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02 심화

1.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뜻하는가?

 

AC.102에서 스베덴보리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감각적인 것에서 나오는 신앙, 곧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이라고 설명합니다. 처음 읽으면 상당히 낯선 해석입니다. 성경 본문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되어 있는데, 왜 이것을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비롯되는 ‘신앙’의 문제로 해석하는 것일까요? 더구나 이렇게 읽으면 감각이나 지식 자체가 위험하거나 악하다는 뜻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문맥은 그렇게 읽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AC.99에서는 주님께서 천적 인간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감각과 기억지식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그것들이 생명의 질서 안에서 어디에 놓이며, 무엇이 무엇의 근원이 되느냐가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AC.102의 두 나무를 함께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뜻합니다. 여기서는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이 거기서 나옵니다. 그리고 AC.105에 이르면 이 생명나무를 ‘주님의 자비’라고까지 설명합니다.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명나무가 나타내는 질서에서는 신앙의 생명과 근원이 인간의 감각이나 지식이 아니라 주님께 있습니다.

 

반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신앙이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옵니다’. 이 차이가 핵심입니다. 사람이 보고 듣고 배우고 기억한 것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앙의 진실 여부를 스스로 세우려는 질서가 문제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 ‘내가 가진 지식으로 납득할 수 있는가?’가 신앙의 근원을 결정하는 자리에 놓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그러므로 생각하지 말라’, ‘이성을 사용하지 말라’, ‘증거를 살피지 말라’는 뜻으로 확대해서도 안 됩니다. AC.102-106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은 계속 인간 안에 있으며 주님의 유입을 받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섬기는 자리에 있는가, 아니면 그것들 자체가 참과 선을 판정하는 궁극적인 근원이 되는가 하는 질서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이 해석은 반지성주의라기보다 신앙의 생명이 어디에서 시작되는가에 관한 설명으로 읽는 것이 적절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스베덴보리가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서로 다른 신앙의 질서와 연결하는지 조금씩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그 사랑과 신앙의 근원이 주님께 있는 질서이며, 다른 하나는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신앙을 끌어내는 질서입니다. 결국 두 나무의 차이는 단순히 ‘신앙 대 지식’이 아니라, 신앙이 어디에서 생명을 얻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다만 AC.106은 ‘지식의 나무’, 곧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비롯되는 신앙의 본성이 ‘뒤에 이어지는 글들에서 밝혀질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그 의미를 모두 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단계에서 분명히 해 둘 것은 감각과 기억지식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그것들로부터 신앙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생명의 질서라는 점입니다. 왜 그것이 인간의 타락과 연결되는지는 이어지는 설명을 따라가면서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AC.102 심화 1)

 

 

 

AC.102, 창2:9, ‘나무는 퍼셉션,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 (AC.102-106)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99 심화

1. 영적 인간에게서 생명의 질서가 ‘뒤집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99에서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에게서 생명의 질서가 ‘뒤집혀 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강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영적 인간 역시 주님에 의해 거듭나는 사람인데, 그의 생명의 질서가 뒤집혀 있다는 것은 그가 잘못된 상태에 있다는 뜻일까요? 더 나아가 천적 인간이 되기 전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뜻일까요?

 

먼저 AC.99 자체가 말하는 것을 정확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에게도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뒤집혀 있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 아니라 사람 자신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 생명의 근원은 영적 인간에게도 주님입니다. 문제는 그 생명이 흘러드는 실제 질서와 사람이 그것을 경험하고 퍼셉션하는 방식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데 있습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과 싸웁니다. 이 때문에 실제로는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시는데도, 사람에게는 지성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기억지식과 이성을 통하여 나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곧 ‘내가 배우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추론하여 이해하게 되었다’는 방향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AC.99이 말하는 ‘뒤집힘’은 우선 이 질서와 관련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이 관계가 달라집니다.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시며,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싸움이 없으므로 그는 이것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다시 말해 천적 인간은 이성과 기억지식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생명과 지성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그 질서대로 퍼셉션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에게서 뒤집혀 있던 질서가 천적 인간에게서 ‘회복’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단순히 ‘잘못된 사람’과 ‘올바른 사람’, 또는 ‘낮은 사람’과 ‘높은 사람’으로 나누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AC.99가 강조하는 차이는 주님의 유입 자체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둘 다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습니다. 다만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앞서고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의 싸움이 아직 있기 때문에, 그 생명의 실제 근원이 사람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싸움이 그치면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질서가 더 이상 거꾸로 보이지 않고 실제 그러한 것으로 퍼셉션됩니다.

 

따라서 ‘뒤집혀 있다’는 표현 때문에 영적 인간의 신앙과 이성, 기억지식의 삶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AC.99는 그것들 안에도 이미 주님께서 흘러들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다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질서 안에서 그 유입의 근원이 더욱 직접적으로 퍼셉션됩니다. 바로 이 회복된 생명의 질서, 곧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지성이 흘러드는 사람을 스베덴보리는 ‘동쪽 에덴에 있는 동산’이라 합니다. (AC.99 심화 1)

 

 

 

AC.99, 창2:8, ‘영적 인간에게 뒤집혀 있던 생명의 질서가 천적 인간에게서 회복됨’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99영적 인간에게서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러합니다.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97 심화

1. 태고교회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호흡의 상태’로 퍼셉션했는가?

 

AC.97에서 가장 놀라운 대목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사랑과 신앙의 상태들을 호흡의 상태들로 퍼셉션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의 독자라면 자연스럽게 ‘그것이 도대체 어떤 호흡이었는가?’라고 묻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질문 앞에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멈춥니다. 그는 ‘이 호흡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그러한 것들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합니다. 따라서 AC.97을 충실하게 읽으려면 먼저 이 한계를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 번호만으로 태고교회 사람들이 어떤 속도나 방식으로 호흡했는지, 특정한 사랑이나 신앙의 상태에 어떤 호흡이 대응했는지를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이것을 오늘날의 명상 호흡법이나 복식호흡, 호흡 훈련 같은 것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AC.97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어떤 호흡법을 훈련하여 영적 상태에 들어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방향은 반대에 가깝습니다. 그들의 사랑과 신앙의 상태와 호흡의 상태가 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퍼셉션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호흡은 영적 상태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기술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이 점은 지금까지 태고교회의 퍼셉션에 관하여 읽어 온 내용과도 어울립니다. 그들의 퍼셉션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막연한 직감이나 감정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인 퍼셉션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호흡의 상태를 퍼셉션했다는 말도 단순히 자신의 몸 상태를 예민하게 관찰했다는 뜻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호흡이 그들의 후손들에게서 점차 변화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독특한 내적 상태가 후대로 그대로 보존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하지만 ‘다른 삶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안다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이 호흡은 스베덴보리에게 단순한 고대인의 생리적 습관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상태와 관련된 현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AC.97에서 우리가 확실히 붙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사랑과 신앙의 상태와 호흡의 상태 사이에 실제적인 관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 관계는 오늘날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셋째, 따라서 그것을 현대적인 호흡법으로 재현하거나 추측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에 고대인들과 말씀에서 영 또는 생명이 ‘바람’과 ‘숨’으로 표현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대목의 가치는 잃어버린 태고교회의 호흡법을 복원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것보다 훨씬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엿보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왜 창2:7의 ‘생명의 숨’이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라 그들에게 실제적인 의미를 가진 표현이었는지를 이해하게 합니다. 그 이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밝히지 않은 만큼 우리도 여기서는 밝히지 않는 것이 맞습니다. (AC.97 심화 1)

 

 

 

AC.97, 창2:7, '호흡과 숨이 생명을 뜻하는 이유, 태고교회의 퍼셉션'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7생명을 ‘숨을 내쉼’(breathing)과 ‘숨’(breath)으로 묘사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태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96 심화

1. 왜 ‘콧구멍’은 퍼셉션을 뜻하는가?

 

AC.96에서 스베덴보리는 고대와 말씀에서 ‘콧구멍’으로 냄새로 말미암아 기분 좋은 모든 것을 이해했으며, 이것이 퍼셉션을 뜻한다고 합니다.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는 다소 뜻밖의 상응입니다. 눈이 이해나 인식과 관계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만, 왜 코와 냄새가 퍼셉션과 연결되는 것일까요?

 

우선 AC.96이 직접 제시하는 연결을 따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콧구멍’에서 곧바로 퍼셉션으로 뛰어가는 것이 아니라 ‘콧구멍 - 냄새 - 기분 좋은 것 - 퍼셉션’이라는 흐름이 있습니다. 즉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코라는 신체기관 자체보다 냄새를 통하여 어떤 것을 기분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작용입니다.

 

이 점은 지금까지 설명된 천적 인간의 퍼셉션과 잘 연결됩니다. 퍼셉션은 단순히 어떤 명제를 논리적으로 추론하여 결론을 얻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천적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내적으로 퍼셉션합니다. AC.95에서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이 되게 한다고 했고, AC.96에서는 사랑과 신앙에 관한 것들이 주님께 가장 기분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퍼셉션은 사랑과 신앙의 생명과 분리된 지적 판단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냄새의 특징을 생각해 보면 이 표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사람은 어떤 향기를 맡을 때 매번 논리적 추론을 거친 뒤에야 그것이 향기로운지 불쾌한지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냄새는 직접적으로 받아들여지고 그 성질이 감지됩니다. 물론 자연적인 후각과 영적인 퍼셉션이 동일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스베덴보리가 고대의 표현과 말씀에서 냄새와 퍼셉션을 연결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현대적인 의미의 ‘직감’이나 ‘느낌’을 곧바로 퍼셉션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어떤 것에 좋은 느낌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지금 다루는 것은 천적 인간의 상태이며, 그의 사랑과 신앙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질서 안에 놓여 있는 가운데 주어지는 퍼셉션입니다.

 

따라서 ‘콧구멍이 퍼셉션을 뜻한다’는 말을 신체기관 하나와 영적 개념 하나를 기계적으로 짝짓는 상응표로 이해하기보다, 말씀 안에서 냄새와 향기로움이 어떤 것을 받아들이고 그 성질을 퍼셉션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문맥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AC.96은 그 연결을 통하여 창2:7의 ‘콧구멍’이 단순한 해부학적 표현이 아니라 천적 인간의 생명과 퍼셉션에 관계된 표현임을 밝혀 줍니다. (AC.96 심화 1)

 

 

 

AC.96, 창2:7, ‘콧구멍과 향기와 퍼셉션, 사랑과 신앙의 생명을 불어넣으심’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6‘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셨다’(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s)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95 심화

1. 왜 신앙의 생명은 사람을 ‘준비’할 뿐이고,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이 되게 하는가?

 

AC.95의 마지막 문장은 매우 강합니다. ‘신앙의 생명은 그를 준비하지만, 그를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사랑의 생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신앙만으로는 왜 아직 충분하지 않으며, 왜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일까요?

 

이 말을 신앙의 가치를 낮추는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생명이 필요 없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사람을 ‘준비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준비는 없어도 되는 단계가 아닙니다. 사람의 이해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 배우며, 주님과 말씀에 속한 것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은 거듭남의 실제 과정에 속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떤 진리를 이해하고 믿는 것과 그 진리가 그의 의지와 사랑의 생명이 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그것을 원하지 않을 수 있고, 선을 인정하면서도 실제로는 다른 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때 진리는 이해 안에 있지만 아직 사람의 삶 전체를 움직이는 사랑이 된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점에서 신앙의 생명은 사람을 준비합니다.

 

앞의 AC.83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될 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95의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이 되게 한다’는 말은 신앙이 없어지고 사랑만 남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과 하나를 이루고, 사람이 알고 믿는 진리가 그가 사랑하고 원하는 것과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AC.91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와도 연결됩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할 때 싸움이 그칩니다. 단지 이해로 ‘순종해야 한다’고 아는 것만으로는 싸움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닙니다. 겉 사람의 바람 자체가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질서와 조화를 이루기 시작할 때 비로소 그 순종은 억지 복종이 아니라 삶이 됩니다. AC.85에서 주님의 뜻이 천적 인간의 ‘바람’이 된다고 했던 것도 이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사랑은 여기서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원하며 무엇을 자신의 삶으로 삼는가와 관련됩니다. AC.95가 사랑을 의지와 나란히 놓아 ‘사랑 또는 의지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도 이 점을 보여 줍니다. 진리가 이해 안에서 받아들여지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의지와 사랑 안에서 살아날 때, 그것은 실제 삶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생명은 준비하고 사랑의 생명은 사람을 ‘사람’이 되게 한다’는 말은 신앙과 사랑의 경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의 질서를 말합니다. 진리는 사람을 준비하고 인도하지만, 마침내 그 진리가 사랑과 의지의 생명이 되어 사람이 그것을 원하고 살아갈 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룹니다. AC.95가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을 비로소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생명의 질서가 겉 사람에까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AC.95 심화 1)

 

 

 

AC.95, 창2:7, ‘신앙의 생명은 준비하고, 사랑의 생명은 그를 ‘사람’이 되게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5여기서는 겉 사람의 생명을 다룹니다. 앞의 두 절에서는 그의 신앙 또는 이해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94 심화

1. 왜 겉 사람은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는가?

 

AC.94에는 처음 읽으면 상당히 낯설게 느껴지는 표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지면의 흙으로 사람을 형성하셨다’는 것은 겉 사람을 형성하신 것이며, 그 겉 사람은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겉 사람도 분명 그 사람의 일부인데, 왜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할까요?

 

먼저 이것은 그 사람이 이전까지 인간이 아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AC.94의 문법상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은 바로 앞의 ‘그의 겉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근거로 창2:5의 ‘지면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는 말씀을 듭니다. 따라서 질문의 초점은 ‘인간이 언제 인간이 되었는가?’가 아니라 ‘왜 겉 사람을 아직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가?’에 있습니다.

 

그 답을 이해하려면 AC.90-93의 흐름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영적 인간일 때의 겉 사람은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으며, 그 때문에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고,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화의 생명을 받습니다. 따라서 겉 사람이 여기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겉 사람이라는 기능이나 기관이 처음 생긴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참으로 살아 있는 인간적인 것이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사람’이라는 말은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을 지칭하는 말보다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겉 사람은 감각과 이성과 기억지식 등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지만, 그것들이 속 사람과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면 아직 AC.94가 말하는 의미에서 살아 있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그 생명에 따라 활동할 때 비로소 겉 사람도 살아 있는 인간적 질서 안에 들어갑니다.

 

이것은 겉 사람을 멸시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주님께서 거듭나게 하시는 목적은 겉 사람을 버리는 데 있지 않고 겉 사람까지 살아 있게 하는 데 있습니다. AC.94의 마지막은 ‘그의 겉 사람도 생명을 얻게 되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감각과 이성과 기억지식과 외적인 삶 자체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받아 참된 질서 안에서 살아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표현은 인간의 존엄이나 인간됨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거듭남의 질서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사람 안의 어떤 것이 단지 존재하고 활동한다고 해서 곧 영적으로 살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속 사람과 하나의 질서 안에서 활동할 때, 겉 사람까지 참으로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창2:5의 ‘지면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는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면’은 천적 인간의 겉 사람과 연결되고, 이제 그 지면을 경작할 ‘사람’이 형성됩니다. 결국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사람의 내면 어느 한 부분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그의 겉 사람과 실제 삶까지 생명 있게 하시는 역사입니다. (AC.94 심화 1)

 

 

 

AC.94, 창2:7,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 - 겉 사람도 살아 있게 되다’ (AC.94-9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93 심화

1. 왜 ‘셋째 날’은 ‘일곱째 날’과 같은 것을 뜻하는가?

 

AC.93에서 스베덴보리는 호6:2-3을 인용하면서 천적 인간의 이 상태가 ‘셋째 날’에 이루어지며, ‘셋째 날’은 말씀에서 ‘일곱째 날’과 같은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숫자로 보면 3과 7은 전혀 다른데, 어떻게 둘이 같은 것을 뜻할 수 있을까요?

 

먼저 ‘같은 것을 뜻한다’는 말을 숫자 3과 7의 모든 상응이 완전히 동일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93에서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지금까지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상태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두 숫자가 이 특정한 상태를 나타내는 점에서 서로 만난다고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앞에서 ‘일곱째 날’은 천적 인간의 상태를 나타냈습니다. 여섯 날 동안의 싸움이 끝나고 주님께서 쉬시는 날이며,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의 안식입니다. AC.84-88에서 이 일곱째 날은 싸움의 종결, 주님의 안식, 그리고 주님 홀로 이루신 거듭남의 완성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런데 AC.93에서 인용한 호세아에서는 ‘셋째 날’에 이와 매우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셋째 날은 죽음과 같은 상태에서 생명을 얻고 일으켜져 주님 앞에서 사는 새로운 상태와 연결됩니다. 이어서 주님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과 같고, 그분은 땅을 적시는 ‘비’와 같이 오신다고 합니다.

 

따라서 AC.93의 문맥에서 셋째 날과 일곱째 날이 만나는 지점은 새로운 생명의 상태입니다. 일곱째 날에는 싸움이 끝나고 천적 인간의 안식이 시작되며, 셋째 날에는 사람이 살아나고 일으켜져 주님 앞에서 삽니다. 둘 다 이전 상태가 끝나고 주님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생명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씀의 숫자를 단순한 산술적 수량으로만 읽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셋째 날’과 ‘일곱째 날’이라는 표현 안에서 사람이 거듭나는 상태를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3 = 7’이라는 새로운 상응 공식을 만들어 모든 성경 구절에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도 안 됩니다. AC.93이 직접 말하는 범위는 이 천적 인간의 상태와 관련하여 ‘셋째 날’이 ‘일곱째 날’과 같은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호세아의 인용은 단순히 ‘셋째 날’이라는 숫자의 증거 구절이 아닙니다. ‘살리심’, ‘일으키심’, ‘주님 앞에서 삶’, ‘새벽’, ‘비’가 한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이것들은 AC.84 이후 계속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안식과 평화, 그리고 AC.90-92에서 설명한 비와 평화의 생명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AC.93에서 ‘셋째 날’과 ‘일곱째 날’이 같은 것을 뜻한다는 말은 두 숫자의 모든 의미가 동일하다는 선언이라기보다, 말씀 안에서 둘 다 주님께서 사람을 새로운 생명의 상태로 이끄시는 완성과 일으키심을 나타낼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더 세밀한 차이는 이후 스베덴보리가 각 숫자를 설명하는 곳에서 다시 살펴보아야 하지만, AC.93을 읽는 독자는 적어도 여기까지는 충분히 이해하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AC.93 심화 1)

 

 

 

AC.93, 창2:5-6, ‘평화의 언약과 복된 비, 셋째 날에 일으켜지는 천적 인간’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92 심화

1. 평화가 어떻게 ‘생명’일 수 있는가?

 

AC.92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의 평화에 관하여 매우 독특한 말을 합니다. 그것은 단지 싸움이 그친 상태가 아니라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평화를 갈등이나 불안이 없는 상태로 생각하는데, 어떻게 평화 자체가 ‘생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먼저 AC.92가 말하는 평화는 단순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정적 상태가 아닙니다. 그 직전까지 사람 안에는 싸움이 있었습니다. AC.91에 따르면 영적 인간일 때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고, 그 결과 싸움이 그치며 평온이 뒤따릅니다. 따라서 평화는 단순히 싸움 하나가 없어졌다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사람 안의 질서가 달라진 결과로 찾아오는 상태입니다.

 

AC.92가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싸움이 그쳤기 때문에 생명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전에는 싸움과 저항 때문에 충분히 나타나지 못하던 것이 이제 겉 사람에게까지 미치기 시작합니다. AC.91에서는 이것을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적시고 이슬로 촉촉하게 하는 수증기에 비유했습니다. 평화는 텅 빈 고요가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에게 생명이 미치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의 안식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인 상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84부터 계속 나온 ‘안식’도 주님께서 피곤하여 일을 중단하신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주님 홀로 사람을 위하여 싸우셨고 그 일이 완성되어 싸움이 그쳤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완성된 질서 안에서 이제 평화로부터 생명이 흘러나옵니다.

 

이것은 자연의 모습으로 생각하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폭풍이 그쳤다고 해서 자연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요한 비와 이슬이 땅을 적실 때 식물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AC.90-91에서 ‘비’와 ‘안개’가 평화의 평온을 뜻하고, 그것에 의해 ‘들의 관목’과 ‘들의 초목’이 산출된다고 한 것도 같은 흐름입니다. 평화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 공백이 아니라 생명이 자라날 수 있는 상태입니다.

 

다만 여기서 ‘평화가 곧 생명이다’라는 하나의 고정된 상응 공식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92의 표현은 더 정확합니다. 그것은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입니다. 중요한 것은 평화가 어디에서 오며 무엇을 하는가입니다. 그것은 사람 자신이 만들어 내는 편안함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나와 겉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거기에서 선과 진리가 살아나게 하는 생명입니다.

 

따라서 AC.92에서 말하는 평화는 싸움의 부재보다 훨씬 적극적인 상태입니다. 탐욕과 거짓으로 말미암은 불안이 그친 뒤,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겉 사람에게 자유롭게 미치기 시작합니다. 그 생명으로 인해 사람 안의 선과 진리가 살아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천적 인간의 평화는 단순한 ‘쉼’이 아니라 생명으로 충만한 안식입니다. (AC.92 심화 1)

 

 

 

AC.92, 창2:5-6, '평화는 싸움의 그침만이 아니라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91 심화

1.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AC.91은 영적 인간일 때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지만,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므로 싸움이 그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긴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먼저 이것을 속 사람은 좋은 것이고 겉 사람은 나쁜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90-91에서 천적 인간에게도 겉 사람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오히려 ‘들의 관목’과 ‘들의 초목’, 곧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이 그 겉 사람에서 산출됩니다. 문제는 겉 사람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질서입니다.

 

영적 인간일 때에는 이 질서가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AC.91의 표현 그대로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습니다. 앞에서 AC.81은 영적 인간이 싸움 가운데 있으면서도 언제나 승리한다고 했고, AC.84-87에서는 여섯 날의 싸움 뒤에 일곱째 날의 안식이 온다고 했습니다. AC.91은 이제 그 싸움이 인간 안에서는 어떤 관계로 나타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가 아직 저항과 싸움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가 달라집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어지는 설명을 보면 이것이 어떤 모습인지 조금 더 알 수 있습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온이 겉 사람을 적시고 이슬로 촉촉하게 하며, 그 결과 겉 사람에서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이 산출됩니다. 즉 겉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독립적으로 움직이려 하지 않고,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 그것을 바깥의 삶 가운데 나타내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순종’은 겉 사람을 억압하거나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섬김’ 역시 인간의 몸과 감각, 이성, 기억지식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제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이성과 기억지식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 안에서 기능하게 됩니다. 겉 사람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천적 인간의 자유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AC.81에서는 천적 인간이 겉으로 어떤 결박에도 제어되지 않고 자유롭다고 했습니다. AC.85에서는 그가 자기 자신의 바람에 따라 행하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행하며, 그 주님의 뜻이 그의 바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한다는 것은 억지로 굴복당하는 상태라기보다, 사람 안의 바람 자체가 새로운 질서 안에 들어가 더 이상 속 사람과 싸우지 않는 상태와 연결됩니다.

 

결국 AC.91의 ‘순종하고 섬긴다’는 표현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 안의 질서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아직 싸움이 있지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겉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그것에 따라 활동합니다. 그때 싸움이 그치고 평온이 뒤따릅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의 안식은 겉 사람이 사라져 얻는 안식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올바른 질서 안에 놓임으로써 얻는 안식입니다. (AC.91 심화 1)

 

 

 

AC.91, 창2:5-6,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길 때 싸움이 그친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90 심화

1. 왜 영적 인간의 겉 사람은 ‘땅’이고,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은 ‘지면’과 ‘들’인가?

 

AC.90에서 스베덴보리는 같은 겉 사람을 두고도 사람이 영적 인간으로 머물러 있을 때에는 ‘땅’이라 하고, 천적 인간이 되면 ‘지면’, 또한 ‘들’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왜 겉 사람은 그대로인데 그 명칭이 달라지는 것일까요?

 

먼저 이 차이는 AC.89에서 설명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형성 질서와 연결해서 보아야 합니다. 영적 인간의 개혁은 겉 사람, 곧 ‘땅’에서 시작하지만,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 곧 ‘하늘’에서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겉 사람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질서가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AC.90에서 그 달라진 상태의 겉 사람을 ‘지면’과 ‘들’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땅’, ‘지면’, ‘들’이라는 세 단어에 언제 어디서나 적용할 수 있는 고정된 의미표를 만들라는 뜻은 아닙니다. AC.90이 직접 알려 주는 것은 현재의 문맥에서 영적 인간의 겉 사람은 ‘땅’이라 하고,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은 ‘지면’과 ‘들’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은 스베덴보리가 이 번호에서 밝힌 범위 안에서 그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렇다면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이 ‘지면’과 ‘들’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보여 줄까요? 바로 이어지는 설명이 중요한 실마리를 줍니다. 이제 그 ‘들’에서는 ‘관목’과 ‘초목’이 산출됩니다. AC.90은 이것들을 일반적으로 ‘그의 겉 사람이 산출하는 모든 것’이라고 합니다. 즉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은 속 사람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영역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받아 산출하는 영역으로 묘사되기 시작합니다.

 

이 점은 바로 다음 AC.91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영적 인간일 때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지만,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온이 겉 사람을 적시자 거기에서 ‘들의 관목’과 ‘들의 초목’이 산출됩니다. 따라서 ‘지면’과 ‘들’은 천적 인간 안에서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 생명 있는 것을 산출하는 겉 사람의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서 ‘지면’과 ‘들’로 명칭이 달라지는 것을 단순한 어휘 변화로 볼 수 없습니다.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변화하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가 달라졌고, 그 결과 겉 사람도 새로운 상태에 들어간 것입니다. 겉 사람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제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며, 그곳에서 흘러오는 생명과 평온을 받아 열매 맺는 ‘지면’과 ‘들’이 됩니다.

 

다만 여기서 ‘땅은 언제나 영적 인간의 겉 사람이고, 지면과 들은 언제나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이다’라는 식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상응은 문맥과 주제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AC.90이 지금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천적 인간의 형성이라는 이 문맥에서 겉 사람의 상태가 달라짐에 따라 말씀의 표현도 ‘땅’에서 ‘지면’과 ‘들’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AC.90 심화 1)

 

 

 

AC.90, 창2:5-6, ‘땅에서 지면과 들로, 싸움이 그친 뒤의 평화의 평온’ (AC.90-93)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And there was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