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창4:13)
AC.384
이로부터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되었다는 것은 라멕에 관하여 말한 것에서 분명합니다(창4:19,23-24). Hence it appears that something of good still remained in Cain; but that all the good of charity afterwards perished is evident from what is said of Lamech (verses 19, 23–24).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창4:19, 23-24)
해설
AC.384는 바로 앞 AC.383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짧은 설명입니다. AC.383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라는 말을 어떤 내적 고통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악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고백한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에서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결론짓습니다. 이것은 가인을 선한 사람으로 평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가인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것’, 곧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자기 악 때문에 내적인 고통을 느끼고 어느 정도 그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 안의 선에 속한 모든 것이 아직 완전히 사라진 상태는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의 어떤 것’이라는 제한된 표현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에게 ‘선이 있었다’고 일반적으로 말하지 않고 ‘something of good still remained’라고 합니다. 즉 악이 크게 지배하고 있었지만 선에 반응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AC.383에서 보았듯이 가인은 자기 상태 때문에 내적 고통을 느꼈고, 자기가 악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고백했습니다. 만일 선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되었다면 그러한 내적 고통과 인정조차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작은 반응 가능성이 이번 번호에서 말하는 ‘아직 남아 있던 선의 어떤 것’입니다.
이 점은 가인에 관한 지금까지의 설명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가인은 ‘악’, 아벨은 ‘선’이라는 식으로 두 사람을 단순한 도덕적 인물 유형으로 나누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해석은 아닙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교리와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 상태가 매우 심각하게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선의 가능성이 한순간에 완전히 없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시작되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고,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며, 그 결과 선과 진리의 방향을 잃어 가는 과정 가운데에서도 아직 선의 어떤 잔여가 남아 있었던 단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AC.384의 후반부는 곧바로 더 어두운 방향을 예고합니다. ‘이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되었다는 것은 라멕에 관하여 말한 것에서 분명하다’고 합니다. 즉 가인에게 남아 있던 선의 어떤 것이 계속 보존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인으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는 후대로 내려가면서 더욱 심화되었고, 마침내 라멕으로 표상되는 상태에서는 체어리티의 선이 완전히 소멸됩니다. 그러므로 AC.384는 가인의 상태를 설명하는 동시에 창4 후반부의 라멕을 미리 바라보게 하는 연결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창4:19,23-24를 가리키는 것도 이 흐름 때문입니다. 창4:19에서는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는 일이 나오고, 23-24절에서는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그리고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라는 라멕의 말이 나옵니다. 이 구절들의 구체적인 속뜻은 해당 번호에서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므로 지금 미리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84에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 구절들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된’ 후대의 상태를 보여 주는 근거로 미리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가인에서 라멕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단순히 악한 개인들의 계보가 아닙니다. 하나의 영적 원리가 세대를 거치며 어디까지 진행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교리적 계보입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구별이 있었고, 그 구별이 분리가 되었으며,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서려고 했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단계에서는 자기 악에 대한 어떤 내적 고통과 인정이 가능할 만큼 선에 속한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그 뒤 그 원리가 더욱 악화되어 라멕에 이르면 그것마저 소멸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앞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구별했던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표현을 좀 더 세밀하게 읽게 합니다. 앞 번호들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AC.384에서는 다시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두 진술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리에서 체어리티가 신앙의 본질과 주도 원리로서 배척되고 소멸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상태에 속한 사람들 안에서 선에 속한 모든 흔적과 반응 가능성이 그 순간 완전히 없어졌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리적 원리의 소멸과 사람 안에 남아 있는 선의 어떤 것을 구별하여 보고 있습니다.
이 구별은 앞으로 ‘가인의 표’를 이해할 때도 중요해질 것입니다. 만일 가인 안에 선에 속한 모든 것이 이미 완전히 소멸되어 아무것도 보존할 것이 없었다면, 왜 주님께서 가인을 즉시 멸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표를 주어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는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AC.384는 아직 그 답을 본격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적어도 가인의 상태 안에 아직 보존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이후의 ‘가인의 표’는 단순히 악인을 보호하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 아니라, 완전히 소멸되지 않은 것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선의 어떤 것’을 곧바로 ‘리메인스’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직 조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remains’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단지 ‘something of good still remained’라고 말합니다. 더 넓은 AC의 가르침과 연결하여 리메인스와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는 있지만, AC.384 자체가 이것을 전문적 의미의 리메인스라고 명시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원문이 말하는 만큼, 곧 ‘선에 속한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었다’고 두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목회적으로도 이 짧은 번호에는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사람의 상태가 크게 무너져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 사람 안에 선에 반응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근거로 다른 사람의 내면을 우리가 판정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가인조차 자기 악 때문에 어떤 내적 고통을 느끼고 그것을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사람의 외적인 상태만 보고 그의 내면에 남아 있는 모든 가능성을 우리가 판단할 수 없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의 내면을 아시고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실 수 있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결국 AC.384는 가인의 이야기에 매우 중요한 미세한 차이를 넣습니다. 가인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렀지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악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하는 내적 고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계속 악화되면서 라멕에 이르러서는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는 가인의 타락을 단번에 완성된 상태로 보지 않고 하나의 진행 과정으로 보게 하며, 동시에 아직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이후 ‘가인의 표’와 연결하여 바라볼 준비를 하게 합니다.
AC.385,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남아 있는 것을 위협하는 악과 거짓’ (A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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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3, 창4:13,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 악을 인정하게 한 내적 고통과 절망’ (AC.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창4:13) AC.38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Cain said unto Jehovah)는 어떤 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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