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ay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and from thy faces shall I be hid; and I shall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4:14)

 

AC.385

 

‘이 지면에서 쫓아내시온즉’(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은 교회의 모든 진리로부터 분리됨을,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hid from thy faces)는 사랑의 신앙의 모든 선(all the good of faith of love)으로부터 분리됨을,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는 무엇이 참이요 선인지를 모르는 것을,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는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파괴할 것을 의미합니다. To be “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truth of the church; to be “hid from thy faces”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good of faith of love; to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is not to know what is true and good;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signifies that all evil and falsity would destroy him.  

 

해설

 

이 지면에서 쫓아내시온즉”은 교회의 모든 진리로부터 분리됨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성경의 ‘(ground)은 단순한 자연적 토양이 아니라, 교회의 진리가 뿌리를 내리는 영적 기반을 상징합니다. “지면”은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속 사람의 영역을 뜻하고,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말은 진리와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 즉 교회의 외적 형태는 남아 있어도 그 안에서 길을 잃어 진리의 빛을 더 이상 인지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가인은 사랑, 곧 체어리티 없이 신앙만을 주장했기 때문에 결국 진리의 토대에서도 밀려나게 된 것입니다.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모든 선으로부터 분리됨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AC 전반에서 항상 “하나님의 선(특히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선)”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즉 하나님의 얼굴로부터 숨겨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숨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체어리티를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선을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선에 대한 지각(good perception)의 상실”이라 부르며, 이는 영적 생명력을 잃어가는 가장 명백한 징후라고 설명합니다.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는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 모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단절”로 풀이합니다. 속 사람(내적 의지)에서 오는 선의 인도함이 없으므로, 사람이 무엇이 올바른지 무엇이 악인지 분별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는 지식은 남아 있지만 그 지식이 방향성을 잃어 무작위로 흩어지며, 신앙의 진리들은 더 이상 길을 안내하는 빛이 되지 못한 채 고립된 정보처럼 남아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방랑”입니다.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는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파괴할 것임을 의미합니다. 가인이 사랑과 선을 잃었을 때, 그는 더 이상 진리를 보호할 내적 힘이 없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만나는 자들”을 외부의 사람이나 존재가 아니라, “가인의 내적 상태에서 생겨난 왜곡된 신앙, 잘못된 개념들, 자기모순, 내적 거짓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사랑이 없는 신앙은 자기 내부에서 발생하는 악과 거짓에 의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취약한 구조를 갖게 됩니다. 선이 없는 진리는 생명력을 잃고, 생명력을 잃은 진리는 악과 거짓의 공격 앞에서 방어할 힘이 없습니다.

 

결국 AC.385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 없이 분리된 신앙은 교회의 진리와 선에서 분리되고, 그 결과 참과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며, 자연스럽게 자신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의 힘에 의해 붕괴되는 운명에 놓인다.’ 이 말은 하나님이 가인을 벌하신 것이 아니라, ‘가인이 사랑을 잃음으로써 스스로 그런 상태에 들어간 것’임을 밝혀 주는 중요한 아르카나입니다.

 

 

 

AC.386, 창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AC.385-391)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6 ‘이 지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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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4, 창4:1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AC.383-384)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창4:13) AC.384 그런 걸 보면, 가인 안에 아직 뭔가 선한 것이 남아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은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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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4:13)

 

AC.384

 

그런 걸 보면, 가인 안에 아직 뭔가 선한 것이 남아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은 사라졌는데, 그건 뒤에 나오는 라멕이 한 말을 보면 분명합니다. 19절하고, 23, 24절입니다. Hence it appears that something of good still remained in Cain; but that all the good of charity afterwards perished is evident from what is said of Lamech (verses 19, 23–24).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4:19, 23-24)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라고 고백한 사실을 통해, 가인 안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선의 흔적(리메인스)’이 남아 있었다고 말합니다. 사랑(체어리티)을 이미 억압하고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인이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인식하고 고통을 느끼는 것 자체’가 그 안에 ‘미세한 선(어떤 최소한의 선한 감수성)’이 여전히 존재함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이 남아 있던 선도 결국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이후 등장하는 ‘라멕(19, 23–24)에 대한 묘사 때문입니다. 라멕은 가인의 계열이 도달한 ‘최종적 타락 상태’를 대표하는 인물로,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사라지고, 신앙의 진리마저 폭력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왜곡으로 변질된 상태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AC.384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가인(사랑을 잃은 신앙) 안에는 처음에는 아주 약한 선이 남아 있었으나, 그 선이 보존되지 못하고 결국 후손(라멕)의 시대에 이르러 ‘체어리티의 선이 완전히 사라진 교회의 상태’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AC.385, 창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AC.385-391)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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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3, 창4:1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AC.383-384)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창4:13) AC.38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Cain said unto Jehovah)는 자기가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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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4:13)

 

AC.38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Cain said unto Jehovah)는 자기가 악 가운데 있었다는 어떤 고백을, 이 고백은 무슨 내적 고통(internal pain)으로 나온 것입니다.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는 그로 인한 절망(despair)을 의미합니다. Cain said unto Jehovah” signifies a certain confession that he was in evil, induced by some internal pain;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signifies despair on that account.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라는 구절을 매우 깊은 영적 장면으로 해석합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대화를 나누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가인의 내면에서 일어난 어떤 ‘자백(confession)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진리(신앙)가 사랑(체어리티)을 떠나 버린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을 때 찾아오는 ‘내적 통증(internal pain)에 의해 일어난 고백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가인이 아직 회개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는 “체어리티라는 사랑을 죽인 신앙”이라는 자신의 상태를 처음으로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의식을 “고통을 동반한 자각”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고통은 외적 형벌의 두려움이 아니라 ‘영적 생명(아벨)이 사라진 데서 오는 내적 비어 있음’이며, 이것이 가인으로 하여금 여호와 앞에 입을 열게 만든 것입니다.

 

이어서 가인은 말합니다.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단순히 죄책감의 표현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 말은 ‘절망(despair)을 뜻합니다. 즉, 자신의 상태가 너무 깊이 무너져서 ‘하나님께 돌아갈 길이 없다고 느끼는 영적 절망감’입니다.

 

여기에는 사랑 없이 존재하려는 신앙의 비극적 논리가 나타납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신앙은, 하나님과의 연결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기 존재의 토대가 무너졌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순간 인간은 하나님께 버려졌다고 느끼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실제 하나님이 떠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체어리티라는 사랑을 잃어 하나님을 인식할 능력을 스스로 차단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절망은 신앙의 붕괴라기보다, 사실은 ‘회복의 첫 단계’입니다. 왜냐하면 절망 속에서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내면의 상태를 보게 되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AC.383은 바로 이 점을 드러냅니다. 가인의 고백은 아직 회개는 아니지만, ‘하나님을 향한 첫 미세한 움직임’, 즉 내면 깊은 곳에서 울리는 ‘영적 통증의 인정’입니다. 하나님은 이 작은 움직임을 통해 회복의 길을 여시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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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본성(own, proprium)에 대한 원전(原典, 라틴) 설명입니다.

 

라틴어 proprium은 원전에서 사용된 용어로, 여기와 다른 여러 곳에서 ‘own’이라는 표현으로 번역되어 온 말입니다. propius의 사전적 의미는 형용사로서는 ‘one’s own,’ ‘proper,’ ‘belonging to one’s self alone,’ ‘special,’ ‘particular,’ ‘peculiar’입니다. 이 proprium은 중성인데 명사로 사용되면, ‘possession,’ ‘property’를 의미하며, 또 ‘a peculiarity,’ ‘characteristic mark,’ ‘distinguishing sign,’ ‘characteristic’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영어 형용사 ‘own’은 웹스터에 ‘belonging to,’ ‘belonging exclusively or especially to,’ ‘peculiar’를 의미하는 걸로 봐서,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이 ‘own’이라는 말은 proprius와 매우 정확히 일치하며, 라틴 proprium에 맞는 어떤 명사를 만들면, 아주 가까운 번역 효과를 얻지 싶습니다. The Latin word proprium is the term used in the original text that in this and other places has been rendered by the expression “own.” The dictionary meaning of propius, as an adjective, is “one’s own,” “proper,” “belonging to one’s self alone,” “special,” “particular,” “peculiar.” The neuter of this which is the word proprium, when used as a noun means “possession,” “property”; also “a peculiarity,” “characteristic mark,” “distinguishing sign,” “characteristic.” The English adjective “own” is defined by Webster to mean “belonging to,” “belonging exclusively or especially to,” “peculiar”; so that our word “own” is a very exact equivalent of proprius, and if we make it a noun in order to answer to the Latin proprium, we effect a very close translation. [Reviser]

 

 

해설

 

이 주석은 스베덴보리 저술의 핵심 용어 가운데 하나인 ‘proprium’(프로프리움)—한국어로 흔히 “자기 고유한 것”, 혹은 “본성”(本性)—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언어학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먼저 라틴어 ‘proprius’는 형용사로 “자기 자신의”, “고유한”, “특유의”, “다른 것과 구별되는”이라는 뜻을 가지며, 그 중성형 명사 ‘proprium’은 “자기 소유물”, “고유성”, “특징”, “독자적 성질”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proprium은 어떤 존재에게서 고유하게, 독립적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영어 “own”은 편집자가 지적했듯이 “자기 자신의”, “특유의”, “배타적으로 속한”이라는 의미를 가지므로, proprius의 뜻과 거의 완전하게 일치합니다. 문제는 거듭남을 다루는 스베덴보리 신학 안에서는 proprium이 단순한 개인의 개성이나 특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분리된 인간 자신의 고유한 성향’을 뜻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일관되게 “사람 자신의 것(own, proprium)은 본질적으로 악이며, 거짓으로 기울어 있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도덕적 평가라기보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에 근거한 존재론적 진술입니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자기 자신에서 나온 것”이라고 느끼는 모든 생각, 판단, 욕망은 영적 실재에서 보면 빛이 없는 상태이며, 그래서 proprium은 항상 어둠, , 흑암, 죽음과 연결되어 설명됩니다. 반대로, 사람 안에서 선하고 참된 것은 모두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므로 인간의 proprium이 아니라 ‘주님의 proprium(신적 본성)’이 사람 안에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proprium은 철저히 부정적 개념”임을 일관되게 강조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proprium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것을 ‘굴복시키고, 재배열하고, 주님의 질서 안으로 재구성’할 때에만 인간은 참된 영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언어학적 주석은 proprium이라는 단어가 단순한 “자기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인간론 전체의 기초 용어임을 보여 주며, 번역 시에도 자기 고유한 것, 자기 본성, 자기에게서 나온 것과 같은 표현으로 신중하게 옮겨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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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1:4, 5)

 

AC.21

 

빛을(good)이라고 합니다. 빛은 주님으로 말미암으며, 주님은 선 그 자체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둠(darkness)은 모든 것, 곧 사람이 새롭게 잉태되어 태어나기 전, 그동안 빛처럼 보여 그런 줄 알았던 모든 걸 말하는데요, 사람이 새롭게 태어나기 전에는 악은 선처럼 보이고, 거짓은 진리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실상은 이들 악과 거짓은 어둠, 곧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그래서 여전히 사람 안에 있는 걸로만 구성되는 어둠입니다. 주님에게 속하는 건 그게 뭐든지 다 (day)과 비교됩니다. 빛에 속하기 때문이지요. 반면, 사람의 본성(own, proprium,자아,고유 속성)은 뭐든지 다 (night)과 비교됩니다. 어둠에 속하기 때문인데, 이런 비교는 말씀에서 자주 나옵니다. Light is called “good,” because it is from the Lord, who is good itself, The “darkness” means all those things which, before man is conceived and born anew, have appeared like light, because evil has appeared like good, and the false like the true; yet they are darkness, consisting merely of the things proper to man himself, which still remain. Whatsoever is of the Lord is compared to “day,” because it is of the light; and whatsoever is man’s own is compared to “night,” because it is of darkness. These comparisons frequently occur in the Word.

 

 

해설

 

AC.21은 창1: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의 영적 의미를 풀어 주며, 거듭남 과정에서 ‘빛과 어둠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빛이 ‘좋다’고 불린 것은 그 빛이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선 그 자체이시며, 그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선하고 참되며 생명을 주는 것이기에, 영적인 빛은 곧 주님의 선의 작용입니다. 반대로 “어둠”은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 스스로 가지고 있던 모든 사고와 감정 상태를 뜻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본래 어둠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는 종종 빛처럼 보입니다. 즉, 악이 선처럼, 거짓이 진리처럼 보이는 자기중심적 착시가 거듭남 이전의 자연적 인간을 지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사람의 고유 본성(man’s proprium)의 본질이며, 주님의 빛이 없을 때 사람은 자신의 욕망과 지혜를 마치 빛인 것처럼 의지하지만, 실제로는 영적 실재와 전혀 맞닿아 있지 않은 어둠 속에 있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이 비추시는 진정한 빛이 들어오면, 이전에 빛처럼 보였던 자기 지혜와 자기 사랑의 판단들이 모두 어둠으로 드러납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에서는 주님에게 속한 모든 것을 “(day)에 비유하고, 사람 자신에게서 나온 모든 것을 “(night)에 비유합니다. 낮은 주님의 빛 안에서 분별과 생명이 있는 상태이고, 밤은 주님의 빛이 없고 자기 고유의 상태만이 작용하는 어둠의 상태입니다. 이러한 낮과 밤의 비유는 시편과 예언서, 복음서 등 성경 전반에서 반복되는 주제이며, “빛과 어둠”, “낮과 밤”의 구분은 곧 ‘주님에게 속한 것과 인간에게 속한 것의 영적 구분’을 뜻합니다. AC.21은 그래서, 창세기의 첫 창조 행위인 빛의 분리가 곧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첫 번째 영적 분별—주님의 것과 자기 고유의 것의 분리—임을 강조하며, 거듭남의 근본 원리가 바로 이 구별에서 시작됨을 보여 줍니다.

 

 

 

AC.20, 창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 거듭남이 시작된 사람의 첫 번째 상태는 그가 선과 참이 뭔가 더 높은 거라는 걸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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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1:3)

 

AC.20

 

거듭남이 시작된 사람의 첫 번째 상태는 그가 선과 참이 뭔가 더 높은 거라는 걸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거의 외적이기만 한 사람들, 그러니까 겉이기만 한 겉의 사람들은 선과 진리라는 게 무엇인지조차 모르는데요, 그들은 자기 사랑(the love of self)과 세상 사랑(the love of the world)에 속한 모든 게 선이며, 그런 사랑들한테 호의적인 게 진리라는 이상한, 뒤집힌 환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선은 악이며, 그런 진리는 거짓임을 그들은 깨닫지를 못하기 때문인데, 그러나 사람이 새롭게 잉태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 곧 자기의 선은 사실은 선이 아니며, 또한 그가 빛 가운데 더욱 들어갈수록, 이 빛은 주님이신데요, 주님은 선과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이런 사실들을 그는 처음으로 알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존재하신다(the Lord exists)는 사실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고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친히 가르치셨습니다. The first state is when the man begins to know that the good and the true are something higher. Men who are altogether external do not even know what good and truth are; for they fancy all things to be good that belong to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and all things to be true that favor these loves; not being aware that such goods are evils, and such truths falsities. But when man is conceived anew, he then begins for the first time to know that his goods are not goods, and also, as he comes more into the light, that the Lord is, and that he is good and truth itself. That men ought to know that the Lord exists he himself teaches in John: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8:24) Except ye believe that I am, ye shall die in your sins (John 8:24).

 

또 주님은 선 그 자체, 즉 생명이시며, 진리 그 자체, 즉 빛이시라는 사실과, 그 결과,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그 어떤 것도 선도, 진리도 아니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Also, that the Lord is good itself, or life, and truth itself, or light, and consequently that there is neither good nor truth except from the Lord, is thus declared: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1, 3-4, 9)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God was the Word. All things were made by him, and without him was not anything made that was made. In him was life, and the life was the light of men. And the light shineth in darkness. He was the true light, which lighteth every man that cometh into the world (John 1:1, 3–4, 9).  

 

 

해설

 

AC.20은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상세하게 밝히며, 그것이 단순히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기 시작하는 상태가 아니라, ‘선과 진리에 대한 최초의 참된 인식이 열리는 순간’임을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거듭남의 첫 단계는, 사람이 처음으로 “선과 진리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보다 더 높은 것(higher)”임을 깨닫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거듭나기 전의 사람은 선을 자기에게 유리한 것, 진리를 자기 욕망과 생각을 뒷받침해 주는 것 정도로 이해하며,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것들을 모두 선으로 착각하고, 그것을 지지하는 생각들을 모두 진리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비가 움직여 속 사람이 조금이라도 열리기 시작하면, 사람은 처음으로 ‘자기 안의 선이라 여겼던 것이 사실은 악이며, 진리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자기중심적 거짓’임을 감지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에 찾아오는 최초의 영적 각성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새로 잉태되는 단계conceived anew”라 부르며, 바로 이때 사람이 비로소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과 진리 자체이시다”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이 인식은 지적 동의가 아니라, 영적 빛이 내면에 처음 스며들어오는 체험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요한복음 824절,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는 말씀을 인용하며, 거듭남의 첫 단계는 반드시 ‘주님이 계심을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강조합니다. 이어서 요한복음 1장의 위대한 선언—“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를 제시하여, 선과 진리의 모든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즉, 사람의 어떤 선도, 어떤 진리도 스스로 낳을 수 없고, 모두 주님으로부터 흐르는 생명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는 말씀처럼, 이 단계는 여전히 무지와 혼돈 속에 있으면서도, 주님의 빛이 처음으로 비추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정리하면, AC.20이 말하는 첫 상태는 종교적 자각의 시작을 넘어, ‘자기중심적 선과 진리의 붕괴’, ‘주님이 선과 진리의 유일한 근원임을 인식하는 첫 빛’, ‘영적 인간으로 잉태되는 시작점’이라는 매우 깊고 결정적인 영적 전환의 순간입니다.

 

 

 

AC.21, 창1:4, 5,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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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창1:2, '수면 위, 리메인스'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은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를 의미하는데, 이를 가리켜 ‘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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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2)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은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를 의미하는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라든지, 혹은 마치 암탉이 자기 알을 품듯 품으시다(brood)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주님이 사람 안에 숨겨 보석처럼 소중하게 보관해 오신 것들을 가리키는데요, 말씀 전반에 걸쳐 이것을 리메인스(remains), 남은 자(a remnant)라고 합니다. 이는 참과 선에 관한 지식으로 되어 있습니다.이 리메인스라는 것은, 겉의 일들이 황폐해질 때까지는 결코 빛, 즉 낮 가운데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 지식을 여기서는 수면 위(the faces of the waters)라 하고 있습니다. By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 The things over which it moves are such as the Lord has hidden and treasured up in man, which in the Word throughout are called remains or a remnant, consisting of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which never come into light or day, until external things are vastated. These knowledges are here called “the faces of the waters.  

 

 

해설

 

AC.19는 창1:2의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라는 구절을 해석하면서, 거듭남의 시작에서 주님의 자비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은 ‘주님의 자비(mercy)를 뜻한다고 설명하며, “운행하시니라(move) 또는 “품으시다(brood)라는 표현을 암탉이 알을 품어 생명이 깨어나도록 하는 모습에 비유합니다. 즉, 거듭남 이전의 인간은 아직 영적 생명을 갖고 있지 않지만, 주님의 자비는 마치 어미 새가 알을 보호하는 것처럼, 사람 안에 숨겨진 잠재적 생명을 깨우기 위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럼 이 자비가 무엇을 “운행”하는가?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바로 ‘리메인스(remains)라고 말합니다. 리메인스는 사람이 유아기부터 성장 과정 중에 경험한 선한 감정들, 신앙적 인지들, 선과 진리에 대한 작고 순수한 인상들, 하나님에 대한 어린 마음의 감각 같은 것들로, 주님이 사람 안에 조용히 저장해 두시는 신적 씨앗입니다. 이 리메인스는 평소에는 의식되지 않지만, 외적 삶이 황폐해지고(vastation), 자기 고유의 욕망과 거짓이 잠잠해질 때 비로소 빛을 발하며, 거듭남의 기반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리메인스를 창1:2의 “수면 위(the faces of the waters)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waters)은 진리의 지식들을, 그 위의 “얼굴들(faces)은 사람 안에 남아 있는 선한 인상들, 즉 주님이 보존해 두신 신적 흔적들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리메인스가 없다면 어떤 사람도 거듭날 수 없으며, 주님의 자비가 운행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AC.19는 따라서 거듭남의 시작이 인간의 결심이나 도덕적 노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람 안에 미리 심어 두신 선과 진리의 씨앗을 깨우는 자비의 역사’에서 비롯됨을 강조합니다.

 

 

 

AC.20, 창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 거듭남이 시작된 사람의 첫 번째 상태는 그가 선과 참이 뭔가 더 높은 거라는 걸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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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 창1:2, '깊음 위'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 ‘깊음 위’(faces of the deep)는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의 탐욕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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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2)

 

AC.18

 

깊음 위(faces of the deep)는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의 탐욕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인데, 그는 전적으로 이런 것들의 사람이며, 이런 것들 안에 완전히 잠긴 사람입니다. 이 상태는 빛이라는 게 전혀 없는 상태로, 그는 무슨 깊음(deep)과도 같은, 뭔가 희미하고 혼란스러운, 그런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말씀 여러 곳에서는 표현하기를 깊음(deeps), ‘바다 깊은 곳(depths of the sea)이라 하는데, 이는 말리신(dried up) 상태, ‘황폐해진(wasted)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이 거듭나기 전 상태이지요. 이사야입니다. The “faces of the deep” are the cupidities of the unregenerate man, and the falsities thence originating, of which he wholly consists, and in which he is totally immersed. In this state, having no light, he is like a “deep,” or something obscure and confused. Such persons are also called “deeps,” and “depths of the sea,” in many parts of the Word, which are “dried up,” or “wasted,” before man is regenerated. As in Isaiah:

 

9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10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11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51:9-11) Awake as in the ancient days, in the generations of old. Art not thou it that drieth up the sea, the waters of the great deep, that maketh the depths of the sea a way for the ransomed to pass over? Therefore the redeemed of Jehovah shall return (Isa. 51:9–11).

 

이런 사람은 또한 하늘에서 보면, 생기라고는 전혀 없는, 무슨 까만 덩어리로 보이는데요,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표현에는 인간의 황폐함(the vastation of man)이라는, 선지서에 자주 언급되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이 거듭남의 선행 상태입니다. 사람은 참된 것을 알 수 있기 전에, 그리고 선한 것으로 영향받기 전에, 먼저 이런 것의 유입을 방해하고 저항하는 것들을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이유로, 새 사람이 잉태될 수 있기 전에, 반드시 옛 사람이 먼저 죽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Such a man also, when seen from heaven, appears like a black mass, destitute of vitality. The same expressions likewise in general involve the vastation of man, frequently spoken of by the prophets, which precedes regeneration; for before man can know what is true, and be affected with what is good, there must be a removal of such things as hinder and resist their admission; thus the old man must needs die, before the new man can be conceived.

 

※ 위 인간의 황폐함(the vastation of man)이라는 표현에 사용된 영어 vastation은 사어(死語)에 가까운 말인지 사전에도 잘 안 나옵니다. NCE(New Century Edition)역에서는 이를 overall spiritual devastation으로 번역했습니다.  

 

 

해설

 

AC.18은 거듭남 이전의 인간 상태를 더욱 세밀하게 설명하며, 창1:2의 표현 “깊음(the deep)이 단순한 혼돈이 아니라 ‘아직 거듭나지 않은 인간 전체를 구성하는 욕망과 거짓의 혼합물’이라는 점을 밝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깊음 위(faces of the deep)라는 표현은 거듭나지 않은 인간 속에 자리 잡은 각종 욕망(cupidities)과 그 욕망에서 비롯된 거짓들(falsities)을 말합니다. 인간은 거듭나기 전에는 선하고 참된 것보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온 생각과 욕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모든 것이 뒤엉켜 있는 상태가 바로 “깊음”입니다. 이 상태는 주님의 빛이 없는 완전한 어둠이기 때문에, 사람은 스스로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진리인지 분별할 수 없고, 영적 방향감각 없이 혼란 속에 잠겨 있습니다. 성경에서 종종 인간을 “깊음”, “바다 깊은 곳”이라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인데, 거듭남 이전의 사람은 이러한 깊음이 “말리신(dried up) 혹은 “황폐해진(wasted)으로 묘사됩니다. 이사야 519-11절에서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여호와라고 한 것은, 주님이 인간 안의 욕망과 거짓을 물리치시고, 그 속에서 구속된 자들이 지나갈 길을 여신다는 뜻이며, 곧 주님이 거듭남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먼저 인간 내부의 혼돈을 제거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런 사람은 또한 하늘에서 보면, 생기라고는 전혀 없는, 무슨 까만 덩어리로 보인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외적 생명은 활발해 보일지라도 영적 생명이 전혀 없을 때 천사들에게는 빛과 생기가 전무한 상태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표현은 예언서에서 자주 말하는 “황폐(vastation)의 교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황폐는 주님이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참된 것과 선한 것이 들어올 수 있도록 이전의 거짓과 욕망이 제거되거나 약화되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즉, 사람 안의 ‘옛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하고, 그래야만 ‘새 사람’이 잉태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죽음은 도덕적 자멸이 아니라, 주님이 거듭남을 시작하기 위해 허용하시는 내적 정리 작업이며, 진리와 선이 들어올 공간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따라서 AC.18은 “깊음”이라는 성경적 상징을 통해, 거듭남의 초기에서 반드시 선행해야 하는 내적 분해와 정화의 과정을 설명하며, 인간의 변화는 언제나 주님의 빛이 깊음 위로 움직이기 전에, 먼저 그 깊음이 드러나고 비워지는 과정을 거침을 가르쳐 줍니다.

 

 

 

AC.19, 창1:2, '수면 위, 리메인스'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은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를 의미하는데, 이를 가리켜 ‘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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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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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1:2)

 

AC.17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가리켜 혼돈하고 공허한 땅(earth void and empty), 또 거기에 선과 진리가 전혀 파종되지 않은 지면(ground)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아직 그 안에 선과 진리가 하나도 씨 뿌려지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서혼돈(void)은 선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공허(empty)는 진리가 하나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 결과, ‘흑암(thick darkness) 상태, 즉 어리석은 상태가 되며, 주님 신앙(faith in the Lord)에 속한 모든 것에,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영적, 천적 생명(spiritual and heavenly life)에 속한 모든 것에 무지한 상태가 됩니다. 그런 사람에 관해 주님은 예레미야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Before his regeneration, man is called the “earth void and empty,” and also the “ground” wherein nothing of good and truth has been sown; “void” denotes where there is nothing of good, and “empty” where there is nothing of truth. Hence comes “thick darkness,” that is, stupidity, and an ignorance of all things belonging to faith in the Lord, and consequently of all things belonging to spiritual and heavenly life. Such a man is thus described by the Lord through Jeremiah:

 

22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4:22, 23) My people is stupid, they have not known me; they are foolish sons, and are not intelligent; they are wise to do evil, but to do good they have no knowledge. I beheld the earth, and lo a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Jer. 4:22–23).  

 

 

해설

 

AC.17은 창1:2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는 표현이 인간 개인에게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명확히 밝히며, 거듭남 이전의 영적 상태가 어떤 모습인지 사실적으로 그려 줍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거듭남 이전의 사람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earth void and empty)라고 하는데, 이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악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선과 참된 진리가 아직 그의 내면에 뿌리내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혼돈(void)는 선의 부재를, “공허(empty)은 진리의 부재를 의미하며, 이 둘의 부재가 결합되면 창세기가 묘사한 “흑암”, 즉 영적 어둠과 무지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우둔함(stupidity)과 “신앙의 모든 것에 대한 무지(ignorance)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지적 무지가 아니라, 주님에 대한 참된 인식과 천국의 질서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은 선과 진리에 대해 아무런 기준도 없기 때문에, 외적으로는 지혜롭고 능력 있어 보일지라도 영적 실재를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악을 행하는 데는 능숙하고 교활하지만, 선을 행하는 데에는 지식도 의지도 없는 상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렘4:22, 23을 인용하여, 주님이 이러한 인간의 상태를 어떻게 묘사하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22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여기서 “”은 인간의 외적 삶(겉 사람)을, “하늘”은 내적 삶(속 사람)을 의미하는데, 거듭남 이전에는 겉 사람 안에는 선이 없고, 속 사람 안에는 진리의 빛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라는 표현은 사람이 영적으로 무엇이 참된 것인지조차 모른다는 뜻이며, 이때 그는 비록 종교적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참된 의미로 이해하거나 적용할 수 있는 내적 지각(perception)이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가 정죄의 상태가 아니라 ‘거듭남이 시작되기 이전 누구나 통과하는 자연적 상태’라고 강조합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빛과 선이 들어오기 전에는 인간의 내면은 언제나 혼돈과 공허 속에 있으며, 주님은 이 상태를 정죄하시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1:2) 것처럼, 이 혼돈과 무질서의 바다 위에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시기 위한 준비를 하십니다. 따라서 AC.17은 영적 삶의 출발점이 결코 밝고 지혜로운 상태가 아니라, ‘무지와 혼돈, 선과 진리의 결핍’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밝혀 주며, 거듭남의 첫걸음은 주님이 임하시기 전 우리의 실제 상태를 자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AC.18, 창1:2, '깊음 위'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 ‘깊음 위’(faces of the deep)는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의 탐욕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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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서 여러 곳에서는 이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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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1:1)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서 여러 곳에서는 이때를 ‘옛날’(days of old, [antiquitatis])이라 하기도 하고, ‘영원’(days of eternity)이라 하기도 합니다. ‘태초’(beginning)는 또한 거듭나는 중인 사람의 첫 번째 시기, 기간을 말하기도 하는데요, 이때 사람은 새롭게 태어나고, 생명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새 창조’(new creation)라고도 하지요. 선지서들 가운데 거의 모든 곳에서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라는 표현들은 그 상징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다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이사야를 보면, The most ancient time is called “the beginning.” By the prophets it is in various places called the “days of old” [antiquitatis] and also the “days of eternity.” The “beginning” also involves the first period when man is being regenerated, for he is then born anew, and receives life. Regeneration itself is therefore called a “new creation” of man. The expressions to “create,” to “form,” to “make,” in almost all parts of the prophetic writings signify to regenerate, yet with a difference in the signification. As in Isaiah: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43:7) 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 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 I have formed him, yea, I have made him (Isa. 43:7).

 

그리고 그래서 같은 선지서에서 주님은 ‘구속자’(redeemer), ‘태에서부터 지으신 이’(former from the womb), ‘만드신 이’(maker) 및 ‘창조자’(creator)라 일컬음을 받으십니다. And therefore the Lord is called the “redeemer,” the “former from the womb,” the “maker,” and also the “creator”; as in the same prophet: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43:15) I am Jehovah your holy one, the creator of Israel, your king (Isa. 43:15).

 

시편에서는 In David: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102:18) The people that is created shall praise Jah (Ps. 102:18).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104:30)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30).

 

‘천’(, heaven)은 속 사람을, ‘지’(, earth)는 아직 거듭나기 전인 겉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들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That “heaven” 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 “earth” the external man before regeneration may be seen from what follows.

 

 

해설

 

AC.16은 창1:1의 “태초에”라는 한 단어가 담고 있는 영적 깊이를 풀어 주면서, “창조”라는 표현을 문자적 우주 기원에만 묶어 두지 않고 ‘태고교회와 개인의 거듭남’이라는 두 차원에서 동시에 읽도록 길을 열어 줍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태초(beginning)가 역사적으로는 ‘가장 옛 시대, 곧 태고교회의 시대’를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예언서들에서 자주 나오는 “옛날”, “영원”이라는 표현이 바로 이 시기를 가리키는데,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살던 인류 최초 교회의 시기입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태초”라는 말이 단지 과거의 어떤 시점만을 의미하지 않고, ‘사람이 거듭남을 받기 시작하는 첫 시기’도 함께 포함한다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거듭날 때, 그는 마치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새로운 생명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새 창조(new creation)라고 부릅니다. 이때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make)라는 표현들은 예언서에 거의 빠짐없이 나오는데, 문자적으로는 세상과 민족의 형성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여도, 속뜻으로는 ‘사람을 새롭게 하시고, 속 사람을 재형성하시며, 겉 사람을 질서 안에 두시는 주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를 뜻합니다. 이 단락에서 인용하는 사43:7,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는 말씀은, 주님이 당신의 영광, 곧 사랑과 진리가 드러나도록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일을 “창조, 조성, 제작”이라는 세 표현으로 다르게 말해 준 예입니다. 또 같은 예언서에서 주님이 “구속자, 태에서부터 조성하신 이, 만드신 이, 창조자” 등으로 불리는 것 역시, 주님이 사람을 단순히 밖에서 도와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 전체를 속에서부터 다시 빚으시는 분’임을 드러냅니다. 다윗의 시편에서도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102:18),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104:30)라고 할 때, 단순히 새로운 민족이 생겨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영이 임하실 때 사람과 교회가 새롭게 거듭나고, 그 결과로 ‘땅의 얼굴’, 곧 인간의 겉 삶과 외적 상태가 새로워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창세기 1장에서 나오는 “하늘”과 “”도 문자 그대로만 보면 우주의 위, 아래를 가리키지만, 속뜻으로는 거듭남 이전에 존재하는 인간의 두 차원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곧 “하늘”은 사람 안의 ‘속 사람’(내적 인간)을, “”은 ‘겉 사람’(외적 인간)을 상징합니다. 이 둘이 혼돈과 공허, 흑암 속에 있을 때 주님이 창조 사역을 시작하시는데, 이것이 곧 인간 개인에게서는 거듭남의 시작이며, 인류 전체에게서는 태고교회와 그 이후 교회들을 세워 가시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AC.16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짧은 말씀 속에, (1) 태고교회라는 가장 옛 시대의 시작과, (2) 오늘 여기서 각 사람이 주님 안에서 새로 시작하는 거듭남의 첫 단계,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열려 있음을 보여 주며, 성경의 “창조, 조성, 만듦”이라는 모든 언어가 궁극적으로는 ‘사람을 새롭게 빚으시는 주님의 내적 사역’, 곧 거듭남을 가리키는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AC.17,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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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 창1, '천국 전체가 오직 주님 외에는' (AC.6-15)

AC.15 천국 전체가 오직 주님 외에 무슨 다른 아버지라는 건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과 아버지는 하나이시기 때문인데요, 이는 아래와 같이 그분 자신 친히 말씀하신 사실입니다. In the univers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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