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76

그의 생명은 그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됩니다. (7) His life is described by the breathing into him of the breath of lives (verse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7)

 

해설

AC.76은 창2:7의 개요입니다. AC.73에서 스베덴보리는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된 다음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가 되는 것을 창2에서 다룬다고 했고, AC.74에서는 그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했습니다. AC.75에서는 그의 기억지식과 이성이 안개에 의해 적셔지는 땅의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6에서는 그 사람의 생명이 무엇으로 묘사되는지를 밝힙니다. 그것은 창2:7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입니다.

 

여기서 그의 생명에서 는 앞에서 계속 다루고 있는 천적 인간입니다. 따라서 AC.76은 일반적인 생물학적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번호가 아닙니다. 2:7의 문자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사람이 생령이 되는 장면이 나오지만, 스베덴보리는 지금 창2:1-17의 속뜻을 개괄하면서 그 말씀으로 천적 인간의 생명이 묘사된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 한 문장에서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의 속뜻 전체를 미리 풀어서는 안 됩니다. ‘이 무엇을 뜻하는지, 에 불어넣는다고 하는지, ‘생명의 은 무엇이며 생령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는 창2:7의 상세한 해설을 따라가며 확인해야 합니다. AC.76은 아직 그러한 세부 의미를 설명하지 않고, 천적 인간의 생명이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된다는 큰 연결만 제시합니다.

 

또한 생명의 을 곧바로 성령과 동일시하는 것도 이 단계에서는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에서 숨과 호흡과 영이 서로 관련되는 경우가 있지만, AC.76은 그러한 관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Potts 영어의 the breath of lives에서 lives가 복수형이라는 사실만 가지고 여러 종류나 단계의 생명을 뜻한다고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원문의 세부 표현은 기억해 둘 수 있지만, 그 의미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기다려야 합니다.

 

바로 앞의 AC.75와 비교하면 개요의 진행도 보입니다. AC.75에서는 천적 인간의 기억지식과 이성을 말했고, AC.76에서는 그의 생명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순서만으로 기억지식과 이성은 낮은 것이고 생명은 높은 것이라는 위계를 만들거나, 기억지식과 이성에는 생명이 없고 별도로 생명이 주어져야 한다는 체계를 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창2:1-17의 여러 절이 천적 인간의 무엇을 묘사하는지를 한 항목씩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행 해설에서는 불어넣으심이라는 표현을 근거로 생명이 인간 자신에게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주어진다고 설명하고, 천적 인간은 자기에게 있는 사랑과 지혜와 생명이 자기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가장 내적으로 인정하는 인간이라고까지 나아갑니다. 이러한 주제는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매우 중요해집니다. 그러나 AC.76 자체가 여기서 그 교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개요에서는 말씀에서 천적 인간의 생명이 무엇으로 묘사되는지를 정확히 확인하고 멈추는 편이 좋습니다.

 

같은 이유로 proprium의 문제도 아직 끌어오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천적 인간의 생명과 proprium이 이후 깊이 연결되더라도 AC.76에는 proprium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지금 단계에서 후대의 설명을 앞당기면 오히려 독자가 창2의 실제 전개를 따라가면서 그 관계를 발견할 기회를 잃게 됩니다.

 

따라서 AC.76의 역할은 매우 단순합니다. 2:7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는 것은 속뜻에서 지금 다루고 있는 천적 인간의 생명을 묘사합니다. 그 생명이 정확히 무엇인지, ‘생명의 의 각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직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AC.76은 그것을 미리 완성하는 번호가 아니라, 뒤에서 자세히 풀어 갈 창2:7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먼저 보여 주는 개요입니다. (AC.76 해설)

 

 

 

AC.77, 창2:1-17 개요, ‘에덴동산의 지성, 퍼셉션, 사랑과 신앙’ (8-9절)

AC.77그다음 그의 지성은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그 안에서 보기에 좋은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생명나무는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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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5, 창2:1-17 개요, ‘안개로 적셔지는 땅의 관목과 초목, 기억지식과 이성’ (5-6절)

AC.75그의 기억지식과 이성은 안개에 의해 적셔지는 땅에서 난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됩니다. (5-6절) His knowledge and his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 are described by the shrub and the herb out of the 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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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5

그의 기억지식과 이성은 안개에 의해 적셔지는 땅에서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됩니다. (5-6) His knowledge and his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 are described by the shrub and the herb out of the ground watered by the mist (verses 56).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지면을 적셨더라 (5, 6)

 

해설

AC.75는 창2:5-6의 개요입니다. AC.73에서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된 다음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가 된다고 했고, AC.74에서는 그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5에서는 그 사람의 기억지식과 이성이 무엇으로 묘사되는지를 간략하게 밝힙니다. 그것은 안개에 의해 적셔지는 땅에서 관목과 초목입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천적 인간에게도 기억지식과 이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천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사람이 기억지식이나 이성을 잃거나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AC.75는 오히려 그의 기억지식과 이성을 분명히 언급합니다. 다만 이 번호에서는 그것들이 천적 인간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능하는지까지 설명하지 않고, 2:5-6의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된다고만 개괄합니다.

 

scientificum을 단순히 일반적인 지식으로 옮기기보다 기억지식으로 옮기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이 말은 사람이 배우고 경험하여 기억에 받아들인 지식의 층위와 관련됩니다. ‘rationale이성입니다. 따라서 AC.75는 천적 인간에게 기억지식과 이성이 없어진다고 하지 않고, 그것들이 창2:5-6의 특정한 자연적 표상들을 통해 묘사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관목은 기억지식이고 초목은 이성이라고 하나씩 고정하여 대응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AC.75의 문장은 두 가지를 함께 묶어 말합니다. ‘그의 기억지식과 이성은 안개에 의해 적셔지는 땅에서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됩니다.따라서 이 개요 단계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제시한 묶음 그대로 받아들이고, 관목과 초목 각각의 의미와 관계는 실제 본문 해설에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기다리는 편이 안전합니다.

 

현행 해설에서는 관목과 초목이 나무보다 낮게 자라므로 천적 인간에게 기억지식과 이성이 주인이 아니라 섬기는 이며, 삶을 지탱하고 섬기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합니다. 자연 이미지로서는 아름다운 설명이지만 AC.75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특히 자연물의 외형적 특징을 보고 그 상응을 추론하여 확정하는 방식은 조심해야 합니다. 상응은 단순히 나무는 높고 관목은 낮으므로 높은 것은 중심이고 낮은 것은 섬김과 같은 방식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안개에 대해서도 같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현행 해설은 안개가 비처럼 위에서 내리지 않고 땅에서 올라온다는 점을 근거로, 이것을 주님으로부터 오는 직접적인 계시나 교훈이 아니라 내적으로 스며드는 생명의 영향이라고 해석하고, 천적 인간에게는 생명이 안에서 밖으로 부드럽게 흘러간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AC.75 자체는 아직 안개의 속뜻을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기억지식과 이성이 안개에 의해 적셔지는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된다는 연결만 제시됩니다.

 

따라서 이 번호에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인식 방법을 완성된 체계로 대비시키는 것도 조금 기다리는 편이 좋습니다. 현행 해설은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가 먼저이고 기억지식과 이성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지만, 천적 인간에게는 선이 먼저이므로 기억지식과 이성이 그 선을 표현하는 도구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앞으로 매우 중요한 주제가 되지만, AC.75 한 문장이 그것을 모두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요에서는 앞으로 설명될 요소들을 먼저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렇다고 AC.75가 아무 내용도 주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사실 하나를 미리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의 상태를 설명하면서도 스베덴보리는 기억지식과 이성을 제거하지 않습니다. 2가 사랑이나 천적 상태를 다룬다고 해서 기억지식과 이성이 무가치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이 어떤 질서 안에 놓이며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앞으로의 설명을 통해 밝혀져야 하지만, 적어도 천적 인간에게도 기억지식과 이성이 있다는 사실은 이 개요에서 이미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75에서는 서둘러 천적 인간의 인식 구조를 완성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먼저 제시한 그림을 그대로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천적 인간에게 기억지식과 이성이 있으며, 그것들은 창2:5-6에서 안개에 의해 적셔지는 땅의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됩니다. 왜 관목과 초목인지, 안개가 무엇을 뜻하는지, 기억지식과 이성이 천적 인간 안에서 어떠한 질서에 놓이는지는 실제 본문 해설이 시작될 때 하나씩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AC.75 해설)

 

 

 

AC.76, 창2:1-17 개요, ‘그의 생명은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된다’ (7절)

AC.76그의 생명은 그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됩니다. (7절) His life is described by the breathing into him of the breath of lives (verse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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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4,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2-3절)

AC.74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 (2-3절)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on which the Lord rests (verses 2–3).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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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4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 (2-3)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on which the Lord rests (verses 23).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 3)

 

해설

AC.74는 바로 앞의 AC.73을 이어받습니다. AC.73에서 스베덴보리는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된 다음,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가 되며 창2에서는 바로 이것을 다룬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4에서는 그 천적 인간을 창2:2-3일곱째 과 연결하여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천적 인간은 일곱째 이라는 말은 천적 인간이 문자 그대로 어떤 하루라는 뜻이 아닙니다. 1에서 여섯 날은 사람이 거듭나는 연속적인 상태들을 나타냈으며, 이제 그 과정에 이어지는 일곱째 날은 천적 인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창2:2-3에서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신다는 말씀도 속뜻에서는 인간의 거듭남과 연결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천적 인간이 쉰다고 하지 않고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한다는 점입니다. 현행 해설은 이것을 주님의 신적 작용이 방해받지 않고 그대로 흘러가는 상태’, ‘주님이 사람 안에서 편히 거하실 있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방향은 앞으로의 설명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겠지만, AC.74 자체는 아직 그 의미를 풀어 주지 않습니다. 이 번호에서는 우선 천적 인간과 일곱째 날, 그리고 주님의 안식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일곱째 날을 곧바로 이상 무엇을 이루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는 상태라고 정의하거나, 천적 인간에게는 삶이 이상 투쟁이 아니라 흐름이 된다고 설명하는 것도 여기서는 조금 이릅니다. 1에서 여섯째 날까지 거듭남의 과정과 싸움이 있었고, 일곱째 날이 그 뒤에 온다는 큰 흐름은 분명하지만, 왜 이 상태를 특별히 주님의 안식이라 하는지는 뒤의 설명을 따라가며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AC.74를 사후의 천국 상태와 바로 연결할 필요도 없습니다. 현행 해설은 여기서 천국을 안식의 상태로 설명하고, 천적 인간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며 사랑에서 나오는 활동이 수고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확장합니다. 그러나 AC.74의 문맥은 AC.73과 마찬가지로 사후 소생을 설명하는 부분이 아니라 창2:1-17의 속뜻을 개괄하는 부분입니다. 지금은 거듭나는 사람이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나아가는 흐름 안에서 일곱째 날을 이해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1과 창2의 연결도 여기에서 다시 분명해집니다. 1에서 여섯 날에 걸쳐 진행된 거듭남이 창2에서 전혀 다른 이야기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2:2-3의 일곱째 날은 앞의 여섯 날에 이어집니다. AC.73에서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나아간다고 한 뒤 AC.74에서 그 천적 인간을 일곱째 날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연속성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AC.74는 천적 인간의 모든 특징을 설명하는 번호가 아닙니다. 이 번호가 하는 일은 훨씬 단순합니다. 2:2-3의 일곱째 날이 속뜻에서 천적 인간을 가리키며, 바로 그 상태에서 주님께서 쉬신다는 사실을 개괄적으로 알려 주는 것입니다. 왜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인지, 주님께서 그 안에서 쉬신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뒤의 본문 해설에서 차츰 밝혀질 것입니다.

 

AC.73AC.74를 함께 읽으면 창2의 출발점이 선명해집니다.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고,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되며, 그 천적 인간이 일곱째 입니다. 그리고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 이것이 지금 스베덴보리가 독자에게 먼저 제시하는 창2:1-3의 큰 그림입니다. (AC.74 해설)

 

 

 

AC.75, 창2:1-17 개요, ‘안개로 적셔지는 땅의 관목과 초목, 기억지식과 이성’ (5-6절)

AC.75그의 기억지식과 이성은 안개에 의해 적셔지는 땅에서 난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됩니다. (5-6절) His knowledge and his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 are described by the shrub and the herb out of the 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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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3, 창2:1-17 개요, ‘죽어 있던 상태에서 영적으로, 영적 상태에서 천적으로’ (1절)

창2:1-17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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