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RC.037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는 신자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전구한다’ – 주님께 직접 나아가는 기도에 마리아의 중재가 필요한가?

 

해설

‘마리아는 신자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전구한다.’ 이것은 천주교의 마리아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전구’(轉求, intercession)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전구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는 행위를 말합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친 후에도 천국에서 신자들을 사랑하며, 그들을 위하여 주님께 기도한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성모송의 마지막 부분에도 나타납니다. 신자들은 마리아에게 자신들을 위하여 지금과 죽을 때에 기도해 달라고 청합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어머니였던 마리아가 천국에서도 신자들을 모성적 사랑으로 돌보고, 그들이 주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도록 돕는다는 신앙적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을 접하면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마리아가 천국에 있다는 사실과 지상의 신자들이 드리는 기도를 듣는다는 사실은 같은 것일까요? 천국의 천사들과 구원받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직접 기도를 드려도 된다는 근거가 될까요? 무엇보다 주님께서 무한한 사랑과 자비 자체이시라면, 인간이 그분께 나아가기 위하여 마리아의 도움을 먼저 요청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 문제는 마리아에게 기도를 청하는 관행의 적절성을 넘어, 기도의 대상과 영적 교통의 질서, 주님의 유일한 중재, 그리고 천국의 모든 생명과 권능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를 묻는 중요한 신학적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62항은 마리아가 천상의 영광에 들어간 후에도 모성적 역할을 계속하며, 여러 형태의 전구를 통하여 신자들이 구원의 은총을 받도록 돕는다고 설명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969항 역시 이러한 내용을 가르치며, 마리아를 ‘변호자’(Advocate), ‘도움이신 분’(Helper), ‘중재자’(Mediatrix) 등의 칭호로 부르는 전통을 소개합니다. 그러나 970항은 마리아의 모성적 역할이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재를 약화시키거나 대체하지 않으며, 그 모든 구원적 영향력이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재에 전적으로 의존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천주교가 마리아를 그리스도와 동등한 구원자로 가르치거나, 그에게 독립적인 신적 능력이 있다고 선언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전구를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에 참여하는 종속적인 협력으로 설명합니다. 다만 여기서 구별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마리아의 전구가 주님의 권능에 종속되어 있다는 설명과, 마리아가 실제로 지상의 신자들이 드리는 청원을 알고 그들을 위하여 전구한다는 사실이 신적으로 확증되었다는 주장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검토해야 할 핵심은 후자의 주장입니다.

 

천주교가 전구를 설명할 때 중요하게 사용하는 개념은 ‘성도의 통공’(聖徒의 通功, communion of saints)입니다. 이는 지상에서 살아가는 신자들과 죽은 후 정화를 받는 이들, 그리고 천국의 성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영적 공동체를 이룬다는 가르침입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954–959항은 죽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의 영적인 결합을 끊지 못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956항은 천국의 성인들이 지상의 신자들을 위하여 전구하며, 이러한 형제적 사랑이 지상의 신자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리아의 전구는 성인들의 일반적인 전구와 연결되지만, 그가 주님의 어머니이자 교회의 영적 어머니라는 특별한 지위 때문에 더욱 뛰어난 모성적 역할로 이해됩니다. 성경 역시 살아 있는 신자들이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약5:16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병이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권하며, 바울도 여러 서신에서 성도들에게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므로 전구라는 행위 자체를 잘못된 것으로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이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과, 천국에 있는 특정한 성인에게 직접 기도를 청하는 일이 동일한 영적 질서에 속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천주교는 성도의 통공을 근거로 두 행위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고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영계의 질서를 설명하면서 이 문제를 다르게 가르칩니다.

 

2025년 11월 4일 바티칸 신앙교리부가 발표한 ‘신자들의 어머니’(Mater Populi Fidelis)는 이러한 가르침을 더욱 명확하게 정리했습니다. 이 문서의 24–29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이시며, 그분의 중재는 다른 피조물의 도움으로 보충해야 하는 불완전한 중재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37–42항은 마리아의 모성적 전구를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재에 참여하는 특별한 협력으로 이해합니다. 특히 38항은 마리아의 기도가 다른 성인들의 전구와 구별되는 특별한 가치와 효력을 지닌다고 설명하고, 41항은 마리아가 천국에서도 신자들의 기도에 모성적으로 동참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이 문서가 마리아의 역할을 단순한 상징이나 신앙의 모범으로 축소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실제적인 천상 전구를 인정하면서도, 그가 은총을 독립적으로 만들어 내거나 주님의 자비를 대신 관리하는 존재는 아니라고 구별합니다. 이러한 설명에는 주님의 유일한 구원을 보존하려는 중요한 신학적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전구가 그리스도께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지상의 수많은 신자가 드리는 청원을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알고 받아들이는가 하는 질문까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 문제는 자연계와 영계 사이의 영적 교통이 어떤 질서로 이루어지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천주교가 마리아의 전구를 설명할 때 자주 제시하는 성경은 요2:1–11의 가나 혼인 잔치입니다.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마리아는 예수님께 그 사정을 알리고, 하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권합니다. 천주교는 여기서 마리아가 사람들의 필요를 민감하게 살피고 그것을 주님께 아뢰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해석에는 인정해야 할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건과 후대의 신학적 적용은 구별해야 합니다. 요2장의 마리아는 지상에서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고 있던 인간이었으며, 혼인 잔치의 구체적인 상황을 직접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 사정을 예수님께 알렸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곧 사후에도 지상의 모든 신자가 드리는 기도를 듣고 주님께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이 사건에서 실제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분은 마리아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권능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으며, 하인들에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권했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의 중심은 마리아의 독립적인 중재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를 마리아의 전구를 보여 주는 신앙적 표상으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천국에서 이루어지는 전구의 구체적인 작용을 입증하는 직접적인 근거로 삼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천주교는 천사들이 인간을 돕는 말씀과 계8:3–4에서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는 환상도 천상 전구의 근거로 사용합니다. 이러한 성경적 연결 역시 그 의미를 정확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천사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인간을 돕는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곧 인간이 특정한 천사나 성인에게 직접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계8장의 환상도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상징적 장면이지, 마리아에게 직접 전구를 요청하라는 명령은 아닙니다. 한편 딤전2:5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한 분이시며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가르칩니다. 이 말씀은 살아 있는 신자들이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을 금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고 구원하시는 유일한 중재자가 주님이심을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따라서 살아 있는 신자들의 상호 기도, 천사들의 도움, 천국의 성인들에게 드리는 전구 요청, 그리고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적 중재는 각각 구별해야 합니다. 이들을 모두 하나의 의미로 취급하면 성경이 직접 가르치는 내용과 후대의 신학적 해석 사이의 차이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살펴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에서 인간이 죽은 후에도 완전한 인간의 형상을 지니고 영계에서 살아간다고 설명합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서로를 위한 선한 쓰임 가운데 살아갑니다. 따라서 죽음 이후의 인간이 이웃을 향한 사랑을 잃거나 다른 존재를 위한 선한 마음을 모두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천국의 삶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에 기초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천국의 사랑이 곧 지상의 인간이 원하는 특정한 영적 존재를 자유롭게 불러 자신의 청원을 전달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와 영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가르치지만, 그 연결이 인간의 선택에 따라 특정한 성인이나 천사를 기도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모든 참된 영적 교통은 주님의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며, 그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 자신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천사들이 인간을 사랑하고 도울 수 있다는 사실과 그들에게 직접 기도하는 행위가 정당하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것은 마리아의 전구뿐 아니라 모든 성인에게 드리는 기도를 검토할 때 적용해야 할 원칙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스베덴보리의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824–825항에서 매우 직접적으로 나타납니다. TCR.824에서 스베덴보리는 영계에 들어온 가톨릭 신자들, 특히 수도자들이 자신들이 지상에서 공경하던 성인들을 찾는 모습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찾는 성인들은 천국이나 영계의 다른 곳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지상의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기도하고 공경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기록합니다. 또한 자신이 성인으로 공경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러한 공경을 원하는 영들은 오히려 영적 혼란에 빠진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TCR.825에서는 성인들에게 드리는 청원이 실제로 그들에게 들리지 않는다고 더욱 명확하게 말합니다. 그는 지상의 신자들이 성인들에게 전하는 기도가 그들에게 도달하여 전달된다고 생각하는 관행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이 두 항목은 스베덴보리의 성인 전구에 관한 입장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직접 근거입니다. 여기서 그의 비판은 단순히 성인들의 지위가 주님보다 낮다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지상의 신자가 천국의 성인들에게 직접 청원하고, 그들이 그 청원을 듣는다고 생각하는 관행 자체가 영계의 실제 질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 내용은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경험과 그에 근거한 가르침으로 제시한 것이므로, 성경 본문과 동일한 종류의 역사적 증언으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그의 신학 안에서는 성인에게 드리는 기도의 타당성을 판단하는 명백한 자료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피해야 합니다. 천국의 성인들이 지상의 신자들이 자신들에게 드리는 청원을 듣지 못한다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이 천사들이 인간을 돕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천사들이 주님의 섭리 안에서 인간을 보호하고 인도하며, 악령들의 영향으로부터 인간을 지키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자신의 독립적인 능력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사랑과 보호의 역사에 참여합니다. 따라서 천사들의 도움은 실제적이지만 그 근원은 언제나 주님입니다. 인간이 자신에게 어떤 천사가 함께하는지 알지 못하더라도 천사의 보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도움은 인간의 의식에 직접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인 도움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도움을 받기 위하여 특정한 영적 존재를 직접 불러야 한다는 주장을 구별하는 일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은 천사들에게 직접 기도함으로써 주님의 도움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나아가고 주님께서 자신의 섭리에 따라 천사들을 통하여 인간을 보호하고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천국의 사랑과 선한 쓰임을 인정하는 일은 성인들에게 드리는 기도를 정당화하는 일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마리아의 전구와 일반 성인들의 전구도 비교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모든 성인의 전구가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재에 종속되어 있으며, 마리아의 전구는 그 가운데 특별한 모성적 성격과 뛰어난 지위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성인들에게 직접 드리는 청원이 실제 영계의 질서와 일치하지 않는다면,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였다는 사실만으로 그에게 예외적인 기도 청취 능력이 주어졌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TCR.827에서 자신이 영계에서 마리아와 만났다고 기록하면서, 마리아가 주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예배한다고 전합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주님과 나란히 신적 권능을 행사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인간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이 기록이 마리아의 모든 천상 활동을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그에게 어떠한 사랑이나 선한 쓰임도 없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마리아가 지상의 모든 신자가 드리는 기도를 들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TCR.824–825의 직접적인 성인 기도 비판과 TCR.827의 마리아에 관한 기록을 함께 고려하면, 마리아에게 전구를 청하는 관행을 신적으로 확정된 진리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마리아가 복된 여인이라는 사실과 그에게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주장은 별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더욱 근본적인 질문은 인간이 주님께 기도할 때 그 기도가 주님께 도달하기 위하여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 7–12항에서 천국의 모든 선과 진리가 오직 주님에게서 비롯된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은 인간이 자신의 필요를 말씀드리기 전에는 알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며, 다른 피조물이 인간의 사정을 설명해야만 비로소 그를 이해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주님은 무한한 사랑과 지혜 자체이시며, 인간의 내적인 상태와 필요를 모든 피조물보다 완전하게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주님께 기도하는 일은 그분에게 새로운 정보를 알려 드리거나, 원래 베풀지 않으려 하셨던 은총을 설득하여 받아 내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주님께 열고,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이해와 의지를 주님의 뜻에 맞추어 가는 영적인 행위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리아의 전구가 없으면 주님의 자비에 가까이 나아가기 어렵다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물론 천주교의 공식 교리 역시 마리아의 전구가 없으면 주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 직접 전구를 청하는 관행을 특별한 신앙적 도움으로 제시한다면, 그러한 방식이 주님께 직접 나아가는 기도의 질서에 실제로 부합하는지 검토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은 인간에게 이미 가까이 계시며, 인간이 그분께 나아가기 위하여 반드시 거쳐야 하는 별도의 천상 인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인간의 실제적인 신앙 감정과도 관련됩니다. 어떤 신자는 하나님을 엄격한 심판자로 생각하면서 그분께 직접 기도하기를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반면 어머니의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마리아에게는 자신의 연약함과 아픔을 더 쉽게 털어놓을 수 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감정 자체를 경솔하게 비판하거나 그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서로 다른 신앙적 배경과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주님께서는 각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선과 진리를 통하여 그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의 대상을 더욱 깊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리아가 주님보다 더 자비롭고 인간의 고통을 더 잘 이해하는 존재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주님의 사랑에 대한 이해가 아직 충분하지 않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모든 참된 모성애와 위로와 자비의 근원은 오직 주님 자신에게 있습니다. 천주교의 2025년 ‘신자들의 어머니’ 문서 역시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마리아의 전구를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경계합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특정한 신앙 감정을 비난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신앙이 궁극적으로 누구를 모든 사랑과 자비의 근원으로 인정하는가를 살피는 데 있습니다. 참된 신앙의 성숙은 우리를 주님께 직접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고, 주님께서 이미 우리를 완전하게 사랑하시는 분임을 깨닫도록 이끕니다.

 

마리아의 지상 생애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모습도 이러한 방향을 가리킵니다. 요2:5에서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권합니다. 눅1:38에서는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고 부르며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눅1:46–47에서는 자신의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하나님 자신의 구주를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에서 마리아는 자신에게 특별한 신적 권능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반드시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도록 이끄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진정으로 존중한다면 그가 보여 준 믿음과 순종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특별한 쓰임을 감당한 복된 여인이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하지만, 그러한 역사적 역할이 그를 영원한 기도 요청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앙의 귀중한 모범이 될 수 있다는 사실과 그에게 기도를 드리고 영적인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모든 천사와 구원받은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는 피조물이며, 그들이 지닌 모든 선한 쓰임의 근원은 오직 주님입니다. 참된 존중은 그들에게 주님의 권능을 나누어 부여하는 데 있지 않고,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교리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이웃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호 기도는 이웃을 사랑하고 서로의 짐을 지는 체어리티의 중요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의 인간이 천국의 특정한 성인들에게 직접 청원하고, 그들이 그 청원을 듣는다고 생각하는 관행을 영계의 실제 질서와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능력으로 인간을 돕지만, 인간은 그들에게 직접 기도함으로써 주님의 도움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마땅히 바라보고 의지해야 할 분은 오직 주님 자신입니다. 이는 천사들의 도움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도움의 시작과 끝이 주님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마리아 역시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된 복된 여인이었지만, 그에게 어떠한 사랑과 선한 쓰임이 있다면 그것 역시 주님에게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마리아에게 머무르거나 그를 거쳐야만 주님께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 각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을 알고 계시며, 우리가 마음을 열 때 사랑과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참된 기도의 목적은 어떤 천상 존재의 특별한 영향력을 얻는 데 있지 않고, 주님과의 직접적인 영적 결합 안에서 우리의 이해와 의지가 새로워지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결국 모든 기도의 궁극적인 대상과 모든 자비와 구원의 근원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SL.RC.037 해설)

 

요약

‘마리아는 신자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전구한다’라는 명제에는 신자들이 서로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전구를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재와 동등한 권능으로 가르치지 않으며, 그분의 구속과 은총에 종속된 모성적 협력으로 설명합니다. 특히 2025년 신앙교리부 문서는 주님의 자비가 부족하여 마리아가 이를 보충해야 한다는 이해를 경계합니다. 이러한 공식적인 구별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상의 신자들이 천국에 있는 마리아에게 기도를 청할 때 그가 실제로 그 청원을 알고 주님께 전구한다는 주장은 성경이 직접적으로 확정하는 내용을 넘어서는 신학적 주장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와 신자들의 상호 기도, 천사들의 도움에 관한 말씀들은 각각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마리아에게 사후의 전구를 요청하는 행위를 직접 명령하거나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TCR.824–825에서 천국의 성인들이 지상에서 자신들에게 드리는 기도를 알고 듣는다는 생각을 직접 비판하며, 그러한 관행이 실제 영계의 질서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이번 문제에서는 그의 주님론에서 도출되는 해석적 판단뿐 아니라 성인들에게 드리는 기도에 관한 직접적인 반론도 확인됩니다. 다만 이것이 천국의 천사들과 구원받은 인간들이 사랑을 잃거나 주님의 섭리 안에서 선한 쓰임을 감당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류의 핵심은 마리아를 복된 여인으로 존중하거나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랑의 행위를 인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마리아에게 특별한 기도 청취 능력과 전구의 역할이 부여되었다고 확정하고, 그에게 직접 청원하는 행위를 정당한 영적 교통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모든 천국의 선과 권능은 주님에게서 나오며, 주님은 이미 인간의 모든 내적인 필요를 알고 계시는 무한한 사랑과 자비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주님께 나아가기 위하여 마리아의 전구를 요청해야 할 신학적 필요는 없으며, 참된 기도는 주님께 직접 마음을 열고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이웃을 위하여 기도하고 서로를 사랑해야 하지만, 모든 영적 생명과 구원의 유일한 근원이신 주님 한 분만을 기도의 궁극적인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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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이며 모든 신자의 영적 어머니다.’ 이것은 천주교가 마리아에게 부여하는 ‘교회의 어머니’(Mother of the Church)와 ‘영적 모성’(靈的母性, spiritual motherhood)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천주교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육신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넘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와 교회 전체에 대하여 특별한 어머니의 역할을 지닌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마리아는 신자들을 모성적 사랑으로 돌보고, 그들이 그리스도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도록 도우며, 교회의 믿음과 순종을 보여 주는 특별한 모범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어떻게 모든 신자의 어머니라는 결론으로 이어질까요? 성경은 마리아가 교회 전체의 영적 어머니라고 직접 가르칠까요? 사람이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주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일인데, 여기에 마리아의 영적 모성이라는 별도의 관계가 필요한 것일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어머니’가 교회를 나타낸다고 가르치는데, 교회의 영적 모성과 마리아 개인에게 부여된 모성적 지위를 어떻게 구별해야 할까요? 이러한 질문은 단순히 마리아에게 사용하는 존칭의 적절성을 넘어, 인간이 누구에게서 영적 생명을 받고 어떤 과정을 통하여 거듭나는가를 묻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이 명제를 검토하려면 천주교의 공식적인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하고, 성경과 스베덴보리의 교회론 및 거듭남의 가르침에 비추어 그 의미와 한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입장을 확인해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53항은 마리아가 사랑으로 협력하여 그리스도의 지체인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태어나도록 도왔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지체들의 어머니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61항은 마리아가 순종과 믿음, 소망과 사랑으로 구세주의 구원 사업에 특별하게 협력했으므로 ‘은총의 질서 안에서 우리의 어머니’라고 가르칩니다. 62항은 그러한 모성적 역할이 마리아의 지상 생애에만 국한되지 않고 천상에서도 계속된다고 설명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963–970항 역시 이 가르침을 계승합니다. 특히 968항은 마리아가 인간의 초자연적인 생명을 회복시키는 구속의 역사에 특별하게 협력했다고 설명하며, 969항은 그가 천상에서도 신자들을 위한 모성적 돌봄과 전구를 계속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천주교의 영적 모성은 단순히 마리아를 존경할 만한 신앙의 선배로 기억한다는 뜻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과 특별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오늘날에도 신자들의 영적 삶을 돕는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이러한 역할을 그리스도에게서 독립된 권능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교회헌장 60항은 그리스도의 중재가 유일하며, 마리아의 모든 구원적 영향력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재에 의존한다고 명확하게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가 마리아를 영적 생명의 독립적인 근원으로 선언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공식 교리의 실제 의미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이 칭호의 역사적 발전도 중요합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64년 11월 21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3회기 폐막 연설에서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라고 선언했습니다. 여기서 교회란 성직자들만이 아니라 교회의 목자들과 모든 신자를 포함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이후 이 칭호는 가톨릭의 전례와 신심 안에서 더욱 널리 사용되었으며, 2018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결정에 따라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월요일을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영적 모성이라는 생각이 1964년에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 사상은 오랜 교회 전통 안에서 발전했으며, 마리아를 교회의 믿음과 사랑의 모범으로 이해하는 가르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천주교 역시 교회의 설립자와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며, 교회의 생명은 그분의 구속과 성령의 역사에서 비롯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라고 부른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교회의 창설자나 최고 통치자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칭호가 단순한 명예적 표현을 넘어 모든 신자와의 실제적인 영적 관계를 나타낸다고 설명한다면, 그러한 관계가 성경과 주님의 영적 질서에서 어떤 근거를 갖는지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2025년 11월 4일 바티칸 신앙교리부가 발표한 ‘신자들의 어머니’(Mater Populi Fidelis)는 특히 주목할 만한 문서입니다. 이 문서의 34–37항은 마리아의 영적 모성이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하지만,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모든 지체와 관계되는 모성으로 확장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마리아가 단순히 과거의 모범에 머무르지 않고, 오늘날에도 신자들을 위한 모성적 협력과 ‘전구’(轉求, intercession)를 감당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 문서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재를 약화시키거나, 마리아에게 그리스도와 나란히 서는 독립적인 구원적 역할을 부여하는 표현을 경계합니다. 특히 45–47항은 마리아가 하나님과 별도로 은총을 보관하거나 모든 은총이 반드시 그의 손을 통하여 전달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합니다. 마리아의 역할은 신자들이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받아들이도록 돕는 모성적 협력이며, 실제로 영적 생명을 주시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천주교의 공식 교리 자체가 마리아를 주님의 은총과 독립된 생명의 근원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분명한 의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구별을 인정하더라도 마리아 개인에게 모든 신자의 영원한 어머니라는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일이 신적으로 확정된 진리인지에 관한 질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천주교의 영적 모성론과 스베덴보리의 교회론을 비교해야 합니다.

 

천주교가 마리아의 영적 모성을 설명할 때 가장 중요하게 사용하는 성경은 요19:26–27입니다. 십자가 위에 계신 주님께서는 자신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마리아에게는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제자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직접적인 역사적 문맥에서 주님은 자신의 어머니를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맡기시고, 그 제자에게 마리아를 어머니처럼 돌보도록 하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도 어머니를 돌보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여기에서 더 깊은 신학적 의미를 발견합니다. 사랑하시는 제자가 모든 신자를 대표하며, 주님께서 마리아를 그 제자의 어머니로 맡기신 것은 교회 전체에 마리아를 영적 어머니로 주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마리아의 믿음과 순종을 교회의 삶과 연결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19:26–27은 모든 시대의 신자들이 마리아를 반드시 영적 어머니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직접 선언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이 말씀만으로 마리아가 천국에서 모든 신자의 영적 생명을 지속적으로 돌보는 특별한 권위를 받았다고 확정하기도 어렵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직접 기록한 사건과 그 사건에 부여한 후대의 신학적 해석을 구별해야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주님론은 중요한 관점을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102항에서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인성을 영화하셨으므로, 영화 이후의 주님을 여전히 마리아에게서 비롯된 자연적인 인성에 의하여 규정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러한 가르침의 근거 가운데 하나로 요19:26–27을 인용하며, 주님께서 마리아를 ‘어머니’가 아니라 ‘여자여’라고 부르신 사실에 주목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성경의 문자적 문맥과 스베덴보리의 신학적 해석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당시의 호칭 자체가 자연적인 모자 관계를 부정한다는 뜻은 아니며, 이 장면은 오히려 주님께서 마리아를 돌보시는 구체적인 사랑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주님의 영원한 신적 정체성이 마리아에게서 받은 자연적인 인성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주님의 지상 생애에서 실제로 어머니였다는 사실은 인정하되, 그 자연적인 모성을 근거로 영화된 주님과 교회 전체에 대한 영원한 모성적 권위를 도출하는 데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마리아를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맡기신 사건과 마리아에게 모든 신자의 거듭남을 돌보는 보편적 직분이 부여되었다는 주장은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성경에서 ‘어머니’가 지니는 영적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289–290항에서 창3:20의 하와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불린 이유를 해설합니다. 그는 여기서 ‘어머니’가 교회를 나타내며, ‘산 자’는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오는 믿음과 생명을 가진 사람들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AC.289는 아내와 어머니가 교회, 넓은 의미에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주님의 나라를 나타낸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AC.290은 참된 생명이 오직 주님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와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는 것은 어떤 한 여성이 모든 인간의 영적 생명을 직접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고 전달하는 교회의 영적 역할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AC.2691과 2717항에서도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머니를 교회와 연결하여 해석하며, 특히 진리에 대한 애정과 관계된 영적 교회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합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어머니가 지니는 속뜻은 단순한 자연적 출생을 넘어,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그들이 영적으로 살아나는 과정과 관계됩니다. 이것은 마리아의 영적 모성을 검토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입니다. 성경에서 어머니가 교회를 나타낸다는 사실과 마리아라는 역사적 인물에게 모든 신자의 보편적인 영적 모성의 권위가 주어졌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영적 의미는 성경의 다른 말씀에서도 확인됩니다. 갈4:26에서 바울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 자유자이며 우리의 어머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어머니는 특정한 인간 여성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는 자유와 생명을 지닌 영적 공동체를 나타냅니다. 또한 계12:1의 해를 입은 여자에 관하여 스베덴보리는 ‘계시록 해설’(Apocalypse Revealed, AR, 1766) 533항에서 그 여인이 새 하늘에 있는 주님의 새 교회와 땅 위에 세워질 새 교회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어머니와 여자가 교회의 영적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상응의 원리를 조심스럽게 적용해야 합니다. 어떤 여성이 교회를 나타내는 표상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 여성 개인에게 교회의 모든 영적 권위가 실제로 부여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한 모습은 교회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아름답게 보여 주는 신앙적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교회를 나타내는 모범이라는 주장과 그가 모든 신자의 영원한 어머니라는 주장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 원리는 역사적인 인물을 신격화하거나 그에게 특별한 종교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말씀 안에 담긴 주님의 선과 진리를 이해하도록 돕는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영적 출생의 근원을 살펴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요3:3–8에서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으며,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요1:12–13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여기서 ‘거듭남’(regeneration)은 인간이 주님에게서 새로운 영적 생명을 받는 과정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만큼 영적으로 새로워집니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말씀을 가르치고 진리의 삶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영적인 어머니의 쓰임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교회 자체가 생명의 근원인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말씀과 진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곳이며, 실제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인간으로 세상에 오시는 자연적인 출생에서 특별한 역할을 감당했지만, 다른 모든 인간의 영적 출생이 마리아에게서 비롯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교회론은 영적 모성의 중심을 특정한 역사적 인물보다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고 전하는 교회의 쓰임에 둡니다. 그리고 그 교회조차 모든 생명을 주님에게서 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천주교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 사이에 공통점과 차이가 함께 나타납니다. 천주교 역시 영적 생명의 유일한 근원이 마리아 자신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영적 모성은 그리스도의 구속과 은총에 종속되어 있으며, 신자들이 그리스도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도록 돕는 모성적 협력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리아 개인에게 모든 신자를 향한 지속적인 모성적 역할이 실제로 주어졌다고 고백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가르침에서 영적 어머니라는 표현은 우선 교회와 관계되며,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께서 말씀과 선과 진리를 통하여 이루시는 역사입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교회의 모범이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의 자연적인 모성을 모든 신자를 향한 보편적이고 영원한 영적 직분으로 확장하는 데에는 별도의 근거가 필요합니다. 특히 천주교가 마리아의 영적 모성을 천상에서 계속되는 전구와 돌봄의 역할로 설명하는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와 함께 검토해야 합니다. 천국의 천사들이 서로 사랑하며 선한 쓰임을 감당한다는 사실과, 특정한 한 인간에게 모든 신자를 향한 특별한 모성적 권위가 부여되었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의 구체적인 내용은 마리아의 전구와 중재에 관한 후속 해설에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TCR.827에서 자신이 영계에서 마리아와 만난 경험을 기록합니다. 그는 마리아가 자신은 주님의 어머니였지만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인간적인 것을 벗으시고 인성을 신적으로 만드셨으므로 이제는 그분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예배한다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이 기록은 성경에 기록된 사건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경험으로 보고한 내용이므로, 자료의 성격을 정확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마리아 이해를 직접 보여 주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주님을 예배하는 영계의 인간으로 나타나며, 모든 신자의 영적 생명을 낳거나 보존하는 독립적인 권위자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기록에 특별한 모성적 직분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마리아가 천국에서 어떠한 사랑이나 쓰임도 감당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천국론에 따르면 모든 천사는 자신에게 맡겨진 선한 쓰임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특별한 쓰임을 감당했다는 사실과, 그가 영원히 모든 인간의 영적 어머니로서 특별한 천상 권위를 행사한다는 주장은 동일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전자는 성경과 스베덴보리의 저작이 직접 뒷받침하지만, 후자는 그의 직접적인 가르침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이 문제는 실제 신앙생활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인간은 어머니의 사랑을 통하여 위로와 보호, 따뜻함과 돌봄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어머니의 사랑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성경 역시 사49:15에서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잊을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시면서, 설령 어머니가 자식을 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잊지 않으신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어머니의 사랑은 주님의 사랑을 이해하도록 돕는 비유이지만, 주님의 사랑이 부족하여 다른 존재가 그것을 보충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참된 모성애의 근원은 주님 자신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특별히 자비로운 영적 어머니로 생각하면서 주님께서는 멀고 엄격하시지만 마리아는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받아 주는 분이라고 여긴다면, 그 신앙적 이해는 다시 살펴야 합니다. 주님은 이미 무한한 사랑과 자비 자체이시며, 인간이 그분께 나아가기 위하여 반드시 다른 피조물의 모성적 보호를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과 개인적인 통념을 구별해야 합니다. 2025년 신앙교리부 문서는 마리아를 주님의 엄격한 심판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별도의 피난처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경계합니다. 따라서 문제는 어머니의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의 표상을 주님과 인간 사이에 반드시 필요한 별도의 영적 권위나 관계로 확정하는 데 있습니다.

 

마리아의 믿음과 순종을 존중하는 일은 이러한 신학적 구별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눅1:38에서 마리아는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고 부르며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눅1:46–47에서는 자신의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하나님 자신의 구주를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요2:5에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한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리아가 교회의 믿음과 순종을 보여 주는 중요한 모범이 될 수 있음을 알려 줍니다. 그는 자신의 특별한 지위를 주장하기보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이끄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교회의 믿음과 순종의 본보기로 기억하는 데에는 귀중한 신앙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과 순종이 모든 신자에게 마리아와의 직접적이고 영원한 모자 관계를 형성한다는 사실까지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참된 위대함은 특별한 칭호나 지위를 받았는가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얼마나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제적인 삶에서 실천하는가에 있습니다. 마리아가 참으로 복된 여인인 것도 그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되었고, 그 말씀을 믿음과 순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를 진정으로 존중한다면 그의 삶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방향, 곧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태도를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교회의 참된 영적 모성이 무엇이며 인간이 누구에게서 새롭게 태어나는가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우리의 어머니라고 부르며,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어머니가 교회를 나타낸다고 가르칩니다. 교회는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선과 진리를 전하며, 사람들이 그 말씀을 받아들여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영적인 어머니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교회조차 생명의 근원은 아닙니다. 교회가 참된 교회인 것은 오직 주님께서 그 안에 계시고, 그분의 선과 진리가 사람들의 삶 속에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인간으로 오시기 위하여 선택하신 복된 어머니였으며, 그의 믿음과 순종은 교회가 본받아야 할 귀중한 모범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을 영적으로 낳고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마리아가 아니라 주님 자신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어떤 특별한 인간과 영적인 모자 관계를 맺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이며 모든 신자의 영적 어머니다’라는 명제를 검토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마리아의 모성적 지위를 높이거나 낮추는 데 있지 않습니다. 어머니라는 영적 표상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과 교회의 참된 쓰임을 이해하고, 모든 영적 생명의 근원이 오직 주님 한 분이심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는 데 있습니다. 교회는 그 생명을 받아들이고 전하는 영적인 어머니의 쓰임을 감당하지만, 그 모든 생명과 사랑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주님 자신이십니다. (SL.RC.036 해설)

 

요약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이며 모든 신자의 영적 어머니다’라는 명제에는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된 복된 여인이며, 그의 믿음과 순종이 교회와 신자들에게 중요한 모범이 된다는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영적 모성을 그리스도에게서 독립된 생명의 근원으로 설명하지 않으며, 그의 역할을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속과 은총에 종속된 모성적 협력으로 가르칩니다. 특히 2025년 신앙교리부 문서는 마리아에게 독립적인 구원적 권위나 모든 은총의 필수적 전달자라는 지위를 부여하는 이해를 경계합니다. 이러한 공식적인 구별은 정확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요19:26–27에서 주님께서 마리아를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맡기신 사건을 모든 시대의 신자에게 적용하고, 그에게 영원한 영적 모성의 직분이 부여되었다고 확정하는 것은 성경 본문의 직접적인 진술을 넘어서는 신학적 해석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289–290과 2691·2717항에서 어머니가 교회를 나타내며, 모든 참된 영적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비롯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TCR.102와 827에서는 영화된 주님과 마리아의 자연적인 모자 관계를 구별하고, 마리아를 주님을 예배하는 영계의 인간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마리아를 복된 어머니로 존중하거나 교회의 믿음과 순종의 모범으로 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역사적 모성을 교회 전체의 보편적이고 영원한 영적 모성으로 확대하고, 그에게 모든 신자를 향한 특별한 천상 직분을 신적으로 확정하는 데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이 칭호를 직접적으로 반박했다고 주장할 근거는 부족하며, 이러한 판단은 그의 주님론과 교회론, 거듭남의 가르침에 근거한 신학적 평가입니다. 성경에서 어머니가 나타내는 중요한 영적 의미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전달하는 교회이며, 실제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 자신이십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교회의 믿음과 사랑을 보여 주는 귀중한 모범으로 존중할 수는 있지만, 인간의 영적 출생과 구원을 이해하기 위하여 마리아의 별도 모성적 권위를 반드시 믿어야 할 진리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시며, 참된 교회는 그 생명을 받아들이고 이웃에게 전하는 영적인 어머니의 쓰임을 감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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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35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는 하늘의 여왕으로 공경받는다’ – 천국의 참된 왕권은 누구에게 있으며, 마리아의 특별한 지위는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는가?

 

해설

‘마리아는 하늘의 여왕으로 공경받는다.’ 이것은 천주교의 마리아 신앙에서 널리 사용되는 ‘하늘의 여왕’(Regina Caeli, Queen of Heaven)이라는 칭호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마리아를 ‘천상 모후’(天上母后)라고 부르며, 성모상에 왕관을 씌우거나 왕좌에 앉은 마리아의 모습을 성화와 조각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묵주기도의 영광의 신비 마지막 단에서는 마리아가 하늘의 모후로 관을 받으시는 일을 묵상합니다. 이러한 신심에는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로서 특별한 영광을 받았으며, 천국의 모든 성인과 천사 가운데 뛰어난 지위를 차지한다는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을 접하면 몇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천국의 왕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신데, 어떻게 마리아를 하늘의 여왕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마리아가 하늘의 여왕이라는 말은 단순한 존칭일까요, 아니면 실제로 천국에서 특별한 권위를 행사한다는 뜻일까요? 무엇보다 천국의 모든 생명과 권능이 오직 주님에게서 나온다면, 마리아에게 별도의 왕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요? 이 문제는 단순히 마리아에게 사용하는 칭호의 적절성을 넘어, 천국이 어떤 질서로 이루어져 있는지, 천사와 성인들의 영적 권위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그리고 모든 예배의 중심이 누구에게 있어야 하는지를 묻는 중요한 신학적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가 말하는 마리아의 왕권(王權, queenship)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교황 비오 12세는 1954년 10월 11일 회칙 ‘하늘의 여왕께’(Ad Caeli Reginam)를 발표하면서 마리아를 하늘의 여왕으로 공경하는 신학적 근거를 설명하고, 마리아의 왕권을 기념하는 축일을 제정했습니다. 처음에는 5월 31일에 지냈지만, 현재 로마 가톨릭 전례력에서는 성모 승천 대축일로부터 여드레 뒤인 8월 22일에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을 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1954년의 회칙이 마리아의 왕권을 처음으로 새로운 신앙의 교의로 선포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비오 12세는 회칙 6항에서 새로운 신앙의 진리를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교회의 전통과 전례 안에서 인정되어 온 마리아의 왕적 지위를 더욱 분명히 설명하려 한다고 밝혔습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왕권을 1954년에 갑자기 만들어 낸 교리라고 설명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랜 전통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전통이 실제로 주님의 계시에 근거한 진리인가는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특히 마리아의 왕권은 단순히 존칭으로만 이해되지 않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에게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되는 특별한 왕적 존엄과 영향력이 있으며, 그가 신자들을 위하여 모성적으로 전구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명예로운 칭호와 실제적인 천상 권위에 관한 주장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천주교가 마리아의 왕권을 설명하는 첫 번째 근거는 그가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사실입니다. 눅1:32–33에서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실 예수님이 다윗의 왕위를 받으시고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라고 전합니다. 또한 눅1:43에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내 주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천주교는 이 말씀들을 근거로 영원한 왕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에게도 특별한 왕실적 존엄이 주어졌다고 이해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왕실에서 왕의 어머니가 차지한 지위 역시 이러한 해석과 연결됩니다. 왕상2:19에서는 솔로몬이 어머니 밧세바를 위하여 일어나 절하고, 자신의 오른쪽에 자리를 마련해 주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천주교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마리아를 왕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자 특별한 영광을 받은 여인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성경이 직접 증언하는 내용과 후대의 신학적 적용을 구별해야 합니다. 눅1:32–33은 예수님께서 영원히 다스리실 왕이심을 분명하게 가르치지만, 마리아에게 천국의 왕권이 부여된다고 직접 선언하지는 않습니다. 왕상2:19 역시 고대 이스라엘 왕실에서 왕의 어머니가 존중받았다는 역사적 사례이지, 마리아가 천국에서 모든 천사와 성인을 다스린다는 사실을 직접 가르치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왕권은 이러한 성경 본문들을 연결하여 형성된 신학적 해석이며, 성경이 명시적으로 선언하는 주님의 영원한 왕권과는 구별해야 합니다.

 

비오 12세의 회칙은 마리아의 왕권을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지위에만 근거하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특별하게 협력했다는 사실도 중요한 근거로 제시합니다. 회칙 34–39항은 마리아가 구속주이신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으며, 그분의 고난과 승리에 특별한 방식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왕적 존엄을 받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회칙 39항은 엄밀하고 완전한 의미에서 참된 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마리아는 제한적이고 유비적인 의미에서 그 왕권에 참여한다고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여기서 마리아의 왕권은 그리스도에게서 독립된 신적 통치권이 아니라, 그분에게서 비롯되는 종속적인 권위라는 것입니다. 또한 천주교는 하나님께만 드리는 ‘흠숭’(欽崇, adoration)과 성인들에게 드리는 ‘공경’(恭敬, veneration)을 구별하며, 마리아에게는 다른 성인들보다 특별한 공경을 드린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구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66항과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971항에서도 확인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마리아를 주님과 동등한 신으로 숭배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검토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마리아의 왕권이 주님의 왕권에 종속되어 있다고 설명하더라도, 그에게 부여된 특별한 천상 권위와 신자들을 위한 ‘전구’(轉求, intercession)가 과연 성경과 천국의 영적 질서에 근거하는지는 별도로 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하늘의 여왕’이라는 표현이 다른 문맥에서도 나타납니다. 렘7:18과 렘44:17–19에서는 유다 백성이 하늘의 여왕에게 제물을 바치고 분향하며 전제를 드리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이러한 행위를 강하게 책망하십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천주교가 마리아를 하늘의 여왕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곧 구약의 우상숭배와 동일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에서는 역사적 대상과 신학적 의미를 구별해야 합니다. 예레미야서의 하늘의 여왕은 고대 근동의 여신 숭배와 관계된 표현인 반면, 천주교가 마리아를 하늘의 여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어머니에게 주어진 특별한 영광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 대상과 의미가 자동으로 동일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구절들을 마리아 공경에 대한 직접적인 역사적 판정으로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우리가 반드시 살펴야 할 영적 원칙이 있습니다. 인간이 주님께만 속한 신적 권능과 영광을 다른 존재에게 돌리고, 그 존재를 신적 생명과 구원의 근원처럼 의지한다면 그것은 참된 예배의 질서를 벗어나는 일이 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질문은 마리아에게 사용하는 칭호가 고대 여신의 명칭과 같다는 사실이 아니라, 실제로 누구를 모든 사랑과 자비, 권능과 구원의 궁극적인 근원으로 여기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천국의 왕권을 살펴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2–6항에서 천국의 하나님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시라고 가르칩니다. 천국의 모든 천사는 주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그분과 나란히 독립적인 신적 통치권을 지니는 존재는 없습니다. 또한 HH.7–8에서는 천국을 천국 되게 하는 것이 천사들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거룩함이나 권능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흘러나와 천사들이 받아들이는 신적 선과 진리라고 설명합니다. 천사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모든 참된 선과 자신들이 이해하는 모든 참된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어떤 천사도 자신의 능력과 지혜로 천국을 이루거나 유지하지 않습니다. 천국의 모든 생명은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오며, 천사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만큼 천국의 생명에 참여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마리아의 왕권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설령 마리아가 천국에서 매우 높은 상태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독립적인 신적 권능이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어떤 천사가 특별한 지혜와 사랑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그가 다른 천사들에게 신적 생명을 부여하는 근원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천국의 참된 통치권은 오직 주님에게 속하며, 모든 천사와 인간은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자신에게 맡겨진 쓰임을 감당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94항에서 마리아를 높이는 당시 로마 가톨릭의 신심을 직접적으로 비판합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기보다 마리아의 아들로 생각하는 경향을 지적하면서, 로마 가톨릭이 마리아를 다른 모든 성인보다 높이고 여신이나 성인들의 여왕처럼 받들었다고 비판합니다. 원문에는 마리아를 ‘여신 또는 여왕’(goddess or queen)으로 높였다는 강한 표현이 실제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평가와 천주교의 공식 교리를 구별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마리아를 여신이라고 가르치지 않으며, 그에게 주님과 동등한 신적 왕권이 있다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TCR.94의 비판을 오늘날 천주교의 공식 교리를 그대로 설명한 문장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 본문은 스베덴보리가 당시의 마리아 신심에서 발견한 영적 위험을 보여 주는 자료입니다. 그가 특히 경계한 것은 주님의 신적 정체성을 마리아에게서 비롯된 자연적인 모자 관계 안에 가두거나, 마리아에 대한 공경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주님의 유일한 신성이 흐려지는 현상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자연적인 인성을 취하셨지만, 그 인성을 점차 영화하여 온전히 신적으로 만드셨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영화 이후의 주님을 여전히 마리아에게서 비롯된 자연적인 인성에 의하여 규정하거나, 그 모성에서 마리아의 영원한 왕적 권위를 도출하는 일은 그의 주님론에 비추어 다시 검토해야 합니다.

 

이러한 구별은 TCR.827에서도 확인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영계에서 흰옷을 입은 마리아를 보았으며, 마리아가 자신은 주님의 어머니였지만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인간적인 것을 벗으시고 인성을 신적으로 만드셨으므로 이제는 그분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예배한다고 말했다고 기록합니다. 또한 마리아는 주님 안에 모든 신성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그분을 여전히 자신의 아들로 이해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경험으로 보고한 내용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증언과 동일한 종류의 자료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마리아 이해를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중요한 기록입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천국의 왕좌에 앉아 다른 천사와 성인을 다스리는 존재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는 주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예배하는 영계의 인간으로 나타납니다. 다만 이 기록이 마리아의 천국 내 모든 관계와 쓰임을 완전하게 설명하는 것은 아니므로, 마리아에게 어떠한 특별한 영적 상태나 영예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주님과 구별되는 피조물이며, 자신의 하나님으로 오직 주님을 예배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천국의 모든 선과 생명이 오직 주님에게서 비롯된다는 HH.7–8의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높은 지위나 특별한 권위를 갖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흔히 자연계의 왕권을 기준으로 천국의 질서를 상상합니다. 자연계에서 왕이나 여왕은 영토와 백성을 다스리는 통치자이며, 높은 지위에는 더 큰 권력과 영향력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천국의 질서는 그러한 자연적인 권력 구조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천국에도 서로 다른 천사 사회와 질서가 있으며, 천사들은 각자의 상태와 쓰임에 따라 다양한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참된 권위는 자기 자신을 높이거나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데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고, 그 사랑과 지혜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선한 쓰임에서 나타납니다. 주님께서는 막10:42–45에서 세상의 집권자들이 사람들을 주관하지만, 제자들 가운데서는 크고자 하는 사람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천국의 참된 높음은 바로 이러한 섬김의 질서와 관계됩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특별한 영적 상태를 인정하더라도, 그것을 다른 모든 천사와 성인을 지배하는 독립적인 권력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마리아의 복됨은 주님께서 맡기신 거룩한 쓰임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뜻에 순종한 데서 이해해야 합니다. 천국의 어떤 존재도 자신의 권능으로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만큼 참된 사랑과 지혜 안에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천주교의 공식적인 설명과 실제 신앙생활에서 형성될 수 있는 통념을 다시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왕권이 주님의 왕권에 종속되어 있으며, 마리아에 대한 공경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나아가도록 돕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공식적인 교리의 구별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실제 신앙생활에서도 언제나 그 구별이 올바르게 유지된다고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신자가 마리아를 주님보다 더 자비로운 존재로 생각하거나, 주님께서는 엄격하시지만 마리아가 그분의 마음을 움직여 자신에게 필요한 은총을 얻어 준다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별도로 검토해야 할 신앙적 통념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주님론은 매우 중요한 진리를 밝힙니다. 주님은 무한한 사랑과 지혜 자체이시며, 모든 자비와 구원의 근원이십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도우시기 위하여 어떤 피조물에게 설득을 받으셔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통하여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더욱 깊이 깨닫는 것과, 마리아가 주님보다 더 자비로워 그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전자는 신앙적인 정서와 해석의 문제로 살펴볼 수 있지만, 후자는 주님 자신의 신적 사랑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문제는 마리아의 왕권이라는 칭호 자체보다 전구와 중재에 관한 신학적 이해와 더욱 직접적으로 연결되므로, 후속 해설에서 별도로 다루는 것이 적절합니다.

 

마리아라는 인물의 역사적 중요성과 믿음의 모범은 충분히 존중해야 합니다. 눅1:38에서 마리아는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고 부르며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눅1:46–47에서는 자신의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 자신의 구주를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여왕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인간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모습은 천국의 참된 질서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자신들이 가진 선과 진리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기뻐합니다. 마리아의 복됨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의 성육신이라는 특별한 역사에 쓰임을 받았으며,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을 믿음과 순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올바르게 기억하는 길은 그를 하늘의 여왕으로 높이는 표현이 얼마나 장엄한가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인간으로 오신 주님의 신성과 구속의 역사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그가 보여 준 순종을 우리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인간의 참된 영광은 다른 사람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살아가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늘의 여왕’이라는 칭호가 우리에게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을 생각해야 합니다. 천국에는 과연 주님과 나란히 영광을 받으며 특별한 왕권을 행사하는 존재가 있을까요? 스베덴보리는 천국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로 이루어진 하나의 영적 질서이며, 그 안의 모든 천사는 오직 주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고 가르칩니다. 천국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천사 사회가 존재하며, 각기 서로 다른 선한 쓰임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다양성의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 한 분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복된 여인으로 기억하고 그의 믿음과 순종을 존중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에게 천국의 모든 천사와 성인 위에 있는 특별한 왕적 권위를 부여하고 이를 신앙적으로 공경해야 할 지위로 확정하는 일은 별도의 근거를 요구합니다. 특히 그 권위를 주님의 영원한 왕권에 대한 참여라는 말로 설명하더라도, 그러한 참여가 실제로 어떤 영적 의미를 가지며 무엇을 근거로 마리아에게만 특별히 부여되는지 검토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강조하는 것은 천국의 모든 생명과 통치가 오직 주님에게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마리아를 공경하는 마음이 참으로 올바른 방향을 향한다면 그 마음은 마리아에게 머무르지 않고, 마리아가 자신의 하나님이자 구주로 찬양한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역시 어떤 특별한 인간이나 천사의 영광을 바라보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천국의 모든 사랑과 지혜, 모든 선과 진리, 모든 권능과 영광의 근원이신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천국의 참된 왕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시며, 그분의 왕권은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서도 비롯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교리를 검토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마리아의 지위를 높이거나 낮추는 데 있지 않고, 천국의 모든 생명과 권능이 오직 주님에게 속한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는 데 있습니다. (SL.RC.035 해설)

 

요약

‘마리아는 하늘의 여왕으로 공경받는다’라는 명제에는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된 복된 여인이며, 그에게 부여되는 모든 영광과 은총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왕권을 주님과 동등한 신적 통치권으로 가르치지 않으며, 왕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자 구속의 역사에 특별히 협력한 인물에게 주어진 종속적이고 참여적인 권위로 설명합니다. 또한 마리아에 대한 공경과 하나님께 드리는 흠숭을 구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마리아가 천국에서 모든 천사와 성인 위에 있는 여왕으로 통치한다는 사실을 직접 선언하지 않습니다. 천주교가 제시하는 근거들은 주님의 왕권, 고대 왕실에서 왕의 어머니가 차지한 지위, 마리아의 특별한 소명과 구속에 대한 협력을 연결한 신학적 해석에 해당합니다. 스베덴보리는 HH.2–12에서 천국의 모든 선과 권능이 오직 주님에게서 비롯된다고 가르치며, TCR.94에서는 마리아를 여신이나 성인들의 여왕처럼 높이는 당시의 신심을 직접 비판합니다. 또한 TCR.827에서는 마리아가 주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예배하는 영계의 인간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마리아를 복된 여인으로 존중하거나 그가 특별한 쓰임을 감당했다고 인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가 주님의 어머니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천국의 모든 피조물 위에 있는 특별한 왕적 권위를 신적으로 확정하고, 그 권위를 종교적 공경과 전구 요청의 근거로 삼는 데 있습니다. 다만 이는 천주교가 마리아를 여신으로 가르친다는 뜻이 아니며, 마리아의 왕권과 전구의 구체적인 타당성도 각각 구별하여 검토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천국의 모든 천사와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피조물이며, 그들의 참된 위대함은 독립적인 권능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받아 이웃을 섬기는 선한 쓰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여왕’이라는 칭호보다 더욱 중요한 진리는 천국의 유일한 왕이신 주님께 모든 영광과 권능이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참된 신앙은 마리아의 왕권에 머무르지 않고, 마리아 자신이 자신의 하나님이자 구주로 찬양한 주님 한 분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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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천주교 신앙에서 일곱 성사는 교회생활의 중심을 이루는 중요한 제도입니다. 천주교는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고해성사, 병자성사, 성품성사, 혼인성사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시고 교회에 맡기신 거룩한 성사로 가르칩니다. 신자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고, 견진을 통하여 신앙을 굳게 하며, 성체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결합하고, 고해를 통하여 죄의 용서를 받으며, 병자성사를 통하여 고통 가운데 특별한 은총을 구합니다. 성품성사와 혼인성사는 각각 교회의 직무와 부부의 결합을 거룩한 소명으로 이해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성사 체계는 인간의 출생과 성장, 죄와 회개, 질병과 죽음, 결혼과 공동체적 봉사에 이르기까지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포괄합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신앙이 단순한 생각이나 고백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의 은총을 받아야 한다는 귀중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주님의 은총은 일곱 가지 성사라는 특정한 의식들을 통하여 전달되는 것일까요? 그러한 성사를 집전하고 관리하는 교회는 인간의 구원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 성사의 거룩함과 그 성사가 인간 안에서 실제로 이루는 영적인 변화는 어떻게 구별해야 할까요? 이 질문은 천주교의 성사 체계를 단순히 부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를 거듭나게 하시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다시 살펴보는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1113–1134항은 성사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시고 교회에 맡기신 은총의 유효한 표지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단순한 ‘표지’가 아니라 ‘유효한 표지’라는 점입니다. 천주교에 따르면 성사는 보이지 않는 은총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만 하는 의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사 안에서 친히 역사하시며, 그 성사가 나타내는 은총을 실제로 베푸십니다. 특히 교리서 1128항은 성사가 ‘행위 자체로’(ex opere operato) 효력을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이 라틴어 표현은 성사적 행위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효력이 발생한다는 뜻이지만, 그 행위 자체에 주님과 독립된 신비한 능력이 들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천주교는 성사의 효력이 집전자인 사제의 개인적인 거룩함이나 성사를 받는 사람의 공로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 사역과 그분의 능력에 근거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합당한 조건과 교회의 의도에 따라 성사가 거행될 때 그리스도께서 그 성사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성사의 객관적인 효력과 그 성사가 인간 안에서 맺는 열매를 구별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성사의 열매가 그것을 받는 사람의 내적인 준비와 태도에도 달려 있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성사를 받기만 하면 누구나 자동으로 거룩해지고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일곱 성사 모두를 모든 신자가 빠짐없이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의 성사론을 단순한 의식주의나 종교적 마술로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성사가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객관적인 은총의 수단이며, 그 성사적 행위 안에서 실제적인 영적 효력이 발생한다고 보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일곱 성사의 체계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도 중요합니다. 초대 기독교 공동체에는 이미 세례와 성찬, 죄의 고백과 용서, 병자를 위한 기도와 안수, 교회 직무를 위한 안수와 혼인에 관한 여러 신앙적 실천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천들이 처음부터 오늘날 천주교가 가르치는 일곱 가지 성사라는 완성된 체계로 정리되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성사에 관한 신학적 이해는 여러 세기에 걸쳐 발전했고, 중세 서방교회에서 일곱 성사의 체계가 정착되었습니다. 특히 12세기 신학자 페트루스 롬바르두스는 일곱 성사를 체계적으로 설명한 중요한 인물이며, 이후 교회의 공의회들을 거쳐 이 체계는 공식적인 교리로 확립되었습니다. 16세기 트리엔트 공의회는 종교개혁의 성례전 이해에 대응하여 신약의 성사가 일곱 가지이며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다는 가르침을 확정했습니다. 물론 천주교는 이러한 발전을 인간이 임의로 새로운 성사를 만들어 낸 과정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맡기신 신앙의 유산을 성령의 인도 아래 점차 명확하게 이해하고 정식화한 과정으로 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어떤 교리 체계가 발전했다는 사실과, 그 체계의 모든 내용이 주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신적인 질서라는 주장은 서로 구별하여 검토해야 합니다. 성경에 어떤 거룩한 행위가 등장한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독립적인 은총 전달의 성사로 제정되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곱 성사 체계의 신학적 정당성을 판단하려면 그 역사적 형성뿐 아니라 성경의 실제 가르침과 그 의식들의 영적인 의미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성경에서 세례와 성찬이 차지하는 특별한 위치는 분명합니다. 마28:19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셨고, 눅22:19에서는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자신을 기념하여 이를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고전11:23-26에서 바울은 주님의 만찬을 교회가 계속 지켜야 할 거룩한 일로 전합니다. 물론 다른 다섯 성사와 관련된 성경적 근거들도 존재합니다. 약5:14-15에는 병든 사람을 위하여 장로들이 기도하고 기름을 바르는 일이 나오고, 요20:23에는 죄의 용서에 관한 사도적 직무가 언급됩니다. 사도행전에는 안수를 통하여 성령의 은사를 받거나 교회의 직무를 맡기는 장면들이 등장하며, 혼인의 거룩함은 창2:24와 마19:4-6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모두 중요한 신앙적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각각의 행위가 성경에 나타난다는 사실과 그것들이 모두 동일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일곱 가지 성사라는 결론 사이에는 추가적인 신학적 해석이 필요합니다. 천주교는 교회의 성전과 교도권을 통하여 그 결론을 정당화하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성경의 영적 의미와 주님께서 세우신 의식의 실제적인 쓰임을 기준으로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히 성경의 거룩한 행위를 후대의 제도적 질서와 동일시할 때에는, 그 행위가 지닌 본래의 영적인 목적이 제도 자체의 권위에 가려지지 않는지 주의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667–691에서 세례를, TCR.698–752에서 성찬을 설명합니다. 그는 TCR.667에서 기독교회의 두 성사인 세례와 성찬의 의미와 효력을 이해하려면 말씀의 영적 의미를 알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TCR.669에서는 이 두 성사가 기독교회에서 매우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그 쓰임을 이해하지 못하면 사람들이 단지 거룩한 의식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이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성사를 단순한 인간의 종교적 관습이나 상징적인 기념행위로 축소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세례와 성찬이 주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의식이며, 자연계와 영계의 상응을 통하여 실제적인 영적 쓰임을 가진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천주교의 일곱 성사 체계를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세례는 기독교회로 들어가는 입문과 거듭남의 길에 관계되고, 성찬은 주님의 신적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분과 결합하는 일에 관계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두 성사는 단지 교회의 의무적인 예식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출생과 성장, 그리고 주님과의 결합을 나타내고 섬기는 특별한 수단입니다. 여기서 천주교와의 중요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천주교는 일곱 성사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객관적인 은총의 수단으로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는 두 성사의 특별한 거룩함을 인정하면서도 그 의미와 효력을 말씀의 영적 의미, 상응, 거듭남, 주님과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성사의 숫자가 일곱인가 둘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은총의 전달과 인간의 영적 변화가 어떤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는가에 관한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세례의 경우 스베덴보리는 TCR.677–687항에서 세 가지 쓰임을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기독교회로 들어가는 입문이며, 두 번째는 구속자이시며 구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인정하며 따르게 하는 것이고, 세 번째이자 궁극적인 쓰임은 거듭남입니다. 여기서 첫 번째 쓰임과 세 번째 쓰임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기독교회 안으로 들어간다는 사실과 그 사람의 내면에서 거듭남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세례의 물은 영적으로 진리를 통한 정결을 나타내지만, 자연적인 물이 인간의 머리를 씻는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의지와 이해에 자리 잡은 악과 거짓이 모두 제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주님의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의 빛으로 자신의 악을 발견하며,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 그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주님께서는 인간의 내면을 점차 변화시키십니다. 그렇다고 세례가 단순한 표지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세례가 사람을 영계의 기독교인들과 연결하는 실제적인 쓰임도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세례의 거룩함을 인정하면서도 그 의식의 시행 자체를 거듭남의 완성과 동일시하지 않는 구별이 필요합니다. 세례는 주님께서 인간을 새로운 삶으로 부르시는 거룩한 시작이며, 그 시작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실제로 거듭나는 데 있습니다.

 

성찬은 이러한 거듭남과 주님과의 결합을 더욱 깊이 드러냅니다. TCR.698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의 상응을 알지 못하면 성찬의 쓰임과 유익을 이해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성찬의 빵은 주님의 사랑에서 오는 신적 선을, 포도주는 주님의 지혜에서 오는 신적 진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자연적인 육체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오는 신적 선과 진리를 인간이 자신의 영적 생명 안에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성찬이 단지 신적 선과 진리를 기억하게 하는 상징적인 의식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TCR.716에서 스베덴보리는 성찬 안에 주님께서 그분의 모든 구속과 함께 온전히 현존하신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TCR.725에서는 합당하게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주님 안에 있고 주님께서 그들 안에 계시며, 그 결과 주님과의 결합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성찬은 단순히 외적인 믿음을 표현하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과 실제로 결합하시는 특별한 거룩한 수단입니다. 다만 그 결합은 성찬의 자연적인 빵과 포도주가 독립적인 신적 능력을 갖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성찬 안에 현존하시며, 인간이 신앙과 체어리티 안에서 그분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성사 이해를 천주교의 성사적 실재론에 대한 단순한 상징주의적 반박으로 이해한다면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성찬의 실제적인 거룩함과 주님의 현존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자연적인 물질의 실체 변화가 아니라 주님의 신적 선과 진리, 그리고 인간과 주님 사이의 실제적인 영적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이 지점에서 천주교의 ‘행위 자체로’라는 성사 효력의 원리와 스베덴보리의 상응론을 비교하면 두 전통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두 전통 모두 성사의 거룩함이 집전자의 개인적인 능력이나 공로에서 발생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또한 인간이 주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내적인 상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사가 올바르게 거행될 때 그리스도께서 그 성사 안에서 객관적으로 역사하시며, 각 성사에 고유한 은총을 베푸신다고 가르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세례와 성찬의 실제적인 영적 효력을 인정하면서도, 자연적인 표지와 영적인 실재 사이의 상응을 통하여 그 쓰임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상응은 자연적인 물질이 자동으로 영적인 실재로 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물과 빵과 포도주는 각각 영적인 진리와 선을 나타내며, 이러한 상응을 통하여 자연계의 예배와 영계의 질서가 연결됩니다. 따라서 성사의 실제적인 영적 효력이 있다는 사실과 성사 자체가 독립적인 은총 전달 능력을 가진다는 주장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천주교 역시 성사가 그리스도와 독립된 능력을 가진다고 가르치지는 않지만, 성사적 행위의 객관적인 효력과 일곱 성사의 신적 제정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스베덴보리와 차이를 보입니다. 결국 핵심 쟁점은 주님께서 성사를 통하여 역사하실 수 있는가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일곱 가지 성사적 행위를 구원에 필요한 객관적인 은총의 수단으로 제정하셨다는 주장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다섯 성사는 영적인 가치가 없는 것일까요? 그렇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견진은 신앙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주님의 진리에 충실하게 살아가겠다는 결단의 기회가 될 수 있으며, 고해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병자성사는 고통 가운데 주님의 자비와 섭리를 신뢰하도록 도울 수 있고, 성품은 말씀을 가르치고 교회를 섬기는 직무의 중요성을 일깨울 수 있으며, 혼인은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충실하게 살아가야 할 거룩한 책임을 확인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식들은 실제로 인간의 신앙생활에 유익한 쓰임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유익함을 인정하는 것과, 이 모든 의식이 각각 고유한 성사적 은총을 전달하는 신적으로 제정된 수단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다릅니다. 예를 들어 회개는 고해성사의 틀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TCR.509–570항에서 참된 회개가 자신의 악을 살피고 인정하며, 그것을 죄로 여겨 주님의 도움을 받아 실제로 피하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이 사제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사죄경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 죄를 여전히 사랑하고 계속 행하려 한다면, 그 사람 안에서 참된 회개가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주님의 진리 앞에서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진심으로 돌아서는 사람에게는 실제적인 회개의 과정이 시작됩니다. 혼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부의 참된 사랑은 혼인 예식 자체에서 자동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서로를 위하여 살아가는 가운데 깊어집니다. 따라서 종교적인 의식이 영적 성장을 돕는다는 사실과 그 의식 자체가 독립적인 은총의 질서를 이룬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러한 구별의 바탕에는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에 관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DP.71–99는 인간이 합리성에 따른 자유 안에서 행동해야 한다는 원리를 설명하며, DP.100–128은 사람이 자신의 악을 마치 스스로 제거하는 것처럼 노력해야 하지만 실제로 그 악을 제거하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가르칩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능력으로 구원을 획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일이 인간의 자유로운 수용과 협력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모든 인간에게 사랑과 진리의 생명을 주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면서까지 그 생명을 강제로 받아들이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악을 행하고 있는지 살피며, 진리를 받아들여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과정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적인 의식도 이러한 내적인 회개와 거듭남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교회의 성사적 질서가 얼마나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는가만이 아니라, 그 질서가 사람들을 실제로 주님께 인도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교회는 말씀과 예배와 거룩한 의식을 통하여 주님을 증언하고 인간의 영적 성장을 도울 수 있지만,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교회의 직무는 그분의 구원하시는 역사를 섬기는 것이지, 그 역사를 교회의 제도적 권한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를 실제 신앙생활에 적용해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어떤 천주교 신자가 어린 시절 세례를 받고 견진을 받았으며, 평생 미사와 고해성사에 충실하게 참여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러한 신앙생활은 그가 주님을 기억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이웃을 사랑하도록 돕는 귀중한 수단이 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가족을 멸시하고,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거짓을 행하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성사생활에 충실하다는 사실만으로 안심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반대로 같은 성사에 참여하는 다른 신자는 그때마다 자신의 악을 돌아보고 진심으로 회개하며, 가족과 이웃을 대하는 태도를 조금씩 바꾸어 갈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외적으로 동일한 성사에 참여하지만, 그 성사가 각자의 실제적인 삶과 맺는 관계는 서로 다릅니다. 물론 우리는 그들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내적인 사랑과 영원한 운명은 오직 주님께서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사생활의 풍부함이 반드시 내적인 거듭남의 정도와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위험은 천주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개신교 신자 역시 자신이 세례를 받았거나 정기적으로 성찬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영적인 안전의 근거로 삼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례와 성찬을 단순한 기념행위로 축소하여 그 안에 담긴 실제적인 영적 쓰임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이 양쪽 모두를 경계하게 합니다. 성사는 인간을 자동으로 구원하는 의식도 아니지만, 단순히 인간의 기억을 돕기 위한 상징적 행위에 불과한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세례와 성찬은 실제적인 영적 쓰임을 가지며, 그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주님과 결합하도록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은총 자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은총을 어떤 종교적인 의식에 참여할 때 외부에서 주어지는 특별한 영적 혜택처럼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의 은총은 그러한 특정한 순간에만 베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인간에게 당신의 사랑과 지혜를 주시며,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만큼 그분과 결합하고 새로운 생명을 얻습니다. 주님의 신적 선과 진리는 인간의 이해를 밝히고 의지를 변화시키며, 자신만을 사랑하던 마음을 점차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꾸어 갑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따라서 은총의 본질은 종교적인 의식이 완료되었다는 사실보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생명이 인간 안에 실제로 받아들여져 새로운 사랑과 삶을 형성하는 데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주님께서 세우신 성사의 특별한 쓰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세례와 성찬의 목적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세례는 인간을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의 길로 인도하고, 성찬은 주님의 신적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분과 결합하도록 돕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거룩한 의식은 언제나 그것이 나타내는 영적 실재를 향하여 인간을 인도해야 합니다. 표지가 실재를 대신할 수는 없으며, 외적인 형식이 그 형식의 궁극적인 목적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권위와 질서에도 적용됩니다. 교회의 거룩함은 은총을 소유하고 분배하는 독립적인 권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베푸시는 생명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그 생명을 받아들이도록 돕는 쓰임에서 드러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요15:4-5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포도나무로, 제자들을 가지로 말씀하시면서 당신 안에 거하지 않으면 아무도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의 본질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가지가 살아 있는 것은 어떤 외적인 자격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포도나무와 실제로 연결되어 생명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적 생명은 그가 얼마나 많은 종교적인 의식에 참여하였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실제로 결합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인간이 그 결합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거룩한 의식을 세우시고 교회를 통하여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그 의식은 언제나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세례는 거듭남을 향한 거룩한 입문이며, 성찬은 거듭나는 인간이 주님의 신적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분과 결합하는 특별한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단순히 ‘나는 어떤 성사를 받았는가?’가 아닙니다. ‘그 성사가 나타내는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실제로 내 삶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가? 나는 그 진리의 빛으로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피하고 있는가? 주님께서 주시는 선을 받아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려는 구원은 종교적인 의식을 축적하여 얻는 특별한 신분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지혜가 인간 안에 받아들여져 실제적인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생명 안에서 인간은 주님과 결합하며, 그 결합이 점차 깊어지는 가운데 천국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SL.RC.005 해설)

 

요약

‘교회의 일곱 성사는 구원에 필요한 은총을 전달한다’는 명제에는 주님께서 인간의 자연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을 통하여 영적인 생명을 가르치시며, 거룩한 의식을 인간의 신앙과 거듭남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귀중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천주교가 성사의 효력을 집전자의 개인적인 거룩함이나 인간의 공로에 의존시키지 않고 그리스도의 역사에 근거한다고 가르치는 점과, 성사의 열매를 얻기 위하여 수령자의 합당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점도 정확히 평가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일곱 가지 의식 모두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독립적인 성사적 은총의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세례와 성찬이라는 두 성사를 특별히 가르치며, 그 실제적인 영적 효력을 자연계와 영계의 상응, 주님의 신적 선과 진리, 인간의 거듭남과 주님과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따라서 오류의 핵심은 거룩한 의식이 영적인 유익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지 않고, 일곱 성사라는 특정한 제도적 체계에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구원적 은총 전달의 질서라는 지위를 부여하는 데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체계를 인간의 구원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제도적 경로로 절대화한다면, 주님의 직접적인 구원 역사와 교회의 봉사적 역할을 혼동하게 됩니다. 다만 천주교가 모든 신자에게 일곱 성사 전부를 요구하거나, 교회가 그리스도와 독립적으로 은총을 소유하고 분배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결국 구원의 유일한 근원은 주님이시며, 성사의 참된 목적은 인간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실제로 거듭나고 그분과 결합하도록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려는 가장 귀중한 은총은 단순히 거룩한 의식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받아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천국의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거듭남의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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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34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는 지상 생애를 마친 뒤 몸과 영혼이 함께 하늘에 올림받았다’ - 성모 승천은 특별한 육체적 영화인가, 주님의 유일한 부활과 구별해야 할 교리인가?

 

‘마리아는 지상 생애를 마친 뒤 몸과 영혼이 함께 하늘에 올림받았다.’ 이것은 천주교의 대표적인 마리아 교리 가운데 하나인 ‘성모 승천’(聖母昇天, Assumption of Mary)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천주교는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친 뒤 영혼만 천국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몸과 영혼이 함께 천상의 영광에 들어갔다고 믿습니다. 여기에는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로서 특별한 은총을 받았으며,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리에 다른 신자들보다 앞서 참여했다는 신앙적 이해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교리를 접하면 몇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인간은 죽은 후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데, 마리아만 몸과 영혼이 함께 하늘에 올림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몸은 지상에서 사용하던 자연적인 육체일까요, 아니면 영광스럽게 변화된 몸일까요? 마리아의 특별한 승천은 성경 어디에 기록되어 있을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죽은 후에도 완전한 인간의 형상을 지닌 영적 몸으로 살아간다고 가르치는데, 이러한 사후세계의 이해와 천주교의 성모 승천 교리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이 질문은 마리아의 특별한 지위에 관한 문제를 넘어 인간의 죽음과 부활, 자연계와 영계의 관계, 그리고 주님께서 이루신 인성의 영화(榮化, glorification)가 무엇인지를 묻는 중요한 신학적 문제입니다.

 

성모 승천은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가 교황령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Munificentissimus Deus)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확정한 교리입니다. 그 정의문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하느님의 어머니이자 평생 동정녀이신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친 뒤 몸과 영혼이 함께 천상의 영광에 들어갔다고 선언합니다. 이 가르침은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966항에도 나타납니다. 교리서는 마리아의 승천을 그리스도의 부활에 특별하게 참여한 사건이며,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장차 이루어질 몸의 부활을 미리 보여 주는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승천과 마리아의 승천은 구별해야 합니다. 영어에서 주님의 승천은 ‘어센션’(Ascension), 마리아의 승천은 ‘어섬션’(Assumption)이라고 부릅니다. 전자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신의 신적 능력으로 하늘에 오르셨다는 의미이고, 후자는 마리아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으로 천상의 영광에 올림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천주교가 마리아에게 예수님과 동일한 신적 권능을 부여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성모 승천을 자연적인 육체가 아무런 변화 없이 물질적인 공간을 이동한 사건으로 단순화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몸이 영화되어 천상의 영광에 참여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검토해야 할 핵심은 바로 이러한 특별한 육체적 영화가 실제로 계시된 진리인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정확하게 구별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천주교가 1950년에 확정한 교리의 정의문은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쳤다고 선언하지만, 그가 반드시 죽은 뒤 부활했는지, 아니면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늘에 올림받았는지를 신앙의 교리로 확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지상 생애를 마친 뒤’라는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톨릭과 동방교회의 오랜 전통에서는 마리아가 실제로 죽음을 경험했다고 이해하는 견해가 널리 이어져 왔습니다. 동방교회는 이를 ‘성모 안식’(Dormition of the Theotokos)이라고 부르며, 마리아가 죽음의 잠을 거쳐 천상의 영광에 들어갔다고 이해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역시 1997년 7월 2일의 교리교육에서 마리아가 죽은 뒤 그 몸이 영화되었다는 전통적인 이해를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1950년의 교리 정의문이 마리아의 죽음 여부를 신앙의 진리로 결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따라서 천주교가 마리아는 죽지 않았다고 가르친다거나, 반대로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세부 과정까지 공식적으로 확정했다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교리가 실제로 확정한 내용과 그 주변에서 발전한 신학적 설명 및 전승을 구별해야 합니다.

 

성모 승천은 앞서 살펴본 ‘무염시태’(無染始胎, Immaculate Conception) 및 마리아의 평생 동정과 연결됩니다. 천주교는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특별히 준비되었으며, 원죄에서 보존되는 은총을 받았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러한 특별한 은총이 지상 생애의 마지막에도 이어졌다고 이해합니다. 비오 12세는 마리아의 몸이 무덤의 부패에 맡겨지지 않고 천상의 영광에 들어간 것을 그의 특별한 신학적 지위와 연결하여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교리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의 몸이 반드시 다른 모든 인간보다 먼저 영화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논리적으로 자동으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성모 승천은 무염시태와 연결되어 있지만, 그 자체로 별도의 계시적 근거를 요구하는 교리입니다. 천주교는 그 근거를 성경의 직접적인 사건 기록에서만 찾지 않고 교회의 전통과 전례, 성경의 여러 예표와 상징을 종합하여 설명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문제를 검토할 때에는 그러한 신학적 연결이 실제로 말씀의 속뜻과 주님의 부활에 관한 가르침에 부합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로서 특별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사실과, 그 몸이 다른 인간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방식으로 영화되었다는 주장은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과 지상 생애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사실을 기록하지만, 그가 언제 어디에서 지상 생애를 마쳤으며 몸이 어떤 방식으로 천상의 영광에 들어갔는지는 직접적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행1:14에는 마리아가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는 모습이 나타나지만, 그 이후의 죽음이나 승천에 관한 사건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천주교는 계12:1에 나타나는 해를 입은 여자, 창3:15의 여자와 뱀 사이의 적대 관계, 그리고 구약의 언약궤에 관한 말씀들을 성모 승천과 연결하여 해석합니다. 이러한 본문들은 마리아의 역할과 구원의 역사를 신학적으로 연결하여 생각하게 하지만, 마리아의 육체가 실제로 하늘에 올림받았다는 사건을 직접 서술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계12:1의 여인을 마리아 개인과만 동일시하는 것은 본문의 상징적 성격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계시록 해설’(Apocalypse Revealed, AR, 1766) 533항에서 해를 입은 여인이 새 하늘에 있는 주님의 새 교회와 땅 위에 세워질 새 교회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여인은 우선 교회와 그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상입니다. 이를 마리아의 육체적 승천을 직접 증명하는 본문으로 사용하는 것은 말씀의 속뜻과 후대의 교리적 적용을 혼동할 위험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데려가신 사람들에 관한 기록도 있습니다. 창5:24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다고 기록하며, 왕하2:11은 엘리야가 회오리바람 가운데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이 곧 마리아에게도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초기 인물들의 이야기 안에 교회의 영적 상태와 변화에 관한 깊은 속뜻이 담겨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에녹의 이야기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하여 마리아의 승천과 직접 연결하는 데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사람을 데려가실 수 있는가 하는 가능성의 문제와, 마리아에게 실제로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계시되었는가 하는 증거의 문제를 구별하는 일입니다. 성경에 어떤 종류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기록되지 않은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마리아의 성모 승천 역시 이러한 구별 아래에서 검토해야 합니다.

 

이제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론을 살펴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445–452항에서 인간이 죽는 순간의 상태와 영계에서 깨어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인간이 죽는 것은 그 존재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계에서 사용하던 육체와 분리되어 영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물질적인 육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 안에 있으며, 육체는 영이 자연계에서 활동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따라서 육체의 기능이 멈추더라도 인간의 생명은 계속됩니다. 또한 HH.453–469에서는 사람이 죽은 후에도 완전한 인간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며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능력을 계속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후의 인간이 단순히 형체 없는 의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실제로 몸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몸은 자연계의 물질로 이루어진 육체가 아니라 영계에 속하는 ‘영적 몸’(靈的身體, spiritual body)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성모 승천 교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마리아가 죽은 후에도 완전한 인간의 형상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의미라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것은 마리아만의 특별한 특권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죽은 후에도 영적 몸을 지닌 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주교의 성모 승천은 단순히 마리아가 영계에서 인간의 형상을 지닌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천주교는 마리아가 장차 모든 의인에게 이루어질 몸의 부활과 영화에 특별한 방식으로 미리 참여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두 전통의 차이는 사후에도 인간이 몸을 지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몸이 무엇이며 자연적인 육체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의 문제에서 드러납니다.

 

이 구별은 스베덴보리의 ‘최후의 심판’(Last Judgment, LJ, 1758) 36항에서 더욱 명확해집니다. 그는 자연계의 인간은 자연적인 몸을 입고 있지만 영계의 인간은 영적인 몸을 입고 있으며, 두 몸은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한다고 설명합니다. 자연적인 눈은 자연적인 것을 보고, 영적인 눈은 영적인 것을 봅니다. 따라서 영계에 들어간 인간이 완전한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지상에서 입었던 자연적인 육체가 그대로 영계로 옮겨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연적인 몸을 벗고 영적인 몸으로 살아가며, 그 안에서 자신의 사랑과 신앙에 따라 영원한 삶을 계속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물질적인 육체가 다시 살아나야 비로소 인간이 완전해진다는 생각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론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천주교와 스베덴보리의 차이는 더욱 선명해집니다. 천주교는 마지막 날에 모든 인간에게 이루어질 몸의 부활을 믿으며, 마리아는 그 영광에 특별히 앞서 참여했다고 설명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죽은 후 이미 영적 몸을 지닌 완전한 인간으로 살아간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마리아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하여 자연적인 육체의 특별한 영화까지 필요로 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여기서 더욱 결정적인 본문은 HH.316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부활하실 때 영으로만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몸까지 부활하셨다고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지상 생애 동안 자신의 인성 전체를 영화하여 신적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영혼은 처음부터 아버지이신 여호와의 신성 자체였으며, 그분의 인성은 그 신성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일반 인간과 달리 몸까지 영화하여 부활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일반 인간은 영으로 부활하지만 주님은 몸까지 부활하셨다고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여기서 주님의 몸의 부활을 자연적인 물질의 몸이 아무런 변화 없이 보존된 사건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인성을 온전히 신적으로 영화하셨으며, 그 영화된 인성은 자연적인 물질의 한계에 속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부활은 일반 인간의 사후 각성과 동일한 사건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신적 능력으로 이루신 유일한 영화의 완성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마리아가 자신의 몸까지 특별히 영화되어 하늘에 올림받았다는 천주교의 교리는 중요한 신학적 긴장을 일으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만이 몸까지 영화하여 부활하셨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두 전통의 용어를 무조건 같은 의미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가 말하는 마리아의 몸의 영화는 피조물에게 베푸신 은총이며,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의 인성의 영화는 신성 자체가 인성을 신적으로 만드신 사건입니다. 두 설명은 동일한 종류의 영화가 아니므로, 단순히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만으로 모순이라고 단정하기보다 두 전통이 몸의 부활과 영화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함께 검토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사후에 어떤 존재로 이해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827항에서 마리아와 관련된 특별한 영적 경험을 기록합니다. 그는 흰옷을 입은 마리아를 보았으며, 마리아가 자신은 주님의 어머니였지만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인간적인 것을 벗으시고 인성을 신적으로 만드셨으므로 이제는 그분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예배한다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이 기록에서 마리아는 주님과 동일한 신적 권위를 지닌 존재가 아니라 주님을 예배하는 영계의 한 인간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여기서 자료의 성격을 분명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TCR.827은 성경에 기록된 사건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경험으로 보고한 내용입니다. 또한 이 본문은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칠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의 자연적인 육체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마리아와 영계에서 만났다는 기록만으로 성모 승천의 역사적 사실이 반박되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 기록은 스베덴보리가 마리아를 주님을 예배하는 영계의 인간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직접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는 모든 인간이 사후에도 영적 몸을 지닌 존재로 살아간다는 그의 사후세계론과 일치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천국의 영광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성모 승천을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특별히 참여한 사건으로 이해하며, 장차 모든 신자에게 이루어질 몸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보여 준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천국의 영광은 자연적인 육체가 얼마나 특별한 방식으로 보존되거나 변화되었는가에 따라 결정되지 않습니다. 천국의 상태는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얼마나 받아들이고 그 사랑과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천국의 모든 천사는 영적 몸을 지니고 있으며, 각 사람은 자신의 내적인 사랑과 신앙에 따라 서로 다른 천국의 상태에 있게 됩니다. 따라서 자연적인 육체가 특별한 방식으로 영화되었다는 사실이 천국에서의 더 높은 영적 상태를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마리아의 실제적인 천국의 상태를 인간이 임의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내면과 영원한 상태에 대한 최종적인 앎은 오직 주님께 속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리아에게 어떤 특별한 영광이 주어졌는가보다, 천국의 모든 생명과 영광이 오직 주님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입니다. 천국은 특별한 몇 사람의 신체적인 특권에 의하여 성립하는 세계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영적인 삶의 세계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모 승천 교리에서 인정해야 할 진리와 다시 검토해야 할 주장을 구별해야 합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된 복된 여인이었다는 사실은 성경에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또한 주님께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며 죽음 이후에도 인간이 계속 살아간다는 사실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론에서도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친 후에도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 안에서 살아간다는 이해 자체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다른 모든 인간과 달리 자신의 자연적인 육체와 연결된 특별한 육체적 영화를 미리 누렸다는 주장은 별도의 계시적 근거를 요구합니다. 성경은 그러한 사건을 직접 기록하지 않으며, 스베덴보리의 저작 역시 그것을 신적으로 확정된 진리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이 죽은 후 자연적인 몸을 벗고 영적인 몸으로 살아간다고 설명하며, 주님께서 자신의 몸까지 영화하여 부활하신 사건을 일반 인간의 부활과 구별합니다. 따라서 성모 승천을 반드시 믿어야 할 신앙의 교리로 확정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론에서 직접적인 뒷받침을 얻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는 마리아의 사후에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우리가 역사적으로 증명하거나 반증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더욱 중요하게 붙들어야 할 것은 주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베푸시며, 그들을 자신의 사랑과 진리 안에서 천국의 삶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마리아가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하늘에 들어갔는가보다, 죽음을 이기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여 모든 구원의 근원이 되신 주님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일이 더욱 중요합니다. 결국 인간의 영원한 생명과 천국의 영광은 마리아의 특별한 승천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여 모든 인간에게 천국의 길을 열어 주신 주님 한 분에게서 비롯됩니다. (SL.RC.034 해설)

 

 

‘마리아는 지상 생애를 마친 뒤 몸과 영혼이 함께 하늘에 올림받았다’라는 명제에는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된 복된 여인이며, 인간의 영원한 생명이 오직 주님의 은총과 구속에서 비롯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천주교는 성모 승천을 마리아가 자신의 능력으로 하늘에 올랐다는 뜻으로 가르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부활에 특별히 참여하여 몸과 영혼이 천상의 영광에 들어갔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마리아가 죽음을 경험했는지의 여부는 1950년의 교리 정의문에서 확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자신의 몸까지 특별히 영화되어 하늘에 올림받았다는 주장은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을 넘어서는 교리적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HH.445–469와 LJ.36에서 인간이 죽은 후 자연적인 몸을 벗고 영적인 몸으로 살아간다고 설명하며, HH.316에서는 주님만이 자신의 몸까지 영화하여 부활하셨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영계에서 완전한 인간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살아간다는 사실과, 다른 모든 인간과 구별되는 특별한 육체적 영화를 미리 누렸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전자는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론과 일치하지만, 후자는 그의 가르침에서 직접적인 근거를 찾기 어렵습니다. 특히 천주교의 육체 부활론과 스베덴보리의 영적 몸에 관한 가르침은 인간의 사후 상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다만 이러한 신학적 차이가 마리아의 지상 육체에 실제로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역사적으로 증명하거나 반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마리아가 천국에서 살아간다는 믿음이나 그의 특별한 소명을 존중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경의 직접적인 증언과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론에서 확증되지 않는 특별한 육체적 승천을 모든 신자가 반드시 믿어야 할 신적 진리로 확정하는 데 있습니다. 천국의 생명은 자연적인 육체의 특별한 보존에 달려 있지 않으며,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영적 상태와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이 교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마리아의 특별한 육체적 지위를 높이는 데 있지 않고, 죽음을 이기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여 모든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신 주님의 유일한 신성과 구속의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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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는 예수님을 낳기 전과 낳을 때와 낳은 후에도 평생 동정녀였다’ - 주님의 동정녀 탄생과 마리아의 평생 동정은 같은 신앙의 진리인가?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기 전과 낳을 때와 낳은 후에도 평생 동정녀였다.’ 이것은 천주교가 가르치는 ‘마리아의 평생 동정’(終身童貞, Perpetual Virginity of Mary)에 관한 교리입니다. 천주교는 마리아가 남자와 관계없이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사실을 믿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출산하는 순간에도 그의 동정성이 보존되었으며, 출산 이후에도 요셉과 부부관계를 맺지 않고 평생 동정녀로 살았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영원한 동정녀’라는 뜻의 그리스어 ‘아이파르테노스’(Aeiparthenos)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성육신이 전적으로 하느님의 역사였으며, 마리아의 몸과 삶이 그 특별한 소명을 위하여 온전히 봉헌되었다는 신앙적 이해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성경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할 때 동정녀였다고 분명히 증언하지만, 출산하는 순간의 신체적 상태와 그 이후의 결혼생활에 대해서도 같은 정도로 분명하게 가르칠까요?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형제들과 자매들은 누구였을까요? 무엇보다 마리아의 평생 동정이 주님의 신성과 구속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진리일까요? 이러한 질문은 단순히 마리아와 요셉의 사생활에 관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성경이 직접 증언하는 사실과 교회가 후대에 확정한 교리를 어떻게 구별할 것인지, 그리고 동정과 결혼을 어떤 영적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하는지를 묻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이번 명제를 검토하려면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성경의 증언과 스베덴보리의 성육신론 및 상응의 가르침을 차례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은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496–507항에 나타납니다. 496항은 예수님께서 인간 남성의 개입 없이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셨다고 설명합니다. 499항은 마리아의 동정성이 예수님을 출산하는 순간에도 보존되었다고 가르치며, 500항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형제자매들이 마리아가 낳은 다른 자녀들이 아니라 친족들이었다고 해석합니다. 501항은 예수님이 마리아의 유일한 아들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평생 동정은 세 가지 주장으로 구별됩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하기 전까지의 동정(virginitas ante partum)이고, 둘째는 예수님을 출산하는 과정에서도 보존된 동정(virginitas in partu)이며, 셋째는 예수님을 낳은 이후에도 지속된 동정(virginitas post partum)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의 교리 안에 포함되어 있지만, 성경적 근거와 신학적 의미가 동일하지 않습니다. 특히 첫째는 주님의 신적 기원과 직접 연결되는 반면, 둘째와 셋째는 마리아의 출산 과정과 이후 삶에 관한 추가적인 주장입니다. 천주교는 세 가지 모두를 신앙의 진리로 고백하지만, 이를 검토하는 우리는 각각의 근거와 의미를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천주교가 평생 동정을 단순한 신체적 순결 문제가 아니라, 마리아의 믿음과 주님께 대한 전적 헌신의 표지로 이해한다는 점도 인정해야 합니다. 실제로 교리서 506항은 마리아의 동정성을 의심으로 더럽혀지지 않은 믿음과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바친 상태의 표지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교리를 단순히 신체적인 동정 여부에 집착하는 가르침으로만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출산 전 동정에 관해서는 성경의 증언이 매우 분명합니다. 마1:18은 마리아와 요셉이 함께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기록합니다. 마1:20에서 천사는 요셉에게 마리아에게 잉태된 자가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눅1:34에서 마리아는 자신이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을 수 있느냐고 묻고, 눅1:35에서 천사는 성령이 그에게 임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그를 덮을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씀들은 예수님의 잉태가 일반적인 인간의 출생과 근본적으로 달랐음을 증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에 관한 교리’(Doctrine of the Lord, DL, 1763) DL.48과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92에서 이러한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의 특별한 질서를 설명합니다. 주님의 영혼은 처음부터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온 신성 자체였으며, 마리아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위한 자연적 인성을 제공한 어머니였습니다. 주님은 인간 아버지에게서 생명을 받으신 분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신적 생명을 받으시고, 마리아에게서는 자연적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동정녀 탄생은 단순히 놀라운 기적이나 마리아의 순결을 보여 주기 위한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의 신적 기원과 직접 연결되는 성육신의 본질적 진리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사실을 부정하면 주님의 출생을 일반 인간의 출생과 구별하는 중요한 근거를 잃게 됩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기 전까지 동정녀였다는 사실은 성경과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직접적으로 뒷받침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출산하는 순간에도 마리아의 신체적 동정성이 온전히 보존되었다는 두 번째 주장은 별도로 살펴야 합니다. 천주교는 주님의 탄생이 마리아의 동정성을 손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거룩하게 했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출생이 일반적 출산과 달랐다는 특별한 신학적 이해입니다. 그렇다고 천주교가 주님께서 실제 인간의 몸을 취하지 않으셨다거나 출생 자체가 단순한 환상이었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천주교는 주님께서 참된 인간으로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출생이 마리아의 동정성을 훼손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실제로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증언할 뿐, 출산 순간의 구체적인 신체적 과정이나 마리아의 신체 상태가 어떻게 유지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눅2:7은 마리아가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다고 기록하지만, 그 출산이 일반적인 신체적 출산과 어떤 점에서 달랐는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주님의 동정녀 잉태와 신적 기원을 중요하게 설명하지만, 확인되는 주요 직접 본문만으로는 마리아가 출산하는 순간에 어떤 신체적 상태를 유지했는지에 관한 별도의 교리를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출산 중 동정이 반드시 거짓이었다고 단정할 근거도 충분하지 않지만, 이를 주님의 성육신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신적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할 직접적인 근거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실제로 가르치는 내용과 교회가 신학적으로 확정한 내용을 구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 번째 주장인 출산 후의 평생 동정은 성경 해석에서 더욱 직접적인 논쟁을 일으킵니다. 마13:55-56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그분의 형제들인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의 이름을 언급하고 자매들도 있다고 말합니다. 막6:3에도 같은 취지의 기록이 나타나며, 막3:31-35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을 찾아온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1:19에서 바울은 야고보를 ‘주의 형제’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표현을 일반적인 가족관계의 문맥에서 읽으면 예수님께 실제 형제자매들이 있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이들이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다른 자녀들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성경의 친족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엄밀한 가족관계의 용어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으며, 가까운 친족을 형제라고 부르는 관습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리서 500항은 야고보와 요셉이 다른 마리아의 아들들이라고 설명하면서, 복음서의 형제자매 언급이 마리아의 다른 출산을 증명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역사적으로는 그들이 요셉의 이전 결혼에서 태어난 자녀들이었다는 해석도 존재했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형제들’이라는 표현은 마리아에게 다른 자녀들이 있었다는 해석의 중요한 근거가 되지만, 그 표현만으로 논쟁이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동시에 이들이 모두 친족이었다는 천주교의 해석 역시 성경이 직접 명시한 관계를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닙니다. 결국 복음서의 가족관계 표현을 해석할 때에는 그 문맥과 언어적 관습을 함께 고려해야 하며, 어느 한쪽의 결론을 처음부터 확정된 사실로 놓고 본문을 읽어서는 안 됩니다.

 

마1:25 역시 중요한 논쟁의 대상입니다. 이 말씀은 요셉이 마리아가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낳기까지’라는 표현을 근거로 예수님을 낳은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부부관계를 맺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특정 시점까지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이후에는 반대의 일이 일어났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마1:25는 예수님의 출생 이전에 요셉과 마리아가 부부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지만, 출산 이후의 결혼생활을 확정하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닙니다. 눅2:7의 ‘첫아들’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첫아들이라는 말이 반드시 둘째나 셋째 아들의 존재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유대 율법에서 처음 태어난 아들은 후속 자녀의 유무와 관계없이 특별한 지위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표현들은 마리아가 이후 다른 자녀들을 낳았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하지만, 그 가능성을 곧바로 역사적으로 확정해 주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평생 다른 자녀를 낳지 않았다는 주장도 이 본문들만으로 직접 증명할 수 없습니다. 교회 역사에서는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지지하는 전통이 일찍부터 발전했으며, 2세기의 ‘야고보 원복음서’(Protoevangelium of James) 같은 외경 문헌에서도 마리아의 특별한 동정에 관한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헌은 정경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지니지 않습니다. 4세기에는 헬비디우스가 예수님의 형제들에 관한 본문을 근거로 마리아의 출산 후 결혼생활을 주장했고, 히에로니무스는 이에 반대하여 평생 동정을 옹호했습니다. 이 논쟁은 후대 교회에서 동정과 결혼의 영적 가치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되었습니다. 따라서 평생 동정은 천주교만의 독특한 교리가 아니라 오래된 기독교 전통에 속하지만, 오랜 전통 자체가 성경의 직접적인 증언과 동일한 권위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주님의 동정녀 탄생을 분명하게 가르친다는 사실과, 마리아의 출산 중 및 출산 후 동정까지 직접 확정한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주님에 관한 교리’ DP.48과 TCR.92는 주님의 신적 기원과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인성을 설명하는 직접적인 근거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들에서 마리아가 이후에도 평생 동정녀로 살았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마리아의 동정성이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되었는가보다, 주님께서 인간 아버지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신적 생명을 받으셨으며, 마리아에게서는 자연적 인성을 취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인성을 시험과 싸움을 통하여 영화하셨습니다. 따라서 성육신의 본질적인 진리는 주님의 신적 기원과 인성의 영화(榮化, glorification)에 있으며, 마리아의 출산 이후 생활에 관한 추가적인 가정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평생 동정의 세 측면을 동일한 수준의 신적 진리로 확정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직접적 가르침에서 도출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이것은 마리아가 실제로 평생 동정녀였을 가능성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역사적 사실의 가능성과 신앙적으로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교리의 확실성은 서로 구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더 깊이 살펴볼 문제는 성경에서 ‘동정녀’(童貞女, virgin)가 지니는 영적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3081에서 창24:16에 등장하는 리브가가 동정녀이며, 남자가 그를 알지 못했다는 말씀을 해설합니다. 그는 동정녀가 주님의 나라와 교회를 나타내며, 그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결합과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남자가 알지 못했다’는 표현은 거짓에 의하여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동정녀는 단순히 육체적 성경험이 없는 상태를 넘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교회의 순수한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설명은 마리아의 동정녀 탄생을 이해할 때도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주님께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다는 역사적인 사실은 신적 생명의 근원이 인간 남성에게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동시에 동정녀의 상응은 인간이 주님의 생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해석의 범위를 정확하게 지켜야 합니다. AC.3081은 리브가에 관한 말씀의 속뜻을 해설하는 본문이지 마리아의 평생 동정 여부를 직접 판정하는 본문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를 마리아 교리에 적용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 원리에 근거한 신학적 적용이지, 그가 마리아의 출산 후 동정을 직접 인정하거나 부정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이처럼 문자적인 역사적 사실과 말씀의 속뜻을 구별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반드시 지켜야 할 해석의 원칙입니다.

 

이러한 영적 의미를 이해하면 육체적인 동정과 영적인 순결을 반드시 동일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하지 않고 평생 동정생활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마음이 자동으로 거짓과 악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결혼하여 배우자와 사랑을 나누고 자녀를 낳았다고 해서 영적 순결을 잃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결혼애’(Conjugial Love, CL, 1768) CL.154에서 결혼을 부정한 상태로 여기는 사람들은 참된 순결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CL.155에서는 평생 독신을 서약했다는 사실 자체가 참된 순결을 보증하지 않으며, 참된 결혼생활에 대한 사랑이 그 사람 안에 남아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CL.156에서는 결혼생활이 독신생활보다 선호되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참된 결혼애가 영적 선과 진리의 결합에 상응하며, 주님에게서 오는 거룩한 사랑이라는 그의 결혼관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결혼은 인간의 영적 삶을 더럽히는 낮은 상태가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에서 사랑과 지혜가 결합하는 중요한 삶의 형태입니다. 물론 독신이나 동정의 삶도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선한 쓰임 가운데 살아간다면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동정생활 자체가 결혼생활보다 본질적으로 더 거룩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마리아의 평생 동정 교리는 중요한 질문을 받게 됩니다. 만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후, 요셉과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맺었다면 그의 거룩함이 훼손되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결혼관에 비추어 보면 그렇다고 말할 근거는 없습니다. 주님의 질서 안에 있는 참된 결혼애는 거룩한 사랑이며, 정상적인 부부관계 자체는 죄나 영적인 오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도 천주교의 공식적인 입장을 정확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결혼 자체를 부정하거나 부부관계를 본질적으로 부정하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혼인을 ‘성사’(聖事, sacrament)로 인정하며, 배우자 사이의 사랑과 자녀의 출산을 하느님께서 주신 선한 질서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평생 동정 교리를 결혼에 대한 멸시로 규정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동정을 일반적인 결혼생활에 대한 부정으로 설명하기보다, 주님의 성육신이라는 유일한 사건에 온전히 봉헌된 특별한 소명으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의도에는 인정해야 할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특별한 소명을 설명하기 위하여 출산 중의 신체적 상태와 출산 이후의 모든 부부관계까지 신앙의 필수적인 진리로 확정해야 하는지는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참된 거룩함은 외적 신체 상태나 결혼 여부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께서 막3:31-35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러한 영적 관계의 중요성을 보여 줍니다. 이 말씀은 자연적 가족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참된 관계가 혈연이나 외적 조건보다 깊은 영적 차원에 있음을 가르칩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존중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그의 신체적 상태에 관한 추정을 신앙의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한 믿음을 본받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교리가 오늘 우리의 신앙에 던지는 질문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동정녀 탄생은 스베덴보리의 주님론에서 성육신의 중요한 진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 아버지에게서 태어나신 분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신적 생명을 받으시고, 마리아에게서 자연적 인성을 취하신 분입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그분께서는 일반 인간과 달리 자신의 신적 능력으로 모든 시험을 이기시고, 인성을 영화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마리아가 어떤 신체적 상태를 유지했으며, 요셉과 어떠한 결혼생활을 했는지는 주님의 신적 기원과 인성 영화의 진리를 이해하는 데 같은 방식으로 요구되지 않습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증언하는 것은 주님께서 동정녀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사실이며, 마리아의 출산 순간과 이후 생활에 관한 세부 사항은 그만큼 직접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중심은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무조건 입증하거나 반박하는 데 있지 않고, 동정녀에게서 인간으로 오신 주님이 누구이신가를 올바르게 아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각 사람 안에 이루고자 하시는 영적 출생 역시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인간이 거짓과 악에서 돌아서고 순수한 진리에 대한 애정으로 말씀을 받아들일 때, 그 사람 안에 천국의 생명을 이루십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선과 진리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순결은 단순한 육체적 상태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거짓과 악으로 더럽히지 않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려는 마음의 순결입니다. (SL.RC.033 해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기 전과 낳을 때와 낳은 후에도 평생 동정녀였다’라는 명제에는 구별하여 판단해야 할 세 가지 주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인간 아버지의 개입 없이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셨다는 출산 전 동정은 성경이 분명하게 증언하며, 스베덴보리의 성육신론에서도 중요한 신적 진리입니다. 둘째, 마리아가 예수님을 출산하는 순간에도 신체적인 동정성을 보존했다는 출산 중 동정은 천주교의 공식 교리이지만, 성경은 그 구체적인 출산 과정을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셋째,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후에도 요셉과 부부관계를 맺지 않고 평생 동정녀로 살았다는 출산 후 동정 역시 오랜 교회 전통에 근거하지만, 성경만으로 그 역사적 사실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복음서의 형제자매 언급은 마리아에게 다른 자녀들이 있었다는 해석의 중요한 근거가 되지만, 친족관계에 관한 다른 해석도 존재하므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가르침 역시 이 문제를 명확히 해결한다고 주장할 근거는 부족합니다. 따라서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마리아가 실제로 평생 동정녀였을 가능성을 인정하거나 그의 특별한 소명을 존중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증언하는 동정녀 잉태와, 출산 중 및 출산 후 동정에 관한 후대의 교리적 확정을 동일한 수준의 직접적 신적 증언으로 취급하는 데 있습니다. 또한 육체적 동정 자체를 결혼생활보다 자동으로 더 높은 거룩함의 조건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동정녀의 속뜻은 거짓에 의하여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한 상태와 선과 진리의 결합에 관계되며, 참된 거룩함은 외적 신체 상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내적 삶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교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마리아의 출산 전후 생활을 신앙의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인간으로 오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여 인류를 구원하신 주님의 유일한 신성과 구속의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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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32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는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원죄 없이 보존되었다’ - 무염시태는 주님의 성육신과 구속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진리인가?

 

‘마리아는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원죄 없이 보존되었다.’ 이것은 천주교의 대표적 마리아 교리 가운데 하나인 ‘무염시태’(無染始胎, Immaculate Conception)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라틴어로는 ‘콘켑티오 임마쿨라타’(conceptio immaculata)라고 하며, 오늘날 한국 천주교에서는 주로 ‘원죄 없으신 잉태’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천주교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할 때 비로소 특별히 거룩해졌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 자신이 어머니 안에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원죄에서 보존되었으며, 평생 어떠한 개인적인 죄도 짓지 않았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마리아가 특별히 준비되었다는 신앙적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을 접하면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모든 인간이 죄의 영향을 받는 존재라면 어떻게 마리아 한 사람만은 처음부터 원죄 없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주님께서 죄 없으신 거룩한 분으로 태어나시기 위해서는 그분의 어머니 역시 원죄가 없어야 했던 것일까요? 무엇보다 마리아가 특별한 은총으로 원죄에서 보존되었다는 사실은 성경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질문은 마리아 개인의 거룩함을 넘어, 주님의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에서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결합하였으며, 인간에게 전해지는 악의 성향과 주님께서 이루신 인성의 영화(榮化, glorification)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묻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무염시태를 검토하려면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어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유전악과 주님의 구속 및 영화의 질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무염시태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Virgin Birth)에 관한 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무염시태의 대상은 예수님이 아니라 마리아 자신입니다. 이 교리는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가 교황령 ‘형언할 수 없으신 하느님’(Ineffabilis Deus)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확정했습니다. 그 내용은 마리아가 자신의 잉태 첫 순간부터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권으로, 그리고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힘입어 ‘원죄’(原罪, original sin)의 모든 더러움에서 보존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주교가 마리아를 구원이 필요 없는 독립적인 존재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천주교에 따르면 마리아도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하여 구원받았지만, 다른 인간들과 달리 죄에 빠진 다음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도록 보존되는 특별한 방식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흔히 ‘예방적 구속’(preservative redemption)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무염시태를 ‘마리아는 구원이 필요 없는 완전한 인간이었다’라는 주장으로 이해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특별한 거룩함마저 그리스도의 구속과 하느님의 은총에서 비롯된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490–493항에 체계적으로 나타납니다. 491항은 마리아가 자신의 잉태 첫 순간부터 원죄에서 보존되었다고 설명하고, 492항은 그 특별한 거룩함이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되었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493항은 마리아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평생 모든 개인적인 죄에서 자유로웠다고 밝힙니다. 여기에는 구별해야 할 두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하나는 마리아가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원죄의 상태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상 생애 동안 실제적인 죄도 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천주교는 이 둘을 연결하면서 마리아가 구원자의 어머니로서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님의 성육신에 합당하도록 준비되었다’라는 신학적 설명과 ‘주님께서 성육신하시려면 반드시 죄 없는 어머니가 필요했다’라는 논리적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무염시태를 하느님께서 자유롭게 베푸신 특별한 은총으로 설명하지, 하느님께서 원죄 없는 어머니가 없으면 성육신하실 수 없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검토해야 할 것은 마리아의 이러한 특별한 보존이 실제로 계시된 진리인지, 그리고 그것이 주님의 성육신과 구속을 이해하는 데 어떤 신학적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점입니다.

 

무염시태가 역사적으로 형성된 과정도 중요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마리아를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된 복된 여인으로 이해하였으며, 하와의 불순종과 마리아의 순종을 대비하는 신학적 해석도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원죄에서 보존되었다는 교리가 처음부터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정립되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중세 서방교회에서는 마리아의 거룩함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원죄에서 정화되었는가를 놓고 신학적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특히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필요로 한다는 가르침과 마리아의 특별한 무죄성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러한 논쟁 가운데 둔스 스코투스는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하여 미리 죄에서 보존되었다는 신학적 설명을 발전시켰으며, 이는 이후 무염시태 교리를 정식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천주교는 이러한 과정을 새로운 교리를 임의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교회에 맡겨진 신앙의 유산을 점차 명확하게 이해한 과정으로 봅니다. 그러나 교리의 역사적 발전과 그 교리가 신적 계시에 근거한 진리인지는 구별하여 검토해야 합니다. 어떤 교리가 오랜 논쟁을 거쳐 공식적으로 확정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곧바로 성경의 속뜻에 포함된 신적 진리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천주교가 무염시태의 근거로 중요하게 제시하는 성경 말씀 가운데 하나는 눅1:28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은혜를 받은 자라고 인사하며, 주께서 그와 함께하신다고 전합니다. 가톨릭 신학은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케카리토메네’(kecharitōmenē)를 중요하게 해석합니다. 이 표현은 은총을 받은 상태를 나타내며, 천주교는 마리아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특별히 충만하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 자체가 마리아가 자신의 잉태 첫 순간부터 원죄 없이 보존되었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선언하지는 않습니다.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는 사실과 그 은총이 정확히 언제부터 어떤 방식으로 역사했는가는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근거는 창3:15입니다. 천주교는 뱀과 여자, 그리고 그 후손 사이의 적대 관계를 그리스도와 마리아에 연결하여 이해하며, 마리아를 ‘새 하와’(New Eve)로 해석하는 전통을 발전시켰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마리아의 순종을 구원의 역사와 연결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본문 자체가 마리아에게 유전적 악의 성향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까지 직접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창3의 인물과 사건들은 태고교회의 영적 상태와 인간 안에서 일어난 변화를 담고 있으므로, 그 의미를 후대의 특정 교리에 단순히 대응시켜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성경이 명시하는 내용과 후대의 신학적 해석을 통하여 도출한 결론을 구별해야 합니다. 물론 성경에 직접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교리가 곧바로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모든 신자가 반드시 믿어야 할 신적 진리로 확정하려면 그에 합당한 근거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천주교의 무염시태론과 중요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에서 인간에게 전해지는 악을 설명하면서, 그것이 단순히 최초의 인간 아담이 지은 한 번의 죄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의 ‘유전악’(遺傳惡, hereditary evil)은 부모와 조부모, 여러 세대의 조상들이 실제적인 삶에서 형성한 악한 성향이 후손에게 전해지는 것과 관계됩니다. 이러한 성향은 인간이 성장하여 자신의 이해와 의지를 사용하면서 실제적인 악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특히 AC.4563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부모에게서 유전악을 물려받지만, 그 유전적 성향 자체 때문에 실제적 죄를 범한 사람으로 책망받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 안에서 악을 선택하고 행할 때, 그 실제적 악에 대하여 책임을 집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유전악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는 악을 향한 성향과 관계되며, 이미 개인적으로 범한 죄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구별은 마리아의 무염시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유전악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주장과 그 사람이 실제로 죄를 지었다는 주장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천주교의 원죄를 스베덴보리의 유전악과 정확히 구별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404–405항은 원죄를 아담의 죄에 대한 후손 개개인의 직접적인 개인적 책임이나 단순한 법적 죄책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원죄는 인류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 본성에 전해진 ‘원초적 거룩함과 의로움의 결핍’이며, 인간이 스스로 저지른 행위가 아니라 물려받은 상태입니다. 교리서는 인간 본성이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지만 상처를 입었으며, 무지와 고통과 죽음의 영향을 받고 죄로 기우는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 죄로 기우는 성향을 ‘사욕편정’(邪慾偏情, concupiscence)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세례로 원죄가 제거된 사람에게도 이러한 성향이 남아 있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가톨릭의 원죄와 스베덴보리의 유전악은 서로 관련된 문제를 다루지만, 동일한 개념은 아닙니다. 가톨릭의 무염시태가 마리아를 원죄에서 보존되었다고 선언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마리아에게 어떤 의미의 유전적 성향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자동으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유전악을 취하셨다고 가르친다는 사실만으로 가톨릭의 원죄 개념에 따른 무염시태가 곧바로 논리적으로 반박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차이를 분명히 해야 두 전통의 실제적인 신학적 쟁점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무염시태를 검토할 때, 가장 결정적인 본문은 AC.1573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항목에서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겉 사람 안에 어머니에게서 비롯된 유전악이 있었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그는 주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아버지에게서 오는 유전악은 전혀 없었지만, 인간 어머니인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외적 인성에는 유전적 악이 있었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AC.1573은 이러한 모성적 유전성이 주님께서 실제로 시험을 받으실 수 있었던 이유와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유전악을 취하셨다는 사실과 실제로 죄를 지으셨다는 주장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실제적인 악을 행하셨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유전적 악을 통하여 시험을 받으셨지만, 자신의 신적 능력으로 모든 시험을 이기셨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의 영혼은 처음부터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온 신성 자체였으며, 그분에게는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악이 전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자연적 인성은 영화되어야 할 대상이었고, 주님께서는 시험과 싸움을 통하여 그 인성을 점차 신적으로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거룩함은 마리아가 특별히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조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주님 안에 계신 신성 자체에서 비롯됩니다.

 

이러한 구별은 AC.4564에서 더욱 명확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일반 인간이 거듭날 때, 유전악과 실제적인 악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그 악은 주님의 섭리에 의하여 분리되고 주변으로 물러나며, 인간은 주님께서 그를 악으로부터 붙드시고 선 안에 머물게 하시는 만큼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인간도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선을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천국의 천사들조차 자신들에게서 비롯되는 것은 악과 거짓이며, 그들 안에 있는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일반 인간과 전혀 다른 일을 이루셨습니다. AC.4564는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유전악을 완전히 제거하시고, 자신의 인성을 신적으로 만드셨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일반 인간의 ‘거듭남’(regeneration)과 주님의 영화 사이의 결정적 차이입니다. 인간은 주님의 능력으로 악에서 분리되고 선 안에 보존되지만, 주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유전적 악을 완전히 제거하셨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주님론에서 성육신과 구속의 핵심은 마리아의 무죄한 출생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으로 취하신 인성을 시험과 싸움을 통하여 온전히 신적으로 만드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 문제는 주님의 시험과 구속의 관계를 살펴볼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히4:15는 주님께서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는 없으시다고 가르칩니다. 주님께서 시험받으셨다는 사실과 죄 없으셨다는 사실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실제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그 시험에 굴복하여 죄를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시험을 단순히 인간에게 도덕적인 모범을 보여 주시기 위한 사건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지옥의 세력과 싸우시고, 그들을 이기심으로써 구속의 역사를 이루셨으며, 동시에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셨다고 가르칩니다.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자연적 인성은 이러한 시험이 실제로 일어나는 자리였으며, 주님께서는 자신의 신적 능력으로 그 모든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인성이 마리아에게서 유전적 악의 성향을 취하셨다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주님의 거룩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왜 실제적인 시험을 받으셨으며 어떻게 구속과 영화를 이루셨는지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주님의 성육신을 이해하기 위하여 마리아의 무염시태를 필수적인 조건으로 설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성육신론에서 도출되는 판단이지, AC.1573 자체가 마리아의 무염시태라는 후대의 가톨릭 교리를 명시적으로 논박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원문이 직접 가르치는 내용과 그 가르침에 근거한 신학적 판단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염시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리아가 실제로 많은 죄를 범한 사람이라고 판단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유전악을 취하셨다고 가르친다는 사실은 그의 저작을 통하여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마리아가 지상 생애 동안 어떤 구체적인 죄를 범했는지까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역시 마리아의 일생과 그의 모든 내적 상태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무염시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리아를 특별히 죄 많은 사람으로 묘사해서는 안 됩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되었고, 천사의 말씀에 순종했으며, 자신의 하나님이자 구주를 찬양한 복된 여인입니다. 눅1:38에서 그는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고 부르며,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눅1:46-47에서는 자신의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하나님 자신의 구주를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자신의 거룩함을 자랑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은총과 구원을 기뻐하는 인간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천주교는 이러한 고백이 무염시태와 모순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마리아도 그리스도의 공로로 미리 구속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마리아에게 특별한 무죄의 출생 상태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그가 주님의 은총을 받고 거룩한 쓰임을 감당한 복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별은 인간의 거룩함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거룩함을 어떤 사람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특별한 성질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모든 참된 선과 거룩함의 근원은 오직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에게서 선을 만들어 내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만큼 거룩한 삶에 참여하는 존재입니다. 이는 마리아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근본적인 원리입니다. 어떤 사람이 매우 높은 천국의 상태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그가 선 자체의 근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피조물입니다. 물론 천주교 역시 마리아의 거룩함을 하느님에게서 독립된 속성으로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모든 은총과 거룩함이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두 전통의 차이는 거룩함의 궁극적인 근원이 누구인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원죄에서 보존되었다는 특별한 상태를 신적으로 계시된 진리로 인정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은 이러한 특별한 무죄 상태를 가르치지 않으며, 오히려 마리아에게서 유전적 인간성을 취하신 주님의 시험과 영화에 신학적 무게중심을 둡니다. 또한 그가 설명하는 거듭남의 질서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가보다, 주님께서 그 인간 안에 있는 악을 어떻게 다루시고 새로운 생명을 이루시는가에 더욱 집중하게 합니다.

 

이제 우리는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특별히 선택된 복된 여인이었다는 사실은 성경에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자신의 하나님이자 구주를 찬양했다는 사실도 귀중한 진리입니다. 또한 천주교가 마리아의 특별한 거룩함을 그의 독립적인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과 은총에 근거한다고 가르치는 점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자신의 잉태 첫 순간부터 원죄에서 완전히 보존되었으며, 평생 모든 실제적인 죄에서도 자유로웠다는 주장은 성경의 직접적인 진술을 넘어서는 교리적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도 이 교리를 신적으로 확정된 진리로 받아들여야 할 근거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유전악을 취하셨고, 그 유전적인 것을 시험과 싸움을 통하여 완전히 제거하시고, 인성을 영화하셨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은 마리아가 태어날 때부터 얼마나 특별한 상태에 있었는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모든 시험을 이기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심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에 집중해야 합니다. 마리아는 그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된 복된 인간이지만, 성육신의 능력과 구속의 완성은 오직 주님께 속합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가 보여 준 믿음의 가장 귀중한 모습을 생각해야 합니다. 눅1:38에서 마리아는 자신의 특별한 신분이나 거룩함을 선언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의 중심에는 마리아 자신이 아니라 그에게 말씀하시고 역사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우리는 특별한 사람의 출생과 거룩함을 바라보는 데 머무르기보다, 주님께서 지금 우리 안에서 이루고 계시는 거듭남의 역사에 주목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유전악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주님께서 베푸시는 선과 진리의 생명으로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리아에게서 자연적 인성을 취하셨지만, 그 인성의 유전적 한계에 머물러 계시지 않고, 자신의 신적 능력으로 그것을 영화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모든 인간에게 당신의 사랑과 진리를 주시며, 그들이 천국의 생명으로 거듭나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가장 위대한 신비는 마리아의 특별한 출생 상태가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모든 시험을 이기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심으로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인간의 구원과 거룩함의 유일한 근원은 마리아가 아니라, 마리아가 자신의 하나님이자 구주로 찬양했던 바로 그 주님 한 분이십니다. (SL.RC.032 해설)

 

 

‘마리아는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원죄 없이 보존되었다’라는 명제에는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특별히 선택되었으며, 모든 참된 거룩함과 구원이 하느님의 은총에서 비롯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천주교는 무염시태를 마리아가 구속이 필요 없는 독립적인 존재였다는 뜻으로 가르치지 않으며, 오히려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하여 특별한 방식으로 구속받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잉태 첫 순간부터 원죄에서 완전히 보존되었고 평생 개인적인 죄도 범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을 넘어서는 교리적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1573에서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유전악을 취하셨다고 직접 가르치며, AC.4564에서는 주님께서 그 유전적인 악을 완전히 제거하고 자신의 인성을 신적으로 만드셨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가톨릭의 원죄와 스베덴보리의 유전악은 동일한 개념이 아니므로, 두 교리의 차이를 단순한 직접적 모순으로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 분명한 것은 주님의 성육신과 영화가 마리아의 무염시태를 필수적인 전제로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마리아를 복된 여인으로 존중하거나 그의 특별한 소명을 인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경의 직접적인 증언과 스베덴보리의 주님론에서 확증되지 않는 특별한 무죄의 출생 상태를 모든 신자가 반드시 믿어야 할 신적 진리로 확정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의 거룩함은 마리아에게서 비롯되지 않았으며, 처음부터 주님 안에 계신 신성 자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주님은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인성을 자신의 능력으로 영화하셨고, 모든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구원의 근원 역시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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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31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다’ - 주님의 신성을 고백하는 칭호인가, 영화된 주님의 본성을 혼동하는 표현인가?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다.’ 이 명제는 천주교의 마리아 교리를 이해하는 데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할 신학적 출발점입니다. 천주교 신자들에게 마리아는 단순히 예수님을 낳은 한 여인이 아닙니다. 그는 하느님의 아들을 세상에 낳은 어머니이며, 교회가 특별한 공경을 드리는 복된 여인입니다.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며, 이 칭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하는 중요한 신앙 표현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여러 의문이 생깁니다. 영원부터 계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어머니를 가지실 수 있는가? 마리아가 하느님을 낳았다는 말은 그가 신성의 근원이라는 뜻인가?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결국 한 인간 여성에게 지나치게 높은 지위를 부여하는 일이 아닌가? 이러한 질문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주님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관한 중요한 신학적 문제입니다. 그러나 먼저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천주교가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하느님의 신성을 만들어 냈거나 하느님보다 먼저 존재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명제를 검토하려면 이 칭호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에서 확립되었는지 이해하고,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주님의 성육신과 인성의 영화에 비추어 그 의미와 한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은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466항과 495항에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교리서 495항은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하고 육신으로 낳은 분이 성부의 영원한 아들, 곧 삼위일체의 제2위격이시기 때문에 마리아를 참으로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른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사용되는 그리스어는 ‘테오토코스’(Theotokos)이며, 일반적으로 ‘하느님을 낳은 이’ 또는 ‘하느님을 출산한 이’로 번역됩니다. 이 칭호는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중요한 교리적 의미를 지닌 표현으로 확정되었습니다. 당시 논쟁의 핵심은 마리아 개인을 얼마나 높이 공경해야 하는가보다,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있었습니다. 교회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님이 신적 말씀과 특별히 결합한 별개의 인간 인격이 아니라, 신적 말씀이 친히 인간이 되신 한 위격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단순히 어떤 독립적인 인간 인격의 어머니이고, 그 인간 안에 하느님이 별도로 거하셨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의회는 마리아가 신성의 기원이라고 선언하지 않았습니다. 교리서 466항은 신적 말씀의 본성이나 신성이 마리아에게서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며, 신적 말씀이 마리아에게서 육신으로 태어나셨기 때문에 그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른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의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우선 마리아론이 아니라 그리스도론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면 이 칭호를 처음부터 마리아 숭배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표현으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에페소 공의회가 보호하려 한 핵심적인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만약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님을 신적 말씀과 분리된 독립적 인간 인격으로 이해한다면, 성육신은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친히 인간이 되신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어느 인간과 특별히 결합하신 사건으로 축소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위험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테오토코스’라는 칭호의 본래 의도에는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실제로 이 칭호는 천주교뿐 아니라 정교회와 상당수 개신교 신학 전통에서도 인정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구별이 필요합니다. 어떤 칭호가 올바른 그리스도론적 의도를 가지고 형성되었다는 사실과, 그 칭호로부터 발전한 모든 후속 마리아 교리가 정당하다는 사실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이후 마리아의 특별한 지위와 공경을 설명하는 신학적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칭호의 본래 의미와 그것을 바탕으로 발전한 마리아 공경 및 신심 체계를 구별해야 합니다. 후대의 신학적 발전을 비판하기 위하여 처음 칭호에 담긴 진리까지 부정해서도 안 되지만, 처음 칭호가 지닌 정당성을 근거로 그 이후의 모든 교리를 자동으로 인정해서도 안 됩니다.

 

성경은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눅1:31-35에서 천사는 마리아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고 전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며, 성령이 마리아에게 임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그를 덮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어 43절에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내 주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이 말씀은 천주교가 마리아의 신적 모성을 설명할 때, 중요하게 인용하는 성경적 근거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의 ‘내 주의 어머니’라는 표현과 후대에 확립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교리적 칭호는 그 역사적·신학적 의미를 구별하여 살펴야 합니다. 성경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았으며, 그분이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지만, 마리아가 신성의 근원이라는 생각은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눅1:38에서 마리아는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고 부르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또한 46절, 47절에서는 자신의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스스로 신적 지위를 주장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구원을 기뻐하는 인간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성경이 보여 주는 마리아의 복됨은 그가 신성의 근원이 되었다는 데 있지 않고,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되어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거룩한 쓰임을 감당했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구별을 제시합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92에서 그는 주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인성을 취하셨지만, 그분의 영혼은 마리아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은 일반 인간처럼 인간 아버지에게서 생명을 받은 분이 아닙니다. 그분의 영혼은 신성 자체이며,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것은 인간으로 세상에 오시기 위한 자연적 인성이었습니다. 이 구별은 스베덴보리의 주님론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일반 인간의 출생과 주님의 성육신을 구별하면서, 주님께서는 아버지이신 여호와로부터 신성을, 마리아에게서 자연적 인성을 취하셨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을 서로 분리된 두 신적 존재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아버지는 주님 안에 계신 신성 자체이며, 아들은 그 신성이 인간에게 나타나기 위하여 취하신 인성과 관계됩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주님께서 인간으로 세상에 오시도록 자연적 인성을 제공한 어머니였지만, 주님의 신성을 낳거나 그 신성의 근원이 된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마리아를 신성의 기원으로 이해하지 않는 천주교의 공식 설명과 중요한 공통점을 갖습니다. 그러나 두 전통의 차이는 성육신의 출발점보다,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인성이 이후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에서 더욱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에 관한 교리’(Doctrine of the Lord, DL, 1763) DL.35와 TCR.102에서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인성을 점차 벗으시고, 그분 안에 계신 신성으로부터 오는 인성을 입으셨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벗으셨다’는 표현을 주님께서 인간의 몸을 단순히 버리시고, 신성만 남기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주님께서 지상 생애 동안 시험과 싸움을 통하여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유한하고 자연적인 인간적 요소를 극복하시고, 그 인성을 신적 인성(Divine Human)으로 영화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화는 신성이 인간 안에 머무는 정도의 결합이 아니라, 인성 자체가 신성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마리아에게서 인간으로 태어나셨지만, 영화 이후에도 영원히 마리아에게서 받은 유한한 인성의 상태에 머물러 계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분의 인성은 신성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으며, 그분은 신적 인성으로 영원히 계십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천주교의 전통적 그리스도론과 중요한 차이를 보입니다. 천주교는 그리스도께서 참하느님이시며 참인간이시고, 신성과 인성이 각각의 고유한 특성을 보존하면서 한 위격 안에 결합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인성을 영화하여 온전히 신적으로 만드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두 전통 모두 그리스도의 한 인격을 고백하지만, 그 인격 안에서 인성이 영화되는 방식과 최종적 상태를 설명하는 데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구별은 TCR.102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기독교인들이 주님께서 마리아의 아들이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마리아의 아들이시라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잘못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의 아들이셨다는 사실은 참되지만, 영화 이후에도 그분이 마리아에게서 받은 인간적인 것에 머물러 계신다는 의미에서는 더 이상 참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께서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인성을 벗으시고, 아버지에게서 오는 신적 인성을 입으셨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요2:4와 19:26에서 주님께서 마리아를 ‘어머니’가 아니라 ‘여자여’라고 부르신 말씀들을 이러한 구별의 근거로 제시합니다. 다만 여기서 성경 본문의 문자적 문맥과 스베덴보리의 신학적 해석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당시의 ‘여자여’라는 호칭 자체가 모자 관계의 부정이나 무례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요19에서는 오히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리아의 장래를 돌보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 구절들만으로 주님께서 지상 생애 동안 마리아와의 자연적 모자 관계를 부정하셨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말씀들을 사용하는 목적은 주님의 영원한 신적 정체성이 마리아에게서 받은 자연적 인성에 의하여 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 본문의 직접적인 진술과 스베덴보리의 인성 영화론에 근거한 해석을 구별하여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입장은 TCR.94에서 더욱 명확해집니다. 그는 당시의 기독교인들이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보다 ‘마리아의 아들’로 생각하는 경향을 비판하면서, 이러한 이해가 주님의 신성에 대한 인식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특히 로마 가톨릭에서 마리아를 다른 성인들보다 높이고 성인들의 여왕으로 공경하는 관행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신심이 지나치게 발전하면 주님을 영원한 신적 존재로 이해하기보다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자연적 인간으로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의 비판이 향하는 대상을 정확히 구별해야 합니다. 그는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에서 감당한 역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신적 정체성을 자연적 모자 관계 안에 가두거나, 마리아에게 지나친 종교적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주님의 유일한 신성을 흐리게 만드는 이해를 경계하는 것입니다. 또한 TCR.94에 나타나는 로마 가톨릭에 대한 강한 비판은 스베덴보리가 18세기의 종교적 상황을 바라보며 제시한 자신의 평가입니다. 이를 오늘날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마리아를 여신이라고 가르친다는 주장으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는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과 마리아에게 드리는 공경을 구별하며, 마리아를 피조물로 인정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검토해야 할 것은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마리아를 신이라고 선언했는가가 아니라, 마리아에게 부여한 특별한 칭호와 공경이 실제 신앙생활에서 주님을 향한 예배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문제가 앞으로 다룰 마리아의 여러 교리와 신심을 이해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TCR.827에서 마리아에 관한 특별한 영적 경험도 기록합니다. 그는 자신이 흰옷을 입고 나타난 마리아를 보았으며, 마리아가 자신은 주님의 어머니였고 주님께서 자신에게서 태어나셨지만,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인간적인 것을 벗으셨으므로 이제는 그분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예배한다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또한 마리아는 주님 안에 모든 신성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그분을 여전히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기록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마리아 이해를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두 가지 구별이 필요합니다. 첫째,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사건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경험으로 보고한 내용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역사적 증언과 동일한 종류의 자료로 제시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스베덴보리가 기록한 마리아의 말 가운데 주님께서 ‘하나님이 되셨다’는 표현은 주님께서 원래 신적 존재가 아니셨다가 나중에 하나님이 되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주님론에서 주님의 영혼은 처음부터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온 신성 자체였습니다. 그가 설명하는 변화는 신성의 획득이 아니라,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인성의 영화입니다. 이러한 문맥을 고려하면 TCR.827은 마리아를 주님의 신성과 구별되는 피조물로 이해하며, 천국에서도 그가 오직 주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예배한다고 보는 스베덴보리의 입장을 보여 줍니다. 특히 이 기록은 마리아에 대한 그의 평가가 단순한 역사적 인물에 관한 논평이 아니라, 영화된 주님과 천국의 인간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에 대한 정확한 신학적 판단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천주교는 이 칭호를 통하여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분이 신적 위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이 칭호 자체가 마리아를 신성의 근원으로 만든다고 비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문제는 영화 이후의 주님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자연적 인성을 취하셨다는 역사적 사실은 참되지만, 그분은 그 인성을 영화하여 온전히 신적 인성으로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주님의 어머니였다’는 역사적 진술과 ‘영화된 주님은 지금도 마리아의 아들이시다’라는 영원한 관계에 관한 진술은 같은 의미로 취급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천주교와 스베덴보리의 차이는 마리아가 신성을 창조했는가 하는 문제에 있지 않습니다. 양쪽 모두 그런 주장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인성이 어떻게 영화되었으며, 그 영화 이후 자연적 모자 관계를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에서 계속 말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천주교는 성육신하신 신적 위격의 정체성이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리아의 신적 모성을 지속적으로 고백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영화된 주님의 인성이 더 이상 어머니에게서 비롯된 인간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두 전통 사이의 실제적인 신학적 쟁점입니다.

 

이러한 차이를 이해했다고 해서 마리아라는 인물의 신앙과 순종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눅1:48에서 마리아는 이후의 모든 세대가 자신을 복되다고 일컬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복된 여인으로 기억하고 그에게 맡겨진 거룩한 쓰임을 존중하는 것은 성경의 증언과도 일치합니다. 그러나 그의 복됨을 이해하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주님이어야 합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되었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했으며,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역할이 마리아에게 독립적인 신적 권위나 구원적 능력을 부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시며, 천국의 모든 천사와 사람은 그분에게서 생명을 받습니다. 마리아 역시 주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받은 인간이며, 그분을 예배하는 천국의 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존중하는 신앙이 주님의 성육신과 구속의 역사를 더욱 깊이 이해하도록 인도한다면 그 안에는 귀중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존중이 마리아를 주님께 나아가는 데 필요한 별도의 중재자나 특별한 영적 권위자로 이해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면, 그 근거는 다시 검토해야 합니다. 이 문제는 무염시태와 성모 승천, 하늘의 여왕, 마리아의 전구와 공경을 다룰 때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동시에 이 문제는 천주교만이 아니라 개신교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개신교 신자들 역시 주님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 예수님을 성부 하나님과 나란히 존재하시는 별개의 신적 존재로 생각하거나, 성육신 이후에도 신성과 인성이 서로 느슨하게 결합되어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러한 이해 역시 다시 검토해야 합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주님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는 주님 안에 계신 신성 자체이며, 아들은 그 신성이 세상에 나타나신 인성과 관계되고, 성령은 그분에게서 나오는 신적 작용과 관계됩니다. 이 모든 것은 서로 분리된 세 신적 존재가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신적인 삼위일체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모성에 관한 질문도 결국 우리가 주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는가의 문제로 돌아갑니다. 심지어 스베덴보리의 주님론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그 지식을 자신의 영적 우월감으로 삼는다면, 주님의 영화에 관한 깊은 진리를 배우고도 그 진리가 지향하는 사랑과 겸손을 놓칠 수 있습니다. 참된 진리를 아는 목적은 다른 사람보다 높은 신학적 위치를 차지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을 더욱 깊이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마리아가 보여 준 믿음의 가장 귀중한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눅1:38에서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46절, 47절에서는 자신을 높이는 대신 주님을 찬양하고 하나님 자신의 구주를 기뻐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리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마리아가 참으로 복된 여인인 것은 그가 주님보다 높은 영적 지위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맡기신 거룩한 쓰임을 믿음과 순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눅8:21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자연적 혈연관계보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영적 관계가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올바르게 기억하는 길은 그에게서 주님의 영광을 나누어 받는 특별한 권위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이루어진 성육신의 신비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그가 보여 준 순종을 본받는 데 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인간으로 세상에 오시기 위하여 선택하신 복된 여인이었지만, 인간을 구원하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여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 되신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참된 신앙은 마리아에게서 멈추지 않고, 마리아가 자신의 하나님이자 구주로 찬양했던 바로 그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SL.RC.031 해설)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다’라는 명제에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참으로 하느님이시라는 중요한 그리스도론적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이 칭호는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적 통일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확립되었으며, 천주교는 마리아가 신성의 근원이라거나 하느님보다 높은 존재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명제 자체를 마리아를 신격화한 오류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마리아가 주님께 자연적인 인성을 제공한 어머니였다는 역사적 사실과, 영화 이후에도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비롯된 인성을 지니신 채 영원히 그의 아들이시라는 이해는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인성을 영화하시고, 아버지이신 신성으로부터 오는 신적 인성을 입으심으로써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하나가 되셨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두 전통의 실제적인 차이는 마리아가 신성을 낳았는가에 있지 않고, 주님의 인성의 영화와 그 이후 마리아의 모성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오류의 핵심은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자연적인 모자 관계를 영화된 주님의 영원한 신적 정체성을 설명하는 관계로 계속 적용하거나, 그 관계에서 마리아의 특별한 영적 권위와 구원적 역할을 확대하여 도출하는 데 있습니다. 다만 후대의 마리아 공경과 전구에 관한 문제는 이 칭호 자체와 구별하여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결국 마리아는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된 복된 여인이며 존중받아야 할 믿음과 순종의 본보기이지만, 모든 신적 생명과 구원의 근원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이 명제를 이해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마리아를 높이거나 낮추는 데 있지 않고, 마리아에게서 인간으로 태어나시고 그 인성을 영화하여 영원한 신적 인간이 되신 주님의 유일한 신성과 영광을 올바르게 아는 데 있습니다.

 

 

 

RC.032. ‘마리아는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원죄 없이 보존되었다’

SL.RC.032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는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원죄 없이 보존되었다’ - 무염시태는 주님의 성육신과 구속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진리인가? ‘마리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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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 AC.320-448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 소개

 

‘창4, AC.320-448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는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 1688-1772)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AC) 가운데 창세기 4장에 해당하는 AC.324-442를 중심으로, 그 앞뒤에 배치된 사후의 삶과 영에 관한 설명인 AC.320-323과 AC.443-448까지 번역하고 해설한 책입니다. 전체 593쪽에 걸쳐 영어 원문과 한국어 번역, 메인 해설, 필요한 주제에 대한 심화를 함께 수록했습니다. 창세기 4장은 흔히 가인이 아벨을 죽인 최초의 형제 살인 사건과 가인의 후손들, 그리고 셋과 에노스의 출생을 기록한 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장을 단순히 한 가정에서 일어난 비극이나 초기 인류의 계보로 읽지 않습니다. 그는 이 이야기를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신앙이 마침내 이웃을 향한 사랑을 소멸시키며, 그러한 쇠퇴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준비하시는 영적 역사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책은 신앙이 무엇을 알고 고백하는가에 머무르지 않고, 그 신앙 안에 어떤 사랑이 살아 있는지를 묻는 책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우리는 천지창조의 이야기를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는 그렇게 거듭난 인간이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며 살아가는 천적 인간의 상태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어지는 창세기 3장에서는 인간이 점차 주님에게서 오는 지혜보다 자신의 감각과 판단을 신뢰하고, 자신의 ‘프로프리움’(proprium), 곧 자기 자신에게 속한다고 여기는 것을 사랑하면서 본래의 질서에서 멀어지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창세기 4장은 이러한 변화가 신앙과 예배, 교리와 삶 안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기 시작하면 신앙이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에 관한 말과 교리는 남아 있으면서, 그 안에서 사랑이 점차 밀려날 수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바로 이 심각한 가능성을 드러냅니다.

 

이 장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가인과 아벨이 무엇을 나타내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으로, 아벨을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 개별적인 자선 활동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웃의 선을 원하고,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선과 진리에 따라 자신의 관계와 일을 바르게 이루려는 사랑이며, 실제 삶에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또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단순히 신앙 지식이 많다는 뜻도 아닙니다. 진리를 배우고 교리를 이해하는 일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러한 지식과 고백이 이웃을 사랑하는 삶에서 떨어져 나와, 그 자체만으로 신앙의 전부가 될 때 생깁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은 신앙과 사랑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본래 함께 있어야 할 것이 분리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가인이 먼저 태어나고 아벨이 그 뒤에 태어난다는 순서도 이러한 문맥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신앙의 지식이 먼저이고 사랑의 실천이 나중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먼저 배우는가 하는 순서와 무엇이 신앙의 생명인가 하는 질서는 구별해야 합니다. 사랑은 단지 신앙을 배운 뒤 선택적으로 덧붙이는 장식이 아닙니다. 신앙이 살아 있도록 하는 내적인 생명입니다. 이 책은 이러한 구별을 통해, 신앙에 관하여 많이 안다는 사실과 그 신앙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실제로 이웃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고 있는가 하는 질문은 이 장 전체를 읽는 중요한 길잡이가 됩니다.

 

가인과 아벨이 각각 땅의 소산과 양의 첫 새끼를 여호와께 드리는 장면에서는 예배의 내적인 성격이 드러납니다. 겉뜻에서는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예물을 드렸고,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제물은 받으시고 다른 사람의 제물은 받지 않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를 예물의 재료나 직업의 차이만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배가 어떤 마음과 사랑에서 나오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같은 종교적 행동이라도 그 안에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있는가, 아니면 자신이 인정받으려는 마음과 자기 의가 중심에 있는가에 따라 내적인 성격이 달라집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하나님께 인정받을 특별한 예물의 종류를 찾게 하기보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신앙고백의 내면을 돌아보게 합니다. 입술의 말과 외적인 정성 안에 어떤 생명이 담겨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이어서 가인이 분노하고 안색이 변하는 모습은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될 때 나타나는 내적인 반응을 보여 줍니다. 자신의 신앙과 예배가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도, 자신이 기대한 방식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분노할 수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 분노가 무엇을 지키려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주님의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열심인지, 자신의 우월함과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는 마음인지 살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은 이러한 내적 상태를 드러내며, 악이 인간을 지배하기 전에 그것을 알아차리고 다루어야 하는 문제로 독자를 이끕니다. 이 책은 가인을 단순히 우리와 다른 악한 사람으로 멀리 두기보다, 신앙의 이름으로 자신의 분노와 자기 사랑을 정당화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가능성을 살펴보게 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이 장의 가장 비극적인 중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 말은 종교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 반드시 이웃을 미워하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을 사랑의 삶과 무관한 것으로 규정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일을 구원이나 참된 신앙에 관계없는 것으로 밀어낼 때, 신앙 안에서 사랑이 설 자리가 사라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리는 남아 있어도 그 교리가 지향해야 할 생명은 약해집니다. 이 해석을 따라 읽으면 아벨의 죽음은 과거에 일어난 한 번의 사건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신앙의 확신이 오히려 이웃을 향한 무관심과 냉혹함을 정당화하는 곳에서도 그 영적인 문제가 되풀이될 수 있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는 물음과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가인의 대답은 그러한 문제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일이라고 말하면서 이웃의 삶과 고통을 자신의 관심 밖으로 밀어낼 수 있을까요?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이웃을 향한 사랑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해설에서 이 장면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려는 태도의 본질을 보여 줍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요구를 들어주거나 모든 사람의 삶을 대신 책임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웃의 선을 원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해야 할 선을 행하는 일까지 신앙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가인의 대답은 바로 그 관계를 끊어 버리려는 마음을 비추어 줍니다.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 여호와께 부르짖는다는 말씀과 가인이 땅에서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도 이러한 내적인 흐름에서 설명됩니다.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는 것은 단지 좋은 덕목 하나가 부족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질서 자체가 손상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랑이 제거된 신앙은 스스로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참된 영적 열매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가인이 땅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주지 않는다는 말씀은 이러한 상태를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또한 유리하며 방황한다는 표현은 단순한 거주지의 상실을 넘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에 관한 안정된 방향을 잃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이 책은 이러한 말씀들을 주님의 자의적인 분노로만 읽지 않고, 사랑과 신앙의 질서가 무너질 때 인간이 어떤 상태에 이르는지를 살펴봅니다.

 

그러나 창세기 4장의 이야기는 가인에 대한 정죄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을 만나는 사람이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표를 주십니다. 이 장면은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 주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는데도, 주님께서는 신앙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과 가르침이 보존되어야 그것을 통해 다시 체어리티가 심어질 길도 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표는 사랑 없는 신앙을 옳다고 인정하시는 표가 아닙니다. 인간이 무너뜨린 질서 가운데서도 회복에 필요한 것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깊은 배려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악을 선이라고 부르지 않으시면서도, 그 인간을 다시 선으로 이끄는 데 필요한 길을 지키십니다.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성의 이름을 아들의 이름을 따라 에녹이라고 부르는 장면에서는 분리된 신앙이 하나의 교리 체계로 확대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어지는 후손들의 이름은 단순한 가계의 목록이 아니라, 그러한 교리적 흐름이 변해 가는 상태들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성경의 이름들을 읽는 방식도 중요해집니다. 같은 이름이 다른 장에 등장한다고 해서 언제나 동일한 영적 상태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창4의 에녹과 창5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기록된 에녹은 각각의 문맥 안에서 살펴야 합니다. 이 책은 이름 하나에 고정된 뜻을 붙여 모든 곳에 적용하기보다, 그 이름이 어떤 계열에 속하고 어떤 흐름 속에 등장하는지 함께 살펴봅니다. 상응을 이해한다는 것은 낱말의 뜻을 외우는 데 그치지 않고, 말씀 안에서 선과 진리 또는 악과 거짓이 어떤 관계를 이루는지 읽어 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흐름은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남지 않은 상태로 나아갑니다. 처음에는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했지만, 그 결과는 신앙 자체의 생명까지 잃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점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신앙을 가장 중요하게 지키겠다고 하면서 사랑을 밀어냈는데, 마침내 신앙도 보존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라멕이 사람과 소년을 죽였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심각한 상태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부분을 단순히 옛사람의 폭력적인 자랑으로만 읽으면 장 전체를 관통하는 영적인 문제를 놓치기 쉽습니다. 신앙을 참된 신앙이게 하는 생명을 제거한 채 그 이름과 외형만 지키려 할 때, 인간의 내면에는 무엇이 남는가 하는 질문이 여기에서 제기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계보 안에 아다와 씰라,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이 등장합니다. 겉뜻에서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생활, 악기를 다루는 일, 금속을 가공하는 기술의 기원이 소개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들을 통해 새로운 교회와 그 교회에 속한 천적인 것, 영적인 것, 자연적인 것이 묘사된다고 설명합니다.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은 각각 사랑과 선, 신앙과 진리, 그리고 그것들이 자연적인 삶에 나타나는 차원과 관계합니다. 이 부분은 창세기 4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쇠퇴만 이어지는 장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인간의 내적인 질서가 무너지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새로운 교회를 위한 선과 진리를 마련하십니다. 또한 교회의 생명은 내적인 사랑이나 교리적 이해 가운데 어느 한 부분에만 머무르지 않고, 외적인 삶에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도 생각하게 합니다.

 

창4:25에서 셋이 태어나는 장면은 이러한 회복의 방향을 더욱 분명히 드러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셋을 체어리티가 심어지도록 주님께서 새롭게 주신 신앙으로 설명합니다. 가인도 신앙을 나타내고 셋도 신앙을 나타내지만, 그 둘의 성격은 같지 않습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되어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신앙을 나타냅니다. 반면 셋은 체어리티를 받아들이게 하는 신앙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장의 결론은 신앙을 버리고 사랑만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본래의 목적을 회복하여 사랑의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진리를 배우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는 데 사용하는 사람과, 자신의 악을 돌아보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데 사용하는 사람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셋의 등장은 주님께서 인간에게 열어 주시는 새로운 길을 보여 줍니다.

 

이어서 셋에게서 에노스가 태어나고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말씀은 새로운 교회의 성격을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노스를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삼는 교회와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가르침을 소홀히 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의 가르침이 무엇을 위해 주어지는지를 바르게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진리를 배우고 주님을 인정하며 예배하는 모든 일이 이웃을 향한 선한 사랑과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단순히 특정한 호칭을 입으로 말하는 행위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어떻게 인정하며 어떤 마음으로 예배하는가 하는 문제와 관계합니다. 이처럼 창세기 4장은 사랑을 소멸시킨 신앙의 비극에서 시작하여, 신앙을 통해 사랑이 다시 심어지고 예배의 내적인 생명이 회복되는 방향으로 마무리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질서가 쇠퇴한 이후에는 신앙의 가르침을 통해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새로운 길이 중요해집니다. 이것은 사랑보다 지식이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상태가 달라진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그에게 가능한 방식으로 사랑의 삶을 열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전의 상태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곧 모든 회복의 가능성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을 아시며, 그 상태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와 선을 통해 다시 인도하십니다. 이 장의 교회사는 인간의 실패를 보여 주면서도, 그 실패보다 깊은 곳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지혜를 바라보게 합니다.

 

이 책의 앞부분인 AC.320-323에서는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인간의 삶이 계속된다는 설명을 다룹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에 갓 들어온 사람이 자신이 여전히 이 세상에 있고 육체 안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기록합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삶이 계속되기 때문에, 자신이 영이라는 말을 듣고 오히려 놀란다는 것입니다. 또한 영의 감각과 사고와 언어 능력이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후의 인간을 감각도 인격도 없는 희미한 존재로 상상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감각과 사고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이 곧 사랑과 지혜가 선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무엇을 지각할 수 있는가 하는 능력의 문제와, 무엇을 사랑하며 그 능력을 사용하는가 하는 삶의 문제는 구별해야 합니다.

 

책의 마지막인 AC.443-448에서는 사람들이 생전에 영혼이나 영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관한 사례들을 살펴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을 단순한 생각이나 아무런 실체도 없는 관념으로 이해하는 견해를 비판하며, 영이 실제로 감각하고 생각하는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특히 영이 유기적인 실체라는 말은 영이 자연적인 육체와 같은 물질로 이루어졌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책은 별도의 심화를 통해 영적인 실체와 자연적인 물질을 구별하면서, 영의 실재성을 인정하는 것과 영을 지상의 물체처럼 상상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봅니다. 또한 자신이 여전히 육체 안에 있다고 믿었던 영들의 사례와 생전의 지인들과 나누었다는 대화를 통해, 사후의 삶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이러한 기록은 그의 영계 경험에 관한 증언으로 읽으며, 원문이 말하는 내용과 해설자가 덧붙이는 설명을 구별하고자 했습니다.

 

창세기 4장 본문과 그 앞뒤의 영계 경험 기록은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루지만, 인간의 참된 생명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서 만납니다. 본문에서는 신앙의 지식이 남아 있어도 사랑이 소멸될 수 있다는 사실을 살펴봅니다. 영계 경험 기록에서는 육체가 사라져도 인간의 감각과 생각과 내적인 삶이 계속된다는 설명을 읽습니다. 이 두 부분을 함께 읽으면 눈에 보이는 외형이나 말로 고백하는 내용만으로 인간의 생명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자신이 아는 진리를 어떻게 사용하고, 이웃에게 어떤 마음으로 행동하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사후의 삶에 관심을 갖는 일과 오늘 이웃을 사랑하는 삶은 서로 동떨어진 관심사가 아닙니다. 지금 형성되는 내적인 삶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묻는 하나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이번 책에서 메인 해설과 심화를 함께 마련한 이유도 이러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입니다. 메인 해설에서는 각 번호의 논점을 충분히 설명하고, 본문의 흐름과 필요한 개념을 그 안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신앙과 사랑의 관계, 교회 상태의 변화, 상응을 읽는 방법, 영적인 실체와 자연적인 육체의 차이처럼 독자가 별도로 질문할 수 있는 문제들은 필요한 곳에서 심화로 살펴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설명의 양 자체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처음 읽는 독자가 표현의 낯섦 때문에 핵심을 놓치지 않도록 돕는 것입니다. 또한 가인과 아벨, 성읍과 계보, 악기와 금속 등의 의미를 단순한 상징 목록으로 제시하기보다, 그 각각이 장 전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하도록 했습니다. 말씀의 속뜻은 독특한 지식을 모으는 데서 끝나지 않고, 인간의 신앙과 삶을 비추는 가르침으로 읽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가인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데 앞서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도록 권합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쉽게 특정한 교리나 교회, 또는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사랑을 강조하는 말을 하면서 실제로는 이웃에게 냉정할 수 있고, 진리를 지킨다고 하면서 자신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신앙 지식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도, 아는 진리에 따라 정직하게 살고 이웃의 선을 위해 자신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느 편에 속한다고 선언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내가 믿는다고 말하는 진리가 실제로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지를 살피는 데 있습니다. 창세기 4장의 가인과 아벨은 이러한 질문을 우리 앞에 놓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찰이 자기 정죄나 절망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이 장에서 주님은 체어리티가 소멸된 뒤에도 신앙을 보존하시고, 그 신앙을 통해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가인에게 표를 주시는 일과 셋을 주시는 일은 서로 다른 장면이지만, 무너진 인간을 다시 선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섭리 안에서 연결됩니다. 인간은 자신이 받은 진리를 잘못 사용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가능한 회복의 길을 지키십니다. 따라서 자신의 신앙 안에 사랑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모든 것이 끝났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는 진리를 삶으로 옮기고, 이웃에게 해야 할 작은 선을 행하며, 주님께 사랑의 생명을 구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인간의 신앙이 얼마나 쉽게 변질될 수 있는지를 밝히면서도, 인간을 다시 사랑으로 이끄시는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창4, AC.320-448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는 이러한 의미에서 사랑을 잃어버린 신앙에 관한 책이며, 동시에 신앙 안에 사랑을 다시 심으시는 주님의 섭리에 관한 책입니다. 가인과 아벨, 받아들여지는 예배와 그렇지 않은 예배, 아벨의 핏소리와 가인의 방황, 가인을 보호하는 표, 성읍과 후손들의 계보, 라멕의 황폐한 상태, 새로운 교회를 위한 준비, 셋과 에노스를 통한 회복, 그리고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인간의 삶이 이 한 권에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주제들을 연결하는 중심에는 모든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이 계십니다. 이 책을 읽는 목적은 스베덴보리의 해석에 익숙해지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그 해석을 통해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욱 깊이 알고, 자신이 받은 진리를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이어 가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한 가지 질문을 남기고 싶습니다. ‘나의 신앙 안에서 이웃을 향한 사랑은 살아 있는가?’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설명할 수 있고, 어떤 교리가 옳은지 논증할 수 있으며, 오랫동안 예배를 드려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안에서 가까운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이 옳다는 확신 때문에 이웃에게 해야 할 선을 미루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아우에 대한 물음 앞에서 책임을 부인했지만, 주님께서는 사랑이 사라진 자리에 다시 사랑을 심을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이 책이 독자에게 새로운 해석을 제공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자신이 아는 진리를 살아 있는 신앙으로 받아들이며,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오늘의 관계와 일 속에서 실천하는 작은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창4, AC.320-448 - 20261101, 본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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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 AC.182-319 번역, 해설 및 심화 with ChatGPT (20261027)

‘창3, AC.182-319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 소개 ‘창3, AC.182-319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는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 1688-1772)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AC)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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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V.001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잠언 100선 | 잠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1:7)

 

‘지식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 자신의 지혜를 내려놓고 주님의 지혜를 받아들이는 삶

 

사람은 누구나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복잡한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하며,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 유지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부하고, 경험을 쌓고, 책을 읽고, 지혜롭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조언을 구합니다. 그러나 잠언은 지혜의 출발점을 전혀 다른 곳에서 찾습니다. 잠1:7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인간이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뛰어난 판단력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주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않으면 참된 영적 지혜에 이르지 못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분의 명령을 어기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일까요? 또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지혜로운 판단을 내리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데,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말씀은 단순히 종교적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혜가 어디에서 비롯되며, 그 지혜가 어떻게 사랑과 결합되고, 마침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되는가를 보여 주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먼저 잠1:7이 놓인 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잠1:1-6은 이 책의 목적을 설명합니다.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고,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 행하는 법과 의와 공평과 정직을 배우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목적을 밝힌 직후 7절에서는 그 모든 배움의 기초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경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르아’(יִרְאָה)는 두려움뿐 아니라 경건한 존경과 경외심을 포함하며, ‘근본’에 해당하는 ‘레쉬트’(רֵאשִׁית)는 시작과 으뜸가는 것을 함께 나타낼 수 있습니다. 또한 ‘지식’에 해당하는 ‘다아트’(דַּעַת)는 단순한 정보의 축적을 넘어 삶에서 분별하고 판단하는 실제적인 앎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하나님을 경외하면 모든 학문적 지식을 저절로 얻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진리는 자신의 존재와 삶이 주님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이며, 그 사실을 인정할 때 다른 모든 지식도 올바른 목적을 향해 사용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잠언이 말하는 지혜는 무엇을 얼마나 많이 아느냐보다, 자신이 아는 것을 어떤 사랑으로, 무엇을 위해 사용하는가에 더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의 차이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하나님께 벌을 받을까 두려워 죄를 피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무섭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지옥에 갈까 두렵기 때문에 악한 행동을 삼가기도 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악을 억제하는 출발점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참된 경외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에게 꾸중을 들을까 두려워 잘못을 피하는 아이와, 부모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잘못을 피하는 아이를 생각해 보면 이 차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아이의 외적 행동은 같을 수 있지만 그 행동을 이끄는 내적 동기는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2826에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설명합니다. 특히 AC.2826:13에서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예배, 신앙의 선에서 비롯된 예배, 사랑의 선에서 비롯된 예배를 구별합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형벌에 대한 두려움은 줄어들지만, 거룩한 경외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경외는 주님과 이웃을 거스르거나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 반하는 것을 생각하거나 행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AC.3718에서는 사랑과 거룩한 경외의 관계를 음식과 소금에 비유합니다. 거룩한 경외가 없는 사랑은 소금이 빠진 음식처럼 싱거우며, 거룩한 경외가 있는 사랑은 적절하게 간을 한 음식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이 깊어진 사람은 하나님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악을 더욱 경계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구원이 위태로워질까 두려워 악을 피하는 상태에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악 자체를 싫어하고 멀리하는 상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별을 이해하면 잠언이 왜 여호와 경외하는 것을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하는지도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지혜는 인간 자신의 이해에서 독립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265-275에서 그는 천사들의 지혜가 인간의 지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다고 설명하면서, 그 근원을 천국의 빛과 열에서 찾습니다. 천국의 빛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적 진리이며, 천국의 열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적 선입니다. 천사들은 이 빛과 열을 받아들이는 만큼 지혜로워집니다. 특히 HH.268에서는 천국의 사랑이 자신의 선을 다른 사람과 나누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이것은 지혜가 단순히 진리를 많이 아는 능력이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고 그것으로 다른 존재에게 유익을 주려는 생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천사들의 지혜조차 그들 자신의 소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면, 인간의 지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이해하고 판단하며 선택하는 주체로 살아가지만, 그 모든 능력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자신의 지성을 무시하거나 판단 능력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이해를 성실하게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독립적인 생명의 근원이 아님을 인정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인도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가 자주 설명하는 ‘프로프리움’(proprium)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프로프리움은 인간에게 고유한 자기 자신이라는 뜻을 지니지만, 스베덴보리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할 때에는 모든 선과 진리, 지혜와 능력이 자신에게서 비롯된다고 여기며 그것을 자기 소유와 공로로 삼으려는 성향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성향은 노골적인 교만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며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에게도 미묘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랜 경험과 공부를 통해 탁월한 판단력을 얻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여러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면서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갖게 되고, 어느 순간부터 다른 사람의 조언을 불필요하게 여기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경험을 통해 얻은 판단력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고, 자신의 생각이 틀릴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깊이 연구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신의 영적 우월함을 확인하려 한다면, 그 지식은 주님을 향한 겸손보다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해와 지혜를 감사히 사용하면서도 그 근원이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잠1:7 후반부가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잠언이 말하는 미련함은 단순히 지적 능력이 부족하거나 배움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여기서 ‘미련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윌림’(אֱוִילִים)은 지혜와 교정을 거부하는 완고함을 특징으로 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이 드러났을 때 그것을 인정하기보다 방어하거나 정당화하려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많은 지식이 주어져도 그 지식이 내적 변화로 이어지기 어렵습니다. 그는 진리를 배우는 데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제로는 자신이 이미 옳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더 큰 관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뿐 아니라 모르고 있는 것도 살핍니다. 다른 사람의 말이 자신을 불편하게 하더라도 그 안에 진실이 있는지 검토하며,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그것을 수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비판과 훈계를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부당한 요구와 잘못된 가르침은 분별하고 거절해야 합니다. 참된 겸손은 자신의 판단을 포기하는 맹목적 복종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모두 거부하는 완고함도 아닙니다. 주님만이 선과 진리의 궁극적 근원이심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모두 그 기준 아래에서 살피는 태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참된 지혜를 가질 수 없다는 뜻일까요? 여기서는 세상에서 발휘되는 지혜와 영적 지혜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훌륭한 학자가 될 수 있고,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으며, 어려운 이웃을 진심으로 도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식과 능력, 선한 행동을 무가치하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과 지옥’ HH.318-328에서 교회 밖에서 살아온 사람들도 자신의 종교에 따라 하나님을 인정하고, 양심을 따라 선하게 살아왔다면 천국에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설명합니다. 물론 그의 신학에서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입니다. 따라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씀을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의 지혜와 선한 삶을 부정하는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모든 참된 지혜와 선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밝히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자신의 지혜를 더 의지하고 이웃을 위한 선을 외면한다면, 그는 아직 이 말씀의 영적 의미를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삶은 입술의 신앙고백만으로 완성되지 않으며, 그 고백이 실제로 어떤 사랑과 행동으로 나타나는가를 통해 확인됩니다.

 

거듭남의 관점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은 자신의 내적 상태를 살피는 데서 구체적으로 시작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분노하거나 상처받았을 때에는 자신의 판단이 정당하다는 확신이 더욱 강해집니다. 가족 사이에서도 자신이 오랫동안 희생하고 책임을 다해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불평을 부당하게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과 판단을 마지막 기준으로 삼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자신이 느끼는 분노가 정말로 선과 진리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인지 살펴봅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마음 안에 이웃을 위한 사랑이 있는지, 아니면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려는 욕망이 있는지도 돌아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모두 용납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무조건 억누르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감정과 판단을 말씀의 빛 아래에 놓고 무엇이 참으로 선하고 올바른지를 분별하라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DP.100-128에서 인간이 악을 마치 스스로 제거하는 것처럼 능동적으로 노력해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제거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라고 설명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깨달은 진리에 따라 삶을 바꾸려고 노력합니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자신의 능력을 절대화하지 않으면서도 자유와 책임을 다하는 거듭남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지혜와 사랑의 관계를 더욱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은 진리를 알게 되면 그 자체로 영적으로 성장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진리는 그것을 배우는 데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진리가 인간의 의지와 사랑 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실제 삶에서 선한 행동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그 사람의 생명과 결합됩니다. 어떤 사람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훌륭하게 설명할 수 있더라도, 실제로는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경멸하고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외면한다면 그 진리는 아직 그의 사랑과 충분히 결합되지 않은 것입니다. 반대로 성경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은 많지 않더라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다른 사람에게 공정하고 정직하게 행동하려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 삶에서 선으로 실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외적 행동만으로 사람의 영적 상태를 최종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행동 안에 어떤 사랑과 의도가 들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따라서 참된 지혜는 옳은 답을 많이 아는 능력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가 자신의 의지를 변화시키도록 받아들이는 능력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지보다 그 진리가 얼마나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를 살핍니다.

 

이 말씀은 가정과 직장, 교회에서 더욱 실제적인 질문이 됩니다. 배우자와 의견이 충돌할 때 우리는 자신의 말이 옳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아니면 서로를 이해하고 더 선한 관계로 나아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직장에서 부당한 일을 겪을 때에는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고 상대방에게 되갚아 주려 합니까, 아니면 무엇이 정직하고 지혜로운 선택인지 분별하려 합니까? 교회에서 자신과 신앙적 견해가 다른 사람을 만날 때에는 그 사람의 오류를 드러내어 자신의 신앙이 옳다는 사실을 확인하려 합니까, 아니면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소중히 여기면서도 상대방의 양심과 형편을 존중하려 합니까?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언제나 양보하는 사람도 아니고, 갈등을 무조건 피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때로는 잘못된 일을 단호하게 거절하고, 불의를 바로잡기 위해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도 자신의 분노와 욕망이 판단을 지배하지 않도록 살피며, 자신이 추구하는 목적이 참으로 선한 것인지 묻습니다. 또한 잘못을 발견했을 때, 자신을 정죄하거나 절망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잘못을 주님 앞에 인정하며, 실제로 멀리하려고 노력합니다. 정직하게 말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듣고, 불필요한 비난을 삼가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여 사과하는 작은 행동들이 모두 이러한 삶의 일부입니다. 거듭남은 어느 날 갑자기 완전한 지혜를 얻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이러한 일상의 선택을 통해 우리의 사랑과 의지 안에 점차 자리 잡는 과정입니다.

 

결국 잠1:7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먼저 하나님을 무서워해야 한다는 단순한 교훈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모든 참된 지혜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으며, 인간이 그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영적 지혜가 시작된다는 가르침입니다. 경외는 두려움으로 시작될 수 있지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랑과 결합된 거룩한 경외로 변화합니다. 또한 미련함은 단순한 지식 부족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을 절대화하고 지혜와 훈계를 거부하는 완고함으로 나타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무조건 순종하는 사람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이해와 자유를 올바르게 사용하면서 그분의 사랑과 지혜를 자신의 삶 안에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의 지혜를 무가치하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지혜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에 의해 끊임없이 교정되고 깊어지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진리를 알게 된 것을 자랑하기보다 그 진리가 자신의 사랑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 살피며,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먼저 자신의 내적 상태를 돌아보고, 자신의 유익을 넘어 이웃에게 선한 쓰임이 되는 길을 찾습니다. 참된 지혜는 내가 얼마나 많이 알고 얼마나 옳은 판단을 내리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아는 모든 지혜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형벌을 두려워하거나 종교적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경외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선과 진리에 반하는 악을 멀리하려는 거룩한 마음입니다. 또한 지혜의 근본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 있다는 말씀은 인간의 지적 능력이나 경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참된 지혜의 궁극적인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자신의 지혜를 절대화하고 교정을 거부하는 것은 미련함이며,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여 실제 삶에서 선을 행하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지혜는 지식의 축적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여 인간의 의지와 삶을 변화시키는 거듭남 안에서 완성되어 갑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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