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레위기 1장의 번제를 읽으면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올립니다. 흠 없는 제물이 사람을 대신하여 죽고 피를 흘린다는 모습이 주님의 죽음과 매우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흔히 구약의 희생제사를 ‘죄인이받아야할형벌을예수님께서대신받으신사건의예표’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번제는 예수님의 대속 죽음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도 희생제사와 번제의 최고 의미가 주님께 관한 것임을 인정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번제와예수그리스도는관계가없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관계는 매우 깊습니다. 문제는 ‘어떤방식으로관계하는가?’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2776(창22:2)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드리라’고 하신 말씀을 해설하면서 ‘번제로드리는것’이 주님께서 자신을 신성에 거룩하게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주님께서 시험과 승리를 통하여 자신의 인성을 신성과 하나 되게 하신 과정과 연결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의 ‘영화’입니다.
따라서 번제의 최고 의미에서 우리가 먼저 보아야 할 것은 ‘성부께서죄에대한형벌을요구하시고성자께서죄인대신그형벌을받으셨다’는 장면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성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지옥의 모든 세력과 싸우시고 시험을 이기시며, 자신의 인성을 완전히 신성하게 하신 구속과 영화의 과정입니다. 십자가는 그 과정에서 가장 마지막이며 가장 큰 시험이었습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형벌대속의 구조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면 성부는 진노하여 형벌을 요구하시는 분이고 성자는 그 진노를 대신 받아 인간을 구해 내시는 분처럼 이해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구속을 이루신 분은 한 분 주님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인성을 입고 오셔서 인간을 붙잡고 있던 지옥의 권세를 이기시고, 인간이 다시 자유롭게 주님을 향할 수 있는 질서를 회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한 신적 위격이 다른 신적 위격을 만족시키기 위한 형벌의 지불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인간 구원을 위하여 끝까지 감당하신 마지막 시험과 승리의 절정으로 이해됩니다.
이렇게 보면 레위기 1장의 번제와 십자가의 관계도 훨씬 깊어집니다. 번제물 전체가 불 위에 드려지는 모습은 단지 ‘누군가대신죽는다’는 한 장면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인성을 완전히 신성에 결합시키시는 영화의 전 과정을 표상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번제와 희생제사의 세세한 의식들이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영화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AC.10057, 출29:18).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주님의 영화와 우리의 거듭남이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영화와 인간의 거듭남은 서로 전혀 관계없는 두 주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거듭남이 가능해졌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으로 지옥을 정복하시고 인성을 신성하게 하심으로써 이제 모든 인간에게 악과 거짓을 이길 수 있는 신적 생명과 능력을 공급하십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신을 거듭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되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거듭납니다.
그래서 희생제사와 번제는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영화이고, 상대적 의미에서는 인간의 거듭남입니다. 이 두 의미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이 인간 안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점차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시험을 통하여 인성을 신성과 완전히 하나 되게 하셨고,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시험을 통과하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점차 하나의 질서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우리를위해죽으셨다’는 말 자체를 버려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의 죽음까지 감당하셨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다만 그 ‘우리를위하여’를 ‘우리가받아야할형벌의정확한양을대신받으셨다’는 의미로만 제한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지옥과 싸우셨고, 우리를 위하여 모든 시험을 이기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고, 그리하여 우리가 악과 거짓에서 벗어나 다시 주님과 결합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1장의 번제를 보면서 우리는 분명히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주님은 성부의 진노를 달래기 위해 희생당하는 별개의 신적 인격이 아니라, 친히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의 인성을 신성하게 하시고 지옥을 이기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화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 안에서도 거듭남이라는 또 하나의 번제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십자가는 우리에게 ‘주님이다하셨으니나는아무것도하지않아도된다’는 자리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신 구속의 능력 안에서 우리도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선과 진리의 삶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됩니다. 주님의 영화가 우리 안에서는 거듭남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번제와 십자가를 함께 바라볼 때 드러나는 더 깊은 연결입니다. (SW.3레1심화2)
레위기 1장을 처음 읽는 현대 독자에게 가장 먼저 생기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왜하나님께서는굳이동물을죽여제물로드리게하셨을까?’입니다. 소와 양과 염소의 목을 따고,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몸을 각 뜨고, 그것을 불에 태우는 장면은 오늘날 우리의 감각으로는 상당히 낯설고 심지어 잔혹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정말 이런 동물의 죽음과 피와 불을 원하셨던 것일까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제사자체가예배의본질이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Coelestia, 1749-1756, AC) 922(창8:20)는 번제와 희생제사가 내적 예배를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소와 양과 염소와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가 각각 서로 다른 천적인 것들을 표상했으며, 크게 보아 짐승들은 체어리티의 선을, 새들은 신앙의 진리를 표상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신 것은 짐승 자체가 아니라 그 짐승들이 표상하고 있는 인간 안의 선과 진리, 사랑과 체어리티와 신앙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성경 자체에서도 반복해서 드러납니다. 사무엘은 ‘여호와께서번제와다른제사를그의목소리를청종하는것을좋아하심같이좋아하시겠나이까순종이제사보다낫고듣는것이숫양의기름보다나으니’라고 말합니다(삼상15:22). 미가 역시 수많은 번제물보다 ‘정의를행하며인자를사랑하며겸손하게네하나님과함께행하는것’을 말씀합니다(미6:6-8). 호세아에서는 더욱 직접적으로 ‘나는인애를원하고제사를원하지아니하며번제보다하나님을아는것을원하노라’고 하십니다(호6:6). 스베덴보리가 AC.922(창8:20)에서 바로 이러한 말씀들을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외적 제사는 내적 예배를 담고 있을 때만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외적인 제사 형식이 필요했을까요? 고대의 표상교회에서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자연계의 사물과 행위들을 통해 표상되었습니다. 제단과 불과 피와 물, 그리고 서로 다른 종류의 동물들은 각각 천국의 실재를 표상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의 세세한 규례도 임의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희생제사와 번제의 각 과정 안에 ‘천국의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설명합니다(AC.10057, 출29:18). 최고 의미에서는 그것들이 주님의 영화에 관한 것이며, 상대적 의미에서는 인간의 거듭남과 정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레위기의 제사는 ‘죄를지었으니하나님께서화가나셨고,그화를풀기위해동물을죽여피를보여드려야한다’는 구조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피는 신적 진리를 표상하고(AC.10046, 출29:16), 물로 씻는 것은 진리에 의한 정결과 관계하며, 제단의 불은 사랑을 표상합니다. 짐승의 종류들 역시 인간 안의 서로 다른 선과 진리의 애정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제사 전체는 악과 거짓으로부터 인간이 정결하게 되고, 선과 진리가 그 안에 심어지고, 마침내 그것들이 결합하여 하나의 새로운 삶을 이루는 과정을 가시적인 의식으로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가장 분명하게 정리하는 것이 AC.10143(출29:42)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희생제사와 번제가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 선과 진리의 심음, 그리고 그 둘의 결합을 의미하며, 이 전체가 거듭남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단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궁극적으로 짐승에게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에게 관한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무엇을 정결하게 하시고, 무엇을 새롭게 하시며, 어떻게 인간을 당신과 결합시키시는지를 보여 주는 표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동물의 죽음 자체가 아닙니다. 그 외적 의식이 표상하고 있던 내적 실재였습니다. 인간이 악을 버리고,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며, 체어리티의 선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참된 제사였습니다. 외적 제사가 그 내적 실재와 분리되는 순간 제사는 껍데기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그토록 강하게 제사를 책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면서도 악을 행한다면 제사의 표상과 실제 삶이 완전히 분리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소와 양과 비둘기를 제단에서 불사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레위기의 제사가 우리와 무관해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는 그 외적 표상이 가리키던 실재를 우리의 삶에서 살아야 합니다.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며, 이웃을 사랑하고, 우리의 자연적인 삶까지 주님의 질서 안으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짐승의 번제는 사라졌지만 그것이 표상하던 ‘살아있는예배’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1장을 읽으며 ‘왜하나님께서는이런제사를명하셨을까?’라고 묻는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피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을 통하여 표상되는 인간의 거듭남이었습니다. 제단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궁극적으로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할 일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참된 제사는 짐승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악을 버리는 것이며, 참된 번제는 인간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가 주님의 사랑 안에서 새롭게 되어 삶 전체가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SW.3레1심화1)
레위기를 펼치면 현대의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우 낯선 세계가 나타납니다. 소와 양과 염소를 잡고,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며,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고, 마침내 제물을 불태웁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제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므로 레위기 1장은 자칫 오래전에 폐지된 제사 규정을 기록한 장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으면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립니다. 스베덴보리는 번제와 희생제사의 의식과 절차 안에 ‘천국의아르카나’가 있으며,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인성의 영화에 관한 것이고, 상대적 의미에서는 인간의 거듭남과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1장은 단순히 짐승을 어떻게 잡고 불사를 것인가를 가르치는 장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정결하게 하시고 선과 진리를 그 안에 심고 결합하셔서 마침내 인간 전체가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게 하시는가를 보여 주는 장입니다.
그런데 레위기의 첫 장은 인간이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회막에서모세를부르시고그에게말씀하여이르시되’로 시작합니다. 먼저 부르시는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출애굽기 마지막에서 성막이 완성되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한 뒤, 바로 이어지는 레위기의 첫 음성이 ‘부르심’이라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784(출27:20)는 ‘회막’이 주님의 임재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사의 출발점은 인간의 종교적 열심이 아니라 인간 가운데 임재하시는 주님입니다. 거듭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을 찾아내고 무엇인가를 드려 주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고 우리를 부르시며 인간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께 나아갑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인간이 가지고 나오는 것이 ‘예물’입니다. 첫 번째로 등장하는 것은 소의 번제입니다. ‘그예물이소의번제이면흠없는수컷으로회막문에서여호와앞에기쁘게받으시도록드릴지니라.’ 스베덴보리는 제사에 사용되는 동물들이 아무렇게나 선택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각각의 동물은 서로 다른 종류의 선과 진리, 그리고 서로 다른 예배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특별히 소 떼에 속한 동물들은 겉 또는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애정을 표상하며, 수송아지는 겉 또는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이노센스와 체어리티의 선을 의미합니다(AC.9391, 출24:5). 그러므로 번제는 우리의 종교적 생각이나 감정만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몸을 가지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실제 생활, 곧 말과 행동, 습관과 관계, 일상의 선택까지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번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습니다. 이것 역시 단순한 의식적 접촉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것이 전달과 이전과 받아들임을 표상한다고 설명하며, 머리는 전체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AC.10023, 출29:10). 따라서 이 장면에는 인간 자신과 번제가 표상하는 예배 사이의 결합이라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번제는 나와 상관없는 짐승 하나가 대신 죽는 외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번제가 표상하는 정결과 거룩하게 됨이 바로 나의 삶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나 자신이며, 나의 생각과 의지와 삶 전체입니다.
그 다음에는 피가 등장합니다. ‘아론의자손제사장들은그피를가져다가회막문앞제단사방에뿌릴것이며.’ 스베덴보리는 제사의 피가 신적 진리를 표상한다고 설명하고(AC.10046, 출29:16), 그 피가 제단에 뿌려지는 것은 신적 진리와 신적 선의 결합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AC.10047, 출29:16). 이것은 거듭남의 매우 중요한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인간은 막연히 착해지고 싶다고 해서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가 우리 삶 안으로 들어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밝히고, 그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며 살아갈 때 정결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진리를 우리 안의 선과 결합하십니다. 그러므로 제단에 뿌려지는 피는 단순히 죽음의 흔적이 아니라 인간을 정결하게 하고 선과 진리가 결합하게 하는 신적 진리의 표상입니다.
이제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뜹니다. 이 두 행위에도 분명 내적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희생제사와 번제의 세세한 의식과 절차 안에 천국의 아르카나가 있으며, 그것들이 인간의 거듭남을 표상한다고 분명히 말하기 때문입니다(AC.10057, 출29:18). 그러나 여기서는 더 나아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가죽’이 말씀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바깥의 것을 표상한다는 원리는 확인할 수 있지만, 레1:6의 ‘가죽을벗기는행위’ 자체를 스베덴보리가 정확히 어떻게 적용하는지 충분한 직접 근거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럴듯한 의미를 만들어 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각을뜨는것’ 역시 의미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구체적인 상응은 현재로서는 보류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상응은 우리의 상상력이 아니라 말씀 안에 주님께서 두신 질서이므로, 확인되는 만큼만 읽는 것이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 충실합니다.
그러나 ‘그내장과정강이를물로씻을것이요’에서는 다시 매우 분명한 길이 열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제사의 내장을 씻는 것이 가장 낮은 것들의 정결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AC.10049, 출29:17), 이어 정강이는 자연적 인간의 외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AC.10050, 출29:17). 인간의 가장 낮고 자연적인 부분은 세상과 직접 접촉하기 때문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감각적 즐거움과 오류에 쉽게 물듭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도 정결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서 ‘물로씻는것’은 진리에 의한 정결과 관계합니다. 인간이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면서 악에서 돌이킬 때 자연적 인간도 점차 정결하게 됩니다.
여기서 레위기 1장의 거듭남 이해가 매우 실제적인 것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자연적 인간을 없애려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몸도 없애지 않으시고, 일상생활도 없애지 않으시며,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도 없애지 않으십니다. 그것들을 씻으십니다. 거짓과 악에 물든 것을 진리로 정결하게 하시고, 자연적 인간이 속 사람을 섬기며 주님의 선을 실제 삶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질서 안에 두십니다. 거듭남은 자연적인 것을 버리고 영적인 존재가 되는 과정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 안에서 바르게 표현되도록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질서 있게 결합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씻은 내장과 정강이는 버리지 않습니다. 제사장은 ‘그전부를제단위에서불살라’ 번제로 드립니다. 여기서 번제의 핵심이 드러납니다. ‘전부’입니다. 머리만도 아니고, 좋은 부분만도 아니며, 속 사람만도 아닙니다. 가장 낮은 자연적 부분까지 씻긴 후에는 모두 제단의 불 위로 올라갑니다. 스베덴보리는 ‘불’이 주님과 그분께 드리는 예배에 사용될 때 사랑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향기로운냄새’는 주님께 기쁘고 받아들여지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신앙으로부터의 예배라고 설명하면서 바로 레1:9, 13, 17을 인용합니다(AC.925, 창8:21). 그러므로 번제의 마지막은 인간의 소멸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인간 전체가 정결해져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가는 상태가 번제가 지향하는 내적 실재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향기로운냄새’라는 표현도 문자적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짐승이 타는 냄새를 좋아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 향기로운 것은 제물의 연기가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사랑하며,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인간의 변화된 삶이 주님께 ‘향기로운냄새’가 되는 것입니다(AC.925, 창8:21).
10절부터는 양이나 염소의 번제가 이어집니다. 절차는 소의 번제와 매우 비슷하지만 제물의 종류가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소 떼의 동물들과 양 떼의 동물들을 구별하며, 전자가 겉 또는 자연적 인간 안의 선과 진리의 애정을 표상한다면 후자는 속 또는 영적 인간 안의 선과 진리의 애정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AC.9391). 이것은 번제가 인간의 겉 생활만이 아니라 속의 애정과 의도까지 관계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겉으로 선한 일을 하면서도 속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반대로 선한 뜻을 품고 있다고 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그것을 행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거듭남은 어느 한쪽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속과 겉이 함께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소의 번제에서 양과 염소의 번제, 다시 새의 번제로 이어지는 순서를 거듭남의 시간적인 ‘1단계,2단계,3단계’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각각의 제물이 서로 다른 종류의 선과 진리 및 예배 상태를 표상한다고 설명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레1의 배열 자체를 인간이 차례로 통과하는 세 단계라고 직접 설명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세 종류의 번제는 거듭나는 인간 전체 안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층위와 상태를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층위가 결국 하나의 목적, 곧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상태를 향한다는 것입니다.
14절에서는 다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제 짐승이 아니라 ‘산비둘기나집비둘기새끼’가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노아가 번제를 드린 창8:20을 해설하면서 레1:3-17을 직접 언급합니다. 그는 번제에 사용된 소와 어린양과 염소와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가 각각 특별한 천적인 것을 의미했으며, 큰 구별에서 짐승은 체어리티의 선을, 새는 신앙의 진리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AC.922, 창8:20). 또한 비둘기는 거듭나는 사람에게 있는 신앙의 진리와 선, 특별히 신앙의 이해에 속한 것들과 관계합니다(AC.870, 창8:8-9). 따라서 주님께서는 인간의 애정만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각과 이해, 곧 진리를 받아들이고 분별하는 능력까지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 역시 그 자체가 최종 목적은 아닙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거듭남의 완성은 아닙니다. 진리는 인간을 선으로 인도하고, 마침내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을 이루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새의 번제도 마지막에는 똑같이 ‘이는화제라여호와께향기로운냄새니라’로 끝납니다. 소의 번제도, 양이나 염소의 번제도, 새의 번제도 마지막 목적지는 같습니다. 서로 다른 선과 진리, 서로 다른 인간의 상태가 결국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새의 번제에는 ‘모이주머니와그더러운것은제거하여제단동쪽재버리는곳에던지고’, ‘날개자리에서그몸을찢되아주찢지말고’라는 매우 특이한 규정도 있습니다. 이것들 역시 아무 의미 없는 절차는 아닐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희생제사와 번제의 세부 규정 안에 천국의 아르카나가 있다고 분명히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 확인된 원전만으로 ‘모이주머니는이것이다’, ‘날개자리에서찢는것은이것이다’, ‘아주찢지않는것은이것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즉시 상징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확인된 상응에는 충실하고 아직 확인되지 않은 곳에서는 멈출 줄 아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제 레위기 1장 전체를 다시 보면 처음 보았던 피와 죽음과 불의 장면 뒤에서 하나의 놀라운 거듭남의 서사가 나타납니다. 주님께서 회막에서 인간을 부르십니다. 인간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께 나아갑니다. 번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자신과 그 예배가 결합합니다. 피, 곧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가 인간을 정결하게 하고 선과 결합합니다. 가장 낮은 자연적 삶까지 진리의 물로 씻깁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함께 질서 안으로 들어옵니다. 신앙의 진리와 체어리티의 선이 함께 주님께 향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전부’가 불 위에 놓입니다. 인간 전체가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전체 과정을 매우 간결하고 실제적으로 정리합니다. 희생제사와 번제는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 선과 진리의 심음, 그리고 선과 진리의 결합을 표상하며, 이것이 바로 거듭남이라고 설명합니다(AC.10143, 출29:42). 그리고 악과 거짓에서 정결해진다는 것은 그것들을 삼가고 피하며 싫어하는 것이고, 선과 진리가 심어진다는 것은 선하고 참된 것을 생각하고 의지하며 말하고 행하는 것이며, 선과 진리의 결합은 그것들로 이루어진 삶을 사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번제는 종교적 감정의 한 순간이나 ‘모든것을바치겠다’는 결단에 머물지 않습니다. 실제 삶 전체가 주님의 선과 진리에 의해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1장이 오늘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나는하나님께무엇을희생할것인가?’보다 더 깊습니다. ‘내안에서아직진리의물로씻기지않은것은무엇인가?’, ‘내속사람과겉사람은서로하나가되어있는가?’, ‘내가알고있는진리는실제선한삶과결합하고있는가?’, ‘나의가장자연적이고일상적인삶까지주님의질서안으로들어오고있는가?’, 그리고 ‘내삶전체는사랑으로부터주님을예배하고있는가?’입니다.
번제와 희생제사 자체가 예배의 본질이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내적 예배를 표상하는 외적 형식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외적 제사가 내적 예배와 분리되면 참된 예배가 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AC.922). 그러므로 오늘날 동물의 번제가 사라졌다고 해서 레위기 1장의 말씀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 표상이 사라진 지금 우리는 그 표상 안에 감추어져 있던 내적 실재, 곧 실제 삶에서 이루어지는 거듭남을 읽어야 합니다.
레위기 1장의 번제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하시고, 선과 진리를 그 안에 심으시며, 그것들을 서로 결합하셔서 마침내 인간의 가장 깊은 애정에서 가장 바깥의 일상생활까지 주님을 향하게 하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때 인간의 예배는 더 이상 입술이나 의식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삶 전체가 예배가 됩니다. 이것이 ‘그전부를제단위에서불살라’라는 번제의 아르카나이며, 주님께 ‘향기로운냄새’가 되는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SW.3레1해설)
※ ‘스베덴보리의렌즈로읽는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혀 주신 말씀의 상응과 속뜻,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의 질서에 비추어, 주님의 말씀 안에 이미 담겨 있는 선과 진리를 더욱 분명히 살피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작업의 시작과 중심과 마지막에 계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SW.2,눅15:11-32, ‘돌아온탕자와큰아들’
11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15:11-32)
누가복음 15장의 ‘돌아온탕자의비유’는 기독교인에게 너무나 익숙한 말씀입니다. 흔히 이 비유를 ‘하나님을떠난죄인이회개하여돌아오면하나님아버지께서받아주신다’는 이야기로 읽습니다. 물론 그것이 이 비유의 가장 분명한 문자적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혀 주신 말씀의 상응과 거듭남의 질서에서 이 비유를 다시 살펴보면, 이 이야기는 단순히 집을 나갔다 돌아온 한 청년의 이야기를 넘어 한 인간이 주님에게서 받은 영적 재산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떠났다가 그것을 모두 잃은 뒤, 마침내 자기 자신에게서 돌아서 주님께 돌아와 다시 진리와 선으로 옷 입혀지는 거듭남의 이야기로 펼쳐집니다.
무엇보다 이번 비유에는 매우 든든한 직접 근거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9391(출24:5)에서 바로 이 돌아온 탕자를 직접 언급합니다. 그는 ‘탕자’가 ‘천국의부요함,곧선과진리에관한지식들을탕진한사람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가 아버지께 돌아와 자신은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고백한 것은 ‘마음의회개와자기를낮춤’을 의미하며, 아버지가 입혀 준 ‘제일좋은옷’은 일반적인 진리들을, ‘살진송아지’는 그 진리들에 상응하는 일반적인 선들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비유를 거듭남의 과정으로 읽는 것은 비유의 세부에 임의의 상응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 비유를 직접 그렇게 열어 준 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 AC는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틴Arcana Coelestia, 영어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 1749-1756, 창, 출속뜻주석, 총10,837개글)를 뜻하며, 숫자는 글 번호입니다. 괄호 안의 성경 장절은 해당 글이 다루는 말씀의 본문입니다.
비유는 ‘어떤사람에게두아들이있는데’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재산중에서내게돌아올분깃을내게주소서’라고 요구합니다. 여기서 벌써 인간의 깊은 문제가 드러납니다. 아들이 가진 것은 본래 아버지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그것을 ‘내게돌아올분깃’으로 받아 들고 아버지를 떠납니다. 영적으로 보면 인간에게 있는 생명, 이해, 자유, 진리를 아는 능력, 선을 행할 능력은 모두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proprium은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느끼고 마침내 ‘내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모든 것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게 하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유가 있어야 사랑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을 행할 때 그것이 마치 내 선택과 내 행동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면 선을 자유롭게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내것처럼’ 사용하는 것과 ‘내게서나온것’이라고 믿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둘째 아들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아버지와 분리하여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 합니다.
13절은 ‘그후며칠이안되어둘째아들이재물을다모아가지고먼나라에가’라고 합니다. ‘먼나라’는 문자적으로는 아버지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이지만, 영적으로 읽으면 주님에게서 멀어진 인간의 상태를 매우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주님은 공간적으로 우리에게서 멀어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이 사랑과 삶에서 주님에게서 멀어집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와 선을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할수록 사람은 마음의 상태에서 ‘먼나라’로 갑니다.
그곳에서 둘째 아들은 ‘허랑방탕하여그재산을낭비’합니다. 여기에서 AC.9391의 직접 설명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탕자가 탕진한 것을 ‘천국의부요함’, 곧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라고 밝힙니다. 사람은 말씀을 통해 많은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선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용서가 무엇인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위해 사용하거나 삶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면 영적으로 그것을 탕진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진리의 목적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천국의 재산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없앤후’ 흉년이 옵니다. 이 순서가 의미심장합니다. 재산을 다 없앤 뒤 흉년이 왔습니다. 외부에서 갑자기 불행이 닥쳐서 탕자가 타락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가진 것을 다 탕진한 상태에서 흉년이 닥치자 그의 내적 빈곤이 밖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영적 의미에서 흉년은 선과 진리가 결핍된 상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를 계속 삶에서 밀어내면 어느 순간 ‘먹을것’이 없어집니다. 말씀을 알고 있는데도 마음은 굶주리고, 많은 것을 경험했는데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릅니다. 이것이 영적 궁핍입니다.
그 결과 둘째 아들은 그 나라 사람에게 붙어 살며 돼지를 치게 됩니다. 유대인의 청중에게 ‘돼지를친다’는 것은 단순히 가난한 직업을 얻었다는 것보다 훨씬 강렬한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레위기의 정결 규례에서 돼지는 부정한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집에서 아들로 살던 사람이 이제 먼 나라에서 돼지를 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주님에게서 멀어져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욕망의 지배 아래 내려간 인간의 상태를 아주 강하게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더욱 처참한 것은 16절입니다. ‘돼지먹는쥐엄열매로배를채우고자하되주는자가없는지라.’ 이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천국의 양식이 아니라 돼지가 먹는 음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무엇인가로 채워져야 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로 채워지지 않으면 결국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오는 것들로 자신을 채우려 합니다. 인정, 소유, 쾌락, 우월감, 원망, 자기 합리화 같은 것들이 잠시 마음을 채우는 듯하지만 영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먹으려 하지만 배부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17절에서 이 비유 전체의 방향이 바뀝니다. ‘이에스스로돌이켜.’ 개역개정의 이 표현은 참 좋습니다. 외적 환경이 먼저 바뀐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사람을 보내 데려온 것도 아닙니다. 아들의 내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보기 시작합니다. ‘내아버지에게는양식이풍족한품꾼이얼마나많은가나는여기서주려죽는구나.’
거듭남에서도 이 순간은 결정적입니다. 사람은 먼저 자기 상태를 보아야 합니다. 자신이 주님에게서 멀어져 있다는 사실, 자기 지혜와 자기 사랑으로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성찰의 시작이며 회개의 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아직 아버지 집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이미 좋은 사람이 된 뒤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지금어디에있는가’를 보는 순간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는 말합니다. ‘내가일어나아버지께가서.’ 이것은 단순한 후회와 회개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 후회는 돼지우리에서 ‘내가왜이렇게되었지?’ 하고 슬퍼하는 데서 끝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일어나아버지께가는것’입니다. 방향이 바뀝니다. 스베덴보리가 AC.9391에서 탕자의 귀환을 ‘마음의회개와자기를낮춤’으로 설명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악에서 돌아서 주님께 향하는 실제적인 방향 전환입니다.
18절과 19절의 고백도 중요합니다. ‘아버지내가하늘과아버지께죄를지었사오니지금부터는아버지의아들이라일컬음을감당하지못하겠나이다.’ 여기에는 변명도 자기 합리화도 없습니다. ‘환경이나빴습니다’, ‘친구들을잘못만났습니다’, ‘아버지가처음부터재산을주지말았어야했습니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악을 자기 것으로 인정합니다. 이것이 참된 회개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악을 죄로 여겨 피하려면 먼저 그것이 ‘나의악’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결심한 뒤 아버지를 찾아 헤매는 장면이 길게 나오지 않습니다. ‘아직도거리가먼데아버지가그를보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들은 아직 멀리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미 그를 봅니다.
이 장면은 이 비유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들이 먼저 돌아서기는 했지만, 그가 아버지께 도착해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충분히 회개했음을 증명한 뒤 아버지가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거리가먼데’ 아버지가 먼저 보고, 측은히 여기고, 달려갑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완전히 깨끗해진 뒤에야 가까이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유 가운데 방향을 돌려 주님께 향하기 시작할 때, 이미 주님의 자비는 그 사람을 향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달려가목을안고입을맞춥니다.’ 여기에는 심문이 없습니다. ‘재산을얼마나남겼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그동안어디서무엇을했느냐?’며 조서를 작성하지도 않습니다. 먼저 안습니다. 이것은 죄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들은 이미 자기 죄를 보고 돌아섰습니다. 회개가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자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는 언제나 있었지만, 이제 아들이 그것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변화가 하나 있습니다. 아들은 돌아오기 전에 ‘나를품꾼의하나로보소서하리라’고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아버지 앞에 도착해서는 ‘아버지내가하늘과아버지께죄를지었사오니지금부터는아버지의아들이라일컬음을감당하지못하겠나이다’까지만 말합니다. ‘나를품꾼의하나로보소서’라는 말은 본문에서 사라집니다. 그 말을 꺼낼 틈도 없이 아버지가 종들에게 명령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아들은 ‘품꾼’의 자리라도 달라고 생각하지만 아버지는 그를 품꾼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시작하는 일은 ‘아들의회복’입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깁니다.
바로 이 대목을 스베덴보리가 직접 풉니다. AC.9391에서 ‘제일좋은옷’은 ‘일반적인진리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9, AE)AE.279(계5:1)에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제일좋은옷’은 일반적이고 주된 진리들을, ‘손의가락지’는 속 또는 영적 사람 안에서 진리와 선의 결합을, ‘발의신’은 겉 또는 자연적 사람 안에서 그와 같은 결합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둘, 곧 가락지와 신이 함께 ‘거듭남’을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이렇게 보면 아버지가 아들을 받아들이는 장면은 단순한 환영식이 아닙니다. 거듭남의 회복 장면입니다. 먼저 옷을 입힙니다. 말씀에서 옷은 진리와 관련됩니다. 벌거벗고 궁핍해진 사람에게 다시 진리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진리는 머리에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락지가 ‘손’에 끼워집니다. 손은 행위와 능력의 영역과 연결됩니다. 진리와 선이 속 사람 안에서 결합하고 그것이 삶의 행위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발’에 신을 신깁니다. 발은 자연적 삶의 가장 바깥 영역과 관계됩니다. 즉 거듭남은 마음속에서만 일어나는 신비한 변화가 아니라 일상생활의 가장 바깥 부분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에 돌아왔다고 해서 이야기가 ‘용서받았다’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다시 입히고, 연결하고, 걷게 합니다. 주님의 용서는 단순히 과거의 죄를 장부에서 지우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을 다시 질서 안으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진리로 옷 입히고,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고, 자연적 삶까지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살진송아지’를 잡으라고 합니다. 이것 역시 스베덴보리가 직접 해설합니다. AC.9391에서는 살진 송아지가 앞의 진리들에 상응하는 ‘일반적인선들’을 의미한다고 하며, AE.279에서는 더 분명하게 ‘사랑과체어리티의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제일 좋은 옷과 살진 송아지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옷은 진리이고 송아지는 선입니다. 돌아온 아들에게 진리만 다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가 향해야 할 선, 곧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이 회복됩니다.
그래서 ‘우리가먹고즐기자’는 말씀도 단순한 잔치 장면이 아닙니다. AE.279는 이것을 ‘결합과천국의기쁨’으로 설명합니다. 말씀에서 함께 먹는다는 것은 단순한 음식 섭취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선을 함께 받아들이고 나누는 결합을 나타냅니다. 아들은 먼 나라에서 쥐엄 열매조차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집에서는 살진 송아지를 함께 먹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대비입니까? 주님에게서 떠난 proprium의 삶이 주는 음식과 주님과의 결합 안에서 받는 천국의 음식이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그러므로 24절의 ‘이내아들은죽었다가다시살아났으며내가잃었다가다시얻었노라’는 말씀이 비유의 중심에 놓입니다. 아들은 육체적으로 죽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아버지에게서 떠난 상태가 ‘죽음’이었고, 돌아와 다시 결합된 상태가 ‘삶’입니다. 영적 죽음과 영적 생명의 차이입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얼마나 활발히 활동하고 성공하고 즐기고 있느냐가 생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있느냐가 영적 생명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비유가 끝났다면 우리는 훨씬 편안했을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와 아버지가 서로 끌어안고 잔치를 벌이는 아름다운 장면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야기를 계속하십니다. ‘맏아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맏아들이야말로 이 비유를 단순한 ‘탕자의회개이야기’에서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바꾸어 놓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맏아들은 먼 나라에 가지 않았습니다. 재산을 창녀들과 함께 탕진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 집에 계속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말합니다. ‘내가여러해아버지를섬겨명을어김이없거늘.’ 외적으로 보면 모범적인 아들입니다. 그런데 동생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자 ‘노하여들어가고자하지아니합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아버지집안에있는것’과 ‘아버지의마음안에있는것’은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맏아들은 몸으로는 아버지 곁에 있었지만 아버지가 왜 기뻐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는 동생을 ‘내동생’이라고 부르지 않고 아버지에게 ‘아버지의살림을창녀들과함께삼켜버린이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관계가 끊어져 있습니다. 그의 관심은 동생이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보다 ‘나는이렇게충성했는데왜저사람에게더잘해주느냐’는 비교와 공로에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문맥을 생각하면 이것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이 장은 세리와 죄인들이 주님께 가까이 나아오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사람이죄인을영접하고음식을같이먹는다’고 수군거리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그리고 잃은 아들의 비유를 연이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둘째 아들만큼이나 맏아들도 이 비유의 중요한 대상입니다. ‘죄인과함께먹는주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맏아들에게서 드러납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 보면 매우 엄중한 질문이 됩니다. 사람은 외적으로 종교적 질서를 잘 지키면서도 그 중심에 자기 공로가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내가여러해아버지를섬겨명을어김이없거늘’이라는 말 안에는 순종의 기록이 가득하지만, 동시에 ‘그러므로나는받을자격이있다’는 자기 의가 숨어 있습니다. 선을 행하면서 그 선을 주님에게서 온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 공로로 붙잡으면, 다른 사람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자비를 기뻐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맏아들은 동생의 회복을 보면서 기뻐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의 문제입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다른 사람이 주님께 돌아오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러나 자기 공로를 중심에 놓는 신앙은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자비를 불공평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나는이렇게오래섬겼는데저사람은저렇게살다가돌아와서왜저런환대를받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버지는 둘째에게 했던 것과 비슷하게 맏아들에게도 ‘나옵니다.’ 둘째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버지가 달려 나갔고, 맏아들이 화가 나서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도 ‘아버지가나와서권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아버지는 먼 나라에 간 아들에게만 자비로운 분이 아닙니다. 자기 의와 분노 때문에 잔치에 들어오지 못하는 맏아들에게도 나아가십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사실 ‘잃어버린아들’은 한 명만이 아닐 수 있습니다. 둘째는 아버지 집 밖의 먼 나라에서 잃어버렸고, 맏아들은 아버지 집 가까이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한 사람은 허랑방탕 속에서 주님에게서 멀어지고, 다른 사람은 자기 의와 공로의식 속에서 주님의 마음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맏아들도 정죄하지 않습니다. ‘얘너는항상나와함께있으니내것이다네것이로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네동생은죽었다가살아났으며내가잃었다가얻었기로우리가즐거워하고기뻐하는것이마땅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맏아들이 ‘이아들’이라고 부른 사람을 다시 ‘네동생’이라고 불러 줍니다. 끊어진 관계를 다시 이어 주는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체어리티의 본질을 다시 보게 됩니다. 주님께 돌아온 사람을 보면서 ‘저사람이과거에무엇을했는가’를 끝없이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살아났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함께 기뻐하는 것이 천국의 기쁨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비유는 맏아들이 결국 잔치에 들어갔는지를 말하지 않고 끝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열린 결말입니다. 둘째 아들의 선택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일어나아버지께로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의 선택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는 밖으로 나와 권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가 자기 공로와 분노를 내려놓고 아버지와 함께 동생의 회복을 기뻐하며 잔치에 들어갈 것인가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돌아온탕자의비유’를 읽으며 우리는 둘째 아들에게만 자신을 대입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안에는 둘째도 있고 맏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내 것이라 여기며 먼 나라로 가려는 proprium도 있고,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proprium도 있습니다. 하나는 노골적으로 아버지를 떠나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 곁에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떠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중심을 ‘탕자’에게만 두면 오히려 가장 중요한 분을 놓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둘째가 재산을 요구할 때도 아버지가 있습니다. 둘째가 먼 나라에 있을 때도 아버지의 집은 그대로 있습니다. 둘째가 스스로 돌이킬 때 기억해 낸 것도 아버지의 집입니다. 아직 거리가 먼데 먼저 발견한 것도 아버지이고, 달려간 것도 아버지이며, 목을 안고 입을 맞춘 것도 아버지입니다.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긴 것도 아버지이며,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시작한 것도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맏아들이 분노하여 밖에 서 있을 때 다시 밖으로 나가 권하는 분도 아버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인간이어떻게하나님께돌아가는가’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그보다 더 근원적으로 ‘주님께서잃어버린인간을어떻게대하시는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빼앗아 억지로 집에 붙잡아 두지 않으십니다. 둘째가 떠나는 것도 허용하십니다. 그러나 떠났다고 사랑을 거두시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선택의 결과를 통해 자기 상태를 보고, 자유 가운데 돌이켜 주님께 향할 때 주님께서는 그를 품꾼으로 강등시키지 않으십니다. 다시 진리로 옷 입히고,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며, 자연적 삶까지 새롭게 하시고,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 안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이것이 AC.9391과 AE.279가 옷과 가락지와 신과 살진 송아지를 통해 우리에게 열어 보여 주는 거듭남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전에 우리가 나누었던 질문, 곧 ‘아버지는둘째모르게사람을보내그가사는형편을은밀히살필수있지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다시 떠올릴 수 있습니다. 문자적 이야기 안에서는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오히려 더 깊은 답이 보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먼 나라에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상태를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여 억지로 데려오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자유 가운데 ‘내가일어나아버지께가리라’고 할 수 있도록 섭리하시면서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방향을 돌리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됩니다. 사실 아버지는 처음부터 우리를 잊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비유를 우리 자신의 거듭남에 놓고 읽으면 질문은 아주 구체적으로 바뀝니다. ‘나는지금아버지에게서받은무엇을내것이라고여기고있는가?나는어떤선과진리를내목적을위해탕진하고있는가?내마음의먼나라는어디인가?나는무엇으로영혼의배를채우려하고있는가?나는지금돼지우리에서내처지를한탄하고만있는가,아니면실제로일어나아버지께가고있는가?그리고혹시나는이미아버지집가까이에있으면서도다른사람에게베푸시는주님의자비때문에화가난맏아들은아닌가?’
그런데 이 모든 질문 끝에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은 결국 우리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이신 주님입니다.
‘아직도거리가먼데아버지가그를보고측은히여겨달려가.’
이 한 장면 안에 이 비유의 복음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먼 나라에서 돌아오지만, 구원은 인간이 먼 길을 완주하여 마침내 주님께 도달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이 자유 가운데 주님께로 방향을 돌릴 때, 주님께서 그를 향하여 오십니다. 그리고 그를 단지 과거의 상태로 돌려놓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다시 옷 입히고,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고, 삶의 가장 바깥까지 새롭게 하여 천국의 기쁨 안으로 들이십니다.
‘이내아들은죽었다가다시살아났으며내가잃었다가다시얻었노라.’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죽어 있던 것이 살아나는 것이며, 잃었던 것이 주님에게 다시 발견되는 것입니다.
※ ‘스베덴보리의렌즈로읽는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혀 주신 말씀의 상응과 속뜻,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의 질서에 비추어, 주님의 말씀 안에 이미 담겨 있는 선과 진리를 더욱 분명히 살피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작업의 시작과 중심과 마지막에 계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SW.1, 마13:1-23, ‘씨뿌리는자의비유’
1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3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어떤 것은 육십 배,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0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2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4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6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18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20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3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어떤 것은 육십 배,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마13:1-23)
마태복음 13장의 ‘씨뿌리는자의비유’는 주님의 비유 가운데서도 특별합니다. 주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18절로 23절에서 그 의미까지 친히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렌즈’로 이 비유를 읽는다는 것은 주님의 해설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하나 더 얹거나, 주님께서 설명하신 것보다 더 깊은 의미를 스베덴보리에게서 찾아내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친히 밝혀 주신 이 해설을 출발점으로 삼아,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혀 주신 말씀의 상응과 인간의 거듭남의 질서에 비추어, 주님의 이 말씀이 우리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빛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시며, 말씀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말씀 안에 주님께서 두신 질서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 안내자입니다.
이 비유의 문자적 문맥부터 살펴보면 구조가 매우 분명합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립니다. 그런데 씨가 떨어지는 곳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먹어 버리고, 어떤 씨는 돌밭에 떨어져 금방 싹이 나지만 뿌리가 없어 해가 뜨자 말라 버립니다. 어떤 씨는 가시떨기 가운데 떨어져 자라기는 하지만 가시가 기운을 막아 결실하지 못합니다. 마지막 씨는 좋은 땅에 떨어져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의미를 직접 설명하십니다. 씨는 ‘천국말씀’이며,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와 좋은 땅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서로 다른 상태입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씨’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그것을 ‘천국말씀’이라고 하셨으므로 씨의 의미는 이미 주님께서 밝혀 주셨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은 이것을 말씀 전체의 상응 안에서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AC.2851(창22:17)에서는 ‘씨’가 체어리티와 신앙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AC.3373(창26:3)에서는 주님에게서만 ‘천국의씨’, 곧 모든 선과 진리가 나온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씨는 단순한 종교적 정보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과 진리이며, 특별히 사람 안에 심겨 그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 있는 말씀의 진리입니다. 씨 한 알 안에 장차 자라날 나무와 열매의 가능성이 들어 있듯, 주님의 진리 안에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고 마침내 선과 체어리티라는 열매를 맺게 할 천국의 생명력이 들어 있습니다.
※ AC는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틴Arcana Coelestia, 영어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 1749-1756, 창, 출속뜻주석, 총10,837개글)를 뜻하며, 숫자는 글 번호입니다. 괄호 안의 성경 장절은 해당 글이 다루는 말씀의 본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중심은 씨의 차이가 아닙니다. 같은 씨가 뿌려집니다. 씨 뿌리는 자도 같습니다. 차이는 ‘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6148(창47:26)에서 ‘땅’(ground)을 진리를 받아들이는 리셉터클, 곧 받아들이는 그릇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더 깊이 보면 그 받아들이는 능력 자체도 인간에게서 독립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의 인플럭스 때문에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좋은 땅인 사람이 자기 힘으로 좋은 땅이 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씨도 주시고, 그 씨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도 주십니다. 다만 인간에게는 그 씨를 자유롭게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 있는 리셉션의 상태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길가’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나천국말씀을듣고깨닫지못할때는악한자가와서그마음에뿌려진것을빼앗는다’고 하십니다. 길가는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 굳어진 곳입니다. 씨가 땅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표면에 그대로 놓여 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심지어 말씀에 관한 많은 지식을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이말씀은지금나에게무엇을요구하는가?내안에서무엇을고치라고하시는가?’라는 자리까지 들어오지 못한다면 씨는 아직 마음의 표면에 놓여 있는 셈입니다.
길가의 씨를 새들이 먹어 버렸다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말씀에서 새는 문맥에 따라 생각과 지적인 것들을 의미하며, 반대 의미에서는 진리를 파괴하는 거짓된 사고와 추론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자마자 자기 생각으로 재단하고, 자기 욕망에 맞게 해석하며, 자신에게 불편한 진리를 합리화해 버리는 상태를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씨는 분명 마음에 떨어졌지만 그 진리가 내 삶을 판단하기 전에 오히려 내가 그 진리를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말씀을 내가 듣는 것이 아니라 내 proprium이 말씀을 심문하기 시작하면 씨는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두 번째는 ‘돌밭’입니다. 이 사람은 길가보다 훨씬 더 나아간 것처럼 보입니다. 말씀을 듣고 ‘즉시기쁨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감동하고,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여 기뻐하며, 어떤 때는 자신의 삶이 완전히 달라질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결정적인 문제를 ‘그속에뿌리가없다’고 하십니다. 여기에는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구별이 있습니다. 진리를 ‘아는것’, 진리에 ‘감동받는것’, 진리를 ‘행하는것’은 서로 같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반복해서 밝히신 거듭남의 질서에서 진리는 이해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의지로 내려가 삶이 되어야 합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374에서는 이것을 씨와 나무와 열매의 관계로 아주 아름답게 설명합니다. 씨 안에는 열매를 향한 목적이 들어 있고, 씨가 땅에서 올라와 가지와 잎을 이루는 것은 이해에 해당하며, 마침내 열매를 맺는 것은 선한 일을 행하는 것에 해당합니다. 즉 씨의 목적은 싹 자체가 아니라 열매입니다. 진리의 목적 역시 ‘내가진리를알게되었다’는 데 있지 않고 그 진리가 내 의지를 변화시키고 삶에서 선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돌밭의 결정적인 시험은 ‘환난이나박해’입니다. 이것을 외적인 종교박해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말씀의 진리가 내가 지금까지 사랑해 온 악과 충돌할 때 내적 싸움이 시작됩니다. ‘용서하라’는 말씀을 들을 때는 아름답지만 실제로 나에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해야 할 때는 다릅니다. ‘자기를부인하라’는 말씀도 들을 때는 거룩하지만 실제 내 자존심과 명예와 이익을 내려놓아야 할 때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됩니다. 바로 그때 진리에 뿌리가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진리가 나를 위로할 때만 사랑하고, 진리가 나를 고치려 할 때 거부한다면 아직 뿌리가 깊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새 예루살렘과 그 천국 교리』(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1758)에서 ‘시험’(temptation)을 거듭남의 중요한 과정으로 다루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거듭남은 진리를 많이 배우는 평탄한 지적 과정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와 선이 기존의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면서 새로운 사람이 형성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돌밭에서 중요한 것은 처음 싹이 얼마나 빨리 나왔느냐가 아닙니다. 뿌리가 어디까지 내려갔느냐입니다.
세 번째는 ‘가시떨기’입니다. 이 부분은 특별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AC.9144(출22:6)에서 스베덴보리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직접 인용하면서 ‘가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시를 ‘욕망에서나오는거짓들’과 연결하며, 특히 세상에 대한 염려와 세상적 욕망을 지지하는 거짓들이 사람의 내면을 닫아 버릴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바로 막4의 씨 뿌리는 자 비유, 곧 ‘세상의염려와재물의유혹과기타욕심이들어와말씀을막아결실하지못하게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시’가 단순히 돈이나 재산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세상에서 직업을 가지고 일하며 재산을 관리하고 가족을 돌보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은 악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올바른 질서 안에서 ‘쓰임’(use)을 이루는 중요한 삶의 영역입니다. 문제는 세상의 것이 천국의 것을 섬기느냐, 천국의 것이 세상의 것을 섬기게 되었느냐입니다. AC.9144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적인 사랑이 될 때 그것들이 선과 진리를 소멸시키는 불처럼 작용한다고 설명합니다.
가시떨기의 무서운 점은 씨가 아예 없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씨도 자라고 가시도 자랍니다. 말씀도 있고 세상 사랑도 있습니다. 신앙도 있고 인정욕구도 있습니다. 예배도 드리고 자기중심적 욕망도 키웁니다. 성경도 읽고 재물과 체면과 성공도 마음의 중심에 놓습니다. 둘이 한동안 함께 자랍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쪽이 더 강한지가 드러납니다. 가시는 씨를 뽑아 버리지 않습니다. ‘기운을막습니다.’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신앙과 체어리티에 관한 가르침과 정확히 만납니다. 진리는 그 자체를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신앙 역시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습니다. TCR.373-376에서는 체어리티와 신앙이 가능한 곳에서는 반드시 행위 안에서 함께 존재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머리에는 진리가 가득하지만 삶에서 선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아직 씨가 그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네 번째 ‘좋은땅’에서 비로소 이 비유 전체의 목적이 나타납니다. 주님께서는 좋은 땅에 뿌려진 사람을 ‘말씀을듣고깨닫는자’라고 하시며 곧바로 ‘결실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깨달음’과 ‘결실’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는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참된 이해는 삶과 분리된 지적 이해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진리를 알고, 그것을 인정하고, 그 진리에 따라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선을 행할 때 진리가 사람의 것이 되어 갑니다.
스베덴보리가 『생명의 교리』(Doctrine of Life, 1763, Life) 2에서 바로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인용하는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그는 주님의 여러 말씀을 모아 ‘듣는것’과 ‘행하는것’의 관계를 보여 주면서,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말씀을 듣고 주의를 기울여 마침내 열매를 맺는 사람이라고 인용합니다. 따라서 좋은 땅의 핵심은 지식의 양이 아닙니다. ‘리셉션’, 곧 받아들임입니다. 그리고 그 받아들임이 실제 삶으로 내려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열매’는 무엇일까요? TCR.373은 사람의 내면이 그 사람의 행위 안에 나타난다고 설명하며, 체어리티와 신앙은 선한 행위 안에서 함께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같은 책 421에서는 영적 씨를 ‘말씀에서나오는교회의진리’라고 부르며, 그것이 어떤 열매를 맺는지는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내적 동기에 따라 달라진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열매는 단순히 교회 봉사를 많이 한다거나 종교적 업적을 많이 남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가 사람 안에서 선이 되고, 그 선이 체어리티와 쓰임의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전체에는 ‘진리에서선으로’라는 거듭남의 운동이 흐르고 있습니다. 씨는 진리입니다. 씨가 땅에 들어갑니다. 뿌리를 내립니다. 싹이 납니다. 자랍니다. 마침내 열매가 됩니다. 진리가 기억에 들어오고, 이해에 들어오고, 시험을 통과하고, 의지에 받아들여지고, 마침내 삶의 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수없이 설명하는 거듭남의 질서와 놀랍도록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을 단순히 세상 사람들을 네 부류로 나누는 분류표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한 사람 안에서 이 네 상태가 모두 발견될 수 있습니다. 어떤 진리 앞에서는 내가 좋은 땅인데 다른 진리 앞에서는 돌밭일 수 있습니다. 내가 듣기 좋아하는 말씀에는 마음을 활짝 열면서도 내 proprium을 건드리는 말씀에는 길가처럼 굳어 있을 수 있습니다. 재물에 대해서는 자유로운데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서는 가시떨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은 ‘너는네종류중어느인간이냐?’라기보다 ‘내말씀이네안의어디까지들어오고있느냐?’일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9절의 ‘귀있는자는들으라’는 말씀과 16절의 ‘너희눈은봄으로,너희귀는들음으로복이있도다’가 비유의 한가운데 놓여 있는 이유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AC.2701(창21:19)에서 스베덴보리는 바로 마13:16을 직접 인용하면서 ‘눈으로본다’는 것이 이해하고 신앙하는 것을 의미하고, ‘귀로듣는다’는 것이 순종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제자들이 복된 이유가 단순히 육신의 눈으로 주님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이해로 받아들이고 신앙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귀로 듣는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고 밝힙니다. AC.3863(창29:32)에서도 마13:13-17을 직접 인용하면서 ‘본다’는 것이 신앙에 속한 것을 알고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것과 관련됨을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귀있는자는들으라’는 말씀은 단순히 ‘내말을잘들어라’가 아닙니다. ‘이말씀을네삶으로받아들이라’는 부르심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다는 것은 진리를 이해하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말씀을어떻게받아들이는가’라는 문제가 흐르고 있습니다. 씨는 계속 뿌려지고 있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듣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10절로 15절에서 제자들이 ‘어찌하여그들에게비유로말씀하시나이까?’라고 묻는 대목도 새롭게 보입니다. 얼핏 읽으면 주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일부러 감추시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모든 역사는 구원을 향하고 있으며,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람은 자신이 실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따라 진리를 받습니다. 더 깊은 진리를 안다고 해서 반드시 더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악을 사랑하는 상태에서 거룩한 진리를 깊이 인정한 뒤 그것을 부인하고 모독하면 상태가 더욱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여러 곳에서 설명하는 ‘모독’(profanation)의 문제와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진리를 무차별적으로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그리고 그 진리가 그 사람에게 영원한 해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섭리하십니다. 그러므로 비유는 진리를 감추는 잔인한 암호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자유와 영적 상태를 보호하면서 진리를 전달하는 주님의 자비로운 형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문자적 이야기를 통해 누구나 들을 수 있게 하시면서도, 그 안의 더 깊은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사람에게 열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12절의 ‘무릇있는자는받아넉넉하게되되없는자는그있는것도빼앗기리라’도 같은 질서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부자는 더 부자로 만들고 가난한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까지 빼앗으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받은 진리를 삶에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그 진리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받을 능력이 생깁니다. 하나의 진리를 실제로 행하면 그 진리가 다음 진리를 이해하는 문을 열어 줍니다. 반대로 알고 있는 진리를 계속 거부하면 지식은 남아 있을지라도 그 진리의 영적 생명은 사라져 갑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9, AE)629(계11:1)에서도 ‘듣는자에게더주어진다’는 말씀을 ‘듣는다’, 곧 순종하고 행하는 사람에게 영적 정서와 체어리티가 더해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흐름은 결국 ‘열매’로 모입니다. 씨 뿌리는 자는 씨를 뿌리는 데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씨의 목적은 열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목적 역시 우리가 성경에 관한 많은 정보를 가지게 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진리가 우리 안에서 선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하고, 이해가 의지와 결합하며, 앎이 삶이 되고, 마침내 주님에게서 받은 것이 이웃을 향한 쓰임으로 흘러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듯 지혜는 진리가 삶에 옮겨질 때 생깁니다. 진리가 생명으로 내려갈 때 비로소 열매가 됩니다.
그렇다면 ‘백배,육십배,삼십배’는 무엇일까요? 여기서는 숫자의 세부 상응을 성급하게 확정하여 이 비유의 중심을 흐릴 필요는 없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좋은 땅에서도 결실의 정도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은 모습으로 만드시지 않습니다. 천국에서도 모든 천사가 동일하지 않고, 사람마다 받은 능력과 상태와 쓰임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육십 배, 어떤 사람은 삼십 배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왜너는저사람처럼백배가아니냐?’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 주어진 상태 안에서 실제로 열매가 맺혔느냐에 있습니다. 삼십 배도 열매입니다. 중요한 것은 비교가 아니라 결실입니다.
여기까지 오면 처음의 질문도 달라집니다. 우리는 흔히 이 비유를 읽으면서 ‘나는길가인가,돌밭인가,가시떨기인가,좋은땅인가?’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혀 주신 거듭남의 질서에 비추어 보면 훨씬 더 구체적인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주님께서내게주신말씀가운데아직내마음의길가에놓여있는것은무엇인가?나는어떤진리를듣기는하지만내삶안으로들어오지못하게하고있는가?어떤말씀은기쁨으로받았지만실제시험이오자포기하고있는가?어떤진리는이미내안에서자라고있지만세상의염려와재물과인정욕구와proprium의욕망이그기운을막고있는가?그리고어떤진리는이제실제체어리티와쓰임이라는열매를맺고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는 다른 사람을 분류하기 어려워집니다. ‘저사람은길가야.저사람은돌밭이야’라고 판단하는 대신 내 마음의 밭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이 비유를 거듭남의 말씀으로 읽을 때 일어나는 중요한 변화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주 큰 희망이 있습니다. ‘땅은바뀔수있다’는 것입니다. 길가는 영원히 길가일 필요가 없습니다. 굳은 땅은 갈아엎을 수 있습니다. 돌은 걷어 낼 수 있습니다. 가시는 뽑아낼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신을 좋은 땅으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씨도 주님에게서 오고, 그것을 받아들일 능력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우리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그 진리에 따라 살도록 끊임없이 이끄십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스베덴보리의렌즈’로 읽고 난 뒤 가장 마지막에 남는 분은 스베덴보리가 아니라 ‘씨뿌리시는주님’이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우리로 하여금 씨와 땅과 가시와 열매가 무엇인지 조금 더 분명히 보게 도울 뿐입니다. 씨를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땅을 부드럽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며, 돌과 가시를 발견하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우리가 그것들을 제거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씨가 자라 열매 맺게 하시는 생명 자체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씨뿌리는자의비유’는 네 종류의 사람을 판정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끊임없이 인간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으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길가가 되어도 주님은 씨를 뿌리시고, 돌밭이어도 뿌리시며, 가시떨기 가운데서도 뿌리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한 곳에서라도 그 씨가 받아들여져 뿌리를 내리고 자라 열매 맺기를 기다리십니다.
‘귀있는자는들으라.’
이 말씀은 그래서 비유의 끝에 붙은 단순한 경구가 아닙니다. ‘내가지금네게뿌리는이말씀을이해에만두지말고네의지와삶으로받아들이라’는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주님께 고침을 받고, 마침내 열매를 맺는 것, 바로 이것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보여 주는 거듭남의 길입니다.
AC.89에서 스베덴보리는 창2부터 나타나는 한 가지 중요한 변화를 지적합니다. 앞에서 영적 인간을 다루는 구절들에서는 주님을 단지 ‘하나님’이라고 하였는데, 이제 천적 인간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여호와하나님’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에서 ‘여호와하나님’으로 호칭이 달라지는 것일까요?
먼저 AC.89가 실제로 말하는 범위를 정확히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이 호칭의 변화를 분명히 지적하고, 이것을 지금부터 앞에서 다루었던 영적 인간과는 다른 사람, 곧 천적 인간이 다루어진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AC.89자체에서는 왜 영적 인간을 다룰 때에는 ‘하나님’이라 하고 천적 인간을 다룰 때에는 ‘여호와하나님’이라 하는지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한 번호만으로 ‘여호와는언제나사랑을의미하고하나님은언제나진리를의미한다’거나, ‘여호와하나님은언제나사랑과진리의결합을의미한다’는 식으로 고정해서 설명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곳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차이를 설명하는 내용들을 찾을 수 있더라도, 그것을 확인하지 않은 채 AC.89의 짧은 언급만으로 전체 호칭 체계를 먼저 완성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이 질문을 계기로 ‘예수’, ‘그리스도’, ‘주’, ‘구주’, ‘아버지’, ‘아들’, ‘하나님의아들’, ‘인자’, ‘성령’등 주님에 관한 모든 호칭을 한꺼번에 설명하는 것도 AC.89의 독자가 지금 필요로 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이러한 호칭들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지만, 각각 성경의 문맥과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그 호칭을 설명하는 곳에서 살펴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여러 호칭이 나온다고 해서 먼저 각 호칭에 하나씩 고정된 ‘기능’이나 ‘작용’을 배정해 놓고 이후의 본문을 그 틀에 맞추어 읽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AC.89의 호칭 변화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것을 천적 인간의 형성이 새롭게 다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로 제시했으므로 반드시 주목해야 합니다. 창1에서 영적 인간이 형성되는 동안에는 ‘하나님’이라고 하였는데, 창2에서 천적 인간의 형성을 다루면서 ‘여호와하나님’이라는 호칭이 등장합니다. 독자는 우선 이 변화가 우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AC를 읽는 방법에서도 중요한 원칙을 보여 줍니다. 말씀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달라질 때 그 차이를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이름 하나를 발견하자마자 미리 만든 의미표를 기계적으로 대입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그 이름의 차이를 실제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야 합니다. AC.89에서는 우선 ‘하나님’에서 ‘여호와하나님’으로의 변화가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주제가 전환되었음을 보여 주는 하나의 표지라는 데까지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왜하나님에서여호와하나님으로바뀌는가?’라는 질문은 여기서 완전히 닫기보다 가지고 가는 편이 좋습니다. AC.89가 우리에게 확실히 알려 주는 것은 호칭의 변화가 의미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변화의 더 깊은 이유는 스베덴보리가 이후의 본문에서 하나님의 이름들을 직접 설명할 때 하나씩 확인하면 됩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먼저 만든 주님의 호칭 체계로 AC를 읽는 것이 아니라, AC자체가 주님의 여러 이름을 어떻게 열어 가는지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AC.89심화1)
AC.87을 읽으면 ‘악한영들은물러가고선한영들이가까이오며,천적천사들도가까이온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앞의 AC.50에서는 사람마다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 ‘두영’을 악한 영들로 이해했다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AC.87의선한영들은갑자기어디에서등장한것인가?’
이 질문을 풀기 위해서는 먼저 앞에서 가졌던 전제 하나를 바로잡는 것이 좋습니다. ‘영들’이라는 말 자체를 언제나 ‘악한영들’과 같은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87만 보아도 스베덴보리는 악한 영들과 선한 영들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따라서 어떤 번호에서 단순히 ‘영들’이라고 했을 때 그것을 자동으로 악한 영들이라고 확정하기보다, 그 번호의 문맥과 스베덴보리의 직접 설명을 따라 판단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AC.50의 ‘두영’에 대한 앞선 설명도 수정해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AC.50이 사람과 영계 및 천국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영들’과 ‘천사들’을 구별했다고 해서, 거기서 말한 ‘영들’이라는 명칭 자체가 곧 ‘악한영들’을 뜻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영’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선악을 확정하는 명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AC.87은 같은 ‘영들’가운데 ‘악한영들’과 ‘선한영들’을 명시적으로 구별하여 말합니다.
그렇다면 AC.87에서 왜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을 따로 말할까요? 여기서는 원문이 말하는 데까지 정확히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될 때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이 가까이 오며 천적 천사들도 가까이 옵니다. 그리고 이들이 함께 있을 때에는 악한 영들이 도저히 머물 수 없어 멀리 달아납니다. 따라서 이 번호에서 ‘선한영들’과 ‘천적천사들’은 같은 명칭으로 묶이지 않고 서로 구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AC.87한 번호만 가지고 이 두 부류의 존재론적 차이와 영계에서의 정확한 위치, 역할, 상태를 모두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영들은천사들보다아래단계의존재들이다’, ‘아직완전히확정되지않은상태의존재들이다’, ‘선한영들은인간을더나은상태로이끄는역할을한다’는 식으로 전체 구조를 먼저 완성하면 AC.87이 직접 말하지 않은 내용까지 섞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구별은 스베덴보리가 영들의 세계와 천국, 영들과 천사들의 상태를 직접 설명하는 곳에서 차례로 확인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AC.87에서 지금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충분합니다. ‘영들’이라는 말은 곧 ‘악한영들’이라는 고정된 뜻이 아니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악한 영들과 선한 영들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또한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도 서로 구별하여 말합니다. 그러므로 AC를 읽을 때 ‘영’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미리 정해 둔 하나의 뜻을 기계적으로 대입하기보다, 그 문맥에서 어떤 영들을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용어 문제를 넘어 앞으로 AC를 읽는 데 중요한 원칙이 됩니다. 우리가 상응을 고정된 사전처럼 사용하지 않기로 한 것과 마찬가지로, 영계의 존재들을 가리키는 명칭도 한 번 정한 설명을 모든 번호에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50은 AC.50의 문맥에서, AC.87은 AC.87의 문맥에서 먼저 읽어야 하며, 여러 번호가 충분히 쌓였을 때 스베덴보리 자신이 보여 주는 전체 구조를 따라 정리해야 합니다.
따라서 ‘선한영들은갑자기어디에서등장했는가?’라는 질문에 지금 가장 정확하게 답하면 이렇습니다. 선한 영들이 AC.87에서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앞서 ‘영들’을 너무 빨리 ‘악한영들’로만 한정해서 이해했던 것입니다. AC.87은 그 이해를 바로잡아 줍니다. 영들 가운데 악한 영들도 있고 선한 영들도 있으며, 이 번호에서는 천적 인간에게서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온다고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고 있습니다. 그보다 더 자세한 영들과 천사들의 질서는 앞으로 스베덴보리 자신이 그것을 열어 줄 때 따라가면 됩니다. (AC.87심화1)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18)
AC.404
이모든이름은‘가인’(Cain)이라불린최초의이단에서파생된이단들을의미합니다.그러나그것들에관하여는이름들외에는전해지는것이없으므로,그것들에관하여무엇인가말하는것은불필요합니다.그이름들의어원으로부터어느정도알수있는것이있을수있습니다.예를들어‘이랏’(Irad)은그가‘성읍에서내려온다’(descendsfromacity)는것을의미하며,따라서‘에녹’(Enoch)이라불린이단에서내려왔음을의미합니다.다른이름들도이와같습니다. All these names signify heresies derived from the first,which was called “Cain”;but as there is nothing extant respecting them,except the names,it is unnecessary to say anything about them. Something might be gathered from the derivations of the names;for example,“Irad” means that he “descendsfromacity,” thus from the heresy called “Enoch,” and so on.
해설
AC.404는 창4:18에 이어지는 가인의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간결하게 밝혀 줍니다. 가인에게서 에녹이 나왔고, 에녹에게서 이라드가 나왔으며, 그 뒤로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이 이어집니다. 문자적 의미에서는 한 가문의 족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이름이 ‘가인’이라 불린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여러 이단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제 가인의 계보는 단순히 여러 세대가 이어지는 혈통이 아니라, 최초의 영적 분리가 계속 다른 형태로 파생되어 가는 하나의 교리적 계보로 읽힙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399-400과 직접 연결됩니다. AC.399에서는 가인이라는 분열 또는 이단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분열을 산출했고 그것이 에녹이라 불렸다고 했습니다. AC.400에서는 그 원리를 더욱 일반화하여 ‘하나의이단이잉태되면거기에서수많은이단이태어납니다’라고 했습니다. AC.404는 바로 그 말이 실제 가인의 계보에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가인에서 시작된 최초의 분리가 에녹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여러 이름으로 계속 파생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최초의이단’이라는 표현은 가인의 본래 의미를 다시 기억하게 합니다. 가인은 단순히 어떤 잘못된 교리 하나를 표상한 것이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상태를 표상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고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지만,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에게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AC.398의 표현대로 하면 ‘의지대신이해가,사랑대신신앙이지배하게된’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최초의 분리에서 이후의 여러 이단이 파생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라드, 므후야엘, 므드사엘 등이 각각 정확히 어떤 교리를 주장했는지 알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스스로 멈춥니다. ‘그것들에관하여는이름들외에는전해지는것이없으므로,그것들에관하여무엇인가말하는것은불필요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AC를 읽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해석 태도를 보여 줍니다. 속뜻이 있다고 해서 본문이 제공하지 않는 세부 내용까지 자유롭게 만들어 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스베덴보리는 이름의 의미에서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예로 ‘이라드’를 듭니다. 이라드라는 이름은 ‘성읍에서내려온다’는 의미를 가지므로, 속뜻에서는 앞의 ‘성읍’, 곧 에녹이라 불린 이단에서 파생되어 내려온 것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AC.401에서 에녹은 시작되거나 형성되기 시작한 가르침과 연결되었고, AC.402에서 성읍은 교리적인 것 또는 이단적인 것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이라드가 ‘성읍에서내려온다’는 것은 앞서 형성된 에녹의 교리적·이단적 상태에서 또 다른 상태가 파생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의 계보에는 상당히 일관된 흐름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가인이라는 최초의 분리가 있습니다. 그 분리에서 에녹이라는 새로운 이단이 산출됩니다. 에녹은 가르침으로 시작되고 형성되는 상태와 관련되고, 그 이름을 따라 성읍이 세워지면서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가 하나의 형태를 갖춥니다. 그리고 이제 그 ‘성읍’에서 이라드가 내려옵니다. 하나의 분리된 신앙이 가르침이 되고, 그 가르침이 교리적인 전체를 이루며, 그 교리적 전체에서 다시 새로운 형태의 분리가 파생되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AC.404에서 말하는 ‘계보’는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앞의 상태가 뒤의 상태를 낳는 연속성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AC.400에서 이미 말한 ‘잉태와출생’의 원리와 같습니다. 하나의 교리적 전제가 받아들여지면 그 안에서 다음 결론이 나오고, 그 결론에서 다시 다른 결론이 나옵니다. 처음의 근본 원리가 계속 후속적인 형태들을 산출하면서 하나의 계보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의 절제입니다. 그는 ‘다른이름들도이와같다’고 말할 뿐, 각각의 이름에 대해 상세한 교리적 내용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이름의 어원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을 뒷받침할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상응을 다룰 때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상응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영적 의미를 붙이는 작업이 아니라, 말씀 자체와 AC의 설명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 점은 앞의 AC.403과도 잘 연결됩니다. 태고인들은 영적인 것들을 ‘표상적유형들’아래 ‘역사형식’으로 배열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계보에 등장하는 이름들도 영적인 상태들의 연속을 역사적 족보의 형태로 나타냅니다. 그러나 표상적 역사라고 해서 모든 이름의 세부 의미가 우리에게 자동으로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속뜻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우리가 그 속뜻의 모든 세부를 알고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AC.404는 한편으로는 매우 강하게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강하게 말하는 것은 ‘이모든이름은가인이라는최초의이단에서파생된이단들을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은 ‘각각이구체적으로무엇인지는이름외에는자료가없으므로자세히말하지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두 태도를 함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교리 이해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잘못된 근본 원리는 여러 후속적인 오류를 낳을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진리를 선한 삶에서 분리하며, 이해를 사랑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시키는 원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교리적 형태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역사 속의 모든 교리나 교파를 임의로 가인의 어느 후손과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AC.404자체가 그런 과도한 추정을 경계하게 합니다.
오히려 가인의 계보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면 더욱 유익합니다. 하나의 잘못된 원리를 받아들였을 때 그것이 어떤 후속적인 생각들을 낳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옳다는것이사랑하는것보다중요하다’는 원리가 마음에 자리 잡으면, 거기서 상대를 판단하는 생각이 나오고, 그 판단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생기며, 마침내 사랑하지 않는 행동까지도 옳다고 설명하는 하나의 내적 ‘성읍’이 세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의 분리가 그 자체에서 후손을 낳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거듭남의 역사에서는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잘못된 근본 원리가 발견되고 그것을 악으로 인정하여 피할 때, 주님께서는 진리를 다시 선과 결합시키십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섬기게 되고, 이해는 자기 지성에서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표현하는 수단이 됩니다. 가인의 계보를 읽는 목적은 단순히 옛 이단의 역사를 분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신앙과 사랑의 질서가 어떻게 유지되거나 무너지는지를 보는 데 있습니다.
결국 AC.404는 가인의 후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상세히 해독하려 하기보다 그 계보 전체의 성격을 먼저 붙들게 합니다. 그들은 모두 ‘가인’이라 불린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이단들을 나타냅니다. 이라드가 ‘성읍에서내려온다’는 이름으로 에녹의 이단에서 파생된 상태를 보여 주듯, 뒤의 이름들도 같은 계보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세부 내용이 주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멈추어야 합니다. 말씀의 속뜻을 깊이 읽는 것과 말씀보다 앞서 나가는 것은 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AC.404는 바로 그 두 가지를 함께 가르쳐 주는 번호입니다. (AC.404해설)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창4:17)
AC.403
이제우리는‘성읍’(city)이무엇을의미하는지를살펴보았습니다.그러나창세기의이부분전체가역사형식(historicalform)으로구성되어있기때문에,문자적의미(senseoftheletter)안에있는사람들에게는가인이성읍을세우고그것을에녹이라불렀던것처럼보일수밖에없습니다.비록문자적의미로부터그들은또한가인이아담의장자에불과했음에도이미그땅에많은사람이살고있었다고생각하지않을수없지만말입니다.역사적연속(historicalseries)에는이러한것이들어있습니다.그러나앞에서살펴본것처럼,태고인들(mostancientpeople)은모든것을‘표상적유형들’(representativetypes)아래‘역사형식’(formofahistory)으로배열하는데익숙했습니다.그리고이것은그들에게지극히즐거운일이었는데,그렇게함으로써모든것이살아있는것처럼보였기때문입니다. We have now seen what a “city” signifies.But as all this part of Genesis is put into a historical form,to those who are in the sense of the letter it must seem that a city was built by Cain,and was called Enoch,although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they must also suppose that the land was already populous,notwithstanding that Cain was only the firstborn of Adam;the historical series has this in it.But as we observed above,the most ancient people were accustomed to arrange all things in the form of a history,under representative types,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highest degree,for it made all things seem to be alive.
해설
AC.403은 창세기 4장을 읽는 데서만 중요한 번호가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반부 전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해석 원리입니다. 앞의 AC.402에서는 ‘성읍’이 실제 성읍 자체보다 교리적인 것 또는 이단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왜 창세기 본문은 마치 실제 인물들이 태어나고, 성읍을 세우고, 그 성읍에 이름을 붙인 것처럼 역사 이야기의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403은 바로 그 질문에 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창세기의이부분전체가역사형식으로구성되어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문자적 의미만을 따라 읽으면 가인이 실제로 성읍을 세우고 그 이름을 에녹이라 불렀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본문이 그렇게 보이도록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역사 형식을 문자 그대로만 밀어붙일 때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아담의 장자에 불과한데도 이미 성읍을 세울 만큼 많은 사람이 땅에 살고 있었다고 생각해야 하는 난점이 생긴다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단순히 ‘가인의아내는어디에서왔는가?’같은 역사적 난제를 해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이이야기는처음부터실제사건들의연대기적기록만을목적으로쓰인것인가?’하는 것입니다. 그의 답은 그렇지 않다는 쪽입니다. 창세기 초반의 이 부분은 영적인 실재를 역사적인 형식 아래 배열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역사적연속’(historicalseries)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가인이 태어나고, 아벨을 죽이고, 놋 땅에 거하고, 에녹을 낳고, 성읍을 쌓는 일련의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하나의 연속된 역사처럼 전개됩니다. 그러나 그 속뜻에서는 교회의 상태들이 서로 이어지고, 하나의 교리적 상태가 다음 상태를 산출하며, 사랑과 신앙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쇠퇴하는지가 하나의 영적 연속으로 펼쳐집니다. 문자적 역사 형식은 그 영적 연속을 담는 외적 그릇인 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태고인들의 사고방식에서 찾습니다. 태고인들은 ‘모든것을표상적유형들아래역사형식으로배열하는데익숙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표상적유형들’(representativetypes)이란 자연적인 인물, 장소, 사건, 사물 등을 통하여 영적이고 천적인 실재를 나타내는 형식을 말합니다. 곧 추상적인 교리나 영적 상태를 직접 개념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사람과 장소와 사건의 형태로 살아 있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적 성격과도 잘 연결됩니다. 태고인들은 영적인 것을 자연적인 것과 분리된 추상 개념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자연계의 모든 것 속에서 영적인 의미를 느끼고 보았으며, 자연적인 형상들을 통해 천적이고 영적인 실재를 지각하는 데 익숙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영적 진리를 이야기와 인물과 장소의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 단순한 문학적 장식이 아니라 매우 자연스러운 사고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방식이 그들에게 ‘지극히즐거운일’이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모든것이살아있는것처럼보였기때문’입니다. 이것은 AC.403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적 진리를 단지 추상적인 명제와 정의로만 전달하면 개념으로 머물 수 있지만, 그것을 사람과 사건과 장소의 형식으로 표현하면 진리가 움직이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가인과 아벨, 에덴과 놋, 에녹과 성읍은 단순한 추상어가 아니라 영적 상태들이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이야기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창세기 초반의 서술은 일종의 ‘살아있는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앙이체어리티에서분리되면교리적오류가파생된다’고 한 문장으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것을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고, 놋 땅에 거하고, 에녹을 낳고, 성읍을 쌓는 이야기로 펼쳐 보여 줍니다. 그러면 하나의 교리적 명제가 인간의 선택과 관계와 결과를 가진 살아 있는 서사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AC.403을 근거로 ‘창세기초반은역사적의미가전혀없고순전히만들어낸이야기다’라고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강조하는 것은 ‘역사형식’과 ‘표상적유형들’입니다. 그의 관심은 문자적 형식 뒤에 있는 속뜻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에서 우리가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스베덴보리는창세기이부분을단순한문자적연대기로만읽지않고,영적인실재를역사형식아래배열한말씀으로읽는다’는 정도입니다.
또한 ‘역사형식’이라고 해서 내용이 임의적이거나 무질서하게 꾸며졌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역사적연속’이라고 부른 것처럼, 사건들의 순서와 관계 자체가 영적 상태들의 질서와 진행을 담고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보다 먼저 나오고, 아벨을 죽인 뒤 놋 땅에 거하며, 그 뒤 에녹과 성읍이 나오는 순서는 임의적인 배열이 아닙니다. 각각이 앞의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이어지는 영적 연속을 표현합니다.
이 점은 AC.399-402의 흐름을 다시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이라는 분열에서 에녹이라는 새로운 분열이 산출되고, 그것이 가르침으로 형성되며, 다시 성읍이라는 교리적 전체가 만들어졌습니다. 만일 이것을 추상적인 교리 설명으로만 기록했다면 매우 건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것을 출생과 이름과 성읍 건설이라는 이야기로 표현했습니다.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영적 변화가 ‘살아있는것처럼’보이게 됩니다.
따라서 AC.403은 우리가 창세기 초반을 읽는 태도에도 중요한 기준을 줍니다. 문자적 이야기를 무시하고 곧바로 속뜻으로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이야기의 흐름을 충분히 따라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역사 형식 자체가 속뜻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먼저 나오고, 누가 누구를 낳고, 어디로 이동하며, 무엇을 세우고, 무엇이라 이름하는지가 모두 영적 연속을 담는 표상적 형식입니다.
동시에 문자적 이야기에서만 멈추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말씀의 깊이는 그 역사 형식 안에 교회의 상태, 인간의 거듭남, 사랑과 신앙의 관계, 선과 진리의 질서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자적 의미와 속뜻은 경쟁하는 두 층위라기보다, 외적 형식과 그 안에 담긴 내적 생명의 관계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AC.403의 마지막 표현, ‘모든것이살아있는것처럼보였다’는 말은 우리가 왜 말씀의 표상과 상응을 공부하는지까지 생각하게 합니다. 상응을 공부하는 목적은 단어마다 뜻을 붙여 놓는 일종의 암호 해독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 속 인물과 사건과 장소가 영적 실재와 연결되면서 다시 살아 움직이도록 보는 데 있습니다. ‘가인=신앙’, ‘아벨=체어리티’, ‘성읍=교리’라고 대응표만 외운다면 아직 태고인들이 느꼈던 그 생명성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그 관계들이 하나의 살아 있는 영적 서사로 움직이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AC.403은 창세기 초반의 속뜻을 읽는 하나의 중요한 안내문입니다. 태고인들은 영적 실재를 ‘표상적유형들’아래 ‘역사형식’으로 배열했고, 그 방식은 모든 것을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인물과 장소와 사건들은 단순한 이름과 지명이 아니라 교회의 상태와 인간 마음의 변화를 살아 있는 역사처럼 보여 주는 표상적 형식입니다.
결국 AC.403이 말하는 것은 ‘역사를버리고상징만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의 역사적 형식이 왜 그렇게 구성되었는지를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그 형식 안에서 영적 실재가 인물과 사건과 장소를 통하여 살아 움직입니다. 가인의 성읍도 바로 그렇게 읽어야 합니다. 단순히 고대의 한 사람이 세운 도시가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어떻게 가르침을 낳고 교리적 세계를 형성해 갔는지를 살아 있는 역사 형식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태고인들이 즐겨 사용했던 표상적 서술 방식이며,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반의 속뜻을 읽는 기본 관점입니다. (AC.403해설)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창4:17)
AC.402
가인이‘쌓은성읍’(citythatwasbuilt)이그이단에서나온교리적인것과이단적인것전체를의미한다는사실은말씀에서성읍의이름이나오는모든구절로부터분명합니다.그어느곳에서도성읍자체를의미하지않고,언제나어떤교리적인것또는이단적인것을의미하기때문입니다.천사들은성읍이무엇인지,또어떤성읍의이름이무엇인지전혀알지못합니다.앞에서보여준것처럼그들의관념은영적이고천적이기때문에성읍에대한어떤관념도가지고있지않으며가질수도없습니다.그들은오직성읍과그이름이무엇을의미하는지만퍼셉션합니다.따라서‘거룩한성’(holycity),곧‘거룩한예루살렘’(holyJerusalem)은일반적으로는주님의나라를,특별히는그나라가그안에있는각개인을의미합니다.‘성읍시온’(city)과‘시온산’(mountainofZion)도이와같은방식으로이해되는데,후자는신앙의천적인것을,전자는신앙의영적인것을의미합니다. That by the “citythatwasbuilt” is signified all the doctrinal and heretical teaching that came from that heresy,is evident from every passage of the Word in which the name of a city occurs;for in none of them does it ever mean a city,but always something doctrinal or else heretical. The angels are altogether ignorant of what a city is,and of the name of any city;since they neither have nor can have any idea of a city,in consequence of their ideas being spiritual and celestial,as was shown above. They perceive only what a city and its name signify. Thus by the “holycity,” which is also called the “holyJerusalem,” nothing else is meant than the kingdom of the Lord in general,or in each individual in particular in whom is that kingdom. The “city” and “mountainofZion” also are similarly understood;the latter denoting the celestial of faith,and the former its spiritual.
[2]천적인것과영적인것자체도‘성읍들’(cities),‘궁전들’(palaces),‘집들’(houses),‘성벽들’(walls),‘성벽의기초들’(foundationsofwalls),‘방벽들’(ramparts),‘성문들’(gates),‘빗장들’(bars),그리고그가운데있는‘성전’(temple)으로묘사됩니다.에스겔48장과The celestial and spiritual itself is also described by “cities,” “palaces,” “houses,” “walls,” “foundationsofwalls,” “ramparts,” “gates,” “bars,” and the “temple” in the midst;as in Ezekiel 48;
여기서‘진리의성읍’(cityoftruth),곧‘예루살렘’(Jerusalem)은신앙의영적인것들을의미하고,‘성산’(mountainofholiness),곧‘시온산’(ofZion)은신앙의천적인것들을의미합니다. where the “cityoftruth,” or “Jerusalem,” signifies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and the “mountainofholiness,” or “ofZion,”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3] 신앙의천적인것들과영적인것들이성읍으로표상되는것처럼,유다와이스라엘의성읍들은모든교리적인것들을의미합니다.이성읍들은각각그이름이언급될때어떤교리적인것에관한고유한의미를가지지만,그것이무엇인지는속뜻으로부터가아니면아무도알수없습니다.‘성읍들’(cities)이교리적인것들을의미하므로이단들도역시성읍들로의미되며,이경우각각의성읍은그이름에따라어떤특정한이단적견해를의미합니다.지금은다음말씀의구절들로부터일반적으로‘성읍’(city)이어떤교리적인것또는이단적인것을의미한다는사실만을보여주고자합니다. As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of faith are represented by a city,so also are all doctrinal things signified by the cities of Judah and of Israel,each of which when named has its own specific signification of something doctrinal,but what that is no one can know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 As doctrinal things are signified by “cities,” so also are heresies,and in this case every particular city,according to its name,signifies some particular heretical opinion. At present we shall only show from the following passages of the Word,that in general a “city” signifies something doctrinal,or else heretical.
여기서는주님의강림때영적이고천적인것들에관한기억지식(memory-knowledge)을다룹니다.또환상의골짜기,곧환상(fantasy)을다루는곳에서는, where the subject treated of is the memory-knowledge of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a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So again,when treating of the valley of vision,that is,of fantasy:
예레미야에서는‘남방에있는자들’(inthesouth),곧진리의빛가운데있으면서그것을꺼버리는자들을말하면서, In Jeremiah,speaking of those who are “inthesouth,” that is,in the light of truth,and who extinguish it:
여기서‘성벽’(wall),‘방벽’(rampart),‘성문’(gates),‘빗장’(bars)이오직교리적인것들을의미한다는것은누구나볼수있습니다. where anyone may see that by a “wall,” a “rampart,” “gates,” and “bars,” doctrinal things only are meant.
여기서‘혼돈의성읍’(cityofemptiness)은교리의공허함을의미하며,‘거리들’(streets)은여기서도다른곳에서와마찬가지로성읍에속한것들,곧거짓들이나진리들을의미합니다.계시록에서는, where the “cityofemptiness” denotes emptinesses of doctrine;and “streets” signify here as elsewhere the things which belong to the city,whether falsities or truths. In John:
그여자가그러한성격의교회를의미한다는것은앞에서보여준바와같습니다. and that the woman denotes a church of that character has been shown before.
해설
AC.402는 가인이 에녹의 이름을 따라 세운 ‘성읍’이 왜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를 의미하는지를 말씀 전체의 용례를 통하여 설명합니다. AC.399에서는 이 의미를 간단히 제시했지만, 이번 번호에서는 거룩한 예루살렘과 시온에서부터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시편, 스가랴, 민수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많은 구절을 인용하여 ‘성읍’이라는 표상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많은 성경 인용에 압도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무엇 하나를 입증하기 위해 이 모든 구절을 모으고 있는지를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하나의 명제는 ‘성읍은교리적인것또는이단적인것을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하게 ‘말씀에서성읍은어느곳에서도성읍자체를의미하지않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말씀의 속뜻을 설명하는 그의 방식에서 나온 진술입니다. 문자적 의미에서 실제 예루살렘이나 시온이나 여러 성읍이 역사적 장소로 존재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말이라기보다, 천사들이 받아들이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는 그러한 자연적 장소가 영적인 실재를 표상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근거로 말씀의 문자적·역사적 의미가 무가치하다고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집중하는 것은 성읍의 ‘속뜻’입니다.
그는 이 점을 천사들의 관념을 통하여 설명합니다. 천사들은 성읍이 무엇인지 또는 어떤 성읍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그들의 관념은 영적이고 천적이기 때문에 자연계의 성읍에 관한 관념을 갖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이 퍼셉션하는 것은 그 성읍과 이름이 ‘무엇을의미하는가’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자연적 이미지가 말씀을 통하여 천국에 이를 때 천사들은 그 자연적 형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상응하는 영적·천적 실재를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거룩한예루살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룩한 성, 곧 거룩한 예루살렘이 일반적으로는 ‘주님의나라’를 의미하고, 특별히는 그 나라가 그 안에 있는 각 개인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단지 인간 밖에 존재하는 천국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가 한 사람 안에 세워질 때 그 사람 안에도 주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예루살렘이라는 성읍은 주님의 나라가 교리와 진리의 질서 안에서 형성된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어 ‘시온산’과 ‘성읍시온’을 구별합니다. 산은 신앙의 ‘천적인것’을, 성읍은 신앙의 ‘영적인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천적인 것은 사랑과 선에 더 직접적으로 관련되고, 영적인 것은 그 사랑과 선에서 나오는 진리와 신앙에 관련됩니다. 산이 높은 곳으로서 사랑의 천적 상태를 나타낸다면, 성읍은 그 안에 질서 있게 배치된 길과 집과 성벽과 문을 가진 구조로서 진리와 교리의 영적 질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2]에서는 성읍뿐 아니라 ‘궁전,집,성벽,성벽의기초,방벽,성문,빗장,성전’이 한꺼번에 등장합니다. 에스겔 48장과 계시록 21장의 거룩한 성이 대표적입니다. 이것들은 단순한 천국 건축물의 설계도가 아니라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이 어떻게 하나의 질서를 이루는지를 자연적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특히 성벽과 성문과 기초는 성읍을 이루고 보호하며 출입을 규정하는 요소들이므로 교리의 진리들과 그 질서에 관련된 표상으로 이해됩니다.
시편의 ‘하나님의성’, 에스겔의 ‘여호와께서거기계시다’, 이사야의 ‘여호와의성읍’, 스가랴의 ‘진리의성읍’도 모두 같은 논증에 사용됩니다. 특히 슥8:3에서 ‘예루살렘은진리의성읍’, ‘시온산은성산’이라고 한 구절은 스베덴보리의 구별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는 예루살렘, 곧 진리의 성읍을 ‘신앙의영적인것들’로 보고, 시온산을 ‘신앙의천적인것들’로 봅니다. 성읍이 진리와 교리의 질서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구절인 셈입니다.
그러나 성읍이 언제나 좋은 교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3]부터의 중요한 전환입니다. ‘성읍’이라는 상응은 교리적인 것을 나타내므로, 그 교리가 거짓과 악에서 나온 경우에는 이단적인 것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성읍 자체가 선하거나 악한 상응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어떤 성읍인지, 어떤 문맥에 있는지,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각각의 성읍도 각기 다른 교리적인 것을 의미하며,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속뜻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86에서 확인한 중요한 원리와도 통합니다. 상응은 기계적인 일대일 암호표가 아닙니다. ‘성읍=참된교리’라고 고정할 수도 없고 ‘성읍=거짓교리’라고 고정할 수도 없습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성읍은 ‘교리적인것’을 나타내며, 그것의 영적 질은 그 성읍이 놓인 전체 문맥과 이름에 따라 결정됩니다. 거룩한 예루살렘은 주님의 나라와 참된 교리의 질서를 나타내지만, 가인의 에녹 성읍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를 나타냅니다.
[4]와 [5]의 수많은 인용은 바로 이 원리를 양쪽 방향에서 입증합니다. 애굽 땅의 다섯 성읍, 환상의 골짜기의 떠들썩한 성읍, 닫힌 남방의 성읍들, 시온의 성벽과 성문과 빗장, 견고한 성읍, 혼돈의 성읍, 계시록의 큰 성읍과 만국의 성읍들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각각의 구절을 별개의 주제로 떼어 심화하기보다, 모두 ‘성읍과그구성요소들이교리적상태를표현한다’는 하나의 증거군으로 읽는 것이 이번 번호의 논지를 가장 잘 살립니다.
특히 사24:10의 ‘혼돈의성읍’은 이해하기 좋은 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교리의공허함’이라고 풀이합니다. 실제 건물들이 비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리가 사라져 교리가 텅 빈 상태를 성읍의 황폐함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읍의 ‘거리들’은 성읍에 속한 것, 곧 문맥에 따라 거짓이나 진리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하나의 성읍이 전체적인 교리의 질서를 나타낸다면 그 안의 거리와 성벽과 문과 집들도 그 전체를 구성하는 개별적인 것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계16장의 ‘큰성읍이세갈래로갈라지고만국의성읍들이무너졌다’는 말씀도 같은 방식으로 읽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단순히 어떤 거대한 도시가 물리적으로 세 부분으로 갈라지는 사건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단적인 교회 상태와 그 교리적 구조의 붕괴를 나타낸다고 봅니다. 계17:18에서는 그 큰 성읍이 요한이 본 ‘여자’라고 설명되며, 스베덴보리는 그 여자가 그러한 성격의 교회를 의미한다고 연결합니다. 따라서 ‘성읍’과 ‘여자’와 ‘교회’가 서로 다른 자연적 표상을 통하여 하나의 영적 실재를 여러 측면에서 보여 주게 됩니다.
이제 이 모든 설명을 다시 가인의 성읍으로 가져오면 AC.399-402의 흐름이 선명해집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분열을 표상합니다. 그 가인에게서 에녹이라는 또 다른 분열이 태어났습니다. AC.401에서는 에녹이라는 이름이 ‘시작되거나형성되기시작한가르침’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에녹의 이름을 따라 성읍이 세워집니다. 즉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하나의 새로운 가르침을 낳고, 그 가르침에서 다시 여러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들이 형성되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이성읍을쌓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단계입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가 뒤집힌 하나의 원리였습니다. 그 원리가 새로운 분열을 낳았고, 그 분열이 가르침이 되었으며, 이제 그 가르침이 하나의 교리적 세계를 형성합니다. 잘못된 영적 원리가 개인적인 생각의 수준을 넘어 전승되고 조직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교리체계’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거룩한 예루살렘 역시 성읍입니다. 즉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질서 있게 결합되어 이루는 참된 교리도 성읍으로 표상됩니다. 문제는 성읍을 세우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성읍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체어리티를 중심으로 진리가 질서를 이루면 거룩한 성읍이 될 수 있지만,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원리가 중심이 되면 가인의 성읍이 됩니다.
이 점은 교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도 중요한 기준을 줍니다. 교리는 필요합니다. 인간이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잃은 뒤에는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며 그것을 통하여 주님께 인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앞의 AC.393-398에서 신앙이 ‘인류의쓰임을위하여’보존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교리가 많다는 것도, 교리가 체계적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 교리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지, 그리고 사람을 실제 사랑과 선한 삶으로 이끄는지가 중요합니다.
AC.402가 보여 주는 가장 아름다운 대조는 결국 ‘가인의성읍’과 ‘거룩한예루살렘’입니다. 둘 다 성읍이며 둘 다 교리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형성된 교리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나라가 그 안에 이루어진 교리적·영적 질서입니다. 외적으로는 모두 ‘성읍’이지만 그 안에 거하는 사랑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성읍의 속뜻을 이해하는 핵심은 건물의 규모나 성벽의 견고함이 아니라 그 성읍을 이루는 진리들이 어떤 선과 결합되어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진리는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을 때 주님의 나라를 이루는 거룩한 성읍이 됩니다. 반대로 진리가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조직될 때에는 아무리 견고한 성벽과 정교한 구조를 갖추더라도 가인의 성읍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AC.402가 수많은 말씀의 성읍들을 통하여 가인이 쌓은 한 성읍의 속뜻을 밝혀 주는 이유입니다. (AC.402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