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은 매우 그럴듯한 통계와 사례를 엮어 하나의 결론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러나 먼저 구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영상 속 일부 수치와 업계 경험담은 실제 현상을 반영할 수 있지만, 다른 일부는 특정 결혼정보업체의 조사나 비공식 경험을 일반화한 것이어서 우리 사회 전체를 그대로 설명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조건 다섯 개 이상이면 평생 매칭이 안 된다’, ‘20대 공무원이 30대 변호사보다 무조건 높은 등급이다’ 같은 표현은 업계 내부의 경향이나 일부 사례일 수는 있어도 보편적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상이 건드리는 핵심 문제는 분명 존재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배우자를 선택할 때, 기준을 세웁니다. 외모, 건강, 성격, 경제력, 신앙, 가치관 등은 모두 중요한 요소입니다. 문제는 기준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기준들이 서로를 밀어 올리면서 실제 존재하기 어려운 한 사람을 상상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이성(rational)은 선과 진리를 분별하도록 주어진 것이지만, 자기애(proprium)가 그 안으로 들어오면 분별은 점차 ‘비교’와 ‘계산’으로 변질됩니다. 그러면 사람을 사랑하기보다 조건을 사랑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결혼은 본래 두 사람의 외적 조건이 아니라 두 사람의 내적 사랑이 하나가 되는 과정입니다. 천국의 결혼은 진리와 선의 결합이며, 남편과 아내 역시 서로에게서 주님의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만큼 하나가 됩니다. 따라서 연봉이나 키, 학벌은 결혼을 가능하게 하는 보조 조건일 뿐, 결혼을 행복하게 만드는 본질은 아닙니다. 행복한 결혼은 상대가 나를 얼마나 높여 주느냐보다 내가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얼마나 선한 사람이 되어 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영상 후반부에서 ‘같이 밥 먹을 때 편한 사람’,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은 오히려 매우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결혼을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함께 있을 때 마음이 평안하고, 서로를 조종하려 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하는 관계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결혼애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천국의 사랑에는 강요가 없고, 자유와 신뢰가 있습니다. 자유가 사라지고 계산만 남으면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영적인 결합은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이 영상은 여성들의 조건을 주로 문제 삼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같은 오류는 남성에게도 얼마든지 나타납니다. 외모만 보는 남성, 나이만 보는 남성, 경제력만 보는 남성 역시 똑같이 사람보다 조건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악의 본질을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에서 찾지 않고, 사랑의 방향에서 찾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중심이 되면, 남녀 모두 상대를 하나의 인격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채워 줄 대상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건을 낮춘 것이 아니라 ‘중요한 기준을 다시 발견했다’는 사례입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과정과도 닮아 있습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외적인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점차 내적인 것을 더 가치 있게 보도록 주님께 인도됩니다. 처음에는 ‘무엇을 가진 사람인가’를 묻다가, 나중에는 ‘어떤 사랑을 가진 사람인가’를 묻게 됩니다. 이것이 외적 인간에서 속 사람으로 시선이 이동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경계해야 합니다. ‘눈을 낮추라’는 말이 아무 관계나 받아들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폭력적이거나, 거짓말을 일삼거나, 중독이 있거나, 신뢰를 깨뜨리는 사람과의 결혼까지 권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도 참된 결혼애는 진리와 선 위에만 세워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과, 양보할 수 있는 선호 조건은 구별해야 합니다. 신앙, 정직, 책임감,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는 원칙에 속하고, 키나 직업, 연봉 같은 요소는 상대적으로 조정 가능한 조건일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영상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결혼을 실패하게 만드는 것은 조건 자체가 아니라, 조건이 사람보다 더 사랑받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실 때 먼저 우리의 연봉이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우리의 의지와 사랑을 보시듯이, 참된 배우자를 찾는 길도 결국은 ‘무엇을 가진 사람인가’보다 ‘어떤 사랑을 품은 사람인가’를 분별하는 데 있습니다. 조건은 결혼의 문을 열 수는 있지만, 그 문 안에서 평생을 함께 살아가게 하는 것은 서로를 향한 선한 사랑과 자유로운 신뢰, 그리고 주님 안에서 함께 거듭나려는 마음입니다.

 

 

 

SY.24, ‘1천-5천만 원 장로, 권사 헌금 강요하던 교회, 1년 후 충격적 결과’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글은 앞선 이야기와 정반대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앞의 글이 ‘권력이 교회를 사유화하는 과정’을 그렸다면, 이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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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22, ‘사례비, 진짜 이 정도였나?’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이야기는 두 개의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앞부분은 ‘교회와 사역자의 관계’, 뒷부분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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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1

번째 일반적인 사실은 영이 육체 안에서 때보다 훨씬 뛰어난 감각 기능을 누리며,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 또한 훨씬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태는 거의 비교할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영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성찰하는 능력을 허락하시기 전까지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지 못합니다. A second general fact is that a spirit enjoys much more excellent sensitive faculties, and far superior powers of thinking and speaking, than when living in the body, so that the two states scarcely admit of comparison, although spirits are not aware of this until gifted with reflection by the Lord.

 

해설

AC.321은 앞의 AC.320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AC.320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자신이 여전히 감각하고 원하고 생각하는 한 사람으로 살아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AC.321에서는 사후의 삶이 단지 지상 삶의 의식이 그대로 계속되는 정도가 아니라, 감각과 생각과 말의 능력에 있어서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차이가 상태를 거의 비교할 없을 정도라고까지 표현합니다. 이것은 사후의 인간을 희미한 의식이나 그림자 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관념과 정반대입니다. 사람이 육체를 벗었다고 해서 감각과 사고가 흐릿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으로서 감각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이 훨씬 더 탁월해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다음 AC.322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자신의 반복된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영들 자신은 처음부터 자신들의 능력이 그렇게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앞의 AC.320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죽은 뒤에도 라는 의식의 연속성을 경험합니다. 여전히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기 때문에 자신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전보다 자신의 감각과 사고가 훨씬 더 탁월해졌음에도 그것을 당연한 자신의 상태처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들이 이 사실을 깨닫는 것도 주님께서 그들에게 성찰하는 능력을 허락하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능력이 향상되었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자기 상태를 돌아보고 그것을 이전 상태와 비교하여 알아차리는 것 역시 주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생명의 근원이 자신에게 있다고 느끼기 쉽지만, 스베덴보리에게 모든 생명과 그것을 인식하는 능력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AC.320AC.321을 함께 놓으면 사후세계에 관한 매우 중요한 그림이 나타납니다. 죽음 이후에도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계속 살아가며, 그 연속성이 너무 자연스러워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삶은 지상에서보다 희미해진 삶이 아니라, 감각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에 있어서 오히려 훨씬 더 탁월한 삶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의식과 인격이 흐려져 사라져 가는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전하는 증언입니다.

 

다만 AC.321에서는 아직 이러한 차이가 왜 생기는지, 각각의 감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지는지까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어지는 AC.322에서 훨씬 구체적으로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한 가지를 분명히 붙들면 충분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후의 인간은 지상의 인간보다 덜 인간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감각과 사고와 말의 능력이 더욱 탁월한 상태에서 계속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이 점은 결국 우리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만일 육체가 죽은 뒤에도 감각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인간 자신이 계속 살아가며, 오히려 그러한 능력이 더욱 탁월해진다면 인간의 본질을 자연계의 육체에만 둘 수는 없습니다. AC.321은 그 사실을 긴 논증으로 설명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영들과 함께하면서 거듭 경험한 하나의 일반적인 사실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다음 AC.322에서는 그 증언을 더욱 구체적인 경험으로 펼쳐 보이게 됩니다.

 

 

 

AC.322, 창4 앞, 시각과 청각, 후각과 촉각, 욕망과 애정, 사고와 말의 능력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2영들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그릇된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수천 번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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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0, 창4 앞,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0-323)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AC.320영혼(soul)으로서의 삶, 곧 죽은 뒤 처음 영계에 들어가는 신참, 신생 영들(novitiate spirits)의 삶에 관한 일반적인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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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이야기는 두 개의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앞부분은 ‘교회와 사역자의 관계’, 뒷부분은 ‘교회를 떠나려는 자녀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입니다. 두 주제 모두 실제 목회 현장에서 매우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특히 말씀하시는 분, 곧 화자(話者)가 어느 한쪽만 일방적으로 두둔하지 않고 균형점을 찾으려는 점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사역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부분입니다. 화자는 ‘헌신과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무조건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라고 말하면서도, 반대로 사역을 단순한 노동 계약으로만 이해하는 태도 역시 경계합니다. 이 균형은 스베덴보리의 사상과도 상당 부분 일치합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봉사가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상대를 착취하는 명분이 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상대의 자유를 존중하며, 필요한 것을 공급하려 합니다. 따라서 교회가 사역자를 ‘믿음이 있으니 희생해야 한다’는 이유로 방치하는 것은 체어리티가 아닙니다. 동시에 사역자가 교회를 단순한 고용주로만 보는 것도 참된 체어리티의 관계는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은 언제나 상호적(mutual)이라고 설명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은 주는 기쁨과 받는 감사가 서로 순환할 때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화자가 지방 교회의 전도사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장학금이나 교통비, 생활 지원 등을 제안하는 부분도 주목할 만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복지의 문제가 아니라,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선에 대한 애정이 외적인 질서로 구현되는 모습’입니다. 천국에서는 사랑이 반드시 질서를 낳습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실제 생활을 유지할 최소한의 질서가 마련되지 않으면, 사랑은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사역자를 현실적으로 돌보는 것은 세속화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의 외적 형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한 가지를 더 강조했을 것입니다. 교회의 중심은 ‘헌신’도 아니고 ‘권리’도 아닙니다. 중심은 ‘유용성’, 그러니까 쓰임새(use)입니다. 천국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 가장 많은 쓰임새를 행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목회자든 전도사든 장로든 성도든 자신의 권리보다 ‘내가 주님의 나라에 어떤 쓰임새를 제공하는가’를 먼저 생각할 때, 교회는 살아납니다. 반대로 쓰임새가 사라지고 자기 사랑이 중심이 되면, 헌신도 권리도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한 명분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습니다.

 

후반부의 ‘교회를 떠나려는 자녀’에 대한 권면은 더욱 인상적입니다. 화자는 부모가 먼저 이유를 들어 주고, 공감하고, 삶으로 보여 주라고 권합니다. 말로 이기려 하지 말고, 사랑으로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와 매우 잘 맞습니다. 사람은 강요로는 결코 선해질 수 없습니다. 모든 거듭남은 자유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도 인간을 강제로 천국으로 끌고 가지 않으십니다. 사랑은 언제나 자유를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녀가 ‘교회 가기 싫다’고 말할 때, 화자는 즉시 꾸짖기보다 먼저 ‘힘들었겠네’, ‘아팠겠네’라고 말해 주라고 권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심리 상담 기술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를 ‘먼저 상대의 선한 의도를 보고 이해하려 한다’는 점에서 찾습니다. 악을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선의 가능성을 먼저 붙드는 것입니다. 부모가 먼저 자녀의 상처를 이해하려는 태도는 이런 천국적 질서와 통합니다.

 

화자가 자녀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하나님이 싫어서라기보다 교회 안의 인간관계와 상처 때문’이라고 분석하는 부분 역시 깊이 생각할 만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은 주님을 직접 미워하기보다, 주님을 대표, 대신, 표상해야 할 사람들의 모습에서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그것이 신앙을 버리는 정당한 이유는 될 수 없지만, 교회 공동체가 자신도 모르게 주님의 얼굴을 가리거나 왜곡할 수 있다는 사실은 매우 엄중한 경고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라 불리지만, 그 몸을 이루는 사람들이 주님의 성품을 나타내지 못하면, 많은 이들이 주님까지 오해하게 됩니다.

 

가장 스베덴보리적인 부분은 마지막 결론입니다. 화자는 결국 부모의 삶과 눈물의 기도가 자녀를 변화시킨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기도가 자녀의 자유를 대신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과 기도는 주님께서 그 자녀에게 더 풍성한 선한 영향과 진리를 제공하실 수 있는 통로를 넓혀 줍니다. 주님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사랑을 보내시지만, 사랑 안에서 드리는 기도는 천사들의 활동과 섭리가 역사할 수 있는 환경을 더욱 풍성하게 마련합니다. 결국 변화시키는 분은 부모가 아니라 주님이시며, 부모의 기도는 그 섭리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다만 마지막 한 가지는 조금 보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야기에서는 ‘눈물의 기도는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목회적 위로로는 아름다운 말이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조금 더 신중하게 표현할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기도를 들으시지만, 응답은 언제나 그 사람의 영원한 구원과 자유를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어떤 자녀는 빠르게 돌아오고, 어떤 자녀는 수십 년 뒤에 돌아오며, 어떤 경우에는 부모가 지상에서 그 열매를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해 가장 완전한 섭리를 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교회는 헌신과 권리를 다투는 조직이 아니라 서로의 쓰임새를 기뻐하는 사랑의 공동체이며, 자녀를 신앙으로 이끄는 가장 강한 힘은 논쟁이나 강요가 아니라 주님을 닮아 가는 부모 자신의 삶과, 그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기도이다.’

 

 

 

SY.23, ‘조건 10개 달던 노처녀, 결국 이런 남자와 결혼했다’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영상은 매우 그럴듯한 통계와 사례를 엮어 하나의 결론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러나 먼저 구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영상 속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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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21, ‘퐁퐁남 될뻔한 사연’, 30대 결혼 D-14 극적인 파혼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사례는 사실 여부를 떠나 오늘날 결혼을 둘러싼 불신과 경제적 긴장을 극적으로 압축한 이야기입니다. 영상은 ‘예단 5천’, ‘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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