하는 순간에 그 연결을 다시 잇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를 다시 창조주의 생명으로 계속해서 살게 하시려고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과 땅이 다시 이어지는 것’입니다.

 

 

둘째, 성탄의 빛은 ‘지식’이 아니라 ‘생명’

 

요한복음은 말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1:9)

 

이 빛은 머리를 밝히는 정보가 아니라, 삶을 바꾸는 빛입니다. 전자는 오용(誤用)될 경우, 세상살이에만 능하게 할 뿐이지만, 후자는 속 사람을 변화시켜 천국으로, 그래서 주님께로 인도하는 영원한 빛입니다. 그래서 성탄의 빛은 학자보다 목자에게 먼저 비쳤고, 성전보다 들판에 먼저 임한 것입니다. 주님의 빛은 많이 아는 사람보다, 살고자 하는 마음, 선해지고자 하는 작은 의지 안으로 먼저 들어옵니다. 빛이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상태가 결과를 초래하는, 자초하는 것입니다. 햇빛이 방안에까지 들어오지 못하는 이유가 햇빛 때문이 아니라 내가 아직 커튼을 걷지 않았기 때문인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어찌 보면 하나의 그릇입니다. 영을 몸 안에 담고 다니는 그릇, 주님을, 그리고 주님의 빛을 담고 다니는 그릇 말입니다. 다음 주님 말씀이 생각납니다.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5:14-16)

 

우리는 생명 되신 주님을 담고 사는 생명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셋째, 성탄은 ‘주님이 우리 안에 태어나시는 시작’

 

성탄은 과거의 사건이지만, 동시에 지금도 계속되는 사건입니다. 주님은 한 번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끝나신 분이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 마음이 낮아질 때, 우리 삶이 주님을 모실 자리를 낼 때, 그분은 우리 안에 다시 태어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미움 대신 용서를 선택할 때, 이익보다 선을 택할 때, 진리를 알고 나서 그것을 살아내려 할 때 말입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 안에서 아기로 오셨다가, 점점 주님으로 자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성탄의 비밀입니다. 구주는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 삶 안에서 점점 주가 되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한테서 나오는 모든 것, 곧 사랑, 빛, 선, 생명, 말씀 안에는 주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성탄은 하루의 절기가 아니라 삶의 방향 전환입니다. 주님이 인간이 되신 이유는 우리가 주님을 바라만 보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기도를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특별히 오늘 주님 오신 성탄절에 저희 가운데 오셔서 저희 생각을 비추시고, 저희 선택을 인도하시며, 저희 삶 안에서 저희의 주님이 되어 주세요.

 

그때 성탄은 추억이 아니라, 현재가 되고, 주님은 우리 안에 살아 계신 구주가 되십니다.

 

성육신하신 주님의 참된 빛이 여러분의 삶 전체에 머물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설교

2025-12-25(D5)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4. 2025-12-25(D5)-성탄절예배(눅2,10-11, 요1,9), ‘오늘 우리를 위하여 오신 참 빛 되신 주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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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에 나오는 ‘기억-지식’이라는 게 뭔가요?

 

 

1. 기억-지식이란 무엇인가 (scientia / memory-knowledge)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기억-지식’은 한마디로 말해, 기억 속에 저장된 모든 앎의 재료들, 곧 사실, 정보, 교리 문장, 경험, 개념, 언어, 기술 등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모두 기억-지식에 속합니다.

 

* 성경 구절을 암기하고 있는 것

* 교리 문장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

* 이건 옳고, 저건 틀리다라고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것

* 철학, 신학, 과학, 역사, 윤리 지식

* 삶의 경험에서 얻은 판단 기준

* 설교를 많이 들어서 쌓인 신앙 용어들

 

중요한 점은, 기억-지식은 아직 ‘’, 곧 삶이 되지 않은 앎이라는 것입니다.

 

 

2. 기억-지식은 어디에 속하는가 – ‘자연적 차원’

 

스베덴보리 체계에서 기억-지식은 분명히 자연적 차원에 속합니다.

 

* 몸에 속하고

* 뇌와 기억에 저장되고

* 말로 설명할 수 있고

* 잊어버릴 수도 있고

* 옳게도, 그르게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424에서 장인(artificer)이 기억-지식의 표상으로 등장합니다. 장인은 재료를 다루는 사람입니다. 기억-지식도 마찬가지로, 아직은 재료일 뿐입니다.

 

기억-지식 자체는 선도 아니고, 진리도 아닙니다. 아직은 선과 진리가 될 가능성일 뿐입니다.

 

 

3. 기억-지식 ≠ 신앙

 

스베덴보리는 아주 단호하게 말합니다.

 

기억-지식은 신앙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이해와 의지의 결합이고, 기억-지식은 기억에 저장된 정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 ‘이웃 사랑이 중요하다’를 아는 것 → 기억-지식

* 그 말이 옳다는 것을 내적으로 납득함 → 이해

* 실제로 그렇게 살려고 하는 마음 → 의지

* 그 결과 삶이 바뀌는 것 → 신앙의 시작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자주 이런 구조를 사용합니다.

 

기억-지식 → 이해 → 신앙 → 삶

 

이 순서가 뒤집히면, 즉 기억-지식이 이해와 삶을 지배하면 → 가인의 길이 됩니다.

 

 

4. 왜 기억-지식이 위험해질 수 있는가

 

기억-지식은 중립적입니다. 그래서 두 가지 방향으로 갑니다.

 

① 위로 열리면 (정상 질서)

 

* 기억-지식 → 이해의 도구

* 신앙과 체어리티에 봉사

* 두발가인처럼 ‘스승(instructor)이 됨

 

② 아래로만 닫히면 (타락)

 

* 기억-지식 → 자기 확신의 무기

* 거짓을 꾸미는 재료

* 우상을 만드는 장인의 도구 (AC.424)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기억-지식은 주인을 잘못 만나면 우상을 만들고, 주님께 복종하면 성전을 짓는다

 

 

5. 기억 지식은 왜 꼭 필요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지식은 절대 제거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기억-지식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말씀, 설교, 교리, 성경 언어는 모두 기억-지식의 형태로 먼저 들어옵니다. 기억-지식은 영적 씨앗이 심길 토양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억-지식은 신앙의 출발점이지만, 목적지는 아니다

 

 

6. 정리

 

기억-지식이란 아직 삶이 되지 않은 앎, 주인을 기다리는 재료, 신앙을 섬길 수도 있고, 신앙을 죽일 수도 있는 자연적 지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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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과 그의 두 아내, 아다와 씰라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18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4:16-24)

 

 

보통은 성탄절을 앞둔, 그러니까 오는 목요일(25)이지요, 오늘 같은 주일은 성탄 관련 본문으로 주일 설교를 준비하는데요, 저도 이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AC에 헌신하기로 한 이상, 앞으로는 거의 모든 절기 설교들조차 꾹 참고 가급적 오직 한 우물만 파는 게 맞는 것 같아 오늘도 창세기 본문을 준비했습니다. 이점 다들 양해 바라며, 다만 성탄 당일은 따로 성탄 축하 예배를 오전 10시에 드리겠습니다. 성탄 설교는 그때 나누기로 하지요.

 

 

오늘 본문은 성경 전체에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나고, 성을 쌓고, 족보는 계속 이어지며, 문화와 기술은 발전하고, 음악과 금속 가공까지 등장합니다. 겉으로 보면 문명은 전진하고, 삶은 풍요로워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흐름을 ‘’이 아니라, ‘황폐(荒廢, vastation)로 향하는 길로 묘사합니다. 왜일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문명이 발전하면 교회도 살아 있는가? 외적 번영이 곧 영적 생명인가? 스베덴보리는 이 본문을 주석하면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그리고 주님께서 그 한가운데서도, 즉 상황이 가장 안 좋을 때도 그 가운데에서 어떻게 새 교회를 준비하시는지를 다음 세 가지로 보여 줍니다.

 

 

첫째, 여호와 앞을 떠난 신앙은 성까지 쌓지만 결국 생명을 잃는다 (16-18)

 

16절은 오늘 본문 전체의 방향을 결정하는 말씀입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4:16)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는 단순한 장소 이동이 아니라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상태’를 뜻합니다. ‘여호와의 얼굴’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선을 의미하는데, 가인은 그 앞을 떠났기 때문이지요. 즉, 신앙은 남아 있으되, 사랑과 생명에서 분리된, 떨어져 나간 상태인 것입니다.

 

그 결과 가인은 ‘놋 땅에 거주’, 곧 진리와 선의 바깥에서 살며, ‘성을 쌓고’, 즉 성읍을 세웁니다. 성경에서 ‘(, city)은 언제나 ‘교리 체계’를 뜻하는데요, 가인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교리로 자신을 방어하는 구조’를 만듭니다. 이것이 ‘성을 쌓는’ 것이며, 그래서 성경에서 ‘에녹(Enoch)은 ‘신앙을 교리화하여 체계적으로 정돈하는 사람’을 표상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창4 가인 계보와 나란히 진행되는 창5(Seth) 계보에서도 동명이인인 ‘에녹’이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창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의 속뜻이 바로 이런 건데요, 그러니까 당시 에녹이 힘쓴 나름의 ‘신앙의 조직화’, 즉 오늘날 조직신학 같은 정돈을, 그러나 주님은 이런 건 태고교회에 맞지 않기 때문에 홍수 후 세대를 위해 잠시 보류하시는데, 그걸 저렇게,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처럼 점잖게 표현하신 것이지요. 그동안 우리는 저 본문을 ‘에녹이 얼마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으면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가셨을까... 우리도 저런 에녹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라며 설교했고, 그리고 ‘아멘!’하며 받아들였지요. 우리가 성경을 겉으로만 읽어도 웬만하면 충분하지만, 가끔 이렇게 전혀 엉뚱한 삼천포로 빠질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가급적 속뜻도 함께 알 수만 있으면 아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 그리고 여기서 한가지, 그럼, 스베덴보리는 이런 걸 어떻게 알았던 걸까요? 주님이 스베덴보리 곁에서 불러주는 걸 그는 그저 딕테이션(dictation), 그러니까 받아적기만 한 건가요? 전에 제가 잘 모르고 이렇게 여러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오늘 이 부분을 좀 바로잡고자 합니다.

 

설교 중이니 짧게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는 성경에 없던 새로운 의미를 발명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말하기를, “성경의 속뜻은 이미 하늘(영계)의 질서 안에 존재하며, 그 질서가 문자 속에 ‘상응’(correspondence)으로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영계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질서와 구조가 성경의 이름과 계보, 배열 속에 상응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나는 성경을 새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스스로 사용해 온 언어를 끝까지 따라갔을 뿐이다. 나는 영계에서 천사들이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듣고, 보고, 검증하도록 허락받았다.” 즉, 그는 새 내용을 받아 적은 예언자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영적 의미를 관찰하고 확인한 증인’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합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점 하나는, 스베덴보리는 자기 개인의 생각이나 계시를 성경 위에 두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의 일관성과 맞는가?”, “다른 본문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하는가?”, “교회의 역사 전체와 어긋나지 않는가?” 이 기준을 통과하지 못하면 아르카나로 제시하지 않았지요. 결론적으로, 스베덴보리는 ‘새 계시의 전달자가 아니라 계시의 구조를 열어 보인 사람’입니다. 비유하자면, 그는 새 음악을 작곡한 사람이 아니라 이미 연주되고 있던 음악의 악보를 보여 준 사람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그는 반복해서 말합니다. “이것이 참인지 아닌지는 내 말을 믿지 말고, 성경과 삶에서 직접 시험해 보라”고 말이지요. 거듭 말씀드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을 새로 쓰거나 받아 적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성경이 하늘에서는, 그러니까 천사들 사이에서는 어떻게 이해되는지를 오랫동안 보고 확인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고, 그 이해가 성경 전체와 일치할 때만 주석으로 남겼습니다.

 

네, 우선 이 정도로만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이런 아르카나를 알 수 있었나에 대해 그동안 제가 잘못 전달한 부분을 바로잡습니다.

 

오늘 본문 관련, 계속해서 말씀드리면,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신앙이 사랑을 잃으면, 반드시 체계를 강화한다’는 사실과, ‘살아 있는 관계 대신, 안전한 구조를 선택한다’는 사실입니다. 8백 년 전 사람인 성 프란체스코도 그의 열두 명의 제자 중 이 가인 같은 제자, 에녹 같은 제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로 말미암아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프란체스코 말년에 큰 어려움은 물론 훗날 크게 변질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체어리티가 안 보이는 신앙생활의 맹점이며, 초래하는 무서운 사실입니다.

 

그 이후 이어지는 족보는, 생명의 계보가 아니라 ‘이단(異端, heresy)의 계보입니다. 한 오류는 또 다른 오류를 낳고, 신앙은 점점 추상화되고, 삶과 분리됩니다. 가인의 길은 단절되지 않고 계속 확장되어 가지만, 안타깝게도 그 확장은 생명의 확장이 아니며, 그 끝은 황폐함, 곧 종말입니다.

 

 

둘째, 그러나 ‘황폐’(荒廢, vastation)의 끝에서도 주님은 새 교회의 씨앗을 심으신다 (19-22)

 

19절에서 갑자기 분위기가 바뀝니다.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4:19)

 

라멕에게 두 아내, ‘아다(Adah)와 ‘씰라(Zillah)가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을 신앙이 거의 완전히 사라진 황폐의 극점(極點)으로 보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주님은 새 교회의 윤곽을 보여 주십니다.

 

아다는 새 교회의 ‘천적, 영적 차원’을, 씰라는 ‘자연적 차원’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자녀들이지요, 먼저 ‘야발(Jabal), 아다의 아들인 야발은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 곧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을 의미하고, 다음은 그의 아우 ‘유발(Jubal)입니다.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 즉 신앙의 정서와 질서를 의미합니다. 다음은 씰라의 아들 ‘두발가인(Tubal-Cain),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 곧 자연적 삶의 기술과 질서를 의미합니다. 그의 누이 ‘나아마(Naamah)는 유사한 교회, 즉 그 교회 밖에 있는 자연적 선과 진리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문명의 발전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가 회복될 때 반드시 필요한 요소들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것입니다. 이 새 교회는 황폐가 끝나기 전에 싹으로만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아직 시대를 바꿀 힘은 없고, 여전히 가인의 계보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완성된 새 교회가 아니라, 주님이 미리 심어 두신 씨앗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위로를 받는데요, 그것은 가장 어두운 때에도, 주님은 결코 손 놓고 계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입니다.

 

 

셋째, 문화가 극에 달할수록, 교회는 침묵하고 홍수는 가까워진다 (23, 24)

 

23, 24절은 충격적입니다. 라멕이살인을 노래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4:23)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은 ‘신앙’, ‘소년’은 ‘체어리티’입니다. 이는 더 이상 싸움이 아니라, 영적 생명의 완전한 붕괴를 뜻합니다. 라멕은 신앙도, 사랑도 모두 죽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절망이 아니라 ‘자기 확신’입니다. 절망을 해도 모자랄 판에 확신을 하고 앉아 있는 것이지요.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4:24)

 

이는 하나님의 보호를 신뢰하는 말이 아니라, 심판마저 상대화하는 교만이요, 거룩한 것을 숫자로 계산하는 상태입니다. 이미 선을 넘은 것이며, 돌이킬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깨닫습니다. 문명은 최고조에 이르렀지만, 교회는 완전히 황폐되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홍수’가 필요했습니다. 홍수는 벌이 아니라, ‘시대 전환’입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뒤섞이는 상태를 끊고, 주님께서 보존하신 ‘노아’, 곧 리메인스를 통해 완전히 다른 방식의 교회인 양심의 교회를 시작하시기 위함입니다. 퍼셉션(perception)의 교회가 더 이상 존재, 존속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늘 주님과 연결되어야 있어야 살 수 있는데, 인류의 첫 연결 방식인 퍼셉션이 막을 내렸기 때문에 주님은 부득이하게 그보다는 못하지만 새로운 방식인 ‘양심’이라는 연결 방식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바로 ‘노아’ 때부터 말이지요. 이 둘의 차이는 전자인 퍼셉션 방식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신앙하는 반면, 후자인 양심 방식은 주님 사랑을 신앙을 통해 배워서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모독(冒瀆, profanation)을 이토록 엄중하게 다루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죄나 오류가 아니라 인간의 영적 구조 자체를 파괴하여 회복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모독’이란, 사람이 주님의 진리와 선을 알고 인정하며 어느 정도 믿기까지 한 뒤에, 그것을 삶에서 의도적으로 거부하거나, 자기 욕망, 자기 영광, 권력, 이익을 위해 왜곡하여 사용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때 일어나는 가장 심각한 결과는, 인간 안에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분리되지 못한 채 강제로 결합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속 사람에는 주님께서 보존하신 리메인스, 곧 선과 진리의 흔적이 저장되어 있고, 겉 사람에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온 악과 거짓이 자리 잡고 있는데, 모독은 이 둘을 억지로 섞어 버립니다. 그 결과 인간의 마음은 어느 한쪽으로도 돌아설 수 없는 상태, 즉 선을 완전히 택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악으로 완전히 떨어질 수도 없는 ‘내적 분열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를 ‘영혼이 찢어진다’는 표현으로 설명하는데, 이는 사후 세계에서 그 사람이 극심한 고통과 혼란 속에 놓이게 됨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영계에서는 사람의 내적 상태가 그대로 드러나므로, 선을 사랑하는 부분과 악을 사랑하는 부분이 동시에 활성화되어 서로를 끊임없이 공격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이 상태에 놓인 영들은 가장 깊은 불안과 자기혐오, 분노와 절망 속에 머물게 되는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지옥 가운데서도 가장 참혹한 상태’라고까지 말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모독이 반복될 경우, 주님께서 인간 안에 보존하신 리메인스 자체가 훼손될 위험이 생긴다는 점입니다. 리메인스는 거듭남의 유일한 토대이기에, 이것이 손상되면 주님께서 더 이상 그 사람을 새로운 상태로 인도하실 길이 거의 사라집니다. 바로 이 때문에 주님은 사람을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상태로라도 머물게 하시고, 심지어는 신앙 자체를 거의 잃게 되는 황폐를 허락하시면서까지 모독만은 피하도록 섭리하십니다. 차라리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상태는, 새 빛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알고 믿으면서도 거부하고 뒤섞는 모독의 상태는 그 가능성 자체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독은 단순히 ‘나쁜 죄’ 정도가 아니라, ‘인간이 주님과 다시 연결될 수 있는 내적 구조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결정적 단절’이며,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말하듯, 주님께서 모독을 무엇보다 엄중히 금하시고, 역사 전체를 통해서까지 그것을 막으시는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거울’입니다.

 

우리는 성을 쌓고 있습니까, 아니면 장막에 거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신앙을 방어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랑으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문화와 성취가 커질수록, 우리는 더 겸손해지고 있습니까?

 

주님은 황폐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모독을 막기 위해 황폐를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언제나 ‘새 교회의 씨앗을 숨겨 두십니다’.

 

오늘도 주님은 묻고 계십니다. “너는 가인의 성에 살 것인가, 아니면 노아의 방주로 들어올 것인가?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우리가 겉으로는 풍요로워 보이나 속으로는 사랑을 잃은 신앙이 되지 않게 하시옵소서.

 

성을 쌓는 교회가 아니라, 장막에 거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교회가 되게 하시옵소서.

 

황폐의 시대에도 주님께서 숨겨 두신 리메인스를 소중히 여기게 하시고, 새 교회의 씨앗을 알아보는 눈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우리 안에 참된 체어리티를 다시 살리시고, 노아의 방주와 같은 양심으로 이 시대를 건너가게 하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설교

2025-12-2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3. 창4.4, 2025-12-21(D1)-주일예배(창4,16-24, AC.397-433), ‘라멕과 그의 두 아내, 아다와 씰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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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12/28, 창4:25-26),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25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셋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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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12/14, 창4:13-15), '가인에게 표를 주사'

가인에게 표를 주사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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