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CR(True Christian Religion) 소개, 그러니까 왜 이름을 이렇게 지었으며, 왜 세상 떠나기 전 이런 책을 썼고, 왜 주님은 이 책이 나오자 제자들을 불러 온 천국에 전하게 하셨는지, 그리고 이 책은 보니까 거의 조직신학같아 보이는데,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처음 리딩하기 시작할 때, 이 책은 언제쯤 읽는 게 좋을지 등에 대한 자세한 해설을 부탁합니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TCRArcana Coelestia의 연장선 위에 있으면서도, 성격 자체는 전혀 다른 책입니다. AC가 ‘창세기, 출애굽기의 속뜻을 따라가며 인간의 거듭남 과정을 풀어낸 주석서’라면, TCR은 그 모든 내용을 한 번에 정리하여 ‘기독교 전체를 다시 세우는 종합 교리서’, 곧 일종의 ‘영적 조직신학’이라고 보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왜 이름이 ‘True Christian Religion’(참된 기독교)인가 하는 질문은 이 책의 존재 이유와 직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당시 교회가 이미 본래의 기독교에서 벗어나 있다고 보았습니다. 특히 ‘신앙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식의 분리된 신앙 이해, 삼위일체의 오해, 삶과 단절된 교리 중심 신앙 등을 문제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 주님께서 세우신 기독교’, 곧 사랑(체어리티)과 신앙이 하나로 결합된 본래의 기독교를 다시 드러내기 위해 이 책을 썼습니다. 여기서 ‘True’라는 단어는 단순히 ‘정확한’이 아니라 ‘원래의, 회복된, 본질적인’이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말하자면 ‘기독교의 리셋판’, ‘본래 상태로 복원된 기독교’라는 선언입니다.

 

왜 생애 말년에 이 책을 썼는가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미 AC를 비롯한 수많은 저작에서 방대한 진리를 풀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부분 ‘조각들’처럼 흩어져 있었습니다. TCR은 그 조각들을 하나로 모아, 하나님, 신앙, 체어리티, 회개, 거듭남, 성례, 성경, 교회, 종말 등 기독교의 핵심 주제들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한 ‘최종 정리’입니다. 그래서 TCR은 단순한 한 권의 책이 아니라, 그의 전 생애 사상의 ‘결론’이자 ‘봉인’에 해당합니다. 마치 오랜 시간 쌓아 온 내용을 마지막에 한 권으로 정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하신 ‘주님께서 이 책이 나오자 제자들을 불러 온 천국에 전하게 하셨다’는 대목은, 이 책이 단순한 신학서가 아니라 ‘새 시대의 선언문’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 책의 출간은 단순한 출판 사건이 아니라 영적 세계에서의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곧 ‘새 교회(New Church)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고, 천국과 교회 모두에 새로운 진리가 선포되는 계기였습니다. 그래서 ‘천사적 차원에서도 이 책의 내용이 전파되었다’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는 과장된 상징이 아니라, 그만큼 이 책의 위상을 강조하는 신학적 진술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 책은 매우 ‘조직신학적’입니다. 실제로 구성도 그렇습니다. 하나님론, 구원론, 신앙과 체어리티, 회개, 거듭남, 성례, 성경, 교회 등 전통적인 조직신학의 구조를 그대로 따르면서, 그 안의 내용을 완전히 새롭게 재해석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차이는, 일반 조직신학이 ‘논리’ 중심이라면, TCR은 ‘영적 경험과 계시 + 상응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읽다 보면 단순한 교리 설명을 넘어, 인간의 실제 변화 과정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언제 읽는 것이 좋은가 하는 질문이 매우 현실적이고 중요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너무 처음에는 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너무 늦게도 아닙니다.’입니다. 처음부터 이 책을 읽으면 개념이 너무 압축되어 있고 전제가 많아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최소한 Heaven and Hell이나 초기 저작들, 그리고 AC의 일부를 통해 ‘속뜻’, ‘상응’, ‘거듭남’ 같은 기본 개념이 어느 정도 형성된 후에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너무 뒤로 미루면, 전체 그림 없이 부분만 계속 파고들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시점은 ‘기본 개념이 잡히고, 이제 전체 구조가 궁금해질 때’입니다. 그때 TCR을 읽으면, 그동안 흩어져 있던 내용들이 한 번에 정리되면서 ‘, 이게 다 하나였구나’ 하는 깨달음이 옵니다.

 

정리하자면, TCR은 스베덴보리 사상의 ‘정수이자 종합’이며, 동시에 ‘새 교회의 헌장’과 같은 책입니다. AC가 ‘여정’이라면, TCR은 ‘지도’입니다. AC가 ‘과정의 기록’이라면, TCR은 ‘완성된 구조도’입니다. 그래서 두 책은 경쟁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완성시키는 관계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AC를 통해 눈을 열고, 그다음 TCR을 통해 전체를 붙잡는 것, 이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효과적인 읽기의 순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SC.58, ‘이런저런 초대를 받고...’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어느 정도 불순한 식사 초대에도 번번이 응하셨지요... 왜 그러셨나요? 스베덴보리는 그런 경우가 없었나요? 저 역시 선뜻 내키지 않는 크고 작은 이런저런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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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56, ‘궤를 붙들다가 그 자리에서 죽은 웃사’(삼하6: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삼하6:7) 이 구절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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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천사들과 말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모든 것이 상상이라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제가 신뢰를 얻기 위해 이런 것들을 이야기한다고 것이며, 다른 사람들은 밖의 여러 반대를 제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저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보았고, 들었으며, 느꼈기 때문입니다. I am well aware that many will say that no one can possibly speak with spirits and angels so long as he lives in the body; and many will say that it is all fancy, others that I relate such things in order to gain credence, and others will make other objections. But by all this I am not deterred, for I have seen, I have heard, I have felt.

 

해설

AC.68AC.67에서 시작된 스베덴보리의 영계에 관한 증언을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딛게 합니다. AC.67에서 그는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으며 그동안 듣고 본 것을 이제 밝히겠다고 했습니다. AC.68에서는 곧바로 그러한 주장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자신도 잘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으면서 영들과 천사들과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사람들, 모든 것이 상상이라고 할 사람들, 사람들의 신뢰를 얻으려고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할 사람들이 있을 것임을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러한 반대에 대해 논증으로 답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영들과 천사들과 대화하는 것이 철학적으로 어떻게 가능한지를 증명하려 하지도 않고, 자신의 말을 믿어야 할 이유들을 길게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그의 대답은 매우 짧습니다. ‘저는 보았고, 들었으며, 느꼈기 때문입니다.AC.68에서 스베덴보리가 내세우는 것은 이론적 가능성이 아니라 자신에게 실제로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경험의 증언입니다.

 

그렇다고 보았다’, ‘들었다’, ‘느꼈다라는 세 동사에 각각 별도의 영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보았다는 형상과 구조와 질서를 인식했다는 뜻이고, ‘들었다는 의미와 소통이 있었다는 뜻이며, ‘느꼈다는 실재로서 경험했다는 선언이라고 세분합니다. 그러나 AC.68 자체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세 표현을 함께 사용함으로써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경험을 단순한 생각이나 추측이 아니라 직접적인 경험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정도로 읽는 것이 더 충실합니다.

 

또한 이 세 가지 경험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증언이 상상이나 자기 암시일 수 없다고 논증해서도 안 됩니다. 현재 해설에는 상상이라면 질서 있게 보고 들을 수 없고, 자기 암시라면 일관된 구조와 반복 가능한 경험으로 남기 어려우며, 조작이라면 수십 년 동안 내부 정합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AC.68에서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논증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그러한 반론을 하나씩 논파하려 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경험했다고 증언하는 데 머뭅니다. 그 절제된 태도 자체를 그대로 보존하는 편이 이 단락의 힘을 더 잘 살립니다.

 

AC.68은 독자에게 스베덴보리의 증언을 무조건 믿으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보고 듣고 느꼈다고 말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번호에서 중요한 것은 독자에게 믿을 것인가, 거짓말이라고 것인가를 당장 선택하게 만드는 데 있다기보다, 앞으로 이어질 기록의 성격을 분명히 밝히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영계에 관하여 앞으로 기록할 내용들을 추측이나 철학적 사색이 아니라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하도록 허락된 것에 관한 증언으로 제시하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67AC.68은 매우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AC.67에서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다른 삶을 향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 삶의 본성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68에서는 그러한 말을 사람들이 믿기 어려워할 것이라는 사실까지 인정하면서도 그 증언을 거두지 않습니다. 독자는 바로 이 전제를 알고 이후의 기록을 읽게 됩니다.

 

그러므로 AC.68의 마지막 세 동사는 짧지만 중요합니다. ‘저는 보았고, 들었으며, 느꼈기 때문입니다.스베덴보리는 이 문장으로 모든 반론이 해결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반론을 예상하면서도 자신이 경험했다고 하는 것을 부정하거나 침묵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밝힙니다. 앞으로 그의 영계에 관한 기록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는 독자의 몫이지만,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이 그것을 어떤 성격의 기록으로 제시하고 있는지는 이 짧은 번호에서 분명해집니다. (AC.68 해설)

 

 

 

AC.69, 창2 앞, ‘인간은 본래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69사람은 주님에 의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사람은 몸을 입은 영이므로 그들과 하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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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7, 창2 앞, ‘왜 말씀의 속뜻을 알려면 다른 삶의 본성을 알아야 하는가’ (AC.67-72)

AC.67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에게는 말씀의 속뜻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 속뜻 안에는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었고, 또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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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7 심화

1. 다른 삶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AC.67을 처음 읽는 독자는 거의 즉시 한 가지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 안에 들어 있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는 다른 삶의 본성을 알지 못하면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은 무엇이며,  본성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AC.67은 아직 그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제부터 자신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예고합니다. 그러므로 이 심화에서도 뒤에 나올 내용을 모두 앞당겨 설명하기보다, 앞으로의 독서를 위해 꼭 필요한 정도만 먼저 짚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다른 은 이 세상의 육체적 삶과 구별되는 사후의 삶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사후의 삶은 단지 죽은 뒤 어딘가에서 존재한다는 막연한 교리가 아닙니다. 사람이 육체의 죽음 뒤에도 의식과 인격을 지닌 채 계속 살아가며, 영들과 천사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영적 세계가 있다는 것이 그의 증언의 중요한 전제입니다. AC.67에서 그가 여러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었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다른 삶이 그에게 관념이나 추측이 아니라 듣고 볼 수 있도록 허락된 실제의 삶이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AC.67은 단순히 사후세계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그 삶을 향하고, 그 삶에 속한 것들을 묘사하며, 또한 그것들을 그 안에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의 문자에는 땅과 하늘, 집과 성, 사람과 짐승, 올라감과 내려감, 전쟁과 평화, 삶과 죽음 같은 자연계의 언어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그러한 표현들이 인간의 영적 생명과 주님의 나라에 속한 것들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계의 의미만 알고 영적 삶의 질서를 전혀 알지 못한다면, 속뜻에서 말하는 많은 것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다른 삶의 본성을 안다는 것을 영계에 관한 수많은 정보를 미리 외워 두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AC를 읽기 전에 천국과 지옥의 구조를 모두 알아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AC.67부터 이어지는 글 자체가 독자에게 그 세계를 차례로 소개하기 시작합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의 속뜻이 자연계의 사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실제 영적 생명과 영적 세계의 질서를 향하고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고 읽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을 안다는 것은 단순한 사후세계 호기심과도 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다른 삶을 말하는 이유는 죽은 뒤 무엇을 보고 어디를 돌아다니는지가 흥미롭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과 연결되는 것은 그 세계가 인간의 내적 생명과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AC가 진행되면서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선과 진리, 천국과 지옥, 거듭남과 같은 주제들이 계속 등장하게 됩니다. 다른 삶의 본성을 알아 가는 것은 결국 인간이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으며, 이 세상에서 어떤 생명을 형성해야 하는지를 알아 가는 일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AC.67에서 다른 삶의 본성을 모르면 속뜻의 가장 깊은 아르카나를 알 수 없다고 한 말을 지나치게 부담스럽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먼저 영계를  알아야 AC 읽을 자격이 있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자연계의 시야 안에서만 읽었던 말씀을 더 넓은 실재 안에서 읽도록 독자의 시선을 여는 말에 가깝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만이 전부가 아니며, 말씀의 속뜻은 인간의 영원한 생명과 주님의 나라에 속한 실재를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AC.67은 창2의 시작에 영계에 관한 이야기를 갑자기 끼워 넣은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창2의 속뜻을 읽기 위해 독자가 갖추어야 할 하나의 중요한 시야를 먼저 열어 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다른 에 관하여 보고 들은 것을 이제 밝히겠다고 한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독자는 앞으로 그의 증언을 따라가면서 다른 삶의 본성이 무엇인지 조금씩 배우게 되고, 동시에 왜 그것을 알아야 말씀의 속뜻이 더 깊이 열리는지도 차츰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AC.67 심화 1)

 

 

 

AC.67, 창2 앞, ‘왜 말씀의 속뜻을 알려면 다른 삶의 본성을 알아야 하는가’ (AC.67-72)

AC.67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에게는 말씀의 속뜻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 속뜻 안에는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었고, 또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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