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70.심화

 

1. 영계에도 하루가 존재하는지?

 

이 세상 하루나 사후 세계인 저세상 하루나 동일한가요? 아니, 애초에 영계에 하루라는 게 존재하나요? 영계는 자연계처럼 시공간의 나라가 아니라 상태의 나라라 들었는데, AC.70 본문에서는 하루라는 게 있는 것처럼 기술하고 있어 좀 이상합니다.

 

 

아주 정확한 지점을 짚으신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영계에는 자연계와 같은 의미의 시간으로서의 하루’는 존재하지 않지만, ‘하루와 같은 것’, 곧 상태의 변화로 나타나는 유사한 주기’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Arcana Coelestia나 다른 저작들에서 하루’, ‘아침’, ‘저녁 같은 표현이 나오는 것은,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상태의 질서 있는 흐름’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한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먼저 원칙부터 보면,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영계는 시간과 공간의 나라’가 아니라 상태(state)의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시간이 흐르고 하루가 나뉘지만, 영계에는 자연적 태양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의미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곳에서는 사랑과 신앙, 곧 의지와 이해의 상태가 변함에 따라 시간처럼 느껴지는 것’이 생깁니다. 그래서 시간’은 실제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상태의 변화에 대한 지각’으로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루’라는 표현이 나올까요? 이유는 그 상태 변화가 단순히 불규칙한 것이 아니라, 매우 질서 있고 반복적인 주기’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특히 천국에서 아침저녁’과 유사한 상태의 순환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주님께 대한 사랑과 지혜가 더 밝게 열리는 상태가 아침’, 그 빛 안에서 활동하는 상태가 ’, 점차 빛이 약해지는 상태가 저녁’, 그리고 비교적 어두워지고 휴식에 가까운 상태가 ’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해가 뜨고 지는 것이 아니라, ‘내적 상태의 변화’가 그렇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70에서 하루’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은 전혀 모순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의도적으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자연적 시간 개념을 빌려, 영적 상태의 질서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하루’는 자주 단순한 24시간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 또는 하나의 과정’을 의미합니다. 창세기의 창조의 6’이 실제 시간이라기보다 거듭남의 단계들을 의미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차이를 하나 분명히 하시면 이해가 훨씬 또렷해집니다. 이 세상의 하루’는 외부 조건(태양의 운동)에 의해 강제로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반면 영계의 하루’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 곧 사랑과 생각의 상태 변화에 따라 형성됩니다. 그래서 영계에서는 같은 하루’라도 사람마다 다르게 경험될 수 있고, 어떤 상태에서는 시간이 매우 빠르게, 어떤 상태에서는 거의 느껴지지 않게 흐르는 것처럼 인식됩니다.

 

정리하면, 영계에는 자연적 시간 단위로서의 하루’는 없지만, 상태의 변화가 만들어 내는 질서 있는 순환이 있으며, 그것이 인간의 언어로 표현될 때 하루’라는 말로 번역됩니다. 따라서 AC.70 하루’는 시간 개념이 아니라 상태의 한 주기’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하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AC.70, 심화 2, ‘연옥’(purgatory)

AC.70.심화 2. ‘연옥’(purgatory) 위 해설에 ‘연옥’이 나오는데요, 사실 교회사도 그렇고, 특히 개신교는 카톨릭의 이 ‘연옥’에 대해 몹시 불편해합니다. 개신교인들은 사람이 죽었다가 눈 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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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 창2, ‘소생’, 곧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으로 들어갈 때

AC.70 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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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

 

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으로 들어갈 때, 그 상태가 어떠한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음을 제가 알 수 있도록, 저는 육체 안에 사는 동안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과 말하고,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것도 하루나 한 주에 그친 것이 아니라, 여러 달 동안, 거의 일 년 동안이나 이 세상에서처럼 똑같이 말하고 교제했습니다. 그들은 육체 안에 사는 동안 자기들이 그랬듯, 또 지금도 매우 많은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삶은 계속될 거라고 믿지 않는 그러한 불신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몹시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사실상 육체의 죽음 이후에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사람은 다른 삶(the other life) 안에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의 연속(a continuation of life)이기 때문입니다. As it is permitted me to disclose what for several years I have heard and seen, it shall here be told, first, how the case is with man 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or how he enters from the life of the body into the life of eternity. In order that I might know that men live after death, it has been given me to speak and be in company with many who were known to me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 and this not merely for a day or a week, but for months, and almost a year, speaking and associating with them just as in this world. They wondered exceedingly that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they were, and that very many others are, in such incredulity as to believe that they will not live after death; when in fact scarcely a day intervenes after the death of the body before they are in the other life; for death is a continuation of life.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이제 서론의 방향을 분명히 바꿉니다. AC.67-69 이런 증언이 가능한 이유’와 인간 본성의 구조’를 설명했다면, AC.70은 그 전제 위에서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는 이제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밝힙니다. 그 첫 주제가 바로 사람이 소생될 때’, 다시 말해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과정 중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기서 이미 스베덴보리는 죽음을 단절이나 소멸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죽음을 들어감’으로, 곧 이동이 아니라 상태의 전환’으로 규정합니다.

 

특히 눈여겨볼 표현은 소생될 때(when he is being resuscitated)라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죽음을 끝이 아니라 깨어남으로 이해하게 만듭니다. 사람은 죽어서 무언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살아 있던 상태가 다른 방식으로 의식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후 세계’라는 표현보다, ‘영원한 삶으로 들어간다’라는 말을 씁니다.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삶의 차원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증언이 어떻게 확인되었는지를 말합니다. 매우 구체적이고, 그래서 더 충격적입니다. 그는 육체 안에 살 때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과 사후에 다시 말하고, 함께 있었으며, 그 시간이 하루나 한 주가 아니라 여러 달’, 심지어 거의 일 년’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교제의 방식은 이 세상에서와 똑같이’였습니다. 이는 사후 세계가 막연한 안개 속의 상태가 아니라, ‘의식, 기억, 관계가 지속되는 실제적 삶’임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이 대목에서 스베덴보리는 어떤 감상이나 신비적 분위기를 전혀 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지나치게 담담합니다. 그 담담함 자체가 이 경험을 비범한 사건’이 아니라 확인된 사실’로 제시합니다. 마치 누군가가 나는 그곳에 가서 그 사람을 만났다’고 말하듯, 그는 나는 그들과 말했고, 함께 지냈다’고 말합니다. 이 어조는 독자에게 불편함을 주지만, 동시에 진술의 무게를 크게 만듭니다.

 

사후에 만난 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보인 반응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육체 안에 살 때, 그리고 여전히 이 땅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더 이상 삶이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을 몹시 이상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책망이나 비난도 없습니다. 다만 순수한 놀라움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사후의 삶은 너무나 자명한 현실이었기에, 그것을 부정하던 과거의 자신과 타인의 상태가 오히려 이해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사후 세계에 대한 인간의 불신을 지적하지만, 그것을 도덕적 문제로 다루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무지의 문제’, 더 정확히는 겉 사람에 너무 깊이 잠긴 상태의 결과’로 암시합니다. 육체의 감각과 세상의 질서에 지나치게 몰입해 있으면, 생명이 그 너머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막상 육체를 벗어나면, 그 불신은 즉시 사라집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문장은 이 글의 정점입니다. ‘사실상 육체의 죽음 이후에 하루도 거의 지나지 않아 사람은 다른 삶 안에 있게 된다.’ 여기에는 어떤 중간 지대나 긴 공백이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연옥이나 무의식 상태를 전제하지 않습니다. 그는 죽음과 사후 삶 사이에 거의 시간적 간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단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 사후관 전체를 요약하는 문장입니다.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라, 삶의 다른 국면입니다. 끊어지는 것은 육체와의 관계이지, 의식과 존재 자체가 아닙니다. 사람은 살아 있는 채로 다른 삶의 양식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사후 세계는 낯선 곳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 형성되어 온 삶의 성향과 애정이 그대로 이어지는 자리입니다.

 

AC.70은 그래서 독자에게 조용하지만, 결정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죽음을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만약 죽음을 끝으로 이해한다면, 삶은 필연적으로 불안과 집착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계속, 지속, 연속’으로 이해한다면, 이 땅의 삶은 준비이자 전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아르카나 전체를 통해 말하려는 이야기를 이 글에서 이미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 삶은 다음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서 AC.67-69 말씀이 왜 다른 삶, 즉 사후 시작되는 삶을 향하는가’를 설명했다면, AC.70은 이제 그 다른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그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실제 경험에 근거해 말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부터 아르카나는 더 이상 추상적 논의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연속성에 대한 상세한 증언’으로 전개됩니다.

 

 

심화

 

1. 영계에도 하루가 존재하는지?

 

 

AC.70, 심화 1, 영계에도 ‘하루’가 존재하는지?

AC.70.심화 1. 영계에도 ‘하루’가 존재하는지? 이 세상 ‘하루’나 사후 세계인 저세상 ‘하루’나 동일한가요? 아니, 애초에 영계에 ‘하루’라는 게 존재하나요? 영계는 자연계처럼 시공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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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연옥(purgatory)

 

 

AC.70, 심화 2, ‘연옥’(purgatory)

AC.70.심화 2. ‘연옥’(purgatory) 위 해설에 ‘연옥’이 나오는데요, 사실 교회사도 그렇고, 특히 개신교는 카톨릭의 이 ‘연옥’에 대해 몹시 불편해합니다. 개신교인들은 사람이 죽었다가 눈 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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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AC.70, 심화 3,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AC.70.심화 3.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위 본문에 ‘사실상 사람은 ‘다른 삶’(the other life) 안에 있게 됩니다.’라는 부분 말인데요, 왜 이런 ‘중간 텀’이 있는 건가요? 마치 이 방문 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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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1, 창2, 'AC 전개 방식'

AC.7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말씀 본문 안에 들어 있는 내용들 사이에 그대로 끼워 넣게 되면, 그것들은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각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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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9, 창2, '사람은 본래 영들,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69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이렇게 창조되었습니다. 곧,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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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9.심화

 

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본문 중 사람이 잠겨 있던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기만 하면, 그 길은 다시 열리며, 그는 영들 가운데 있게 되고, 그들과 더불어 어떤 공동의 삶 안에 있게 됩니다.’ 말인데요, 이것은 사람의 사후 일어나는 일을 말하는 건가요? 해설을 보니 스베덴보리 본인은 이런 상태였던 것 같은데... 그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이런 상태에 들어갈 수 있나요?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69의 그 구절은 ‘일반적인 사람에게 요구되는 상태’나 ‘의도적으로 들어가야 할 영적 체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 아래 허락된 ‘예외적 개방 상태’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Emanuel Swedenborg 자신이 경험한 바로 그 상태가 그것이며, 모든 사람이 동일한 방식으로 추구하거나 재현해야 하는 길로 제시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붙잡으셔야 할 것은 ‘이것은 사후 상태의 원리를 설명하는 동시에, 특수한 경우의 예시를 포함한다’는 점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이 구절은 1차적으로는 ‘사후 상태’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적 감각과 그에 묶여 있던 것들이 물러가고, 그 즉시 영적 감각이 열리면서 영들과 더불어 실제적인 공동의 삶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다른 삶(the other life)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일반 원리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자신에게는 이 상태가 ‘육체 안에 있으면서도’ 제한적으로 열렸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죽은 뒤에 일어날 일을 미리 경험하도록 허락받은 ‘특수한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이런 상태에 들어갈 수 있는가’인데, 여기서 방향을 아주 조심해서 잡으셔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전체 저작을 일관되게 보면, 그는 결코 사람들이 ‘영들과 교통하는 상태’를 추구하도록 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것은 매우 위험할 수 있으며, 인간의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의 특별한 보호와 목적 아래에서만 허락된다고 강조합니다. 인간의 정상적인 상태는 ‘외적으로는 이 세상에, 내적으로는 주님과 연결된 상태’이지, 의식적으로 영들과 교류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간다’는 말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을 문자적으로 ‘감각을 끊는다’, ‘현실을 떠난다’로 이해하시면 곧바로 길이 어긋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육체적인 것’은 단순히 몸 자체가 아니라, ‘감각 중심의 삶’,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묶인 상태’를 포함합니다. 따라서 이것이 물러간다는 것은, 외적 삶을 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에 지배되지 않는 상태’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허락된 방식은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우리는 영들과 눈에 보이게 교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와 이해의 질서’를 통해 이미 영적 세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선을 사랑하고 진리를 따르며 살아갈 때, 그는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천사들과 함께 있는 것이고, 반대로 자기중심적 사랑에 빠질 때는 다른 영들과 연결됩니다. 즉, 우리는 이미 ‘공동의 삶 안에’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감각적으로 열려 있지 않을 뿐입니다.

 

이 점에서 보면,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영적 체험을 얻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을 통해 상태를 바꾸는 것입니다. 곧, 의지가 정화되고 이해가 밝아지면서, 점점 더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때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간다’는 것은, 세상일을 하면서도 그것에 매이지 않고, 감각을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중심이 되지 않으며, 점점 더 ‘속 사람’이 ‘겉 사람’을 이끄는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히려 여기서 중요한 역설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이 억지로 ‘영적 상태’에 들어가려고 하면 할수록, 그것은 참된 영적 상태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그 욕구 자체가 종종 ‘보고 싶다’, ‘특별해지고 싶다’는 자기중심적 사랑에서 나오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이런 감각적 개방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대신 더 안전하고 본질적인 길, 곧 ‘사랑과 신앙을 통한 내적 결합’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정리하면, AC.69의 상태는 ‘모든 사람이 들어가야 할 체험 상태’가 아니라, ‘죽은 뒤에는 누구나 들어가게 되는 실제 상태’이며, 동시에 스베덴보리에게는 특별히 미리 열렸던 상태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그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육체적인 것에 지배되지 않는 삶’, 곧 사랑과 진리 안에서 점점 자유로워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이미, 비록 보이지 않을 뿐, 영들과 더불어 참된 공동의 삶 안에 있는 것입니다.

 

 

 

AC.69, 창2, '사람은 본래 영들,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69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이렇게 창조되었습니다. 곧,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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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9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이렇게 창조되었습니다. ,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몸을 입은 영이므로, 그들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에 너무 깊이 잠기게 되어, 그 밖의 것에는 거의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게 되자, 그 길이 닫히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잠겨 있던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기만 하면, 그 길은 다시 열리며, 그는 영들 가운데 있게 되고, 그들과 더불어 어떤 공동의 삶 안에 있게 됩니다. Man was so created by the Lord as to be able while living in the body to speak with spirits and angels, as in fact was done in the most ancient times; for, being a spirit clothed with a body, he is one with them. But because in process of time men so immersed themselves in corporeal and worldly things as to care almost nothing for aught besides, the way was closed. Yet as soon as the corporeal things recede in which man is immersed, the way is again opened, and he is among spirits, and in a common life with them.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의 모든 오해의 가능성을 단번에 정리해 버립니다. 그는 ‘영들, 그리고 천사들과 말하는 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능력의 문제로 다루지 않습니다. 대신 그것을 ‘창조 질서의 문제’로 끌어올립니다. 즉, 이것은 어떤 특별한 인간에게만 주어진 예외적 능력이 아니라, ‘사람은 처음부터 그런 게 가능하도록 창조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이 한 문장만으로도, 영적 교통을 둘러싼 많은 종교적 상상과 오해는 자리를 잃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본질적으로 ‘몸을 입은 영’입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인간을 ‘육체를 가진 존재’에서 출발하지 않고, ‘영적 존재가 육체를 입은 상태’로 정의합니다. 따라서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은 본질적으로 낯선 일이 아닙니다. 같은 종류의 생명이 다른 옷을 입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영적 존재 사이의 단절은 본질이 아니라 ‘상태의 문제’입니다.

 

태곳적에는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졌다’는 말은, 스베덴보리의 인류사 이해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태고교회는 영계와 자연계를 오가는 특별한 집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오간다’는 개념 자체가 필요 없었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분리되지 않았고, 자연과 영적 실재가 동시에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영적 교통은 신비 체험이 아니라 ‘삶의 일상적 차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전환합니다. 문제가 언제, 왜 발생했는지를 분명히 짚습니다. 사람들은 점차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에 자신을 깊이 잠그게 되었고, 그 결과 다른 것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육체적인 것’ 자체가 악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그것들 속에 잠겨 버린 상태’입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을 압도하고, 외적 관심사가 내적 생명을 가려 버린 상태입니다.

 

이때 스베덴보리는 ‘길이 닫혔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정확합니다. 길은 파괴된 것이 아니라 닫혔습니다. 즉, 인간의 본성에서 영적 교통의 가능성은 제거된 것이 아니라, ‘차단된 상태’로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만약 길이 파괴되었다면 회복은 불가능하지만, 닫혔다면 다시 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글의 후반부는 놀랍도록 희망적입니다. ‘사람이 그 안에 잠겨 있던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기만 하면’ 길은 다시 열린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어떤 특별한 의식이나 기술, 수행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잠김에서 벗어남’을 말합니다. 즉, 겉 사람의 지배가 약화되고, 속 사람이 다시 숨을 쉴 수 있는 상태가 되면, 인간은 자연스럽게 영들 가운데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영들 가운데 있게 되고, 그들과 더불어 어떤 공동의 삶 안에 있게 된다’는 마지막 문장은, 사후 세계를 전혀 다른 차원의 삶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되고 있던 삶의 ‘연속’입니다. 사람은 죽음 이후에 갑자기 새로운 세계로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이 속해 있던 공동의 삶의 차원이 분명해질 뿐입니다.

 

이 지점에서, 목사님이 앞서 던지신 질문, 곧 ‘스베덴보리는 평소 영계를 그렇게 오랜 시간 방문하면서 동시에 어떻게 이런 방대한 저술 작업을 병행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이 다시 한번 명확해집니다. AC.69는 그 답을 ‘특별한 이중생활’이 아니라, ‘본래 인간에게 주어진 상태의 부분적 회복’에서 찾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육체의 삶을 중단한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것들에 대한 잠김이 느슨해진 상태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땅에서 글을 쓰며 살면서도, 동시에 영적 공동체 안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계를 방문할 동안 육신은 마치 무슨 마취 상태에 있듯 꼼짝 못 한 채 누워있었다가 몸 안에 돌아오면 그때 깨어나 기억을 더듬어 가며 저술을 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방식이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AC.69는 우리에게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인간을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만약 인간을 철저히 육체적, 세속적 존재로만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의 말은 처음부터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몸을 입은 영’으로 이해한다면, 이 글은 기이한 선언이 아니라, 오히려 잃어버린 인간 이해의 회복처럼 들리기 시작합니다.

 

AC.67이 ‘말씀의 내적 의미는 다른 삶을 향한다’는 선언이었다면, AC.68은 ‘나는 그것을 경험했다’는 증언이었고, AC.69는 ‘그 경험은 인간 본성 자체에 근거한다’는 설명입니다. 이 세 단락이 함께 놓일 때, 스베덴보리는 더 이상 신비가가 아니라, ‘창조 질서를 다시 설명하는 증언자’로 서게 됩니다.  

 

 

심화

 

1.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하려면

 

 

AC.69, 심화 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AC.69.심화 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본문 중 ‘사람이 잠겨 있던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기만 하면, 그 길은 다시 열리며, 그는 영들 가운데 있게 되고, 그들과 더불어 어떤 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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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 창2, '이 책에 대한 사람들의 예상 반응'

AC.68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많은 이들은 이것이 모두 상상이라고 할 것이며,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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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CR(True Christian Religion) 소개, 그러니까 왜 이름을 이렇게 지었으며, 왜 세상 떠나기 전 이런 책을 썼고, 왜 주님은 이 책이 나오자 제자들을 불러 온 천국에 전하게 하셨는지, 그리고 이 책은 보니까 거의 조직신학같아 보이는데,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처음 리딩하기 시작할 때, 이 책은 언제쯤 읽는 게 좋을지 등에 대한 자세한 해설을 부탁합니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TCRArcana Coelestia의 연장선 위에 있으면서도, 성격 자체는 전혀 다른 책입니다. AC가 ‘창세기, 출애굽기의 속뜻을 따라가며 인간의 거듭남 과정을 풀어낸 주석서’라면, TCR은 그 모든 내용을 한 번에 정리하여 ‘기독교 전체를 다시 세우는 종합 교리서’, 곧 일종의 ‘영적 조직신학’이라고 보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왜 이름이 ‘True Christian Religion’(참된 기독교)인가 하는 질문은 이 책의 존재 이유와 직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당시 교회가 이미 본래의 기독교에서 벗어나 있다고 보았습니다. 특히 ‘신앙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식의 분리된 신앙 이해, 삼위일체의 오해, 삶과 단절된 교리 중심 신앙 등을 문제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 주님께서 세우신 기독교’, 곧 사랑(체어리티)과 신앙이 하나로 결합된 본래의 기독교를 다시 드러내기 위해 이 책을 썼습니다. 여기서 ‘True’라는 단어는 단순히 ‘정확한’이 아니라 ‘원래의, 회복된, 본질적인’이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말하자면 ‘기독교의 리셋판’, ‘본래 상태로 복원된 기독교’라는 선언입니다.

 

왜 생애 말년에 이 책을 썼는가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미 AC를 비롯한 수많은 저작에서 방대한 진리를 풀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부분 ‘조각들’처럼 흩어져 있었습니다. TCR은 그 조각들을 하나로 모아, 하나님, 신앙, 체어리티, 회개, 거듭남, 성례, 성경, 교회, 종말 등 기독교의 핵심 주제들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한 ‘최종 정리’입니다. 그래서 TCR은 단순한 한 권의 책이 아니라, 그의 전 생애 사상의 ‘결론’이자 ‘봉인’에 해당합니다. 마치 오랜 시간 쌓아 온 내용을 마지막에 한 권으로 정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하신 ‘주님께서 이 책이 나오자 제자들을 불러 온 천국에 전하게 하셨다’는 대목은, 이 책이 단순한 신학서가 아니라 ‘새 시대의 선언문’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 책의 출간은 단순한 출판 사건이 아니라 영적 세계에서의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곧 ‘새 교회(New Church)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고, 천국과 교회 모두에 새로운 진리가 선포되는 계기였습니다. 그래서 ‘천사적 차원에서도 이 책의 내용이 전파되었다’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는 과장된 상징이 아니라, 그만큼 이 책의 위상을 강조하는 신학적 진술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 책은 매우 ‘조직신학적’입니다. 실제로 구성도 그렇습니다. 하나님론, 구원론, 신앙과 체어리티, 회개, 거듭남, 성례, 성경, 교회 등 전통적인 조직신학의 구조를 그대로 따르면서, 그 안의 내용을 완전히 새롭게 재해석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차이는, 일반 조직신학이 ‘논리’ 중심이라면, TCR은 ‘영적 경험과 계시 + 상응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읽다 보면 단순한 교리 설명을 넘어, 인간의 실제 변화 과정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언제 읽는 것이 좋은가 하는 질문이 매우 현실적이고 중요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너무 처음에는 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너무 늦게도 아닙니다.’입니다. 처음부터 이 책을 읽으면 개념이 너무 압축되어 있고 전제가 많아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최소한 Heaven and Hell이나 초기 저작들, 그리고 AC의 일부를 통해 ‘속뜻’, ‘상응’, ‘거듭남’ 같은 기본 개념이 어느 정도 형성된 후에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너무 뒤로 미루면, 전체 그림 없이 부분만 계속 파고들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시점은 ‘기본 개념이 잡히고, 이제 전체 구조가 궁금해질 때’입니다. 그때 TCR을 읽으면, 그동안 흩어져 있던 내용들이 한 번에 정리되면서 ‘, 이게 다 하나였구나’ 하는 깨달음이 옵니다.

 

정리하자면, TCR은 스베덴보리 사상의 ‘정수이자 종합’이며, 동시에 ‘새 교회의 헌장’과 같은 책입니다. AC가 ‘여정’이라면, TCR은 ‘지도’입니다. AC가 ‘과정의 기록’이라면, TCR은 ‘완성된 구조도’입니다. 그래서 두 책은 경쟁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완성시키는 관계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AC를 통해 눈을 열고, 그다음 TCR을 통해 전체를 붙잡는 것, 이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효과적인 읽기의 순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SC.58, ‘이런저런 초대를 받고...’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어느 정도 불순한 식사 초대에도 번번이 응하셨지요... 왜 그러셨나요? 스베덴보리는 그런 경우가 없었나요? 저 역시 선뜻 내키지 않는 크고 작은 이런저런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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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56, ‘궤를 붙들다가 그 자리에서 죽은 웃사’(삼하6: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삼하6:7) 이 구절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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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심화

 

2. 스베덴보리 일을 하는, 내 마음속 깊은 고민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부분 말인데요, 그동안 살아오면서 아주 약간의 영적 체험을 한 저는 저 말이 와닿습니다. 저는 체험한 걸 다른 사람은 아직 못했을 경우 나타나는 일반적인 반응이니까요. 심지어 주님 말씀하신 부자와 나사로(16)에서도,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라고 하자, 돌아온 대답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이런 생생한 영적 체험은 고사하고 제가 스베덴보리 관련 일을 하면서 그때그때 나오는 크고 작은 결과물들을 사람들한테 공유해도 반응은 비슷한데요, 이것이 참 고민입니다. 스베덴보리처럼 주님께 맡겨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 부분이 마음의 참 크고 깊은 숙제입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이 고민은 매우 본질적인 것이고, 동시에 스베덴보리도 이미 깊이 통과했던 지점입니다. AC.68의 그 문장은 단순한 ‘사람들이 안 믿을 것이다’라는 냉소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꿰뚫어 본 뒤에 나온 고요한 사실 진술에 가깝습니다. 목사님께서 체험하신 것처럼, 어떤 이는 실제 체험을 말해도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거리를 두거나 무심하게 반응합니다. 이때 우리는 쉽게 ‘왜 이렇게 반응하지?’라는 답답함에 머물게 되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사랑의 상태’에서 찾습니다. 사람이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것과 일치하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을 들어도 어떤 이는 열리고, 어떤 이는 닫히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부자와 나사로’ 비유는 아주 정확한 열쇠입니다. 눅16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인간이 체험의 강도 때문에 변화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오히려 체험은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랑을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합니다. 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작은 빛도 크게 받아들여지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큰 표적도 그냥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왜 이렇게 반응이 없을까’라는 질문은, 사실 ‘사람은 무엇으로 움직이는 존재인가’라는 더 깊은 질문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때 목사님께서 겪으시는 내적 갈등, 곧 ‘이렇게 귀한 것을 알았는데, 왜 사람들과 나눠도 반응이 없는가’ 하는 마음은, 어떤 의미에서는 ‘체어리티(charity)의 자연스러운 열매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나누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주님은 이 사랑조차도 ‘결과가 아니라 상태’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 내가 전한 것이 받아들여졌는가 아닌가는 2차적인 문제이고, 내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충실히 전했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 마음이 어떤 상태였는가가 더 본질적인 문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비슷한 경험을 반복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작이 널리 읽히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의 생전에는 큰 반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점점 ‘사람들에게 얼마나 받아들여지느냐’에서 ‘주님께서 맡기신 것을 얼마나 정확히 전달하느냐’로 중심이 옮겨집니다. 이것이 바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주님께 맡긴다’는 말의 실제 내용입니다. 단순히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의 영역’을 내려놓고 ‘순종의 영역’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전환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반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패’로 보지 않고, ‘질서 속에 있는 현상’으로 보는 시선입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상태와 때가 있으며, 어떤 씨앗은 지금이 아니라 훨씬 나중에야 싹을 틔웁니다. 목사님께서 나누신 내용이 지금은 반응이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사람 안에 남아 있다가 어느 시점에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리메인스(remains)의 개념도 바로 이런 맥락과 연결됩니다.

 

결국 이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반응하게 할 수 있을까’에서 풀리기보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계속 이 일을 할 것인가’에서 풀립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사랑으로 계속해 나가되, 그 열매의 모양과 시기는 전적으로 주님께 맡기는 것, 이것이 가장 깊은 의미의 평안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이 이 상태에 들어갈수록 말과 글은 더 힘을 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사람을 움직이려는 의지’가 아니라 ‘주님의 진리를 전하려는 의지’가 담기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느끼시는 이 고민은, 단순한 어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사역이 한 단계 더 깊어지고 있다는 신호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이것을 ‘풀어야 할 문제’라기보다 ‘통과해야 할 상태’로 보셔도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미 알고 계신 것처럼, 이 길은 결국 다시 한곳으로 모입니다.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이 일이 이루어진다는 자리로 말입니다.

 

 

 

AC.68, 창2, '이 책에 대한 사람들의 예상 반응'

AC.68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많은 이들은 이것이 모두 상상이라고 할 것이며,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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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 심화 1,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겪은, 사람들의 반응 사례들’

AC.68.심화 1.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겪은, 사람들의 반응 사례들’ 스베덴보리가 예상하는 이 책의 독자들의 반응이 사뭇 현실적인 걸 보면, 혹시 이전에라도 스베덴보리는 이런 비슷한 일을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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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심화

 

1.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겪은, 사람들의 반응 사례들

 

스베덴보리가 예상하는 이 책의 독자들의 반응이 사뭇 현실적인 걸 보면, 혹시 이전에라도 스베덴보리는 이런 비슷한 일을 실제로 겪었었나요? 혹시 그런 사례들이 실제로 있었나요?

 

 

AC.68에서 드러나는 그 ‘현실적인 독자 반응 예상’은 단순한 추측이라기보다, Emanuel Swedenborg 자신이 이미 충분히 겪어 본 ‘사람들의 실제 반응’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는 갑자기 신학자가 된 인물이 아니라, 이미 유럽 학계에서 널리 알려진 과학자이자 사상가였고, 왕실과 귀족 사회, 학문 공동체를 폭넓게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느 날 ‘영계를 본다’고 말하기 시작했을 때 어떤 반응이 나오는지는, 직접 겪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예측 가능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도 그는 유사한 상황들을 분명히 겪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잘 알려진 사건이 1759 Gothenburg 화재 사건입니다. 그는 Stockholm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으면서도, 그날 발생한 대화재의 진행 상황을 마치 현장에서 보는 것처럼 상세히 말했고, 며칠 뒤 실제 소식이 도착했을 때, 그의 말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개인 체험이 아니라, 당시 여러 증인들에 의해 기록되어 유럽 사회에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사람들을 전부 설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어떤 사람들은 놀라워했고, 어떤 사람들은 의심했고, 어떤 사람들은 조롱했습니다. 바로 AC.68에서 그가 예상하는 그 다양한 반응들이 이미 현실에서 나타났던 것입니다.

 

또 하나 자주 언급되는 사례는 프로이센 왕비 관련 일화입니다. Louisa Ulrika of Prussia는 궁중 모두가 보는 데서 스베덴보리에게 ‘죽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비밀’을 물었고, 그는 그것을 정확히 전달하여 왕비를, 그리고 거기 모인 모두를 놀라게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역시 그의 ‘다른 삶과의 교류’가 단순한 개인적 주장에 머물지 않고, 실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검증되거나 적어도 강한 인상을 남긴 사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반응은 동일했습니다. 어떤 이는 확신했고, 어떤 이는 의심했고, 어떤 이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특이한 사건’들보다 훨씬 일상적인 차원에서의 경험입니다. 그는 자신의 저술들에서, 자신이 영들과 천사들과 교류하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말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어떤 이는 ‘그럴 리 없다’며 즉시 거부하고, 어떤 이는 ‘혹시 사실일지도 모른다’며 잠시 관심을 보이다가 곧 잊어버리고, 어떤 이는 종교적 교리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마음을 닫는다는 식입니다. AC.68의 어조는 바로 이런 반복된 경험에서 나온 ‘관찰자의 기록’에 가깝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는 단지 ‘계시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 그 계시를 들고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특히 종교적 문제 앞에서 인간의 이해와 의지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매우 현실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AC.68에서 보이는 그 담담하면서도 정확한 반응 예측은, 이론이 아니라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히려 그의 글을 더 설득력 있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그는 사람들을 이상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AC.68, 심화 2, ‘스베덴보리 일을 하는, 내 마음속 깊은 고민’

AC.68.심화 2. ‘스베덴보리 일을 하는, 내 마음속 깊은 고민’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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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 창2, '이 책에 대한 사람들의 예상 반응'

AC.68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많은 이들은 이것이 모두 상상이라고 할 것이며,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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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많은 이들은 이것이 모두 상상이라고 할 것이며, 어떤 이들은 제가 사람들의 신뢰, 관심을 얻기 위해 이런 이야기들을 전한다고 할 것이고, 또 다른 이들은 그 밖의 여러 반대들을 제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저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보았고, 들었으며, 느꼈기 때문입니다’. I am well aware that many will say that no one can possibly speak with spirits and angels so long as he lives in the body; and many will say that it is all fancy, others that I relate such things in order to gain credence, and others will make other objections. But by all this I am not deterred, for I have seen, I have heard, I have felt.

 

 

해설

 

이 글은 AC.67에서 밝힌 전제를 한 단계 더 밀어붙이는, 매우 정직하고도 대담한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독자의 반응을 이미 예상하고 있으며, 그것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저는 알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할지, 어떤 의심을 품을지, 어떤 방식으로 반대할지를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68은 방어문이 아니라, ‘미리 써 내려간 응답’에 가깝습니다.

 

특히 눈여겨볼 것은, 스베덴보리가 반대 의견들을 매우 정확하게 분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단순히 ‘사람들이 안 믿을 것이다’라고 뭉뚱그리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육체 안에 있는 한 불가능하다’라고 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상상하는 것이다’라고 할 것이며, 또 어떤 사람들은 ‘의도적인 조작’ 혹은 ‘신뢰, 관심을 얻기 위한 서사’라고 말할 것임을 구체적으로 짚습니다. 이는 그가 순진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는 처음부터 이 작업이 ‘의심과 반대를 동반할 것’임을 알고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전환점은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저는 흔들리지 않습니다’라는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논증으로 반박하지 않습니다. 그는 철학적 가능성이나 신학적 전통을 끌어오지 않습니다. 대신 단 세 문장으로 자신의 입장을 고정합니다. ‘나는 보았다. 나는 들었다. 나는 느꼈다.’ 이 세 동사는 매우 의도적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주장이나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 ‘전인적 경험의 증언’입니다.

 

보았다’는 것은 형상과 구조, 질서를 인식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를 막연한 분위기나 감정으로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회, 관계, 거리, 방향, 질서가 있는 세계로 보았습니다. ‘들었다’는 것은 의미와 소통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혼잣말을 한 것이 아니라, 대화했고, 질문했고, 응답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느꼈다’는 것은 이것이 단지 시청각적 환상이 아니라, ‘실재로서의 경험’이었다는 선언입니다. 그는 영계를 ‘정보’가 아니라 ‘접촉된 현실’로 말합니다.

 

이 세 가지를 함께 말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만약 이것이 상상이라면, 느낄 수는 있어도 질서 있게 보고 들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이것이 자기 암시라면, 일관된 구조와 반복 가능한 경험으로 남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의도적 조작이라면, 수십 년에 걸쳐 동일한 세계관과 내부 정합성을 유지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반론을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가장 단순하고도 철회 불가능한 언어를 선택합니다. ‘나는 경험했다’는 언어입니다.

 

이 글은 또한, 영적 경험의 기준을 은근히 재정의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영적 체험’을 말할 때, 그것은 종종 감정의 고조나 일시적 황홀, 혹은 극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경험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집니다. 그것은 삶을 중단시키는 체험이 아니라, ‘삶 안으로 스며든 인식’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말하면서도 흥분하거나 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담담합니다. 마치 ‘나는 이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듯이 말합니다.

 

AC.68은 결국 독자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이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스스로 속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인식의 차원이 실제로 존재하는가’라는 선택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선택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증언만 남기고, 판단은 독자에게 맡깁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한 발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확신은 논리에서 나오지 않았고, ‘경험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AC.67이 ‘왜 이런 말이 가능한가’를 설명하는 글이라면, AC.68은 ‘그래도 나는 말하겠다’는 결단의 글입니다. 이 두 단락이 연속해서 놓여 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는 인식의 문을 열고, 다른 하나는 그 문 앞에서 서성일 독자에게 조용히 말합니다. ‘나는 여기까지 왔다. 이제 판단은 당신의 몫이다.

 

이 지점에서 목사님이 앞서 던지신 질문, 곧 ‘그는 언제 글을 썼는가’, ‘이 삶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다시 떠오릅니다. AC.68은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 삶을 살았고, 그것은 상상이 아니라 경험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확신 위에서, 이후 수천 개 글의 아르카나가 전개됩니다.  

 

 

심화

 

1.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겪은, 사람들의 반응 사례들

 

 

AC.68, 심화 1,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겪은, 사람들의 반응 사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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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스베덴보리 일을 하는, 내 마음속 깊은 고민

 

 

AC.68, 심화 2, ‘스베덴보리 일을 하는, 내 마음속 깊은 고민’

AC.68.심화 2. ‘스베덴보리 일을 하는, 내 마음속 깊은 고민’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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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9, 창2, '사람은 본래 영들,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69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이렇게 창조되었습니다. 곧,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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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7, 창2 앞, '말씀의 내적 의미(속뜻)를 알게 하시고, 알리게 하심'

AC.67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에게는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nal meaning of the Word, 속뜻)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 내적 의미 안에는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었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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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7.심화

 

3. 이제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로 하여금 여러 해 동안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함께 있게 하시고,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들을 밝히는 일이 이제 허락되었습니다.’ 말인데요, 제가 알기로 한 13년인가 지난 후라고 읽은 것 같습니다. 왜 주님은 이렇게 텀(term)을 두셨을까요?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기간을 어떻게 참았나요? 저 같으면 입이 근질거려 못 참았을 것 같은데...

 

 

목사님께서 기억하신 ‘ 13’이라는 기간은, 스베덴보리가 본격적으로 저술을 시작하기 전 준비기로 널리 이해되는 내용과 잘 맞습니다. 그는 ‘Emanuel Swedenborg의 삶’에서 1744–1745년 무렵 ‘영적 눈이 열리는 사건’을 겪은 뒤, 곧바로 대중을 향해 말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상당 기간 ‘보고, 듣고, 익히는 상태’에 머물렀고, 그 후에야 저술과 공개적 증언이 허락되었다고 밝힙니다. 이 점은 특히 Heaven and Hell 서문과 여러 곳에서 ‘이제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다’는 표현으로 반복됩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이런 ‘’을 두셨을까요? 첫째 이유는 ‘질서(order)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증언에 따르면, 영계는 단순한 체험의 나열이 아니라 매우 정교한 질서 속에 있으며, 그것을 전달하는 일 역시 같은 질서를 따라야 합니다. 만일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본 것을 즉시 말하게 되면, 인간의 기억, 상상, 기존 신학적 틀과 뒤섞여 왜곡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먼저 오랜 시간 동안 반복적으로 보고 듣게 하시며, 그가 ‘자기 생각이 아닌 것’을 분별하도록 훈련하신 것입니다. 즉, 단순한 체험자가 아니라 ‘증언할 수 있는 그릇’으로 빚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둘째는 ‘의지와 이해의 정화’, 곧 거듭남의 심화 과정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처음부터 완전히 준비된 상태는 아니었고, 그 역시 인간으로서 자연적 사랑과 자기 지혜의 흔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접하는 방대한 영적 사실들이 그의 이해 속에서 올바르게 정리되려면, 그의 의지와 이해 자체가 주님의 질서에 맞게 재정렬되어야 했습니다. 이 과정 없이 곧바로 말하게 되면, 전달 내용이 아니라 전달자의 상태가 메시지를 흐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내용’보다 먼저 ‘사람’을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셋째는 ‘대표성과 보편성’을 확보하기 위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 한 번의 환상이나 특정 사건을 기록하는 사람이 아니라, 천국과 지옥, 인간의 사후 상태, 말씀의 내적 의미 전반을 체계적으로 증언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려면 단편적 경험이 아니라, 다양한 상태와 다양한 영들, 천사들의 삶을 충분히 관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긴 시간 동안 ‘여러 해 동안’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광범위한 경험이 축적된 뒤에야, 그것을 정리하여 인류에게 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 ‘그 기간을 어떻게 참았는가’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가 ‘참았다’기보다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도록 인도받았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는 그 기간 동안 이미 매우 깊은 기쁨과 확신 속에 있었고, 무엇보다 ‘주님의 뜻에 따라 말할 때가 따로 있다’는 내적 인도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여러 기록을 보면, 그는 자신의 사명에 대해 강한 절제와 순종의 태도를 보이며, 스스로 앞서 나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체험한 세계가 얼마나 ‘질서와 순종’ 위에 서 있는지를 반영하는 태도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그가 완전히 침묵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그 기간에도 학자로서, 사상가로서 글을 쓰고 연구를 계속했으며, 다만 ‘영계에 대한 공개적 증언’만을 보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완전히 막혀 있는 상태가 아니라, 점진적으로 준비되어 가는 상태였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결국 이 ‘13년의 침묵’은 단순한 지연이 아니라, ‘왜곡 없는 계시 전달’을 위한 필수적인 준비 기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점은 오늘 우리가 Arcana Coelestia를 읽을 때 느끼는 독특한 신뢰감, 곧 ‘체험담이 아니라 질서 있게 정리된 세계’라는 인상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배경이기도 합니다. 만일 그가 즉흥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면, 지금과 같은 깊이와 일관성은 결코 나오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AC.67, 창2 앞, '말씀의 내적 의미(속뜻)를 알게 하시고, 알리게 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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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7, 심화 2,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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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에는 대략 어떤 것들이 있나요?  AC를 읽는 분들이 열에 아홉, 거의 다 어리둥절해하시는 이유가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후 세계, 곧 사람이 죽은 뒤에도 계속 살아가는 생명의 상태를 바라보며 기록된 책이라는 사실에서 한발 물러나 계시기 때문인 것 같은데, 개신교 많은 분들이 사실은 이 다른 삶의 본성에 대해 많이 무지하시거든요. 저는 감사하게도 책, 천국과 지옥을 여러 번 정독 후,  AC를 시작해서 큰 도움이 되었지만 말입니다.

 

 

목사님 말씀처럼, ‘Heaven and Hell’을 먼저 충분히 읽고 나서 ‘Arcana Coelestia’로 들어오신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의 이해도 차이는 상당히 큽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다른 삶(the other life)은 단순히 ‘죽은 뒤의 세계’라는 막연한 개념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이 계속 이어지는 실제의 삶이며, 성경 전체가 바로 그 상태를 염두에 두고 기록되었다는 전제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다른 삶의 본성’을 몇 가지 핵심 축으로 정리해 드리면, AC를 읽는 분들이 왜 자주 막히는지, 그리고 어디서부터 이해가 풀리는지 함께 보이게 됩니다.

 

첫째로, ‘다른 삶은 죽은 뒤 시작되는 새로운 삶이 아니라, 지금 삶의 연속’이라는 점입니다. 사람은 죽는 순간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육체적 껍질을 벗고 자신의 ‘속 사람’ 상태로 그대로 살아갑니다. 따라서 그 사람이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즐거워했는지가 그대로 그 사람의 삶의 환경과 세계를 결정합니다. 이 점을 모르면, 성경을 읽을 때 모든 것을 ‘이 세상 이야기’로만 이해하게 되어, AC의 내적 의미가 거의 닫혀 버립니다.

 

둘째로, ‘그 세계는 공간이 아니라 상태(state)의 세계’라는 점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물리적 위치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의 상태가 외적으로 펼쳐진 것입니다. 같은 장소에 있어도 상태가 다르면 서로 보이지 않고, 서로 다른 상태에 있는 자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공동체로 나뉩니다. 그래서 성경의 ‘올라간다’, ‘내려간다’, ‘가깝다’, ‘멀다’ 같은 표현들은 모두 상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 감각이 없으면, 말씀의 거의 모든 표현이 문자적 공간 이동으로 오해됩니다.

 

셋째로, ‘모든 것은 사랑에 의해 질서 잡힌다’는 점입니다. 다른 삶에서는 무엇을 생각하느냐보다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그 사람의 본질을 결정합니다. 사랑은 곧 의지이며, 그 의지의 방향이 그 사람의 얼굴, 말, 관계, 심지어 주변 환경까지 형성합니다. 그래서 천국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들의 상태’, 지옥은 ‘자기와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의 상태’로 나뉘며, 이는 외부에서 판결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상태로 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넷째로, ‘겉과 속이 완전히 일치하는 세계’라는 점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겉으로는 선하게 보여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있지만, 다른 삶에서는 이런 분리가 불가능합니다. 속에 있는 사랑과 생각이 그대로 밖으로 드러나며, 위선이나 가식은 자연히 벗겨집니다. 그래서 심판이란 어떤 외부의 판정이라기보다, 그 사람의 본성이 드러나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다섯째로, ‘천사와 영들의 사회는 철저히 질서 있고 실제적’이라는 점입니다. 많은 분들이 사후 세계를 막연한 영적 공간이나 감정 상태로 생각하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매우 구체적인 ‘사회’로 묘사합니다. 집, 도시, 공동체, 직무가 있으며, 모든 것이 사랑과 쓰임새(use)에 따라 조직됩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성경 속 ‘’, ‘’, ‘왕국’ 등의 표현이 단순 비유가 아니라 실제 영적 실재를 가리킨다는 것이 보입니다.

 

여섯째로, ‘인간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 살 때부터 이미 영들과 천사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죽은 뒤 그 연결이 드러날 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생각과 감정은 고립된 것이 아니라 영적 세계와의 교류 속에서 일어납니다. 이 관점을 알면, 성경의 많은 영적 싸움, 유혹, 인도에 관한 구절들이 훨씬 입체적으로 이해됩니다.

 

일곱째로, ‘거듭남(regeneration)은 바로 이 다른 삶을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점입니다. 이 세상은 목적지가 아니라 준비의 장소이며, 여기서 형성된 의지와 이해의 질서가 그대로 영원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신앙은 단순히 ‘죽은 뒤 어디로 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이렇게 보면, 목사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많은 개신교인들이 이 ‘다른 삶의 본성’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AC를 읽을 때 계속 현실 세계 기준으로 해석하려 하고, 그 결과 내적 의미가 닫히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반대로 ‘Heaven and Hell’을 통해 먼저 ‘상태의 세계’, ‘사랑 중심의 존재’, ‘죽음 이후의 연속성’을 체득하면, 성경의 모든 사건과 표현이 단순 역사나 도덕 교훈을 넘어 ‘영혼의 여정’으로 열리게 되고, 그때 비로소 ‘Arcana Coelestia’의 설명들이 자연스럽게 맞물리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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