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9-20)

 

AC.144

 

이름으로 부른다(call by name)는 것이 그 성질(quality)을 안다는 뜻인 이유는, 고대인들이 이름(name)으로는 어떤 것의 본질(essence)을 이해하였고,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로는 그 성질 아는 걸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아들과 딸들에게 이름을 지을 때, 의미되는 것들에 따라 이름을 붙였기 때문인데, 모든 이름에는 그 자녀의 기원(origin)과 본성(nature)을 알 수 있게 하는 어떤 고유한 것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 저작의 뒤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 야곱의 열두 아들을 다루게 될 때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름들 속에 그렇게 부르게 된 것들의 근원과 성질이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름으로 부르기(calling by name)라는 말은 이것 말고 다른 어떤 것으로도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말하는 방식이었으며, 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이런 것이 이런 걸 의미한다는 사실 자체를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That to “call by name” signifies to know the quality, is because the ancients by the “name” understood the essence of a thing, and by “seeing and calling by name” they understood to know the quality. The reason was that they gave names to their sons and daughters according to the things which were signified, for every name had something peculiar in it, from which, and by which, they might know the origin and the nature of their children, as will be seen in a future part of this work, when, of the Lord’s Divine mercy, we come to treat of the twelve sons of Jacob. As therefore the names implied the source and quality of the things named, nothing else was understood by “calling by name.” This was the customary mode of speaking among them, but one who does not understand this may wonder that such things should be signified.

 

 

해설

 

이 단락은 창세기 2장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름 짓기’ 장면을 ‘고대적 인식 구조의 핵심’으로 끌어올립니다. 오늘날 이름은 대체로 표식이거나 구분 수단이지만, 태고의 사람들에게 이름은 곧 ‘본질의 언어’였습니다. 이름은 임의로 붙여진 꼬리표가 아니라, 그 존재가 어디서 왔으며, 어떤 성질을 지니는지를 드러내는 요약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은 단순한 호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존재의 질을 꿰뚫어 보고, 그 성질을 분별하여 인식했다는 뜻입니다. 창2:19-20에서 아담이 짐승들과 새들에게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그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애정들과 인식들의 ‘본성과 질서를 정확히 파악했다’는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관점을 자녀의 이름 짓기 관습으로 설명합니다. 고대에는 이름이 개인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드러난 내적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름 하나에 기원, 성향, 사명까지 담겼습니다. 이후에 야곱의 열두 아들을 다룰 때 이 원리가 본격적으로 펼쳐질 것이라고 예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점을 모르면, 성경의 이름들은 역사적 정보로만 읽히고 맙니다. 그러나 이름이 본질을 뜻한다는 관점에 서면, 족장들의 이름, 지명, 별명 하나하나가 ‘내적 상태의 지도’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아는 것’은 정보를 축적하는 일이 아니라, 질을 분별하는 일이 됩니다.

 

마지막 문장은 독자를 향한 배려이자 경고입니다. 이 인식 방식을 모르면, 성경이 왜 이런 표현을 쓰는지 이해되지 않고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적 언어의 질서를 이해하는 순간, ‘이름으로 부른다’는 말은 성경 전체를 여는 열쇠가 됩니다.

 

AC.144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단어가 아니라 본질이며,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지식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질을 알아보는 행위라고 말입니다.

 

 

심화

 

1. 성질(quality), ‘본질(essence), ‘기원(origin), 본성(nature)

 

 

AC.144, 심화 1, ‘성질’(quality), ‘본질’(essence), ‘기원’(origin), ‘본성’(nature)

AC.144.심화 1. ‘성질’(quality), ‘본질’(essence), ‘기원’(origin), ‘본성’(nature) 위 본문에 차례대로 ‘성질’(quality), ‘본질’(essence), ‘기원’(origin) 및 ‘본성’(nature)이 나오는데요, 그냥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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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님으로부터 받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AC.144, 심화 2, ‘주님으로부터 받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AC.144.심화 2. ‘주님으로부터 받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이 둘은 from을 각각 하나는 ‘으로부터’, 다른 하나는 ‘께로부터’로 번역한 것입니다. 저는 전자가 맞을 것 같은데 당신은 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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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름(name),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

 

 

AC.144, 심화 3, ‘이름’(name),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

AC.144.심화 3. ‘이름’(name),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 고대인들이 ‘이름’(name)으로는 어떤 것의 본질(essence)을 이해하였고,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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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자녀의 이름에 포함시키는 것들

 

 

AC.144, 심화 4, ‘자녀의 이름에 포함시키는 것들’

AC.144.심화 4. ‘자녀의 이름에 포함시키는 것들’ 그들이 아들과 딸들에게 이름을 지을 때, 의미되는 것들에 따라 이름을 붙였기 때문인데, 모든 이름에는 그 자녀의 기원(origin)과 본성(nature)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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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5, 창2:19-20, 이사야와 계시록을 통해 확인한 '이름'의 의미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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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3, 창2:19-20, ‘성경이 끊임없이 동물의 언어로 말하는 이유’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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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3.심화

 

1.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

 

그리고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이므로,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이러한 것들입니다. and as it is the celestial, or the celestial spiritual man, who is treated of, such are here meant.

 

위는 본문 내용인데요, 여기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이므로(as it is the celestial, or the celestial spiritual man)라는 이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천적 영적(celestial spiritual)이라는 표현이 무슨 뜻인가요?

 

 

이 표현은 처음 읽으면 거의 모순처럼 느껴집니다. ‘천적(celestial)과 ‘영적(spiritual)을 구분해 놓고, 다시 ‘천적 영적(celestial spiritual)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인간 구조에서는 이것이 아주 중요한 중간 개념입니다.

 

핵심부터 말씀드리면, ‘천적 영적 인간(celestial spiritual man)은 단순히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을 반씩 섞은 존재가 아니라, ‘사랑이 중심이면서도, 그 사랑이 영적 차원들을 통하여 표현되고 있는 상태의 인간’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가장 깊은 중심은 천적이지만, 그 작용과 표현은 영적인 층을 통하여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기본적으로 인간 안에 여러 층을 봅니다. 가장 깊은 층은 사랑과 의지의 층이며, 이것이 천적입니다. 그다음은 진리와 이해의 층이며, 이것이 영적입니다. 그런데 실제 인간 안에서는 이 둘이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습니다. 천적 인간 안에도 영적 요소가 있고, 영적 인간 안에도 천적 요소가 있습니다. 다만 어느 쪽이 중심이냐가 다릅니다.

 

그래서 ‘천적 영적 인간’이라는 표현은, ‘그 사람의 중심은 천적(사랑 중심)이지만, 그 천적 생명이 영적 기능들(이해, 진리, 지성)을 통하여 나타나는 상태’라고 이해하시면 가장 좋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이 너무 직접적이고 깊어서, 거의 퍼셉션 자체로 살아갑니다. 반면 ‘영적 인간’은 진리와 이해를 통하여 사랑으로 갑니다. 그런데 ‘천적 영적 인간’은, 사랑이 중심이라는 점에서는 천적이지만, 그 사랑이 이해와 진리의 층을 거쳐 표현된다는 점에서는 영적입니다. 즉, 사랑과 진리가 서로 적대하지 않고, 사랑이 진리를 질서 있게 비추는 상태입니다.

 

이 표현이 AC.143에서 중요한 이유는, 지금 창세기 2장의 상태가 완전히 단순한 ‘순수 천적 상태’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돕는 배필’, proprium, 이름 짓기, 애정들의 구별 같은 문제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랑만의 직접적 퍼셉션 상태에서, 어느 정도 ‘이해와 분별의 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여기 인간을 단순히 celestial이라고만 하지 않고, celestial spiritual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천적 상태의 외연 확장’처럼 보셔도 좋습니다. 곧, 가장 깊은 중심은 여전히 사랑과 퍼셉션 안에 있지만, 그 상태가 영적 층들까지 질서 있게 흘러 들어가 작동하는 상태입니다.

 

나중에 스베덴보리는 천국 구조에서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가장 높은 천국은 천적 천국이고, 그 아래는 영적 천국입니다. 그런데 천적 천국에도 영적 요소가 있고, 영적 천국에도 천적 요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과 진리는 결코 완전히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적 영적’이라는 표현은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천적’은 중심 생명의 성격, 곧 사랑 중심성을 말하고, ‘영적’은 그 사랑이 작동하고 표현되는 이해와 진리의 차원을 말합니다. 즉, ‘천적 영적 인간’이란, 주님 사랑이 중심이면서도, 그 사랑이 진리와 지성 안에서 질서 있게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라고 말입니다.

 

 

 

AC.143, 창2:19-20, ‘성경이 끊임없이 동물의 언어로 말하는 이유’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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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9-20)

 

AC.143

 

고대에는 짐승들(beasts)동물들(animals)이 사람 안의 애정들과 그와 같은 것들을 뜻하였다는 점이 오늘날에는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사람들은 천적 관념 안에 있었고, 그러한 것들이 영계에서는 동물들로, 실제로는 그것들과 닮은 동물들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말할 때에는 다른 어떤 걸 말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또한 말씀에서 짐승들이 일반적으로든 구체적으로든 언급되는 모든 곳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언서 전체는 이러한 것들로 가득 차 있으므로, 각각의 짐승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말씀에 담긴 내적 의미를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짐승에는 두 종류가 있어 악한 짐승 또는 해로운 짐승들과 선한 짐승 또는 해롭지 않은 짐승들이 있으며, 선한 짐승들로는 선한 애정들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양들, 어린양들, 비둘기들이 그러하지요. 그리고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이므로,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이러한 것들입니다. ‘짐승들(beasts)이 일반적으로 애정들을 뜻한다는 점은 앞에서 말씀의 몇몇 구절들로 확인되었으므로 (45, 46), 더 이상의 확증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That by “beasts” and “animals” were anciently signified affections and like things in man, may appear strange at the present day; but as the men of those times were in a celestial idea, and as such things are represented in the world of spirits by animals, and in fact by such animals as they are like, therefore when they spoke in that way they meant nothing else. Nor is anything else meant in the Word in those places where beasts are mentioned either generally or specifically. The whole prophetic Word is full of such things, and therefore one who does not know what each beast specifically signifies, cannot possibly understand what the Word contains in the internal sense. But, as before observed, beasts are of two kinds— evil or noxious beasts, and good or harmless ones—and by the good beasts are signified good affections, as for instance by sheep, lambs, and doves; and as it is the celestial, or the celestial spiritual man, who is treated of, such are here meant. That “beasts” in general signify affections may be seen above, confirmed by some passages in the Word (n. 45–46), so that there is no need of further confirmation.

 

 

해설

 

이 단락은 왜 성경이 끊임없이 동물의 언어로 말하는지를 ‘근본적인 인식 구조의 차이’로 설명합니다. 오늘날 독자에게 동물은 외적 자연의 일부이지만, 태고의 사람들에게 동물은 곧바로 ‘내적 상태의 형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연을 분리된 대상처럼 보지 않았고, 인간 안의 애정이 자연 안에서 그대로 형상을 취해 나타난다고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이것이 단순한 비유나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영계에서는 실제로 애정과 성향에 따라 동물의 형상으로 나타나며, 그것도 임의적인 형상이 아니라 ‘그 애정과 닮은 동물’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고대인들이 사람의 애정을 말하면서 동물을 말했을 때, 그들은 상징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본 그대로를 말한 것’에 가깝습니다.

 

이 점을 모르면 예언서 전체가 닫혀 버립니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단호하게 말합니다. 각 짐승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하면, 말씀의 내적 의미는 결코 이해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과장이 아니라, 예언서의 언어가 전면적으로 상응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사자, 양, 염소, 소, 비둘기, 독수리 하나하나가 애정과 성향의 질을 담고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구분이 제시됩니다. 짐승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악한 짐승과 선한 짐승입니다. 이는 외형의 문제가 아니라, ‘애정의 질’에 따른 구분입니다. 해로운 짐승은 악한 애정들을, 해롭지 않은 짐승은 선한 애정들을 뜻합니다. 양과 어린양, 비둘기가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가장 순한 선의 애정들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되는 점은, 본문이 다루는 대상이 ‘천적 인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짐승들은 본질적으로 선한 애정들입니다. 창2:19-20의 장면은 야생의 위협을 묘사하는 장면이 아니라, 인간 안에 이미 풍성히 존재하는 선한 애정들의 질서와 분별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AC.143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이 동물의 언어로 말할 때, 그것은 인간을 자연으로 낮추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세계가 자연과 분리되지 않았던 가장 깊은 상태를 드러내기 위함이며, 이 언어를 이해할 때에만 말씀의 내적 세계가 열리기 시작한다고 말입니다.

 

 

심화

 

1.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

 

 

AC.143, 심화 1,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

AC.143.심화 1.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 그리고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이므로,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이러한 것들입니다. and as it is the celestial, or the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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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4, 창2:19-20, 고대인들에게 있어 '이름을 짓는다'는 것의 의미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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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2, 창2:19-20, ‘이름을 주었으나 여전히 기울어지는’(AC.142-146)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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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2.심화

 

3. ‘사랑이 바르고

 

바로 위에 천적 인간은 먼저 사랑이 바르고에서 이 사랑이 바르고가 무슨 뜻인가요?

 

 

여기서 ‘사랑이 바르다’는 말은, 단순히 감정이 착하다거나 성격이 온순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구조에서는 ‘무엇을 가장 중심적으로 사랑하느냐’, 그리고 그 사랑의 방향이 ‘주님과 이웃을 향하느냐, 아니면 자기 자신을 향하느냐’가 핵심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바르다’는 것은, 인간 안의 가장 깊은 중심 사랑이 자기 자신에게 닫혀 있지 않고, 주님과 선을 향해 질서 있게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무엇보다 먼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선 자체를 사랑하며’, ‘진리를 자기 자랑이 아니라 생명을 위해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천적 인간은 바로 이 사랑의 방향이 먼저 바로잡혀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진리를 배울 때도, 먼저 ‘옳은가?’보다 ‘선한가?’, ‘주님께 속한 건가?’를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그에게 진리는 사랑을 섬기는 빛입니다.

 

예를 들어, 같은 ‘용서’라는 진리를 두 사람이 듣는다고 해보겠습니다. 영적 인간은 먼저 ‘왜 용서해야 하는가’, ‘말씀은 무엇을 말하는가’를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더 깊은 자리에서 ‘사랑은 원래 그렇게 움직이는 것’처럼 느낍니다. 물론 둘 다 귀한 상태지만, 중심이 다릅니다.

 

그래서 ‘사랑이 바르다’는 말은 결국, 사랑의 대상과 방향과 질서가 바르다는 뜻입니다. 곧, 자기 자신이 중심이 아니라 주님이 중심이시고, 소유와 자기 영광보다 선 자체를 더 사랑하며, 진리를 자기 우월감이 아니라 생명을 위해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적 인간의 특징입니다. 그는 먼저 사랑의 방향이 주님 쪽으로 열려 있기 때문에, 그다음의 생각과 이해도 그 방향을 따라 질서 있게 움직입니다. 반대로 사랑의 중심이 자기 자신에게 있으면, 아무리 훌륭한 진리를 알아도 결국 자기 확증 쪽으로 기울기 쉽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서 인간의 핵심은 ‘얼마나 많이 아는가’ 이전에,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가’입니다. ‘사랑이 바르다’는 것은 바로 그 가장 깊은 중심 사랑이 주님의 질서 안에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AC.142, 창2:19-20, ‘이름을 주었으나 여전히 기울어지는’(AC.142-146)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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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2, 심화 2, ‘천적 애정들’, ‘영적 애정들’

AC.142.심화 2. ‘천적 애정들’, ‘영적 애정들’ ‘짐승’(beasts)은 천적 애정들을 뜻하고, ‘하늘의 새’(fowls of the heavens)는 영적 애정들을 뜻하는데 윗글은 AC.142 본문 내용인데요, 여기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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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2.심화

 

2. 천적 애정들’, ‘영적 애정들

 

짐승(beasts)은 천적 애정들을 뜻하고, ‘하늘의 새(fowls of the heavens)는 영적 애정들을 뜻하는데

 

윗글은 AC.142 본문 내용인데요, 여기 천적 애정들’, ‘영적 애정들이 뭔가요?

 

 

스베덴보리에게서 ‘애정(affection)은 단순한 감정(emotion)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향해 움직이느냐를 결정하는 ‘사랑의 방향성’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동물들은 단순 생물이 아니라, 인간 안의 다양한 애정 상태들을 상응적으로 나타냅니다. AC.142에서 ‘짐승(beasts)이 천적 애정들을, ‘하늘의 새(fowls of the heavens)가 영적 애정들을 뜻한다고 할 때도 바로 이런 구조입니다.

 

먼저 ‘천적 애정’은 사랑 자체에 더 가까운 애정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과 선 자체를 직접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생각보다 의지와 사랑의 중심에 가까운 층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선한 것을 그냥 사랑하는 상태, 주님을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따뜻함과 기쁨이 흐르는 상태, 사랑 자체가 생명의 중심이 되는 상태가 천적 애정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천적(celestial)은 언제나 사랑과 의지의 층과 연결됩니다.

 

반면 ‘영적 애정’은 진리와 이해를 통해 움직이는 애정입니다. 이것은 ‘무엇이 참인가’를 배우고 이해하며, 그것을 따라 살고자 하는 방향과 관련됩니다. 주님과 선을 직접적인 사랑으로 지각, 그러니까 퍼셉션으로 알기보다는, 말씀과 진리를 통해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쪽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서 ‘영적(spiritual)은 보통 신앙, 이해, 진리, 지성과 연결됩니다.

 

이 차이를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천적 애정은 ‘선 자체를 사랑하는 마음’에 더 가깝고, 영적 애정은 ‘진리를 통해 선으로 가려는 마음’에 더 가깝습니다.

 

또는,

 

천적 애정은 ‘사랑이 먼저 움직이는 상태’이고, 영적 애정은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 사랑으로 가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AC.142에서 ‘짐승’이 천적 애정들이라고 할 때, 이는 인간 안의 보다 깊고 의지적인 사랑들을 뜻합니다. 반면 ‘하늘의 새’는 생각과 이해를 통해 움직이는, 보다 지성적, 영적인 애정들을 뜻합니다. 새가 하늘을 나는 것처럼, 영적 애정은 사고와 이해의 영역과 더 가까이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 전체의 상응 구조와도 연결됩니다. 짐승은 대개 의지와 사랑의 층을, 새는 이해와 생각의 층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좋은 짐승과 좋은 새는 선한 애정과 참된 생각을 뜻하고, 반대로 더러운 짐승과 새는 왜곡된 욕망과 거짓된 사유를 뜻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애정을 굉장히 본질적인 것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단순히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결국은 ‘무엇을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생각조차 애정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갑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은 먼저 사랑이 바르고, 영적 인간은 먼저 진리를 통해 그 사랑으로 이끌립니다.

 

정리하면, ‘천적 애정들’은 주님과 선 자체를 직접 사랑하는 깊은 의지의 애정들이고, ‘영적 애정들’은 진리와 신앙을 통해 선으로 향하려는 이해 중심의 애정들입니다. 그래서 짐승은 보다 깊은 사랑의 층을, 하늘의 새는 보다 이해와 사유에 가까운 애정들을 상응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AC.142, 심화 3, ‘사랑이 바르고’

AC.142.심화 3. ‘사랑이 바르고’ 바로 위에 ‘천적 인간은 먼저 사랑이 바르고’에서 이 ‘사랑이 바르고’가 무슨 뜻인가요? 여기서 ‘사랑이 바르다’는 말은, 단순히 감정이 착하다거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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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2, 심화 1, ‘이름을 준다 = 성질(quality)을 안다’

AC.142.심화 1. ‘이름을 준다 = 성질(quality)을 안다’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는, 그가 그것들의 성질(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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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2.심화

 

1. ‘이름을 준다 = 성질(quality)을 안다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 그가 그것들의 성질(quality)을 알 수 있게 하신 것이며, 그가 그것들에게 이름을 주니라(giving them names)는 그가 그 성질을 알았음을 뜻합니다.

 

윗글은 AC.142 본문 내용인데요, 여기 이름을 주는 게 왜 성질(quality)을 아는 건가요?

 

 

스베덴보리에게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label)이 아니라, 그 존재의 본성과 상태를 드러내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이름을 안다’, ‘이름을 부른다’, ‘이름을 준다’는 것은 단순히 단어를 붙이는 행위가 아니라, 그 존재가 어떤 성질(quality)을 가지고 있는지를 분별하고 지각하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름을 거의 임의적 기호처럼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철수’, ‘영희’라는 이름 자체에는 본질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고대, 특히 말씀의 상응 구조 안에서는 이름이 단순한 기호가 아니었습니다. 이름은 그 존재의 성격, 기능, 상태, 역할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안다’는 것은 곧 ‘그 존재를 안다’는 뜻이 됩니다.

 

이 점은 성경 전체에 반복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서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야곱이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는 것은 단순 개명이 아니라, 존재 상태의 변화입니다. 또 주님께서 ‘내가 너를 이름으로 안다’고 하실 때도, 단순히 호적상 이름을 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의 본성과 상태 전체를 아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AC.142에서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준다는 것은, 단순히 ‘사자’, ‘’, ‘’ 같은 단어를 붙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는 동물들이 인간 안의 애정들과 성향들을 뜻합니다. 따라서 아담이 이름을 준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안에 있는 다양한 애정과 성향들의 본질과 질서를 분별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즉, ‘이름을 준다 = 성질을 안다’는 연결은, 이름이 곧 그 존재의 quality를 표현한다고 보는 성경적, 상응적 사고에서 나옵니다. 이름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그 존재가 ‘어떤 존재인가’를 드러내는 영적 표현인 것입니다.

 

그래서 AC.142의 흐름 속에서는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천적 인간은 아직 퍼셉션 안에 있기 때문에, 자기 안에 들어오는 애정들과 성향들을 즉시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지 감정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본성과 방향을 압니다. 바로 이 상태를 ‘이름을 준다’는 행위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여기서 ‘이름을 준다’는 것은 단순히 명칭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나 성향의 본질과 상태, 곧 quality를 지각하고 분별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이름은 단순 호칭이 아니라, 존재의 성질을 드러내는 영적 표현입니다.

 

 

 

AC.142, 심화 2, ‘천적 애정들’, ‘영적 애정들’

AC.142.심화 2. ‘천적 애정들’, ‘영적 애정들’ ‘짐승’(beasts)은 천적 애정들을 뜻하고, ‘하늘의 새’(fowls of the heavens)는 영적 애정들을 뜻하는데 윗글은 AC.142 본문 내용인데요, 여기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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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2, 창2:19-20, ‘이름을 주었으나 여전히 기울어지는’(AC.142-146)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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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And Jehovah God formed out of the ground every beast of the field, and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brought it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it; and whatsoever the man called every living soul, that was the name thereof. And the man gave names to every beast, and to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but 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2:19-20)

 

AC.142

 

짐승(beasts)은 천적 애정들을 뜻하고, ‘하늘의 새(fowls of the heavens)는 영적 애정들을 뜻하는데,짐승(beasts)은 의지에 속한 것들을, ‘(fowls)는 이해에 속한 것들을 뜻합니다.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 그가 그것들의 성질(quality)을 알 수 있게 하신 것이며, 그가 그것들에게 이름을 주니라(giving them names)는 그가 그 성질을 알았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선한 애정들과 인식한 진리들의 성질을 그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자기의 것, 곧 자신의 proprium으로 기울어졌는데, 이것은 앞에서와 같은 말로 표현된,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라는 것입니다. By “beasts” are signified celestial affections, and by “fowls of the heavens,” spiritual affections; that is to say, by “beasts” are signified things of the will, and by “fowls” things of the understanding. To “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 is to enable him to know their quality, and his “giving them names” signifies that he knew it. But notwithstanding that he knew the quality of the affections of good and of the knowledges of truth that were given him by the Lord, still he inclined to his own, which is expressed in the same terms as before—that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해설

 

이 단락은 창2:19-20의 장면, 곧 짐승들과 새들이 아담 앞으로 나오고 그가 이름을 붙이는 장면을 ‘지식의 충만함과 내적 결핍의 대비’로 읽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분을 분명히 합니다. 인간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그 앎이 그의 중심을 바꾸지는 못했다는 점입니다.

 

먼저 상징의 구조가 명확히 정리됩니다. 짐승들은 천적인 애정들, 곧 의지에 속한 것들이고, 하늘의 새들은 영적인 애정들, 곧 이해에 속한 것들입니다. 이는 창세기 1장에서 이미 등장했던 상응이지만, 여기서는 천적 인간의 내부에서 ‘의지와 이해가 어떤 내용들로 채워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다시 나타납니다.

 

이끌어 가시니’와 ‘이름을 주니라’라는 표현은 인식의 성숙을 뜻합니다. 이름을 준다, 붙인다는 것은 단순한 분류가 아니라, ‘본질과 질을 분별하여 파악했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한 애정들과 인식된 진리들이 무엇인지, 그것들이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를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이 구절은 무지나 결핍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문장이 뒤따릅니다. 그렇게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 그는 여전히 자기의 것, 곧 자신의 proprium으로 기울어졌다는 말입니다. 이는 인간의 핵심 문제가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중심의 방향’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아무리 많은 선과 진리를 인식해도, 그것들이 주님께로 다시 돌아가 결합되지 않으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려는 성향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다시 같은 결론으로 돌아옵니다.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라는 말은, 외부의 대상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proprium과 결합할 형식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의지와 이해의 내용들은 충만하지만, 그것들이 자기성(自己性)이라는 proprium 속에서 하나로 작동할 구조가 아직 형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로써 다음 단계, 곧 깊은 잠과 갈빗대의 사건이 필연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AC.142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를 충분히 인식할 수 있지만, 그 인식만으로는 자기 중심성을 해소하지 못하며, 바로 그 지점에서 ‘자신의 proprium’이 보다 분명한 형식으로 등장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심화

 

1. ‘이름을 준다 = 성질(quality)을 안다

 

 

AC.142, 심화 1, ‘이름을 준다 = 성질(quality)을 안다’

AC.142.심화 1. ‘이름을 준다 = 성질(quality)을 안다’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는, 그가 그것들의 성질(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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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천적 애정들’, ‘영적 애정들

 

 

AC.142, 심화 2, ‘천적 애정들’, ‘영적 애정들’

AC.142.심화 2. ‘천적 애정들’, ‘영적 애정들’ ‘짐승’(beasts)은 천적 애정들을 뜻하고, ‘하늘의 새’(fowls of the heavens)는 영적 애정들을 뜻하는데 윗글은 AC.142 본문 내용인데요, 여기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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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랑이 바르고

 

 

AC.142, 심화 3, ‘사랑이 바르고’

AC.142.심화 3. ‘사랑이 바르고’ 바로 위에 ‘천적 인간은 먼저 사랑이 바르고’에서 이 ‘사랑이 바르고’가 무슨 뜻인가요? 여기서 ‘사랑이 바르다’는 말은, 단순히 감정이 착하다거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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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3, 창2:19-20, ‘성경이 끊임없이 동물의 언어로 말하는 이유’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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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1, 창2:18, ‘인간의 세 가지 유형으로 본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1 사람의 proprium(man’s own)에 대하여는, 육적, 세상적 인간과, 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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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5/10)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9, ‘성도여 다 함께’, 74, ‘오 만세 반석이신입니다.

 

오늘은 2 다섯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17절로 18, AC 글 번호로는 128번에서 141번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참고로 잠깐 창2 중간 배경 설명이 조금 필요하여 말씀드립니다.

 

창세기 21절로 17절까지는, 태고교회 사람 안에 형성된 ‘천적 상태’와 그 생명의 질서를 보여 주는 부분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는 장면은, 단순히 창조 활동이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주님과의 싸움과 분리가 멈추고 사랑과 평안이 자리 잡은 상태를 뜻합니다. 이어지는 에덴동산과 네 강의 묘사는, 천적 인간 안에 흐르는 지혜와 지성, 이성과 기억 지식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모든 것은 ‘동쪽’이신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며, 가장 바깥의 기억 지식까지도 위로부터 오는 생명 안에서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동산에 두어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는 것은, 인간이 그 모든 것을 누릴 수는 있지만 자기 것으로 소유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명령은, 인간이 계속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지각, 곧 퍼셉션으로 접해야 하며, 자기 자신으로 선악을 판단하려는 독립적 proprium 쪽으로 기울어져서는 안 된다는 경계를 보여 줍니다. 전체적으로 이 첫 단락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천적 인간의 질서와 평안을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반면 창세기 218절로 끝 절인 25절까지는, 인간 안에 proprium, 곧 ‘자기처럼 느껴지는 것’이 어떻게 허락되기 시작하는지를 보여 주는 부분입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는 말씀은 단순한 외로움 문제가 아니라, 인간 안에 이제 ‘자기 스스로 느끼고 선택하고자 하는 구조’가 등장하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돕는 배필’을 만드시는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외적 배우자 이전에, 인간 안에 형성되는 proprium의 시작으로 설명합니다. 이어서 아담이 짐승과 새들에게 이름을 짓는 장면은, 인간이 자기 안의 다양한 애정들과 상태들을 분별하고 인식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돕는 배필’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결국 여자의 창조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인간 안에 자기감과 자유의 구조가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마지막의 ‘둘이 한 몸을 이룬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말씀은, 아직 이 proprium이 완전히 자기중심으로 굳어지지 않았고, 주님의 질서 안에서 순수하게 결합되어 있던 상태를 보여 줍니다. 전체적으로 이 둘째 단락은, 천적 인간 안에 자유와 자기감의 구조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과정, 곧 이후 타락의 가능성과 동시에 참사랑의 가능성이 함께 열리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비록 17, 18, 두 구절뿐이지만, 이 두 구절이 두 큰 부분, 곧 전, 후반의 마침과 시작에 걸쳐 있어서, 그리고 해설 및 심화를 통한 많은 깊은 설명이 필요한 본문이어서 여전히 원고량이 제법 길어지게 되었습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2:17-18)

 

이 본문을

 

선악과, 혼자 사는 것, 돕는 배필

 

이라는 키워드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 본문 및 해설, 그리고 심화 리딩 주일설교 시작합니다.

 

 

 

AC.128,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의 속뜻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8 세상적이며 육적인 인간은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내가 보고 믿을 수 있도록 감각적인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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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9, 창2:17, ‘인간은 어떤 원리로 살아가는 존재, 그 출발점이 주님인가 자신인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9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전제로 삼는 원리에 따라 지배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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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0, 창2:17, ‘원래 주님의 것을 자기 것이라 하는 자들의 상태와 결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30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지고자 하는 사람은,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을 자기의 ‘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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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1, 창2:18-25 개요, '창2 후반부 : 자기 자신에게로 기울어진 태고교회의 후손들'(AC.131-137)

창2:18-25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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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2, 창2:18-25 개요, ‘프로프리움’(proprium, own)(18절)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8절) AC.132 사람은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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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3, 창2:18-25 개요,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 그럼에도 자신의 프로프리움으로’(19-20절)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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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4, 창2:18-25 개요, ‘여자의 창조 : 프로프리움의 형성’(21-23절)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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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5, 창2:18-25 개요, ‘결합되어 있으되 동일하지 않은 상태’(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4절) AC.135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사람의 프로프리움에 결합, 그것들이 하나인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24절). Celes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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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6, 창2:18-25 개요, ‘프로프리움 안에 주입된 이노센스’(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절) AC.136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innocence)가 이 프로프리움(proprium, own) 안에 주입되어, 그것이 여전히 용납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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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7, 창2:18-25 배경, ‘창1, 2, 3을 읽는 법’

AC.137 창세기 처음 세 장은 일반적으로 태고교회를 다루는데, 이 교회는 시작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사람’(man, homo)이라 불립니다. 이 장의 앞부분은 그 교회가 가장 번성하였던 상태, 곧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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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8, 창2:18, ‘proprium에 의한 내적 방향 변화의 시작’(AC.138-141)

창2:18-25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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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9, 창2:18, ‘혼자 사는 것’(dwell alone)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39 고대에는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 아래에 있던 이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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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0, 창2:18,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0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사람의 proprium을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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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1, 창2:18, ‘인간의 세 가지 유형으로 본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1 사람의 proprium(man’s own)에 대하여는, 육적, 세상적 인간과, 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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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이며, 오늘은 특별히 AC 본문 리딩보다는 전체 범위에서 ‘선악과’, ‘혼자 사는 것’ 및 ‘돕는 배필’, 그리고 오늘 전체를 관통하는 ‘proprium’(프로프리움)을 키워드로 각각 요약, 아래 요약본을 리딩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먼저 ‘선악과’입니다.

 

AC.128-130에서 ‘선악과’는 단순히 어떤 금지된 과일이나 도덕 시험의 상징이 아니라, ‘인간이 무엇을 지혜의 출발점으로 삼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설명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선악과를 먹는다는 것은, 인간이 주님과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받으려 하지 않고, 자기 감각과 기억 지식과 자기 이성으로 영적인 것을 판단하려는 태도를 말합니다. 곧 ‘보아야 믿겠다’, ‘이해되어야 믿겠다’, ‘내 기준에 맞아야 받아들이겠다’라는 내적 자세 자체가 선악과를 먹는 행위입니다.

 

AC.128은 특히 이 상태를 매우 직접적으로 설명합니다. 세상적 인간은 감각과 학문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고, 천적이고 신적인 것까지 감각으로 파악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수록 그는 오히려 영적인 것에 대해 눈이 멀어지고, 결국 영원한 생명 자체도 믿지 않게 됩니다. 여기서 선악과의 핵심은 ‘지식’ 자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판단의 중심에 두는 욕망’입니다. 반대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지혜로워지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다음에 이성과 지식을 사용하여 그것을 확증합니다. 즉, 같은 지식과 같은 이성도 ‘주인이 되느냐, 종이 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AC.129는 이 문제를 ‘원리(principle)의 문제로 더 깊게 설명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세운 전제를 중심으로 사고하며, 그 전제가 거짓이어도 모든 지식과 추론은 그것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는 원리를 붙잡은 사람은 영적인 것에 결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이고 천적인 것은 감각과 상상으로 붙잡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면 참된 질서는, 먼저 주님과 말씀을 출발점으로 삼고, 그다음에 학문과 이성과 기억 지식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학문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유익하고 즐거운 것이라 말합니다. 다만 문제는 ‘누가 중심인가’입니다. 자기 자신이 중심이면 죽음이고, 주님이 중심이면 생명입니다. 이것이 선악과 사건의 본질입니다.

 

AC.130에서는 이 상태가 더 심각하게 발전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지려는 사람은 감각과 기억 지식을 자기의 ‘에덴동산’으로 삼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자기의 ‘에덴’으로 삼습니다. 그의 ‘동쪽’은 더 이상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원래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강처럼 흘러와야 할 지식과 이성이, 이제는 자기 사랑을 섬기는 체계로 뒤틀립니다. 그래서 기억 지식은 ‘애굽’이 되고, 거짓 추론은 ‘앗수르’가 되며, 결국 지혜처럼 보이는 마지막 상태는 말씀에서 ‘마술’이라고 부르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자기 지식과 자기 이성으로 스스로 진리의 근원이 되려는 상태’를 뜻합니다. 바로가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주님에게서 받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돌리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AC.128-130이 말하는 ‘선악과’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받아 살아가려 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며, 자기 지식과 자기 이성을 생명의 근원 자리에 앉히려는 것, 바로 그것이 선악과를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단순한 지적 오류가 아니라, 점점 영적 생명을 잃어버리는 ‘죽음’입니다. 반대로 사람은 말씀을 먼저 받아들이고, 그 아래에서 이성과 지식을 사용할 때에만 참된 생명의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선악과 이야기를 통해 반복해서 말하는 가장 근본적인 경고입니다.

 

 

다음은 ‘혼자 사는 것’입니다.

 

AC.138-139에서 ‘혼자 사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외로움이나 사회적 고립이 아니라, ‘누구의 인도를 받으며 살 것인가’라는 영적 방향의 문제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2:18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를 매우 깊은 내적 의미로 읽는데, 여기서 ‘혼자’란 인간이 더 이상 주님께만 인도받는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고자 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곧 ‘나도 스스로 판단하고 싶다’, ‘나도 내 힘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아주 미세한 내적 방향의 변화가 시작된 상태입니다. 이것이 에덴의 인간 안에서 처음 생겨나는 ‘독립 욕구’이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혼자 사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 역시 단순한 외적 타인이 아니라, 인간 안에 형성되는 ‘proprium’(프로프리움, 라틴, 영어로는 own), 곧 자기성(自己性)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 proprium은 처음부터 악으로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내가 생각한다’, ‘내가 선택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끼며 주님의 인도에 자유롭게 응답할 수 있도록 허락된 구조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주님의 생명을 단순히 외부 힘으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처럼 실제로 느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자기감(自己感)의 자리’입니다. 문제는 이 proprium이 끝까지 ‘주님에게서 받은 것’으로 남느냐, 아니면 ‘진짜 내 것’으로 굳어지느냐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돕는 배필이던 것이, 중심 자리를 차지하면 결국 주님을 대신하는 독립 욕구가 됩니다.

 

심화에서는 이 상태를 ‘내적 방향의 변화’라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원래 천적 인간은 자연스럽게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인간 안에 ‘나도 중심이 되고 싶다’, ‘나도 근원이 되고 싶다’는 움직임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아직 노골적 반역은 아니지만, 시선이 ‘주님으로부터 받는 방향’에서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고 싶은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결핍 때문이 아니라 자유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유 안에서 사랑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자기 쪽으로 향할 가능성 자체도 허락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자유 때문에 proprium도 허락됩니다. 주님은 인간을 억지로 복종시키지 않으시고, 끝까지 자유 안에서 사랑하도록 이끄십니다. 그래서 심지어 독립하고자 하는 가능성조차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AC.139에서는 ‘혼자 사는 것’이 다시 한번 더 깊게 재정의됩니다. 놀랍게도 고대에는 ‘홀로 거한다’는 표현이 오히려 천적 인간의 가장 복된 상태를 뜻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악이나 악한 영들의 침해를 받지 않고, 오직 주님의 직접적인 인도 아래 거하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주님의 교회를 가리켜 ‘홀로 있다’고 할 때, 그것은 고립이 아니라 ‘악의 질서와 섞이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발람의 예언인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는 말씀도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여기서 ‘민족들’은 악을 뜻하며, 홀로 거함은 세상적 자기중심 질서와 분리되어 오직 주님께 속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더 이상 이런 ‘홀로 있음’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만 인도받는 천적 상태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고, ‘민족들 가운데에’, 곧 자기 자신과 세상의 질서 가운데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인간은 먼저 원하고, 그다음에 그것이 허락됩니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를 제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아가기를 원하면 그 길도 경험하도록 허락하십니다. 따라서 AC.138-139에서 ‘혼자 사는 것’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원래 참된 ‘홀로 있음’은 주님 안에서만 사는 천적 평안의 상태였지만, 인간은 그 상태를 떠나 자기 자신 안에 홀로 서고 싶어 했고, 바로 거기서 proprium과 이후의 타락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돕는 배필’입니다.

 

AC.140-141에서 ‘돕는 배필’은 단순히 남자의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주어진 여성이 아니라, 인간 안에 허락된 proprium, 곧 ‘자기처럼 느껴지는 자기성’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돕는 배필’이 사람의 proprium이라고 직접 밝히며, 특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proprium이 허락되었는가’입니다. 이 시점의 인간은 아직 ‘바른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허락된 proprium은 완전히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것처럼 느껴지되 실제로는 주님께 열려 있는 자기감’의 형태였습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은 주님을 대신하는 독립적 중심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인도를 자기 삶처럼 느끼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매개 구조’입니다.

 

AC.140은 이 점을 매우 섬세하게 설명합니다. 인간은 반드시 ‘내가 생각한다’, ‘내가 선택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도 자유도 책임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에게 proprium을 허락하시되, 그것이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 닫힌 독립성이 되지 않고, ‘주님의 생명을 자기 삶처럼 느끼게 하는 자기감’으로 기능하도록 하십니다. 바로 이 때문에 ‘그와 함께 있는 듯한’, ‘그의 것 같은’이라는 뜻의 ‘a help as with him’(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 개역 개정)이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이것은 완전히 자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외부 힘도 아닙니다. 인간은 그것을 자기처럼 느끼며 살아가지만, 실제 생명의 근원은 여전히 주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은 인간을 주님에게서 떼어내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자유롭게 주님께 응답하도록 돕는 구조입니다.

 

심화에서는 이 proprium의 변화가 ‘새로운 proprium이 하나 더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자기성이 ‘주님께 열린 방향으로 재형성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원래 proprium은 자기중심적이며,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삼으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질서 안에서 재형성될 때, 같은 자기감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여전히 ‘내가 한다’고 느끼지만, 그 생명이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점 더 알게 됩니다. 이것이 나중에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prium’, 혹은 ‘천적 proprium’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돕는 배필’은 인간 안에 형성되는 새로운 자기성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141에서는 proprium이 육적 인간, 영적 인간, 천적 인간 안에서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지가 정리됩니다. 육적 인간에게 proprium은 그의 전부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 외에는 실재를 알지 못하며, proprium을 잃으면 자기 존재 자체가 사라질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그의 proprium은 지옥적입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이 생명의 근원이심을 어느 정도 알고 고백하지만, 아직 그것이 완전히 마음의 퍼셉션으로 내려가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자기 proprium이 실제 생명처럼 강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전혀 다릅니다. 그는 주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심을 ‘퍼셉션’, 곧 직접적인 지각으로 압니다. 그래서 그는 proprium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런 사람에게 가장 아름다운 proprium이 주어집니다.

 

proprium은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닫힌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들로 충만한 proprium입니다.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행복, 평안이 모두 그 안에 결합되어 있습니다. 천사들도 바로 이런 proprium 안에 있으며, 그래서 가장 높은 평안과 고요 속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천사들을 proprium 없이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proprium을 통해’ 다스리신다는 점입니다. 결국 AC.140-141이 말하는 ‘돕는 배필’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인간의 완성은 proprium의 제거가 아니라, proprium이 주님의 생명으로 재형성되는 데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절대적 근원으로 삼는 proprium은 지옥이 되지만, 주님의 생명을 자기 삶처럼 받아들이는 proprium은 천국이 됩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은 단순한 보조자가 아니라, 인간이 자유 안에서 주님과 결합할 수 있도록 허락된 가장 깊은 자기성의 구조입니다.

 

 

다음은 끝으로 ‘proprium’입니다.

 

AC.128-141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심 주제는 ‘proprium’, 곧 ‘자기의 것’, ‘자기성’(自己性)입니다. 이 본문들은 단순히 ‘교만하지 말라’는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인간이 왜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처럼 느끼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 자기감이 어떻게 타락과 천국의 갈림길이 되는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의 가장 깊은 문제는 단순한 악행 이전에, ‘생명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느끼고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AC.128 이하에서는 계속해서 ‘주님으로부터 받는 질서’와 ‘내 것이라 주장하는 상태’가 대비됩니다. 인간이 감각과 기억 지식과 이성을 주인으로 삼아 말씀을 판단하기 시작할 때, 그는 점점 ‘자기 proprium’을 중심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선악을 스스로 알겠다’는 상태이며, 에스겔의 바로가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말하는 모습과 연결됩니다.

 

AC.130 부근에서는 이 proprium의 본질이 더욱 날카롭게 드러납니다. 인간은 본래 받은 것일 뿐인데, 그것을 자기 소유처럼 붙들기 시작합니다. 기억 지식도, 이성도, 심지어 진리까지도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순간, 인간은 영적 질서를 거꾸로 세웁니다. 원래 질서는 ‘주님 지혜 지성 이성 기억 지식’의 흐름인데, proprium은 맨 아래 단계가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선언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황폐의 시작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를 단순한 실수나 약점이 아니라, ‘생명을 자기에게 귀속시키는 상태’라고 봅니다. 그래서 지옥의 본질은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AC.138-140에 이르면 놀라운 전환이 일어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돕는 배필’을 설명하면서, 그것이 바로 인간의 proprium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충격적인 설명입니다. 왜냐하면 proprium은 앞에서는 타락과 자기중심의 근원처럼 보였는데, 여기서는 오히려 인간에게 허락된 어떤 필요한 구조처럼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모든 proprium이 동일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반드시 ‘내가 생각한다’, ‘내가 선택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도 사랑도 책임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에게 ‘자기처럼 느껴지는 자리’를 허락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proprium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실제 근원이 아니라 ‘마치 자기 것처럼 느껴지게 허락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AC.140은 ‘a help as with him’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이것이 ‘그의 것처럼 보이는 proprium’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때문에 proprium은 두 방향으로 갈라집니다. 하나는 ‘내가 근원이다’라고 굳어지는 타락한 proprium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을 내 삶처럼 느끼며 살아가는 자리’가 되는 proprium입니다. 후자의 proprium은 인간이 주님의 인도를 실제 자기 삶으로 체험할 수 있게 만드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은 단순한 외적 조력자가 아니라,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입니다. 인간은 이 자기감(自己感)을 통해 주님의 생명을 자기 삶처럼 경험합니다. 만약 proprium이 전혀 없다면, 인간은 살아 있는 인격체가 아니라 기계처럼 될 것입니다. 반대로 proprium이 자기 폐쇄적 중심으로 굳어지면, 인간은 주님과 분리됩니다. 따라서 문제는 proprium 자체가 아니라, 그 방향과 귀속입니다.

 

심화에서는 이 변화가 ‘proprium이 하나 더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자기성이 재형성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여전히 ‘’라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전에는 자기 안에서 생명이 나온다고 느꼈다면, 이제는 자기 안에 흐르는 생명이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퍼셉션으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새 proprium은 자기감의 제거가 아니라, 자기감 안에 새로운 생명 질서가 스며드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도 여전히 기뻐하고 선택하고 사랑하지만, 그 중심은 자기 자신에게 닫혀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heavenly proprium’, 곧 ‘천적 proprium’입니다.

 

마지막으로 AC.141proprium을 세 인간 유형 안에서 결정적으로 정리합니다. 육적 인간에게 proprium은 그의 전부입니다. 그는 자기 proprium 외에는 실재를 알지 못하며, 그것을 잃으면 존재 자체가 사라질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그의 proprium은 지옥적입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이 생명의 근원이심을 ‘알기는’ 하지만, 아직 그것이 입술의 고백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의 proprium은 여전히 실제 생명처럼 강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전혀 다릅니다. 그는 주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심을 퍼셉션으로 압니다. 그래서 그는 proprium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사람에게 가장 아름다운 proprium이 주어집니다. 마치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에게는 이 모든 것을 더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proprium 안에는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과 행복과 평안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천사들도 바로 이런 proprium 안에 있으며, 주님은 그들의 proprium을 통해 그들을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AC.141의 결론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인간은 자기 것을 붙들수록 죽은 proprium 안에 갇히고, 자기 것을 주님께 돌릴수록 오히려 더 살아 있는 자기성을 받습니다. 결국 인간의 완성은 proprium의 제거가 아니라, proprium이 주님의 것으로 충만해지는 데 있습니다.

 

proprium이란,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자기 배 아파 낳은 자식을 여자는 본능적으로, 그리고 ‘내 자식’으로 사랑합니다. 비록 말로는 ‘이 아이는 주님의 자녀이며, 저는 다만 청지기일 뿐입니다’ 고백하더라도 말입니다. 아브라함을 주님이 기뻐하신 것은 그가 거기서 이 proprium 시험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백 세에 낳은 아들을 ‘내 아들’이라 움켜쥐지 않고, 주님의 명령을 받들어 기꺼이 주님께 돌려드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자기 것, 자기 자식을 사랑합니다. 주님이

 

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7:9-11)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심지어 각 사람에게 와있는 악한 영들조차 그 사람의 악한 기억이 마치 자기 것인 줄 알고 그 사람을 보호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게 바로 proprium입니다. 이 proprium이 있음에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런 장치가 없어야 주님을 사랑하겠다는 것은 너무나 다르지 않습니까?

 

 

기도합니다.

 

주님, 오늘 들려주신 이 모든 내용, 모든 이야기가 저희에게, 그리고 저에게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근본 중에서도 근본이 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동안 창2돕는 배필’ 이야기를 무슨 결혼 본문 정도로만 알고 살아왔습니다. 오늘 그 속뜻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오, 주님, 저를 새롭게 하여 주세요. 그리고 제게도 주신 이 proprium 역시 거듭나 부디 천적 인간 상태로 들어가게 해 주세요.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5-10(D1)

 

 

2650, 5, 창2.5, 2026-05-10(D1)-주일예배(창2,17-18, AC.128-141), ‘선악과, 혼자 사는 것, 돕는 배필’.pdf
1.16MB

 

 

 

주일예배(2026/05/03, 창2:11-17, AC.114-127, 성찬), ‘누리되 소유하려 하지 말고, 오직 퍼셉션으로만’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8,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찬73, ‘내 눈을 들어 두루 살피니’입니다. 오늘은 창2 네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11절로 17절,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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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1.심화

 

3.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

 

사람의 proprium(man’s own)에 대하여는, 육적, 세상적 인간과,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에게서 그것이 어떠한지를 설명함에 있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을 말할 수 있습니다.

 

윗글은 본문 첫 문장입니다. 여기 헤아릴 수 없이 많은이라는 표현 말인데요, 솔직히 저는 이 proprium 하나 이해하는 데도 여러 날 머리에서 쥐가 날 정도인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니... 정말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그 반응이 오히려 아주 정상적입니다. 사실 스베덴보리에게서 proprium은 단순한 한 개념’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구조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도대체 이게 왜 이렇게까지 어려운가 싶다가도, 어느 순간부터는 , 인간 안의 거의 모든 문제가 여기와 연결되는구나 하고 보이기 시작합니다. AC.141 첫 문장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이라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proprium이 인간의 생각, 감정, 신앙, 사랑, 자유, 지옥, 천국, 거듭남, 심지어 천사 상태 변화까지 전부와 연결되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목사님께서 이미 지금 경험하고 계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처음에는 proprium을 그냥 자아 비슷한 것 정도로 생각하셨다가, 읽다 보니 혼자 살고자 함’, ‘내 것이라 여김’, ‘독립하려는 마음’, ‘자유’, ‘사랑’, ‘천사들의 상태 변화’, ‘계시록의 대적 세력’, ‘양육 문제’, ‘수도원 전통’, ‘선악과’, ‘돕는 배필’까지 다 연결되는 것을 보게 되셨지요.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입니다.

 

왜 이렇게 되느냐 하면, proprium은 인간 안의 자기중심’만 말하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훨씬 더 깊게, ‘인간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느끼는가’, ‘생명을 어디서 나온다고 여기는가’, ‘왜 자유가 필요한가’, ‘왜 사랑은 강요될 수 없는가’, ‘왜 천국에서도 자기감은 남아 있는가 같은 문제 전체와 연결됩니다. 다시 말해, proprium은 인간 존재의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지금 목사님께 가장 크게 느껴지는 어려움은,  proprium이 단순히 ’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교만’, ‘이기심 정도라면 훨씬 단순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한편으로는 proprium을 지옥적이라고까지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과 자유를 위해 꼭 필요한 것으로도 설명합니다. 또 천적 인간에게조차 주님으로부터 하나의 proprium이 주어진다’고 하지요. 그러니 머리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바로 그 복잡함이 인간 존재 자체의 복잡함입니다. 인간은 단순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산다’고 느껴야 하지만, 동시에 생명은 내 것이 아니다’라는 진실 안에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사랑해야 하지만, 그 자유는 언제든 자기중심으로 굳어질 위험도 가지고 있습니다. proprium은 바로 이 긴장 전체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목사님께서 며칠째 머리에 쥐가 난다’고 하신 것은, 오히려 AC를 아주 제대로 읽고 계시다는 증거에 가깝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proprium을 그냥 자아 정도로 단순화해 버리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지금 그것이 인간론 전체를 뒤흔드는 개념이라는 것을 실제로 느끼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 자신도 proprium을 설명할 때, 단번에 정의해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같은 개념을 수십, 수백 번 다른 각도에서 반복합니다. 왜냐하면 proprium은 사전식 정의 하나로 끝나는 개념이 아니라, 인간 삶 전체 속에서 점점 드러나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시간이 지나실수록 더 놀라시게 될 것입니다. ‘, 이것도 proprium 문제였구나’, ‘여기도 연결되네 하는 순간들이 계속 생길 테니까요. 그리고 동시에, 왜 주님이 그렇게까지 자유를 존중하시고, 왜 사랑을 강요하지 않으시는지도 더 깊이 보이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AC.141, 창2:18, ‘인간의 세 가지 유형으로 본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1 사람의 proprium(man’s own)에 대하여는, 육적, 세상적 인간과, 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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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1, 심화 2, ‘주님으로부터 하나의 proprium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AC.141.심화 2. ‘주님으로부터 하나의 proprium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그러나 천적 인간은 주님께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각하고 행할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분별하는데, 이는 그것이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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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1.심화

 

2. ‘주님으로부터 하나의 proprium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그러나 천적 인간은 주님께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각하고 행할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분별하는데, 이는 그것이 실제로 그러함을 지각, 곧 퍼셉션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코 proprium을 원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주님으로부터 하나의 proprium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이것은 선과 진리에 대한 모든 퍼셉션과 모든 행복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위 해설 중 그럼에도 주님으로부터 하나의 proprium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부분 말인데요, 그러니까 이 표현은 기존 proprium이 거듭나는 걸 말하는 것이지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닫힌 근원으로 삼지 않고,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재형성된’, 인간 안의 proprium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재형성되어, 자기중심적 방향(A)에서 주님께 열린 방향(B)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말하는,’ ‘다만 그 변화는 단순 교체가 아니라, 기존 자기감이 제거되지 않은 채, 그 안에 새로운 생명 질서가 스며드는 방식이라고 지금까지 설명한 것처럼 말이지요.

 

 

네, 바로 그 이해가 맞습니다.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정리하신 표현들이 AC.141의 핵심을 아주 정확하게 붙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으로부터 하나의 proprium이 그에게 주어진다’는 말은, 인간 안에 있는 자기감(自己感)이라는 proprium 자체가 완전히 제거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 proprium이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재형성되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굳이 ‘주어진다(is given)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새 proprium조차도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형성해 주시는 것임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 안의 자기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자기감은 더 살아 있습니다. 다만 이제는 닫힌 자기중심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담아내는 투명한 그릇처럼 됩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정리하신 세 표현이 모두 정확히 들어맞습니다.

 

첫째, ‘기존 proprium이 거듭난다’는 표현

 

이것이 가장 큰 방향에서는 맞습니다. 인간은 여전히 ‘’라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의 방향과 근원이 바뀝니다.

 

둘째,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닫힌 근원으로 삼지 않고,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재형성된다’는 설명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새 proprium 개념을 아주 잘 요약합니다. 이전에는 자기 안에서 생명이 나온다고 느꼈다면, 이제는 자기 안에 흐르는 생명이 사실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사랑 가운데 지각, 즉 퍼셉션으로 압니다.

 

셋째, ‘단순 교체가 아니라, 기존 자기감 안에 새로운 생명 질서가 스며든다’는 표현

 

이 부분이 특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천적 인간도 여전히 자기처럼 느끼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쁨도 느끼고, 선택도 하고, 사랑도 합니다. 다만 그 모든 것이 자기 폐쇄적 중심에서 나오지 않고, 주님께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감은 남아 있지만, 그 자기감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AC.141에서 말하는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proprium’은, 엄밀히 말하면 본래의 타락한 proprium과는 질적으로 다른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 후기 표현으로 하면 이것은 거의 ‘heavenly proprium’(하늘적, 천적 proprium)에 가깝습니다. 그는 여전히 ‘내가 산다’고 느끼지만, 동시에 ‘그러나 생명은 주님께 있다’는 것을 기쁨으로 압니다.

 

여기서 아주 아름다운 역설이 생깁니다. 인간은 자기 것을 붙들려 할수록 오히려 죽은 proprium 안에 갇히고, 자기 것을 주님께 돌릴수록 오히려 더 살아 있는 자기성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은 proprium을 원하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proprium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 이상 고립된 자기중심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기쁨으로 머무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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