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2026/09/13)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3, ‘영원한 하늘나라’, 93, ‘예수는 나의 힘이요입니다.

 

오늘 4 절별 주석 그 네 번째, 9절로 15, AC 글 번호로는 370번에서 396번입니다. 먼저 본문니다.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9-15)

 

제목은

 

가인의 , 인간의 실패보다 깊은 주님의 섭리

 

이며, 다음은 지난주부터 시작한 3 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그동안 함께해오신 분들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한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시간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따라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1에서는 천지창조를 거듭남의 과정으로, 2에서는 에덴동산을 주님의 사랑과 생명 안에 살아가는 천적 상태로, 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기 감각과 proprium 따르면서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으로 읽었습니다.

 

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읽고 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지난주에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다가 마침내 , 교리의 영역에서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는 것을 읽었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결국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킨 것입니다.

 

오늘은 바로 그다음 장면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가인에게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물으십니다. 그리고 아벨의 피들이 땅에서 부르짖고, 가인은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그런 가인을 완전히 없애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인의 주어 보존하십니다.

 

오늘은 가지를 마음에 두고 읽겠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생명과 방향을 잃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의 실패 속에서도 다시 체어리티로 돌아올 길을 보존하십니다. 오늘은 가인의 실패보다 깊은 곳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370-396 요약입니다.

 

 

AC.370-396 지난주에 읽은 AC.359-369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 직후부터 시작합니다. 지난주 본문에서 가인은 체어리티를 표상하는 아벨을 자기 아래 두려 했고, 마침내 , 교리의 영역에서 아벨을 죽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살해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우위에 두려는 교리가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키는 과정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번 AC.370-396 바로 다음을 다룹니다.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은 어떻게 되는가, 주님과의 결합을 잃은 신앙은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그렇게 타락한 신앙을 주님께서는 완전히 없애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인의 주어 보존하시는가가 이번 리딩의 중심입니다.

 

AC.370에서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물으십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아벨의 행방을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속뜻에서 아벨 체어리티이므로 질문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에게 안의 체어리티가 어디 있느냐? 묻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이제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체어리티에 종속되기를 거부하고,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을 완전히 밀어냈음을 의미합니다. 지난주에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죽이는 데까지 갔다면, 이제는 걸음 나아가 체어리티에 대한 책임 자체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AC.371 여기서 매우 중요한 퍼셉션과 양심 문제를 설명합니다. AC.370에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것은 내면에서 오는 어떤 퍼셉션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사람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퍼셉션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천적 상태에서 멀어진 뒤에는 이러한 퍼셉션을 잃었고, 훗날 영적 교회에서는 신앙을 통하여 형성된 양심이 자리를 대신하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신다 것은 반드시 외적인 음성을 듣는다는 뜻이 아니라, 태고교회에서는 퍼셉션으로, 후대의 영적 사람에게는 양심을 통하여 선과 진리가 내적으로 알려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구별은 뒤의 AC.393에서 다시 매우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AC.372-376에서는 아우의 피들의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말씀이 설명됩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히브리어에서 단수가 아니라 피들 표현된다는 점입니다. 피들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을 의미하며, 특히 체어리티와 정반대되는 미움을 가리킵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의 선과 생명을 원하지만, 미움은 영적으로 이웃을 해치고 죽이려 합니다. 따라서 아벨의 피들이 땅에서 부르짖는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이 자체로 죄책을 드러내고 고발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모르셨던 사실을 피가 알려드린다는 뜻이 아니라, 악에는 자체의 죄책이 들어 있으며 영적 질서 안에서 그것이 스스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합니다. 문맥에서 땅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시킨 분열 또는 이단 교리적 토대를 나타냅니다. 다만 여기서 이단 오늘날 특정 교파나 사람에게 직접 붙이는 말로 읽어서는 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구별했다는 있지 않고, 둘을 분리한 신앙을 독립시키고 체어리티 위에 세웠다는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은 누가 이단인가? 아니라 나는 어떤 진리를 전체의 질서에서 떼어 내어 절대화하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정확하게 말하면서도 진리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떨어져 있다면 우리 역시 가인이 갈았던 땅을 있습니다.

 

AC.377-382에서는 결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납니다.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말씀입니다. 체어리티가 소멸되면 주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결속도 끊어집니다. 신앙은 여전히 교리를 연구하고 논증하며 많은 지식을 쌓을 있지만, 체어리티가 없다면 신앙은 생명 있는 신앙이 아니라 단지 지식에 머물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땅을 갈아도 땅은 이상 힘을 내어 주지 않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를 계속 연구하고 확증하고 정교한 교리 체계로 만들어도 거기서는 참된 영적 열매가 나올 없습니다. 이유를 AC.381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피하며 유리하는 된다는 것은 단순히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닌다는 뜻이 아닙니다. 속뜻에서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하게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AC.382 예레미야애가, 아모스, 호세아, 예레미야, 이사야의 여러 말씀을 인용하여 이것을 확증합니다. 특히 물을 찾아 성읍에서 성읍으로 유리하지만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은 진리를 찾고 있으면서도 진리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지 않아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지 못하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진리를 많이 찾아다니는 것과 진리 안에 실제로 사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선에서 분리된 진리는 결국 사람에게 영적 방향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AC.383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가인은 죄악이 너무 커서 사함을 받을 없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앞에서는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며 책임을 부인하던 가인이 이제 자기 상태 때문에 어떤 내적 고통을 느끼고, 자기가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인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을 완전한 회개라고 수는 없지만, 완전히 굳어 버린 상태와도 다릅니다. AC.384 바로 점에서 가인 안에 선의 어떤 것이 아직 남아 있었다 설명합니다. 만일 선이 완전히 소멸되었다면 자기 때문에 내적으로 고통받거나 그것을 인정하는 일조차 일어날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번 본문 후반의 가인의 보존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됩니다.

 

AC.385-388에서는 가인이 자기 상태를 자세히 말합니다. 주께서 오늘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합니다. 지면에서 쫓겨난다 것은 교회에 속한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하고,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 것은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결과 다시 피하며 유리하는 됩니다. 진리에서도 떨어지고 선에서도 떨어지면 결국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선인지 분별할 없게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는 처음에는 하나의 교리적 선택처럼 보이지만, 끝에서는 인간의 영적 방향감각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AC.389-391에서는 가인의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는 두려움이 설명됩니다. 사람이 체어리티를 잃으면 주님과의 결합에서 멀어지고 자기 자신, proprium 맡겨집니다. 그러면 생각에서는 거짓이, 의지에서는 악이 점점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악과 거짓에는 자체로 두려움과 형벌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밖에서 형벌을 만들어 가인에게 던지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악과 거짓 자체가 사람을 불안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지옥의 상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악한 영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해치고 빼앗으려 하기 때문에 자기 역시 다른 존재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죄의 형벌은 주님께서 분노하여 외부에서 부과하시는 어떤 것이라기보다, 악과 거짓이 자체 안에 품고 있는 결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이번 본문의 가장 놀라운 전환이 일어납니다. 가인이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고 하자 여호와께서는 가인을 죽이지 말라고 하시며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배나 받으리라 하십니다. 그리고 가인에게 주어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십니다. 문자적으로만 읽으면 살인자인 가인을 하나님께서 오히려 보호하시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AC.392-396 속뜻을 따라가면 전혀 다른 의미가 열립니다. 가인을 보존한다는 것은 가인의 악을 승인한다는 뜻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된 신앙 자체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주님께서 섭리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AC.393 매우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사람들에게는 사랑이 먼저였고 신앙은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퍼셉션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천적 상태를 잃은 뒤에는 이상 같은 방법으로 주님께 인도될 없었습니다. 홍수 후의 영적 교회에서는 먼저 신앙의 지식이 주어지고, 신앙을 통하여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주시며,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하면서 양심이 형성되는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후대의 인간에게는 신앙의 지식 주님께서 인간을 다시 체어리티로 인도하시는 중요한 수단이 것입니다.

 

AC.394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결국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고 독립적인 교리로 만들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렇다고 신앙 자체를 완전히 사라지게 내버려 두셨다면 후대의 인간은 구원에 이르는 중요한 수단을 잃게 됩니다. 인간이 이상 태고교회처럼 사랑에서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없기 때문에, 먼저 신앙의 지식을 배우고 진리를 통하여 체어리티로 인도받는 길이 보존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가인이 잘못되었음에도 가인 완전히 죽임당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야 것은 보존 승인입니다. 주님께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옳다고 인정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패 속에서도 장차 다시 체어리티로 돌아갈 있는 통로인 신앙 자체를 보존하신 것입니다.

 

AC.395에서 보존이 거룩하고 침범해서는 되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말씀에서 일곱 거룩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AC.396 마침내 가인의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말씀에서 어떤 사람이나 상태를 다른 것과 구별하는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이마나 몸에 실제로 어떤 신비한 표시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말씀의 속뜻은 아닙니다. 가인의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을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AC.370-396 전체는 놀라운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부분에서는 체어리티를 죽인 신앙의 비참한 결과를 끝까지 보여 줍니다. 아벨이 사라지고, 그의 피들이 땅에서 부르짖으며, 땅은 이상 힘을 내지 않고, 가인은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한 피하며 유리하게 됩니다. 체어리티를 제거함으로써 신앙이 강하고 순수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 자체가 생명과 방향을 잃은 것입니다. 그런데 후반부에서는 실패 가운데서도 주님의 섭리가 작용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의 잘못을 옳다고 하시지 않으면서도 가인을 완전히 죽게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사랑의 질서를 무너뜨렸어도 장차 다시 사랑으로 돌아올 있도록 신앙이라는 통로를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합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귀합니다. 그러나 지식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순간부터 가인의 길이 시작될 있습니다. 특히 AC 읽으며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배우는 우리에게는 더욱 조심스러운 말씀입니다. 깊은 아르카나를 안다는 것이 다른 사람보다 영적으로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다른 사람의 신앙을 쉽게 판단하며, 사람 안에 주님께서 보존하고 계시는 작은 선과 진리까지 무시하게 된다면 우리는 다시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동시에 가인의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에도 중요한 빛을 줍니다. 어떤 사람의 신앙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해서 사람 안에 있는 모든 신앙과 모든 진리를 함께 없애 버리려 해서는 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잘못된 상태 안에서도 장차 구원에 사용하실 있는 것을 구별하여 보존하십니다. 우리는 잘못된 것을 분별해야 하지만, 주님께서 보존하고 계시는 것까지 함부로 파괴해서는 됩니다. 가인의 표는 악을 보호하는 표가 아니라, 인간의 실패보다 깊고 멀리 내다보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주는 표입니다.

 

결국 AC.370-396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지난주의 내가 가진 신앙 안에서 아벨은 살아 있는가?에서 걸음 나아갑니다. 아벨을 잃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묻습니다. 체어리티를 잃은 신앙은 아무리 많은 진리를 가지고 있어도 결국 선과 진리의 방향을 잃고 유리하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께서는 가인마저 완전히 버리지 않으십니다. 인간 안에 남아 있는 작은 선을 보시고, 다시 체어리티로 돌아오는 사용될 있는 신앙의 지식을 보존하시며, 인간의 실패 속에서도 구원의 길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도록 섭리하십니다.

 

따라서 이번 리딩은 가인의 형벌보다 깊은 곳에서 주님의 섭리 보게 합니다. 인간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했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죽였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을 곧바로 폐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보존하여 훗날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있는 길을 남겨 두셨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랑에서 신앙으로라는 천적 질서가 무너진 뒤에도,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영적 질서를 마련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안에 숨어 있는 놀라운 아르카나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AC.370-396 전체 흐름은 체어리티의 소멸 죄책의 드러남 주님과의 결합 상실 영적 결실의 상실 선과 진리의 방향 상실 내적 고통과 악의 일부 인정 악과 거짓에서 오는 두려움 가인의 보존 신앙의 보존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로 돌아갈 길의 보존으로 읽을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깊지만 주님의 섭리는 그보다 깊습니다. 인간은 아벨을 죽이지만, 주님께서는 가인에게도 표를 주십니다. 그것은 가인의 길을 인정하시는 표가 아니라, 인간의 실패 속에서도 구원의 길을 끝까지 보존하시는 주님의 자비와 섭리의 표입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370, 창4:9,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 체어리티를 완전히 거부하게 된 신앙’ (AC.370-3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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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1, 창4:9, ‘퍼셉션에서 양심으로 -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의 속뜻’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4:9) AC.371‘여호와께서 말씀하심’(speaking of Jehovah)으로 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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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2, 창4:9,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4:9) AC.372‘지키는 자’(keeper)가 된다는 것은 섬기는 것을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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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3, 창4:10, ‘네 아우의 핏소리가 내게 호소하느니라 -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과 죄책의 고발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창4:10) AC.373‘네 아우의 피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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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4, 창4:10, ‘왜 아벨의 피가 부르짖는가? - 미움은 체어리티에 가하는 폭력입니다’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4‘피들의 소리’(voice of bloods)가 체어리티에 폭력이 가해졌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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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5, 창4:10, ‘부르짖는 소리는 왜 죄책의 고발을 뜻하는가?’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5‘부르짖는 소리’(voice crying)와 ‘부르짖음의 소리’(voice of a cry)는 말씀에서 흔히 사용되는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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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6, 창4:10, ‘피들이 부르짖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 체어리티에 가한 폭력이 드러내는 죄책’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6이로부터 ‘피들이 부르짖는 것’(crying of bloods)은 죄책의 고발을 의미한다는 것이 따라 나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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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7, 창4:10,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입니다 - 무엇이 심어지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집니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7여기서 ‘땅’(ground)이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는 것은 ‘밭’(field)이 교리를 의미한다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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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8, 창4:11,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 분열로 말미암아 주님에게서 돌아선 가인’ (AC.378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And now cursed art thou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창4:11) AC.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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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9, 창4:11,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 의지가 실제 사람입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창4:11) AC.379이러한 것들이 의미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으로부터 분명하며, ‘저주를 받는 것’(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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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0, 창4:12,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신앙’ (AC.38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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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1, 창4:12,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실이 없는가?’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1‘땅을 가는 것’(till the ground)이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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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2, 창4:12, ‘피하며 유리하는 자란 누구인가? -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게 된 신앙’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2‘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가 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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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3, 창4:13,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 악을 인정하게 한 내적 고통과 절망’ (AC.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창4:13) AC.38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Cain said unto Jehovah)는 어떤 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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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4, 창4:13, ‘가인에게도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 라멕에 이르러 소멸되는 체어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창4:13) AC.384이로부터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되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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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5,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남아 있는 것을 위협하는 악과 거짓’ (A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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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6, 창4:14,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6‘지면에서 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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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7, 창4:14,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자비에서 나오는 신앙의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7‘주의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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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8, 창4:14, ‘피하며 유리하는 자 -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8‘땅에서 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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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9,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체어리티를 잃으면 왜 악과 거짓에 맡겨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9‘그를 만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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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0, 창4:14,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은 왜 끊임없이 두려워하는가?’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0악과 거짓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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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1, 창4:14, ‘악과 거짓은 그 자체 안에 형벌을 품고 있습니다 - 악령들이 서로 두려워하는 이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1악과 거짓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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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2, 창4:15,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시다 - 분리된 신앙까지 보존하시는 이유’ (AC.392-39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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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3, 창4:15,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홍수 후 교회의 양심 - 신앙과 체어리티의 새로운 질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3지금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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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4, 창4:15, ‘가인의 표와 천국의 결혼 -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4이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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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5, 창4:15,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 일곱은 왜 거룩한 것을 뜻하는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5‘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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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6, 창4:15, ‘가인의 표는 무엇인가? - 주님께서 신앙을 구별하여 보존하신 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6‘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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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필수 리딩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AC.370, 창4:9,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 체어리티를 완전히 거부하게 된 신앙’ (AC.370-3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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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1, 창4:12,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실이 없는가?’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1‘땅을 가는 것’(till the ground)이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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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4, 창4:15, ‘가인의 표와 천국의 결혼 -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4이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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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9-13(D1)

 

2668, 5, 창4.5, 2026-09-13(D1)-주일예배(창4,9-15, AC.370-396), ‘가인의 표, 인간의 실패보다 더 깊은 주님의 섭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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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9/06, 창4:6-8, AC.359-369),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 오늘(2026/09/06)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2, ‘다 함께 주를 경배하세’,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찬92, ‘위에 계신 나의 친구’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세 번째, 6절로 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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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5 심화

1.  아르카나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는가?’

 

AC.85의 첫 문장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천적 인간이 일곱째 이고 그 때문에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구별되어 안식일이라 하였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아르카나라면, 왜 이것은 처음부터 좀 더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말씀에 이 정도의 설명이라도 함께 주어졌다면 안식일과 창조의 날들을 둘러싼 많은 혼란을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답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AC.85가 실제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아르카나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이유를 곧바로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의 본성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영적 인간의 본성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지 때문에 사람들은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에도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같은 것으로 여겨 왔다고 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AC.85가 직접 주는 첫 번째 답은 분명합니다. 일곱째  안식일의 속뜻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바로 그것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를 모르면 왜 영적 인간의 형성이 여섯째 날과 연결되고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 또는 안식일과 연결되는지도 알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앞의 AC.67에서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 안에는 다른 삶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결코   없는 아르카나들이 있다고 한 것과도 닮아 있습니다. 어떤 속뜻은 단어 하나의 암호를 알아내듯 풀리는 것이 아니라, 그 속뜻이 가리키는 영적 실재 자체를 알아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AC.85의 안식일도 그런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천적 인간이라는 영적 상태를 알지 못하면 일곱째 날이 왜 천적 인간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천적 인간의 본성을 처음부터 모든 사람에게 명백하게 설명하지 않으셨는가?라고 물으면, AC.85 한 번호만으로는 충분한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AC.85   아르카나가 알려지지 않았는가에 관하여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본성이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주님께서 그것을  일찍 명시적으로 계시하지 않으셨는가라는 더 큰 섭리의 문제까지 여기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자유, 인간의 수용 상태, 말씀의 문자와 속뜻의 관계, 속뜻의 보존, 신적 섭리와 계시의 때 같은 스베덴보리의 다른 가르침들을 곧바로 AC.85의 확정적인 해답으로 끌어오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한 주제들은 이 질문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지만, 각각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그 문제를 다루는 곳에서 확인하면서 연결해야 합니다.

 

또 하나 조심할 것은 속뜻이 처음부터 명백하게 쓰여 있었다면 교회사적 혼란이 없었을 이라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충분한 인간적인 이유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낳았을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명백한 설명이 언제나 명백한 수용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주님의 계시 방식에 대한 우리의 추측보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히는 설명을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렇다고 처음의 질문을 접어 둘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매우 중요한 질문으로 남겨 둘 가치가 있습니다. AC를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다, 이것은 아르카나이다라고 말하는 곳들을 계속 만나게 됩니다. 그때마다  이제야 밝혀지는가?라는 질문이 다시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 본문들이 충분히 쌓이면 우리는 한 번호의 추측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의 여러 설명을 서로 대조하면서 더 신중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AC.85에서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데까지 먼저 가는 것이 좋습니다.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안식일이라는 아르카나가 알려지지 않았던 직접적인 이유는 천적 인간의 본성이 알려져 있지 않았고 영적 인간의 본성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깊은 질문,   이러한 영적 실재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도록 허용되었는가?는 여기서 성급하게 닫지 않고, 앞으로 AC가 그 답을 열어 줄 때까지 가지고 가야 할 질문입니다. (AC.85 심화 1)

 

 

 

AC.85, 창2:2-3, ‘주님 자신이 안식일이시며, 주님의 뜻이 천적 인간의 뜻이 된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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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3 심화

1. the sixth day the sixth day 다른 뜻인가?

 

AC 영어 원문을 자세히 읽다 보면 작은 따옴표 문제가 눈에 들어옵니다. AC.83 Potts 영어는 when man has become the sixth day라고 되어 있습니다.  the sixth day가 아니라 정관사 the를 따옴표 밖에 두고 sixth day만 묶었을까요? 두 표기에 서로 다른 속뜻이 있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이 차이에 별도의 교리적 또는 상응적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 the sixth day라고 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sixth day라는 상징 자체를 특별히 강조한다거나, 반대로 the sixth day라고 되어 있으면 정관사까지 포함한 특정 상태 전체를 강조한다고 구별할 충분한 근거는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읽는 영어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영어로 쓴 문장이 아니라 라틴어 원문을 영어로 옮긴 번역문입니다. 따라서 영어의 따옴표 위치에는 번역자와 편집자의 판단이 개입될 수 있습니다. 특히 영어에서는 어떤 명사구 가운데 핵심 표현만 인용하거나 특별한 용법으로 표시하면서 관사나 다른 문법 요소를 따옴표 밖에 둘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따옴표가 the를 포함했는지 여부만으로 속뜻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AC.83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따옴표의 범위가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여섯째 을 문자적인 하루가 아닌 사람의 상태에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사람이 여섯째 이 되었을 때 하늘과 땅과 그 모든 만상이  이루어졌다고 하며, 그 이유를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독자가 붙들어야 할 핵심은 the가 따옴표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가 아니라 여섯째 이라는 표현이 이 문맥에서 거듭난 사람의 상태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AC 영어 원문을 읽을 때에도 유용한 원칙입니다. Potts 영어의 따옴표는 스베덴보리가 지금 말씀의 어떤 표현을 집어 설명하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그래서 현재 번역에서도 영어 원문이 실제로 따옴표로 표시한 핵심 표현을 한국어와 함께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어 번역문의 따옴표 위치 자체를 새로운 상응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최종 판단이 필요한 경우에는 영어 번역의 문장부호보다 라틴어 원문을 우선해서 확인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Potts 영어는 매우 중요한 번역 자료이지만, 따옴표와 같은 편집 요소까지 모두 스베덴보리 자신의 신학적 의도를 직접 나타낸다고 전제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번역상의 중요한 의미 차이가 의심될 때에는 라틴어 어휘와 문법을 확인하고, 영어의 문장부호는 그다음 참고자료로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the sixth day’’ ‘‘the sixth day’’를 서로 다른 영적 상태나 서로 다른 상응으로 구별할 필요는 없습니다. AC.83에서 중요한 것은 여섯째 이 단순한 시간 표시를 넘어 사람의 거듭남의 상태를 가리키며, 그 상태에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영어 따옴표는 그 표현을 알아보도록 돕는 표지로 사용하되, 따옴표의 범위 자체에서 별도의 교리를 만들어 내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AC.83 심화 1)

 

 

 

AC.83, 창2:1,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될 때,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창2:1) AC.83‘하늘과 땅과 그 모든 만상’(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은 사람이 ‘여섯째 날’(sixth day)이 되었을 때 ‘다 이루어졌다’(finished)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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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2 심화

1.  주님은 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라고 말씀하시는가?

 

13:12에서 여호와께서는 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멀어지고 참된 인간의 상태를 잃는 것이 인간의 악 때문이라면, 왜 말씀은 마치 주님께서 직접 사람을 희귀하게 만드시는 것처럼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표현하는 것일까요?

 

먼저 AC.82 자체가 이 질문에 직접 답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자리에서 사13:12-13을 인용한 직접적인 목적은 하늘 이 사람에 대하여 서술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AC.82만 가지고 내가 사람을 희귀하게 한다는 표현의 속뜻을 완전히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AC를 계속 읽다 보면 반복해서 만나게 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말씀에는 주님께서 노하시고, 벌하시고, 멸하시며, 때로는 인간에게 악한 결과를 직접 가져오시는 것처럼 표현되는 곳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들에서 이러한 표현을 말씀의 외적인 나타남과 인간에게 보이는 방식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주님에게서는 선과 진리만 나오지만,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상태에 따라 그 결과가 전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주님께서 하신다는 표현을 만날 때에는 두 가지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의 문자에 실제로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그 표현으로부터 그러므로 악이나 파괴의 근원이 주님이다라고 결론짓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전체적인 가르침에서는 후자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악과 거짓의 근원을 주님에게 돌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함께 허용이라는 문제도 나중에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원하시거나 만들어 내시는 분이 아니지만, 인간의 자유가 보존되는 질서 안에서 악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허용한다는 것은 악을 승인하거나 방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적 허용은 신적 섭리와 분리된 독립적인 원리가 아니며, 주님께서는 허용되는 것 안에서도 가능한 한 선한 목적을 향하여 섭리하십니다.

 

다만 이러한 appearance permission에 관한 전체 교리를 사13:12 한 절에 곧바로 대입하여  구절의 뜻은 정확히 이것이다라고 확정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 AC.82에서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 말씀을 하늘 이 사람에게 서술될 수 있다는 증거로 인용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을 희귀하게 하며라는 표현이 왜 이런 형식을 취하는가 하는 문제는 여기서 생겨난 정당한 독자 질문이지만, 그 답은 AC 전체에서 말씀의 표현 방식과 신적 섭리를 더 배우면서 점차 분명해져야 합니다.

 

따라서 이 심화에서 먼저 기억할 원칙은 간단합니다. 말씀에서 주님께서 어떤 악한 결과를 직접 일으키시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고 해서 곧바로 그 악의 근원이 주님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문자에 기록된 내가 하리라라는 표현을 임의로 사실은 주님이 하지 않으셨다고 지워 버려서도 안 됩니다. 먼저 말씀의 문자 그대로를 존중하여 읽고, 그 표현이 속뜻에서 어떻게 이해되는지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해당 원리를 설명하는 곳들을 따라 확인해야 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사13:12의 질문은 단순히 하나의 난해한 구절을 해결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다고 기록되어 있을까?라는 질문을 만날 때마다, 문자에 나타난 표현과 주님의 실제 본성, 그리고 인간의 자유와 신적 허용 및 섭리의 관계를 성급하게 혼합하지 않고 구별하여 읽게 하는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AC.82 심화 1)

 

 

 

AC.82, 창2:1, ‘하늘은 속 사람, 땅은 겉 사람 - 각 사람이 먼저 교회여야 하는 이유’ (AC.82-8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창2:1) AC.82이 말씀은 사람이 이제 ‘여섯째 날’(sixth day)이 될 만큼 영적으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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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0 심화

1.  개역개정에는 열매 들어가 있는가?(2:16-17)

 

2:16-17을 개역개정과 AC에 실린 영어 성경으로 함께 읽으면 작은 차이 하나가 눈에 띕니다. 개역개정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번역합니다. 그런데 AC에 인용된 영어에서는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이라고 되어 있어 열매에 해당하는 단어가 따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개역개정은 왜 열매를 넣었을까요?

 

먼저 중요한 것은 히브리어 본문에도 이 두 절에서 열매에 해당하는 별도의 명사가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문자적으로는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너는 먹을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먹지 말라에 가까운 구조입니다. 따라서 AC에 실린 영어가 tree를 그대로 살린 것은 히브리어의 표현 구조와 잘 맞습니다.

 

그러나 한국어에서는 나무에서 먹는다 또는 문맥에 따라 나무를 먹는다는 표현이 독자에게 어색하거나 오해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이 먹는 것은 나무 자체가 아니라 나무에서 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의 나무의 열매는 이 뜻을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전달하기 위해 먹는 대상을 명시적으로 풀어 준 번역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열매가 히브리어 원문에 별도의 단어로 있는데 영어 번역이 빠뜨린 것도 아니고, 반대로 개역개정이 전혀 근거 없는 내용을 임의로 첨가했다고 볼 필요도 없습니다.

 

AC를 읽을 때 이 차이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개별 표현을 매우 세밀하게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원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역개정의 열매라는 번역 표현을 근거로 창2:16-17의 속뜻에 원문에 없는 별도의 열매 상응을 추가해서는 안 됩니다. AC.80에서 스베덴보리가 해설하는 것은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아는 것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들을 알려 하거나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하려 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AC와 함께 읽을 때는 개역개정의 자연스러운 한국어와 원문의 표현 구조를 함께 기억하면 좋습니다. 예배에서 개역개정을 읽을 때는 그대로 나무의 열매라고 읽으면 됩니다. 그러나 AC의 속뜻을 검토할 때는 히브리어와 AC의 영어가 실제로 나무에서 먹는다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번역문에 명시적으로 보이는 단어와 원문에 실제로 있는 단어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개역개정의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 번역 AC 속뜻 해설이 서로 다른 일을 한다는 점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성경 번역은 원문의 뜻을 독자가 자연스럽게 이해하도록 한국어로 전달해야 하고, AC 해설에서는 그 번역 뒤에 있는 원문의 표현까지 확인하면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근거로 속뜻을 설명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창2:16-17에서는 개역개정의 열매를 그대로 존중하여 읽되, AC의 상응을 판단할 때 그것을 원문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단어처럼 취급하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AC.80 심화 1)

 

 

 

AC.80, 창2:1-17 개요, '주님으로부터 알고,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하지 말라' (16-17절)

AC.80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해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sens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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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1 심화

1. 허락되었습니다 -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허락을 받았는가?

 

AC.71에서 스베덴보리는 다른 삶에 관한 내용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AC.67부터 이러한 표현은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말씀의 속뜻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고,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으며,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AC.71에서는 그 내용들을 어떤 순서로 배치하는 것까지 허락의 언어로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이 허락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요? 주님께서 직접 이제 이것을 기록하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AC.71 자체가 그 방법을 설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번호에는 어떤 음성을 들었다는 말도 없고, 천사가 지시했다는 말도 없으며, 퍼셉션이나 유입을 통해 알았다는 설명도 없습니다. 따라서 허락되었습니다라는 표현만 가지고 그 전달 방식을 하나로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은 오히려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영들과 천사들과 실제로 말하고 함께 있었다고 매우 구체적으로 증언할 때에는 그렇게 말합니다. AC.67에서는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다고 했고, AC.70에서는 육체 안에서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그들과 말하고 함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허락 자체가 어떤 방식으로 알려졌는가에 대해서는 적어도 AC.71까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부분은 모르는 채로 두는 것이 그의 기록에 더 충실합니다.

 

그렇다고 이 표현을 단순히 스베덴보리가 그렇게 느꼈다는 정도로 낮추어 읽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AC.67부터 반복되는 표현을 보면 그는 말씀의 속뜻을 알게 된 것,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게 된 것, 그동안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일정한 순서로 기록하는 것까지 자신의 독자적인 결정이나 성취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일관되게 주님의 신적 자비 허락이라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은 이 모든 일을 자신에게서 시작된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가장 안전한 답은 두 가지를 함께 붙드는 것입니다. 첫째,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기록하고 있는 일을 주님의 신적 자비 아래 허락된 일로 이해했습니다. 둘째, 그 허락이 매번 어떤 구체적인 방식으로 그에게 전달되었는지는 AC.71이 말하지 않습니다. 직접적인 말씀인지, 영적 교통 가운데 주어진 인식인지, 다른 어떤 방식인지 이 한 문장만으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허락되었습니다라는 말을 신비화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단순한 문학적 겸손의 표현으로 축소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그렇게 표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표현은 독자에게 그의 자기 이해를 보여 줍니다. 그는 자신을 말씀의 아르카나와 다른 삶의 실상을 스스로 발견하여 발표하는 독립적인 탐구자로 제시하지 않고, 그것들을 알고 보고 밝히도록 허락받은 사람으로 제시합니다.

 

앞으로 그의 기록을 더 읽으면서 이러한 허락의 성격을 밝혀 주는 직접적인 설명을 만나게 된다면 그때 우리의 이해를 더 넓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71의 독자는 아직 거기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은 스베덴보리가 분명히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을 함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는 허락되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허락되었는가는 여기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구별을 지키는 것이 오히려 그의 증언을 가장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입니다. (AC.71 심화 1)

 

 

 

AC.71, 창2 앞, ‘다른 삶에 관한 내용들을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다’

AC.71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을 말씀 본문에 들어 있는 것들 사이에 끼워 넣는다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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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2 심화

1.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

 

AC.162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뜻밖에 느껴지는 문장이 있습니다. ‘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인데, 이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창1과 창2에서 천적 인간이라는 표현은 거듭남의 가장 깊은 상태에 이른 사람이나 태고교회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여러 차례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갑자기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천적 인간이라 했던 사람들은 무엇이며, 왜 여기서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AC.162가 무엇을 설명하려는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이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흘러나온다고 말합니다. 이어 온 천국이 하나의 천적 인간이라고 하고, 그 이유를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며 주님께서 천국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강조점은 누가 천적 상태에 이를 수 있는가보다 천적인 것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창2에서 계속 배워 온 질서와도 같습니다. 지혜와 지성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고 주님에게서 옵니다. 선과 진리도 인간이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AC.149에서는 더 나아가 오직 주님만이 본래적으로 자기 자신의 것, 곧 주님의 proprium을 가지고 계시며, 주님의 proprium은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 생명이 아니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이 천적인 것의 근원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인 생명을 받아 그 질서 안에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라는 말과 태고교회의 사람들이 천적 인간이었다는 말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천적인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본래적으로 천적 인간이십니다. 반면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만큼 천적 인간이 됩니다. AC.155에서 천사들이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한다고 한 것도 같은 질서를 보여 줍니다. 천사가 천사인 까닭도, 천적 인간이 천적 인간인 까닭도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AC.162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이라고 한 뒤 곧바로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천국의 모든 천사를 하나의 거대한 사람으로 상상하라는 데 우선적인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맥에서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천국의 천적인 성질 자체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도 주님께서 천국과 천적 인간의 모든  안에서 모든 것이시므로, 천국과 천적 인간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천적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천국은 스스로 천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말미암아 천적입니다.

 

이 점은 이어지는 혼인의 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지상의 혼인이 천적 혼인으로부터 파생되어야 한다고 할 때, 그 천적 혼인의 가장 깊은 중심에도 한 분 주님이 계십니다. AC.162가 천적 혼인을   주님과 하나의 천국,  머리가 주님이신 하나의 교회라고 설명하는 이유입니다. 혼인의 하나 됨도 인간 둘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독립적인 하나 됨이 아니라, 그 본과 질서를 한 분 주님에게서 받습니다.

 

따라서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라는 문장은 인간이나 천사의 천적 상태를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천적인 모든 것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밝히는 말입니다.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고 천국이 천적 천국이 되는 것은 주님과 별도로 천적인 무엇을 소유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생명과 질서를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짧은 문장은 지금까지 창2가 계속 가르쳐 온 한 가지 질서를 다시 가장 깊은 곳에서 확인합니다. ‘생명의 근원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AC.162 심화 1)

 

 

 

AC.162, 창2:24, ‘혼인의 법’(the law of marriages)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2:24) AC.162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은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온 천국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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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1 심화

1. influx -  사람과  사람이 하나처럼 보이는 이유

 

AC.161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말을 합니다. ‘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서 활동하는지, 또는 어떻게 하나처럼 보이는지는 하나가 다른 하나 안으로 유입되는 것을 알지 못하면   없습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유입(influx)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는 직접적인 열쇠로 제시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구별된다는 것도 읽었고, 동시에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된다는 것도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서로 구별되는 것들이 어떻게 실제 인간의 삶에서는 하나의 생각과 느낌과 행동처럼 나타나는 것일까요? AC.161은 그 답을 유입에서 찾기 시작합니다.

 

이 질문은 사실 AC.161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앞의 여러 번호를 읽으면서 계속 쌓여 왔습니다. AC.149에서는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 죽어 있으며, 오직 주님의 proprium만이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생명의 기관이라고 했습니다. AC.150에서는 더 놀라운 말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오랫동안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알도록 허락받았으며, 모든 생각의 관념이 흘러든다는 것을 퍼셉션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독자는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한다고 경험하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면 나의 삶은 어디에 있는가?

 

AC.155는 이 질문에 천사들의 상태를 통해 중요한 실마리를 줍니다. 천사들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특별히 의식하며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으로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과 자기 자신의 생명처럼 살아간다는 경험이 서로 모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자기 생명을 끊임없이 외부에서 조종당하는 무엇처럼 경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각하고 사랑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장 깊은 곳에는 그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보편적인 퍼셉션이 있습니다.

 

AC.159에서는 이 관계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구조 안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천적 인간은 무엇이 속 사람에게 속하고 무엇이 겉 사람에게 속하는지를 분명하게 퍼셉션했으며,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어떻게 다스려지는지도 퍼셉션했습니다. 그러므로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구별되지만 서로 단절되어 있는 두 영역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을 다스리시는 질서 안에서 서로 관계를 맺습니다. 바로 이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AC.161 유입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AC.161은 여기서 유입에 관한 전체 교리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평범한 행위 하나를 예로 듭니다. 어떤 사람이 겉으로 선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행위 안에 체어리티, 곧 사랑과 신앙이 있어야 하며, 다시 그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셔야 그 행위를 체어리티의 행위 또는 신앙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외적인 행위만 떼어 놓고 보아서는 그 행위의 영적 성질을 충분히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서 활동하는지를 조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 나타나는 행위와 그 행위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은 서로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신앙의 생명의 근원인 주님도 인간의 외적인 행위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구별됩니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는 서로 단절된 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타나 하나의 행위가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떤 일을 할 때  부분은  사람이고  부분은  사람이다라고 나누어 경험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삶, 하나의 의지, 하나의 행동처럼 경험합니다. 이것이 AC.161이 말하는 하나로서 활동하고 하나처럼 보이는 상태를 이해하는 출발점입니다.

 

이 때문에 유입을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지금까지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AC.155의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살면서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AC.161의 태고교회 후손들도 겉 사람 안에서, 곧 자기들의 proprium 안에서 살기를 원했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다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proprium에 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 안에 영적 천적인 것을 자비롭게 스며들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과 인간이 자기 삶으로 받아 살아가는 것이 서로 경쟁하는 두 생명처럼 제시되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라는 앞의 표현들이 다시 중요해집니다. 인간의 proprium 자체가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생명을 얻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명을 얻은 proprium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AC.155에서는 그것을 주님의 신부와 아내라고까지 했으며,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퍼셉션하고 지혜와 지성을 누린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방향을 나라는 존재가 점점 없어지는 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의 본문이 보여 주는 방향은 오히려 인간이 자기 생명의 참된 근원을 주님에게서 받아들이면서, 그 생명을 자기 자신의 삶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입은 주님께서 안에서 움직이시고 인간은 밖에서 수동적으로 따라 움직인다는 식의 단순한 그림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161이 보여 주는 것은 훨씬 섬세합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은 구별되지만 하나로서 활동합니다. 천적·영적 생명과 proprium도 서로 같은 것은 아니지만 인간 안에서는 하나처럼 나타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삶을 실제 자기 삶처럼 살아가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이 여러 사실을 함께 붙들게 하는 개념이 지금 이 지점에서 등장한 유입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행하는 선한 일도 새롭게 보게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같은 행동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저절로 체어리티의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AC.161이 행위를 예로 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행위 안에 체어리티, 곧 사랑과 신앙이 있고, 그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실 때 비로소 그 외적인 행위는 안에 있는 것과 하나로서 활동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외적인 행동을 버리고 내적인 것만 추구하는 것도 아니며, 외적인 선행만으로 만족하는 것도 아닙니다.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밖의 삶과 행위 안으로 흘러들어 하나의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아직 AC.161에서 유입에 관한 모든 것이 설명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이제 그 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유입의 전체 교리를 미리 완성하려 하기보다, 지금까지 읽은 것만으로 한 가지를 분명히 붙들면 충분합니다. ‘나는  삶을  삶으로 살아가지만,  생명의 근원은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 우리의 실제 삶과 행위 안에 나타날 때, 서로 구별되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은 하나로서 활동하고 하나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AC.161에서 처음 열어 보여 주는 유입의 의미입니다. (AC.161 심화 1)

 

 

 

AC.161, 창2:24,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 영적 천적인 것을 스며들게 하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1이 태고교회의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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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유튜브 채널 ‘말씀의 서사’의 이번 영상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기에 상당히 중요한 영상입니다. 주제가 바로 ‘삼위일체’이기 때문입니다. 자막 전체를 보면 이 영상은 전통적인 니케아-아타나시우스적 삼위일체론을 대중적으로 아주 쉽게 설명하려는 영상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중간중간 사용하는 비유와 표현 가운데는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 이해에 매우 가까이 접근하는 부분이 있는 반면, 결정적인 대목에서는 스베덴보리가 가장 강하게 문제 삼았던 ‘영원 전부터 서로 구별되는 신적 위격’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은 단순히 ‘맞다, 틀리다’로 판정하기보다, 전통적 삼위일체론이 무엇을 지키려 했으며 스베덴보리가 그것을 어떻게 다시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이해했는지를 보여 주기에 아주 좋은 자료입니다.

 

영상은 오랫동안 교회를 다닌 사람도 ‘삼위일체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쉽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데서 출발하며, 이것을 신앙이 얕기 때문이 아니라 삼위일체가 그만큼 깊고 신비로운 진리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출발점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삼위일체가 본래부터 인간의 이해를 초월할 만큼 모순적인 신비인가, 아니면 교회가 하나님을 영원한 위격으로 설명하면서 이해하기 어려워진 것인가?’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후자에 훨씬 가깝습니다. 그는 삼위일체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기독교에는 반드시 삼위일체가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 삼위일체를 ‘ 신적 인격의 연합’으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 자체, 신적 인간, 발출하는 신성의 삼위일체로 이해합니다. 영상과 스베덴보리 모두 ‘하나님은 분이며 삼위일체가 있다’고 말하지만, ‘ 셋이 어디에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서 길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영상은 신명기 64절의 ‘하나’인 히브리어 ‘에하드’가 창세기 224절의 ‘ ’에도 쓰인다는 사실을 들어, 하나가 반드시 단순한 숫자적 하나만을 뜻하지 않고 ‘여럿이 연합된 하나’일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창세기 11절의 ‘엘로힘’이 형태상 복수인데 동사는 단수라는 점도 삼위일체를 암시하는 하나의 힌트처럼 제시합니다. 다행히 영상도 이것들만으로 삼위일체가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선을 긋는데, 이 신중함은 좋습니다. 그러나 ‘에하드’가 집합적 하나를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곧 하나님이 복수 인격으로 구성된 존재라는 뜻은 아니며, ‘엘로힘’의 형태 역시 그것만으로 삼위일체의 증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하나 되심을 먼저 온전히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성은 세 존재가 하나의 목적과 사랑으로 연합하여 이루는 하나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영상이 창세기 126절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를 설명하면서 ‘혼자가 아니었던 겁니다’, ‘하나님 안에는 이미 서로 대화하고 의논하시는 우리가 계셨던 ’이라고 말하는 대목은 더욱 조심해서 보아야 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창조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을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의 형성을 다루는 말씀의 속뜻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창1:26의 ‘우리’를 곧바로 영원 전부터 서로 의논하던 세 신적 위격의 대화로 읽는 것은 AC의 해석과 상당히 멀어집니다. 더구나 ‘서로 대화하고 의논하시는 우리’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성부가 성자에게 말하고 성자가 성부에게 응답하며 성령이 그 옆에 계시는 세 신적 주체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전통적 삼위일체 교리에서 가장 우려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은 ’이라고 고백하면서 생각 속에서는 세 분을 그리게 되는 것입니다.

 

영상이 가장 강력한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요단강에서 예수께서 세례받으시는 장면입니다. 물속에는 성자, 비둘기같이 내려오는 성령, 하늘에서는 성부의 음성이 있으므로 ‘성부, 성자, 성령 분이 같은 순간에 각자의 자리에서 동시에 나타났다’고 설명하며, 이것이 한 분이 세 역할을 하는 ‘1 3’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삼위일체를 단순한 양태론, 곧 한 하나님이 때로는 아버지 역할을 하고 때로는 아들 역할을 하고 때로는 성령 역할을 한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상이 경계하는 단순한 ‘1 3역론’에 스베덴보리를 넣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세례 장면이 ‘영원히 서로 구별되는 신적 인격’을 증명하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은 실제적인 구별이지만 세 하나님 사이의 구별이 아닙니다.

 

특히 주님의 성육신과 영화의 과정에서는 아직 완전히 하나가 된 상태를 시간 속에서 이루어 가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복음서에는 아들이 아버지께 기도하고,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고, 성령이 임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곧바로 ‘영원 전부터 존재하던 인격이 잠시 장면에 동시에 등장했다’고 읽으면 성육신과 영화라는 거대한 과정이 사라져 버립니다. 성육신하신 주님은 단순히 이미 완성된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 인간의 옷을 입고 잠시 지상에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모친 마리아에게서 취한 인성을 통하여 시험을 겪으시고 악과 지옥을 이기시며 그 인성을 점차 신성과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 나타나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이해할 때에는 이 ‘영화’의 과정이 반드시 함께 고려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 영상에서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 있습니다. 9분대에 등장하는 ‘태양 비유’입니다. 영상은 하나의 태양에서 ‘, , 생명을 살리는 에너지’가 나온다고 설명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모습은 셋이지만 본질은 완전히 하나’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뜻밖에도 스베덴보리의 신학을 설명하기에 훨씬 적합한 방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신적 지혜를 태양의 열과 빛에 상응시켜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의 태양에서 열과 빛이 나오듯 신성의 근원이 나뉘어 여러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성이 서로 구별되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발출합니다. 따라서 이 영상은 여기에서 조금만 방향을 달리했더라면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 이해에 상당히 가까이 갈 수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비유를 제시한 직후 다시 ‘성부가 계획하고, 성자가 실행하고, 성령이 적용한다’는 세 주체의 분업 구조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복음주의 교회에서 삼위일체적 구원을 설명할 때 매우 익숙하고 교육적으로도 이해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자칫 ‘성부라는 분이 계획하고, 성자라는 다른 분이 지상으로 내려와 값을 치르고, 성령이라는 다른 분이 그것을 인간에게 전달한다’는 구조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영상의 ‘예수님은 번의 죽음으로 우리의 값을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갚아주셨습니다’라는 문장은 전통적인 대속·형벌대속적 구원론과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십자가는 구속의 핵심적인 마지막 시험이며 영화의 완성이지만, 성부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형벌의 값을 성자가 대신 지불하여 성부의 태도를 바꾸었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육신 전에는 진노하시다가 성자의 희생 때문에 인간을 사랑하게 되신 분이 아닙니다. 바로 그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랑 때문에 친히 인간에게 오셔서 지옥을 정복하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심으로 인간에게 다시 구원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영상 후반에 제시하는 ‘삼위일체를 일상에서 누리는 다섯 가지 실천법’에서도 이 차이는 매우 실제적으로 나타납니다. 영상은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를 주관해 주세요. 예수님,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성령님, 오늘 저를 인도해 주세요’라고 각각 부르도록 권하고, 찬송도 1절은 성부, 2절은 성자, 3절은 성령께 드리라고 하며, 하루의 감사 역시 세 분에게 역할별로 나누어 드리도록 권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문제 제기가 실제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이것을 오랫동안 반복하면 신자의 마음속에는 자연스럽게 세 개의 신적 중심이 형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기도할 때는 세 분을 차례로 찾아가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새 교회 신학에서 중심은 ‘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부는 주님 밖에 따로 계시는 또 다른 신적 인격이 아니라 주님의 내적 신성이며, 성자는 그 신성이 세상에서 취하셨다가 영화하신 신적 인간이며,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발출하여 인간에게 역사하시는 신적 진리와 신적 활동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성부를 건너뛰는 것도 아니고 성령을 제외하는 것도 아닙니다. 한 분 주님께 나아감으로써 신성 전체에 나아갑니다. 이 점에서는 오히려 영상 자체가 14분대에 말한 ‘여러분은 기도할 때마다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와 만나고 있는 겁니다’라는 표현이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라면 그것을 ‘ 분이 동시에 기도를 듣는다’고 설명하기보다 ‘ 주님 안에 신성의 충만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을 것입니다.

 

영상의 신학적 결론은 마지막 부분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런데 혼자서는 사랑할 없다. 그러므로 창조 이전부터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서로 사랑하고 계셨다.’ 그리고 그 사랑이 넘쳐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설명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대목이 스베덴보리와 전통적 삼위일체론의 차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은 하나님 안에 사랑을 주고받는 세 인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신성 자체가 사랑 그 자체이며 지혜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본질에는 자신 밖의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그 존재에게 자신의 것을 주며, 그 존재와 결합하기를 원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적 사랑은 창조를 향합니다. 인간과 천국을 창조하신 것도 사랑할 대상을 필요로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완전한 신적 사랑 자체가 자신의 선과 행복을 다른 존재에게 나누어 주려 하기 때문입니다. 영상의 논리를 끝까지 밀고 가면 ‘사랑이 되기 위해 하나님 안에 최소한 복수의 인격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되지만,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의 단일성은 결핍이나 고독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한한 사랑과 지혜와 생명의 완전한 하나 됨입니다.

 

그렇다고 이 영상을 ‘삼위일체를 잘못 가르치는 영상’이라고 단순하게 평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전통적 기독교가 지키고자 했던 매우 중요한 진리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신적이라는 것, 성령은 단순한 비인격적 힘으로 축소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구원 전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영상은 진지하게 붙들고 있습니다. 또한 고난 속에서 외적 상황의 변화보다 먼저 마음이 변화되고 평안을 얻는다는 후반부의 메시지도 매우 귀합니다. 이것은 ‘문제 해결’ 자체보다 인간의 내적 상태와 거듭남을 중요하게 보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충분히 귀하게 받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영상에는 한 가지 일관된 긴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라고 계속 말하면서 실제 설명에서는 성부·성자·성령을 각각 생각하고, 말하고, 사랑하고, 계획하고, 행동하는 세 신적 주체로 그립니다. 그래서 ‘셋이 완벽하게 하나로 움직인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독자의 내적 사고에는 결국 세 분이 남기 쉽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론은 이 문제에 대해 매우 급진적이면서도 단순한 답을 내놓습니다. ‘삼위일체를 버리지 말라. 그러나 삼위를 영원한 인격에게 나누지 말라. 삼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사람에게 영혼과 몸과 그에게서 나오는 활동이 있다고 해서 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듯, 주님 안에는 성부라 불리는 신성 자체, 성자라 불리는 신적 인간, 성령이라 불리는 발출하는 신성이 있습니다. 이 셋은 세 하나님이 서로 완벽하게 협력하여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삼위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핵심 질문도 ‘ 분이 어떻게 하나가 되는가?’에서 ‘ 하나님 안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가 어떻게 존재하는가?’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 제목 ‘그런데 아직도 어려운 삼위일체’에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답한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삼위일체가 어려운 까닭은 반드시 하나님 자체가 모순적인 신비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분이라고 고백하면서 분을 생각하도록 배워 왔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삼위일체를 없애지 않습니다. 오히려 흩어져 있던 삼위를 다시 주님 안에 모읍니다. 그때 성부께 것인가, 성자께 것인가, 성령께 구할 것인가 하는 신자의 오래된 혼란도 새로운 아래 놓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면 됩니다. 그분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번 영상에서 가장 역설적인 부분입니다. 영상은 ‘삼위일체의 안개를 걷어 주겠다’고 시작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그 안개가 완전히 걷히는 지점은 ‘ 분이 어떻게 하나인가’를 더 정교하게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 셋이 주님 안에서 어떻게 하나인가’를 보는 데 있습니다. 그 순간 삼위일체는 세 하나님을 억지로 하나라고 이해해야 하는 난제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랑 자체로 계시고, 인간에게 보이도록 오셨으며, 지금도 자신의 영으로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구원의 한 질서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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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에서 강사가 다루는 본문은 역대상 49-10절의 유명한 ‘야베스의 기도’입니다. 한때 한국 교회에서도 ‘나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라는 구절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했던 기도입니다. 그 과정에서 ‘지경’은 사업의 확장, 재산의 증가, 사역의 성장, 영향력의 확대 같은 것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야베스의 기도가 대표적인 ‘복을 구하는 기도’로 자리 잡았습니다. 강사가 문제 삼는 것도 바로 이 지점입니다. 그는 히브리어 본문을 자세히 살피면서 마지막 구절을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고만 읽을 것이 아니라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게 하옵소서’라고도 읽을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그렇게 되면 야베스의 기도는 ‘하나님, 나를 잘되게 주십시오’라는 기도에서 ‘하나님, 내가 남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되지 않게 주십시오’라는 기도로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볼 때 바로 이 방향 전환은 매우 주목할 만합니다.

 

먼저 히브리어 자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대상 49절에서 야베스의 어머니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고 말하는데, 여기 사용된 히브리어 ‘오체브(עֹצֶב)는 고통, 슬픔, 수고 같은 뜻을 가집니다. 그리고 ‘야베스(יַעְבֵּץ)라는 이름과 이 단어 사이에는 분명한 언어유희가 있습니다. 실제로 여러 번역과 주석도 이 점을 인정합니다. 다만 영상에서 설명하듯 야베스라는 이름이 단순히 ‘오체브의 자음 순서를 바꾼 단어’라고 어원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조금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본문이 두 단어의 유사한 소리를 이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성경의 이름 풀이에서는 현대 언어학적 어원과 문학적인 언어유희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야베스라는 이름과 고통을 뜻하는 오체브 사이에 의도적인 말놀이가 있다’고 하는 정도가 가장 안전합니다. 더구나 고유명사 야베스의 첫 요드(י)를 곧바로 히브리어 미완료형의 접두사라고 분석하는 것 역시 지나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고유명사가 되면 그 자체로 이름이므로, 일반 동사의 활용형처럼 단순하게 역분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본문 저자가 ‘야베스 - 고통 - 근심’이라는 음성적 연결을 독자에게 의식시키고 있다는 강사의 큰 관찰은 옳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10절 끝의 ‘레빌티 오츠비(לְבִלְתִּי עָצְבִּי)입니다. 여기의 ‘오츠비’는 ‘고통하다, 슬프게 하다’와 관련된 동사의 부정사 형태에 1인칭 단수 접미사가 붙은 것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부정사에 붙은 인칭 접미사는 문맥에 따라 행위의 주체처럼 이해되기도 하고 객체처럼 이해되기도 하기 때문에, 강사가 소개한 두 방향의 가능성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 영어 번역들도 갈립니다. NASBNET 같은 번역은 대체로 ‘그것이 나를 아프게 하지 않도록’, 곧 야베스가 고통받지 않도록이라는 방향으로 번역하지만, NKJVHCSB 계열은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도록’이라는 방향을 취한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강사가 말하는 ‘내가 고통을 야기하지 않게 주십시오’는 임의로 만들어 낸 번역은 아닙니다. 다만 영상에서 ‘킹제임스 번역이 저처럼 해석했다’고 말한 부분은 정확히는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통적인 KJV는 ‘that it may not grieve me’, 곧 ‘그것이 나를 근심하게 하지 않도록’이라고 번역하며, ‘that I may not cause pain’이라고 한 것은 NKJV입니다. 작은 차이 같지만 히브리어 해석을 중심으로 하는 영상이므로 이 구분은 중요합니다.

 

더구나 이 절의 히브리어는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습니다. ‘웨아시타 메라아(וְעָשִׂיתָ מֵּרָעָה)라는 부분 자체가 해석상 어려움이 있는 표현입니다. 많은 번역본은 문맥을 따라 ‘나를 악에서 지켜 주시고’, ‘재앙으로부터 보호하시고’와 같이 이해하지만, 마소라 본문의 문법을 문자 그대로 풀면 매끄럽지 않습니다. NET 성경도 이 대목의 히브리어가 어렵다는 점을 주석에서 명시하고 다른 본문 가능성까지 논의합니다. 그러므로 10절 마지막을 하나의 문법 분석만으로 완전히 해결됐다고 말하기보다는, ‘본문 자체가 여러 해석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가운데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도록이라는 이해도 실제 번역 전통 속에 존재한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오래된 유대교 주석 전통에서는 대체로 야베스 자신에게 손해와 고통이 닥치지 않게 해 달라는 의미로 읽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남에게 고통을 주지 않게’라는 해석은 매우 아름답고 문법적으로 가능한 독법 가운데 하나이지만, 전통적 해석을 폐기하는 결정적 번역이라고까지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나에게 고통이 오지 않게 주십시오’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곧바로 기복주의라고 규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님께 보호와 건강과 평안과 생계와 필요한 자연적 복을 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무엇을 위해 구해지는가입니다. ‘나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가 ‘ 소유를 늘려 주십시오’, ‘나를 유명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 사역을 남들보다 크게 만들어 주십시오’라는 자기중심적 욕망으로 변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맡기신 쓰임을 더 잘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자연적 조건과 능력과 기회를 구한다면 같은 말도 전혀 다른 기도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외적 행위 자체보다 그 행위 안에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목적으로 삼는지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야베스의 기도의 핵심은 ‘복을 구했느냐, 복을 구하지 않았느냐’가 아닙니다. ‘ 복의 중심에 누가 있는가’입니다. 우리의 proprium은 복조차도 자기 자신을 향하게 만듭니다. ‘주님, 나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라고 하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내가 인정받게 주십시오’, ‘ 이름이 높아지게 주십시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성공하게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같은 ‘지경’을 구하면서 ‘제가 많은 사람에게 선을 행할 있게 하시고, 책임을 감당하게 하시며, 주님께 받은 것을 넓게 쓰게 하십시오’라고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똑같은 기도라 하더라도 내적 의미에서는 전혀 다른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강사가 마지막 구절을 ‘내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 않게 주십시오’라고 읽은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놀라울 만큼 잘 만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반복해서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을 기독교적 삶의 첫째요 본질적인 것으로 말합니다. ‘신적 섭리265번에서도 악을 죄로 여겨 삼가는 것이 기독교 종교의 본질이라고 설명하며, ‘참된 기독교535번에서는 체어리티의 첫째가 악을 피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나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십시오’라는 기도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악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나가지 못하게 주십시오. 말과 행동과 욕망 때문에 다른 사람이 상처받지 않게 주십시오. 그리고 악을 단순히 억제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것이 주님께 죄임을 보고 돌이키게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도록’이라는 기도조차 단순한 도덕적 착함을 넘어가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자신의 내면을 정결하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외적 삶에서 악을 죄로 여기고 싸우며 물리칠 때, 실제로 그 악의 욕망을 내면에서 제거하시는 분은 주님이라고 설명합니다.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1764) 145번은 사람이 악을 죄로 여기고 그것을 그만두기로 결심하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싸움이 시작되고, 그 과정에서 주님께서 악한 욕망을 제거하고 선의 애정을 심으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깊은 야베스의 기도는 ‘제가 남에게 피해를 끼치도록 성격을 관리하겠습니다’가 아니라 ‘주의 손이 나와 함께하사, 제가 악을 행하지 않도록 하시고, 안에서 악을 일으키는 것까지 주님께서 다스려 주십시오’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야베스의 기도 가운데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라는 구절과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따라서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와 ‘주의 손이 나와 함께하게 하십시오’와 ‘악에서 지켜 주십시오’와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게 하십시오’를 서로 떨어진 네 가지 소원으로만 읽지 않고 하나의 거듭남의 흐름으로 읽어 볼 수도 있습니다. ‘주님, 제게 주신 선과 진리의 삶의 영역을 넓혀 주십시오. 그러나 그것을 힘으로 소유하려 하지 않게 하시고, 언제나 주님의 손이 저와 함께하게 하십시오. 안의 악이 넓어진 지경 안으로 흘러들지 않게 하시며, 제가 받은 능력과 영향력이 오히려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하는 도구가 되지 않게 주십시오.’ 이렇게 읽으면 ‘지경의 확대’는 성공의 확대가 아니라 쓰임의 확대가 됩니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더 많은 사람을 지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고, 재물이 많아질수록 더 많이 소유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며, 목회자의 영향력이 넓어질수록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은 영혼을 주님께 연결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대상 410절에 스베덴보리가 직접 붙인 속뜻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거듭남과 쓰임의 교리 안에서 이 기도를 읽을 때 자연스럽게 열리는 적용입니다.

 

이 지점에서 한국 교회의 이른바 ‘야베스의 기도 열풍’도 조금 다르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는 사실 자체를 기복주의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지나칩니다. 성경에는 자연적 복을 구하는 기도가 있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연적 삶도 섭리하십니다. 그러나 자연적 복을 최종 목적으로 만들 때 신앙의 질서가 뒤집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을 섬겨야 합니다. 재물과 건강과 지위와 지식과 능력과 영향력은 모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선한 쓰임을 위한 수단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버릴 것이 아니라 그 기도의 중심을 바꾸어야 합니다. ‘ 지경을 넓혀 것을 크게 주십시오’가 아니라 ‘주님께서 제게 맡기실 있는 쓰임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영상의 가장 귀한 문장은 처음과 끝에 반복된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도록 그런 내가 있도록 인도해 달라.’ 이것은 매우 실제적인 회개의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 사람 때문에 내가 고통받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시선을 다시 나 자신에게 돌리게 합니다. ‘ 사람의 ’은 그 사람이 주님 앞에서 다룰 문제이고, 내가 지금 살펴야 하는 것은 ‘ 안의 ’입니다. ‘나는 누구에게 고통을 주고 있지는 않은가? proprium 자존심과 지배욕과 인정욕과 탐욕과 분노와 냉혹함 때문에 가까운 사람이 힘들어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것을 보는 것이 자기 성찰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발견한 악을 ‘ 성격이 원래 그래’라고 합리화하지 않고 ‘이것은 주님께 죄입니다’라고 인정하고 피하려 할 때 거듭남이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을 그토록 강조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강사의 해석을 이렇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히브리어 주해 차원에서는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도록’이라는 번역을 유일한 정답으로 밀어붙이기에는 조심할 점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내가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이라는 해석 역시 충분한 문법적·번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실제 마소라 본문 자체에도 난해한 부분이 있습니다. 또한 영상에서 KJVNKJV를 혼동한 작은 오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강사가 야베스의 기도를 자기중심적인 복의 청원에서 타인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구하는 기도로 전환한 것은 매우 좋은 신학적 통찰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내게 고통이 없게 하옵소서’와 ‘내가 고통을 주지 않게 하옵소서’ 가운데 하나를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둘이 함께 갈 수 있습니다. ‘주님, 악으로부터 저를 보호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무엇보다 제가 악의 통로가 되지 않게 하십시오.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proprium 지경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흘러갈 쓰임의 지경이 되게 하십시오. 주의 손이 저와 함께하시되, 손으로 주변의 장애물만 치워 달라고 하지 않게 하시고, 먼저 안의 악을 보게 하시며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하게 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야베스의 기도는 더 이상 ‘고통 없는 인생과 성공을 보장받는 주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을 받을수록 선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지경이 넓어질수록 많은 쓰임을 감당하게 하시며, 힘이 커질수록 아무도 해치지 않게 하시고, 무엇보다 모든 과정에서 주님의 손을 떠나지 않게 주십시오’라는 거듭남의 기도가 됩니다. 저는 야베스의 짧은 기도를 오늘 우리가 다시 드린다면, 바로 이 지점까지 가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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