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5:32)

 

AC.536

 

앞선 글들에서 홍수 이전 존재하였던 교회들이 지녔던 퍼셉션에 관하여 많은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날에는 이 ‘퍼셉션(perception)이라는 것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아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지속적인 계시의 한 형태로 상상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인간에게 본래 심겨진 어떤 것으로 여기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상상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퍼셉션은 사랑의 신앙(the faith of love)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바로 그 천적인 것이며, 보편적 천국(universal heaven) 안에는 무한한 다양성을 지닌 퍼셉션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퍼셉션이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어지는 글들에서 천국에 존재하는 주요한 퍼셉션의 종류들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As in the foregoing pages much has been said about the perception possessed by the churches that existed before the flood, and as at this day perception is a thing utterly unknown, so much so that some may imagine it to be a kind of continuous revelation, or to be something implanted in men; others that it is merely imaginary, and others other things; and as perception is the very celestial itself given by the Lord to those who are in the faith of love, and as there is perception in the universal heaven of endless variety: therefore in order that there may be among men some conception of what perception is, of the Lord’s Divine mercy I may in the following pages describe the principal kinds of perception that exist in the heavens.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는 동시에, ‘이후 전개될 매우 중요한 설명을 위한 문턱’을 형성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독자의 상태를 정확히 짚어 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퍼셉션은 더 이상 살아 있는 경험이 아니라, 개념조차 모호한 대상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퍼셉션을 오해하는 여러 방식들을 차분히 나열합니다.

 

어떤 이들은 퍼셉션을 마치 끊임없이 주어지는 계시처럼 생각합니다. 이는 퍼셉션을 외부에서 갑자기 주어지는 초자연적 정보로 이해하는 태도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퍼셉션을 인간에게 본래부터 심겨진 본능이나 직관 정도로 여깁니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퍼셉션이라는 말 자체를 비현실적인 상상으로 치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오해가 퍼셉션이 더 이상 지상 교회의 경험 속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것임을 암시합니다.

 

그는 여기서 퍼셉션의 본질을 매우 분명하게 규정합니다. 퍼셉션은 사랑의 신앙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천적인 것입니다. 즉, 퍼셉션은 인간의 능력도 아니고, 훈련의 산물도 아니며, 타고난 감각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과의 결합 상태, 곧 사랑과 신앙의 상태 안에서 주어지는 인식입니다. 이 점에서 퍼셉션은 계시와도 다르고, 본능과도 다르며, 상상과는 더더욱 다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이 단일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천국 전체에는 끝없는 다양성을 지닌 퍼셉션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퍼셉션이 획일적인 기준이나 동일한 느낌이 아니라, 각 천적 공동체와 각 개인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주어지는 살아 있는 인식임을 뜻합니다. 앞서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미세하고 개별적’이라고 설명되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글의 중요한 전환점은, 스베덴보리가 이제 ‘설명 방식 자체를 바꾸겠다고 선언’하는 데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주로 지상 교회, 특히 태고교회의 상태를 통해 퍼셉션을 간접적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천국에 실제로 존재하는 퍼셉션의 종류들을 직접 설명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는 퍼셉션이 추상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며 질서와 구조를 지닌 인식이라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태도를 가르쳐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을 신비화하지도 않고, 도덕화하지도 않으며, 인간의 능력으로 축소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퍼셉션을 ‘주님께서 주시는 천적 질서의 일부’로 다루며, 가능한 한 오해 없이 전달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전달 방식 역시, 계시적 선언이 아니라 설명과 분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 글은 또한 독자에게 하나의 약속처럼 읽힙니다. 퍼셉션이 무엇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스베덴보리는 가능한 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그 실체를 보여 주겠다고 말합니다. 이는 퍼셉션을 회복하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퍼셉션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게 함으로써, 오늘날의 신앙이 스스로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도록 돕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AC.536은 단순한 서론이 아니라, 이후 천국론과 인식론 전체로 이어지는 중요한 연결 고리입니다. 퍼셉션이 사라진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퍼셉션이 무엇이었는지를 바르게 알게 하는 것 자체가 이미 큰 신앙적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AC.537, 창5 뒤, ‘천국과 천국 기쁨에 관하여 (계속)’ (AC.537-546)

AC.537 어떤 영이 제 왼편에 붙어 저에게 자기가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알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허락을 받아 그에게 대답하기를, 천국에 들어가는 일은 오직 주님께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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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5, 창5:32, ‘노아’는 홍수 이전 교회들 가운데 하나가 아님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창5:32) AC.535 ‘노아’(Noah)라 하는 교회를 홍수 이전의 교회들 가운데 하나로 봐서는 안 된다는 점은, 29절에서 그를 가리켜 ‘여호와께서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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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5:32)

 

AC.535

 

노아(Noah)라 하는 교회를 홍수 이전의 교회들 가운데 하나로 봐서는 안 된다는 점은, 29절에서 그를 가리켜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comfort them from their work and the toil of their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라고 한 데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 ‘위로(comfort)란, 그 교회가 살아남아 지속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 관해서는, 이후 주님의 신적 자비로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That the church called “Noah” is not to be numbered among the churches that were before the flood, appears from verse 29, where it is said that it should “comfort them from their work and the toil of their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 The “comfort” was that it should survive and endure. But concerning Noah and his sons,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해설

 

이 글은 노아의 교회가 태고교회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라, ‘이미 다른 질서에 속한 교회’임을 명확히 선 긋는 대목입니다. 앞서까지의 흐름만 보면, 노아가 태고교회의 연속선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분명히 말합니다. 노아의 교회는 홍수 이전의 교회들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 근거는 29절에 나오는 ‘위로’라는 표현입니다. 이 위로는 단순히 고통을 덜어 주는 의미가 아니라, ‘존속과 지속’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노아의 교회는 사라질 교회가 아니라 남겨질 교회이며, 심판을 통과해 이어질 교회입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와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태고교회는 라멕에 이르러 완전히 역할을 마쳤고, 더 이상 이어질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라는 표현이 다시 언급되는 이유도 분명해집니다. 태고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는 이 수고와 고됨이 교회 자체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노아에게서는 같은 표현이 ‘위로’와 연결됩니다. 이는 상태가 같다는 뜻이 아니라, ‘같은 조건 속에서도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 교회의 성격에서 나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에 기반한 교회였기 때문에, 퍼셉션이 사라지면 교회 자체가 더 이상 성립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노아의 교회는 교리에 기반한 교회입니다. 퍼셉션이 사라진 조건 속에서도, 교리를 통해 질서를 유지하고 신앙을 보존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수고와 고됨’ 속에서도, 노아의 교회는 무너지지 않고 지속됩니다. 참고로, 여기 ‘수고와 고됨’은 주님의 선과 진리 아는 일이 예전엔 퍼셉션으로 즉시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지만, 점점 기울다가 라멕의 때쯤 이르자 ‘수고와 고됨’의 일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노아는 태고교회의 회복판이 아니라, ‘전혀 다른 교회 유형의 시작점’입니다. 따라서 노아를 태고교회의 한 인물로 설교하거나, 태고적 신앙을 되살린 인물로 묘사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관점과 어긋납니다. 노아는 퍼셉션을 되찾은 사람이 아니라, 퍼셉션 이후의 시대를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된 교회의 대표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지점에서 자세한 설명을 미루고, ‘뒤에서 더 말씀드리겠다’고 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노아와 그의 아들들은 단순한 후속 인물이 아니라, 고대교회의 구조 전체를 설명하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 장에서는 위치만 정리하고, 본격적인 내용은 이후에 펼치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AC.535는 짧지만 결정적입니다. 노아는 태고교회의 끝이 아니라, ‘홍수 이후를 살아갈 교회의 시작’입니다. 이 한 문장을 통해, 독자는 창세기 전반부의 큰 전환점을 분명히 인식하게 됩니다. 이제 이야기는 멸망을 향해 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보존과 지속, 그리고 새로운 교회의 전개를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AC.536, 창5:32, ‘퍼셉션’(perception), 사랑의 신앙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천적인 것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창5:32) AC.536 앞선 글들에서 홍수 이전 존재하였던 교회들이 지녔던 퍼셉션에 관하여 많은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날에는 이 ‘퍼셉션’(perce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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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4, 창5:32,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AC.534-536)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And Noah was a son of five hundred years; and Noah begat Shem, Ham, and Japheth. (창5:32) AC.534 ‘노아’(Noah)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고대교회(the ancient church)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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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And Noah was a son of five hundred years; and Noah begat Shem, Ham, and Japheth. (5:32)

 

AC.534

 

노아(Noah)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고대교회(the ancient church)를 의미합니다. ‘, , 야벳(Shem, Ham, and Japheth)은 세 고대교회를 의미하는데, 이들의 부모가 되는 교회가 바로 ‘노아’라 하는 고대교회입니다. By “Noah,” as has been said, is signified the ancient church. By “Shem, Ham, and Japheth” are signified three ancient churches, the parent of which was the ancient church called “Noah.”

 

 

해설

 

이 글은 노아 이후 전개될 교회 역사의 ‘기본 구조를 한 문장으로 제시하는 핵심 진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노아를 하나의 교회 상태로 규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노아 교회가 이후 여러 교회의 ‘부모’가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고대교회가 단일한 형태로 오래 지속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서로 다른 성격의 교회들이 갈라져 나왔음을 뜻합니다.

 

앞서 태고교회에서는 하나의 중심적 교회 흐름이 여러 단계로 약화되며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노아 이후의 고대교회에서는 양상이 달라집니다. 동일한 교리적 토대 위에 서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방향과 강조점을 지닌 교회들이 동시에 존재하게 됩니다. 셈, 함, 야벳은 바로 그 분화를 대표하는 이름들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 세 교회가 서로 무관하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모두 노아 교회에서 나왔으며, 같은 뿌리를 공유합니다. 즉, 퍼셉션의 교회가 아니라 교리의 교회라는 공통 기반 위에 서 있습니다. 차이는 그 교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무엇을 중심에 두느냐에 있습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말하면, 이는 매우 현실적인 교회 이해를 제공합니다. 하나의 참된 교회에서 출발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다른 교회 형태들이 생겨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문제는 분화 자체가 아니라, 그 분화가 여전히 같은 근원에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셈, 함, 야벳을 모두 고대교회로 부르며, 이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 글에서 ‘부모’라는 표현은 다시 한번 중요합니다. 부모는 자녀의 모든 선택을 대신하지는 않지만, 생명과 구조를 제공합니다. 마찬가지로 노아 교회는 이후 교회들이 존재할 수 있는 기본 틀과 신앙 구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후의 교회들은 이 틀 안에서 각기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그래서 AC.534는 단순한 족보 설명이 아니라, ‘고대교회 전체를 조망하는 지도’와도 같습니다. 노아라는 하나의 중심에서 셈, 함, 야벳이라는 세 갈래가 뻗어 나가고, 이 세 갈래는 이후 인류 영적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교회 유형의 원형이 됩니다.

 

 

 

AC.535, 창5:32, ‘노아’는 홍수 이전 교회들 가운데 하나가 아님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창5:32) AC.535 ‘노아’(Noah)라 하는 교회를 홍수 이전의 교회들 가운데 하나로 봐서는 안 된다는 점은, 29절에서 그를 가리켜 ‘여호와께서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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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부를 찬송가는 순서대로 찬28, ‘복의 근원 강림하사’와 찬433, ‘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입니다.

 

오늘은 창세기 5장 다섯 번째 시간, 25절로 27절이며, AC 글 번호로는 526번에서 533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28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29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30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1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5:28-31)

 

이 본문을

노아, 인류를 위한 주님의 위로

 

라는 제목으로 말씀 준비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주님이 빛을 비추셔서 이 시간 우리 영과 육이 활짝 열려 모두 들을 귀 만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오늘도 여전히 ‘퍼셉션(perception)이 나옵니다. 이 창5를 하면서 계속 다루었지만, 여전히 알쏭달쏭, 흐릿합니다. 그렇다고 안 다룰 수도 없습니다. 창5를 끝으로 퍼셉션의 교회인 태고교회가 막을 내리고, 창6부터는 이제 전혀 새로운 교회인 노아의 고대교회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득불 오늘도 이 퍼셉션 이야기를 살짝이라도 좀 먼저 드리고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오늘은 2월 첫주, 성찬이 있으므로 가급적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퍼셉션을 한 문장으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퍼셉션은 생각을 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사랑이라는 방향을 잡았더니 저절로 알게 되는, 그런 상태다.

 

무엇을 새로 알 때 우리는 보통 이렇게 압니다. ‘배워서 이해하고 판단하고 행동한다.’ 이 순서가 너무 익숙해서, 이것 말고 다른 앎의 방식이 있다는 것 자체가 잘 상상이 안 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거의 전부 이 방식으로 삽니다. 노아의 고대교회도 기본적으로 이쪽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이 순서가 달랐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살았습니다. ‘사랑이 먼저 있고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옳은지가 보이고 그 보임대로 산다.’ 여기서 핵심은, ‘보인다’는 말입니다. 논리로 결론을 내리는 게 아니라, 마치 방향 감각처럼 즉각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엄마의 얼굴을 볼 때를 생각해 보세요. 비록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아이는 엄마가 지금 슬퍼하신다는 걸 엄마 얼굴을 보고 그냥 ‘즉시 압니다.’ 무슨 학습을 해서 아는 게 아니고 말입니다. 이건 추론이 아닙니다. 사랑 안에서 생긴 ‘직관적 인식’입니다. 퍼셉션은 이와 비슷하지만, 대상이 더 깊습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지금 이 상황에서 무엇이 선인가?’, ‘지금 이 선택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택인가?’를 ‘생각을 거치지 않고’ 아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퍼셉션에는 이런 특징들이 있습니다.

 

첫째, 퍼셉션은 정보가 아닙니다.

 

퍼셉션은 지식이 쌓여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리로 가르칠 수도 없고, 말로 정리해도 생기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퍼셉션은 절대로 생기지 않습니다.

 

둘째, 퍼셉션은 판단이 아니라 방향 감각입니다.

 

우리가 길을 걸을 때, 인공지능 로봇들처럼 ‘왼쪽으로 가면 15도 각도고, 오른쪽은...’ 이러면서 걷지 않듯이, 태고교회 사람들은 선과 진리를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이쪽이다’가 보였습니다.

 

셋째, 퍼셉션은 나한테서 나오지 않습니다.’

 

이게 제일 중요합니다. 퍼셉션은 ‘내가 잘 훈련해서 얻는 능력’이 아닙니다. 사랑이 주님을 향해 열려 있을 때, ‘주님 쪽에서 흘러 들어오는 인식’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을 ‘계시의 한 형태’라고도 말하지만, 오늘 우리가 상상하는 ‘특별한 음성’이나 ‘신비 체험’과는 전혀 다릅니다. 아주 조용하고,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이게 특별한 건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럼, 왜 오늘 우리는 퍼셉션을 거의 모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랑의 질서, 순서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는 ‘사랑 인식 ’의 구조였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걸 사랑으로, 사랑에서 출발했다면, 노아 이후의 고대교회, 그리고 오늘의 우리는 ‘배움 이해 선택 ’의 구조입니다. 즉 머리로, 지식에서 출발합니다. 이건 타락이라기보다, ‘상태의 변화’입니다. 주님은 퍼셉션을 잃은 인간에게 퍼셉션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노아 교회는 퍼셉션이 아니라 교리, 기억, 훈련, 순종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오해 하나를 풀어야 합니다. 퍼셉션이 ‘고급해서’ 지금 우리에게 없는 게 아닙니다. 퍼셉션은 ‘지금 우리에게 맞지 않는 방식’이기 때문에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눈으로 길을 보던 시대에서 지도와 표지판을 쓰는 시대로 온 것과 비슷합니다. 눈이 나빠졌다고 길을 포기한 게 아니라, ‘다른 방식의 안내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성인’(聖人)이라 하는 사람의 삶을 살다 간 사람들은 그러니까 이 ‘머리’의 시대에 태고교회처럼 ‘가슴’, 즉 ‘사랑’의 삶을 살다 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사는 우리가 퍼셉션을 이해할 때, 이렇게 생각하시면 좋습니다. 퍼셉션은 ‘우리가 회복해야 할 능력’이 아니라 ‘우리가 그랬던 적이 있었음을 이해해야 할 상태’입니다. 이걸 이해해야 노아의 고대교회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 왜 교리가 필요한지, 왜 믿음과 순종이 강조되는지 비로소 연결됩니다.

 

마지막으로, 아주 짧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퍼셉션이란 ‘주님을 사랑하는 상태에서,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가 생각 없이 보이던 삶의 방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퍼셉션을 잃은 인간을 위해 주님께서 새로 여신 길 위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비교가 가능합니다. 퍼셉션의 교회 → 노아의 교회로, 보는 교회 → 배우는 교회로, 그리고 즉각적 인식 → 점진적 거듭남으로 말입니다.

 

 

네, 그럼, 몇 주에 걸친 퍼셉션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치고, 이제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세 가지만 간략하게 나누고 이후 순서 진행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창5:28-31은 태고교회의 계보가 끝나고, 전혀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직전의 마지막 장면을 보여 줍니다. 라멕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교회 상태는 이미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을 전혀 보존하지 못한 상태에 이르렀고, 그 안에서 노아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 본문은 한 개인의 출생 이야기가 아니라,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교회가 준비되는 결정적인 전환의 순간을 증언합니다.

 

첫째, 라멕의 상태는 수고와 저주로 가득 찬 교회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라멕이 노아의 이름을 지으며 말한 고백을 보면,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이는 얼핏 농사나 노동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쉬우나, 그게 아니고, 선과 진리를 더 이상 자연스럽게 인식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라멕으로 상징되는 이 교회는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 너무도 일반적이고 흐릿해져서 사실상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무엇이 옳은지 알기 위해 늘 애써야 했고, 선을 행하기 위해 고된 노력을 해야 했으며, 그 결과는 기쁨이 아니라 피로와 좌절이었습니다. ‘수고’와 ‘손의 고됨’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서 선과 진리를 만들어 내려는 시도를 뜻하며, ‘저주받은 땅’은 그러한 시도에서 나오는 것이 결국 거짓과 악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는 영적 현실을 보여 줍니다. 이 상태는 회복을 위한 과도기가 아니라, 이미 내부적으로는 끝에 도달한 상태였습니다.

 

둘째, 노아라는 이름은 새로운 교회를 향한 주님의 위로의 선언입니다.

 

라멕은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 짓고, 그가 우리를 안위하리라 말합니다. 여기서 ‘안위하다’라는 말은 단순한 감정적 위로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교회를 다시 회복시키시는 교리적 위로, 곧 새 교회를 통해 주어질 영적 쉼과 질서의 회복으로 해석합니다. 노아로 상징되는 교회는 태고교회처럼 퍼셉션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대신 에녹을 통해 보존된 교리와, 주님께서 남겨 두신 리메인스(remains) 위에 세워지는 교회입니다. 즉, 더 이상 즉각적으로 아는 교회가 아니라, 배우고 기억하고 순종함으로 거듭나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노아는 태고교회의 연장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방식의 시작입니다. 이 시작은 인간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예전 기준을 요구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자비에서 비롯됩니다. 퍼셉션을 잃은 인류에게 더 이상 퍼셉션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대신 그 상태에 맞는 새로운 길을 여시는 것이 바로 노아교회입니다.

 

셋째, ‘칠백칠십칠(777)이라는 숫자는 끝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의 완결을 말합니다.

 

라멕의 수명이 칠백칠십칠 세였다는 기록은 우연한 숫자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숫자는 상태를 표현합니다. 일곱은 거룩함과 완결을 뜻하는 수이며, 그것이 반복된 777은 한 질서가 완전히 마무리되었음을 상징합니다. 이는 인간적 성취의 완성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 더 이상 유지되지 않아야 할 상태가 비로소 정리되었음을 뜻합니다. 라멕의 죽음은 단순한 종말이 아니라, 태고교회 계열 전체의 종결을 알리는 표지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노아가 등장합니다. 주님은 어떤 교회나 교회 시대가 종말을 향해 갈 때, 그 교회나 교회 시대를 그 무너진 상태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시고, 항상 다음을 준비하십니다. 라멕의 끝은 노아의 시작을 위한 자리 마련이며, 홍수는 파괴만이 아니라 새 교회의 토양을 정화하는 과정이 됩니다.

 

참고로, 교회뿐 아니라 각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그러나 각 개인은 특별히 본인 의사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무리 한 개인의 인생이 망가져도 눅15에 나오는 둘째 아들처럼 돌이켜 거듭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결국 끝까지 돌이키지 않아 파국을 맞는, 그래서 결국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마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지 싶습니다. 우리는 혹시 지금은 방황하고 연거푸 실수해도, 그래서 지금은 앞이 캄캄하고 숨 막히는 상황이더라도 어린 시절을 비롯, 지금도 주님이 내 안에 나도 모르게 쟁여놓으시는 리메인스, 곧 주님의 선과 진리가 있음을 기억, 그것을 활용하여 더 늦기 전에 돌이켜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본문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의 신앙은 지금 ‘수고와 고됨’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주님께서 준비하신 새로운 쉼의 질서로 나아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한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한계를 정확히 아시고, 그 상태에 맞는 새로운 교회를 여십니다. 노아는 바로 그 자비의 이름입니다. 수고의 끝에서 시작되는 쉼, 저주받은 땅 위에서 다시 세워지는 교회, 그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전하는 복음입니다.

 

이 본문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언제나 반복되는 주님의 섭리의 방식입니다. 한 시대가 끝날 때마다, 주님은 언제나 노아를 준비하십니다. 그리고 그 노아는 늘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안위’를 가져옵니다. 주님의 신실하심과 사랑, 그리고 자비로우심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혹시 오늘 우리가 이 시대 노아들이어도 이 길 끝에 천국 있음을 기억하고, 주님 맡기신 쓰임새의 삶, 저 노아들처럼 잘 살다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2-01(D1)

 

2636, 29. 창5.5, 2026-02-01(D1)-주일예배(창5,28-31, AC.526-533, 성찬), ‘노아, 인류를 위한 주님의 위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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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1/25, 창5:25-27), '퍼셉션 이야기 (심화)'

오늘은 창세기 5장 네 번째 시간, 25절로 27절이며, AC 글 번호로는 523번에서 525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25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6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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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1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5:30, 31)

 

AC.533

 

라멕에 관하여는 그가 자녀들을 낳았다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언급된 바가 없으므로, 이 주제에 대해서는 더 머무르지 않겠습니다. 그 출생들, 곧 ‘자녀들(the sons and daughters)이 무엇이었는지는 그 교회를 보면 알 수 있는데, 교회가 그러한 상태이기에 거기서 나온 것들도 그와 같은 성격을 띱니다. ‘므두셀라(Methuselah)라 이름한 교회와 ‘라멕(Lamech)이라 이름한 교회는 모두 홍수 직전에 소멸되었습니다. As nothing more is related concerning Lamech than that he begat sons and daughters, which are the conceptions and births of such a church, we shall dwell no longer on the subject. What the births were, or the “sons and daughters,” appears from the church; for such as is the church, such are the births from it. Both the churches called “Methuselah” and “Lamech” expired just before the flood.

 

 

해설

 

이 글은 라멕이라 이름하는 교회에 대한 해설을 ‘의도적으로 마무리하는 종결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더 이상의 분석이 불필요하다고 말하며, 그 이유를 분명히 합니다. 그 교회에서 나온 ‘출생들’, 곧 자녀들이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는, 이미 그 교회의 상태 자체가 충분히 말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중요한 해석 원리를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교회가 그러하면, 거기서 나오는 것도 그러하다’는 원리입니다. 교회의 내적 상태가 살아 있으면, 거기서 나오는 개념과 삶의 열매도 살아 있습니다. 반대로 교회가 황폐해졌다면, 그 교회에서 생산되는 사상과 실천 역시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출생을 따로 분석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근원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라멕의 교회에서 나온 아들들과 딸들이 무엇이었는지를 하나하나 열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통찰을 더해 주지 못하고, 오히려 같은 사실을 반복하는 데 그치기 때문입니다. 황폐해진 교회에서 나오는 것은 언제나 그 황폐함에 상응하는 개념과 생겨남뿐입니다.

 

이 글에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므두셀라’와 ‘라멕’ 두 교회가 함께 언급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둘은 태고교회의 마지막 국면을 대표하는 교회들로, 하나는 이미 죽음을 향해 가던 상태였고, 다른 하나는 그 결과로 완전히 황폐해진 상태였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교회가 모두 ‘홍수 직전에 소멸되었다’고 말함으로써, 태고교회의 종말이 단번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진행된 과정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줍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대목은 매우 냉정하면서도 정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더 이상의 감정적 평가나 도덕적 비난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상태를 진단하고, 그 상태에 상응하는 결과를 말할 뿐입니다. 교회가 황폐해지면, 그 교회는 더 이상 생명을 낳지 못하고, 결국 역사 속에서 역할을 마치게 됩니다.

 

홍수 직전’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시간 표시가 아닙니다. 그것은 다음에 등장할 노아의 교회, 곧 전혀 다른 방식의 교회가 등장하기 직전의 경계선을 가리킵니다. 태고교회는 여기서 완전히 막을 내리고, 그 안에서 더 이상 새로운 가능성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AC.533은 라멕 이야기의 끝이자, 동시에 노아 이야기의 문턱입니다. 이 글을 통해 독자는 더 이상 과거의 교회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교회의 출현을 바라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조용하지만 분명한 방식으로, 한 시대를 정리하고 다음 시대를 향해 독자를 이끌어 갑니다.

 

 

 

AC.534, 창5:32,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AC.534-536)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And Noah was a son of five hundred years; and Noah begat Shem, Ham, and Japheth. (창5:32) AC.534 ‘노아’(Noah)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고대교회(the ancient church)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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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2, 창5:30-31, ‘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C.532-533)

30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1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Lamech lived after he begat Noah five hundred ninety and five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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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1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Lamech lived after he begat Noah five hundred ninety and five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Lamech were seven hundred seventy and seven years, and he died. (5:30, 31)

 

AC.532

 

라멕(Lamech)은 앞서 말한 것처럼 황폐해진 교회를 의미합니다. ‘자녀들(sons and daughters)은 그러한 교회에서 생겨나는 것들(the conceptions and births of such a church)을 의미합니다. By “Lamech,” as before said, is signified the church vastated. By “sons and daughters” are signified the conceptions and births of such a church.

 

 

해설

 

이 글은 라멕이라 이름하는 교회의 상태를 다시 한번 압축적으로 정리하면서, 그 교회에서 더 이상 무엇이 나올 수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을 ‘황폐해진 교회’라고 단정한 뒤, 그 교회에서 낳는 ‘자녀들(sons and daughters)의 성격까지 함께 규정합니다. 이는 교회가 황폐해졌을 때, 그 안에서 형성되는 사상과 삶의 열매가 어떠한지를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앞서 여러 차례 살펴본 것처럼, ‘자녀들’은 단순한 후손이나 수적 증가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언제나 교회 안에서 형성되는 진리의 개념들과 선의 형태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앞에 중요한 한정이 붙습니다. 곧 ‘그러한 교회에서(such a church) 생겨나는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즉, 퍼셉션이 사라지고 황폐해진 교회, 그런 교회에서 생기는 것들, 낳는 것들은, 본질적으로 왜곡된 상태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황폐해진 교회에서도 여전히 생각은 만들어지고, 가르침은 형성되며, 신앙적 언어는 생산됩니다. 그러나 그 출발점이 이미 자기 자신과 외적 사고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 결과물 역시 생명을 지니기 어렵습니다. 겉으로는 진리처럼 보일 수 있고, 선처럼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내적 빛은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개념들과 출생들(conceptions and births)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는 생명이 있는 탄생이라기보다는, 사고와 사유, 곧 머리에서 만들어진 결과물에 가깝습니다. 태고교회에서의 ‘자녀들’이 퍼셉션에서 흘러나온 살아 있는 진리와 선이었다면, 라멕의 교회에서의 그것들은 이미 그 성격이 달라졌습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대목은 매우 현실적인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교회가 황폐해졌다고 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말은 더 많아질 수 있고, 개념은 더 정교해질 수 있으며, 체계는 더 복잡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자녀들’이 생명을 지니는 것은 아닙니다.

 

이 글은 그래서 다음에 등장하는 노아와 더욱 선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라멕의 교회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낳지만, 그 낳음은 회복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반면 노아는 새로운 교회의 출현 자체를 의미합니다. 하나는 황폐한 상태 안에서의 반복이고, 다른 하나는 전혀 다른 근원에서 시작되는 새출발입니다.

 

결국, AC.532는 황폐해진 교회의 한계를 짧고 분명하게 그어 줍니다. 그 교회 안에서는 새로운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그 상태에 걸맞은 개념과 생겨남만이 반복될 뿐입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다음 본문으로 넘어갈 때, 노아의 등장이 왜 ‘위로’와 ‘’으로 연결되는지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AC.533, 창5:30-31, ‘라멕 이야기의 끝, 곧 태고교회의 종말’

30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1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30, 31) AC.533 라멕에 관하여는 그가 자녀들을 낳았다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언급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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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1, 창5:29, ‘라멕이라는 황폐한 교회와 노아라는 새 교회의 대비’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창5:29) AC.531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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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hallowed it; because that in i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2:2, 3)

 

AC.84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the seventh day)입니다. 주님께서 엿새 동안 일하셨으므로, 그것을 ‘그가 하시던 모든 일(his work)이라 하며, 모든 싸움(combat)이 그때 그치게 되므로, 주님께서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그날에 안식하시니라’라고 하십니다. 이로 인해 일곱째 날은 거룩하게 구별되었고, ‘안식(rest)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שבת(샤바트, the sabbath)에서 유래하여 안식일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창조되고, 형성되며,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말씀을 보면 아주 분명합니다.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which, as the Lord has worked during the six days, is called “his work”; and as all combat then ceases, the Lord is said to “rest from all his work.” On this account the seventh day was sanctified, and called the sabbath, from a Hebrew word meaning “rest.” And thus was man created, formed, and made. These things are very evident from the words.

 

 

해설

 

이 글은 창2:1-3에 대한 해설 가운데서도, 앞선 모든 논의를 하나의 고요한 결론으로 이끄는 자리입니다. AC.83이 ‘다 이루어짐’의 의미를 신앙과 사랑의 결합에서 설명했다면, AC.84는 그 결합이 도달하는 최종 상태를 ‘일곱째 날’이라는 이름으로 분명히 합니다. 천적 인간은 과정의 한 단계가 아니라, ‘과정이 안식으로 전환된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일곱째 날’을 천적 인간과 동일시합니다. 이는 시간의 하루가 아니라, 인간 내적 상태의 이름입니다. 엿새 동안 주님께서 ‘일하셨다’는 말은, 인간 안에서 질서가 세워지고, 진리가 밝혀지며, 싸움이 계속되던 상태를 뜻합니다. 이때의 ‘’은 창조의 수고이며, 동시에 인간 거듭남의 긴 여정입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이 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모든 싸움이 그칩니다. 여기서 싸움이란 외적 갈등이 아니라, ‘악과 거짓에 맞서 진리를 선택해야 했던 내적 투쟁’을 말합니다. 천적 상태에 이르면, 그 싸움이 더 이상 중심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이미 중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악과 거짓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그것들이 삶의 방향을 결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이 안식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주님께서 활동을 멈추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생명과 선이 ‘방해받지 않고 사람 안에서 그대로 흘러가는 상태’를 뜻합니다. 주님이 쉬신다는 것은, 인간 안에서 주님의 질서가 더 이상 저항을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안식입니다.

 

이로 인해 일곱째 날은 ‘거룩하게 구별’됩니다. 안식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질서가 완성된 상태’이기 때문에 거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안식일의 거룩함을 규칙이나 계명에서 찾지 않고, 인간 내적 상태의 변화에서 찾습니다. 사람이 안식의 상태에 이를 때, 그날은 거룩해집니다. 거룩함은 시간에 붙어 있는 속성이 아니라, 상태에 붙어 있는 속성입니다.

 

여기서 ‘안식일’이라는 말의 어원이 ‘’을 뜻하는 히브리어 ‘שבת(샤바트, the sabbath)에서 나왔다는 설명은 단순한 어학 정보가 아닙니다. 이는 안식일의 본질이 ‘행위의 중단이 아니라 싸움의 중단’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싸움이 끝났다는 것은, 주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안정되었다는 뜻이며,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주님의 질서 안에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창조되고, 형성되며,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이 세 동사, create, form, make는 우연한 반복이 아닙니다. 창조는 목적의 설정이고, 형성은 질서의 구성이며, 만들어짐은 실제 삶으로의 구현입니다. 즉, 사람은 단번에 완성되지 않고, ‘목적-질서-삶이라는 단계를 거쳐 안식에 이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마지막 문장, ‘이러한 사실들은 말씀을 보면 아주 분명합니다’라는 말은, 스베덴보리의 특유의 확신을 보여 줍니다. 그는 이것을 새로운 교리를 제시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말씀이 이미 말하고 있는 것을, 그 내적 질서에 따라 풀어 보였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논증으로 마무리하지 않고, ‘자명함의 선언’으로 마칩니다.

 

AC.84에 이르면, 창세기 1, 2장은 더 이상 우주의 기원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어떻게 ‘죽은 상태’에서 시작하여, 영적 상태를 거쳐, 마침내 천적 상태, 곧 안식의 상태에 이르는가에 대한 ‘완결된 인간학적 서사’입니다. 그리고 이 서사의 끝은 활동이 아니라, 쉼입니다. 그러나 그 쉼은 공허가 아니라, 가장 충만한 생명의 상태입니다.

 

여기까지 오면, 창세기 2장의 첫 단락은 사실상 하나의 완전한 원을 이룹니다. 시작은 ‘다 이루어짐’이었고, 끝은 ‘안식’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의 모든 설명은, 왜 이 마침이 안식일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AC.85, 창2:2-3, ‘천적 인간 = 일곱째 날 = 안식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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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3, 창2:1, ‘다 이루어지니라’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창2:1) AC.83 ‘천지와 만물’(The 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이 ‘다 이루어지니라’(to be finished)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여섯째 날’(the sixth day)이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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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1)

 

AC.83

 

천지와 만물(The 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이 ‘다 이루어지니라(to be finished)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여섯째 날(the sixth day)이 되었을 때입니다. 이는 그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 둘이 하나를 이룰 때는, 신앙이 아니라 사랑이, 다시 말해 영적 원리가 아니라 천적 원리가 주가 되기 시작하며, 이것이 곧 천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The “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 are said to be “finished,” when man has become the “sixth day,” for then faith and love make a one. When they do this, love, and not faith, or in other words the celestial principle, and not the spiritual, begins to be the principal, and this is to be a celestial man.

 

 

해설

 

이 글은 창2:1의 ‘다 이루어지니라(to be finished)라는 말을, 단순한 종결이 아니라 ‘질서의 완성’으로 해석하는 결정적인 열쇠를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라는 말을, 어떤 일이 끝났다는 선언으로 읽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사람 안에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는 상태 선언’으로 읽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사람이 ‘여섯째 날’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육일 창조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했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아직 ‘일곱째 날’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여섯째 날은 완성 직전의 상태이며, ‘전환이 가능한 마지막 지점’입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룰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마침’의 기준을 분명히 제시합니다. 그것은 지식의 충만이나 이해의 완성에 있지 않습니다. 기준은 오직 하나,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었는가’에 있습니다. 신앙이 아무리 정교해도, 사랑과 하나를 이루지 못하면 아직 ‘다 이루어진’ 상태가 아닙니다. 반대로,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면, 비로소 하늘과 땅, 곧 속 사람과 겉 사람의 모든 요소들이 질서 있게 결합됩니다.

 

이 지점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는 순간, 더 이상 신앙이 주도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매우 명확하게 말합니다. ‘신앙이 아니라 사랑이’, 다시 말해 ‘영적 원리가 아니라 천적 원리가’ 중심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신앙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자리를 바꾼다는 뜻’입니다. 신앙은 더 이상 앞에서 끌고 가지 않고, 사랑 안에 거하게 됩니다.

 

이 전환이 바로 ‘천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은 신앙을 버린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신앙을 가장 온전한 자리에 둔 사람입니다. 신앙은 사랑을 설명하고 보호하며 밝히는 역할을 하고, 사랑은 삶 전체를 움직이는 중심이 됩니다. 이 질서가 세워질 때, 사람 안에서 더 이상 분열이나 긴장이 중심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다 이루어지니라’라는 말을, 정지나 완결의 의미로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안식으로 들어갈 준비가 끝났다는 뜻’입니다. 여섯째 날에 모든 것이 마쳐질 때, 일곱째 날의 안식이 가능해집니다.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는, 안식은 결코 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여전히 판단과 갈등, 자기중심의 움직임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또한, 신앙 중심 신앙생활의 한계를 조용히 드러냅니다. 신앙이 주된 원리로 남아 있는 한, 사람은 여전히 ‘영적 인간’의 단계에 머뭅니다. 이는 귀하고 필수적인 단계이지만, 목적지는 아닙니다. 목적지는 사랑이 중심이 되는 상태, 곧 천적 상태입니다. AC.83은 그 목적지의 문턱을 정확히 가리킵니다.

 

여기까지의 흐름을 다시 보면, 창세기 1, 2장의 구조가 매우 선명해집니다. 창세기 1장은 신앙이 형성되고 질서 잡히는 과정, 곧 여섯째 날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2장은 그 신앙 위에서 사랑이 중심이 되어 안식으로 들어가는 이야기입니다. AC.83은 이 두 장을 하나의 영적 과정으로 연결하는 ‘연결 고리’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짧지만, 무게는 큽니다. ‘다 이루어지니라’라는 말 속에, 인간 거듭남의 전체 구조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이 질문으로 수렴됩니다. 지금 내 안에서는 무엇이 주된 원리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신앙이 앞서고 있는가, 아니면 사랑이 앞서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AC.83은 판단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방향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은, 신앙이 사랑 안에서 쉬게 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천지와 만물’이 비로소 ‘다 이루어집니다.’

 

 

 

AC.84, 창2:2-3,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AC.84-88)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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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2, 창2: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창2:1) AC.82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이 이제 영적 상태에 이르러(render) ‘여섯째 날’(the sixth day)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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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1)

 

AC.82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이 이제 영적 상태에 이르러(render)여섯째 날(the sixth day)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 하늘, heaven)은 그의 속 사람이고, ‘(, , earth) 그의 겉 사람입니다. ‘만물(the army of them)은 사랑과 신앙, 그리고 그에 속한 지식(knowledges)으로서, 앞서 큰 광명들과 별들이 의미했던 것들입니다. 속 사람을 ‘하늘’이라 하고, 겉 사람을 ‘’이라 한다는 것은, 이미 앞 장의 인용 구절들로부터 분명하며, 그에 더해 여기 이사야의 다음 구절들도 있습니다. By these words is meant that man is now rendered so far spiritual as to have become the “sixth day”; “heaven” is his internal man, and “earth” his external; “the army of them” are love, faith, and the knowledges thereof, which were previously signified by the great luminaries and the stars. That the internal man is called “heaven,” and the external “earth,” is evident from the passages of the Word already cited in the preceding chapter, to which may be added the following from Isaiah:

 

12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 13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13:12, 13) I will make a man more rare than solid gold, even a man than the precious gold of Ophir; therefore I will smite the heavens with terror, and the earth shall be shaken out of its place (Isa. 13:12–13).

 

13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 16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말하기 위함이니라 (51:13, 16) Thou forgettest Jehovah thy maker, that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nd layeth the foundations of the earth; but I will put my words in thy mouth, and I will hide thee in the shadow of my hand, that I may stretch out the heaven, and lay the foundation of the earth (Isa. 51:13, 16).

 

이 말씀들로부터, ‘하늘’과 ‘’이 모두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비록 그것들이 주로 태고교회를 가리켜 언급된 것이지만, 말씀의 내적 의미는 그러한 성질(nature)을 지니고 있어서, 교회에 대해 한 말은 무엇이든 그 교회의 각 개별 지체에게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교회가 아니라면, 결코 교회의 일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사람이 주님의 성전이 아니라면, 성전이 의미하는 바, 곧 교회와 천국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태고교회를 가리켜 단수로 ‘사람(man)이라고 합니다. From these words it is evident that both “heaven” and “earth” are predicated of man; for although they refer primarily to the most ancient church, yet the interiors of the Word are of such a nature that whatever is said of the church may also be said of every individual member of it, who, unless he were a church, could not possibly be a part of the church, just as he who is not a temple of the Lord cannot be what is signified by the temple, namely, the church and heaven. It is for this reason that the most ancient church is called “man,” in the singular number.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장 해설의 한 정점을 이루는 문장입니다. AC.73부터 AC.81까지 ‘천적 인간’이라는 상태를 다양한 각도에서 펼쳐 보였다면, AC.82는 그 모든 설명을 다시 ‘2:1의 언어’로 되돌려 묶어 줍니다. 즉, 이 글은 앞선 모든 논의를 정리하면서 동시에, 창세기 1장의 창조 질서와 정확히 접속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여섯째 날’이라는 표현을 다시 불러옵니다. 이는 천적 상태 그 자체가 아니라, ‘영적 상태에 완전히 이른 단계’를 가리킵니다. 사람은 이 시점에서 더 이상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막 형성 중인 불안정한 상태도 아닙니다. 그는 이제 영적 질서가 완성된 상태에 도달했습니다. 다시 말해, 진리와 선의 기본 구조가 속 사람과 겉 사람 안에 제대로 세워진 상태입니다. 이 여섯째 날 위에서만, 일곱째 날의 안식이 가능합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다시 한번 ‘하늘’과 ‘’을 사람 안의 구조로 해석합니다. ‘하늘’은 속 사람이고, ‘’은 겉 사람입니다. 이는 이미 창세기 1장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된 해석이지만, AC.82에서는 이 해석이 단순한 상응 설명을 넘어, ‘인간 존재 전체를 이해하는 원리’로 확장됩니다. 하늘과 땅은 우주의 공간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두 차원입니다.

 

만물(the army of them)이 사랑과 신앙, 그리고 그에 속한 지식(knowledges)이라는 설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군대라는 말은 단순한 집합이 아니라, ‘질서 있게 배열된 힘들’을 뜻합니다. 사랑과 신앙, 그리고 그 지식은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정보나 감정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 안에 각각 배치되어 서로 협력하는 요소들입니다. 앞서 큰 광명들과 별들로 표현되었던 것들이, 이제는 한 사람 안의 영적 구조로 명확히 자리 잡습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이 해석이 자의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 주기 위해, 이사야를 인용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사야의 이 구절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우주적 격변이나 역사적 심판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사람 안의 변화로 읽습니다.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라는 말은, 한 사람 안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가 흔들리거나 새롭게 세워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특히 사51의 말씀에서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라는 표현은 결정적입니다. 이는 창조의 언어이면서 동시에 ‘한 사람 안에서의 재창조’, 곧 거듭남의 언어입니다. 주님께서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라는 표현은, 외적 보호와 내적 인도를 동시에 뜻합니다. 이 모든 것이 결국 한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원리를 명확히 합니다. 성경에서 교회에 대해 말한 것은, 동시에 ‘각 사람에 대해 말한 것’이라는 원리입니다. 교회는 집단 이전에 상태이며, 그 상태는 반드시 개인 안에 존재해야 합니다. 사람이 교회가 아니라면, 그는 교회의 일부가 될 수 없다는 말은, 교회를 제도나 조직으로 환원하는 모든 사고를 근본에서부터 차단합니다.

 

이 비유를 설명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성전(temple)의 예를 듭니다. 사람이 주님의 성전이 아니라면, 그가 어떻게 교회와 하늘, 곧 천국을 의미하는 성전이 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내적 실재에 대한 선언’입니다. 천국과 교회는 외부에 있는 어떤 공간이 아니라, 주님이 거하실 수 있는 사람 안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이 나옵니다. 태고교회를 단수로 ‘사람’(아담)이라 한 이유입니다. 이는 특정 인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완전한 상태로서의 인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태고교회는 여러 개인의 집합이었지만, 그 내적 상태가 하나였기 때문에 단수로 불립니다. 이는 곧, 천국의 본질이 다수가 하나 안에서 일치하는 데 있음을 암시합니다.

 

AC.82는 이렇게 해서 창세기 1, 2장의 대주제를 다시 한번 정리합니다. 창조는 우주의 기원이 아니라, 인간의 형성에 관한 이야기이며, 하늘과 땅은 멀리 있는 차원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두 세계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한 사람이 ‘사람’이 되어 가는 이야기입니다.

 

 

 

AC.83, 창2:1, ‘다 이루어지니라’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창2:1) AC.83 ‘천지와 만물’(The 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이 ‘다 이루어지니라’(to be finished)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여섯째 날’(the sixth day)이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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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1, 창2:1-17 배경, '한 인간이 거쳐 갈 수 있는 세 가지 상태'

AC.81 이 장은 ‘천적 인간’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앞의 장은 ‘죽은 상태에 있던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 영적 인간이 무엇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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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1

 

이 장은 ‘천적 인간’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앞의 장은 ‘죽은 상태에 있던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 영적 인간이 무엇인지, 더 나아가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이 무엇인지조차 거의 다 모르는 상황이므로, 먼저 그 차이를 알 수 있도록 각각의 어떠함을 간략히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습니다. 첫째, 죽어 있는 사람, 즉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 겉으로는 살아있으나 주님과의 관계에서는 죽은 상태인 사람은 몸과 세상에 속한 것 외에는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바로 그것을 숭배(adore)합니다. 영적 인간은 영적이고 천적인 참과 선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사랑에서라기보다 신앙의 원리에서 인정하며, 그의 행위 역시 주로 그 신앙에서 나옵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영적이고 천적인 참과 선을 믿고 또한 퍼셉션으로 알며,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그의 행위 또한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This chapter treats of the celestial man, as the preceding one did of the spiritual, who was formed out of a dead man. But as it is unknown at this day what the celestial man is, and scarcely what the spiritual man is, or a dead man, it is permitted me briefly to state the nature of each, that the difference may be known. First, then, a dead man acknowledges nothing to be true and good but what belongs to the body and the world, and this he adores. A spiritual man acknowledges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 and good; but he does so from a principle of faith, which is likewise the ground of his actions, and not so much from love. A celestial man believes and perceives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 and good, acknowledging no other faith than that which is from love, from which also he acts.

 

[2] 둘째, 죽어 있는 사람을 움직이는(influence) 목적은 오직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삶만을 향하며(regard), 그러니까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그 목적이 오직 육체적이고 세상적일 뿐이며, 그는 영원한 생명(, life)이 무엇인지도, 주님이 누구이신지도 알지 못하고, 혹 알더라도 믿지 않습니다. 영적 인간을 움직이는 목적은 영원한 생명을 향하고, 그로 인해 주님을 향합니다. 천적 인간을 움직이는 목적은 주님을 향하며, 그로 인해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향합니다. Second: The ends which influence a dead man regard only corporeal and worldly life, nor does he know what eternal life is, or what the Lord is; or should he know, he does not believe. The ends which influence a spiritual man regard eternal life, and thereby the Lord. The ends which influence a celestial man regard the Lord, and thereby his kingdom and eternal life.

 

[3] 셋째, 죽어 있는 사람은 싸움, 그러니까 영적 전투 중에 있을 때 거의 항상 패하며, 싸움이 없을 때에도 악과 거짓이 그를 지배하여 그는 종이 됩니다. 그를 묶는 사슬은 외적인 것들로서, 곧 법에 대한 두려움, 생명과 재산, 이익, 그리고 명성을 잃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이런 것들이 아주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지만 항상 승리하며, 그를 붙드는 사슬은 내적인 것으로서, 양심의 사슬이라 불립니다. 천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지 않으며,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때에도 그것들을 멸시하므로 정복자라 불립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 아무 사슬에도 묶여 있지 않으며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사슬이 있는데, 그것들은 드러나지 않는 사슬로서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Third: A dead man when in combat almost always yields, and when not in combat, evils and falsities have dominion over him, and he is a slave. His bonds are external, such as the fear of the law, of the loss of life, of wealth, of gain, and of the reputation which he values for their sake. The spiritual man is in combat, but is always victorious; the bonds by which he is restrained are internal, and are called the bonds of conscience. The celestial man is not in combat, and when assaulted by evils and falsities, he despises them, and is therefore called a conqueror. He is apparently restrained by no bonds, but is free. His bonds, which are not apparent, are perceptions of good and truth.

 

 

해설

 

이 단락은 창세기 2장의 해설 가운데서도, 가장 교육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급진적인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상징을 풀지 않고, 은유를 쓰지 않으며, 곧바로 사람의 상태를 세 가지로 나누어 제시합니다.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A dead man), ‘영적 인간(The spiritual man), ‘천적 인간(The celestial man)입니다. 이는 인류를 세 부류로 나누기 위한 분류표가 아니라, ‘한 인간이 거쳐 갈 수 있는 세 가지 상태’를 질서 있게 드러내기 위한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설명을 굳이 덧붙이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는 이미 이 시대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영적 인간’조차도 제대로 이해되지 않고 있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사실상 ‘죽은 상태’에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음을 전제합니다. 그러므로 이 단락은 설명이 아니라, ‘인식의 눈을 열기 위한 조정’에 가깝습니다.

 

첫 번째 구분은 ‘무엇을 참과 선으로 인정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몸과 세상에 속한 것만을 참과 선으로 인정합니다. 여기에는 악의 의도가 전제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 세상에서 유용한 것만을 실제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숭배’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것이 그의 삶의 중심이 됩니다.

 

영적 인간은 여기서 분명히 달라집니다. 그는 영적이고 천적인 참과 선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인정의 출발점은 ‘사랑’이 아니라 ‘신앙’입니다. 그는 이것이 옳다고 믿고, 그래서 그것을 따릅니다. 그의 행위는 신앙에 의해 유지됩니다. 이는 매우 귀하고 중요한 단계이지만, 여전히 중간 단계입니다.

 

천적 인간은 이 둘과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는 영적이고 천적인 참과 선을 믿을 뿐 아니라, 그것을 퍼셉션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그것을 보듯이 압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외에 다른 신앙이 없습니다. 믿음이 사랑을 앞서지 않고, 사랑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행위는 의무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두 번째 구분은 ‘삶을 움직이는 목적’의 문제입니다.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의 목적은 오직 현세적 삶에 있습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그것을 실제로 여기지 않습니다. 주님 역시 개념으로는 알 수 있지만, 삶의 중심은 아닙니다.

 

영적 인간은 목적이 분명히 바뀝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고, 그로 인해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목적의 최종점이 여전히 ‘영원한 생명’이라는 결과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목적 자체가 주님입니다. 그는 결과를 위해 주님을 향하지 않고, 주님을 향하기 때문에 결과가 따라옵니다. 그래서 그의 목적은 곧 주님의 나라이며, 영원한 생명은 그 자연스러운 열매입니다.

 

세 번째 구분은 가장 실제적이고도 날카롭습니다. ‘싸움과 자유’의 문제입니다.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싸움에서 거의 항상 패합니다. 설령 외적으로는 질서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여도, 내적으로는 악과 거짓이 그를 지배합니다. 그를 붙잡는 것은 법, 처벌, 손해, 체면 같은 외적 사슬입니다. 그는 자유로워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가장 많은 것에 매여 있습니다.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습니다. 그는 유혹과 갈등을 겪지만, 싸움 끝에 승리합니다. 그를 붙잡는 사슬은 더 이상 외적인 것이 아니라, 양심이라는 내적인 사슬입니다. 그는 자유롭지만, 동시에 책임을 집니다.

 

천적 인간은 여기서 다시 한 단계 올라섭니다. 그는 싸움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악과 거짓이 다가오지만, 그것을 심각하게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들을 멸시합니다. 이는 무관심이 아니라, ‘이미 중심이 너무 분명하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는 ‘정복자’라 불립니다.

 

겉으로 보면, 천적 인간은 아무 사슬에도 묶여 있지 않은 완전한 자유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매우 중요한 말을 덧붙입니다. 그에게도 사슬은 있습니다. 다만 그것은 드러나지 않는 사슬입니다. 그것은 법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그는 선을 떠올리기 때문에 악을 의도하지 않고, 진리를 보기 때문에 거짓을 택하지 않습니다. 그의 자유는 방임이 아니라, ‘가장 깊은 질서 안에 있는 자유’입니다.

 

AC.81은 그래서 창세기 2장의 모든 내용을 하나의 인간 이해로 묶어 줍니다. 에덴동산, 생명나무, 네 강, 금지 명령, 안식일은 모두 ‘천적 인간’이라는 한 상태를 설명하기 위한 서로 다른 얼굴들입니다. 그리고 이 상태는 신화 속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본래 지향하도록 창조된 상태’입니다.

 

이 글을 읽고 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묻게 됩니다. 나는 지금 어느 상태에 서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판단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길의 구조를 보여 줍니다.

 

 

 

AC.80, 창2:1-17 개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은 오직 퍼셉션으로만' (16-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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