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86은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넘어가는 전환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섯째날’이 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시작할때’, 바로 그 상태가 ‘안식일의저녁’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앞의 AC.83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거기서는 사람이 여섯째 날에 이르면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그때 신앙이 아니라 사랑, 곧 영적인 것이 아니라 천적인 것이 주된 것이 ‘되기시작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86에서는 바로 그 변화가 시작되는 상태를 ‘안식일의저녁’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과 일곱째 날의 천적 인간 사이를 서로 아무 관계 없는 두 상태처럼 끊어서 볼 것이 아니라,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어 가는 전환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저녁’을 곧바로 어둠이나 악이나 타락의 상태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86은 이 ‘저녁’이 무엇인지를 직접 밝혀 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미 ‘여섯째날’이 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상응을 고정된 사전처럼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좋은 예이기도 합니다. 어떤 표현이 다른 문맥에서 특정한 의미를 나타냈다고 해서 그 의미를 모든 곳에 그대로 대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안식일의저녁’이 어떤 상태인지를 분명히 말하고 있으므로 그 설명을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동시에 이 상태를 몇 단계로 이루어진 별도의 심리적 과정처럼 세분할 필요도 없습니다. AC.86이 말하는 것은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가 있다는 것이며, 그것을 ‘안식일의저녁’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가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으로 표상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AC.85에서 유대교회에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표상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제정되지 않았다고 한 설명과 이어집니다. 여섯 날의 수고와 일곱째 날의 안식이 싸움과 평화를 표상했듯이, 저녁부터 시작되는 안식일도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를 표상한 것입니다. 다만 AC.86은 여기서 유대교회의 안식일 규례 전체의 역사나 그 세부적인 의미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녁부터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켰다는 사실을 통하여 ‘안식일의저녁’이라는 전환의 상태를 보여 주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천적인간은아침’이라고 말하면서 이에 대해서는 곧 이어 말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침’의 의미를 미리 자세히 풀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 번호에서 확실히 밝혀진 것만 붙들면 충분합니다. ‘여섯째날’이 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가 ‘안식일의저녁’이고, 천적 인간은 ‘아침’입니다. AC.83에서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시작한다’고 한 설명과 AC.86에서 천적 인간이 ‘되기시작한다’고 한 설명이 서로 이어지면서, 여섯째 날에서 일곱째 날로의 변화가 한순간의 단절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어지는 거듭남의 질서임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아침’에 관해서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곧 설명하겠다고 했으므로, 우리는 그 설명을 기다리면 됩니다. (AC.86해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2, 3)
AC.85
천적인간이‘일곱째날’(seventhday)이며,따라서일곱째날이거룩하게구별되어안식일이라하였다는것은지금까지밝혀지지않았던아르카나입니다.천적인간의본성을아는사람이아무도없었고,영적인간의본성을아는사람도거의없었기때문입니다.이러한무지로인해사람들은영적인간을천적인간과같은것으로여겨왔지만,그둘사이에는큰차이가있습니다.이는AC.81에서볼수있습니다.일곱째날에관하여,그리고천적인간이‘일곱째날’(seventhday)또는‘안식일’(sabbath)이라는것에관하여말하자면,이는주님자신이안식일이시라는사실로부터분명합니다.그러므로주님께서는말씀하십니다. That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day,” and that the seventh day was therefore hallowed,and called the sabbath,are arcana which have not hitherto been discovered.For none have been acquainted with the nature of the celestial man,and few with that of the spiritual man,whom in consequence of this ignorance they have made to be the same as the celestial man,notwithstanding the great difference that exists between them,as may be seen in n.81.As regards the seventh day,and as regards the celestial man being the “seventhday” or “sabbath,” thi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Lord himself is the sabbath;and therefore he says:
이말씀은주님께서사람그자체이시며안식일그자체이심을함축합니다.하늘과땅에있는주님의나라는주님으로말미암아안식일,곧영원한평화와안식이라합니다.which words imply that the Lord is man himself,and the sabbath itself.His kingdom in the heavens and on the earth is called,from him,a sabbath,or eternal peace and rest.
[2] 여기서다루고있는태고교회는그뒤를이은모든교회보다더욱주님의안식일이었습니다.이후의모든주님의가장내적인교회도역시안식일이며,거듭난사람도천적인간이될때안식일입니다.그가주님의형상이기때문입니다.그에앞서여섯날의싸움또는수고가있습니다.이러한것들은유대교회에서수고하는날들과안식일인일곱째날로표상되었습니다.그교회에서는주님과주님의나라를표상하지않는것은아무것도제정되지않았기때문입니다.같은것이법궤가나아갈때와쉴때에도표상되었습니다.광야에서법궤가나아간것은싸움과시험을표상하였고,법궤가쉰것은평화의상태를표상하였습니다.그러므로법궤가떠날때모세가말했습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which is here treated of,was the sabbath of the Lord above all that succeeded it.Every subsequent inmost church of the Lord is also a sabbath;and so is every regenerate person when he becomes celestial,because he is a likeness of the Lord.The six days of combat or labor precede.These things were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the days of labor,and by the seventh day,which was the sabbath;for in that church there was nothing instituted which was not representative of the Lord and of his kingdom.The like was also represented by the ark when it went forward,and when it rested,for by its journeyings in the wilderness were represented combats and temptations,and by its rest a state of peace;and therefore,when it set forward,Moses said:
천적인간의본성은이와같아서그는자기자신의뜻에따라행동하지않고주님의선하신뜻에따라행동하며,그주님의뜻이그의‘뜻’(desire)이됩니다.이리하여그는내적인평화와행복을누리는데,이것이여기서는‘땅의높은곳에올림을받는것’(beingupliftedovertheloftythingsoftheearth)으로표현되며,동시에외적인평온과기쁨을누리는데,이외적인평온과기쁨은‘야곱의기업으로양육되는것’(beingfedwiththeheritageofJacob)이라는표현으로나타납니다. Such is the quality of the celestial man that he acts not according to his own desire, but according to the good pleasure of the Lord, which is his “desire.” Thus he enjoys internal peace and happiness—here expressed by “beingupliftedovertheloftythingsoftheearth”— andat the same time external tranquility and delight, which is signified by “beingfedwiththeheritageofJacob.”
해설
AC.85는 AC.84에서 제시한 ‘천적인간은일곱째날’이라는 아르카나를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이유를 먼저 말합니다. 천적 인간의 본성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영적 인간의 본성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에도 사람들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같은 것으로 여겨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AC.81을 가리킵니다. AC.81에서 영적 인간은 신앙의 원리로부터 선과 진리를 인정하고 양심의 결박 가운데 싸우는 사람이며,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인정하고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며 악과 거짓을 업신여기는 사람으로 구별되었습니다.
AC.85가 천적 인간을 ‘일곱째날’또는 ‘안식일’이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천적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주님자신이안식일이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를 밝히기 위해 막2:28의 ‘인자는안식일에도주인이니라’를 인용합니다. 그는 이 말씀이 주님께서 사람 그 자체이시며 안식일 그 자체이심을 함축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이 안식일인 것은 그가 주님과 독립하여 스스로 안식의 상태를 이루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AC.85는 뒤에서 거듭난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될 때 안식일인 이유를 ‘그가주님의형상이기때문’이라고 직접 밝힙니다. 주님은 안식일 그 자체이시고 천적 인간은 주님의 형상으로서 안식일입니다. 이 구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에 있는 주님의 나라도 안식일, 곧 ‘영원한평화와안식’이라 합니다. 이로써 안식일의 속뜻은 단순히 일을 멈추는 날이라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그 근원은 주님 자신에게 있으며, 주님의 나라의 상태가 영원한 평화와 안식으로 묘사됩니다.
이 원리는 교회에도 적용됩니다. 여기서 다루는 태고교회는 그 뒤를 이은 모든 교회보다 더욱 주님의 안식일이었으며, 이후의 모든 주님의 가장 내적인 교회도 역시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도 같은 원리가 적용되어, 모든 거듭난 사람은 천적 인간이 될 때 안식일입니다. 이것은 AC.82에서 교회에 관하여 말한 것은 그 교회의 각 사람에게도 말할 수 있다고 했던 원리와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안식에 앞서는 것이 있습니다. ‘여섯날의싸움또는수고’입니다. 이것은 AC.84에서 천적 인간의 상태에 이르면 모든 싸움이 그친다고 한 설명과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싸움과 안식의 질서가 유대교회에서 수고하는 날들과 일곱째 날 안식일로 표상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표상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제정되지 않았다고 밝힙니다.
이어지는 법궤의 인용도 바로 이 싸움과 안식의 대조를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법궤가 광야에서 나아간 것이 ‘싸움과시험’을 표상하고, 법궤가 쉰 것이 ‘평화의상태’를 표상했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민10:35-36에서 법궤가 떠날 때 ‘여호와여일어나사주의대적들을흩으시고’라고 하고, 쉴 때에는 ‘여호와여이스라엘종족들에게로돌아오소서’라고 한 말씀을 인용합니다. 이 자리에서는 대적이나 이스라엘의 수많은 종족 각각의 상응을 따로 풀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힌 ‘법궤의나아감은싸움과시험,쉼은평화의상태’라는 인용 목적을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민10:33의 ‘그들의쉴곳을찾기위하여’라는 말씀도 같은 이유로 이어집니다. AC.85가 여기서 직접 강조하는 것은 법궤의 광야 여정과 쉼을 통하여 싸움과 안식의 질서가 표상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삼일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법궤가 앞서가는 것의 세부적인 상응이 무엇인지를 이 번호에서 새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3]에서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천적 인간의 안식이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를 사58:13-14를 통하여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인용만 한 뒤 멈추지 않고 그 의미를 직접 풀이합니다. 천적 인간은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행동하며, 그 주님의 뜻이 그의 ‘뜻’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85의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천적 인간의 안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행동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행동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의 뜻이 단지 외부에서 그에게 명령되는 뜻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뜻’이 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AC.81에서 천적 인간이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결박도 없는 것처럼 보이며 자유롭지만, 그의 보이지 않는 결박은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한 설명을 한층 더 이해하게 합니다. 천적 인간에게 주님의 뜻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외부에서 강제로 시키는 명령으로만 남아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선하신 뜻이 그의 뜻이 되기 때문에 그는 그 질서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기자신의뜻에따라행동하지않는다’는 말을 인간에게 더 이상 의지가 없다거나 인간이 수동적인 존재가 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원문 자체가 주님의 선하신 뜻이 ‘그의뜻’이 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AC.85가 말하는 안식은 행동이나 의지가 사라지는 상태가 아니라, 천적 인간의 뜻이 주님의 선하신 뜻과 일치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결과를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은 내적인 평화와 행복을 누리며, 이것이 ‘땅의높은곳에올림을받는것’으로 표현됩니다. 동시에 외적인 평온과 기쁨을 누리며, 이것이 ‘야곱의기업으로양육되는것’으로 의미됩니다. 여기서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두 표현의 의미를 직접 밝혀 주므로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따라서 사58:13-14가 AC.85에 인용된 핵심도 분명합니다. 안식일의 외적인 규정을 설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천적 인간의 안식이 자기 자신의 뜻을 따라 행동하는 상태가 아니라 주님의 선하신 뜻이 자신의 뜻이 된 상태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는 내적인 평화와 행복, 외적인 평온과 기쁨이 있습니다.
AC.85전체의 흐름은 하나로 이어집니다. 주님 자신이 안식일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나라는 영원한 평화와 안식이며, 주님의 가장 내적인 교회도 안식일이고, 거듭난 사람도 천적 인간이 될 때 주님의 형상으로서 안식일입니다. 그 안식에 앞서 여섯 날의 싸움 또는 수고가 있으며, 이것이 유대교회의 수고하는 날들과 안식일, 그리고 법궤의 나아감과 쉼으로 표상되었습니다. 그리고 천적 인간의 안식이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는 사58:13-14를 통하여 설명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행동하며, 그 주님의 뜻이 그의 뜻이 됩니다. 바로 이 상태에서 그는 내적인 평화와 행복, 외적인 평온과 기쁨을 누립니다. (AC.85해설)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5, ‘면류관 벗어서’, 찬69, ‘온 천하 만물 우러러’입니다.
오늘은창2 첫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1절로 3절, AC 글 번호로는 82번에서 84번입니다만, 창2 여는 글들 및 개요 글들 포함, 67번부터 다루겠습니다. 여기 ‘여는 글들’은 아래 71번 글을 참고하세요.
본문 함께 읽습니다.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창2:1-3)
이 본문을
일곱째 날, 곧 천적 인간의 상태
이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본문 및 해설,그리고 심화 리딩 주일설교시작합니다.
최근 개신교 어느 교회 예배에 참석, 오랜만에 참 익숙하지만, 그러나 무척 낯설었던 시간을 가졌는데요, 참 익숙했던 건, 제가 개신교에서 50대 후반까지 머물렀었기 때문이고, 또 무척 낯설었던 건 예배와 설교 전반에 아르카나, 즉 ‘속의 언어’가 아닌, 세상 언어, 곧 ‘겉의 언어’가 많이 섞인 예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제가 아르카나를 처음 접하던 초창기처럼 무슨 반감이 들거나 그러진 않았는데요, 스베덴보리가 죽는 날까지 자신의 배경인 루터교회를 출석했던 거나 주님이 안식일마다 유대교 회당을 찾으셨던 것처럼, 저 역시 전심으로 그 예배에 참여, 함께 손을 들어 주님을 찬양하고, 말씀에 귀 기울이며, 함께 웃고 즐거워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두 세계의 언어가 섞인 예배였지만, 속으로 실시간 통역을 하면서 ‘아, 이걸 이렇게, 저걸 저렇게 표현한 거구나!’ 하면서 드렸습니다. 우리 안에 와있는 천사들 역시 우리의 일상 일거수일투족 중 그렇겠구나 싶었습니다.
이 아르카나 순도 8, 90%의 예배는 지상에서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100%는 천국에서나 가능하겠지요. 어쩌면 주님이 훗날을 위해 미리 우리 교회를 통해 이것저것 테스트를 진행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겉’과 ‘속’은 같이 갑니다. ‘속’은 ‘겉’이라는 그릇에 담기며, ‘겉’이라는 옷을 입고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동안 자연적 인간과 영적, 천적 인간 역시 같이 갑니다. 우리의 영적, 천적 인간은 겉으로 보기엔 ‘자연적 인간’으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쉽진 않으시겠지만, 항상 이 ‘균형’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