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위‘소유 의식이 천천히 풀어지는 과정’중‘천천히 풀어지는’을 좀 더 분명하게 설명드리면 이렇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이건 내 것이 아니다’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거의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내 것’이라고 붙잡습니다. 재물만이 아니라, 내 생각, 내 판단, 내 경험, 심지어 내 신앙까지도 그렇게 여깁니다. 그래서 소유 의식은 단번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인식이 바뀌면서 서서히 풀리는 것’입니다.
처음 단계에서는 ‘이건 주님의 것이다’라는 말을 ‘배워서 말합니다’.AC.123에서 말하는 영적 인간의 단계입니다. 이때는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래도 내 것 같은데...’ 하는 감각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그렇게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다음 단계에서는 작은 경험들이 쌓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잘했다고 생각했던 일이 사실은 주님의 인도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는다든지, 붙잡고 있던 것이 오히려 내려놓을 때 더 평안해진다든지 하는 경험입니다. 이런 것들이 반복되면서, ‘내 것’이라는 감각이 조금씩 느슨해집니다.
그다음 단계가 되면, 사람 안에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더 이상 애써 ‘주님의 것이다’라고 말하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느껴집니다. 이때가 천적 상태의 시작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이 ‘생각’이 아니라 ‘보이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소유하려는 긴장이 사라지고, 대신 맡겨진 것을 돌보는 자유가 생깁니다.
그래서 ‘소유 의식이 풀린다’는 말은, 무언가를 억지로 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붙잡고 있던 마음의 힘이 서서히 느슨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주님의 것임을 아는 평안’이 들어옵니다.
결국 이것은 훈련 이전에 ‘질서의 회복 과정’입니다. ‘내가 중심’이던 상태에서 ‘주님이 근원’이라는 질서로 돌아갈 때, 소유 의식은 자연스럽게 힘을 잃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강요로 되는 일이 아니라, 말씀과 삶 속에서 점차 열리는 과정입니다.
저는 스베덴보리를 알기 전,그러니까 이AC를 읽기 전,좀 특이한 단계를 밟았는데,그것은 수도원이었습니다.수도원 공부를 하게 되면 자연스레 수도사들,곧 보통‘성인’이라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요,그러니까 성인전을 통해 많이 접하게 되지요.성인들의 몇 가지 일반인과 다른 특징들이 있는데,그중 가장 두드러진 게 바로‘소유’에 대한 태도입니다.물론 한 나라 왕이었어도 성인인 케이스도 있지만,거의 대부분은 자기가 가진 모든 소유로부터 물러남을 통해서 이 삶을 시작합니다.저는 수도원의 권유에도 불구,수도원에 들어가 산 적은 없고,단지 잦은 왕래와‘순종,겸손,청빈,정결 및 기도와 노동의 균형’공부만 한 케이스여서 반쪽짜리일 수 있지만,어쨌든 덕분에 이‘소유’에 대한,이 물질만능 시대에 나름 요동치 않는 관점을 가질 수 있었고,그래서인지 개신교 목사임에도 불구,이 스베덴보리의 저작들,특히 그 기초인 이AC를 읽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제 질문은 이것입니다.그렇다면,저희 교회 성도들에게도 어느 정도는 초기 입문 과정에서 이 수도원 과정,즉‘성인전 과정’을 어떤 식으로든 도입하는 게 이런 과정 없이 갑자기 쑥 들어오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제 경우를 보면,만일 저에게 이런 중간 과정이 없었으면,그러니까 저를 잘 아시는 주님이 이런 과정을 허락하지 않으셨으면,저는 스베덴보리 읽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하거든요...
목사님의 문제 제기는 매우 실제적이지만,그대로‘수도원식 과정’을 도입,그대로 옮기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왜냐하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핵심은‘외적 소유를 끊는 형식’이 아니라, ‘내적 소유 의식이 어떻게 바뀌느냐’이기 때문입니다.만일 형식이 먼저 들어오면,오히려 사람들이‘나는 내려놓았다’는 새로운 자기 의를 만들 가능성이 큽니다.그러므로 방향은‘수도원 도입’이 아니라, ‘수도원에서 길러지는 내적 태도를 교회 안에서 어떻게 자연스럽게 형성할 것인가’가 되어야 합니다.
목사님께서 겪으신 과정이 왜 유익했는지를 보면 답이 보입니다.성인전은 단순히 금욕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사람 안에 있는‘내 것’이라는 감각을 서서히 흔들어 놓았습니다.누군가는 재물을 내려놓고,누군가는 명예를 내려놓고,누군가는 자기 뜻을 내려놓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접하면서,사람은‘아,인간은 소유 없이도 살 수 있는 존재구나’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받아들이게 됩니다.이 단계가 없으면,AC.122–123에서 말하는‘소유하지 않음’은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그래서 목사님처럼 미리 그 토양이 형성된 경우에는,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낯설지 않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성인전에서의 내려놓음은 때로‘외적 단절’의 형태로 나타나지만,스베덴보리는 그것을‘내적 귀속의 변화’로 설명합니다.즉,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그것을‘내 것’으로 여기느냐,아니면‘주님께서 맡기신 것’으로 여기느냐입니다.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길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충분히 실천 가능합니다.이 점을 놓치고 수도원 형식만 도입하면,오히려 교회 성도들에게는 부담과 거리감이 커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실제적인 방향은 이렇습니다.성도들에게 곧바로‘소유하지 말라’고 가르치기보다,먼저‘누림과 소유의 차이’를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예를 들어,지금 가진 것들에 대해‘이것은 내 것인가,아니면 맡겨진 것인가’를 스스로 묻게 하고,작은 영역에서부터‘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연습’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이때 성인전은 매우 유익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다만 그것을‘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규범으로 제시하기보다, ‘‘이런 삶의 방향도 있다’는 창을 열어 주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단계입니다.AC.123이 보여주듯이,사람은 처음부터‘지각으로 아는 상태’에 들어가지 않습니다.대부분은‘말씀을 통해 배워서 인정하는 단계’에서 시작합니다.이 단계는 결코 낮은 것이 아니라,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그러므로 성도들에게는 먼저‘배워서 말하는 인정’을 충분히 하게 하고,그 위에 삶의 경험과 작은 실천을 통해 서서히‘지각으로 아는 상태’로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목사님의 통찰은 매우 정확합니다.중간 과정 없이 곧바로 들어가면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그러나 그 중간 과정은‘수도원이라는 형식’이 아니라, ‘성인전과 삶의 실천을 통해 소유 의식이 천천히 풀어지는 과정’으로 구현되어야 합니다.그렇게 할 때 성도들은 부담 없이,그러나 실제적으로,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삶’으로 자연스럽게 이끌릴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2:15)
AC.123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이 일반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의 것임을, 지각하기(perceive) 때문에 인정합니다. 영적 인간도 동일한 사실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이는 말씀으로부터 배웠기(learn) 때문에 입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적이며 육적인 인간은 이를 인정하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으며,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자기 것이라 부르고, 만일 그것을 잃게 된다면 자기 자신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The celestial man acknowledges, because he perceives, that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re the Lord’s. The spiritual man does indeed acknowledge the same, but with the mouth, because he has learned it from the Word. The worldly and corporeal man neither acknowledges nor admits it; but whatever he has he calls his own, and imagines that were he to lose it, he would altogether perish.
해설
이 단락은 AC.122에서 말한 ‘누림은 허락되었으나 소유는 허락되지 않았다’는 원리를, ‘세 부류의 인간 상태’를 대비시키며 아주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여기서 핵심은 무엇을 말로 고백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인식하고, 어디서부터 살아가느냐’입니다.
천적 인간은 ‘인정한다’고 말하지만, 그 인정의 근거는 배움이나 교리가 아니라 ‘지각’입니다. 그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따로 생각해서 결론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입니다’. 그래서 그의 인정은 선택이나 결단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인식의 결과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내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거의 생기지 않습니다.
영적 인간도 같은 말을 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방식은 다릅니다. 그는 말씀을 통해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말합니다. 즉, 그의 인정은 여전히 이해와 신앙의 차원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는 거짓이 아니며, 매우 귀한 단계이지만, 아직은 ‘지각의 즉각성’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입니다.
세 번째로 등장하는 세상적, 육적인 인간은, 앞의 두 부류와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는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인간의 내적 논리를 폭로합니다. 그는 자기가 가진 것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합니다. 그래서 소유를 잃는 것은 곧 존재의 붕괴로 느껴집니다.
이 대목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내가 가진 것 = 나’라는 등식이 성립할 때, 인간은 끊임없이 불안해집니다. 잃지 않기 위해 움켜쥐고,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방어하며, 더 가지기 위해 경쟁합니다. 이는 단순한 성격 문제가 아니라, ‘존재를 소유에 걸어 둔 상태’입니다.
이렇게 보면, AC.122에서 말한 ‘소유하지 않음’은 결핍이 아니라 해방입니다.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지각하기 때문에, 잃을 것이 없습니다. 그는 이미 자기 자신을 주님께 맡긴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세상적 인간은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항상 잃을 가능성 안에 살아갑니다.
이 단락은 이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의 긴장을 예고합니다. ‘내 것’으로 삼으려는 충동은, 결국 인간을 에덴 밖으로 밀어내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천적 질서는 ‘주님의 것임을 지각함’ 위에 서 있고, 타락은 ‘자기 것이라 부름’에서 시작됩니다.
AC.123은 이렇게 말합니다. 같은 고백을 하더라도, 지각에서 나오는 인정과 배움에서 나온 인정은 전혀 다르며, 소유를 자기 존재와 동일시하는 순간 인간은 이미 에덴의 질서를 벗어나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And Jehovah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창2:15)
AC.122
‘에덴동산’(garden of Eden)은 앞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천적 인간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게 하신 것’(till it and take care of it)은, 그가 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었으나, 그것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것들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By the “garden of Eden” are signified all things of the celestial man, as described; by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is signified that it is permitted him to enjoy all these things, but not to possess them as his own, because they are the Lord’s.
해설
이 단락은 지금까지 장황하게 펼쳐진 에덴의 구조와 네 강의 질서를, ‘인간의 태도와 위치’라는 한 문장으로 정리해 줍니다. 천적 인간에게 에덴동산은 어떤 특정한 기능 하나가 아니라, 사랑, 지혜, 지성, 이성, 기억 지식이 모두 질서 있게 살아 있는 ‘전 인격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 충만함의 절정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제한을 덧붙입니다.
‘경작하고 지킨다’는 표현은 흔히 인간의 수고와 책임을 뜻하는 말로 읽히지만, 여기서는 그보다 훨씬 섬세한 의미를 가집니다. 천적 인간은 동산을 만들어낸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동산 안에 ‘두어짐’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안에서 살고, 누리고, 돌볼 수는 있지만, ‘주인 행세를 할 수는 없습니다’.
이 점은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 그리고 ‘죽어 있는 상태’의 인간을 가르는 결정적 기준 중 하나입니다.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는 순간, 그러니까 ‘내 것, 내 소유다’, ‘내가 했다’고 여기는 순간, 질서는 흔들립니다. 천적 질서는 모든 선과 진리, 모든 지혜와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즉각적으로 지각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린다’와 ‘소유한다’는 이 단락의 핵심 대조입니다. 누림은 허락되었지만, 소유는 금지되었습니다. 이는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큰 자유입니다. 자기 것으로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에, 지킬 필요도 없고, 비교할 필요도 없으며, 빼앗길 두려움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고, 인간은 그 흐름 안에 머무를 뿐입니다.
이 단락은 창세기 2장 전체를 관통하는 태도를 미리 제시합니다. 이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한 명령도, 이 원리 위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은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주님의 선물’이며, 천적 인간은 그 선물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AC.122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적 인간에게 허락된 것은 충만한 누림이지만, 결코 소유가 아니며, 이 겸허한 질서 안에서만 에덴은 에덴으로 남는다고 말합니다.
1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신 자들은 모두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2모세가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그 마음에 여호와께로부터 지혜를 얻고 와서 그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를 부르매 (출36:1, 2)Filled with the spirit of God,in wisdom,in understanding,and in knowledge[scientia],and in all work. (Exod. 31:3; 35:31; 36:1–2)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출31:3)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출35:31)
이 구절들이AC.121에 인용된 이유는, ‘지혜–총명–지식’이라는 세 요소가‘서로 다른 차원이면서도 하나의 질서로 결합될 때에만 참된 영적 작업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성막 제작이라는 매우 구체적인 장면을 통해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스베덴보리는 이를 단순한 장인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인간 안에서 주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가에 대한‘내면 구조의 표상’으로 읽습니다.
먼저‘하나님의 영을 충만하게 하여’라는 표현이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지혜,총명,지식이 인간에게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유입된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이는 앞선AC.120에서 말한 바와 같이,기억 지식과 이성은 결코 근원이 아니며,반드시 위로부터의 흐름 안에 있을 때에만 참된 역할을 한다는 원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이제 세 용어의 질서가 중요해집니다.지혜는 사랑에서 나오는 가장 내적인 빛이며,총명은 그 빛이 이해 안에서 정리되고 분별되는 상태이고,지식은 그 모든 것이 외적으로 표현되고 실행될 수 있도록 하는 재료입니다.즉,지혜에서 시작된 것이 총명을 거쳐 지식으로 내려가‘실제 작업으로 구현되는 흐름’입니다.이 질서가 유지될 때,외적인 일조차도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거룩한 일’이 됩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그들은 단순히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지혜–총명–지식이 주님의 영 안에서 하나로 결합된 상태를 대표하는 인물들’입니다.그래서 성소의 모든 기구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성소는 인간 안의 거룩한 질서를 표상하는 곳이기 때문에,그것을 만드는 일 역시 같은 질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또한‘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지혜가 머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는 말은,이것이 단순한 이해나 정보가 아니라‘삶과 의지에 결합된 상태’임을 뜻합니다.그래서 그들은‘마음에 원하는 자들’로 불립니다.주님으로부터 받은 지혜는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 참여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이AC.121에서 가지는 의미는 분명합니다.인간 안의 기억 지식과 기술,그리고 외적 능력은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지혜와 총명 아래에 놓일 때에만 참된 기능을 한다’는 것입니다.기억 지식이 경계라 하더라도,그것이 지혜에서 흘러 내려온 질서 안에 있을 때에는,오히려 가장 구체적이고 아름다운 형태로‘성소를 짓는 일’에 사용됩니다.
정리하면,이 본문은 지혜,총명,지식이 각각 따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주님의 영 안에서 하나의 흐름으로 결합될 때,인간의 모든 외적 활동까지도 거룩한 질서 안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에AC.121에 인용된 것입니다.
13너희의 각 지파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인정 받는 자들을 택하라 내가 그들을 세워 너희 수령을 삼으리라 한즉,15내가 너희 지파의 수령으로 지혜가 있고 인정 받는 자들을 취하여 너희의 수령을 삼되 곧 각 지파를 따라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과 조장을 삼고(신1:13, 15)
이 구절이AC.121에 인용된 이유는, ‘지혜와 지식이 있는 자들’을 세워 백성을 다스리게 한다는 장면을 통해, 인간 안에서 ‘지성, 이성, 기억 지식이 어떻게 질서 있게 배열되어야 하는가’를 외적 역사 형식으로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장면을 단순한 행정 조직이 아니라, ‘내면 구조의 표상’으로 읽습니다.
먼저 ‘지혜와 지식이 있는 자들’이라는 표현이 핵심입니다. 여기서 지혜는 사랑에서 나오는 깊은 통찰, 곧 위로부터 오는 빛에 해당하고, 지식은 기억 지식과 경험의 축적을 의미합니다. 이 둘이 함께 언급된 것은, 인간 안에서 ‘위로부터 오는 것과 아래에서 쌓인 것이 결합되어야만 올바른 판단이 가능하다’는 질서를 보여줍니다. 어느 한쪽만으로는 참된 통치, 곧 삶의 인도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제 ‘천부장,백부장,오십부장,십부장’이라는 구조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군사 조직이 아니라, ‘질서의 단계적 배열’을 뜻합니다. 큰 단위에서 작은 단위로 내려가는 이 구조는, 인간 안에서도 더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질서가 흘러 내려가며 배열되어야 함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 가장 내적인 지혜가 중심이 되고, 그 아래로 이성이 정리되고, 그 아래로 기억 지식이 구체적 실행으로 나누어지는 구조입니다.
이 장면이AC.120의 흐름에서 중요한 이유는, 앞서 말한 ‘경계’ 개념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기억 지식은 경계이며 마지막 단계이지만, 그렇다고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 역시 ‘질서 속에 배치될 때에만 제 역할을 합니다’. 이 본문은 바로 그 점을 보여줍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을 아무렇게나 두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 함께 있는 자’가 질서 속에 세워져 각 단위를 다스리게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인정받는 자들’이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단순한 능력만이 아니라, ‘삶 속에서 검증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참된 지혜와 지식은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과 결합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실제로 다른 것들을 질서 있게 이끌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 신명기 구절은 인간 안의 다양한 인식 요소들, 곧 지혜, 이성, 기억 지식이 서로 충돌하거나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아래로 흐르는 질서 안에서 단계적으로 배열될 때에만 참된‘통치’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기억 지식이 경계라는 사실과 동시에, 그 경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올바르게 조직되어야 한다는 점을 함께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천적 질서의 성질, 곧 생명에 속한 것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이 강들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즉, ‘동쪽’(East)이신 주님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지혜로부터 지성이 나오며, 지성으로부터 이성이 나오고, 그렇게 이성을 통하여 기억 지식이 생명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생명의 질서이며, 이러한 상태의 사람들이 곧 천적 인간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천적 인간들을 대표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지혜로운 자들, 명철한 자들, 아는 자들’(wise, intelligent, and knowing)이라 불렸습니다 (신1:13, 15). 이 때문에 또한 언약궤를 만들었던 브살렐에 대하여, The nature of celestial order, or how the things of life proceed, is evident from these rivers, namely, from the Lord, who is the “East,” and that from him proceeds wisdom, through wisdom intelligence, through intelligence reason, and so by means of reason the knowledges of the memory are vivified. This is the order of life, and such are celestial men; and therefore, since the elders of Israel represented celestial men, they were called “wise, intelligent, and knowing” (Deut. 1:13, 15). Hence it is said of Bezaleel, who constructed the ark, that he was:
1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신 자들은 모두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 2모세가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그 마음에 여호와께로부터 지혜를 얻고 와서 그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를 부르매 (출36:1, 2) Filled with the spirit of God, in wisdom, in understanding, and in knowledge [scientia], and in all work. (Exod. 31:3; 35:31; 36:1–2)
13너희의 각 지파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인정 받는 자들을 택하라 내가 그들을 세워 너희 수령을 삼으리라 한즉, 15내가 너희 지파의 수령으로 지혜가 있고 인정 받는 자들을 취하여 너희의 수령을 삼되 곧 각 지파를 따라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과 조장을 삼고(신1:13, 15)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출31:3)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출35:31)
해설
이 단락은 창세기 2장에 등장하는 네 강의 의미를 하나의 ‘완결된 생명 질서’로 정리해 주는 결정적 요약입니다. 지금까지 각각 따로 설명되었던 강들이, 여기서는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됩니다. 시작점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동쪽’, 곧 주님입니다. 천적 질서는 인간 안에서 시작되지 않으며, 언제나 주님에게서 시작됩니다.
주님으로부터 먼저 나오는 것은 지혜입니다. 이는 단순한 사고 능력이 아니라, 사랑과 하나로 결합된 생명의 빛입니다. 이 지혜가 곧바로 기억 지식으로 떨어지지 않고, 먼저 지성으로 흐릅니다. 지성은 선과 진리를 분별하고 지각하는 능력이며, 지혜의 빛을 받아 형태를 갖추는 단계입니다.
그다음 단계가 이성입니다. 이성은 지성과 기억 지식 사이에 놓인 중간 영역으로, 명석하게 보고 정리하며 연결하는 기능을 합니다. 그러나 이성은 근원이 아닙니다. 위로부터 오는 흐름을 받아 전달할 뿐입니다. 이 점이 유지될 때, 이성은 명석함을 잃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기억 지식은 이성을 통해 생명을 받습니다. 기억 지식은 가장 외적인 층위이지만, 위로부터의 유입이 있을 때에만 살아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억 지식은 단지 쌓여 있는 정보에 불과합니다. 천적 질서에서는 가장 바깥까지도 생명이 흐르지만, 그 흐름은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질서가 바로 ‘천적 인간의 상태’라고 말합니다. 천적 인간은 이 질서 안에 살며, 이 질서가 뒤집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천적 인간을 대표하며, ‘지혜로운 자, 명철한 자, 아는 자’로 불렸습니다. 이 세 표현은 임의적인 수사가 아니라, 지혜–지성–이성(또는 지식)의 질서를 정확히 반영합니다.
브살렐에 대한 언급은 이 질서가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실제 삶과 일 속에서 구현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는 언약궤라는 가장 거룩한 기구를 만드는 일을 맡았는데, 그 자격은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충만함은 지혜, 이해, 지식이라는 정확한 질서로 표현됩니다.
AC.121은 이렇게 말합니다. 천적 질서란 인간이 위로 올라가 이해하는 구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생명이 질서 있게 인간 전체를 살리는 흐름이며, 이 질서 안에서 지혜와 이해와 지식은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하나의 생명을 이룬다고 말합니다.
본문에‘실제로 유브라데 강은 이스라엘 땅이 앗수르 쪽으로 미치는 경계였는데,이는 기억 지식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지성과 지혜에 있어서 경계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그리고 해설에‘기억 지식은 반드시 필요하지만,그 자체가 목적이 되면 더 이상 안쪽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그래서 유브라데는‘마지막 단계’이자‘경계’입니다’,심화에서도‘반면‘그 큰 강 유브라데’는 그 기억 지식이 도달하는‘최종 경계’,곧 더 이상 안쪽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외적 인식의 끝입니다’등...이‘경계’라는 것과,‘더 이상 안쪽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표현들이 알 듯 모를 듯합니다.이게 무슨 말인가요?
이 표현이 막연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경계’라는 말을 흔히‘막다른 끝’이나‘더 이상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서 말하는 경계는 그런 폐쇄된 끝이 아니라, ‘영역이 달라지는‘문턱’’입니다.다시 말해,거기까지는 어떤 방식이 유효하지만,그 지점부터는‘다른 방식으로만 들어갈 수 있는 자리’입니다.
먼저‘기억 지식’이 무엇인지부터 다시 짚어 보시면 이해가 풀립니다.기억 지식은 보고 듣고 배우고 축적한 모든 정보와 경험,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생각의 재료입니다.이것은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왜냐하면 이성도,판단도,설명도 이 재료 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이 영역은 넓고 중요하며,실제로 인간의 삶 대부분이 이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이 기억 지식이‘‘안쪽’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주지는 못한다’는 점입니다.여기서‘안쪽’이란 지성,더 나아가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는 퍼셉션의 영역입니다.이 영역은 단순히 더 많은 정보를 쌓는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예를 들어, ‘사랑이 무엇인가’, ‘선이 무엇인가’를 책과 정보로 아무리 많이 알아도,그것이 곧 사랑을 아는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어느 순간에는‘아는 방식’이 바뀌어야 합니다.바로 그 지점이‘경계’입니다.
그래서‘유브라데가 경계다’라는 말은,기억 지식이 쓸모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도달할 수 있는 최종 지점이 있다’는 뜻입니다.그 지점까지는 분석하고 비교하고 축적하는 방식으로 갈 수 있지만,그 지점을 넘어서려면 더 이상 같은 방법으로는 안 됩니다.위로부터의 유입,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이 열려야만 그다음 단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일상적인 비유로 말씀드리면,지도를 아무리 정밀하게 연구해도 실제 길을‘걷는 것’자체는 다른 차원의 경험입니다.지도는 길의 끝까지 안내해 주지만, ‘그 길 위에 발을 디디는 순간은 지도 밖의 일’입니다.기억 지식은 지도와 같고,퍼셉션은 실제로 그 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지도는 반드시 필요하지만,그것만으로는‘들어간 것’이 되지 않습니다.이 둘이 갈리는 지점이 바로 경계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이 경계가‘지켜져야 한다’는 것입니다.왜냐하면 사람이 이 경계를 무시하고,기억 지식이나 이성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 들면,결국 자신이 알 수 없는 영역까지도 억지로 재단하게 되기 때문입니다.그 결과가 바로 왜곡입니다.반대로 이 경계를 인정하면,사람은 자연스럽게‘여기까지는 내가 아는 방식이고,그 너머는 주님께서 열어 주셔야 하는 영역’이라는 겸손한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더 이상 안쪽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은 좌절의 선언이 아니라,오히려‘올바른 진입의 방식이 바뀌는 지점’을 알려 주는 말입니다.그 경계까지는 기억 지식과 이성이 인도하고,그다음은 사랑과 신앙,곧 주님의 유입이 열어 줍니다.스베덴보리가 유브라데를 경계라고 부르는 이유는,바로 이‘전환의 자리’를 정확히 짚어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15:18)Unto thy seed will I give this land,from the river of Egypt unto the great river,the river Euphrates(Gen. 15:18).
이 구절이AC.120에 인용된 이유는, ‘애굽의 강에서 유브라데까지’라는 표현을 통해‘인간 안에 허락된 전 영역의 범위와 그 바깥 경계가 어디까지인가를 한 문장으로 규정해 주기 때문’입니다.스베덴보리는 이 약속을 지리적 영토의 확대가 아니라, ‘기억 지식에서 시작하여 그 최외곽 경계에 이르는 전 인식 영역 전체가 주님의 질서 안에 포함된다는 선언’으로 읽습니다.
먼저 애굽의‘강’은 기억 지식의 출발점,곧 감각에서 올라오는 가장 기초적인 인식의 자리입니다.인간은 외부 세계를 접하고,보고 듣고 경험하며,그것을 기억으로 쌓습니다.이것이 인식의 가장 바깥에서 시작되는 기초입니다.반면‘그 큰 강 유브라데’는 그 기억 지식이 도달하는‘최종 경계’,곧 더 이상 안쪽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외적 인식의 끝입니다.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유브라데를‘마지막 단계이자 경계’라고 말합니다.
이 두 경계를 함께 제시하는 이유가 중요합니다.주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것은‘일부’가 아니라, ‘가장 외적인 감각적 지식에서부터 그 지식의 한계선까지 전부’입니다.이는 곧 인간의 외적 영역 전체,곧 기억 지식과 감각,그리고 그것이 이성으로 조직되는 모든 범위가 주님의 통치 아래 들어올 수 있다는 뜻입니다.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경계의 선언이기도 합니다.그 너머는 더 이상 지성과 지혜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AC.120에서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앞서 미가서와 시편에서는‘이 경계까지 생명이 미친다’는 확장을 보여주었고,예레미야에서는‘그 경계를 근원으로 삼으려 할 때의 왜곡’을 경고했습니다.이제 창세기15장은 그 모든 것을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곧, ‘주님이 허락하신 영역은 이 경계 안 전체이지만,그 질서는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네 자손에게 주노니’라는 표현은,이 영역이 단순한 자연적 소유가 아니라‘거듭남을 통해 이어지는 영적 유산’임을 뜻합니다.인간은 기억 지식을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그것을 올바른 위치에 두고,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안에서 사용해야 합니다.그럴 때 이 전체 영역이‘기업’이 됩니다.
정리하면,이 구절은 인간 인식의 바깥선이 어디까지이며,그 전체가 어떻게 주님의 질서 안에 포함되는지를 가장 간결하게 보여주는 본문입니다.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통해,기억 지식은 배제의 대상이 아니라 포함의 대상이지만,동시에 반드시‘경계로서 지켜져야 할 영역’이라는 점을 결정적으로 확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8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11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시80:8, 11)Thou hast made a vine to go forth out of Egypt;Thou hast cast out the nations;Thou hast planted her;Thou hast sent out her shoots even to the sea,and her twigs to the river(Euphrates) (Ps. 80:8, 11),
이 구절이AC.120에 인용된 이유는,앞에서 계속 다루어진‘애굽–앗수르–브랏’의 구조를‘부정이나 경고가 아니라, ‘올바르게 사용될 때의 확장과 결실’이라는 긍정적 장면으로 완성해 주기 위해서’입니다.예레미야에서는‘애굽과 앗수르의 물을 마신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왜곡된 의존이 경고되었다면,시편80편은 그와 동일한 요소들이‘주님의 질서 안에 놓일 때 어떻게 살아나는가’를 보여줍니다.
먼저 애굽에서‘포도나무를 가져왔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애굽은 기억 지식을 의미하지만,이 본문에서는 그것이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출발점으로 사용됩니다’.곧 기억 지식은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취하시어 새롭게 심으시는 재료’입니다.이어서‘민족들을 쫓아내시고 심으셨다’는 말은,그 지식 안에 섞여 있던 왜곡과 혼합된 요소들이 제거되고,순수한 상태로 재정렬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제‘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다’는 표현이 나옵니다.여기서 바다는 가장 외적인 영역,곧 감각과 삶의 실제를 의미하고, ‘강’곧 브랏은 기억 지식의 경계,인간 인식의 최외곽을 의미합니다.이 말은 곧, ‘주님께서 심으신 생명(포도나무)이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가장 바깥 영역까지 모두를 덮고 확장된다’는 뜻입니다.
이 장면이AC.120에서 중요한 이유는,같은 애굽과 강(브랏)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에서는 사람이 거기서‘물을 마시려’,즉 그것을 근원으로 삼으려 했습니다.그러나 여기서는 주님이 먼저 심으시고 자라게 하시며,그 결과로 가지가 바다와 강까지‘뻗어 나갑니다’.곧 방향이 완전히 다릅니다.전자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려는 시도이고,후자는 위에서 아래로 흘러 내려가며 확장되는 생명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이 구절이‘경계까지 이른다’는 표현을 긍정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브랏은 경계이지만,그 경계는 닫힌 끝이 아니라‘생명이 미치는 범위의 끝’입니다.즉,주님으로부터 시작된 생명은 인간의 이성과 기억 지식을 지나,가장 바깥 영역까지 도달하여 그 전체를 살아 있게 합니다.
정리하면,이 시편 구절은AC.120에서 다음을 보여주기 위해 인용됩니다.기억 지식과 이성,그리고 그 경계까지 포함한 인간의 모든 층위는 제거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에 놓일 때,전체가 살아나고 확장되는 영역’이라는 점입니다.그래서 이 구절은‘잘못된 의존’과‘올바른 확장’을 대비시키며,동일한 구조가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는 본문으로 사용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