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08(D1)-제9권32호통415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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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And the sons of God saw the daughters of man that they were good; and they took to themselves wives of all that they chose. (창6:2)

 

 

569. ‘하나님의 아들들’은 신앙의 교리, 가르침(teachings)을 상징합니다. By the “sons of God” are signified the doctrinal things of faith.

 

여기 나오는 ‘딸들’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갈망, 욕망(cravings)을 상징합니다. By “daughters,” here as before, yearnings.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는 신앙의 가르침과 사람의 욕망 둘을, 그 욕망이 무엇이든, 어떤 종류든 상관없이 이 둘을 단단히 묶었다는 뜻입니다. By the “sons of God seeing the daughters of man that they were good, and taking to themselves wives of all that they chose” is signified that the doctrinal things of faith conjoined themselves with yearnings, in fact with any yearnings whatever.

 

※ 여기 둘을 묶었다, 결합하게 했다, 또는 잠기게 했다 하는 표현의 뜻은, 신앙의 교리, 신학, 가르침을 자신의 갈망, 자신의 욕구, 욕망을 해소, 해결하는 방편으로 이용했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의 진리, 곧 주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주님의 말씀이며, 주님이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순전함으로 따라야 하는데, 이들은 그럴 마음은 전혀 없고, 대신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만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주님의 것에 사사로이 사람의 것을 섞는 신성모독입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자기 사랑의 모습이며, 결코 주님 사랑이 아닙니다.

 

 

570. ‘하나님의 아들들’이 신앙의 가르침을 상징한다는 것은, ‘아들들’의 상징을 보면 분명합니다. (바로 위, 그리고 앞 장 4절, ‘아들들’은 교회의 진리를 상징한다는 내용 참조, AC.489) That by the “sons of God” are signified doctrinal things of faith,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sons” (concerning which just above, and also in the preceding chapter, verse 4, where “sons” signify the truths of the church).

 

교회의 진리는 교리 형태의 가르침으로 되어 있으며, 본 장에 나오는 사람들은 이 진리를 참으로 여겼습니다. 태고인들을 통해 구전(口傳)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진리를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부르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갈망을 가리켜 ‘사람의 딸들’이라 부르기 때문에, 비교해서 그렇게 부른 것이기도 합니다. The truths of the church are doctrinal things, which regarded in themselves were truths because those here treated of had them by tradition from the most ancient people, and therefore they are called the “sons of God”; they are so called also relatively, because yearnings are called the “daughters of man.

 

본 절에서는 이 교회 사람들의 퀄러티(캐릭터)를 설명하고 있는데요, 즉, 이들은 본래 거룩했던, 교회의 진리를 자기들의 갈망으로 잠기게 했고, 그렇게 더럽혔으며, 그런 식으로, 그들은 자기들이 강하게 붙들고 있는 원리들을 더욱 더 신념으로 확고하게 삼았습니다. The quality of the members of this church is here described, namely, that they immersed the truths of the church, which were holy, in their yearnings, and thereby defiled them; and in this way they confirmed the principles of which they were so strongly persuaded.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것은 누구라도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데요,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것을 관찰하면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주제에 관해 자신을 확신시키고자 할 때, 우리는 그것이 진리임을 모든 그럴듯한 것들을 가지고, 심지어는 주님의 말씀으로부터도 가지고 와서 자신에게 증명해 보이지요. 우리는 우리가 채택한 원리들과 신념들에 착 달라붙어 있는 한, 우리는 모든 것을 그것들과 일치시키려 하고 조화시키려 합니다. How this occurred may be easily conceived by anyone, from observing what passes in himself and others: those who persuade themselves in regard to any subject, confirm themselves in such persuasion by everything which they imagine to be true, even by what they find contained in the Word of the Lord; for while they cling to principles which they have received, and have become persuaded of, they make everything favor and assent to them.

 

우리가 우리 자신에 빠져들면 들수록, 우리는 점점 더 완고하게 그 입장을 고수합니다. And the more anyone is under the influence of self-love, the more firmly he holds them.

 

이런 설명이 지금 논의 중인 인종(人種, race)에 딱 맞습니다. 이들에 관해서는, 나중에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우리가 그들의 가공할 신념들을 다루게 될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cf. AC.573, 580-586a, 607:3, 619-637, 659-662, 792-813) 참 말씀드리기 생소한 것은,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합리적 사고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그랬다면 그들은 그들 주위 영들의 모든 합리적인 능력들을 죄다 죽여버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욕망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려 했습니다. Such was this race, concerning whom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when we come to treat of their direful persuasions, which strange to say are such that they are never allowed to flow in by reasonings, but only from yearnings, for otherwise they would kill everything rational in the spirits present.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그들이 신앙의 가르침들과 그들의 욕망 둘을 하나로, 실제로 어떤 종류의 무슨 욕망이든지, 이 둘을 하나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Hence it appears what is signified by the “sons of God seeing the daughters of man, that they were good, and taking to themselves wives of all that they chose,” namely, that they conjoined the doctrinal things of faith with their yearnings, in fact with any yearnings.

 

 

571. 사람이 정신 나간 욕망 가운데 신앙의 진리를 침수시키는 그런 캐릭터가 될 때, 그는 진리를 모독하며, 자신에게서 리메인스를 빼앗습니다. 비록 이들 리메인스가 사람 안에 머물지라도 그는 이 리메인스를 양심으로 데리고 가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순간, 그는 이미 더럽혀진 사고(思考, thoughts)로 또 다시 리메인스를 훼손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대한 신성모독은 일종의 굳은살을 만들어 모든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마치 댐처럼 차단, 흡수해버리고 맙니다. When a man is of such a character that he immerses the truths of faith in his insane yearnings, he then profanes the truths, and deprives himself of remains, which although they remain cannot be brought forth, for as soon as they are brought forth they are again profaned by things that are profane; for profanations of the Word produce as it were a callosity, which causes an obstruction, and absorbs the goods and truths of remains.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훼손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거짓된 원리, 가정(assumptions)에 사로잡혀있는 사람한테는 진리가 들어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지라도, 주님의 말씀에는 영원한 산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Therefore let man beware of the profanation of the Word of the Lord, which contains the eternal truths wherein is life, although one who is in false principles does not believe that they are truths.

2021-08-07(D7)-토요예배(AC.569-571, 창6,2), '홍수를 자초한 사람들의 퀄러티(캐릭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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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azWW7mOKFA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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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And it came to pass that man began to multiply himself upon the faces of the ground, and daughters were born unto them. (창6:1)

 

 

566. [4] 에스겔에서 In Ezekiel:

 

41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나오게 하고 너희가 흩어진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낼 때에 내가 너희를 향기로 받고 내가 또 너희로 말미암아 내 거룩함을 여러 나라의 목전에서 나타낼 것이며 42내가 내 손을 들어 너희 조상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 곧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들일 때에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고 I will gather you out of the lands wherein ye have been scattered, and ye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when I shall bring you again into the ground of Israel, into the land for which I lifted up my hand to give it to your fathers, (겔20:41-42)

 

이스라엘 ‘’(ground)은 내적 예배를 상징합니다. 내적 예배가 없는 곳은 여러 ‘나라’(land)라고 합니다. where “ground” signifies internal worship; it is called “land” when there is no internal worship.

 

말라기에서 In Malachi:

 

11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12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I will rebuke him that consumeth for your sakes, and he shall not corrupt for you the fruit of the ground, nor shall the vine be bereaved for you in the field and all nations shall call you blessed, because ye shall be a delightsome land, (말3:11-12)

 

너희 ‘’(land)은 컨테이너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토지’(ground)가 교회, 혹은 교리를 가리킬 때, ‘’(land)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습니다. where “land” denotes the container, and therefore it plainly denotes man, who is called “land” when “ground” denotes the church, or doctrine.

 

[5] 모세의 글에서 In Moses:

 

너희 민족들아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들에게 복수하시고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 Sing, O ye nations, his people, he will make expiation for his ground, his people, (신32:43)

 

이것은 분명히 이방인들, 곧 유대인이 아닌 나라들의 교회를 상징하며, 그걸 가리켜 자기 ‘’(ground)이라 하고 있습니다. evidently signifying the church of the gentiles, which is called “ground.

 

이사야에서 In Isaiah: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Before the child shall know to refuse the evil and choose the good, the ground shall be forsaken, which thou abhorrest in presence of both her kings, (사7:16)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ground will be forsaken)를 통해 교회, 혹은 신앙에 관한 참된 교리를 위해 준비된 땅이 황폐해질 것을 말하면서, 주님의 강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speaking of the advent of the Lord; that the “ground will be forsaken” denotes the church, or the true doctrine of faith.

 

’(ground)과 ‘’(field)이라는 말들은 곡식 심기와 연결되어 사용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사야에서처럼 말입니다. That “ground” and “field” are so called from being sown with seed is evident; as in Isaiah:

 

23네가 땅에 뿌린 종자에 주께서 비를 주사 땅이 먹을 것을 내며 곡식이 풍성하고 기름지게 하실 것이며 그 날에 네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을 것이요 24밭 가는 소와 어린 나귀도 키와 쇠스랑으로 까부르고 맛있게 한 먹이를 먹을 것이며 Then shall he give rain of thy seed wherewith thou shalt sow the ground; the oxen also and the young asses that labor on the ground. (사30:23-24)

 

그리고 요엘입니다. And in Joel: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마르니 곡식이 떨어지며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 The field is laid waste, and the ground hath mourned, because the corn is laid waste. (욜1:10)

 

이런 걸 보면, 히브리말로 ‘아담’이라고 하는 ‘사람’은 ‘토지’(ground)에서 왔으며, 교회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ence then it is evident that “man,” who in the Hebrew tongue is called “Adam,” from “ground,” signifies the church.

 

 

567. 참된 신앙에 관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사는 지역 전부를 총체적으로 아울러 교회 지역이라고 합니다. 전에 유대 교회가 있었던 가나안 땅 같은 곳이지요. 지금 기독 교회가 있는 유럽 또한 그렇습니다. 그 외의 지역과 나라들은 교회 지역이 아니며, 이것이 곧 오늘 본문, ‘땅 위’(faces of the ground)의 의미입니다. All that region is called the region of the church where those live who are instructed in the doctrine of true faith; as the land of Canaan, when the Jewish church was there, and Europe, where the Christian church now is; the lands and countries outside of this are not the region of the church, or the “faces of the ground.

 

홍수 전 교회들이 있었던 곳은 에덴동산에서 발원한 강들로 둘러싸인 땅들을 보고도 알 수 있겠는데요, 이 강들은 말씀 여러 곳에서 가나안 땅 경계로 자주 언급된 강들입니다. (cf. 창15:18; 신1:7; 11:24; 수1:4; 왕상5:9) Where the church was before the flood, may also appear from the lands which the rivers encompassed that went forth from the garden of Eden, by which in various parts of the Word are likewise described the boundaries of the land of Canaan;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창15:18)

 

방향을 돌려 행진하여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가고 그 근방 곳곳으로 가고 아라바와 산지와 평지와 네겝과 해변과 가나안 족속의 땅과 레바논과 큰 강 유브라데까지 가라 (신1:7)

 

너희의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의 소유가 되리니 너희의 경계는 곧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와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서해까지라 (신11:24)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수1:4)

 

또 동으로 가서 거주하면서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광야 지경까지 다다랐으니 이는 길르앗 땅에서 그 가축이 번식함이라 (대상5:9)

 

그 장소는 또한 이어지는 내용들, 가령, 네피림이 ‘거기에’(in the land) 있었다는 사실과, 그들이 가나안 땅에 거주했다는 민수기 13장 33절 말씀,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에 관한 말씀 등으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and also from what follows concerning the Nephilim that were “in the land”; and that these Nephilim dwelt in the land of Canaan is evident from what is said of the sons of Anak: that they were “of the Nephilim” (Num. 13: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13:33)

 

 

568. ‘딸들’(daughters)이 그런 사람의 의지 안에 거주하는 것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갈망, 욕망을 상징한다는 것은, 그동안 ‘자녀들’(sons and daughters) 관련, 앞장에서 다루어 온 내용들(AC.489-491, 창5:4)을 보면 분명하며, 거기서 ‘아들들’(sons)은 진리를, ‘딸들’(daughters)은 선을 각각 상징합니다. That “daughters” signify such things as are of the will of that man, consequently yearnings,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and shown concerning “sons and daughters” in the preceding chapter (Gen. 5:4), where “sons” signify truths, and “daughters,” goods.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딸들’, 혹은 선은 의지에 속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런 사람이면 그의 인식능력도, 그의 의지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 ‘자녀들’입니다. Daughters,” or goods, are of the will, but such as a man is, such is his understanding and such his will, thus such are the “sons and daughters.

 

※ 즉, 우리의 지적 능력과 의지가 어떤 모습일지는 우리의 캐릭터가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의 ‘자녀들’ 또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다루는 사람은 부패한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은 의지랄 게 없으며, 대신 원색적 욕망만 있습니다. 이들은 이런 걸 의지로 여기며, 실제로 그렇게 부릅니다. The present passage treats of man in a corrupt state, who has no will, but mere cupidity instead of will, which is supposed by him to be will, and is also so called.

 

어떤 것에 대한 설명은 설명하고 있는 그것의 퀄러티와 일치합니다. 여기서 딸들이 설명하고 있는 사람은 앞서 지금까지 죽 설명해온 대로 부패한 사람입니다. (cf. AC.560, 562-563, 565) What is predicated is in accordance with the quality of the thing whereof it is predicated, and that the man of whom the daughters are here predicated was a corrupt man, has been shown before.

 

딸들’은 의지 안에 있는 것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 선을 위한 게 전혀 없으면, 그때는 갈망(yearnings)을 상징하게 되며, ‘아들들’은 이해하는 능력(understanding) 안에 있는 것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 진리에 관한 이해가 전혀 없으면, 그때는 환상(fantasies)을 상징합니다. 왜 이런가 하는 것은, 성(sex)의 본성 때문입니다. 여성은 태생적으로 의지나 탐욕(cupidity)이 이해하는 능력을 다스리게 되어 있습니다. The reason why “daughters” signify the things of the will, and, where there is no will of good, yearnings; and why “sons” signify the things of the understanding, and, where there is no understanding of truth, fantasies, is that the female sex is such, and so formed, that the will or cupidity reigns in them more than the understanding.

 

여성의 몸 모든 섬유조직이 다 이런 기질(disposition), 이런 성향이며, 이것이 여성의 본성인 반면, 남성은 지성(intellect) 또는 이성(reason)이 우위를 나타내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남성의 몸 모든 섬유조직이 다 이런 기질, 이런 성향이며, 이것이 남성의 본성입니다. Such is the entire disposition of their fibers, and such their nature, whereas the male sex is so formed that the intellect or reason rules, such also being the disposition of their fibers and such their nature.

 

두 사람 간 결혼이 그래서 각 사람 안의 의지와 이해하는 능력 간 결혼과 비슷한 것입니다. 오늘날엔 선을 위한 의지는 없고, 대신 탐욕(cupidity)만 있으며, 약간의 지성이나 이성만 가능한데, 이것이 바로 유대 교회에 있는 그 많은 법들이 왜 남편의 특권(prerogative)과 아내의 복종에 관한 것인지 하는 이유가 되겠습니다. Hence the marriage of the two is like that of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in every man; and since at this day there is no will of good, but only cupidity, and still something intellectual, or rational, can be given, this is why so many laws were enacted in the Jewish church concerning the prerogative of the husband [vir], and the obedience of the wife.

2021-08-06(D6)-매일예배(AC.566-568, 창6,1), '땅 위, 딸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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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7KWMMXap4Q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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