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8:25-28에서는 위임식의 뜻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숫양의 기름과 오른쪽 뒷다리, 무교병과 기름 섞은 떡과 전병을 모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손에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흔들어 요제로 삼습니다. 왜 위임식에서는 제물을 그냥 제단으로 가져가지 않고 굳이 제사장의 ‘손’에 올려놓았을까요?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매우 직접적으로 해설합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82(출29:24)는 손바닥 위에 놓인 기름과 콩팥과 오른쪽 뒷다리와 떡들이 신적 선과 신적 진리를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손에 놓는 것은 ‘이모든것은주님의것이며주님에게서온다’는 인정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위임’의 개념을 뒤집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직책에 위임된다는 것은 권한을 자기 손에 넘겨받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레8의 위임식에서는 손이 채워지는 순간 오히려 그 손에 있는 것이 자기 것이 아님을 인정합니다. 손에 많은 것이 놓일수록 ‘이것은주님에게서왔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어 AC.10083(출29:24)은 그것을 흔드는 요제를 ‘생명을부여하는것’과 연결합니다. 특별히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함으로써 신적 생명이 들어온다고 설명합니다. 지식만으로는 아직 생명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고 그것에 따라 살기 시작할 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래서 손에 놓인 제물과 흔드는 동작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먼저 ‘주님에게서왔다’고 인정하고, 그 인정으로부터 생명이 시작됩니다. 인간이 자기 지혜와 능력과 선을 자기 것이라고 붙들면 그것은 proprium안에서 죽기 시작하지만, 그것의 근원을 주님께 돌릴 때 그 선과 진리는 인간 안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이것은 모든 쓰임에 적용됩니다. 설교하는 능력도, 가르치는 지혜도, 사람을 돌보는 따뜻함도, 돈을 벌고 사용하는 능력도,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도, 이웃을 섬길 기회도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손은 그것을 실제로 행하지만 근원은 손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손을채운다’는 위임의 히브리적 이미지와 스베덴보리의 해설은 아주 아름답게 만납니다. 빈손이 채워지지만 그 채움은 소유를 위한 것이 아니라 쓰임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을 받아 다시 주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는 것입니다.
참된 위임은 ‘이제내가권한을가졌다’가 아니라 ‘주님께서내손에맡기셨다’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참된 요제는 ‘내가이것을이루었습니다’가 아니라 ‘이모든선과진리는주님에게서왔습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8의 제사장은 손이 가득 찼지만 자기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역설적으로 바로 그런 손이 주님의 쓰임을 가장 온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며 주님에게서 온다는 인정 안에서 인간의 손은 비로소 신적 생명의 도구가 됩니다. (SWC.레8심화4)
레8:23-24는 제사장 위임식 가운데 가장 낯설면서도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모세는 위임식 숫양의 피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오른쪽 귓부리, 오른쪽 엄지손가락,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바릅니다. 왜 하필 이 세 곳이며, 왜 모두 오른쪽일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의 원전이 놀라울 만큼 구체적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60(출29:20)은 위임식 숫양의 피가 주님의 신적 선에서 나오는 신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세 곳에 발라지는 것은 같은 신적 진리가 서로 다른 층위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여 줍니다.
AC.10061(출29:20)은 오른쪽 귓부리를 해설합니다. 귀는 ‘지각’을 의미하며, 특히 오른쪽 귀는 선에서 나오는 진리를 지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오른쪽이 선에서 나오는 진리와 관련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귀에 피가 발라지는 것은 먼저 주님의 진리를 듣고 그 진리를 속에서 지각하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 다음은 오른손 엄지입니다. AC.10062(출29:20)는 엄지손가락이 선을 통한 진리의 능력, 곧 선에서 나오는 진리가 가진 힘과 그로부터 생기는 이해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손은 능력과 행동을 나타내며, 엄지는 손의 힘을 대표하는 끝부분입니다. 귀에서 받아들인 진리가 이제 이해와 능력, 그리고 행동의 영역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오른발 엄지입니다. AC.10063(출29:20)은 이것을 가장 바깥 천국에 해당하는 이해와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머리와 그 기관들이 가장 안쪽 천국에, 몸과 손이 중간 천국에, 발이 가장 바깥 천국에 상응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귀·손·발은 단순한 세 신체 부위가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완전한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이것을 인간의 거듭남에 적용하면 매우 실제적인 의미가 나타납니다. 진리는 먼저 귀로 ‘들려야’ 합니다. 그러나 들었다고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이해와 능력으로 내려와 손에서 행해져야 하고, 다시 가장 바깥 일상의 삶으로 내려와 발이 걷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안다’와 ‘말씀대로산다’ 사이에는 귀에서 발까지의 거리가 있습니다. 설교를 듣고 감동하는 것은 귀의 단계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해하고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손의 단계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순간만이 아니라 돈을 쓰고, 사람을 만나고, 운전하고, 일하고, 가족과 살아가는 일상의 방향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발의 단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 곳 모두 ‘오른쪽’이라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오른쪽은 선에서 나오는 진리와 연결됩니다. 단순히 진리를 많이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선으로부터 진리를 듣고 이해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진리는 제사장의 귀와 손과 발을 거룩하게 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따라서 레8의 피는 귀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손을 지나 발까지 내려갑니다. 주님의 신적 진리는 우리의 가장 안쪽 지각에서 시작하여 이해와 행동을 지나 가장 바깥 일상의 삶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속 사람에서 받아들인 진리가 겉 사람의 삶까지 질서 있게 할 때 거듭남이 실제가 됩니다.
이것이 위임식의 본질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의 쓰임을 감당하는 사람은 진리를 잘 듣는 사람만도 아니고, 일을 많이 하는 사람만도 아닙니다. 주님의 진리를 듣고, 그 진리를 선에서 이해하며, 손으로 행하고, 발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른쪽 귀와 손과 발에 같은 피가 발라진 것은 한 사람 전체가 신적 진리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SWC.레8심화3)
레8:12에서 모세는 관유를 아론의 머리에 붓고 그에게 발라 거룩하게 합니다. 기름을 손이나 옷에 조금 바른 것이 아니라 ‘머리에붓습니다.’ 제사장 위임식에서 왜 기름 부음이 이토록 중요한 것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출29의 병행 본문을 해설하면서 관유를 ‘신적선으로의취임’을 표상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아론은 최고 의미에서 주님을 신적 선에 관하여 표상하고,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주님의 인성 전체에 있는 신적 선을 나타냅니다. 기름이 사랑의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제사의 여러 규례에서도 반복해서 확인됩니다.
따라서 제사장직의 가장 깊은 중심은 ‘사랑의선’입니다. 제사장은 진리를 알고 가르치는 사람이지만 그 진리의 생명은 선에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진리는 차갑고,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은 생명이 없습니다.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외적으로는 제사장의 옷을 입었어도 그 안에 관유가 없는 셈입니다.
관유가 ‘머리’에 부어진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머리는 몸 전체의 첫째와 가장 높은 부분이며,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첫째와 가장 높은 것은 전체를 포함합니다. 따라서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사랑의 선이 일부 행동에만 붙는 것이 아니라 전체 사람을 지배하고 질서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목회나 교회 봉사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정을 섬기든, 직장에서 일하든, 어려운 사람을 돕든, 말씀을 가르치든, 그 쓰임을 실제로 천국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그 일을 움직이는 사랑입니다. 똑같은 행동도 자기 명예를 위해 할 수도 있고 이웃의 선을 위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레8에서는 씻음 다음에 옷을 입히고, 그 후 관유를 붓습니다. 진리로 정결하게 되고 진리를 입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사랑의 선에서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진리가 길을 보여 준다면 사랑은 그 길을 실제로 걷게 하는 생명입니다.
참된 기름 부음은 어떤 특별한 종교적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의지 안으로 들어와 ‘선한것을알고있기때문에’가 아니라 ‘선한것을사랑하기때문에’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이 깊어지면서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따라서 아론의 머리에 부어진 관유는 제사장이라는 지위에 권위를 더하는 의식이 아닙니다. 모든 거룩한 쓰임의 근원이 사랑의 선이라는 선언입니다. 진리가 아무리 많아도 사랑이 없으면 생명이 없으며,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이 전체 사람을 채울 때 비로소 진리는 살아 있는 쓰임이 됩니다. (SWC.레8심화2)
레8의 제사장 위임식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순서입니다. 모세는 아론에게 화려한 에봇이나 흉패부터 입히지 않습니다. 먼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물로그들을씻깁니다.’ 그 다음에야 속옷과 띠와 겉옷과 에봇과 흉패와 관을 입힙니다. 왜 거룩한 옷보다 씻음이 먼저일까요?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02(출29:4)는 이 장면을 매우 직접적으로 해설합니다. ‘물로씻는것’은 신앙의 진리들을 통한 정결을 의미합니다. 물은 진리를 나타내며, 인간의 정결과 거듭남은 진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먼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말씀을 통해 보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씻음이 옷보다 먼저라는 것은 중요한 영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인간이 진리를 많이 ‘입는것’과 그 진리에 의해 실제로 정결하게 되는 것은 다릅니다. 성경 지식과 교리와 신학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자기 악을 비추고 씻는 데 사용되지 않는다면, 거룩한 옷은 입었지만 몸은 씻지 않은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진리는 먼저 우리를 꾸미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씻기 위해 주어집니다. ‘이말씀으로다른사람을어떻게가르칠까?’보다 먼저 ‘이말씀은내안에서무엇을드러내고있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분노와 교만과 탐욕과 자기애를 비추고, 그것이 죄임을 인정하게 하며,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 피하게 하는 것이 말씀의 첫 쓰임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후에 옷이 입혀집니다. AC.10003(출29:5)은 아론의 옷을 주님의 영적 나라의 표상으로 설명합니다. 정결하게 된 사람에게 진리가 입혀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악을 제거하는 소극적 과정이 아니라 새로운 진리를 받아 새로운 삶의 형태를 갖추는 적극적 과정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에는 ‘씻음’과 ‘입음’이 모두 필요합니다. 씻기만 하고 아무것도 입지 않으면 비어 있게 되고, 씻지 않은 채 옷만 입으면 겉만 종교적인 사람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진리로 우리를 씻으시고 다시 진리로 우리를 입히십니다. 같은 진리가 처음에는 악을 드러내는 물이 되고, 그 다음에는 새로운 삶을 형성하는 옷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8의 첫 위임 행위가 물로 씻는 것이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의 쓰임을 감당하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직책도, 지식도, 권위도 아닙니다. 말씀의 진리가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어 악과 거짓으로부터 정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위임은 먼저 씻김에서 시작됩니다. (SWC.레8심화1)
레위기 8장은 새로운 큰 단락을 엽니다. 레1-7에서는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규례를 배웠습니다. 이제 레8에서는 그 제사를 실제로 섬길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으로 위임됩니다. 그래서 장면도 달라집니다. 제물을 가지고 오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온 회중이 회막 문에 모인 가운데 씻음, 옷 입힘, 기름 부음, 속죄제, 번제, 위임식의 숫양, 피, 요제, 먹음, 그리고 이레 동안 회막 문에 머무는 긴 위임 절차가 이어집니다. 겉으로 보면 고대 이스라엘의 성직 임명식이지만, 스베덴보리의 원전을 따라 들어가면 이것은 훨씬 더 깊은 것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정결하게 하시고 선과 진리를 입히시며, 마침내 그 선과 진리를 실제 쓰임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시는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특히 레8을 이해하는 열쇠는 출29입니다. 레8에서 모세가 시행하는 거의 모든 절차는 이미 출29에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999이하에서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출29의 제사장 위임식을 매우 상세하게 해설합니다. 그 최고 의미에서는 아론이 주님의 신적 선을, 그의 아들들이 거기서 나오는 신적 진리를 표상하며, 위임식 전체는 주님의 신적 인성과 그분에게서 나오는 신적 선과 진리가 천국에서 어떻게 전달되고 받아들여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일관된 원리에 따라 이것은 상대적으로 인간의 거듭남에도 적용됩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신 질서가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질서의 원형이기 때문입니다.
6절에서 그 첫 행동은 ‘씻음’입니다.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물로 씻깁니다. AC.10002(출29:4)는 이것을 매우 직접적으로 ‘신앙의진리들을통한정결’이라고 설명합니다. 물은 진리를 의미하며 인간의 정결과 거듭남은 진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사장이 먼저 직분을 받고 나중에 씻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씻음이 먼저입니다. 쓰임을 맡기 전에 정결이 있고, 선을 행하기 전에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진리로 분별하는 일이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한다는 이유로 인간의 악과 거짓이 자동으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쓰임에 들어갈수록 인간은 말씀의 물로 계속 씻김을 받아야 합니다.
7절로 9절에서는 아론에게 제사장의 옷을 입힙니다. 속옷과 띠와 겉옷과 에봇과 흉패, 우림과 둠밈, 관과 금 패가 차례로 놓입니다. AC.9999-10008은 이 옷들을 하나의 장식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선에서 나오는 신적 진리의 여러 층위를 표상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특히 AC.10003(출29:5)은 아론의 옷이 주님의 영적 나라를 표상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에서도 중요한 순서입니다. 씻음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악과 거짓을 제거한 인간에게 주님께서는 진리를 ‘입히십니다’. 벗겨 내는 것만이 구원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입는 것이 구원입니다. 거짓을 버린 자리에 진리가 들어오고, 악한 삶을 버린 자리에 선한 삶이 들어와야 합니다.
10절로 12절에서는 관유가 등장합니다. 모세는 성막과 그 안의 모든 것, 제단과 기구와 물두멍에 관유를 바르고, 아론의 머리에는 관유를 붓습니다. AC.9999의 요약과 이어지는 해설에서 관유는 신적 선으로의 취임을 표상하며, 아론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주님의 인성 전체에 있는 신적 선을 표상합니다. 기름이 사랑의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의 제사들에서도 계속 확인했습니다. 따라서 제사장직의 가장 깊은 근원은 지식이나 권한이 아니라 선, 곧 사랑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의식을 정확하게 수행하는 것만으로 제사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진리와 쓰임의 생명이 사랑에서 나와야 합니다.
14절로 21절에서는 속죄제의 수송아지와 번제의 숫양이 차례로 드려집니다. 이것은 레4와 레1에서 이미 보았던 제사들이지만 이제는 ‘제사장위임’이라는 문맥 안에 놓입니다. 제사장 자신도 먼저 속죄를 받아야 하고, 그 후 전부를 드리는 번제가 이어집니다. 속죄제의 수송아지 가죽과 고기와 똥은 진영 밖에서 불살라지고, 번제의 숫양은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은 뒤 전부 제단에서 불사릅니다. AC.10057이하가 설명하듯 이 일련의 과정은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영화와 관련되고, 상대적으로 인간에게는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과 선과 진리의 결합, 곧 거듭남을 나타냅니다. ‘직분을받았으므로거룩하다’가 아니라 먼저 정결하게 되고, 그 다음 자신의 전체가 주님의 사랑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2절부터 레8의 절정인 ‘위임식의숫양’이 등장합니다. 출29에서는 이것을 ‘손을채우는숫양’이라고 표현하며, 스베덴보리는 이 ‘손을채움’을 대단히 중요하게 다룹니다. AC.10076은 ‘손을채우는것’이 주님의 신적 선에서 나오는 신적 진리의 전달과 받아들임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성경의 ‘위임’은 단순히 직책을 부여한다는 의미보다 훨씬 깊습니다. 인간의 빈손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채워지고, 그것을 가지고 실제 쓰임을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위임은 권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아 섬길 것을 받는 것입니다.
23절과 24절은 그래서 레8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모세는 위임식 숫양의 피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오른쪽귓부리’, ‘오른쪽엄지손가락’, ‘오른쪽엄지발가락’에 바릅니다. 이것은 막연히 ‘듣는것,일하는것,걸어가는것을하나님께바친다’는 정도의 상징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훨씬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AC.10060(출29:20)은 이 피를 주님의 신적 선에서 나오는 신적 진리라고 하고, AC.10061(출29:20)은 오른쪽 귀를 선에서 나오는 진리를 지각하는 능력과 연결합니다. AC.10062(출29:20)는 오른손 엄지를 선에서 나오는 진리의 능력 및 그에 따른 이해와 연결하며, AC.10063(출29:20)은 오른발 엄지를 가장 바깥 또는 최종 단계에서의 이해와 연결합니다. 더 깊게는 귀·손·발이 각각 가장 안쪽 천국, 중간 천국, 가장 바깥 천국에 상응합니다. 위임식의 피가 인간 존재의 안에서 밖까지 내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의 거듭남에 적용하면 매우 아름다운 질서가 드러납니다. 먼저 주님의 진리를 ‘듣고지각하는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듣기만 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는 손으로 내려와 실제 능력과 행동이 되어야 하고, 다시 발까지 내려와 일상의 가장 바깥 삶과 행보가 되어야 합니다. 귀에서는 경건한데 손에서는 이기적이고, 손에서는 봉사하는데 발이 실제 삶에서는 다른 길로 간다면 아직 온전한 위임이 아닙니다. 주님의 신적 진리는 우리의 지각과 이해와 행동, 그리고 일상의 최종적인 삶까지 관통해야 합니다. 제사장의 귀와 손과 발에 같은 피가 발라지는 것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의 신적 질서 아래 놓이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25절로 28절에서는 또 놀라운 장면이 이어집니다. 숫양의 기름과 오른쪽 뒷다리, 그리고 무교병과 기름 섞은 떡과 전병을 모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손’에 올려놓고 여호와 앞에서 흔들게 합니다. AC.10077-10080은 이 떡들이 천적 선의 안쪽·중간·바깥 층위를 나타낸다고 설명하고, AC.10082(출29:24)는 이 모든 것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손바닥 위에 놓는 것이 ‘이모든것은주님의것이며주님에게서온다’는 인정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AC.10083(출29:24)은 그것을 흔드는 요제가 그 인정으로부터 오는 ‘신적생명’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아직 생명이 아닙니다. ‘이선과진리는내것이아니라주님에게서온것입니다’라고 인정할 때 그것이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이 점에서 ‘위임’의 의미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인간의 손이 채워지지만 그 순간 인간은 오히려 ‘이것은내것이아니다’라고 인정합니다. 주님께서 능력을 주셨는데 인간이 ‘내능력’이라고 하면 위임의 의미를 잃습니다. 말씀을 가르칠 능력, 이웃을 섬길 능력, 체어리티를 행할 능력, 교회를 섬길 능력 모두 주님에게서 옵니다. AC.10082가 손바닥 위에 놓인 제물들을 ‘주님의것이며주님에게서온다는인정’으로 설명하는 것은 그래서 매우 중요합니다. 참된 위임은 자기 권한의 확대가 아니라 자기 능력의 근원을 주님께 돌리는 데서 시작됩니다.
30절에서는 관유와 제단 위의 피가 함께 아론과 그의 옷, 그의 아들들과 그들의 옷에 뿌려집니다. AC.10067-10069의 출29병행 해설에서 피는 신적 진리, 관유는 신적 사랑의 선을 나타내며, 이 둘의 결합은 신적 선과 신적 진리의 상호적 결합을 표상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말을 덧붙입니다. 실제 피나 기름이라는 물질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이라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의식 자체에서 자동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함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31절과 32절에서는 위임식 숫양의 고기와 광주리의 떡을 회막 문에서 먹고, 남은 것은 불사릅니다. AC.10105(출29:31)는 고기를 삶는 것을 ‘주님의빛가운데교리의진리를통해선을삶의쓰임에맞게준비하는것’이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이어 AC.10106-10109는 그 고기와 떡을 먹는 것이 정결하게 된 사람에게 주님의 선이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도 위임은 단순한 직책 임명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선을 실제 삶의 쓰임으로 준비하고, 그것을 자기 의지 안에 받아들여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마지막 33절로 35절에서는 이 모든 위임이 하루 만에 끝나지 않습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이레동안’ 회막 문을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AC.9228은 바로 레8:33-34를 인용하면서 ‘일곱’이 완전한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제사장 위임이 이레 동안 계속되었다고 설명합니다. AC.10102(출29:30)도 ‘이레’를 ‘충만하고완전한인정과받아들임’이라고 풀이합니다. 그러므로 위임은 순간적인 감동이나 한 번의 결단이 아닙니다. 인간 존재 전체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하나의 상태가 충만해지는 과정입니다.
레8은 결국 ‘누가주님의쓰임을감당할수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합니다. 씻김을 받은 사람, 진리를 입은 사람, 사랑의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된 사람, 주님의 진리를 귀로 받아들이고 손으로 행하며 발로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자기 손에 놓인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의것이며주님에게서온다’고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목회자나 성직자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거듭나는 사람은 주님의 나라에서 어떤 쓰임을 위해 준비됩니다. 거듭남은 단지 ‘내가구원받는것’으로 끝나지 않고, 주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선한 쓰임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레8의 위임식은 인간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의식이 아니라 인간 전체를 주님의 선과 진리의 통로로 준비시키는 거룩한 과정입니다. 귀에서 듣고, 손에서 행하고, 발에서 살아가며, 그 모든 힘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제사장 위임식에 감추어진 거듭남과 쓰임의 아르카나입니다. (SWC.레8해설)
레7:30-34에는 레위기의 상응을 읽는 재미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면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화목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기름과 함께 가슴을 자기 손으로 가져옵니다. 가슴은 여호와 앞에서 흔들어 ‘요제’로 삼고, 오른쪽 뒷다리는 들어 올려 ‘거제’로 드립니다. 그리고 두 부분 모두 제사장에게 돌아갑니다. 본문도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가 제사장에게 주어진 영원한 몫이라고 명시합니다.
이 장면은 스베덴보리가 놀라울 정도로 직접 해설합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87(출29:26)은 ‘가슴’이 체어리티의 선을 의미하며,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신적 영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의 가슴 안에는 심장과 폐가 있고, 그 상응에 따라 가슴은 둘째 또는 중간 천국의 영적 선, 곧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의 선과 연결됩니다.
반면 오른쪽 뒷다리는 더 안쪽의 선을 나타냅니다. AC.10075(출29:22)는 오른쪽 뒷다리를 가장 내적인 선, 곧 천적 선과 연결하면서 레7:32, 34-35를 직접 인용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가슴은 영적 선을, 오른쪽 뒷다리는 천적 선을 표상하기 때문에 이 두 부분이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졌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부위만 다른 것이 아니라 동작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가슴은 ‘흔들고’, 오른쪽 뒷다리는 ‘들어올립니다’. AC.10091(출29:27)은 가슴을 흔드는 것을 ‘인정에의해살아있게됨’과 연결합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를 이해하고 인정하면서 그 진리로부터 선에 이릅니다.
AC.10092-10093(출29:27)은 오른쪽 뒷다리를 들어 올리는 것을 신적 천적인 것, 곧 주님에게만 속한 신적 선이 천국과 교회에서 지각되고 받아들여지는 것과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영적 천국과 천적 천국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영적 천국에서는 신적 진리가 이해의 영역에서 ‘인정’되고, 천적 천국에서는 신적 선이 의지의 영역에서 ‘지각’됩니다.
그러므로 ‘가슴을흔들고뒷다리를들어올린다’는 것은 단순한 고대의 제의 동작이 아닙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영적 선과 천적 선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더 나아가 천국의 두 큰 질서가 어떻게 다른지를 몸의 두 부분과 두 동작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작은 제사 동작 하나 안에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까지 숨어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두 부분이 결국 제사장에게 주어진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AC.10090(출29:26)은 제사에서 모세나 아론에게 몫으로 주어진 것이 거룩한 신성의 ‘교통’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의 선은 주님에게만 머물러 있는 선이 아니라 인간에게 전달되고 받아들여져 인간의 생명이 되는 선입니다.
그래서 레7의 화목제는 정말 ‘화목’의 제사입니다. 가슴의 체어리티와 오른쪽 뒷다리의 천적 선이 주님에게서 인간에게 전달되고, 인간은 그것을 인정하고 지각하며 받아들입니다. 화목은 단순히 적대 관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이 인간 안으로 흘러들어 와 인간의 사랑과 체어리티가 되고, 인간이 그 선의 근원을 다시 주님께 인정하는 살아 있는 교통입니다.
레7의 마지막에 이 장면이 놓인 것은 그래서 매우 아름답습니다. 레1부터 수많은 동물과 피와 기름과 제단과 불과 씻음과 속죄와 보상을 지나왔는데, 마침내 남는 것은 ‘가슴’과 ‘오른쪽뒷다리’입니다. 체어리티의 선과 천적 사랑의 선입니다. 악을 정결하게 하고 거짓을 제거하는 것은 목적이 아니라 이 사랑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준비였습니다. 거듭남의 최종 목적은 결국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그 사랑이 모두 주님에게서 왔음을 기쁘게 인정하는 삶입니다. (SWC.레7심화5)
레3의 마지막 말씀은 ‘너희는기름과피를먹지말라’였습니다. 그런데 레7:22-27에서는 같은 명령이 훨씬 더 길고 강하게 반복됩니다. 소나 양이나 염소의 기름을 먹지 말고, 어떤 피도 먹지 말라고 하며, 그것을 먹는 사람은 백성 가운데서 끊어진다고까지 합니다. 왜 기름과 피는 이처럼 특별하게 구별되었을까요?
여기에는 직접적인 원전이 있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5943(창45:18)은 레7:23-26을 직접 인용하면서 제사의 기름과 그것을 불사르는 것이 천적 신성 자체, 곧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선’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피 역시 제사의 핵심 상응입니다. 앞에서 여러 차례 보았듯이 스베덴보리는 제사의 피를 주님의 신적 인간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와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기름과 피는 제사의 두 중심인 선과 진리를 나타냅니다. 하나는 사랑의 선이고 다른 하나는 그 선에서 나오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왜 인간이 그것을 먹으면 안 될까요? ‘먹는다’는 것이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는 원리를 함께 놓으면 매우 깊은 의미가 드러납니다. 인간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살아야 하지만 그것들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선과 진리는 인간에게 전달되고 인간 안에서 살아 움직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언제나 주님의 것입니다.
인간의 proprium은 바로 여기서 가장 미묘하게 개입합니다. 악한 일을 자기 것이라고 하는 것보다 오히려 선한 일을 자기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영적으로 더 발견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내가사랑했다’, ‘내가희생했다’, ‘내가진리를깨달았다’, ‘내가사람을변화시켰다’고 하면서 주님에게서 온 선과 진리를 자기 소유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름과 피를 먹지 않는 규례는 선과 진리를 거부하라는 뜻과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충분히 받아 살아가되 ‘그근원은주님에게있습니다’라고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선은 인간 안에 있지만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며, 진리도 인간의 이해 안에 있지만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이 구별이 지켜질 때 인간은 주님의 선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행하면서도 공로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적 자유의 역설입니다. 천사들은 선을 자기 의지에서 하는 것처럼 행하지만 그 선의 근원이 주님임을 압니다.
그러므로 레7에서 기름과 피가 다시 한번 엄격하게 보호되는 것은 제사의 중심을 지키는 일입니다. 거듭남의 마지막까지 인간이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가 있습니다. ‘선과진리는주님의것이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 자기 삶으로 삼되 그 근원을 proprium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바로 그 인정 안에서 주님과 인간의 참된 화목과 결합이 지속됩니다. (SWC.레7심화4)
레7:17-18은 매우 강한 말씀입니다. 화목제 고기가 셋째 날까지 남으면 불살라야 하고, 만일 셋째 날에 그것을 먹으면 처음 드린 제사 자체가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그 고기는 ‘가증한것’이 된다고 합니다. 하루 차이인데 왜 이처럼 엄격할까요? 본문은 실제로 셋째 날의 고기를 명백하게 금합니다.
여기에서도 먼저 선을 하나 그어야 합니다. ‘셋째날’이라는 말만 보고 곧바로 주님의 부활 셋째 날에 연결하거나, 숫자 3의 일반적인 상응을 그대로 대입하여 레7의 의미를 확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이번에 확인한 스베덴보리의 1차 원전에서는 레7:17-18을 직접 그렇게 해설하는 근거를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화목제 자체의 의미에서는 중요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화목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누리며 그분과 교통하고 결합하는 제사입니다. ‘먹는것’이 자기 것으로 삼음을 나타낸다면,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그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 데도 신적 질서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살아 있는 선입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주님에게서 흘러오는 것이지 인간이 한 번 받아 창고에 넣어 두고 ‘이것은이제내선이다’라고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선의 근원을 주님에게 돌리는 동안 그 선은 살아 있지만, 그것을 proprium의 공로나 소유로 붙잡으면 성질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 많은 선을 행한 사람이 어느 순간 ‘나는평생이렇게선하게살아왔다’는 자기 의에 머물 수 있습니다. 처음의 선은 실제로 주님에게서 받은 선이었을지라도, 그것을 자기 공로로 저장하여 현재의 악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면 더 이상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어제의 체어리티가 오늘의 자기 의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셋째 날의 고기를 ‘왜정확히셋째날인가?’까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거룩한선을신적질서밖에서붙들어자기것으로만들수없다’는 큰 원리는 화목제의 전체 상응과 잘 맞습니다. 남은 것은 불살라야 합니다. 이미 그 상태의 쓰임을 다한 것을 proprium이 붙잡고 먹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경험에도 적용됩니다. 오래전의 은혜 체험, 과거의 뜨거운 기도, 이전의 사역 성과가 오늘 주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감사할 기억이지만 오늘의 양식은 아닙니다. 오늘은 오늘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레7의 셋째 날 규례는 적어도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경계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주신 선을 받아 기뻐하되 그것을 내 공로로 저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선은 언제나 현재 주님에게서 오는 살아 있는 선이어야 합니다. 화목은 과거의 선을 소유하는 상태가 아니라 지금 주님에게서 받고 지금 이웃과 나누는 살아 있는 결합입니다. (SWC.레7심화3)
레7의 화목제에는 아주 미묘한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드린 화목제의 고기는 반드시 그날 먹어야 하며 아침까지 남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서원이나 자원으로 드린 화목제는 그날뿐 아니라 이튿날에도 먹을 수 있습니다. 본문이 의도적으로 두 경우를 구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감사는 하루이고 서원과 자원은 이틀일까요? 이것 역시 현재 확인된 스베덴보리의 1차 원전에서 레7:15-16의 차이를 직접 풀어 주는 강한 대목은 찾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첫째날은정확히무엇,둘째날은정확히무엇’이라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응 원리에서는 중요한 방향을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날’은 단순한 24시간보다 상태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제물을 먹을 수 있는 날의 차이도 단순한 식품 보관 규정 이상의 대표적 의미가 있었다고 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특히 감사는 이미 받은 선을 즉시 주님께 돌려드리는 응답입니다. 어떤 은혜를 경험하고 그 선의 근원이 주님임을 바로 인정하는 상태입니다. 그런 감사는 살아 있는 현재의 상태입니다. 어제 받은 감사를 저장해 두었다가 오늘 자기 공로처럼 꺼내 쓰는 것이 아닙니다.
서원과 자원에는 인간의 의지와 약속이라는 요소가 조금 더 들어옵니다. 서원은 앞으로 행할 것을 약속한 뒤 이루어진 상태와 관련되고, 자원제는 인간이 자유롭게 드리는 응답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감사제와 정확히 같은 시간 규정을 갖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세 종류의 화목제가 서로 다른 영적 상태를 표상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감사제는더높고서원제는더낮다’는 식으로 순위를 매길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다양한 선한 상태를 하나의 획일적인 방식으로 다루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즉각 솟아나는 감사도 있고, 약속을 지키는 신실함도 있으며, 자유롭게 선을 선택하는 기쁨도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경우에 공통된 한계가 있습니다. 셋째 날까지는 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거룩한 선이라도 인간이 그것을 붙잡아 proprium의 소유로 만들기 시작하면 처음의 살아 있는 교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목제의 선은 살아 있는 상태에서 받아들여지고 누려져야 합니다.
따라서 레7:15-16은 거듭남이 ‘한번받은은혜를저장하여평생소비하는삶’이 아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언제나 살아 있으며 인간도 날마다 새롭게 그것을 받아야 합니다. 감사든 서원이든 자원이든, 중요한 것은 주님의 선이 현재의 삶 안에서 살아 있는 선이 되는 것입니다. (SWC.레7심화2)
레7:12-13은 레2를 읽은 사람에게 아주 뜻밖의 장면입니다. 감사의 화목제에는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은 과자를 드립니다. 여기까지는 레2와 익숙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또유교병을화목제의감사제물과함께’ 드리라고 합니다. 레2에서는 ‘누룩을넣어서는안된다’고 하셨는데, 왜 감사의 화목제에는 누룩 있는 빵이 등장하는 것일까요? 본문상 이 차이는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무교는 순수하고 정결한 것을 나타내며, 누룩은 여러 문맥에서 거짓이나 불순한 것이 섞이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레2의 소제에서 누룩이 금지된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제단에서 여호와께 화제로 올라가는 것은 순수한 선과 진리를 표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7의 유교병에 대해서는 중요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제가 확인한 범위에서는 스베덴보리가 레7:13을 직접 들어 ‘감사화목제에유교병을넣은이유는정확히이것이다’라고 해설하는 강한 원전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누룩=악이므로화목제에악도함께드린다’와 같은 식의 해석은 피해야 합니다. 그것은 상응을 기계적으로 역산하는 것이 됩니다.
다만 화목제의 전체 구조는 중요한 단서를 줍니다. 번제는 전부 제단에서 불살라지지만 화목제는 제사장과 제물을 드린 사람이 함께 먹습니다. 즉 화목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인간의 실제 삶과 공동체의 기쁨 안으로 들어와 함께 누려지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레7의 감사제에는 제단에 직접 올라가는 거룩한 부분과 인간이 함께 먹는 부분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교병과 유교병이 함께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화목제가 ‘인간이이미완전히천사처럼순수해진뒤에만가능한교통’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아직 자연적 인간의 삶을 살아가며 불완전함이 남아 있는 사람도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감사하며 이웃과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레7:13에 대한 직접적인 스베덴보리의 해설이 아니라 화목제 전체와 누룩의 일반 상응을 바탕으로 한 ‘유력한독법’ 정도로 두는 것이 안전합니다.
오히려 이 구절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 조심스러운 경계에 있습니다. 레2의 무교 소제는 주님께 드려지는 선과 진리의 순수함을 강조하고, 레7의 감사 화목제는 그 선이 인간의 실제 생활 속 기쁨과 교제 안으로 내려오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거듭남은 자연적 삶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을 주님의 질서 안으로 데려오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완전해진 사람이 마지막에 드리는 제사가 아닙니다. 아직 거듭나는 과정 가운데 있는 사람이 주님께서 주신 선을 발견하고 ‘이것은주님에게서왔습니다’라고 인정하며 누리는 것이 감사입니다. 레7의 무교병과 유교병이 한 상에 놓이는 장면은 그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다만 그 이상의 세부 상응은 원전이 더 발견될 때까지 열어 두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가장 정직하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SWC.레7심화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