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4:10)

 

AC.375

부르짖는 소리(voice crying) 부르짖음의 소리(voice of a cry) 말씀에서 흔히 사용되는 표현으로, 어떤 소음이나 소동이나 혼란이 있는 모든 경우에 적용되며, 또한 어떤 기쁜 일이 있을 때에도 사용됩니다(32:17-18; 1:9-10; 65:19; 48:3). A voice crying and the voice of a cry are common forms of expression in the Word, and are applied to every case where there is any noise, tumult, or disturbance, and also on the occasion of any happy event (as in Exod. 32:1718; Zeph. 1:910; Isa. 65:19; Jer. 48:3).

 

17여호수아가 백성들의 요란한 소리를 듣고 모세에게 말하되 진중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나이다 18모세가 이르되 이는 승전가도 아니요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도 아니라 내가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로다 하고 (32:17, 18)

 

9그날에 문턱을 뛰어넘어서 포악과 거짓을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 10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에 어문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구역에서는 울음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 (1:9, 10)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65:19)

 

호로나임에서 부르짖는 소리여 황폐와 파멸이로다 (48:3)

 

그러나 여기서는 죄책의 고발을 의미합니다. In the present passage it denotes accusation.

 

해설

AC.375는 바로 앞 AC.373에서 피들이 부르짖는 죄책의 고발을 의미한다고 한 해석을 보충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부르짖는 소리라는 표현 자체가 언제나 죄책이나 고발을 뜻한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에서 부르짖는 소리부르짖음의 소리는 매우 넓게 사용되며, 소음이나 소동이나 혼란이 있을 때뿐 아니라 기쁜 일이 있을 때에도 사용된다고 먼저 밝힙니다. 그런 다음 그러나 여기서는 죄책의 고발을 의미한다고 범위를 한정합니다. 이것은 말씀의 상응과 속뜻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를 보여 줍니다. 어떤 단어나 표현에 하나의 뜻을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 표현이 놓인 문맥과 그것이 결합하고 있는 다른 표상들을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출32:17-18을 인용하는 이유는 소리가 반드시 한 종류의 영적 상태만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산에서 내려올 때 진영에서 들려오는 큰 소리가 있었고, 여호수아는 그것을 싸우는 소리로 생각했지만 모세는 승리하거나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아니라 노래하는 소리라고 말합니다. 소리는 어떤 집단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강한 상태가 외적으로 드러나는 표현입니다.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 소리 자체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무엇 때문에 그 소리가 일어났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1:9-10과 렘48:3에서는 소리가 재앙과 파괴와 혼란에 연결됩니다. 심판과 황폐의 상태가 부르짖는 소리로 표현됩니다. 반면 사65:19에서는 정반대의 문맥이 나타납니다. 새롭게 된 예루살렘에서는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소리와 부르짖음은 어떤 내적 상태가 외부로 드러나는 것을 나타내지만, 그 구체적인 의미는 문맥에 따라 결정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 네 구절을 인용하는 목적은 각각의 구절에 독립적인 새로운 교리를 붙이려는 것이 아니라, ‘소리부르짖음이라는 표현이 말씀에서 여러 상태에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4:10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죄책의 고발을 의미하는 이유도 단어 하나만 떼어 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부르짖는 것은 바로 아벨의 피들입니다. 앞의 AC.374에서 보았듯이 피들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 특히 미움과 그 미움에서 솟아나는 온갖 불의하고 가증한 것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 피들이 부르짖는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이 그 자체로 죄책을 드러내고 고발한다는 뜻이 됩니다.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부인했지만, 그가 소멸시킨 아벨의 피들은 침묵하지 않습니다. 행해진 악의 영적 성질 자체가 그 죄책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고발역시 주님께서 어떤 외부의 증언을 들어야 비로소 가인의 죄를 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렇게 표현합니다. 주님 앞에서는 인간의 내적 상태가 이미 드러나 있으며,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은 그 자체의 결과와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들의 부르짖음은 주님께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는 고발이라기보다, 가인이 부인하고 감추려 한 악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는 감추어질 수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인간은 말로 알지 못합니다라고 할 수 있지만, 그가 사랑하고 의도하며 행한 것은 그의 영적 상태 안에 남아 있습니다.

 

AC.375는 짧지만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중요한 점도 가르쳐 줍니다. ‘소리 = 고발’, ‘부르짖음 = 죄책이라고 사전식으로 외워서는 안 됩니다. 같은 표현도 문맥에 따라 싸움이나 소동, 혼란, 슬픔, 기쁨 등 서로 다른 상태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상응은 단어와 뜻을 일대일로 기계적으로 치환하는 암호표가 아니라, 말씀 전체의 연결과 그 안에서 표현되는 영적 상태를 함께 살피는 것입니다. AC.375에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말씀에서는 여러 경우에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죄책의 고발을 의미한다고 구별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을 잘 보여 줍니다.

 

결국 AC.375의 핵심은 마지막 한 문장에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죄책의 고발을 의미합니다.4:10에서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여 흘리게 된 아벨의 피들이 부르짖고 있기 때문입니다. AC.373피들의 부르짖음 = 죄책의 고발이라는 뜻을 먼저 제시하고, AC.374피들이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했다면, AC.375는 이제 부르짖는 소리가 왜 이 문맥에서 고발이 되는지를 확인합니다. 가인은 자신의 책임을 부인하지만,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결과 자체가 그의 죄책을 드러냅니다.

 

 

 

AC.376, 창4:10, ‘피들이 부르짖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 체어리티에 가한 폭력이 드러내는 죄책’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6이로부터 ‘피들이 부르짖는 것’(crying of bloods)은 죄책의 고발을 의미한다는 것이 따라 나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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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4, 창4:10, ‘왜 아벨의 피가 부르짖는가? - 미움은 체어리티에 가하는 폭력입니다’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4‘피들의 소리’(voice of bloods)가 체어리티에 폭력이 가해졌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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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4:10)

 

AC.374

피들의 소리(voice of bloods) 체어리티에 폭력이 가해졌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에서 분명합니다. 구절들에서 소리(voice) 고발하는 어떤 것을, (blood) 온갖 종류의 , 특히 미움을 의미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마음으로 그를 죽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십니다. That the voice of bloods signifies that violence had been done to charity is evident from many passages in the Word, in which voice denotes anything that accuses, and blood any kind of sin, and especially hatred; for whosoever bears hatred toward his brother, kills him in his heart; as the Lord teaches:

 

21 사람에게 말한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5:21-22) Ye have heard that it was said to them of old, thou shalt not kill, and whosoever shall kill shall be in danger of the judgment; but I say unto you, that whosoever is angry with his brother rashly shall be in danger of the judgment; and whosoever shall say to his brother, Raca, shall be in danger of the council; but whosoever shall say, thou fool, shall be in danger of the hell of fire, (Matt. 5:2122)

 

말씀은 미움의 여러 정도를 의미합니다. 미움은 체어리티와 반대되는 것이며, 수만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죽입니다. 손으로 죽이지 못하더라도 영으로는 죽이며, 외적인 제약에 의해서만 손으로 행하는 것이 억제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미움은 (blood)입니다. 예레미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by which words are meant the degrees of hatred. Hatred is contrary to charity, and kills in whatever way it can, if not with the hand, yet in spirit, and is withheld only by external restraints from the deed of the hand. Therefore all hatred is blood, as in Jeremiah:

 

33네가 어찌 사랑을 얻으려고 행위를 아름답게 꾸미느냐 그러므로 행위를 악한 여자들에게까지 가르쳤으며 34 옷단에는 없는 가난한 자를 죽인 피가 묻었나니 그들이 구멍을 뚫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모든 때문이니라 (2:33-34) Why makest thou thy way good to seek love? Even in thy skirts are found the bloods of the souls of the needy innocent ones. (Jer. 2:3334)

 

[2] 그리고 (blood) 미움을 의미하므로, 마찬가지로 온갖 종류의 불의를 의미합니다. 미움은 모든 불의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호세아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And as hatred is denoted by blood, so likewise is every kind of iniquity, for hatred is the fountain of all iniquities. As in Hosea:

 

2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3그러므로 땅이 슬퍼하며 거기 사는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4:2-3) Swearing falsely, and lying, and killing, and stealing, and committing adultery, they rob, and bloods, in bloods have they touched; therefore shall the land mourn, and everyone that dwelleth therein shall languish. (Hos. 4:23)

 

무자비함에 관하여 에스겔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And in Ezekiel, speaking of unmercifulness:

 

2인자야 네가 심판하려느냐 흘린 성읍을 심판하려느냐 그리하려거든 자기의 모든 가증한 일을 그들이 알게 하라 3너는 말하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자기 가운데에 피를 흘려 받을 때가 이르게 하며 우상을 만들어 스스로 더럽히는 성아 4네가 흘린 피로 말미암아 죄가 있고 네가 만든 우상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혔으니 날이 가까웠고 연한이 찼도다 그러므로 내가 너로 이방의 능욕을 받으며 만국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노라, 6이스라엘 모든 고관은 각기 권세대로 피를 흘리려고 가운데에 있었도다, 9 가운데에 피를 흘리려고 이간을 붙이는 자도 있었으며 가운데에 위에서 제물을 먹는 자도 있었으며 가운데에 음행하는 자도 있었으며 (22:2-4, 6, 9) Wilt thou judge the city of bloods, and make known to her all her abominations, a city that sheddeth bloods in the midst of it? Thou art become guilty through thy blood that thou hast shed. (Ezek. 22:24, 6, 9)

 

너는 쇠사슬을 만들라 이는 흘리는 죄가 땅에 가득하고 포악이 성읍에 찼음이라 (7:23) The land is full of the judgment of bloods, and the city is full of violence. (Ezek. 7:23)

 

예레미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And in Jeremiah:

 

13그의 선지자들의 죄들과 제사장들의 죄악들 때문이니 그들이 성읍 안에서 의인들의 피를 흘렸도다 14그들이 거리 거리에서 맹인 같이 방황함이여 그들의 옷들이 피에 더러워졌으므로 그들이 만질 없도다 (4:13-14) For the sins of the prophets of Jerusalem, and the iniquities of her priests, that have shed the blood of the righteous in the midst of her, they wander blind in the streets, they have been polluted with blood. (Lam. 4:1314)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Isaiah:

 

이는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중에서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 (4:4) When the Lord shall wash away the filth of the daughters of Zion, and shall have purged the bloods of Jerusalem from the midst, with the spirit of judgment, and with the spirit of burning. (Isa. 4:4)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 (59:3) Your palms are defiled in blood, and your fingers in iniquity. (Isa. 59:3)

 

예루살렘의 가증한 것들을 피들(bloods)이라고 부르는 에스겔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Ezekiel, speaking of the abominations of Jerusalem, which are called bloods:

 

6내가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고, 22네가 어렸을 때에 벌거벗은 몸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네가 모든 가증한 일과 음란을 행하였느니라 (16:6, 22) I passed by thee, and saw thee trampled in thine own bloods, and I said unto thee, Live in thy bloods, yea, I said unto thee, Live in thy bloods. (Ezek. 16:6, 22)

 

[3] 마지막 때의 무자비함과 미움 역시 계시록에서는 (blood) 묘사됩니다(16:3-4). The unmercifulness and hatred of the last times are also described by blood in the Revelation (16:3, 4).

 

3둘째 천사가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죽은 자의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4셋째 천사가 대접을 강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 (16:3, 4)

 

피들(bloods) 복수형으로 언급되는 것은 사랑에서 모든 선하고 거룩한 것들이 솟아 나오듯이, 미움에서는 모든 불의하고 가증한 것들이 솟아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미워하는 사람은 수만 있다면 그를 죽일 것이며, 실제로 자기가 있는 모든 방식으로 그를 죽입니다. 이것이 그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 여기서 피들의 소리(voice of bloods) 본래 의미하는 것입니다. “Bloods are mentioned in the plural, because all unjust and abominable things gush forth from hatred, as all good and holy ones do from love. Therefore he who feels hatred toward his neighbor would murder him if he could, and indeed does murder him in any way he can; and this is to do violence to him, which is here properly signified by the voice of bloods.

 

해설

AC.374는 바로 앞 AC.373에서 제시한 피들의 소리는 체어리티에 폭력이 가해졌음을 의미한다는 해석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입증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논증을 따라가 보면 의 속뜻이 단순히 살인이나 유혈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가 온갖 종류의 죄, 특히 미움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마음으로 그를 죽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따라서 창4에서 가인이 아벨의 피를 흘린 사건은 속뜻에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사건이며, 그 뿌리에는 체어리티와 정반대되는 미움이 있습니다.

 

이것을 밝히기 위해 스베덴보리가 가장 먼저 인용하는 말씀이 마5:21-22입니다. 주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단순히 육체적인 살인 행위에만 한정하지 않으시고, 형제를 향한 분노와 멸시와 모욕의 내적 상태까지 들어가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미움의 여러 정도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살인은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내적 원인 없이 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먼저 시작됩니다. 체어리티가 이웃의 선을 바라는 사랑이라면 미움은 그 반대입니다. 이웃에게 선이 있기를 바라지 않고, 그의 선을 싫어하며, 더 나아가 그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살인이 실행되지 않았더라도 그 내적 의지 안에는 이미 살인의 본질이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미움은 수만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죽인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 뜻입니다. 이것을 모든 순간적인 화나 불쾌감까지 곧바로 영적인 살인으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에게는 자연적인 분노가 일어날 수 있고, 불의에 대한 정당한 분개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이웃의 악을 미워하는 것과 이웃이라는 사람 자체를 미워하여 그의 선과 행복을 원하지 않는 상태를 구별하지 않은 채 모든 분노를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이웃을 향한 악의가 의지 안에서 자리 잡아 그를 해치고 제거하기를 원하는 미움입니다. 외적인 법과 체면과 두려움 때문에 손으로 실행하지 않을 뿐, 기회가 주어지면 해치고 싶어 하는 의지가 있다면 그 미움 안에는 살인의 본질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모든 미움은 라고 말합니다. 2:33-34에서 옷단에 가난하고 죄 없는 자들의 피가 발견된다는 말씀은 바로 그러한 내적 악이 외적인 삶에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어 호4:2-3에서는 거짓 맹세, 거짓말, 살인, 도둑질, 간음과 함께 피가 피를 뒤잇는상태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가 미움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불의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미움은 모든 불의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가 이웃의 선을 원하여 여러 형태의 선한 행위로 흘러나오는 것처럼, 미움은 이웃의 선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 형태의 불의와 가증한 것으로 흘러나옵니다.

 

22장과 겔7:23을 인용하는 이유도 같습니다. ‘ 흘린 성읍’, ‘ 흘리는 죄가 가득한 ’, ‘포악이 가득한 성읍이라는 표현에서 피와 포악이 함께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실제 살인 사건의 통계로 읽는 것이 아니라 무자비함과 미움이 지배하는 영적 상태로 읽습니다. 체어리티가 사라지면 이웃은 더 이상 사랑하고 섬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위해 이용하거나 방해가 되면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앞 AC.372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한다는 질서와도 연결됩니다. 체어리티를 섬기기를 거부한 신앙은 결국 이웃을 향한 살아 있는 사랑을 잃고, 그 자리에 자기 사랑에서 나오는 무자비함과 미움이 들어설 수 있습니다.

 

4:13-14와 사4:4, 59:3 역시 같은 논증 안에 있습니다.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 의인의 피를 흘렸다는 것, 예루살렘의 피가 씻겨야 한다는 것, 손과 손가락이 피와 죄악으로 더러워졌다는 것은 가 단순한 육체적 유혈보다 넓은 영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특히 사4:4에서 주님께서 예루살렘의 를 씻으신다는 표현은 피가 제거되어야 할 죄악과 불의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구절들은 각각 별개의 주제를 말하는 인용들이 아니라 =미움과 거기서 나오는 불의라는 하나의 상응을 여러 방향에서 입증하는 증거들입니다.

 

16:6, 22피투성이가 되어라는 표현도 같은 맥락에서 인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예루살렘의 가증한 것들을 피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도 피는 한 가지 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여러 가증한 악들이 한꺼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AC.374 마지막에서 피가 복수형 bloods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어집니다. 사랑에서 모든 선하고 거룩한 것들이 솟아 나오듯이 미움에서는 모든 불의하고 가증한 것들이 솟아 나오기 때문에 피들이라고 복수형으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AC.373에서는 이 복수형의 이유를 아직 설명하지 않았지만, 이제 AC.374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그 이유를 밝혀 줍니다.

 

이 대조는 매우 중요합니다. 한쪽에는 사랑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미움이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의 내적 근원이지만 거기에서 자비, 용서, 섬김, 정직, 인내, 선한 행위와 같은 수많은 선하고 거룩한 것들이 흘러나옵니다. 반대로 미움 역시 하나의 내적 근원이지만 거기에서 거짓, 모욕, 보복, 기만, 폭력, 무자비함과 같은 수많은 불의하고 가증한 것들이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단수 가 아니라 복수 피들이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가인이 아벨에게 가한 폭력은 단 하나의 잘못으로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의 반대인 미움에서 흘러나오는 악의 전체 계열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6:3-4을 인용하여 마지막 때의 무자비함과 미움 역시 로 묘사된다고 하는 것도 이 원리를 말씀 전체에 연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의 가인과 아벨에서 시작된 의 상응이 선지서에 나타나고 다시 계시록에까지 이어집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창4:10의 아벨의 피는 고립된 고대 살인 사건의 이미지가 아니라, 체어리티가 파괴될 때 말씀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영적 표상입니다. 사랑이 사라지고 미움이 지배할 때 그 결과는 로 표현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선과 체어리티의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사랑에서 모든 선하고 거룩한 것이 솟아 나온다고 할 때 그 사랑의 최초 근원은 인간의 proprium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만큼 체어리티 안에 있게 되고, 그 체어리티에서 여러 선한 쓰임이 흘러나옵니다. 반대로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거부하고 자기 사랑을 중심에 놓을수록 이웃을 경쟁자나 방해물로 보기 쉬워지고, 그 상태가 굳어지면 미움과 거기서 나오는 여러 불의가 나타납니다. 따라서 사랑과 미움의 대조는 단순한 감정의 대조가 아니라 인간이 어떤 근원과 질서를 받아들이고 살아가느냐의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AC.374는 앞의 가인 이야기를 더욱 내면으로 가져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쉽게 나는 사람을 죽인 적이 없으므로 말씀은 나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5:21-22에서 계명을 마음의 상태까지 가져가십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말씀을 통해 미움 자체가 체어리티에 대한 폭력임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단지 나는 누구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했는가?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누구의 선을 원하지 않고 있는가? 누구의 실패를 기뻐하고 있는가? 누구를 마음에서 지워 버리고 싶은가?가 됩니다. 다만 이런 자기 성찰도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위한 잣대가 아니라 자기 안의 미움을 주님 앞에서 발견하고 피하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결국 AC.374의 마지막 문장이 전체를 압축합니다. 이웃을 미워하는 사람은 할 수만 있다면 그를 죽이며, 실제로 자기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를 죽입니다. 이것이 이웃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며, 바로 그것이 피들의 소리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벨의 피가 부르짖는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했지만, 피들은 부르짖습니다. 체어리티를 거부하는 교리가 아무리 자신을 정당화해도 그 안에서 발생한 미움과 불의는 그 자체로 죄책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단지 손으로 살인하지 않는 데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서 마음속의 미움까지 보게 하실 때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피하며, 그 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체어리티가 자리 잡도록 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AC.375, 창4:10, ‘부르짖는 소리는 왜 죄책의 고발을 뜻하는가?’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5‘부르짖는 소리’(voice crying)와 ‘부르짖음의 소리’(voice of a cry)는 말씀에서 흔히 사용되는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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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3, 창4:10, ‘네 아우의 핏소리가 내게 호소하느니라 -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과 죄책의 고발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창4:10) AC.373‘네 아우의 피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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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4:10)

 

AC.373

아우의 피들의 소리(voice of thy brothers bloods) 체어리티에 폭력이 가해졌음을 의미하고, 피들이 부르짖는 (crying of bloods) 죄책의 고발을 의미하며, (ground)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합니다.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signifies that violence had been done to charity; the crying of bloods is the accusation of guilt, and ground signifies a schism or heresy.

 

해설

AC.373은 창4:10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의 속뜻을 아주 압축적으로 제시합니다. 앞에서 가인은 아벨을 죽였고, 이어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속뜻에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나아가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한다는 질서 자체를 거부한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아우의 피들의 소리가 내게 부르짖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AC.373부터는 단순히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는 사실을 넘어, 그 소멸이 가져오는 죄책과 그 죄책이 드러나는 상태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먼저 아우의 피들의 소리체어리티에 폭력이 가해졌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아벨은 계속해서 체어리티를 표상하므로 아벨의 피는 단순히 육체적인 죽음의 흔적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를 분리하고 마침내 소멸시켰다는 것이며, 이제 흘려진 아벨의 피는 바로 그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을 나타냅니다. ‘폭력이라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체어리티가 저절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이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는 가인의 교리적 원리가 결국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피는 사랑과 체어리티의 질서가 침해되고 파괴된 결과를 보여 줍니다.

 

특히 원문이 blood가 아니라 bloods’, 곧 복수형이라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AC.373 자체는 아직 왜 복수형인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피들의 소리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을 의미한다고만 밝힙니다. 따라서 이 번호에서 복수형의 세부적인 상응을 미리 단정하여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번역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붙들고 있는 복수형을 보존하고, 그 의미가 이어지는 번호들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계속 지켜 온 원칙과도 맞습니다. 현재 번호가 직접 말하는 범위는 분명히 말하되, 뒤의 설명을 앞당겨 과도하게 넣지는 않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피들이 부르짖는 죄책의 고발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마치 주님께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모르시다가 땅에 흘린 피의 소리를 듣고 범죄를 발견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르짖음은 이미 행해진 악 자체가 그 악의 성질과 죄책을 드러내는 것을 나타냅니다.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했지만, 아벨의 피는 부르짖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행한 악을 부인하고 합리화하며 감추려 할 수 있지만, 영적 질서 안에서는 그 악이 실제로 무엇을 파괴했는지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은 그 자체로 죄책을 드러냅니다. 이런 의미에서 피들의 부르짖음은 죄책의 고발입니다.

 

여기서 고발이라는 말을 주님께서 인간의 죄를 찾아내어 처벌할 근거를 모으신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큰 틀에서 주님은 인간을 파멸시키려는 분이 아니라 끊임없이 악에서 건져 선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유 가운데 실제로 악을 선택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과 교리 안에 굳히면 그 악에는 그에 따른 결과가 있습니다. 그 결과가 드러나는 것을 말씀은 마치 피가 소리를 내어 하나님께 고발하는 것처럼 표현합니다. 따라서 죄책의 고발은 변덕스러운 신적 분노가 새롭게 일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악의 실상이 더 이상 감추어질 수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ground)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에서부터 이어져 온 ground의 의미를 가인의 상태에 맞추어 읽어야 하는 대목입니다. 가인의 근본적인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구별했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둘을 분리하고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여 마침내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는 교리를 만든 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이 단순히 한 사람의 개인적 감정이나 행동 안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시킨 교리적 토대 안에서 일어났음을 보여 줍니다. AC.370의 마지막 문장 그들의 교리는 이와 같이 되었습니다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여기서 이단이라는 표현 역시 오늘날의 교파적 의미로 성급하게 옮겨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373이 말하는 heresy는 이 문맥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살아 있는 결합에서 떨어져 나와 한 부분을 독립시키고 그것을 절대화하는 교리적 왜곡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특정 교단이나 사람에게 곧바로 가인의 이단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이 번호의 목적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이 어떤 진리 하나를 전체 질서에서 떼어 내어 절대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신앙의 정확성을 강조하면서 그 신앙의 생명인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피게 하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AC.373은 이렇게 앞의 흐름을 세 단어로 압축합니다. ‘피들’, ‘부르짖음’, ‘입니다. ‘피들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을, 부르짖음은 죄책의 고발을, ‘은 그러한 폭력이 일어난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합니다. 앞에서는 가인의 교리가 신앙이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결과 아벨이 죽었습니다. 이제 그 결과가 사라지지 않고 피들의 소리가 되어 부르짖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는 있어도, 그렇게 함으로써 생긴 영적 파괴까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결국 창4:10 아우의 핏소리가 내게 호소하느니라는 말씀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에도 그 일이 주님 앞에서 감추어질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했지만 피들은 부르짖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교리와 논리로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도 있지만, 주님의 질서 안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여 사랑을 훼손한 결과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참된 신앙은 아벨의 피를 흘리는 신앙이 아니라 아벨을 아우로 인정하고 그의 지키는 가 되는 신앙입니다. 곧 체어리티를 섬기고 보호하며, 그 안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얻는 신앙입니다.

 

 

 

AC.374, 창4:10, ‘왜 아벨의 피가 부르짖는가? - 미움은 체어리티에 가하는 폭력입니다’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4‘피들의 소리’(voice of bloods)가 체어리티에 폭력이 가해졌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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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2, 창4:9,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4:9) AC.372‘지키는 자’(keeper)가 된다는 것은 섬기는 것을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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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4:9)

 

AC.372

지키는 (keeper) 된다는 것은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교회에서 문지기들(door keepers) 문을 지키는 자들(porters), 문지방을 지키는 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의 지키는 라고 불리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인이라 하는 교리의 원리에 따르면 신앙이 지배해야 했으며, 이는 7절에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To be a keeper signifies to serve, like door keepers and porters (that is, the keepers of the threshold) in the Jewish church. Faith is called the keeper of charity, from the fact that it ought to serve it, but it was according to the principles of the doctrine called Cain that faith should rule, as was said in verse 7.

 

해설

AC.372는 창4:9에서 가인이 한 말 가운데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지키는 (keeper)를 설명합니다. 바로 앞 AC.370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대답이 신앙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체어리티에 종속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을 거부했음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72에서는 왜 지키는 라는 말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나타내는지를 설명합니다. 결론은 매우 분명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의 지키는 자라고 불리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따라서 가인의 질문은 단순히 내가 동생을 보호할 책임이 있습니까?라는 책임 회피를 넘어, 속뜻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겨야 합니까?라는 영적 질서에 대한 거부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지키는 섬기는 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유대교회의 문지기들을 예로 듭니다. 문지기는 문이나 문지방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는 집이나 성전 자체의 주인이 아니라 그곳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역할은 자신이 지키는 것을 대신하거나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온전히 기능하도록 섬기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 이미지가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에 적용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의 지키는 입니다. 신앙의 진리들은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어떤 악을 죄로 여겨 피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체어리티를 보호하고 인도하며 체어리티가 삶에서 올바르게 나타나도록 섬깁니다.

 

여기서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긴다는 말을 신앙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문지기가 집을 섬긴다고 해서 문지기의 역할이 불필요한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신앙의 진리가 없으면 인간은 자기가 선이라고 느끼는 것을 곧바로 참된 선이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선한 의도만으로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유익한지를 언제나 정확히 아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는 사랑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밝혀 줍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라고 해서 진리가 불필요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기고, 체어리티는 신앙에 생명을 줍니다. 문제는 둘 가운데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둘의 올바른 질서를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앞의 창4:7, 특히 AC.361-365에서 살펴본 주도권의 문제와 정확히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거기서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AC.372 마지막에서 이는 7절에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라고 한 것은 바로 그 논의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AC.372를 이해하려면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 생기는가?라는 시간적 순서보다 둘이 결합된 무엇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목적과 주도권의 질서를 보아야 합니다. 영적 인간의 거듭남에서는 진리를 먼저 배우고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과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최종적인 질서에서 신앙이 사랑을 지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는 선을 섬기며,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깁니다.

 

이 점은 방금 AC.371에서 살펴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졌다는 말과도 잘 연결됩니다. 홍수 후 영적 인간에게서는 먼저 말씀과 계시된 진리를 배우고, 그것으로 양심이 형성되며,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질서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신앙을 통하여체어리티가 주어진다고 해서 신앙이 체어리티의 근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체어리티와 모든 선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신앙은 주님께서 인간을 체어리티로 이끄시는 수단이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긴다는 AC.372의 설명과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진다는 AC.371의 설명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함께 읽을 때 영적 인간의 질서가 더 선명해집니다. 진리가 먼저 의식에 들어올 수 있지만, 그 진리가 궁극적으로 섬기는 것은 선이며, 신앙이 살아 있게 되는 것은 체어리티 안에서입니다.

 

반대로 가인이라 하는 교리는 이 질서를 뒤집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의 교리의 원리에 따르면 신앙이 지배해야 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가인의 문제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사랑과 구별하여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생각하고, 그다음에는 사랑과 분리하며, 나중에는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합니다. 그 결과 아벨, 곧 체어리티가 소멸됩니다. 그리고 아벨을 죽인 뒤에는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말합니다. 결국 나는 체어리티를 섬기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신앙이 자신의 올바른 기능을 거부하고 오히려 주인이 되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할 때 체어리티가 소멸되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으면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어떤 교리를 정확히 고백하는가, 어떤 진리를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이해하는가가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면 진리가 사람을 사랑과 쓰임으로 인도하기보다 자기의 의로움과 우월성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진리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사용하는 사랑의 질서가 뒤집힌 것입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을 가졌다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여 그것이 체어리티를 지배하게 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키는 라는 표현에는 단순한 보호 이상의 아름다운 질서가 담겨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악을 선이라고 부르지 않도록 진리가 체어리티를 지키고, 좋은 의도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잘못된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도록 진리가 체어리티를 지킵니다. 또한 감정적인 호의만을 체어리티라고 착각하지 않도록 무엇이 이웃의 참된 선인지를 말씀의 진리가 밝혀 줍니다. 그러나 그렇게 진리가 체어리티를 지키는 목적은 진리가 왕좌에 앉기 위해서가 아니라 체어리티가 더 순수하고 지혜롭게 쓰임을 행하도록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은 체어리티의 문지기와 같습니다.

 

이 원리는 오늘날 교회와 개인의 신앙을 살피는 데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교리가 정확하고 성경 지식이 많으며 신앙고백이 분명한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람을 더 겸손하게 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선을 구하고, 맡겨진 쓰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도록 섬기지 않는다면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강조한다는 이유로 진리를 가볍게 여기는 것도 올바른 질서는 아닙니다. 문지기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문지기가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선을 섬기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기며, 선과 진리 모두의 근원과 주인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결국 AC.372는 가인의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질문에 속뜻으로 매우 분명한 대답을 줍니다. ‘그렇다. 신앙은 체어리티의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그러나 가인의 교리는 그 질서를 거부했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기려 하지 않고 오히려 지배하려 했으며, 그 결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따라서 이 짧은 번호는 가인과 아벨 이야기 전체의 핵심을 다시 압축합니다. 참된 신앙의 위대함은 체어리티 위에 군림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로 체어리티를 지키고 섬기며,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되는 데 있습니다.

 

 

 

AC.373, 창4:10, ‘네 아우의 핏소리가 내게 호소하느니라 -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과 죄책의 고발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창4:10) AC.373‘네 아우의 피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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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1, 창4:9, ‘퍼셉션에서 양심으로 -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의 속뜻’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4:9) AC.371‘여호와께서 말씀하심’(speaking of Jehovah)으로 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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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4:9)

 

AC.371

여호와께서 말씀하심(speaking of Jehovah)으로 태고교회 사람들은 퍼셉션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지각하는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퍼셉션은 사랑이 주된 것이었던 동안에만 계속될 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그치고, 결과 이웃을 향한 사랑도 그치자 퍼셉션은 소멸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남아 있는 만큼 퍼셉션도 남아 있었습니다. 퍼셉션의 능력은 태고교회에 고유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홍수 사람들에게서처럼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고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지게 되었을 때에는 양심이 뒤를 이었습니다. 양심 역시 딕테이트를 주지만 방식은 다르며, 이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양심이 딕테이트를 때에도 말씀에서는 이와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Jehovah speaks) 합니다. 양심은 계시된 것들과 지식들,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말하거나 딕테이트를 때에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양심이나 신앙에 관한 일을 말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the Lord says) 하는 것보다 흔한 표현은 없습니다. By the speaking of Jehovah the most ancient people signified perception, for they knew that the Lord gave them the faculty to perceive. This perception could continue no longer than while love was the principal. When love to the Lord ceased, and consequently love toward the neighbor, perception perished; but insofar as love remained, perception remained. This perceptive faculty was proper to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hen faith became separated from love, as in the people after the flood, and charity was given through faith, then conscience succeeded, which also gives a dictate, but in a different way,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When conscience dictates, it is in like manner said in the Word that Jehovah speaks; because conscience is formed from things revealed, and from knowledges, and from the Word; and when the Word speaks, or dictates, it is the Lord who speaks; hence nothing is more common, even at the present day, when referring to a matter of conscience, or of faith, than to say, the Lord says.

 

해설

AC.371은 지금까지 태고교회와 가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계속 부딪혀 온 퍼셉션과 양심은 어떻게 다른가?라는 문제를 스베덴보리 자신이 매우 명료하게 정리하는 중요한 단락입니다. 특히 바로 앞 AC.370에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내면에서 오는 어떤 퍼셉션이라고 했는데, 이제 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는 표현이 퍼셉션을 의미할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동시에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사라진 뒤 왜 양심이 그 뒤를 잇게 되었으며, 양심을 통해서도 주님께서 말씀하신다고 표현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AC.371은 단순한 한 구절의 어휘 풀이를 넘어, 태고교회와 홍수 후 고대교회의 내적 영적 구조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 주는 핵심 단락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심이 퍼셉션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지각하는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퍼셉션은 단순한 직감이나 느낌이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주님을 향한 사랑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내적으로 지각했습니다. 먼저 어떤 교리를 외부에서 배운 뒤 그것이 옳은지 논리적으로 판단하여 선을 행하는 방식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자체가 그들의 내면을 질서 있게 하고 있었으므로 그 사랑 안에서 선과 진리를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반드시 외부에서 들려오는 음성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퍼셉션의 조건을 매우 분명하게 밝힙니다. ‘ 퍼셉션은 사랑이 주된 것이었던 동안에만 계속될 있었습니다.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퍼셉션은 인간이 독립적으로 소유한 초자연적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그들의 생명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주님의 선물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랑이 사라지면 퍼셉션도 유지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그치고, 결과 이웃을 향한 사랑도 그치자 퍼셉션은 소멸되었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사랑이 남아 있는 만큼 퍼셉션도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퍼셉션이 어느 날 갑자기 주님에 의해 회수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사랑에서 멀어진 만큼 사랑으로부터 오는 퍼셉션도 함께 약해지고 소멸된 것입니다.

 

이 설명은 가인의 계열을 이해하는 데 특히 중요합니다. 가인은 태고교회와 전혀 관계없는 후대의 교회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가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에게 태고교회 전성기의 순수한 퍼셉션이 온전히 있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퍼셉션이 처음부터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AC.371사랑이 남아 있는 만큼 퍼셉션도 남아 있었다고 직접 말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AC.370에서 스베덴보리가 a certain perceptivity from within’, 내면에서 오는 어떤 퍼셉션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가인의 상태에서는 사랑이 크게 훼손되고 체어리티가 소멸되어 가고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퍼셉션의 흔적까지 한순간에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371은 결정적인 역사적·영적 전환을 설명합니다. ‘ 퍼셉션의 능력은 태고교회에 고유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홍수 사람들에게서처럼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고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지게 되었을 때에는 양심이 뒤를 이었습니다.이것이 우리가 계속 구별해 온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과 홍수 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 사이의 차이입니다. 태고교회의 질서는 사랑이 먼저이고 그 사랑 안에서 신앙과 진리를 지각하는 질서였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상실된 뒤에는 인간이 먼저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면서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내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말해 주는 것이 양심입니다.

 

그렇다고 양심이 퍼셉션의 낮은 복제품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양심 역시 딕테이트를 주지만 방식은 다르다고 명시합니다. 퍼셉션과 양심은 모두 인간에게 내적으로 무엇인가를 알려 준다는 점에서는 비슷해 보이지만 그 근거와 작용 방식이 다릅니다. 퍼셉션은 사랑의 선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지각하는 태고교회의 천적 방식이고, 양심은 계시된 진리와 신앙의 지식, 특히 말씀으로부터 형성되어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내적으로 말해 주는 영적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안에서 어떤 강한 느낌이 든다는 것을 모두 퍼셉션이나 양심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특히 양심은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참되다고 받아들인 선과 진리를 토대로 형성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양심은 계시된 것들과 지식들,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형성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양심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완성된 형태로 가지고 있는 독립적인 내적 음성이 아닙니다.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그것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 가운데 형성됩니다. 특히 말씀으로부터 받은 진리가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그 진리에 반하는 일을 하려고 할 때 내적으로 제지하고, 그 진리에 따라 행하려 할 때 이끄는 것이 양심의 작용입니다. 따라서 잘못된 것을 진리라고 확신하면 왜곡된 양심이 형성될 가능성도 있으며, 참된 양심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진리를 배우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살려는 의지가 함께 중요합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는 표현이 왜 양심에도 사용될 수 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이 말하거나 딕테이트를 때에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라고 합니다. 양심이 말씀과 계시된 진리로부터 형성되어 있다면, 그 양심을 통하여 말씀의 진리가 인간에게 내적으로 말할 때 그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태고교회에서는 퍼셉션을 두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할 수 있었고,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말씀으로 형성된 양심의 딕테이트를 두고도 주님께서 말씀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표현은 같지만 내적 방식은 다릅니다.

 

이 설명은 바로 앞 AC.359-360에서 생겼던 난제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conscience dictated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당시 가인이 태고교회 문맥에 있으므로 이것을 곧바로 홍수 후 고대교회의 완성된 양심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조심했습니다. AC.371은 그 조심스러운 태도가 필요했음을 확인해 주면서도 한 가지를 더 밝혀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있으며 바로 이 단락에서 직접 구별합니다. 따라서 AC.359-360conscience를 단순한 실수라고 보거나 임의로 perception으로 고칠 이유는 없습니다. 반대로 그것만을 근거로 가인에게 후대 영적 인간과 동일한 양심이 있었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AC.370-371이 보여 주듯 가인의 시대는 사랑과 함께 퍼셉션이 쇠퇴해 가는 과정 안에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그 내적 딕테이트를 설명하면서 문맥에 따라 퍼셉션과 양심에 관련된 표현을 사용합니다. 정확한 관계를 본문 이상으로 체계화하기보다 그가 직접 밝힌 구별을 보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AC.371은 또한 거듭남의 질서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사랑으로부터 직접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는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진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며, 주님께서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의 양심을 형성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해야 한다는 외적인 순종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에 따라 살면서 주님께서 그 진리를 선과 결합시키시면, 점차 단순히 규칙을 지키는 데서 벗어나 선 자체를 사랑하고 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진다는 말도 신앙 자체가 체어리티의 근원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사랑과 선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시며, 신앙의 진리는 인간이 그 사랑과 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수단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오늘날 신앙생활과 직접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양심이나 신앙에 관한 일을 말할 때 주님께서 말씀하신다고 하는 것이 지금도 매우 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속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곧바로 주님이 내게 말씀하셨다고 신성화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AC.371은 그 반대의 기준을 줍니다. 양심은 계시된 것들과 지식들,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내적 음성이나 확신이 정말 주님의 진리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말씀에 비추어 살펴야 합니다. 자기 욕망이나 두려움이나 proprium에서 나온 생각을 주님의 음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위험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근거는 인간 자신의 주관적 확신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이며, 오늘날 우리에게 그 중심적인 토대는 말씀입니다.

 

결국 AC.371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는 한 표현 속에 서로 다른 두 시대의 영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주된 것이었고, 그 사랑으로부터 퍼셉션이 있었습니다. 사랑이 사라진 만큼 퍼셉션도 사라졌습니다. 홍수 후에는 인간의 상태가 달라졌고, 말씀과 계시된 진리로부터 형성되는 양심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퍼셉션도 양심도 인간 자신의 독립적인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선과 진리로 이끄시는 방식입니다. 다만 그 방식이 서로 다릅니다. 이 차이를 붙들면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고대교회의 양심을 혼동하지 않으면서도, 두 경우 모두에서 왜 말씀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표현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70, 창4:9,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 체어리티를 완전히 거부하게 된 신앙’ (AC.370-3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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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4:9)

 

AC.37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Jehovah said unto Cain) 것은 체어리티, 아우 아벨(brother Abel) 관하여 그들에게 어떤 딕테이트를 주는, 내면에서 오는 어떤 퍼셉션(a certain perceptivity from within) 의미합니다. 가인의 대답인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신앙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으며, 체어리티에 종속되기를 원하지 않았고, 결과 신앙이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을 완전히 거부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교리는 이와 같이 되었습니다. “Jehovah said unto Cain signifies a certain perceptivity from within that gave them a dictate concerning charity or the brother Abel.Cains reply,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signifies that faith considered charity as nothing, and was unwilling to be subservient to it, consequently that faith altogether rejected everything of charity. Such did their doctrine become.

 

해설

AC.370은 창4: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와 가인의 대답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를 설명합니다. 앞의 창4:6-8에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체어리티와의 올바른 질서를 거부하다가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아벨이 죽은 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문자적으로는 살인한 가인에게 아벨의 행방을 묻는 장면이지만, 속뜻에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에게 다시 체어리티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AC.370은 앞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한 단계 더 깊은 교리적 상태로 끌고 갑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에 대한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체어리티, 아우 아벨에 관하여 그들에게 어떤 딕테이트를 주는, 내면에서 오는 어떤 퍼셉션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AC.359-360과 함께 읽으면 특히 흥미롭습니다. 거기서는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conscience dictated’,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a certain perceptivity from within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 가인 계열의 내적 경고를 설명하면서 양심퍼셉션에 관련된 표현을 모두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두 용어의 교리적 구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 특징적인 것은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지각하는 퍼셉션이고, 홍수 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에게 특징적인 것은 배운 진리와 선으로부터 형성되는 양심입니다. 그러므로 AC.370의 표현은 가인 계열에게 후대 고대교회의 양심이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는 증거로 읽기보다, 태고교회의 질서가 크게 훼손된 상태에서도 체어리티에 관하여 내면에서 무엇인가를 알리고 지시하는 퍼셉션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벨은 이미 죽었습니다. 속뜻으로는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이것은 인간이 체어리티를 거부했다고 해서 주님께서 즉시 그를 완전히 버리시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내면에서는 여전히 아벨이 어디 있느냐’, 체어리티는 어디에 있느냐는 딕테이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르셔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알 수 있도록 내면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도 주님께서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고 말씀하셨듯이, 체어리티를 실제로 소멸시킨 뒤에도 주님의 말씀은 계속됩니다. 인간의 상태가 변한다고 해서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먼저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인의 대답은 이제 그들의 상태가 얼마나 깊이 굳어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스베덴보리는 이 짧은 대답을 세 단계로 풉니다. 첫째, 신앙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습니다.둘째, 신앙은 체어리티에 종속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셋째, 그 결과 신앙은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을 완전히 거부했습니다.앞의 번호들에서 진행되어 온 가인의 타락이 여기에서 하나의 완성된 교리적 태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구별하는 데서 시작했지만, 신앙을 사랑에서 독립된 것으로 여기면서 둘의 분리가 생겼고, 그 결과 체어리티 없는 행위와 예배가 나타났습니다. 이어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주도권을 가지려 했고, 마침내 아벨을 죽였습니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아벨을 지켜야 하는가?라고 말합니다. 체어리티 자체를 신앙과 무관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체어리티에 종속되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특별히 주의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신앙을 억압하거나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열등하여 없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될 때 각각의 기능이 온전해진다는 뜻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무엇이 선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밝혀 주지만, 그 진리를 사랑하고 실제로 행하게 하는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체어리티 아래 있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며 그것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앞의 AC.361-365에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했듯이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하며, 체어리티는 신앙을 통하여 자신이 어떻게 선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아갑니다.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하지만 그 생명의 근원과 주도권은 사랑과 체어리티에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말은 단순한 책임 회피보다 훨씬 깊은 뜻을 갖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아우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 서로 완전히 무관한 두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의 문자 자체가 보존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둘은 형제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이제 내가 그를 지켜야 하는가?라고 묻습니다. 속뜻으로 읽으면 신앙이 체어리티를 돌보아야 하는가? 신앙이 체어리티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말이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앙은 자기 존재의 목적을 잃어버립니다. 신앙의 모든 진리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인도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선을 실제 삶으로 행하게 하기 위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선언한다면 자신에게 생명을 주는 목적과 결합을 거부하는 셈입니다.

 

마지막의 그들의 교리는 이와 같이 되었습니다라는 한 문장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가인이라는 한 개인이 순간적으로 거짓말하고 책임을 회피했다는 심리적 설명에 머물지 않습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의 교리가 이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지만, 그것이 반복되고 확증되면서 하나의 교리가 되었습니다. 신앙을 그 자체로 구원의 본질적인 것으로 높이고,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낮추며, 마침내 체어리티에 속한 것을 신앙에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체계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단지 사람들이 이웃 사랑을 잘 실천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라는 사실 자체를 교리적으로 거부하기에 이른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교리가 왜 중요한지도 역으로 보여 줍니다. 교리는 단순히 머릿속에 저장된 신학적 문장이 아닙니다. 무엇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느냐에 따라 사람의 사랑과 삶의 방향도 영향을 받습니다. 체어리티를 신앙의 생명으로 인정하는 교리는 사람이 내가 믿는 진리가 어떻게 이웃의 선으로 나타나야 하는가?를 묻게 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신앙과 무관한 것으로 만드는 교리는 결국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태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오늘날 특정 교파나 특정 신학적 표어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다루는 것은 신앙이 실제로 사랑과 삶에서 분리되어 체어리티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드는 내적 원리입니다. 사람의 실제 영적 상태는 그가 사용하는 교리적 명칭만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사랑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AC.370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함께 놓으면 더욱 깊은 대비가 나타납니다. 한쪽에서는 내면으로부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퍼셉션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그들이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대답하는 교리를 만들어 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내적 딕테이트와 인간이 스스로 확증한 교리가 서로 맞서는 것입니다. 내면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임을 알리고 있는데, 인간은 신앙이 체어리티 아래 있기를 거부하는 교리를 세웁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는 단순히 진리를 몰랐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체어리티에 관한 어떤 내적 퍼셉션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거부하고 반대되는 것을 교리로 굳혔다는 데 있습니다.

 

결국 AC.370은 창4:9의 질문을 우리에게도 돌려놓습니다. ‘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이것은 단지 가인에게 죽은 동생의 행방을 묻는 질문이 아니라,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람에게 신앙 안에서 체어리티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 질문이 됩니다. 우리가 알고 고백하는 진리가 실제로 이웃의 참된 선을 구하게 하는지, 우리의 신앙이 사랑과 자비와 쓰임의 삶으로 이어지는지, 아니면 신앙의 정확성을 주장하면서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참된 신앙은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홀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비로소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AC.371, 창4:9, ‘퍼셉션에서 양심으로 -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의 속뜻’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4:9) AC.371‘여호와께서 말씀하심’(speaking of Jehovah)으로 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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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9, 창4:8, ‘가인이 아벨을 죽이다 -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신앙’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9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Cain 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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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9/06)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2, ‘ 함께 주를 경배하세’, 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92, ‘위에 계신 나의 친구입니다.

 

오늘 4 절별 주석 그 세 번째, 6절로 8, AC 글 번호로는 359번에서 369번입니다. 먼저 본문니다.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4:6-8)

 

제목은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이며, 다음은 오늘부터 시작하는 3 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기존 성도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한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과 문맥을 잊지 않기 위한 시간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따라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1에서는 천지창조를 주님께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2에서는 에덴동산을 주님의 사랑과 생명 안에 살아가는 천적인 상태로 읽었습니다. 그리고 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기 감각과 proprium 따르면서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4에서는 이후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읽고 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본래 신앙과 체어리티는 함께 있어야 형제이지만,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내어 자체로 중요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면서 사이의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지난주에는 가인과 아벨의 제물을 읽었습니다. 사람 모두 제물을 드렸지만 중요한 것은 제물의 종류가 아니라 예배가 어디에서 나왔는가였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가 나올 있지만, 사랑의 생명이 없으면 죽은 행위 죽은 예배 있습니다. 가인은 자기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했고 그의 얼굴이 떨어졌습니다. 바로 지점에서 지난주 리딩이 끝났습니다.

 

오늘은 다음 장면입니다. 아직 가인은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먼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시며 돌이킬 길을 열어 두십니다. 오늘은 가지를 마음에 두고 읽겠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함께 살아야 형제이며,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제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가운데에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인간을 부르시는지 함께 읽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359-369 요약입니다.

 

 

AC.359-369 앞의 AC.346-358에서 가인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결과 가인이 분하여 얼굴이 떨어진 , 그러니까 안색이 변한 , 주님께서 아직 그에게 돌이킬 길을 열어 주시는 장면에서 시작,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4:6-8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그리고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말씀을 하나씩 풀면서, 스베덴보리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할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체어리티 위에 군림하려 함으로써 마침내 그것을 소멸시키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이번 구간의 중심은 단순히 가인이 아벨을 죽였는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무엇이 주도해야 하며, 질서가 뒤집힐 신앙은 어떻게 자기 생명인 체어리티를 잃게 되는가? 있습니다.

 

AC.359-360에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라는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양심이 말해 주었다(conscience dictated)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가인은 이미 분노했고 얼굴이 떨어졌으며, 체어리티가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것들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벨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사이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악이 실제 행위로 완성되기 전에 주님께서 인간의 내면에 경고하시며 돌이킬 가능성을 열어 두신다는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가인의 상태가 이미 크게 기울어졌어도 주님의 부르심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여기서 양심이라는 표현은 태고교회와 고대교회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조심스럽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퍼셉션으로 인도되었고, 홍수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형성된 양심으로 인도되었다고 구별합니다. 그러므로 AC.359-360에서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 한다고 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후대 영적 인간과 똑같은 형태의 완성된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미 타락의 길에 들어섰어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인 딕테이트와 경고가 아직 남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악을 선택하기 전에 끊임없이 선을 향하여 돌이킬 길을 보여 주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를 함께 생각하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지 못하도록 그의 자유를 강제로 빼앗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침묵하신 것도 아닙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말씀하시며 그의 상태를 보여 주시고,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경고하시며, 아직 선택할 있는 길을 열어 주십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을 강제로 선하게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자유 가운데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스스로 악에서 돌아서도록 끊임없이 이끄시는 방식으로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이야기는 악이 이미 결정된 운명처럼 진행된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차례의 경고와 돌이킬 가능성에도 불구, 인간이 점차 체어리티를 거부하는 이야기입니다.

 

AC.361부터는 돌이킬 길이 무엇인지 더욱 분명해집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것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을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것은 선한 의도가 없다면 체어리티가 없고 오히려 악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말씀을 스베덴보리는 매우 뜻밖의 방식으로 풉니다. 여기서 너를 원하는 체어리티이며,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 있을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하나를 버려야 한다는 있는 것이 아니라 사이의 질서에 있습니다.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벨로 표상되는 체어리티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서로 적대하는 원리가 아니라 하나의 교회적 생명을 이루어야 하는 형제입니다. 문제는 가인,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와 함께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위에 서서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한다는 있습니다. 따라서 4:7 깊은 긴장은 신앙이냐 체어리티냐 아니라 누가 주도권을 가지느냐입니다.

 

AC.362 질서의 전도가 어떻게 하나의 교리로 굳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가인 이제 단순히 사람의 내적 상태가 아니라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고, 결과 사랑의 자손인 체어리티에서도 신앙을 분리하는 하나의 신앙의 교리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느 교회에서든 사람들이 신앙의 어떤 조항에 지나치게 집중하여 그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 이단이 생길 있다고 설명합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거짓으로 믿어서 이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가지를 전체보다 앞세우고 그것을 중심으로 나머지 모든 것을 재배열하면서 교리의 질서가 무너질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생각을 자신이 발견한 것으로 여기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거기에 결합하면 문제는 더욱 깊어집니다. 사람은 자기가 특별히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가지에 마음이 사로잡히면 점차 모든 것이 그것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생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성경도, 경험도, 다른 교리도 모두 자기 생각을 확증하는 자료처럼 읽히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그것이 거짓이라 해도 틀림없는 진리라고 맹세할 정도가 됩니다. 이것이 AC.362 보여 주는 가인의 교리가 굳어지는 과정입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사랑보다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사랑 없이 살아감으로써 자기 사랑과 거기서 나온 판타지가 서로 결합하여 교리를 더욱 확증했습니다.

 

대목은 교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특별히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문제는 교리를 깊이 연구하는 자체가 아닙니다. 진리의 측면을 전체 질서에서 떼어 내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고, 지식을 자기의 발견이나 영적 우월성으로 소유하려 문제가 시작됩니다. 이것은 AC 읽고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배우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아르카나를 안다는 사실이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내가 깊은 진리를 안다는 자기 의식을 강화한다면 높은 진리조차 가인의 교리로 변질될 있습니다. 진리는 언제나 사랑과 체어리티를 섬겨야 합니다.

 

AC.363 그래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올바른 질서를 매우 명확하게 선언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결합될 있지만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에서 선을 행한다 것은 속뜻으로 선한 의도를 가지는 것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을 행하는 것은 선을 의도하는 (from willing what is good)에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가인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순히 겉으로 착한 행동 가지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적 의지가 선을 향하고 선에서 실제 행위가 나오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고대에는 행위와 의지가 하나였다 말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고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이 거짓이나 위선을 전혀 몰랐다는 일반적인 역사적 진술로 확대하기보다, 문맥에서 다루는 태고교회 사람들의 특유한 내적 상태와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의지와 행위가 아직 하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행위를 보면 사람의 의지를 있었으며, 속마음과 다른 모습을 밖으로 꾸미는 위선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AC.363 관심은 당시 인류 전체의 사회사를 설명하는 있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제물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가인에게는 행위가 있었고 예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AC.348-349에서 그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죽은 행위 죽은 예배 설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한다 것은 단지 외적 행위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의지에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한 의지의 궁극적 근원 역시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의지하고 행할 ,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다시 결합되며 그의 얼굴, 내적인 것들도 다시 들릴 있습니다.

 

AC.364에서는 반대의 상태가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선한 의도가 없으면 체어리티가 없고, 체어리티가 없는 곳에는 무자비함과 증오가 있으며 결과 온갖 악이 들어올 준비를 합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 것은 악이 아직 완전히 들어와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최종 상태라기보다, 마음 앞에서 들어오기를 원하며 기다리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가인은 이미 분노했고 얼굴도 떨어졌지만 아직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는 경고와 함께 아직 돌아설 있다는 가능성도 들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죄를 일반적으로 마귀라고 부르며, 사람이 체어리티를 잃을 마귀, 지옥의 무리가 가까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악을 행한 책임을 외부 마귀에게 돌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유입에 관한 가르침에서 인간에게 선과 악의 영향이 유입되지만, 인간은 자유 가운데 어느 것을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삼을지를 선택합니다. 그러므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 것은 악이 강제로 인간 안으로 들어온다는 뜻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사라진 마음이 악의 유입을 받아들이기 쉬운 상태가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있습니다.

 

그리고 AC.364 악을 마음 문에서 몰아내는 길을 매우 단순하면서도 강하게 제시합니다. 그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강한 자기 의지나 많은 종교 지식만으로 악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악을 몰아내는 근본적인 힘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 이어져 가인의 문제를 정확히 뒤집습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회복의 역시 신앙을 더욱 독립적으로 강화하는 있지 않고, 신앙이 다시 사랑과 체어리티 안으로 돌아가는 있습니다.

 

AC.365 관계를 불꽃 이라는 아름다운 비유로 설명합니다. 체어리티는 불꽃과 같고 신앙은 불꽃에서 나오는 빛과 같습니다. 불꽃에는 열과 빛이 함께 있으며, 열과 빛은 모두 불꽃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불꽃의 열이 없는 빛과 같아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겨울의 이라고 부릅니다. 겨울에도 빛은 있습니다. 사물을 수도 있고 무엇이 어디 있는지 분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빛에는 생명을 일으키는 따뜻함이 없기 때문에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습니다.

 

겨울의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성질을 매우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사람에게 성경 지식과 교리적 이해가 있을 있고, 상당히 정확하게 진리를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빛에는 열이 없습니다. 반대로 이것이 진리나 신앙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도 아닙니다. 불꽃에는 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빛도 있습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진리의 빛을 필요로 하며, 진리는 사랑이 어떻게 지혜롭게 이웃을 섬겨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문제는 자체가 아니라 빛이 불꽃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존재하려는 있습니다.

 

따라서 AC.361-365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신앙을 버리고 체어리티만 가지라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올바른 질서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는 동안에는 참된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비로소 신앙이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랑이 신앙을 지배해야 한다는 단순한 인간 중심적 명제가 아닙니다. 모든 참된 체어리티의 근원은 주님이시므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진리를 통하여 인간의 삶을 이끈다는 뜻입니다.

 

AC.366에서 마침내 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이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먼저 가인이 아벨에게 말하고라는 표현이 시간의 간격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아벨의 죽음은 가인의 분노 직후 갑자기 일어난 사건으로만 읽히지 않습니다. 가인이 분노하고, 얼굴이 떨어지고, 주님의 경고를 받고,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말씀을 들었음에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가인의 타락은 이번에도 점진적입니다.

 

여기서 아벨을 거듭 아우, 형제라고 부르는 것도 중요합니다. 아벨로 표상되는 체어리티는 신앙의 적이 아니라 신앙의 형제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교회 안에서 함께 태어나 함께 살아야 하는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자기와 무관한 적을 제거했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에게 생명을 주어야 형제를 죽였다는 뜻입니다.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순간 신앙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생명의 근원을 잃게 됩니다.

 

또한 가인이 아벨을 죽인 장소가 이라는 것도 중요합니다. 교리에 속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의 소멸은 단순히 감정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리의 에서도 일어납니다. AC.362에서 보았듯이 신앙을 사랑보다 본질적인 것으로 세우는 생각이 하나의 교리로 굳어지고, 교리가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낼 , 바로 교리의 들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이 일어납니다. 교리는 체어리티를 살리는 들이 수도 있고,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들이 수도 있습니다.

 

AC.367 그래서 체어리티가 신앙의 형제라는 사실을 말씀 전체를 통해 확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에서와 야곱, 베레스와 세라, 에브라임과 므낫세처럼 말씀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형제와 장자권의 이야기를 가져옵니다. 이야기들에는 공통적으로 누가 장자인가, 누가 주도권을 가지는가라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교회의 자손이지만,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서는 어느 것이 앞서는 것처럼 보이는가와 궁극적으로 어느 것이 주도해야 하는가 사이에 긴장이 나타날 있습니다.

 

특히 야곱과 에서의 관계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와 비슷한 문제를 보여 줍니다. 야곱은 에서를 밀어내려 했으며 장자권과 주도권을 차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궁극적으로 에서로 표상되는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지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질서를 이해하는 중요합니다. 영적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서는 진리와 신앙이 먼저 앞에 서서 사람을 이끄는 것처럼 보일 있습니다. 사람은 먼저 말씀을 배우고 무엇이 선인지 알며, 진리에 따라 자신을 훈련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지면 진리가 안으로 들어가고, 마침내 선과 체어리티가 진리를 이끄는 천국의 질서가 세워집니다. 따라서 체어리티의 주도권은 진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본래의 목적 안에 두는 것입니다.

 

AC.367 마지막에서 주님께서 어머니와 동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라 하신 8:21 말씀도 같은 질서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듣는 신앙에, 행하는 체어리티에 연결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은 서로 떨어져서는 됩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7에서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따라서 참된 형제 관계 신앙을 고백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들은 진리가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날 이루어집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형제의 언약 진리를 듣는 것과 진리를 행하는 것이 하나가 되는 삶입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형제라는 말의 의미도 새롭게 보여 줍니다. 같은 교리를 고백하고 같은 교회에 속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영적 형제 관계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초대교회에서 서로를 형제라 부른 깊은 이유는 체어리티에 있었습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말씀을 듣고 행하며, 서로의 쓰임을 위하여 살아갈 신앙의 형제 관계가 실제가 됩니다. 따라서 교회의 참된 연합 역시 단순한 교리적 동일성만이 아니라 진리와 체어리티가 함께 살아 있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AC.368 AC.366에서 교리를 상징한다고 것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더욱 자세히 확증합니다. 씨를 뿌리는 , 좋은 씨와 가라지가 함께 있는 , 밭에 감추인 보화 말씀에서 단순한 농경지가 아니라 진리와 선이 심기고 자라며 열매 맺는 교리적 영역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장소가 이어야 했는지를 이해하게 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결정하는 중요한 싸움이 바로 교리의 영역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교리는 본래 인간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이유도 결국 진리가 삶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교리가 목적을 잃고 자기 정당화나 우월성을 위한 체계가 되면, 같은 오히려 체어리티를 죽이는 장소가 있습니다. 따라서 교리의 참됨은 단순히 논리적으로 얼마나 정교한가만으로 판단할 없습니다. 참된 교리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를 살리고, 인간이 실제 선과 쓰임의 삶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의 씨앗이 자라는 장소인 동시에, 질서가 뒤집히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장소가 수도 있습니다.

 

AC.369 지금까지의 설명을 하나로 모아 4:8 결론을 밝힙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고, 아벨은 체어리티이며, 둘은 본래 형제이고, 들은 신앙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말씀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교회의 교리 안에서 나왔음에도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그로 말미암아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를 뜻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의 소멸이 처음부터 체어리티는 필요 없다 노골적으로 선언하는 방식으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먼저 신앙을 사랑보다 본질적인 것으로 세웁니다. 그러면 체어리티는 신앙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 됩니다. 입술로는 사랑과 선한 삶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구원의 본질은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 자체에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전제가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킨다고 말합니다.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69 스베덴보리 당시 기독교의 체어리티의 행위가 없어도 오직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 교리를 직접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특정 교파나 종교개혁의 표어를 공격하는 것으로만 읽어서는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영적 질서입니다. 실제로 입술로는 사랑이 없는 신앙은 구원하지 못한다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구원하는 본질은 오직 신앙이라고 전제한다면 체어리티는 실제 교리와 삶에서 점차 주변으로 밀려날 있습니다. 바로 내적 모순을 가인의 상태가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359-369 전체를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결코 갑작스럽지 않습니다. AC.338에서 시작된 작은 구별이 사랑과 신앙의 분리가 되고, AC.346-358에서 분리가 죽은 행위와 죽은 예배로 나타났으며,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와 내적인 것들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번 구간에서는 주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주도권을 가지려 하고, 질서의 전도가 하나의 교리로 굳어지며, 마침내 교리의 들에서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를 소멸시킵니다. 구별 분리 죽은 행위 죽은 예배 분노 내적인 것들의 변화 체어리티에 대한 지배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하나의 흐름이 4:8에서 절정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구간에는 심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자비의 메시지도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 여호와께서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하셨고, 죄가 아직 문에 있을 경고하셨으며, 선을 행하면 다시 얼굴을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악의 길로 상당히 깊이 들어갔어도 주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선으로 돌아올 길을 열어 두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변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입니다. 주님의 얼굴은 여전히 인간을 향하고 있지만, 가인은 얼굴을 받아들이는 대신 자기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선택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과정에서도 매우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우리 안에도 어떤 진리를 다른 모든 것보다 높이고 싶은 마음이 생길 있고, 내가 옳다는 확신 때문에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교리를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정죄하고, 진리를 변호한다는 이유로 체어리티를 희생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때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 말씀과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 말씀이 우리에게도 들려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자유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웃을 지혜롭게 사랑할 것인지를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특히 AC 읽는 우리에게 가인의 이야기는 더욱 조심스러운 자기 점검을 요구합니다. 말씀의 속뜻을 알고 상응을 이해하며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를 많이 배운다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지식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보다 깊은 진리를 안다 생각이 자라나고,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을 쉽게 판단하거나 안에 있는 선과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게 된다면 바로 우리가 공부하는 교리의 에서 아벨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참된 교리는 사람을 높이는 지식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더욱 겸손하게 하고, 이웃을 지혜롭게 사랑하게 하며, 실제 쓰임으로 나아가게 하는 진리여야 합니다.

 

결국 AC.359-369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옳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에서 걸음 나아갑니다. 내가 가진 신앙 안에서 아벨은 살아 있는가? 묻습니다. 내가 알고 믿는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따뜻해지고 있는지, 아니면 많은 빛은 있지만 열이 없는 겨울의 되어 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경쟁자로 여기지 않고 자기 형제로 받아들이며, 체어리티 안에서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이번 AC.359-369 앞의 AC.346-358에서 나타난 죽은 행위와 죽은 예배 어디까지 나아갈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결정적인 구간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처음에는 여전히 행위하고 예배하며 진리를 말할 있습니다. 그러나 분리가 계속되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 두려 하고, 교리적으로 질서를 정당화하며,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킬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과정을 거꾸로 돌리는 일입니다. 진리가 다시 선을 섬기고,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하며, 우리가 듣는 말씀을 실제로 행하고,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이웃을 향한 쓰임으로 나타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 안에서 매일 일어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에 관한 말씀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가인과 아벨이 형제로 함께 사는 것입니다. 신앙의 빛이 체어리티의 불꽃에서 나오고, 진리가 선을 섬기며, 아는 것과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주님 안에서 점차 하나가 되는 , 이것이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그리고 질서가 회복될 우리의 신앙은 이상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하는 겨울의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열을 품고 이웃을 살리는 살아 있는 빛이 됩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359,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 양심을 통한 주님의 부르심 (AC.359-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is thine anger kindled?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창4:6) AC.35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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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0,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 다시 확인되는 양심의 딕테이트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0‘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Jehovah said unto Cain)가 양심이 말해 주었음을 뜻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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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1, 창4:7,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AC.361-365)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is there not an uplifting? And if thou doest not 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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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2, 창4:7,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든 가인의 교리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2여기서는 ‘가인’(Cain)이라 하는 신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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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3, 창4:7,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3‘가인’(Cain)이라 불린 신앙의 교리가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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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4, 창4:7,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 악을 물리치는 것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4 둘째로,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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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5, 창4:7,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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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6,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다 -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다 (AC.366-36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spake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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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7, 창4:8,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입니다 - 장자권과 주도권의 속뜻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7이러한 것들은 말씀의 비슷한 구절들로 확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체어리티가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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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8, 창4:8, ‘들’은 왜 교리를 상징하는가? - 신앙의 씨가 뿌려지는 곳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8‘들’(field)이 교리를 상징하며,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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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9, 창4:8, 가인이 아벨을 죽이다 -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신앙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9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Cain 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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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필수 리딩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AC.361, 창4:7,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AC.361-365)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is there not an uplifting? And if thou doest not 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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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5, 창4:7,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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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9, 창4:8, 가인이 아벨을 죽이다 -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신앙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9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Cain 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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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어서 성찬 있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9-06(D1)

 

2667, 4, 창4.4, 2026-09-06(D1)-주일예배(창4,6-8, AC.359-369, 성찬),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pdf
1.00MB
성찬.pdf
0.12MB

 

 

 

주일예배(2026/08/30, 창4:3-5, AC.346-358), ‘가인과 아벨의 제물 - 무엇이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가?’

※ 오늘(2026/08/30)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1, ‘홀로 한 분 하나님께’, 찬91, ‘슬픈 마음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두 번째, 3절로 5절, AC 글 번호로는 346번에서 358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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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4:8)

 

AC.369

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Cain rose up against his brother Abel, and slew him,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ogether)라는 말씀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신앙의 교리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그로 말미암아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킬 수밖에 없었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체어리티의 행위가 없어도 오직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경우와 같습니다. 그들은 사랑이 없으면 신앙이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입술로 고백하면서도, 바로 오직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 전제 자체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From this then it follows that the words Cain rose up against his brother Abel, and slew him,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ogether, denote that while both faith and charity were from the doctrine of faith, yet faith separate from love could not but disregard and thereby extinguish charity; as is the case at the present day with those who maintain that faith alone saves, without a work of charity, for in this very supposition they extinguish charity, although they know and confess with their lips that faith is not saving unless there is love.

 

해설

AC.369는 앞의 여러 단락에서 하나씩 설명해 온 상응을 창4:8의 한 장면 안에 다시 모아 줍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형제는 본래 서로 결합되어야 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은 교리, 곧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라는 말씀은 단순히 한 형제가 다른 형제를 죽인 사건을 넘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교리의 영역에서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특별히 눈여겨볼 것은 스베덴보리가 신앙과 체어리티가 신앙의 교리에서 나온 이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처음부터 전혀 관계없는 두 원리가 아니었습니다. AC.367에서 이미 보았듯이 둘은 모두 교회의 자손이며 형제입니다. 참된 교리 안에는 신앙도 있고 체어리티도 있습니다. 진리를 믿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은 본래 하나의 교회적 삶 안에서 함께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독립적인 구원의 원리로 세울 때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사용하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먼저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disregard)고 합니다. 처음부터 체어리티는 필요 없다고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것만이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신앙을 구원의 본질적인 것으로 세우고 체어리티를 그 뒤에 따라오는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내는 순간 이미 질서가 뒤집히기 시작합니다. AC.365에서 보았듯이 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참된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 비로소 신앙이 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에 덧붙이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신앙에 생명을 주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의 깊은 의미입니다.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것은 단순히 체어리티의 위치를 조금 낮추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로 말미암아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킨다고 말합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채 구원하는 신앙으로 세워지면,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사는가는 구원의 본질에서 점차 밀려나게 됩니다. 입술로는 사랑과 선한 삶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교리의 구조 자체가 그것들을 구원의 본질에서 제외한다면 체어리티는 실제 삶에서 점점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AC.369 후반은 스베덴보리 당시의 기독교를 향한 매우 직접적인 비판으로 이어집니다. 그는 체어리티의 행위가 없어도 오직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가인의 상태와 연결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비판하는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앞에서 계속 보았듯이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이며 둘 다 교회의 자손입니다. 문제는 신앙만으로라는 분리입니다.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내어 그것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만드는 순간, 신앙은 자기 생명의 근원과 분리됩니다.

 

더욱 날카로운 것은 그들이 체어리티의 필요성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도 사랑이 없으면 신앙이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입술로 고백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교리적으로는 사랑도 중요합니다’, ‘선한 삶도 필요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구원은 오직 신앙만으로 받는다고 전제한다면, 사랑과 체어리티는 결국 구원의 본질 밖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바로 이 내적인 모순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특정 교파의 교리 문구를 공격하기 위한 설명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은 하나의 역사적 교리 논쟁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려는 영적 경향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나는 오직 신앙만을 주장하지 않으니 가인과 관계없다고 쉽게 지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것, 올바른 교리를 고백하는 것, AC의 속뜻을 이해하는 것을 실제 사랑과 삶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한다면 같은 질서의 전도가 우리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특히 AC를 읽는 우리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많이 알고,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아르카나를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영적 생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지식 때문에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진리를 알고 있다고 여기고, 그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실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게 된다면 바로 그 교리의 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높은 진리라 할지라도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겨울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키지 않고 살립니다. 진리를 알수록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더 분명히 보게 되며, 이웃을 더 지혜롭게 사랑하고 실제 쓰임을 행하게 된다면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로 함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에게서 생명을 받고, 체어리티는 신앙의 진리를 통하여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배우며, 둘은 하나의 삶 안에서 결합됩니다.

 

따라서 AC.369에서 가장 무서운 말은 어쩌면 죽였다보다 그 앞의 중요하지 않게 여겼다일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의 소멸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사랑보다 신앙을 조금 더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고, 다음에는 체어리티를 신앙 뒤에 따라오는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며, 마침내는 체어리티가 없어도 신앙 자체가 사람을 구원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AC.338부터 이어져 온 가인의 길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먼저 그 자체로 어떤 것으로 구별되고, 점차 사랑에서 분리되고, 체어리티 없는 행위와 예배를 낳으며,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고, 마침내 자기 형제 아벨을 소멸시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당신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만을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신앙 안에서 아벨은 살아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내가 믿고 고백하는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지, 아니면 입술로는 체어리티를 인정하면서 실제로는 그것을 신앙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밀어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자기 형제를 죽이지 않습니다. 체어리티와 함께 살며,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체어리티의 궁극적인 근원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모든 선과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이십니다.

 

 

 

AC.370, 창4:9,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 체어리티를 완전히 거부하게 된 신앙’ (AC.370-3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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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8, 창4:8, ‘들’은 왜 교리를 상징하는가? - 신앙의 씨가 뿌려지는 곳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8‘들’(field)이 교리를 상징하며,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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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4:8)

 

AC.368

(field) 교리를 상징하며,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상징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분명합니다. 예레미야에서, That afieldsignifies doctrine, and consequently whatever belongs to the doctrine of faith and charity, is evident from the Word, as in Jeremiah:

 

들에 있는 나의 산아 영토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재산과 모든 보물과 산당들로 노략을 당하게 하리니 (17:3) O my mountain in the field, I will give thy possessions [facultates] and all thy treasures for a spoil. (Jer. 17:3)

 

여기서 (field) 교리를 상징하고, 재산(possessions) 보물(treasures) 신앙의 영적 부요함, 신앙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뜻합니다. 같은 예레미야에서, In this passagefieldsignifies doctrine; “possessionsandtreasuresdenote the spiritual riches of faith, or the things that belong to the doctrine of faith. In the same: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바위를 떠나겠으며 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 (18:14) Shall the snow of Lebanon fail from the rock of my field? (Jer. 18:14)

 

신앙의 교리가 없어진 시온에 관해서는 밭같이 갈아엎어질 (plowed like a field)이라고 선언합니다(26:18; 3:12). It is declared concerning Zion, when destitute of the doctrine of faith, that she shall beplowed like a field.(Jer. 26:18, Micah 3:12)

 

유다의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시온은 같이 경작지가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무더기가 되며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26:18)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 (3:12)

 

에스겔에서, In Ezekiel:

 

땅의 종자를 꺾어 옥토에 심되 수양버들 가지처럼 큰물 가에 심더니 (17:5) He took of the seed of the land, and set it in a field of sowing, (Ezek. 17:5)

 

이는 교회와 신앙을 다루는 말씀입니다. 교리는 안에 씨가 있기 때문에 (field)이라 합니다. 같은 에스겔에서, treating of the church and of its faith; for doctrine is called afieldfrom the seed in it. In the same:

 

들의 모든 나무가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고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는 알리라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17:24) And let all the trees of the field know that I Jehovah bring down the high tree. (Ezek. 17:24)

 

요엘에서, In Joel:

 

10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마르니 곡식이 떨어지며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 11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밭의 소산이 없어졌음이로다 12밭의 모든 나무가 시들었으니 (1:10-12) The field is laid waste, the ground mourneth, for the corn is wasted, the new wine is dried up, the oil languisheth, the husbandmen are ashamed, the harvest of the field is perished, all the trees of the field are withered, (Joel 1:1012)

 

여기서 (field) 교리를, 나무들(trees) 지식을, 농부들(husbandmen) 예배하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시편에서, where thefieldsignifies doctrine, “treesknowledges, andhusbandmenworshipers. In David:

 

밭과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96:12) The field shall exult and all that is therein; then shall all the trees of the forest sing, (Ps. 96:12)

 

여기서 밭이 즐거워할 수도 없고 숲의 나무들이 노래할 수도 없다는 것은 아주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는 사람 안에 있는 것들, 신앙의 지식들을 뜻합니다. 예레미야에서, where it is perfectly evident that the field cannot exult, nor the trees of the forest sing; but things that are in man, which are the knowledges of faith. In Jeremiah:

 

언제까지 땅이 슬퍼하며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12:4) How long shall the land mourn, and the herb of every field wither? (Jer. 12:4)

 

여기에서도 땅이나 들의 채소가 슬퍼할 있는 것이 아니며, 표현들이 황폐함의 상태에 있는 사람 안의 어떤 것들을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이사야에도 있습니다. where it is also evident that neither the land nor the herbs of the field can mourn; but that the expressions relate to something in man while in a state of vastation. A similar passage occurs in Isaiah: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것이며 (55:12) The mountains and the hills shall break forth before you into singing, and all the trees of the field shall clap their hands. (Isa. 55:12)

 

주님께서도 시대의 완성에 관하여 예언하시면서 신앙의 교리를 (field)이라 하십니다. The Lord also in his prediction concerning the consummation of the age calls the doctrine of faith afield:

 

그때에 사람이 밭에 있으매 사람은 데려가고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24:40; 17:36) Then shall two be in the field, the one shall be taken and the other left, (Matt. 24:40; Luke 17:36)

 

여기서 (field) 참된 것이든 거짓된 것이든 신앙의 교리를 뜻합니다. (field) 교리를 상징하므로, 신앙의 씨를 받는 것은 사람이든 교회든 세계든 또한 (field)이라 합니다. where by afieldis meant the doctrine of faith, both true and false. As afieldsignifies doctrine, whoever receives a seed of faith, whether a man, the church, or the world, is also called afield.

 

해설

AC.368은 바로 앞 AC.367에서 남겨 둔 한 가지를 집중적으로 확증합니다. AC.367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형제라는 것을 주로 설명했다면, 이제 AC.368에서는 (field)이 교리를 상징하며, 더 구체적으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상징한다는 것을 말씀 여러 곳을 통해 보여 줍니다. 이것은 창4:8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라는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일이 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속뜻에서 분리된 신앙이 교리의 영역에서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 교리를 상징할까요? AC.368은 그 이유를 매우 간결하게 보여 줍니다. 들은 씨가 뿌려지는 곳입니다. 에스겔의 말씀을 인용한 뒤 스베덴보리는 교리는 안에 씨가 있기 때문에 들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자연계에서 들이 씨를 받아 싹이 나고 자라 열매를 맺는 곳이라면, 영적으로 교리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진리가 받아들여지고 자라는 영역입니다. 따라서 =교리라는 상응은 단순히 임의로 정해진 상징어가 아니라, 씨와 들의 관계를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창1에서 살펴본 의 의미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는 사람 안에 심기는 씨와 같고, 그 씨가 받아들여져 자랄 수 있는 곳이 필요합니다. AC.368에서는 바로 그 씨가 있는 곳이라는 점 때문에 교리를 이라 합니다. 따라서 교리는 단순히 머릿속에 정리된 신학 명제들의 목록이 아닙니다. 참된 교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 보존하고, 그것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자라도록 하는 밭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예레미야의 들의 나의 에 관한 말씀에서 은 교리를 상징하고, ‘재산보물은 신앙의 영적 부요함, 곧 신앙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적인 재산과 보물의 언어가 말씀의 속뜻에서는 사람이 주님에게서 받은 영적인 부요함을 나타낼 수 있음을 봅니다. 교회가 가진 참된 부요함은 건물이나 재산이나 외적인 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선과 진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교리 안에 받아들여지고 보존될 때 교리는 영적 보물을 품은 이 됩니다.

 

반대로 교리가 황폐해질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교리가 없어진 시온이 밭같이 갈아엎어질 이라는 렘26:18과 미3:12을 인용합니다. 들이 씨와 열매로 풍성할 수도 있고 황무지가 될 수도 있는 것처럼, 교리 역시 참된 진리를 품을 수도 있고 진리를 잃어 황폐해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라는 상응 자체가 언제나 좋은 교리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AC.368 마지막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람이 밭에 있으매 사람은 데려가고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이라는 말씀을 설명하면서, 스베덴보리는 이 참된 것이든 거짓된 것이든 신앙의 교리를 뜻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교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그 내용이 자동으로 참된 것은 아닙니다. 교리는 씨를 품는 들이지만, 어떤 씨를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는 교리가 있는가 하면, 거짓을 신앙의 진리처럼 체계화하는 교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AC.362에서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자기 사랑과 거기서 나온 판타지로 그것을 계속 확증했습니다. 그 결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하나의 교리로 굳어졌습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이 에 있었다는 것은 단순한 장소 설명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교리의 문제로 들어갔음을 보여 줍니다.

 

요엘의 말씀은 의 황폐함을 더욱 풍성한 상응으로 보여 줍니다. ‘밭이 황무하고’, ‘곡식이 진하여’, ‘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으며’, ‘밭의 모든 나무가 시들었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을 교리, ‘나무들을 지식, ‘농부들을 예배하는 사람들로 설명합니다. 자연적인 농경의 황폐함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교리와 그 안의 지식들이 생명을 잃고 그것을 가지고 예배하는 사람들까지 황폐해지는 상태가 묘사됩니다. 교리가 삶에서 분리되면 단지 몇 가지 신학 명제가 잘못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믿으며 어떻게 예배하는가 하는 전체 질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96:12밭과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노래하리로다라는 말씀과 사55:12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것이며라는 말씀은 말씀의 속뜻이 왜 필요한지를 매우 알기 쉽게 보여 줍니다. 자연적인 밭이 실제로 즐거워할 수 없고 나무가 노래하거나 손뼉 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표현은 사람 안에 있는 살아 있는 영적 실재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시편의 경우 그것을 신앙의 지식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말씀은 자연계의 사물들을 통하여 인간의 내적인 것과 천국적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렘12:4땅이 슬퍼하며 지방의 채소가 마른다는 말씀은 황폐함(vastation)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땅이나 풀이 실제로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의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이 황폐해지는 상태가 자연계의 모습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처럼 같은 과 그 안의 식물들이 어떤 곳에서는 기뻐하고 노래하며, 다른 곳에서는 마르고 황폐해지는 것은 교리와 지식이 그 안에 무엇을 받아들이고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시대의 완성에 관하여 그때에 사람이 밭에 있으매 사람은 데려가고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라고 하신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인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을 신앙의 교리라고 설명하면서 특별히 참된 것이든 거짓된 것이든이라고 덧붙입니다. 두 사람이 모두 같은 에 있다는 외적 사실만으로 그들의 내적 상태가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교리에 속해 있고 말씀을 알고 신앙을 고백한다고 해서 모두 같은 영적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이 그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그것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삶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AC.368 마지막에는 의 의미가 한 단계 더 넓어집니다. 들이 교리를 상징하는 이유가 그 안에 씨가 있기 때문이라면, 신앙의 씨를 받는 것 역시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든 교회든 세계든 신앙의 씨를 받는 것은 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상응의 의미가 단순한 단어 대응보다 훨씬 유기적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은 교리를 뜻하지만, 더 넓게는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의 씨가 받아들여지고 자랄 수 있는 수용의 영역까지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 마음 역시 주님의 말씀이 심기는 하나의 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지 많은 씨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은 교리를 알고, AC의 많은 아르카나를 이해한다고 해도 그것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다면 바로 그 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교리를 많이 아는 것이 오히려 자기 의와 우월감을 확증하는 수단이 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사랑을 잃게 한다면 진리를 담아야 할 들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장소로 변한 것입니다.

 

반대로 참된 교리는 아벨을 살립니다. 진리가 우리를 주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고, 자기 악을 보게 하며, 이웃을 더 지혜롭게 사랑하고 실제 쓰임을 행하게 한다면 그 교리는 좋은 씨가 자라는 들이 됩니다. 그러므로 AC.368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올바른 교리를 알고 있는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교리는 안에서 무엇을 자라게 하고 있는가?까지 나아갑니다. 신앙의 들에서 체어리티가 살아 있는가, 아니면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 체어리티가 밀려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교리의 궁극적인 쓰임은 그 자체를 높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결합되어 살아 있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열매를 맺게 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AC.369, 창4:8, 가인이 아벨을 죽이다 -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신앙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9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Cain 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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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7, 창4:8,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입니다 - 장자권과 주도권의 속뜻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7이러한 것들은 말씀의 비슷한 구절들로 확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체어리티가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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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4:8)

 

AC.367

이러한 것들은 말씀의 비슷한 구절들로 확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체어리티가 신앙의 형제(brother)라는 것과, (field)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상징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필요한 만큼은 예외입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의 형제(brother)라는 것은 신앙의 본성 또는 본질 자체로부터 누구에게나 분명합니다. 형제 관계는 에서와 야곱으로 표상되었으며, 장자권과 그에 따른 주도권을 둘러싼 그들의 다툼도 여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또한 유다가 다말에게서 낳은 베레스와 세라(38:28-30), It is unnecessary to confirm these things by similar passages from the Word, except so far as to prove that charity is thebrotherof faith, and that afieldsignifies whatever is of doctrine. That charity is thebrotherof faith is evident to everyone from the nature or essence of faith. This brotherhood was represented by Esau and Jacob, and was the ground of their dispute about the birthright and the consequent dominion. It was also represented by Pharez and Zarah, the sons of Tamar by Judah (Gen. 38:28, 29, 30);

 

28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손에 매었더니 29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30그의 손에 홍색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38:28-30)

 

그리고 에브라임과 므낫세(48:13-14)로도 표상되었습니다. and by Ephraim and Manasseh (Gen. 48:13, 14);

 

13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14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48:13-14)

 

경우뿐 아니라 이와 비슷한 다른 경우들에서도 장자권과 그에 따른 주도권을 둘러싼 다툼이 있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교회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1절의 가인처럼 사람(man)이라 하고, 체어리티는 19:2, 13:14 다른 곳들에서처럼 형제(brother) 합니다. and in both of these, as well as in other similar cases, there is a dispute about the primogeniture and the consequent dominion. For both faith and charity are the offspring of the church. Faith is called aman,as was Cain, in verse 1 of this chapter, and charity is called abrother,as in Isa. 19:2; Jer. 13:14; and other places.

 

내가 애굽인을 격동하여 애굽인을 치리니 그들이 각기 형제를 치며 각기 이웃을 것이요 성읍이 성읍을 치며 나라가 나라를 것이며 (19:2)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 사이에도 그러하게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사랑하지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14)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은 형제의 언약(the covenant of brethren)이라 합니다(1:9). The union of faith and charity is calledthe covenant of brethren.” (Amos 1: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음이라 (1:9)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야곱과 에서가 상징하는 것도 가인과 아벨이 상징하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야곱 역시 자기 에서를 밀어내려 했는데, 이는 호세아에서도 분명합니다. Similar to the signification of Cain and Abel was that of Jacob and Esau, as just said; in that Jacob also was desirous of supplanting his brother Esau, as is evident also in Hosea:

 

2야곱을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 3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12:2-3) To visit upon Jacob his ways, according to his doings will he recompense him; he supplanted his brother in the womb. (Hos. 12:23)

 

그러나 에서, 에서로 표상된 체어리티가 마침내 주도권을 가지게 것이라는 사실은 그들의 아버지 이삭의 예언에서 나타납니다. But that Esau, or the charity represented by Esau, should nevertheless at length have the dominion, appears from the prophetic prediction of their father Isaac: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멍에를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27:40) By thy sword shalt thou live, and shalt serve thy brother; and it shall come to pass, when thou hast the dominion, that thou shalt break his yoke from off thy neck. (Gen. 27:40)

 

또는 같은 의미로, 이방인의 교회, 교회는 에서로 표상되고 유대교회는 야곱으로 표상됩니다. 이런 이유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형제로 인정해야 한다는 말씀이 자주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교회, 초대교회에서는 체어리티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형제라 불렀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도 주님께서는 형제라 하십니다(8:21). Or what is the same, the church of the gentiles, or new church, is represented by Esau, and the Jewish church is represented by Jacob; and this is the reason for its being so often said that the Jews should acknowledge the gentiles as brethren; and in the church of the gentiles, or primitive church, all were called brethren, from charity. Such as hear the Word and do it are likewise called brethren by the Lord (Luke 8: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머니와 동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8:21)

 

듣는 사람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고, 행하는 사람은 체어리티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듣기만 하는 사람, 신앙이 있다고 말하면서 행하지 않는 사람, 다시 말해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은 형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어리석은 사람에 비유하시기 때문입니다(7:24, 26). those who hear are such as have faith; those who do are such as have charity; but those who hear, or say that they have faith, and do not, or have not charity, are not brethren, for the Lord likens them unto fools (Matt. 7:24, 26).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6나의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7:24, 26)

 

해설

AC.367은 직전 AC.366에서 아벨을 거듭 가인의 아우’, 형제라고 부른 이유를 말씀 전체의 표상을 통해 확증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상징하지만, 본래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적대하는 두 원리가 아닙니다. 둘은 모두 교회의 자손이며 서로 형제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자기와 아무 관계도 없는 어떤 것을 제거했다는 뜻이 아니라, 본래 자기와 하나를 이루어야 할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형제라는 표현은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형제 관계가 가인과 아벨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 반복된다고 설명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에서와 야곱입니다. 두 사람은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이지만 장자권을 둘러싸고 다툽니다. 야곱은 에서의 장자권을 얻으려 하고 결국 아버지 이삭의 축복까지 대신 받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이야기를 단순한 가족 간의 재산이나 상속 문제로만 보지 않고,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무엇이 먼저이며 무엇이 주도권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영적 질서의 문제로 읽습니다.

 

이 때문에 AC.367은 에서와 야곱뿐 아니라 다말이 유다에게서 낳은 베레스와 세라, 그리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까지 언급합니다. 이 이야기들에서도 누가 먼저 태어나며 누가 장자의 위치와 축복을 얻는가 하는 문제가 반복됩니다. 자연적인 관점에서는 단지 가족 계보에서 벌어진 특이한 사건들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에서 반복되는 장자권주도권의 문제는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의 질서와 깊이 연결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교회의 자손이기 때문에, 어느 것이 장자의 자리에 있으며 어느 것이 다른 것을 이끄느냐 하는 문제가 이렇게 여러 형제 이야기를 통해 표상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시간적인 순서로 이해하여 체어리티가 먼저 생기고 그다음 신앙이 생긴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사람이 먼저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면서 거듭남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경험상 진리와 신앙이 먼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은 선이며, 신앙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은 체어리티입니다.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진리는 의지 안으로 들어가 선과 결합하고, 마침내 선이 진리를 이끄는 질서가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장자권과 주도권은 단순히 무엇이 시간적으로 먼저 나타났는가?보다 무엇이 궁극적으로 다른 것에 생명을 주고 그것을 이끄는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AC.367은 바로 앞 AC.365의 설명과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를 불꽃에, 신앙을 그 불꽃에서 나오는 빛에 비유했습니다. 불꽃에서 열과 빛이 나오듯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나옵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자기가 주도권을 가지려 하면 그것은 불꽃의 열이 없는 겨울의 과 같아집니다. 빛은 있으나 생명을 살리는 따뜻함이 없기 때문에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습니다. AC.367에서 반복되는 장자권의 다툼도 결국 이와 같은 질서의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야곱과 에서가 가인과 아벨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고 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야곱 역시 자기 형 에서를 밀어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호12:2-3을 인용하여 야곱이 모태에서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다는 말씀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야곱이 영원히 에서를 지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삭의 예언에는 에서가 마침내 그 멍에를 자기 목에서 떨쳐버릴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에서로 표상되는 체어리티가 마침내 주도권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 읽습니다. 신앙이 먼저 앞에 서고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 두려 할 수 있지만, 주님의 질서에서는 결국 체어리티가 신앙을 이끄는 위치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에서를 이방인의 교회, 교회’, 야곱을 유대교회와 연결합니다. 이것 역시 단순히 어느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 안에서 이방인들은 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를 표상하는 경우가 있고, 유대교회는 진리와 교회의 외적인 것들을 맡아 보존한 교회를 표상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형제로 인정해야 한다는 말씀들이 나오며, 초대교회에서도 사람들을 체어리티로 말미암아 형제라 불렀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교회의 참된 형제 관계는 단순히 같은 조직에 속하거나 같은 교리 문장을 말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체어리티 안에서 서로 결합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AC.367의 마지막에서 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 등장하면서 이 모든 설명이 우리의 실제 신앙생활로 들어옵니다. 주님께서는 어머니와 동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8:21).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듣는 을 신앙과, ‘행하는 을 체어리티와 연결합니다. 말씀을 듣고 진리라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들은 말씀이 삶으로 들어가 행함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형제가 된다는 것은 바로 진리를 듣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 하나의 삶 안에서 결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7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행위로 신앙의 공로를 보충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의 AC.363에서 이미 보았듯이 참된 행함은 단순한 외적 행동이 아니라 선을 의도하는 것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선의 궁극적인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가 체어리티가 되어 의지와 삶 안에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형제라는 표현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아벨은 가인의 경쟁자가 아니었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의 AC.361AC.365에서 보았듯이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신앙도 체어리티도 모두 교회의 자손이며, 둘이 결합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교회가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와 함께 있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그 위에 서서 주도권을 가지려 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잘못된 질서가 끝까지 진행되었을 때 가인은 마침내 자기 형제 아벨을 죽입니다.

 

그러므로 AC.367은 단순히 성경에 나오는 여러 형제 이야기를 설명하는 단락이 아닙니다. 가인과 아벨, 에서와 야곱, 베레스와 세라,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로 함께 살고 있는가, 아니면 신앙이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위에 서려 하는가?많은 진리를 알고 정확한 교리를 고백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신앙은 자기 형제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경쟁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고, 체어리티의 인도를 받아 삶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형제라 하며, 마침내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AC.367의 중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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