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And unto the man he said, Because thou hast hearkened unto the voice of thy wife, and hast eaten of the tree of which I commanded thee, saying, Thou shalt not eat of it; cursed is the ground for thy sake; in great sorrow shalt thou eat of it all the days of thy life. (3:17)



AC.238

 

그다음에는 이성(rational)의 상태가 어떻게 되었는지가 묘사됩니다. 곧 그것이 동의(consent)하였고, 그 결과 스스로를 저주하였으며, 지옥(infernal)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참된 이성(reason)은 남아 있지 않고, 단지 추론(ratiocination)만 남게 되었습니다. (17) The quality of the rational is then described, in that it consented, and thus cursed itself, and became infernal, so that reason no longer remained, but ratiocination. (verse 17)

 

 

해설

 

이 글은 AC.237의 연속입니다. 앞 구절에서는 교회를 의미하는 ‘여자’가 own을 사랑하게 되어 진리를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여자를 다스려야 했던 ‘이성(rational) 자체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원래 이성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받아 진리를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이성(reason)은 자기 스스로 진리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이성은 주님의 빛 아래 있을 때 가장 건강하게 작용합니다.

 

그런데 이성은 의지와 애정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에 동의(consent)하였습니다. 이것이 결정적인 타락입니다. 감각이 먼저 유혹했고, 의지가 그것을 좋아했으며, 마지막으로 이성이 그것을 정당화한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성이 스스로를 저주하였다’고 말합니다. 이것 역시 주님께서 저주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성이 자신의 본래 기능을 버리고, 자기 사랑과 감각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지옥 상태로 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reason’과 ‘ratiocination’의 차이입니다. 한국어로는 둘 다 ‘이성’ 또는 ‘추리’로 번역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는 두 단어를 엄격히 구분합니다.

 

Reason’은 주님의 빛 안에서 진리를 분별하는 참된 이성입니다. 반면 ‘ratiocination’은 이미 결론을 정해 놓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논리를 사용하는 추론입니다. 다시 말해, reason은 진리를 찾기 위해 생각하지만, ratiocination은 자기 생각을 옹호하기 위해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겸손한 사람은 ‘무엇이 진리인가?’를 묻습니다. 이것은 reason입니다. 그러나 자기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은 ‘내 생각이 왜 옳은가?’를 증명하려 합니다. 이것은 ratiocination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타락 이후 인간에게 이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이성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끝없는 추론과 논쟁이 대신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점에서 AC.238AC.229-233의 내용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것입니다. 처음에는 감각을 신뢰했고, 다음에는 own을 사랑했으며, 이제는 그 잘못된 사랑을 이성이 정당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진리를 찾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변호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타락한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잘못된 전제 위에서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성을 진리를 향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합니다.

 

이것이 AC.238의 핵심입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단순히 의지가 타락한 것이 아니라, 이성까지도 그 타락에 동의하였습니다. 그 결과 더 이상 참된 의미의 이성(reason)은 남아 있지 않고,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는 추론(ratiocination)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것을 인간 정신이 지옥 상태로 떨어지는 중요한 단계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AC.239, 창3:14-19, ‘18절 개요’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An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it bring forth unto thee, and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창3:18)AC.239 저주(curse)와 황폐(vastation)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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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7, 창3:14-19, ‘16절 개요’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And unto the woman he said, I will greatly 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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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And unto the woman he said, I will greatly multiply thy sorrow and thy conception; in sorrow thou shalt bring forth sons, and thine obedience shall be to thy man [vir], and he shall rule over thee. (3:16)



AC.237

 

교회는 또한 여자(the woman)에 의해 더 자세히 묘사됩니다. 이 여자는 자기 자신(self) 또는 own을 너무 사랑하게 되어 더 이상 진리를 파악할 수 없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다스리게 되어 있는 이성(rational)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16) The church is further described by the “woman,” which so loved self or the own as to be no longer capable of apprehending truth, although a rational was given them that should “rule”. (verse 16)

 

 

해설

 

이 글은 창3:16의 내적 의미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여자’를 한 개인으로 보지 않고 교회(church)의 한 상태로 봅니다. 이전에도 그는 ‘남자(man)를 이해(understanding) 또는 이성(rational)과 관련하여 설명했고, ‘여자(woman)를 의지(will) 또는 애정(affection)과 관련하여 설명해 왔습니다.

 

그런데 태고교회의 이 후손들은 점차 own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했고, 그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perception)했습니다. 그러나 타락이 시작되면서 사랑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주님을 향하던 사랑이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여자가 own을 너무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자존감이나 자기 보존 본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삶의 중심에 두고, 자기 판단과 자기 욕망을 최고로 여기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더 이상 진리를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진리는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지식이 아닙니다. 진리는 사랑과 결합되어야 비로소 보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왜곡되면 이해도 왜곡됩니다. 자기 사랑이 강해질수록 사람은 진리를 진리로 보기 어려워집니다. 진리가 무엇이냐보다, 그것이 자기에게 유리하냐 불리하냐가 더 중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지각은 잃어버렸지만, 아직 ‘이성(rational)은 남겨 두셨습니다. 그래서 AC.237은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다스리게 되어 있는 이성이 주어져 있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다스린다(rule)는 건 억압하거나 강제한다는 게 아닙니다. 의지와 애정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태고교회 초기에는 사랑 자체가 주님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도의 이성적 통제가 크게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왜곡되기 시작하자, 주님께서는 인간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이성이라는 새로운 수단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가 천적 인간(celestial man)과 영적 인간(spiritual man)을 구분하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봅니다. 그러나 영적 인간은 먼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통해 선으로 인도됩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전자의 상태를 잃어버리고 후자의 상태로 이동하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AC.237은 단순한 심판 말씀이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자기 사랑 때문에 진리를 잃어버린 교회의 비극을 말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께서 아직 이성이라는 수단을 남겨 두셨다는 희망도 보여줍니다.

 

결국 이 구절은 타락 이후 인간 상태의 중요한 변화를 설명합니다. 본래 인간은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했습니다. 그러나 own이 사랑의 중심이 되자 그 지각은 사라졌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인간이 완전히 멸망하지 않도록 이성(rational)을 주셔서, 비록 예전처럼 직접 지각하지는 못하더라도 진리를 배우고 분별하며, 다시 주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이것이 AC.237에서 ‘여자’와 ‘다스리는 이성’이 의미하는 깊은 뜻입니다.

 

 

 

AC.238, 창3:14-19, ‘17절 개요’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And unto the man he 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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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6, 창3:14-19, ‘15절 개요’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And I will put enmity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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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And I will put enmity between thee and the woman, and between thy seed and her seed; he shall trample upon thy head, and thou shalt bruise his heel. (3:15)



AC.236

 

그러므로 모든 인류가 지옥으로 돌진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15) Therefore to prevent all mankind from rushing into hell, the Lord promised that he would come into the world. (verse 15)

 

 

해설

 

이 글은 창세기 3장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희망의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인간의 타락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자기 사랑이 생겼고, 감각과 자기 이성을 신뢰하기 시작했으며, 주님의 음성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점점 더 own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 결과 태고교회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길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AC.236에 이르면 분위기가 갑자기 바뀝니다. 지금까지 인간이 한 일이 아니라, 이제 주님께서 하실 일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류는 단순히 약간 잘못된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대로 두면 ‘모든 인류가 지옥으로 돌진(rushing into hell)’할 정도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표현은 매우 강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과장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관점에서 인간은 중립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자연스럽게 지옥적 사랑들, 곧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가 계속 타락하면, 결국 인간은 천국과의 연결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의 강림은 단순히 새로운 종교를 세우기 위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류 전체를 위한 구원의 개입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만일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다면 인간과 천국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졌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창3:15는 흔히 ‘원복음(Protoevangelium)이라고 불립니다. 타락 직후에 이미 구원의 약속이 주어진 것입니다. 인간이 막 넘어졌을 때, 주님은 이미 회복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시각에서는 이 약속이 단순히 미래의 한 사건 예고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사랑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주님을 떠나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 주님은 인간을 되찾기 위한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인간의 타락보다 먼저 있었던 것은 주님의 사랑이며, 인간의 실패보다 더 강한 것은 주님의 구원 의지였습니다.

 

이 점에서 AC.236AC.223과도 연결됩니다. 인간은 주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었지만, 주님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돌아섰지만, 주님은 인간에게서 돌아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최종 표현이 바로 성육신(Incarnation), 곧 주님의 세상 강림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창3:15는 단순한 예언 구절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중심을 미리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첫 부분에서 이미 복음의 핵심이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타락했지만, 주님은 모든 인류가 지옥으로 돌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친히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AC.236은 창세기 3장의 어두운 흐름 속에 처음 비치는 새벽빛과 같습니다. 타락 이야기가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인간의 역사보다 더 깊은 곳에서 이미 주님의 구원 계획이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창3은 단순히 죄의 시작에 관한 장이 아니라, 동시에 구원의 시작이 선포되는 장이기도 한 것입니다.

 

 

 

AC.237, 창3:14-19, ‘16절 개요’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And unto the woman he said, I will greatly 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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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5, 창3:14-19, ‘14절 개요’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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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se thou hast done this, thou ar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upon thy belly shalt thou go, and dust shalt thou eat all the days of thy life. (3:14)

 

 

AC.235

 

감각(the senses)으로 파악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감각 파트, 이걸 (serpent)이라 한 건데, 이 감각 파트는 스스로를 저주하였고, 지옥(infernal)이 되었습니다. (14) Being unwilling to believe anything that could not be apprehended by the senses, the sensuous part which is the “serpent” cursed itself, and became infernal. (verse 14)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 AC.229-233에서 계속 설명해 온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는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뱀이 저주를 받았다’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실제 뱀이 저주를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 안의 감각 수준(sensuous level)이 자기 본래의 자리를 벗어나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었을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각의 존재’,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감각은 주님께서 주신 것이며, 자연계를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합니다. 문제는 감각이 최종 판단자가 되는 것입니다. 원래 감각은 이해를 섬기고, 이해는 신앙을 섬기며, 신앙은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타락이 시작되면서 이 질서가 뒤집혔습니다. 사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셨으니 그러하다’가 아니라, ‘내가 보고 만지고 이해할 수 있어야 믿겠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것을 뱀의 상태라고 봅니다. 감각은 본래 가장 바깥 단계에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가장 위에 올라가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은 점점 부정되고, 결국 몸과 세상에 속한 것만 실재처럼 보이게 됩니다.

 

특히 AC.235에서 눈에 띄는 표현은 ‘스스로를 저주하였다(cursed itself)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누구도 저주하지 않으십니다. 이전 AC.223에서도 보았듯이, 주님은 결코 얼굴을 돌리지 않으시며, 언제나 자비와 평화 가운데 계십니다. 따라서 저주란 주님께서 어떤 존재를 미워하시거나 벌하시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주님의 질서에서 벗어남으로써 초래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마치 사람이 태양을 등지고, 깊은 동굴로 들어간 뒤 어둠에 갇혔다고 해서 태양이 그 사람을 벌한 것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는 스스로 빛을 떠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뱀의 저주도 이와 같은 원리로 이해합니다. 감각이 주님과 신앙을 섬기는 자리에 머물렀다면 선한 도구가 되었겠지만, 스스로 주인이 되려 했기 때문에, 결국 지옥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235는 단순히 뱀에 대한 심판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시대의 인간에게 주어지는 경고입니다. 인간이 감각과 자기 이성을 신앙 위에 두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단지 ‘확인해 보고 믿겠다’는 정도로 시작, 결국에는 ‘감각으로 증명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영적인 것은 사라지고, 몸과 세상만 남게 됩니다.

 

따라서 AC.235의 핵심은 ‘감각을 사용하지 말라’가 아니라, ‘감각을 주인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감각은 훌륭한 종이 될 수 있지만, 본래 자리를 벗어나면 나쁜 주인이 됩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바로 이 점에서 넘어졌고, 그 결과 감각적 인간은 스스로를 저주, 지옥 상태로 떨어지게 되었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AC.236, 창3:14-19, ‘15절 개요’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And I will put enmity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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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4, 창3:14-19, ‘창3:14-19 본문, 개요’(AC.234-279)

창3:14-19 14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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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19

 

14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se thou hast done this, thou ar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upon thy belly shalt thou go, and dust shalt thou eat all the days of thy life.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And I will put enmity between thee and the woman, and between thy seed and her seed; he shall trample upon thy head, and thou shalt bruise his heel. 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And unto the woman he said, I will greatly multiply thy sorrow and thy conception; in sorrow thou shalt bring forth sons, and thine obedience shall be to thy man [vir], and he shall rule over thee.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And unto the man he said, Because thou hast hearkened unto the voice of thy wife, and hast eaten of the tree of which I commanded thee, saying, Thou shalt not eat of it; cursed is the ground for thy sake; in great sorrow shalt thou eat of it all the days of thy life.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An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it bring forth unto thee, and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In the sweat of thy face shalt thou eat bread, till thou return unto the ground; for out of it wast thou taken; for dust thou art, and unto dust shalt thou return. (3:14-19)

 

개요

 

AC.234

 

여기서는 홍수(the flood)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그 이후 상태가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교회가 스스로를 완전히 파괴하였기 때문에,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실 것이 예언됩니다. The subsequent state of the church down to the flood is here described; and as at that time the church utterly destroyed itself, it is foretold that the Lord would come into the world and save the human race.

 

 

해설

 

이 글은 창세기 3장의 해설이 단순히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가 아니라, 태고교회 전체의 역사와 운명을 다루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지금까지 스베덴보리는 창3의 여러 장면들을 통해 태고교회 후손들이 어떻게 점차 타락해 갔는지를 설명해 왔습니다. 처음에는 자기 사랑이 생겼고, 다음에는 감각과 자기 이성을 신뢰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지각(perception)은 약해지고, 주님의 음성을 두려워하게 되더니, 결국 자신들의 own 속으로 점점 더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AC.234에 이르면 스베덴보리는 이 과정이 단순한 개인의 타락이 아니라 교회 전체의 붕괴 과정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붕괴는 일시적인 약화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를 완전히 파괴하였다(utterly destroyed itself) 표현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할 점은 ‘파괴되었다’가 아니라 ‘스스로를 파괴하였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교회의 몰락은 주님께서 교회를 버리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언제나 인간이 먼저 주님을 떠났고, 진리를 거부했으며,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AC.223에서 ‘주님은 결코 얼굴을 돌리지 않으신다’고 했던 원리가 여기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런데 태고교회의 경우 그 결과가 매우 심각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홍수 직전의 사람들은 자기 사랑과 거짓 확신 속에 깊이 빠져 있었고, 천국으로부터 오는 영향(influx)을 거의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홍수를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교회의 영적 종말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실 것이 예언된다.’

 

창세기 3장은 보통 타락 이야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장을 단순한 타락의 기록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타락과 함께 이미 구원의 약속도 포함되어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스스로를 완전히 구원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가 무너졌고, 그 뒤의 고대교회도 결국 쇠퇴했으며, 유대교회도 타락했습니다. 인간은 반복해서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따라서 어느 시점에 이르면 단순히 예언자나 천사를 보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성육신(Incarnation)을 인류 역사의 중심 사건으로 봅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직접 인간성, 그러니까 인성을 입고 세상에 오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234는 매우 감동적인 글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인간의 실패 이야기였습니다. own, 자기 사랑, 감각의 지배, 신앙의 상실, 체어리티의 소멸, 영적 어둠의 확대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처음으로 희망의 빛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교회는 스스로를 파괴했지만, 즉 파괴를 자초했지만, 주님은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은 반복해서 넘어졌지만, 주님은 구원의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창3의 가장 깊은 의미는 단순히 ‘인간이 타락했다’가 아니라, ‘인간이 타락했음에도 불구, 주님은 구원을 준비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AC.234는 창세기 3장 전체를 바라보는 하나의 열쇠와 같습니다. 이 장은 죄의 시작을 말하는 동시에, 장차 오실 주님에 의한 회복의 시작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이 깊어질수록 오히려 주님의 구원 계획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며,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점을 이 짧은 글 속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AC.235, 창3:14-19, ‘14절 개요’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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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3, 창3:11-13, ‘감각과 기억 지식만으로는 신앙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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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6/28)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6, ‘주 예수 이름 높이어’, 82, ‘성부의 어린 양이입니다.

 

오늘 3 네 번째, 본문은 창3:8-13이고, AC 글 번호로는 218번에서 233입니다.  

 

먼저 본문,

 

8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3:6-7)

 

제목은

 

네가 어디 있느냐 - 타락 이후에도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

 

이며, 다음은 AC.218-233입니다. 그전에 먼저 오늘 범위에 대한 요약 설명 후, 전체 글 중 특별히 몇몇 글을 리딩하겠습니다.  

 

먼저 요약입니다.

 

 

오늘 리딩할 본문 전체의 큰 흐름은 창세기 38절로 13절까지, 곧 타락한 인간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숨는 장면에서 시작,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는 주님의 부르심, 그리고 여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인간 내면의 구조까지를 다루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단순히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숲속에 숨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퍼셉션을 잃어 가면서도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은 상태, 곧 마지막 남은 퍼셉션과 자연적 선 가운데서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느끼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첫 번째 글인 AC.218은 이 장면을 타락 이후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퍼셉션의 마지막 흔적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먼저 8절의 핵심은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귀로 들리는 외적 소리가 아니라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 곧 사람 안에 남아 있던 퍼셉션의 희미한 잔재로 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본래 주님의 뜻을 직접 지각하던 사람들이었지만, 타락이 진행되자 그 지각, 즉 퍼셉션은 거의 사라지고, 이제는 마치 멀리서 들리는 희미한 음성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음성을 기쁨으로 듣지 못하고 두려움으로 듣습니다. 이는 주님이 변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주님의 음성이 순수한 상태에서는 평안과 기쁨이지만, 악을 의식하는 상태에서는 책망과 두려움으로 경험됩니다.

 

그날 바람이 불 때는 단순한 저녁 시간이 아니라, 교회가 아직 완전한 밤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낮의 빛을 잃어 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곧 아직 얼마간의 퍼셉션이 남아 있어 자신들이 타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상태입니다. 완전히 악에 빠진 사람은 숨지도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 사람들은 숨고 부끄러워합니다. 그래서 이 숨음은 절망의 표시만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아직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 감각이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숨었다는 말도 주님의 진노를 피해 달아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의 얼굴은 자비, 평화, 사랑, 모든 선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가 피한 것은 무서운 얼굴이 아니라 자비의 얼굴이었습니다. 이상하지요? 자비의 얼굴을 피하다니요! 문제는 주님의 얼굴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상태였습니다. 악을 의식하는 사람은 사랑의 빛조차 불편하게 느끼며, 자기 상태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얼굴을 돌리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얼굴을 돌린 것입니다. 참고로,자비는 마음이 겸손한 사람들이,은혜는 머리가 겸손한 사람들이 찾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자연적 선 안으로 물러난 상태로 봅니다. 이미 천적 이노센스와 밝은 퍼셉션은 잃었지만, 아직 자연적 선은 남아 있었습니다. 이 자연적 선은 완전한 영적 선은 아니지만, 부끄러워할 줄 알고, 악을 악으로 느끼며, 자기 상태를 어느 정도 의식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선한 바탕입니다. 특히 나무가 단수로 언급되는 것은, 이전에는 많았던 퍼셉션의 풍성함이 이제 거의 사라지고 단 하나의 희미한 흔적처럼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본문의 해당 부분도 수많은 퍼셉션 가운데 단 하나의 희미한 흔적만 남아 있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9절과 10절에서는 주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주님이 아담의 위치를 모르셔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 질문은 정보를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상태를 스스로 인정하고 고백하게 하시는 질문입니다. 주님은 강제로 회개시키지 않으십니다. 먼저 사람에게 자기 상태를 보게 하시고, 스스로 말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질문은 장소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너는 지금 어떤 사랑 안에 있느냐?’,너는 지금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는, 상태를 묻는 영적 질문입니다.

 

AC.227228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퍼셉션, 내적 딕테이트, 양심이 어디서 오는지를 설명합니다. 사람은 혼자 생각하고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라, 늘 영들과 천사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악한 영들이 사람을 악과 거짓으로 끌어가려 할 때, 천사들은 그것을 막고 선과 진리를 보존하려 합니다. 이때 사람 안에는 내적 전투가 일어나며, 이것이 태고교회 사람에게는 퍼셉션으로, 후대의 사람에게는 양심으로, 거듭나는 사람에게는 내적 딕테이트로 느껴집니다. 천사들은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 생각과 애정이 신앙의 진리사랑의 선에 맞는지, 반대되는지를 사람 자신보다 훨씬 더 섬세하게 지각합니다.

 

11절로 13절에서는 책임 전가의 구조가 드러납니다. 주님께서 네가 먹었느냐?’ 물으시자 아담은 여자에게, 여자는 뱀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변명 장면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여기서 은 실제 동물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 파트, 곧 보고 느끼고 확인할 수 있는 것만 믿으려는 인간의 가장 바깥 부분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이성은 자기 사랑 때문에 이 감각 파트에게 속임을 당했고, 결국 주님과 말씀을 그대로 믿기보다 먼저 자기 감각과 자기 판단으로 확인하려 하였습니다.

 

이후 AC.230-232는 그 타락의 뿌리를 더 넓게 설명합니다. 태고교회 말기의 주된 악은 세상 사랑보다 자기 사랑이었습니다. 곧 재물을 쌓으려는 욕망보다, 자기 판단을 주님의 말씀보다 높이 두려는 욕망이 더 근본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악이 모든 시대의 교회에 반복된다고 말합니다. 홍수 이전 교회, 홍수 이후 고대교회, 유대교회, 주님 이후의 교회,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까지, 근본 악은 동일합니다. 그것은 주님과 말씀보다 자기 자신과 자기 감각을 더 믿는 것입니다.

 

AC.232는 이 문제를 현대적으로 더 무겁게 만듭니다. 옛사람들은 감각으로 불신했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기억 지식과 과학적 지식으로 그 불신을 확증할 수 있습니다. 지식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지식이 주님을 섬기려 하는 대신, 주님을 재판하는 법정이 될 때 어둠이 깊어집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AI와 과학 문명의 시대에도 매우 날카롭게 들립니다. 문제는 지식이 많다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으로 주님 없이도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 AC.233은 이 흐름의 결론처럼 읽을 수 있습니다.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 지식만으로 파악하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연계의 작은 것 하나도 완전히 알기 어려운데, 하물며 영적이고 천적인 생명의 신비를 감각과 철학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사람은 악한 영들의 영향 아래 악으로 기울지만, 그것을 사랑하고 동의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책임을 집니다. 반대로 선은 천사들을 통해 주님에게서 오지만, 사람은 그것을 마치 자기 스스로 행하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실행해야 합니다. 이 구조는 감각적 사고로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는 인간 자유와 주님의 인플럭스가 함께 보존되는 핵심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전체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타락한 뒤에도 곧바로 완전히 버려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음성은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퍼셉션과 자연적 선을 통해 여전히 들립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악을 의식할 때, 주님의 자비로운 얼굴을 두려워하고 숨습니다. 주님은 그런 인간을 정죄하기보다 먼저 부르시고, 스스로 자기 상태를 인정하고 고백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계속 자기 감각과 자기 지식을 주님보다 위에 두면, 그 희미한 빛마저 어둠으로 바뀌고, 마침내 신앙과 체어리티를 잃게 됩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단지 에덴의 옛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 각 사람에게 주어지는 질문입니다. ‘너는 지금 어디 있느냐? 너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아니면 자기 감각과 자기 지식 속에 숨어 있는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아래는 오늘 본문에 해당하는 전체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218, 창3:8,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AC.218-225)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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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9, 창3:8,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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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0, 창3:8, ‘거니시는 소리’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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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1, 창3:8, ‘그 날 바람이 불 때’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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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2, 창3:8,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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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3, 창3:8, ‘여호와 하나님의 낯’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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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4, 창3:8, ‘숨은지라’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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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5, 창3:8, ‘동산 나무 사이’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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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6, 창3:9-10,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AC.226-228)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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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7, 창3:9-10, 지각(perception),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 양심(conscience) 및 시험(temptations)의 기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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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8, 창3:9-10, '천사들의 지각(perception)의 정교함'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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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9, 창3:11-13,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AC.229-233)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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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0, 창3:11-13, ‘태고교회 말기 사람들을 지배하던 사랑’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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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1, 창3:11-13, ‘모든 교회 시대를 꿰뚫는 근본 악의 뿌리’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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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2, 창3:11-13, ‘옛 시대보다 훨씬 더 악한 오늘날’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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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3, 창3:11-13, ‘감각과 기억 지식만으로는 신앙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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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 링크들 중 오늘 예배 때 시간 관계상 리딩을 위한 선별 글들입니다.

 

 

AC.218, 창3:8,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AC.218-225)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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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2, 심화 1, ‘민6:25-26’

AC.222.심화 1. ‘민6:25-26’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민6:25, 26) Jehovah make 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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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3, 창3:8, ‘여호와 하나님의 낯’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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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6, 창3:9-10,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AC.226-228)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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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7, 창3:9-10, 지각(perception),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 양심(conscience) 및 시험(temptations)의 기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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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9, 창3:11-13,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AC.229-233)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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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3, 심화 1, ‘그 책임도 자기에게 있습니다’

AC.233.심화 1. ‘그 책임도 자기에게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는 악을 행하고 주님에게서 돌아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일을 하는 것은 그와 함께 있는 악한 영들입니다.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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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 주님,

 

오늘 우리는 에덴동산에 숨은 아담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변함없이 자비와 평화의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지만, 우리는 때때로 두려움과 자기 생각 속에 숨어 주님의 음성보다 우리 자신의 판단을 더 의지하였습니다.

 

그러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기 전에 이미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으시며, 오늘도 ‘네가 어디 있느냐?’ 사랑으로 부르고 계심을 알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작은 선과 진리를 지켜 주시고, 주님의 말씀 앞에서 늘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지식과 판단보다 주님의 지혜를 더 신뢰하게 하시고, 숨거나 변명하지 않고 정직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생명이시며 빛과 평화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6-28(D1)

 

2657, 4, 창3.4, 2026-06-28(D1)-주일예배(창3,8-13, AC.218-233), ‘네가 어디 있느냐 - 타락 이후에도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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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6/21, 창3:6-7, AC.207-217),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진 인간의 내면 상태’

※ 오늘(2026/06/21)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5, ‘큰 영화로신 주’, 찬81, ‘주는 귀한 보배’입니다. 오늘은 창3 세 번째, 본문은 창3:6-7이고, AC 글 번호로는 207번에서 217번입니다. 먼저 본문, 6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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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3.심화

 

1. ‘그 책임도 자기에게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는 악을 행하고 주님에게서 돌아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일을 하는 것은 그와 함께 있는 악한 영들입니다. 그렇다고 그 악한 영들이 스스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자기 것으로 만든 악 자체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은 악을 행하고 주님에게서 돌아서며, 그 책임도 자기에게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오직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AC.233 [2])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 특유의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지만, 악은 사람에게 귀속된다’는 구조를 압축해서 말한 것이어서, 처음 읽으면 서로 충돌하는 말처럼 보입니다. 하나씩 풀면 이렇습니다.

 

첫째, ‘사람은 자기 스스로는 악을 행하고 주님에게서 돌아설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말은, 인간의 own, 곧 주님에게서 분리된 자기 자신만 놓고 보면 그 안에는 선과 진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 자체가 독립된 생명체처럼 스스로 선을 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사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주님에게서 흘러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own으로 기울면, 그 방향은 자연히 자기 사랑, 세상 사랑, 거짓, 악으로 흐르게 됩니다.

 

둘째, ‘그러나 실제로 그 일을 하는 것은 그와 함께 있는 악한 영들입니다’라는 말은, 사람 안에 악한 충동과 생각이 일어날 때, 그것이 고립된 개인 심리만의 현상이 아니라 영계와의 연결 속에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은 언제나 영들 및 천사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선한 애정과 진리는 천사들을 통해 주님에게서 들어오고, 악한 욕망과 거짓된 설득은 악한 영들과의 교류를 통해 들어옵니다. 그래서 사람이 악으로 기울 때, 그 악은 그 사람과 결합된 악한 영들을 통해 활동합니다.

 

셋째, ‘그렇다고 그 악한 영들이 스스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자기 것으로 만든 악 자체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라는 말은 더 깊은 층위입니다. 악한 영들도 독립된 생명의 근원이 아닙니다. 그들도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습니다. 다만 그 생명을 자기 사랑과 거짓 안에서 뒤틀어 받기 때문에, 그들에게서는 악한 작용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악한 영이 ‘자기 힘으로’ 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랑하고 자기 것으로 만든 악, 곧 그들의 지배적 사랑이 그들을 움직입니다. 사람도, 영도, 천사도 모두 생명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받는 존재입니다. 차이는 그 생명을 어떤 사랑으로 받아들이느냐에 있습니다.

 

넷째, ‘그럼에도 사람은 악을 행하고 주님에게서 돌아서며, 그 책임도 자기에게 있습니다’라는 말은, 여기서 책임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악한 영들이 영향을 미친다고 해서 사람이 꼭두각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고, 동의하며, 자기 것으로 삼을 자유가 있습니다. 악이 들어와도 그것을 자기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기뻐하고, 합리화하고, 실행하면 그것은 그 사람의 것이 됩니다. 그래서 악한 영들이 작용하더라도, 사람이 그것에 동의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면 책임은 사람에게 귀속됩니다.

 

다섯째, ‘그런데도 그는 오직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며 살아갑니다’라는 말은 모든 문장의 기초입니다. 선한 사람도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고, 악한 사람도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습니다. 천사도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고, 악한 영도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습니다. 주님은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천사는 그 생명을 사랑과 선으로 받아들이고, 악한 영은 그것을 자기 사랑과 거짓으로 뒤틀어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같은 태양 빛이 좋은 나무에는 열매를 맺게 하지만, 썩은 것에서는 악취를 일으키는 것처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은 그 받는 그릇의 상태에 따라 선으로도, 악의 활동처럼도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전체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악의 근원은 주님이 아니라 사람의 own과 그와 결합된 악한 영들의 상태에 있으며, 사람은 악한 영들의 영향을 받아 악을 행하지만, 그것을 사랑하고 동의함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책임을 지며, 그럼에도 그가 존재하고 생각하고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생명 자체는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뜻입니다.

 

쉽게 비유하면, 전기는 하나입니다. 좋은 기계에 들어가면 빛과 온기를 내고, 고장 난 기계에 들어가면 불꽃과 고장을 일으킵니다. 전기가 악한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장치의 상태가 문제입니다. 주님의 생명도 그렇습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은 오직 생명과 선이지만, 그것을 자기 사랑과 거짓의 구조가 받아들이면 악한 작용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한편으로는 ‘모든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악은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AC.233, 창3:11-13, ‘감각과 기억 지식만으로는 신앙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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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And he said, Who told thee that thou wast naked? Hast thou eaten of the tree whereof I commanded thee that thou shouldest not eat? And the man said, The woman whom thou gavest to be with me, she gave me of the tree, and I did eat.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woman, Why hast thou done this? And the woman said, The serpent beguiled me, and I did eat. (3:11-13)

 

AC.233

신앙의 신비들(the mysteries of faith)을 기억 지식으로 탐구하려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려 하거나, 갈빗대 하나가 가슴과 심장의 가장 미세한 섬유들을 다스리려 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연계의 숨은 것들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아서, 사람이 그것들을 연구한다 해도 겨우 하나를 발견할까 말까 하며, 연구하는 동안에도 수많은 오류에 빠집니다. 이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자연계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 하나에도 수많은 신비가 숨어 있는데, 하물며 영적, 천적 생명의 숨은 진리들을 연구할 때는 얼마나 더 그러하겠습니까! To explore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memory-knowledges is as impossible as it is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or for a rib to govern the finest fibrils of the chest and of the heart. He who would investigate the hidden things of nature, which are innumerable, discovers scarcely one, and while investigating them falls into errors, as is well known. How much more likely is this to be the case while investigating the hidden truths of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where myriads of mysteries exist for one that is invisible in nature!

 

[2] 예를 하나만 들어 봅시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는 악을 행하고 주님에게서 돌아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일을 하는 것은 그와 함께 있는 악한 영들입니다. 그렇다고 그 악한 영들이 스스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자기 것으로 만든 악 자체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은 악을 행하고 주님에게서 돌아서며, 그 책임도 자기에게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오직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반대로 사람은 자기 스스로는 선을 행하거나 주님께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이것은 천사들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천사들 또한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이 하십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마치 자기 스스로 하는 것처럼 선을 행하고 주님께로 돌이킬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감각과 기억 지식, 그리고 철학으로는 결코 이해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기준으로 삼으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부인하게 됩니다. 다른 모든 영적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As an illustration take this single example: of himself man cannot but do what is evil, and turn away from the Lord. Yet man does not do these things, but the evil spirits who are with him. Nor do these evil spirits do them, but the evil itself which they have made their own. Nevertheless man does evil and turns himself away from the Lord, and is in fault; and yet he lives only from the Lord. So on the other hand, of himself man cannot possibly do what is good, and turn to the Lord, but this is done by the angels. Nor can the angels do it, but the Lord alone. And yet man is able as of himself to do what is good, and to turn himself to the Lord. These facts can never be apprehended by our senses, memory-knowledge, and philosophy, but if these are consulted will be denied in spite of their truth. And it is the same all through.

 

[3]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신앙의 문제에서 감각과 기억 지식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은 단순히 의심(doubt)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부인(denial)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곧 짙은 어둠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온갖 정욕(cupidities)에 빠집니다. 왜냐하면 거짓을 믿는 사람은 거짓을 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영적이고 천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되면, 몸과 세상에 속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자신과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고, 이렇게 하여 거짓으로부터 정욕과 악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From what has been said it is evident that those who consult sensuous things and memory-knowledges in matters of belief, plunge themselves not only into doubt, but also into denial, that is, into thick darkness, and consequently into all cupidities. For as they believe what is false, they also do what is false. And as they believe that what is spiritual and celestial has no existence, so they believe that there is nothing else but what is of the body and the world. And so they love all that belongs to self and the world, and in this way do cupidities and evils spring from what is false.

 

 

해설

 

이 글은 AC.232의 내용을 절정으로 끌고 가는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왜 감각과 기억 지식만으로는 신앙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는가’를 설명합니다. 먼저 그는 매우 강렬한 비유를 사용합니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어렵다는 뜻이 아니라, 접근 방식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현미경 없이 세균을 보려 하거나, 귀로 색깔을 들으려 하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합니다. 방법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진리를 감각과 철학만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도 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특히 2항은 스베덴보리 신학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는 ‘사람은 스스로 악을 행하지만, 동시에 악한 영들의 영향 아래 있다’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책임은 사람에게 있다고 합니다. 또 ‘사람은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지만, 마치 자기 스스로 하는 것처럼 선을 행해야 한다’ 합니다. 언뜻 보면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바로 이것을 예로 듭니다. 감각과 철학만으로는 이런 진리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으로만 접근하면, 곧바로 ‘악한 영이 시켰다면 왜 내가 책임을 지나?’, ‘주님이 선을 행하게 하신다면 왜 내가 상을 받지?’,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온다면 자유는 어디 있지?’ 같은 질문이 나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영계의 실제 구조를 보면, 이 모든 것이 동시에 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영향(influx)을 받지만, 기계가 아니며, 주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악한 영들은 영향을 미치지만, 강제로 결정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책임을 지며, 동시에 도움을 받습니다. 이것은 감각으로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영적 차원에서는 동시에 참인 진리입니다.

 

목사님께서 자주 다루시는 인플럭스(influx)와 자유(freedom)의 문제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이 끊임없이 영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말합니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붙들지 못하면, 결국 숙명론이나 자기 공로주의 가운데 하나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에 매우 중요한 결론을 내립니다. 사람이 영적, 천적 세계를 부정하기 시작하면 결국 남는 것은 몸(body)과 세상(world)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몸과 세상만이 실재라고 믿게 되면, 자연스럽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삶의 중심이 됩니다. 그 결과 거짓이 정욕을 낳고, 정욕이 다시 악을 낳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흥미로운 순서를 제시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악한 욕망 때문에 거짓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거짓이 먼저이고, 그 거짓이 정욕과 악을 낳는다’고 말합니다. 즉 ‘영적인 것은 없다’, ‘천국은 없다’, ‘주님은 없다’, ‘나는 내 힘으로 산다’는 거짓이 자리 잡으면, 그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거기서 수많은 악이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233은 단순한 철학 비판이 아닙니다. 그것은 창3에서 시작된 뱀의 길이 어디까지 가는지를 보여주는 결론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확인해 보고 믿겠다’로 시작합니다. 다음에는 ‘감각으로 확인되지 않으니 믿지 않겠다’가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적인 것은 없다. 몸과 세상만이 전부다’에 이르게 됩니다. 그 결과 사람은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거짓에서 정욕이, 정욕에서 악이 끝없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AC.233에서 경고하는 가장 깊은 영적 어둠입니다.

 

 

심화

 

1. ‘그 책임도 자기에게 있습니다

 

 

AC.233, 심화 1, ‘그 책임도 자기에게 있습니다’

AC.233.심화 1. ‘그 책임도 자기에게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는 악을 행하고 주님에게서 돌아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일을 하는 것은 그와 함께 있는 악한 영들입니다.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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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2, 창3:11-13, ‘옛 시대보다 훨씬 더 악한 오늘날’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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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2.심화

 

1. ‘18세기 중엽 과학 지식과 문명으로도

 

18세기 중엽의 과학 지식과 문명을 가지고도 이 AC.232 본문처럼 말한다면, AI, AGI 시대로 들어가는 오늘 21세기 과학 문명을 가지고는 어떤 말을 하게 될까요?

 

 

만일 18세기 중엽의 스베덴보리가 당시 막 태동하던 근대 과학과 계몽주의 문명을 바라보며 이미 이렇게 말했다면, 오늘날 AI AGI 시대의 문명을 보면서는 아마 훨씬 더 강한 표현을 사용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아마 과학 자체를 비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광물학, 야금학, 해부학, 생리학, 천문학, 수학, 기계공학 등 당시 유럽 최고 수준의 과학자이자 발명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문제 삼았던 것은 과학이 아니라 과학이 차지하는 자리였습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억 지식(scientifica)은 하인(servant)이어야지 주인(master)이 되어서는 안 되며, 진리를 이해하도록 돕는 계단이어야지 진리를 재판하는 법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마 그는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옛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 믿으려 하였다. 그러나 현대인은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기계가 계산한 것만 믿으려 하고, 알고리즘이 예측한 것만 참으로 여기며, 통계와 데이터로 측정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한다. 그리하여 감각의 지배는 이제 기계의 지배라는 새로운 옷을 입게 되었다.’

 

스베덴보리가 오늘의 시대를 보았다면 가장 우려했을 것은 아마 AI의 발전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영혼을 기계적 사고방식에 맞추어 축소시키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타락은 ‘주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참이다’에서 ‘내가 이해해야 참이다’로 옮겨간 것이었습니다. 근대의 타락은 다시 ‘내가 증명할 수 있어야 참이다’가 되었고, AI 시대의 타락은 어쩌면 ‘기계가 계산할 수 있어야 참이다’라는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동시에 매우 중요한 점을 덧붙였을 것입니다. 천국의 가장 중요한 것들은 계산될 수 없고 측정될 수도 없습니다. 사랑(love)은 측정되지 않으며, 자비(mercy)는 데이터가 아니고, 체어리티(charity)는 알고리즘이 아니며, 지혜(wisdom)는 정보량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사랑하기 때문에 인간이며, 천사는 사랑하기 때문에 천사입니다. 반대로 지옥은 사랑을 잃어버릴 수는 있어도 지식을 잃어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에게 지성(intelligence)과 지혜(wisdom)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지성은 진리를 아는 능력이고, 지혜는 그 진리를 사랑하는 능력입니다. AI는 어쩌면 인간보다 훨씬 더 큰 지성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계산이 아니라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AC.232를 오늘의 언어로 다시 쓴다면, 어쩌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요? ‘옛날 사람들은 감각으로 자신을 속였으나 현대인은 기술로 자신을 확증한다. 그리고 가장 깊은 어둠은 거짓을 믿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데서 생긴다. 왜냐하면 사람이 더 이상 하늘을 향하여 가르쳐 주십시오 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나는 이미 알고 있어 하는 순간, 그곳에서 뱀은 다시 말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AC.232, 창3:11-13, ‘옛 시대보다 훨씬 더 악한 오늘날’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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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And he said, Who told thee that thou wast naked? Hast thou eaten of the tree whereof I commanded thee that thou shouldest not eat? And the man said, The woman whom thou gavest to be with me, she gave me of the tree, and I did eat.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woman, Why hast thou done this? And the woman said, The serpent beguiled me, and I did eat. (3:11-13)

 

AC.232

그러나 오늘날은 옛 시대보다 훨씬 더 악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사람들은 고대인들이 알지 못했던 기억 지식들을 사용, 감각의 불신(incredulity of the senses)을 확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어둠을 낳았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이 원인으로부터 생겨난 어둠이 얼마나 큰지를 안다면, 크게 놀랄 것입니다. At this day, however, it is much worse than in former times, because men can now confirm the incredulity of the senses by memory-knowledges unknown to the ancients, and this has given birth to an indescribable degree of darkness. If men knew how great is the darkness from this cause they would be astounded.

 

 

해설

 

이 글은 AC.231의 내용을 더욱 심화한 내용입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모든 시대의 교회가 같은 근본적 악, 곧 주님과 말씀보다 자기 자신과 자기 감각을 더 신뢰하는 악에 빠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오늘날의 상태가 과거보다 더 심각하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의외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 때문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지식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평생 과학자였고, 광물학, 해부학, 천문학, 수학, 공학을 연구한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학문과 과학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지식이 주님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주님을 부정하기 위한 무기가 될 때입니다.

 

태고교회 말기 사람들도 자기 감각을 신뢰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지식은 오늘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제한적이었습니다. 반면 현대인은 엄청난 양의 과학, 철학, 역사, 심리학, 사회학, 기술 문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감각과 자기 이성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훨씬 정교하게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옛사람은 ‘나는 보지 못했으니 믿지 않겠다’ 정도였다면, 현대인은 수많은 학문적 체계를 동원하여 ‘영혼은 존재할 수 없다’, ‘천국은 심리적 투사일 뿐이다’, ‘신앙은 진화 과정의 부산물이다’와 같은 복잡한 논증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감각의 불신을 확증한다(confirm the incredulity of the senses)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감각이 이미 ‘보지 못했으니 믿지 않겠다’고 말하는데, 지식은 거기에 수많은 논리와 증거와 체계를 덧붙여 그 불신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어둠’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무지’를 어둠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잘못 사용된 지식이 더 큰 어둠을 만든다고 말합니다.

 

무지한 사람은 진리를 들으면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지식으로 완전히 무장한 사람은 진리가 들어올 틈 자체를 막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종종 단순한 사람들보다 자기 지혜를 절대화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더 위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점은 AC.215의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와도 연결됩니다. 문제는 지혜가 아니라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태도입니다.

 

또한 AC.232는 현대 문명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놀라운 통찰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그는 18세기 사람인데도, 이미 인간이 과학과 지식을 이용하여 영적 세계를 부정하는 시대가 올 것을 보고 있는 듯합니다.

 

목사님께서 종종 AGI, ASI, AI 시대 이야기를 하셨던 것이 생각납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기술 자체를 두려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 기술과 지식을 이용, 더욱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더욱 주님을 배제하려 한다면, 그것은 AC.232가 말하는 어둠의 확대라고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의 핵심은 ‘지식이 많아서 어둡다’가 아닙니다. ‘지식을 이용하여 주님 없이도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어둡다’는 것입니다.

 

결국 AC.232는 매우 역설적인 진리를 말합니다. 지식은 빛이 될 수도 있고, 어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향해 열려 있을 때, 지식은 지혜가 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을 향할 때, 지식은 거짓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만일 사람들이 이 어둠이 얼마나 큰지 안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그가 말하는 어둠은 무지의 어둠이 아닙니다. 자신이 밝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주님의 빛을 차단하고 있는 상태의 어둠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그것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깊은 어둠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심화

 

1. ‘18세기 중엽 과학 지식과 문명으로도

 

 

AC.232, 심화 1, ‘18세기 중엽 과학 지식과 문명으로도’

AC.232.심화 1. ‘18세기 중엽 과학 지식과 문명으로도’ 18세기 중엽의 과학 지식과 문명을 가지고도 이 AC.232 본문처럼 말한다면, AI, AGI 시대로 들어가는 오늘 21세기 과학 문명을 가지고는 어떤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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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3, 창3:11-13, ‘감각과 기억 지식만으로는 신앙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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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1, 창3:11-13, ‘모든 교회 시대를 꿰뚫는 근본 악의 뿌리’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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