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년생 여자는 23.7세입니다. 구글링을 하니 나오는, 여성정책연구원 통계DB 완전생명표에 나오는 수치입니다. 참고로, 39년생 여자는 7.7세, 46년생 여자는 12.5세, 43년생 남자는 7.9세 등이 그 남은 기대수명입니다. 저는 61년생인데... 그러면, 이 통계대로라면, 제게 남은 시간은 22년이 채 안 되는군요...
꼭 이걸 신봉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러나 유의미한 무슨 지표는 되지 싶습니다. 가령, 앞으로는 절대 시간을 허투루 쓰면 안 되겠다. 앞으로는 오직 천국 입국 조건, 즉 주님의 신성에만 올인해야겠다 결심하는 등 말이지요.
저의 경우, 스베덴보리의 저술들 번역하는 일만 하기에도 너무 빠듯할 것 같은데요, 여러 저술 중 백미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년 시작, 총 8년에 걸쳐 저술된,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라틴 주석, 총 10,837개의 글)의 경우, 하루 다섯 개씩만 잡아도 6년!
이 외에도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232),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581), ‘결혼애’(Conjugial Love, 696), ‘하나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435),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299), 그리고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851) 등 꼭 번역을 남기고픈 주요 저작들만 추려도 4,094개의 글이나 되는데다가...
스베덴보리의 책들은 그 내용이 내적(內的, internal)이요, 영적이기 때문에, 읽어보시면들 아시겠지만, 뇌가 마비될 정도로 그 내용이 깊고 높아 어렵습니다. 하여, 1차 결과물들인 번역들과 일반 독자들을 이어주는, 무슨 가교역할을 할, 좀 대중적 풀이들이 필요한데요, 사실 이 2차 결과물들이 더 요긴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이기 때문이지요!
특별히 그의 모든 저작 중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경우, 그 엄청난 분량에도 불구, 이미 두 종류의 한글번역들이 나와 있는데요, 정말 고생고생하셔서들 번역하셨을 줄 믿기에 이 자리를 빌어 존경과 감사의 인사말씀 올립니다만... 그러나 저의 역량 때문인지 이 기존 번역들이 제게는 좀 맞지가 않더군요... 그래서 오랜 시간 고민하다가 그냥 제가 직접 번역하자 마음 먹게 된 것입니다.
번역 자체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번역자 본인이 영계에 대한 나름의 이해와 그 내면이 열려야 하기 때문인데, 그래서 영어나 라틴을 좀 한다고 바로 번역할 수 있는 게 절대 아니고, 스베덴보리를 한 4, 5년 해야 겨우 제대로 된, 걸음마 수준의 번역이라도 할 수 있지요. 이 부분에서는 전문 번역가라도 예외가 없습니다. 번역의 전문성은 있지만 이 책에 합당한 내면이 열리지 않았을 경우, 그런 분의 번역은 도저히 감출 수 없는 어떤 엉뚱함, 살짝 영혼 없는 번역이 나타나거든요... 저 역시 이 문제 때문에 창세기 앞 부분만 일곱 번째 번역 중인데요, 이제는 더이상 유턴할 시간이 없어 이런 '처음부터 다시!'를 그만하고 그냥 쭈욱 가야만 할 것 같습니다. 지난 5년, 이런 되풀이를 반복한 것은 하다 보니 너무 바보같은 번역, 너무 어처구니 없는 실수, 마치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한 번역을 한 게 하고 나면 또 보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만 62세를 조금 넘었습니다. 제가 언제까지 이렇게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키보드를 칠 수 있을까요? 저는 한쪽 눈이 안 보이는, 그리고 다른 눈은 사분의 일이 안 보이는 경험을 한 2년 했습니다. 지금은 주님의 은혜로 많이 회복, 번역하는 데 큰 지장은 없습니다. 운전도 별 무리 없고요. 그러나 늘 긴장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 눈을 필히 영양가 있게 써야만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저도 모르게 유튜브 보는 일에 넋 놓고 있을 때가 많아 참 안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는 1688년에 태어나 1772년에 떠났습니다. 저도 저 위 기대수명만큼만 더 머물다가 간다면, 얼추 스베덴보리처럼 가게 되는데요... 그는 떠날 때, 자기가 떠나는 날을 알고 있었고, 저 위 마지막 저작, ‘참된 기독교’를 1771년에 끝마치고, 이듬해 어느 주일 오후, 아주 포근하고 향기롭게 눈을 감았습니다. 깔끔하게 떠났지요. 저 역시 떠나는 날까지 일하다가 깔끔하게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자식들을 비롯, 주변 사람들 폐 끼치지 않고 갈 수 있으니까요... 저대로라면, 저희 사모는 제가 먼저 가고 한 이 년 후, 따라오겠네요. ㅎㅎㅎ
자식들은 이런 얘기하면 질색들을 하겠지만... 그러나 나름 또 유익도 있겠지요. 저는 어머님은 고3 때인 1980년 9월에, 아버님은 대졸 때인 1988년 2월에 제 곁을 떠나셨는데요, 만일 그 시절에 저런 통계가 존재했다면, 그래서 대략 부모님이 앞으로 얼마를 더 사시겠다 그 기대수명을 알고 있었더라면, 좀 더 다른 시간들을 보냈을 텐데 하는, 진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가령, 아버님의 경우, 옛날엔 화장실이 밖에 있었고, 그래서 특히 추운 겨울엔 방마다 요강이 있어 그 방안 요강으로들 해결했지요. 저는 그 시절, 중1에서 고1 때였는데, 제 기억에 아침에 요강 비우는 건 늘 칠순을 바라보시는 아버님이셨습니다. 저는 더럽다고 거의 손도 대지 않았거든요... 저는 지금은이런 거 하나까지 다 후회가 됩니다. 그 시절, 불과 2년 후에 어머님이 그렇게 갑자기 떠나실 줄은, 그리고 아버님이 8년 후, 그렇게 또 어머니 뒤를 따르실 줄은 정말 몰랐거든요!
이제는 주신 소명 마치는, 이 쓰임새의 일에만, 그리고 그와 더불어 더더욱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삶에만 올인해야겠습니다. 아직도 이 나라, 특히 내년 총선 걱정이 크지만, 균형을 잡아야겠다, 이제 저 나라로 이민 갈 준비도 착실히 하면서... 하는 생각을 오후 잠시 쉬면서 이렇게 해봅니다.
25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 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눅14:25-30)
주님 신앙 안에서 그의 계명에 따라 사는 사람들한테는 영적인 시험이 있는데, 이 시험은 그들이 자기들과 같이 있는 악한 영들을 쫓아낼 때 있습니다. 이 악한 영들은 그들의 욕망과 마치 한 몸처럼 행하는 자들입니다. 다음 말씀에 나오는 십자가는 바로 이 시험을 뜻합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마10:38) (계시록 속뜻 639:2) By “temptations” are here meant spiritual temptations, which exist with those who have faith in the Lord and live according to his commandments, when they drive away the evil spirits that are with them, who act as one with their lusts. These temptations are signified by “the cross” in the following passages: And he that taketh not his cross and followeth after me is not worthy of me (Matt. 10:38).
복음서에 보면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많은 무리가 모였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있는데요, 가령 키가 작은 삭개오가 주님을 보려고 뽕나무 위로 올라간 이야기, 주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나 되는 무리를 먹였다는 에피소드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주님을 따라다녔을까요? 병을 고치려고 온 사람들도 있었을 테고, 단순히 기적을 보기 위해 온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님의 놀라우신 말씀을 듣기 위해 온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께 나아왔던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자신들이 원하는 것들을 얻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많던 무리 중 마지막까지 남아 주님의 곁을 지켰던 사람은 불과 몇 명이 안 되었는데요, 주님 골고다 십자가 마지막 현장까지 함께했던, 주님이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과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몇 명의 여인들뿐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많은 무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였습니다. 말씀에서 ‘무리’(multitude)는 진리를 뜻하는데요, 그러므로 주님이 가시는 곳에 무리가 따라다닌다는 것은 진리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5, 6절입니다.
25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 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려면,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 및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는 것은 신앙인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덕목입니다. 십계명에도 부모를 공경하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들을 미워하라고 하시는데요, 그 이유가 뭘까요? 여기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는 그 속뜻으로는, 실제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가 아니라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모든 악과 거짓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자아 사랑을 뜻하고, ‘어머니’는 세상 사랑을, ‘처자와 형제, 자매’는 그 사랑에서 나오는 온갖 악한 애정과 거짓된 생각을 뜻합니다. 그것은 모두 진리와 반대되는 것들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마땅히 그것들을 미워해야 합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숨’은 자아라고 하는 인간의 타고난 생명을 뜻하기 때문인데, 인간의 자아는 악과 거짓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아를 사랑하는 사람은 선과 진리를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사랑한다면, 자신에게 이익이 될 때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도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선하고 진실한 것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웃을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있는, 그런 숭고한 마음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도 사람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불교 신자들은 인간의 내면에 부처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그들이 말하는 부처는 바로 주님이시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니까 그들은 사람이 곧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 교회에서는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결합해야 할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이시지만, 그러나 그분이 곧 우리 자신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마치 자기가 주님인 것처럼 말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내면에 계신 주님이 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복음서 여러 곳에서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를 미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 및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라 하신 주님이 27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7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자아와 세상에 속한 것을 미워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요, 왜냐하면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생명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버리는 일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아와 세상을 버리는 일은 한 번에 되지 않습니다. 많은 시험과 내적 싸움이 필요한데요, 주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신 것은 그래서입니다. ‘십자가’는 내적 싸움과 시험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먹을 것이나 입을 것, 또는 주거 문제와 같은 세상적인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느냐, 곧 그 쓰임새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세상 것들은 주님과 이웃을 위해 쓰일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는 인식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시험에 임할 때, 능히 시험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험에는 내적인 시험이 있고, 외적인 시험이 있습니다. 내적인 시험은 자신의 자아, 또는 자아의 악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외적 시험은 뭘까요? 외적인 시험은 질병이나 불운 같은 것이며, 또는 주님이 바리새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으신 것처럼, 교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교리적으로 공격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시험의 성격과 종류가 모두 다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외적인 시험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내적인 시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이 다르다고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각자에게 맞는 시험을 허용하시고, 그 시험을 통해 그들에게 있는 그들 고유의 악들을 몰아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28절에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28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망대는 적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감시하는 탑입니다. 그래서 ‘망대를 세우는 것’은 영적으로는 진리를 획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는 시험이 올 때, 악과 거짓을 미리 감지하고 맞서 싸우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해 “천국의 비밀” 8960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험은 사람의 악과 거짓 안에 있는 악령들이 끌어들이는 것이며, 그때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주님의 천사들은 신앙의 진리를 불러내 그것으로 악령들을 막아낸다.” 그러니까 신앙의 진리가 바로 영적인 망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망대를 준공하기까지 자기가 가진 것을 계산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신앙의 진리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시험에서 이겨야 하는데, 그것이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시험에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시험의 악들과 맞서 싸우고, 한편으로는 쉬지 않고 주님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시험에서 한 번 두 번 이길 때, 주님으로부터 우리 마음속에 신앙의 진리가 심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면에 세워지는 진리의 망대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진리를 소유하기 전에는 사실은 신앙이 있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냥 신앙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일 뿐이지요.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는 시험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29절과 3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9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기초’는 신앙을 형성하는 교리의 지식을 뜻합니다. 따라서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한다’는 것은 교리의 지식만 있고, 신앙의 진리는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많은 신앙인이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교리에 대해 조금 안다고 해서 신앙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를 위한 싸움에서 이겨야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사력을 다해 시험에서 이길 때, 주님께서 신앙의 진리를 주십니다. 그리고 신앙의 진리를 소유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점점 더 많은 시험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신앙의 진리 안에는 선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때부터가 신앙이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신앙의 진리가 아니라 교리의 지식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시험에서 항상 집니다. 기억 속에만, 즉 알고만 있고, 삶에 적용하지 않는, 즉 실천하지 않는 교리의 지식 안에는 선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의 믿음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늘 제자리걸음을 합니다. 앉은뱅이 신앙이지요. 바로 이런 사람들이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공사를 시작하고 마치지는 못하는 사람들이지요.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들을 비웃는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 이끄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가 이끄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가 되고자 사람은 자아와 세상으로부터 오는 악을 미워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 및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라 하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부모와 처자, 형제, 자매는 영적으로, 즉 그 속뜻으로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오는 모든 악에 대한 애정과 거짓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자아와 세상에 속한 악은 한 번에 없어지지 않고, 단계적으로 천천히 없어집니다. 그 과정은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말씀으로부터 교리를 배웁니다. 그래야 무엇이 자아이고, 자아의 악인지를 알기 때문이지요. 그다음에는 교리의 지식을 그때그때 삶에 적용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내적 싸움이 시작됩니다. 겉 사람의 저항 때문이지요. 그 싸움이 바로 각자가 짊어지고 갈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이런 말씀을 전하실 때, 알아듣는 사람이 몇이나 됐을까요? 대부분 알아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알아듣지 못할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 질문에 대해 주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듣고 죄를 지으면 더 큰 화를 입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차라리 그들이 모르는 게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리 중에는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진리로 다시 오신 주님을 알아보는 자가 거의 없습니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 주님을 알아봅니다. 그런가 하면 진리를 알았음에도 막상 시험이 닥치면 그냥 주저앉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각자의 마음 상태가 모두 다르기 때문인데요, 우리 모두 얼마나 어렵게 이 진리를 만났습니까? 항상 자신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서 돌을 골라내고 가시덤불을 제거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의 씨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주님께서는 망대를 높이 세우려다 기초만 쌓고 마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지옥의 악령들로부터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 참된 진리로 다시 오신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진정 복된 사람들입니다. 진리의 망대를 높이 세우시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주님을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막10:21)
15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6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1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눅14:15-24)
만찬에서의 떡은 사랑의 선으로서 주님을 뜻하고, 포도주는 신앙의 진리로서 주님을 뜻하며, 동시에 인간이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이 두 가지가 교회의 본질이며, 그러므로 예배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10149)
※ 오늘 본문 역시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본문입니다. 특히 23절 말씀,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말씀은 교회들, 특히 본당이 큼지막하게 있는 교회들마다 대형 세로 표어에 써서 특히 전도와 선교, 복음 전파를 강조하는 그런 말씀이기도 하지요. 오늘도 우리에게 익숙한 본문을, 그러나 여전히 그 속뜻으로 살펴보는 시간을 우리는 갖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다들 너무 바빠 남의 잔치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이웃에게 만찬을 베풀려거든 가까운 사람을 부르지 말고, 대신 가난한 자, 몸 불편한 자를 먼저 부르라는 뜻일까요? 이 말씀에는 더 깊은 의미, 속뜻이 숨겨져 있는데요, 먼저 15절로 17절부터 보겠습니다.
15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6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여기서 잔치를 베푸는 집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잔치가 열리는 곳은 주님의 교회, 또는 천국이고요. 교회와 천국은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마시는 것은 주님에게서 진리를 배우는 것이고, 먹는 것은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진리와 선을 먹고 마셔야 주님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인간의 생명은 겉으로는 생명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악과 거짓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매일 같이 우리를 당신의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그런데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모두 자신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들 합니다. 본문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는데요,
18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첫 번째 사람은 밭을 샀기 때문에 잔치에 오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이 ‘밭을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한글 성경에는 ‘밭’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ground’로 되어 있습니다. ground는 밭으로도, ‘땅’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전자의 경우, 교회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항상 교회라는 밭에 진리의 씨를 뿌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ground는 교회가 아니라 ‘영적으로 가장 낮은 것’을 뜻하며, 그래서 밭이라고 번역하면 안 되고, 땅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가장 낮은 것이란 무엇입니까? 영적으로 높은 것은 천국에 속한 것이고, 낮은 것은 세상의 물질이나 명예 같은 세속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이 밭을 산다는 것은 교회 안의 사람들이 영적인 것에는 뜻, 관심이 없고, 오직 세상 것만을 좇는, 세속적인 것만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걸 그는 잔치에 갈 수 없다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사람은 소의 겨리를 샀기 때문에 잔치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소의 겨리가 뭘까요? 겨리라는 것은 소가 밭을 갈 때 사용하는 도구들인데, 예를 들면 쟁기나 멍에 같은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멍에는 무슨 뜻일까요? 멍에는 사람들을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세상 욕망을 뜻합니다. 욕망을 좇는 일은 어찌 보면 자유롭고 행복한,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지만, 그러나 이 욕망이라는 것은 만족을 모릅니다. 그 결과, 세상의 욕망은 사람을 가두고 속박하는 감옥이며 멍에입니다. 한편, 주님이 지워주시는 진리의 멍에도 있습니다. 그것은 욕망에 매인 사람을 구원하는 멍에입니다. 그것을 멍에라고 부르는 이유는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진리로 자신을 강제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8-30)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소의 멍에를 산 사람이나 앞에서 땅을 산 사람이나 영적으로는 비슷한 사람들이지요. 즉 주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세상 즐거움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 물론 밭을 샀기 때문에 보러 가고, 새로 산 소 다섯 겨리를 시험하는 일이 무조건 악한 일은 아닌, 그저 일상의 일이지만, 그러나 다른 날에도 할 수 있는 이런 일을 굳이 이 큰 잔치에 특별히 초대받은 날에 하고자 하는 걸로 보아, 그리고 미리 선 초청을 한 상태로 일정 조정할 여유가 이미 충분히 있었음에도, 이들이 이러는 것은 이들은 그냥 가기가 싫었던 것이며, 이 큰 잔치를 베푼 주인과 평소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구나 짐작해 봅니다.
그러면 세 번째 사람은 뭐라고 했나요? 장가를 가서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장가를 가는 것은 육신의 쾌락이나 세상 즐거움하고 결혼하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이 역시 거 참 이유치고는...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사람들은 이렇게 세상의 욕망에 빠져 삽니다. 그것에 대해 마태복음 24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7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24:37-39)
노아의 홍수는 아담교회(태고교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교회인 노아교회(고대교회)가 세워질 때의 진통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노아 시대에 사람들이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은 아담교회의 마지막 때, 사람들이 주님이 아니라 세상의 욕망과 결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지 못하겠다고 하자 종들이 주인에게 돌아와 그대로 고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화를 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1절 말씀입니다.
21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주님은 당신의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주인이 화를 냈다고 표현한 것은 인간에 대한 주님의 사랑, 또는 구원의 열정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여기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주님을 믿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이웃을 사랑하는 교회 밖 선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을 몸 불편한 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행하는 선이 진리를 바탕으로 한 온전한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결핍이 있는 것이지요. 선과 진리는 서로 균형을 이뤄야 하는데요, 선은 진리를 바탕으로 행해야 하고, 진리 또한 그 바탕에 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한 것은 주님께서 교회 밖 선한 사람들을 데리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스스로 주님의 교회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종들이 주인의 명에 따라 이들을 데리고 와 자리를 채웠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비어있는 곳이 있습니다. 종이 이 사실을 고하자 주인이 종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22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앞 절에서는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저들을 데리고 오라 하더니, 여기서는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합니다. 이 ‘길과 산울타리 가’, 곧 길에서 만난 자들과 울타리 근처에서 만난 사람들은 어떻게 다를까요? 둘 다 진리 알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선을 올바르게 행할 목적으로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이고, 울타리 근처에서 만난 사람들은 세상 거짓과 맞서 싸울 목적으로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울타리는 거짓과 맞서 싸우는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진리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이웃을 올바르게 사랑하기 위해서거나 또는 악과 거짓에 맞서 싸워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힘으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고, 또한 악과 거짓과 싸워 이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길에서 데리고 온 사람들과 울타리 근처에서 데리고 온 사람들은 모두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가진 사람들을 뜻합니다. 주님은 그런 순수한 사람들을 데리고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며, 절대로 진리를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하시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 속뜻은 이렇습니다. 새 교회가 처음 세워질 때의 모습은 마치 길에 나가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가진 사람들을 모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진리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극히 적고, 교세 또한 빈약합니다. 누구나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교회가 없어져 버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인간의 생각일 뿐이며, 주님께서 이 교회를 급하게 부흥시키실 때가 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우리는 모르고, 오직 주님만이 아십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미약하나마 이 교회를 유지시켜야 하는 사명을 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들이 주인에게 자리가 아직 비어있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우리 새 교회인들이 ‘주님, 불과 몇 평도 안 되는 이 교회에 왜 이렇게 빈자리가 많습니까...’라고 하며 안타까워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때가 되면 주님께서 급하게 사람들을 모아 이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실 것입니다. 사람들을 강권하여 잔치에 데리고 오는 것은 바로 그때를 말합니다. 24절에서 주인이 말했습니다.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전에 청하였던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주님 당시에는 유대교회 사람들이고, 오늘날에는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주류 기독교인들인데, 특별히 그 가운데 겉과 속이 다르며, 저들이 말하는 믿음과 사랑이 따로 노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겉으로는 진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하지만, 속으로는 진리를 부정하거나 파괴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자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잔치에 초대받았으나 아무도 응하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주님의 잔치에 참석하는 것보다 세상의 재물과 명성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며, 외적인 것, 곧 겉에 관한 것에 너무 사로잡힌 나머지 내적인 것, 곧 속에 관한 것의 가치를 전혀 몰랐기 때문입니다. 지상의 일에는 시력이 2.0, 3.0, 4.0에 가까웠으나 천국의 일에는 아주 깜깜, 장님이었기 때문이지요. 본문에는 그들을 땅을 산 사람, 소의 겨리를 장만한 사람, 장가를 간 사람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참된 진리를 찾기 위해 ‘시내의 거리와 골목’, ‘길과 산울타리 가’를 헤메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 우리는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잔치가 아직 끝난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잔치에 우리를 부르십니다. 천국의 진리와 선으로 먹이고 입히시기 위해서지요. 하지만 주님이 부르실 때 우리는 기꺼이 항상 응하고 있을까요? 그동안 우리 모습을 보면, 주님이 베푸신 밥상과 세상이 차려놓은 밥상 사이에서 갈등할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자아와 세상에 속한 것들이 더 달콤해 보였기 때문이지요. 이와 관련된 말씀이 계시록 3장 15절에 있습니다. 거기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계3:15)
차지도 뜨겁지도 않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신앙인의 상태가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두 주인을 섬기는 상태입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이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 믿고, 인애, 체어리티, 이웃 사랑의 삶에는 전혀 관심이 없거나 마지못해 눈길 한번 주는 수준입니다. 우리 새 교회 교인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머리로는 진리를 아는데 행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지옥은 매 순간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때 자신의 힘으로 이기려 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그간 경험을 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의 것은 모두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지혜와 능력에 기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 집요한, 매 순간의 시험들을 완벽하게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계2:17)
주님의 말씀을 믿으시고 매일 같이 이기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6: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