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2.심화

 

3. ‘29:3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29:3) Behold, I am against thee, Pharaoh king of Egypt, the great whale that lieth in the midst of his rivers, that hath said, my river is mine own, and I have made myself (Ezek. 29:3).

 

 

이 구절이 AC.42에 인용된 이유는, 창세기 1 21절의 큰 물고기들(great whales)이 항상 좋은 의미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문맥에 따라서는 인간의 왜곡된 지식과 자기 지혜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42에서 스베덴보리는 큰 물고기들’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인 지식들(knowledges)과 그로부터 형성된 이해의 큰 구조들을 의미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지식이 주님에게서 분리되어 자기 자신에게 귀속될 때는 부정적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에스겔 29장의 바로와 큰 악어는 바로 그 상태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애굽은 말씀에서 흔히 기억-지식(scientia)과 학문적 지식을 의미합니다. 원래 지식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의 이해를 준비시키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이 반복해서 부정적으로 사용될 때는, 지식이 신앙과 사랑을 섬기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지배하려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바로는 그러한 자연적 인간의 교만을 대표합니다.

 

본문에서 바로는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돌립니다. 강은 지식과 이해의 흐름을 뜻하는데, 바로는 그것이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AC.39에서 스베덴보리가 경고한 자기에게서 선과 진리가 나온다고 믿는 상태’와 같은 본질을 지닙니다.

 

그래서 여기서 바로는 큰 악어 또는 큰 물고기’로 묘사됩니다. 큰 물고기는 원래 큰 지식과 넓은 이해를 의미할 수 있지만, 그것이 자기 사랑과 교만에 사로잡히면, 진리를 섬기는 도구가 아니라 진리를 왜곡하는 도구가 됩니다. 따라서 에스겔의 큰 악어는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자기 지혜를 절대화한 자연적 인간을 상징합니다.

 

AC.42의 문맥에서는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물고기들이 이해력에 속한 것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한 뒤, 그러한 상응이 긍정적으로도 사용되고 부정적으로도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여러 본문을 인용합니다. 에스겔 47장의 물고기들은 살아 있는 진리의 이해를 뜻하지만, 에스겔 29장의 큰 악어는 자기 지혜에 빠진 왜곡된 이해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이 AC.42에 인용된 이유는, ‘큰 물고기’가 단순한 자연계 생물이 아니라 인간의 지식과 이해의 큰 체계를 의미하며, 특별히 여기서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자연적 인간의 교만한 지성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바로가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진리를 자기 것으로 돌리는 상태를 대표하며, 스베덴보리는 이를 통해 큰 물고기’의 부정적 상응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AC.42, 심화 4, ‘겔32:2’

AC.42.심화 4. ‘겔32:2’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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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 심화 2, ‘스베덴보리는 인용 구절들의 이런 속뜻을 어떻게 아는 건가요?’

AC.42.심화 2. ‘스베덴보리는 인용 구절들의 이런 속뜻을 어떻게 아는 건가요?’ AC.42를 보면 여러 인용 구절이 나오며, 스베덴보리는 그에 대한 속뜻을 거침없이 기술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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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심화

 

2. 스베덴보리는 인용 구절들의 이런 속뜻을 어떻게 아는 건가요?’

 

AC.42를 보면 여러 인용 구절이 나오며, 스베덴보리는 그에 대한 속뜻을 거침없이 기술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속뜻들 하나하나가 다 놀라운 수준인데요, 스베덴보리는 이런 속뜻을 어떻게 아는 건가요? 주님, 혹은 천사가 곁에서 구술하는 건가요, 아니면 갑자기 눈이 확 밝아져 그 속뜻들이 마치 디스플레이 되듯 눈앞에 펼쳐지는 건가요? 전에 한번 문답을 나눈 것 같은데, 여전히 너무 놀라워 다시 여쭙는 것입니다.

 

목사님, 이 질문은 많은 분들이 마음 깊이에서 품게 되는 질문이고, 동시에 스베덴보리 이해의 핵심에 닿아 있는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또렷하게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는 구술받아 적은 것도 아니고, ‘영상처럼 펼쳐지는 것을 본 것도 아니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 속에서 지속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상태’, 곧 계시적 이해 속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이것은 감각적 환상도 아니고, 단순한 학문적 추론도 아닌, 그리고 그 둘 사이 어떤 거가 아닌, ‘전혀 다른 차원의 인식 방식’입니다.

 

이걸 이해하려면, 스베덴보리가 스스로 여러 곳에서 밝힌 자신의 상태를 먼저 보셔야 합니다. 그는 일관되게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은 천사들과 교통하면서, 그들과 함께 말씀을 읽고, 그들이 이해하는 방식대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옆에서 말해 주었다’가 아니라, ‘같은 빛 안에 들어갔다’는 점입니다. 천사들은 말씀을 글자 그대로가 아니라 속뜻으로 이해하는데, 스베덴보리는 그들과 같은 상태에 들어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 질문처럼 ‘곁에서 누가 불러 주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매우 분명하게, ‘어떤 천사도 자기 생각을 대신해 주지 못하며,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강조합니다. 천사들은 매개일 뿐이고, 실제로 빛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과정은 ‘구술’이라기보다, ‘빛 가운데서 이해가 열리는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눈앞에 펼쳐지듯 보이는가?’인데요, 이것도 일부는 맞고, 일부는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실제로 영계를 ‘보는’ 경험을 했고, 상응에 해당하는 장면들을 형상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을 풀 때는, 그것이 주된 방식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문장을 읽을 때, 그 안의 영적 의미가 즉시 이해되는 상태’, 곧 ‘보듯이 이해되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주 ‘perceived’, ‘was given to see’ 같은 표현을 쓰는데, 이것은 물리적 시각이라기보다 ‘이해와 지각이 동시에 일어나는 상태’입니다.

 

조금 더 쉽게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글을 읽을 때, 글자 하나하나를 따로 해석하지 않아도, 문장의 의미가 ‘한 번에 들어오는’ 경험을 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에게는 그 수준이 훨씬 깊어서, ‘글자의 의미를 넘어서 그 안에 담긴 영적 구조와 연결이 동시에 보이는 상태’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인용 구절을 하나 가져오면, 그것이 단절된 문장이 아니라, ‘전체 말씀 안에서 어떤 자리에 있고, 무엇을 가리키는지가 함께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핵심은 이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속뜻을 아는 방식은 ‘정보를 전달받는 방식이 아니라, 상태가 열리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그는 ‘배웠다’기보다, ‘보여졌다’, ‘이해되었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에 의존한다’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래서 이 모든 작업은 인간 스베덴보리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계시 사역’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누가 옆에서 불러 주는 것을 받아 적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빛 속에서 말씀을 이해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을 때 그 속뜻이 함께 열렸습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지나치게 신비화하지 않으면서도 본질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과의 교통 속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 가운데 들어가 말씀의 속뜻을 보듯이 이해하는 상태에서 기록하였으며, 그것은 구술도 환상도 아닌 계시적 이해입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놀라움’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고, 사실 그 놀라움 자체가 이 작업의 본질을 잘 보여 줍니다.

 

 

 

AC.42, 심화 3, ‘겔29:3’

AC.42.심화 3. ‘겔29:3’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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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 심화 1, ‘겔32:2 속뜻에 대하여’

AC.42.심화 1. ‘겔32:2 속뜻에 대하여’ AC.42에서 겔32:2,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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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심화

 

1. 32:2 속뜻에 대하여

 

AC.42에서 겔32:2,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도다를 인용하면서 그 속뜻으로 이 말씀은 기억 지식을 수단으로 삼아, 그러니까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뜻합니다.’라고 하는데요, 속뜻이라고는 하지만... 좀 어리둥절합니다. 이게 어떻게 해서 그렇게 연결되는지요?

 

목사님, 이 대목이 어리둥절하게 느껴지시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상응’이 한 단계가 아니라, ‘여러 층을 한 번에 겹쳐 읽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 연결을 풀어 보려면, 구절 안에 있는 상징들을 하나씩 풀어서 다시 조합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어째서 이것이 기억 지식으로 신앙의 신비에 들어가려는 사람인가?’가 또렷해집니다.

 

먼저 ‘애굽’(이집트)입니다. 스베덴보리 전체에서 ‘애굽’은 일관되게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을 뜻합니다. 즉, 외적인 지식, 경험, 학문, 논리, 감각에서 얻은 정보들입니다. 이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을 ‘출발점이 아니라 주인으로 삼을 때’입니다. 곧, 모든 것을 지식으로 판단하고, 지식으로 신앙을 재단하려 할 때입니다.

 

다음으로 ‘바로 왕’입니다. 왕은 일반적으로 ‘지배하는 원리, 주도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애굽의 바로 왕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지식이 지배자가 된 상태’, 곧 ‘지식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이해가 아니라 지식이 왕이 된 상태’입니다.

 

이제 ‘큰 악어’(혹은 용, dragon, crocodile)가 나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상징인데, 스베덴보리에게서 이것은 ‘감각적이고 자연적인 인간의 가장 낮은 층, 그러나 동시에 교묘하고 교만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겉으로는 힘 있고 크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낮은 수준의 감각과 자기 확신에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바다 가운데 있다’는 말이 붙습니다. 바다는 ‘지식과 개념들이 뒤섞여 있는 상태’, 곧 외적 이해의 영역입니다.

 

그다음 표현이 결정적입니다. ‘강에서 튀어 올라 물을 휘젓고 더럽힌다.’ 여기서 ‘’은 ‘보다 질서 있는 진리의 흐름’, 곧 말씀이나 교리에서 오는 진리의 흐름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악어’가 그 물을 휘저어 더럽힙니다. 이것은 ‘자기 지식과 감각으로 진리를 뒤섞고 왜곡하는 상태’입니다. 즉,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방식으로 재단하고 흐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제 이 모든 것을 한 줄로 연결해 보겠습니다. 애굽(지식)이 있고, 그 지식이 왕이 되어 지배하고 있으며, 그 상태에서 감각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악어)가 진리의 흐름(강)을 휘저어 더럽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억 지식을 수단으로 삼아 신앙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신앙을 배우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지식으로 신앙을 해석하고 통제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지식을 사용하는 것’과 ‘지식으로 들어가는 것’은 다릅니다. 전자는 올바른 순서입니다. 즉, 먼저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받고, 그다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지식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자는 순서가 뒤집힌 것입니다. 즉, ‘지식을 기준으로 삼아 신앙을 판단하고, 이해되지 않으면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AC.42가 말하는 것은 바로 이 후자입니다.

 

실제적인 예로 설명드리면 더 분명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모든 선이 온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이때 한 사람은 ‘아직 다 이해는 안 되지만, 이 말이 참일 수 있겠다’ 하고 받아들인 뒤, 점점 이해해 갑니다. 이것은 ‘진리에서 출발하여 이해로 들어가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그게 과학적으로 증명되나? 논리적으로 완벽히 설명되나?’를 먼저 따집니다. 그리고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거부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식으로 신앙의 신비에 들어가려는 상태’입니다. 겉으로는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강을 흐리는 악어’와 같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 그렇게 연결되는 이유는, 단순히 상징 몇 개를 억지로 맞춘 것이 아니라, ‘전체 구조가 정확히 그 상태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왕이 되고, 감각적 사고가 진리를 휘저어 흐리게 만드는 상태,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잘못된 접근’입니다.

 

문제는 지식이 아니라, 지식을 주님보다 앞세우는 것입니다.’ 이 한 문장이 바로 이 구절 전체의 핵심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주는 경고로도 들립니다. 왜냐하면 이 상태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쉽게 빠질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42는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신앙의 출발점이 어디인가를 묻는 말씀’입니다.

 

 

 

AC.42, 심화 2, ‘스베덴보리는 인용 구절들의 이런 속뜻을 어떻게 아는 건가요?’

AC.42.심화 2. ‘스베덴보리는 인용 구절들의 이런 속뜻을 어떻게 아는 건가요?’ AC.42를 보면 여러 인용 구절이 나오며, 스베덴보리는 그에 대한 속뜻을 거침없이 기술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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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 창1:21, ‘지식을 살리는가 삼키는가 : 큰 바다짐승들로 드러나는 일반 원리의 방향’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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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심화

 

2. 그 안에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들어 있습니다

 

AC.41 그 안에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들어 있습니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왜 이 두 가지가 함께 나오나요? 주님의 신성이 이런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인가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함께 나오는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자체가 항상 이 두 가지, 곧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를 함께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단순한 병렬 표현이 아니라, ‘생명의 구조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spiritual)인 것은 주로 ‘진리, 신앙, 이해’에 속한 것을 가리키고, ‘천적(celestial)인 것은 ‘, 사랑, 의지’에 속한 것을 가리킵니다. 이 둘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을 이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사랑 없이 살아 있을 수 없고, 사랑은 진리 없이 방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언제나 ‘‘진리로 비추고, 사랑으로 살게 하는 두 작용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AC.41의 문맥을 다시 보면, 사람의 ‘자기 것(proprium)은 생명이 없고 죽은 것처럼 보이는 반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의 형상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 안에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단순한 생각이나 감정 하나가 아니라, 진리와 사랑이 함께 들어 있는 살아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영계에서는 ‘‘사람다운 형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 쪽의 구조가 아니라, ‘주님의 신성 자체에서 오는 질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 안에는 신적 선(Divine good)과 신적 진리(Divine truth)가 있으며, 이 둘이 완전히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거듭남을 통해 이 질서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 안에서도 이 두 가지, 곧 사랑과 진리가 하나로 결합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상태’, 곧 인간다운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AC.41에서 이 표현이 나오는 것은 매우 의도적입니다. 단순히 ‘좋은 것이 들어 있다’가 아니라,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함께 들어 있다’, 즉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작동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아무리 옳은 생각을 해도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아무리 좋은 감정을 가져도 그것 역시 방향 없는 것이 됩니다. 둘이 함께 있을 때만 비로소 생명이 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항상 두 가지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를 깨닫게 하는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살게 하는 사랑입니다. 이 둘이 함께 있을 때, 그것이 진짜 생명입니다.’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함께 나온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생명은 진리와 사랑, 이해와 의지가 결합된 상태로 온다는 뜻이며, 바로 그 결합이 사람을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드는 핵심입니다.’

 

 

 

AC.41, 창1:20, ‘참된 생명의 근원 : 주님에게서 오는 것만이 살아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1 사람의 본성(own, proprium)에 속한 것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으며, 그것을 눈으로 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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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 심화 1, ‘천사적 영’

AC.41.심화 1. ‘천사적 영’ AC.41에 ‘천사적 영’이라는 표현이 나와요. 이건... 그러니까 ‘천사’라는 건가요, ‘영’이라는 건가요? ‘‘천사적 영’(angelic spirit)은 ‘중간 존재’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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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심화

 

1. 천사적 영

 

AC.41 천사적 영이라는 표현이 나와요. 이건... 그러니까 천사라는 건가요, 이라는 건가요?

 

‘‘천사적 영(angelic spirit) 중간 존재가 아니라, ‘천국에 속한 영’,  천사와 같은 성질을 가진 영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존재의 종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존재를 어떤 관점에서 부르느냐의 차이’입니다.

 

제가 처음에 ‘천사도 아니고, 단순한 영도 아닌, 그 사이 상태’라고 말씀드린 것은 부정확했습니다. 그렇게 들으면, 마치 ‘천사’와 ‘’ 사이에 ‘3의 존재 계층이 따로 있는 것처럼’ 오해가 생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 체계에서는 그런 ‘중간 종(種)’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는 두 범주입니다. 하나는 ‘(spirits), 곧 아직 완전히 정착되지 않은 상태의 존재들이고, 다른 하나는 ‘천사(angels), 곧 천국에 정착된 상태의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천사적 영’은 무엇이냐 하면, 이것은 ‘존재의 종류가 아니라 상태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곧, 어떤 존재가 이미 선과 진리 안에 있어 천국에 속해 있고, 그 성질이 천사와 같을 때, 그러나 문맥상 ‘영적 존재로서의 작용’이 강조될 때, 그를 ‘천사적 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천사이면서도, 영적 존재로서 사람과 함께 작용하는 측면에서 부르는 이름’이라고 이해하시면 정확합니다.

 

조금 더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같은 사람을 두고, 어떤 때는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어떤 때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존재가 다른 것이 아니라, 관계와 관점이 다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존재를 ‘천사’라고 부를 때는 그 ‘완성된 천국 상태’를 강조하는 것이고, ‘천사적 영’이라고 할 때는 그가 ‘영적 존재로서 작용하는 측면’, 특히 사람과 연결되어 있는 작용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AC.41 문맥에서는 왜 ‘천사’가 아니라 ‘천사적 영’이라고 했느냐 하면, 거기서 말하는 것이 단순히 천국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과의 관계를 설명할 때, 종종 ‘영들’과 ‘천사들’을 함께 말하면서, 그중에서도 천국 쪽에 속한 존재들을 ‘천사적 영’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그들이 ‘천국에 속했으면서도, 여전히 영적 교류의 영역에서 작용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한 표현’입니다.

 

‘‘천사적 영은 별도의 중간 존재가 아니라, 천국에 속한 존재를 영적 작용의 관점에서 부른 이름이며, 본질적으로는 천사와 같은 범주에 속합니다.’

 

 

 

AC.41, 심화 2, ‘그 안에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들어 있습니다’

AC.41.심화 2. ‘그 안에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들어 있습니다’ AC.41에 ‘그 안에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들어 있습니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왜 이 두 가지가 함께 나오나요?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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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 창1:20, ‘참된 생명의 근원 : 주님에게서 오는 것만이 살아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1 사람의 본성(own, proprium)에 속한 것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으며, 그것을 눈으로 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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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심화

 

8. ‘2:18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2:18) And in that day will I make a covenant for them with the wild beast of the field, and with the fowls of heaven, and with the moving thing of the ground (Hos. 2:18).

 

 

이 구절이 AC.40에 인용된 이유는, 말씀에서 들짐승’, ‘공중의 새’, ‘땅의 곤충’(또는 기는 것들)이 단순한 동물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사람 안에 존재하는 여러 종류의 생명 활동들, 곧 애정과 사유와 보다 외적인 생명의 작용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40은 창세기 1 20절의 물들은 생물을 내고 새들은 하늘을 날라’는 말씀을 해설하면서, 물고기와 새와 여러 생물들이 인간 안의 살아 있는 영적 기능들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호세아 2 18절은 바로 그러한 상응을 한 구절 안에 함께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문자 그대로 보면 주님께서 장차 들짐승과 새와 곤충들과 언약을 맺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께서 동물들과 계약을 체결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언급되는 모든 생물들을 사람 안의 영적 요소들로 봅니다. ‘들짐승’은 의지와 애정에 속한 것들을, ‘공중의 새’는 이해와 사유에 속한 것들을, ‘땅의 곤충 또는 기는 것’은 보다 외적이고 자연적인 차원의 생명 활동들을 의미합니다.

 

특히 AC.40의 주제와 직접 관련되는 것은 공중의 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새를 이해력과 영적 사유의 상징으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새들과 언약을 맺으신다는 것은, 사람의 이해와 사유가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고 그분의 평화 가운데 놓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거듭남을 통해 생각과 이해가 더 이상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의해 지배되지 않고, 주님의 진리에 의해 다스려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한 본문은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국가 간의 전쟁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에 벌어지던 영적 싸움이 주님의 승리로 평화를 얻게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로 앞에 언급된 들짐승과 새와 기는 것들도 이제 서로 충돌하거나 혼란을 일으키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질서 안에서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이것은 창세기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의 창조가 지향하는 목표와도 연결됩니다. 물고기와 새와 짐승이 창조되는 것은 단순히 생명체의 출현이 아니라, 인간 안의 이해와 의지와 애정이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그 살아난 기능들이 결국 주님의 언약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호세아 2 18절이 AC.40에 인용된 이유는, 말씀에서 공중의 새’가 이해력과 영적 사유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동시에, 그러한 이해와 사유가 주님의 언약과 평화 안으로 들어가는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절은 창세기 1장의 새와 짐승들이 단순한 자연계 생물이 아니라, 거듭난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영적 기능들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 주는 중요한 증거인 것입니다.

 

 

 

AC.40, 창1:20, ‘지식과 지성이 살아나는 순간 : 물고기와 새로 나타나는 거듭난 생명’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 속한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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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 심화 7, ‘겔17:22-23’

AC.40.심화 7. ‘겔17:22-23’ 22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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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심화

 

7. ‘17:22-23

 

22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23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17:22, 23) I will plant a shoot of a lofty cedar, and it shall lift up a branch, and shall bear fruit, and be a magnificent cedar; and under it shall dwell every fowl of every wing, in the shadow of the branches thereof shall they dwell (Ezek. 17:22–23).

 

 

이 구절이 AC.40에 인용된 이유는, 말씀에서 ’가 이해력과 사유에 속한 것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긍정적인 측면에서 매우 아름답게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40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하늘의 새’를 영적 사유와 이해력의 활동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에스겔 17장의 이 예언은 그러한 이해와 사유가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과 진리 안에서 어떻게 자라고 보호받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친히 백향목 꼭대기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심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 따르면 나무는 사람이나 교회의 상태를, 특히 선과 진리가 성장하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백향목은 높은 차원의 영적 진리와 지혜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백향목이 무성하게 자라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주님께서 교회와 사람 안에 진리와 선을 심으시고, 그것을 풍성하게 성장시키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다음에 나오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인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새가 단순한 새를 뜻한다면 굳이 AC.40에서 인용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새가 이해력과 사유를 의미한다면, 이 장면은 매우 깊은 영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곧 주님에게서 나온 진리와 선이 사람 안에 굳게 뿌리내릴 때, 그 위에 수많은 영적 사유와 이해가 자리 잡게 된다는 뜻입니다.

 

특히 각종 새가’, ‘모든 날개 가진 새가’라는 표현은 진리에 대한 이해가 한 가지 형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마다 이해가 다르고, 천사들마다 지혜가 다르며, 진리에 대한 통찰도 무수히 많습니다. 그래서 여러 종류의 새들이 한 나무에 깃드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는 말씀도 중요합니다. 가지는 진리의 확장과 전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새들이 가지의 그늘 아래 거한다는 것은, 이해력과 사유가 진리의 보호 아래에서 안전하게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참된 영적 사유는 자기 지혜에서 나오지 않고, 주님에게서 온 진리 안에서 자라고 머무르게 됩니다.

 

AC.40의 문맥에서 보면, 이것은 다섯째 날에 창조된 ’의 가장 완성된 모습을 보여 주는 예입니다. 새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해이며, 그 이해는 주님께서 심으신 영적 진리의 나무 위에 깃들 때, 가장 건강하고 풍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장차 세워질 참된 교회와 주님의 나라를 거대한 백향목으로,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이해와 지혜를 각종 새들로 묘사한 것입니다.

 

따라서 겔17:22-23 AC.40에 인용된 이유는, 말씀에서 ’가 이해력과 영적 사유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며, 더 나아가 그러한 이해와 사유가 주님께서 심으신 진리와 선 안에서 자라고 보호받으며 풍성해진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절은 ’의 상응을 가장 긍정적이고 충만한 모습으로 보여 주는 대표적인 본문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AC.40, 심화 8, ‘호2:18’

AC.40.심화 8. ‘호2:18’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호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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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 심화 6, ‘렘4:25’

AC.40.심화 6. ‘렘4:25’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5)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5). 이 구절이 AC.40에 인용된 이유는, 말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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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4:25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4:25)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5).

 

 

이 구절이 AC.40에 인용된 이유는, 말씀에서 ’가 이해력과 사유에 속한 것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40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하늘의 새’가 살아 있는 이해와 사유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어떤 상응의 의미를 설명할 때 늘 그렇듯이, 말씀은 그 존재뿐 아니라 그 상실도 함께 묘사합니다. 따라서 새가 날아갔다’는 것은 단순히 새가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과 영적 사유가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 4장은 교회의 황폐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 구절들에서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 ‘하늘에는 빛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창세기 1 2절의 상태를 연상시키는데, 교회와 사람의 내면이 질서를 잃고 영적으로 황폐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 흐름 속에서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 따르면 사람’은 단순한 인간 개체가 아니라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교회적 인간, 곧 참된 인간성을 뜻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없다’는 것은 선이 사라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다’는 것은 진리에 대한 이해와 영적 사고가 사라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선도 없고 진리도 없는 상태, 사랑도 없고 신앙도 없는 상태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AC.40의 핵심 주제와 직접 연결됩니다. 창세기 1장에서 새가 창조된 것은 이해력이 살아나고 진리를 생각하는 능력이 생겨나는 것을 뜻합니다. 반대로 새가 사라지는 것은 그 능력이 상실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교회의 황폐를 설명하면서 새들이 날아가 버렸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특히 공중의 새’라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새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하늘과 연결된 존재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의미의 새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하늘의 진리와 연결된 사유를 뜻합니다. 그런데 그 새들이 날아가 버렸다는 것은 사람이 더 이상 하늘의 진리를 생각하지 않고, 이해하지도 않으며, 받아들이지도 않는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레미야 4 25절이 AC.40에 인용된 이유는, 창세기 1장의 ’가 이해력과 사유에 속한 것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반대의 경우를 통해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새가 많고 살아 있는 상태는 진리의 이해가 풍성한 상태를 뜻하고, 새가 모두 날아가 버린 상태는 진리에 대한 이해와 영적 사유가 사라진 황폐의 상태를 뜻합니다. 이 구절은 바로 그 영적 황폐를 묘사하는 대표적인 예이기 때문에 AC.40에서 인용된 것입니다.

 

 

 

AC.40, 심화 7, ‘겔17: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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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심화

 

5. ‘46:11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 (46:11) Calling a bird from the east, the man of my counsel from a distant land (Isa. 46:11).

 

 

이 구절이 AC.40에 인용된 이유는, 말씀에서 (bird, fowl)가 단순한 새가 아니라 이해력에 속한 것들, 특별히 진리에서 나오는 사유와 지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40은 창세기 1 20절의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는 말씀을 해설하면서, 물고기는 이해력의 보다 외적인 영역을, 새는 이해력의 보다 내적인 활동과 사유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사야 46 11절은 그러한 상응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 가운데 하나입니다.

 

문자 그대로 보면 여기의 사나운 날짐승’은 어떤 역사적 인물, 혹은 먼 나라에서 오는 정복자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새를 언제나 사유와 이해에 연결합니다. 새가 하늘을 나는 것처럼 생각도 이해의 하늘에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의 날짐승’은 단순한 새가 아니라 주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사용되는 지성과 분별력을 의미합니다.

 

특히 본문은 동쪽에서 날짐승을 부른다고 말합니다. 말씀에서 동쪽’은 주님과 사랑의 근원을 의미합니다. 해가 동쪽에서 떠오르듯이, 영적으로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선이 동쪽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동쪽에서 오는 새는 자기 지혜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나온 빛과 사랑에 의해 인도되는 이해를 뜻합니다.

 

이어지는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이라는 표현도 같은 의미를 반복합니다. 여기서 사람은 주님의 계획을 수행하는 도구를 뜻하며, 앞의 ’와 병행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부르시는 새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여 그 뜻을 이루는 이해력과 사유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AC.40의 문맥에서 보면 이것은 다섯째 날에 창조된 새들의 긍정적 의미를 보여 주는 예입니다. 새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유입니다. 물고기가 진리의 지식과 이해를 뜻한다면, 새는 그 이해가 더 높아져 자유롭게 진리를 생각하고 분별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새를 부른다’는 표현이 사용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사야 46 11절이 AC.40에 인용된 이유는, 말씀에서 ’가 이해력과 사유에 속한 것들을 의미하며, 특별히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에 의해 인도되는 지성을 뜻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 1장의 새들이 단순한 자연계의 새가 아니라 영적으로 살아 있는 이해와 사유를 의미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로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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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심화 4. ‘겔47:8-10’ 8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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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47:8-10

 

8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또 이 강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47:8-10) The Lord Jehovih said unto me, These waters that shall issue to the boundary toward the east, and shall come toward the sea, being led into the sea, and the waters shall be healed;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 living soul that shall creep forth, whithersoever the water of the rivers shall come, shall live, and there shall be exceeding much fish, because those waters shall come thither, and they shall heal, and everything shall live whither the river come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fishers shall stand upon it from En-gedi 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 shall they be; their fish shall be according to its kind, as the fish of the great sea, exceeding many (Ezek. 47:8–10).

 

 

이 구절이 AC.40에 인용된 이유는, 앞서 이사야 50장에서 보인 ‘물이 마르고 물고기가 죽는 상태’와 정반대로,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가 사람과 교회 안에 흘러 들어올 때 이해력과 신앙이 살아나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40에서 스베덴보리는 ‘’은 신앙의 지식들과 진리들을, ‘물고기’는 그러한 진리들로부터 살아 움직이는 이해의 활동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에스겔 47장은 바로 그 상응을 가장 아름답고 풍성하게 보여 주는 대표적인 본문입니다.

 

본문에서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강물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의 흐름을 뜻합니다. 그 물이 바다에 들어가자 ‘바다의 물이 되살아난다’고 합니다. 바다는 지식과 기억의 가장 바깥 영역, 곧 자연적 사람의 이해를 의미합니다. 원래 바다는 짠물이라 생명이 풍성하지 못하지만, 성전에서 나온 물이 흘러들자 살아납니다. 이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가 인간의 자연적 이해 속으로 들어갈 때, 그 이해가 영적 생명을 얻게 되는 모습을 뜻합니다.

 

그래서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생물’은 살아 있는 애정과 생각들을, ‘고기’는 살아 있는 신앙의 지식들과 이해의 활동을 뜻합니다. AC.40의 문맥에서는 특별히 ‘고기’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물고기를 이해력에 속한 것들, 곧 진리들을 생각하고 이해하는 능력에 대한 상징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고기가 많아진다는 것은 단순한 수산업의 번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풍성해지는 상태를 뜻합니다.

 

또한 ‘어부가 설 것이며’,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는 말씀도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말씀에서 어부는 사람들을 진리로 가르치고 인도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상응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부들이 강가에 선다는 것은 진리가 풍성한 곳에서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일도 풍성하게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특히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라는 표현은 진리가 한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형태와 수준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마다 이해의 수준이 다르고, 천사들도 각기 다른 지혜를 가지듯이, 진리의 인식도 무한히 다양합니다. 그래서 물고기들이 ‘그 종류를 따라’ 많아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에스겔의 환상은 AC.40이 설명하는 다섯째 날의 상태를 매우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물이 흐르면 이해력이 살아나고, 그 결과 물고기들이 번성하듯 진리에 대한 인식과 이해도 풍성해집니다. 따라서 겔47:8-10은 ‘’이 진리를, ‘물고기’가 이해력에 속한 살아 있는 신앙의 활동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증거이기 때문에 AC.40에서 인용된 것입니다.

 

 

 

AC.40, 심화 5, ‘사46:11’

AC.40.심화 5. ‘사46:11’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 (사46:11)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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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 심화 3, ‘사50:2-3’

AC.40.심화 3. ‘사50:2-3’ 2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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