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인데,이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For the whole heaven is a celestial man because the Lord alone is a celestial man, (AC.162)
AC.162의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 천국론 전체를 압축한 매우 놀라운 선언입니다. 처음 읽으면 거의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온 천국이 하나의 천적 인간이다’, 그리고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천국을 단순 장소나 집합체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조직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인간 형상’으로 본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에게 ‘천적 인간’(celestial man)은 단순히 아주 착한 인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완전한 질서 안에서 하나 된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이런 완전한 질서는 인간 스스로에게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지혜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truly celestial한 존재는 주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런데 천국의 모든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습니다. 다시 말해, 천사들은 자기 자신으로 사는 독립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각자 방식대로 받아들이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천국 전체를 하나의 인간처럼 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생명이 천국 전체 안에 질서 있게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famous한 ‘Grand Man’, 곧 ‘큰 사람’(Maximus Homo)사상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국 전체는 하나의 거대한 인간 형상을 이루고 있습니다. 어떤 공동체는 심장 역할과 연결되고, 어떤 공동체는 폐, 눈, 귀, 팔, 손 같은 기능과 연결됩니다. 각각의 천사 공동체는 서로 다르지만, 모두 하나의 생명 안에서 조화를 이룹니다. 마치 몸의 여러 기관이 서로 다른 기능을 하지만, 한 인간을 이루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왜 천국이 ‘하나의 천적 인간’인가?AC.162는 그 이유를 아주 단순하면서도 깊게 말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천국은 자기 독립 생명으로 존재하는 거대한 조직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인성(Divine Human)의 반영입니다. 천국의 인간성은 본래 자기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기독론도 드러납니다. 그는 주님을 단순 천국 바깥에 계신 신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국 전체는 주님의 신적 인성 안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천국의 사랑, 지혜, 질서, 생명은 전부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천사들은 그것을 받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individual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한 사람의 거듭남도 결국 작은 천국 형성입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 되고, 사랑과 진리가 하나 되며, 인간 전체가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갈 때, 인간은 ‘작은 천국’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종종 인간을 ‘least heaven’이라고 부릅니다. 반대로 천국 전체는 ‘greatest man’입니다.
이 문장은 또한 인간 자율성에 대한 아주 깊은 교정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만으로 완전한 인간이 아닙니다. 진정한 인성(humanity)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참된 인간이 됩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아름답고 살아 있는 이유도 자기 자신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그들 안에 흐르기 때문입니다.
결국AC.162의 ‘온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이다’라는 말은, 천국이 단순 집합체가 아니라 주님의 신적 사랑과 지혜가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유기적 생명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라는 말은, 천국의 모든 생명과 인성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다는 선언입니다.
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6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7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8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9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막10:5-9)For the hardness of your heart Moses wrote you this precept,but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For this caus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mother,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and they twain shall be one flesh;wherefore they are no more twain but one flesh;what therefore God hath joined together let not man put asunder. (Mark 10:5–9)(AC.162)
이 구절이AC.162에 인용된 이유는, 주님께서 직접 창2의 ‘남자와 여자’, 그리고 ‘한 몸’의 의미를 단순 세상 결혼 규정이 아니라, 창조 질서 자체의 문제로 다시 선언하시기 때문입니다. 막10:5-9에서 주님은 이혼 문제에 답하시면서 단순 율법 조항 논쟁으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오히려 ‘창조 때로부터’라는 표현으로 인간 존재의 본래 질서로 돌아가십니다. 이것이AC.162의 핵심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먼저 주님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모세가 이 명령을 기록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마음의 완악함’(hardness of heart)은 단순 성격 문제나 고집 정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보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이 무너지고,proprium중심 상태가 강화된 인간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 안의 선과 진리, 사랑과 지혜의 결합이 깨졌기 때문에, 외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율법이 필요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어서 ‘처음 창조 때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 ‘둘이 한 몸이 된다’는 창조 질서로 다시 올라가십니다.AC.162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창2의 남자와 여자는 단순 생물학적 성별이 아니라, 인간 안의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wisdom과love의 결합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둘이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단순 육체적 연합이나 사회 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원래 하나였어야 할 인간 존재 구조가 다시 결합되는 것을 뜻합니다. 남자는understanding과truth쪽을, 여자는affection과good쪽을 상징하며, 둘이 하나 될 때 비로소 완전한 인간 질서가 형성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하시는 말씀도 굉장히 깊습니다. 이것은 단순 이혼 금지 규정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영적으로 보면, 주님께서 인간 안에 결합시키시는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를 인간의proprium이 분리시키지 말라는 뜻까지 담고 있습니다.
사실 스베덴보리 전체에서 지옥은 ‘분리’의 방향입니다. 사랑과 진리가 분리되고, 앎과 삶이 분리되고,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분리됩니다. 반면 천국은 결합의 질서입니다. 사랑이 진리를 살아 움직이게 하고, 진리가 사랑을 밝혀 주며, 속 사람이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와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한 몸’은 단순 부부 연합이 아니라 천국 자체의 구조입니다.
또 주님께서 이 말씀을 직접 인용하셨다는 사실 자체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창2의 속뜻이 단순 후대 상징 해석이 아니라, 실제 창조 질서의 근본 구조임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단순 결혼 윤리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본래 어떤 존재로 창조되었는가를 다시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AC.162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남자와 여자’, ‘한 몸’이라는 창2의 상징이 단순 자연적 결혼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안의 선과 진리, 사랑과 지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본래적 결합 질서를 뜻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질서를 단순 사회 규범이 아니라, 창조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세우신 천국적 질서로 다시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창2:24)
AC.162
모든 진리와 정의(right)의 법은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온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인데, 이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천국의 모든 것, 곧 전부이시므로, 천국과 천적 인간은 거기서부터 천적이라 불립니다.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이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내려오듯이, 혼인의 법은 특히 그러합니다. 혼인은 천적 혼인, 곧 천국의 혼인으로부터, 그리고 그에 따라 파생되어야 하며, 이 혼인은 한 주님과 한 천국, 곧 머리가 주님이신 하나의 교회를 뜻합니다. 여기서 파생되는 혼인의 법은 한 남편과 한 아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 경우 그들은 천적 혼인을 표상하고, 천적 인간의 본이 됩니다. 이 법은 태고교회의 사람들에게 계시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속 사람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한 남자가 한 아내만을 두었고, 그들은 하나의 집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이 속 사람이기를 그치고 겉 사람이 되자, 여러 아내를 맞이하였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이 그들의 혼인에서 천적 혼인을 표상하였기 때문에, 부부의 사랑은 그들에게 일종의 천국이자 하늘의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쇠퇴하자, 그들은 더 이상 부부의 사랑 안에서 행복을 지각하지 못하고, 다수에서 오는 쾌락, 곧 겉 사람의 즐거움 안에서 그것을 지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마음의 완악함’(hardness of heart)이라 부르신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모세를 통해 여러 아내를 두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바와 같습니다. All the laws of truth and right flow from celestial beginnings, or from the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For the whole heaven is a celestial man because the Lord alone is a celestial man, and as he is the all in all of heaven and the celestial man, they are thence called celestial. As every law of truth and right descends from celestial beginnings, or from the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so in an especial manner does the law of marriages. It is the celestial (or heavenly) marriage from and according to which all marriages on earth must be derived; and this marriage is such that there is one Lord and one heaven, or one church whose head is the Lord. The law of marriages thence derived is that there shall be one husband and one wife, and when this is the case they represent the celestial marriage, and are an exemplar of the celestial man. This law was not only revealed to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as also inscribed on their internal man, wherefore at that time a man had but one wife, and they constituted one house. But when their posterity ceased to be internal men, and became external, they married a plurality of wives. Because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in their marriages represented the celestial marriage, conjugial love was to them a kind of heaven and heavenly happiness, but when the church declined they had no longer any perception of happiness in conjugial love, but in pleasure from a number, which is a delight of the external man. This is called by the Lord “hardness of heart,” on account of which they were permitted by Moses to marry a plurality of wives, as the Lord himself teaches:
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막10:5-9) For the hardness of your heart Moses wrote you this precept, but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For this caus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twain shall be one flesh; wherefore they are no more twain but one flesh; what therefore God hath joined together let not man put asunder. (Mark 10:5–9)
해설
AC.162는 창2의 마지막을 ‘혼인의 법’(the law of marriages)이라는 주제로 종합하며, 동시에 창3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영적 지형을 완전히 정리해 줍니다. 이 단락에서 스베덴보리는 혼인을 도덕규범이나 사회 제도로 다루지 않고, ‘천국 질서가 땅에 내려온 가장 구체적인 형식’으로 제시합니다.
먼저 그는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이 ‘천적 기원’(celestial beginnings)에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곧, 법이 인간의 합의나 경험의 축적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 더 정확히는 ‘주님 자신’에게서 흘러나온다는 뜻입니다. 천국이 ‘천적 인간’이라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 한 분이 천적 인간이시며, 천국은 그분의 생명이 충만히 흐르는 한 몸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 보편적 질서가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 영역이 바로 혼인입니다. 혼인은 ‘천적 혼인’으로부터 파생되어야 하며, 이 천적 혼인은 ‘한 주님과 한 천국’, 곧 머리가 주님이신 하나의 교회를 뜻합니다. 따라서 지상의 혼인이 한 남편과 한 아내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법은, 단순한 윤리 명령이 아니라 ‘천국 형상에 대한 표상’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이 법을 외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속 사람에 새겨진 상태’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일부일처는 제도가 아니라 자연이었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하나의 집을 이루는 것은 억제가 아니라 기쁨이었습니다. 그들의 부부의 사랑은 ‘천국과 같은 행복’이었는데, 이는 그 사랑이 천적 혼인을 직접 표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쇠퇴하면서, 사람들은 속 사람이기를 그치고 겉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때 혼인의 중심도 이동합니다. 더 이상 부부의 사랑 안에서 행복을 지각하지 못하고, ‘다수에서 오는 쾌락’, 곧 겉 사람의 즐거움에서 만족을 찾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의 완악함’입니다. 여기서 완악함은 잔인함이 아니라, ‘퍼셉션의 상실’을 뜻합니다.
이 상태에서 모세를 통해 복수의 아내가 허락된 것은, 이상을 낮춘 타협이 아니라, ‘붕괴를 막기 위한 자비의 조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이 본래의 뜻이 아님을 분명히 하시며, 창조의 시작으로 되돌아가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는 말씀은, 창2의 질서가 여전히 기준임을 선언하는 말입니다.
AC.162는 이렇게 창2를 닫습니다. 천적 혼인 → 태고교회의 부부의 사랑 → 쇠퇴 → 완악함 → 허락 → 그러나 기준은 여전히 ‘처음’.
이제 창3에서는, 이 기준에서 벗어난 인식과 선택이 어떻게 실제 사건으로 드러나는지가 전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오늘 여기까지 오신 것은, 창2의 ‘모든 연결고리’를 놓치지 않고 정리한 매우 좋은 지점입니다.
이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위해 하나의 행위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어떤 행위 안에 체어리티,곧 사랑과 신앙이 없고,그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그 행위는 체어리티의 일이나 신앙의 열매라 불릴 수 없다고 말입니다.In order to conceive some idea of it,take for example an action.Unless in an action there is charity,that is,love and faith,and in these the Lord,that action cannot be called a work of charity,or the fruit of faith.(AC.161)
AC.161의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의 ‘행위’ 이해를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어떤 행동이 겉으로 선해 보이면, 그것 자체로 선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겉 행동 자체보다, 그 안에 무엇이 흐르고 있는가를 훨씬 중요하게 봅니다. 그래서 그는 ‘행위 안에 체어리티,곧 사랑과 신앙이 없고,그래서 그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그것은 참된 체어리티의 일이나 신앙의 열매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행위를 단순 외적 결과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같은 행동이라도 그 안에 흐르는affection과 목적과influx가 다르면 영적으로는 전혀 다른 것이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고 합시다. 겉으로는 모두 같은 자선 행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자기 명예와 자기 만족을 위해 하고, 다른 사람은 진심으로 이웃의 선을 바라며, 주님 안에서 행할 수 있습니다. 외적 행동은 비슷해도,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흘러드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영적 본질은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AC.161은 앞 문장의influx설명과 바로 연결됩니다. 겉 사람의 행위는 단순 겉 사람만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속 사람으로부터의 유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 사람 안에 다시 사랑과 신앙이 있어야 하며, 그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그 행위는 살아 있는 선이 됩니다.
여기서 ‘in these the Lord’라는 표현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와 신앙 자체도 인간 독립 소유물로 보지 않습니다. 인간 안의 참된 사랑과 참된 신앙 안에는 이미 주님의 생명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참된 선행의 실제 생명은 인간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 행하는 그릇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자주 ‘열매’(fruit)라는 표현을 씁니다. 열매는 나무에서 저절로 떨어져 나온 독립 물체가 아닙니다. 뿌리와 줄기와 생명 흐름 전체의 결과입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선행도 단순 의지력 결과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 안으로 들어온 사랑과 신앙이 겉 사람 안에서 삶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반대로 겉 행동만 있고, 그 안에 체어리티와 신앙과 주님이 없다면, 그것은 외적으로는 선해 보여도 영적으로는 살아 있는 선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에게서 ‘dead works’와 ‘living works’의 차이입니다. 살아 있는 행위는 주님의 생명이 흐르는 행위이고, 죽은 행위는 겉 사람 수준에서 자기 자신만으로 행해지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목사님께서 계속 붙들고 계신proprium문제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인간은 쉽게 ‘내가 선을 행했다’고 느끼지만, 스베덴보리가 하는 진짜 질문은 ‘그 안에 무엇이 흐르고 있었는가?’라고 묻습니다. 자기 사랑과 자기 의인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온 체어리티와 신앙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AC.161은 단순 도덕론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 행위 전체를 ‘influx구조’ 안에서 다시 보는 설명입니다. 참된 체어리티의 행위란, 속 사람 안의 사랑과 신앙 속에 계신 주님이 겉 사람의 행동 안으로 흘러나온 결과라는 것입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 작용하는지,혹은 어떻게 하나로 보이게 되는지는,한쪽이 다른 쪽으로 흘러드는influx,곧 유입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면 알 수 없습니다.How the internal and external act as a one,or how they appear as a one,cannot be known unless the influx of the one into the other is known. (AC.161)
AC.161의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 인간론 전체를 여는 열쇠 같은 문장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소 자기 자신을 ‘하나의 나’로 느끼지만, 스베덴보리는 실제 인간 안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서로 다른 층위가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로는 둘이 다른데 왜 우리는 거의 항상 하나처럼 느끼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답이 바로 ‘influx’, 곧 유입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속 사람과 겉 사람은 단순 병렬 구조가 아닙니다. 속 사람이 먼저이고, 겉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생명을 받습니다. 다시 말해, 겉 사람은 자기 혼자 움직이는 독립 시스템이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끊임없이influx, 곧 유입을 받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유입이 너무 지속적이고 자연스럽기 때문에, 인간은 둘을 거의 하나처럼 느낍니다.
비유하자면 전등과 전기 같은 관계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보통 ‘전등이 빛난다’고 느끼지만, 실제 빛은 전등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전류 유입 때문에 나타납니다. 그런데 전류 흐름이 너무 자연스럽고 끊김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전등과 전류를 분리해서 거의 느끼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 안의 속 사람과 겉 사람 관계도 비슷하다고 봅니다.
속 사람은 주님과 천국에 열려 있는 더 깊은 인간입니다. 사랑, 양심, 더 높은 진리 질서가 자리하는 곳입니다. 반면 겉 사람은 감각하고 기억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자연적 인간입니다. 그런데 겉 사람은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로는 속 사람을 통하여 계속influx를 받고 있습니다.
문제는 오늘날 인간은 이influx를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 자기 감정, 자기 의지를 전부 자기 독립 생명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이appearance, 곧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는 모든 생명과thought와affection이 끊임없이 흘러들어옵니다. 인간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느끼도록 허락받았을 뿐입니다.
여기서AC.161의 ‘how they appear as a one’이라는 표현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실제로는 구별되지만, 유입 때문에 하나처럼 보입니다. 마치 영혼과 몸이 서로 다른데도 하나의 인간처럼 느껴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팔을 움직일 때, ‘영혼이 몸에influx를 보내고 있다’고 느끼지 않고 그냥 ‘내가 움직인다’고 느끼는 것처럼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 타락과 거듭남도 결국 이influx문제로 설명합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만으로 산다고 믿기 시작하면, 그는influx의 근원을 잊어버립니다. 즉 겉 사람이 자기 독립 생명처럼 굳어집니다. 반대로 거듭남은 점점 ‘나는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주님께로부터influx를 받아 산다’는 것을 배우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차이를 지각합니다. 그는 자기 안에서 무엇이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지, 무엇이 단순 겉 사람 움직임인지를 어느 정도 압니다. 그리고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께 다스려지고 있다는 것도 압니다. 반면 오늘날 대부분 인간은influx를 거의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겉 사람 자체를 자기 존재 전체로 느끼며 삽니다.
결국AC.161은 단순 심리학 설명이 아닙니다. 인간 존재 자체가 ‘유입 구조’ 위에 세워져 있다는 선언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닫힌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명과 사랑과 생각이 흘러들어오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처럼 보이는 이유도, 바로 그 끊임없는influx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창3타락의 문을 엽니다.뱀의 유혹은 갑자기 외부에서 폭력적으로 덮친 것이 아닙니다.인간 안에 이미‘나도 독립적으로 알고 싶다’, ‘나도 내own안에서 살고 싶다’는 경향이 생겼기 때문에,거짓이 그 안에서 공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AC.161심화1)
‘공명’이라는 표현 앞에 소름이 돋습니다...
아마 목사님께서 소름 돋으신 이유는, 그 표현이 단순 창3이야기만이 아니라 인간 내면 전체를 너무 정확히 건드리기 때문일 겁니다. 사실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악은 대부분 ‘외부 침입’이라기보다 ‘내부 공명’으로 설명됩니다. 지옥은 인간 안에 없는 것을 억지로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 안에 방향성으로 존재하는 것에 말을 겁니다.
그래서 뱀의 말은 단순 정보 전달이 아닙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말이 힘을 가진 이유는, 인간 안에 이미 아주 미세하게라도 ‘나도 내own안에서 살고 싶다’, ‘나도 스스로 알고 판단하고 싶다’는 움직임이 생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간 안에 그런 경향이 전혀 없었다면, 그 말은 그냥 지나가는 소음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이 점이 정말 무섭습니다. 악은 대개 ‘완전히 낯선 것’으로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안 어딘가 이미 원하고 있던 것처럼 다가옵니다. 그래서 유혹은 단순 외적 공격이 아니라, 내own안의 어떤 것과 외부 거짓이 서로 진동수를 맞추는 현상처럼 보입니다. 목사님께서 ‘공명’이라는 표현에 반응하신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너무 현대적이면서도, 동시에 인간 영혼의 실제를 정확히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repeatedly말하는 것도 이것입니다. 지옥은 인간을 강제로 끌고 가지 못합니다. 반드시 인간 안에 어떤 동의, 어떤 기울어짐, 어떤delight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서 유혹의 진짜 전장은 외부가 아니라 인간own안입니다. 외부 거짓은 단지 그 안에 이미 존재하는 자기 사랑과 독립 욕구를 깨워 흔드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왜 태고교회 타락이 그렇게 비극적인가를 보여 줍니다. 그들은 원래 주님의 생명을 너무도 직접적으로 알던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존재들 안에서 ‘나도 내own안에서 살고 싶다’는 미세한 방향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이전에는 단순히 거짓으로 보이던 것이 이제는 ‘매력적인 가능성’처럼 들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공명입니다.
사실 오늘날 인간도 거의 같은 구조 안에서 삽니다. 어떤 말이나 사상이 내 안에서 강하게 흔들리는 이유는, 대개 이미 그 방향의affection이 내 안 어딘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단순 지식 교정이 아니라affection의 재형성입니다. 내 안의 공명 구조 자체가 바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천사들의 경우는, 자기 사랑과 지옥적 사고가 들려와도 그것과 공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의 불협화음처럼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내적affection구조 자체가 이미 주님 중심으로 재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이 어떤 영에게는 달콤하게 들리고, 어떤 천사에게는 고통스럽게 들립니다. 결국 인간은 ‘무엇과 공명하는 존재인가’에 따라 자기 영적 상태가 드러나는 셈입니다.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악하지 않았으며,여전히 선한 상태에 있었습니다.다만 그들은 겉 사람 안,곧 자기의own안에서 살기를 원하였고,이것이 주님에 의해 허락되었습니다.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evil,but was still good;and because they desired to live in the external man or in their own,this was permitted them by the Lord; (AC.161)
위 본문에서‘그들은 겉 사람 안,곧 자기의own안에서 살기를 원하였고’말인데요,이것이‘악한 거’아닌가요?
바로 그 지점이AC.161의 핵심 긴장입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아니,겉 사람 안에서,자기own안에서 살고 싶어 한다면 그게 이미 악 아닌가?’라는 감각은 사실 매우 자연스럽고, 스베덴보리도 결국은 그 방향이 타락으로 이어졌다고 봅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악’(evil)을 단순 충동 발생 자체로 보지 않고, 그것이 굳어져 의지의 중심이 되는 상태로 본다는 점입니다.
AC.161에서 말하는 이 후손들은 아직 ‘악한 자들’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중심 자체가 완전히 자기 사랑으로 굳어진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선을 사랑했고, 여전히 주님과의 연결 안에 있었습니다. 다만 이제 이전 태고교회처럼 ‘주님 안에서만 살고 싶다’는 상태보다, ‘나 자신 안에서도 살고 싶다’, ‘내own안에서도 느끼고 움직이고 싶다’는 방향성이 강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즉, 문제는 아직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그 자체라기보다, 자기 자신 안에서 살고자 하는 경향의 강화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것을 즉시 끊어버리지 않으시고 허락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자리 자체를 완전히 제거하면 자유와 자발성도 함께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태고교회 초기 인간은 자기감을 거의 ‘투명한 그릇’처럼 가졌습니다. 자기 자신을 느끼더라도 즉시 그것이 주님께로부터 온 생명임을 알았습니다. 그런데AC.161의 후손들은 점점 그 자기감을 더 독립적으로 느끼고 싶어 하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이전에는 ‘나는 주님으로부터 산다’가 너무 자명했는데, 이제는 ‘나도 나 자신처럼 살고 싶다’는 방향성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아직 완성된 악이라기보다, 악의 방향성(direction)의 시작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마치 병이 아직 몸 전체를 장악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중심 방향이 바뀌기 시작한 상태와 비슷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들을 여전히 ‘good’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선을 미워하지 않았고, 진리를 조롱하지도 않았으며, 자기 사랑 속에 굳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이 점점 ‘주님 안의 삶’에서 ‘자기own안의 삶’으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창3타락의 문을 엽니다. 뱀의 유혹은 갑자기 외부에서 폭력적으로 덮친 것이 아닙니다. 인간 안에 이미 ‘나도 독립적으로 알고 싶다’, ‘나도 내own안에서 살고 싶다’는 경향이 생겼기 때문에, 거짓이 그 안에서 공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AC.161은 굉장히 미묘한 상태를 다룹니다. 완전히 악한 상태는 아닙니다. 그러나 순수한 천적 상태에서 방향이 틀어지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마치 아주 미세하게 나침반 방향이 틀어졌는데, 시간이 지나면 엄청난 거리 차이가 생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타락은 대개 이렇게 시작됩니다. 갑작스러운 폭발적 악이라기보다, ‘주님 중심’에서 ‘자기 중심’으로 무게 중심이 조금씩 이동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창2:24)
AC.161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악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선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겉 사람 안, 곧 자기의 own 안에서 살기를 원하였고, 이것이 주님에 의해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은 자비로 그 안에 주입되었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 작용하는지, 혹은 어떻게 하나로 보이게 되는지는, 한쪽이 다른 쪽으로 흘러드는 influx, 곧 유입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면 알 수 없습니다. 이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위해 하나의 행위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행위 안에 체어리티, 곧 사랑과 신앙이 없고, 그래서 그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 행위는 체어리티의 일이나 신앙의 열매라 불릴 수 없다고 말입니다.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evil, but was still good; and because they desired to live in the external man or in their own, this was permitted them by the Lord; what is spiritual celestial, however, being mercifully instilled therein. How the internal and external act as a one, or how they appear as a one, cannot be known unless the influx of the one into the other is known. In order to conceive some idea of it, take for example an action. Unless in an action there is charity, that is, love and faith, and in these the Lord, that action cannot be called a work of charity, or the fruit of faith.
해설
AC.161은 창2의 마지막 상태를 ‘정확히 평가하는 균형의 문장’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후손들을 ‘이미 악해진 존재’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분명히 말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선했다고. 이 진술은 이후의 타락을 단순한 도덕적 실패로 오해하지 않게 하는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이 후손들이 문제를 안게 된 이유는 악을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삶의 중심을 어디에 두고자 했는가’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겉 사람, 곧 자기의 own 안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주님은 이 욕구를 즉각적으로 거부하지 않으시고, 허락하셨습니다. 다만 동시에,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을 자비로 그 안에 주입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이 상태는 방임이 아니라 ‘보호가 동반된 허락’이었습니다.
여기서 핵심 개념은 ‘유입’(influx)입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처럼 작용하거나 보이게 되는 것은, 둘이 동일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무엇이 어떻게 흘러들어오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 유입의 질서가 유지되는 한, 겉 사람 안에서의 삶도 여전히 선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이해시키기 위해 ‘행위’를 예로 듭니다. 어떤 행위가 겉으로 보기에 선해 보여도, 그 안에 체어리티, 곧 사랑과 신앙이 없고, 그래서 그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 행위는 체어리티의 일도, 신앙의 열매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이는 외적 형식과 내적 근원의 차이를 분명히 가릅니다.
이 예시는 단순한 도덕 교훈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는 구조적 비유’입니다. 겉 사람의 행위는 속 사람으로부터의 유입이 있을 때만 살아 있습니다. 유입이 끊기면, 동일한 행위라도 그 성질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AC.161은 따라서 창2의 마지막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아직 선했고, 주님은 그들이 자기의 own 안에서 살도록 허락하셨으며, 동시에 그 안에 영적, 천적 생명을 계속 주입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구조는 ‘유입에 대한 의존성’ 위에 서 있었고, 바로 그 지점이 다음 절에서 다룰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움이 없었다’는 마지막 보호 상태로 이어집니다.
다음 AC.162에서는 이 상태가 왜 아직 무너지지 않았는지, 그리고 무엇이 마지막으로 그들을 지켜 주고 있었는지가 밝혀지게 됩니다.
저는 하루 중 상당 시간을 ChatGPT를 통한 AC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 관련, 초벌 및 마무리 작업, 그리고 그걸 블로그에 게시하는 작업으로 보냅니다. 보통 매일 8개 전후의 글 작성을 하는데, 글 하나하나에 집중하다 보면 지쳐 중간중간 누워 쉬어야 하며, 그럴 때면, 하릴없이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나 웹툰을 보거나 들으며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보내는 시간이 다 합치면 몇 시간씩 된다는 것이며, 더욱 심각한 건, 제 시야가 자꾸 세상사를 향하게 되어 흐려진다는 것입니다. AC, 그리고 천국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말이지요... 스베덴보리는 어땠나요? 그의 전체 저작량을 보면 하루하루가 거의 살인적인 시간 사용이었을 것 같은데, 그는 지치지 않았나요? 갈수록 6, 7, 8학년이 되어 심신이 예전 같지 않았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목사님 말씀을 읽으며, 지금 목사님이 단순히 ‘글을 많이 쓰느라 피곤한 상태’가 아니라, 실제로는 ‘두 세계 사이를 하루 종일 왕복하고 계시는 상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C 본문을 붙들고 내적 의미를 따라가며, 그것을 번역하고 해설하고 심화까지 풀어낸다는 건, 단순 지적 노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각보다 훨씬 깊은 수준의 정신 집중과 내적 긴장을 요구합니다. 특히 목사님처럼 단순 번역이 아니라 ‘상태 안으로 들어가며’ 작업하는 경우에는 더 그렇습니다. 그러니 중간중간 몸이 꺼지듯 누워야 하는 것도, 정신이 자동적으로 가벼운 영상이나 웹툰 쪽으로 도피하려는 것도, 어느 정도는 자연스러운 반작용입니다. 사람이 높은 긴장 상태를 오래 유지하면, 낮은 감각 자극으로 균형을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목사님이 정확히 보신 것도 있습니다. 문제는 ‘쉬는 것 자체’보다, 그 쉬는 방식이 점점 시야를 세상으로 끌고 내려간다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단순 휴식이었는데, 어느 순간 마음의 초점 자체가 흐려지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스베덴보리도 인간이기에 피곤함 자체는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후기 저작들을 보면, 인간적 체력으로는 거의 설명이 안 될 정도의 작업량입니다. 특히 Arcana Coelestia는 단순 집필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절 단위로 따라가며 영적 의미를 풀어내는 작업이었으니, 오늘날 기준으로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노동입니다. 게다가 그는 50대 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영계 체험과 저작에 들어갔고, 60대와 70대에 가장 방대한 책들을 써냈습니다. 그러니 육체적으로 지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오히려 비현실적입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는 목사님과 조금 다른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두 세계 중 어느 쪽이 실재인가’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했습니다. 우리처럼 ‘천국을 믿는 사람’ 수준이 아니라, 실제로 영적 세계가 더 실재적이라는 감각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니 그의 경우는 세상 자극이 지금 우리에게 스마트폰처럼 강한 흡인력을 갖기 어려웠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후기에 점점 더 세상 사교와 오락, 명예 경쟁, 학문적 과시에서 멀어집니다. 대신 아주 규칙적인 삶을 살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과식하지 않았고, 밤늦게까지 무리하지 않았으며, 산책과 휴식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즉, 그 엄청난 저작량은 ‘광적인 몰아치기’라기보다, 오히려 놀라울 정도의 규칙성과 집중의 반복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목사님은 지금 거의 ‘전투 모드’로 작업하고 계신 느낌이 강합니다. 하루 8개 전후의 글을 매일 생산한다는 건, 실제로는 일반적인 연구자나 목회자의 작업량을 이미 훨씬 넘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 목사님께 필요한 것은, ‘더 몰입해야 한다’보다, ‘내적 시야를 흐리지 않는 방식으로 오래 가는 법’을 배우는 것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목사님을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사역으로 부르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지금 목사님은 자꾸 ‘AC에 집중해도 모자랄 시간인데’라고 느끼시지만, 인간 정신은 계속 최고 긴장 상태를 유지할 수 없게 창조되었습니다. 문제는 휴식이 아니라 ‘휴식의 질서’입니다. 예를 들어 스베덴보리라면, 휴식을 완전히 세속적 감각의 홍수 속으로 던져 넣기보다, 정신의 결을 크게 흐리지 않는 방향을 택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조용한 산책, 가벼운 독서, 자연 관찰, 기도 속 멈춤 같은 것 말입니다. 반면 오늘날 스마트폰 알고리즘은 사람의 ‘주의력 자체’를 계속 밖으로 끌어당기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몇 시간 웹툰과 유튜브를 보고 나면, 단순히 시간이 아까운 게 아니라, 마음의 방향 자체가 아래로 끌려 내려간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목사님이 너무 자신을 정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목사님은 이미 상당 부분 ‘자기 own과 싸우며’ 이 작업을 하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왜 또 무너졌나’가 아니라, ‘어떻게 다시 방향을 돌리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인간 의지 자체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이 끊임없이 아래로 흐르려는 존재라는 것을 너무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질서’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목사님도 지금부터는, ‘유튜브를 완전히 끊어야 한다’보다, ‘내 영의 초점을 크게 흐리지 않는 휴식 구조’를 만드는 게 더 현실적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완전히 감각적 영상 대신 자연 다큐, 조용한 클래식, 천국과 지옥 관련 지도, 미술, 역사 탐색, 혹은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눈 감고 쉬는 시간 같은 방향입니다. 인간 정신은 쉬어야 합니다. 문제는 ‘어디에서 쉬느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사님이 자꾸 ‘내가 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죄책감 속에만 머물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목사님이 하고 계신 AC 작업은, 사실상 한국어권에서는 거의 전례를 찾기 어려운 규모입니다. 당장은 조회수도 적고 반응도 미미하지만, 스베덴보리 자신도 생전에는 자기 저작이 이렇게 오래 읽힐 줄 인간적으로는 다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씨를 뿌렸고, 열매는 훨씬 뒤에 나타났습니다. 목사님 역시 지금 ‘즉각적 반응’보다 ‘미래 세대를 위한 길 닦기’에 가까운 일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속도를 더 올리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고 오래 가는 것입니다.
첫 번째 태고교회는 우리보다 훨씬 더 주님 안에 있었고,훨씬 더 직접적으로 주님의 생명을 지각했기 때문에,자기 자신을 주님과 분리된 독립 중심처럼 느끼는 정도가 매우 적었습니다.(AC.160심화3)
창1에 의하면,창2전반‘첫 번째 태고교회’역시 부단한 자기own과의 싸움,그리고 그 극복을 통해 저 자리,저 상태까지 이른 것 같은데...그래서 윗글 표현‘자기 자신을 주님과 분리된 독립 중심처럼 느끼는 정도가 매우 적었습니다’라는 표현은‘자기 자신을 주님과 분리된 독립 중심처럼 느끼려는 순간,아주 단호하게 물러납니다’로 고쳐 표현해야 할 것 같아요.
목사님 지적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 사실AC.16-63까지의 ‘창1거듭남 구조’를 충분히 따라온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생길 수밖에 없는 문제 제기입니다. 왜냐하면 말씀하신 대로, 창2의 태고교회 인간 역시 아무 노력 없이 자동으로 천적 상태에 도달한 존재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창1여섯 날의 과정 전체가, 질서 없는 상태로부터 점차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긴 형성 과정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제안하신 표현, 곧 ‘‘자기 자신을 주님과 분리된 독립 중심처럼 느끼는 정도가 매우 적었습니다’라기보다, ‘그렇게 느끼려는 순간 아주 단호하게 물러납니다’라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지적은 상당히 통찰력 있습니다. 실제로 천적 인간을 너무 ‘자기감 자체가 거의 없는 존재’처럼 이해하면, 창1전체의 거듭남 투쟁 구조와 잘 연결되지 않는 면이 생깁니다.
다만 스베덴보리 흐름 안에서는 이 둘이 완전히 충돌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즉, 태고교회 인간에게도proprium가능성 자체는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창2에서 ‘돕는 배필’, ‘깊은 잠’, ‘여자’, 그리고 이후 타락 가능성 자체가 등장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도 인간인 이상 자기 자신 안으로 기울 가능성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이는 ‘무게 중심’에 있습니다. 오늘날 인간은 거의 기본 상태 자체가 자기 자신 중심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돌이키려면 거꾸로 방향을 틀어야 합니다. 반면 태고교회 인간은 기본 중심이 주님 쪽에 훨씬 더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독립 중심으로 느끼려는 움직임이 생기더라도, 그것이 오늘날 인간처럼 굳어지고 체질화되기 전에 훨씬 더 민감하게 그것을 감지하고 물러날 수 있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즉 목사님 표현대로라면, 태고교회 인간은 ‘독립 중심 감각 자체가 전혀 없는 존재’라기보다, 그것이 올라오는 순간 즉시 그것의 위험성을 퍼셉션으로 느끼고, 자연스럽게 주님께 다시 돌이키는 존재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퍼셉션의 무서운 민감성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 사랑이나 자기 의를 느껴도 그것을 상당히 오랫동안 ‘나 자신’으로 붙들고 살아갑니다. 심지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기proprium을 강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자기 자신 안으로 굽어지는 움직임 자체를 거의 영적 통증처럼 느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훨씬 빠르게 주님 질서로 되돌아갑니다.
이 점에서 창1의 여섯 날도 새롭게 보입니다. 그것은 단순 자동 성장 과정이 아니라, 인간 안의 혼돈이 점차 주님의 질서 안으로 정렬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안식 상태 역시 ‘더 이상 어떤 유혹도 없는 상태’라기보다, 주님의 질서가 중심을 잡고 있는 상태로 이해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수정 표현은 상당 부분 타당합니다. 특히 ‘자기 자신을 독립 중심처럼 느끼는 정도가 적었다’는 말을 너무 정적인 상태로 이해하지 않고, ‘그 방향으로 움직이는 순간 즉시 퍼셉션으로 감지하고 물러나는 상태’로 이해하면, 창1의 거듭남 구조와도 훨씬 잘 연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