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Cain)이사랑에서분리된신앙,또는그러한분리를인정하는교리를상징한다는것과,‘그의제물을돌아보지않으셨다’(tohisofferinghelookednot)는것이그의예배가받아들여질수없었음을상징한다는것은앞에서설명했습니다. That by “Cain” is signified faith separated from love, or a doctrine that admits of this separation; and that “tohisofferinghelookednot” signifies that his worship was not acceptable, has been shown before.
해설
AC.356은 새로운 내용을 전개하는 글이라기보다 바로 앞 AC.355의 첫 부분을 확인하고 정리하는 짧은 연결 단락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두 가지 모두 ‘앞에서설명했다’고 밝히므로, 여기서는 이미 나온 내용을 길게 반복하기보다 앞으로 이어질 ‘분노’와 ‘안색이변함’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한 전제를 다시 세워 놓았다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첫 번째 전제는 ‘가인’입니다. 가인은 단순히 신앙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사랑에서분리된신앙’을 상징합니다. 더 정확하게는 ‘신앙과사랑의분리가가능하다고인정하는교리’까지 포함합니다. 이 구별은 중요합니다. 처음에는 실제 삶에서 신앙과 사랑이 조금씩 멀어지는 상태일 수 있지만, 그것이 굳어지면 마침내 ‘사랑과체어리티가없어도신앙은신앙으로온전히존재할수있다’는 하나의 교리적 입장이 됩니다.
두 번째 전제는 ‘그의제물을돌아보지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가인이라는 개인에 대한 주님의 거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가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뜻합니다. 바로 앞 AC.349에서 보았듯이 외적 예배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라는 내적 생명에서 분리된 예배는 외적 형식을 아무리 갖추고 있어도 살아 있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주의할 것은 ‘가인의제물을돌아보지않으셨다’는 말씀을 ‘주님께서는신앙을기뻐하지않으시고체어리티만기뻐하신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에서분리된신앙’입니다. AC.353에서는 오히려 ‘신앙역시사랑에서비롯될때에는천적’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의 대비는 ‘신앙대체어리티’가 아닙니다. ‘체어리티에서분리된신앙’과 ‘체어리티와결합된살아있는신앙’의 대비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아벨이 상징하는 체어리티가 신앙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에 생명을 줍니다. 그래서 앞의 AC.341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없는 곳에는 신앙도 없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이러한 전제를 AC.356에서 다시 확인하는 이유는 이제 가인의 더 깊은 내적 변화가 설명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사실에 가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중요해집니다. 그는 자신을 돌아보고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려 하지 않고 ‘몹시분하여안색이변합니다.’ AC.355는 이것을 체어리티가 떠나고 내적인 것들이 변한 상태라고 미리 밝혔습니다.
따라서 AC.356은 짧지만 가인의 타락 과정에서 하나의 경계선과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가인이무엇을상징하는가’, ‘그의제물은무엇인가’, ‘왜그의예배가받아들여질수없는가’를 설명했다면, 이제부터는 그러한 분리된 신앙이 인간의 내면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를 살펴보게 됩니다.
결국 AC.356의 핵심은 이미 확인한 두 사실을 다시 붙드는 데 있습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며, ‘받아들여지지않은제물’은 그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받아들여질 수 없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상태에서 다음 단계인 ‘분노’와 ‘안색의변화’가 생겨납니다. 즉 잘못된 신앙과 예배의 질서는 결국 생각과 교리의 문제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의 애정과 내적인 것들까지 변화시키기 시작합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But to Cain and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창4:5)
AC.355
앞에서말한바와같이‘가인’(Cain)은사랑에서분리된신앙,또는그러한분리가가능하다고인정하는교리를상징합니다.그의‘제물을돌아보지않으셨다’(offeringnotbeinglookedto)는것은앞에서와같이그의예배가받아들여질수없었음을상징합니다.‘가인이몹시분하여그의안색이변했다’(Cain’sangerbeingkindledexceedingly, andhisfacesfalling)는것은내적인것들이변했음을상징합니다.‘분노’(anger)는체어리티가떠났음을뜻하고,‘안색’(faces)은내적인것들을뜻하는데,그것들이변할때안색이‘떨어졌다’(fall)고말합니다. By “Cain,” as has been stated, is signified faith separated from love, or such a doctrine as admits of the possibility of this separation; by his “offeringnotbeinglookedto” is signified as before that his worship was unacceptable. By “Cain’sangerbeingkindledexceedingly,andhisfacesfalling” is signified that the interiors were changed. By “anger” is denoted that charity had departed; and by the “faces,” the interiors, which are said to “fall” when they are changed.
해설
AC.355부터 창4:5의 속뜻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앞의 AC.346-354에서는 가인과 아벨이 각각 무엇을 드렸으며, 왜 아벨의 제물은 받아들여지고, 가인의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이제 말씀의 초점은 ‘그결과가인안에서무슨일이일어났는가?’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감정적 분노가 아니라, 교회의 ‘내적인것들이변하는’ 과정으로 읽습니다.
먼저 ‘가인’에 대한 정의가 조금 더 정밀해졌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인은 ‘사랑에서분리된신앙’을 상징할 뿐 아니라 ‘그러한분리가가능하다고인정하는교리’도 상징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단순히 어떤 사람이 사랑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상태를 넘어, ‘신앙은사랑과분리되어도참된신앙일수있다’고 교리적으로 인정하는 단계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처음부터 가인이 극단적으로 타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AC.347에서는 처음에는 가인이라 불리는 교리가 그렇게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로 보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사랑에서 지금처럼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의 작은 구별이 점차 실제적인 분리가 되고, 이제는 그 분리 자체를 하나의 교리로 인정하는 데까지 이릅니다.
따라서 ‘그의제물을돌아보지않으셨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셨다는 의미에 머물지 않습니다. AC.349에서 ‘제물’은 예배를 상징한다고 했으므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는 주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외적으로 아무리 예배의 형식을 갖추고 있어도 그 안에 체어리티라는 생명이 없다면 참된 예배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가인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가인이몹시분하여.’ 스베덴보리는 이 ‘분노’를 단순히 기분이 상했다거나 질투했다는 자연적인 감정으로만 읽지 않습니다. ‘분노는체어리티가떠났음을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가인 이야기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왜 분노가 체어리티의 떠남을 나타낼까요? 체어리티가 있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의 선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웃의 선을 기뻐하고 그의 선을 원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신을 사랑보다 높이고, 자신의 교리적 위치를 지키려 할 때, 체어리티는 점점 설 자리를 잃습니다. 특히 자신의 예배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아벨의 예배는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 가인이 아벨을 향하여 분노한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기 형제로 받아들이기는커녕, 이제 그것을 적대하기 시작하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 점에서 ‘몹시’라는 표현도 그냥 지나치기 어렵습니다. 분리는 이제 단순한 개념상의 구별이 아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된 뒤, 체어리티를 불편하게 여기고, 마침내 그것을 향해 분노하는 단계까지 왔습니다. 처음에는 ‘신앙도사랑과별개로하나의독립된것이아닌가?’라는 작은 변화에서 시작했지만, 그 질서가 계속 뒤집히자, 이제 사랑과 체어리티 자체가 신앙의 자기주장을 방해하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안색이변했다’는 말씀은 이 변화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나타냅니다. 영어 원문은 ‘hisfacesfalling’, 문자적으로는 ‘그의얼굴들이떨어졌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얼굴’(faces)을 인간의 ‘내적인것들’로 해석합니다. 얼굴은 사람의 내면에 있는 애정과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기뻐하면 얼굴이 밝아지고, 슬프거나 분노하면 얼굴이 달라지는 것처럼 얼굴은 내적 상태의 외적 표현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안색이변했다’는 것은 단순히 가인이 화난 표정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내적인것들이변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변화입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사랑의 관계에 관한 교리적 변화로 시작했지만, 이제 그 잘못된 질서가 인간의 내면 자체를 바꾸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흐름을 AC.338부터 연결해서 보면 가인의 타락 과정이 상당히 선명하게 보입니다. 처음에는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되고인정’되기 시작합니다. 그다음 신앙이 사랑에서 점차 분리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분리가 하나의 교리로 굳어집니다. 그러자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죽은 행위와 받아들여질 수 없는 예배가 나오고, 이제 그 결과로 체어리티가 떠나면서 내적인 것들까지 변합니다. 이후에는 결국 아벨을 죽이는 단계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영적 파국이 아닙니다. AC.355는 그 직전의 내적 과정을 보여 줍니다. 먼저 질서가 생각과 교리에서 뒤집히고, 그 뒤 애정이 변하며, 마침내 삶의 행위로 나타납니다. 잘못된 교리가 단순히 머릿속의 잘못된 생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지속되면 인간의 애정과 의지까지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오늘날의 신앙에도 매우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는 것은 단지 신학 시험에서 답 하나를 틀리는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바른교리를믿고있으므로어떻게살아가든신앙자체는온전하다’는 생각이 굳어지면, 처음에는 작은 교리적 분리처럼 보여도 점차 삶과 애정의 질서를 바꿀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의 옳음을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오히려 방해물처럼 여기게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종교적 분노를 돌아볼 때 AC.355는 날카로운 기준을 제공합니다. 물론 모든 분노가 곧 체어리티의 상실이라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악과 불의에 대한 의로운 분개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신앙과교리가인정받지못하기때문에’, ‘다른사람의선이오히려인정받기때문에’, ‘내가옳다는것을받아들이지않기때문에’ 일어나는 분노라면 그 안에 가인의 상태가 들어오고 있지 않은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인의 분노에서 특히 두려운 것은 그가 여전히 종교적인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여호와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예배를 폐기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 그 종교성 안에서 체어리티가 떠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외적 종교생활이 계속된다는 사실만으로 내적 상태가 안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진리를 말하고,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체어리티가 떠날 수 있다는 것이 가인의 이야기가 보여 주는 비극입니다.
반대로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가 살아 있는지를 끊임없이 살핍니다. 내가 진리를 더 알게 될수록 이웃을 더 사랑하는가, 더 자비로워지는가, 다른 사람의 선을 기뻐할 수 있는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낮아질 수 있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신앙의 진리가 체어리티에 생명을 주는 주님의 선과 결합하고 있다면 사람의 내적인 것들도 점차 주님을 향해 열립니다.
결국 AC.355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분노’보다 그 뒤에 있는 ‘내적인것들의변화’입니다. 가인의 얼굴이 변하기 전에 그의 내면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면이 변한 근본 이유는 체어리티가 떠났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고, 그 분리가 교리로 굳어지며, 그 교리에서 예배하고,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향하여 분노하게 될 때, 인간의 내적인 얼굴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AC.355는 가인의 타락이 본격적으로 외적 행동으로 나타나기 직전의 결정적인 지점을 보여 줍니다. ‘사랑에서분리된신앙’은 중립적인 상태로 머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체어리티가 떠나면 인간의 내적인 것들이 변합니다. 그리고 다음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바로 그 가인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아직 아벨을 죽이기 전입니다. 이것은 가인의 내면이 변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주님께서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돌이킬 길을 열어 두고 계심을 이후의 글에서 살펴볼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4
‘여호와께서아벨과그의제물을돌아보셨다’(JehovahlookedtoAbel, andtohisoffering)는것은체어리티에속한것들과체어리티에기초한모든예배가주님을기쁘시게한다는것을상징합니다.이는‘아벨’(Abel)과그의‘제물’(offering)에관하여앞에서이미설명한바와같습니다. That “JehovahlookedtoAbel,andtohisoffering,” signifies that the things of charity, and all worship grounded therein, are pleasing to the Lord, has been explained before, as regards both “Abel,” and his “offering.”
해설
AC.354는 매우 짧으며, 사실상 앞의 AC.350-353을 마무리하는 결론 역할을 합니다. 새로운 상응을 제시하기보다는 창4:4의 마지막 부분인 ‘여호와께서아벨과그의제물을돌아보셨다’는 말씀의 속뜻을 다시 확인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그의 ‘제물’은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속한 것과 거기서 나오는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표현은 ‘체어리티에기초한모든예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지 ‘체어리티가주님을기쁘시게한다’고 하지 않고 예배의 근거, 곧 예배가 무엇에 ‘기초하고있는가’를 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9에서 말한 ‘외적인것은내적인것들로부터생명을얻으며,그것들을통하여주님에게서생명을얻는다’는 원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외적인 예배의 형식이 아무리 온전해 보여도 그 안에 체어리티라는 내적 생명이 없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는 살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체어리티 자체의 근원이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AC.352에서는 ‘모든사랑은주님에게서오는것이며,인간에게서오는것은조금도없다’고 했고, AC.353에서는 ‘기름’이 천적인 것, 곧 사랑에 속한 것을 나타내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제물이 주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에게서 어떤 훌륭한 것을 만들어 주님께 바쳤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선을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체어리티의 삶과 예배로 다시 주님께 돌려드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여호와께서돌아보셨다’는 표현도 주님께서 가인이라는 사람보다 아벨이라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더 좋아하셨다는 뜻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돌아보시는’ 것은 아벨이 표상하는 체어리티와 그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입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의 제물에 대한 주님의 서로 다른 반응은 사람에 대한 편애가 아니라 두 종류의 내적 상태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점은 곧 이어질 가인의 반응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가인 역시 제물을 드렸습니다. 외적으로는 예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예배였습니다. 반면 아벨의 예배는 체어리티에 기초했습니다. 결국 두 제물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을드렸는가?’보다 ‘어디에서부터드렸는가?’입니다. 한쪽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고, 다른 한쪽은 체어리티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창4:4의 ‘돌아보셨다’는 말씀은 오늘날 우리의 예배에도 매우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어떤 형식으로 예배하는가, 얼마나 정확한 교리를 고백하는가, 얼마나 많은 종교적 활동을 하는가도 중요하지만, 그 모든 것의 내적 근원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예배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고, 진리를 알수록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아간다면 그 예배에는 아벨의 생명이 있습니다.
AC.354는 짧지만 AC.350-353 전체를 한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아벨=체어리티’, ‘처음난것=오직주님께속한거룩한것’, ‘기름=주님께속한천적인사랑의선’, 그리고 이 모든 것으로 드리는 ‘제물=체어리티에기초한예배’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것은 결국 ‘주님에게서받은사랑이체어리티가되고,그체어리티에서예배가나오는질서’를 주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까지 계속 살펴온 가인과 아벨의 문제를 다시 가장 단순한 자리로 돌려놓습니다. 문제는 신앙이냐 행위냐의 대립이 아닙니다. ‘신앙과예배안에체어리티의생명이있는가?’입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생명을 받고, 예배가 체어리티에 기초할 때, 그것은 주님께서 ‘돌아보시는’ 살아 있는 신앙과 예배가 됩니다.
이번 강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상당히 강한 긴장 속에서 진행됩니다. 정동수 목사는 이동원 목사의 지구촌교회 창립기념 설교를 계기로, 떼제 공동체와 관상기도, 가톨릭과 개신교의 일치, 에큐메니즘, 유진 피터슨과 레노바레 운동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 비판합니다. 그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단순히 ‘기도방법하나가마음에들지않는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에게 이것은 결국 ‘다른복음’의 문제이며, 교회가 성경에서 떠나 종교통합과 신비주의로 이동하는 ‘배도’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의 ‘다른복음’, 고린도후서 11장의 ‘다른예수, 다른영, 다른복음’, 요한이서의 ‘그리스도의교리’를 가져와 자신의 비판을 뒷받침합니다.
이처럼 정동수 목사의 문제의식 자체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사랑’, ‘화해’, ‘포용’, ‘넓은마음’이라는 아름다운 말 아래서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를 더 이상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 문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모든 종교적 차이를 지워 버리고 ‘무엇을믿든착하게만살면된다’는 식의 무차별주의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에게 선과 진리는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선만 있고 진리가 없어도 안 되고, 진리만 있고 선이 없어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번 강의가 제기하는 ‘넓은마음이라는이름으로진리의경계까지없애도되는가?’라는 질문은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도 반드시 진지하게 받아야 할 질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정동수 목사와 스베덴보리의 길은 크게 갈라집니다. 정동수 목사는 ‘진리의경계’를 거의 교리적 소속과 정통성의 경계로 설정합니다.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와 개신교가 함께 예배하는 것을 종교통합으로 보고, 그것을 사실상 ‘다른복음’과 연결합니다. 더 나아가 강의 마지막에는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의 교리를 그대로 믿으면 구원이 없다고 단정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진리의 경계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경계는 사람이 어느 교단 명부에 속해 있는가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번 강의를 읽는 데 가장 중요한 차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세계에 관한 방대한 기록에서 사람을 ‘가톨릭’, ‘개신교’, ‘유대교’, ‘이방인’이라는 지상의 명칭만으로 나누어 구원을 판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각 종교 안에는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있으며, 특히 종교를 이용하여 사람의 양심을 지배하거나 자신에게 신적 권위를 돌리는 것은 매우 심각하게 비판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어떤 교회적 환경에서 태어났고 어떤 교리를 배웠다는 사실과,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어떻게 살았는가는 구별합니다. 그의 저서,‘천국과지옥’에서 반복되는 중요한 원리도 결국 사람이 사후에 자기의 지배적 사랑에 따라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단순히 지상에서 가입했던 교파의 연장선이 아닙니다.
따라서 정동수 목사의 ‘가톨릭신자는그교리를그대로믿으면구원이없다’는 식의 결론은 스베덴보리의 구원 이해와 상당히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라면 먼저 그 사람이 알고 있는 진리가 무엇인지, 그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았는지,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보아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는 사람을 선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교리는 구원의 목적이 아니라 삶을 인도하는 수단입니다. 교리적으로 많은 것을 정확히 알고 있으면서 자기애와 세상 사랑 속에서 사는 사람보다, 제한된 진리밖에 모르면서도 자신이 아는 진리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이 주님께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이 점을 먼저 세워 놓고 이동원 목사의 ‘하나님의넓은마음’이라는 표현을 보아야 합니다. 이 표현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상당히 아름다운 진실이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인간이 만든 교파의 울타리보다 훨씬 큽니다. 주님은 개신교라는 명칭 아래 있는 사람만 돌보시는 분이 아니며,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 합니다. 심지어 참된 종교에 관하여 거의 아무것도 알 기회가 없었던 사람에게도 그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선과 진리를 공급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마음은우리의교파적마음보다넓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스베덴보리에게 낯선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한 문장이 뒤따라야 합니다. ‘주님의마음이넓다는것과주님께서진리와거짓을구별하지않으신다는것은전혀다른말입니다.’ 사랑은 진리를 폐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적 사랑은 신적 지혜와 영원히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리를 동일하게 참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넓은마음’은 아닙니다. 가톨릭과 개신교와 동방정교회 사이에 실제 교리적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정직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교황권, 성인에 대한 기도, 성찬 이해, 칭의, 교회론 등에 실제 차이가 있는데 ‘우리는다똑같으니아무차이도중요하지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화해라기보다 진리 문제의 회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떼제 공동체에서 서로 다른 전통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기도한다는 사실 자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이 문제에서도 양극단을 피해야 합니다. ‘함께기도했으니모든교리가참이라고인정한것이다’라고 단정할 수도 없고, 반대로 ‘함께기도했으니아무문제도없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임이 실제로 무엇을 고백하고 무엇을 지향하며, 참여자가 그 가운데서 무엇을 받아들이느냐입니다. 정동수 목사는 떼제를 ‘가짜들끼리같이모이는’ 곳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이렇게 집단적으로 판정하는 데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외적 형식만 보고 그곳에 모인 수많은 사람의 영적 상태를 우리가 알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강의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예레미야 24장의 ‘좋은무화과’와 ‘나쁜무화과’입니다. 정동수 목사는 이동원 목사가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넓은마음’을 끌어낸 것을 ‘설교왜곡’이라고 비판합니다.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바벨론으로 보내신 목적이 ‘넓은마음을배우게하기위해서’였다는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자가 먼저 하고 싶은 말을 정해 놓은 다음 성경 본문을 그것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설교왜곡’이라고 정의합니다. 이 지적은 상당히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 역시 본문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여기서 우리 자신에게도 똑같은 경고를 적용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라고 해서 어느 본문에든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집어넣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문자의 뜻을 정직하게 읽어야 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역사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본문의 직접적인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 뒤에야 말씀의 속뜻을 살펴야 합니다. 속뜻은 문자적 의미를 무시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자 안에 주님께서 넣어 두신 더 깊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24장에서 좋은 무화과는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들을, 나쁜 무화과는 남아 있거나 심판 아래 놓인 이들을 가리킵니다. 놀라운 것은 인간의 눈에는 정반대로 보였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포로가 된 사람들이 실패자이고 예루살렘에 남은 사람들이 살아남은 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포로로 끌려간 이들을 오히려 ‘좋은무화과’라고 하십니다.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징계를 통하여 보존하시고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만으로도 매우 깊은 영적 원리가 보입니다. 인간이 불행이라고 판단하는 사건이 반드시 영적 파멸은 아니며, 인간이 안전이라고 생각하는 상태가 반드시 영적 안전도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서 ‘무화과’라는 표상은 스베덴보리의 성경 해석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말씀에서 무화과는 대체로 자연적 선, 곧 사람의 외적·자연적 삶에서 나타나는 선과 관련됩니다. 포도나무가 보다 영적인 선과 연결되고 올리브가 보다 천적인 선과 연결되는 것과 비교하면, 무화과는 인간의 자연적인 차원에서 나타나는 선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의 대비는 단순히 ‘좋은사람과나쁜사람’이라는 도덕적 구분보다 더 깊게, 사람의 자연적 삶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선하게 형성되었는가 아니면 부패했는가 하는 문제까지 열어 줍니다.
그렇게 보면 바벨론 포로라는 사건도 색다르게 보입니다. 포로 생활 자체가 선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유다의 오랜 우상숭배와 불순종으로 인한 심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심판 가운데서도 리메인스를 보존하십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가운데 다시 교회를 일으킬 수 있는 남은 것을 지키십니다. ‘좋은무화과’는 바로 그런 보존과 회복의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악을 선이라고 부르지 않으면서도 그 악의 결과 가운데서 선을 끌어내십니다.
이 점에서는 이동원 목사가 고난을 통하여 더 넓은 시야를 배우는다는 방향으로 적용한 것이 본문의 문자에 직접 쓰여 있지는 않더라도, ‘고난을통한변화’라는 적용 자체를 곧바로 성경 왜곡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조금 더 살펴볼 여지가 있습니다. 설교에는 본문 해석과 오늘의 적용이라는 두 단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적용은 본문의 문장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적용이 본문의 중심 흐름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가, 아니면 본문을 발판으로 전혀 다른 주장을 하는가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이동원 목사의 실제 설교 전체 문맥을 놓고 따져야 공정합니다. 이번 원고가 제시한 비판자의 설명만으로 그의 설교 전체를 최종 판정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오히려 정동수 목사 자신에게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본문에없는것을가져와자기가하고싶은말을하면설교왜곡’이라고 매우 좋은 원칙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후 예레미야에서 ‘하늘의여왕’을 가져와 현대 가톨릭의 마리아 칭호와 직접 연결하고, 따라서 예레미야를 설교한다면 가톨릭의 마리아 숭배와 종교통합을 버리라고 설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동일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당시 말한 ‘하늘의여왕’과 후대 가톨릭에서 마리아에게 사용된 ‘하늘의여왕’이라는 칭호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두 대상을 곧바로 동일시할 수 있는가? 이것 역시 본문 밖의 역사적·신학적 연결을 사용한 ‘적용’입니다.
이것은 정동수 목사의 결론이 반드시 틀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해석의 일관성입니다. 이동원 목사가 본문에서 현대 교회의 화해를 적용하는 것은 ‘본문에없는것을넣은것’이라 비판하면서, 자신은 같은 예레미야에서 현대 가톨릭의 마리아론을 끌어오는 것이 자동적으로 허용된다면 해석 기준이 비대칭적이 됩니다. 설교자를 분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해석 원칙을 자기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하는지 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는 여기서 매우 유익한 제3의 길을 제공합니다. 역사적 문맥은 역사적 문맥대로 존중하면서, 그 안에 있는 영적 의미는 인간의 자의적인 연상으로 찾지 않고 말씀 전체의 상응을 통해 살펴보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하늘의여왕’을 단순히 2천여 년 뒤 특정 교단의 명칭으로 바로 점프시키는 것보다, 우상숭배가 인간 내면에서 무엇인지 먼저 묻는 것입니다. 사람이 주님에게 속해야 할 사랑과 경배를 자기 자신이나 세상의 어떤 대상에게 돌릴 때 무엇이 일어나는가? 이것이 모든 시대의 사람에게 적용되는 속뜻의 질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강의에서 계속 등장하는 ‘배도’ 역시 단순히 교단 이동이나 에큐메니즘 참여보다 훨씬 깊은 문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가장 심각한 배도는 입으로 주님을 고백하면서 삶에서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교리가 아무리 정통이어도 체어리티가 죽어 있으면 신앙도 살아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천국의비밀’에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 반복해서 나타나는 원리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하기 시작하면 결국 아벨, 곧 체어리티를 죽입니다. 그러므로 ‘다른복음’을 경계하는 사람은 동시에 ‘나는올바른교리를가지고있다는확신때문에다른사람을멸시하고있지는않은가?’도 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이번 강의의 언어를 돌아보게 합니다. ‘가짜목사’, ‘쓰레기’, ‘마귀가만든것’, ‘가짜들끼리모인다’, ‘침례교의침자도모르는사람’ 같은 표현이 반복됩니다. 교리적 오류를 강하게 비판하는 것과 사람을 멸시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진리를 위한 열심도 그 안의 정서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선에서 나오는 열심은 진리를 보호하면서도 사람의 구원을 원합니다. 자기애에서 나오는 열심은 진리를 방패 삼아 상대를 공격하고 이기는 데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둘 다 매우 강한 말을 할 수 있지만 속의 불은 서로 다릅니다.
그렇다고 ‘사랑해야하므로오류를지적하지말자’는 뜻도 아닙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체어리티는 무조건 상대의 말을 인정하는 온순함이 아닙니다. 악을 악이라고 하고 거짓을 거짓이라고 하는 것도 이웃 사랑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어떤 가르침이 사람을 영적으로 해친다면 그것을 밝히는 것이 오히려 체어리티일 수 있습니다. 다만 목적이 중요합니다. ‘저사람을무너뜨리기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거짓에서벗어나선과진리안으로들어오도록하기위해서’여야 합니다. 이것이 논쟁에서 가장 어려운 지점입니다.
이제 관상기도 문제를 보겠습니다. 강사는 관상기도, 침묵기도, 향심기도, 호흡기도 등을 거의 하나의 범주로 묶고, 불교·힌두교의 명상 및 만트라와 연결합니다. 반복적인 말을 계속하면 이성적 사고가 정지되고 의식을 잃게 되며, 수동적인 상태가 되어 외부 영적 존재에게 열리고 결국 ‘마귀가쑥들어온다’고 설명합니다. 촛불을 바라보거나 호흡을 조절하는 것 역시 같은 위험의 통로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는 매우 세심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영계와 실제로 연결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혼자 생각하고 느끼는 독립된 섬이 아니라 영들과 천사들을 통해 영계와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영향’이라는 개념 자체를 스베덴보리에게 낯선 것으로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부분만 보면 강사의 경계심이 스베덴보리와 접점을 갖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평상시에도 영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정 기도법을 사용해야 비로소 영이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섭리 아래 인간이 자유와 이성 안에서 보존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촛불을 켰다는 사실, 몇 분 침묵했다는 사실, 짧은 기도문을 반복했다는 사실만으로 ‘마귀가들어오는통로가열렸다’고 단정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와도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정말 중요한 경계선은 ‘자유와이성을훼손하는가’입니다. 사람을 무비판적 수동성으로 몰아가고, 자신의 이성을 내려놓게 하고, 어떤 내적 음성이나 느낌을 곧바로 하나님의 직접 계시라고 믿게 만드는 수행이라면 분명 위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파괴하여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선택하여 그것을 삶으로 행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이 점에서는 강사가 ‘정신을똑바로차리고말씀을묵상해야한다’고 강조하는 데 중요한 진실이 있습니다.
하지만 ‘침묵’ 자체는 악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고 잠시 침묵하면서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 역시 그 자체로 비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그 침묵 속에서 무엇을 하는가입니다. 자기 생각을 완전히 제거하여 무의식 상태로 들어가려 하는 것과, 방금 읽은 말씀을 주님 앞에서 조용히 되새기며 자신을 살피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외형은 둘 다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일 수 있지만 내적 활동은 정반대일 수 있습니다.
반복기도도 같은 구별이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헛된반복’을 경계하신 것은 분명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반복이 곧 ‘헛된반복’은 아닙니다. 같은 시편을 반복해서 읽는 것, ‘주님, 저를불쌍히여기소서’라고 진심으로 여러 번 기도하는 것, 찬송의 후렴을 반복하는 것을 그 자체만으로 힌두교 만트라와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핵심은 말의 횟수보다 그 말 안에 있는 의도와 의식입니다. 의미를 제거하고 의식을 변형시키기 위한 기계적 반복과, 마음을 주님께 돌리며 의미를 더욱 깊이 새기는 반복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의도’와 ‘목적’에 관한 가르침으로 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같은 외적 행위라도 목적이 다르면 영적으로 전혀 다른 행위가 됩니다. 한 사람은 침묵 속에서 자기 안의 신성을 발견하려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침묵 속에서 주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낮출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반복을 통해 의식을 지우려 하고, 다른 사람은 같은 말씀을 반복하며 그 의미를 마음에 새길 수 있습니다. 외적 형식만으로 내적 상태를 판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떼제 찬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악의 구조가 단순하고 짧은 문장을 반복한다고 해서 그 구조 자체가 곧 악령을 불러들이는 장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음악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영적으로 선한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그찬양이사람의애정을어디로이끄는가? 주님을향한겸손과사랑으로이끄는가, 아니면자기감정의황홀경자체를사랑하게하는가? 그리고그정서가이후의삶에서체어리티로이어지는가?’
이 기준은 통성기도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조용한 기도만 위험하고 큰소리 기도는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큰소리로 열정적으로 기도하면서도 자기 감정에 도취될 수 있고, 조용히 침묵하면서도 깊은 회개 가운데 주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외적인 기도 형식보다 그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이 본질입니다.
강의에서 ‘설교없는예배’에 대한 비판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로마서 10장의 ‘신앙은들음에서난다’를 근거로 말씀 선포가 반드시 있어야 하며, 성경을 읽고 5~10분 침묵하는 것을 ‘설교’라고 부르는 것은 성경적 설교관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문제에서도 말씀을 가르치는 직무의 중요성은 충분히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워야 하고,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감정적 체험만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말씀 자체는 인간 설교자의 설명보다 더 근원적인 거룩함을 지닙니다. 설교자는 말씀의 주인이 아니라 봉사자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봉독한 뒤 잠시 조용히 그 말씀을 생각하는 시간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말씀 선포를 폐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설교가 있느냐 없느냐보다 ‘사람이말씀의진리를배우고그것을삶에적용하도록인도받고있는가’입니다. 훌륭한 설교도 사람을 자기 숭배로 이끌 수 있고, 짧은 말씀 봉독 하나가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대목은 역설적으로 이번 강의 자체에도 적용됩니다. 강사는 성도들에게 ‘유명한목사가말한다고무조건아멘하지말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원칙은 이동원 목사에게만 적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강의를 하는 강사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해야 합니다. ‘이동원목사가유명하다고믿지말라’가 옳다면 ‘이동원목사를비판하는유명한목사가말한다고그대로믿지도말라’ 역시 옳습니다. 모든 주장을 말씀과 사실과 이성 앞에서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이번 강의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분별의 원칙입니다. ‘누가말했는가?’보다 ‘무엇을말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좋아하는사람이말했는가?’보다 ‘그말이참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베덴보리가말했다’는 이유만으로 생각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말씀 전체를 어떻게 연결하고 주님과 천국과 인간의 거듭남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유진 피터슨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이러한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강사는 유진 피터슨을 ‘신비주의자’, ‘이단’이라고 규정하고 ‘메시지’를 ‘쓰레기’라고까지 표현합니다. 여기서는 한 사람의 저작과 신학 전체를 특정 연관관계 몇 가지로 한꺼번에 판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저자의 특정 주장에 문제가 있다면 그 주장을 구체적으로 살피면 됩니다. 리처드 포스터나 댈러스 윌라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사람과관계가있으므로저사람도잘못되었다’는 연쇄적인 방식보다 각각의 가르침을 실제 내용에 따라 검토하는 편이 더 공정합니다.
특히 ‘누구이름이나오면가지말라’는 방식의 분별은 성도들에게 단기적으로는 편리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분별력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이름 목록만 외우면 되기 때문입니다. 참된 분별은 ‘이사람은금지된사람인가?’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이가르침은인간의자유와이성을존중하는가, 주님께로향하게하는가, 말씀의진리와조화를이루는가, 체어리티의삶으로열매맺게하는가’를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번 강의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인 가톨릭과 구원의 문제로 돌아가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로마 가톨릭의 교황권과 성인 숭배, 인간에게 신적 권위를 돌리는 문제를 결코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밝히기’에서 바벨론에 관한 해설을 읽어 보면 그 비판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종교를 이용하여 사람의 영혼과 천국에 대한 권세를 자기에게 돌리는 사랑을 심각한 악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는포용적이니까가톨릭교리에아무문제가없다고보았다’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큰 오해입니다.
그러나 그 비판은 ‘가톨릭신자는모두지옥간다’는 결론과 전혀 같지 않습니다. 교리 체계의 오류를 비판하는 것과 그 안에 태어나 살아온 개개인의 영원한 운명을 판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놀라울 정도로 섬세한 부분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알지 못했던 진리에 대해 같은 방식으로 책임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각 사람이 받은 빛과 기회 안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십니다.
이것은 동방정교회뿐 아니라 불교, 이슬람교 등 기독교 밖의 사람들을 바라볼 때도 적용됩니다. ‘천국과지옥’에서 스베덴보리는 교회 밖의 민족들, 곧 이방인들의 구원 가능성을 분명히 다룹니다. 그들이 기독교인이 아니었다는 이유만으로 정죄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종교 안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선한 삶을 살며 양심에 따라 행동했다면 사후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번 강의 마지막의 ‘구원은기독교안에만있다’는 문장은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중요한 수정이 필요합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구원은오직주님에게서만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도 단호합니다. 그러나 ‘오직주님을통해구원받는다’와 ‘지상에서특정한기독교교리체계에소속된사람만구원받는다’는 같은 문장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 기회를 얻지 못했더라도 그가 받아들인 선과 진리의 근원은 궁극적으로 주님입니다. 그리고 사후에 그 근원이 누구인지를 배우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구원론은 놀랍도록 넓으면서 동시에 철저하게 주님 중심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넓은마음’이라는 이번 논쟁의 표현이 다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은 정말 넓습니다. 그러나 ‘아무거나괜찮다’는 의미에서 넓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선과 진리 안으로 인도하시려 하기 때문에 넓습니다. 불교인도, 무슬림도, 가톨릭 신자도, 개신교 신자도 사랑하시지만 그들 안에 있는 모든 거짓을 사랑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사랑하시되 거짓에서는 건져 내시고, 선을 보존하시며, 더 온전한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에큐메니즘과 잘못된 종교통합도 구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교리차이는아무의미가없으니모두똑같다’고 하는 것은 진리를 희생한 통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서로다른교리를가지고있지만상대를악마화하지않고, 함께대화하면서무엇이참인지찾고, 가능한선에서는협력하며, 최종적인심판은주님께맡긴다’는 태도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는 후자와 훨씬 가깝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번 강의의 장점과 한계를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장점은 매우 분명합니다. 교회의 화해와 포용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진리의 문제를 덮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 설교자가 본문을 자기 주장에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 유명한 목사의 말도 성도가 분별해야 한다는 경고, 감정적·신비적 체험이 말씀의 진리를 대신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는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고가 지나치게 확대되면서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침묵을 곧 관상기도로, 관상기도를 곧 동양 종교의 명상으로, 반복 찬양을 곧 만트라로, 만트라적 반복을 곧 의식 상실로, 의식의 이완을 곧 마귀의 침입으로 연결하는 일련의 논증에는 단계마다 별도의 검증이 필요합니다. 또한 떼제에 참여한 사람들을 ‘가짜’로 묶고,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의 사람들에게 구원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분별’에서 ‘심판’으로 넘어갈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보여 주는 영적 세계는 오히려 우리에게 더 큰 경외심과 신중함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겉모습은 볼 수 있지만 그 사람의 내적 사랑 전체를 볼 수 없습니다. 누가 천국에 속했고 누가 지옥에 속했는지는 주님께서 아십니다. 우리는 교리를 살필 수 있고 행동의 선악을 판단할 수 있으며 위험한 가르침을 경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 자체를 최종적으로 판결하는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의렌즈’를 사용하는 우리 자신에게도 매우 중요한 경고입니다. 스베덴보리를 읽다 보면 기존 기독교의 여러 교리가 얼마나 다르게 보이는지 경험하게 됩니다. 삼위일체, 믿음만의 구원, 속죄, 부활, 천국과 지옥, 최후의 심판, 말씀의 속뜻 등 거의 모든 핵심 주제가 새롭게 보입니다. 바로 그때 가장 조심해야 할 유혹이 ‘나는이제알았고저들은모른다’는 우월감입니다. 그것이 들어오는 순간 진리를 많이 아는 것이 오히려 proprium의 먹이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보여 주시는 목적은 다른 사람을 정죄할 자격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먼저 우리 자신을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저사람이왜틀렸는가?’가 아니라 ‘이말씀이내안에서무엇을드러내는가?’입니다. 예레미야 24장의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도 결국 내 안의 문제입니다. 내 자연적 삶 안에서 주님께 순종하는 선은 무엇이며, 이미 부패하여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내가 붙들고 있는 예루살렘은 정말 주님의 도성인가, 아니면 내가 안전하다고 착각하는 proprium의 성인가? 때로는 내가 실패라고 생각하는 ‘바벨론포로’ 같은 경험을 통해 주님께서 오히려 내 안의 리메인스를 보존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읽기 시작하면 ‘좋은무화과한광주의소망’이라는 본문은 특정 목사의 에큐메니즘을 공격하기 위한 무기가 되기 전에 우리 자신의 거듭남을 비추는 말씀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을 열어 보이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말씀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판정하는 책이기 전에 나를 심판하고 고치고 거듭나게 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결국 이번 강의를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바라보며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넓은마음이냐, 진리수호냐’라는 양자택일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는 사랑과 진리가 결코 싸우지 않습니다. 신적 사랑은 신적 지혜와 하나이며, 선은 진리와 결혼해야 합니다. 진리를 버린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니고, 사랑을 잃은 진리는 살아 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리적 차이를 분명하게 말하면서도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잘못된 영성을 경계하면서도 침묵과 묵상 자체를 악마화하지 않아야 합니다. 가톨릭의 교리적 문제를 비판하면서도 가톨릭 신자의 영혼을 우리가 대신 심판하지 않아야 합니다. 에큐메니즘의 위험을 살피면서도 다른 전통의 그리스도인을 만나는 것 자체를 배도로 규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목사의 설교를 분별하라고 가르치면서 그 목사를 비판하는 또 다른 유명한 목사의 말 역시 똑같은 기준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넓은마음’이라는 말을 가장 안전하게 이해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그 넓음은 진리를 희석시키는 넓음이 아니라, 진리를 가지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사랑의 넓음입니다. 주님은 거짓을 참이라고 부르실 만큼 넓으신 분이 아니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까지 버리지 않고 참으로 이끄실 만큼 넓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렌즈’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분별도 바로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붙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리에는경계가있습니다. 그러나주님의자비에는우리가함부로그을수있는경계가없습니다.’ 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잃으면 한쪽에서는 무차별적인 종교혼합으로 흐르고, 다른 한쪽에서는 교리적 정죄와 영적 우월감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한 시간의 강의를 다 듣고 난 뒤 우리에게 남아야 할 질문은 ‘이동원목사는배도한목사인가?’ 하나만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어야 합니다. ‘나는진리를사랑하기때문에거짓을경계하는가, 아니면내가옳다는것을확인하기위해다른사람의오류를찾고있는가?’ 그리고 또 하나, ‘나는사람을사랑한다는이유로진리의차이를흐리고있는가, 아니면진리를사랑하면서도그진리가궁극적으로사람을살리기위한주님의것임을기억하고있는가?’
이 두 질문 사이에서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이 하나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넓지만흐리지않고, 분명하지만정죄하지않는’ 분별에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이번 논쟁을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바라보면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붙들고 싶은 지점입니다.
이번 설교는 마태복음 21장의 ‘열매없는무화과나무’ 사건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 성전의 외형적 종교성과 어린아이 같은 신앙, 하나님과의 친밀함, 그리고 기도에 대한 신뢰로 나아갑니다. 설교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문장은 사실 매우 단순합니다. ‘하나님자신보다하나님이주시는것을더사랑하지말라.’ 박요한 목사는 어린아이에게 ‘엄마가전부’인 것처럼 신앙인에게도 하나님이 전부가 되어야 한다고 반복합니다. 이 중심은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보아도 상당히 깊은 지점을 건드립니다. 다만 설교 후반부의 ‘무엇이든지믿고구하면반드시받는다’는 적용으로 갈수록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중요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먼저 박요한 목사가 무화과나무 사건을 문자 그대로만 읽지 않고 ‘표면성이면에는영적인의미가있다’고 말한 대목은 매우 주목할 만합니다. 박요한 목사는 예수께서 배가 고프셔서 열매를 찾으셨는데 열매가 없자 화가 나서 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으로만 읽으면 이해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그래서 무성한 잎은 있으나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당시 예루살렘 종교의 상태와 연결합니다. 성전과 제사와 제사장과 종교적 형식은 화려하지만 정작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라는 ‘열매’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는 방식과 상당히 가까이 다가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 속의 나무와 잎과 열매는 단순한 자연물이 아닙니다. 특히 ‘열매’는 사람이 알고 믿는 것을 실제 선한 삶으로 가져가는 것, 곧 선과 체어리티의 실제적인 산출과 깊이 연결됩니다.
따라서 이 설교의 ‘잎은무성한데열매가없다’는 진단은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잎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교리도 필요하고, 말씀에 관한 지식도 필요하며, 예배의 형식도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열매를위한잎’이 아니라 그 자체로 종교의 목적이 될 때입니다. 사람이 말씀을 많이 알고, 신앙에 관한 말을 많이 하고, 예배와 기도와 찬양에 열심이어도 그것이 삶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살며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영적으로는 잎만 무성한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무화과나무 사건을 오늘의 교회에 적용한다면 ‘예배를화려하게하지말자’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예배와찬양과설교와기도가실제삶에서어떤열매를맺고있는가?’입니다.
이 지점에서 박요한 목사가 대형 연합집회, 수많은 직함, 화려한 찬양대와 찬양 형식을 비판하는 문제도 조금 조심스럽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박요한 목사가 무엇을 염려하는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의 명예와 직함과 외형이 앞서는 종교는 분명 위험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화려함’ 자체와 ‘악’을 동일시하기 어렵습니다. 소박한 예배라고 해서 자동으로 내적 예배가 되는 것도 아니고, 장엄하고 아름다운 예배라고 해서 자동으로 외적 예배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핵심은 그 외적 형식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입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찬양대를없애야한국교회가산다’는 식의 결론보다는 ‘찬양대가있든없든그것이주님을사랑하고이웃을사랑하는내적예배를담고있는가’를 묻는 편이 더 본질적입니다.
설교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 가운데 하나는 어린아이에 관한 해설입니다. 박요한 목사는 어린아이도 장난감과 좋은 것을 좋아하지만 엄마가 보이지 않는 순간 그것들을 내려놓고 엄마를 찾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영적 통찰이 있습니다. 문제는 세상의 좋은 것을 누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재산과 직업과 가정과 건강과 성취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주님과그것들가운데어느것이목적이고어느것이수단인가’입니다. 어린아이 비유를 이 관점에서 읽으면, 장난감을 가지고 즐겁게 노는 것은 괜찮지만 ‘엄마보다장난감이더중요해지는순간’ 질서가 뒤집힙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은 주님에게서 받아 선하게 사용하는 동안에는 축복이지만, 그것이 주님을 대신하여 삶의 궁극적 목적이 되면 우상이 됩니다.
이것은 설교 중 출애굽기 33장의 모세와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은 주시겠지만 친히 함께 올라가지는 않겠다고 하시자 모세가 ‘주께서친히가지아니하시려거든우리를이곳에서올려보내지마옵소서’라고 대답합니다. 박요한 목사는 이것을 ‘가나안보다하나님을원하는신앙’으로 읽습니다. 바로 이 대목이 이번 설교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영적 중심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주시는가나안’보다 ‘하나님자신’을 원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조금 더 깊이 표현한다면, 천국조차 주님과 분리된 독립적인 보상이 아닙니다. 천국의 본질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 그 안에서 사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없이천국만얻겠다’는 것은 영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말입니다.
어린아이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이해를 더하면 이 설교는 더욱 깊어집니다. 어린아이가 천국적인 것은 단순히 지적으로 미숙하기 때문도 아니고, 부모에게 무엇이든 달라고 조르기 때문도 아닙니다. 어린아이에게 나타나는 순진무구함의 핵심에는 ‘자기자신으로부터살지않는상태’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개념인 proprium과 정반대 방향입니다. ‘내가안다’, ‘내가할수있다’, ‘내힘으로산다’는 자기중심적 독립성이 아니라 자신에게 생명과 선이 공급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어린아이같은신앙’은 지성을 포기하는 신앙도,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신앙도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나자신에게서선할수없으며모든선과진리는주님에게서온다’는 깊은 인정에 가깝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박요한 목사가 ‘어린아이는어머니로부터모든것을공급받는다’고 한 것은 매우 좋은 비유입니다. 다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에게서 ‘모든것을공급받는다’는 말의 가장 깊은 뜻은 반드시 돈과 성공과 건강과 소원의 성취를 공급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가장 근원적으로는 생명, 선을 사랑할 능력, 진리를 볼 빛, 악과 싸울 힘, 그리고 거듭남에 필요한 모든 것을 순간순간 주님에게서 받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연적인 생명뿐 아니라 영적인 생명에서도 스스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마음으로 인정하는 것이 어린아이의 상태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설교 후반부의 기도론은 이 렌즈에서 한 번 더 정교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박요한 목사는 자신의 경제적 어려움과 오랜 기도 끝에 유튜브가 크게 성장한 경험을 들려주면서 ‘기도는반드시응답된다’, ‘무엇이든지믿고구한것은다받는다’고 강조합니다. 개인적으로 체험한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하는 고백 자체는 소중합니다. 어려운 시절에도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증언 역시 귀합니다. 그러나 한 개인에게 경제적인 회복과 성공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마태복음 21장 22절의 보편적 해석 원리로 확장하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믿음으로 오래 기도했는데도 병이 낫지 않은 사람, 사업이 회복되지 않은 사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은 ‘내가어린아이처럼믿지못했기때문인가?’라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응답은 우리의 욕망을 무제한으로 실현해 주시는 데 있지 않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는 신적 섭리 안에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무엇이든 요구한다고 해서 사랑하는 엄마가 문자 그대로 무엇이든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이가 엄마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엄마는 아이가 원하는 것과 아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구별합니다. 그러므로 박요한 목사가 사용한 ‘엄마만믿어’라는 표현은 역설적으로 기도 응답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됩니다. 어린아이의 믿음은 ‘엄마에게조르면내가원하는것은반드시얻는다’가 아니라 ‘엄마가나를사랑하기때문에엄마에게나를맡길수있다’에 더 가깝습니다.
이렇게 보면 ‘무엇이든지믿고구하는것은다받으리라’는 말씀도 ‘내욕망을강한확신으로밀어붙이면현실이된다’는 공식이 아닙니다.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의 기도 자체가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주님, 이것을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만 점차 ‘주님, 이것이제게정말선한것이라면허락하시고그렇지않다면제뜻을고쳐주십시오’라는 기도로 변합니다. 결국 가장 깊은 기도는 주님의 뜻과 사람의 뜻이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응답의 절정은 ‘내뜻대로이루어졌다’가 아니라 ‘내뜻이주님의뜻을사랑하게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에서 ‘성령충만’을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고 사모하는 상태로 설명한 부분 역시 매우 좋습니다. 방언이나 봉사나 종교적 활동 하나를 성령 충만의 결정적 표지로 삼지 않고 ‘하나님한분이면만족합니다’라는 방향으로 가져간 것은 이번 설교의 중요한 장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붙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감정적인 친밀감에서 끝나지 않고 결국 ‘주님이원하시는것을행하기를기뻐하는것’으로 나타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계명을 사랑하고, 그 계명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즐거워함’과 ‘이웃에게선을행함’은 서로 경쟁하는 두 영성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이 안과 밖으로 나타나는 두 모습입니다.
반면 설교 중 몇몇 단정적인 표현은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구별해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교 전체를 ‘예수님이씨를말려버린이단종교’라고 규정하는 표현이나, 특정 음악가·연예인들의 약물 문제를 감정적 공연 방식과 직접적인 인과관계로 연결하는 설명, 점이나 타로를 본 사람의 영 안으로 곧바로 악령이 들어와 영혼을 갉아먹는다고 설명하는 방식 등은 설교의 중심 메시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주장들이 아닙니다. 특히 무화과나무의 심판을 역사적 유대인 전체에 대한 주님의 저주로 확대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특정 민족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표상했던 ‘교회의영적상태’를 읽는 것입니다. 그렇게 읽어야 그 말씀이 오늘 우리 자신에게도 살아 있는 심판과 경고가 됩니다. ‘저유대인들이열매없는무화과나무였다’고 끝내면 말씀은 남을 판단하는 도구가 되지만, ‘혹시지금내안에잎만무성하고열매없는무화과나무가있지않은가?’라고 읽으면 말씀이 거듭남의 말씀이 됩니다.
설교 첫머리에서 언급한 엘리사와 아이들 사건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박요한 목사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자적 사건 앞에서 ‘성격이불같은사람도하나님이사용하시는구나’라고 나름의 답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이런 본문일수록 문자적 사건에 나타난 인물의 성격을 중심으로 교훈을 끌어내기보다 말씀의 표상과 상응을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박요한 목사 자신이 무화과나무에서는 ‘표면성이면의영적인의미’를 찾으면서 엘리사 사건에서는 문자적 인물의 성격으로 해석한 것은 방법론적으로 조금 일관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두 사건을 함께 놓으면 ‘문자만으로이해하기어려운말씀일수록속뜻이왜필요한가’를 보여 주는 좋은 사례가 됩니다.
결국 이번 설교의 가장 귀한 부분은 ‘기도하면원하는것을얻는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깊은 중심은 박요한 목사 자신이 앞부분에서 이미 말했습니다. ‘가나안도하나님이함께하지않으시면필요없습니다.’ 이것을 끝까지 밀고 가면 설교 전체가 하나로 연결됩니다. 무화과나무의 문제도 ‘하나님없는종교’이고, 성전의 문제도 ‘하나님없는종교적외형’이며, 어린아이의 아름다움도 ‘엄마없는좋은것을원하지않는것’이고, 모세의 위대함도 ‘하나님없는가나안을거절한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도의 절정 역시 ‘하나님없는응답’을 원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렌즈’로 이번 설교를 한 문장으로 다시 읽는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어린아이같은신앙이란주님께무엇이든요구하면무엇이든얻어내는신앙이아니라, 주님에게서모든생명과선이온다는것을인정하며,주님자신을모든선물보다더사랑하고, 그사랑을삶의열매로맺어가는신앙입니다.’ 그렇게 읽을 때 무화과나무의 ‘열매’, 어린아이의 ‘엄마’, 모세의 ‘주께서친히가지아니하시려거든’, 그리고 예수께서 가르치신 ‘믿고구하는기도’가 한 줄로 이어집니다. 잎만 무성한 종교에서 열매 맺는 신앙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사랑하는 데서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는 데로, 자기 능력을 의지하는 어른의 proprium에서 모든 선을 주님에게서 받는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번 설교에서 ‘스베덴보리의렌즈’가 가장 밝게 비추어 줄 수 있는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영상은 앞서 살펴본 개별 수도사 이야기들과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은퇴 후 약 7년 동안 수도원에서 무엇을 해왔는지 돌아보고, 수도학교와 잇사갈 성경대학, 봉쇄학당, 수도 영성가 연구, 방문객 교육과 부흥회 사역 등을 소개한 뒤, 자신이 생각하는 수도원 운동의 방향을 ‘청빈, 거룩, 오직예수’라는 세 가지 말로 압축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편은 하나의 수도 일화라기보다 강문호 수도사가 생각하는 ‘개신교수도원운동의자기소개와비전’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볼 때도 개별 사실 하나하나를 따지는 것보다 이 세 축이 과연 사람을 어디로 이끌려 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하겠습니다.
영상은 은퇴를 앞두고 ‘후반전이더아름답게해달라’고 기도했다는 고백에서 시작합니다. 이 출발점에는 귀한 것이 있습니다. 은퇴를 인생의 퇴장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남은 생애를 어떻게 주님께 드릴 것인가를 묻는 태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인간의 영적 성장은 특정 나이에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평생 계속되며, 이 세상에서 시작된 변화는 영원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노년은 단순히 지난 업적을 정리하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proprium, 곧 자기 자신에게 속한 것을 더욱 내려놓고 주님께로 향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후반전이더아름다워야한다’는 강문호 수도사의 소망은 충분히 공감할 만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아름다운후반전이란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나 더 던집니다. 많은 일을 이루는 것이 아름다운 후반전일까요, 아니면 사람이 점점 더 주님 앞에서 작아지는 것이 아름다운 후반전일까요? 물론 둘은 서로 배척되지 않습니다. 수도원을 세울 수도 있고, 학교를 만들 수도 있고, 수백 권의 자료를 집필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모든 외적 성취가 무엇을 향하고 있느냐입니다. 거듭남의 관점에서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얼마나많은일을이루었는가?’보다 ‘그일을하는동안자기사랑과세상사랑이얼마나주님의질서아래놓였는가?’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수도원을 알기 위해 이스라엘의 수많은 수도원을 방문하고 여러 나라의 수도원을 답사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도원에 대한 자신의 선입견이 깨졌다고 고백합니다. 이 대목 역시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이 속한 개신교 전통 밖으로 나가 오래된 기독교 수도 전통을 직접 보고 배우려 했다는 것은 적어도 ‘우리에게없는것이다른전통에는있을수있다’는 열린 태도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개신교가 종교개혁 이후 수도원 제도와 상당히 멀어진 것을 생각하면, 오래된 기독교 전통 안에서 기도와 절제, 침묵, 공동생활, 노동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려는 시도 자체는 귀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서도 외적 수도생활과 내적 거듭남을 구별합니다. 수도원을 많이 방문했다고 수도의 본질을 아는 것은 아니며, 수도복을 입었다고 수도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봉쇄된 공간에 오래 머물렀다고 내면의 자기 사랑까지 봉쇄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과의 접촉을 줄이면 이전에는 외부 활동에 가려져 있던 proprium이 더 선명하게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수도의 시험은 ‘얼마나세상을떠났는가?’가 아니라 ‘세상을떠난그자리에서자기자신으로부터얼마나떠나고있는가?’에 있습니다.
영상에 나오는 새벽 4시의 기도실 이야기도 같은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연 속 작은 기도실에 들어가 예수의 형상 아래 머리를 대고 ‘오늘안수해주세요’라고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한다는 모습에는 주님께 의탁하려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어떤 형상 자체에 능력이 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마음을 주님께 향하게 하는 외적 도움으로 사용된다면 그 자체를 굳이 문제 삼을 이유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상이 아니라 그 순간 마음이 향하는 대상입니다. 더 나아가 아침에 주님의 인도를 구했다면 하루 동안 실제로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님의 계명 아래 두려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기도실에서의 ‘주님, 저를지켜주세요’가 생활 속에서는 ‘주님, 제뜻보다주님의뜻을따르게해주세요’가 되어야 합니다.
이어지는 수도학교 이야기는 강문호 수도사의 사역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개신교 안에 수도사를 양성하는 학교를 만들고, 그 가운데 일부가 실제 수도사의 길을 택하고, 다시 일부가 수도원을 세우는 흐름을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도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무조건 긍정하거나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수도제도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지만,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 기도와 자기 성찰, 절제와 쓰임을 훈련하는 환경이 될 수는 있습니다. 반대로 수도제도 자체가 영적 우월감이나 특별한 신분의식으로 변한다면 오히려 거듭남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제도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제도 안에서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따라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선을 행할 때 거룩함이 형성됩니다.
성경 연구에 대한 열정도 이번 영상의 큰 축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한번성경만깊이파보자’, ‘오직예수공부만해보자’며 여러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여 수백 권의 소책자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경이 놀라울 정도로 깊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고백합니다.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깊게 만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은 인간이 그 문자만 읽어서는 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품고 있으며, 그 안에는 천국과 연결되는 내적 의미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은생각했던것보다훨씬깊다’는 발견 자체는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도 크게 공감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을 깊이 안다는 것은 희귀한 자료를 많이 알고, 고대 문헌을 많이 읽고, 사람들이 처음 듣는 정보를 많이 찾아낸다는 것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깊이는 궁극적으로 ‘얼마나놀라운정보를발견했는가?’에 있지 않고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을 더 알고, 자기 안의 악을 발견하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삶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을 그토록 방대하게 펼쳐 보인 목적도 지적 경탄을 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이 주님과 천국과 인간의 거듭남을 어떻게 품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경악할만큼새로운성경지식’은 종착지가 아니라 출발점이어야 합니다. 그 지식이 사람의 생명을 바꾸지 못한다면 아직 말씀은 머리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영상 후반부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강문호 수도사가 마지막 때를 대비하는 수도원 영성을 ‘청빈, 거룩, 오직예수’라는 세 가지로 정리하는 대목입니다. ‘돈대신청빈, 음란대신거룩, 배교대신오직예수’라는 구도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강렬하고 기억하기 쉬운 표어입니다. 그리고 각각에는 분명 기독교적 가치가 있습니다. 재물의 지배에서 자유로워지고, 성적 욕망의 무질서를 다스리며, 주님에게서 떠나지 않으려는 삶은 모두 중요한 영적 과제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세 가지를 조금 다르게 깊이 들어갑니다. 먼저 ‘청빈’의 반대는 단순히 돈이 아닙니다. 돈 자체는 악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재물을 사랑하고 그것을 자기 자신을 높이는 수단으로 삼는 사랑입니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도 그것을 주님의 질서에 따라 선한 쓰임에 사용할 수 있으며, 아무 재산이 없어도 돈을 몹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적 청빈보다 더 깊은 것은 ‘소유에대한내적자유’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내 힘과 내 영광의 증거로 붙들지 않고, 주님에게서 맡겨진 것으로 보며 쓰임에 따라 사용하는 것입니다.
‘음란대신거룩’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적 절제는 중요하지만, 거룩은 단순한 금욕보다 훨씬 큽니다. 외적 행동을 억제했다고 내적 욕망까지 정돈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결혼애의 질서는 오히려 매우 중요하며, 성 자체를 부정하거나 육체를 악한 것으로 보는 것이 거룩은 아닙니다. 거룩은 사랑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도자의 독신도 그 자체가 더 높은 거룩함을 보증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욕망을 중심에 놓지 않고 사랑을 주님의 질서 아래 두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배교대신오직예수’는 세 표어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구호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오직예수’를 반복한다고 주님 중심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그분의 이름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너희가나를사랑하면나의계명을지키리라’는 말씀처럼, 주님을 향한 사랑은 결국 삶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오직예수’의 가장 깊은 형태는 ‘내가아니라주님’입니다. 내 지식이 아니라 주님, 내 업적이 아니라 주님, 내 사역의 성공이 아니라 주님, 내가 세운 제도와 내가 만든 책과 내가 이룬 결과가 아니라 그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신 주님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번 영상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영상에는 ‘내가방문했다’, ‘내가수도원을세웠다’, ‘내가자료를만들었다’, ‘내가학교를세웠다’는 식의 개인적 경험과 성취가 자연스럽게 많이 등장합니다. 이것 자체를 곧바로 자기 자랑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사역을 소개하는 영상이라면 당연히 자신이 한 일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렌즈’는 그보다 한 단계 안쪽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모든일을누가이루셨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사람이 선한 일을 많이 할수록 더욱 깊어져야 할 고백은 ‘내가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허락하시고이끄셨으며, 나는쓰임을위해사용된도구일뿐이다’라는 고백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 처음의 ‘후반전이아름답게해달라’는 기도와 마지막의 ‘오직예수’는 사실 하나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후반전은 앞선 전반전보다 더 많은 업적을 쌓는 후반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참으로 아름다운 후반전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기 이야기는 조금씩 작아지고 주님 이야기가 점점 커지는 후반전일 수 있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내가무엇을이루어야하는가?’가 중요했다면, 영적 노년에는 ‘주님께서나를통해무엇을이루셨으며, 나는얼마나그분앞에서비워지고있는가?’가 더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수도원의 존재 이유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수도원은 세상에서 도망치는 장소도 아니고, 특별히 거룩한 사람들이 모여 자신들의 거룩함을 증명하는 장소도 아닐 것입니다. 수도원이 참으로 교회를 섬기려 한다면, 그곳은 사람이 조용히 자기 proprium을 직면하고, 주님 앞에서 그것을 내려놓으며, 다시 세상 속 이웃을 더 잘 사랑하고 섬기도록 준비되는 장소여야 합니다. 외적 침묵이 내적 침묵으로, 외적 청빈이 내적 자유로, 외적 독신과 절제가 사랑의 질서로, 성경 연구가 삶의 거듭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 제시된 ‘청빈, 거룩, 오직예수’를 ‘스베덴보리의렌즈’로 조금 다듬어 다시 말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소유하지않는것’보다 ‘소유에사로잡히지않는것’, ‘욕망을억누르는것’보다 ‘사랑의질서가회복되는것’, 그리고 ‘오직예수라고말하는것’보다 ‘자기대신주님이중심이되게하는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이루어진다면 수도원은 교회와 경쟁하는 또 하나의 제도가 아니라 교회를 섬기는 귀한 영적 훈련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번 영상에서 가장 오래 붙들 만한 말은 처음에 나왔던 ‘후반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인생의 후반전은 단순한 제2의 성공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점점 더 ‘나’에게서 ‘주님’으로 중심이 옮겨가는 시간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는가보다 주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가 크게 보이고, 내가 얼마나 알려졌는가보다 내가 얼마나 주님의 선한 쓰임에 사용되었는지가 중요해지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가장 아름다운 수도의 열매는 수도원 숫자도, 제자의 숫자도, 책의 숫자도 아닐 것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한 사람의 말과 표정과 삶에서 ‘그사람’보다 ‘주님’이 더 잘 보이게 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오직예수’라는 고백이 마침내 한 인간 안에서 이루어 낸 가장 아름다운 후반전일 것입니다.
AC.353에서 스베덴보리는 신32:14을 인용한 뒤 매우 이례적으로 강한 말을 합니다. ‘이러한표현들의의미는속뜻을통하지않고서는누구도알수없습니다.’ 그리고 속뜻이 없다면 ‘소의엉긴젖’, ‘양의젖’, ‘어린양의기름’, ‘숫양과염소의기름’, ‘바산의아들들’, ‘밀의콩팥의기름’, ‘포도의피’와 같은 표현들은 ‘단지말들에지나지않을것’이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 구절이 단순히 이스라엘이 풍요로운 땅에서 좋은 음식을 먹었다는 사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인것들’의 헤아릴 수 없는 다양성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AC.353의 출발점을 다시 붙들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인것은사랑에속한모든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신앙역시사랑에서비롯될때에는천적’이며, ‘체어리티는천적인것’, ‘체어리티의모든선은천적인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신32:14에 나오는 풍성한 음식들의 목록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것을 자연적인 음식의 목록이 아니라 사랑과 선에 속한 여러 천적 상태를 표현하는 말씀으로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것이AC.353 [3]의 첫 문장입니다. ‘천적인것들은헤아릴수없이많은종류와,그보다도더헤아릴수없이많은세부종류로이루어져있다.’ 이것이 신32:14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이유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 ‘선’, ‘체어리티’라고 하면 각각 하나의 단순한 개념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사랑과 선은 그렇게 단조로운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은 사람과 천사의 서로 다른 상태와 쓰임과 수용 정도에 따라 셀 수 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말씀은 그것을 하나의 자연물로만 표상하지 않고 젖, 기름, 밀, 포도즙 등 서로 다른 수많은 자연적 형상을 사용합니다.
‘소의엉긴젖’(butter of kine)부터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AC.353에서 이 표현 하나하나의 세부 상응을 아직 풀어 주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이 글만을 근거로 ‘소의엉긴젖은정확히이것이다’라고 지나치게 세분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이 글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소의엉긴젖’ 역시 천적인 것의 어떤 종류와 세부 종류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연적인 젖이 아니라 그것이 담고 있는 선의 질입니다.
‘양의젖’도 마찬가지입니다. 젖은 생명을 먹이고 자라게 하는 음식입니다. 그러나AC.353의 직접적인 초점은 각각의 식품에 고정된 사전식 의미를 부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소의엉긴젖’과 ‘양의젖’이 서로 다른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하나이면서도 그것을 받는 상태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하나 됨은 모든 것이 똑같아지는 획일성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선들이 하나의 주님을 중심으로 질서를 이루는 하나 됨입니다.
이어 ‘어린양의기름’이 나옵니다. 여기서는AC.353전체에서 이미 설명한 ‘기름’의 상응이 직접 적용됩니다. ‘기름’은 천적인 것 자체, 곧 사랑에 속한 선을 상징합니다. 특히 이 구절에서 중요한 것은 기름 하나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과 숫양과 염소 등 서로 다른 동물들과 관련된 표현들이 연이어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천적 선이 하나의 획일적인 선이 아니라 무수한 종류와 세부 종류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바산에서난숫양’이라는 표현도 흥미롭습니다. 문자적으로 바산은 풍요로운 목축지로 유명한 지역이므로 좋은 가축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AC.353에서 스베덴보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지리적 풍요 자체가 아닙니다. 그는 ‘바산의아들들’까지 천적인 것들의 종류와 세부 종류를 나타내는 표현 가운데 하나로 포함합니다. 즉 말씀의 지명과 동물과 음식은 서로 무관하게 늘어놓은 장식적 표현이 아니라, 속뜻에서는 서로 구별되는 영적·천적 실재들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리고 매우 독특한 표현이 나옵니다. 영어 원문은 ‘thefatofthekidneysofwheat’입니다. 문자적으로 옮기면 ‘밀의콩팥의기름’ 정도가 됩니다. 개역개정은 이를 자연스럽게 ‘지극히아름다운밀’이라고 번역합니다. 성경의 문자적 문체만 생각하면 상당히 기이한 표현입니다. 밀에 무슨 콩팥이 있으며, 그 콩팥에 무슨 기름이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표현 때문에 스베덴보리가 ‘속뜻이없으면단지말들에지나지않을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콩팥’과 ‘기름’이라는 표현은 가장 깊고 귀한 부분을 나타내는 표상적 언어이고, 여기에 ‘밀’이 결합됩니다. 다만AC.353자체에서는 ‘밀의콩팥의기름’이 구체적으로 어느 종류의 천적 선인지를 더 세분하여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스베덴보리보다 앞서 나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 특이한 표현까지도 무의미한 시적 과장이 아니라 천적인 선의 특정한 종류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포도의피’가 등장합니다. 개역개정은 ‘포도즙의붉은술’이라고 번역하지만,AC.353의 영어 표현은 ‘thebloodofthegrape’입니다. 자연적인 포도에 ‘피’가 있다고 말하는 것 역시 문자적으로만 보면 매우 특이합니다. 그러나 말씀의 표상적 언어에서는 포도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즙을 ‘피’라고 부르는 자연적 형상을 통해 더 깊은 실재를 담을 수 있습니다.AC.353은 이 역시 천적인 것들의 종류와 세부 종류 가운데 하나라고 밝힙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읽는 방법에 관한 매우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상응을 단순히 ‘기름=사랑’, ‘포도주=신앙’ 같은 일대일 대응표로만 이해하면 말씀의 풍요로움을 오히려 축소할 수 있습니다.AC.353은 천적인 것 자체가 ‘헤아릴수없이많은종류와,그보다도더헤아릴수없이많은세부종류’를 가진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표상하는 자연계의 사물들도 그 차이를 표현하기 위해 무수히 다양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랑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사랑은 아닙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 이웃의 선을 바라는 사랑, 어린아이를 돌보는 사랑,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 맡겨진 쓰임을 성실히 행하려는 애정 등은 모두 선과 사랑에 속하면서도 그 질과 쓰임이 서로 다릅니다. 더구나 각각의 사랑 안에도 다시 셀 수 없이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천국의 선은 하나의 무색무취한 ‘선’이 아니라 주님의 무한한 선이 유한한 천사들과 인간들에게 받아들여지면서 나타나는 헤아릴 수 없는 다양성입니다.
이것은 천국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모든 천사가 선하다고 해서 모든 천사가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각 천사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자기 고유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며, 각 공동체도 서로 다른 주된 선과 쓰임을 중심으로 질서를 이룹니다. 그러면서도 그 모든 다양성은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하나의 천국을 이룹니다. 신32:14의 풍성한 음식들은 이러한 ‘하나안의무수한다양성’을 자연적인 형상으로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음식으로 표현될까요? 음식은 사람의 몸 안으로 들어와 생명이 되고 힘이 됩니다. 영적인 차원에서도 선과 진리는 인간의 내면을 먹이고 살아 있게 합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먹고 마시는 표현이 매우 자주 등장합니다. 신32:14에서도 이스라엘이 먹고 마시는 모습은 속뜻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여러 종류의 선을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내적 생명을 얻는 상태를 담아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신32:14은 바로 앞AC.353 [2]의 시36:8-9와도 잘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주의집에있는살진것으로풍족할것’이며 ‘주의복락의강물을마시게하신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살진것’과 ‘생명의원천’을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으로, ‘복락의강물’과 ‘빛’을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으로 풀이했습니다. 먹고 마시고 만족하는 말씀의 표현들이 결국 인간의 속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로 살아나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천적인 것들의 근원입니다.AC.353은 첫머리에서 ‘기름’이 천적인 것을 뜻한다고 하면서 ‘이것역시주님께속한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앞의AC.352도 ‘모든사랑은주님에게서오는것이며,인간에게서오는것은조금도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신32:14에 펼쳐지는 이 풍성한 천적 선의 세계는 인간이 자기 안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종류와 세부 종류의 선은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사실은 신32:14을 모세의 노래 전체 문맥에서 볼 때 더욱 아름답습니다. 이스라엘이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기름과 밀과 포도즙을 스스로 만들어 자기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인도하시고 먹이신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속뜻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며 여러 종류의 사랑과 선으로 그의 속 사람을 먹이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며 마치 자기 것으로 느끼고 자유롭게 살아가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다시 창4:4의 아벨에게 돌아옵니다. 아벨은 ‘양의첫새끼와그기름’을 드렸습니다.AC.352에서 ‘처음난것’은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을 뜻했고,AC.353에서 ‘기름’은 오직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 곧 사랑의 선을 뜻합니다. 따라서 신32:14의 긴 인용은 창4:4의 짧은 ‘기름’이라는 한 단어 안에 얼마나 광대한 천적 실재가 담겨 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제시된 것입니다.
아벨이 드린 ‘기름’을 단순히 ‘좋은마음’ 정도로 이해해서는 부족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기름’ 안에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의 헤아릴 수 없는 종류와 상태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서 단 하나의 선만 키우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 관계 전체, 쓰임 전체에 서로 다른 선들을 질서 있게 형성해 가십니다.
그래서AC.353의 신32:14인용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를 보여 주는 매우 좋은 사례이기도 합니다. 문자적 의미에서 보면 젖과 기름과 밀과 포도즙으로 이루어진 풍요의 노래입니다. 그러나 그 문자 안에는 천국의 사랑과 선의 무수한 종류들이 담겨 있습니다. 자연적인 음식의 다양성이 영적인 생명을 이루는 선의 다양성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상응입니다.
결국 신32:14의 핵심은 ‘어떤음식이정확히어떤선을뜻하는가?’를 하나하나 외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AC.353이 특별히 강조하는 더 큰 원리는 ‘천적인것들은헤아릴수없이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은 하나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천국과 인간 안에서는 무수한 선과 쓰임으로 펼쳐집니다. 그래서 말씀 역시 그 풍요를 ‘소의엉긴젖’, ‘양의젖’, ‘어린양의기름’, ‘바산의숫양’, ‘염소’, ‘밀의콩팥의기름’, ‘포도의피’라는 서로 다른 자연적 형상들 속에 담아 놓았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우리에게 말씀을 읽는 태도에 대해서도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문자적으로 낯설고 이상해 보이는 표현을 만나더라도 ‘왜성경에이런표현이필요할까?’ 하며 쉽게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바로 그런 세부에 아르카나가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AC.353의 표현대로 속뜻이 없다면 그것들은 ‘단지말들에지나지않을것’입니다. 그러나 상응을 통하여 열어 보면, 그 낯선 말들 하나하나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의 헤아릴 수 없는 풍요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풍요의 중심에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모든사랑은주님에게서옵니다.’ 신32:14의 풍성한 식탁도, 아벨이 드린 ‘기름’도 결국 이것을 향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을 주시고, 그 선을 무수한 형태의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살아내게 하시며, 우리는 그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여 다시 주님께 돌려드립니다. 이것이 아벨의 제물 안에 들어 있는 천적인 질서이며, 신32:14의 풍성한 표현들이 열어 보여 주는 사랑의 세계입니다.
그이유는그교회가내적인것조차인정하지않았으며, 천적인것은더더욱인정하지않는그러한교회였기때문입니다. This was because that church was such that it did not even acknowledge internal, much less celestial things.
[2] ‘기름’(fat)이천적인것들과체어리티의선들을상징한다는것은선지서에서도분명합니다. 이사야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That “fat” signifies celestial things, and the goods of charity, is evident in the prophets; as in Isaiah:
여기서 ‘기름진것’이문자그대로의기름을뜻하는것이아니라천적·영적선을뜻한다는것은매우분명합니다. 다윗의글에서도다음과같이말합니다. where it is very evident that fatness is not meant, but celestial spiritual good. So in David:
여기서 ‘살진것’(fatness)과 ‘생명의원천’(fountainoflives)은사랑에속한천적인것을상징하고, ‘복락의강물’(riverofdeliciousnesses)과 ‘빛’(light)은사랑에서비롯된신앙에속한영적인것을상징합니다. 다시다윗의글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Here “fatness” and the “fountainoflives” signify the celestial, which is of love; and the “riverofdeliciousnesses,” and “light,” the spiritual, which is of faith from love. Again in David:
여기에서도마찬가지로 ‘기름진것’(fat)은천적인것을, ‘찬송하는입술’(lips of songs)은영적인것을뜻합니다. 그것이영혼을만족하게한다고하였으므로천적인것을뜻한다는것이매우분명합니다. 같은이유로땅의처음난것인첫열매들도 ‘기름’(fat)이라고합니다.(민18:12)whereinlikemanner “fat” denotesthecelestial, and “lipsofsongs” thespiritual. Thatitiswhatiscelestialisveryevident, becauseitwillsatiatethesoul. Forthesamereasonthefirstfruits, whichwerethefirstbornoftheearth, arecalled “fat.”(Num. 18:12)
그들이여호와께드리는첫소산곧제일좋은기름과제일좋은포도주와곡식을네게주었은즉(민18:12)
[3]천적인것들은헤아릴수없이많은종류와, 그보다도더헤아릴수없이많은세부종류로이루어져있기때문에, 모세가백성앞에서읊은노래에서는그것들을다음과같이총괄적으로묘사합니다. As celestial things are of innumerable genera, and still more innumerable species, they are described in general in the song which Moses recited before the people:
이러한표현들의의미는속뜻을통하지않고서는누구도알수없습니다. 속뜻이없다면 ‘소의엉긴젖’(butter of kine), ‘양의젖’(milk of sheep), ‘어린양의기름’(fat of lambs), ‘숫양과염소의기름’(fat of rams and goats), ‘바산의아들들’(sons of Bashan), ‘밀의콩팥의기름’(fat of the kidneys of wheat), ‘포도의피’(blood of the grape)와같은표현들은단지말들에지나지않을것입니다. 그러나이모든표현하나하나는천적인것들의종류와세부종류를상징합니다.It is impossible for anyone to know the signification of these expressions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 Without the internal sense, such expressions as the “butterofkine,” the “milkofsheep,” the “fatoflambs,” the “fatoframsandgoats,” the “sonsofBashan,” the “fatofthekidneysofwheat,” and the “bloodofthegrape,” would be words and nothing more, and yet they all and each signify genera and species of celestial things.
해설
AC.353은 앞의 AC.350에서 아벨이 드린 ‘기름진것’이 ‘천적인것자체이며, 이것역시주님께속한다’고 한 내용을 본격적으로 풉니다. 그리고 첫 문장부터 핵심을 매우 명료하게 제시합니다. ‘천적인것은사랑에속한모든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기름’은 단순히 풍요나 좋은 것을 막연하게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사랑에 속한 선, 곧 천적인 것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이 중요합니다. ‘신앙역시사랑에서비롯될때에는천적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과 아벨을 통해 계속 살펴온 신앙과 사랑의 관계를 다시 한번 정확하게 정리해 줍니다. 신앙 자체를 배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반대로 신앙이 사랑에서 비롯되고 사랑과 결합되어 있다면 그 신앙 역시 천적인 성질을 가집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아니라 ‘사랑에서분리된신앙’이었습니다.
이어 ‘체어리티는천적인것입니다. 체어리티의모든선도천적인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이로써 사랑,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 체어리티, 체어리티의 선이 하나의 생명 질서 안에 놓입니다. 이것들은 서로 고립된 별개의 종교 요소가 아니라 모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라는 하나의 근원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바로 앞 AC.352에서 ‘모든사랑은주님에게서오는것이며, 인간에게서오는것은조금도없다’고 했으므로, AC.353의 ‘기름’ 역시 인간 자신의 선이나 공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선을 가리킵니다.
이 때문에 희생 제사에서 기름이 특별히 여호와께 드려졌습니다. 간을 덮는 기름, 콩팥 위의 기름, 내장을 덮는 기름 등은 모두 거룩한 것으로 구별되어 제단 위에서 불살라졌습니다. 문자적, 그러니까 겉으로만 보면 왜 동물의 특정 부위에 붙은 기름을 이처럼 세밀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셨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표상의 관점에서는 그 세밀한 규례들이 인간 안에 있는 여러 종류와 정도의 사랑과 선을 나타내는 외적 표상이 됩니다.
특히 이것들이 ‘여호와께향기로운화제의음식’이라고 불렸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자연적인 음식이나 기름을 필요로 하신다는 뜻일 수는 없습니다. 제물이 ‘음식’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것이 주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과 결합에 관한 것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단 위에서 드려지는 기름의 거룩함은 물질 자체에 있지 않고, 그것이 표상하는 천적 선에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문제가 생깁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은 그 기름을 먹어서는 안 되었을까요? AC.353은 그 이유를 상당히 강하게 설명합니다. 당시 유대교회는 ‘내적인것조차인정하지않았으며, 천적인것은더더욱인정하지않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장 내적인 사랑의 선을 표상하는 기름은 그들에게 속한 것으로 취하여 먹게 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께 돌리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 역시 ‘천적인것은오직주님께속한다’는 원리를 표상적으로 보존하는 장치였습니다.
[2]에서 스베덴보리는 이제 제사법에서 선지서로 이동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름진것’이 문자 그대로의 지방이나 풍부한 음식만을 의미할 수 없는 구절들을 제시한다는 점입니다. 사55:2의 ‘너희자신들이기름진것으로즐거움을얻으리라’는 말씀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의 만족을 말합니다. 렘31:14 역시 ‘내백성을나의선으로만족하게한다’는 것과 제사장들의 심령을 ‘기름’으로 만족하게 한다는 표현을 병행합니다. 따라서 ‘기름’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으로 영혼이 채워지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시36:8-9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나란히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살진것’과 ‘생명의원천’을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으로, ‘복락의강물’과 ‘빛’을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천적·영적 질서가 매우 아름답게 나타납니다. 먼저 생명과 사랑이 있고, 그 사랑에서 진리와 신앙의 빛이 나옵니다. ‘주의빛안에서우리가빛을본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지성에서 진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사랑 안에서 참된 진리를 본다는 질서와도 잘 연결됩니다.
시63:5에서도 ‘기름진것’은 영혼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천적인 것을 뜻한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합니다. 육체의 배부름이 아니라 영혼의 만족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찬송하는입술’은 영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 내적인 사랑의 선이 먼저 있고, 그 선에서 나오는 진리의 고백과 찬송이 뒤따릅니다. 여기에서도 사랑이 신앙보다 내적으로 먼저라는 AC.352의 질서가 그대로 이어집니다.
민18:12에서 첫 열매가 ‘기름’으로 불리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앞의 AC.352에서 처음 난 것이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 처음 난 것과 ‘기름’이 서로 연결됩니다. 처음 난 것이 주님의 것인 것처럼, 그 안의 가장 좋은 것, 곧 사랑과 선의 생명 역시 주님의 것입니다. 결국 ‘처음난것’과 ‘기름진것’을 함께 드린 아벨의 제물은 ‘거룩한것과천적인것은모두주님에게서온다’는 하나의 고백을 두 상응을 통해 표현하고 있는 셈입니다.
[3]에서는 신32:14가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더욱 깊어집니다. ‘소의엉긴젖’, ‘양의젖’, ‘어린양의기름’, ‘바산에서난숫양’, ‘염소’, ‘지극히아름다운밀’, ‘포도즙의붉은술’ 같은 표현은 문자적으로 읽으면 풍요로운 음식의 목록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들이 각각 천적인 것들의 서로 다른 종류와 세부 종류를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원리가 하나 나옵니다. ‘천적인것들은헤아릴수없이많은종류와, 그보다도더헤아릴수없이많은세부종류로이루어져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이나 ‘선’을 하나의 단순한 개념처럼 생각하지만, 천국의 사랑과 선은 단조로운 하나의 상태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은 무한하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천사와 인간의 상태에 따라 셀 수 없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말씀도 그것을 단 하나의 상징으로 표현하지 않고 여러 동물과 음식과 기름과 젖과 곡식과 포도주를 통하여 서로 다른 종류의 선을 표현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읽을 때에도 중요합니다. ‘기름=사랑’이라는 등식 하나를 외우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어떤 기름인지, 어떤 동물의 기름인지, 어떤 제사에서 사용되는지, 어떤 다른 표현들과 함께 등장하는지에 따라 더 구체적인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상응은 단순한 암호표가 아니라 천국의 질서와 인간 내면의 무수한 상태들이 자연적 형상 속에 표현되는 살아 있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32:14에 대해 ‘속뜻이없다면이러한표현들은단지말들에지나지않을것’이라고 강하게 말합니다. 이것은 문자적 의미가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왜 말씀의 문자에 이토록 세밀하고 때로는 낯선 표현들이 들어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문자 안에는 천국의 실재들이 담겨 있으며, 그래서 인간에게는 이상하게 보이는 세부 사항 하나하나도 속뜻에서는 의미를 가집니다.
AC.353을 다시 아벨의 제물로 돌아가 읽으면 창4:4의 짧은 표현이 놀랍도록 깊어집니다. ‘아벨은자기도양의첫새끼와그기름으로드렸더니.’ ‘처음난것’은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을 나타내고, ‘기름’은 오직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 곧 사랑의 선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아벨 자체는 체어리티입니다. 따라서 아벨의 제물 전체가 하나의 질서를 이룹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선을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며, 그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주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의 차이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에게도 ‘소산’이 있었고 ‘제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산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행위였고, 그 제물은 그러한 신앙에서 나온 예배였습니다. 반면 아벨의 제물에는 ‘처음난것’과 ‘기름’이 있습니다. 곧 모든 거룩함과 사랑의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인정이 있고,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가 있습니다. 두 제물의 차이는 물질의 차이가 아니라 내적 생명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AC.353의 핵심을 ‘기름은천적인것을뜻한다’는 상응 하나로만 기억해서는 아쉽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왜기름이천적인것을뜻하는가?’입니다. 천적인 것은 사랑에 속한 것이고, 모든 참된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그 사랑에서 나올 때 살아 있고,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의 모든 선도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결국 ‘기름’은 인간의 종교적 성취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오는 사랑의 생명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바라보는 기준도 바꾸어 줍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가, 예배를 얼마나 드리는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 안에 ‘기름’이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곧 그 신앙과 예배와 행위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의 생명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나오고, 예배가 체어리티에서 나오며, 행위가 주님에게서 받은 선에서 나올 때, 그것은 아벨이 드린 ‘기름진것’과 같은 살아 있는 예배가 됩니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소개하는 곳은 아토스의 이비론 수도원입니다. 아토스에 얽힌 전승과 이비론 수도원의 오래된 역사,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에서 경험한 ‘손님대접의영성’을 소개하면서, ‘주는것을잊지말고, 하나님께로부터받는것도잊지말라’는 메시지로 나아갑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보면, 이번 영상은 앞선 몇 편과 조금 다른 의미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수도자의 극단적인 금욕이나 기이한 일화보다 ‘타인을향하여열리는삶’이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아토스를 바라보는 시선부터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에는 ‘마리아의정원’, 여성 출입 금지의 기원, 황후의 방문 등에 관한 여러 전승이 등장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그 자체로 동방정교회의 오랜 수도 전통과 신심을 이해하는 데 흥미로운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전승의 신성함이나 기적성 자체가 영적 진리를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장소가 천 년 이상 보존되었고, 수많은 성물과 고문서를 간직하고 있으며, 수많은 수도자가 그곳에서 기도했다는 사실은 존중할 만하지만, 그것이 곧 그 장소 자체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룩함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며, 사람이나 장소, 그리고 물건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으로 나타내는 만큼만 거룩함에 참여합니다. 따라서 ‘마리아의정원’이라는 전승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그곳에서사람들이어떤사랑으로살아가는가?’입니다.
이 점에서 영상 후반부의 ‘손님대접’ 이야기가 오히려 이번 영상의 영적 중심에 가깝습니다. 가뭄과 흉년 때문에 수도원 자신들의 먹을 것조차 부족해지자 수도사들은 방문객에게 무료로 음식을 제공하던 관행을 중단하기로 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결정입니다. 그런데 한 가난한 방문객이 찾아와 ‘두가지를잊지말라. 주는것과받는것이다. 사람들에게주면하나님께로부터받을것을믿으라’는 취지의 말을 남깁니다. 이후 수도원은 다시 창고를 열어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에게 음식을 나누었고, 그것이 이비론 수도원의 중요한 전통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의 신학과 매우 아름답게 만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삶은 근본적으로 ‘받아서주는삶’입니다. 모든 선과 진리, 모든 사랑과 생명은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옵니다. 인간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움켜쥐기 위해 받는 존재가 아니라, 받아서 다시 이웃에게 흘려보내도록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영상의 ‘주는것과받는것을잊지말라’는 말은 단순한 자선의 격언보다 훨씬 깊게 읽을 수 있습니다. ‘받음’과 ‘줌’은 서로 반대되는 두 행동이 아니라 하나의 영적 순환입니다. 주님에게서 받고, 이웃에게 흘려보내며, 그렇게 흘려보내는 가운데 다시 주님에게서 받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주의점도 있습니다. 이것을 ‘내가남에게하나를주면하나님께서나에게열을주신다’는 식의 보상 원리로 이해하면 금세 본래 의미에서 벗어납니다. 주는 행위가 더 큰 물질적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되는 순간, 겉으로는 체어리티처럼 보여도 그 안에는 자기 사랑이 숨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주었으니하나님께서나에게갚으실것이다’가 아니라 ‘내가가진것부터가주님에게서온것이므로필요한이웃에게흘려보내는것이마땅하다’가 더 깊은 질서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주시는 것도 반드시 돈이나 재산의 증가를 뜻하지 않습니다. 선을 사랑하는 마음, 이웃을 볼 수 있는 눈, 더 깊은 평안과 지혜,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훨씬 귀한 선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손님이오지않는집에는천사도오지않는다’는 수도원의 말도 문자 그대로 어떤 신비한 법칙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가리키는 정신은 아름답습니다. 낯선 사람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식탁을 열고, 자기에게 속한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행위는 인간을 자기 자신에게서 밖으로 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말하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모든 것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운동이라면, 체어리티는 받은 선을 이웃에게 유용하게 흘려보내는 운동입니다. 그래서 환대는 단순한 예절이 아니라 잘 행해질 때 ‘use’, 곧 쓰임의 한 형태가 됩니다.
영상에서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하다 천사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연결하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읽으면 좋습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자기 장막 앞을 지나가는 이들을 보고 먼저 달려나가 맞이하고, 물과 음식과 쉼을 제공합니다. 속뜻에서 더 깊은 의미들이 있겠지만, 겉으로도 이 장면에는 매우 아름다운 질서가 있습니다. ‘먼저대접하고, 나중에그들이누구였는지를알게됩니다.’ 상대가 천사인 줄 알았기 때문에 대접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환대했습니다. 바로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체어리티는 ‘가치있는사람인지확인한뒤사랑하는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에 따라 필요한 쓰임을 행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수도원이라는 장소를 넘어 우리 일상으로 곧바로 이어집니다. 수도원에 들어가지 않아도 식탁 하나를 여는 것이 수도가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는 것도 수도가 될 수 있고, 어려운 사람에게 시간과 물질을 내어주는 것도 수도가 될 수 있으며, 자기 능력과 지식을 필요한 사람에게 사용하는 것도 수도가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수도생활을 바라볼 때, 특히 중요하게 보는 지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얼마나세상에서멀리떨어졌는가?’보다 ‘얼마나자기중심성에서벗어나주님의선을이웃에게흘려보내는가?’가 더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번 영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천 년 된 박물관도, 아토스의 신비로운 전승도, 여성의 출입이 제한된 독특한 수도 전통도 아닙니다. 오히려 굶주림이 닥쳤을 때 닫으려 했던 ‘창고를다시여는장면’입니다. 수도원의 거룩함이 박물관 속 오래된 성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에게 내어주는 한 조각의 빵에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적 성물은 과거의 거룩한 삶을 기억하게 할 수 있지만, 체어리티는 지금 여기에서 주님의 사랑을 살아 있게 합니다.
다만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스베덴보리는 ‘주는것’ 자체도 분별 없이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는 단순히 누구에게나 무엇이든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실제로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지혜롭게 살피는 사랑입니다. 악을 돕는 것은 체어리티가 아니며, 상대의 잘못을 강화하는 도움 역시 참된 선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환대와 나눔에는 사랑과 함께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단순한 자선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 사이의 중요한 차이입니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아토스의 웅장한 역사와 희귀한 보물들을 한참 이야기하지만,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끝까지 따라가 보면 결국 가장 빛나는 보물은 다른 데 있는 듯합니다. 그것은 ‘주는것과받는것을잊지말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조금 더 깊게 바꾸어 읽어볼 수 있습니다. ‘주님에게서받았음을잊지말고, 받은것을이웃에게흘려보내기를잊지말라.’ 그렇게 읽는 순간 이비론 수도원의 오래된 환대 이야기는 특정 수도원의 미담을 넘어 그리스도인의 일상 전체를 비추는 말이 됩니다.
결국 참된 수도는 세상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느냐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외적 고요가 내적 고요를 도울 수 있고, 외적 청빈이 자기 사랑을 돌아보게 할 수도 있으며, 수도원의 규율과 전통이 영적 훈련에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목적은 아닙니다. 목적은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자기 것으로 가두지 않고, 삶의 쓰임으로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 우리가 가져갈 가장 아름다운 문장은 어쩌면 이것일 것입니다. ‘받은것은내것이어서받은것이아니라, 주님의선이나를지나다른사람에게까지흘러가도록받은것입니다.’ 그 흐름이 막히지 않는 곳,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바로 그곳에서 천국의 질서가 시작됩니다.
40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태어난 남자를 일 개월 이상으로 다 계수하여 그 명수를 기록하라41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중 모든 처음 태어난 것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내게 돌리라42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계수하니43일 개월 이상으로 계수된 처음 태어난 남자의 총계는 이만 이천이백칠십삼 명이었더라4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45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에 레위인을 취하고 또 그들의 가축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취하라 레위인은 내 것이라 나는 여호와니라(민3:40-45)
14너는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구별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내게 속할 것이라15네가 그들을 정결하게 하여 요제로 드린 후에 그들이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할 것이니라16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게 온전히 드린 바 된 자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초태생 곧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내가 그들을 취하였나니17이스라엘 자손 중에 처음 태어난 것은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내게 속하였음은 내가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치던 날에 그들을 내게 구별하였음이라18이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레위인을 취하였느니라19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그들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 그들로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게 하며 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가까이 할 때에 그들 중에 재앙이 없게 하려 하였음이니라20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께서 레위인에 대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다 따라 레위인에게 행하였으되 곧 이스라엘 자손이 그와 같이 그들에게 행하였더라(민8:14-20)
출13과 민3, 민8을 함께 읽으면 처음에는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출13에서 여호와께서는 ‘태에서처음난모든것은다거룩히구별하여내게돌리라이는내것이니라’고 명하십니다. 사람의 장자도, 짐승의 처음 난 것도 모두 여호와의 것입니다. 그런데 민수기에 이르면 뜻밖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모든 장자를 직접 여호와께 구별하는 대신 레위 지파 전체를 취하여 그 장자들을 대신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자손중모든처음태어난자대신에레위인을내게돌리고’(민3:41), ‘이스라엘자손중모든처음태어난자대신내가그들을취하였나니’(민8:16)라고 하십니다. 왜 하필 레위일까요? 더구나 야곱의 실제 장자는 르우벤이며, 출생 순서로 보아도 레위는 르우벤과 시므온 다음의 셋째 아들입니다.AC.352는 이 문제를 말씀의 속뜻에서 풀면서 사랑과 신앙의 내적 질서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먼저 ‘처음난것’이 왜 거룩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출13:2에서 주님께서는 ‘처음난모든것은다거룩히구별하여내게돌리라이는내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처음’ 못지않게 ‘내것’입니다. 처음 난 것이 거룩한 까닭은 자연적 출생 순서 자체에 신성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모든 선과 진리의 처음이시며 근원이신 주님을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AC.352는 처음 난 것들이 모두 거룩했던 이유를 ‘오직홀로‘장자’이신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예배에서 처음 난 것은 궁극적으로 주님을 표상합니다.
그런데AC.352는 곧이어 ‘사랑과거기서비롯된신앙이‘장자’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거기서비롯된’이라는 말입니다. 신앙이 홀로 장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거기서비롯된신앙’이 장자입니다. 그 이유는 이어지는 문장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모든사랑은주님에게서오는것이며,인간에게서오는것은조금도없다.’ 따라서 처음 난 것을 주님께 돌리는 행위에는 ‘내안에있는참된사랑과선의근원은내가아니라주님이시다’라는 내적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처음 난 것이 ‘내것’이 아니라 ‘여호와의것’이라는 출13의 반복은 바로 이 질서를 표상합니다.
출13:15의 유월절 사건도 같은 배경을 보여 줍니다. 애굽의 처음 난 것은 죽었지만 이스라엘의 장자는 보존되었고, 그 결과 이스라엘의 모든 처음 난 것은 여호와께 속한 것으로 구별되었습니다. 따라서 장자의 거룩함에는 단지 ‘첫번째’라는 의미뿐 아니라 ‘주님께서살리셨으므로주님의것’이라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생명을 보존하신 분이 주님이시므로 그 생명의 처음을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속뜻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 인간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의 참된 생명 역시 인간 자신에게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원리가 드러납니다.
그런데 민3과 민8에 이르면 모든 장자를 대신하여 레위인을 취하십니다. 민3:41은 ‘이스라엘자손중모든처음태어난자대신에레위인을내게돌리라’고 하고, 민8:18은 더욱 직접적으로 ‘이스라엘자손중모든처음태어난자대신레위인을취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자연적 질서만 보면 이상합니다. 장자를 대신할 사람을 고른다면 실제 장자인 르우벤과 연결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AC.352는 여기에서 자연적 출생 순서와 영적 질서가 반드시 같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속뜻에서 레위는 ‘사랑’을 상징합니다. 반면 레위보다 먼저 태어난 르우벤과 시므온은 신앙에 속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놀라운 역전이 일어납니다. 자연적 순서에서는 르우벤과 시므온이 레위보다 먼저지만, 내적 질서에서는 레위가 나타내는 사랑이 신앙보다 먼저입니다. 그래서 실제 출생 순서로 셋째인 레위가 영적 의미에서는 모든 장자를 대신하게 됩니다. 말씀의 속뜻에서는 육체의 출생 순서보다 사랑과 신앙 사이의 내적 질서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AC.352가 이 구절들을 인용하는 핵심 이유입니다. ‘사랑이신앙보다내적으로먼저다.’ 여기서 ‘먼저’라는 말은 단순한 시간 순서를 뜻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신앙의 생명이며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이 아무리 먼저 의식에 나타나고, 진리를 먼저 배우며, 그것을 지성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그 신앙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신앙은 생명을 잃습니다. 반대로 사랑 안에 있을 때 신앙은 사랑이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밝히는 진리가 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을 통해 살펴본 문제와 정확히 연결됩니다.AC.338에서 ‘가인’은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 곧 신앙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처음난것’이라고 불리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실제로AC.352마지막에서도 ‘교회의처음난것은신앙’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매우 섬세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교회의처음난것이신앙이다’라는 것과 ‘신앙이사랑보다내적으로우위에있다’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인식되는 교회의 첫 출발이 신앙일 수 있습니다. 특히 태고교회 이후의 인간은 말씀을 통하여 먼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인 뒤,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그 신앙으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길을 걷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은 교회의 ‘처음난것’입니다. 그러나 그 신앙에 생명을 주는 근원은 여전히 사랑이며, 사랑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따라서 외적·시간적 순서에서는 신앙이 먼저 나타날 수 있어도 내적·생명적 질서에서는 사랑이 먼저입니다.
바로 이 점을 레위가 모든 장자를 대신하는 표상이 놀랍도록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르우벤과 시므온은 자연적 출생 순서에서는 레위보다 앞섭니다. 그러나 사랑을 나타내는 레위가 모든 장자를 대신하여 주님께 속하게 됩니다. 이는 신앙에 속한 것들이 아무리 먼저 나타난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의 내적 중심에는 사랑이 있어야 함을 보여 줍니다. 신앙의 진리들은 사랑을 섬기기 위해 존재하며, 궁극적으로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더구나 레위인은 단순히 장자를 대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성막 봉사의 직무를 받습니다. 민8:15은 정결하게 된 레위인들이 ‘회막에들어가서봉사할것’이라고 하고, 민8:19은 그들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 ‘회막에서이스라엘자손을대신하여봉사하게’ 했다고 말합니다. 이것 역시 의미심장합니다. 사랑은 관념으로 머무르지 않고 ‘봉사’, 곧 쓰임으로 나아갑니다. 체어리티가 실제 삶에서 이웃의 선을 위한 행위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질서입니다.
따라서 레위가 장자를 대신한다는 말씀은 ‘사랑이중요하고신앙은중요하지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이 신앙답게 되기 위해서는 사랑이라는 생명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가인의 길로 나아가지만, 사랑에서 생명을 받는 신앙은 주님의 질서 안에 있습니다. 신앙과 사랑은 서로 제거해야 할 경쟁자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을 이루어야 할 것들입니다. 다만 그 안에는 분명한 질서가 있습니다. 신앙이 사랑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신앙에 생명을 주고, 신앙은 그 사랑이 바르게 행할 수 있도록 진리로 섬깁니다.
이렇게 보면 ‘장자’라는 표현에 두 층위가 있다는AC.352마지막 문장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배에서처음난것들은주님을상징하고,교회의처음난것은신앙을상징한다.’ 예배에서 처음 난 것을 여호와께 드리는 것은 모든 거룩함과 사랑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반면 교회의 발생이라는 측면에서 처음 난 것은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 신앙조차 독립적인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두 의미는 충돌하지 않고 하나의 질서를 이룹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질서가 아벨의 제물 안에 들어 있습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그가 드린 것은 ‘양떼의처음난것’입니다. 체어리티가 주님께 드리는 처음 난 것은 ‘내안에있는사랑과선은내것이아니라주님의것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아벨의 제물에는 자기 공로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인정이 있고,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있습니다.
결국 ‘왜장자가아닌레위가모든장자를대신했는가?’라는 질문의 답은 자연적 족보가 아니라 말씀의 내적 질서에서 찾아야 합니다. 자연적 출생에서는 르우벤과 시므온이 레위보다 먼저지만, 영적 생명의 질서에서는 사랑이 신앙보다 내적으로 먼저입니다. 신앙은 진리를 보고 고백하지만, 그 신앙에 생명을 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 자체의 근원은 인간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그래서 모든 처음 난 것은 주님의 것이며, 사랑을 상징하는 레위가 모든 장자를 대신하여 주님께 속하게 됩니다.
이것은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읽는 데도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존재했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신앙이 자신에게 생명을 주는 사랑으로부터 독립하려 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반대로 주님의 질서는 신앙을 다시 사랑 안에 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AC.352에서 장자와 레위의 표상을 통하여 보여 주시는 질서는 결국 하나입니다. ‘사랑은주님에게서오며,신앙은그사랑으로부터생명을얻는다.’ 자연적 순서에서는 신앙이 먼저 보일 수 있지만, 내적 질서에서는 언제나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먼저입니다. 이것이 장자가 아닌 레위가 모든 장자를 대신하게 된 말씀 안에 담긴 깊은 속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