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44에서 스베덴보리는 영을 단순한 ‘생각’이라고 여겼던 사람에게 영은 ‘유기적’이며, 곧 ‘유기적실체’(organicsubstance)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독자에게는 오히려 이 표현이 낯설 수 있습니다. 영이 유기적 실체라면 육체처럼 어떤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인가, 아니면 영에게도 눈이나 뇌 같은 기관이 있다는 뜻인가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그러나 먼저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반박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상대방은 영에게 아무런 연장(extension)도 없다고 생각했고, 결국 영을 ‘생각’ 그 자체라고 여겼습니다. 다시 말해 ‘생각하는존재’와 ‘생각’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스베덴보리는 그 사람이 지금 영이 된 상태에서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매우 섬세하게 촉각을 느끼며, 원하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영은 단순히 남아 있는 ‘생각’이 아니라 실제로 생각하고 감각하는 주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기적실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입니다. 육체의 시각에는 눈이라는 기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내적시각,곧생각’에도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어떤 실체적 토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묻습니다. 생각이 아무것에도 속하지 않은 채 허공에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생각하는 주체 역시 단순한 추상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는 영을 ‘유기적실체’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뇌를 예로 드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영혼이나 영이 아무런 유기적 토대도 필요 없는 ‘생각자체’라면, 인간에게 내적 감각의 기관인 그토록 큰 뇌가 왜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영혼이 근육에 작용하여 다양한 움직임을 일으킨다는 점도 제시합니다. 여기서 그의 논지는 영혼을 육체의 어느 한 부분과 동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고 생각하며 작용하는 존재를 아무런 구조도 실체도 없는 추상적인 ‘생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데 있습니다.
다만 AC.444만으로 ‘유기적실체’를 자연계의 물질과 같은 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은 영이 어떤 종류의 실체로 이루어져 있는지, 영적 기관과 육체적 기관은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 영의 연장은 자연적 공간의 연장과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문제까지 이 한 글에서 답하려 한다면 본문보다 앞서 나가게 됩니다. 여기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영이 ‘아무것도아닌것’이나 ‘순수한생각’이 아니라는 데까지입니다.
그러므로 AC.444에서 ‘유기적실체’라는 표현의 핵심은 먼저 영의 ‘실재성’에 있습니다. 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육체이고, 죽으면 그 생각만 희미하게 남는 것이 아니라, 지금 생각하고 원하고 느끼는 ‘나’의 생명 자체가 영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붙들면 스베덴보리가 왜 영을 단순한 생각이라고 하는 관념을 그토록 강하게 바로잡으려 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은 생각 그 자체가 아니라 ‘생각하는존재’이며, 바로 그 존재가 실제로 살아 있고 감각하며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AC.444심화1)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8
나는이세상에서알고지냈던많은사람들과대화를나누었습니다.그것도오랫동안,곧몇달에서몇년에걸쳐서그렇게했습니다.비록내적인음성이기는하지만,이세상의친구들과이야기할때처럼분명한음성으로대화를나누었습니다.때로우리대화의주제는사후인간의상태였습니다.그들은육체의삶이끝난뒤에도사람이이와같이살아간다는사실을육체의삶동안에는아무도알지못하거나믿지않는다는것을몹시놀라워했습니다.그런데실제로는삶이계속되며,그것도사람이희미한삶에서밝은삶으로옮겨가는방식으로계속되고,주님을신앙하는사람들은더욱더밝아지는삶으로들어간다고했습니다. 그들은자신들이살아있다는사실을친구들에게알려달라고,그리고내가이곳에있는그들의친구들의상태에관해그들에게여러가지를이야기해주었던것처럼,자신들의상태가어떠한지도글로써서친구들에게알려달라고부탁했습니다.그러나나는그들의친구들에게이런것을말하거나글로써보낸다해도믿지않을것이며,오히려망상이라고하고비웃으며,믿기전에표적이나기적을요구할것이므로,나는단지그들의조롱거리가될뿐이라고대답했습니다. 그리고이런일들이참되다는것을믿을사람은아마도매우적을것입니다.사람들은마음속으로영들의존재를부정하며,그것을부정하지않는사람들조차누군가가영들과대화할수있다는말은들으려하지않기때문입니다. 고대에는영들에관하여이와같은불신의상태가없었습니다.그러나오늘날은그렇습니다.사람들은터무니없는추론(crazyratiocination)을통해영이무엇인지를알아내려고하며,자신들의정의와가정으로영에게서모든감각을빼앗아버립니다.그리고더학식있는사람이되고자할수록더욱그렇게합니다. I have conversed with many who had been known to me in this life (and this I have done for a long time—for months and years), in as clear a voice, although an inward one, as with friends in this world.The subject of our conversation has sometimes been the state of man after death, and they have wondered exceedingly that during the bodily life no one knows or believes that he is so to live when the bodily life is over, when yet there is then a continuation of life, and such a continuation that the man passes from an obscure life into a clear one, and those who are in faith in the Lord into a life that is more and more clear.They have desired me to tell their friends that they are alive, and to write and tell them what their condition is, even as I had related to themselves many things about that of their friends here.But I replied that were I to tell their friends such things, or to write to them about them, they would not believe, but would call them delusions, would scoff at them, and would ask for signs or miracles before they would believe; and I should merely expose myself to their derision.And that these things are true, perchance but few will believe.For at heart men deny the existence of spirits, and even those who do not deny it are unwilling to hear that anyone can speak with spirits.In ancient times there was no such state of belief in regard to spirits, but so it is now when by crazy ratiocination men try to find out what spirits are, and by their definitions and suppositions deprive them of all the senses, and do this the more, the more learned they desire to be.
해설
AC.448은 AC.443부터 이어져 온 체험 기록을 마무리하면서, 이 단락 전체의 출발점이었던 ‘사후에도인간은실제로살아있는가?’라는 문제로 다시 돌아갑니다. 이번에는 일반적인 영들과의 대화가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이 세상에서 실제로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죽은 뒤 그들과 다시 대화했다고 보고하는 체험을 제시합니다. 더욱이 그것이 잠깐의 체험이 아니라 ‘몇달에서몇년’에 걸쳐 계속되었고, 비록 ‘내적인음성’이지만 이 세상의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처럼 분명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체험으로 보고하는 증언이라는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크게 놀라워한 것은 단순히 ‘죽은뒤에도삶이있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육체 안에 살 때에는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이처럼 계속 살아간다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놀라워했습니다. 그들 자신은 죽은 뒤에도 여전히 자기 자신이며, 생각하고 말하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AC.447의 초보 영이 자신이 이미 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던 장면과도 이어집니다. 육체의 삶 동안에는 몸을 자기 존재 자체와 너무 강하게 동일시하기 때문에, 몸을 벗고도 ‘나’가 그대로 존재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사후의 삶을 ‘희미한삶에서밝은삶으로’(fromanobscurelifeintoaclearone)옮겨 가는 것으로 묘사한 부분입니다. 이것은 AC.443과 정확히 호응합니다. AC.443의 사람은 육체의 생명이 사라지면 영에게는 희미하고 불분명한 삶만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단락의 마지막인 AC.448에서는 정반대로 말합니다. 육체의 죽음은 삶을 희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분명한 상태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AC.443에서 시작된 문제가 AC.448에서 다시 돌아와 하나의 결론을 이룹니다.
그러나 여기서 모든 사람의 사후 상태가 동일하게 밝아진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희미한삶에서밝은삶으로’ 옮겨 간다고 한 뒤, 특별히 ‘주님을신앙하는사람들’(thosewhoareinfaithintheLord)은 ‘더욱더밝아지는삶’(alifethatismoreandmoreclear)으로 들어간다고 구별합니다. 적어도 이 글의 표현만 놓고 보면, 사후에 의식과 지각이 더욱 분명해진다는 것과 주님을 신앙하는 사람의 삶이 계속해서 더욱 밝아진다는 것은 구별해서 읽어야 합니다. 다만 AC.448하나만으로 천국과 지옥을 포함한 모든 사후 상태를 상세히 설명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죽은 이들이 살아 있는 친구들에게 자신들의 상태를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는 대목도 눈길을 끕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에, 지상에 있는 친구들도 그것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그런 사실을 전하거나 글로 써 보낸다 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고, 망상이라고 하거나 비웃으며, 믿기 전에 표적이나 기적을 요구할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증거를 하나 더 제시하면 누구나 믿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의 존재 자체를 마음속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특별한 증언이나 체험을 전해 주어도 그것이 곧 믿음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마지막 부분에서 AC.445-446의 논의와 다시 연결됩니다. 사람들은 영의 존재를 입으로는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실제로 누군가가 영과 대화할 수 있다고 하면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배경 가운데 하나로 당시 사람들이 영에 관해 만들어 낸 지나치게 추상적인 관념을 지적합니다. 영이 무엇인지 설명하려고 정의와 가정을 거듭하면서 오히려 영에게서 모든 감각을 제거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실제 존재가 아니라, 이름만 남은 추상적 개념에 가까워집니다. AC.444의 ‘단지생각’, AC.445의 ‘추상적생각’, AC.446의 연장과 실체를 둘러싼 논쟁이 여기에서 하나로 모입니다.
‘더학식있는사람이되고자할수록더욱그렇게한다’는 마지막 표현 역시 학문이나 깊은 사고 자체를 부정하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442에서는 오히려 태고 시대 사람들의 사고가 오늘날보다 훨씬 깊었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AC.446에서 문제가 된 것도 지성 자체가 아니라 ‘지성을향한길을막는’ 추상적 논쟁이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비판받는 것은 배움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정의와 가정을 실제보다 앞세운 나머지 영을 살아 있는 존재로 이해할 가능성 자체를 없애 버리는 사고입니다. 지성은 실재를 더 깊이 이해하는 길이 될 수 있지만, 반대로 인간의 개념 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길 때에는 오히려 실재를 가리는 장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AC.443-448을 함께 읽으면 하나의 일관된 흐름이 드러납니다. 영적 삶은 육체가 사라진다고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며(AC.443), 영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유기적 실체이고(AC.444), 영혼을 추상적 생각으로만 만들면 결국 사후 존속 자체를 믿기 어려워지며(AC.445),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영의 연장과 실체를 부정해서는 안 되고(AC.446), 인간에게서 실제로 감각하고 생각하는 주체는 몸이 아니라 영이며(AC.447), 육체의 죽음 뒤에도 바로 그 인간의 삶이 계속됩니다(AC.448). 그러므로 이 여섯 글이 궁극적으로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죽은뒤에무엇이있는가?’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살아있는나는본질적으로누구인가?’를 묻습니다. 이 단락에서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답은 분명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에 있어서는 영이며, 따라서 육체의 죽음은 인간 자신의 소멸이 아니라 그 생명이 계속되는 상태의 변화입니다. (AC.448해설)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7
어떤초보영(novitiatespirit)이내가영에관해말하는것을듣고는자신이사람이라고생각하면서,‘영이란무엇입니까?’(Whatisaspirit?)라고물었습니다.나는그에게모든사람안에는영이있으며,사람은자신의생명에있어서는영이고,몸은단지사람이땅위에서살아갈수있도록하는것이며,살과뼈,곧몸자체는전혀살지도생각하지도않는다고말했습니다.그가어찌할바를몰라하기에,나는그에게영혼에관해들어본적이있느냐고물었습니다.그러자그는‘영혼이란무엇입니까?’(Whatisasoul?)라고되물으며,‘나는영혼이무엇인지모릅니다’(Idonotknowwhatasoulis)라고대답했습니다.그때나는그에게지금그자신이영혼,곧영이라는사실을말해줄수있도록허락받았습니다.그가내머리위에있으며땅을딛고서있지않다는사실로도그것을알수있다고했습니다.나는그에게이것을지각할수없느냐고물었습니다.그러자그는두려움에사로잡혀달아나면서‘나는영이다!나는영이다!’(Iamaspirit! Iamaspirit!)라고외쳤습니다. A certain novitiate spirit, on hearing me speak about the spirit, asked, “Whatisaspirit?” supposing himself to be a man. And when I told him that there is a spirit in every man, and that in respect to his life a man is a spirit; that the body is merely to enable a man to live on the earth, and that the flesh and bones, that is, the body, does not live or think at all; seeing that he was at a loss, I asked him whether he had ever heard of the soul. “Whatisasoul?” he replied, “Idonotknowwhatasoulis.” I was then permitted to tell him that he himself was now a soul, or spirit, as he might know from the fact that he was over my head, and was not standing on the earth. I asked him whether he could not perceive this, and he then fled away in terror, crying out, “Iamaspirit!Iamaspirit!”
어떤유대인은자신이전적으로몸안에서살고있다고생각했기때문에,그렇지않다는사실을좀처럼납득하지못했습니다.그가영이라는것을보여주었는데도,그는자신이보고들을수있다는이유로여전히자기는사람이라고고집했습니다.이세상에머무는동안몸에몰두하여살아온사람들은이와같습니다.이와같은사례를훨씬더많이덧붙일수도있지만,여기서는사람안에서감각을행하는것은몸이아니라영이라는사실을확인하기위해이몇가지사례만제시했습니다. A certain Jew supposed himself to be living wholly in the body, insomuch that he could scarcely be persuaded to the contrary. And when he was shown that he was a spirit, he still persisted in saying that he was a man, because he could see and hear. Such are they who, during their abode in this world, have been devoted to the body. To these examples very many more might be added, but these have been given merely in order to confirm the fact, that it is the spirit in man, and not the body, which exercises sensation.
해설
AC.447은 AC.443부터 계속되어 온 논의를 매우 직접적인 명제로 모아 줍니다. 앞에서는 사후의 삶이 희미한 것이 아니라는 것, 영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유기적 실체라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영의 실재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안에서실제로감각하는것은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합니다.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이 그 답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사람안에서감각을행하는것은몸이아니라영’입니다.
첫 번째 사례의 ‘초보영’(novitiatespirit)은 사후 세계에 막 들어온 영을 가리킵니다. 그는 이미 몸을 떠나 영으로 존재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여전히 육체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영에 관해 이야기하자 ‘영이란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지식 부족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는 바로 자신이 영인데도 영을 자기 자신과는 별개의 어떤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영혼이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만큼 생전의 영혼과 영에 대한 관념도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모든사람안에는영이있다’고 한 뒤, 더욱 중요한 말을 덧붙입니다. 사람은 ‘자신의생명에있어서는영’이라는 것입니다. 몸은 사람이 땅 위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며, 살과 뼈로 이루어진 몸 자체가 독립적으로 살거나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몸을 무가치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핵심은 아닙니다. 오히려 몸에는 분명한 역할이 있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지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과 사고와 감각의 주체가 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 이 글의 요점입니다.
초보 영이 ‘나는영이다!나는영이다!’라고 외치며 달아나는 장면은 이 차이를 매우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그는 죽은 뒤에도 자신을 자기 자신으로 느끼고 있었고, 생각하고 대화하며 주변을 지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이미 육체를 떠났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지금까지 ‘나’라고 느끼며 보고 듣고 생각하던 존재가 바로 영이었다는 사실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AC.443에서 사후의 삶이 희미해지지 않는다고 했던 이유와 AC.444에서 영을 단순한 생각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던 이유가 이 사례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두 번째 유대인의 사례도 같은 사실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그는 사후에도 보고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여전히 육체를 가진 사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생각에는 ‘보고듣는다’는 것과 ‘몸을가지고있다’는 것이 너무 강하게 결합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이 사례를 제시하는 이유는 정반대의 결론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몸을 떠난 뒤에도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의 설명 안에서는 감각의 근원적 주체가 육체 자체가 아니라 영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이세상에머무는동안몸에몰두하여살아온’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모든 육체적 삶이나 육체에 대한 관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사례에서 문제는 인간 자신을 사실상 몸과 동일시하여, 몸을 떠난 뒤에도 살아 있고 생각하며 감각하는 영적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생전에 ‘나는곧이몸’이라는 관념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으면, 사후에도 자신의 감각이 계속된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몸을 떠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AC.447전체를 읽는 열쇠입니다. ‘감각을행하는것은몸이아니라영’이라는 말은 눈이나 귀 같은 육체의 감각 기관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몸은 영이 이 자연계에서 보고 듣고 느끼기 위한 기관으로 기능합니다. 그러나 감각 기관 자체가 지각의 최종 주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눈이 ‘보는나’인 것도 아니고 귀가 ‘듣는나’인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는 눈과 귀를 통해 보고 듣는 주체가 사람의 영이며, 그렇기 때문에 육체를 벗은 뒤에도 영은 자신의 세계에서 계속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443-447은 하나의 질문을 점점 더 깊게 파고들고 있습니다. 육체가 죽으면 삶이 희미해지는가, 영은 단지 생각에 불과한가, 보이지 않는 영을 실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실제로 보고 듣고 느끼는 주체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AC.447의 답은 매우 선명합니다. 인간은 생명에 있어서는 영이며, 육체는 지상 생활을 위한 기관입니다. 따라서 죽음은 ‘나’라는 감각하고 생각하는 주체가 사라지는 사건이 아니라, 그 주체가 지상 생활을 위해 사용하던 육체를 벗는 사건으로 이해됩니다. 바로 이것이 초보 영이 자신이 이미 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토록 놀랐던 이유이며, 스베덴보리가 이 사례들을 통해 확인하려는 사후 인간의 연속성입니다. (AC.447해설)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6
나는오늘날사람들사이에널리퍼져있는견해,곧영은눈으로볼수없고기억지식(memory-knowledges[scientias])으로도파악할수없기때문에그존재를믿어서는안된다는견해에관하여영들과이야기한적이있습니다.사람들은이런이유로영에게연장(extension)이있다는것뿐아니라영이실체(substance)라는것까지부정하며,실체가무엇인지를두고논쟁합니다.그리고영에게연장이있다는것을부정하고실체에대해서도논쟁하기때문에,영이어떤장소에있다는것역시부정하며,그결과영이인간의몸안에있다는것도부정합니다.그러나가장단순한사람이라도자신의영혼또는영이자기몸안에있다는것은알수있을것입니다. 내가이런말을하자,비교적단순한영들이었던그들은오늘날사람들이그렇게어리석다는사실에놀랐습니다.그리고‘부분없는부분들’(partswithoutparts)과그밖의이와비슷한논쟁의표현들을듣고는,그런것들을터무니없고우스우며익살스러운말이라고하면서,그런것들은지성을향한길을막기때문에마음을조금도차지해서는안된다고했습니다. I have discoursed with spirits concerning the common opinion that prevails among men at the present day, that the existence of the spirit is not to be credited because they do not see it with their eyes, nor comprehend it by their memory-knowledges [scientias], and so they not only deny that the spirit has extension, but also that it is a substance, disputing as to what substance is. And as they deny that it has extension, and also dispute about substance, they also deny that the spirit is in any place, and consequently that it is in the human body; and yet the most simple might know that his soul or spirit is within his body. When I said these things, the spirits, who were some of the more simple ones, marveled that the men of the present day are so foolish. And when they heard the words that are disputed about, such as “partswithoutparts,” and other such terms, they called them absurd, ridiculous, and farcical, which should not occupy the mind at all, because they close the way to intelligence.
해설
AC.446은 AC.444-445에서 다룬 ‘영의연장’과 ‘영의실체’ 문제를 한 단계 더 밀고 나갑니다. 앞에서는 영을 아무런 연장도 없는 ‘추상적생각’으로 보는 관념을 다루었다면, 여기서는 왜 사람들이 그런 관념에 이르게 되는지를 지적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오늘날 사람들은 영을 육안으로 볼 수 없고 자신들이 가진 기억 지식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 존재 자체를 믿기 어려워합니다. 곧 감각으로 확인하거나 기존 지식의 틀 안에서 설명할 수 있는 것만 실재한다고 여기는 태도가 문제의 출발점입니다.
여기서 ‘기억지식’(memory-knowledges[scientias])이라는 표현에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지식이나 학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감각을 통해 얻고 기억 속에 축적한 지식의 범위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영적 실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눈으로 볼 수 없으니 연장이 없고, 연장이 없으니 실체라고 할 수 없으며, 실체가 아니니 어떤 장소에도 있을 수 없다는 식으로 논리가 이어집니다. AC.446은 바로 이러한 추론의 연쇄를 보여 줍니다.
특히 ‘연장→실체→장소’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사람들은 영에게 연장이 없다고 전제한 뒤 영이 실체라는 것도 의심하고, 다시 영이 실체가 아니라면 어디에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자신의 영혼 또는 영이 자기 몸 안에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생각마저 철학적으로 설명하기 곤란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가장단순한사람’도 자신의 영혼 또는 영이 몸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면서, 복잡한 추상적 논의가 오히려 자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을 흐리게 만들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 점에서 AC.446은 단순한 사람과 학식 있는 사람을 흥미롭게 대비시킵니다. 여기서 ‘단순한’ 사람이나 영은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지나친 추상화에 사로잡히지 않고 실제 삶과 경험에서 직접적으로 이해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문맥에 가깝습니다. 그들은 영이 존재하고 자신이 영이라는 사실을 실제로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영의 실체와 장소를 끝없이 논쟁한다는 말을 듣고 오히려 이상하게 여깁니다. 학문적 정교함이 언제나 더 분명한 이해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역설이 여기 있습니다.
‘부분없는부분들’(partswithoutparts)이라는 표현은 바로 그런 추상적 논쟁의 한 예로 제시됩니다. AC.446자체는 이 용어가 어떤 철학적 전통에서 어떤 엄밀한 뜻으로 사용되었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그 배경을 임의로 덧붙이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이 표현을 어떤 목적으로 인용했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교적 단순한 영들은 이런 표현들을 듣고 ‘터무니없고우스우며익살스럽다’고 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특정 철학 용어를 하나하나 논박하는 데 있기보다, 그런 추상적 논쟁이 오히려 영적 실재를 이해하는 길을 막을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의 ‘지성을향한길을막는다’(closethewaytointelligence)는 말이 이 글의 중요한 결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생각이 깊어지는 것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AC.442에서는 오히려 태고 시대 사람들이 오늘날보다 훨씬 깊이 사고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비판하는 것은 실재를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 사고가 아니라, 말과 개념을 계속 추상화한 끝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오히려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사고입니다. 영은 보이지 않으므로 연장이 없고, 연장이 없으므로 실체가 아니며, 실체가 아니므로 어디에도 없다는 식으로 나아가면 결국 ‘존재하지만어디에도없고,살아있지만아무런실체도없는영’이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관념만 남게 됩니다.
AC.444-446을 함께 읽으면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바로잡으려 하는지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영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생각하는 주체이며, 아무런 실체도 없는 추상이 아니라 ‘유기적실체’입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 실재성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사후의 인간은 자신을 실제 존재로 경험하며 보고, 듣고, 느끼고, 원하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글의 초점은 철학을 배척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철학과 지식이 실제 영적 존재를 이해하는 길을 열어 주는가, 아니면 지나친 추상화로 오히려 그 길을 막고 있는가를 묻는 데 있습니다. (AC.446해설)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5
더나아가이런말도했습니다.학자들은죽은뒤에도살아갈영혼,곧영을‘추상적생각’(abstractthought)외에다른것으로믿지않습니다.이것은그들이연장(extension)과연장에속한것을암시하는어떤표현도받아들이려하지않는데서매우분명하게드러납니다.어떤주체(subject)에서떼어내어추상적으로생각한생각자체에는연장이없지만,생각의주체와생각의대상에는연장이있기때문입니다.또한연장이없는대상에대해서도사람들은그것을이해하기위해경계를정하고연장을부여합니다.이것은학자들이영혼또는영을단지생각으로밖에는이해하지못하며,따라서사람이죽으면그것이사라질것이라고생각할수밖에없음을매우분명하게보여줍니다. It was further remarked, that the learned have no other belief than that the soul which is to live after death, that is, the spirit, is abstract thought.This is very manifest from their unwillingness to admit of any term that implies extension and what belongs to extension, because thought abstractedly from a subject is not extended, whereas the subject of the thought, and the objects of the thought, are extended; and as for those objects which are not extended, men define them by boundaries and give extension to them, in order that they may comprehend them.This shows very clearly that the learned have no other conception of the soul or spirit than that it is mere thought, and so cannot but believe that it will vanish when they die.
해설
AC.445는 바로 앞 AC.444에서 한 사람과 나눈 대화를 보다 일반적인 문제로 확대합니다. AC.444의 사람은 영을 아무런 연장도 유기적 실체도 없는 ‘생각’이라고 여겼는데, AC.445에서는 이러한 관념이 그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당시 학자들에게 널리 나타나는 사고방식이라고 지적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핵심은 영혼의 존재를 말하면서도 실제로 그것을 ‘추상적생각’(abstractthought)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이해하는 태도입니다.
여기서 ‘추상적생각’이라는 표현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각하는 ‘누군가’와 그가 생각하는 ‘무엇’을 모두 떼어 낸 채 ‘생각’ 자체만을 하나의 독립적인 것으로 상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생각은 반드시 생각하는 주체에게 속한다고 봅니다. 생각 자체를 주체로부터 추상하면 연장이 없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실제로 생각하는 주체와 그 생각이 향하는 대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을 단순히 ‘생각’이라고 정의하는 순간, 생각하고 지각하며 살아 있는 실제 주체로서의 영은 설명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이 때문에 AC.445에서는 ‘생각의주체’(subjectofthethought)와 ‘생각의대상’(objectsofthethought)을 구별합니다. 이 구별은 앞의 AC.444와 직접 연결됩니다. 사후의 영은 단순히 ‘생각이남아있는상태’가 아니라 실제로 보고, 듣고, 느끼고, 원하고, 생각하는 주체입니다. AC.444에서 영이 ‘유기적실체’라고 한 것도 바로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생각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하는 주체가 있어야 하며, 스베덴보리는 그 주체를 아무런 실체도 없는 추상적인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연장이없는대상에대해서도사람들은경계를정하고연장을부여하여이해한다’는 말은 다소 낯설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사고가 어떤 것을 이해할 때 그것을 전혀 무규정적인 상태로 두기 어렵다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직접 공간적 연장을 가진 것으로 생각할 수 없는 대상조차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경계를 지어 하나의 구별되는 대상으로 파악합니다. 즉 인간의 이해는 어떤 것을 파악하려면 그것을 다른 것과 구별되는 일정한 것으로 생각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을 아무런 형체나 구별도 없는 순수한 추상으로 생각하는 데 근본적인 어려움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AC.445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한 사고방식이 사후의 삶에 대한 믿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지적합니다. 영혼이나 영을 ‘단지생각’이라고 여긴다면 육체가 죽을 때 그 생각도 함께 사라질 것이라고 여기기 쉽다는 것입니다. 생각을 실제로 살아 있는 영적 주체의 활동으로 보지 않고 육체에 붙어 있는 추상적인 현상처럼 생각한다면, 육체가 사라진 뒤에도 그 생각의 주체가 계속 살아간다는 것을 실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영을 추상적 생각으로만 이해하는 관념 안에 이미 사후 존속을 믿기 어렵게 만드는 문제가 들어 있다고 봅니다.
이 점에서 AC.443-445는 하나의 흐름을 이룹니다. AC.443에서는 육체가 사라지면 영의 삶이 희미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다루었고, AC.444에서는 영이 연장도 유기적 실체도 없는 단순한 생각이라는 관념을 한 사람의 사례를 통해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AC.445에서는 그것을 학자들의 일반적인 관념으로 확대합니다. 세 글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문제는 육체에는 강한 실재성을 부여하면서 영에는 그와 같은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사후 세계 체험을 통해 바로 이 관념을 뒤집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말하는 ‘연장’의 문제는 단순히 영이 공간을 얼마나 차지하는가를 묻는 철학적 호기심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 밑에는 ‘영은실제로존재하는실체인가,아니면육체가살아있는동안나타나는추상적인생각에불과한가?’라는 훨씬 근본적인 질문이 놓여 있습니다. AC.445에서 스베덴보리가 경계하는 것은 영을 지나치게 ‘비물질적’으로 생각한 나머지 결국 아무런 실재성도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의 설명에서 사후에 살아가는 영은 생각 그 자체가 아니라 ‘생각하는존재’이며, 바로 그 존재가 죽음 이후에도 자신의 감각과 욕구와 사고를 가지고 계속 살아갑니다. (AC.445해설)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4
이세상에살때영은아무런연장(extension)도가지고있지않다고믿었으며,그런이유로연장을암시하는어떤말도받아들이려하지않았던한사람과대화를나눈적이있습니다.나는그에게,이제자신이영혼또는영이되어시각과청각과후각,매우섬세한촉각,욕구와생각을가지고있으며,자신이마치육체안에있는것과똑같다고여길정도인데,지금은자신에대해어떻게생각하느냐고물었습니다. 그는세상에서그렇게생각하던당시의관념안에머물게되었고,영은생각이라고대답했습니다.나는그에게다시물을수있도록허락받아,그가세상에살때기관,곧눈이라는시각기관이없이는육체의시각이있을수없다는것을알지못했느냐고물었습니다.그렇다면내적시각,곧생각은어떻게가능하겠습니까?생각하려면그것역시어떤유기적실체(organicsubstance)를가지고있어야하지않겠습니까? 그러자그는육체의삶동안영은단지생각일뿐이며,유기적인것이나연장을가진것은전혀없다고생각한것이잘못된관념이었음을인정했습니다. 나는이어서말했습니다.만일영혼또는영이단지생각일뿐이라면인간에게그토록큰뇌가필요하지않을것입니다.뇌전체가내적감각들의기관이기때문입니다.만일그렇지않다면두개골안은텅비어있어도되고,그안에서생각이영처럼활동할수있을것입니다.나는이사실하나만으로도,그리고영혼이근육에작용하여그토록다양한움직임을일으킨다는사실로부터도,영이유기적이라는것,곧유기적실체(organicsubstance)라는것을그가확신할수있다고말했습니다.그러자그는자신의잘못을인정하면서,자신이어떻게그렇게어리석은생각을할수있었는지놀라워했습니다. Conversing with one who while he lived in this world had believed that the spirit has no extension, and on that ground would admit of no word that implied extension, I asked him what he now thought of himself, seeing that now he was a soul or spirit, and possessed sight, hearing, smell, an exquisite sense of touch, desires, thoughts, insomuch that he supposed himself to be exactly as if in the body.He was kept in the idea which he had when he had so thought in the world, and he said that the spirit is thought.I was permitted to ask him in reply, whether, having lived in the world, he was not aware that there can be no bodily sight without an organ of vision or eye?And how then can there be internal sight, or thought?Must it not have some organic substance from which to think?He then acknowledged that while in the bodily life he had labored under the delusion that the spirit is mere thought, devoid of everything organic or extended.I added that if the soul or spirit were mere thought man would not need so large a brain, seeing that the whole brain is the organ of the interior senses; for if it were not so the skull might be hollow, and the thought still act in it as the spirit.From this consideration alone, as well as from the operation of the soul into the muscles, giving rise to so great a variety of movements, I said that he might be assured that the spirit is organic, that is, an organic substance.Whereupon he confessed his error, and wondered that he had been so foolish.
해설
AC.444의 두 번째 사례는 AC.443과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앞의 사람은 영의 존재를 믿으면서도 육체가 사라지면 영의 삶은 희미하고 흐릿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사람 역시 영을 인정했지만, 영에는 아무런 ‘연장’(extension)이 없으며 결국 영은 ‘생각’ 그 자체라고 여겼습니다. 두 사람 모두 영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실재성이 강한 것은 육체이고 영은 그보다 훨씬 덜 실재적인 무엇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는 서로 통합니다.
여기서 ‘연장’이라는 말은 일상적으로 쓰는 ‘길이를늘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문맥에서는 어떤 것이 공간적 크기나 차원을 가지며 일정한 형체를 이루고 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이 사람은 영적인 것은 비물질적이므로 아무런 연장도, 형체도, 유기적 구조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연장을 암시하는 표현 자체를 영에게 적용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에게 영은 어떤 실체라기보다 육체에서 분리된 순수한 ‘생각’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사후의 실제 경험이 그의 관념과 충돌합니다. 그는 이제 영이 되었는데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매우 섬세하게 만지며, 욕구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이 육체 안에 있을 때와 똑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러한 감각과 의식이 생생하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질문합니다. 육체의 시각에도 눈이라는 기관이 필요한데, 그렇다면 ‘내적시각’인 생각에는 아무런 기관이나 실체가 필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 중요한 표현이 ‘유기적실체’(organicsubstance)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려는 것은 영이 우리가 만지는 육체와 같은 물질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글의 범위에서 분명한 것은, 영을 아무런 구조도 형체도 없는 추상적인 ‘생각그자체’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보고 듣고 느끼며 생각하는 영적 삶에도 그 기능을 가능하게 하는 유기적인 실체가 있다는 것이 AC.444의 주장입니다. 따라서 ‘비물질적이다’와 ‘아무런실체가없다’를 같은 뜻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뇌에 관한 논증도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생각이 아무런 유기적 기반도 필요로 하지 않는 순수한 무엇이라면, 왜 인간에게 그토록 큰 뇌가 필요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뇌 전체를 ‘내적감각들의기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영혼이 근육에 작용하여 수많은 서로 다른 운동을 일으킨다는 사실도 함께 제시합니다. 이 두 가지를 통해 그는 영혼 또는 영이 단순한 추상적 사고가 아니라 ‘유기적실체’라는 결론으로 나아갑니다. 이 논증은 AC.444에서 그 사람의 생전 관념을 교정하기 위해 제시된 설명이라는 문맥 안에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이 대목에서는 ‘영이유기적이다’라는 말을 현대의 육체적 기관 개념과 곧바로 동일시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AC.444가 말하는 ‘유기적’은 영에게 육체와 똑같은 뇌나 눈이나 근육이 있다는 단순한 주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적 감각과 생각이 아무런 실체적 기반도 없이 허공에서 작동하는 추상이 아니라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AC.443에서 사후의 삶이 희미한 그림자가 아니라 매우 밝고 분명한 삶이라고 했다면, AC.444에서는 그 삶을 살아가는 영 자체도 단순한 생각이나 관념의 덩어리가 아니라 실제로 보고 듣고 느끼며 생각하는 실체임을 한 단계 더 설명하는 셈입니다.
따라서 AC.443과 AC.444를 함께 읽으면 스베덴보리가 바로잡으려는 두 가지 오해가 선명해집니다. 하나는 ‘육체가없어지면삶도희미해질것’이라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영은형체나구조가없는순수한생각일뿐’이라는 생각입니다. 그의 체험에서 사후의 인간은 희미한 의식으로 떠도는 유령도 아니고, 추상적인 생각만 남은 존재도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 느끼며, 보고 듣고 느끼고 원하고 생각합니다. AC.444에서 그 사람이 자신의 옛 생각을 잘못이었다고 인정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이 실제로 영이 되어 살아 보니, 영을 ‘아무런유기적인것도,연장도없는단순한생각’으로 여겼던 생전의 관념으로는 지금 자신이 경험하는 생생한 삶을 설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AC.444해설)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Some Examples Drawn from Experience with Spirits Concerning What They Had Thought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 about the Soul or Spirit
AC.443
다른삶에서는사람들이육체안에서살았을때영혼과영,그리고사후의삶에관해어떤견해를가지고있었는지를분명하게지각할수있습니다.그들이육체의상태와비슷한상태에놓이면이전과같은방식으로생각하며,그들의생각은마치소리내어말하는것처럼분명하게전달되기때문입니다. 어떤사람의경우,그가세상을떠난지얼마되지않았을때나는그가살아있을때어떤생각을가지고있었는지를지각했으며,그자신도그것을인정했습니다.그는영의존재를믿기는했지만,죽은뒤에는영이어떤희미한삶을살아갈것이라고생각했습니다.육체의생명이거두어지면희미하고흐릿한것외에는아무것도남지않을것이라고여겼기때문입니다.그는생명이육체안에있다고생각했으므로영을하나의유령같은것으로여겼습니다.또한짐승들도사람과거의마찬가지로생명을가지고있는것을보고이러한생각을더욱굳혔습니다. 그러나이제그는영들과천사들이가장큰빛가운데서,가장뛰어난총명과지혜와행복가운데서살아가며,거의묘사하기어려울만큼완전한퍼셉션을누린다는사실에놀랐습니다.그러므로그들의삶은희미하기는커녕가장완전하게밝고분명합니다. In the other life it is given to perceive clearly what opinions people had entertained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concerning the soul, the spirit, and the life after death; for when kept in a state resembling that of the body they think in the same way, and their thought is communicated as plainly as if they spoke aloud.In the case of one person, not long after his decease, I perceived (what he himself confessed) that he had indeed believed in the existence of the spirit, but had imagined that it must live after death an obscure kind of life, because if the life of the body were withdrawn there would remain nothing but what is dim and obscure; for he had regarded life as being in the body, and therefore he had thought of the spirit as being a phantom; and he had confirmed himself in this idea from seeing that brutes also have life, almost as men have it.He now marveled that spirits and angels live in the greatest light, and in the greatest intelligence, wisdom, and happiness, attended with a perception so perfect that it can scarcely be described; consequently that their life, so far from being obscure, is most perfectly clear and distinct.
해설
AC.443부터 AC.448까지는 창4의 속뜻에 대한 해설을 마친 뒤 이어지는 체험 기록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부분에 ‘영혼또는영에관하여그들이육체의삶동안무엇을생각했는지에대한영들과의체험에서얻은몇가지사례’라는 제목을 붙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부터는 창4의 특정 구절을 직접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세상에서 영혼과 영, 사후의 삶에 관해 품었던 생각이 사후에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여러 실제 사례를 통해 보여 줍니다.
첫 사례의 사람은 영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영이 존재하고 사람이 죽은 뒤에도 살아간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그 사후의 삶을 어떻게 상상했느냐에 있었습니다. 그는 생명이 근본적으로 육체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육체가 사라지면 생명의 대부분도 함께 사라지고, 영에게는 희미하고 흐릿한 어떤 존재 상태만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사후의 삶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현세의 육체적 삶보다 훨씬 희박하고 불완전한 삶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가 영을 ‘유령’(phantom)같은 것으로 생각했다는 말은 이러한 관념을 잘 보여 줍니다. 그에게 실재성이 강한 것은 육체였고, 영은 육체에서 생명이 빠져나간 뒤 남는 희미한 잔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짐승들도 인간과 거의 마찬가지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더욱 굳혔습니다. 육체를 가진 동물에게도 생명이 있으므로 생명은 육체에 속한 것이며, 그렇다면 육체가 없어지면 인간에게 남는 생명도 매우 희미할 것이라고 추론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그 추론을 일반적인 교리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생전에 실제로 품고 있었던 생각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사후에 직접 경험한 것은 자신의 예상과 정반대였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들과 천사들이 ‘가장큰빛’ 가운데 있으며, ‘가장뛰어난총명과지혜와행복’을 누린다고 말합니다. 더욱이 그들의 퍼셉션은 거의 묘사하기 어려울 정도로 완전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후의 삶이 단순히 계속된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육체가 사라진 뒤 의식과 지각이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이 더욱 밝고 분명해진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가장완전하게밝고분명하다’(mostperfectlyclearanddistinct)는 표현은 이 글의 핵심을 잘 압축합니다. 이 사람은 육체를 생명의 중심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육체가없어지면삶도희미해진다’고 여겼지만, 사후에는 오히려 그 반대를 발견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체험에 따르면 영적 삶은 육체적 삶의 흐릿한 그림자가 아니라, 지각과 사고와 의식이 더욱 선명한 삶입니다. 따라서 육체에서 벗어나는 것은 인간의 의식이 점차 꺼져 가는 과정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다만 여기서 ‘영들과천사들이가장큰빛과총명과지혜와행복가운데산다’는 표현을 모든 영이 사후 즉시 똑같은 천국적 행복을 누린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의 논점은 사후의 모든 사람의 상태가 동일하다는 데 있지 않고, ‘육체가사라지면영의삶은희미해질것’이라는 생각을 반박하는 데 있습니다. 선한 영과 악한 영의 상태, 천국과 지옥의 차이 등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AC.443이 강조하는 것은 육체의 죽음이 인간의 영적 의식과 삶을 희미한 그림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첫 사례가 AC.443-448의 맨 앞에 놓인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사후의 삶을 생각할 때 사람은 자신이 지금 경험하는 육체적 감각을 기준으로 삼기 쉽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는 현재의 삶을 가장 실재적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몸이 없어지면 삶도 덜 실재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그 전제를 뒤집습니다. 육체가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면 육체의 죽음은 생명의 소멸이나 희미해짐을 뜻하지 않습니다. AC.443의 놀라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생전에 영의 존재를 믿었던 사람조차 사후에 이르러 자신이 영의 삶을 얼마나 희미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AC.443해설)
AC.439를 읽다 보면 한 가지 뜻밖의 표현을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노스’(Enosh)라는 이름 역시 ‘사람’(man)을 뜻한다고 하면서, 그 사람이 ‘천적인간’(celestialman)이 아니라 ‘영적인간’(spiritualman)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금까지 창1과 창2를 따라온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질문을 일으킵니다. 창1에서는 거듭남의 여섯 날을 거쳐 영적 인간이 형성되고, 창2에서는 일곱째 날과 함께 천적 인간이 다루어지며, 그 천적 상태가 태고교회의 고유한 상태로 설명되었습니다. 반면 홍수 후에 나타나는 고대교회는 영적 성격의 교회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아직 홍수 이전인 창4에서 에노스가 벌써 ‘영적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먼저 ‘영적인간’이라는 표현을 곧바로 ‘홍수후고대교회에속한사람’이라는 역사적 명칭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천적’과 ‘영적’은 서로 다른 교회 시대를 가리킬 때도 사용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서로 다른 질서와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나 교회가 홍수 이전에 존재한다고 해서 그 상태가 언제나 천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영적인간’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고 해서 곧 홍수 후 고대교회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AC.439자체도 에노스의 교회를 ‘영적교회’라고 하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에노스라는 이름이 나타내는 ‘사람’을 ‘천적인간이아니라영적인간’이라고 합니다. 이 구별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왜 태고교회의 시대 안에서 이런 영적 상태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창2에서 보았던 태고교회의 처음 상태와 창4에서 다루는 상태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2의 태고교회는 사랑이 먼저이고 그 사랑으로부터 신앙과 진리를 지각하는 천적 질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창3과 창4로 진행하면서 인간은 점차 자기 자신에게 기울었고, 마침내 가인으로 나타나는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습니다. 아벨이 나타내는 체어리티가 소멸된 뒤에도 주님께서는 신앙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 않으시고 ‘가인의표’를 통해 보존하셨으며, 이후 라멕에 이르러서는 그렇게 보존되어 있던 신앙마저 황폐해지는 상태가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창4마지막의 회복은 창2의 최초 천적 상태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대로 되돌아오는 장면으로 볼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셋과 에노스가 중요해집니다. AC.436에 따르면 셋은 ‘체어리티가심어지는신앙’을 뜻하고, 에노스는 ‘신앙을통해심어진체어리티’를 뜻합니다. AC.438에서는 이를 교회의 차원에서 다시 설명하여, 셋은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을, 에노스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창2의 천적 인간과는 다른 질서가 보입니다. 최초의 천적 상태에서는 사랑과 체어리티로부터 신앙이 나왔지만, 여기서는 이미 무너진 상태 가운데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지는 회복의 과정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에노스를 ‘영적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적어도 이 새로운 상태가 최초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와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과 잘 맞습니다.
이 때문에 ‘셋은신앙,에노스는체어리티’라는 표현도 조심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인간의 정상적인 영적 질서가 언제나 ‘먼저신앙을얻고그다음체어리티를얻는것’이라는 보편 공식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이미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발생했고,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으며, 그 가운데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신 뒤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특별한 회복의 과정이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셋에서 에노스로 이어지는 ‘신앙을통한체어리티’는 태고교회 본래의 천적 질서를 설명한다기보다, 그 질서가 무너진 뒤 주님께서 다시 교회를 일으키시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므로에노스에서이미영적교회가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현재 본문보다 앞서 나갑니다. AC.439가 분명히 말하는 것은 에노스로 나타나는 사람이 ‘천적인간이아니라영적인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AC.438은 에노스를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라고 하며, AC.441은 이전 교회가 소멸된 뒤 나타난 ‘새교회’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새 교회를 훗날 홍수 후에 나타나는 고대교회와 같은 의미의 ‘영적교회’라고 AC.439가 직접 규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영적인간’이라는 표현과 ‘영적교회’라는 역사적·교회적 구분을 성급하게 하나로 합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오히려 이 대목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주님의 회복이 언제나 과거 상태의 단순한 복원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창2의 천적 상태가 무너진 뒤 주님께서는 인간을 버려 두지 않으시고,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며 그 상태에서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십니다. 에노스는 바로 그러한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홍수 전에 ‘영적인간’이 등장한다는 사실 자체를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영적’이라는 말이 반드시 홍수 후의 특정 교회 시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상태를 나타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왜 스베덴보리가 이 시점의 에노스를 특별히 ‘영적인간’이라고 규정했으며, 이것이 이후 홍수와 고대교회의 영적 질서와 정확히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AC.439만으로 모두 밝혀지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현재까지의 설명 안에서 가장 안전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에노스가 홍수 전에 ‘영적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홍수 후 고대교회가 벌써 시작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창2에서 나타난 태고교회 본래의 천적 상태가 이미 크게 무너진 뒤, 주님께서 보존하신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시는 새로운 회복의 상태가 나타났으며, 에노스는 그 과정에서 ‘천적인간이아니라영적인간’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창4마지막은 단순히 최초의 천적 상태로 되돌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깊이 무너진 인간을 그 상태에 맞게 다시 붙드시고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이후 AC에서 이 영적 상태의 성격이 더 구체적으로 밝혀진다면, 그때는 여기서 확인한 기초 위에서 한 단계 더 깊이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AC.439심화1)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2
앞에서설명한이장의내용으로부터,태고시대에도교회에서분리된많은교리와이단들이있었으며,각각에는저마다의이름이있었다는사실이분명합니다.이렇게분리된교리와이단들은오늘날의어떤것보다도훨씬더깊은사고에서나온것이었습니다.그시대사람들의천성이그러했기때문입니다. From the contents of this chapter as above explained, it is evident that in the most ancient time there were many doctrines and heresies separate from the church, each one of which had its name, which separate doctrines and heresies were the outcome of much more profound thought than any at the present day, because such was the genius of the men of that time.
해설
AC.442는 창4의 마지막 절에 대한 세부 해석을 하나 더 덧붙인다기보다, 지금까지 해설한 창4전체를 뒤돌아보며 하나의 중요한 결론을 제시합니다. 창4에 등장한 가인, 에녹,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과 그의 아내들 및 자녀들, 그리고 마지막의 셋과 에노스에 이르기까지, 이 이름들을 단순히 개인들의 계보로만 읽어서는 이 장의 속뜻을 알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의 해설 전체를 근거로 태고 시대에 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여러 교리와 이단들이 있었으며, 그것들이 각각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특히 주의할 표현은 ‘교회에서분리된’(separatefromthechurch)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교회와 아무 관계도 없던 외부의 종교나 사상들이 있었다는 뜻이라기보다, 본래 교회 안에 있던 것들이 점차 분리되어 독립적인 교리와 이단으로 발전했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창4에서 가인으로 나타난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그 후 여러 이름으로 나타나는 상태들이 계속 전개된 것도 이러한 흐름 안에 있습니다. 하나였던 교회의 생명에서 어떤 교리적 요소가 떨어져 나가 독자적인 것이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본래 교회의 질서 안에 머물지 않게 됩니다.
이 점에서 AC.442는 창4에 그렇게 많은 이름이 등장하는 이유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선 해설에서 이 이름들을 단순한 개인의 이름으로만 다루지 않고, 서로 다른 교리와 교회 상태를 나타내는 이름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따라서 ‘각각에는저마다의이름이있었다’는 말은 단순히 여러 사람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 구별되는 교리적 흐름들이 존재했다는 뜻입니다. 이름이 달라진다는 것은 그만큼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사상과 교리의 성격도 서로 달랐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 글에서 상당히 뜻밖인 대목은 그러한 교리와 이단들이 ‘오늘날의어떤것보다도훨씬더깊은사고’에서 나왔다고 하는 부분입니다. ‘이단’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고가 단순하거나 지적으로 수준이 낮았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태고 시대 사람들의 천성 자체가 오늘날 사람들과 달랐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생겨난 잘못된 교리와 이단조차 매우 깊은 사고의 산물이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깊다’는 것은 그것이 참되거나 선하다는 평가가 아닙니다. 사고의 깊이와 교리의 진실성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깊은 사고에서 나온 것이라도 교회의 생명에서 분리되면 그릇된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4의 핵심 문제와도 잘 맞습니다.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의 문제는 신앙 자체가 얕거나 무지했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AC.442가 말하는 여러 교리와 이단의 존재 역시 단순히 지적 수준의 저하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깊이 사고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기에 교회에서 분리된 교리 역시 복잡하고 깊게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리의 깊이가 그것을 참된 교회로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창4전체에서 계속 드러났듯이, 결정적인 것은 진리가 사랑과 체어리티에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동시에 AC.442의 ‘그시대사람들의천성이그러했다’는 마지막 말은 태고 시대 사람들을 오늘날의 사고방식으로 단순히 환원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시대 사람들의 내적 상태와 사고 능력이 오늘날과 달랐다고 전제합니다. 다만 이 짧은 글은 그 차이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태고인의 사고방식을 세부적으로 추정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명시한 범위에 머무르는 것이 안전합니다. 곧 그들은 매우 깊이 사고할 수 있었고, 그러한 특성 때문에 교회에서 분리된 교리와 이단들 역시 오늘날보다 훨씬 깊은 사고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AC.442는 창4를 마무리하면서 매우 의미 있는 역설을 남깁니다. 교회가 무너지는 것은 반드시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게 되거나 지적으로 무지해지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깊은 사고와 정교한 교리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될 수 있습니다. 창4에서 가인으로 시작된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장 마지막에서 셋과 에노스를 통해 다시 제시되는 길 역시 단순히 더 깊은 교리를 갖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를 향하고 체어리티가 신앙의 으뜸이 되며, 그 체어리티에서 주님께 대한 예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AC.442는 창4전체를 ‘얼마나깊이아는가’보다 ‘그진리가어떠한사랑과결합되어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마무리하게 합니다. (AC.442해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1
여호와의이름을부르는일이이때처음시작된것이아니라는사실은,앞에서태고교회에관해이미설명한내용으로충분히분명합니다.태고교회는다른어떤교회보다도주님을경배하고예배했습니다.또한아벨이양떼의첫새끼를제물로드렸다는사실에서도이를알수있습니다.그러므로여기서‘여호와의이름을부르다’(callinguponthenameofJehovah)는가인과라멕이라고하는이들에의해이전교회가소멸된후에세워진새교회의예배외에다른것을뜻하지않습니다. That the invocation of the name of Jehovah did not commence at this time is sufficiently evident from what has already been said above in regard to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more than any other adored and worshiped the Lord; and also from the fact that Abel brought an offering of the firstlings of the flock; so that in this passage by “callinguponthenameofJehovah” nothing else is signified than the worship of the new church, after the former church had been extinguished by those who are called “Cain” and “Lamech.”
해설
AC.441은 창4:26의 ‘그때에사람들이비로소여호와의이름을불렀더라’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할 때 생길 수 있는 오해를 직접 바로잡습니다. ‘비로소’라고 해서 이때 인류가 처음으로 주님을 알고 예배하거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설명한 태고교회만 생각해 보아도 이것이 분명하다고 합니다. 태고교회는 다른 어떤 교회보다도 주님을 경배하고 예배했기 때문입니다.
아벨 역시 그 사실을 보여 주는 직접적인 근거입니다. 창4:4에서 아벨은 ‘양의첫새끼와그기름’을 여호와께 제물로 드렸습니다. 에노스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주님께 드리는 예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4:26의 ‘그때에비로소’라는 표현을 인류 역사에서 예배 자체가 처음 생겨난 시점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AC.440에서 ‘여호와의이름을부르다’가 주님께 드리는 예배 전반을 뜻한다 설명했다면, AC.441은 이제 그 예배가 ‘비로소시작되었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밝힙니다.
그 답은 ‘새교회의예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호와의이름을부르다’가 여기서는 ‘이전교회가가인과라멕이라고하는이들에의해소멸된후에시작된새교회의예배’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시작’의 주어는 인류 전체의 예배가 아니라 새 교회의 예배입니다. 이전에는 아무도 주님을 예배하지 않다가 에노스 때 처음 예배가 생긴 것이 아니라, 이전 교회가 소멸된 뒤 새롭게 형성된 교회가 이제 그 교회에 속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창4전체의 흐름과 연결해서 볼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냈고, 그 신앙은 아벨이 나타내는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가운데에서도 신앙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 않으시고 ‘가인의표’를 통해 보존하셨습니다. 이후 라멕에 이르러서는 그렇게 보존되어 있던 신앙마저 황폐해지는 상태가 나타납니다. 곧 창4의 흐름은 체어리티가 소멸된 뒤에도 보존되었던 신앙이 마침내 황폐해지는 데까지 내려갑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주님께서 새로운 것을 일으키시는 방향으로 전환됩니다.
그 새로운 시작을 나타내는 것이 셋과 에노스입니다. 앞의 AC.434-440에서 셋은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에노스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를 나타냈습니다. 그러므로 ‘그때에사람들이비로소여호와의이름을불렀더라’는 말씀은 단순히 새로운 종교적 행위가 생겨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그 후 보존되어 있던 신앙마저 황폐해진 이전 교회의 뒤를 이어,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시고 체어리티가 다시 중심이 되는 새 교회를 일으키셨으며, 이제 그 교회에서 체어리티로부터 나오는 예배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AC.440과 AC.441은 서로 정확히 이어집니다. AC.440의 초점이 ‘여호와의이름을부른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있었다면, AC.441의 초점은 ‘왜그것을이제시작했다고하는가’에 있습니다. 전자는 그것이 주님께 드리는 예배 전반이며 그 예배는 체어리티에서 나와야 한다고 설명하고, 후자는 그러한 예배 자체가 인류에게 처음 생긴 것이 아니라 ‘새교회의예배’가 이제 시작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창4:26의 ‘비로소’는 최초의 예배를 가리키는 시간적 표현이라기보다, 이전 교회의 소멸과 새 교회의 출현 사이에 놓인 영적 전환을 보여 주는 말입니다.
또한 ‘가인과라멕이라고하는이들’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두 역사적 개인이 하나의 교회를 없앴다는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의 속뜻에서 가인과 라멕은 교회가 거쳐 간 특정한 영적 상태를 나타냈습니다. 따라서 이전 교회의 소멸 역시 창4에서 계속 다루어 온 신앙과 체어리티의 변질과 황폐라는 흐름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소멸 뒤에 셋과 에노스가 등장한다는 것은 인간의 실패가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전 교회의 생명이 다한 자리에서도 주님께서는 새로운 신앙과 체어리티를 일으키시고, 그로부터 다시 참된 예배가 시작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AC.441에서 ‘여호와의이름을불렀더라’(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는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창4마지막 부분의 중요한 전환입니다. (AC.441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