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1-17

 

98. 8절,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Verse 8.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aboriente]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동산’은 지성(intelligence)을, ‘에덴’은 사랑을, ‘동방’은 주님을 각각 상징하며, 그 결과 ‘동방의 에덴동산’은 천적 인간의 지성, 곧 주님에게서 나와 사랑을 통해 흘러 들어가는 지성을 상징합니다. By a “garden” is signified intelligence; by “Eden,” love; by the “east,” the Lord; consequently by the “garden of Eden eastward” is signified the intelligence of the celestial man, which flows in from the Lord through love.

 

 

99. 영적 인간한테서 볼 수 있는 생명과 생명의 질서(order, 순서)는 이렇습니다. 주님이 신앙을 통해서 그의 이해(understanding), 이성(reason) 및 기억(memory, 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 들어가심에도 불구, 아직 그의 겉 사람은 그의 속 사람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얼핏 보기에는 마치 주님이 아닌 그 사람 자신에게서 지식과 이성에 속한 것들을 통해서 지성이 흘러 들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Life, or the order of life, with the spiritual man, is such that although the Lord flows in, through faith, into the things of his understanding, reason, and memory [in ejus intellectualia, rationalia, et scientifica], yet as his external man fights against his internal man, it appears as if intelligence did not flow in from the Lord, but from the man himself, through the things of memory and reason [per scientifica et rationalia].

 

※ 실제로 세상에서는 지성이라는 것이 많은 세상 지식과 학문을 인간 이성으로 잘 다듬으면 나오는 것으로, 이룰 수 있고 성취할 수 있는 것으로들 알고 있습니다. 그 순서를 잘못 알고 있는, 정반대로들 알고 있는 것이지요. 세상에서 소위 ‘지성인’이라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반면, 천적 인간의 생명, 혹은 생명의 질서,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은 사랑과 사랑에 속한 신앙을 통해서 그의 이해, 이성 및 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거기엔 더 이상 속 사람과 겉 사람 간 싸움이 없기 때문에, 그는 이것이 참으로 그렇다는 것을 지각합니다. But the life, or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is such that the Lord flows in through love and the faith of love into the things of his understanding, reason, and memory, and as there is no combat between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he perceives that this is really so.

 

※ 영적 인간의 경우는 주님이 그의 신앙을 통해서 그의 이해, 이성, 지식 안으로 들어가시지만, 천적 인간의 경우는 그의 사랑을 통해서 들어가십니다. 즉, 천적 인간의 경우, 그가 무엇을 배우며, 무슨 언행과 생각, 어떤 사유(思惟)를 하더라도 그는 그것을 사랑으로 하지만, 영적 인간의 경우는 신앙 때문에, 교리 때문에, 지적 욕구 때문에 한다는 말입니다.

 

영적 인간일 때는 이 지점까지 뒤집힌 상태였던 질서가 천적 인간이 되면서는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지금 설명하는 중입니다. ‘동방의 에덴동산’은 이 질서, 혹은 사람을 말합니다. Thus the order which up to this point had been inverted with the spiritual man is now described as restored with the celestial man, and this order, or man, is called a “garden in Eden in the east.

 

※ 즉, 천적 인간의 지성이란 이런 질서, 이를 가리켜 ‘신적 질서’, ‘신성한 질서’(the Divine order)라 하는데, 이런 질서를 알며, 시인하고, 그 자신 이런 질서 안에 있는 지성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창설하신 동산’, 가장 높은 뜻(the supreme sense)으로는 주님 자신이십니다. In the supreme sense, the “garden planted by Jehovah God in Eden in the east” is the Lord himself.

 

가장 내적인 뜻(the inmost sense), 이는 또한 유니버설(universal, 전 세계적인, 보편적인)한 뜻인데, 이 뜻으로는 주님의 나라(the Lord’s kingdom)요, 천국을 의미합니다. 이 천국은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면 있게 될 그런 곳이지요. In the inmost sense, which is also the universal sense, it is the Lord’s kingdom, and the heaven in which man is placed when he has become celestial.

 

그때 그의 상태는 천국 천사들과 함께하는 상태, 마치 그들 중 하나가 된 것 같은 그런 상태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 동시에 천국에도 있을 수 있도록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인데요, His state then is such that he is with the angels in heaven, and is as it were one among them; for man has been so created that while living in this world he may at the same time be in heaven.

 

이 상태에서는 그의 모든 사고(thoughts)와 사고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들, 그리고 심지어 그의 언행(言行)이 모두 오픈 상태이며, 심지어 주님으로부터 온 것들까지도 오픈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안에는 천적, 영적인 것들이 담깁니다. 그 이유는, 그 하나하나에 다 주님의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인데, 이로 인해 그는 퍼셉션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In this state all his thoughts and ideas of thoughts, and even his words and actions, are open, even from the Lord, and contain within them what is celestial and spiritual; for each one [of these] has the Lord’s life within it, which enables him to have perception.

 

※ 천적 인간의 상태는 결국 주님의 생명 덩어리인 셈이지요. 그의 모든 사고와 아이디어, 모든 언행 및 주님으로 말미암아 그의 안에 있는 모든 것에 주님의 생명이 들어 있으니, 이런 상태에서는 당연히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받을 수 있지요. 모든 태고교회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천사들이 바로 이런 상태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오픈하기 좋아하는데 그것은 그들 안에 오직 선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100. ‘동산’이 지성을, ‘에덴’이 사랑을 상징하는 것은 이사야에도 나옵니다. That a “garden” signifies intelligence, and “Eden” love, appears also from Isaiah: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사51:3) Jehovah will comfort Zion, he will comfort all her waste places, and he will make her wilderness like Eden, and her desert like the garden of Jehovah; joy and gladness shall be found therein, confession and the voice of singing. (Isa. 51:3)

 

여기서 ‘사막’, ‘기뻐함’, ‘감사함’은 신앙 혹은 사랑에 관련된 천적인 것들을, ‘광야’, ‘즐거워함’, ‘창화하는 소리’는 신앙 혹은 이해에 속한 영적인 것들을 각각 표현하는 말들입니다. In this passage, “wilderness,” “joy,” and “confession” are terms expressive of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or such as relate to love; but “desert,” “gladness,” and “the voice of singing,” of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or such as belong to the understanding.

 

전자는 ‘에덴’, 후자는 ‘동산’과 각각 관련되는데, 그 이유는, 이 선지자는 이 두 가지 표현을 사용해서 늘 하나는 천적인 것을,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The former have relation to “Eden,” the latter to “garden”; for with this prophet two expressions constantly occur concerning the same thing, one of which signifies celestial, and the other spiritual things.

 

에덴동산’의 더욱 깊은 의미에 관해서는 10절에서 다루겠습니다. What is further signified by the “garden in Eden,” may be seen in what follows at verse 10.

 

 

101. 주님이 ‘’(東, east)이시라는 것 또한 말씀에 나오는데요, 에스겔입니다. That the Lord is the “east” also appears from the Word, as in Ezekiel: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쪽을 향한 문이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겔43:1-2, 4) He brought me to the gate, even the gate that looketh the way of the east, and behold the glory of the God of Israel came from the way of the east; and his voice was as the voice of many waters, and the earth shone with his glory. (Ezek. 43:1–2, 4)

 

표상(表象, representative) 교회였던 유대 교회에서 성전 건물 앞에서 기도할 때, 전통적으로 그들의 얼굴을 동쪽을 향하여 돌렸던 것은 이렇게 주님의 임재가 ‘’이셨기 때문입니다. It was in consequence of the Lord’s being the “east” that a holy custom prevailed in the representative Jewish church, before the building of the temple, of turning their faces toward the east when they prayed.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2장 8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속뜻)

천적 인간 안으로 주님의 신성과 사랑으로 말미암은 지성이 흘러 들어갑니다. 이로 인하여 그는 주님의 생명으로 가득하게 되고, 퍼셉션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천국 천사들과 같은 상태가 됩니다.

 

 

※ 어떤 선, 사랑, 신앙이 주님과 천국으로 말미암은 것이려면, 그 안에 천국의 두 기둥 중 하나인 이노센스(innocence, 純眞)가 있어야 하듯, 어떤 지성 역시 주님과 천국으로 말미암은 것이 되려면, 그 순서, 질서가 올바른 순서, 질서여야 합니다.

 

즉,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랑을 통해 위에서부터 내려와야지, 거꾸로 세상 지식으로 말미암아 교리를 통해 위로 올라가려 해서는 안 됩니다. 지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얼핏 비슷해 보여도 그 본성과 정체는 완전 정반대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https://youtu.be/ym-mXRY9pQ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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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17

 

94. 7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Verse 7.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spiraculum]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ing soul.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겉 사람을 지으심입니다. 그의 겉 사람은 전(before)까지는 사람(man)이 아니었습니다. 5절에,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To “form man, dust from the ground” is to form his external man, which before was not man; for it is said (verse 5) that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그에게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주시는 것을,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그의 겉 사람 또한 살아있는(alive) 상태가 되었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To “breathe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is to give him the life of faith and love; and by “man became a living soul” is signified that his external man also was made alive.

 

 

95. 겉 사람의 생명, 즉, 앞의 두 구절에서는 신앙 혹은 이해(understanding)의 생명이, 본 절에서는 그의 사랑 혹은 의지(will)의 생명이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The life of the external man is here treated of—the life of his faith or understanding in the two former verses, and the life of his love or will in this verse.

 

지금까지 겉 사람은 속 사람에게 굴복, 그를 섬기는 걸 내켜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늘 싸우는 편이었지요. 이런 이유로, 겉 사람은 아직 ‘사람’(man)이 아니었습니다. Hitherto the external man has been unwilling to yield to and serve the internal, being engaged in a continual combat with him, and therefore the external man was not then “man.

 

그러나 이제 천적 인간이 되면서 겉 사람은 속 사람에게 복종, 그를 섬기기 시작합니다. 신앙의 생명, 사랑의 생명으로 변화되어 가면서(being so rendered) 겉 사람은 또한 ‘사람’이 됩니다. Now, however, being made celestial, the external man begins to obey and serve the internal, and it also becomes “man,” being so rendered by the life of faith and the life of love.

 

그를 준비하는 것은 신앙의 생명이지만, 그가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사랑의 생명입니다. The life of faith prepares him, but it is the life of love which causes him to be “man.

 

 

9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라고 말씀하신 부분인데요, 이 경우는 이렇습니다. As to its being said that “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case is this:

 

고대에, 그리고 말씀에서, ‘’(nostrils, 콧구멍)는 그 향기의 결과, 무엇이든 고마운 것(grateful), 감사한 것으로 이해되었는데요, 그게 바로 퍼셉션(perception)입니다. In ancient times, and in the Word, by “nostrils” was understood whatever was grateful in consequence of its odor, which signifies perception.

 

※ 이 퍼셉션은 홍수 이후 사람들은 알 수 없게 된, 오직 홍수 이전인 태고교회 사람들한테만 허용된 영적 통찰력입니다. 내적 호흡이라 할 수도 있는, 또는 입류(入流, influx)의 다른 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간으로 하여금 주님과 결합할 수 있게 해주는 그 무엇입니다. 천사들은 지금도 이 퍼셉션으로 주님과 결합하고 있습니다. 이 퍼셉션이 사라져서 인류가 더 이상 주님과 결합할 수 없게 되자 할 수 없이 그 빈자리를 ‘양심’(良心, conscience)이라는 것으로 대신하셔야만 했을 정도로 아주 본질적인 것입니다. 인류는 어떤 식으로든 늘 주님과 연결되어 있어야만 한순간이라도 소위 존재, 존속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허용되었던 퍼셉션이 닫힌 것은 그들의 어두워짐, 타락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여호와께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반복되는데요, 가령, 번제(the burnt offerings) 및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표현한 것들에게서 주님은 ‘어떤 쉼과 안식의 향기(an odor of rest)를 맡으셨다’ 같은, 그런 기록들입니다. 사랑과 신앙에 관련된 것들은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 가장 좋아하시는 것, 가장 고마워하시는(most grateful) 것이기 때문에, 이르기를, ‘여호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다’ 하시는 것입니다. On this account it is repeatedly written of Jehovah, that he “smelled an odor of rest” from the burnt offerings, and from those things which represented him and his kingdom; and as the things relating to love and faith are most grateful to him, it is said that “he breathed through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 ‘이는 여호와께 드리는 번제요 이는 향기로운 냄새니’(출29:18)와 같은 표현들은 정말 자주 반복되지요. 또, 이것을 바울은 로마서에서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12:1, 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라고 표현했지요.

 

그래서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 곧 주님을 가리켜 ‘콧김’(애4:20)이라 하신 것입니다. Hence the anointed of Jehovah, that is, of the Lord, is called the “breath of the nostrils” (Lam. 4:20).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가 그들의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그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의 그늘 아래에서 이방인들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 (애4:20)

 

주님 자신 요한복음에서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라 하심으로써 같은 걸 상징하셨습니다. And the Lord himself signified the same by “breathing on his disciples,” as written in John: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요20:22) He breathed on them and said, Receive ye the Holy Spirit. (John 20:22)

 

 

97. ‘호흡’(breathing)과 ‘’(breath)으로 생명을 묘사하는 이유는,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사랑과 신앙의 상태들을 호흡의 상태들로 지각했기 때문인데요, 이 호흡 상태들은 후에 그 후손들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변했습니다. The reason why life is described by “breathing” and by “breath” is also that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perceived states of love and of faith by states of respiration, which were successively changed in their posterity.

 

이것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말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오늘날, 이와 관련해서 알려진 게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Of this respiration nothing can as yet be said, because at this day such things are altogether unknown.

 

태고시대 사람들은 이런 것에 매우 친숙했고, 내세의 사람들 역시 그렇습니다만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땅 위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이런 것에 대해 친숙하지도, 접해본 적도 없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영 또는 생명을 ‘바람’(wind)에 비유하는 이유입니다.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well acquainted with it, and so are those who are in the other life, but no longer anyone on this earth, and this was the reason why they likened spirit or life to “wind.

 

주님 또한 사람의 거듭남을 이야기 하실 때, 요한복음에서 이것을 말씀하셨습니다. The Lord also does this when speaking of the regeneration of man, in John: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요3:8) The wind bloweth where it listeth, and thou hearest the voice thereof, and knowest not whence it cometh, or whither it goeth; so is everyone that is born of the spirit. (John 3:8)

 

다윗의 시편들에서도 So in David: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시33:6) By the word of Jehovah were the heavens made, and all the army of them by the breath of his mouth. (Ps. 33:6)

 

29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30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104:29-30) Thou gatherest their breath, they expire, and return to their dust;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29–30)

 

’을 사용하여 신앙의 생명, 사랑의 생명을 표현하는 것은 욥기서에도 나옵니다. That the “breath” [spiraculum] is used for the life of faith and of love, appears from Job: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욥32:8) He is the spirit in man, and the breath of Shaddai giveth them understanding. (Job 32:8)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욥33:4) The spirit of God hath made me, and the breath of Shaddai hath given me life. (Job 33:4)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2장 7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속뜻)

주님은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을 지으시되 그 안에 주님의 생명, 사랑과 신앙의 생명인 퍼셉션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영적 인간 중이었을 때는 겉 사람이 여전히 속 사람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으나 이제 천적 인간이 되고 나서는 정말 주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겉 사람이 속 사람을 사랑하여 자원함으로 순종하고 섬기게 되었습니다. 사랑과 신앙의 생명을 받은 겉 사람은 비로소 생령, 곧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https://youtu.be/11XEbAmyru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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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17

 

90. 5, 6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Verse 5. 6 And there was no shrub of the field as yet in the earth, and there was no herb of the field as yet growing, because Jehovah God had not caused it to rain upon the earth. And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And he made a mist to ascend from the earth, and watered all the faces of the ground.

 

들의 초목’(the shrub of the field)과 ‘밭의 채소’(the herb of the field)는 보통은 겉 사람한테서 나오는(produce) 모든 걸 의미합니다. By the “shrub of the field” and the “herb of the field” are meant in general all that his external man produces.

 

사람이 아직 영적 인간일 동안은 그의 겉 사람을 가리켜 ‘’이라 하지만, 그가 천적 인간이 되면, 그때는 그의 겉 사람을 가리켜 ‘지면’이라, ‘’이라 합니다. The external man is called “earth” while he remains spiritual, but “ground” and also “field” when he becomes celestial.

 

바로 뒤에 나오는 ‘안개’(mist)라 하는 ‘’는 전투가 그쳤을 때 맛보는 평화의 평온함(tranquility)입니다. Rain,” which is soon after called “mist,” is the tranquility of peace when combat ceases.

 

 

91. 그러나 이들 안에 들어있는 것은,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된다, 천적 인간이 된다 하는, 이 인간의 상태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전까지는 절대로 깨달을(perceive) 수 없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만큼 아주 깊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But what these things involve cannot possibly be perceived unless it is known what man’s state is while from being spiritual he is becoming celestial, for they are deeply hidden.

 

사람이 영적 인간일 동안은, 겉 사람은 아직 속 사람에게 기꺼이 복종하거나 그를 섬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거기엔 전투가 있지요. 그러나 그가 천적 인간이 되면, 그때는 겉 사람은 속 사람에게 복종, 섬기기 시작합니다. 자연히 전투도 그치고, 평온함이 뒤따르지요. (cf. 87) While he is spiritual, the external man is not yet willing to yield obedience to and serve the internal, and therefore there is a combat; but when he becomes celestial, then the external man begins to obey and serve the internal, and therefore the combat ceases, and tranquility ensues (see n. 87).

 

’, ‘안개’는 이 평온함을 의미하는데요, 이는 마치 겉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수분 공급을 받아 촉촉해지는 일종의 증기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들의 초목’과 ‘밭의 채소’라 하는 것들이 다 이 평온함, 평화의 샘에서 나오는(produce) 것이며, 이들은 특별히 일종의 천적 영적 기원에서 나오는 합리적 마인드와 기억들(the rational mind and of the memory [rationalia et scientifica])에 속한 것들입니다. This tranquility is signified by “rain” and “mist,” for it is like a vapor with which the external man is watered and bedewed from the internal; and it is this tranquility, the offspring of peace, which produces what are called the “shrub of the field,” and the “herb of the field,” which, specifically, are things of the rational mind and of the memory [rationalia et scientifica] from a celestial spiritual origin.

 

 

92. 전투, 혹은 탐욕과 거짓들로 인해 쉴 수 없는 사람들(the unrest)에게나 해당하는 그런 상태가 그칠 때, 겉 사람한테 찾아오는 평화로운 평온함의 본성은 어떤 평화의 상태(a state of peace)라는 걸 접해본 사람들이라야만 알 수 있습니다. The nature of the tranquility of peace of the external man, on the cessation of combat, or of the unrest caused by cupidities and falsities, can be known only to those who are acquainted with a state of peace.

 

이 상태는 기쁨에 대한 모든 아이디어를 초월하는 그런 건데요, 단순히 전투 종료 정도로 그치는 게 아니라, 내적 평화로부터 시작, 겉 사람을 감동하며 뻗어나가는 그런 생명입니다. 아... 이건 정말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는데요! 신앙의 진리, 사랑의 선도 다 그 생명이 여기서 비롯되고, 그렇게 태어나는, 그런 것입니다. This state is so delightful that it surpasses every idea of delight: it is not only a cessation of combat, but is life proceeding from interior peace, and affecting the external man in such a manner as cannot be described; the truths of faith, and the goods of love, which derive their life from the delight of peace, are then born.

 

 

93. 천적 인간의 상태는 내리는 비로 리프레쉬된 상태, 평화로운 평온의 상태, 악과 거짓의 매임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상태인데요, 이 상태를 가리켜 에스겔서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The state of the celestial man, thus gifted with the tranquility of peace—refreshed by the rain—and delivered from the slavery of what is evil and false, is thus described by the Lord in Ezekiel:

 

25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26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 27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지라 내가 그들의 멍에의 나무를 꺾고 그들을 종으로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겠고 31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34:25-27, 31) I will make with them a covenant of peace, and will cause the evil wild beast to cease out of the land, and they shall dwell confidently in the wilderness, and sleep in the woods; and I will make them and the places round about my hill a blessing; and I will cause the rain to come down in his season; rains of blessing shall they be. And the tree of the field shall yield its fruit, and the earth shall yield its increase, and they shall be upon their ground in confidence, and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when I have broken the reins of their yoke, and delivered them out of the hand of those that make them to serve them; and ye my flock, the flock of my pasture, ye are a man, and I am your God. (Ezek. 34:25–27, 31)

 

그리고 이것을 호세아서에서는 ‘셋째 날’이라 하여 창세기 본문 ‘일곱째 날’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십니다. And that this is effected on the “third day,” which in the Word signifies the same as the “seventh,” is thus declared in Hosea:

 

2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호6:2-3) After two days will he vivify us; in the third day he will raise us up, and we shall live before him and we shall know, and shall follow on to know Jehovah: his going forth is prepared as the dawn, and he shall come unto us as the rain, as the late rain watering the earth. (Hos. 6:2–3)

 

에스겔서에서는 이 상태를 ‘들의 성장’, 즉 들 벌판 가득 자라는 풀로 비유하셨는데, 이것은 고대교회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And that this state is compared to the “growth of the field” is declared by Ezekiel, when speaking of the ancient church:

 

내가 너를 들의 풀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유방이 뚜렷하고 네 머리털이 자랐으나 네가 여전히 벌거벗은 알몸이더라 (겔16:7) I have caused thee to multiply as the growth of the field, and thou hast increased and hast grown up, and hast come to excellent ornaments. (Ezek. 16:7)

 

이렇게도 비유하시고요. And it is also compared to: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원히 땅을 차지하리니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사60:21) A shoot of the Lord’s planting, and a work of the hands of Jehovah God. (Isa. 60:21)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2장 5-6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속뜻)

천적 인간의 상태는 모든 전투가 그친 상태입니다. 이 상태는 마치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증기와도 같은 상태로 천국 평화, 평온한 상태입니다.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기꺼이 복종하며, 사랑으로 자원함으로 섬기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전투가 없기 때문입니다.

 

 

※ 주님의 질서는 주님-천국-속 사람-겉 사람 순이며, 천적 인간이 바로 이 순서, 이 질서대로 자리 잡고 사는 사람입니다. 영적 인간은 속 사람, 겉 사람 간 순위 다툼이 아직 진행 중인 상태에 있는 사람이지요. 이 순서가 정말 중요한 이유는, 이래야 만이 천국 모든 복과 형통, 주님의 모든 걸 누릴 수 있기 때문이며, 이 질서로 살아가야만 그 내면이 열려 주님의 모든 것, 천국의 모든 것이 내 안에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https://youtu.be/ezkpqhIPFJ8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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