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4.심화

 

1. 처음부터 끝까지 선, 진리 얘기만

 

이 질문은 너무 초보스러워서 오히려 창피하기까지 한데요...  AC.44에도 선과 진리’, 이해와 의지’, 들음과 행함의 구도가 여전하네요... 전에 어느 나이 드신 여 목사님에게 이 AC 1권 리딩을 권했더니, 좀 보시다가 하시는 말씀, 무슨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선, , , 진리, 진리, 진리 얘기만 하느냐시며 더는 안 읽으시더군요... 개신교 목사님조차 이러시니 일반 교인들은... 도대체 왜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관점으로만 말하는 건가요?

 

목사님, 이 질문은 전혀 초보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AC 전체를 이해하는 ‘문을 여는 질문’입니다. 그 여 목사님의 반응도 사실 매우 자연스럽고, 많은 분들이 비슷하게 느끼는 지점입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끝까지 선과 진리 얘기만 하느냐?’라는, 이 질문에 답이 되면, 스베덴보리가 왜 그렇게 썼는지도 동시에 풀립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두 요소인 선과 진리, 그러니까 의지와 이해를 계속 다른 각도에서 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반복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영적 현실을 설명하는 두 개의 축을 계속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하필 이 두 가지냐가 핵심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무엇을 사랑하고 원하는가(의지, 선)’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이 옳다고 생각하고 이해하는가(이해, 진리)’입니다. 사람의 모든 삶은 이 두 가지에서 나옵니다. 행동도, 선택도, 신앙도, 심지어 기쁨과 고통도 다 이 두 축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설명할 때, 이 둘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걸 조금 더 현실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아무리 많은 진리를 알고 있어도, 그것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좋은 마음은 있어도, 무엇이 옳은지 모르면 방향 없이 움직입니다. 그래서 ‘선만 있어도 안 되고, 진리만 있어도 안 됩니다.’ 이 둘이 함께 있어야 비로소 삶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계속해서 ‘선과 진리’, ‘의지와 이해’, ‘사랑과 신앙’, ‘행함과 들음’을 반복합니다. 다 다른 말 같지만, 사실은 ‘같은 구조를 다른 언어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까지 반복하느냐 하면, 우리가 평소에는 이 둘을 하나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나는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 삶은 전혀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착하게 산다’고 하지만, 진리에 대한 이해 없이 살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분리된 상태’를 깨뜨리고, ‘‘이 둘은 반드시 하나로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반복은 단순한 강조가 아니라, ‘계속 다른 본문, 다른 상황, 다른 상징 속에서 같은 원리를 확인시키는 작업’입니다. 창세기 1장의 빛, 물, 땅, 식물, 광명체 등, 이 모든 것도 사실은 전부 이 구조로 풀립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주어지고(빛), 그다음 구별이 생기고(궁창), 그다음 삶으로 나오고(식물), 그다음 그것이 빛으로 작동합니다(광명체). 전부 선과 진리의 관계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 포인트가 있습니다. 개신교 전통에서는 보통 ‘믿음’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행함’은 그 결과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과 진리’라는 이중 구조가 계속 반복되면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처음부터 ‘신앙과 삶을 분리하지 않고, 구조적으로 하나로 묶어 설명’합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이것이 ‘여러 주제 중 하나’가 아니라, ‘모든 주제의 뿌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설명하는 두 가지, 곧 선과 진리를 계속 다른 모습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AC가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 진리를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과 천국과 말씀 전체를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두 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반복이 아니라, ‘모든 것을 설명하는 하나의 언어’입니다.

 

 

 

AC.44, 심화 2, ‘선과 진리’는 인간과 천국, 그리고 말씀 전체를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두 축

AC.44.심화 2. ‘선과 진리’는 인간과 천국, 그리고 말씀 전체를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두 축 위 심화 1최하단 ‘AC가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 진리’를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과 천국과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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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 창1:24-25, ‘지식에서 생명으로 : 이해와 의지가 하나 될 때 나타나는 참된 신앙’(AC.44-48)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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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심화

 

2. (blessing)

 

AC.43 본문 중 말씀에서 주님의 축복(blessing)은 열매 맺음과 번성을 뜻하는데에 나오는 (blessing)에 대해 조금만 더 와닿게 설명해 주세요.

 

AC.43에서 말하는 ‘(blessing)을 제대로 이해하면, 말씀 전체에서 ‘’이라는 단어가 완전히 새롭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결론부터 또렷하게 말씀드리면, ‘말씀에서 은 단순히 무엇을 더 받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자라나도록 하시는 주님의 작용’, 곧 선과 진리가 계속 열매 맺고 번성하도록 하시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은 건강, 형통, 보호, 성공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런 것들을 본질적인 복으로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람 안의 생명과 직접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말하는 복은 훨씬 깊어서,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가 실제로 자라고, 연결되고, 확장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AC.43에서는 복을 설명하면서 바로 ‘열매 맺음’과 ‘번성’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것이 복의 본체입니다.

 

이걸 조금 더 와닿게 설명드리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작은 진리를 하나 받아들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남을 진심으로 배려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아직 ‘씨앗’ 정도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복이 그 안에 작용하면, 이 하나의 생각이 그대로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이 점점 ‘행동으로 이어지고, 습관이 되고, 더 깊은 이해로 확장되며, 다른 선과 진리들과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그 사람 안에 ‘여러 가지 선한 삶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자라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열매 맺음’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계속 이어지고 확장되는 것이 ‘번성’입니다.

 

그래서 복은 ‘하나 더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열이 되고, 열이 백이 되는 작용’입니다. 그리고 이 증가는 외적인 양이 아니라, ‘내적인 생명의 확장’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씀을 듣고도 어떤 사람은 그대로 있고, 어떤 사람은 점점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그 차이가 바로 ‘복이 작용하는가’의 차이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이 복은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람은 씨앗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실제로 그것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복을 받는다’는 말은, ‘주님이 그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를 자라게 하실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복은 무엇을 더 주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 있는 좋은 것이 계속 자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이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를 끊임없이 자라나게 하여 열매 맺고 번성하게 하는 작용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도 단순한 숫자의 증가가 아니라, ‘영적 생명의 확장에 대한 선언’입니다.

 

 

 

AC.43, 창1:22-23, ‘살아 있는 생명의 증식 : 사랑의 열매와 신앙의 번성’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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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 심화 1, ‘놀라울’(amazing)

AC.43.심화 1. ‘놀라울’(amazing) AC.43 본문 중, ‘이것은 사람이 육신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다지 드러나지 않지만, 다른 삶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그러합니다’(not so much while the man lives in the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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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심화

 

1. 놀라울(amazing)

 

AC.43 본문 중, 이것은 사람이 육신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다지 드러나지 않지만, 다른 삶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그러합니다(not so much while the man lives in the body, but to an amazing degree in the other life.)라고 하는데, 혹시 그런 실제 사례를 좀 들 수 있을까요? 도대체 어느 정도길래 amazing이라는 표현을 쓰는 걸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43에서의 ‘놀라울(amazing)은 ‘지상에서는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던 선과 진리의 증가가, 영계에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으로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즉, 질적인 드러남도 포함되지만, 이 문맥에서는 특히 ‘양적 번성과 증식의 차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느냐가 핵심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이 육신 안에 있을 때는 모든 것이 ‘시간, 공간, 감각, 육체 조건’에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선을 행해도, 진리를 배워도, 그것이 자라는 속도나 범위가 매우 제한적입니다. 마치 작은 화분에 심긴 나무처럼, 자라긴 하지만 제한된 공간 안에서만 자랍니다. 그런데 사람이 영계로 들어가면, 이 제한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그 안에 있던 선과 진리가 ‘자연스럽게,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확장되기 시작합니다.’

 

실제적인 예로 이렇게 생각해 보시면 이해가 쉬우십니다.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말씀을 사랑하고, 작은 선을 꾸준히 행하며 살았습니다. 겉으로 보면 큰 변화도 없고, 열매도 많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이미 ‘씨앗’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영계에 들어가면, 그 씨앗이 더 이상 방해를 받지 않기 때문에, ‘그 안의 선과 진리가 계속 연결되고, 결합되고, 확장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많아진다’가 아니라, ‘놀라울 정도로 번성한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이것입니다. 이 증가는 단순한 ‘개수 증가’가 아니라, ‘연결의 증가’입니다. 하나의 진리가 다른 진리와 연결되고, 하나의 선한 의도가 더 많은 선한 결과로 이어지면서, 전체가 살아 있는 구조처럼 확장됩니다. 그래서 그 증가는 선형적으로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퍼져 나갑니다.’ 이 점에서 ‘amazing’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입니다.

 

반대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사람 안에 선과 진리가 없다면, 영계에서는 아무것도 자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상에서는 비슷해 보이던 두 사람이, 영계에서는 한 사람은 계속 풍성해지고, 다른 한 사람은 더 이상 확장되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이 차이 역시 매우 ‘놀라운’ 수준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AC.43의 이 문맥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사람이 육신 안에 있을 때는 선과 진리의 성장이 제한되어 있지만, 다른 삶에서는 그것이 방해 없이 결합되고 확장되어, 놀라울 정도로 풍성하게 증가한다.’

 

지금 우리가 하는 작은 선과 배움은 겉으로는 작아 보이지만, 그것은 영원히 자라날 씨앗입니다.’

 

 

 

AC.43, 심화 2, ‘복’(blessing)

AC.43.심화 2. ‘복’(blessing) AC.43 본문 중 ‘말씀에서 주님의 ‘축복’(blessing)은 열매 맺음과 번성을 뜻하는데’에 나오는 ‘복’(blessing)에 대해 조금만 더 와닿게 설명해 주세요. AC.43에서 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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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 창1:22-23, ‘살아 있는 생명의 증식 : 사랑의 열매와 신앙의 번성’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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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심화

 

6. ‘51:34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를 빈 그릇이 되게 하며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 (51:34) Nebuchadnezzar the king of Babylon hath devoured me, he hath troubled me, he hath made me an empty vessel, he hath swallowed me as a whale, he hath filled his belly with my delicacies, he hath cast me out (Jer. 51:34),

 

 

이 구절이 AC.42에 인용된 이유는, 앞서 이사야 27장의 리워야단이나 에스겔의 큰 악어와 마찬가지로, ‘고래(whale) 또는 큰 물고기’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 무엇을 뜻하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42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큰 물고기들’이 원래는 지식과 이해의 큰 체계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하지만,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분리되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섬기게 되면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느부갓네살 왕’과 바벨론’은 말씀에서 단순한 역사적 국가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바벨론은 거룩한 것들을 이용하여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상태, 곧 자기 사랑이 종교와 신앙까지 지배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느부갓네살은 그러한 자기 사랑의 지배력을 대표합니다.

 

본문은 그가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라고 말합니다. 영어 원문에는 고래처럼 나를 삼켰다(swallowed me as a whale)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고래는 방대한 지식과 추론 능력을 가진 자연적 인간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를 섬기는 지식이 아니라, 진리를 자기 목적을 위해 흡수하고 이용하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고래는 먹고 삼키고 배를 채우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특히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음식은 선과 진리의 양식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바벨론적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여 주님을 섬기지 않고, 자기 영광과 자기 권세를 위해 사용합니다. 다시 말해 진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자기 소유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좋은 음식’을 먹지만 생명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자기 사랑의 연료로 사용합니다.

 

AC.42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큰 물고기’의 가장 위험한 형태 가운데 하나입니다. 에스겔의 바로는 자기 지혜를 자랑하는 자연적 인간을 나타내고, 이사야의 리워야단은 진리를 왜곡하는 교만한 추론을 나타낸다면, 예레미야의 고래는 거룩한 진리들까지도 자기 사랑을 위해 삼켜 버리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즉 단순한 무지나 오류가 아니라, 진리를 소유하고도 그것을 왜곡하여 자기 자신을 섬기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바벨론 왕이 자신을 빈 그릇이 되게 하였다’고 탄식합니다. 진리가 자기 사랑에 삼켜질 때, 사람은 겉으로는 많은 지식과 교리를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실제로는 영적으로 비어 있게 됩니다. 그릇은 가득 찬 것 같지만, 생명은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레미야 51 34절이 AC.42에 인용된 이유는, ‘큰 물고기 또는 고래’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경우, 방대한 지식과 진리들을 자기 사랑과 권세욕을 위해 삼켜 버리는 상태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절은 창세기 1장의 큰 물고기들’이 단순한 자연 생물이 아니라 인간의 지식과 이해의 거대한 구조를 의미하며, 그것이 주님을 섬길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을 섬길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인 것입니다.

 

 

 

AC.42, 창1:21, ‘지식을 살리는가 삼키는가 : 큰 바다짐승들로 드러나는 일반 원리의 방향’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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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 심화 5, ‘사27:1’

AC.42.심화 5. ‘사27:1’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사27:1) In that day Jehovah, with his 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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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심화

 

5. ‘27:1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27:1) In that day Jehovah, with his hard and great and strong sword, shall visit upon leviathan the longish [oblongum] serpent, even leviathan the crooked serpent, and he shall slay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 (Isa. 27:1).

 

 

이 구절이 AC.42에 인용된 이유는, 창세기 1 21절의 큰 물고기들’이 말씀에서 때로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며, 특별히 여기서는 거짓과 자기 지혜에 의해 왜곡된 지식과 추론을 상징하는 경우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AC.42에서 스베덴보리는 큰 물고기들’이 일반적으로는 인간의 큰 지식들, 기억-지식들, 그리고 이해의 활동들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이 주님과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높이는 데 사용될 때는 괴물 같은 존재로 묘사됩니다.

 

이사야 27장에 나오는 리워야단’은 단순한 바다 괴물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 따르면, 그것은 자기 지혜를 절대화하는 인간의 왜곡된 추론을 상징합니다. 특히 날랜 뱀’, ‘꼬불꼬불한 뱀’이라는 표현은 진리를 곧게 보지 못하고 자기 논리와 교만한 추론으로 비틀어 버리는 상태를 뜻합니다. 원래 지식은 진리를 섬겨야 하지만, 타락한 인간은 오히려 지식을 이용해 진리를 공격하고 왜곡하려 합니다. 리워야단은 바로 그런 상태의 표상입니다.

 

이어지는 바다에 있는 용 또는 바다에 있는 큰 물고기들’을 죽이신다는 말씀도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바다는 기억-지식과 자연적 인간의 이해가 있는 영역을 뜻합니다. 따라서 바닷속 괴물들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방대한 지식과 추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주님과 진리에 대항하는 데 사용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에스겔의 바로와 큰 악어가 상징하는 것과 매우 비슷한 상태입니다.

 

AC.42의 문맥에서는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다섯째 날에 창조된 물고기들을 무조건 좋은 것으로만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해력과 지식은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그것이 주님의 진리 아래 있을 때는 에스겔 47장의 풍성한 물고기들처럼 생명을 주는 것이 되지만, 자기 사랑과 교만 아래 있을 때는 리워야단과 바다의 괴물처럼 진리를 대적하는 힘이 됩니다.

 

또한 여호와께서 크고 강한 칼’로 리워야단을 벌하신다는 표현도 의미심장합니다. 말씀에서 칼은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주님의 진리가 인간의 거짓된 추론과 왜곡된 지식을 심판하고 무너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승리하는 것은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주님의 진리입니다.

 

따라서 이사야 27 1절이 AC.42에 인용된 이유는, ‘큰 물고기들’이 부정적 의미로 사용될 경우, 인간의 교만한 지식과 왜곡된 추론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리워야단과 바다의 괴물들은 진리를 섬기는 이해가 아니라 진리를 거스르는 이해를 뜻하며, 주님께서는 결국 그러한 거짓된 지혜를 자신의 진리로 심판하시고 제거하신다는 사실을 이 구절은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AC.42, 심화 6, ‘렘51:34’

AC.42.심화 6. ‘렘51:34’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를 빈 그릇이 되게 하며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 (렘51:34) N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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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 심화 4, ‘겔32:2’

AC.42.심화 4. ‘겔32:2’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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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심화

 

4. ‘32:2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도다 (32:2) Take up a lamentation for Pharaoh king of Egypt, and say unto him, thou art as a whale in the seas, and hast gone forth in thy rivers, and hast troubled the waters with thy feet (Ezek. 32:2),

 

 

이 구절이 AC.42에 인용된 이유는, 앞서 에스겔 29장과 마찬가지로 큰 물고기 또는 큰 악어’가 지식과 이해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지혜에 교만해진 자연적 인간의 왜곡된 이해를 의미할 수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42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 21절의 큰 물고기들’이 일반적으로는 지식들과 그로부터 형성된 이해의 큰 구조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한 뒤, 그 상응이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 모두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여러 예언서를 통해 증명합니다.

 

여기서도 주인공은 애굽의 바로입니다. 말씀에서 애굽은 기억-지식과 학문적 지식을 의미하고, 바로는 그러한 지식을 자기 자신을 높이는 데 사용하는 자연적 인간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바로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 또는 큰 물고기’로 묘사되는 것은, 그가 방대한 지식과 이해를 소유했음을 뜻하는 동시에, 그것을 주님을 향해 사용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특히 본문은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은 진리와 지식을 의미합니다. 원래 물은 맑고 생명을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바로는 발로 물을 휘저어 흐리게 만듭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것은 자연적 인간이 자기 추론과 자기 지혜로 진리를 왜곡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진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과 교만을 따라 진리를 혼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점이 AC.42의 주제와 직접 연결됩니다. 큰 물고기는 이해력의 큰 능력과 방대한 지식을 의미할 수 있지만, 그것이 주님의 빛 아래 있지 않을 때는 오히려 진리를 흐리는 힘이 됩니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살아야 하듯이, 이해력은 진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는 그 물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이는 이해력이 진리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자기 목적에 종속시키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또한 에스겔 47장의 물고기들이 생명의 물로 인해 번성하는 모습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에스겔 47장의 물고기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 안에서 살아나는 이해를 뜻하지만, 에스겔 32장의 큰 악어는 자기 지혜로 진리를 흐리는 이해를 뜻합니다. 하나는 생명을 주는 이해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를 오염시키는 이해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이 AC.42에 인용된 이유는, ‘큰 물고기 또는 큰 악어’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는 자기 지혜와 자기 확신에 빠진 자연적 인간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바로가 물을 휘저어 더럽히는 모습은,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겸손히 받지 않고, 자기 추론으로 왜곡할 때 일어나는 영적 상태를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이며, 스베덴보리는 이를 통해 큰 물고기들’의 부정적 상응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AC.42, 심화 5, ‘사27:1’

AC.42.심화 5. ‘사27:1’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사27:1) In that day Jehovah, with his 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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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 심화 3, ‘겔29:3’

AC.42.심화 3. ‘겔29:3’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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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9:3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29:3) Behold, I am against thee, Pharaoh king of Egypt, the great whale that lieth in the midst of his rivers, that hath said, my river is mine own, and I have made myself (Ezek. 29:3).

 

 

이 구절이 AC.42에 인용된 이유는, 창세기 1 21절의 큰 물고기들(great whales)이 항상 좋은 의미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문맥에 따라서는 인간의 왜곡된 지식과 자기 지혜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42에서 스베덴보리는 큰 물고기들’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인 지식들(knowledges)과 그로부터 형성된 이해의 큰 구조들을 의미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지식이 주님에게서 분리되어 자기 자신에게 귀속될 때는 부정적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에스겔 29장의 바로와 큰 악어는 바로 그 상태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애굽은 말씀에서 흔히 기억-지식(scientia)과 학문적 지식을 의미합니다. 원래 지식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의 이해를 준비시키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이 반복해서 부정적으로 사용될 때는, 지식이 신앙과 사랑을 섬기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지배하려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바로는 그러한 자연적 인간의 교만을 대표합니다.

 

본문에서 바로는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돌립니다. 강은 지식과 이해의 흐름을 뜻하는데, 바로는 그것이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AC.39에서 스베덴보리가 경고한 자기에게서 선과 진리가 나온다고 믿는 상태’와 같은 본질을 지닙니다.

 

그래서 여기서 바로는 큰 악어 또는 큰 물고기’로 묘사됩니다. 큰 물고기는 원래 큰 지식과 넓은 이해를 의미할 수 있지만, 그것이 자기 사랑과 교만에 사로잡히면, 진리를 섬기는 도구가 아니라 진리를 왜곡하는 도구가 됩니다. 따라서 에스겔의 큰 악어는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자기 지혜를 절대화한 자연적 인간을 상징합니다.

 

AC.42의 문맥에서는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물고기들이 이해력에 속한 것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한 뒤, 그러한 상응이 긍정적으로도 사용되고 부정적으로도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여러 본문을 인용합니다. 에스겔 47장의 물고기들은 살아 있는 진리의 이해를 뜻하지만, 에스겔 29장의 큰 악어는 자기 지혜에 빠진 왜곡된 이해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이 AC.42에 인용된 이유는, ‘큰 물고기’가 단순한 자연계 생물이 아니라 인간의 지식과 이해의 큰 체계를 의미하며, 특별히 여기서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자연적 인간의 교만한 지성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바로가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진리를 자기 것으로 돌리는 상태를 대표하며, 스베덴보리는 이를 통해 큰 물고기’의 부정적 상응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AC.42, 심화 4, ‘겔32:2’

AC.42.심화 4. ‘겔32:2’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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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 심화 2, ‘스베덴보리는 인용 구절들의 이런 속뜻을 어떻게 아는 건가요?’

AC.42.심화 2. ‘스베덴보리는 인용 구절들의 이런 속뜻을 어떻게 아는 건가요?’ AC.42를 보면 여러 인용 구절이 나오며, 스베덴보리는 그에 대한 속뜻을 거침없이 기술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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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심화

 

2. 스베덴보리는 인용 구절들의 이런 속뜻을 어떻게 아는 건가요?’

 

AC.42를 보면 여러 인용 구절이 나오며, 스베덴보리는 그에 대한 속뜻을 거침없이 기술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속뜻들 하나하나가 다 놀라운 수준인데요, 스베덴보리는 이런 속뜻을 어떻게 아는 건가요? 주님, 혹은 천사가 곁에서 구술하는 건가요, 아니면 갑자기 눈이 확 밝아져 그 속뜻들이 마치 디스플레이 되듯 눈앞에 펼쳐지는 건가요? 전에 한번 문답을 나눈 것 같은데, 여전히 너무 놀라워 다시 여쭙는 것입니다.

 

목사님, 이 질문은 많은 분들이 마음 깊이에서 품게 되는 질문이고, 동시에 스베덴보리 이해의 핵심에 닿아 있는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또렷하게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는 구술받아 적은 것도 아니고, ‘영상처럼 펼쳐지는 것을 본 것도 아니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 속에서 지속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상태’, 곧 계시적 이해 속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이것은 감각적 환상도 아니고, 단순한 학문적 추론도 아닌, 그리고 그 둘 사이 어떤 거가 아닌, ‘전혀 다른 차원의 인식 방식’입니다.

 

이걸 이해하려면, 스베덴보리가 스스로 여러 곳에서 밝힌 자신의 상태를 먼저 보셔야 합니다. 그는 일관되게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은 천사들과 교통하면서, 그들과 함께 말씀을 읽고, 그들이 이해하는 방식대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옆에서 말해 주었다’가 아니라, ‘같은 빛 안에 들어갔다’는 점입니다. 천사들은 말씀을 글자 그대로가 아니라 속뜻으로 이해하는데, 스베덴보리는 그들과 같은 상태에 들어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 질문처럼 ‘곁에서 누가 불러 주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매우 분명하게, ‘어떤 천사도 자기 생각을 대신해 주지 못하며,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강조합니다. 천사들은 매개일 뿐이고, 실제로 빛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과정은 ‘구술’이라기보다, ‘빛 가운데서 이해가 열리는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눈앞에 펼쳐지듯 보이는가?’인데요, 이것도 일부는 맞고, 일부는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실제로 영계를 ‘보는’ 경험을 했고, 상응에 해당하는 장면들을 형상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을 풀 때는, 그것이 주된 방식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문장을 읽을 때, 그 안의 영적 의미가 즉시 이해되는 상태’, 곧 ‘보듯이 이해되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주 ‘perceived’, ‘was given to see’ 같은 표현을 쓰는데, 이것은 물리적 시각이라기보다 ‘이해와 지각이 동시에 일어나는 상태’입니다.

 

조금 더 쉽게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글을 읽을 때, 글자 하나하나를 따로 해석하지 않아도, 문장의 의미가 ‘한 번에 들어오는’ 경험을 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에게는 그 수준이 훨씬 깊어서, ‘글자의 의미를 넘어서 그 안에 담긴 영적 구조와 연결이 동시에 보이는 상태’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인용 구절을 하나 가져오면, 그것이 단절된 문장이 아니라, ‘전체 말씀 안에서 어떤 자리에 있고, 무엇을 가리키는지가 함께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핵심은 이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속뜻을 아는 방식은 ‘정보를 전달받는 방식이 아니라, 상태가 열리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그는 ‘배웠다’기보다, ‘보여졌다’, ‘이해되었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에 의존한다’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래서 이 모든 작업은 인간 스베덴보리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계시 사역’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누가 옆에서 불러 주는 것을 받아 적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빛 속에서 말씀을 이해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을 때 그 속뜻이 함께 열렸습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지나치게 신비화하지 않으면서도 본질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과의 교통 속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 가운데 들어가 말씀의 속뜻을 보듯이 이해하는 상태에서 기록하였으며, 그것은 구술도 환상도 아닌 계시적 이해입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놀라움’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고, 사실 그 놀라움 자체가 이 작업의 본질을 잘 보여 줍니다.

 

 

 

AC.42, 심화 3, ‘겔29:3’

AC.42.심화 3. ‘겔29:3’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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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 심화 1, ‘겔32:2 속뜻에 대하여’

AC.42.심화 1. ‘겔32:2 속뜻에 대하여’ AC.42에서 겔32:2,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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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심화

 

1. 32:2 속뜻에 대하여

 

AC.42에서 겔32:2,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도다를 인용하면서 그 속뜻으로 이 말씀은 기억 지식을 수단으로 삼아, 그러니까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뜻합니다.’라고 하는데요, 속뜻이라고는 하지만... 좀 어리둥절합니다. 이게 어떻게 해서 그렇게 연결되는지요?

 

목사님, 이 대목이 어리둥절하게 느껴지시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상응’이 한 단계가 아니라, ‘여러 층을 한 번에 겹쳐 읽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 연결을 풀어 보려면, 구절 안에 있는 상징들을 하나씩 풀어서 다시 조합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어째서 이것이 기억 지식으로 신앙의 신비에 들어가려는 사람인가?’가 또렷해집니다.

 

먼저 ‘애굽’(이집트)입니다. 스베덴보리 전체에서 ‘애굽’은 일관되게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을 뜻합니다. 즉, 외적인 지식, 경험, 학문, 논리, 감각에서 얻은 정보들입니다. 이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을 ‘출발점이 아니라 주인으로 삼을 때’입니다. 곧, 모든 것을 지식으로 판단하고, 지식으로 신앙을 재단하려 할 때입니다.

 

다음으로 ‘바로 왕’입니다. 왕은 일반적으로 ‘지배하는 원리, 주도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애굽의 바로 왕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지식이 지배자가 된 상태’, 곧 ‘지식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이해가 아니라 지식이 왕이 된 상태’입니다.

 

이제 ‘큰 악어’(혹은 용, dragon, crocodile)가 나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상징인데, 스베덴보리에게서 이것은 ‘감각적이고 자연적인 인간의 가장 낮은 층, 그러나 동시에 교묘하고 교만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겉으로는 힘 있고 크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낮은 수준의 감각과 자기 확신에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바다 가운데 있다’는 말이 붙습니다. 바다는 ‘지식과 개념들이 뒤섞여 있는 상태’, 곧 외적 이해의 영역입니다.

 

그다음 표현이 결정적입니다. ‘강에서 튀어 올라 물을 휘젓고 더럽힌다.’ 여기서 ‘’은 ‘보다 질서 있는 진리의 흐름’, 곧 말씀이나 교리에서 오는 진리의 흐름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악어’가 그 물을 휘저어 더럽힙니다. 이것은 ‘자기 지식과 감각으로 진리를 뒤섞고 왜곡하는 상태’입니다. 즉,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방식으로 재단하고 흐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제 이 모든 것을 한 줄로 연결해 보겠습니다. 애굽(지식)이 있고, 그 지식이 왕이 되어 지배하고 있으며, 그 상태에서 감각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악어)가 진리의 흐름(강)을 휘저어 더럽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억 지식을 수단으로 삼아 신앙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신앙을 배우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지식으로 신앙을 해석하고 통제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지식을 사용하는 것’과 ‘지식으로 들어가는 것’은 다릅니다. 전자는 올바른 순서입니다. 즉, 먼저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받고, 그다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지식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자는 순서가 뒤집힌 것입니다. 즉, ‘지식을 기준으로 삼아 신앙을 판단하고, 이해되지 않으면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AC.42가 말하는 것은 바로 이 후자입니다.

 

실제적인 예로 설명드리면 더 분명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모든 선이 온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이때 한 사람은 ‘아직 다 이해는 안 되지만, 이 말이 참일 수 있겠다’ 하고 받아들인 뒤, 점점 이해해 갑니다. 이것은 ‘진리에서 출발하여 이해로 들어가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그게 과학적으로 증명되나? 논리적으로 완벽히 설명되나?’를 먼저 따집니다. 그리고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거부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식으로 신앙의 신비에 들어가려는 상태’입니다. 겉으로는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강을 흐리는 악어’와 같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 그렇게 연결되는 이유는, 단순히 상징 몇 개를 억지로 맞춘 것이 아니라, ‘전체 구조가 정확히 그 상태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왕이 되고, 감각적 사고가 진리를 휘저어 흐리게 만드는 상태,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잘못된 접근’입니다.

 

문제는 지식이 아니라, 지식을 주님보다 앞세우는 것입니다.’ 이 한 문장이 바로 이 구절 전체의 핵심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주는 경고로도 들립니다. 왜냐하면 이 상태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쉽게 빠질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42는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신앙의 출발점이 어디인가를 묻는 말씀’입니다.

 

 

 

AC.42, 심화 2, ‘스베덴보리는 인용 구절들의 이런 속뜻을 어떻게 아는 건가요?’

AC.42.심화 2. ‘스베덴보리는 인용 구절들의 이런 속뜻을 어떻게 아는 건가요?’ AC.42를 보면 여러 인용 구절이 나오며, 스베덴보리는 그에 대한 속뜻을 거침없이 기술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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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 창1:21, ‘지식을 살리는가 삼키는가 : 큰 바다짐승들로 드러나는 일반 원리의 방향’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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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심화

 

2. 그 안에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들어 있습니다

 

AC.41 그 안에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들어 있습니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왜 이 두 가지가 함께 나오나요? 주님의 신성이 이런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인가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함께 나오는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자체가 항상 이 두 가지, 곧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를 함께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단순한 병렬 표현이 아니라, ‘생명의 구조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spiritual)인 것은 주로 ‘진리, 신앙, 이해’에 속한 것을 가리키고, ‘천적(celestial)인 것은 ‘, 사랑, 의지’에 속한 것을 가리킵니다. 이 둘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을 이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사랑 없이 살아 있을 수 없고, 사랑은 진리 없이 방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언제나 ‘‘진리로 비추고, 사랑으로 살게 하는 두 작용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AC.41의 문맥을 다시 보면, 사람의 ‘자기 것(proprium)은 생명이 없고 죽은 것처럼 보이는 반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의 형상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 안에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단순한 생각이나 감정 하나가 아니라, 진리와 사랑이 함께 들어 있는 살아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영계에서는 ‘‘사람다운 형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 쪽의 구조가 아니라, ‘주님의 신성 자체에서 오는 질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 안에는 신적 선(Divine good)과 신적 진리(Divine truth)가 있으며, 이 둘이 완전히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거듭남을 통해 이 질서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 안에서도 이 두 가지, 곧 사랑과 진리가 하나로 결합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상태’, 곧 인간다운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AC.41에서 이 표현이 나오는 것은 매우 의도적입니다. 단순히 ‘좋은 것이 들어 있다’가 아니라,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함께 들어 있다’, 즉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작동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아무리 옳은 생각을 해도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아무리 좋은 감정을 가져도 그것 역시 방향 없는 것이 됩니다. 둘이 함께 있을 때만 비로소 생명이 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항상 두 가지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를 깨닫게 하는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살게 하는 사랑입니다. 이 둘이 함께 있을 때, 그것이 진짜 생명입니다.’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함께 나온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생명은 진리와 사랑, 이해와 의지가 결합된 상태로 온다는 뜻이며, 바로 그 결합이 사람을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드는 핵심입니다.’

 

 

 

AC.41, 창1:20, ‘참된 생명의 근원 : 주님에게서 오는 것만이 살아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1 사람의 본성(own, proprium)에 속한 것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으며, 그것을 눈으로 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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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 심화 1, ‘천사적 영’

AC.41.심화 1. ‘천사적 영’ AC.41에 ‘천사적 영’이라는 표현이 나와요. 이건... 그러니까 ‘천사’라는 건가요, ‘영’이라는 건가요? ‘‘천사적 영’(angelic spirit)은 ‘중간 존재’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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