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10(D1)-주일예배(2518, 눅14,31-35),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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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8dz5vK-viOo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의 속뜻

 

 

31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4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눅14:31-35)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고, 그러므로 인간에게서 오는 악과 거짓을 따르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따르는 것이다. (천국의 비밀 10490:7)

 

 

주님께서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를 미워하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에서 ‘부모와 처자와 형제’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악한 애정과 거짓된 생각들을 뜻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마땅히 그러한 것들을 미워해야 합니다. 자아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 왜 악이며 거짓일까요? 그 이유는 인간의 자아는 이웃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물질이나 육신에 속한 것에 집착하고, 사랑과 인애(仁愛, charity) 같은 영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아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사기와 보복, 잔인한 폭력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아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만큼 세상은 지옥으로 변합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지옥으로 변해가는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서로 미워하고 싸우는 사람들을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람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위해 세상에 오셔서 신성한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직접 십자가를 지시고, 자아와 세상과 싸우는 모범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자아의 감옥에서 벗어나 온전히 주님을 따라갈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31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1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어떤 임금, 왕이 다른 왕과 전쟁을 하는데, 군사 일만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저쪽의 군사 이만을 상대할 수 있을까 궁리를 합니다. 여기서 ‘왕들의 전쟁’은 신앙인들의 시험을 뜻합니다. 즉 진리와 거짓의 싸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은 진리 또는 거짓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쪽 왕의 군사가 만 명이고, 저쪽 왕의 군사가 이만’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신앙인들의 진리가 지옥의 거짓을 이기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진리가 거짓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진리를 가지고는 지옥의 거짓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인간의 진리 안에는 힘의 원천인 선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옥을 이길 힘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 또는 사랑에서만 나옵니다. 시험이 올 때, 믿음이 깊은 사람은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 의지해 옳다 생각되는 일을 하고, 결과는 모두 주님께 맡기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믿음이 없는 사람은 걱정이 많습니다. 주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시험이 오면 항상 집니다. 이것이 이쪽 왕의 군사는 만 명이고, 저쪽 왕의 군사는 이만 명인 상태입니다. 우리 자신이 이런 상태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에 대해 3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32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라고 합니다.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한다’는 것은 지옥과 타협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이 오기 전에 주님을 의지, 미리 대비하는 것을 뜻합니다. 시험이 올 때는 갑자기 오지 않고, 그 전에 어떤 징후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주님 앞에 얼마나 겸손한지, 주님의 생각보다 자신의 생각을 믿는 것은 아닌지를 스스로 점검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좋지 않은 의도나 버릇이 있다면 주님을 의지해서 끊어내야 합니다. 그런 방법으로 미리 대비를 하면, 시험이 오더라도 능히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한다는 것은 지옥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도움을 청해 시험에 대비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3절 말씀입니다.

 

33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자기의 소유를 버리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시험이 오기 전에 자신을 점검하고, 자아의 의도나 습관들을 미리미리 끊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아와 세상과의 싸움에서 넘어지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0절 이하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20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마19:20-21)

 

주님을 찾아온 어떤 부자 청년에게 주님께서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부자’는 진리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부자의 소유는 바로 진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들을 다 처분하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유가 뭘까요? ‘부자의 진리’는 인간의 지혜요 세상의 지식일 뿐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의 소유를 모두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진리 안에는 선한 것이 들어 있지 않고, 그러므로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버리느니라

 

소금을 쳐야 음식의 맛이 살아나는 것처럼 진리 안에는 진리를 온전하게 만드는 소금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 소금이 뭘까요? 선 또는 선한 애정입니다. 모든 진리 안에는 선이라는 생명이 들어있습니다. 선으로 말미암아 진리가 살아납니다. 선이 있는 진리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지옥 전체를 이길 힘이 있습니다. 진리 안에 들어있는 소금이 선이라면, 선 안에 들어있는 소금은 진리입니다. 이와 같이 진리와 선은 함께 있어야 온전한 것이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악인에게 쫓기는 어떤 선한 사람이 자기 집 다락방에 숨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악인이 와서 그 사람의 행방을 묻습니다. 그때 그가 다락방에 숨어있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일까요, 아니면 그 사실을 숨기는 것이 진실일까요? 당연히 숨기는 것이 진실입니다. 모든 진실은 선을 위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돈만 생기면 도박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돈을 빌리러 왔습니다. 돈을 빌려주는 것이 선일까요, 아니면 거절하는 것이 선일까요? 거절하는 것이 선입니다. 모든 선은 그 바탕에 진리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진리가 무엇입니까? 돈을 빌려주면 그 사람을 망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는 아무리 어려워도 돈을 빌려주지 않는 것이 선입니다.

 

인간의 진리 안에는 선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또 진리라고 하더라도 생각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진리에는 선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행동하는 진리 안으로 오셔서 그곳에 선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선이 없는 진리를 맛을 잃은 소금에 비유하시고 거름으로도 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2장 13절에서 여호와께서는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약의 소금’이라고 하신 까닭은, 언약은 주님과의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선이 들어있지 않은 진리를 가지고는 주님과 결합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끝으로, 주님께서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당시에도 그렇고, 오늘날에도 그렇고,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뿐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시는 것은 바로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은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귀는 순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 오늘도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에 대해 말씀을 함께 나눴습니다. 오늘 말씀을 공부하면서 주님께서 왜 부모와 처자와 형제를 미워하라고 하시는지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생각해 보니 별 생각 없이 했던 많은 일들이 주님을 위한 일이 아니라 자아와 세상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삶의 곳곳에 그런 잘못들이 퍼져 있는 이유는, 그동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지 않고, 인간의 생각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생각만 하고 삶에 적용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진리, 또는 삶에 적용하지 않는 진리는 맛을 잃은 소금과도 같아서 쓸모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선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이 없는 진리를 가지고는 영적으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차지도 덮지도 않은 미지근한 자, 롯의 아내처럼 늘 뒤를 돌아보는 자라고 하십니다. 주님 말씀을 따라 항상 진실하기를 원하고 낮아지기를 원하며 온유하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는 모든 성도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31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32롯의 처를 기억하라 (눅17:31-32)

 

아멘

 

원본

2021-03-28(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2-1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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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년생 대한민국 남자 기대수명이 21.8세... (2023/12/5)

 

완전생명표_성_연령별__20231206101440.xls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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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생 여자는 23.7세입니다. 구글링을 하니 나오는, 여성정책연구원 통계DB 완전생명표에 나오는 수치입니다. 참고로, 39년생 여자는 7.7세, 46년생 여자는 12.5세, 43년생 남자는 7.9세 등이 그 남은 기대수명입니다. 저는 61년생인데... 그러면, 이 통계대로라면, 제게 남은 시간은 22년이 채 안 되는군요...

 

꼭 이걸 신봉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러나 유의미한 무슨 지표는 되지 싶습니다. 가령, 앞으로는 절대 시간을 허투루 쓰면 안 되겠다. 앞으로는 오직 천국 입국 조건, 즉 주님의 신성에만 올인해야겠다 결심하는 등 말이지요.

 

저의 경우, 스베덴보리의 저술들 번역하는 일만 하기에도 너무 빠듯할 것 같은데요, 여러 저술 중 백미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년 시작, 총 8년에 걸쳐 저술된,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라틴 주석, 총 10,837개의 글)의 경우, 하루 다섯 개씩만 잡아도 6년!

 

이 외에도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232),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581), ‘결혼애’(Conjugial Love, 696), ‘하나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435),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299), 그리고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851) 등 꼭 번역을 남기고픈 주요 저작들만 추려도 4,094개의 글이나 되는데다가...

 

스베덴보리의 책들은 그 내용이 내적(內的, internal)이요, 영적이기 때문에, 읽어보시면들 아시겠지만, 뇌가 마비될 정도로 그 내용이 깊고 높아 어렵습니다. 하여, 1차 결과물들인 번역들과 일반 독자들을 이어주는, 무슨 가교역할을 할, 좀 대중적 풀이들이 필요한데요, 사실 이 2차 결과물들이 더 요긴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이기 때문이지요!

 

특별히 그의 모든 저작 중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경우, 그 엄청난 분량에도 불구, 이미 두 종류의 한글번역들이 나와 있는데요, 정말 고생고생하셔서들 번역하셨을 줄 믿기에 이 자리를 빌어 존경과 감사의 인사말씀 올립니다만... 그러나 저의 역량 때문인지 이 기존 번역들이 제게는 좀 맞지가 않더군요... 그래서 오랜 시간 고민하다가 그냥 제가 직접 번역하자 마음 먹게 된 것입니다.

 

번역 자체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번역자 본인이 영계에 대한 나름의 이해와 그 내면이 열려야 하기 때문인데, 그래서 영어나 라틴을 좀 한다고 바로 번역할 수 있는 게 절대 아니고, 스베덴보리를 한 4, 5년 해야 겨우 제대로 된, 걸음마 수준의 번역이라도 할 수 있지요. 이 부분에서는 전문 번역가라도 예외가 없습니다. 번역의 전문성은 있지만 이 책에 합당한 내면이 열리지 않았을 경우, 그런 분의 번역은 도저히 감출 수 없는 어떤 엉뚱함, 살짝 영혼 없는 번역이 나타나거든요... 저 역시 이 문제 때문에 창세기 앞 부분만 일곱 번째 번역 중인데요, 이제는 더이상 유턴할 시간이 없어 이런 '처음부터 다시!'를 그만하고 그냥 쭈욱 가야만 할 것 같습니다. 지난 5년, 이런 되풀이를 반복한 것은 하다 보니 너무 바보같은 번역, 너무 어처구니 없는 실수, 마치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한 번역을 한 게 하고 나면 또 보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만 62세를 조금 넘었습니다. 제가 언제까지 이렇게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키보드를 칠 수 있을까요? 저는 한쪽 눈이 안 보이는, 그리고 다른 눈은 사분의 일이 안 보이는 경험을 한 2년 했습니다. 지금은 주님의 은혜로 많이 회복, 번역하는 데 큰 지장은 없습니다. 운전도 별 무리 없고요. 그러나 늘 긴장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 눈을 필히 영양가 있게 써야만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저도 모르게 유튜브 보는 일에 넋 놓고 있을 때가 많아 참 안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는 1688년에 태어나 1772년에 떠났습니다. 저도 저 위 기대수명만큼만 더 머물다가 간다면, 얼추 스베덴보리처럼 가게 되는데요... 그는 떠날 때, 자기가 떠나는 날을 알고 있었고, 저 위 마지막 저작, ‘참된 기독교’를 1771년에 끝마치고, 이듬해 어느 주일 오후, 아주 포근하고 향기롭게 눈을 감았습니다. 깔끔하게 떠났지요. 저 역시 떠나는 날까지 일하다가 깔끔하게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자식들을 비롯, 주변 사람들 폐 끼치지 않고 갈 수 있으니까요... 저대로라면, 저희 사모는 제가 먼저 가고 한 이 년 후, 따라오겠네요. ㅎㅎㅎ

 

자식들은 이런 얘기하면 질색들을 하겠지만... 그러나 나름 또 유익도 있겠지요. 저는 어머님은 고3 때인 1980년 9월에, 아버님은 대졸 때인 1988년 2월에 제 곁을 떠나셨는데요, 만일 그 시절에 저런 통계가 존재했다면, 그래서 대략 부모님이 앞으로 얼마를 더 사시겠다 그 기대수명을 알고 있었더라면, 좀 더 다른 시간들을 보냈을 텐데 하는, 진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가령, 아버님의 경우, 옛날엔 화장실이 밖에 있었고, 그래서 특히 추운 겨울엔 방마다 요강이 있어 그 방안 요강으로들 해결했지요. 저는 그 시절, 중1에서 고1 때였는데, 제 기억에 아침에 요강 비우는 건 늘 칠순을 바라보시는 아버님이셨습니다. 저는 더럽다고 거의 손도 대지 않았거든요... 저는 지금은 이런 거 하나까지 다 후회가 됩니다. 그 시절, 불과 2년 후에 어머님이 그렇게 갑자기 떠나실 줄은, 그리고 아버님이 8년 후, 그렇게 또 어머니 뒤를 따르실 줄은 정말 몰랐거든요!

 

이제는 주신 소명 마치는, 이 쓰임새의 일에만, 그리고 그와 더불어 더더욱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삶에만 올인해야겠습니다. 아직도 이 나라, 특히 내년 총선 걱정이 크지만, 균형을 잡아야겠다, 이제 저 나라로 이민 갈 준비도 착실히 하면서... 하는 생각을 오후 잠시 쉬면서 이렇게 해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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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3(D1)-주일예배(2517, 눅14,25-30), '부모와 처자, 형제자매 및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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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SHW97au7zXo

 

 

'부모와 처자, 형제자매 및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의 속뜻

 

 

25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 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눅14:25-30)

 

 

주님 신앙 안에서 그의 계명에 따라 사는 사람들한테는 영적인 시험이 있는데, 이 시험은 그들이 자기들과 같이 있는 악한 영들을 쫓아낼 때 있습니다. 이 악한 영들은 그들의 욕망과 마치 한 몸처럼 행하는 자들입니다. 다음 말씀에 나오는 십자가는 바로 이 시험을 뜻합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마10:38) (계시록 속뜻 639:2) By “temptations” are here meant spiritual temptations, which exist with those who have faith in the Lord and live according to his commandments, when they drive away the evil spirits that are with them, who act as one with their lusts. These temptations are signified by “the cross” in the following passages: And he that taketh not his cross and followeth after me is not worthy of me (Matt. 10:38).

 

 

복음서에 보면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많은 무리가 모였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있는데요, 가령 키가 작은 삭개오가 주님을 보려고 뽕나무 위로 올라간 이야기, 주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나 되는 무리를 먹였다는 에피소드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주님을 따라다녔을까요? 병을 고치려고 온 사람들도 있었을 테고, 단순히 기적을 보기 위해 온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님의 놀라우신 말씀을 듣기 위해 온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께 나아왔던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자신들이 원하는 것들을 얻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많던 무리 중 마지막까지 남아 주님의 곁을 지켰던 사람은 불과 몇 명이 안 되었는데요, 주님 골고다 십자가 마지막 현장까지 함께했던, 주님이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과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몇 명의 여인들뿐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많은 무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였습니다. 말씀에서 ‘무리(multitude)는 진리를 뜻하는데요, 그러므로 주님이 가시는 곳에 무리가 따라다닌다는 것은 진리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5, 6절입니다.

 

25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 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려면,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 및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는 것은 신앙인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덕목입니다. 십계명에도 부모를 공경하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들을 미워하라고 하시는데요, 그 이유가 뭘까요? 여기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는 그 속뜻으로는, 실제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가 아니라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모든 악과 거짓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자아 사랑을 뜻하고, ‘어머니’는 세상 사랑을, ‘처자와 형제, 자매’는 그 사랑에서 나오는 온갖 악한 애정과 거짓된 생각을 뜻합니다. 그것은 모두 진리와 반대되는 것들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마땅히 그것들을 미워해야 합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숨’은 자아라고 하는 인간의 타고난 생명을 뜻하기 때문인데, 인간의 자아는 악과 거짓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아를 사랑하는 사람은 선과 진리를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사랑한다면, 자신에게 이익이 될 때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도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선하고 진실한 것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웃을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있는, 그런 숭고한 마음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도 사람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불교 신자들은 인간의 내면에 부처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그들이 말하는 부처는 바로 주님이시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니까 그들은 사람이 곧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 교회에서는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결합해야 할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이시지만, 그러나 그분이 곧 우리 자신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마치 자기가 주님인 것처럼 말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내면에 계신 주님이 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복음서 여러 곳에서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를 미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 및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라 하신 주님이 27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7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자아와 세상에 속한 것을 미워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요, 왜냐하면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생명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버리는 일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아와 세상을 버리는 일은 한 번에 되지 않습니다. 많은 시험과 내적 싸움이 필요한데요, 주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신 것은 그래서입니다. ‘십자가’는 내적 싸움과 시험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먹을 것이나 입을 것, 또는 주거 문제와 같은 세상적인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느냐, 곧 그 쓰임새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세상 것들은 주님과 이웃을 위해 쓰일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는 인식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시험에 임할 때, 능히 시험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험에는 내적인 시험이 있고, 외적인 시험이 있습니다. 내적인 시험은 자신의 자아, 또는 자아의 악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외적 시험은 뭘까요? 외적인 시험은 질병이나 불운 같은 것이며, 또는 주님이 바리새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으신 것처럼, 교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교리적으로 공격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시험의 성격과 종류가 모두 다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외적인 시험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내적인 시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이 다르다고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각자에게 맞는 시험을 허용하시고, 그 시험을 통해 그들에게 있는 그들 고유의 악들을 몰아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28절에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28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망대는 적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감시하는 탑입니다. 그래서 ‘망대를 세우는 것’은 영적으로는 진리를 획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는 시험이 올 때, 악과 거짓을 미리 감지하고 맞서 싸우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해 “천국의 비밀” 8960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험은 사람의 악과 거짓 안에 있는 악령들이 끌어들이는 것이며, 그때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주님의 천사들은 신앙의 진리를 불러내 그것으로 악령들을 막아낸다.” 그러니까 신앙의 진리가 바로 영적인 망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망대를 준공하기까지 자기가 가진 것을 계산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신앙의 진리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시험에서 이겨야 하는데, 그것이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시험에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시험의 악들과 맞서 싸우고, 한편으로는 쉬지 않고 주님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시험에서 한 번 두 번 이길 때, 주님으로부터 우리 마음속에 신앙의 진리가 심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면에 세워지는 진리의 망대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진리를 소유하기 전에는 사실은 신앙이 있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냥 신앙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일 뿐이지요.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는 시험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29절과 3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9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기초’는 신앙을 형성하는 교리의 지식을 뜻합니다. 따라서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한다’는 것은 교리의 지식만 있고, 신앙의 진리는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많은 신앙인이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교리에 대해 조금 안다고 해서 신앙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를 위한 싸움에서 이겨야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사력을 다해 시험에서 이길 때, 주님께서 신앙의 진리를 주십니다. 그리고 신앙의 진리를 소유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점점 더 많은 시험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신앙의 진리 안에는 선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때부터가 신앙이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신앙의 진리가 아니라 교리의 지식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시험에서 항상 집니다. 기억 속에만, 즉 알고만 있고, 삶에 적용하지 않는, 즉 실천하지 않는 교리의 지식 안에는 선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의 믿음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늘 제자리걸음을 합니다. 앉은뱅이 신앙이지요. 바로 이런 사람들이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공사를 시작하고 마치지는 못하는 사람들이지요.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들을 비웃는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 이끄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가 이끄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가 되고자 사람은 자아와 세상으로부터 오는 악을 미워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 및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라 하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부모와 처자, 형제, 자매는 영적으로, 즉 그 속뜻으로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오는 모든 악에 대한 애정과 거짓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자아와 세상에 속한 악은 한 번에 없어지지 않고, 단계적으로 천천히 없어집니다. 그 과정은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말씀으로부터 교리를 배웁니다. 그래야 무엇이 자아이고, 자아의 악인지를 알기 때문이지요. 그다음에는 교리의 지식을 그때그때 삶에 적용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내적 싸움이 시작됩니다. 겉 사람의 저항 때문이지요. 그 싸움이 바로 각자가 짊어지고 갈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이런 말씀을 전하실 때, 알아듣는 사람이 몇이나 됐을까요? 대부분 알아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알아듣지 못할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 질문에 대해 주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듣고 죄를 지으면 더 큰 화를 입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차라리 그들이 모르는 게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리 중에는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진리로 다시 오신 주님을 알아보는 자가 거의 없습니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 주님을 알아봅니다. 그런가 하면 진리를 알았음에도 막상 시험이 닥치면 그냥 주저앉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각자의 마음 상태가 모두 다르기 때문인데요, 우리 모두 얼마나 어렵게 이 진리를 만났습니까? 항상 자신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서 돌을 골라내고 가시덤불을 제거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의 씨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주님께서는 망대를 높이 세우려다 기초만 쌓고 마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지옥의 악령들로부터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 참된 진리로 다시 오신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진정 복된 사람들입니다. 진리의 망대를 높이 세우시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주님을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막10:21)

 

아멘

 

원본

2021-03-2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2-0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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