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Some Examples Drawn from Experience with Spirits Concerning What They Had Thought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 about the Soul or Spirit

 

AC.443

다른 삶에서는 사람들이 육체 안에서 살았을 때 영혼과 영, 그리고 사후의 삶에 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지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육체의 상태와 비슷한 상태에 놓이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며, 그들의 생각은 마치 소리 내어 말하는 것처럼 분명하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의 경우,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그가 살아 있을 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지각했으며, 그 자신도 그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는 영의 존재를 믿기는 했지만, 죽은 뒤에는 영이 어떤 희미한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육체의 생명이 거두어지면 희미하고 흐릿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생명이 육체 안에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영을 하나의 유령 같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또한 짐승들도 사람과 거의 마찬가지로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이러한 생각을 더욱 굳혔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영들과 천사들이 가장 큰 빛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총명과 지혜와 행복 가운데서 살아가며, 거의 묘사하기 어려울 만큼 완전한 퍼셉션을 누린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은 희미하기는커녕 가장 완전하게 밝고 분명합니다. In the other life it is given to perceive clearly what opinions people had entertained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concerning the soul, the spirit, and the life after death; for when kept in a state resembling that of the body they think in the same way, and their thought is communicated as plainly as if they spoke aloud. In the case of one person, not long after his decease, I perceived (what he himself confessed) that he had indeed believed in the existence of the spirit, but had imagined that it must live after death an obscure kind of life, because if the life of the body were withdrawn there would remain nothing but what is dim and obscure; for he had regarded life as being in the body, and therefore he had thought of the spirit as being a phantom; and he had confirmed himself in this idea from seeing that brutes also have life, almost as men have it. He now marveled that spirits and angels live in the greatest light, and in the greatest intelligence, wisdom, and happiness, attended with a perception so perfect that it can scarcely be described; consequently that their life, so far from being obscure, is most perfectly clear and distinct.

 

해설

AC.443부터 AC.448까지는 창4의 속뜻에 대한 해설을 마친 뒤 이어지는 체험 기록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부분에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라는 제목을 붙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부터는 창4의 특정 구절을 직접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세상에서 영혼과 영, 사후의 삶에 관해 품었던 생각이 사후에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여러 실제 사례를 통해 보여 줍니다.

 

첫 사례의 사람은 영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영이 존재하고 사람이 죽은 뒤에도 살아간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그 사후의 삶을 어떻게 상상했느냐에 있었습니다. 그는 생명이 근본적으로 육체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육체가 사라지면 생명의 대부분도 함께 사라지고, 영에게는 희미하고 흐릿한 어떤 존재 상태만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사후의 삶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현세의 육체적 삶보다 훨씬 희박하고 불완전한 삶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가 영을 ‘유령’(phantom)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는 말은 이러한 관념을 잘 보여 줍니다. 그에게 실재성이 강한 것은 육체였고, 영은 육체에서 생명이 빠져나간 뒤 남는 희미한 잔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짐승들도 인간과 거의 마찬가지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더욱 굳혔습니다. 육체를 가진 동물에게도 생명이 있으므로 생명은 육체에 속한 것이며, 그렇다면 육체가 없어지면 인간에게 남는 생명도 매우 희미할 것이라고 추론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그 추론을 일반적인 교리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생전에 실제로 품고 있었던 생각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사후에 직접 경험한 것은 자신의 예상과 정반대였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들과 천사들이 ‘가장 큰 빛’ 가운데 있으며, ‘가장 뛰어난 총명과 지혜와 행복’을 누린다고 말합니다. 더욱이 그들의 퍼셉션은 거의 묘사하기 어려울 정도로 완전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후의 삶이 단순히 계속된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육체가 사라진 뒤 의식과 지각이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이 더욱 밝고 분명해진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가장 완전하게 밝고 분명하다’(most perfectly clear and distinct)는 표현은 이 글의 핵심을 잘 압축합니다. 이 사람은 육체를 생명의 중심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육체가 없어지면 삶도 희미해진다’고 여겼지만, 사후에는 오히려 그 반대를 발견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체험에 따르면 영적 삶은 육체적 삶의 흐릿한 그림자가 아니라, 지각과 사고와 의식이 더욱 선명한 삶입니다. 따라서 육체에서 벗어나는 것은 인간의 의식이 점차 꺼져 가는 과정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다만 여기서 ‘영들과 천사들이 가장 큰 빛과 총명과 지혜와 행복 가운데 산다’는 표현을 모든 영이 사후 즉시 똑같은 천국적 행복을 누린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의 논점은 사후의 모든 사람의 상태가 동일하다는 데 있지 않고, ‘육체가 사라지면 영의 삶은 희미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반박하는 데 있습니다. 선한 영과 악한 영의 상태, 천국과 지옥의 차이 등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AC.443이 강조하는 것은 육체의 죽음이 인간의 영적 의식과 삶을 희미한 그림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첫 사례가 AC.443-448의 맨 앞에 놓인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사후의 삶을 생각할 때 사람은 자신이 지금 경험하는 육체적 감각을 기준으로 삼기 쉽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는 현재의 삶을 가장 실재적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몸이 없어지면 삶도 덜 실재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그 전제를 뒤집습니다. 육체가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면 육체의 죽음은 생명의 소멸이나 희미해짐을 뜻하지 않습니다. AC.443의 놀라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생전에 영의 존재를 믿었던 사람조차 사후에 이르러 자신이 영의 삶을 얼마나 희미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AC.443 해설)

 

 

 

AC.444, 창4 뒤, ‘영은 단지 생각일 뿐이며 아무런 형체도 없는가?’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4이 세상에 살 때 영은 아무런 연장(extension)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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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2, 창4:26, ‘태고 시대에도 교회에서 분리된 많은 교리와 이단이 있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2앞에서 설명한 이 장의 내용으로부터, 태고 시대에도 교회에서 분리된 많은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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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9 심화

1. ‘왜 홍수 전 에노스가 벌써 영적 인간인가?’

 

AC.439를 읽다 보면 한 가지 뜻밖의 표현을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노스’(Enosh)라는 이름 역시 ‘사람’(man)을 뜻한다고 하면서, 그 사람이 ‘천적 인간’(celestial man)이 아니라 ‘영적 인간’(spiritual man)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금까지 창1과 창2를 따라온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질문을 일으킵니다. 창1에서는 거듭남의 여섯 날을 거쳐 영적 인간이 형성되고, 창2에서는 일곱째 날과 함께 천적 인간이 다루어지며, 그 천적 상태가 태고교회의 고유한 상태로 설명되었습니다. 반면 홍수 후에 나타나는 고대교회는 영적 성격의 교회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아직 홍수 이전인 창4에서 에노스가 벌써 ‘영적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먼저 ‘영적 인간’이라는 표현을 곧바로 ‘홍수 후 고대교회에 속한 사람’이라는 역사적 명칭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천적’과 ‘영적’은 서로 다른 교회 시대를 가리킬 때도 사용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서로 다른 질서와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나 교회가 홍수 이전에 존재한다고 해서 그 상태가 언제나 천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영적 인간’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고 해서 곧 홍수 후 고대교회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AC.439 자체도 에노스의 교회를 ‘영적 교회’라고 하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에노스라는 이름이 나타내는 ‘사람’을 ‘천적 인간이 아니라 영적 인간’이라고 합니다. 이 구별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왜 태고교회의 시대 안에서 이런 영적 상태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창2에서 보았던 태고교회의 처음 상태와 창4에서 다루는 상태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2의 태고교회는 사랑이 먼저이고 그 사랑으로부터 신앙과 진리를 지각하는 천적 질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창3과 창4로 진행하면서 인간은 점차 자기 자신에게 기울었고, 마침내 가인으로 나타나는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습니다. 아벨이 나타내는 체어리티가 소멸된 뒤에도 주님께서는 신앙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 않으시고 ‘가인의 표’를 통해 보존하셨으며, 이후 라멕에 이르러서는 그렇게 보존되어 있던 신앙마저 황폐해지는 상태가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창4 마지막의 회복은 창2의 최초 천적 상태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대로 되돌아오는 장면으로 볼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셋과 에노스가 중요해집니다. AC.436에 따르면 셋은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신앙’을 뜻하고, 에노스는 ‘신앙을 통해 심어진 체어리티’를 뜻합니다. AC.438에서는 이를 교회의 차원에서 다시 설명하여, 셋은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을, 에노스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창2의 천적 인간과는 다른 질서가 보입니다. 최초의 천적 상태에서는 사랑과 체어리티로부터 신앙이 나왔지만, 여기서는 이미 무너진 상태 가운데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지는 회복의 과정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에노스를 ‘영적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적어도 이 새로운 상태가 최초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와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과 잘 맞습니다.

 

이 때문에 ‘셋은 신앙, 에노스는 체어리티’라는 표현도 조심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인간의 정상적인 영적 질서가 언제나 ‘먼저 신앙을 얻고 그다음 체어리티를 얻는 것’이라는 보편 공식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이미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발생했고,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으며, 그 가운데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신 뒤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특별한 회복의 과정이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셋에서 에노스로 이어지는 ‘신앙을 통한 체어리티’는 태고교회 본래의 천적 질서를 설명한다기보다, 그 질서가 무너진 뒤 주님께서 다시 교회를 일으키시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므로 에노스에서 이미 영적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현재 본문보다 앞서 나갑니다. AC.439가 분명히 말하는 것은 에노스로 나타나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아니라 영적 인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AC.438은 에노스를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라고 하며, AC.441은 이전 교회가 소멸된 뒤 나타난 ‘새 교회’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새 교회를 훗날 홍수 후에 나타나는 고대교회와 같은 의미의 ‘영적 교회’라고 AC.439가 직접 규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이라는 표현과 ‘영적 교회’라는 역사적·교회적 구분을 성급하게 하나로 합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오히려 이 대목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주님의 회복이 언제나 과거 상태의 단순한 복원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창2의 천적 상태가 무너진 뒤 주님께서는 인간을 버려 두지 않으시고,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며 그 상태에서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십니다. 에노스는 바로 그러한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홍수 전에 ‘영적 인간’이 등장한다는 사실 자체를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영적’이라는 말이 반드시 홍수 후의 특정 교회 시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상태를 나타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왜 스베덴보리가 이 시점의 에노스를 특별히 ‘영적 인간’이라고 규정했으며, 이것이 이후 홍수와 고대교회의 영적 질서와 정확히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AC.439만으로 모두 밝혀지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현재까지의 설명 안에서 가장 안전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에노스가 홍수 전에 ‘영적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홍수 후 고대교회가 벌써 시작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창2에서 나타난 태고교회 본래의 천적 상태가 이미 크게 무너진 뒤, 주님께서 보존하신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시는 새로운 회복의 상태가 나타났으며, 에노스는 그 과정에서 ‘천적 인간이 아니라 영적 인간’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창4 마지막은 단순히 최초의 천적 상태로 되돌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깊이 무너진 인간을 그 상태에 맞게 다시 붙드시고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이후 AC에서 이 영적 상태의 성격이 더 구체적으로 밝혀진다면, 그때는 여기서 확인한 기초 위에서 한 단계 더 깊이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AC.439 심화 1)

 

 

 

AC.439, 창4:26, ‘에노스는 왜 천적 인간이 아닌 영적 인간을 의미하는가?’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39‘셋’(Seth)이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을 뜻한다는 것은 앞 절에서 설명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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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2

앞에서 설명한 이 장의 내용으로부터, 태고 시대에도 교회에서 분리된 많은 교리와 이단들이 있었으며, 각각에는 저마다의 이름이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분리된 교리와 이단들은 오늘날의 어떤 것보다도 훨씬 더 깊은 사고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천성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From the contents of this chapter as above explained, it is evident that in the most ancient time there were many doctrines and heresies separate from the church, each one of which had its name, which separate doctrines and heresies were the outcome of much more profound thought than any at the present day, because such was the genius of the men of that time.

 

해설

AC.442는 창4의 마지막 절에 대한 세부 해석을 하나 더 덧붙인다기보다, 지금까지 해설한 창4 전체를 뒤돌아보며 하나의 중요한 결론을 제시합니다. 창4에 등장한 가인, 에녹,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과 그의 아내들 및 자녀들, 그리고 마지막의 셋과 에노스에 이르기까지, 이 이름들을 단순히 개인들의 계보로만 읽어서는 이 장의 속뜻을 알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의 해설 전체를 근거로 태고 시대에 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여러 교리와 이단들이 있었으며, 그것들이 각각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특히 주의할 표현은 ‘교회에서 분리된’(separate from the church)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교회와 아무 관계도 없던 외부의 종교나 사상들이 있었다는 뜻이라기보다, 본래 교회 안에 있던 것들이 점차 분리되어 독립적인 교리와 이단으로 발전했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창4에서 가인으로 나타난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그 후 여러 이름으로 나타나는 상태들이 계속 전개된 것도 이러한 흐름 안에 있습니다. 하나였던 교회의 생명에서 어떤 교리적 요소가 떨어져 나가 독자적인 것이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본래 교회의 질서 안에 머물지 않게 됩니다.

 

이 점에서 AC.442는 창4에 그렇게 많은 이름이 등장하는 이유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선 해설에서 이 이름들을 단순한 개인의 이름으로만 다루지 않고, 서로 다른 교리와 교회 상태를 나타내는 이름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따라서 ‘각각에는 저마다의 이름이 있었다’는 말은 단순히 여러 사람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 구별되는 교리적 흐름들이 존재했다는 뜻입니다. 이름이 달라진다는 것은 그만큼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사상과 교리의 성격도 서로 달랐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 글에서 상당히 뜻밖인 대목은 그러한 교리와 이단들이 ‘오늘날의 어떤 것보다도 훨씬 더 깊은 사고’에서 나왔다고 하는 부분입니다. ‘이단’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고가 단순하거나 지적으로 수준이 낮았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태고 시대 사람들의 천성 자체가 오늘날 사람들과 달랐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생겨난 잘못된 교리와 이단조차 매우 깊은 사고의 산물이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깊다’는 것은 그것이 참되거나 선하다는 평가가 아닙니다. 사고의 깊이와 교리의 진실성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깊은 사고에서 나온 것이라도 교회의 생명에서 분리되면 그릇된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4의 핵심 문제와도 잘 맞습니다.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의 문제는 신앙 자체가 얕거나 무지했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AC.442가 말하는 여러 교리와 이단의 존재 역시 단순히 지적 수준의 저하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깊이 사고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기에 교회에서 분리된 교리 역시 복잡하고 깊게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리의 깊이가 그것을 참된 교회로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창4 전체에서 계속 드러났듯이, 결정적인 것은 진리가 사랑과 체어리티에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동시에 AC.442의 ‘그 시대 사람들의 천성이 그러했다’는 마지막 말은 태고 시대 사람들을 오늘날의 사고방식으로 단순히 환원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시대 사람들의 내적 상태와 사고 능력이 오늘날과 달랐다고 전제합니다. 다만 이 짧은 글은 그 차이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태고인의 사고방식을 세부적으로 추정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명시한 범위에 머무르는 것이 안전합니다. 곧 그들은 매우 깊이 사고할 수 있었고, 그러한 특성 때문에 교회에서 분리된 교리와 이단들 역시 오늘날보다 훨씬 깊은 사고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AC.442는 창4를 마무리하면서 매우 의미 있는 역설을 남깁니다. 교회가 무너지는 것은 반드시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게 되거나 지적으로 무지해지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깊은 사고와 정교한 교리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될 수 있습니다. 창4에서 가인으로 시작된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장 마지막에서 셋과 에노스를 통해 다시 제시되는 길 역시 단순히 더 깊은 교리를 갖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를 향하고 체어리티가 신앙의 으뜸이 되며, 그 체어리티에서 주님께 대한 예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AC.442는 창4 전체를 ‘얼마나 깊이 아는가’보다 ‘그 진리가 어떠한 사랑과 결합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마무리하게 합니다. (AC.442 해설)

 

 

 

AC.443, 창4 뒤, ‘육체의 생명이 사라지면 영의 삶도 희미해질 것이라는 생각’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Some Examples Drawn from Experience with Spirits Concerning What They Had Thought during Their Life in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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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1, 창4:26,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은 새 교회의 예배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1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이때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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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1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이때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앞에서 태고교회에 관해 이미 설명한 내용으로 충분히 분명합니다. 태고교회는 다른 어떤 교회보다도 주님을 경배하고 예배했습니다. 또한 아벨이 양 떼의 첫 새끼를 제물로 드렸다는 사실에서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calling upon the name of Jehovah)는 가인과 라멕이라고 하는 이들에 의해 이전 교회가 소멸된 후에 세워진 새 교회의 예배 외에 다른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That the invocation of the name of Jehovah did not commence at this time is sufficiently evident from what has already been said above in regard to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more than any other adored and worshiped the Lord; and also from the fact that Abel brought an offering of the firstlings of the flock; so that in this passage by “calling upon the name of Jehovah” nothing else is signified than the worship of the new church, after the former church had been extinguished by those who are called “Cain” and “Lamech.”

 

해설

AC.441은 창4:26의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할 때 생길 수 있는 오해를 직접 바로잡습니다. ‘비로소’라고 해서 이때 인류가 처음으로 주님을 알고 예배하거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설명한 태고교회만 생각해 보아도 이것이 분명하다고 합니다. 태고교회는 다른 어떤 교회보다도 주님을 경배하고 예배했기 때문입니다.

 

아벨 역시 그 사실을 보여 주는 직접적인 근거입니다. 창4:4에서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여호와께 제물로 드렸습니다. 에노스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주님께 드리는 예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4:26의 ‘그때에 비로소’라는 표현을 인류 역사에서 예배 자체가 처음 생겨난 시점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AC.440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가 주님께 드리는 예배 전반을 뜻한다 설명했다면, AC.441은 이제 그 예배가 ‘비로소 시작되었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밝힙니다.

 

그 답은 ‘새 교회의 예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가 여기서는 ‘이전 교회가 가인과 라멕이라고 하는 이들에 의해 소멸된 후에 시작된 새 교회의 예배’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시작’의 주어는 인류 전체의 예배가 아니라 새 교회의 예배입니다. 이전에는 아무도 주님을 예배하지 않다가 에노스 때 처음 예배가 생긴 것이 아니라, 이전 교회가 소멸된 뒤 새롭게 형성된 교회가 이제 그 교회에 속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창4 전체의 흐름과 연결해서 볼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냈고, 그 신앙은 아벨이 나타내는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가운데에서도 신앙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 않으시고 ‘가인의 표’를 통해 보존하셨습니다. 이후 라멕에 이르러서는 그렇게 보존되어 있던 신앙마저 황폐해지는 상태가 나타납니다. 곧 창4의 흐름은 체어리티가 소멸된 뒤에도 보존되었던 신앙이 마침내 황폐해지는 데까지 내려갑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주님께서 새로운 것을 일으키시는 방향으로 전환됩니다.

 

그 새로운 시작을 나타내는 것이 셋과 에노스입니다. 앞의 AC.434-440에서 셋은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에노스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를 나타냈습니다. 그러므로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말씀은 단순히 새로운 종교적 행위가 생겨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그 후 보존되어 있던 신앙마저 황폐해진 이전 교회의 뒤를 이어,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시고 체어리티가 다시 중심이 되는 새 교회를 일으키셨으며, 이제 그 교회에서 체어리티로부터 나오는 예배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AC.440과 AC.441은 서로 정확히 이어집니다. AC.440의 초점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있었다면, AC.441의 초점은 ‘왜 그것을 이제 시작했다고 하는가’에 있습니다. 전자는 그것이 주님께 드리는 예배 전반이며 그 예배는 체어리티에서 나와야 한다고 설명하고, 후자는 그러한 예배 자체가 인류에게 처음 생긴 것이 아니라 ‘새 교회의 예배’가 이제 시작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창4:26의 ‘비로소’는 최초의 예배를 가리키는 시간적 표현이라기보다, 이전 교회의 소멸과 새 교회의 출현 사이에 놓인 영적 전환을 보여 주는 말입니다.

 

또한 ‘가인과 라멕이라고 하는 이들’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두 역사적 개인이 하나의 교회를 없앴다는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의 속뜻에서 가인과 라멕은 교회가 거쳐 간 특정한 영적 상태를 나타냈습니다. 따라서 이전 교회의 소멸 역시 창4에서 계속 다루어 온 신앙과 체어리티의 변질과 황폐라는 흐름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소멸 뒤에 셋과 에노스가 등장한다는 것은 인간의 실패가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전 교회의 생명이 다한 자리에서도 주님께서는 새로운 신앙과 체어리티를 일으키시고, 그로부터 다시 참된 예배가 시작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AC.441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는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창4 마지막 부분의 중요한 전환입니다. (AC.441 해설)

 

 

 

AC.442, 창4:26, ‘태고 시대에도 교회에서 분리된 많은 교리와 이단이 있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2앞에서 설명한 이 장의 내용으로부터, 태고 시대에도 교회에서 분리된 많은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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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0, 창4:26, ‘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를 의미하는가?’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0방금 인용한 말씀이 그 교회의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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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0

방금 인용한 말씀이 그 교회의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call upon the name of Jehovah)가 주님께 드리는 모든 예배를 나타내는 관용적이고 일반적인 표현이라는 사실에서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예배가 체어리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앞 절에서는 그분을 ‘하나님’(God)이라고 했으나 여기서는 ‘여호와’(Jehovah)라고 한 사실에서도 분명합니다. 또한 주님은 체어리티가 아니고서는 예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에 속하지 않은 신앙에서는 참된 예배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런 예배는 단지 입술의 것일 뿐 마음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call on the name of Jehovah)가 주님께 드리는 모든 예배를 나타내는 관용적인 표현이라는 것은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 관해, That by the words just quoted is signified the worship of that church from charit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is a customary and general form of speech for all worship of the Lord; and that this worship was from charit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Jehovah” is here mentioned, whereas in the preceding verse he was called “God,” as well as from the fact that the Lord cannot be worshiped except from charity, since true worship cannot proceed from faith that is not of charity, because it is merely of the lips, and not of the heart. That to “call on the name of Jehovah” is a customary form of speech for all worship of the Lord, appears from the Word; thus it is said of Abraham, that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창12:8);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13:4) “he built an altar to Jehovah, and called on the name of Jehovah” (Gen. 12:8; 13:4)

 

또다시, and again, that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창21:33) he “planted a grove in Beersheba, and called there on the name of Jehovah, the God of eternity” (Gen. 21:33).

 

이 표현이 모든 예배를 포함한다는 것은 이사야에서도 분명합니다. That this expression includes all worship, is plain from Isaiah:

 

22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롭게 여겼으며 23네 번제의 양을 내게로 가져오지 아니하였고 네 제물로 나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는 제물로 말미암아 너를 수고롭게 하지 아니하였고 유향으로 말미암아 너를 괴롭게 하지 아니하였거늘 (사43:22, 23)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hath said, thou hast not called upon me, O Jacob, but thou hast been weary of me, O Israel. Thou hast not brought to me the small cattle of thy burnt offerings, neither hast thou honored me with thy sacrifices. I have not caused thee to serve with an offering, nor wearied thee with incense, (Isa. 43:22–23)

 

이 말씀에는 모든 표상적 예배의 요약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in which text a summary is given of all representative worship.

 

해설

AC.440은 창4:26의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말씀 가운데 특히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것은 단순히 ‘여호와’라는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기 시작했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에서 주님께 드리는 ‘모든 예배’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표현입니다. 따라서 창4:26의 초점은 하나님의 이름을 처음 발음한 시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에노스로 나타나는 교회에서 어떠한 예배가 이루어졌는가에 있습니다.

 

그런데 AC.440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예배의 근원이 ‘체어리티’였다고 말합니다. 그 첫 번째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하나님’(God)과 ‘여호와’(Jehovah)라는 이름의 차이입니다. 앞 절, 곧 창4:25에서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고 하여 ‘하나님’이라고 했지만, 창4:26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명칭의 변화 자체를 의미 있는 것으로 보고, 여기서 말하는 예배가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라는 근거 가운데 하나로 제시합니다. 다만 AC.440은 이 글에서 ‘하나님’과 ‘여호와’의 차이를 더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으므로, 그 구체적인 의미까지 미리 확대해서 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두 번째 근거는 더욱 직접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은 체어리티가 아니고서는 예배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예배의 외적 형식보다 그것을 낳는 내적 생명입니다. 신앙이 있다고 말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입술로 신앙을 고백한다고 해서 그 자체로 참된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 역시 ‘입술의 것’일 뿐 ‘마음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예배는 체어리티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설명은 창4 전체의 흐름과도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냈고, 그 분리된 신앙은 아벨이 나타내는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신앙을 보존하셨고, 셋에 이르러서는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이 나타났으며, 에노스에서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제 그 교회의 예배가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라고 설명됩니다. 결국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예배에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는가만이 아니라 그 믿음이 어떠한 사랑과 삶에서 나오는가가 예배의 성격을 결정합니다.

 

아브라함에 관한 창12:8, 13:4와 창21:33의 인용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라는 표현이 예배 전반을 가리킨다는 것을 말씀 자체에서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거나 브엘세바에서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단순히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는 한 행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리는 예배를 포괄하는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4:26의 같은 표현 역시 이러한 말씀의 용례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어지는 사43:22-23의 인용은 그 의미를 더욱 넓혀 줍니다. 그 말씀에는 여호와를 부르는 것과 함께 번제, 제물, 향 등 당시의 여러 예배 행위가 함께 언급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모든 표상적 예배의 요약’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표현 안에는 한 가지 기도 행위만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예배 전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단, 번제, 제물, 향과 같은 외적 형식들이 서로 달라도 그것들은 모두 예배라는 하나의 큰 범주 안에 놓입니다.

 

그러나 AC.440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예배를 참된 예배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리며 향을 피우는 외적인 예배가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마음의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신앙을 고백한다고 해도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있다면 그것은 ‘입술의 것’에 머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에노스로 나타나는 교회에서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 체어리티에서 예배가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창4:26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다’는 말씀은 앞에서부터 이어져 온 신앙과 체어리티의 문제가 마침내 예배의 문제로까지 나아간 것을 보여 줍니다. 참된 예배는 입술에서 시작하여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있는 마음에서 나와 입술과 삶으로 표현되는 예배입니다. (AC.440 해설)

 

 

 

AC.441, 창4:26,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은 새 교회의 예배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1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이때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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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9, 창4:26, ‘에노스는 왜 천적 인간이 아닌 영적 인간을 의미하는가?’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39‘셋’(Seth)이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을 뜻한다는 것은 앞 절에서 설명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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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39

‘셋’(Seth)이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을 뜻한다는 것은 앞 절에서 설명했습니다. 그의 ‘아들, 곧 이름이 에노스인 이’(son, whose name was Enosh)가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를 뜻한다는 것 역시 앞에서 말한 내용으로 분명하며, 또한 그에게 ‘에노스’(Enosh)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합니다. 이 이름 역시 ‘사람’(man)을 뜻하는데, 천적 인간(celestial man)이 아니라 여기서 ‘에노스’라고 하는 바로 그 영적 인간(spiritual man)을 뜻합니다. 이것은 바로 이어지는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다’(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는 말씀에서도 분명합니다. That by “Seth” is signified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was shown in the preceding verse. That by his “son, whose name was Enosh,” is signified a church that regarded charity as the principal of faith, is also evident from what has been said before, as well as from the fact that it is called “Enosh,” which name also means a “man,” not a celestial man, but that human spiritual man which is here called “Enosh.”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words that immediately follow: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해설

AC.439는 앞의 AC.438에서 제시한 에노스의 의미를 그의 이름을 통해 한층 더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셋은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을 뜻하고, 그의 아들 에노스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를 뜻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에노스’라는 이름 자체도 ‘사람’(man)을 뜻한다고 하면서 매우 중요한 구별을 하나 덧붙입니다. 에노스가 나타내는 사람은 ‘천적 인간’(celestial man)이 아니라 ‘영적 인간’(spiritual man)이라는 것입니다.

 

이 구별은 창세기 앞부분을 읽어 온 독자에게는 오히려 새로운 질문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창1에서는 거듭남의 과정을 거쳐 영적 인간이 되고, 창2에서는 더 나아가 천적 인간이 된 상태를 다루었습니다. 태고교회의 본래 상태는 이 천적 인간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아직 홍수 이전인 창4의 에노스에게 스베덴보리가 다시 ‘영적 인간’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에노스의 등장을 태고교회 처음의 천적 상태가 그대로 회복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AC.439 자체는 왜 이 시점에서 다시 영적 인간이 나타나는지까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에노스가 천적 인간이 아니라 영적 인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데 머뭅니다.

 

이 사실은 앞에서 이어져 온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욱 주목할 만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냈습니다.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에도 주님께서는 신앙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 않으시고 보존하셨습니다. 그리고 셋에서는 마침내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이 나타납니다. 이제 에노스에서는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기는 교회가 나타납니다. 따라서 에노스는 앞의 가인과 같은 분리된 신앙의 상태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다시 올바른 방향을 찾은 상태와 관련됩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겼다’(regarded charity as the principal of faith)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에노스로 나타나는 교회는 신앙을 버리거나 가볍게 여긴 교회가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을 인정하면서도 그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해야 하며,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으뜸이 되어야 한다고 여긴 교회입니다. 가인에게서 문제였던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것이었습니다. 셋과 에노스에 이르러서는 이 관계가 달라집니다. 셋은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이고, 에노스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기는 교회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어지는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다’는 말씀도 에노스의 의미를 뒷받침한다고 합니다. AC.438에서는 이 말씀을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그 교회의 예배’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에노스로 나타나는 교회가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겼다는 것과, 그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가 나타났다는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체어리티가 단순히 교리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인정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예배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AC.439는 에노스로 나타나는 ‘교회’를 직접 ‘영적 교회’라고 규정하지 않습니다. 에노스라는 이름이 뜻하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아니라 영적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한 글만을 근거로 에노스의 교회를 훗날 홍수 후에 등장하는 고대교회와 같은 의미의 ‘영적 교회’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단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태고교회 처음의 천적 상태가 그대로 되돌아온 것이 아니며, 에노스라는 이름에는 분명히 ‘영적 인간’이라는 새로운 성격이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AC.439는 창4 마지막의 회복을 단순한 원상복귀로 이해하지 못하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을 그대로 두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처음의 천적 상태를 단순히 되돌려 놓으신 것도 아닙니다. 셋으로 나타나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중심에 놓이는 교회를 마련하셨고, 그 교회를 나타내는 에노스라는 이름에는 ‘천적 인간이 아니라 영적 인간’이라는 중요한 변화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교회에서 체어리티로부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가 나타납니다. 왜 홍수 이전에 벌써 ‘영적 인간’이 등장하는지는 이후의 설명까지 더 살펴보아야 하지만, 적어도 AC.439는 태고교회의 쇠퇴 이후 이루어지는 회복이 처음 상태의 단순한 반복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AC.439 해설)  

 

심화

1. ‘왜 홍수 전 에노스가 벌써 영적 인간인가?’

 

AC.439 심화 1, ‘왜 홍수 전 에노스가 벌써 영적 인간인가?’

AC.439 심화1. ‘왜 홍수 전 에노스가 벌써 영적 인간인가?’ AC.439를 읽다 보면 한 가지 뜻밖의 표현을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노스’(Enosh)라는 이름 역시 ‘사람’(man)을 뜻한다고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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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0, 창4:26, ‘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를 의미하는가?’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0방금 인용한 말씀이 그 교회의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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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8, 창4:26, ‘에노스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를 의미한다’ (AC.438-442)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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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창4:26)

 

AC.438

‘셋’(Seth)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을 뜻합니다. 그의 ‘아들’(son), 곧 이름이 ‘에노스’(Enosh)인 이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call on the name of Jehovah) 시작했다는 것은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그 교회의 예배를 뜻합니다. By “Seth” is signified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as was said above; by his “son,” whose name was “Enosh,” is signified a church which regarded charity as the principal of faith; by beginning then to “call on the name of Jehovah” is signified the worship of that church from charity.

 

해설

AC.438은 창4:26 전체의 속뜻을 먼저 압축하여 제시하는 글입니다. 바로 앞의 AC.434-437에서 셋은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 곧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시기 위해 주신 새로운 신앙을 뜻했습니다. 이제 그 셋에게서 ‘아들’ 에노스가 태어납니다. 따라서 여기서 에노스는 단순히 셋 다음에 태어난 한 인물을 넘어, 앞에서 준비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실제로 교회의 중심에 자리 잡은 새로운 교회 상태를 나타냅니다.

 

특히 중요한 표현은 에노스가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a church which regarded charity as the principal of faith)를 뜻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으뜸’은 단순히 체어리티가 여러 덕목 가운데 하나로서 중요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무엇이 신앙의 중심이며 무엇이 신앙을 살아 있게 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이 교회가 체어리티를 중심적인 것으로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가인이 나타낸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었다면, 에노스로 나타난 교회에서는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를 중심으로 질서를 찾게 됩니다.

 

이 점에서 셋과 에노스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 자체가 곧 체어리티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셋은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을 뜻하고, 에노스는 그 신앙을 통하여 형성되어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인정하는 ‘교회’를 뜻합니다. AC.436에서 이미 셋은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신앙’, 에노스는 ‘신앙을 통해 심어진 체어리티’라고 예고되었습니다. AC.438은 이제 그 관계를 창4:26의 본문에 맞추어 더욱 분명하게 풀어 줍니다. 따라서 셋에서 에노스로의 진행은 단순한 부자 관계가 아니라, 새로운 신앙에서 그 신앙의 목적이었던 체어리티 중심의 교회로 나아가는 흐름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보존과도 연결됩니다. 가인이 나타낸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지만, 주님께서는 그 신앙까지 완전히 없어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신앙을 보존하신 목적은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창4 마지막에 이르러 셋은 그 목적에 맞게 새롭게 주어진 신앙을, 에노스는 마침내 체어리티를 중심으로 삼는 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에노스의 등장은 앞에서부터 이어져 온 주님의 보존과 회복의 역사가 하나의 교회 형태로 나타난 지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말씀도 이러한 흐름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AC.438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call on the name of Jehovah)를 단순히 여호와라는 이름을 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역사적 사실로만 읽지 않고, 그 교회의 ‘예배’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예배가 ‘체어리티에서 비롯된’(from charity) 예배라는 점입니다. 즉 에노스로 나타난 교회의 예배는 신앙에 관한 지식이나 고백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그 내적 생명으로 삼은 예배였습니다.

 

따라서 ‘그때에 비로소’라는 표현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그 이전에는 아무도 여호와를 부르거나 예배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곧바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적어도 AC.438에서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예배 행위가 역사상 처음 생긴 시점 자체가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새로운 교회가 이제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는 교회적 의미입니다. ‘그때’는 셋으로 나타난 새로운 신앙을 통하여 에노스로 나타난 체어리티 중심의 교회가 형성되고, 그 교회의 성격에 맞는 예배가 나타나는 흐름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보면 창4의 마지막은 가인과 라멕으로 이어진 쇠퇴의 이야기와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마침내 황폐에 이르렀지만, 주님께서는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고 새 교회를 준비하셨습니다. 셋에서는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이 나타나고, 에노스에서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기는 교회가 나타나며, 마침내 그 교회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AC.438은 창4 마지막 절을 통해 신앙의 회복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 목적은 신앙 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이며, 그 체어리티에서 참된 예배가 나오는 것입니다. (AC.438 해설)

 

 

 

AC.439, 창4:26, ‘에노스는 왜 천적 인간이 아닌 영적 인간을 의미하는가?’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39‘셋’(Seth)이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을 뜻한다는 것은 앞 절에서 설명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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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7, 창4:25, ‘다른 씨는 왜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의미하는가?’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7여기서 ‘셋’(Seth)이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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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5 심화

1.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은 처음부터 병행한 두 계열인가?’

 

창세기 4장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은 자연스럽게 서로 다른 두 계열로 보입니다. 가인에게서 에녹,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나오고, 장 마지막에는 아담과 하와에게 셋이 태어나며, 다음 장에서는 셋의 계보가 다시 이어집니다. 따라서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이 같은 시대에 나란히 존재했던 두 계보라고 이해하는 것은 문자적 서사에서는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계보들을 속뜻에서 읽을 때 문자적 혈통의 병행 관계를 그대로 교회의 역사에 옮겨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단서를 제시합니다.

 

AC.435가 그 출발점입니다. 창4:25에서 다시 등장하는 ‘사람과 그의 아내’는 앞에서 아다와 씰라로 나타났던 새 교회를 뜻하지만, 창5:1-4에서 다시 등장하는 사람과 아내와 셋은 ‘태고교회의 첫 후손’을 뜻한다고 합니다. 같은 아담과 그의 아내와 셋을 말하면서도 속뜻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1과 창2에서 인간의 창조를 거듭 말하지만 전자는 영적 인간의 창조를, 후자는 천적 인간의 창조를 다루는 것을 그 예로 듭니다. 따라서 같은 인물과 사건이 반복된다고 해서 속뜻에서도 반드시 동일한 교회나 동일한 역사적 단계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곧바로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은 속뜻에서 결코 병행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단정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442는 태고 시대에 ‘교회에서 분리된’(separate from the church) 많은 교리와 이단들이 있었으며, 각각 저마다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교회에서 분리되었다’는 표현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질문을 일으킵니다. 어떤 교리들이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왔다면, 그들이 분리되어 나온 모체인 교회와 그 안에 남아 있던 이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으로 시작되는 분리된 교리들의 계열만 존재했다고 생각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 ‘교회에 남아 있던 이들’을 곧바로 셋 계열과 동일시하는 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AC.441은 에노스와 관련된 예배를 ‘가인과 라멕이라고 하는 이들에 의해 이전 교회가 소멸된 후의 새 교회의 예배’라고 명시합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이전 교회 → 소멸 → 새 교회’라는 전환이 있습니다. 따라서 셋과 에노스가 나타내는 교회를 처음부터 가인 계열과 나란히 존속해 온 또 하나의 교회라고 단순하게 규정하면, AC.441이 말하는 ‘이전 교회가 소멸된 후의 새 교회’라는 설명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게 됩니다.

 

AC.436이 제시하는 창4 전체의 연속적인 흐름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을 뜻하지만, 주님께서는 ‘가인의 표’를 통해 신앙 자체는 보존하셨습니다. 이후 여러 상태를 거쳐 라멕에 이르러서는 그렇게 보존되어 있던 신앙마저 황폐해집니다. 그리고 장 마지막에서 셋은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에노스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를 나타냅니다. 이런 속뜻의 흐름에서 창4는 단순히 두 집안의 역사를 번갈아 기록한 장이라기보다, 교회의 분리와 쇠퇴, 보존과 소멸, 그리고 새로운 교회의 형성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영적 서사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문자적 계보와 속뜻의 교회사를 서로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이 서로 다른 두 족보이며, 두 계열이 시간적으로 나란히 존재하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또한 속뜻에서도 AC.442의 ‘교회에서 분리된’ 교리들이라는 표현 때문에, 분리된 교리들과 구별되는 교회가 존재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AC.434-442만으로 그 교회에 남아 있던 이들이 정확히 누구였는지, 그들이 셋 계열과 어떤 관계였는지, 두 교회적 흐름이 실제 시간 속에서 어느 정도 병행했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을 ‘악한 계열과 선한 계열이라는 두 교회가 처음부터 끝까지 나란히 존속했다’는 단순한 도식으로 이해하는 것도, 반대로 ‘둘은 전혀 병행하지 않았고 하나가 완전히 끝난 뒤 다른 하나가 시작되었다’고 단정하는 것도 현재 본문보다 앞서 나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다른 데 있습니다. 가인 계열을 통해서는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여러 교리와 그로 인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가 전개되고, 셋과 에노스에서는 이전 교회가 소멸된 뒤 주님께서 일으키신 새로운 신앙과 새 교회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본래 교회에 남아 있던 이들이 누구였으며 이 여러 흐름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겹쳤는지는 이후의 설명을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결국 이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창세기의 족보를 속뜻의 교회사와 일대일로 대응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문자적 의미에서는 실제 계보의 흐름을 읽되, 속뜻에서는 각 이름이 나타내는 교리와 교회의 상태가 어떤 순서와 관계로 전개되는지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AC.435, 436, 441, 442를 함께 놓고 보면, 창4의 중심은 두 혈통 가운데 어느 쪽이 어느 시기에 존재했는지를 밝히는 데 있다기보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어떻게 교회를 황폐하게 하는지, 그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신앙을 보존하시며, 마침내 셋과 에노스로 나타나는 새로운 신앙과 교회를 일으켜 다시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가 가능하게 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AC.435 심화 1)

 

 

 

AC.435, 창4:25, ‘같은 사람과 아내가 다시 나오는데 왜 다른 교회를 의미하는가?’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5여기서 ‘사람’(man)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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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7

여기서 ‘셋’(Seth)이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뜻한다는 것은 그의 이름으로 설명됩니다. 그의 이름이 그렇게 붙여진 것은 하나님께서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기’(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씨를 주셨다’(appointed another seed)는 것은 주님께서 다른 신앙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다른 씨’(another seed)는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씨’(seed)가 신앙을 뜻한다는 것은 앞의 AC.255에서 볼 수 있습니다. That “Seth” here signifies a new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is explained by his name, which it is said was given him because God “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 That God “appointed another seed” means that the Lord gave another faith; for “another seed” is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That “seed” signifies faith may be seen above (n. 255).

 

해설

AC.437은 창4:25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하면서 ‘셋’과 ‘다른 씨’가 왜 새로운 신앙을 뜻하는지를 밝힙니다. 앞의 AC.434에서는 셋이 ‘체어리티를 얻을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이라고 했고, AC.436에서는 그것을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통로가 되는 신앙’이라고 좀 더 분명하게 설명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 해석의 근거를 창4:25 자체의 ‘다른 씨’라는 표현과 셋의 이름에서 찾습니다.

 

먼저 중요한 것은 ‘다른’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단순히 다시 ‘씨’를 주셨다고 하지 않고 ‘다른 씨’(another seed)를 주셨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께서 다른 신앙을 주셨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여기서 ‘다른 신앙’은 신앙과 전혀 다른 어떤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가인으로 나타났던 신앙과는 성격이 달라진 신앙을 뜻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냈지만, 셋은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과 셋은 모두 신앙과 관계되지만,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맺는 관계가 서로 다릅니다.

 

이 차이는 AC.436에서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가인이 나타내는 분리된 신앙은 아벨이 나타내는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신앙 자체를 완전히 없어지게 하지 않으시고 ‘가인의 표’를 통해 보존하셨습니다. 그 목적은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AC.437의 ‘다른 씨’는 그 긴 과정의 결과를 나타냅니다. 가인과 같은 분리된 신앙이 그대로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로 이어질 수 있는 ‘다른 신앙’이 주님에 의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씨’가 신앙을 뜻할까요? 바로 이 점 때문에 AC.437은 AC.255를 참조합니다. AC.255는 창3:15의 ‘여자의 씨’(seed of the woman)를 설명하면서, ‘여자’(woman)는 교회를 뜻하고 그 교회의 ‘씨’는 신앙이라고 밝힙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주님을 믿는 신앙으로부터 교회가 교회라 불리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437에서 ‘다른 씨’가 ‘다른 신앙’을 뜻한다는 해석은 이번 글에서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앞에서 이미 세워진 ‘씨 = 신앙’이라는 상응에 근거합니다.

 

AC.255에 인용된 여러 성경 구절도 이 의미를 뒷받침합니다. 말2:14-15에서는 ‘하나님의 씨’(seed of God), 사44:3에서는 ‘네 씨’(thy seed), 계12:17에서는 여자의 ‘남은 자손’(remnant of her seed), 시89편에서는 다윗의 ‘씨’(seed)가 언급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가운데 특히 ‘여자’가 교회를 나타내고 그 교회의 ‘씨’가 신앙을 나타낸다는 관계를 밝힙니다. 그러므로 창4:25의 ‘다른 씨’ 역시 단순히 아벨 대신 태어난 또 하나의 육적인 후손이라는 의미를 넘어, 새 교회에 주어진 새로운 신앙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창4:25은 ‘아벨 대신에’ 다른 씨가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아벨은 앞에서 체어리티를 나타냈으므로, 여기에는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아벨이 체어리티라면 아벨을 대신하여 주어진 셋도 체어리티를 뜻해야 할 것 같은데, 스베덴보리는 셋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AC.434-437을 함께 읽으면 그 이유가 드러납니다. 셋은 아벨이 나타냈던 체어리티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체어리티가 다시 주어질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입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의 에노스가 ‘신앙을 통해 심어진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아벨 대신’이라는 말은 상응하는 의미가 단순히 ‘체어리티에서 체어리티로’ 일대일 교체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소멸된 체어리티가 다시 세워지기 위한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4:25의 구조가 상당히 정교합니다. 아벨이 나타내는 체어리티는 가인에 의해 소멸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마저 함께 소멸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보존하셨습니다. 그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사랑의 거룩한 것과 선, 신앙의 영적인 것, 자연적 선과 진리가 차례로 주어졌고, 마침내 셋이라는 ‘다른 씨’, 곧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다음 절의 에노스에서 그 신앙을 통해 심어진 체어리티가 나타납니다. 창4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처음의 가인과 아벨 문제를 다시 풀어 가는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주목해야 할 것은 주어가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씨를 주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다른 신앙을 주셨다는 뜻이라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스스로 자신을 고쳐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남아 있는 신앙을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새 교회를 준비하시며, 마침내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셋이 나타내는 새로운 시작의 중심에는 인간의 자기 회복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하심이 있습니다.

 

결국 AC.437에서 ‘셋’은 단순히 가인을 대신하는 또 하나의 인물도, 아벨을 대신하는 또 하나의 아들도 아닙니다. 그는 ‘다른 씨’, 곧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나타냅니다. 가인으로 나타난 신앙은 사랑에서 분리되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지만, 셋으로 나타난 신앙은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는 통로가 됩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신앙을 주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로써 창4:25은 가인과 아벨에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어떻게 주님의 섭리 가운데 새로운 질서를 향해 나아가는지를 보여 주는 글로 마무리됩니다. (AC.437 해설)

 

 

 

AC.438, 창4:26, ‘에노스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를 의미한다’ (AC.438-442)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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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6, 창4:25, ‘가인에서 셋과 에노스까지, 신앙과 체어리티는 어떻게 다시 이어지는가?’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6그 여자의 ‘아들’(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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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6

그 여자의 ‘아들’(son), 곧 그가 셋이라 이름한 아들이 체어리티에 이를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을 뜻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으로부터 분명하며, 또한 가인에 관해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그에게 표를 주셨다’(mark was set upon him, lest anyone should slay him)고 기록된 사실에서도 분명합니다. 이 주제가 연속적으로 전개되는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가인’(Cain)으로, 체어리티는 ‘아벨’(Abel)로 나타냈으며, 분리된 상태의 그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으로 나타냈습니다. 체어리티가 그 신앙을 통해 주님에 의해 심어질 수 있도록 신앙을 보존하신 것은 아무도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신 것으로 나타냈습니다. That by her “son,” whom she named Seth, is signified a new faith, by which charity may be attained,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previously stated, as well as from its being related of Cain that a “mark was set upon him, lest anyone should slay him.” For the subject as it stands in a series is as follows: Faith separated from love was signified by “Cain”; charity, by “Abel”; and that faith in its separated state extinguished charity was signified by Cain slaying Abel. The preservation of faith in order that charity might be thereby implanted by the Lord was signified by Jehovah’s setting a mark on Cain lest anyone should slay him.

 

그 후 사랑의 거룩한 것과 거기서 나오는 선이 주님에 의해 신앙을 통해 주어진 것은 아다가 낳은 야발로 나타냈고, 신앙의 영적인 것이 주어진 것은 그의 아우 유발로 나타냈으며, 이들로부터 자연적 선과 진리가 나온 것은 씰라가 낳은 두발가인으로 나타냈습니다. 창세기 4장의 마지막 두 절에는 이 모든 것의 결론, 따라서 그 요약이 들어 있습니다. 곧 ‘사람과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는 앞에서 아다와 씰라라고 불렸던 그 새 교회를 뜻하고, ‘셋’(Seth)은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통로가 되는 신앙을 뜻하며, 이제 이어지는 절의 ‘에노스’(Enosh)는 신앙을 통해 심어진 체어리티를 뜻합니다. That afterwards the holy of love and the good thence derived were given by the Lord through faith was signified by Jabal whom Adah bare; and that the spiritual of faith was given, was signified by his brother Jubal; and that from these there came natural good and truth was signified by Tubal-Cain whom Zillah bare. In these two concluding verses of Genesis 4 we have the conclusion, and thus the summary, of all these matters, to this effect, that by the “man and his wife” is signified that new church which before was called Adah and Zillah, and that by “Seth” is signified the faith through which charity is implanted; and in the verse which now follows, by “Enosh” is signified the charity that is implanted through faith.

 

해설

AC.436은 창4의 가인 이후 이야기를 거의 한눈에 펼쳐 보이는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지금까지 가인, 아벨, 가인의 표, 야발, 유발, 두발가인, 그리고 마지막의 셋이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 개별적으로 설명해 왔다면, 여기서는 그 모든 내용을 하나의 연속된 과정으로 묶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 주제가 연속적으로 전개되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고 하며 그 흐름을 다시 정리합니다. 따라서 창4의 인물들을 서로 독립된 상징들로만 읽어서는 안 되고,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와 소멸, 보존, 그리고 다시 결합을 향한 과정으로 읽어야 합니다.

 

출발점은 가인과 아벨입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AC.436은 가인의 의미를 더욱 정확하게 표현합니다. 단순히 ‘신앙’이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반전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가인을 곧바로 없애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도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표를 주셨습니다. 앞에서 이 ‘가인의 표’를 신앙의 보존으로 설명했지만, AC.436은 이제 그 보존의 목적을 아주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것은 단순히 분리된 신앙 자체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체어리티가 그 신앙을 통해 주님에 의해 심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보존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보존하신 것은 그 신앙을 최종 상태로 인정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장차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실 수 있는 수단을 남겨 두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가인의 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가인의 표는 악한 상태를 승인하거나 분리된 신앙을 이상적인 신앙으로 인정한다는 표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아직 남아 있는 신앙을 파괴되지 않게 보존하시고, 바로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십니다. 인간 편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되고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지만, 주님의 섭리는 그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여 새로운 교회의 출발점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이후 야발, 유발, 두발가인의 의미도 이러한 큰 흐름 안에서 다시 정리됩니다. 야발은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주신 ‘사랑의 거룩한 것과 거기서 나오는 선’을, 유발은 ‘신앙의 영적인 것’을, 두발가인은 이들로부터 나온 ‘자연적 선과 진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인물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목축, 음악, 금속 기술의 기원을 말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으로는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주님께서 교회 안에 다시 사랑과 선, 신앙의 영적인 것, 그리고 자연적 선과 진리를 마련해 가시는 과정이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434-435에서 제기된 창4의 가인 계열과 창5의 셋 계열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도 중요한 빛을 비춥니다. 문자적으로만 보면 가인에게서 시작된 후손들의 계보와 셋에게서 시작되는 계보를 두 개의 나란한 혈통으로 읽기 쉽습니다. 그러나 AC.436은 속뜻으로는 창4의 가인 이후 이야기가 셋과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된 교회적 과정임을 분명히 합니다. 가인이 나타내는 분리된 신앙이 보존되고, 그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사랑과 선 및 영적인 것이 주어지며, 마침내 셋이 나타내는 새로운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지는 흐름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창4의 마지막 두 절이 ‘이 모든 것의 결론, 따라서 그 요약’이라고 직접 말합니다. 이것은 창4:25-26을 앞의 가인 계열과 전혀 관계없는 새로운 족보의 시작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단서입니다. 창4 전체에서 전개되어 온 신앙과 체어리티의 이야기가 마지막 두 절에서 결론을 맺는 것입니다. ‘사람과 그의 아내’는 앞에서 아다와 씰라라고 불렸던 새 교회이고, 그들에게서 난 셋은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통로가 되는 신앙입니다. 따라서 셋은 앞의 이야기를 지워 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인물이 아니라, 앞에서 보존되고 준비되어 온 것이 새로운 질서 안에서 결실을 향해 나아가는 지점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AC.436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직 읽지 않은 창4:26의 에노스까지 미리 밝혀 줍니다. 셋이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통로가 되는 신앙’이라면, 에노스는 ‘신앙을 통해 심어진 체어리티’입니다. 이 둘의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셋 자체가 체어리티인 것이 아닙니다. 셋은 체어리티가 주님에 의해 심어질 수 있게 하는 신앙이고, 에노스에 이르러 그 체어리티가 실제로 심어진 상태가 나타납니다. 따라서 가인에서 셋과 에노스에 이르는 전체 흐름을 보면, 분리된 신앙에서 시작하여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그럼에도 신앙이 보존되며, 그 신앙을 통해 주님께서 다시 사랑과 선을 주시고, 마침내 새로운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지는 하나의 긴 과정이 드러납니다.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주도권은 계속 주님께 있습니다. 체어리티를 다시 만들어 내는 것은 보존된 신앙 자체가 아닙니다. AC.436은 체어리티가 ‘주님에 의해’ 신앙을 통해 심어진다고 거듭 말합니다. 신앙은 통로이며, 심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가인의 표에서부터 셋과 에노스에 이르는 과정의 중심에는 인간이 무너뜨린 것 가운데서도 남은 것을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다시 사랑과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주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436은 창4의 어두운 역사를 단순한 쇠퇴의 기록으로 끝내지 않고, 그 쇠퇴 속에서도 새 교회를 준비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보여 주는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AC.436 해설)

 

 

 

AC.437, 창4:25, ‘다른 씨는 왜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의미하는가?’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7여기서 ‘셋’(Seth)이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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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5, 창4:25, ‘같은 사람과 아내가 다시 나오는데 왜 다른 교회를 의미하는가?’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5여기서 ‘사람’(man)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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