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창2:25)
AC.163
그들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naked and not ashamed)는 그들이 순진함(innocent) 안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그들의 own안에 순진함을 주입하셔서, 그것이 못 받아들여지는 것이 되는 걸 막으셨기 때문입니다. Their being “naked and not ashamed” signifies that they were innocent, for the Lord had instilled innocence into their own, to prevent its being unacceptable.
해설
AC.163은 창2의 마지막 절을 여는 ‘결정적인 열쇠’를 제공합니다. 여기서 ‘벌거벗음’은 결핍이나 수치의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순진함의 표지’로 제시됩니다. 중요한 점은, 이 순진함이 인간에게서 자연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own 안에 주입하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앞 단락들에서 충분히 밝혀졌듯이, 인간의 own은 본질상 악하며, 그대로 두면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도 이 시점에서 그들의 own이 아직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이유는, 그 위에 ‘순진함이라는 보호막’이 덮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진함은 own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해악이 드러나지 않도록 ‘완충 역할’을 합니다.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는, 아직 own을 own으로 주장하거나 방어할 필요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즉, 그들은 own 안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생명의 근원으로 삼지 않았던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AC.163은 앞선 AC.150의 ‘깊은 잠’과도 미묘하게 연결됩니다. 아직 완전히 깨어 있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아직 완전히 타락하지도 않은 상태입니다.
이 단락은 또한 창3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마지막 안전지대’를 보여 줍니다. 순진함이 주입되어 있는 동안에는, own이 살아나 있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파괴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순진함이 상실되는 순간, 벌거벗음은 더 이상 순진함이 아니라 ‘수치’로 바뀌게 됩니다. 바로 그 전환이 다음 장에서 일어납니다.
AC.163은 그래서 짧지만 매우 밀도가 높은 단락입니다. own + 순진함 = 아직 허용된 상태, own - 순진함 = 곧 드러날 위기
이제 이어질 AC.164-167에서는, 이 순진함이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 그리고 왜 그것이 유지되지 못했는지가 조금 더 정밀하게 설명되며, 창2가 완전히 마무리됩니다.
모든진리와정의의법은천적기원들,곧천적인간의생명의질서로부터흘러나옵니다.온천국은하나의천적인간인데,이는오직주님만이천적인간이시기때문입니다.그리고주님께서천국과천적인간의모든것안에서모든것이시므로,천국과천적인간은그분으로말미암아천적이라합니다.모든진리와정의의법이천적기원들,곧천적인간의생명의질서로부터내려오는것처럼,특별히‘혼인의법’(thelawofmarriages)이그러합니다.지상의모든혼인은‘천적혼인’(celestialmarriage),곧천국의혼인으로부터,그리고그혼인에따라파생되어야합니다.이혼인은한분주님과하나의천국,곧머리가주님이신하나의교회가있는그러한혼인입니다.여기서파생되는‘혼인의법’(lawofmarriages)은한남편과한아내가있어야한다는것입니다.이경우그들은천적혼인을표상하며,천적인간의본이됩니다.이법은태고교회의사람들에게계시되었을뿐아니라그들의속사람에새겨져있었습니다.그러므로그당시에는한남자가오직한아내만을두었고,그들은하나의집을이루었습니다.그러나그들의후손들이속사람이기를그치고겉사람이되었을때에는여러아내를맞이하였습니다.태고교회의사람들은그들의혼인에서천적혼인을표상했기때문에,부부의사랑은그들에게일종의천국이자천국의행복이었습니다.그러나교회가쇠퇴했을때그들은더이상부부의사랑안에서행복을퍼셉션하지못하고,다수에게서오는쾌락,곧겉사람의즐거움에서행복을퍼셉션했습니다.이것을주님께서는‘마음의완악함’(hardnessofheart)이라하셨으며,이로말미암아그들은모세를통하여여러아내를두는것을허락받았습니다.주님께서친히다음과같이가르치십니다.All the laws of truth and right flow from celestial beginnings,or from the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For the whole heaven is a celestial man because the Lord alone is a celestial man,and as he is the all in all of heaven and the celestial man,they are thence called celestial. As every law of truth and right descends from celestial beginnings,or from the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so in an especial manner does the law of marriages. It is the celestial(orheavenly)marriage from and according to which all marriages on earth must be derived;and this marriage is such that there is one Lord and one heaven,or one church whose head is the Lord. The law of marriages thence derived is that there shall be one husband and one wife,and when this is the case they represent the celestial marriage,and are an exemplar of the celestial man. This law was not only revealed to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but was also inscribed on their internal man,wherefore at that time a man had but one wife,and they constituted one house. But when their posterity ceased to be internal men,and became external,they married a plurality of wives. Because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in their marriages represented the celestial marriage,conjugial love was to them a kind of heaven and heavenly happiness,but when the church declined they had no longer any perception of happiness in conjugial love,but in pleasure from a number,which is a delight of the external man. This is called by the Lord “hardnessofheart,” on account of which they were permitted by Moses to marry a plurality of wives,as the Lord himself teaches:
AC.162는 창2:24의 ‘둘이한몸을이룰지로다’를 혼인 자체의 질서로 확장하여 설명합니다. 출발점은 지상의 혼인이 아니라 천국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이 인간 사회의 편의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천적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내려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특별히 혼인의 법이 그러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혼인은 단순한 사회 제도나 생활 방식이 아니라 천국의 질서가 지상에서 표상되는 매우 중요한 형식입니다.
이 설명의 중심에는 ‘천적혼인’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상의 모든 혼인이 천적 혼인으로부터, 그리고 그 혼인에 따라 파생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천적 혼인을 설명하면서 먼저 ‘한분주님과하나의천국’을 말하고, 이어 ‘머리가주님이신하나의교회’를 말합니다. 따라서 혼인의 하나 됨을 이해하는 가장 깊은 기준은 두 인간이 서로에게만 집중하여 하나가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 됨의 근원이 한 분 주님에게 있다는 데 있습니다. 천국도 교회도 그분을 머리로 할 때 하나이며, 지상의 혼인도 이 천적 질서를 표상합니다.
바로 여기서 한 남편과 한 아내라는 혼인의 법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당시의 관습이나 인간이 만들어 낸 윤리 규정에서 도출하지 않고 천적 혼인으로부터 도출합니다. 한 남편과 한 아내가 혼인을 이룰 때 그들은 천적 혼인을 표상하고 천적 인간의 본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일부일처는 이 단락에서 단순히 허용된 여러 결혼 형태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천적 혼인에서 파생되는 혼인의 질서로 제시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이 법이 외적으로 계시되었을 뿐 아니라 속 사람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이 한 남자와 한 여자로 하나의 집을 이루었던 것은 단지 외적인 명령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내적 상태가 그 질서와 상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부부의 사랑은 ‘일종의천국이자천국의행복’이었습니다. 혼인의 외적 형태와 그들의 내적 생명의 질서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후손들이 속 사람이기를 그치고 겉 사람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변화를 혼인에서도 그대로 보여 줍니다. 그들은 더 이상 부부의 사랑 안에서 행복을 퍼셉션하지 못하고 다수에게서 오는 쾌락, 곧 겉 사람의 즐거움에서 그것을 퍼셉션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아내의 수가 바뀌었다는 외적 사실보다 행복을 어디에서 퍼셉션하게 되었는가 하는 내적 변화입니다. 혼인의 외적 변화는 이미 일어난 인간 내면의 변화를 드러내는 결과였습니다.
이 때문에 AC.162가 막10:5-9를 인용하는 이유도 분명합니다. 주님께서는 모세가 허용한 것을 곧바로 창조의 본래 질서와 동일시하지 않으시고, ‘너희마음이완악함으로말미암아’ 그렇게 기록되었다고 말씀하신 뒤 ‘창조때로부터’의 질서로 돌아가십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말씀을 인용한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복수의 아내가 허락되었다는 사실이 혼인의 본래 법을 바꾼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상태가 달라짐에 따라 허용된 것이 있었지만, 혼인의 기원과 기준은 여전히 천적 혼인에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마음의완악함’을 단순히 고집이 세거나 잔인하다는 뜻으로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 AC.162자체의 흐름에서 보면,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속 사람이기를 그치고 겉 사람이 되었으며, 부부의 사랑에서 누리던 천국의 행복을 더 이상 퍼셉션하지 못하게 된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막10장에서 모세의 허용을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창조의 처음을 다시 가리키신 것은, 인간의 변화된 상태와 혼인의 본래 질서를 구별하여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AC.162는 이렇게 창2:24를 천적 혼인에서 지상의 혼인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질서 안에 놓습니다. 한 분 주님, 하나의 천국과 교회, 한 남편과 한 아내, 그리고 하나의 집이라는 흐름의 중심에는 단순한 숫자상의 ‘하나’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 됨이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부부의 사랑이 천국의 행복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혼인이 이 천적 질서를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락의 ‘혼인의법’은 결혼생활에 관한 하나의 규칙을 넘어, 지상의 혼인이 어디에서 그 본과 질서를 받아야 하는지를 밝히는 말씀입니다. (AC.162해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창2:24)
AC.161
이태고교회의후손들은악하지않았고여전히선했습니다.그리고그들은겉사람안에서,곧자기들의proprium안에서살기를원했기때문에주님께서는이것을그들에게허락하셨으며,다만영적천적인것을자비롭게그안에스며들게하셨습니다.속사람과겉사람이어떻게하나로서활동하는지,또는어떻게하나처럼보이는지는하나가다른하나안으로유입되는것을알지못하면알수없습니다.이에관하여어떤관념을갖기위해하나의행위를예로들어보겠습니다.어떤행위안에체어리티,곧사랑과신앙이없고,또그사랑과신앙안에주님이계시지않는다면,그행위는체어리티의행위또는신앙의열매라고할수없습니다.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evil,but was still good;and because they desired to live in the external man or in their own,this was permitted them by the Lord;what is spiritual celestial,however,being mercifully instilled therein. How the internal and external act as a one,or how they appear as a one,cannot be known unless the influx of the one into the other is known. In order to conceive some idea of it,take for example an action. Unless in an action there is charity,that is,love and faith,and in these the Lord,that action cannot be called a work of charity,or the fruit of faith.
해설
AC.161에서 먼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을 ‘악하지않았고여전히선했다’고 분명히 말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이미 악에 빠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전의 천적 인간처럼 전적으로 속 사람의 질서 안에서 살기보다 겉 사람 안에서, 곧 자기들의 proprium안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proprium을 원했다는 사실만으로 곧바로 그들을 악한 상태라고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들의 이러한 상태를 허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허락하셨다는 것은 그들을 proprium에 내버려 두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은 곧이어 주님께서 ‘영적천적인것’을 자비롭게 그 안에 스며들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151에서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고 한 것, AC.154에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난다고 한 것과 이어집니다. 인간이 proprium안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그 생명의 근원이 proprium자체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서 활동하면서 하나처럼 보일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유입’(influx)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둘이 실제로 하나의 것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AC.159에서 천적 인간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구별되며,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어떻게 다스려지는지를 퍼셉션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은 구별되지만 서로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유입을 통하여 하나로서 활동합니다.
이것은 앞서 AC.155에서 천사들의 상태를 설명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천사들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하지만, 그것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으로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곧 생명의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사실과 그 생명을 자기 자신의 삶처럼 살아가는 경험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AC.161에서 겉 사람의 proprium안에 영적 천적인 것이 스며든다는 설명도 같은 흐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유입을 추상적인 설명으로 끝내지 않고 하나의 ‘행위’를 예로 듭니다. 어떤 행위가 겉으로 선하게 보인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체어리티의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행위 안에 체어리티, 곧 사랑과 신앙이 있어야 하며, 다시 그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여기서 행위는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사랑과 신앙은 그 행위를 안에서 살아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신앙의 생명 역시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따라서 AC.161에서 말하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하나 됨은 둘 사이의 구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흘러들어 실제 삶과 행위 안에서 함께 활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둘이한몸을이룰지로다’를 해설하면서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된다고 한 내용도 더 분명하게 해 줍니다. 하나처럼 보이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인간 안에서 질서 있게 받아들여져 하나의 삶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AC.161은 창2후반부의 proprium에 관한 설명을 한 단계 더 깊게 만듭니다. 인간에게 proprium이 허락되었다는 것만으로 설명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proprium안에 무엇이 스며들어 있으며, 무엇이 그 삶과 행위의 내적 근원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천적인 것이 그 안에 있고, 그것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 안으로 유입되어 실제 삶에서 나타날 때, 인간은 자기 삶을 자기 삶처럼 살아가면서도 그 생명의 근원은 주님에게 두게 됩니다. 이것이 AC.161이 유입이라는 개념을 통해 보여 주기 시작하는 중요한 질서입니다. (AC.161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