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5:15)

 

AC.511

 

퍼셉션의 능력이 감소하여, 더 개별적이고 분명하던 상태에서 더 일반적이고 어두운 상태로 바뀌어 간 것처럼, 사랑의 생명 곧 쓰임새의 생명 또한 그렇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생명이나 쓰임새의 생명이 어떠한가에 따라 퍼셉션의 능력도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선으로부터 진리를 아는 것은 천적인 것입니다. ‘마할랄렐’(Mahalalel)이라 불리는 교회를 이루었던 이들의 생명은, 쓰임새로부터 오는 기쁨보다 진리들로부터 오는 기쁨을 더 선호하는 그러한 상태였는데, 이는 저세상에서 그들과 같은 이들 가운데서의 경험을 통해 나에게 알려진 바입니다. As the perceptive faculty decreased, and from being more particular or distinct, became more general or obscure, so also did the life of love or of uses; for as is the life of love or of uses, so is the perceptive faculty. From good to know truth is celestial; the life of those who constituted the church called “Mahalalel” was such that they preferred the delight from truths to the delight from uses, as has been given me to know by experience among their like in the other life.

 

 

해설

 

이 글은 퍼셉션의 변화가 단지 인식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사랑의 생명과 쓰임새의 방향 변화’와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퍼셉션이 분명하던 상태에서 일반적이고 어두운 상태로 이동할 때, 그에 따라 삶의 중심도 함께 이동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가지를 따로 설명하지 않고,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다룹니다. 사랑의 생명이 바뀌면 퍼셉션도 바뀌고, 퍼셉션이 바뀌면 사랑의 생명도 바뀐다고 말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사랑의 생명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어디에서 기쁨을 느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태고교회의 더 초기 상태에서는 쓰임새, 곧 선을 행하고 진리를 살아내는 데서 자연스러운 기쁨이 흘러나왔습니다. 이때 퍼셉션은 선에서 진리로 나아갔고,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천적 질서라고 부릅니다. 선이 먼저 있고, 진리는 그 선이 자신을 알게 하는 빛과 같았어요.

 

그러나 ‘마할랄렐(Mahalalel)의 교회에 이르면, 이 질서에 미묘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이들의 삶에서는 쓰임새에서 오는 기쁨보다, ‘진리 자체에서 오는 기쁨’이 더 앞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진리를 아는 것, 이해하는 것, 분별하는 것에서 만족과 즐거움을 느끼는 경향이 강해진 것이지요. 이것은 곧 삶의 무게중심이 행함에서 앎으로 조금씩 이동했음을 뜻합니다.

 

이 변화는 갑작스러운 전도나 타락이 아닙니다. 여전히 선을 사랑하고, 여전히 교회의 범주 안에 있지만, 기쁨의 근원이 달라졌을 뿐이에요. 스베덴보리는 이 지점을 아주 섬세하게 짚습니다. 쓰임새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쓰임새보다 진리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퍼셉션은 더 이상 개별적이고 살아 있는 분별이라기보다, 점차 일반적이고 덜 생생한 인식으로 변해 갑니다.

 

스베덴보리가 ‘선으로부터 진리를 아는 것이 천적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은 매우 중요해요. 이는 진리를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진리의 자리가 어디에 놓여 있는가’에 대한 판단 기준입니다. 진리가 선을 섬길 때, 곧 쓰임새를 밝혀 주는 역할을 할 때 퍼셉션은 살아 있습니다만, 반대로 진리가 그 자체로 기쁨의 대상이 될 때, 퍼셉션은 점차 분명함을 잃게 됩니다.

 

이 글에서 인상적인 점은, 스베덴보리가 이 내용을 단순한 이론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저세상, 곧 영계에서 ‘마할랄렐’과 같은 상태에 속한 이들을 직접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그 경험에 따르면, 그들은 선을 행하는 기쁨보다 진리를 아는 기쁨을 더 선호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교회 상태의 차이가 단지 개념이 아니라, 실제 삶과 성향으로 드러난다는 증거로 제시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매우 날카로운 자기 점검의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신앙 안에서 어디에서 가장 큰 기쁨을 느끼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에요. 말씀을 이해하는 데서 오는 만족인가요, 아니면 그 말씀이 삶에서 쓰임새로 드러날 때의 기쁨인가요. 둘 다 중요하지만, 그 순서와 중심은 신앙의 상태를 깊이 드러냅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이 변화는 익숙하게 나타납니다. 어느 시기에는 봉사와 실천이 자연스럽고 기쁘게 느껴지다가, 또 어느 시기에는 말씀 공부와 이해가 더 즐거워질 수 있어요. 이 자체가 잘못은 아니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때 퍼셉션이 어떤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는지를 분별하라고 초대합니다. 앎이 삶을 섬기고 있는지, 아니면 삶이 앎을 섬기고 있는지를 살펴보라는 것이지요.

 

결국 AC.511은 태고교회의 다섯 번째 단계에서 나타난 미묘하지만 결정적인 이동을 보여 줍니다. 퍼셉션이 일반화되면서, 사랑의 생명과 쓰임새의 생명도 함께 변했고, 그 결과 진리에서 오는 기쁨이 쓰임새에서 오는 기쁨보다 더 선호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글은 교회의 역사뿐 아니라, 오늘 우리의 신앙 상태를 비추는 매우 정직한 거울이 됩니다.

 

 

 

AC.510, 창5:15,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AC.510-511)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And Mahalalel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Jared. (창5:15) AC.510 ‘마할랄렐’(Mahalalel)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다섯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야렛’(Jared)은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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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And Mahalalel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Jared. (5:15)

 

AC.510

 

‘마할랄렐’(Mahalalel)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다섯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야렛’(Jared)은 여섯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Mahalalel” is signified, as before said, a fifth church; by “Jared” a sixth.

 

 

해설

 

이 글은 매우 간단해 보이지만, 태고교회의 흐름이 계속해서 ‘끊김 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분명히 확인해 주는 자리예요. 스베덴보리는 ‘마할랄렐(Mahalalel)과 ‘야렛(Jared)을 더 이상 개인으로 설명하지 않고, 앞선 경우들과 동일하게 교회 상태의 연속으로만 언급합니다. 이는 독자가 이미 해석의 방향을 충분히 익혔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마할랄렐로 상징되는 다섯 번째 교회는, 게난 이후에 형성된 상태를 이어받습니다. 퍼셉션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미 상당히 일반화되어 있고, 삶의 세부를 즉각적으로 비추기보다는 보다 넓은 틀 안에서 작동하는 단계에 해당해요. 이 상태에서는 선과 진리에 대한 인식이 살아 있기는 하지만, 그 분명함은 앞선 교회들보다 더 줄어들어 있습니다.

 

야렛으로 상징되는 여섯 번째 교회는 그 다음 단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여섯 번째 교회를 설명할 때도 여전히 태고교회의 흐름 안에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아직 노아로 대표되는 결정적 전환 이전이며, 퍼셉션의 잔존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다만 이 퍼셉션은 점점 더 외적인 구조와 매개에 의존하게 됩니다.

 

이처럼 숫자가 늘어날수록 교회는 점점 더 바깥쪽 층위로 이동합니다. 이는 열매의 알맹이에서 막질로, 더 두꺼운 외피로 옮겨가는 과정과 닮아 있어요. 중심의 생명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지만, 그것을 감싸는 구조가 점점 더 많아지고, 생명은 직접 드러나기보다 보호 속에 머물게 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짧은 글은 신앙의 지속과 변화에 대해 중요한 균형을 제공합니다. 변화가 있다고 해서 곧바로 단절이나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아요. 마할랄렐과 야렛의 교회는 이전보다 덜 천적이지만, 여전히 주님의 섭리 안에 있으며, 그 상태에 맞는 쓰임새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이 글은 성경 해석에서 ‘말해지지 않은 것의 의미’를 읽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많은 설명을 덧붙이지 않지만, 바로 그 침묵 속에서 흐름을 읽도록 초대합니다. 이미 밝혀진 원리를 따라가면,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교회의 성격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이 단계들은 익숙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어떤 시기에는 신앙이 비교적 안정되고 체계화되어 있지만, 동시에 즉각적인 분별의 예민함은 줄어들 수 있어요. 이때 중요한 것은 그 상태를 부정하거나 억지로 되돌리려 하기보다, 그 상태 안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퍼셉션과 쓰임새를 분별하는 일입니다.

 

결국 AC.510은 태고교회의 생명이 여섯 번째 단계에 이르기까지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아주 간단한 말로 확인해 줍니다. 이름은 달라지고 상태는 변하지만, 흐름은 끊어지지 않았어요. 이 점을 기억하면, 이후에 등장하는 에녹과 노아의 교회도 훨씬 입체적으로 읽히게 됩니다.

 

 

 

AC.511, 창5:15, ‘마할랄렐’(Mahalalel)이라 하는 교회의 상태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창5:15) AC.511 퍼셉션의 능력이 감소하여, 더 개별적이고 분명하던 상태에서 더 일반적이고 어두운 상태로 바뀌어 간 것처럼, 사랑의 생명 곧 쓰임새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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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9, 창5:13-14, ‘모든 것은 언제나 교회의 상태에 따라’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13, 14) AC.509 여기서 단지 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 것들이 교회의 상태와의 관계에 따라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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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5:13, 14)

 

AC.509

 

여기서 단지 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 것들이 교회의 상태와의 관계에 따라 규정된다는 점입니다. It is here only to be remarked, that all things are determined by their relation to the state of the church.

 

 

해설

 

이 글은 분량은 짧지만, 스베덴보리의 성경 해석 전체를 떠받치는 아주 중요한 원리를 담고 있어요. 그는 어떤 사물이나 사건, 표현도 그 자체로 의미가 고정되어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언제나 교회의 상태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따라 의미가 정해진다고 봅니다. 이 점을 놓치면, 성경은 쉽게 평면적인 기록으로 보이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의 상태란 제도나 조직의 외형을 뜻하지 않아요. 그 안에 살아 있는 퍼셉션이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는지를 말합니다. 같은 말씀이 주어져도, 교회의 퍼셉션이 살아 있고 분명할 때와, 퍼셉션이 일반화되었을 때는 그 말씀이 작동하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언제나 표현 자체보다 상태와의 관계를 먼저 보라고 말하는 거예요.

 

이 원리는 창세기 5장을 읽을 때 특히 중요합니다. 이름들, 날과 해의 숫자들, 자녀들, 그리고 죽음에 대한 표현까지도, 교회의 상태와 연결되지 않으면 그 의미가 잘 드러나지 않아요. 상태를 보지 않고 읽으면 그저 족보처럼 보이지만, 상태를 중심에 두고 읽으면 교회의 생명이 어떻게 이동했는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말해 보자면, 성경에 나오는 어떤 표현도 단독으로 선이나 진리, 생명이나 소멸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언제나 교회의 상태에 따라 달라져요. 같은 ‘’이라는 말도 어떤 상태에서는 새 생명의 시작을 가리키고, 다른 상태에서는 쇠퇴나 끝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의미는 표현 안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태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원리는 아주 실제적인 기준이 됩니다. 같은 본문을 설교하더라도, 회중의 상태가 다르면 강조점과 적용이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그것은 설교자가 임의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상태에 따라 다르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성경 해석의 예외가 아니라, 오히려 정상적인 방식으로 봅니다.

 

개인의 신앙에서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돼요. 같은 말씀을 읽어도 어떤 날에는 위로로 다가오고, 어떤 날에는 마음을 찌르는 경고로 들립니다. 말씀의 내용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말씀을 받는 사람의 상태가 달라졌기 때문이에요. 모든 것은 상태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AC.509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표현을 붙잡고 씨름하기보다, 지금 교회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그리고 내가 어떤 상태로 이 말씀을 듣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라는 초대입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성경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상태에 따라 말하는 말씀이 됩니다.

 

 

 

AC.510, 창5:15,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AC.510-511)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And Mahalalel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Jared. (창5:15) AC.510 ‘마할랄렐’(Mahalalel)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다섯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야렛’(Jared)은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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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8, 창5:13-14,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십 세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Kenan lived after he begat Mahalalel eight hundred and fo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K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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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Kenan lived after he begat Mahalalel eight hundred and fo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Kenan were nine hundred and ten years, and he died. (5:13, 14)

 

AC.508

 

여기서도 ‘날’(days)과 ‘해’(years)의 숫자들은 앞에서와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또한 ‘자녀들’(sons and daughters)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퍼셉션하던 진리와 선들을 의미하는데, 다만 더 일반적인 방식으로 그러합니다. 그가 ‘죽었더라’(died)는 말 역시 이와 같이 그러한 퍼셉션의 상태가 더 이상 지속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The “days” and numbers of “years” have the same signification here as before. “Sons and daughters” here also signify truths and goods, whereof the members of the church had a perception, but in a more general manner. That he “died” signifies in like manner the cessation of such a state of perception.

 

 

해설

 

이 글은 AC.507에서 제시된 변화의 흐름을 한 단계 더 분명하게 확인해 줍니다. ‘(days)과 ‘(years)의 숫자들이 앞에서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다시 말하는 것은, ‘게난(Kenan) 이후의 교회 상태에서도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상태의 개념으로 읽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태고교회의 전개는 언제나 상태의 변화로 이해되어야 하며, 연대기적 숫자 계산만으로는 본질인 각 교회의 상태 변화, 곧 퍼셉션의 성격과 그 변화를 읽어낼 수 없습니다.

 

자녀들’, 곧 ‘아들들과 딸들(sons and daughters)이 여기서도 진리와 선들을 뜻한다는 점은 동일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하나 덧붙여집니다. 그것은 이 진리와 선들이 이제는 더 일반적인 방식으로 퍼셉션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앞선 교회들에서는 진리와 선이 보다 개별적이고 분명하게 인식되었지만, 이 단계에 이르면 그러한 인식은 점차 포괄적이고 덜 세밀한 형태를 띠게 됩니다.

 

이 일반화는 퍼셉션의 상실이 아니라, 퍼셉션의 성격 변화입니다. 여전히 교회 안에는 진리와 선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즉각적이거나 생생하지 않습니다. 대신 더 많은 매개와 해석을 필요로 하며, 개별 상황에 대한 분별보다는 전체적인 틀 속에서 이해되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이 변화는 게난의 교회에서 시작되어 이후의 교회들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 위 볼드체 문장은 이 해설 끝을 참조하세요.

 

그가 ‘죽었다’는 표현은 이러한 상태 변화의 종결을 가리킵니다. 이는 개인의 생물학적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 상태를 특징짓던 퍼셉션 방식이 더 이상 유지되지 않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의 퍼셉션 양식이 역할을 마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간 것입니다.

 

이 글은 태고교회의 쇠퇴가 단계적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퍼셉션은 먼저 분명함을 잃고 일반화되며, 그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의 상태로서 끝에 이릅니다. AC.508은 이 과정을 간결하게 요약하면서, 독자가 이미 익숙해진 해석 틀을 계속 유지하도록 돕습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신앙의 변화가 언제나 급격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교회 안에 여전히 진리와 선이 말해지고, 그것들이 일정한 쓰임새를 지니고 있을지라도, 퍼셉션의 성격은 이미 달라졌을 수 있습니다. 이 미묘한 차이를 분별하지 못하면, 상태의 변화를 단순한 지속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또한 이 글은 교회가 진리와 선을 어떻게 인식하는지가 그 교회의 생명 상태를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임을 보여 줍니다. 같은 진리와 선이라도, 분명하게 퍼셉션되는지, 아니면 일반적으로만 인식되는지에 따라 교회의 상태는 크게 달라집니다. AC.508은 이 차이를 짧은 문장 안에 분명히 담아냅니다.

 

개인의 신앙에서도 이 흐름은 그대로 나타납니다. 어떤 시기에는 진리와 선이 매우 구체적으로 마음에 와닿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것들이 점차 원칙이나 개념의 수준으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이때 신앙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지만, 퍼셉션의 방식은 이미 바뀌어 있습니다. AC.508은 이러한 변화를 자연스러운 상태의 이동으로 이해하도록 이끕니다.

 

결국 이 글은 태고교회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퍼셉션 상태가 어떻게 일반화되고, 그 상태가 마침내 끝에 이르는지를 간결하게 보여 줍니다. 이 반복을 통해 독자는 창세기 5장을 읽는 눈을 더욱 안정적으로 갖추게 되며, 이후에 이어질 더 외적인 교회 상태들을 준비된 마음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 아래는 위 ‘대신 더 많은 매개와 해석을 필요로 하며, 개별 상황에 대한 분별보다는 전체적인 틀 속에서 이해되는 경향이 강해집니다’에 대한 설명입니다.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제공합니다.

 

 

퍼셉션이 분명하던 상태에서 일반화된 상태로 옮겨갈 때, 가장 먼저 달라지는 것은 인식의 직접성입니다. 태고교회의 초기 상태에서는 선과 진리가 거의 설명 없이 즉각적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어떤 상황이 주어지면, 그 안에서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사랑에 속하는지가 자연스럽게 느껴졌어요. 이때의 퍼셉션은 판단 이전에 이미 방향을 알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퍼셉션이 일반화되기 시작하면 이러한 직접성이 점차 약해집니다. 이제는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판단하기 위해 생각하고, 기억해 둔 기준을 떠올리고, 말씀이나 교훈을 적용하며,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해져요. 이것이 위 해설에서 말한 ‘더 많은 매개와 해석을 필요로 한다’는 뜻입니다. 진리가 바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말과 개념, 규칙과 교리 같은 것들이 판단의 중간 단계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 변화는 곧 인식의 초점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퍼셉션이 분명할 때는 각 상황이 고유하게 보였습니다. 이 사람에게 지금 필요한 선이 무엇인지, 이 선택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이 무엇인지가 상황마다 다르게 분별되었어요. 같은 원칙이라도 적용 방식은 매번 달랐고, 그 차이가 자연스럽게 인식되었습니다. 마치 다음 주님에 대한 말씀처럼 말입니다.

 

24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2:24, 25)

 

하지만 퍼셉션이 일반화되면, 개별 상황을 세밀하게 분별하기보다 이미 형성된 이해의 틀 안에서 상황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때 판단은 ‘이건 원칙적으로 옳다’, ‘이건 성경적으로 맞다’, ‘이건 교리와 어긋난다’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쉬워요. 이런 판단이 잘못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공동체와 질서를 위해 필요합니다. 다만 이 방식은 상황 고유의 미묘함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경향을 지니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전체적인 틀 속에서 이해된다’는 표현은 바로 이 점을 가리킵니다. 진리와 선이 더 이상 살아 있는 분별로 즉각 인식되기보다, 이미 갖추어진 틀 안에서 해석되고 적용되는 경향이 강해진다는 뜻이에요. 이는 퍼셉션이 사라졌다는 말이 아니라, 퍼셉션의 작동 방식이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설명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신앙의 초기에는 어떤 분들이 ‘이건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이건 마음이 불편해요’라고 말합니다. 설명은 잘 못 하지만 방향은 분명한 경우지요. 시간이 지나면 표현은 달라집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원칙상으로는’, ‘교리적으로는’이라는 말이 더 많이 등장합니다. 이는 신앙이 약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퍼셉션이 일반화된 상태로 옮겨갔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변화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문제는 이 변화를 자각하지 못한 채, 틀과 원칙 자체를 생명으로 착각할 때 생깁니다. 틀은 필요하지만, 틀만 남고 살아 있는 분별이 사라지면 퍼셉션은 점점 더 멀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을 조심스럽게 짚어 주고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퍼셉션이 일반화된 상태에서는 선과 진리를 인식하는 방식이 직접적 분별에서 매개와 해석을 거치는 방식으로 바뀌고, 그 결과 개별 상황의 고유함보다는 이미 형성된 전체적인 이해 틀 안에서 판단하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이 설명은 태고교회의 변화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신앙 상태를 비추는 매우 실제적인 통찰이기도 합니다.

 

 

 

AC.509, 창5:13-14, ‘모든 것은 언제나 교회의 상태에 따라’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13, 14) AC.509 여기서 단지 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 것들이 교회의 상태와의 관계에 따라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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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7, 창5:12, ‘게난’, 퍼셉션의 성격이 달라지기 시작한 상태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창5:12) AC.507 ‘게난’(Kenan)이라 하는 교회는, 앞의 세 더 완전한 교회들 가운데에 그렇게 많이 포함시킬 수는 없는데, 이는 이전의 교회들에서는 분명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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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5:12)

 

AC.507

 

‘게난’(Kenan)이라 하는 교회는, 앞의 세 더 완전한 교회들 가운데에 그렇게 많이 포함시킬 수는 없는데, 이는 이전의 교회들에서는 분명하던 퍼셉션이 이제는 일반적인 것이 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열매나 씨앗의 알맹이에 비해 처음의 부드러운 막질들이 차지하는 위치와 같은데, 이러한 상태는 여기서는 직접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지만, 뒤따르는 내용, 곧 ‘에녹’(Enoch)과 ‘노아’(Noah)라 하는 교회들에 대한 설명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The church called “Kenan” is not to be so much reckoned among those three more perfect ones, inasmuch as perception, which in the former churches had been distinct, began now to become general, comparatively as are the first and softer membranes relatively to the kernel of fruits or seeds; which state is not indeed described, but still is apparent from what follows, as from the description of the churches called “Enoch” and “Noah.”

 

 

해설

 

이 글은 태고교회의 내부 구분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짚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게난의 교회를 앞선 세 교회와 동일한 수준으로 취급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태고교회의 흐름에서 배제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게난의 교회를 태고교회 내부에 남아 있으되, 이미 ‘퍼셉션의 성격이 달라지기 시작한 상태’로 봅니다.

 

앞선 세 교회에서는 퍼셉션이 분명했습니다. 선과 진리는 거의 즉각적으로 인식되었고, 그 인식은 삶의 방향과 선택을 자연스럽게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게난이라는 교회에 이르러서는 퍼셉션이 더 이상 그렇게 분명하지 않고, 점차 일반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합니다. 이는 퍼셉션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작동 방식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다시 열매와 씨앗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앞선 세 교회는 알맹이에 가까웠다면, 게난의 교회는 알맹이를 둘러싼 첫 번째이자 비교적 부드러운 막질에 해당합니다. 이 막질은 알맹이보다 덜 본질적이지만, 여전히 생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알맹이를 보호하고, 바깥으로의 전개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상태가 여기서는 자세히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일부러 게난의 교회를 길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독자가 뒤에 나올 에녹과 노아에 대한 설명을 통해, 게난의 상태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는지를 스스로 파악하도록 합니다. 이는 성경 해석이 항상 즉각적인 설명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앞뒤 맥락 속에서 점차 분명해지는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이 글은 태고교회의 쇠퇴가 단번에 일어난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퍼셉션은 먼저 분명함을 잃고 일반화되며, 그 다음 단계에서야 보다 뚜렷한 변화가 드러납니다. 게난의 교회는 바로 그 초기 단계에 해당합니다. 아직은 알맹이와의 연결이 유지되고 있지만, 중심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신앙의 변화를 섬세하게 분별하도록 요구합니다. 신앙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고, 교회의 형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 상태가 이전과 동일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퍼셉션이 분명한 상태에서 일반적인 상태로 옮겨가는 변화는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글은 교회의 평가 기준을 다시 한번 조정합니다. 게난의 교회는 더 이상 ‘가장 완전한 교회’로 불리지는 않지만, 여전히 태고교회의 흐름 안에 있으며, 나름의 쓰임새를 지닙니다. 모든 교회 상태가 동일한 역할을 수행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상태는 중심이 되고, 어떤 상태는 보호와 연결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이 글은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어떤 시기에는 신앙의 퍼셉션이 매우 분명하여 거의 망설임 없이 선을 선택하지만, 어떤 시기에는 그 분명함이 줄어들고 더 일반적인 기준과 생각에 의존하게 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 변화가 곧바로 신앙의 상실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다만 상태가 달라졌을 뿐입니다.

 

결국 AC.507은 태고교회 내부에서 일어난 미세한 변화의 시작을 가리킵니다. 게난의 교회는 더 이상 알맹이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알맹이를 둘러싼 첫 막질로서 여전히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연결이 유지되는 한, 이후에 나타날 더 외적인 교회 상태들도 그 근원을 잃지 않게 됩니다.

 

 

 

AC.508, 창5:13-14,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십 세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Kenan lived after he begat Mahalalel eight hundred and fo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K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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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6, 창5:12,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And Kenan lived seventy years, and begat Mahalalel. (창5:12) AC.506 ‘게난’(Kenan)은 네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마할랄렐’(Mahalalel)은 다섯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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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And Kenan lived seventy years, and begat Mahalalel. (5:12)

 

AC.506

 

‘게난’(Kenan)은 네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마할랄렐’(Mahalalel)은 다섯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Kenan” is signified a fourth church, and by “Mahalalel” a fifth.

 

 

해설

 

이 글은 매우 짧지만, 태고교회의 전개 방식에 대해 중요한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게난(Kenan)과 ‘마할랄렐(Mahalalel)을 개인 이름으로 취급하지 않고, 앞선 경우들과 동일하게 각각 하나의 교회 상태로 이해합니다. 이는 창세기 5장의 이름들이 일관되게 교회들의 연속을 가리킨다는 해석 원리가 여기서도 흔들림 없이 적용된다는 뜻입니다.

 

게난으로 상징되는 네 번째 교회는, 에노스 이후에 나타난 상태를 대표합니다. 앞선 글들에서 이미 밝혀졌듯이, 태고교회의 흐름은 퍼셉션이 점차 덜 분명해지고 더 일반화되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게난의 교회 역시 이 흐름 안에 있으며, 여전히 태고교회의 범주에 속하지만, 퍼셉션의 즉각성과 선명함은 앞선 교회들보다 더 약화된 상태에 해당합니다.

 

마할랄렐로 상징되는 다섯 번째 교회는 그 다음 단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더 이상의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 이유는, 이미 충분히 확립된 해석 틀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들은 이전 교회의 상태로부터 연속적으로 나타나며, 각 단계는 퍼셉션의 정도와 작동 방식에 차이를 가질 뿐, 동일한 생명 흐름 안에 있습니다.

 

이 간결한 진술은 태고교회의 쇠퇴가 급격한 단절이나 붕괴가 아니라, 매우 점진적인 변화였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줍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교회라는 표현은 단순한 번호 매김이 아니라, 퍼셉션이 중심에서 바깥으로 이동해 가는 과정을 표시하는 표지와 같습니다. 각 교회는 이전 교회가 지니고 있던 생명의 흔적을 여전히 품고 있으며, 다만 그것이 더 외적인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이 글은 짧지만 분명한 메시지를 줍니다. 신앙과 교회의 변화는 어느 순간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서서히 진행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어느 번호의 교회에 속해 있는가가 아니라, 그 상태 안에서 퍼셉션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 있는가입니다.

 

또한 이 글은 창세기 5장을 읽을 때 성급하게 의미를 과도하게 채워 넣지 말라는 암묵적인 가르침도 담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떤 이름들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하고, 어떤 이름들에 대해서는 한 문장으로만 처리합니다. 이는 모든 교회 상태가 동일한 비중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각 상태가 전체 흐름 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관점을 드러냅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이 구조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어떤 상태는 삶의 방향을 크게 바꾸는 전환점이 되지만, 어떤 상태는 그 전환 이후의 지속과 정착을 보여 주는 단계일 수 있습니다. 게난과 마할랄렐은 바로 그러한 지속과 진행의 상태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AC.506은 태고교회의 연속성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음을 아주 간결하게 확인해 줍니다. 네 번째 교회와 다섯 번째 교회가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태고교회의 생명이 여전히 다양한 형태로 유지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 짧은 글은 그 연속성을 놓치지 말라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안내입니다.

 

 

 

AC.507, 창5:12, ‘게난’, 퍼셉션의 성격이 달라지기 시작한 상태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창5:12) AC.507 ‘게난’(Kenan)이라 하는 교회는, 앞의 세 더 완전한 교회들 가운데에 그렇게 많이 포함시킬 수는 없는데, 이는 이전의 교회들에서는 분명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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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5, 창5:10-11, ’에노스‘, '셋', '사람'(아담)의 퍼셉션 차이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10, 11) AC.505 ‘에노스’(Enosh)는 앞서 관찰한 바와 같이 세 번째 교회를 의미하는데, 여전히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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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5:10, 11)

 

AC.505

 

‘에노스’(Enosh)는 앞서 관찰한 바와 같이 세 번째 교회를 의미하는데, 여전히 태고교회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셋’(Seth)의 교회보다 덜 천적이며, 그 결과 퍼셉션도 더 적습니다. 또한 이 셋의 교회 역시 ‘사람’(man)이라 불리는 부모 교회만큼 천적이지도 않고 퍼셉션이 풍성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세 교회가 태고교회를 이루는 것들이며, 이들은 뒤이어 나타난 교회들에 비하면 열매나 씨앗의 알맹이와 같고, 그 이후의 교회들은 이에 비해 막질로 된 부분들과 같습니다. Enosh,” as before observed, is a third church,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but less celestial, and consequently less perceptive, than the church “Seth”; and this latter was not so celestial and perceptive as the parent church, called “man.” These three are what constitute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relatively to the succeeding ones, was as the kernel of fruits, or seeds, whereas the succeeding churches are relatively as the membranaceous parts of these.

 

 

해설

 

이 글은 태고교회의 내부 구성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정리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노스, 셋, 사람(아담)이라는 이름을 통해 세 교회를 구분하지만, 동시에 이 셋이 함께 태고교회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이는 태고교회가 하나의 동일한 상태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퍼셉션의 정도가 서로 다른 여러 상태들이 함께 존재하며 형성되었음을 뜻합니다. 마치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와 아들 부부, 딸 부부 세대, 그리고 손주 세대가 같이 사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이라 불리는 부모 교회는 가장 천적인 상태였고, 퍼셉션이 가장 분명했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인식되었고, 그 인식은 삶 전반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었습니다. 셋의 교회는 여전히 태고교회의 범주에 속하지만, 이미 퍼셉션은 이전보다 덜 즉각적이 되었고, 조금 더 매개된 방식, 그러니까 뭔가 보조 설명이 필요한 방식으로 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에노스의 교회에 이르러서는 퍼셉션이 더욱 일반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고, 선과 진리를 인식하는 분명함도 더 줄어들었습니다.

 

이 차이는 가치의 우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태의 차이를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느 교회도 부정하거나 배제하지 않습니다. 그는 각 교회가 주님의 섭리 안에서 허락된 고유한 위치를 지니며, 그 위치에 맞는 퍼셉션과 역할을 지녔다고 봅니다. 덜 천적이고 덜 퍼셉션적이라는 말은, 생명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생명이 작동하는, 즉 움직이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열매와 씨앗의 비유를 다시 사용합니다. 태고교회의 세 교회는 이후 교회들과 비교할 때 알맹이에 해당합니다. 알맹이는 생명의 중심이 자리한 곳이며, 이후의 모든 전개는 이 중심으로부터 나옵니다. 반면, 이후에 나타난 교회들은 막질과 같은 부분으로 비유되는데, 이는 알맹이를 감싸고 보호하며 생명이 바깥으로 전개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지요. 여기에는 각기 다른 쓰임새가 있을 뿐, 우열의 판단은 없습니다.

 

이 비유는 교회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균형 있게 잡아 줍니다. 태고교회의 알맹이적 상태는 가장 분명한 퍼셉션을 지녔지만, 그것만으로 인류 전체의 영적 여정을 감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더 많은 외적 구조와 매개가 필요해졌고, 그에 따라 교회의 형태도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타락의 이야기라기보다, 인간 상태에 맞추어진 섭리의 전개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볼 때, 이 글은 교회를 평가하는 기준을 다시 묻게 합니다. 교회가 알맹이에 해당하는 상태에 있느냐, 막질에 해당하는 상태에 있느냐가 핵심이 아니라, 그 막질이 여전히 알맹이를 품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외적인 제도와 형식이 중심이 되더라도, 그 안에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생명의 핵심이 살아 있다면, 그 교회는 여전히 주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신앙에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어떤 시기에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퍼셉션이 매우 분명하게 느껴질 수 있고, 어떤 시기에는 더 많은 생각과 규칙, 형식을 통해 신앙을 유지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 형식들이 여전히 안쪽의 생명을 보호하고 있는지, 아니면 형식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렸는지입니다.

 

결국 이 글은 태고교회의 세 교회를 하나의 연속된 생명 흐름으로 보게 합니다. 사람, 셋, 에노스는 서로 다른 퍼셉션의 정도를 지녔지만, 함께 태고교회를 이루었고, 이후 교회들의 생명적 근원이 되었습니다. 이 연결이 유지되는 한, 교회는 형태가 달라져도 생명을 잃지 않습니다.

 

 

 

AC.506, 창5:12,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And Kenan lived seventy years, and begat Mahalalel. (창5:12) AC.506 ‘게난’(Kenan)은 네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마할랄렐’(Mahalalel)은 다섯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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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4, 창5:10-11,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오 세를 살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Enosh lived after he begat Kenan eight hundred and fifte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Enosh w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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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Enosh lived after he begat Kenan eight hundred and fifte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Enosh were nine hundred and five years, and he died. (5:10, 11)

 

AC.504

 

여기서도 이와 같이 ‘날’(days)과 ‘해’(years)의 숫자들, 또한 ‘자녀들’(sons and daughters), 그리고 그가 ‘죽었더라’(dying)는 말은 앞에서와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Here in like manner the “days” and numbers of “years,” and also “sons and daughters,” and his “dying,” signify like things.

 

 

해설

 

이 글은 새로운 설명을 더하기보다, 지금까지 확립된 해석의 ‘일관성을 다시 확인하는 결론 문장’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5장의 각 절을 해석할 때마다, 혹시라도 독자가 어느 지점에서 문자적 이해로 되돌아갈 여지를 차단합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이와 같이’라는 표현으로, 동일한 해석 원리가 예외 없이 적용됨을 분명히 합니다.

 

먼저 ‘(days)과 ‘(years)의 숫자들은 앞서 누차 설명된 대로, 연대적 시간의 길이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교회가 거쳐 간 ‘상태의 지속과 변화의 질서’를 가리킵니다. AC.504는 이 원리가 이미 충분히 확립되었음을 전제하고, 더 이상의 반복 설명 없이도 독자가 동일한 틀로 읽어야 함을 요구합니다. 이는 해석의 피로를 줄이기 위한 배려이자, 동시에 해석의 엄격함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자녀들’, 그러니까 ‘아들들과 딸들(sons and daughters) 역시 동일합니다. 여기서도 그것들은 개인의 자녀가 아니라, 해당 교회 상태 안에서 퍼셉션된 ‘진리와 선들’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 진리와 선들이 언제나 교회의 상태에 상응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그 교회가 낳는 진리와 선의 성격도 달라집니다. AC.504는 이 상응 원리가 이미 충분히 설명되었으므로, 다시 정의하지 않습니다.

 

그가 죽었다’는 진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라, 그 교회 상태를 특징짓던 퍼셉션이 더 이상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반복하면서도, 점점 더 간결하게 처리합니다. 이는 독자가 이제 이 표현을 들을 때마다 자동적으로 ‘퍼셉션의 소멸’을 떠올리도록 훈련시키는 효과를 냅니다.

 

이 글의 특징은, 설명의 축소가 곧 의미의 축소를 뜻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AC.504는 앞선 해석들이 단편적 설명이 아니라, ‘하나의 완결된 해석 체계’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날, 해, 자녀들, 그리고 죽음이라는 네 가지 요소는 더 이상 각각 따로 설명될 필요가 없습니다. 이들은 이미 하나의 언어 체계 안에서 함께 작동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문단은 매우 중요한 균형을 제공합니다. 설교자는 모든 구절을 매번 새롭게 설명하려는 유혹을 받기 쉽지만,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반복 속에서 형성된 이해를 신뢰합니다. 이미 충분히 설명된 원리는, 이후에는 간결하게 확인하는 정도로도 충분하다는 태도입니다. 이는 청중을 존중하는 해석 방식이기도 합니다.

 

또한 AC.504는 창세기 5장이 단조로운 족보처럼 보이는 이유를 역설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반복되는 표현들은 지루함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같은 영적 구조가 여러 교회 상태에 걸쳐 적용됨’을 보여 주기 위한 장치입니다. 반복은 변화 없음의 표시가 아니라, 동일한 생명 원리가 서로 다른 상태들 속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창세기 5장을 하나의 긴 이야기로 읽게 됩니다. 각 인물, 각 교회 상태는 다르지만, 그들을 관통하는 해석의 열쇠는 동일합니다. 퍼셉션이 살아 있을 때 교회는 자녀들을 낳고, 퍼셉션이 흐려질 때 교회는 죽음에 이릅니다. 날과 해는 그 과정을 표시하는 표지일 뿐입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이 반복은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신앙의 상태가 달라질 때마다 전혀 다른 기준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기준이 다른 상황에 적용’됩니다. 무엇이 생명인가, 무엇이 죽음인가라는 기준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 기준은 퍼셉션이며, 퍼셉션의 분명함과 소멸 여부가 모든 것을 가릅니다.

 

결국 AC.504는 말수가 적지만, 그만큼 강력한 확인을 제공합니다. ‘여기서도 이와 같이’라는 한마디 안에, 창세기 5장을 관통하는 모든 해석 원리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이 문단을 지나며 독자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같은 눈으로 다음 절들을 읽을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AC.505, 창5:10-11, ’에노스‘, '셋', '사람'(아담)의 퍼셉션 차이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10, 11) AC.505 ‘에노스’(Enosh)는 앞서 관찰한 바와 같이 세 번째 교회를 의미하는데, 여전히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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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3, 창5:9, ‘태고교회 퍼셉션 능력의 비밀’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3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 선을 행함으로부터 생겨나는 행복과 기쁨에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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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창세기 본문 중 에서가 자기 아내들을 구하는 장면들입니다.

 

34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35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 (26:34, 35)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27:46)

 

6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맞이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라 하였고 7또 야곱이 부모의 명을 따라 밧단아람으로 갔으며 8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지라 9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 (28:6-9)

 

그리고 아래는 이에 대한 해설입니다.

 

에서의 두 결혼(헷 족속 유딧, 바스맛)과 그로 인한 이삭, 리브가 마음의 ‘근심’, 그리고 리브가가 ‘내 삶이 싫어졌다’고까지 말하는 탄식은, 문자 그대로만 보면 ‘이방(헷)과의 혼인 문제’처럼 보이지만, 창세기 속뜻의 흐름에서는 ‘가정 내 갈등’ 자체가 핵심이라기보다 ‘교회 안에서의 선과 진리의 결합(혼인)’이 어떻게 흐트러지는가를 보여 주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혼인’은 단지 가족사(史)가 아니라, ‘(사랑)과 진리(신앙/교리)가 결합하여 생명이 생겨나는 상태’를 대표적으로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딸(아내)을 맞이했는가’는 ‘어떤 종류의 정서, 욕구, 교리, 삶의 방식과 결합했는가’를 드러냅니다.

 

에서(자연적 선, 혹은 자연인의 강건한 에너지에 가까운 것)는 본래 ‘야곱(진리의 차원, 교리, 질서, 분별)’과 한 사람 안에서 함께 있어야 합니다. 즉 ‘자연의 힘(에서)’은 ‘진리의 인도(야곱)’를 받아 ‘선의 도구’가 될 때 복된 자리에 놓입니다. 그런데 창26–28의 이 결혼 장면들은, ‘자연적 힘이 진리의 인도를 싫어하거나(혹은 무시하거나)’, 그 대신 ‘바깥의 것(외적 매력, 세상적 기준, 감각적, 자기중심적 기쁨)’과 결합해 버릴 때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 결과가 바로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입니다. 속뜻으로 말하면, ‘속 사람(이삭의 선, 리브가의 진리)’이 ‘겉 사람(에서의 삶)’의 잘못된 결합과 선택으로 인해 깊은 불일치와 불쾌, 곧 ‘양심의 고통’과 같은 상태를 겪는 것입니다.

 

특히 ‘헷 족속’은 단순히 ‘민족이 이방이다’라는 표지가 아니라, ‘선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주님과의 결합에 어긋나는 어떤 요소’—다시 말해 ‘내적 예배(주님 사랑)와 연결되지 않은 외적 예배’, 혹은 ‘진리의 빛이 아닌 감각과 습관이 주도하는 삶의 방식’ 같은 것을 대표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헷 족속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다는 것은, ‘자연적 삶이 자기에게 편하고 좋아 보이는 방식(외형상 그럴듯한 것)과 결합하는데, 그것이 주님께로 향한 내적 결합을 깨뜨리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겉으로는 결혼이요 가정의 확장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생명(선과 진리의 혼인)이 아닌 다른 결합’이 됩니다. 그러니 리브가가 ‘내 삶이 싫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된 감정 표출이 아니라, ‘진리(리브가)의 입장에서 보아, 선과 진리의 계승이 끊어질 수 있다는 절박함’을 드러내는 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야곱이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이라는 대목은, ‘진리의 계열(야곱)이 외적, 감각적 결합을 택하면, 교회(한 사람 안의 교회)의 미래가 사라진다’는 두려움입니다.

 

이때 중요한 포인트는 ‘리브가가 야곱을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아내를 맞게 하려는 것’이 단지 ‘민족 순수성’이나 ‘좋은 혼처 찾기’가 아니라, 속뜻에서는 ‘진리가 자기에게 합당한 정서, 선의 바탕을 얻어와야 한다’는 원리를 보여 준다는 점입니다. 밧단아람(아람, 라반의 집)은 흔히 ‘외적 지식들, 기억-지식들, 교리적 재료들’이 모여 있는 영역을 가리키는 방향으로 이해됩니다. 즉 야곱이 그곳으로 가서 아내를 맞는다는 것은, ‘진리(야곱)가 주님께서 쓰실 수 있는 선의 바탕(애정, 삶의 습관, 실천의 토양)을 얻어와 결합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가나안 사람의 딸’과 ‘헷 사람의 딸’은 ‘겉은 종교, 도덕, 문화로 포장되었으나 내적이 주님께로 열려 있지 않은 결합’을 대표할 수 있고, 반대로 ‘밧단아람에서의 결합’은 ‘진리가 주님의 섭리 아래서 순서를 갖추어 선과 결합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 상징이 됩니다.

 

28:6-9에서 에서가 보이는 반응은 아주 인간적으로도 설득력 있습니다. ‘내가 뭔가 잘못했나? 아버지가 기뻐하지 못하네. 그럼 다른 방식으로라도 맞춰볼까?’ 그래서 에서는 ‘가나안 딸들이 아버지를 기쁘게 하지 못함’을 보고, 이번에는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겉으로는 ‘수정’이고 ‘효도’ 같은 동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더 섬세한 진단이 가능합니다. 여기서 ‘에서가 깨달은 것’은 ‘주님의 뜻(내적 이유)’이 아니라 ‘아버지의 기분(외적 신호)’에 머무를 위험이 큽니다. 즉 ‘내적 회개’가 아니라 ‘외적 처방’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가 드러납니다. ‘가나안이 안 된다면 이스마엘 쪽은 어떨까?’ 하는 선택은, ‘내적 진리의 인도’가 아니라 ‘대안 탐색’으로 움직이는 자연인의 전형적인 움직임일 수 있습니다.

 

또한 이스마엘 계열은 성경 전체 상징 흐름에서 종종 ‘영적인 것과 분리된 합리성/지식, 혹은 외적 신앙과 내적 사랑의 불일치’ 같은 것을 대표하는 방향으로 읽힙니다(물론 문자적으로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아들이고, 그 자체로 단순 악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에서가 ‘본처들 외에’ 또 더한다는 표현까지 보면, 이것은 ‘정리와 순서의 회복’이 아니라 ‘혼합의 확대’에 가깝습니다. 속뜻에서 ‘한 남자가 여러 아내를 둔다’는 표상은, ‘한 삶이 여러 종류의 애정/교리를 뒤섞어 품는 상태’, 곧 ‘일관된 중심이 없는 결합’을 드러내기 쉽습니다. 그래서 에서의 시도는 ‘근본 문제의 치유’가 아니라 ‘겉모양의 조정’에 머물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그 기쁨이 ‘주님 안에서의 질서’가 아니라 ‘관계의 표면’에서만 판단되면, 결과적으로 ‘내적 사람의 근심’을 제거하지 못합니다.

 

이 대목들을 설교자의 관점으로 풀어내면, 성도들에게는 꽤 현실적인 거울이 됩니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며 감각적 선택을 밀어붙이는 것도 문제이지만, ‘눈치 보고 반응 보고, 다른 처방을 덧대는 방식’도 동일하게 문제의 뿌리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주님이 다루시는 것은 ‘내가 누구를 기쁘게 했는가’가 아니라 ‘내 안에서 무엇과 결합했는가’입니다. 즉 ‘내 삶(자연적 욕구, 일상 습관, 즐거움, 자존심, 효율, 성공욕)’이 ‘주님의 진리’와 결합해 주님께로 향하는가, 아니면 ‘겉으로 그럴듯한 외적 기준’과 결합하여 내적 생명을 갉아먹는가가 핵심입니다. 그래서 이삭, 리브가의 ‘근심’은 단지 부모 마음이 상한 정도가 아니라, ‘내적 교회가 외적 삶의 결혼 선택 때문에 숨이 막히는 상태’를 그립니다.

 

정리하면, (1) 에서의 헷 족속 결혼은 ‘자연적 힘이 외적, 감각적 삶의 방식과 결합하여 내적 선, 진리와 어긋나는 상태’를 보여주고, 그 결과가 (2) ‘이삭과 리브가의 근심’—곧 ‘내적 양심의 고통, 주님과의 결합에서 오는 불쾌’로 나타납니다. (3) 리브가의 탄식과 야곱의 파송은 ‘진리가 합당한 선의 바탕과 결합하도록 주님이 순서를 세우시는 섭리’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4) 에서가 이스마엘의 딸을 추가로 맞이하는 장면은 ‘내적 변화가 아닌 외적 보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연인의 움직임’과 ‘혼합의 확대’라는 위험을 보여줍니다. 결국 이 단락들은 ‘가정사’라기보다 ‘한 사람 안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 어떤 길로 가는가’—‘주님 중심의 결합인가, 외형 중심의 결합인가’를 깊이 묻는 본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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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5:9)

 

AC.503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 선을 행함으로부터 생겨나는 행복과 기쁨에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선행의 행복과 기쁨이 없이는 퍼셉션 능력은 생명을 가지지 못하며, 이러한 행복과 기쁨에 의해 그것은 생명을 받습니다. 태고교회가 누렸던 사랑의 생명과 그로부터 나온 신앙의 생명은, 쓰임새(use)를 행하는 가운데 있는 생명, 곧 쓰임새의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생명이었습니다. 생명은 쓰임새로부터, 쓰임새에 의해, 그리고 쓰임새에 따라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며, 무익한 것에는 생명이 있을 수 없는데, 무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버려지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태고의 사람들은 주님을 닮은 사람들이었고, 그러므로 퍼셉션 능력에 있어서 주님의 형상이 되었습니다. 퍼셉션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아는 데에 있으며, 따라서 무엇이 신앙에 속하는지를 아는 데에 있습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아는 데에서 기쁨을 느끼지 않고, 선과 진리를 행하는 데에서, 곧 유용한 사람, 쓰임새의 사람이 되는 데에서 기쁨을 느낍니다. The perceptive facul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consisted not only in the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 but also in the happiness and delight arising from well doing; without such happiness and delight in doing what is good the perceptive faculty has no life, but by virtue of such happiness and delight it receives life. The life of love, and of the derivative faith, such as the most ancient church enjoyed, is life while in the performance of use, that is, in the good and truth of use: from use, by use, and according to use, is life given by the Lord; there can be no life in what is useless, for whatever is useless is cast away. In this respect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likenesses of the Lord, and therefore in perceptive powers they became images of him. The perceptive power consists in knowing what is good and true, consequently what is of faith: he who is in love is not delighted in knowing, but in doing what is good and true, that is, in being useful.

 

 

해설

 

이 글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왜 ‘살아 있는 퍼셉션’이었는지를 가장 분명하게 설명해 주는 핵심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을 단순히 ‘옳고 그름을 아는 능력’으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퍼셉션은 선과 진리를 아는 것과 동시에, ‘그것을 행할 때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행복과 기쁨을 포함하는 능력’입니다. 이 기쁨이 빠진 퍼셉션은, 겉모습은 남아 있을지라도 생명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하나 일어납니다. 퍼셉션의 생명은 ‘’ 자체에 있지 않고, ‘행함에서 느끼는 기쁨’에 있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선을 행하는 데서 오는 행복과 기쁨이 없으면, 퍼셉션 능력에는 생명이 없다고 말입니다. 이는 지식 중심 신앙에 대한 매우 강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아무리 정확히 알아도, 그것을 행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앎은 생명을 잃은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생명을 ‘쓰임새를 행하는 가운데 있는 생명’이라고 정의합니다. 여기서 ‘쓰임새(use)는 단순한 기능 수행이나 사회적 역할을 뜻하지 않습니다. 쓰임새는 ‘사랑에서 비롯되어 타인을 향해 흘러가는 선과 진리의 실제적인 움직임’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선을 행하는 것이 의무가 아닌, 자신의 생명이었기 때문에 행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 자체가 쓰임새였고, 그 쓰임새 안에서 생명을 느꼈습니다.

 

이 글은 매우 중요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생명은 쓰임새로부터, 쓰임새에 의해, 그리고 쓰임새에 따라 주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원리입니다. 이는 생명이 어떤 정적인 소유물이 아니라, ‘관계와 작용 속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뜻합니다. 생명은 저장해 둘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흘러갈 때 유지됩니다. 그래서 무익한 것에는 생명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무익한 것은 흘러가지 않기 때문에, 결국 버려집니다. 마치 고인 물은 썩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점에서 태고의 사람들은 주님의 닮음들, 즉 주님을 닮은 사람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그 사랑은 끊임없이 쓰임새로 흘러갑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도 사랑 안에서 살며, 그 사랑을 쓰임새로 드러냈기 때문에, 주님의 닮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닮음 때문에, 퍼셉션의 능력에 있어서 주님의 형상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즉, 퍼셉션은 추상적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 방식에 참여한 결과’였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의 능력을 다시 정의합니다. 퍼셉션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아는 능력이며, 따라서 무엇이 신앙에 속하는지를 아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안다’는 말은 개념적으로 이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현실로 분별하고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이 분별은 사랑 안에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아는 데에서 기쁨을 느끼지 않고, 선과 진리를 행하는 데에서 기쁨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지식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에게 앎은 행함을 위해 존재하며, 행함이 곧 기쁨입니다. 그 기쁨이 바로 퍼셉션의 생명입니다.

 

이 글은 오늘날 신앙의 상태를 매우 정직하게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을 ‘얼마나 많이 아는가’로 평가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전혀 다른 기준을 제시합니다. 진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선과 진리를 행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가, 아니면 그저 아는 데서 만족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후자의 경우, 퍼셉션은 이미 생명을 잃은 상태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봉사와 사역에 대한 이해도 바로잡아줍니다. 쓰임새는 억지로 감당해야 할 짐이 아니라, ‘사랑이 살아 있을 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생명의 표현’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쓰임새를 통해 지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안에서 행복과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퍼셉션의 교회가 지녔던 독특한 생명력입니다.

 

결국 AC.503은 퍼셉션의 본질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게 합니다. 퍼셉션은 선과 진리를 아는 능력이되, 그 생명은 선과 진리를 행하는 데서 오는 기쁨에 있습니다. 이 기쁨이 살아 있을 때, 퍼셉션은 살아 있고, 교회는 살아 있습니다. 이 기쁨이 사라질 때, 퍼셉션은 점차 어두워지고, 마침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 통찰은 태고교회의 이해를 넘어, 오늘 우리의 신앙과 사역을 깊이 점검하게 만드는 기준이 됩니다.

 

 

 

AC.504, 창5:10-11,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오 세를 살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Enosh lived after he begat Kenan eight hundred and fifte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Enosh w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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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2, 창5:9, ‘사람’(아담), ‘셋’, ‘에노스’, 첫 세 교회와 이후 교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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