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7 심화

1. 다른 삶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AC.67을 처음 읽는 독자는 거의 즉시 한 가지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 안에 들어 있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는 다른 삶의 본성을 알지 못하면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은 무엇이며,  본성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AC.67은 아직 그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제부터 자신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예고합니다. 그러므로 이 심화에서도 뒤에 나올 내용을 모두 앞당겨 설명하기보다, 앞으로의 독서를 위해 꼭 필요한 정도만 먼저 짚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다른 은 이 세상의 육체적 삶과 구별되는 사후의 삶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사후의 삶은 단지 죽은 뒤 어딘가에서 존재한다는 막연한 교리가 아닙니다. 사람이 육체의 죽음 뒤에도 의식과 인격을 지닌 채 계속 살아가며, 영들과 천사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영적 세계가 있다는 것이 그의 증언의 중요한 전제입니다. AC.67에서 그가 여러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었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다른 삶이 그에게 관념이나 추측이 아니라 듣고 볼 수 있도록 허락된 실제의 삶이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AC.67은 단순히 사후세계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그 삶을 향하고, 그 삶에 속한 것들을 묘사하며, 또한 그것들을 그 안에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의 문자에는 땅과 하늘, 집과 성, 사람과 짐승, 올라감과 내려감, 전쟁과 평화, 삶과 죽음 같은 자연계의 언어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그러한 표현들이 인간의 영적 생명과 주님의 나라에 속한 것들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계의 의미만 알고 영적 삶의 질서를 전혀 알지 못한다면, 속뜻에서 말하는 많은 것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다른 삶의 본성을 안다는 것을 영계에 관한 수많은 정보를 미리 외워 두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AC를 읽기 전에 천국과 지옥의 구조를 모두 알아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AC.67부터 이어지는 글 자체가 독자에게 그 세계를 차례로 소개하기 시작합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의 속뜻이 자연계의 사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실제 영적 생명과 영적 세계의 질서를 향하고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고 읽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을 안다는 것은 단순한 사후세계 호기심과도 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다른 삶을 말하는 이유는 죽은 뒤 무엇을 보고 어디를 돌아다니는지가 흥미롭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과 연결되는 것은 그 세계가 인간의 내적 생명과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AC가 진행되면서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선과 진리, 천국과 지옥, 거듭남과 같은 주제들이 계속 등장하게 됩니다. 다른 삶의 본성을 알아 가는 것은 결국 인간이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으며, 이 세상에서 어떤 생명을 형성해야 하는지를 알아 가는 일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AC.67에서 다른 삶의 본성을 모르면 속뜻의 가장 깊은 아르카나를 알 수 없다고 한 말을 지나치게 부담스럽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먼저 영계를  알아야 AC 읽을 자격이 있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자연계의 시야 안에서만 읽었던 말씀을 더 넓은 실재 안에서 읽도록 독자의 시선을 여는 말에 가깝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만이 전부가 아니며, 말씀의 속뜻은 인간의 영원한 생명과 주님의 나라에 속한 실재를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AC.67은 창2의 시작에 영계에 관한 이야기를 갑자기 끼워 넣은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창2의 속뜻을 읽기 위해 독자가 갖추어야 할 하나의 중요한 시야를 먼저 열어 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다른 에 관하여 보고 들은 것을 이제 밝히겠다고 한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독자는 앞으로 그의 증언을 따라가면서 다른 삶의 본성이 무엇인지 조금씩 배우게 되고, 동시에 왜 그것을 알아야 말씀의 속뜻이 더 깊이 열리는지도 차츰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AC.67 심화 1)

 

 

 

AC.67, 창2 앞, ‘왜 말씀의 속뜻을 알려면 다른 삶의 본성을 알아야 하는가’ (AC.67-72)

AC.67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에게는 말씀의 속뜻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 속뜻 안에는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었고, 또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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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7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에게는 말씀의 속뜻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속뜻 안에는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었고,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결코 없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습니다. 이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바로 삶을 향하고 있고, 삶에 속한 것들을 묘사하며, 또한 그것들을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로 하여금 여러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게 하시고, 기간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들을 밝히는 일이 이제 허락되었습니다. As of the Lords Divine mercy it has been given me to know the internal meaning of the Word, in which are contained deepest arcana that have not before come to anyones knowledge, nor can come unless the nature of the other life is known (for very many things of the Words internal sense have regard to, describe, and involve those of that life), I am permitted to disclose what I have heard and seen during some years in which it has been granted me to be in the company of spirits and angels.

 

해설

AC.67은 창2의 본문 해설로 들어가기 전에 놓인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곧바로 창2의 속뜻을 설명하지 않고, 자신이 이제부터 무엇을 밝히려 하는지 먼저 말합니다. 그것은 말씀의 속뜻 안에 들어 있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이며, 특히 그 가운데 매우 많은 것은 다른 ’, 곧 사후에도 계속되는 영적 삶의 본성을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AC.67은 창2의 첫 해설이라기보다, 앞으로 이어질 AC.67-72의 영계에 관한 증언을 여는 서문에 가깝습니다.

 

첫 문장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을 알게 된 일을 자신의 학문이나 추론의 성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자신에게 허락된일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문장에서도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었던 일과 그동안 듣고 본 것을 밝히는 일이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AC.67의 처음과 끝이 모두 인간의 성취보다 주님의 허락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가 말씀의 속뜻과 다른 삶의 본성을 연결하는 이유도 본문 안에 분명히 제시되어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그 삶을 향하고’, 그 삶에 속한 것들을 묘사하며’, 또한 그것들을 그 안에 포함하고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단순히 사후세계를 많이 알면 성경 해석에 도움이 된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 자체가 영적 세계와 인간의 영원한 삶에 관계되는 것들을 품고 있으므로, 그 세계의 본성을 전혀 모른다면 속뜻의 많은 부분 역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을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사후세계에 관한 책이다라고까지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현재 메인 해설에는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후 세계를 바라보며 기록된 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AC.67의 직접 진술은 그보다 신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다른 삶을 향하고 그것을 묘사하며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말씀의 속뜻은 이후 주님과 그분의 나라, 교회, 인간의 거듭남과 천국의 질서 등 훨씬 넓고 깊은 내용을 펼쳐 보일 것이므로, AC.67에서는 원문이 정한 범위를 그대로 지키는 편이 좋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듣고 보았던 것들을 밝히겠다고 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다른 삶의 본성을 철학적 추론으로 재구성하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으며, 그 기간 동안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합니다. 바로 다음 AC.68부터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사람들이 보일 반응까지 예상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AC.67은 앞으로 이어질 영계에 관한 기록을 어떤 성격의 글로 읽어야 하는지를 미리 알려 주는 역할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AC.67 하나만으로 스베덴보리의 영적 경험 전체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확정해서도 안 됩니다. 현재 메인 해설에는 공간을 이동한 것이 아니라 인식과 지각의 차원이 열렸다고 단정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 번호 자체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그가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고 그 가운데서 듣고 보았다고 말하는 데까지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 경험의 구체적인 성격은 이어지는 번호들과 다른 관련 저작을 통해 점차 확인해야 합니다.

 

결국 AC.67의 무게는 말씀의 속뜻과 영계에 관한 증언을 처음부터 서로 연결해 놓는 데 있습니다. 앞으로 창2의 속뜻을 읽는 독자는 단지 자연계의 사건과 인간 심리만을 가지고 말씀을 이해하려 해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만나게 됩니다. 동시에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그 다른 삶을 알게 된 것도, 그것을 이제 밝히게 된 것도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자비와 허락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이 두 축, 말씀의 속뜻과 다른 삶의 관계주님의 허락 아래 주어진 증언AC.67 이후를 읽는 출발점입니다. (AC.67 해설)

 

심화

1. 다른 삶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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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6, 창1,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 : 태고교회, 역사, 예언, 시편

AC.66말씀에는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이 땅의 것과 세상의 것을 말할 때,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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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CR.287

 

말씀에서 십계명이 특별히 율법’(the law)이라 불린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그것이 교리와 삶에 속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을 향한 모든 것과 인간을 향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그 법은 두 돌판에 기록되었는데,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것을, 다른 하나는 인간에 관한 것을 다룹니다. 또한 교리와 삶에 속한 모든 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관련된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으며, 이 두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이 십계명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말씀 전체에서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이것만 가르친다는 것은 주님의 다음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It is known that in the Word the Decalogue is called by way of eminence the law, because it contains all things of doctrine and life; for it contains both all things that look to God, and all things that look to man. For this reason the law was written on two tables, one of which treats of God, the other of man. It is also known that all things belonging to doctrine and life have reference to love to God and love towards the neighbor; and all things pertaining to these loves are contained in the Decalogue. That in the whole Word nothing else is taught can be seen from these words of the Lord: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22:37, 39-40) Jesus said, thou shalt love the Lord thy God from all thy heart, and in all thy soul, and in all thy mind, and thy neighbor as thyself. On these two commandments hang the law and the prophets (Matt. 22:37, 39–40).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the law and the prophets)는 말씀 전체를 의미합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The law and the prophets” signify the whole Word. And again:

 

25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10:25-28) A certain lawyer, tempting Jesus, said, Master, what shall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And Jesus said unto him, What is written in the law? How readest thou? And he answering said, thou shalt love the Lord thy God with all thy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strength, and with all thy mind, and thy neighbor as thyself. And Jesus said, This do, and thou shalt live (Luke 10:25–28).

 

이와 같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말씀 전체이며, 십계명의 첫째 돌판은 하나님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요약하고 있고, 둘째 돌판은 이웃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요약하고 있으므로, 십계명은 교리와 삶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 두 돌판을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자신의 돌판에서 인간을 향해 보시고, 인간은 자신의 돌판에서 하나님을 향해 보는 방식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바라봄은 상호적인 것으로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인간을 향해 보시며 인간의 구원에 관한 것들을 역사하시고, 인간이 자신의 돌판에 기록된 것을 받아 행할 때 상호적인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께서 율법사에게 말씀하신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This do, and thou shalt live.)는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Since then, love to God and love towards the neighbor are the whole of the Word, and the first table of the Decalogue contains in a summary all things pertaining to love to God, and the second table all things pertaining to love to the neighbor, it follows that the Decalogue contains all things of doctrine and life. From these two tables so regarded it is plain that they are connected in such a manner that God from his table looks to man, and man from his table in turn looks to God, thus the looking is reciprocal, that is, it is such that God on his part never ceases to look to man and to make operative such things as relate to man’s salvation; and when man receives and does what is written on his table, a reciprocal conjunction is effected; and then comes to pass what the Lord said to the lawyer, “This do, and thou shalt live.”

 

 

해설

 

이 본문은 지금까지의 흐름을 한 번에 정리해 주는 결정적인 결론과 같습니다. 핵심은 매우 단순하지만, 동시에 가장 본질적입니다. ‘말씀 전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십계명은 이 두 가지를 완전히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요약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관통하는 구조입니다. 즉, 아무리 복잡해 보이는 교리와 삶의 문제들도 결국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는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는가’로 귀결됩니다.

 

특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돌판 = 두 사랑’이라는 대응입니다. 첫째 돌판은 하나님과의 관계, 둘째 돌판은 이웃과의 관계를 다룹니다. 그런데 이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입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면 그 사랑이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고, 이웃을 참으로 사랑하는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 둘은 나란히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완성시키는 관계입니다.

 

또한 ‘율법과 선지자’가 말씀 전체를 의미한다는 설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이 구절을 통해, 스베덴보리는 ‘성경 전체가 결국 이 두 사랑을 가르치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다시 말해, 성경의 모든 이야기, 교훈, 예언, 계명은 결국 인간이 하나님과 이웃을 바르게 사랑하도록 이끌기 위한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가장 깊은 부분은 ‘상호적 바라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보시고,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본다는 표현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결합의 구조’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인간에게 다가오시고, 구원을 이루기 위해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응답하지 않으면 그 결합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신의 돌판, 곧 삶 속에서 계명을 행하는 자리에서 응답할 때, 비로소 ‘상호적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결국 이 본문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십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축으로 이루어진 말씀 전체의 요약이며, 인간이 그것을 삶으로 행할 때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결합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바로 그때 주님의 말씀이 현실이 됩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TCR, '십계명의 층 구조'

십계명이 자연적 의미로는 교리와 삶의 일반적인 계명들을 담고 있지만, 영적, 천적 의미로는 모든 계명들을 보편적으로 담고 있다 In the sense of the letter the Decalogue contains the general precepts of doct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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