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한 분 되심

The Unity of God

 

5

신학 전체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시인하는 것(the acknowledgment of God from a knowledge of God)이 바로 에센스(essence), 쏘울(soul)이기 때문에, 맨 먼저 하나님의 하나되심(the unity of God)을 다룰 필요가 있으며, 이는 이어지는 섹션들에서 순서대로 전개될 것입니다. As the acknowledgment of God from a knowledge of God is the very essence and soul of the entire contents of theology, it is necessary that the unity of God should be the first thing treated of. This shall be set forth in order in the following sections:

 

(1) 성경 전체와 거기서 나오는, 기독교계 전체 교회들의 교리들에 의하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The entire holy Scripture, and the doctrines therefrom of the churches in the Christian world, teach that God is one.

 

(2) 하나님으로부터 나와 사람들의 영혼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범우주적인 입류(入流, influx)가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계시며, 그분은 한 분이시라는 진리에 관한 것이다. There is a universal influx [from God] into the souls of men of the truth that there is a God, and that he is one.

 

(3) 이런 연유로, 종교를 가진, 그리고 제대로 된 이성을 소유한 나라(nation)치고 한 분 하나님을, 그리고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는 나라는 전 세계에 단 한 군데도 없다. For this reason there is in all the world no nation possessing religion and sound reason that does not acknowledge a God, and that God is one.

 

(4)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사실은 동의하고 인정, 존중하지만,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여러 나라와 민족들은 그동안 의견이 달랐고, 지금도 여전히 다른 것이다. Respecting what the one God is, nations and peoples have differed and still differ, from many causes.

 

(5) 인간 이성은 맘만 먹으면, 세상 만물을 통해 하나님이 계시며, 그분은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지각하고, 확신할 수 있다. Human reason can, if it will, perceive and be convinced, from many things in the world, that there is a God, and that he is one.

 

(6) 만일 하나님이 한 분이 아니셨다면, 우주는 창조될 수도, 그리고 보존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If God were not one, the universe could not have been created and preserved.

 

(7)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교회로부터 파문당하고, 정죄를 받는다. Whoever does not acknowledge a God is excommunicated from the church and condemned.

 

(8) 한 분 하나님 대신 여러 하나님을 시인하는 사람한테는 교회와 관련된 일에 있어 전혀 일관성이 없다. With the man who acknowledges several Gods instead of one, there is no coherence in the things relating to the church.

 

이들 명제들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These propositions shall be unfolded one by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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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 하나님

God the 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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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후(Since the Lord’s time), 기독교회는 유아기부터 최고령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stages)를 거쳤습니다. 기독교회의 유아기는 사도들의 시대였는데요, 그때 그들은 회개(repentance)와 구주 되신 주 하나님 신앙(faith in the Lord God the savior)을 세상에 전했습니다. 이 사실은 아래 사도행전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Since the Lord’s time the Christian church has passed through the several stages from infancy to extreme old age. Its infancy was in the lifetime of the apostles, when they preached throughout the world repentance and faith in the Lord God the savior. That this is what they preached is evident from these words in the Acts of the Apostles: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행20:21) Paul testified, both to the Jews and to the Greeks, repentance toward God and faith in our Lord Jesus Christ (Acts 20:21).

 

※ 사도행전이나 요한일서 등은 스베덴보리가 말한 '말씀'(The Word) 목록에는 없지만, 현 성경 66권에 포함되었음을 감안, '...아래 사도행전 말씀을 보면...' 식으로 그냥 가볍게 표현한 것입니다. 참고하세요.

 

 

성경 66권 중 말씀(The Word)은...

성경 66권 중에서 속뜻(internal sense, inner meaning)이 있는 성경을 '말씀'(The Word, 총 34권)이라 하며, 다음과 같습니다. 구약 : 창, 출, 레, 민, 신, 수, 삿, 삼상, 삼하, 왕상, 왕하, 시, 사, 렘, 애, 겔,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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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 만한 사실은, 몇 달 전, 주님은 지금은 천사가 된 그의 열두 제자를 다 함께 불러 영계 전체에 그들을 보내어 그곳에 새로운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오래전 그들을 통해 세우신 교회가 그동안 계속 황폐해지다가 오늘날엔 그 남은 자들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으며, 급기야 이런 일, 곧 신적 삼위일체(the Divine trinity)가 세 인격(three persons), 곧 그 각각이 하나님이며 주님인 세 인격으로 나뉘고 마는 사태까지 벌어졌기 때문이지요. It is a noteworthy fact that some months ago the Lord called together his twelve disciples, now angels, and sent them forth throughout the spiritual world, with the command to preach the gospel there anew, since the church that was established by the Lord through them has at this day become so far consummated that scarcely a remnant of it survives; and this has come to pass, because the Divine trinity has been divided into three persons, each one of whom is God and Lord.

 

※ 위 ‘몇 달 전’이라는 표현과 함께 이어지는 내용은 스베덴보리가 이 글을 작성 중이던 당시, 실제 영계에서 일어난 일을 말합니다.

 

[2] 이 때문에 일종의 광분, 광란(frenzy)이 모든 신학은 물론, 주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모든 교회를 침략, 침공했는데요(has invaded), 이를 광란이라 하는 이유는, 이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미치게 해서 하나님이 한 분인지, 세 분인지 모를 지경까지 이르게 했기 때문입니다. 입술로는 한 하나님이 계신다라고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세 인격을 생각하는 게 현실이며, 그 결과, 마음과 입술, 그러니까 생각과 말이 서로 상충, 모순, 결국 하나님이라는 건 논리적으로 절대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오늘날 만연한 물질주의는 무슨 다른 데 원인이 있는 게 아닙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라고 하는 입술과 셋을 생각하는 마음을 놓고, 만일 이 둘이 만날 때, 둘 중 어떤 걸 내려놓을 수 있는지 말입니다. 결론적으로는, 사람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만일 그가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그저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밖에는, 그러니까 그 이름에 하나님에 관한 무슨 지식이 들어있어 그로 인한 어떤 의미를 수반한다는 걸 일절 배제한 채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Because of this a sort of frenzy has invaded not only all theology, but also the church that from the Lord’s name is called Christian. It is called a frenzy because men’s minds have been made so demented by it as not to know whether there is one God or three. On the lips there is one God; but in the thought of the mind there are three; consequently the mind and lips, that is, the thought and speech, are at variance; and the result of this variance is that there is no God at all. The materialism that prevails at this day is from no other source. Consider, if you will, with the lips speaking of one and the mind thinking of three, whether one of these statements does not, when they meet within, cancel the other. Consequently when a man thinks about God, if he thinks at all it is nothing more than thought from the mere name God, unaccompanied by any sense of the meaning of the name that involves any knowledge of God.  

 

※ 그러니까 사람의 마음속에 이 ‘하나님은 한 분이시냐, 세 분이시냐(whether there is one God or three) 하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본인도 모르게 결국 ‘하나님은 없다(there is no God at all)는 결론에 도달, 물질주의에 기반한 삶을 살게 되며, 그런 상태 가운데 있는 사람한테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살면서 요 정도로밖에는 무슨 큰 의미가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3] 하나님에 대한 생각(idea)은 하나님에 관한 모든 개념과 함께 그동안 결국 이 지경, 곧 산산조각이 난 상황이기 때문에, 제가 원하는 건, 순서대로 창조주 하나님(God the creator), 구속주 되신 주님(the Lord the redeemer), 행하시는 성령(the Holy Spirit the operator), 그리고 끝으로 신적 삼위일체(the Divine trinity)를 다루는 것이며, 그 최종 목적은 이 산산조각 난 걸 다시 전체적으로 세우는 것인데요, 이는 사람의 이성이 말씀과 말씀의 빛, 곧 거기 신적 삼위일체가 있으며, 이 삼일성(the trinity)이 주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마치 영과 육, 그리고 이 영육으로 인한 활동이 한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해서 아타나시우스 신조에 있는 다음 글이 참임을 확신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됩니다. The idea of God, with all conception of him, having been thus rent asunder, it is my purpose to treat, in their order, of God the creator, of the Lord the redeemer, and of the Holy Spirit the operator, and lastly of the Divine trinity, to the end that what has been rent asunder may be again made whole; which is done when the reason of man is convinced by the Word and by light therefrom that there is a Divine trinity, and that the trinity is in the Lord God the savior Jesus Christ, like the soul, the body, and what goes forth from these, in man; and that thus this article in the Athanasian Creed is true: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 즉 신성(the Divine)과 인성(the human)이 둘이 아니라 한 인격(person) 안에 있습니다. 이성을 가진 영(the rational soul)과 육이 한 사람이듯, 그렇게 하나님과 사람이 한 그리스도입니다. In Christ God and man, or the Divine and the human, are not two, but are in one person; and as the rational soul and the flesh are one man, so God and man are one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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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4(D1)-주일예배(2525, 눅15,22-32), ‘두 아들과 내게 돌아올 분깃’의 속뜻(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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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유튜브는 오디오입니다. 참고하세요.

 

 

 

두 아들과 내게 돌아올 분깃’의 속뜻(2)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눅15:22-32)

 

 

결혼 그 자체는 그 이상 거룩한 것이 없을 정도로 거룩하다. 그것으로 인해 인류가 생성되고 인류로 인해 천국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천사의 삶을 살았던 사람은 천국으로 가기 때문이다. 반대로 간음은 그 이상 불경한 것이 없을 만큼 불경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에게 있는 천국과 교회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9961:4) ...marriages are so holy that there is nothing more holy, and this also for the reason that they are the seminaries of the human race, and the human race is the seminary of the heavens, for thither come the men who in the world have lived an angelic life. And on the other hand adulteries are so profane that there is nothing more profane, because they are destructive of heaven... (AC.9961:4)

 

 

오늘 본문은 2주 전 다룬, ‘두 아들과 내게 돌아올 분깃’의 속뜻, 그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이 본문은 그 유명한 누가복음 15장, ‘돌아온 탕자의 비유’ 본문인데, 본문이 길어 전, 후반 둘로 나눈 것으로, 오늘은 그 후반 본문입니다. 먼저 22절, 23절은 멀리 떠났다 돌아온 아들을 주님께서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아버지가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며, 아들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인다고 합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속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아들은 속 사람의 뜻을 따르지 않고, 떠나 제 마음대로 살다 돌아와 이제는 속 사람과 결합하기를 원하는 겉 사람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좋은 옷을 입히고 살진 소를 잡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 겉 사람 안으로 선과 진리를 많이 보내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좋은 옷은 진리를 뜻하고, 살진 송아지는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단절되었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다시 통할 때, 주님은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에 있는 진리의 지식들 안으로 당신의 생명인 선을 불어넣으십니다. 그때 그 지식들이 살아나 진리로 변합니다. 그러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는 것은 지식들 안으로 선이 흘러 들어가는 것이고, 좋은 옷을 입히는 것은 그때 그 지식들이 진리로 변하는 것을 뜻합니다.

 

※ 우리는 보통 내 안에 지식이 많으면, 그러면 언제든 내가 맘만 먹으면 나는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경험에 의하면, 지식과 실제로 그 지식을 가지고 선한 삶을 사는 건 별개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선을 행할 수 있으려면, 선 그 자체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오셔야 하는데요, 이것을 ‘주님이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에 있는 진리의 지식들 안으로 당신의 생명인 선을 불어넣으신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가락지를 끼워주신다고 했는데, 가락지는 보통 결혼식에서 배우자들이 서로 나눠 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가락지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을 의미하고, 또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으로 인해 겉 사람에게 힘이 생기는 것을 뜻합니다. 가락지로 표상되는 겉 사람의 힘이란 어떤 것입니까? 어떤 시험에서도 이길 수 있는 힘이며, 자기 자신보다 주님과 이웃을 더 사랑할 수 있는 힘입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이 결합할 때, 겉 사람은 그런 힘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주님이 끼워주시는 가락지, 반지입니다.

 

말씀에는 또 아들의 발에 신을 신겼다고 했습니다. 말씀에서 발이나 신은 겉 사람 안에 있는 더러운 것을 뜻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처음 만나실 때 신을 벗으라고 하신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신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으로 인해 깨끗하게 된 겉 사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속 사람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선하고 진실한 것들이 겉 사람을 정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발을 씻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로 돌아와 순종할 때 일어나는 변화들입니다.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4절에서 아버지가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말했습니다. 겉 사람이 주님 앞에 회개하고 속 사람과 결합할 때, 죽었던 겉 사람이 다시 살아납니다. 주님은 어떤 식으로 겉 사람을 살리실까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으로 선과 진리를 불어넣으시고, 그때 겉 사람 안의 모든 것들이 살아나면서 능력이 생기는 식입니다.

 

그런데 그때 밭에 있던 큰아들이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 모습을 25절에서는, 맏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25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여기서 맏아들과 작은아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내면의 교회를 형성하는 두 마음, 곧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맏아들이 밭에 있다는 것은 속 사람이 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밭은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집에서 노랫소리와 춤추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노래와 춤은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 안으로 선과 진리가 흘러들어올 때, 그 선과 진리에서 비롯한 기쁨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예배를 드릴 때, 악기를 연주하고 찬송을 하는 것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을 때의 기쁨을 나타냅니다. 춤추는 것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맏아들이 화를 냅니다. 그것에 대해 29절과 3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8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맏아들이 말하기를 내가 여러 해 동안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속 사람은 그동안 주님의 명령에 따라 겉 사람에게 진리와 선을 충실하게 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겉 사람은 말을 듣지 않고 세상을 좇다가 가지고 있던 선과 진리를 모두 잃어버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런 그에게 선과 진리를 아낌없이 주십니다. 맏아들이 아버지에게 창녀들과 함께 살림을 탕진한 이 아들을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라고 성을 내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창녀들과 함께 살림을 탕진하는 것은 주님이 주신 선과 진리를 모두 더럽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간음은 선과 진리를 악과 거짓과 뒤섞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씀에는 이렇게 표현했지만, 그러나 실제로 속 사람은 이렇게 분노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맏아들이 분노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성(聖) 문서에서는 그것에 대해 자세히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 즉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오픈하신 모든 계시를 특별히 구분하여 ‘(聖) 문서’라고 칭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가지고 곰곰이 생각을 해 봤는데요, 아마 이런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내면의 교회를 이루는 것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면 외부의 교회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누굴까요? 속 사람의 역할을 하는 이는 목회자입니다. 선과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겉 사람은 성도들입니다. 외부의 교회 중에는 가정도 있습니다. 고대 교회 때는 각 가정에서 가장의 인도로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속 사람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가장입니다. 그리고 겉 사람은 아내와 자녀들입니다. 교회의 목회자나 가정에서 가장들이나 세상 즐거움을 느낄 겨를없이 성도들을 위해, 가족들을 위해 계속해서 맡은 일을 하지요. 그런데 때로는 소외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목회자에게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해서 신랄하게 비판을 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잘한 것보다는 잘못을 지적하는 분들도 계시지요. 서운한 일이 있다고 교회를 떠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럴 때 목회자나 가장은 마음에 상처를 받습니다. 하느라고 했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인가 하는 것입니다. 맏아들이 아버지께 성을 내는 것은 이를테면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 이 설교 원본은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지난 2021년 5월 16일 주일 설교인데요, 이런 설명, 이런 풀이 앞에 저는 참 마음 깊이 탄복합니다. 주님의 성품 안에서 주님의 지혜를 온전히 의뢰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영적 의미로 목회자는 사랑으로 주님을 표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는 모든 문제를 사랑, 또는 선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데요, 그러나 본문에서 맏아들의 모습은 사랑이나 선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이해하는 모습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본문 26절에 보면,

 

26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맏아들이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종에게 물어봤다고 했습니다. 말씀에서 종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여기서는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종에게 물어봤다는 것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선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 이해하는 모습입니다. 자기 앞에 놓인 상황을 선으로 이해하면 어떤 경우든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리로 이해할 때는 화도 나고 자괴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 이와 관련, 마태복음 산상수훈 말씀이 생각납니다.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5:38-44)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는 이 본문은 참으로 능력의 말씀, 선 그 자체이신 주님의 능력이 느껴지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부족함을 느끼는 건 다름 아닌 선악 분별의 능력과 지혜입니다.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선, 곧 주님의 뜻인지를 잘 모르겠는 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중 요즘 가장 저를 괴롭히는 한 가지는 바로, 저를 이단으로 단정, 일체 어떤 권면도 거절하는 사람을 저는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시도 때도 없이 진리, 즉 옳고 그름의 잣대가 떠올라 저를 분노하게 하는데요, 바로 오늘 본문의 맏아들 모습이 딱 제 모습입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은 정말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맏아들은 아버지에게, 내가 여러 해 아버지의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지 않습니까 라며 서운함을 내비쳤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1절과 32절 말씀입니다.

 

31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마9:13에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눅15:4절 이하에서는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서 주님은 선한 사람보다 죄인들을 더 챙기신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특별히 누구를 더 챙기거나 덜 챙기시지 않습니다. 병든 자들에게 주님의 손길이 더 필요한 것 뿐입니다. 주님이 보실 때 온전한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어느 만큼은 영적인 병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돌아온 탕자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새 신을 신기실 때, 질투하거나 시기하면 안 됩니다. 우리 주변을 보더라도 매일 같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서, 그런데 나름대로 노력한다고 하는 나는 왜 거듭나지를 못하나 하는 마음이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웃이 거듭나고 성장할 때, 우리도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춰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우리 안에 있는 탕자가 치유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가 되어 주님의 교회를 만드는 것처럼 우리도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그렇게 하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참으로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고, 이를 위해 참으로 주님이 제 안에 와 계시기를,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선한 능력으로 제가 즐겁게 선을 행할 수 있게 되기를, 비록 제가 무례히 여김을 당하며, 모욕을 당해도 프란치스코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선을 행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는 모든 성도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과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4:2)

 

아멘

 

 

원본

2021-05-1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1-1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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