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4:14)

 

AC.388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된다는 것은 앞에서와 같이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To be a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means as before not to know what is true and good.

 

해설

AC.388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가 된다는 것이 앞에서와 같이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을 의미한다고 짧게 확인합니다. 여기서 앞에서와 같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 표현의 의미는 이미 AC.380에서 처음 제시되었고, AC.382에서는 예레미야애가, 아모스, 호세아, 예레미야, 이사야의 여러 구절을 통해 자세히 확증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같은 설명을 반복하지 않고 그 의미를 창4:14에 그대로 적용합니다.

 

이 짧은 문장은 바로 앞의 AC.386-387과 함께 읽을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AC.386에서는 지면에서 쫓겨나는 이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이라고 했고, AC.387에서는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388에서는 그 결과를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이라고 합니다. 즉 진리에서 분리되고 선에서 분리되면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할 방향 자체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지식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에게 신앙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교리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살아 있게 하는 체어리티를 잃으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 무엇이 참된 진리이고 무엇이 참된 선인지 분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인 유리함입니다.

 

따라서 피하며 유리한다는 것은 단순한 방황이 아니라 영적 중심과 방향을 잃은 상태입니다. AC.382에서 물을 찾아 이 성읍에서 저 성읍으로 유리하지만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이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계속 진리를 찾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진리가 지향해야 할 선을 잃었기 때문에 어디에서 참된 만족을 얻어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AC.388이 이 설명을 길게 반복하지 않는 데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이미 앞에서 충분히 확증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 결과를 전체 흐름 속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됨’, ‘사랑의 신앙의 선에서 분리됨’,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함은 서로 별개의 세 가지 형벌이 아닙니다. 하나의 영적 붕괴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설명하는 연속된 상태입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결과 신앙이 더 순수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과 진리 모두를 잃고 방향 없이 유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번 번호의 핵심은 짧지만 분명합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의 결합 안에서만 선과 진리를 제대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선은 진리를 통하여 형태를 얻습니다. 이 둘의 결합이 깨어지면 사람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영적으로는 피하며 유리하는 가 될 수 있습니다. 가인의 유리함은 바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결국 어디에 이르는지를 보여 주는 표상입니다.

 

 

 

AC.389,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체어리티를 잃으면 왜 악과 거짓에 맡겨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9‘그를 만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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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7, 창4:14,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자비에서 나오는 신앙의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7‘주의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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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4:14)

 

AC.387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hid from thy faces)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얼굴(faces of Jehovah)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여호와의 얼굴 자비이며, 자비로부터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님의 얼굴(faces) 신앙의 선들을 의미합니다. That to behid from thy faces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faces of Jehovah. Theface of Jehovah,as before said, is mercy, from which proceed all the goods of the faith of love, and therefore the goods of faith are here signified by hisfaces.

 

해설

AC.387은 창4:14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리니라는 말을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이라고 해석하고, 그 근거를 여호와의 얼굴의 상응에서 찾습니다. 앞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를 의미하며, 그 자비로부터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는 얼굴이라는 한 상응어를 설명하는 짧은 문장이면서도, 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밝혀 주는 번호입니다.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라는 말입니다. 성경의 문자적 표현에서는 하나님께서 얼굴을 보이시기도 하고 감추시기도 하며, 얼굴을 사람에게 향하시거나 돌리시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의 사랑과 자비 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사랑이시며 자비이십니다. 따라서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어느 순간 자비를 거두시고 가인에게서 얼굴을 돌리셨다는 뜻이 아니라, 가인이 그 자비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의 저주를 설명하면서 계속 지켜 온 원리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사람에게서 돌아서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악과 거짓으로 말미암아 주님에게서 돌아섭니다. 태양은 계속 빛을 비추고 있지만 사람이 등을 돌리거나 문을 닫으면 어둠 가운데 있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물론 이것은 이해를 위한 비유일 뿐이지만,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상태가 주님의 자비가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그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의 상태라는 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AC.387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여호와의 얼굴이 자비일 뿐 아니라 자비로부터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번 번호에서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사람에게 있는 참된 선의 근원을 사람 자신에게 두지 않습니다.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은 여호와의 얼굴, 곧 주님의 자비로부터 나옵니다. 사람이 선을 의도하고 행한다고 해서 그 선의 최초 근원이 인간의 proprium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람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자기 삶에서 의지하고 행할 때 그것이 사람 안에서 신앙의 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느끼지 못한다거나 종교적인 위로가 사라졌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훨씬 깊게는 신앙에 생명을 주는 선의 근원과의 결합을 잃은 상태입니다. 가인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체어리티를 신앙 아래에 두려 했으며,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표상된 체어리티의 소멸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체어리티를 제거한 결과는 신앙만 깨끗하게 남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고, 결국 그 선의 근원이신 주님의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사랑의 신앙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신앙은 사랑과 독립하여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생명을 받는 신앙이 참된 신앙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신앙에 속한 이라는 표현은 신앙과 사랑을 두 개의 독립된 것으로 놓은 뒤 나중에 결합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신앙 자체가 사랑과 결합되어 있으며, 그 신앙 안에서 선이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인이 주장했던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과 정반대입니다.

 

AC.386AC.387을 나란히 놓으면 창4:14의 두 표현도 아름답게 대응합니다. ‘지면에서 쫓겨남은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이고,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함은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는 것입니다. 하나는 진리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선의 측면입니다. 결국 가인의 길은 진리만 잃는 것도 아니고 선만 잃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한 결과 선과 진리 모두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이어 피하며 유리하는 가 되어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게 된다는 설명은 바로 이 두 가지 분리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385-387의 구조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고, 주님의 자비에서 나오는 사랑의 신앙의 선에서 분리되자, 선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유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킬 위험에 놓입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하나의 교리적 오류가 점차 인간의 영적 생명 전체를 흔드는 결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함을 주님의 거절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바로 다음 전개가 그것을 더욱 분명히 보여 줍니다. 가인은 주님의 얼굴에서 숨겨졌다고 느끼고 자신이 죽임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지만, 주님은 그를 완전히 버려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에게 표를 주어 보존하십니다. 주님의 얼굴이 자비라는 AC.387의 선언은 이후 가인의 를 이해하는 열쇠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인간이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에 빠졌어도 주님의 자비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AC.384에서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이 남아 있었다고 한 것도 여기와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그 선의 근원이 가인 자신에게 있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가 모든 선의 근원을 분명히 밝혀 줍니다.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은 주님의 자비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가인에게 아직 남아 있던 선의 어떤 것도 궁극적으로는 주님에게서 온 것이며, 주님께서는 악과 거짓이 그것을 완전히 파괴하지 못하도록 보존하실 수 있습니다. 이후의 가인의 표를 단순한 형벌의 완화가 아니라 주님의 보존 섭리와 연결하여 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AC.387의 중심은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라는 짧은 선언에 있습니다. 주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단지 주님을 지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에서 흘러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들이는 것과 연결됩니다. 반대로 그 얼굴에서 숨겨진다는 것은 주님의 자비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그 자비에서 나오는 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가인의 비극은 주님께서 자비를 거두신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함으로써 그 자비에서 나오는 사랑의 신앙의 선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데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가인에게도 주님은 보존의 길을 마련하십니다. 이것이 곧이어 나타날 가인의 를 바라보게 하는 중요한 준비가 됩니다.

 

 

 

AC.388, 창4:14, ‘피하며 유리하는 자 -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8‘땅에서 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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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6, 창4:14,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6‘지면에서 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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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4:14)

 

AC.386

지면에서 쫓겨나는 (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ground)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순수한 의미에서는 교회 또는 교회의 사람을 의미하며, 따라서 앞에서 보여 것처럼 교회가 고백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말의 의미는 반드시 다루는 주제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잘못 고백하는 자들, 분열 또는 이단을 고백하는 자들도 역시 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여기서 지면에서 쫓겨나는 (driven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이상 교회의 진리 안에 있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That to be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i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truth of the church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ground,which, in the genuine sense, is the church, or the man of the church, and therefore whatever the church professes, as shown above. The meaning of a word necessarily varies with the subject treated of, and therefore even those who wrongly profess faith, that is who profess a schism or heresy, are also calledground. Here however to bedriven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signifies to be no longer in the truth of the church.

 

해설

AC.386은 바로 앞 AC.385에서 지면에서 쫓겨나는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을 의미한다고 한 해석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 출발점은 의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순수한 의미에서는 교회 또는 교회의 사람을 의미하며, 따라서 교회가 고백하고 가르치는 것들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장소에서 추방되는 것이 아니라 속뜻에서는 교회의 진리가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 더 이상 그 진리 안에 있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번 번호에서 특히 주목할 문장은 어떤 말의 의미는 반드시 다루는 주제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입니다. ‘땅은 언제나 교회다’, ‘물은 언제나 진리다’, ‘빛은 언제나 신앙이다라는 식으로 하나의 자연적 대상에 하나의 영적 의미를 기계적으로 대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인 상응의 중심은 있지만, 실제 본문에서 그 의미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그 단어가 놓여 있는 전체 문맥과 현재 다루고 있는 영적 상태에 따라 결정됩니다.

 

바로 이 좋은 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순수한 의미에서 을 교회 또는 교회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곳이며, 교회의 사람 역시 선과 진리가 심어지는 하나의 땅과 같습니다. 그래서 앞의 AC.377에서도 사람 자신이 이며 또한 이라고 했습니다. 사람 안에 선들과 진리들이 심어지면 선하고 참된 사람이 되고, 악들과 거짓들이 심어지면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즉 땅이라는 상응의 중심에는 무엇인가가 심어지고 받아들여지는 이라는 개념이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가인의 분열이나 이단도 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바로 이번 번호에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신앙을 잘못 고백하는 자들, 곧 분열 또는 이단을 고백하는 자들도 하나의 이라고 불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 역시 어떤 교리적 원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 안에서 배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라는 단어 자체가 언제나 선한 교회를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 그 땅에 심어져 있으며, 어떤 교리가 그 사람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80-381에서 땅을 간다는 표현이 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었는지도 설명해 줍니다. 일반적으로 땅을 가는 것은 좋은 씨를 심고 열매를 얻기 위한 긍정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 문맥의 은 이미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한 분열 또는 이단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땅을 간다는 것은 선과 진리를 배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열된 교리를 계속 배양하고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경작이라는 이미지도 현재 다루는 주제가 무엇인가에 따라 속뜻의 성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상응의 의미가 문맥에 따라 아무렇게나 바뀐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만일 상응의 의미가 아무런 질서 없이 매번 달라진다면 말씀의 내적 의미를 객관적으로 읽을 수 없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그런 임의성이 아닙니다. ‘에는 여전히 교회, 교회의 사람, 그리고 그 사람 안에 받아들여지는 교리와 같은 일관된 의미망이 있습니다. 다만 그 교회나 사람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인지, 아니면 그것을 왜곡하여 분열과 이단을 받아들인 상태인지에 따라 긍정적 또는 부정적인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응은 고정된 낱말사전도 아니지만 무제한적인 상징 놀이도 아닙니다. 말씀 전체의 의미망과 현재의 문맥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 원리는 AC를 읽는 데 실제로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번호에서 =교회라고 배웠다고 해서 이후 모든 을 무조건 교회라는 한 단어로 바꾸어 읽으면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놓칠 수 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처럼 교회의 사람’, ‘교회가 고백하는 ’, 심지어 왜곡된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의 상태까지 그 의미가 확장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상응어를 만날 때 단어는 무엇을 뜻하는가?만 묻기보다 바로 문맥에서 의미로 사용되는가?를 함께 물어야 합니다.

 

이제 이러한 원리를 현재 구절에 적용하면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다시 여기서는이라고 범위를 한정합니다. 여기서 그것은 이상 교회의 진리 안에 있지 않게 되는 을 의미합니다. 즉 가인은 단순히 자신이 살던 토지에서 추방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과정을 거치면서 마침내 교회의 진리 안에 있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점에서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교단이나 외적인 교회 조직에서 제명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속뜻에서 교회는 사람 안에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따라 살아갈 때 그 사람 안에 교회가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으로는 여전히 교회에 속해 있고 신앙의 언어를 사용하며 교리를 고백하더라도,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그 진리를 삶에서 거부한다면 내적으로는 교회의 진리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가인의 추방은 바로 이러한 내적인 분리를 보여 줍니다.

 

또한 여기서도 주님께서 먼저 가인을 진리 밖으로 내던지셨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 저주가 선에서 돌아선 상태를 의미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인은 자신이 받아들이고 확증한 분열 때문에 더 이상 교회의 진리 안에 있지 않게 됩니다. 진리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면 진리의 생명을 잃고, 결국 무엇이 진리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AC.382피하며 유리함과 이번 번호의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됨은 같은 영적 쇠퇴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결국 AC.386은 짧은 번호이지만 두 가지를 동시에 가르칩니다. 하나는 가인의 지면에서 쫓겨남이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상태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말씀의 상응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관한 중요한 원리입니다. 같은 단어라도 다루는 주제에 따라 의미의 양상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상응을 기계적인 일대일 대응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 변화도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일관된 상응 질서와 현재의 문맥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AC를 읽을 때 중요한 것은 상응어의 뜻을 외우는 것만이 아니라, 그 상응이 지금 이 문맥에서 왜 그렇게 나타나는지를 함께 이해하는 것입니다.

 

 

 

AC.387, 창4:14,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자비에서 나오는 신앙의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7‘주의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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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5,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남아 있는 것을 위협하는 악과 거짓’ (A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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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ay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and from thy faces shall I be hid; and I shall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4:14)

 

AC.385

지면에서 쫓겨나는 (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hid from thy faces)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된다는 것은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키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To be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truth of the church; to behid from thy faces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good of faith of love; to be a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is not to know what is true and good;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signifies that all evil and falsity would destroy him.

 

해설

AC.385는 창4:14의 네 표현을 차례로 해석하면서 가인이 처한 영적 상태가 얼마나 위태로워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지면에서 쫓겨나는 은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이고,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이며,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가 되는 것은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는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키리라는 뜻입니다. 이 네 가지는 서로 떨어진 상응들이 아니라 하나의 영적 붕괴가 진행되는 순서를 보여 줍니다.

 

먼저 지면에서 쫓겨나는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을 의미합니다. 앞에서 은 문맥에 따라 사람 자신, 교리, 그리고 가인의 경우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이 자리 잡은 상태를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표현을 교회의 진리와의 단절로 해석합니다. 가인은 신앙을 높이려 했지만, 체어리티에서 신앙을 분리함으로써 결국 교회의 진리 자체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앞의 AC.380-382에서 보았던 역설과 같습니다. 진리를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그 결과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진리의 상실에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갑니다. 단지 무엇이 참인지 알지 못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에서 생명을 받는 신앙의 선과도 분리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얼굴은 단순한 외적 형상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사랑과 자비, 선의 현존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얼굴에서 숨겨진다는 것은 주님께서 얼굴을 돌리셨다는 뜻으로 이해하기보다, 사람이 악과 거짓 때문에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저주와도 같은 원리입니다. 주님께서 가인을 미워하시고 그에게서 선과 진리를 빼앗으신 것이 아닙니다. 가인이 체어리티를 배척함으로써 스스로 그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변하지 않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가 변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표현은 주님의 부재라기보다 인간 쪽에서 일어난 수용 능력의 상실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세 번째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AC.380AC.382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을 의미합니다. 이번 번호에서 이 표현이 다시 나오는 것은 앞의 두 상태가 실제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고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에서 분리되면,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할 방향을 잃습니다.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 많은 종교적 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지식을 선을 위해 사용할 생명의 중심을 잃으면 무엇이 실제로 선이며 무엇이 실제로 진리인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 번호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마지막입니다.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키리라는 을 의미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가인이 다른 사람에게 살해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장면이지만, 속뜻에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의 상태가 악과 거짓에 의해 완전히 파괴될 위험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죽인다는 것은 자연적인 생명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영적인 것을 소멸시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AC.384가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자기 악 때문에 어떤 내적 고통을 느끼고 그것을 어느 정도 고백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385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킨다는 말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존재가 다시 멸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인의 상태 안에 아직 보존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악과 거짓에 의해 완전히 소멸될 위험을 말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이어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가인의 가 왜 필요한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다만 여기서도 AC.384선의 어떤 을 곧바로 전문적인 의미의 리메인스라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아직 그렇게 부르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인에게 선에 속한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었으며, 이제 악과 거짓이 그것마저 파괴할 위험이 있었다는 정도입니다. 이후 스베덴보리가 가인의 표와 보존의 의미를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본 뒤 리메인스와의 관계를 판단하는 것이 더 안전합니다.

 

이렇게 보면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는 가인의 두려움은 단순한 자기보존의 공포 이상으로 읽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뒤에도 신앙에 속한 어떤 지식과 선에 반응할 가능성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악과 거짓에 완전히 삼켜지면 그것마저 없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섭리는 단지 완전한 사람이나 온전한 교회만을 보존하시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에서도 아직 보존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지키시고, 궁극적으로 구원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여기서 앞으로 나올 가인의 의 의미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살인자인 가인을 왜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지가 매우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속뜻에서 가인은 한 개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교리와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 상태가 잘못되었다고 해서 거기에 남아 있는 신앙에 속한 모든 것까지 즉시 소멸되도록 허용하시는 것이 주님의 목적은 아닙니다. 악과 거짓 가운데에서도 아직 보존될 수 있는 것을 보존하시는 것이 주님의 섭리입니다.

 

이 점은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킨다는 표현을 이해할 때도 중요합니다. 악과 거짓은 주님에게서 오는 어떤 독립된 형벌의 도구가 아닙니다. 악은 선을 파괴하고 거짓은 진리를 왜곡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확증할수록 자신 안에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더욱 밀어냅니다. 따라서 악과 거짓에 의한 멸망은 외부에서 임의적으로 부과되는 형벌이라기보다 사람이 악과 거짓을 받아들임으로써 영적 생명을 스스로 파괴하는 과정입니다.

 

AC.385의 네 표현을 다시 연결하면 흐름이 매우 분명합니다. 먼저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됩니다. 이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에서 분리됩니다. 그러자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악과 거짓이 아직 남아 있는 것마저 완전히 파괴할 위험에 이릅니다.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단순한 교리상의 작은 차이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선과 진리는 서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 결합을 깨뜨리면 결국 둘 모두를 잃어버리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가장 위태로운 지점에서 창4의 이야기는 뜻밖의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가인이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고 말한 뒤 주님은 그를 즉시 멸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표를 주어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따라서 AC.385는 단지 가인의 멸망을 선언하는 번호가 아니라, 왜 그에게 보존이 필요했는지를 보여 주는 번호이기도 합니다.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고, 모든 악과 거짓이 그것을 완전히 파괴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어지는 가인의 에서는 잘못된 상태를 승인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AC.386, 창4:14,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6‘지면에서 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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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4, 창4:13, ‘가인에게도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 라멕에 이르러 소멸되는 체어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창4:13) AC.384이로부터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되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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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4:13)

 

AC.384

이로부터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되었다는 것은 라멕에 관하여 말한 것에서 분명합니다(4:19,23-24). Hence it appears that something of good still remained in Cain; but that all the good of charity afterwards perished is evident from what is said of Lamech (verses 19, 2324).

 

19라멕이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4:19, 23-24)

 

해설

AC.384는 바로 앞 AC.383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짧은 설명입니다. AC.383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라는 말을 어떤 내적 고통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악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고백한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에서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결론짓습니다. 이것은 가인을 선한 사람으로 평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가인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 곧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자기 악 때문에 내적인 고통을 느끼고 어느 정도 그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 안의 선에 속한 모든 것이 아직 완전히 사라진 상태는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의 어떤 이라는 제한된 표현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에게 선이 있었다고 일반적으로 말하지 않고 something of good still remained라고 합니다. 즉 악이 크게 지배하고 있었지만 선에 반응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AC.383에서 보았듯이 가인은 자기 상태 때문에 내적 고통을 느꼈고, 자기가 악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고백했습니다. 만일 선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되었다면 그러한 내적 고통과 인정조차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작은 반응 가능성이 이번 번호에서 말하는 아직 남아 있던 선의 어떤 입니다.

 

이 점은 가인에 관한 지금까지의 설명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가인은 ’, 아벨은 이라는 식으로 두 사람을 단순한 도덕적 인물 유형으로 나누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해석은 아닙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교리와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 상태가 매우 심각하게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선의 가능성이 한순간에 완전히 없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시작되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고,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며, 그 결과 선과 진리의 방향을 잃어 가는 과정 가운데에서도 아직 선의 어떤 잔여가 남아 있었던 단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AC.384의 후반부는 곧바로 더 어두운 방향을 예고합니다. ‘이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되었다는 것은 라멕에 관하여 말한 것에서 분명하다고 합니다. 즉 가인에게 남아 있던 선의 어떤 것이 계속 보존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인으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는 후대로 내려가면서 더욱 심화되었고, 마침내 라멕으로 표상되는 상태에서는 체어리티의 선이 완전히 소멸됩니다. 그러므로 AC.384는 가인의 상태를 설명하는 동시에 창4 후반부의 라멕을 미리 바라보게 하는 연결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창4:19,23-24를 가리키는 것도 이 흐름 때문입니다. 4:19에서는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는 일이 나오고, 23-24절에서는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그리고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라는 라멕의 말이 나옵니다. 이 구절들의 구체적인 속뜻은 해당 번호에서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므로 지금 미리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84에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 구절들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된후대의 상태를 보여 주는 근거로 미리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가인에서 라멕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단순히 악한 개인들의 계보가 아닙니다. 하나의 영적 원리가 세대를 거치며 어디까지 진행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교리적 계보입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구별이 있었고, 그 구별이 분리가 되었으며,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서려고 했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단계에서는 자기 악에 대한 어떤 내적 고통과 인정이 가능할 만큼 선에 속한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그 뒤 그 원리가 더욱 악화되어 라멕에 이르면 그것마저 소멸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앞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구별했던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표현을 좀 더 세밀하게 읽게 합니다. 앞 번호들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AC.384에서는 다시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두 진술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리에서 체어리티가 신앙의 본질과 주도 원리로서 배척되고 소멸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상태에 속한 사람들 안에서 선에 속한 모든 흔적과 반응 가능성이 그 순간 완전히 없어졌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리적 원리의 소멸과 사람 안에 남아 있는 선의 어떤 것을 구별하여 보고 있습니다.

 

이 구별은 앞으로 가인의 를 이해할 때도 중요해질 것입니다. 만일 가인 안에 선에 속한 모든 것이 이미 완전히 소멸되어 아무것도 보존할 것이 없었다면, 왜 주님께서 가인을 즉시 멸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표를 주어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는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AC.384는 아직 그 답을 본격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적어도 가인의 상태 안에 아직 보존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이후의 가인의 는 단순히 악인을 보호하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 아니라, 완전히 소멸되지 않은 것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선의 어떤 을 곧바로 리메인스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직 조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remains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단지 something of good still remained라고 말합니다. 더 넓은 AC의 가르침과 연결하여 리메인스와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는 있지만, AC.384 자체가 이것을 전문적 의미의 리메인스라고 명시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원문이 말하는 만큼, 선에 속한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었다고 두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목회적으로도 이 짧은 번호에는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사람의 상태가 크게 무너져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 사람 안에 선에 반응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근거로 다른 사람의 내면을 우리가 판정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가인조차 자기 악 때문에 어떤 내적 고통을 느끼고 그것을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사람의 외적인 상태만 보고 그의 내면에 남아 있는 모든 가능성을 우리가 판단할 수 없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의 내면을 아시고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실 수 있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결국 AC.384는 가인의 이야기에 매우 중요한 미세한 차이를 넣습니다. 가인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렀지만 아직 선의 어떤 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악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하는 내적 고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계속 악화되면서 라멕에 이르러서는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는 가인의 타락을 단번에 완성된 상태로 보지 않고 하나의 진행 과정으로 보게 하며, 동시에 아직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이후 가인의 와 연결하여 바라볼 준비를 하게 합니다.

 

 

 

AC.385,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남아 있는 것을 위협하는 악과 거짓’ (A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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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3, 창4:13,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 악을 인정하게 한 내적 고통과 절망’ (AC.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창4:13) AC.38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Cain said unto Jehovah)는 어떤 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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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4:13)

 

AC.38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Cain said unto Jehovah) 어떤 내적 고통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고백한 것을 의미합니다. 죄악이 너무 커서 사함을 받을 없나이다(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그로 인한 절망을 의미합니다. Cain said unto Jehovahsignifies a certain confession that he was in evil, induced by some internal pain;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signifies despair on that account.

 

해설

AC.383은 창4: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가인의 상태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음을 보여 줍니다. 앞에서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도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체어리티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어떤 내적 고통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고백한 이라고 설명합니다. 완전한 회개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전의 완강한 부인과는 다른 상태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 a certain confession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자기의 악을 고백했다고 단정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제한된 표현을 사용합니다. 또한 그 고백이 some internal pain’, 어떤 내적 고통에 의해 일어났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곧바로 참된 회개나 거듭남의 시작이라고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은 자신이 처한 상태 때문에 내적으로 고통을 느꼈고, 그 고통 가운데 적어도 자기가 악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앞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와 비교하면 분명한 변화이지만, 아직 그 악에서 돌이켜 선을 향하는 완전한 회개라고 말할 단계는 아닙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기 악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고 해서 그 고통이 언제나 악 자체를 미워하는 회개의 고통인 것은 아닙니다. 악의 결과가 두렵기 때문에 괴로울 수도 있고, 자기에게 닥친 손실이나 형벌 때문에 괴로울 수도 있으며, 자기 상태가 회복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절망할 수도 있습니다. 참된 회개에서는 때문에 내가 고통스럽다는 데서 더 나아가 이것이 주님을 거스르는 악이므로 이상 원하지 않는다는 방향 전환이 필요합니다. AC.383은 아직 가인에게 그 전체 과정이 일어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고백이라는 제한된 표현이 적절합니다.

 

이어지는 죄악이 너무 커서 사함을 받을 없나이다그로 인한 절망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가인의 시선은 자신의 악을 인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이것은 이상 제거될 수도, 용서될 수도 없다는 절망으로 내려갑니다. 악을 악으로 보는 것과 나는 악에서 결코 벗어날 없다고 믿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전자는 회개의 출발점이 될 수 있지만, 후자는 오히려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악을 보지 않는 것도 위험하지만, 자기 악을 보고 주님의 자비보다 그것을 더 크게 여기는 것 역시 위험합니다.

 

이 점에서 AC.383은 앞의 AC.379-382와도 연결됩니다. 체어리티가 소멸되면서 주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결속이 끊어지고,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결실하지 못하며, 결국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여 피하며 유리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상태에 놓인 가인이 이제 자기 악의 결과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체어리티와의 살아 있는 결합을 잃었기 때문에 그 인식은 곧바로 주님의 자비를 향한 신뢰로 나아가기보다 절망으로 기울어집니다. 악을 깨달았지만 그 악보다 크신 주님의 자비를 아직 바라보지 못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도 한 가지 균형이 필요합니다. AC.383절망을 모든 영적 절망에 대한 일반론으로 곧바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곳에서는 거듭남 과정의 시험 가운데 사람이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는 상태도 다룹니다. 그러한 상태는 주님만을 의지하도록 이끄는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가인의 문맥에서 말하는 절망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선과 진리의 방향을 잃은 결과로 나타나는 절망입니다. 따라서 다른 종류의 영적 고통이나 시험과 섞어 해석하기보다 우선 이 문맥 자체를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가인이 다시 여호와께말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이후의 전개를 보기 위해 중요하게 남겨 둘 필요가 있습니다. 가인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악 가운데 있으며 절망한다고 해서 주님과의 모든 관계가 이야기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는 여호와께 자기 상태를 말하고 있으며,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자신의 두려움을 호소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를 주시는 주님의 보존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AC.383의 절망만을 보고 가인이 완전히 버림받았다고 결론짓는 것은 이후의 흐름과 맞지 않습니다.

 

이 점은 앞에서 살펴본 저주의 의미와도 연결됩니다. 저주는 주님께서 사람에게서 돌아서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악으로 말미암아 선에서 돌아서는 상태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돌아섰다고 해서 주님의 자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여전히 그 사람의 보존과 궁극적인 선을 위해 역사하십니다. 가인의 절망은 죄악은 너무 커서 제거될 없다고 느끼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는 인간의 절망이 주님의 섭리와 자비의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줄 준비를 합니다.

 

목회적으로도 이 구별은 중요합니다. 자기 안의 악을 발견하는 것은 거듭남에서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악을 발견하는 목적은 나는 이렇게 악하니 끝났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힘으로는 악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주님께 돌이키는 데 있습니다. 자신의 악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그 악을 주님의 구원 능력보다 더 크게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참된 겸손은 자기 악을 정확히 보면서 동시에 모든 선과 구원의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결국 AC.383은 가인의 내면에서 일어난 미묘하지만 중요한 변화를 보여 줍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책임을 부인하던 상태에서 이제는 어떤 내적 고통 때문에 자기가 악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인정은 아직 주님의 자비를 신뢰하는 회개로 나아가지 못하고 죄악이 너무 커서 사함을 받을 없다는 절망으로 기울어집니다. 악을 인정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절망이 마지막이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악보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크며, 이후 가인에게 주어지는 보존의 표는 바로 이 절망 뒤에서도 주님의 섭리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 주게 됩니다.

 

 

 

AC.384, 창4:13, ‘가인에게도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 라멕에 이르러 소멸되는 체어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창4:13) AC.384이로부터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되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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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2, 창4:12, ‘피하며 유리하는 자란 누구인가? -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게 된 신앙’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2‘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가 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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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번 영상은 앞서 다루었던 202015일의 티혼 수도사 이야기와 상당 부분 겹칩니다. 다만 이번에는 티혼 수도사의 극단적 금욕생활뿐 아니라 그가 연결되어 소개되는 아토스의 이비론 수도원, 그곳의 공동생활과 식사 규칙, 기도와 금식, 그리고 강문호 수도사가 실제로 그곳에서 경험한 일들까지 함께 펼쳐집니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앞서 이미 살핀 ‘금욕과 거듭남’의 문제를 되풀이하기보다, 영상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과 하나 되는 ’, ‘외적 질서와 내적 질서’, 그리고 ‘거룩한 공동체란 무엇인가’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역사적으로 한 가지는 구별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에서는 1884년 러시아에서 태어난 티혼 수도사가 여러 수도원을 찾아다닌 끝에 이비론 수도원에 이르러 그곳에서 수도한 인물처럼 소개됩니다. 그러나 현재 확인되는 정교회 자료에서 티혼 골렌코프(1884-1968)는 아토스의 카프살라에서 살았던 러시아계 은수자로, 말년에는 스타브로니키타 수도원에 속한 성십자가 켈리에서 살았으며, 훗날 성 파이시오스의 영적 스승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2026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청이 그를 공식 성인 명부에 올렸습니다. 그러므로 티혼을 이비론 수도원이 ‘배출한 대표적 수도사’로 직접 연결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는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Cloud of Witnesses) 이것은 영상의 영적 메시지를 무너뜨리는 문제가 아니라, 수도원과 인물의 실제 관계를 구별해 두자는 정도입니다.

 

영상의 티혼 수도사 묘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극단적인 금욕입니다. 잠들지 않기 위해 목에 끈을 걸고 밤새 기도하고, 아주 적은 음식만 먹으며, 딱딱한 잠자리와 한 장의 담요로 겨울과 여름을 지낸 것으로 소개됩니다. 또한 ‘탐식은 모든 죄가 들어오는 현관문’이라는 생각 아래 배부름을 경계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전해지는 티혼의 생애에서도 극심한 가난과 지속적인 기도와 금욕은 중요한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Cloud of Witnesses) 이런 삶을 바라볼 때 우리는 먼저 그 진지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기를 갈망하여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기도에 생애를 바친 사람의 열망 자체를 가볍게 볼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언제나 여기서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갑니다. 적게 먹는 것이 곧 탐욕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며, 딱딱한 침대에서 자는 것이 곧 proprium을 제거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하루에 열매 반쪽만 먹으면서도 자기 금욕을 자랑할 수 있고,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감사와 절제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음식의 양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지배하는 사랑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육체를 가능한 한 괴롭히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악한 욕망이 주님의 질서 아래 놓이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외적 절제는 내적 거듭남을 돕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지만, 둘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배부르면 음란해지고, 배부르면 교만해지고, 배부르면 자기 자랑을 하게 된다’는 영상의 설명도 이런 구별이 필요합니다. 과식과 탐식이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 영적 집중력을 흐릴 수 있다는 수도 전통의 경험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죄의 근원이 음식이나 배부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악의 뿌리는 인간의 proprium 안에서 주님과 이웃보다 자신을 사랑하려는 질서의 전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탐식을 절제했는데도 사람을 지배하려 하고, 인정받기를 원하고, 자기 공로를 높이고, 타인을 업신여긴다면 근본적인 싸움은 아직 남아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음식에 대한 절제도 결국 이러한 내적 악과 싸우는 데 봉사할 때 영적 의미를 갖습니다.

 

티혼과 동물들의 관계를 전하는 부분은 따뜻합니다. 여우가 찾아오고, 멧돼지 새끼들을 보호하며, 사냥꾼에게 동물을 숨겨 주고, 심지어 곤충들에게 자신의 피를 먹게 했다는 성인전적 이야기까지 소개됩니다. 이런 세부를 모두 역사적으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전달하려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수도자의 거룩함이 인간에게만 친절한 데서 끝나지 않고 피조물 전체에 대한 온유함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론에서도 동물은 인간의 다양한 애정들을 표상합니다. 그렇다고 실제 여우나 멧돼지를 곧바로 특정 애정과 일대일 대응시킬 필요는 없지만, 인간 안의 거칠고 자연적인 것까지 주님의 질서 아래 평화롭게 놓이는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장면으로는 충분히 읽을 수 있습니다.

 

영상은 이런 혹독한 훈련 끝에 티혼이 ‘하나님과 합일의 단계’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중요한 구별을 하나 더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동일해지는 의미에서 ‘합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생명 자체이시고 인간은 그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유한한 피조물입니다. 인간이 주님과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 안의 선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임을 더욱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참된 결합은 ‘내가 어떤 높은 영적 단계에 올랐다’는 자기의식보다, 자신의 생명과 선이 전적으로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점 더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영상 중간의 우물 이야기에서도 같은 원칙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가뭄으로 우물이 말랐을 때 성자의 초상화를 우물에 넣고 수도자들이 기도하자 물이 차올라 초상화가 떠올랐다는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그리고 강문호 수도사는 ‘기도는 응답이다. 기도는 되는 것을 되게 하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고, 닫힌 문을 연다’는 취지로 강조합니다. 이 이야기는 수도원 전승으로 받아들이면 충분하겠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본질을 ‘내가 바라는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능력’으로만 이해하면 기도가 어느새 인간의 뜻을 관철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참된 기도는 주님의 뜻을 내 뜻에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이 주님의 섭리와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응답이 내가 요구한 형태로 오지 않을 때에도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가 오히려 더 깊은 기도의 시험일 수 있습니다.

 

이번 영상에서 매우 흥미로운 부분은 이비론 수도원의 공동 식사입니다. 원장이 먹기 시작하면 모두 함께 먹고, 원장이 수저를 놓으면 아직 다 먹지 못했어도 모두 수저를 놓으며, 식사 중에는 한 사람이 성경을 읽어 육신의 양식과 영의 양식을 함께 취한다는 설명입니다. 여기에 담긴 질서와 절제는 충분히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수도원장이 모든 것의 표준’이라는 표현은 영적으로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동체의 운영에는 외적 질서가 필요하고 수도자는 자발적으로 그 질서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양심과 진리의 최종 기준은 인간 지도자가 아니라 주님과 말씀입니다. 인간 지도자에게 대한 순종이 주님께 대한 순종을 돕는 수단이라면 좋은 질서가 되지만, 지도자의 의지가 곧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면 외적 순종이 내적 자유를 침범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수도원 밖의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강제로 거듭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보존하시면서 그가 선과 진리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이끄십니다. 따라서 가장 깊은 순명은 ‘ 인간이 시키는 대로 하는 ’이 아니라, 자기 의지를 내려놓고 주님의 선과 진리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외적 규율이 그것을 훈련해 줄 수는 있지만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원장이 숟가락을 놓았기 때문에 나도 숟가락을 놓는 훈련보다 더 깊은 것은, 내 욕망이 ‘조금 먹고 싶다’, ‘ 뜻대로 하고 싶다’, ‘나는 예외이고 싶다’고 말할 때 그것을 주님의 질서 아래 놓는 내적 순종입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만난 일본 수도사가 ‘한국에서 수도사가 없다. 한국과 아토스의 고리를 만들어 달라’며 자신을 붙들었다는 일화도 흥미롭습니다. 여기에는 ‘한국에도 이런 수도 영성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강문호 수도사의 오랜 열망이 드러납니다. 영상 마지막에도 ‘우리나라에도 이런 교회 수도사들이 많이 배출되어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이 소망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대교회가 활동, 성장, 재정, 조직, 프로그램에 치우칠 때 기도와 절제와 하나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자는 요청은 귀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수도사가 많이 배출되는 ’과 ‘거듭난 사람이 많아지는 ’을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수도복을 입은 사람의 수가 많아져도 자기 사랑과 공로의식과 지배욕이 그대로라면 천국이 가까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수도사라는 이름을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사람이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서 자신의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정직한 쓰임을 행한다면 그는 실질적으로 천국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수도 영성을 바라보면서 계속 외적 형식과 내적 상태를 구별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의 ‘하나님하고 가까이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사막이 도시가 된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기 때문에 그곳이 아름답다’는 취지의 말은 상당히 좋습니다. 다만 ‘아름다운 사람’의 기준을 다시 주님께 돌려놓으면 훨씬 깊어집니다. 사람 자체가 스스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삶으로 흘러나올 때 그 사람을 통해 천국의 아름다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천국의 아름다움도 천사들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과 지혜가 외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번 영상은 앞서 살핀 티혼 수도사 이야기보다 조금 더 넓은 질문을 우리에게 남깁니다. ‘거룩한 수도자가 되는 ’보다 ‘거룩한 공동체가 어떻게 형성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극단적인 금식, 긴 기도, 엄격한 규칙, 침묵, 수도원장의 권위가 공동체를 특별하게 보이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적 공동체의 진정한 표지는 구성원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며, 상대의 자유를 존중하고, 자신의 공을 내려놓으며, 각자의 쓰임을 통해 전체의 선을 섬기는가에 있습니다. 외적 질서가 이러한 내적 질서를 보호한다면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외적 질서 자체가 거룩함의 증표가 되는 순간 수도원 역시 세상의 다른 조직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이번 영상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가장 주의 깊게 바라보게 되는 문장은 어쩌면 ‘지독한 훈련 끝에 드디어 하나님과 합일의 단계에 들어갔다’는 표현일 것입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지독하게 하면 도달하는 영적 고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의 악과 거짓을 인식하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버리며, 주님께서 우리 안에 새 의지와 새 이해를 형성하시도록 허용하는 평생의 과정입니다. 인간이 노력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 자체를 구원의 원인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가장 깊이 거듭난 사람일수록 ‘내가 여기까지 올라왔다’보다 ‘주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이끄셨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티혼의 극단적 금욕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이 영상에서 우리가 취할 결론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삶에서 받아들일 것은 ‘하나님을 무엇보다 우선하고 싶었던 갈망’, ‘욕망에 끌려다니지 않으려 했던 절제’, ‘기도를 삶의 중심에 두려 했던 태도’, ‘피조물에게까지 미친 온유함’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오늘 우리의 형편 속에서 더 내적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음식을 조금 덜 먹는 것보다 탐욕을 덜 먹이고, 말을 조금 덜 하는 것보다 자기 자랑을 덜 말하며, 세상을 떠나 동굴로 들어가는 것보다 자기 안의 proprium을 발견하고 주님께 맡기는 것이 더 깊은 수도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아토스의 숲과 수도원이 ‘천국 같은 ’인 이유가 있다면 건물이나 금식 규칙이나 수도복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을 서로를 향한 사랑과 쓰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곳에 천국의 어떤 것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천국은 아토스에만 세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의 식탁에서도, 작은 교회에서도, 직장에서도, 병실에서도 주님의 질서가 인간의 의지와 생각 속에 받아들여지면 천국의 어떤 것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수도원의 외적 아름다움을 지나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바라보게 하는 더 깊은 수도원, 곧 인간 안에 주님께서 세우시는 내적 질서일 것입니다.

 

 

 

SY.96, 강문호 수도사, ‘바늘로 천국을 만들었다’ (20260901)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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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4:12)

 

AC.382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된다는 것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유리하는 (wandering) 피하여 달아나는 (fleeing away) 의미로부터 분명합니다. 예레미야애가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That to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signifies not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wandering and fleeing away in the Word. As in Jeremiah:

 

13그의 선지자들 죄들과 제사장들 죄악들 때문이니 그들이 성읍 안에서 의인들의 피를 흘렸도다 14그들이 거리 거리에서 맹인 같이 방황함이여 그들의 옷들이 피에 더러워졌으므로 그들이 만질 없도다 (4:13, 14) The prophets and priests wander blind in the streets, they have been polluted in blood; the things they cannot do they touch with garments, (Lam. 4:1314)

 

여기서 선지자들(prophets) 가르치는 자들을, 제사장들(priests) 그에 따라 사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거리에서 맹인 같이 방황하는 (wander blind in the streets)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where prophets are those who teach, and priests, those who live accordingly; to wander blind in the streets is not to know what is true and good.

 

[2] 아모스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Amos:

 

7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부분은 비를 얻고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 8 성읍 사람이 어떤 성읍으로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가서 만족하게 마시지 못하였으나 (4:7, 8) A part of the field was rained upon, and the part of the field whereupon it rained not withered; so two or three cities shall wander unto one city to drink waters, and shall not be satisfied, (Amos 4:78)

 

여기서 비가 내린 밭의 부분(part of the field on which it rained)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신앙의 교리를 의미하고, 비가 내리지 않은 밭의 부분(part or piece of the field on which it did not rain)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교리를 의미합니다. 물을 마시려고 유리하는 (wander to drink the waters) 역시 진리를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where by the part of the field on which it rained is signified the doctrine of faith from charity; and by the part or piece of the field on which it did not rain, the doctrine of faith without charity. To wander to drink the waters likewise denotes to seek after truth.

 

[3] 호세아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Hosea:

 

16에브라임은 매를 맞아 뿌리가 말라 열매를 맺지 못하나니 비록 아이를 낳을지라도 내가 사랑하는 태의 열매를 죽이리라 17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리니 그들이 여러 나라 가운데에 떠도는 자가 되리라 (9:16, 17) Ephraim is smitten, their root is dried up, they shall bear no fruit; my God will cast them away, because they did not hearken unto him; and they shall be wanderers among the nations. (Hos. 9:16, 17)

 

여기서 에브라임(Ephraim) 진리에 대한 이해, 신앙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가 요셉의 장자였기 때문입니다. 말라 버린 뿌리(root which was dried up) 열매를 맺을 없는 체어리티를 의미하고,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떠도는 자들(wanderers among the nations)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Ephraim here denotes the understanding of truth, or faith, because he was the firstborn of Joseph; the root which was dried up denotes charity that cannot bear fruit; wanderers among the nations are those who do not know what is true and good.

 

[4] 예레미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Jeremiah:

 

28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공격을 받은 게달과 하솔 나라들에 대한 말씀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일어나 게달로 올라가서 동방 자손들을 황폐하게 하라, 30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솔 주민아 도망하라 멀리 가서 깊은 곳에 살라 이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너를 모략과 너를 계책을 세웠음이라 (49:28, 30) Go ye up against Arabia, and devastate the sons of the east. Flee, wander ye exceedingly; the inhabitants of Hazor have let themselves down into the deep for a habitation. (Jer. 49:28, 30)

 

아라비아(Arabia) 동방의 아들들(sons of the east) 천적인 부요함, 사랑에 속한 것들을 소유함을 의미합니다. 이것들이 황폐해질 그들은 피하고(flee) 유리한다(wander), 선한 것을 전혀 행하지 않을 피하며 유리하는 자들(fugitives and wanderers) 된다고 말합니다. 하솔 주민들(inhabitants of Hazor), 영적인 부요함인 신앙에 속한 것들을 소유한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let themselves down into the deep) 하는데, 이는 그들이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Arabia and the sons of the east, signify the possession of celestial riches, or of the things that are of love, which, when vastated, are said to flee, and wander, that is, to be fugitives and wanderers, when they do nought of what is good. Of the inhabitants of Hazor, or those who possess spiritual riches, which are those of faith, it is said that they let themselves down into the deep, that is, they perish.

 

[5]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Isaiah:

 

너의 관원들도 함께 도망하였다가 활을 버리고 결박을 당하였고 너의 멀리 도망한 자들도 발견되어 함께 결박을 당하였도다 (22:3) All thy foremost ones wander together, they are bound before the bow, they have fled from far, (Isa. 22:3)

 

이는 환상의 골짜기(valley of vision), 체어리티 없는 신앙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두고 말입니다. 이로부터 뒤의 절에서 그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고백하는 자를 피하며 유리하는 (fugitive and a wanderer), 선과 진리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자라고 말한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speaking of the valley of vision, or the fantasy that faith is possible without charity. Hence appears the reason why it is said, in a subsequent verse (Isa. 22:14), that he who professes faith that is apart from charity is a fugitive and a wanderer, that is, knows nothing of good and truth.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귀에 들려 이르시되 진실로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2:14)

 

해설

AC.382AC.380에서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을 의미한다고 한 해석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확증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리한다는 것을 단순히 장소를 옮겨 다니는 것으로 읽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예레미야애가, 아모스, 호세아, 예레미야, 이사야를 차례로 인용하면서 말씀에서 유리함피하여 달아남이 영적으로 방향을 잃은 상태, 특히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인용은 가인의 문제, 곧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결과와 연결됩니다.

 

첫 번째 인용인 애4:13-14에서는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 거리에서 맹인 같이 방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지자들을 가르치는 자들로, ‘제사장들을 그 가르침에 따라 사는 자들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가르침과 삶을 대표하는 두 부류가 모두 맹인처럼 거리를 방황한다는 것은 단순히 길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이 진리이고 선인지 알지 못하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거리는 사람들이 오가는 길인데, 영적으로 방향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그 거리에서 방황한다는 이미지는 진리와 선을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를 매우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이것이 가인이 유리하는 가 된다는 말과 연결됩니다.

 

두 번째 암4:7-8은 이번 번호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한 밭에는 비가 내리고 다른 밭에는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비가 내린 밭을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신앙의 교리, 비가 내리지 않은 밭을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교리로 해석합니다. 여기서 두 종류의 신앙이 아주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생명을 받는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후자는 비를 받지 못한 밭처럼 말라 버립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물을 마시려고 이 성읍 저 성읍으로 유리하지만 만족하지 못합니다. 물은 여기서 그들이 찾고 있는 진리와 연결됩니다. 즉 체어리티를 잃은 신앙은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계속 진리를 찾아 헤매며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릅니다.

 

이것은 AC.379-381의 흐름을 그대로 이어 줍니다. AC.379에서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지 지식이라고 했고, AC.380에서는 그런 신앙이 결국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게 된다고 했으며, AC.381에서는 그 땅이 결실하지 못하는 이유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암4장의 물을 마시려고 유리하지만 만족하지 못하는사람들은 그 상태를 하나의 이미지로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와 결합되지 않은 신앙은 지식을 계속 더할 수는 있어도 그 지식이 생명으로 이어지지 않으므로 참된 영적 만족에 이르지 못합니다.

 

세 번째 호9:16-17에서는 에브라임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브라임을 진리에 대한 이해, 신앙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뿌리가 말라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체어리티와 연결합니다. 이것은 앞의 땅이 효력을 내지 않는다는 설명과 거의 같은 구조입니다. 뿌리가 마르면 나무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에서 체어리티라는 생명이 사라지면 신앙도 영적인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떠도는 가 됩니다. 다시 말해 신앙은 남아 있다고 주장하지만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 렘49장의 아라비아동방의 아들들은 조금 더 깊은 층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들을 천적인 부요함’, 곧 사랑에 속한 것들을 소유한 상태와 연결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황폐해지면 피하고 유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를 선한 것을 전혀 행하지 않는 과 연결합니다. 이것은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한다는 상태가 단순한 지적 혼란이 아니라 삶의 선이 사라진 상태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선을 행하는 삶과 분리된 신앙은 결국 무엇이 선인지도 제대로 알 수 없게 됩니다. ‘하솔 주민들이 가진 영적인 부요함, 곧 신앙에 속한 것들 역시 결국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즉 멸망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영적 지식은 스스로 생명을 보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사22장의 환상의 골짜기는 이 모든 설명을 가인의 핵심 문제에 직접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체어리티 없는 신앙이 가능하다는 환상이라고 규정합니다. 여기서 fantasy라는 말이 매우 강합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떼어 놓고도 그것이 여전히 살아 있는 신앙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영적인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교리가 걸어온 길입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와 구별하는 데서 시작하여 둘을 분리하고, 신앙을 체어리티 위에 놓으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신앙이 더 순수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피하며 유리하는상태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역설이 드러납니다. 가인은 신앙을 지키려다가 신앙의 방향을 잃었습니다. 체어리티를 제거하면 진리만 더욱 순수하게 남을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진리를 분별할 능력까지 잃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선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알려 주는 것은 선이며, 신앙에 생명을 주는 것은 체어리티입니다. 목적을 잃은 진리는 지식으로는 남아 있을 수 있지만 살아 있는 진리로 기능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물을 찾아 이리저리 다니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길을 걷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됩니다.

 

그렇다고 체어리티가 있으면 교리적 진리를 몰라도 된다는 반대 극단으로 가서도 안 됩니다. AC.382의 결론은 진리를 버리고 선만 붙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체어리티는 진리를 필요로 합니다.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 분별하려면 진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진리는 체어리티를 필요로 합니다. 진리가 무엇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지를 체어리티가 그 방향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문제는 이 둘을 구별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분리한 데 있었습니다.

 

이번 번호의 여러 성경 인용을 하나씩 별개의 교리로 떼어 읽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다섯 인용을 가져온 목적은 하나입니다. 말씀에서 방황하고’, ‘유리하고’, ‘피하여 달아나는이미지들이 영적인 방향 상실과 연결되며, 그 방향 상실은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애가에서는 맹인처럼 방황하고, 아모스에서는 물을 찾아 유리하며, 호세아에서는 열매 없는 에브라임이 여러 나라 가운데 떠돌고, 예레미야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부요함을 잃은 자들이 피하고 유리하며, 이사야에서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이라는 환상속에서 사람들이 도망합니다. 서로 다른 장면이지만 모두 하나의 영적 상태를 비춥니다.

 

따라서 창4:12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는 것은 단순히 가인에게 내려진 외적인 유랑 형벌이 아닙니다. 속뜻에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이 결국 자기 안에서 선과 진리의 방향을 잃게 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가인의 교리가 맞이한 가장 깊은 비극 가운데 하나입니다. 신앙만을 높이려 했는데 결국 신앙 자체가 무엇이 참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버릴 때 순수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체어리티와 결합될 때 비로소 살아 있으며 선과 진리를 분별하는 올바른 방향을 얻게 됩니다.

 

 

 

AC.383, 창4:13,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 악을 인정하게 한 내적 고통과 절망’ (AC.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창4:13) AC.38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Cain said unto Jehovah)는 어떤 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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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1, 창4:12,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실이 없는가?’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1‘땅을 가는 것’(till the ground)이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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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4:12)

 

AC.381

땅을 가는 (till the ground)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방금 설명한 (ground)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그리고 땅이 효력을 내지 아니하는 (not yielding its strength) 결실 없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땅에 관하여 앞에서 말한 것과 자체에서도 분명하며, 또한 체어리티 없는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은 아무런 신앙도 고백하지 않는 것이라는, 앞에서 말한 사실에서도 분명합니다. That to till the ground means to cultivate this schism or heresy appears from the signification of ground, of which we have just now spoken; and that its not yielding its strength denotes its barrenness, is evident both from what was said concerning ground, and from the words themselves, as well as from this consideration, that those who profess faith without charity, profess no faith, as was said above.

 

해설

AC.381은 바로 앞 AC.380의 설명 가운데 처음 두 부분을 확증합니다. ‘땅을 가는 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한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이며, 그 땅이 효력을 내지 아니한다는 것은 그 분열이 결실을 맺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새로운 상응을 길게 전개하지 않습니다. 대신 앞에서 이미 밝혀진 의 의미와 창4:12의 표현 자체, 그리고 AC.379에서 제시한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는 원리를 함께 가져와 AC.380의 해석이 왜 성립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먼저 땅을 가는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이라는 해석은 의 의미에서 나옵니다. AC.377에서 사람 자신이 이며 또한 이라고 했고, 그 사람 안에 무엇이 심어지느냐에 따라 그의 영적 성질이 형성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인의 문맥에서 그 땅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교리적 분열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그 땅을 계속 간다는 것은 그 분열을 계속 연구하고 확증하고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사람은 거짓된 원리를 한 번 받아들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계속 생각하고 논증하고 가르치면서 더욱 견고한 체계로 만들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여기서 말하는 배양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경작하더라도 그 땅은 효력을 내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결실 없음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해석은 땅이 효력을 내지 않는다는 표현 자체에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땅의 힘은 씨를 받아 싹을 틔우고 열매를 내는 데 나타나는데, 이제 그 힘이 가인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속뜻에서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한 교리를 아무리 발전시켜도 거기에서는 참된 영적 생명의 열매가 나올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번 번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그 결실 없음의 이유를 다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에서 찾는다는 점입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은 아무런 신앙도 고백하지 않는 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AC.379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지 지식이다라는 설명을 압축하여 되풀이한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땅이 결실하지 못하는 것은 주님께서 임의로 그 땅의 생산력을 빼앗아 벌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신앙의 생명 자체를 이루는 체어리티를 신앙에서 떼어 내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제거한 뒤에는 아무리 그 신앙을 경작해도 살아 있는 열매를 얻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체어리티 없는 신앙을 고백한다는 표현도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입으로 나는 신앙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문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profess에는 어떤 교리를 자기의 신앙 원리로 인정하고 주장한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 되는 것은 체어리티를 신앙의 본질적인 생명에서 떼어 내면서도 그것을 참된 신앙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것을 부정합니다. 체어리티가 빠진 신앙은 신앙의 한 종류가 아니라, 앞에서 말했듯이 신앙에 관한 지식만 남은 상태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행위가 있어야 신앙의 부족분을 채워 완전해진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는 신앙에 외적으로 덧붙이는 공로적 행위가 아닙니다. AC.379에서 체어리티를 사랑과 자비라고 했고, 그것이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킨다고 했습니다. 또한 선을 행하려는 의지가 생각 안에 있을 때 그 생각 안에 신앙의 본질인 체어리티가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참된 신앙의 열매는 머리로 알고 있는 진리에 외적인 선행 몇 가지를 더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가 선을 의도하는 의지와 결합되어 실제 삶으로 나타날 때 생깁니다.

 

이렇게 보면 땅을 열심히 가는데도 열매가 없다는 이미지는 상당히 강력합니다. 사람은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 자기 신앙의 논리를 세우고, 성경 구절을 모으고, 교리 체계를 정교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 보면 매우 열심히 땅을 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작업의 중심에서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가 제거되어 있다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 경작 자체가 생명의 열매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못된 분리를 더 깊이 배양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얼마나 많이 경작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땅을 경작하고 있으며 무엇을 열매 맺으려 하느냐입니다.

 

이 점은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에게도 특별히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올바른 교리를 찾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말씀의 진리와 참된 교리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리의 목적은 체어리티와 분리된 지식 체계를 완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선을 가르치고 선으로 인도하며, 마침내 선과 결합되어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진리를 연구할수록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보다 정죄하게 되고, 자기의 지적 우월성을 확인하며, 선한 쓰임보다 교리적 승리를 더 사랑하게 된다면 우리가 갈고 있는 이 어떤 땅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AC.381은 그래서 AC.379-380을 매우 긴밀하게 연결합니다. AC.379에서는 체어리티가 소멸되면 주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결속이 끊어지며,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단지 지식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AC.380에서는 그런 분열을 계속 배양해도 그 땅은 결실하지 못하고, 결국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여 피하며 유리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81은 그 결실 없음의 이유를 다시 한 번 명시합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문제의 핵심은 외적인 형벌이 아니라 신앙에서 그 생명을 제거한 데 있습니다.

 

결국 AC.381의 메시지는 단순하면서도 날카롭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한 땅은 아무리 갈아도 참된 영적 결실을 내지 못합니다. 신앙의 생명은 체어리티에 있으며, 체어리티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자비가 인간의 의지와 삶 안에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신앙은 진리를 많이 아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진리가 선을 의도하고 행하는 삶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가인의 비극은 신앙을 지키려다가 체어리티를 제거한 데 있었고, 그 결과 남은 것은 더 순수한 신앙이 아니라 열매 맺지 못하는 땅이었습니다.

 

 

 

AC.382, 창4:12, ‘피하며 유리하는 자란 누구인가? -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게 된 신앙’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2‘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가 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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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0, 창4:12,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신앙’ (AC.38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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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shalt thou be in the earth. (4:12)

 

AC.380

땅을 가는 (till the ground)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땅이 다시는 네게 효력을 내지 아니할 것이요(it shall not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그것이 결실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된다는 것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To till the ground signifies to cultivate this schism or heresy; it shall not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signifies that it is barren. To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is not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

 

해설

AC.380은 창4: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의 속뜻을 세 부분으로 압축하여 제시합니다. 바로 앞 AC.377-379에서 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했고, 그 분열로 말미암아 사람이 선에서 돌아서며, 체어리티가 소멸될 때 주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결속이 끊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80에서는 그러한 분열을 계속 붙들고 발전시킬 때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를 보여 줍니다. 아무리 그 땅을 갈아도 결실이 없으며, 마침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한 채 피하며 유리하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먼저 땅을 간다는 것은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땅을 간다는 것은 씨를 뿌리고 열매를 얻기 위해 토지를 경작하는 긍정적인 이미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응의 의미는 언제나 문맥 안에서 결정됩니다. 여기서 은 이미 AC.377에서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규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땅을 간다는 것은 선과 진리를 배양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그 분열된 교리를 더욱 발전시키고 확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잘못된 원리도 사람이 계속 생각하고 논증하고 뒷받침하면 점점 더 정교한 하나의 체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계가 정교해졌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을 참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 점은 가인의 진행 과정과도 잘 맞습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구별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구별이 분리가 되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는 원리가 되었으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AC.378에서는 그 분열이 입을 벌려’, 곧 하나의 이단적 교리로 가르쳐졌다고 했습니다. 이제 땅을 간다는 것은 그렇게 형성된 교리를 계속 배양하는 단계입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하나의 중요한 경고가 있습니다. 거짓은 반드시 조잡한 모습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된 출발점을 붙들고 오랫동안 연구하고 논증하면 매우 정교하고 일관성 있어 보이는 교리 체계도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출발점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살아 있는 결합을 파괴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많이 경작해도 그 땅은 참된 영적 열매를 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곧이어 땅이 다시는 네게 효력을 내지 아니할 것이요가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간단히 그것이 결실이 없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strength는 땅이 가지고 있는 생산력, 곧 열매를 내는 힘입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교리를 아무리 발전시키고 확증해도 거기에서는 살아 있는 신앙의 열매가 나오지 않습니다. 앞의 AC.379에서 그 이유가 이미 설명되었습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지 지식이며, 우리를 주님과 결합시키는 것은 체어리티, 곧 사랑과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 신앙에 관한 지식을 아무리 많이 경작해도 그 지식 자체에서는 주님과의 결합에서 나오는 생명이 열매 맺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결실이 없다는 것을 외적인 활동이나 종교적 성과가 전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AC.379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 없는 사람도 종교적 지식을 가지고 경건한 열심처럼 보이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외적으로는 설교도 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많은 종교 활동을 하며, 상당한 성과를 이루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열매는 그러한 외적 성과 자체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결합되어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나는 영적 결실입니다. 바로 그 결실을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스스로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가 된다는 것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AC.380에서 가장 중요한 결론입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더 순수하게 보존하려고 체어리티와 구별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완전히 분리하고 체어리티를 배척하면 역설적으로 신앙 자체도 선과 진리를 분별하는 능력을 잃게 됩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선과 결합할 때 살아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라는 목적을 잃어버린 신앙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지식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 결과 무엇이 실제로 선이며 무엇이 실제로 진리인지에 관하여 방향을 잃고 피하며 유리하는상태가 됩니다.

 

이 점은 앞의 AC.379와 매우 깊게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지옥의 무리들조차 신앙에 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진리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진리에 관한 문장을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이것이 참된 교리다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으면서도 그것을 악한 목적에 사용할 수 있다면, 그는 그 진리를 생명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선과 결합되지 않은 진리는 사람 안에서 방향을 잃습니다. 그래서 체어리티를 제거하고 나면 결국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한다는 상태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식의 부족이라기보다 영적 분별의 상실에 가깝습니다.

 

피하는 유리하는 라는 두 표현 역시 지금 번호에서는 하나하나 별도의 상응으로 세분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한 전체 의미를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AC.380은 둘을 합쳐 not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피하는 자는 이것, 유리하는 자는 저것이라고 미리 나누어 의미를 만들어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뒤의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두 표현을 더 구체적으로 구별한다면 그때 따라가면 됩니다. 현재로서는 선과 진리에 대한 방향을 잃고 안정된 영적 토대를 갖지 못하는 상태 전체를 나타낸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신앙에도 매우 실제적인 경고가 됩니다. 신학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과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영적으로 분별하는 것은 반드시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신앙의 정확성을 매우 강조하면서도 이웃을 사랑하는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오히려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들을 자기 사랑이나 정죄나 지배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때에는 진리를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그 진리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역설적인 상태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 하면 땅을 열심히 갈고 있지만 그 땅이 효력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방향을 얻습니다. 진리는 무엇이 선인지 보여 주고, 선은 진리를 받아들여 삶으로 만듭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기고 보호하며, 체어리티는 신앙에 생명을 줍니다. 이 둘이 주님 안에서 결합될 때 사람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점점 더 분명하게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 자신의 지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함께 받아들일 때 생기는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유리함과 반대되는 상태는 단순히 교리적 확신이 강한 상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삶의 방향이 분명해지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AC.380은 가인의 분열이 어디에 도달하는지를 세 단계로 보여 줍니다. 먼저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을 계속 경작합니다. 그러나 그 땅에서는 영적인 열매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여 피하며 유리하는 가 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를 버리고 신앙만을 지키려 했던 교리가 결국 신앙 자체의 방향까지 잃어버리는 역설입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제거함으로써 순수해지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와 결합될 때 비로소 살아 있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향하여 올바른 방향을 갖게 됩니다.

 

 

 

AC.381, 창4:12,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실이 없는가?’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1‘땅을 가는 것’(till the ground)이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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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9, 창4:11,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 의지가 실제 사람입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창4:11) AC.379이러한 것들이 의미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으로부터 분명하며, ‘저주를 받는 것’(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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