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9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진지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행위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이 선들을 자신에게서 나온 걸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 선들은 아직은 생기가 없는(inanimate) 선들입니다. 이러한 선들을 말씀에서는 ‘풀’(tender grass),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라고 합니다. The third state is that of repentance, in which the man, from his internal man, speaks piously and devoutly, and brings forth goods, like works of charity, but which nevertheless are inanimate, because he thinks they are from himself. These goods are called the “tender grass,” and also the “herb yielding seed,” and afterwards the “tree bearing fruit.”

 

 

해설

 

AC.9은 거듭남의 세 번째 상태를 설명하며, 인간이 처음으로 ‘의식적 회개’에 들어가는 과정을 다룹니다. 이 단계는 속 사람이 어느 정도 열리고, 주님의 빛이 마음에 스며들어 자신의 상태를 보기 시작할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회개의 상태”라고 부르며, 사람은 이때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진지하게 말하기 시작하고, 체어리티의 행위와 같은 선한 행동들을 하기 시작한다고 설명합니다. 즉, 그는 하나님을 향한 말과 태도에서 더 깊은 진실성을 갖게 되며, 이전보다 선한 일을 행하려는 의지가 강해지고 실제 행동으로도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 단계의 선들은 아직 ‘생기 없는 선(inanimate good)이라고 불립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여전히 그 선이 ‘자신에게서 나왔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선한 일을 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주님의 역사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노력, 자신의 경건함, 자신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깁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 단계의 선은 아직 살아 있는 선이 아니라, ‘(tender grass)과 같은 초기적, 유아적 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 셋째 날의 식물 묘사를 사용해 이 단계를 설명하는데, ‘’은 막 돋아난 선의 싹이며,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는 선 속에 진리의 씨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함을 뜻하고,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는 이 초기적 선이 후일 완전한 선으로 성숙하게 될 잠재력을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즉, 회개의 단계는 아직 미성숙하지만 필수적입니다. 사람은 이 단계에서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선을 지향하며, 경건하게 살려는 의지를 가지지만, 아직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러한 초기적 선을 기뻐하시며, 이를 통해 이후 단계에서 더 깊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깨어날 수 있는 토양을 준비하십니다. 그러므로 AC.9의 ‘회개의 상태’는 거듭남의 구조에서 매우 중요한 과도기적 단계로서, 인간 안에 자라날 선의 씨앗과 진리의 씨앗을 주님이 심으시는 시점이며, 비록 아직은 미숙하고 자기중심적 요소가 섞여 있으나, 이후 영적 생명이 성장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는 성스러운 시작 단계입니다.

 

 

 

AC.10, 창1, '네 번째 상태' (AC.6-15)

AC.10 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게 되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그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한 일들을 행하였지만, 그것은 그가 겪는 시험과 곤궁 때문에 그러한 것

bygrace.kr

 

AC.8, 창1, '두 번째 상태' (AC.6-15)

AC.8 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 사이에 구별이 일어나는 상태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 불리는데, 여기서 리메인스란 특히 유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8

 

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 사이에 구별이 일어나는 상태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 불리는데, 여기서 리메인스란 특히 유아기부터 배워 저장되어 온 신앙의 지식들입니다. 이 지식들은 저장되어 있으나, 사람이 이 두 번째 상태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이 상태가 거의 항상 시험이나 불행, 혹은 슬픔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드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을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고요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속 사람에 속한 것들과 분리됩니다. 그리고 속 사람 안에는 리메인스가 있는데, 이 리메인스는 지금까지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주님에 의해 저장되어 온 것입니다. The second state is when a distinction is made between thos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and those which are proper to man. Th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are called in the word “remains,” and here are especially knowledges of faith, which have been learned from infancy, and which are stored up, and are not manifested until the man comes into this state. At the present day this state seldom exists without temptation, misfortune, or sorrow, by which the things of the body and the world, that is, such as are proper to man, are brought into quiescence, and as it were die. Thus the things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are separated from those which belong to the internal man. In the internal man are the remains, stored up by the Lord unto this time, and for this use.

 

 

해설

 

AC.8은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를 설명하며, 인간 영적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를 나타냅니다. 첫 번째 상태가 주님의 자비가 어둠 속에서 처음 움직이시는 준비의 단계라면, 두 번째 상태는 인간 내부에서 주님의 것과 ‘자기 고유한 것(proprium, own), 즉 고유 본성이 처음으로 분별되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별이 영적 삶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한 결코 거듭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님께 속한 것들은 성경에서 ‘남은 자(remains, 리메인스)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유아기부터 주님이 사람 안에 조용히 저장해 두신 선과 진리의 씨앗들, 즉 신앙의 지식들, 선한 분위기와 감정, 기도와 예배 경험, 사랑받고 사랑한 경험 등 모든,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한 흔적을 말합니다. 이것들은 평소에는 감춰져 있지만, 주님은 필요한 때에 이것들을 깨워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리메인스가 의식적으로 작동하려면 먼저 사람 안의 ‘자기 고유한 것’, 즉 몸과 세상에 속한 욕망과 집착이 조용해져야 하는데,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오늘날 이 두 번째 상태는 거의 항상 ‘시련, 슬픔, 불행, 내적 갈등’과 함께 온다고 말합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인데요, 소위 모태신앙이라 하는 저였지만, 3 때 어머니 교통사고로 갑자기 별세하시는 청천벽력 같은 일을 겪고 나서야 그동안 천방지축, 교회 안 다니는 사람과 별 다를 바 없었던 인생의 세속적 추구로부터 한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겨우 시작이었고, 비록 대기업도 다니고, 대형 교회의 중요 스태프로 섬겼어도 여전히 큰 교만과 자만의 세속적 괴물이었던 저는 이후 권고사직이라는 내침을, 그것도 신학을 하기 전 한 번, 신학을 하고 난 다음 또 한 번 등 두 번이나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비록 겉으로는 신앙의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그 본모습은 여전히 주님의 것을 가로채려는 자였던 것이었죠. 저는 저를 부단히도 스스로 높이는 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 나이는 먹어가면서, 그러나 더 이상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말할 수 없는 비참 가운데 있다가, 드디어 진심으로 저 둘째의 고백,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15:17-19)

 

하는 고백이 터져 나왔는데, 그러면서 뭔가 제 삶에 영적 전환이 비로소 시작된 것입니다. 제게 이 전환이 가능했던 이유가 이제 보니 바로 저 리메인스, 곧 주님이 저의 어린 시절, 제 안에 차곡차곡 쟁여놓으셨던 리메인스였던 것이지요.

 

이러한 고통은 주님이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겉 사람(외적 인간)을 잠잠하게 하여 속 사람(내적 인간)을 열어 주시는 섭리적 허용입니다. 고난을 통해 외적 욕망은 약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보이게 되며, 그 자리에 속 사람 안에 저장된 리메인스가 떠오를 여지가 생깁니다. 이때 처음으로 사람은 내적 차원에서 주님에게 속한 것과 자기에게 속한 것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으며, 이는 거듭남의 본격적인 시작을 뜻합니다. 이렇게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속 사람과 분리되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내적 세계를 향한 관문을 열게 되고, 주님이 이제껏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이 시기에 사용되도록 깨어납니다. 따라서 AC.8이 말하는 두 번째 상태는 고통의 시간이 아니라, 주님이 인간을 재창조하기 위해 반드시 지나가게 하시는 성스러운 분별의 과정이며, 겉 사람의 소리가 조용해질 때 비로소 속 사람의 진짜 생명이 깨어나는 전환의 시점입니다.

 

 

 

AC.9, 창1, '세 번째 상태' (AC.6-15)

AC.9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진지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행위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이 선들을 자신에게

bygrace.kr

 

AC.7, 창1, '첫 번째 상태' (AC.6-15)

AC.7 첫 번째 상태는, 거듭남에 앞서 존재하는 상태인데, 여기에는 어린 시절(유아기) 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직전에 있는 바로 그 상태가 모두 포함됩니다. 이 상태는 ‘혼돈’, ‘공허’, 그리고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7

 

첫 번째 상태는, 거듭남에 앞서 존재하는 상태인데, 여기에는 어린 시절(유아기) 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직전에 있는 바로 그 상태가 모두 포함됩니다. 이 상태는 ‘혼돈’, ‘공허’, 그리고 ‘흑암’이라 불립니다. 그리고 그 상태 안에 일어나는 첫 움직임, 곧 주님의 자비(긍휼) 가 바로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라는 말씀입니다. The first state is that which precedes, including both the state from infancy, and that immediately before regeneration. This is called a “voi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And the first motion, which is the Lord’s mercy, is “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해설

 

AC.7은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를 설명하며, 인간 영적 삶의 시작이 어떤 실존적 조건 위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밝히는 핵심 단락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시작을 ‘첫째 날’에 대응시키며, 이 단계는 거듭남 이전의 모든 상태를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유아기의 상태와, 성인이 되어 거듭남 직전에 놓인 내적 상태가 모두 포함됩니다. 유아기는 악을 스스로 행할 수 없어 죄가 없지만 여전히 영적 무지 속에 있으며, 선과 진리의 의식적 빛은 아직 없는 상태입니다. 성인이 되어 거듭남의 문턱에 이르면 인간은 내면에서 공허함, 혼란, 영적 무지, 삶의 의미 상실과 같은 깊은 내적 어둠을 경험하는데, 성경은 이를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는 표현으로 상징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혼돈(void), “공허(emptiness), “흑암(thick darkness)은 모두 선이 없고, 진리가 없으며,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조차 없는 영적 빈곤과 무질서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상태는 단순한 절망이나 부정이 아니라 주님이 거듭남을 일으키기 위해 준비시키시는 ‘(前) 재창조’의 상태입니다. 바로 이 어둠 속에서 최초의 움직임이 일어나는데,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로 표현하고, 스베덴보리는 이는 주님의 긍휼과 사랑의 가장 첫 작용이라고 해석합니다. 인간은 이 단계에서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고, 모든 선한 동기와 영적 깨달음의 첫 시초는 오직 주님의 자비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이 ‘운행’은 겉 사람의 혼란과 무지 속에 은밀히 스며드는 주님의 생명의 기운으로, 속 사람 안에 저장된 리메인스들을 깨우기 위한 준비이며, 곧 이어지는 빛의 창조(둘째 절)에 앞서 주님의 ‘선재적 역사(prevenient mercy)가 작용하는 순간입니다. 따라서 이 글 AC.7이 말하는 첫째 상태는 절망적 공허가 아니라, 주님의 빛이 비춰 들어올 수 있도록 인간의 내적 기반을 정리해 가는 창조적 혼돈의 단계이며, 인간이 비로소 거듭남의 길에 들어서기 위해 반드시 거치는 필수적 영적 출발점입니다.

 

 

 

AC.8, 창1, '두 번째 상태' (AC.6-15)

AC.8 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 사이에 구별이 일어나는 상태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 불리는데, 여기서 리메인스란 특히 유

bygrace.kr

 

AC.6, 창1, '본문, 개요' (AC.6-15)

창1 개요 AC.6 6일이라는 기간은,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 가운데 연이어 일어나는 수많은 상태를 말하는데, 보통은 다음과 같습니다. The six days, or periods, which are so many successive states of the regeneration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아래 설명은 ‘스베덴보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 즉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한, 그의 대표 저작인 ‘Arcana Coelestia’(약어 AC)에 대한 소개입니다.

 

참고로,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은 전부 약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AC는 ‘천계비의(天界秘義, Arcana Coelestia, 1749-1756, 라틴)의 약어이고, HH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CL은 ‘결혼애(結婚愛, Conjugial Love, 1768)의 약어입니다.

 

Arcana Coelestia’라는 책은 어떤 책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내적, 영적 의미를, 천국 관점에서 풀어낸 거대한 영적 주석서’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성경 주석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간 영혼의 구조’, ‘주님과 인간의 관계’, ‘거듭남의 과정’, ‘천국과 지옥의 실상’, ‘삶과 사후의 법칙’ 등을 다루는, 기독교 전통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저작입니다.

 

왜 이런 책을 썼는가?

 

스베덴보리는 ‘성경에는 외적 의미, 곧 겉 글자의 뜻, 겉뜻만이 아니라, 그 안에 영적 의미, 곧 속뜻(arcana)이 계시되어 있다. 사람이 육과 영으로 되어있듯 말씀도 겉뜻과 속뜻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자기는 주님의 허락으로 오랜 세월 영계를 보고 듣고 경험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자기로 하여금 이러한 성경의 속뜻, 곧 arcana를 설명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고 기록합니다. Arcana Coelestia는 단순한 신학책이 아니라, ‘천사들은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영계에서 성경의 단어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의 내면은 어떻게 되어있는가?’, ‘영적 성장, 곧 거듭남은 실제로 어떤 단계를 거치는가?’ 등, 이런 질문들에 대한 ‘체계적인 해설서’입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 다섯 가지

 

첫째, 성경의 영적 의미를 체계적으로 해설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모든 낱말, 사건, 인물들을 ‘상응(correspondence) 개념으로 풀어 설명합니다. 예를 들면, ‘아담’은 태고교회, ‘가인’은 신앙과 사랑의 분리, ‘홍수’는 인간 내부의 영적 붕괴, 그리고 ‘출애굽’은 거듭남의 전체 여정이라는 의미와 각각 상응한다는 것이지요.

 

둘째, 주님을 중심으로 성경 전체를 통합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결국 ‘주님의 영광, 주님의 인성의 영화, 그리고 인간 구원의 내적 과정’을 다루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셋째, 인간 영혼의 작동 원리를 밝힘

 

거듭남은 감정이 아니라 ‘내적 질서의 회복’이며, 그 과정에서 신앙, 사랑, 양심, 자유의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매우 세밀하게 설명합니다.

 

넷째, 천국과 지옥을 실제 세계로 다룸

 

어디까지나 추측, 즉 ‘이럴 것이다’가 아니라, ‘보았다’, ‘들었다’, ‘그들과 대화했다’ 등의 형식으로 영계의 구조, 영혼의 상태, 사후의 삶을 설명합니다.

 

다섯째, 신앙생활과 일상에 직결되는 원리를 제시

 

Arcana Coelestia는 단순 주석이 아니라 ‘삶의 법칙’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선과 진리가 어떻게 하나가 되는가?’, ‘자아(ego)의 본질은 무엇인가?’, ‘선을 행하는 자유란 무엇인가?’, ‘악과 거짓의 구조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주님은 어떻게 사람을 인도하시는가?’ 등, 이 책을 읽으면 신앙적인 질문뿐 아니라 ‘인생 전체에 대한 관점’이 달라집니다.

 

누가 읽으면 좋은가?

 

기독교인 가운데 성경의 깊은 면을 알고 싶은 사람이라든지, 비기독교인 중에서는 철학이나 영성, 인간 의식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든지, 혹은 학자나 사상가 중에서는 신학, 심리학, 영성학의 교차점에 관심 있는 사람 등, 그러니까 사람의 내면 변화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좋습니다.

 

이 책, ‘Arcana Coelestia’는 특정 종파의 권유, 호교론이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근본 원리를 다루는 보편적 영성서’입니다.

 

요약

 

Arcana Coelestia는 성경의 영적 의미를 체계적으로 해설하며, 인간 영혼의 구조와 천국과 지옥, 주님의 인도하심, 그리고 거듭남의 실제 과정을 설명하는 기독교 영성의 대작이다.

 

비유하자면

 

성경이 ‘겉으로 보이는 이야기’라면, Arcana Coelestia는 그 뒤에 있는 ‘설계도와 작동 원리’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마치 건물의 외관만 보고 살던 사람이 처음으로 그 건물의 내부 구조와 전기, 배관, 철골 설계를 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에서 더 나아가, ‘왜 그렇게 말하는가?’, ‘그게 인간 안에서 실제로 어떤 영적 과정으로 일어나는가?’를 알려 주는 책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

1 개요

 

AC.6

 

6일이라는 기간은,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 가운데 연이어 일어나는 수많은 상태를 말하는데, 보통은 다음과 같습니다. The six days, or periods, which are so many successiv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are in general as follows.

 

 

해설

 

창세기 1장을 여섯 날의 창조로 기록한 말씀은 문자적 차원에서는 시간적 순서의 우주 창조를 서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Arcana Coelestia AC.6에서 이 여섯 날을 “사람의 거듭남의 여섯 연속적 상태들”이라고 밝힘으로써 말씀의 속뜻을 향한 문을 열어 줍니다. 이 구절은 창세기 1장 전체를 해석하는 ‘열쇠 문장’으로서, 영적 의미에서 말씀의 ‘(day)은 언제나 ‘상태(state)를 뜻하며, 거듭남은 한순간에 이뤄지는 단일 사건이 아니라 주님이 사람 안에서 순서와 질서에 따라 전개하시는 여섯 단계의 내적 과정임을 선언합니다. 첫째 날은 주님의 자비가 깊은 무지와 혼돈 속에 있는 인간에게 비추는 첫 빛으로서, 선과 진리를 분별하는 최초의 의식이 생겨나는 상태입니다. 둘째 날은 내적 진리와 외적 진리가 분리, 정돈되는 과정이며,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구별되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셋째 날은 속 사람에 심겨 두신 ‘리메인스(remains)가 작동하여 선의 첫 싹이 돋아나는 단계, 곧 선행의 초기 형태가 삶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넷째 날은 사랑과 신앙이 속 사람 안에서 광명체(해와 달)처럼 밝아지는 단계로, 진리와 선이 질서 있게 배열되며 영적 조명이 시작됩니다. 다섯째 날은 이제 신앙으로 말하고 ‘체어리티(charity)로 행하는 능력이 활발해져 지식적 진리(물고기)와 사유의 진리(새)가 생기 있게 움직이는 단계입니다. 여섯째 날은 신앙과 사랑이 결합하여 살아 있는 선과 진리를 낳고, 사람의 애정들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생명을 갖는 상태로, 이때 사람은 주님의 ‘형상(image)인 영적 인간으로 서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이 글 AC.6은 여섯 날이 단순한 창조의 나열이 아니라 주님이 인간 영혼을 새롭게 형성하시는 점진적 과정, 즉 거듭남의 질서요 구조임을 밝히며, 말씀의 창조 기록 전체를 인간 내부의 재창조, 즉 거듭남으로 읽도록 안내하는 기초 원리가 됩니다.

 

 

 

AC.7, 창1, '첫 번째 상태' (AC.6-15)

AC.7 첫 번째 상태는, 거듭남에 앞서 존재하는 상태인데, 여기에는 어린 시절(유아기) 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직전에 있는 바로 그 상태가 모두 포함됩니다. 이 상태는 ‘혼돈’, ‘공허’, 그리고

bygrace.kr

 

AC.5, 서문, '주님의 허락으로 사후 세계에서 경험한 모든 것' (AC.1-5)

AC.5 이 모든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미리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임없이, 그리고 중단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5

 

이 모든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미리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임없이, 그리고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지내게 되어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또 제가 그들에게 말을 할 수 있는, 그런 은혜를 입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하여 저는, 지금까지 어떤 인간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고, 그의 관념 속에조차 들어온 적이 없는, 다른 삶, 곧 사후세계의 놀라운 것들을 듣고 보게 된 것입니다. 저는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죽음 이후 영혼의 상태에 관하여, 지옥 곧 불신앙 가운데 있는 자들의 비참한 상태에 관하여, 천국 곧 신앙 안에 있는 자들의 복된 상태에 관하여, 그리고 특히 온 하늘에서 인정되고 있는 신앙의 교리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주제들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더 말할 것입니다. That this is really the case no one can possibly know except from the Lord. It may therefore be stated in advance that of the Lord’s Divine mercy it has been granted me now for some years to be constantly and uninterruptedly in company with spirits and angels, hearing them speak and in turn speaking with them. In this way it has been given me to hear and see wonderful things in the other life which have never before come to the knowledge of any man, nor into his idea. I have been instructed in regard to the different kinds of spirits; the state of souls after death; hell, or the lamentable state of the unfaithful; heaven, or the blessed state of the faithful; and especially in regard to the doctrine of faith which is acknowledged in the universal heaven; on which subjects, of the Lord’s Divine mercy, more will be said in the following pages.

 

 

해설

 

스베덴보리는 이 글에서 Arcana Coelestia 전체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핵심 전제를 밝히는데, 그것은 말씀의 내적 의미와 영계의 실제는 인간 스스로 탐구하거나 추론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만’ 배울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인식 위에서 그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자신에게 주어진 독특한 소명을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진술합니다. 즉, 수년 동안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의 말을 듣고 또한 그들에게 말을 건넬 수 있는 특별한 상태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일시적 환상이나 신비적 황홀경이 아니라, 그가 깨어 있는 동안 지속적이고 실제적인 의식의 개방—영계와 자연계를 동시에 지각하는 이중 의식(dual consciousness)—을 의미하며, 스베덴보리 저술 전체가 이러한 체험적 기반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는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이 죽은 뒤 맞이하는 실재적 삶을 보고 들었으며, 지금까지 인류의 사상 속에조차 들어온 적 없는 영계의 질서, 천사들의 삶, 지옥의 비참한 상태, 천국의 복된 질서, 다양한 영들의 종류와 속성, 그리고 무엇보다 ‘온 하늘이 공통으로 인정하는 참된 신앙의 교리’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 ‘하늘의 보편 교리’는 스베덴보리 신학의 중심축을 이루며, Arcana Coelestia를 포함한 모든 저작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영적 원리의 근거가 됩니다. 그는 이어서 이러한 주제들에 대해 주님의 자비로 앞으로 더 자세히 말할 것이라고 예고하며, 이를 통해 자신이 밝히려는 모든 교리가 인간의 사유나 철학적 체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이 여신 영계에서 직접 듣고 배운 것임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 글은 스베덴보리 신학의 ‘계시적 성격’을 선언하는 자리로서, 내적 의미가 단순한 상징 해석이나 영적 묵상이 아니라 ‘영계의 실제와 주님의 직접적인 빛’에서 비롯된 것임을 분명히 하고, 그의 주석 전체를 신적 기원 위에 세우는 역할을 합니다. 목회자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스베덴보리가 성경의 내적 의미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영계의 실상을 체험하며 그 구조를 실제로 본 증인으로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며, Arcana Coelestia의 모든 해석이 단순한 학문적 견해가 아니라 “하늘에서 들려온 것”이라는 본래적 자리를 명확히 드러내는 부분입니다.

 

 

 

AC.6, 창1, '본문, 개요' (AC.6-15)

창1 개요 AC.6 6일이라는 기간은,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 가운데 연이어 일어나는 수많은 상태를 말하는데, 보통은 다음과 같습니다. The six days, or periods, which are so many successive states of the regeneration

bygrace.kr

 

AC.4, 서문, '말씀 안에 들어있는 아르카나(arcana)' (AC.1-5)

AC.4마음이 문자적 의미에만 붙어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 어떤 사람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발견할 수 있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4

 

마음이 문자적 의미에만 붙어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 어떤 사람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세상의 창조, 낙원이라고 하는 에덴동산, 그리고 처음 창조된 사람이라는 아담에 관한 이야기뿐입니다. 누가 그 이상의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뒤따르는 페이지들에서 충분히 입증될 텐데요, 곧, 이 내용들 안에는 지금까지 결코 드러난 적이 없는 비밀들(arcana)이 들어 있으며, 실상 창세기 1장은 그 속뜻으로는 일반적으로 사람의 새로운 창조, 즉 그의 거듭남에 관한 것을, 구체적으로는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에 관한 것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방식은, 그 장의 가장 작은 표현 하나까지도 이런 내용들을 표상하고 의미하며, 그 속에 품고 있을 정도라는 사실입니다. While the mind cleaves to the literal sense alone, no one can possibly see that such things are contained within it. Thus in these first chapters of Genesis, nothing is discoverable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other than that the creation of the world is treated of, and the garden of Eden which is called paradise, and Adam as the first created man. Who supposes anything else? But it will be sufficiently established in the following pages that these matters contain arcana which have never yet been revealed; and in fact that the first chapter of Genesis in the internal sense treats in general of the new creation of man, or of his regeneration, and specifically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is in such a manner that there is not the least expression which does not represent, signify, and enfold within it these things.

 

 

해설

 

스베덴보리는 이 글에서 말씀을 문자 그대로만 붙들고 있을 때 인간이 빠지는 결정적인 한계를 지적합니다. 마음이 문자적 의미에만 머물러 있으면, 그 속에 무엇이 내포되어 있는지—곧 영적, 천적 의미가 어떻게 포개어져 있는지—결코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첫 장들을 보더라도, 문자적으로는 단지 천지 창조, 에덴동산(낙원), 그리고 최초의 인간 아담이라는 서술만 보일 뿐이며, 대부분의 사람은 그 이상의 무언가를 떠올리지 못합니다. 실제로 기독교 세계에서도 창세기 1장을 우주의 기원에 관한 ‘역사적 보고’로만 이해하는 경우가 많으며, 에덴 이야기도 고대 근동의 신화적 표현으로 치부되기 일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이해가 말씀을 외피 수준에서만 읽는 시각이며, 문자 안에 담긴 진짜 의미는 전혀 인식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 내용들이 사실은 지금까지 한 번도 드러난 적 없는 비밀(arcana)을 담고 있음을 이어지는 주석 전체를 통해 충분히 입증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창세기 1장의 내적 의미, 곧 속뜻은 우주의 물리적 창조가 아니라, 사람의 새로운 창조—즉 영혼의 거듭남(regeneration)—을 다루고 있으며, 더 구체적으로는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의 형성과 그 영적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고 밝힙니다. 창세기의 6일 창조는 인간이 영적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혼란에서 질서로, 분리에서 결합으로 나아가는 여섯 단계의 내적 과정을 상징하며, 안식일은 주님과의 결합이라는 최종 상태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의 모든 표현—빛, 궁창, 물과 땅의 분리, 해와 달, 생물의 등장 등—하나하나가 이 영적 과정을 표상하고 의미하며 그 비밀을 내포한다고 말합니다. 즉, 성경의 문자적 이야기 뒤에는 ‘영혼의 창조기’가 숨어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말씀의 진정한 목적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말씀의 외적 이야기(창조, 동산, 아담)는 내적 의미를 담는 그릇일 뿐이며, 내적 의미가 열릴 때에만 말씀은 살아 있는 신적 계시로 빛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단락은 Arcana Coelestia 전체 연구의 출발점이 되는 핵심 주장으로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모든 표현이 주님의 구원 질서—태고교회의 형성, 인간의 거듭남, 주님과의 결합—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앞으로의 전편에서 하나씩 해명하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AC.5, 서문, '주님의 허락으로 사후 세계에서 경험한 모든 것' (AC.1-5)

AC.5 이 모든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미리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임없이, 그리고 중단

bygrace.kr

 

AC.3, 서문, '말씀의 겉과 속, 사람의 육체와 영' (AC.1-5)

본문AC.3이러한 생명이 없으면, 말씀은 글자(letter)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이 점에서 말씀의 상태는 사람의 경우와 동일합니다. 기독교 세계에서도 알고 있듯이, 사람은 내적 사람, 곧 속 사람(in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

 

이러한 생명이 없으면, 말씀은 글자(letter)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이 점에서 말씀의 상태는 사람의 경우와 동일합니다. 기독교 세계에서도 알고 있듯이, 사람은 내적 사람, 곧 속 사람(internal man)과 외적 사람, 곧 겉 사람(external man), 이렇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속 사람과 분리된 겉 사람은 단지 몸, 그러니까 육체일 뿐이며, 그러므로 죽은 상태입니다. 분리되었다 했으니까요. 겉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은 속 사람 때문인데, 이 속 사람이 곧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글자만을 놓고 보면, 영혼 없는 몸과 같은 것입니다. Without such a life, the Word as to the letter is dead. The case in this respect is the same as it is with man, who—as is known in the Christian world—is both internal and external. When separated from the internal man, the external man is the body, and is therefore dead; for it is the internal man that is alive and that causes the external man to be so, the internal man being the soul. So is it with the Word, which, in respect to the letter alone, is like the body without the soul.

 

 

해설

 

스베덴보리는 이 글에서 말씀의 문자, 곧 겉뜻과 내적 의미, 곧 속뜻의 관계를 인간의 몸과 영혼의 관계에 비유하며, 말씀의 본질적 구조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그는 “이러한 생명”—즉 말씀 안에 있는 속뜻, 곧 주님을 향한 영적, 천적 내용—이 없으면, “말씀은 글자 그대로는 죽은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이는 문자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문자만으로는 말씀의 생명에 닿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기독교 세계 누구나 아는 인간의 이중 구조를 예로 듭니다. 인간은 내적 사람, 곧 속 사람과 외적 사람, 곧 겉 사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겉 사람만 따로 떼어놓으면 단지 육체일 뿐이고 살아 있지 않으며, 오히려 죽음을 의미합니다. 겉 사람이 움직이며 말하고 행동하는 이유는 속 사람이—즉 영혼이—그에게 생명을 주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영혼이 떠난 몸은 그 형체만 남아 있을 뿐 더 이상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도 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말씀의 문자적 의미인 겉뜻은 겉 사람, 즉 몸에 해당하고, 내적 의미인 속뜻은 영혼에 해당합니다. 겉뜻이 아무리 아름답고 감동적이라 해도, 그 안에 영혼(주님을 향한 속뜻, 아르카나)이 없다면 말씀은 실제로는 생명이 없는 외형적 글자에 불과합니다. 이는 문자적 해석(Literalism)이나 단순한 윤리, 역사적 해석에 머물러 있는 신앙이 왜 사람의 영적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는지, 왜 구약의 많은 부분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해되지 않고 먼 책’처럼 느껴지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문자만을 읽는 것은 죽은 몸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여, 그 속에 담긴 진짜 생명—하늘의 질서, 영혼의 거듭남 과정, 주님의 신성—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살아있는 말씀으로 읽으려면 속뜻 안으로 들어가야 하고, 이것이 곧 주님을 보는 영적 시야가 열리는 과정입니다. 결국 이 글은 말씀의 본질이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영혼을 가진 생명체”이며, 그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고 내적 의미, 곧 속뜻 안에 놓여 있다는 스베덴보리 신학의 핵심을 인간의 구조를 통해 쉽게, 그러나 매우 강하게 설명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AC.4, 서문, '말씀 안에 들어있는 아르카나(arcana)' (AC.1-5)

AC.4마음이 문자적 의미에만 붙어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 어떤 사람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발견할 수 있

bygrace.kr

 

AC.2, 서문, '말씀은 그 안에 영적, 천적인 것들이 들어 있다' (AC.1-5)

본문AC.2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의 모든 것, 곧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요소들, 그러니까 가장 미세한 이오타(iota) , 즉 일점일획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2

 

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의 모든 것, 곧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요소들, 그러니까 가장 미세한 이오타(iota) , 즉 일점일획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며, 그 안에 그런 것들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은 거의 돌보아지지 않는 상황이지요. 그러나 말씀의 성격이 본래 이러하다는 사실은 단 한 가지 사실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일인 것이, 곧, 말씀이 주님의 것이며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그 안에는 천국과 교회, 그리고 신앙에 속한 것들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주님의 말씀이라 불릴 수 없고,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도 말할 수 없지요. 말씀의 생명은 오직 생명에 속한 것들에서만 옵니다. 즉, 그 안의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생명이신 주님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내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은 살아 있지 않습니다. 실제로 말씀 중 어떤 표현이든 그 안에 주님을 품고 있지 않은 것, 곧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그분을 가리키지 않는 것은 ‘신성하다’(Divine) 할 수 없습니다. The Christian world, however, is as yet profoundly unaware of the fact that all things in the Word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nay, the very smallest particulars down to the most minute iota, signify and enfold within them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 and therefore the Old Testament is but little cared for. Yet that the Word is really of this character might be known from the single consideration that being the Lord’s and from the Lord it must of necessity contain within it such things as belong to heaven, to the church, and to religious belief, and that unless it did so it could not be called the Lord’s Word, nor could it be said to have any life in it. For whence comes its life except from those things that belong to life, that is to say, except from the fact that everything in it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bears reference to 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so that anything which does not inwardly regard him is not alive; and it may be truly said that any expression in the Word that does not enfold him within it, that is, which does not in its own way bear reference to him, is not Divine.  

 

 

해설

 

스베덴보리는 이 단락에서 기독교 세계가 아직도 거의 알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지적하는데, 그것은 말씀의 모든 요소—큰 구조에서 작은 세부, 심지어 가장 미세한 철자 하나(iota)에 이르기까지—모두가 영적·천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 안에 그것들을 내포한다는 진리입니다. 문자만 보면 구약은 고대 유대교의 율례와 역사로 보이기에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을 경시하거나 덜 중요한 책으로 취급하지만,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관점이 말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오해라고 말합니다. 말씀은 주님의 것이며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므로, 그 안에는 필연적으로 하늘과 교회, 그리고 신앙에 속한 것—즉 영원한 생명과 직결되는 실체들—이 담겨 있어야 하고, 만일 그것이 없다면 더 이상 “주님의 말씀”이라 부를 수도,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생명은 어디서 오는가?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나오므로, 말씀 안의 모든 것이 내적으로 주님을 바라볼 때만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각 구절, 단어, 표현 하나라도 주님을 향한 내적 의미를 담지 않으면 신적이라고 할 수 없고,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는 죽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이는 스베덴보리가 앞선 글에서 말한 “문자주의의 한계”를 더욱 분명히 하면서, 왜 말씀의 내적 의미가 절대적으로 필요한지를 신학적 논리로 정초(定礎)하는 설명입니다. 곧, 말씀은 본질적으로 ‘주님을 담은 책’이며, 주님과의 연결이 끊어진 부분은 더 이상 영적 효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을 덜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문자적 이해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면, 스베덴보리는 그 시각을 뒤집어 “바로 그 문자 너머에 천국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구약은 더없이 중요하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 생명은 신학적 사유나 학문적 연구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적 시야가 열리고 주님을 바라보는 상태에서 비로소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Arcana Coelestia 전체가 이 감추어진 생명—말씀 속에 감추어진 주님—을 밝히 드러내기 위한 작업임을 이 단락을 통해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AC.3, 서문, '말씀의 겉과 속, 사람의 육체와 영' (AC.1-5)

본문AC.3이러한 생명이 없으면, 말씀은 글자(letter)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이 점에서 말씀의 상태는 사람의 경우와 동일합니다. 기독교 세계에서도 알고 있듯이, 사람은 내적 사람, 곧 속 사람(in

bygrace.kr

 

AC.1, 서문, '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을 시작하며' (AC.1-5)

본문AC.1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는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

 

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는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그리고 그와 연결된 모든 걸 가리킨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 곧 겉 글자만으로는, 그러니까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저 유대교회의 외적 의식들과 규례들만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인데요, 그러나 실상은 그 말씀 전체 곳곳에는 외적인 것들, 곧 그런 겉 글자 상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 어떤 내적인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다만 극히 일부만이 주님에 의해 사도들에게 드러나고 설명되었을 뿐인데요, 예를 들면, 희생 제사들은 주님을 상징하며, 가나안 땅과 예루살렘은 천국을 상징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천국의 가나안’, ‘하늘의 예루살렘이라 부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낙원도 그렇고요. From the mere letter of the Word of the Old Testament no one would ever discern the fact that this part of the Word contains deep secrets of heaven, and that everything within it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bears reference to the Lord, to his heaven, to the church, to religious belief, and to all things connected therewith; for from the letter or sense of the letter all that anyone can see is that—to speak generally—everything therein has reference merely to the external rites and ordinances of the Jewish church. Yet the truth is that everywhere in that Word there are internal things which never appear at all in the external things except a very few which the Lord revealed and explained to the apostles; such as that the sacrifices signify the Lord; that the land of Canaan and Jerusalem signify heaven—on which account they are called the heavenly Canaan and Jerusalem—and that paradise has a similar signification.

 

 

해설

 

구약의 글자적 의미만으로는 그 안에 하늘의 비밀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볼 수 없다는 스베덴보리의 진술은, 말씀의 두 층위—겉의 문자와 속의 내적 의미—사이의 극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선언입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구약은 유대 교회의 의식, 규례, 제사, 절기 등 외적 종교 형식에 관한 책으로만 보입니다. 독자는 그 안에서 주님에 관한 것, 천국의 질서, 교회의 본질, 신앙의 실제, 영적 삶의 내면 구조를 발견할 단서를 거의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런 점이 말씀의 신적 성격을 증명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인간의 문헌이 아니라, 신성한 생명을 품은 계시이므로, 그 속에는 반드시 천국의 것들—주님, 그의 왕국, 교회, 신앙, 영적 삶—이 담겨 있어야 하며, 그것이 없다면 그것은 주님의 말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내적 의미가 ‘글자’라는 외적 옷 안에 완전히 감추어져 있어서, 주님이 직접 일부를 드러내신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제사가 주님을 의미한다”, “가나안 땅과 예루살렘이 천국을 의미한다”, “낙원이 천적 상태를 의미한다”라고 밝히신 것은 내적 의미의 ‘조각들’에 해당하지만, 전체 구조는 여전히 은폐된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주장하는 핵심은, ‘말씀은 본래부터 이중 구조를 가진 신적 책이며, 문자만 보면 인간, 역사, 의식 규례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하늘의 실체—주님과 인간 거듭남의 모든 질서—가 완전한 체계를 이루며 침잠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내적 의미가 직접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인간이 영적 상태가 되지 않으면 그것을 지각할 수 없기 때문이며, 따라서 말씀을 참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자에서 내적으로, 역사에서 영적으로, 사건에서 주님을 향한 내적 질서로 들어가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결국 이 글은, “말씀 전체가 천국을 품고 있다”는 스베덴보리 신학의 핵심 명제를 압축적으로 제시하며, Arcana Coelestia 전권이 왜 ‘하늘의 비밀(arcana)을 풀어내는 작업인지 설명하는 서문적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2, 서문, '말씀은 그 안에 영적, 천적인 것들이 들어 있다' (AC.1-5)

본문AC.2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의 모든 것, 곧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요소들, 그러니까 가장 미세한 이오타(iota) , 즉 일점일획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