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26(D1)-주일예배(2516, 눅14,15-24), '주님의 큰 잔치를 맛보는 사람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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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XSMx16Q-jKo

 

 

 주님의 큰 잔치를 맛보는 사람들

 

15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6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1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눅14:15-24)

 

 

만찬에서의 떡은 사랑의 선으로서 주님을 뜻하고, 포도주는 신앙의 진리로서 주님을 뜻하며, 동시에 인간이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이 두 가지가 교회의 본질이며, 그러므로 예배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10149)

 

 

※ 오늘 본문 역시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본문입니다. 특히 23절 말씀,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말씀은 교회들, 특히 본당이 큼지막하게 있는 교회들마다 대형 세로 표어에 써서 특히 전도와 선교, 복음 전파를 강조하는 그런 말씀이기도 하지요. 오늘도 우리에게 익숙한 본문을, 그러나 여전히 그 속뜻으로 살펴보는 시간을 우리는 갖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다들 너무 바빠 남의 잔치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이웃에게 만찬을 베풀려거든 가까운 사람을 부르지 말고, 대신 가난한 자, 몸 불편한 자를 먼저 부르라는 뜻일까요? 이 말씀에는 더 깊은 의미, 속뜻이 숨겨져 있는데요, 먼저 15절로 17절부터 보겠습니다.

 

15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6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여기서 잔치를 베푸는 집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잔치가 열리는 곳은 주님의 교회, 또는 천국이고요. 교회와 천국은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마시는 것은 주님에게서 진리를 배우는 것이고, 먹는 것은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진리와 선을 먹고 마셔야 주님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인간의 생명은 겉으로는 생명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악과 거짓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매일 같이 우리를 당신의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그런데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모두 자신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들 합니다. 본문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는데요,

 

18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첫 번째 사람은 밭을 샀기 때문에 잔치에 오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이 ‘밭을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한글 성경에는 ‘’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ground’로 되어 있습니다. ground는 밭으로도, ‘’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전자의 경우, 교회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항상 교회라는 밭에 진리의 씨를 뿌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ground는 교회가 아니라 ‘영적으로 가장 낮은 것’을 뜻하며, 그래서 밭이라고 번역하면 안 되고, 땅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가장 낮은 것이란 무엇입니까? 영적으로 높은 것은 천국에 속한 것이고, 낮은 것은 세상의 물질이나 명예 같은 세속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이 밭을 산다는 것은 교회 안의 사람들이 영적인 것에는 뜻, 관심이 없고, 오직 세상 것만을 좇는, 세속적인 것만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걸 그는 잔치에 갈 수 없다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사람은 소의 겨리를 샀기 때문에 잔치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소의 겨리가 뭘까요? 겨리라는 것은 소가 밭을 갈 때 사용하는 도구들인데, 예를 들면 쟁기나 멍에 같은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멍에는 무슨 뜻일까요? 멍에는 사람들을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세상 욕망을 뜻합니다. 욕망을 좇는 일은 어찌 보면 자유롭고 행복한,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지만, 그러나 이 욕망이라는 것은 만족을 모릅니다. 그 결과, 세상의 욕망은 사람을 가두고 속박하는 감옥이며 멍에입니다. 한편, 주님이 지워주시는 진리의 멍에도 있습니다. 그것은 욕망에 매인 사람을 구원하는 멍에입니다. 그것을 멍에라고 부르는 이유는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진리로 자신을 강제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8-30)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소의 멍에를 산 사람이나 앞에서 땅을 산 사람이나 영적으로는 비슷한 사람들이지요. 즉 주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세상 즐거움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 물론 밭을 샀기 때문에 보러 가고, 새로 산 소 다섯 겨리를 시험하는 일이 무조건 악한 일은 아닌, 그저 일상의 일이지만, 그러나 다른 날에도 할 수 있는 이런 일을 굳이 이 큰 잔치에 특별히 초대받은 날에 하고자 하는 걸로 보아, 그리고 미리 선 초청을 한 상태로 일정 조정할 여유가 이미 충분히 있었음에도, 이들이 이러는 것은 이들은 그냥 가기가 싫었던 것이며, 이 큰 잔치를 베푼 주인과 평소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구나 짐작해 봅니다.

 

그러면 세 번째 사람은 뭐라고 했나요? 장가를 가서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장가를 가는 것은 육신의 쾌락이나 세상 즐거움하고 결혼하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이 역시 거 참 이유치고는...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사람들은 이렇게 세상의 욕망에 빠져 삽니다. 그것에 대해 마태복음 24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7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24:37-39)

 

노아의 홍수는 아담교회(태고교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교회인 노아교회(고대교회)가 세워질 때의 진통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노아 시대에 사람들이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은 아담교회의 마지막 때, 사람들이 주님이 아니라 세상의 욕망과 결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지 못하겠다고 하자 종들이 주인에게 돌아와 그대로 고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화를 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1절 말씀입니다.

 

21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주님은 당신의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주인이 화를 냈다고 표현한 것은 인간에 대한 주님의 사랑, 또는 구원의 열정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여기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주님을 믿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이웃을 사랑하는 교회 밖 선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을 몸 불편한 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행하는 선이 진리를 바탕으로 한 온전한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결핍이 있는 것이지요. 선과 진리는 서로 균형을 이뤄야 하는데요, 선은 진리를 바탕으로 행해야 하고, 진리 또한 그 바탕에 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한 것은 주님께서 교회 밖 선한 사람들을 데리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스스로 주님의 교회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종들이 주인의 명에 따라 이들을 데리고 와 자리를 채웠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비어있는 곳이 있습니다. 종이 이 사실을 고하자 주인이 종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22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앞 절에서는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저들을 데리고 오라 하더니, 여기서는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합니다. 이 ‘길과 산울타리 가’, 곧 길에서 만난 자들과 울타리 근처에서 만난 사람들은 어떻게 다를까요? 둘 다 진리 알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선을 올바르게 행할 목적으로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이고, 울타리 근처에서 만난 사람들은 세상 거짓과 맞서 싸울 목적으로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울타리는 거짓과 맞서 싸우는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진리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이웃을 올바르게 사랑하기 위해서거나 또는 악과 거짓에 맞서 싸워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힘으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고, 또한 악과 거짓과 싸워 이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길에서 데리고 온 사람들과 울타리 근처에서 데리고 온 사람들은 모두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가진 사람들을 뜻합니다. 주님은 그런 순수한 사람들을 데리고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며, 절대로 진리를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하시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 속뜻은 이렇습니다. 새 교회가 처음 세워질 때의 모습은 마치 길에 나가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가진 사람들을 모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진리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극히 적고, 교세 또한 빈약합니다. 누구나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교회가 없어져 버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인간의 생각일 뿐이며, 주님께서 이 교회를 급하게 부흥시키실 때가 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우리는 모르고, 오직 주님만이 아십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미약하나마 이 교회를 유지시켜야 하는 사명을 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들이 주인에게 자리가 아직 비어있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우리 새 교회인들이 ‘주님, 불과 몇 평도 안 되는 이 교회에 왜 이렇게 빈자리가 많습니까...’라고 하며 안타까워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때가 되면 주님께서 급하게 사람들을 모아 이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실 것입니다. 사람들을 강권하여 잔치에 데리고 오는 것은 바로 그때를 말합니다. 24절에서 주인이 말했습니다.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전에 청하였던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주님 당시에는 유대교회 사람들이고, 오늘날에는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주류 기독교인들인데, 특별히 그 가운데 겉과 속이 다르며, 저들이 말하는 믿음과 사랑이 따로 노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겉으로는 진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하지만, 속으로는 진리를 부정하거나 파괴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자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잔치에 초대받았으나 아무도 응하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주님의 잔치에 참석하는 것보다 세상의 재물과 명성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며, 외적인 것, 곧 겉에 관한 것에 너무 사로잡힌 나머지 내적인 것, 곧 속에 관한 것의 가치를 전혀 몰랐기 때문입니다. 지상의 일에는 시력이 2.0, 3.0, 4.0에 가까웠으나 천국의 일에는 아주 깜깜, 장님이었기 때문이지요. 본문에는 그들을 땅을 산 사람, 소의 겨리를 장만한 사람, 장가를 간 사람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참된 진리를 찾기 위해 ‘시내의 거리와 골목’, ‘길과 산울타리 가’를 헤메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 우리는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잔치가 아직 끝난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잔치에 우리를 부르십니다. 천국의 진리와 선으로 먹이고 입히시기 위해서지요. 하지만 주님이 부르실 때 우리는 기꺼이 항상 응하고 있을까요? 그동안 우리 모습을 보면, 주님이 베푸신 밥상과 세상이 차려놓은 밥상 사이에서 갈등할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자아와 세상에 속한 것들이 더 달콤해 보였기 때문이지요. 이와 관련된 말씀이 계시록 3장 15절에 있습니다. 거기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계3:15)

 

차지도 뜨겁지도 않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신앙인의 상태가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두 주인을 섬기는 상태입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이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 믿고, 인애, 체어리티, 이웃 사랑의 삶에는 전혀 관심이 없거나 마지못해 눈길 한번 주는 수준입니다. 우리 새 교회 교인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머리로는 진리를 아는데 행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지옥은 매 순간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때 자신의 힘으로 이기려 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그간 경험을 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의 것은 모두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지혜와 능력에 기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 집요한, 매 순간의 시험들을 완벽하게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계2:17)

 

주님의 말씀을 믿으시고 매일 같이 이기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6:35)

 

아멘

 

원본

2021-03-0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1-2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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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9(D1)-주일예배(2515, 눅14,7-14),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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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JJ4ABNVwJLA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7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8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10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2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3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4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눅14:7-14)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 또 그런 이유로 선을 행하는 것은 보상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공로를 일에 돌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하나님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행하고 또한 생각하기 때문이다. (참된 기독교 440)

 

 

본문을 보면 주님께서 어떤 집에 초대를 받으셨는데 초대를 받은 다른 사람들이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7절로 9절의 말씀입니다.

 

7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8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이 말씀에서 혼인 잔치의 속뜻은 선과 결합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속뜻, 곧 영적인 의미로 남녀의 혼인은 선과 진리의 결합, 또는 신앙과 신앙에 따른 삶의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 속에서 혼인 잔치가 열리는 곳은 어디일까요? 첫 번째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따라 인애(仁愛), 이웃 사랑인 체어리티(charity)를 실천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직장입니다. 새 교회에서는 직장에서 맡은 일을 공정하고 정직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체어리티의 실천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거나 병든 사람을 보살피는 것, 교회와 자선단체에 큰돈을 기부하는 것도 체어리티입니다. 그러나 새 교회 교리에 의하면 그것은 체어리티의 첫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이웃을 열심히 구제하면서도 직업과 관련된 일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하지 않으면 체어리티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보면 우리는 매일 같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주님께서는 항상 진리에 따라 체어리티의 삶을 살도록 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혼인 잔치 집에서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이를테면 어디서나 자기가 중심이 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궂은일, 힘든 일, 표 안 나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 자기는 편한 일, 돋보이는 일만 하려는 사람입니다. 일 자체에는 뜻이 없고, 오직 대우만 바라는 사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늘 의식하는 사람입니다. 분수를 모르고, 콧대만 높은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며, 그러다 보면 중요한 일에서 제외되고 계속 사소한 일만 합니다. 집주인에 의해 끝자리로 보내진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말씀에는 청한 사람에 의해 결국 끝자리로 보내졌다고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자기 스스로 기회를 계속 놓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바로 다음 10절, 1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0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일을 통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진리를 선으로 만들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신 이유입니다. 혼인 잔치에 참석한 사람은 자기와 다른 사람을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디 앉았는지 무슨 음식을 먹는지 알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주어진 자리에 앉아 차려진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나 직장에서도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하면 됩니다. 궂은일이나 단순한 일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면 됩니다. 그것이 끝자리에 앉아 체어리티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담임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몇 년 전에 지하실 식당에 습기가 많아 의자에 온통 곰팡이가 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교우 한 분이 평일에 교회에 오셔서 집사람과 함께 그것을 닦았던 일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곰팡이 입자들이 많이 날아다녔을 것입니다. 또 곰팡이 제거액 때문에 약품 냄새도 독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개의치 않고 의자들을 모두 닦고 깨끗이 말렸습니다. 나중에 제습기를 비치해서 곰팡이가 모두 사라졌지만, 그때 기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 저도 비슷한 일이 하나 생각나 나눕니다.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당시 제게 맡겨진 여러 사역 중 하나가 미디어여서 그날도, 그날은 평일이었는데, 오전에 이쪽 주일학교 교육관 건물, 마침 3층에 있던 때였습니다. 무심코 창밖을 보니 오전이었는데, 어느 할머니께서 호미를 하나 들고 오시더니 도로변 화단에 들어가 흙을 깊이 긁어 뒤집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시력도 좀 그렇고, 거리도 좀 되어 뉘신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제법 긴 그 화단을 꾸역꾸역 다 마치 소 쟁기질하듯 그렇게 뒤엎으시고는 조용히 떠나시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교회 마당에 인적도 거의 없어 아마도 그걸 본 사람은 제가 유일하지 싶습니다. 봄이 시작되어 겨우내 얼어 단단해졌던 화단 흙을 그렇게 부드럽게 하신 건데, 저는 보는 내내 마음이 참 좋아 마침 들고 있던 캠코더로 그걸 조금 담아놓았습니다. 아마 하늘의 하나님도 지상을 두루 감찰하실 때, 마음이 그러시겠다 싶습니다. 지금도 그 교회 미디어실 자료를 찾아보면 아마 그 영상이 어디 있을 겁니다.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 스스로 끝자리에 앉는 것은 어쩌면 그런 모습일 수 있습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대가 없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낮은 자리에 앉아 묵묵히 맡은 일을 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어느 날 오셔서 벗이여 올라와 앉으라고 하십니다. 그때 그는 모든 사람 앞에 영광된 사람이 됩니다. 주님은 스스로 낮은 자리에 앉은 사람을 때가 되면 높이 들어 쓰십니다. 그래서 본문에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12절과 13절에서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2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3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이웃을 초대해 점심이나 저녁을 베풀 때는 벗이나 형제,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초대하지 말고, 차라리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 맹인들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점심이나 저녁을 베푸는 것은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벗이나 형제,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은 누굴까요?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은 내 명령대로 행하는 사람이 곧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14절)

 

또 누가복음 8장 21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내 어머니요 형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한 마디로, 친구와 형제는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며,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좋아할 만한 성품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즐겁습니다. 그들의 말투나 행동, 그리고 물질적으로 서로 주고받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친구나 형제에게 선을 베푸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 맹인들과 사귀는 것은 다릅니다. 속뜻으로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 맹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진리와 선이 무엇인지 모르는 교회 밖의 사람들이며, 그럼에도 진리를 알기 원하는 진실하고 선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이 주변에 있을 때, 그들에게 먼저 사랑을 베풀고, 그들이 원하는 진리를 가르쳐 주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과 맹인들에게 점심과 저녁을 베푸는 일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14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4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그동안 다른 교회에 다니는 분들과 새 교회 교리에 대해 몇 번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친절하게 대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랬던 이유는 진리를 배우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편견을 버려야 하는데 그분들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각자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만났던 분들, 즉 진리를 모르면서도 안다고 논쟁을 걸어왔던 분들이 사실은 가난한 자요 몸이 불편한 자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분들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못한 것을 반성합니다.

 

※ 위 사례는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 사례이지만, 제게도 남의 얘기가 아닌 듯하여 그대로 옮겼습니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선 상대가 진리를 원해야 하고, 또 배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최선을 다해 친절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것이 보상을 바라지 않고, 맹인과 저는 자에게 인애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할 때 복이 있다 하시고, 의인의 부활 시에 갚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의인이란 세상 살 때 이웃에게 체어리티의 선을 행했던 사람입니다. 그들은 사후에 주님 앞에 나갈 때 주님으로부터 상을 받습니다. 그 상은 어떤 것입니까? 진리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영적 총명함, 그리고 지혜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와 총명함에서 나오는 천국의 기쁨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그 지혜에서 비롯한 기쁨이 어떤 것인지는 세상 살 때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상 그 어떤 재물이나 명예 따위와는 전혀 비교할 수 없이 고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는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며 스스로 낮아지고자 하는 자는 때가 되면 주님께서 높이시고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또 이웃에게 선을 베풀 때는 보상을 바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할 때 의인의 부활 시에 받을 상이 크다고 하십니다. 누구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근거 없는 자부심이나 교만 같은 것이 있습니다. 사람을 사귀어도 힘 있는 사람, 아는 게 많은 사람, 부유한 사람하고만 사귀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누구나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가 도와줄 테니 그 모든 것을 이겨내라 하십니다. 교만함과 보상을 바라는 마음, 육신의 정욕과 복수심이 없어지려면 죽을 것 같은 영혼의 고통과 십자가 시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 시험 가운데서 우리의 자아가 마치 죽은 자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를 의인의 부활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것에 대해 주님은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하셨습니다. 또 요한복음 5장 21절에서는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5:21)

 

라고 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 열매란 어떤 것입니까? 교만한 마음, 보상을 바라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며, 온갖 정욕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처럼 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며, 주님께서 함께하셔야만 합니다. 스스로 낮은 자리를 택해 앉으며, 보상을 바라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는 은혜가 서울 새 교회와 한결같은 교회의 모든 성도, 그리고 진리를 사랑하는 이웃들과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눅6:35)

 

아멘

 

 

원본

2021-02-2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1-1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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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2(D1)-주일예배(2514, 눅14,1-6),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들어가신 주님'.pdf
0.41MB
2023-11-12(D1)-주일예배.축도.pdf
0.22MB

 

https://youtu.be/-s9KrXJTXEo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들어가신 주님

 

 

1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2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3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4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5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6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 (눅14:1-6)

 

 

주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해서 주님에 대한 표상(表象)이 끝났을 때, 안식일은 신성한 것을 가르치는 날이 되었고, 그러므로 일에서 벗어나 휴식하는 날, 구원과 영생에 대해 묵상하는 날,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날이 되었다. (참된 기독교 301)

 

 

오늘부터 누가복음 14장을 들어갑니다. 원래 11월 첫 주인 지난주부터였는데 지난주는 저의 장인, 장모 이장(移葬) 날짜가 갑자기 주일로 앞당겨 잡히는 바람에 주일예배를 이장 예배로 대신 드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장 예배는 개장(開葬), 화장(火葬) 및 납골(納骨), 이렇게 세 번의 예배로 드렸는데, 모두 교회 유튜브와 블로그에 올렸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COVID-19이 지속되던 시절, 코로나가 가져온 많은 변화 중 가장 두드러졌던 한 가지는 바로 많은 일들이 비대면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는데요, 물건을 구입할 때도 인터넷으로, 사람들끼리의 모임도 인터넷 공간에서 말이지요. 심지어 예배도 각자의 집에서 인터넷으로 드리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었었지요. 세월이 그렇다 보니 이제 본격적으로 비대면의 시대가 오는 것이 아니냐 하고 우려하는 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새 교회에서는 가장 작은 천국이나 교회는 개인의 마음속에 있다 가르치는데요, 그렇다면 꼭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려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으시죠? 그러나 ‘천국의 비밀’ 3147번 글의 10번 항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외적 예배 의식에 묶어두시는 이유는 그 의식이 표상하는 내적인 것들을 통해 주님과의 교류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예배 의식이 표상하는 내적인 것들을 통해 주님과의 교류가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는데요, 그렇다면 이 내적인 것들을 표상하는 예배 의식들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예를 들면, 주님 친히 침례 요한에게 받으셨던 침례 의식이라든가, 십자가의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손수 포도주를 따라 주시고, 떡을 떼어주시면서 이 일을 오랫동안 기억하라 하신 성찬 의식 같은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외적 예배를 통해 주님과의 교류가 계속 끊어지지 않고 이어질 수 있다 하십니다. 주님은 또 마태복음 18장 20절에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 하셨는데요, 여기서 ‘두세 사람’은 사람의 숫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그리고 ‘내 이름으로 모인 곳’이란 사랑과 신앙으로 예배드리는 곳, 즉 교회를 뜻합니다.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끼리 정기적으로 만나 예배를 드릴 때, 영적으로 더 많은 성장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의 사람들을 통해 나타나는 다양한 선과 진리를 통해 서로 배우는 것이 많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밤에는 감람산에서 기도하시고, 아침이 되면 직접 사람들을 만나 말씀을 전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셨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주님은 안식일에 어떤 바리새인의 집으로 가셔서 그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십니다. 본문 1절에서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1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주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을 방문하셨다고 합니다. 바리새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주님께서는 자주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외식(外飾)하는 자들이라 하셨는데요, 외식하는 자들은 겉으로는 경건하게 행동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거짓을 말하고, 진리를 혐오하는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외식하는 자는 위선자입니다. 위선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진리를 모르는 교회 밖의 사람들의 위선이 있고, 교회 안의 사람들의 위선이 있습니다. 주님 당시 바리새인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위선은 교회 안의 사람들의 위선입니다. 그들은 말씀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지만, 그러나 속으로는 그와는 정반대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교회 밖의 사람이라고 해서,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이라고 해서 다 위선자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중 많은 분이 진실한 삶,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다. 여기서는 그러나 그 가운데 그렇지 못한 분들, 위선의 삶을 살고 계시는 분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새 교회인들의 위선도 있습니다. 입으로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말하면서 정작 행하지는 않는 경우입니다. 어쩌면 본문에서 말하는 바리새인의 지도자는 바로 그런 새 교회인들을 나타내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가장 높은 차원의 진리를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다면 위선 중에서도 아주 큰 위선이기 때문입니다.

 

이 새 교회 사람들의 위선 얘기가 나왔으니 잠시 제 얘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며칠 전 밤, 아내의 부탁으로 음식물 쓰레기를 한 봉지 버리러 날이 꽤 춥지만 내려갔습니다. 우리 208동은 가장 산 쪽이라 특히나 더 바람이 불고 춥습니다. 음식물 쓰레기통을 여는데 세상에! 그 안에 커다랗고 하얀 비닐봉지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별생각 없이 꺼내는데 잘 들리질 않아요. 봤더니 아이고, 그 안에 종류별로 담아 묶은 작은 여러 봉지가 예닐곱 개 정도 들어있어 무거워서 그랬던 거지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툭 던져버리고 가면 어쩌라고... 어찌어찌 쏟아 큰 비닐은 꺼내 저쪽 비닐들만 넣는 통에 넣을 수 있었는데, 이 쏟아진 작은 비닐들은... 아... 어찌해야 하나, 이미 음식물에서 흘러나온 액체들로 뒤범벅이 되어 하나하나 뒤적이며 그 짜맨 걸 풀어 비닐들만 따로 버리기가 쉽지 않더군요. 옷도 가볍게 입고 나와 벌써 굉장히 춥기도 하고 말이지요... 그러다가 에이, 뭐 나중에 저쪽 검사 과정에서 걸러지겠지 하고는 내가 들고 간 것만 한쪽에 쏟아버리고는 돌아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그렇게 찝찝합니다. ‘그래도 너는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 하는 양심의 소리! 그래도 애써 무시하고 그냥 들어와 버렸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이런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음, 이런 게 한두 번 반복되다가 그만 딱딱해지고 익숙해질 텐데... 큰일났습니다. 아무도 안 보는 데서 제 일상이 이렇게 큰 구멍이 쑹쑹 나고 있어서인지 제 삶에 능력이 사라지는 걸 느낍니다. 저는 이렇게 비겁한 사람입니다. 말씀의 속뜻이니 아르카나니 하고 있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저는 이렇게 말씀의 속뜻을 모르는 사람들, 아니 교회 밖의 사람들보다도 더 비겁하고 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의 집으로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집은 사람의 마음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의 집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은 주님이 위선자의 마음속으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떡을 잡수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위선자에게 선한 애정을 심어주시고, 그 애정을 통해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할 수 있도록 만드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위선자와 함께 떡을 드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떡은 선, 또는 선한 애정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위선자는 겉과는 달리 속으로는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을 말하는데요, 그럼에도 주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으로 들어가실 수 있었던 것은 그 사람이 본질적으로 진리를 거부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어쩌면 그는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그러므로 주님의 능력으로 위선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의 집으로 들어가실 수가 있었고, 그와 함께 떡을 드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사람들이 주시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주님을 주시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위선자의 내면에서 주님이 일하시는 것을 바라보는 시선들입니다. 우리도 가끔 그런 경험을 합니다. 시험에서 넘어져 주님,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저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데 문득 주님의 손길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어떻게 나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는지 지켜 보자.’라는 마음이 듭니다. 본문에서 주님이 일하시는 모습을 엿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2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그런데 그때 주님 앞에 수종(水腫)병 걸린 어떤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수종병은 혈액에 문제가 생겨서 몸이 붓는 질병입니다. 속뜻으로는 말씀의 진리를 왜곡하는 질병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의 집에서 수종병 든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은 위선자에게 진리를 왜곡하는 버릇이 있었음을 뜻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언제 진리를 왜곡할까요? 진리를 이용해 거짓된 생각을 관철하려고 할 때이거나, 또는 자아로부터 오는 악한 욕망을 정당화하려고 할 때입니다. 예를 들면, 대면 예배보다 비대면 예배를 지지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앞에서 말씀드린 성도들끼리의 만남이나 예배 의식으로 표상되는 내적인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오히려 말씀의 다른 구절들을 왜곡, 그것으로 자신의 생각을 증명해 보이려고 합니다. 그것이 자아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진리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참된 진리 안에 들어오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그릇된 지식이나 신념들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붙잡고 있는 경우입니다. 그럴 경우, 그 지식이나 신념에 맞지 않는 진리는 버리고 맞는 것만 받아들이며, 그렇게 해서 결과적으로 진리를 왜곡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새 술은 반드시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전에 가지고 있던 낡은 지식을 가지고는 새로운 진리를 담아낼 수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를 왜곡하는 병과 바리새인의 위선은 서로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진리를 왜곡하는 것은 결국 진리 앞에 완전히 굴복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진리 앞에 굴복하지 않으면 시험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 넘어집니다. 그러다 보면 입으로는 진리를 말하면서 행동은 마치 진리를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결국 위선자가 됩니다.

 

주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기 전에 율법교사와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3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여기서 율법교사와 바리새인들은 누굴까요? 그들 역시 위선자의 마음속에 있는 것들인데, 이를테면 스스로 진리를 많이 안다 자부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그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물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안식일에 대한 그들의 생각에 따라 진리 앞에 굴복하는지, 굴복하지 않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것이 합당합니다”라고 하면, 그는 그동안의 생각을 버리고 진리 앞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합당치 않습니다”라고 하면 그것은 진리 앞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며, 만약 그렇다면 주님은 그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없습니다. 그가 진리이신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병을 고쳐 주시기 전에,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물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믿었던 이유는, 십계명에 6일 동안은 힘써 일하되 7일째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6일 동안은 일하고 7일째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6일 동안 일하는 것은 거듭나기 전의 내적 싸움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7일째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거듭난 다음의 상태, 즉 내적 싸움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누구나 내적 싸움을 합니다. 그 이유는 그때에는 말로는 주님을 의지한다 하면서 사실은 자기가 가진 것들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란 신앙의 진리라든가 선한 애정 같은 것입니다. 신앙의 진리와 선은 모두 주님이 주신 것이지만, 그럼에도 거듭나기 전 사람들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올 때, 마치 빛이 매질을 통과할 때 굴절되는 것처럼 굴절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거듭나기 전 선과 진리는 순수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주님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리와 선이 순수하지 않으면 그 능력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지옥의 영들이 아직 거듭나기 전인 사람을 공격할 수 있는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그들의 순수하지 않은 진리와 선으로는 지옥을 압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다음에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전적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기 때문에 싸움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앞에서 인도하시는 주님을 지옥이 감히 대항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다음에는 싸움이 없고 항상 평화롭습니다.

 

4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주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과연 합당하냐 물으시자 본문에는 그들이 아주 잠잠했다고 말합니다. 잠잠하다는 것은 한글 성경 번역이고요, 영어 성경에는 그들이 계속해서 평화의 상태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평화는 속뜻으로는 순진함(이노센스, innocence)에서 오는 기쁨을 뜻합니다. 그러면 순진함은 뭘까요? 어린아이와 같이 전적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마음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잠잠했다는 것은 그 위선자가 자신의 생각을 모두 내려놓고 주님만을 믿고 따르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이 순진하게 주님을 믿고 따를 때 마음의 평화가 있습니다. 마침내 주님께서 수종병 든 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5절에서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5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이 말씀을 영어 성경의 번역으로 옮기면 ‘너희 중에 누가 나귀나 소가 구덩이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끌어내지 않겠느냐’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아들이라 하지 않고 나귀라고 했고요, 우물이라 하지 않고 구덩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말씀에서 나귀는 겉 사람의 진리를 뜻하고, 소는 겉 사람의 선을 뜻합니다. 겉 사람의 진리는 신앙인들이 일상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겉 사람의 선은 그러한 말과 행동의 바탕에 깔려 있는 선한 애정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나귀와 소가 구덩이에 빠졌다 했습니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은 진리와 선이 왜곡되거나 더럽혀지는 것을 말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인들이 자아의 욕망에 빠져있을 때는 진리를 왜곡하기도 하고, 진리에 반하는 행위를 함으로써 진리를 더럽히기도 합니다. 그것이 자기의 나귀와 소를 구덩이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귀와 소를 구덩이에서 끌어내는 것은 왜곡되거나 더럽혀진 진리와 선을 주님께서 회복시키시는 것을 의미하며, 그 일을 안식일에 하시는 것은 안식일은 완전한 진리와 선을 통해 주님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태복음 12장 8절에서 주님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진리를 통해서만 인간은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으며 완전히 거듭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인자는 신성한 진리를 뜻하고, 안식일은 주님과 인간이 하나 되는 상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새 교회 교인들은 모두 주님의 진리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 믿습니다. 그러나 머리로는 그렇게 믿으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생각을 믿을 때가 많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우월감을 가지기도 하고, 자아와 세상의 유혹들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이 시험에서 넘어지는 것은 바로 그러한 생각들 때문입니다. 시험에서 그렇게 자주 넘어지고 실패가 반복될 때, 그는 점점 위선자가 됩니다. 입으로는 진리를 말하면서 속으로는 거짓말을 하고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안식일에 찾아가신 바리새인의 지도자는 어쩌면 시험을 극복하지 못하고 열등감과 우월감 사이를 왕래하는 위선적인 새 교회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새 교회인들은 누구보다 높은 차원의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여러모로 서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바리새인의 위선이 영적인 수종병에서 온다 진단을 하시고 그의 병을 고쳐 주시려고 합니다. 영적 수종병이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좋을 대로 진리를 왜곡하는 병입니다. 어떤 것은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밀어내며, 또 어떤 것은 자신의 생각대로 고치면서 그렇게 진리를 받아들이는 병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자아와 세상에 속한 욕망들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불순한 욕망들을 버리고 마음의 병을 고칠 수 있을까요? 안식일의 주인인 나를 믿느냐 하고 주님께서 물으실 때 “네, 주님만이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우리의 고백에 진정성이 담길 때, 주님은 우리의 영적 수종병을 고쳐 주시고요, 나아가서 위선의 병으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시면서 나는 어느 때 주님을 믿지 않는지, 어느 때 주님 앞에 꼿꼿이 머리를 드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병을 아는 것이 치유의 시작입니다. 수종병과 위선을 치유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새 교회의 모든 성도와 또한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과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또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고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노라 (겔20:12)

 

아멘

 

 

원본

2021-02-0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1-1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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