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10-08(D1)-주일예배(2507, 눅13,10-17),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pdf
0.32MB
2023-10-08(D1)-주일예배.축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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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zOmvD61wZjY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10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1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2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4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7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눅13:10-17)

 

 

주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해서 주님에 대한 표상들이 사라졌을 때, 안식일은 하나님에 대한 것을 가르치는 날이 되었고, 또한 노동에서 벗어나 휴식하는 날이 되었으며, 구원과 영원한 삶에 대해 묵상하는 날이 되었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날이 되었다. (참된 기독교 301)

 

 

말씀에는 주님께서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회당은 주님 당시 유대교회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곳에서 율법을 가르치고 예배를 드렸으며, 교리의 해석을 둘러싼 이견들을 조율했습니다. 때로는 율법을 어긴 사람들을 그곳에서 벌하기도 했지요.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희생과 번제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6세기경 바빌론의 침략으로 수많은 유대인이 바빌론 등지로 유배되면서 더 이상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은 지역마다 회당을 짓고, 거기서 예배를 드리고 유대교회의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그런 식으로 자기들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전통은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계속 이어졌지요.

 

회당에서 이루어지는 크고 작은 일들은 대부분 회당장이라는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 수행했는데, 가끔은 외부에서 랍비들을 초청하기도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 주님은 이렇다 할 학벌이나 지위가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워낙 많았을 뿐 아니라,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주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그곳에 귀신 들려 앓으며 장애를 가진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11절에는 그 여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11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말씀에서 여자는 교회를 뜻하기도 하고 자아를 뜻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고 봐야 합니다. 교회를 뜻한다 하는 것은, 그녀가 주님을 믿고 사랑하기 때문이고, 자아를 뜻한다는 것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아직 주님보다 자신의 자아를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처럼 주님과 인간의 자아를 동시에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여자는 열여덟 해 동안이나 자아를 통해 들어오는 지옥의 귀신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한 싸움이었고, 그러므로 거룩한 싸움이었습니다. 그것을 말씀에서는 열여덟 해 동안 싸운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열여덟은 3과 6을 곱한 수로, 3은 거룩한 것을 뜻하고 6은 내적 싸움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싸웠음에도 여자는 아직 허리를 펴지 못하고 있습니다. 허리를 펴지 못한다는 것은 그가 하늘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여전히 자기 자신과 세상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여자는 아무리 주님을 바라보려 해도 지옥에 붙잡혀 있어서 마음대로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것이 여자가 열여덟 해 동안 앓고 있는 병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여자를 보시고, 그에게 다가가셔서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12절과 13절에서는 주님이 병을 고치시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12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주님이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안수하시는 것은 주님 혼자 병을 치유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능력이 나와 여자에게 전해지고, 여자가 겸손하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이끄시고 인간이 겸손하게 따름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때 여자의 허리가 즉시 펴졌습니다. 허리를 펴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세상만 바라보던 사람이 이제 주님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레위기 26장 13절의 말씀처럼 주님께서 “그의 멍에와 빗장을 부수고 바로 서서 걷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자 여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병의 치유가 주님으로부터 이루어졌음을 고백하고 모든 공을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악을 끊거나, 또는 선을 행할 때 자신의 힘으로 이룬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선하고 지혜롭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영적 질병들이 완전히 치유되지 않습니다. 곧 또 다른 시험이 오고, 싸움이 다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힘으로는 아주 작은 악도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을 솔직히 주님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는 이전 상태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주님이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보고 회당장이 분개했습니다. 14절에서는 그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는데요,

 

14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회당장이 주님께 화를 낸 까닭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그들의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율법에는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이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진짜 이유가 뭘까요? 회당장은 유대교회의 거짓 교리 안에 있는 사람이고, 주님은 진리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거짓, 참과 거짓은 절대로 화합할 수 없고, 대신 반목하거나 대립합니다. 그래서 회당장은 주님을 미워하고 주님에게 분노했습니다. 그것은 유대교회의 거짓된 교리가 진리를 대적하는 모습입니다. 회당장이 분노하는 것을 보시고,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5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유대교회의 회당장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었지만, 오히려 말씀을 왜곡, 거짓 교리를 만들어 교인들에게 지키게 했는데요, 그것은 진리를 방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겉으로는 진리의 편인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진리를 반대하는, 불편해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너희는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여기서 소와 나귀는 선과 진리에 대한 애정을 뜻하고, 물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 물을 먹이는 것은 자아라는 감옥에 갇혀 선과 진리에 목말라하는 자들을 풀어내 마음껏 선과 진리를 마시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식일에 열여덟 해 동안 귀신 들린 여자가 귀신에서 놓여나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자아 사랑에 가로막혀 주님을 사랑할 수 없었던 사람이 오랜 싸움 끝에 주님을 마음껏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일이 안식일에 이루어지는 것은 안식일은 영적 싸움이 끝나는 때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소와 나귀를 안식일에 풀어 물을 먹이듯 귀신에 매인 여자를 안식일에 풀어 주는 것이 어째서 합당하지 아니하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17절에는 주님께서 그 말씀을 하시자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했다고 합니다.

 

17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왜곡해 진리를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들은 그럴듯한 말로 거짓을 진리인 것처럼 포장하고, 그것으로 교인들을 현혹, 진리를 대적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적 진리로 오실 때, 인간이 만든 모든 거짓은 참 진리이신 주님의 빛 아래 설 자리를 잃어버립니다. 주님이 말씀하시자 모든 반대하는 자들이 부끄러워했다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열여덟 해 귀신 들린 여자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진리 가운데 들어온 지 벌써 여러 해가 되었지만, 주님을 과연 얼마나 사랑하는지 스스로 물어볼 때가 많습니다. 잘못된 습관을 끊지 못해 계속 끌려다닙니다. 주님의 일보다는 세상의 일 때문에 늘 염려하고 근심합니다. 자신에게 닥친 작은 불행이나 손실에는 크게 낙심하면서 이웃의 불행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런 상태에 있는 것은 자아 사랑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옥의 영들이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옥의 영들과 끊임없이 싸웠습니다. 마치 열여덟 해 귀신 들린 여자처럼 그렇게 싸웠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주님이 어느 날 문득 여자의 병을 고쳐주신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자는 그동안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안식일이면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자아 사랑을 부추기는 지옥의 영들과 열여덟 해 동안이나 싸웠습니다. 주님이 안수하실 때 겸손하게 주님께 몸을 맡겼습니다. 이러한 노력 때문에 그는 지옥의 영들이 놓은 덫에서 벗어나 안식일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주님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주님이 손을 내미실 때 겸손하게 엎드려야 합니다. 주께서 말씀을 통해 교리를 가르치실 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들, 그리고 진리를 사랑하시는 모든 분과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그들에게 종된 것을 면하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내가 너희의 멍에의 빗장을 부수고 너희를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 (레26:13)

 

아멘

 

원본

2020-11-2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0-0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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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10-01(D1)-주일예배(2506, 눅13,6-9), '두루 파고 거름을 주었음에도 열매를 열지 못하면'.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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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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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1(D1)-주일예배.축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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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1V5lp3sR7E4

 

 

 

두루 파고 거름을 주었음에도 열매를 열지 못하면

 

 

6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눅13:6-9)

 

 

나무에 속한 모든 것은 진리를 뜻하지만, 열매는 다양한 선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선의 상태로 들어가지 못하고 진리의 상태로 남아있는 것은 잎사귀만 있고 열매는 없는 나무와 같다. 마태복음 7장 19절에서는 그것에 대해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라고 말한다. (참된 기독교 106)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그것이 그들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시고, 제자들에게 회개하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세상의 재앙이나 환난은 어떤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 사람들은 모두 보이지 않는 어떤 끈으로 서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한 사람이 선을 행하거나 악을 행하면 그 여파가 다른 모든 사람에게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만큼 세상은 천국이 될 것이지만, 반대로 악을 행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세상은 점점 더 지옥으로 변하고, 질병과 환난과 재앙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어지러우면 어지러울수록 우리 신앙인들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1장 18절 이하에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회개하지 않는 신앙인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18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 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0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마21:18-20)

 

말씀에는 제자들이 이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몇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되는데요, 첫째, 주님께서 과연 그 정도로 허기를 느끼시거나 예민하셨을까 하는 것이고요, 둘째는 주님이 허기를 채우려 하셨다면 얼마든지 다른 방법이 있으셨을 텐데 왜 하필이면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게로 가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주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신 데 왜 무화과나무를 그토록 저주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이 세상에서 보여 주신 모든 기적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그 속에 담긴 영적 의미, 곧 속뜻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겠습니다.

 

말씀에는 주님이 시장하시다 했지만, 그것은 주님의 생리적인 욕구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물론 주님도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배고픔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육신의 문제로는 그렇게 힘들어하시지 않으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느끼시는 허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주님은 모든 인간이 자신의 믿음을 따라 선을 행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바로 그 마음이 주님이 느끼시는 배고픔이며 허기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길가에 무화과나무가 있는 것을 보시고 바로 다가가 열매가 열렸는지를 살펴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무의 열매는 신앙인들이 행하는 선한 행위를 뜻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주님은 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기까지 했을까요? 무화과나무의 열매는 자연적인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세 가지 단계의 천국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선에도 세 가지 단계의 선이 있습니다. 가장 낮은 단계는 자연적 선(natural good)인데,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구원만을 위해 진리를 믿고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연적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웃에 대해서나 교회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에 비해 영적인 선(spiritual good)은 진리와 선을 사랑하되 자신보다는 이웃을 위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단계의 선은 무엇일까요? 바로 천적 선(celestial good)입니다. 천적인 선은 주님을 위해 또는 선 그 자체를 위해 진리와 선을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듭나는 것은 이렇게 자연적인 차원에서 영적인 차원으로, 영적인 차원에서 천적인 차원으로 신앙이 계속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교회나 사람을 보실 때 그에게 어떤 선이 있는가를 먼저 보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살펴보신 무화과나무에는 안타깝게도 열매가 하나도 달려 있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적인 선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연적 선도 없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주님 당시 유대인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오직 세상의 재물과 지위만을 탐했습니다. 말씀을 대할 때도 문자적인 의미에만 매달릴 뿐 그 안에 담긴 영적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와 관련해 마태복음 13장 15절에서 주님은 유대인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마13:14-15)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유대인들의 경우는 말씀의 내적인 것을 모르는 편이 차라리 낫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타고난 특성상 그들은 진리를 알면 오히려 그것을 더럽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유대교회 사람들의 영적 성향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예배는 겉으로만 신성할 뿐 내적으로는 전혀 신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믿음의 열매를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주님이 무화과나무를 향해 ‘네가 이제부터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하신 것은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유대인들 스스로 영적으로 죽어 가는 모습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말씀입니다. 6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6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는데, 와서 보니 열매가 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포도원은 교회를 뜻합니다. 포도원이 교회를 뜻하는 이유는, 포도나무는 영적 선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영적 선이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으로 하는 일을 말합니다. 반면에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을 뜻합니다. 포도원의 주인이신 주님이 당신의 뜰에 무화과나무를 심으신 것은 거듭남의 첫 번째 단계는 자연적 선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어떻게 주님을 믿고 사랑하겠습니까? 누구나 처음에는 나만 구원을 받으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진리의 길을 갑니다. 그러니까 진리에 따라 이웃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일을 할 때도 공정하게 하는 것이 모두 자신의 구원을 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주인이 삼 년을 기다려도 열매를 얻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배우기만 할 뿐 전혀 실천하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7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그러자 주인이 포도원지기에게 말합니다.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여기서 포도원 주인이나 포도원지기는 모두 주님을 나타내는데, 정확히 말하면 주님의 두 가지 본질을 나타냅니다. 즉 포도원 주인은 말씀 또는 진리로서의 주님이시고, 포도원지기는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포도원 주인이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 하는 것은 진리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들에게 구원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주님이 길가의 무화과나무를 향해 ‘네가 이제부터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이나 같은 의미입니다. 주인은 또 삼 년을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셨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삼 년은 처음부터 끝까지, 또는 완전한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얼마나 우리를 위해 기다리실 수 있을까요? 주님은 유대인들이 당신을 때리고, 침을 뱉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 박을 때까지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이 스스로 파멸하기 전에는 절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포도원 주인이 기다린 삼 년이요, 그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8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주님의 그런 마음을 본문 8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두루 파고 거름을 준다는 것은 주님께서 진리로 가르치고 설득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가르치고 설득하실까요? 먼저 나무 주변을 두루 파십니다. 두루 판다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쓸 만한 진리와 선이 있는지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는 일방적으로 진리를 주입하시지 않고, 그가 가지고 있는 진리와 선을 통해 대화하듯 천천히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또 거름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거름은 인분과 같이 더러운 것인데 그것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와 관련해 ‘천국의 비밀’ 4628번 글의 2항을 보면 천국의 천사들은 지옥에서 오는 악한 기운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데 그 냄새는 인분이나 시체가 썩는 냄새같이 아주 역겹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역한 냄새를 지옥의 영들은 아주 좋아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거짓이나 악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는 그것이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지를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좋아합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그 진리 안에 있을 때 비로소 그동안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악과 거짓들의 역한 냄새를 느낍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거름을 주신다는 것은 주께서 새로운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그것을 통해 이전의 악과 거짓의 음습한 기운과 역겨운 냄새를 느끼도록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때 우리는 몸에 밴 악습과 거짓된 신념들을 혐오하게 되고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를 가르쳐 열매 맺게 하는 방법입니다.

 

9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마음을 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찍어내신다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주님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주님의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회개하지 않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봤습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마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참된기독교’ 106번 글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신앙은 어린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수동적인 신앙에서 능동적인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 출애굽기 21장에서는 히브리 사람들의 종은 여섯 해까지만 주인을 섬기고 일곱 해가 되면 자유인이 되어 떠나야 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은 신앙인들은 진리를 위한 싸움을 이겨내야 하고, 그렇게 해서 수동적인 신앙에서 능동적인 신앙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여섯 해는 거듭남을 위한 싸움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수동적인 신앙과 능동적인 신앙은 어떻게 다를까요? 수동적인 신앙은 진리의 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이 복종하는 신앙입니다. 그에 비해 능동적인 신앙은 진리를 행할 때 기쁨을 느끼는 신앙이며, 그러므로 특별한 노력 없이도 자발적으로 진리에 따라 사는 그런 신앙입니다. 사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웃과 뜻을 맞추고, 그들의 행동을 참아 내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때 진리의 명령이니까 용서하고 참는다면 그것은 수동적 신앙입니다. 그러나 기쁨으로 상대를 이해하고 용서한다면 능동적 신앙입니다. 요한복음 8장 31절에서 주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죄의 종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시는 기회를 붙잡고 매 순간 회개해야 합니다. 믿음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영원한 자유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형제자매와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3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요8:34-36)

 

아멘

 

 

원본

2020-10-25(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0-0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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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9-24(D1)-주일예배(2505, 눅13,1-5),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pdf
0.36MB

https://youtu.be/IHM4XUWZFes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1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2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13:1-5)

 

 

주님으로 말미암은, 사람 안에 있는 능력이 있는데 그것은 서로 주고받는 능력이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능력이며, 그러므로 상호 작용하는 능력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은 회개를 해야 하고, 회개할 때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야 한다 하신다. (삶에 관한 교리 103)

 

 

사람에 대한 편견이 누구보다도 많았던 사람들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장애인들을 비하했고, 문둥병자나 세리, 이방인들을 혐오했습니다. 그들이 그런 생각을 가졌던 이유는 성경에 나오는 병자나 장애인, 이방인들은 영적으로는 부정적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이웃을 혐오하고 차별했습니다. 사람에 대한 유대인들의 편견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은 요한복음 9장 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거기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4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요9:1-7)

 

주님의 제자들조차 장애가 있는 사람은 유전 죄가 많거나 스스로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맹인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일까요? 첫째는 주님을 모르면 누구나 다 맹인이 된다는 것이며, 둘째는 그러므로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를 통해서만 맹인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직접 진흙에다 당신의 침을 섞어 맹인의 눈에 발라주시고, 그의 눈을 뜨게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비슷한 내용의 말씀인데요, 본문 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1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이 본문은 여러 다양한 번역들을 살펴보면 대체로 희생제사를 드리던 갈릴리 사람들을 빌라도가 학살, 그들의 피가 희생제물에 흘러들게 되었다는 그런 의미인 것 같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음은 그 번역들의 예입니다.

 

바로 그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빌라도가 희생물을 드리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 흘린 피가 제물에 물들었다는 이야기를 일러드렸다. (공동번역)

 

바로 그때에 몇몇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에 섞었다는 사실을 예수께 일러드렸다. (새번역)

 

바로 그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빌라도가 제사를 드리고 있는 갈릴리 사람들을 죽인 이야기를 하였다. (현대인의 성경)

 

말씀에서 갈릴리 사람은 그 속뜻으로는 이방인을 뜻하며, 그러므로 갈릴리 사람이 흘리는 피는 이방인의 선을 뜻합니다. 피는 선이나 인애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의 선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거나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빌라도의 제물은 무엇입니까? 고대인들은 예배나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을 불에 태워 드리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물은 예배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이방인인 빌라도의 제물이기 때문에 자아에 대한 예배를 뜻합니다. 따라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의 피를 자기의 제물에 섞었다는 것은 이방인들 중에 힘 있는 자가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힘없는 사람들의 선의와 진실을 짓밟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관련, 지난 정권에 의해 저질러진 수많은 조작과 거짓, 선동의 일들이 생각납니다. 가령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이라든지 자유를 찾아 귀순한 두 청년을 판문점에서 강제 북송한 사건이라든지 말이지요. 그런데도 당시 힘 있는 사람들은 죽은 자의 진실을 마음대로 판단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고만 했는데요, 그렇게 했던 이유는 그들이 주님을 예배하지 않고 자신의 자아를 예배했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예배하지 않고 거짓을 예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죽은 자의 진실을 짓밟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희생제물에 섞은 것은 이를테면 그런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얘기를 들으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2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우리는 자신에게 닥쳐서는 안 되는 어떤 불행이 다른 사람에게 닥칠 때, 그들 스스로 지은 죄에 대한 업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이 너희보다 죄가 더 많아서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근거 없는 우월감이며 교만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평범한 이웃들에게 그런 불행이나 시련이 닥치는 이유가 뭘까요? 개인의 죄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3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세상에서의 삶은 사후에 영원히 지속되는 삶에 비하면 찰나와 같은 것입니다. 만약 개인에게 닥친 불행을 영원한 삶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불행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지요. 그러므로 자신에게 닥치든, 이웃에게 닥치든 시련이 있을 때는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살펴보고, 고칠 점이 있으며 고쳐야 합니다. 나와 이웃이 남이 아니라 하나로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같이 망하리라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회개란 무엇입니까? 참된 기독교 528번 글은 회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실제적인 회개는 자신을 검토하여 죄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며, 주님께 기도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먼저 자신의 의도와 행위를 검토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가 발견되면 그것을 주님 앞에 인정하고, 그러고 나서 주님을 의지해 악을 끊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4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앞에서 빌라도에게 희생된 갈릴리 사람들의 얘기가 이방인들의 불행에 대한 것이라면, 지금 이 말씀은 신앙인들의 불행에 대한 것입니다. 실로암은 예루살렘에 있는 연못의 이름입니다. 주님 당시에는 그곳을 통해 예루살렘 성 안으로 물이 공급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에 실로암은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를 뜻하는데요, 또 망대라고 하는 탑은 노아의 후손들이 쌓았던 바벨탑과 같은 의미로 자아에 대한 예배를 뜻합니다. 열여덟 사람이 죽었다고 했는데, 열여덟은 영적 싸움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열여덟(18)이라는 수는 그 속뜻으로는 영적 싸움을 뜻하는 6의 배수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들을 종합해 볼 때,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영적 싸움을 하는 신앙인들이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총명함을 과시하려 했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영적으로 죽어갔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이단 교회들이 많이 있는데요,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성경을 마음대로 해석해 거짓 교리들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고, 그 교리를 근거로 해서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교인들 위에 군림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실로암의 망대를 만들다 치어 죽는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모든 사람에게는 그러한 욕망들이 조금씩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들의 죄가 이들보다 결코 가볍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단단하고 무서운 것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5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거듭 말씀하신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을 이와 같이 두 번 반복해 말씀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는데요, 선과 진리의 결합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즉 첫 번째 회개는 진리 또는 이성에 관한 회개이고, 두 번째 회개는 선 또는 의지의 관한 회개를 의미합니다. 진리 또는 이성에 관한 회개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을 때, 전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만 받아들이지는 않는지, 그리고 진리에다 자신의 생각을 섞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검토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순간 그의 진리는 거짓이 되기 때문이며, 그러면 선 또는 의지에 관한 회개는 무엇입니까? 진리는 바르게 이해하는데 진리에 반(反)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고 고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진정한 회개의 삶이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이웃에게 불행한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거나 자신과는 무관한 일처럼 생각합니다. 심지어 그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 그들 스스로 저지른 죄의 업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지난 수년을 겪었으며, 사실 아직도 꿈틀 중인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통해 실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영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서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행동이 어떤 형태로든 이웃에게 영향을 주고, 이웃의 행동이 또 나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웃의 아픔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는 일입니까? 주님의 말씀처럼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것이 재앙과 환난을 짧게 끝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환난 가운데서 회개하고 거듭나는 주님의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눅3:8-9)

 

아멘

 

 

원본

2020-10-1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9-2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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