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삼상14:29)
이 구절을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말씀에서‘눈이 밝아졌다’는 표현이 단순히 육체적 시력 회복이 아니라 이해와 인식의 밝아짐을 뜻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의 역사적 의미를 보면,요나단은 전투 중 지쳐 있었고,숲에서 발견한 꿀을 조금 맛본 뒤 기력을 회복합니다.그래서 문자적으로는 몸에 힘이 돌아오고,정신이 맑아졌다는 뜻입니다.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더 깊은 의미를 봅니다.요나단은 단순히 눈이 잘 보이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이전보다 더 분명하게 상황을 판단하고,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으로‘눈이 밝아졌다’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AC.211의‘interior dictate’와 연결됩니다.스베덴보리는 창3:7의‘그들의 눈이 밝아져’를 육체적 변화가 아니라 내적 인식의 작용으로 해석합니다.그런데 이것이 성경 전체의 사용법과 일치함을 보여 주기 위해 요나단의 말을 인용하는 것입니다.요나단은 눈으로 새로운 대상을 본 것이 아니라,자신의 상태와 주변 상황을 더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즉‘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이해가 밝아졌다는 뜻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꿀’입니다.말씀에서 꿀은 종종 선한 즐거움이나 선에서 오는 기쁨을 상징합니다.요나단은 꿀을 맛본 뒤 활력을 얻고,판단력이 맑아졌습니다.이것은 영적으로 볼 때,선과 결합된 기쁨이 이해를 밝게 한다는 원리와도 상응합니다.그래서‘눈이 밝아졌다’는 표현은 더욱 자연스럽게 이해의 계몽(enlightenment)을 가리키게 됩니다.
이 때문에AC.212에서 요나단의 사례는 발람의 사례와 나란히 놓입니다.발람은 계시와 환상을 통해‘눈이 열린 사람’으로 불렸고,요나단은 꿀을 맛본 뒤‘눈이 밝아졌다’고 말합니다.두 경우 모두 공통점은 육체의 눈이 아니라 내적 인식과 이해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고 분명합니다.말씀에서‘눈’은 자주 이해를 의미하며,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이해가 밝아지고,어떤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따라서 창3:7의‘눈이 밝아져’도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는 뜻이 아니라,자신들의 상태를 인식하게 된 내적 자각을 의미한다는 설명의 근거로 이 구절을 사용한 것입니다.요나단의‘눈이 밝아졌다’는 말은 곧‘나는 이제 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는 뜻이며,이것이AC.212에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핵심입니다.
좋은 질문입니다. 사실 민24:3은 번역본마다 차이가 상당히 큰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AC.212를 읽다가 보면 ‘스베덴보리는 분명‘눈이 열린 사람(man whose eyes are opened)’이라고 인용하는데,왜 한역(韓譯,한글 번역)은 개역개정이든 개역한글이든 다‘눈을 감았던 자’라고 번역했을까?’ 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문제는 히브리어 원문에 있습니다. 민24:3의 해당 표현은 해석상 논란이 오래된 구절입니다. 전통적으로는 ‘눈이 열린 사람’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영어KJV는 ‘the man whose eyes are open’이라고 번역했고, 스베덴보리도 이 전통적 번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 히브리어 연구에서는 이 단어를 ‘감긴’, ‘닫힌’, ‘덮인’ 쪽으로 이해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글 번역은 ‘눈을 감았던 자’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다만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단순히 잠을 잤다거나 눈을 감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환상이나 계시를 받는 특별한 상태에 들어갔다는 의미로 이해한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같은 장4절을 보면 더 흥미로운 표현이 나옵니다. ‘전능자의 환상을 보고 엎드려서 눈을 뜬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들 가운데는 ‘falling into a trance,but having his eyes open’이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즉 육체적으로는 황홀경이나 깊은 영적 상태에 들어가 있지만, 영적으로는 오히려 눈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AC.212에서 이 구절을 인용할 때 관심을 두는 것은 히브리어 문법 논쟁이 아닙니다. 그는 발람이 영적 환상과 계시를 받는 상태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눈’이 단순한 육체의 시각이 아니라 내적 인식과 이해를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흥미롭게도, 설령 한역의 ‘눈을 감았던 자’를 따른다 해도AC.212의 논지는 크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발람은 결국 환상 가운데서 영적 사실을 보게 된 사람으로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핵심은 ‘눈이 감겼느냐 열렸느냐’의 문자적 표현보다, 발람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래서AC.212의 문맥에서는KJV계열의 ‘눈이 열린 사람’이 스베덴보리의 논증에 더 직접적으로 사용되지만, 한역의 ‘눈을 감았던 자’도 결국은 환상과 계시를 받는 상태를 가리킨다는 점에서는 크게 멀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상응 해석의 측면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사용한 ‘눈이 열린 사람’ 쪽이AC.212의 ‘눈=이해,인식’이라는 논지와 훨씬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민24:3)
이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민24:3)라는 구절을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창3:7의 ‘그들의 눈이 밝아져’라는 표현이 단순히 육체적 시력의 변화가 아니라 내적 이해와 영적 인식의 열림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발람은 여기서 자신을 ‘눈을 감았던 자’, 영어 표현으로는 ‘man whose eyes are opened’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육체의 눈이 갑자기 뜨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발람은 이미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눈이 밝아져’라는 말은 영적 차원의 어떤 것을 보게 되었다는 뜻이며, 더 정확히는 주어진 계시와 환상을 이해하고 지각할 수 있는 상태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합니다. 만일 말씀에서 ‘눈이 열렸다’는 표현이 단순히 육체의 눈을 가리킨다면, 발람의 이 표현은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해와 인식을 가리킨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발람은 환상을 보았고, 그 환상의 의미를 어느 정도 인식하는 상태에 들어갔기 때문에 자신을 ‘눈이 열린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AC.212에서 발람의 사례는 ‘눈=이해’라는 상응을 증명하는 하나의 중요한 예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3:7의 ‘눈이 밝아져’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아담과 하와가 육체적으로 새로운 시력을 얻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상태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이해가 작동하여 자신들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순진무구한 상태에 있지 않음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발람의 경우에도 ‘눈 열림’이 반드시 높은 영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발람은 계시를 받았지만, 끝내 참된 의미에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눈이 열렸다’는 표현 자체의 의미이지, 발람의 영적 수준이 아닙니다. 곧 ‘눈 열림’은 어떤 사물을 이해하고 인식하게 되는 내적 작용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AC.212에서 민24:3을 인용하는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말씀에서 ‘눈이 열렸다’, ‘눈이 밝아졌다’라는 표현은 반복적으로 ‘이해가 열렸다’, ‘내적 인식이 주어졌다’, ‘어떤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뜻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창3:7의 ‘눈이 밝아져’ 역시 새로운 지혜를 얻었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보게 된 내적 자각을 의미한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발람의 ‘눈을 감았던 자’는AC.211의 ‘interior dictate’, 곧 ‘내적 딕테이트’ 또는 ‘내적 자각’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례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창3:7)
AC.212
‘눈이 밝아져’(eyes opened)는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유사한 표현들로부터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발람은 환상들을 본 결과, 자신을 가리켜 ‘눈을 감았던 자’(man whose eyes are opened)라고 합니다(민24:3). That by having the “eyes opened” is signified an interior dictate is evident from similar expressions in the Word, as from what Balaam says of himself, who in consequence of having visions calls himself the “man whose eyes are opened.” (Num. 24:3)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민24:3)
또한 요나단은 꿀을 맛본 후, 그것이 악한 일임을 내적으로 깨닫게 되었을 때, 자신의 ‘눈이 밝아졌다’(eyes saw)고 말하는데, 이는 그가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었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입니다(삼상14:29). And from Jonathan, who when he tasted of the honeycomb and had a dictate from within that it was evil, said that his “eyes saw,” that is, were enlightened, so that he saw what he knew not. (1 Sam. 14:29)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삼상14:29)
더욱이 말씀에서 ‘눈’(eyes)은 자주 이해(understanding)를 뜻하며, 따라서 거기서 나오는 내적 딕테이트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시편은Moreover in the Word, the “eyes” are often used to denote the understanding, and thus an interior dictate therefrom, as in David: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시13:3) Lighten mine eyes, lest I sleep the sleep of death (Ps. 13:3),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눈’(eyes)은 이해를 뜻합니다. 에스겔에서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have eyes to see, and see not) (겔12:2)라고 말합니다. where “eyes” denote the understanding. So in Ezekiel, speaking of those who are not willing to understand, who “have eyes to see, and see not.” (Ezek. 12:2)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겔12:2)
이사야서의In Isaiah: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사6:10) Shut their eyes ,lest they see with their eyes (Isa. 6:10),
라는 말씀 역시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도록 영적으로 눈멀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한 모세는 백성에게denotes that they should be made blind, lest they should understand. So Moses said to the people,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신29:4) Jehovah hath not given you a heart to know, and eyes to see,and ears to hear (Deut. 29:4),
고 말하는데,여기서 ‘마음’(heart)은 의지를, ‘눈’(eyes)은 이해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사야서에서는 주님께서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실 것’(he should open the blind eyes) (사42:7)이라 하며, where “heart” denotes the will, and “eyes” denote the understanding. In Isaiah it is said of the Lord, that “he should open the blind eyes.” (Isa. 42: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사42:7)
또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The eyes of the blind shall see out of thick darkness and out of darkness) (사29:18)라고 말합니다. And in the same prophet: “The eyes of the blind shall see out of thick darkness and out of darkness (Isa. 29:18).”
그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사29:18)
해설
이 본문은 AC.211의 ‘interior dictate’를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설명입니다. 그는 자신의 해석을 단순한 추측이나 상상으로 제시하지 않고, 말씀 전체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상응의 법칙에 근거하여 설명합니다. 창3:7의 ‘눈이 밝아져’를 이해하려면 먼저 말씀에서 ‘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눈 = 이해(understanding)’라는 상응입니다. 자연계에서 눈이 빛을 받아 사물을 보듯이, 영적 차원에서는 이해가 진리의 빛을 받아 사물을 분별합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단순히 시력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밝아지고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발람의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 그는 자신을 ‘눈을 감았던 자’(man whose eyes are opened)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육체의 눈이 갑자기 좋아졌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볼 수 있는 상태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요나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꿀을 먹은 뒤 실제로 눈이 번쩍 뜨인 것이 아니라, 정신이 맑아지고 상황을 분별하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눈이 밝아졌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예들을 통해 창3:7의 ‘눈이 밝아져’ 역시 같은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어떤 새로운 초능력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또한 뱀이 약속한 것처럼 하나님 같은 지혜를 얻은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상태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눈이 열린 것은 지혜의 획득이 아니라 자기 상태의 인식입니다.
특히 AC.212에서 중요한 것은 ‘눈이 밝아져’와 ‘interior dictate’가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내적 딕테이트란 어디선가 음성이 들리는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해가 빛을 받아 어떤 사실을 즉시 알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는 발람, 요나단, 다윗, 모세, 이사야, 에스겔의 본문들을 모두 가져와 ‘눈’이 이해를 뜻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결국 AC.212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창3:7에서 ‘눈이 밝아져’는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가 아직 남아 있던 퍼셉션의 흔적에 의해 자신들의 실상을 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처럼 된 것을 본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이전의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지 않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눈 밝아짐은 영광의 눈 밝아짐이 아니라 자각의 눈 밝아짐이며, 승리의 눈 밝아짐이 아니라 상실의 눈 밝아짐입니다.
또한 이 본문은 말씀 전체에서 ‘눈’이라는 표현을 읽는 중요한 원리를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눈은 단순한 신체 기관이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는 이해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눈먼 자의 눈을 밝히신다’는 말씀은 단순한 육체적 치유를 넘어, 이해를 열어 진리를 보게 하시는 주님의 사역을 의미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AC.212는 단순한 어휘 해설이 아니라, 말씀 전체를 읽는 상응적 해석의 한 모범을 보여 주는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interior dictate’는 직역하면‘내적 지시’, ‘내면의 지시’, ‘내적인 일깨움’정도가 됩니다.여기서‘interior’는 단순히 마음속(inner)이라는 뜻보다 더 깊은 차원의‘속 사람에 속한’, ‘내적인’, ‘영적인’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dictate’는 누군가가 말을 받아 적게 하는 받아쓰기(dictation)의 어원이지만,스베덴보리 문맥에서는‘안에서 알려 주는 작용’, ‘내적으로 지시하는 것’, ‘직접 깨닫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따라서AC.211에서의‘interior dictate’는 어떤 음성이 귀에 들리는 현상을 뜻하지 않습니다.또한 양심의 가책과도 완전히 동일하지 않습니다.오히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남아 있던 지각(perception)의 흔적이 작용하여,자신들의 상태를 즉각적으로 알게 되는 내적 깨달음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누군가에게‘당신이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해주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설명을 듣기 전부터 이미‘아,내가 잘못했구나’하고 안에서 분명히 아는 상태가 있습니다.스베덴보리가 말하는‘interior dictate’는 이런 종류의 직접적인 내적 인식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AC.211에서‘그들의 눈이 밝아져’라는 것은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는 뜻이 아니라, ‘interior dictate’,곧 내적 지시에 의해 자신들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순진무구한 상태에 있지 않고,악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고 인정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번역으로는‘내적 지시’가 가장 무난하고 정확해 보입니다.다만 해설에서는‘내면의 소리’, ‘내적 일깨움’, ‘마음 깊은 곳에서의 자각’, ‘설명 없이도 즉시 알게 되는 내적 인식’등의 표현을 함께 사용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interior dictate’는 소리라기보다 지각이며,음성이라기보다 직접적인 내적 앎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전체 저작을 놓고 보면,이 표현은 특히 태고교회의 특징과 잘 어울립니다.그들은 오늘날 사람들처럼 논증과 추론을 통해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 아니라,사랑 안에서 직접 진리를 지각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따라서 그들에게‘interior dictate’란 누군가의 설명이나 설득이 아니라,주님으로부터 오는 빛 안에서 자신의 상태를 곧바로 알게 되는 내적 작용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그래서AC.211의‘interior dictate’는‘내적 지시’이면서 동시에‘지각의 마지막 흔적’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창3:7)
AC.211
그들의 ‘눈이 밝아져’(eyes being opened)는,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 즉 아직 조금 남아 있는 퍼셉션에 의해 자신들이 ‘벗은 줄’(naked), 곧 이전처럼 더 이상 순진무구한 상태에 있지 않고, 악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고 인정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Their “eyes being opened” signifies their knowing and acknowledging, from an interior dictate, that they were “naked,” that is, no longer in innocence, as before, but in evil.
해설
이 구절은 창세기 3장 7절의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라는 말씀을 해설하는 대목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 구절을 ‘지식을 얻게 되었다’, ‘무언가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전혀 다르게 읽습니다. 그에게 ‘눈이 밝아짐’은 지혜의 획득이 아니라 자기 상태에 대한 자각입니다.
특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적 딕테이트’(an interior dictate)라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선 AC.193에서도 타락 이후 사람들 안에 아직 ‘지각의 남은 흔적’(remnant of perception)이 남아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완전히 무감각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상태에 들어갔는지를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남아 있는 내적 빛에 의해 자신들의 실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눈이 밝아져’는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는 뱀의 약속이 성취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높아진 것이 아니라 떨어졌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혜를 얻은 것이 아니라 순수함을 잃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눈 밝아짐은 승리의 눈 밝아짐이 아니라 상실의 눈 밝아짐입니다.
또한 여기서 ‘벗은’(naked)은 단순히 옷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벌거벗음은 선과 진리의 보호를 잃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전에는 순진무구함과 주님에 대한 신뢰 안에 있었기 때문에 영적으로 보호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 own이 중심이 되었고, 그 결과 그 보호가 벗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AC.211은 매우 중요한 균형을 보여 줍니다. 타락한 사람들은 아직 완전히 죽은 상태가 아닙니다. 그들 안에는 여전히 자신들의 상태를 알아볼 수 있는 최소한의 내적 빛, 퍼셉션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빛은 그들을 기쁘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게 된 것은 자신들의 지혜가 아니라 자신들의 상실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우리 자신의 영적 경험과도 닿아 있습니다. 사람은 때때로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 깨달음은 언제나 즐겁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아프고 부끄럽고 불편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바로 그 자각이 은혜의 시작입니다. 완전히 어두워진 사람은 자신이 어둠 속에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211의 ‘눈이 밝아져’라는 표현은 단순한 지식의 획득이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지각의 흔적에 의해 자신들의 참된 상태를 보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벗은’은 그들이 더 이상 이전의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지 않고, 자기 own과 악의 영역 안으로 들어왔음을 인정하게 된 것을 뜻합니다. 이 장면은 타락의 한가운데에서조차 주님께서 완전히 꺼뜨리지 않으신 마지막 내적 빛이 여전히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매우 인상적인 대목입니다.
실제로 지옥에 가서 이own에 갇힌 자들의 생생한 실존,곧 비참한 상태를 본 스베덴보리로서는 더더욱 이own설명이 생생했겠어요...
그렇습니다.저는AC.210같은 본문을 읽을 때마다,이것이 단순히 책상 앞에서 세운 신학 이론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습니다.스베덴보리는‘own은 지옥적이며 저주받은 것이다’라고 추상적으로 말하고 끝내지 않습니다.그는 이후 수많은 저작들에서 실제 영계와 지옥의 주민들을 관찰한 내용을 반복해서 기록합니다.그래서 그의‘own’설명은 철학자의 정의라기보다 목격자의 증언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특히 스베덴보리가 지옥에서 본 사람들은 대개 자신들이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오히려 자신이 가장 옳고,가장 지혜롭고,가장 정당하다고 확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그들은 자신을 중심에 두고 모든 것을 해석하기 때문에,미움을 사랑이라 부르고,지배욕을 정의라 부르고,복수를 정당한 권리라 부르며,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가장 합리적인 삶이라고 생각합니다.AC.210의‘그들은 미움을 사랑이라 부르고,어둠을 빛이라 부른다’는 말은 바로 이런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지옥의 고통이 외부에서 가해지는 형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그들은 자기own안에 갇혀 있습니다.그래서 끊임없이 남보다 위에 서고 싶어 하고,인정받고 싶어 하며,지배하고 싶어 하고,자신이 중심이 되기를 원합니다.그러나 모든 사람이 똑같이 그렇게 원하기 때문에,결국 서로 충돌하고,질투하고,미워하고,속이고,공격하게 됩니다.그 결과가 바로 지옥의 비참함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own은 단순한 성격상의 결함이나 작은 이기심이 아닙니다.그것은 인간을 주님으로부터 분리시키고,동시에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분리시키는 원리입니다.주님과의 연결이 끊어지고,이웃과의 연결도 끊어지며,결국 자기 자신만 남게 됩니다.그런데 역설적으로,자기 자신만 남은 상태가 바로 가장 깊은 고독과 불행의 상태가 됩니다.
이 점에서 보면,스베덴보리가own을 그렇게 강하게 표현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그는 단지 교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그 끝이 어디로 가는지를 실제로 보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마치 절벽 아래를 직접 내려다본 사람이‘그 길로 가지 마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그 말은 이론적 경고가 아니라 체험적 경고입니다.
한편으로는,스베덴보리가own을 가장 강하게 비판하는 만큼 주님의 자비도 가장 강하게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그는 인간 안에own이 얼마나 깊이 뿌리박혀 있는지를 보았고,또한 그own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주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지도 보았습니다.그래서 그의 저작을 읽다 보면,인간에 대한 평가는 매우 엄격하지만,주님에 대한 평가는 끝없이 따뜻하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어쩌면 목사님 말씀처럼,실제로 지옥에 가서own에 갇힌 영들의 삶을 보고 돌아온 사람이라면AC.210같은 문장을 이렇게밖에 쓸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왜냐하면 그는 단순히‘own은 나쁘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것이 끝내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보았다’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그래서AC.210의 무게는 단순한 교리의 무게가 아니라,영원한 세계를 목격한 증인의 무게처럼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함으로써 그저 악과 거짓이 될 뿐이며,In this way men become mere evil and falsity, (AC.210)
이 문장은 처음 읽으면 매우 충격적으로 들립니다. 마치 스베덴보리가 인간 안에는 선한 것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인간 존재 자체를 정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여기서 ‘주님으로부터 분리된 인간’, 곧own안에만 머무는 인간이 어떤 상태가 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장의 앞부분에 있는 ‘이렇게 함으로써’(In this way)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갑자기 악과 거짓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앞에서 그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중심에 두고, 주님보다 자기 자신을 신뢰하며,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기 시작하면, 사람은 점차 모든 것을 자기own의 관점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은 악과 거짓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악’은 사랑의 왜곡을 의미하고, ‘거짓’은 이해의 왜곡을 의미합니다. 사랑이 왜곡되면 악이 되고, 이해가 왜곡되면 거짓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인간 안의 의지와 이해가 모두own에 의해 지배될 때, 사람 전체가 악과 거짓의 방향으로 기울게 된다고 말합니다.
또한 이 표현은 인간에게서 주님께 속한 것을 제거하고 생각해 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오며,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진리도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만일 사람이 그것들을 모두 자기 것으로 돌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거부한다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바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악과 거짓뿐이라는 것이 그의 논리입니다.
그래서AC.210의 이 문장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혐오스러운 존재라는 선언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생명과 진리의 근원이 될 수 없다는 선언에 가깝습니다. 인간은 달과 같아서 스스로 빛을 만들어 내는 존재가 아니라, 빛을 받아 비추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달이 태양과의 연결을 끊고 자기 스스로 빛을 내겠다고 하면 결국 어둠만 남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런 상태를 ‘그저 악과 거짓일 뿐’(mere evil and falsity)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말은 동시에 주님의 자비를 더욱 크게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힘으로 선해지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의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희망은 자기own에 있지 않고, 주님께 있습니다.AC.210의 강한 표현은 인간을 절망시키기 위한 말이 아니라, 인간이 어디를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기 위한 말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사람은 그저 악과 거짓이 될 뿐입니다’라는 말은 ‘인간은 본래 쓸모없는 존재다’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분리된own만 남게 되면,결국 악과 거짓밖에 남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의도에 가장 가깝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그는 인간의own을 경계하면서도, 동시에 주님의 인플럭스와 자비를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And the woman saw that the tree was good for food, and that it was pleasant to the eyes, and a tree to be desired to give intelligence, and she took of the fruit thereof and did eat, and she gave also to her man [vir] with her, and he did eat. (창3:6)
AC.210
사람의 own이 무엇인지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own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되는 모든 악과 거짓이며, 주님이나 말씀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는 데서 나오는 것이고, 또한 감각과 기억 지식[sensualiter et scientifice]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함으로써 그저 악과 거짓이 될 뿐이며, 따라서 모든 것을 왜곡된 시선으로 보게 됩니다. 악한 것을 선한 것으로, 선한 것을 악한 것으로 보며, 거짓된 것을 참된 것으로, 참된 것을 거짓된 것으로 봅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은 모든 것인 양 여깁니다. 그들은 미움을 사랑이라, 어둠을 빛이라 부르며, 죽음을 생명이라, 그 반대로도 부릅니다. 말씀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저는 자’(lame)와 ‘맹인’(blind)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own인데, 이것은 그 자체로 지옥이며, 저주받은 것입니다. What man’s own is may be stated in this way. Man’s own is all the evil and falsity that springs from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and from not believing in the Lord or the Word but in self, and from supposing that what cannot be apprehended sensuously and by means of memory-knowledge [sensualiter et scientifice] is nothing. In this way men become mere evil and falsity, and therefore regard all things pervertedly; things that are evil they see as good, and things that are good as evil; things that are false they see as true, and things that are true as false; things that really exist they suppose to be nothing, and things that are nothing they suppose to be everything. They call hatred love, darkness light, death life, and the converse. In the Word, such men are called the “lame” and the “blind.” Such then is the own of man, which in itself is infernal and accursed.
해설
이 본문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own’의 정의 가운데 가장 강렬하고도 중요한 대목 중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own’을 단순히 ‘자기 자신’, ‘개성’, ‘자아’ 정도로 이해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에게 own은 훨씬 더 깊고 심각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스스로 존재하고 스스로 판단하며 스스로 살아간다고 믿는 상태 전체를 가리킵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own을 단순한 도덕적 악행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그 뿌리를 ‘주님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는 것’에서 찾습니다. 다시 말해, 문제의 핵심은 행동 이전에 중심의 이동입니다. 원래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생명과 빛을 받아 살아야 하는 존재인데, own은 그 자리에 자기 자신을 앉혀 놓습니다. 그래서 ‘내가 판단하겠다’, ‘내가 결정하겠다’, ‘내가 기준이다’라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와 연결하여 스베덴보리는 또 하나의 특징을 지적합니다. own은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AC.194-209에서 계속 설명된 창3의 뱀의 원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즉, 감각으로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고, 학문적으로 증명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태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단순한 지적 오류가 아니라 own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그 결과 사람은 현실을 거꾸로 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본문의 중심입니다. 그는 악을 선으로, 선을 악으로 보며, 거짓을 진리로, 진리를 거짓으로 봅니다. 이것은 단순한 판단 실수가 아닙니다. 영적 시력이 뒤집힌 상태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없는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모든 것처럼 여긴다고 말합니다.
특히 ‘그들은 미움을 사랑이라, 어둠을 빛이라, 죽음을 생명이라 부른다’는 표현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own의 본질을 드러내는 설명입니다. own은 선을 악으로, 악을 선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까지 바꾸어 버립니다. 그래서 자신이 미워하면서도 사랑한다고 믿고,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빛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며, 영적으로 죽어 있으면서도 자신이 가장 살아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이런 사람들을 ‘저는 자’와 ‘맹인’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합니다. 저는 자는 바르게 걸을 수 없는 사람이며, 맹인은 바르게 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진리의 길을 제대로 걸을 수 없고, 선과 진리를 올바로 분별할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눈이 없어서가 아니라, 눈이 있으면서도 잘못 보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매우 강렬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바로 사람의 own이며, 그것은 그 자체로 지옥이요, 저주받은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는 인간 자체를 저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주님과 분리될 때, 남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서 주님의 생명과 빛을 제거하면 남는 것은 자율성과 독립성이 아니라, 왜곡된 사랑과 왜곡된 판단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AC.210은 단순한 인간 비관론이 아닙니다. 이 본문은 오히려 인간이 왜 주님을 필요로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는 순간, 곧 own이 중심이 되는 순간, 그는 점차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뒤바꾸어 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AC.210이 경고하는 own의 본질이며, 동시에 창세기 3장 전체가 보여 주는 타락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말씀에서 홍수 이후 사람들을 다룰 때에는,의지보다는 이해(understanding)와 관련된 표현들이 사용됩니다.Where the Word treats of the people who lived after the flood, such expressions are used as relate not so much to the will as to the understanding; (AC.209)
혹시 저렇게 사용된 말씀의 예를 든다면?
좋은 질문입니다.AC.209를 읽으면 ‘의지와 관련된 표현’과 ‘이해와 관련된 표현’이 실제로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의도한 차이를 가장 쉽게 보려면 창세기3장과 홍수 이후 인물들, 특히 노아와 아브라함 이야기를 비교해 보면 됩니다.
창3:6의 표현들을 보십시오. ‘먹기에 좋고’, ‘눈에 즐겁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는 말들이 반복됩니다. 이것들은 모두 사랑, 욕망, 즐거움, 끌림 같은 의지의 언어입니다. 무엇을 생각하는가보다 무엇을 원하고 사랑하는가에 초점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선을 사랑하는 상태에서 진리를 알았기 때문에, 말씀도 그들의 내적 애정과 의지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반면, 홍수 이후를 보면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노아에 대해서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행하였다’와 같은 표현들이 나옵니다. 여기서는 무엇이 옳은지 배우고, 이해하고, 순종하는 모습이 강조됩니다. 또한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는 ‘보라’, ‘들으라’, ‘알라’, ‘기억하라’, ‘생각하라’, ‘깨달으라’와 같은 이해와 인식에 관련된 표현들이 훨씬 많이 나타납니다.
선지서들에서도 같은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듣고 깨달으라’, ‘보아도 알지 못한다’, ‘마음으로 깨닫지 못한다’, ‘지혜와 명철’, ‘지식과 총명’ 같은 표현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런 표현들은 인간의 이해와 판단, 분별과 관련된 언어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사랑의 상태가 중심이었다면, 홍수 이후 사람들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는 과정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하신 말씀도 흥미롭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깨닫지 못하느냐?’, ‘어찌하여 생각하지 못하느냐?’ 같은 말씀들이 많습니다. 물론 복음서의 최종 목적은 사랑이지만, 접근 방식은 이해를 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 역시 홍수 이후 인류의 구조와 관련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태고 사람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무엇을 사랑하는가?’를 주로 말합니다. 반면 홍수 이후 사람들은 ‘진리로부터 선을 가집니다’. 그래서 말씀은 ‘무엇을 알고 있는가?’, ‘무엇을 이해하는가?’, ‘무엇을 분별하는가?’를 더 많이 말합니다.
그래서AC.209의 요점은 단순히 문체의 차이가 아닙니다. 말씀의 언어 자체가 인간 구조의 변화에 맞추어졌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의지의 언어가, 홍수 이후 사람들에게는 이해의 언어가 더 적합했습니다. 그 결과 창3에서는 ‘먹기에 좋고’, ‘눈에 즐겁고’, ‘탐스럽다’가 중심이 되지만, 이후 말씀에서는 ‘듣다’, ‘알다’, ‘깨닫다’, ‘명철’, ‘지혜’, ‘총명’ 같은 표현들이 점점 더 전면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