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오시는 날

 
 
4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8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9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사35:4-9)
 
 
오늘날 많은 사람이 주님에 대해 자기와 같은 보통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 이유는 주님의 인성만 보고 동시에 신성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인성과 신성은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주님은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시고, 주님 안의 하나님과 사람은 영혼과 육체가 한 사람인 것처럼 둘이 아니라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주님에 관한 교리 21, 이순철 역) At the present day many think of the Lord no otherwise than as of a common man like themselves, because they think solely of his human, and not at the same time of his Divine, when yet his Divine and his human cannot be separated. For the Lord is God and man, and God and man in the Lord are not two, but one person, yes, altogether one, just as soul and body are one man, (L.21)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성도들과 함께 찬송과 영광을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교회가 빛 그 자체이신 주님을 바르게 가르치지 못했고, 그 결과 세상은 빛이 없는 암흑의 세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빛이 없는 세상을 말씀에서는 사막과 메마른 땅, 용이 사는 곳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막과 메마른 땅, 용이 사는 곳은 우리 주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 다음은 작년 이맘때 국내 및 국외 정세입니다. 이 설교의 원본이 작년 성탄절 설교이기 때문입니다. 1년 후인 오늘은 국내적으로는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및 초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대통령 탄핵소추, 부정선거 이슈 및 각종 대규모집회, 국외적으로는 다음 달인 2025년 1월, 미 트럼프 대통령 취임과 그에 따른 국제 정세의 급변 등 그 어수선하고 어지러운, 선과 악, 진실과 거짓 간 첨예한 대립 상황은 여전합니다.
 
힘을 가진 사람이 힘없는 사람들을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쫓아내고,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빼앗긴 사람들은 총을 들고 일어나 보복을 꾀하고, 보복은 더 큰 보복으로 이어집니다. 수많은 부녀자와 아이들이 죽어가는 동안 싸움의 당사자들은 자기의 입장과 명분만 고집합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 이야기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곳에서는 동성애자들이 늘어나 전통적인 결혼의 질서를 파괴합니다. 최근에는 급기야 어느 종교의 지도자가 동성애자 부부를 축복했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그러면 나라 안 사정은 어떨까요? 80년대 말에 참교육을 하겠다고 처음 교사들의 노조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 일은 그로부터 30년이 지나도록 순진한 학생들에게 편향된 사상을 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6.25 전쟁 때 북쪽의 공산주의자로부터 나라를 지킨 지도자를 민족의 반역자라고 생각합니다. 산업화를 통해 이 나라를 빈곤에서 구한 지도자 역시 그들에게는 반역자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역사의 진실을 뒤집고 우리 사회의 건전한 권위를 파괴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 그들 교사의 권위는 자기가 가르친 학생들에 의해 부정당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은 뿌린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교육계뿐 아니라 정치와 사법, 언론 등의 직업군과 산업 현장 곳곳에서 직업윤리가 사라지고 있고, 종교계의 부패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게 사막이요 메마른 땅이며, 용이 사는 곳의 모습일 것입니다.
 
세상이 혼란할수록 양심적인 사람들은 사는 게 힘듭니다. 양심을 지키는 사람은 여러 가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두 번 시류에 따라 눈을 질끈 감기도 하는데, 그러다 보면 처음 가졌던 마음을 회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때 그들은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는 사막과 같은 세상에서 두려움에 떠는 선한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주님께서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실 때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기쁘게 주님을 영접합니다. 주님이 바로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진리를 대적하는 악한 자들과 지옥의 영들은 그들이 괴롭히던 선한 사람들로부터 분리되어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을 쫓던 애굽의 군대가 모세가 바다를 향해 손을 내밀자 홍해의 깊은 바다에 잠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구원이며 보복입니다.
 
26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들의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 하시니 27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28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29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행하였고 물이 좌우에 벽이 되었더라 30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있는 것을 보았더라 31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출14:26-31)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원하실까요? 그것에 대해 본문 5절로 7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5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한편으로는 진리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한편으로는 낡은 교회를 폐하고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앞의 말씀에서 ‘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는 주님의 제자들이 진리를 통해 영적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는 새 교회의 출현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이 거듭나는 것과 새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새 교회는 거듭나는 모든 사람의 내면에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에게서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기 전에는 우리 모두 맹인이며, 귀머거리이고 절름발이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알지 못하면 눈에 보이는 세상 이치를 진리로 믿고 따르는데 그것은 영원한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세상 것들에 매여 있는 동안에는 영원한 진리에 눈뜰 수 없습니다. 그건 주님에 대해, 사후의 삶에 대해, 영원히 사는 이치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맹인의 상태입니다. 진리를 모르면 또 귀머거리라고 했습니다. 귀머거리라는 건 진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는 뜻입니다. 말씀에서 귀는 진리에 순종하는 의지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뭔지 모르는데 어떻게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절름발이는 무슨 뜻일까요? 참된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삶 가운데서 세상에 속한 것과 영적인 것의 조화를 이뤄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영적 진리를 모를 때 사람들은 세상 법이나 도덕을 기준으로 행동합니다. 새 교회에서는 그건 세상 사람의 눈에 맞춰 사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게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후 육신의 옷을 벗고 영계에 들어갈 때, 속에 감추었던 추악한 본성이 그대로 드러난다고 합니다. 그런 걸 보더라도 진리가 없는 절름발이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진리로 맹인의 눈을 밝히시고, 귀머거리의 귀를 여시며, 절름발이들을 사슴과 같이 뛰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데리고 기존의 교회가 무너진 자리에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앞의 말씀에서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라고 한 것은 새 교회가 세워지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광야와 사막은 풀과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속뜻으로는 진리와 진리에 따른 삶이 없는 황폐한 교회들을 의미합니다. 말씀에서는 또 그런 교회들을 용이 눕던 곳이라고 했습니다.
 
한글 성경에는 ‘승냥이’라고 했는데 원문에는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속뜻으로 용은 무슨 뜻일까요? 기존 교회들이 가르치는 잘못된 교리를 뜻합니다. 즉 입으로는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세 하나님을 믿는 교리입니다. 둘째는 믿음으로부터 삶을 분리하여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입니다. 그러면 새 교회에서는 주님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한 분 주님 안에 세 본질이 있다고 믿습니다. 즉 주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지만, 인간 앞에 나타나실 때는 진리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인간의 구원에 구체적으로 관여하실 때는 진리의 능력, 즉 성령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 안에 있는 세 본질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가 사랑 자체이신 분이라면, 아들은 사랑에서 발현되는 진리이고, 성령은 첫 번째와 두 번째 본질인 사랑과 진리로부터 발현되는 진리의 능력인 것입니다. 주님을 이렇게 이해할 때,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이신 주님과 온전히 결합할 수 있으며, 그때 주님이 주시는 믿음과 사랑은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마지막 때 교회들은 신관에 있어서는 한 분 하나님을 셋으로 나누고, 신앙관에 있어서는 믿음으로부터 사랑을 떼어놓음으로써 주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주님은 그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교회의 원형을 회복하시고, 그를 통해 주님에게서 멀어졌던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라고 한 것은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로부터 참된 진리가 샘솟듯 솟아남을 의미합니다. 물과 시내는 참된 진리와 그것에서 비롯한 교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8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9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본문 8절에는 새 교회를 통해 주님이 가르치시는 진리를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또 9절에서는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사자는 본래 악과 거짓으로부터 교회를 지키는 진리의 능력을 나타내지만, 여기서는 진리를 파괴하는 거짓의 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나운 짐승은 신앙인을 유혹하는 불결한 욕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사자와 사나운 짐승이 없다는 것은 주님께서 오신 후에는 어떤 거짓이나 추악한 욕망도 새 교회의 신성한 진리를 파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위로가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어릴 때는 성탄절과 연말이 되면 카드를 손수 써서 친구들에게 보내곤 했습니다. 카드 속 그림에는 산타할아버지가 썰매를 타고 눈 덮인 숲길을 달리고 숲속에 작은 교회로부터 불빛이 새어 나왔습니다. 그림 속의 교회처럼 새 교회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작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이 교회로부터 나오는 불빛과 빛은 온 세상을 밝히는 가장 밝고 힘 있는 진리입니다. 2000년 전에 오신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고 지옥을 이기신 능력의 진리로 다시 새 교회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주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관련, ‘하나님의 섭리’ 33:2항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주님은 정욕이라고 하는 악한 사랑과 그 애정이 제거되는 만큼만 사람들과 가까이 결합하신다. 이 사랑과 애정들은 자연적 사람 안에 있으며, 사람이 자연적 사람으로부터 하는 일은 뭐든 스스로 하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므로 사람은 스스로 하는 것처럼 그 사랑의 악을 제거해야 하며, 그런 만큼 주님은 가까이 오셔서 당신 자신을 그에게 결합시키신다. (이순철 역) the Lord can conjoin himself more closely to a man only as the love of evil is removed along with its affections, which are lusts. These lusts reside in the natural man. What a man does from the natural man he feels that he does of himself. For his part, therefore, a man should remove the evils of that love; so far as he does, the Lord comes nearer and conjoins himself to him. (DP.33:2)
 
이 글을 통해 우리는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과 하나님을 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세상 정욕을 멀리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보는 것은 그때 주님과 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을 괴롭히는 여러 가지 정욕들이 있습니다. 나를 내세우는 것, 다른 사람 위에 올라 지배하려는 것, 이웃의 것을 탐내는 것, 물질적인 쾌락 그 자체를 즐기는 것 등 다양한 욕망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에 붙잡혀 있는 동안에는 주님은 우리 안으로 오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악한 사랑이 주님과 우리 사이에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탄식합니다. ‘주님을 정말 사랑하지만, 세상을 도저히 이길 수 없습니다.’라고 말이죠. 그러나 그럴수록 능력의 진리로 오신 주님을 믿고 일어서야 합니다. 주님께서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탄절을 맞아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과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1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2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3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10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사35:1-3, 10)
 
아멘

 
2023-12-2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2-25(D4)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2-25(D4)-성탄예배(2576, 사35,4-10), '주님이 오시는 날'(성탄절).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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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12-25(D4)-성탄예배(2576, 사35,4-10), '주님이 오시는 날'(성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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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1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눅2:1-7)

 

 

오늘은 주님의 탄생에 대한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주님의 탄생 이야기는 주님이 세상에 오신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이지만, 그 내적 의미, 즉 속뜻은 많이 다릅니다. 내적 의미로 주님의 탄생은 주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내적 진리로 오시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그것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절입니다.

 

1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가이사는 본래 그 기원이 된 줄리어스 씨저(Gaius Julius Caesar)의 이름입니다. 씨저는 로마 황제의 기원이 된 사람입니다. 클레오파트라로 유명한 그가 암살당한 후, 그의 양자요, 조카인 옥타비아누스가 초대 로마 황제가 됩니다. 신약 말씀에서는 ‘가이사’를 로마 황제를 칭하는 일반명사로 사용했습니다.

 

※ 신약에 나오는 가이사들은 ① 오늘 본문의 가이사 아구스도(B.C. 27–A.D. 14) ②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 총독으로 있을 때 디베료(A.D. 14–37, 눅3:1; 막12:14) ③ 로마에 거주하던 모든 유대인을 추방한 글라우디오(A.D. 41–54, 행17:7, 18:2) ④ 바울이 로마에 상소했을 때 가이사(A.D. 54–68, 행25:11) 등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저 가이사 아구스도는 주님 당시에 로마를 다스렸던 황제, 즉 옥타비아누스의 이름이며, 바로 그가 주님께서 탄생하실 즈음에 모든 사람에게 호적을 하도록 명령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호적을 한다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인구조사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말씀에는 인구조사를 했다는 기록이 몇 군데 나옵니다. 예를 들어, 민수기 1장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를 세어 보라 명령하시고요, 또 사무엘하 24장에는 다윗이 인구조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인구조사를 한다는 것이 영적으로는 어떤 의미일까요? 말씀에 나오는 인구조사의 속뜻은 사람의 내면에 있는 선과 진리들을 살피고 판단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에게 선과 진리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그리고 그 선과 진리들의 종류와 특성이 어떤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말씀에 나오는 인구조사의 속뜻입니다. 따라서 인구조사는 그 속뜻, 곧 영적 의미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들 속에 선과 진리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는 사람의 내면을 알 수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말씀에서 인구조사라 하면 결국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특성이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했을까요?

 

주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 또는 각 개인의 내면으로 오시기 전에는 아직 사람들 안에 진정한 진리가 없습니다. 주님이 각 사람의 내면에 오시기 전 상태의 사람들 안에 있는 진리는 세상 진리입니다.

 

※ 여기 ‘주님이 각 사람의 내면에 오신다’는 표현을 개신교식으로 표현하면, ‘각 사람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이지 싶습니다. 뭔가 살짝 2% 부족합니다만...

 

이 진리 역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이기는 하지만, 가장 낮은 차원의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가이사 아구스도는 그 속뜻으로는 세상 진리나 규범, 또는 세상 법도를 의미합니다. 우리 역시 참된 진리를 전혀 모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의 규범, 또는 말씀의 글자의 뜻으로부터 이해한 진리,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테면, 그때가 가이사 아구스도가 우리의 삶을 다스리던 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때부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피시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이사의 영에 따라 인구조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왜 우리 안에 선하고 진실한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실까요? 우리 안의 선과 진리의 특성을 왜 살피실까요? 그것을 아셔야 각 사람에게 맞는 구원의 섭리를 펼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2절입니다.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레뇨’가 아니라 ‘수리아’입니다. 수리아 지역에서 처음으로 인구조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리아는 지금의 시리아를 말하는데, 주님 당시에는 아람이라고 불리던 곳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종 엘리에셀을 보내 아들 이삭의 짝으로 리브가를 밧단 아람이라는 곳에서 구해 온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이삭의 아들 야곱도 하란이라고도 하는, 이 아람에 사는 외삼촌의 딸들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이런 기록의 속뜻이 무엇일까요? 수리아 또는 아람은 선과 진리를 인식하는 것, 또는 그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람이 선과 진리에 대한 인식을 뜻하는 까닭은, 아람은 원래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들이 살았던 지역이며, 그러므로 아람이라는 지역에는 오래전부터 고대교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말씀에 나오는 아람, 또는 시리아가 그 속뜻으로는, 선과 진리에 관한 인식을 나타내는 이유입니다.

 

※ 이런 관점에서 보면, 최근 시리아 반군이 대를 이어 54년간 세습하던 아주 악명높은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을 몰아내고 나라를 되찾는 일이 일어났는데, 이 역시 무슨 주님의 섭리 있으심이지 싶습니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과정을 통해 선과 진리를 인식할까요?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보내주시면, 그것을 바로 인식,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는 인간의 머리로는 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면에 있는 합리(合理, rational)라는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선이며, 어떤 것이 진리인지, 그리고 선과 진리가 어떤 모양인지를 보는 능력이 합리입니다. 이성(理性)이라 해도 될까요? 다시 말하면 합리라는 의식 속에서 비로소 선과 진리가 형상화됩니다. 그래서 이삭과 야곱이 아내를 아람에서 만나는 것은 합리를 통해 진리를 만나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시리아, 즉 아람에서 가장 먼저 인구조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주님께서 본격적으로 사람의 내면을 살피시는 시기는 우리가 합리(合理)라는 능력을 통해 진리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부터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물론 그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알고 계세요. 그런데 그 전에 아시는 것과, 우리가 진리와 선이 무엇인지 알고 난 후에 우리를 살피시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 처음 호적을 시작했다는 말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웃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할 때, 주님께서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우리들의 내면을 살피시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 오늘 본문 앞부분은 전반적으로 주님이 오시는 시대적 상황, 즉 한 사람의 내면에 주님이 찾아오시는, 전반적 정황에 대한 설명입니다.

 

3절입니다.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여기서 고향이라고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성읍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4절과 5절에는 베들레헴 동네라는 말이 나오는데, 동네라는 말도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면 말씀에서 고향, 성읍, 동네의 속뜻은 무엇일까요? 종교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각 사람의 종교적 신념을 나타낸다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라는 것은 주님이 아직 오시기 전에는, 주님께서 각 사람을 그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사람을 선하다 하실까요? 자기 종교의 교리 가운데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에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교리를 그냥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교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 주님은 그런 사람을 선하게 여기십니다.

 

※ 여기 ‘자기 종교의 교리 가운데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라고 굳이 구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 교리 가운데 보면, 몹시 악한, 누가 보아도 지옥으로 말미암은 교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 곧 거기 녹아있는 주님의 신성은 선하고 진실합니다. 주님 사랑, 이웃 사랑에서 녹아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세상 모든 종교에 주님의 신성이 녹아져 들어가게 하셨고, 그러므로 자기 종교에 녹아져 있는 주님의 신성에 생전에 건강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은 사후에 천사들의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거기서 모두 주님을 영접합니다. 다음은 이와 관련,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21번 글 인용입니다.

 

나는 많은 경우에 의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덕적으로 살고, 자기 종교에 따라 순종과 겸손과 서로 간의 이웃 사랑으로 살았으며, 그래서 양심을 지니게 된 비기독교인들이 내세에 가면 천사들이 이들을 받아들여 정성을 다해 선과 신앙적 진리에 대해 세심히 가르쳐준다. 이 사람들은 일단 배우고 나면, 겸손하고 총명하며, 지혜롭게 행하고, 기꺼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흡수한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는 신앙적 진리에 위배 되는, 뽑아버려야 할 그릇된 관념이 형성되어 있지 않고, 특히 주님을 보통 사람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주님을 함부로 여기는 관념은 더욱 없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비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고, 그렇게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셨다는 말을 들으면, 즉시 수긍하고 주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은 천상천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리고 인류는 그분의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당신을 온전히 나타내신 것이라고 말한다. 주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는 것은 신적 진리다. 그러나 그 말은 모든 구원은 주님으로 말미암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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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모든 사람이 호적 하러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4절과 5절에서는 요셉과 마리아에 대해 말합니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여기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와,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호적 하러 올라가니’라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다윗은 그 속뜻으로 주님을 표상합니다. 그래서 다윗의 집 족속은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다윗의 집 족속은 언제부터 주님의 교회에 속하게 되었을까요? 아람 시절부터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아람, 또는 수리아(시리아)의 상태는 말씀을 통해 진리와 선을 깨닫는 상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오래전부터 시작된 길고 긴 과정을 거쳐 오늘 그 자손 요셉은 지금 다윗의 집 족속, 즉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 위 ‘아람 시절’이란 말은 요셉이 아람, 곧 수리아에서 실제 살았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 내적 의미, 곧 우리 모두 누구나 다 개인 신앙 발전 과정에서 수리아 시절, 아람 시절이 있다는 말입니다. 즉 말씀을 통해 진리와 선을 깨닫는 시기, 우리 안의 합리와 이성을 통해 진리를 만나는 순간이 있다는 말이지요.

 

5절에서는 요셉 혼자 다윗의 동네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과 마리아가 함께 다윗의 동네를 향하는데요,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엘리사벳과 사가랴의 경우처럼 그 내면에 교회가 존재하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즉 교회를 이루는 두 가지 요소인 선과 진리가 바로 요셉과 마리아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참된 진리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어떤 사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알기만 하고, 그것에 따라 살려고는 하지 않는 사람은 그 마음속에 아직 교회가 세워졌다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두 사람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은 주님을 전혀 몰랐던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고, 마침내 주님께서 내적 진리로 그들에게 임재하시기까지 걸리는 기나긴 여정을 나타냅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 진리를 알기까지 여기저기 얼마나 많은 곳을 헤매고 다녔습니까? 그리고 진리를 안 다음에도 제대로 신앙생활을 한다 말할 수 있게 된 건 또 언제부터입니까? 대개는 내적 싸움을 치열하게 하면서 잘못된 습관들을 고치기 시작한 것이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는 아직 그 단계에 들어서지도 못한 분들도 계시고요. 그러니 주님에 대해 전혀 몰랐던 사람이 주님을 알고, 그리고 가장 순수한 진리이신 주님을 만나는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 길입니까? 오늘 말씀에서는 단순히 ‘요셉이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하러 올라갔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 속뜻으로는 사실 아주 길고 험난한 여정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그 길을 처음 가기 시작할 때,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시기로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계획입니다.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놀랍지 않습니까? 주님을 만나는 것은 그냥 하루 이틀 걸어가면 되는 그런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길을 기를 쓰고 가다 보면 언젠간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길의 시작인 갈릴리 나사렛 동네는 주님을 알기 전 이방인의 교리 가운데 있었던 상태이고요, 유대 땅에 들어온 것은 주님의 교회에 소속, 기적적으로 선한 삶을 살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요셉과 마리아는 주님이 탄생하시는 곳 베들레헴에 당도했습니다. 6절입니다.

 

6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이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 신앙인들의 내면으로 오실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때가 되기까지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때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리아에게 첫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 모습을 7절에서는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라고 합니다. 마리아에게 첫아들이 태어나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의 믿음 가운데로 내적 진리이신 주님께서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적 진리이신 것은, 아기가 강보에 싸였다는 사실로 알 수 있는데요, 강보는 그 영적 의미로는 가장 순수한 진리를 나타냅니다. 가장 순수한 진리란, 그 속에 사랑이 있는 진리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의 진리는 사랑이 없는 진리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진리에 대한 지식이나 교리에 대해 그저 알고만 있는 지식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사랑을 동반한 내적 진리로 오셨습니다. 그 주님이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신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가장 순수한 진리, 그 안에 사랑이 있는 진리가 우리 내면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아기가 구유에 누웠다’ 합니다. 구유는 말의 먹이를 담는 통입니다. 건초 같은 걸 담는 통입니다. 그리고 말은 진리에 대한 이해력을 뜻합니다. 따라서 구유는 말씀에서 얻는 진리, 또는 교리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말이 구유의 먹이를 먹고 사는 것처럼, 자라는 것처럼, 사람의 이해력은 말씀의 진리를 먹고 살기 때문에, 자리기 때문에입니다. 그래서 구유는 말씀의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기가 구유에 누웠다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의 진리 가운데로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진리 또는 교리의 지식 안으로 오시는 겁니다. 그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구유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주님께서 오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말씀을 읽으면서 교리 지식을 습득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관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관의 속뜻은 진리를 가르치는 곳입니다. 그래서 여관이 없다는 것은 유대교회 어디에도 진리를 가르치는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말씀의 진리를 모두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를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아주 오래전부터, 즉 주님을 알기 전부터 우리를 살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피시는 것은 각 사람의 영적 상태에 따라 그를 구원의 길로 이끄시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도 나름의 종교가 있고, 신념이 있습니다. 주님은 각자의 종교와 그의 진리를 존중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것을 요셉이 유대 땅으로 오기 전 갈릴리에 살던 시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때부터 각 사람을 위한 구원의 섭리를 펼치십니다. 그러한 주님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갈릴리 땅에서 유대 땅으로 넘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가장 순수한 진리이신 주님을 만납니다. 가장 순수한 진리란 어떤 것입니까? 그 속에 선이 있는 진리이며, 능력이 있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오신다는 것은 바로 그 순수한 진리가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진정한 믿음 가운데 있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 비로소 진정한 진리를 가질 수 있고, 그리고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이런 삶을 실제로 산 대표적인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카톨릭에 보면 사람 이름 앞에 ‘’(聖)을 붙여 성인이다, 성자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 즉 ‘거룩하다’는 표현은 오직 주님한테만 사용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 점은 확실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 아무개, 성자 아무개 할 때의 그 취지와 의도는 그 사람을 주님과 동등으로 여기고자 함이 아니라 그가 그만큼 주님을 본받아 살았음을 존중하고자 함입니다. 물론 이 점을 간과하여 부주의하게 그 성인을 거의 숭배까지 하는 사람들과 그런 경향은 심각한 문제이지만 말입니다. 하여튼 본래 취지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이름 앞에 ‘’을 쓴다고 너무 예민하게 반응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감히 그렇게 못 살지만 그렇게 살다 간 그 사람, 즉 그가 오직 주님만 사랑하여 주님이 그와 함께하신 그 모든 기록을 읽고, 우리 역시 그런 삶을 살 용기를 얻을 수만 있다면 좋은 것이며, 그래서 저는 여러분더러 가급적 성인전을 읽으시라 권하는 편입니다.

 

그전에는 어떻습니까? 선과 진리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반드시 오셔야 합니다. 주님이 오실 때 비로소 우리는 시험에서 넘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라 안팍으로 어수선한 이때, 주님의 그런 은혜가 성탄을 맞는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5:2)

 

아멘

원본

2016-08-07(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12-22(D1)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2024-12-22(D1)-주일예배(2575, 눅2,1-7, 성탄주일예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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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12-22(D1)-주일예배(2575, 눅2,1-7, 성탄주일예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pdf
0.24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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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 생전에 창세기, 출애굽기를 친히 풀어 주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당시 관례처럼 자신의 글에 번호들을 매겼는데, 창세기 50장, 출애굽기 40장까지 글 번호가 10,837번까지 갔으며, 걸린 기간은 1749년에서 1756년이고, 라틴어로 기록했습니다. 이 저작의 이름은 ‘Arcana Coelestia’, 역시 라틴어이며, 천계비의(天界秘義)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약어로는 AC를 사용합니다.

 

그는 이 주석을 쓸 때, 곁에 주님이 계셔서 딕테이트하시면, 자기는 그저 받아적기만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마치 오늘날의 프린터 역할만 했다는 말이지요. 그는 성경 외에 그 어떤 세상 책도 참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는 여러 해 전부터 스베덴보리의 여러 Writings를 작업 중인데, 특별히 그 메인은 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입니다. 위 라틴 제목을 저는 이렇게 읽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창세기는 다분히 그 기록된 겉 글자의 뜻인데요, 그러니까 창세기 1장 천지창조의 기록을 글자 그대로 하나님이 천지를 육 일 만에 창조하셨고, 인류 첫 번째 인간은 아담이다라는 식으로 읽는 것입니다. 기독교 전체가 이렇게 읽지요.

 

그러나 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어 보시면 단번에 느끼시겠지만, 우리가 알던 창세기, 출애굽기하고는 많이, 아니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창세기 1장은 한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을 여섯 단계로 설명하고 있는, 그리고 아담은 인류 최초의 교회로 설명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닫힌 마음으로 읽으시면, 무척 당황하시거나 화가 나실 겁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로 읽는 걸 ‘속뜻으로 읽는다’ 하고, 기존처럼 읽는 걸  ‘겉뜻으로 읽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영과 육으로 되어 있듯, 말씀도 그렇게 되어 있는 걸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사람은 영과 육이 하나 되어 살듯, 말씀 역시 속뜻과 겉뜻이 하나 되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건 어느 게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자신의 몸, 즉 육은 친숙, 익숙하지만, 자신의 영은 무척 낯설듯, 우리 중에 아직 자기 영을 본 사람은 없듯이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겉뜻이라는 그릇 안에 속뜻이라는 내용이 담긴 것이지요!

 

그러니까, 도저히 속뜻으로는 못 읽겠다, 너무 어렵고, 거부감이 심하게 든다 하시면, 겉뜻으로만 읽으며, 신앙생활 하시면 됩니다. 주님은 놀랍게도 겉뜻이라는 그릇만으로도 얼마든지 그 속 사람이 천국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속뜻이 와닿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부디 겉 글자에 담아놓으신 주님의 신성을 실천, 체어리티(charity)의 삶을 사시면 됩니다.

 

그럼에도 굳이 이 책을 번역, 속뜻으로 주님 말씀 읽는 걸 소개하는 이유는, 그 유익이 헤아릴 수 없이 크기 때문이며, 이것이 천국 천사들이 말씀 읽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이 속뜻으로 푼 창세기가 이해가 되시고, 와닿으시면 정말 복 받으신 겁니다. 그런 분이 만 명 중 한 명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친히 풀어 주셨다는 사실에 닻을 내리시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도우심, 곧 빛을 비추어 주시기를 구하면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주님이 보내주신 천사들의 도우심이 있으실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우선 창세기 1장만 올립니다.

창1, AC.1-66.pdf
1.49MB

 

아래 링크는 스베덴보리라는 사람에 관한 링크이며, 그 아래는 그의 저작들(Writings)에 관한 링크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

다음은 제가 번역하는 책들의 저자에 대한 간단한 소개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1688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출생, 웁살라대학에서 언어학, 수학, 광물학, 천문학, 생리학, 신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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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저서들(Writings)

다음은 스베덴보리의 저서목록(Writings)입니다. 인류사에 존재했던 사람 중 가장 지능이 높은 사람으로 기네스 북에는 밀턴, 괴테 그리고 스베덴보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생전에 가장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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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래는 스베덴보리가 알려준, 성경 66권 중 어떤 성경이 말씀’(The Word)인가 하는 내용입니다.

 

 

성경 66권 중 말씀(The Word)은...

성경 66권 중에서 속뜻(internal sense, inner meaning)이 있는 성경, 곧 그 안에 주님의 아르카나(arcana, 秘義, 말씀의 내적 의미)가 담긴 성경을 ‘말씀’(The Word, 총 34권)이라 하며,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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