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PR.008 | 개신교인(Protestants)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구원받았는지 확신하지 못한다면 아직 믿음이 부족한 것이다’ - 구원의 확신은 믿음의 크기인가, 주님을 신뢰하는 삶의 열매인가?
해설
개신교 신앙에서 ‘구원의 확신’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많은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을 뿐 아니라, 자신이 이미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신해야 한다고 배웁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구원받으셨습니까?’라고 묻고, 그 사람이 ‘그렇습니다. 저는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대답하면 믿음이 분명한 사람으로 여기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또는 ‘주님께서 아시겠지요’라고 대답하면 아직 믿음이 부족하거나 구원의 진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태도에는 주님의 구원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어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연약함과 죄 때문에 끊임없이 불안해하는 사람에게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신뢰하도록 권면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는 정도가 실제 믿음의 깊이를 결정하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이 자신의 구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면 그는 반드시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며, 반대로 자신의 영적 상태를 조심스럽게 돌아보면서 구원을 확언하지 못하는 사람은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까? 스베덴보리는 구원의 확신 자체를 부정하지 않지만, 그 확신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를 매우 중요하게 다룹니다. 그는 주님에게서 오는 영적인 확신과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종교적 확신을 구별하면서, 참된 믿음의 확신은 단순히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강한 신념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영적 생명과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먼저 전통적인 개신교의 구원의 확신에 관한 가르침을 정확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개신교 안에는 구원의 확신을 강하게 강조하는 전통이 있으며, 특히 복음주의적인 신앙생활에서는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믿음의 중요한 증거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모든 개신교 전통이 확신의 유무를 참된 믿음의 유무와 동일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8장은 이 문제에 관하여 매우 신중한 설명을 제시합니다. 제18장 1항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고 사랑하며 선한 양심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제18장 3항에서는 이러한 확신이 믿음의 본질에 반드시 속하는 것은 아니므로, 참된 신자라도 확신을 얻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명시합니다. 또한 제18장 4항은 참된 신자라도 죄와 유혹, 여러 영적 어려움 때문에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거나 약해지거나 한동안 사라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개혁주의의 대표적인 신앙고백 자체가 구원의 확신을 귀중하게 여기면서도, 확신이 부족하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에게 참된 믿음이 없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았는지 확신하지 못한다면 믿음이 부족하다’는 표현은 개신교의 공식적인 구원론 전체를 정확하게 나타내기보다, 일부 신앙생활에서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나타날 수 있는 판단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 역시 구원의 확신과 관련하여 서로 구별해야 할 말씀들을 제시합니다. 요일5:13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고 기록했다고 말씀합니다. 롬8:16에서는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신자가 주님의 구원을 신뢰하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동시에 인간이 자신을 지나치게 확신하는 태도를 경계합니다. 고전10:12는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권면하며, 마7:21-23에서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 이름으로 많은 일을 행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주님의 뜻과 다른 삶을 살았을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또한 빌3:12에서 바울은 자신이 이미 얻었다거나 온전히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붙잡으신 목적을 향해 계속 나아간다고 고백합니다. 물론 바울의 이 말씀을 그가 구원을 전혀 확신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향한 깊은 신뢰와 자신의 영적 성숙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인식이 한 사람 안에서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확신은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하여 조금의 의문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계속 살아가도록 이끄는 믿음과 관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의 교리’(The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JHD, 1758) NJHD.115에서 믿음이 주는 확신의 성격을 직접 설명합니다. 그는 체어리티와 분리된 믿음에서 비롯되는 확신을 영적인 확신이 아니라 자연적인 확신이라고 구별합니다. 여기서 자연적인 확신이란 어떤 종교적 명제를 강하게 믿거나,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의심하지 않도록 마음을 굳히는 상태와 관계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올바른 교리를 알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며, 성경의 구원 약속을 확실하게 믿기 때문에 자신의 구원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는 자신의 악을 사랑하고 이웃을 해치면서도 그 행동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면, 그 확신은 그의 영적 생명을 올바르게 나타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영적 확신이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사랑의 선으로부터 생명과 본질을 얻는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구원의 확신을 선행의 양으로 측정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가운데 형성되는 영적 신뢰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구원을 강하게 확신한다고 해서 그 확신이 반드시 영적인 것은 아니며, 반대로 자신의 영적 상태를 겸손하게 살피는 사람에게 확신이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참된 믿음이 없다고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같은 NJHD.115에서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영적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도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분명하게 설명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영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자신을 믿고 자신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을 거듭나게 하시고 천국에 합당하도록 준비시키시는 분이 오직 주님이시며, 그 모든 일이 주님의 순전한 자비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겸손은 자신의 구원에 관하여 어떠한 신뢰나 소망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확신은 더욱 깊고 분명해야 합니다. 다만 자신의 영원한 상태가 이미 확정되었다는 자기 판단과, 주님께서 자신을 구원하고 거듭나게 하신다는 신뢰는 구별해야 합니다. 전자는 자신의 영적 상태에 관한 판단이지만, 후자는 주님의 사랑과 능력에 관한 믿음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내면을 완전하게 알지 못하지만,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며 진실하게 회개하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은 믿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참된 구원의 확신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완전한 판결을 내리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자비를 신뢰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에 응답하는 삶과 관계됩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자신의 영적 상태를 완전히 확신하기 어려운 것일까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인간이 자신의 내면을 지배하는 사랑을 완전하게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어느 정도 살필 수 있지만, 그 생각과 행동을 움직이는 모든 동기와 사랑을 충분히 파악하지는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교회에 봉사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봉사 안에는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나 자신의 명예를 높이려는 욕망이 함께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상대방이 자신의 기대에 맞게 행동할 때에만 그 사랑을 유지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을 매우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내면에는 이미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고 악을 멀리하려는 진실한 의지가 자라고 있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479-480에서 인간의 영적 상태가 그를 지배하는 사랑과 깊이 관계되며, 사후에도 그 사랑의 성격이 계속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영원한 상태가 순간적인 감정이나 종교적 확신의 강도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궁극적으로 사랑하고 어떤 생명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조차 완전하게 파악하지 못할 수 있으므로, 자신의 구원을 확신한다는 감정 자체를 최종적인 영적 판결로 삼는 일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구원의 확신이 부족한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하는 목회적인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어떤 신자는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매우 민감하게 느끼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쉽게 갖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자신의 회개가 충분한지, 여전히 반복되는 잘못 때문에 결국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다는 증거’라고 말한다면, 그는 자신의 믿음을 더욱 의심하고 불안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신의 신앙을 정직하게 살펴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불안과 의심이 곧 영적인 불신앙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자신의 부족함을 더욱 깊이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막9:24에서 한 아이의 아버지는 주님께 자신이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자신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달라고 간구합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완전한 확신을 먼저 증명하라고 요구하시는 대신 그의 간구를 들으십니다. 이 장면은 믿음 안에 의심과 연약함이 존재할 수 있으며, 그러한 상태에서도 사람이 주님께 도움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이 부족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확신을 억지로 높이라는 압박보다, 주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그분의 자비와 인도하심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는지를 배우도록 돕는 일입니다. 또한 그가 자신의 삶에서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멀리하려는 실제적인 노력을 계속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여기서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해 자신의 선행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태도도 경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체어리티와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자신의 행동을 세밀하게 기록하고 선행의 양을 계산하여 구원의 가능성을 판단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기 위해 충분히 기도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도왔는지, 얼마나 자주 죄를 범했는지를 계속 점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자칫 자신의 영적 상태를 주님이 아니라 자신의 성과에 근거하여 판단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인간이 자신의 공로를 쌓아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는 태도와 다릅니다. 모든 참된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오며, 인간은 그것을 자신의 자유 안에서 받아들일 뿐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목적은 자신이 구원받기에 충분한 점수를 얻었는지 확인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지금 어떤 악을 정당화하고 있으며, 주님께서 알려 주신 진리에 따라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 살피는 데 있습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509-510은 참된 믿음과 체어리티가 회개 없이 존재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TCR.528-530은 참된 회개가 자신의 죄를 살피고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기 위해 선행의 증거를 축적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오늘 자신에게 드러난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반대로 자신의 구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 반드시 깊은 평안과 영적 성숙을 누리고 있다고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종교적인 확신은 때로 신앙의 깊은 신뢰에서 비롯되지만, 때로는 자신의 교리적 입장이나 종교적 경험에 대한 강한 자기 확신에서 비롯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NJHD.116-118에서 사람이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을 믿으면서도 실제로 그에 따라 살아가지 않을 수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위해 종교적 진리를 강하게 확신하기도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겉으로 나타나는 확신의 강도와 그 믿음의 영적 생명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올바른 교회에 속해 있고 정확한 교리를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구원을 전혀 의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고, 자신의 신앙적 우월성을 즐긴다면 그 확신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확신이 강한 사람을 모두 자기중심적이라고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참된 믿음 안에서 깊은 평안과 신뢰를 누리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확신의 크기가 아니라 그 확신이 어떤 사랑과 삶에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주님의 자비를 신뢰하는 확신은 자신을 높이거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기보다, 더욱 겸손하게 회개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구원의 확신과 구원의 소망을 구별하면서도 서로 분리하지 않아야 합니다. 확신은 주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믿음과 관계되며, 소망은 그분의 자비와 인도하심을 신뢰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는 마음과 관계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영적 상태를 완전하게 알 수 없으므로, 이러한 확신과 소망을 자신의 영원한 운명에 관한 절대적인 자기 판결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DP.187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를 앞에서가 아니라 뒤에서, 곧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미리 보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진 뒤에 영적인 상태에서 인식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말씀은 자신의 구원에 관한 확신을 직접 다루는 대목은 아니지만, 인간이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방식에 중요한 빛을 비춥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앞으로 자신을 어떻게 인도하실지, 어떤 시험과 변화를 통하여 자신의 내면을 새롭게 하실지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서 주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붙들고 인도하셨는지를 조금씩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자신의 미래와 영원한 상태를 모두 알고 있어야 비로소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까지 아시는 주님께 맡기면서, 오늘 자신에게 주어진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참된 신뢰는 모든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믿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구원에 관하여 질문을 받았을 때 우리는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적절할까요? 어떤 사람은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분의 자비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확신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주님의 구원 능력을 신뢰한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주님을 믿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하지만, 나 자신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는 주님께 맡기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 두 표현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참된 믿음의 증거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실제로 주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있으며, 그 믿음이 자신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자신의 구원을 확신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반드시 교만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구원을 주님께 맡긴다고 말하는 사람이 반드시 믿음이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특히 다른 사람에게 구원의 확신을 요구하고 그 대답을 근거로 그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는 일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인간의 내면을 완전하게 아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적인 대화에서 더욱 중요한 질문은 ‘당신은 구원받았다고 확신합니까?’ 하나만이 아닙니다. ‘당신은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기를 원합니까?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돌아서려고 합니까? 그리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일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와 같은 질문도 함께 필요합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사람의 영적 상태를 최종적으로 판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성찰하도록 돕기 위한 것입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구원받았는지 확신하지 못한다면 아직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까?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며, 그분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것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또한 주님의 자비와 구원의 약속에 대한 확신은 신자에게 평안과 소망을 주고, 더욱 성실하게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도록 하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구원에 관한 확신의 강도를 실제 믿음의 깊이와 동일시하거나,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을 믿음이 부족한 사람으로 판단하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와 분리된 믿음에서 나오는 자연적인 확신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한 삶에 뿌리를 둔 영적인 확신을 구별합니다. 참된 구원의 확신은 자신의 영적 상태를 이미 완성된 것으로 선언하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을 거듭나게 하시고 천국에 합당하도록 준비시키시는 주님의 자비를 신뢰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단지 ‘나는 구원받았다고 얼마나 확신하는가?’가 아닙니다. ‘나는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믿는가? 그분의 말씀에 따라 자신의 악을 살피고 멀리하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실제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리고 나 자신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는 일보다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삶에 마음을 두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믿음의 성숙은 자신에 관한 의심이 완전히 사라지는 상태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더라도, 그 연약함보다 크신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신뢰하면서 오늘도 그분의 인도하심에 응답하는 삶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결국 참된 구원의 확신은 자신이 이미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확보했다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시고 새롭게 하실 수 있다는 영적인 신뢰이며, 그 신뢰가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실제 삶에서 선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구원의 확신과 믿음의 성숙, 그리고 주님께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맡기는 참된 신뢰의 의미입니다. (PR.008 해설)
요약
‘구원받았는지 확신하지 못한다면 아직 믿음이 부족한 것이다’라는 말에는 주님의 구원 약속을 신뢰하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정도를 실제 믿음의 깊이와 동일시하거나, 확신이 부족한 사람을 영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으로 판단하는 것은 오류가 될 수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8장 3-4항도 참된 신자에게 구원의 확신이 늦게 찾아올 수 있으며, 이미 가진 확신도 죄와 유혹, 영적 어려움으로 흔들릴 수 있다고 인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의 교리’(The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JHD, 1758) NJHD.115에서 체어리티와 분리된 믿음의 확신을 자연적인 확신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에 뿌리를 둔 확신을 영적인 확신으로 구별합니다. 또한 영적 믿음을 가진 사람은 주님께서 자신을 거듭나게 하시고 천국에 합당하도록 준비시키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으며, 그 모든 일이 주님의 자비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NJHD.116-118은 강한 종교적 확신이 반드시 참된 믿음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자기중심적인 목적에서 비롯된 확신도 존재할 수 있다고 경계합니다.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479-480에 따르면 인간의 영적 상태는 순간적인 종교 감정이나 확신의 강도보다 그를 지배하는 사랑과 깊이 관계됩니다. 따라서 자신의 구원에 관한 불안이나 의심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참된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구원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영적으로 성숙한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자비를 신뢰하면서 자신의 악을 죄로 인정하고 멀리하며,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실제 삶에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구원의 참된 확신은 자신의 영원한 상태를 스스로 확정하는 판단이 아니라, 자신을 구원하시고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을 믿으며 그분의 사랑과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영적인 신뢰입니다.
PR.007. ‘착하게 사는 것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구원에서 훨씬 중요하다’
SL.PR.007 | 개신교인(Protestants)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착하게 사는 것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구원에서 훨씬 중요하다’ - 믿음과 선한 삶은 비교할 대상인가, 하나의 영적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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