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01.심화

 

4. ‘태고교회 후손들

 

태고교회 후손들은 비록 타락은 했어도 종교적이었나 봅니다. 타락 후 바로 profanation 문제가 대두되는 걸 보면 말입니다.

 

 

네, 바로 그 점을 보신 것이 맞습니다. 태고교회 후손들은 타락했다고 해서 곧바로 무신론자나 비종교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여전히 태고교회로부터 전해 내려온 거룩한 지식과 천국에 관한 인식, 주님에 관한 가르침, 선과 진리의 내적 의미를 어느 정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런 거룩한 것들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자기애와 감각적 욕망 아래로 끌어내려 섞기 시작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태고교회는 본래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해 선과 진리를 직접 지각하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후손들은 단순히 교리 몇 가지를 머리로 배운 정도가 아니라, 천국과 영적 생명에 관한 매우 깊은 인식의 유산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비록 세대가 지나면서 퍼셉션 자체는 점차 사라졌어도, 그 퍼셉션에서 비롯된 지식과 표상, 예배 형태와 거룩한 전승은 상당 기간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들의 타락은 단순한 무지나 야만화가 아니라, 이미 알고 있던 거룩한 것들을 자기중심적 추론과 욕망에 종속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3에서 뱀이 여자에게 말을 걸고, 여자가 나무의 열매에 관하여 대답하며, 마침내 사람이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과정도 이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거룩한 것에 관하여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명령도 알고 있었고, 생명나무가 뜻하는 천적 생명의 질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지각하는 대신 감각과 memory-knowledge를 출발점으로 삼아 거룩한 것들을 판단하려 했습니다. 타락은 종교 자체를 버리는 것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종교적이고 거룩한 것을 proprium의 지배 아래 놓는 것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 직후 profanation의 위험이 곧바로 대두됩니다. 그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면 profanation의 위험도 그만큼 크지 않았을 것입니다. profanation은 거룩한 것을 알고 인정한 사람이 그것을 악과 결합할 때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생명나무의 길이 막힌 것은 이미 충분히 거룩한 것을 알고 있던 상태에서 더 깊은 천적 아르카나까지 접하게 될 경우, 그것마저 자기애와 거짓에 섞어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를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은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종교의 상실과는 다릅니다. 그들은 종교를 버렸다기보다 종교를 변질시켰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대신 자신을 높이기 위해 거룩한 것을 사용했고, 천국의 질서를 따르는 대신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데 영적 지식을 동원했습니다. 외형상으로는 여전히 예배와 거룩한 말, 그리고 종교적 표상을 간직했을 수 있지만, 그 안의 중심은 주님 사랑에서 자기 사랑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창3:22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라는 말씀은 단순히 사람이 지식을 많이 얻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지각하던 사람이 이제 그것들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판단하고 결정하려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거룩한 영역을 떠난 것이 아니라 거룩한 영역 안에서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세우려 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profanation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가장 위험한 문턱이었습니다.

 

따라서 말씀하신 대로, 태고교회 후손들은 타락한 뒤에도 매우 종교적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그 종교성은 점차 주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종교성으로 변해 갔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것을 부정해서만 타락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붙들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proprium과 결합했기 때문에 더욱 위험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은 단순히 죄인을 낙원 밖에 가두는 형벌이 아니라, 거룩한 것의 마지막 깊이까지 profanation하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였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01, 심화 5, ‘가룟 유다’

AC.301.심화 5. ‘가룟 유다’ 가룟 유다의 죄는 profanation으로 보아야 하나요? 스베덴보리의 profanation 개념에 비추어 보면, 가룟 유다의 죄는 단순한 배신을 넘어 profanation의 성격을 매우 강하게 지

bygrace.kr

 

AC.301, 심화 3, ‘세속적 배신, 이중 첩자’

AC.301.심화 3. ‘세속적 배신, 이중 첩자’ profanation은 꼭 종교적,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하고만 관련되어야 성립하나요? 세상, 세속 진리, 그러니까 이중 첩자라든지, 이런저런 배신자들의 경우는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01.심화

 

3. ‘세속적 배신, 이중 첩자

 

profanation은 꼭 종교적,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하고만 관련되어야 성립하나요? 세상, 세속 진리, 그러니까 이중 첩자라든지, 이런저런 배신자들의 경우는 설령 그 행태가 유사, 비슷할지라도 그냥 세상 죄일 뿐, profanation은 아닌 건가요?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의 정의에 따르면 ‘profanation’은 본질적으로 ‘거룩한 것’과 관련된 개념입니다. 따라서 세속적 배신이나 이중 첩자 행위 자체는 아무리 악해도, 그것만으로는 ‘profanation’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profanation’이라는 말 자체가 ‘거룩한 것(sacred things)을 속된 것(profane things)과 결합시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AC.301에서도 계속 ‘holy’와 ‘profane’의 결합을 말하지, ‘’과 ‘’ 일반의 결합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국가 기밀을 적국에 넘긴 이중 첩자는 매우 큰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는 충성심을 배반했고, 많은 사람을 위험에 빠뜨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위가 하나님의 말씀이나 신앙의 거룩한 것과 직접 관련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악한 죄이고 배신이지만, 스베덴보리의 의미에서 ‘profanation’은 아닙니다.

 

사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생 함께 일한 동업자를 속여 회사를 빼앗거나, 친구를 배신하여 큰 이익을 얻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 심각한 악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세속적 탐욕과 배신의 문제라면, 아직 AC.301이 말하는 ‘profanation’은 아닙니다.

 

그러나 같은 배신이라도 양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목회자가 성경 말씀을 이용하여 신자들의 신뢰를 얻고, 그 신뢰를 발판으로 거액의 헌금을 가로채거나 자신의 권력을 세우는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때 그는 단순히 돈을 훔친 것이 아니라, 거룩한 말씀과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탐욕을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배신’이면서 동시에 ‘profanation’이 될 가능성이 생깁니다.

 

또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거짓 예언을 하여 사람들을 조종한다면, 그것 역시 단순한 거짓말을 넘어 거룩한 것을 악의 도구로 사용하는 일이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두려워한 경우입니다.

 

그래서 저는 ‘profanation’을 이렇게 이해하면 가장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profanation’은 죄이지만, 모든 죄가 ‘profanation’은 아닙니다.

 

모든 ‘profanation’은 악이지만, 모든 악이 ‘profanation’은 아닙니다.

 

profanation’은 ‘거룩한 것을 알고, 어느 정도 인정한 뒤, 그것을 의도적으로 악과 결합시키는 특수한 죄’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개념은 매우 좁고도 엄격합니다. 그는 사람을 쉽게 ‘profanation’의 상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AC.301에서 강조하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들이 그런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때로는 더 깊은 진리를 아직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profanation’은 일반적인 죄보다 더 깊고 특별한 영적 상태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특별한 섭리로 그것을 막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창3:22-24는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생명나무의 길을 막으신 것은 단순히 죄인을 막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거룩한 것’을 ‘’과 영구히 결합시키는 ‘profanation’에 빠지는 것을 막으신 주님의 자비로운 보호였다는 것이 AC.301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01, 심화 4, ‘태고교회 후손들’

AC.301.심화 4. ‘태고교회 후손들’ 태고교회 후손들은 비록 타락은 했어도 종교적이었나 봅니다. 타락 후 바로 profanation 문제가 대두되는 걸 보면 말입니다. 네, 바로 그 점을 보신 것이 맞습니다

bygrace.kr

 

AC.301, 심화 2, ‘중세 교회와 오늘날’

AC.301.심화 2. ‘중세 교회와 오늘날’ 중세 교황들 및 그 계급 구조 아래서 겉과 속이 다르게 산 많은 성직자들, 그리고 오늘날 뉴스에 나오는 많은 목회자들도 어쩌면 저런 경우일 수 있겠네요..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01.심화

 

2. ‘중세 교회와 오늘날

 

중세 교황들 및 그 계급 구조 아래서 겉과 속이 다르게 산 많은 성직자들, 그리고 오늘날 뉴스에 나오는 많은 목회자들도 어쩌면 저런 경우일 수 있겠네요...

 

 

네, 충분히 그런 가능성은 있습니다. 다만 AC.301의 기준에 따르면, 특정 집단 전체를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기준은 직분이나 교단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내적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일부 교황들과 고위 성직자들 가운데는 말씀과 교회의 거룩한 것들을 충분히 알면서도 그것을 권력과 재물, 정치적 지배를 위해 이용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진리를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그것을 자기애와 세속적 야망의 도구로 사용하였다면, 그것은 AC.301이 말하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결합시키는 상태’에 가까운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아래에 있던 수많은 사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모두 같은 상태로 볼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는 단지 잘못된 교리 속에서 태어나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으며 살았을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도 여러 곳에서, 잘못된 교리 안에 있어도 선한 삶을 산 사람들은 사후에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인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직분만으로 AC.301의 대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뉴스에 등장하는 일부 목회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그들이 말씀을 깊이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그것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속이고, 자신의 권력과 명예와 재산을 위해 복음을 수단으로 삼는다면, AC.301의 설명과 상당히 가까운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거룩한 말씀을 이용하여 악을 정당화하거나, 자신의 탐욕을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포장하는 일은 스베덴보리가 가장 심각하게 본 ‘profanation’의 방향과 일치합니다.

 

반대로 뉴스에 이름이 오르내린다고 해서 모두 AC.301의 상태라고 판단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내면과 그가 알고 있는 진리의 정도, 그리고 얼마나 의식적으로 행했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최종적인 영적 상태에 대한 판단은 언제나 주님께 속한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AC.301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남을 판단하는 기준이라기보다 자신을 살피는 기준입니다. ‘나는 말씀을 배우는 만큼 그것에 따라 살려고 하는가?’, ‘혹시 내가 아는 진리를 내 자존심이나 명예, 유익을 위해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가?’를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사실 스베덴보리 자신도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무지보다도 ‘알면서 거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창3:22-24를 설명하면서,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더 깊은 진리를 아직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조차 심판이 아니라 자비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안다는 것은 그만큼 더 큰 책임도 함께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목회자, 신학자, 성직자뿐 아니라 스베덴보리를 연구하는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경고라고 볼 수 있습니다.

 

 

 

AC.301, 심화 3, ‘세속적 배신, 이중 첩자’

AC.301.심화 3. ‘세속적 배신, 이중 첩자’ profanation은 꼭 종교적,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하고만 관련되어야 성립하나요? 세상, 세속 진리, 그러니까 이중 첩자라든지, 이런저런 배신자들의 경우는

bygrace.kr

 

AC.301, 심화 1, ‘profanation’

AC.301.심화 1. ‘profanation’ 마침내는 거룩한 것들과 속된 것들을 서로 뒤섞는 일조차 거리낌없이 행하게 됩니다. 사람이 이러한 상태에 이르면, 다른 삶에서는 더 이상 구원의 희망이 남지 않을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01.심화

 

1. ‘profanation

 

마침내는 거룩한 것들과 속된 것들을 서로 뒤섞는 일조차 거리낌없이 행하게 됩니다. 사람이 이러한 상태에 이르면, 다른 삶에서는 더 이상 구원의 희망이 남지 않을 정도로 정죄됩니다. 이는 profanation으로 인해 한 번 뒤섞인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계속 뒤섞인 채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것에 대한 어떤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것과 결합된 속된 것에 대한 생각도 동시에 떠오르게 됩니다. 그 결과 그는 정죄 받은 자들의 사회 외에는 어느 사회에도 있을 수 없게 됩니다. (AC.301)

 

 AC.301에 나오는 내용이 좀 알쏭달쏭합니다. 그러니까 지상 생활 중 어떤 상황, 어떤 경우가 이런 케이스가 될까요?

 

 

AC.301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fanation’은 단순히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교회를 떠나는 것도 아닙니다. ‘거룩한 것을 충분히 알고, 어느 정도 인정하고 경험한 뒤, 그것을 의도적으로 악과 결합시키는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 일상에서 어떤 경우를 염두에 둔 것인지 이해하면 AC.301이 훨씬 선명해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말씀을 배우고, 그것이 참이라는 것도 마음으로 인정하며, 주님의 임재까지 깊이 경험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자기 욕망을 버리지 못해 ‘말씀은 참이지만, 나는 내 욕심대로 살겠다’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말씀을 이용, 자신의 탐욕과 명예욕을 정당화하기 시작합니다. 이 경우에는 거룩한 진리를 단순히 버린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악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fanation’은 바로 이런 상태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목회자가 말씀을 깊이 알고 설교도 합니다. 그는 사랑과 겸손을 설교하지만, 실제로는 교회를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그는 말씀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그것을 자신의 야망을 위해 사용합니다. 그러면 그의 마음속에서는 거룩한 말씀과 자기애가 서로 결합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AC.301이 말하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뒤섞이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는 늘 ‘용서하라’, ‘사랑하라’ 가르치면서, 정작 자신은 미움과 복수를 즐기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면, 아이들에게 가르친 거룩한 진리와 자신의 악한 삶이 한 사람 안에서 함께 존재하게 됩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곧바로 AC.301이 말하는 ‘profanation’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 사람이 진리를 충분히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계속 그렇게 살아간다면, 점점 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설명입니다.

 

반대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낙심하여 한동안 교회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사람, 또는 진리를 잘 이해하지 못해 의심하는 사람은 AC.301의 대상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이런 사람들에게는 회개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봅니다. 그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진리를 분명히 알면서도 그것을 악을 위해 이용하는 상태’입니다.

 

본문에서 특히 어려운 표현은 ‘거룩한 것을 생각할 때마다 속된 것도 함께 떠오른다’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이런 뜻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말씀을 이용하여 평생 남을 속이고 권력을 얻었다면, 사후에는 ‘말씀’이라는 생각 자체가 곧 자신의 탐욕과 연결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거룩한 진리만 따로 받아들이고 기뻐하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거룩한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그것과 결합된 악도 동시에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분리될 수 없다’ 말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창3:22에서 주님께서 사람이 생명나무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신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심판이 아니라 보호로 이해합니다. 이미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이 더 깊은 신앙의 신비까지 알게 되면, 그것마저 자신의 악과 결합시켜 훨씬 더 심한 ‘profanation’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더 깊은 진리를 아직 허락하지 않으심으로써, 오히려 그들을 더 큰 영적 파멸에서 보호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AC.301의 핵심은 ‘죄를 많이 지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거룩한 진리를 충분히 알고도 그것을 자기 악과 의도적으로 결합시키는 것이 가장 위험한 영적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섭리는 사람의 상태에 맞추어 진리를 허락하시며, 때로는 더 깊은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하게 하시는 것조차 자비의 한 형태라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이는 창3:24에서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이유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AC.301, 심화 2, ‘중세 교회와 오늘날’

AC.301.심화 2. ‘중세 교회와 오늘날’ 중세 교황들 및 그 계급 구조 아래서 겉과 속이 다르게 산 많은 성직자들, 그리고 오늘날 뉴스에 나오는 많은 목회자들도 어쩌면 저런 경우일 수 있겠네요..

bygrace.kr

 

AC.301, 창3:22, 두 번째 아르카나,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1 또 하나의 아르카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3:22)

 

AC.301

 

또 하나의 아르카나는, 만일 그들이 신앙의 신비들을 배웠더라면 영원히 멸망하였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하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 사정은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삶의 질서를 거꾸로 뒤집어, 자기 자신과 자기 proprium으로부터가 아니면 살려고도 하지 않고, 지혜로워지려고도 하지 않는 상태가 되면, 그들은 신앙에 관한 모든 것을 들을 때마다 그것이 과연 사실인지 아닌지를 자기 스스로 따져 보려 합니다. 그런데 그 판단을 자기 자신과 자기의 감각 및 기억 지식으로부터 내리기 때문에, 결국은 반드시 부인하기(denial)에 이르게 되고, 이어서 blasphemyprofanation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마침내는 거룩한 것들과 속된 것들을 서로 뒤섞는 일조차 거리낌없이 행하게 됩니다. 사람이 이러한 상태에 이르면, 다른 삶에서는 더 이상 구원의 희망이 남지 않을 정도로 정죄됩니다. 이는 profanation으로 인해 한 번 뒤섞인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계속 뒤섞인 채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것에 대한 어떤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것과 결합된 속된 것에 대한 생각도 동시에 떠오르게 됩니다. 그 결과 그는 정죄 받은 자들의 사회 외에는 어느 사회에도 있을 수 없게 됩니다. 이처럼 결합되어 있는 생각은 다른 생명에서 매우 예민하게 지각됩니다. 중간 영계의 영들조차 그것을 아주 분명히 알아차리며, 천사적 영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들은 한 사람의 단 하나의 생각만으로도 그 사람의 성품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한 번 결합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다시 분리하는 것은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만일 사람이 그 고통이 어떠한지를 안다면, 그는 지옥 자체를 피하려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profanation을 피하려 할 것입니다. The other arcanum is that had they been instructed in the mysteries of faith they would have perished eternally, which is signified by the words, “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The case is this: When men have become inverted orders of life, and are unwilling to live, or to become wise, except from themselves and from their own, they reason about everything they hear respecting faith, as to whether it is so, or not; and as they do this from themselves and from their own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it must needs lead to denial, and consequently to blasphemy and profanation, so that at length they do not scruple to mix up profane things with holy. When a man becomes like this, he is so condemned in the other life that there remains for him no hope of salvation. For things mixed up by profanation remain so mixed up, so that whenever any idea of something holy presents itself, an idea of something profane that is conjoined with it is also there, the consequence of which is that the person cannot be in any society except one of the damned. Whatever is present in any idea of thought in consequence of being conjoined with it, is most exquisitely perceived in the other life, even by spirits in the world of spirits, and much more so by angelic spirits, so exquisitely indeed that from a single idea they know a person’s character. The separation of profane and holy ideas when thus conjoined cannot be effected except by means of such infernal torment that if a man were aware of it he would as carefully avoid profanation as he would avoid hell itself.

 

 

해설

 

AC.301에서 스베덴보리는 본 절인 창3:22의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는 말씀의 참뜻을 설명합니다. 겉으로만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이 영생 얻는 것을 막으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심판이 아니라 자비로운 보호를 의미한다 설명합니다.

 

본문의 첫 번째 핵심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신앙의 가장 깊은 신비를 알려 주지 않는 것이 오히려 주님의 자비라는 점입니다. 이미 삶의 질서가 뒤집혀 자기 자신과 자기 proprium만을 신뢰하는 사람은,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이더라도 그것을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감각과 memory-knowledge로 판단하려 합니다. 따라서 더 많은 진리를 알게 될수록 더 깊은 부인과 반대에 빠질 위험이 커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사람이 결국 ‘부인’, ‘blasphemy’, 그리고 ‘profanation’으로 나아간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논리의 흐름은 매우 분명합니다. 자기 지성만을 절대 기준으로 삼으면, 먼저 진리를 의심하게 되고, 계속해서 거절하게 되며, 마침내는 거룩한 것마저 속된 것과 뒤섞어 버리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왜 profanation이 다른 죄보다 특별히 심각한지를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거룩한 것과 악한 것이 한 사람 안에서 동시에 결합되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거룩한 것을 생각할 때마다 그것과 결합된 속된 것도 함께 떠오르므로, 두 가지를 다시 분리하기가 극히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창3:24에서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것도, 사람이 이런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한 주님의 보호로 연결됩니다.

 

본문의 마지막 부분은 사후 세계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는 사람의 생각 하나에도 그 사람의 전체 상태가 담겨 있으며, 영들은 물론 천사들까지도 그 생각 하나만으로 사람의 성품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설명을 덧붙이는 이유는, profanation이 단순히 외적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 상태를 영원히 뒤섞어 버리는 일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AC.301의 중심 메시지는, 주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신앙의 깊은 신비를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은 그들을 버리시기 때문이 아니라, 더 큰 영적 파멸인 profanation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한 자비로운 섭리라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창3:22의 말씀은 영생을 막으시는 선언이 아니라, 사람이 영원한 멸망에 빠지지 않도록 생명나무의 길을 잠시 막아 두시는 주님의 사랑과 보호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심화

 

1. ‘profanation

 

 

AC.301, 심화 1, ‘profanation’

AC.301.심화 1. ‘profanation’ 마침내는 거룩한 것들과 속된 것들을 서로 뒤섞는 일조차 거리낌없이 행하게 됩니다. 사람이 이러한 상태에 이르면, 다른 삶에서는 더 이상 구원의 희망이 남지 않을

bygrace.kr

 

2. ‘중세 교회와 오늘날

 

 

AC.301, 심화 2, ‘중세 교회와 오늘날’

AC.301.심화 2. ‘중세 교회와 오늘날’ 중세 교황들 및 그 계급 구조 아래서 겉과 속이 다르게 산 많은 성직자들, 그리고 오늘날 뉴스에 나오는 많은 목회자들도 어쩌면 저런 경우일 수 있겠네요..

bygrace.kr

 

3. ‘세속적 배신, 이중 첩자

 

 

AC.301, 심화 3, ‘세속적 배신, 이중 첩자’

AC.301.심화 3. ‘세속적 배신, 이중 첩자’ profanation은 꼭 종교적,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하고만 관련되어야 성립하나요? 세상, 세속 진리, 그러니까 이중 첩자라든지, 이런저런 배신자들의 경우는

bygrace.kr

 

4. ‘태고교회 후손들

 

 

AC.301, 심화 4, ‘태고교회 후손들’

AC.301.심화 4. ‘태고교회 후손들’ 태고교회 후손들은 비록 타락은 했어도 종교적이었나 봅니다. 타락 후 바로 profanation 문제가 대두되는 걸 보면 말입니다. 네, 바로 그 점을 보신 것이 맞습니다

bygrace.kr

 

5. ‘가룟 유다

 

 

AC.301, 심화 5, ‘가룟 유다’

AC.301.심화 5. ‘가룟 유다’ 가룟 유다의 죄는 profanation으로 보아야 하나요? 스베덴보리의 profanation 개념에 비추어 보면, 가룟 유다의 죄는 단순한 배신을 넘어 profanation의 성격을 매우 강하게 지

bygrace.kr

 

6. ‘자살

 

 

AC.301, 심화 6, ‘자살’

AC.301.심화 6. ‘자살’ ‘자살’의 경우, 사후 ‘이 사람은 참 괜찮은 삶을 살았는데 순간 판단 실수로 자살했으니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 하여 구원받는 경우가 있나요? 네, 있습니다. 그리

bygrace.kr

 

7. ‘결혼애에 나오는 자살자들

 

 

AC.301, 심화 7, ‘결혼애’에 나오는 자살자들

AC.301.심화 7. ‘결혼애’에 나오는 자살자들 위 ‘자살’에 대한 답변과 달리 스베덴보리의 ‘결혼애’에서는 자살을 매우 어둡게 기술하고 있는 걸로 읽었던 것 같아요... 좋은 질문입니다. 사

bygrace.kr

 

8. ‘blasphemyprofanation

 

 

AC.301, 심화 8, ‘blasphemy와 profanation’

AC.301.심화 8. ‘blasphemy와 profanation’ 이 둘은 서로 관련은 있지만 같은 개념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는 둘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blasphemy’는 보통 ‘신성모

bygrace.kr

 

9. ‘성령 모독(12:31, 32)

 

 

AC.301, 심화 9, ‘성령 모독’(마12:31, 32)

AC.301.심화 9. ‘성령 모독’(마12:31, 32) 31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

bygrace.kr

 

10. ‘profanation 관련 대표 구절들

 

 

AC.301, 심화 10, ‘profanation 관련 대표 구절들’

AC.301.심화 10. ‘profanation 관련 대표 구절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하나의 일관된 신학 체계로 읽는 관점에서 보면, 성경에는 profanation을 직접 또는 표상적으로 다루는 본문들이 생각보다

bygrace.kr

 

 

 

AC.302, 창3:22, ‘AC.301 계속’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2 이것이 바로 신앙

bygrace.kr

 

AC.300, 창3:22, 첫 번째 아르카나, ‘여호와 하나님’(Jehovah God)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0 첫 번째 아르카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00.심화

 

11. ‘Jehovih

 

AC.300에서 Jehovih’는 단순한 언어학적 호기심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말씀에서 하나님의 여러 호칭이 사용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중요한 호칭입니다.

 

Jehovih’는 히브리어 성경에 자주 나오지는 않지만, ‘Jehovah’(여호와)와는 구별되어 사용되는 하나님의 호칭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차이를 매우 중요하게 보았으며, 단순히 다른 이름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의미와 연결하여 이해합니다.

 

AC를 비롯한 스베덴보리의 여러 저작을 종합하면,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Jehovah’는 주님의 존재 자체, 곧 신적 사랑과 신적 존재(Divine Esse)를 강조하는 호칭입니다.

 

God 또는 Elohim’은 신적 진리, 신적 능력, 신적 역사(Divine Truth, Divine Power)를 강조하는 호칭입니다.

 

Jehovih’는 이 둘 사이의 연결점에서 사용되는 호칭으로, 특히 주님께서 말씀하시거나 계시하시며 신적 진리를 나타내시는 측면을 강조할 때 사용됩니다. 다시 말해, 신적 존재이신 여호와께서 신적 진리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시는 경우에 나타나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예언서에서 자주 나오는 Lord Jehovih’를 특별히 주목합니다. 이 표현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신적 존재이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고 심판하시며 구원하시는 신적 역사를 나타내기 때문에 사용된다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에스겔과 이사야에서는 Lord Jehovih’가 매우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예언자들에게 주님의 말씀이 전달되고, 교회를 가르치며, 심판과 회복을 선포하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Jehovih’는 계시와 말씀, 곧 신적 진리의 전달이라는 성격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AC.300의 흐름에서 Jehovih’가 언급되는 이유도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Jehovah’, ‘God’, ‘Jehovih 등 서로 다른 호칭들이 여러 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한 분 주님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나타내는 호칭임을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Jehovah’는 신적 존재와 사랑을, ‘God’은 신적 진리와 능력을, 그리고 Jehovih’는 신적 존재이신 주님께서 신적 진리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시고 역사하시는 측면을 강조하는 호칭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모두 창1:26 우리’가 여러 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의 다양한 신적 작용을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AC.300의 논증과 연결됩니다.

 

 

 

AC.300, 창3:22, 첫 번째 아르카나, ‘여호와 하나님’(Jehovah God)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0 첫 번째 아르카나,

bygrace.kr

 

AC.300, 심화 10, ‘출7:1’

AC.300.심화 10. ‘출7: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출7:1) AC.300에서 스베덴보리가 출7:1을 인용한 이유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00.심화

 

10. ‘7: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7:1)

 

 

AC.300에서 스베덴보리가 출7:1을 인용한 이유는, 사람을 가리켜서도 말씀에서 ‘god’(신)이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를 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에서는 천사들이 ‘gods’라고 불리는 여러 구절을 인용하였다면, 여기서는 모세라는 한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다’는 말씀을 통해 같은 원리를 확인합니다.

 

7:1에서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모세가 실제로 신이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여전히 사람이며 피조물입니다. 다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권위를 받아 바로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대표하는 위치에 세워졌기 때문에 ‘’이라 불린 것입니다.

 

이 점은 이어지는 말씀에서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라는 말씀은 모세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씀을 전하는 대표자이며, 아론은 모세의 말을 대신 전하는 대언자임을 보여줍니다. 즉, 모세가 ‘’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의 본질이 신적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권위를 맡아 전달하는 대표적 역할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AC.300의 중심 논지를 그대로 뒷받침합니다. 말씀에서 천사나 사람을 ‘god’ 또는 ‘gods’라 할 수 있는 것은 그들 자신에게 신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와 권위를 받아 그분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명칭은 그들에게 적용되지만, 그 명칭의 근거는 언제나 주님께 있습니다.

 

또한 이 구절은 앞서 인용한 요10:34-35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이라 말씀하셨는데, 모세는 바로 그 원리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바로에게 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신 같이’ 되었다 불렸습니다.

 

AC.300에서 출7:1을 인용한 핵심 이유는, 말씀에서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과 권위를 받아 대표하는 위치에 있을 때, ‘’으로 불릴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통해 스베덴보리는 ‘god’ 또는 ‘gods’라는 명칭은 본질적인 신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와 권위를 받아 그분을 대표하는 직분과 역할을 의미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증명하며, 창1:26의 ‘우리’가 여러 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성을 받아 섬기는 천사들을 가리킨다는 자신의 해석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AC.300, 심화 11, ‘Jehovih’

AC.300.심화 11. ‘Jehovih’ AC.300에서 ‘Jehovih’는 단순한 언어학적 호기심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말씀에서 하나님의 여러 호칭이 사용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중요한 호칭입니

bygrace.kr

 

AC.300, 심화 9, ‘요10:34-35’

AC.300.심화 9. ‘요10:34-35’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00.심화

 

9. ‘10:34-35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10:34-35)

 

 

AC.300에서 스베덴보리가 요10:34-35를 인용한 이유는, 앞서 시82:6을 인용하며 제시한 해석이 주님 자신의 말씀에 의해 직접 확인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시82:6에서는 ‘너희는 신들이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요10:34-35에서 주님께서는 바로 그 구절을 직접 인용하시며 그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따라서 AC.300에서 이 구절은 앞선 시편의 해석을 확증하는 가장 중요한 신약의 증거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신 뒤, 곧이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설명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여기서 사람들을 ‘신들’이라 하는 이유는 그들 자신의 본성이나 본질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신들’이라는 명칭은 그들 안에 있는 어떤 고유한 신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적 진리를 받아들이고 전달하는 역할과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점은 AC.300의 핵심 논지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천사들이나 말씀을 맡은 사람들을 ‘gods’라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신이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와 능력이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명칭은 그들에게 적용되지만, 그 명칭의 근거는 언제나 주님에게 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라 말씀하시며, 시82:6의 표현이 정당한 성경 표현임을 친히 인정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통해 ‘신들’이라는 호칭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곧 ‘신들’은 여러 신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를 받아 대표하는 자들에게 붙는 말씀의 표현입니다.

 

AC.300에서 요10:34-35를 인용한 핵심 이유는, 주님께서 친히 시82:6을 해석하시면서 ‘신들’이라는 호칭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에게 적용된다고 밝히셨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통해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천사들이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gods’라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신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으로부터 받은 신적 진리와 능력에 근거한 것임을 확증하며, 창1:26의 ‘우리’가 여러 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성을 받아 섬기는 천사들을 가리킨다는 자신의 해석을 더욱 굳게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AC.300, 심화 10, ‘출7:1’

AC.300.심화 10. ‘출7: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출7:1) AC.300에서 스베덴보리가 출7:1을 인용한 이유

bygrace.kr

 

AC.300, 심화 8, ‘시82:6’

AC.300.심화 8. ‘시82:6’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시82:6) AC.300에서 스베덴보리가 시82:6을 인용한 이유는 앞서 인용한 시82:1, 시89:6, 시136:2-3의 논지를 직

bygrace.kr

 

'즐겨찾기 > AC 창3' 카테고리의 다른 글

AC.300, 심화 11, ‘Jehovih’  (0) 2026.07.22
AC.300, 심화 10, ‘출7:1’  (0) 2026.07.22
AC.300, 심화 8, ‘시82:6’  (0) 2026.07.22
AC.300, 심화 7, ‘시136:2-3’  (0) 2026.07.22
AC.300, 심화 6, ‘시89:6’  (0) 2026.07.22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00.심화

 

8. ‘82:6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82:6)

 

 

AC.300에서 스베덴보리가 시82:6을 인용한 이유는 앞서 인용한 시82:1, 시89:6, 시136:2-3의 논지를 직접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절은 말씀에서 천사들, 또는 주님의 신적 진리를 받아 대표하는 자들을 실제로 ‘신들(gods)이라 한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증거입니다.

 

82:6에서 주님은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여러 참된 신이 존재한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구절은 주님께 속한 자들이, 주님의 신적 진리와 능력을 받아 그분을 대표하기 때문에, 그들을 가리켜 ‘신들’이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특히 이 구절은 ‘신들’과 ‘지존자의 아들들’이라는 두 표현을 나란히 사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통해 ‘신들’이라는 명칭은 독립된 신성을 가진 존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지존자’이신 주님께 속한 존재를 가리키는 명칭임을 보여 준다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모든 존귀함과 권위는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지존자이신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구절은 AC.300의 논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앞에서 인용한 시82:1, 시89:6, 시136:2-3은 ‘gods’라는 명칭이 말씀에 실제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면, 시82:6은 주님께서 친히 어떤 존재들을 향해 ‘너희는 신들이다’ 말씀하셨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gods’라는 표현 자체가 성경적인 표현이며,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AC.300의 결론은 언제나 같습니다. 천사들이나 주님의 신적 진리를 받아 대표하는 자들이 ‘신들’로 불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전달하기 때문이지, 그들 자신이 신적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붙는 ‘신들’이라는 명칭은 어디까지나 주님한테서 유래한 것이며,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AC.300에서 시82:6을 인용한 핵심 이유는, 말씀에서 천사들이나 주님의 신적 진리를 받아 대표하는 자들을 실제로 ‘신들’이라 한다는 사실을 성경으로 증명하면서도, 그 명칭은 그들 자신의 신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지존자이신 주님으로부터 받은 신적 진리와 능력에 근거한 것임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창1:26의 ‘우리’가 여러 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성을 받아 섬기는 천사들을 가리킨다는 AC.300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AC.300, 심화 9, ‘요10:34-35’

AC.300.심화 9. ‘요10:34-35’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

bygrace.kr

 

AC.300, 심화 7, ‘시136:2-3’

AC.300.심화 7. ‘시136:2-3’ 2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3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136:2–3) Confess ye to the God of gods, co

bygrace.kr

 

'즐겨찾기 > AC 창3' 카테고리의 다른 글

AC.300, 심화 10, ‘출7:1’  (0) 2026.07.22
AC.300, 심화 9, ‘요10:34-35’  (0) 2026.07.22
AC.300, 심화 7, ‘시136:2-3’  (0) 2026.07.22
AC.300, 심화 6, ‘시89:6’  (0) 2026.07.22
AC.300, 심화 5, ‘시82:1’  (0) 2026.07.22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00.심화

 

7. ‘136:2-3

 

2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3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6:2–3) Confess ye to the God of gods, confess ye to the Lord of lords (Ps. 136:2–3).

 

 

AC.300에서 스베덴보리가 시136:2-3을 인용한 이유는 앞의 시82:1, 시89:6과 같은 주제를 더욱 분명하게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곧 말씀에서 천사들을 ‘gods’(신들) 또는 ‘lords’(주들)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결코 주님과 동등한 존재가 아니며, 오직 주님으로부터 받은 신적 진리와 능력 때문에 그러한 명칭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136:2-3은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에 이어 ‘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고 합니다. 겉으로만 보면 ‘신들’과 ‘주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를 여러 신이나 여러 주가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 ‘주들 중에 뛰어난 주’라는 표현 자체가 오직 한 분이신 주님께서 모든 ‘gods’와 ‘lords’의 근원이시며, 그들 위에 계심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점은 명칭의 관계입니다. 만일 천사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신성과 주권을 가진 존재라면, 주님을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 ‘주들 중에 뛰어난 주’라고 부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모든 ‘gods’와 ‘lords’가 오직 한 분 주님께 속해 있음을 선언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독립된 신적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신성과 권세를 받아 섬기는 존재들임을 보여줍니다.

 

이 구절은 AC.300의 중심 논지를 한층 확장합니다. 앞의 시82와 시89에서는 천사들이 ‘gods’라고 불리는 이유를 설명하였다면, 여기서는 그들이 ‘lords’라고도 불릴 수 있음을 함께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참된 하나님은 오직 ‘God of gods’이시며, 참된 주는 오직 ‘Lord of lords’이십니다. 천사들에게 붙는 명칭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며, 그들 자신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AC.300에서 시136:2-3을 인용한 핵심 이유는, 말씀에서 천사들이 ‘gods’나 ‘lords’라고 불릴 수는 있지만, 그 모든 명칭의 근원과 주체는 오직 한 분 주님이심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통해 스베덴보리는 창1:26의 ‘우리’가 여러 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와 능력을 받아 섬기는 천사들을 가리킨다는 자신의 해석을 다시 한번 성경으로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AC.300, 심화 8, ‘시82:6’

AC.300.심화 8. ‘시82:6’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시82:6) AC.300에서 스베덴보리가 시82:6을 인용한 이유는 앞서 인용한 시82:1, 시89:6, 시136:2-3의 논지를 직

bygrace.kr

 

AC.300, 심화 6, ‘시89:6’

AC.300.심화 6. ‘시89:6’ 무릇 구름 위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신들 중에서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 (시89:6) Who in the sky shall be compared unto Jehovah? Who among the sons of the gods shall be lik

bygrace.kr

 

'즐겨찾기 > AC 창3' 카테고리의 다른 글

AC.300, 심화 9, ‘요10:34-35’  (0) 2026.07.22
AC.300, 심화 8, ‘시82:6’  (0) 2026.07.22
AC.300, 심화 6, ‘시89:6’  (0) 2026.07.22
AC.300, 심화 5, ‘시82:1’  (0) 2026.07.22
AC.300, 심화 4, ‘시31:14’  (0) 2026.07.22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