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21(D1)-주일예배(2526, 눅16,1-8, AE.763), ‘오십이라 쓰라, 팔십이라 쓰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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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1-21(D1)-주일예배(2526, 눅16,1-8), ‘오십이라 쓰라, 팔십이라 쓰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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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이라 쓰라, 팔십이라 쓰라’의 속뜻

 

 

1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4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6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눅16:1-8)

 

 

신구약 말씀에서 ‘’과 ‘행위’, 그리고 ‘행함’과 ‘사랑’이란 말이 그렇게나 자주 언급되고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에, 그들은 사람은 선하게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그러나 그들은 일이나 행위가 사람을 의롭게 하지도, 구원하지도 못한다고 하면서 그것들을 신앙으로부터 분리해 온 이래, 지금은 또 이 둘을 교묘하게 신앙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해설 763:2) But inasmuch as they find in the Word of both testaments “works” and “deeds,” as well as “doing” and “loving,” so frequently mentioned, they can do no otherwise than affirm that one ought to live well; but since they have separated works or deeds from faith as not justifying and saving, they craftily join these and faith together, (AE.763:2)

 

 

오늘 말씀은 주인의 재물을 관리하는 청지기에 대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본문 1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어떤 부자의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의 귀에 들렸다고 합니다. 여기서 청지기는 외적인 교회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믿음만 있고, 인애(仁愛, 체어리티charity)의 삶은 없는 교회, 또는 그런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바로 청지기입니다.

 

※ 오늘 설교를 처음하신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과 달리 개신교 장로교 통합 가정에서 태어나 침례교인이 된 후, 침례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제 경험에 의하면, 이렇게 순수하게(?)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된 기독교인들은, 그리고 개신교인들은 사실 겉으로 봐서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만, 그러나 제가 속했던 교회들이 대체로 괜찮은 교회였을 수도 있고, 또 지금은 스베덴보리가 살던 시대인 1700년대 중반 유럽 기독교회 때와는 또 좀 많이 달라졌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주님 보시기에는 그나마 한국 기독교회가 좀 나을 뿐, 세상이, 곧 교회가 종말을 향해 점점, 더욱 아주 심하게 황폐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오늘 설교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청지기가 외적인 교회를 뜻하는 이유는, 이 세상 청지기는 대개 주인이 시키는 일만 할뿐, 주인 입장에서 정성껏 일하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 주신 선과 진리를 쌓아 두기만 하고 사용하지는 않거나, 사용하기는 하는데 주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신앙 가운데 있을 때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실까요? 그것에 대해 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주인이 청지기에게 더 이상 청지기의 직무를 계속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믿음에 따라 살지 않는다고 해서 교회에서 내쫓거나 직분을 빼앗으시지는 않으시는데요, 그러면 이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신 건 무슨 뜻일까요? 외적인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이 내적인 신앙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나중에는 그나마 있던 외적인 신앙마저 없어져 버린다는 뜻입니다. 누구나 처음 신앙을 가질 때는 외적인 신앙으로 시작합니다. 외적인 신앙이란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믿음에 따라 살지는 않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도 나오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하지만, 정작 삶에 있어서는 교리대로 살지는 않는 것이지요. 그것이 외적인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신실한 신앙인이라면 외적인 신앙 안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점진적으로 내적인 신앙, 즉 삶의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입술로만 주님을 믿고, 실제 삶은 그 반대가 될 수 있으며, 그 정도가 심해지면 나중에는 신앙의 진리마저 부인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동안 존재했던 많은 교회들의 타락상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외적인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나중에는 주님을 부인하고 진리도 부인하는 상태에 떨어지는 것, 이것이 바로 청지기가 직무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 게 아니고, 자기 스스로 자초하는 것이지요. 3절에서는 주님에 대한 믿음마저 잃어버린 신앙인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3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청지기가 주인으로부터 직분을 빼앗기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외적 신앙 안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회개하지 않았던, 내적 신앙으로 나아가지 않았던 사람들이 종국에 가서는 그 신앙, 그 믿음마저 잃어버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아마 처음 신앙을 가졌을 때의 순수함을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내가 하나님도 잘 믿고, 이웃을 섬기려는 마음도 있었지 하는 감상에 빠지거나, 지금 모습을 생각하며 부끄러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지옥의 영들에게 사로잡혀 있어 순수했던 때로 돌아가려 해도 뜻대로 잘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땅을 파는 것은 샘(fountain)을 얻기 위한 노력을 뜻하고, 샘을 얻고자 한다는 것은 진리를 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땅을 파자니 힘이 없다는 것은 말씀을 아무리 읽어도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외적 신앙 안에 있으면서 계속해서 믿음에 반하는 삶을 살았다가는 어느 순간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그때부터는 말씀을 읽어도 더 이상 진리를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빌어먹자니 부끄럽다 했습니다. 이 비는 것(begging)은 주님 앞에 회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빌어먹자니 부끄럽다고 하는 것은 주님 앞에 겸손하지 않은 것이고, 그러므로 회개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청지기가 마침내 무서운 결심을 합니다. 5절로 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5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6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주님 앞에 빚진 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주신, 말씀의 선과 진리를 선한 일을 통해 다시 주님께 돌려드려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빚진 자가 주인에게 기름 백 말을 빚졌음을 인정하는 것은 그에게 있는 모든 선이 주님의 것이며, 그러므로 선한 일을 통해 다시 주님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름은 사랑으로 행하는 선을 뜻하고, 백 말의 백(100)이란 수는 완전한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에게 청지기는 증서에 오십이라 쓰라고 했습니다. 말씀에서 오십(50)은 보통 작은 것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백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증서에다 오십이라 쓰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채무가 모두 변제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동안 믿음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이제는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타락한 외적 교회들이 교인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7절에 청지기가 밀 백 석 빚진 사람에게 증서에 팔십이라 쓰라 하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여기서 밀은 기름과 마찬가지로 사랑으로 행하는 선을 뜻하고, 팔십(80)은 완전히 거듭난 상태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영적 의미로 일곱째 날(7일), 즉 안식일은 거듭난 상태를 의미하고, 그다음 날인 여덟째 날(8일)은 천국에서 새로운 시작, 즉 구원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밀 백 석을 빚진 사람에게 증서에 팔십이라 쓰라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체어리티의 삶으로 갚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다 가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청지기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주인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8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를 오히려 칭찬했다고 합니다. 교회들이 교인들을 그렇게 잘못 가르칠 때 주님께서 과연 칭찬하실까요? 주님은 그런 교회나 사람들을 칭찬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칭찬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들의 교활하고 영악함에 감탄하셨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대의 아들들이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 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이 세대의 사람들은 감각적이고 교활한 뱀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교묘한 논리로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뒤집는 사람들입니다. 그에 비해 빛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의지해 선을 행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시대든 빛의 아들보다는 감각적이고 추론, 논리, 말재주에 능한 사람, 교활한 사람들이 권세도 얻고, 부도 얻습니다. 그래서 시편 73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시73: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부정한 청지기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말씀에 등장하는 부정한 청지기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지는 않는 교회와 그런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믿음이 매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믿음에 따라 주님과 이웃을 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거나 롯의 아내처럼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면 나중에는 이기적이고 감각적인 사람이 되고, 종래에는 겉으로만 하나님을 믿고 속으로는 전혀 믿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 당시 유대교회가 그랬고, 오늘날 주류교회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속으로는 세상 재물을 믿고, 하나님의 지혜보다 인간의 지식을 더 믿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예배는 외적으로만 경건하고, 내적으로는 공허한 예배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청지기입니다. 주님께서 부정한 청지기 이야기를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것은 그들을 거울삼아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라는 것입니다. 부정한 청지기는 자신이 영적으로 잘못되어 가고 있는 줄 알면서도 주님 앞에 겸손하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결과 주님을 더 이상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말씀을 왜곡, 다른 사람의 구원마저 가로막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회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621번 글 6번 항에는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날 때부터 갖고 있던 유전 악 가운데 여전히 머물러 있게 됩니다. 회개는 사람이 악을 행하고자 마음먹는 걸 그만두는 것, 그건 하나님께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일 년에 한두 번 자신을 살펴 자신의 죄를 보고 주님 앞에 고백, 도와주시기를 구하며, 악을 삼가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할수록, 그리고 주님을 믿을수록 그의 죄는 용서되지요. (참된 기독교 621:6) [6] The angels said further, “Man must repent of his sins in order to be saved, and unless he repents he remains in the sins into which he was born; and repentance consists in man’s ceasing to will evils because they are contrary to God, searching himself once or twice a year, seeing his evils, confessing them before the Lord, praying for help, refraining from evils, and beginning a new life; and so far as he does this, and believes in the Lord, his sins are forgiven.” (TCR.621:6)

 

주님께 도움을 구해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힘으로는 악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에서는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요3:27)

 

했고, 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5)

 

하신 것입니다. 자신을 매일 살피시고, 주님께 도움을 청해 모든 종류의 악에서 벗어나시기를, 물러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9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막10:29, 30)

 

아멘

 

 

원본

2021-05-3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1-2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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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4(D1)-주일예배(2525, 눅15,22-32), ‘두 아들과 내게 돌아올 분깃’의 속뜻(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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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유튜브는 오디오입니다. 참고하세요.

 

 

 

두 아들과 내게 돌아올 분깃’의 속뜻(2)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눅15:22-32)

 

 

결혼 그 자체는 그 이상 거룩한 것이 없을 정도로 거룩하다. 그것으로 인해 인류가 생성되고 인류로 인해 천국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천사의 삶을 살았던 사람은 천국으로 가기 때문이다. 반대로 간음은 그 이상 불경한 것이 없을 만큼 불경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에게 있는 천국과 교회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9961:4) ...marriages are so holy that there is nothing more holy, and this also for the reason that they are the seminaries of the human race, and the human race is the seminary of the heavens, for thither come the men who in the world have lived an angelic life. And on the other hand adulteries are so profane that there is nothing more profane, because they are destructive of heaven... (AC.9961:4)

 

 

오늘 본문은 2주 전 다룬, ‘두 아들과 내게 돌아올 분깃’의 속뜻, 그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이 본문은 그 유명한 누가복음 15장, ‘돌아온 탕자의 비유’ 본문인데, 본문이 길어 전, 후반 둘로 나눈 것으로, 오늘은 그 후반 본문입니다. 먼저 22절, 23절은 멀리 떠났다 돌아온 아들을 주님께서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아버지가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며, 아들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인다고 합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속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아들은 속 사람의 뜻을 따르지 않고, 떠나 제 마음대로 살다 돌아와 이제는 속 사람과 결합하기를 원하는 겉 사람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좋은 옷을 입히고 살진 소를 잡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 겉 사람 안으로 선과 진리를 많이 보내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좋은 옷은 진리를 뜻하고, 살진 송아지는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단절되었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다시 통할 때, 주님은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에 있는 진리의 지식들 안으로 당신의 생명인 선을 불어넣으십니다. 그때 그 지식들이 살아나 진리로 변합니다. 그러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는 것은 지식들 안으로 선이 흘러 들어가는 것이고, 좋은 옷을 입히는 것은 그때 그 지식들이 진리로 변하는 것을 뜻합니다.

 

※ 우리는 보통 내 안에 지식이 많으면, 그러면 언제든 내가 맘만 먹으면 나는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경험에 의하면, 지식과 실제로 그 지식을 가지고 선한 삶을 사는 건 별개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선을 행할 수 있으려면, 선 그 자체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오셔야 하는데요, 이것을 ‘주님이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에 있는 진리의 지식들 안으로 당신의 생명인 선을 불어넣으신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가락지를 끼워주신다고 했는데, 가락지는 보통 결혼식에서 배우자들이 서로 나눠 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가락지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을 의미하고, 또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으로 인해 겉 사람에게 힘이 생기는 것을 뜻합니다. 가락지로 표상되는 겉 사람의 힘이란 어떤 것입니까? 어떤 시험에서도 이길 수 있는 힘이며, 자기 자신보다 주님과 이웃을 더 사랑할 수 있는 힘입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이 결합할 때, 겉 사람은 그런 힘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주님이 끼워주시는 가락지, 반지입니다.

 

말씀에는 또 아들의 발에 신을 신겼다고 했습니다. 말씀에서 발이나 신은 겉 사람 안에 있는 더러운 것을 뜻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처음 만나실 때 신을 벗으라고 하신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신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으로 인해 깨끗하게 된 겉 사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속 사람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선하고 진실한 것들이 겉 사람을 정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발을 씻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로 돌아와 순종할 때 일어나는 변화들입니다.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4절에서 아버지가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말했습니다. 겉 사람이 주님 앞에 회개하고 속 사람과 결합할 때, 죽었던 겉 사람이 다시 살아납니다. 주님은 어떤 식으로 겉 사람을 살리실까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으로 선과 진리를 불어넣으시고, 그때 겉 사람 안의 모든 것들이 살아나면서 능력이 생기는 식입니다.

 

그런데 그때 밭에 있던 큰아들이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 모습을 25절에서는, 맏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25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여기서 맏아들과 작은아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내면의 교회를 형성하는 두 마음, 곧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맏아들이 밭에 있다는 것은 속 사람이 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밭은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집에서 노랫소리와 춤추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노래와 춤은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 안으로 선과 진리가 흘러들어올 때, 그 선과 진리에서 비롯한 기쁨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예배를 드릴 때, 악기를 연주하고 찬송을 하는 것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을 때의 기쁨을 나타냅니다. 춤추는 것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맏아들이 화를 냅니다. 그것에 대해 29절과 3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8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맏아들이 말하기를 내가 여러 해 동안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속 사람은 그동안 주님의 명령에 따라 겉 사람에게 진리와 선을 충실하게 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겉 사람은 말을 듣지 않고 세상을 좇다가 가지고 있던 선과 진리를 모두 잃어버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런 그에게 선과 진리를 아낌없이 주십니다. 맏아들이 아버지에게 창녀들과 함께 살림을 탕진한 이 아들을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라고 성을 내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창녀들과 함께 살림을 탕진하는 것은 주님이 주신 선과 진리를 모두 더럽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간음은 선과 진리를 악과 거짓과 뒤섞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씀에는 이렇게 표현했지만, 그러나 실제로 속 사람은 이렇게 분노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맏아들이 분노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성(聖) 문서에서는 그것에 대해 자세히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 즉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오픈하신 모든 계시를 특별히 구분하여 ‘(聖) 문서’라고 칭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가지고 곰곰이 생각을 해 봤는데요, 아마 이런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내면의 교회를 이루는 것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면 외부의 교회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누굴까요? 속 사람의 역할을 하는 이는 목회자입니다. 선과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겉 사람은 성도들입니다. 외부의 교회 중에는 가정도 있습니다. 고대 교회 때는 각 가정에서 가장의 인도로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속 사람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가장입니다. 그리고 겉 사람은 아내와 자녀들입니다. 교회의 목회자나 가정에서 가장들이나 세상 즐거움을 느낄 겨를없이 성도들을 위해, 가족들을 위해 계속해서 맡은 일을 하지요. 그런데 때로는 소외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목회자에게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해서 신랄하게 비판을 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잘한 것보다는 잘못을 지적하는 분들도 계시지요. 서운한 일이 있다고 교회를 떠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럴 때 목회자나 가장은 마음에 상처를 받습니다. 하느라고 했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인가 하는 것입니다. 맏아들이 아버지께 성을 내는 것은 이를테면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 이 설교 원본은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지난 2021년 5월 16일 주일 설교인데요, 이런 설명, 이런 풀이 앞에 저는 참 마음 깊이 탄복합니다. 주님의 성품 안에서 주님의 지혜를 온전히 의뢰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영적 의미로 목회자는 사랑으로 주님을 표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는 모든 문제를 사랑, 또는 선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데요, 그러나 본문에서 맏아들의 모습은 사랑이나 선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이해하는 모습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본문 26절에 보면,

 

26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맏아들이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종에게 물어봤다고 했습니다. 말씀에서 종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여기서는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종에게 물어봤다는 것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선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 이해하는 모습입니다. 자기 앞에 놓인 상황을 선으로 이해하면 어떤 경우든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리로 이해할 때는 화도 나고 자괴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 이와 관련, 마태복음 산상수훈 말씀이 생각납니다.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5:38-44)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는 이 본문은 참으로 능력의 말씀, 선 그 자체이신 주님의 능력이 느껴지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부족함을 느끼는 건 다름 아닌 선악 분별의 능력과 지혜입니다.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선, 곧 주님의 뜻인지를 잘 모르겠는 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중 요즘 가장 저를 괴롭히는 한 가지는 바로, 저를 이단으로 단정, 일체 어떤 권면도 거절하는 사람을 저는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시도 때도 없이 진리, 즉 옳고 그름의 잣대가 떠올라 저를 분노하게 하는데요, 바로 오늘 본문의 맏아들 모습이 딱 제 모습입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은 정말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맏아들은 아버지에게, 내가 여러 해 아버지의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지 않습니까 라며 서운함을 내비쳤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1절과 32절 말씀입니다.

 

31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마9:13에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눅15:4절 이하에서는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서 주님은 선한 사람보다 죄인들을 더 챙기신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특별히 누구를 더 챙기거나 덜 챙기시지 않습니다. 병든 자들에게 주님의 손길이 더 필요한 것 뿐입니다. 주님이 보실 때 온전한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어느 만큼은 영적인 병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돌아온 탕자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새 신을 신기실 때, 질투하거나 시기하면 안 됩니다. 우리 주변을 보더라도 매일 같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서, 그런데 나름대로 노력한다고 하는 나는 왜 거듭나지를 못하나 하는 마음이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웃이 거듭나고 성장할 때, 우리도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춰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우리 안에 있는 탕자가 치유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가 되어 주님의 교회를 만드는 것처럼 우리도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그렇게 하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참으로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고, 이를 위해 참으로 주님이 제 안에 와 계시기를,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선한 능력으로 제가 즐겁게 선을 행할 수 있게 되기를, 비록 제가 무례히 여김을 당하며, 모욕을 당해도 프란치스코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선을 행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는 모든 성도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과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4:2)

 

아멘

 

 

원본

2021-05-1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1-1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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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4). The Word is written solely by correspondences, and for this reason each thing and all things in it have a spiritual meaning (n. 1404, 1408, 1409, 1540, 1619, 1659, 1709, 1783, 2900, 9086).

 

 

1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And Abram went up out of Egypt, he and his wife, and all that he had, and Lot with him, toward the south. ... 18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And Abram pitched his tent, and came, and dwelt in the oak groves of Mamre, which are in Hebron, and built there an altar unto Jehovah.

 

 

1535

This chapter treats of the external man in the Lord which was to be conjoined with his internal man. The external man is the human essence, the internal is the Divine essence. The former is here represented by Lot, but the latter by Abram.

 

 

1536

1537

1538

1539

 

 

1540

The true historicals of the Word began, as before said, with the foregoing chapter—the twelfth. Up to that point, or rather to Eber, they were made-up historicals. In the internal sense, the historicals here continued respecting Abram are significative of the Lord, and in fact of his first life, such as it was before his external man had been conjoined with the internal so as to make one thing; that is, before his external man had been in like manner made celestial and Divine. The historicals are what represent the Lord; the words themselves are significative of the things that are represented. But being historical, the mind of the reader cannot but be held in them; especially at this day, when most persons, and indeed nearly all, do not believe that there is an internal sense, and still less that it exists in every word; and it may be that in spite of the fact that the internal sense has been so plainly shown thus far, they will not even now acknowledge its existence, and this for the reason that the internal sense appears to recede so far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as to be scarcely recognized in it. And yet that these historicals cannot be the Word they might know from the mere fact that when separated from the internal sense there is no more of the Divine in them than in any other history; whereas the internal sense makes the Word to be Divine.

 

[2] That the internal sense is the Word itself is evident from many things that have been revealed, as “out of Egypt have I called my son” (Matt. 2: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마2:15)

 

besides many others. The Lord himself also, after his resurrection, taught the disciples what had been written concerning him in Moses and the prophets (Luke 24: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24:27)

 

and thus that there is nothing written in the Word that does not regard him, his kingdom, and the church. These are th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of the Word; but the things contained in the literal sense are for the most part worldly, corporeal, and earthly; which cannot possibly make the Word of the Lord. At this day men are of such a character that they perceive nothing but such things; and what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 are, they scarcely know. It was otherwise with the men of the most ancient and of the ancient church, who, had they lived at this day, and had read the Word, would not have attended at all to the sense of the letter, which they would look upon as nothing, but to the internal sense. They wonder greatly that anyone perceives the Word in any other way. All the books of the ancients were therefore so written as to have in their interior sense a different meaning from that in the 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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