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를 처음 읽는 분에게는 여기서 또 하나 매우 중요한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창4에도 ‘에녹’이 나오고 창5에도 ‘에녹’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창4의 에녹은 가인의 계열에 속하지만, 창5의 에녹은 야렛의 아들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된 인물입니다. 이름은 같지만, 두 에녹이 표상하는 교회적 상태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사실 자체가 창세기 초반의 이름들을 단순히 개인의 이름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름의 철자가 같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놓인 계열과 문맥, 그리고 그것이 표상하는 교회적 상태입니다. 창4의 에녹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리된 신앙의 이단이 더욱 확장된 것을 나타냅니다. 반면 창5의 에녹은 전혀 다른 교회적 계승선 안에서 등장하며, 후에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듯 태고교회의 퍼셉션으로 알게 된 것들을 수집하여 교리적 지식으로 보존한 사람들 또는 교회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에녹이라는 이름 자체가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영적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상응을 처음 접할 때 생기기 쉬운 오해이기도 합니다. 말씀의 속뜻은 단순히 ‘A라는 이름은 언제나B를 뜻한다’는 암호표를 적용하여 해독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각 인물과 장소와 사물은 전체 문맥과 계열 안에서 그 의미가 정해지며, 특히 창세기 초기의 계보에서는 각각의 이름이 서로 다른 교회와 교리의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AC.331은 앞서 살펴본 ‘창4와 창5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문제에도 좋은 실제 사례가 됩니다. 창4의 가인 계열과 창5의 셋 계열은 하나의 족보를 시간순으로 이어 붙인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시대 안에서 전개된 서로 다른 교회적 계열들을 각각 보여 줍니다. 그래서 두 계열에 ‘에녹’이라는 같은 이름이 등장한다고 해서 하나의 에녹을 억지로 동일한 계보 안에 맞추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각각의 에녹이 자기 계열 안에서 어떤 영적 상태를 표상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AC.331의 짧은 문장을 상당히 중요하게 만듭니다. 이제부터 가인의 후손들을 읽을 때, 우리는 단순히 ‘가인의 아들,그 아들의 아들,다시 그 아들의 아들’이라는 생물학적 계보만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최초의 원리가 시간이 흐르며,어떤 교리적 형태들로 발전하고 변질되어 가는가’를 따라가게 됩니다. 가인이 하나의 씨앗이라면 에녹은 그 씨앗에서 자라난 첫 번째 확대된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계열이 계속 이어지면서 창4는 분리된 신앙이 교회 안에서 어떤 결과들을 낳게 되는지를 점점 더 구체적으로 보여 주게 됩니다.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창4:17)
AC.331
이 이단의 확장을 ‘에녹’(Enoch)이라 합니다. (17절) The amplification of this heresy is called “Enoch.” (verse 17)
해설
AC.331은 매우 짧은 한 문장이지만, 창4의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글입니다. 창4:17에는 ‘가인이 그의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가인의 아들 에녹의 출생을 말하지만, 속뜻으로는 앞에서 ‘가인’이라 했던 교리, 곧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이제 하나의 독립된 교리적 체계로 더욱 발전하고 확장되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the amplification of this heresy’, 곧 ‘이 이단의 확장’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amplification’을 단순히 사람의 수가 많아졌다거나 가인의 후손이 번성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확장은 앞에서 생겨난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더욱 전개되고 발전하여 하나의 구체적인 교리적 형태를 갖추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AC.324에서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리들, 곧 ‘heresies’가 창4의 중요한 주제라고 하였고, AC.325에서는 그 가운데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가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에녹’은 그 가인적 교리가 한 단계 더 전개되고 확장된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창4와 창5의 계보를 읽는 방식과도 직접 연결됩니다. AC를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가인이 에녹을 낳았다’는 말씀을 먼저 한 개인이 다른 개인을 낳은 족보로 읽게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속뜻으로 보는 ‘낳음’은 교회와 교리의 발생과 계승을 의미합니다. 어떤 교리적 상태에서 또 다른 교리적 상태가 발생하고, 그것이 다시 발전하여 새로운 형태를 이루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이 에녹을 낳았다’는 것은 속뜻으로는 ‘가인’이라는 분리된 신앙의 교리로부터 ‘에녹’이라 불리는 더욱 발전된 교리적 형태가 생겨났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단의 확장’이라고 하면 오늘날 어떤 이단 단체가 포교하여 신도 수를 늘리고 조직을 확장했다는 식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물론 외적으로 그런 현상과 연결하여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AC.331의 직접적인 의미는 그보다 깊습니다. 이것은 교리의 내적 발전을 말합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신앙과 체어리티를 서로 구별할 수 있다’는 정도였던 생각이 점차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중요하다’로 발전하고, 더 나아가 ‘체어리티와 관계없이 신앙만으로도 충분하다’는 하나의 독립된 교리 체계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분리가 논리와 설명과 가르침을 갖추어 점차 체계화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확장’에 가깝습니다.
앞의 AC.330에서 ‘가인의 표’가 주어진 것도 이 대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을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으셨습니다. 훗날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다시 심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앙 자체는 보존되었습니다. 그러나 보존되었다고 해서 당시의 ‘분리된 신앙’이라는 왜곡된 상태가 곧바로 바로잡힌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역사적으로는 그 교리가 계속 발전하고 여러 형태로 확장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첫 번째 확장이 ‘에녹’으로 표상됩니다. 주님께서 어떤 것을 섭리 가운데 보존하신다는 것과 그 상태 자체를 승인하신다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임을 여기서도 볼 수 있습니다.
창4:17에는 또 하나 중요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가인은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습니다. 이어지는 AC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말씀에서 ‘성’은 흔히 교리적인 것을 표상합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면 ‘에녹’이 단순한 한 사람의 이름을 넘어, 가인으로 시작된 분리된 신앙이 이제 일정한 교리적 구조와 체계를 갖추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분리된 생각이었지만, 이제 그것을 둘러싼 ‘성’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교회의 타락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매우 섬세하게 보여 줍니다. 잘못된 교리는 처음부터 완성된 체계로 나타나는 경우가 드뭅니다. 처음에는 참된 것 가운데 어느 한 부분을 다른 것에서 떼어 내는 작은 분리에서 시작됩니다. AC.325의 가인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신앙 자체가 거짓이었던 것이 아니라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그 분리가 지속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설명하고 정당화하기 시작합니다. 논리가 만들어지고, 교리가 형성되고, 그것을 지지하는 여러 생각들이 덧붙여집니다. 마침내 처음의 작은 분리가 하나의 독립적인 교리적 세계를 형성합니다. AC.331의 ‘에녹’은 바로 이러한 발전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proprium의 작용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진리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을 때, 사람은 그 진리를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여기며, 그것을 선한 삶을 위하여 사용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선에서 분리되면, 인간의 proprium은 그 진리를 자기 것으로 붙들고 체계화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논리를 만들고, 자신의 입장을 방어하기 위해 또 다른 교리를 세우며, 마침내 그 안에 하나의 ‘성’을 쌓습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작은 분리였던 것이 점점 견고한 교리적 구조가 되어, 오히려 그 안에 갇혀 밖의 진리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AC.330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부분은 역시 ‘가인의 표’입니다. 지금까지의 흐름만 보면 가인은 부정적인 것의 연속입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했고, 그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였으며, 마침내 아벨을 죽여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 결과 교리가 왜곡되고, 거짓과 악이 생겨났으며, 사람들은 주님에게서 돌아서 영원한 죽음의 위험에 놓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그런 가인을 보호하셨을까요?
그 답은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라는 한 문장에 있습니다. 이것은 태고교회 이후 인류의 거듭남이 어떤 방향으로 바뀌게 되는지를 미리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순수한 사람들은 ‘사랑에서 신앙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들에게 사랑은 출발점이었고, 진리는 그 사랑 안에서 지각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상실된 뒤 인간에게 동일한 길을 그대로 요구한다면 아무도 거듭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의 달라진 상태에 맞추어 ‘신앙에서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새로운 길을 준비하십니다. 사람은 먼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인 다음, 그 진리에 따라 살면서 체어리티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따라서 가인의 표는 단순히 ‘살인자에게도 자비를 베푸셨다’는 도덕적 교훈보다 훨씬 깊은 섭리를 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망가뜨린 것 가운데서도 장차 구원에 사용될 수 있는 것을 완전히 파괴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는 것은 질서의 파괴였지만, 신앙 그 자체에는 여전히 진리를 담아 전달하는 기능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보존하셨습니다. 그리고 훗날 그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의 표’는 창3마지막의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과도 흥미롭게 연결됩니다. 창3에서는 인간이 거룩한 것을 모독하여 완전히 멸망하지 않도록 생명나무의 길을 보호하셨습니다. 창4에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인간이 장차 다시 체어리티에 이를 수 있도록 신앙을 보호하십니다. 하나는 생명나무의 길을 보존하시는 보호이고, 다른 하나는 훗날 그 생명으로 돌아가는 데 사용될 신앙을 보존하시는 보호입니다. 인간의 타락이 계속 깊어지는 가운데서도 주님의 섭리는 끊임없이 다음 구원의 가능성을 남겨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AC.330은 가인의 이야기를 단순한 타락의 이야기로 끝내지 않습니다. ‘아벨은 죽었지만 가인은 보존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사라져도 분리된 신앙만 남으면 괜찮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체어리티를 다시 회복시키기 위하여 신앙이 보존된 것입니다. 신앙의 최종 목적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체어리티입니다. 진리는 선으로 이끌기 위해 존재하고, 사람이 배우고 믿는 것은 결국 그것을 살아가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표는 신앙의 독립을 영구히 승인하는 표가 아니라, 언젠가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를 섬기는 본래의 목적을 이루도록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의 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AC.325부터AC.330까지를 하나로 읽으면 창4의 흐름이 매우 선명해집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됨’, ‘예배가 분리됨’, ‘내적 상태가 악해짐’,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높아짐’, ‘체어리티가 소멸됨’, ‘교리가 왜곡되고 거짓과 악이 생겨남’으로 인간의 타락은 계속 깊어집니다. 그런데 바로 그 가장 어두운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가인의 표’를 두십니다. 인간은 하나였던 것을 갈라놓지만, 주님께서는 그 갈라진 것 가운데서도 다시 생명으로 이어질 길을 보존하십니다.AC.330의 중심에는 바로 이 역설적인 주님의 자비와 섭리가 놓여 있습니다.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And now art thou cursed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shalt thou be in the earth.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ay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and from thy faces shall I be hid, and I shall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And Jehovah said unto him, Therefore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And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창4:10-16)
AC.330
‘핏소리’(voice of bloods)는 소멸된 체어리티를(10절),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curse from the ground)는 왜곡된 교리를(11절),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fugitive and wanderer in the earth)는 거기에서 비롯된 거짓과 악을(12절) 각각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에게서 자신을 돌이켰기 때문에 영원한 죽음에 처할 위험에 놓였습니다.(13-14절) ‘가인에게 표를 주신 것’(mark set upon Cain)은 그러나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었으므로, 신앙은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되었음을 의미합니다.(15절) ‘가인이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Cain dwelling toward the east of Eden)는 신앙이 이전의 위치에서 옮겨진 것을 의미합니다.(16절) Charity extinguished is called the “voice of bloods.” (verse 10); perverted doctrine, the “curse from the ground.” (verse 11); the falsity and evil originating thence, the “fugitive and wanderer in the earth.” (verse 12) And as they had averted themselves from the Lord, they were in danger of eternal death. (verses 13–14) But as it was through faith that charity would afterwards be implanted, faith was made inviolable, and this is signified by the “mark set upon Cain.” (verse 15) And its removal from its former position is denoted by “Cain dwelling toward the east of Eden.” (verse 16)
해설
AC.330은 창4:10-16 전체의 속뜻을 한꺼번에 압축하여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개요입니다. 앞의 AC.325-329에서 사랑과 신앙의 분리로 시작된 과정은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 곧 체어리티의 소멸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AC.330에서는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가 사라지자 교리는 왜곡되고, 그 왜곡된 교리에서 거짓과 악이 생겨나며, 사람은 주님에게서 점점 멀어져 영원한 죽음의 위험에 처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그런 가인을 즉시 멸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표’를 주어 보호하십니다. 왜냐하면 훗날 체어리티가 다시 인간에게 심어질 때, 바로 ‘신앙’을 통하여 심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AC.330은 가인의 타락을 다루면서 동시에 그 타락 가운데서도 미래의 거듭남을 준비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먼저 ‘소멸된 체어리티는 피들의 소리라 불린다’고 합니다. 창4:10의 개역개정은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지만, 히브리어에는 ‘피’가 복수형으로 되어 있어 스베덴보리는 이를 ‘voice of bloods’, 곧 ‘피들의 소리’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육체적인 피 자체가 아니라 아벨로 표상되던 체어리티가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AC.329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인 사람들에게서 체어리티가 소멸된 것을 뜻했습니다. 따라서 ‘피들의 소리’는 그렇게 죽임당한 체어리티가 주님 앞에서 증거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체어리티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사라졌지만, 그 소멸된 상태가 주님 앞에서 감추어질 수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는 ‘왜곡된 교리’를 뜻합니다. 여기서 ‘땅’은 단순한 자연계의 토양이 아니라 교회, 또는 교회에 속한 사람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본래 교회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는 함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체어리티가 소멸된 뒤에도 신앙의 교리는 남았습니다. 문제는 이제 그 교리를 살아 있게 해 줄 선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진리가 선과 분리되면 사람의 proprium이 그것을 붙들고 자기 목적에 맞게 해석하기 시작하며, 그 결과 교리는 점차 왜곡됩니다. 따라서 가인의 길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왜곡된 교리’로 진행됩니다.
그 결과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왜곡된 교리에서 비롯되는 ‘거짓과 악’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상응입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되어 있을 때, 사람에게는 영적인 중심과 방향이 있습니다. 무엇이 참된지 알고, 그것을 왜 행해야 하는지도 알며, 주님을 향하여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교리가 왜곡되면 그 중심을 잃습니다. 생각은 이 교리에서 저 교리로 흔들리고, 삶 역시 선이라는 중심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거짓에는 참된 영적 안식처가 없고, 악에는 주님 안에서의 평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는 결국 더욱 심각한 결과로 이어집니다. AC.330은 ‘그들은 주님에게서 자신을 돌이켰기 때문에 영원한 죽음에 처할 위험에 놓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들에게서 돌아서셨다’고 하지 않고 ‘그들이 주님에게서 자신을 돌이켰다’고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하나님 이해에서 계속 나타나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주님은 사람에게서 사랑과 생명을 거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태양이 계속 빛과 열을 내듯 주님의 사랑은 끊임없이 모든 사람에게 흘러옵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사랑과 거짓을 향하여 돌아설 때 그 생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영원한 죽음의 위험은 주님께서 사람을 버리셔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에게서 스스로 돌아서기 때문에 생깁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AC.330의 놀라운 반전이 나타납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렇다면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 역시 함께 없애 버리는 것이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십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창4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입니다. 지금까지 신앙은 사랑에서 떨어져 나와 문제를 일으킨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신앙 자체를 완전히 폐기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이후 인류의 영적 구조가 달라지면서 바로 그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로 가는 통로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이르렀습니다. 먼저 주님을 사랑했고, 그 사랑 안에서 진리를 퍼셉션으로 지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천적 질서가 무너진 뒤에는 인간이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거듭날 수 없게 됩니다. 이후에는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며,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사람 안에 심어지는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신앙은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되었습니다.’ 여기서 ‘faith was made inviolable’은 신앙이 절대적으로 가장 높은 것이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을 없애서는 안 되도록 주님께서 보호하셨다는 뜻입니다. 가인이 잘했기 때문에 보호받은 것이 아닙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훗날 주님의 구원 섭리에서 다시 사용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사랑에서 직접 진리를 지각할 수 없게 된 뒤에는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체어리티에 이르는 길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에게 주어진 ‘표’는 악에 대한 승인이나 면죄의 표가 아니라, 미래의 구원을 위하여 신앙이라는 기능 자체를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표상합니다.
이 점은 앞의 AC.328과 연결해서 보면 더욱 선명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이 주된 것이 되어 체어리티보다 높임을 받지만 않는다면’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질서의 전도였습니다. 이제 아벨이 죽고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지만, 주님께서는 가인마저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신앙을 보존하여 언젠가 다시 체어리티와 결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갈라놓았지만, 주님의 섭리는 그 갈라진 신앙마저 붙들어 장차 다시 체어리티로 이끄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마지막으로 ‘가인이 에덴 동쪽에 거주하였다’는 것은 신앙이 ‘이전의 위치에서 옮겨진 것’을 뜻합니다. ‘동쪽’은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주님과 사랑을 표상하는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가인이 에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에덴 동쪽’에 거주하게 되었다는 것은, 신앙이 본래 태고교회에서 차지했던 위치와 상태에서 벗어나 다른 위치로 옮겨졌음을 나타냅니다. 본래 신앙은 사랑 안에 있었고 사랑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이제는 그 직접적인 천적 질서 안에 있지 못합니다. 신앙은 여전히 보존되지만, 그 성격과 기능, 교회 안에서의 위치가 달라진 것입니다.
AC.329를 오늘의 신앙생활에 비추어 보면, ‘아벨을 죽인다’는 것은 반드시 어떤 사람이 노골적으로 사랑과 선행을 반대한다고 선언하는 데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훨씬 미묘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올바른 신앙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맞는 말입니다. 다음에는 ‘올바른 신앙이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여기서부터 조심해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올바르게 믿는다면 삶은 그다음 문제다’라고 생각하게 되고, 마침내 ‘구원은 신앙의 문제이므로 체어리티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여기게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벨의 생명이 꺼지기 시작합니다.
더 무서운 것은 아벨이 죽은 뒤에도 가인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즉 체어리티가 소멸된 뒤에도 신앙의 교리는 계속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AC.329가 보여 주는 매우 엄중한 영적 현실입니다. 교회가 체어리티를 잃었다고 해서 곧바로 모든 종교적 활동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교리도 남아 있고, 예배도 남아 있고, 신앙고백도 남아 있으며, 성경에 관한 많은 지식도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교회가 여전히 활발해 보이는데, 그 안에서 아벨만 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말하지만 서로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말하지만 그 진리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며, 신앙을 지킨다고 하면서 자기 의와 자기 우월성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은 시대를 넘어 모든 교회와 모든 신앙인에게 향하는 질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네가 고백하는 신앙이 어디 있느냐?’가 아니라 ‘그 신앙 안의 체어리티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말씀을 많이 읽었는데 그 말씀으로 인해 이웃을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교리를 깊이 알게 되었는데 그 지식 덕분에 더 겸손해졌는가, 예배를 오래 드렸는데 그 예배로 인해 악을 더 미워하고, 선을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러한 열매가 바로AC.328에서 말한 ‘신앙의 질’을 드러냅니다.
동시에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이나 다른 교회를 ‘가인’이라고 지목하기 전에, 먼저 자기 안을 살피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은 언제나 우리 자신의 거듭남에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옳은 것을 알고 있다’는 만족이 ‘나는 그것을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밀어내는 순간, 우리 안에서도 가인이 아벨보다 높아질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진리가 나를 더 사랑하게 하고 더 겸손하게 만드는 대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나의 옳음을 증명하는 수단이 된다면, 가인의 원리가 이미 작용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AC.325에서AC.329까지는 하나의 연속적인 영적 과정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의 분리’였고, 다음에는 ‘예배의 분리’, 이어서 ‘내적 상태의 악화’, 그리고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이는 질서의 전도’가 일어났으며, 마침내 ‘체어리티의 소멸’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그러므로 창4의 첫 살인은 단순히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육체적 생명을 빼앗은 이야기를 넘어, 교회 안에서 진리가 선과 분리되고, 신앙이 사랑보다 높아질 때, 마침내 교회의 참된 생명인 체어리티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깊은 영적 역사입니다.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And Jehovah said 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창4:8-9)
AC.329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앞세운 사람들한테서 체어리티가 소멸된 것을,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인 것’(Cain slaying his brother Abel)이라고 합니다. (8-9절)That charity was extinguished in those who separated faith, and set it before charity, is described by “Cain slaying his brother Abel.” (verses 8–9)
해설
AC.329는 지금까지 이어져 온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마침내 결정적인 지점에 도달했음을 보여 줍니다. AC.325에서는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어 ‘가인’이 되었고, 체어리티는 ‘아벨’이라 불렸습니다. AC.326에서는 이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로 드러났으며, AC.327에서는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져 가인의 ‘분함’과 ‘안색이 변함’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AC.328에서는 아직 마지막 가능성이 남아 있었습니다. 신앙이 자신을 주된 것으로 삼아 체어리티보다 높이지 않는다면, 체어리티는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AC.329에서는 그 질서가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신앙이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앞세운 결과 체어리티 자체가 ‘소멸’되는 단계에 이릅니다. 이것이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extinguished’라는 표현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죽였다’는 창세기의 형제 살인 사건을 속뜻으로는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불이 꺼지듯 체어리티의 생명이 꺼진 것입니다. 따라서 아벨의 죽음은 단순히 악한 신앙이 선한 체어리티를 공격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체어리티가 더 이상 살아 있는 원리로 작용하지 못하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신앙에 관한 교리는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고, 예배도 계속될 수 있으며, 하나님에 관한 말도 계속할 수 있지만, 그 안에서 이웃 사랑이라는 생명이 사라진 것입니다.
특히 AC.329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것’과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앞세운 것’을 구별하여 함께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분리’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 하나였는데 그것을 서로 떼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분리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일단 둘을 분리하면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하는 문제가 생기고, 마침내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앞세우게’ 됩니다. 본래 사랑과 선을 섬겨야 할 신앙과 진리가 오히려 주된 자리를 차지하고, 체어리티는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납니다. 바로 이 질서의 전도가 결국 아벨의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의 핵심은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앞섰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앞섰다’는 것은 단순히 순서를 먼저 두었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이 교회의 본질이며, 무엇이 주된 것인가 하는 자리의 문제입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에서는 사랑이 생명이었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선이 먼저이고, 진리는 그 선의 형체였습니다. 그런데 가인에게서는 이 질서가 뒤집혔습니다. 신앙이 스스로 주된 것이 되고, 체어리티는 그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체어리티는 처음에는 부차적인 것이 되고, 다음에는 불필요한 것이 되며, 마침내 완전히 사라집니다. 이것이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이 보여 주는 영적 과정입니다.
이 점에서 창4의 살인은 창4:8에서 갑자기 시작된 사건이 아닙니다. 이미 AC.325에서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는 순간부터 아벨의 죽음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분리는 예배의 분리로 이어졌고, 예배의 분리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악하게 만들었으며, 그 악한 상태에서 신앙은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높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창4의 몇 절 안에서 읽어 내는 것은 단순한 범죄의 진행이 아니라 교회가 영적으로 죽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다시 ‘신앙은 나쁘고, 체어리티만 중요하다’고 이해하면 AC.329의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separated faith’, 곧 ‘분리된 신앙’입니다. AC.328에서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한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아벨은 가인을 없애려 하지 않았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배척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할 때, 교회의 생명이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가인이 아벨을 자신의 형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을 그보다 앞세운 데 있습니다. 따라서 참된 회복은 가인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가인과 아벨의 본래 질서, 곧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을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아우 아벨’이라는 표현도 의미심장합니다. 문자적으로 아벨은 가인의 동생이지만, 속뜻으로도 체어리티가 신앙보다 열등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AC.328-329의 설명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된 것이며, 신앙은 체어리티에 종속되어야 합니다. 말씀의 문자적 출생 순서와 영적 우선순위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닙니다. 가인이 먼저 등장한다고 해서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본질적으로 앞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로 그 신앙이 자신을 ‘앞세웠을’ 때 영적 질서가 뒤집히고,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습니다.
창4:9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주님의 질문도 이러한 맥락에서 매우 깊어집니다. 주님께서 아벨의 위치를 모르셔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 질문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에게 ‘너희 안의 체어리티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신앙도 있고, 교리도 있고, 예배도 있는데, 그 신앙이 낳아야 할 이웃 사랑은 어디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가인의 대답인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는 이후 AC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이미 체어리티에 대한 책임 자체를 부인하는 상태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 원고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으면, 상당히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겉으로는 ‘이단 침투 사건’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핵심은 단순히 ‘어느 교리가 옳고 어느 교리가 틀렸는가’만이 아닙니다. 사람의 외로움과 상처를 이용하여 관계를 만들고, 그 관계를 통해 신뢰를 장악한 다음, 기존의 영적 판단 기준을 서서히 무너뜨리고, 마침내 특정 집단과 특정 가르침에 사람을 종속시키는 과정이 이 원고 전체를 관통합니다. 스베덴보리라면 바로 이 지점을 매우 심각하게 보았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신학에서 인간의 영적 생명을 지탱하는 가장 근본적인 두 능력 가운데 하나가 ‘자유’이고 다른 하나가 rational, 곧 진리를 이해하고 분별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원고 속 침투 방식은 사람을 노골적으로 강제하지 않으면서도, 정서적 의존과 ‘우리만 아는 특별한 진리’를 통해 그 두 능력을 점차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처음 등장하는 ‘더 깊은 말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라는 표현부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아주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자신이야말로 성경의 문자적 의미 안에 ‘속뜻’이 있으며, 그 안에 무수한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말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더 깊은 말씀이 있다’는 말 자체를 이단의 표지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목사 입장에서 그 말을 들었다면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어디에서 배우셨습니까?’, ‘그 깊다는 말씀의 내용은 무엇입니까?’라고 차분히 물어보는 것이 맞았을 것입니다. 원고의 목사도 나중에 바로 그 질문을 하지 않은 것을 첫 번째 실수라고 회고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속뜻’과 이 원고에서 말하는 ‘더 깊은 말씀’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속뜻은 사람을 어떤 인간 지도자나 비밀 조직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주님과 그분의 나라, 거듭남, 사랑과 체어리티의 질서로 데려갑니다. 반면 원고 속 가르침은 ‘기존 교회의 목사는 진리를 다 알지 못한다’, ‘더 깊은 말씀을 아는 특별한 사람을 통해야 한다’, ‘우리 모임에만 구원의 완전함이 있다’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바로 여기서 성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진리의 깊이가 사람을 주님께 더 직접적으로 의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특정 집단과 지도자에게 더 종속시킨다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미 매우 중대한 경고 신호입니다.
특히 원고 속 ‘박순자 씨’가 하는 일은 처음에는 모두 체어리티처럼 보입니다. 비 오는 날 예배에 참석하고, 한 시간을 걸어 새벽기도에 나오고, 화장실을 청소하고, 식사를 대접하고, 혼자 사는 권사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고, 사람의 고민을 끝까지 들어줍니다. 겉으로만 보면 선행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행위의 영적 성질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를 낳는 사랑과 목적에서 결정됩니다. 똑같이 음식을 가져다주어도 상대의 행복을 위해서 할 수 있고, 상대의 마음을 확보하기 위해서 할 수도 있습니다. 똑같이 눈물을 닦아주어도 진정한 체어리티일 수 있고, 상대의 신뢰를 얻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례는 스베덴보리가 왜 그렇게 끊임없이 ‘의도’, ‘목적’, ‘지배적 사랑’을 강조하는지를 아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이 점에서 원고의 ‘가장 따뜻한 얼굴로, 가장 부지런한 손으로, 가장 낮은 자세로 온다’는 표현은 다소 극적으로 쓰였지만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영적 악은 항상 노골적인 악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악한 영들도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진리를 말할 수 있고, 선한 것처럼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입니다.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가, 아니면 지배하는가. 주님께 가까이 가게 하는가, 아니면 인간에게 종속시키는가. 선과 진리를 사랑하게 하는가, 아니면 자기 집단만 옳다고 믿게 하는가. 이 기준을 적용하면 원고 속 행동들의 성격이 점차 달리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저는 ‘스베덴보리라면 처음부터 저 사람을 알아봤을까?’라는 식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스베덴보리의 원리를 따르는 목회라면 어느 지점에서 무엇을 확인했을까?’라고 묻는 편이 좋다고 봅니다. 첫 번째 확인점은 바로 ‘더 깊은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도들과 목회자에게 알리지 않은 별도의 성경공부입니다. 세 번째는 교재를 공개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네 번째는 ‘목사도 모르는 진리가 있다’는 우월의식이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공동체 안의 인간관계가 공개적이고 자유로운 교제에서 비밀스럽고 폐쇄적인 관계로 변하는 것입니다. 원고에는 이 신호들이 상당히 일찍부터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비밀성’입니다. 천국의 질서는 빛의 질서입니다. 진리는 빛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이것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다’, ‘목사에게는 말하지 말라’,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알려 주면 안 된다’는 식으로 점점 폐쇄적인 구조를 만든다면 그 자체가 이미 의심해 볼 이유가 됩니다. 물론 모든 개인적 성경공부가 공개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 공동체 안에서 사람을 은밀하게 선별하고, 지도자에게는 내용을 감추고, 구성원들에게 ‘너희는 이제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안다’는 특별의식을 심는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진리 탐구와는 완전히 다른 구조입니다.
원고에서 목사가 교육관의 비밀 모임을 보고도 바로 들어가지 않고 돌아서는 장면은 생각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그는 ‘들어가면 감시하는 목사가 될 것 같다’, ‘더 큰 갈등을 만들 것 같다’고 염려합니다. 인간적으로 이해되는 반응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사랑은 반드시 지혜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이미 교회 시설에서, 목회자에게 알리지 않은 채, 정체를 감춘 교재로 조직적인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는 상당한 근거가 확보되었다면 그 시점에는 단순한 관망보다 질서 있는 개입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자유를 존중한다는 것은 거짓된 방법으로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도록 방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들이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자유롭게 판단하도록 사실을 제공하는 것이 자유를 보호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목사님의 질문에 제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답은 이렇습니다. 아마도 ‘사람을 몰아붙이지는 않았겠지만, 거짓은 아주 명확하게 밝혔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저작에서 기존 교회의 잘못이라고 판단한 교리들을 상당히 직설적으로 비판합니다. 삼위일체 이해, 오직 신앙, 대속 개념, 인간의 자유와 행위 등에 대해서 그는 결코 ‘다 좋게 생각합시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를 ‘교리적 차이는 따지지 않고 사람을 품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사람에 대해서는 체어리티를 강조하지만, 거짓된 교리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합니다.
다만 ‘사람’과 ‘그 사람이 받아들인 거짓’을 구별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원고에서는 처음 돌아온 성도에게 목사가 ‘어리석은 것이 아닙니다. 속은 것입니다. 그 둘은 다릅니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대목이 이번 원고에서 가장 좋은 부분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사람이 거짓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를 곧바로 악한 사람으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거짓은 무지 때문에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신뢰하던 사람에게 속아서 받아들이며, 어떤 것은 상처와 외로움 때문에 붙잡습니다. 특히 사람이 진심으로 선을 원하면서도 거짓을 진리라고 믿은 경우에는 주님께서 그 거짓을 바로잡아 주실 여지가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이미 마음이 기운 성도들을 공개석상에서 논리로 꺾으려 하지 않은 것도 일면 지혜로운 선택이었습니다. 원고의 목사는 ‘마음이 이미 기울어진 사람에게 논리는 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을 절대적인 명제로 만들 필요는 없지만, 심리적 현실은 상당히 정확합니다. 사람의 이해성, 그러니까 이해하는 능력은 의지와 애정의 영향을 받습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사람이 어떤 것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그 이해성은 그 사랑을 지지하는 이유들을 찾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 순간에는 열 가지 논박보다 관계를 끊지 않고, 돌아올 문을 열어두며, 시간이 지나 실제 열매를 경험하도록 기다리는 것이 더 지혜로울 수도 있습니다.
김복순 권사에게 ‘언제든 돌아오고 싶으실 때 문은 열려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억지로 붙잡지 않은 장면도 이 점에서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여 진리를 받아들이게 할 수 없다고 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옳은 진리라도 강제로 받아들인 것은 사람의 것이 되지 못합니다. 목회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을 보여 주고, 거짓의 구조를 설명하고, 선택의 결과를 알려 주고,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그 사람이 자유 안에서 선택하도록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냉정한 방임과 다른 것은, 떠난 뒤에도 사랑의 문이 닫히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원고처럼 성도들이 떠난 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만 할 필요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본다면 ‘논쟁’보다 ‘교육’이 중요합니다. 특정 집단의 교리를 항목별로 공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 사람은 ‘우리만 아는 진리’에 매혹되는지, 왜 비밀지식이 영적 우월감을 주는지, 왜 외로운 사람에게 친절이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지, 말씀의 속뜻과 인간이 만들어 낸 비밀 교리를 어떻게 구별하는지, 참된 자유와 종교적 지배는 어떻게 다른지를 평소에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이단 예방 교육 자체가 단순한 ‘이단 목록 암기’가 아니라 영적 분별 훈련이 됩니다.
그리고 이 원고에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았을 때 반드시 한 번 걸러야 할 대목도 있습니다. 발견된 자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신 다른 무언가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는 것을 이단 판별의 결정적 기준처럼 묘사합니다. 일반 복음주의적 관점에서는 이해되는 표현이지만,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는 이것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인간의 죄값을 대신 갚기 위해 아들을 형벌하셨다’는 식의 대속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라면 ‘십자가를 중심에 두느냐’ 하나로 참과 거짓을 판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더 근본적으로 물었을 것은 ‘주님을 누구라고 하는가’, ‘그분의 신성과 인성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가’, ‘회개와 거듭남을 어떻게 말하는가’,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는가’, ‘선한 삶이 실제로 요구되는가’, ‘사람의 자유를 보존하는가’, ‘한 인간이나 조직을 구원의 필수 중개자로 세우는가’ 같은 질문들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 기준으로 보면 원고 속 집단의 문제는 훨씬 더 분명해집니다. 문제는 단순히 기존 교회와 해석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자유로운 양심과 분별을 약화시키고 특정 집단에 구원을 독점시키며, 인간관계를 도구로 사용한다는 데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단에 빠진 사람을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가’입니다. 원고의 후반에서 떠났던 성도가 2년 뒤 돌아와 삶이 무너졌다고 고백할 때 목사가 따지지 않고 기다려 주고, ‘왜 내 말을 안 들었습니까?’라고 하지 않고, 다시 올 수 있다고 말하는 장면은 상당히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는 바로 이런 데서 빛을 발합니다. 진리를 지킬 때에는 단호하지만, 사람이 돌아올 때에는 그 사람의 과거 오류를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재료로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옳았고 당신이 틀렸다’가 아니라 ‘이제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가 되어야 합니다.
다만 회복도 단순히 ‘다시 우리 교회로 돌아왔다’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이라면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게 되었느냐입니다. 이전 집단을 미워하고 원래 교회를 다시 좋아하게 되었다고 해서 자동으로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그 경험을 통해 거짓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됨 자체를 미워하고,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경계하며, 말씀의 진리를 자유롭게 배우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 진정한 회복입니다. ‘이단 탈퇴’는 출발점이지 거듭남의 완성은 아닙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스베덴보리라면 저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에 대해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거짓을 사랑의 이름으로 방치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진리의 이름으로 사람의 자유를 짓밟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거짓은 밝히고, 침투 행위는 중단시키고, 교회의 질서는 보호하되, 이미 넘어간 사람에게는 돌아올 자유를 남겨두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도들이 목사를 맹목적으로 믿도록 하는 대신, 왜 그것이 거짓인지 말씀과 이성으로 스스로 볼 수 있도록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원고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을 ‘이단을 경계하자’에서 한 걸음 더 깊이 가져가고 싶습니다. 교회가 가장 안전한 때는 성도들이 목사를 무조건 믿을 때가 아닙니다. 성도 각자가 진리를 사랑하고, 말씀 앞에서 생각하며, 선과 악을 분별하고, 사람의 친절과 영적 진리를 혼동하지 않을 때입니다. 목회자의 임무도 성도들을 자기 울타리 안에 단단히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와서 아무리 따뜻하게 손을 잡고 ‘더 깊은 진리’를 말하더라도 스스로 그 열매와 방향을 살펴볼 수 있는 사람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 이야기는 앞서 우리가 이야기했던 rational과도 연결됩니다. 정상적인 능력을 가진 성도에게 목회자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보호는 모든 답을 대신 주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내적 기반’을 길러 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자유와 이해성을 보호하면서, 그것이 거짓에 이용되지 않도록 진리로 형성하는 것, 저는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본 이 사건의 가장 깊은 목회적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한 문장은 오늘날 신앙을 돌아보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의 신앙을 그의 신앙 고백이나 성경 지식, 교리적 입장, 기도와 예배의 열심으로 판단합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중요합니다. 그러나AC.328은 그보다 더 깊은 곳을 보라고 합니다. 그 신앙이 그 사람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신앙이 실제로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악을 멀리하게 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기게 한다면 그 신앙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반대로 신앙을 강하게 주장할수록 더 교만해지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며, 자기의 옳음을 세우고,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바로 그 열매가 그 신앙의 질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행위를 보고 구원 여부를 판단하자’는 단순한 도덕주의와도 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는 겉으로 착한 일을 많이 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사랑하고, 그 선에 따라 이웃에게 유익을 행하려는 내적 애정입니다. 따라서 겉으로 많은 선행을 하면서도 속으로 자기 명예와 공로를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참된 체어리티가 아닐 수 있습니다. 반대로 눈에 띄는 큰일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자리에서 정직하게 의무를 행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이웃의 유익을 진실하게 바란다면 그 안에 체어리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체어리티가 신앙의 내적 질을 보여 줍니다.
특히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말은 기억해 둘 만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처음 접하면 자칫 ‘신앙보다 체어리티가 중요하니 결국 신앙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아닌가?’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AC.328은 정반대를 말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오직 신앙이 ‘주된 것’이 되어 자신을 체어리티 위에 세우는 데 있습니다. 참된 질서는 신앙 없는 체어리티도, 체어리티 없는 신앙도 아니라 둘의 결합입니다. 다만 그 결합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선이 주된 것이고, 진리는 그 선을 섬기며, 사랑이 생명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 형체와 방향을 줍니다.
따라서AC.325에서 시작된 흐름을 여기까지 이어 보면 매우 선명합니다. 처음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고, 그 사랑과 신앙은 하나였습니다. 그 후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가인’이 되었고, 체어리티는 ‘아벨’이라 불렸습니다. 분리는 예배에까지 이어졌고, 가인의 상태는 점차 악해졌습니다. 그러나AC.328에 이르러 주님께서는 아직 한 번 더 길을 열어 놓으십니다. ‘아벨’은 아직 ‘가인’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신앙이 자기 자리를 낮추고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한다면 아직 회복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끝내 자신을 주된 것으로 높이고 체어리티 위에 서려 한다면, 다음에 일어날 일은 이미 예고되어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4의 비극은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해서 일어난 비극이 아니라, 본래 하나여야 할 둘 사이의 질서가 뒤집힘으로써 일어난 비극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창4:7)
AC.328
그리고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으며, 신앙이 주된 것이 되어 체어리티보다 높임을 받지만 않는다면,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7절) And that the quality of the faith is known from the charity; and that charity wishes to be with faith, if faith is not made the principal, and is not exalted above charity. (verse 7)
해설
AC.328은 앞의 AC.325-327에서 계속되어 온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 문제를 한층 더 깊이 다룹니다. AC.325에서는 태고교회가 본래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으나, 이후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하였습니다. AC.326에서는 그 분리가 예배에까지 나타나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이라는 두 종류의 예배가 되었고, AC.327에서는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점차 악해져 가인의 ‘분함’과 ‘안색이 변함’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AC.328에서는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가 덧붙여집니다.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완전히 밀어내고 자신을 그 위에 세우지만 않는다면, 체어리티는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질’(質, quality)은 그 신앙이 어떤 성질의 신앙인가, 곧 참되고 살아 있는 신앙인가, 아니면 외형만 신앙인 죽은 신앙인가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신앙 자체의 주장이나 교리적 정교함이 아니라 ‘체어리티’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지, 얼마나 확신 있게 신앙을 고백하는지, 얼마나 열심히 예배에 참여하는지만으로는 그 신앙의 참된 질을 알 수 없습니다. 그 신앙이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지, 악을 죄로 여기고 멀리하게 하는지, 선을 행하게 하는지,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게 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 수 있듯, 체어리티를 보고 신앙의 질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을 낮게 평가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밝혀 주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체어리티와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진리는 선이 무엇인지 가르치고, 신앙은 사람이 그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실제 의지와 삶 안으로 들어가 체어리티가 되지 않는다면, 아직 온전한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다’는 말은 신앙을 체어리티와 경쟁시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본래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지를 밝혀 줍니다. 신앙은 사람을 선으로, 곧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어지는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표현은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마치 체어리티를 살아 있는 존재처럼 표현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제거하려 하지 않습니다. 아벨은 본래 가인의 적이 아닙니다. 이것이 창4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문제는 ‘신앙이냐 체어리티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본래 둘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필요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참된 신앙 역시 체어리티를 떠나려 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선과 함께 있기를 원하고, 선은 진리를 통하여 형체를 얻습니다. 둘의 결합이 바로 교회의 생명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의 조건이 붙습니다. ‘신앙이 주된 것이 되어 체어리티보다 높임을 받지만 않는다면’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문제입니다. 신앙이 존재한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신앙이 자신을 ‘principal’, 곧 주된 것으로 삼고 체어리티 위에 올라서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본래 천적 질서에서는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이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이 질서가 뒤집히면 신앙이 스스로 주인이 되고, 체어리티는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납니다. ‘무엇을 믿느냐가 가장 중요하고, 어떻게 사느냐는 그 다음이다’, 더 나아가 ‘올바르게 믿기만 하면 체어리티의 삶은 구원에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가인의 원리가 점점 강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28은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단순한 대립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합니다. 아벨은 가인을 죽이려 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몰아내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가인이 자신을 아벨보다 높이는 순간, 문제가 생깁니다. 이것은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의 속뜻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인 분리된 신앙이 결국 체어리티를 제거합니다. 창4의 비극은 두 원리가 서로 존재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그 둘의 질서가 뒤집혔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창4:7의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는 말씀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아직 길이 열려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신앙이 다시 선을 향하고 체어리티와 결합한다면 회복될 수 있습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을 가졌다는 데 있지 않았으므로 신앙 자체를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신앙이 다시 자신의 본래 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고, 진리가 선을 향하며, 사람이 알고 믿는 것이 실제 삶으로 이어질 때, ‘가인’으로 표상된 신앙도 본래의 질서 안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328은 앞의 AC.327에서 보았던 주님의 질문, 곧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가 단순한 책망이 아니었음을 더욱 분명히 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의 상태가 악해지고 있음에도 그에게 회복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아직 아벨은 살아 있고, 아직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며, 아직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지 않는다면 둘은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4:7은 심판의 선언이라기보다 분리된 것을 다시 결합시키려는 주님의 자비로운 부르심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AC.327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문제는 이것입니다. 사랑과 신앙을 분리한 것이 왜 결국 사람의 상태를 ‘악하게’ 만드는가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교리적으로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잘못 이해했다고 해서 반드시 사람이 악해져야 하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여기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는 근본 질서를 보아야 합니다. 선은 진리의 생명이며, 진리는 선의 형체입니다. 둘은 서로를 위하여 존재합니다. 신앙의 진리가 체어리티의 선에서 분리되면, 진리는 생명의 근원을 잃고, 결국 사람의proprium이 그것을 자기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문에 ‘분리된 신앙’은 처음부터 노골적인 거짓이나 악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매우 신앙적이고, 교리적으로도 정확해 보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진리를 강하게 주장하고, 예배에도 열심일 수 있습니다. 가인 역시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체어리티가 없으면, 신앙은 점차 ‘내가 무엇을 아는가’, ‘내가 얼마나 옳은가’, ‘내 신앙이 얼마나 정통인가’를 중심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면 진리는 자기 성찰의 빛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되고, 마침내 자신의 신앙이 인정받지 못할 때 분노하게 됩니다.AC.327은 바로 이 내적 변질의 순간을 ‘가인의 분함’으로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분노는 단순한 감정 문제가 아니라 영적 질서가 뒤집힌 결과입니다. 사랑이 신앙의 생명이었을 때에는 진리가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자 동일한 진리가 오히려proprium을 강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분리’가 ‘악’으로 발전하는 이유입니다. 진리 자체가 악해지는 것이 아니라, 선에서 분리된 진리가 자기 사랑의 손에 들어가 악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4의 진행은 매우 정교합니다.AC.325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분리’,AC.326에서는 ‘예배의 분리’,AC.327에서는 ‘내적 상태의 악화’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제 그 악화된 상태가 계속되면, 다음에는 체어리티 자체를 제거하려는 단계, 곧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상태로 나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창4의 최초 살인은 어느 순간 갑자기 폭발한 사건이 아닙니다. 속뜻으로 보면, 그 살인은 이미 오래전, 신앙이 사랑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부터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AC.327이 짧은 한 문장으로 보여 주는 창4의 매우 깊은 영적 경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