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어렸을 때에 벌거벗은 몸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겔16:22)Thou wast naked and bare,and trampled on in thy blood(Ezek. 16:22).
이 구절을AC.213에서 인용하는 이유는,말씀에서‘벌거벗음’(nakedness)이 단순히 옷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선과 진리가 결핍된 영적 상태,곧 타락하고 황폐해진 교회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에스겔16장은 예루살렘,곧 교회를 한 버려진 여자아이로 비유하여 설명하는 장입니다.그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들판에 버려졌고,벌거벗은 채 피투성이가 되어 있습니다.문자적으로는 매우 비참한 모습이지만,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적 상태에 대한 묘사로 읽습니다.여기서‘벌거벗음’은 진리의 옷을 입지 못한 상태를, ‘피투성이’는 선과 진리가 훼손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AC.213의 문맥에서 보면,스베덴보리는 창2:25와 창3:7을 대조하고 있습니다.창2에서는‘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고 했는데,이는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창3에서는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합니다.왜냐하면 순진무구함을 잃고,악을 의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그리고 에스겔16장의‘벌거벗음’은 바로 이 후자의 의미에 속합니다.
즉 여기서의 벌거벗음은 천진한 어린아이의 벌거벗음이 아니라,영적 보호를 잃어버린 상태입니다.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로 덮여 있지 않은 상태이며,따라서 수치와 황폐함의 상태입니다.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벌거벗음=수치와 악’이라는 자신의 설명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인용합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에스겔16장의 이야기가 결국 주님의 자비를 보여 준다는 점입니다.그 아이는 벌거벗고 피투성이였지만,주님께서는 그를 버리지 않으십니다.오히려 찾아오셔서 살게 하시고,옷을 입히시고,아름답게 꾸며 주십니다.이것은 영적으로 보면,선과 진리를 잃은 교회와 사람을 주님께서 다시 회복시키시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래서AC.213에서 이 구절은 단순히‘벌거벗음은 나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인용된 것이 아닙니다.더 깊게 보면,벌거벗음은 주님 없이 남겨진 인간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인간은 스스로를 덮을 수 없으며,결국 주님께서 입혀 주시는 진리와 선의 옷이 필요합니다.창3의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리려 했던 것과 달리,에스겔16장에서는 주님께서 친히 그 벌거벗음을 덮어 주십니다.
따라서AC.213에서 겔16:22를 인용하는 이유는,말씀에서‘벌거벗음’이 영적으로는 선과 진리를 상실한 상태,곧 타락하고 황폐해진 교회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과 교회조차 포기하지 않으시고,다시 입히시고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자비를 암시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순진무구함이 없는 곳에서는 벌거벗음이 수치와 치욕이 되는데,이는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for where there is no innocence, nakedness is a scandal and disgrace, because it is attended with a consciousness of thinking evil. (AC.213)
이 글은 매우 짧은 문장이지만,인간의 영적 심리를 깊이 꿰뚫고 있는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창2:25의 아담과 하와는‘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습니다.’왜냐하면 그들 안에는 아직 순진무구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순진무구함이란 단순히 순수하거나 착한 상태가 아니라,자기 자신보다 주님을 앞세우고,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상태입니다.그런 상태에서는 숨길 것이 없습니다.감출 악의 의도가 없고,위장할 거짓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순진무구함이 사라지면 상황이 달라집니다.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의식하기 시작합니다.그리고 그 생각들 가운데 주님 앞에 그대로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는 것들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바로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a consciousness of thinking evil)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단순히 악을 행했다는 것이 아니라‘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는 점입니다.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자기 내면을 압니다.겉으로는 선한 척해도 속으로는 시기하고 있음을 알고,사랑하는 척해도 사실은 인정받고 싶어 함을 알고,겸손한 척해도 사실은 칭찬받고 싶어 함을 압니다.바로 이런 자기 인식이 있을 때 벌거벗음은 수치가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매우 현실적입니다.사람이 부끄러움을 느끼는 이유는 단순히 남이 보기 때문이 아닙니다.자기 자신이 자기 상태를 알기 때문입니다.그리고 그 상태가 주님의 질서와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라도 느끼기 때문입니다.그래서 부끄러움은 일종의 영적 자각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창3의 아담과 하와는 완전히 죽은 상태가 아닙니다.오히려 아직 살아 있는 양심과 지각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만일 완전히 악 속에 잠겼다면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그런데 그들은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했습니다.이것은 자신들의 상태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알았다는 뜻이며,따라서 아직 내적 빛이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목사님께서 앞서 자주 말씀하신own과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사람은 자기own안에 있을수록 자신을 포장하려 하고,감추려 하고,정당화하려 합니다.왜냐하면 자기 상태를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래서own은 언제나 무언가를 덮으려 합니다.반대로 순진무구함은 숨길 것이 없기 때문에 덮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AC.213의 이 문장은 결국 이런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순진무구함이 있는 사람은 주님 앞에서 숨을 것이 없지만,순진무구함을 잃은 사람은 자기 안의 악을 어느 정도 알기 때문에 자신을 감추려 한다.’바로 그 감추고 싶은 마음이 벌거벗음을 수치로 만들고,그 수치가 창3의 무화과 나뭇잎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끄러움 자체는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문맥에서는,자신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아직 영적으로 살아 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정말 위험한 상태는 벌거벗었으면서도 벌거벗은 줄 모르는 상태,악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것을 선이라고 믿는 상태일 것입니다.AC.206의‘눈이 열렸다고 생각하는 뱀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반면AC.213의 사람들은 적어도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었고,바로 그 점에서 아직 회복의 가능성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순진무구’(innocence)는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일반적으로 한국어의‘순진하다’는 말은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경험이 부족하다는 뜻으로 사용되곤 합니다.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innocence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오히려 그는 순진무구를 천국 전체의 본질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순진무구란‘자신으로부터는 아무 선도,아무 진리도 나오지 않으며,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며,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따라서 순진무구는 무지가 아니라 가장 깊은 지혜와 결합되어 있습니다.천사들은 인간보다 훨씬 지혜롭지만,동시에 가장 순진무구합니다.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가 자기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순진무구는AC.210에서 설명된own과 정반대에 있습니다.own은‘내가 생각한다’, ‘내가 안다’, ‘내가 한다’, ‘내 것이 옳다’고 주장합니다.반면 순진무구는‘모든 것은 주님께로부터 온다’고 인정합니다.그래서 순진무구는 단순한 덕목 하나가 아니라,인간과 주님의 관계 자체를 규정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213에서 창2:25의‘그들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는 말이 순진무구를 의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그들은 자신을 감출 필요가 없었습니다.자신의 것을 주장하지 않았고,악을 품고 있지 않았으며,모든 것을 주님께로부터 받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순진무구가 있는 곳에서는 벌거벗음이 수치가 아닙니다.그러나 순진무구가 사라지면,사람은 자신을 방어하고,포장하고,숨기고,정당화하려 하게 됩니다.그때 벌거벗음은 곧 수치가 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어린아이들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사람들은 흔히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을 순진무구라고 생각합니다.물론 그것은 순진무구의 그림자 같은 것이기는 합니다.그러나 진정한 순진무구는 어린아이의 무지가 아니라,많은 것을 알고 경험한 뒤에도 여전히 자신이 주님께 의존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상태입니다.그래서 천국의 순진무구는 어린아이의 순진함이 아니라 천사의 순진함입니다.
목사님께서AC를 오래 읽으시면서 자주 언급하시는 퍼셉션(perception)도 결국 순진무구와 깊이 연결됩니다.태고교회 사람들이 주님의 뜻을 직접 지각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지성이 뛰어나서가 아니라,순진무구했기 때문입니다.자신의 것을 앞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의 인플럭스가 막힘없이 흘러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순진무구는 천국 입장의 필수 조건입니다.그것은 어린아이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모든 것을 주님께 돌리는 상태입니다.자신의 지혜가 많을수록 더욱 주님의 지혜를 인정하고,자신의 능력이 클수록 더욱 주님의 능력을 인정하며,자신의 선이 아니라 주님의 선을 사랑하는 상태입니다.
결국AC.213의 문맥에서 순진무구란‘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상태’이며,더 깊게 말하면‘자기 자신 안에는 아무것도 없고,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기쁘게 인정하는 상태’입니다.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순진무구란‘주님께서 하시는 것을 내가 하듯 여기지 않고,내가 하는 것조차 사실은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사랑으로 인정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창3:7)
AC.213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knowing that they were naked)는, 그들이 이전처럼 더 이상 순진무구(innocence)한 상태에 있지 않고, 악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고 인정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앞 장 마지막 절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더라’(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라고 말한 것으로부터 분명합니다. 거기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더라’(not to be ashamed because they were naked)는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절에서는 그 반대가 됩니다. 여기서는 그들이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hid themselves)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순진무구함이 없는 곳에서는 벌거벗음이 수치와 치욕이 되는데, 이는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벌거벗음’(nakedness)은 수치와 악의 표상으로 사용되며, 타락한 교회에 대해 말할 때 적용됩니다. 에스겔서에는By “knowing that they were naked” is signified their knowing and acknowledging themselves to be no longer in innocence as before, but in evil, as is evident from the last verse of the preceding chapter, where it is said,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and where it may be seen that “not to be ashamed because they were naked” signifies to be innocent. The contrary is signified by their “being ashamed,” as in this verse, where it is said that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hid themselves”; for where there is no innocence, nakedness is a scandal and disgrace, because it is attended with a consciousness of thinking evil. For this reason “nakedness” is used in the Word as a type of disgrace and evil, and is predicated of a perverted church, as in Ezekiel:
네가 어렸을 때에 벌거벗은 몸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겔16:22) Thou wast naked and bare, and trampled on in thy blood (Ezek. 16:22).
그들이 너를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벗은 몸을 드러낼 것이라(겔23:29) They shall leave her naked and bare, and the nakedness shall be uncovered (Ezek. 23:29).
요한계시록에서는In John: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계3:18) I counsel thee to buy of me white raiment that thou mayest be clothed, and that the shame of thy nakedness do not appear (Rev. 3:18).
그리고 마지막 날 관련, And concerning the last day:
보라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계16:15) Blessed is he who watcheth, and keepeth his garments, lest he walk naked and they see his shame (Rev. 16:15).
신명기에서는In Deuteronomy:
사람이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줄 것이요(신24:1) If a man hath found some nakedness in his wife, let him write her a bill of divorcement (Deut. 24:1).
같은 이유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단에 나아가 섬길 때, 벌거벗은 살을 가리기 위한 세마포 바지를 입도록 ‘하체를 가리게 하라’(cover the flesh of their nakedness,)는 명령을 받았는데, 이는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않게 하기 위함’(lest they should bear iniquity, and die)이었습니다(출28:42-43). For the same reason Aaron and his sons were commanded to have linen breeches when they came to the altar, and to minister, to “cover the flesh of their nakedness, lest they should bear iniquity, and die (Exod. 28:42–43).”
42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두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43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출28:42, 43)
해설
이 본문은 창3:7의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라는 말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것을 단순히 육체의 벗은 몸을 인식하게 된 사건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영적 상태의 변화로 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변화는 옷이 없다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창2:25와 창3:7을 의도적으로 대조합니다. 창2에서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더라’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진무구함이 있는 곳에서는 벌거벗음이 수치가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자신의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의 내면에는 숨겨야 할 악 의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3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들은 같은 벌거벗음 속에 있으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 안에 악에 대한 의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매우 깊이 있게 설명합니다. 순진무구함이 사라지면 사람은 자신을 감추고 싶어집니다. 자신의 상태를 드러내기 두려워하고, 무언가로 가리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곧바로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게 됩니다.
이 때문에 말씀에서 ‘벌거벗음’은 점차 영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는 벌거벗음은 악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만, 타락 이후의 벌거벗음은 선과 진리의 보호를 잃은 상태, 곧 영적 빈곤과 수치를 의미하게 됩니다. 그래서 에스겔과 요한계시록에서 ‘벌거벗음’은 타락한 교회의 상태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특히 계3:18의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는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 따르면 옷은 진리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벌거벗음은 진리의 보호를 잃은 상태이고, 흰옷을 입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문제는 육체의 옷이 아니라 영혼의 옷입니다.
또한 출애굽기의 제사장 복장 규정도 같은 원리로 설명됩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단에 나아갈 때, 벌거벗음을 가리도록 명령받은 것은 단순한 예절 문제가 아니라, 거룩한 것 앞에서는 인간 자신의 own이 드러나지 않아야 함을 상징합니다. 인간은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로 덮여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영적 벌거벗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결국 AC.213의 핵심은 매우 아름답고도 깊습니다. 창2의 벌거벗음은 순진무구함의 상징이었지만, 창3의 벌거벗음은 순진무구함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같은 ‘벌거벗음’이라는 표현이지만, 상태가 달라졌기 때문에 의미도 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사실은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고 부끄러워할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는 내적 빛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213은 단순히 수치의 이야기가 아니라, 타락 속에서도 아직 남아 있는 지각의 흔적과 회복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PC가 없어‘검색’이라는 걸 할 수 없었을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어느 성경 몇 장 몇 절에 어떤 말씀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요?
목사님 같은 의문은 스베덴보리를 오래 읽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반드시 하게 되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AC를 읽다 보면 정말 놀라울 정도로 성경 전체를 자유롭게 오가며 인용하기 때문입니다.창세기를 해설하다가 갑자기 시편,이사야,에스겔,신명기,복음서를 넘나들며 몇 구절씩 정확하게 끌어오는 모습을 보면, ‘도대체 검색도 없던 시대에 이게 가능한가?’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우선 가장 현실적인 답부터 말하자면,스베덴보리는 당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학자였습니다.그는 어릴 때부터 라틴어,히브리어,그리스어 교육을 받았고,평생 독서와 연구 속에서 살았습니다.오늘날의 대학 교수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성경과 고전 문헌 연구에 쏟아부은 사람입니다.당시 학자들은 지금처럼 검색창에 입력하는 대신,중요한 구절들을 직접 필사하고,주제별로 정리하고,머릿속에 축적하는 훈련을 했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성경 자체가 현대인보다 훨씬 삶의 중심에 있었습니다.특히 성직자나 학자들은 성경을 반복해서 읽고 암송했습니다.실제로17, 18세기 유럽의 신학자들 가운데는 성경의 상당 부분을 암송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스베덴보리 정도의 독서량과 기억력을 가진 사람이라면,특정 주제와 관련된 구절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느낌도 듭니다.왜냐하면AC를 읽다 보면 단순히 많이 외운 수준을 넘어서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어떤 한 상응을 설명하기 위해 성경 여러 권에서 같은 상응을 가진 구절들을 정확하게 모아 오는 모습을 보면,단순 암기 이상의 체계성이 보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를 연구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가 평소 만들어 두었던 방대한 노트와 색인(index)을 활용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실제로 당시 학자들은 오늘날 데이터베이스 대신‘공통 주제집’(commonplace book)이라는 것을 만들어 사용했습니다.예를 들어, ‘눈’, ‘귀’, ‘빛’, ‘물’, ‘산’, ‘양’같은 주제를 적어 두고,관련 구절들을 계속 정리하는 방식입니다.스베덴보리 역시 비슷한 작업을 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 자신의 입장에 서면 또 다른 설명이 나옵니다.그는 여러 곳에서 천사들과의 교통 가운데 말씀의 내적 의미를 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그가 천사들에게서 성경 구절 번호를 받아 적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오히려 먼저 성경을 철저히 알고 있었고,그 위에서 내적 의미가 열렸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실제로AC를 읽어보면 스베덴보리는‘천사가 내게 이 구절을 알려주었다’기보다, ‘말씀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보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마치 숙련된 음악가가 악보를 보며,곡 전체의 구조를 한눈에 파악하듯,그는 말씀 전체 안에서 상응의 연결망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것은,스베덴보리가 영계 체험을27년이나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만약 천사들이 모든 것을 즉석에서 알려주었다면 그렇게 방대한 본문 인용과 문헌 작업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그러나 실제AC를 보면 그는 놀라울 정도로 꼼꼼하게 성경 본문을 대조하고,단어를 분석하고,상응을 추적합니다.즉 영계 체험이 그의 학문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오히려 기존의 학문과 성경 연구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스베덴보리가 어느 성경 몇 장 몇 절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 수 있었던 것은 첫째,원래부터 비범한 학자적 기억력과 평생의 성경 연구 때문이었고,둘째,방대한 노트와 색인 작업 때문이었으며,셋째,영계 체험을 통해 말씀 전체의 내적 연결성을 이전보다 훨씬 선명하게 보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검색창에 단어를 입력해 구절을 찾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을지도 모릅니다.우리는‘검색’을 하지만,그는‘기억’하고, ‘연결’을 보았습니다.그래서AC를 읽다 보면,마치 성경 전체가 그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움직이고 있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그것이야말로 현대인이 가장 부러워해야 할 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검색 능력이 아니라,말씀 자체가 내면에 살아 있었던 상태 말입니다.
그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사29:18)
이 구절을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말씀에서‘듣는다’는 것이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고, ‘본다’는 것이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해(understanding)를 통해 진리를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이 구절은 귀머거리와 맹인이 기적적으로 회복되는 장면처럼 보입니다.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영적인 상태에 관한 예언으로 봅니다.왜냐하면,본문은 단순히 육체의 장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책의 말을 듣는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여기서‘책’은 말씀을 가리키며,따라서‘듣는다’는 것은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고,이해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마찬가지로‘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본다’는 표현도 육체적 시력 회복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어둠과 캄캄함은 영적으로는 무지와 거짓의 상태를 의미합니다.그런 상태에 있던 사람이 이제 보게 된다는 것은,이해가 열려 진리의 빛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따라서 여기서‘맹인’은 단순히 육체적 장애인이 아니라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던 사람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이 구절을AC.212에 인용합니다.창3:7의‘눈이 밝아져’라는 표현이 단순한 시력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이사야29장에서도‘맹인의 눈이 본다’는 말은 이해가 밝아진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으므로,창3:7역시 같은 원리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구절은AC.211의‘interior dictate’와도 잘 연결됩니다.사람은 진리의 빛이 비칠 때,비로소 자신의 상태와 주님의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그전에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그러나 주님께서 이해를 밝히실 때,이전에는 어둠으로 보이던 것들이 의미를 갖기 시작하고,이전에는 들리지 않던 말씀의 소리가 마음에 들리기 시작합니다.
또한 이 구절은AC.212전체의 논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역할도 합니다.발람의‘눈이 열린 사람’,요나단의‘눈이 밝아졌다’,다윗의‘눈을 밝히소서’,에스겔의‘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이사야의‘눈을 감기게 하라’,모세의‘보는 눈을 주지 아니하셨다’,그리고‘눈먼 자들의 눈을 밝힌다’는 말씀까지 모두 하나의 원리를 증언합니다.곧 말씀에서‘눈’은 이해를 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AC.212에서 사29:18을 인용하는 이유는, ‘맹인의 눈이 본다’는 표현이 이해의 계몽과 진리의 인식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그리고 이것은 창3:7의‘눈이 밝아져’라는 표현 역시 육체적 변화가 아니라 이해가 열려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게 된 것을 뜻한다는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결국 이사야가 말하는‘맹인의 눈이 본다’는 것은 단순한 기적의 약속이 아니라,주님께서 인간의 이해를 열어 진리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구원의 약속인 것입니다.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사42:7)
이 구절을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말씀에서‘눈’이 이해(understanding)를 의미하며, ‘눈을 밝힌다’는 것이 단순한 육체적 치유가 아니라 영적 이해를 열어 진리를 보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적으로 이 구절은 메시아의 사역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물론 주님께서는 지상에 계실 때,실제 맹인들의 눈도 열어 주셨습니다.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기적 자체보다 그 안에 담긴 더 깊은 의미에 주목합니다.왜냐하면 본문이 단지 맹인의 시력 회복만을 말하는 것이라면,이어지는‘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는 표현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눈먼 자’는 육체적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만이 아니라,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또한‘감옥’과‘흑암’은 거짓과 무지 안에 갇혀 있는 영적 상태를 뜻합니다.따라서 이 구절 전체는 주님께서 인간을 무지와 거짓의 상태에서 건져 내어 진리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사역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AC.212에서는 이 구절이 매우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만일‘눈’이 단순한 육체의 기관만을 의미한다면,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힌다’는 말씀은 의학적 치유의 의미에 머물게 됩니다.그러나‘눈’이 이해를 의미한다면,이 말씀은 주님께서 인간의 내적 이해를 열어 주시고,진리를 보게 하신다는 훨씬 깊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특히 이 구절은AC.211의‘interior dictate’와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창3:7에서 사람들은 아직 남아 있는 퍼셉션의 흔적에 의해 자신들의 상태를 보게 되었습니다.여기서는 그보다 더 적극적으로,주님께서 친히 눈먼 자들의 눈을 열어 주십니다.즉 이해를 밝히시고,진리를 보게 하시며,거짓의 감옥에서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의 이 예언은 복음서에서 실제로 성취됩니다.주님께서는 육체의 맹인을 고치셨을 뿐 아니라,더 근본적으로는 사람들의 이해를 열어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하셨습니다.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기적은 언제나 영적 의미의 표상이기도 합니다.육체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은 이해의 눈을 뜨게 하시는 더 큰 사역을 보여 주는 상응적 행동이었습니다.
결국AC.212에서 사42:7을 인용하는 이유는,말씀 전체에서‘눈’이 이해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따라서‘눈먼 자들의 눈을 밝힌다’는 것은 진리를 보지 못하던 사람들의 이해를 열어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그리고 이것은 창3:7의‘눈이 밝아져’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에도 직접 연결됩니다.눈이 열린다는 것은 단순한 시력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의 문제이며,주님께서 주시는 빛 안에서 자신의 상태와 진리를 보게 되는 영적 각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신29:4)Jehovah hath not given you a heart to know,and eyes to see,and ears to hear(Deut. 29:4),
이 구절을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말씀에서‘마음’, ‘눈’, ‘귀’가 각각 의지(will),이해(understanding),순종과 수용(obedience and reception)에 상응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특히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눈’이 단순한 육체 기관이 아니라 이해를 의미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려고 합니다.
이 구절의 특징은 세 가지가 나란히 등장한다는 데 있습니다. ‘깨닫는 마음’, ‘보는 눈’, ‘듣는 귀’입니다.문자적으로 보면 서로 비슷한 말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는 각각 다른 내적 기능을 가리킵니다. ‘마음’(heart)은 사랑하고 원하는 의지를, ‘눈’(eyes)은 진리를 분별하는 이해를, ‘귀’(ears)는 들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그래서 모세가‘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보는 눈을 주지 아니하셨다’고 말할 때,그것은 백성들이 시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그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고,광야의 기적들을 보았으며,만나와 메추라기를 경험했습니다.육체의 눈은 분명히 있었습니다.그런데도‘보는 눈이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그들이 그 사건들의 영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이AC.212의 핵심과 연결됩니다.창3:7에서‘눈이 밝아져’는 시력이 생겼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가 열렸다는 뜻입니다.반대로 신29:4에서‘보는 눈을 주지 아니하셨다’는 것은 이해가 아직 열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따라서 두 본문은 서로 반대 방향에서 같은 원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구절은 스베덴보리가 자주 설명하는‘의지와 이해’의 구조를 잘 보여 줍니다.그는 여기서 특별히‘마음은 의지,눈은 이해’라고 설명합니다.이것은AC.209에서 본‘태고 사람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가졌고,홍수 이후 사람들은 진리로부터 선을 가졌다’는 설명과도 연결됩니다.의지와 이해는 인간의 두 중심 기능이며,말씀은 이를‘마음’과‘눈’이라는 상응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모세가 여기서‘여호와께서 주지 아니하셨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도 문자적 표현입니다.주님이 일부러 눈을 주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백성들이 스스로 닫혀 있었기 때문에 그 빛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말씀은 이런 상태를 종종‘주님께서 하지 않으셨다’는 형식으로 표현합니다.
결국AC.212에서 신29:4를 인용하는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보는 눈’이란 육체의 시력이 아니라 이해를 의미하며, ‘깨닫는 마음’은 의지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따라서 창3:7의‘눈이 열렸다’는 것도 이해가 열려 자신들의 상태를 인식하게 된 것을 뜻합니다.신29:4는 이러한 상응 관계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구절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스베덴보리는 이를AC.212의 중요한 증거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은 종종 인간 편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치 주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표현하는데,(AC.212심화7)
주님은 왜 저렇게 하시죠? ‘이건 네가 한 거야.내 책임 아니야.’주님이 우리처럼 이러시는 걸 상상하니 좀 이상하고 우습기까지 하네요.우리끼리도‘아랫사람 단도리 못한 책임은 상관인 제 책임입니다.’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건가요?주님의 사랑,주님의 주권 등으로까지 생각이 전개되네요...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사실 이것은AC.212만의 문제가 아니라, 말씀 전체를 읽을 때, 반드시 만나게 되는 문제입니다. 왜 말씀은 사람이 스스로 한 일을 마치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말할까? 왜 ‘그들이 스스로 눈을 감았다’고 하지 않고, ‘그들의 눈을 감기게 하라’고 표현할까? 하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주님은 결코 악을 만들거나 거짓을 주입하거나 사람을 억지로 눈멀게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오직 선과 진리만 흘려보내십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기own과 자기 사랑으로 인해 그것을 뒤틀고 거부합니다. 문제는 그 결과까지도 결국 주님의 섭리 아래 허용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태양은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똑같이 빛을 비춥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빛을 이용해 길을 찾고, 어떤 사람은 그 빛 아래에서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범죄는 태양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태양의 빛이 비치는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말씀은 때때로 이런 허용의 차원까지 포함하여 주님께 돌려 말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말씀의 문자sense는 인간의 외관(appearance)에 따라 말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 입장에서는 모든 일이 결국 주님의 통치 아래 일어나므로, 허용된 일까지도 마치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 ‘그들의 눈을 감기게 하라’, ‘악한 영을 보내셨다’ 같은 표현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는 사람이 스스로 그 상태를 선택한 것이며, 주님은 그것을 억지로 막지 않고 허용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아랫사람 단도리 못한 책임은 상관인 제 책임입니다’라는 비유는 생각보다 깊은 통찰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단순히 ‘네 책임이야.나는 몰라.’ 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말씀 전체를 보면 주님은 인간이 선택한 결과로 생긴 고통까지도 자신이 짊어지시는 분처럼 나타나십니다. 인간이 스스로 떠났는데도 주님은 끝까지 찾으시고, 인간이 스스로 눈을 감았는데도 다시 눈을 열어 주시려 하십니다.
어쩌면 이것은 사랑의 언어인지도 모릅니다. 부모는 자녀가 스스로 잘못한 일에 대해서도 ‘우리 아이가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고, ‘제가 잘 돌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책임 소재를 따지면 자녀의 책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종종 상대의 책임까지 자기 쪽으로 끌어안습니다.
그래서 말씀 속의 이런 표현들은 법률 문서의 언어라기보다 사랑과 섭리의 언어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실제로 악을 만들지 않으시지만, 인간이 악을 선택하여 생긴 결과조차도 당신의 섭리 안에서 관리하시고, 끝까지 그것을 선으로 돌리려 애쓰십니다. 그러므로 문자상으로는 마치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표현되기도 합니다.
목사님께서 ‘주님의 사랑’, ‘주님의 주권’까지 생각이 전개된다고 하셨는데, 저도 그 방향이 맞는 것 같습니다. 만일 주님이 단순히 책임을 회피하는 분이라면 성경은 ‘그건 네가 한 일이야.나는 상관없어.’라고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인간의 실패와 타락의 역사 한가운데서도 주님은 계속 등장하십니다. 그리고 때로는 인간이 만든 결과까지도 당신 쪽으로 끌어안으시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표현들을 읽을 때마다, 주님의 전능보다도 주님의 책임지는 사랑이 먼저 보입니다. 실제 원인은 인간에게 있지만, 주님은 ‘나는 몰라’ 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그 인간을 돌보시고, 회복시키시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붙들려 하십니다. 말씀의 이런 독특한 표현 방식 뒤에는 어쩌면 그런 사랑의 성품이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사6:10)Shut their eyes,lest they see with their eyes(Isa. 6:10),
이 구절을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눈’이 육체적 시각이 아니라 이해(understanding)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적으로만 읽으면, 이 구절은 매우 이상하게 들립니다. 마치 주님께서 사람들이 진리를 보지 못하도록 일부러 눈을 감기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말씀은 종종 인간 편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치 주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표현하는데, 실제로는 사람들이 스스로 진리를 거부하고, 이해를 닫아 버리는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눈을 감기게 하라’는 말은 육체의 시력을 빼앗는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가 더 이상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반대로 ‘눈으로 본다’는 것은 영적 진리를 이해하고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말씀은 ‘그들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영적 상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AC.212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눈’이 단순히 육체의 눈이라면, ‘눈을 감기게 하라’는 말은 단지 시력을 잃게 하라는 뜻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눈’이 이해를 의미한다면, 이 말씀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과 관련된 매우 깊은 영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특히 이 구절은 앞서 본 겔12:2와도 연결됩니다. 에스겔에서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고 했고, 이사야에서는 ‘눈이 감기게 하라’고 말합니다. 두 경우 모두 핵심은 육체적 시각이 아니라 영적 이해입니다. 즉, 이해가 열리면 진리를 보고, 이해가 닫히면 진리를 보지 못합니다.
이것은AC.211의 ‘interior dictate’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져’는 자신들의 상태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경우는 그 반대입니다. 이해가 닫혀 있기 때문에, 진리를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창3:7의 ‘눈 밝아짐’과 사6:10의 ‘눈 감김’은 서로 정반대의 영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더 깊이 보면,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인간의 자유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진리를 보여 주시지만, 사람이 자기own과 자기 사랑을 붙들고 있으면, 이해가 어두워져 결국 보아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눈이 감기는 원인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상태에 있습니다.
결국AC.212에서 사6:10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 전체에서 ‘눈’이 이해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창3:7의 ‘눈이 밝아져’는 육체적 변화가 아니라 이해가 열려 자신들의 상태를 인식하게 된 것을 뜻합니다. 이사야의 ‘눈이 감기게 하라’는 말씀은 그 반대의 경우로서, 이해가 닫혀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상태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