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2.심화

3. 여기서 말하는 태고교회, 천적 천사들의 의미

 AC.32 본문,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습니다.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합니다.’(The most ancient church acknowledged no other faith than love itself. The celestial angels also do not know what faith is except that which is of love.) 말인데요, 제가 알기로 태고교회도 그 후대로 갈수록 황폐해져서 결국 종말을 고하게 되는데, 그러면 이 사랑 자체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다는 표현을 태고교회 전체를 향해 쓰면 안 되지 않나요? 그리고 바로 천적 천사들 얘기가 나오는데, 그런 태고교회의 후손들일지라도 모두 천적 천사가 되었을 리는 없을 텐데, 이렇게 일반화해도 되는 건지요?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습니다.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읽으면 두 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도 결국 쇠퇴하고 황폐해져 종말을 맞았는데 어떻게 태고교회 전체를 두고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또 바로 이어 천적 천사들을 언급한다고 해서 태고교회 사람들 모두가 천적 천사가 되었다는 뜻일까요?

 

먼저 첫 번째 질문에서는 스베덴보리가 한 교회를 그 교회의 고유한 영적 성격에 따라 말하는 경우와, 그 교회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쇠퇴해 가는 과정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태고교회는 AC 전체에서 천적 교회로 설명됩니다. 그 교회의 고유한 질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중심에 있고, 신앙이 그 사랑과 분리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다는 말은 태고교회의 역사에 속한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언제나 동일한 사랑의 상태에 있었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태고교회 역시 쇠퇴했고, 마침내 그 본래의 천적 상태를 잃었습니다. 그러므로 AC.32의 표현은 그 교회를 특징짓는 고유한 영적 질서, 곧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있지 않았던 천적 교회의 성격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맞습니다.

 

여기서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다는 표현도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진리가 필요 없었다거나 그들에게 신앙이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사랑과 신앙이 오늘날 흔히 생각하듯 서로 독립된 두 요소로 나뉘어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신앙에 속한 진리가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랑에서 분리된 별도의 신앙을 그들은 참된 신앙으로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2의 전체 논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사랑은 광명체이고, 신앙은 작은 광명체입니다.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런데 세대의 종말에는 사랑이 거의 없어졌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어졌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처럼 사랑과 신앙이 분리된 상태와 대조되는 예로 태고교회를 제시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본래 질서가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로 이어서 천적 천사들을 언급할까요? 스베덴보리의 문장을 자세히 보면 태고교회 사람들이 모두 천적 천사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태고교회에 관한 진술에 이어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즉 두 집단의 모든 개인을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에서 나타나는 같은 천적 질서를 나란히 보여 주는 것입니다.

 

태고교회가 천적 교회라고 불리는 것과 천국에 천적 천사들이 있다는 것은 서로 관련되지만, 그렇다고 태고교회의 모든 구성원의 사후 운명이 자동으로 천적 천국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한 교회의 영적 성격을 말하는 것과 그 교회에 속했던 모든 개인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정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특히 태고교회가 후대로 가면서 쇠퇴하고 황폐해졌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구별은 더욱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천적 천사들을 언급하는 이유는 오히려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어서 천국은 사랑의 천국이며, 천국에는 사랑의 생명 외에 다른 생명이 없고, 모든 천국의 행복이 거기에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천적 천사들은 그 사랑과 생명과 행복을 자기 자신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얻는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32의 관심은 태고교회 사람들의 사후 분류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중심은 사랑과 신앙의 올바른 질서입니다. 태고교회라는 지상의 천적 교회의 고유한 상태에서도, 천적 천사들의 천국적 상태에서도 신앙은 사랑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사랑에 속하며,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다는 말을 태고교회의 쇠퇴와 모순되는 절대적인 역사 진술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태고교회를 그 고유한 천적 성격에 따라 말하고 있으며, 그 성격을 오늘날 천적 천사들의 상태와 나란히 놓아 사랑과 신앙의 본래 질서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구별을 줍니다. 어떤 교회를 말할 때 그 교회가 나타내는 고유한 영적 성격과, 그 교회에 속한 모든 개인의 실제 상태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가 천적 교회였다고 해서 그 역사의 모든 사람이 천적 인간으로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니며, 천적 천사가 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반대로 태고교회가 후에 쇠퇴했다는 이유로 그 교회의 본래 천적 성격까지 부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결국 AC.32에서 태고교회천적 천사들이 나란히 등장하는 까닭은 둘을 동일한 집단으로 보기 때문이 아니라, 양쪽에서 같은 천적 질서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 질서는 바로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은 사랑에 속하며, 모든 사랑과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AC.32가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을 함께 언급하는 핵심 이유입니다.

 

 

 

AC.38, 창1:18-19, ‘낮과 밤의 분별 : 행위로 드러나는 선과 악, 빛과 어둠의 기준’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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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심화 2, ‘아르카나, 세대의 종말, 사랑도 신앙도 거의 없는’

AC.32.심화 2. ‘아르카나, 세대의 종말, 사랑도 신앙도 거의 없는’ 위 AC.32 본문, ‘이 아르카나가 특히 이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는 이유는,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기 때문이며, 이때에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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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AC.32 본문,  아르카나가 특히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는 이유는,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기 때문이며, 이때에는 사랑이 거의 없고,  결과 신앙도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The reason why these arcana are more especially concealed in this end of days is that now i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when there is scarcely any love, and consequently scarcely any faith,) 말인데요,  셋이 서로 무슨 상관이지요? 그러니까 아르카나가 가려져 있는 이유와 세대의 종말 사랑도, 신앙도 거의 없는 것이 서로 무슨 상관인가요? 제가 너무 초보적이고 유치한 질문을 하는 같아 부끄럽습니다만...

 

AC.32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는 문장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이 ‘ 광명체’이고 신앙이 ‘ 작은 광명체’라는 것을 설명한 뒤, ‘ 아르카나가 특히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는 이유는,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기 때문이며, 이때에는 사랑이 거의 없고, 결과 신앙도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르카나가 가려져 있다’, ‘세대의 종말이다’, ‘사랑이 거의 없고 따라서 신앙도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셋은 서로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먼저 여기서 말하는 ‘ 아르카나’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막연히 ‘말씀 안에 있는 모든 비밀’이라고 생각하면 문장의 연결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앞에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고 있는 아르카나는 창1의 두 광명체가 나타내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입니다. 사랑은 ‘ 광명체’이고 신앙은 ‘ 작은 광명체’이며, 사랑이 낮을 다스리고 신앙이 밤을 다스립니다. 그리고 앞의 AC.30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참으로 살아 있는 신앙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가려져 있다는 아르카나는 무엇보다 ‘사랑이 신앙보다 먼저이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영적 질서입니다. 이 점을 붙들면 나머지 두 표현과의 관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당시를 ‘세대의 종말’이라고 부르면서 그 상태를 곧바로 ‘사랑이 거의 없고, 결과 신앙도 거의 없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그는 ‘신앙이 거의 없기 때문에 사랑도 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거의 없고, 결과 신앙도 거의 없다’고 합니다. 바로 이 문장 자체가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왜 사랑이 없으면 신앙도 거의 없을까요? AC.30-32의 흐름에서는 신앙의 생명이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교리를 알고 성경을 읽고 신앙에 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살아 있는 신앙과 같지 않습니다. 사랑이 사라지면 신앙의 생명도 함께 사라집니다.

 

바로 여기에서 ‘아르카나가 가려져 있다’는 말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과 신앙이 실제 삶에서 서로 분리된 시대에는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진리 자체가 낯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사랑과 별개로 생각하고, 무엇을 믿고 어떤 교리를 인정하느냐만으로 신앙을 설명하기 쉬워집니다. 그러면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이 그 사랑에서 나오는 더 작은 광명체라는 창1의 질서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AC.32의 논리는 매우 직접적입니다. 교회의 종말에는 사랑이 거의 없어집니다. 사랑이 거의 없어지면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참된 신앙도 거의 없어집니다. 그리고 사랑과 신앙의 실제 결합이 사라지면, ‘사랑이 신앙의 생명이다’라는 영적 질서도 더 이상 알려지거나 인정되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그 질서가 하나의 ‘가려진 아르카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24:29을 인용하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진다’는 말씀에서 스베덴보리는 해를 사랑, 달을 신앙, 별들을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라고 설명합니다. 해가 먼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으며 별들까지 떨어지는 모습은 AC.32의 논리를 그대로 보여 줍니다. 사랑이 소멸되면 신앙도 생명을 잃고, 마침내 신앙에 관한 지식들까지 본래의 영적 기능을 잃게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아르카나가 가려졌다’는 것을 단순히 ‘사람들의 사랑이 부족해서 성경을 읽어도 속뜻을 직관적으로 알아낼 없었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말씀의 상응과 내적 의미를 스스로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AC.32가 여기서 직접 말하는 초점은 그런 개인적 해석 능력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글의 초점은 사랑과 신앙의 참된 질서 자체가 당시 교회의 상태 속에서 가려져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사랑이 신앙의 생명이라는 질서가 실제 교회의 신앙과 삶에서 사라지면, 그 질서를 가르치는 말씀의 속뜻 역시 알려지지 않은 아르카나로 남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지금 그것을 밝혀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 문장의 배경에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세대의 종말’과 ‘아르카나가 가려짐’ 사이에 어떤 신비한 법칙을 따로 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둘을 연결하는 것은 바로 ‘사랑과 신앙의 상태’입니다. 교회가 종말에 이르렀다는 것은 사랑과 신앙이 거의 소멸된 상태이고, 그 상태에서는 사랑이 신앙의 근원이자 생명이라는 질서 역시 더 이상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진리가 아르카나가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왜 스베덴보리가 창1의 해와 달을 단순히 ‘사랑과 신앙’이라고만 설명하지 않고 굳이 ‘ 광명체’와 ‘ 작은 광명체’의 질서까지 강조하는지도 보여 줍니다. 사랑과 신앙은 나란히 놓인 두 개의 독립적인 종교 요소가 아닙니다.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말의 시대에 가려져 있었다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아르카나입니다.

 

그러므로 AC.32의 문장은 다음과 같이 읽으면 가장 분명합니다. ‘ 아르카나가 가려져 있는가? 지금은 교회의 종말이기 때문이다. 종말인가? 사랑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으므로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신앙도 거의 없다. 그러므로 사랑이 신앙의 생명이라는 질서 자체도 알려지지 않고 가려져 있다.

 

이렇게 세 문장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같은 원리가 있습니다. 신앙의 생명은 사랑에 있으며, 사랑과 신앙의 올바른 질서가 회복되어야 참된 신앙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AC.32, 심화 3, 여기서 말하는 ‘태고교회, 천적 천사들’의 의미

AC.32.심화 3. 여기서 말하는 ‘태고교회, 천적 천사들’의 의미 위 AC.32 본문,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습니다.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 무슨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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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심화 1, ‘세대의 종말’(the consummation of the age)

AC.32.심화 1. ‘세대의 종말’(the consummation of the age) 위 AC.32 본문,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기 때문이며’(now i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말인데요, 이 글, 곧 ‘Arcana Coelestia’ 작성 시기가 1749-1756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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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대의 종말 수백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AC.32 본문,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기 때문이며(now i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말인데요,  ,  Arcana Coelestia 작성 시기가 1749-1756임을 생각하면, 지금은 2026년이니 대략 270년이 흘렀어요. 세대의 종말 이렇게 길게 몇백 년씩 계속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사랑이 ‘ 광명체’이고 신앙이 ‘ 작은 광명체’라는 아르카나가 특별히 이 마지막 시대에 감추어져 있는 이유는 ‘지금이 세대의 종말(the consummation of the age)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Arcana Coelestia’가 18세기 중엽에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그때가 ‘세대의 종말’이었다면,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떻게 세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요?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세상의 종말’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AC.32에서 이 표현은 바로 이어지는 설명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그는 ‘이때에는 사랑이 없고, 따라서 신앙도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뒤 마24:29의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진다’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리고 해는 사랑, 달은 신앙, 별들은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세대의 종말’은 지구가 사라지거나 인류 역사가 끝나는 물리적 종말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영적 종말과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AC.32를 읽을 때 ‘스베덴보리가 18세기에 세계가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예측이 빗나갔다’고 이해하면 그의 말뜻을 놓치게 됩니다. 그가 말하는 종말은 자연계의 시간표에 따른 지구의 파괴가 아니라 교회의 영적 상태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이 생깁니다. ‘그래도 종말이라면 언젠가는 끝나야 하지 않는가? 18세기의 종말을 21세기인 지금까지 계속되는 상태라고 설명해야 하는가?’ 여기서는 오히려 그렇게 설명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AC.32가 기록되던 당시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살던 시대를 그 교회의 종말 상태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기 저작에서는 그 뒤에 일어난 사건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최후의 심판은 자연계에서 지구가 불타 없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영계에서 이루어지는 심판입니다. 그는 그 최후의 심판이 1757년에 영계에서 실제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그의 저작 전체의 시간 흐름을 따르면, AC.32의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라는 말은 수백 년 동안 끝없이 계속되는 종말을 뜻한다고 볼 필요가 없습니다. AC가 기록되던 시기는 그가 말하는 종말의 국면에 있었고, 이후 최후의 심판이라는 결정적인 사건을 거쳐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갔다고 이해하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서 ‘종말’의 의미도 조금 더 정확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한 교회의 종말은 달력상의 어느 날 교회 조직이 갑자기 없어지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외적인 형태와 이름은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예배당도 있고, 성경도 읽고, 교리도 가르치며,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계속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내적인 생명, 곧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참된 신앙이 소멸되면 그 교회는 내적으로 종말에 이를 수 있습니다.

 

AC.32가 바로 이 점을 말합니다. 사랑이 없으므로 신앙도 없고, 그 상태가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으로 말씀에 표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대의 종말’은 먼저 이러한 영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지상에 여전히 기독교회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스베덴보리의 ‘종말’과 모순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교회론에서 어떤 교회의 영적 종말과 그 교회에 속한 외적인 조직들의 역사적 존속은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또한 기존 교회 안에 속해 있다고 해서 그 안의 모든 개인에게 사랑과 신앙이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의 보편적인 상태에 대한 판단과 개개인의 영적 상태에 대한 판단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기독교회의 종말’이라는 말을 듣고 오늘날의 모든 기독교인과 모든 교회를 일괄적으로 영적으로 죽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의 시대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지상에서 특정 교단에 속한 모든 개인의 내면을 한꺼번에 판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실제 영적 상태는 그가 어떤 이름의 교회에 속했느냐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또한 새 교회의 시작 역시 기존 교회 조직들이 어느 날 모두 사라지고 새로운 조직 하나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식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새 교회의 핵심은 새로운 교리적 빛과 주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 그리고 사랑과 신앙의 올바른 질서가 다시 세워지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영계에서 이루어진 최후의 심판과 지상에서 새로운 교회의 진리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확산되는 과정 역시 구별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32의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라는 표현 때문에 ‘ 종말이 270 동안 계속되고 있는가?’라고 물을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 문장의 ‘지금’은 우선 AC.32가 기록되던 당시의 ‘지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당시 기독교회의 내적 상태를 종말로 보았고, 이후 자신의 저작에서 1757년 영계에서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졌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AC.32의 한 문장만을 떼어 18세기의 ‘종말’을 오늘날까지 그대로 연장하기보다, 그의 저작 전체에서 이어지는 계시의 흐름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AC.32의 본래 주제로 다시 돌아가게 합니다. 왜 스베덴보리는 ‘세대의 종말’을 여기서 언급했을까요? 종말론 자체를 자세히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시대에는 사랑과 신앙의 참된 관계가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에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신앙이 무엇인지도 알기 어려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는 사랑이고 달은 신앙이다’라는 단순해 보이는 상응 안에 당시에는 감추어진 하나의 아르카나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결국 AC.32에서 ‘세대의 종말’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언제 지구가 끝나는가?’가 아니라 ‘교회에서 사랑과 신앙이 어떤 상태에 이르렀는가?’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 자신의 저작 흐름을 따르면, AC가 기록되던 종말의 시대에서 1757년의 최후의 심판을 거쳐 새 교회가 시작되는 새로운 국면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18세기의 ‘세대의 종말’을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하나의 긴 종말 기간으로 늘여 설명하기보다, 당시의 영적 상태와 그 이후에 이어진 사건들을 구별하여 읽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AC.32, 심화 2, ‘아르카나, 세대의 종말, 사랑도 신앙도 거의 없는’

AC.32.심화 2. ‘아르카나, 세대의 종말, 사랑도 신앙도 거의 없는’ 위 AC.32 본문, ‘이 아르카나가 특히 이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는 이유는,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기 때문이며, 이때에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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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창1:14-17, ‘해가 사랑이고, 달이 신앙이다 : 마지막 시대에 드러나는 광명체의 아르카나’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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