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에 해당되는 글 352건

  1. 2024.04.03 AC.372, 창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AC.370-372)
  2. 2024.04.03 AC.371, 창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AC.370-372)
  3. 2024.04.03 AC.370, 창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AC.370-372)
  4. 2024.04.03 성독(聖讀).HH.51-58, 7장, '각 천사는 가장 작은 천국이다'
  5. 2024.04.03 AC.369,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AC.366-369) -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의 속뜻
  6. 2024.04.03 AC.368,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AC.366-369) - ‘들’의 속뜻
  7. 2024.04.03 AC.367,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AC.366-369) - 체어리티는 신앙의 '아우', 둘 사이 생득권, 장자권 분쟁
  8. 2024.04.03 AC.366,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AC.366-369) -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의 속뜻
  9. 2024.04.03 AC.365, 창4:7,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AC.361-365) -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의 속뜻
  10. 2024.04.03 AC.364, 창4:7,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AC.361-365) -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의 속뜻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키는 자’, 그러나 안타깝게도 신앙은 자기가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 ‘가인이라는 교리를 원리로 삼아 따르고 말음

 

9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372

지키는 자’가 된다는 건 유대 교회의 ‘문지기’나 ‘수위’(문지방을 지키는 자)처럼 섬기는 걸 말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키는 자라고 합니다. 그것이 원래 신앙의 의무이니까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신앙은 자기가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는, ‘가인이라 하는 교리를 원리로 삼아 따르고 말았습니다. 7절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말입니다. To be a “keeper” signifies to serve, like “door keepers” and “porters” (that is, the keepers of the threshold) in the Jewish church. Faith is called the “keeper” of charity, from the fact that it ought to serve it, but it was according to the principles of the doctrine called “Cain” that faith should rule, as was said in verse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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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태고인들의 퍼셉션, 홍수 후 양심으로 대체됨. 양심 역시 일종의 딕테이션이지만 방식이 다름

 

9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371

태고인들은 자신들의 퍼셉션을 ‘여호와의 스피킹’이라는 워딩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런 퍼셉션 역량을 주신 분이 주님이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퍼셉션은 사랑이 주(主, the principal)일 동안은 계속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to) 사랑이 식고 그 결과, 이웃을 향한(toward) 사랑 또한 식으면 퍼셉션은 사라졌습니다만, 그러나 아직 사랑이 남아 있는 한은 퍼셉션도 남아 있었습니다. 이러한 퍼셉션 역량은 태고교회에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홍수 후 세대처럼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고,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해서 주어지자 양심이라는 게 그 뒤를 이었습니다. 이 양심이라는 것 또한 일종의 딕테이트를 주는 건데 방식은 다릅니다.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양심이 딕테이트할 때, 그것은 말씀에 나오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와 같은 식입니다. 양심은 계시와 지식, 그리고 말씀으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말씀(the Word) 말씀하시거나(speaks) 딕테이트하실 때, 말씀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런 까닭에 심지어 오늘날에조차 양심, 혹은 신앙에 관한 걸 언급하면서 ‘주께서 말씀하십니다’라고 하는 것보다 더 일반적인 표현은 없습니다. By the “speaking of Jehovah” the most ancient people signified perception, for they knew that the Lord gave them the faculty to perceive. This perception could continue no longer than while love was the principal. When love to the Lord ceased, and consequently love toward the neighbor, perception perished; but insofar as love remained, perception remained. This perceptive faculty was proper to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hen faith became separated from love, as in the people after the flood, and charity was given through faith, then conscience succeeded, which also gives a dictate, but in a different way,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When conscience dictates, it is in like manner said in the Word that “Jehovah speaks”; because conscience is formed from things revealed, and from knowledges, and from the Word; and when the Word speaks, or dictates, it is the Lord who speaks; hence nothing is more common, even at the present day, when referring to a matter of conscience, or of faith, than to say, “the Lord s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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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의 속뜻

 

9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37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는 그들에게 체어리티, 혹은 ‘아우 아벨’에 관하여 일종의 딕테이트(dictate)를 준 어떤 퍼셉션 같은 것(perceptivity)을 말합니다. 가인의 대답,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뭣도 아닌 걸로 여겼음을, 그리고 체어리티가 원하는 대로 하는 걸 마음에 내켜 하지 않았고 그 결과, 체어리티와 관련된 모든 걸 거부했다는 말입니다. 그런 게 그들의 교리가 되었습니다. Jehovah said unto Cain” signifies a certain perceptivity from within that gave them a dictate concerning charity or the “brother Abel.” Cain’s reply,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signifies that faith considered charity as nothing, and was unwilling to be subservient to it, consequently that faith altogether rejected everything of charity. Such did their doctrine be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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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각 공동체는 보다 작은 형태의 천국이고, 각 천사는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이다

Each Society Is a Heaven in a Smaller Form, and Each Angel in the Smallest Form

천국과지옥.1.7.51-58.'각 천사는 가장 작은 천국이다'.sca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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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51, '각 공동체는 보다 작은 형태의 천국이고, 각 천사는...'(HH.7.51-58)

※ 각 공동체가 작은 형태의 천국이고, 각 천사가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인 까닭은, 사랑과 신앙의 선이 천국을 이루기 때문이며, 이 선이 모든 공동체와 거기 속한 천사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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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52, '각 공동체는 보다 작은 형태의 천국이고, 각 천사는...'(HH.7.51-58)

※ 주께서 천사들 가운데 나타나실 때, 여럿에게 둘러싸인 한 분으로 보이지 않으시고, 그 전체의 모습이 하나가 되어 천사 한 명의 형상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성경에서 ‘천사’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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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53, '각 공동체는 보다 작은 형태의 천국이고, 각 천사는...'(HH.7.51-58)

※ 천사의 마음 안에 있는 내면성들은 천국의 형태로 배치되어 있으며, 따라서 자기 외부에 있는 천국의 모든 것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있다.  7각 공동체는 보다 작은 형태의 천국이고,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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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54, '각 공동체는 보다 작은 형태의 천국이고, 각 천사는...'(HH.7.51-58)

※ 천국은 사람 안에 있다. 모든 천사는 그 자신 안에 있는 천국에 따라서 밖에 있는 천국을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천국 가는 것이 단순히 천사들 있는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라고 믿거나,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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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55, '각 공동체는 보다 작은 형태의 천국이고, 각 천사는...'(HH.7.51-58)

※ 모든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천국의 특성에 맞게 밖에 있는 천국을 받아들이고, 마찬가지로 주님을 받아들인다. 천국은 주의 신성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께서 천국 공동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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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56, '각 공동체는 보다 작은 형태의 천국이고, 각 천사는...'(HH.7.51-58)

※ 공동체마다 선이 각기 달라서 주님을 예배하는 형태도 다양한데, 이것은 해롭지 않고, 오히려 유익하다. 천국의 완벽함은 다양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7각 공동체는 보다 작은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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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57, '각 공동체는 보다 작은 형태의 천국이고, 각 천사는...'(HH.7.51-58)

※ 천국에 대해 말한 것은 그대로 교회에 적용된다. 교회는 땅 위의 천국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교회가 있지만, 그 안에서 사랑과 신앙이 주도하는 한, 모두 교회라 할 수 있고, 사실 교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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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58, '각 공동체는 보다 작은 형태의 천국이고, 각 천사는...'(HH.7.51-58)

※  7각 공동체는 보다 작은 형태의 천국이고, 각 천사는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이다Each Society Is a Heaven in a Smaller Form,and Each Angel in the Smallest Form 58끝으로 말해둘 것은, 자기 안에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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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69,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AC.366-369) -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의 속뜻

 

8절,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369

그래서 이상으로부터 이어지는 내용은 본문,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의 의미인데요, 그것은 신앙과 체어리티는 둘 다 교리적으로는 신앙의 교리로부터 말미암았음에도 불구, 신앙, 얘가 문젠데... 곧 애써 자기를 사랑에서 분리 및 체어리티를 무시, 반드시 체어리티를 지배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래서 결국은 체어리티의 불을 꺼트리고야 마는 게 신앙이라는 내용인데요, 오늘날의 경우, 체어리티의 실천은 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바로 이런 걸로 그들은 체어리티의 불을 꺼트리기 때문인데요, 아무리 그들이 사랑 없이 신앙 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고, 입술로 고백할지라도 말입니다. From this then it follows that the words “Cain rose up against his brother Abel, and slew him,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ogether,” denote that while both faith and charity were from the doctrine of faith, yet faith separate from love could not but disregard and thereby extinguish charity; as is the case at the present day with those who maintain that faith alone saves, without a work of charity, for in this very supposition they extinguish charity, although they know and confess with their lips that faith is not saving unless there is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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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68,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AC.366-369) - ’의 속뜻

 

8절,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368

’이 교리를, 그리고 결과적으로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것이면 무엇이든 의미한다는 것은 다음 예레미야 말씀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a “field” signifies doctrine, and consequently whatever belongs to the doctrine of faith and charity, is evident from the Word, as in Jeremiah:

 

들에 있는 나의 산아 네 온 영토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네 재산과 네 모든 보물과 산당들로 노략을 당하게 하리니 (렘17:3) O my mountain in the field, I will give thy possessions [facultates] and all thy treasures for a spoil. (Jer. 17:3)

 

이 구절에서 ‘’은 교리를, ‘재산’과 ‘보물’은 신앙의 영적인 부(富), 혹은 신앙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가리킵니다. 다음 말씀도 같습니다. In this passage “field” signifies doctrine; “possessions” and “treasures” denote the spiritual riches of faith, or the things that belong to the doctrine of faith. In the same: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바위를 떠나겠으며 먼 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 (렘18:14) Shall the snow of Lebanon fail from the rock of my field? (Jer. 18:14)

 

시온을 향하여 선포하시기를, 신앙의 교리가 결핍되면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라 하십니다. (렘26:18; 미3:12) 에스겔에서 It is declared concerning Zion, when destitute of the doctrine of faith, that she shall be “plowed like a field.” (Jer. 26:18, Micah 3:12) In Ezekiel:

 

그 땅의 종자를 꺾어 옥토에 심되 수양버들 가지처럼 큰 물 가에 심더니 (겔17:5) He took of the seed of the land, and set it in a field of sowing, (Ezek. 17:5)

 

교회와 교회의 신앙을 다루면서 말입니다. 교리를 일컬어 그 안에 종자, 씨가 심긴 ‘’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본문에서 treating of the church and of its faith; for doctrine is called a “field” from the seed in it. In the same: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고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겔17:24) And let all the trees of the field know that I Jehovah bring down the high tree. (Ezek. 17:24)

 

요엘입니다. In Joel:

 

10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마르니 곡식이 떨어지며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 11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밭의 소산이 다 없어졌음이로다 12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니 (욜1:10-12) The field is laid waste, the ground mourneth, for the corn is wasted, the new wine is dried up, the oil languisheth, the husbandmen are ashamed, the harvest of the field is perished, all the trees of the field are withered, (Joel 1:10–12)

 

여기 ‘’은 교리를, ‘나무’는 지식들을, ‘농부들’은 예배자들을 말합니다. 시편에서 where the “field” signifies doctrine, “trees” knowledges, and “husbandmen” worshipers. In David:

 

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 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시96:12) The field shall exult and all that is therein; then shall all the trees of the forest sing, (Ps. 96:12)

 

여기 ‘’이 어떻게 기뻐 어쩔 줄 몰라 하겠으며, ‘숲의 모든 나무들’이 어떻게 노래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사람 안에 있는 것들, 곧 신앙에 관한 지식들 얘기임이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예레미야에서 where it is perfectly evident that the field cannot exult, nor the trees of the forest sing; but things that are in man, which are the knowledges of faith. In Jeremiah: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렘12:4) How long shall the land mourn, and the herb of every field wither? (Jer. 12:4)

 

여기서도 분명한 것은 ‘’도, ‘지방의 채소’도 슬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들은 황폐한 상태 가운데 있는 사람의 어떤 것에 관한 것입니다. 비슷한 구절이 이사야에도 나옵니다. where it is also evident that neither the land nor the herbs of the field can mourn; but that the expressions relate to something in man while in a state of vastation. A similar passage occurs in Isaiah: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사55:12) The mountains and the hills shall break forth before you into singing, and all the trees of the field shall clap their hands. (Isa. 55:12)

 

주님 또한 세상 종말 관련 예언 가운데 신앙의 교리를 가리켜 ‘’이라 하십니다. The Lord also in his prediction concerning the consummation of the age calls the doctrine of faith a “field:”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마24:40; 눅17:36) Then shall two be in the field, the one shall be taken and the other left, (Matt. 24:40; Luke 17:36)

 

※ 개역개정 한글 성경에는 눅17:36 본문이 ‘(없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 ‘’은 신앙의 교리, 곧 참된 교리, 거짓된 교리 둘 다를 의미합니다. ’이 교리를 가리키기 때문에, 신앙의 씨앗을 받아들이는 그 누구든, 그것이 사람이든, 교회든, 아니면 세상이든 또한 일컬어 ‘’이라 합니다. where by a “field” is meant the doctrine of faith, both true and false. As a “field” signifies doctrine, whoever receives a seed of faith, whether a man, the church, or the world, is also called a “field.”

 

 

유다의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 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렘26:18)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 (미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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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67,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AC.366-369) - 체어리티는 신앙의 '아우', 둘 사이 생득권, 장자권 분쟁

 

8절,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367

체어리티가 신앙의 ‘아우’라는 것, 그리고 ‘’이 교리에 속한 것이면 무엇이든 의미한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말고는 굳이 말씀 내 유사 구절들을 찾아 이들을 컨펌할 필요는 없지 싶습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의 아우라는 사실은 신앙의 본성이나 본질상 누구에게나 자명합니다. 이 형제지간이 에서와 야곱으로 표현되었으며, 그 생득권(生得權, the birthright) 및 그로 인한 주도권 다툼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유다로 말미암은 다말의 두 아들, 베레스와 세라로 (38:28-30), 또 에브라임과 므낫세로도 표현되었습니다 (48:13-14). 이 둘도 다른 유사한 경우들과 같이 장자권(長子權, the primogeniture)과 그로 인한 주도권 다툼이 있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교회의 자식들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남자라 합니다. 본 장 1절의 가인처럼 말이지요. 그리고 체어리티는 아우라 합니다. 19:2, 13:14 및 다른 데서들처럼 말이지요. 신앙과 체어리티의 연합을 형제의 계약’(1:9)이라 합니다. 가인과 아벨의 상징과 비슷한 것이 방금 말씀드린 야곱과 에서의 상징이었습니다. 야곱 또한 그의 형 에서를 대신하고 싶어 했다는 점에서 그런데요, 호세아를 봐도 분명합니다. It is unnecessary to confirm these things by similar passages from the Word, except so far as to prove that charity is the “brother” of faith, and that a “field” signifies whatever is of doctrine. That charity is the “brother” of faith is evident to everyone from the nature or essence of faith. This brotherhood was represented by Esau and Jacob, and was the ground of their dispute about the birthright and the consequent dominion. It was also represented by Pharez and Zarah, the sons of Tamar by Judah (Gen. 38:28, 29, 30); and by Ephraim and Manasseh (Gen. 48:13, 14); and in both of these, as well as in other similar cases, there is a dispute about the primogeniture and the consequent dominion. For both faith and charity are the offspring of the church. Faith is called a “man,” as was Cain, in verse 1 of this chapter, and charity is called a “brother,” as in Isa. 19:2; Jer. 13:14; and other places. The union of faith and charity is called “the covenant of brethren.” (Amos 1:9) Similar to the signification of Cain and Abel was that of Jacob and Esau, as just said; in that Jacob also was desirous of supplanting his brother Esau, as is evident also in Hosea:

 

2야곱을 그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 3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호12:2-3) To visit upon Jacob his ways, according to his doings will he recompense him; he supplanted his brother in the womb. (Hos. 12:2–3)

 

그러나 에서, 곧 에서로 표현된 체어리티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주도권을 쥘 것이라는 내용이 그들의 아버지 이삭의 예언을 보면 나옵니다. But that Esau, or the charity represented by Esau, should nevertheless at length have the dominion, appears from the prophetic prediction of their father Isaac: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창27:40) By thy sword shalt thou live, and shalt serve thy brother; and it shall come to pass, when thou hast the dominion, that thou shalt break his yoke from off thy neck. (Gen. 27:40)

 

또한 같은 건데요, 이방인들의 교회, 혹은 새 교회는 에서로, 유대인들의 교회는 야곱으로 표현됩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형제로 인정해야 한다는 말을 그렇게 자주 듣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교회, 혹은 원시 교회에서는 체어리티로 말미암아 모두 서로를 형제라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도 누가복음에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을 형제라 하고 계십니다. (8:21)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신앙의 사람들이요, 말씀을 행하는 사람들은 체어리티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으면서, 혹은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 행함은 없는, 혹은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형제가 아닙니다. 주님이 이런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들에 비유하셨기 때문입니다. (7:24, 26)  Or what is the same, the church of the gentiles, or new church, is represented by Esau, and the Jewish church is represented by Jacob; and this is the reason for its being so often said that the Jews should acknowledge the gentiles as brethren; and in the church of the gentiles, or primitive church, all were called brethren, from charity. Such as hear the Word and do it are likewise called brethren by the Lord (Luke 8:21); those who hear are such as have faith; those who do are such as have charity; but those who hear, or say that they have faith, and do not, or have not charity, are not brethren, for the Lord likens them unto fools (Matt. 7:24, 26).

 

 

28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손에 매었더니 29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30그의 형 곧 손에 홍색 실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창38:28-30)

 

13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14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창48:13-14)

 

내가 애굽인을 격동하여 애굽인을 치리니 그들이 각기 형제를 치며 각기 이웃을 칠 것이요 성읍이 성읍을 치며 나라가 나라를 칠 것이며 (사19:2)

 

또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 사이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사랑하지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13:1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음이라 (암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눅8:21)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7:2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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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66,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AC.366-369) -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의 속뜻

 

8절,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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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는 일종의 시간 간격, 즉 시간이 흘렀음을 말합니다. 가인은 앞서 기술(記述)처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 곧 신앙의 아우를 말하며, 그래서 여기 그는 두 번 아우라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field)은 무엇이든지 교리에 속한 것이면 다 입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는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의 불을 꺼트렸음을, 즉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음을, 끝장냈음을 말합니다. Cain spake to Abel” signifies an interval of time. Cain,” as before stated, signifies faith separated from love; and “Abel” charity, the brother of faith, on which account he is here twice called his “brother.” A “field” signifies whatever is of doctrine.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signifies that separated faith extinguished ch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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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65, 창4:7,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AC.361-365) -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의 속뜻

 

7절,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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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입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는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지내기를 무척 원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 게, 신앙은 오히려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질서에 역행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주도권을 쥐려 하는 한, 그런 건 신앙이 아닙니다. 오직 체어리티의 지배하에서만 신앙이 됩니다. 위에서 보여드린 것처럼, 체어리티가 신앙보다 주(, the principal)이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를 불에 비유할 수 있겠는데요, 불은 열과 빛의 본질이지요. 열과 빛이 불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분리 상태에 있는 신앙은 마치 빛은 빛인데 열 없는 빛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빛은 있어도 만물이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겨울철 빛 말입니다. In the third place it is said, “Un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by which is signified that charity is desirous to abide with faith, but cannot do so because faith wishes to rule over it, which is contrary to order. So long as faith seeks to have the dominion, it is not faith, and only becomes faith when charity rules; for charity is the principal of faith, as was shown above. Charity may be compared to flame, which is the essential of heat and light, for heat and light are from it; and faith in a state of separation may be compared to light that is without the heat of flame, when indeed there is light, but it is the light of winter in which everything becomes torpid and 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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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64, 창4:7,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AC.361-365) -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의 속뜻

 

7절,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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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는 만일 네가 선을 행할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너는 체어리티의 사람이 아니고 대신 악인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가 안으로 들어가고자 준비를 마치고 대기 중인 악을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체어리티가 모두 사라지게 되면, 그때는 오직 무자비함과 증오, 결과적으로는 모든 악만 남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죄를 가리켜 악마(the devil)라고 하지요, 이 악마는 체어리티가 결핍된 사람에게 아주 가까이 와 있는, 지옥과도 같이 끔찍한 그의 동료입니다. 마음 문 앞에 와 있는 이 악마와 그의 동료를 쫓아버리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Secondly, it is sai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which signifies, If thou art not well disposed, there is no charity present, but evil. Everybody can see that “sin lying at the door” is evil ready and desirous to enter; for when there is no charity there are unmercifulness and hatred, consequently all evil. Sin in general is called the “devil,” who, that is, his crew of infernals, is ever at hand when man is destitute of charity; and the only means of driving away the devil and his crew from the door of the mind is love to the Lord and toward the neighb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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