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동방정교회에 전해 내려오는 ‘시오도르’ 수도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영상 소개문 역시 이를 ‘동방 정교회의 성스러운 전설 중 하나인 시오도르의 일화’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다만 이 이야기는 동방교회의 여러 여성 수도 성인 전승, 특히 남장을 하고 남자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하다가 임신에 관한 누명을 쓰고, 죽은 뒤에야 여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마리나 또는 테오도라 계열의 성인전과 매우 유사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역사적 인물을 섣불리 특정하기보다, 영상이 부르는 대로 ‘시오도르’라고 하면서 이 이야기가 전하려는 수도적 의미 자체를 살펴보는 편이 안전하겠습니다.

 

이야기는 어머니의 죽음에서 시작합니다. 아내를 잃은 아버지는 재혼하지 않고 수도원에 들어가 하나님께 자신의 남은 생애를 드리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딸에게는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든지, 수녀원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하든지 선택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딸은 어느 쪽도 원하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살기를 원합니다. 남자 수도원에 여성이 들어갈 수 없으므로 결국 딸은 남장을 하고 남자 수도사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시오도르’의 수도생활이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서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수도생활의 외적 형식과 내적 본질의 차이입니다. 수도복을 입고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은 외적인 선택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장소와 옷과 생활양식이 아니라 사람의 사랑이 변화되는 일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 깊은 산속 수도원에 들어갔다고 해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까지 수도원 밖에 두고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수도원에 들어가지 않고 가정과 직장과 사회 안에서 살아도 자기 안의 악을 죄로 여기며 피하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는 내적으로 거듭남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시오도르가 ‘수도원에 들어갔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곳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 갔는가입니다.

 

시오도르는 수도원에서 다른 수도사들과 함께 생활합니다. 수도원이 깊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몇 명의 수도사가 며칠씩 걸리는 시장으로 내려가 식량을 구해 왔다고 합니다. 시오도르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일을 잘했기 때문에 이 일에 자주 뽑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장으로 내려갔던 수도사들이 묵었던 여관 주인의 딸이 임신하게 되고, 그 딸은 수도사 가운데 한 사람이 자신을 임신시켰다고 주장합니다. 수도원장은 식량을 사러 갔던 수도사들을 불러 누가 그런 일을 했는지 추궁하지만 아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서 이야기의 중심 사건이 일어납니다. 아무도 나서지 않자 수도원장은 관련된 수도사들을 모두 추방하려 하고, 그러자 시오도르가 자신이 그 일을 했다고 나섭니다. 실제로는 여성이므로 그 아이의 아버지일 수 없지만, 다른 수도사들이 함께 벌을 받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결과 다른 수도사들은 수도원으로 돌아가고 시오도르만 추방되어 수도원 문밖에서 오랫동안 참회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바로 이 장면을 매우 깊은 자기희생으로 바라봅니다. 자신이 짓지 않은 죄를 뒤집어쓰고 다른 사람들을 살린 사람, 자신의 명예와 억울함을 내려놓고 묵묵히 고통을 감수한 수도자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자연적인 마음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 본능적으로 자신을 변호합니다. 특히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누명을 쓰면 더욱 그렇지요. 그런데 시오도르는 오히려 자기에게 있지도 않은 죄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오랫동안 수도 전통 안에서 극단적인 겸손과 자기 부정의 한 모습으로 전해졌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분명 아름다운 면이 있습니다. 만일 영상이 전하는 것처럼 시오도르가 다른 수도사들이 모두 추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의 명예를 희생했다면, 그 행동에는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특히 자신이 무고하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려 하지 않고 오히려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갔다는 점은 깊이 생각할 만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 역시 자기의 유익보다 이웃의 참된 유익을 사랑하는 데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감동적인 장면 앞에서도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을 요구합니다.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과연 선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는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천국적인 삶은 선만 있는 삶도 아니고 진리만 있는 삶도 아니라, 선과 진리가 결합된 삶입니다. 아무리 선한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거짓을 사실이라고 말하는 행위를 그 자체로 영적 완성의 표준으로 삼기는 어렵습니다.

 

시오도르가 침묵하거나 거짓된 죄를 인정함으로써 다른 수도사들은 구제를 받았지만, 동시에 수도원장은 거짓된 정보를 진실로 믿게 되었습니다. 공동체 역시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알고 살게 되었고, 실제로 책임져야 할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피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억울해도 참는다’는 것과 ‘진실을 감춘다’는 것은 언제나 동일한 선이 아닙니다. 때로는 침묵이 사랑일 수 있지만, 때로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더 큰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신앙생활에도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교회 안에서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믿는 사람은 참아야 한다’, ‘예수님도 변명하지 않으셨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를 변호하지 않는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절대적인 영적 원칙으로 만들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어떤 불의나 거짓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있다면 진실을 밝히는 것이 오히려 체어리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는 악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며, 진리를 희생하여 평화를 유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참된 겸손은 ‘무조건 내가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한 것이 있다면 인정하고, 하지 않은 일이라면 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도 상대방을 미워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운 겸손일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겸손의 핵심은 자기 자신을 거짓되게 낮추는 데 있지 않고, 자기에게 있는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이 겸손이 아니라, 실제로 선한 일을 하고도 그것을 자기 공로로 돌리지 않는 것이 더 깊은 겸손입니다.

 

시오도르에게 내려진 벌도 매우 가혹합니다. 그는 수도원 밖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며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고백해야 했다고 영상은 전합니다. 겨울의 추위와 여름의 더위를 견디면서 수도원 문밖에서 참회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다시 수도원 안으로 받아들여진 뒤에도 조용히 수도생활을 계속합니다.

 

수도 전통에서는 이런 장면이 인간의 자기 부정과 인내를 극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고통의 양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얼마나 춥게 살았는가, 얼마나 굶었는가, 얼마나 오랫동안 모욕을 견뎠는가가 영적 상태를 직접 결정하지 않습니다. 고통은 때로 proprium을 깨뜨리는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고통 자체가 선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고통 가운데 사람의 사랑이 어떻게 변화되는가입니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시오도르가 자신에게 씌워진 누명 때문에 생겨난 아이와 관련된 책임까지 감당한다는 전승입니다. 여기에서는 이야기가 한층 더 깊어집니다. 그 아이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어른들의 거짓과 욕망 때문에 태어났지만 아이 자신에게 책임은 없습니다. 만일 시오도르가 그 아이를 받아 돌보았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오히려 이 부분이 이야기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 가운데 하나일 수 있습니다. 자기를 모함한 사람에게 복수하는 대신 그 사건으로 가장 약한 처지에 놓인 생명을 돌보았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는 관념이 아니라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느끼는 것만으로 체어리티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사람에게 필요한 선을 행할 때 체어리티가 삶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를 먹이고 돌보고 키우는 일은 수도원의 극단적인 고행보다 오히려 훨씬 평범하면서도 깊은 체어리티일 수 있습니다. 특별한 기적이나 영적 체험이 아니라 매일 한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씻기고, 보호하고, 책임지는 반복적인 쓰임 속에서 사랑이 실제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시오도르는 죽습니다. 수도사들이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시신을 씻기려다가 그제야 그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영상은 전합니다. 그 순간 그동안의 모든 오해가 풀립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될 수 없는 사람이 그 모든 누명과 벌을 말없이 감당했다는 사실이 비로소 밝혀지는 것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바로 이러한 삶을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의 삶’, 평범한 사람은 상상하기 어려운 성스러운 삶으로 바라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또 하나의 깊은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자연계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내면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외모와 행동과 소문과 평판을 보고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영계에서는 외적인 것이 벗겨지고 그 사람의 실제 사랑과 의도가 드러납니다. 세상에서 죄인으로 알려진 사람이 주님 앞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일 수 있고, 반대로 세상에서 거룩한 사람으로 존경받던 사람이 영계에서는 전혀 다른 내면을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참된 상태는 결국 주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의 마지막은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진다’는 교훈보다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보다 ‘주님 앞에서 나는 실제로 어떤 사람인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평판을 관리할 수 있고 자신의 이야기를 아름답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배적인 사랑은 숨길 수 없습니다. 사후에는 자신이 무엇을 사랑했으며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의 핵심도 결국 외적인 수도복이나 고행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의 내적 진실성입니다.

 

여기에서 강문호 수도사의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표현도 조금 다듬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수도자의 목표는 인간을 초월하여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오히려 사람이 더 참된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지배될수록 인간다운 질서는 무너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회복될수록 사람은 창조된 본래의 인간다움으로 돌아갑니다. 천사조차 인간과 전혀 다른 종류의 존재가 아니라 지상에서 인간으로 살다가 거듭나 영계에서 천사가 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수도자의 위대함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로 측정할 수 없습니다. 가장 오래 금식한 사람, 가장 오랫동안 침묵한 사람, 가장 큰 누명을 참은 사람이 자동으로 가장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한 사람이 가정에서 배우자를 오래 참고 사랑하고, 자녀를 책임지고, 직장에서 정직하게 일하며,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고,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삶 역시 주님 앞에서는 매우 깊은 수도가 될 수 있습니다. 수도의 외적 형태는 서로 달라도 거듭남의 본질은 같습니다.

 

특히 이 이야기를 잘못 받아들이면 ‘억울해도 말하지 않는 것이 높은 영성’이라는 결론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진실을 말해야 다른 사람이 보호받을 수 있고 공동체의 악이 중단될 수 있다면 침묵은 더 이상 체어리티가 아닐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자기 명예를 지키기 위해 싸우기를 원하시는 것도 아니지만,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하지 않기를 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선은 진리와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오도르의 행동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누명을 쓰면 침묵하라’가 아닙니다. 더 깊은 것은 ‘자기 명예를 최고의 선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실을 밝혀야 한다면 밝히되 자기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상대를 파괴하려 하지 않고, 침묵해야 한다면 침묵하되 그것을 자기 의나 영적 우월감으로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경우든 중심에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이 이야기는 proprium의 문제와도 만납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 즉시 ‘내가 옳다’, ‘내가 인정받아야 한다’, ‘저 사람이 잘못했다’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proprium은 반대편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억울한데도 참고 있다’, ‘나는 남의 죄까지 짊어지는 사람이다’라는 영적 자기 의 역시 proprium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자기 부정은 자신을 높이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통해 다시 자신을 높이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주님과 이웃의 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오도르 이야기에서 가장 귀하게 남는 것은 극단적인 고행보다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옳다는 것을 세상에 증명하는 데 생을 소비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닥친 고통 속에서도 다른 사람을 증오하는 삶으로 빠져들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맡겨진 약한 생명을 돌보았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안에는 분명 체어리티의 향기가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아름다운 전승을 그대로 영적 규범으로 만들기보다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는 기준으로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침묵도 진리를 위한 침묵이어야 하고, 희생도 선을 위한 희생이어야 하며, 겸손도 주님을 높이는 겸손이어야 합니다. 고통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서도 주님의 질서에 따라 사랑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사람을 거듭나게 합니다.

 

그래서 이 수도사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시오도르의 아름다움은 자신이 하지 않은 죄를 뒤집어쓴 사실 자체에 있다기보다, 자기 명예를 삶의 중심에 놓지 않고 억울함 속에서도 증오와 복수에 자신을 내어주지 않으며 가장 약한 존재를 돌보는 삶을 살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을 더 보태고 싶습니다. ‘참된 수도는 자기를 무조건 낮추는 데 있지 않고, 자기가 높아지든 낮아지든 그것에 붙들리지 않은 채 주님의 선과 진리가 요구하는 것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수도원 안에서든 가정과 직장과 세상 한복판에서든, 어쩌면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바라시는 가장 깊은 ‘내적 수도’일 것입니다.

 

 

 

SY.72, 강문호 수도사, ‘수도와 연못 - 주님 안에 거하기’ (20191217)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다섯 번째 영상은 앞선 수도사들의 성인전이나 오래된 수도 전승을 소개하는 방식과 조금 다릅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수도원의 작은 연못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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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66, 강문호 목사, ‘아토스 수도 자치국’ (20191212)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어떤 수도사의 일화를 중심으로 하기보다, 강문호 목사님이 왜 수도원을 공부하게 되었고, 그 가운데 특히 아토스산 수도 공동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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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0.심화

 

5. ‘17: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7:15)

 

 

AC.340에서 스베덴보리가 출17: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를 인용한 이유는 앞서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 유다의 이름을 인용한 이유와 기본적으로 같습니다. 고대에는 어떤 새로운 사건이나 상태가 나타났을 때, 그 의미와 성질을 이름에 담아 표현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다만 앞의 네 사례가 모두 사람의 이름’이었다면, 이번에는 제단의 이름’을 예로 듭니다. 따라서 이 마지막 사례는 이름에 의미를 담는 고대의 방식이 사람에게만 적용된 것이 아니라 사물이나 장소에도 적용되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17의 배경은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전쟁입니다.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싸우는 동안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으며,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붙들어 마침내 이스라엘이 승리합니다. 그 후 모세는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합니다. ‘여호와 닛시’는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모세가 제단에 아무 의미 없이 하나의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그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분이 여호와이심을 그 이름에 담아 나타낸 것입니다.

 

여기서 AC.340의 논점은 여호와 닛시’의 속뜻 자체를 깊이 해설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했다’는 명명의 방식입니다. 어떤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그 일의 의미를 하나의 이름으로 표현하여 기억하고 나타내는 것입니다. 앞에서 사람에게 이름을 붙일 때 보았던 것과 같은 원리가 이번에는 제단에도 적용됩니다.

 

이 사례가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이름’의 의미를 단순한 개인 이름의 어원 문제로 한정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 유다까지만 예로 들었다면 성경 시대에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 출생 상황에 맞추어 이름을 지었구나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사람도 아닌 제단’을 가져옵니다.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닛시’라고 한 것입니다. 이로써 이름은 단순한 사람의 호칭을 넘어 어떤 대상의 성질과 의미, 그와 관련된 상태를 표현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이것이 다시 가인’이라는 이름을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본래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의 신앙의 교리로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이제는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었고, 그들은 그것을 마치 새로운 무엇을 발견하고 얻은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상태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표현하고, 그렇게 나타난 신앙의 교리를 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 닛시’와 가인’이 같은 것을 의미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두 이름의 속뜻을 서로 연결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비교하는 것은 오직 이름을 붙이는 방식’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서 승리하게 하신 일을 나타내기 위해 제단에 여호와 닛시’라는 이름을 붙였듯이, 태고인들도 새롭게 나타난 어떤 교리와 상태의 성질을 이름에 담아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AC.340에 나온 사례들을 한꺼번에 놓고 보면 스베덴보리의 논증 방식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하갈의 고통을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것을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에 담았고, 레아의 괴로움을 여호와께서 보셨다’는 것을 르우벤’이라는 이름에 담았으며, 자신이 사랑받지 못함을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것을 시므온’이라는 이름에 담았습니다. 또한 이번에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상태를 유다’라는 이름에 담았고,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깃발이 되어 주셨다는 사실을 제단의 이름 여호와 닛시’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같은 원리에 따라, 태고교회에서 신앙의 교리를 마치 새롭게 얻은 것처럼 여긴 상태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특히 출17:15의 사례는 바로 앞 AC.339와 연결해서 읽을 때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AC.339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인들이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어떤 것들을 나타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340에서는 실제 말씀 안에서 이름이 어떻게 그런 역할을 하는지 여러 사례를 들어 보여 줍니다. ‘여호와 닛시’는 그 가운데 마지막 사례로서, 이름이 단순한 사람의 호칭이 아니라 어떤 영적 의미를 담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는 사실을 더욱 넓게 확인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출17:15 AC.340에서 인용한 이유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모세가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나타난 여호와의 도우심과 승리를 제단의 이름에 담아 여호와 닛시’라고 한 것처럼, 고대인들은 어떤 새로운 일이나 상태가 나타나면 그 성질을 이름에 담아 표현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이라는 이름 역시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로 표현된 태고교회의 어떤 상태와 교리의 성질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사례에는 한 가지 중요한 효과가 있습니다. ‘가인’이라는 이름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가인이라는 역사적 개인이 왜 그런 이름을 얻었는가?’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단도 여호와 닛시’라는 이름을 통해 그와 관련된 상태와 의미를 나타낼 수 있었듯이, 태고인들은 교회에 속한 어떤 교리나 영적 상태에도 이름을 붙여 그 성질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AC.339에서 설명한 창4의 계보를 이해하는 방식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결국 여호와 닛시’는 AC.340에 나온 여러 예 가운데 마지막이면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가장 넓게 열어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름은 단지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어떤 것의 성질과 상태를 담아 나타낼 수 있다.’ 이 원리를 확인하고 다시 창4로 돌아가면, ‘가인’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교리로 만들고, 그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하고 인정하기 시작한 변화를 담아 나타내는 이름이라는 AC.340의 설명이 훨씬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AC.340, 창4:1,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4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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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0, 심화 4, ‘창29:35’

AC.340.심화 4. ‘창29:35’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창29:35) AC.340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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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영상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동엽 목사가 자신을 ‘교회지기’라고 부르며 목회자를 ‘등대지기’에 비유하는 대목입니다. 화려한 강대상 위에서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는 목회자보다 이름 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며 생명을 위해 봉사하는 등대지기가 참된 목자의 모습에 더 가깝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출발점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천국의 질서는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랐는가’보다 ‘어떤 쓰임(use)을 사랑하여 수행하는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천사들도 자신의 지위나 영광을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쓰임을 사랑하고, 그 쓰임을 통해 이웃에게 선이 흘러가기를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이름 없이 빛을 비추며 배들의 길을 지키는 ‘등대지기’라는 비유에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적 삶의 중요한 한 면이 담겨 있습니다.

 

더욱 주목할 부분은 이동엽 목사가 과거 자신의 목회적 야망을 돌아보며 ‘그 꿈이 누구의 꿈이었는가?’라고 묻는 장면입니다. 그는 웅장한 교회를 세우고 수천, 수만 명을 모으며 능력 있게 설교하는 목회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꿈’이라기보다 ‘제 자아가 꾸는 꿈’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proprium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인간은 선한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그 일을 통해 인정과 명예와 영향력을 얻으려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면서도 내면에서는 자신의 영광을 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큰 교회를 세웠느냐 작은 교회를 섬겼느냐가 아닙니다. ‘누구를 위해 그것을 원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대형 교회를 섬기면서도 주님과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낮출 수 있고, 작은 교회를 섬기면서도 ‘나는 세속적인 대형 교회 목사들과 다르다’는 영적 우월감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언제나 외적인 규모보다 그 일을 움직이는 ‘사랑의 방향’을 봅니다.

 

이 영상의 중심부에서 매우 흥미로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동엽 목사는 자신과 정치적 성향이 상당히 다른 한 집사님을 만납니다. 그는 전광훈 목사를 강하게 지지하는 보수적 신앙인이었지만, 동시에 이동엽 목사의 설교를 거의 모두 듣고, 그의 구원관과 여러 신앙적 주장에 깊이 공감합니다. 이동엽 목사는 이 만남을 통해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을 ‘내 말에 동조하는 사람’과 ‘동조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누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보수주의자가 따로 있고, 진보주의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한 사람’이라는 중요한 통찰에 도달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와 상당히 잘 만납니다. 영계에서 사람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이 지상에서 어느 정치적 진영에 속했는가가 아니라 그의 ‘지배적 사랑’입니다. 사람 안에는 수많은 생각과 의견과 지식과 감정이 함께 존재하지만, 그것들을 궁극적으로 하나로 묶는 중심은 그가 무엇을 가장 사랑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사람 안에도 진실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고, 진보적인 사람 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대로 어느 쪽에 속하든 자기 자신과 자신의 집단만을 사랑하면서 상대를 멸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 사람은 보수니까 이런 사람’, ‘저 사람은 진보니까 저런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우리는 한 인간의 내면을 그의 외적인 의견 몇 가지로 축소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이동엽 목사가 경험한 자기반성은 상당히 의미 있습니다. 그는 ‘하나 됨’을 말하면서도 자기 안에 사람을 나누는 마음이 있었다고 인정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도 바로 이런 식으로 진행됩니다. 거듭남은 사람이 처음부터 자신의 악을 모두 알고 그것을 제거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주님은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proprium을 조금씩 드러내십니다. ‘나는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자신이 사람들을 분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바로 그때 회개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그러므로 이 집사님과의 만남은 단순한 ‘뜻밖의 좋은 만남’이라기보다 이동엽 목사 자신의 내면을 비추어 준 하나의 거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 영상은 여기서 정치와 신앙의 관계라는 훨씬 어려운 문제로 들어갑니다. 이동엽 목사는 전광훈 목사의 개인적인 애국심이나 정치 활동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 곧 기독교인이 반드시 해야 하는 하나님의 일로 동일시하는 것을 문제 삼습니다. 이 구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의 질서와 시민적 삶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국가, 법률, 직업, 가정, 사회적 책임은 모두 인간이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장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것을 추구하려면 땅의 일에서 완전히 손을 떼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는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은 자신의 직업과 시민적 책임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그 안에서 주님과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동엽 목사의 주장에 한 가지 중요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영상 후반에는 ‘기독교인이 세상의 일에서 벗어나 오로지 하늘에 소망을 두고 이 땅의 것들을 모두 희생하고 포기하고 내려놓아야 한다’는 방향의 표현이 나옵니다. 이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스베덴보리의 관점과는 거리가 생깁니다. 천국을 준비하는 삶은 세상에서 도피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서 자신의 의무를 신실하게 수행하되 그것을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도구로 만들지 않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상인은 정직하게 장사하고, 공무원은 공정하게 직무를 수행하며, 정치인은 공공선을 위해 정치하고, 목회자는 영혼의 선을 위해 목회합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의 일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그 일을 어떤 사랑에서 하느냐’입니다.

 

이 원리는 정치 참여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 자체를 비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불의한 제도를 바로잡고 약자를 보호하며 공동선을 위해 행동하는 일은 오히려 이웃 사랑의 한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기독교 신앙을 동원하거나, 특정 정치적 선택을 곧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하거나, 자신과 다른 정치적 선택을 하는 사람을 신앙적으로 열등한 사람으로 규정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그 순간 정치적 확신이 신앙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정치적 확신을 섬기기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이동엽 목사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땅의 나라를 뒤섞지 말라’는 문제의식에는 충분히 귀 기울일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서도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단순히 ‘교회와 정치를 섞으면 안 된다’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무엇이 무엇을 지배하고 있는가?’입니다.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섬기면 질서가 바로 서지만,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욕망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정치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니고 애국심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자기 진영의 승리, 권력, 지배, 증오 같은 자연적 욕망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거룩하게 포장할 때 발생합니다. 반대로 정치적 행동이 진실과 정의와 공동선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고, 그 과정에서도 상대방을 인간으로 존중하며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다면 정치 역시 하나의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정치적 힘과 대조하는 부분도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이동엽 목사는 로마의 압제 아래 있던 예수님이 정치적·군사적 힘으로 로마를 무너뜨리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십자가는 단순히 정치적 비폭력의 모범보다 훨씬 깊은 사건입니다. 주님은 세상 나라를 정복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지옥의 권세와 싸우고 인성을 신성하게 하시며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다시 여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싸움은 사람을 죽이는 싸움이 아니라 악과 거짓을 정복하는 영적 전쟁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를 정치적 승리의 프로그램으로 읽는 것은 복음의 중심을 놓칠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영상에서 말하듯 ‘공산당이 싫으면 그들과 맞서 싸우지 말고 그들의 손에 우리가 죽어야 한다’는 표현까지 그대로 일반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자기희생을 강조하려는 강한 수사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악에 저항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을 보호하기 위해 악을 제어해야 할 때가 있으며, 사회에는 법과 질서와 공적 정의가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악한 사람을 미워하기 때문에 악을 제어하는 것과, 선과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악을 제어하는 것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외적인 행동은 비슷해 보여도 내적인 동기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악에 저항하지 않는 것’과 ‘악을 미워하지 않으면서 악을 제어하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구약의 전쟁과 진멸을 오늘날 문자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이동엽 목사의 지적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특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여기서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성경 해석이 이동엽 목사의 문제의식을 훨씬 더 깊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말씀의 문자적 의미 안에는 속뜻이 있으며, 특히 구약의 전쟁들은 인간 내면에서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에 일어나는 영적 전쟁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는 본문을 오늘날 다른 종교인이나 정치적 반대자를 공격하라는 명령으로 옮겨 오는 것은 말씀의 영적 목적을 심각하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멸해야 할 ‘가나안 족속’은 무엇보다 우리 밖의 사람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주님을 대적하는 악과 거짓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불상을 부수거나 다른 종교의 성소를 훼손하면서 그것을 ‘우상 파괴’라고 부르는 행위에 대한 이동엽 목사의 비판도 훨씬 깊은 의미를 얻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가장 위험한 우상은 돌이나 나무로 만든 형상 자체보다 인간 안에서 하나님보다 높아진 자기애와 세상 사랑입니다. 밖의 우상을 깨뜨리면서 자기 안의 지배욕과 멸시와 증오를 그대로 품고 있다면 그는 영적으로 우상을 제거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종교적 열심이라는 이름 아래 proprium을 강화할 수도 있습니다. 참된 영적 전쟁의 전장은 먼저 자기 자신 안에 있습니다.

 

다만 영상에서 ‘유대교는 그렇게 할 수 있다’, ‘구약만을 믿는 유대교는 그렇게 투쟁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부분은 조심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 유대교 전체를 구약의 진멸 전쟁과 직접 연결하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가 될 수 있고, 특정 민족이나 종교 전체를 하나의 성향으로 묶는 것은 이 영상 앞부분에서 이동엽 목사 자신이 깨달았던 ‘사람을 하나의 범주로 나누지 말자’는 통찰과도 긴장됩니다. 한 사람을 ‘보수’나 ‘진보’라는 한 단어로 규정해서는 안 되듯, 유대교나 이슬람이나 어떤 종교 집단 전체도 몇 가지 역사적 사건이나 극단적 사례로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도 앞부분의 깨달음을 끝까지 밀고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한 ‘기독교 정신은 정말 진보적이다’라는 표현도 그 의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조금 더 정교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복음은 현대 정치의 ‘진보’나 ‘보수’ 가운데 어느 한쪽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약자를 보호하고 인간의 존엄을 존중하며 억압을 거부하는 면에서는 오늘날 진보적 가치와 만날 수 있고, 개인의 책임과 도덕적 질서, 가정과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면에서는 보수적 가치와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선과 진리는 어느 정치 진영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양쪽 모두 자기에게 유리한 부분만 복음에서 가져가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강화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보수다’도 위험하지만 ‘기독교는 본래 진보다’ 역시 같은 종류의 환원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영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오히려 정치에 관한 결론보다 그 정치 이야기를 가능하게 만든 ‘만남’ 자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정치적 입장이 다른 두 사람이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집사님은 자신이 존경하는 목사를 비판한 이동엽 목사의 말을 끝까지 들었고, 이동엽 목사도 자신과 다른 정치적 신념을 가진 집사님의 신앙과 삶을 존중했습니다. 두 사람은 상대방에게 ‘당신이 틀렸다’고 말하기 전에 ‘당신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 적어도 한 사람은 자기 안의 숨은 판단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체어리티가 진리의 차이를 다루는 방식과 가까운 모습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리적 차이가 있다고 해서 곧 교회가 갈라지는 것은 아니며, 체어리티가 중심에 있다면 서로 다른 교리적 견해 가운데서도 하나 됨이 가능하다는 취지의 가르침을 반복합니다. 이것을 오늘날의 상황에 적용하면 정치적 견해의 일치가 교회의 하나 됨의 조건일 수는 없습니다. ‘나와 같은 후보를 지지해야 형제이고, 나와 같은 정치적 판단을 해야 참된 그리스도인이다’라는 순간 교회는 체어리티보다 정치적 신념을 더 높은 자리에 올려놓게 됩니다. 반대로 서로 다른 판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대방 안에 있는 선을 인정하고 함께 주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외적인 차이 아래 더 깊은 하나 됨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내용을 처음의 ‘등대지기’로 다시 가져오면 영상 전체가 하나의 원을 그립니다. 등대는 바다 위의 모든 배를 자기에게 오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배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옳으니 나에게로 오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빛을 비추어 각각의 배가 안전하게 자기 길을 가도록 돕습니다. 참된 목회도 어쩌면 그렇습니다. 목회자가 사람들을 자기 정치관, 자기 신학적 취향, 자기 영향력 아래 모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빛이 사람들의 길을 비추도록 자신은 한 자리에서 묵묵히 쓰임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영상을 읽을 때 저는 이동엽 목사의 모든 주장에 그대로 동의하는 것보다, 이 영상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하나의 더 깊은 방향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큰 목회’를 꿈꾸던 사람이 ‘교회지기’를 꿈꾸기 시작하고,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하나의 정치적 범주로 보던 사람이 ‘그냥 한 사람’을 보기 시작하며, 세상의 힘으로 상대를 이기는 신앙에서 십자가의 자기 비움으로 시선을 돌리는 흐름입니다. 아직 몇몇 표현에는 정치적 이분법이 남아 있고, ‘세상에서 벗어남’이나 ‘악에 저항하지 않음’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보완할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서 흐르는 방향, 곧 ‘자기를 높이는 데서 쓰임으로, 판단에서 이해로, 지배에서 섬김으로, 외적인 적과의 싸움에서 자기 안의 악과의 싸움으로’ 향하려는 움직임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방향과 상당히 깊이 만납니다.

 

어쩌면 이 영상의 처음에 나온 ‘그 꿈이 누구의 꿈이었는가?’라는 질문이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형 교회를 세우려는 꿈에도 물을 수 있고, 나라를 구하려는 꿈에도 물을 수 있으며, 진보적 사회를 만들려는 꿈에도 물을 수 있고, 심지어 ‘올바른 기독교’를 세우겠다는 꿈에도 물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 주님의 뜻을 사랑해서 품은 것인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세상에 관철하고 싶은 proprium의 꿈인가?’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결국 우리를 상대편에게서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세웁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부터 참된 영적 전쟁과 거듭남이 시작됩니다.

 

 

 

SY.66, 강문호 목사, ‘아토스 수도 자치국’ (20191212)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어떤 수도사의 일화를 중심으로 하기보다, 강문호 목사님이 왜 수도원을 공부하게 되었고, 그 가운데 특히 아토스산 수도 공동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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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0.심화

 

4. ‘29:35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29:35)

 

 

AC.340에서 스베덴보리가 창29:35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를 인용한 이유도 앞서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을 인용한 이유와 같습니다. 고대인들은 어떤 새로운 일이 생기거나 새로운 상태가 나타났을 때, 그 성질을 이름에 담아 표현했으며, 스베덴보리는 이 원리를 통해 창4의 ‘가인’이라는 이름 역시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나타내는 교리의 성질을 담고 있음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29:35에서는 이름과 그 이름을 붙인 이유가 본문 안에서 직접 연결됩니다. 레아는 넷째 아들을 낳은 뒤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말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유다’라고 합니다. ‘유다’라는 이름은 ‘찬송하다’, ‘감사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유다’라는 이름에는 단순히 넷째 아들이라는 신분이 아니라, 그때 레아에게 있었던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상태가 담겨 있습니다.

 

특히 개역개정의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라는 표현은 AC.340에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원리를 아주 잘 보여 줍니다. 먼저 어떤 상태가 있고, 그 상태를 말로 표현하며, ‘이로 말미암아’ 그에 맞는 이름을 붙입니다. 따라서 이름은 그 상태와 아무 관계 없이 임의로 정한 표지가 아니라, 그 상태를 한 이름 안에 담아 나타내는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원리를 ‘가인’에게 적용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본래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의 신앙의 교리로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이제는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었고, 그들은 그것을 마치 전에 없던 새로운 무엇을 발견하고 얻은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 상태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표현했고, 그렇게 나타난 신앙의 교리를 ‘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와 가인이 나타내는 영적 의미가 같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유다의 속뜻을 가인의 속뜻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붙이는 방식’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레아에게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상태가 있었고, 그 상태를 담아 ‘유다’라고 한 것처럼, 태고교회 안에서도 신앙을 하나의 독립된 교리로 얻었다고 여기는 상태가 생겼고, 그것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곧 ‘가인’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AC.340에서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 유다를 연이어 제시한 의도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스마엘’에는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것이, ‘르우벤’에는 ‘여호와께서 보셨다’는 것이, ‘시므온’에는 다시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것이, ‘유다’에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것이 각각 이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사례를 거듭 제시하면서, 말씀의 이름을 오늘날의 단순한 고유명사처럼 읽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특히 유다의 사례는 ‘가인’을 이해하는 데 한 가지를 더욱 선명하게 해 줍니다. 이름은 단순히 이미 존재하는 사람에게 나중에 의미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태의 성질을 이름으로 표현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4에서 ‘가인’이라는 이름을 만났을 때도 먼저 ‘가인이라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기보다 ‘왜 이것을 가인이라고 했는가?’, ‘이 이름에는 어떤 상태가 담겨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39에서 설명한 태고인들의 계보 작성 방식과도 이어집니다. 태고인들은 교회에 속한 것들에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그것들의 성질을 나타냈습니다. 또한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서 생겨나는 관계를 잉태와 출생과 자손과 계보의 형식으로 표현했습니다. 따라서 ‘하와가 가인을 낳았다’는 기록도 속뜻으로는 태고교회로부터 하나의 새로운 신앙의 교리가 생겨난 것을 나타내며, ‘가인’이라는 이름은 바로 그 교리의 성질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사례를 가인과 나란히 놓으면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이 보입니다. 이름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다는 사실 자체는 그 이름이 나타내는 상태가 선한지 악한지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유다’에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상태가 담기고, ‘가인’에는 신앙을 사랑에서 구별하여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상태가 담깁니다. 이름을 붙이는 형식은 같지만, 그 이름으로 나타내는 내용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고대의 명명법은 어떤 특정한 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상태와 성질을 이름에 담아 나타내는 하나의 표현 방식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유다’라는 이름의 속뜻 자체로 너무 깊이 들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후반에서 유다와 그의 이름이 나타내는 것을 훨씬 더 깊게 다루지만, AC.340에서는 그것이 논점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오직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말과 ‘유다’라는 이름이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야 독자가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과 ‘가인’이라는 이름의 관계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창29:35 AC.340에서 인용한 이유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레아가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 아들의 이름을 ‘유다’라고 한 것처럼, 고대인들은 어떤 상태와 성질을 이름 안에 담아 나타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인’이라는 이름에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로 표현된 태고교회의 어떤 상태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본래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의 교리로 만들고, 그것을 마치 새롭게 얻은 독립된 무엇처럼 인식하고 인정하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유다의 이름까지 예로 든 목적은 ‘가인’이라는 이름을 읽는 법을 더욱 확실하게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유다’라는 이름 뒤에서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를 읽듯이, ‘가인’이라는 이름 뒤에서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를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 뒤에서는 다시 태고교회 안에서 일어난 더 깊은 변화, 곧 마음에 새겨져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이 사랑에서 구별되어 하나의 교리와 지식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변화를 읽어야 합니다. 이것이 창29:35 AC.340에서 하는 역할입니다.

 

 

 

AC.340, 심화 3, ‘창29:33’

AC.340.심화 3. ‘창29:33’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창29:33) AC.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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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0.심화

 

3. ‘29:33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29:33)

 

 

AC.340에서 스베덴보리가 창29:33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를 인용한 이유는, 앞의 이스마엘과 르우벤의 경우처럼 고대인들이 어떤 이름을 붙일 때, 그 이름 안에 당시의 사건이나 상태, 그리고 그 상태의 성질을 담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시므온의 속뜻 자체를 해설하는 데 있지 않고, ‘시므온’이라는 이름과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라는 말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29:33에서 레아는 자신이 야곱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처지에 있음을 말하면서,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이름을 시므온’이라고 합니다. ‘시므온’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의 듣다’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시므온’은 단순히 한 아이를 다른 아이와 구별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레아의 경험과 그때의 상태를 이름 안에 담아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창29:32의 르우벤과 아주 비슷한 구조를 가집니다. 르우벤에서는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다’,  보셨다’는 것이 이름과 연결되고, 시므온에서는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다’는 것이 이름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이 사례들을 연이어 제시함으로써, 고대의 이름에는 그 이름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어떤 성질이나 상태가 담겨 있었다는 사실을 점점 더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것이 AC.340에서 중요한 이유는 결국 가인’이라는 이름 때문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본래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의 신앙의 교리’로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전에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을 이제는 지식으로 알게 되었고, 그것을 마치 새롭게 무엇인가를 얻은 것처럼 여겼습니다. 이 상태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표현했고, 그렇게 나타난 신앙의 교리를 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시므온의 사례와 가인의 경우는 의미 자체가 같은 것이 아니라 이름을 붙이는 방식’이 같습니다. 시므온에게서는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상태가 먼저 있고, 그 상태를 시므온’이라는 이름에 담았습니다. 가인의 경우에는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의 독립된 교리로 얻었다고 여기는 상태가 먼저 있고, 그것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과 가인’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시므온은 무엇을 상징하는가?’라는 질문으로 곧바로 넘어가면 AC.340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직접적인 목적에서는 조금 벗어나게 됩니다. 물론 창세기 후반에서 스베덴보리는 시므온의 이름에 담긴 속뜻을 별도로 아주 깊이 해설합니다. 그러나 AC.340에서는 그 내용까지 다루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오직 이름에는 그 이름을 붙이게 된 상태와 의미가 담긴다’는 원리를 보여 주는 증거로 시므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가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을 차례로 인용하는 것을 보면 하나의 공통된 형식이 더욱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이스마엘은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다’, 르우벤은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다’, 시므온은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다’라는 말과 각각 연결됩니다. 이름이 먼저 있고, 나중에 임의로 뜻을 붙인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과 상태가 있었고,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그에 맞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것은 AC.339에서 설명한 태고인들의 이름과 계보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인들이 교회에 속한 것들에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그것들의 성질을 나타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창4에서 가인’, ‘에녹’, ‘이랏’, ‘므후야엘 같은 이름들이 이어질 때, 우리는 그것들을 단순한 개인들의 이름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어떤 교리와 신앙의 모습을 나타내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AC.340의 여러 성경 인용은 바로 이러한 독법이 말씀의 이름 사용 방식과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또 한 가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듣다’라는 매우 일상적인 동사가 하나의 이름에 담긴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고대의 이름이 반드시 복잡한 신학적 개념을 직접 표현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어떤 사건 가운데 경험한 주님의 역사하심, 어떤 상태에서 느낀 것, 그때 일어난 중요한 일이 이름에 담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경험이 시므온’이라는 이름이 되고, ‘여호와께서 보셨다’는 경험이 르우벤’이라는 이름과 연결됩니다.

 

이렇게 보면 하와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도 훨씬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그 말은 단순히 가인을 낳고 한 감탄이 아니라, 속뜻으로는 태고교회 안에서 일어난 하나의 중요한 변화를 표현합니다. 이전에는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교리로 만들고, 그것을 우리가 무엇인가를 얻었다’고 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신앙의 교리를 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창29:33 AC.340에서 인용한 이유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시므온’이라는 이름에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다’는 상태와 의미를 담았듯이, ‘가인’이라는 이름에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로 표현된 태고교회의 어떤 상태가 담겨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는 시므온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이름을 이름으로만 읽지 말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왜 이 이름을 붙였는가?’, ‘이 이름에 어떤 상태가 담겨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원리를 가지고 다시 창4로 돌아가면 가인’이라는 이름은 한 개인의 호칭이 아니라, 본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신앙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의 교리로 세우고, 그것을 독립된 무엇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태고교회의 중대한 변화를 담고 있는 이름으로 읽히게 됩니다.

 

 

 

AC.340, 심화 2, ‘창29:32’

AC.340.심화 2. ‘창29:32’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창29:32) AC.340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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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0.심화

 

2. ‘29:32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29:32)

 

 

AC.340에서 스베덴보리가 창29:32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를 인용한 직접적인 이유는, 앞서 이스마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대에는 이름을 단순한 호칭으로 붙인 것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어떤 일이나 상태, 성질을 나타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창4 가인’이라는 이름 역시 그 이름으로 나타내는 어떤 영적인 내용을 담고 있음을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르우벤의 경우에는 이 관계가 본문 안에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레아는 야곱에게 라헬보다 사랑받지 못하는 처지에서 아들을 낳은 뒤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다’고 말하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합니다. ‘르우벤’이라는 이름에는 히브리어의 보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으며, 따라서 레아가 경험한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보셨다’는 사건과 그때의 상태를 그 이름 안에 담은 것입니다. 이름과 그것을 붙이게 된 이유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AC.340에서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르우벤의 속뜻 자체를 여기서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태가 생김  그 상태를 말로 표현함  그 표현에 해당하는 이름을 붙임’이라는 고대의 명명 방식을 보여 줍니다. 29:32에서는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다’는 것이 먼저 있고, 그것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르우벤’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을 창4의 가인에게 적용하면 AC.340의 논리가 훨씬 선명해집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본래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의 교리로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을 이제는 지식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마치 새로운 무엇을 얻은 것처럼 여겼고, 그 상태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타난 신앙의 교리를 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르우벤과 가인 사이에는 이런 공통된 구조가 있습니다. 레아에게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다’는 경험과 상태가 있었고, 그것을 르우벤’이라는 이름에 담았다면,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들을 하나의 독립된 교리로 얻었다고 여기는 상태가 생겼고, 그것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과 가인’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르우벤의 사례를 통해 독자가 가인’이라는 이름도 이런 방식으로 읽도록 돕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도 있습니다. ‘르우벤’과 가인’이 같은 영적 의미를 가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두 이름을 서로 상응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르우벤은 여기서 오직 이름에 그 이름으로 나타내는 상태와 의미를 담는 고대의 방식’을 보여 주는 사례로 등장합니다. 따라서 AC.340의 관심은 르우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보다 왜 레아가 그 상태에서 아들의 이름을 르우벤이라고 했는가?’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예는 앞의 이스마엘보다 한 가지를 더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29:32에는 단순히 이름의 어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자신의 상태를 말하고  이름을 붙이는 과정이 한 절 안에 함께 나타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39에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한 잉태’, ‘출생’, ‘자손’, ‘이름’, ‘계보’의 원리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어떤 새로운 상태가 생겨나고, 그것이 밖으로 나타나며, 그 성질에 따라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AC.339 AC.340은 서로 아주 긴밀하게 이어집니다. AC.339에서는 태고인들이 교회에 속한 것들에 이름을 붙이고,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서 생겨나는 관계를 잉태와 출생과 계보로 표현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AC.340에서는 이스마엘과 르우벤, 시므온, 유다, ‘여호와 닛시’를 실제 사례로 제시하면서 말씀 안에서 이름이 이렇게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 결과 독자는 창4 가인’을 단순한 사람 이름으로 읽는 데서 벗어나, 그 이름에 담긴 교리의 성격을 볼 수 있게 됩니다.

 

특히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라는 레아의 말과 르우벤’이라는 이름의 관계를 이해하고 나면, 하와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와 가인’의 관계도 한결 자연스러워집니다. 하와의 말은 단순히 출산 후의 감탄사가 아니라, 속뜻으로는 태고교회 안에서 새롭게 구별하여 세운 신앙의 교리가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를 표현하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창29:32 AC.340에서 인용한 이유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르우벤’이라는 이름에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다’는 상태와 의미를 담아 이름을 붙였듯이, ‘가인’이라는 이름에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로 표현된 상태가 담겨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가인의 경우 그 상태란, 본래 사랑 안에서 마음에 새겨져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의 교리로 만들고, 그것을 마치 새롭게 얻은 독립된 무엇처럼 인식하고 인정하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르우벤을 여기서 데려온 목적은 르우벤’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인’을 읽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이름을 보거든 단순히 누구의 이름인가만 보지 말고, 왜 그 이름을 붙였으며 그 이름 안에 어떤 상태를 담았는지를 보라.’ 이것이 창29:32의 인용을 통해 AC.340이 우리에게 건네는 중요한 독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40, 심화 3, ‘창29:33’

AC.340.심화 3. ‘창29:33’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창29:33) AC.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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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0, 심화 1, ‘창16:11’

AC.340.심화 1. ‘창16: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창16:11) AC.340에서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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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0.심화

 

1. ‘16: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6:11)

 

 

AC.340에서 스베덴보리가 창16:11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를 인용한 직접적인 이유는 이스마엘 자체를 해설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여기서는 가인’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고대인들이 이름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예로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AC.340의 중심에는 하와가 한 말,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와 가인’이라는 이름의 관계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은 본래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의 신앙의 교리’로 정리하기 시작하면서, 마치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얻은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새롭게 구별하여 세운 신앙의 교리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독자에게는 이것이 다소 낯설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한 문장인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가 가인’이라는 이름과 연결되고, 더 나아가 하나의 신앙의 교리를 나타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성경 안에서 이름과 그것이 나타내는 상태가 연결되는 여러 사례를 제시합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16:11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고 하면서 곧바로 그 이유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라고 설명합니다.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뜻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이 이름은 단순히 아이를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한 호칭이 아니라, 그때 일어난 일과 그 상태를 이름 안에 담고 있습니다. 하갈의 고통을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사실을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AC.340에서 중요한 것은 이스마엘은 무엇을 상응하는가?’가 아닙니다. 여기서는 이름을 붙이는 방식’이 중요합니다.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다’라는 어떤 상태와 사건이 있고, 그것을 한 이름 안에 담아 이스마엘’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르우벤, 시므온, 유다의 사례도 모두 같은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예를 연이어 제시함으로써 가인’이라는 이름 역시 아무 의미 없이 붙인 고유명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을 가인에게 적용하면 구조가 선명해집니다. ‘이스마엘’에는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의미가 담겨 있고, ‘르우벤’에는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다’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유다’에는 이번에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가인’에는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로 표현된 상태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AC.340은 그 상태가 무엇인지를 밝혀 줍니다. 바로 신앙에 속한 것들을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상태에서 그것들을 따로 꺼내어 하나의 신앙의 교리로 정리하고, 그것을 마치 새롭게 얻은 무엇처럼 여긴 상태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창16:11을 인용한 데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AC.339에서 설명한 태고인들은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어떤 것들을 의미하게 했다’는 원칙을 실제 성경 구절을 통해 보여 주는 것입니다. AC.339에서 원리를 설명했다면, AC.340에서는 성경을 보라. 실제로 이름이 이런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았는가?’ 하며 구체적인 사례들을 제시하는 셈입니다.

 

특히 이것은 창4를 평범한 가족 족보처럼 읽지 않는 데 중요합니다. ‘가인’이라는 이름을 단순히 한 개인의 이름으로만 읽으면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하와의 말은 출산에 대한 감사 정도로 보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고대의 이름이 그 이름으로 나타내는 어떤 성질과 상태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가인’이라는 이름 자체가 태고교회 안에서 새롭게 나타난 교리의 성격을 표현한다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다만 이스마엘과 가인 사이에는 구별할 점도 있습니다. 16:11은 실제 역사적 시대에 속하는 기록이므로 하갈과 이스마엘의 역사적 사건이 있으면서 동시에 그 안에 속뜻이 있습니다. 반면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창4는 앞서 AC.339에서 확인했듯 태고교회의 영적인 일들을 이름과 출생과 계보의 형식으로 표현한 기록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이스마엘과 가인을 똑같은 종류의 역사적 인물로 놓고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 안에 그 이름으로 나타내는 어떤 상태와 의미를 담는다’는 고대의 명명 방식이 말씀 안에서도 확인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 이스마엘을 예로 든 것입니다.

 

결국 창16:11 AC.340에서 인용한 이유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이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다’라는 의미를 담아 붙인 이름인 것처럼, ‘가인’이라는 이름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로 표현된 어떤 영적 상태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란 이전에는 마음에 새겨져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의 교리로 만들고, 그것을 마치 새롭게 얻은 독립된 무엇처럼 여기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이 인용은 이스마엘을 설명하기 위한 곁가지가 아니라, ‘가인’이라는 이름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열쇠입니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나타내는 상태를 담는 그릇이며, ‘가인’이라는 이름 안에는 태고교회에서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구별되어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결정적인 변화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AC.340, 심화 2, ‘창29:32’

AC.340.심화 2. ‘창29:32’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창29:32) AC.340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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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0, 창4:1,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4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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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4:1)

 

AC.34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라는 말은 가인(Cain)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하고 인정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이 장의 처음에서 말한 것으로 분명합니다. 이전에 그들은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마치 알지 못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앙에 관한 구별된 교리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이전에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것들을 가져다가 교리로 정리하였고, 그것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하여 이전에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이제는 단지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었습니다. 고대에는 새로운 것이 생길 때마다 그것에 이름을 붙였으며, 이런 식으로 그 이름 안에 담긴 것들을 나타냈습니다.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Jehovah hath heard her affliction)라는 말로 설명되고(16:11), That the words “I have gotten a man, Jehovah” signify that with such as are called “Cain” faith is recognized and acknowledged as a thing by itself,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at the beginning of this chapter. Previously, they had been as it were ignorant of what faith is, because they had a perception of all the things of faith. But when they began to make a distinct doctrine of faith, they took the things they had a perception of and reduced them into doctrine, calling it “I have gotten a man, Jehovah,” as if they had found out something new; and thus what was before inscribed on the heart became a mere matter of knowing. In ancient times they gave every new thing a name, and in this way set forth the things involved in the names. Thus the signification of the name Ishmael is explained by the saying, “Jehovah hath heard her affliction;” (Gen. 16: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6:11)

 

르우벤은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므로(Jehovah hath looked upon my affliction)라는 말로(29:32), that of Reuben, by the expression, “Jehovah hath looked upon my affliction;” (Gen. 29:32)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29:32)

 

시므온은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Jehovah hath heard that I was less dear)라는 말로(29:33), the name Simeon, by the saying, “Jehovah hath heard that I was less dear;” (Gen. 29:33)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29:33)

 

유다는 이번에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This time will I praise Jehovah)라는 말로 설명됩니다(29:35). and that of Judah by, “This time will I praise Jehovah;” (Gen. 29:35)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29:35)

 

또한 모세는 자신이 세운 제단에 여호와 닛시’, 여호와는 나의 깃발(Jehovah my banner)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17:15). and an altar built by Moses was called, “Jehovah my banner.” (Exod. 17: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7:15)

 

이와 같은 방식으로 여기서는 신앙의 교리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In like manner the doctrine of faith is here denominated “I have gotten a man, Jehovah,” or “Cain.”

 

 

해설

 

AC.340은 바로 앞 AC.338에서 나온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이라는 표현을 한층 더 깊이 설명합니다. 특히 이 글을 읽으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거짓된 신앙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들이 교리로 정리한 내용은 원래 태고교회 안에 이미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이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알았는가’보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그리고 ‘그 신앙이 사랑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역설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들은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마치 알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신앙이 없었다거나 신앙에 무지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이 그들의 사랑과 생명 안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들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따로 떼어 ‘이것이 신앙이다’라고 정의하거나 하나의 교리 체계로 만들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부모를 깊이 사랑하며 평생 살아왔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는 먼저 ‘부모 사랑의 원칙’을 배우고 그것을 실천하여 부모를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부모를 존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돌보며, 사랑하기 때문에 어려울 때 돕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부모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항목별로 설명해 보라’고 하면 오히려 잠시 생각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부모 사랑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그것을 지식으로 정리하기 전에 이미 삶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이 신앙을 ‘마치 알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이전에는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하나씩 꺼내어 구별하고 정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신앙에 관한 구별된 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표현합니다. 전에는 사랑 안에서 하나로 살아 있던 것들을 이제는 대상으로 삼아 ‘이것은 신앙에 속한 것이다’, ‘저것도 신앙에 속한 것이다’라고 구별하여 하나의 교리로 정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 교리를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를 곧 악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핵심은 그 과정에서 신앙과 사랑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변화를 매우 인상적으로 표현합니다. ‘이전에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이제는 단지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었다.’ AC.340 전체를 이해하는 데 이보다 중요한 문장은 많지 않습니다.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는 것은 단순히 기억 속에 많은 진리를 저장하고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진리가 그들의 사랑과 삶 안에 있었고, 그래서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내적으로 퍼셉션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진리를 사랑에서 구별하여 교리로 정리하고 하나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이전에는 ‘살아서 알던 것’이 점차 ‘배워서 아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진리의 내용 자체가 갑자기 거짓이 된 것은 아닙니다. 진리가 사람 안에 존재하는 방식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AC.338에서 살펴본 ‘가인의 분리’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처음에는 사랑 안에 신앙이 있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믿었고, 사랑 안에서 무엇이 참인지를 퍼셉션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신앙에 속한 것들을 사랑에서 구별하여 하나의 교리로 정리하면서,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마치 전에는 없었던 무엇인가를 새롭게 발견한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마치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새롭게 발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미 그들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것을 이제 밖으로 꺼내어 이름을 붙이고 교리로 정리한 것입니다. 바로 이 새로운 신앙의 교리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곧 ‘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이라는 이름에는 단순히 ‘신앙’이라는 뜻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변화까지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는 매우 미묘한 역설이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엇인가를 잃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을 이제 지식으로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진리를 살아서 알았는데 이제는 진리를 대상으로 삼아 알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사랑 안에서 무엇이 참인지 퍼셉션했는데, 이제는 교리를 통하여 무엇이 참인지 배우게 되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신앙에 관한 지식과 체계가 생겨났으니 무엇인가 발전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태고교회 특유의 퍼셉션이 사라져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AC.340을 근거로 ‘교리나 지식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고 이미 설명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으로부터 신앙을 가졌지만, 오늘날의 인간은 먼저 신앙의 진리를 배우고, 그 신앙으로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질서를 따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이해하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분별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질서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에서 신앙으로’ 나아가는 질서가 있었습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퍼셉션했고, 그 진리가 곧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인으로 나타나는 변화에서는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하나의 독립된 교리로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반면 오늘날 우리는 먼저 신앙의 진리를 배우되, 그것이 체어리티로 이어지고 마침내 삶에 새겨져야 합니다. 표현을 조금 달리하면, 태고교회에서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단지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는’ 방향으로 변화가 일어났다면, 오늘날 우리의 거듭남은 ‘지식으로 배운 진리가 다시 마음과 삶에 새겨지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AC.340 후반에서 스베덴보리가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 유다, 그리고 ‘여호와 닛시’를 차례로 예로 드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고대인들에게 이름은 단순히 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한 호칭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름에는 그 사람이나 대상과 관련된 어떤 성질과 상태가 담겨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사실이 이스마엘이라는 이름과 연결되고,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다’는 사실이 르우벤과 연결되며, ‘이번에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말이 유다라는 이름과 연결됩니다. 같은 방식으로 ‘가인’이라는 이름에도 그 이름으로 나타낸 신앙의 교리가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도 단순히 한 여인이 아이를 낳고 기뻐하며 한 말로 읽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앞서 AC.339에서 살펴본 것처럼, 창4의 잉태와 출생과 이름과 계보는 태고교회 안에서 교리에 속한 것들이 어떻게 생겨나고 서로에게서 파생되었는지를 나타냅니다. 여기서는 이전까지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하나의 독립된 교리로 정리하여 ‘우리가 이것을 얻었다’고 여긴 상태를 ‘가인’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 대목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 역시 말씀을 공부하고 교리를 배우면서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정리하고 체계적으로 이해하면서 큰 기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한 가지를 함께 물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알게 된 이 진리가 내 마음과 삶에도 새겨지고 있는가?’입니다. 지식이 늘어나는 것과 생명이 깊어지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히 AC를 읽는 우리에게는 이 질문이 더욱 실제적일 수 있습니다. ‘상응’, ‘퍼셉션’, ‘리메인스’, ‘인플럭스’, ‘속 사람과 겉 사람’,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 같은 개념을 점점 정확하게 이해하고 서로 연결할 수 있게 되어도, 그것 자체가 곧 거듭남은 아닙니다. 그 진리로 자기 안의 악을 보고,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하며,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더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갈 때, 머리로 배운 진리가 점차 마음과 삶에 새겨지기 시작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AC.340은 ‘진리를 얼마나 많이 발견했는가?’만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진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묻습니다. 마음에 새겨져 생명으로 살아 있는가, 아니면 기억 속에 저장된 지식으로만 남아 있는가? 교리가 사랑을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교리가 사랑에서 떨어져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이 되어 있는가? 가인의 시작은 처음부터 명백한 거짓을 믿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본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참된 것을 사랑에서 구별하여 별도로 소유하기 시작한 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AC.340의 핵심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진리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이미 마음에 새겨져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사랑에서 구별하여 하나의 교리로 정리하고, 그것을 마치 새롭게 얻은 독립된 무엇처럼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미세한 변화 속에 이후 가인의 계열에서 점점 더 분명하게 나타날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이미 씨앗처럼 들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340은 단순히 ‘가인’이라는 이름의 뜻을 설명하는 글을 넘어섭니다. 우리가 진리를 대하는 방식 자체를 돌아보게 합니다. 진리는 많이 알고 소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이 되기 위한 것이며, 교리는 사랑을 대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거듭남의 길은 머리로 배운 진리가 주님의 역사하심으로 점차 마음과 삶에 새겨져, 마침내 우리가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과 살아가는 것이 다시 하나가 되어 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화

 

1. ‘16:11

 

 

AC.340, 심화 1, ‘창16:11’

AC.340.심화 1. ‘창16: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창16:11) AC.340에서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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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9:32

 

 

AC.340, 심화 2, ‘창29:32’

AC.340.심화 2. ‘창29:32’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창29:32) AC.340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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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9:33

 

 

AC.340, 심화 3, ‘창29:33’

AC.340.심화 3. ‘창29:33’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창29:33) AC.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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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9:35

 

 

AC.340, 심화 3, ‘창29:33’

AC.340.심화 3. ‘창29:33’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창29:33) AC.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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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7:15

 

 

AC.340, 심화 5, ‘출17:15’

AC.340.심화 5. ‘출17: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출17:15) AC.340에서 스베덴보리가 출17:15의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를 인용한 이유는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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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1, 창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AC.341-345)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창4:2) AC.341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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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9, 창4:1, ‘창4의 계보를 읽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39 앞의 세 장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가 태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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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어떤 수도사의 일화를 중심으로 하기보다, 강문호 수도사가 왜 수도원을 공부하게 되었고, 그 가운데 특히 아토스산 수도 공동체에서 무엇을 인상 깊게 보았는지를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은퇴를 앞두고 기도하던 중 수도원의 영성을 세상에 전해야 한다는 사명을 받았다고 이해했고, 그 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여러 나라의 수도원을 직접 찾아다니며 수도 전통을 공부했다고 말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강한 인상을 받은 곳이 그리스의 아토스산(Mount Athos)이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토스산은 그리스 영토 안에 있으면서 특별한 자치권을 가진 정교회 수도 공동체이며, 현재 20개의 주요 수도원이 있습니다. 수도 전통은 적어도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여성의 출입을 제한하는 ‘아바톤(avaton) 전통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아토스산을 ‘수도사들의 나라’처럼 묘사합니다. 표현 자체는 다소 과장될 수 있지만, 그곳이 일반적인 수도원 하나와 다른 독특한 공동체라는 점은 맞습니다. 아토스산은 하나의 반도 전체에 여러 수도원과 스케테, 은수처가 분포하며, 행정적으로도 자치적인 수도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약 20개의 수도원이 존재하고, 천 명이 넘는 수도사들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UNESCO도 아토스산을 오랜 정교회 수도 전통의 중심지로 소개합니다.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특히 놀라워하는 것은 ‘여성이 들어오지 않는 남성 수도 공동체가 천 년 넘게 유지되어 왔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아토스산에는 여성의 출입을 금지하는 전통이 있으며, 이는 중세부터 제도화되어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서 즉시 한 가지 구별이 필요합니다. 여성과의 접촉을 차단하는 외적 환경은 수도자의 정결을 돕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정결을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음란과 욕망은 외부의 대상이 있기 때문에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의 애정과 사랑의 질서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이 전혀 없는 장소에서도 사람은 음란한 상상과 자기 사랑을 품을 수 있고, 반대로 남녀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 안에서도 주님으로부터 순결한 결혼애와 절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상에서 어떤 수도사가 ‘하와 한 명만 들어와도 이곳은 무너진다’는 취지로 말했다는 이야기는 수도 전통 안에서는 이해될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상당히 조심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성을 남성 수도자의 영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외적 위험 요소처럼 보는 순간, 인간 안의 욕망에 대한 책임이 외부 대상에게 옮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음란의 근원은 ‘여자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 안의 사랑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순결은 여성을 보지 않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욕망의 대상으로 소유하려는 사랑이 변화되어 상대를 하나의 인격과 영적 존재로 존중하게 되는 데서 형성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특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는 남녀의 차이를 창조질서 안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참된 결혼애를 천국의 가장 깊은 사랑 가운데 하나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성 자체를 영적 위험으로 이해하는 수도적 감수성과 스베덴보리의 결혼 이해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수도자의 독신은 개인의 소명과 훈련이 될 수 있지만, 남녀의 결합 자체가 더 낮은 영적 삶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결혼애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표상하며, 천국의 질서와 깊은 상응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상에는 아토스산 수도사들이 죽으면 일정 기간 매장한 뒤 뼈를 다시 꺼내 납골당에 보존하는 관습도 소개됩니다. 이러한 관습은 실제 아토스산의 수도 전통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육체의 덧없음을 기억하고 죽은 수도사들을 공동체 안에서 계속 기억하기 위한 방식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해골과 뼈는 인간의 참된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는 영으로 계속 살아가며, 자연적 육체만 세상에 남습니다. 그러므로 수도자의 뼈를 바라볼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도 언젠가 뼈가 된다’가 아니라 ‘내가 이 육체를 벗은 뒤에도 그대로 가지고 갈 사랑은 지금 무엇인가’일 것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아토스산 수도자들의 모습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사는 모습’으로 이해하며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에는 상당히 귀한 면이 있습니다. 세상의 성공과 재물과 명예에서 거리를 두고 하나님께 집중하려는 삶은 우리 자신의 욕망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무엇을 더 소유하고, 더 경험하고, 더 유명해질 것인가가 삶의 중심이 되기 쉽기 때문에, 그것과 정반대 방향으로 살아가는 수도자의 모습은 사람에게 강한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과연 무엇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본다’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시간이 많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은 결국 이웃을 향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루 종일 기도하면서도 옆 사람을 업신여기고, 자신의 영적 수준을 자랑하며,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정죄한다면 그 기도는 아직 사랑과 결합되지 않은 것입니다. 반대로 생활 속에서 맡은 일을 정직하게 수행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며, 자신의 악을 피하는 사람은 외적으로 수도원에 살지 않아도 실제로 주님을 바라보며 살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아토스산의 수도 전통을 바라볼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외적 극단성을 영적 깊이와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천 년 동안 여성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 수도사들이 평생 독신으로 산다는 사실, 죽은 뒤 뼈를 다시 거두어 납골당에 둔다는 사실, 세상과 단절된 산속에서 기도한다는 사실은 모두 강렬한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의 영적 수준을 판단하는 기준은 이런 외적인 희생의 크기가 아닙니다. 그 안에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실제로 얼마나 약해졌으며,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얼마나 자라났는가가 기준입니다.

 

사람은 세상을 떠나면서도 세상 사랑을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수도원 안에서 재산을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명예를 사랑할 수 있고,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은수자가 되면서도 ‘나는 특별한 수도자’라는 자기 의식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proprium의 매우 미세한 모습입니다. 반대로 큰 도시에서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며 살아도 자신의 재물을 주님께서 맡기신 것으로 여기고, 정직하게 사용하며, 이웃을 위해 유용하게 쓴다면 그 사람의 자연적 삶 안에는 천국적인 질서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는 강문호 수도사 자신이 ‘한국 사람으로서 이곳을 밟은 최초의 사람’이라는 말을 수도원마다 들었다고 소개합니다. 이 부분은 영상 자체에서 단순한 여행 경험이나 놀라움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러한 종류의 경험에서도 아주 조용한 경계를 하나 세웁니다. 영적인 길에서 ‘내가 최초다’, ‘내가 특별한 곳에 갔다’, ‘나는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했다’는 사실은 영성의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특별한 경험을 많이 할수록 그것을 자기 특별함의 근거로 삼지 않도록 더 깊은 겸손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특별한 경험을 허락하셨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떤 선한 쓰임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보는 편이 영적 질서에 맞습니다.

 

영상에서 언급되는 ‘성 뽀르피리오스’는 아마 현대 정교회에서 널리 존경받는 성 포르피리오스(St. Porphyrios)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그의 수도생활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아토스산에 대한 갈망이 커졌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서도 중요한 것은 어떤 수도자의 비범한 체험이나 영적 능력 자체보다, 그 삶을 통해 주님과 이웃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수도자의 신비한 체험을 동경하기 시작하면 신앙은 쉽게 특별한 현상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를 실제로 보고 천사와 영들과 대화한 사람이었지만, 흥미롭게도 자신의 독자들에게 그런 체험을 추구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에게 가장 안전한 길은 말씀을 읽고, 계명을 따라 악을 피하며, 자신의 직업과 관계 속에서 선한 쓰임을 행하는 것이라고 반복합니다. 영적 세계를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자연계에서 어떤 사랑으로 살아가는가입니다. 이런 점에서 수도사들의 신비 체험 역시 ‘어떻게 그런 체험을 할 수 있을까?’보다 ‘그 체험 때문에 그 사람은 더 겸손하고 더 선한 사람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영상 마지막에서 아토스산과 같은 수도 영성이 한국 교회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소개하고 싶어 이 유튜브 채널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취지는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는 종교개혁 이후의 전통에 익숙한 반면, 그보다 훨씬 오래된 동방교회의 수도 전통이나 초기 기독교의 금욕적 영성은 상대적으로 낯설기 때문입니다. 다른 기독교 전통을 접하는 것은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다른 전통이 오래되었다거나 낯설고 신비롭다는 이유로 자동적으로 더 깊은 영성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모든 전통은 결국 말씀과 주님의 질서라는 기준 아래에서 분별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수도원 영성이 한국 교회에 던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질문은 ‘우리도 수도원에 들어가야 하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세상 사랑에 얼마나 붙들려 있는가?’일 것입니다. 수도자들이 재산과 명예와 결혼을 포기한 모습을 보며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나는 내가 가진 재산과 지위와 관계를 어떤 사랑으로 사용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수도자의 외적 포기는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형식이 아니지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내려놓는 내적 포기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됩니다.

 

그리고 아토스산의 가장 깊은 영성을 스베덴보리식으로 다시 표현한다면,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며 사는 것’보다 ‘자기에게 있는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그것을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의 삶이어야 합니다. 주님께 가까워질수록 사람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더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 영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토스산의 천 년 수도 전통과 철저한 금욕은 현대의 신앙인에게 강한 질문을 던지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참된 수도의 깊이는 얼마나 세상과 단절했는가가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강문호 수도사가 감탄했던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이라는 말을 조금 더 깊게 다듬는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으로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사람은 세상을 보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속 모든 사람과 모든 쓰임을 주님의 질서 안에서 바라보기 시작하는 사람입니다.’

 

 

 

SY.65, 강문호 목사, ‘이영길 수도사’ (20191210)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이영길 수도사’라는 한 인물을 통해 수도의 완성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강문호 목사님은 전남 화순의 깊은 산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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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4:1)

 

AC.339

 

앞의 세 장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가 태고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충분히 밝혀졌으므로, 이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그 교회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잉태와 출생 역시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성격의 것이었음이 분명합니다. 태고인들에게는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뭔가를 의미하게 하며, 그렇게 해서 계보를 구성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교회에 속한 것들은 서로 이런 관계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곧 자연적인 출생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잉태되고 태어나는 것처럼, 교회에 속한 것들도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잉태되고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는 교회에 속한 것들을 잉태(conceptions), ‘출생(births), ‘자손(offspring), ‘갓난아이(infants), ‘어린아이(little ones), ‘아들(sons), ‘(daughters), ‘청년(young men) 등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말씀의 예언적 부분에는 이와 같은 표현들이 매우 많이 나옵니다. In the three foregoing chapters it has been sufficiently shown that by the “man and his wife” is signified the most ancient church, so that it cannot be doubted, and this being admitted, it is evident that the conception and the birth effected by that church were of the nature we have indicated. It was customary with the most ancient people to give names, and by names to signify things, and thus frame a genealogy. For the things of the church are related to each other in this way, one being conceived and born of another, as in generation. Hence it is common in the Word to call things of the church “conceptions,” “births,” “offspring,” “infants,” “little ones,” “sons,” “daughters,” “young men,” and so on. The prophetical parts of the Word abound in such expressions.

 

 

해설

 

AC.339는 앞으로 이어질 창4의 이름과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바로 앞 AC.338에서 스베덴보리는 ‘아담과 그의 아내’를 태고교회로, 그 교회의 ‘첫 번째 자손, 곧 처음 난 것’을 신앙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이 사랑 안에 머물지 않고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상태를 ‘가인’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태고교회가 어떻게 ‘잉태’하고 ‘낳으며’, 신앙이나 교리가 어떻게 그 교회의 ‘자손’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339는 바로 이 문제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인들은 어떤 영적 실재에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그것의 성질을 나타내며, 서로에게서 생겨나는 것들을 마치 부모와 자녀처럼 연결하여 계보를 구성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계보’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 족보와 성격이 다릅니다. 자연적인 출생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서 태어나듯, 교회 안에서도 하나의 교리와 신앙의 모습이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나고, 그것이 다시 또 다른 교리와 신앙의 모습을 낳습니다. 태고인들은 바로 이러한 영적인 발생과 파생의 관계를 ‘잉태’와 ‘출생’, ‘부모’와 ‘자녀’, 그리고 ‘계보’의 형식으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 점은 창4의 이름들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기 부분에 대해 제시한 설명에 따르면, 우리는 가인과 아벨, 에녹과 이랏, 므후야엘과 므드사엘, 라멕 등을 오늘날의 역사책에 등장하는 개인들의 연속적인 가족사처럼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이름들은 태고교회 안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영적인 변화, 곧 교리와 신앙의 여러 모습에 붙여진 이름들입니다. 그러므로 창4의 계보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이 사람은 역사적으로 누구였는가?’가 아니라 ‘이 이름은 무엇을 나타내며, 이것은 앞의 것으로부터 어떻게 생겨났는가?’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실제 역사가 아니므로 단지 지어낸 비유일 뿐이다’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깊습니다. 역사적 인물들의 가족사를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그 이름들이 나타내는 영적 현실은 실제였습니다. 태고교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의 관계가 달라졌고, 하나의 교리가 다른 교리를 낳았으며, 어떤 교리는 점차 왜곡되어 여러 이단과 분파로 갈라졌습니다. 말씀은 이러한 실제적인 교회의 변화를 사람의 잉태와 출생, 이름과 계보라는 형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실이 아닌 이야기에 영적인 뜻을 나중에 붙인 것’이라기보다, 영적인 사실을 이야기와 계보의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잉태’와 ‘출생’이라는 표현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어떤 교리나 신앙의 모습은 아무런 원인 없이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사람들의 내면에서 어떤 생각이나 원리가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점차 하나의 확고한 관점이 되며, 마침내 교리와 가르침으로 밖에 나타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이 잉태되어 자라다가 때가 되면 아이가 태어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따라서 내적으로 어떤 새로운 생각과 원리가 형성되는 것은 ‘잉태’에, 그것이 교리와 삶의 형태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출생’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바로 앞 AC.338의 ‘가인의 분리’에 적용하면 더욱 잘 이해됩니다. 태고교회에는 본래 사랑 안에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신앙을 사랑 안에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새로운 원리가 ‘잉태’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리가 점차 확고해져 하나의 교리와 신앙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그것이 ‘가인’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됩니다. 다시 말해 ‘하와가 가인을 낳았다’는 것은 한 여인이 한 남자아이를 출산했다는 역사적 사건을 속뜻으로 다시 해석한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로부터 어떤 새로운 교리적 흐름이 생겨나는 것을 출생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태어난 ‘가인’은 다시 자기와 같은 성격의 것들을 낳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것이 된 신앙이라는 원리가 한 번 자리 잡으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원리를 설명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또 다른 생각들이 생기고, 거기에서 다시 새로운 교리들이 파생되며, 그것들이 계속 갈라지면서 여러 이단과 분파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에게서 에녹이 나오고, 다시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으로 계보가 이어지는 것은 단순히 여러 세대에 걸쳐 자손들이 태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의 교리적 원리에서 다른 것들이 계속 파생되어 나가는 관계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339는 우리가 앞서 창4와 창5를 읽으면서 중요하게 살펴본 문제에도 빛을 줍니다.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을 두 집안의 연대기처럼 놓고 ‘어느 집안이 먼저였는가?’, ‘가인 계열이 끝난 다음 셋 계열이 시작되었는가?’라고 읽으면 말씀의 관심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 계보들은 태고교회 안에서 나타난 서로 다른 영적 흐름을 각각 보여 줍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이 나란히 이어진다’고 말할 때에도, 두 실제 가문이 역사적으로 같은 시기에 병존했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 안에서 나타난 서로 다른 교리와 신앙의 흐름을 말씀이 각각의 계보라는 형식으로 보여 준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어서 ‘잉태’, ‘출생’, ‘자손’, ‘갓난아이’, ‘어린아이’, ‘아들’, ‘’, ‘청년’ 같은 표현들을 열거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말씀에서 이러한 가족과 출생의 언어는 자연적인 가족관계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선과 진리가 어떻게 생겨나고 자라며, 서로 결합하여 또 다른 영적인 것을 낳는지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선지서에서도 ‘잉태하다’, ‘낳다’, ‘아들’, ‘’, ‘자녀’ 같은 표현들이 매우 자주 등장합니다. 자연적인 출생이 생명의 이어짐을 보여 주듯, 영적으로도 선과 진리, 또는 반대로 악과 거짓은 서로에게서 생겨나며 계속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의 원리는 혼자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랑으로 살아가면 그 진리에서 또 다른 선한 생각과 애정이 생겨나고, 그것들이 다시 선한 말과 행동을 낳습니다. 반대로 하나의 거짓된 원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 안에서 정당화하기 시작하면 그 거짓을 유지하기 위해 또 다른 거짓이 필요해지고, 그것은 다시 다른 악과 거짓을 낳습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잉태하고 낳는’ 것입니다.

 

바로 이 원리가 가인의 계보를 무겁게 만듭니다. AC.338에서 살펴본 시작은 매우 작아 보였습니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얼핏 보면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AC.339는 우리에게 그 작은 원리가 혼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것은 자손을 낳습니다. 하나의 분리가 또 다른 분리를 낳고, 하나의 교리적 왜곡이 그것을 뒷받침하는 다른 왜곡을 낳으며, 그렇게 이어지다 보면 처음에는 작았던 변화가 마침내 전혀 다른 교회의 모습을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4의 계보는 단순히 과거 태고교회에서 일어난 일을 보여 주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 각 사람 안에서도 이러한 ‘잉태’와 ‘출생’은 계속 일어납니다. 어떤 생각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그 생각은 또 다른 생각을 낳고, 그 생각들은 애정과 행동으로 이어지며, 결국 하나의 삶의 모습을 만들어 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마음 안에서도 날마다 어떤 ‘계보’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받아들인 하나의 진리가 내일의 선한 선택을 낳을 수도 있고, 오늘 허용한 하나의 거짓이 또 다른 자기 합리화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339는 창4의 낯선 이름들을 읽기 위한 단순한 사전 설명이 아닙니다. 앞으로 가인의 계보를 읽을 때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하나의 중요한 열쇠입니다. 이름을 보면서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표현된 교리와 신앙의 모습을 보고, 출생을 보면서 생물학적 혈통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무엇으로부터 생겨났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계보 전체를 통하여 하나의 영적 원리가 어떤 결과들을 계속 낳아 가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AC.339를 읽고 난 뒤 창4의 계보 앞에서 우리가 계속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일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으로부터 태어났으며, 또 무엇을 낳고 있는가?’ 이 질문을 붙들고 가인의 계보를 읽으면, 창4는 더 이상 낯선 고대 이름들의 목록이 아닙니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독립하기 시작한 작은 변화가 어떻게 하나의 교리가 되고, 그 교리가 다시 다른 교리들을 낳으며, 마침내 교회 전체의 모습을 바꾸어 가는지를 보여 주는 살아 있는 영적 계보가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오늘 우리 안에서 어떤 생각과 사랑을 ‘잉태’하고 있으며, 그것이 장차 어떤 ‘자손’을 낳게 될 것인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 됩니다.

 

 

 

AC.340, 창4:1,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4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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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AC.338-340)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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