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3:22)

 

AC.301

 

또 하나의 아르카나는, 만일 그들이 신앙의 신비들을 배웠더라면 영원히 멸망하였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하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 사정은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삶의 질서를 거꾸로 뒤집어, 자기 자신과 자기 proprium으로부터가 아니면 살려고도 하지 않고, 지혜로워지려고도 하지 않는 상태가 되면, 그들은 신앙에 관한 모든 것을 들을 때마다 그것이 과연 사실인지 아닌지를 자기 스스로 따져 보려 합니다. 그런데 그 판단을 자기 자신과 자기의 감각 및 기억 지식으로부터 내리기 때문에, 결국은 반드시 부인하기(denial)에 이르게 되고, 이어서 blasphemyprofanation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마침내는 거룩한 것들과 속된 것들을 서로 뒤섞는 일조차 거리낌없이 행하게 됩니다. 사람이 이러한 상태에 이르면, 다른 삶에서는 더 이상 구원의 희망이 남지 않을 정도로 정죄됩니다. 이는 profanation으로 인해 한 번 뒤섞인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계속 뒤섞인 채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것에 대한 어떤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것과 결합된 속된 것에 대한 생각도 동시에 떠오르게 됩니다. 그 결과 그는 정죄 받은 자들의 사회 외에는 어느 사회에도 있을 수 없게 됩니다. 이처럼 결합되어 있는 생각은 다른 생명에서 매우 예민하게 지각됩니다. 중간 영계의 영들조차 그것을 아주 분명히 알아차리며, 천사적 영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들은 한 사람의 단 하나의 생각만으로도 그 사람의 성품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한 번 결합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다시 분리하는 것은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만일 사람이 그 고통이 어떠한지를 안다면, 그는 지옥 자체를 피하려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profanation을 피하려 할 것입니다. The other arcanum is that had they been instructed in the mysteries of faith they would have perished eternally, which is signified by the words, “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The case is this: When men have become inverted orders of life, and are unwilling to live, or to become wise, except from themselves and from their own, they reason about everything they hear respecting faith, as to whether it is so, or not; and as they do this from themselves and from their own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it must needs lead to denial, and consequently to blasphemy and profanation, so that at length they do not scruple to mix up profane things with holy. When a man becomes like this, he is so condemned in the other life that there remains for him no hope of salvation. For things mixed up by profanation remain so mixed up, so that whenever any idea of something holy presents itself, an idea of something profane that is conjoined with it is also there, the consequence of which is that the person cannot be in any society except one of the damned. Whatever is present in any idea of thought in consequence of being conjoined with it, is most exquisitely perceived in the other life, even by spirits in the world of spirits, and much more so by angelic spirits, so exquisitely indeed that from a single idea they know a person’s character. The separation of profane and holy ideas when thus conjoined cannot be effected except by means of such infernal torment that if a man were aware of it he would as carefully avoid profanation as he would avoid hell itself.

 

 

해설

 

AC.301에서 스베덴보리는 본 절인 창3:22의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는 말씀의 참뜻을 설명합니다. 겉으로만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이 영생 얻는 것을 막으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심판이 아니라 자비로운 보호를 의미한다 설명합니다.

 

본문의 첫 번째 핵심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신앙의 가장 깊은 신비를 알려 주지 않는 것이 오히려 주님의 자비라는 점입니다. 이미 삶의 질서가 뒤집혀 자기 자신과 자기 proprium만을 신뢰하는 사람은,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이더라도 그것을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감각과 memory-knowledge로 판단하려 합니다. 따라서 더 많은 진리를 알게 될수록 더 깊은 부인과 반대에 빠질 위험이 커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사람이 결국 ‘부인’, ‘blasphemy’, 그리고 ‘profanation’으로 나아간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논리의 흐름은 매우 분명합니다. 자기 지성만을 절대 기준으로 삼으면, 먼저 진리를 의심하게 되고, 계속해서 거절하게 되며, 마침내는 거룩한 것마저 속된 것과 뒤섞어 버리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왜 profanation이 다른 죄보다 특별히 심각한지를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거룩한 것과 악한 것이 한 사람 안에서 동시에 결합되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거룩한 것을 생각할 때마다 그것과 결합된 속된 것도 함께 떠오르므로, 두 가지를 다시 분리하기가 극히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창3:24에서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것도, 사람이 이런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한 주님의 보호로 연결됩니다.

 

본문의 마지막 부분은 사후 세계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는 사람의 생각 하나에도 그 사람의 전체 상태가 담겨 있으며, 영들은 물론 천사들까지도 그 생각 하나만으로 사람의 성품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설명을 덧붙이는 이유는, profanation이 단순히 외적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 상태를 영원히 뒤섞어 버리는 일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AC.301의 중심 메시지는, 주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신앙의 깊은 신비를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은 그들을 버리시기 때문이 아니라, 더 큰 영적 파멸인 profanation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한 자비로운 섭리라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창3:22의 말씀은 영생을 막으시는 선언이 아니라, 사람이 영원한 멸망에 빠지지 않도록 생명나무의 길을 잠시 막아 두시는 주님의 사랑과 보호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심화

 

1. ‘profanation

 

 

AC.301, 심화 1, ‘profa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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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세 교회와 오늘날

 

 

AC.301, 심화 2, ‘중세 교회와 오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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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세속적 배신, 이중 첩자

 

 

AC.301, 심화 3, ‘세속적 배신, 이중 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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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1, 심화 6,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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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blasphemyprofanation

 

 

AC.301, 심화 8, ‘blasphemy와 profa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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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성령 모독(12:31, 32)

 

 

AC.301, 심화 9, ‘성령 모독’(마12:31,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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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profanation 관련 대표 구절들

 

 

AC.301, 심화 10, ‘profanation 관련 대표 구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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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0, 창3:22, 첫 번째 아르카나, ‘여호와 하나님’(Jehovah God)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0 첫 번째 아르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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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0.심화

 

11. ‘Jehovih

 

AC.300에서 Jehovih’는 단순한 언어학적 호기심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말씀에서 하나님의 여러 호칭이 사용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중요한 호칭입니다.

 

Jehovih’는 히브리어 성경에 자주 나오지는 않지만, ‘Jehovah’(여호와)와는 구별되어 사용되는 하나님의 호칭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차이를 매우 중요하게 보았으며, 단순히 다른 이름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의미와 연결하여 이해합니다.

 

AC를 비롯한 스베덴보리의 여러 저작을 종합하면,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Jehovah’는 주님의 존재 자체, 곧 신적 사랑과 신적 존재(Divine Esse)를 강조하는 호칭입니다.

 

God 또는 Elohim’은 신적 진리, 신적 능력, 신적 역사(Divine Truth, Divine Power)를 강조하는 호칭입니다.

 

Jehovih’는 이 둘 사이의 연결점에서 사용되는 호칭으로, 특히 주님께서 말씀하시거나 계시하시며 신적 진리를 나타내시는 측면을 강조할 때 사용됩니다. 다시 말해, 신적 존재이신 여호와께서 신적 진리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시는 경우에 나타나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예언서에서 자주 나오는 Lord Jehovih’를 특별히 주목합니다. 이 표현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신적 존재이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고 심판하시며 구원하시는 신적 역사를 나타내기 때문에 사용된다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에스겔과 이사야에서는 Lord Jehovih’가 매우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예언자들에게 주님의 말씀이 전달되고, 교회를 가르치며, 심판과 회복을 선포하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Jehovih’는 계시와 말씀, 곧 신적 진리의 전달이라는 성격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AC.300의 흐름에서 Jehovih’가 언급되는 이유도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Jehovah’, ‘God’, ‘Jehovih 등 서로 다른 호칭들이 여러 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한 분 주님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나타내는 호칭임을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Jehovah’는 신적 존재와 사랑을, ‘God’은 신적 진리와 능력을, 그리고 Jehovih’는 신적 존재이신 주님께서 신적 진리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시고 역사하시는 측면을 강조하는 호칭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모두 창1:26 우리’가 여러 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의 다양한 신적 작용을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AC.300의 논증과 연결됩니다.

 

 

 

AC.300, 창3:22, 첫 번째 아르카나, ‘여호와 하나님’(Jehovah God)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0 첫 번째 아르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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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0, 심화 10, ‘출7:1’

AC.300.심화 10. ‘출7: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출7:1) AC.300에서 스베덴보리가 출7:1을 인용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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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0.심화

 

10. ‘7: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7:1)

 

 

AC.300에서 스베덴보리가 출7:1을 인용한 이유는, 사람을 가리켜서도 말씀에서 ‘god’(신)이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를 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에서는 천사들이 ‘gods’라고 불리는 여러 구절을 인용하였다면, 여기서는 모세라는 한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다’는 말씀을 통해 같은 원리를 확인합니다.

 

7:1에서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모세가 실제로 신이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여전히 사람이며 피조물입니다. 다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권위를 받아 바로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대표하는 위치에 세워졌기 때문에 ‘’이라 불린 것입니다.

 

이 점은 이어지는 말씀에서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라는 말씀은 모세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씀을 전하는 대표자이며, 아론은 모세의 말을 대신 전하는 대언자임을 보여줍니다. 즉, 모세가 ‘’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의 본질이 신적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권위를 맡아 전달하는 대표적 역할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AC.300의 중심 논지를 그대로 뒷받침합니다. 말씀에서 천사나 사람을 ‘god’ 또는 ‘gods’라 할 수 있는 것은 그들 자신에게 신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와 권위를 받아 그분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명칭은 그들에게 적용되지만, 그 명칭의 근거는 언제나 주님께 있습니다.

 

또한 이 구절은 앞서 인용한 요10:34-35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이라 말씀하셨는데, 모세는 바로 그 원리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바로에게 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신 같이’ 되었다 불렸습니다.

 

AC.300에서 출7:1을 인용한 핵심 이유는, 말씀에서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과 권위를 받아 대표하는 위치에 있을 때, ‘’으로 불릴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통해 스베덴보리는 ‘god’ 또는 ‘gods’라는 명칭은 본질적인 신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와 권위를 받아 그분을 대표하는 직분과 역할을 의미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증명하며, 창1:26의 ‘우리’가 여러 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성을 받아 섬기는 천사들을 가리킨다는 자신의 해석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AC.300, 심화 11, ‘Jehovih’

AC.300.심화 11. ‘Jehovih’ AC.300에서 ‘Jehovih’는 단순한 언어학적 호기심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말씀에서 하나님의 여러 호칭이 사용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중요한 호칭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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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0, 심화 9, ‘요10:34-35’

AC.300.심화 9. ‘요10:34-35’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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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0:34-35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10:34-35)

 

 

AC.300에서 스베덴보리가 요10:34-35를 인용한 이유는, 앞서 시82:6을 인용하며 제시한 해석이 주님 자신의 말씀에 의해 직접 확인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시82:6에서는 ‘너희는 신들이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요10:34-35에서 주님께서는 바로 그 구절을 직접 인용하시며 그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따라서 AC.300에서 이 구절은 앞선 시편의 해석을 확증하는 가장 중요한 신약의 증거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신 뒤, 곧이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설명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여기서 사람들을 ‘신들’이라 하는 이유는 그들 자신의 본성이나 본질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신들’이라는 명칭은 그들 안에 있는 어떤 고유한 신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적 진리를 받아들이고 전달하는 역할과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점은 AC.300의 핵심 논지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천사들이나 말씀을 맡은 사람들을 ‘gods’라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신이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와 능력이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명칭은 그들에게 적용되지만, 그 명칭의 근거는 언제나 주님에게 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라 말씀하시며, 시82:6의 표현이 정당한 성경 표현임을 친히 인정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통해 ‘신들’이라는 호칭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곧 ‘신들’은 여러 신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를 받아 대표하는 자들에게 붙는 말씀의 표현입니다.

 

AC.300에서 요10:34-35를 인용한 핵심 이유는, 주님께서 친히 시82:6을 해석하시면서 ‘신들’이라는 호칭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에게 적용된다고 밝히셨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통해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천사들이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gods’라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신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으로부터 받은 신적 진리와 능력에 근거한 것임을 확증하며, 창1:26의 ‘우리’가 여러 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성을 받아 섬기는 천사들을 가리킨다는 자신의 해석을 더욱 굳게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AC.300, 심화 10, ‘출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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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82:6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82:6)

 

 

AC.300에서 스베덴보리가 시82:6을 인용한 이유는 앞서 인용한 시82:1, 시89:6, 시136:2-3의 논지를 직접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절은 말씀에서 천사들, 또는 주님의 신적 진리를 받아 대표하는 자들을 실제로 ‘신들(gods)이라 한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증거입니다.

 

82:6에서 주님은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여러 참된 신이 존재한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구절은 주님께 속한 자들이, 주님의 신적 진리와 능력을 받아 그분을 대표하기 때문에, 그들을 가리켜 ‘신들’이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특히 이 구절은 ‘신들’과 ‘지존자의 아들들’이라는 두 표현을 나란히 사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통해 ‘신들’이라는 명칭은 독립된 신성을 가진 존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지존자’이신 주님께 속한 존재를 가리키는 명칭임을 보여 준다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모든 존귀함과 권위는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지존자이신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구절은 AC.300의 논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앞에서 인용한 시82:1, 시89:6, 시136:2-3은 ‘gods’라는 명칭이 말씀에 실제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면, 시82:6은 주님께서 친히 어떤 존재들을 향해 ‘너희는 신들이다’ 말씀하셨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gods’라는 표현 자체가 성경적인 표현이며,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AC.300의 결론은 언제나 같습니다. 천사들이나 주님의 신적 진리를 받아 대표하는 자들이 ‘신들’로 불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전달하기 때문이지, 그들 자신이 신적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붙는 ‘신들’이라는 명칭은 어디까지나 주님한테서 유래한 것이며,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AC.300에서 시82:6을 인용한 핵심 이유는, 말씀에서 천사들이나 주님의 신적 진리를 받아 대표하는 자들을 실제로 ‘신들’이라 한다는 사실을 성경으로 증명하면서도, 그 명칭은 그들 자신의 신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지존자이신 주님으로부터 받은 신적 진리와 능력에 근거한 것임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창1:26의 ‘우리’가 여러 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성을 받아 섬기는 천사들을 가리킨다는 AC.300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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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36:2-3

 

2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3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6:2–3) Confess ye to the God of gods, confess ye to the Lord of lords (Ps. 136:2–3).

 

 

AC.300에서 스베덴보리가 시136:2-3을 인용한 이유는 앞의 시82:1, 시89:6과 같은 주제를 더욱 분명하게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곧 말씀에서 천사들을 ‘gods’(신들) 또는 ‘lords’(주들)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결코 주님과 동등한 존재가 아니며, 오직 주님으로부터 받은 신적 진리와 능력 때문에 그러한 명칭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136:2-3은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에 이어 ‘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고 합니다. 겉으로만 보면 ‘신들’과 ‘주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를 여러 신이나 여러 주가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 ‘주들 중에 뛰어난 주’라는 표현 자체가 오직 한 분이신 주님께서 모든 ‘gods’와 ‘lords’의 근원이시며, 그들 위에 계심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점은 명칭의 관계입니다. 만일 천사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신성과 주권을 가진 존재라면, 주님을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 ‘주들 중에 뛰어난 주’라고 부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모든 ‘gods’와 ‘lords’가 오직 한 분 주님께 속해 있음을 선언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독립된 신적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신성과 권세를 받아 섬기는 존재들임을 보여줍니다.

 

이 구절은 AC.300의 중심 논지를 한층 확장합니다. 앞의 시82와 시89에서는 천사들이 ‘gods’라고 불리는 이유를 설명하였다면, 여기서는 그들이 ‘lords’라고도 불릴 수 있음을 함께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참된 하나님은 오직 ‘God of gods’이시며, 참된 주는 오직 ‘Lord of lords’이십니다. 천사들에게 붙는 명칭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며, 그들 자신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AC.300에서 시136:2-3을 인용한 핵심 이유는, 말씀에서 천사들이 ‘gods’나 ‘lords’라고 불릴 수는 있지만, 그 모든 명칭의 근원과 주체는 오직 한 분 주님이심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통해 스베덴보리는 창1:26의 ‘우리’가 여러 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와 능력을 받아 섬기는 천사들을 가리킨다는 자신의 해석을 다시 한번 성경으로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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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89:6

 

무릇 구름 위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신들 중에서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 (89:6) Who in the sky shall be compared unto Jehovah? Who among the sons of the gods shall be likened to Jehovah? (Ps. 89:6).

 

 

AC.300에서 스베덴보리가 시89:6을 인용한 이유는 시82:1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 구절 역시 천사들을 말씀에서 ‘gods’ 또는 ‘the sons of the gods’라고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성경적 근거로 제시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천사들에게 붙여진 이러한 명칭이 그들 자신의 신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으로부터 받은 신적 진리와 능력을 나타낸다는 점을 밝히고자 합니다.

 

89:6은 먼저 ‘무릇 구름 위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라고 묻습니다. 이어 ‘신들 중에서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라고 다시 묻습니다. 이 두 질문은 모두 같은 결론을 향합니다. 곧 여호와와 견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 ‘신들(the sons of the gods)은 여호와와 같은 신적 존재들이 아니라, 여호와와 분명히 구별되는 피조물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을 중요하게 봅니다. 말씀은 ‘신들 중에서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신들’이 여호와와 동등한 신적 존재라는 말이 아니라, 여호와와 비교되는 피조물임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그들을 ‘신들’이라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신성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신적 진리와 능력을 받아 섬기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AC.300의 중심 논지와도 연결됩니다. 천사들을 가리켜 때로 ‘gods’ 또는 ‘the sons of the gods’라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님의 신적 진리와 능력을 받아 전달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있는 모든 지혜와 능력은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오는 것이므로, 그들은 결코 여호와와 동등한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AC.300에서 시89:6을 인용한 핵심 이유는, 말씀에서 천사들을 ‘신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여호와와 비교될 수 없는 피조물이며, 오직 주님으로부터 받은 신적 진리와 능력 때문에 그러한 명칭을 받을 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통해 스베덴보리는 창1:26의 ‘우리’가 여러 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성을 받아 섬기는 천사들을 가리킨다는 자신의 해석을 다시 한번 성경으로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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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82:1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82:1) God hath stood in the congregation of God, he will judge in the midst of the gods (Ps. 82:1);

 

 

AC.300에서 스베덴보리가 시82:1을 인용한 이유는 앞에서 살펴본 여러 구절과는 약간 다릅니다. 앞의 인용들이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 구절은 왜 천사들이나 사람들도 말씀에서 ‘gods’(신들)이라고 불리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증거로 사용됩니다.

 

82:1은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라고 말합니다. 겉으로만 보면 하나님 외에도 여러 ‘신들’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여러 신의 존재를 말하는 구절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참 하나님이시며, 여기서 ‘gods’는 주님으로부터 신적 능력을 받아 주님의 뜻을 수행하는 천사들, 또는 그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AC.300은 바로 이 점을 입증하기 위해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천사들은 자기 자신에게서 어떤 신성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gods’라 불리는 이유는 주님의 신적 진리와 능력을 받아 전달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름은 그들에게 붙지만, 실제 신성은 전적으로 주님께 속합니다.

 

구절의 앞부분과 뒷부분도 이러한 의미를 잘 보여줍니다. 구절은 먼저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라고 하여 유일하신 하나님을 제시합니다. 이어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고 하는데, 여기서 ‘신들’은 하나님과 나란한 또 다른 신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신적 진리와 능력을 받아 섬기는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심판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며, 천사들은 그분의 신적 질서를 받들어 섬기는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여기의 ‘gods’는 심판의 주체가 아니라, 주님의 신적 통치 아래 있는 수용자들입니다.

 

이 인용은 AC.300의 앞부분과도 직접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1:26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를 설명하면서, 이 ‘우리’는 여러 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성을 받아 주님의 일을 수행하는 천사들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시82:1에서 천사들을 ‘gods’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설명을 뒷받침하는 성경적 근거가 됩니다.

 

AC.300에서 시82:1을 인용한 핵심 이유는, 말씀에서 천사들을 ‘gods’라고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신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신 주님의 신적 진리와 능력을 받아 전달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임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통해 스베덴보리는 창1:26의 ‘우리’가 여러 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성을 받아 역사하는 천사들을 가리킨다는 자신의 해석을 성경으로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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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1:14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31:14)

 

 

AC.300에서 스베덴보리가 시31:14를 인용한 이유는 앞서 인용한 사49, 사55, 시18과 동일한 원리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이 한 절을 깊이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두 이름이 서로 구별된 의미를 가지고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간결한 증거로 제시합니다.

 

31:14은 ‘여호와여’라고 주님을 부른 뒤, 곧이어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고백합니다. 같은 한 절 안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두 이름이 함께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이 우연한 반복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의미에 따른 의도적인 구별이라고 봅니다.

 

먼저 ‘여호와여’라는 부름은 생명과 존재의 근원이신 주님 자신을 향한 신뢰를 나타냅니다. 사람은 오직 스스로 존재하시며, 생명 자체이신 분께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의 ‘여호와’는 주님의 신적 존재와 본질을 나타냅니다.

 

이어지는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는 고백은 그 주님께서 자신의 하나님으로서 실제로 역사하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여기의 ‘하나님’은 사람 안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신적 능력과 역사를 나타냅니다. AC.300은 이러한 구별을 근거로 ‘여호와’는 본질을, ‘하나님’은 능력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짧은 한 절은 AC.300의 핵심 논지를 매우 간결하게 보여줍니다. 한 분 주님을 가리키면서도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두 이름이 함께 사용되는 것은, 주님의 신적 존재와 신적 능력이 서로 다른 두 존재가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서 구별되면서도 하나임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AC.300에서 시31:14를 인용한 핵심 이유는, 한 절 안에 함께 나타나는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두 이름을 통하여, 말씀이 주님의 신적 본질과 신적 능력을 각각 다른 이름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절은 앞서 인용된 사49, 사55, 시18과 같은 원리를 더욱 간명하게 증명하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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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8: 2, 28-29, 31

 

2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28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29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31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18: 2, 28-29, 31)

 

AC.300에서 스베덴보리가 시18:2, 28-29, 31을 인용한 이유도 앞의 이사야 본문들과 동일한 맥락입니다. 그는 시편 전체를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일정한 원리에 따라 구별되어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이 구절들을 인용합니다.

 

18은 다윗이 주님의 구원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그 찬양 속에는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두 이름이 자연스럽게 교차하여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2절에서는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한 뒤 곧이어 ‘나의 하나님이시요’라고 말합니다. 또 28절에서는 ‘여호와 내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함께 사용되고, 29절에서는 ‘주를 의뢰하고’와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가 나란히 나타납니다. 마지막으로 31절에서는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라고 하여 두 이름을 다시 함께 사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들이 우연한 반복이 아니라 내적 의미에 따른 것이라고 봅니다.

 

먼저 ‘여호와’라는 이름은 흔들리지 않는 반석과 피난처,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반석, 요새, 산성이라는 표현은 모두 변하지 않는 신적 존재와 보호를 상징하며, 이는 스스로 존재하시고, 모든 생명의 근원 되시는 주님의 본질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이 시편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주님의 신적 존재와 사랑을 강조하는 이름으로 사용됩니다.

 

반면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주님께서 실제로 사람을 도우시고 힘을 주시며, 승리를 이루시는 능력의 측면을 나타냅니다.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라는 말씀에서는 주님의 능력이 사람 안에서 역사하여 어둠을 밝히고 원수를 이기게 하시는 모습이 강조됩니다. AC.300은 바로 이러한 점을 들어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신적 능력과 작용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28절의 ‘여호와 내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AC.300의 핵심 사상을 잘 보여줍니다. 여기서는 두 이름이 하나로 결합되어 사용됩니다. 이는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 그분의 능력이 실제로 역사하시는 측면이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가 창2에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중요하게 다루는 것도 바로 같은 이유입니다. ‘여호와’와 ‘하나님’은 서로 다른 두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의 서로 다른 신적 측면을 나타냅니다.

 

마지막으로 31절은 이러한 논의를 결론짓는 역할을 합니다.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라는 말씀은 참된 하나님이 오직 한 분뿐이심을 선언합니다. 다시 말해, ‘여호와’와 ‘하나님’은 서로 다른 신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라, 동일하신 주님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다만 ‘여호와’는 그분의 신적 존재와 본질을, ‘하나님’은 그 신적 본질이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측면을 각각 강조하는 것입니다.

 

AC.300에서 시18:2, 28-29, 31을 인용한 핵심 이유는, 시편 안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두 이름이 서로 구별되면서도 함께 사용되는 예를 통하여, 말씀이 주님의 신적 본질과 신적 능력을 각각 다른 이름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앞서 인용된 사49와 사55의 경우와 같은 원리를 또 다른 말씀을 통해 확인해 주는 증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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