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PR.004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죽기 직전에라도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 천국 간다’ - 마지막 고백이 평생의 사랑을 바꿀 수 있는가?

 

개신교 신앙생활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평생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거나 심지어 악하게 살았더라도,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특히 임종을 앞둔 사람을 위해 기도하거나 복음을 전할 때 강하게 나타납니다. 가족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어떻게든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목회자는 병상 곁에서 복음을 전하고, 환자가 짧게라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 구원의 확신을 전하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한 영혼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사랑과, 인간의 어떠한 죄보다 주님의 자비가 크다는 귀중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이 ‘어떤 삶을 살았든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기만 하면 천국에 간다’는 공식으로 굳어진다면, 우리는 매우 중요한 질문을 놓치게 됩니다. 과연 천국은 마지막 순간에 특정한 신앙고백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들어가는 장소일까요? 그리고 인간이 평생 사랑하며 형성해 온 내면의 생명은 죽기 직전의 몇 마디 말로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것일까요?

 

먼저 이 문제에서도 개신교의 모든 전통을 하나로 묶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주의 신앙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강조하며,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도 회개의 기회가 열려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진실한 회개와 단순한 입술의 고백을 동일하게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참된 회심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내적 변화라고 보며, 웨슬리안 전통에서도 회개와 믿음의 진정성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다만 실제 전도와 목회 현장에서는 이러한 신학적 구별이 단순화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죽기 전에 예수님만 영접하면 된다’는 말이 반복되면서, 마치 마지막 순간의 신앙고백 자체에 구원을 보장하는 특별한 효력이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 검토하려는 것은 임종 직전의 진실한 회개가 가능하냐는 질문을 넘어, 그 회개를 한순간의 언어적 고백으로 축소하고, 인간의 실제 내적 상태와 분리해 이해하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가장 대표적인 성경적 근거는 눅23:39-43에 등장하는 십자가 위의 행악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예수님을 비방했지만, 다른 사람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께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에게 낙원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 장면은 기독교 역사에서 마지막 순간의 회개와 구원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본문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실제로 이 말씀은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도 주님의 자비가 닫혀 있지 않다는 강력한 희망을 줍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행악자가 단순히 ‘예수님을 믿습니다’라는 말을 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정당한 형벌을 받을 만한 것이었다고 인정했고, 예수님께는 잘못이 없다고 고백했으며,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자신의 죄에 대한 인정, 그리고 예수님을 향한 신뢰가 함께 나타납니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내면을 완전하게 아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을 근거로 어떤 사람이든 죽기 직전에 신앙고백만 하면 그 내면의 상태와 관계없이 자동으로 구원받는다고 일반화하는 것은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범위를 넘어서는 해석입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구원이 무엇인가를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은 인간이 죽음 이후에도 자신의 생명을 계속 지니며, 지상에서 형성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이 사후의 삶을 결정한다고 설명합니다(HH.470–484). 특히 HH.476은 사람이 죽은 뒤에도 자신의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온 신앙을 지니며, 그것들이 그의 행위와 삶 안에 실제로 담겨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어지는 HH.477은 인간의 지배적인 사랑이 사후에도 지속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지배적인 사랑(ruling love)이란 사람이 일시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나 순간적 결심이 아니라, 오랜 시간 자신의 의지와 선택을 통해 형성해 온 생명의 중심적인 방향입니다. 어떤 사람이 평생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해치는 것을 즐거워했다면, 그러한 사랑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생명의 성향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기뻐했다면, 그 사랑 역시 그의 내면에 형성된 생명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과 지옥은 외적 신앙고백의 유무만으로 결정되는 보상과 처벌의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 실제로 어떠한 사랑을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였는가에 따라 들어가게 되는 영적 상태입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볼 때, 죽기 직전의 신앙고백은 그것이 아무리 진지하게 들리더라도 그 사람의 내면 전체를 자동으로 변화시키는 행위가 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에서 입술로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참된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설명합니다(TCR.516–519). 특히 TCR.529에서는 고통과 두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슬퍼하는 말을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그 사람 안에 자리 잡은 악한 사랑이 제거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참된 회개는 자신의 악을 살피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TCR.528–531).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지막 요소인 새로운 삶입니다. 단순한 후회와 회개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는 것과, 자신의 악이 주님의 뜻에 반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악 자체를 미워하게 되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전자는 자신의 고통이나 처벌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될 수 있지만, 후자는 선과 진리에 대한 새로운 애정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임종 직전의 고백을 평가할 때도 그 사람이 얼마나 절박하게 말했는가보다, 그 고백이 어떠한 내적 사랑에서 나왔는가가 더욱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는 참된 회개가 불가능하다는 뜻일까요? 반드시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내면을 완전하게 알지 못하며, 주님께서 그 사람의 생애 전체에 걸쳐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겉으로는 오랫동안 주님을 거부하며 살아온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도 양심과 선한 애정, 진리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보존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 어린 시절부터 선과 진리의 상태들을 보존하시며, 이것들이 이후의 영적 생명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합니다(AC.561, 661). 이러한 리메인스(remains)의 관점에서 보면, 마지막 순간에 드러나는 신앙고백이 반드시 그 순간 처음으로 생겨난 내적 변화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거나 억눌려 있던 선한 애정과 진리를 향한 마음이 죽음을 앞두고 비로소 드러날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특정한 임종 고백이 실제로 그러한 상태에서 나왔는지를 우리가 판정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사람 안에 무엇이 보존되어 있었으며, 마지막 순간의 고백이 얼마나 진실한 내적 응답이었는지는 오직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과, 마지막 순간에 인간의 지배적인 사랑이 아무런 내적 과정 없이 완전히 뒤바뀔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는 HH.480에서 인간이 죽은 뒤에는 지상에서 형성한 지배적인 사랑이 지속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사후에는 지상에서처럼 외적 삶을 통해 자신을 새롭게 형성하는 개혁과 거듭남의 과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이 가르침을 깊이 생각하면, 지상에서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자유와 합리성을 주시고, 자연계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진리를 배우고 악을 멀리하며 선을 행할 기회를 허락하십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사랑이 형성되고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평생 악을 사랑하며 살아온 사람이 죽기 직전에 천국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 순간 자신의 악한 사랑을 모두 버리고 천국의 사랑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존재로 바뀌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천국은 특정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들어갈 수 있는 외적 장소가 아니라, 천국의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생명이 있어야 참으로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깊은 질문이 생깁니다. 만일 평생 악하게 살았던 사람이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그 고백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면, 천국에서 그는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지상에서 즐거워하던 악한 욕망과 이웃을 해치려는 사랑을 그대로 지닌 채 천국에 들어간다면, 그는 천국의 삶을 기뻐할 수 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천국의 기쁨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데서 비롯되며, 지옥의 영들이 즐거워하는 것은 그와 반대되는 사랑입니다(HH.481). 따라서 악한 사랑을 그대로 지닌 사람이 천국의 환경에 놓인다고 해서 천국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에게 천국의 선과 진리는 자신의 내적 성향과 충돌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 사람을 받아들이기 싫어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시지만, 인간이 스스로 사랑하게 된 생명의 성향을 무시하고 천국의 기쁨을 강제로 주입하지는 않으십니다.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장소를 옮기는 일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천국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면 무엇이든 가능하지 않은가?’라는 반론을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주님의 신성한 능력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전능하심을 인간의 자유와 거듭남이라는 질서를 무시하는 능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는 주님께서 인간을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개혁하시고 거듭나게 하신다고 가르칩니다(DP.71, 82–86). 인간이 주님의 사랑을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이려면, 그 사랑을 이해하고 자유롭게 선택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원하지 않는 사랑을 억지로 그 사람의 중심적 사랑으로 만들어 놓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만일 인간이 평생 악을 사랑하도록 자신을 형성했는데도 죽기 직전의 고백 한마디로 그 사랑이 강제로 제거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와 인격을 존중하면서 구원하시는 주님의 섭리와 조화되기 어렵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인간의 실제 생명을 변화시키는 은혜이지, 변화되지 않은 생명을 변화된 것으로 간주하는 외적 선언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무한함을 믿는 것과 구원의 영적 질서를 무시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죽기 직전의 신앙고백을 가볍게 여기거나 임종을 앞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불필요하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임종의 순간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이 붙들고 있던 것들이 얼마나 덧없는지 깨달으며, 주님 앞에서 겸손해질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시간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평생 들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던 진리가 그 순간 비로소 마음에 깊이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남아 있던 신앙과 양심이 마지막 순간에 다시 살아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임종을 앞둔 사람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자신의 죄를 정직하게 돌아보며 주님께 마음을 열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사람에게 특정한 신앙고백을 받아 냈다는 사실만으로 천국행을 보증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환자의 의식이 흐려져 있거나 말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구원의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입술에서 나오는 소리만 들으시는 분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에 있는 사랑과 의지와 생각을 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임종의 자리에서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은 구원을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증언하고 그 사람을 주님의 섭리에 맡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유가족을 위로하는 방식에도 중요한 변화를 가져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다면, 우리는 그 고백을 귀하게 여기고 주님께서 그 사람의 내면에서 역사하셨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근거로 그 사람이 반드시 천국에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반대로 평생 교회를 다니지 않았거나 마지막 순간에 신앙고백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판단하는 것 역시 옳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HH.318–328에서 지상에서 기독교를 알지 못한 사람도 자신의 종교와 양심에 따라 선하게 살아왔다면 주님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가르침은 구원이 인간의 외적인 종교적 소속이나 특정한 언어적 고백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물론 이러한 이해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자동으로 보장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실제 내면을 아시며, 그 사람이 자신에게 허락된 진리와 선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완전하게 아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실한 위로는 ‘마지막에 영접기도를 했으니 무조건 천국에 갔다’거나 ‘그 기도를 하지 못했으니 구원받지 못했다’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완전한 사랑과 지혜로 인도하시는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결국 ‘죽기 직전에라도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 천국 간다’는 말에서 우리가 보존해야 할 진리는 주님의 자비에는 인간이 정해 놓은 시간적 한계가 없으며,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도 주님께 나아갈 소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로잡아야 할 오류는 마지막 순간의 언어적 고백이 평생 형성된 내면의 사랑과 관계없이 천국을 보장한다는 생각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마지막 말만 들으시는 분이 아니라, 그의 생애 전체를 보시고 그 안에 어떤 사랑이 형성되었는지를 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에도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언젠가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오늘의 삶을 미루어도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오늘의 삶은 단순히 죽음을 준비하는 대기 시간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진리를 받아들이며, 어떤 악을 멀리하고, 어떤 선을 행하는가를 통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형성되는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마지막 순간에 사용할 수 있는 구원의 공식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 자신입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순간에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은 마지막까지 미루어 둘 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 시작해야 할 일입니다.

 

죽기 직전에도 주님께 나아가고 진실하게 회개할 가능성을 인간이 일률적으로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기만 하면, 그 사람의 실제 내적 상태와 관계없이 천국에 간다는 주장은 스베덴보리의 구원론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외적 신앙고백의 유무보다 인간 안에 형성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비롯된 삶에 관계되며, 참된 회개는 입술의 고백에 그치지 않고 악에서 돌이키는 내적 변화를 포함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제거하여 천국의 사랑을 강제로 주입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임종자의 최종적 영적 상태는 인간이 판단할 수 없으며, 오직 주님의 완전한 사랑과 지혜에 맡겨야 합니다.

 

 

 

PR.003, ‘한번 구원받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SL.PR.003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한번 구원받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 주님의 영원한 사랑과 인간의 자유를 혼동하다 개신교 신앙생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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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03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이 말은 천주교 신앙생활에서 매우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가르침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세례를 단순히 신앙 공동체에 가입하는 의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원죄가 씻기고, 새로운 생명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결합하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유아 세례도 중요하게 여깁니다. 아직 말을 하지 못하고 신앙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아이라도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은총을 베푸신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들을 때 우리는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세례라는 외적 의식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 사람의 내적 생명에도 실제로 영적 출생이 완성되는 것일까요? 물로 머리를 씻고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과, 인간의 내면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하는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는 것은 과연 같은 사건일까요? 더 나아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은 그 사람에게 새로운 종교적 신분이 부여되었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그 사람이 실제로 주님의 생명을 받아 그분을 닮은 존재로 변화되어 간다는 뜻입니까? 이번 주제의 핵심은 세례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례가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이 가리키는 참된 영적 출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분별하는 데 있습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을 정확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제1265항은 세례가 모든 죄를 씻을 뿐 아니라 세례받은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 하느님의 양자, 그리스도의 지체, 성령의 성전으로 만든다고 가르칩니다. 제1266항은 세례를 통하여 성화의 은총과 의화의 은총이 주어지며, 하느님을 믿고 바라고 사랑할 능력과 선을 행할 영적 능력이 주어진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제1272항은 세례가 그리스도께 속한다는 지워지지 않는 영적 인호를 남긴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천주교가 세례를 단순한 상징적 의식으로 여기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이 실제로 역사하는 성사로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도 있습니다. 천주교는 세례받은 사람이라면 이후 어떻게 살아도 자동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세례의 은총은 신앙생활 속에서 성장해야 하며, 죄는 그 은총의 열매를 가로막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유효한 세례를 받은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자들도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다고 인정하며, 세례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의 자비를 통한 구원 가능성이 있음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의 실제 쟁점은 ‘천주교 신자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가?’라는 단순한 배타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세례라는 외적 성사가 그 자체로 인간의 영적 신분과 내적 생명에 어떤 변화를 일으킨다고 이해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성경은 세례와 새로운 출생을 긴밀하게 연결하면서도, 그 출생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도록 이끕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에서 주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고, 5절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주교는 이 구절을 세례의 필요성과 은총을 설명하는 중요한 근거로 사용합니다. 실제로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말씀에는 외적 정결과 내적 새 생명이 연결되어 있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어지는 6절에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영적 출생이 단순히 외적 사건이나 자연적 신분 변화로 완성되는 것이 아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또한 요한복음 1장 12절과 13절은 주님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며, 이들이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근원은 인간의 혈통이나 제도적 소속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세례는 그 출생을 가리키는 거룩한 표지가 될 수 있지만, 그 표지가 가리키는 실제적인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물세례와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을 서로 무관한 것으로 분리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외적 물세례와 내적 거듭남을 동일한 사건으로 단순화해서도 안 됩니다. 이 구별을 분명히 할 때 비로소 세례가 가리키는 영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667–691에 걸쳐 세례의 의미와 쓰임을 체계적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세례에 세 가지 쓰임이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첫 번째 쓰임은 사람을 기독교회 안으로 인도하고 동시에 영계의 기독교인들과 연결하는 것이며(TCR.677–680), 두 번째 쓰임은 구속자이시며 구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인정하며 그분을 따르게 하는 것이고(TCR.681–683), 세 번째이자 궁극적인 쓰임은 인간이 거듭나는 것입니다(TCR.684–687). 이 세 가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스베덴보리가 세례를 단순한 인간의 종교적 관습으로 축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세례가 주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의식이며, 자연계에서 행하는 세례가 영계의 질서와도 실제적인 관계를 맺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세례의 첫 번째 쓰임과 마지막 쓰임을 엄격하게 구별합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기독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주님의 진리와 선을 받아 실제로 거듭나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전자는 새로운 영적 삶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같고, 후자는 그 입구를 지나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내적 변화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거듭남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세례의 첫 번째 쓰임을 그 궁극적인 목적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세례의 참된 가치는 그 의식 자체에 머물지 않고, 그것이 사람을 어디로 인도하며 어떤 새로운 생명을 향하여 준비시키는가에 있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가 유아 세례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TCR.677에서 그는 유아들이 아직 신앙에 관한 것을 이해하거나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능력이 없지만 세례를 받는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이 세례가 교회로 들어가는 표지라는 것을 보여 준다고 설명합니다. 아직 선과 악을 분별하거나 의식적으로 회개할 능력이 없는 아기가 세례받는 순간 이미 성인의 의미에서 거듭남을 완성한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유아 세례에는 아무런 영적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세례받은 아이들이 영계에서 기독교인들과 연결되고, 주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그 아이들이 장차 주님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보호하고 준비시키신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자연계의 세례가 영계와 전혀 무관한 단순한 표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결정적인 구별이 있습니다. 아이가 성장하여 자기의 이해와 의지를 사용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의 영적 상태는 점차 자신이 무엇을 믿고 사랑하며 어떤 삶을 선택하는가와 깊이 연결됩니다. 세례받았다는 사실이 이후의 모든 삶을 대신해 주지는 않습니다. 유아 세례는 거듭남의 완성이 아니라 거듭남을 향한 출발이며, 장차 주님을 알고 그분의 진리에 따라 살아가도록 인도하는 거룩한 시작입니다. 따라서 세례받은 어린아이를 하느님의 자녀라고 부를 때에도, 그 표현이 가리키는 은총의 시작과 장차 이루어져야 할 실제적인 영적 성장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TCR.677–680 해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4255에서도 세례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세례가 교회와 교회에 속한 것들로 들어가는 입문을 뜻하며, 따라서 거듭남과 거듭남에 속한 것들을 표상한다고 밝힙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세례 자체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는 그 거듭남을 나타내는 표지라는 구별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론을 이해할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물은 말씀의 진리를 상응적으로 나타내며, 물로 씻는 행위는 진리를 통하여 인간의 악과 거짓이 제거되는 영적 정결을 뜻합니다. 그러나 물이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 낸다고 해서 그것이 곧 인간의 마음에 자리 잡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미움과 탐욕, 교만과 악한 욕망을 씻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내적 악은 인간이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의 빛으로 자신의 악을 발견하며,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할 때 점차 제거됩니다. 이 과정에서 진리는 단순히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려 주는 지식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이해를 밝히고 의지를 변화시키는 수단이 됩니다. 그러므로 세례의 물이 가리키는 참된 씻음은 물이라는 자연적 요소 자체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물이 상응하는 신적 진리가 인간의 내면에서 역사할 때 이루어집니다. 세례가 거룩한 이유는 물 자체에 독립적인 영적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인간에게 거듭남의 길과 목적을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세례의 표상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 의식 자체에 지나친 구원적 효력을 부여하는 것은, 외적 표지와 그것이 나타내는 내적 실재를 혼동하는 문제가 됩니다. (AC.4255, 10239 해설)

 

그렇다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세례의 목적을 설명하는 TCR.681과 684, 그리고 성찬과 거듭남의 관계를 설명하는 TCR.728과 729에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신분이 변경되거나 교회의 회원 명부에 이름이 올라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고 그 생명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로 새롭게 형성된다는 뜻입니다. 특히 TCR.729에서 스베덴보리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이들이 주님의 인도 아래 천국에서 양육받으며 점차 거듭나 주님의 자녀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대목은 유아 세례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세례받은 아이가 주님의 보호와 인도하심 가운데 놓인다는 사실은 참으로 귀중하지만, 그것을 곧바로 영적 성장의 완성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기독교회 밖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주님의 섭리 안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 어떤 특정한 교회의 제도적 의식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허락되는 특권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모든 인간의 구원을 원하시며, 사람이 태어난 종교적 환경에 따라 그분의 사랑을 제한하지 않으십니다. 결국 하느님의 자녀라는 표현의 가장 깊은 의미는 주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생명으로 새롭게 하시고, 그 사람이 자유롭게 주님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존재로 자라나도록 인도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스스로 신적 존재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그분의 사랑과 지혜를 반영하는 존재로 변화된다는 사실입니다. (TCR.681, 684, 728–729 해설)

 

이제 이러한 가르침을 실제 신앙생활에 적용해 보면 매우 중요한 문제가 드러납니다. 어떤 사람이 어린 시절 세례를 받고 평생 천주교 신자로 살아왔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세례명을 기억하고, 세례받은 날짜를 소중히 여기며, 주일마다 미사에 참여하고, 여러 성사생활에도 충실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그의 신앙생활에 귀중한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일상생활에서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자기 이익을 위하여 거짓말하며, 가족에게 분노와 폭력을 행사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나는 세례받은 하느님의 자녀다’라는 사실에 안심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그러한 사람이 반드시 지옥에 간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내적인 상태와 최종적인 운명은 오직 주님께서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세례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반복적인 확인이 아니라, 세례가 가리키는 참된 회개와 거듭남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반대로 아직 세례받지 않았거나 특정 교회에 소속되지 않았더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의 삶 속에서도 주님의 섭리가 역사할 가능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세례는 신앙생활의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입니다. 세례받은 날이 중요한 것은 그날부터 모든 것이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날의 거룩한 표지가 평생의 삶을 통하여 실제적인 영적 생명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세례받은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은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라는 선언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라는 가르침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천주교만을 비판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는 개신교 신앙에도 거의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개신교에서는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으니 구원받았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천주교에서 세례가 새로운 신분의 출발점으로 강조된다면, 일부 개신교에서는 영접기도나 회심의 고백이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기도 합니다. 물론 두 전통의 구원론과 성례전 이해는 서로 다르지만, 신앙인이 외적 종교 행위나 과거의 한 사건을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한 확실한 보증으로 삼으려는 위험은 공통으로 존재합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자신이 세례의 영적 의미를 이해하고, 상응론을 배우고, 거듭남과 체어리티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다른 신자들보다 더 높은 영적 상태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역시 지식과 생명을 혼동하는 것입니다. ‘프로프리움’(proprium)은 심지어 진리를 아는 사람에게도 자기 우월감과 영적 교만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순히 ‘내가 세례를 받았는가?’, ‘내가 올바른 교리를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이 아닙니다. 더욱 중요한 질문은 ‘나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를 따라 실제로 악을 피하고 있는가?’, ‘나의 사랑은 이전보다 자신에게서 이웃에게로 향하고 있는가?’, ‘나는 주님의 생명을 내 삶 속에서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례의 참된 열매는 사람의 이마에 남아 있는 보이지 않는 종교적 신분이 아니라, 그의 내면에서 자라나 삶으로 나타나는 사랑과 선의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라는 명제에서 우리가 인정해야 할 진리는 세례가 주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의식이며, 기독교회로 들어가는 입문과 장차 이루어질 거듭남의 중요한 표지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세례를 통하여 인간을 신앙의 공동체와 연결하시고, 영계의 질서 안에서도 그 사람을 보호하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수정되어야 할 부분은 외적 세례의 시행 자체를 인간의 내적 거듭남과 동일시하거나, 그 의식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영적 상태가 이미 완성되었다고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천주교 역시 세례받은 이후의 성장과 은총에 대한 협력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단순한 오해를 공식 교리 전체의 입장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세례가 그 자체로 새로운 영적 신분과 지워지지 않는 인호를 부여한다는 성사적 이해는, 세례를 거듭남의 표지와 입문으로 구별하는 스베덴보리의 설명과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냅니다. 주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어떤 종교 조직에 가입하거나 특정한 의식을 치렀다는 사실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역사하시고, 인간이 자유롭게 그분의 진리와 사랑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살아 있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세례가 가리키는 삶을 실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은 한 번 머리 위에 부어질 수 있지만, 주님의 진리가 인간의 마음을 씻고 새롭게 하는 일은 평생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속적인 거듭남 속에서 인간은 점차 주님의 자녀다운 존재로 형성되어 갑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세례는 기독교회로 들어가는 거룩한 입문이자 거듭남의 표지이지만,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참된 영적 생명은 외적 세례의 시행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와 사랑을 받아들여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실제적인 거듭남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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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구원받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 주님의 영원한 사랑과 인간의 자유를 혼동하다

 

개신교 신앙생활에서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말은 많은 신자에게 깊은 위로와 확신을 주는 표현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므로,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어떤 실패와 죄를 경험하더라도 최종적으로 구원을 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은 특히 자신의 연약함과 반복되는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신자들에게 큰 위안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사랑하신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시며, 인간의 부족함 때문에 자신의 구원 약속을 철회하지 않으신다는 믿음에는 분명 귀중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이미 구원받았으므로 이후에 어떤 삶을 살더라도 천국에 가는 것은 확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인간이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실제 상태를 구별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구원을 과거 어느 시점에 획득한 영원한 자격으로 이해하면, 성경이 그토록 강조하는 회개와 거듭남, 끝까지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은 구원의 본질이 아니라 부차적인 문제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먼저 이 명제를 개신교 전체의 공식 교리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개혁주의 전통은 흔히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라고 부르는 교리를 가르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7장은 하나님께서 참으로 부르시고 거룩하게 하신 사람들은 은혜의 상태에서 완전히 또는 최종적으로 떨어져 나가지 않으며,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끝까지 보존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참된 신자도 심각한 죄에 빠지고 한동안 그 죄 가운데 머물 수 있으며, 그 결과 양심이 상하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따라서 엄밀한 개혁주의 견인 교리는 ‘한때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으니 이후에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무조건적인 면죄부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반면 웨슬리안·알미니안 전통은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먼저 역사하지만 인간은 그 은혜에 대한 응답을 거부하고 믿음에서 떠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결국 개신교 안에서도 구원의 영원한 보장에 관한 이해는 서로 다릅니다. 우리가 이 글에서 검토하려는 것은 이러한 교리적 차이를 무시한 채, ‘한번 구원받았으면 이후의 삶과 관계없이 모든 것이 확정되었다’고 받아들이는 신앙적 통념입니다.

 

성경에서 영원한 구원의 확신을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말씀은 요한복음 10장 28절로 29절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양들에게 영생을 주시며 그들을 자신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8장 38절로 39절 역시 사망이나 생명이나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들은 주님의 사랑과 구원하시는 능력이 인간의 연약함이나 세상의 위협보다 무한히 크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같은 요한복음 10장 27절에서 자신의 양들이 자신의 음성을 듣고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요한복음 15장 4절로 6절에서는 자신 안에 거하라고 명하시며,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양들을 지키시는 능력과 그 양들이 실제로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상태를 분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진리와, 사람이 주님을 떠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문제는 같은 차원에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히브리서 6장 4절로 6절과 10장 26절로 29절에는 한때 영적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라도 의도적으로 진리를 거스르고 악으로 돌아설 때 발생하는 심각한 위험이 경고되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20절로 22절 역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사람이 다시 그것에 얽매이는 상태를 경고합니다. 물론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이러한 본문들을 참된 중생자의 구원 상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외적으로 신앙에 참여했으나 참된 구원에 이르지 못한 사람에 관한 경고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반면 다른 개신교 전통에서는 실제 신자에게도 배교의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이처럼 해석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어느 입장에서든 성경의 경고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약속은 회개와 순종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허가증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이 문제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구원의 의미 자체가 더욱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는 주님의 섭리가 지향하는 목적이 인간의 구원이며, 인간이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개혁되고 거듭나야 한다고 설명합니다(DP.71, 82–86). 여기서 구원이란 단순히 인간의 이름이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의 명단에 기록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주님에 의해 변화되고, 악을 사랑하던 사람이 선을 사랑하며, 거짓을 즐기던 사람이 진리를 기뻐하는 새로운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의 내면에서 실제로 일어나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제거하여 강제로 천국의 생명을 주입하지는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자유롭게 받아들이지 않은 사랑은 그 사람 자신의 사랑이 될 수 없고, 이해를 거치지 않은 진리는 그 사람의 생명과 결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부여하시는 외적인 신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를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가운데 실제로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께서 한번 시작하신 구원의 역사를 인간이 거부할 수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은 결코 인간에 대한 구원의 뜻을 철회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으며, 주님은 모든 사람을 가능한 한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끊임없이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와 합리성은 구원의 첫 순간에만 허락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 전체에서 존중되어야 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한때 진리를 받아들이고 선을 행하기 시작했더라도, 이후 자신의 자유로 악을 사랑하고 진리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돌아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사람을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의 삶을 통해 주님의 인도를 거스르는 방향을 선택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자신의 악을 마치 스스로 제거하는 것처럼 노력해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제거하고 선을 주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라고 설명합니다(DP.100–128).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획득한다는 뜻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과 분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구원을 단번에 획득한 뒤 잃어버릴 수 있는 물건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명제가 구원을 영구적인 소유물처럼 이해하는 위험을 지닌다면, 반대로 ‘죄를 지을 때마다 구원을 잃었다가 회개하면 다시 얻는다’는 생각 역시 구원의 본질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순간에 구원을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에서 어떤 사랑이 형성되고 있으며 그 사랑이 어떠한 삶을 만들어 내고 있느냐입니다. 사람이 악을 행했다고 해서 그 순간 곧바로 모든 영적 생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되며, 그 과정에는 수많은 시험과 넘어짐, 회개와 회복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모든 과정에서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반복되는 연약함 때문에 자신의 구원이 매번 취소되는 것처럼 두려워할 필요도 없지만, 과거의 신앙고백 하나만을 근거로 자신의 현재 삶을 돌아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에 나타나는 지배적인 사랑의 가르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죽은 뒤에도 지상에서 형성한 자신의 사랑과 그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을 지니고 살아간다고 설명합니다(HH.476). 특히 HH.477에서는 인간의 지배적인 사랑이 사후에도 계속되며, 그 사랑이 그의 영원한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지배적인 사랑이란 그 사람이 일시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나 특정한 순간의 생각이 아니라, 그의 의지와 삶 전체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중심적인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이 입술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실제로는 자신만을 사랑하고 이웃을 지배하며 해치는 것을 즐거워한다면, 그 사람의 내면을 지배하는 것은 신앙고백의 내용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많은 실패와 연약함이 있더라도 악을 죄로 여기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선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서는 전혀 다른 내적 생명이 형성됩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것은 단순히 어느 날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 이루어 가신 생명이 실제로 어떤 사랑으로 자리 잡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렇게 보면 ‘구원이 취소된다’는 표현 자체도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합니다. 취소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유효하다고 선언하신 구원을 인간의 잘못 때문에 나중에 철회하시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은 인간을 구원하기로 하셨다가 마음을 바꾸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과 구원하시는 뜻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문제는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내적 상태입니다. 마치 태양이 끊임없이 빛과 열을 보내지만 창문을 닫거나 빛을 가리는 쪽으로 돌아서면 그 빛과 열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이러한 비유가 인간의 자유와 구원의 신비를 모두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주님께서 사랑을 거두시기 때문에 사람이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 사랑을 거부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생명을 형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욱 적절한 질문은 ‘한번 받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가?’보다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생명을 사람이 실제로 받아들이고 있는가?’입니다.

 

이것은 목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어떤 신자가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면서도 반복적인 죄와 악한 습관 때문에 괴로워한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에게 ‘한번 구원받았으니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만 말한다면,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실제로 악을 멀리하도록 돕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계속 그렇게 죄를 지으면 구원을 잃는다’고만 말한다면, 그는 주님의 사랑을 신뢰하기보다 자신의 구원 상태를 끊임없이 의심하며 두려움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느 쪽도 충분한 목회적 돌봄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다시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자신의 악을 정직하게 살피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며, 주님의 힘으로 조금씩 그 악에서 벗어나십시오’라고 권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이러한 권면은 주님의 사랑을 축소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회개와 책임을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붙드신다는 진리는 우리가 그분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따르도록 격려하는 말씀이어야지, 그 손길을 외면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보증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 명제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주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느냐에 있습니다. ‘한번 구원받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는 말이 주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라면, 우리는 그 안에 담긴 진리를 존중해야 합니다. 주님은 인간의 실패 때문에 사랑을 거두시는 분이 아니며, 한때 죄에 빠졌다고 해서 돌아오는 사람을 거절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말이 인간이 이후에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삶을 살든 그 내적 상태와 관계없이 천국의 생명을 영원히 보장받았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주님의 구원을 지나치게 외적인 것으로 이해한 결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은 단지 우리가 죽은 뒤 천국이라는 장소에 들어가도록 허락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천국의 생명을 이루시고, 우리가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기쁘게 받아들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구원의 확신은 과거에 어떤 종교적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에만 근거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도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그 사랑에 응답하여 살아가는 데서 더욱 깊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이미 확보했다고 생각하는 구원의 자격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를 구원하고 계시는 주님 자신입니다.

 

‘한번 구원받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는 명제에는 주님의 사랑과 구원하시는 뜻이 변하지 않는다는 귀중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신앙고백이나 회심 경험만으로 이후의 삶과 관계없이 영원한 구원이 확정된다고 이해한다면 오류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구원은 인간의 내면에 주님의 선과 진리가 받아들여져 거듭남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며, 인간의 자유와 그 안에서 형성되는 지배적인 사랑을 제외하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지만,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주님께서 구원을 취소하시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구원하시는 생명을 실제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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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02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이 짧은 문장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강력하면서도 가장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교회론적 명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라틴어로는 ‘Extra Ecclesiam Nulla Salus’라고 하며, 일반적으로 3세기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와 관련하여 알려져 있습니다. 이 명제는 본래 교회의 일치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을 강조하는 신학적 맥락에서 발전했지만, 역사 속에서는 종종 눈에 보이는 교회 조직의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배타적인 주장으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천주교회의 입장에서 이 말은 단순한 신앙적 구호가 아닙니다. 교회가 구원의 역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며,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이 교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설명하는 중요한 교리적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 명제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즉각적인 의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천주교 신자가 아닌 개신교인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 다른 종교 안에서 양심에 따라 선하게 살아온 사람들, 심지어 교회를 알면서도 그 교회의 모습에 실망하여 떠난 사람들은 모두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입니까? 무엇보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까, 아니면 교회라는 제도에 속하게 하시기 위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이 질문은 단순히 천주교의 배타성을 비판하는 문제를 넘어, 우리가 교회와 구원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먼저 반드시 확인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오늘날 천주교회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명제를 천주교 신자가 아니면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뜻으로 공식 해석하지 않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제846항은 이 명제를 긍정적인 형태로 다시 설명하면서, 모든 구원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서 그분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온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제847항은 자신의 잘못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은총의 도움을 받아 양심을 따라 그 뜻을 실천하려는 사람들도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밝힙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제14항과 제16항 역시 이러한 구별을 제시합니다. 다만 천주교회가 그리스도께서 구원에 필요한 교회로 세우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그 교회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거나 그 안에 머물기를 거부한다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천주교의 공식 입장은 무조건적인 제도적 배타주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보편성과 가톨릭교회의 구원적 필요성을 동시에 주장하는 구조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정확하게 인정해야 할 부분입니다. 상대방이 실제로 가르치지 않는 내용을 먼저 만들어 놓고 비판하는 것은 진리를 분별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새로운 신학적 질문이 생깁니다. 천주교회가 자기 밖에 있는 사람들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구원이 궁극적으로 가톨릭교회와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하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구원의 유일한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과, 그 구원이 반드시 하나의 역사적 교회 제도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동일한 명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은 성경 전체에 흐르는 근본적인 진리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고,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 ‘주님 외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과 ‘특정 교회 조직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교회의 제도적 유일성으로 옮겨 놓을 때, 구원의 근원과 구원을 전달하도록 맡겨진 수단이 서로 혼동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가 말씀을 보존하고 주님을 증언하며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치는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역할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곧 교회가 주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독점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가 참으로 주님의 교회라면, 교회는 사람들을 자기 자신에게 묶어 두기보다 주님께 인도해야 합니다. 교회의 가치는 교회 자체의 권위가 아니라 그 교회를 통하여 사람들이 얼마나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게 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318에서 매우 분명한 설명을 제시합니다. 그는 교회 밖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말씀을 가지고 있지 않고, 주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견해를 소개한 뒤, 그러한 사람들도 구원받는다는 사실은 주님의 자비가 보편적이라는 점에서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주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며,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므로 모든 인간의 구원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표현은 주님의 자비가 모든 개인에게 미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을 특정한 종교권에서 태어나게 하셨다는 이유로 구원에서 배제하지 않으십니다. 태어난 나라와 시대, 부모의 종교와 문화, 복음을 접할 수 있었던 환경은 인간이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러한 외적 조건이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면 주님의 사랑과 공의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역사적 우연에 종속되고 말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주님의 본성을 강조합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그 사랑의 본질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말씀을 직접 접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그들이 가진 종교와 양심을 통하여 신적인 것을 인정하고 선하게 살아갈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가 똑같이 참되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종교적 환경에 놓였든 주님의 구원하시는 섭리가 그 사람에게 도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HH.318 해설)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HH.308과 HH.328에서 주님의 교회가 온 지구에 퍼져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에 따르면 주님의 교회는 말씀을 소유하고 주님을 명시적으로 아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각자의 종교 안에서 신적인 것을 인정하고 체어리티(charity)의 선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도 주님의 보편적인 교회에 속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구별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알 수 있는 교회의 역할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교회는 인체의 심장과 폐에 해당하고, 다른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인체의 여러 기관과 지체에 해당한다고 설명합니다. 심장과 폐가 온몸의 생명 유지에 특별한 역할을 담당하듯, 말씀이 있는 교회도 인류 전체의 영적 생명에 특별한 쓰임을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비유 때문에 어느 한 기관도 몸 전체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심장이 중요하다고 해서 손과 발이 몸 밖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폐가 생명 유지에 필수적이라고 해서 다른 모든 기관이 무의미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교회는 하나의 살아 있는 영적 몸과 같으며, 각 부분은 주님의 섭리 안에서 서로 관계를 맺습니다. 따라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말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다시 읽는다면, 참된 교회가 주님의 사랑과 진리의 생명으로 이루어지는 영적 공동체라는 의미에서는 일정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를 특정한 역사적 조직과 동일시하는 순간, 그 명제는 주님의 보편적 구원 섭리를 좁히는 오류로 변할 수 있습니다. (HH.308, 328 해설)

 

이 문제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1032에서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노아와 맺으신 언약을 설명하면서,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지닌 모든 사람과 결합하시며, 여기에는 교회 안의 사람들뿐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도 포함된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그는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자기 교리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의 구원을 부정하는 경향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신앙 지식을 구원의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그 지식을 갖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인간이 어떤 교리적 명칭을 가지고 있는가보다, 그 사람 안에 실제로 체어리티의 생명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물론 이 말은 진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은 진리를 통하여 그 방향을 발견하고, 진리는 선을 통하여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람이 자기 잘못 없이 더 밝은 진리를 배우지 못한 경우, 주님께서는 그가 알고 있는 진리와 선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를 이끄실 수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도 이러한 인도는 계속됩니다. HH.321–325는 다른 종교권 출신의 사람들이 사후에 주님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고, 선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모습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구원은 특정 종교의 이름을 붙이는 형식적 절차가 아니라, 인간의 내적 사랑이 진리를 받아들여 주님과 결합하는 과정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천주교나 개신교에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그리고 주님께서 그를 어떻게 인도하시는가가 더욱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AC.1032, HH.321–325 해설)

 

그렇다고 해서 이 가르침을 ‘선하게만 살면 어느 종교를 믿든 상관없이 모두 천국에 간다’라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은 단순히 사회적으로 착한 사람이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참된 선은 주님에게서 비롯되며, 인간은 자신의 자유 안에서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며, 주님의 생명에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그가 말하는 체어리티는 외적 친절이나 자선행위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되어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는 내적 삶의 성향입니다. 따라서 종교 밖에 있는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은 선과 악의 구별이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며, 구원의 기준이 느슨해졌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인 종교적 소속보다 인간의 내적 삶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교회에 속한 사람은 더 많은 진리를 배울 기회를 얻은 만큼 그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할 책임도 커집니다. 반대로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받은 빛에 따라 판단받으며, 주님께서는 그가 처했던 환경과 알 수 있었던 진리, 그리고 그 진리에 대한 실제적인 반응을 온전히 아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구원 여부를 판단할 수 없지만,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진리를 어떻게 살아 내고 있는지는 진지하게 돌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교회 이해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변화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저 사람은 우리 교회 밖에 있으므로 구원받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나는 주님의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여기서 천주교와 스베덴보리 사이의 차이를 정확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양쪽 모두 구원의 근원이 인간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 곧 주님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또한 복음을 알지 못한 사람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점에서 접점을 갖습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그러한 구원까지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관련하여 이해하고, 가톨릭교회 안에 구원의 수단들이 온전히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교회를 처음부터 전 인류에 걸친 영적 실재로 이해하며, 교회에 속한다는 것의 본질을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체어리티의 삶을 살아가는 데서 찾습니다. 이 차이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역사적 교회와 그 성사적 질서가 구원론에서 본질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반면, 스베덴보리에게는 주님과 인간의 실제적인 결합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물론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을 통해 주님을 아는 교회의 특별한 역할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역할은 구원의 독점권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섬기는 영적인 쓰임입니다. 따라서 두 입장의 차이는 단순히 ‘천주교는 배타적이고, 스베덴보리는 포용적이다’라는 정도로 정리할 수 없습니다. 더 근본적인 차이는 교회의 본질을 어디에 두고, 주님의 구원하시는 역사와 제도적 교회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는가에 있습니다. 교회가 주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섬기는 것인지, 아니면 주님의 구원이 교회의 제도적 질서를 통해서만 완성된다고 보는 것인지, 바로 이 문제가 핵심입니다.

 

이제 우리는 처음의 명제로 돌아옵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이 말은 ‘주님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때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이시며, 누구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없이 천국의 행복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한 참된 교회가 주님과 결합한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영적 공동체라는 의미에서도,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 주님의 보편적인 교회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특정한 역사적 교회 조직의 회원 자격이나 제도적 권위에 종속시키는 순간 문제가 발생합니다. 주님의 교회는 인간의 조직보다 크고, 주님의 사랑은 인간이 설정한 종교적 경계보다 넓으며, 주님의 섭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구원의 경로보다 훨씬 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떠나거나 교리를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진리를 배운 사람일수록 그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하며, 교회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알리고 그분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돕는 거룩한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결국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너는 어느 교회에 속해 있었느냐?’라는 외적 소속의 확인이 아니라, ‘너는 내가 너에게 가르쳐 준 진리를 사랑하였으며, 그 진리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고 악을 피하며 살아왔느냐?’라는 내적 삶의 문제일 것입니다. 이 마지막 질문은 성경과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오늘의 신앙생활에 적용하여 표현한 것이며, 주님의 실제 심판을 인간의 언어로 단순화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남의 구원을 판정할 권위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진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겸손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교회의 참된 목적을 발견합니다. 교회는 구원의 문을 자기 소유로 선언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주님을 증언하고 그분의 사랑으로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명제의 참된 핵심은 구원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다는 데 있으며, 그 구원을 특정한 교회 제도에 대한 소속으로 제한하는 것은 주님의 보편적인 사랑과 교회의 영적 본질을 혼동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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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PR.002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영접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 주님께 나아가는 길을 하나의 기도문에 가두다

 

개신교 신앙생활에서 ‘영접기도’만큼 익숙하면서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은 기도는 흔치 않습니다. 전도자가 복음을 설명한 뒤 상대방에게 예수님을 영접하겠느냐고 묻고, 상대방이 동의하면 정해진 기도문을 한 문장씩 따라 하도록 인도합니다. ‘주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제 마음에 들어오셔서 저의 구주와 주님이 되어 주십시오.’ 기도가 끝나면 전도자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축하하며, 때로는 그날의 날짜를 기록해 두라고 권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수많은 사람이 처음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을 향해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 자체로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본래 주님께 나아가도록 돕기 위해 마련된 기도가 어느새 구원에 반드시 필요한 절차처럼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과연 주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특정한 기도문을 반드시 말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을까요?

 

먼저 역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에서 널리 사용하는 영접기도, 곧 ‘죄인의 기도’(Sinner's Prayer)는 초대교회부터 동일한 형식으로 전해 내려온 기도가 아닙니다. 회개와 신앙고백의 전통은 초기 기독교부터 존재했지만, 전도집회에서 결신을 요청하고 일정한 기도문을 따라 하도록 하는 방식은 근대 부흥운동과 복음전도 문화 속에서 발전했습니다. 특히 19세기 이후의 부흥집회와 20세기 대중전도 활동을 거치면서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모든 개신교 교단이 영접기도를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개신교 신학자와 목회자도 기도문을 따라 하는 행위 자체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검토하려는 것은 개신교 전체의 공식 교리라기보다, 특정한 전도 방식이 오랫동안 반복되면서 신자들의 의식 속에 사실상 구원의 필수 절차처럼 자리 잡은 현상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이 문제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사도행전 2장 37, 38절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묻자,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권합니다. 사도행전 16장 30, 31절에서 빌립보 간수가 바울과 실라에게 구원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자, 그들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대답합니다. 로마서 10장 9, 10절 역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어디에도 모든 사람이 동일한 문장으로 영접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규정은 없습니다. 성경은 회개와 믿음, 주님을 향한 고백과 삶의 변화를 가르치지만, 구원을 특정한 기도문을 암송하거나 따라 말하는 행위에 결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영접기도를 드리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사람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성경이 명시하지 않은 조건을 인간이 덧붙이는 일이 됩니다.

 

여기서 특별히 살펴볼 본문은 누가복음 23장 39–43절에 등장하는 십자가 위의 강도입니다. 그는 전도자의 안내를 받아 영접기도를 드리지 않았고, 교회의 정식 절차를 거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예수님께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낙원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 본문은 구원을 받기 위해 정해진 기도문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반대편 극단으로 넘어가, 죽기 직전 몇 마디 고백만 하면 그 사람의 실제 내적 상태와 관계없이 구원이 자동으로 확정된다고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강도의 내면을 아셨지만,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강도의 짧은 고백 안에 어떤 참된 회개와 신뢰가 있었는지 그 깊이를 완전히 판단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의 핵심은 마지막 순간에 사용할 수 있는 간단한 구원 공식을 발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종교적 절차에 갇히지 않으시며, 그 사람의 실제 내면을 아시고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는 이 문제를 더 깊은 차원에서 조명합니다. 그는 구원하는 신앙이 주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라고 설명하며(TCR.337), 사람이 주님께 나아가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갈 때 신앙이 형성된다고 가르칩니다(TCR.343–348). 여기에는 중요한 순서가 있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은 시작이며,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는 것은 그 시작을 밝히는 과정이고,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것은 배운 진리가 인간의 생명과 결합되는 과정입니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를 나머지와 완전히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영접기도는 주님께 나아가는 마음을 표현하는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문을 따라 말한 사실 자체가 참된 믿음을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입술로 주님을 부르면서도 실제 의지로는 여전히 악을 사랑할 수 있으며, 반대로 아직 기독교 언어와 기도 형식을 배우지 못했더라도 자신이 아는 진리에 충실하고 악을 죄로 여기며 선을 행하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외적 신앙 형식 자체보다 그 형식을 통해 실제로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스베덴보리의 회개론에서 더욱 뚜렷해집니다. 그는 TCR.510–511에서 회개를 인간 안에 교회가 성립하는 첫 번째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TCR.516–519에서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참된 회개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TCR.528–531에서는 실제적인 회개란 자신을 살피고,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인정하며, 주님께 기도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단순한 죄책감이나 종교적 감정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며,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그 악으로부터 돌아서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기도는 결코 불필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일은 회개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참된 의미는 정해진 문장을 정확히 말하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의 의지와 삶을 실제로 주님께 돌이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입술의 고백과 생명의 회개를 구별하는 기준입니다.

 

그렇다면 영접기도를 한 번도 드리지 않은 사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조차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의 구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의 구원론이 전통적인 배타적 구원 이해와 구별되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318–328에서 교회 밖에서 태어난 사람도 자신의 종교에 따라 선하게 살고, 자신이 아는 범위 안에서 신성, 그러니까 신적인 것을 인정하며, 양심에 따라 살아간다면 천국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가 동일한 진리를 가르친다거나, 주님을 믿는 신앙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모든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며, 주님을 명시적으로 알지 못한 사람도 구원받는다면 그 역시 주님에 의해 구원받습니다. 다만 지상에서 특정 종교에 속했는지, 특정 기도문을 사용했는지가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자동으로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신성한 사랑과 섭리는 인간이 태어난 시대와 지역, 종교적 환경이라는 외적 조건보다 훨씬 깊은 차원에서 역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접기도가 무의식 속에서 교리화될 때 발생하는 또 하나의 문제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교회가 정해 놓은 절차를 통과해야만 작동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아직 영접기도를 하지 않았으니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믿거나, 다른 사람이 ‘저 사람은 영접기도를 하지 않았으니 구원받지 못했다’고 단정한다면, 이미 구원을 주님의 신성한 사랑과 지혜보다 인간의 종교적 형식에 더 강하게 연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이 마련한 형식에 의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선과 진리의 생명을 끊임없이 공급하시며, 각 사람이 자신의 자유 안에서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인도하십니다. 사람이 진리를 모르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와, 진리를 알고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이유는 서로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차이를 모두 아십니다. 따라서 누군가의 구원을 판단할 때 단지 영접기도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보시는 인간 내면의 깊이를 외적인 한 가지 사실로 축소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영접기도를 없애야 한다거나 전도 현장에서 더 이상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진지하게 주님께 나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의 용서와 인도를 구하도록 돕는 것은 얼마든지 유익합니다. 처음 신앙을 시작하는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라 도움을 요청한다면, 목회자가 함께 기도문을 만들어 주거나 한 문장씩 인도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기도 자체가 아니라 기도에 부여하는 의미입니다. 기도가 끝난 뒤 ‘이제 영접기도를 했으니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하는 것과, ‘이제 주님께 마음을 열었으니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면서 주님과 더욱 깊이 결합해 갑시다’라고 권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전자는 기도라는 사건을 구원의 완성처럼 받아들이게 만들 위험이 있지만, 후자는 기도를 거듭남의 출발점으로 이해하게 합니다. 전도와 목회의 목적은 사람에게 어떤 종교적 절차를 완료했다는 안도감을 주는 데 있지 않고,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결국 ‘영접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우리가 바로잡아야 할 것은 기도의 중요성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이해입니다. 주님께 나아가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구원을 간구하는 일은 분명히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 소중한 행위가 하나의 필수적인 종교 형식으로 절대화될 때, 우리는 그 형식이 본래 가리키던 실체를 놓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의 입술에서 특정한 기도문이 한 번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과 삶이 실제로 그분을 향해 열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모든 사람을 당신께로 부르시며, 각 사람이 자신의 형편과 이해의 수준 안에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거듭남의 길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나는 영접기도를 했는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나는 지금도 주님께 나아가고 있는가? 내 입술의 기도가 내 의지의 변화로 이어지고 있는가? 내가 고백한 주님께서 실제로 내 삶의 주님이 되어 가고 계시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구원의 본질은 인간이 어떤 기도문을 완성했다는 사실에 있지 않고, 오직 주님께서 인간 안에 새로운 생명을 이루어 가시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영접기도는 주님께 나아가고 믿음을 고백하는 유익한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구원에 반드시 필요한 성경적 절차는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며, 그 구원은 믿음과 회개, 체어리티와 거듭남을 통해 인간의 실제 생명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기도문을 사용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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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01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천주교회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다’ - 주님의 교회는 역사적 계승에 있는가, 사랑과 신앙의 생명에 있는가?

 

천주교는 자신을 수많은 기독교 교파 가운데 하나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신 교회가 역사 속에서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왔으며, 그 교회의 온전한 실재가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과 일치하는 가톨릭교회 안에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여기에는 단순한 교단적 자부심을 넘어서는 신학적 주장이 담겨 있습니다. 곧 교회는 인간들이 신앙생활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 낸 공동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공동체이며, 사도적 계승과 성사, 교도권과 교회적 일치가 그 본질적인 요소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주교 신자에게 가톨릭교회에 속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느 종교단체에 가입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온전한 질서 안에 머물며, 그분께서 맡기신 구원의 수단들에 참여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참된 교회도 역사적 계승과 제도적 연속성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어떤 공동체를 당신의 교회로 인정하시는 기준은 사도적 계승과 교회의 외적 일치에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 공동체 안에서 실제로 살아 있는 사랑과 신앙에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은 특정 교단의 역사적 정통성을 부정하거나 인정하는 문제를 넘어, 교회의 참된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는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8항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유일한 교회가 가톨릭교회 안에 온전히 존속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사용되는 표현은 ‘존속한다’(subsistit in)라는 말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톨릭교회 안에 역사적이고 지속적인 실재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이 말이 가톨릭교회 밖에는 아무런 진리나 은총도 없다는 뜻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안에도 성화와 진리의 요소들이 존재하며, 세례받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도 실제적이지만 불완전한 친교가 존재한다고 인정합니다. 또한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836–848항은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 있으며, 자기 잘못 없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알지 못한 사람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음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주교회만이 참된 교회다’라는 명제를 ‘천주교 신자가 아니면 모두 지옥에 간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천주교의 실제 주장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지닌 온전한 신앙과 성사, 교회적 질서가 가톨릭교회 안에 지속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온전한 교회’의 기준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검토해야 합니다.

 

성경은 교회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출발점을 제공합니다.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주교는 이 말씀을 베드로에게 주어진 특별한 사도적 직무와 그 후계자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적 해석에서 베드로는 신앙, 특히 주님을 신적 존재로 인정하는 진리를 표상합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AE, 1759) AE.206과 ‘계시록 풀이’(Apocalypse Revealed, AR, 1766) AR.768에서 그는 베드로에게 주어진 열쇠와 반석의 의미를 인간 개인에게 독립적으로 주어진 영적 지배권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의 진리와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권능에 연결합니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교회의 기초는 베드로라는 한 인간의 지위 자체가 아니라, 베드로가 고백한 주님에 관한 진리에 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사도들 가운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사실을 근거로 주님의 교회 전체에 대한 영적 권위가 특정한 인간 직위에 독점적으로 계승된다고 보는 해석과는 구별됩니다. 교회를 세우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그 교회에 생명을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318–328에서 주님의 교회를 훨씬 넓은 시야로 설명합니다. 그는 주님의 자비가 모든 사람에게 미치며, 말씀을 직접 접하거나 주님의 이름을 알지 못한 사람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HH.328에서는 주님의 교회가 온 지구에 퍼져 있으며, 각자의 종교 안에서 신적인 것, 곧 신성을 인정하고 체어리티(charity)의 선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도 주님의 보편적인 교회에 속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종교가 동일한 진리를 가르치며 모든 종교적 가르침이 똑같이 참되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알 수 있는 교회에 특별한 영적 역할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그러한 교회를 인체의 심장과 폐에, 다른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을 인체의 여러 기관과 지체에 비유합니다. 심장과 폐가 온몸의 생명 유지에 특별한 쓰임을 담당하듯, 말씀을 가진 교회도 인류 전체의 영적 생명에 특별한 쓰임을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비유 때문에 어느 한 기관도 몸 전체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심장이 중요하다고 해서 손과 발이 몸 밖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폐가 생명 유지에 필수적이라고 해서 다른 모든 기관이 무의미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교회는 인간이 설정한 종교적 경계보다 크며, 그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비롯됩니다.

 

이러한 교회 이해는 ‘새 예루살렘과 그 천적 교리’(The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JHD, 1758) NJHD.241–248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에 의하여 성립하며, 말씀에서 비롯된 교리가 필요하지만, 교리만으로 인간 안에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교리에 따른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리의 정확성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교리는 인간에게 무엇이 선하고 진리인지를 가르치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도록 인도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정확한 교리를 알고 있더라도 그것이 이해 속의 지식으로만 머물고 의지와 삶으로 내려가지 않는다면, 그 사람 안에 교회의 참된 생명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사랑에 관한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악을 행한다면, 그의 이해에는 사랑에 관한 지식이 있을지라도 의지에는 아직 그 사랑이 살아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교리적 이해에 일정한 부족함이 있더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려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생명이 실제로 역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본질은 외적 교리 체계와 제도적 연속성 자체에 있지 않고,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 안에서 결합하여 살아 있는 생명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적 계승과 교회의 역사적 연속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역사 속에서 말씀을 보존하시고, 신앙의 가르침을 다음 세대로 전하며, 예배와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도록 섭리하셨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교회의 역사 속에는 말씀을 필사하고 보존한 사람들, 신앙을 가르친 사람들, 이웃을 섬기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본 사람들의 수많은 헌신이 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실제적인 선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가 공동체적인 예배와 교육과 봉사를 위하여 일정한 질서와 직무를 갖추는 것은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필요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외적인 질서를 교회의 영적 생명 자체와 동일시할 때 발생합니다. 교회의 제도는 주님과 인간의 결합을 돕는 수단이지, 주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목적이 아닙니다. 사제와 주교와 교황이든, 목사와 장로와 교회의 지도자이든, 그들의 직무는 사람들을 자기 권위에 종속시키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와 사랑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외적인 계승이 아무리 분명하더라도 그 안에서 이웃을 향한 사랑이 사라진다면 계승된 것은 교회의 형식일 뿐, 그 생명이 온전히 보존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교회의 외적인 모습이 보잘것없더라도 주님의 진리와 사랑이 살아 있다면 그곳에 참된 교회의 생명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교회 이해가 천주교 신자들에게만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천주교 신자가 자신이 사도적 계승을 보존한 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영적인 우월감의 근거로 삼을 수 있듯이, 개신교 신자도 자신이 성경 중심의 정통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도 자신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깊은 진리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영적인 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순간 진리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을 높이는 수단으로 변합니다. 스베덴보리가 경계하는 ‘프로프리움’(proprium)은 바로 이러한 종교적인 자기 사랑의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참된 교회에 관한 가르침을 배우는 목적은 어느 공동체가 더 우월한지를 결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교회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를 깨닫고, 자신이 그 생명 안에 실제로 참여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인간에게 종교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도록 인도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천주교의 주장에는 인정해야 할 진리와 다시 검토해야 할 부분이 함께 존재합니다. 교회가 주님의 것이며, 주님께서 역사 속에서 말씀과 예배와 신앙 공동체를 보존하도록 섭리하셨다는 사실은 귀중한 진리입니다. 또한 교회에 질서와 직무가 필요하며, 신앙의 가르침이 세대를 넘어 전해져야 한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역사적 계승과 제도적 일치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온전히 존재하는 장소를 결정한다는 주장은, 스베덴보리의 영적 교회 이해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교회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의 마음과 삶 안에서 실제로 결합하는 곳에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특정 교회가 참된 교리를 많이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교회의 구성원들이 실제로 참된 신앙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특정 교회의 제도적 경계 밖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사람에게 주님의 교회에 속한 영적 생명이 없다고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거룩한 수단이지만, 주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독점하는 소유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포도나무로, 제자들을 가지로 말씀하시면서 당신 안에 거하는 사람이 열매를 맺는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서 가지의 생명은 어느 가지가 먼저 생겼는지, 어느 가지가 더 높은 위치에 있는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모든 가지가 동일한 포도나무로부터 생명을 받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3장 35절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알아보게 하는 표지가 그들 사이의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가장 근본적인 기준을 보여 줍니다. 교회는 주님의 진리를 보존하고 가르쳐야 하지만, 그 진리는 결국 사랑의 생명으로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교회는 역사를 가지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그 역사 안에서 주님을 증언해야 하며, 질서를 갖추어야 할 뿐 아니라 그 질서를 통하여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어느 교회가 자신을 참된 교회라고 선언하는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어느 곳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가 실제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 생명이 사람들의 사랑과 삶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를 이루는 것은 인간이 자랑하는 역사적 이름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 안에 이루어 가시는 살아 있는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기 때문입니다.

 

‘천주교회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다’라는 명제에는 교회가 인간이 임의로 만들어 낸 공동체가 아니라 주님께 속하며, 주님께서 역사 속에서 말씀과 예배와 교회 질서를 보존하도록 섭리하신다는 귀중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가 지닌 온전한 실재를 사도적 계승과 교황과의 일치라는 특정한 역사적·제도적 구조 안에 독점적으로 위치시키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교회 이해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을 가진 교회의 특별한 영적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주님의 보편적인 교회가 온 지구에 퍼져 있으며 체어리티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오류의 핵심은 교회의 역사와 제도를 존중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외적인 질서를 참된 교회의 영적 본질과 동일시하거나 그 본질을 특정한 제도의 독점적 소유로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참된 교회는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의 의지와 이해 안에 받아들여져 사랑과 신앙의 생명으로 결합하는 곳에 존재합니다. 결국 교회의 참됨은 역사적 계승 자체가 아니라, 그 교회를 통하여 사람들이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에서 드러납니다. (SL.RC.001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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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PR.001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았다’ - 영접은 끝이 아니라 거듭남의 시작입니다

 

개신교 신앙생활에서 가장 익숙한 표현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았다’는 말입니다.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이면, 전도자는 그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축하합니다. 어떤 사람은 수십 년 전 부흥회에서 예수님을 영접했던 순간을 기억하며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날 이후 신앙생활에 많은 어려움과 실패가 있었더라도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만큼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분명 소중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자신의 공로나 종교적 성취가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오며, 주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구원의 길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접이라는 한 번의 사건을 그 이후의 삶과 관계없이 영원한 구원이 확정되는 순간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구원과 거듭남의 본질을 놓칠 수 있습니다.

 

요1:12는 주님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영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단순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일까요? 물론 그러한 신앙고백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요14:21에서 자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자신을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시고, 23절에서는 자신을 사랑하여 자신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에게 오셔서 거처를 함께하시겠다고 가르치십니다. 따라서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그분에 관한 어떤 사실을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분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실제로 주님과 결합해 가는 것을 포함합니다. 주님을 마음에 모셨다고 말하는 것과, 주님께서 실제로 그 사람의 사랑과 생각과 삶을 다스리시도록 자신을 여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는 구원하는 신앙이 주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라고 밝히면서, 참된 믿음이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합니다. TCR.340–342에서는 올바르게 믿고 선하게 사는 사람이 주님에 의해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며, TCR.343–348에서는 주님께 나아가고,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며,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이 세 가지가 결합되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표현은 ‘주님에 의해’라는 말입니다. 인간이 선하게 살아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시며, 인간은 그것들을 자신의 자유 안에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접은 단순한 종교적 결단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자신 안에서 역사하도록 마음과 삶을 여는 일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일과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일은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구원은 법적 신분이 바뀌는 사건만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주님에 의해 새로워지고, 악을 사랑하던 사람이 점차 선을 사랑하며,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던 사람이 이웃을 향한 사랑과 쓰임의 기쁨을 배워 가는 실제적 변화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내면을 강제로 바꾸지 않으시며, 인간이 진리를 배우고, 자신의 악을 발견하며, 그 악에서 돌아서도록 끊임없이 인도하십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71–99항은 인간이 자유와 합리성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영적 질서를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인간을 새롭게 하십니다. 따라서 영접의 순간에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자신이 받아들인 진리가 실제 삶 속에서 사랑과 선으로 나타나는 과정이 이어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엡2:8-9의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라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말씀은 구원이 인간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10절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존재라고 가르칩니다. 은혜와 선한 삶은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모든 선의 근원이며, 믿음은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체어리티는 그 진리가 사랑의 생명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받아들이고도 그 진리를 따라 살기를 거부한다면, 그 사람의 믿음이 실제로 어떠한 생명을 지니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약2:17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선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진리와 선이 분리되면, 믿음은 인간의 기억과 이해 속에 머무를 수는 있어도 아직 그의 온전한 생명이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은 영접의 경험이 자기 자신에 대한 영적 보증서로 바뀌는 일입니다. 사람이 ‘나는 이미 예수님을 영접했으므로 구원받았다’는 확신만을 붙들고,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이 무엇을 사랑하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관한 질문을 점차 피할 수 있습니다. 자기 욕망과 교만을 정당화하면서도 자신은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안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때 인간의 ‘프로프리움’(proprium), 곧 자신을 중심에 놓으려는 성향은 신앙의 언어까지 자기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구원의 확신을 가진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확신은 오히려 주님께 대한 감사와 겸손, 악을 멀리하려는 결심을 깊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확신 자체가 아니라 그 확신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신뢰인가, 아니면 자신이 이미 확보했다고 생각하는 구원의 지위에 대한 안심인가를 구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마7:21에서 자신을 향하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다른 사람의 구원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지배적인 사랑과 내면 상태를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인간의 외적 신앙고백과 실제 내면의 생명을 구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영접기도를 했다고 해서 반드시 천국에 간다고 단정해서도 안 되며, 영접기도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구원받을 수 없다고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주님의 진리를 배우고, 자신의 악을 죄로 인정하며,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가고자 하는 방향입니다. 이러한 삶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연약하고 때로는 실패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 거듭남으로 인도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았다’는 말에서 보존해야 할 진리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이 오직 주님이시며, 주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영접이라는 한 번의 사건만으로 거듭남의 모든 과정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목적은 단지 죽은 뒤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주시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람 안에 천국의 생명을 이루시고,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여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존재로 새롭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언제 예수님을 영접했는가?’라는 질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나는 오늘도 주님을 영접하고 있는가? 그분의 진리가 내 생각을 바꾸고, 그분의 사랑이 내 의지를 바꾸며, 그분의 생명이 내 삶에서 나타나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주님을 참으로 영접한다는 것은 과거의 어느 순간에 그분께 문을 열어 드렸다는 기억만이 아니라, 오늘도 그분과 함께 살아가며 그분의 생명으로 새롭게 되어 가는 일입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시작이지만, 영접 선언 자체가 거듭남의 완성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며, 인간은 믿음과 체어리티가 결합되는 삶을 통해 그 구원하시는 역사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구원의 확신은 과거의 영접 경험만이 아니라 오늘도 자신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신뢰하는 데서 깊어집니다.

 

(SL.PR.001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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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종을 대적하면 벌받아’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면 결국 벌받아.’ 교회 안에서 종종 듣는 말입니다. 목회자나 선교사, 영적 지도자에게 심각한 비판을 제기하면 ‘주의 종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에게 대적하다가 잘된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성경에도 모세를 대적한 고라 일당이 심판을 받고(민16),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한 뒤 나병에 걸리며(민12), 엘리사를 조롱한 아이들이 큰 화를 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왕하2:23-24). 이런 본문들을 읽으면 ‘하나님의 사람을 건드리면 하나님께서 직접 벌하신다’는 생각이 생기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분명 붙들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선한 일을 악의적으로 방해하고, 거짓으로 사람을 모함하며, 진리를 미워하여 그것을 전하는 사람을 박해하는 것은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호칭 자체에 일종의 영적 면책특권을 부여할 때 생깁니다. ‘저 사람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이니 그의 말과 행동을 비판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한 인간에게 주님의 권위를 거의 그대로 옮겨 놓게 됩니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의 모든 판단과 행동이 자동으로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함부로 죽이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지만(삼상24:6), 그렇다고 사울의 모든 행동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실제로 다윗을 죽이려 했고,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잘못된 행동을 거듭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여 자신의 손으로 왕위를 차지하지는 않았지만, 사울의 악한 행동에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존중과 복종은 같은 말이 아니며, 직분을 존중하는 것과 그 직분자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도 같은 말이 아닙니다. 더 분명한 사례는 바울과 베드로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직접 사도로 세우신 사람이었지만,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함께 먹다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물러났을 때, 바울은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고 말합니다(갈2:11). 만일 ‘하나님의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는 공식이 옳다면 바울은 사도 베드로를 책망해서는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이 사건을 기록하여 하나님의 사람도 잘못할 수 있고, 그 잘못은 진리에 따라 바로잡혀야 함을 보여 줍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왕에게 순종만 하지 않았습니다. 나단은 다윗에게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말하며 그의 죄를 직면하게 했고(삼하12:7), 엘리야는 아합의 악을 책망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 아래 있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고라가 모세를 대적한 사건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고라 사건의 핵심을 단순히 ‘하나님의 지도자를 비판했다’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고라와 그 무리는 모세의 개인적인 실수를 지적하거나 책임 있는 질문을 제기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맞서 자기들의 권력과 지위를 요구하며 반역했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을 오늘날 ‘목회자를 비판하면 고라처럼 심판받는다’는 식으로 곧바로 적용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모세의 지위와 현대 교회의 목회자 직분을 아무 설명 없이 동일시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민12의 미리암과 아론 사건 역시 단순히 모세와 의견이 달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고 하며(민12:2) 모세에게 주어진 고유한 사명을 시기하고 자기들의 위치를 높이려 했습니다. 본문은 이어서 모세가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기록합니다(민12:3). 이것은 자기 권위를 지키기 위해 ‘나를 건드리면 하나님께 벌받는다’고 위협하는 지도자의 모습과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는 것’과 ‘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과 ‘주님을 대적하는 것’도 같은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진리를 미워하기 때문에 선한 사역자를 거짓으로 모함하고 악의적으로 방해한다면 그것은 분명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목회자의 잘못된 가르침을 성경에 비추어 질문하거나, 재정 비리를 지적하거나, 권력 남용과 부당한 행동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까지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는 일’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특히 ‘나를 대적하면 하나님께서 가만두지 않으신다’, ‘나를 떠난 사람들은 결국 잘되지 않았다’, ‘주의 종에게 손대면 자녀에게까지 화가 간다’는 식의 말을 지도자 자신이 사용한다면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자기 권위를 지켜 주는 보복자로 만들고, 사람으로 하여금 주님보다 목회자를 두려워하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모든 참된 권위는 ‘선’(good)과 ‘진리’(truth)를 섬기기 위한 권위입니다. 직분 그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라는 직함, 안수, 교회의 규모, 오랜 사역 경력, 많은 추종자가 그 사람의 모든 말을 주님의 말씀으로 바꾸어 주지 않습니다. 직분은 선과 진리를 섬기도록 맡겨진 ‘쓰임’(use)이며, 그 권위 역시 그 쓰임을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 지도자에게 중요한 질문은 ‘사람들이 나에게 얼마나 순종하는가?’가 아니라 ‘나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얼마나 충실하게 섬기고 있는가?’입니다. 성도에게 중요한 질문도 ‘저 사람은 유명한 하나님의 사람이니까 무조건 따라야 하는가?’가 아니라 ‘그가 말하고 행하는 것이 주님의 선과 진리에 합당한가?’입니다. 사람을 중심에 놓으면 신앙은 인물 숭배로 흐르기 쉽지만, 선과 진리를 중심에 놓으면 지도자와 성도 모두 주님 아래 서게 됩니다.

 

여기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은 특별히 위험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종교적 권위를 가진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기 쉽습니다. ‘주님께서 이 사역을 맡기셨다’는 고백이 어느 순간 ‘그러므로 나를 반대하는 것은 주님을 반대하는 것이다’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판단과 주님의 뜻 사이의 경계가 흐려집니다. 종교적 프로프리움은 자신의 욕망과 권위를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보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위험합니다. 그러나 반대편에도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목회자도 사람인데 뭐’라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직분과 선한 사역 자체를 가볍게 여기거나,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선한 사역을 무너뜨리려 하거나, 진리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그것을 전하는 사람을 공격하는 것도 악입니다. 비판하는 사람 역시 ‘나는 정말 진리를 위해 이 말을 하는가, 아니면 그 사람이 싫어서 공격하고 싶은 것인가?’를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지도자도 비판자도 자신의 프로프리움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양쪽 모두 누가 더 높은 위치에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참된가를 기준으로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누군가가 주님의 선한 일을 악의적으로 대적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악에는 결과가 있습니다. 거짓을 사랑하면 거짓이 그 사람의 내면을 형성하고, 미움과 지배욕을 반복해서 선택하면 그것이 점점 그의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것이 훨씬 더 깊은 의미의 ‘벌’입니다. 하나님께서 화가 나서 밖에서 보복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사랑한 악이 결국 그 자신의 생명과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했으니 하나님께서 사업을 망하게 하셨다’, ‘목회자를 비판했더니 병에 걸렸다’, ‘주의 종을 떠났더니 집안에 문제가 생겼다’는 식으로 사건을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런 인과관계를 알 수 없습니다. 자연계의 불행을 하나님의 보복으로 해석하는 것은 신적 섭리의 원리와도 맞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44). 주님께서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주님의 종을 비판한 사람에게 병과 실패를 보내어 보복하시는 분으로 주님을 이해한다면 주님 자신이 가르치신 사랑과 충돌하게 됩니다.

 

스데반과 사울의 이야기는 이 점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참여한 사울은 실제로 주님의 사람을 대적했습니다. 그가 한 일은 분명 악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사울에게 즉시 보복하여 멸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다메섹 길에서 그를 만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물으셨고(행9:4), 그를 돌이켜 훗날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목적이 보복이 아니라 구원임을 보여 줍니다.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네가 어찌하여 내 사람들을 박해하느냐’가 아니라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스데반과 성도들을 향한 박해가 주님을 향한 박해가 된 것은 그들이 특별한 신분의 ‘주의 종’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 때문에 박해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심은 사람의 지위가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는 주님의 선과 진리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호칭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실제로 주님의 선과 진리를 섬기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대하는 우리 역시 그 사람의 인격이나 지위보다 그를 통해 나타나는 선과 진리를 존중해야 합니다. 동시에 그가 선과 진리에서 벗어날 때에는 사람을 우상화하지 않고, 그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면 결국 벌받는다’는 말은 그대로 공식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진리를 미워하여 선한 사람을 박해하는 것은 분명 심각한 악이며 그 악은 인간의 내면에 결과를 남깁니다. 그러나 어떤 종교 지도자에게 반대하거나 그의 잘못을 지적했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자연적인 불행을 보내신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선과 진리를 악의적으로 대적하는 것은 영적으로 심각한 일이지만, 어떤 “하나님의 사람”에게 반대했다는 이유만으로 주님께서 보복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더 깊이 압축하면 이것이겠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람을 건드려 벌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느라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거부하거나, 반대로 사람을 주님과 동일시하여 그의 잘못까지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목회자와 영적 지도자에게 가장 안전한 자리는 ‘나를 대적하지 말라’고 말하는 자리가 아니라 자신 역시 언제나 주님의 선과 진리 아래 있음을 기억하는 자리입니다. 성도에게 가장 안전한 자리 역시 지도자를 무조건 따르거나 무조건 의심하는 자리가 아니라, 사람을 존중하되 주님께 속한 선과 진리를 기준으로 분별하는 자리입니다.

 

사람은 틀릴 수 있습니다. 직분자도 틀릴 수 있고, 비판하는 사람도 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선과 진리는 사람보다 높습니다. 그래서 결국 질문은 ‘누가 하나님의 사람인가?’에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지금 나는 사람의 편을 들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따르고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는 목회자도 성도도 함께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SL.29, ‘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

‘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 ‘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참 많이 하는 말입니다. 걱정하던 문제를 놓고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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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

 

‘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참 많이 하는 말입니다. 걱정하던 문제를 놓고 기도한 뒤 ‘이제 주님께 맡기자’고 마음먹으면 불안했던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합니다. 성경에도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라는 말씀이 있고(시37:5),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는 말씀도 있습니다(벧전5:7). 그러므로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집착을 내려놓고 주님을 신뢰하는 것은 분명 신앙의 중요한 모습입니다.

 

문제는 ‘맡긴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결과를 주님께 맡긴다’는 것과 ‘내가 해야 할 일까지 주님께 맡긴다’는 것을 혼동합니다. 기도했으니 이제 내가 할 것은 없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알아서 사람도 보내 주시고 돈도 마련해 주시며 문제도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해야 할 결정과 책임을 미루면서도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주님을 의지하는 것과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같은 뜻이 아닙니다.

 

느헤미야가 좋은 예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 앞에서 울며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느1:4). 그러나 기도한 뒤 ‘하나님께 맡겼으니 하나님께서 알아서 성벽을 세우시겠지’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왕에게 무엇을 요청할지 준비했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뒤에는 밤에 직접 성벽의 상태를 살폈으며, 사람들을 조직하여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대적들이 공격하려 하자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들로 말미암아 파수꾼을 두어 주야로 방비’했습니다(느4:9). 이 한 구절에 맡김의 균형이 아주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동시에 ‘파수꾼을 두었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지만 그것 때문에 현실적인 행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행27에서 배가 풍랑을 만나 모두가 죽을 위험에 처했을 때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생명을 보존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선원들이 배에서 몰래 도망하려 하자 바울은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합니다(행27:31). 하나님께서 살려 주신다는 약속을 받았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신적 섭리에 대한 신뢰와 인간이 해야 할 적절한 행동은 서로 반대가 아니었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해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험을 앞둔 사람이 기도한 뒤 공부하지 않는 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 없고, 건강 문제를 놓고 기도하면서 필요한 치료와 생활 습관의 변화를 거부하는 것도 맡김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깨어진 관계를 위해 기도하면서 자신이 사과해야 할 것은 사과하지 않고 상대방만 변화되기를 기다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적인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다고 하면서 자신의 지출과 책임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뢰라기보다 책임 회피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아무리 준비하고 노력해도 우리의 손에 있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자녀에게 좋은 말을 해 줄 수는 있지만 자녀 대신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병원에 가고 치료를 받을 수는 있지만 결과까지 명령할 수는 없습니다. 사업계획을 세우고 성실하게 일할 수는 있지만 시장과 다른 사람의 선택을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진심으로 사과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이 반드시 용서하도록 만들 수는 없습니다. 바로 이 경계에서 참된 ‘맡김’이 시작됩니다.

 

내가 해야 할 것은 내가 하되, 내가 할 수 없는 것까지 붙잡고 하나님 노릇을 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이 인간의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그것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 능력들은 거듭남(regeneration)을 위해 필수적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선택과 행동을 대신해 버리신다면 인간은 주님과 자유롭게 결합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선을 행할 때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행해야 한다는 역설적인 원리를 강조합니다. 나는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심하고, 노력하고, 악을 거절하며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 순간에는 실제로 내가 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선을 행할 능력과 생명 자체가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내가 한다’와 ‘주님께서 하신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두 차원을 함께 붙드는 신앙입니다.

 

여기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의 두 가지 상반된 모습도 드러납니다. 한쪽에서는 ‘내가 다 해야 한다. 내가 해결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모든 결과의 주인으로 만드는 프로프리움입니다. 그러나 반대편에서는 ‘나는 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 역시 다른 모습의 프로프리움이 될 수 있습니다. 책임을 져야 할 자리에서 책임을 피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뢰는 이 두 극단 사이에 있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다하면서도 결과의 주인이 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서도 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마26:39). 이것은 수동적인 체념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기도하신 뒤 당신 앞에 놓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맡김은 행동의 중단이 아니라 끝까지 그 길을 살아 내는 순종으로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맡김’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책임 있게 행동하면서 결과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농부는 씨를 뿌리고 밭을 돌봅니다. 그러나 비를 내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의사는 환자를 진찰하고 최선의 치료를 합니다. 그러나 생명 자체를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가르치고 필요한 경계를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된 자녀의 마음과 선택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과 할 수 없는 영역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에서는 이 구별이 더욱 필요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을 강제로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진실을 말할 수 있지만 상대방에게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상대방의 인생을 대신 살아 줄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 그 사람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해야 할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는 계속 행하되, 그 사람의 자유와 최종적인 내면까지 내가 책임지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체어리티는 ‘하나님께 맡겼으니 나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무관심과 다릅니다. 배고픈 사람을 보고 ‘하나님께서 알아서 먹이시겠지’라고 하는 것이 체어리티일 수 없습니다. 야고보는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묻습니다(약2:15-16). 기도는 행동을 대신하는 수단이 아니라 선한 행동을 낳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반대편으로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내가 할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을 ‘결국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다시 자기 의존으로 돌아갑니다. 내가 최선을 다했다고 해서 원하는 결과가 반드시 오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그때 맡김이 필요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을 행한 뒤에도 결과가 내 뜻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음을 받아들이고, 그 결과 속에서도 주님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와 행동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기도한 뒤 행동하고, 행동하면서 다시 기도합니다. 기도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더 바르게 보게 합니다. 행동은 기도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에게서 받은 빛을 실제 삶으로 옮기는 과정입니다. 기도와 행동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어떤 문제를 하나님께 맡길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이 문제에서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사과해야 한다면 사과하고, 공부해야 한다면 공부하고, 치료받아야 한다면 치료받고,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면 요청하며, 잘못된 습관을 고쳐야 한다면 고쳐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 이미 지나간 과거,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환경, 그리고 최종적인 결과는 내 손에 있지 않습니다.

 

그 경계가 보일 때 맡김은 훨씬 구체적인 신앙이 됩니다.

 

‘주님, 제가 해야 할 것은 피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할 수 없는 것까지 붙잡고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맡김입니다.

 

그리고 결과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제대로 맡기지 못했나?’라고 자책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결과를 하나님께서 대신 보장해 주신다는 계약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원하는 결과와 주님의 섭리가 다를 수도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주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자연적인 성공만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궁극적으로 보시는 것은 우리가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는가입니다. 어떤 문제는 해결되면서 우리를 가르치고, 어떤 문제는 오래 남아 있으면서 우리를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관계는 회복되고, 어떤 관계는 우리가 최선을 다해도 이전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과정에서 우리가 악을 피하고 선을 선택하며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라는 말에는 귀한 진리가 있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교만과 불안을 내려놓고 주님의 섭리를 신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그러니 이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되는 순간 맡김은 영적 방임으로 바뀝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내가 해야 할 책임까지 주님께 넘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선을 성실히 행한 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결과를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더 깊이 압축하면 이것이겠습니다.

 

‘참된 맡김은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하면서도, 선을 행할 힘과 결과의 궁극적인 주권은 모두 주님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맡겼다’는 말 뒤에는 두 문장이 함께 따라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러나 결과까지 내가 지배하려 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두 문장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균형이 무너집니다. 첫 번째가 빠지면 영적 방임이 되고, 두 번째가 빠지면 자기 의존이 됩니다.

 

신앙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움직이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모든 것을 내가 해결하려고 애쓰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빛과 힘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을 자유롭게 행하면서,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평안히 주님의 손에 놓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 맡긴다’는 말의 가장 깊은 뜻은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주님, 제 몫은 피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몫까지 제가 붙들고 있지도 않겠습니다.’

 

 

 

SL.30, ‘주의 종을 대적하면 벌받아’

‘주의 종을 대적하면 벌받아’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면 결국 벌받아.’ 교회 안에서 종종 듣는 말입니다. 목회자나 선교사, 영적 지도자에게 심각한 비판을 제기하면 ‘주의 종을 함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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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28,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셔. 그러니 일어난 일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야’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셔. 그러니 일어난 일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야’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셔. 그러니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의 뜻이야.’ 신앙생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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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셔. 그러니 일어난 일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야’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셔. 그러니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의 뜻이야.’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이런 말을 자연스럽게 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가르치며, 참새 한 마리조차 하나님의 돌보심 밖에 있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연처럼 보이는 일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여전히 다스리고 계심을 신뢰하는 것은 매우 귀한 신앙입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와 ‘일어난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직접 원하셨다’를 같은 뜻으로 만들어 버릴 때 생깁니다. 이 둘은 같지 않습니다. 만일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이 그대로 하나님의 뜻이라면 살인과 전쟁, 학대와 배신, 거짓과 착취까지도 하나님께서 원하신 일이 되어 버립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니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악을 금하시는 분이면서 동시에 그 악이 일어나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모순에 빠집니다.

 

성경은 악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악을 행하는 자가 되지 말고 선을 행하는 자가 되라’고 하며(요삼1:11), 야고보는 더욱 분명하게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말합니다(약1:13). 주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말할 때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하지 말라고 명하신 일을 주님께서 동시에 하기를 원하셨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주님께서 뜻하시는 것’과 ‘주님께서 허용하시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에서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뜻하시는 것은 언제나 선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악에서 돌이켜 선을 선택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며, 마침내 천국의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자유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주님의 뜻을 거부하고 악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악을 원하시지는 않지만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기 위해 일정 범위에서 그것을 허용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악을 아예 막아 버리지 않으실까요? 이것은 인간의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에 관계됩니다. 사람이 선을 선택하려면 악을 선택할 가능성도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이 악을 선택하려 할 때마다 초자연적으로 손을 붙잡아 막으신다면, 겉으로는 악이 없는 세상이 될지 몰라도 인간은 자유롭게 선을 사랑하는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선을 강제로 행하는 것은 참된 선이 될 수 없으며, 사랑 역시 강요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천국으로 끌고 가는 기계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주님을 향할 수 있는 인간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허용이 방관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허용하신다’는 말을 ‘상관하지 않고 내버려 두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적 허용은 신적 섭리 밖에 존재하는 별도의 영역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선으로 바꾸어 악이 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이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그것이 가능한 한 더 큰 악으로 번지는 것을 제한하시고, 그 결과 속에서도 인간을 선으로 돌이키기 위해 끊임없이 역사하십니다. 악은 인간과 지옥에서 나오지만, 악을 제한하고 그 가운데서 선한 가능성을 보존하시는 것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요셉의 이야기가 이 차이를 잘 보여 줍니다. 형들은 요셉을 미워했고 그를 죽이려 했으며 결국 노예로 팔았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해 버리면 형들의 악한 선택까지 하나님께서 원하셨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훗날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형들이 의도한 것은 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선이었습니다. 같은 사건 안에서도 인간의 악한 의도와 하나님의 선한 섭리는 구별됩니다.

 

십자가는 이 문제를 가장 깊은 차원에서 보여 줍니다. 유다는 주님을 배신했고, 종교 지도자들은 거짓 증언을 이용했으며, 군병들은 주님을 조롱하고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들의 배신과 증오와 잔인함 자체를 ‘하나님의 선한 뜻’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악은 악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행한 그 악조차 주님의 구원 역사를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인간과 지옥의 가장 깊은 악을 맞아 그것을 이기시고 인류를 위한 구원의 길을 이루셨습니다. 여기에서 신적 섭리의 놀라운 깊이가 드러납니다. 주님은 악을 만들어 선을 이루시는 분이 아니라, 악이 일어나도 그것이 당신의 궁극적인 선을 좌절시키지 못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 구별은 우리의 실제 삶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데려가셨습니다’라고 말하거나, 범죄 피해자에게 ‘이 일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난 것입니다’라고 너무 쉽게 말하면 큰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특히 누군가의 악한 선택으로 고통받은 사람에게 그 악까지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한다면, 피해자는 자신을 해친 사람뿐 아니라 하나님까지 두려워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건의 이유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너무 빨리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자연재해나 질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진과 홍수, 암과 감염병, 갑작스러운 죽음이 발생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이것을 보내셨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자연계에는 주님께서 세우신 질서와 법칙이 있고, 그 자연적 질서 안에서 인간에게 고통스러운 일도 일어납니다. 또한 인간의 탐욕과 무책임, 폭력과 잘못된 판단 때문에 발생하는 고통도 있습니다. 모든 원인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의지 하나로 환원하면 자연적인 원인과 인간의 책임을 지워 버릴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반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지 않으신가? 막으실 수 있는데도 허용하셨다면 결국 뜻하신 것과 같은 것 아닌가?’ 이것이 바로 이 문제에서 가장 어려운 지점입니다. 그러나 ‘막을 능력이 있음’과 ‘그 일을 원함’은 같지 않습니다. 부모가 성인이 된 자녀의 모든 잘못된 선택을 물리적으로 막을 능력이 없어서만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억지로 통제하는 것이 그 사람의 자유 자체를 파괴하기 때문에 고통스럽게 지켜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인간 부모와 주님의 섭리를 그대로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허용 = 찬성’이 아니라는 점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인간의 거듭남(regeneration)과 직접 연결됩니다. 주님의 목적은 단지 우리가 고통 없는 자연적 삶을 사는 데 있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자유롭게 악을 거부하고 선을 선택하여 천국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적 섭리는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역사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왜 당장 개입하지 않으시는가?’라고 묻지만, 주님의 섭리는 우리가 보는 한순간보다 인간의 영원한 삶 전체를 보고 움직입니다.

 

그렇다고 고통 앞에서 ‘다 하나님의 허용이니 받아들여라’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허용의 교리는 고통받는 사람에게 체념을 강요하기 위한 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악을 악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게 해 주는 교리입니다. 학대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므로 벗어나야 하고, 폭력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므로 막아야 하며, 불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므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병이 생겼다면 치료해야 하고, 재난이 일어났다면 사람을 구조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여 악과 고통 앞에서 수동적으로 있는 것은 신적 섭리를 믿는 태도와 다릅니다.

 

여기에서 ‘체어리티’(charity)가 중요해집니다. 체어리티란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이웃을 향하여 실제적인 선과 유용한 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누군가 고통받고 있을 때 ‘이것도 하나님의 뜻일 거야’라고 설명하는 것보다 그 사람 곁에 서고, 필요한 도움을 주고, 악을 막으며, 가능한 선을 행하는 것이 훨씬 더 주님의 뜻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왜 하나님께서 이 일을 허락하셨을까?’를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상처를 싸매고 돌보았습니다(눅10:33-35).

 

또한 이 구별은 인간의 책임을 보존합니다. 만일 일어난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가 저지른 잘못도 결국 하나님께서 뜻하신 일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회개의 근거가 약해집니다. ‘내가 화를 내고 상처를 주었지만 이것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난 일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악의 책임을 주님께 돌릴 수 없습니다. 악은 인간이 자신의 ‘프로프리움’(proprium)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거부할 때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란 자신의 악을 하나님의 섭리 뒤에 숨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악으로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받아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는 고백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고백을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 깊게 이해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직접 원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과 지옥의 어떤 악도 주님의 궁극적인 선한 목적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없으며, 주님께서는 허용된 모든 상황 속에서도 가능한 한 인간을 선과 구원으로 이끌고 계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났을 때 ‘왜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뜻하셨을까?’라고 묻는 것보다 때로는 질문을 바꾸는 편이 좋습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원하셨는지는 내가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이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는 어떤 선을 이루기 원하시는가? 그리고 나는 지금 어떤 선을 행해야 하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악을 하나님의 뜻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신적 섭리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게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한쪽 극단에는 ‘세상일은 모두 우연이고 하나님은 아무것도 관여하지 않으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다른 쪽 극단에는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직접 계획하고 원하신 것이다’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는 이 두 극단 사이에서 훨씬 섬세하게 움직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섭리하시지만 악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를 허용하시지만 인간을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악을 허용하시지만 그 악이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니 일어난 일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말에는 귀한 신앙고백과 위험한 오해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는 고백은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러므로 일어난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원하셨다’고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신적 섭리 밖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어난 모든 것을 주님께서 직접 뜻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더 깊이 압축하면 이것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뜻하시지 않지만 인간의 자유 때문에 악을 허용하시며, 허용된 악 속에서도 끊임없이 그것을 제한하고 인간을 가능한 선과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신앙은 비극을 만날 때마다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야’라고 설명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때로는 왜 이런 일이 허용되었는지 모른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악이 주님의 선보다 강하지는 않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것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가장 깊은 악을 행했지만, 그 악이 주님의 사랑을 패배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신적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모든 사건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도 주님의 선한 목적을 최종적으로 좌절시킬 수 없음을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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