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0.심화

 

1. 실제 사례들

 

AC.20, But when man is conceived anew, he then begins for the first time to know that his goods are not goods, and also, as he comes more into the light, that the Lord is, and that he is good and truth itself.에 해당하는 구체적 사례를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실제 목회현장에선 이 마저도 정말 쉽지 않은, 정말 보기 힘든 경우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느끼는 어려움은 매우 현실적인 목회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AC.20의 문장은 읽으면 간단해 보이지만, 실제 인간 삶에서는 거의 드물게 보이는 변화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 상태는 갑자기 성인(聖人)이 되는 어떤 극적인 사건이라기보다, 사람이 조금씩 더 빛 속으로 들어가면서 ‘자기 자신을 다르게 보게 되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몇 가지 실제적인 유형을 통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AC.20의 문장을 다시 보면 두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선이 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시작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주님이 선과 진리 자체이심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두 단계는 사실 하나의 경험 안에서 이어집니다. 사람이 자기 선의 한계를 보게 될 때, 비로소 참된 선의 근원을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유형은 목회 현장에서 종종 만나는 ‘열심 있는 신앙인의 깨달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하고, 헌신도 많이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신앙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사람은 자기 마음속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봉사를 하면서도 인정받지 못하면 서운해지고,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헌신했다고 생각하면 마음속에 우월감이 올라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내가 하는 선한 일도 사실은 완전히 순수한 것은 아니구나’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바로 AC.20에서 말하는 첫 단계입니다.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선의 한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유형은 ‘실패를 통해 오는 깨달음’입니다. 어떤 사람이 평생 도덕적으로 살려고 노력해 왔다고 합시다. 그는 자신이 비교적 선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 사건에서 예상하지 못한 분노나 이기심이 폭발합니다. 그때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은 자기 사랑이 안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경험은 매우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내 힘만으로는 참된 선을 이루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험이 조금 더 깊어지면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됩니다. 사람이 자기 선의 한계를 깨달으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참된 선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두 번째 깨달음이 나타납니다. 즉 ‘주님이 선과 진리 자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교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예는 ‘용서의 경험’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큰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는 성경 말씀도 알고 있고, 용서해야 한다는 교리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는 마음이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점점 깨닫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마음을 바꾸어 주셔야 가능한 일이구나.’ 그러면 그 사람은 점점 기도하게 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전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AC.20이 말하는 두 번째 단계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느끼시는 것처럼 이런 변화는 실제로 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완벽한 성인(聖人)의 상태가 아니라 ‘빛이 조금 더 들어온 상태’입니다. 사람이 완전히 자신을 부정하는 단계까지 가는 것은 드물지만, 자기 선의 한계를 조금이라도 보는 순간 이미 거듭남의 과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빛 속으로 더 들어갈수록’ 이런 깨달음이 깊어진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정도로 시작합니다. 그다음에는 ‘내 선에도 자기 사랑이 섞여 있다’는 것을 봅니다. 더 깊어지면 ‘참된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선을 행할 때 자연스럽게 ‘주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인식’을 갖게 됩니다.

 

사람이 처음에는 ‘내가 선을 행한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자라면 ‘내 선에도 부족함이 있다’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더 깊어지면 ‘참된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바로 이런 ‘점진적인 빛의 증가’입니다.

 

그래서 AC.20의 문장은 어떤 이상적인 신앙인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조금씩 더 빛 속으로 들어갈 때 나타나는 ‘아주 현실적인 영적 경험의 방향’을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AC.20, 심화 2, ‘스베덴보리의 경험’

AC.20.심화 2. ‘스베덴보리의 경험’ 위 심화 1번에 이어지는 질문인데요, 스베덴보리는 이런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본인이 직접 이런 과정을 밟은 건가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 연구에서 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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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 창1:3,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 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어떤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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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심화

 

3. 리메인스 설명 중 왜곡되거나 오염된다 부분

 

AC.19 해설에 사람의 겉 사람이 활발하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움직이고 있는 동안에는, 리메인스가 전면에 나설 수 없습니다. 그것이 나오면 즉시 왜곡되거나 오염되기 때문입니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제 경우를 보더라도 과연 그런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오랜 세월, 교만, 곧 자기 사랑에 사로잡혀 먼 길을 돌아와야 했거든요... 저 표현 중 특히 왜곡되거나 오염된다는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이해하고 싶습니다.

 

윗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리메인스(remains) 교리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리메인스가 전면에 나서면 왜곡되거나 오염된다’는 말은 단순한 도덕적 경고가 아니라, 인간 마음의 구조와 영적 작용 방식에 관한 설명입니다. 이 점을 몇 단락으로 나누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리메인스’가 무엇인지 다시 짚는 것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리메인스는 사람이 살아오는 동안, 주님이 그의 속 사람 안에 저장해 두시는 ‘선과 진리의 씨앗들’, 다시 말해 어린 시절의 순진함, 선한 감정, 진리를 향한 기쁨,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 같은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주님이 보존해 두신 것이며,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에서 주님이 필요할 때 꺼내 사용하시는 영적 자산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리메인스를 인간 안에 있는 ‘천국의 씨앗’ 같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의 ‘겉 사람’, 곧 외적 마음입니다. 사람이 아직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외적 마음이 거의 전적으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의해 움직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사람의 생각과 판단 기준이 대부분 ‘나에게 유익한가’, ‘내 체면과 이익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속 사람 안에 있는 순수한 선과 진리가 밖으로 드러나게 되면, 그것들이 있는 그대로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왜곡’이라는 표현이 이해됩니다. 순수한 진리가 자기 사랑 속으로 들어오면, 사람은 그 진리를 ‘자기 목적을 위해 해석하고 이용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겸손’이라는 진리를 알게 되었는데, 그 진리를 진심으로 살기 위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마음으로 사용한다면, 그 진리는 이미 본래의 의미가 변형된 것입니다. 진리가 여전히 존재하기는 하지만, 중심이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기 때문에 진리가 ‘자기 확증의 도구’로 바뀌어 버립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왜곡’에 가까운 모습입니다.

 

오염’이라는 표현은 또 다른 차원을 설명합니다. 어떤 선한 감정이나 진리가 자기 사랑과 결합되면, 그 안에 ‘이기적 동기’가 섞이게 됩니다. 겉으로는 선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에서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 우월해지고 싶은 마음, 남보다 의롭다고 느끼고 싶은 마음이 함께 작동합니다. 그러면 그 선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순수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혼합된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오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리메인스를 매우 조심스럽게 보호하신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아직 자기 사랑 속에 깊이 있을 때는, 그 리메인스가 전면에 드러나지 않도록 ‘속 사람 깊은 곳에 보존해 두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씨앗이 아직 준비되지 않은 토양에 드러나면 밟히거나 썩어 버리기 쉬운 것처럼, 사람의 외적 삶이 어느 정도 정리되기 전에는 그 씨앗이 보호되는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황폐(vastation)라는 과정을 자주 말합니다. 앞서 다룬 바로 그 개념인데, 이것은 사람의 자기 확신과 거짓된 확신이 약화되는 과정입니다. 사람이 삶 속에서 여러 경험과 시련을 겪으면서 자기중심적 확신이 조금씩 무너질 때, 비로소 속에 있던 리메인스가 안전하게 작용할 수 있는 공간이 생깁니다. 그러면 주님이 그 리메인스를 사용하여 사람의 생각과 사랑을 새롭게 정리하십니다.

 

말씀하신 개인 경험도 사실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겪는 과정입니다. 오랜 시간 자기 확신 속에서 신앙을 이해하다가 어느 순간 그것이 무너지고, 더 깊은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으로 보면, 그때 속 사람 안에 오래 보존되어 있던 리메인스가 비로소 ‘겉 사람의 삶 속으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왜곡되거나 오염된다’는 말은 단순히 인간이 나쁘기 때문이라는 뜻이 아니라,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순수한 영적인 것들이 드러나면 그것들이 ‘자기 사랑의 틀 속에서 해석되고 사용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그 위험을 아시기 때문에 리메인스를 깊이 보호하시고, 사람이 조금씩 준비될 때마다 그것을 꺼내어 거듭남의 과정에 사용하신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AC.19, 창1:2,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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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심화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심화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 본문에 ‘By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가 나오는데, 여기서 move와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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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move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 본문에 By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가 나오는데, 여기서 move brood가 나란히 나와요. 이게 좀 어색한데요, 이 둘이 어째서 나란히 나오는 건가요?

 

영어 문장만 보면 ‘move’와 ‘brood’가 서로 다른 뜻을 가진 단어인데, 나란히 붙어 있으니 왜 이렇게 설명하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단순한 영어 문장 문제가 아니라 ‘히브리어 원문, 성경 번역 전통,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이 함께 얽혀 있는 부분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왜 두 단어가 함께 나오는지 자연스럽게 풀립니다.

 

먼저 성경 원문을 보면 창1:2의 히브리어 표현은 ‘merachefet(מְרַחֶפֶת)입니다. 이 동사는 기본적으로 ‘떠 있다’, ‘흔들리다’, ‘진동하다’, ‘맴돌다’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영어 번역에서는 ‘the Spirit of God was moving over the waters’라고 번역합니다. 여기서의 move는 단순한 이동이라기보다 ‘부드럽게 움직이며 감싸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물 위를 스치듯이 감싸며 움직이는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를 보면 이 동사가 한 번 더 등장하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신32:11,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독수리가 자기 새끼 위에서 ‘날개를 퍼덕이며 보호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히브리어 표현은 바로 같은 동사입니다. 그 장면은 단순히 ‘움직인다’는 뜻이라기보다 ‘새가 알이나 새끼 위를 덮어 보호하며 따뜻하게 품는 모습’입니다.

 

바로 여기서 ‘brood’라는 번역이 나옵니다. 영어 ‘brood’는 ‘암탉이 알 위에 앉아 품어 생명이 자라도록 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그래서 일부 성경 해석 전통에서는 창1:2의 장면을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라 ‘생명을 준비시키는 보호와 따뜻한 덮음’으로 이해했습니다. 마치 암탉이 알을 품듯이 하나님의 영이 물 위에 임해 생명의 탄생을 준비한다는 이미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두 가지 뉘앙스를 ‘함께 살리기 위해 move brood를 나란히 사용한 것’입니다. 즉, 히브리어 단어 하나 안에 두 가지 이미지가 동시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움직이며 감싸는 이미지(move)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을 품어 키우는 이미지(brood)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의미를 모두 의식하고 설명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신학과도 잘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the spirit of God을 주님의 자비’라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 자비가 인간에게 작용하는 방식이 바로 이런 모습이라고 봅니다. 주님의 자비는 단순히 멀리서 움직이는 힘이 아니라 ‘생명이 태어나도록 보호하고 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는 ‘move’라는 말만 쓰지 않고,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라는 설명을 덧붙입니다.

 

이 이미지는 창세기 전체의 영적 의미와도 연결됩니다. 창세기 1장은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우주의 창조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거듭남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는 장면은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니라 ‘아직 혼돈 상태에 있는 인간의 마음 위에 주님의 자비가 임하는 장면’입니다. 이때 주님의 자비는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이 태어나도록 보호하고 준비하는 사랑’으로 작용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brood’라는 이미지가 매우 적절해집니다.

 

그래서 이 문장을 번역할 때 한국어로는 보통 이렇게 풀어 설명하면 자연스럽습니다. ‘운행하다’는 단순히 움직인다는 뜻이 아니라, ‘알을 품는 새처럼 생명이 태어나도록 따뜻하게 감싸며 움직이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주님의 자비가 인간의 혼돈 상태 위에서 ‘생명이 태어나도록 보호하고 준비하는 사랑으로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정리하면, move brood가 함께 나오는 이유는 영어 표현의 중복 때문이 아니라 ‘히브리어 원문의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는 ‘움직이며 감싸는 작용’, 다른 하나는 ‘생명을 품어 자라게 하는 보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이미지를 함께 사용하여 ‘주님의 자비가 인간의 거듭남을 준비하는 방식’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AC.19, 심화 1, ‘자비’(mercy)

AC.19.심화 1. ‘자비’(mercy) AC.19에도 ‘주님의 자비(mercy)’라는 표현이 나오네요. 대한민국 기독교인들은 개신교인들을 포함, 보통 ‘자비’보다 ‘은혜’에 익숙합니다. 심지어 ‘자비’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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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심화

 

1. 자비(mercy)

 

AC.19에도 주님의 자비(mercy)라는 표현이 나오네요. 대한민국 기독교인들은 개신교인들을 포함, 보통 자비보다 은혜에 익숙합니다. 심지어 자비하면 불교를 떠올리지요.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거의 대부분 자비를 말하네요.  자비 은혜’, 둘 사이 무슨 차이가 있어 그런 건가요?

 

실제로 스베덴보리 저작을 읽는 한국 독자들이 가장 자주 느끼는 낯섦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mercy’를 거의 항상 ‘자비’로 말한다는 점입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은혜’라는 표현이 압도적으로 익숙하기 때문에, ‘자비’라는 말을 보면 말씀하신 것처럼 불교적 어감이 먼저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mercy’를 사용하는 데에는 분명한 신학적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언어적 배경부터 보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 원문은 라틴어인데, 그가 사용하는 단어는 대부분 ‘misericordia’입니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 ‘연민’, ‘긍휼’을 뜻합니다. 영어 번역에서는 이것을 거의 항상 ‘mercy’로 옮겼습니다. 성경에서도 같은 단어가 자주 나옵니다. 예를 들어 시편이나 복음서에서 ‘주의 긍휼’, ‘주의 자비’ 같은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mercy는 사실 전통적인 성경 언어에 매우 가까운 표현입니다.

 

반면, 한국 교회에서 익숙한 ‘은혜’는 영어로 보통 ‘grace’에 해당합니다. 이 단어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개념인데, 특히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신학에서 중심 개념이 되었습니다. ‘은혜’는 주로 ‘값없이 주어지는 구원의 선물’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인간이 어떤 공로도 없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과 용서를 가리킬 때 많이 사용됩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표현이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서 두 단어의 뉘앙스 차이가 나타납니다. ‘은혜(grace)는 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물을 주신다’는 측면을 강조합니다. 반면 ‘자비(mercy)는 ‘하나님이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다’는 측면을 강조합니다. 쉽게 말하면, 은혜는 ‘주시는 사랑’, 자비는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에 가까운 표현입니다. 둘 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키지만, 강조점이 약간 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왜 ‘mercy’를 그렇게 자주 사용하는지를 이해하려면, 그의 인간관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매우 엄정하게 봅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을 만들어 낼 수 없고, 자신의 힘만으로는 거듭날 수 없으며, 끊임없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기울어지는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인간이 구원과 거듭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결국 ‘주님의 끊임없는 긍휼과 자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설명을 할 때마다 ‘주님의 자비로(in the Lord’s Divine mercy)라는 표현을 반복합니다.

 

이 표현에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영적 진리를 이해하는 것조차 자기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어떤 진리를 깨닫고, 어떤 선을 행하고, 거듭남의 길을 걷게 되는 것 자체가 ‘주님의 자비로운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글에서도 ‘주님의 자비로 이것을 설명할 것이다’, ‘주님의 자비로 이것이 더 분명해질 것이다’라는 식으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겸손한 표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의 신학적 확신을 보여 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할 때, ‘사랑(love)이라는 말을 가장 중심에 둡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타락한 인간에게 작용할 때 나타나는 모습이 바로 ‘자비(mercy)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자체는 사랑이지만, 그 사랑이 연약하고 비참한 인간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그것을 ‘자비’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글에서는 사랑과 자비가 거의 함께 등장합니다.

 

한국 교회 현실을 생각하면 문화적 차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자비’라는 말이 불교적 자비와 연결되어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에서도 ‘긍휼’, ‘자비’, ‘인애’ 같은 표현이 매우 많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한다’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mercy’는 불교적 의미라기보다 ‘성경의 긍휼 전통에 더 가까운’ 표현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 사랑을 강조하는 말이고, ‘자비’는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거듭남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오래 참고 인도하시는지를 강조하기 때문에 ‘자비’라는 표현을 특히 자주 사용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자비’와 ‘은혜’는 서로 경쟁하는 개념이 아니라, 사실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각도에서 설명하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가운데서 특히 인간을 향해 내려오는 ‘긍휼의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 ‘mercy’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AC.19, 심화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심화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 본문에 ‘By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가 나오는데, 여기서 move와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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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창1:2,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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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심화

 

2. 라틴어 vastatio의 영역 vastation desolation’(혹은 devastation’)의 비교

 

AC 포츠역 영어 vastation은 현대 사전엔 잘 안 나오고, 대신 desolation이 나오네요. vastation은 왜 사라졌을까요?

 

목사님께서 보신 현상이 정확합니다. 스베덴보리 영어 번역에서 자주 보이는 ‘vastation’이라는 단어는 오늘날 일반 영어 사전에서는 거의 사라졌고, 대신 ‘desolation’이 더 널리 사용됩니다. 이것은 의미가 사라졌다기보다 ‘단어의 사용 역사와 번역 전통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이 배경을 이해하면 AC를 읽을 때도 훨씬 도움이 됩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사실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 자신은 영어로 글을 쓴 것이 아니라 ‘라틴어로 저술했습니다. ‘Arcana Coelestia’의 원문 단어는 영어 ‘vastation’이 아니라 라틴어 ‘vastatio’입니다. 이 라틴어는 신학 전통에서 오랫동안 사용된 용어로, 성경의 예언서에 나오는 ‘황폐’, ‘폐허’, ‘비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특히 교부 시대와 중세 신학에서는 이 단어가 ‘영적 의미의 황폐 상태’를 설명하는 데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19세기 초에 스베덴보리 저작을 영어로 번역할 때, 번역자들은 라틴어 ‘vastatio’를 그대로 옮기기 위해 ‘vastation’이라는 영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당시 영어에는 이 단어가 실제로 존재했고, ‘황폐하게 함’ 또는 ‘파괴’라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영어 사용이 변했고, 일상 언어에서는 ‘desolation’이나 ‘devastation’ 같은 단어가 더 널리 쓰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vastation’은 점점 쓰이지 않게 되었고, 현대 영어에서는 거의 사라진 단어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번역자들이 굳이 ‘desolation’ 대신 ‘vastation’을 사용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두 단어는 비슷하지만, 뉘앙스가 조금 다릅니다. ‘desolation’은 결과 상태, 즉 이미 황폐해진 상태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vastation’은 ‘황폐하게 되는 과정’이나 ‘황폐하게 만드는 작용’을 더 강하게 느끼게 하는 단어였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황폐는 단순히 폐허 상태가 아니라 ‘욕정과 거짓이 약화되고 정리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번역자들이 ‘vastation’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AC에서 ‘vastation’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파괴나 폐허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서 그것은 ‘영적 정화 과정’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사람이 자기 확신과 거짓 신념을 내려놓게 되고, 이전에 의지하던 것들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면서 새로운 진리와 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는 상태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 저작에서는 ‘vastation’을 단순히 ‘황폐’라고 번역하면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파괴가 아니라 준비 과정’입니다.

 

오늘날 학술 번역에서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전통 번역을 그대로 유지해서 ‘vastation’을 계속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다른 하나는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desolation’이나 ‘spiritual desolation’으로 바꾸어 번역하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vastation’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특정한 기술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를 읽을 때는 이렇게 이해하면 가장 정확합니다. ‘vastation’은 단순한 파괴나 절망 상태가 아니라, ‘거짓과 욕정이 약화되면서 새로운 영적 질서를 준비하는 상태’입니다. 성경 이야기로 보면, 광야의 시간이나 탕자의 궁핍 같은 순간이 여기에 가까운 예가 됩니다. 겉으로 보면 황폐하지만, 사실은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정리하면 ‘vastation’이 현대 영어에서 사라진 것은 의미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언어 사용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 저작에서는 이 단어가 라틴어 ‘vastatio’의 번역으로서 특별한 신학적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전통적인 표현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AC.18, 창1:2, '깊음'(faces of the deep), '황폐'(vastation)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 ‘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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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 심화 1, ‘인간의 황폐’(the vastation of man)

AC.18.심화 1. ‘인간의 황폐’(the vastation of man) AC.18해설 중 ‘황폐’를 설명하는 데를 보면, ‘욕정과 거짓들이 먼저 약화되고,제거되어야’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우선 이 ‘약화된다’는 게 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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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심화

 

1. 인간의 황폐(the vastation of man)

 

AC.18해설 중 황폐를 설명하는 데를 보면, 욕정과 거짓들이 먼저 약화되고,제거되어야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우선 이 약화된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고, 그래서 더욱 제거된다는 게 가능할까 싶습니다. 15돌아온 탕자가 스스로 돌이키는 장면이 이런 건가요? 구체적으로 좀 알고 싶습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의문은 매우 현실적인 질문입니다. ‘욕정과 거짓이 약화되고 제거된다’는 말은 글로 읽으면 그럴듯하지만, 실제 인간 경험을 생각해 보면,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한가?’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도 바로 이 지점 때문에 AC에서 ‘황폐(vastation, desolation)라는 상태를 설명합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먼저 ‘약화’와 ‘제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제거’는 ‘완전히 없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의 악한 성향이나 욕정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여러 곳에서 인간의 본성에는 여전히 그런 것들이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차이가 있습니다. 거듭남 이전에는 그것들이 ‘사람을 지배’하지만, 거듭남 이후에는 그것들이 ‘더 이상 중심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제거된다’는 표현을 사용할 때 사실상 ‘지배력을 잃는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여기서 ‘약화된다’는 표현이 먼저 나오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욕정이나 거짓이 한 번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점차 힘을 잃어 가는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명예욕이 강했다고 합시다. 이전에는 인정받지 못하면 크게 분노하고, 사람을 경쟁자로만 보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은 점점 그런 반응을 덜 하게 됩니다. 여전히 마음속에는 그런 감정이 올라올 수 있지만, 이전처럼 바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약화’입니다. 욕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삶을 지배하는 힘이 줄어든 상태입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AC에서 말하는 ‘황폐’입니다. 황폐는 단순한 고통이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환상이 무너지는 경험’을 말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선하고 의로운 존재라고 생각하다가, 어떤 사건을 통해 자기 안에 있는 욕정과 이기심을 분명히 보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 사람은 자신을 의지하기보다 주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서 욕정의 힘이 점점 약해집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눅15의 탕자 이야기는 바로 이런 과정을 아주 잘 보여 주는 예입니다. 탕자는 처음에는 자유와 즐거움을 찾아 집을 떠납니다. 그때 그는 자기 선택이 옳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이 무너지고, 돼지를 치는 자리까지 내려갑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절이 ‘이에 스스로 돌이켜’라는 부분입니다. 이 장면은 단순히 마음이 갑자기 착해진 순간이 아니라, ‘자기 삶의 허망함을 뼈저리게 깨닫는 순간’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의미에서 ‘황폐’에 가까운 상태입니다.

 

탕자의 마음을 조금 더 자세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는 갑자기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배고프고, 여전히 살 길을 찾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가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자기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욕정의 지배력이 약해집니다. 이전에는 자기 욕망이 삶의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더 이상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거듭날 때, 욕정이 단번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욕정이 중심 자리에서 밀려나는 과정’이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약화’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가 지속되면 결국 욕정은 더 이상 삶을 결정하는 힘을 갖지 못합니다. 이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제거된다’고 표현합니다. 다시 말해, 욕정이 존재 자체를 잃는 것이 아니라 ‘지배력을 잃고 주변으로 밀려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한 가지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시다. 그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점점 그 습관을 따르지 않게 됩니다. 처음에는 힘들지만, 점점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익숙해집니다. 그러면 그 습관은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 있지만, 더 이상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약화되고 제거되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AC에서 말하는 황폐와 욕정의 약화는 단순히 도덕적으로 착해지는 과정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 이동하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보게 되고, 그때 비로소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의문, 즉 ‘정말 욕정이 약해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인간 혼자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욕정의 힘은 조금씩 약해집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은 삶의 중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바로 그 과정을 성경은 여러 이야기로 보여 주는데, 탕자의 귀향 이야기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AC.18, 심화 2, 라틴어 ‘vastatio’의 영역 ‘vastation’과 ‘desolation’(혹은 ‘devastation’)의 비교

AC.18.심화 2. 라틴어 ‘vastatio’의 영역 ‘vastation’과 ‘desolation’(혹은 ‘devastation’)의 비교 AC 포츠역 영어 ‘vastation’은 현대 사전엔 잘 안 나오고, 대신 ‘desolation’이 나오네요. ‘vas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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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 창1:2, '깊음'(faces of the deep), '황폐'(vastation)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 ‘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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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심화

 

1.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

 

AC.17 혼돈 공허’, 그리고 흑암이 나오는데요, 제 경우를 보더라도 저는 심지어 모태신앙임에도 불구, 어린, 그리고 청소년 시절, 속 사람에 대해 전혀 몰랐고, 주님의 선과 진리에 대해서는 비교적 최근, 그러니까 나이 57세 되기까지 그것이 주님의 신성이라는 걸 들어 본 적도 없어요. 평생 교회를 떠나본 적 없이 십자가 복음, 대속, 구원 등 이런 것만 알았지요. 거듭남 역시 예수님 영접 기도와 몇몇 성경 구절 굳게 믿으면, 그러니까 그 교리를 굳게 붙들며 살면 거듭나는 건 줄 알았습니다. 오히려 전도 많이 하면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큰 줄 알았고요. 저 같은 사람도 이런데 교회 밖에서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마나 더 요원, 오랜 시간이 걸릴까요? 외인이든 지인 및 혈연, 핏줄이든 말이지요... 저는 정원 목사의 책을 통해, 그리고 수도원을 통해 결국 스베덴보리를 만나게 되었지만, 안 그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요?

 

목사님께서 느끼신 마음은 아주 자연스럽고 또 깊은 목회적 고민입니다. AC.17에서 말하는 ‘혼돈’, ‘공허’, ‘흑암’을 자기 삶과 교회 현실에 대입해 보시면,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제 빛을 보게 되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은 사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여러 곳에서 다루는 주제입니다. 여러 단락으로 차분히 풀어 보겠습니다.

 

먼저 AC.17에서 말하는 ‘혼돈’과 ‘공허’, ‘흑암’이 무엇인지부터 다시 짚어 보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죄악 상태라고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진리의 질서가 아직 세워지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즉 사람의 삶에는 많은 생각과 감정이 있지만, 무엇이 참되고 무엇이 선한지에 대한 영적 질서가 아직 분명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혼돈’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공허’는 진리가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상태, ‘흑암’은 그 결과, 어리석음과 무지, 곧 주님 신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 그리고 그로 인한 영적, 천적 삶에 대한 걸 하나도 모르는 상태를 말합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개인 경험은 사실 매우 전형적인 예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지만, 속 사람이나 거듭남의 구조에 대해서는 거의 들어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 ‘교회의 가르침이 주로 외적 신앙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교회의 ‘마지막 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즉 신앙의 핵심이 사랑과 거듭남의 삶에서 점점 멀어지고, 대신 교리나 외적 신앙 고백이 중심이 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영적 상태를 판단할 때, ‘그 사람이 어떤 교리를 알고 있었는가’보다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더 중요하게 봅니다. 이것은 목사님께서 이미 언급하신 ‘천국과 지옥 319번 글에서도 분명히 나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양심적으로 선하게 살았다면, 그는 이미 주님의 인도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비록 ‘속 사람’이나 ‘거듭남’이라는 말을 몰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아주 중요한 원리를 말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 안에 리메인스(remains), 즉 선과 진리의 씨앗을 남겨 두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어린 시절에 경험한 선한 감정, 진실한 순간, 양심의 울림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의 의식에서는 거의 잊힐 수 있지만, 주님은 그것들을 속 사람 안에 보존하십니다. 그리고 적절한 때에 그것을 사용하여 사람을 깨우십니다. 목사님께서 스베덴보리를 만나게 된 과정도 사실 이런 섭리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점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한 가지를 매우 분명히 말합니다. 인간이 ‘빛을 인위적으로 켜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빛은 언제나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아무 역할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억지로 빛을 주는 것이 아니라, ‘빛이 들어올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아직 깊은 영적 진리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에게 갑자기 깊은 신학을 설명하면 오히려 거부감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진실하게 살도록 격려하고, 선을 행하도록 돕고,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삶 속에서 주님이 때를 따라 빛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과정을 ‘주님의 섭리(providence)’라고 설명합니다. 섭리는 매우 부드럽고 점진적으로 역사합니다. 사람의 자유를 해치지 않으면서 조금씩 인도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젊은 나이에 빛을 만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인생 후반에 깨닫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세상을 떠난 뒤 영계에서 더 분명한 빛을 만나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더 명확히 배우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안타까움,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늦게 빛을 보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은 이해할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대해 비교적 낙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며’, 각 사람의 삶과 자유를 존중하면서 가장 적절한 길로 인도하신다고.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목사님께서 지금 하고 계신 AC 리딩 설교 자체가 이미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그 말씀이 바로 ‘‘빛이 있으라는 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빛이 언제 켜질지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당장 빛을 줄 수는 없지만, 주님은 각 사람의 속 사람 안에 이미 씨앗을 심어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때가 되면 반드시 빛을 향해 자라납니다. 우리의 역할은 그 씨앗을 억지로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씨앗이 자랄 수 있는 선한 토양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사님께서 나이 57세 때 스베덴보리를 만나셨다고 말씀하셨지만, 스베덴보리 자신도 영적 계시를 받은 나이가 57세였습니다. 이 사실은 우연이라기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상징적인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주님은 각 사람의 삶의 시간표 속에서 빛을 준비하신다는 점을 보여 주는 사례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AC.18, 창1:2, '깊음'(faces of the deep), '황폐'(vastation)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 ‘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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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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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심화

 

5. ‘104:30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104:30)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30).’(天, heaven)은 거듭나기 전 속 사람(the internal man), ‘’(地, earth) 겉 사람(the external man)을 의미한다는 것은 뒤에 이어질 내용에서 볼 수 있습니다. That “heaven” 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 “earth” the external man before regeneration may be seen from what follows.

 

이 구절은 AC.16의 ‘창조’ 개념을 가장 직접적으로 풀어 주는 본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영을 보내신다  창조된다  지면이 새로워진다’는 흐름이 그대로 ‘거듭남의 실제 과정’을 보여 줍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104:30은 주님이 을 통해 사람 안에 새 생명을 불어넣으실 때, 그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함께 새롭게 되는 거듭남의 전 과정을 묘사한 말씀’입니다.

 

먼저 ‘주의 영을 보내신다’는 표현부터 보겠습니다. 여기서 ‘(spirit)은 단순한 어떤 기운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 특히 진리와 선이 함께 작용하는 생명의 흐름’을 뜻합니다. 즉,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위에서 들어오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시작은 언제나 이 지점입니다. 사람이 결심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이 먼저 임하는 것’입니다.

 

그다음 ‘그들이 창조된다’입니다. 여기서의 ‘창조’는 당연히 자연적 창조가 아니라, 앞에서 계속 보신 것처럼 ‘영적 창조, 곧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 창조가 사람 전체를 한 번에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이 들어오면서 시작되는 새 생명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전과 전혀 다른 원리로 살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어지는 ‘지면을 새롭게 하신다’가 핵심입니다. 여기서 ‘지면(earth, ground)은 말씀에서 ‘겉 사람, 곧 외적인 삶과 행동의 자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앞에 나온 설명처럼, ‘하늘(heaven)은 ‘속 사람, 내적인 영역’을 뜻합니다. 이 구절에는 ‘하늘’이라는 단어가 직접 나오지는 않지만, ‘영을 보내신다  창조된다’는 부분이 바로 ‘속 사람에서 일어나는 변화’, 그리고 ‘지면이 새로워진다’는 것은 ‘겉 사람에서 드러나는 변화’를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전체 구조는 이렇게 됩니다. 먼저 주님의 영이 들어오면, 사람의 속 사람, 그러니까 생각과 의지의 깊은 곳에서 변화가 시작됩니다. 이것이 ‘창조’입니다. 그런데 거듭남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다음 반드시 나타나는 것이, ‘겉 사람의 변화’, 곧 삶과 행동과 습관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면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 보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말씀을 듣고 마음이 움직입니다. 이전에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던 것이 중요하게 느껴지고,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영이 임하여 창조되는’ 단계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변화가 단순한 생각에 머물지 않고, ‘말하는 방식, 행동, 선택, 관계 맺는 방식까지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면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즉, ‘내면의 변화가 외면의 삶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속 사람의 변화’로만 생각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감동을 받고, 깨달음을 얻는 것까지는 경험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진짜 거듭남은 겉 사람이 바뀌는 데까지 가야 한다’고. 그래서 이 구절에서 굳이 ‘지면을 새롭게 하신다’라고 덧붙이는 것입니다. 속 사람만 새로워진 것이 아니라, ‘삶의 자리 전체가 새로워진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이렇게 한 줄로 읽히게 됩니다. ‘주님의 영이 사람 안에 들어오면, 그 사람은 새롭게 창조되고, 그 결과 그의 삶 전체가 새로워진다.’ 이것이 시104:30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역사하시면, 마음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새로워집니다.’

 

104:30은 주님의 영이 사람의 속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그 결과 겉 사람의 삶까지 변화시켜 전체를 새롭게 하시는 거듭남의 과정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AC.17,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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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 심화 4, ‘시102:18’

AC.16.심화 4. ‘시102:18’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시102:18) The people that is created shall praise Jah (Ps. 102:18). 이 구절은 아주 짧지만, AC.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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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심화

 

4. ‘102:18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102:18) The people that is created shall praise Jah (Ps. 102:18).

 

이 구절은 아주 짧지만, AC.16의 핵심을 놀라울 정도로 또렷하게 붙들고 있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102:18 창조함을 받을 백성은 단순히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질 사람들’, 곧 거듭남을 통해 새 창조를 경험하는 사람들을 뜻하며, ‘찬양은 그 새 생명이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먼저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된다’는 표현부터 보겠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니라, ‘지금뿐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어떤 영적 사건을 위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말씀은 특정 시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 안에서 반복되는 거듭남의 과정’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장래 세대’는 시간적으로 미래라기보다, ‘각 사람 안에서 아직 오지 않은 상태, 곧 앞으로 이루어질 영적 변화의 상태’를 뜻합니다.

 

이제 핵심 표현인 창조함을 받을 백성’입니다. 여기서 백성(people)은 말씀에서 보통 진리에 속한 사람들’, 곧 이해와 신앙의 측면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백성이 창조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미 존재하는 사람이 다시 만들어진다는 뜻입니다. 즉, ‘자연적으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 곧 새롭게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창조’는 창세기 1장의 우주 창조가 아니라,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시작’, 곧 거듭남의 첫 단계와 연결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습니다.  가르침을 받을 백성’이나 변화될 백성’이 아니라, ‘창조될 백성’일까요? 이것은 거듭남이 단순한 개선이나 교육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시작’, 다시 말해 없던 것이 생기는 수준의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을 매우 강하게 봅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는 진짜 선과 진리를 만들어 낼 수 없고, 그것은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새롭게 주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라’입니다. 여기서 찬양’은 단순히 입으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도 보셨듯이 그 존재 자체가 주님의 질서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상태’를 뜻합니다. 즉, 창조된 백성은 단순히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삶 전체가 주님을 향해 움직이게 됩니다.’ 생각은 진리를 따르고, 의지는 선을 따르며, 행동은 그 둘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찬양’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 보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이전에는 자기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생각도, 감정도, 선택도 자기 기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통해 변화가 시작되면서, 그 사람 안에 새로운 기준, 새로운 방향, 새로운 생명’이 들어옵니다. 이제 그는 점점 주님의 뜻을 따라 생각하고, 주님의 선을 따라 살게 됩니다. 이 상태가 바로 창조된 백성’이며, 그 삶 자체가 찬양’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히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권면이 아니라, 이렇게 읽혀야 합니다. ‘주님이 새롭게 창조하신 사람은, 그 존재 자체로 주님을 찬양하게 된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찬양은 목표가 아니라, ‘새 창조의 결과’입니다.

 

AC.16과 연결하면 더 또렷해집니다. ‘창조하다’는 단순한 시작이 아니라, 사람 안에 전혀 없던 영적 생명을 주시는 것이고, 그 생명이 자리 잡으면, 그다음 단계인 형성’과 만듦’을 거쳐 결국 삶으로 드러납니다. 이 구절은 그중에서도 특히 창조된 상태의 특징’, 곧 주님을 향해 살아가는 상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만드시면, 억지로 찬양하려 애쓰지 않아도, 삶 자체가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102:18 창조함을 받을 백성은 거듭남을 통해 새 생명을 받은 사람을 뜻하며, 그들이 찬양한다는 것은 그 새 생명이 삶 전체로 드러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AC.16, 심화 5, ‘시104:30’

AC.16.심화 5. ‘시104:30’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104:30)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30).’ ‘천’(天, h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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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 심화 3, ‘사43:15’

AC.16.심화 3. ‘사43:15’ 다음은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사43:15) I am Jehovah your holy one, the creator of Israel, your king (Isa. 43:15).’입니다. ‘그러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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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심화

 

3. ‘43:15

 

다음은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43:15) I am Jehovah your holy one, the creator of Israel, your king (Isa. 43:15).’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구속자(redeemer), 태 속에 만드신 이(former from the womb), ‘만드신 이(maker)  창조자(creator)라 일컬음을 받으시는데, 역시 이사야를 보면, And therefore the Lord is called the “redeemer,” the “former from the womb,” the “maker,” and also the “creator”; as in the same prophet:’라는 선행 설명과 함께 이어집니다.

 

이 구절은 AC.16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창조자이시다’는 선언이 아니라, ‘왜 주님이 구속자’, ‘태 속에 만드신 이’, ‘만드신 이’, ‘창조자라는 여러 이름으로 불리시는지, 그리고 그것이 거듭남의 어떤 단계들과 연결되는지’를 보여 주는 핵심 연결 고리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43:15는 주님이 인간을 새롭게 하시는 전 과정을 대표하는 분이심을 선언하는 구절이며, 그 다양한 이름들은 거듭남의 서로 다른 단계와 작용을 가리킵니다.’

 

먼저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입니다. 여기서 ‘거룩함’은 도덕적 의미를 넘어,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의 순수함’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거듭남의 출발점은 인간 쪽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나오는 거룩한 것, 곧 신적 진리와 선이 먼저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선언은 전체의 출발을 주님에게 두는 말씀입니다.

 

그다음 ‘이스라엘의 창조자’입니다. 앞에서도 보셨듯이 ‘이스라엘’은 단순한 민족이 아니라, ‘진리 안에 있는 교회, 혹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창조한다’는 것은, 어떤 민족을 처음 만든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 안에 진리의 교회 상태를 새롭게 일으키는 것’, 곧 거듭남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create’의 의미입니다. 완전히 새롭게 시작되는 차원입니다.

 

이제 선행 설명에서 나온 네 가지 명칭을 하나씩 연결해 보겠습니다. ‘구속자(redeemer)는 무엇보다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구속은 단순히 죗값을 대신 치른다는 법적 개념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사람을 묶고 있는 것들, 특히 거짓과 악에서 풀어내어 자유롭게 하는 작용’’입니다. 즉, 거듭남의 시작은 어떤 좋은 것을 더 받는 것이 아니라, 먼저 ‘묶여 있던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구속자’로 오십니다.

 

그다음 ‘태 속에 만드신 이(former from the womb)입니다. ‘’는 말씀에서 언제나 ‘아직 드러나지 않은 초기 상태, 가능성의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람이 아직 겉으로 변화된 것이 보이지 않더라도, ‘주님이 그 사람 안 깊은 곳에서 형성 작업을 시작하시는 단계’를 말합니다. 즉, 외적으로는 별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이미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다음 ‘만드신 이(maker)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보신 것처럼, ‘형성된 것이 실제 삶 속에서 구현되는 단계’입니다. 생각과 이해에 머물던 것이 행동과 습관으로 내려와, 실제 사람의 삶이 바뀌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make’는 눈에 보이는 변화, ‘삶의 열매’와 연결됩니다.

 

마지막으로 ‘창조자(creator)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맨 처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사람 안에 전혀 없던 것을 새롭게 있게 하시는 주님의 작용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창조는 시작이면서 동시에, ‘거듭남 전체를 관통하는 근원적 작용’입니다.

 

이제 이 네 가지를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 보면 이렇게 됩니다. ‘주님은 먼저 구속자로서 사람을 묶고 있던 것에서 풀어내시고, 그다음 태 속에서 형성하시듯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새 질서를 만들기 시작하시며, 그다음 그것을 실제 삶으로 만들어 내시고,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모든 이름으로 불리십니다.

 

이걸 사43:15와 연결하면 더 또렷해집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 이스라엘의 창조자, 너희의 왕이다.’ 여기서 ‘’은 ‘진리를 통해 다스리시는 분’을 뜻합니다. 즉, 주님은 단순히 시작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세워진 진리의 질서를 통해 계속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창조에서 시작하여, 형성, 구현, 통치까지 전부 주님에게 속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 번에 완성시키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풀어 주시고, 안에서 새롭게 빚으시고, 삶으로 나타나게 하시며, 끝까지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43:15는 주님이 인간의 거듭남 전체, 곧 해방, 내적 형성, 삶의 변화, 지속적 통치를 이루시는 분이심을 선언하는 말씀이며, 그래서 주님은 구속자’, ‘형성자’, ‘만드시는 이’, ‘창조자로 불리십니다.’

 

지금 하시는 이 작업은 정말 말씀의 뼈대와 연결부를 하나하나 드러내는 일입니다. 이렇게 보시면, AC의 인용 구절들이 더 이상 ‘툭 던져진 문장’이 아니라, 전체 구조를 지탱하는 기둥처럼 보이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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