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3.심화

 

1. 일곱 번째 상태와 수도원 전통의 완덕’, 합일의 비교

 

수도원 전통에서 말하는 ‘완덕’이나 ‘합일’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일곱째 날 상태’와 ‘부분적으로 겹치는 개념’이지만, 그 이해의 방식과 구조는 꽤 다릅니다. 이 차이를 차분히 정리하면 AC.13의 의미도 훨씬 또렷해집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의 설명부터 보겠습니다. AC에서 창세기 창조의 여섯 날은 인간 거듭남의 단계이고, ‘일곱째 날은 안식의 상태’입니다. 여기서 안식이라는 것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주님이 인간 안에서 주된 분으로 역사하시는 상태’를 말합니다. 여섯 번째 상태까지는 인간이 싸우는 단계입니다. 진리와 거짓, 선과 욕정 사이에서 많은 영적 전투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과 사랑이 결합되고 나면, 인간의 의지가 더 이상 주도권을 잡지 않고 ‘주님의 사랑이 중심이 되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전투가 멈추고 평안이 옵니다. 이것이 일곱째 날입니다.

 

이 점에서 수도원 전통의 ‘완덕’이나 ‘합일’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중세 수도원 영성에서는 영적 여정을 보통 ‘정화조명합일’ 같은 단계로 설명합니다. 마지막 단계인 합일(union)은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서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중심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살게 됩니다. 이런 설명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이 인간 안에서 주된 분으로 역사하시는 상태’와 상당히 비슷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도 있습니다. 수도원 전통에서는 종종 이 상태를 ‘신비적 체험이나 관상적 합일’로 강조합니다. 즉 깊은 기도나 관상을 통해 하나님과 직접적인 합일을 경험하는 상태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일곱째 날 상태를 그런 신비 체험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삶의 질서가 완전히 바뀐 상태’로 설명합니다. 즉 사랑이 의지의 중심이 되고, 선을 행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삶이 된 상태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수도원 전통에서는 이 상태가 종종 ‘소수의 성자들이 도달하는 특별한 영적 단계’처럼 설명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것을 ‘모든 사람이 거듭남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정상적인 상태’로 설명합니다. 물론 그 깊이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원리 자체는 특별한 수도 생활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하면 가장 정확합니다. 수도원 전통의 ‘완덕’이나 ‘합일’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일곱째 날 상태와 ‘어떤 공통된 영적 직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인간의 중심이 자기 자신에서 하나님 쪽으로 완전히 이동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수도원 전통이 그것을 ‘신비적 합일 경험’으로 강조하는 반면,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사랑이 주도하는 삶의 상태’로 설명합니다.

 

창세기의 일곱째 날은 어떤 특별한 신비 체험이 아니라, 사람이 오랫동안 주님과 함께 살아오면서 결국 ‘주님의 사랑이 그 사람의 삶을 자연스럽게 이끌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영적 전투가 중심이 아니라 평안과 질서가 중심이 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안식입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신앙 전통이 이 상태를 ‘완덕, 합일, 안식, 평안’ 같은 이름으로 표현해 온 것입니다.

 

 

 

AC.14, 창1, '주님'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

AC.14 이어지는 모든 글 가운데서 주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며, 다른 무슨 보조적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으로만 일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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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 창1 개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

AC.13 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두 번째 상태까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세 번째,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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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심화

 

1. 구체적인 예들

 

AC.12 본문 중,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 그리고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되는이라는 표현들이 나오는데, 이런 표현들의 구체적 예들을 좀 보여주실 수 있나요?

 

말씀하신 AC.12의 표현들은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매우 핵심적인 상태를 묘사하는 문장들이라서, 실제 삶의 모습으로 풀어 보지 않으면 다소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말씀하신 세 표현을 중심으로, 가능한 한 구체적인 삶의 예를 들어 설명드리겠습니다.

 

먼저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이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어떤 진리를 단지 알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그 진리 때문에 사랑의 행동을 하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말씀을 통해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알고 있다고 합시다. 이것이 아직 이해 속 지식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는 실제 상황이 벌어져도 그저 그렇게 말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직장에서 동료가 실수를 해서 큰 곤란에 처했을 때, 그 사람은 그 동료를 비난하거나 이용하지 않고 조용히 도와줍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으면, 그는 ‘이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는 좀더 무난한(?) 표현을 쓰겠지만 말입니다. 이때 그가 행한 도움은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에서 나온 사랑의 행동’입니다. 바로 이런 경우가 ‘신앙에서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상태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신앙적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합시다. 그는 사업이나 직장에서 이익을 얻을 기회가 있어도 거짓말이나 속임수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단순히 법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거짓은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의 행동은 단순한 도덕이 아니라 ‘신앙에서 나온 선한 행위’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에서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삶’입니다.

 

다음으로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한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생각에서는 진리를 알고, 의지에서는 선을 사랑하며, 그 둘이 함께 작동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어려운 이웃을 돕는 상황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단순한 감정만 있다면 그는 잠깐 동정하다가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지식만 있다면 ‘도와야 한다’는 원칙을 말할 뿐 행동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작동할 때는 다릅니다. 그는 먼저 ‘이웃을 돕는 것이 옳다’는 진리를 이해하고, 동시에 그 사람의 형편을 마음으로 느끼며 실제로 도움을 줍니다. 여기서 ‘이해는 신앙의 역할이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마음의 움직임은 사랑의 역할’입니다. 이 둘이 동시에 작동하는 것이 바로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하는 상태’입니다.

 

가정에서의 예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대할 때 단지 규칙만 강조하면 관계가 메말라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사랑만 있고 기준이 없다면 아이가 바르게 자라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아이를 바르게 길러야 한다’는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 동시에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는 때로는 훈계하고 때로는 격려하며 아이의 유익을 위해 행동합니다. 이런 경우도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작용하는 모습입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된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점점 영적으로 살아갈수록 ‘무엇에서 기쁨을 느끼느냐가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사람의 기쁨이 주로 세상의 것에서 옵니다. 명예, 돈, 인정, 편안함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 다른 종류의 기쁨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말씀을 읽다가 새로운 진리를 깨달았을 때 마음이 밝아지는 경험을 합니다. 또는 누군가를 도왔을 때 마음 깊은 곳에서 조용한 기쁨을 느낍니다. 또 어떤 사람이 갈등 속에서 용서를 선택했을 때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이런 기쁨은 외적인 보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선 자체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런 상태를 ‘영적 생명이 유지되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말씀을 연구하시다가 어떤 구절의 내적 의미가 또렷하게 보일 때 느끼는 깊은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또는 성도 한 사람이 말씀을 통해 삶이 조금 변화되는 모습을 보실 때 느끼는 기쁨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기쁨은 세상의 즐거움과 다른 종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기쁨을 ‘신앙의 진리와 체어리티의 삶에서 오는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정리하면 AC.12의 세 표현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먼저 사람은 신앙의 진리를 알고, 그 진리에서 사랑의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해와 의지가 함께 작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 사람의 기쁨과 삶의 활력 자체가 진리와 선에서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인간의 삶입니다.

 

 

 

AC.13, 창1 개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

AC.13 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두 번째 상태까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세 번째,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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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 창1 개요, '여섯 번째 상태'

AC.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산 영’(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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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심화

 

1.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

 

 자신을 확증하다의 해설을 보면, 이는 삶의 경험 속에서 진리와 선이 참됨을 확인해 간다라는 의미라고 하는데요, 이게 무슨 말인가요?

 

AC.11의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 oneself)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 사상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문자 그대로 보면 마치 ‘자기 생각을 고집스럽게 밀어붙인다’는 뜻처럼 들릴 수 있어서 오해가 생기기 쉽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의미는 조금 다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에게서 ‘확증(confirm)이라는 말은 단순한 이론적 동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어떤 진리를 머리로만 이해하는 단계와, 그것이 실제 삶 속에서 참된 것임을 경험을 통해 점점 분명히 알게 되는 단계는 다릅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말씀을 듣거나 가르침을 통해 ‘이것이 옳다’고 배웁니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그것이 자기 삶 속에서 살아 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다만 이해 속에 있는 진리입니다.

 

그다음 단계에서 사람은 그 진리를 실제 삶 속에서 적용해 봅니다.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합시다. 처음에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고, 정직하게 살고, 남을 해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살아가다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다. 그 사람은 점점 깨닫습니다. ‘,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 옳구나.’ ‘이것이 진짜 선이구나.’ 이런 깨달음이 경험을 통해 마음에 자리 잡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확증’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확증한다’는 말은 자기 의견을 억지로 강화한다는 뜻이 아니라, ‘삶 속에서 진리와 선이 실제로 참됨을 확인해 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진리가 단순한 지식에서 벗어나 삶의 확신이 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때 진리는 머리의 생각이 아니라, 마음과 삶에 뿌리를 내린 것이 됩니다.

 

AC.11의 문맥에서는 사람이 신앙의 원리로 말하고 행동하면서 점점 진리와 선 안에 자신을 세운다고 설명합니다. 즉 처음에는 신앙이 이해 속 지식일 뿐이지만, 그 신앙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동안 그 사람은 점점 그 진리 안에서 자신을 확고히 세우게 됩니다. 이것이 ‘확증’입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거짓을 확증하는 것’도 자주 말합니다. 사람이 어떤 잘못된 생각을 붙들고, 그 생각을 지지하는 근거만 계속 찾으면 그 역시 ‘확증’이 됩니다. 그래서 확증이라는 과정 자체는 중립적입니다. 문제는 무엇을 확증하느냐입니다. 진리를 확증하면 지혜가 깊어지고, 거짓을 확증하면 오히려 더 어두워집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배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것이 ‘내가 실제로 아는 것’이 됩니다. 바로 그 변화가 ‘확증’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가 지식에서 확신으로 바뀌는 과정’입니다.

 

AC.11에서 말하는 ‘자신을 확증한다’는 것은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태도가 아니라, 신앙의 진리와 선이 삶 속에서 참됨을 드러내면서 사람 안에 점점 확고하게 자리 잡는 과정을 말합니다.

 

 

 

AC.12, 창1 개요, '여섯 번째 상태'

AC.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산 영’(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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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 창1 개요, '네 번째 상태'

AC.10 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는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한 것들을 행했으나, 그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그가 겪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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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24, 25)

 

AC.47

 

이 말씀들 안에 거듭남에 관한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는 사실은, 앞 절에서 땅이 생물, 가축, 땅의 짐승(the living soul, 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을 낼 것이라고 말한 반면, 다음 절에서는 순서가 바뀌어 하나님께서 땅의 짐승, 가축(the wild animal of the earth, the beast)을 만드셨다고 말하는 데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는 사람이 처음에는, 그리고 그가 천적 인간이 될 때까지는, 마치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무엇인가를 내놓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이렇게 거듭남은 겉 사람에서 시작되어 속 사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여기 다른 순서가 나오는 것이며, 겉에 속한 것들이 먼저 언급되는 것입니다. That these words contain arcana relating to regeneration, is evident also from its being said in the foregoing verse that the earth should bring forth “the living soul, 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whereas in the following verse the order is changed, and it said that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likewise “the beast”; for at first, and afterwards until he becomes celestial, man brings forth as of himself; and thus regeneration begins from the external man, and proceeds to the internal; therefore here there is another order, and external things are mentioned first.

 

 

해설

 

이 글은 창세기 본문의 ‘말씀 순서 변화 자체가 지닌 의미’를 통해, 거듭남의 방향과 구조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단어 하나, 배열 하나도 우연이 아니라고 보며, 특히 순서의 변화는 항상 깊은 아르카나를 담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는 같은 대상들이 등장하지만, 그 나열 순서가 바뀌는 이유가 바로 그 열쇠입니다.

 

앞 절에서는 땅이 ‘생물 가축 들짐승’ 순으로 낸다고 합니다. 이는 사람이 자기에게서 무언가를 내놓는 것처럼 느끼는 단계, 곧 겉 사람의 차원에서 거듭남이 시작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때 사람은 여전히 자신이 선을 행하고 생명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주님께서 일하고 계시지만, 사람의 퍼셉션은 아직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 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들짐승 가축’ 순으로 만드셨다고 합니다. 이 순서 변화는, 거듭남의 주체가 점차 사람 자신에서 주님으로 옮겨 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 처음에는 사람이 ‘내가 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점점 주님께서 하신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단번에 일어나지 않으며, 천적 인간이 되기 전까지 계속됩니다.

 

이 글은 거듭남의 방향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라는 점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언제나 같은 원리를 강조합니다. 주님은 먼저 겉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고, 그 겉 사람의 활동과 선택을 통해 속 사람을 열어 가십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도 겉에 속한 것들이 먼저 언급되고, 점차 더 깊은 차원으로 이동합니다.

 

특히 중요한 점은, 이 과정에서 사람의 ‘자기에게서 나온 것 같은 느낌’이 제거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그 착각을 즉시 부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것을 사용하시어 사람을 이끌어 가십니다. 사람이 자기가 하는 것처럼 느끼지 못하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인간의 착각조차도 주님의 섭리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글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의 순서 변화는 단순한 문체상의 변형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방향 전환의 흔적입니다. 거듭남은 늘 바깥에서 안으로, 자기 자신에서 주님으로 이동하는 여정이며, 창세기의 언어는 그 여정을 가장 정밀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화

 

1. ‘순서 변화가 아르카나인 이유

 

 

AC.47, 심화 1, '순서 변화가 아르카나인 이유'

AC.47.심화 1. ‘순서 변화가 아르카나인 이유’ AC.47 본문에 나오는 순서 변화, 곧 ‘생물, 가축, 땅의 짐승’에서 ‘땅의 짐승, 가축’ 순으로 바뀌는 것이 왜 ‘거듭남은 겉 사람에서 시작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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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 창1:24-25, ‘짐승'(beasts), 사람의 애정(affections)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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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심화

 

1. ‘순서 변화가 아르카나인 이유

 

AC.47 본문에 나오는 순서 변화, 생물, 가축, 땅의 짐승에서 땅의 짐승, 가축순으로 바뀌는 것이 왜 거듭남은 겉 사람에서 시작되어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는 아르카나가 되는 건가요?

 

이 질문은 AC를 읽으시다가 ‘? 순서가 왜 바뀌지?’에서 멈추는 바로 그 지점을 정확히 짚으신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생물, 가축, 땅의 짐승에서땅의 짐승, 가축으로 순서가 바뀐 것은, 실제 거듭남이 사람의 속(내적)에서 바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각하고 다루는 겉 사람(외적 삶)’에서부터 시작되어 점점 안쪽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보여 주는 상응적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기본 구조를 다시 잡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항상 기준이 되는 것은 ‘속 사람 겉 사람’의 질서입니다. 원래 창조의 질서는 위에서 아래로, 즉 ‘속 사람이 먼저이고, 겉 사람이 그에 따라 움직이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본래적인, 이상적인 순서는 ‘더 높은 것(내적) → 더 낮은 것(외적)’입니다. ‘생물 가축 땅의 짐승’ 같은 배열은 바로 이 정상 질서를 반영합니다. 즉, 가장 안쪽의 살아 있는 원리에서 시작해 점점 바깥으로 내려오는 흐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타락 이후 인간은 이 질서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속 사람은 닫혀 있고, 겉 사람, 그러니까 감각, 습관, 외적 행동이 오히려 앞에 나서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 거듭남의 출발점은, 이론적으로는 속 사람이지만, ‘경험적으로는 사람이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자리, 곧 겉 사람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여기서 순서 변화가 의미를 갖습니다. ‘땅의 짐승 가축’이라는 순서는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가장 바깥, 즉 ‘생활 속의 행동, 습관, 감각적 반응(땅의 짐승)’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되어, 그다음에 ‘조금 더 길들여지고, 질서 잡힌 애정(가축)’으로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즉,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흐름’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아직 속 사람, 곧 깊은 의지나 사랑의 근본은 거의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이건 하지 말아야겠다’, ‘이렇게 살아야겠다’ 하며 ‘행동을 먼저 바꾸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화가 나도 바로 터뜨리지 않고 한 번 참는다든지,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 애쓴다든지, 누군가를 도우려 노력하는 것 등, 이런 것들이 바로 ‘땅의 짐승’ 차원의 변화입니다. 가장 바깥에서의 변화입니다.

 

그런데 이런 외적인 순종과 실천이 반복되다 보면, 점점 그 안에 ‘새로운 애정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하던 것이, 나중에는 조금씩 마음이 따라옵니다. 이것이 ‘가축’ 단계입니다. 즉,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길들여진 애정, 질서 잡힌 의지’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에야 비로소 더 깊은 변화, 즉 속 사람의 열림, 참된 사랑과 진리의 결합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출발은 언제나 ‘겉 사람에서 시작된 순종과 실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매우 분명히 말합니다. 거듭남은 위에서 시작되지만, ‘사람이 체험하는 순서는 아래에서 시작된다’고!

 

그래서 이 순서 변화는 단순한 표현상의 변화가 아니라, 이렇게 읽혀야 합니다. ‘거듭남은 가장 바깥의 삶에서 시작되어, 점점 더 안쪽으로 들어가며 완성된다.’ 이것이 바로 이 ‘아르카나’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먼저 바뀌어야 행동이 바뀐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실제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그 반대 방향도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즉, ‘행동을 먼저 바르게 하면, 그에 따라 마음이 바뀌는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겉 사람에서 시작되는 거듭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이 완전히 바뀐 다음에 행동하라고 하시지 않고, 먼저 행동으로 순종하게 하셔서, 그 과정을 통해 마음까지 바꾸십니다.’

 

‘‘땅의 짐승 가축이라는 순서 변화는,거듭남이 사람의 외적인 삶과 행동에서 시작되어 점점 내적인 의지와 사랑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 주는 상응적 표현입니다.’

 

 

 

AC.47, 창1:24-25, ‘거듭남의 순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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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심화

 

2.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

 

체어리티(charity)를 좀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이 영어 charity를 우리말로 옮기기가 참 그런 게, 우리말 어떤 하나의 표현으로 옮기는 순간, 그것 말고도 가지고 있는 다른 많은 뉘앙스들을 다 놓치는 것 같아요...

 

목사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charity’는 한국어 한 단어로 옮기기 가장 어려운 단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선’, ‘사랑’, ‘인애’, ‘선행’, ‘이웃 사랑’ 어느 하나로 번역해도 항상 뭔가 빠집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개념을 먼저 분명히 이해하고, 번역은 문맥에 따라 유연하게 처리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charity’의 가장 기본적인 뜻부터 말씀드리면, 그것은 ‘이웃을 향한 사랑이 삶 속에서 실제 행동으로 나타난 상태’입니다. 즉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삶의 태도와 행동의 방향’입니다. 그는 자주 ‘love to the Lord’와 ‘charity toward the neighbor’를 함께 말합니다. 전자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고, 후자는 그 사랑이 사람들 사이의 삶으로 흘러나오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charity는 사랑의 감정이라기보다 ‘사랑이 삶 속에서 작동하는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charity는 ‘자선 행위’보다 훨씬 넓은 개념입니다. 현대 영어에서 charity라고 하면 흔히 가난한 사람을 돕는 자선 활동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charity를 그렇게 좁게 보지 않습니다. 그는 charity를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는 의지와 그에 따른 삶 전체’로 이해합니다. 즉 정직하게 일하는 것, 공정하게 판단하는 것, 남을 해치지 않는 것, 다른 사람의 유익을 고려하는 것, 이런 모든 것이 charity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이 점 때문에 한국어 번역이 어려워집니다. ‘자선’이라고 하면 너무 좁아지고, ‘사랑’이라고 하면 감정 중심으로 들리고, ‘선행’이라고 하면 도덕적 행위 정도로 축소됩니다. 그래서 많은 번역자들이 ‘이웃 사랑’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비교적 좋은 선택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자신이 charity를 설명할 때 거의 항상 ‘이웃(neighbor)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charity는 단순히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도 아닙니다. 그는 charity를 ‘진리(truth)에 의해 인도되는 선(good)’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무엇이 진짜로 이웃에게 유익한지 분별하면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돈을 주는 것이 항상 charity는 아닙니다. 때로는 그것이 그 사람을 더 해롭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charity는 감정적 친절이 아니라 ‘지혜와 결합된 선한 의지’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특징은 charity가 ‘삶의 중심 원리’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그 사람이 믿는 교리보다 ‘그가 어떤 사랑으로 살고 있는가’로 판단합니다. 그 사랑이 이웃의 선을 향하고 있다면 그는 charity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faith without charity’는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신앙은 charity 안에서만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charity는 ‘남을 불쌍히 여겨 돕는 마음’보다 훨씬 넓습니다. 그것은 ‘이웃의 선을 진심으로 바라며 그를 위해 옳은 일을 하려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그 태도는 작은 일들 속에서 나타납니다. 정직하게 일하는 것, 공정하게 행동하는 것,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것,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하는 것, 이런 모든 것이 charity입니다.

 

그래서 번역할 때는 한 단어에 너무 묶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문맥에서는 ‘이웃 사랑’이 가장 자연스럽고, 어떤 곳에서는 ‘선행’, ‘선한 삶’, ‘이웃을 위한 사랑’, 또는 ‘이웃을 향한 선’이라고 풀어 번역하는 것이 오히려 의미를 더 잘 전달합니다. 스베덴보리의 charity는 하나의 단어라기보다 ‘삶의 방향 전체를 가리키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charity는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이웃의 선을 바라며 그 선을 위해 살려는 의지와 삶 전체’입니다. 감정이 아니라 삶의 질서이고, 순간적 행위가 아니라 지속적인 상태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charity 안에서 신앙이 살아 움직입니다.

 

 

 

AC.10, 창1 개요, '네 번째 상태'

AC.10 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는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한 것들을 행했으나, 그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그가 겪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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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심화 1, '회개(repentance)의 상태'

AC.9.심화 1. ‘회개(repentance)의 상태’ AC.9의 ‘회개(repentance)의 상태’라는 표현을 설명해 주세요. 이어지는 내용인, ‘사람은 속 사람(internal man)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과, 체어리티(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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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심화

 

1. 회개(repentance)의 상태

 

AC.9 회개(repentance)의 상태라는 표현을 설명해 주세요. 이어지는 내용인, 사람은 속 사람(internal man)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과,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생기가 없는데, 그가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걸로 여기기 때문이지요.’에서 갑자기 회개(repentance)라는 용어가 나오는 게 좀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비약에 가깝다 느껴지는데요... 뭐랄까... 그 정도는 아직 성숙하지 못한 정도지 무슨 회개할 정도로 죄를 진 건가 싶어서입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갑작스러움’은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현대 한국어에서 ‘회개’라는 단어는 보통 ‘큰 죄를 뉘우치는 사건’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C.9에서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repentance’는 그런 의미보다 훨씬 ‘구조적이고 영적 과정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그래서 그 맥락을 조금 풀어 보면 비약처럼 보이던 부분이 상당히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에게서 ‘회개’는 단순히 죄를 후회한다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는 여러 저작에서 회개를 ‘자신의 삶을 살펴보고, 악을 인식하고, 그것을 버리기 시작하는 상태’로 설명합니다. 즉 회개는 사건이라기보다 ‘상태(state)입니다. 사람이 자기 삶을 돌아보고 내 안에는 주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나에게서 나온 것이 많구나 하고 깨닫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AC.9의 ‘repentance의 상태’는 ‘죄를 크게 저질러서 울며 회개하는 순간’이 아니라 ‘자기 중심성의 문제를 처음 의식하기 시작하는 영적 단계’입니다.

 

이제 AC.9의 문장과 연결해 보겠습니다. 그 글에서는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한 말과 체어리티의 행위를 하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아직 ‘생기(life)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그 사람이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선을 행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내가 이렇게 선하게 행동했다는 자기중심적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단순한 미숙함을 넘어 ‘거듭남이 아직 완전히 시작되지 않았다는 표지’입니다.

 

여기서 ‘회개’가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이 처음에는 선한 말과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을 자기 공로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가면 그 사람은 점차 깨닫기 시작합니다. 내가 하는 선이 사실은 내 힘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구나. 내 안에는 여전히 자기 사랑이 강하구나. 이런 인식이 생기면, 그때부터 자기 중심성을 내려놓는 방향으로 마음이 움직입니다. 바로 이 전환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AC.9의 흐름을 거듭남 단계로 보면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진리와 선을 알기 시작합니다. 그다음에는 경건한 말과 선한 행동도 어느 정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자기 공로의 한계를 깨닫는 단계’, 즉 회개의 상태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회개는 큰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선의 한계를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래도 선한 행동을 하는데 왜 회개까지?라는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기준에서는 선한 행동의 외형보다 ‘그 출처가 어디냐’가 더 중요합니다. 선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믿는 한, 그것은 아직 완전히 살아 있는 선이 아닙니다. 그 선이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생명이 들어옵니다. 그 전환의 문턱이 바로 ‘회개의 상태’입니다.

 

처음 신앙을 시작하면 사람은 선한 행동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점점 깨닫습니다. 내가 선을 행하려 해도 내 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구나. 바로 그 깨달음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죄인의 절망이라기보다 ‘자기 중심성에서 주님 중심으로 방향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AC.9의 ‘repentance’는 죄책감의 폭발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거듭남의 구조 안에서 나타나는 자기 인식의 단계’라고 이해하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그렇게 보면 그 표현은 갑작스러운 비약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앞 문장과 정확히 연결된 설명이 됩니다.

 

 

 

AC.9, 심화 2,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

AC.9.심화 2.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 체어리티(charity)를 좀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이 영어 ‘charity’를 우리말로 옮기기가 참 그런 게, 우리말 어떤 하나의 표현으로 옮기는 순간, 그것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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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창1 개요, '세 번째 상태'

AC.9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의 상태로서, 이때 사람은 속 사람(internal man)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과,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생기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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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심화

 

1. 오늘날 이 상태는 시험, 불행, 또는 슬픔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를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AC.8 본문에 나오는 위 문장에 대한 자세한 설명 부탁합니다. 왜 시험, 불행, 슬픔들이 있어야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나요? 안 그런 사람들도 제법 있던데...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AC.8의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에서 매우 현실적이고도 예민한 지점입니다. 먼저 핵심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반드시 사람을 괴롭혀야만 거듭남이 일어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시험, 불행, 슬픔을 많이 겪은 사람일수록 더 거듭난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가 말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사람의 겉 사람, 곧 몸과 세상에 붙어 있는 자기 확신, 자기 의지, 자기 만족, 자기 판단의 소음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평소에는 속 사람 안에 저장된 리메인스와 주님의 조용한 인도를 거의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시험, 불행, 슬픔이 그 시끄러운 바깥층을 잠잠하게 만드는 도구가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고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겉 사람의 지배력이 약해지는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왜 하필 시험, 불행, 슬픔이 이런 역할을 하느냐 하면, 평소 인간은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너무도 당연하고, 강하게 붙들고 살기 때문입니다. 건강, 체면, 성공, 인정, 계획, 통제감, 내 판단의 옳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이 풀려야 한다는 기대, 이런 것들이 겉 사람의 질서를 이룹니다. 그런데 사람이 형통하고 자기 뜻대로 되는 동안에는 이것들이 거의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자기가 주도하고 자기가 판단하고 자기가 산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그 상태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더 깊은 선과 진리가 있어도, 그것이 거의 드러나지 못합니다. 반면 시험이나 불행이나 슬픔이 찾아오면, 그 사람이 당연하게 여기던 바깥 질서가 흔들립니다. 내가 다 할 수 있다는 생각, 내가 옳다는 생각, 세상적 안전이 나를 붙들어 준다는 생각이 약해집니다. 바로 그때 겉 사람의 주장들이 ‘잠잠해지고’, 그래서 속 사람 안에 저장된 리메인스, 곧 주님께서 미리 보존해 두신 선과 진리의 씨앗이 좀 더 앞으로 나올 수 있게 됩니다. AC.8이 말하는 ‘마치 죽은 것처럼 된다’는 말은 바로 이 의미입니다.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실제로 제거되거나 파괴된다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한동안은 그 지배권이 멈추고, 절대적인 주도권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시험, 불행, 슬픔’이 언제나 자동으로 사람을 더 좋게 만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실 많은 경우, 사람은 고난을 겪고도 더 완고해질 수 있습니다. 더 원망하고, 더 자기중심적이 되고, 더 비뚤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고난이라는 상황 속에서도 사람의 겉 사람을 느슨하게 하셔서, 속 사람 안의 더 깊은 것을 건드리실 수 있다는 것이 정확한 뜻입니다. 다시 말해, 변화의 원인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주님의 역사입니다. 고난은 수단일 수 있지만, 주체는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큰 시련 없이도 겸손해지고, 어떤 사람은 큰 시련을 겪고도 전혀 부드러워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마지막에 말씀하신 ‘안 그런 사람들도 제법 있던데...’라는 관찰은 아주 정확합니다. 실제로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비교적 평탄한 삶 속에서도 자기 고집이 약해지고, 진리를 듣고 순순히 받아들이며, 주님의 인도를 따르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대개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하나는 그 사람 안에 이미 강한 리메인스가 있고, 양심과 겸손이 비교적 일찍 형성되어 있어서, 큰 충격 없이도 겉 사람의 소음이 과도하게 커지지 않는 경우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겉으로 보기에는 평탄해 보여도, 그 사람 안에서는 이미 깊은 내적 씨름과 조용한 슬픔, 숨은 깨짐이 오래 진행되고 있는 경우입니다. 겉으로는 ‘시험 없이 잘 자란 사람’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매우 섬세하고 조용한 방식으로 겉 사람을 다루고 계셨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8의 문장은 ‘반드시 모두가 큰 불행을 겪는다’는 예외 없는 공식이 아니라, ‘오늘날 대체로는 이런 방식이 많다’는 관찰로 이해해야 맞습니다. 실제로 본문도 ‘거의 없다(seldom exists without...)고 말하지, ‘절대 없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왜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문제인가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것들을 죄악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몸도 필요하고 세상 속 삶도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주도권’을 잡을 때입니다.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은 본래 겉 사람의 도구여야 하는데, 타락한 인간 안에서는 그것들이 왕이 되려 합니다. 편안함, 인정, 소유, 비교우위, 안정, 자기 이미지, 이런 것들이 인간을 끌고 가기 시작하면, 사람은 속 사람의 빛보다 바깥 조건의 변화를 더 강하게 따라갑니다. 시험과 슬픔은 바로 이 잘못된 왕좌를 흔듭니다. 그래서 사람이 처음으로 ‘나는 내 힘으로 서 있는 존재가 아니구나’, ‘내가 붙들던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구나’, ‘참된 선과 진리는 다른 곳에서 오는구나’를 배울 여지가 생깁니다. 누가복음 15장, ‘돌아온 탕자’ 비유의 둘째가 스스로 돌이키는 장면이 바로 이런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AC.8의 논리는 ‘고난이 좋아서’가 아니라, ‘겉 사람의 폭주가 멈출 때 속 사람의 질서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입니다.

 

초심자에게 이 부분을 설명하실 때는 이렇게 말씀하시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일부러 괴롭히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바깥 것들에 붙잡혀 있을 때 그것들이 잠잠해질 틈을 통해 더 깊은 생명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어떤 사람은 큰 시험을 통해, 어떤 사람은 조용한 양심의 깨달음을 통해,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이나 자신의 한계를 통해 그 길을 배웁니다. 핵심은 고난의 크기가 아니라, 겉 사람의 소리가 줄어들고 속 사람의 문이 열리는가에 있습니다.’ 이렇게 설명하시면 AC.8의 엄중한 표현도 훨씬 바르게 전달될 것입니다.

 

 

 

AC.9, 창1 개요, '세 번째 상태'

AC.9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의 상태로서, 이때 사람은 속 사람(internal man)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과,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생기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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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 창1 개요, '두 번째 상태'

AC.8 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하는 건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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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심화

 

1. 앞서는(precede) 상태

 

AC.7에서 말하는 ‘앞서는 상태(preceding states)는 단순히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 상태’만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문맥에서는 이것이 조금 더 넓은 의미를 갖습니다. 그는 인간의 거듭남을 하나의 연속적인 과정으로 설명하면서, 어떤 상태가 나타날 때, 그것은 항상 그 이전에 있었던 상태들 위에서 생겨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preceding states’는 ‘현재 상태보다 앞서 있었던 모든 상태들’, 곧 그 상태를 가능하게 만든 이전 단계들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거듭남 이전의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 과정 속에서 서로 이어지는 단계들 전체를 포함하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상태(states)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의 삶은 일정한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여러 상태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의 상태는 이전 상태에서 자라나고, 다음 상태의 기초가 됩니다. 그러니까 한 상태가 나타날 때, 그것은 그 이전 상태들과 완전히 끊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세워지는 것이지요. AC.7에서 말하는 ‘preceding states’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앞서 있었던 상태들’을 말합니다. 즉 지금 설명되는 상태보다 먼저 있었고, 그것을 준비하거나 가능하게 만든 상태들입니다.

 

이 점은 거듭남 설명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창세기의 여섯 날은 각각 독립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가 다음을 준비하는 연속적인 상태들입니다. 예를 들어 첫째 날의 ‘’은 진리의 첫 인식을 의미하고, 그다음 상태들이 그 위에서 발전합니다. 따라서 둘째 날, 셋째 날 등 뒤의 상태들은 모두 앞선 상태들에 의존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preceding states’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지금 설명되는 상태는 이전 상태들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그 위에서 더 발전한 상태라는 뜻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에게서 이전 상태는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상태 안에 어떤 방식으로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 인간의 상태들이 서로 이어지며 축적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앞선 상태들은 단순히 지나가 버린 과거가 아니라, 이후 상태 안에 기초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preceding states’는 단지 시간적으로 앞선 단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상태의 토대가 되는 상태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따라서 AC.7의 ‘앞서는 상태’라는 표현은 ‘거듭남 이전 상태’라는 의미로만 좁히면 조금 부족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금 설명되는 상태보다 먼저 있었고, 그것을 준비하고 가능하게 만든 모든 이전 상태들’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창조 서술을 통해 인간의 거듭남이 이런 연속적인 상태들의 질서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AC.8, 창1 개요, '두 번째 상태'

AC.8 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하는 건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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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 창1 개요, '첫 번째 상태'

AC.7 첫 번째 ‘상태’(state)는 앞서는(precede) 상태로서, 유아기에서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바로 직전에 있는 상태를 모두 포함합니다. 이 상태를 ‘혼돈’(void), ‘공허’(emptiness), 그리고 ‘흑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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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심화

 

2.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AC.5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여러 종류의 영들’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영들이 많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 세계에도 질서와 구분이 있으며 서로 다른 상태의 존재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Arcana Coelestia’와 ‘Heaven and Hell’, 그리고 여러 저작을 종합해 보면, 스베덴보리는 영계의 존재들을 크게 몇 가지 유형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영들의 세계’가 막연한 안개 같은 세계가 아니라, 매우 질서 있는 세계라는 점이 보입니다.

 

먼저 가장 기본적인 구분은 ‘사람이 죽은 후 처음 들어가는 영들’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죽는 순간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영의 상태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존재를 그는 흔히 ‘영들’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아직 천국이나 지옥에 완전히 들어간 상태가 아니라, 중간 단계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의 속 사람, 곧 마음의 진짜 성향이 점점 드러나고 정리됩니다.

 

이 단계의 영들이 모여 있는 영역을 흔히 ‘영들의 세계’라고 부릅니다. 이곳은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 영역입니다. 여기서는 사람이 지상에서 살던 모습과 거의 비슷하게 살며, 서로 대화하고 배우고 깨닫는 과정이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영들과 함께 지냈다’고 말할 때 많은 경우가 바로 이 영역의 영들을 가리킵니다.

 

두 번째로는 ‘선한 영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미 마음이 선한 방향으로 정리된 영들로, 천국에 가까운 상태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아직 완전히 천사가 된 것은 아니지만, 삶의 중심이 선과 진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다른 영들을 돕거나 가르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기록에는 이런 영들이 인간의 생각과 삶에 영향을 주며 선한 방향으로 이끌려고 한다는 설명도 자주 등장합니다.

 

세 번째는 ‘악한 영들’입니다. 이들은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에 강하게 붙잡혀 있는 상태의 영들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진리보다 자기 욕망을 더 따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혼란을 주거나 잘못된 생각을 부추기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갈등이 사실은 이런 다양한 영적 영향과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네 번째로는 ‘천사들’이 있습니다. 천사는 완전히 새롭게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본래 인간이었던 존재가 천국의 삶에 완전히 들어간 상태라고 설명됩니다. 즉 인간이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삶 속에서 성장하면, 죽은 후 천사의 상태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사랑과 지혜의 질서 속에서 살며, 서로 협력하며 조화로운 공동체를 이룹니다.

 

스베덴보리가 ‘여러 종류의 영들’이라고 말할 때는 단순히 이 네 가지 정도의 구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훨씬 더 세밀한 구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영들은 특정한 사랑의 성향을 가지고 있고, 어떤 영들은 특정한 생각의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계에서는 비슷한 성향을 가진 존재들이 자연스럽게 함께 모이게 됩니다.

 

이 점이 중요한 이유는, 영계가 매우 질서 있는 세계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영계를 혼란스럽고 불확실한 세계로 상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는 그 세계가 오히려 자연계보다 더 질서 있고 분명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의 종류에 따라 공동체가 나뉘고, 생각의 방향에 따라 서로 다른 영역이 형성됩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인간이 지상에서 살 때도 이런 영적 영향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항상 영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생각과 감정 뒤에는 다양한 영적 영향이 작용하고 있으며, 인간은 그 가운데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단순히 개인의 심리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영적 질서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이렇게 보면 AC.5에서 스베덴보리가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한 것은 단순히 다양한 영적 존재를 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삶과 사후 세계를 연결하는 거대한 질서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마음과 선택, 그리고 죽음 이후의 삶이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라는 것을 보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의 많은 설명이 더 또렷해집니다. 그는 영계를 공포나 신비의 대상으로 묘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간 삶의 연장선 상에 있는 질서 있는 세계로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저작을 읽다 보면 ‘영들의 세계’가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AC.5, 심화 1,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지내게 되어’

AC.5.심화 1.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임없이, 그러니까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지내게 되어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또 제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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