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내소 안에 감람나무로 두 그룹을 만들었는데 그 높이가 각각 십 규빗이라24한 그룹의 이쪽 날개도 다섯 규빗이요 저쪽 날개도 다섯 규빗이니 이쪽 날개 끝으로부터 저쪽 날개 끝까지 십 규빗이며25다른 그룹도 십 규빗이니 그 두 그룹은 같은 크기와 같은 모양이요26이 그룹의 높이가 십 규빗이요 저 그룹도 같았더라27솔로몬이 내소 가운데에 그룹을 두었으니 그룹들의 날개가 퍼져 있는데 이쪽 그룹의 날개는 이쪽 벽에 닿았고 저쪽 그룹의 날개는 저쪽 벽에 닿았으며 두 날개는 성전의 중앙에서 서로 닿았더라28그가 금으로 그룹을 입혔더라29내 외소 사방 벽에는 모두 그룹들과 종려와 핀 꽃 형상을 아로새겼고,32감람나무로 만든 그 두 문짝에 그룹과 종려와 핀 꽃을 아로새기고 금으로 입히되 곧 그룹들과 종려에 금으로 입혔더라(왕상6:23-29, 32)
왕상6:23-29, 32가AC.308에 인용된 이유는, 성전의 가장 안쪽인 내소 뿐 아니라 내소와 외소의 벽과 문에까지 새겨진 ‘그룹들’이, 주님의 가장 깊은 거룩한 것에서부터 교회의 외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보호하고 질서 있게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출25의 그룹들이 증거궤와 속죄소 위에서 가장 내적 거룩함을 지키고, 출26의 그룹들이 성막의 휘장과 경계를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왕상6의 그룹들은 그 보호가 성전 전체의 구조 안에 확장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먼저 두 그룹은 ‘내소 안’에 놓였습니다. 내소는 성전의 가장 안쪽 방인 지성소이며, 말씀의 속뜻으로는 주님의 신적 선과 가장 내적인 천적 천국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내소 가운데 놓인 두 그룹은 사람이 자신의proprium과 감각 및 기억 지식으로 가장 내적인 신적, 천적인 것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보호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나타냅니다. 창3:24에서 그룹들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생명나무가 주님과 주님께 속한 천적 생명을 뜻하듯, 성전의 내소도 주님의 가장 깊은 임재와 천적인 것들을 뜻하므로, 그곳에 그룹들이 놓인 것은AC.308의 설명을 직접적으로 뒷받침합니다.
두 그룹이 ‘감람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감람나무는 천적 사랑의 선, 곧 주님을 사랑하는 데서 나오는 가장 내적 선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그룹들이 감람나무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거룩한 것을 지키시는 주님의 섭리가 두려움이나 정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적 사랑의 선에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이 신앙의 아르카나 안으로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는 것은 그를 배척하거나 지식을 독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거룩한 것을profane, 스스로를 파멸시키지 않도록 사랑으로 보호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룹의 보호는 본질적으로 사랑의 보호입니다.
각 그룹의 높이가 십 규빗이고, 날개 끝에서 끝까지도 십 규빗이었다는 점은 그 보호의 충만함과 완전함을 나타냅니다. 말씀에서 ‘십’(10)은 리메인스와 충만한 상태를 뜻하며, 여기서는 주님의 섭리가 부분적이거나 우연하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 전체를 완전하게 보존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두 그룹의 크기와 모양이 같았다는 것도 같은 의미를 강화합니다. 주님의 섭리는 서로 모순되거나 불균형하게 작용하지 않고, 신적 질서 안에서 완전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작용합니다.
그룹들의 날개가 내소 전체를 가득 채웠다는 사실은 특별히 주목할 만합니다. 한쪽 그룹의 바깥 날개는 한쪽 벽에 닿고, 다른 그룹의 바깥 날개는 반대편 벽에 닿았으며, 안쪽 날개들은 성전 중앙에서 서로 맞닿았습니다. 따라서 내소 안에는 그룹들의 날개가 미치지 않는 공간이 없었습니다. 이는 주님의 섭리가 가장 내적 거룩함의 어느 한 부분만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체를 감싸고 있음을 뜻합니다. 사람의 눈에는 주님의 섭리가 보이지 않거나 어떤 곳에서는 작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주님의 보호는 가장 내적인 것에서부터 가장 바깥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빈틈없이 미치고 있습니다.
‘날개’는 말씀에서 능력과 보호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날개가 벽에서 벽까지 펼쳐졌다는 것은 주님의 신적 능력이 거룩한 것을 온전히 보호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 보호는 거룩한 것을 사람에게서 빼앗는 폐쇄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신의proprium으로부터 거룩한 것 안으로 들어가 그것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이용하지 못하도록 막는 보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겸손히 받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필요한 만큼 열리지만, 자기 지성과 감각적 추론으로 침입하려는 사람에게는 닫히는 것입니다.
두 그룹의 날개가 성전 중앙에서 서로 맞닿았다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룹들은 서로 분리되어 각자 한쪽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중앙에서 연결되어 하나의 완전한 보호 질서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주님의 섭리가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서로 무관하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과 마지막, 가장 안쪽과 가장 바깥쪽, 선과 진리가 하나의 목적 아래 결합되어 작용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목적은 사람이 거룩한 것을profane하지 않도록 보호하면서, 동시에 그가 받을 수 있는 만큼 주님과 천국에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룹들이 금으로 입혀졌다는 사실은 이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말씀에서 ‘금’은 천적 사랑의 선을 뜻합니다. 그룹의 재료인 감람나무도 천적 사랑의 선을 표상하고, 그 위에 입힌 금도 같은 천적 선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그룹들의 안과 밖이 모두 사랑의 선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이 됩니다. 이는 사람의 접근을 제한하고 거룩한 것을 감추시는 주님의 섭리가 겉으로는 엄격한 금지처럼 보여도, 그 안과 밖의 본질은 모두 신적 사랑임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제한은 사랑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취하는 보호의 형식입니다.
왕상6:29에서는 내소와 외소의 사방 벽에 그룹들과 종려, 그리고 핀 꽃 형상이 아로새겨졌다고 합니다. 이 구절은 그룹들의 의미를 지성소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내소’는 교회와 사람의 더 내적인 것들을, ‘외소’는 그보다 외적인 것들을 표상합니다. 내소와 외소의 모든 벽에 그룹들이 새겨졌다는 것은 주님의 섭리가 가장 내적인 천적 상태뿐 아니라 영적 상태와 자연적 상태에도 두루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어느 단계에 있든 주님의 섭리 밖에 있지 않습니다. 가장 깊은 진리를 받는 사람도 보호받고, 아직 외적 진리와 예배 안에 있는 사람도 그가profanation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받습니다.
벽에 새겨진 ‘종려’와 ‘핀 꽃’도 그룹들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종려는 선에서 나오는 영적 진리와 그 승리를, 핀 꽃은 진리와 지식이 처음 생겨나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그룹들과 종려, 그리고 핀 꽃이 함께 새겨진 것은, 주님의 섭리가 단순히 거룩한 것의 접근을 막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자라고 열매 맺도록 보호한다는 뜻입니다. 그룹은 생명을 차단하는 표상이 아니라, 참된 생명이 올바른 질서 안에서 자라도록 지키는 표상입니다.
그룹들이 내소와 외소 사방 벽에 새겨졌다는 것은 주님의 섭리가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에 함께한다는 점도 보여줍니다. 사람 안에서 진리가 꽃처럼 처음 피어날 때에도 주님의 섭리가 보호하며, 그 진리가 선과 결합, 종려가 표상하는 승리와 열매에 이를 때에도 주님의 섭리가 보호합니다.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것보다 더 깊은 진리가 너무 일찍 열리지 않도록 하시고, 이미 받은 진리를 악한 삶으로 더럽히지 않도록 내적으로 경고하시며, 때로는 그 진리에 대한 기억이나 이해를 흐리게 하심으로써 더 깊은profanation을 막기도 하십니다.
32절에서는 내소로 들어가는 감람나무 문짝에도 그룹과 종려, 핀 꽃이 아로새겨지고 금으로 입혀졌다고 합니다. ‘문’은 안과 밖을 연결하는 매개이며, 무엇이 안으로 들어가고 나오는지를 결정하는 접근 수단을 뜻합니다. 따라서 내소의 문에 그룹들이 새겨졌다는 것은, 가장 내적인 거룩함에 이르는 접근 자체가 주님의 섭리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단지 지식을 많이 쌓거나 논리적으로 추론한다고 해서 내소가 표상하는 천적 아르카나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열어 주시고, 사람의 사랑과 삶이 준비되었을 때에만 그 문을 통하여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문짝도 감람나무로 만들어지고 금으로 입혀졌습니다. 이는 가장 내적인 거룩함에 이르는 길이 오직 사랑의 선을 통해서만 열린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기 지성으로 내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통하여 들어갑니다. 신앙의 아르카나는 호기심이나 지적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선한 삶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룹들이 문에 새겨졌다는 것은, 자기 사랑과 감각적 추론으로 들어가려는 길은 막히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선을 통해 들어가는 길은 보호되고 열려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 구절은AC.308에서 언급한 유대인들의 상태와도 직접 연결됩니다. 유대인들은 외적으로는 이 성전과 그룹들, 그리고 금과 감람나무, 종려와 꽃을 보았지만, 그것들이 주님의 오심과 천국, 그리고 속 사람과 말씀의 속뜻을 표상한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이 내적 의미가 감추어진 것은 주님의 거룩한 것을 그들에게 주지 않으려는 처분이 아니라, 그들이 그것을 알고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안에서 거부,profane하지 않도록 보호하신 섭리였습니다. 그들은 성전의 표상 안에는 있었지만, 그 표상의 속뜻은 마치 내소의 문과 그룹들 뒤에 있는 것처럼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출25의 그룹들과 비교하면 의미의 발전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출25에서는 작은 증거궤 위의 그룹들이 속죄소를 덮고 있었지만, 왕상6에서는 거대한 그룹들의 날개가 성전 내소 전체를 덮고 있습니다. 이는 같은 주님의 섭리가 성막에서 성전으로, 한 기물의 보호에서 성전 전체의 보호로 확대되어 표상된 것입니다. 그러나 본질은 동일합니다. 증거궤와 내소가 모두 주님과 주님께 속한 가장 거룩한 천적인 것들을 뜻하므로, 그 위와 그 안을 채우고 있는 그룹들은 사람이 자신의proprium으로 그 거룩한 것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뜻합니다.
창3:24와의 연결도 분명합니다. 에덴동산의 그룹들은 생명나무의 길을 지켰고, 솔로몬 성전의 그룹들은 내소와 그 문과 벽을 가득 채우며 지켰습니다. 생명나무와 내소는 모두 주님과 천적 생명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창3의 그룹들과 왕상6의 그룹들은 동일한 속뜻을 가집니다. 주님께서는 생명의 길을 폐지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profane, 영원히 파멸하지 않도록 지키셨습니다. 성전의 그룹들도 내소를 없애거나 비워 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보존하면서 그 접근을 질서 있게 제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왕상6:23-29, 32가AC.308에 인용된 이유는, 그룹들이 주님의 가장 내적 거룩함을 보호할 뿐 아니라 성전의 내소와 외소, 벽과 문, 곧 교회와 사람의 모든 내적, 외적 단계에 걸쳐 주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감람나무와 금은 그 보호의 본질이 천적 사랑의 선임을 나타내고, 내소 전체를 채운 날개는 그 보호가 완전함을 나타내며, 벽과 문에 새겨진 그룹들은 거룩한 것에 이르는 모든 과정과 접근이 주님의 질서 아래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 인용의 중심 메시지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성전의 그룹들은 사람이 신앙의 아르카나 안으로 자신의proprium과 감각, 기억 지식을 가지고 광적으로 들어가 그것들을profane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표상합니다. 그러나 그 섭리는 사람을 거룩한 것에서 영원히 배제하는 냉혹한 장벽이 아니라, 사랑의 선에서 나와 거룩한 것을 온전히 보존하고, 사람이 합당한 상태가 되었을 때, 주님으로부터 그것을 받을 수 있도록 지키시는 자비로운 보호입니다.
1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 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31너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짜서 휘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정교하게 수 놓아서(출26:1, 31)
출26:1, 31이AC.308에 인용된 이유는, ‘그룹들’이 가장 안쪽의 증거궤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거룩한 것에 접근하는 모든 과정과 경계를 보호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성막의 휘장은 단순히 공간을 나누거나 성막을 덮는 천이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으로는 성막 전체가 천국과 교회, 그리고 거듭난 사람을 표상하며, 성막 안의 여러 공간과 기물은 사람 안에 있는 외적인 것에서부터 가장 내적인 것에 이르기까지의 질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성막의 휘장은 서로 다른 영적 상태와 단계를 구분하는 경계를 뜻합니다. 사람은 외적인 상태에서 곧바로 가장 내적인 거룩함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주님께서 정하신 질서에 따라 단계적으로 인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휘장들 위에 그룹들이 수놓아져 있습니다.AC.308은 이 사실을 통해, 거룩한 것에 대한 주님의 보호가 증거궤나 지성소와 같은 가장 내적인 곳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섭리는 사람이 진리와 선을 처음 접하는 외적 단계에서부터 가장 깊은 천적인 것에 가까이 가는 단계까지 모든 과정에 함께합니다. 사람이 어느 단계에서든 자신의proprium과 감각 및 기억 지식으로 거룩한 것을 침범, 왜곡하거나profane하지 못하도록 지키시는 것입니다.
출26:1의 열 폭 휘장은 성막 전체를 이루는 가장 안쪽의 휘장들입니다. 이 휘장들 위에 그룹들이 정교하게 수놓아졌다는 것은, 성막 전체, 곧 천국과 교회의 질서 전체가 주님의 섭리 아래 보호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룹들은 어느 한 출입구에만 서 있는 문지기가 아니라, 거룩한 질서 전체에 두루 존재하는 보호의 표상입니다. 다시 말하면 거룩한 것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것을 보존하고 지키시는 주님의 섭리도 함께 있습니다.
출26:31의 휘장은 특별히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입니다. 지성소는 주님의 가장 직접적인 임재와 가장 내적인 천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이 휘장 위에 그룹들이 수놓아졌다는 것은, 사람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가장 깊은 신적, 천적인 것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막혀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 막힘은 사람을 배척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것을 알고도profane, 스스로를 파멸시키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은 창3:24의 ‘생명나무의 길’과 같은 기능을 합니다. 창3에서는 그룹들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고 있으며, 출26에서는 그룹들이 지성소로 들어가는 휘장에 수놓아져 있습니다. 두 장면 모두 사람이 자신의 능력과 지성으로 가장 내적 거룩함 안에 들어가는 것을 막으시는 주님의 섭리를 나타냅니다. 생명나무의 길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지켜지고 있듯이, 지성소도 사라진 것이 아니라 휘장 뒤에서 보호되고 있습니다.
휘장에 사용된 재료와 색들도 이 의미를 더 깊게 합니다. 가늘게 꼰 베 실은 선에서 나온 순수한 진리를, 청색은 천적인 것에 대한 애정을, 자색은 천적 선을, 홍색은 영적 선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이 휘장들은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선과 진리로 이루어진 천국의 질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선과 진리의 조직 속에 그룹들이 함께 수놓아져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섭리가 선과 진리의 질서 바깥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질서 자체 안에 내재하여 거룩한 것을 보존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그룹들이 휘장 위에 ‘정교하게 수놓아졌다’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그룹들은 완성된 휘장 위에 나중에 붙인 별도의 장식물이 아니라, 휘장의 직조 과정에서 그 무늬 안에 함께 짜였습니다. 이는 주님의 섭리가 사후에 덧붙여진 임시 조치가 아니라, 천국과 교회의 질서 안에 처음부터 마련되어 있는 보호의 원리임을 나타냅니다. 주님께서는 악이 생긴 뒤에야 뒤늦게 대응하시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모든 상태와 가능성을 보시고, 사람을 보호하는 질서를 마련하십니다.
출26:1의 휘장들과 출26:31의 휘장은 서로 다른 범위에서 같은 진리를 보여줍니다. 열 폭의 휘장 위에 그룹들이 수놓아진 것은 성막 전체와 그 안의 모든 거룩한 것이 주님의 섭리 아래 있음을 나타내고,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 위에 그룹들이 수놓아진 것은 특별히 가장 내적 거룩함에 대한 접근이 주님의 질서에 따라 제한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는 전체적인 보호를, 다른 하나는 가장 내적 경계에서의 보호를 보여줍니다.
이 인용은 유대교회의 상태와도 직접 연결됩니다. 유대인들은 성막과 휘장과 그룹들을 외적으로는 보고 사용하였지만, 그것들이 주님과 천국, 그리고 교회의 내적인 것들을 표상한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습니다.AC.308에 따르면, 이것은 그들에게 내적 진리를 주시지 않은 냉혹한 처분이 아니라, 그들이 그것을profane하지 않도록 하신 주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외적 표상과 의식은 허락되었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주님의 오심, 사후의 삶, 속 사람, 말씀의 속뜻에 관한 명백한 지식은 감추어졌습니다.
이러한 감춤은 휘장의 기능과 정확히 상응합니다. 휘장은 지성소를 없애지 않으면서도 보이지 않게 하며, 동시에 아무나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유대인들에게도 내적인 거룩한 것들은 존재하고 있었지만, 휘장 뒤에 있는 것처럼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외적인 예배를 통하여 그 거룩한 것들과 표상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그것들을 명백히 이해하고 소유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는 그들의 악한 상태에서 더 깊은profanation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신 보호였습니다.
그러므로 휘장은 단순한 차단이나 단절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휘장은 한편으로는 경계를 만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경계 안쪽에 있는 거룩한 것을 보존합니다. 사람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에는 가리고 막지만, 주님께서 정하신 때와 질서가 되면 열릴 수 있는 경계입니다. 실제로 주님의 강림과 인성의 신성화가 완성되었을 때, 성전 휘장이 찢어진 사건도, 주님으로 말미암아 가장 내적 거룩함에 이르는 길이 열렸음을 표상합니다. 그러나 그 길 역시 사람의proprium과 감각적 추론으로 열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통하여 열립니다.
또한 그룹들이 휘장 위에 있다는 것은 주님의 섭리가 단지 거룩한 것을 사람에게서 감추는 데만 있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섭리는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만큼은 받게 하시고, 받을 수 없는 것은 감추시며, 그가 더 준비되면 다시 더 내적인 것을 열어 주십니다. 거듭남의 모든 과정은 이러한 열림과 감춤의 반복입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천적인 아르카나를 모두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외적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삶으로 행하며, 체어리티 안에 들어간 뒤에야 더 내적 진리가 열립니다.
따라서 그룹들이 휘장 위에 수놓아졌다는 것은 거듭남의 각 단계 사이에 주님의 섭리가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단계를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기억 지식을 많이 쌓았다 해서 곧바로 내적 진리를 이해하는 것도 아니며, 신앙에 관한 많은 교리를 안다고 해서 천적 사랑 안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실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만 그다음 단계의 것을 열어 주십니다. 이것이 그룹들이 휘장의 경계마다 있는 이유입니다.
AC.308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직접적인 목적은 ‘그룹들’이 사람의 신앙 탐구 자체를 막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proprium으로부터’, 그리고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부터 신앙의 아르카나 안으로 광적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으시는 주님의 섭리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있습니다. 휘장 위의 그룹들은 사람이 주님의 질서를 거치지 않고, 가장 내적 거룩함에 접근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거룩한 것은 연구의 대상이기 이전에 삶으로 받아야 할 것이며, 자기 지성으로 소유할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출26:1, 31이AC.308에 인용된 이유는, 그룹들이 성막 전체와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경계에 새겨져 있음으로써, 주님의 섭리가 거룩한 것을 보호하고, 사람의 접근을 질서 있게 조절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룹들은 사람을 거룩한 것에서 영원히 쫓아내는 표상이 아니라, 그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거룩한 것을profane하지 않도록 지키며, 장차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합당한 상태가 되었을 때, 더 내적인 것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그 거룩함을 보존하시는 자비의 표상입니다.
18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19한 그룹은 이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할지며20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21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출25:18-21)
출25:18-21이AC.308에 인용된 이유는, ‘그룹들’이 사람을 거룩한 것에서 영원히 밀어내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거룩한 것에 함부로 접근, 그것을profane하지 못하도록 지키시는 주님의 섭리를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구절에서는 그룹들이 어디에 놓였으며, 무엇을 덮고 있고,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가 매우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그 모든 배치가AC.308의 중심 메시지를 드러냅니다.
먼저 그룹들은 증거궤 위의 ‘속죄소’(on the mercy seat over the ark)두 끝에 놓였습니다. 증거궤 안에는 증거판, 곧 십계명이 들어 있었으므로, 증거궤는 말씀의 신적 진리와 더 깊게는 신적 진리이신 주님을 표상합니다.AC.308은 이 증거궤가 창3의 ‘생명나무’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밝힙니다. 곧 생명나무와 증거궤는 모두 주님과 오직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들, 다시 말해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지혜의 생명을 뜻합니다. 따라서 그룹들이 증거궤 위에 놓였다는 것은, 주님과 주님께 속한 가장 거룩한 것들이 주님의 섭리로 보호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룹들이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그룹들은 속죄소와 별도로 만들어져 나중에 붙여진 것이 아니라, 속죄소 자체에서 쳐서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거룩한 것을 보호하시는 섭리가 주님의 자비와 분리된 별도의 조치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속죄소(the mercy seat)는 주님의 자비와 죄 사함을 표상하고, 그룹들은 거룩한 것을 지키시는 섭리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그룹들의 보호는 냉혹한 차단이나 배제가 아니라, 바로 주님의 자비에서 나오는 보호입니다. 사람이 거룩한 것을profane, 스스로를 파멸시키지 않도록 접근을 제한하시는 것 자체가 속죄소가 나타내는 주님의 자비에 속합니다.
또한 그룹들은 날개를 높이 펴서 속죄소를 덮고 있었습니다. 말씀에서 ‘날개’는 보호와 능력을 뜻하며, 여기서는 특별히 주님의 섭리가 거룩한 것을 덮어 지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 ‘덮음’은 거룩한 것을 완전히 없애거나 영원히 감추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신의proprium과 감각, 그리고 기억 지식으로 거룩한 것 안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진리를 주시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상태와 질서에 따라 진리를 열어 주십니다. 받을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 가장 깊은 진리가 감추어지는 것은 벌이 아니라 보호입니다.
그룹들의 얼굴이 서로를 향하면서 동시에 속죄소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도 같은 의미를 강화합니다. 그들의 시선은 바깥을 향하거나 사람을 위협하는 방향을 향하지 않고, 속죄소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룹들의 기능이 사람을 공격하거나 정죄하는 데 있지 않고, 속죄소가 표상하는 주님의 자비와 거룩함을 섬기고 보호하는 데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룹들의 모든 자세와 방향은 주님의 자비를 중심으로 정돈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룹은 단순한 심판의 표상이 아니라, 자비로운 섭리의 표상입니다.
속죄소가 증거궤 위에 놓이고, 증거판이 궤 안에 들어 있다는 구조도 중요합니다. 가장 안쪽에는 증거판이 있고, 그 위에는 속죄소가 있으며, 속죄소 위에는 그룹들이 있습니다. 이는 신적 진리의 가장 내적 거룩함이 주님의 자비로 덮여 있고, 그 자비의 질서 안에서 섭리로 보호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곧바로 가장 내적인 신적 진리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와 섭리를 통하여 접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기 지성과 감각으로는 증거판이 표상하는 신적 진리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자비와 질서 안에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또한 그룹들이 단순히 접근을 막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과 만나시고 말씀하시는 장소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로 다음 절인 출25:22에서 주님께서는 ‘두 그룹 사이’에서 모세를 만나고 말씀하시겠다 하십니다. 따라서 그룹들이 있다는 것은 계시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계시가 주님의 질서 안에서 보호되고 전달된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신의own으로부터 신앙의 아르카나를 침범해서는 안 되지만, 주님께서는 그룹들 사이에서, 곧 주님의 섭리가 정한 질서와 한계 안에서 사람이 받아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AC.308이 특별히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유대교회의 상태와도 관련됩니다. 유대인들은 성막과 증거궤와 속죄소와 그룹들을 외적으로는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들이 주님과 천국, 그리고 말씀의 속뜻을 표상한다는 사실은 명백히 알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 내적 의미를 분명히 알면서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위한 외적 예배를 계속하였다면, 그 거룩한 진리를profane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표상은 허락하셨으나 그 속뜻은 감추셨습니다. 속죄소 위의 그룹들은 바로 이러한 보호를 가시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것은 창3:24의 그룹들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창3에서는 그룹들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고 있고, 출25에서는 그룹들이 생명나무와 같은 것을 의미하는 증거궤와 속죄소를 덮어 지키고 있습니다. 두 장면 모두 사람이 자신의own으로부터 주님과 천적인 것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는 섭리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지켜지고’ 있듯이, 증거궤의 거룩함도 파괴되거나 제거된 것이 아니라 그룹들 아래에서 보존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이 거룩한 것을 모독하지 않도록 보호하면서도, 장차 주님의 질서 안에서 다시 그것을 받을 가능성을 보존하시는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출25:18-21이AC.308에 인용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증거궤와 증거판은 주님과 주님께 속한 신적, 천적인 것들을, 속죄소는 주님의 자비를, 그 위에서 날개로 덮고 있는 그룹들은 사람이 자신의proprium(own)과 감각, 그리고 기억 지식으로 그 거룩함을 침범하여profane하지 못하도록 지키시는 주님의 섭리를 표상합니다. 더욱이 그룹들이 속죄소와 한 덩이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이러한 제한과 보호가 주님의 자비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비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결국 이 구절은 그룹이 단순한 금지와 차단의 표상이 아니라, 사람이 거룩한 것을profane, 스스로를 파멸시키지 않도록 지키시는 주님의 ‘보호하시는 자비’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에AC.308에 인용된 것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4)
AC.308
앞에서 ‘동쪽’(east)과 ‘에덴동산’(garden of Eden)의 의미를 설명하였으므로, 여기서 다시 오래 머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룹들’(cherubim) 말인데요, 이것은, 만일 이것이 없으면, 사람은 자신의 own으로부터, 그리고 감각과 기억 지식에 속한 것들로부터 신앙의 아르카나(the mysteries of faith) 안으로 미친 듯이 들어가 그것들을 profane,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파멸시킬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막으시는 주님의 섭리를 뜻합니다. 이것은 말씀에서 ‘그룹들’이 언급되는 모든 구절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로 이런 quality의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만일 주님의 오심, 교회의 표상, 모형들이 주님을 상징함, 사후의 삶, 속 사람과 말씀의 속뜻 등 이런 것들에 관하여 밝히 알게 되는 순간, 이들은 분명 그것을 profane, 그렇게 해서 결국 영원히 멸망하였을, 그런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궤 위 속죄소(the mercy seat over the ark)에 있는 ‘그룹들’(cherubim), 성막 휘장들(the curtains of the tabernacle)에 있는 그룹들, 휘장(the veil)에 있는 그룹들, 그리고 성전(the temple)에 있는 그룹들로 표상되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들을 지켜 보존하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As the signification of the “east” and of the “garden of Eden” were given above, it is needless to dwell longer on them; but that “cherubim” denote the providence of the Lord lest man should insanely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from his own, and from what is of the senses and of memory-knowledge, and should thus profane them, and destroy himself, is evident from all the passages in the Word where mention is made of “cherubim.” As the Jews were of such a quality that if they had possessed any clear knowledge concerning the Lord’s coming, concerning the representatives or types of the church as being significative of him, concerning the life after death, concerning the interior man and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they would have profaned it, and would have perished eternally; therefore this was represented by the “cherubim” on the mercy seat over the ark, upon the curtains of the tabernacle, upon the veil, and also in the temple; and it was signified that the Lord had them in keeping. (Exod. 25:18–21; 26:1, 31; 1 Kings 6:23–29, 32)
18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19한 그룹은 이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할지며 20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21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출25:18-21)
1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 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 31너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짜서 휘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정교하게 수 놓아서(출26:1, 31)
23내소 안에 감람나무로 두 그룹을 만들었는데 그 높이가 각각 십 규빗이라 24한 그룹의 이쪽 날개도 다섯 규빗이요 저쪽 날개도 다섯 규빗이니 이쪽 날개 끝으로부터 저쪽 날개 끝까지 십 규빗이며 25다른 그룹도 십 규빗이니 그 두 그룹은 같은 크기와 같은 모양이요 26이 그룹의 높이가 십 규빗이요 저 그룹도 같았더라 27솔로몬이 내소 가운데에 그룹을 두었으니 그룹들의 날개가 퍼져 있는데 이쪽 그룹의 날개는 이쪽 벽에 닿았고 저쪽 그룹의 날개는 저쪽 벽에 닿았으며 두 날개는 성전의 중앙에서 서로 닿았더라 28그가 금으로 그룹을 입혔더라 29내 외소 사방 벽에는 모두 그룹들과 종려와 핀 꽃 형상을 아로새겼고, 32감람나무로 만든 그 두 문짝에 그룹과 종려와 핀 꽃을 아로새기고 금으로 입히되 곧 그룹들과 종려에 금으로 입혔더라(왕상6:23-29, 32)
증거판(the testimony)이 들어 있던 궤는 이 구절(창3:24)의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와 같은 것을 의미하였는데, 곧 주님과 오직 주님께만 속한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은 자주 ‘그룹들 위에 앉아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God of Israel sitting on the cherubim)으로 일컬음을 받으셨고, 또한 그룹들 사이에서(between the cherubim)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For the ark, in which was the testimony, signified the same as the tree of lives in this passage, namely, the Lord and the celestial things which belong solely to him. Hence also the Lord is so often called the “God of Israel sitting on the cherubim,” and hence he spoke with Moses and Aaron “between the cherubim” (Exod. 25:22; Num. 7:89).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25:22)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민7:89)
이것은 에스겔에서 분명하게 묘사되는데, 거기 보면, This is plainly described in Ezekiel, where it is said:
3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5그들에 대하여 내 귀에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6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7그가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성전을 더럽혀 시체로 모든 뜰에 채우라 너희는 나가라 하시매 그들이 나가서 성읍 중에서 치더라 (겔9:3-7) The glory of the God of Israel was uplifted from upon the cherub whereon he was, to the threshold of the house. And he called to the man clothed with linen, and said unto him, Go through the midst of the city, through the midst of Jerusalem, and set a mark upon the foreheads of the men who groan and sigh for all the abominations done in the midst thereof. And to the others he said, Go ye after him through the city, and smite; let not your eye spare, neither have ye pity; slay to blotting out the old man, and the young man, and the virgin, the infant, and the women; defile the house, and fill the courts with the slain (Ezek. 9:3–7).
2하나님이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그룹 밑에 있는 바퀴 사이로 들어가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 하시매 그가 내 목전에서 들어가더라, 7그 그룹이 그룹들 사이에서 손을 내밀어 그 그룹들 사이에 있는 불을 집어 가는 베 옷을 입은 자의 손에 주매 그가 받아 가지고 나가는데(겔10:2, 7) He said to the man clothed in linen, Go in between the wheel to beneath the cherub, and fill thy palms with coals of fire from between the cherubim, and scatter them over the city; the cherub put forth his hand from between the cherubim unto the fire which was between the cherubim, and took thereof, and put it into the palms of him that was clothed in linen, who took it and went out (Ezek. 10:2, 7).
이 구절들을 통해 ‘그룹들’(cherubim)은 사람들이 신앙의 아르카나 안으로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는 주님의 섭리(the providence of the Lord)를 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광적 욕망(insane cupidities)에 내맡겨졌는데, 이것을 여기서는 ‘성읍 위에 흩어질 불’(fire that was to be scattered over the city)과 ‘아무도 아끼지 말라’(none should be spared)는 표현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From these passages it is evident that the providence of the Lord in preventing men from entering into the mysteries of faith is signified by the “cherubim”; and that therefore they were left to their insane cupidities, here also signified by the “fire that was to be scattered over the city,” and that “none should be spared.”
해설
AC.308은 창3:24의 ‘그룹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씀 전체의 여러 구절을 통해 본격적으로 밝히는 글입니다. 앞의 AC.306에서는 그룹들이, 거룩한 것에 사람이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뜻한다 간단히 설명하였고, AC.307에서는 홍수 직전 태고교회의 마지막 후손들이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잃고, 광적 욕망과 persuasion에 내맡겨진 상태를 다루었습니다. 이제 AC.308은 왜 거룩한 것에 대한 접근이 제한되는 것이 오히려 주님의 자비로운 보호인지를 성막과 성전, 그리고 에스겔의 환상을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먼저 이 글에서 ‘그룹들’은 어떤 특별한 계급의 천사들을 단순히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으로는, 사람이 자신의 proprium과 감각적 사고, 그리고 기억 지식을 가지고 신앙의 아르카나 안으로 함부로 들어가 그것들을 모독, 즉 profanation 하지 못하도록 보호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뜻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한다는 행위 자체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문제는 ‘자신의 proprium으로부터’,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겸손과 선한 애정 없이 자기 지성과 감각적 판단만으로 거룩한 것들을 장악하려는 데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거룩한 진리를 자기 안에서 받아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판단하고 지배 및 이용하려 합니다.
‘감각과 기억 지식에 속한 것들로부터’ 신앙의 아르카나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도 같은 뜻입니다. 감각과 기억 지식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겉 사람에게 속한 유용한 수단이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속 사람의 빛을 섬길 때에는 진리를 확인하고 삶에 적용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순서가 뒤집혀 감각적 증거와 기억 지식이 신앙의 진리를 재판하는 최종 기준이 되면, 사람은 천적인 것을 자연적인 것 아래에 두게 됩니다. 그는 이해되지 않는 것은 부정하고, 감각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은 거짓이라 여기며, 자기 지성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거룩한 것으로 인정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러니까 자신의 proprium을 가지고 신앙의 아르카나 안으로 들어가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러한 진입을 ‘광적으로’, 그러니까 미친 듯이 들어가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단순히 열심히 연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사랑과 거짓된 확신에 사로잡힌 사람이 거룩한 것을 자기 소유로 삼고, 자기 판단에 복종시키며, 자기 목적에 이용하려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때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진리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혜롭다는 평가를 받거나 다른 사람을 지배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악한 삶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진리를 이용합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의 아르카나는 그 사람 안에서 모독, 곧 profanation 됩니다.
profanation은 거룩한 것을 단순히 모르거나 부정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입니다. profanation은 사람이 먼저 거룩한 것을 알고 인정하고 받아들인 뒤, 다시 그것을 부정하거나 악한 삶과 뒤섞을 때 생깁니다. 거룩한 것과 불결한 것이 한 사람 안에서 결합되면,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서로 분리되기 어려운 상태가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사람이 그런 상태에 이를 위험이 있을 때, 오히려 더 깊은 진리를 보지 못하도록 하시고, 더 깊은 거룩한 것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으십니다. 이것이 그룹들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의미는 유대인들에게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AC.308은 유대인들이 만일 주님의 오심, 교회의 표상과 모형들이 주님을 의미한다는 사실, 사후의 삶, 속 사람, 말씀의 속뜻에 관하여 명백한 지식을 가졌더라면 그것을 profane 하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유대 민족 전체를 단순히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 그러니까 유대교회의 표상적 기능과 그들의 내적 상태 사이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그들은 외적 예배와 의식은 매우 철저히 지켰지만, 그 안에 있는 주님과 천국, 그리고 거듭남의 의미를 받아들일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 내적 의미가 분명하게 열렸다면, 그들은 외적으로는 거룩한 것을 행하면서 내적으로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위하여 그것을 이용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더 깊은 profanation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표상적 예배는 허락하셨지만, 그 표상들의 깊은 속뜻은 감추셨습니다. 성막과 성전의 모든 기물과 의식은 주님과 천국, 그리고 교회에 관한 가장 깊은 아르카나를 담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은 그것을 외적인 명령과 의식으로만 알았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진리를 주지 않으신 냉혹한 처분이 아니라,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것을 알아 나중에 profane 하지 않도록 보호하신 섭리였습니다. 그래서 그룹들이 속죄소 위에, 성막 휘장에,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 그리고 성전 벽과 문에 새겨졌습니다.
특히 궤 위 속죄소의 두 그룹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궤 안에는 증거판, 곧 십계명이 들어 있었고, 궤 위에는 속죄소가 있었으며, 그 위에 두 그룹이 날개를 펴고 있었습니다. 증거궤는 말씀과 신적 진리를, 더 깊게는 주님 자신과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AC.308은 이 궤가 창3의 생명나무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생명나무가 주님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지혜의 생명을 뜻하는 것처럼, 증거궤도 주님과 오직 주님께만 속한 천적인 것들을 뜻합니다.
그룹들이 속죄소를 날개로 덮고 그 얼굴을 속죄소를 향한 것은, 신적 거룩함이 주님의 섭리로 보호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그룹들은 거룩한 것을 주님으로부터 떼어 내어 사람에게 감추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거룩한 것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지키는 표상입니다. 동시에 두 그룹 사이에서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거룩한 진리가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와 방법에 따라 전달된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함부로 거룩한 것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막으시지만, 사람이 겸손히 주님으로부터 받고자 할 때에는 필요한 만큼 말씀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이 점에서 그룹은 단순한 차단의 상징이 아니라, 계시의 질서를 지키는 상징입니다. 생명나무로 가는 길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지켜지고 있습니다. 궤도 감추어져 있지만, 그룹들 사이에서 주님의 음성은 들립니다. 그러므로 그룹의 기능은 사람을 영원히 진리 밖에 두는 데 있지 않고, 그 사람이 진리를 profane 하지 않으면서 받을 수 있는 상태가 될 때까지 거룩한 것을 보호하는 데 있습니다.
성막의 휘장들과 성전 벽에 그룹들이 수놓아지고 새겨진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휘장은 성소의 여러 단계와 경계를 나타내며, 무엇이 더 내적인 것이고, 무엇이 더 외적인 것인지를 구분합니다. 그룹들이 그 경계에 놓였다는 것은 사람이 외적 상태에서 곧바로 가장 내적인 거룩함 안으로 뛰어들 수 없으며, 주님께서 정하신 질서에 따라 점차 준비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거듭남도 이와 같습니다. 사람은 기억 지식에서 신앙으로, 신앙에서 체어리티로, 체어리티에서 주님 사랑으로 한 단계씩 인도됩니다. 자기 지성으로 이 질서를 건너뛰려 하면, 거룩한 것을 이해하는 대신 왜곡하고 모독하게 됩니다.
AC.308이 겔9와 10을 인용하는 이유는 그룹들의 보호 기능이 단순히 평화로운 성전 장면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장면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겔9에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은 그룹 위에서 성전 문지방으로 옮겨가고, 예루살렘의 가증한 일을 보고 탄식하며 우는 사람들의 이마에는 표가 그어집니다. 반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임합니다. 여기서 이마의 표는 사람의 사랑과 의지 안에 주님의 선이 남아 있음을 뜻합니다. 겉으로는 같은 성읍과 성전에 있어도, 속으로 악을 슬퍼하고 거부하는 사람과 악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전혀 다른 상태에 있습니다.
겔10에서 그룹들 사이의 불이 성읍 위에 흩어지는 장면도 같은 원리를 보여줍니다. 불은 그 본래 의미에서는 사랑을 뜻하지만, 악한 사람에게 임할 때에는 자기 사랑과 그 욕망의 불을 뜻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악한 사람 안에 들어가면 그 사람의 상태에 따라 뒤집혀 자기 사랑의 불처럼 경험됩니다. 그러므로 성읍 위에 흩어지는 불은 주님께서 악을 만들어 보내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광적 욕망에 내맡겨진 결과 그 욕망이 그들을 심판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AC.308의 마지막 문장은 이 점을 분명히 합니다. 사람들은 신앙의 아르카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보호받았고, 그 결과 자신들의 광적 욕망에 내맡겨졌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들의 악을 원하시거나 그들을 악으로 밀어 넣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이 이미 거룩한 것을 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으므로, 더 깊은 진리를 열어 주어 profanation을 증가시키기보다 그들이 선택한 외적이고 자연적인 욕망의 수준에 머물도록 허용하셨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살핀 것처럼, 같은 지옥 상태로 향하더라도 더 깊은 profanation으로 인해 더욱 악한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제한하신 것입니다.
‘아무도 아끼지 말라’는 표현도 주님의 자비가 사라졌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서는 가혹한 심판처럼 보이지만, 속뜻으로는 악과 거짓이 완전히 성숙하여 더 이상 선과 진리가 들어갈 자리가 없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주님께서 긍휼을 거두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의 긍휼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모든 것을 자기 안에서 소멸시킨 것입니다. 심판은 주님에게서 오는 분노가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고 형성한 사랑의 상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글은 또한 왜 세상에서 악이 곧바로 제거되지 않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빛을 줍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없애면서까지 악을 강제로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자유가 사라지면 회개와 거듭남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주님께서는 악을 허용하시되, 그 악이 무한히 커지지 못하도록 제한하시고, 사람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끼치는 파멸을 가능한 한 줄이시며, 더 깊은 profanation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지키십니다. 그룹들은 바로 이러한 보이지 않는 섭리의 표상입니다.
그러므로 창3:24의 그룹들은 단순히 타락한 인간을 생명나무에서 쫓아내는 무서운 문지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거룩한 것을 함부로 다루어 자기 자신을 영원히 파멸시키지 않도록 생명나무의 길을 보호하시는 주님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그 길은 닫힌 것이 아니라 지켜지고 있으며, 사람은 자기 지성과 감각으로 그 길을 침범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질서 안에서는 다시 그 길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AC.308의 중심은 이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사람에게서 빼앗기 위하여 그룹들을 세우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거룩한 것을 profane, 스스로를 파멸시키지 않도록 보호하시기 위하여 그룹들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룹은 심판의 표상이면서 동시에 자비의 표상이고, 차단의 표상이면서 동시에 보존의 표상이며,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시면서도 그 자유가 영원한 파멸로 치닫지 않도록 끝까지 지키시는 주님의 섭리를 나타냅니다.
1. ‘being left to their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
그러나 그들이 이러한 상태에‘내맡겨졌다’,‘남겨졌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들을 버리셨다는 뜻이 아닙니다.오히려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상태를 허용하심으로써,더 깊은 거룩한 것들을 모독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막으시는 자비로운 섭리를 뜻합니다.앞글에서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AC.307해설)
위 해설 중 이 부분 말인데요,이미 돌이킬 수는 없고,그럼 할 수 없이‘같은 지옥을 가더라도 덜 심한 지옥을 가도록’ 하셨다는 말로 이해해도 되나요?
네, 스베덴보리의 전체 신학에서는 그렇게 이해해도 큰 무리는 없습니다. 다만 표현을 조금 더 정확하게 다듬으면 좋겠습니다.
‘같은 지옥을 가더라도 덜 심한 지옥을 가도록’이라는 말은 핵심 취지는 맞지만, 자칫 ‘주님께서 어느 지옥으로 보낼지를 결정하신다’는 뉘앙스를 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옥의 위치나 정도를 주님께서 임의로 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형성한 사랑의 상태가 그에 상응하는 공동체를 찾아간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AC.306, 307의 의미를 스베덴보리식으로 풀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이 이미 자기 사랑과persuasion속에 깊이 빠졌더라도,아직 천국의 가장 깊은 거룩한 것들을 충분히 알지 못한 상태라면,그 악은 그 정도에서 머뭅니다.그러나 만일 그런 사람이 천적 진리까지 깊이 알고,그것을 인정하였다가 다시 의도적으로 부인하고 거스른다면,그는‘profanation’에 빠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악보다 훨씬 더 무서운 상태로 봅니다.선과 악,진리와 거짓을 한 사람 안에서 뒤섞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더 깊은 진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으십니다. 이것은 벌을 주기 위한 제한이 아니라, ‘더 악한 상태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보호’입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표현으로 옮기면,
‘같은 지옥을 가더라도 조금이라도 덜 악한 지옥에 머물도록 하시는 주님의 자비’
라는 뜻에 상당히 가깝습니다.
저는 오히려 이렇게 표현하면 더 스베덴보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상태에 이른 사람까지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비록 그가 끝내 지옥을 선택하게 될지라도,더 깊은 거룩한 것들을 모독하여 훨씬 더 비참한 상태에 이르지 않도록 막으십니다.그러므로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은 천국의 문을 닫기 위한 것이 아니라,사람이 자신이 만든 악보다 더 깊은 악 속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지키시는 마지막 자비의 표상입니다.’
이 표현이AC.306과AC.307의 핵심을 가장 잘 담는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것은 스베덴보리 신학의 매우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님의 섭리는 구원받을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구원받지 않는 사람에게도 미칩니다.’ 지옥에 가는 사람에게조차도 가능한 한 악을 제한하시고, 가능한 한 고통을 줄이시며, 가능한 한 덜 악한 상태에 머물도록 질서를 세우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저작에서 주님께서 지옥까지도 질서 가운데 다스리신다고 설명하는데, 바로 그 원리가 여기AC.306, 307에도 이미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아래 링크들은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 관련 글들입니다. 좀더 깊은 내용들이니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4)
AC.307
여기서는 홍수로 멸망한 여섯째와 일곱째 후손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에덴동산에서 쫓겨난’(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자들, 그러니까 진리를 이해하는 모든 능력이 박탈되었고, 그 결과 그들은 말하자면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으며, 자신들의 광적 욕망(insane cupidities)과 persuasions에 남겨진 사람들이었습니다. It here treats of the sixth and seventh posterities, which perished by the flood, and were altogether “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that is, from all understanding of truth, and became as it were not men, being left to their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
해설
이 글은 앞의 AC.306을 이어받아, 창3 마지막 장면의 속뜻이 태고교회 말기에 이르러 홍수로 멸망하게 되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설명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여섯째와 일곱째 후손’은 단순히 족보의 세대 수를 세려는 표현이 아니라, 태고교회가 마지막에 이르러 극도로 타락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서 창4와 5는 단순한 역사적 연대기로 이해하기보다, 태고교회 안에서 나타난 서로 다른 영적 계열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창4는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서 점차 타락해 가는 하나의 계열, 곧 가인 계열을, 창5는 주님께서 보존하신 또 다른 계열, 그러니까 셋 계열로 말이지요. 따라서 두 계열은 반드시 시간적으로 앞뒤를 이루는 사건이라기보다, 같은 시대 안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 영적 흐름으로 이해하는 것이 AC 전체의 해석과 더 잘 조화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여섯째와 일곱째 후손’도 어느 한 족보만을 가리키기보다, 결국 홍수로 멸망하게 된 태고교회의 마지막 사람들을 대표, 즉 표상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어느 계열이든 결국 끝에 가서는 홍수를 만나게 되니까요.
본문은 이어서 그들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어떤 장소에서 추방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를 이해하는 모든 능력을 박탈당했다는 말입니다. 에덴동산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지혜의 생명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그곳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더 이상 천적인 빛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뜻합니다.
또한 그들이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는 말씀도 육체적인 인간성을 잃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사람’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사랑과 거짓에 완전히 사로잡혀 선과 진리의 생명을 잃게 되면, 비록 겉모습은 여전히 사람일지라도 영적인 의미에서는 참된 사람이 아니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광적 욕망과 persuasion에 그대로 남겨졌다’(being left to their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고 합니다. 여기서 ‘광적 욕망’은 자기 사랑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악한 탐닉을 말하며, persuasion은 거짓을 너무도 강하게 확신한 나머지 어떤 진리도 받아들일 수 없게 된 영적 고착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겉으로는 신앙의 거룩한 것에 관심을 보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을 위하여 이용하기 때문에 결국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러한 상태에 ‘내맡겨졌다’, ‘남겨졌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들을 버리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상태를 허용하심으로써, 더 깊은 거룩한 것들을 모독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막으시는 자비로운 섭리를 뜻합니다. 앞글에서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AC.307은 태고교회의 마지막 상태를 매우 간결하게 요약합니다. 그들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잃었고, 참된 사람됨을 상실했으며,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 광적 욕망과 persuasion 속에 스스로를 가두었습니다. 그 결과 홍수로 상징되는 영적 종말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의 목적은 단순히 과거의 심판을 기록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을 떠난 인간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왜 주님께서 사람의 상태에 따라 진리를 허락하시기도 하고 감추시기도 하시며, 거룩한 것들이 모독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보호하시는지, 그리고 그렇게 하심으로써 가능한 한 비록 지옥 상태에 이르더라도 좀 덜 고통스러운 상태에 이르도록 끝까지 살피시는지를 밝히려는 데 있습니다.
심화
1. ‘being left to their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
‘Cherubim’은 히브리어‘케루빔’(כְּרוּבִים,kerubim)의 음역으로, ‘Cherub’(그룹)의 복수형입니다.우리말 성경에서는 보통‘그룹들’또는‘그룹 천사들’로 번역하지만,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는 단순히 천사의 한 종류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보호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상징하는 표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그룹은 여러 곳에 등장합니다.창3에서는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기 위해 에덴동산 동쪽에 세워졌고(창3:24),출25에서는 언약궤의 속죄소 위에 두 그룹이 마주 보고 날개를 펼치고 있으며(출25:18-22),겔1과10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모시는 존재로 나타나고,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에서 끊임없이 주님을 찬양하는 네 생물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처럼 성경마다 모습은 조금씩 다르지만,스베덴보리는 그 모든 표상이 하나의 공통된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합니다.곧‘거룩한 것에 대한 접근을 주님의 질서에 따라 허락하거나 제한하시는 섭리’입니다.
AC.306에서도 바로 이 의미가 사용됩니다. ‘그룹들을 에덴동산 동쪽에 두셨다’는 것은 무서운 천사들이 칼을 들고 사람을 위협한다는 뜻이 아닙니다.오히려 아직 자기 사랑 가운데 있는 사람이 천국의 가장 깊은 진리와 사랑에 함부로 들어가 그것을 모독하지 않도록 보호하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룹이 사람을 막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만일 영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천국의 가장 깊은 진리를 충분히 알고도 그것을 거절하거나 왜곡한다면,그는 단순한 무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모독(profanation)에 빠지게 됩니다.주님께서는 이것이 사람의 영혼에 가장 치명적인 상태임을 아시기 때문에,그룹을 통하여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룹은‘심판의 상징’이라기보다‘보호의 상징’입니다.그들이 지키는 것은 천국의 문이 아니라,사람의 영혼입니다.주님께서는 사람의 상태에 맞을 때까지 더 깊은 진리를 감추시기도 하고,준비가 되었을 때에는 다시 그 길을 열어 주십니다.이것이 그룹이 상징하는 주님의 섭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이 의미를 반복하여 설명합니다.특히AC.306을 비롯하여AC.308,AC.9277,AC.9509-9511등에서는 그룹의 본질적인 의미를 일관되게‘주님의 섭리,곧 거룩한 것들이 모독되지 않도록 지키시는 보호’로 해석합니다.따라서 창3의 그룹은 죄인을 쫓아내는 무서운 수문장이 아니라,언젠가 사람이 다시 생명나무에 이를 수 있도록 그 길을 거룩하게 보존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표상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해석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And he cast out the man; and he made to dwell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cherubim, and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창3:24)
AC.306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cast out the man)는 그에게서 선한 의지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the will of good and understanding of truth)을 완전히 빼앗으셔서, 그것들로부터 분리되게 하셨고, 그 결과 그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을 두어’(make cherubim from the east to dwell)는 그런 사람이 더 이상 신앙의 어떤 비밀스런 것들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으셨다는 말입니다. ‘에덴동산 동쪽’(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은 천적인 것을 말하는데, 지성(intelligence)이 여기서 비롯되며, ‘그룹’(cherubim)은 그러한 사람이 신앙에 속한 것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그러니까 보호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말합니다. ‘두루 도는 불 칼’(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은 자기 사랑(self-love)과 거기서 나오는 광적 욕망(insane desires) 및 그에 따른 persuasions을 의미합니다. 이런 것들이 그가 정말 원하는 것들이며, 그 결과 그는 육적이고 세상적인 것들한테로 끌려갑니다. 이것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keeping the way of the tree of lives)의 의미, 즉 거룩한 것들을 profanation으로부터 막기 위한 것입니다. To “cast out the man” is to entirely deprive him of all the will of good and understanding of truth, insomuch that he is separated from them, and is no longer man. To “make cherubim from the east to dwell” is to provide against his entering into any secret thing of faith; for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is the celestial, from which is intelligence; and by “cherubim” is signified the providence of the Lord in preventing such a man from entering into the things of faith. By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is signified self-love with its insane desires and consequent persuasions, which are such that he indeed wishes to enter, but is carried away to corporeal and earthly things, and this for the purpose of “keeping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that is, of preventing the profanation of holy things.
해설
이 글은 창3의 마지막 절을 전체적으로 요약하면서, 왜 주님께서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시고,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는지를 다시 한번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얼핏 보면 이는 심판과 추방의 장면처럼 보이지만, 말씀의 속뜻으로는 철저히 보호와 섭리의 장면입니다.
먼저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는 단순히 장소를 옮기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타락한 사람이 더 이상 선한 의지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 안에 머물지 못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원래 선과 진리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참된 의미에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사랑과 자기 지혜를 선택한 결과, 그들은 그 생명으로부터 스스로 분리되었고, 결국 참된 사람됨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목적은 사람을 버리시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큰 영적 파멸을 막으시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룹’을 두셨습니다. 성경에서 그룹은 언제나 거룩한 것을 지키시는 주님의 섭리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천국의 깊은 진리와 사랑 안으로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 주시는 사랑의 보호입니다.
‘에덴동산 동쪽’ 역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동쪽은 언제나 주님과 천적 사랑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에덴동산 동쪽은 천국의 가장 안쪽 생명,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지혜의 근원을 의미합니다. 그룹이 바로 그곳을 지키고 있다는 것은, 천국의 가장 거룩한 생명이 아무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에서만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두루 도는 불 칼’도 심판의 무기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자기 사랑과 거기에서 생겨나는 광적 욕망, 그리고 persuasions의 상태로 설명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겉으로는 신앙을 알고 싶어 하고, 천국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마음은 여전히 육체와 세상에 묶여 있기 때문에,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다시 자기 자신과 세상적인 것들을 향해 끌려갑니다. 두루 도는 불 칼은 바로 이러한 상태 자체를 상징합니다.
글의 마지막은 이 모든 섭리의 목적을 한마디로 밝힙니다. 그것은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 거룩한 것들이 모독되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만일 사람이 아직 자기 사랑 가운데 있으면서도 천국의 가장 깊은 진리를 충분히 알고, 그다음 그것을 의도적으로 거부한다면, 그는 단순한 무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모독, 즉 profanation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비 가운데 사람의 상태에 맞추어 진리를 허락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감추시기도 하십니다.
창3의 마지막 장면은 인간을 쫓아내시는 하나님의 분노가 아니라, 끝까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생명나무의 길을 막으신 것은 생명을 빼앗기 위함이 아니라, 언젠가 사람이 다시 그 생명에 이를 수 있도록 그 길을 거룩하게 보존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그룹과 두루 도는 불 칼이 서 있는 이유이며, 창3을 관통하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의 절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Therefore Jehovah God sent him forth from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 (창3:23)
AC.305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의 의미는 모든 지성과 지혜를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의 의미는 거듭나기 이전의 상태처럼 다시 육체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의 의미가 모든 지성과 지혜를 빼앗기는 것임은 앞에서 살펴본 ‘동산’(garden)과 ‘에덴’(Eden)의 의미로부터 분명합니다. ‘동산’의 의미는 지성, 곧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며, ‘에덴’의 의미, 곧 상징은 사랑이므로 지혜, 곧 선을 의지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또한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의 의미가 거듭나기 이전의 육체적인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은 같은 표현이 나오는 앞의 19절 해설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습니다. To be “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is to be deprived of all intelligence and wisdom; and to “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 is to become corporeal, as he was previous to regeneration. That to be “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is to be deprived of all intelligence and wisdom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garden,” and of “Eden,” as above; for a “garden” signifies intelligence, or the understanding of truth; and “Eden,” being significative of love, signifies wisdom, or the will of good. That to “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 signifies to become corporeal, such as he was before regeneration, has been shown above (verse 19), where similar words occur.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9)
해설
이 글은 타락의 결과를 매우 간결하면서도 본질적으로 요약합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장소를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받던 내적 생명의 상태를 상실했다는 의미입니다. 창세기의 에덴동산은 지상의 어떤 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가장 깊은 영적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에덴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상태의 변화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동산’을 지성, 곧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으로 설명합니다. 동산에는 수많은 나무와 열매가 질서 있게 자라는데, 이는 사람 안에서 수많은 진리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 있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동산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진리가 생명 안에서 질서 있게 연결된 지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에덴’은 사랑을 상징하며, 그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지혜를 의미합니다. 지성은 사랑과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무엇을 이해하고, 무엇을 참이라고 받아들이는지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참된 지혜는 많은 지식을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에덴이 사랑을 의미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곧 ‘에덴동산에서 내쫓기’는 것은 사랑과 지성이 함께 무너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먼저 사랑이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 향하게 되고, 그 결과 지혜가 사라지며, 결국 진리를 보는 눈까지 잃게 됩니다. 이것이 타락의 본질입니다. 사람은 여전히 많은 것을 알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더 이상 천적 또는 영적 지혜가 아니라 자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머물게 됩니다.
이어지는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곧 ‘그가 취함을 받은 땅을 경작한다’는 말씀은 이러한 변화가 사람의 생활 전체에 미치는 결과를 보여줍니다. ‘땅’은 사람 자신, 특히 그의 외적 생명을 의미하며, ‘경작하는’ 것은 그 상태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땅은 거듭나기 이전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즉 사람은 다시 감각과 육체의 지배를 받는 자연적 인간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인간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는 이전처럼 주님의 직접적인 인도 아래 있는 천적 인간이 아니라, 외적인 것들을 배우고, 진리로 훈련받으며, 자유 가운데 거듭남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후의 성경 역사는 모두 이러한 자연적 인간이 다시 주님께로 돌아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섭리 또한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이 더 이상 에덴의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게 하셨지만, 동시에 새로운 구원의 길도 마련하셨습니다. 사람은 에덴의 순수한 퍼셉션은 잃었지만, 대신 말씀을 배우고, 양심을 형성하며, 신앙과 체어리티를 통해 점진적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길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에덴에서의 추방은 단순한 심판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에게 새로운 구원의 질서를 마련하신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이기도 합니다.
※오늘(2026/07/26)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40, ‘찬송으로 보답할 수 없는’, 찬86, ‘내가 늘 의지하는 예수’입니다.
오늘은창3여덟 번째, 본문은 창3:20-22이고, AC 글 번호로는 280번에서 304번입니다. 오늘과 다음 주는 창3 전체 세 본문 중 마지막 본문(창3:20-24)을 다룹니다. 이 창3 마지막 본문은 창3 전체, 나아가서 창1-3 전체를 압축한, 그러니까 태고교회의 일생을 요약한 결론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본문이 다섯 절로 짧아 전체를 읽겠습니다.
20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22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0-24)
제목은
하와, 가죽옷, 영생할까 하노라
이며, 다음은AC.280-304입니다. 먼저 오늘 범위에 대한 요약 설명입니다. 오늘 범위는 글 수에 비해 내용, 그러니까 심화가 많아 페이지가 제법 됩니다.
먼저 요약입니다.
AC.280-286 (개요) 요약
창3 마지막 부분은 태고교회와 그 후손들의 영적 역사를 전체적으로 요약하는 결론입니다. 처음에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인도받던 천적 교회가 있었으나, 점차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감각을 따르면서 본래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세대를 거듭할수록 점진적으로 쇠퇴하여, 마침내 홍수 직전에 이르는 완전한 영적 파멸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쇠퇴는 한순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여러 세대를 거치며 단계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첫 번째 후손에게는 아직 ‘천적 영적 선’이 남아 있었고, 두 번째와 세 번째 후손에게는 ‘자연적 선’이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 후손에 이르러서는 자연적 선마저 소멸하기 시작하였고, 다섯 번째 후손은 선과 진리를 잃어버린 채 거듭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후손은 선과 진리에 관한 기억 지식마저 상실하여 자기 사랑과 그릇된 확신 속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도 주님의 섭리는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각 세대의 영적 상태에 맞는 선을 보존하시고,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것을 함부로 접하여 모독(profanation)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셨습니다. 가죽옷은 타락한 인간에게 남겨 두신 외적 선과 보호를, 생명나무를 지키는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은 거룩한 것을 모독하지 못하도록 지키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나타냅니다.
이처럼 창3은 단순히 아담과 하와의 범죄를 기록한 장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형성에서 시작하여 그 점진적인 타락과 종말, 그리고 그 모든 과정 속에서도 인간을 끝까지 보존하시고 새로운 구원의 길을 마련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압축하여 보여주는 장입니다. 이는 동시에 모든 시대의 교회와 각 개인의 거듭남과 타락의 과정을 함께 비추어 주는 보편적인 영적 역사이기도 합니다.
AC.287-291 (20절) 요약
창3:20은 창세기 1장부터 3장까지 이어져 온 태고교회의 역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게 하는 전환점입니다. 앞에서는 교회의 타락과 심판이 강조되었다면, 이제부터는 그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새로운 생명의 길을 준비하시는 섭리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아담’은 단순한 한 개인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천적인 사람, 곧 천적 인간을, ‘아내’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또한 ‘하와’, 곧 ‘모든 산 자의 어머니’는 생명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세상에 전하는 최초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녀를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교회가 모든 영적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에 대한 신앙의 삶’은 단순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 믿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실제 삶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태고교회는 주님을 사랑하였기에 선을 행하였고, 그 선 안에서 진리를 지각하였습니다. 곧 사랑과 신앙, 삶과 진리가 하나였던 천적 교회였습니다.
따라서 창3:20은 단순히 하와라는 이름이 정해진 사건이 아니라, 비록 타락의 이야기가 전개된 뒤에도 주님께서 교회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시고, 생명을 이어 갈 새로운 소망을 준비하고 계심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이 절은 창3:20-24 전체의 출발점이자, 창세기 초반부를 관통하는 ‘생명과 교회의 회복’이라는 주제를 여는 첫 장면입니다.
AC.292-297 (21절) 요약
창3:21은 주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의 새로운 상태에 맞는 삶의 길을 마련해 주시는 장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말씀은 단순히 몸을 가려 주셨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에게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가르치시고, 그것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셨음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처음에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퍼셉션을 받아 천적 선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러나 타락으로 그 상태를 잃자, 더 이상 내적 생명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그들의 현재 상태에 맞게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허락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다시 당신을 따를 수 있도록 새로운 삶의 질서를 마련하셨습니다. ‘가죽옷’은 바로 이러한 주님의 자비로운 교육과 보호를 상징합니다.
말씀의 이러한 의미는 겉 글자만으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가죽옷’은 성경 전체에서 반복되는 상응의 한 예로서, 양과 숫양, 해달의 가죽, 성막의 덮개, 그리고 제사장의 의복 등과 서로 연결됩니다. 이들은 모두 체어리티(charity)에서 비롯된 영적 선과 자연적 선, 곧 사람의 내적 생명을 보호하고 삶 속에 나타나게 하는 외적 선을 의미합니다.
또한 태고교회가 처음에는 순진무구함(innocence)으로 인해 ‘벌거벗었다’ 불렸으나, 타락 후에는 악을 의식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옷을 입었다’는 것은 단순히 수치를 가렸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들을 악 가운데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영적 선과 자연적 선으로 덮어 보호하셨음을 뜻합니다. 이는 교회의 생명이 가장 깊은 천적 상태에서 점차 외적인 상태로 옮겨 갔음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가장 깊은 천적 선은 옷이라는 걸 입지 않지만, 그보다 외적인 천적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은 ‘의복’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에스겔의 ‘아름다운 옷’, 이사야의 ‘아름다운 옷’, 계시록의 ‘흰옷’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가 사람의 삶 속에 드러난 상태를 의미합니다. 반면 창3의 ‘가죽옷’은 아직 몸 안에 있는 인간에게 허락된 보다 외적인 선을 가리키며, 주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끝까지 보호하시고 거듭남의 길을 이어 가시는 자비로운 섭리를 보여줍니다.
AC.298-304 (22절) 요약
창3:22는 주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생명에서 배제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그를 더 깊은 영적 파멸로부터 보호하시는 자비로운 섭리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라는 말씀은 인간이 참으로 지혜로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려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우리’라는 표현은 여러 신이나 여러 인격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천국과 하나 되어 당신의 신적 섭리를 이루시는 질서를 가리킵니다.
이어지는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는 말씀 역시 문자 그대로 영생을 막으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생명나무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생명 자체를 의미하며, 사람이 타락한 상태에서 그 거룩한 것에 참여하였다가 다시 그것을 거부하면 profanation에 빠져 돌이킬 수 없는 영적 파멸에 이르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막으신 것은 심판이 아니라 보호였습니다.
이 보호의 섭리는 이후의 성경 전체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주님께서 유대교회에 내적 진리를 모두 드러내지 않으시고, 복음서에서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도 같은 이유였습니다. 사람의 영적 상태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을 때 깊은 진리를 충분히 알고도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profanation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계시를 제한하신 것은 사람을 구원에서 제외하기 위함이 아니라, 장차 참된 회개와 거듭남의 가능성을 보존하시기 위한 자비였습니다.
이처럼 창3:22는 타락 이후의 인간을 향한 주님의 가장 깊은 보호의 섭리를 밝히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면서도, 그가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것에 함부로 참여하여 영원한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필요한 만큼만 진리를 허락하십니다. 이어지는 창3:24의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은 바로 이러한 자비로운 보호가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는 표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