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86.심화

 

1. ‘악인에게도 이런 첫 상태를 허락하시는 주님

 

그는 그때부터 자신의 삶을 시작합니다. 이 삶은 처음에는 행복하고 기쁜 상태인데, 그는 스스로가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왔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금빛을 띠게 되는 밝은 흰빛으로 나타나며, 이는 그의 첫 삶이 곧 천적인 동시에 영적인 삶임을 의미합니다. He then commences his life.This at first is happy and glad, for he seems to himself to have come into eternal life, which is represented by a bright white light that becomes of a beautiful golden tinge, by which is signified his first life, to wit, that it is celestial as well as spiritual. (AC.186)

 

심지어 악인에게도 이런 첫 상태를 허락하시는 주님이 정말 놀랍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사실 AC.182-189를 처음 읽는 사람들은 흔히 이 부분을 놓칩니다. 그러나 천천히 읽어보면, 여기에는 스베덴보리가 평생 강조한 주님의 성품이 매우 아름답게 드러나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는 사람을 처음 만나실 때, 심판자로 만나지 않으시고, 보호자와 아버지로 만나신다는 점입니다.

 

AC.186에서 죽은 사람은 자신의 삶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시작은 두려움도 아니고, 조사도 아니고, 판결도 아닙니다. ‘행복하고 기쁜 상태’입니다. 그는 자신이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왔다고 느끼며, 그 상태는 아름다운 금빛을 띠게 되는 밝은 흰빛’으로 표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그 사람이 선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 구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아직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허락하시는 첫 번째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HH에서도 반복되는 원리입니다. 죽은 직후의 사람은 거의 모두 천사들과 함께 있으며, 자신이 여전히 사람으로 살아 있음을 발견하고, 사랑으로 돌봄을 받습니다. 심지어 지옥으로 가게 될 사람들까지도 처음에는 천사들의 보호 아래 놓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며, 누구도 처음부터 버려진 존재로 취급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 신학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죽으면 곧바로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본 세계에서는, 죽은 사람은 먼저 천적 천사들의 품 안에서 깨어납니다. 마치 긴 여행을 마친 아이가 집에 돌아와 보호받는 것처럼 말입니다.

 

목사님께서 심지어 악인에게도 이런 첫 상태를 허락하시는 주님이 정말 놀랍습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악인도 처음에는 천국의 기쁨을 어느 정도 경험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끝까지 그 사람 안에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살리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가능한 한 천국으로 이끌 수 있는 길을 찾으십니다.

 

물론 이후에는 각 사람이 자신의 진짜 사랑을 드러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천사들의 사랑 안에 계속 머물기를 원하고, 어떤 사람은 점차 그것을 불편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께서 밀어내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의 삶의 방향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AC.182도 분명히 말하듯이, 떠나기를 원하는 쪽은 천사가 아니라 사람 자신입니다.

 

그래서 AC.186을 읽으면 저는 주님의 공의보다 먼저 주님의 자비를 보게 됩니다. 주님은 사람을 만나자마자 너는 어디로 갈 것이다’라고 선언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영원한 생명 안에 들어왔다는 기쁨을 맛보게 하십니다. 먼저 사랑받는 존재임을 느끼게 하십니다. 먼저 살아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어쩌면 이것은 복음서의 탕자 비유와도 비슷합니다. 아버지는 탕자가 돌아왔을 때, 먼저 잔치를 베풀고 옷을 입히고 안아 줍니다. 심문부터 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묘사한 사후 첫 상태도 어딘가 그런 분위기를 풍깁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감탄하신 바로 그 지점,  악인에게도’라는 부분이야말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적 사랑의 특징입니다. 주님은 선한 사람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며, 악인조차도 가능한 한 오래, 가능한 한 부드럽게, 가능한 한 천국 가까이 머물게 하십니다.

 

그래서 AC.186 밝은 흰빛이 아름다운 금빛으로 변한다’는 장면은 단순히 죽은 사람의 경험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주님의 마음을 보여 주는 장면인지도 모릅니다. 그 빛은 인간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사람에게 비추시는 주님의 사랑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AC.186, 창3 앞, ‘영으로서의 삶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됨’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6 그는 그때부터 자신의 삶을 시작합니다. 이 삶은 처음에는 행복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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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6

 

그는 그때부터 자신의 삶을 시작합니다. 이 삶은 처음에는 행복하고 기쁜 상태인데, 그는 스스로가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왔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금빛을 띠게 되는 밝은 흰빛으로 나타나며, 이는 그의 첫 삶이 곧 천적인 동시에 영적인 삶임을 의미합니다. He then commences his life. This at first is happy and glad, for he seems to himself to have come into eternal life, which is represented by a bright white light that becomes of a beautiful golden tinge, by which is signified his first life, to wit, that it is celestial as well as spiritual.

 

해설

 

이 단락은 사후 여정에서 하나의 분명한 경계선을 표시합니다. 앞선 단계들에서는 보호, 인식의 개시, 자기 정체성의 자각이 중심이었다면, 여기서는 명확히 ‘삶이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죽음 이후가 단절이나 정지가 아니라, 하나의 연속된 삶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국면에 들어감을 뜻합니다.

 

그는 그때부터 자신의 삶을 시작한다’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생전에 살았던 삶이 무의미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영으로서의 삶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이전까지는 깨어남과 준비의 단계였고, 이제부터가 실제적인 영적 생명의 전개입니다.

 

이 첫 삶의 정서는 ‘행복하고 기쁜 상태’로 묘사됩니다. 그 이유는 그가 스스로를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왔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영원한 생명은 미래에 주어질 보상이 아니라, 지금 시작된 현재적 삶의 상태입니다. 영은 더 이상 시간의 단절 속에 있지 않고, 지속되는 삶의 감각 안으로 들어옵니다.

 

이 상태는 빛의 형상으로 표현되는데, 처음에는 ‘밝은 흰빛’으로 나타나고, 이어서 ‘아름다운 금빛’을 띠게 됩니다. 흰빛은 진리의 순수함과 새로움, 그리고 혼탁되지 않은 인식을 뜻하며, 금빛은 사랑과 선, 곧 천적인 요소를 상징합니다. 이 두 색의 결합은 이 첫 삶이 단순히 지적인 각성만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가 함께 있는 상태임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빛이 의미하는 바를 직접 설명하며, 이를 ‘그의 첫 삶’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삶이 ‘천적인 동시에 영적인 삶’이라고 명시합니다. 이는 사후 초기 단계에서 인간이 아직 분리나 판단의 상태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사랑의 선과 이해의 진리가 함께 작동하는 조화로운 상태에 있음을 뜻합니다.

 

이 단락은 결국, 죽음 이후의 시작이 두려움이나 심판이 아니라, 기쁨과 충만함으로 열리는 삶이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그리고 그 첫 삶은 인간이 창조될 때 의도된 질서, 곧 천적 요소와 영적 요소가 함께 있는 상태를 잠시나마 다시 경험하는 단계로 제시됩니다.  

 

 

심화

 

1. ‘악인에게도 이런 첫 상태를 허락하시는 주님

 

 

AC.186, 심화 1, ‘악인에게도 이런 첫 상태를 허락하시는 주님’

AC.186.심화 1. ‘악인에게도 이런 첫 상태를 허락하시는 주님’ 그는 그때부터 자신의 삶을 시작합니다. 이 삶은 처음에는 행복하고 기쁜 상태인데, 그는 스스로가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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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7, 창3 앞, 생명력 넘치는 ‘젊음’의 상태에서 출발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7 그가 다음으로 선한 영들의 공동체로 이끌려 가는 것은, 한 젊은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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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5, 창3 앞, ‘지각(perception)의 첫 작동은 반드시 사랑의 정서 안에서’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5 그다음에는 얼굴에서 무언가가 부드럽게 풀려 내려오는 것처럼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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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5.심화

 

1. ‘천사들이 특히 조심하는 것

 

이때 천사들은 특히 조심하여, 그에게서 나오는 어떤 생각도 사랑과 같은 부드럽고 온화한 성질의 것이 아니면 일어나지 않도록 합니다. the angels being especially cautious to prevent any idea coming from him but such as is of a soft and tender nature, as of love; (AC.185)

 

천사들이 특별히 주의하여 부드럽고 온화한 성질의 생각만 허용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이 시기의 영혼이 아직 거칠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며, 지각의 첫 작동은 반드시 사랑의 정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영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 진리는 사랑 없이 주어지지 않으며, 지각은 언제나 애정의 상태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AC.185 해설)

 

 AC.185 본문과 해설을 보면 천적 천사들의 어떠함을 볼 수 있는데요, 저들에 비하면 저는 얼마나 울퉁불퉁하고 무례한지, 얼마나 극단적이고 얕은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많이 부끄럽고 한심합니다...

 

 

목사님, AC.185를 깊이 읽다 보면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천적 천사들의 모습을 보면, 우리는 흔히 자신의 거친 부분, 조급함, 자기 주장, 판단하는 습관 같은 것들을 더욱 선명하게 보게 됩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AC.185는 천적 천사들이 원래부터 그런 존재였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 안에서 그렇게 된 존재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을 다른 종족이나 다른 본성의 존재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한때는 지상에서 살았던 인간들이며, 주님의 인도를 받아 점차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사실 AC.185를 자세히 보면, 여기서 놀라운 것은 천사들의 완전함보다도 그들의 배려’입니다. 그들은 영혼에게 진리를 가르치려고 서두르지 않습니다. 교리를 설명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먼저 그 영혼이 상처받지 않도록 보호합니다. 먼저 사랑의 분위기를 마련합니다. 먼저 부드럽고 온화한 생각만 흐르게 합니다. 이것은 강한 능력의 표현이 아니라, 깊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목사님께서 나는 얼마나 울퉁불퉁하고 무례한가’라고 느끼시는 이유도 어쩌면 같은 사랑을 보고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보지 못하면 자신의 거친 부분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질서를 조금이라도 보게 되면, 그 빛 속에서 자신의 부족함도 함께 보이게 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자신의 거친 부분을 보고 슬퍼하는 상태와, 자신의 거친 부분을 전혀 보지 못하는 상태 중 어느 쪽이 더 위험할까요? 당연히 후자입니다. AC.206에서 보았듯이, 가장 위험한 사람들은 자기 눈이 완전히 열렸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자기 상태를 보지 못합니다.

 

반면 목사님께서 지금 말씀하시는 것은 나는 왜 이렇게 거친가’, ‘왜 이렇게 얕은가’라는 탄식입니다. 물론 지나친 자기 비난은 도움이 되지 않지만, 적어도 이것은 자신의 상태를 전혀 보지 못하는 사람의 언어는 아닙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AC.185의 천사들은 죽은 사람에게서 거친 생각이 올라오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영혼이 아직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지금도 살아 있는 우리에게도 비슷한 일을 하고 계시지 않을까요?

 

목사님께서 지난 몇 년 동안 AC를 번역하고 해설해 오신 과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2018년에 처음 스베덴보리를 접하셨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같은 사람인데도 생각의 결이 많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예전에는 쉽게 지나쳤을 문장이 지금은 몇 시간씩 마음에 남고, 예전에는 관심 없던 사랑과 지각의 문제를 지금은 깊이 묵상하고 계십니다.

 

저는 이것 자체가 이미 주님께서 매우 오랫동안 목사님 안에서 어떤 생각은 약하게 하시고, 어떤 생각은 자라게 하시며, 어떤 거친 부분은 다루고 계신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천적 천사들의 모습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비교의 장소가 아니라 소망의 장소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천적 천사들의 모습을 기록한 이유도 너는 저들에 비해 형편없다’를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어디까지 인도하실 수 있는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님의 말씀을 읽으며, ‘정말 많이 부끄럽고 한심합니다’보다, ‘주님, 저도 저런 부드러움을 조금이라도 배우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더 AC.185에 가까운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천적 천사들 자신도 아마 목사님을 만나면 왜 그렇게 한심해하십니까?’라고 말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AC.185의 모습 그대로, 목사님의 그런 마음이 너무 거칠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사랑과 같은 부드럽고 온화한 생각만 흘러들게 하려고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성품이니까요.

 

 

 

AC.185, 창3 앞, ‘지각(perception)의 첫 작동은 반드시 사랑의 정서 안에서’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5 그다음에는 얼굴에서 무언가가 부드럽게 풀려 내려오는 것처럼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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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5

 

그다음에는 얼굴에서 무언가가 부드럽게 풀려 내려오는 것처럼 보이며, 그에게 지각(perception)이 전달됩니다. 이때 천사들은 특히 조심하여, 그에게서 나오는 어떤 생각도 사랑과 같은 부드럽고 온화한 성질의 것이 아니면 일어나지 않도록 합니다. 그리고 이때에 이르러 그는 자신이 영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Afterwards there seems to be something gently unrolled from the face, and perception is communicated to him, the angels being especially cautious to prevent any idea coming from him but such as is of a soft and tender nature, as of love; and it is now given him to know that he is a spirit.

 

해설

 

이 단락은 이전 단계에서 시작된 ‘빛의 사용’이 이제 단순한 인식의 가능성을 넘어, 실제 지각의 작동으로 넘어가는 순간을 묘사합니다. 여기서 ‘얼굴에서 무언가가 부드럽게 풀려 내려오는 것처럼 보인다’는 표현은, 이해의 장애가 제거되는 것을 넘어서 자기 정체성과 관련된 내적 가림이 걷히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얼굴은 스베덴보리에게서 내적 상태가 외적으로 드러나는 가장 직접적인 표상이며, 그 얼굴에서 무엇인가가 풀린다는 것은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이 열리는 전환점을 뜻합니다.

 

이제 ‘지각이 전달된다’고 말하는데, 이는 단순히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과는 다른 단계입니다. 앞서 인간은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보지는 못했고, 이후에는 희미하게 보았으나 아직 분명히 알지는 못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각은, 생각과 빛이 결합되어 의미를 알아차리는 상태, 곧 내적 인식이 실제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천사들이 특별히 주의하여 ‘부드럽고 온화한 성질의 생각만’ 허용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이 시기의 영혼이 아직 거칠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며, 지각의 첫 작동은 반드시 사랑의 정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영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 진리는 사랑 없이 주어지지 않으며, 지각은 언제나 애정의 상태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여기서 허용되는 생각의 본질이 ‘사랑과 같은 것’으로 한정된다는 것은, 이 단계가 아직 심판이나 자기 성찰의 단계가 아님을 뜻합니다. 오히려 영혼이 스스로를 인식하되, 두려움이나 혼란 없이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준비 단계입니다. 천사들의 조심스러운 보호는, 인간이 자기 존재를 처음으로 명확히 인식하는 순간이 상처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비로소 결정적인 인식이 주어집니다. ‘그는 자신이 영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는 사후 여정에서 매우 중요한 경계선이며, 이전까지는 상태의 변화만 경험했을 뿐,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알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인간은 자신이 더 이상 육체 안에 있지 않으며, 영적 존재로 살아가고 있음을 자각하게 됩니다.

 

이 단락은 결국, 죽음 이후 인간이 ‘살아 있음’을 아는 순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것은 충격이나 각성의 순간이 아니라, 보호와 사랑 속에서 서서히 지각이 열리며, 마침내 자신이 영이라는 사실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심화

 

1. ‘천사들이 특히 조심하는 것

 

 

AC.185, 심화 1, ‘천사들이 특히 조심하는 것’

AC.185.심화 1. ‘천사들이 특히 조심하는 것’ 이때 천사들은 특히 조심하여, 그에게서 나오는 어떤 생각도 사랑과 같은 부드럽고 온화한 성질의 것이 아니면 일어나지 않도록 합니다. the angels b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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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6, 창3 앞, ‘영으로서의 삶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됨’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6 그는 그때부터 자신의 삶을 시작합니다. 이 삶은 처음에는 행복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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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4, 창3 앞, 처음에는 ‘눈꺼풀 사이로 희미하게 비치는 빛’ 정도에 불과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4 이 작은 막이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말려 벗겨진 뒤에, 약간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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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4.심화

 

1. ‘약간의 빛

 

약간의 빛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사람이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 눈꺼풀 사이로 희미하게 보는 빛과 같은 것입니다. some light is visible, but dim, such as a man sees through his eyelids when he first awakes out of sleep; (AC.184)

 

이 단락은 결국, 죽음 이후의 각성이 급격한 변화가 아니라, 보호 속에서 아주 서서히 이루어지는 깨어남임을 조용히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AC.184 해설)

 

 AC.184 본문과 해설에서도 볼 수 있듯이 주님이 하시는 모든 돌보심은 점진적이며, 그 대상의 역량과 상태를 감안, 사랑과 자비로 속도와 정도를 조절하시는 것을 봅니다. 참으로 우리 하나님은 놀라우신 분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AC.182-186을 천천히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우리에게 알려주려는 것은 단순히 죽은 뒤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영혼을 어떻게 다루시는가 하는 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별히 목사님께서 인용하신 AC.184의 장면은 그 사실을 매우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보통 인간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종종 갑작스러운 심판, 즉각적인 판정, 단번에 모든 것이 드러나는 상황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본 사후 세계는 정반대입니다. 죽은 사람은 갑자기 눈부신 빛 속으로 던져지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거의 잠에서 깨어나는 사람처럼 희미한 빛만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빛조차도 천적 천사들의 보호 아래에서 조심스럽게 경험하게 됩니다.

 

생각해 보면, 만일 평생 자연계 안에서만 살던 사람이 죽는 순간 곧바로 천국의 빛을 전면적으로 마주한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충격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영혼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열어주십니다. 마치 갓 잠에서 깨어난 사람의 눈에 처음부터 정오의 태양을 비추지 않으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 원리는 사실 사후 세계만이 아니라, 주님의 모든 섭리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원리이기도 합니다. 말씀을 보아도 그렇고, 거듭남의 과정도 그렇고, 천국 교육도 그렇습니다. 주님은 인간을 끌고 가시지 않고 인도하십니다. 밀어붙이지 않으시고 이끄십니다. 강요하지 않으시고 기다리십니다.

 

스베덴보리가 여러 곳에서 반복하는 것처럼, 주님은 인간 안에 있는 가장 작은 선과 가장 작은 진리까지도 해치지 않으시면서 일하십니다. 그래서 변화는 종종 너무 천천히 일어나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주님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를 다음 단계로 준비시키고 계셨음을 알게 됩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그 대상의 역량과 상태를 감안, 사랑과 자비로 속도와 정도를 조절하신다’는 표현은 바로 AC.184의 핵심을 잘 짚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빛 자체보다 먼저 그 빛을 받을 수 있는 상태를 준비하십니다. 천적 천사들의 보호도, 희미한 빛도, 푸른 그림자도, 작은 별도 모두 그 준비 과정의 일부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목사님께서 오랫동안 연구해 오신 상응’의 원리와도 연결됩니다. 자연계에서 좋은 교사는 학생이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가르칩니다. 부모도 아이의 성장 속도에 맞추어 설명합니다. 의사도 환자의 상태에 따라 약의 용량을 조절합니다. 그렇다면 무한한 사랑과 무한한 지혜 그 자체이신 주님께서 영혼을 다루실 때야말로 얼마나 더 세심하시겠습니까?

 

그래서 AC.184를 읽으며, 저는 오히려 죽음보다 주님의 성품을 보게 됩니다. 죽은 사람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희미한 빛만 보고 있지만, 주님은 이미 그 영혼이 감당할 수 있는 정확한 정도를 알고 계십니다. 너무 빠르지도 않게, 너무 늦지도 않게, 너무 강하지도 않게, 너무 약하지도 않게 인도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AC.184는 단순한 사후 세계의 묘사가 아니라, 주님의 섭리 전체를 보여 주는 작은 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약간의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이 짧은 문장 속에는, 인간을 결코 부수지 않으시고, 언제나 살리시는 주님의 놀라운 사랑과 자비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AC.184, 창3 앞, 처음에는 ‘눈꺼풀 사이로 희미하게 비치는 빛’ 정도에 불과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4 이 작은 막이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말려 벗겨진 뒤에, 약간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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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4

 

이 작은 막이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말려 벗겨진 뒤에, 약간의 빛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사람이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 눈꺼풀 사이로 희미하게 보는 빛과 같은 것입니다. 이때 소생되고 있는 사람은 평온한 상태에 있으며, 여전히 천적 천사들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푸른빛을 띤 일종의 그림자가 나타나고, 그 가운데 작은 별 하나가 보이는데, 나는 이것이 사람마다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After this little membrane has been thus in appearance rolled off, some light is visible, but dim, such as a man sees through his eyelids when he first awakes out of sleep; and he who is being resuscitated is in a tranquil state, being still guarded by the celestial angels. There then appears a kind of shadow of an azure color, with a little star, but I perceived that this takes place with variety.

 

해설

 

이 단락은 AC.183에서 말한 ‘빛의 사용이 주어지기 시작함’이 실제 경험 차원에서는 얼마나 미미하고 점진적인지를 보여 줍니다. 막이 벗겨진 뒤 즉시 밝은 빛이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눈꺼풀 사이로 희미하게 비치는 빛’ 정도에 불과합니다. 이는 사후 초기 인식이 완전한 자각이나 분명한 이해가 아니라, 아주 약한 깨달음의 시작 단계임을 뜻합니다.

 

이때의 빛이 ‘희미하다’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이는 아직 영적 분별이 본격적으로 작동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며, 인간이 자기 상태를 전면적으로 인식하기에는 이르다는 뜻입니다. 마치 깊은 잠에서 막 깨어난 사람이 주변을 인식하되, 아직 사물의 윤곽을 또렷이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와 같습니다.

 

그럼에도 이 시기의 핵심 정서는 ‘평온함’입니다. 소생되는 사람은 아직 두려움이나 혼란 속에 있지 않으며, 여전히 천적 천사들의 보호 아래 있습니다. 이는 앞선 단계와의 연속성을 보여 주며, 이해의 빛이 미약하게 들어오기 시작해도 보호의 상태는 즉시 거두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어지는 ‘푸른빛을 띤 그림자’와 ‘작은 별’의 묘사는 매우 상징적입니다. 푸른색, 곧 청색 계열은 스베덴보리 체계에서 진리와 관련된 색으로 자주 등장하며, 그림자라는 표현은 아직 완전한 빛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강조합니다. 즉, 진리의 빛이 직접적으로 비추는 것이 아니라, 아직은 간접적이고 희미한 형태로만 인식되는 단계입니다.

 

작은 별’은 이 상태 가운데서도 방향성과 중심이 이미 주어지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별은 언제나 인도를 상징하며, 이 작은 별은 이후 인식과 분별이 자라날 씨앗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아직 미약하지만, 무질서한 상태는 아니라는 점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이 현상이 ‘사람마다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덧붙입니다. 이는 사후 과정이 기계적으로 동일하지 않으며, 각 사람의 내적 상태와 생전의 삶에 따라 인식의 방식과 상징적 경험이 달라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다양성 속에서도 질서는 동일하며, 모두가 동일한 평온과 보호의 단계에서 출발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 단락은 결국, 죽음 이후의 각성이 급격한 변화가 아니라, 보호 속에서 아주 서서히 이루어지는 깨어남임을 조용히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심화

 

1. ‘약간의 빛

 

 

AC.184, 심화 1, ‘약간의 빛’

AC.184.심화 1. ‘약간의 빛’ 약간의 빛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사람이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 눈꺼풀 사이로 희미하게 보는 빛과 같은 것입니다. some light is visible, but dim, such as a man sees th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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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5, 창3 앞, ‘지각(perception)의 첫 작동은 반드시 사랑의 정서 안에서’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5 그다음에는 얼굴에서 무언가가 부드럽게 풀려 내려오는 것처럼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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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3, 창3 앞, ‘인간의 지각 속에서 경험되는, 빛의 사용이 주어지는 과정’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3 이 천사들이 어떻게 하는지가 제게 보였습니다. 그들은 마치 왼쪽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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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4.심화

 

2. ‘왼쪽 눈(left eye)

 

그들은 마치 왼쪽 눈의 막을 코의 중격 쪽으로 말아 벗겨내는 것처럼 보였으며, They seemed to as it were roll off the coat of the left eye toward the septum of the nose, (AC.183)

 

 AC.183 본문에서 왜 왼쪽 눈’?

 

 

좋은 질문입니다. 사실 AC.183을 읽으면서 왜 하필 눈인가?’보다 더 나아가 왜 하필 왼쪽 눈인가?’를 묻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곧바로 왼쪽 눈 = 무엇’이라고 직접 해설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스베덴보리의 전체 상응 체계와 다른 저작들을 참고하여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합니다.

 

우선 가장 넓은 의미에서 ’은 이해(intellect) 또는 진리에 대한 인식을 상징합니다. 말씀 전체에서 눈은 단순한 시각 기관이 아니라 보는 능력’, 곧 이해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그래서 눈이 열린다’는 것은 대개 이해가 열리는 것을, ‘눈이 먼다’는 것은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AC.182에서 영적 천사들이 와서 빛을 사용하는 능력’을 주는 장면 바로 다음에 AC.183에서 눈의 막이 벗겨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묘사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여기서 실제 주제는 이해의 개방입니다.

 

그런데 왜 왼쪽 눈’일까요? 스베덴보리의 상응 체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오른쪽과 왼쪽이 서로 다른 기능을 나타냅니다. 가장 넓게 말하면, 오른쪽은 선(good) 또는 의지(will) 쪽에, 왼쪽은 진리(truth) 또는 이해(understanding) 쪽에 연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천국의 큰 사람(Maximus Homo) 구조에서도 오른편은 사랑과 선의 측면, 왼편은 신앙과 진리의 측면과 연결되어 설명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일 이 원리를 AC.183에 적용한다면, 여기서 열리고 있는 것은 사랑의 기관이라기보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이해의 기관입니다. 죽은 사람은 이미 천적 천사들의 보호 아래 사랑과 평안의 상태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영적 천사들이 와서 빛의 사용’을 주려고 합니다. 영적 천사들의 특징은 사랑보다 진리, 지각(perception)보다 이해의 빛에 있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열리는 것은 바로 진리를 보는 측면,  왼쪽 눈’인 것입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가 두 눈’이 아니라 왼쪽 눈’만 언급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지금 일어나는 변화가 인간 전체의 완성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기능의 개방을 말한다는 인상을 줍니다. 아직 그는 천국의 완전한 지혜 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영계에서 사물을 분별하고 인식할 수 있는 첫 단계의 빛을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과 진리가 모두 충만하게 결합된 상태라기보다, 먼저 진리를 인식하는 창이 열리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흐름을 보면, AC.184에서는 희미한 빛이 보이고, AC.185에서는 지각이 전달되며, AC.186에서는 자신이 영원한 생명 안에 들어왔음을 알게 됩니다.  AC.183은 일종의 영적 시력의 개안식’과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왼쪽 눈은 이해의 눈, 진리를 보는 눈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여기서도 지나친 기계적 해석은 피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it is only an appearance’라고 덧붙입니다. 다시 말해, 실제로 영혼의 왼쪽 눈에 어떤 막이 있었고, 그것이 제거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 변화는 내적 상태의 변화이며, 그 변화가 그 사람에게는 왼쪽 눈의 막이 벗겨지는 것처럼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AC.183 왼쪽 눈’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곧, ‘영적 천사들이 주는 진리의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이해의 기능이 열리는 현상이, 그 사람에게는 마치 왼쪽 눈의 막이 벗겨지는 것처럼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AC 전체 문맥과도 가장 잘 어울리는 해석으로 보입니다.

 

 

 

AC.183, 창3 앞, ‘인간의 지각 속에서 경험되는, 빛의 사용이 주어지는 과정’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3 이 천사들이 어떻게 하는지가 제게 보였습니다. 그들은 마치 왼쪽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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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3, 심화 1, ‘현상’(appearance)

AC.183.심화 1. ‘현상’(appearance) 그 사람에게는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실재가 아니라 오직 그렇게 보이는 현상(appearance)일 뿐입니다. To the man it appears as if this were 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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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3.심화

 

1. ‘현상(appearance)

 

그 사람에게는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실재가 아니라 오직 그렇게 보이는 현상(appearance)일 뿐입니다. To the man it appears as if this were really done, but it is only an appearance. (AC.183)

 

이는 영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가 실제로는 내적 상태의 변화이지만, 경험하는 주체에게는 외적 움직임처럼 느껴진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AC.183 해설)

 

 AC.183 본문과 해설에 대한 좀 더 심도 깊은 설명

 

 

AC.183의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핵심은 ‘영계의 현상은 가짜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계의 물질적 사건도 아니다’라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it is only an appearance’라고 할 때, 이것은 ‘허상’이나 ‘착각’이라는 뜻이 아니라, 내적 상태가 영계의 감각 안에서 그렇게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appearance’를 너무 약하게 ‘겉보기’ 정도로만 이해하면 부족하고, 너무 강하게 ‘실재가 아닌 환상’으로 이해해도 곤란합니다. 영계에서의 appearance는 내적 실재가 감각 가능한 형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AC.183에서 천사들이 ‘왼쪽 눈의 막을 코의 중격 쪽으로 말아 벗겨내는 것처럼’ 보였다는 묘사는 실제로 어떤 천사가 육체의 눈꺼풀이나 막을 손으로 벗겨냈다는 뜻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은 이미 자연적 육체의 눈으로 보는 상태가 아니며, 여기서 열리는 눈도 자연적 눈이 아닙니다. 실제 변화는 그 사람의 내적 인식, 곧 영적 빛을 받을 수 있는 상태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적 변화가 경험하는 사람 본인에게는 마치 눈을 덮고 있던 막이 벗겨지는 외적 사건처럼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은 영계에서 ‘장소’, ‘움직임’, ‘’, ‘’, ‘’, ‘’, ‘’ 같은 것들이 모두 내적 상태의 표현이라는 스베덴보리의 큰 원리와 연결됩니다. 영계에서 누가 위로 올라가는 것은 실제 공간 이동이라기보다 더 내적인 선과 진리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며, 어두운 곳으로 내려가는 것은 더 외적이고 낮은 애정 상태로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의 영들에게는 그것이 실제 길, 실제 이동, 실제 빛과 어둠으로 경험됩니다. 그래서 영계의 현상은 ‘없는 것’이 아니라, 자연계와 다른 방식으로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은 ‘실재’와 ‘현상’의 관계입니다. 자연계에서는 우리가 보통 ‘실재’는 물질적이고, ‘현상’은 그것을 눈으로 보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계에서는 그 순서가 다릅니다. 영계의 더 깊은 실재는 애정과 사고, 곧 사랑과 신앙의 상태이고, 그 실재가 바깥으로 드러난 것이 현상입니다. 따라서 AC.183의 ‘appearance’는 실재보다 낮은 것이기는 하지만, 실재와 무관한 거짓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현상은 그 사람의 상태를 정확히 드러내는 상응적 표현입니다.

 

이 점에서 AC.183의 장면은 매우 섬세합니다. 천사들이 눈의 막을 벗겨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사람이 이제 ‘생각만 하던 상태’에서 ‘보는 상태’로 옮겨가기 때문입니다. AC.182에서 그는 이전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오직 생각만 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즉, 내적 의식은 있었지만, 아직 영계의 빛 안에서 사물을 분별하는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AC.183 appearance는 바로 이 전환, 곧 생각의 내적 흐름이 시야의 형식으로 열리는 순간을 보여줍니다.

 

왼쪽 눈’이라는 표현도 그냥 해부학적 묘사가 아니라, 이해의 측면, 특히 진리를 받아들이는 지성의 측면과 관련된 표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은 보는 기능, 곧 이해를 뜻하고, ‘’은 그 이해를 가리고 있던 불투명한 상태를 뜻합니다. ‘코의 중격 쪽으로 말려 벗겨진다’는 묘사는 호흡과 생명, 그리고 내적 감각의 통로가 열리는 느낌을 동반한 상징적 현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지나치게 도식화하여 ‘왼쪽 눈은 반드시 이것, 코의 중격은 반드시 이것’이라고 고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appearance’라고 선을 긋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성경의 환상과 계시를 이해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에스겔이 본 생물들, 요한계시록의 보좌와 유리 바다와 말들, 다니엘의 짐승들 같은 장면들은 단순한 상상이나 문학적 비유가 아니라, 영적 상태와 질서가 영계의 현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환상은 물질세계의 사진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허구도 아닙니다. 그것은 내적 실재가 상응의 방식으로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AC.183의 해설을 조금 더 깊게 풀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영계에서는 내적 상태가 외적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천사들의 작용은 실제로는 영혼의 지각을 여는 내적 작용이지만, 그 사람에게는 마치 눈의 막이 벗겨지는 물리적 사건처럼 경험됩니다. 이것은 착각이 아니라 상응적 현상입니다. 다만 자연계의 물질적 방식으로 실제인 것은 아니며, 영적 상태가 그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번역문에 ‘그 사람에게는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실재가 아니라 오직 그렇게 보이는 현상일 뿐입니다’라고 하신 것은 전체적으로 좋습니다. 다만 ‘실재가 아니라’라는 표현은 독자에 따라 ‘그러면 가짜인가?’라고 오해할 수 있으니, 해설에서는 반드시 보완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를 들면, ‘여기서 실재가 아니라는 말은 그것이 허위라는 뜻이 아니라, 자연적, 물질적 방식으로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영적 실재는 그 사람의 내적 상태 변화이며, 그 상태 변화가 눈의 막이 벗겨지는 현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라고 덧붙이면 안전합니다.

 

 

 

AC.183, 창3 앞, ‘인간의 지각 속에서 경험되는, 빛의 사용이 주어지는 과정’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3 이 천사들이 어떻게 하는지가 제게 보였습니다. 그들은 마치 왼쪽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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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3

 

이 천사들이 어떻게 하는지가 제게 보였습니다. 그들은 마치 왼쪽 눈의 막을 코의 중격 쪽으로 말아 벗겨내는 것처럼 보였으며, 그로 인해 눈이 열리고 빛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는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실재가 아니라 오직 그렇게 보이는 현상(appearance)일 뿐입니다. I was shown how these angels work. They seemed to as it were roll off the coat of the left eye toward the septum of the nose, in order that the eye might be opened and the use of light be granted. To the man it appears as if this were really done, but it is only an appearance.

 

해설

 

이 단락은 AC.182에서 말한 ‘빛의 사용이 주어지는 과정’이 인간의 지각 속에서는 어떻게 경험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하는 일을 물리적, 해부학적 행위로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이 그것을 거의 물리적 사건처럼 지각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영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가 실제로는 내적 상태의 변화이지만, 경험하는 주체에게는 외적 움직임처럼 느껴진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왼쪽 눈’이 언급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체계에서 눈은 이해를, 특히 진리에 대한 인식을 의미하며, 왼쪽은 이성적, 지적 측면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왼쪽 눈의 막이 제거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이성의 사용이 방해받던 상태에서 벗어나 이해의 기능이 열리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 혹은 ‘겉껍질’은 실제 기관이 아니라, 이해를 가로막고 있던 이전의 상태, 곧 혼탁한 사고, 자기중심적 관념, 또는 아직 정돈되지 않은 사유의 층을 뜻합니다. 그것이 제거되는 것처럼 보일 때, 비로소 ‘눈이 열리고’, 앞 단락에서 말한 ‘빛의 사용’이 가능해집니다. 이는 진리가 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질 준비가 된 진리가 작동하기 시작함을 의미합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모든 묘사가 ‘실재’가 아니라 ‘현상’임을 분명히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독자가 상징을 문자 그대로 오해하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선을 긋습니다. 천사들이 실제로 눈의 막을 벗겨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상태가 변하면서 그것이 감각적으로 그렇게 지각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영계의 작용이 언제나 내적이며, 외적 형상은 그 내적 변화가 의식에 번역된 결과임을 보여 줍니다.

 

이 단락은 결국, 인간이 사후에 ‘본다’는 것이 시각 기관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와 인식의 질서가 열리는 문제임을 아주 섬세하게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앞선 AC.182의 ‘생각만 하고 보지 못하던 상태’에서, 이제 비로소 ‘보는 상태’로 넘어가는 전환이 여기서 구체적 이미지로 제시됩니다.  

 

 

심화

 

1. ‘현상(appearance)

 

 

AC.183, 심화 1, ‘현상’(appearance)

AC.183.심화 1. ‘현상’(appearance) 그 사람에게는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실재가 아니라 오직 그렇게 보이는 현상(appearance)일 뿐입니다. To the man it appears as if this were 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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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왼쪽 눈(left eye)

 

 

AC.183, 심화 2, ‘왼쪽 눈’(left eye)

AC.184.심화 2. ‘왼쪽 눈’(left eye) 그들은 마치 왼쪽 눈의 막을 코의 중격 쪽으로 말아 벗겨내는 것처럼 보였으며, They seemed to as it were roll off the coat of the left eye toward the septum of the nose, (AC.183) 위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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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4, 창3 앞, 처음에는 ‘눈꺼풀 사이로 희미하게 비치는 빛’ 정도에 불과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4 이 작은 막이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말려 벗겨진 뒤에, 약간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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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2, 창3 앞,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AC.182-189)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2 천적 천사들이 소생된 사람과 함께 있을 때에는 그를 떠나지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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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심화

 

2. 그 땅의 들짐승

 

 AC.45 해설 하단에 이 글은 그 땅의 들짐승이라는 표현을 통해, 의지 안에서도 더 낮은 층위를 구분합니다. 들짐승은 몸과 더 가까이 연결된 욕정과 쾌락을 뜻합니다. 이것들은 완전히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질서 안으로 들어와야 할 대상입니다. 거듭남은 욕정을 없애는 과정이 아니라, 그것들이 주님의 통치 아래에서 제자리를 찾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내용이 참 감동적입니다. 혹시 그러면 그 구체적인 방법을 좀 알 수 있을까요? 실제 일상 속에서는 매 순간 바로 이 욕정과 쾌락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은 실제 삶과 가장 깊이 맞닿아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결론부터 또렷하게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욕정과 쾌락을 질서 안으로 두는 방법은 그것을 직접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부터 다스림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싸워서 뿌리 뽑는 방식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의 질서 아래에 두어 방향을 바꾸는 방식’입니다.

 

먼저 아주 중요한 원리를 하나 붙들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반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욕정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그것이 주인이 되어 있는 상태가 문제’입니다. 같은 욕망이라도, 주님 아래 있으면 선을 섬기는 도구가 되고, 자기 사랑 아래 있으면 사람을 끌고 가는 힘이 됩니다. 그래서 핵심은 제거가 아니라 ‘통치의 주체가 누구인가’입니다.

 

이걸 일상적으로 풀어보면 이렇게 시작됩니다. 첫 단계는 ‘알아차림’입니다. 어떤 욕정이나 쾌락이 올라올 때, 그것을 바로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지금 이건 어디서 오는 걸까? 나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 걸까?’ 하고 한 발짝 떨어져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질서의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 그 욕정이 더 이상 ‘주인’이 아니라, ‘내가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방향을 바꾸는 선택’입니다. 예를 들어,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올라올 때, 그것을 억지로 없애려 하면 더 커집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럼 이 에너지를 다른 사람을 세워 주는 데 쓰자’라고 바꾸면, 같은 욕망이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합니다.’ 쾌락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끊으려 하면 반발이 생기지만, 그것을 더 건강하고 질서 있는 방식으로 옮기면, 점점 자리를 찾아갑니다. 이것은 ‘억제’가 아니라 ‘재배치’입니다.

 

세 번째는 ‘작은 절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극단적인 금욕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대신, 아주 작은 선택에서 질서를 세우는 것을 중요하게 봅니다. 예를 들어, 말하고 싶은 것을 한 번 참는 것, 더 가지려는 마음에서 한 번 멈추는 것, 감정이 올라올 때 즉시 반응하지 않는 것 등, 이런 작은 절제들이 쌓이면서, 욕정은 점점 ‘주인이 아니라 종의 자리’로 내려옵니다. 이것이 실제적인 변화입니다.

 

네 번째는 가장 중요한데,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빠지면, 앞의 모든 과정이 결국 자기 노력으로 끝나버립니다. 욕정과 싸우다 보면 금방 느끼게 됩니다. ‘이건 내 힘으로 안 되는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주님, 이건 제 것이 아니라, 저를 끌고 가는 힘입니다. 주님이 다스려 주세요.’ 하고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진짜 싸움’입니다. 영적 싸움, 곧 영적 전투는 직접 싸우는 것, 곧 내가 이 ‘욕정과 쾌락’을 직접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넘기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를 하나로 묶으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알아차리고  방향을 바꾸고  작은 절제로 길을 내고  주님께 맡긴다.’ 이것이 일상에서 가능한 실제적인 길입니다.

 

이 과정은 빠르게 끝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거듭남의 평생 과정’으로 봅니다. 그래서 어떤 욕정이 계속 올라온다고 해서 실패가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대하는 방식이 바뀌고 있는가’입니다. 예전에는 그대로 끌려갔다면, 이제는 한 번 멈추고, 한 번 생각하고, 한 번 주님께 돌리는, 즉 이럴 수만 있다면, 이것은 이미 이 질서가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욕망을 없애시기보다, 그것이 우리를 끌고 가지 못하게 하십니다.’

 

욕정과 쾌락을 다스리는 길은 그것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빛과 사랑 아래 두어 방향과 자리를 바꾸게 하는 것입니다.’

 

 

 

AC.45, 창1:24-25, ‘짐승으로 드러나는 마음 : 애정과 욕정의 질서화’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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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 심화 1, ‘태고 시대’

AC.45.심화 1. ‘태고 시대’ AC.45 본문에 ‘태고 시대’가 나오는데요, 기독교 배경이 없는 분들은 대뜸 ‘석기 시대’를 떠올리실 겁니다. 동굴에서 살며, 돌연장을 사용, 사냥을 하며 살았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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