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4:26)

 

AC.440

 

방금 인용한 말씀이 그 교회의 예배가 체어리티에서 비롯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call upon the name of Jehovah)이 주님을 예배하는 모든 예식에서 관례적이고 일반적인 말투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분명합니다. 또한 이 예배가 체어리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여호와’(Jehovah)가 ‘하나님’(God)이라고 불렸던 앞 구절과 달리 여기서는 ‘여호와’로 언급되었다는 사실에서 분명합니다. 또한 주님은 체어리티로만 예배받으실 수 있다는 사실로도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예배는 체어리티 아닌 신앙에서는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예배는 단지 입술에서 나오는 것이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call on the name of Jehovah)이 주님을 예배하는 모든 예배에서 관례적인 말투라는 것은 말씀에서 나타나는데,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경우입니다. That by the words just quoted is signified the worship of that church from charit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is a customary and general form of speech for all worship of the Lord; and that this worship was from charit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Jehovah” is here mentioned, whereas in the preceding verse he was called “God,” as well as from the fact that the Lord cannot be worshiped except from charity, since true worship cannot proceed from faith that is not of charity, because it is merely of the lips, and not of the heart. That to “call on the name of Jehovah” is a customary form of speech for all worship of the Lord, appears from the Word; thus it is said of Abraham, that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12:8);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13:4) “he built an altar to Jehovah, and called on the name of Jehovah” (Gen. 12:8; 13:4)

 

그리고 또, 그 and again, that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21:33) he “planted a grove in Beersheba, and called there on the name of Jehovah, the God of eternity” (Gen. 21:33).

 

이 표현이 모든 예배를 포함한다는 것은 이사야서에서 분명합니다. That this expression includes all worship, is plain from Isaiah:

 

22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롭게 여겼으며 23네 번제의 양을 내게로 가져오지 아니하였고 네 제물로 나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는 제물로 말미암아 너를 수고롭게 하지 아니하였고 유향으로 말미암아 너를 괴롭게 하지 아니하였거늘 (사43:22, 23)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hath said, thou hast not called upon me, O Jacob, but thou hast been weary of me, O Israel. Thou hast not brought to me the small cattle of thy burnt offerings, neither hast thou honored me with thy sacrifices. I have not caused thee to serve with an offering, nor wearied thee with incense, (Isa. 43:22–23)

 

그 본문에는 모든 표상적 예배에 대한 요약이 나와 있습니다. in which text a summary is given of all representative worship.

 

해설

 

스베덴보리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표현이 특정 기도문이나 한순간의 행위를 뜻하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이는 성경 전반에서 주님께 드리는 모든 예배 전체를 가리키는 관용적, 총칭적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말로 부르는 행위만이 아니라 삶, 제사, 신뢰, 순종이 함께 어우러진 전인적 예배를 뜻하는 것이지요. 이 표현은 예배의 범위가 아니라 본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12:8; 13:4; 21:33)는 구절들은, 단순한 호칭이나 발성이 아니라 삶의 방향과 신뢰가 주님께로 향한 상태를 뜻합니다. 이처럼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예배의 형식이 아니라 주님과의 결합 상태를 요약합니다.

 

AC.440은 왜 여기서 ‘하나님(God)이 아니라 ‘여호와(Jehovah)가 사용되는지를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용례에서 ‘하나님’은 진리와 신앙의 측면, ‘여호와’는 사랑과 자비의 근원을 가리킵니다. 앞 절에서는 신앙의 질서가 다뤄졌기에 ‘하나님’이 쓰였고, 이제 체어리티가 중심이 된 예배가 시작되었기에 ‘여호와’가 쓰입니다. 이 명칭의 전환은 예배의 질적 전환, 곧 입술의 신앙에서 마음의 사랑으로라는 전환을 표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언합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 나온 예배는 참된 예배가 아니다. 그것은 말과 형식은 있으나 마음의 결합이 없는 예배입니다. 참된 예배는 오직 체어리티에서만 흘러나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의 섬김 아래 있을 때에만, 예배는 생명을 가집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사43:22-23을 인용합니다. 그 본문에서 주님은 번제, 제사, 향 등 모든 대표적 의식을 열거하시며 ‘너희가 나를 부르지 않았다’고 책망하십니다. 문제는 의식의 부재가 아니라, 체어리티의 부재였습니다. 예배의 총량이 아니라 근원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선언은, 이 교회의 예배가 체어리티에서 흘러나오는 예배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의무나 전통이 아니라, 사랑의 질이 예배를 규정합니다. 이때 예배는 삶과 분리되지 않고, 삶 자체가 예배의 자리로 확장됩니다.

 

AC.440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창4:26의 말은 시간상의 시작이 아니라 본질상의 시작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의 길로 정렬되었고, 그 결과 예배는 입술에서 마음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C.441, 창4:26,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처음이 아니라 재개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1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이때에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은, 다른 어떤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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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9, 창4:26, 에노스는 ‘참된 영적 인간’(human spiritual man)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39 ‘셋’(Seth)이 체어리티가 오는 신앙을 상징한다는 것은 앞 구절에서 드러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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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4:26)

 

AC.439

 

‘셋’(Seth)이 체어리티가 오는 신앙을 상징한다는 것은 앞 구절에서 드러났습니다. 그의 ‘이름이 에노스인 아들’(son, whose name was Enosh)이라는 표현이 체어리티를 신앙의 중심으로 여기는 교회를 상징한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내용과 그 이름이 ‘에노스’(Enosh)라고 불린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는데요, 이 이름은 ‘사람’(man), 곧 천적 인간(celestial man)이 아닌 인간적 영적 인간(human spiritual man)을 의미합니다. 이런 인간을 여기서 ‘에노스’라고 하는 것이지요. 바로 뒤에 이어지는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라는 말씀에서도 동일한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That by “Seth” is signified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was shown in the preceding verse. That by his “son, whose name was Enosh,” is signified a church that regarded charity as the principal of faith, is also evident from what has been said before, as well as from the fact that it is called “Enosh,” which name also means a “man,” not a celestial man, but that human spiritual man which is here called “Enosh.”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words that immediately follow: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해설

 

AC.439는 앞선 AC.438의 내용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의미를 더 정밀하게 고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셋은 체어리티로 나아가게 하는 신앙, 에노스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주된 것으로 삼은 교회입니다. 이는 단순한 세대 구분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가 어디에 놓이는가에 대한 결정적 구분입니다. 이 반복은 중복이 아니라, 독자가 놓치기 쉬운 핵심을 다시 붙잡아 주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서는 이름입니다. ‘에노스(Enosh)는 히브리어로 ‘사람’을 뜻하지만, 그 의미는 ‘아담’이나 ‘이쉬’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분명히 구분하여 말합니다. 에노스는 천적 인간(celestial man)이 아니라, 영적 인간(spiritual man)을 뜻합니다. 이는 태고교회처럼 사랑을 즉각적으로 지각하는 상태가 아니라, 신앙을 통해 사랑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인간 상태를 가리킵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 진리를 통해 선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결정적인 점은, 에노스로 표상된 교회가 체어리티를 신앙의 ‘주된 것(principal)으로 삼았다는 사실입니다. 즉, 진리를 판단하고 선택하는 기준이 사랑과 이웃에 대한 선입니다. 신앙은 여전히 필수적이지만, 더 이상 중심이 아닙니다. 이는 가인의 신앙, 그러니까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스스로 중심이 된 신앙하고는 정반대의 구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노스’가 ‘사람’을 뜻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 ‘사람’이 완전한 천적 인간이 아니라 인간적 영적 인간(human spiritual man)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인간의 상태가 타락했다는 뜻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상태에 맞는 교회 질서가 확립되었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에노스의 교회는 이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지속 가능한 상태입니다.

 

AC.439는 에노스의 의미가 단지 이름 분석에 그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어지는 구절,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가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이는 이 교회의 예배가 체어리티에서 흘러나오는 예배임을 보여줍니다. 여호와는 사랑과 자비의 신적 본질을 강조하는 이름이며, 그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사랑의 질에 따라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이전에도 예배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노스의 시대에 이르러, 예배는 더 이상 형식이나 두려움, 의무가 아니라 삶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 됩니다. 체어리티가 중심이 되면, 참된 예배는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시점을 예배의 ‘시작’으로 기록합니다. 이는 시간상의 시작이 아니라, 본질상의 시작입니다.

 

이 구조는 교회 역사뿐 아니라 개인의 거듭남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신앙을 통해 사랑을 배우고(셋), 그 사랑이 삶의 기준이 될 때(에노스), 사람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즉, 말과 의식 이전에 삶이 예배가 됩니다.

 

AC.439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참된 ‘사람’은 체어리티를 신앙의 중심에 두는 영적인 사람이며, 그 삶은 자연스럽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로 드러난다.

 

셋은 이 길을 열었고, 에노스는 그 길 위에 선 인간의 이름입니다. 이로써 창세기 4장은 신앙의 회복을 넘어, 사랑이 중심이 된 교회의 탄생으로 마침표를 찍습니다.

 

 

 

AC.440, 창4:26,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0 방금 인용한 말씀이 그 교회의 예배가 체어리티에서 비롯되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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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8, 창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AC.438-442)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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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4:26)

 

AC.438

 

‘셋’(Seth)은 위에서 말했듯이 체어리티가 나오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그의 ‘아들’(son)의 이름은 ‘에노스’(Enosh)인데, 체어리티를 믿음의 원리로 여긴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beginning then to call on the name of Jehovah)는 체어리티에서 나온 그 교회의 예배를 상징합니다. By “Seth” is signified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as was said above; by his “son,” whose name was “Enosh,” is signified a church which regarded charity as the principal of faith; by beginning then to “call on the name of Jehovah” is signified the worship of that church from charity.

 

해설

 

AC.438은 셋이 표상하는 것이 ‘체어리티를 얻게 하는 신앙’임을 다시 확인한 뒤, 그의 아들 에노스를 통해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셋은 체어리티로 이끄는 수단으로서의 신앙이라면, 에노스는 그 신앙을 통해 실제로 형성된 체어리티를 중심에 둔 교회를 표상합니다. 즉, 셋은 ‘’이고, 에노스는 ‘도착’에 가깝습니다. 이 차이는 미묘하지만 결정적입니다. 신앙이 아무리 바르다 해도 체어리티가 중심이 되지 않으면 교회의 질서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에노스가 셋의 ‘아들’로 소개되는 것은, 체어리티가 신앙과 단절되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부터 합법적으로 태어난 결과임을 뜻합니다. 이는 체어리티가 신앙을 대체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제 자리를 지킬 때 자연스럽게 맺히는 열매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 구조는 가인의 오류, 즉 신앙이 체어리티를 밀어내는 상태와 정확히 반대입니다.

 

AC.438의 핵심 문구는 에노스로 표상된 교회가 체어리티를 신앙의 주된 것으로 여겼다는 진술입니다. 여기서 ‘주된 것(principal)이란 단순히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판단의 기준, 삶의 방향, 예배의 중심을 의미합니다. 이 교회에서 신앙은 여전히 필요하지만, 체어리티를 섬기는 위치에 있습니다. 진리는 사랑, 즉 체어리티를 설명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며, 체어리티 없는 진리는 더 이상 신앙으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에노스 시대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표현은 단순히 기도의 시작이나 호칭의 변화를 뜻하지 않습니다. 내적 의미, 즉 속뜻으로 ‘이름’은 질과 본질을 뜻하고, ‘부른다’는 건 그 질에 따라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이 교회의 예배가 체어리티에서 흘러나오는 예배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즉, 의무나 전통이 아니라 체어리티라는 사랑에서 우러난 예배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용례에서 ‘여호와’는 사랑과 자비의 근원을 강조하는 이름입니다. 체어리티를 중심으로 한 교회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예배의 초점이 진리의 정확성보다 사랑의 실천과 자비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이는 예배의 질적 전환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 변화는 예배의 외형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생명을 바꾸는 것입니다. 체어리티가 중심이 되면, 말씀은 논쟁의 재료가 아니라 삶의 등불이 되고, 교리는 판단의 무기가 아니라 섬김의 지침이 됩니다. 에노스로 표상된 교회는 바로 이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때를 예배의 ‘시작’으로 기록합니다. 이전에도 예배는 있었지만, 이제야 비로소 참된 의미의 예배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구조는 개인의 거듭남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배워야 하고(셋), 그 신앙을 통해 삶이 바뀌며, 마침내 체어리티가 삶의 기준이 될 때(에노스), 예배는 의무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호흡이 됩니다. 그때 사람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 즉, 사랑의 질에 따라 살고 예배합니다.

 

AC.438은 창세기 4장의 마지막을 이렇게 봉인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낳기 위해 주어졌고, 체어리티가 중심이 될 때 비로소 예배는 살아난다.

 

셋은 이 길을 열었고, 에노스는 그 길의 목적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주된 것이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삶의 고백입니다.

 

 

 

AC.439, 창4:26, 에노스는 ‘참된 영적 인간’(human spiritual man)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39 ‘셋’(Seth)이 체어리티가 오는 신앙을 상징한다는 것은 앞 구절에서 드러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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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7, 창4:25, ‘셋’(Seth)은 체어리티가 말미암는 새로운 신앙을 의미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7 여기서 ‘셋’(Seth)이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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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4:25)

 

AC.437

 

여기서 ‘셋’(Seth)이 체어리티가 말미암는 새로운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은 그의 이름이 다음과 같은 이유, 곧 하나님께서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 다른 씨를 주셨다’(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는 것 때문에 그에게 주어졌다는 사실로 설명됩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씨를 주셨다’(appointed another seed)는 것은 주님께서 다른 신앙을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씨’(another seed)는 체어리티가 말미암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씨’(seed)가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은 위 AC.255번 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That “Seth” here signifies a new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is explained by his name, which it is said was given him because God “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 That God “appointed another seed” means that the Lord gave another faith; for “another seed” is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That “seed” signifies faith may be seen above (n. 255).

 

해설

 

AC.437은 ‘’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미 그의 영적 의미를 설명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 다른 씨를 주셨다’에 대한 설명 속에서, 셋은 단순히 잃어버린 아들을 보충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께서 새로운 질서를 공식적으로 세우셨음을 알리는 표지입니다. 여기서 ‘대신’이라는 말은 동일한 것을 반복한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회복하신다는 뜻입니다. 곧, 주님은 아벨이라는 체어리티를 같은 자리와 같은 방식으로 되돌려놓지 않으시고, 신앙을 통해 다시 심기게 하시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죽은 아벨을 다시 살리는 것과 같은 어떤 신기한 방식으로 쉽게 이 문제를 해결하실 것 같은데 말입니다.

 

본문은 다른 ‘(seed)가 곧 신앙임을 분명히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선 AC.255번 글을 인용하며, 말씀에서 ‘’는 상응적으로 신앙을 뜻한다고 밝힙니다. 씨는 땅에 심겨 자라 열매를 맺는 시작점이듯, 신앙은 체어리티가 자라나도록 하는 영적 시작점입니다. 중요한 점은, 씨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씨는 열매를 위해 존재합니다. 따라서 ‘씨로서의 신앙’은 체어리티를 낳기 위해 주어진 신앙입니다.

 

셋이 표상하는 신앙은 이전의 신앙, 곧 ‘가인(Cain)으로 표상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과 질적으로 다릅니다. 가인의 신앙은 스스로 목적이 되었고, 그 결과 체어리티를 제거했습니다. 반면 셋의 신앙은 처음부터 체어리티를 목적으로 갖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AC.437은 셋을 ‘체어리티를 얻게 하는 신앙’으로 규정합니다. 이 표현은 신앙의 자리, 즉 신앙이 있어야 할 올바른 자리를 정확히 규정하는 결정적 문장입니다.

 

하나님이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 다른 씨를 주셨다’의 ‘주셨다(appointed)라는 표현에는 주님의 주권적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새 신앙을 발명하거나 선택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교회의 붕괴 속에서도 신앙의 올바른 형태를 지정하고 보존하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셋의 신앙은 인간의 사상적 선택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질서입니다.

 

아벨은 체어리티 그 자체를 표상했고, 가인에 의해 제거되었습니다. 셋은 아벨의 단순한 복원판이 아닙니다. 아벨은 직접적 사랑의 상태였고, 셋은 사랑으로 이끄는 신앙의 상태입니다. 이 차이는 결정적입니다. 태고교회처럼 사랑이 곧바로 지각되던 시대가 지나간 이후, 주님은 신앙을 매개로 사랑이 형성되는 질서를 허락하셨습니다. 셋은 이 새로운 시대의 표상입니다.

 

신앙을 ‘’로 주신 이유에는 인간의 자유가 존중됩니다. 씨는 강제로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시간이 필요하고, 토양과 돌봄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셋으로 표상된 신앙은 사람 안에 체어리티가 자발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 공간을 만듭니다. 이는 강요된 선이 아니라, 자유 안에서 자라나는 선입니다. 주님은 이 질서를 통해 체어리티를 보다 견고하게 회복하십니다.

 

AC.437의 논지는 교회 역사에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동일합니다. 먼저 왜곡된 신앙(가인)이 드러나고, 사랑이 상실된 아픔(아벨의 죽음)을 겪은 후, 주님은 새 신앙(셋)을 주셔서 다시 사랑이 자라게 하십니다. 이때 신앙은 중심이 아니라 출발점입니다.

 

AC.437은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체어리티를 직접 강제로 주시지 않고, 그것을 낳을 수 있는 ‘신앙의 씨’를 다시 주신다.

 

셋은 이 씨의 이름이며, 교회와 인간에게 주어진 희망의 질서입니다. 신앙은 목적이 아니라 길이고, 체어리티는 그 길의 끝에 맺히는 열매입니다.

 

 

 

AC.438, 창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AC.438-442)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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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6, 창4:25, '창4 전체 흐름과 결론'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6 그녀가 셋이라 이름 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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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4:25)

 

AC.436

 

그녀가 셋이라 이름 지은 ‘아들’(son)이 체어리티를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내용과 가인에 대해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mark was set upon him, lest anyone should slay him)는 이야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가인’(Cain)으로, 체어리티는 ‘아벨’(Abel)로 상징하였습니다. 그리고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을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으로, 그리고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심어주시기 위해 신앙을 보존하셨다는 것을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어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신 것으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That by her “son,” whom she named Seth, is signified a new faith, by which charity may be attained,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previously stated, as well as from its being related of Cain that a “mark was set upon him, lest anyone should slay him.” For the subject as it stands in a series is as follows: Faith separated from love was signified by “Cain”; charity, by “Abel”; and that faith in its separated state extinguished charity was signified by Cain slaying Abel. The preservation of faith in order that charity might be thereby implanted by the Lord was signified by Jehovah’s setting a mark on Cain lest anyone should slay him.

 

그 후에 주님께서 신앙을 통해 사랑의 거룩함과 그로부터 비롯된 선을 주신 것을 아다가 낳은 야발을 통해 상징하였습니다. 계속해서 신앙의 영적인 것이 주어진 것을 그의 형제 유발을 통해, 그리고 이들로부터 자연적인 선과 진리가 나왔는데, 이것을 실라가 낳은 두발가인을 통해 상징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4장의 이 두 결론 구절에서 우리는 이 모든 사항의 결론, 즉 요약을 볼 수 있는데요, 즉, ‘남자와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는 이전에 아다와 실라라고 했던 새로운 교회를, ‘셋’(Seth)은 체어리티가 심기는 신앙을,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에서 ‘에노스’(Enosh)는 신앙을 통해 심기는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That afterwards the holy of love and the good thence derived were given by the Lord through faith was signified by Jabal whom Adah bare; and that the spiritual of faith was given, was signified by his brother Jubal; and that from these there came natural good and truth was signified by Tubal-Cain whom Zillah bare. In these two concluding verses of Genesis 4 we have the conclusion, and thus the summary, of all these matters, to this effect, that by the “man and his wife” is signified that new church which before was called Adah and Zillah, and that by “Seth” is signified the faith through which charity is implanted; and in the verse which now follows, by “Enosh” is signified the charity that is implanted through faith.

 

해설

 

AC.436은 창세기 4장의 마지막을 결론(conclusio)으로 규정합니다. 이는 단순한 마무리가 아니라, 지금까지 전개된 모든 상응의 사슬을 한 문장으로 압축해 보여 주는 요약입니다. 다시 말해, 가인으로 시작된 분열의 문제, 표를 통한 보존, 아다, 씰라의 회복적 징후, 그 자녀들, 곧 야발, 유발, 두발가인으로 나타난 단계적 회복이 하나의 목적인 체어리티의 회복으로 수렴함을 밝힙니다.

 

먼저 가인과 아벨의 분리와 상실의 핵심 문제입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그러니까 신앙이 자기 목적화된 상태인데요, 이런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서술은, 신앙이 사랑과 분리될 때 교회 안에서 체어리티가 실제로 소멸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사건이 아니라, 교회의 중심 질서가 붕괴되는 영적 사건입니다.

 

가인의 표’가 의미하는 바는 제거가 아니라 보존의 섭리입니다. 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계속해서 그럼에도 주님은 가인을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가인에게 표를 주심’은 분리된 신앙 자체를 보존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신앙은 사랑의 대체물이 아니라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즉, 신앙은 체어리티를 다시 심기 위한 수단으로 남겨져야 하기 때문인데요, 여기서 이미 본문의 목적이 제시됩니다. 보존된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를 다시 심는 것, 바로 이것이 주님의 일관된 섭리입니다.

 

아다, 씰라와 그 자녀들인데요, 회복의 단계화를 말합니다. 이후의 전개는 회복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아다에게서 야발, 즉 천적이지요, 사랑의 거룩함과 선이, 그리고 유발, 영적이지요, 신앙의 진리와 선이, 계속해서 씰라에게서 두발가인, 이번에는 자연적인데요, 자연적 선과 진리가 태어났다는 서술은, 체어리티 회복이 천적→영적→자연적으로 단계화되어 진행됨을 뜻합니다. 이는 감정의 폭발이나 단번의 변화가 아니라, 질서 있는 재건입니다.

 

셋의 의미는 ‘체어리티를 얻게 하는 신앙’입니다. 이 모든 흐름의 요지가 셋입니다. 셋은 ‘새 신앙’을 표상하지만, 그 신앙은 가인의 신앙과 다릅니다. 셋은 체어리티를 얻게 하는 신앙, 즉, 사랑을 목적으로 하고 사랑으로 귀결되는 신앙입니다. 여기서 신앙의 자리가 바로잡힙니다. 신앙은 중심이 아니라 길이며, 그 길의 끝에는 체어리티가 있습니다. 즉 체어리티를 위해 신앙을 하는 것입니다.

 

에노스인데요, 이는 목적, 곧 체어리티의 실현을 말합니다. AC.436은 다음 절을 미리 밝혀 줍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4:26)

 

셋 다음에 에노스가 나오는데, 에노스는 신앙을 통해 실제로 심어진 체어리티를 표상합니다. 곧, 셋이라는 수단을 통해 에노스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구조이지요. 이것이 창4의 최종 결론입니다. 신앙은 보존되었고, 그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가 다시 실재화됩니다.

 

이러한 흐름은 교회 역사뿐 아니라 개인 거듭남의 질서를 그대로 비춥니다. 주님은 신앙을 폐기하지 않으시고 정렬하셔서, 마침내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십니다.

 

AC.436은 단언합니다. 체어리티는 결코 최종적으로 소멸되지 않는다. 신앙이 왜곡되면 사랑은 가려지지만, 주님은 그 신앙을 보존하여 다시 사랑을 심으십니다. 이것이 창세기 4장의 결론이며, 모든 교회와 모든 신자의 희망입니다.

 

 

 

AC.437, 창4:25, ‘셋’(Seth)은 체어리티가 말미암는 새로운 신앙을 의미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7 여기서 ‘셋’(Seth)이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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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5, 창4:25, '사람(아담)과 그의 아내'라는 표현의 반복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5 여기서 ‘남자’(man)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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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4:25)

 

AC.435

 

여기서 ‘남자’(man)와 그의 ‘아내’(wife)가 위에서 아다와 실라가 상징했던 새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아무도 겉 글자로만 봐서는 알거나 추론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자와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는 전에 있었던 태고 교회와 그 후손을 상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 곧 속뜻과 바로 다음 장(1-4)에서 남자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들이 낳은 셋이 완전히 다른 표현으로 다시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 이는 매우 분명합니다. 이 경우에는 태고 교회의 첫 번째 후손을 상징합니다. That the “man” and his “wife” here mean the new church signified above by Adah and Zillah no one could know or infer from the literal sense, because the “man and his wife” had previously signified the most ancient church and its posterity; but it is very evident from the internal sense, as well as from the fact that immediately afterwards, in the following chapter (verses 1–4), the man and his wife, and their begetting Seth, are again mentioned, but in entirely different words, and in this case there is signified the first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1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1-4)

 

앞의 구절에서 다른 의미가 없었다면 여기서도 같은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첫 장에서 인간과 땅의 소산과 짐승의 창조가 다루어진 것과 같은 방식으로, 두 번째 장에서 그것들이 다시 다루어집니다. 왜냐하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첫 장에서는 영적인 사람의 창조가 다루어지는 반면, 두 번째 장에서는 천적 인간의 창조가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언급에서 이러한 반복이 있을 때마다, 그것은 항상 의미의 차이를 동반하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내적 의미, 곧 속뜻으로밖에는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연결 자체가 주어진 의미를 확증하며, ‘남자[homo]와 아내’라는 표현은 문제의 모 교회를 의미하는 일반적인, 그러니까 관용적인 용어라는 점을 추가로 고려해야 합니다. If nothing else were signified in the passage before us, there would be no need to say the same thing here: in like manner as in the first chapter the creation of man, and of the fruits of the earth, and of the beasts, is treated of, and then in the second chapter they are treated of again, for the reason, as has been said, that in the first chapter it is the creation of the spiritual man that is treated of, whereas in the second chapter the subject is the creation of the celestial man. Whenever there is such a repetition in the mention of one and the same person or thing, it is always with a difference of signification, but what it is that is signified cannot possibly be known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 Here, the connection itself confirms the signification that has been given, and there is the additional consideration that man [homo] and wife are general terms which signify the parent church that is in question.

 

해설

 

AC.435에서 스베덴보리는 독자들이 가장 쉽게 빠질 수 있는 문자적 혼동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즉, ‘사람(아담)과 그의 아내’라는 동일한 표현이 앞에서는 태고 교회를 뜻했고, 여기서는 아다와 씰라로 표상된 새 교회를 뜻한다는 점입니다. 문자적 의미만 붙들고 있다면, 이것은 명백한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 차이는 결코 우연도 오류도 아니며, 오히려 말씀의 본질적 구조를 보여 주는 증거라고 말입니다.

 

그는 먼저, 이 사실이 문자 의미로는 절대 알 수 없고, 오직 ‘내적 의미(internal sense, 속뜻)로만 분별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표현 ‘사람과 그의 아내’가 이미 앞부분에서는 태고 교회와 그 후손들을 뜻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표현이 여기서도 동일한 교회를 뜻한다면, 성경은 불필요한 반복을 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말씀은 결코 그렇게 쓰이지 않습니다. 같은 표현이 반복될 때에는, 언제나 다른 영적 상태가 다루어집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바로 다음 장, 창세기 51–4절을 지목합니다. 거기서도 다시 ‘사람과 그의 아내’와 셋의 출생이 언급되는데, 그 표현과 문맥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분명히 태고 교회의 첫 후손, 곧 가장 오래된 교회의 계보가 다시 다루어집니다. 만일 창4:25의 ‘사람과 그의 아내’가 태고 교회라면, 창5에서 같은 내용을 다시 반복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이 사실 자체가, 창4:25의 ‘사람과 그의 아내’가 다른 교회, 곧 새 교회를 가리킨다는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창세기 1장과 2장의 관계를 예로 듭니다. 두 장 모두 ‘사람의 창조’를 말하지만, 전혀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1장은 영적인 사람의 창조를, 2장은 천적인 사람의 창조를 다룹니다. 표면적으로는 반복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영적 차원과 상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창4와 창5에서 반복되는 ‘사람과 그의 아내’ 역시 서로 다른 교회 상태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중요한 해석 원리가 하나 분명히 드러납니다.

 

말씀에서 동일한 인물이나 사물이 반복될 때, 그것은 항상 ‘같은 것의 반복’이 아니라 ‘다른 상태의 기술’이다.

 

이 차이를 분별하지 못하면, 성경은 모순으로 가득 찬 책이 됩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의 관점에서 보면, 이 반복은 오히려 질서 있고 정밀한 영적 서술 방식입니다. 말씀은 사건을 시간순으로 나열하는 책이 아니라, 교회와 인간 내면의 상태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단계적으로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AC.435의 마지막 문장은 이 해석을 결정적으로 확증합니다. ‘사람(homo)과 아내’라는 표현은 특정 개인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언제나 그때그때 문제 되는 ‘부모 교회(parent church)를 가리키는 일반적, 관용적 용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동일한 표현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동일한 교회를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것은, 말씀의 언어를 자연적 언어로만 오해한 결과입니다.

 

정리하면, AC.435는 이렇게 말합니다.

 

4:25의 ‘사람과 그의 아내’는 아다와 씰라로 표상된 새 교회이며, 창5:1 이하의 ‘사람과 그의 아내’는 태고 교회의 첫 계보를 뜻하고, 이 둘은 시간적으로 이어진 반복이 아니라, 영적으로 서로 다른 층위의 교회 상태입니다.

 

이 설명은 ‘가인의 계보와 셋의 계보가 병행했다는 해석’과 정확히 맞아떨어집니다. 말씀은 먼저 겉으로 드러난 붕괴의 역사(가인)를 끝까지 보여준 뒤, 그와 병행하여 보존되고 있던 생명의 계보(셋)를 다시 꺼내어 조명합니다. 그 과정에서 동일한 표현이 사용되지만, 그 의미는 그때그때 다루는 교회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결국 AC.435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성경의 반복은 중복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으로 내려가는 문이며, 그 문은 내적 의미 없이는 결코 열리지 않는다.

 

성경은 사건을 반복하는 책이 아니라 사람과 교회의 영적 상태를 겹겹이 비추는 책’입니다.

 

 

 

AC.436, 창4:25, '창4 전체 흐름과 결론'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6 그녀가 셋이라 이름 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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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4, 창4: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AC.434-437)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homo]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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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homo]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n, and called his name Seth; for God hath appointed me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for Cain slew him. (4:25)

 

AC.434

 

여기 ‘아담’(man)과 그의 ‘아내’(wife)는 위의 ‘아다와 씰라’(Adah and Zillah)로 상징된 새 교회를, 이름이 셋(Seth)인 그녀의 ‘아들’(son)은 새로운 신앙을 의미합니다. 이 신앙은 체어리티를 얻을 수 있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God 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라는 표현은, 체어리티, 곧 가인이 분리, 소멸시킨 것을 이제 주님이 다시 이 교회에 주신 것입니다. The “man” and his “wife” here mean the new church signified above by “Adah and Zillah”; and by her “son,” whose name was Seth, is signified a new faith, by which charity might be obtained. By “God 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 is signified that charity, which Cain had separated and extinguished, was now given by the Lord to this church.

 

해설

 

AC.434에서 스베덴보리는 창4:25의 문장을 교회의 결정적 전환점으로 읽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담이 자기 아내와’는 단순히 한 부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앞서 상세히 해석된 새 교회 전체를 뜻합니다. 곧 ‘아담’과 ‘그의 아내’는 AdahZillah로 표상된 교회, 다시 말해 천적, 영적, 자연적 차원이 모두 회복되어 질서를 갖춘 교회를 가리킵니다. 이 교회는 사랑(천적)과 신앙(영적), 그리고 삶의 실천(자연적)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결합된 상태로 서 있습니다.

 

이 교회에서 태어난 ‘아들’, 곧 Seth은 ‘새 신앙’을 표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신앙은 가인의 신앙처럼 사랑과 분리된 교리적 확신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셋을 ‘체어리티를 얻게 하는 신앙’으로 규정합니다. 즉, 이 신앙은 스스로 목적이 되는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로 나아가게 하는 통로이자 수단입니다. 이는 신앙의 자리를 바로잡는 매우 중요한 선언입니다. 신앙은 사랑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다시 가능하게 만드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는 말은, 단순한 대체나 보충이 아닙니다. Abel은 체어리티 자체를 표상했고, 그는 Cain—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 의해 제거되었습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신앙이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중심에 섰던 비극을 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체어리티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같은 방식으로 즉각 되돌려 놓지 않으시고, 새 질서로 다시 주셨습니다. 그 새 질서가 바로 셋으로 표상된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가 회복되는 길입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깊은 섭리가 드러납니다. 태고 교회처럼 사랑이 즉각적으로 살아나는 상태는 더 이상 인류에게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신앙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시고, 신앙의 자리를 ‘수단’으로 재배치하셨습니다. 셋은 아벨의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아벨이 다시 살 수 있도록 길을 여는 신앙입니다. 이로써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는 경쟁이나 대체가 아니라, 질서 있는 협력으로 재정립됩니다.

 

또한 ‘다른 씨(seed)라는 표현은 교회의 보존과 연속성을 강조합니다. 씨는 즉각적인 열매가 아니라, 미래를 담은 시작입니다. 주님은 체어리티를 씨로 다시 주셔서, 시간이 지나 자라고 열매 맺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인간의 자유와 성장을 존중하는 방식이며, 동시에 체어리티가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 삶의 열매로 나타나게 하는 길입니다. 셋의 계보가 이후 노아로 이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씨로 보존되어, 황폐의 시대를 지나 새 교회의 근간이 됩니다.

 

결국 AC.434의 요지는 분명합니다. 새 교회는 체어리티를 잃지 않았고, 다만 얻는 방식이 바뀌었습니다. 사랑이 곧바로 지각되던 시대에서, 이제는 신앙을 통해 사랑에 이르는 시대로 전환되었습니다. 셋은 이 전환의 이름이며,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다시 주셨다는 은혜의 표지입니다. 이로써 말씀은 선언합니다. 체어리티는 제거될 수 없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살리기 위해 주어졌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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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를 위하여 오신 참 빛 되신 주님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2:10, 11)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9)

 

 

※ 오늘 부를 찬송가는 순서대로 찬115, ‘기쁘다 구주 오셨네’, 찬125, ‘천사들의 노래가’입니다.

 

 

오늘은 성탄절 당일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먼저 1225일이 성탄절이 된 유래와 그 의미를 살핀 후, 이어서 오늘 본문을 살피고자 합니다.

 

 

우선 왜 1225일인가입니다. 정말 그날 주님이 태어나셨을까요?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날짜는 나오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1225일은 초대 교회 이후 형성된 전통적 기념일일 뿐입니다.

 

여기에는 로마 문화적 배경이 있는데요, 로마에는 ‘동지’(冬至) 전후에 열리던 ‘무적의 태양(Sol Invictus) 축제라는 게 있었습니다. ‘동지’는 어둠이 가장 깊은 날이지만, 이날을 기점으로 다시 낮, 곧 빛이 길어지는 날이지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빛이 어둠을 이기는 시점으로 본 것입니다. 주님을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1:9)으로 본 초대 교회는 그래서 동지의 이런 상징을 ‘세상의 빛으로 오신 주님’과 연결한 것입니다. 즉, ‘동지’의 특징과 로마의 ‘축제’라는 상징을 차용, 이날을 주님 오신 성탄절로 삼은 것이지요. 날짜의 정확성보다 의미의 정확성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주님 오신 그 실제 시기를 짐작할 때도 12월 설은 좀 무리가 있는데요, 그 이유는,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2:8)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유대 지역에서 12월은 우기, 한랭기이며, 밤에 들에서 양을 치는 것은 봄에서 가을 사이가 일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때만 특별히 당시 호적 명령으로 대규모 이동도 있었고요. 이런 현실적 이유로 주님의 탄생을 12월, 그것도 25일로 보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하는 것입니다.

 

주님 탄생의 그 가장 유력한 시기를 유대 절기와 연결지어 생각할 때, 학자들과 신학자들이 가장 주목하는 절기는 바로 ‘초막절(Sukkot, 티쉬리월 / 9-10)인데요, 왜냐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14)라는 말씀에서 이 ‘거하시매’라는 말이 바로 ‘장막을 치다, 초막을 세우다’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초막절은 바로 하나님이 백성과 함께 거하심, 곧 ‘임마누엘’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계심을 선포하는 절기이지요. 이 절기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하는 ‘강생’(降生, 신이 인간으로 태어남)의 핵심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또한 이 절기는 ‘빛의 절기’이기도 합니다. 이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거대한 등불 점화가 있기 때문인데, 이는 ‘나는 세상의 빛(8:12)이라 하시는 주님의 선언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초막절에 오셨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견해가 매우 강하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실제 역사 연대기보다 섭리의 질서입니다. 주님의 강생은 자연의 한 날이 아니라 인류의 영적 밤의 한가운데에 비추어진 ‘새 날’이기 때문이지요.

 

결론적으로, 1225일은 역사의 어떤 한 날짜라기보다는 인류의 ‘어둠이 가장 깊을 때 오신 빛’이라는 상응적 표지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특정 날짜보다, 인류가 가장 어두워진 ‘’에 오신 것이지요.

 

참고로, 이 ‘어둡다’는 것은 어떤 한 시대가 주님의 선과 진리에 대해 완전히 깜깜한 상태를 말합니다. 교회 밖 세상인 로마는 그때가 가장 찬란한 시절이었지만, 정작 교회 안은 그때가 가장 어두운 때였습니다. 주님이 누구시며, 언제, 왜 오시는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고, 또 관심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적으로 ‘새 교회’는 항상 이전 교회의 종말의 때에 일어납니다. 가인 계보의 라멕 때가 그랬고, 셋 계보의 라멕 때가 그랬지요. 태고 교회에서 고대 교회로, 고대 교회에서 유대 교회로, 그리고 유대 교회에서 기독 교회로 이어져 온 이 교회 시대마다 이런 종말과 일어남은 반복되었고, 그것이 주님의 오심, 곧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의 강생, 주님의 초림으로 지금 유대 교회에서 기독 교회로 새 교회 시대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지난 2천 년을 이어온 현 기독 교회는 말씀의 속뜻으로 오시는 주님의 재림으로 종말을 고하고, 지금은 이후 영원한 ‘새 교회’로 옮겨 가고 있는 중이며, 주님 초림 당시에 침례 요한을 통해 그 준비를 하셨다면, 주님 재림의 지금은 스베덴보리를 통해 그 준비를 하신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2:10, 11)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신다면, 보통은 하나님은 신이시므로 그 권능과 위엄을 떠올립니다. 과거 세상을 호령한 왕과 황제들, 영웅들의 개선이 그랬으니까요. 그러나 성탄의 주님은 가장 연약한 모습, 말도 못 하는 아기로 오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겸손의 상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삶 안으로 실제로 들어오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참 역설적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께서 이토록 조용히, 심지어 들에서 밤에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을 상대로 참 초라하게, 그것도 여관에 빈방이 없어 마구간에서 태어나 말 구유에 누이시다니요! 주님의 방식은 참 다릅니다. 세상 방식과 정말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주님이 부여하신 쓰임새의 삶을 살 때 주님이 일하시는 이런 방식을 반드시 따라야 하겠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경하러 오셨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인간 안에서 다시 시작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성육신은 인간 안에서 하늘과 땅을 다시 연결하시는 사건, 즉. 외적 역사보다 내적 탄생이며, 또한 빛은 지식이 아니라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을 다음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성탄은 ‘하늘과 땅이 다시 이어진 날’

 

천사는 말합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2:11)

 

이 말씀은 단지 한 아기의 출생을 알리는 소식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끊겨가던 하늘과 인간의 연결이 다시 열렸다는 선언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자기를 지은 창조주와 늘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어야만 존속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왜 태어났는지도 모른 채 그저 자기 잘난 맛으로 사는 줄 알지만 말입니다. 존속이란 존재를 유지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께서는 우리를 지으신 후 나 몰라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늘 순간순간 존속할 수 있도록 우리로 하여금 자신과 연결되어 자신의 생명을 공급받아 살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마치 가지가 포도나무에 연결되어 있어야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처럼 말입니다.

 

창조주이신 주님과 연결된다는 것은 주님의 성품, 곧 그 신성과 연결된다는 말이며, 이는 곧 그분의 선과 진리로 연결되는 걸 말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세상은 그 반대인 악과 거짓으로 정반대의 길을 걸었고, 그 결과 세상에는, 그리고 우리 안에는 더 이상 주님의 신성이 남아있지 않게 되어 인류의 생명 유지 장치가 곧 ‘삐...’ 소리를 낼 단계까지 오게 된 것이지요.

 

이때입니다. 주님이 우리 중에 한 아기로 오신 때가 말입니다. ‘너희를 위하여’라는 말은 창조주이신 주님과의 연결이 끊어질락 말락 하는 순간에 그 연결을 다시 잇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를 다시 창조주의 생명으로 계속해서 살게 하시려고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과 땅이 다시 이어지는 것’입니다.

 

 

둘째, 성탄의 빛은 ‘지식’이 아니라 ‘생명’

 

요한복음은 말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1:9)

 

이 빛은 머리를 밝히는 정보가 아니라, 삶을 바꾸는 빛입니다. 전자는 오용(誤用)될 경우, 세상살이에만 능하게 할 뿐이지만, 후자는 속 사람을 변화시켜 천국으로, 그래서 주님께로 인도하는 영원한 빛입니다. 그래서 성탄의 빛은 학자보다 목자에게 먼저 비쳤고, 성전보다 들판에 먼저 임한 것입니다. 주님의 빛은 많이 아는 사람보다, 살고자 하는 마음, 선해지고자 하는 작은 의지 안으로 먼저 들어옵니다. 빛이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상태가 결과를 초래하는, 자초하는 것입니다. 햇빛이 방안에까지 들어오지 못하는 이유가 햇빛 때문이 아니라 내가 아직 커튼을 걷지 않았기 때문인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어찌 보면 하나의 그릇입니다. 영을 몸 안에 담고 다니는 그릇, 주님을, 그리고 주님의 빛을 담고 다니는 그릇 말입니다. 다음 주님 말씀이 생각납니다.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5:14-16)

 

우리는 생명 되신 주님을 담고 사는 생명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셋째, 성탄은 ‘주님이 우리 안에 태어나시는 시작’

 

성탄은 과거의 사건이지만, 동시에 지금도 계속되는 사건입니다. 주님은 한 번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끝나신 분이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 마음이 낮아질 때, 우리 삶이 주님을 모실 자리를 낼 때, 그분은 우리 안에 다시 태어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미움 대신 용서를 선택할 때, 이익보다 선을 택할 때, 진리를 알고 나서 그것을 살아내려 할 때 말입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 안에서 아기로 오셨다가, 점점 주님으로 자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성탄의 비밀입니다. 구주는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 삶 안에서 점점 주가 되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한테서 나오는 모든 것, 곧 사랑, 빛, 선, 생명, 말씀 안에는 주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성탄은 하루의 절기가 아니라 삶의 방향 전환입니다. 주님이 인간이 되신 이유는 우리가 주님을 바라만 보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기도를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특별히 오늘 주님 오신 성탄절에 저희 가운데 오셔서 저희 생각을 비추시고, 저희 선택을 인도하시며, 저희 삶 안에서 저희의 주님이 되어 주세요.

 

그때 성탄은 추억이 아니라, 현재가 되고, 주님은 우리 안에 살아 계신 구주가 되십니다.

 

성육신하신 주님의 참된 빛이 여러분의 삶 전체에 머물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설교

2025-12-25(D5)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4. 2025-12-25(D5)-성탄절예배(눅2,10-11, 요1,9), ‘오늘 우리를 위하여 오신 참 빛 되신 주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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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4:22)

 

AC.425

 

다음과 같은 사실을 오늘날 세상은 모르는데요, 그러니까 ‘동’(, brass)은 자연적 선과 상응한다는 사실 같은 건데, 이런 식으로 말씀에 나오는 모든 금속은 저마다 그 속뜻으로는 어떤 특별한 것들과 상응한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금’(, gold)은 천적 선, ‘은’(, silver)은 영적 진리, ‘동’은 자연적 선, ‘철’(, iron)은 자연적 진리와 각각 상응한다는 것이지요. 계속해서 다른 금속들도 그렇고요, ‘나무’(wood)와 ‘돌’(stone)도 마찬가지입니다. 법궤와 성막, 그리고 성전에 사용된 ‘금’, ‘은’, ‘동’ 및 ‘나무’의 상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자비를 따라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사야 같은 선지서들을 보면 이런 상응 사실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It is unknown to the world at the present day that “brass” signifies natural good, and also that every metal mentioned in the Word has a specific signification in the internal sense—as “gold,” celestial good; “silver,” spiritual truth; “brass,” natural good; “iron,” natural truth; and so on with the other metals, and in like manner “wood” and “stone.” Such things were signified by the “gold,” “silver,” “brass,” and “wood,” used in the ark and in the tabernacle and in the temple,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That such is their signification is manifest from the prophets, as from Isaiah:

 

16네가 이방 나라들의 젖을 빨며 뭇 왕의 젖을 빨고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 17내가 금을 가지고 놋을 대신하며 은을 가지고 철을 대신하며 놋으로 나무를 대신하며 철로 돌을 대신하며 화평을 세워 관원으로 삼으며 공의를 세워 감독으로 삼으리니 (60:16, 17) Thou shalt also suck the milk of the gentiles, and shalt suck the breast of kings. For brass I will bring gold, and for iron I will bring silver, and for wood brass, and for stones iron; I will also make thy tribute peace, and thine exactors righteousness, (Isa. 60:16–17)

 

위 구절들은 주님의 오심, 그의 나라와 천적 교회에 대해 다루는데요, ‘금을 가지고 놋을’(For brass gold)은 자연적 선은 천적 선으로, ‘은을 가지고 철을’(for iron silver)은 자연적 진리는 영적 진리로, ‘놋으로 나무를’(for wood brass)은 육적(, corporeal) 선은 자연적 선으로, ‘철로 돌을’(for stones iron)은 감각적(sensuous) 진리는 자연적 진리로 각각 상응합니다. 에스겔에는 treating of the Lord’s advent, of his kingdom, and of the celestial church. “For brass gold,” signifies for natural good celestial good; “for iron silver,” signifies for natural truth spiritual truth; “for wood brass,” signifies for corporeal good natural good; “for stones iron,” signifies for sensuous truth natural truth. In Ezekiel:

 

야완과 두발과 메섹은 네 상인이 되었음이여 사람과 놋그릇을 가지고 네 상품을 바꾸어 갔도다 (27:13) Javan, Tubal, and Meshech, these were thy merchants, in the soul of man, and vessels of brass they gave thy trading, (Ezek. 27:13)

 

두로(Tyre), 그러니까 이 두로가 영적, 천적 부를 소유한 사람들과 상응한다는 내용인데요, 여기서 ‘놋그릇’(vessels of brass)은 자연적 선과 상응합니다. speaking of Tyre, by which are signified those who possess spiritual and celestial riches; “vessels of brass” are natural goods.

 

신명기입니다. In Moses: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8:9) A land whose stones are iron, and out of whose mountains thou mayest hew brass, (Deut. 8:9)

 

이 구절에서도 ‘돌’(stones)은 감각적 진리를, ‘철’(iron)은 자연적, 그러니까 이성적(rational) 진리를, 그리고 ‘동’(brass)은 자연적 선을 각각 가리킵니다. 에스겔이 본 것은 where also “stones” denote sensuous truth; “iron,” natural, that is, rational truth; and “brass,” natural good. Ezekiel saw:

 

5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 그들에게 사람의 형상이 있더라 6그들에게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7그들의 다리는 곧은 다리요 그들의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광낸 구리 같이 빛나며 (1:7) Four living creatures, or cherubs, whose feet sparkled like the appearance of burnished brass, (Ezek. 1:7)

 

여기서도 거듭 ‘구리’(brass)는 자연적 선과 상응하며, 사람의 ‘발바닥’(foot)은 자연적인 걸 표현합니다. 다니엘한테도 같은 식으로 나타났습니다. where again “brass” signifies natural good, for the “foot” of man represents what is natural. In like manner there appeared to Daniel,

 

5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 6또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10:5, 6) A man clothed in linen, whose loins were girded with gold of Uphaz, his body also was like the beryl, and his arms and his feet like the appearance of burnished brass. (Dan. 10:5–6)

 

‘놋뱀’(brazen serpent)(21:9)이 주님의 감각적, 자연적 선을 표현한다는 것은 위에서 볼 수 있습니다. That the “brazen serpent” (Num. 21:9) represented the sensuous and natural good of the Lord may be seen above.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21:9)

 

해설

 

AC.425에서 스베덴보리는 오늘날 거의 잊혀진, 그러나 말씀의 내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원리 하나를 다시 분명히 합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에 등장하는 금속과 재료 하나하나가 각각 고유한 영적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특히 ‘(brass, 구리)이 자연적 선을 뜻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금속 전반이 하나의 질서 안에서 배열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질서는 임의적이 아니라, 천적–영적–자연적 구조에 정확히 상응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gold)은 천적 선, 곧 사랑의 가장 내적인 선을 뜻하고, ‘(silver)은 영적 진리, 곧 신앙의 진리를 뜻하며, ‘(brass)은 자연적 선, 즉 외적 삶에서 실천되는 선을 뜻하고, ‘(iron)은 자연적 진리, 곧 이성과 합리성의 차원에서 인식되는 진리를 뜻합니다.

 

이러한 상응은 단순한 상징 풀이가 아니라, 말씀 전체에 일관되게 적용되는 영적 질서입니다. 그래서 성막과 성전, 언약궤에 사용된 재료들, 그러니까 금, 은, 놋, 나무, 돌은 모두 교회와 인간 안에 있는 서로 다른 차원의 선과 진리를 표상합니다. 주님은 아무 재료나 사용하지 않으셨고, 각각의 재료는 그에 상응하는 영적 실재를 담기 위해 선택되었습니다.

 

이사야 60장의 예언은 이 질서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금을 가지고 놋을 대신하며 은을 가지고 철을 대신하며 놋으로 나무를 대신하며 철로 돌을 대신하며’라는 말씀은 단순한 물질적 번영의 약속이 아닙니다. 이는 자연적 차원의 선과 진리가 더 높은 차원인 천적, 영적 차원으로 끌어올려지고 변화됨을 뜻합니다. 자연적 선(놋)이 천적 선(금)으로, 자연적 진리(철)가 영적 진리(은)로 변화된다는 것은, 인간의 외적 삶이 주님의 사랑과 신앙에 의해 새롭게 재구성됨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곧 주님의 나라, 곧 천적 교회의 회복입니다.

 

에스겔 27장에서 ‘두로(Tyre)가 ‘사람과 놋그릇을 가지고 네 상품을 바꾸어 갔도다’라는 표현도 같은 맥락입니다. 두로는 말씀에서 영적, 천적 풍요를 지닌 자들, 곧 선과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들을 표상합니다. 그들이 거래하는 ‘놋그릇’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자연적 선을 담는 그릇, 즉 삶 속에서 사용될 수 있는 선을 뜻합니다. 여기서도 놋은 언제나 외적 삶의 선, 실천 가능한 선과 연결됩니다.

 

신명기 8장에서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라는 표현 역시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을 감각적 진리, ‘’을 자연적, 이성적 진리, ‘’을 자연적 선으로 해석합니다. 이는 인간의 인식이 감각에서 이성으로, 그리고 삶의 선으로 이어지는 자연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 진리는 단지 아는 데서 멈추지 않고, 선으로 실현될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에스겔 1장에서 그룹들의 발이 ‘그들의 발바닥은 광낸 구리 같이 빛나며’라는 묘사도 이 질서를 강화합니다. ‘’은 언제나 인간의 자연적 차원, 곧 삶의 가장 아래 단계, 행동과 실천의 영역을 뜻합니다. 그 발이 놋처럼 빛났다는 것은, 자연적 삶 자체가 선으로 충만해졌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하늘의 실재가 가장 낮은 차원까지 내려와 자연적 삶을 거룩하게 만들었음을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다니엘 10장에서 등장하는 인물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라는 묘사도 같은 의미입니다. 허리는 금으로 띠를 두르고(천적 선), 몸은 보석처럼 빛나며(영적 상태), 팔과 발은 놋과 같습니다. 이는 천적–영적–자연적 차원이 한 인물 안에서 질서 있게 결합된 상태를 상응적으로 보여 줍니다. 즉, 자연적 선은 결코 하위적이거나 무시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위의 차원들을 충실히 담아내는 기반입니다.

 

마지막으로 언급된 놋뱀은 이 모든 상응을 집약합니다. 놋뱀은 감각적, 자연적 차원에서 바라보면 단순한 물체이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의 자연적 선, 곧 인간의 가장 낮은 상태까지 내려오셔서 구원을 이루신 주님의 선을 표상합니다. 여기서도 놋은 언제나 구원과 연결된 자연적 선으로 나타납니다.

 

결국 AC.425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말씀에 등장하는 금속과 재료들은 결코 장식이나 역사적 우연이 아니며, 교회와 인간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층위적 구조를 드러내는 상응의 언어입니다. 그중 ‘’은 특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랑과 신앙이 실제 삶으로 내려와 구현되는 자리, 곧 자연적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통해, 참된 신앙은 언제나 금과 은으로 끝나지 않고, 놋으로 내려와 삶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AC.424, 창4:22, 'artificer'의 속뜻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4 말씀에 나오는 ‘기능공, 공장(工匠), 장색(匠色), 장인(匠人), 숙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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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에 나오는 ‘기억-지식’이라는 게 뭔가요?

 

 

1. 기억-지식이란 무엇인가 (scientia / memory-knowledge)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기억-지식’은 한마디로 말해, 기억 속에 저장된 모든 앎의 재료들, 곧 사실, 정보, 교리 문장, 경험, 개념, 언어, 기술 등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모두 기억-지식에 속합니다.

 

* 성경 구절을 암기하고 있는 것

* 교리 문장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

* 이건 옳고, 저건 틀리다라고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것

* 철학, 신학, 과학, 역사, 윤리 지식

* 삶의 경험에서 얻은 판단 기준

* 설교를 많이 들어서 쌓인 신앙 용어들

 

중요한 점은, 기억-지식은 아직 ‘’, 곧 삶이 되지 않은 앎이라는 것입니다.

 

 

2. 기억-지식은 어디에 속하는가 – ‘자연적 차원’

 

스베덴보리 체계에서 기억-지식은 분명히 자연적 차원에 속합니다.

 

* 몸에 속하고

* 뇌와 기억에 저장되고

* 말로 설명할 수 있고

* 잊어버릴 수도 있고

* 옳게도, 그르게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424에서 장인(artificer)이 기억-지식의 표상으로 등장합니다. 장인은 재료를 다루는 사람입니다. 기억-지식도 마찬가지로, 아직은 재료일 뿐입니다.

 

기억-지식 자체는 선도 아니고, 진리도 아닙니다. 아직은 선과 진리가 될 가능성일 뿐입니다.

 

 

3. 기억-지식 ≠ 신앙

 

스베덴보리는 아주 단호하게 말합니다.

 

기억-지식은 신앙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이해와 의지의 결합이고, 기억-지식은 기억에 저장된 정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 ‘이웃 사랑이 중요하다’를 아는 것 → 기억-지식

* 그 말이 옳다는 것을 내적으로 납득함 → 이해

* 실제로 그렇게 살려고 하는 마음 → 의지

* 그 결과 삶이 바뀌는 것 → 신앙의 시작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자주 이런 구조를 사용합니다.

 

기억-지식 → 이해 → 신앙 → 삶

 

이 순서가 뒤집히면, 즉 기억-지식이 이해와 삶을 지배하면 → 가인의 길이 됩니다.

 

 

4. 왜 기억-지식이 위험해질 수 있는가

 

기억-지식은 중립적입니다. 그래서 두 가지 방향으로 갑니다.

 

① 위로 열리면 (정상 질서)

 

* 기억-지식 → 이해의 도구

* 신앙과 체어리티에 봉사

* 두발가인처럼 ‘스승(instructor)이 됨

 

② 아래로만 닫히면 (타락)

 

* 기억-지식 → 자기 확신의 무기

* 거짓을 꾸미는 재료

* 우상을 만드는 장인의 도구 (AC.424)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기억-지식은 주인을 잘못 만나면 우상을 만들고, 주님께 복종하면 성전을 짓는다

 

 

5. 기억 지식은 왜 꼭 필요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지식은 절대 제거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기억-지식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말씀, 설교, 교리, 성경 언어는 모두 기억-지식의 형태로 먼저 들어옵니다. 기억-지식은 영적 씨앗이 심길 토양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억-지식은 신앙의 출발점이지만, 목적지는 아니다

 

 

6. 정리

 

기억-지식이란 아직 삶이 되지 않은 앎, 주인을 기다리는 재료, 신앙을 섬길 수도 있고, 신앙을 죽일 수도 있는 자연적 지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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