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70

여러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상태가 어떠한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음을 제가 있도록, 저는 육체 안에 사는 동안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과 말하고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것도 단지 하루나 동안만이 아니라 여러 동안, 거의 동안이나 세상에서처럼 그들과 말하고 교제했습니다. 그들은 육체 안에 자신들이 그랬듯이, 그리고 지금도 매우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죽은 뒤에는 살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그러한 불신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을 몹시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사실 육체의 죽음 이후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사람은 다른 안에 있게 됩니다.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As it is permitted me to disclose what for several years I have heard and seen, it shall here be told, first, how the case is with man 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or how he enters from the life of the body into the life of eternity. In order that I might know that men live after death, it has been given me to speak and be in company with many who were known to me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 and this not merely for a day or a week, but for months, and almost a year, speaking and associating with them just as in this world. They wondered exceedingly that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they were, and that very many others are, in such incredulity as to believe that they will not live after death; when in fact scarcely a day intervenes after the death of the body before they are in the other life; for death is a continuation of life.

 

해설

AC.70부터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예고한 다른 에 관한 실제 내용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AC.67에서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 삶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삶의 본성을 알아야 한다고 했고, AC.68에서는 자신이 보고 듣고 느꼈다고 증언했으며, AC.69에서는 사람이 몸을 입은 영이기 때문에 육체 안에 있으면서도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0에서는 그 다른 삶에 들어가는 첫 순간, 곧 사람이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때의 상태를 다루겠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처음 등장하는 중요한 표현이 소생될 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육체의 죽음 이후의 일을 소멸한 사람이 다시 존재하게 되는 것으로 설명하지 않고,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소생은 죽음으로 존재가 끊어졌다가 다시 만들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AC.70의 마지막 문장이 그 의미를 가장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다는 것을 자신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도 말합니다. 그는 육체 안에서 알고 지냈던 많은 사람들과 그들이 죽은 뒤에도 말하고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더욱이 그 경험은 하루나 한 주 정도에 그치지 않고 여러 달 동안, 어떤 경우에는 거의 일 년 동안 이어졌으며, 그는 그들과 이 세상에서처럼 말하고 교제했다고 합니다. AC.68에서 보았고, 들었으며, 느꼈다고 한 증언이 여기서부터 구체적인 내용으로 펼쳐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가 사후에 만난 사람들이 보인 반응도 주목할 만합니다. 그들은 육체 안에서 살 때 자신들도 죽은 뒤에 계속 살아갈 것을 믿지 않았으며, 지금도 매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몹시 이상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죽기 전에는 사후의 삶을 믿지 못했던 사람이 죽은 뒤에는 오히려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직접 경험하고, 과거의 자기 불신을 이상하게 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그들의 불신을 책망하거나 그 원인을 자세히 분석하지 않고, 그들이 보인 놀라움 자체를 전합니다.

 

이어지는 육체의 죽음 이후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사람은 다른 안에 있게 된다는 문장은 특히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 문장이 직접 말하는 것은 육체의 죽음과 다른 삶 사이에 긴 단절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거의 하루를 곧바로 영계의 하루라는 시간 단위로 해석하거나, 반대로 실제 시간이 전혀 아니라 하나의 상태만을 뜻한다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제부터 사람이 어떻게 소생되어 다른 삶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차례로 설명하려 하고 있으므로, 그 구체적인 과정은 이어지는 기록을 따라가며 확인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같은 이유로 AC.70에서 곧바로 연옥이나 영들의 세계에 관한 완성된 교리를 끌어올 필요도 없습니다. 현재 해설에는 어떤 중간 지대나 공백이 없다’, ‘연옥이나 무의식 상태를 전제하지 않는다는 설명이 있지만, AC.70 자체가 여기서 연옥을 논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번호의 직접적인 강조점은 훨씬 단순하고 강합니다. 육체가 죽은 뒤 인간의 삶은 중단되지 않으며,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는 다른 삶 안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70의 마지막 문장은 이 번호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죽음은 삶의 연속이라는 말은 죽음이 아무 변화도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간다는 분명한 변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 가운데서도 살아 있는 인간 자체가 소멸했다가 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이 번호의 중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제 그 연속성 안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다음 번호들에서 더 자세히 말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AC.70 해설)

 

심화

1.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 영계에도 시간이 있는가?

 

AC.70 심화 1,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 영계에도 시간이 있는가?

AC.70 심화1.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 영계에도 시간이 있는가? AC.70에서 스베덴보리는 육체의 죽음 이후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사람이 다른 삶 안에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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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1, 창2 앞, ‘다른 삶에 관한 내용들을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다’

AC.71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을 말씀 본문에 들어 있는 것들 사이에 끼워 넣는다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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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9, 창2 앞, ‘인간은 본래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69사람은 주님에 의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사람은 몸을 입은 영이므로 그들과 하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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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9 심화

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AC.69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에 너무 깊이 잠김으로 영들과 천사들과 말하던 길이 닫혔지만, ‘사람이 잠겨 있는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기만 하면  길은 다시 열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육체적인 것들을 물러가게 하면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일까요?

 

먼저 AC.69가 실제로 말하는 범위를 정확히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들과 말할 수 있는 상태에 들어가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금식이나 명상이나 특별한 기도법을 제시하지도 않고, 감각을 억제하거나 세상생활에서 물러나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인간이 본래 육체 안에서도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으며, 태곳적에는 실제로 그러했지만, 사람들이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에 너무 깊이 잠기면서 그 길이 닫혔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간다는 표현을 곧바로 어떤 수행 방법으로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몸 자체를 나쁜 것으로 여기거나 일상생활을 버리는 것이 그 길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AC.69에서 문제는 인간에게 육체가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에 너무 깊이 잠겨 그 밖의 것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게 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의 중심은 육체를 제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인간의 관심과 삶을 완전히 사로잡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사후의 일을 말하는 것일까요? AC.67부터의 흐름을 보면 다른 ’, 곧 육체의 삶 이후의 영적 삶이 중요한 배경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AC.69의 첫 문장은 명백히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인간이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마지막 문장을 오직 죽은 뒤에만 일어나는 일로 제한할 수도 없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육체 안에서 살아 있는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다고 바로 앞의 AC.67에서 말했습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러므로 우리도 스베덴보리와 같은 상태를 추구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AC.69에는 그런 권고가 없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어떤 일이 인간에게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과, 모든 사람이 그것을 의도적으로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현재 이 번호에서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영적 세계와 전적으로 무관한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에 대한 깊은 잠김이 그 길을 닫았다는 것까지입니다.

 

그러므로 AC.69을 읽고 우리가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어떻게 하면 나도 영들을   있을까?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나는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만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질문이 본문에 더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몸을 입은 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현재의 삶도 영적 생명과 무관한 시간이 될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세상에 속한 것만을 실재의 전부로 여기지 않는 것이 AC.69이 독자에게 먼저 열어 주는 시야입니다.

 

앞으로 AC가 진행되면 인간과 영계의 관계, 스베덴보리에게 특별히 허락된 상태, 그리고 사후에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에 관하여 더 구체적인 설명들이 이어집니다. 따라서 AC.69에서 그 모든 문제를 미리 해결하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한 가지를 분명히 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간다는 말을 영적 체험을 얻기 위한 기술이나 수행의 지침으로 읽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지금 설명하는 것은 인간이 본래 어떤 존재로 창조되었으며, 왜 태곳적에 열려 있던 길이 닫히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AC.69 심화 1)

 

 

 

AC.69, 창2 앞, ‘인간은 본래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69사람은 주님에 의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사람은 몸을 입은 영이므로 그들과 하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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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9

사람은 주님에 의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사람은 몸을 입은 영이므로 그들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에 너무 깊이 잠기게 되어, 밖의 것에는 거의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게 되었고, 그리하여 길이 닫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이 잠겨 있는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기만 하면 길은 다시 열리며, 그는 영들 가운데 있게 되고 그들과 공동의 안에 있게 됩니다. Man was so created by the Lord as to be able while living in the body to speak with spirits and angels, as in fact was done in the most ancient times; for, being a spirit clothed with a body, he is one with them. But because in process of time men so immersed themselves in corporeal and worldly things as to care almost nothing for aught besides, the way was closed. Yet as soon as the corporeal things recede in which man is immersed, the way is again opened, and he is among spirits, and in a common life with them.

 

해설

AC.69는 앞의 두 번호에서 제기된 문제를 인간의 창조 질서와 연결합니다. AC.67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 삶을 향하고 있다고 했고, AC.68에서는 자신이 영들과 천사들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사람들이 상상이라고 여길 것을 알면서도 보았고, 들었으며, 느꼈기때문에 물러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제 AC.69에서는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말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의 대답은 사람이 주님에 의해 처음부터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로 제시되는 문장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몸을 입은 이므로 영들과 하나라고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육체만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육체 안에서 살아가는 현재의 인간에게도 영적 차원이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육체를 입지 않은 영들과 전적으로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AC.69가 말하는 영들과의 관계는 인간에게 전혀 낯선 능력이 외부에서 추가되는 것으로 설명되지 않고, 인간이 어떤 존재로 창조되었는가에서 출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실제로 태곳적에는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현재 메인 해설처럼 태고교회 사람들이 자연계와 영계를 동시에 인식했으며 영적 교통이 일상적 삶이었다고 여기서부터 자세히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AC.69가 직접 말하는 것은 태곳적 사람들이 육체 안에서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었다는 데까지입니다. 그들의 내적 상태와 퍼셉션,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는 이후의 설명을 따라가면서 점차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렇다면 왜 지금은 이러한 일이 일반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요? AC.69는 그 원인을 인간이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에 너무 깊이 잠기게 에서 찾습니다. 여기서 육체와 세상 자체를 악하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이 문제 삼는 것은 사람이 그것들에 너무 깊이 잠겨 그 밖의 것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게 된 상태입니다. 인간의 관심이 감각으로 접하는 것과 세상에 속한 것에 압도되면서, 영들과 천사들과 말하던 길이 닫혔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길이 닫혔다는 표현 역시 조심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메인 해설은 길은 파괴된 것이 아니라 닫혔으므로 인간의 본성 안에 영적 교통의 가능성이 차단된 상태로 남아 있다고 설명합니다.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지만, AC.69가 직접 설명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간 표현입니다. 이 번호에서 분명한 것은 육체적인 것들에 잠김으로 길이 닫혔고, 그것들이 물러가면 다시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상의 인간론적 구조는 뒤의 설명과 함께 확인하는 편이 좋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면서도 오해하기 쉽습니다. ‘사람이 잠겨 있는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기만 하면 길은 다시 열린다고 합니다. 이것을 읽고 그렇다면 나도 육체적인 것들을 물러가게 하면 영들과 말할 있는가?라고 묻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AC.69 자체는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나 수행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육체적 감각을 억제하라거나 세상생활을 떠나라거나 영들과의 접촉을 의도적으로 추구하라는 권고도 없습니다. 이 번호는 그 길이 어떤 조건에서 닫혔고 어떤 조건에서 다시 열리는지를 설명할 뿐입니다.

 

따라서 현재 메인 해설의 마지막 부분처럼 AC.69만으로 스베덴보리가 육체적 일상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영계를 지속적으로 지각했고, 두 가지 활동을 동시에 수행했다고 구체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조금 이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의 특별한 상태가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앞으로 그의 증언을 더 읽으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붙들어야 할 핵심은 더 근본적입니다. 인간은 단순히 육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몸을 입은 이며, 그래서 영적 세계와 전적으로 무관한 존재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AC.67-69를 함께 읽으면 흐름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AC.67은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 삶을 향하고 있다고 밝히고, AC.68은 스베덴보리가 그것을 직접 경험했다고 증언하며, AC.69는 그러한 경험의 가능성을 인간이 몸을 입은 이라는 사실과 연결합니다. 동시에 인간이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에 깊이 잠김으로 그 길이 닫혔다고 설명합니다. 이로써 앞으로 이어질 영계에 관한 증언은 인간과 전혀 관계없는 낯선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육체의 삶 이후에도 어떻게 계속 살아가는가라는 문제와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AC.69 해설)

 

심화

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AC.69 심화 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AC.69 심화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AC.69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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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 창2 앞, ‘죽음은 삶의 연속이다’

AC.70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때 그 상태가 어떠한지를 말하고자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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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 창2 앞, ‘나는 보았고, 들었고, 느꼈다’

AC.68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천사들과 말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상상이라고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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