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의 기본 설정은 흥미롭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IT 개발자로 살던 한 남자가 갑자기 수인들이 살아가는 원시 세계로 이동합니다. 그곳에서는 불을 피우는 기술조차 ‘샤먼’이라는 특별한 존재가 독점하고 있으며, 불씨가 꺼지면 다른 부족에게 많은 식량을 바치고 다시 얻어 와야 합니다. 질병이 생겨도 원인을 알지 못하고, 사냥은 주로 힘과 머릿수에 의존하며, 깨끗한 물과 배설물 처리 같은 기본적인 위생 개념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현대 문명의 지식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그는 불을 직접 피우고, 열병을 치료하고, 창을 만들고, 사냥을 조직화하며, 물을 끓여 마시게 하고, 배설물과 쓰레기를 주거지에서 분리합니다. 한 사람이 가진 ‘지식’이 부족 전체의 생존 방식을 바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지식의해방’입니다. 불을 피우는 방법은 원래 샤먼만 알고 있으며 그 지식은 후계자에게만 전수됩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것을 모든 부족민에게 가르치겠다고 합니다. 이 장면은 의외로 상당히 좋은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지식을 권력의 근거로 독점하지 않고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위해 나누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지식 자체는 목적이 아닙니다. 모든 진리는 결국 삶을 향해야 하며, 더 정확히 말하면 ‘쓰임’(use)을 향해야 합니다. 무엇을 많이 아느냐보다 그것을 가지고 누구를 살리고 무엇을 유익하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불 피우는 지식이 한 사람의 신비한 권위를 높이는 데 사용될 때 그것은 권력이 되지만, 부족 전체가 혹한을 견디게 하는 데 사용될 때 그것은 쓰임이 됩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주인공이 공동체를 강하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처음 부족민들은 강함을 거의 육체적인 힘으로 이해합니다. 강한 종족은 큰 짐승을 잡고, 많은 전사를 가진 부족은 더 많은 먹이를 차지합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전혀 다른 원리를 가르칩니다. ‘정보를수집하라. 환경을이용하라. 퇴로를확보하라. 각자의장점을살려라. 무기를개선하라. 역할을나누어라.’ 특히 ‘너희가약했던게아니라사냥방식이잘못됐던거였어’라는 대목은 이 이야기 전체를 압축하는 문장처럼 들립니다. 힘이 부족해서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와 지혜가 없어서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의 질서와도 묘하게 접점이 있습니다. 천국 역시 모두가 똑같은 능력을 가진 사회가 아니라 서로 다른 기능과 쓰임을 가진 존재들이 하나의 목적 아래 조화를 이루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렌즈’를 조금 더 깊이 들이대야 합니다. 이 콘텐츠에서 문명 발전의 방향은 거의 일관되게 ‘더많이알고, 더효율적으로생산하고, 더강한무기를만들고, 더잘조직하고, 더강한부족이되는것’으로 향합니다. 그래서 보다 강한 적을 물리치고 영토를 확보하며, 식량을 저장하고, 방어벽과 초소를 세우고, 다른 부족보다 우월한 생존 체계를 갖추는 과정이 곧 ‘진보’로 그려집니다. 여기에서 목사님이 느끼신 중국적 색채도 어느 정도 이해됩니다. 다만 이것을 곧바로 ‘중화사상’이라고 단정하기보다는, ‘혼란한주변세계를뛰어난지식과질서를가진중심인물이조직하고교화하여더큰질서안으로편입시킨다’는 서사 구조에 주목하는 편이 정확하겠습니다. 중국 역사문화에서 오래 반복되어 온 ‘문명과주변’, ‘질서와혼란’, ‘교화와편입’의 상상력과 닮은 부분이 분명히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특히 주인공은 단순히 좋은 아이디어를 하나씩 제공하는 조언자가 아닙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는 ‘무엇이옳은지를아는사람’이 되고, 공동체는 그가 제시하는 방식을 받아들일수록 강해집니다. 처음에는 ‘저사람말이맞을까?’라고 의심하던 이들이 결국 그의 지식과 성과를 경험하면서 그를 신뢰하고 따르게 됩니다. 여기에는 매우 오래된 인간의 꿈이 숨어 있습니다. ‘현명하고유능한한사람이올바른지식으로공동체를이끈다면세상은훨씬좋아질것이다.’ 이것은 중국만의 생각도 아닙니다. 플라톤의 철인정치에서 현대의 기술관료주의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끊임없이 품어 온 꿈입니다. 문제는 스베덴보리에게 인간 사회의 근본 문제는 ‘지식부족’이 아니라 ‘사랑의질서가뒤집힌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이 좋은지 몰라서만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 위에 있기 때문에 자신이 아는 진리마저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가장 조심해서 보아야 할 것은 바로 ‘지식→문명→힘→선’이라는 연결입니다. 깨끗한 물을 마시게 하고, 병자를 치료하고, 식량을 저장하고, 혹한에서 살아남을 집을 짓는 것은 분명 좋은 쓰임입니다. 반면 더 치명적인 창을 만들고, 독을 이용하고, 더 효과적으로 적을 죽이고, 더 넓은 영역을 확보하는 능력 역시 동일한 ‘지식’에서 나옵니다. 지식은 그 자체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움직이는 사랑이 무엇인가에 따라 천국적인 쓰임이 될 수도 있고 지옥적인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지성과 지혜의 차이도 바로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많이 아는 사람이 반드시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진리를 사용하고, 그 진리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 점에서 저는 오히려 이 중국 AI 이야기가 의도하지 않은 중요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고 봅니다. 주인공이 부족에게 불을 주고, 의술을 주고, 무기를 주고, 위생을 주고, 조직을 주고, 정착지를 주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는 그들에게 ‘더좋은사람’이 되는 법도 주었을까요? 기술이 발전하면 시기와 탐욕도 사라질까요? 식량이 풍부해지면 이웃 부족을 사랑하게 될까요? 무기가 강해지면 그것을 약자를 보호하는 데만 사용할까요? 바로 이 지점에서 자연적 문명과 영적 거듭남은 갈라집니다. 외적인 삶은 놀라울 정도로 문명화되었는데 내면은 여전히 지배욕과 소유욕과 자기 우월감에 붙들려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으로는 매우 소박하게 살아도 이웃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천국의 질서에 훨씬 가까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렌즈’로 이 작품을 보면 문명의 진정한 척도 자체가 달라집니다. ‘얼마나강한부족인가?’가 아니라 ‘그힘을무엇을위해사용하는가?’입니다. ‘얼마나많은지식을가졌는가?’가 아니라 ‘그지식이누구를살리는가?’입니다. ‘얼마나잘조직되어있는가?’가 아니라 ‘그질서의중심에자기집단의우월함이있는가, 아니면공동의선과이웃에대한사랑이있는가?’입니다. 주인공이 불 피우는 방법을 독점하지 않고 모두에게 가르쳐 주는 순간에는 천국적인 원리가 비칩니다. 병든 사람을 살리고, 부족원 가운데 단 한 명도 다치지 않기를 바라며 사냥법을 개선하는 순간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식과 기술이 ‘우리부족을가장강하게만드는것’으로 중심을 옮기는 순간, 같은 지식 안으로 인간의 proprium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이 작품은 단순한 중국식 문명 우월 판타지로만 읽기에는 조금 아깝습니다. 그 안에는 인간 문명의 오래된 모순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불을 발견한 인간은 추위를 이겼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의 집을 불태울 수도 있게 되었고, 금속을 다루게 된 인간은 농기구와 칼을 동시에 만들었으며, 현대 과학은 질병을 치료하는 기술과 대량살상 기술을 함께 만들어 냈습니다. 결국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더많은지식’ 자체가 아닙니다. 지식을 움직이는 사랑이 바뀌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바로 그 중심의 변화입니다. ‘나와우리를위해무엇을더가질것인가’에서 ‘주님께받은것을가지고누구에게어떤쓰임이될것인가’로 삶의 중심이 이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을 보면서 느껴지는 ‘중화사상’의 흔적보다 더 근원적인 것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중국인의 문제라기보다 인간 proprium의 보편적인 꿈입니다. ‘내가더많이알고, 더강해지고, 더잘조직하면세상을바로잡을수있다’는 꿈입니다. 주님은 그것보다 훨씬 깊은 곳을 보십니다. 세상을 바꾸기 전에 사랑의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식이 많아지는 것이 문명의 시작이라면, 그 지식을 자기 자신보다 이웃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사용하는 것은 천국의 시작입니다. 이 콘텐츠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어쩌면 거대한 짐승을 쓰러뜨리는 순간이 아니라, 한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불피우는법’을 더 이상 자기만의 힘으로 붙잡지 않고 모두에게 가르쳐 주겠다고 말하는 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는직접피우면되니까불씨를얻으려고음식을바칠필요없어.’ 바로 그때 지식은 권력에서 쓰임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이가진불은누구를따뜻하게하고있는가?’
AC.414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이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으며, 이를 기억하게 하는 절기로 초막절이 제정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레23:42-43은 이스라엘 자손이 초막에 거주해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밝힙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 그들을 초막에 거주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대대로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초막절은 출애굽과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절기입니까, 아니면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를 기억하는 절기입니까? 이 질문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와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표상적 의미를 어떻게 함께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먼저 레위기가 직접 밝히는 초막절의 기념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땅의 소산을 거두어들인 뒤 초막절을 지켰으며, 일정 기간 초막에 거주했습니다. 레23:42-43은 그 이유를 출애굽 때의 초막 생활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초막절의 문자적 의미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받아들인다는 이유로 ‘초막절은사실출애굽과관계가없다’거나 ‘레위기가밝힌기념이유는겉으로만내세운설명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와 절기의 규례는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왜 태고교회를 말합니까? AC.414에서 그는 초막절의 문자적 제정 이유를 다시 설명하기보다, ‘장막’이라는 표상이 지닌 더 오래된 의미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태고교회 사람들은 각자의 가족 안에서 살면서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장막은 그 사랑의 예배와 연결되어 천적인 것과 사랑의 거룩한 것을 표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후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초막에 거주하는 절기를 지킬 때, 그 행위는 출애굽의 역사를 기억하는 동시에 장막이 오래전부터 지녀 온 거룩한 의미와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하나의 표상에 문자적 역사와 속뜻이 함께 있다는 설명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려면 ‘무엇을기념하라고명령하셨는가?’와 ‘그기념에사용된장막은무엇을표상하는가?’를 나누어 생각하면 도움이 됩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레위기가 직접 답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뒤 초막에 거주했던 일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AC.414가 답합니다. 장막은 태고교회의 거룩한 예배와 연결되어 사랑의 거룩한 것을 표상한다는 것입니다. 두 대답은 서로 다른 층위의 질문에 대한 것이므로, 하나를 인정하기 위해 다른 하나를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함께 인용한 신16:13도 이 관계를 살피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 말씀은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들인 뒤 초막절을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레23:39역시 땅의 소산을 거두어들인 뒤 절기를 지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초막절에는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일뿐 아니라 수확을 마친 뒤 주님 앞에서 절기를 지키는 일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다만 AC.414는 타작마당이나 포도주 틀의 세부적인 속뜻을 여기서 풀이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심화에서는 그 물건들에 새로운 상응을 임의로 부여하기보다, 초막절이 출애굽의 기억과 수확의 기쁨을 함께 지닌 절기라는 문자적 문맥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호12:9에서 주님은 다시 장막에 거주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도 AC.414가 초막절과 장막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인용한 본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장막 생활이 단지 과거의 불편한 생활 방식으로만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말씀은 장막에 거주하는 모습을 다시 불러오며,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들을 사랑의 거룩한 것에 관한 장막의 의미와 연결합니다. 그러나 호세아서의 구체적인 역사적 문맥과 AC.414가 밝히는 속뜻을 구별하여 읽어야 합니다. 이 한 구절만으로 태고교회의 모든 예배 방식이나 초막절의 세부 규례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목회적으로 중요한 질문은 ‘오늘우리도초막에서살아야더거룩한예배를드릴수있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AC.414의 설명은 그런 결론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의 재료나 생활 방식 자체가 거룩함을 만들어 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표상한다는 것은 그 장막과 연결된 예배의 내적인 의미를 살피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초막절을 읽는 성도는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주님의 역사를 기억하면서, 그 기억이 가리키는 주님의 사랑과 거룩함을 함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외적인 절기의 형식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과 그 절기가 나타내는 거룩한 것을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결국 초막절의 문자적 기념 내용은 출애굽과 광야의 초막 생활이며, 스베덴보리가 AC.414에서 밝히는 표상적 의미는 장막에 담긴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와 연결됩니다. 이 두 의미는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자적 역사를 통해 주님의 인도하심을 기억하고, 장막의 속뜻을 통해 그분에게서 오는 사랑의 거룩함을 생각하게 합니다. 초막절을 읽으며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어느시대의장막이더중요합니까?’라는 선택이 아니라, 말씀의 역사 속에서도 그 속뜻 안에서도 사람을 주님께로 이끄시는 분이 누구신가 하는 질문입니다. (AC.414심화2)
AC.414를 읽으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과 성막과 성전이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면서도, 고대에는 장막에서 예배를 드렸고 그 장막이 모독되기 시작하자 성막이 세워졌으며, 그 후에는 성전이 세워졌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세 가지가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무엇이며, 예배의 장소가 바뀌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을 풀려면 ‘무엇을표상하는가?’와 ‘어떤역사적상태에서사용되었는가?’를 구별해야 합니다.
먼저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세 건축물이 문자적으로 동일하다거나, 그 안에서 행해진 예배의 모든 절차가 같다는 뜻이 아닙니다. 장막은 가족이 거주할 수 있는 처소이고,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 가운데 세워진 예배의 처소이며, 성전은 이후에 세워진 건축물입니다. 이 차이는 문자적인 역사에서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공통된 의미는 이 서로 다른 처소들이 모두 주님에게 속한 거룩함을 표상한다는 데 있습니다. 외적인 형태는 달라져도 그 형태가 가리키는 거룩함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표상하게 된 이유를 태고교회의 예배에서 찾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각자의 가족 안에서 살며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여기서 장막은 단지 비바람을 막아 주는 생활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삶과 예배가 이루어지는 처소였고, 스베덴보리는 그 예배를 사랑의 거룩함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장막의 의미를 이해할 때에는 천막이라는 물건 자체보다, 그 안에서 주님을 향하여 드려졌던 예배와 그 예배에 속한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AC.414는 사람들이 장막에서 불경한 예배를 행하며 그것을 모독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장막이라는물건이더러워졌으므로하나님께서더좋은건물을요구하셨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문제는 천막의 재료나 구조가 아니라 예배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거룩한 예배를 위해 사용되던 처소가 그와 반대되는 예배에도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와 관련하여 성막이 세워지고, 그 후에는 성전이 세워졌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예배 장소의 변화가 단순한 건축 기술의 발전만으로 설명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성막과 성전은 장막보다 더 높은 수준의 거룩함을 지닌 것입니까? AC.414는 오히려 태고교회의 장막이 후에 모독된 성전보다 더 거룩하게 여겨졌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합니다. 건물이 더 크고 견고해졌다는 사실이 그 안에서 드리는 예배까지 더 거룩해졌다는 증거는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의 장막을 특별히 언급하는 이유는 그 장막이 연결되어 있던 사랑의 예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막·성막·성전의 순서를 외적인 규모나 화려함에 따라 영적 우열을 매기는 순서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시27:4-6은 이 세 표현의 공통된 의미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근거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살기를 구하고 성전에서 주님을 사모하며, 환난 날에는 초막과 장막 안에서 보호받고 장막에서 제사를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는 여러 이름의 거룩한 처소가 등장하지만, 다윗이 구하는 중심은 하나입니다. 그는 주님 가까이에 머물며 그분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그분의 보호 안에서 예배드리기를 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문맥을 통해 장막과 성막과 성전이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각각의 건축물을 따로 떼어 놓고 이름만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을 구하고 누구에게 나아가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AC.414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장 높은 의미에서 주님께서 그분의 인성의 본질에 관하여 장막이시며 성막이시고 성전이시라고 말합니다. 이 설명에 이르면 세 처소가 공통으로 가리키는 중심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거룩함은 장막이나 성막이나 성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거룩함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표상하는 처소가 거룩한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또한 천적 사람을 주님의 장막이나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사람이 독립적으로 거룩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거룩함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장막과 성막과 성전은 역사적으로 서로 다른 처소이고, 그것들이 사용된 예배의 상태도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속뜻에서 그 처소들은 모두 주님과 그분에게서 오는 거룩함을 표상한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따라서 ‘같은의미’라는 말은 역사적 차이를 지우는 말이 아니며, ‘서로다른시대에세워졌다’는 사실도 그 공통된 속뜻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이 말씀에서 붙들어야 할 것은 어느 시대의 건물이 가장 거룩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예배가 외적인 처소에 머무르지 않고 그 처소가 가리키는 주님과 그분의 사랑을 향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AC.414심화1)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4
‘장막에거주한다’(dwellintents)는것이사랑의거룩한것을의미한다는사실은말씀에서‘장막들’(tents)이뜻하는바를보면분명해집니다.다윗의시편에는다음과같이기록되어있습니다. That to “dwellintents” signifies what is holy of lov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ents” in the Word. As in David:
이말씀에서는‘장막에거주한다’(dwellinthetent)는것,또는‘성산에거주한다’(inthemountainofholiness)는것이무엇인지를사랑의거룩한것들,곧정직하게행하고공의를실천하는것으로설명합니다.또다른시편에는다음과같이기록되어있습니다. in which passage, what it is to “dwellinthetent” or “inthemountainofholiness” is described by holy things of love, namely, the walking uprightly, and working righteousness. Again:
여기서‘장막’(tent)은천적인것을,‘날개아래의그늘’(covertofwings)은거기서나오는영적인것을나타냅니다.이사야서에는다음과같이기록되어있습니다.where the “tent” denotes what is celestial, and the “covertofwings” what is spiritual thence derived. In Isaiah:
여기서도‘장막’(tent)은사랑의거룩한것을나타냅니다.이는‘공의로판결함’(judgingjudgment)과‘공의를신속히행함’(hastingrighteousness)이언급되는데서알수있습니다.또다른곳에는다음과같이기록되어있습니다. where also the “tent” denotes what is holy of love, as may be seen by the mention of “judgingjudgment,” and “hastingrighteousness.” Again:
‘장막의포로됨’(captivityoftents)은천적인것,곧사랑의거룩한것들이황폐해진상태를의미합니다.아모스서에는다음과같이기록되어있습니다. the “captivityoftents” signifies the vastation of what is celestial, or of the holy things of love. In Amos:
여기서도‘성막’(tabernacle)은천적인것과거기에속한거룩한것들을나타냅니다.예레미야서에는다음과같이기록되어있습니다. where the “tabernacle” in like manner denotes what is celestial and the holy things thereof. In Jeremiah:
여기서‘장막’(tent)은천적인것들을,‘휘장들’(curtains)과‘줄들’(cords)은거기서나오는영적인것들을의미합니다.또다른곳에는다음과같이기록되어있습니다. where the “tent” signifies celestial things, and “curtains” and “cords” spiritual things thence derived. Again:
이는아라비아와동방의자손들에관한말씀인데,이들은천적인것또는거룩한것을지닌사람들을표상합니다.또다른곳에는다음과같이기록되어있습니다. speaking of Arabia and the sons of the east, by whom are represented those who possess what is celestial or holy. Again:
이는신앙의천적인것또는거룩한것들이황폐해지는상태에관한말씀입니다. speaking of the vastation of the celestial or holy things of faith.
[3]말씀에서‘장막’(tent)이라는말을천적인것과사랑의거룩한것들을표상하는데사용하는이유는,고대에사람들이장막에서거룩한예배의식을행했기때문입니다.그러나사람들이불경한종류의예배로장막을모독하기시작하자성막이세워졌고,그후에는성전이세워졌습니다.따라서장막은후에성막이,그리고그다음에는성전이나타내게된모든것을표상했습니다.같은이유로거룩한사람도주님의‘장막’(tent),‘성막’(tabernacle),‘성전’(temple)이라고불립니다.‘장막’(tent)과‘성막’(tabernacle)과‘성전’(temple)이같은의미를지닌다는사실은다윗의시편에서분명해집니다. The reason why the term “tent” is employed in the Word to represent the celestial and holy things of love is that in ancient times they performed the holy rites of worship in their tents. But when they began to profane the tents by profane kinds of worship, the tabernacle was built, and afterwards the temple, and therefore tents represented all that was subsequently denoted first by the tabernacle, and afterwards by the temple. For the same reason a holy man is called a “tent,” a “tabernacle,” and a “temple” of the Lord. That a “tent,” a “tabernacle,” and a “temple” have the same signification, is evident in David:
AC.414는 앞의 AC.412-413에서 제시한 야발의 속뜻을 말씀의 여러 구절로 뒷받침합니다. 야발은 ‘장막에거주하며가축을치는자의조상’이고, 스베덴보리는 그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당연히 ‘장막에사는일이왜사랑의거룩함과관계됩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번 번호는 바로 그 질문에 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이라는 물건의 모양이나 용도만으로 뜻을 정하지 않고, 말씀에서 장막이 어떤 말들과 함께 등장하며 어떤 상태를 묘사하는지를 여러 본문에 걸쳐 살핍니다. 이 번호를 읽을 때 중요한 것은 인용 구절의 수를 따라가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구절들이 어떤 공통된 의미를 드러내는지 이해하는 것입니다.
먼저 시15:1-2는 ‘주의장막에머무를자’가 누구인지 묻고,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고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라고 답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말씀을 첫 근거로 제시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장막에 거한다는 것이 단순히 거룩한 장소에 들어가는 일이라면, 시편의 대답은 건물에 출입할 자격이나 예배 절차에 관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 사람의 삶을 말합니다. 정직하게 행하고 공의를 실천하며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것은 사랑이 실제 삶에서 선으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장막에거주한다’는 속뜻은 거룩한 공간을 소유하거나 그 안에 머무는 외적인 행위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 그 사랑에 따라 살아가는 상태와 관련됩니다. 이것이 야발을 사랑의 거룩한 것들에 관한 교리와 연결하는 첫 번째 근거입니다.
다른 인용 구절들은 장막이 사랑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여러 방향에서 보여 줍니다. 시19:4에서는 해를 위하여 장막을 베푸셨다고 하는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해가 사랑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시61:4에서는 주의 장막에 머무는 것과 주의 날개 아래 피하는 것이 함께 나오며, 그는 장막을 천적인 것, 날개 아래의 그늘을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으로 구별합니다. 사16:5에서는 다윗의 장막 안에서 인자함으로 굳게 선 왕위와 공의로운 판결이 나타납니다. 사33:20에서는 시온과 예루살렘을 ‘옮겨지지아니할장막’으로 묘사합니다. 이 구절들이 모두 같은 장면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장막이 사랑과 거룩함, 그리고 그 사랑에 속한 삶과 연결된다는 점에서는 서로를 비추어 줍니다. 특히 장막과 날개 아래의 그늘을 구별한 시61:4는 천적인 것과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예레미야서와 아모스서의 인용은 장막의 의미를 반대 방향에서도 보여 줍니다. 렘30:18은 야곱의 장막이 포로 된 상태에서 돌아오는 일을 말하고, 암9:11은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우는 일을 말합니다. 반면 렘4:20과 렘10:20에서는 장막이 무너지고 휘장과 줄이 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의 포로 됨을 사랑의 거룩한 것들이 황폐해진 상태로 설명하며, 장막은 천적인 것들을, 휘장과 줄은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이때 장막의 회복과 파괴를 단순히 천막의 재건이나 손실로만 읽지 않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나타내므로, 장막이 무너지는 말씀은 교회 안에서 그 사랑에 속한 것들이 황폐해지는 상태를 이해하는 근거가 되고, 장막을 다시 세우는 말씀은 그와 반대되는 회복의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다만 이번 번호가 인용된 모든 물건과 인물의 속뜻까지 각각 풀이하는 것은 아니므로, 휘장·줄·자녀·낙타 등의 의미를 이 자리에서 임의로 세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왜 하필 장막이 그러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는지 역사적인 이유를 설명합니다. 고대 사람들은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장막이 불경한 예배로 모독되기 시작하자 성막이 세워졌고, 그 뒤에는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장막은 나중에 성막과 성전이 표상하게 된 거룩한 것들을 먼저 나타내는 표상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장막이라는 재료나 건축 방식 자체가 성막이나 성전보다 거룩하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장막의 거룩함은 그것이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와 연결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예배 장소가 장막에서 성막과 성전으로 바뀌어도, 그 장소들이 가리켜야 할 중심은 주님과 그분에게서 오는 거룩함입니다.
시27:4-6은 이러한 연결을 한 본문 안에서 보여 줍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살기를 구하고, 성전에서 사모하며, 환난 날에는 초막과 장막 안에서 보호받고, 장막에서 제사를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근거로 장막과 성막과 성전이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문자적인 건축물들이 동일하거나 말씀의 모든 문맥에서 각 표현의 세부 의미까지 언제나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본문에서는 서로 다른 이름의 거룩한 처소들이 모두 주님께 나아가고 그분의 보호 안에 머무르며 예배드리는 일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느건물이더거룩한가?’보다 ‘그건물이나타내는거룩함은어디에서오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그 거룩함의 근원은 건물 자체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이번 번호의 마지막 부분은 그 의미를 가장 높은 차원까지 끌어올립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장 높은 의미에서 주님께서 그분의 인성의 본질에 관하여 장막이시며 성막이시고 성전이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천적 사람과 천적이고 거룩한 모든 것도 그렇게 불린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사람을 주님의 장막이나 성전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사람이 스스로 거룩함의 근원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거룩함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야발의 ‘장막에거주하는자’라는 표현도 단순히 옛사람들의 생활 방식에 관한 기록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거룩한 것들에 관한 교리가 새 교회 안에 존재한다는 설명으로 이어집니다.
끝으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이 각자의 가족 안에서 살며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고, 이를 기억하게 하는 절기로 초막절이 제정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레23:39-44와 신16:13은 수확 후 초막절을 지키는 일을 말하며, 호12:9는 다시 장막에 거주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레위기 본문은 출애굽 때 이스라엘 자손이 초막에 거주했던 일을 기억하게 한다고도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문자적인 절기의 기념 내용과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에 관한 표상적 의미를 서로 지워 버리지 않고 함께 읽어야 합니다. AC.414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장막은 그 자체가 거룩함의 근원이어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그 사랑 안에서 드리는 거룩한 예배를 표상하기 때문에 사랑의 거룩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야발의 속뜻을 이해하기 위해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여러 장막을 길게 살펴본 이유입니다. (AC.414해설)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3
‘아다’(Adah)가신앙의천적인것들의어머니를의미한다는사실은,그의맏아들야발이‘장막에거주하는자의조상’(fatherofthedwellerintents)이자‘가축을치는자의조상’(andofcattle)이라고불리는데서분명해집니다.이것들은사랑의거룩한것들과그로부터나오는선들을의미하므로천적인것입니다. That by “Adah” is signified the mother of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is evident from her firstborn Jabal being called the “fatherofthedwellerintents,andofcattle,” which are celestial because they signify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goods thence derived.
해설
AC.413은 앞 번호에서 밝힌 야발의 속뜻을 근거로, 그의 어머니 아다가 왜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하는지 설명합니다. AC.412에서는 야발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뜻한다고 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그 설명을 거꾸로 따라 올라갑니다. 야발이 뜻하는 것들이 천적이기 때문에, 그를 낳은 아다는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중심은 새로운 상응을 하나 더 제시하는 데 있지 않고, 아다와 야발의 의미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밝히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성도들이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아다라는 인물의 개인적인 신앙이나 성품을 평가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문자적으로 아다는 야발의 어머니이고, 야발은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모자 관계를 새 교회 안에서 생겨나는 것들의 관계로 읽습니다. 아다가 ‘어머니’라는 것은 그녀에게서 태어나는 것으로 표현된 것들이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 보여 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야발의 속뜻을 살펴보면 아다가 의미하는 바도 더 분명해집니다.
그렇다면 야발이 뜻하는 것은 왜 천적인 것입니까? AC.413은 그 이유를 ‘사랑의거룩한것들과그로부터나오는선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직접 밝힙니다. 여기서 천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고상하거나 종교적인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번 문맥에서는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에 관계된 것을 가리킵니다.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이 천적이므로, 그것들에 관한 교리를 뜻하는 야발도 천적인 것과 관련됩니다. 이처럼 스베덴보리는 ‘천적’이라는 이름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천적인지를 사랑과 선의 관계에서 설명합니다.
특히 ‘그로부터나오는’이라는 표현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선은 사랑과 무관하게 따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옵니다. 사랑이 무엇을 원하고 소중히 여기는가에 관계된다면,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은 그것이 실제로 나타나는 모습과 관계됩니다. 물론 겉으로 비슷한 일을 한다고 해서 언제나 그 일을 움직이는 사랑까지 같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선을 말하면서도 그 근원인 사랑을 함께 말합니다. 이번 번호의 순서는 사랑의 거룩한 것들이 먼저이고,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이 그다음입니다.
이 설명은 앞서 가인의 계보를 읽으며 반복해서 살펴본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가인의 계보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그 분리가 깊어져 마침내 신앙마저 소멸하는 상태가 나타났습니다. 이제 새 교회의 계보에서는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가 등장합니다. 다만 AC.413이 새 교회의 모든 성격을 한꺼번에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번호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야발이 의미하는 교리의 천적인 성격과, 그 성격을 통해 밝혀지는 아다의 의미입니다.
성도들은 이 대목에서 ‘아다가천적인것들의어머니’라는 표현을 낯선 상응 하나로만 기억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곧 야발이 의미하는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이 천적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의 연결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사랑과 선을 함께 말하되, 선이 사랑에서 나온다는 질서를 기억해야 합니다. AC.413은 아다와 야발의 관계를 통해 새 교회의 천적인 것들이 무엇과 관련되는지를 한층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AC.413해설)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And Adah bare Jabal; he was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창4:20)
AC.412
‘아다’(Adah)는앞에서와같이신앙의천적인것들과영적인것들의어머니를의미합니다.‘야발’(Jabal),곧‘장막에거주하는자의조상’(thefatherofthedwellerintents)이자‘가축을치는자의조상’(andofcattle)은사랑의거룩한것들과그로부터나오는선들에관한교리를의미하며,이것들은천적인것입니다. By “Adah” is signified, as before, the mother of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of faith; by “Jabal,thefatherofthedwellerintents,andofcattle,” is signified doctrine concerning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goods thence derived, which are celestial.
해설
AC.412는 창4:20에 등장하는 야발의 속뜻을 밝히는 첫 번째 번호입니다. 앞서 AC.405에서 아다는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아다의 아들 야발에게서 그 가운데 천적인 것에 관한 교리를 봅니다. 창4:20은 야발을 ‘장막에거주하며가축을치는자의조상’이라고 소개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장막 생활과 목축의 시작을 알려 주는 기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계보를 새 교회 안에서 어떤 가르침이 생겨났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조상’이라는 표현을 이해할 때에는 한 생업의 최초 발명자라는 문자적 의미와 함께, 그에 해당하는 교리가 시작되는 모습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장막에 거주하는 일과 가축을 치는 일이 왜 사랑과 선에 관한 교리와 연결됩니까? AC.412는 그 대응 관계를 먼저 제시할 뿐, 장막과 가축의 속뜻을 각각 입증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이 번호만으로 ‘장막은언제나이것,가축은언제나저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번 문장에는 분명한 순서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사랑의거룩한것들’을 말하고, 이어서 ‘그로부터나오는선들’을 말합니다. 사랑이 먼저이고 선이 그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순서를 놓치면 야발의 의미를 단순히 종교적 지식이나 선행의 기술에 관한 가르침으로 축소하기 쉽습니다. 여기서 다루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그 사랑이 사람의 삶에 나타내는 선에 관한 교리입니다.
‘사랑의거룩한것들’이라는 표현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룩함은 사람이 자기 노력으로 사랑에 덧붙이는 성질이 아닙니다. 사랑의 근원이 주님께 있기 때문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에 속한 것들이 거룩합니다. 그러므로 야발이 의미하는 교리는 ‘사람이어떻게하면스스로훌륭한사랑을만들어낼수있는가?’를 가르치는 교리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알고 받아들이며, 그 사랑이 자신의 삶을 이끌도록 하는 일과 관련된 가르침입니다. 성도들이 여기서 사랑을 단지 따뜻한 감정이나 사람 사이의 호감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번 번호의 사랑은 교회의 천적인 것과 관련된 사랑이며,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까지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이어지는 ‘그로부터나오는선들’도 중요합니다. 사랑과 선은 같은 말의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사랑이 사람의 내면에서 무엇을 원하고 소중히 여기는가와 관계된다면, 선은 그 사랑이 실제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와 관계됩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이웃에게 필요한 선을 행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이 삶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겉으로는 선한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을 움직이는 사랑이 무엇인지는 별도로 살펴야 합니다. AC.412는 이 모든 문제를 상세히 풀이하지는 않지만, ‘사랑의거룩한것들’과 ‘그로부터나오는선들’을 함께 제시함으로써 사랑과 선을 떼어 놓지 않도록 이끕니다. 사랑은 선의 근원이며, 선은 사랑이 삶에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야발이 의미하는 것은 사랑이나 선 자체가 아니라 왜 ‘그것들에관한교리’입니까? 이 구별은 새 교회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필요합니다. 사랑과 선의 근원은 주님이시지만, 교회는 그 사랑과 선에 관하여 배우고 가르칩니다.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인지, 그 사랑에서 어떤 선이 나오는지, 사람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삶으로 나타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가르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리와 삶은 동일하지 않지만 서로 무관하지도 않습니다. 사랑에 관한 교리는 사랑의 삶을 대신할 수 없고, 사랑의 삶 또한 무엇이 참된 선인지 알려 주는 진리의 가르침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야발이 ‘교리’를 의미한다는 설명은 새 교회 안에 사랑과 선에 관한 가르침이 있다는 뜻이지, 교리를 아는 것만으로 이미 사랑과 선을 소유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대목은 가인의 계보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흐름과 나란히 놓을 때 더욱 선명해집니다. 가인에게서 시작된 문제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앞서 지배하도록 한 데 있었습니다. 그 분리는 라멕에게 이르러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은 황폐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새 교회의 계보를 설명하면서 야발에게서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봅니다. 여기서 곧바로 ‘야발이가인의모든잘못을바로잡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앞의 계보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문제였다면, 이제 새 교회에 관한 설명에서는 사랑과 선에 관한 교리가 등장한다는 대비는 분명히 살펴볼 만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이 무엇을 중심에 두어야 하는지를 다시 묻게 되는 자리입니다.
성도들이 AC.412를 읽고 기억해야 할 것은 야발이라는 이름에 낯선 뜻 하나를 더 외우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내가배우는신앙의진리는주님에게서오는사랑을알도록이끄는가?그사랑이내삶에서선으로나타나도록돕는가?’라는 질문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동시에 장막과 가축의 속뜻을 이번 번호에서 모두 이해했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야발이 의미하는 교리의 전체 내용을 먼저 밝히고 있으며, 그 표현들이 왜 그러한 뜻을 지니는지는 이어지는 설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AC.412는 새 교회의 가르침을 살펴보는 출발점입니다. 그 출발점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중심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입니다. (AC.412해설)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11
새교회가일어나기전에황폐의마지막때가반드시있어야한다는사실은주님께서예언서들에서자주밝히신바입니다.그곳에서는신앙의천적인것들과관련하여이를‘황폐’(vastation)또는‘황폐하게함’(layingwaste)이라부르고,신앙의영적인것들과관련하여‘황량’(desolation)이라부릅니다.또한‘완결’(consummation)과‘끊어버림’(cuttingoff)이라고도말합니다.사6:9,11-12,사23:8-끝,사24,사42:15-18,렘25,단8,단9:24-끝,습1,신32,계15-16및그이후의장들을보십시오. That the last time of vastation must exist before a new church can arise, is frequently declared by the Lord in the prophets, and is there called “vastation” or “layingwaste,” in reference to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and “desolation,” in relation to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It is also spoken of as “consummation” and “cuttingoff.” (See Isa. 6:9, 11–12; 23:8 to the end; 24; 42:15–18; Jer. 25; Dan. 8; 9:24 to the end; Zeph. 1; Deut. 32; Rev. 15; 16; and following chapters.)
해설
AC.411은 앞의 AC.408-410에서 설명한 교회의 황폐와 새로운 시작의 질서를 말씀의 예언서들과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이전 교회의 황폐가 마지막 때에 이르러야 한다고 설명해 왔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이것이 가인의 계보에만 적용되는 해석이 아니라, 주님께서 예언서들에서 거듭 밝히신 교회의 상태와 관련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 다니엘서와 스바냐서, 신명기와 요한계시록의 여러 대목을 제시합니다.
먼저 ‘황폐’(vastation)와 ‘황폐하게함’(layingwaste)은 이번 번호에서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천적인 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에 관계됩니다. 따라서 신앙의 천적인 것들이 황폐해진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신앙에 생명을 주어야 할 사랑과 선이 사라지는 상태와 관련됩니다. 이는 앞에서 가인이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운 데서 시작된 분리가 라멕에게 이르러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 진행된 것과도 연결됩니다.
한편 ‘황량’(desolation)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됩니다. 영적인 것은 신앙의 진리와 그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에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황량은 교회 안에서 신앙의 진리가 더 이상 살아 있는 진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태를 생각하게 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두 용어의 관계를 짧게 구별할 뿐, 각각에 해당하는 모든 영적 상태를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황폐와 황량을 서로 완전히 무관한 두 사건으로 나누기보다, 교회의 마지막 상태를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의 측면에서 구별하여 표현한 것으로 읽는 편이 적절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완결’(consummation)과 ‘끊어버림’(cuttingoff)이라는 표현도 덧붙입니다. 이 말들은 교회의 이전 상태가 끝에 이르는 모습을 가리키는 표현들입니다. 특히 이번 문맥에서 ‘완결’은 교회가 충만하고 온전해졌다는 긍정적인 뜻이 아니라, 이전 교회의 상태가 그 끝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이 두 표현의 세부적인 차이까지 정의하지 않으므로, 각각의 의미는 인용된 본문과 이어지는 AC의 설명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용어 구별은 말씀에 나타나는 심판과 종말의 표현을 읽을 때 중요합니다. 예언서에서 땅이 황폐해지고 성읍이 무너지며 모든 것이 끝나는 듯한 말씀이 나올 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외적인 재난의 묘사로만 읽지 않습니다. 그 말씀에 교회의 내적인 상태, 곧 사랑과 선, 신앙과 진리가 어떻게 쇠퇴하고 끝에 이르는가에 관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언서의 모든 황폐와 멸망의 표현을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뜻으로 바꾸어 읽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각 말씀의 구체적인 속뜻은 해당 문맥 안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이번 번호에 인용된 사6:9, 11-12는 그 연결을 이해하는 데 특히 도움이 됩니다. 이사야가 전하도록 명령받은 말씀에는 백성이 듣고도 깨닫지 못하며 보고도 알지 못하는 상태가 나타납니다. 이어 이사야가 언제까지 그러한 일이 계속되는지를 묻자, 성읍들이 황폐해지고 주민이 없어지며 땅이 황무해질 때까지라는 대답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본문을 인용한 이유는 단순히 황폐라는 낱말이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진리를 듣고 보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가 교회의 황폐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로 앞의 AC.410에서 ‘알면서도알려하지않고,보면서도보려하지않는’ 상태를 설명한 내용과 맞닿아 있습니다.
단9:24이하의 말씀도 이번 논의와 연결됩니다. 그곳에는 허물이 그치고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고 영원한 의가 드러나는 일과 함께, 정해진 기간과 끝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대목을 인용하는 것은 이전 상태의 끝과 새로운 질서의 시작이 서로 연결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AC.411은 다니엘서의 각 구절을 하나씩 풀이하지 않으므로, 이 인용만으로 다니엘서의 모든 예언을 특정한 역사적 시기나 사건에 대응시켜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 15장과 16장 및 그 이후의 장들도 같은 맥락에서 인용됩니다. 그곳에는 재앙과 심판, 이전 상태의 끝을 나타내는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말씀 역시 교회의 마지막 상태를 이해하는 데 관련된다고 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재앙의 장면 자체에만 시선을 머무르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AC.411이 인용하는 목적은 교회의 황폐가 마지막 때에 이른 뒤 새로운 교회가 일어난다는 앞의 설명을 뒷받침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들은 AC.408에서 말한 새로운 ‘아침’과도 함께 읽어야 합니다.
다른 인용 본문들도 각각의 문맥은 다르지만,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제시하는 공통된 논점은 분명합니다. 교회의 마지막 상태는 말씀에서 여러 표현으로 선포되며, 그 상태가 끝에 이르는 일은 새로운 교회의 출현과 연결됩니다. 그렇다고 이 모든 인용 구절이 동일한 사건을 똑같은 방식으로 묘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각각의 예언을 자세히 해설하기보다, 말씀 전체에 이러한 질서가 반복해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제 AC.408-411의 흐름을 함께 보면 논의가 정리됩니다. 이전 교회가 황폐해지기 전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이 모독적인 것들과 뒤섞여 있어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 상태가 끝에 이르면 새로운 빛, 곧 ‘아침’이 밝아 오고 새 교회가 일어납니다. AC.409는 이를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새 교회의 출현과 연결했고, AC.410은 새 교회가 진리를 알고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상태에 머무는 사람들 가운데서가 아니라 아직 진리를 알지 못했던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AC.411은 이러한 질서가 예언서들에서도 거듭 선포된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새교회가일어나기전에황폐의마지막때가있어야한다’는 말을 인간이 일부러 신앙과 체어리티를 잃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황폐를 권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황폐해진 교회의 마지막 상태와 그 이후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는 질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빛은 황폐 자체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앞의 AC.407에서 살펴본 것처럼 교회의 어떤 핵심이 보존되고, 주님께서 새로운 시작의 길을 여시는 것입니다.
결국 AC.411은 라멕에게서 드러난 황폐를 말씀 전체의 교회 역사와 연결하는 번호입니다. ‘황폐’와 ‘황폐하게함’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황량’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되며, ‘완결’과 ‘끊어버림’ 역시 이전 교회가 끝에 이르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들이 예언서들에 거듭 등장한다는 사실을 통해, 이전 교회의 마지막 때와 새 교회의 출현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말씀은 교회의 황폐를 말하면서도 그 이후에 비칠 새로운 아침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AC.411해설)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10
황폐에는두종류가있습니다.첫째는알면서도알려하지않거나,보면서도보려하지않는사람들의황폐입니다.옛날의유대인들과오늘날의기독교인들이그러합니다.둘째는무지로말미암아아무것도알지못하고보지못하는사람들의황폐입니다.고대와오늘날의이방인들이그러합니다.알면서도알려하지않는사람들,곧보면서도보려하지않는사람들에게황폐의마지막때가이르면,그들가운데서가아니라그들이이방인이라고부르는사람들가운데서교회가새롭게일어납니다.홍수이전의태고교회에서도,홍수이후의고대교회에서도,유대교회에서도이러한일이일어났습니다.새로운빛이그이전이아니라바로그때비치는이유는앞에서말한것과같습니다.그때에는사람들이계시된것들이참되다는사실을인정하거나믿지않으므로,더이상그것들을모독할수없기때문입니다. Vastation is of two kinds; first, of those who know and do not wish to know, or who see and do not desire to see, like the Jews of old, and the Christians of the present day; and secondly, of those who, in consequence of their ignorance, neither know nor see anything, like both the ancient and modern gentiles. When the last time of vastation comes upon those who know and do not desire to know, that is, who see and do not desire to see, then a church arises anew, not among them, but with those whom they call gentiles. This occurred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that was before the flood, with the ancient church that was after that event, and also with the Jewish church. The reason why new light shines forth then and not before is, as has been said, that then they can no longer profane the things revealed, because they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that they are true.
해설
AC.410은 교회의 황폐를 두 종류로 구별합니다. 하나는 진리를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고, 보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다른 하나는 무지로 말미암아 아직 진리를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상태입니다. 겉으로 보면 두 경우 모두 참된 신앙이 없는 상태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원인이 서로 다르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첫째는 이미 접한 진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상태이고, 둘째는 진리를 받아들일 기회나 지식 자체가 없었던 상태입니다.
이 구별은 앞의 AC.409에서 교회가 왜 황폐해진 사람들 가운데 머물지 않고,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옮겨지는지를 설명한 내용과 연결됩니다.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과, 진리를 알지 못하여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은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새로운 교회가 후자의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아직 진리를 알지 못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처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일 길도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종류의 황폐를 설명할 때 스베덴보리는 ‘알면서도알려하지않는다’는 표현에 이어 ‘보면서도보려하지않는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단순히 눈으로 무엇을 본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를 이해하거나 알아차리는 일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진리를 접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상태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태도를 강조합니다. 다만 어떤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알고 이해하는지, 무엇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지는 외적인 소속이나 행동만으로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첫째 종류의 사례로 옛날의 유대인들과 자신의 시대의 기독교인들을, 둘째 종류의 사례로 고대와 자신의 시대의 이방인들을 듭니다. 이 사례들은 그가 교회의 황폐와 이전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신학적 구분입니다. 특히 원문의 ‘오늘날’은 AC가 집필되던 스베덴보리의 시대를 가리킵니다. 이를 오늘날의 유대인이나 기독교인, 또는 다른 종교에 속한 모든 사람의 실제 신앙 상태에 대한 일괄적인 판정으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 살펴야 할 것은 집단에 붙인 명칭보다 ‘진리를알고도받아들이지않는상태’와 ‘아직알지못하는상태’ 사이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첫째 종류의 황폐가 마지막에 이르면 교회가 그들 가운데서가 아니라 그들이 이방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가운데서 새롭게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홍수 이전의 태고교회,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 유대교회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새교회가일어난다’는 것은 단순히 기존 교회의 명칭이나 조직이 바뀐다는 뜻이 아닙니다. 새로운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 가운데 교회의 생명이 새롭게 시작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새로운 빛은 그 이전이 아니라 황폐의 마지막 때에 비치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앞의 AC.408에서 제시한 이유를 다시 듭니다. 그때에는 사람들이 계시된 것들이 참되다는 사실을 더 이상 인정하거나 믿지 않으므로, 그것들을 더 이상 모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이 모독적인 것들과 뒤섞여 있는 동안 새로운 빛이나 체어리티가 스며들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그 설명을 이어받아, 그러한 상태가 끝난 뒤에 새로운 시작이 가능해지는 이유를 밝힙니다.
여기서 ‘알면서도알려하지않는것’과 ‘단지알고있을뿐인정하거나믿지않는것’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의 AC.408에서 어떤 진리를 단지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을 모독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AC.410에서도 모독할 수 없게 되는 이유를 계시된 것들이 참되다는 사실을 더 이상 인정하거나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를 ‘진리에관하여들었거나지식이있는사람은모두모독하고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모독의 문제는 거룩한 것을 어떻게 인정하고 믿으며, 그것을 무엇과 결합시키는가에 관계됩니다.
또한 무지 자체가 신앙보다 낫다거나, 진리를 배우지 않는 편이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려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무지가 영적 목표라는 뜻이 아니라,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한 사람에게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것이 새 교회의 시작이지, 계속 무지 가운데 머무는 것이 새 교회의 완성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번 번호의 두 종류의 황폐는 진리를 아는 일의 가치를 낮추기 위한 구별이 아니라, 진리를 대하는 서로 다른 상태를 밝히기 위한 구별입니다.
이제 AC.407-410을 함께 읽으면 논의의 흐름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교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참된 신앙에서 떠나 황폐해질 수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교회의 어떤 핵심은 보존됩니다. 이전 교회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이 모독적인 것들과 뒤섞인 상태가 끝나면 새로운 빛, 곧 ‘아침’이 밝아 옵니다. 그리고 새 교회는 진리를 알고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상태에 머무는 사람들 가운데서가 아니라, 아직 진리를 알지 못했던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AC.410은 바로 이 마지막 구별을 명확히 하는 번호입니다.
결국 이번 번호는 교회의 새로운 시작을 이해할 때 ‘진리를얼마나많이알고있는가’만을 기준으로 삼을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진리를 받아들이려 하는가, 그리고 받아들인 진리가 삶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로 살아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황폐해진 교회의 끝에서 새로운 빛이 비치고, 그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 가운데 새 교회가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AC.410이 앞의 ‘아침’과 ‘새교회’에 관한 설명에 더하는 핵심입니다. (AC.410해설)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9
‘가인’(Cain)이라불린이단의경우도마찬가지였습니다.이이단은시간이흐르면서황폐해졌습니다.사랑을인정하기는했지만신앙을으뜸으로삼아사랑보다앞세웠기때문입니다.이이단에서파생된이단들은점차그것에서벗어났으며,가인으로부터순서상여섯번째인라멕은마침내신앙마저완전히부인했습니다.이때가되자새로운빛,곧아침이밝아왔고,여기서‘아다와씰라’(AdahandZillah)라불리는새교회가이루어졌습니다.이들은‘라멕의아내들’(wivesofLamech)이라불립니다.라멕에게는아무런신앙도없었지만이들이그의아내들이라불리는것은,역시아무런신앙도없었던유대인들의속교회와겉교회가말씀에서‘아내들’(wives)이라불리는것과같습니다.이들은야곱의두아내인레아와라헬로표상되는데,레아는겉교회를,라헬은속교회를표상합니다.이교회들은둘처럼보이지만실제로는하나일뿐입니다.속교회에서분리된겉교회,곧표상적교회는우상숭배적인것또는죽은것과같지만,속교회와겉교회가함께있을때하나의교회를,실로동일한하나의교회를이루기때문입니다.여기서아다와씰라도그러합니다.그러나야곱과그의후손들은라멕과마찬가지로아무런신앙도없었으므로,교회가그들에게머물수없었고불신앙이아니라무지가운데살고있던이방인들에게옮겨졌습니다.교회가황폐해졌으면서도자기들가운데진리들을가지고있는사람들에게머무는일은드물며,있다하더라도거의없습니다.오히려진리들에관하여전혀알지못하는사람들에게옮겨집니다.이들은앞의사람들보다신앙을훨씬더쉽게받아들이기때문입니다. The case was the same with the heresy called “Cain,” which in process of time was vastated, for although it acknowledged love, yet it made faith the chief and set it before love, and the heresies derived from this one gradually wandered from it, and Lamech, who was the sixth in order, altogether denied even faith. When this time arrived, a new light, or morning, shone forth, and a new church was made which is here named “AdahandZillah,” who are called the “wivesofLamech.” They are called the wives of Lamech, although he possessed no faith, just as the internal and external church of the Jews, who also had no faith, are also in the Word called “wives,” being represented by Leah and Rachel, the two wives of Jacob—Leah representing the external church and Rachel the internal. These churches, although they appear like two, are yet only one; for the external or representative, separate from the internal, is but as something idolatrous, or dead, whereas the internal together with the external constitute a church, and even one and the same church, as Adah and Zillah do here. As however Jacob and his posterity, like Lamech, had no faith, the church could not remain with them, but was transferred to the gentiles, who lived not in infidelity but in ignorance. The church rarely, if ever, remains with those who when vastated have truths among them[apud se]but is transferred to those who know nothing at all of truths, for these embrace the faith much more easily than the former.
해설
AC.409는 가인의 계보에서 일어난 황폐와 새로운 교회의 출현을 설명하면서, 교회의 속과 겉이 어떤 관계에 있어야 하는지를 밝힙니다. 앞의 AC.405에서는 라멕이 신앙의 황폐를 의미하고 그의 두 아내 아다와 씰라가 새 교회의 출현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AC.408에서는 이전 교회가 황폐해진 뒤에야 새로운 빛, 곧 ‘아침’이 밝아 온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이 두 설명을 연결하여, 가인에게서 시작된 분리가 라멕에게서 신앙의 소멸에 이르렀을 때 새로운 교회가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가인이라 불린 이단이 처음부터 사랑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사랑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신앙을 으뜸으로 삼아 사랑보다 앞세웠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분리였습니다. 참된 질서에서는 신앙이 사랑에 속하고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얻어야 하지만,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은 그 질서를 뒤집어 신앙이 사랑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후 그 이단에서 파생된 이단들은 점차 최초의 상태에서 더 멀어졌고, 마침내 여섯 번째인 라멕에게서는 신앙마저 완전히 부인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가인의 처음 상태와 라멕의 마지막 상태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인은 사랑을 인정하면서도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웠습니다. 반면 라멕은 신앙마저 부인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계보는 처음부터 모든 신앙과 사랑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의 질서가 뒤집힌 데서 시작하여 그 분리가 점차 진행된 끝에 신앙 자체도 소멸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AC.409는 이러한 진행을 ‘점차그것에서벗어났다’는 말로 압축합니다.
바로 그때 새로운 빛, 곧 아침이 밝아 왔고 새 교회가 이루어졌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새 교회를 ‘아다와씰라’라고 부릅니다. AC.405에서 아다는 새 교회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이며, 씰라는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이 구별을 교회의 속과 겉이라는 관점에서 더욱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새 교회는 내적인 것만을 가진 교회도 아니고 외적인 것만을 가진 교회도 아닙니다. 속과 겉이 함께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라멕에게 아무런 신앙도 남아 있지 않았다면, 왜 새 교회를 나타내는 아다와 씰라가 하필 ‘라멕의아내들’이라고 불리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이 문제를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에 비교하여 설명합니다. 그의 해석에서 야곱과 그의 후손들에게도 참된 신앙이 없었지만, 그들과 관련된 교회의 속과 겉은 말씀에서 아내들로 표상됩니다. 따라서 아다와 씰라가 라멕의 아내들이라고 불린다는 사실만으로 라멕 자신에게 참된 신앙이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비교에서 레아는 겉 교회를, 라헬은 속 교회를 표상합니다. 겉 교회는 예배의 형식과 의식, 말씀의 외적인 표현과 생활의 자연적인 차원에 관계되고, 속 교회는 그 안에 있어야 할 주님을 향한 사랑과 체어리티,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살아 있는 신앙에 관계됩니다. 물론 이번 번호가 레아와 라헬의 모든 상응을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두 아내의 표상을 통하여 교회의 속과 겉이 구별되면서도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는 원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 원리를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속 교회와 겉 교회는 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교회입니다. 교회의 속과 겉은 서로 독립하여 따로 존재하는 두 교회가 아닙니다. 속 교회가 겉 교회에 생명을 주고, 겉 교회는 속 교회가 자연적인 삶 가운데 나타나는 형식이 됩니다. 따라서 둘은 구별되지만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앞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설명할 때 확인한 원리와도 통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구별된다고 해서 서로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듯, 교회의 속과 겉도 구별되지만 하나의 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속 교회에서 분리된 겉 교회, 곧 표상적 교회는 ‘우상숭배적인것또는죽은것과같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외적인 예배 형식 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문제는 그 형식이 속에 있는 사랑과 신앙에서 분리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예배와 의식이 아무리 정교하고 말씀의 외적인 형식을 충실히 보존하더라도, 그 안에 주님을 향한 사랑과 체어리티가 없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교회의 외적 표현이 되지 못합니다. 반대로 속 교회와 겉 교회가 함께 있을 때에는 하나의 살아 있는 교회를 이룹니다.
이것이 아다와 씰라에게도 적용됩니다. 아다는 새 교회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과 관련되고, 씰라는 자연적인 것들과 관련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서로 경쟁하는 두 교회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두 사람은 새 교회의 서로 다른 차원을 나타내며, 그 차원들이 함께 하나의 교회를 이룹니다. 따라서 아다와 씰라의 의미를 이해할 때에는 어느 한쪽만을 참된 교회로 여기거나 다른 한쪽을 불필요한 것으로 보지 않아야 합니다. 새 교회는 내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함께 있어야 온전한 하나의 교회가 됩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왜 교회가 야곱과 그의 후손들에게 머물지 못하고 이방인들에게 옮겨졌는지를 설명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야곱과 그의 후손들은 라멕과 마찬가지로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교회가 그들에게 계속 머물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교회가 옮겨졌다는 것은 어떤 민족의 혈통이나 문화가 본질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영적 상태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차이는 ‘불신앙’과 ‘무지’의 구별에서 드러납니다. 이번 번호에서 불신앙은 단순히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이미 진리들이 자기들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와 관련됩니다. 반면 무지는 진리 자체를 아직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미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황폐해진 사람들보다 신앙을 훨씬 더 쉽게 받아들인다고 설명합니다. 진리를 처음 접하는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이미 진리를 알고도 거부하는 상태에서는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이기가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구별은 앞의 AC.408에서 설명한 모독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거룩한 것을 인정하고 믿으면서 모독적인 것과 뒤섞는 상태에서는 새로운 빛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러한 방식으로 거룩한 것을 모독한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일 길이 열려 있습니다. AC.409에서 교회가 무지 가운데 있던 이방인들에게 옮겨졌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영적 질서와 관련됩니다.
다만 이 설명을 오늘날 특정 종교나 민족에 속한 사람들의 실제 신앙 상태를 일괄적으로 판정하는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그의 신학적 해석 안에서 교회의 황폐와 이전을 설명하는 원리입니다. 실제로 한 사람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인정하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외적인 소속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진리를 많이 배웠다는 사실 자체가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제 AC.405-409의 흐름을 함께 보면 라멕과 두 아내의 의미가 한층 선명해집니다. 가인에게서는 사랑을 인정하면서도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우는 분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분리는 여러 이단을 낳으며 진행되었고, 라멕에게서는 신앙마저 부인되는 황폐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때 새로운 아침이 밝아 왔고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새 교회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새 교회는 천적이고 영적인 내적 차원과 자연적인 외적 차원이 함께 하나를 이루는 교회입니다.
결국 AC.409는 두 가지 질서를 함께 보여 줍니다. 하나는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우는 분리가 계속될 때 결국 신앙마저 소멸할 수 있다는 황폐의 질서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전 교회의 황폐 이후에도 새로운 빛이 비치고, 속과 겉이 함께 하나를 이루는 새 교회가 일어난다는 회복의 질서입니다. 이때 참된 교회의 본질은 외적인 형식만을 보존하는 데 있지 않고, 그 형식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가 살아 있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아다와 씰라는 바로 그 내적·외적 질서가 함께 이루는 하나의 새 교회를 보여 줍니다. (AC.409해설)
AC.408-410을 읽으면 매우 자연스럽게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거룩한 것들을 알면서 그것들을 인정하고 믿은 뒤 모독적인 것들과 뒤섞는 상태를 매우 위험하게 설명하는 한편, 그것들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 사람은 그런 방식으로 모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진리를 배우지 않는 것이 안전한 것 아닐까요? 주님과 말씀에 관하여 적게 알수록 모독할 위험도 줄어든다면, 무지가 오히려 유리한 상태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AC.408의 요점은 ‘무지가좋은상태’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핵심은 ‘모독’이 단순한 무지나 불신앙과 같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거룩한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면 그것을 자기 안에서 거룩한 것으로 받아들였다가 다시 악과 거짓에 결합시키는 방식의 모독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반면 사람이 진리를 알고 인정하며 그것을 신앙의 거룩한 것으로 받아들인 뒤, 그것을 의도적으로 그 반대되는 악과 거짓에 결합시키면 서로 함께 있을 수 없는 것들이 그의 내면에서 뒤섞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위험하다고 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모르는사람’과 ‘알면서거부하는사람’ 사이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AC.410은 황폐에도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알면서도알려하지않고,보면서도보려하지않는’ 상태이며, 다른 하나는 무지 때문에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상태입니다. 후자의 사람에게 진리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 사람의 완성된 영적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직 진리를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이미 알고 보면서도 그것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상태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새로운 교회가 때때로 이전 교회의 중심이 아니라 ‘이방인’이라고 불리던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난다고 설명합니까? AC.408-410의 문맥에서는 이미 계시된 거룩한 것들을 알고도 계속 거부하고 뒤섞어 온 곳보다, 아직 그것들을 알지 못했던 곳에서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떤 민족이나 종교 집단 자체가 다른 집단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것은 교회의 ‘상태’입니다. 어느 곳이든 진리를 알고도 완강하게 거부하는 상태가 될 수 있고, 어느 곳이든 아직 알지 못했지만 받아들일 준비가 된 상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가르침을 ‘복음을듣지않는것이더안전하다’거나 ‘진리를배우지않는것이영적으로유리하다’는 결론으로 가져가서는 안 됩니다. 진리는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고 거듭나게 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문제는 진리를 ‘아는것’이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인 뒤 그것을 어떻게 대하는가입니다. 진리를 알게 된다는 것은 위험 자체가 아니라 큰 선물이며, 동시에 그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이라는 부르심입니다. 위험은 빛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받아들여 빛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의도적으로 어둠과 결합시키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408의 ‘새로운아침’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무지를 보존하기 위해 새 교회를 일으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새로운 빛을 주시기 위해 일으키십니다. 이전 상태에서는 거룩한 것과 모독적인 것이 뒤섞여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그 상태가 끝에 이르면 아직 그렇게 뒤섞이지 않은 곳에서 다시 진리가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지는 목적이 아니라 새로운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출발 상태일 뿐입니다. 목적은 결국 진리를 알고, 인정하고, 믿으며, 그것을 체어리티의 삶과 결합하는 데 있습니다.
목회적으로도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우리는 ‘모르면책임이적으니차라리모르는것이낫다’고 가르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빛을 주실 때 그 빛을 감사히 받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복입니다. 동시에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을 정죄해서도 안 됩니다. 그가 아직 알지 못한다는 사실과 진리를 알고도 거부한다는 것은 같은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AC.408-410은 주님께서 인간의 상태를 얼마나 세밀하게 구별하시며, 황폐 가운데서도 다시 진리를 받을 수 있는 곳을 마련하여 새로운 아침을 여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AC.408심화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