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And all the days of Enoch were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창5:23-24)

 

 

520.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라는 표현은 그들의 수가 아주 적었다는 뜻입니다. By “all the days of Enoch being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is signified that they were few.

 

그의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표현은 위에서처럼, 신앙 관련 교리를 의미합니다. By his “walking with God” is signified, as above, doctrine concerning faith.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는 표현은 후손들의 사용을 위해 이 교리를 보존하신다는 뜻입니다. By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is signified the preservation of that doctrine for the use of posterity.

 

 

521.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는 표현이 후손들의 사용을 위해 이 교리를 보존하심을 뜻한다는 것에 관하여, 에녹의 경우는, 이미 말씀드린 대로,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태고교회에서는 퍼셉션의 일이었던 것을 교리라는 형태로 하향 재탄생케 하였는데, 이것은 그 교회 시대에는 허용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퍼셉션으로 아는 것은, 교리로 배우는 것하고는 아주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As to the words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signifying the preservation of that doctrine for the use of posterity, the case with Enoch, as already said, is that he reduced to doctrine what in the most ancient church had been a matter of perception, and which in the time of that church was not allowable; for to know by perception is a very different thing from learning by doctrine.

 

퍼셉션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교리 형태로 정리해서 굳이 따로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다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They who are in perception have no need to learn by formulated doctrine that which they know already.

 

예를 들어, 잘 생각하는 법을 이미 아는 사람은 생각하는 법을 예술 수준으로까지 올린 무슨 규칙들을 가지고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오히려 그의 잘 생각하는 타고난 재능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스콜라 철학의 먼지를 스틱으로 빠르게 찌르고 있는 사람들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For example: he who knows how to think well, has no occasion to be taught to think by any rules of art, for in this way his faculty of thinking well would be impaired, as is the case with those who stick fast in scholastic dust.

 

퍼셉션으로 배우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무엇이 선이요, 진리인지를 내적 방식과 경로로 알게 하십니다. 그러나, 교리로 배우는 사람들은, 지식이라는 것을 외적 방식, 혹은 육체적 감각으로 얻게 되는데, 이 둘의 차이는 마치 빛과 어두움 간 차이와도 같습니다. To those who learn by perception, the Lord grants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 by an inward way; but to those who learn from doctrine, knowledge is given by an external way, or that of the bodily senses; and the difference is like that between light and darkness.

 

또한 천적 인간의 퍼셉션은 도무지 어떻게 설명을 할 수가 없다는 점도 고려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가장 작고 특별한 것들 속으로 상태들과 환경들, 상황들을 따라 온갖 다양성을 가지고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Consider also that the perceptions of the celestial man are such as to admit of no description, for they enter into the most minute and particular things, with all variety according to states and circumstances.

 

그러나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이 사라지고 난 후, 인류는 무엇이 진리요, 선인지를 교리로 배우게 되며, 곧, 어두움을 겪고 나서 빛으로 나아오게 될 것을 미리 아시고, 여기 이르시기를,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 즉, 후손들이 사용하도록 그 교리를 보존하셨다 하신 것입니다. But as it was foreseen that the perceptive facul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ould perish, and that afterwards mankind would learn by doctrines what is true and good, or by darkness would come to light, it is here said that “God took him,” that is, preserved the doctrine for the use of posterity.

 

 

522. 또한 ‘에녹’이라 하는 사람들이 가진 퍼셉션의 상태와 퀄러티가 제게 경험된 적이 있었는데요, The state and quality of the perception with those who were called “Enoch” have also been made known to me.

 

그것은 일종의 무슨 차이점 없는 일반적인 뿌연 퍼셉션이었습니다. 이런 경우, 마음은 자기 밖 희미한 뷰를 교리적인 것으로 결정합니다. It was a kind of general obscure perception without any distinctness; for in such a case the mind determines its view outside of itself into the doctrinal things.

2021-07-21(D4)-매일예배(AC.520-522, 창5,23-24), '에녹,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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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YdVSLTJ7wg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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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Enoch walked with God after he begat Methuselah three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창5:22)

 

 

518. ‘하나님과 동행’은 신앙에 관한 교리를 상징합니다. To “walk with God” signifies doctrine concerning faith.

 

그가 ‘자녀들을 낳았다’는 것은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적인 것들을 상징합니다. That he “begat sons and daughters” signifies doctrinal matters concerning truths and goods.

 

 

519. 태고 교회에서 출발, 그 후속 교회들에 이르기까지 퍼셉션에 속했던 사안들로부터 교리들을 추출, 뼈대를 세우며 조직하던 사람들이 그때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한 이유는, 이 교리를 기준으로 사람들이 무엇이 선이요, 진리인지를 알게 하려는 것이었지요. 이 사람들이 바로 ‘에녹’입니다. There were some at that time who framed doctrines from the things that had been matters of perception in the most ancient and succeeding churches, in order that such doctrine might serve as a rule whereby to know what was good and true: such persons were called “Enoch.

 

그리고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라는 표현이 상징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며, 그래서 그들은 그걸 가리켜 교리라 하였는데, 이것은 ‘에녹’이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바와 비슷합니다. 이 이름의 뜻이 ‘가르치다’이기 때문입니다. This is what is signified by the words,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so did they call that doctrine; which is likewise signified by the name “Enoch,” which means to “instruct.

 

동행하다’라는 표현 역시 같은 걸 상징하는데요, 그를 일컬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라 하지 ‘여호와와 동행하였다’라고는 하지 않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신앙의 교리를 따라 가르치며 사는 것이지만, ‘여호와와 동행하는 것’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expression to “walk,” and from the fact that he is said to have “walked with God,” not “with Jehovah”; to “walk with God” is to teach and live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faith, but to “walk with Jehovah” is to live the life of love.

 

행(行)하다, 걷다, 살다’라는 표현은 살아가는 걸 상징하는 일상적인 말투입니다. 예를 들면, ‘법대로 살다’, ‘규범 가운데 살다’, ‘진실하게 살다’처럼 말입니다. To “walk” is a customary form of speaking that signifies to live, as to “walk in the law,” to “walk in the statutes,” to “walk in the truth.

 

행하는 것’은 어떤 길이나 삶, 방식에 대한 적절한 레퍼런스를 갖는 것인데, 이 길은 진리, 곧 신앙 혹은 신앙의 교리와 관련됩니다. To “walk” has reference properly to a way, which has relation to truth, consequently to faith, or the doctrine of faith.

 

말씀에서 ‘행함’이 상징하는 바는 이어지는 구절들을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What is signified in the Word by “walking,” may in some measure appear from the following passages.

 

[2] 미가입니다. In Micah: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He hath showed thee, O man, what is good, and what doth Jehovah require of thee, but to do judgment and the love of mercy, and to humble thyself by walking with thy God?, (미6:8)

 

여기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상징하는 바는 여기서 가리키는 것들을 따라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 ‘하나님과 함께’라는 표현에 대해서, 에녹에 대한 다른 성경(히브리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함께로부터’를 상징하고 있는데, 이 표현은 좀 애매합니다. where to “walk with God” signifies to live according to the things here indicated; here, however, it is said “with God,” while of Enoch another word is used which signifies also “from with God,” so that the expression is ambiguous.

 

시편입니다. In David: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Thou hast delivered my feet from impulsion, that I may walk before God in the light of the living, (시56:13)

 

여기 ‘하나님 앞에서 다니는 것’은 신앙의 진리, 곧 ‘생명의 빛’ 가운데 다니는 것입니다. where to “walk before God” is to walk in the truth of faith, which is the “light of the living.

 

이사야에서도 같습니다. In like manner in Isaiah: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The people that walk in darkness see a great light. (사9:2)

 

또한 주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So the Lord says by Moses: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I will walk in the midst, and will be your God, and ye shall be my people, (레26:12)

 

율법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할 것을 상징하십니다. signifying that they should live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the law.

 

[3]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 별 아래에서 펼쳐지게 하리니 They shall spread them before the sun, and the moon, and to the armies of the heavens, whom they have loved, and whom they have served, and after whom they have walked, and whom they have sought, (렘8:2)

 

여기 보면, 사랑 관련된 것들과 신앙 관련된 것들 사이에 뚜렷한 차이를 두는데요, 전자는 ‘사랑하며’와 ‘섬기며’로, 후자는 ‘뒤따르며’와 ‘구하며’로 각각 표현하고 있습니다. where a manifest distinction is made between the things of love, and those of faith; the things of love being expressed by “loving” and “serving”; and those of faith by “walking” and “seeking.

 

모든 예언서들을 보면, 모든 표현들을 아주 정교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표현을 다른 걸로 적당히 대신하거나 섞어 쓰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In all the prophetical writings every expression is used with accuracy, nor is one term ever used in the place of another.

 

말씀에서 ‘여호와와 함께 걷다’나 ‘여호와 앞에’라는 표현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But to “walk with Jehovah,” or “before Jehovah,” signifies, in the Word, to live the life of love.

2021-07-20(D3)-매일예배(AC.518-519, 창5,22), '에녹, 하나님과 동행'.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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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FysJC29GAI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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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And Enoch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Methuselah. (창5:21)

 

 

516. 전에 말씀드린 대로, ‘에녹’은 일곱 번째 교회를, ‘므두셀라’는 여덟 번째 교회를 각각 상징합니다. By “Enoch,” as before said, is signified a seventh church; and by “Methuselah” an eighth.

 

 

517. ‘에녹’이라는 교회의 퀄러티는 이어지는 절들에서 설명합니다. The quality of the church “Enoch” is described in the following verses.

2021-07-19(D2)-매일예배(AC.516-517, 창5,21), '에녹, 일곱 번째 교회'.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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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bgzGBjXp1v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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