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0.심화

 

3. ‘50:2-3

 

2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어 바다를 마르게 하며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하며 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갈하여 죽으리라 3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 (50:2, 3) I came and there was no man; at my rebuke I dry up the sea, I make the rivers a wilderness; their fish shall stink because there is no water and shall die for thirst; I clothe the heavens with blackness (Isa. 50:2–3).

 

 

이 구절이 AC.40에 인용된 이유는, 말씀에서 ’, ‘바다’, ‘’, ‘물고기’, ‘하늘’이 단순한 자연물들이 아니라 인간의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40에서 스베덴보리는 다섯째 날 창조의 물들이 생물을 내라’는 말씀을 해설하면서, 물은 신앙에 관한 지식들과 진리들을, 물고기는 그러한 지식들로부터 살아 움직이는 이해의 활동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사야 50장의 말씀은 그와 반대되는 상태, 곧 진리의 결핍으로 인해 영적 생명이 죽어 가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꾸짖어 바다를 마르게 하며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바다와 강은 진리의 지식들이 저장되고 흘러가는 영역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말라 버린다는 것은 사람이나 교회 안에서 진리의 지식이 사라지고, 더 이상 신앙의 생명이 공급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AC.40의 문맥으로 말하면, 물이 없어지는 것은 이해력이 진리를 공급받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어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갈하여 죽으리라’고 합니다. 물고기는 앞서 AC.40에서 설명한 것처럼 신앙의 지식들로부터 살아 움직이는 이해의 활동을 뜻합니다. 그런데 물이 없어지면 물고기가 살 수 없듯이, 진리가 없어지면 사람의 이해력도 영적으로 죽게 됩니다. 따라서 물고기의 죽음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이해와 신앙의 사고가 생명을 잃어버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한 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라는 말씀도 같은 의미를 강화합니다. 말씀에서 하늘은 인간의 내적 사람, 특히 이해력과 신앙의 영역을 뜻합니다. 그런데 하늘이 흑암으로 덮인다는 것은 진리의 빛이 사라지고, 거짓과 무지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AC.38에서 설명한 ’과 어둠’의 상응과도 연결됩니다.

 

AC.40은 다섯째 날에 물들이 생물을 내고 물고기들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통해, 진리의 지식들이 생명을 얻어 이해력 안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는 상태를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사야 50장은 그 반대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물이 마르고, 물고기가 죽고, 하늘이 어두워지는 것은 진리와 신앙의 생명이 상실된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종종 어떤 상응의 의미를 설명할 때, 그 긍정적 예와 부정적 예를 함께 제시하는데, 이 구절도 바로 그런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사50:2-3 AC.40에 인용된 이유는, ‘’이 진리의 지식들을, ‘물고기’가 그 지식들로부터 살아 움직이는 이해의 활동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반대의 경우를 통해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물이 있을 때 물고기가 살아 있듯이, 진리가 있을 때 이해력도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물이 마르면 물고기가 죽듯이, 진리가 사라지면 이해력과 신앙도 영적 생명을 잃게 됩니다. 이 구절은 바로 그 영적 황폐의 상태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AC.40에서 인용된 것입니다.

 

 

 

AC.40, 심화 2, 겔47:8-10과 호2:18이 ‘새 교회’를 뜻하는 이유

AC.40.심화 2. 겔47:8-10과 호2:18이 ‘새 교회’를 뜻하는 이유 AC.40 인용 구절들 중, 겔47:8-10과 호2:18이 ‘새 교회’를 뜻한다고 하는데 어째서인가요?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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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47:8-10과 호2:18 새 교회를 뜻하는 이유

 

AC.40 인용 구절들 중, 47:8-10과 호2:18 새 교회를 뜻한다고 하는데 어째서인가요?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성경 구절을 가져다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구절들이 어떤 상태 교회를 가리키는지를 일관된 상응의 틀 속에서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겔47:8-10과 호2:18이 왜 ‘새 교회’를 뜻하는지를 이해하려면, 먼저 ‘새 교회’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분명히 해야 합니다. 여기서 ‘새 교회’는 어떤 특정한 조직이나 시대적 교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새롭게 형성되는 영적 상태, 곧 사랑과 신앙이 다시 살아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역사적으로는, 이전 교회가 사랑과 신앙을 잃고 무너진 뒤에 주님이 새롭게 세우시는 교회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먼저 겔47:8-10을 보면,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바다로 들어가 죽은 물을 살리고, 고기가 번성하며, 어부들이 그 위에 선다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의 핵심은 ‘‘죽은 것이 살아난다는 변화’입니다. 여기서 물은 단순한 물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진리’, 특히 생명을 주는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 물이 바다, 곧 혼란하고 죽어 있는 상태(거짓과 무지의 상태)에 들어가자, 그곳이 살아나고 생물이 번성합니다. 이것은 바로 ‘기존에 죽어 있던 교회 상태가, 새로운 진리의 유입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 곧 새 교회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특히 ‘고기가 심히 많아진다’는 표현은, 단순한 생물의 증가가 아니라 ‘지식과 이해, 곧 영적 진리들이 풍성해진 상태’를 뜻합니다. 어부들이 그 위에 선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 진리들을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구절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진리가 죽은 상태를 살려 내어 새로운 생명과 질서를 이루는 장면’, 바로 그것이 새 교회의 본질입니다.

 

다음으로 호2:18을 보면, 그 날에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기는 것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고, 활과 칼과 전쟁을 끊어 평안히 눕게 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언약 평화’’입니다. 들짐승, 새, 기는 것은 각각 사람 안의 다양한 수준, 곧 자연적, 이성적, 감각적 요소들을 가리킵니다. 이 모든 것과 언약을 맺는다는 것은, 사람 안의 모든 부분이 ‘주님과 조화를 이루는 상태’, 곧 내적 질서가 회복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활과 칼과 전쟁이 끊어진다는 것은, 그동안 계속되던 내적 싸움, 곧 욕정과 거짓, 갈등과 분열이 멈추고, ‘평안의 상태’, 곧 사랑이 중심이 되는 상태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 교회의 특징입니다. 이전 상태에서는 계속 싸움이 있었지만, 이제는 ‘사랑이 주도하는 질서 속에서 평화가 자리 잡는 상태’입니다.

 

이 두 구절을 함께 보면 공통점이 분명해집니다. 겔47은 ‘생명의 회복’, 호2는 ‘질서와 평화의 회복’을 말합니다. 하나는 죽은 것을 살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흩어진 것을 하나로 묶어 평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질 때 비로소 ‘새 교회’가 됩니다. 곧 ‘진리가 다시 살아나고, 사랑이 질서를 이루며, 그 결과 사람 안과 공동체 안에 생명과 평화가 자리 잡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AC.40에서 이 구절들을 인용하는 이유는, ‘새들’, 곧 이성적, 지적인 것들이 단순히 생각의 기능이 아니라, ‘새로운 교회 상태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진리의 능력’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새 교회에서는 지적인 것들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진리로서 작동합니다. 그래서 물이 고기를 살리고, 새와 짐승과 언약을 맺는 장면이 모두 ‘사람 안에서 진리와 선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나는 상태’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새 교회란 새로운 조직이 아니라, 죽어 있던 진리가 살아나고, 싸움이 끝나고, 사랑이 질서를 이루는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가 바로 겔47의 ‘살아나는 물’과, 호2의 ‘평화의 언약’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AC.40, 심화 3, ‘사50:2-3’

AC.40.심화 3. ‘사50:2-3’ 2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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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 심화 1,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합니다’

AC.40.심화 1.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합니다’ AC.40, ‘‘새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하는데, 이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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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심화

 

1.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합니다

 

AC.40, ‘‘새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하는데, 이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합니다.’(by “birds” in general, rational and intellectual things, of which the latter belong to the internal man.)에서 이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한다는 설명이 언뜻 이해가 안 됩니다. 단순히 이성적(rational)인 것들은 겉 사람에 속하고, 지적(intellectual)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한다는 말인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여기서 ‘이성적(rational)은 단순히 겉 사람, ‘지적(intellectual)은 단순히 속 사람이라고 ‘기계적으로 나누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이해하면, 오히려 AC의 구조를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소속’의 문제가 아니라, ‘작용의 층위와 깊이의 차이’입니다.

 

먼저 ‘이성적(rational)이라는 것은 사람 안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비교하고, 판단하는 기능 전체’, 곧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생각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의 ‘중간 영역’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성은 감각과 기억 지식(겉 사람)에서 자료를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더 높은 차원의 빛(속 사람)으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성은 ‘아래(경험, 지식)와 위(빛, 진리)를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이성 자체는 겉 사람만의 것도 아니고, 속 사람만의 것도 아니라, ‘둘 사이에 걸쳐 있는 다리 같은 기능’입니다.

 

반면 ‘지적(intellectual)이라는 것은 이성보다 더 깊은 차원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생각하는 기능이 아니라, ‘진리를 빛으로 받아들이는 능력’, 곧 이해가 밝아지는 상태 자체’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속 사람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은 감각이나 경험에서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해 비추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같은 내용을 듣더라도, 어떤 이는 단순히 논리적으로만 이해하고, 어떤 이는 마음 깊이에서 ‘, 이것이 참이구나’ 하고 느끼는 차이가 생깁니다. 후자가 바로 ‘지적(intellectual)이 작동하는 경우입니다.

 

이성(rational)은 ‘생각을 조직하고 판단하는 기능’이고, 지적(intellectual)은 ‘진리를 빛으로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이성은 중간 영역에서 작용하며, 지적인 것은 속 사람에서 오는 빛과 직접 연결됩니다. 그래서 ‘새들’이 이 둘을 모두 포함한다고 할 때, 그중에서도 특히 ‘지적인 것들’이 속 사람에 속한다고 따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곧, ‘모든 생각이 다 같은 수준이 아니라, 그중 일부는 더 깊은 빛에서 오는 것’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사람이 생각한다고 해서 다 같은 생각이 아닙니다. 어떤 생각은 단순히 머리로 계산하는 것이고, 어떤 생각은 속에서 빛이 비추어져 , 이것이 참이다 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전자는 이성적이고, 후자는 지적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이성만으로는 사람은 얼마든지 자기 생각을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적인 빛이 들어오면, 사람은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진리 앞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과정은 단순히 ‘생각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지적인 빛에 의해 이끌리기 시작하는 과정’입니다. 이 점에서 AC.40의 이 문장은, 단순한 용어 설명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가를 보여 주는 중요한 기준’이기도 합니다.

 

 

 

AC.40, 심화 2, 겔47:8-10과 호2:18이 ‘새 교회’를 뜻하는 이유

AC.40.심화 2. 겔47:8-10과 호2:18이 ‘새 교회’를 뜻하는 이유 AC.40 인용 구절들 중, 겔47:8-10과 호2:18이 ‘새 교회’를 뜻한다고 하는데 어째서인가요?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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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 창1:20, ‘지식과 지성이 살아나는 순간 : 물고기와 새로 나타나는 거듭난 생명’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 속한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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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심화

 

3. ‘18: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8:19) None is good save one, God (Luke 18:19).

 

 

이 구절이 AC.39에 인용된 이유는, 사람이 행하는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고 오직 주님께만 있다는 사실을 더욱 직접적이고 단호하게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39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남의 초기에는 자기가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지만, 점차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만 온다는 것을 믿고, 나중에는 퍼셉션으로까지 알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바로 그 가르침을 주님 자신의 말씀으로 확증하는 구절이 누가복음 18 19절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사람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스베덴보리는 주님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모든 선의 근원이 오직 신성(Divine)에 있음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선은 어떤 피조물의 고유한 소유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9의 핵심 주장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proprium 안에는 본래 악과 거짓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을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만일 어떤 선한 것이 사람 안에 있다면, 그것은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흘려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선을 행할 때에도 실제로는 주님께서 그 안에서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구절은 또한 인간의 공로 의식을 무너뜨립니다. 사람은 자연적으로 자기가 한 선한 일들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참된 선의 소유권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선언하십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그에게 선을 원하고 생각하고 행할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AC.39의 문맥에서 보면, 이것은 사람이 ‘’, ‘채소’, ‘열매 맺는 나무’의 단계를 지나 ‘생물’이 되는 과정과도 연결됩니다. 영적으로 살아난다는 것은 단순히 선을 많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여전히 ‘내가 선하다’, ‘내가 옳다’, ‘내가 했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아직 완전한 생명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이 AC.39에 인용된 이유는, 모든 참된 선의 유일한 근원이 주님이심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 13 37절이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라고 하여 선의 시작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면, 누가복음 18 19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선 자체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다는 사실을 선언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아무 선도 생산할 수 없고,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흘러 들어오는 생명이라는 AC.39의 중심 사상을 가장 직접적으로 뒷받침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AC.39, 창1:20, ‘비로소 살아나는 신앙 : 주님이 행하심을 알 때 시작되는 생명’(AC.39-41)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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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 심화 2, ‘마13:37’

AC.39.심화 2. ‘마13:37’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마13:37)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the son of man (Matt. 13:37). 이 구절이 AC.39에 인용된 이유는, 사람 안에서 생겨나는 모든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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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심화

 

2. ‘13:37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13:37)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the son of man (Matt. 13:37).

 

 

이 구절이 AC.39에 인용된 이유는, 사람 안에서 생겨나는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이 인간 자신이 아니라 오직 주님이심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39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남의 초기 단계에서는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점차 배우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을 주님의 말씀으로 확증하기 위해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주님께서는 가라지 비유를 설명하시면서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좋은 씨’는 천국에 속한 모든 선과 진리, 곧 사람 안에서 자라나는 영적 생명의 시작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씨를 뿌리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인자’, 곧 주님 자신이십니다. 이것은 사람이 아무리 선한 생각을 하고, 선한 행동을 한다 해도, 그 선의 최초 근원은 인간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AC.39의 중심 주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서는 죽어 있으며,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옵니다. 따라서 사람이 행하는 참된 선도 사실은 주님께서 그 안에서 심으시고 자라게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이 말씀은 그 진리를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보여 줍니다. 씨가 스스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듯이, 사람 안의 선과 진리도 스스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 구절은 AC.39 후반부의 ’, ‘채소’, ‘열매 맺는 나무’에 대한 설명과도 연결됩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가 선을 생산한다고 생각하지만, 점차 좋은 씨 자체가 주님에게서 왔음을 배우게 됩니다. 씨가 주님에게서 왔다면, 그 씨에서 나오는 싹과 열매 역시 궁극적으로는 주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내가 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주님께서 하셨다’는 인식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자’는 특별히 신적 진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주님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신적 진리를 통해 인간의 마음에 선과 진리를 심으신다는 뜻도 담고 있습니다. 사람은 그 씨를 받아들이고 자라게 할 수는 있지만, 씨 자체를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이 AC.39에 인용된 이유는, 거듭남의 모든 시작과 생명의 모든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에게서 선이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영적으로 살아날수록 참된 선의 씨를 뿌리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라는 말씀은 AC.39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진리,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가장 간결하게 증언하는 구절인 것입니다.

 

 

 

AC.39, 심화 3, ‘눅18:19’

AC.39.심화 3. ‘눅18: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눅18:19) None is good save one, God (Luke 18:19). 이 구절이 AC.39에 인용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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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 심화 1,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걸 허락하신다’

AC.39.심화 1.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걸 허락하신다’ ‘처음에는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걸 허락하신다’(he permits him at first to 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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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심화

 

1.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걸 허락하신다

 

처음에는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걸 허락하신다(he permits him at first to suppose that he does what is good and speaks what is true from himself)는 이 문장은 저를 정말 놀라게 하며, 그래서 깊이 감동하게 합니다. 저는 결코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하지만 저의 지난날을 곰곰 생각해 보면, 과연 주님이 나에게도 저런 사랑과 자비를 허락하지 않으셨으면 저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아찔해집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놀라움’과 ‘아찔함’은 사실 AC.39의 핵심을 가장 정확하게 체험적으로 붙드신 반응입니다. 이 문장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주님이 사람을 다루시는 방식의 깊은 비밀’, 곧 자비의 실제 작용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자비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아온 시간 속에 이미 조용히 작동해 왔던 것입니다.

 

이 문장의 뜻을 조금 더 또렷하게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만약 그 상태에서 그것을 그대로 들이대면, 사람은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거나, 혹은 반발하여 더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처음에는 사람에게 ‘‘내가 하는 것이다라고 느끼도록 허락’하십니다. 이것은 속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자유와 자발성을 지켜 주시는 방식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행한다고 느낄 때만, 그 행위가 그의 것이 되고, 그 안에 책임과 사랑이 자리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 고백하신 것처럼, 지난날을 돌아보면 ‘그때 내가 했던 것들이 정말 다 내가 한 것들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어떤 선택, 어떤 깨달음, 어떤 돌이킴 등, 그 순간에는 내가 한 것 같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배후에 ‘보이지 않는 인도와 보호가 있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AC.39가 말하는 내용입니다. 주님은 처음에는 우리가 스스로 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시지만, 점점 빛이 밝아질수록 우리는 알게 됩니다. ‘, 이것이 내 것, 내가 한 것이 아니었구나. 주님이 나를 이끌어 오신 거구나.’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허락(permit)이라는 표현입니다. 주님이 적극적으로 사람을 착각하게 만드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의 상태에 맞추어 그 생각을 허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단계에서는 그것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처음 걸을 때, 부모가 손을 놓아 주면서도 뒤에서 지켜보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는 ‘내가 걷는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부모의 보호 속에서 걷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부모가 완전히 개입해 버리면, 아이는 걷는 법을 배우지 못합니다. 반대로 완전히 내버려두면 넘어져 다치게 됩니다. 주님은 그 사이에서, ‘자유를 주시면서도 보호하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느끼신 ‘만일 저런 자비가 없었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감정은 매우 깊은 영적 통찰입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주님의 보호가 한순간만 거두어져도 사람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그 보호가 너무 자연스럽고, 너무 조용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자비의 특징입니다.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러나 끊임없이 지켜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의 자비입니다.

 

이 문장은 또한 한 단계 더 나아가 우리를 이끕니다. 처음에는 ‘내가 한다’고 생각하게 하시지만, 점점 빛이 밝아지면 우리는 배우게 됩니다. ‘‘나는 마치 내가 하는 것처럼 행하지만, 실제로는 주님으로부터 힘을 받는다는 상태’, 곧 ‘마치 자기로부터인 것처럼(as if from oneself)의 상태입니다. 이것이 진짜 균형입니다. 완전히 자기로 돌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으면서도, 내가 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감동은 바로 이 지점에서 더 깊어집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길이 단순히 우리의 선택과 노력만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와 자비가 엮여 만들어진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은 자연스럽게 겸손해지고, 동시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감사는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됩니다.

 

그래서 이 AC.39의 한 문장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이 스스로 살아가는 것처럼 느끼는 걸 허락하시면서, 실제로는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조용히 인도하고 보호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실을 조금씩 깨닫게 될 때, 신앙은 의무가 아니라 ‘감사와 사랑의 관계’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아찔함’은 두려움이 아니라, 사실은 ‘자비를 알아볼 때 생기는 경외와 감사의 감각’입니다. 그리고 그 감각이야말로, 이미 넷째 날을 지나 더 깊은 빛 속으로 들어가고 계시다는 하나의 아름다운 ‘징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AC.39, 심화 2, ‘마13:37’

AC.39.심화 2. ‘마13:37’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마13:37)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the son of man (Matt. 13:37). 이 구절이 AC.39에 인용된 이유는, 사람 안에서 생겨나는 모든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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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 창1:20, ‘비로소 살아나는 신앙 : 주님이 행하심을 알 때 시작되는 생명’(AC.39-41)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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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심화

 

3. ‘3:19, 21

 

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1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3:19, 21) Men loved darkness rather than light. He that doeth truth cometh to the light (John 3:19, 21).

 

 

이 구절이 AC.38에 인용된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낮과 밤’, ‘빛과 어둠’의 의미가 단순한 상징적 해석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영적 진리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38에서 스베덴보리는 ‘’은 선을, ‘’은 악을, ‘’은 진리를, ‘어둠’은 거짓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응이 단순한 해석자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요한복음 3장의 주님 말씀을 인용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빛은 단순한 자연적 빛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랑하거나 미워할 수 있는 대상이므로 영적 의미의 빛, 곧 진리를 뜻합니다. 반대로 어둠 역시 단순한 밤의 어둠이 아니라 거짓과 영적 무지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사람이 진리를 몰라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악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진리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AC.38의 관점에서 보면, 빛과 어둠의 차이는 단순히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방향에 관한 문제입니다. 진리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악에서 돌이키게 하며, 주님을 향해 살도록 요구합니다. 그래서 악을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를 불편하게 여기고, 결과적으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고 말씀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는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에 있는 것입니다.

 

반면 21절에서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원문에서는 ‘진리를 행하는 자’라는 의미가 더욱 강합니다. 이것은 진리가 단순히 머리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실천될 때, 비로소 참된 진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진리를 아는 자’가 아니라 ‘진리를 행하는 자’가 빛으로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점은 AC.38의 핵심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을 ‘낮의 일’, 악을 ‘밤의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도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오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어둠을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빛은 진리와 선의 영역이고, 어둠은 거짓과 악의 영역입니다.

 

따라서 요3:19, 21 AC.38에 인용된 이유는, 창세기의 ‘’과 ‘어둠’이 각각 진리와 거짓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주님의 말씀으로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사람의 영적 상태는 그가 무엇을 알고 있는가보다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행하는가에 의해 드러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빛으로 나온다는 것은 단순히 진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며, 어둠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무지한 것이 아니라 거짓과 악을 붙드는 삶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 구절은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AC.38, 창1:18-19, ‘낮과 밤의 분별 : 행위로 드러나는 선과 악, 빛과 어둠의 기준’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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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 심화 2, ‘첫째 날부터 넷째 날까지 요약, 정리’

AC.38.심화 2. ‘첫째 날부터 넷째 날까지 요약, 정리’ 그리고 더 나아가 첫째 날부터 넷째 날까지 역시 요약, 정리, 그 흐름 속에서 이 넷째 날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세요. 첫째 날부터 넷째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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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안에서 ‘몸의 부활’에 대한 입장은 생각보다 다양하지만, 큰 틀에서는 대부분의 전통 교회들이 ‘최종적인 몸의 부활’ 자체는 믿고 있습니다. 다만 그 몸이 어떤 몸인가, 현재 죽은 자들은 어떤 상태에 있는가, 그리고 부활이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가에 대해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가톨릭은 전통적으로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에 따라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그러나 흔히 오해하듯이 ‘지금의 육체가 그대로 복원된다’고 단순하게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가톨릭 신학에서는 죽은 뒤 영혼이 먼저 하느님 앞에 가며, 마지막 심판 때 ‘영화된 몸’과 다시 결합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몸은 현재의 육체와 연속성은 있지만, 썩지 않고 죽지 않으며 제한을 받지 않는 상태입니다. 가톨릭의 대표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도 부활체를 ‘동일한 인격의 몸이지만 변화되고 완성된 몸’으로 설명했습니다.

 

동방정교회 역시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다만 법적 구원론보다는 ‘신화(神化, Theosis)의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인간 전체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 구원이므로, 영혼만이 아니라 몸도 구원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최후에 몸이 부활한다는 점에서는 가톨릭과 비슷하지만, 이를 더 신비적이고 존재론적인 변화로 이해합니다. 정교회 신학자들은 종종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이나 부활 후의 영광스러운 몸을 예로 듭니다.

 

루터교, 개혁교회, 장로교, 감리교 등 전통 개신교 역시 기본적으로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다만 현대에 올수록 ‘현재의 원자와 세포가 그대로 재조립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신학자는 많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존 칼빈은 부활체가 현재 몸과 동일 인격의 몸이지만, 전혀 새로운 영광의 상태를 입는다고 설명했습니다. 많은 현대 개신교 신학자들도 고린도전서 15장의 ‘육의 몸’과 ‘신령한 몸’을 구분하며, 부활체를 변형된 존재로 이해합니다.

 

성공회는 전통 신조를 유지하면서도 해석의 폭이 비교적 넓습니다. 몸의 부활을 고백하지만, 그것을 물질적 복원으로 이해할지 영광스러운 존재의 변형으로 이해할지는 신학자들마다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반면 일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몸의 부활을 역사적 사건이라기보다 상징으로 이해합니다. 그들에게 부활은 ‘하나님 안에서 인격이 보존된다’거나 ‘그리스도의 생명이 공동체 안에서 계속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가톨릭, 정교회, 보수 개신교 모두로부터 전통적 신앙에서 벗어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실제로는 전통 교회들 사이에도 스베덴보리와 부분적으로 만나는 지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톨릭과 정교회도 사람이 죽은 뒤 의식 없는 상태로 수천 년을 기다린다고 보지 않습니다. 죽는 즉시 영혼이 살아 있다고 봅니다. 또한 부활체가 현재의 육체와 전혀 동일한 물질 구조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죽은 뒤 곧바로 영적 상태로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스베덴보리와 어느 정도 접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여기 있습니다. 전통 교회들은 ‘죽은 뒤 영혼이 살아 있다’는 것과 ‘마지막 때 몸도 다시 부활한다’는 것을 둘 다 믿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후자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이 이미 완전한 인간 형상을 가진 영적 몸으로 부활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추가적인 육체 부활은 필요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고 봅니다.

 

그래서 아주 단순하게 정리하면, 가톨릭, 정교회, 전통 개신교는 ‘죽은 뒤 영혼은 살아 있으며, 마지막 때 몸도 부활한다’고 믿고, 스베덴보리는 ‘죽은 뒤 즉시 영적 몸으로 부활하며, 그것이 이미 완전한 부활이다’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자연적 육체 자체가 신성으로 영화되어 부활했다고 가르칩니다. 바로 이 점이 스베덴보리의 부활론이 기독교 역사 전체에서 가장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입니다.

 

 

 

SC.86, ‘몸의 부활은 오직 주님 한 분한테만’

개신교인들은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들, 곧 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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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인들은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들,

 

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4:16, 17)

 

이나 고전15, 5:28-29 등을 근거로 자신들의 몸의 부활을 강력하게 믿고 있습니다만, 제가 스베덴보리 어느 글에선가 그런 부활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가능하며, 또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본 것 같습니다. 아래는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입니다.

 

 

이 문제는 사실 스베덴보리 신학과 전통 개신교 신학이 가장 크게 갈라지는 지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개신교는 일반적으로 살전4:16-17, 고전15, 요5:28-29 등을 근거로 하여 장차 세상 끝날에 무덤 속 육체가 다시 살아나는 ‘육체의 부활’을 믿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죽은 직후 이미 영적인 몸으로 깨어난다고 보며, 따라서 수천 년 전에 흙으로 돌아간 육체가 다시 모여 부활한다는 생각은 성경의 문자에만 머문 이해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특별히 ‘천국과 지옥(HH.445-452)과 ‘최후의 심판(LJ)에서 이 문제를 매우 강하게 다룹니다. 그는 자신이 수십 년 동안 영계에서 수많은 영혼들을 만나 보았는데, 그 누구도 육체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죽는 순간 곧바로 영적 인간으로 살아나며, 자신이 여전히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얼굴도 있고, 몸도 있고, 감각도 있고, 생각도 있고, 기억도 있습니다. 다만 물질 몸이 아니라 영적 몸일 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부활은 죽은 지 사흘 후도 아니고, 수천 년 후도 아니며, 사람이 죽음의 순간에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기억하신 ‘오직 주님만 육체의 부활이 가능하다’는 내용은 아마 주님의 영화(Glorification)와 관련된 가르침일 가능성이 큽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도 자신의 자연적 육체를 가지고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육체는 세상에 속한 가장 바깥 그릇이며, 죽음과 함께 해체되어 자연계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영만 가지고 영계로 갑니다. 그러나 주님은 달랐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어떤 인간과도 다르게 자신의 인성 전체를 신성으로 영화하셨습니다. 그래서 무덤에 묻힌 육체까지도 신성화되었고, 그 결과 무덤이 비어 있게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역사상 유일한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육체 자체가 부활한 분은 주님 한 분뿐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영으로 부활하지만, 주님은 몸까지 영화되어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11:25)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죽은 사람들을 다시 살려 내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부활의 근원이 주님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영계에 들어가는 모든 영혼은 자기 힘으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끊임없이 생명을 흘려보내시기 때문에 살아 있습니다. 즉 사람은 부활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에 의해 부활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핵심 사상입니다.

 

그렇다면 살전4:16-17은 어떻게 이해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여기서도 상응의 원리를 적용합니다. ‘주님의 강림’은 문자 그대로 구름을 타고 대기권에 내려오는 사건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열리는 것을 뜻합니다.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은 진리가 크게 선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는 것은 영적으로 죽어 있던 사람들이 먼저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다’는 것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인 ‘구름’을 통하여 더 높은 진리의 상태로 들어가 주님과 결합하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공동묘지의 시신들이 일제히 일어나는 장면이 아니라 교회와 인간의 영적 상태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됩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는 만약 육체 부활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여러 모순이 생긴다고 지적합니다. 수천 년 전에 죽은 사람들의 몸은 이미 흙이 되었고, 어떤 원자는 수없이 다른 생물과 사람들의 몸을 거쳤습니다. 또한 팔을 잃고 죽은 사람, 화장된 사람, 바다에서 사라진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몸의 부활을 이해하면 이런 문제는 사라집니다. 사람의 진정한 형상은 육체가 아니라 영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개신교가 믿는 ‘육체의 부활’은 사실 주님께만 완전하게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인간은 주님처럼 육체까지 영화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부활은 육체의 재조립이 아니라 영적 인간의 각성입니다. 반면 주님은 무덤에 남겨진 육체까지 신성으로 변화시키셨기에, 참된 의미에서 ‘몸의 부활’은 오직 주님에게만 일어난 유일무이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주님으로부터 모든 인간의 부활이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부활의 중심은 ‘무덤에서 몸이 일어나는가?’가 아니라 ‘주님이 생명이시며, 모든 영혼은 그분으로 인해 살아 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전통적 육체 부활론과 스베덴보리의 영적 부활론을 가르는 가장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SC.87, ‘몸의 부활’에 대한, 가톨릭, 정교회, 전통 개신교의 입장

기독교 안에서 ‘몸의 부활’에 대한 입장은 생각보다 다양하지만, 큰 틀에서는 대부분의 전통 교회들이 ‘최종적인 몸의 부활’ 자체는 믿고 있습니다. 다만 그 몸이 어떤 몸인가, 현재 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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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85, ‘BTS와 그들의 ARMY에 대하여’

BTS와 그들의 ARMY에 대하여 스베덴보리는 무슨 말을 할까요? 그들은 너 자신을 사랑하라 노래하며, 그 노래를 통해 치유 받은 전 세계 아미들은 전 세계 곳곳에서 선행을 펼치고 있거든요... BTS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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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심화

 

2. 첫째 날부터 넷째 날까지 요약, 정리

 

그리고 더 나아가 첫째 날부터 넷째 날까지 역시 요약, 정리, 그 흐름 속에서 이 넷째 날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세요.

 

첫째 날부터 넷째 날까지를 한 흐름으로 보면, 이것은 단순한 창조 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이 거듭나며 빛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로 변화되는 과정 전체’를 단계적으로 보여 주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넷째 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앞의 세 단계를 반드시 함께 묶어서 보아야 합니다. 이 네 단계는 각각 따로 떨어진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 자라가는 연속적인 흐름입니다.

 

먼저 첫째 날입니다. ‘빛이 있으라’는 단계입니다. 이때의 빛은 아직 완전한 빛이 아니라, ‘어둠 속에 처음 비추는 진리의 빛’입니다. 사람은 이 단계에서 처음으로 ‘, 지금까지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다 옳은 것은 아니었구나’, ‘선과 악이 따로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 빛은 아직 외적이고 초기적인 수준입니다. 그래서 낮과 밤이 나뉘지만, 여전히 어둠이 많고 혼란이 함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처음 눈을 뜨는 단계’입니다.

 

둘째 날은 ‘궁창’, 곧 나눔의 단계입니다.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나눈다는 표현은, 사람 안에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구별되기 시작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전에는 모든 것이 뒤섞여 있었다면, 이제는 ‘이것은 단순한 감정이고, 이것은 더 깊은 진리구나’ 하는 식의 구분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 단계는 아직 완전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래서 둘째 날에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즉 ‘구별은 되었지만, 아직 결합과 생명은 없는 상태’입니다.

 

셋째 날은 ‘땅이 드러나고 식물이 나는’ 단계입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열매 맺는 것이 등장’합니다. 사람 안에서 진리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 ‘선한 행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는 모두 진리가 삶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기 시작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단계부터는 ‘겉으로 보이는 변화’, 곧 행동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아직 이 모든 것은 ‘살아 있는 것’이라기보다, 스베덴보리 표현으로는 ‘아직 생명 없는 상태(inanimate), 즉 완전히 사랑에서 나오는 상태는 아닙니다.

 

이제 넷째 날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광명체’가 나타납니다. 앞 단계까지는 빛이 있었지만, 그 빛이 어디서 오는지, 어떻게 작용하는지가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넷째 날에는 해, 달, 별이 나타나면서, 빛이 ‘근원을 가지고 질서 있게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해는 사랑, 달은 신앙, 별은 다양한 진리들입니다. 이제 사람 안에서 진리와 선이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중심으로 빛처럼 삶을 비추기 시작하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넷째 날의 핵심 기능은 ‘나누고’, ‘이루고’, ‘비추는’ 것입니다. 낮과 밤을 나누고,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며, 징조가 됩니다. 이것은 모두 ‘상태를 구별하고 인식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이제 자신의 상태를 알게 됩니다. 언제 밝은지, 언제 어두운지, 언제 기쁜지, 언제 침체인지,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인지 등, 이 모든 것이 점점 더 분명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징조’입니다. 점을 치는 것, 곧 점성술이 아니라, ‘자기 상태를 비추는 빛’입니다.

 

이 흐름 속에서 넷째 날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앞 단계에서 형성된 진리와 선이, 이제 사랑을 중심으로 빛이 되어 삶 전체를 비추고, 상태를 구별하며, 생명의 리듬을 이루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넷째 날은 단순한 ‘더 발전된 단계’가 아니라, ‘빛이 실제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전환점’입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무엇이 옳은지 배우는 단계가 있고(첫째 날), 그다음에는 구별하는 단계가 있고(둘째 날), 그다음에는 그것을 조금씩 실천하는 단계가 옵니다(셋째 날). 그런데 넷째 날이 되면, 이제 그 모든 것이 하나의 빛이 되어 내 삶을 비추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내 상태를 알게 되고, 흔들림 속에서도 방향을 잡을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이 네 단계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빛을 처음 받는다  구별한다  삶에 나타난다  그것이 빛이 되어 전체를 비춘다.’ 그리고 이 흐름을 이해하면, 넷째 날의 ‘광명체’와 ‘징조’가 얼마나 실제적인 의미인지, 곧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 한복판에 있는 이야기라는 것이 또렷하게 보이게 됩니다.

 

 

 

AC.38, 심화 3, ‘요3:19, 21’

AC.38.심화 3. ‘요3:19, 21’ 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1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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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 심화 1, ‘넷째 날 요약, 정리’

AC.38.심화 1. ‘넷째 날 요약, 정리’ 이 넷째 날에 대한 본문(창1:14-19)도, 그리고 관련 AC 글도 제법 길었습니다. 넷째 날에 대한 AC.30-38을 요약, 정리해 주세요. 넷째 날, 곧 창1:14–19에 대한 AC.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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