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And Jehovah saw that the evil of man was multiplied on the earth, and that all the imagination of the thoughts of his heart was only evil every day. (창6:5)

 

 

584.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을 보시고’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사라지기 시작했음을,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었다’는, 진리와 선에 관한 퍼셉션이 전혀 없었음을 각각 상징합니다. Jehovah saw that the evil of man was multiplied on the earth” signifies that there began to be no will of good; “all the imagination of the thoughts of his heart was only evil every day” signifies that there was no perception of truth and good.

 

 

585.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이,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사라지기 시작했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위에서 말씀드린 내용(cf. AC.568), 즉, 진정한 의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대신 탐욕(cupidity), 욕구(desire)만 남았다는 사실을 통해 분명하고요, ‘세상에 있는 사람’이 상징하는 것을 통해서도 그렇습니다. That by the evil of man being multiplied in the earth is signified that there began to be no will of good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above, namely, that there was no longer any will, but only cupidity;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man in the earth.

 

’, ‘세상’은 글자의 뜻으로는, 사람이 사는 곳을 말합니다. In the literal sense the “earth” is where man is.

 

’은 속뜻으로는, 사랑이 있는 곳, 그리고 사랑은 의지 혹은 욕망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의지 그 자체를 의미하기 위해 ‘’이 사용된 것입니다. In the internal sense it is where the love is, and as love is of the will, or of the cupidity, the earth is taken to mean the will itself of man.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것은 의지입니다. 알고 있고, 이해한다고 해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안다는 것, 이해한다는 것은 다 그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의지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그는 알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의도하지 않은 뭔가를 말하거나 하고 있을 때조차 거기엔 여전히 그의 의지와 관계된 뭔가가 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말이나 행위하고는 직접적 관련은 없어 보이나 사실은 은밀히 그를 움직이는 무슨 숨은 동기, 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For man is man from willing, and not so much from knowing and understanding, because these flow out from his will; whatever does not flow out from his will he is willing neither to know nor understand; nay, even when he is speaking or doing something that he does not will, still there is something of the will remote from the speech or action that governs him.

 

가나안 땅’이라든지, ‘거룩한 땅’ 같은 표현을 써서 사실은 사랑, 그리고 결과적으로 천적(天的, the celestial) 인간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말씀 여러 곳에서 이런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데요, 같은 식으로, 세상 여러 나라들 역시 그들의 사랑, 곧 일반적으로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만 이 주제는 아주 많이 반복되기 때문에 여기서 이걸 다루느라 머무를 필요는 없지 싶습니다. That the “land of Canaan,” or the “holy land,” denotes love, and consequently the will of the celestial man, might be confirmed by many passages from the Word; in like manner, that the lands of various nations denote their loves, which in general are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but as this subject so often recurs, it need not be dwelt upon here.

 

이런 이유들로, 이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려보는데요, ‘땅(세상) 위 사람의 죄악’은 그의 자연적 악, 곧 그의 의지를 표현하는 세속적 악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이 악을 ‘불어났다’, ‘배가되었다’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그 정도로 타락하지는, 즉, 철저하게 사악하지는 않았기 때문인데, 선행을 하기 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기적인 목적으로였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라는 표현을 통해 도착(倒錯, perversion), 왜곡(corruption)의 완성, 즉, 철저하게 부패하고, 변질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Hence it appears that by “the evil of man on the earth” is signified his natural evil, which is of the will, and which is said to be “multiplied” because it was not so depraved in all but that they wished good for others, yet for the sake of themselves; but that the perversion became complete is signified by the “imagination of the thoughts of the heart.

 

 

586.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다’가 상징하는 것은 진리와 선에 관한 퍼셉션(perception, 지각, 영적 통찰)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전에 말씀드리고 보여드린 대로 (cf. AC.560, 570), 그 이유는, 그들이 신앙에 관한 가르침들로 하여금 그들의 아주 더러운 갈망(yearnings)에 잠기게 하였고, 이런 일이 벌어진 결과, 모든 퍼셉션은 사라졌으며, 그 자리를 대신 끔찍한 자기기만(persuasion), 즉, 가장 뿌리 깊고 치명적인 환상들이 차지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을 질식시켜 멸망케 한 것입니다. The imagination of the thoughts of the heart was only evil every day signifies that there was no perception of truth and good, for the reason, as before said and shown, that they immersed the doctrinal things of faith in their filthy yearnings, and when this occurred all perception was lost, and in place thereof a dreadful persuasion succeeded, that is, a most deep-rooted and deadly fantasy, which was the cause of their extinction and suffocation.

 

이 끔찍한 자기기만, 죽음을 초래하는 신념이 바로 여기서 말씀하신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 곧 그들이 마음으로 생각하고 고안해낸 것이 상징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는 계획’, 곧 마음이 날조(fabricate), 조작하는 것이 ‘생각’, 사고(thoughts) 없이 언급될 때, 그것은 자기 사랑 혹은 갈망의 악, 곧 자기 사랑이나 욕망과 연결된 악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뒤에 나오는 장에서 노아가 번제를 드린 후, 여호와께서 하신 아래 말씀에 나옵니다. This deadly persuasion is here signified by “the imagination of the thoughts of the heart”; but by “the imagination of the heart,” without the word “thoughts,” is signified the evil of the love of self, or of yearnings, as in the following chapter, where Jehovah said, after Noah had offered a burnt offering: “I will not again curse the ground for man’s sake, because the imagination of the heart of man is evil from his childhood” (Gen. 8: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창8:21)

 

계획’(imagination), 곧 제작(fabrication)은, 사람이 자기를 위해 지어내는 것, 곧 자기 마음 안을 꾸미며, 자기가 참이라고 설득하는 것입니다. 하박국에 그 예가 있습니다. An “imagination” is that which man invents for himself, and of which he persuades himself; as in Habakkuk: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What profiteth a graven image, that the fashioner thereof hath graven it, the molten image and teacher of lies, that the fashioner trusteth to his imagination, to make dumb idols? (합2:18)

 

새긴 우상’, 조각물은 사람이 속으로 품고 생각해낸 것들에 기반을 둔 거짓된 설득, 신념, 자기기만을 상징합니다. ‘새겨 만든 자’, 제작자는 자기-설득된 사람, 곧 위에서 설명한 ‘계획’으로 설득된 사람입니다. A “graven image” signifies false persuasions originating in principles conceived and hatched out by one’s self; the “fashioner” is one who is thus self-persuaded, of whom this “imagination” is predicated.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O your perversity! Shall the potter be reputed as the clay, that the work should say to him that made it, He made me not; and the thing fashioned say to him that fashioned it, He had no understanding?; (사29:16)

 

여기 ‘빚음을 받은 물건’은 사람의 것에 기반한 사고와, 거짓과 거기서 나온 것에 의한 설득, 곧 자아중심적 사고와, 거짓을 참이라 하는, 거기서 나온 확신을 상징합니다. the “thing fashioned” here signifies thought originating in man’s own, and the persuasion of what is false thence derived.

 

빚음을 받은 물건’이나 ‘계획된’, 곧 제작(fabrication)이나 디자인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마음이나 의지로 고안한 것, 그리고 또 생각이나 신념(persuasion)으로 발명한 것입니다. 다윗의 글입니다. A “thing fashioned” or “imagined,” in general, is what a man invents from the heart or will, and also what he invents from the thought or persuasion, as in David: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Jehovah knoweth our fashioning [figmentum], he remembereth that we are dust. (시103:14)

 

모세의 글입니다. In Moses:

 

그들이 수많은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아노라 I know his imagination that he doeth this day, before I bring him into the land. (신31:21)

2021-08-11(D4)-매일예배(AC.584-586, 창6,5),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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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YUuRfSgeJ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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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There were Nephilim in the earth in those days; and most especially after the sons of God went in unto the daughters of man, and they bare to them; the same became mighty men, who were of old, men of renown. (창6:4)

 

 

580. ‘네피림’은, ‘아, 나는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가, 아, 나는 얼마나 탁월한 사람인가...’ 하는 신념(persuasion)과 망상(delusions)에 사로잡혀, 거룩하거나 참된 어떤 것도 하찮게 여긴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는, 이런 일이 그들이 신앙에 관한 가르침을 그들의 갈망(yearnings)과 욕구(appetites)에 잠기게 하여, 거짓된 것을 신념화했을 때 일어났음을 말합니다. ‘그들은 용사라’는 그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는 전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By “Nephilim” are signified those who through a persuasion of their own loftiness and preeminence made light of all things holy and true; “and especially after the sons of God went in unto the daughters of man, and they bare to them” signifies that this occurred when they immersed the doctrinals of faith in their yearnings, and formed persuasions of what is false; they are called “mighty men” from their love of self; “of old, men of renown” signifies that there had been such before.

 

 

581. ‘네피림’ 하면, ‘아, 나는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가, 아, 나는 얼마나 탁월한 사람인가...’ 하는 신념과 망상에 사로잡혀, 거룩하거나 참된 어떤 것도 하찮게 여긴 사람들을 말한다는 사실은, 앞서 말한 것과 뒤에 이어지는 내용, 즉,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라는 말씀을 통해, 그들이 신앙에 관한 가르침을 그들의 갈망과 욕구에 잠기게 하여, 거짓된 것을 신념화하였음을 상징한다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That by the “Nephilim” are signified those who through a persuasion of their own loftiness and preeminence made light of all things holy and true, appears from what precedes and what follows, namely, that they immersed the doctrinals of faith in their yearnings, signified by the “sons of God going in unto the daughters of man, and their bearing unto them.

 

그들 자신 및 그들이 가진 환상과 관련된 신념과 망상은 그와 관련된 것들이 축적되면 축적될수록 증가하다가 결국 되돌릴 수 없는, 돌이킬 수 없는 데까지 갑니다. 이런 상태에서, 이번엔 여기다 신앙의 교리들, 신앙적인 가르침들까지 보태어지면 원리에 가까운 가장 강력한 엉뚱한 종교적 신념들이 생겨나고, 이것이 하나의 입장이 되면, 이번에는 거룩하고 참된 모든 것의 가치를 무시해 버리고 마는 상태가 되는데, 이 상태가 바로 ‘네피림’인 것입니다. Persuasion concerning self and its fantasies increases also according to the multitude of things that enter into it, till at length it becomes indelible; and when the doctrinals of faith are added thereto, then from principles of the strongest persuasion they make light of all things holy and true, and become “Nephilim.

 

이 네피림이라는 인종(race)은, 홍수 전에 살았는데, 자기들이 가진 끔찍한 환상, 망상으로 모든 영들을 질식시켜 죽이는 그런 인종입니다. (cf. AC.562-563) 이들에게서 쏟아져나오는 이 망상은 질식시키는 독가스 같은 것인데, 영들은 여기에 한 번 걸리면 생각하는 능력을 완전히 빼앗겨 거의 반 죽은 상태가 되지요. 주께서 세상에 오셔서 이런 독을 가진 인종으로부터 영들의 세계를 해방하여 주지 않으셨으면, 거기에 아무도 존재할 수 없었고, 그 결과, 주님으로 말미암아 영들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인류는 사라졌을 것입니다. That race, which lived before the flood, is such that they so kill and suffocate all spirits by their most direful fantasies (which are poured forth by them as a poisonous and suffocating sphere) that the spirits are entirely deprived of the power of thinking, and feel half dead; and unless the Lord by his coming into the world had freed the world of spirits from that poisonous race, no one could have existed there, and consequently the human race, who are ruled by the Lord through spirits, would have perished.

 

그래서 그들은 지금 지옥 왼쪽 발뒤꿈치 아래, 안개 속 육중하고 거대한 바위 밑에 격리되어, 그곳을 빠져나갈 어떤 시도도 할 수 없습니다. They are therefore now kept in a hell under as it were a misty and dense rock, under the heel of the left foot, nor do they make the slightest attempt to rise out of it.

 

그래서 영들의 세계는 이 가장 위험한 무리로부터 안전합니다. 이들에 관한, 그리고 이런 종류의 신념, 망상이 왜 독과 같은 것인지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cf. AC.1265-1272) Thus is the world of spirits free from this most dangerous crew, concerning which and its most poisonous sphere of persuasions,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네피림’이라 하는 자들이 있었고, 이들은 거룩하고 참된 모든 것을 하찮게 여겼습니다. These are they who are called “Nephilim,” and who make light of all things holy and true.

 

말씀에 그들에 대한 언급이 더 나오는데요, 그들의 후손은 ‘아낙 족속’으로, ‘르바임’으로 불렸습니다. Further mention is made of them in the Word, but their descendants were called “Anakim” and “Rephaim.

 

그들을 ‘아낙 자손’으로 불렀음이 모세의 글에 나옵니다. That they were called “Anakim” is evident from Moses: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There we saw the Nephilim, the sons of Anak, of the Nephilim, and we were in our own eyes as grasshoppers, and so we were in their eyes. (민13:33)

 

그들을 또한 ‘르바임’으로도 불렀음이 모세의 글에 나옵니다. That they were called “Rephaim” appears also from Moses:

 

10이전에는 에밈 사람이 거기 거주하였는데 아낙 족속 같이 강하고 많고 키가 크므로 11그들을 아낙 족속과 같이 르바임이라 불렀으나 모압 사람은 그들을 에밈이라 불렀으며 The Emim dwelt before in the land of Moab, a people great, and many, and tall, as the Anakim, who also were accounted Rephaim, as the Anakim, and the Moabites call them Emim. (신2:10-11)

 

네피림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 반면, 르바임은 계속 나오는데, 선지자들은 르바임을 바로 위에서 다룬 저런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입니다. The Nephilim are not mentioned any more, but the Rephaim are, who are described by the prophets to be such as are above stated; as in Isaiah:

 

아래의 스올이 너로 말미암아 소동하여 네가 오는 것을 영접하되 그것이 세상의 모든 영웅을 너로 말미암아 움직이게 하며 열방의 모든 왕을 그들의 왕좌에서 일어서게 하므로 Hell low down has been in commotion for thee, to meet thee in coming, it hath stirred up the Rephaim for thee, (사14:9)

 

르바임 같은 영들이 거주하는 지옥을 설명합니다. speaking of the hell which is the abode of such spirits.

 

다시 이사야입니다. In the same: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그들을 멸하사 그들의 모든 기억을 없이하셨음이니이다 Thy dead shall not live, the Rephaim shall not arise, because thou hast visited and destroyed them, and made all their memory to perish, (사26:14)

 

여기서도 그들의 지옥이 언급되고 있는데, 그들은 그곳에서 다시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where also their hell is referred to, from which they shall no more rise again.

 

계속 이사야입니다. In the same: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Thy dead shall live, my corpse, they shall rise again; awake and sing, ye that dwell in the dust, for the dew of herbs is thy dew; but thou shalt cast out the land of the Rephaim; (사26:19)

 

르바임의 땅’은 위에서 말한 지옥입니다. the land of the Rephaim” is the hell above spoken of.

 

다윗의 글입니다. In David: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Wilt thou show a wonder to the dead? Shall the Rephaim arise, shall they confess to thee? (시88:10)

 

르바임의 지옥에 대해 같은 뜻으로 말하면서, 그들은 절대 일어나지 못하며, 그들의 아주 끔찍한 독과 같은 망상으로 영들의 세계를 들끓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speaking in like manner concerning the hell of the Rephaim, and that they cannot rise up and infest the sphere of the world of spirits with the very direful poison of their persuasions.

 

그러나 주님은 인류가 더 이상 그런 끔찍한 망상과 신념에 푹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셨습니다. But it has been provided by the Lord that mankind should no longer become imbued with such dreadful fantasies and persuasions.

 

홍수 전을 살았던 사람들은 자신들로 하여금 그런 뒤틀린 생각들을 흡수하게 했던 본성(nature)과 정신(genius)을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는 아직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으나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cf. AC.927) 밝힐 것입니다. Those who lived before the flood were of such a nature and genius that they could be imbued, for a reason as yet unknown,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582.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After that the sons of God came in unto the daughters of men, and they bare to them.

 

이 말씀은, 그들이 신앙에 대한 가르침들을 자신들의 타락한 갈망을 가지고 합쳐버린 바로 그때, 그들은 네피림이 되었다는 뜻으로, 이런 사실은 위 2절의 내용, 즉, ‘하나님의 아들들’은 신앙의 가르침들을, ‘딸들’은 갈망을 각각 상징함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y became Nephilim when they had immersed the doctrinals of faith in their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and shown above in verse 2, namely, that the “sons of God” signify the doctrinal things of faith, and that “daughters” signify yearnings.

 

그 결과는, 신앙의 거룩한 속성들을 하찮게 여기고, 모독하는 것밖에 없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곧 물질만능주의로 되어 있는 인간의 갈망은 거룩하고 참된 것하고는 완전히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The birth thereby produced must needs make light of and profane the holy things of faith, for the yearnings of man, being those of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are altogether contrary to what is holy and true.

 

지금은 사람 안에 갈망이 만연합니다. 거룩하고 참되며, 또 그런 걸로 인식되는 무언가가 갈망에 잠기면, 사람은 끝입니다. 갈망은 뿌리뽑히거나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갈망은 모든 생각(idea)에 착 달라붙습니다. 예를 들면, 저세상에서는 생각으로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데, 거룩하고 참된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바로 모독과 거짓이 그 생각과 결합하고, 이런 이상한 일은 즉시 지각됩니다. Now in man yearnings prevail, so that when what is holy and true, and is acknowledged to be such, is immersed in yearnings, it is all over with the man, for the yearnings cannot be rooted out and separated; they cling to every idea, and in the other life it is ideas that are communicated from one to another, so that as soon as any idea of what is holy and true is brought forth, what is profane and false is joined to it, which is instantly perceived.

 

이런 이유로,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분리되어 지옥으로 던져지게 됩니다. Therefore such persons have to be separated and thrust down into hell.

 

 

583. 네피림을 일컬어 ‘용사’라 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인데, 이것은 말씀 여러 곳에서 그런 사람을 가리켜 ‘용사’라 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That the Nephilim are called “mighty men” from the love of self, is evident from various passages of the Word, where such are called “mighty”; as in Jeremiah:

 

바벨론의 용사는 싸움을 그치고 그들의 요새에 머무르나 기력이 쇠하여 여인 같이 되며 그들의 거처는 불타고 그 문빗장은 부러졌으며 The mighty ones of Babel have ceased to fight, they sit in their holds, their might faileth, they are become as women, (렘51:30)

 

여기 ‘바벨론의 용사’는 자기 사랑의 덫에 걸린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where the “mighty ones of Babel” denote those who are eaten up with the love of self.

 

같은 예레미야입니다. In the same:

 

칼이 자랑하는 자의 위에 떨어지리니 그들이 어리석게 될 것이며 칼이 용사의 위에 떨어지리니 그들이 놀랄 것이며 A sword is against the liars, and they shall be insane, a sword is against her mighty ones, and they shall be dismayed. (렘50:36)

 

5그들이 놀라 물러가며 그들의 용사는 패하여 황급히 도망하며 뒤를 돌아보지 아니함은 어찜이냐 두려움이 그들의 사방에 있음이로다 6발이 빠른 자도 도망하지 못하며 용사도 피하지 못하고 그들이 다 북쪽에서 유브라데 강가에 넘어지며 엎드러지는도다 9말들아 달려라 병거들아 정신없이 달려라 용사여 나오라 방패 잡은 구스 사람과 붓 사람과 활을 당기는 루딤 사람이여 나올지니라 하거니와 I saw them dismayed, and turning away back, their mighty ones were broken in pieces, and have been put to flight, and looked not back; fear was round about; the swift shall not flee away, nor the mighty one escape; come up, ye horses, and rage, ye chariots, and let the mighty ones go forth, Cush, Put, the Lydians, (렘46:5-6, 9)

 

사람을 속이는 합리화에 관한 말씀입니다. speaking of persuasion from reasonings.

 

계속해서 Again:

 

14너희가 어찌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용사요 능란한 전사라 하느냐 15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모압이 황폐하였도다 How say ye, We are mighty, and men of strength for war? Moab is laid waste. (렘48:14-15)

 

성읍들이 점령을 당하며 요새가 함락되는 날에 모압 용사의 마음이 산고를 당하는 여인 같을 것이라 The city is taken, and the strongholds, it has been seized, and the heart of the mighty men of Moab in that day is become as the heart of a woman in her pangs. (렘48:41)

 

같은 뜻으로 말씀하시기를 In like manner it is said:

 

에돔 용사의 마음이 진통하는 여인 같이 되리라 하시니라 The heart of the mighty ones of Edom. (렘49:22)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원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속량하셨으니 Jehovah hath redeemed Jacob, and hath avenged him from the hand of him that was mightier than he, (렘31:11)

 

여기 ‘강한 자’는 다른 말, 히브리 말 표현입니다. where “mighty” is expressed by another term.

 

네피림이었던 아낙 자손이 ‘강대한 나라들’이었음은 모세의 글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e Anakim, who were of the Nephilim, were called “mighty ones” is evident from Moses:

 

1이스라엘아 들으라 네가 오늘 요단을 건너 너보다 강대한 나라들로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니 그 성읍들은 크고 성벽은 하늘에 닿았으며 2크고 많은 백성은 네가 아는 아낙 자손이라 그에 대한 말을 네가 들었나니 이르기를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 하거니와 Thou passest over Jordan today, to go in to possess nations greater and more numerous than thyself, cities great and fortified to heaven, a people great and tall, the sons of the Anakim, whom thou knowest, and of whom thou hast heard; who shall stand before the sons of Anak? (신9:1-2)

2021-08-10(D3)-매일예배(AC.580-583, 창6,4), '네피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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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XG9mhStcx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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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My spirit shall not reprove man forever, for that he is flesh; and his days shall be a hundred and twenty years. (창6:3)

 

 

577. ‘열둘’이라는 숫자가 신앙, 혹은 사랑의 속성들과 그 속성에서 대략적으로 파생된 신앙을 상징한다는 사실은 말씀 여러 구절, 곧 여러 현상을 통해 또한 확인할 수 있는데요, 가령, 야곱의 ‘열두’ 아들과 그들의 이름이라든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든지, 그리고 주님의 ‘열두’ 제자 등등... 그러나 이와 관련된 내용은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나중에(cf. AC.3858, 3913:1), 특히 창세기 29장과 30장을 다룰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That the number “twelve” signifies faith, or the things of love and the derivative faith in one complex, might also be confirmed by many passages from the Word, as from the “twelve” sons of Jacob and their names, the “twelve” tribes of Israel, and the Lord’s “twelve” apostles; but concerning these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especially in Genesis 29 and 30.

 

 

578. 이 숫자들을 살핀 것만으로도 주님의 말씀은 그 심장과 내면 깊숙이 무엇이 들어 있으며, 육안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얼마나 많은 아케이나가 그 안에 봉인되어 있는지가 분명해졌습니다. From these numbers alone it is evident what the Word of the Lord contains in its bosom and interior recesses, and how many arcana are concealed therein which do not at all appear to the naked eye.

 

말씀 어디서나 그렇습니다. 모든 말씀에 다 그런 똑같은 것이 있습니다. And so it is everywhere: there are like things in every word.

 

 

579. 여기서 다룬 홍수 전 세대의 경우, 리메인스가 아주 적거나 거의 없었다는 사실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cf. AC.660, 661:2) 그들에 대해 주로 다루게 될 때 말씀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리메인스가 전혀 보존될 수 없었기 때문에 ‘노아’라는 새 교회의 출현이 여기 예언된 것인데요, 이들은 리메인스를 가지고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에 관하여도 역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cf. AC.635, 737, 1050) That with the antediluvians here treated of there were few and almost no remains, will be manifest from what, of the Lord’s Divine mercy, will be said of them hereafter; and as no remains could be preserved among them, it is here foretold of the new church called “Noah” that it should have remains; concerning which also,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2021-08-09(D2)-매일예배(AC.577-579, 창6,3), '열둘, 숫자에 담긴 아케이나, 리메인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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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r2KERgcf8Nk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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