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의 기본 설정은 흥미롭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IT 개발자로 살던 한 남자가 갑자기 수인들이 살아가는 원시 세계로 이동합니다. 그곳에서는 불을 피우는 기술조차 ‘샤먼’이라는 특별한 존재가 독점하고 있으며, 불씨가 꺼지면 다른 부족에게 많은 식량을 바치고 다시 얻어 와야 합니다. 질병이 생겨도 원인을 알지 못하고, 사냥은 주로 힘과 머릿수에 의존하며, 깨끗한 물과 배설물 처리 같은 기본적인 위생 개념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현대 문명의 지식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그는 불을 직접 피우고, 열병을 치료하고, 창을 만들고, 사냥을 조직화하며, 물을 끓여 마시게 하고, 배설물과 쓰레기를 주거지에서 분리합니다. 한 사람이 가진 ‘지식’이 부족 전체의 생존 방식을 바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지식의 해방’입니다. 불을 피우는 방법은 원래 샤먼만 알고 있으며 그 지식은 후계자에게만 전수됩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것을 모든 부족민에게 가르치겠다고 합니다. 이 장면은 의외로 상당히 좋은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지식을 권력의 근거로 독점하지 않고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위해 나누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지식 자체는 목적이 아닙니다. 모든 진리는 결국 삶을 향해야 하며, 더 정확히 말하면 ‘쓰임(use)을 향해야 합니다. 무엇을 많이 아느냐보다 그것을 가지고 누구를 살리고 무엇을 유익하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불 피우는 지식이 한 사람의 신비한 권위를 높이는 데 사용될 때 그것은 권력이 되지만, 부족 전체가 혹한을 견디게 하는 데 사용될 때 그것은 쓰임이 됩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주인공이 공동체를 강하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처음 부족민들은 강함을 거의 육체적인 힘으로 이해합니다. 강한 종족은 큰 짐승을 잡고, 많은 전사를 가진 부족은 더 많은 먹이를 차지합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전혀 다른 원리를 가르칩니다. ‘정보를 수집하라. 환경을 이용하라. 퇴로를 확보하라. 각자의 장점을 살려라. 무기를 개선하라. 역할을 나누어라.’ 특히 ‘너희가 약했던 아니라 사냥 방식이 잘못됐던 거였어’라는 대목은 이 이야기 전체를 압축하는 문장처럼 들립니다. 힘이 부족해서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와 지혜가 없어서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의 질서와도 묘하게 접점이 있습니다. 천국 역시 모두가 똑같은 능력을 가진 사회가 아니라 서로 다른 기능과 쓰임을 가진 존재들이 하나의 목적 아래 조화를 이루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조금 더 깊이 들이대야 합니다. 이 콘텐츠에서 문명 발전의 방향은 거의 일관되게 ‘ 많이 알고, 효율적으로 생산하고, 강한 무기를 만들고, 조직하고, 강한 부족이 되는 ’으로 향합니다. 그래서 보다 강한 적을 물리치고 영토를 확보하며, 식량을 저장하고, 방어벽과 초소를 세우고, 다른 부족보다 우월한 생존 체계를 갖추는 과정이 곧 ‘진보’로 그려집니다. 여기에서 목사님이 느끼신 중국적 색채도 어느 정도 이해됩니다. 다만 이것을 곧바로 ‘중화사상’이라고 단정하기보다는, ‘혼란한 주변 세계를 뛰어난 지식과 질서를 가진 중심 인물이 조직하고 교화하여 질서 안으로 편입시킨다’는 서사 구조에 주목하는 편이 정확하겠습니다. 중국 역사문화에서 오래 반복되어 온 ‘문명과 주변’, ‘질서와 혼란’, ‘교화와 편입’의 상상력과 닮은 부분이 분명히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특히 주인공은 단순히 좋은 아이디어를 하나씩 제공하는 조언자가 아닙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는 ‘무엇이 옳은지를 아는 사람’이 되고, 공동체는 그가 제시하는 방식을 받아들일수록 강해집니다. 처음에는 ‘ 사람 말이 맞을까?’라고 의심하던 이들이 결국 그의 지식과 성과를 경험하면서 그를 신뢰하고 따르게 됩니다. 여기에는 매우 오래된 인간의 꿈이 숨어 있습니다. ‘현명하고 유능한 사람이 올바른 지식으로 공동체를 이끈다면 세상은 훨씬 좋아질 것이다.’ 이것은 중국만의 생각도 아닙니다. 플라톤의 철인정치에서 현대의 기술관료주의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끊임없이 품어 온 꿈입니다. 문제는 스베덴보리에게 인간 사회의 근본 문제는 ‘지식 부족’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가 뒤집힌 ’이라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이 좋은지 몰라서만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 위에 있기 때문에 자신이 아는 진리마저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가장 조심해서 보아야 할 것은 바로 ‘지식문명’이라는 연결입니다. 깨끗한 물을 마시게 하고, 병자를 치료하고, 식량을 저장하고, 혹한에서 살아남을 집을 짓는 것은 분명 좋은 쓰임입니다. 반면 더 치명적인 창을 만들고, 독을 이용하고, 더 효과적으로 적을 죽이고, 더 넓은 영역을 확보하는 능력 역시 동일한 ‘지식’에서 나옵니다. 지식은 그 자체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움직이는 사랑이 무엇인가에 따라 천국적인 쓰임이 될 수도 있고 지옥적인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지성과 지혜의 차이도 바로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많이 아는 사람이 반드시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진리를 사용하고, 그 진리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 점에서 저는 오히려 이 중국 AI 이야기가 의도하지 않은 중요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고 봅니다. 주인공이 부족에게 불을 주고, 의술을 주고, 무기를 주고, 위생을 주고, 조직을 주고, 정착지를 주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는 그들에게 ‘ 좋은 사람’이 되는 법도 주었을까요? 기술이 발전하면 시기와 탐욕도 사라질까요? 식량이 풍부해지면 이웃 부족을 사랑하게 될까요? 무기가 강해지면 그것을 약자를 보호하는 데만 사용할까요? 바로 이 지점에서 자연적 문명과 영적 거듭남은 갈라집니다. 외적인 삶은 놀라울 정도로 문명화되었는데 내면은 여전히 지배욕과 소유욕과 자기 우월감에 붙들려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으로는 매우 소박하게 살아도 이웃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천국의 질서에 훨씬 가까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작품을 보면 문명의 진정한 척도 자체가 달라집니다. ‘얼마나 강한 부족인가?’가 아니라 ‘ 힘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는가?’입니다.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 지식이 누구를 살리는가?’입니다. ‘얼마나 조직되어 있는가?’가 아니라 ‘ 질서의 중심에 자기 집단의 우월함이 있는가, 아니면 공동의 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는가?’입니다. 주인공이 불 피우는 방법을 독점하지 않고 모두에게 가르쳐 주는 순간에는 천국적인 원리가 비칩니다. 병든 사람을 살리고, 부족원 가운데 단 한 명도 다치지 않기를 바라며 사냥법을 개선하는 순간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식과 기술이 ‘우리 부족을 가장 강하게 만드는 ’으로 중심을 옮기는 순간, 같은 지식 안으로 인간의 proprium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이 작품은 단순한 중국식 문명 우월 판타지로만 읽기에는 조금 아깝습니다. 그 안에는 인간 문명의 오래된 모순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불을 발견한 인간은 추위를 이겼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의 집을 불태울 수도 있게 되었고, 금속을 다루게 된 인간은 농기구와 칼을 동시에 만들었으며, 현대 과학은 질병을 치료하는 기술과 대량살상 기술을 함께 만들어 냈습니다. 결국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 많은 지식’ 자체가 아닙니다. 지식을 움직이는 사랑이 바뀌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바로 그 중심의 변화입니다. ‘나와 우리를 위해 무엇을 가질 것인가’에서 ‘주님께 받은 것을 가지고 누구에게 어떤 쓰임이 것인가’로 삶의 중심이 이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을 보면서 느껴지는 ‘중화사상’의 흔적보다 더 근원적인 것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중국인의 문제라기보다 인간 proprium의 보편적인 꿈입니다. ‘내가 많이 알고, 강해지고, 조직하면 세상을 바로잡을 있다’는 꿈입니다. 주님은 그것보다 훨씬 깊은 곳을 보십니다. 세상을 바꾸기 전에 사랑의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식이 많아지는 것이 문명의 시작이라면, 그 지식을 자기 자신보다 이웃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사용하는 것은 천국의 시작입니다. 이 콘텐츠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어쩌면 거대한 짐승을 쓰러뜨리는 순간이 아니라, 한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 피우는 ’을 더 이상 자기만의 힘으로 붙잡지 않고 모두에게 가르쳐 주겠다고 말하는 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는 직접 피우면 되니까 불씨를 얻으려고 음식을 바칠 필요 없어.’ 바로 그때 지식은 권력에서 쓰임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가진 불은 누구를 따뜻하게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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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4 심화

2. 초막절은 출애굽의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절기인데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와 연결되는가?’

 

AC.414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이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으며, 이를 기억하게 하는 절기로 초막절이 제정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레23:42-43은 이스라엘 자손이 초막에 거주해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밝힙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 그들을 초막에 거주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대대로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초막절은 출애굽과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절기입니까, 아니면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를 기억하는 절기입니까? 이 질문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와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표상적 의미를 어떻게 함께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먼저 레위기가 직접 밝히는 초막절의 기념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땅의 소산을 거두어들인 뒤 초막절을 지켰으며, 일정 기간 초막에 거주했습니다. 23:42-43은 그 이유를 출애굽 때의 초막 생활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초막절의 문자적 의미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받아들인다는 이유로 초막절은 사실 출애굽과 관계가 없다거나 레위기가 밝힌 기념 이유는 겉으로만 내세운 설명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와 절기의 규례는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왜 태고교회를 말합니까? AC.414에서 그는 초막절의 문자적 제정 이유를 다시 설명하기보다, ‘장막이라는 표상이 지닌 더 오래된 의미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태고교회 사람들은 각자의 가족 안에서 살면서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장막은 그 사랑의 예배와 연결되어 천적인 것과 사랑의 거룩한 것을 표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후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초막에 거주하는 절기를 지킬 때, 그 행위는 출애굽의 역사를 기억하는 동시에 장막이 오래전부터 지녀 온 거룩한 의미와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하나의 표상에 문자적 역사와 속뜻이 함께 있다는 설명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려면 무엇을 기념하라고 명령하셨는가? 기념에 사용된 장막은 무엇을 표상하는가?를 나누어 생각하면 도움이 됩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레위기가 직접 답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뒤 초막에 거주했던 일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AC.414가 답합니다. 장막은 태고교회의 거룩한 예배와 연결되어 사랑의 거룩한 것을 표상한다는 것입니다. 두 대답은 서로 다른 층위의 질문에 대한 것이므로, 하나를 인정하기 위해 다른 하나를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함께 인용한 신16:13도 이 관계를 살피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 말씀은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들인 뒤 초막절을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23:39 역시 땅의 소산을 거두어들인 뒤 절기를 지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초막절에는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일뿐 아니라 수확을 마친 뒤 주님 앞에서 절기를 지키는 일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다만 AC.414는 타작마당이나 포도주 틀의 세부적인 속뜻을 여기서 풀이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심화에서는 그 물건들에 새로운 상응을 임의로 부여하기보다, 초막절이 출애굽의 기억과 수확의 기쁨을 함께 지닌 절기라는 문자적 문맥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12:9에서 주님은 다시 장막에 거주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도 AC.414가 초막절과 장막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인용한 본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장막 생활이 단지 과거의 불편한 생활 방식으로만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말씀은 장막에 거주하는 모습을 다시 불러오며,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들을 사랑의 거룩한 것에 관한 장막의 의미와 연결합니다. 그러나 호세아서의 구체적인 역사적 문맥과 AC.414가 밝히는 속뜻을 구별하여 읽어야 합니다. 이 한 구절만으로 태고교회의 모든 예배 방식이나 초막절의 세부 규례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목회적으로 중요한 질문은 오늘 우리도 초막에서 살아야 거룩한 예배를 드릴 있습니까?하는 것입니다. AC.414의 설명은 그런 결론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의 재료나 생활 방식 자체가 거룩함을 만들어 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표상한다는 것은 그 장막과 연결된 예배의 내적인 의미를 살피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초막절을 읽는 성도는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주님의 역사를 기억하면서, 그 기억이 가리키는 주님의 사랑과 거룩함을 함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외적인 절기의 형식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과 그 절기가 나타내는 거룩한 것을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결국 초막절의 문자적 기념 내용은 출애굽과 광야의 초막 생활이며, 스베덴보리가 AC.414에서 밝히는 표상적 의미는 장막에 담긴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와 연결됩니다. 이 두 의미는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자적 역사를 통해 주님의 인도하심을 기억하고, 장막의 속뜻을 통해 그분에게서 오는 사랑의 거룩함을 생각하게 합니다. 초막절을 읽으며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어느 시대의 장막이 중요합니까?라는 선택이 아니라, 말씀의 역사 속에서도 그 속뜻 안에서도 사람을 주님께로 이끄시는 분이 누구신가 하는 질문입니다. (AC.414 심화 2)

 

 

 

AC.414, 창4:20, ‘장막에 거주한다는 것은 왜 사랑의 거룩한 것을 뜻하는가? - 말씀의 장막과 성막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4‘장막에 거주한다’(dwell in tents)는 것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에서 ‘장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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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4 심화 1, ‘장막·성막·성전은 같은 의미라면서 왜 서로 다른 시대에 세워졌는가?’

AC.414 심화1. ‘장막·성막·성전은 같은 의미라면서 왜 서로 다른 시대에 세워졌는가?’ AC.414를 읽으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과 성막과 성전이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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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4 심화

1. 장막·성막·성전은 같은 의미라면서 서로 다른 시대에 세워졌는가?’

 

AC.414를 읽으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과 성막과 성전이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면서도, 고대에는 장막에서 예배를 드렸고 그 장막이 모독되기 시작하자 성막이 세워졌으며, 그 후에는 성전이 세워졌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세 가지가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무엇이며, 예배의 장소가 바뀌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을 풀려면 무엇을 표상하는가?어떤 역사적 상태에서 사용되었는가?를 구별해야 합니다.

 

먼저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세 건축물이 문자적으로 동일하다거나, 그 안에서 행해진 예배의 모든 절차가 같다는 뜻이 아닙니다. 장막은 가족이 거주할 수 있는 처소이고,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 가운데 세워진 예배의 처소이며, 성전은 이후에 세워진 건축물입니다. 이 차이는 문자적인 역사에서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공통된 의미는 이 서로 다른 처소들이 모두 주님에게 속한 거룩함을 표상한다는 데 있습니다. 외적인 형태는 달라져도 그 형태가 가리키는 거룩함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표상하게 된 이유를 태고교회의 예배에서 찾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각자의 가족 안에서 살며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여기서 장막은 단지 비바람을 막아 주는 생활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삶과 예배가 이루어지는 처소였고, 스베덴보리는 그 예배를 사랑의 거룩함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장막의 의미를 이해할 때에는 천막이라는 물건 자체보다, 그 안에서 주님을 향하여 드려졌던 예배와 그 예배에 속한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AC.414는 사람들이 장막에서 불경한 예배를 행하며 그것을 모독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장막이라는 물건이 더러워졌으므로 하나님께서 좋은 건물을 요구하셨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문제는 천막의 재료나 구조가 아니라 예배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거룩한 예배를 위해 사용되던 처소가 그와 반대되는 예배에도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와 관련하여 성막이 세워지고, 그 후에는 성전이 세워졌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예배 장소의 변화가 단순한 건축 기술의 발전만으로 설명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성막과 성전은 장막보다 더 높은 수준의 거룩함을 지닌 것입니까? AC.414는 오히려 태고교회의 장막이 후에 모독된 성전보다 더 거룩하게 여겨졌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합니다. 건물이 더 크고 견고해졌다는 사실이 그 안에서 드리는 예배까지 더 거룩해졌다는 증거는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의 장막을 특별히 언급하는 이유는 그 장막이 연결되어 있던 사랑의 예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막·성막·성전의 순서를 외적인 규모나 화려함에 따라 영적 우열을 매기는 순서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27:4-6은 이 세 표현의 공통된 의미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근거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살기를 구하고 성전에서 주님을 사모하며, 환난 날에는 초막과 장막 안에서 보호받고 장막에서 제사를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는 여러 이름의 거룩한 처소가 등장하지만, 다윗이 구하는 중심은 하나입니다. 그는 주님 가까이에 머물며 그분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그분의 보호 안에서 예배드리기를 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문맥을 통해 장막과 성막과 성전이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각각의 건축물을 따로 떼어 놓고 이름만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을 구하고 누구에게 나아가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AC.414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장 높은 의미에서 주님께서 그분의 인성의 본질에 관하여 장막이시며 성막이시고 성전이시라고 말합니다. 이 설명에 이르면 세 처소가 공통으로 가리키는 중심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거룩함은 장막이나 성막이나 성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거룩함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표상하는 처소가 거룩한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또한 천적 사람을 주님의 장막이나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사람이 독립적으로 거룩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거룩함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장막과 성막과 성전은 역사적으로 서로 다른 처소이고, 그것들이 사용된 예배의 상태도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속뜻에서 그 처소들은 모두 주님과 그분에게서 오는 거룩함을 표상한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따라서 같은 의미라는 말은 역사적 차이를 지우는 말이 아니며, ‘서로 다른 시대에 세워졌다는 사실도 그 공통된 속뜻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이 말씀에서 붙들어야 할 것은 어느 시대의 건물이 가장 거룩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예배가 외적인 처소에 머무르지 않고 그 처소가 가리키는 주님과 그분의 사랑을 향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AC.414 심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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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4 심화2. ‘초막절은 출애굽의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절기인데 왜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와 연결되는가?’ AC.414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이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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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4, 창4:20, ‘장막에 거주한다는 것은 왜 사랑의 거룩한 것을 뜻하는가? - 말씀의 장막과 성막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4‘장막에 거주한다’(dwell in tents)는 것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에서 ‘장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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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4:20)

 

AC.414

장막에 거주한다(dwell in tents) 것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에서 장막들(tents) 뜻하는 바를 보면 분명해집니다. 다윗의 시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That todwell in tentssignifies what is holy of lov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tentsin the Word. As in David:

 

1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누구오니이까 2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15:1, 2) Jehovah, who shall abide in thy tent? Who shall dwell in the mountain of thy holiness? He that walketh upright, and worketh righteousness, and speaketh the truth in his heart, (Ps. 15:12)

 

말씀에서는 장막에 거주한다(dwell in the tent) , 또는 성산에 거주한다(in the mountain of holiness) 것이 무엇인지를 사랑의 거룩한 것들, 정직하게 행하고 공의를 실천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다른 시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in which passage, what it is todwell in the tentorin the mountain of holinessis described by holy things of love, namely, the walking uprightly, and working righteousness. Again:

 

그의 소리가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19:4) Their line is gone out through all the earth, and their discourse to the end of the world. In them hath he set a tent for the sun, (Ps. 19:4)

 

여기서 (sun) 사랑을 나타냅니다. 다른 시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where thesundenotes love. Again: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61:4) I will abide in thy tent to eternities, I will trust in the covert of thy wings, (Ps. 61:4)

 

여기서 장막(tent) 천적인 것을, 날개 아래의 그늘(covert of wings)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이사야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where thetentdenotes what is celestial, and thecovert of wingswhat is spiritual thence derived. In Isaiah:

 

다윗의 장막에 인자함으로 왕위가 굳게 것이요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정의를 구하며 공의를 신속히 행하리라 (16:5) By mercy the throne has been made firm, and one hath sat upon it in truth, in the tent of David, judging and seeking judgment, and hasting righteousness, (Isa. 16:5)

 

여기서도 장막(tent) 사랑의 거룩한 것을 나타냅니다. 이는 공의로 판결함(judging judgment) 공의를 신속히 행함(hasting righteousness) 언급되는 데서 있습니다. 다른 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where also thetentdenotes what is holy of love, as may be seen by the mention ofjudging judgment,andhasting righteousness.Again:

 

우리 절기의 시온성을 보라 눈이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33:20) Look upon Zion, the city of our appointed feast; thine eyes shall see Jerusalem a quiet habitation, a tent that shall not be moved away, (Isa. 33:20)

 

이는 하늘의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입니다. speaking of the heavenly Jerusalem.

 

[2] 예레미야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In Jeremiah: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야곱 장막의 포로들을 돌아오게 것이고 거처들에 사랑을 베풀 것이라 성읍은 폐허가 언덕 위에 건축될 것이요 (30:18) Thus said Jehovah, Behold, I bring again the captivity of Jacobs tents, and will have mercy on his dwelling places, and the city shall be builded upon her own heap; (Jer. 30:18)

 

장막의 포로 (captivity of tents) 천적인 , 사랑의 거룩한 것들이 황폐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모스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thecaptivity of tentssignifies the vastation of what is celestial, or of the holy things of love. In Amos:

 

그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9:11) In that day will I raise up the tabernacle of David which is fallen; and will fence up the breaches thereof, and I will raise up its ruins, and I will build it as in the days of eternity, (Amos 9:11)

 

여기서도 성막(tabernacle) 천적인 것과 거기에 속한 거룩한 것들을 나타냅니다. 예레미야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where thetabernaclein like manner denotes what is celestial and the holy things thereof. In Jeremiah: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장막과 휘장은 갑자기 파멸되도다 (4:20) The whole land is laid waste, suddenly are my tents laid waste, and my curtains in a moment. (Jer. 4:20)

 

장막이 무너지고 나의 모든 줄이 끊어졌으며 자녀가 나를 떠나가고 있지 아니하니 장막을 세울 자와 휘장을 자가 다시 없도다 (10:20) My tent is laid waste, and all my cords are plucked out, my sons are gone forth from me, and they are not; there is none to stretch my tent anymore, and to set up my curtains, (Jer. 10:20)

 

여기서 장막(tent) 천적인 것들을, 휘장들(curtains) 줄들(cords)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다른 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where thetentsignifies celestial things, andcurtainsandcordsspiritual things thence derived. Again:

 

너희는 그들의 장막과 떼를 빼앗으며 휘장과 모든 기구와 낙타를 빼앗아다가 소유로 삼고 (49:29) Their tents and their flocks shall they take; they shall carry off for themselves their curtains, and all their vessels, and their camels, (Jer. 49:29)

 

이는 아라비아와 동방의 자손들에 관한 말씀인데, 이들은 천적인 또는 거룩한 것을 지닌 사람들을 표상합니다. 다른 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speaking of Arabia and the sons of the east, by whom are represented those who possess what is celestial or holy. Again:

 

시온의 장막에 그의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2:4) Into the tent of the daughter of Zion the Lord hath poured out his wrath like fire, (Lam. 2:4)

 

이는 신앙의 천적인 또는 거룩한 것들이 황폐해지는 상태에 관한 말씀입니다. speaking of the vastation of the celestial or holy things of faith.

 

[3] 말씀에서 장막(tent)이라는 말을 천적인 것과 사랑의 거룩한 것들을 표상하는 사용하는 이유는, 고대에 사람들이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 의식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불경한 종류의 예배로 장막을 모독하기 시작하자 성막이 세워졌고, 후에는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따라서 장막은 후에 성막이, 그리고 그다음에는 성전이 나타내게 모든 것을 표상했습니다. 같은 이유로 거룩한 사람도 주님의 장막(tent), 성막(tabernacle), 성전(temple)이라고 불립니다. 장막(tent) 성막(tabernacle) 성전(temple)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은 다윗의 시편에서 분명해집니다. The reason why the termtentis employed in the Word to represent the celestial and holy things of love is that in ancient times they performed the holy rites of worship in their tents. But when they began to profane the tents by profane kinds of worship, the tabernacle was built, and afterwards the temple, and therefore tents represented all that was subsequently denoted first by the tabernacle, and afterwards by the temple. For the same reason a holy man is called atent,atabernacle,and atempleof the Lord. That atent,atabernacle,and atemplehave the same signification, is evident in David:

 

4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가지 그것을 구하리니 내가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5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6이제 머리가 나를 둘러싼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27:4-6) One thing have I asked of Jehovah, that will I seek after, that I may remain in the house of Jehovah all the days of my life, to behold Jehovah in sweetness, and to visit early in his temple; for in the day of evil he shall hide me in his tabernacle; in the secret of his tent shall he hide me; he shall set me up upon a rock. And now shall my head be lifted up against mine enemies round about me, and I will offer in his tent sacrifices of shouting. (Ps. 27:46)

 

[4] 가장 높은 의미에서 주님은 그분의 인성의 본질에 관하여 장막(tent)이시며, 성막(tabernacle)이시고, 성전(temple)이십니다. 여기서 모든 천적 사람도 그렇게 불리며, 천적이고 거룩한 모든 역시 그렇게 불립니다. 태고교회는 뒤를 이은 교회들보다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 당시 사람들은 각자 자기 가족 안에서 따로 살면서 장막에서 그토록 거룩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장막은 후에 모독된 성전보다 거룩하게 여겨졌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초막절이 제정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땅의 소산을 거두어들일 초막절을 지켰으며, 기간에는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장막에서 거주했습니다. (23:39-44, 16:13, 12:9) (AC.414)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as to his human essence is thetent,” thetabernacle,” and thetemple”; hence every celestial man is so called, and also everything celestial and holy. Now as the most ancient church was better beloved of the Lord than the churches that followed it, and as men at that time lived alone, that is, in their own families, and celebrated so holy a worship in their tents, therefore tents were accounted more holy than the temple, which was profaned. In remembrance thereof the feast of tabernacles was instituted, when they gathered in the produce of the earth, during which, like the most ancient people, they dwelt in tents. (Lev. 23:3944; Deut. 16:13; Hosea 12:9)

 

해설

AC.414는 앞의 AC.412-413에서 제시한 야발의 속뜻을 말씀의 여러 구절로 뒷받침합니다. 야발은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고, 스베덴보리는 그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당연히 장막에 사는 일이 사랑의 거룩함과 관계됩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번 번호는 바로 그 질문에 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이라는 물건의 모양이나 용도만으로 뜻을 정하지 않고, 말씀에서 장막이 어떤 말들과 함께 등장하며 어떤 상태를 묘사하는지를 여러 본문에 걸쳐 살핍니다. 이 번호를 읽을 때 중요한 것은 인용 구절의 수를 따라가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구절들이 어떤 공통된 의미를 드러내는지 이해하는 것입니다.

 

먼저 시15:1-2주의 장막에 머무를 가 누구인지 묻고,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고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라고 답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말씀을 첫 근거로 제시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장막에 거한다는 것이 단순히 거룩한 장소에 들어가는 일이라면, 시편의 대답은 건물에 출입할 자격이나 예배 절차에 관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 사람의 삶을 말합니다. 정직하게 행하고 공의를 실천하며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것은 사랑이 실제 삶에서 선으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장막에 거주한다는 속뜻은 거룩한 공간을 소유하거나 그 안에 머무는 외적인 행위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 그 사랑에 따라 살아가는 상태와 관련됩니다. 이것이 야발을 사랑의 거룩한 것들에 관한 교리와 연결하는 첫 번째 근거입니다.

 

다른 인용 구절들은 장막이 사랑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여러 방향에서 보여 줍니다. 19:4에서는 해를 위하여 장막을 베푸셨다고 하는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해가 사랑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61:4에서는 주의 장막에 머무는 것과 주의 날개 아래 피하는 것이 함께 나오며, 그는 장막을 천적인 것, 날개 아래의 그늘을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으로 구별합니다. 16:5에서는 다윗의 장막 안에서 인자함으로 굳게 선 왕위와 공의로운 판결이 나타납니다. 33:20에서는 시온과 예루살렘을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으로 묘사합니다. 이 구절들이 모두 같은 장면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장막이 사랑과 거룩함, 그리고 그 사랑에 속한 삶과 연결된다는 점에서는 서로를 비추어 줍니다. 특히 장막과 날개 아래의 그늘을 구별한 시61:4는 천적인 것과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예레미야서와 아모스서의 인용은 장막의 의미를 반대 방향에서도 보여 줍니다. 30:18은 야곱의 장막이 포로 된 상태에서 돌아오는 일을 말하고, 9:11은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우는 일을 말합니다. 반면 렘4:20과 렘10:20에서는 장막이 무너지고 휘장과 줄이 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의 포로 됨을 사랑의 거룩한 것들이 황폐해진 상태로 설명하며, 장막은 천적인 것들을, 휘장과 줄은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이때 장막의 회복과 파괴를 단순히 천막의 재건이나 손실로만 읽지 않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나타내므로, 장막이 무너지는 말씀은 교회 안에서 그 사랑에 속한 것들이 황폐해지는 상태를 이해하는 근거가 되고, 장막을 다시 세우는 말씀은 그와 반대되는 회복의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다만 이번 번호가 인용된 모든 물건과 인물의 속뜻까지 각각 풀이하는 것은 아니므로, 휘장··자녀·낙타 등의 의미를 이 자리에서 임의로 세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왜 하필 장막이 그러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는지 역사적인 이유를 설명합니다. 고대 사람들은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장막이 불경한 예배로 모독되기 시작하자 성막이 세워졌고, 그 뒤에는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장막은 나중에 성막과 성전이 표상하게 된 거룩한 것들을 먼저 나타내는 표상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장막이라는 재료나 건축 방식 자체가 성막이나 성전보다 거룩하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장막의 거룩함은 그것이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와 연결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예배 장소가 장막에서 성막과 성전으로 바뀌어도, 그 장소들이 가리켜야 할 중심은 주님과 그분에게서 오는 거룩함입니다.

 

27:4-6은 이러한 연결을 한 본문 안에서 보여 줍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살기를 구하고, 성전에서 사모하며, 환난 날에는 초막과 장막 안에서 보호받고, 장막에서 제사를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근거로 장막과 성막과 성전이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문자적인 건축물들이 동일하거나 말씀의 모든 문맥에서 각 표현의 세부 의미까지 언제나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본문에서는 서로 다른 이름의 거룩한 처소들이 모두 주님께 나아가고 그분의 보호 안에 머무르며 예배드리는 일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느 건물이 거룩한가?보다 건물이 나타내는 거룩함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그 거룩함의 근원은 건물 자체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이번 번호의 마지막 부분은 그 의미를 가장 높은 차원까지 끌어올립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장 높은 의미에서 주님께서 그분의 인성의 본질에 관하여 장막이시며 성막이시고 성전이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천적 사람과 천적이고 거룩한 모든 것도 그렇게 불린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사람을 주님의 장막이나 성전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사람이 스스로 거룩함의 근원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거룩함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야발의 장막에 거주하는 라는 표현도 단순히 옛사람들의 생활 방식에 관한 기록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거룩한 것들에 관한 교리가 새 교회 안에 존재한다는 설명으로 이어집니다.

 

끝으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이 각자의 가족 안에서 살며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고, 이를 기억하게 하는 절기로 초막절이 제정되었다고 설명합니다. 23:39-44와 신16:13은 수확 후 초막절을 지키는 일을 말하며, 12:9는 다시 장막에 거주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레위기 본문은 출애굽 때 이스라엘 자손이 초막에 거주했던 일을 기억하게 한다고도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문자적인 절기의 기념 내용과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에 관한 표상적 의미를 서로 지워 버리지 않고 함께 읽어야 합니다. AC.414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장막은 그 자체가 거룩함의 근원이어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그 사랑 안에서 드리는 거룩한 예배를 표상하기 때문에 사랑의 거룩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야발의 속뜻을 이해하기 위해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여러 장막을 길게 살펴본 이유입니다. (AC.414 해설)

 

심화

1. 장막·성막·성전은 같은 의미라면서 서로 다른 시대에 세워졌는가?’

 

AC.414 심화 1, ‘장막·성막·성전은 같은 의미라면서 왜 서로 다른 시대에 세워졌는가?’

AC.414 심화1. ‘장막·성막·성전은 같은 의미라면서 왜 서로 다른 시대에 세워졌는가?’ AC.414를 읽으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과 성막과 성전이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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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막절은 출애굽의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절기인데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와 연결되는가?’

 

AC.414 심화 2, ‘초막절은 출애굽의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절기인데 왜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와

AC.414 심화2. ‘초막절은 출애굽의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절기인데 왜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와 연결되는가?’ AC.414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이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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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5, 창4:20, ‘가축의 조상은 왜 사랑의 거룩한 것에서 나오는 선을 뜻하는가?’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5‘가축의 조상’(father of cattle)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에서 나오는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이 장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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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3, 창4:20, ‘아다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인 이유 - 야발이 뜻하는 사랑과 선’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3‘아다’(Adah)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그의 맏아들 야발이 ‘장막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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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4:20)

 

AC.413

아다(Adah)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그의 맏아들 야발이 장막에 거주하는 자의 조상(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이자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and of cattle)이라고 불리는 데서 분명해집니다. 이것들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을 의미하므로 천적인 것입니다. That byAdahis signified the mother of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is evident from her firstborn Jabal being called the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which are celestial because they signify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goods thence derived.

 

해설

AC.413은 앞 번호에서 밝힌 야발의 속뜻을 근거로, 그의 어머니 아다가 왜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하는지 설명합니다. AC.412에서는 야발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뜻한다고 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그 설명을 거꾸로 따라 올라갑니다. 야발이 뜻하는 것들이 천적이기 때문에, 그를 낳은 아다는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중심은 새로운 상응을 하나 더 제시하는 데 있지 않고, 아다와 야발의 의미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밝히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성도들이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아다라는 인물의 개인적인 신앙이나 성품을 평가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문자적으로 아다는 야발의 어머니이고, 야발은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모자 관계를 새 교회 안에서 생겨나는 것들의 관계로 읽습니다. 아다가 어머니라는 것은 그녀에게서 태어나는 것으로 표현된 것들이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 보여 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야발의 속뜻을 살펴보면 아다가 의미하는 바도 더 분명해집니다.

 

그렇다면 야발이 뜻하는 것은 왜 천적인 것입니까? AC.413은 그 이유를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직접 밝힙니다. 여기서 천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고상하거나 종교적인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번 문맥에서는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에 관계된 것을 가리킵니다.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이 천적이므로, 그것들에 관한 교리를 뜻하는 야발도 천적인 것과 관련됩니다. 이처럼 스베덴보리는 천적이라는 이름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천적인지를 사랑과 선의 관계에서 설명합니다.

 

특히 그로부터 나오는이라는 표현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선은 사랑과 무관하게 따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옵니다. 사랑이 무엇을 원하고 소중히 여기는가에 관계된다면,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은 그것이 실제로 나타나는 모습과 관계됩니다. 물론 겉으로 비슷한 일을 한다고 해서 언제나 그 일을 움직이는 사랑까지 같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선을 말하면서도 그 근원인 사랑을 함께 말합니다. 이번 번호의 순서는 사랑의 거룩한 것들이 먼저이고,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이 그다음입니다.

 

이 설명은 앞서 가인의 계보를 읽으며 반복해서 살펴본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가인의 계보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그 분리가 깊어져 마침내 신앙마저 소멸하는 상태가 나타났습니다. 이제 새 교회의 계보에서는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가 등장합니다. 다만 AC.413이 새 교회의 모든 성격을 한꺼번에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번호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야발이 의미하는 교리의 천적인 성격과, 그 성격을 통해 밝혀지는 아다의 의미입니다.

 

성도들은 이 대목에서 아다가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라는 표현을 낯선 상응 하나로만 기억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곧 야발이 의미하는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이 천적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의 연결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사랑과 선을 함께 말하되, 선이 사랑에서 나온다는 질서를 기억해야 합니다. AC.413은 아다와 야발의 관계를 통해 새 교회의 천적인 것들이 무엇과 관련되는지를 한층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AC.413 해설)

 

 

 

AC.414, 창4:20, ‘장막에 거주한다는 것은 왜 사랑의 거룩한 것을 뜻하는가? - 말씀의 장막과 성막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4‘장막에 거주한다’(dwell in tents)는 것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에서 ‘장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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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2, 창4:20,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 야발 -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로부터 나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창4:20) AC.412‘아다’(Adah)는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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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And Adah bare Jabal; he was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4:20)

 

AC.412

아다(Adah) 앞에서와 같이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합니다. 야발(Jabal), 장막에 거주하는 자의 조상(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이자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and of cattle)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하며, 이것들은 천적인 것입니다. ByAdahis signified, as before, the mother of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of faith; byJabal,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is signified doctrine concerning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goods thence derived, which are celestial.

 

해설

AC.412는 창4:20에 등장하는 야발의 속뜻을 밝히는 첫 번째 번호입니다. 앞서 AC.405에서 아다는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아다의 아들 야발에게서 그 가운데 천적인 것에 관한 교리를 봅니다. 4:20은 야발을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라고 소개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장막 생활과 목축의 시작을 알려 주는 기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계보를 새 교회 안에서 어떤 가르침이 생겨났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조상이라는 표현을 이해할 때에는 한 생업의 최초 발명자라는 문자적 의미와 함께, 그에 해당하는 교리가 시작되는 모습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장막에 거주하는 일과 가축을 치는 일이 왜 사랑과 선에 관한 교리와 연결됩니까? AC.412는 그 대응 관계를 먼저 제시할 뿐, 장막과 가축의 속뜻을 각각 입증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이 번호만으로 장막은 언제나 이것, 가축은 언제나 저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번 문장에는 분명한 순서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사랑의 거룩한 것들을 말하고, 이어서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을 말합니다. 사랑이 먼저이고 선이 그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순서를 놓치면 야발의 의미를 단순히 종교적 지식이나 선행의 기술에 관한 가르침으로 축소하기 쉽습니다. 여기서 다루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그 사랑이 사람의 삶에 나타내는 선에 관한 교리입니다.

 

사랑의 거룩한 것들이라는 표현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룩함은 사람이 자기 노력으로 사랑에 덧붙이는 성질이 아닙니다. 사랑의 근원이 주님께 있기 때문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에 속한 것들이 거룩합니다. 그러므로 야발이 의미하는 교리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스스로 훌륭한 사랑을 만들어 있는가?를 가르치는 교리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알고 받아들이며, 그 사랑이 자신의 삶을 이끌도록 하는 일과 관련된 가르침입니다. 성도들이 여기서 사랑을 단지 따뜻한 감정이나 사람 사이의 호감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번 번호의 사랑은 교회의 천적인 것과 관련된 사랑이며,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까지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이어지는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도 중요합니다. 사랑과 선은 같은 말의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사랑이 사람의 내면에서 무엇을 원하고 소중히 여기는가와 관계된다면, 선은 그 사랑이 실제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와 관계됩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이웃에게 필요한 선을 행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이 삶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겉으로는 선한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을 움직이는 사랑이 무엇인지는 별도로 살펴야 합니다. AC.412는 이 모든 문제를 상세히 풀이하지는 않지만, ‘사랑의 거룩한 것들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을 함께 제시함으로써 사랑과 선을 떼어 놓지 않도록 이끕니다. 사랑은 선의 근원이며, 선은 사랑이 삶에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야발이 의미하는 것은 사랑이나 선 자체가 아니라 왜 그것들에 관한 교리입니까? 이 구별은 새 교회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필요합니다. 사랑과 선의 근원은 주님이시지만, 교회는 그 사랑과 선에 관하여 배우고 가르칩니다.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인지, 그 사랑에서 어떤 선이 나오는지, 사람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삶으로 나타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가르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리와 삶은 동일하지 않지만 서로 무관하지도 않습니다. 사랑에 관한 교리는 사랑의 삶을 대신할 수 없고, 사랑의 삶 또한 무엇이 참된 선인지 알려 주는 진리의 가르침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야발이 교리를 의미한다는 설명은 새 교회 안에 사랑과 선에 관한 가르침이 있다는 뜻이지, 교리를 아는 것만으로 이미 사랑과 선을 소유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대목은 가인의 계보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흐름과 나란히 놓을 때 더욱 선명해집니다. 가인에게서 시작된 문제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앞서 지배하도록 한 데 있었습니다. 그 분리는 라멕에게 이르러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은 황폐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새 교회의 계보를 설명하면서 야발에게서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봅니다. 여기서 곧바로 야발이 가인의 모든 잘못을 바로잡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앞의 계보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문제였다면, 이제 새 교회에 관한 설명에서는 사랑과 선에 관한 교리가 등장한다는 대비는 분명히 살펴볼 만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이 무엇을 중심에 두어야 하는지를 다시 묻게 되는 자리입니다.

 

성도들이 AC.412를 읽고 기억해야 할 것은 야발이라는 이름에 낯선 뜻 하나를 더 외우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내가 배우는 신앙의 진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알도록 이끄는가? 사랑이 삶에서 선으로 나타나도록 돕는가?라는 질문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동시에 장막과 가축의 속뜻을 이번 번호에서 모두 이해했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야발이 의미하는 교리의 전체 내용을 먼저 밝히고 있으며, 그 표현들이 왜 그러한 뜻을 지니는지는 이어지는 설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AC.412는 새 교회의 가르침을 살펴보는 출발점입니다. 그 출발점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중심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입니다. (AC.412 해설)

 

 

 

AC.413, 창4:20, ‘아다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인 이유 - 야발이 뜻하는 사랑과 선’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3‘아다’(Adah)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그의 맏아들 야발이 ‘장막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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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1, 창4:19, ‘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왜 황폐의 마지막 때가 오는가? - 예언서에 나타난 황폐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11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황폐의 마지막 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주님께서 예언서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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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4:19)

 

AC.411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황폐의 마지막 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주님께서 예언서들에서 자주 밝히신 바입니다. 그곳에서는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관련하여 이를 황폐(vastation) 또는 황폐하게 (laying waste)이라 부르고,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하여 황량(desolation)이라 부릅니다. 또한 완결(consummation) 끊어 버림(cutting off)이라고도 말합니다. 6:9, 11-12, 23:8-, 24, 42:15-18, 25, 8, 9:24-, 1, 32, 15-16 이후의 장들을 보십시오. That the last time of vastation must exist before a new church can arise, is frequently declared by the Lord in the prophets, and is there calledvastationorlaying waste,in reference to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anddesolation,in relation to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It is also spoken of asconsummationandcutting off.(See Isa. 6:9, 1112; 23:8 to the end; 24; 42:1518; Jer. 25; Dan. 8; 9:24 to the end; Zeph. 1; Deut. 32; Rev. 15; 16; and following chapters.)

 

해설

AC.411은 앞의 AC.408-410에서 설명한 교회의 황폐와 새로운 시작의 질서를 말씀의 예언서들과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이전 교회의 황폐가 마지막 때에 이르러야 한다고 설명해 왔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이것이 가인의 계보에만 적용되는 해석이 아니라, 주님께서 예언서들에서 거듭 밝히신 교회의 상태와 관련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 다니엘서와 스바냐서, 신명기와 요한계시록의 여러 대목을 제시합니다.

 

먼저 황폐(vastation)황폐하게 (laying waste)은 이번 번호에서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천적인 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에 관계됩니다. 따라서 신앙의 천적인 것들이 황폐해진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신앙에 생명을 주어야 할 사랑과 선이 사라지는 상태와 관련됩니다. 이는 앞에서 가인이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운 데서 시작된 분리가 라멕에게 이르러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 진행된 것과도 연결됩니다.

 

한편 황량(desolation)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됩니다. 영적인 것은 신앙의 진리와 그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에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황량은 교회 안에서 신앙의 진리가 더 이상 살아 있는 진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태를 생각하게 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두 용어의 관계를 짧게 구별할 뿐, 각각에 해당하는 모든 영적 상태를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황폐와 황량을 서로 완전히 무관한 두 사건으로 나누기보다, 교회의 마지막 상태를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의 측면에서 구별하여 표현한 것으로 읽는 편이 적절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완결(consummation)끊어 버림(cutting off)이라는 표현도 덧붙입니다. 이 말들은 교회의 이전 상태가 끝에 이르는 모습을 가리키는 표현들입니다. 특히 이번 문맥에서 완결은 교회가 충만하고 온전해졌다는 긍정적인 뜻이 아니라, 이전 교회의 상태가 그 끝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이 두 표현의 세부적인 차이까지 정의하지 않으므로, 각각의 의미는 인용된 본문과 이어지는 AC의 설명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용어 구별은 말씀에 나타나는 심판과 종말의 표현을 읽을 때 중요합니다. 예언서에서 땅이 황폐해지고 성읍이 무너지며 모든 것이 끝나는 듯한 말씀이 나올 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외적인 재난의 묘사로만 읽지 않습니다. 그 말씀에 교회의 내적인 상태, 곧 사랑과 선, 신앙과 진리가 어떻게 쇠퇴하고 끝에 이르는가에 관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언서의 모든 황폐와 멸망의 표현을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뜻으로 바꾸어 읽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각 말씀의 구체적인 속뜻은 해당 문맥 안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이번 번호에 인용된 사6:9, 11-12는 그 연결을 이해하는 데 특히 도움이 됩니다. 이사야가 전하도록 명령받은 말씀에는 백성이 듣고도 깨닫지 못하며 보고도 알지 못하는 상태가 나타납니다. 이어 이사야가 언제까지 그러한 일이 계속되는지를 묻자, 성읍들이 황폐해지고 주민이 없어지며 땅이 황무해질 때까지라는 대답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본문을 인용한 이유는 단순히 황폐라는 낱말이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진리를 듣고 보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가 교회의 황폐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로 앞의 AC.410에서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고, 보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상태를 설명한 내용과 맞닿아 있습니다.

 

9:24 이하의 말씀도 이번 논의와 연결됩니다. 그곳에는 허물이 그치고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고 영원한 의가 드러나는 일과 함께, 정해진 기간과 끝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대목을 인용하는 것은 이전 상태의 끝과 새로운 질서의 시작이 서로 연결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AC.411은 다니엘서의 각 구절을 하나씩 풀이하지 않으므로, 이 인용만으로 다니엘서의 모든 예언을 특정한 역사적 시기나 사건에 대응시켜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 15장과 16장 및 그 이후의 장들도 같은 맥락에서 인용됩니다. 그곳에는 재앙과 심판, 이전 상태의 끝을 나타내는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말씀 역시 교회의 마지막 상태를 이해하는 데 관련된다고 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재앙의 장면 자체에만 시선을 머무르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AC.411이 인용하는 목적은 교회의 황폐가 마지막 때에 이른 뒤 새로운 교회가 일어난다는 앞의 설명을 뒷받침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들은 AC.408에서 말한 새로운 아침과도 함께 읽어야 합니다.

 

다른 인용 본문들도 각각의 문맥은 다르지만,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제시하는 공통된 논점은 분명합니다. 교회의 마지막 상태는 말씀에서 여러 표현으로 선포되며, 그 상태가 끝에 이르는 일은 새로운 교회의 출현과 연결됩니다. 그렇다고 이 모든 인용 구절이 동일한 사건을 똑같은 방식으로 묘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각각의 예언을 자세히 해설하기보다, 말씀 전체에 이러한 질서가 반복해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제 AC.408-411의 흐름을 함께 보면 논의가 정리됩니다. 이전 교회가 황폐해지기 전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이 모독적인 것들과 뒤섞여 있어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 상태가 끝에 이르면 새로운 빛, 아침이 밝아 오고 새 교회가 일어납니다. AC.409는 이를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새 교회의 출현과 연결했고, AC.410은 새 교회가 진리를 알고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상태에 머무는 사람들 가운데서가 아니라 아직 진리를 알지 못했던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AC.411은 이러한 질서가 예언서들에서도 거듭 선포된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황폐의 마지막 때가 있어야 한다는 말을 인간이 일부러 신앙과 체어리티를 잃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황폐를 권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황폐해진 교회의 마지막 상태와 그 이후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는 질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빛은 황폐 자체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앞의 AC.407에서 살펴본 것처럼 교회의 어떤 핵심이 보존되고, 주님께서 새로운 시작의 길을 여시는 것입니다.

 

결국 AC.411은 라멕에게서 드러난 황폐를 말씀 전체의 교회 역사와 연결하는 번호입니다. ‘황폐황폐하게 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황량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되며, ‘완결끊어 버림역시 이전 교회가 끝에 이르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들이 예언서들에 거듭 등장한다는 사실을 통해, 이전 교회의 마지막 때와 새 교회의 출현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말씀은 교회의 황폐를 말하면서도 그 이후에 비칠 새로운 아침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AC.411 해설)

 

 

 

AC.412, 창4:20,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 야발 -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로부터 나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창4:20) AC.412‘아다’(Adah)는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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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0, 창4:19, ‘교회의 황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 알면서 거부하는 상태와 아직 알지 못하는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10황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거나, 보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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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4:19)

 

AC.410

황폐에는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거나, 보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의 황폐입니다. 옛날의 유대인들과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그러합니다. 둘째는 무지로 말미암아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황폐입니다. 고대와 오늘날의 이방인들이 그러합니다.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는 사람들, 보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황폐의 마지막 때가 이르면, 그들 가운데서가 아니라 그들이 이방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가운데서 교회가 새롭게 일어납니다. 홍수 이전의 태고교회에서도,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에서도, 유대교회에서도 이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새로운 빛이 이전이 아니라 바로 그때 비치는 이유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습니다. 그때에는 사람들이 계시된 것들이 참되다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믿지 않으므로, 이상 그것들을 모독할 없기 때문입니다. Vastation is of two kinds; first, of those who know and do not wish to know, or who see and do not desire to see, like the Jews of old, and the Christians of the present day; and secondly, of those who, in consequence of their ignorance, neither know nor see anything, like both the ancient and modern gentiles. When the last time of vastation comes upon those who know and do not desire to know, that is, who see and do not desire to see, then a church arises anew, not among them, but with those whom they call gentiles. This occurred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that was before the flood, with the ancient church that was after that event, and also with the Jewish church. The reason why new light shines forth then and not before is, as has been said, that then they can no longer profane the things revealed, because they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that they are true.

 

해설

AC.410은 교회의 황폐를 두 종류로 구별합니다. 하나는 진리를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고, 보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다른 하나는 무지로 말미암아 아직 진리를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상태입니다. 겉으로 보면 두 경우 모두 참된 신앙이 없는 상태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원인이 서로 다르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첫째는 이미 접한 진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상태이고, 둘째는 진리를 받아들일 기회나 지식 자체가 없었던 상태입니다.

 

이 구별은 앞의 AC.409에서 교회가 왜 황폐해진 사람들 가운데 머물지 않고,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옮겨지는지를 설명한 내용과 연결됩니다.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과, 진리를 알지 못하여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은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새로운 교회가 후자의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아직 진리를 알지 못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처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일 길도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종류의 황폐를 설명할 때 스베덴보리는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는다는 표현에 이어 보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단순히 눈으로 무엇을 본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를 이해하거나 알아차리는 일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진리를 접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상태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태도를 강조합니다. 다만 어떤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알고 이해하는지, 무엇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지는 외적인 소속이나 행동만으로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첫째 종류의 사례로 옛날의 유대인들과 자신의 시대의 기독교인들을, 둘째 종류의 사례로 고대와 자신의 시대의 이방인들을 듭니다. 이 사례들은 그가 교회의 황폐와 이전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신학적 구분입니다. 특히 원문의 오늘날AC가 집필되던 스베덴보리의 시대를 가리킵니다. 이를 오늘날의 유대인이나 기독교인, 또는 다른 종교에 속한 모든 사람의 실제 신앙 상태에 대한 일괄적인 판정으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 살펴야 할 것은 집단에 붙인 명칭보다 진리를 알고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아직 알지 못하는 상태사이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첫째 종류의 황폐가 마지막에 이르면 교회가 그들 가운데서가 아니라 그들이 이방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가운데서 새롭게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홍수 이전의 태고교회,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 유대교회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교회가 일어난다는 것은 단순히 기존 교회의 명칭이나 조직이 바뀐다는 뜻이 아닙니다. 새로운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 가운데 교회의 생명이 새롭게 시작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새로운 빛은 그 이전이 아니라 황폐의 마지막 때에 비치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앞의 AC.408에서 제시한 이유를 다시 듭니다. 그때에는 사람들이 계시된 것들이 참되다는 사실을 더 이상 인정하거나 믿지 않으므로, 그것들을 더 이상 모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이 모독적인 것들과 뒤섞여 있는 동안 새로운 빛이나 체어리티가 스며들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그 설명을 이어받아, 그러한 상태가 끝난 뒤에 새로운 시작이 가능해지는 이유를 밝힙니다.

 

여기서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는 단지 알고 있을 인정하거나 믿지 않는 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의 AC.408에서 어떤 진리를 단지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을 모독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AC.410에서도 모독할 수 없게 되는 이유를 계시된 것들이 참되다는 사실을 더 이상 인정하거나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를 진리에 관하여 들었거나 지식이 있는 사람은 모두 모독하고 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모독의 문제는 거룩한 것을 어떻게 인정하고 믿으며, 그것을 무엇과 결합시키는가에 관계됩니다.

 

또한 무지 자체가 신앙보다 낫다거나, 진리를 배우지 않는 편이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려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무지가 영적 목표라는 뜻이 아니라,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한 사람에게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것이 새 교회의 시작이지, 계속 무지 가운데 머무는 것이 새 교회의 완성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번 번호의 두 종류의 황폐는 진리를 아는 일의 가치를 낮추기 위한 구별이 아니라, 진리를 대하는 서로 다른 상태를 밝히기 위한 구별입니다.

 

이제 AC.407-410을 함께 읽으면 논의의 흐름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교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참된 신앙에서 떠나 황폐해질 수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교회의 어떤 핵심은 보존됩니다. 이전 교회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이 모독적인 것들과 뒤섞인 상태가 끝나면 새로운 빛, 아침이 밝아 옵니다. 그리고 새 교회는 진리를 알고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상태에 머무는 사람들 가운데서가 아니라, 아직 진리를 알지 못했던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AC.410은 바로 이 마지막 구별을 명확히 하는 번호입니다.

 

결국 이번 번호는 교회의 새로운 시작을 이해할 때 진리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만을 기준으로 삼을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진리를 받아들이려 하는가, 그리고 받아들인 진리가 삶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로 살아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황폐해진 교회의 끝에서 새로운 빛이 비치고, 그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 가운데 새 교회가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AC.410이 앞의 아침 교회에 관한 설명에 더하는 핵심입니다. (AC.410 해설)

 

 

 

AC.411, 창4:19, ‘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왜 황폐의 마지막 때가 오는가? - 예언서에 나타난 황폐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11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황폐의 마지막 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주님께서 예언서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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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9, 창4:19, ‘아다와 씰라는 왜 라멕의 아내인가? - 속 교회와 겉 교회는 하나입니다’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9‘가인’(Cain)이라 불린 이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이단은 시간이 흐르면서 황폐해졌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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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4:19)

 

AC.409

가인(Cain)이라 불린 이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단은 시간이 흐르면서 황폐해졌습니다. 사랑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신앙을 으뜸으로 삼아 사랑보다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이단에서 파생된 이단들은 점차 그것에서 벗어났으며, 가인으로부터 순서상 여섯 번째인 라멕은 마침내 신앙마저 완전히 부인했습니다. 이때가 되자 새로운 , 아침이 밝아 왔고, 여기서 아다와 씰라(Adah and Zillah) 불리는 교회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은 라멕의 아내들(wives of Lamech)이라 불립니다. 라멕에게는 아무런 신앙도 없었지만 이들이 그의 아내들이라 불리는 것은, 역시 아무런 신앙도 없었던 유대인들의 교회와 교회가 말씀에서 아내들(wives)이라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은 야곱의 아내인 레아와 라헬로 표상되는데, 레아는 교회를, 라헬은 교회를 표상합니다. 교회들은 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일 뿐입니다. 교회에서 분리된 교회, 표상적 교회는 우상 숭배적인 또는 죽은 것과 같지만, 교회와 교회가 함께 있을 하나의 교회를, 실로 동일한 하나의 교회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다와 씰라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야곱과 그의 후손들은 라멕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신앙도 없었으므로, 교회가 그들에게 머물 없었고 불신앙이 아니라 무지 가운데 살고 있던 이방인들에게 옮겨졌습니다. 교회가 황폐해졌으면서도 자기들 가운데 진리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머무는 일은 드물며, 있다 하더라도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진리들에 관하여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옮겨집니다. 이들은 앞의 사람들보다 신앙을 훨씬 쉽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The case was the same with the heresy calledCain,which in process of time was vastated, for although it acknowledged love, yet it made faith the chief and set it before love, and the heresies derived from this one gradually wandered from it, and Lamech, who was the sixth in order, altogether denied even faith. When this time arrived, a new light, or morning, shone forth, and a new church was made which is here namedAdah and Zillah,who are called thewives of Lamech.They are called the wives of Lamech, although he possessed no faith, just as the internal and external church of the Jews, who also had no faith, are also in the Word calledwives,being represented by Leah and Rachel, the two wives of JacobLeah representing the external church and Rachel the internal. These churches, although they appear like two, are yet only one; for the external or representative, separate from the internal, is but as something idolatrous, or dead, whereas the internal together with the external constitute a church, and even one and the same church, as Adah and Zillah do here. As however Jacob and his posterity, like Lamech, had no faith, the church could not remain with them, but was transferred to the gentiles, who lived not in infidelity but in ignorance. The church rarely, if ever, remains with those who when vastated have truths among them [apud se] but is transferred to those who know nothing at all of truths, for these embrace the faith much more easily than the former.

 

해설

AC.409는 가인의 계보에서 일어난 황폐와 새로운 교회의 출현을 설명하면서, 교회의 속과 겉이 어떤 관계에 있어야 하는지를 밝힙니다. 앞의 AC.405에서는 라멕이 신앙의 황폐를 의미하고 그의 두 아내 아다와 씰라가 새 교회의 출현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AC.408에서는 이전 교회가 황폐해진 뒤에야 새로운 빛, 아침이 밝아 온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이 두 설명을 연결하여, 가인에게서 시작된 분리가 라멕에게서 신앙의 소멸에 이르렀을 때 새로운 교회가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가인이라 불린 이단이 처음부터 사랑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사랑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신앙을 으뜸으로 삼아 사랑보다 앞세웠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분리였습니다. 참된 질서에서는 신앙이 사랑에 속하고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얻어야 하지만,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은 그 질서를 뒤집어 신앙이 사랑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후 그 이단에서 파생된 이단들은 점차 최초의 상태에서 더 멀어졌고, 마침내 여섯 번째인 라멕에게서는 신앙마저 완전히 부인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가인의 처음 상태와 라멕의 마지막 상태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인은 사랑을 인정하면서도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웠습니다. 반면 라멕은 신앙마저 부인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계보는 처음부터 모든 신앙과 사랑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의 질서가 뒤집힌 데서 시작하여 그 분리가 점차 진행된 끝에 신앙 자체도 소멸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AC.409는 이러한 진행을 점차 그것에서 벗어났다는 말로 압축합니다.

 

바로 그때 새로운 빛, 곧 아침이 밝아 왔고 새 교회가 이루어졌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새 교회를 아다와 씰라라고 부릅니다. AC.405에서 아다는 새 교회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이며, 씰라는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이 구별을 교회의 속과 겉이라는 관점에서 더욱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새 교회는 내적인 것만을 가진 교회도 아니고 외적인 것만을 가진 교회도 아닙니다. 속과 겉이 함께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라멕에게 아무런 신앙도 남아 있지 않았다면, 왜 새 교회를 나타내는 아다와 씰라가 하필 라멕의 아내들이라고 불리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이 문제를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에 비교하여 설명합니다. 그의 해석에서 야곱과 그의 후손들에게도 참된 신앙이 없었지만, 그들과 관련된 교회의 속과 겉은 말씀에서 아내들로 표상됩니다. 따라서 아다와 씰라가 라멕의 아내들이라고 불린다는 사실만으로 라멕 자신에게 참된 신앙이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비교에서 레아는 겉 교회를, 라헬은 속 교회를 표상합니다. 겉 교회는 예배의 형식과 의식, 말씀의 외적인 표현과 생활의 자연적인 차원에 관계되고, 속 교회는 그 안에 있어야 할 주님을 향한 사랑과 체어리티,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살아 있는 신앙에 관계됩니다. 물론 이번 번호가 레아와 라헬의 모든 상응을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두 아내의 표상을 통하여 교회의 속과 겉이 구별되면서도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는 원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 원리를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속 교회와 겉 교회는 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교회입니다. 교회의 속과 겉은 서로 독립하여 따로 존재하는 두 교회가 아닙니다. 속 교회가 겉 교회에 생명을 주고, 겉 교회는 속 교회가 자연적인 삶 가운데 나타나는 형식이 됩니다. 따라서 둘은 구별되지만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앞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설명할 때 확인한 원리와도 통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구별된다고 해서 서로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듯, 교회의 속과 겉도 구별되지만 하나의 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속 교회에서 분리된 겉 교회, 곧 표상적 교회는 우상 숭배적인 또는 죽은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외적인 예배 형식 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문제는 그 형식이 속에 있는 사랑과 신앙에서 분리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예배와 의식이 아무리 정교하고 말씀의 외적인 형식을 충실히 보존하더라도, 그 안에 주님을 향한 사랑과 체어리티가 없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교회의 외적 표현이 되지 못합니다. 반대로 속 교회와 겉 교회가 함께 있을 때에는 하나의 살아 있는 교회를 이룹니다.

 

이것이 아다와 씰라에게도 적용됩니다. 아다는 새 교회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과 관련되고, 씰라는 자연적인 것들과 관련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서로 경쟁하는 두 교회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두 사람은 새 교회의 서로 다른 차원을 나타내며, 그 차원들이 함께 하나의 교회를 이룹니다. 따라서 아다와 씰라의 의미를 이해할 때에는 어느 한쪽만을 참된 교회로 여기거나 다른 한쪽을 불필요한 것으로 보지 않아야 합니다. 새 교회는 내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함께 있어야 온전한 하나의 교회가 됩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왜 교회가 야곱과 그의 후손들에게 머물지 못하고 이방인들에게 옮겨졌는지를 설명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야곱과 그의 후손들은 라멕과 마찬가지로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교회가 그들에게 계속 머물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교회가 옮겨졌다는 것은 어떤 민족의 혈통이나 문화가 본질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영적 상태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차이는 불신앙무지의 구별에서 드러납니다. 이번 번호에서 불신앙은 단순히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이미 진리들이 자기들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와 관련됩니다. 반면 무지는 진리 자체를 아직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미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황폐해진 사람들보다 신앙을 훨씬 더 쉽게 받아들인다고 설명합니다. 진리를 처음 접하는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이미 진리를 알고도 거부하는 상태에서는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이기가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구별은 앞의 AC.408에서 설명한 모독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거룩한 것을 인정하고 믿으면서 모독적인 것과 뒤섞는 상태에서는 새로운 빛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러한 방식으로 거룩한 것을 모독한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일 길이 열려 있습니다. AC.409에서 교회가 무지 가운데 있던 이방인들에게 옮겨졌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영적 질서와 관련됩니다.

 

다만 이 설명을 오늘날 특정 종교나 민족에 속한 사람들의 실제 신앙 상태를 일괄적으로 판정하는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그의 신학적 해석 안에서 교회의 황폐와 이전을 설명하는 원리입니다. 실제로 한 사람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인정하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외적인 소속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진리를 많이 배웠다는 사실 자체가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제 AC.405-409의 흐름을 함께 보면 라멕과 두 아내의 의미가 한층 선명해집니다. 가인에게서는 사랑을 인정하면서도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우는 분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분리는 여러 이단을 낳으며 진행되었고, 라멕에게서는 신앙마저 부인되는 황폐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때 새로운 아침이 밝아 왔고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새 교회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새 교회는 천적이고 영적인 내적 차원과 자연적인 외적 차원이 함께 하나를 이루는 교회입니다.

 

결국 AC.409는 두 가지 질서를 함께 보여 줍니다. 하나는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우는 분리가 계속될 때 결국 신앙마저 소멸할 수 있다는 황폐의 질서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전 교회의 황폐 이후에도 새로운 빛이 비치고, 속과 겉이 함께 하나를 이루는 새 교회가 일어난다는 회복의 질서입니다. 이때 참된 교회의 본질은 외적인 형식만을 보존하는 데 있지 않고, 그 형식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가 살아 있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아다와 씰라는 바로 그 내적·외적 질서가 함께 이루는 하나의 새 교회를 보여 줍니다. (AC.409 해설)

 

 

 

AC.410, 창4:19, ‘교회의 황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 알면서 거부하는 상태와 아직 알지 못하는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10황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거나, 보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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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8, 창4:19, ‘교회가 황폐해진 뒤에야 새 아침이 밝는 이유 - 거룩한 것의 모독과 새로운 시작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8 교회가 더 이상 아무런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을 만큼 황폐해졌을 때, 그때 비로소, 그 이전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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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8 심화

1. 진리를 모르면 모독할 없다면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은가?

 

AC.408-410을 읽으면 매우 자연스럽게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거룩한 것들을 알면서 그것들을 인정하고 믿은 뒤 모독적인 것들과 뒤섞는 상태를 매우 위험하게 설명하는 한편, 그것들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 사람은 그런 방식으로 모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진리를 배우지 않는 것이 안전한 것 아닐까요? 주님과 말씀에 관하여 적게 알수록 모독할 위험도 줄어든다면, 무지가 오히려 유리한 상태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AC.408의 요점은 무지가 좋은 상태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핵심은 모독이 단순한 무지나 불신앙과 같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거룩한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면 그것을 자기 안에서 거룩한 것으로 받아들였다가 다시 악과 거짓에 결합시키는 방식의 모독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반면 사람이 진리를 알고 인정하며 그것을 신앙의 거룩한 것으로 받아들인 뒤, 그것을 의도적으로 그 반대되는 악과 거짓에 결합시키면 서로 함께 있을 수 없는 것들이 그의 내면에서 뒤섞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위험하다고 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모르는 사람알면서 거부하는 사람사이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AC.410은 황폐에도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고, 보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상태이며, 다른 하나는 무지 때문에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상태입니다. 후자의 사람에게 진리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 사람의 완성된 영적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직 진리를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이미 알고 보면서도 그것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상태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새로운 교회가 때때로 이전 교회의 중심이 아니라 이방인이라고 불리던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난다고 설명합니까? AC.408-410의 문맥에서는 이미 계시된 거룩한 것들을 알고도 계속 거부하고 뒤섞어 온 곳보다, 아직 그것들을 알지 못했던 곳에서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떤 민족이나 종교 집단 자체가 다른 집단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것은 교회의 상태입니다. 어느 곳이든 진리를 알고도 완강하게 거부하는 상태가 될 수 있고, 어느 곳이든 아직 알지 못했지만 받아들일 준비가 된 상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가르침을 복음을 듣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거나 진리를 배우지 않는 것이 영적으로 유리하다는 결론으로 가져가서는 안 됩니다. 진리는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고 거듭나게 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문제는 진리를 아는 이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인 뒤 그것을 어떻게 대하는가입니다. 진리를 알게 된다는 것은 위험 자체가 아니라 큰 선물이며, 동시에 그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이라는 부르심입니다. 위험은 빛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받아들여 빛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의도적으로 어둠과 결합시키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408새로운 아침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무지를 보존하기 위해 새 교회를 일으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새로운 빛을 주시기 위해 일으키십니다. 이전 상태에서는 거룩한 것과 모독적인 것이 뒤섞여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그 상태가 끝에 이르면 아직 그렇게 뒤섞이지 않은 곳에서 다시 진리가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지는 목적이 아니라 새로운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출발 상태일 뿐입니다. 목적은 결국 진리를 알고, 인정하고, 믿으며, 그것을 체어리티의 삶과 결합하는 데 있습니다.

 

목회적으로도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우리는 모르면 책임이 적으니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낫다고 가르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빛을 주실 때 그 빛을 감사히 받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복입니다. 동시에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을 정죄해서도 안 됩니다. 그가 아직 알지 못한다는 사실과 진리를 알고도 거부한다는 것은 같은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AC.408-410은 주님께서 인간의 상태를 얼마나 세밀하게 구별하시며, 황폐 가운데서도 다시 진리를 받을 수 있는 곳을 마련하여 새로운 아침을 여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AC.408 심화 1)

 

 

 

AC.408, 창4:19, ‘교회가 황폐해진 뒤에야 새 아침이 밝는 이유 - 거룩한 것의 모독과 새로운 시작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8 교회가 더 이상 아무런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을 만큼 황폐해졌을 때, 그때 비로소, 그 이전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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