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And Noah found grace in the eyes of Jehovah. (창6:8)

 

 

598.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의 의미는, 주님은 인류가 이렇게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을 예견하셨다는 것입니다. He found grace in the eyes of Jehovah signifies that the Lord foresaw that the human race might thus be saved.

 

주님의 자비는 인류 전체의 구원에 관한 것이며, 주님은 인류의 구원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호의, 은혜 역시 그러하며, 그래서 여기 ‘은혜’(grace)가 인류의 구원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The Lord’s mercy involves and looks to the salvation of the whole human race; and it is the same with his “grace,” and therefore the salvation of the human race is signified.

 

노아’는 새 교회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새 교회의 신앙, 곧 체어리티의 신앙 또한 상징합니다. By “Noah” is signified not only a new church, but also the faith of that church, which was the faith of charity.

 

그래서 주님은 이 체어리티의 신앙, 곧 체어리티가 원인인 신앙을 통해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을 예견하셨습니다. (이 신앙에 관해서는 나중에) Thus the Lord foresaw that through the faith of charity the human race might be saved (concerning which faith hereafter).

 

[2] 말씀에서는 ‘자비’와 ‘은혜’를 구분하며, 이 구분은 이것을 받은 사람들에 따릅니다. ‘자비’는 천적인 사람들에게, ‘은혜’는 영적인 사람들에게 쓰입니다. 천적인 사람들은 자비만, 영적인 사람들은 거의 은혜만 압니다. But there is a distinction in the Word between “mercy” and “grace,” and this in accordance with the difference that exists in those who receive them; “mercy” being applied to those who are celestial, and “grace” to those who are spiritual; for the celestial acknowledge nothing but mercy, and the spiritual scarcely anything but grace.

 

천적인 사람들은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며, 영적인 사람들은 자비가 무엇인지 거의 모릅니다. 영적인 사람들은 자비와 은혜는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The celestial do not know what grace is; the spiritual scarcely know what mercy is, which they make one and the same with grace.

 

이것은 두 가지 아주 다른 겸손에서 나옵니다. 가슴(heart)의 겸손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주님의 자비를, 머리(thought)의 겸손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주님의 은혜를 간구합니다. 만일 후자가 자비를 구한다면, 그건 시험 중이거나 진심이 아닌 말로만 구하는 것입니다. This comes from the ground of the humiliation of the two being so different; they who are in humiliation of heart implore the Lord’s mercy; but they who are in humiliation of thought beseech his grace; and if these implore mercy, it is either in a state of temptation, or is done with the mouth only and not from the heart.

 

노아’라 하는 새 교회는 천적이 아닌 영적이기 때문에, 여호와께 ‘자비’를 입었다 하지 않고, ‘은혜’를 입었다 하는 것입니다. Because the new church called “Noah” was not celestial but spiritual, it is not said to have found “mercy,” but “grace,” in the eyes of Jehovah.

 

[3] 말씀에서 ‘자비’와 ‘은혜’를 구분하고 있음은, 여호와를 가리켜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다’ 하시는 많은 구절들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That there is a distinction in the Word between “mercy” and “grace” is evident from many passages where Jehovah is called “merciful and gracious. (as in 시103:8; 111:4; 145:8; 욜2:13)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시103:8)

 

그의 기적을 사람이 기억하게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도다 (시111:4)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시145:8)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욜2:13)

 

이런 구분은 다른 데, 가령 예레미야에서도 마찬가지로 하고 있습니다. The distinction is likewise made in other places, as in Jeremiah:

 

2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나니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3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Thus saith Jehovah, The people which were left of the sword found grace in the wilderness, when I went to give rest to him, to Israel. Jehovah appeared unto me from afar; and I have loved thee with an everlasting love; therefore in mercy have I drawn thee, (렘31:2-3)

 

여기 보면, ‘은혜’는 영적인 퀄러티를, ‘자비’는 천적인 퀄러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where “grace” is predicated of the spiritual, and “mercy” of the celestial.

 

이사야에는 In Isaiah: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Therefore will Jehovah wait that he may give grace unto you, and therefore will he exalt himself that he may have mercy upon you. (사30:18)

 

이 역시, ‘은혜’는 영적인 퀄러티를, ‘자비’는 천적인 퀄러티를 보고 있습니다. Here likewise “grace” regards the spiritual, and “mercy” the celestial.

 

창세기 후반부, 롯이 천사에게 말하는 장면, So in the chapter presently following, where Lot says to the angel:

 

주의 종이 주께 은혜를 입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Behold I pray thy servant hath found grace in thine eyes, and thou hast made great thy mercy which thou hast wrought with me, to make alive my soul. (창19:19)

 

은혜’는 신앙이나 언더스탠딩(understanding, 이해하는 능력) 같은 영적 목표에 초점을 맞춘다는 사실은 여기 ‘주께 은혜를 입었고’라는 표현을 보면 확실하고요, ‘자비’는 사랑이나 의지 같은 천적 목표에 초점을 맞춘다는 사실은 천사가 한 말, ‘인자를 베푸셨다’, ‘내 생명을 구원하셨다’라는 표현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grace” relates to spiritual things, which are of faith, or of the understanding, is evident here also in that it is said, he “hath found grace in thine eyes”; and that “mercy” relates to celestial things which are of love, or of the will,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angel is said to have “wrought mercy,” and to have “made alive the soul.

2021-08-17(D3)-매일예배(AC.598, 창6,8), '자비(mercy)와 은혜(grace)의 차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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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l-Ayh81JRY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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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And Noah found grace in the eyes of Jehovah. (창6:8)

 

 

596. ‘노아’는 새 교회를 상징합니다. By “Noah” is signified a new church.

 

그가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라는 말씀은, 주님은 인류가 이렇게 구원받게 될 것임을 예견하셨다는 뜻입니다. That he “found grace in the eyes of Jehovah” signifies that the Lord foresaw that the human race might thus be saved.

 

즉, 이것이 인류가 구원받는 방법임을 주님은 예견하셨다는 것입니다.

 

597. ‘노아’는 고대 교회라 하는 새 교회를 상징하는데요, 고대 교회라는 명칭은 홍수 전 존재했던 태고 교회와, 홍수 후 존재했던 이 교회를 구별해 부르기 위한 것입니다. By “Noah” is signified a new church, which is to be called the ancient church, for the sake of distinction between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was before the flood, and that which was after the flood.

 

이들 두 교회들의 상태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The states of these two churches were entirely different.

 

태고 교회의 상태는,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선과 거기서 나오는 진리에 관한 일종의 퍼셉션(perception, 지각, 배우지 않고도 주님의 선과 진리를 아는 타고난 능력)을 받은 그런 상태였습니다. The state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such that they had from the Lord a perception of good and the derivative truth.

 

고대 교회, 혹은 ‘노아’의 상태는, 그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일종의 양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The state of the ancient church, or “Noah,” became such that they had a conscience of good and truth.

 

즉, 선량함(goodness)과 진실에 관한 일종의 양심으로 상태가 바뀐 것입니다.

 

태고 교회와 고대 교회 간 상태의 차이는 이런 차이, 곧 퍼셉션을 갖는 것과 양심을 갖는 것 간 차이였습니다. Such as is the difference between having perception and having conscience, such was the difference of state of the most ancient and the ancient churches.

 

퍼셉션은 양심이 아닙니다. 천적(天的, celestial) 천사들은 퍼셉션을, 영적(靈的, spiritual) 천사들은 양심을 갖고 있습니다. Perception is not conscience: the celestial have perception; the spiritual have conscience.

 

태고 교회는 천적이었고, 고대 교회는 영적이었습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was celestial, the ancient was spiritual.

 

[2] 태고 교회는 영들 및 천사들과 어울려 지냄을 통해, 그리고 비전 및 꿈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고, 그렇게 해서 그들에게는 선과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일반적인 능력이 생겼습니다. 그들이 이런 걸 인식하게 되자, 이번에는 이런 퍼셉션 능력으로 얻게 된 무수한 인사이트들(insights, 통찰력)을 통해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원리들, 말하자면, 엑시엄(axioms, 자명한 이치, 公理)들을 컨펌하게 되었습니다. 이들 인사이트들은 특정 디테일들을 구성하는데, 넓은 카테고리들이 이런 디테일들로 채워지는 그런 것입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had immediate revelation from the Lord by consort with spirits and angels, as also by visions and dreams; whereby it was given them to have a general knowledge of what was good and true; and after they had acquired a general knowledge, these general leading principles, as we may call them, were confirmed by things innumerable, by means of perceptions; and these innumerable things were the particulars or individual things of the general principles to which they related.

 

즉, 천국, 곧 주님의 신적 질서의 나라, 질서정연한 진리 체계가 차곡차곡 각 사람 내면에 자리 잡아갔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가장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원리들이 날마다 컨펌되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이 원리에 부합하지 않으면 그들은 그걸 그렇지 않은 것으로, 부합하면 그런 것으로 지각했습니다. Thus were the general leading principles corroborated day by day; whatever was not in agreement with the general principles they perceived not to be so; and whatever was in agreement with them they perceived to be so.

 

즉, 주님의 신적 질서의 근본에 대한 감각이 저변에 깔려 있어 어떤 것이 그 질서에 맞는지, 안 맞는지를 직관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천적 천사들이 바로 이런 상태입니다. Such also is the state of the celestial angels.

 

[3] 태고 교회의 보편적 원리들, 곧 엑시엄들은 천적이며, 영원한 진리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주님이 모든 피조세계를 다스리신다.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 말미암는다. 모든 생명은 주님으로 말미암는다. 사람의 것(own, 사람에게 고유한 것)은 악 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그 자체로 죽은 것이다 등등... 그외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The general principles of the most ancient church were heavenly and eternal truths—as that the Lord governs the universe, that all good and truth is from the Lord, that all life is from the Lord, that man’s own is nothing but evil, and in itself is dead; with many others of similar character.

 

태고 교회 사람들은 이런 진리들, 원리들을 컨펌하고 지지하는 수많은 것들, 생각들에 관한 퍼셉션을 주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And they received from the Lord a perception of countless things that confirmed and supported these truths.

 

그들에게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랑이었습니다. With them love was the principal of faith.

 

그들로 하여금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지각할 수 있도록 주님이 그들을 북돋워 주신 방법은 바로 사랑입니다. 앞에서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말입니다. (cf. AC.32:2, 202, 398) By love it was given them of the Lord to perceive whatever was of faith, and hence with them faith was love, as was said before.

 

그러나 고대 교회의 경우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하심을 받고 말씀드리겠습니다. But the ancient church became entirely different,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2021-08-16(D2)-매일예배(AC.596-597, 창6,8), '태고 교회와 고대 교회의 차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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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_ahFylQ344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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