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431

‘상처’(wound)와 ‘타박상’(bruise)이 더 이상 성한 곳이 없음을 뜻하고, ‘상처’(wound)는 신앙이 황폐해졌음을, ‘타박상’(bruise)은 체어리티가 황폐해졌음을 뜻한다는 사실은 ‘상처’가 ‘사람’(man)에 관해, ‘타박상’이 ‘어린아이’(little one)에 관해 쓰였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신앙의 황폐와 체어리티의 황폐는 이사야에서도 같은 표현들로 묘사됩니다. That by a “wound” and a “bruise” is signified that there was soundness no longer, by a “wound” that faith was desolated, and by a “bruise” that charity was devastated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wound” is predicated of a “man,” and “bruise” of a “little one.” The desolation of faith and the vastation of charity are described in the same terms in Isaiah: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사1:6) From the sole of the foot even unto the head there is no soundness in it; but wound and bruise and a fresh sore they have not been pressed out, neither bound up, neither mollified with oil. (Isa. 1:6)

 

이 말씀에서 ‘상처’(wound)는 황폐해진 신앙에 관해, ‘타박상’(bruise)은 황폐해진 체어리티에 관해, ‘종기’(sore)는 그 둘 모두에 관해 쓰였습니다. In this passage “wound” is predicated of faith desolated, “bruise” of charity devastated, and “sore” of both.

 

해설

AC.431은 라멕이 ‘내가 한 사람을 죽여 내게 상처를 입혔고, 어린아이를 죽여 내게 해를 입혔다’고 한 말의 마지막 부분을 설명합니다. 앞의 AC.429에서는 ‘사람’이 신앙을,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뜻한다는 근거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그 두 표현에 각각 연결된 ‘상처’와 ‘타박상’의 의미를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표현이 더 이상 성한 곳이 없는 상태를 나타내며,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어 하나만 떼어 놓고 의미를 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상처’가 ‘사람’에 관해 쓰였고, ‘타박상’이 ‘어린아이’에 관해 쓰였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앞에서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나타낸다고 밝혔으므로, 그들에게 연결된 상처와 타박상도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는 말씀의 속뜻을 이해할 때 개별 표현뿐 아니라 표현들 사이의 관계도 함께 살펴야 함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해석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1:6을 인용합니다. 이사야는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고 상처와 타박상과 새로 생긴 종기뿐인 모습을 묘사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온몸이 상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가 묘사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인용은 라멕의 말에 나오는 상처와 타박상이 단순한 육체적 부상을 넘어 영적 상태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근거가 됩니다.

 

여기서 세 표현은 서로 구별됩니다. ‘상처’는 황폐해진 신앙을, ‘타박상’은 황폐해진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종기’는 신앙과 체어리티 둘 모두에 관해 쓰입니다. 이처럼 스베덴보리는 비슷해 보이는 상처의 표현들을 하나의 뜻으로 뭉뚱그리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서로 다른 표현이 사용된 데에는 그에 상응하는 의미의 구별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세 상처가 실제로 어떤 순서로 발생하는지, 각각 어떤 구체적인 악이나 거짓에 대응하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는 이사야의 표현도 중요합니다. 이 말씀은 상처가 한 부분에만 있다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에 성한 곳이 없다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인용하면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라멕의 고백을 단순히 신앙의 일부가 손상되었거나 체어리티가 잠시 약해진 상태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앞의 AC.427에서도 그는 상처와 타박상이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음을 뜻한다고 밝혔습니다.

 

이사야의 말씀은 상처들을 ‘짜내지도, 싸매지도, 기름으로 부드럽게 하지도 않았다’고 이어집니다. 이러한 표현은 상처가 돌봄을 받지 못한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다만 AC.431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풀이하는 것은 상처와 타박상과 종기의 의미입니다. 짜내는 일이나 싸매는 일, 기름을 바르는 일의 개별 속뜻까지 이 번호에서 확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표현들을 곧바로 특정한 회복 과정에 일대일로 대응시키기보다, 우선 이사야가 묘사하는 상처의 심각성을 함께 읽는 것이 원문에 충실합니다.

 

이번 번호를 읽을 때 ‘황폐’와 일상적인 영적 연약함을 구별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누구나 자신의 신앙이 흔들리거나 이웃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431에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것은 라멕이 나타내는 황폐, 곧 신앙과 체어리티에 더 이상 성한 곳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 말씀을 자신의 모든 부족함에 즉시 적용하여 회복할 수 없는 상태라고 단정하는 것은 본문의 설명을 넘어섭니다. 특히 AC.431은 황폐의 의미를 밝히는 번호이지, 어떤 개인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정하는 번호가 아닙니다.

 

결국 AC.431은 라멕의 말에 등장하는 ‘상처’와 ‘타박상’이 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뜻하는지 설명합니다. 사람과 어린아이의 의미를 바탕으로 두 상처를 구별하고, 사1:6에서 같은 표현들이 사용된 사실을 통해 그 해석을 확인합니다. 이사야의 ‘성한 곳이 없다’는 말씀은 라멕이 나타내는 황폐의 심각성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신앙과 체어리티가 교회의 영적 온전함과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보게 됩니다. (AC.431 해설)

 

심화

1.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AC.431 심화 1,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AC.430 심화1.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사1:6은 읽는 사람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말씀입니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는 표현은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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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2, 창4:24, ‘라멕의 일흔일곱 배 보복은 무엇을 뜻하는가?’ (AC.432-433)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창4:24) AC.432 이 말씀은 그들이 ‘가인’(Cain)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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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0, 창4:23, ‘어린아이는 왜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의미하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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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0 심화

3. 주님은 왜 ‘아이’라고 불리시는가?

 

AC.430의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사9:6을 인용합니다. 이사야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다’고 말하며, 그분을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아이’라고 불리시는 이유를 주님이 순진무구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말씀은 앞에서 살펴본 어린아이의 의미를 주님 자신에게 연결합니다.

 

우리가 ‘아이’라는 말을 들을 때 흔히 떠올리는 것은 작고 연약하며 아직 자라는 중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아이로 불리시는 이유를 미숙함이나 부족함에서 찾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이 순진무구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주님을 ‘아이’라고 부르는 표현을 이해하려면, 어린아이의 외적인 모습뿐 아니라 그 표현이 나타내는 순진무구와 사랑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이 점은 같은 구절에 나오는 주님의 이름들을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아이로 불리시는 분이 동시에 기묘자와 모사, 하나님과 용사, 영존하시는 아버지와 평강의 왕이라고 불리십니다. 그러므로 ‘아이’라는 표현이 주님의 신적 능력이나 지혜를 낮추는 말일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주님께서 순진무구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시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참된 순진무구와 참된 체어리티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여러 말씀으로 확인했습니다. 마지막에 주님 자신을 ‘아이’라고 부르는 말씀을 인용한 것은 이러한 의미를 주님께 연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순진무구와 사랑을 설명하는 표현이 주님 자신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이 이번 번호의 마지막 논거가 됩니다.

 

이것은 눅18:15, 17을 읽을 때에도 도움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AC.430의 흐름에서 이 말씀을 읽으면,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를 단순히 나이가 어리거나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어린아이의 속뜻은 순진무구와 체어리티이며, 주님은 순진무구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며 주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저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그리워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번 번호가 밝히는 순진무구와 사랑의 의미를 주님 자신에게 연결하여 생각하는 일입니다. 다만 AC.430은 주님의 탄생과 신성에 관한 모든 교리를 설명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여기서는 주님이 ‘아이’라고 불리시는 이유를 순진무구 자체와 사랑 자체라는 두 표현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결국 AC.430의 마지막 인용은 어린아이의 속뜻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결론을 제시합니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나타내며, 주님께서는 순진무구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아이’라고 불리십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한 아기’에 관한 말씀은 어린아이의 속뜻이 단순한 연령이나 외적인 모습에 머물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AC.430 심화 3)

 

 

 

AC.430, 창4:23, ‘어린아이는 왜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의미하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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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0 심화 2, ‘젖먹이·유아·어린아이, 사랑의 세 단계는 무엇을 구별하는가?’

AC.430 심화2. ‘젖먹이·유아·어린아이, 사랑의 세 단계는 무엇을 구별하는가?’ AC.430에서 스베덴보리는 순진무구에 세 단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말씀에서는 그 단계들을 ‘젖먹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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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0 심화

2. ‘젖먹이·유아·어린아이, 사랑의 세 단계는 무엇을 구별하는가?’

 

AC.430에서 스베덴보리는 순진무구에 세 단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말씀에서는 그 단계들을 ‘젖먹이’, ‘유아’, ‘어린아이’라는 말로 구별한다고 설명합니다. 독자에게는 이 구별이 낯설 수 있습니다. 세 표현 모두 나이가 어린 존재를 가리키므로, 단순히 같은 뜻을 반복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들이 사랑의 서로 다른 모습을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먼저 젖먹이의 사랑은 어머니나 유모를 향한 부드러운 사랑에 비유됩니다. 젖먹이는 자신을 돌보는 이에게 의지하며 사랑을 받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관계를 통해 사랑의 한 단계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젖먹이가 어떤 교리를 알고 있거나 자신의 사랑을 말로 설명할 수 있느냐가 아닙니다. 어머니나 유모와 맺는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부드러운 사랑의 모습입니다.

 

유아의 사랑은 부모를 향한 사랑에 비유됩니다. 젖먹이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가까운 관계 안에서 나타나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를 별도의 단계로 구별합니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단계에서는 자신을 가르치는 사람을 향한 체어리티를 말합니다. 세 표현을 나란히 놓으면, 스베덴보리가 사랑을 추상적인 감정 하나로만 설명하지 않고 구체적인 관계를 통해 구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어린아이가 가르치는 사람을 향해 품는 체어리티’라는 표현을 단순히 선생님의 말을 무조건 따르는 태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430은 교사에 대한 복종을 체어리티의 정의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린아이와 자신을 가르치는 사람의 관계를 사랑의 한 단계를 설명하는 비유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관계를 통해 어린아이가 나타내는 체어리티의 의미를 생각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세 단계를 실제 나이에 따라 누구나 반드시 거쳐야 하는 영적 성장표로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AC.430의 직접적인 설명은 말씀에서 젖먹이와 유아와 어린아이가 순진무구와 사랑의 세 단계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성인의 영적 상태를 실제 나이와 일대일로 대응시키거나, 한 단계에 있는 사람이 다른 단계에 있는 사람보다 반드시 더 거룩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이번 번호의 설명을 넘어섭니다.

 

이 구별은 렘44:7을 이해할 때 도움이 됩니다. 그 말씀에서는 ‘남자와 여자’뿐 아니라 ‘유아와 젖먹이’까지 끊어 버려 남은 것이 없게 하려느냐고 묻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남자와 여자가 이해력과 의지, 곧 진리와 선을 나타내며, 유아와 젖먹이는 사랑의 첫 단계들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진리와 선에 관한 표현뿐 아니라 사랑의 첫 단계들에 관한 표현까지 함께 담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도 바로 그 구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젖먹이와 유아와 어린아이는 말씀에서 단순히 같은 연령대를 반복하여 가리키는 표현이 아닙니다. AC.430에서 이들은 순진무구와 사랑의 세 단계를 나타내며, 어린아이는 특별히 체어리티와 연결됩니다. 이러한 구별을 알면 말씀에 등장하는 작은 표현 하나에도 서로 다른 영적 의미가 담겨 있다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430 심화 2)

 

 

 

AC.430 심화 3, 주님은 왜 ‘아이’라고 불리시는가?

AC.430 심화3. 주님은 왜 ‘아이’라고 불리시는가? AC.430의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사9:6을 인용합니다. 이사야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다’고 말하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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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0 심화 1, ‘순진무구는 왜 체어리티 없이 존재할 수 없는가?’

AC.430 심화1. ‘순진무구는 왜 체어리티 없이 존재할 수 없는가?’ 우리는 ‘순진무구’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어린아이의 해맑은 표정이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AC.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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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0 심화

1. ‘순진무구는 왜 체어리티 없이 존재할 수 없는가?’

 

우리는 ‘순진무구’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어린아이의 해맑은 표정이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AC.430에서 스베덴보리는 순진무구를 단순히 나이가 어리거나 경험이 적은 상태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참된 순진무구는 체어리티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참된 체어리티도 순진무구 없이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독자가 이번 번호를 이해하려면 먼저 이 두 가지가 왜 함께 언급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 경험이 적고 남을 쉽게 믿는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그에게 참된 체어리티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을 돕는 행동을 많이 한다고 해서, 그 행동의 내면까지 저절로 순진무구하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도움을 주면서도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려 할 수 있고, 상대방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는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겉모습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생각하도록 돕습니다.

 

AC.430은 이 두 가지의 관계를 ‘참된’ 순진무구와 ‘참된’ 체어리티라는 표현으로 밝힙니다. 순진무구가 참된 사랑과 분리될 수 없고, 체어리티도 순진무구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순진무구를 단순한 무지나 무력함으로, 체어리티를 단순한 외적 선행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둘의 구체적인 내적 구조를 모두 설명하지는 않지만, 어느 한쪽만을 떼어 내어 참된 영적 상태라고 부를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 관계를 생각하면 주님께서 어린아이들을 가까이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더 깊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른이 어린아이처럼 지식과 판단력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어린아이를 통해 밝히는 것은 순진무구와 체어리티에 관한 영적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이해하면서도,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신의 마음이 사랑과 분리되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제 라멕의 고백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AC.429에서 라멕이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었습니다. AC.430은 그 어린아이가 순진무구도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그렇다면 라멕의 황폐를 이해할 때 체어리티의 소멸만 따로 떼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체어리티와 참된 순진무구는 서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라멕이 나타내는 상태가 왜 심각한지 이해하는 데 이번 번호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읽으며 자신에게 순진무구가 조금이라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순간, 곧바로 자신이 라멕처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고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30은 순진무구와 체어리티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으며, 앞의 번호들은 라멕이 나타내는 황폐의 상태를 다루고 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는 일과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된 상태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AC.430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참된 순진무구와 참된 체어리티가 서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린아이의 속뜻을 이해하려면 그저 순수하고 해맑은 모습을 떠올리는 데 머물지 않고, 사랑과 연결된 순진무구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관계를 이해할 때 라멕이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이 왜 체어리티의 소멸을 나타내는지도 더 분명해집니다. (AC.430 심화 1)

 

 

 

AC.430 심화 2, ‘젖먹이·유아·어린아이, 사랑의 세 단계는 무엇을 구별하는가?’

AC.430 심화2. ‘젖먹이·유아·어린아이, 사랑의 세 단계는 무엇을 구별하는가?’ AC.430에서 스베덴보리는 순진무구에 세 단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말씀에서는 그 단계들을 ‘젖먹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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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0, 창4:23, ‘어린아이는 왜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의미하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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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430

말씀에서 ‘어린 것’(a little one), 곧 ‘어린아이’(little child)는 순진무구를 뜻하며, 체어리티도 뜻합니다. 참된 순진무구는 체어리티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참된 체어리티도 순진무구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순진무구에는 세 단계가 있으며, 말씀에서는 이를 ‘젖먹이들’(sucklings), ‘유아들’(infants), ‘어린아이들’(little children)이라는 말로 구별합니다. 참된 사랑과 체어리티 없이는 참된 순진무구도 없으므로, ‘젖먹이들’(sucklings), ‘유아들’(infants), ‘어린아이들’(little children)은 사랑의 세 단계도 뜻합니다. 곧 젖먹이가 어머니나 유모를 향해 품는 사랑과 같은 부드러운 사랑, 유아가 부모를 향해 품는 사랑과 같은 사랑, 그리고 어린아이가 자신을 가르치는 사람을 향해 품는 사랑과 같은 체어리티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 “little one,” or “little child,” in the Word, signifies innocence, and also charity, for true innocence cannot exist without charity, nor true charity without innocence. There are three degrees of innocence, distinguished in the Word by the terms “sucklings,” “infants,” and “little children”; and as there is no true innocence without true love and charity, therefore also by “sucklings,” “infants,” and “little children” are signified the three degrees of love: namely, tender love, like that of a suckling toward its mother or nurse; love like that of an infant toward its parents; and charity, similar to that of a little child toward its instructor. Thus it is said in Isaiah: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사11:6) The wolf shall dwell with the lamb, and the leopard shall lie down with the kid; and the calf, and the young lion, and the fatling together, and a little child shall lead them. (Isa. 11:6)

 

여기서 ‘어린양’(lamb), ‘어린 염소’(kid), ‘송아지’(calf)는 순진무구와 사랑의 세 단계를 뜻하고, ‘이리’(wolf), ‘표범’(leopard), ‘어린 사자’(young lion)는 그 반대되는 것들을 뜻하며, ‘어린아이’(little child)는 체어리티를 뜻합니다. 예레미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Here a “lamb,” a “kid,” and a “calf” signify the three degrees of innocence and love; a “wolf,” a “leopard,” and a “young lion,” their opposites; and a “little child,” charity. In Jeremiah:

 

만군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가 어찌하여 큰 악을 행하여 자기 영혼을 해하며 유다 가운데에서 너희의 남자와 여자와 아이와 젖 먹는 자를 멸절하여 남은 자가 없게 하려느냐 (렘44:7) Ye commit this great evil against your souls, to cut off from you man and wife, infant and suckling, out of the midst of Judah, to leave you no remains. (Jer. 44:7)

 

‘남자와 여자’(man and wife)는 이해력과 의지에 속한 것들, 곧 진리와 선을 나타내며, ‘유아와 젖먹이’(infant and suckling)는 사랑의 첫 단계들을 나타냅니다. ‘유아’(infant)와 ‘어린아이’(little child)가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는 사실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에서도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Man and wife” denote things of the understanding and of the will, or of truth and of good; and “infant and suckling,” the first degrees of love. That an “infant” and a “little child” denote innocence and charity is very evident from the Lord’s words in Luke:

 

15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눅18:15, 17) They brought unto him little children that he should touch them. And Jesus said, Suffer little children to come unto me, and forbid them not, for of such is the kingdom of God. Verily I say unto you, Whosoever shall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 as a little child, shall in no wise enter therein. (Luke 18:15, 17)

 

주님 자신도 ‘어린 것’(little one), 곧 ‘아이’(child)라고 불리십니다(사9:6). 주님은 순진무구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같은 구절에서 주님은 ‘기묘자’(wonderful), ‘모사’(counselor), ‘하나님’(God), ‘용사’(hero), ‘영존하시는 아버지’(father of eternity), ‘평강의 왕’(prince of peace)이라고도 불리십니다. The Lord himself is called a “little one,” or “child” (Isa. 9:6), because he is innocence itself and love itself, and in the same passage he is spoken of as “wonderful, counselor, God, hero, father of eternity, prince of peace.”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9:6)

 

해설

AC.430은 라멕이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이 왜 체어리티의 소멸을 뜻하는지 설명합니다. 앞의 AC.429에서는 ‘사람’이 신앙을,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뿐 아니라 순진무구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참된 순진무구는 체어리티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참된 체어리티도 순진무구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말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중심은 어린 나이 자체가 아니라, 순진무구와 사랑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순진무구’는 단순히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잘못을 저지를 능력이 없는 상태와 구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순진무구의 완전한 정의를 제시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참된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어린아이의 모습이 순진무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모든 어린아이가 언제나 사랑과 체어리티를 완전하게 지니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서 어린아이는 우리가 살펴야 할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순진무구에 세 단계가 있다고 말하면서, 말씀의 ‘젖먹이’, ‘유아’, ‘어린아이’를 구별합니다. 젖먹이는 어머니나 유모를 향한 부드러운 사랑과 연결되고, 유아는 부모를 향한 사랑과 연결되며, 어린아이는 자신을 가르치는 사람을 향한 체어리티와 연결됩니다. 이 구별은 사랑이 단 하나의 모습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을 지닌다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모든 사람이 실제 나이에 따라 이 세 단계를 반드시 차례로 통과한다는 발달 이론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에서 사용된 세 표현의 영적 의미를 구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사11:6을 인용합니다. 이 구절에는 이리와 어린양, 표범과 어린 염소, 어린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등장하며, 마지막에는 어린아이가 그들을 인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린양과 어린 염소와 송아지가 순진무구와 사랑의 세 단계를, 이리와 표범과 어린 사자가 그 반대되는 것들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인도한다’는 말에서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뜻한다고 밝힙니다. 이 인용의 목적은 각 동물에 대해 별도의 상세한 상응표를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에서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렘44:7에서는 ‘남자와 여자’에 이어 ‘유아와 젖먹이’가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남자와 여자가 이해력과 의지에 속한 것들, 곧 진리와 선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유아와 젖먹이는 사랑의 첫 단계들을 나타냅니다. 이 구절의 문자적 문맥은 유다 백성의 악행과 그로 인한 멸절의 경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말씀 안에서 진리와 선뿐 아니라 사랑의 첫 단계들까지 언급되고 있음을 밝힙니다. 특히 원문 끝의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게 하려느냐’는 표현은 이러한 상실의 심각성을 드러냅니다. 다만 AC.430은 여기서 리메인스의 교리를 별도로 풀이하지 않으므로, 그 개념을 자세히 설명하려면 관련 번호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눅18:15, 17에서는 주님께서 어린아이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어린아이가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는 사실의 근거로 제시합니다. 여기서 독자가 주목할 부분은 주님께서 단지 어린아이를 가까이하셨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인다’는 표현을 통해 어린아이가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상태와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순진무구와 체어리티가 천국의 삶과 무관한 부수적 성품이 아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사9:6을 인용하여 주님 자신이 ‘아이’라고 불리신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순진무구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앞의 구절들에서는 어린양과 어린아이, 젖먹이와 유아를 통해 순진무구와 사랑의 여러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그 의미를 주님 자신에게 연결합니다. 여기서 주님을 ‘아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의 능력이나 지혜가 미숙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같은 말씀에서 그분은 기묘자, 모사, 하나님, 용사,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고도 불리십니다.

 

이렇게 보면 AC.430은 ‘어린아이’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순진무구와 체어리티의 관계를 차례로 밝혀 갑니다. 먼저 두 가지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하고, 젖먹이와 유아와 어린아이를 통해 사랑의 세 단계를 구별합니다. 이어 이사야와 예레미야, 누가복음의 말씀을 통해 그 의미를 확인한 다음, 주님께서 순진무구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시라는 사실로 마무리합니다. 따라서 라멕이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단순히 어떤 선한 행동이 줄어들었다는 뜻을 넘어, 교회 안에서 순진무구와 분리될 수 없는 체어리티가 소멸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AC.430 해설)

 

심화

1. ‘순진무구는 왜 체어리티 없이 존재할 수 없는가?’

 

AC.430 심화 1, ‘순진무구는 왜 체어리티 없이 존재할 수 없는가?’

AC.430 심화1. ‘순진무구는 왜 체어리티 없이 존재할 수 없는가?’ 우리는 ‘순진무구’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어린아이의 해맑은 표정이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AC.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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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젖먹이·유아·어린아이, 사랑의 세 단계는 무엇을 구별하는가?’

 

AC.430 심화 2, ‘젖먹이·유아·어린아이, 사랑의 세 단계는 무엇을 구별하는가?’

AC.430 심화2. ‘젖먹이·유아·어린아이, 사랑의 세 단계는 무엇을 구별하는가?’ AC.430에서 스베덴보리는 순진무구에 세 단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말씀에서는 그 단계들을 ‘젖먹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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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님은 왜 ‘아이’라고 불리시는가?

 

AC.430 심화 3, 주님은 왜 ‘아이’라고 불리시는가?

AC.430 심화3. 주님은 왜 ‘아이’라고 불리시는가? AC.430의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사9:6을 인용합니다. 이사야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다’고 말하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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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1, 창4:23, ‘상처와 타박상은 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뜻하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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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9, 창4:23, 왜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뜻하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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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9 심화

1, ‘신앙에서 체어리티가 태어난다는 말은 체어리티가 신앙보다 낮다는 뜻인가?’

 

AC.429에서 처음 읽는 독자가 특히 멈칫할 만한 표현은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입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문제를 강조했는데, 이번에는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태어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설명을 단순히 ‘어느 쪽이 먼저인가’라는 순서의 문제로만 읽으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려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우열이 아니라, 라멕이 소멸시킨 두 가지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이번 번호의 문맥을 살펴보겠습니다. 라멕은 ‘한 사람’과 ‘어린아이’를 죽였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신앙으로 풀이하고, ‘어린아이’를 체어리티로 풀이합니다. 이어 신앙을 부인하고 죽이는 사람은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도 함께 부인하고 죽인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태어난다’는 표현은 여기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서로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히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에도 서로 다른 상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의 내용을 알고 그것이 참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아직 그 진리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고 살아가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배운 진리가 삶 속에서 사랑과 선행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그 신앙이 삶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예는 AC.429의 문장을 이해하기 위한 설명이지,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신앙의 모든 단계를 상세히 구분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점에서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는 체어리티가 신앙에 비해 덜 중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과 체어리티를 떼어 놓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로 읽을 수 있습니다. 라멕의 고백에서 신앙을 죽이는 일은 체어리티를 죽이는 일과 함께 나타납니다. 신앙의 소멸을 말하면서 체어리티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설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 번호를 모든 사람의 거듭남에서 반드시 신앙이 시간적으로 먼저 생기고 체어리티가 나중에 생긴다는 공식으로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AC.429는 라멕의 말에 등장하는 ‘사람’과 ‘어린아이’의 의미를 설명하는 자리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 전체를 이해하려면 앞에서 다룬 가인과 아벨의 해설, 그리고 이어지는 번호들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한 문장의 표현을 떼어 내어 스베덴보리의 전체 설명을 대신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독자의 입장에서 이번 번호가 던지는 질문은 오히려 분명합니다. 내가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이 단지 알고 인정하는 데 머물러 있는지, 아니면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실제로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보게 하는 것입니다. 다만 자신의 연약함이나 일시적인 실패를 곧바로 라멕의 ‘소멸’과 동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설명하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된 황폐의 상태입니다.

 

결국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라는 표현은 체어리티의 가치를 낮추기 위한 말이 아닙니다. AC.429에서는 신앙을 부인하고 소멸시키는 일이 그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의 소멸과도 연결된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이 관계를 이해하면 라멕이 ‘사람’과 ‘어린아이’를 함께 죽였다고 한 말이 왜 교회의 황폐를 나타내는지 조금 더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AC.429 심화 1)

 

 

 

AC.429, 창4:23, 왜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뜻하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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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429

‘사람’(man [vir])이 신앙을 뜻한다는 사실은 이 장의 첫 절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와가 가인을 낳았을 때 ‘내가 한 사람을 얻었다, 여호와를’(I have gotten a man, Jehovah)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인은 신앙의 교리를 뜻했으며, 그 교리를 ‘한 사람, 여호와’(a man, Jehovah)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앞에서 사람 또는 남자가 이해력을 뜻한다고 밝힌 내용에서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이해력은 신앙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여기서 ‘어린 것’(a little one), 곧 ‘어린아이’(a little child)라고 부르는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다는 사실도 여기에서 따라 나옵니다. 신앙을 부인하고 죽이는 사람은 동시에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도 부인하고 죽이기 때문입니다. That by a “man” [vir] is signified faith is evident from the first verse of this chapter, in that Eve said, when she bare Cain, “I have gotten a man, Jehovah”; by whom was meant the doctrine of faith, called “a man, Jehovah.” It is evident also from what was shown above concerning a man or male, that he signifies understanding, which is of faith. That he had also extinguished charity, here called a “little one,” or a “little child,” follows, for he who denies and murders faith, at the same time also denies and murders the charity that is born from faith.

 

해설

AC.429는 앞의 AC.427에서 라멕의 말을 풀이하면서 제시한 두 가지 상응의 근거를 설명합니다. 라멕이 ‘한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을 소멸시켰다는 뜻이고,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것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먼저 왜 ‘사람’이 신앙을 나타내는지 밝힌 다음, 신앙의 소멸이 체어리티의 소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합니다.

 

‘사람’이 신앙을 뜻한다는 첫 번째 근거는 창4:1입니다. 하와는 가인을 낳고 ‘내가 한 사람을 얻었다, 여호와를’이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이 구절의 가인이 신앙의 교리를 뜻한다고 풀이했습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사람’은 단순히 남성이나 인간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가인에게 적용된 ‘사람’이라는 표현을 앞선 해설과 연결하여, 그것이 신앙을 나타낸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근거는 사람 또는 남자가 ‘이해력’을 나타낸다는 앞선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해력이 신앙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이해력을 통해 신앙에 관한 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과 ‘신앙’의 관계는 단순히 한 단어에 임의의 뜻을 붙인 결과가 아니라, 이해력과 신앙의 관계를 통해 설명됩니다. 다만 이해력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에게 살아 있는 신앙이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번호는 이해력이 신앙에 속한다는 관계를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그렇다면 왜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뜻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를 ‘신앙에서 태어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신앙을 부인하고 죽이는 사람은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도 동시에 부인하고 죽인다고 말합니다. 라멕이 ‘사람’과 ‘어린아이’를 함께 죽였다고 한 것은, 신앙의 소멸과 체어리티의 소멸이 서로 무관한 두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라는 표현은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여러 각도에서 설명하며, 특히 신앙을 체어리티와 분리하는 일을 경계합니다. 따라서 이 한 문장만으로 체어리티가 언제나 신앙보다 낮거나 부차적이라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AC.429의 직접적인 논지는 신앙을 소멸시키면 그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도 함께 소멸된다는 데 있습니다.

 

이 설명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창4장의 앞부분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되는 문제를 다루었고, 라멕의 말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된 상태가 나타납니다. AC.429는 그 가운데 ‘사람’과 ‘어린아이’라는 표현을 통해 두 소멸의 관계를 밝힙니다. 라멕의 고백을 단순히 두 사람을 죽였다는 문자적 진술로만 읽으면 놓치기 쉬운 부분입니다.

 

결국 AC.429는 라멕이 죽였다고 말한 ‘사람’이 왜 신앙을 뜻하는지 창4:1과 이해력에 관한 앞선 설명을 통해 밝힙니다. 또한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뜻하는 이유를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에서 설명합니다. 신앙을 부인하고 소멸시키는 일은 그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의 소멸과도 연결됩니다. 이처럼 라멕의 말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사라진 교회의 황폐를 드러냅니다. (AC.429 해설)

 

심화

1, ‘신앙에서 체어리티가 태어난다는 말은 체어리티가 신앙보다 낮다는 뜻인가?’

 

AC.429 심화 1, ‘신앙에서 체어리티가 태어난다는 말은 체어리티가 신앙보다 낮다는 뜻인가?’

AC.429 심화1, ‘신앙에서 체어리티가 태어난다는 말은 체어리티가 신앙보다 낮다는 뜻인가?’ AC.429에서 처음 읽는 독자가 특히 멈칫할 만한 표현은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입니다.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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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0, 창4:23, ‘어린아이는 왜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의미하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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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8, 창4:23, ‘라멕의 말은 왜 황폐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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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428

이 절과 다음 절의 내용에서 ‘라멕’(Lamech)이 황폐를 뜻한다는 사실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가 ‘한 사람을 죽였다’(slain a man)고 하고, ‘어린아이’(little child)를 죽였다고 하며, 가인은 일곱 배로 보복을 받겠지만 라멕은 ‘일흔일곱 배로’(seventy and sevenfold) 보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From the contents of this and the following verse, it is very evident that by “Lamech” is signified vastation; for he says that he had “slain a man,” and a “little child,” and that Cain should be avenged sevenfold, and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해설

AC.428은 앞의 AC.427에서 풀이한 라멕의 고백을 다음 절까지 연결하여, 라멕이 왜 ‘황폐’를 나타내는지 확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새로운 상응을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라멕이 직접 한 말들을 근거로, 그가 나타내는 상태가 황폐라는 사실이 매우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핵심은 창4:23의 ‘죽였다’는 표현과 창4:24의 ‘일흔일곱 배’라는 표현을 함께 읽는 데 있습니다.

 

앞의 AC.427에서 ‘한 사람을 죽였다’는 말은 신앙을 소멸시켰다는 뜻이었고,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번 번호는 이 두 표현을 다시 언급합니다. 라멕의 황폐는 단순히 신앙이 약해진 상태나 체어리티가 잠시 부족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앞 번호에서 설명했듯이,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와 관련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음 절의 ‘가인은 일곱 배, 라멕은 일흔일곱 배’라는 말까지 함께 제시합니다. 창4:24는 가인에게 적용된 ‘일곱 배’와 라멕에게 적용된 ‘일흔일곱 배’를 대비합니다. 이 대비가 라멕의 황폐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는 것이 이번 번호의 설명입니다. 다만 AC.428 자체는 일곱과 일흔일곱의 속뜻을 아직 풀이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일흔일곱 배를 황폐의 정도를 나타내는 단순한 수치로 계산하거나, 가인보다 라멕이 정확히 열한 배 더 악하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보복’이라는 표현을 곧바로 주님께서 분노하여 가인이나 라멕에게 복수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보복의 성격을 설명하기보다, 라멕의 말에 등장하는 두 죽음과 두 수치의 대비를 통해 황폐의 의미를 확인합니다. 보복과 숫자의 속뜻은 다음 절에 관한 설명을 살피면서 판단해야 합니다.

 

이처럼 AC.428은 짧지만 앞뒤 번호를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AC.427은 라멕이 죽였다고 말한 ‘사람’과 ‘어린아이’의 의미를 밝히고, AC.428은 그 말과 다음 절의 보복에 관한 선언을 함께 제시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는 라멕의 황폐에 관한 설명을 마무리하는 동시에, 창4:24의 ‘일곱 배’와 ‘일흔일곱 배’에 관한 해설로 독자를 이끕니다.

 

결국 라멕이 황폐를 나타낸다는 사실은 그가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고 고백하는 말에서 드러나며, 다음 절에서 가인과 라멕의 보복을 대비하는 표현을 통해 더욱 분명해집니다. AC.428은 이 두 절을 하나의 문맥으로 읽게 하면서, 라멕의 상태를 이해하려면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뿐 아니라 이어지는 ‘일흔일곱 배’의 의미도 살펴야 함을 보여 줍니다. (AC.428 해설)

 

 

 

AC.429, 창4:23, 왜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뜻하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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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7, 창4:23, ‘라멕은 왜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고 고백하는가?’ (AC.427-431)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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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창4:23)

 

AC.427

‘라멕’(Lamech)은 앞에서와 같이 황폐를 뜻합니다. 그가 ‘자기 아내들인 아다와 씰라에게 말하기를, 너희 귀로 내 말을 들으라’(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고 한 것은 고백을 뜻합니다. 이러한 고백은 교회가 있는 곳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데, 앞에서 말했듯이 그의 ‘아내들’(wives)은 교회를 나타냅니다. ‘내가 한 사람을 죽여 내게 상처를 입혔다’(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는 그가 신앙을 소멸시켰음을 뜻합니다. ‘사람’(man)은 신앙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를 죽여 내게 해를 입혔다’(a little one to my hurt)는 그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음을 뜻합니다. ‘상처’(wound)와 ‘타박상’(bruise)은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음을 뜻합니다. ‘상처’는 신앙이 황폐해졌음을, ‘해’(hurt)는 체어리티가 황폐해졌음을 나타냅니다. By “Lamech” is signified vastation, as before; that he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signifies confession, which can only be made where there is a church, which, as has been said, is signified by his “wives.”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signifies that he had extinguished faith, for by a “man” is signified faith; “a little one to my hurt” signifies that he had extinguished charity. By a “wound” and a “bruise” is signified that there was no more soundness; by a “wound,” that faith was desolated; by a “hurt,” that charity was devastated.

 

해설

AC.427은 창4:23에 나오는 라멕의 말을 풀이합니다. 앞의 AC.421-426에서는 라멕의 아내들과 자녀들을 통해 새 교회의 내적·외적 요소, 그리고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다시 라멕 자신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이 앞에서와 같이 ‘황폐’를 나타낸다고 밝히며, 그의 말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에 관한 고백이라고 설명합니다.

 

라멕은 먼저 자기 아내들인 아다와 씰라에게 말을 듣도록 요청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을 ‘고백’으로 풀이합니다. 그가 아내들에게 말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아내들이 교회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고백이 교회가 있는 곳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고백은 단순히 어떤 사건을 이야기하는 행위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된 상태를 드러내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어 라멕은 자신이 ‘한 사람’을 죽였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사람’이 신앙을 나타내므로, 사람을 죽였다는 말은 신앙을 소멸시켰다는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창4:23의 살인에 관한 표현을 문자적 사건의 차원에서만 읽지 않고, 교회 안에서 신앙이 소멸된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읽는 것입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라멕이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신앙을 소멸시켰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과정은 앞뒤의 황폐에 관한 설명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음을 뜻합니다. 여기서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다른 표현으로 구별됩니다.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의 말에 등장하는 두 죽음을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에 연결함으로써, 이 고백이 교회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 모두에 관한 것임을 밝힙니다.

 

이 구별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와도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창4장의 앞부분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 그리고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를 다루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라멕의 고백을 통해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된 상태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연결을 근거로 가인과 라멕의 상태가 모든 면에서 동일하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AC.427이 직접 밝히는 것은 라멕이 황폐를 나타내며, 그의 말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을 뜻한다는 사실입니다.

 

라멕은 이 두 죽음을 말하면서 자신에게 ‘상처’와 ‘해’가 생겼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상처’와 ‘타박상’이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음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상처는 신앙의 황폐를, 해는 체어리티의 황폐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들은 라멕이 입은 육체적 부상의 정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어 교회 안에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황폐’라는 말도 단순히 신앙생활이 잠시 약해지거나 체어리티를 충분히 실천하지 못한 상태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고 말하며,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읽고 자신의 일시적인 연약함을 곧바로 라멕의 황폐와 동일한 상태로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 번호는 라멕이 표상하는 교회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국 AC.427에서 라멕의 말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된 상태에 관한 고백입니다. 아다와 씰라는 교회를 나타내며, 그들에게 말을 듣도록 요청하는 것은 고백을 뜻합니다. ‘사람’을 죽였다는 말은 신앙의 소멸을,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체어리티의 소멸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상처와 해는 그 결과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교회의 황폐가 단순히 외적인 형식의 변화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의 생명에 관한 문제임을 살펴보게 됩니다. (AC.427 해설)

 

 

 

AC.428, 창4:23, ‘라멕의 말은 왜 황폐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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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6, 창4:22, ‘쇠는 왜 자연적 진리를 의미하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6‘쇠’(iron)가 자연적 진리를 뜻한다는 사실은 에스겔이 두로에 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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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6 심화

1. ‘철장은 왜 주님의 말씀의 진리를 의미하는가?’

 

AC.426에서 스베덴보리는 쇠가 자연적 진리를 뜻한다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진리에는 아무도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쇠가 ‘산산이 부순다’, ‘짓부순다’는 표현과 함께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는 쇠의 강함을 설명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계시록의 ‘쇠 지팡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지 살펴봅니다. 그 결론은 분명합니다. ‘쇠 지팡이’는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입니다.

 

먼저 계2:26-27에서는 이기는 자에게 민족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고 말씀합니다. 이어 그가 쇠 지팡이로 민족들을 목양하며, 토기장이의 그릇처럼 그들을 깨뜨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쇠 지팡이는 강한 권세와 심판의 도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쇠가 진리를 나타내며, 진리에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쇠 지팡이의 속뜻을 이해하려면 먼저 쇠가 나타내는 진리의 의미를 살펴야 합니다.

 

계12:5에서도 쇠 지팡이가 등장합니다. 여자가 낳은 남자아이는 장차 쇠 지팡이로 모든 민족을 목양할 자라고 말합니다. 계2장에서는 이기는 자에게 쇠 지팡이가 주어지고, 계12장에서는 남자아이가 쇠 지팡이로 목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구절을 나란히 인용하여 쇠 지팡이가 진리의 힘과 관련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여자가 누구를 뜻하는지, 남자아이가 무엇을 나타내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의미를 확정하려면 계시록의 해당 구절에 관한 별도의 해설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쇠 지팡이가 단순히 강한 권세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의 진리라는 사실은 어디에서 분명해집니까? 스베덴보리는 계19:11, 13, 15를 인용하여 이를 설명합니다. 이 말씀에서 백마를 타신 분은 ‘충신과 진실’이라 불리며, 공의로 심판하고 싸우십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명시됩니다. 그분의 입에서는 예리한 검이 나오고, 그분은 쇠 지팡이로 민족들을 목양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문맥을 통해 쇠 지팡이가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임을 밝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과 ‘쇠 지팡이’가 같은 분에 관한 묘사 안에 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쇠 지팡이의 의미를 금속의 단단함만으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쇠가 진리를 나타낸다는 앞선 설명과, 쇠 지팡이로 목양하시는 분의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함께 살핍니다. 그러므로 쇠 지팡이는 단순한 물리적 무기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를 나타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가 인용한 영어 본문은 ‘다스린다’는 표현을 ‘목양한다’(pasture)고 옮깁니다. 이는 쇠 지팡이의 의미를 생각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입니다. 말씀의 진리가 지닌 힘은 단순히 무언가를 부수는 힘으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계시록의 본문은 쇠 지팡이로 민족들을 목양한다고도 말합니다. 다만 AC.426은 그 목양이 구체적으로 어떤 영적 과정을 뜻하는지까지 자세히 풀이하지 않으므로, 여기서는 주님의 말씀의 진리가 다스림과 목양의 이미지로 표현된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진리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에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 힘을 인간의 주장이나 논쟁의 승리와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계19장에서 쇠 지팡이로 목양하시는 분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리를 말한다고 주장한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의 말에 그러한 힘이 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자신이 붙들고 있는 것이 실제로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인지 살펴야 합니다.

 

결국 계시록의 쇠 지팡이는 AC.426의 논지를 완성합니다. 쇠는 자연적 진리를 뜻하고, 진리에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계19장은 그 쇠 지팡이가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진리의 힘을 인간 자신의 강함에서 찾기보다,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에서 찾아야 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AC.426 심화 1)

 

 

 

AC.426, 창4:22, ‘쇠는 왜 자연적 진리를 의미하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6‘쇠’(iron)가 자연적 진리를 뜻한다는 사실은 에스겔이 두로에 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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