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죽음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실제 상태를 조용히 밝혀 주는 설교입니다.

 

25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요11:25, 26)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시116:15)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고후5:1)

 

오늘 우리는 한 사람의 삶이 끝났다는 사실 앞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늘을 ‘’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땅의 장막을 벗고, 다른 집으로 옮겨 가는 날’이라고 말합니다. 장례 예배는 죽음을 애써 미화하는 자리가 아니며, 동시에 죽음을 두려움으로 덮어 버리는 자리도 아닙니다. 장례 예배는 ‘주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보시는가’를 다시 배우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과 천국의 관점에서 보면, 정확한 표현은 ‘사람이 이 땅에서의 역할을 마쳤다’입니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육체가 아니라 영이며, 육체는 이 세상에서 잠시 사용하는 도구요 옷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 벌의 옷이 벗겨진 것을 보고 있지만, 그 사람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장래의 어떤 먼 사건을 가리키는 말씀이 아닙니다. 부활은 이미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며, 죽음은 그것을 완성시키는 문과 같습니다. 사람이 죽는 순간, 그는 무(無)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분명한 ‘자기 자신’으로 깨어납니다.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증언한 것 중 하나는 이것입니다. ‘사람은 죽은 직후에도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는 여전히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고, 기억하고,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더 이상 육체의 무게와 시간의 제약 속에 있지 않을 뿐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죽음’이라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의 이동’, 혹은 ‘외적 삶에서 내적 삶으로의 전환’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겪는 이 이별은, 그분의 관점에서는 ‘분리’가 아니라 ‘이동’입니다.

 

우리는 종종 장례 자리에서 ‘이제 고인의 모든 고통이 끝났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부분적으로만 옳습니다. 육체의 고통은 끝났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여전히 자기 삶의 방향과 성향, 사랑의 질을 그대로 지니고 살아갑니다. 천국은 ‘선한 사람을 갑자기 선하게 만드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 평생 사랑해 온 것을 드러내는 세계’입니다.

 

이 점에서 장례 예배는 남아 있는 우리에게 더 직접적인 말씀을 던집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왔는가?’ 이것은 신앙 고백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실제 문제입니다. 사람은 죽은 후, 자신이 입으로 말한 신앙이 아니라, 마음 깊이 붙들고 살았던 사랑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이 두려움의 날이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진실한 위로의 날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혼자 죽게 두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죽음의 순간에 천사들과 영적 세계의 인도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낯선 어둠 속으로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질서와 배려 속에서 다음 삶으로 안내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경건한 자들의 죽음이 귀하다’는 말은, 그 죽음이 슬픔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소중히 여기시며,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직접 돌보신다는 뜻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그 어떤 인생도 하찮지 않으며, 그 어떤 생도 허무하게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눈물 흘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물은 절망의 눈물이 아니라, 사랑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분은 이미 나사로가 살아날 것을 알고 계셨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슬픔은 믿음 없음의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의 증거입니다. 다만 주님은 우리에게 이 슬픔이 ‘절망으로 굳어지지 않도록’ 진리를 주십니다. ‘너희는 소망 없는 자와 같이 슬퍼하지 말라’는 말씀은 ‘슬퍼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슬픔이 끝내 모든 것을 삼키게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고린도후서에서 말하는 ‘하늘에 있는 집’은 추상적인 비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삶의 터전입니다. 그곳에서 사람은 더 이상 시간에 쫓기지 않고, 비교에 시달리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꾸미지 않아도 됩니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자기와 맞는 공동체 안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오늘 고인을 떠나보내지만, 주님은 고인을 ‘받아들이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두 사건은 동시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작별과, 저편에서의 환영이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흘리는 눈물 위에, 천국의 평안이 이미 겹쳐지고 있습니다.

 

장례 예배는 죽은 이를 위한 예배이기보다, 산 자를 깨우는 예배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 각자의 마음에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너의 생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너는 무엇을 영원으로 가져갈 것인가?’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의 질, 사랑의 퀄리티’뿐입니다.

 

오늘의 이별은 마지막이 아닙니다. 다만 서로 다른 세계에서의 잠정적인 분리일 뿐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관계는 결코 끊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맺어진 것은 죽음으로 해체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형태를 바꿀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슬픔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 한 사람의 생이 주님 앞에서 헛되지 않았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도 여전히 주님의 손 안에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마음에 남기고자 합니다.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라, 삶의 연장이다.’ 단지 무대가 바뀌고, 빛이 더 분명해질 뿐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살아 계시며, 산 자와 죽은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주님께 우리의 눈물과 질문, 그리고 남은 날들을 맡깁니다. 아멘.

 

2026-01-17(D7)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교회 음악과 찬양에 관한 언급이 상대적으로 적은 이유

개신교를 비롯, 전체 기독교에서는 예배와 생활 속에서 교회 음악과 찬양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스베덴보리 저작을 보면 상대적으로 언급이 적은 것 같아요. 왜 그런 건가요? 1. 문제 제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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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1 해설 중 ‘극히 미세하고 개별적인 인식’이라는 게 무엇인지?

위 521 해설 중 ‘퍼셉션은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 상태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극히 미세하고 개별적인 인식이기 때문에, 언어로 고정해 설명하는 순간 이미 그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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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 해설 중 퍼셉션은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 상태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극히 미세하고 개별적인 인식이기 때문에, 언어로 고정해 설명하는 순간 이미 그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라는 문장에서 극히 미세하고 개별적인 인식’, 이 부분이 잘 잡히지 않습니다. 혹시 좀 더 선명한 설명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퍼셉션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개념적 이해나 논리적 판단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인식입니다. 그것은 정보를 모아 분석한 결과도 아니고, 규칙을 적용해 도출한 결론도 아닙니다. 퍼셉션은 선과 진리를 직접 감지하고 즉각적으로 알아차리는 인식으로, 생각이 작동하기 이전에 이미 방향이 주어지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퍼셉션은 배우는 대상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며, 설명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상태로 작동합니다.

 

이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미세하다’는 표현은 퍼셉션이 불분명하거나 흐릿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퍼셉션은 너무 정밀해서 일반적인 언어로는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퍼셉션은 어떤 상황을 볼 때, 그 상황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를 분리하지 않고 한꺼번에 인식합니다. 말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 듣는 사람의 준비 정도, 관계의 맥락, 시기의 적절성, 그리고 그 선택이 불러올 결과까지가 동시에 감지됩니다. 이 모든 요소가 하나의 인식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퍼셉션은 매우 정교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퍼셉션은 항상 개별적으로 작동합니다. 같은 말, 같은 행동이라 하더라도 퍼셉션은 그것을 상황마다 다르게 인식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선이 되지만, 다른 경우에는 침묵하는 것이 선이 됩니다. 이 차이는 원칙을 어긴 결과가 아니라, 상태, 곧 상황이,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분별의 차이입니다. 퍼셉션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의 상태’를 기준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모든 경우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판단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퍼셉션은 교리와 뚜렷하게 구별됩니다. 교리는 전달되기 위해 반드시 일반화를 필요로 합니다. ‘항상’, ‘대체로’, ‘원칙적으로’와 같은 표현이 없으면 교리는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경우를 하나의 틀로 묶어야 가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퍼셉션은 이러한 일반화 자체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퍼셉션은 언제나 이번 경우를 보고, 지금 상태를 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을 언어로 고정해 설명하는 순간 이미 그 본질을 놓치게 된다고 말합니다. 언어는 필연적으로 경계를 긋고, 흐름을 멈추고, 판단을 고정합니다. 그러나 퍼셉션은 흐르며, 상태에 따라 달라지며, 살아 움직입니다. 살아 있는 분별을 문장이나 규칙으로 붙잡아 두려는 순간, 우리는 그 생명 대신 틀만 붙잡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든 사고의 비유는 이 점을 매우 잘 보여 줍니다. 바르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에게 사고의 규칙을 가르치면, 오히려 사고의 자유로움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이는 사고능력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외적인 규칙에 매이면서 내적 판단이 위축되기 때문입니다. 퍼셉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내적인 빛으로 알고 있는 것을 규칙으로 다시 배우게 하면, 그 인식은 점차 경직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천적인 사람의 퍼셉션은 묘사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흐릿하거나 불분명해서가 아니라, 너무 구체적이고 상황 의존적이며 살아 있어서 일반 개념으로 묶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퍼셉션은 숙련된 장인이 재료를 다루며 느끼는 감각과 비슷합니다. 그 감각은 말로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실제 작업에서는 매우 정확하게 작동합니다. 천국의 천사들이 바로 이런 퍼셉션으로 생활하며, 그래서 그들은 일상 대인관계나 지상의 누구를 도울 때 실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퍼셉션으로 섬기기 때문에 온전하며, 완전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동시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분명히 말합니다. 이러한 퍼셉션 능력은 장차 사라질 것이었고, 실제로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이후의 인류는 더 이상 내적인 빛으로 즉각 알지 못하고, 교리를 통해 배우며 점진적으로 선과 진리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이 전환을 대비하여, 에녹이라는 교회에게 퍼셉션 내용을 교리로 정리하는 일이 허락되었던 것입니다.

 

에녹의 교회는 퍼셉션 자체를 살아내는 교회가 아니라, 퍼셉션을 기억하고 보존하는 역할을 맡은 교회였습니다. 그 교리는 퍼셉션 그 자체는 아니지만, 퍼셉션이 다시 회복될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라는 표현은, 이 교리가 인간의 판단이나 역사적 우연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 안전하게 보존되었음을 뜻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설명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 현실을 깊이 비춥니다. 우리는 대부분 교리를 통해 신앙을 배웁니다. 이것은 잘못이 아니라, 현재 인류의 상태에 맞는 방식입니다. 다만 교리가 곧 생명이라고 착각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교리는 빛을 가리키는 창이지, 빛 그 자체는 아닙니다.

 

정리하면, 퍼셉션이 ‘미세하고 개별적’이라는 말은 선과 진리를 규칙이나 원칙이 아니라 각 상태와 순간 속에서 직접 분별하는 살아 있는 인식을 뜻합니다. 이 인식은 너무 살아 있어서 언어로 고정될 수 없고, 교리로 완전히 담길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퍼셉션은 사라졌고, 대신 교리가 보존되었습니다. 이 흐름을 이해할 때, 에녹의 교회와 그 보존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2026-01-16(D6)

 

 

 

스베덴보리 버전 장례 설교

아래는 ‘죽음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실제 상태’를 조용히 밝혀 주는 설교입니다. 25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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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는 ‘Apocalypse Explained’를 왜 완성하지 않았나요?

요한계시록 관련, 스베덴보리의 저작은 두 가지가 있지요.이중 ‘Apocalypse Explained’라는 저작이 있는데,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왜 완성을 하지 않았나요? 19장 10절인가까지만 나오네요... 스베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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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관련, 스베덴보리의 저작은 두 가지가 있지요.이중 Apocalypse Explained라는 저작이 있는데,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왜 완성을 하지 않았나요? 1910절인가까지만 나오네요...

 

 

스베덴보리가 요한계시록을 다룬 저작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뉩니다. 하나는 ‘Apocalypse Explained’이고, 다른 하나는 ‘Apocalypse Revealed’입니다. 이 둘은 단순히 ‘초기작’과 ‘후기작’의 차이가 아니라, 요한계시록을 대하는 태도와 방법론 자체가 달라졌음을 보여 주는 징표입니다. 특히 ‘Apocalypse Explained’가 요한계시록 1910절에서 갑자기 멈춘 사실은 오랫동안 독자들에게 의문을 남겨 왔습니다. 그러나 이 중단은 우연이나 실패가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의 신학적 분별에서 나온 매우 의미 있는 선택으로 보아야 합니다.

 

Apocalypse Explained’는 본래 스베덴보리가 성경 전체를 주석하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작업입니다. 그는 이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통해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절 단위로 해설하는 방식을 충분히 경험했습니다. 그 경험은 ‘말씀은 절마다 내적 의미를 지니며, 그 의미는 상응을 통해 체계적으로 열릴 수 있다’는 확신을 낳았습니다. 요한계시록 역시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당연해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속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실제로 방대한 분량을 써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창세기나 출애굽기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책입니다. 이 책은 역사적 사건의 서술도 아니고, 교회의 외적 제도를 설명하는 책도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의 종말과 새 교회의 도래’를 상징적, 예언적으로 다루는 책입니다. 그만큼 상징의 밀도가 높고, 같은 개념이 반복적으로 변주되며, 시간적 순서조차 외적으로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Apocalypse Explained’가 점점 방대해지고 반복이 많아진 이유는, 바로 이 책의 성격 때문이었습니다. 설명을 더하면 더할수록, 오히려 중심 메시지가 흐려질 위험이 생겼던 것입니다.

 

중단 지점이 요한계시록 1910절이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 절은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는 선언으로, 요한계시록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원리를 요약합니다. 또한 구조적으로 보면, 이 지점은 바벨론의 심판과 옛 교회의 붕괴가 사실상 끝나고, ‘어린양의 혼인’과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가기 직전입니다. 다시 말해, ‘무너질 것’에 대한 설명은 거의 다 끝났고, 이제 ‘세워질 것’이 전면에 등장하는 문턱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지점에서, 지금까지 사용해 온 ‘끝없는 주석 방식’이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이 ‘설명되어야 할 책’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열려 드러내어져야 할 책’이라는 확신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표현상의 변화가 아니라, 신학적 태도의 변화입니다. ‘설명(explain)은 인간 이성의 단계적 분석을 전제로 합니다. 반면 ‘계시(reveal)는 주님이 이미 보여 주신 구조를 받아 적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더 이상 요한계시록을 인간의 설명으로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새 교회를 위해 열어 두신 핵심 구조를 간결하고 분명하게 제시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판단의 결과가 바로 ‘Apocalypse Revealed’입니다. 이 저작은 분량 면에서도, 문체 면에서도 ‘Apocalypse Explained’와 현저히 다릅니다. 반복은 줄어들고, 구조는 정제되며, 교회론과 종말론의 핵심만이 남습니다. 특히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 대한 설명이 상대적으로 짧은 것은, 그 내용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미 충분히 드러났기 때문’이라는 인식 때문입니다. 설명을 늘리는 대신, 방향을 분명히 제시하는 것이 목적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Apocalypse Explained’의 미완성은 실패나 중단이 아니라, ‘방식의 포기’이자 ‘사명의 정련’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끝까지 설명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로 선택했습니다. 이는 그가 자신의 저작을 ‘학문적 성취’가 아니라 ‘주님께서 새 교회를 위해 주신 도구’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필요 없는 것을 남기지 않는 것,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 방식은 과감히 멈추는 것, 이것이 그의 태도였습니다.

 

이 점은 오늘날 말씀을 다루는 목회자와 교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언제까지 설명해야 하는가, 언제 멈추고 주님의 일하심을 신뢰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스베덴보리 역시 피할 수 없었던 문제였습니다. ‘Apocalypse Explained’는 ‘끝까지 설명하려는 열심’의 흔적이고, ‘Apocalypse Revealed’는 ‘이제 주님께서 열어 두신 것을 그대로 제시하려는 신뢰’의 산물입니다. 이 둘이 함께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스베덴보리 신학의 성숙 과정을 보여 줍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Apocalypse Explained’가 1910절에서 멈춘 이유는 ‘시간이 없어서’도,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그것은 스베덴보리가 요한계시록이라는 책의 성격을 더 깊이 분별한 결과이며, 새 교회를 향한 주님의 의도를 더 정확히 전하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이 미완성은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절제의 증거이며, 그의 신학이 한 단계 더 깊어졌음을 보여 주는 조용한 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26-01-16(D6)

 

 

 

AC.521 해설 중 ‘극히 미세하고 개별적인 인식’이라는 게 무엇인지?

위 521 해설 중 ‘퍼셉션은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 상태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극히 미세하고 개별적인 인식이기 때문에, 언어로 고정해 설명하는 순간 이미 그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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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는 어떻게 세상을 떠날 때까지 27년간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나?

저는 지난 2018년 11월부터 스베덴보리 관련 블로그를 시작했습니다만... 지금까지 구독자도, 그리고 글 조회 수나 좋아요 수도 여전히 한 자리 내지는 없기도 합니다. 저는 지난 만 7년을 정말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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