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58.심화

 

3. ‘wise’, ‘intelligent

 

스베덴보리 용어에서 wise’와 intelligent’는 서로 가까우면서도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intelligent’는 진리를 이해하고 분별하는 사람을, ‘wise’는 그 진리를 사랑 안에서 살아내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intelligent understanding 쪽에, wise will love까지 결합된 더 깊은 상태에 연결됩니다.

 

먼저 intelligent’입니다. 이것은 보통 총명한’, ‘지성 있는’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intelligent한 사람은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질서를 보고, 개념들을 연결하고, 무엇이 참인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 인간(spiritual man) intelligence와 많이 연결됩니다. 그는 진리를 배우고 이해함으로 선으로 나아갑니다. 다시 말해, 먼저 이해하고, 그다음 살아가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반면 wise’는 단순히 진리를 아는 수준을 넘습니다. wise한 사람은 진리를 실제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는 단지 무엇이 옳은지’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뻐하고 사랑하며 존재 자체로 살아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wisdom love inseparable합니다. 사랑 없는 wisdom은 참된 wisdom이 아닙니다. 이런 이유로 천적 인간(celestial man)과 천적 천사들은 특히 wise하다고 불립니다. 그들은 논리적 추론 이전에 선과 진리를 사랑 안에서 직관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아주 쉽게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체어리티와 겸손에 대해 훌륭하게 설명하고, 교리적으로도 정확하다면 그는 intelligent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 사랑을 내려놓고,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간다면, 그때는 wise에 가까워집니다.  intelligent 진리를 아는 능력’이고, wise 진리가 생명이 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종종 intelligence wisdom을 나란히 놓으면서도, wisdom을 더 높은 상태로 다룹니다. intelligence는 아직 understanding 중심이지만, wisdom understanding will이 하나 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intelligent한 사람은 진리를 봅니다’. 그러나 wise한 사람은 진리 안에서 삽니다’.

 

번역으로 정리하면, 보통 이렇게 가실 수 있습니다. intelligent = 총명한, 지성 있는. wise = 지혜로운. 그런데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에게 wise는 단순 IQ 높고 현명한 사람이 아니라, 사랑과 선 안에서 진리를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가장 wise한 존재들은 가장 많이 아는 존재들이 아니라, 가장 깊이 사랑하는 존재들입니다.

 

 

 

AC.158, 창2:23, ‘man [vir]’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bygrace.kr

 

AC.158, 심화 2, ‘렘5:1’

AC.158.심화 2. ‘렘5: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58.심화

 

2. ‘5: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5:1) Run ye to and fro through the streets of Jerusalem, and see if ye can find a man, if there be any executing judgment, seeking the truth. (Jer. 5:1) (AC.158)

 

 

이 구절이 AC.158에 인용된 이유도, 말씀에서 man’이 단순 인간 일반이 아니라, 진리와 선 안에서 사는 영적 인간, 특별히 이해와 분별 안에 있는 사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영어의 man’은 단순 homo가 아니라 vir 계열 의미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렘5:1 한 사람을 찾으면’이라는 말씀은 단순히 착한 시민 한 명을 찾는다는 뜻이 아니라, 정의와 진리 안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참된 영적 인간을 찾는다는 뜻입니다.

 

본문을 보면 조건이 두 가지입니다. ‘정의를 행하며’와 진리를 구하는 자’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각각 선과 진리를 뜻합니다. 정의(judgment)는 단순 법률 판결이 아니라, 진리에서 나오는 바른 분별과 질서를 뜻하고, 진리를 구한다는 것은 주님의 진리를 사랑하고 찾는 상태를 뜻합니다. 즉, 여기의 한 사람’은 선과 진리가 결합된 인간입니다. 바로 이런 인간이 말씀에서 vir’로 표현됩니다.

 

AC.158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말씀에서 남자 혹은 사람’이라는 표현이 자주 진리와 이해의 차원을 상징한다는 점입니다. 앞의 사41:28에서는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이 참된 영적 분별의 부재를 뜻했다면, 여기 렘5:1에서는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이라는 말이, 아직 교회 안에 선과 진리가 살아 있는 인간이 존재하는가를 묻는 표현이 됩니다.

 

 예루살렘 거리로 다니라’는 표현도 상징적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예루살렘은 교회를 뜻하고, 거리(streets)는 교리적 진리들이 지나가는 길, 곧 교회의 진리 체계를 뜻합니다. 그런데 그 거리 속에서조차 참된 사람’, 곧 진리 안에 사는 영적 인간을 찾기 어렵다는 것은, 교회 전체가 외적 형식만 남고, 실제 생명은 잃어버린 상태를 뜻합니다.

 

특히 여기서 주님이 한 사람만 있어도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고 하시는 점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 숫자의 문제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선과 진리 안에 있는 한 사람은, 그 안에 교회의 본질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참된 영적 인간 한 명만 있어도 그 안에 주님의 교회가 살아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AC.158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말씀에서 사람(man, vir)이 단순 인간 일반이 아니라, 진리와 선 안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영적 인간을 뜻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렘5:1은, 교회가 아무리 외적으로 존재해도 그런 사람’이 사라지면 영적 생명을 잃은 상태가 된다는 것을 드러내는 대표적 구절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AC.158, 심화 3, ‘wise’, ‘intelligent’

AC.158.심화 3. ‘wise’, ‘intelligent’ 스베덴보리 용어에서 ‘wise’와 ‘intelligent’는 서로 가까우면서도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intelligent’는 진리를 이해하고 분별하는 사람

bygrace.kr

 

AC.158, 심화 1, ‘사41:28’

AC.158.심화 1. ‘사41:28’ 내가 본즉 한 사람도 없으며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에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 (사41:28) I behold, and there is no man [vir], even among them, and there is no counselor, (Isa. 41:28)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58.심화

 

1. ‘41:28

 

내가 본즉 한 사람도 없으며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에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 (41:28) I behold, and there is no man [vir], even among them, and there is no counselor, (Isa. 41:28) (AC.158)

 

 

이 구절이 AC.158에 인용된 이유는, 말씀에서 ‘man’이라는 말이 단순 인간 일반을 뜻하지 않고, 특별히 진리와 지혜 안에 있는 인간, 곧 참된 이해와 분별을 가진 사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사41:28의 영어는 일반적 인간을 뜻하는 homo가 아니라 ‘vir’가 사용되는데, 스베덴보리는 이 차이를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사41:28에서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은 단순 인구 부재가 아니라, 참된 진리 안에서 판단하고 조언할 수 있는 영적 인간이 없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라틴어 ‘vir’는 보통 이해, 진리, 지혜와 연결됩니다. 반면 homo는 보다 일반적인 인간 존재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vir가 없다’는 표현은, 교회 안에 더 이상 참된 분별과 영적 이해가 남아 있지 않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이어지는 ‘조언자도 없다’는 표현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counsel은 단순 의견 제시가 아니라, 진리로부터 오는 분별과 지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AC.158의 흐름은, 인간 안에서 참된 진리와 선의 결합이 무너질 때, 어떤 상태가 되는지를 설명하는 쪽으로 이어집니다. 앞에서 ‘여자’가 affection proprium의 차원을 상징했다면, 여기 vir라고 하는 ‘man’은 보다 이해와 진리의 차원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진리 안에서 분별할 ‘vir’가 사라지면, affection 역시 방향을 잃게 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선과 진리, 의지와 이해가 함께 결합될 때, 비로소 온전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 구절은 우상숭배 문맥 안에 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이사야 41장은 인간이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을 의지하는 상태를 비판하는 장입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보면 이것은 proprium 중심 상태와 연결됩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과 세상 지혜만 의지하게 되면, 결국 참된 ‘vir’, 곧 주님의 진리 안에서 보는 이해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은 단순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영적 분별 자체의 상실을 뜻합니다.

 

따라서 AC.158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말씀에서 ‘man [vir]’이 단순 남성이나 인간 일반이 아니라, 진리와 지혜 안의 영적 인간을 뜻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vir가 없다’는 것은 곧 교회 안에 참된 이해와 조언,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의 빛이 사라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AC.158, 심화 2, ‘렘5:1’

AC.158.심화 2. ‘렘5: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

bygrace.kr

 

AC.158, 창2:23, ‘man [vir]’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bygrace.kr

 

'즐겨찾기 > AC 창2' 카테고리의 다른 글

AC.158, 심화 3, ‘wise’, ‘intelligent’  (0) 2026.05.18
AC.158, 심화 2, ‘렘5:1’  (0) 2026.05.18
AC.158, 창2:23, ‘man [vir]’  (0) 2026.05.18
AC.157, 심화 4, ‘삼하5:1’  (0) 2026.05.18
AC.157, 심화 3, ‘삿9:2’  (0) 2026.05.18
Posted by bygracetistory
,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use she was taken out of man [vir]. (2:23)

 

AC.158

 

사람(man)은 속 사람을 뜻하며, 같은 말로 하면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을 뜻한다는 것이 이사야서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man signifies the internal man, or what is the same, one who is intelligent and wise, is plain from Isaiah:

 

내가 본즉 한 사람도 없으며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에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 (41:28) I behold, and there is no man [vir], even among them, and there is no counselor, (Isa. 41:28)

 

이는 지혜롭고 총명한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또한 예레미야서에서도 이르기를, meaning none wise and intelligent. Also in Jeremiah: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5:1) Run ye to and fro through the streets of Jerusalem, and see if ye can find a man, if there be any executing judgment, seeking the truth. (Jer. 5:1)

 

여기서 공의를 행하는 자(One who executes judgment)는 지혜로운 사람을 뜻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one who seeks the truth)는 총명한 사람을 뜻합니다. One who executes judgment” means a wise person; and “one who seeks the truth,” an intelligent one.



해설

 

AC.158은 앞 절들에서 사용된 ‘사람’이라는 단어가 ‘성별이나 일반적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명확히 ‘속 사람’, 곧 ‘지혜와 총명을 지닌 상태’를 뜻한다는 점을 확정해 주는 단락입니다. 이는 창2:23-24를 해석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기준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구절을 통해, 말씀에서 ‘사람(vir)이 없다고 할 때, 그것이 인구의 부재를 뜻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없다’는 말은 곧 ‘지혜와 총명이 사라진 상태’를 뜻합니다. 모사가 없다는 말도 같은 맥락으로, 판단과 분별의 중심이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의 표현은 더욱 분명합니다. ‘공의를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을 한다는 뜻이 아니라, ‘지혜로 판단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또한 ‘진리를 구한다’는 것은 정보나 지식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살아 움직이는 상태’, 곧 총명을 뜻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사람’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창세기 2장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앞 절에서 ‘여자’가 ‘아내’가 되고,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는 말이 나온 뒤, 곧이어 ‘사람이 부모를 떠나’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여기서 ‘사람’은 단순한 남성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속 사람이 자기의 own과 결합하는 주체’, 곧 지혜와 총명을 가진 내적 중심을 뜻합니다.

 

따라서 AC.158은 창2의 흐름을 이렇게 정리해 줍니다. own이 살아나 ‘아내’가 되었고, 이제 그것과 결합하는 주체는 ‘사람’, 곧 속 사람입니다. 이는 본능적 결합이나 감정적 결합이 아니라, ‘의식과 인식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결합’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결합은 더욱 강력해지며, 동시에 이후에 나타날 위험도 함께 커집니다.

 

이 단락은 짧지만, 창2:24를 이해하기 위한 ‘해석의 문법’을 제공하는 핵심 고리입니다. 다음 AC.159에서는 이 결합이 ‘부모를 떠난다’는 말로 어떻게 확장되며, 질서 전체의 이동을 뜻하게 되는지가 이어서 밝혀지게 됩니다.

 

 

심화

 

1. ‘41:28

 

 

AC.158, 심화 1, ‘사41:28’

AC.158.심화 1. ‘사41:28’ 내가 본즉 한 사람도 없으며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에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 (사41:28) I behold, and there is no man [vir], even among them, and there is no counselor, (Isa. 41:28)

bygrace.kr

 

2. ‘5:1

 

 

AC.158, 심화 2, ‘렘5:1’

AC.158.심화 2. ‘렘5: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

bygrace.kr

 

3. ‘wise’, ‘intelligent

 

 

AC.158, 심화 3, ‘wise’, ‘intelligent’

AC.158.심화 3. ‘wise’, ‘intelligent’ 스베덴보리 용어에서 ‘wise’와 ‘intelligent’는 서로 가까우면서도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intelligent’는 진리를 이해하고 분별하는 사람

bygrace.kr

 

 

 

AC.159, 창2:23, ‘속 사람, 겉 사람을 구별 못하게 된 천적 인간의 후손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bygrace.kr

 

AC.157, 창2:23,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 own 관련 여러 구절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57.심화

 

4. ‘삼하5:1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삼하5:1) Behold, we are thy bone and thy flesh. (2 Sam. 5:1) (AC.157)

 

 

이 구절이 AC.157에 인용된 이유 역시, ‘뼈와 살’이라는 표현이 단순 혈연 확인이 아니라, 같은 생명과 같은 질서 안에 속한 결합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삼하5:1에서 이스라엘 지파들이 다윗에게 ‘우리는 왕의 한 골육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같은 민족이라는 뜻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는 당신과 같은 생명 안에 속하며, 당신의 통치 질서와 하나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선언에 가깝습니다.

 

AC.157의 문맥에서 스베덴보리는 ‘’와 ‘’을 영적 상응으로 읽습니다. ‘’는 인간 안의 외적 진리 구조, 곧 지탱하고 형태를 유지하는 것을 뜻하고, ‘’은 그 안에 흐르는 살아 있는 선과 affection을 뜻합니다. 따라서 ‘뼈와 살’은 단순 육체가 아니라, 진리와 선이 결합된 살아 있는 인간 전체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우리는 왕의 뼈와 살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 정치적 충성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다윗은 자주 주님, 특히 왕 되신 주님과 그분의 신적 진리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영적으로 보면, 교회가 주님의 통치 아래 하나 되기를 인정하는 장면처럼 읽힙니다. 즉, 같은 선과 진리 안에 속한 결합의 고백입니다.

 

또 여기에는 ‘통치’의 성격도 드러납니다. 세상 통치는 강압과 외적 권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 천국적 통치는 같은 생명 안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지파들은 다윗을 단순 힘 있는 지도자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본질적으로 연결된 존재’로 받아들입니다. 말씀에서 이런 ‘골육’의 표현은 언제나 단순 친족 이상의 깊은 결합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창2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와도 흐름이 이어집니다. 거기서 그것은 남자와 여자, 곧 진리와 선의 결합을 뜻했다면, 여기서는 왕과 백성, 곧 주님과 교회의 결합을 나타냅니다. 결국 AC.157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뼈와 살’이라는 표현이 말씀 전체에서 같은 생명, 같은 선과 진리, 같은 영적 질서 안의 결합을 뜻하는 상징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AC.157, 창2:23,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 own 관련 여러 구절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bygrace.kr

 

AC.157, 심화 3, ‘삿9:2’

AC.157.심화 3. ‘삿9:2’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57.심화

 

3. ‘9:2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9:2) Remember that I am your bone and your flesh. (Judges 9:2) (AC.157)

 

 

이 구절이 AC.157에 인용된 이유도, 말씀에서 뼈와 살’이라는 표현이 단순 혈연관계를 넘어, 같은 본성과 같은 생명 질서 안에 속함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9:2에서 아비멜렉은 세겜 사람들에게 나는 너희의 골육이다’라고 말하면서 자신과 그들 사이의 친밀성과 동일성을 강조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한 혈연 호소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런 표현을 영적 상응의 관점에서 읽습니다.

 

AC.157의 문맥에서 ’는 보다 외적이고 지탱하는 진리 구조를, ‘’은 살아 있는 선과 affection을 뜻합니다. 그래서 뼈와 살’은 단순 육체 조합이 아니라, 진리와 선이 결합된 살아 있는 인간 전체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너는 내 뼈요 살이다’라는 말은, ‘너와 나는 같은 생명 안에 속한다’, ‘같은 사랑과 같은 질서 안에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사기 9장의 경우는 조금 더 의미심장합니다. 아비멜렉은 이 표현을 이용해 사람들의 affection과 결속감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려 합니다. 다시 말해, ‘같은 골육’이라는 표현은 원래는 생명의 친밀한 결합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그것이 자연적, 정치적 목적에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보면 이것은 외적 결합이 내적 결합을 흉내 내는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말씀에서 뼈와 살’이라는 표현 자체는 본래 선과 진리, 사랑과 이해의 결합을 뜻하는 깊은 상징인데, 인간은 그것을 자연적 유대나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 혈연 언급이 아니라, 인간이 같은 생명’의 언어를 어떻게 자기편 만들기의 수단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 구절은 창2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과 연결됩니다. 2에서는 그것이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본질적 결합을 뜻했다면, 여기서는 그 표현이 겉 사람 수준으로 내려와 정치적 설득과 자연적 연대의 언어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런 경우에도 여전히 그 표현 속의 본래 영적 의미를 읽어 냅니다. 곧, 인간은 본능적으로 같은 생명 안에 속하고 싶어 하는 존재’이며, 진짜 천국적 결합은 혈연이 아니라 같은 선과 진리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AC.157, 심화 4, ‘삼하5:1’

AC.157.심화 4. ‘삼하5:1’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삼하5:1) Behold, we are thy bone and thy flesh. (2 Sam. 5:1) (AC.157) 이 구절이

bygrace.kr

 

AC.157, 심화 2, ‘겉 사람과 속 사람의 결합’

AC.157.심화 2. ‘겉 사람과 속 사람의 결합’ 야곱은 이후 교회의 외적 차원과 연결되는 인물인데, ‘뼈와 살’이라는 표현은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에도 결합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AC.15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57.심화

 

2. ‘겉 사람과 속 사람의 결합

 

야곱은 이후 교회의 외적 차원과 연결되는 인물인데, ‘뼈와 살이라는 표현은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에도 결합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AC.157 심화 1)

 

 

스베덴보리에게서 창세기의 인물들은 단순 역사 인물이 아니라, 인간 안의 여러 영적 상태들과 교회의 여러 차원을 표상합니다. 그 가운데 야곱은 특별히 ‘겉 사람’ 혹은 교회의 외적 차원과 깊이 연결되는 인물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보다 천적인 상태, 이삭은 내적, 합리적 차원, 야곱은 실제 삶과 행위, 자연적 인간의 차원과 많이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야곱은 ‘삶의 현장 속 인간’을 대표합니다. 아직 완전히 속 사람과 하나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주님의 질서 안으로 이끌릴 수 있는 겉 사람입니다.

 

그래서 라반이 야곱에게 ‘너는 참으로 내 뼈요 살이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단순 친척 확인 이상의 뜻을 가집니다. AC.157의 흐름 속에서 ‘’는 외적 진리 구조를, ‘’은 그 안에 살아 있는 선과 affection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뼈와 살’이라는 표현은 단순 혈연이 아니라, 서로 같은 생명 질서 안에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야곱이 완전히 천적 인간도 아니고, 아직 많은 자연성과 자기 중심성을 가진 상태라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버려진 존재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겉 사람 자체를 악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겉 사람은 속 사람과 결합될 때 비로소 살아납니다. 문제는 겉 사람이 자기 자신만으로 독립하려 할 때입니다.

 

그래서 ‘뼈와 살’이라는 표현은, 야곱 같은 겉 사람 안에도 속 사람과 연결될 수 있는 구조가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겉 사람은 ‘’처럼 비교적 단단하고 외적인 구조를 가집니다. 반면 속 사람은 ‘’처럼 생명과 affection을 공급합니다. 둘은 서로 다른 차원이지만, 결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듭남(regeneration)이란 바로 이 결합 과정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진리를 머리로만 아는 상태는 아직 겉 사람 수준에 머무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사랑과 결합해 실제 삶이 되기 시작하면, 속 사람의 생명이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때 겉 사람은 더 이상 단순 껍데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 구조가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야곱 이야기를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대부분 인간은 처음부터 천적 상태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야곱처럼 자연적이고 계산적이며, 자기 보호적인 상태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런 겉 사람까지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점차 속 사람과 결합시키십니다.

 

따라서 ‘뼈와 살’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우리는 친척이다’라는 말이 아니라, 겉 사람도 속 사람과 연결될 수 있고, 자연적 삶도 주님의 생명을 담는 그릇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의 표현으로 읽힙니다. 이것이 AC.157에서 이 표현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AC.157, 심화 3, ‘삿9:2’

AC.157.심화 3. ‘삿9:2’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

bygrace.kr

 

AC.156, 심화 1, ‘창29:14’

AC.156.심화 1. ‘창29:14’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창29:14) Surely thou art my bone and my flesh. (Gen. 29:14) (AC.157) 이 구절이 AC.157에 인용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57.심화

 

1. ‘29:14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29:14) Surely thou art my bone and my flesh. (Gen. 29:14) (AC.157)

 

 

이 구절이 AC.157에 인용된 이유는, 말씀에서 내 혈육(my bone and my flesh)이라는 표현이 단순 혈연관계를 넘어, 같은 본성과 같은 생명에 속한 결합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AC.157의 흐름에서 스베덴보리는 ‘’와 ‘’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계속 설명하고 있는데, 특별히 ‘’는 보다 외적이고 지탱하는 진리 구조를, ‘’은 그 안에 살아 있는 선과 affection을 뜻합니다. 따라서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는 말은 단순 친척 확인이 아니라, ‘너와 나는 같은 생명 질서 안에 있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29:14에서 라반은 야곱을 단순 외부 손님으로 대하지 않고, 자기와 같은 혈육, 곧 자기 생명권 안에 속한 자로 인정합니다. 스베덴보리식 속뜻에서는 이것이 단순 가족 관계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야곱은 이후 교회의 외적 차원과 연결되는 인물인데, ‘뼈와 살’이라는 표현은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 사이, 곧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에도 결합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특히 AC.149 이후 스베덴보리는 계속 ‘’와 ‘’을 영적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에서는 죽은 상태의 인간이 주님의 breath로 살아나는 모습이 나오고, 주님의 부활 장면에서는 ‘영은 살과 뼈가 없다’고 하심으로써, 신적 인성의 실제성과 충만함을 보여줍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뼈와 살’은 단순 육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 전체 구조를 뜻합니다.

 

그래서 AC.157에서 이 구절이 인용되는 이유는, 참된 결합은 단순 외적 접촉이 아니라 같은 선과 진리, 같은 생명 질서 안에 속하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만 있으면 차갑고 딱딱한 구조에 불과하지만, ‘’이 함께할 때 거기에 살아 있는 affection과 생명이 들어옵니다. 즉, 진리와 선의 결합이 완전한 인간을 이룹니다.

 

또 이 표현은 앞선 창2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와도 연결됩니다. 거기서도 핵심은 단순 육체적 동일성이 아니라, 서로 같은 생명과 본질 안에서 결합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라반의 말 역시, 말씀 전체의 상응 체계 안에서는 ‘같은 생명 안에 속함’, ‘같은 affection과 진리 안에서 연결됨’을 뜻하는 표현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AC.157, 심화 2, ‘겉 사람과 속 사람의 결합’

AC.157.심화 2. ‘겉 사람과 속 사람의 결합’ 야곱은 이후 교회의 외적 차원과 연결되는 인물인데, ‘뼈와 살’이라는 표현은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에도 결합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AC.15

bygrace.kr

 

AC.157, 창2:23,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 고대 세계에 통용되던, own 관련 언어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use she was taken out of man [vir]. (2:23)

 

AC.157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이 그 안에 속 사람이 들어 있는, 겉 사람의 own을 뜻하였기 때문에, 고대에는 자기의 사람들, 곧 같은 집이나 같은 가족에 속한 사람들이나, 어떤 정도로든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라반은 야곱에게 말하기를, Inasmuch as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 signified the own of the external man in which was the internal, therefore in ancient times all those were called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 who could be called their own [proprii], and were of one house, or of one family, or in any degree of relationship. Thus Laban said of Jacob,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29:14) Surely thou art my bone and my flesh. (Gen. 29:14)

 

아비멜렉도 자기 어머니의 형제들과 외조부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And Abimelech said of his mother’s brethren, and of the family of the house of his mother’s father,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삿9:2) Remember that I am your bone and your flesh. (Judges 9:2)

 

또한 이스라엘 지파들이 다윗에게 말하기를, The tribes of Israel also said of themselves to David,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삼하5:1) Behold, we are thy bone and thy flesh. (2 Sam. 5:1)



해설

 

AC.157은 앞 절의 선언, 곧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 ‘시적 표현이나 개인적 감정의 언어가 아니라’, 고대 세계 전체에 통용되던 ‘영적, 사회적 인식의 언어’였음을 보여주는 단락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성경 안의 실제 역사적 용례들을 통해, 이 표현이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분명히 합니다.

 

핵심은 이 표현이 ‘자기의 사람들(their own, [proprii])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단순한 친근감이나 애정 표현이 아니라, ‘같은 생명권, 같은 소속, 같은 정체성 안에 있다는 인식’을 뜻합니다. 즉 ‘너는 나와 하나의 own에 속한다’는 선언입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한 말은 혈연적 사실을 넘어, 야곱을 자기 집안의 일부로 완전히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아비멜렉의 말 역시 정치적 설득의 언어이지만, 그 근거는 혈연적 자기 동일성에 있습니다. 다윗에게 한 이스라엘 지파들의 말도 마찬가지로, 왕과 백성이 단순한 계약 관계가 아니라 ‘하나의 몸과 같은 관계’임을 선언하는 말입니다.

 

이 모든 용례에서 공통적인 것은, ‘뼈와 살’이라는 표현이 ‘분리될 수 없는 결속’을 뜻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외적 연합이 아니라, own으로 묶인 연합입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매우 강력합니다. 한편으로는 보호와 충성의 언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적 거리두기가 불가능한 상태’를 뜻하기도 합니다.

 

이 점이 창2의 문맥에서는 결정적으로 중요해집니다. 앞 절에서 ‘여자’가 ‘아내’로 불리고, 이제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언어가 등장함으로써, 인간의 own은 더 이상 외부에 있는 어떤 것으로 취급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 나의 집, 나의 몸, 나의 생명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것이 바로 다음 절(AC.158-159)로 이어지는 논리적, 영적 다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는 말은, 단순히 결혼제도의 기원이 아니라, ‘자기의 own과의 결합이 최종적으로 정당화되는 단계’를 뜻합니다. AC.157은 그 결합이 왜 그렇게 강력하고 되돌리기 어려운지를, 고대 언어의 실제 사용을 통해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심화

 

1. ‘29:14

 

 

AC.156, 심화 1, ‘창29:14’

AC.156.심화 1. ‘창29:14’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창29:14) Surely thou art my bone and my flesh. (Gen. 29:14) (AC.157) 이 구절이 AC.157에 인용

bygrace.kr

 

2. ‘겉 사람과 속 사람의 결합

 

 

AC.157, 심화 2, ‘겉 사람과 속 사람의 결합’

AC.157.심화 2. ‘겉 사람과 속 사람의 결합’ 야곱은 이후 교회의 외적 차원과 연결되는 인물인데, ‘뼈와 살’이라는 표현은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에도 결합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AC.15

bygrace.kr

 

3. ‘9:2

 

 

AC.157, 심화 3, ‘삿9:2’

AC.157.심화 3. ‘삿9:2’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

bygrace.kr

 

4. ‘삼하5:1

 

 

AC.157, 심화 4, ‘삼하5:1’

AC.157.심화 4. ‘삼하5:1’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삼하5:1) Behold, we are thy bone and thy flesh. (2 Sam. 5:1) (AC.157) 이 구절이

bygrace.kr

 

 

 

AC.158, 창2:23, ‘man [vir]’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bygrace.kr

 

AC.156, 창2:23,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AC.156-159)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use she was taken out of man [vir]. (2:23)

 

AC.156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은 겉 사람의 own을 뜻합니다. 여기서 (bone)는 아직 그다지 살아나지 않은 own을 뜻하고, ‘(flesh)은 살아난 own을 뜻합니다. 또한 남자(Man)는 속 사람을 뜻하며, 이어지는 다음 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이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결합되었기 때문에, 이전에 여자(woman)라 했던 own을 여기서는 아내(wife)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Now)라는 말은 상태가 변화되었기 때문에 이때에 이렇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 signify the own of the external man; “bone,” this own not so much vivified, and “flesh,” the own that is vivified. Man, moreover, 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 from his being so coupled with the external man as is stated in the subsequent verse, the own which was before called “woman” is here denominated “wife.” “Now” signifies that it was thus effected at this time because the state was changed.



해설

 

AC.156은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는 선언이 단순한 감탄이나 결혼 서약의 시초가 아니라, ‘인간 내적 구조의 변화가 언어로 표출된 장면’임을 밝히는 단락입니다. 이 말은 인식의 언어가 아니라, 상태의 언어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철저히 ‘own’의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는 여전히 생명이 적은 own이며, ‘’은 주님에 의해 살아난 own입니다. 즉 이 문장은 own이 완전히 제거되었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own이 ‘살아난 정도의 차이’를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적 상태에서 이미 벗어나,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미묘한 징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전환은 명칭의 변화입니다. 이전까지 ‘여자’라 하던 것을 이제는 ‘아내’라고 합니다. 이 변화는 역할이나 위계의 변화가 아니라, ‘결합 방식의 변화’를 뜻합니다. ‘남자’, 즉 ‘사람’은 여전히 속 사람을 뜻하고, ‘아내’는 겉 사람의 own입니다. 이제 이 둘은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 상호 결합된 상태로 인식됩니다. own이 더 이상 외부에 있는 어떤 것으로 보이지 않고, ‘나 자신’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합니다.

 

이제’라는 말은 이 모든 것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상태의 변화에 따른 필연적 결과’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전 상태에서는 own이 ‘여자’로서 어느 정도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own이 속 사람과 하나의 몸처럼 인식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후에 나타날 더 큰 위험의 전조입니다. own이 살아나되, 너무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AC.156은 따라서 중립적인 진술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매우 긴장된 지점에 서 있습니다. 주님에 의해 살아난 own이 ‘아내’로 불리며 결합되었으나, 이 결합은 아직 ‘시험을 거치지 않은 결합’입니다. 그래서 바로 다음 단락들에서는 이 결합이 어떻게 사랑의 언어로 정당화되고, 동시에 질서의 한계를 넘게 되는지가 이어서 드러나게 됩니다.

 

지금 이 절은 창2의 정서적 정점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전환의 경고등’과도 같은 자리입니다. 이 긴장을 품은 채로 AC.157-159로 넘어가게 되면, ‘버리고 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는 말이 왜 그토록 결정적인 문장이 되는지가 더욱 또렷해질 것입니다.

 

 

 

AC.157, 창2:23,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 고대 세계에 통용되던, own 관련 언어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bygrace.kr

 

AC.155, 창2:22, ‘말씀 자체의 가장 깊은 핵심을 직접적으로 열어 보이는 단락’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5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