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7:17-18은 매우 강한 말씀입니다. 화목제 고기가 셋째 날까지 남으면 불살라야 하고, 만일 셋째 날에 그것을 먹으면 처음 드린 제사 자체가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그 고기는 ‘가증한것’이 된다고 합니다. 하루 차이인데 왜 이처럼 엄격할까요? 본문은 실제로 셋째 날의 고기를 명백하게 금합니다.
여기에서도 먼저 선을 하나 그어야 합니다. ‘셋째날’이라는 말만 보고 곧바로 주님의 부활 셋째 날에 연결하거나, 숫자 3의 일반적인 상응을 그대로 대입하여 레7의 의미를 확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이번에 확인한 스베덴보리의 1차 원전에서는 레7:17-18을 직접 그렇게 해설하는 근거를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화목제 자체의 의미에서는 중요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화목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누리며 그분과 교통하고 결합하는 제사입니다. ‘먹는것’이 자기 것으로 삼음을 나타낸다면,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그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 데도 신적 질서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살아 있는 선입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주님에게서 흘러오는 것이지 인간이 한 번 받아 창고에 넣어 두고 ‘이것은이제내선이다’라고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선의 근원을 주님에게 돌리는 동안 그 선은 살아 있지만, 그것을 proprium의 공로나 소유로 붙잡으면 성질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 많은 선을 행한 사람이 어느 순간 ‘나는평생이렇게선하게살아왔다’는 자기 의에 머물 수 있습니다. 처음의 선은 실제로 주님에게서 받은 선이었을지라도, 그것을 자기 공로로 저장하여 현재의 악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면 더 이상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어제의 체어리티가 오늘의 자기 의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셋째 날의 고기를 ‘왜정확히셋째날인가?’까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거룩한선을신적질서밖에서붙들어자기것으로만들수없다’는 큰 원리는 화목제의 전체 상응과 잘 맞습니다. 남은 것은 불살라야 합니다. 이미 그 상태의 쓰임을 다한 것을 proprium이 붙잡고 먹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경험에도 적용됩니다. 오래전의 은혜 체험, 과거의 뜨거운 기도, 이전의 사역 성과가 오늘 주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감사할 기억이지만 오늘의 양식은 아닙니다. 오늘은 오늘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레7의 셋째 날 규례는 적어도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경계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주신 선을 받아 기뻐하되 그것을 내 공로로 저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선은 언제나 현재 주님에게서 오는 살아 있는 선이어야 합니다. 화목은 과거의 선을 소유하는 상태가 아니라 지금 주님에게서 받고 지금 이웃과 나누는 살아 있는 결합입니다. (SW.레7심화3)
레7의 화목제에는 아주 미묘한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드린 화목제의 고기는 반드시 그날 먹어야 하며 아침까지 남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서원이나 자원으로 드린 화목제는 그날뿐 아니라 이튿날에도 먹을 수 있습니다. 본문이 의도적으로 두 경우를 구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감사는 하루이고 서원과 자원은 이틀일까요? 이것 역시 현재 확인된 스베덴보리의 1차 원전에서 레7:15-16의 차이를 직접 풀어 주는 강한 대목은 찾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첫째날은정확히무엇,둘째날은정확히무엇’이라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응 원리에서는 중요한 방향을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날’은 단순한 24시간보다 상태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제물을 먹을 수 있는 날의 차이도 단순한 식품 보관 규정 이상의 대표적 의미가 있었다고 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특히 감사는 이미 받은 선을 즉시 주님께 돌려드리는 응답입니다. 어떤 은혜를 경험하고 그 선의 근원이 주님임을 바로 인정하는 상태입니다. 그런 감사는 살아 있는 현재의 상태입니다. 어제 받은 감사를 저장해 두었다가 오늘 자기 공로처럼 꺼내 쓰는 것이 아닙니다.
서원과 자원에는 인간의 의지와 약속이라는 요소가 조금 더 들어옵니다. 서원은 앞으로 행할 것을 약속한 뒤 이루어진 상태와 관련되고, 자원제는 인간이 자유롭게 드리는 응답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감사제와 정확히 같은 시간 규정을 갖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세 종류의 화목제가 서로 다른 영적 상태를 표상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감사제는더높고서원제는더낮다’는 식으로 순위를 매길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다양한 선한 상태를 하나의 획일적인 방식으로 다루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즉각 솟아나는 감사도 있고, 약속을 지키는 신실함도 있으며, 자유롭게 선을 선택하는 기쁨도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경우에 공통된 한계가 있습니다. 셋째 날까지는 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거룩한 선이라도 인간이 그것을 붙잡아 proprium의 소유로 만들기 시작하면 처음의 살아 있는 교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목제의 선은 살아 있는 상태에서 받아들여지고 누려져야 합니다.
따라서 레7:15-16은 거듭남이 ‘한번받은은혜를저장하여평생소비하는삶’이 아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언제나 살아 있으며 인간도 날마다 새롭게 그것을 받아야 합니다. 감사든 서원이든 자원이든, 중요한 것은 주님의 선이 현재의 삶 안에서 살아 있는 선이 되는 것입니다. (SW.레7심화2)
레7:12-13은 레2를 읽은 사람에게 아주 뜻밖의 장면입니다. 감사의 화목제에는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은 과자를 드립니다. 여기까지는 레2와 익숙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또유교병을화목제의감사제물과함께’ 드리라고 합니다. 레2에서는 ‘누룩을넣어서는안된다’고 하셨는데, 왜 감사의 화목제에는 누룩 있는 빵이 등장하는 것일까요? 본문상 이 차이는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무교는 순수하고 정결한 것을 나타내며, 누룩은 여러 문맥에서 거짓이나 불순한 것이 섞이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레2의 소제에서 누룩이 금지된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제단에서 여호와께 화제로 올라가는 것은 순수한 선과 진리를 표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7의 유교병에 대해서는 중요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제가 확인한 범위에서는 스베덴보리가 레7:13을 직접 들어 ‘감사화목제에유교병을넣은이유는정확히이것이다’라고 해설하는 강한 원전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누룩=악이므로화목제에악도함께드린다’와 같은 식의 해석은 피해야 합니다. 그것은 상응을 기계적으로 역산하는 것이 됩니다.
다만 화목제의 전체 구조는 중요한 단서를 줍니다. 번제는 전부 제단에서 불살라지지만 화목제는 제사장과 제물을 드린 사람이 함께 먹습니다. 즉 화목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인간의 실제 삶과 공동체의 기쁨 안으로 들어와 함께 누려지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레7의 감사제에는 제단에 직접 올라가는 거룩한 부분과 인간이 함께 먹는 부분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교병과 유교병이 함께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화목제가 ‘인간이이미완전히천사처럼순수해진뒤에만가능한교통’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아직 자연적 인간의 삶을 살아가며 불완전함이 남아 있는 사람도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감사하며 이웃과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레7:13에 대한 직접적인 스베덴보리의 해설이 아니라 화목제 전체와 누룩의 일반 상응을 바탕으로 한 ‘유력한독법’ 정도로 두는 것이 안전합니다.
오히려 이 구절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 조심스러운 경계에 있습니다. 레2의 무교 소제는 주님께 드려지는 선과 진리의 순수함을 강조하고, 레7의 감사 화목제는 그 선이 인간의 실제 생활 속 기쁨과 교제 안으로 내려오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거듭남은 자연적 삶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을 주님의 질서 안으로 데려오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완전해진 사람이 마지막에 드리는 제사가 아닙니다. 아직 거듭나는 과정 가운데 있는 사람이 주님께서 주신 선을 발견하고 ‘이것은주님에게서왔습니다’라고 인정하며 누리는 것이 감사입니다. 레7의 무교병과 유교병이 한 상에 놓이는 장면은 그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다만 그 이상의 세부 상응은 원전이 더 발견될 때까지 열어 두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가장 정직하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SW.레7심화1)
레위기 7장은 레1부터 시작된 제사의 첫 큰 단락을 마무리합니다. 37절은 지금까지 나온 것을 ‘번제와소제와속죄제와속건제와위임식과화목제의규례’라고 한꺼번에 열거합니다. 그래서 레7은 새로운 제사 하나를 소개하는 장이라기보다 앞에서 배운 제사들을 다시 제사장의 관점에서 정리하고, 특히 화목제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제사의 목적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장입니다. 죄를 깨닫고 정결하게 되는 것만이 끝이 아닙니다. 악과 거짓이 제거된 인간은 마침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웃과 함께 누리며, 주님과 결합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1절로 7절은 속건제를 다시 다룹니다. 속건제물은 번제물을 잡던 곳에서 잡고 피는 제단 사방에 뿌리며,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내장을 덮은 기름, 두 콩팥과 그 기름, 간에 덮인 꺼풀을 제단에서 불사릅니다. 이것들은 레3의 화목제에서 이미 만났던 요소들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3(출29:13)은 피를 신적 진리와, 기름을 신적 선과 연결하며, AC.10072(출29:22)는 내장을 덮은 기름을 가장 낮은 것 안에 있는 선과 연결합니다. AC.10074(출29:22)는 콩팥을 자연적 인간의 내적 진리와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속건제가 단순히 ‘잘못에대한벌금’을 지불하는 제사가 아님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실제 삶에서 손상된 것을 바로잡게 하실 뿐 아니라 자연적 인간의 가장 안쪽과 바깥쪽까지 선과 진리의 질서로 다시 세우십니다.
6절과 7절에서는 속건제가 ‘지극히거룩하다’고 다시 선언되며 제사장들이 그것을 먹습니다. 레6에서 보았듯이 거룩한 제물을 먹는 것은 단순한 식사가 아닙니다. AC.2187(창18:8)은 제사 음식을 먹는 것을 교통, 결합, 자기 것으로 삼음과 연결합니다.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정결해진 자리에 주님의 선이 들어와 인간의 실제 생명이 되어야 합니다. 죄를 버리는 것은 비움이고, 주님의 선을 받아 살아가는 것은 채움입니다. 레위기의 제사들은 이 두 방향을 계속 함께 보여 줍니다.
8절로 10절에서는 번제물의 가죽과 여러 소제물이 제사장에게 돌아갑니다. 이것은 제사의 모든 것이 제단 위에서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려진 것 가운데 어떤 것은 제사장을 통해 다시 인간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다만 레7:8의 ‘가죽’ 자체를 이 문맥에서 무엇이라고 정확히 상응시키는지에 대해서는 이번에 충분한 직접 원전을 확보하지 못했으므로 세밀하게 단정하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7절로 10절 전체에 ‘돌아갈것이요’, ‘제사장에게로돌아갈것이니’, ‘균등하게분배할것이니라’가 반복된다는 사실입니다. 제사는 인간이 주님께 무엇을 빼앗기는 행위가 아니라,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한 뒤 다시 그분에게서 받아 올바르게 누리는 질서를 가르칩니다.
11절부터 장의 중심인 화목제 규례가 시작됩니다. 레3에서 화목제의 기본 구조를 보았다면 여기서는 화목제가 ‘감사’, ‘서원’, ‘자원’이라는 서로 다른 상태에서 어떻게 드려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감사의 화목제에는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 고운 가루에 기름 섞은 과자가 함께 드려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13절에는 ‘유교병’, 곧 누룩이 들어간 빵도 함께 등장합니다. 레2에서는 누룩을 제단의 화제로 드리지 말라고 했는데, 화목제의 감사 식사에서는 유교병이 함께 놓이는 것입니다. 본문 자체가 감사 화목제에 무교병과 유교병이 함께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여기서는 조심스러운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누룩은 문맥에 따라 거짓이나 불순한 것을 의미할 수 있으며, 무교는 순수함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레7:13의 유교병이 왜 특별히 감사 화목제에 허용되는지를 직접 풀어 주는 강한 AC원전은 이번 검색에서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유교병은정확히이것을뜻한다’고 단정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문자적 구조만으로도 중요한 차이는 분명합니다. 번제처럼 모든 것을 불살라 주님께 올리는 제사와 달리 화목제는 제사장과 제물을 드린 사람이 함께 먹는 제사입니다. 즉 인간의 실제 삶과 기쁨과 감사가 주님 앞의 교제 안으로 들어오는 제사입니다. 이 점은 별도 심화에서 원전상 확실한 부분과 해석상 유력한 부분을 구별하여 더 살펴보겠습니다.
15절로 18절은 더욱 흥미롭습니다. 감사로 드린 화목제의 고기는 반드시 그날 먹어야 하고 아침까지 남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서원이나 자원으로 드린 화목제는 이튿날까지 먹을 수 있습니다. 단 셋째 날에는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되며 남은 것은 불살라야 합니다. 실제 본문은 감사제와 서원·자원제 사이에 이 시간 차이를 명확히 둡니다. 여기에는 ‘오늘의선을어제의것으로살아서는안된다’는 매우 매력적인 영적 독법이 가능하지만, 스베덴보리의 직접 해설로 확인되지 않은 세부를 확정적인 상응으로 만들지는 않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거룩한 선을 받아들이고 누리는 데에도 상태와 질서와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인간의 proprium이 붙들어 자기 소유로 만들기 시작하면 처음의 거룩한 교통이 변질될 수 있습니다.
19절로 21절은 그래서 ‘먹는사람의상태’를 강조합니다. 화목제 고기가 부정한 것에 접촉되면 먹지 못하며, 부정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 거룩한 화목제물을 먹어서도 안 됩니다. 앞에서 ‘먹음’이 교통과 결합과 자기 것으로 삼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받아들이는가뿐 아니라 ‘어떤상태에서받아들이는가’도 중요합니다. 거룩한 진리를 많이 알고 입으로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으로 거룩한 삶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악을 붙든 채 거룩한 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하면 오히려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을 섞게 됩니다. 그래서 정결은 결합보다 먼저 옵니다. 레4-6의 속죄제와 속건제가 레7의 화목제보다 앞에 놓여 있는 것도 이런 큰 질서와 잘 어울립니다.
22절로 27절에서는 레3마지막에서 이미 보았던 ‘기름과피를먹지말라’는 명령이 다시 매우 강하게 반복됩니다. AC.5943(창45:18)은 바로 레7:23-26을 직접 인용하면서 제사의 기름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 곧 천적인 신성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레3에서 확인했듯이 피는 신적 진리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기름과 피를 먹지 못하게 한 것은 선과 진리를 인간의 proprium이 자기 것으로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원리와 연결됩니다. 선은 주님의 것이고 진리도 주님의 것입니다. 인간은 그것들을 받아 살아갈 수 있지만 그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릴 수는 없습니다. ‘내가선하다’, ‘내가진리를소유한다’고 하는 순간 주님에게서 온 것을 proprium의 것으로 바꾸기 시작합니다.
28절로 36절은 레7의 절정 가운데 하나입니다. 화목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기름과 가슴을 ‘자기손으로’ 가져옵니다. 가슴은 여호와 앞에서 흔들어 요제로 삼고, 기름은 제단에서 불사르며, 가슴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아갑니다. 또 오른쪽 뒷다리는 거제로 제사장에게 줍니다. 여기에는 매우 직접적인 원전이 있습니다. AC.10087(출29:26)은 가슴을 ‘체어리티의선’, 더 높은 의미에서는 신적 영적인 것과 연결합니다. 가슴이 심장과 폐가 있는 부분이며, 중간 또는 둘째 천국의 영적 선과 상응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슴을 흔드는 것은 그 선이 살아나게 되는 것과 연결됩니다.
오른쪽 뒷다리에 대해서도 원전이 놀랍도록 분명합니다. AC.10075(출29:22)는 오른쪽 넓적다리 또는 뒷다리를 가장 내적인 천적 선과 연결하고, 레7:32, 34-35를 직접 인용하면서 가슴은 영적 선, 오른쪽 뒷다리는 천적 선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가슴은 둘째 천국의 체어리티의 선을, 오른쪽 뒷다리는 가장 안쪽 셋째 천국의 천적 선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이 둘이 제사장에게 돌아가는 것은 단순한 제사장의 몫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영적 선과 천적 선의 교통과 받아들임을 표상합니다.
더구나 AC.10093(출29:27)은 ‘흔드는것’과 ‘들어올리는것’의 차이까지 설명합니다. 가슴을 흔드는 것은 신적 진리가 ‘인정되어살아있게되는것’을, 오른쪽 뒷다리를 들어 올리는 것은 주님에게만 속한 신적 선이 ‘지각되고받아들여지는것’을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차이를 영적 천국과 천적 천국의 차이와 연결합니다. 영적 천국에서는 신적 진리를 이해를 통해 ‘인정’하고, 천적 천국에서는 신적 선을 의지를 통해 ‘지각’합니다. 레7의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 요제와 거제의 작은 동작 안에 천국의 두 큰 질서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화목제의 ‘화목’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화목은 단지 하나님께서 화가 나셨다가 제물을 보고 마음을 푸시는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선과 진리가 인간에게 전달되고,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며, 그것이 체어리티와 사랑의 삶으로 자기 것이 되고, 다시 주님께 그 근원을 인정하는 교통과 결합의 상태입니다. 제단에는 기름이 올라가고, 제사장에게는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가 돌아가며, 깨끗한 사람들은 화목제의 고기를 함께 먹습니다. 주님과 제사장과 백성이 하나의 제사 안에서 연결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37절과 38절은 레1-7전체를 아주 아름답게 닫습니다.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위임식, 화목제가 모두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하나의 질서 안에 있습니다. ‘참된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 506도 레7:1, 11, 37을 직접 인용하면서 이러한 제사 규례들을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에 속한 것으로 열거합니다. 각각의 제사는 따로 떨어진 종교 행위가 아니라 인간을 주님과 결합시키는 하나의 거듭남의 질서를 여러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레1의 번제에서 인간 전체가 주님의 사랑에 드려지는 모습을 보았고, 레2의 소제에서 선과 진리가 삶의 예물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레3의 화목제에서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레4와 5의 속죄제에서는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을, 레5와 6의 속건제에서는 잘못을 인정하고 실제로 회복하는 삶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레7은 다시 화목제로 돌아와 그 모든 과정의 목적을 보여 줍니다. 거듭남의 목적은 죄 없는 사람처럼 자신을 관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이 자기 삶이 되고, 그 선을 이웃과 함께 나누며, 모든 선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결합의 삶에 있습니다. 그래서 레7의 마지막 모습은 제물을 잃어버린 인간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함께 먹고 누리는 인간입니다. 정결은 화목을 향하고, 회개는 결합을 향하며, 거듭남은 마침내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을 향합니다. (SW.레7해설)
레6:28은 문자로만 읽으면 위생 규정처럼 보입니다. 속죄제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깨뜨리고, 유기에 삶았으면 그릇을 닦아 물로 씻으라고 합니다. 왜 하나는 아예 깨뜨려 버리고 다른 하나는 씻어서 다시 사용할 수 있게 했을까요?
놀랍게도 이 구절에는 스베덴보리의 매우 직접적인 해설이 있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105(출29:31)는 레6:28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토기는 ‘선과결합하지않는거짓’을 의미하고, 유기는 ‘그안에선이있는교리적인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속죄제와 속건제의 고기를 그 안에서 삶는 것은 악과 거기에서 나오는 거짓으로부터 정결하게 되기 위한 준비를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이 설명에 따르면 왜 두 그릇의 처리가 달랐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선과 결합하지 않는 거짓은 씻어서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깨뜨려야 합니다. 거짓 자체를 조금 깨끗하게 만들어 계속 가지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거짓은 버려야 합니다. 반면 유기가 나타내는 것은 선이 들어 있는 교리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잘못 붙어 있는 것을 제거하고 정결하게 하여 다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거듭남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모든 과거의 생각과 종교적 지식을 다 버려야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똑같이 처리하지 않으십니다. 악과 결합되어 진리를 완전히 왜곡시키는 거짓은 깨뜨리십니다. 그러나 불완전하게 이해했을 뿐 그 안에 선을 향한 마음이 있고 진리를 받을 수 있는 교리는 씻고 바로잡아 사용하십니다.
AC.10105는 ‘삶는다’는 것 자체도 설명합니다. 고기를 삶는 것은 선을 삶에 사용하기 위해 교리의 진리들을 통해 준비하는 것을 의미하며, 물은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유기를 ‘닦고물로씻는것’은 단순한 세척이 아니라 교리적인 것을 진리로 정결하게 하여 선한 삶에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매우 아름다운 표상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잘못 알고 있던 교리가 있다고 합시다. 그 안에 완전히 거짓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표현이 불완전하거나 이해가 부족했을 뿐 그 중심에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는 선이 있었다면 모든 것을 파괴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의 물로 씻고, 거짓된 부분을 제거하고, 더 밝은 진리 안에서 다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토기와 유기의 차이는 사람을 판단하는 데도 조심성을 줍니다. 어떤 사람의 신앙 이해가 잘못되어 있다고 해서 그 사람 안의 모든 것을 ‘토기’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만이 그 안에 선이 있는지 아십니다. 선과 결합할 수 없는 거짓은 깨뜨리시지만, 선을 품고 있으면서 아직 불완전한 이해는 진리를 통해 정결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레6:28은 거듭남이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분별’의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무엇을 버려야 하고 무엇을 씻어야 하는지 구별하는 것입니다. 악과 결합된 거짓은 깨뜨리되, 선을 섬길 수 있는 것은 진리로 씻어 보존합니다. 토기는 깨뜨리고 유기는 물로 씻으라는 짧은 한 절 안에 ‘주님께서우리의생각과교리를어떻게정결하게하시는가’라는 놀라운 아르카나가 숨어 있습니다. (SW.레6심화5)
레6에는 현대 독자에게 조금 낯선 장면이 반복됩니다. 하나님께 드린 소제와 속죄제의 일부를 제사장이 먹습니다.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는데 왜 그 제물을 다시 사람이 먹는 것일까요? 단순히 제사장들의 생활을 위한 식량 공급 규정만으로 보면 이 반복되는 ‘먹음’의 영적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부분을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2177(창18:6)은 레6:13-17을 직접 인용하면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소제의 나머지를 먹는 것은 인간의 ‘상호성’과 ‘자기것으로삼음’을 표상하며, 그 결과 사랑과 체어리티를 통한 결합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AC.2187(창18:8)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먹는것’ 자체가 교통과 결합과 자기 것으로 삼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레6:16, 18, 26을 직접 열거합니다. 거룩한 제물을 먹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영적 선을 받아들여 그것이 인간 안의 실제 생명이 되는 것을 표상한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것으로삼음’은 선의 근원이 인간 자신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여 마치 자기 의지에서 행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이 밖에 놓인 교리로만 남아 있지 않고 내가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고 ‘좋은말씀이구나’라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먹은 것이 아닙니다. 용서하라는 말씀을 읽었다면 실제 용서하려고 싸우고, 정직하라는 말씀을 읽었다면 손해가 와도 정직을 선택하며,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읽었다면 실제 이웃의 필요를 돌아볼 때 비로소 그 진리가 삶의 일부가 됩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거룩한 것을 아무 곳에서나 먹지 않고 ‘거룩한곳’, 곧 회막 뜰에서 먹습니다. 주님의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 일은 proprium이 그것을 차지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임재와 질서 안에서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을 행하지만 그 선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중요한 목표입니다. 주님의 진리가 계속 내 밖에 있는 명령으로만 남아 있으면 우리는 억지로 순종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우리 안에 받아들여지면 어느 순간 그 일을 사랑해서 행하기 시작합니다. 밖에 있던 말씀이 안으로 들어와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6에서 제사장이 제물을 먹는 장면은 제사의 부수적인 뒤처리가 아닙니다. 제단에서 주님께 드려진 것이 다시 인간에게 돌아와 인간의 생명이 되는 순간입니다. 거듭남은 악을 버리는 것으로만 완성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그것을 먹고, 자기 삶으로 삼고, 마침내 사랑과 체어리티로 살아가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SW.레6심화4)
번제가 모두 타고 나면 남는 것은 재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제사는 끝났고 재는 치워야 할 폐기물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레6은 그 재를 처리하는 일까지 매우 세밀하게 규정합니다. 제사장은 세마포 긴 옷과 세마포 속바지를 입고 재를 제단 곁에 두었다가, 다시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그 재를 ‘진영바깥정결한곳’으로 가져갑니다.
여기서 가장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세마포의 의미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959(출28:42)는 세마포를 외적 진리, 곧 자연적 진리와 연결하면서 바로 레6:10-11의 이 장면을 직접 인용합니다. 제사장이 재를 처리할 때조차 세마포 옷을 입어야 했던 것은 이 마지막 외적 처리까지 진리의 질서 안에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본문은 재를 단순히 ‘진영밖’에 버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진영바깥정결한곳’으로 가져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제물은 이미 불에 완전히 살라졌지만 그 결과물까지 아무렇게나 취급되지 않습니다. 제사가 끝난 뒤 남은 것에도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에 확보한 스베덴보리 원전 가운데 레6의 ‘재’ 자체를 직접적으로 세밀하게 풀이하는 강한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재는정확히무엇을상응한다’고 하나의 공식으로 못 박지는 않겠습니다. 오히려 확실한 본문의 구조를 붙드는 편이 좋습니다. 거룩한 제사의 마지막 결과까지 정결한 질서 속에서 처리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에도 좋은 통찰을 줍니다. 어떤 악과의 싸움이 끝났다고 해서 그 경험 전체를 무가치한 것으로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어떤 시험에서 건져 내셨다면 그 과정에서 배운 진리와 겸손, 자기 인식은 이후의 삶에 남습니다. 그러나 지나간 악 자체를 계속 붙잡고 살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끝난 것은 끝난 자리로 옮겨야 합니다.
특히 ‘다른옷을입고’ 진영 밖으로 나가는 장면은 제단에서 봉사하는 일과 그 결과를 밖으로 옮기는 일이 서로 다른 외적 질서를 필요로 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모든 영적 경험을 같은 방식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각 상태에 맞는 질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제의 재는 적어도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남깁니다. ‘주님께서이미태워없애신것을나는아직제단위에붙들고있지는않은가?’입니다. 회개한 죄를 끝없이 되씹고, 이미 지나간 실패를 자기 정체성으로 붙들고 있는 것은 정결의 완성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끝내신 것은 정결한 질서 가운데 제자리로 옮겨 놓고, 제단에서는 다시 새로운 불과 새로운 번제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SW.레6심화3)
레6에서 가장 강렬하게 반복되는 명령은 ‘불을끄지말라’는 것입니다. 번제물은 밤새도록 제단 위에 있고, 불은 아침까지 타고 있어야 합니다.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더 놓아야 하며, 13절에서는 마침내 ‘불은끊임이없이제단위에피워꺼지지않게할지니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의 해설이 놀랄 만큼 직접적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2177(창18:6)은 레6:13-17을 직접 인용한 뒤, 제단에서 계속 타야 했던 불은 ‘주님의사랑,곧영원하고영속적인주님의자비’를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AC.6832(출3:2)역시 레6:12-13을 직접 인용하면서 이 영속적인 불이 신적 사랑을 표상했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처음부터 ‘우리의신앙열심을절대로식히지말라’는 명령으로 읽으면 중심이 인간에게 옮겨집니다. 제단의 불이 가장 먼저 나타내는 것은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입니다. 꺼지지 않는 것은 우리의 감정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의 영적 상태는 끊임없이 변합니다. 뜨거울 때도 있고 차가울 때도 있으며, 밝은 아침 같은 때도 있고 긴 밤 같은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었다고 제단의 불까지 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주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때에도 주님의 사랑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불 위에 놓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영원하지만 인간에게는 날마다의 응답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어제의 예배로 오늘을 살 수 없고, 십 년 전의 뜨거웠던 체험으로 오늘의 악을 이길 수도 없습니다. 매일 말씀 앞에 서고, 오늘 보이는 악을 피하며, 오늘 행할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거듭남에는 두 방향이 동시에 있습니다. 하나는 위에서 아래로 끊임없이 오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사랑을 날마다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인간의 자유입니다. 전자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후자가 없다면 주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 삶이 되지 못합니다.
결국 ‘꺼지지않는불’은 레6전체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훔친 것을 돌려주고,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되고, 주님의 선을 받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는 이유는 그 모든 과정 아래에서 주님의 사랑이 한순간도 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불이 꺼질 때조차 주님의 불은 꺼지지 않습니다. 거듭남은 바로 그 영원한 불에 날마다 다시 자신의 삶을 가져가는 과정입니다. (SW.레6심화2)
레6:1-7에서 가장 눈여겨볼 것은 범죄의 대상입니다. 맡긴 물건을 속이고, 도둑질하고, 착취하고, 잃어버린 물건을 주워 놓고 부인한 것은 모두 이웃에게 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여호와께신실하지못하여범죄’한 것이라고 부르십니다. 이웃을 향한 부정직과 하나님을 향한 불신실이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속건제의 순서가 의미심장합니다. 범죄한 사람은 훔친 것이나 착취한 것이나 맡은 것이나 주운 물건을 먼저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오분의 일을 더합니다. 그런 다음 숫양을 여호와께 속건제물로 가져갑니다. 본문은 실제 반환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하나의 회개 안에 묶어 놓습니다.
이것은 레5에서 보았던 ‘자복’과 ‘보상’을 한층 더 구체화합니다. 하나님께 ‘제가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내가 부당하게 가지고 있는 것은 계속 가지고 있을 수 없습니다. 회개가 참되다면 가능한 곳에서는 외적 삶도 바뀌어야 합니다. 속에서 죄를 인정한 것이 겉에서는 반환과 보상이라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과거의 잘못을 문자적으로 원상복구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도 있고 상대를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회개의 방향입니다. 지금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있는데도 ‘하나님께용서받았으니끝났다’며 외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화해가 이웃에 대한 책임을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레6은 그래서 예배를 매우 현실적으로 만듭니다. 제단 앞에서 거룩한 말을 하는 것과 장터와 집과 인간관계에서 정직하게 사는 것이 서로 다른 종교가 아닙니다. 맡긴 물건을 정직하게 돌려주고, 남의 것을 탐하지 않고, 손해를 입혔다면 가능한 만큼 회복하는 삶 자체가 체어리티의 문제입니다.
결국 속건제가 묻는 것은 이것입니다. ‘주님께용서를구하고있는그일가운데아직내가이웃에게돌려주어야할것이남아있지는않은가?’입니다. 있다면 회개는 그곳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주님께 드리는 예배와 이웃에게 행하는 체어리티가 하나가 될 때 속 사람에서 시작된 회개가 겉 사람의 삶까지 내려와 실제 거듭남이 됩니다. (SW.레6심화1)
레위기 6장은 앞의 장들과 조금 다른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레4에서는 죄를 ‘깨닫는것’, 레5에서는 그것을 ‘자복하는것’과 ‘보상하는것’이 강조되었다면, 레6:1-7에서는 그 보상이 아주 구체적인 이웃 관계 안으로 들어옵니다. 맡긴 물건을 속이고, 전당물을 부인하고, 도둑질하고, 착취하고, 남이 잃은 물건을 주워 놓고도 모른다고 하며, 거기에 거짓 맹세까지 하는 경우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경이 이런 행동을 단순히 ‘이웃에게신실하지못한것’이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께신실하지못하여범죄’한 것이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이웃에게 행한 부정직이 곧 주님께 대한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체어리티와 예배를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제사의 법 한가운데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속건제의 순서도 중요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먼저 훔치거나 착취하거나 맡아 두었던 물건을 ‘돌려보내되곧그본래물건에오분의일을더하여’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숫양을 속건제물로 여호와께 가져갑니다. 레5에서 이미 보았듯이 속건제는 단순히 마음속에서 미안해하는 것으로 끝나는 회개가 아닙니다. 잘못으로 실제 손상이 생겼다면 가능한 범위에서 그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가져가는 종교적 행위가 이웃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웃에게 바로잡을 것을 바로잡는 것과 주님 앞에서 속죄하는 것이 하나의 회개 안에 함께 들어 있습니다. 레6은 그래서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바로잡으려 한다면 이웃과의 관계에서 내가 저지른 실제 불의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까지가 레5후반의 속건제를 완성하는 부분이라면 8절부터는 시선이 크게 바뀝니다. 이제 ‘누가어떤제물을가져오는가’보다 제사장이 그 제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가 중심이 됩니다. 번제, 소제, 속죄제의 규례가 다시 나오지만 레1, 2, 4의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앞에서는 제물을 가져오는 사람의 입장에서 제사를 보았다면 여기서는 제단과 제사장의 입장에서 그 제사가 어떻게 계속되고, 어떻게 거룩하게 다루어지며,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레6은 레1-5에서 배운 제사의 의미를 한 단계 더 안쪽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심에 9절로 13절의 ‘불’이 있습니다. ‘제단의불이그위에서꺼지지않게할것이요’, ‘제단위의불은항상피워꺼지지않게할지니’, 그리고 다시 ‘불은끊임이없이제단위에피워꺼지지않게할지니라.’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이 부분에는 매우 분명한 스베덴보리의 직접 해설이 있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2177(창18:6)은 레6:13-17을 직접 인용하면서 제단에서 계속 타고 있어야 했던 불은 ‘주님의사랑,곧영원하고영속적인주님의자비’를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AC.6832(출3:2)도 레6:12-13을 직접 인용하면서 제단 위의 영속적인 불이 신적 사랑 자체를 표상했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이 불은 먼저 ‘우리의열심이꺼지지않아야한다’는 명령이 아닙니다. 인간의 사랑보다 먼저 꺼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향한 주님의 사랑과 자비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에는 아침과 저녁이 있고 뜨거울 때와 차가울 때가 있습니다. 어떤 날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하지만 어떤 날은 말씀을 읽는 것조차 힘들 수 있습니다. 만일 거듭남이 인간의 종교적 열심이라는 불에 달려 있다면 그 불은 오래전에 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단의 불은 인간이 처음 만들어 내는 불이 아닙니다. 주님의 신적 사랑이 먼저 끊임없이 흐르고 있으며 인간은 매일 아침 그 불 위에 나무를 놓고 번제를 벌여 놓습니다. 그러므로 ‘아침마다’라는 말씀과 ‘꺼지지않는불’이 함께 있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끊이지 않지만 인간은 날마다 새롭게 그 사랑에 응답해야 합니다. 거듭남은 한 번 뜨거워진 신앙으로 평생을 버티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흐르는 주님의 사랑을 매일 새롭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10절과 11절에서는 번제가 다 타고 남은 ‘재’가 등장합니다. 제사장은 세마포 옷을 입고 재를 제단 곁에 두었다가, 다시 옷을 갈아입고 그 재를 ‘진영바깥정결한곳’으로 가져갑니다. 여기에서도 세부를 함부로 상응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만, 세마포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AC.9959(출28:42)는 세마포가 외적 또는 자연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바로 레6:10-11의 제사장이 재를 치울 때 세마포 옷과 속바지를 입었던 규정을 직접 인용합니다. 따라서 제사의 마지막 남은 것까지 진리의 질서 아래 처리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재가 ‘진영밖’으로 나가지만 아무 데나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정결한곳’으로 옮겨진다는 사실입니다. 제사가 끝났다고 해서 그 결과가 부정한 폐기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재 자체의 세부 의미에 대해서는 이번에 확보한 직접 원전보다 더 나아가 단정하지 않겠습니다.
14절로 18절의 소제 규례는 레2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의 일부를 제단에서 불사르고 나머지를 아론과 그의 자손이 거룩한 곳에서 먹습니다. 그런데 AC.2177은 이 본문을 직접 해설하면서 고운 가루는 체어리티의 영적인 것을, 기름은 체어리티의 천적인 것을, 유향은 그렇게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한 움큼을 취하는 것은 온 힘과 온 영혼으로 사랑하는 것을, 누룩 없이 먹는 것은 순수하고 불결함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고 풀이합니다. 그리고 특히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남은 것을 먹는 것은 인간 편에서의 ‘상호성’과 ‘자기것으로삼음’을 표상하며, 그 결과 사랑과 체어리티를 통한 결합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제물은 제단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께 드려진 선이 다시 인간에게 주어지고 인간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레6에서 ‘먹는다’는 행동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AC.2187(창18:8)에서 거룩한 제물을 먹는 것은 ‘교통,결합,자기것으로삼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레6:16, 18, 26을 직접 열거합니다. 제사장이 거룩한 것을 먹는 것은 단순히 제사장의 식량을 마련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표상적으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인간 안에 받아들여져 실제 생명의 일부가 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진리를 듣기만 하는 것과 그 진리가 내가 살아가는 선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말씀을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먹어’ 자기 삶으로 만드는 것도 다릅니다. 거듭남은 결국 주님의 선과 진리가 내 생각과 의지와 행동 안으로 들어와 나의 삶이 되는 과정입니다.
19절로 23절에는 또 하나 특이한 소제가 나옵니다. 아론과 그의 자손이 기름 부음을 받는 날에는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아침과 저녁으로 나누어 드리되, 이 제물은 제사장이 먹지 않고 ‘온전히불사르라’고 합니다. AC.9993은 아론이 기름 부음을 받는 날 드리는 레6의 소제를 직접 언급하면서 누룩 없는 떡과 기름이 결합된 여러 형태가 천적 선의 서로 다른 층위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는 모든 세부를 억지로 풀기보다 중요한 차이를 붙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일반 소제에서는 일부가 제사장에게 돌아가지만 제사장 자신을 위한 이 소제는 온전히 여호와께 돌려집니다. 주님께 봉사하는 직분 자체도 자기 소유가 될 수 없으며, 그것의 근원과 목적 전체가 주님께 있음을 보여 주는 매우 인상적인 규례입니다.
24절로 30절에서는 속죄제 규례가 다시 등장합니다. 여기서 반복되는 표현은 ‘지극히거룩하다’입니다. 죄를 다루는 제물인데 왜 오히려 ‘지극히거룩하다’고 부를까요? 스베덴보리는 정결이 단지 인간이 자기 악을 들여다보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실제로 건져 내시는 신적 역사라고 봅니다. AC.10132는 정결과 거듭남이 이노센스의 상태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속죄제와 속건제가 레6:17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지극히거룩하다’고 불렸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속죄제의 거룩함은 죄 자체가 거룩하다는 뜻이 아니라 죄를 제거하고 인간을 다시 주님의 질서 안으로 돌려놓으시는 주님의 정결케 하시는 역사가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27절과 28절은 더욱 놀랍습니다. 속죄제의 고기에 접촉하는 것은 거룩하게 되고, 피가 옷에 묻으면 거룩한 곳에서 빨아야 하며,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깨뜨리고 유기에 삶았으면 닦고 물로 씻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직접적인 원전이 있습니다. AC.10130(출29:37)은 레6:18, 27을 직접 인용하면서 ‘접촉’은 교통과 전달과 받아들임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AC.10105(출29:31)는 레6:28을 직접 인용하면서 토기는 ‘선과결합하지않는거짓’을, 유기는 ‘선이들어있는교리적인것’을 의미한다고 풀이합니다. 속죄제의 고기를 삶는 것은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되기 위한 준비를 의미하므로, 선과 결합할 수 없는 거짓은 ‘깨뜨려야’ 하지만 선을 담고 있는 교리적인 것은 버리지 않고 ‘닦고물로씻어’ 정결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레6의 가장 사소해 보이는 그릇 하나에도 거듭남의 놀라운 아르카나가 들어 있습니다.
마지막 30절에서는 속죄제 가운데서도 차이가 나타납니다. 어떤 속죄제는 제사장이 먹지만, 그 피를 회막 안 성소로 가지고 들어가 속죄한 제물은 먹지 않고 불살라야 합니다. 본문 자체가 이 둘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이것을 현재 확보한 원전 이상으로 세밀하게 상응시키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레6전체에서 한 가지 원리는 분명합니다. 제사의 모든 것이 똑같은 방식으로 처리되지 않습니다. 무엇은 제단에서 불살라지고, 무엇은 제사장이 먹으며, 무엇은 씻고, 무엇은 깨뜨리고, 무엇은 성소로 들어가고, 무엇은 다시 불살라집니다. 거듭남 역시 모든 것을 무조건 버리는 과정이 아닙니다. 악과 결합된 거짓은 깨뜨려야 하지만 선을 섬길 수 있는 진리는 정결하게 하여 보존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받아들여 자기 삶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레6은 놀랍도록 역동적인 장입니다. 처음에는 훔친 것을 ‘돌려보내라’고 하고, 마지막에는 속죄제의 그릇 하나까지 어떻게 정결하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그 모든 과정의 한가운데에는 ‘불은끊임이없이제단위에피워꺼지지않게할지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을 깨닫고, 자복하고, 돌려주고, 악과 거짓을 씻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삶으로 만들 수 있는 근원은 결국 우리의 의지력이 아닙니다. 꺼지지 않는 것은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자비입니다. 그 영원한 불이 제단 위에 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오늘도 다시 정결하게 되고, 다시 선을 받아들이며, 다시 이웃에게 바로 행하는 삶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레6이 보여 주는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SW.레6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