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7-09(D1)-주일예배(2490, 눅11,1-4), '주기도문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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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AnACqmb8kus

 

 

주기도문의 속뜻

 

1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3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4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눅11:1-4)

 

 

천사들의 말이,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God the Father)을 생각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는 보이지 않기(invisible) 때문이다. 우리는 신적 인성(Divine Human) 안에 계신 그분을 생각한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그분이 보이시기(visible) 때문이다. 신적 인성 안에 계시는 그분을 당신은 그리스도(Christ)라 하고, 우리는 주님(the Lord)이라고 한다. (AR.839.6) we do not then think of God the Father, because he is invisible; but we think of him in his Divine human, because in this he is visible; and in this he is called by you Christ, but by us the Lord; (AR.839.6)

 

 

오늘은 주기도문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루에도 여러 번 기도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 취침 전에 또 한 번, 그리고 식사 때마다 등 최소한 이렇게 여러 번 기도합니다. 그러다 보면 가끔은 형식적인 기도가 될 때도 있지요. 그러나 가정에 우환이 생겼거나 자녀들이 시험을 볼 때, 또는 직장 승진심사가 있거나 할 때는 마음을 모아 정성껏 기도합니다. 아마 거기에 인생이 달렸다, 모든 게 걸렸다 생각하기 때문이겠죠. ‘천국의 비밀’ 8179번 글에는 ‘기도에 너무 의존하지 말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가 꼭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하지는 말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기도가 주님의 의도와 다르면 주님은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자기 욕심과 욕정으로 인한 시험 가운데 있는 사람이 정작 회개는 안 하고, ‘주님! 이 시험의 고통에서 나를 구하소서’ 한다면 주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시험의 목적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 시험이 중단되면 그 사람은 영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놓치게 되고,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면 그는 결국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험의 목적이 온전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시험이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 전 과정을 사람이 스스로 하는 것처럼, 즉 자기 힘으로 견디고 이겨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내와 자기와의 싸움이 전제되지 않은 기도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 자신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주님께서 기도하신 것처럼 어떤 경우든 ‘하나님 아버지, 저희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해야 합니까? 이와 관련, ‘천국의 비밀’ 2535번 글은 ‘기도는 주님과 대화하는 것이며, 기도하는 내용을 내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기도하면서 자기가 기도하는 것을 내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좀 더 주님 뜻에 가까운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래서 오늘은 주기도문의 의미, 그 속뜻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본문 1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1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주님의 제자들이 주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합니다. 세례요한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요한’의 영적인 뜻은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letter sense)를 나타냅니다. 세례요한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나타내는 이유는, 처음 교회 나오는 사람들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통해 주님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의 문자적 의미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이며, 곧 세례자 요한(John the Baptist)입니다. 요한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기도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 배우는 기도를 말합니다.

 

말씀에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6장에서 주님은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6) 하시고, 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하십니다. 이러한 말씀 안에는 모두 내적인 의미(internal sense)가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의미를 알지 못하면 온전한 기도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문자의 뜻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요한의 제자들입니다. 반면에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주님의 제자들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가르치는 기도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그 내적 의미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르침을 구하는 상대인 주님은 문자적인 의미와 내적 의미가 함께 있는 말씀(The Word)이시며, 말씀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주님에 대해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요1:27)고 말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하자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주님은 먼저 ‘아버지여’로 시작하십니다. 기도를 하려면 당연히 그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 대상은 인간을 창조하신 영원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버지라 부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구약의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오늘날 기독교인들조차도 그것을 분명히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구약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하나뿐인 아들이라고 믿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을 따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분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며,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의 진리에 위배되는 일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믿어야 하는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생물학적인 부자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두 가지 본질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즉 아버지는 사랑 자체이시고, 존재 자체이시며, 신성 자체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뜻하고, 아들은 사랑의 열기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빛이시고, 존재의 드러남이시며, 신성에서 비롯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 말씀하시고, 또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요17:21), 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14:9)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버지라고 불러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는 그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내면의 모습(quality)을 함께 떠올리며 부릅니다. 그것처럼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주님의 겉모습인 인성과 그 내면에 있는 신성을 함께 부르는 것입니다. 내면에 신성(神性)을 담고 있는 주님의 인성(人性)을 우리는 신적 인성(Divine Human)이라고 합니다. 즉 거룩한 인간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은 바로 신적 인성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신성과 함께 인성을 가지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피조물의 입장에서는 주님의 신성은 볼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볼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성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세상에 오실 때 입으셨던 그 인성은 아직은 거룩한 인성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인성 안에는 마리아로부터 받은 유전적 악이 그대로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모진 시험을 통해 마리아로부터 받은 인성을 벗으시고 여호와로부터 받은 새로운 인성으로 갈아입으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인간이 거듭나는 과정에서 타고난 자아를 벗고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자아를 받는 것과 유사한 일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마리아의 인성을 벗으시고 여호와로부터 새로운 인성을 입으셨을 때, 비로소 주님의 인성은 당신 안의 신성과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의 신적 인성을 우리는 거룩하게 되신 주님, 또는 영화롭게 되신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처럼 주님이 우리 마음에 처음 오실 때는 완전한 주님이 아니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처음 진리를 받아들일 때는 완전한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진리는 개인의 자아를 통과하는 순간 조금씩 왜곡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빛이 물을 통과할 때 굴절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왜곡된 진리는 사람이 영적으로 거듭남에 따라 점차 완전한 진리로 변합니다.

 

그와 관련해 ‘계시록의 속뜻’ 935번 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님은 사람에게 있는 진리의 질(質, quality)에 따라 그에게 인애(仁愛, charity)와 선을 만들어 주신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개인에게 있는 진리의 특성에 따라 인애와 선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각 사람 안에서 진리와 선이 균형 있게 성장하고 서로 결합하는 것, 이것이 진리가 완전해지는 것이고 우리 안에서 신적 인성이신 주님이 거룩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그런 뜻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와 결합한 선이 바로 신적 인성이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렇게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나라가 임하시오며’입니다. 신앙인들이 영적으로 거듭날수록 우리 마음은 점점 천국으로 변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나라가 각 사람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주님의 나라가 임하시기를 기도하여야 합니다.

 

3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네 번째는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양식은 육신의 양식이 아닙니다. 영혼의 양식인 선과 진리이며 사랑과 지혜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고, 거듭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와 선을 지나치게 욕심(?)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말씀을 공부하면서 가끔 드는 생각은, 성경 전체의 내적, 외적 의미를 체계적으로 정리,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말씀을 읽을 때마다 구약과 신약의 수많은 말씀이 서로 연결되면서 진리의 깨달음이 폭죽처럼 터질 것입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16장에는 ‘일용할 양식을 매일 거둘 것이며 아침까지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침까지 만나를 두는 것’은 진리와 선을 주님이 주시는 대로 받지 않고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만나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진리의 세계는 무한해서 인간의 작은 머리로는 담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때그때 필요한 진리들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항상 주님께 마음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4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다섯 번째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는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자가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옥에 가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때 주인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크게 화를 내며,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옥졸들에게 넘겼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불쌍히 여기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까맣게 잊고, 이웃에게 모질게 대할 때가 참 많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구절을 보면,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매우 중요한 요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기 위해 늘 노력해야 하고, 그것이 잘 안되면 주님 앞에 용서의 능력을 구하셔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그러지 않으면 주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입니다. 시험을 통해 우리는 자기 안에 있는 악을 볼 수 있고,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시험에 들지 않기를 구하라’ 하십니다. 시험이 없으면 영적으로 변화될 수가 없는데 왜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실까요? 시험이 없는 상태, 즉 완전히 거듭난 후의 상태를 목표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라는 이 기도는 완전한 거듭남, 또는 영적 안식의 상태를 소망하는 기도이며, 동시에 그것을 위해 당면한 시험들을 견디고 이겨나가겠다고 하는 결단의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동안 주기도문을 매일 외우면서도 우리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내적인 의미를 통해 이 간결하고 아름다운 기도 안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기도의 시작은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그것은 신적 인성이신 주님이 영화롭게 되신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진리 역시 완전하고 순수한 진리가 되기를 염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기도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입니다. 이것은 목적을 위한 수단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거듭나기 위해서는 주님으로부터 진리와 선을 받아야 하고요, 또한 죄 사함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죄 사함을 받으려면 먼저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이렇게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입니다. 그것은 시험이 없는 상태 즉 완전한 거듭남을 소망하면서 당면한 시험들을 이겨나가겠다는 결단의 기도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 안에는 구원의 목적과 수단에 대한 염원 및 인간의 결단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기도 안에 있는 모든 구절이 다 소중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말씀이 저의 마음을 때렸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 큰 죄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작은 허물을 용서하지 않은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이웃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할 때, 막혔던 혈관이 뻥 뚫리는 것과 같은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와 치유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 축원합니다.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마6:33-34)

 

아멘

 

 

 

 

원본

2019-12-0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0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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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6(D5)-매일예배(2489, 눅8,22-25), '호수를 건너가는 동안 예수께서 잠이 드셨다는 말씀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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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EGd-vV7cIac

 

 

 

호수를 건너가는 동안 예수께서 잠이 드셨다는 말씀의 속뜻

 

 

22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23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24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25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눅8:22-25)

 

 

어느 날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게 되셨습니다. 배가 진행되는 동안 주님이 잠깐 잠이 드셨는데 갑자기 큰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파도가 배를 덮쳤습니다. 그리고 금방 배에 물이 가득 찼습니다. 제자들은 이대로 그냥 배가 가라앉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잔뜩 겁을 먹고, 잠이 드신 주님을 깨웠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이렇게 외치듯 주님을 깨웠습니다. 제자들은 그동안 주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얼마나 큰 능력을 갖고 계신 분이신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정작 위기가 닥쳤을 때,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잠깐 사라졌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들이 마치 바람 앞에 등불처럼 떨었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주님에 대한 믿음이 견고하게 있었다면 아마 그렇게까지 두려워하며 떨지는 않았을 겁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깨우는 소리를 들으시고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는 바람과 파도를, 물결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순식간에 바다가 조용, 잔잔해졌습니다. 오늘 말씀의 줄거리가 여기까지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주님의 제자들의 모습이나 우리 자신의 모습이 어쩜 이리도 흡사할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믿는다 하지만 어떤 위기에 처하면 언제나 두려움을 느끼고 마음이 초조해집니다. 왜 우리는 주님을 이렇게 온전히 믿을 수 없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오늘은 그러한 문제들을 본문의 영적인 의미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22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22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본문에는 ‘하루는’이라고 표현되어 있는데요, 영어 성경에는 ‘어느 날’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말씀에서 ‘시간’은 어떤 뜻입니까? 각자의 영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어느 날이라고 하는 것은 신앙인 각자가 도달해 있는 어떤 영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 상태는 물론 사람마다 같지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상태에 있고, 어떤 사람은 저런 상태에 있고... 다 다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이제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는데요, 여기서 ‘’는 뭘까요? 배는 교리를 나타냅니다. 배가 없으면 바다를 건널 수 없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교회의 교리를 모르면 거듭남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교리를 모르면 어떻게 행동하는 게 옳은지 그런 걸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배는 교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호수’는 물이 많기 때문에, ‘바다’와 같은 의미입니다. 즉 지옥을 의미합니다. 보통 ‘’은 진리를 의미하지요. 세례의 관점에서는. 그러나 반대로는 거짓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호수는 물이 많은 곳입니다. 그래서 긍정적인 의미로는 지식을, 바다와 마찬가지로 지식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진리의 지식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거짓이 많은 곳, 그러니까 지옥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이제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는 것은 신앙인들이 지옥의 항해를 뚫고, 교리에 따라 거듭남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들이 교리에 따라 거듭남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은, 이들이 그냥 배만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배 안에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교리 가운데 주님이 계신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주님이 계실 때, 교리는 살아있는 교리가 됩니다. 교리나 진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그들이 교리를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교리가 살아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를 타고 가는 동안 큰바람이 불더니 파도가 일어 배를 덮쳤습니다. 그 광경을 23절에서는,

 

23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잠이 드셨다고 합니다. 시편 121편 4절에 보면,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이런 말씀이 있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이 잠이 드셨답니다. 주님께서 잠이 드셨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는 문자 그대로 주님이 잠이 드셨다는 것이 아니구요, 신앙인들이 주님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믿는 상태를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자기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고, 세상의 것들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때 주님은 우리의 마음의 중심에서 바깥으로 밀려납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 중심에는 이기심과 세속적 욕망들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며, 말씀에서는 이런 상태를 주님이 주무시는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만약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시시때때로 지옥으로부터 밀려들어 오는 모든 악과 거짓의 물결을 우리가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계셔야만 주님이 그것을 막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는 것은 지옥으로부터 밀려들어 오는 수많은 악과 거짓들을 의미합니다. 그 악과 거짓들이란, 지옥이 인간의 머릿속으로 불어넣는 수많은 생각과 추측들입니다. 그 생각과 추측들이란 어떤 것이냐 하면, 모든 실제 상황을 부풀리거나 그 실제 상황을 왜곡하는 겁니다. 지옥은 우리에게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를 않습니다. 그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든 왜곡해서 오해하고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런 경험은 너무나도 많으실 겁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우리가 매일 수많은 일을 겪고, 매일 수많은 사람을 만나지 않습니까? 사람을 만나거나 일을 겪을 때, 우리가 느끼는 느낌이 있는데요, 주님이 함께 계실 때는 언제나 긍정적인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계시지 않을 때는 지옥이 그 많은 정보를 왜곡해서 우리한테 전달합니다. 저 사람이 나한테 이렇게 했는데 그것은 필시 저 사람 마음속에 이런 것이 있기 때문일꺼야... 라고 그 사람의 진심을 의심하거나, 저 사람이 나한테 잘해주어도 저거는 뭐 어떤 다른, 또 다른 무슨 좋지 않은 의도가 있을꺼야 이렇게 추측하게 만든다거나 등등 이런 것들이 다 지옥이 우리에게 불어넣는 왜곡된 정보들입니다. 그것은 모두 거짓입니다. 그러므로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한 것’은 영적 시험을 의미합니다. 24절에는, 시험 가운데서 신앙인들이 극도의 불안을 느끼면서 주님을 찾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24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우리가 시험이 올 때, 어떤 느낌입니까? 싸움 아닙니까? 마치 외나무다리에서 힘센 사람과 싸우는 것 같은 느낌을 느낍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때는 주님께서 앞장서셔서 그 싸움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시는데, 주님께서 계시지 않을 때는,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을 때,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주님을 믿지 않고 세상을 믿거나 자기 자신의 지혜를 믿을 때는 우리는 혼자 싸워야 하며, 그때 그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제롭니다. 그래서 거짓의 유혹에 넘어갈 때, 신앙인들은 극도의 불안을 느낍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제자들이 바로 주님을 깨웠다 기록하고 있는데, 실제의 삶에서는 시험이 시작되더라도 한동안은 주님을 찾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이렇게도 해보려고 하고, 저렇게도 해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지옥은 점점 더 우리의 목을 죕니다. 그렇게 해서 시험은 점점 더 깊어집니다. 시험이 깊어질 때는 이웃을 사랑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웃을 배려하기도 어렵고, 이웃에게 너그럽게 대하기도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는,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조차 힘에 부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지옥에서 오는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오해와 불신을 조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험 중에는, 시험을 받을 때는 큰 실수를 하기도 하고, 작은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어떨 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이웃에게 주기도 하지요. 그런 식으로 시험의 절정에 도달합니다. 그때 비로소 신앙인들은 ‘주여, 제가 죽겠나이다. 제 힘으로는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나이다!’ 이렇게 외치면서 주님의 손을 붙잡습니다. 그것이 잠들어 계신 주님을 깨우는 순간입니다. 그때 주님은 깨셔서 미칠 듯이 부는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십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마음속에서 부글거리던 모든 의심과 오해, 분노와 적개심, 그리고 불순한 욕망이 모두 사라져버립니다. 한순간에 사라져버립니다. 마치 바람과 파도가 딱 멎는 것 같이, 바다가 잔잔해지는 것 같이 그렇게 사라져버립니다. 그렇게 시험은 끝이 납니다. 주님께서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시기 전에는 시험은 절대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시험은 오직 주님을 의지할 때만 이길 수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참된 기독교’ 123번 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옥은 마치 괴물이나 사자와 같아서 주님이 족쇄를 채우시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 혼자서는 절대로 감당할 수 없다 (TCR.123)

 

유튜브 영상 가운데는 사람이 호랑이와 싸우는 장면을 보여주는 그런 영상이 있습니다. 그 호랑이가 바로 지옥의 모습입니다. 먹이를 쫓는 사자나 호랑이가 얼마나 집요하게 덤빕니까? 지옥이 바로 그러한 모습으로 우리한테 달려드는데요, 그래서 베드로도 그의 편지에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적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로 지옥의 유혹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바람이 멈췄을 때,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25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이르셨을 때, 주님의 제자들의 반응은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였습니다.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겼다고 했습니다. ‘두려워하고’는 주님을 아직 잘 믿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두려움’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는, 나의 뜻대로 되지 않을까 봐 걱정하는 마음입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설사 나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주님의 섭리, 주님께서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신다는, 궁극적으로는 주님께서 바른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지금 내가 원하는 길로 가지 않는다고 해서, 지금 이 상황이 내가 원하는 상황이 아니라고 해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제자들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서로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바람을 잠재우는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그 기적을 통해서 주님의 능력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무슨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기적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섭리가 아주 작은 것 하나하나에도 다 들어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같은 인간과 다르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적은 신성한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그런 기적하고는 전혀 다른, 차원이 다른 기적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시험을 이길 수 없고,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만 시험을 이길 수 있으며,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주님은 바람을 잠재우는 기적을 통해 보여주셨기 때문에, 주님은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지옥이라는 데가 어떤 곳, 어떤 상태임을, 그 속성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그동안, 오랫동안 가까이서 주님을 모셔 왔기 때문에, 주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많이 봤습니다.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시고요, 중풍 들린 자를 걷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런 기적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수천 명을 먹이는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직 주님에 대해 잘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에 대해 모른다는 것은 그들이 주님의 신성을 아직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메시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인정하지만, 그러나 주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실 주님을 가까이서 아는, 잘 아는, 주님을 잘 아는 사람일수록 주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고향 사람들이 주님을, 주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주님의 고향 사람들이 보여준 반응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고향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것을 마태복음 13장 54절 이하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54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55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56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57예수를 배척한지라 (마13:54-57)

 

주님은 그들에게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의 진리가 정작 교회로부터는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주님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교회는 주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과 사랑을 분리,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사랑을 따로 떼어놓는 사람들은 주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천국의 비밀’ 3868번 글을 보면, ‘믿음은 이웃 사랑에서 비롯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사랑의 형상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은 일종의 의지와 같은 것이구요,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잘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이런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뭡니까? 진리입니다. 우리가 믿는 진립니다.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사랑의 형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진리를 많이 알아도,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살아있는 믿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런 믿음 가운데는 주님이 계시지 않구요, 그런 믿음에는 능력이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세상의 바람과 파도가 높을수록 이웃을 자기 자신보다도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그 바람과 파도를 멈추게 하실 수가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해서, 이웃을 자신보다 더 사랑한다고 하니까 이것을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이웃을 사랑할 수가 있지 않느냐? 맞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이웃을 자신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막 팽개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올 때, 화장도 안 하고, 머리도 아무렇게나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식사도 아무렇게나 하고, 운동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나 자신만을 위해서 그것을 하지는 말라는 겁니다. 주님과 이웃과 교회를 위해 나를 돌보고 바로 세우는 것은, 그러므로 언제나 옳은 일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 삶의 곳곳에 주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요8:31)

 

아멘

 

원본

2018-11-1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06(D5)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

2023-07-04(D3)-매일예배(2488, 눅10,38-42), '마르다에게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하신 말씀의 속뜻'.pdf
0.32MB

https://youtu.be/KmAyCZKouuU

 

 

마르다에게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하신 말씀의 속뜻

 

 

38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41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눅10:38-42)

 

 

교회 교세가 너무도 미약, 어떻게 하면 교회를 성장시키고, 부흥시킬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마음이 복잡할 때는 계시록 12장, 아들을 낳는 여인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위안을 얻곤 합니다. 계시록 12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5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6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계12:5-6)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아들을 낳은 여자’는 새 교회, 곧 주님 오셔서 새롭게 시작하실 새 예루살렘 교회, 인류의 다섯 번째가 될, 그리고 더 이상은 없는 마지막 영원한 교회를 뜻합니다. 그리고 ‘아들’은 그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이 새 교회는 기존 교회의 마지막 때 세워집니다. 즉 기존의 교회들이 믿음과 삶의 행위를 분리시켜서 완전히 타락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 교회들의 문을 닫으시고,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늘 그러셨습니다. 인류의 교회사를 보면, 지금이 네 번째 교회 시대인데, 앞 모든 교회 시대마다 늘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새 교회, 그러나 이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하실 교회를 말씀에서는 ‘여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가 낳는 ‘아들’은 주님이 새 교회를 통해 밝히시는 새로운 교리이며 말씀입니다.

 

새 교회 교리가 처음 나타날 때, 기존 교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그들을 지탱하고 있던 교리가, 그리고 지금은 ‘오직 믿음’의 교리가 한 번에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들은 새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주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주님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요. 새 교회가 기존 교회들에 의해 박해를 당하는 것을 말씀에서는 ‘여자가 광야로 피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초목이 자라지 않는 황폐한 땅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진리도 없고, 사랑도 없는 교회들의 모습입니다. 바로 그런 광야 한 가운데 이 새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험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그런 이유로 해서 처음에는 새 교회 진리를 믿는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다고 합니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새 교회의 진리를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만 명 중 하나도 쉽지 않다고 하지요. 그러다가 주님의 때가 이르면 빠르게 부흥이 된다고 합니다. 말씀에는 그것을 ‘여자가 천이백육십일 동안 하나님의 양육을 받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양육을 받는 천이백육십일은 새 교회가 열악한 상태에서 차츰 부흥이 되는 기간인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의 의미를 통해서 우리는 새 교회가 처음에 얼마나 열악한지, 그리고 시험이 얼마나 많은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어려울 때마다 저는 이 말씀으로 위로를 받습니다. 새 교회는 주님께서 지켜 주시는 특별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무너지지 않으며, 때가 되면 크게 부흥할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예비하신 천이백육십일 동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 손 놓고 그냥 주님이 이루어주시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그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 보겠습니다. 본문 38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8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서 마르다라는 여인을 만나셨다는 겁니다. 말씀에서 ‘여자’는 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마르다는 마음속에 교회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주닙을 자기 집에 영접했습니다. ‘’은 사람의 의지를 나타내기도 하구요, 여기서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선한 마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마르다가 주님을 집으로 모시는 것’은 그가 주님으로 표상되는 새 교회 진리를 선한 마음 가운데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속에 선한 것이 없는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선과 진리는 서로 끌어당겨 하나가 되고자 하는, 하나로 결합하려고 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선한 마르다는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참 진리이신 분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봤습니다.

 

주님을 받아들였을 때, 마르다의 믿음의 상태는 어땠을까요? 주님께서 마을로 들어가셨다는 사실로부터 마르다의 믿음이 어떤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마을’은 신앙의 외적인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예배 의식이나 교회의 제도 같은 것이 바로 마을입니다. 마을과 비교되는 것으로 좀 더 큰 성읍이 있지요. ‘성읍’은 신앙의 내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교리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성읍이 중심에 있고, 마을은 그 바깥쪽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르다의 신앙은 외적 신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그가 성읍에 살지 않고, 마을에 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적 신앙과 외적 신앙은 서로 어떻게 다를까요? 한 마디로, 내적 신앙은 진리를 알면 바로 삶으로 옮기는 신앙입니다. 반면, 외적 신앙은 입으로는 믿음을 고백하는데 삶으로는 옮기지 않는 신앙입니다. 따라서 마르다의 믿음은 후자의 신앙입니다. 39절에는 마르다와 비교되는 그의 동생 마리아가 등장하는데, 그에 대해 말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9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주님의 발은, 주님은 진리이신 분 아닙니까? 그리고 발은 가장 낮은 곳에 있지요? 그래서 ‘주님의 발’은 말씀의 문자적인 뜻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발치에 마리아가 앉아있는 것'은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로부터 내적 진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입니다. 또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했는데, ‘듣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뜻이지요? 그렇게 보면, 마리아의 신앙이 언니 마르다보다는 더 내적인 신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동안, 언니 마르다는 주님을 대접할 준비를 하느라 마음이 바쁩니다. 그런 동생이 언니 마르다의 눈에는 한가로워 보이기만 합니다. 심지어 야속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주님께 나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40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이게 무슨 말일까요? 교회에서나 직장에서 눈에 띄는 일을 하기를 좋아하고, 혼자 바쁜 사람들이 있지요.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것이 선이고 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주장이 많아지고, 자기가 한 일을 인정받지 못할 때는 불평을 하기도 합니다. 지금 마르다가 그런 상태입니다. 마르다는 마리아가 주님에게서 물러나 자기 일 돕기를 원합니다. 마르다처럼 외적 신앙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마리아 같은 내적인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치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눈치 없이 이기적이며, 게으름을 부리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르다는 주님 앞에서 자기 신앙이 마리아의 신앙보다 옳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마르다의 말을 들으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1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주님께서는 마르다가 불필요한 일을 너무 많이 하고 있다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구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교회의 예배 의식이나 교회의 제도, 또 선교, 전도 활동 등은 교회의 재정과 역량에 맞게 가능한 한 단순한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그것이 과연 주님을 위한 일인지 의문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만일 그러한 모든 일들이 목회자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일이거나, 또는 교인들의 자부심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면 그만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숨은 동기로 하는 일들은 모두 외적인 신앙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은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주님을 위한 일인지를 먼저 생각하시고, 그것에 따라서 일의 경중과 순서를 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2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주님은 마리아가 지금 선한 일을 하고 있으니 그 일을 빼앗지 말라 하십니다. 그 일을 그만두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영어 성경의 번역은 다릅니다. ‘한 가지 일로 족하니라’ 이렇게만 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 일’이라고 하니 정말 한 가지 일만 하라는 뜻으로 이해하기가 쉬운데 그게 아니고요, 여기서 ‘하나’는 속뜻으로 선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 일로 족하다’는 것은 선한 일만 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번잡하게 여러 가지, 주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또는 우리 가족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여러 가지 하는 일 중에는 선하지 않은 것이 많다는 겁니다. 그 목적이 선하지 않은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왜 선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순수하게 이웃을 위한 것이 아닐 경우, 순수하게 교회를 위하는 일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위한 어떤 좀 불순한 목적이 들어 있을 경우에는 그것은 선한 것이 아닌 게 되겠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리아가 선한 편을 택했으니 그것을 빼앗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겉으로 표 나는 일이 있고, 표가 나지 않더라도 꼭 필요한 일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든 표가 나는 일을 하려고 하고요, 심지어 없는 일도 만들어서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내용이 없고 보여주기식의 일을 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런 것은 선한 행동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도 아닙니다. 주님은 어느 곳에서나 표가 나든지 말든지 꼭 필요한 일만을 묵묵히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주님을 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하는 일은 쓰임새에 충실한 일입니다. 천국은 쓰임새의 나라요, 천국 모든 구성원은 모두 이 쓰임새에 충실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마르다는 외적 신앙 가운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행하기보다는 주님을 대접하는 일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동생 마리아가 이 바쁜 와중에 한가로이 주님 말씀이나 듣고 앉아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마르다에게 주님은 한 가지 일에 족하라고 충고하십니다. 한 가지 일은 앞에 말씀드린 대로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달리 동생 마리아는 어땠습니까?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행동을 선하게 보시고, 그가 선한 편을 택했으니 빼앗지 말라 언니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대접한다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아니구요,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삶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런 예배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교회 건물이 하늘을 찌르고, 수천 명의 성가대가 찬양을 하더라도, 교인들이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외적인 것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것 안에는 반드시 내적인 것이 함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런 마음으로 주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 새 교회 사람들은 그런 마음으로 주님의 때가 오기를 기다려야만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새 교회의 미래가 머지않아 눈부시게 펼쳐질 날이 올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눅10:42)

 

아멘

 

원본

2019-11-1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04(D3)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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