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1:26)

 

AC.49

 

태고교회, 곧 그 교회의 사람들과는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셨는데, 그때 주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이러한 이유로,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 외에는 누구도 사람(man)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들만을 사람(men)이라고 했고, 자기 자신을 그 호칭으로 부르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 안에서 인식된 것들, 곧 주님에게서 왔다고 퍼셉션된 모든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만을 사람의 것(of man)이라 했습니다. 그것들은 주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In the most ancient church, with the members of which the Lord conversed face to face, the Lord appeared as a man; concerning which much might be related, but the time has not yet arrived. On this account they called no one “man” but the Lord himself, and the things which were of him; neither did they call themselves “men,” but only those things in themselves—as all the good of love and all the truth of faith—which they perceived they had from the Lord. These they said were “of man,” because they were of the Lord.

 

[2] 이로부터 예언서들에서 사람(man)인자(the son of man)는 최고의 뜻으로는 주님을 뜻하고, 속뜻으로는 지혜와 총명을 뜻하며, 따라서 거듭난 모든 사람을 뜻하게 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Hence in the prophets, by “man” and the “son of man,” in the supreme sense, is meant the Lord; and in the internal sense, wisdom and intelligence; thus everyone who is regenerate. As in Jeremiah: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4:23, 25) 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3, 25).

 

이사야에서 사람(man)은 속뜻으로는 거듭난 사람을, 최고의 뜻으로는 유일한 사람으로서의 주님을 뜻합니다. In Isaiah, where, in the internal sense, by “man” is meant a regenerate person, and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himself, as the one man: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45:11, 12) Thus saith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and his former, I have made the earth, and created man upon it; I, even my hands, have stretched out the heavens, and all their army have I commanded (Isa. 45:11–12).

 

[3] 이 때문에 주님은 예언자들에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에스겔입니다. The Lord therefore appeared to the prophets as a man, as in Ezekiel: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1:26) Above the expanse, as the appearance of a sapphire stone, the likeness of a throne, and upon the likeness of the throne was the likeness as the appearance of a man above upon it (Ezek. 1:26).

 

다니엘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는 인자(the son of man), 곧 사람이라 일컬음을 받으셨습니다. 이는 같은 뜻입니다. And when seen by Daniel he was called the “son of man,” that is, the man, which is the same thing:

 

13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7:13, 14) I saw, and behold, one like the son of man came with the clouds of heaven, and came to the ancient of days, and they brought him near before him; and there was given him dominion, and glory, and a kingdom, that all people, and nations, and languages should serve him. His dominion is an everlasting dominion, which shall not pass away, and his kingdom that which shall not be destroyed (Dan. 7:13–14).

 

[4] 주님께서는 복음서에서도 자신을 자주 인자(the son of man), 곧 사람이라 하시며, 다니엘에서와 같이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The Lord also frequently calls himself the “son of man,” that is, the man, and, as in Daniel, foretells his coming in glory: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24:30) Then shall they see the son of man coming in the clouds of heaven with power and great glory (Matt. 24:30).

 

여기 하늘 구름(The clouds of heaven)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하고, ‘능력과 큰 영광(power and great glory)은 말씀의 속뜻을 뜻합니다. 이 속뜻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오직 주님과 그분의 나라만을 가리키며, 바로 여기서 속뜻의 능력과 영광이 나옵니다. The “clouds of heaven” are the literal sense of the Word; “power and great glory” ar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which in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has reference solely to the Lord and his kingdom; and it is from this that the internal sense derives its power and glory.

 

 

해설

 

AC.49가 인용한 구절들(4:23, 25 / 45:11-12 / 1:26 / 7:13-14 / 24:30)을 ‘사람’과 ‘인자’의 의미, 그리고 문자 의미와 속뜻의 관계라는 큰 축 위에 올려놓고 보면, 이 글은 단순한 주석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단어 하나로 인간론, 기독론, 말씀론을 한꺼번에 관통하는 매우 높은 밀도의 설명입니다. 여기서 ‘사람’은 생물학적 인간을 뜻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가 ‘주님 외에는 아무도 사람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다’는 진술은, 겸손한 표현이 아니라 영적 사실의 정확한 진술입니다. 그들은 자기 안에서 ‘나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실은 주님에게서 유입된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라는 것을 퍼셉션으로 알았고, 그래서 그것들만을 ‘사람의 것’이라 불렀습니다. 즉 ‘사람’이란 내 안에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가 살아 있고 움직이는 상태이며, 그 근원이신 주님이야말로 최고 의미에서 유일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관점이 서면, 예언서와 복음서에서 ‘사람’과 ‘인자’가 왜 그렇게 자주, 그리고 결정적인 지점마다 등장하는지 비로소 맥이 잡힙니다.

 

4:23, 25에서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는 나라의 황폐, 질서 붕괴, 심판의 참상을 묘사하는 예언적 언어입니다. 그러나 AC.49의 문맥에서 이 구절은 ‘사람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단순한 인구의 멸절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의미에서 ‘사람됨’이 사라졌음을 말합니다. 사람됨은 사랑과 지혜, 곧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유입되어 마음(의지와 이해력)의 질서로 자리 잡은 상태인데, 그 질서가 무너지고 주님의 빛이 꺼지면, 즉 이러한 사람됨이 사라지면 겉으로는 사람이 걸어 다니고 말하고 일하는 것 같아도 속뜻으로는 ‘사람이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새들이 날아갔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새들은 이성적, 지적인 것, 곧 이해력의 활동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없다는 말은 곧 지혜와 총명이 없다는 말이며, 새가 날아갔다는 말은 이해력이 진리의 빛에서 이탈하여 더 이상 위를 향해 날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예레미야의 탄식은 단지 사회적 비극이 아니라 거듭남 이전의 ‘공허와 흑암’ 상태, 혹은 교회의 황폐 상태를 묘사하는 본문이 됩니다.

 

45:11-12에서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다’는 선언은 문자 의미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입니다. 그러나 AC의 큰 흐름에서는 ‘창조하다, 만들다, 빚다’ 같은 표현이 예언서에서 자주 ‘거듭남’과 연결된다는 점을 우리는 이미 여러 번 확인했습니다. 곧 ‘사람을 창조하였다’는 말은 생물학적 인간의 탄생이 아니라, ‘참된 사람됨’의 형성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사람’이 단수로 말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람의 원형은 하나’라는 진술로 끌어옵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사람됨을 만들지 못하고, 오직 주님에게서 유입되는 사랑과 지혜에 의해서만 사람으로 빚어집니다. 그래서 최고 의미에서 ‘사람’은 주님이시며, 속뜻으로 ‘사람’은 거듭남을 통해 주님의 형상을 받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사야의 언어는 창조의 언어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독법에서는 그 창조가 곧 새 창조, 즉 거듭남으로 번역됩니다.

 

1:26의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는, 왜 주님이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시는지를 보여 주는 핵심 증거로 사용됩니다. 문자적으로는 환상 언어이며, 인간이 신적 현실을 직접 담아낼 수 없기에 ‘사람 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한계의 표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49의 논지는 거꾸로 갑니다. 주님이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참 사람’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형상과 사람됨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형상은 우연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신적 실재의 형상과 연결된 결과이며, 그 형상이 ‘보좌’와 연결되어 나타난다는 것은 주님의 통치가 힘이나 폭력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질서로 이루어진다는 뜻을 함축합니다. 에스겔의 환상에서 ‘사람 같은 형상’이 가장 높은 자리인 보좌 위에 놓이는 것은, ‘사람됨’이 곧 신적 통치의 본질과 닿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7:13-14의 ‘인자 같은 이’는 신약에서 예수님이 가장 자주 사용하신 자기 호칭과 직결됩니다. AC.49는 여기서 ‘인자’가 사실상 ‘사람’과 같은 말이라는 점을 전면에 세웁니다. 다니엘의 환상에서 ‘인자’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가 주어지고 그 통치가 영원하다고 말할 때, 속뜻은 ‘한 인간 지도자가 영원한 제국을 세운다’가 아니라, 주님이 참 사람으로서, 곧 사랑과 지혜의 결합으로서 영원히 다스리신다는 선언입니다. 또 ‘구름을 타고 온다’는 표현은 후에 마24:30과 연결되며, ‘구름’이 말씀의 문자 의미를 뜻한다는 해석으로 이어집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시고, 말씀 안에서 ‘사람’, 곧 인자로 인식되십니다. 그래서 인자 환상은 종말론적 장면이라기보다, 말씀 안에서 주님이 어떻게 드러나시는가에 대한 근본 구조를 담고 있습니다.

 

24:30의 ‘인자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는 구절도, AC.49에서는 단순한 미래 사건의 예언으로 좁혀지지 않습니다. ‘구름’은 문자, ‘능력과 큰 영광’은 속뜻이라는 해석이 들어오면, 이 말씀은 곧 ‘문자 의미가 매개가 되어 속뜻이 열릴 때, 주님이 인자로 오신다’는 말이 됩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오심’은 단지 시간 속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말씀을 읽고 이해하는 방식 속에서도 일어납니다. 속뜻이 열리기 전에는 사람들은 문자 속에 가려진 주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그래서 주님이 ‘사람’이심도 흐릿하게만 압니다. 그러나 속뜻이 열리면, 그 속뜻이 가리키는 바가 오직 주님과 그분의 나라라는 사실이 드러나며, 거기서 ‘능력’과 ‘영광’이 나온다는 말이 이해됩니다. 즉 속뜻의 능력은 정보량이나 지적 체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과 연결되는 데서 나옵니다.

 

이 모든 인용 구절이 합쳐져 AC.49가 세우는 결론은 생각보다 단순하면서도 강력합니다. 주님은 최고 의미에서 유일한 ‘사람’이시며, 인간은 주님에게서 유입되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자기 안에서 퍼셉션하고, 그것에 따라 살 때에만 ‘사람’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언서에서 ‘사람이 없다’는 말은 단지 인구의 부재가 아니라 지혜와 총명의 부재이며, ‘사람을 창조한다’는 말은 단지 생물학적 탄생이 아니라 거듭남에 의한 새 창조입니다. 또 주님이 ‘사람 같은 형상’으로 나타나시는 것은 인간의 형상이 신적 인성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 주며, ‘인자’의 구름-영광 언어는 말씀의 문자와 속뜻이 어떻게 연결되어 주님의 임재를 드러내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AC.49는 창세기 1장의 ‘사람 창조’를 읽는 열쇠이자, 예수님이 왜 자신을 ‘인자’라 부르셨는지, 그리고 왜 말씀의 속뜻이 ‘능력과 영광’이라 불리는지에 대한 핵심 답변을 한 덩어리 안에 담고 있는 글입니다.

 

 

심화

 

1.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AC.49, 심화 1,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AC.48.심화 1.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이 AC.49 본문 중, ‘태고교회, 곧 그 교회의 사람들과는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셨는데, 그때 주님은 사람의 모습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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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4:23, 25

 

 

AC.49, 심화 2, ‘렘4:23, 25’

AC.49.심화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3, 25) 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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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5:11-12

 

 

AC.49, 심화 3, ‘사45:11-12’

AC.49.심화 3. ‘사45:11-12’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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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26

 

 

AC.49, 심화 4, ‘겔1:26’

AC.49.심화 4. ‘겔1:26’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겔1:26) Above the expanse, as the appearance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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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7:13-14

 

 

AC.49, 심화 5, ‘단7:13-14’

AC.49.심화 13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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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4:30

 

 

AC.49, 심화 6, ‘마24:30’

AC.49.심화 6. ‘마24:30’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24:30) Then shall they s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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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 창1:24-25,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여섯 번째 상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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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대가 아직 나한테 용서를 구하지 않고 있어도?

 

상대가 아직 저에게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있는데, 무조건 제 쪽에서 먼저 용서해야 하나요?

 

이건 매우 현실적인 질문이고, 동시에 다섯 번째 상태와 여섯 번째 상태의 차이가 실제 삶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상대가 용서를 구하지 않았더라도 마음으로는 미리 용서해야 하지만’, 관계의 회복까지 서둘러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내면의 용서와 외적 관계의 처리에는 구분이 필요합니다.’

 

먼저 ‘마음으로 용서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것은 ‘괜찮다, 아무 일도 아니다’라고 넘기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상대의 잘못을 정당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상대를 향한 미움과 복수의 의지를 내려놓고, 그 사람을 주님의 질서 안에서 다시 회복될 수 있는 존재로 바라보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이 한 일은 잘못이지만, 나는 당신을 미워하는 상태에 머물지 않겠다’는 선택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섯 번째 상태로 가는 방향’, 곧 사랑이 중심이 되는 움직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균형이 있습니다. 마음으로 용서했다고 해서, 곧바로 모든 관계를 이전과 동일하게 회복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상대가 여전히 같은 태도를 유지하고 있고, 상처를 반복할 가능성이 있다면, ‘지혜롭게 거리를 두고, 질서를 세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이 진리와 함께 작용하는 상태’입니다. 즉,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옳은 방식으로 관계를 다루는 것’도 사랑입니다.

 

이걸 조금 더 실제적으로 풀어 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 사람이 사과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때 선택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마음속에 계속 분노를 품고, ‘언젠가 갚아주겠다’는 상태로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일은 잘못된 것이지만, 나는 이 사람을 미워하는 상태에 머물지 않겠다’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후자가 ‘마음의 용서’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그 사람과 이전처럼 가까이 지내거나,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필요하다면 ‘분명한 선을 긋고, 관계를 조정하는 것’이 오히려 바른 질서입니다.

 

여기서 다섯 번째 상태와 여섯 번째 상태의 차이가 다시 드러납니다.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용서해야 하니까 용서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애씁니다. 그래서 여전히 마음 안에 갈등이 큽니다. 그러나 여섯 번째 상태로 갈수록, 점점 이렇게 됩니다. ‘나는 미워하고 싶지 않다. 주님이 나를 다루신 것처럼,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 그래서 용서가 점점 ‘의무가 아니라 방향’이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진리도 함께 있기 때문에, ‘무질서하게 관계를 허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질문에 대한 가장 균형 잡힌 답은 이것입니다. ‘마음에서는 먼저 용서하되, 관계에서는 지혜롭게 행하라.’ 이것이 선과 진리가 함께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대를 미워하지 말라고 하시지만, 아무렇게나 관계를 유지하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용서는 상대의 반응과 무관하게 내 마음에서 먼저 시작되어야 하지만, 관계의 회복은 진리와 지혜에 따라 분별하며 이루어져야 합니다.’

 

 

 

AC.48, 창1:24-25,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여섯 번째 상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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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 심화 1, ‘다섯 번째 상태와 여섯 번째 상태’

AC.48.심화 1. ‘다섯 번째 상태와 여섯 번째 상태’ AC.48에 의하면, 다섯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이해에 속한 신앙의 원리로 말하며,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한다’ 하고, 여섯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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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섯 번째 상태와 여섯 번째 상태

 

AC.48에 의하면, 다섯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이해에 속한 신앙의 원리로 말하며,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한다 하고,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과,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한다고 하네요. 뭐가 다른 거지요?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이해가 주된 반면,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의지가 주라는 말 같은데, 좀 더 명료하게 설명해 주세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다섯 번째 상태는 이해(진리)가 앞서고 의지는 아직 따라오는 단계이고, 여섯 번째 상태는 의지(사랑)가 중심이 되어 이해와 행동까지 자연스럽게 이끄는 단계’’입니다. 겉으로 보면, 둘 다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한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지만, ‘그 근원과 무게 중심이 완전히 다릅니다.’

 

먼저 다섯 번째 상태를 보겠습니다. 여기서는 사람이 ‘이해에 속한 신앙’, 즉 ‘무엇이 옳은가’를 비교적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진리를 가지고 말하고, 판단하고, 심지어 스스로를 설득하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한다’고 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즉, 이 단계의 사람은 이렇게 움직입니다. ‘이게 옳으니까 이렇게 해야 한다.’ 그래서 실제로 선을 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직 특징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행동의 중심이 알고 있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어떤 사람이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화가 나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용서해야지.’ 그래서 참고, 노력하고, 실제로 용서하려 합니다. 이것은 분명 선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여전히 ‘싸움과 긴장, 그리고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는 이해가 주도하고, 의지는 그 이해를 따라가며 형성되고 있는 중입니다.

 

이제 여섯 번째 상태를 보겠습니다. 여기서는 상황이 바뀝니다. 이제 사람은 더 이상 ‘이게 옳으니까 해야 한다’에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대신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상태’가 됩니다. 즉, 의지, 곧 사랑이 중심이 됩니다. 그래서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더 이상 부담이나 의무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흐름’이 됩니다.

 

같은 예로 보면 이렇게 됩니다. 이전에는 ‘용서해야 하니까 참자’였다면, 이제는 ‘저 사람을 이해하고 싶다, 용서하고 싶다’가 됩니다. 그래서 행동이 훨씬 부드럽고 자연스럽고, 억지스럽지 않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이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의지 안으로 들어가 하나가 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말할 때도 단순한 논리가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두 상태의 차이를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다섯 번째 상태는 진리가 사랑을 이끌어 가는 단계이고,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랑이 진리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단계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습니다. 다섯 번째 상태는 여전히 ‘자기 자신을 확증한다는 표현’이 들어갑니다. 즉, 아직은 어느 정도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내가 이렇게 한다’는 의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여섯 번째 상태로 가면, 점점 이 중심이 바뀌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사랑이 중심이 되고, 사람은 그것을 받아 행하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여섯 번째 상태는 단순히 더 착한 상태가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상태’입니다.

 

처음에는 옳은 것을 알기 때문에 선을 행하지만, 나중에는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행하게 됩니다.’

 

다섯 번째 상태는 이해가 주도하여 선을 행하는 단계이고, 여섯 번째 상태는 의지, 곧 사랑이 중심이 되어 진리와 행동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단계입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미묘한 차이가 바로 거듭남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입니다.

 

 

 

AC.48, 심화 2, ‘상대가 나한테 아직 용서를 구하지 않고 있다면’

AC.48.심화 2. ‘상대가 나한테 아직 용서를 구하지 않고 있다면’ 상대가 아직 저에게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있는데, 무조건 제 쪽에서 먼저 용서해야 하나요? 이건 매우 현실적인 질문이고,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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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 창1:24-25,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여섯 번째 상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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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24, 25)

 

AC.48

 

이로부터 사람이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에 있을 때가 분명해집니다. 이때 사람은 이해에 속한 신앙의 원리로 말하며,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합니다. 그가 이때 내놓는 것들은 생명이 있는 것들이며, 그것들을 가리켜 바다의 물고기(fishes of the sea),하늘의 새(fowl of the heavens)라 합니다. 사람이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면, 이해에 속한 신앙과,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합니다. 그가 이때 내놓는 것을 생물(living soul),가축(beast)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때 그는 신앙으로뿐만 아니라 사랑으로도 행동하기 시작하므로,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라 하는 영적 인간이 됩니다. 이것이 지금 여기서 다루는 주제입니다. Hence then it appears that man is in the fifth state of regeneration when he speaks from a principle of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he true and in the good. The things then brought forth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 “fishes of the sea,” and the “fowl of the heavens.” He is in the sixth state, when from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and from love thence derived, which is of the will, he speaks truths, and does goods; what he then brings forth being called the “living soul,” and the “beast.” And as he then begins to act from love, as well as from faith,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 “image of God,” which is the subject now treated of.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 설명해 온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의 의미를 한 번에 정리해 주는 요약이자 전환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각 단계를 분리해서 설명해 왔지만, 이 글에서는 그 단계들이 어떻게 서로 이어지고, 무엇이 결정적인 차이인지 명확히 드러냅니다.

 

다섯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신앙의 원리로 말합니다. 이 신앙은 이해력에 속하며, 사람은 그 신앙을 통해 진리와 선을 확인하고 확증합니다. 이때 그의 사고와 말은 더 이상 무생물, 곧 못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것, 곧 움직이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그래서 ‘물고기’와 ‘’가 등장합니다. 이는 기억-지식과 이성적, 지적 사고가 이제 생명을 얻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여전히 그 중심이 이해력에 있습니다.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면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제 사람은 이해력의 신앙뿐 아니라, 그 신앙에서 나온 의지의 사랑으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다시 말해, 진리가 단지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사랑을 통해 삶으로 내려옵니다. 이때 등장하는 상징이 ‘생물’과 ‘짐승’(‘가축’)입니다. 이는 삶의 중심이 생각에서 애정과 행위로 옮겨졌음을 뜻합니다.

 

이 글에서 특히 중요한 점은, 여섯 번째 상태에서 사람이 ‘행동하기 시작한다’는 표현입니다. 앞선 단계들에서도 사람은 무언가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이해력의 차원, 곧 신앙의 확증과 말의 차원이었습니다. 이제는 사랑에서 비롯된 행동, 곧 의지 차원에서의 삶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생명의 실제적인 시작입니다.

 

그래서 이 단계의 사람을 ‘영적인 사람’, 곧 ‘영적 인간’이라 하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형상이라는 말은 단순한 닮음이 아니라, ‘작동 방식의 닮음’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사랑으로 진리를 통해 행하시는 것처럼, 이제 이 사람도 사랑과 신앙이 하나가 되어 움직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는 삶입니다.

 

이 글은 거듭남의 핵심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신앙만으로 말할 때는 아직 다섯 번째 상태이고,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작동하여 삶으로 드러날 때 여섯 번째 상태에 이릅니다. 그리고 이때 비로소 사람은 주님의 형상을 따라 사는 영적 인간이 됩니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가 결국 인간이 어떻게 ‘사람답게’ 되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임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글입니다.  

 

 

심화

 

1. ‘다섯 번째 상태와 여섯 번째 상태

 

 

AC.48, 심화 1, ‘다섯 번째 상태와 여섯 번째 상태’

AC.48.심화 1. ‘다섯 번째 상태와 여섯 번째 상태’ AC.48에 의하면, 다섯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이해에 속한 신앙의 원리로 말하며,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한다’ 하고, 여섯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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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대가  아직 나한테 용서를 구하지 않고 있어도?

 

 

AC.48, 심화 2, ‘상대가 나한테 아직 용서를 구하지 않고 있다면’

AC.48.심화 2. ‘상대가 나한테 아직 용서를 구하지 않고 있다면’ 상대가 아직 저에게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있는데, 무조건 제 쪽에서 먼저 용서해야 하나요? 이건 매우 현실적인 질문이고,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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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 창1:24-25, ‘거듭남의 순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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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심화

 

4. 갑작스런 repentance의 등장

 

AC.29 두 번째 단락에, This is the third successive stage of the regeneration of man, being his state of repentance,’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부분이 좀 어리둥절합니다. 갑자기 repentance가 나오기 때문인데... 이게 어떻게 연결이 되는 건가요?

 

AC.29의 문맥을 처음 읽으면 앞에서는 식물 이야기—‘tender herb’, ‘herb yielding seed’, ‘tree bearing fruit’—를 하다가 갑자기 ‘repentance의 상태’라는 말이 등장하기 때문에 논리 점프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1장 해석 구조를 보면 이것은 갑작스러운 전환이 아니라 ‘앞 단계에서 준비된 상태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이 연결을 이해하려면 창세기 1장에서 말하는 거듭남의 초기 단계들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첫 부분을 인간 거듭남의 초기 과정으로 설명하면서 대략 이런 흐름을 말합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완전히 혼돈과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다음 진리의 빛이 조금씩 들어옵니다. 그리고 진리와 거짓이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이런 과정을 지나면 사람 안에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 곧 식물로 상징되는 단계가 나타납니다. 바로 여기서 ‘herb’와 ‘tree’가 등장합니다. 즉 사람 안에 처음으로 선과 진리의 싹이 나타나는 단계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repentance의 상태’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처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고 선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할 때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상태를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 자신의 생각과 삶이 괜찮다고 여겼던 것들이 진리의 빛 속에서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순간에 사람은 처음으로 ‘자기 삶을 돌아보고 바꾸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repentance입니다.

 

여기서 repentance라는 말을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의미—큰 죄를 뉘우치며 눈물로 회개하는 사건—으로 이해하면 연결이 어려워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repentance는 훨씬 더 기본적인 의미입니다. 그것은 ‘자기 삶을 돌아본 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보고, 그것을 바꾸려는 의지’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이 자신의 삶을 그 진리에 맞추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AC.29의 식물 비유와 repentance는 실제로 매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tender herb’는 사람이 처음으로 진리를 듣고 마음이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herb yielding seed’는 그 진리가 생각 속에서 자라 다른 진리를 낳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tree bearing fruit’는 그 진리가 실제 삶 속에서 행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진리에 따라 삶을 바꾸기 시작하는 바로 그 과정이 ‘repentance’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식물 단계 전체를 ‘repentance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씀을 듣다가 ‘나는 지금까지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듭니다. 이것이 tender herb입니다. 그다음 그는 말씀을 더 배우면서 자신의 행동들을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내가 왜 이렇게 말했을까?’, ‘이 행동은 옳았을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이것이 herb yielding seed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실제 행동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쉽게 화를 냈다면 이제는 참아 보려고 노력합니다. 이전에는 남을 비판했다면 이제는 말을 조심합니다. 이것이 tree bearing fruit입니다. 바로 이 전체 과정이 repentance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AC.29에서 repentance가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식물의 성장 비유가 바로 repentance의 실제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기 시작할 때, 그 순간이 바로 회개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회개를 거듭남의 매우 초기 단계로 보고 있습니다. 아직 완전히 거듭난 상태는 아니지만,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삶을 진리의 빛 속에서 고치기 시작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그것을 ‘repentance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회개는 어떤 특별한 감정 사건이 아니라, 진리를 알게 된 사람이 ‘자기 삶을 그 진리에 맞추어 바꾸기 시작하는 과정’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식물이 처음 자라는 장면이 바로 그 회개의 시작을 상징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AC.29, 창1:11-13,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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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심화 3,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단계에서도 ‘생명 없는’(inanimate) 상태?

AC.29.심화 3.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단계에서도 ‘생명 없는’(inanimate) 상태? 위 심화 1의 세 번째 단계인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 단계, 즉 ‘진리가 삶의 성품이 되며, 선한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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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단계에서도 생명 없는(inanimate) 상태?

 

위 심화 1의 세 번째 단계인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 단계,  진리가 삶의 성품이 되며, 선한 행동이 열매처럼 자연스럽게 나오는 단계에서도 여전히 생명 없는(inanimate) 상태일 수가 있나요?

 

이 질문은 사실 창세기 1장 해석에서 매우 미묘하지만 핵심적인 지점을 건드립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 단계에서도 여전히 어느 정도 inanimate’, 곧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는 아닐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해석 구조를 보면 이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먼저 ‘inanimate’라는 표현의 의미를 정확히 짚을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animate’와 ‘inanimate’는 단순히 활동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다고 느끼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어떤 선한 일을 하고 진리를 말하며 실제 삶에서 선한 열매를 맺고 있어도, 그 사람이 그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여긴다면’,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라고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선이 아무리 아름다워 보일지라도, 그것이 여전히 ‘나의 선’이라는 의식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 상태는 완전히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자기 생명처럼 보이는 상태’, 곧 어느 의미에서는 ‘inanimate’에 가까운 상태입니다.

 

이 점에서 창세기 1장의 식물 단계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식물들을 설명할 때 ‘‘living soul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herb’, ‘tree’, ‘fruit’ 같은 식물적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의도적인 것입니다. 식물은 생명이 있지만 ‘자기 스스로 움직이거나 의식적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영적 의미에서, 사람이 선과 진리를 가지고 있고 실제로 선한 삶을 살고 있어도 아직 그 선이 ‘자유로운 사랑에서 살아 움직이는 상태까지는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이 단계는 선이 존재하지만, 아직 완전히 ‘animate’ 상태는 아닌 단계로 이해됩니다.

 

어떤 성도가 오랜 신앙생활을 통해 매우 성실하고 선한 삶을 살고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정직하며 교회에서도 헌신적으로 봉사합니다. 그의 삶에는 분명히 ‘fruit’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이런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그래도 꽤 선하게 살아왔다’, ‘내가 이렇게 봉사해 왔다.’ 이것은 교만한 마음이라기보다 자연스러운 자기의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 상태에서도 여전히 선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는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다음 단계로 이어지는 이유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식물 다음에 등장하는 것이 ‘‘living soul’, 즉 살아 있는 생명’입니다. 이것은 동물 단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동물은 ‘사랑과 애정(affection)을 상징합니다. 즉 사람이 선과 진리를 단순히 알고 실천하는 수준을 넘어, 그것을 ‘사랑 자체로 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진짜 ‘animate’ 상태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때 사람은 선을 행하면서도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걸 더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tree bearing fruit’ 단계는 매우 중요한 단계이지만 아직 최종 단계는 아닙니다. 이 단계에서는 진리가 실제 삶의 열매로 나타나지만, 사람은 여전히 어느 정도는 ‘자기 자신이 그 선을 행한다고 느끼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다음 단계로 들어가면 사람은 점점 더 분명히 깨닫습니다. ‘내가 하는 선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통해 하시는 선이구나.’ 그때 선은 더 이상 식물처럼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 움직이는 생명’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구조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먼저 진리가 싹트는 단계가 있고, 그다음 진리가 열매를 맺는 삶의 단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이 완전히 살아 있는 생명이 되기 위해서는 그 선이 ‘사랑에서 나오고, 또한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하는 상태’로 들어가야 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식물의 상징이 끝나고 ‘living soul’이 등장합니다.

 

사람은 선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이 아직 ‘내가 하는 선’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열매가 맺힌 단계이지만 아직 완전히 살아 있는 단계는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점점 더 빛 속으로 들어가면, 그 선이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알게 되고 그때 선은 진짜 생명처럼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창세기 1장의 식물에서 동물로 넘어가는 변화가 바로 이 차이를 보여 준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AC.29, 심화 4, ‘갑작스런 repentance의 등장’

AC.29.심화 4. ‘갑작스런 repentance의 등장’ AC.29 두 번째 단락에, ‘This is the third successive stage of the regeneration of man, being his state of repentance,’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부분이 좀 어리둥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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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심화 2, ‘각기 종류대로’

AC.29.심화 2. ‘각기 종류대로’ ‘각기 종류대로’라는 표현이 계속 나오는데요, 그냥 다양한 종류의 채소, 나무라는 단순한 의미만은 아니겠지요? ‘각기 종류대로’라는 표현은 창세기 1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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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각기 종류대로

 

각기 종류대로라는 표현이 계속 나오는데요, 그냥 다양한 종류의 채소, 나무라는 단순한 의미만은 아니겠지요?

 

각기 종류대로’라는 표현은 창세기 1장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문자적으로만 보면 단순히 식물이 여러 종류로 나뉘어 있다는 뜻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훨씬 깊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종류(kind, genus, species)라는 말은 단순한 생물학적 분류가 아니라 ‘선과 진리의 질서와 구별’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이 창조하시는 것은 무질서한 혼합이 아니라, 각각 고유한 성질을 가진 선과 진리들이 ‘자기 질서 속에서 자라도록 하는 것’입니다.

 

먼저 자연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연 세계에서도 모든 생명은 ‘종류대로’ 번식합니다. 밀은 밀을 낳고, 포도는 포도를 낳습니다. 이것은 자연의 질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자연의 질서가 사실은 더 깊은 영적 질서를 반영한다고 말합니다. 즉 인간의 영적 삶에서도 ‘각 선과 진리는 그 고유한 성질에 따라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친구 사이의 우정, 이웃을 돕는 자비,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 등이 모두 다릅니다. 이 사랑들은 서로 관련되어 있지만 동일하지 않습니다. 각각 고유한 성질과 역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 의미에서 ‘각기 종류대로’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도 이 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선을 배우고 진리를 받아들일 때, 그것들이 무질서하게 섞이면 건강한 영적 생명이 자라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지만,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선한 감정은 있지만 진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를 ‘혼합’ 또는 ‘혼동’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때는 선과 진리가 ‘자기 종류와 질서에 맞게 자라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 계속 ‘각기 종류대로’라는 표현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실제 신앙생활에서도 이 원리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진리를 배우는 기쁨이 먼저 자랍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이웃을 돕는 사랑이 먼저 자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는 경건한 예배의 마음이 강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서로 다른 ‘종류’의 선과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온 것이라면 각각의 자리에서 조화를 이루며 성장합니다. 이것이 ‘각기 종류대로 열매 맺는다’는 의미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의미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섞이지 않는다는 원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선과 진리는 서로 결합하지만, 선과 악은 결합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영계에서는 모든 것이 결국 자기 ‘종류’에 따라 나뉘게 됩니다. 선한 사랑은 선한 사랑과 함께 있고, 이기적인 사랑은 그와 같은 것들과 함께 모입니다. 이 점에서도 ‘각기 종류대로’라는 표현은 단순한 식물 분류가 아니라 ‘영계의 근본 질서’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때 모든 사람을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혜가,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가, 어떤 사람에게는 봉사의 마음이 더 두드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주님에게서 온 선과 진리라는 공통된 뿌리 안에서 자랍니다. 이것이 바로 ‘각기 종류대로’라는 표현이 가리키는 깊은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단순히 ‘여러 종류의 채소와 나무가 있다’는 자연 묘사가 아니라, ‘주님이 인간의 영적 삶을 질서 있게 자라게 하시는 방식’을 보여 주는 말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반복되는 이 표현은 결국 한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주님이 창조하시는 모든 생명은 무질서하게 섞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고유한 성질과 자리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AC.29, 심화 3,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단계에서도 ‘생명 없는’(inanimate) 상태?

AC.29.심화 3.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단계에서도 ‘생명 없는’(inanimate) 상태? 위 심화 1의 세 번째 단계인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 단계, 즉 ‘진리가 삶의 성품이 되며, 선한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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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심화 1, ‘tender herb’, ‘herb yielding seed’ 및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에 대한 실

AC.29.심화 1. ‘tender herb’, ‘herb yielding seed’ 및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에 대한 실제 예 AC.29의 ‘tender herb’, ‘herb yielding seed’ 및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에 대한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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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심화

 

1. tender herb’, herb yielding seed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에 대한 실제 예

 

AC.29 tender herb’, herb yielding seed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에 대한 실제 예를 들어주세요. 거듭남 가운데 있는 한 개인에 있어 어떤 게 tender herb이고, 어떤 게 herb yielding seed인지, 그리고 어떤 모습이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인지 말이지요.

 

AC.29에서 나오는 ‘tender herb’, ‘herb yielding seed’,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는 식물 비유이지만, 실제로는 ‘거듭남 과정에서 선과 진리가 자라는 단계’를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식물들을 인간 영혼 안에서 자라는 영적 상태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실제 한 사람의 신앙 경험 속에서 보면 훨씬 이해가 쉬워집니다.

 

먼저 ‘tender herb’입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막 돋아난 연한 싹 같은 상태’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사람이 아직 진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선한 감정이나 진리를 향한 마음이 처음으로 생깁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어느 날 설교를 듣다가 ‘그래,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는 마음이 처음으로 생깁니다. 또는 ‘내 삶이 조금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아직 그 사람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깊이 알지 못합니다. 그저 마음이 조금 움직였을 뿐입니다. 이런 상태가 바로 ‘tender herb’입니다. 어린아이의 순진함이나, 신앙 초기에 생기는 막연한 선한 마음도 여기에 속합니다. 아직 약하고 쉽게 흔들리지만 ‘생명의 시작’이 이미 있는 상태입니다.

 

그다음이 ‘herb yielding seed’입니다. 여기서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진리가 조금씩 이해되고 그것이 다시 다른 진리를 낳을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예를 들어 아까의 사람을 생각해 보면, 처음에는 막연히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배우면서 ‘왜 미워하면 안 되는지’, ‘주님이 왜 사랑을 말씀하셨는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또 다른 생각을 낳습니다. ‘그러면 나는 직장에서 이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내 가족에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식으로 진리가 계속 확장됩니다. 이것이 바로 ‘seed’를 가진 상태입니다. 즉 ‘한 진리가 다른 진리를 낳는 상태’입니다. 목회적으로 보면 성도들이 말씀을 듣고 삶 속에서 적용하기 시작하는 단계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마지막이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진리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삶의 성품이 됩니다’. 이제 그 사람은 ‘사람을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리를 생각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행동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자신을 공격해도 이전처럼 바로 분노가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이해하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이 그 사람에게서 ‘열매처럼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여기서 ‘fruit’는 실제 선한 행동과 삶의 열매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seed is in itself’라는 표현은 그 선이 다시 다른 선을 낳을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그 사람의 삶 자체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새로운 선을 낳는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의 태도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변화되거나, 그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신앙의 본보기가 되는 경우입니다.

 

어떤 성도가 처음 교회에 나와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지고 ‘사람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tender herb’입니다. 그다음 그는 말씀을 배우면서 왜 사랑과 봉사가 중요한지 이해하게 되고, 구체적으로 교회 봉사나 이웃 돕기에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herb yielding seed’입니다. 시간이 더 지나면서 그는 봉사를 의무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기쁨으로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줍니다. 이것이 ‘tree bearing fruit’의 상태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 세 단계가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성장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작은 싹처럼 시작하고, 그다음에는 진리가 확장되며, 마지막에는 삶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가 식물 비유를 사용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식물처럼 영적 생명도 ‘점진적으로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29의 세 표현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tender herb’는 선과 진리를 향한 ‘첫 마음의 싹’, ‘herb yielding seed’는 이해된 진리가 계속 ‘새 진리를 낳는 상태’,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는 그 진리가 삶 속에서 ‘선한 열매가 되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이 바로 이런 식으로 사람 안에서 자라난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AC.29, 심화 2, ‘각기 종류대로’

AC.29.심화 2. ‘각기 종류대로’ ‘각기 종류대로’라는 표현이 계속 나오는데요, 그냥 다양한 종류의 채소, 나무라는 단순한 의미만은 아니겠지요? ‘각기 종류대로’라는 표현은 창세기 1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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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창1:11-13,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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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5 ‘돌아온 탕자’ 비유에서도 아버지가 은밀히 사람을 보내 둘째를 보살필 수 있었을 것 같은데도 그리 하지 않은 이유 역시 아래 SC.49와 같은 걸로 봐도 되나요?

 

네, 큰 틀에서는 그렇게 보셔도 됩니다. 다만 이 비유는 단순히 ‘섭리를 기다리셨다’는 설명을 넘어서, ‘회개와 신앙의 본질적 구조’를 드러내는 장면이기 때문에, 그 이유를 한 걸음 더 깊이 이해하시는 것이 훨씬 유익합니다.

 

먼저 누가복음 15장의 이 비유에서 아버지가 사람을 보내지 않은 것은 단순한 무관심이나 방치가 아니라, ‘사랑의 방식이 강제가 아니라 자유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은밀히 사람을 보내 아들의 삶을 관리하거나 도왔다면, 아들은 여전히 자기 욕망 속에서 살면서도 고통을 충분히 자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이야기에서는 ‘이에 스스로 돌이켜(15:17)라는 결정적 전환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외부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변화가 아니라, ‘내면에서 일어난 자발적 각성’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핵심입니다.

 

스베덴보리적 관점으로 보면, 인간의 거듭남은 반드시 ‘자유와 이성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선을 주시고 이끄시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도록, 즉 스스로 선택한 것처럼 이루어지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외적으로 개입하여 억지로 끌어당기는 방식은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사람을 보내지 않은 것은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랑이 너무 깊어서, 아들이 진짜로 돌아오도록기다린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요셉 이야기에서 말씀드린 ‘재회보다 먼저 변화’라는 질서와 정확히 같은 결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고통의 역할입니다. 탕자는 돼지 치는 자리까지 내려가고, 배를 채우지 못하는 궁핍을 겪습니다. 이 과정이 없었다면 그는 결코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뒤에서 계속 돌봐주었다면, 그는 ‘멀리 떠난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어느 정도 편안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러면 회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즉, 아버지가 개입하지 않은 것은 방치가 아니라, ‘회개를 가능하게 하는 환경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 이야기에서 형제들이 기근을 겪도록 허락된 것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두 이야기에는 중요한 차이도 있습니다. 요셉 이야기에서는 ‘섭리의 역사’가 중심이라면, 탕자 비유에서는 ‘아버지의 마음’이 더 전면에 드러납니다. 아버지는 보내지 않지만, 대신 ‘아직도 거리가 먼데 측은히 여겨 달려가’ 맞이합니다. 즉, ‘기다림과 환대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보내지 않는 것은 사랑의 부재가 아니라, 돌아올 때 완전히 받아주기 위한 준비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면 개입하고 싶고, 도와주고 싶고, 문제를 빨리 해결해 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때로 우리 생각과 다르게 나타납니다. ‘주님은 우리를 대신 살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돌아오도록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도와주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깊은 방식으로 돕고 계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탕자의 아버지가 사람을 보내지 않은 이유도 요셉 이야기와 같은 맥락, 곧 ‘변화를 먼저 이루시는 주님의 질서’로 이해하셔도 좋습니다. 다만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덧붙이시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기다림은 차가운 방관이 아니라, 언제든지 달려갈 준비가 된 사랑의 기다림’이라는 점입니다.

 

 

 

SC.49, ‘요셉이 사사로이 가나안 혈육들을 챙기지 않은 이유’

요셉은 총리가 된 이후 얼마든지 사람을 보내 사사로이 가나안 아버지를 돌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은 이유가 있을까요? 이 질문은 단순한 가족사 문제가 아니라, ‘요셉 이야기 전체의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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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8.심화

 

1. 스베덴보리가 AC 초기부터 여러 인용 구절의 속뜻을 알 수 있었던 이유

 

AC.28을 보면,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 그러니까 이사야, 학개, 스가랴, 시편 등에서 여러 구절들을 인용하는데, 그것도 겉뜻이 아닌 속뜻으로 인용합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요? 실제로 주석한 성경은 창세기와 출애굽기 및 계시록 뿐인데 말입니다. 창세기도 28번 글이면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한 거고 말이지요.곁에서 주님이 구절들을 생각나게 하시면서 계속 풀어 주고 계셨던 건가요?

 

실제로 ‘Arcana Coelestia’를 읽다 보면 창세기 초반인데도 이미 이사야, 예레미야, 시편, 복음서 등 여러 곳의 말씀을 자유롭게 인용하면서 그것들의 속뜻을 설명합니다. 그래서 많은 독자들이 ‘이 많은 연결을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알았을까?’라는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스베덴보리의 계시 이해와 집필 방식, 그리고 말씀의 구조에 대한 그의 인식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먼저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성경의 속뜻을 ‘연구’만으로 발견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여러 곳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는 인간의 학문적 연구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열려야만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설명을 ‘주님의 자비로 보여진 것’ 또는 ‘주님의 자비로 알게 된 것’이라는 표현으로 자주 소개합니다. 즉 그는 자신이 해석 체계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영계의 경험과 주님의 조명을 통해 알게 된 것을 기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받아쓰기(dictation) 방식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글을 쓸 때, 주님이 곁에서 문장을 그대로 불러 주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조명(illumination)과 ‘내적 지각(perception)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즉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그 안에 담긴 영적 의미가 마음에 분명하게 보이도록 밝혀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실제로 성경을 읽으면서 설명을 써 내려갔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두 번째 요소가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이 ‘전체적으로 하나의 일관된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말씀은 전부 상응(correspondence)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한 번 그 상응의 질서를 알게 되면 다른 구절들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예를 들어, ‘’는 사랑을, ‘’은 신앙을, ‘’은 신앙의 지식들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사야든 시편이든 복음서든 어디에서 같은 상징이 나와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다른 예언서 구절들이 인용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서 ‘’이 등장하면, 예언서에서 ‘’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도 함께 연결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주석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상응 구조를 보여 주는 방식’입니다. 다시 말해 스베덴보리는 한 구절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영적 언어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생각해야 할 점은, 스베덴보리가 이미 매우 깊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계시 이전에도 성경을 오랫동안 연구했습니다. 그의 일기와 기록을 보면, 성경을 매우 정밀하게 읽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구절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그는 그 구절들의 ‘내적 의미를 보는 눈이 열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님이 곁에서 구절을 떠올리게 해 주셨느냐’라는 부분은 어느 정도 맞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비슷한 경험을 여러 번 기록합니다. 어떤 구절을 읽다가 다른 구절이 연결되어 떠오르고, 그것이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게 되는 경험입니다. 그는 이것을 자신의 능력이라기보다 ‘주님의 인도와 조명’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AC.28 같은 곳에서 여러 예언서를 자유롭게 인용하는 것은, 창세기 주석이 아직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말씀 전체가 하나의 영적 언어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예언서의 상징도 설명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이 인용들은 단순한 참고 구절이 아니라 ‘상응의 보편성을 보여 주는 증거’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을 연구하여 상징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 공통으로 흐르는 영적 언어를 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창세기를 설명할 때도 자연스럽게 이사야나 시편의 구절들이 연결됩니다. 이는 성경 전체가 하나의 동일한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를 읽다 보면 창세기 주석이면서 동시에 ‘성경 전체의 영적 사전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창세기의 한 단어를 설명하는 순간, 같은 상징이 사용된 다른 말씀들도 함께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AC.28, 창1: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창1:10)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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