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4:19)

 

AC.407

교회 전체의 상태는 이와 같습니다. 교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참된 신앙에서 떠나 마침내 신앙이 완전히 없어지는 이르며, 이때 교회가 황폐해졌다(vastated) 합니다. 태고교회에서 가인파(Cainites) 불린 사람들에게도 그러했고, 홍수 고대교회에도 그러했으며, 유대교회에도 그러했습니다. 주님께서 강림하실 당시 유대교회는 이처럼 황폐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주님께서 자신들의 구원을 위하여 세상에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고, 주님을 믿는 신앙에 관해서는 더욱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강림 후에 존재했던 초기 기독교회도 그러했으며, 오늘날에는 신앙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완전히 황폐해졌습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언제나 어떤 핵심(nucleus) 남아 있으며, 신앙에 관하여 황폐해진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에서도 그러했습니다. 교회의 남은 부분(remnant) 홍수 때까지 존속했고, 사건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교회의 남은 부분을 노아(Noah)라고 부릅니다. The state of a church in general is thus circumstanced. In process of time it departs from the true faith until at last it comes to be entirely destitute of faith, when it is said to bevastated.This was the case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among those who were called Cainites, and also with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as well as with the Jewish church. A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this last was in such a state of vastation that they knew nothing about the Lord, that he was to come into the world for their salvation, and they knew still less about faith in him. Such was also the case with the primitive Christian church, or that which existed after the Lords advent, and which at this day is so completely vastated that there is no faith remaining in it. Yet there always remains some nucleus of a church, which those who are vastated as to faith do not acknowledge; and thus it was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of which a remnant remained until the time of the flood, and continued after that event. This remnant of the church is calledNoah.

 

해설

AC.407은 앞의 AC.405-406에서 설명한 라멕의 황폐를 교회 전체의 역사라는 더 넓은 관점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라멕은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의미하며, 그가 사람과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씀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을 나타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황폐가 가인의 계보에서만 일어난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교회가 시간이 흐르면서 참된 신앙에서 떠날 때 반복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황폐(vastation)는 이번 문맥에서 교회가 참된 신앙을 잃어 마침내 신앙이 전혀 남아 있지 않게 된 상태입니다. 따라서 황폐를 단순히 교회의 외적인 쇠퇴나 건물과 제도의 소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외적으로 존속하더라도 그 안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과 체어리티에 결합된 참된 신앙이 사라진다면,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는 황폐한 상태에 이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인 규모가 작아졌다는 사실만으로 그 교회가 황폐해졌다고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이번 번호가 다루는 것은 교회의 내적인 신앙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황폐의 사례로 태고교회에서 가인파라 불린 사람들, 홍수 후 고대교회, 유대교회, 그리고 초기 기독교회를 차례로 언급합니다. 여기서 태고교회 전체와 가인파를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처음 사례로 지목하는 것은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 가운데 가인파라 불린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계열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태고교회의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가인과 같은 상태였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홍수 후 고대교회와 유대교회에 관한 언급도 같은 논지를 이어 갑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처음의 참된 신앙에서 점차 떠나 황폐에 이르는 일이 여러 교회에서 반복되었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주님의 강림 당시 유대교회가 주님께서 구원을 위하여 세상에 오실 것을 알지 못했고 주님을 믿는 신앙에 관해서는 더욱 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그 교회의 영적 상태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읽어야 합니다. 당시 모든 유대인이 주님에 관한 동일한 지식과 태도를 가졌다는 역사적·사회적 일반화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초기 기독교회에 관한 설명에서도 시점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강림 후에 존재했던 초기 기독교회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황폐에 이르렀으며, 자신의 시대에는 신앙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을 만큼 황폐해졌다고 진술합니다. 여기서 오늘날AC가 집필되던 스베덴보리의 시대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별도의 검토 없이 오늘날의 모든 기독교회와 모든 신자에 대한 현재적 사실 판단으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스베덴보리가 교회의 황폐를 어떻게 이해했는지에 집중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의 쇠퇴를 설명한 직후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전환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언제나 어떤 핵심이 남아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nucleus)은 교회가 황폐해졌다고 해서 교회에 속한 모든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황폐해진 사람들은 그 핵심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들의 인정 여부와 관계없이 교회의 남은 부분은 존속합니다. 따라서 교회의 황폐와 교회의 완전한 소멸을 동일하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서 이번 번호의 핵심(nucleus)남은 부분(remnant)은 서로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교회에 언제나 어떤 핵심이 남는다고 말한 뒤, 태고교회에서도 그 교회의 남은 부분이 홍수 때까지 존속했고 홍수 이후에도 계속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남은 부분을 노아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노아는 이번 문맥에서 단순히 홍수 이야기의 한 인물을 넘어, 황폐해진 태고교회로부터 보존되어 이어지는 교회의 남은 부분을 나타냅니다.

 

다만 여기서 남은 부분을 곧바로 개인의 거듭남에서 말하는 기술적 의미의 리메인스와 동일시하지는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번 번호는 교회 전체의 황폐와 그 가운데 보존되는 교회의 핵심을 다루고 있습니다. 개인 안에 보존되는 리메인스와 연결하여 생각할 여지는 있지만, 그 관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면 관련 AC 본문을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번에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사용한 핵심교회의 남은 부분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살리는 편이 정확합니다.

 

이제 가인의 계보와 노아의 관계도 조금씩 드러납니다. 가인으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는 라멕에게서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은 황폐에 이릅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역사는 그 황폐로 완전히 끝나지 않습니다. 그 교회의 남은 부분이 보존되어 홍수를 지나서도 계속되며, 그 남은 부분이 노아라는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계보에서 라멕으로 이어지는 흐름과 노아로 이어지는 흐름은 교회의 황폐와 보존이라는 두 측면에서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섭리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참된 신앙에서 떠나 황폐해지더라도 주님께서는 교회의 모든 것이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새로운 교회로 이어질 수 있는 핵심을 보존하십니다. 물론 이번 번호는 그 핵심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졌는지, 어떤 방식으로 보존되었는지, 홍수 이후의 교회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 내용은 노아와 홍수에 관한 이어지는 AC에서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황폐 가운데에서도 교회의 남은 부분이 존속한다는 사실만큼은 이번 번호에서 분명하게 제시됩니다.

 

따라서 AC.407을 읽을 때에는 교회의 황폐에 관한 진술만큼이나 그 뒤에 나오는 그러나에 주목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교회의 황폐를 열거한 뒤에도 교회에는 언제나 어떤 핵심이 남는다고 말합니다. 황폐해진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핵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남은 부분은 홍수를 지나서도 계속되었고, 그 교회의 남은 부분을 노아라고 부릅니다. 결국 AC.407은 한 교회의 쇠퇴를 설명하면서도, 그 쇠퇴를 넘어 계속되는 교회의 보존을 함께 보여 주는 번호입니다. (AC.407 해설)

 

 

 

AC.408, 창4:19, ‘교회가 황폐해진 뒤에야 새 아침이 밝는 이유 - 거룩한 것의 모독과 새로운 시작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8 교회가 더 이상 아무런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을 만큼 황폐해졌을 때, 그때 비로소, 그 이전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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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6, 창4:19, ‘라멕은 왜 신앙의 황폐를 의미하는가? -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6‘라멕’(Lamech)이 황폐(vastation), 곧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뒤에 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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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4:19)

 

AC.406

라멕(Lamech) 황폐(vastation), 신앙이 이상 남아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뒤에 나오는 23절과 24절로부터 분명합니다. 거기서는 그가 상처를 위하여 사람을 죽였고, 상함을 위하여 어린아이를 죽였다(slew a man to his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his hurt)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람(man) 신앙을, 어린아이(little one), 어린 자녀(little child)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That byLamechis signified vastation, or that there was no faith, is evident from the following verses (2324), in which it is said that heslew a man to his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his hurt”; for there, by amanis meant faith, and by alittle oneorlittle child, charity.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4:23, 24)

 

해설

AC.406은 앞의 AC.405에서 라멕이 황폐’, 곧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고 한 근거를 밝혀 줍니다. 그 근거는 라멕의 이름 자체가 아니라 뒤에 나오는 창4:23-24의 라멕의 노래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노래에서 라멕이 사람을 죽였고 어린아이를 죽였다고 한 말씀을 인용한 뒤,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라멕의 황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가인의 계보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가인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상태를 표상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분리된 신앙이라도 아직 보존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AC.392-396에서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신 것은 그 신앙이 훗날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데 쓰일 수 있도록 구별하여 보존하시는 섭리와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라멕에 이르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AC.405에서는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고 했고, 이번 번호에서는 그 이유를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을 나타내는 라멕의 노래에서 찾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어린아이가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구별하는 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문맥에서 사람을 신앙으로, ‘어린아이를 체어리티로 풀이합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을 죽였다는 표현은 단순히 같은 의미를 반복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라는 서로 구별되는 두 가지가 모두 소멸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앞서 가인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지만, 라멕에게서는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은 황폐에 이른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람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신앙을, ‘어린아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체어리티를 뜻한다고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밝히는 것은 라멕의 노래에 등장하는 이 표현들의 속뜻입니다. 같은 단어라도 말씀의 문맥과 그것이 다루는 영적 상태에 따라 구체적인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해석은 창4:23-24의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죽였다는 표현을 실제 살인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만 읽으면 스베덴보리가 밝히려는 영적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그는 앞의 AC.403에서 창세기 이 부분이 영적인 것들을 역사 형식 아래 배열한 표상적 서술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라멕의 노래 역시 그러한 관점에서 읽습니다. 여기서 신앙과 체어리티를 죽였다는 것은 그 계열의 교회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더 이상 살아 있지 않게 된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다만 상처상함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지 이번 번호에서 미리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라멕의 노래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뒤의 번호에서 살펴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 대목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홀로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될 때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일은 단순히 신앙에 덧붙여야 할 한 가지 덕목을 잃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생명을 얻는 관계 자체를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라멕에게서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는 설명은 이러한 관계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를 앞의 AC.405와 함께 읽을 때에는 또 하나의 사실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라멕은 신앙의 황폐를 의미하지만, 그의 두 아내는 새 교회의 출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라멕에게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했다는 사실이 곧 모든 사람에게서 선과 진리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에게서 이어진 교리적 계열의 황폐와 새 교회의 출현을 구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교회의 황폐가 곧 주님의 모든 교회 역사의 종말은 아닌 것입니다.

 

결국 AC.406은 라멕의 의미를 뒤에 나오는 말씀으로 확인하는 번호입니다.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의미하며, 라멕이 이들을 죽였다는 말씀은 그 계열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가인에게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라멕에게서는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은 황폐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새 교회의 출현도 예고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라멕에게서 이전 교회의 황폐를 보면서도, 그 이후의 새로운 교회를 위한 주님의 섭리가 계속되고 있음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AC.406 해설)

 

 

 

AC.407, 창4:19, ‘교회가 황폐해져도 남아 있는 핵심 - 노아로 이어지는 교회의 보존’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7교회 전체의 상태는 이와 같습니다. 교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참된 신앙에서 떠나 마침내 신앙이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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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5, 창4:19, ‘라멕에게서 신앙이 소멸하고 새 교회가 일어나다 - 아다와 씰라의 속뜻’ (AC.405-41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창4:19) AC.405가인으로부터 순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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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4:19)

 

AC.405

가인으로부터 순서상 여섯 번째인 라멕(Lamech) 신앙이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됨으로써 초래된 황폐(vastation) 의미합니다. 그의 아내(two wives) 교회의 출현을 의미합니다. 아다(Adah) 교회의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씰라(Zillah)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합니다. ByLamech,who was the sixth in order from Cain, is signified vastation, in consequence of there being no longer any faith; by histwo wivesis signified the rise of a new church; byAdah,the mother of its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and byZillah,the mother of its natural things.

 

해설

AC.405는 가인에게서 시작된 교리적 분리가 어디에 이르렀으며, 그 이후 어떤 새로운 일이 시작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앞의 AC.399-404에서는 가인이라는 최초의 이단에서 에녹이라는 새로운 이단이 나오고, 그로부터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를 의미하는 성읍이 형성되며, 다시 여러 이단이 계보를 따라 파생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 계보는 라멕에 이릅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으로부터 순서상 여섯 번째인 라멕이 신앙이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됨으로써 초래된 황폐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일이었지만, 그 분리가 이어진 끝에는 신앙 자체마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여기서 황폐(vastation)는 단순히 교회의 외적인 규모가 줄어들거나 제도가 무너지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히는 황폐의 원인은 이상 아무런 신앙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라멕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리적 계열이 내적으로 어디까지 쇠퇴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 가인에게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도 보존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신앙이 훗날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데 쓰일 수 있도록 가인에게 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라멕에 이르면 그 계열에서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은 황폐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일이 왜 심각한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신앙은 진리를 아는 것만으로 생명을 얻지 않습니다. 진리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에 결합될 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신앙에서 계속 밀어내면 처음에는 신앙만이라도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신앙 역시 생명의 근원에서 분리된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라멕의 황폐는 바로 그 분리가 계보를 따라 진행된 결과를 보여 줍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라멕에게서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할 뿐, 그 이전의 각 후손에게서 신앙이 어떤 단계로 얼마나 감소했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베덴보리는 라멕의 황폐를 말한 직후 그의 아내가 새 교회의 출현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AC.405의 중요한 전환입니다. 가인의 계보에서 신앙이 소멸하는 것과 새 교회가 일어나는 것이 같은 짧은 번호 안에 함께 등장합니다. 따라서 라멕의 두 아내를 단순히 황폐한 교회의 또 다른 특징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에게서 이전 교회의 쇠퇴와 구별되는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봅니다.

 

두 아내 가운데 아다는 새 교회의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합니다. 천적인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에, 영적인 것은 그 사랑과 선에 속한 진리와 신앙에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아다가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라는 말은 새 교회 안에서 이러한 내적인 것들이 산출되는 근원적 역할을 표상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어머니는 아다라는 개인에게서 천적이고 영적인 생명이 독립적으로 나온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이시며, 아다는 새 교회의 이러한 것들이 출현하는 과정을 표상하는 이름입니다.

 

다른 아내인 씰라는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합니다. 자연적인 것은 인간의 겉 사람에 속하는 생각과 지식, 말과 행동, 일상적인 삶의 차원과 관계됩니다. 교회는 내적인 사랑과 신앙만을 추상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연적인 삶 가운데 표현되고 실현되는 질서도 필요합니다. 따라서 아다와 씰라가 각각 천적·영적인 것들과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로 구별된다는 사실은 새 교회에 내적인 차원과 자연적인 차원이 함께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구별을 곧바로 아다는 좋은 교회이고 씰라는 나쁜 교회라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두 사람 모두 새 교회의 출현과 관련된다고 말합니다. 아다는 그 교회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이며, 씰라는 그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입니다. 자연적인 것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자연적인 삶에까지 내려와 표현될 때 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함께 질서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후 아다와 씰라에게서 태어나는 자녀들의 의미를 살펴보면 이러한 구별이 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새 교회의 출현을 말하면서도 그 교회의 구체적인 성격과 형성 과정을 아직 모두 설명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AC.405는 라멕의 황폐, 두 아내를 통한 새 교회의 출현, 아다와 씰라가 각각 무엇의 어머니인지만 밝힙니다. 따라서 이 번호만으로 새 교회가 어떤 방식으로 조직되었는지, 이전 교회와 정확히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그 안의 모든 천적·영적·자연적 상태가 어떠했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번호들에서 자녀들의 의미가 밝혀질 때 그 구체적인 모습도 차례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럼에도 AC.405가 보여 주는 큰 흐름은 분명합니다. 가인으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는 라멕에게서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은 황폐에 이릅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 황폐에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습니다. 라멕의 두 아내를 통하여 새 교회의 출현을 알리고, 그 교회에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과 자연적인 것들이 나타날 것을 예고합니다. 이전 교회의 소멸과 새로운 교회의 시작이 하나의 계보 안에서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를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이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그 분리를 계속 발전시켜 결국 신앙마저 잃는 상태에 이르더라도, 주님의 교회를 위한 역사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번 번호가 새 교회의 출현을 알려 준다는 사실과, 그 출현의 구체적인 과정이 무엇인지는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께서 교회의 황폐 이후에도 새로운 것을 일으키시는 섭리의 방향을 볼 수 있지만, 아직 설명되지 않은 세부까지 앞질러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 AC.405라멕 아내를 함께 읽어야 하는 번호입니다. 라멕만 보면 가인에게서 시작된 분리의 비극적인 끝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아다와 씰라까지 읽으면 그 끝에서 새 교회의 출현이 시작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다는 그 교회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이며, 씰라는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입니다. 이처럼 말씀은 신앙의 황폐를 말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교회의 내적·외적 형성을 예고합니다. 인간의 실패가 마지막 말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계속되는 주님의 섭리가 마지막까지 말씀의 흐름을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AC.405 해설)

 

 

 

AC.406, 창4:19, ‘라멕은 왜 신앙의 황폐를 의미하는가? -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6‘라멕’(Lamech)이 황폐(vastation), 곧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뒤에 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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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4, 창4:18, ‘가인의 계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여러 이단들’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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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1 심화

1.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게 되는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이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게 된다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처음에는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설령 그의 삶에 사랑이 부족하더라도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는 더 잘 분별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지적인 차원에서는 많은 진리를 알고 그것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AC.379-381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은 단순히 교리 내용을 기억하고 설명할 수 있다는 뜻보다 훨씬 깊습니다.

 

AC.379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사람을 주님과 결합하게 하는 결속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순한 지식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진리가 그 자체로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교리를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사랑과 선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 그 진리는 사람 안에서 생명을 얻지 못하고 기억과 이해성 안에 머물게 됩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아는 과 진리가 자기 삶에서 참인 것을 보는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베덴보리에게서 진리의 목적은 선입니다. 진리는 사람이 무엇이 선인지 알게 하고, 그 선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진리를 배우면서 실제로 선을 행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할 때, 그 진리는 점차 그의 의지와 삶에 결합됩니다. 그때 그는 단순히 이것이 옳다고 배웠다고 말하는 데서 더 나아가 왜 그것이 옳은지를 삶을 통해 알게 됩니다. 반대로 진리를 많이 배우면서도 그것을 자기 삶의 선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진리와 그의 실제 애정 사이에 틈이 생깁니다.

 

이것이 AC.380땅이 다시는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가인은 계속 을 갈 수 있습니다. 곧 신앙에 관한 지식을 계속 연구하고 배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가 소멸한 상태에서는 그 땅이 더 이상 결실하지 않습니다. 지식은 늘어날 수 있지만 그것이 선한 삶이라는 열매로 이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 결과를 피하며 유리하는 가 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진리를 전혀 모르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을 하나의 살아 있는 중심에서 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 점은 체어리티가 있으면 교리를 몰라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신앙의 진리는 무엇을 사랑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체어리티는 그 진리를 살아 있게 합니다. 눈이 있어야 길을 볼 수 있지만 실제로 걸어야 목적지에 이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보는 것과 걷는 것을 서로 경쟁시키는 것이 잘못인 것처럼,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하나를 제거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을 가진 것 자체가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마침내 그것이 체어리티를 지배하게 한 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는 말은 교리적 정확성을 가볍게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교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묻는 말입니다. 진리를 연구할수록 주님과 이웃을 더 사랑하고, 자기 악을 더 분명히 보고 그것을 버리며, 실제 쓰임의 삶으로 나아간다면 그 진리는 살아 있는 신앙이 되어 갑니다. 그러나 진리를 연구할수록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만 많아지고 자기의 지적 우월성을 확인하는 데 그친다면, 지식은 증가해도 그 지식이 자라야 할 은 점차 효력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과 진리에 대한 영적인 분별은 지식의 양만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고 그 선을 행하려는 삶 안에서 진리는 서로 연결되고 질서를 얻습니다. 체어리티는 진리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살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생명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 있을 때 사람은 진리를 단지 기억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체어리티를 잃은 가인이 마침내 피하며 유리하는 가 되는 이유이며, 동시에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AC.381 심화 1)

 

 

 

AC.381, 창4:12,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실이 없는가?’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1‘땅을 가는 것’(till the ground)이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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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11 심화

3. 부정한 짐승의 주검은 만지기만 해도 부정해졌을까?’

 

11에서는 먹지 말라는 명령만큼이나 만지지 말라는 명령이 반복됩니다. 특히 부정한 짐승의 주검을 만지면 저녁까지 부정해지고, 그것을 옮기는 사람은 옷까지 빨아야 했습니다. 먹지도 않았는데 단지 접촉했다는 이유로 왜 부정해졌을까요?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94(9:3)는 이 문제에 직접적인 단서를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기는 이 좋은 의미에서는 선한 애정 안에 있는 자연적 즐거움을 의미하지만, 반대 의미에서는 proprium과 악한 욕망에서 나오는 더러운 즐거움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레11:27, 29-33의 부정한 기는 것들을 직접 언급하면서, 이런 것들이 악한 욕망에서 나오는 더러운 즐거움을 표상했기 때문에 당시 표상교회에서는 그것을 만지는 것까지 부정하게 여겼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접촉입니다. 인간은 어떤 악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고 해서 그 악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악한 욕망이나 거짓을 마음 가까이에 두고 반복해서 바라보고 즐기다 보면 그것이 점차 우리의 애정과 생각에 영향을 줍니다. 처음에는 단지 접촉하는 것처럼 보여도 계속 가까이하면 어느 순간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AC.994가 강조하는 것은 그 안의 즐거움입니다. 악은 언제나 처음부터 무섭고 혐오스러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재미있고 달콤하고 만족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험담을 듣는 즐거움, 복수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느끼는 만족, 음란한 생각의 쾌감,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낫다는 것을 확인할 때의 기쁨도 처음에는 작은 즐거움처럼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즐거움 안에 어떤 애정이 들어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원하지 않는 악한 생각이 순간적으로 떠오르거나 유혹을 받는 것 자체가 곧 그 악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혹은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받아들여 즐기고 의도하느냐, 아니면 그것이 악임을 알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거절하느냐입니다. 악이 문 앞에 오는 것과 문을 열어 안으로 들이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또한 이 말씀을 사람 자체에 적용해서 부정한 사람과 접촉하면 나도 더러워진다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영적으로 피해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악과 거짓입니다. 오히려 체어리티는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가까이 가면서도 그 사람을 지배하는 악을 악으로 분별할 수 있게 합니다.

 

11에서 부정해진 사람이 영원히 부정한 채 남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옷을 빨고 저녁까지 기다린 뒤 다시 정하게 됩니다. 이것은 악과 거짓의 영향이 인간에게 들어올 수 있지만 주님의 진리를 통해 다시 정결하게 될 수 있다는 큰 원리와 잘 어울립니다. 거듭남은 한 번도 더러워지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더러움을 깨닫고 계속 씻김을 받는 삶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레11의 접촉 규정은 인간의 마음이 무엇과 가까이하고 무엇을 즐기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생각과 욕망과 정보와 영상과 이야기에 접촉합니다. 그 모든 것을 마음 안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것은 접촉하는 순간부터 그것이 내 애정을 어디로 끌고 가는지 살펴야 합니다.

 

거듭남에는 먹지 않는 뿐 아니라 만지지 않는 도 있습니다. 어떤 악은 충분히 경험해 본 뒤 판단하겠다고 가까이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 지혜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분별은 무엇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것인가뿐 아니라 무엇과 마음의 접촉을 끊을 것인가까지 포함합니다. 11만지지 말라는 말씀은 바로 그 마음의 경계까지 거룩하게 하시는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SWC.11 심화 3)

 

 

 

SWC.레11,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 것인가’

SWC.레11,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 것인가’ 1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육지의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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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11 심화2, ‘왜 기어 다니는 곤충 중 메뚜기 종류는 먹을 수 있었을까?’

SWC.레11 심화2. ‘왜 기어 다니는 곤충 중 메뚜기 종류는 먹을 수 있었을까?’레11의 음식법 가운데 상당히 뜻밖의 규정이 하나 있습니다.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은 일반적으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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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11 심화

2. 기어 다니는 곤충 메뚜기 종류는 먹을 있었을까?’

 

11의 음식법 가운데 상당히 뜻밖의 규정이 하나 있습니다.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은 일반적으로 가증하게 여기라고 하시면서도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은 먹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메뚜기와 베짱이와 귀뚜라미와 팥중이 종류가 예외가 됩니다. 왜 이런 작은 차이가 정함과 부정함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을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 놀라울 만큼 직접적인 설명을 남겼습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543(9:3)은 바로 레11:20-22를 인용하면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런 메뚜기 종류를 먹도록 허용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다리는 영적 선과 결합된 자연적 선을 의미하고, ‘은 그 선에서 나오는 자연적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에서 나오는 진리는 인간에게 받아들여지고 결합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런 곤충을 먹는 것이 허용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원리를 보여 줍니다. 메뚜기는 땅 가까이 사는 낮은 생물입니다. 가장 높은 천적인 것을 직접 표상하는 동물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선과 결합되어 있고, 거기에서 자연적인 진리가 나온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자연적인가 영적인가의 단순한 대립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에서 자연적 인간은 제거되어야 할 인간이 아닙니다. 자연적 인간도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의 몸과 직업과 돈과 음식과 휴식과 인간관계와 일상의 즐거움은 그 자체로 악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 지배되는가, 아니면 영적인 선과 체어리티를 섬기는가입니다.

 

예를 들어 돈을 버는 것은 매우 자연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돈 자체를 사랑하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 한다면 자연적인 것이 자기애와 결합한 것입니다. 반대로 가족을 책임지고 다른 사람을 돕고 선한 쓰임을 하기 위해 정직하게 일하여 돈을 번다면 같은 자연적 활동이 영적인 선과 연결됩니다. 음식과 휴식과 취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이 삶의 목적이 될 때와 선한 쓰임을 위한 몸과 마음을 돌보는 수단이 될 때는 그 내적 질이 다릅니다.

 

그래서 이 작은 곤충의 뛰는 다리는 자연적인 삶을 무조건 버리지 말라는 중요한 가르침을 품고 있습니다. 다만 물리적으로 위로 뛰는 행위 자체를 영적 상승이라고 단순하게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강조하는 핵심은 영적 선과 결합된 자연적 선에서 나오는 자연적 진리입니다.

 

거듭남은 인간을 세상에서 떼어내어 순수하게 영적인 존재로 만드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평범한 자연적 삶까지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과정입니다. 일하고, 먹고, 쉬고, 가족을 돌보고, 사람을 만나고, 작은 친절을 행하는 모든 일이 체어리티와 연결될 때 자연적인 삶도 천국의 질서를 섬기게 됩니다.

 

따라서 레11의 메뚜기 규례는 뜻밖의 희망을 보여 줍니다. 땅에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것이라도 영적인 선과 결합되어 그 선에서 진리가 나오면 인간에게 받아들여져 삶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연적인 삶을 버리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삶까지 거듭나게 하십니다. (SWC.11 심화 2)

 

 

 

SWC.레11 심화3, ‘왜 부정한 짐승의 주검은 만지기만 해도 부정해졌을까?’

SWC.레11 심화3. ‘왜 부정한 짐승의 주검은 만지기만 해도 부정해졌을까?’ 레11에서는 ‘먹지 말라’는 명령만큼이나 ‘만지지 말라’는 명령이 반복됩니다. 특히 부정한 짐승의 주검을 만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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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11 심화1,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은 왜 나뉘었을까? - 음식법에 감추어진 애정의 분별’

SWC.레11 심화1.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은 왜 나뉘었을까? - 음식법에 감추어진 애정의 분별’ 레11을 읽으면 가장 먼저 생기는 질문은 ‘하나님께서는 왜 어떤 동물은 정하다고 하고 어떤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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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11 심화

1.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은 나뉘었을까? - 음식법에 감추어진 애정의 분별

 

11을 읽으면 가장 먼저 생기는 질문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동물은 정하다고 하고 어떤 동물은 부정하다고 하셨을까?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동물 자체에 도덕적인 선악이 있다는 뜻일까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분명합니다. 동물 자체가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 교회가 표상교회였기 때문에 각 동물이 인간 안의 서로 다른 애정을 표상했던 것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719(7:2)는 정한 짐승이 선한 애정을, 부정한 짐승이 악한 애정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정한 짐승들이 온순하고 선하며 유용한 성질을 가진 것으로 나타나는 반면, 부정한 짐승들은 그 반대의 성질을 표상합니다. 중요한 것은 동물을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동물이 표상하는 인간의 애정입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650(11:7)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레11의 음식법 자체를 직접 언급합니다. 당시 교회가 표상교회였기 때문에 짐승에 관한 법 하나하나에도 표상적 의미가 있었으며, 먹을 수 있는 짐승은 선을, 먹을 수 없는 짐승은 악을 의미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레11의 정결 규례는 고대의 음식 목록을 넘어 인간 안의 선한 애정과 악한 애정을 분별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먹는다는 행위와 연결됩니다. 음식은 몸 밖에 있을 때는 아직 내 몸이 아니지만 먹으면 내 몸 안으로 들어와 나의 일부가 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애정이나 생각이 마음에 떠올랐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곧 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즐기며 의도할 때 점차 자기 것으로 삼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정한 것을 먹으라고 하고 부정한 것은 먹지 말라고 합니다.

 

이 원리는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에게 악한 생각이나 욕망이 떠오르지 않는 상태가 거듭남은 아닙니다. 유혹 속에서는 원하지 않는 생각과 욕망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인정하고 사랑하느냐, 아니면 주님의 진리 앞에서 그것이 악임을 보고 거절하느냐입니다. 우리 앞에 음식이 놓였다고 모두 먹어야 하는 것이 아니듯 마음에 떠오르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의 실패를 들었을 때 은근한 즐거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즐거움을 계속 되새기며 즐긴다면 그것을 먹는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누군가를 돕고 싶은 마음, 진실을 알고 싶은 마음, 용서하고 싶은 마음, 주님께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면 그런 선한 애정은 받아들이고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삶의 일부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레11의 내적 의미를 살아간다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의 음식 목록을 그대로 복원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루 동안 내 마음에 들어오는 수많은 애정과 생각 가운데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단순히 이것이 즐거운가?가 아니라 즐거움은 어떤 사랑에서 오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이런 의미에서 영적인 식생활과 같습니다. 무엇이든 마음이 원하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무엇이 생명에 속하고 무엇이 죽음에 속하는지를 분별하여 생명에 속한 것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 참된 자유입니다. 11의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은 오늘도 우리 마음의 식탁에 놓여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먹고 있는가? 어떤 애정과 생각을 것으로 만들고 있는가?이것이 음식법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SWC.11 심화 1)

 

 

 

SWC.레11 심화2, ‘왜 기어 다니는 곤충 중 메뚜기 종류는 먹을 수 있었을까?’

SWC.레11 심화2. ‘왜 기어 다니는 곤충 중 메뚜기 종류는 먹을 수 있었을까?’레11의 음식법 가운데 상당히 뜻밖의 규정이 하나 있습니다.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은 일반적으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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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11,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 것인가’

SWC.레11,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 것인가’ 1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육지의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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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11,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 것인가

 

 

1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육지의 모든 짐승 너희가 먹을 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3모든 짐승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4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낙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5사반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6토끼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7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8너희는 이러한 고기를 먹지 말고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 9물에 있는 모든 중에서 너희가 먹을 만한 것은 이것이니 강과 바다와 다른 물에 있는 모든 중에서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은 너희가 먹되 10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과 물에서 사는 모든 강과 바다에 있는 것으로서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모든 것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라 11이들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니 너희는 고기를 먹지 말고 주검을 가증히 여기라 12수중 생물에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가 혐오할 것이니라 13 중에 너희가 가증히 여길 것은 이것이라 이것들이 가증한즉 먹지 말지니 독수리와 솔개와 물수리와 14말똥가리와 말똥가리 종류와 15까마귀 종류와 16타조와 타흐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17올빼미와 가마우지와 부엉이와 18 올빼미와 사다새와 너새와 19황새와 백로 종류와 오디새와 박쥐니라 20날개가 있고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은 너희가 혐오할 것이로되 21다만 날개가 있고 발로 기어 다니는 모든 곤충 중에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은 너희가 먹을지니 22 중에 메뚜기 종류와 베짱이 종류와 귀뚜라미 종류와 팥중이 종류는 너희가 먹으려니와 23오직 날개가 있고 기어다니는 곤충은 너희가 혐오할 것이니라 24이런 것은 너희를 부정하게 하나니 누구든지 이것들의 주검을 만지면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25 주검을 옮기는 모든 자는 옷을 빨지니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26굽이 갈라진 모든 짐승 중에 쪽발이 아닌 것이나 새김질 아니하는 것의 주검은 네게 부정하니 만지는 자는 부정할 것이요 27 발로 다니는 모든 짐승 발바닥으로 다니는 것은 네게 부정하니 주검을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28 주검을 옮기는 자는 옷을 빨지니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그것들이 네게 부정하니라 29땅에 기는 길짐승 중에 네게 부정한 것은 이러하니 두더지와 쥐와 도마뱀 종류와 30도마뱀붙이와 육지 악어와 도마뱀과 사막 도마뱀과 카멜레온이라 31모든 기는 이것들은 네게 부정하니 주검을 만지는 모든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32이런 어떤 것의 주검이 나무 그릇에든지 의복에든지 가죽에든지 자루에든지 무엇에 쓰는 그릇에든지 떨어지면 부정하여지리니 물에 담그라 저녁까지 부정하다가 정할 것이며 33그것 어떤 것이 어느 질그릇에 떨어지면 속에 있는 것이 부정하여지나니 너는 그릇을 깨뜨리라 34먹을 만한 축축한 식물이 거기 담겼으면 부정하여질 것이요 그같은 그릇에 담긴 마실 것도 부정할 것이며 35이런 것의 주검이 물건 위에 떨어지면 그것이 모두 부정하여지리니 화덕이든지 화로이든지 깨뜨려버리라 이것이 부정하여져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 되리라 36샘물이나 물이 고인 웅덩이는 부정하여지지 아니하되 주검에 닿는 것은 모두 부정하여질 것이요 37이것들의 주검이 심을 종자에 떨어지면 그것이 정하거니와 38만일 종자에 물이 묻었을 때에 그것이 위에 떨어지면 너희에게 부정하리라 39너희가 먹을 만한 짐승이 죽은 때에 주검을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40그것을 먹는 자는 옷을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주검을 옮기는 자도 그의 옷을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41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은 가증한즉 먹지 못할지니 42 땅에 기어다니는 모든 기는 중에 배로 밀어 다니는 것이나 발로 걷는 것이나 여러 발을 가진 것이라 너희가 먹지 말지니 이것들은 가증함이니라 43너희는 기는 기어다니는 때문에 자기를 가증하게 되게 하지 말며 또한 그것 때문에 스스로 더럽혀 부정하게 되게 하지 말라 44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45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46이는 짐승과 새와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과 땅에 기는 모든 길짐승에 대한 규례니 47부정하고 정한 것과 먹을 생물과 먹지 못할 생물을 분별한 것이니라 (11)

 

해설

레위기 11장은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짐승을 먹을 수 있고 어떤 짐승은 먹을 수 없는지, 어떤 물고기와 새와 곤충과 길짐승이 정하고 부정한지, 그 주검을 만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길게 이어집니다. 그러나 장의 마지막에 이 모든 규례의 목적이 밝혀집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그리고 다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따라서 레11의 중심은 음식 자체가 아니라 거룩함이며, 그 거룩함을 위해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해야 하는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음식법의 기본 원리를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650(11:7)은 레11의 규례를 직접 언급하면서, 당시 교회가 표상교회였기 때문에 짐승에 관한 법들도 모두 영적인 것을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먹을 수 있는 짐승은 선을, 먹을 수 없는 짐승은 악을 의미했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719(7:2)도 정한 짐승은 선한 애정을, 부정한 짐승은 악한 애정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동물 자체가 도덕적으로 선하거나 악해서가 아니라, 각각의 동물이 가진 성질이 인간 안의 서로 다른 애정과 욕망을 표상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먹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먹은 음식이 몸 안으로 들어와 우리의 일부가 되듯, 말씀에서 먹는 것은 어떤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삼는 것, 곧 삶에 결합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레11은 단순히 어떤 동물을 먹어도 되는가?를 가르치는 장이 아닙니다. 거듭남의 관점에서는 나는 무엇을 안으로 받아들여 삶의 일부로 만들고 있는가?를 묻는 장입니다. 인간은 날마다 수많은 생각과 지식과 욕망과 즐거움에 접촉하며, 그 가운데 어떤 것은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거절하면서 자기 내면을 형성합니다.

 

3절로 8절에서는 육지 짐승의 두 가지 기준이 제시됩니다.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동시에 새김질해야 합니다. 낙타와 사반과 토끼는 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았고, 돼지는 굽은 갈라졌지만 새김질하지 않으므로 부정합니다. 여기에서 새김질은 정확히 무엇이고 갈라진 굽은 정확히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기지만, 스베덴보리가 레11의 이 두 조건을 각각 특정한 영적 의미로 직접 해설한 충분히 강한 원전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새김질은 말씀 묵상, 굽은 행함처럼 그럴듯한 대응을 만들어 내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본문 자체가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어느 한 조건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전체 가르침에서도 선과 진리, 신앙과 체어리티,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분리되어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레11의 두 조건 역시 적어도 한쪽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영적 질서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세부 대응은 보류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9절로 19절에서는 물속 생물과 새로 범위가 넓어집니다. 물속 생물 가운데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만 먹을 수 있고, 이어 독수리와 솔개와 까마귀와 올빼미 등 먹지 못할 새들이 열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물고기는 일반적으로 자연적 인간 안의 지식과 기억지식에 연결되고, 새는 생각과 지적인 것들에 연결됩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우리가 받아들이는 지식과 생각 역시 분별되어야 한다는 큰 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느러미는 이것, 비늘은 저것’, 또는 레11에 열거된 새 하나하나를 특정한 악이나 거짓에 기계적으로 대응시키는 것은 직접 원전이 충분하지 않은 곳에서 상응을 만들어 내는 일이 될 수 있으므로 하지 않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모든 지식이 영적 양식이 되는 것도 아니고, 머리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20절로 23절에서는 아주 흥미로운 예외가 나옵니다. 날개가 있으면서 기어 다니는 곤충은 일반적으로 먹지 못하지만, 발 위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메뚜기 종류는 먹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설명이 있습니다. AE.543(9:3)은 바로 레11:20-22를 인용하면서, ‘다리는 영적 선과 결합된 자연적 선을, ‘은 그 선에서 나오는 자연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선에서 나온 진리는 인간에게 받아들여지고 결합되어야 하므로 이런 곤충은 먹도록 허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것이라고 해서 그 자체로 낮거나 악한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삶이 영적 선과 연결되어 있을 때 그것 역시 거듭난 인간의 삶에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24절 이후에는 먹음뿐 아니라 접촉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부정한 짐승의 주검을 만지거나 옮기면 저녁까지 부정하게 되고, 어떤 경우에는 옷을 빨아야 합니다. AC.994(9:3)는 레11:27, 29-33의 기는 것들을 직접 언급하면서, ‘기는 이 좋은 의미에서는 선한 애정에서 나오는 자연적 즐거움을, 반대 의미에서는 proprium과 악한 욕망에서 나오는 더러운 즐거움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당시 표상교회에서는 그러한 것을 표상하는 부정한 기는 것과 접촉하는 것까지 부정한 것으로 규정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연적 즐거움 자체가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즐거움 안에 어떤 애정이 들어 있는가입니다. 음식과 휴식과 아름다움과 몸의 감각 같은 자연적인 즐거움도 선한 쓰임과 체어리티에 연결되면 좋은 것이지만,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 지배되면 인간을 가장 낮은 감각적인 것에 붙잡아 둘 수 있습니다.

 

32절로 40절에서는 부정한 주검이 그릇이나 의복이나 음식과 물에 접촉했을 때의 규례가 이어집니다. 어떤 것은 물에 담가 씻지만 질그릇은 깨뜨려야 하고, 샘이나 물이 고인 웅덩이는 부정해지지 않으며, 마른 종자와 물 묻은 종자의 경우도 다르게 취급됩니다. 이런 세부 규례 하나하나에도 표상적 의미가 있었겠지만,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해설이 확보되지 않은 부분까지 세밀한 상응으로 채울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전체 계열에서는 한 가지가 분명합니다. 부정한 것이 인간의 삶에 접촉했을 때 그것을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씻고, 분리하고, 때로는 버리는 정결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아는 데서 끝나지 않고 실제로 악과 거짓의 영향을 제거하는 과정까지 포함합니다.

 

41절로 43절에서는 다시 기는 이 강조됩니다. 배로 밀어 다니는 것이나 네 발 또는 여러 발로 기어 다니는 것을 먹지 말라고 하시며, ‘그것 때문에 자기를 가증하게 되게 하지 말며 또한 그것 때문에 스스로 더럽혀 부정하게 되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AC.994가 설명하듯 악한 의미의 기는 것은 proprium에서 나오는 더러운 감각적 즐거움과 욕망을 나타냅니다. 인간의 문제는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감각적 즐거움이 삶의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선과 진리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거듭남은 자연적인 것을 파괴하는 과정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의 질서 아래 놓이게 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44절과 45절에서 이 모든 규례의 이유가 마침내 밝혀집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인간은 자기 힘으로 거룩함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거룩함은 오직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이 거룩해진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선과 진리에 반대되는 악과 거짓을 주님의 도움으로 거절함으로써 주님의 것이 자기 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11먹으라먹지 말라는 결국 거룩함의 두 방향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받아들이고, 그분에게 반대되는 것은 자기 것으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45절은 이 거룩함을 출애굽과 연결합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여호와라.이스라엘이 정결 규례를 완벽하게 지켰기 때문에 애굽에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먼저 여호와께서 그들을 종살이에서 이끌어 내셨고, 그 후 구원받은 백성에게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셨습니다. 거듭남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정결해져 주님께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인간을 악과 거짓의 종살이에서 이끌어 내시고, 그 후 선과 악을 분별하며 자유롭게 선을 선택하도록 계속 인도하십니다.

 

마지막 47절은 그래서 레11 전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부정하고 정한 것과 먹을 생물과 먹지 못할 생물을 분별한 것이니라.이것은 바로 앞 레10과도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10에서 제사장에게 요구된 것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는 이었습니다. 그런데 레11에서는 그 분별이 제사장과 성소를 넘어 백성의 식탁과 손과 그릇과 일상생활 전체로 내려옵니다. 거룩함은 제단 앞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레11이 오늘 우리에게 묻는 가장 깊은 질문은 어떤 음식을 먹어도 되는가?가 아니라 나는 무엇을 안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입니다. 어떤 애정을 즐기고, 어떤 생각을 반복하며, 어떤 지식을 자기 것으로 삼고, 어떤 감각적 즐거움을 사랑하는지가 결국 우리의 내면을 형성합니다. 거듭남은 모든 것을 무차별하게 받아들이는 삶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는 받아들이고 악과 거짓은 거절하는 분별의 삶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11의 길고 세밀한 음식법은 결국 이 한 말씀을 인간의 가장 평범한 일상까지 내려보낸 것입니다. (SWC.11 해설)

 

심화

1.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은 나뉘었을까? - 음식법에 감추어진 애정의 분별

 

SWC.레11 심화1,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은 왜 나뉘었을까? - 음식법에 감추어진 애정의 분별’

SWC.레11 심화1.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은 왜 나뉘었을까? - 음식법에 감추어진 애정의 분별’ 레11을 읽으면 가장 먼저 생기는 질문은 ‘하나님께서는 왜 어떤 동물은 정하다고 하고 어떤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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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어 다니는 곤충 메뚜기 종류는 먹을 있었을까?’

 

SWC.레11 심화2, ‘왜 기어 다니는 곤충 중 메뚜기 종류는 먹을 수 있었을까?’

SWC.레11 심화2. ‘왜 기어 다니는 곤충 중 메뚜기 종류는 먹을 수 있었을까?’레11의 음식법 가운데 상당히 뜻밖의 규정이 하나 있습니다.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은 일반적으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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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부정한 짐승의 주검은 만지기만 해도 부정해졌을까?’

 

SWC.레11 심화3, ‘왜 부정한 짐승의 주검은 만지기만 해도 부정해졌을까?’

SWC.레11 심화3. ‘왜 부정한 짐승의 주검은 만지기만 해도 부정해졌을까?’ 레11에서는 ‘먹지 말라’는 명령만큼이나 ‘만지지 말라’는 명령이 반복됩니다. 특히 부정한 짐승의 주검을 만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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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10,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 - 거룩한 예배를 움직이는 사랑은 어디에서

SWC.레10,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 - 거룩한 예배를 움직이는 사랑은 어디에서 오는가?’ 1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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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10 심화

5. 나답과 아비후는 죽었는데 아론의 규례 위반은 받아들여졌을까?’

 

10을 끝까지 읽으면 한 가지 매우 흥미로운 대조가 나타납니다. 장의 처음에서는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했다가 죽습니다. 그런데 장의 마지막에서도 명령대로 행하지 않은 일이 발생합니다. 속죄제 염소를 제사장이 먹어야 했는데 이미 불살라 버린 것입니다. 모세는 크게 노하지만 아론의 설명을 듣고 좋게 여겼습니다.왜 앞의 일은 죽음으로 끝나고 뒤의 일은 받아들여졌을까요?

 

먼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레10:19-20의 아론의 행동을 직접 상세하게 해설하여 두 사건의 차이를 항목별로 설명한 강한 원전은 이번 검토에서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이 마지막 장면에 세밀한 상응을 임의로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본문 자체가 보여 주는 차이는 분명합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을 적극적으로 가져와 예배에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에게서가 아닌 다른, 사랑과 말씀 이외의 다른 근원에서 나온 예배로 직접 해설합니다.

 

반면 아론의 경우에는 다른 불을 가져오거나 자기 방식의 예배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두 아들을 잃은 바로 그날, 자신에게 닥친 비극 가운데서 속죄제물을 먹는 것이 과연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실 일인지 묻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 설명을 듣고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이 두 사건은 하나님의 규칙을 어기면 죽는다는 동일한 범주로 묶이지 않습니다. 나답과 아비후 사건의 중심은 스베덴보리가 직접 설명한 대로 예배의 근원이 바뀐 데 있습니다. 주님의 불 대신 다른 불, 말씀에서 나온 교리 대신 다른 근원에서 나온 것이 거룩한 예배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마지막 사건은 오히려 외적 규례와 그 규례가 섬기는 내적 목적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아론은 규례를 무시하여 자기 뜻대로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 아니라 오늘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는데 이것을 먹는 것이 여호와 보시기에 과연 옳겠느냐고 묻습니다.

 

여기에는 영적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욕망을 하나님의 뜻보다 위에 놓고 거룩한 것을 자기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뜻을 진실하게 따르려 하기 때문에 오히려 상황에서 뜻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은 기계적 복종과 같지 않습니다. 참된 순종에는 분별이 있습니다. 물론 인간이 자기 편의대로 말씀을 고치는 것을 분별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외적인 문자만 지켰다는 사실이 자동으로 내적인 순종을 보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점에서 레10 마지막은 10절의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라는 말씀과도 잘 어울립니다. 이 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순한 규칙 준수보다 더 깊은 분별을 요구합니다. 다른 불과 주님의 불을 분별하고,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며, 마지막에는 주님께서 실제로 무엇을 기쁘게 여기시는지를 묻습니다.

 

그래서 레10은 엄격함으로 시작하지만 율법주의로 끝나지 않습니다. 거룩함은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외적 형식을 기계적으로 실행하는 데서 자동으로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거룩함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 그분의 뜻을 진실하게 분별하고 따르는 데 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 을 가져왔고, 아론은 여호와께서 어찌 좋게 여기셨으리요?라고 물었습니다. 바로 이 차이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는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거룩한 곳으로 가져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통한 상황에서도 무엇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지 묻는 것입니다. 거듭남이 깊어진다는 것은 규칙을 많이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주님의 사랑과 진리 안에서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을 점점 더 분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SWC.10 심화 5)

 

 

 

SWC.레10,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 - 거룩한 예배를 움직이는 사랑은 어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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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10 심화4, ‘나답과 아비후는 왜 진영 밖으로 옮겨졌을까?’

SWC.레10 심화4. ‘나답과 아비후는 왜 진영 밖으로 옮겨졌을까?’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뒤 모세는 미사엘과 엘사반에게 그들을 ‘성소 앞에서 진영 밖으로’ 메고 나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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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10 심화

4. 나답과 아비후는 진영 밖으로 옮겨졌을까?’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뒤 모세는 미사엘과 엘사반에게 그들을 성소 앞에서 진영 밖으로메고 나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시신 처리 이상의 표상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324(5:8)는 레10:1-5를 직접 인용하며 나답과 아비후가 진영 밖으로 옮겨진 의미를 설명합니다. 그들의 예배가 천국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예배는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으며, 이스라엘의 진영은 천국과 교회를 표상했습니다.

 

따라서 진영 은 단순히 공동체에서 추방당했다는 의미보다 더 깊습니다. 다른 불에서 나온 예배는 천국의 질서에 속하지 않으므로 천국을 표상하는 진영 안에 머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레4와 레6에서 보았던 진영 과도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각 제사의 문맥이 다르므로 모든 진영 을 완전히 같은 세부 상응으로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큰 원리는 천국과 교회의 질서에 속하지 않는 것이 분리되고 제거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거듭남의 중요한 면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흔히 주님께서 우리 안에 새로운 것을 넣어 주시는 것만 생각하지만, 거듭남에는 밖으로 옮겨지는 도 있습니다. 이전에는 내 신앙이라고 생각했던 자기 의, 내 열심이라고 생각했던 자기애, 진리라고 확신했던 거짓이 주님의 빛 가운데 드러나면 그것은 더 이상 마음의 중심에 머물 수 없습니다.

 

특히 나답과 아비후가 표상한 것은 노골적인 세상 악이 아니라 종교적 형태를 가진 잘못된 예배였습니다. 그래서 더 중요합니다. 인간은 세속적인 욕심보다 종교적인 proprium을 더 오래 붙들 수도 있습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 이렇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이 자기애라는 사실을 발견하기가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불이 비추면 그 근원이 드러납니다. 주님에게서 온 사랑인지 자기에게서 나온 다른 불인지 분명해지고, 다른 불에 속한 것은 천국의 질서 밖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다른 사람을 교회 밖으로 몰아내는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10의 내적 의미가 먼저 향하는 곳은 다른 사람의 신앙을 심판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면입니다. ‘ 안에서 진영 밖으로 옮겨져야 다른 불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먼저입니다.

 

거듭남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천국에 속하지 않는 것을 분리하는 과정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의 모든 종교적 열심을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그 열심 가운데 자기애에서 나온 것을 드러내어 밖으로 옮기시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만이 예배의 불로 남게 하십니다. (SWC.10 심화 4)

 

 

 

SWC.레10 심화5, ‘왜 나답과 아비후는 죽었는데 아론의 규례 위반은 받아들여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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