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Enosh lived after he begat Kenan eight hundred and fifte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Enosh were nine hundred and five years, and he died. (5:10, 11)

 

AC.504

 

여기서도 이와 같이 ‘날’(days)과 ‘해’(years)의 숫자들, 또한 ‘자녀들’(sons and daughters), 그리고 그가 ‘죽었더라’(dying)는 말은 앞에서와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Here in like manner the “days” and numbers of “years,” and also “sons and daughters,” and his “dying,” signify like things.

 

 

해설

 

이 글은 새로운 설명을 더하기보다, 지금까지 확립된 해석의 ‘일관성을 다시 확인하는 결론 문장’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5장의 각 절을 해석할 때마다, 혹시라도 독자가 어느 지점에서 문자적 이해로 되돌아갈 여지를 차단합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이와 같이’라는 표현으로, 동일한 해석 원리가 예외 없이 적용됨을 분명히 합니다.

 

먼저 ‘(days)과 ‘(years)의 숫자들은 앞서 누차 설명된 대로, 연대적 시간의 길이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교회가 거쳐 간 ‘상태의 지속과 변화의 질서’를 가리킵니다. AC.504는 이 원리가 이미 충분히 확립되었음을 전제하고, 더 이상의 반복 설명 없이도 독자가 동일한 틀로 읽어야 함을 요구합니다. 이는 해석의 피로를 줄이기 위한 배려이자, 동시에 해석의 엄격함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자녀들’, 그러니까 ‘아들들과 딸들(sons and daughters) 역시 동일합니다. 여기서도 그것들은 개인의 자녀가 아니라, 해당 교회 상태 안에서 퍼셉션된 ‘진리와 선들’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 진리와 선들이 언제나 교회의 상태에 상응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그 교회가 낳는 진리와 선의 성격도 달라집니다. AC.504는 이 상응 원리가 이미 충분히 설명되었으므로, 다시 정의하지 않습니다.

 

그가 죽었다’는 진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라, 그 교회 상태를 특징짓던 퍼셉션이 더 이상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반복하면서도, 점점 더 간결하게 처리합니다. 이는 독자가 이제 이 표현을 들을 때마다 자동적으로 ‘퍼셉션의 소멸’을 떠올리도록 훈련시키는 효과를 냅니다.

 

이 글의 특징은, 설명의 축소가 곧 의미의 축소를 뜻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AC.504는 앞선 해석들이 단편적 설명이 아니라, ‘하나의 완결된 해석 체계’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날, 해, 자녀들, 그리고 죽음이라는 네 가지 요소는 더 이상 각각 따로 설명될 필요가 없습니다. 이들은 이미 하나의 언어 체계 안에서 함께 작동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문단은 매우 중요한 균형을 제공합니다. 설교자는 모든 구절을 매번 새롭게 설명하려는 유혹을 받기 쉽지만,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반복 속에서 형성된 이해를 신뢰합니다. 이미 충분히 설명된 원리는, 이후에는 간결하게 확인하는 정도로도 충분하다는 태도입니다. 이는 청중을 존중하는 해석 방식이기도 합니다.

 

또한 AC.504는 창세기 5장이 단조로운 족보처럼 보이는 이유를 역설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반복되는 표현들은 지루함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같은 영적 구조가 여러 교회 상태에 걸쳐 적용됨’을 보여 주기 위한 장치입니다. 반복은 변화 없음의 표시가 아니라, 동일한 생명 원리가 서로 다른 상태들 속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창세기 5장을 하나의 긴 이야기로 읽게 됩니다. 각 인물, 각 교회 상태는 다르지만, 그들을 관통하는 해석의 열쇠는 동일합니다. 퍼셉션이 살아 있을 때 교회는 자녀들을 낳고, 퍼셉션이 흐려질 때 교회는 죽음에 이릅니다. 날과 해는 그 과정을 표시하는 표지일 뿐입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이 반복은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신앙의 상태가 달라질 때마다 전혀 다른 기준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기준이 다른 상황에 적용’됩니다. 무엇이 생명인가, 무엇이 죽음인가라는 기준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 기준은 퍼셉션이며, 퍼셉션의 분명함과 소멸 여부가 모든 것을 가릅니다.

 

결국 AC.504는 말수가 적지만, 그만큼 강력한 확인을 제공합니다. ‘여기서도 이와 같이’라는 한마디 안에, 창세기 5장을 관통하는 모든 해석 원리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이 문단을 지나며 독자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같은 눈으로 다음 절들을 읽을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AC.505, 창5:10-11, ’에노스‘, '셋', '사람'(아담)의 퍼셉션 차이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10, 11) AC.505 ‘에노스’(Enosh)는 앞서 관찰한 바와 같이 세 번째 교회를 의미하는데, 여전히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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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3, 창5:9, ‘태고교회 퍼셉션 능력의 비밀’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3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 선을 행함으로부터 생겨나는 행복과 기쁨에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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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창세기 본문 중 에서가 자기 아내들을 구하는 장면들입니다.

 

34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35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 (26:34, 35)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27:46)

 

6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맞이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라 하였고 7또 야곱이 부모의 명을 따라 밧단아람으로 갔으며 8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지라 9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 (28:6-9)

 

그리고 아래는 이에 대한 해설입니다.

 

에서의 두 결혼(헷 족속 유딧, 바스맛)과 그로 인한 이삭, 리브가 마음의 ‘근심’, 그리고 리브가가 ‘내 삶이 싫어졌다’고까지 말하는 탄식은, 문자 그대로만 보면 ‘이방(헷)과의 혼인 문제’처럼 보이지만, 창세기 속뜻의 흐름에서는 ‘가정 내 갈등’ 자체가 핵심이라기보다 ‘교회 안에서의 선과 진리의 결합(혼인)’이 어떻게 흐트러지는가를 보여 주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혼인’은 단지 가족사(史)가 아니라, ‘(사랑)과 진리(신앙/교리)가 결합하여 생명이 생겨나는 상태’를 대표적으로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딸(아내)을 맞이했는가’는 ‘어떤 종류의 정서, 욕구, 교리, 삶의 방식과 결합했는가’를 드러냅니다.

 

에서(자연적 선, 혹은 자연인의 강건한 에너지에 가까운 것)는 본래 ‘야곱(진리의 차원, 교리, 질서, 분별)’과 한 사람 안에서 함께 있어야 합니다. 즉 ‘자연의 힘(에서)’은 ‘진리의 인도(야곱)’를 받아 ‘선의 도구’가 될 때 복된 자리에 놓입니다. 그런데 창26–28의 이 결혼 장면들은, ‘자연적 힘이 진리의 인도를 싫어하거나(혹은 무시하거나)’, 그 대신 ‘바깥의 것(외적 매력, 세상적 기준, 감각적, 자기중심적 기쁨)’과 결합해 버릴 때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 결과가 바로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입니다. 속뜻으로 말하면, ‘속 사람(이삭의 선, 리브가의 진리)’이 ‘겉 사람(에서의 삶)’의 잘못된 결합과 선택으로 인해 깊은 불일치와 불쾌, 곧 ‘양심의 고통’과 같은 상태를 겪는 것입니다.

 

특히 ‘헷 족속’은 단순히 ‘민족이 이방이다’라는 표지가 아니라, ‘선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주님과의 결합에 어긋나는 어떤 요소’—다시 말해 ‘내적 예배(주님 사랑)와 연결되지 않은 외적 예배’, 혹은 ‘진리의 빛이 아닌 감각과 습관이 주도하는 삶의 방식’ 같은 것을 대표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헷 족속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다는 것은, ‘자연적 삶이 자기에게 편하고 좋아 보이는 방식(외형상 그럴듯한 것)과 결합하는데, 그것이 주님께로 향한 내적 결합을 깨뜨리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겉으로는 결혼이요 가정의 확장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생명(선과 진리의 혼인)이 아닌 다른 결합’이 됩니다. 그러니 리브가가 ‘내 삶이 싫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된 감정 표출이 아니라, ‘진리(리브가)의 입장에서 보아, 선과 진리의 계승이 끊어질 수 있다는 절박함’을 드러내는 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야곱이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이라는 대목은, ‘진리의 계열(야곱)이 외적, 감각적 결합을 택하면, 교회(한 사람 안의 교회)의 미래가 사라진다’는 두려움입니다.

 

이때 중요한 포인트는 ‘리브가가 야곱을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아내를 맞게 하려는 것’이 단지 ‘민족 순수성’이나 ‘좋은 혼처 찾기’가 아니라, 속뜻에서는 ‘진리가 자기에게 합당한 정서, 선의 바탕을 얻어와야 한다’는 원리를 보여 준다는 점입니다. 밧단아람(아람, 라반의 집)은 흔히 ‘외적 지식들, 기억-지식들, 교리적 재료들’이 모여 있는 영역을 가리키는 방향으로 이해됩니다. 즉 야곱이 그곳으로 가서 아내를 맞는다는 것은, ‘진리(야곱)가 주님께서 쓰실 수 있는 선의 바탕(애정, 삶의 습관, 실천의 토양)을 얻어와 결합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가나안 사람의 딸’과 ‘헷 사람의 딸’은 ‘겉은 종교, 도덕, 문화로 포장되었으나 내적이 주님께로 열려 있지 않은 결합’을 대표할 수 있고, 반대로 ‘밧단아람에서의 결합’은 ‘진리가 주님의 섭리 아래서 순서를 갖추어 선과 결합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 상징이 됩니다.

 

28:6-9에서 에서가 보이는 반응은 아주 인간적으로도 설득력 있습니다. ‘내가 뭔가 잘못했나? 아버지가 기뻐하지 못하네. 그럼 다른 방식으로라도 맞춰볼까?’ 그래서 에서는 ‘가나안 딸들이 아버지를 기쁘게 하지 못함’을 보고, 이번에는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겉으로는 ‘수정’이고 ‘효도’ 같은 동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더 섬세한 진단이 가능합니다. 여기서 ‘에서가 깨달은 것’은 ‘주님의 뜻(내적 이유)’이 아니라 ‘아버지의 기분(외적 신호)’에 머무를 위험이 큽니다. 즉 ‘내적 회개’가 아니라 ‘외적 처방’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가 드러납니다. ‘가나안이 안 된다면 이스마엘 쪽은 어떨까?’ 하는 선택은, ‘내적 진리의 인도’가 아니라 ‘대안 탐색’으로 움직이는 자연인의 전형적인 움직임일 수 있습니다.

 

또한 이스마엘 계열은 성경 전체 상징 흐름에서 종종 ‘영적인 것과 분리된 합리성/지식, 혹은 외적 신앙과 내적 사랑의 불일치’ 같은 것을 대표하는 방향으로 읽힙니다(물론 문자적으로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아들이고, 그 자체로 단순 악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에서가 ‘본처들 외에’ 또 더한다는 표현까지 보면, 이것은 ‘정리와 순서의 회복’이 아니라 ‘혼합의 확대’에 가깝습니다. 속뜻에서 ‘한 남자가 여러 아내를 둔다’는 표상은, ‘한 삶이 여러 종류의 애정/교리를 뒤섞어 품는 상태’, 곧 ‘일관된 중심이 없는 결합’을 드러내기 쉽습니다. 그래서 에서의 시도는 ‘근본 문제의 치유’가 아니라 ‘겉모양의 조정’에 머물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그 기쁨이 ‘주님 안에서의 질서’가 아니라 ‘관계의 표면’에서만 판단되면, 결과적으로 ‘내적 사람의 근심’을 제거하지 못합니다.

 

이 대목들을 설교자의 관점으로 풀어내면, 성도들에게는 꽤 현실적인 거울이 됩니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며 감각적 선택을 밀어붙이는 것도 문제이지만, ‘눈치 보고 반응 보고, 다른 처방을 덧대는 방식’도 동일하게 문제의 뿌리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주님이 다루시는 것은 ‘내가 누구를 기쁘게 했는가’가 아니라 ‘내 안에서 무엇과 결합했는가’입니다. 즉 ‘내 삶(자연적 욕구, 일상 습관, 즐거움, 자존심, 효율, 성공욕)’이 ‘주님의 진리’와 결합해 주님께로 향하는가, 아니면 ‘겉으로 그럴듯한 외적 기준’과 결합하여 내적 생명을 갉아먹는가가 핵심입니다. 그래서 이삭, 리브가의 ‘근심’은 단지 부모 마음이 상한 정도가 아니라, ‘내적 교회가 외적 삶의 결혼 선택 때문에 숨이 막히는 상태’를 그립니다.

 

정리하면, (1) 에서의 헷 족속 결혼은 ‘자연적 힘이 외적, 감각적 삶의 방식과 결합하여 내적 선, 진리와 어긋나는 상태’를 보여주고, 그 결과가 (2) ‘이삭과 리브가의 근심’—곧 ‘내적 양심의 고통, 주님과의 결합에서 오는 불쾌’로 나타납니다. (3) 리브가의 탄식과 야곱의 파송은 ‘진리가 합당한 선의 바탕과 결합하도록 주님이 순서를 세우시는 섭리’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4) 에서가 이스마엘의 딸을 추가로 맞이하는 장면은 ‘내적 변화가 아닌 외적 보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연인의 움직임’과 ‘혼합의 확대’라는 위험을 보여줍니다. 결국 이 단락들은 ‘가정사’라기보다 ‘한 사람 안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 어떤 길로 가는가’—‘주님 중심의 결합인가, 외형 중심의 결합인가’를 깊이 묻는 본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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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5:9)

 

AC.503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 선을 행함으로부터 생겨나는 행복과 기쁨에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선행의 행복과 기쁨이 없이는 퍼셉션 능력은 생명을 가지지 못하며, 이러한 행복과 기쁨에 의해 그것은 생명을 받습니다. 태고교회가 누렸던 사랑의 생명과 그로부터 나온 신앙의 생명은, 쓰임새(use)를 행하는 가운데 있는 생명, 곧 쓰임새의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생명이었습니다. 생명은 쓰임새로부터, 쓰임새에 의해, 그리고 쓰임새에 따라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며, 무익한 것에는 생명이 있을 수 없는데, 무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버려지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태고의 사람들은 주님을 닮은 사람들이었고, 그러므로 퍼셉션 능력에 있어서 주님의 형상이 되었습니다. 퍼셉션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아는 데에 있으며, 따라서 무엇이 신앙에 속하는지를 아는 데에 있습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아는 데에서 기쁨을 느끼지 않고, 선과 진리를 행하는 데에서, 곧 유용한 사람, 쓰임새의 사람이 되는 데에서 기쁨을 느낍니다. The perceptive facul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consisted not only in the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 but also in the happiness and delight arising from well doing; without such happiness and delight in doing what is good the perceptive faculty has no life, but by virtue of such happiness and delight it receives life. The life of love, and of the derivative faith, such as the most ancient church enjoyed, is life while in the performance of use, that is, in the good and truth of use: from use, by use, and according to use, is life given by the Lord; there can be no life in what is useless, for whatever is useless is cast away. In this respect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likenesses of the Lord, and therefore in perceptive powers they became images of him. The perceptive power consists in knowing what is good and true, consequently what is of faith: he who is in love is not delighted in knowing, but in doing what is good and true, that is, in being useful.

 

 

해설

 

이 글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왜 ‘살아 있는 퍼셉션’이었는지를 가장 분명하게 설명해 주는 핵심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을 단순히 ‘옳고 그름을 아는 능력’으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퍼셉션은 선과 진리를 아는 것과 동시에, ‘그것을 행할 때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행복과 기쁨을 포함하는 능력’입니다. 이 기쁨이 빠진 퍼셉션은, 겉모습은 남아 있을지라도 생명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하나 일어납니다. 퍼셉션의 생명은 ‘’ 자체에 있지 않고, ‘행함에서 느끼는 기쁨’에 있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선을 행하는 데서 오는 행복과 기쁨이 없으면, 퍼셉션 능력에는 생명이 없다고 말입니다. 이는 지식 중심 신앙에 대한 매우 강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아무리 정확히 알아도, 그것을 행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앎은 생명을 잃은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생명을 ‘쓰임새를 행하는 가운데 있는 생명’이라고 정의합니다. 여기서 ‘쓰임새(use)는 단순한 기능 수행이나 사회적 역할을 뜻하지 않습니다. 쓰임새는 ‘사랑에서 비롯되어 타인을 향해 흘러가는 선과 진리의 실제적인 움직임’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선을 행하는 것이 의무가 아닌, 자신의 생명이었기 때문에 행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 자체가 쓰임새였고, 그 쓰임새 안에서 생명을 느꼈습니다.

 

이 글은 매우 중요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생명은 쓰임새로부터, 쓰임새에 의해, 그리고 쓰임새에 따라 주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원리입니다. 이는 생명이 어떤 정적인 소유물이 아니라, ‘관계와 작용 속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뜻합니다. 생명은 저장해 둘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흘러갈 때 유지됩니다. 그래서 무익한 것에는 생명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무익한 것은 흘러가지 않기 때문에, 결국 버려집니다. 마치 고인 물은 썩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점에서 태고의 사람들은 주님의 닮음들, 즉 주님을 닮은 사람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그 사랑은 끊임없이 쓰임새로 흘러갑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도 사랑 안에서 살며, 그 사랑을 쓰임새로 드러냈기 때문에, 주님의 닮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닮음 때문에, 퍼셉션의 능력에 있어서 주님의 형상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즉, 퍼셉션은 추상적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 방식에 참여한 결과’였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의 능력을 다시 정의합니다. 퍼셉션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아는 능력이며, 따라서 무엇이 신앙에 속하는지를 아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안다’는 말은 개념적으로 이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현실로 분별하고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이 분별은 사랑 안에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아는 데에서 기쁨을 느끼지 않고, 선과 진리를 행하는 데에서 기쁨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지식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에게 앎은 행함을 위해 존재하며, 행함이 곧 기쁨입니다. 그 기쁨이 바로 퍼셉션의 생명입니다.

 

이 글은 오늘날 신앙의 상태를 매우 정직하게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을 ‘얼마나 많이 아는가’로 평가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전혀 다른 기준을 제시합니다. 진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선과 진리를 행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가, 아니면 그저 아는 데서 만족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후자의 경우, 퍼셉션은 이미 생명을 잃은 상태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봉사와 사역에 대한 이해도 바로잡아줍니다. 쓰임새는 억지로 감당해야 할 짐이 아니라, ‘사랑이 살아 있을 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생명의 표현’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쓰임새를 통해 지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안에서 행복과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퍼셉션의 교회가 지녔던 독특한 생명력입니다.

 

결국 AC.503은 퍼셉션의 본질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게 합니다. 퍼셉션은 선과 진리를 아는 능력이되, 그 생명은 선과 진리를 행하는 데서 오는 기쁨에 있습니다. 이 기쁨이 살아 있을 때, 퍼셉션은 살아 있고, 교회는 살아 있습니다. 이 기쁨이 사라질 때, 퍼셉션은 점차 어두워지고, 마침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 통찰은 태고교회의 이해를 넘어, 오늘 우리의 신앙과 사역을 깊이 점검하게 만드는 기준이 됩니다.

 

 

 

AC.504, 창5:10-11,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오 세를 살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Enosh lived after he begat Kenan eight hundred and fifte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Enosh w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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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2, 창5:9, ‘사람’(아담), ‘셋’, ‘에노스’, 첫 세 교회와 이후 교회들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2 ‘사람’(man), ‘셋’(Seth), ‘에노스’(Enosh)라 하는 이 세 교회는 태고교회를 이루지만, 퍼셉션의 완전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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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5:9)

 

AC.502

 

‘사람’(man), ‘셋’(Seth), ‘에노스’(Enosh)라 하는 이 세 교회는 태고교회를 이루지만, 퍼셉션의 완전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 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뒤이어 나타난 교회들에서 점차 감소하여 더 일반적인 것이 되었는데, 이는 앞서 열매나 그 씨앗에 대해, 또 뇌에 대해 말한 바와 같습니다. 완전성은 분명하게 퍼셉션하는 능력, 곧 또렷함에 있으며, 퍼셉션이 덜 분명하고 더 일반적일수록 그 능력은 감소합니다. 그러면 이전에 더 분명하던 퍼셉션을 대신하여 더 어두운 퍼셉션이 뒤따르게 되고, 이로써 그것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These three churches, “man,” “Seth,” and “Enosh,” constitute the most ancient church, but still with a difference of perfection as to perceptions: the perceptive faculty of the first church gradually diminished in the succeeding churches, and became more general, as observed concerning fruit or its seed, and concerning the brain. Perfection consists in the faculty of perceiving distinctly, which faculty is diminished when the perception is less distinct and more general; an obscurer perception then succeeds in the place of that which was clearer, and thus it begins to vanish away.

 

 

해설

 

이 글은 태고교회 내부의 구조를 한 문장으로 종합하는 매우 핵심적인 진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man), ‘(Seth), ‘에노스(Enosh)를 각각 독립된 교회로 부르면서도, 동시에 이 셋이 함께 태고교회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이는 태고교회가 단일하고 균질한 실체가 아니라, ‘서로 다른 퍼셉션의 완전성을 지닌 여러 상태들의 연합체’였음을 분명히 합니다.

 

여기서 핵심 개념은 ‘완전성’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의 완전성을 외적 거룩함이나 도덕적 무결성으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완전성은 오직 하나, ‘얼마나 분명하게 퍼셉션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퍼셉션이 분명할수록 교회는 더 완전하며, 퍼셉션이 흐려질수록 완전성은 감소합니다. 이 기준은 단순하면서도 매우 급진적입니다.

 

첫 번째 교회, 곧 ‘사람(man, 아담)으로 불리는 교회는 가장 분명한 퍼셉션을 지녔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거의 즉각적으로 인식되었고, 혼의 작용과 삶의 행위 사이에 간극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퍼셉션은 뒤이은 교회들에서 점차 약화되었습니다. 셋의 교회에서도 여전히 퍼셉션은 있었지만, 그것은 이미 이전보다 덜 즉각적이었고, 에노스의 교회에서는 더욱 일반적인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이 세 교회 중에서 비교하자면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변화를 ‘일반화’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퍼셉션이 일반화된다는 것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분별이 줄어들고, 보다 포괄적이고 흐릿한 인식으로 바뀐다는 뜻입니다. 이는 열매와 씨앗의 비유에서, 중심의 핵이 바깥층으로 갈수록 희석되는 과정과 같습니다. 본질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 선명도는 점차 낮아집니다.

 

뇌의 비유 역시 이 점을 보강합니다. 혼의 작용이 가장 미묘하게 일어나는 피질 물질에서 멀어질수록, 작용은 점점 더 매개되고 둔해집니다. 이는 기능의 상실이 아니라, ‘작동 방식의 변화’입니다. 그러나 이 변화가 계속될 때, 어느 순간에는 작용 자체가 더 이상 분명히 인식되지 않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을 ‘퍼셉션의 소멸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봅니다.

 

중요한 점은, 퍼셉션이 갑자기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글은 퍼셉션의 소멸이 ‘연속적이고 점진적인 과정’임을 분명히 합니다. 먼저 덜 분명해지고, 그다음에 더 일반적이 되며, 마침내 더 어두운 퍼셉션이 이전의 밝은 퍼셉션을 대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퍼셉션은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는 한순간의 붕괴가 아니라, 서서히 진행되는 소멸입니다.

 

※ 퍼셉션이 어두워진다는 건 어떤 상황, 당면한 문제에 관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래서 그 대안으로 금식기도, 백일, 또는 천일기도, 안수기도, 그리고 기도원을 가거나 수도원을 가거나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정말 어두운 사람들이며, 그런 시대에 사는 것입니다. 우스갯소리이지만, 천사들은 주님의 뜻을 알려고 금식기도 같은 거 안 하거든요...

 

목회적으로 이 문단은 매우 날카로운 자기 성찰의 기준을 제공합니다. 신앙이 여전히 존재하고, 말과 형식이 유지되고 있을지라도, 퍼셉션이 점점 더 일반적이고 흐릿해지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완전성의 감소가 시작되었다는 신호입니다. 문제는 퍼셉션이 ‘있느냐 없느냐’의 이분법이 아니라, ‘얼마나 분명하냐’의 문제입니다.

 

또한 이 글은 태고교회의 쇠퇴를 비극으로만 보지 않게 합니다. 이 변화는 인간 조건 안에서 불가피한 것이었고, 주님께서는 각 단계에 맞는 교회 상태를 허락하셨습니다. 셋과 에노스의 교회는 첫 번째 교회보다 덜 완전했지만, 여전히 태고교회의 일부였고, 그 나름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완전성의 차이는 가치의 차이가 아니라, ‘상태의 차이’입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어떤 시기에는 신앙이 매우 분명하고 생생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것이 더 일반적이고 덜 선명해질 수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책이나 절망이 아니라, 퍼셉션의 흐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퍼셉션이 흐려질수록, 우리는 더 의식적인 선택과 훈련을 통해 주님과의 연결을 붙들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AC.502는 태고교회의 구조와 쇠퇴를 하나의 명확한 기준으로 설명합니다. 교회의 완전성은 퍼셉션의 분명함에 있으며, 퍼셉션이 일반화되고 어두워질수록 그 완전성은 감소합니다. 이 감소가 누적될 때, 퍼셉션은 마침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 통찰은 창세기 5장을 넘어, 모든 시대의 교회와 모든 개인의 신앙을 평가하는 깊은 기준을 제공합니다.

 

 

 

AC.503, 창5:9, ‘태고교회 퍼셉션 능력의 비밀’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3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 선을 행함으로부터 생겨나는 행복과 기쁨에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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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1, 창5:9, '이어지는 교회들 간의 관계'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1 시간의 경과 속에서 서로 이어서 나타난 교회들, 곧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태어났다고 하는 교회들의 경우는, 비유하자면, 열매나 그 씨앗의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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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5:9)

 

AC.501

 

시간의 경과 속에서 서로 이어서 나타난 교회들, 곧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태어났다고 하는 교회들의 경우는, 비유하자면, 열매나 그 씨앗의 경우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 한가운데, 곧 가장 안쪽에는 마치 열매 속의 열매, 씨앗 속의 씨앗과 같은 것이 있어, 거기서부터 연속적인 부분들이 마치 질서 있게 살아 나옵니다. 이 가장 안쪽으로부터 둘레를 향해 멀어질수록, 그 안에는 열매나 씨앗의 본질이 점점 더 적게 남아 있다가, 마침내는 열매나 씨앗이 끝나는 껍질이나 외피만 남게 됩니다. 또한 뇌의 경우와도 같은데, 그 가장 안쪽 부분에는 피질 물질이라 불리는 미묘한 유기적 형태들이 있으며, 혼(soul)의 작용은 거기서부터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나옵니다. 그로부터 질서에 따라 더 순수한 막(coverings)이 차례로 뒤따르고, 그 다음에는 더 치밀한 것들이, 그리고 마침내는 수막이라 불리는 일반적인 막이 나타나며, 이것들은 다시 더 일반적인 막으로 끝나고, 마지막에는 가장 일반적인 것인 두개골로 끝납니다. As regards the churches that in course of time succeeded one another, and of which it is said that one was born from another, the case with them was the same as it is with fruits, or with their seeds. In the midst of these, that is, in their inmosts, there are as it were fruits of the fruits, or seeds of the seeds, from which live as it were in regular order the successive parts. For the more remote these are from the inmost toward the circumference, the less of the essence of the fruit or of the seed is there in them, until finally they are but the cuticles or coverings in which the fruits or seeds terminate. Or as in the case of the brain, in the inmost parts of which are subtle organic forms called the cortical substances, from which and by which the operations of the soul proceed; and from which in regular order the purer coverings follow in succession, then the denser ones, and finally the general coverings called meninges, which are terminated in coverings still more general, and at last in the most general of all, which is the skull.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이후에 이어진 여러 교회들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매우 강력한 비유를 사용합니다. 하나는 열매와 씨앗의 비유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뇌 구조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 두 비유는 서로 다른 영역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동일한 영적 원리를 서로 다른 각도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핵심은,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중심에서부터 시작되어 바깥으로 질서 있게 전개된다’는 점입니다.

 

먼저 열매와 씨앗의 비유에서, 스베덴보리는 교회들이 서로에게서 태어난다는 말이 단절이나 복제의 의미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열매 안에는 다시 씨앗이 있고, 그 씨앗 안에는 또 다른 생명의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이 ‘씨앗 속의 씨앗’이 바로 가장 안쪽, 곧 본질이 자리한 자리입니다.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가장 안쪽에는 주님으로부터 온 생명의 핵심이 있으며, 그것이 다음 교회들로 전달됩니다.

 

그러나 이 전달은 균등하지 않습니다. 가장 안쪽에서 멀어질수록, 곧 시간이 흐르고 단계가 내려갈수록, 본질은 점점 더 희석됩니다. 이는 타락이나 실패의 언어라기보다, ‘확장과 외화, 즉 겉을 향한, 밖을 향한 결과’입니다. 생명이 바깥으로 퍼질수록, 그것은 더 많은 형식과 외피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본질 자체보다 그것을 감싸는 껍질이 더 두드러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 비유는 왜 후대의 교회들이 점점 덜 천적으로 보이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것은 생명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이 더 바깥쪽에서 작용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의 중심적 퍼셉션은 씨앗의 가장 깊은 핵과 같았고, 이후의 교회들은 그 핵에서 나온 층층의 구조들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바깥층에 있다고 해서 생명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생명의 작동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두 번째 비유인 뇌의 구조는 이 점을 더욱 정밀하게 보여 줍니다. 뇌의 가장 안쪽에 있는 피질 물질은 혼의 작용이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자리입니다. 이 부분은 매우 미묘하고 섬세하여, 외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안쪽에서부터 모든 작용이 시작되어, 점차 더 외적인 피복들, 그러니까 막으로 전달됩니다. 이 막들은 안쪽의 작용을 보호하고 질서 있게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교회 역시 이와 같습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안쪽 퍼셉션은 혼의 작용에 해당하고, 그로부터 이어진 교회들은 점차 더 많은 외적 구조와 형식을 갖추게 됩니다. 수막과 두개골이 뇌를 보호하듯이, 후대 교회의 교리와 제도, 예식들은 안쪽의 생명을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합니다. 문제는 외피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외피만 남고 안쪽의 생명이 끊어질 때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스베덴보리는 교회사의 쇠퇴를 단순한 퇴락으로 보지 않게 합니다. 그는 쇠퇴라는 말을 쓰기보다는, ‘중심에서 주변으로의 이동’이라는 관점으로 설명합니다. 중심에 가까울수록 퍼셉션은 즉각적이고 충만하지만, 바깥으로 갈수록 퍼셉션은 더 매개, 즉 무언가의 설명이 필요하고, 더 형식화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단계는 하나의 생명 흐름 안에 있습니다.

 

목회적으로 이 글은 매우 중요한 균형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종종 ‘처음 교회가 가장 좋았다’거나 ‘후대 교회는 본질을 잃었다’는 식으로 단정하려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단순화하지 않습니다. 그는 각 교회가 ‘그 위치에 맞는 역할과 구조를 지녔다’고 봅니다. 열매의 껍질이 불필요하지 않듯이, 외적 형식의 교회도 필요합니다.

 

동시에 이 비유는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껍질만 남고 씨앗이 사라질 수 있고, 두개골은 남아 있지만 혼의 작용이 끊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진정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질문은, 교회가 얼마나 중심에 가깝냐가 아니라, ‘그 중심과 여전히 연결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신앙에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한 사람 안에도 씨앗의 핵심에 해당하는 퍼셉션이 있고, 그 주위로 생각과 말과 행위라는 층들이 형성됩니다. 이 층들이 살아 있으려면, 반드시 안쪽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AC.501은 교회와 개인 모두에게, 생명의 방향이 언제나 안쪽에서 바깥으로 흘러야 함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결국 이 글은 태고교회 이후의 교회들을 하나의 유기체로 보게 합니다. 각 교회는 이전 교회의 열매이며, 동시에 다음 교회를 위한 씨앗입니다. 이 연속성의 중심에는 퍼셉션이 있으며, 그 퍼셉션이 유지되는 한, 교회의 생명은 형태를 달리하면서도 계속 이어집니다.

 

 

 

AC.502, 창5:9, ‘사람’(아담), ‘셋’, ‘에노스’, 첫 세 교회와 이후 교회들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2 ‘사람’(man), ‘셋’(Seth), ‘에노스’(Enosh)라 하는 이 세 교회는 태고교회를 이루지만, 퍼셉션의 완전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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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0, 창5:9,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AC.500-503)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And Enosh lived ninety years, and begat Kenan. (창5:9) AC.500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에노스’(Enosh)는 ‘셋’(Seth)이라는 교회보다 더 덜 천적(still less celestial)인 세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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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And Enosh lived ninety years, and begat Kenan. (5:9)

 

AC.500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에노스’(Enosh)는 ‘셋’(Seth)이라는 교회보다 더 덜 천적(still less celestial)인 세 번째 교회를 의미하지만, 그래도 역시 여전히 태고교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게난’(Kenan)은 네 번째 교회, 그러니까 앞선 교회들을 계속해서 계승하는 교회입니다. By “Enosh,” as before said, is signified a third church, still less celestial than the church “Seth,”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by “Kenan” is signified a fourth church, which succeeded the former ones.

 

 

해설

 

이 글은 태고교회 내부의 ‘연속적 분화’를 한눈에 보여 주는 요약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노스(Enosh)와 ‘게난(Kenan)을 개인의 이름으로 취급하지 않고, ‘각각 고유한 교회 상태’로 명확히 규정합니다. 특히 ‘여전히 태고교회들 가운데 하나’라는 반복은, 변화가 곧 단절을 의미하지 않음을 강조합니다. 태고교회의 생명은 한순간에 끊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단계의 상태 변화를 거치며 점진적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먼저 에노스는 셋의 교회보다 ‘더 덜 천적(still less celestial)인 세 번째 교회로 설명됩니다. 이는 사랑의 선이 중심이던 초기 상태에서, 신앙의 이해가 점차 더 전면에 나서는 방향으로 이동했음을 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퍼셉션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퍼셉션은 존재하지만, 그 즉각성과 충만함은 약화되었고, 더 많은 반성과 매개를 필요로 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단계는 태고교회의 내부에서 일어난 ‘질적 변화의 축적’을 보여 줍니다.

 

이어지는 ‘게난(Kenan)은 네 번째 교회로 제시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긴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앞선 교회들을 계승했다’고만 말합니다. 이 간결함은 의도적입니다. 이미 확립된 원리, 곧 교회는 이전 교회의 상태로부터 ‘연속적으로 파생된다’는 점을 다시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게난의 교회는 에노스의 교회가 지닌 성격을 바탕으로 하여, 또 하나의 다른 상태를 형성합니다.

 

이 흐름에서 중요한 것은 ‘덜 천적’이라는 표현이 반복되지만, 그것이 가치 판단이나 도덕적 낙인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느 단계도 ‘거짓 교회’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각 단계를 ‘주님의 섭리 안에서 허용되고 인도된 상태’로 봅니다. 태고교회의 변화는 실패의 연속이 아니라, 인간 상태에 맞추어 조정된 인도의 역사입니다.

 

이러한 단계적 분화는 유전적 악의 누적과도 연결됩니다. 세대를 거치며 유전적 악이 더해질수록, 초기의 즉각적 퍼셉션, 즉 맑고 또렷한 퍼셉션은 유지되기 어려워집니다. 그 결과, 교회는 점점 덜 천적인 형태를 띠게 됩니다. 그러나 이 변화 속에서도 주님은 각 단계에 맞는 교회 상태를 일으키십니다. 에노스의 교회가 그러했고, 게난의 교회도 그러했습니다.

 

설교적으로 보면, 이 문단은 교회의 역사를 ‘정체성의 상실’이 아니라 ‘형태, 곧 퍼셉션 형태의 변화’로 읽게 합니다. 우리는 종종 ‘처음이 가장 순수했고, 이후는 계속 나빠졌다’는 식으로 단순화하지만, 스베덴보리는 훨씬 섬세한 관점을 제시합니다. 각 교회는 그 시대와 상태에 맞는 방식으로 주님과 연결되어 있었고, 퍼셉션 역시 그에 상응하는 형태로 유지되었습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한 사람의 신앙 안에서도 ‘셋의 상태’, ‘에노스의 상태’, ‘게난의 상태’와 같은 단계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떤 시기에는 사랑이 중심이 되고, 어떤 시기에는 이해와 분별이 더 전면에 나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단계에 있느냐가 아니라, ‘그 단계 안에서도 여전히 퍼셉션이 살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글은 교회 간의 비교를 경계하게 합니다. 더 천적이냐, 덜 천적이냐 하는 것은 상대적 표현일 뿐, 우열의 판단 기준이 아닙니다. 각 교회는 주님께서 허락하신 고유한 역할과 위치를 지닙니다. 에노스의 교회와 게난의 교회는 태고교회의 부모 교회와 동일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님의 섭리 밖에 있지도 않습니다. 점점 종말, 곧 노아의 홍수를 향해 가고 있지만 말입니다.

 

결국 AC.500은 태고교회가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 ‘여러 상태들의 연속체였음’을 다시 한번 확증합니다. 이 연속체의 중심에는 퍼셉션이 있으며, 그 퍼셉션은 형태를 달리하면서도 가능한 한 오래 유지되도록 인도되었습니다. 비록 갈수록 희미해졌지만 말입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창세기 5장의 족보는 더 이상 낯선 이름의 나열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이 어떻게 이어지고 변모했는지를 보여 주는 지도’로 읽히게 됩니다.

 

 

 

AC.501, 창5:9, '이어지는 교회들 간의 관계'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1 시간의 경과 속에서 서로 이어서 나타난 교회들, 곧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태어났다고 하는 교회들의 경우는, 비유하자면, 열매나 그 씨앗의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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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9, 창5:7-8,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Seth lived after he begat Enosh eight hundred and sev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Seth were n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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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Seth lived after he begat Enosh eight hundred and sev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Seth were nine hundred and twelve years, and he died. (5:7, 8)

 

AC.499

 

‘날’(days)과 ‘해’(years)의 숫자들은 여기서도 앞에서와 같이 시간과 상태를 의미합니다. ‘자녀들’(sons and daughters) 또한 앞에서와 같은 의미를 가지며, 그가 ‘죽었더라’(died)는 진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The “days” and numbers of “years” signify here as before the times and states. “Sons and daughters” too have the same signification as before; and so likewise as the statement that he “died.”

 

 

해설

 

이 글은 AC.492에서 AC.498까지 이어진 해석을 하나로 묶어 주는 정리 문장과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새로운 내용을 제시하기보다, 이미 확립된 해석 원리가 여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창세기 5장의 족보가 부분적으로만 상징적이거나, 어떤 구절은 문자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식의 혼합 해석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먼저 ‘(days)과 ‘(years)의 숫자들이 다시 언급됩니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연대적 시간 해석으로 되돌아가려는 유혹을 차단합니다. 앞에서 충분히 밝혀졌듯이, 날과 해는 교회의 지속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거쳐 간 ‘상태의 흐름과 질서’를 말합니다. AC.499는 이 원리가 예외 없이 계속 적용됨을 확인합니다.

 

자녀들(sons and daughters)에 대한 언급도 동일합니다. 여기서도 그것들은 생물학적 자녀가 아니라, 그 교회 상태 안에서 퍼셉션된 진리와 선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 진리와 선이 ‘항상 교회의 상태에 상응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어떠한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그 교회가 낳는 진리와 선의 성격도 달라집니다. 따라서 ‘자녀들을 낳았으며’라는 말은, 그 교회가 여전히 영적으로 생산적인 상태에 있었음을 뜻합니다.

 

이어지는 그가 ‘죽었더라(died)는 진술 역시 앞에서 설명된 의미와 동일합니다. 이것은 한 개인의 생물학적 죽음을 뜻하지 않고, ‘그 교회 상태를 특징짓던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AC.499는 이 점을 반복함으로써, 창세기 5장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이 바로 퍼셉션의 유지와 소멸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 반복은 불필요한 중언부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독자가 한 번이라도 문자적 이해로 되돌아가 이 족보를 읽지 않도록, 같은 원리를 여러 번 확인시킵니다. 특히 ‘죽었다’는 표현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육체의 죽음으로 오해될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앞선 해석을 그대로 다시 적용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신학적으로 보면, 이 문단은 교회의 생명과 죽음을 판단하는 기준을 명확히 고정합니다. 교회의 생명은 제도의 존속이나 인원의 지속이 아니라, ‘퍼셉션의 존재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퍼셉션이 살아 있을 때, 교회는 날과 해의 상태를 지나며 자녀들, 곧 진리와 선을 낳습니다. 그러나 퍼셉션이 사라질 때, 성경은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이 원리는 태고교회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AC.499를 통해, 이후에 등장하는 모든 교회들에도 동일한 해석 원리가 적용된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즉, 교회사는 외형의 흥망이 아니라, ‘퍼셉션 변화사’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교회든, 퍼셉션이 살아 있으면 그 교회는 살아 있고, 퍼셉션이 소멸되면 그 교회는 죽은 것입니다.

 

설교적으로 이 문단은 매우 강한 메시지를 지닙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의 죽음을 출석 감소나 사회적 영향력 상실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준은 전혀 다릅니다. 퍼셉션이 사라지고, 선과 진리가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살아 있는 것으로 인식되지 않을 때, 그때가 바로 교회의 죽음입니다. 반대로 외적으로는 미약해 보여도, 퍼셉션이 살아 있다면 그 교회는 여전히 생명 가운데 있습니다.

 

또한 개인의 신앙에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한 사람 안에도 날과 해, 자녀들, 그리고 죽음에 해당하는 상태들이 있습니다. 어떤 시기에는 진리와 선이 풍성히 퍼셉션되지만, 어떤 시기에는 그것이 희미해질 수 있습니다. AC.499는 이러한 변화를 도덕적 실패로만 해석하지 않고, ‘상태의 변화’로 읽도록 인도합니다.

 

결국 AC.499는 창세기 5장의 족보를 읽는 독자에게 하나의 안정된 해석 틀을 제공합니다. 날과 해, 자녀들, 그리고 죽음은 모두 같은 언어 체계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그 중심에는 퍼셉션이 있습니다. 이 틀을 붙들 때, 우리는 족보의 반복 속에서 지루함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 리듬을 읽게 됩니다.

 

 

 

AC.500, 창5:9,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AC.500-503)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And Enosh lived ninety years, and begat Kenan. (창5:9) AC.500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에노스’(Enosh)는 ‘셋’(Seth)이라는 교회보다 더 덜 천적(still less celestial)인 세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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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8, 창5:6, ‘에노스를 낳았고’(begat Enosh)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8 그가 ‘에노스를 낳았다’(begat Enosh)는 말은, 그들로부터 ‘에노스’(Enosh)라 하는 또 다른 교회가 이어졌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 장에서 이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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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5:6)

 

AC.498

 

그가 ‘에노스를 낳았다’(begat Enosh)는 말은, 그들로부터 ‘에노스’(Enosh)라 하는 또 다른 교회가 이어졌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 장에서 이름들이 교회들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합니다. That he “begat Enosh” signifies that from them there descended another church called “Enosh”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in this chapter the names signify nothing else than churches.

 

 

해설

 

이 문단은 짧지만, 창세기 5장을 해석하는 데 있어 매우 결정적인 원리를 다시 한번 명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노스를 낳았다(begat Enosh)는 표현을, 개인의 출생으로 읽지 말고 ‘교회의 출현’으로 읽어야 한다고 단언합니다. 그 근거는 단순합니다. 이 장에서 등장하는 이름들은 어느 것도 개인을 의미하지 않으며, 오직 ‘교회의 상태들’만을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이 진술은 앞선 모든 해석을 한 줄로 요약하는 역할을 합니다. 만일 이름들이 개인이라면, 창세기 5장은 긴 수명과 혈통을 기록한 고대 연대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름들이 교회라면, 이 장은 태고교회가 어떻게 여러 상태로 분화되고, 그 상태들이 어떻게 서로를 ‘낳으며’ 이어졌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계보’가 됩니다. AC.498은 후자의 관점을 확정합니다.

 

낳았다’는 말이 교회의 계승을 뜻한다는 점은, 앞서 반복적으로 확립된 원리입니다. 한 교회가 다른 교회를 낳는다는 것은, 한 상태 안에서 형성된 진리와 선의 퍼셉션이 다음 상태로 전이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전이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이며, 외형의 변화보다 ‘내적 생명의 이동’에 초점이 있습니다.

 

에노스(Enosh)라는 이름 자체도 이 점을 보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에노스’가 상대적으로 연약한 인간 상태, 곧 스스로에 대한 자각이 더해진 상태와 연결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셋의 교회보다 한 단계 더 내려온, 그러니까 더 흐릿해진 상태를 암시합니다. 즉, 에노스의 교회는 여전히 태고교회의 범주 안에 있지만, 퍼셉션의 즉각성과 충만함, 또렷함은 더 약화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 약화가 곧바로 죽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에노스의 교회 역시 살아 있는 교회였고, 진리와 선을 퍼셉션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 퍼셉션은 이전보다 덜 직접적이고, 더 많은 반성과 매개를 필요로 하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교회의 변화는 항상 단계적이며, 각 단계는 저마다 고유한 성격을 지닙니다.

 

AC.498이 강조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이 장 전체의 해석 원리의 일관성’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에서 이름들이 교회들 외에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부분적 상징 해석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아담, 셋, 에노스, 그 이후의 모든 이름들은 동일한 규칙 아래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일관성이 무너지면, 장 전체의 구조도 함께 무너집니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교회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상태의 연속’이라는 것이지요. 한 교회가 다음 교회를 낳는다는 말은, 오늘의 교회가 내일의 교회를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자신 안에 머무르지 않고, 다음 상태를 위한 씨앗을 품습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 안에도 여러 ‘이름’의 상태들이 있습니다. 어떤 시기의 신앙은 셋과 같고, 어떤 시기는 에노스와 같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변화가 곧바로 실패나 타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다른 방식으로 인도하고 계신다는 표지’일 수 있습니다. 질러갈 걸 좀 돌아가는 걸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 인생이 끝에 가서 아주 잃어버리는 인생이 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결국 AC.498은 창세기 5장을 읽는 독자에게 분명한 선택을 요구합니다. 이 장을 개인들의 전기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교회의 생명사가 기록된 말씀, 곧 교회의 영적 계보로 읽을 것인가 하는 선택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호하게 후자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교회와 신앙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 있는 상태로 이해하게 만듭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에노스를 낳았다(begat Enosh)는 말은 더 이상 낯선 족보 문장이 아니라, ‘섭리 안에서 이어지는 교회의 맥박’으로 들리게 됩니다.

 

 

 

AC.499, 창5:7-8,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Seth lived after he begat Enosh eight hundred and sev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Seth were n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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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7, 창5:6, '교회의 쇠퇴와 회복은 점진적으로'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7 ‘셋’(Seth)이 부모 교회인 태고교회보다 덜 천적이지만, 여전히 태고교회들 가운데 하나인 두 번째 교회라는 사실은, 셋에 관해 위에서 말한 내용(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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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5:6)

 

AC.497

 

‘셋’(Seth)이 부모 교회인 태고교회보다 덜 천적이지만, 여전히 태고교회들 가운데 하나인 두 번째 교회라는 사실은, 셋에 관해 위에서 말한 내용(3)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That “Seth” is a second church less celestial than the most ancient church, its parent,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may appear from what was said above concerning Seth (verse 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5:3)

 

교회들의 경우는, 우리가 말해 온 바와 같이, 위에서 언급한 원인으로 인해 본질적인 것들에 있어 점진적으로, 그리고 시간의 경과에 따라 쇠퇴하게 됩니다. The case with churches, as we have said, is that by degrees, and in process of time, they decrease as to essentials, owing to the cause above mentioned.

 

 

해설

 

이 글은 AC.496에서 제시된 진술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그 원리를 보다 일반적인 교회론으로 확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셋이 태고교회의 두 번째 교회이며, 부모 교회보다 덜 천적이라는 점을 새로운 주장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앞에서 충분히 설명된 사실을 다시 상기시키며, 이제 그것을 ‘모든 교회에 적용되는 보편 원리’로 정식화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덜 천적이지만 여전히 태고교회들 가운데 하나’라는 규정입니다. 이는 교회의 변화가 흑백 논리로 설명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셋의 교회는 태고교회의 최초 상태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전혀 다른 종류의 교회로 전락한 것도 아닙니다. 본질은 유지되었으되, 그 강도와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다시 말해, 퍼셉션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 퍼셉션이 작동하는 깊이와 즉시성이 부모 교회에 비해서 좀 약화 되었다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을 개인의 타락이나 도덕적 실패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교회들의 경우는 점진적으로 쇠퇴한다’고 말하며, 이 쇠퇴를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필연적 과정’으로 제시합니다. 이는 인간의 본성, 특히 유전적 악의 축적이라는 원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처음에는 순수한 상태로 시작하지만, 세대를 거치며 그 순수함을 유지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이 ‘점진적 쇠퇴’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쇠퇴는 급격한 붕괴나 단번의 배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미세한 변화들이 누적되면서, 본질적인 것들이 조금씩 약화 되는 식이었지요. 사랑이 중심이던 상태에서 신앙이 점점 더 두드러지게 되고, 그렇게 해서 퍼셉션이 처음처럼 즉각적이고 또렷하기보다는 덜 즉각적, 덜 또렷해지는 방향으로 이동한 것이지요. 셋의 교회는 바로 이런 변화의 초기 단계에 해당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과정을 ‘본질적인 것들에 있어 쇠퇴한다’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본질적인 것들(essentials)이란 교회의 생명, 곧 주님과의 직접적인 연결과 퍼셉션을 말합니다. 외적 형식이나 제도는 여전히 유지될 수 있지만, 본질적인 것이 약화 될 때, 교회는 이미 쇠퇴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교회의 쇠퇴는 외적 변화보다 ‘내적 생명의 변화’로 판단되어야 합니다.

 

이 글은 태고교회의 역사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후 모든 교회의 운명을 암시합니다. 태고교회 다음에 등장하는 교회들 역시, 동일한 원리에 따라 시작과 전성기, 그리고 쇠퇴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차이는 형태와 정도일 뿐, 그 구조는 동일합니다. 그래서 셋의 교회는 단순한 역사적 사례가 아니라, ‘교회 변화의 전형’을 보여 주는 그 첫 사례가 됩니다.

 

이 말씀은 매우 현실적인 통찰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종종 교회의 쇠퇴를 특정 사건이나 외부 환경 탓으로만 돌리려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더 깊은 원인을 제시합니다. 교회의 쇠퇴는 내부에서, 그것도 본질적인 차원에서 서서히 진행됩니다. 퍼셉션이 약화되고, 사랑이 덜 중심이 될 때, 교회는 이미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 진술은 절망적인 숙명론으로 흐르지는 않습니다. 쇠퇴가 점진적이라는 말은, ‘회복 역시 단계적으로 가능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셋의 교회가 여전히 태고교회들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었던 것은, 퍼셉션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교회를 단번에 버리지 않으시고, 가능한 한 오래 생명을 유지하도록 인도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한 사람 안에서도 초기의 열정과 사랑이 시간이 지나며 변화할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렇다고 그 변화가 곧바로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변화 속에서도 퍼셉션이 살아 있는지,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여전히 살아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지 하는 것입니다. 셋의 교회는 그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결국 AC.497은 태고교회의 두 번째 단계인 셋의 교회를 통해, 교회의 쇠퇴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합니다. 그것은 단절이나 파멸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본질의 약화’입니다. 이 인식을 가질 때, 우리는 교회의 역사와 오늘의 교회를 보다 차분하고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AC.498, 창5:6, ‘에노스를 낳았고’(begat Enosh)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8 그가 ‘에노스를 낳았다’(begat Enosh)는 말은, 그들로부터 ‘에노스’(Enosh)라 하는 또 다른 교회가 이어졌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 장에서 이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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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6, 창5:6,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AC.496-498)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And Seth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and begat Enosh. (창5:6) AC.496 ‘셋’(Seth)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태고교회의 부모 교회에 비해 덜 천적이지만, 여전히 태고교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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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And Seth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and begat Enosh. (5:6)

 

AC.496

 

‘셋’(Seth)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태고교회의 부모 교회에 비해 덜 천적이지만, 여전히 태고교회들 가운데 하나인 두 번째 교회입니다. ‘백오 세에’(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는 앞에서와 같이 시간과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에노스를 낳았고’(begat Enosh)는 그들로부터 ‘에노스’(Enosh)라고 하는 또 다른 교회가 이어졌음을 의미합니다. Seth,” as was observed, is a second church, less celestial than the most ancient church, its parent,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that he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signifies, as before, times and states; that he “begat Enosh” signifies that from them there descended another church that was called “Enosh.”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내부 분화를 매우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요약합니다. ‘(Seth)은 단순히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태고교회 내부에서 나타난 ‘두 번째 교회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는 이 교회를 ‘덜 천적이지만 여전히 태고교회들 가운데 하나’라고 규정함으로써, 단절이 아니라 연속 속의 변화임을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는 한순간에 무너진 것이 아니라, 점진적인 변화를 거치며 여러 상태로 분화된 것입니다.

 

덜 천적(less celestial)이라는 표현은 퇴보나 타락을 곧바로 뜻하지 않습니다. 이는 사랑이 중심이던 상태에서, 사랑과 결합한 신앙이 점점 더 분명해지는 방향으로의 이동을 가리킵니다. 즉, 셋의 교회는 여전히 퍼셉션을 지니고 있었지만, 태고교회의 최초 상태처럼 전적으로 사랑에서 즉각적으로 퍼셉션하는 단계는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는 여전히 태고교회의 범주 안에 속하며, 그 생명은 퍼셉션에 있었습니다.

 

백오 세(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라는 표현은 앞서 반복적으로 확립된 원리에 따르면 연대적 나이를 말하는 게 아니고, 대신 셋의 교회가 ‘어떤 시간과 상태를 거쳐 유지되었는지’를 나타내는 표지입니다. 숫자는 그 상태의 성격을 암시하지만, 핵심은 길이가 아니라 질, 곧 숫자의 겉뜻에서 물러날 때 보이는 속뜻입니다. 셋의 교회는 일정한 기간 동안 고유한 상태를 유지했고, 그 상태 안에서 다음 교회가 준비되었습니다.

 

이어지는 ‘셋은 에노스를 낳았고(Seth begat Enosh)는 셋의 교회로부터 또 다른 교회가 출현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낳다’는 말은 생물학적 출산이 아니라, ‘영적 전이와 계승’을 뜻합니다. 한 교회의 상태 안에서 형성된 진리와 선의 퍼셉션이 다음 교회 상태로 이어지는 과정을, 성경은 출산의 언어로 표현합니다.

 

에노스(Enosh)라 하는 이 다음 교회는 셋의 교회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름이 바뀌었다는 사실 자체가 상태의 변화와 차이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 변화 역시 단절이 아니라 연속입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점차 다른 형태로 표현되며, 각 단계마다 새로운 교회 상태를 형성합니다. 이처럼 창세기 5장의 족보는, 한 교회가 다른 교회를 낳는 ‘영적 계보’를 보여 줍니다.

 

이 글은 태고교회의 쇠퇴를 단순한 붕괴로 이해하는 관점을 교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쇠퇴를 ‘갑작스러운 상실’이 아니라, ‘상태의 변화와 이동’으로 설명합니다. 셋의 교회는 태고교회의 부모 교회보다 덜 천적이었지만, 여전히 주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 안에 있었고, 그 관계는 퍼셉션으로 유지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변화는 타락이라기보다, 다른 형태의 질서로의 이동이었습니다.

 

이 구절은 교회의 역사뿐 아니라 개인의 신앙 여정에도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한 사람 안에서도 신앙의 상태는 동일하게 유지되지 않습니다. 어떤 시기에는 사랑이 중심이 되고, 어떤 시기에는 신앙의 이해가 더 두드러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태의 변화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변화 속에서도 ‘퍼셉션이 살아 있는가’입니다.

 

셋이라는 교회가 에노스라는 교회를 낳았다는 말은, 살아 있는 신앙은 언제나 다음 단계를 준비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퍼셉션이 살아 있는 교회는 자신 안에 머무르지 않고, 다음 세대를 위한 토대를 마련합니다. 반대로 퍼셉션이 사라진 교회는 더 이상 ‘낳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5장의 족보가 단순한 과거 기록이 아니라, 오늘의 교회와 신앙을 비추는 거울이 되는 이유입니다.

 

결국 AC.496은 태고교회의 연속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드러냅니다. 셋은 태고교회의 두 번째 교회로서, 부모 교회와 다른 성격을 지녔지만, 여전히 같은 생명의 흐름 안에 있었습니다. 그 흐름의 핵심은 퍼셉션이며, 그 퍼셉션이 이어지는 한, 교회는 형태를 달리하며 계속해서 ‘낳고’ 이어집니다.

 

 

 

AC.497, 창5:6, '교회의 쇠퇴와 회복은 점진적으로'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7 ‘셋’(Seth)이 부모 교회인 태고교회보다 덜 천적이지만, 여전히 태고교회들 가운데 하나인 두 번째 교회라는 사실은, 셋에 관해 위에서 말한 내용(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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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5, 창5:5, '교회의 쇠퇴와 퍼셉션의 관계'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 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했는지는, 퍼셉션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데요, 왜냐하면 태고교회는 퍼셉션의 교회였고, 그런 교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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