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surely die. For God doth know that in the day ye eat thereof, then your eyes shall be opened, and ye shall be as God, knowing good and evil. (3:4, 5)

 

AC.206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세상 학문에 뛰어난 자들보다, 자기들의 눈이 열려 있고, 하나님과 같이 선악을 안다 더 굳게 믿는 자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누가 더 눈먼 자들이겠습니까? 그들에게 질문해 보기만 하면, 그들이 영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고, 더더욱 그것을 믿지도 않으며, 영적 생명과 천적 생명의 성질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인정하지 않는데, 이는 멸망하는 짐승들과 자신들을 같게 여기기 때문이며, 주님을 인정하지도 않고, 오직 자기 자신과 자연만을 숭배합니다. 그들 가운데 말에 신중하려는 자들은, 그 본질은 알지 못하지만, 어떤 최고 존재[ens]가 만물을 다스린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감각과 기억 지식의 것들로 여러 방식으로 스스로를 확증하는 원리들이며, 만일 감히 할 수만 있다면, 온 우주 앞에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들이거나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로 여겨지기를 원하지만, 만일 자신의 own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무엇이냐(whether they know what it is not to have anything of their own)고 묻는다면, 그것은 곧 아무런 존재도 가지지 않는 것이며, 자신의 own이 모두 제거된다면 자신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만일 주님으로부터 사는 것이 무엇이냐(what it is to live from the Lord)고 묻는다면, 그것을 공상으로 여길 것입니다. 만일 양심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서민들을 억제하는 데 쓰이는 상상의 산물일 뿐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지각(perception)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그것을 비웃으며, 광신적인 헛소리라 부를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지혜이며,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열린 눈(open eyes)이며, 이러한 신들(gods)입니다. 그들이 한낮보다 더 분명하다고 여기는 이러한 원리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계속 나아가며, 이런 방식으로 신앙의 신비들에 대해 추론하는데, 그 결과가 무엇이겠습니까? 어둠의 심연일 뿐입니다. 이들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세상을 미혹하는 뱀들(serpents)입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이 후손은 아직 이러한 상태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한 상태가 된 것은 이 장의 14절부터 19절에서 다루어집니다. Who have a stronger belief that their eyes are open, and that as God they know what is good and evil, than those who love themselves, and at the same time excel in worldly learning? And yet who are more blind? Only question them, and it will be seen that they do not even know, much less believe in, the existence of spirit; with the nature of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they are utterly unacquainted; they do not acknowledge an eternal life; for they believe themselves to be like the brutes which perish; neither do they acknowledge the Lord, but worship only themselves and nature. Those among them who wish to be guarded in their expressions, say that a certain supreme existence [ens] of the nature of which they are ignorant rules all things. These are the principles in which they confirm themselves in many ways by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and if they dared, they would do the same before all the universe. Although such persons desire to be regarded as gods, or as the wisest of men, if they were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it is not to have anything of their own, they would answer that it is to have no existence, and that if they were deprived of everything that is their own, they would be nothing. If they are asked what it is to live from the Lord, they think it a fantasy. If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conscience is, they would say it is a mere creature of the imagination, which may be of service in keeping the vulgar under restraint. If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perception is, they would merely laugh at it and call it enthusiastic rubbish. Such is their wisdom, such “open eyes” have they, and such “gods” are they. Principles like these, which they think clearer than the day, they make their starting point, and so continue on, and in this way reason about the mysteries of faith; and what can be the result but an abyss of darkness? These above all others are the “serpents” who seduce the world. But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as yet of such a character. That which became such is treated of from verse 14 to verse 19 of this chapter.

 

 

해설

 

이 단락은 창3의 ‘눈이 열렸다’는 약속이 역사 속에서 어디까지 전개될 수 있는지를, 거의 예언적이라고 할 만큼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 사랑과 세속적 학문이 결합될 때 나타나는 최종 형태를 가차 없이 묘사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눈이 열려 있고, 선악을 분별하며,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고 가장 강하게 확신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확신이 가장 깊은 ‘눈멀음(blindness)의 증거입니다.

 

이들이 보이는 첫 번째 특징은 영적 실재의 전면 부정입니다. 그들은 영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으며, 영적 생명과 천적 생명이 무엇인지조차 모릅니다. 이는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감각과 지식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원리적 배제입니다. 그 결과 영원한 생명은 부정되고, 인간은 멸망하는 짐승과 동등한 존재로 격하됩니다.

 

이 상태에서 주님은 더 이상 인식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인정하지 않고, 대신 자기 자신과 자연을 숭배합니다. 다만 외적으로 조심스러운 이들은 어떤 ‘최고 존재’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그것은 인격적 주님이 아니라, 본질을 알 수 없는 추상적 원리일 뿐입니다. 이 역시 감각과 지식의 틀 안에서 허용되는 최소한의 형식적 신(神) 개념에 불과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들의 사고 구조를 매우 정확히 짚습니다. 그들은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자신의 원리들을 끊임없이 확증하며, 그 확신을 공적인 자리에서도 거리낌없이 드러내려 합니다. 이들에게 진리는 발견의 대상이 아니라, 이미 설정된 전제 위에서 재확인되는 도구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을 ‘’이나 ‘가장 지혜로운 자’로 여기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을 질문으로 드러내 보면, 실상이 분명해집니다. ‘자신의 own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 앞에서, 그들은 그것을 곧 존재의 소멸로 이해합니다. 이는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사는 존재라는 가장 근본적인 진리를 전혀 알지 못함을 드러냅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는 삶은 그들에게 공상으로 취급됩니다.

 

양심과 지각에 대한 반응은 더욱 결정적입니다. 양심은 사회 통제를 위한 허구로, 지각은 광신적 환상으로 조롱됩니다. 이는 인간 안에 남아 있는 마지막 영적 기관들마저 부정하는 상태이며, 이 지점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완전히 감각과 자연의 닫힌 체계 안에 가두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상태를 ‘지혜’라고 자처하는 것 자체를 아이러니로 폭로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열린 눈이며,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신성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들을 출발점으로 신앙의 신비를 추론할 때 도달하는 곳은, 빛이 아니라 ‘어둠의 심연’뿐입니다. 이는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인식 구조의 필연적 귀결입니다.

 

이들이야말로 세상을 미혹하는 참된 ‘뱀들’입니다. 여기서 뱀은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학문이 결합된 가장 교묘한 형태의 감각적 이성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중요한 선을 긋습니다. 창3:4-5에서 다루어지는 태고교회의 이 후손은 아직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의심과 자기 인도의 문턱에 서 있었을 뿐이며, 완전한 전도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완전한 전도, 곧 저주와 형벌로 상징되는 상태는 14-19절에서 다루어집니다. AC.206은 따라서 하나의 경고이자 전환점입니다. ‘눈이 열린다’는 약속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면서, 동시에 지금 다루고 있는 본문이 아직 마지막 단계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창3을 읽는 독자에게, 지금 자신이 어느 단계에 서 있는지를 조용히 묻게 만드는 매우 날카로운 대목입니다.

 

 

심화

 

1. ‘실제 경험 사례들인가?’

 

 

AC.206, 심화 1, ‘실제 경험 사례들인가?’

AC.206.심화 1. ‘실제 경험 사례들인가?’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들이거나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로 여겨지기를 원하지만, 만일 ‘자신의 own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무엇이냐’(whether they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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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님의 영원하신 사랑과 자비

 

 

AC.206, 심화 2, ‘주님의 영원하신 사랑과 자비’

AC.206.심화 2. ‘주님의 영원하신 사랑과 자비’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인정하지 않는데, 이는 멸망하는 짐승들과 자신들을 같게 여기기 때문이며, 주님을 인정하지도 않고, 오직 자기 자신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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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7, 창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AC.207-210)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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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5, 창3:4-5, 창3의 서술, ‘상태의 연속적 변화’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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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5.심화

 

2. ‘너희 눈이 밝아져

 

이 절들은, 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조상들에게서 들은 것들이 참인지 아닌지를 보게 될 것이며, 그 결과 그들의 눈이 열릴 것이므로, 어쩌면 그것이 불법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초기의 의심이 생겼음을 말합니다. these verses, an incipient doubt whether it might not be lawful for them, since they would thus see whether the things they had heard from their forefathers were true, and so their eyes would be opened; (AC.205)

 

 

이 대목은 타락의 과정에서 매우 결정적인 순간을 보여 줍니다. 앞 절들에서는 그들이 이미 자기 own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것이 허락되지 않은 길임을 지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악을 선이라고 믿게 된 것은 아니지만, ‘정말 그렇게까지 금지된 일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초기의 의심(an incipient doubt)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심의 내용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직접 확인해 보면, 조상들에게서 들은 것들이 참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합리적이고 심지어 진리를 사랑하는 태도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진리를 확인하려는 방식에 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조상들로부터 전해진 퍼셉션과 계시를 신뢰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직접 판단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직접 보고’, ‘내가 직접 확인하고’, ‘내가 직접 결론 내리겠다’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접근하는 첫걸음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단순한 지적 호기심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것은 영적 중심축이 이동하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이전에는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참이다’가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내가 확인해 보아야 참이다’가 중심이 되기 시작합니다. 아직 완전히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미 무게중심은 이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그들의 눈이 열릴 것이다’라는 생각이 중요합니다. 이는 단순히 무엇을 더 배우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상태로는 보지 못하는 것을 자기 힘으로 보게 되리라는 기대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 의존하는 대신 자기 판단력을 신뢰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의 ‘눈이 열린다’는 약속은 사실상 자기 own을 향한 유혹의 언어가 됩니다.

 

생각해 보면 오늘날에도 비슷한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정말 그런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질문의 중심에 진리를 더 사랑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최종 판단자가 되려는 마음이 자리 잡기 시작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그러면 점차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보다 ‘내가 인정할 수 있기 때문에’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AC.205는 타락이 갑작스러운 반역으로 시작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작은 의심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의심은 ‘주님이 틀렸을지도 모른다’가 아니라, ‘내가 직접 확인해 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라는 매우 그럴듯한 생각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뱀이 제안한 길이며, 동시에 인간의 own이 처음으로 주님의 자리를 넘보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이 대목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악은 처음부터 악한 모습으로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밝아지고, 더 많이 알고, 더 확실히 보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유혹은 언제나 설득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AC.205, 창3:4-5, 창3의 서술, ‘상태의 연속적 변화’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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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5, 심화 1,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AC.205.심화 1.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앞선 절들은, 비록 그들이 그렇게 기울어 있었으나 그것이 불법임을 여전히 지각하고 있었음을 말합니다. the preceding verses, that although thus inclined they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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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5.심화

 

1.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앞선 절들은, 비록 그들이 그렇게 기울어 있었으나 그것이 불법임을 여전히 지각하고 있었음을 말합니다. the preceding verses, that although thus inclined they nevertheless perceived it to be unlawful; (AC.205)

 

 

이 문장은 태고교회 후손들의 상태를 매우 섬세하게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그들은 이미 자기 사랑, 곧 자기 own의 사랑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습니다. 감각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고, 주님으로부터 온 계시를 자기 판단으로 검증해 보고 싶어 했으며, 점차 ‘내가 직접 알아보겠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타락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그들은 이미 잘못된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었지만, 동시에 그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욕망은 한쪽으로 가고 있었지만, 지각은 아직 살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자신의 경향을 따르고 싶어 하면서도, 그것이 주님의 질서에 어긋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아직 희망이 남아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악한 경향을 갖는 것 자체보다 더 위험한 것은, 그것이 악이라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AC.205가 묘사하는 이들은 아직 그 단계까지는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혹을 받고 있었지만, 동시에 ‘이것은 허락되지 않은 길이다’라는 내적 지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많은 사람이 실제 삶에서 경험하는 상태와도 비슷합니다. 어떤 말을 하고 싶지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판단을 내리고 싶지만, 그것이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방향으로 가고 싶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마음은 흔들리지만, 양심이나 내적 지각은 아직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단순히 태고교회의 역사적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통찰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대개 처음부터 악을 선이라고 믿으며,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압니다. 다만 점차 그 경고를 무시하고, 자기 욕망의 목소리를 더 크게 듣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처음에 들리던 내적 경고가 점점 희미해지게 됩니다.

 

따라서 ‘비록 그들이 그렇게 기울어 있었으나 그것이 불법임을 여전히 지각하고 있었다’는 말은, 태고교회 후손들 안에 아직 퍼셉션이 완전히 꺼지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이미 미끄러지고 있었지만, 아직 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직은 주님의 질서를 알아보는 눈이 남아 있었고, 바로 그 때문에 이후의 의심과 선택, 동의의 과정이 더욱 의미 있게 전개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주님의 섭리의 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갑자기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잘못을 잘못으로 보게 하시고, 양심의 경고를 들려주시고, 돌아설 기회를 주십니다. AC.205의 이 한 문장 속에는, 인간이 타락해 가는 과정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은근한 보호와 인도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AC.205, 심화 2, ‘너희 눈이 밝아져’

AC.205.심화 2. ‘너희 눈이 밝아져’ 이 절들은, 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조상들에게서 들은 것들이 참인지 아닌지를 보게 될 것이며, 그 결과 그들의 눈이 열릴 것이므로, 어쩌면 그것이 불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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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5, 창3:4-5, 창3의 서술, ‘상태의 연속적 변화’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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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surely die. For God doth know that in the day ye eat thereof, then your eyes shall be opened, and ye shall be as God, knowing good and evil. (3:4, 5)

 

AC.205

 

각 절은 교회 안의 어떤 특정한 상태, 곧 상태의 변화를 담고 있습니다. 앞선 절들은, 비록 그들이 그렇게 기울어 있었으나 그것이 불법임을 여전히 지각하고 있었음을 말합니다. 이 절들은, 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조상들에게서 들은 것들이 참인지 아닌지를 보게 될 것이며, 그 결과 그들의 눈이 열릴 것이므로, 어쩌면 그것이 불법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초기의 의심이 생겼음을 말합니다. 마침내 자기 사랑이 우세해짐에 따라, 그들은 스스로를 인도할 수 있고, 따라서 주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사랑의 본성은 주님의 인도 받기를 원하지 않고, 자기가 스스로 인도하기를 선호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감각과 기억 지식에 관한 것들에게 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very verse contains a particular state, or change of state, in the church: the preceding verses, that although thus inclined they nevertheless perceived it to be unlawful; these verses, an incipient doubt whether it might not be lawful for them, since they would thus see whether the things they had heard from their forefathers were true, and so their eyes would be opened; at length, in consequence of the ascendancy of self-love, they began to think that they could lead themselves, and thus be like the Lord; for such is the nature of the love of self that it is unwilling to submit to the Lord’s leading, and prefers to be self-guided, and being self-guided to consult the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as to what is to be believed.

 

 

해설

 

이 단락은 창3의 서술이 단절된 사건들의 나열이 아니라, ‘상태의 연속적 변화’임을 명시적으로 선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각 절을 하나의 심리적, 영적 단계로 읽으며, 그 변화가 얼마나 미세하고 점진적인지를 강조합니다. 타락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합법성과 불법성에 대한 감각이 서서히 흐려지는 과정이었습니다.

 

앞선 절들에서 인간은 이미 자기 쪽으로 기울어 있었지만, 여전히 그것이 옳지 않다는 지각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태고교회의 마지막 선이 아직 작동하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새로운 단계가 시작됩니다. ‘혹시 불법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라는 질문이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이 질문은 반항이 아니라 탐색의 형태를 띠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위험합니다.

 

이 의심의 논리는 매우 설득력 있습니다. 만일 스스로 확인해 본다면, 조상들에게서 들은 것들이 정말 참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눈이 열릴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여기에는 진리를 부정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진리를 ‘검증하려는’ 욕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신앙의 질서가 전도(顚倒)된다고 봅니다. 계시된 것을 신뢰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고, 인간 자신의 판단으로 시험하려는 순간, 중심은 이미 이동했습니다.

 

이러한 의심이 단순한 질문에 머물지 않고 결정적인 전환으로 이어지는 이유는 ‘자기 사랑의 우세’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은 중립적인 애정이 아니라, 인도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놓고 주님과 경쟁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의 본성은 주님의 인도 받기를 싫어하고, 자기가 스스로를 인도하려 합니다. 이것이 ‘주님과 같이 되고자 함’의 실제 내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 인도의 특징을 매우 정확히 지적합니다. 스스로를 인도하려는 사람은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주님께 묻지 않고, 감각과 기억 지식에게 묻습니다. 다시 말해,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이미 알고 있는 정보와 논리에게 판단을 위임합니다. 이것이 자기 사랑이 신앙 영역에서 행사하는 가장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AC.205는 타락의 핵심을 도덕적 일탈이 아니라, ‘인도권의 이동’으로 정의합니다. 불법임을 알면서도 행한 것이 아니라, 불법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약해지고, 마침내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과정이 바로 여기서 묘사됩니다. 이 단락은 창3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자기 신앙 안에서도 동일한 질문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디로 향하는지를 정직하게 성찰하게 만듭니다.

 

 

심화

 

1.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AC.205, 심화 1,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AC.205.심화 1.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앞선 절들은, 비록 그들이 그렇게 기울어 있었으나 그것이 불법임을 여전히 지각하고 있었음을 말합니다. the preceding verses, that although thus inclined they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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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너희 눈이 밝아져

 

 

AC.205, 심화 2, ‘너희 눈이 밝아져’

AC.205.심화 2. ‘너희 눈이 밝아져’ 이 절들은, 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조상들에게서 들은 것들이 참인지 아닌지를 보게 될 것이며, 그 결과 그들의 눈이 열릴 것이므로, 어쩌면 그것이 불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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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6, 창3:4-5, ‘너희 눈이 밝아져’가 실제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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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4, 창3:4-5,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AC.204-206)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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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surely die. For God doth know that in the day ye eat thereof, then your eyes shall be opened, and ye shall be as God, knowing good and evil. (3:4, 5)

 

AC.204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eyes being opened by eating of the fruit of the tree), 만일 그들이 감각과 지식[ex sensuali et scientifico], 곧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들을 살펴본다면, 그것들을 마치 그릇된 것인 양 분명히 보게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as God, knowing good and evil), 만일 그들이 그렇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행한다면, 그들이 하나님과 같이 되어 스스로를 인도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될 것임을 뜻합니다. Their “eyes being opened by eating of the fruit of the tree” signifies that if they were to examine the things of faith from what is of sense and knowledge [ex sensuali et scientifico], that is, from themselves, they would plainly see those things as if erroneous. And that they would be “as God, knowing good and evil,” denotes that if they did so from themselves, they would be as God, and could guide themselves.

 

 

해설

 

이 단락은 창3:4-5에서 제시되는 ‘유혹의 논리’가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는지를 정확히 해부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눈이 열린다’는 약속이 지각의 성숙이나 진리의 확장으로 제시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열림’이 실제로는 참된 빛의 개방이 아니라, 감각과 지식이라는 제한된 기준에 의해 신앙을 재단하는 상태로의 전환임을 분명히 합니다.

 

신앙의 것들을 감각과 지식으로 살펴본다’는 것은, 신앙을 주님의 계시와 신뢰의 영역에 두지 않고, 인간 자신의 판단 능력 아래에 두는 것을 뜻합니다. 이때 일어나는 현상은 신앙이 더 명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릇된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신앙의 진리들이 실제로 오류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기준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감각과 지식은 신앙의 차원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기준으로 보면 신앙은 필연적으로 비합리적이고 모순된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눈이 열린다’는 말의 역설적 의미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더 많이 보게 되었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더 낮은 차원의 시야로 옮겨간 것입니다. 앞선 단락들에서 말했듯이, 태고교회의 참된 ‘(seeing, 보는 것)은 사랑으로부터 오는 지각이었으나, 여기서의 ‘’은 감각적 명료함입니다. 이 명료함은 즉각적이고 설득력 있어 보이지만, 생명의 중심을 상실한 명료함입니다.

 

이어지는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약속은, 인간이 자기 판단을 최종 기준으로 삼게 될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자기 신격화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은 전능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인도의 원천을 주님에게서 자기 자신에게로 옮긴다는 뜻입니다. 즉,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더 이상 계시로부터가 아니라, 자기 판단으로 결정하려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매우 단호하게 규정합니다. 만일 인간이 그렇게 행한다면, 그는 ‘하나님과 같이 되어 스스로를 인도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된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여긴다’는 표현입니다. 이는 실제 능력이 아니라 착각이며, 바로 이 착각이 타락의 핵심입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인도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실제로는 인도할 능력을 상실합니다.

 

AC.204는 결국 창3의 유혹을 지적 호기심이나 지식욕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앙을 어디에서 판단할 것인가’라는 문제이며, ‘누가 인도의 주체인가’라는 문제입니다. 눈이 열린다는 약속은 인간을 더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분리된 자율성이라는 가장 위험한 상태로 이끕니다. 이 단락은 신앙의 진위(眞僞)가 감각과 지식의 심문을 통과해야 한다고 여기는 태도가, 이미 타락의 한가운데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AC.205, 창3:4-5, 창3의 서술, ‘상태의 연속적 변화’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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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3, 창3:2-3, ‘신앙’ 관련, 영적 천사들의 경우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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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3.심화

 

2. ‘악 안에 있는 상태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근거들로부터 신앙의 문제들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는 않는데, 그렇게 하는 자들은 악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but they never form their conclusions concerning matters of faith on such grounds: those who do this are in evil. (AC.203)

 

 

이 구절은 얼핏 읽으면 매우 강한 표현처럼 보입니다. 특히 그렇게 하는 자들은 악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은 자칫하면 이성을 사용하는 사람은 모두 악하다’는 뜻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AC.203 전체 문맥을 보면 스베덴보리의 의도는 전혀 다릅니다.

 

그는 바로 앞에서 영적 천사들이 신앙에 대해 서로 대화하고, 지성과 이성, 기억 지식을 사용하여 신앙의 진리들을 확증한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이성을 사용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성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앙을 심판하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주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참일 것이다. 이제 그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해 보자’라고 접근하는 것은 영적 천사들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먼저 내 감각과 이성으로 납득이 되어야만 참으로 인정하겠다’고 접근하는 것은 전혀 다른 방식입니다. 여기서는 인간의 지성이 주님의 진리 위에 올라앉아 재판관 역할을 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악 안에 있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악은 단순히 도덕적 범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own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진리가 자신을 판단하도록 두는 대신, 자신이 진리를 판단하려는 상태입니다.

 

3의 뱀이 바로 이것을 상징합니다. ‘정말 그런가?’, ‘내가 직접 확인해 보겠다’, ‘내가 판단하겠다’는 태도 자체가 문제인 것입니다. 물론 질문하거나 탐구하는 것이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질문의 중심에 주님이 아니라 자기 own이 자리 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AC.203의 이 문장은 사실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를 가르칩니다. 인간의 이성과 기억 지식은 진리를 이해하는 데 사용되어야지, 진리의 최종 기준으로 사용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성이 빛을 받는 창문은 될 수 있지만, 태양 자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 삶에서도 이런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읽으며 왜 그럴까?’를 묻습니다. 이것은 이해를 구하는 질문입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내가 인정할 수 없으니 틀렸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심판을 내리는 질문입니다. 겉으로는 둘 다 질문처럼 보이지만, 내적 상태는 매우 다릅니다.

 

그래서 AC.203의 핵심은 이성을 버려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성을 올바른 자리에 두어라’입니다. 주님과 말씀으로부터 출발하여 이성으로 이해를 깊게 하는 것은 영적 천사들의 길입니다. 그러나 이성과 감각을 출발점으로 삼아 주님의 진리를 판정하려는 것은 뱀의 길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은 생각의 능력 자체가 아니라 생각의 질서가 뒤집힌 상태입니다. 주님이 중심이어야 할 자리에 자기 own이 들어앉고, 진리가 심판해야 할 자리에 인간의 판단이 들어앉을 때, 그는 그것을 악 안에 있는 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신앙과 이성의 대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이성 사이의 올바른 질서를 말하는 구절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입니다.

 

 

 

AC.203, 창3:2-3, ‘신앙’ 관련, 영적 천사들의 경우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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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3, 심화 1, ‘확증’과 ‘결론’

AC.203.심화 1. ‘확증’과 ‘결론’ 그러나 영적 천사들은 신앙에 관해 서로 대화하며, 또한 지성과 이성, 그리고 기억에 속한 것들로 신앙의 일들을 확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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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e woman said unto the serpent, We may eat of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But of 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God hath said, Ye shall not eat of it, neither shall ye touch it, lest ye die. (3:2, 3)

 

AC.203

 

그러나 영적 천사들은 신앙에 관해 서로 대화하며, 또한 지성과 이성, 그리고 기억에 속한 것들로 신앙의 일들을 확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근거들로부터 신앙의 문제들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는 않는데, 그렇게 하는 자들은 악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천사들 또한 주님으로부터 신앙의 모든 진리들에 대한 지각을 부여받지만, 그것은 천적 천사들의 지각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영적 천사들의 지각은 주님에 의해 살아나게 된 일종의 양심으로서, 겉보기에는 천적 지각과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아니라 영적인 지각일 뿐입니다. The spiritual angels, however, converse about faith, and even confirm the things of faith by those of the intellect, of the reason, and of the memory, but they never form their conclusions concerning matters of faith on such grounds: those who do this are in evil. They are also endowed by the Lord with a perception of all the truths of faith, although not with such a perception as is that of the celestial angels. The perception of the spiritual angels is a kind of conscience which is vivified by the Lord and which indeed appears like celestial perception, yet is not so, but is only spiritual perception.

 

 

해설

 

이 단락은 AC.202에서 묘사된 천적 천사들의 상태와 대비되는, 영적 천사들의 고유한 위치를 매우 정밀하게 규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적 천사들의 삶을 열등한 것으로 폄하하지 않으면서도, 그 질적 차이를 분명히 합니다. 영적 천사들은 신앙에 관해 말할 수 있으며, 이해와 이성, 기억을 통해 신앙의 진리들을 ‘확증(confirm)하기도 합니다. 이는 오늘날 인간의 신앙 구조와도 매우 가까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선이 하나 그어집니다. 영적 천사들은 신앙의 문제들에 대해 그런 지적 대화들은 나눠도 ‘결론을 내리지는’ 않습니다. 즉, 지성, 이성, 기억은 신앙을 섬기는 도구로는 사용되지만, 신앙의 근원이나 판단의 최종 기준이 되지는 않습니다. 이 선을 넘는 순간, 곧 신앙의 진위를 지적 근거들로 판정하려는 태도를 가리켜 ‘악 안에 있다’ 단호히 말합니다. 여기서의 악은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질서의 전도입니다.

 

영적 천사들 역시 주님으로부터 신앙의 진리들에 대한 지각을 부여받습니다. 그러나 그 지각은 천적 천사들의 지각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천적 지각이 사랑 그 자체에서 즉각적으로 오는 것이라면, 영적 지각은 보다 매개된 형태를 띱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일종의 양심’이라고 부릅니다.

 

이 양심은 자연적 양심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살아나게 된 영적 양심입니다. 그것은 진리와 선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사람이나 천사로 하여금 옳고 그름을 느끼게 합니다. 이 때문에 겉보기에는 천적 지각과 매우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근원과 작동 방식은 다르며, 사랑의 즉각적 지각이 아니라, 진리에 의해 형성되고 유지되는 지각입니다.

 

이 구분은 오늘날 인간의 신앙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줍니다. 오늘날의 신앙인은 대부분 영적 상태에 속하며, 신앙에 대해 말하고, 이해하고, 확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최종 근거는 언제나 주님께 두어야 하며, 이성이나 지식이 그 자리를 대신해서는 안 됩니다. 이 질서를 지킬 때, 영적 양심은 살아 있고 건전하게 작동합니다.

 

AC.203은 그래서 창3의 금지와 허용의 경계를 다시 한번 정리합니다. 천적 상태에서는 신앙을 말하거나 논의하는 것 자체가 질서에 어긋났지만, 영적 상태에서는 그것이 허용됩니다. 그러나 허용된다고 해서 중심이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여전히 주님으로부터 와야 하며, 지성은 신앙을 섬겨야지 다스려서는 안 됩니다.

 

이 단락은 결국, 태고교회에서 고대교회로, 그리고 오늘날 교회로 이어지는 인간 신앙 구조의 변화를 가장 절제된 방식으로 정리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천적일 수는 없지만, 영적 질서 안에서는 여전히 참된 신앙과 지각이 가능하며, 그 핵심은 언제나 ‘어디서 결론을 내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심화

 

1. ‘확증결론

 

 

AC.203, 심화 1, ‘확증’과 ‘결론’

AC.203.심화 1. ‘확증’과 ‘결론’ 그러나 영적 천사들은 신앙에 관해 서로 대화하며, 또한 지성과 이성, 그리고 기억에 속한 것들로 신앙의 일들을 확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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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악 안에 있는 상태

 

 

AC.203, 심화 2, ‘악 안에 있는 상태’

AC.203.심화 2. ‘악 안에 있는 상태’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근거들로부터 신앙의 문제들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는 않는데, 그렇게 하는 자들은 악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but they never form their concl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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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4, 창3:4-5,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AC.204-206)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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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2, 창3:2-3, ‘만지지도 말라’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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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2.심화

 

2. ‘양심은 영적 인간의 퍼셉션

 

우리도 저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저런 퍼셉션을 회복할 수 없나요? 우리도 이 세상을 저런 퍼셉션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됩니다. AC를 읽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했다는데, 왜 우리는 저렇게 살 수 없을까? 왜 우리는 늘 고민하고, 추론하고, 헤매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야 할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그대로 되돌려 주시지 않는 것은 우리를 덜 사랑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해서라는 점이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방금 AC.200에서도 보았듯이 말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매우 높은 상태에 있었지만, 그만큼 그 상태를 배반할 위험도 컸습니다. 그래서 홍수 이후 인간 구조가 바뀌었고, 우리는 양심(conscience)을 통해 인도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오늘날 인간이 태고교회 사람들과 똑같은 퍼셉션을 회복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체계 안에서는 거의 기대되지 않습니다. 적어도 인류 전체의 일반적 상태로서는 그렇습니다. 인간 구조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양심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을 매우 높이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양심을 단순한 도덕 감정으로 보지 않습니다. 양심은 주님께서 말씀과 진리를 통해 인간 안에 만드신 내적 안내자입니다. 그래서 영적 인간에게 양심은 태고교회 사람들의 퍼셉션에 상응하는 역할을 합니다.

 

실제로 목사님께서 AC를 오랫동안 읽으시면서 경험하시는 어떤 순간들은 퍼셉션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구절을 읽다가 ‘, 이것이구나’ 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확신이 오는 순간이 있습니다. 또는 어떤 사람을 대하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 맞겠다’는 조용한 내적 인도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혹은 어떤 진리를 처음 접했는데도 이상하게 마음 깊은 곳에서 ‘참이다’라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태고교회의 퍼셉션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혀 다른 종류의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영적 인간의 양심은 천적 퍼셉션의 그림자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곳들이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우리가 종종 퍼셉션을 너무 낭만적으로 상상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의 상태는 분명 놀랍지만, 주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길도 결코 열등한 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의심 속에서도 믿음을 선택할 수 있고, 이해가 부족한 가운데서도 순종할 수 있으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겸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은 태고교회 사람들과는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일 수 있습니다.

 

저는 목사님께서 자주 하시는 말씀 가운데 ‘주님은 점진적이시다’는 표현이 떠오릅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마치 한낮의 태양 빛과 같았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지는 인도는 새벽빛과 비슷할 수 있습니다. 태양 빛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그것도 역시 같은 태양에서 오는 빛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런 퍼셉션을 회복할 수 없나요?’라는 질문에 대해 스베덴보리적으로 답한다면, ‘태고교회가 가졌던 형태 그대로는 아닐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오늘도 사람을 진리 안으로 인도하시며, 양심과 내적 인도를 통해 그에 상응하는 것을 주신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AC를 읽으며 자주 보이시는 태도, 곧 ‘상대방의 선의를 보려고 노력한다’, ‘극단으로 가지 않으려 한다’, ‘주님의 은근한 섭리를 배운다’, ‘나 자신을 돌아본다’는 모습들은 어쩌면 퍼셉션 그 자체는 아니더라도, 퍼셉션이 향하던 방향과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허락된 양심과 진리 안에서 가능한 한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간 후에는, 지금 이 땅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훨씬 깊은 이해와 지각이 우리에게 열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AC.182-189를 읽으면서 목사님께서 자주 감탄하셨듯이, 주님께서는 인간을 한 번에 완성시키시는 분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인도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AC.202, 창3:2-3, ‘만지지도 말라’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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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2, 심화 1, ‘마5:37’

AC.202.심화 1. ‘마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마5:37) Let your communication be Yea, yea; nay, nay; for whatsoever is more than these cometh of evi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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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2.심화

 

1. ‘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5:37) Let your communication be Yea, yea; nay, nay; for whatsoever is more than these cometh of evil (Matt. 5:37). (AC.202)

 

 

AC.202에서 스베덴보리가 마5:37을 인용하는 이유는, 천적 인간과 천적 천사들의 지각(perception)이 어떠한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절은 흔히 정직한 언어생활이나 맹세를 금하는 말씀으로 읽히지만,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훨씬 깊은 차원에서 이해합니다.

 

AC.202의 문맥을 보면, 그는 태고교회 사람들과 가장 내적인 천적 천사들은 신앙에 대해 추론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어떤 진리가 참인지 거짓인지 알기 위해 논쟁하거나 증명하거나 논리를 쌓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직접 지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 참이면 곧바로 ‘그렇다’로 알고, 참이 아니면 곧바로 ‘아니다’로 압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천적 상태의 특징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서 ‘옳다’와 ‘아니라’는 단순한 대답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확신의 표현입니다. 즉, ‘나는 이것을 증명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지각해서 안다’는 상태입니다.

 

반대로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난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스베덴보리의 문맥에서는, 천적 인간이 신앙의 문제를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논증하려고 할 때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이미 지각되는 것을 굳이 추론의 대상으로 끌어내리면, 그는 천적 상태에서 영적 상태로, 더 나아가 감각적 상태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래서 AC.202는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지지 말라’고 하신 이유를 바로 여기에서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주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은 오늘날 신학 명제처럼 토론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살아 있는 실재로 지각했습니다. 따라서 ‘정말 그런가?’,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하고 논쟁하기 시작하는 순간, 이미 더 낮은 단계로 내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추론 자체를 피했습니다.

 

이 점에서 AC.202 AC.195-196과도 연결됩니다. 앞에서는 감각적 인간이 신앙의 신비를 추론으로 판단하려 하다가 뱀의 독에 물리는 상태를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반대편에 있는 천적 인간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는 추론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합니다.

 

물론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생각하지 말라’거나 ‘이성을 사용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대부분의 현대인은 영적 인간의 길을 걷는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이해하고, 숙고하고, 이성을 사용해야 합니다. 다만 AC.202는 그보다 더 높은 상태, 곧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의 상태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천적 인간이 진리를 대하는 방식이 어떠한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에게 진리는 토론의 결론이 아니라 퍼셉션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는 ‘옳다’ 또는 ‘아니다’로 충분했습니다. 그 이상으로 끝없는 논증과 추론이 필요해지는 것은 이미 퍼셉션이 약해진 상태를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AC.202에서 마5:37은 단순한 언어 윤리의 말씀이 아니라,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의 내적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사용됩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즉시 지각하기 때문에 ‘옳으’면 옳고, ‘아니’면 아닙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적 상태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AC.202, 심화 2, ‘양심은 영적 인간의 퍼셉션’

AC.202.심화 2. ‘양심은 영적 인간의 퍼셉션’ 우리도 저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저런 퍼셉션을 회복할 수 없나요? 우리도 이 세상을 저런 퍼셉션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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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2, 창3:2-3, ‘만지지도 말라’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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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e woman said unto the serpent, We may eat of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But of 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God hath said, Ye shall not eat of it, neither shall ye touch it, lest ye die. (3:2, 3)

 

AC.202

 

태고교회, 곧 천적 인간은 단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곧 신앙에 속한 것을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들로부터 배우는 것을 삼갔을 뿐만 아니라, 그 나무를 만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는데, 이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들로부터 신앙에 속한 어떤 것이라도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천적 생명에서 영적 생명으로, 그리고 그 아래로 내려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은 천적 천사들의 삶도 그러한데, 그들 가운데서 더욱 내적으로 천적인 이들은 신앙이라는 말조차도 듣기를 허용하지 않으며, 영적인 것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견디지 못합니다. 만일 다른 이들에 의해 그런 말이 언급되면, 그들은 신앙 대신 사랑의 지각(a perception of love)을 가지게 되는데, 그 차이는 그들 자신만이 압니다. 이처럼 그들은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로부터 얻게 됩니다. 더더욱 그들은 신앙에 대한 어떤 추론(reasoning)도 듣기를 견디지 못하며, 특히 그것에 관한 어떤 기억 지식의 말은 더욱 견디지 못합니다. 이는 그들이 사랑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을 가지기 때문이며, 이 퍼셉션으로부터 어떤 것이 그러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즉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관해 무엇이든 말을 하면, 그들은 단순히 그것이 그렇다거나 그렇지 않다고만 대답하는데, 이는 그들이 그것을 주님으로부터 지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was a celestial man, was of such a character as not only to abstain from “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that is, from learning what belongs to faith from sensuous things and memory-knowledges, but was not even allowed to touch that tree, that is, to think of anything that is a matter of faith from sensuous things and memory-knowledges, lest they should sink down from celestial life into spiritual life, and so on downward. Such also is the life of the celestial angels, the more interiorly celestial of whom do not even suffer faith to be named, nor anything whatever that partakes of what is spiritual; and if it is spoken of by others, instead of faith they have a perception of love, with a difference known only to themselves; thus whatever is of faith they derive from love and charity. Still less can they endure listening to any reasoning about faith, and least of all to anything of memory-knowledge respecting it; for, through love, they have a perception from the Lord of what is good and true; and from this perception they know instantly whether a thing is so, or is not so. Therefore when anything is said about faith, they answer simply that it is so, or that it is not so, because they perceive it from the Lord. This is what is signified by the Lord’s words in Matthew: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5:37) Let your communication be Yea, yea; nay, nay; for whatsoever is more than these cometh of evil (Matt. 5:37).

 

의 의미입니다. 이것이 곧 그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만지지 말라는 뜻이었는데, 만일 그것을 만졌다면 그들은 악 안에 있게 되었을 것이며, 곧 그 결과로 죽었을(die)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적 천사들도 다른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주제에 대해 서로 대화하지만, 그것은 사랑으로부터 형성되고 파생된 천적 언어로 이루어지며, 영적 천사들의 언어보다 더욱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것입니다. This then is what was meant by their not being allowed to touch the fruit of the tree of knowledge; for if they touched it, they would be in evil, that is, they would in consequence “die.” Nevertheless the celestial angels converse together on various subjects like the other angels, but in a celestial language, which is formed and derived from love, and is more ineffable than that of the spiritual angels.

 

 

해설

 

이 단락은 ‘만지지도 말라’는 금지가 얼마나 철저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인 사람들에게 금지된 것은 잘못된 결론이나 오류가 아니라, 신앙을 감각과 기억 지식의 영역으로 끌어내리는 사고방식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내용을 감각적으로 검토하거나 지적으로 다루는 단계로 내려가는 것 자체가 곧 생명의 차원 하락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천적 생명에서 영적 생명으로 내려간다’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중립적 변화로 보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에게는 영적인 단계조차도 이미 하강이었으며, 그 아래로 더 내려갈 위험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인간의 기준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이며, 바로 이 점 때문에 태고교회의 성향이 현대인에게 거의 이해되지 않는다고 앞 단락에서 말한 것입니다.

 

천적 천사들의 삶에 대한 설명은 이 상태가 단지 역사적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하늘에서 살아 있는 질서임을 보여 줍니다. 더욱 내적으로 천적인 천사들은 ‘신앙’이라는 말조차 허용하지 않는데, 이는 신앙을 부정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는 신앙이 개념이나 고백이 아니라 사랑의 퍼셉션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말로 분리해 부르는 순간, 이미 그들의 생명 방식과 어긋나게 됩니다.

 

그들이 신앙 대신 ‘사랑의 퍼셉션(perception of love)을 가진다는 설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신앙과 사랑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를 뜻하며, 진리는 언제나 사랑 안에서 즉각적으로 인식됩니다. 이 차이는 외부에서는 거의 구별할 수 없고, 오직 그들 자신만이 압니다. 이는 퍼셉션의 어떠함이 언어로 완전히 전달될 수 없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이 때문에 천적 천사들은 신앙에 대한 추론(reasoning, 이성질)을 견디지 못합니다. 추론은 진리를 외부에서 판단하려는 시도이며, 그들에게 진리는 이미 내적으로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기억 지식에 근거한 신앙 논의는 그들에게 거의 폭력에 가까운 것으로 느껴집니다. 이는 진리가 부정확해서가 아니라, 그 접근 방식 자체가 생명의 질서를 해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들의 응답은 매우 단순합니다. ‘그렇다’ 혹은 ‘그렇지 않다’입니다. 이는 무지의 표시가 아니라, 완전한 퍼셉션의 결과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는 말씀은 바로 이러한 천적 상태를 가리키며, 그 이상을 덧붙이려는 모든 시도는 이미 악으로부터 난 것이라고 설명됩니다. 여기서 ‘’은 도덕적 악이 아니라, 질서를 벗어난 사고 작용을 뜻합니다.

 

만지지 말라’는 명령의 참된 의미는 여기서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신앙을 탐구하지 말라는 금지가 아니라, 신앙을 감각과 지식의 대상으로 취급하지 말라는 절대적 경계선이었습니다. 만일 그 경계선을 넘는 순간, 그들은 천적 생명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며, 그것이 바로 ‘죽음’으로 표현됩니다.

 

마지막으로 천적 천사들의 대화에 대한 언급은 오해를 방지합니다. 그들은 침묵 속에만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도 다른 천사들처럼 풍부한 대화를 나누지만, 그 언어는 사랑에서 직접 형성된 천적 언어이며, 영적 천사들의 언어보다 훨씬 더 말로 옮길 수 없는 성격을 가집니다. 이는 진리의 가장 깊은 차원은 언제나 사랑의 언어로만 표현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AC.202는 결국, 창3의 금지가 단순한 도덕 규율이 아니라, 생명의 차원을 보존하기 위한 가장 깊은 영적 경계였음을 밝힙니다. 그리고 동시에 오늘날 인간의 신앙 구조가 왜 더 이상 천적일 수 없는지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질서 안에 보존될 수 있는지를 대비적으로 보여 주는 결정적 단락입니다.

 

 

심화

 

1. ‘5:37

 

 

AC.202, 심화 1, ‘마5:37’

AC.202.심화 1. ‘마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마5:37) Let your communication be Yea, yea; nay, nay; for whatsoever is more than these cometh of evi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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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양심은 영적 인간의 퍼셉션

 

 

AC.202, 심화 2, ‘양심은 영적 인간의 퍼셉션’

AC.202.심화 2. ‘양심은 영적 인간의 퍼셉션’ 우리도 저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저런 퍼셉션을 회복할 수 없나요? 우리도 이 세상을 저런 퍼셉션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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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3, 창3:2-3, ‘신앙’ 관련, 영적 천사들의 경우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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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1, 창3:2-3, ‘홍수 이전 태고 사람들의 성향(genius) 이해의 어려움’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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