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81

장은 천적 인간을 다루는데, 장이 죽은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을 다룬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고, 영적 인간이나 죽은 사람이 무엇인지조차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차이를 있도록 각각의 본성이 어떠한지를 간략히 말하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습니다. 첫째, 죽은 사람은 몸과 세상에 속한 외에는 아무것도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바로 그것을 숭배합니다. 영적 인간은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와 선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는 사랑에서라기보다는 신앙의 원리로부터 그렇게 하며, 또한 그것을 바탕으로 행합니다. 천적 인간은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와 선을 믿고 퍼셉션하며,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또한 사랑으로부터 행합니다. This chapter treats of the celestial man, as the preceding one did of the spiritual, who was formed out of a dead man. But as it is unknown at this day what the celestial man is, and scarcely what the spiritual man is, or a dead man, it is permitted me briefly to state the nature of each, that the difference may be known. First, then, a dead man acknowledges nothing to be true and good but what belongs to the body and the world, and this he adores. A spiritual man acknowledges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 and good; but he does so from a principle of faith, which is likewise the ground of his actions, and not so much from love. A celestial man believes and perceives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 and good, acknowledging no other faith than that which is from love, from which also he acts.

 

[2] 둘째, 죽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목적들은 오직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삶만을 향하며, 그는 영원한 삶이 무엇인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알지 못합니다. 안다 하더라도 믿지 않습니다. 영적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목적들은 영원한 삶을 향하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을 향합니다. 천적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목적들은 주님을 향하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삶을 향합니다. Second: The ends which influence a dead man regard only corporeal and worldly life, nor does he know what eternal life is, or what the Lord is; or should he know, he does not believe. The ends which influence a spiritual man regard eternal life, and thereby the Lord. The ends which influence a celestial man regard the Lord, and thereby his kingdom and eternal life.

 

[3] 셋째, 죽은 사람은 싸움 가운데 있을 거의 언제나 굴복하며, 싸움 가운데 있지 않을 때에는 악과 거짓이 그를 지배하고 그는 종이 됩니다. 그의 결박은 외적인 것으로서, 법에 대한 두려움, 생명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재산과 이익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가 이러한 것들 때문에 중요하게 여기는 평판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것들입니다.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지만 언제나 승리합니다. 그를 제어하는 결박은 내적인 것이며, 양심의 결박이라 합니다. 천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지 않으며,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그것들을 업신여깁니다. 그러므로 그는 정복자라 합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결박에도 제어되지 않는 듯하며 자유롭습니다. 그의 결박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데, 그것은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Third: A dead man when in combat almost always yields, and when not in combat, evils and falsities have dominion over him, and he is a slave. His bonds are external, such as the fear of the law, of the loss of life, of wealth, of gain, and of the reputation which he values for their sake. The spiritual man is in combat, but is always victorious; the bonds by which he is restrained are internal, and are called the bonds of conscience. The celestial man is not in combat, and when assaulted by evils and falsities, he despises them, and is therefore called a conqueror. He is apparently restrained by no bonds, but is free. His bonds, which are not apparent, are perceptions of good and truth.

 

해설

AC.81은 창2에서 말하는 천적 인간이 어떤 사람인지를 본격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 장인 창1죽은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을 다루었고, 이 장인 창2는 천적 인간을 다룬다고 먼저 밝힙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영적 인간과 죽은 사람이 무엇인지조차 거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셋의 차이를 알 수 있도록 각각의 본성을 간략히 설명하겠다고 합니다. 따라서 AC.81은 앞으로 창2를 읽을 때 계속 기준이 되는 중요한 비교표와 같은 번호입니다.

 

첫 번째 차이는 사람이 무엇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하며, 무엇으로부터 행하는가에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몸과 세상에 속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그것을 숭배합니다. 여기서 죽은 사람은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1에서 이미 다루었던, 아직 거듭나지 않은 상태의 사람입니다. 그의 관심과 판단의 중심이 몸과 세상에 속한 것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그를 죽은 사람이라 합니다.

 

영적 인간은 이와 다릅니다. 그는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와 선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제한이 붙습니다. 그는 사랑에서라기보다는 신앙의 원리로부터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그 신앙의 원리를 바탕으로 행합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에게 신앙은 단순히 어떤 교리를 머리로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실제로 그 신앙으로부터 행합니다. 다만 아직 사랑 자체로부터 알고 행하는 천적 인간의 상태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천적 인간에 이르면 표현이 다시 달라집니다. 그는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와 선을 믿고 퍼셉션합니다.영적 인간에게 사용되지 않았던 퍼셉션이 여기에서 직접 등장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가 행하는 것도 바로 그 사랑으로부터입니다. 따라서 AC.77에서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한다고 했던 것이 AC.81에 이르러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천적 인간에게 사랑과 신앙은 서로 무관한 두 가지가 아니라, 신앙이 사랑에서 나오는 질서 안에 있습니다.

 

여기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신앙이 사라진 상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은 천적 인간에게 신앙이 없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인정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천적 상태를 신앙을 넘어 사랑으로 상태라고 단순화하면 원문의 표현을 놓칠 수 있습니다. 차이는 신앙의 존재 여부보다 그 신앙이 어디에서 나오는가에 있습니다.

 

두 번째 차이는 목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세 사람을 그들이 무엇을 목적으로 삼는지를 통해 다시 구별합니다. 죽은 사람의 목적은 오직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삶을 향합니다. 그는 영원한 삶이 무엇인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알지 못하며, 혹 안다고 하더라도 믿지 않습니다. 여기에서도 몸과 세상 자체가 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의 목적이 오직 그것만을 향한다는 데 있습니다.

 

영적 인간의 목적은 영원한 삶을 향하며, ‘그것을 통하여 주님을 향합니다. 반면 천적 인간의 목적은 먼저 주님을 향하며, ‘그것을 통하여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을 향합니다. 이 순서는 AC.81이 직접 제시하는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영원한 삶이 먼저 언급되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께 향하지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주님이 먼저이며 그분을 통하여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삶을 향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천적 인간에게 무엇이 가장 중심적인 목적이 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를 가지고 영적 인간은 자기 구원만 생각하고 천적 인간만 주님을 사랑한다고 지나치게 낮추어 말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 역시 영원한 삶을 통하여 주님을 향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은 죽은 사람과 달리 모두 주님과 영원한 삶을 향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목적의 질서에서 차이가 나타납니다.

 

세 번째 차이는 싸움결박입니다. 죽은 사람은 싸움 가운데 있을 때 거의 언제나 굴복하고, 싸움이 없을 때에는 악과 거짓의 지배를 받아 종이 됩니다. 그를 제어하는 것은 법에 대한 두려움, 생명이나 재산이나 이익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러한 것들 때문에 중요하게 여기는 평판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같은 외적인 결박입니다. 여기서 결박은 사람을 악에서 붙잡아 두는 제어의 수단을 가리킵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그 결박이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는 싸움 가운데 있으며 언제나 승리하고, 그를 제어하는 결박은 양심의 결박이라 합니다. 이것은 창1에서 거듭나는 영적 인간의 과정에 싸움이 있었던 이유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영적 인간에게 싸움이 있다는 것은 그가 아직 죽은 상태에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싸우며, 그 싸움에서 승리합니다.

 

천적 인간에 이르면 다시 놀라운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는 싸움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때 그것들을 업신여기며, 그러므로 정복자라 합니다. 여기서 천적 인간에게 악과 거짓의 공격 자체가 전혀 없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원문은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차이는 공격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영적 인간은 싸워서 이기지만, 천적 인간은 그것들을 업신여깁니다.

 

천적 인간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결박도 없는 것처럼 보이며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에게도 결박이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것은 외적으로 보이지 않는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천적 인간의 자유는 아무런 질서도 없고 아무 제어도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외적인 두려움이나 양심의 싸움에 의해 억지로 붙들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자체가 그의 내적인 결박이 됩니다.

 

이 점에서 첫 번째 비교와 세 번째 비교가 서로 만납니다. 첫 번째에서 천적 인간은 진리와 선을 퍼셉션한다고 했고, 세 번째에서는 그의 보이지 않는 결박이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합니다. 퍼셉션은 천적 인간이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방식일 뿐 아니라, 그가 자유롭게 살아가면서도 선과 진리의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는 내적인 결박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것은 AC.77에서 처음 등장했던 퍼셉션의 의미를 한 단계 더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AC.81의 세 비교를 함께 보면 죽은 사람,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의 차이는 단순히 세 등급의 지식이나 도덕성의 차이가 아닙니다. 무엇을 선과 진리로 인정하는지, 무엇으로부터 행하는지, 삶의 목적이 어디를 향하는지, 악과 거짓을 대할 때 어떤 상태에 있는지, 무엇이 그를 제어하는지가 모두 달라집니다. 죽은 사람은 몸과 세상에 속한 것에 머물고 외적인 결박에 붙들립니다. 영적 인간은 영적이고 천적인 선과 진리를 신앙으로 인정하고 그 신앙으로부터 행하며, 양심의 결박 안에서 싸워 승리합니다.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믿고 퍼셉션하며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인정하고 사랑으로부터 행하며, 주님을 목적으로 삼고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안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러므로 AC.81은 앞에서 짧게 반복되었던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라는 말을 처음으로 상당히 구체적으로 풀어 주는 번호입니다. 특히 신앙에서 행함사랑에서 행함’, ‘영원한 삶을 통하여 주님을 향함주님을 통하여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삶을 향함’, ‘싸워서 승리함싸움 없이 악과 거짓을 업신여김’, ‘양심의 결박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라는 차이를 함께 붙들면, 앞으로 창2에서 말하는 천적 인간이 어떤 상태인지를 훨씬 분명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AC.81 해설)

 

 

 

AC.82, 창2:1, ‘하늘은 속 사람, 땅은 겉 사람 - 각 사람이 먼저 교회여야 하는 이유’ (AC.82-8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창2:1) AC.82이 말씀은 사람이 이제 ‘여섯째 날’(sixth day)이 될 만큼 영적으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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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0, 창2:1-17 개요, '주님으로부터 알고,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하지 말라' (16-17절)

AC.80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해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sens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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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0

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해서는 되며,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해서도 됩니다. 그렇게 하면 그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됩니다. (16-17) He is also permitted to acquire a knowledge of what is good and true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from the Lord, but he must not do so from himself and the world, nor search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 which would cause the death of his celestial nature (verses 1617).

 

16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16, 17)

 

해설

AC.80은 창2:16-17의 개요이며, 앞에서 계속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질서에 하나의 중요한 제한을 제시합니다. AC.79에서는 천적 인간이 에덴동산과 같은 사람이지만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그 안의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80에서는 선과 진리를 아는 에서도 이와 비슷한 구별이 나타납니다. 천적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아는 것이 금지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금지되는 것은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알려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창2:16-17의 금령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등장한다고 해서 지식이나 이성 자체가 금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AC.75에서는 천적 인간에게 기억지식과 이성이 있음을 말했고, AC.78에서는 이성과 기억지식이 겉 사람에게 속하며 이것들까지도 지혜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80의 문제는 인간이 알고 생각하고 배우는 것 자체가 아니라, 선과 진리 및 신앙의 아르카나를 무엇으로부터 알고 판단하려 하는가에 있습니다.

 

천적 인간에게 허락된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AC.77에서는 에덴동산의 보기에 좋은 나무들이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이 선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80은 그 퍼셉션의 근원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오는 퍼셉션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퍼셉션을 인간 자신에게서 생겨나는 직감이나 자기 확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천적 인간은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알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어지는 문장이 그 뜻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밝혀 줍니다. 그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해서도안 됩니다. 여기서 감각적인 것들은 인간이 감각을 통하여 받아들이는 외적인 것들과 관계되고, ‘기억지식은 사람이 배우고 경험하여 기억에 받아들인 것들과 관계됩니다.

 

그러나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 자체가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AC.78에서 기억지식은 천적 인간의 겉 사람에게 속하는 것으로 이미 제시되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하려 하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AC.80은 자연계의 사실을 관찰하거나 기억지식을 배우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가지고 신적인 것의 진실 여부를 인간 자신이 결정하려는 질서를 경계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해서는 된다는 말을 질문이나 연구 자체의 금지로 읽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말씀의 속뜻을 밝히면서 끊임없이 설명하고 구별하고 연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AC.80에서 금지되는 것은 탐구라는 행위 자체라기보다, 그 앞에 붙어 있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라는 방식입니다.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아는 것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을 알아내려 하는 것이 서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이 구별 때문에 AC.80을 반지성주의적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천적 인간에게 이성과 기억지식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며, 자연적인 사실을 감각과 관찰을 통하여 확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다루는 것은 신앙의 아르카나입니다. 자연적인 것들을 알아보는 데 사용하는 감각과 기억지식을 그대로 신적인 것의 최종 판단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문제가 단순한 인식 방법의 차이에 그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게 하면 그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됩니다.여기서 죽음은 육체적 죽음이 아닙니다. 2:17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이 속뜻에서는 천적 인간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되는 것과 관계됩니다. 따라서 AC.73에서 거듭남 이전의 사람이 죽어 있던상태라고 한 것과 AC.80에서 천적 본성이 죽게 된다고 하는 것은 둘 다 육체적 죽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다른 문맥에 놓여 있습니다.

 

AC.79AC.80을 함께 읽으면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도 보입니다. AC.79에서는 천적 인간이 동산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AC.80에서는 선과 진리를 알 수 있지만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두 번호 모두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가지거나 아는 것 자체를 금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는 방향을 경계합니다. 그러나 이 관계를 여기서 proprium이나 인간의 자유에 관한 전체 교리로까지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AC.79AC.80이 보여 주는 직접적인 연결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AC.80은 따라서 창2:16-17의 금령을 알지 말라는 명령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적 인간은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로부터 아는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아는 것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질서입니다.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하려 할 때 천적 인간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된다는 것이, 이 개요에서 스베덴보리가 창2:16-17에 관하여 먼저 제시하는 핵심입니다. (AC.80 해설)

 

심화

1. 개역개정에는 열매 들어가 있는가?’(2:16-17)

 

2:16-17을 개역개정과 AC에 실린 영어 성경으로 함께 읽으면 작은 차이 하나가 눈에 띕니다. 개역개정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번역합니다. 그런데 AC에 인용된 영어에서는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이라고 되어 있어 열매에 해당하는 단어가 따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개역개정은 왜 열매를 넣었을까요?

 

먼저 중요한 것은 히브리어 본문에도 이 두 절에서 열매에 해당하는 별도의 명사가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문자적으로는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너는 먹을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먹지 말라에 가까운 구조입니다. 따라서 AC에 실린 영어가 tree를 그대로 살린 것은 히브리어의 표현 구조와 잘 맞습니다.

 

그러나 한국어에서는 나무에서 먹는다또는 문맥에 따라 나무를 먹는다는 표현이 독자에게 어색하거나 오해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이 먹는 것은 나무 자체가 아니라 나무에서 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의 나무의 열매는 이 뜻을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전달하기 위해 먹는 대상을 명시적으로 풀어 준 번역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열매가 히브리어 원문에 별도의 단어로 있는데 영어 번역이 빠뜨린 것도 아니고, 반대로 개역개정이 전혀 근거 없는 내용을 임의로 첨가했다고 볼 필요도 없습니다.

 

AC를 읽을 때 이 차이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개별 표현을 매우 세밀하게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원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역개정의 열매라는 번역 표현을 근거로 창2:16-17의 속뜻에 원문에 없는 별도의 열매상응을 추가해서는 안 됩니다. AC.80에서 스베덴보리가 해설하는 것은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아는 것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들을 알려 하거나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하려 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AC와 함께 읽을 때는 개역개정의 자연스러운 한국어와 원문의 표현 구조를 함께 기억하면 좋습니다. 예배에서 개역개정을 읽을 때는 그대로 나무의 열매라고 읽으면 됩니다. 그러나 AC의 속뜻을 검토할 때는 히브리어와 AC의 영어가 실제로 나무에서 먹는다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번역문에 명시적으로 보이는 단어와 원문에 실제로 있는 단어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개역개정의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 번역AC 속뜻 해설이 서로 다른 일을 한다는 점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성경 번역은 원문의 뜻을 독자가 자연스럽게 이해하도록 한국어로 전달해야 하고, AC 해설에서는 그 번역 뒤에 있는 원문의 표현까지 확인하면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근거로 속뜻을 설명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창2:16-17에서는 개역개정의 열매를 그대로 존중하여 읽되, AC의 상응을 판단할 때 그것을 원문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단어처럼 취급하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AC.80 심화 1)

 

 

 

AC.81, 창2:1-17 배경, ‘죽은 사람,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의 세 가지 차이’

AC.81이 장은 천적 인간을 다루는데, 앞 장이 죽은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을 다룬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고, 영적 인간이나 죽은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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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9,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에덴동산이지만,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다' (15절)

AC.79천적 인간은 이와 같은 동산입니다. 그러나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15절) The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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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9

천적 인간은 이와 같은 동산입니다. 그러나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사람은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15) The celestial man is such a garden. But as the garden is the Lords, it is permitted this man to enjoy all these things, and yet not to possess them as his own (verse 15).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5)

 

해설

AC.79는 창2:15의 개요입니다. 바로 앞의 AC.77에서는 천적 인간의 지성이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되고, 그 안의 나무들이 진리와 선에 대한 퍼셉션이며,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AC.78에서는 동산의 강이 지혜이고, 거기에서 나온 네 강이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을 나타내며, 이 모든 것이 지혜에서 나오고 그 지혜가 다시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9는 이 모든 설명을 받아 천적 인간은 이와 같은 동산입니다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에덴동산은 단지 천적 인간이 들어가 있는 외부의 장소로만 제시되는 것이 아닙니다. 속뜻에서 천적 인간 자신이 이와 같은 동산입니다. 앞에서 지성, 퍼셉션, 사랑과 신앙, 지혜, 그리고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차례로 언급된 뒤, 이제 그 전체를 천적 인간이라는 하나의 동산으로 묶어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매우 중요한 제한을 덧붙입니다. ‘ 동산은 주님의 것입니다.천적 인간이 동산이라고 해서 그 동산이 천적 인간 자신의 소유라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앞의 AC.78에서도 네 강으로 묘사된 모든 것이 지혜에서 나오고, 그 지혜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9에서는 그 동산 자체가 주님의 것이라고 명시합니다.

 

이 때문에 이어지는 누리는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의 구별이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에게 그 동산에 속한 모든 것을 누리는 은 허락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버리거나 사용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누리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은 허락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자기 것으로 소유한다는 말을 단순한 물질적 소유의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말하는 동산은 천적 인간 자신과 그의 지성, 퍼셉션, 사랑과 신앙, 지혜 등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이러한 것들을 실제로 가지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아니라, 주님의 것인 그것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데 있습니다.

 

이 구별은 AC.79의 문장 자체 안에 들어 있습니다. ‘누리는 은 허락되고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인간은 아무것도 받아서는 안 된다거나, 아무것도 자기 삶 안에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천적 인간은 동산에 속한 것들을 실제로 누립니다. 다만 그 동산이 누구의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서는 바뀌지 않습니다. ‘ 동산은 주님의 것입니다.

 

현행 해설은 여기에서 인간의 자유와 책임, 선을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행하는 문제, 그리고 proprium의 교리까지 연결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앞으로 매우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그러나 AC.79라는 개요에서는 아직 그 전체 교리를 미리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자기 것으로 소유한다는 한 표현만으로 이후의 proprium 교리 전체를 이 번호 안에 끌어들이기보다, 우선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한 누림소유의 대조를 정확하게 보존하는 편이 좋습니다.

 

2:15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는 말씀 역시 아직 여기서 자세히 풀 필요가 없습니다. AC.79는 그 명령의 세부적인 속뜻을 설명하기보다, 천적 인간이 이와 같은 동산이며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그가 그 안의 모든 것을 누릴 수는 있지만 자기 것으로 소유할 수는 없다는 개요를 먼저 제시합니다. ‘경작하며 지킨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해당 본문의 상세 해설을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원리를 곧바로 창3의 타락에 적용하여 에덴의 상실은 주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주장한 결과라고 완성해 버리는 것도 아직은 기다려야 합니다. AC.79가 이후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중요한 바탕이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번호 자체는 아직 타락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우선 에덴의 상태에서 무엇이 허락되고 무엇이 허락되지 않는지를 분명히 기억하면 됩니다.

 

AC.79에서 붙들어야 할 것은 결국 매우 단순하면서도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은 에덴동산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동산은 그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그는 그 안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짧은 문장으로 천적 인간과 그가 누리는 모든 것 사이에 하나의 분명한 질서를 세웁니다. 인간은 동산을 누리는 자이지만, 동산의 주인은 아닙니다. (AC.79 해설)

 

 

 

AC.80, 창2:1-17 개요, '주님으로부터 알고,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하지 말라' (16-17절)

AC.80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해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sens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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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8, 창2:1-17 개요, ‘에덴의 강과 네 강, 지혜에서 나오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것들’ (10-14절)

AC.78동산의 강은 지혜를 의미합니다. 거기에서 네 강이 나왔는데, 첫째는 선과 진리이고, 둘째는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것, 곧 사랑과 신앙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앎입니다. 이것들은 속 사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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