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
AC.96
‘여호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s)라고 하는 것에 관한 설명입니다. 고대와 말씀에서 ‘코’(nostrils, 콧구멍)는 그 향기로 인해 기쁨을 주는 모든 것을 뜻하였으며, 이것은 곧 퍼셉션(perception)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여호와께서 번제물 및 그분과 그분의 나라를 표상하는 것들로부터 ‘향기로운 냄새를 맡으셨다’(smelled an odor of rest)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이 그분께 가장 기쁨이 되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다’ 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이, 곧 주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이를 가리켜 ‘콧김’(the breath of the nostrils)이라 하는데, 이는 예레미야 애가에 기록된 바와 같습니다 (애4:20). As to its being said that “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case is this: In ancient times, and in the Word, by “nostrils” was understood whatever was grateful in consequence of its odor, which signifies perception. On this account it is repeatedly written of Jehovah, that he “smelled an odor of rest” from the burnt offerings, and from those things which represented him and his kingdom; and as the things relating to love and faith are most grateful to him, it is said that “he breathed through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Hence the anointed of Jehovah, that is, of the Lord, is called the “breath of the nostrils” (Lam. 4:20).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가 그들의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그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의 그늘 아래에서 이방인들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애4:20)
또한 주님 자신도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으라’ 하심으로 같은 걸 의미하셨습니다(요20:22). And the Lord himself signified the same by “breathing on his disciples,” as written in John: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20:22) He breathed on them and said, Receive ye the Holy Spirit (John 20:22).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장 7절의 가장 섬세하고도 오해되기 쉬운 표현, 곧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다’라는 말을 풀어 주는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생물학적 행위나 신체 묘사로 읽지 않습니다. 그는 고대인의 언어 감각과 말씀의 상응 구조 속에서 이 표현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고대에 ‘코’, 즉 ‘콧구멍’은 단순히 호흡 기관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향기를 느끼는 자리였고, 곧 ‘기쁨을 분별하는 감각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콧구멍’을 퍼셉션과 직접 연결합니다. 퍼셉션이란,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걸 즉각적으로 알아차리는 능력입니다. 이는 논리나 추론이 아니라, 향기를 맡듯이 자연스럽게 분별되는 인식입니다.
이 배경 위에서, 성경에 반복해서 나오는 ‘여호와께서 향기로운 냄새를 맡으셨다’는 표현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실제 냄새를 맡으셨다는 말이 아니라,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 것들을 기쁘게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번제물과 희생 제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주님과 그분의 나라를 표상하는 상징이었습니다. 그 상징이 사랑과 신앙에서 나올 때, 그것은 ‘향기’가 됩니다.
그래서 ‘코로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말은, 주님께서 사람에게 생물학적 생명을 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바입니다. 여기서 말씀드리는 것은, ‘사랑과 신앙의 생명을 퍼셉션의 차원에서 주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사람에게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느끼고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을 불어넣으신 것입니다.
이 맥락에서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이’가 ‘콧김의 숨’이라 불린다는 표현이 이해됩니다. 이는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과 퍼셉션의 흐름을 가리킵니다. 기름 부음은 사랑의 상징이며, 그 사랑이 퍼셉션을 통해 살아 움직일 때, 그것은 ‘숨’으로 표현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요한복음의 장면을 연결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하신 장면은, 바로 이 창세기적 의미를 다시 실현한 사건입니다. 이는 새로운 교회, 새로운 인간에게 ‘퍼셉션의 생명’이 주어지는 순간입니다. 성령은 단순한 능력이나 열정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분별하고 받아들이는 내적 감각입니다.
AC.96은 이렇게 말합니다. 생명의 숨은 폐로 들어가는 공기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을 기쁨으로 인식하는 퍼셉션의 생명’이라고 말입니다. 이 숨이 있을 때, 사람은 비로소 주님의 생명을 자기 안에서 살아 있는 것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 퍼셉션이야말로,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가장 본래적이었고, 천적 인간의 가장 깊은 특징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
AC.95
여기서는 겉 사람의 생명이 다루어집니다. 앞의 두 절에서 그의 신앙, 그러니까 이해의 생명이 다루어졌다면, 이 절에서는 그의 사랑, 곧 의지의 생명이 다루어집니다. 지금까지 겉 사람은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는 걸 마음 내켜 하지 않았고, 대신 그와 끊임없이 싸우고 있었으므로, 이때에는 겉 사람은 ‘사람’(man)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천적 상태가 되면서,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 이로 인해 겉 사람 또한 이제 ‘사람’이 됩니다. 이는 신앙의 생명과 사랑의 생명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신앙의 생명은 그를 준비시키지만, 그를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사랑의 생명입니다. The life of the external man is here treated of—the life of his faith or understanding in the two former verses, and the life of his love or will in this verse. Hitherto the external man has been unwilling to yield to and serve the internal, being engaged in a continual combat with him, and therefore the external man was not then “man.” Now, however, being made celestial, the external man begins to obey and serve the internal, and it also becomes “man,” being so rendered by the life of faith and the life of love. The life of faith prepares him, but it is the life of love which causes him to be “man.”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장 7절을 둘러싼 설명을 한 단계 더 깊이 밀어 넣습니다. AC.94에서 겉 사람이 생명의 숨을 받아 살아나게 되었음을 말했다면, AC.95는 그 생명이 ‘어떤 질서로 겉 사람 안에 자리 잡는가’를 분명히 구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생명을 하나로 뭉뚱그리지 않습니다. 그는 겉 사람의 생명 안에서도, 신앙의 생명과 사랑의 생명을 분리하여 설명합니다.
먼저 앞의 두 절에서 다루어진 것은 신앙, 곧 이해의 생명입니다. 이는 겉 사람이 무엇이 참인지 알고 분별할 수 있게 되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 겉 사람은 여전히 속 사람과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그는 진리를 알지만, 그것 따르기를 즐거워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때까지 겉 사람은 아직 ‘사람’이라 불리지 않습니다. 지식과 이해만으로는, 아직 사람의 본질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이 절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사랑의 생명, 곧 의지의 생명입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겉 사람이 더 이상 속 사람과 싸우지 않고, 대신 그를 섬기기 시작합니다. 순종이 강요가 아니라, 의지의 움직임이 됩니다. 이때 비로소 겉 사람은 속 사람과 하나의 방향을 갖게 되고, 그래서 비로소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상태에 들어갑니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단호하게 말합니다. 지금까지 겉 사람은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입니다. 이는 충격적인 표현처럼 들릴 수 있지만, 그 의미는 분명합니다. 겉 사람은 생명의 질서에 참여하지 않는 한, 단지 기능과 형식일 뿐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사람’이 되는 순간은, 속 사람의 사랑이 그의 의지를 움직이기 시작할 때입니다.
여기서 신앙과 사랑의 관계가 명확히 정리됩니다. 신앙의 생명은 준비합니다. 이해를 열고, 길을 닦고, 질서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준비 위에 사랑의 생명이 와야 합니다. 사랑의 생명이 겉 사람의 의지를 사로잡을 때, 사람은 더 이상 분열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마지막 문장에서 결론을 압축합니다. 신앙의 생명은 그를 준비시키지만, 그를 ‘사람’ 되게 하는 것은 사랑의 생명이라고 말입니다. 이는 스베덴보리 인간학의 핵심 원리 중 하나입니다.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것은, 무엇을 아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느냐’입니다.
AC.95는 이렇게 창세기 2장의 ‘사람 형성’을 마무리합니다. 겉 사람은 신앙으로 빚어지고, 사랑으로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일 때, 비로소 겉 사람과 속 사람은 하나의 사람으로 서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ing soul.(창2:7)
AC.94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to form man, dust from the ground)는 그의 겉 사람을 형성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는 그 이전에는 겉 사람이 아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며, 그래서 앞 절(5절)에서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no man to till the ground)라고 한 것입니다.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to breathe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는 그에게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주셨다는 뜻이며,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man became a living soul)는 그의 겉 사람 또한 살아 있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To “form man, dust from the ground” is to form his external man, which before was not man; for it is said (verse 5) that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To “breathe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is to give him the life of faith and love; and by “man became a living soul” is signified that his external man also was made alive.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장 7절을 둘러싼 가장 핵심적인 오해를 바로잡는 자리입니다. 흔히 이 구절을 ‘인류 최초 인간의 육체적 창조’로 읽어 왔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해석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의 형성’은 육체의 시작이 아니라, ‘겉 사람이 비로소 ‘사람’이 되는 과정‘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표현을 겉 사람의 형성으로 해석합니다. 이는 매우 결정적인 전환입니다. 겉 사람은 그 자체로 자동적으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앞 절을 다시 불러옵니다. 거기 ‘땅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는 말은, 단순히 노동 인구가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겉 사람이 아직 주님의 질서 안에서 기능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겉 사람은 존재하고 있었지만, 아직 ‘사람’이라 부를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흙’이라는 표현은 겉 사람의 가장 외적이고 낮은 차원을 가리킵니다. 흙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생명이 형성되어 나타나는 자리입니다. 겉 사람은 바로 그런 자리입니다. 그 자체로는 생명을 가지지 않지만, 속 사람으로부터 생명이 주어질 때, 비로소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그래서 ‘형성되었다’라는 말이 사용됩니다. 이는 목적과 질서가 주어졌다는 뜻이지, 생명이 이미 충만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제 핵심은 ‘생명의 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생물학적 호흡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앙과 사랑의 생명’입니다. 즉, 생명의 숨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생명이며, 속 사람의 생명입니다. 이 숨이 불어넣어질 때, 비로소 겉 사람은 단순한 외적 구조를 넘어, 속 사람과 연결된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말은, 속 사람만 살아난 것이 아니라, ‘겉 사람 또한 살아나게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이전까지 겉 사람은 도구였고, 형체였으며, 가능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속 사람의 생명이 그 안에 흐르면서, 겉 사람도 함께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람’입니다.
이 구조는 앞서 반복적으로 설명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다시 한번 명확히 합니다. 겉 사람이 먼저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의 생명이 먼저 주어지고, 그 생명이 겉 사람을 살립니다. 그래서 천적 상태에서는 겉 사람이 억지로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살아 있기 때문에, ‘기쁘게 섬깁니다’.
AC.94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흙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생명의 숨을 받아 겉 사람까지 살아났기 때문에 사람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이는 인간 존재를 육체 중심으로 이해하는 모든 사고를 근본에서부터 전환시키는 설명입니다.
이 단락에 이르면, 창세기 2장의 ‘사람 창조’는 더 이상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반복되는 이야기입니다. 겉 사람이 아직 살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주님께서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실 때, 사람은 다시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그때, 겉 사람과 속 사람은 하나의 생명 안에서 함께 숨 쉬게 됩니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창2:5, 6)
AC.93
평화의 평온함을 부여받고, 비로 새로워지며, 악과 거짓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천적 인간의 상태는 주님에 의해 에스겔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됩니다. The state of the celestial man, thus gifted with the tranquility of peace—refreshed by the rain—and delivered from the slavery of what is evil and false, is thus described by the Lord in Ezekiel:
25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26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27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지라 내가 그들의 멍에의 나무를 꺾고 그들을 종으로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겠고, 31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겔34:25-27, 31) I will make with them a covenant of peace, and will cause the evil wild beast to cease out of the land, and they shall dwell confidently in the wilderness, and sleep in the woods; and I will make them and the places round about my hill a blessing; and I will cause the rain to come down in his season; rains of blessing shall they be. And the tree of the field shall yield its fruit, and the earth shall yield its increase, and they shall be upon their ground in confidence, and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when I have broken the reins of their yoke, and delivered them out of the hand of those that make them to serve them; and ye my flock, the flock of my pasture, ye are a man, and I am your God (Ezek. 34:25–27, 31).
또한 이것이 ‘셋째 날’에 이루어진다고 말하는데, 말씀에서 ‘셋째 날’은 ‘일곱째 날’과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호세아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됩니다. And that this is effected on the “third day,” which in the Word signifies the same as the “seventh,” is thus declared in Hosea:
2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3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하니라(호6:2, 3) After two days will he vivify us; in the third day he will raise us up, and we shall live before him and we shall know, and shall follow on to know Jehovah: his going forth is prepared as the dawn, and he shall come unto us as the rain, as the late rain watering the earth (Hos. 6:2–3).
또한 이 상태가 ‘밭의 성장’(the growth of the field)에 비유된다는 것은, 에스겔에서 태고교회를 말하면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And that this state is compared to the “growth of the field” is declared by Ezekiel, when speaking of the ancient church:
내가 너를 들의 풀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겔16:7) I have caused thee to multiply as the growth of the field, and thou hast increased and hast grown up, and hast come to excellent ornaments (Ezek. 16:7).
이 상태는 또한 비유되기를, And it is also compared to: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사60:21) A shoot of the Lord’s planting, and a work of the hands of Jehovah God (Isa. 60:21).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 축적해 온 모든 설명을, ‘말씀 전체의 증언’ 속에 단단히 고정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더 이상 개념 설명에 머물지 않고, 에스겔, 호세아, 이사야를 연속적으로 인용하여, 천적 인간의 상태가 특정 저자의 사상이나 체험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는 주제’임을 보여 줍니다.
먼저 에스겔의 ‘화평의 언약’(a covenant of peace)은, 천적 상태의 핵심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합니다. 언약은 단순한 약속이 아니라, ‘관계의 안정’을 뜻합니다. 평화의 언약이 세워졌다는 것은, 주님과 사람 사이 관계가 더 이상 깨질 위험 속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악한 들짐승이 그친다는 표현은, 외적 위협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악과 거짓이 더 이상 내면을 점령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영적 의미에서는 매우 정확합니다. 광야와 숲은 본래 위험과 불확실성의 장소입니다. 그곳에서 안심하고 잠든다는 것은, 환경이 안전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 안에 평화가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천적 평화는 조건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적 질서의 결과입니다.
이제 다시 ‘비’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는 앞서 AC.90–92에서 말한 안개 같은 평온함을, 보다 풍성한 생명의 공급으로 확장합니다. 이 비로 인해 밭의 나무는 열매를 맺고, 땅은 소산을 냅니다. 이는 천적 인간에게서 겉 사람의 행위와 삶의 결과가 ‘자연스럽고 풍성하게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억지나 불안이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특히 ‘그들의 멍에의 나무를 꺾고’라는 표현은 결정적입니다. 이는 죄책감이나 규범의 억압에서 벗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악과 거짓의 강제적 지배에서 해방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겠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지식의 증가가 아니라, 관계의 확증입니다.
에스겔의 마지막 선언,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라는 말씀은, 태고교회가 단수로 ‘사람’이라 불렸던 이유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천적 상태에서 인간은 흩어진 개인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하나의 사람’으로 서게 됩니다.
이어지는 호세아의 인용은 시간의 상징을 더합니다. ‘셋째 날’은 말씀에서 항상 완성을 뜻하며, 여기서는 ‘일곱째 날’과 같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둘 다 ‘안식과 생명의 완성’을 뜻합니다. 이틀은 준비의 시간이고, 셋째 날은 생명이 일어나는 날입니다. 그래서 ‘살리심’과 ‘일으키심’을 함께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호세아에서 주님이 비와 같이, 늦은 비와 같이 오신다는 표현은, 천적 상태의 평화가 ‘갑작스러운 개입이 아니라, 때가 찼을 때 자연스럽게 임하는 은혜’임을 보여 줍니다. 늦은 비는 성숙을 위한 비입니다. 씨 뿌릴 때 필요한 봄비가 아니라, 열매를 맺게 하는 비입니다.
마지막으로 에스겔과 이사야의 비유는 이 상태를 ‘성장’으로 묘사합니다. 천적 상태는 점프나 도약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성장’입니다. 밭에서 자라나는 식물처럼, 주님이 심으시고 주님의 손으로 이루신 일입니다. 그래서 이 상태는 ‘여호와의 심으심’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손의 일’이라 불립니다.
AC.93은 이렇게 모든 것을 하나로 묶습니다. 천적 평화는 싸움이 끝난 뒤에 오는 정지 상태가 아니라, 주님과의 언약 안에서 자라나는 ‘살아 있는 생명 상태’입니다. 비가 내리고, 열매가 맺히고, 사람은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주님의 양 떼이자 ‘사람’으로 서게 됩니다.
이 지점에 이르면, 안식은 더 이상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말씀 전체가 한 목소리로 증언하는 ‘궁극의 목적’으로 드러납니다.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창22:7)
AC.2803
신적 진리는 ‘아들’이며, 신적 선은 ‘아버지’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아들’은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앞의 489, 491, 533, 1147, 2633 참조). 그리고 ‘아버지’는 선을 의미합니다. 또한 진리의 잉태와 출생이 선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합니다. 진리는 다른 어떤 근원으로부터도 존재할 수 없고 나타날 수 없습니다(existere). 이는 여러 차례 보인 바와 같습니다. 여기서 ‘아들’이 신적 진리이고, ‘아버지’가 신적 선인 까닭은, 신적 본질과 인성의 결합, 그리고 인성과 신성의 결합이 곧 선과 진리의 신적 혼인, 그리고 진리와 선의 신적 혼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천적 혼인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곧 주님 안에는 무한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무한하기 때문에 그것은 어떤 관념으로도 파악될 수 없고, 오직 모든 선과 진리의 ‘있음’과 ‘나타남’(esse et existere), 곧 선 자체와 진리 자체라는 식으로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 자체가 ‘아버지’이며, 진리 자체가 ‘아들’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선과 진리, 그리고 진리와 선의 신적 혼인이 있으므로, 아버지는 아들 안에 있고, 아들은 아버지 안에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친히 가르치신 바와 같습니다. That Divine truth is the “son,” and Divine good the “father,”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son” as being truth (see n. 489, 491, 533, 1147, 2633); and of a “father” as being good; and also from the conception and birth of truth, which is from good. Truth cannot be and come forth [existere] from any other source than good, as has been shown many times. That the “son” here is Divine truth, and the “father” Divine good, is because the union of the Divine essence with the human, and of the human essence with the Divine, is the Divine marriage of good with truth, and of truth with good, from which comes the heavenly marriage; for in Jehovah or the Lord there is nothing but what is infinite; and because infinite, it cannot be apprehended by any idea, except that it is the being and the coming forth [esse et existere] of all good and truth, or is good itself and truth itself. Good itself is the “father,” and truth itself is the “son.” But because as before said there is a Divine marriage of good and truth, and of truth and good, the father is in the son, and the son is in the father, as the Lord himself teaches in John: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요14:10, 11) Jesus saith unto Philip, Believest thou not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John 14:10–11).
36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38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요10:36, 38) Jesus said to the Jews, Though ye believe not me, believe the works; that ye may know and believe that the Father is in me, and I in the Father (John 10:36, 38).
9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21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17:9, 10, 21) I pray for them; for all mine are thine, and thine are mine; and that they all may be one, as thou Father art in me, and I in thee (John 17:9, 10, 21).
31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32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요13:31, 32);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17:1) Now is the son of man glorified, and God is glorified in him; if God be glorified in him, God shall also glorify him in himself. Father, glorify thy son, that thy son also may glorify thee (John 13:31–32; 17:1).
[2]이로부터 주님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결합이 어떠한지(the nature of the union of the Divine and the human in the Lord) 알 수 있습니다. 곧 그것은 상호적이고 교호적인(mutual and alternate) 결합, 다시 말해 서로 안에 거하는(reciprocal) 결합입니다. 이 결합이 바로 ‘신적 혼인’(the Divine marriage)이라 불리는 것이며, 이로부터 ‘천적 혼인’(the heavenly marriage)이 내려오는데, 이것이 곧 하늘에서의 주님의 나라 자체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이렇게 말씀되어 있습니다. From this may be seen the nature of the union of the Divine and the human in the Lord; namely, that it is mutual and alternate, or reciprocal; which union is that which is called the Divine marriage, from which descends the heavenly marriage, which is the Lord’s kingdom itself in the heavens —thus spoken of in John: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 In that day ye shall know that I am in my Father, and ye in me, and I in you (John 14:20).
21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6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21-23, 26) I pray for them, that they all may be one, as thou Father art in me and I in thee, that they also may be one in us, I in them and thou in me; that the love wherewith thou hast loved me may be in them, and I in them (John 17:21–23, 26).
이 천적 혼인이 선과 진리, 그리고 진리와 선의 혼인이라는 것은 앞에서 볼 수 있습니다 (2508, 2618, 2728–2729 이하 참조).That this heavenly marriage is that of good and truth, and of truth and good, may be seen above (n. 2508, 2618, 2728–2729 and following numbers).
[3]그리고 신적 선은 신적 진리 없이 존재하거나 나타날 수 없고, 신적 진리 또한 신적 선 없이 존재하거나 나타날 수 없으며, 둘은 상호적으로 서로 안에 있으므로, 신적 혼인은 영원부터 있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곧 아들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있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가르치신 바와 같습니다. And because Divine good cannot be and come forth without Divine truth, nor Divine truth without Divine good, but the one in the other mutually and reciprocally, it is therefore manifest that the Divine marriage was from eternity; that is, the son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the son, as the Lord himself teaches in John:
5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24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요17:5, 24) And now O Father, glorify thou me with thyself, with the glory which I had with thee before the world was (John 17:5, 24).
영원부터 나신 신적 인성은 또한 시간 안에서도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시간 안에서 태어나 영화롭게 된 것이 바로 그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께로 간다고, 곧 아버지께 돌아간다고 여러 번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But the Divine human which was born from eternity was also born in time; and what was born in time, and glorified, is the same. Hence it is that the Lord so often said that he was going to the Father who sent him; that is, that he was returning to the Father. And in John: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3, 14)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the “Word” is Divine truth itself),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the same was in the beginning with God. All things were made by him, and without him was not anything made that was made. And the Word was made flesh, and dwelt among us, and we saw his glory, the glory as of the only-begotten of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John 1:1–3, 14; see also John 3:13; 6:62).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3:13)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요6:62)
해설
먼저, 이 글은 스베덴보리 기독론의 핵심을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아버지 = 신적 선’, ‘아들 = 신적 진리’라는 상응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존재의 구조를 밝히는 선언입니다. 신적 선은 ‘있음’(esse)이고, 신적 진리는 그 있음이 드러난 ‘나타남’(existere)입니다. 사랑은 본질이고, 진리는 그 사랑이 형상을 입고 이해 가능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사랑은 스스로를 드러내고자 하고, 진리는 사랑이 스스로를 표현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선에서 태어나며, 선 없이는 진리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결코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사랑이 자신을 인식 가능한 형태로 드러낸 것입니다.
여기서 삼위에 대한 전통적 오해가 풀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세 위격을 세 존재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는 주님 안에서 ‘본질과 표현’, ‘사랑과 그 사랑의 지혜’, ‘선과 진리’라는 구분을 합니다. 이는 분리가 아니라 구별입니다. 사랑과 지혜가 다르지만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선과 진리는 서로를 전제로 합니다. 사랑은 자신을 알게 하기를 원하고, 진리는 사랑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둘 사이의 친밀함을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상호 내재, 곧 존재의 상호 침투를 말합니다.
이 상호 내재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적 혼인’입니다. 선이 진리 안에 있고, 진리가 선 안에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조화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본질을 이루는 상태입니다. 선이 진리 안에 있을 때, 진리는 생명을 가집니다. 진리가 선 안에 있을 때, 선은 질서와 방향을 가집니다. 만약 선만 있고 진리가 없다면 그것은 맹목적 충동이 되고, 진리만 있고 선이 없다면 그것은 차갑고 죽은 지식이 됩니다. 주님 안에서는 이 둘이 완전하게 하나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사랑 자체이시며, 동시에 진리 자체이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신적 혼인이 영원부터 있었다는 점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의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광’이라는 말씀은, 시간 이전에 이미 신적 선과 신적 진리의 완전한 결합이 있었다는 선언입니다. 말씀은 영원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은 시간 안에서 새로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신적 진리입니다. 성육신은 영원한 진리가 시간 속에 나타난 사건입니다. 다시 말해, 보이지 않던 사랑이 눈에 보이게 된 사건입니다. 보이지 않던 선이 인간적 형상을 입은 사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영원부터 나신 신적 인성’이라는 표현은, 주님의 인성이 단순한 피조적 육체가 아니라, 신적 진리의 영원한 형상이라는 뜻입니다. 다만 그것이 시간 안에서 점진적으로 영화롭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완전한 신성으로 하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께로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장소 이동이 아니라, 인성의 완전한 신성화, 곧 나타남이 본질과 완전히 하나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교리는 단지 기독론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 거듭남의 원리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신적 혼인에서 하늘의 혼인이 흘러나옵니다. 하늘의 혼인은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인간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배우되, 그것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생명이 없습니다. 반대로 사랑하려 하나, 무엇이 참된지 모르면 그것은 왜곡됩니다. 거듭남은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과정입니다. 진리가 의지 속으로 내려와 사랑이 되고, 사랑이 다시 진리를 통해 질서를 얻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천적 혼인’이며, 이것이 곧 주님의 나라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단순히 ‘예수와 아버지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전체의 구조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그 사랑은 지혜로 드러나며, 그 지혜는 말씀으로 표현됩니다. 말씀은 곧 신적 진리이며, 그것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인간 예수 안에서 보이지 않는 신적 사랑을 만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성육신의 의미입니다.
설교적으로 말한다면, 주님은 사랑을 말씀으로 보여 주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씀을 받아들여 사랑과 결합시킬 때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 내재는 곧 우리 안에 주님이 거하시고,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상태로 이어집니다.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라는 말씀은 신비적 표현이 아니라, 선과 진리의 결합이 인간 안에서 이루어질 때 생기는 실제 상태를 말합니다.
결국 AC.2803은 삼위 이해, 성육신 이해, 하늘의 구조, 인간 거듭남의 원리를 하나로 묶는 핵심 단락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둘이 아니라, 사랑과 그 사랑의 나타남이라는 한 실재의 두 측면입니다. 그 완전한 결합이 주님 안에서 이루어졌고, 그 결합이 우리 안에서 모형적으로 이루어질 때 우리는 하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창20:7)
AC.2533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And now restore the man’s wife
이 말이 ‘합리적 요소의 오염 없이(without taint from the rational) 교리의 영적 진리를 되돌려 놓으라’는 뜻임은 ‘아내’가 영적 진리(spiritual truth)를 의미한다는 데서 분명합니다(2507, 2510 참조). 또한 ‘사람’은 교리 그 자체(doctrine itself)를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상태에서 주님을 표상하는데, 그가 ‘사람’이라 불릴 때에는 천적 기원의 교리, 곧 천적 진리(celestial truth)를 의미합니다. 내적 의미에서 ‘사람’은 지성(the intellectual)을 뜻합니다 (158, 265, 749, 915, 1007, 2517 참조). 그러므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는 것은 교리의 영적 진리를 오염 없이 되돌려 놓으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합리적 요소의 오염 없이’라고 한 것은,그녀를 돌려보내야 할 아비멜렉이 합리적인 것들과 관련된 교리, 곧 교리의 합리적 요소들(the rational things of doctrine)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2510 참조). That this signifies that he should render up the spiritual truth of doctrine without taint from the rational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wife” as being spiritual truth (see n. 2507, 2510);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man” as being doctrine itself; for Abraham (by whom the Lord in that state is represented), when called a “man” signifies celestial truth, which is the same as doctrine from a celestial origin; for in the internal sense a “man” is the intellectual (see n. 158, 265, 749, 915, 1007, 2517). Hence it is evident that to “restore the man’s wife” is to render up the spiritual truth of doctrine without taint. That it means without taint from the rational is because Abimelech, who was to restore her, signifies doctrine that has regard to rational things, or what is the same, the rational things of doctrine (n. 2510).
[2]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신앙의 교리는 그 자체로는 신적이므로 인간은 물론 천사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높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 안에서는 인간의 이해에 맞게, 합리적인 방식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는 마치 부모가 어린 자녀들을 가르칠 때, 자신은 더 깊고 높은 생각에서 사고하면서도 아이들의 기질과 이해 수준에 맞추어 설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르침이 되지 못하고, 마치 바위 위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저 세상에서 단순한 마음을 가진 이들을 가르치는 천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천적이고 영적인 지혜 안에 있으나, 배우는 이들의 이해를 넘어서 말하지 않고 단순하게 말하며, 점차적으로 그들의 이해가 자라도록 이끕니다. 만일 천사적 지혜의 높이에서 그대로 말한다면, 단순한 자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여 신앙의 진리와 선으로 인도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말씀 안에서 인간의 이해에 맞추어 합리적인 방식으로 가르치지 않으셨다면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 내적 의미 안에서 천사적 이해로까지 고양됩니다. 그리고 천사들이 가장 높은 상태에서 지각하는 그 의미조차도 신적 본질에 비하면 무한히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그 기원과 그 자체에 있어 하늘 전체도 작은 일부조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한한 것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문자로는 사소하고 거칠게 보일 뿐입니다. It was said above that although the doctrine of faith is in itself Divine, and therefore above all human and even angelic comprehension, it has nevertheless been dictated in the Word according to man’s comprehension, in a rational manner. The case herein is the same as it is with a parent who is teaching his little boys and girls: when he is teaching, he sets forth everything in accordance with their genius, although he himself thinks from what is more interior or higher; otherwise it would be teaching without their learning, or like casting seed upon a rock. The case is also the same with the angels who in the other life instruct the simple in heart: although these angels are in celestial and spiritual wisdom, yet they do not hold themselves above the comprehension of those whom they teach, but speak in simplicity with them, yet rising by degrees as these are instructed; for if they were to speak from angelic wisdom, the simple would comprehend nothing at all, and thus would not be led to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The case would be the same if the Lord had not taught in the Word in accordance with man’s comprehension, in a rational manner. Nevertheless in its internal sense the Word is elevated to the angelic understanding; and yet that sense, in its highest elevation in which it is perceived by the angels, is infinitely below the Divine. It is hence manifest what the Word is in its origin, and thus in itself; and that it thus everywhere involves more things than the whole heaven is capable of comprehending, even as to a small part, although in the letter it appears so unimportant and so rude.
[3]주님이 곧 말씀이심은, 말씀이 그분한테서 나오며 그분이 말씀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요한복음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That the Lord is the Word, because the Word is from him and he is in the Word, is evident in John: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 4, 14)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God was the Word; in him was life, and the life was the light of men; the Word was made flesh, and dwelt among us; and we saw his glory, the glory as of the only-begotten of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John 1:1, 4, 14; see also Rev. 19:11, 13, 16).
11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3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6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계19:11, 13, 16)
주님이 말씀이시므로 그분은 또한 교리이십니다. 그 자체로 신적인 교리는 오직 그분뿐이기 때문입니다. And as the Lord is the Word, he is also doctrine; for there is no other doctrine which is itself Divine.
해설
이 구절은 창세기 20장의 중심에서 울리는 하나의 영적 명령입니다.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라는 말은 단순히 한 여인을 원래 남편에게 돌려보내라는 역사적 사건의 정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교리의 질서를 바로 세우라는 명령이며, 진리와 합리성의 관계를 재정립하라는 하늘의 선언입니다. 여기서 사라는 ‘영적 진리’를 의미하고, 아브라함은 ‘천적 기원의 교리’, 곧 주님으로부터 직접 나오는 교리를 의미합니다. 아비멜렉은 ‘합리적 단계의 교리’, 즉 인간의 이해와 사유를 통하여 형성되는 교리적 체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진리가 합리성에 의해 소유되거나 지배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결론은 분명합니다. 합리성은 진리를 소유할 수 없으며, 다만 봉사해야 합니다.
‘오염 없이 돌려보내라’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합리성은 본래 악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에게 주어진 귀한 능력입니다. 그러나 합리성은 스스로를 기준으로 삼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고, 스스로 납득한 것만을 진리로 인정하려 합니다. 이때 교리는 인간의 사고 구조에 맞추어 재구성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진리는 점점 인간 중심적으로 변형됩니다. 이것이 바로 ‘합리적 요소의 오염’입니다. 오염이란 반드시 거짓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가 인간의 자아와 결합되어 순수성을 잃는 것을 뜻합니다. 진리가 자기 사랑이나 명예욕, 혹은 지적 우월감과 결합될 때, 그것은 이미 순수한 교리의 상태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깊은 신학적 원리를 제시합니다. 신앙의 교리는 그 자체로는 신적입니다. 그것은 인간은 물론 천사조차 완전히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무한합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 교리를 인간의 이해에 맞게, 합리적인 형식으로 내려주십니다. 이것은 교리가 본래 합리적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이 합리적 단계를 거쳐야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말씀은 놀라운 겸손을 보여 줍니다. 무한하신 주님께서 유한한 인간의 이해에 맞추어 자신을 낮추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원리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말씀은 문자라는 옷을 입고, 인간의 사고 틀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본질은 여전히 신적이며 무한합니다.
여기서 부모가 어린 자녀를 가르치는 비유가 등장합니다. 부모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깊이를 그대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설명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르침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고 수준이 아이의 수준으로 낮아진 것은 아닙니다. 단지 표현이 조정된 것뿐입니다. 천사들이 단순한 자들을 가르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천적, 영적 지혜 안에 있지만, 배우는 이의 상태에 맞추어 단순하게 말합니다. 이 점은 목회 사역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설교자는 깊은 진리를 알고 있다 해도, 그것을 듣는 이들의 상태에 맞추어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진리를 변질시켜서는 안 됩니다. 낮추되, 왜곡하지 않는 것, 이것이 질서입니다.
이 구절은 말씀의 구조 자체를 보여 줍니다. 말씀은 문자적 의미에서는 단순하고 때로는 거칠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 내적 의미는 천사적 이해로까지 고양됩니다. 그리고 그 천사적 이해조차 신적 본질에 비하면 무한히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겉으로는 작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늘 전체가 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품고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대하는 태도를 결정합니다. 문자만 보고 판단하면 얕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를 인식하면, 그 안에 무한한 질서와 조화가 펼쳐집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주님은 곧 말씀이시며, 동시에 교리이시다’라는 선언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이는 단순한 신학적 명제가 아닙니다. 교리는 어떤 학파나 신학 체계의 산물이 아닙니다. 교리는 주님 자신에게서 나오며, 주님 자신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리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곧 주님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교리를 왜곡하면, 주님에 대한 인식도 왜곡됩니다. 이 점에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라는 명령은 매우 엄중합니다. 교리의 영적 진리를 인간의 합리성 속에 가두지 말고, 본래의 주인께 돌려드리라는 명령입니다.
결국 이 구절은 우리 각자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진리를 이해의 틀 안에 가두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해를 진리 아래 두고 있습니까? 합리성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도자가 아니라 도구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교리의 영적 진리가 먼저이며, 합리성은 그 진리를 섬겨야 합니다. 이것이 질서이며, 이것이 거듭남의 길입니다.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라는 이 명령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내면에서 반복되어야 할 영적 행위입니다.
The Word cannot be understood except by means of doctrine from the Word.
교회의 교리는 반드시 말씀으로부터 나와야 한다(3464, 5402, 6832, 10763, 10765). 교리 없이 말씀은 이해되지 않는다(9025, 9409, 9424, 9430, 10324, 10431, 10582). 참된 교리는 말씀을 읽는 자들에게 등불과 같다(10401). 참되고 순수한 교리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열린 사람들(those who are in enlightenment from the Lord)로부터 나와야 한다(2510, 2516, 2519, 2524, 10105). 말씀은 열린 자가 형성한 교리에 의해 이해된다(10324). 열린 자들은 스스로 말씀으로부터 교리를 형성한다(9382, 10659). 교회의 교리로 가르치고 배우는 자들과, 말씀의 겉뜻만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자들 사이의 차이에 대하여 보라(9025). 교리 없이 말씀의 겉뜻 안에만 있는 자들은 신적 진리에 관한 어떤 이해에도 이르지 못한다(9409, 9410, 10582). 그들은 많은 오류에 빠질 수 있다(10431). The doctrine of the church must be from the Word (n. 3464, 5402, 6832, 10763, 10765). The Word without doctrine is not understood (n. 9025, 9409, 9424, 9430, 10324, 10431, 10582). True doctrine is a lamp to those who read the Word (n. 10401). Genuine doctrine must be from those who are in enlightenment from the Lord (n. 2510, 2516, 2519, 2524, 10105). The Word is understood by means of doctrine formed by one enlightened (n. 10324). They who are in enlightenment form for themselves doctrine from the Word (n. 9382, 10659). What is the difference between those who teach and learn from the doctrine of the church, and those who teach and learn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of the Word alone (n. 9025). They who are in the sense of the letter of the Word without doctrine, do not come into any understanding concerning Divine truths (n. 9409, 9410, 10582). They may fall into many errors (n. 10431).
진리를 진리 자체를 위하여 사랑하는 자들은, 성인이 되어 자기 이해로 볼 수 있게 되면, 단지 자기 교회의 교리 안에 머물지 않고, 그것이 참된지 아닌지를 말씀으로부터 살핀다 (5402, 5432, 6047).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누구나 타인과 자기 출생지로부터 진리를 갖게 될 것이며, 유대인으로 태어났든 헬라인으로 태어났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6047). 그러나 말씀의 겉뜻으로부터 신앙에 관한 것이 된 그런 것들은 충분히 살핀 뒤에야 비로소 버려야 하며, 성급히 소멸되어서는 안 된다 (9039). They who are in the affection of truth for the sake of truth, when they become adults, and can see from their own understanding, do not simply abide in the doctrinals of their churches, but examine from the Word whether they be true or not (n. 5402, 5432, 6047). Otherwise everyone would have truth from another, and from his native soil, whether he were born a Jew or a Greek (n. 6047). Nevertheless such things as are become matters of faith from the literal sense of the Word, are not to be extinguished till after a full view (n. 9039).
교회의 참된 교리는 체어리티와 신앙의 교리이다 (2417, 4766, 10763, 10765). 신앙의 교리가 교회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삶, 곧 체어리티가 교회를 이룬다 (809, 1798, 1799, 1834, 4468, 4677, 4766, 5826, 6637). 교리들은 사람이 그것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그것들이 단지 기억과 사고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을 위한 것임은 누구나 알 수 있다 (1515, 2049, 2116). 오늘날 교회들에서는 신앙의 교리가 가르쳐지고, 체어리티의 교리는 도덕 철학이라 불리는 학문으로 밀려나 거절되고 있다 (2417).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삶, 곧 체어리티로 인정받는다면 교회는 하나가 될 것이다 (1285, 1316, 2982, 3267, 3445, 3451, 3452). 체어리티의 교리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교리보다 얼마나 더 우월한지 보라 (4844). 체어리티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은 천적인 것들에 대하여 무지 가운데 있다 (2435). 오직 신앙의 교리만을 붙들고 체어리티의 교리는 붙들지 않는 자들은 오류에 빠지는데, 다음에 그 오류들이 또한 묘사되어 있다 (2383, 2417, 3146, 3325, 3412, 3413, 3416, 3773, 4672, 4730, 4783, 4925, 5351, 7623–7677, 7752–7762, 7790, 8094, 8313, 8530, 8765, 9186, 9224, 10555). The true doctrine of the church is the doctrine of charity and faith (n. 2417, 4766, 10763, 10765). The doctrine of faith does not constitute the church, but the life of faith, which is charity (n. 809, 1798, 1799, 1834, 4468, 4677, 4766, 5826, 6637). Doctrinals are of no account, unless one lives according to them; and everyone may see they are for the sake of life, and not merely for the memory and thought thence derived (n. 1515, 2049, 2116). In the churches at this day the doctrine of faith is taught, and not the doctrine of charity, the latter being rejected to a science, which is called moral philosophy (n. 2417). The church would be one, if they should be acknowledged as men of the church from the life, thus from charity (n. 1285, 1316, 2982, 3267, 3445, 3451, 3452). How much superior the doctrine of charity is to that of faith separate from charity (n. 4844). They who know nothing concerning charity, are in ignorance with respect to heavenly things (n. 2435). They who only hold the doctrine of faith, and not that of charity, fall into errors; which errors are also described (n. 2383, 2417, 3146, 3325, 3412, 3413, 3416, 3773, 4672, 4730, 4783, 4925, 5351, 7623–7677, 7752–7762, 7790, 8094, 8313, 8530, 8765, 9186, 9224, 10555).
오직 신앙의 교리 안에만 있고, 신앙의 삶, 곧 체어리티 안에는 아닌 자들을 가리켜 옛날에는 ‘무할례자’(the uncircumcised), 혹은 ‘블레셋 사람’(Philistines)이라고 불렀다 (3412, 3413, 3463, 8093, 8313, 9340). 고대인들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교리를 붙들었고, 신앙의 교리를 그것에 종속시켰다 (2417, 3419, 4844, 4955). They who are only in the doctrine of faith, and not in the life of faith, which is charity, were formerly called the uncircumcised, or Philistines (n. 3412, 3413, 3463, 8093, 8313, 9340). The ancients held the doctrine of love to the Lord and of charity towards the neighbor, and made the doctrine of faith subservient thereto (n. 2417, 3419, 4844, 4955).
열린 자가 형성한 교리는 그 후에 이성과 학문적인 것들에 의해 확증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더 충만히 이해되고 굳게 세워진다 (2553, 2719, 2720, 3052, 3310, 6047). 이 주제에 관하여는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51번을 보라.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자들은 교회 안의 교리적인 것들은 무슨 이성적 통찰 없이 그저 단순히 믿어야 하는 것들이라고 한다 (3394). Doctrine formed by one enlightened may afterwards be confirmed by things rational and scientific; and that thus it is more fully understood, and is corroborated (n. 2553, 2719, 2720, 3052, 3310, 6047). See more on this subject in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 51). They who are in faith separate from charity would have the doctrinal of the church simply believed, without any rational intuition (n. 3394).
지혜로운 사람의 표지는 교리를 확증하는 데 있지 않고, 그전에 먼저 그것이 참인지를 보는 데 있다. 이것이 열린 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경우다 (1017, 4741, 7012, 7680, 7950). 확증의 빛은 자연적 빛이다. 영적 빛이 아니며, 심지어 악한 자에게도 있을 수 있다 (8780). 모든 것, 심지어 거짓까지도 진리처럼 보이게 하려고 아주 단단히 확증될 수 있다 (2482, 2490, 5033, 6865, 8521). It is not the mark of a wise man to confirm a dogma, but to see whether it be true before it is confirmed; and that this is the case with those who are in enlightenment (n. 1017, 4741, 7012, 7680, 7950). The light of confirmation is a natural light, and not spiritual, and may exist even with the evil (n. 8780). All things, even falsities, may be so far confirmed, as to appear like truths (n. 2482, 2490, 5033, 6865, 8521).
해설
말씀은 거룩하지만, 그 거룩함이 사람에게 자동으로 이해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교리 없이 말씀을 읽으면 이해에 이르지 못한다고 단언합니다. 이것은 교리가 말씀보다 위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으로부터 길어 올린 질서 있는 진리의 체계가 있어야 비로소 말씀의 세부들이 제자리를 찾는다는 뜻입니다. 교리는 지도와 같고, 말씀은 광대한 땅과 같습니다. 지도가 없이 광야에 들어가면 길을 잃기 쉽듯, 교리 없이 말씀을 읽으면 각 구절이 흩어져 보이거나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교리는 사람의 사유에서 임의로 만들어진 체계가 아니라, ‘열림’(enlightenment) 가운데 형성된 것이어야 합니다. 열림은 주님께서 이해의 내면, 곧 속을 여시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리는 단순한 학문적 산물이 아니라, 삶과 사랑의 질서 속에서 주님께 인도받으며 형성된 것입니다. 이런 교리만이 등불처럼 말씀을 밝혀 줍니다. 반대로 글자만 붙들고, 즉 말씀을 겉뜻으로만, 그리고 교리 없이 읽으면 사람은 자기 애정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고, 심지어 거짓도 진리처럼 확증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진리 자체를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은 성인이 되면 자신이 속한 교회의 교리를 그대로 반복하는 데 머물지 않고, 말씀으로 그것을 시험합니다. 이것은 반항이 아니라 성숙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태어난 문화와 전통에 따라 자동적으로 ‘자기 교회 진리’를 갖게 될 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스베덴보리는 신중함을 요구합니다. 겉뜻으로 보고 신앙에 관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들은 충분히 살피기 전에는 성급히 버려서는 안 됩니다. 참된 검토는 파괴가 아니라 정화입니다.
이 WH.8의 중심은 체어리티와 신앙의 관계에 있습니다. 교회의 참 교리는 체어리티와 신앙의 교리이지만, 교회를 실제로 이루는 것은 신앙의 교리가 아니라 ‘신앙의 삶’, 곧 체어리티입니다. 신앙이 머리에만 머물면 교회는 분열되지만, 체어리티가 삶이 되면 교회는 하나가 됩니다. 고대 교회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중심에 두고 신앙을 그에 종속시켰다는 말은, 교리의 중심이 사랑이어야 함을 뜻합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블레셋과 같고, 지식은 있어도 생명은 없는 상태입니다.
또한 열림(enlightenment) 가운데 형성된 교리는 이후 이성과 학문으로 확증될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질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열림이 있고, 그다음 이성적 확증이 있지만, 반대로 먼저 확증하고 나중에 진리를 찾으려 하면, 그것은 자연적 빛 안에서의 논증, 논쟁에 머무를 뿐입니다. 확증의 빛은 악한 자에게도 있을 수 있으며, 모든 거짓도 체계적으로 세워지면 진리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무엇을 확증할 것인가를 먼저 묻지 않고, 그것이 참인가를 먼저 봅니다. 이것이 열린 자의 표지입니다.
결국 WH.8은 말씀과 교리, 사랑과 신앙, 열림과 이성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말씀은 근원이고, 교리는 그로부터 나오며, 체어리티는 교리를 살아 있게 하고, 열림은 그 모든 것을 올바른 질서 안에 두는 하늘의 빛입니다. 이런 질서 안에서만 말씀은 이해되고, 교회는 실제가 됩니다.
AC.19(창1:2) 본문 중 리메인스에 관한 설명 가운데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습니다’라는 설명이 나오는데 이게 무슨 뜻인가요?
AC.19에서 리메인스가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는 표현은, 거듭남의 구조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입니다.
먼저 ‘리메인스’(remains)가 무엇인지부터 분명히 해야 합니다.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사람 안에 몰래 간직해 두신 선과 진리의 씨앗입니다. 어린 시절의 순진함, 양심의 흔적, 말씀을 들으며 잠시 감동받았던 기억, 이웃을 향한 따뜻한 마음 같은 것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것들은 우리의 ‘겉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속 사람’ 안에 저장해 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이 ‘빛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고 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겉 사람이 아직 자기 본성과 세상 사랑에 강하게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잘 살 수 있다고 믿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확신하고, 세상적 성공과 자아 만족을 선이라고 여기고 있는 동안에는, 리메인스가 활동할 공간이 없습니다. 햇빛은 이미 떠 있지만, 짙은 안개가 그것을 가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겉의 일들이 황폐해진다’는 말은, 인생이 무너진다는 뜻이 아니라, 겉 사람의 자만과 자기 신뢰가 흔들린다는 뜻입니다. 실패, 상실, 유혹, 고난, 양심의 가책 같은 경험을 통해 사람이 자기 힘의 한계를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그때 겉 사람의 주장들이 잠잠해집니다. AC에서는 이것을 ‘황폐’ 또는 ‘정적 상태’라고 부릅니다. 겉의 소리가 낮아질 때, 속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황폐’는 파괴가 아니라 정리입니다. 겉 사람의 허위와 교만이 약해질 때, 주님께서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비로소 작용합니다. 그때 사람이 문득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선은 선이지’, ‘그래도 진리는 중요하지’,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등, 이런 깨달음이 바로 리메인스가 빛 가운데 나오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영적 법칙과 같습니다. 낮이 오기 전에는 밤이 있습니다. 씨앗이 싹트기 전에는 껍질이 갈라집니다. 겉 사람의 확신이 무너지지 않으면, 속 사람의 생명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때로 우리 인생을 ‘조용히 비우시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중요한 점은, 리메인스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겉 사람이 아무리 거칠어도, 주님은 속 사람 안에 선과 진리의 씨앗을 남겨 두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빛’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겉의 강한 집착이 약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AC.19에 나오는 저 표현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혹 지금 어떤 황폐를 겪고 있다면,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수 있습니다. 겉 사람이 조용해질 때, 속 사람 안의 리메인스가 깨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빛이 있으라’는 말씀이 실제가 됩니다.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8, ‘성도들아 찬양하자’와 찬63, ‘주가 세상을 다스리니’입니다.
오늘부터 해설 버전 누락분 창세기 1장부터 3장입니다. 창3 마치면 창6으로 원래대로 이번엔 쭈욱 나갑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창11절로 2절, AC 글 번호로는 16번에서 19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1, 2)
이 본문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 AC)에 주목하여 귀 기울이고자 합니다.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오늘은 창1:1-2에 해당하는 AC.16-19를 그 번역과 해설로 접하면서, 거의 설교와도 같은 해설의 어떠함을 다시 한번 맛보고, 거기서 우리 모두 주님의 음성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1:1)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도 합니다.선지자들에 의해 선지서 여러 곳에서 이것은‘옛날’(the days of old, [antiquitatis])이라 하기도 하고,또한‘영원’(the days of eternity)이라 하기도 합니다.이‘태초’는 또한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을 시작하는 첫 시기를 포함하는데,이때 그는 새로 태어나 생명을 받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새 창조’(a new creation)라고도 합니다.선지서 거의 모든 부분에서‘창조하다’(to create),‘짓다’(to form),‘만들다’(to make)라는 표현들은 거듭남을 의미하지만,그 의미에는 차이가 있습니다.이사야를 보면,The most ancient time is called “the beginning.” By the prophets it is in various places called the “days of old” [antiquitatis] and also the “days of eternity.” The “beginning” also involves the first period when man is being regenerated, for he is then born anew, and receives life. Regeneration itself is therefore called a “new creation” of man. The expressions to “create,” to “form,” to “make,” in almost all parts of the prophetic writings signify to regenerate, yet with a difference in the signification. As in Isaiah: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43:7)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I have formed him,yea,I have made him(Isa. 43:7).
그러므로 주님은‘구속자’(the redeemer),‘태 속에 만드신 이’(the former from the womb),‘만드신 이’(the maker)및‘창조자’(the creator)라 일컬음을 받으시는데,역시 이사야를 보면,And therefore the Lord is called the “redeemer,” the “former from the womb,” the “maker,” and also the “creator”; as in the same prophet: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사43:15)I am Jehovah your holy one,the creator of Israel,your king(Isa. 43:15).
시편에서는In David: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시102:18)The people that is created shall praise Jah(Ps. 102:18).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104:30)Thou sendest forth thy spirit,they are created,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Ps. 104:30).
‘천’(天, heaven)은 거듭나기 전‘속 사람’(the internal man)을,‘지’(地, earth)는‘겉 사람’(the external man)을 의미한다는 것은 뒤에 이어질 내용에서 볼 수 있습니다.That “heaven” 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 “earth” the external man before regeneration may be seen from what follows.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1장1절의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는 표현을 시간적 최초의 순간이 아니라, ‘영적 질서의 출발점’으로 해석합니다. ‘태초’는 태고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각 사람이 거듭남을 시작하는 첫 시기를 포함합니다. 즉, 창세기의 ‘태초’는 역사 속 한 시점이면서 동시에, 지금도 반복되는 영적 현실입니다. 사람이 거듭남을 시작할 때, 그는 그 사람만의 ‘태초’에 들어가는 셈입니다.
선지자들이 이 시기를 ‘옛날’(thedays of old, [antiquitatis]), 혹은 ‘영원’(thedays of eternity)이라 한다는 설명은, 이 상태가 단순히 과거에 속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질서’에 속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태고의 상태는 연대기적으로 오래되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직접적인 관계, 곧 영원의 질서가 인간 안에 처음 세워지는 상태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상태는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수 있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태초’, 곧 ‘시작’을 사람의 거듭남의 첫 시기와 직접 연결합니다. 사람이 거듭날 때, 그는 단순히 이전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태어나’ 생명을 받습니다. 여기서 생명은 생물학적 생명이 아니라, 영적 생명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단순한 변화나 성장으로는 설명될 수 없고, 반드시 ‘새 창조’라는 표현이 필요합니다. 이는 매우 강한 표현이지만, 그만큼 거듭남이 전면적인 전환임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 맥락에서 스베덴보리는 선지서에 나오는 ‘창조하다’, ‘짓다’, ‘만들다’ 같은 표현들이 거의 언제나 거듭남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 표현들은 미묘한 차이를 가지는데, 창조는 생명의 근원 주시는 것을, 지음, 곧 형성은 그 생명에 질서 부여하는 것을, 그리고 만드는 것은 그것을 삶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 가는 걸 가리킵니다. 이 차이는 이후에 더 자세히 다루지만, 여기서는 중요한 원칙 하나가 제시됩니다. 성경에서 창조의 언어는 곧 거듭남의 언어라는 점입니다.
이사야의 인용은 이 점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주님은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를 창조하시고, 지으시며, 만드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 곧 주님의 신성과 진리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의 영적 재창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구속자이시며, 태에서부터 지으시는 분이시고, 만드시는 분이시며, 창조자이십니다. 이 모든 호칭은 주님의 다양한 역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이 인간의 거듭남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신다는 사실’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말해 주는 표현들입니다.
시편의 인용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주님을 찬송한다는 말은, 새로 생명을 받은 사람들이 주님을 인식하고 사랑하게 됨을 뜻합니다. 또한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라는 표현은, 거듭남이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며, 그 결과 인간의 외적 삶, 곧 ‘지면’까지 새로워진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거듭남은 내면의 변화에 머무르지 않고, 삶의 표면까지 갱신합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중요한 해석 원리를 예고합니다. ‘천’(天, heaven), 곧 ‘하늘’은 거듭남 이전의 ‘속 사람’을, ‘지’(地, earth), 곧 ‘땅’은 ‘겉 사람’을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창세기1장의 ‘천지창조’가 곧 인간 내면의 구조를 가리킨다는 결정적인 단서입니다. 하늘과 땅은 우주의 두 영역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두 차원입니다. 이 해석이 이후 글들에서 구체적으로 전개되면서, 창세기 전체가 인간 거듭남의 지도임이 점점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결국AC.16은 창세기의 ‘시작’을 역사와 인간을 동시에 꿰뚫는 개념으로 제시합니다. 태고의 시대, 거듭남의 첫 시기, 새로운 창조는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영적 질서를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본 표현들입니다. 주님은 그 모든 시작의 주체이시며, 인간의 영적 삶은 언제나 그분 안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2)
AC.17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가리켜‘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theearth void and empty)라 하며,또 선과 진리가 아무것도 뿌려지지 않은‘땅’(theground)이라고 합니다.‘혼돈’(void)은 선이 전혀 없는 곳을,‘공허’(empty)는 진리가 전혀 없는 곳을 뜻합니다.이로부터‘흑암’(thick darkness)이 나오는데,이것은 어리석음을,그리고 주님 신앙(thefaith in the Lord)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무지를,그리고 그 결과 영적,천적 삶(spiritual and heavenly life)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무지를 뜻합니다.이런 사람을 가리켜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십니다.Before his regeneration, man is called the “earth void and empty,” and also the “ground” wherein nothing of good and truth has been sown; “void” denotes where there is nothing of good, and “empty” where there is nothing of truth. Hence comes “thick darkness,” that is, stupidity, and an ignorance of all things belonging to faith in the Lord, and consequently of all things belonging to spiritual and heavenly life. Such a man is thus described by the Lord through Jeremiah:
22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렘4:22, 23)My people is stupid,they have not known me;they are foolish sons,and are not intelligent;they are wise to do evil,but to do good they have no knowledge.I beheld the earth,and lo a void and emptiness,and the heavens,and they had no light (Jer. 4:22–23).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 과정 시작 전 인간의 상태를 매우 강한 언어로 묘사합니다. 그는 이 상태의 사람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theearth void and empty)라 하며, 그 안에는 선과 진리가 아무것도 뿌려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땅’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인간의 겉 사람을 가리키는 상응적 표현입니다. 즉, 거듭남 과정 시작 전의 겉 사람은 외형적으로는 활동적이고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영적으로는 아직 아무것도 경작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지요.
‘혼돈’(void)과 ‘공허’(empty)의 구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혼돈’은 선의 부재(不在)를, ‘공허’는 진리의 부재를 뜻한다고 분명히 설명합니다. 이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 행동의 근원에 참된 선과 진리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이 상태에서도 많은 일을 하고, 판단하며, 선택하지만, 그 모든 것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라는 자연적 근원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외적으로는 선처럼 보일 수 있어도, 영적으로는 선이 아니며, 외적으로는 진리처럼 보일 수 있어도 실제로는 진리가 아닙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흑암’(thick darkness)입니다. 이 어둠은 단순한 정보 부족이나 교육의 결핍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어리석음’(stupidity)과 ‘무지’(ignorance)라고 부르는데, 특히 주님 신앙(thefaith in the Lord)에 속한 것들에 대한 무지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이 어둠은 영적 무감각의 상태이며, 영적, 천적 삶이 무엇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이 상태에서 세상일에는 매우 영리할 수 있지만, 영적인 일에는 전혀 눈이 열려 있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의 인용은 이 상태를 매우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라는 말씀은,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는 단순히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방향의 문제입니다. 지혜와 지식이 자기중심과 세상 중심을 향해 있을 때, 그것은 영적 선을 향해 사용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지혜는 결국 어둠의 일부가 됩니다.
이어지는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라는 표현은 매우 결정적입니다. 앞서AC.16에서 예고된 것처럼, ‘하늘’은 속 사람을 가리킵니다. 거듭남 이전의 인간에게도 속 사람은 존재하지만, 그 안에 빛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속 사람은 잠재적으로는 있으나, 아직 주님의 빛으로 열리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영적 가능성을 지닌 존재임을 전제하면서도, 그 가능성이 실제로 작동하지 않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이 글은 거듭남의 필요성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인간은 단지 조금 더 나아지거나, 조금 더 선해지기만 하면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혼돈과 공허의 땅에는 새로운 씨가 뿌려져야 하고, 흑암 속에는 빛이 비쳐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오직 주님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창세기1장의 빛의 창조가 그토록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묘사가 특정 집단이나 시대만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 이전의 모든 인간, 즉 아직 거듭나지 않은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있다고 말합니다. 종교적 배경이나 도덕적 성취와 무관하게, 주님의 생명이 실제로 유입되기 전의 인간은 영적으로는 공허하고 비어 있습니다. 이 인식은 인간의 교만을 꺾는 동시에, 주님의 자비를 향한 문을 엽니다.
결국AC.17은 인간을 절망 속에 몰아넣기 위한 설명이 아니라, 정확한 진단입니다. 병이 무엇인지 알아야 치유가 시작되듯, 인간이 자신의 상태가 공허하고 어둡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비로소 빛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다음 글에서 설명될 주님의 자비로운 역사가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AC.18
‘깊음’(the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그로 말미암는 거짓을 뜻하며,사람은 전적으로 이것들로 이루어져 있고,또한 그것들 속에 완전히 잠겨 있습니다.이 상태에서 그는 빛이 없으므로,‘깊음’(deep),곧 어둡고 혼란한 어떤 것과 같습니다.이러한 사람들을 말씀 여러 곳에서‘깊음’(deeps),‘바다 깊은 곳’(depths of the sea)이라 하는데,사람의 거듭남 이전에 그것들은‘마르거나’(dried up)‘황폐해집니다’(wasted).다음 이사야 말씀처럼 말입니다.The “faces of the deep” are the cupidities of the unregenerate man, and the falsities thence originating, of which he wholly consists, and in which he is totally immersed. In this state, having no light, he is like a “deep,” or something obscure and confused. Such persons are also called “deeps,” and “depths of the sea,” in many parts of the Word, which are “dried up,” or “wasted,” before man is regenerated. As in Isaiah:
9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10바다를,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11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사51:9-11)Awake as in the ancient days,in the generations of old.Art not thou it that drieth up the sea,the waters of the great deep,that maketh the depths of the sea a way for the ransomed to pass over?Therefore the redeemed of Jehovah shall return(Isa. 51:9–11).
이러한 사람은 또한 천국에서 볼 때 생명 없는 검은 덩어리처럼 보입니다.이와 같은 표현들은 일반적으로 선지자들에 의해 자주 언급되는 인간의 황폐(the vastation of man)를 포함하는데,이는 거듭남에 앞서 일어나는 것입니다.왜냐하면 사람이 참된 것을 알 수 있고,선한 것에 의해 감동될 수 있기 전에,그것들의 유입을 방해하고 거스르는 것들이 제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옛 사람은 새 사람이 잉태되기 전에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Such a man also, when seen from heaven, appears like a black mass, destitute of vitality. The same expressions likewise in general involve the vastation of man, frequently spoken of by the prophets, which precedes regeneration; for before man can know what is true, and be affected with what is good, there must be a removal of such things as hinder and resist their admission; thus the old man must needs die, before the new man can be conceived.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1장2절에 나오는 ‘깊음’(thefaces of the deep)을 인간 내면의 가장 어두운 상태로 해석합니다. ‘깊음’은 단순히 깊은 바다나 혼돈의 어떤 상태를 뜻하는 대신, 거듭나지 않은 인간이 전적으로 잠겨 있는 욕정과 거짓의 총체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욕정(cupidities)은 단순한 감정이나 충동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된 삶의 근원적 지향을 뜻합니다. 이 욕정에서 자연스럽게 거짓들이 발생하며, 사람은 그것들로 구성된 존재가 됩니다.
이 상태의 핵심 특징은 ‘빛이 없음’입니다. 빛이 없다는 것은 진리가 없다는 뜻이고, 진리가 없다는 것은 방향과 분별이 없다는 뜻이며, 그래서 이 상태는 ‘어둡고 혼란스러운 것’으로 묘사됩니다. 사람은 생각하고 판단하며 선택하지만, 그 모든 것은 어둠 속에서 이루어지므로 참된 질서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깊음’이라는 표현은 매우 적절합니다. 깊은 바닷속에서는 위와 아래, 앞과 뒤의 감각이 사라지듯, 이 상태의 인간은 영적 방향감각을 상실한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말씀에서 ‘깊음’이나 ‘바다의 깊은 곳’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깊음이 거듭남 이전에 ‘마르거나’, ‘황폐해진다’는 점입니다. 이는 거듭남의 과정이 단순히 새로운 것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제거하고 비우는 과정을 반드시 포함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깊은 물이 그대로 있는 한, 그 위에 새로운 질서는 세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인용은 이 점을 강력한 이미지로 드러냅니다. 주님은 큰 깊음의 물들을 마르게 하시고, 바다의 깊은 곳들을 속량 받은 자들이 건너갈 길로 만드십니다. 이는 욕정과 거짓으로 가득 찬 상태 자체를 제거하시고, 그 자리를 구원의 통로로 바꾸시는 주님의 역사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깊음을 단순히 덮어만 두지 않으시고, 그것을 통과 가능한 길로 변화시키십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본질적인 전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또한 이 상태의 인간은 천국에서 볼 때 ‘생명 없는 검은 덩어리’처럼 보인다고 말합니다. 이는 매우 강한 표현이지만, 인간의 외적 활동성, 즉 겉모습, 겉보기와는 전혀 다른 영적 실재를 보여 줍니다. 세상에서는 매우 활발하고 지적이며 도덕적으로 보일 수 있는 사람도, 영적 생명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천국의 빛 아래에서 아무런 생명도 없는 덩어리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을 낮추기 위한 표현이 아니라,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분명히 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베덴보리는 ‘황폐’(vastation)라는 중요한 개념을 제시합니다. 황폐는 파괴가 아니라 준비입니다. 선지자들이 자주 말하는 황폐는, 새로운 생명이 들어오기 위해 기존의 방해 요소들이 제거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사람이 참된 것을 알기 전에, 또 선한 것에 의해 실제로 감동되기 전에, 그 유입을 가로막는 욕정과 거짓들이 먼저 약화되고, 제거되어야 합니다. 이 과정 없이는 어떤 진리도 깊이 들어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분명한 결론을 내립니다. 옛 사람은 새 사람이 잉태되기 전에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자적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삶의 근원이 더 이상 주도권을 쥐지 못하게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 죽음이 있어야만, 새 생명이 잉태될 공간이 생깁니다.AC.18은 이처럼 거듭남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어두운 관문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그 과정 전체가 주님의 구원 사역 안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AC.19
‘하나님의 영’(the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이를 가리켜‘운행하시니라’(move),또는 암탉이 자기 알을 품듯이‘품는다’(brood)라고 합니다.그것이 운행하는 대상은 주님께서 사람 안에 숨겨 두시고 보존해 두신 것들인데,말씀 전체에서 이것들을 가리켜‘리메인스’(remains),또는‘남은 자’(remnant)라고 하는 것입니다.이것들은 참된 것과 선한 것에 관한 지식들로 이루어져 있으며,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습니다.여기 나오는‘수면’(thefaces of the waters)은 바로 이러한 지식들을 말합니다.By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 The things over which it moves are such as the Lord has hidden and treasured up in man, which in the Word throughout are called remains or a remnant, consisting of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which never come into light or day, until external things are vastated. These knowledges are here called “the faces of the waters.”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1장2절의 가장 따뜻하면서도 깊은 표현, 곧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말씀의 내적 의미, 즉 속뜻을 밝힙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을 능력이나 심판의 상징으로 보지 않고, 무엇보다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로 해석합니다. 이는 거듭남의 시작이 두려움이나 강제에서가 아니라, 보호하고 살리시려는 주님의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운행하다’(move)또는 ‘품다’(brood)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암탉이 알을 품는 모습에 비유하는데요, 알은 아직 생명이 드러나지 않았고,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지만, 그 안에는 이미 생명의 가능성이 들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거듭남 이전의 인간 안에도,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생명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주님이 이미 심어 두신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주님의 자비는 그 가능성 위에 머무르시며, 서두르지 않으시고, 억지로 깨뜨리지도 않으시며, 적절한 때까지 조용히 품으십니다.
주님의 자비가 운행하는 대상은 ‘수면’(the faces of the waters)입니다. 앞선 글들에서 보았듯이, 물은 진리의 지식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물은 아직 빛 가운데 드러난 진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사람 안에 숨겨 두신 참된 것과 선한 것에 관한 지식들, 곧 리메인스입니다. 이 리메인스는 사람이 의식적으로 기억하거나 소유한다고 느끼는 지식이 아니라, 주님이 유아기부터 삶의 여러 순간 속에서 조용히 저장해 두신 내적 보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리메인스가 외적인 것들, 곧 사람의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질서입니다. 사람의 겉 사람이 활발하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움직이고 있는 동안에는, 리메인스가 전면에 나설 수 없습니다. 그것이 나오면 즉시 왜곡되거나 오염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외적인 것들이 약화되고, 침묵하게 되는 시간을 허용하시며, 그 이후에야 리메인스를 실제로 사용하십니다.
이 점에서AC.18의 ‘황폐’와AC.19의 ‘운행’은 정확히 맞물립니다. 황폐는 비워내는 과정이고, 운행은 보호하고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주님은 한편으로는 옛사람의 욕정과 거짓을 약화시키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리메인스를 잃지 않도록 세심하게 품고 계십니다. 인간의 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시점이야말로 거듭남에서 가장 깊고 중요한 내적 역사가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수면’, 곧 ‘물의 얼굴’이라는 표현도 의미심장합니다. 얼굴은 드러난 표면이면서 동시에 방향을 나타냅니다. 즉, 리메인스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미 주님을 향한 방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바로 그 방향성 위에서 운행하십니다. 이때 인간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수 있어요. 오히려 더 혼란스럽고 공허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주님은 가장 가까이 계십니다.
이 글은 거듭남이 인간의 의식적 결단이나 열심보다 훨씬 이전에, 훨씬 깊은 차원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주님을 찾기 전에, 주님은 이미 사람을 품고 계십니다.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기 전에, 주님은 이미 진리의 씨앗을 보존해 두셨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인간의 상승이 아니라, 주님의 하강으로 시작됩니다.
결국AC.19는 거듭남의 가장 은밀한 근원을 드러냅니다. 모든 변화의 출발점은 주님의 자비이며, 그 자비는 인간 안에 남겨 두신 리메인스 위에서 조용히, 그러나 결코 멈추지 않고 운행하십니다. 이 인식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들고, 동시에 깊은 위로를 줍니다. 지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아무 진전도 없어 보일 때조차, 주님의 영은 여전히 수면 위에서 운행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네, 이상입니다. 어떻습니까?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AC 원문 번역과 특히 그 해설을 그대로 읽었는데요,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해설 없이 읽을 때는 정말 어려웠지만, 지금은 이렇게 해설로 풀어 주니까 글 하나하나가 다 무슨 설교 같지 않으신지요? 이 AC를 붙들고 어떻게 하면 좀 더 쉽게, 좀 더 와닿게 풀어 번역할 수 있을까 거의 6, 7년을 솔직히 몸부림을 쳐온 저로서는 뒤늦게 이 ChatGPT라는 AI의 도움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릅니다. 지난 세월이 헛수고는 아니었던 것이, 그래도 이 AI의 초벌 결과물을 문장 하나하나, 사용된 단어, 표현 하나하나의 적절함과 적당함을 살필 수 있는 안목을 그동안 주님은 제 안에 조성하셔서, 이 AI로 하여금 본연의 비서 역할에만, 도우미 역할에만 머무르게 하신다는 점입니다. 이 점은 의외로 매우 중요하며, 그래서 주님께 감사하고, 그래서 이 ChatGPT라는 AI를 믿고 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유능한 비서가 생기는 바람에 그동안 엄두도 못 냈던 나머지, 그러나 무척 중요한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들 역시 부지런히 번역 및 해설 작업을 병행, 제 블로그(https://bygrace.kr)에 수시로 올리고 있으니 참고하세요. 지난주 새롭게 시작한 저작들은 ‘최후의 심판’(Last Judgment, 1758, LJ), ‘백마’(白馬, White Horse, 1758, WH) 등인데, 이 비교적 짧은 글들은 AC가 배경으로 깔고 들어가는 다른 중요한 개념들을 매우 깊고 넓게 다져 주는 글들입니다. 이 글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여러분의 내면은 탄탄한, 그리고 빛나는 계시의 지식으로 눈부시게 빛날 것입니다.
앞으로도 너무 많은 분량만 아니면 가급적 AC를 원본 및 해설 그대로 읽고자 합니다. 사실 말이 해설이지 형식만 조금 고치면 그대로 설교와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해설 없이 원본만 읽던 시절도 있었음을 생각하면, 지금은 그런 우리의 우직한 모습을 기뻐하신 주님의 큰 선물이라 생각합니다. ‘진리를 진리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들, 그리고 신적 진리들에 따라 살기를 사랑하는 자들이 주님에 의해 인도되는 자들’(AC.10578, 10645, 10829)이라는 위로의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The Word is not understood except by those who are enlightened.
인간의 이성적 능력(rational faculty)은 주님에 의해 열리지(enlightened) 않으면 신성(Divine)은 물론, 심지어 영적인 것들조차 이해할(comprehend) 수 없습니다 (n. 2196, 2203, 2209, 2654). 그러므로 열린 자들만이 말씀을 이해합니다 (n. 10323). 주님은 열린 자들로 하여금 진리들을 이해하게(understand)하시고,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것들을 분별하게(discern) 하십니다 (n. 9382, 10659). 말씀은 문자적 의미 안에서 일관되지 않게 보이고, 어떤 곳에서는 스스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n. 9025). 그러므로 열리지 않은 자들에 의해, 그들이 어떤 의견이나 이단을 확증하기 위하여, 또는 어떤 세속적, 육체적 사랑을 변호하기 위하여 그렇게 해석되고 적용될 수 있습니다 (n. 4738, 10339, 10401). The human rational faculty cannot comprehend Divine, nor even spiritual things, unless it be enlightened by the Lord (n. 2196, 2203, 2209, 2654). Thus they only who are enlightened comprehend the Word (n. 10323). The Lord enables those who are enlightened to understand truths, and to discern those things which appear to contradict each other (n. 9382, 10659). The Word in its literal sense appears inconsistent, and in some places seems to contradict itself (n. 9025). And therefore by those who are not enlightened, it may be so explained and applied, as to confirm any opinion or heresy, and to defend any worldly and corporeal love (n. 4738, 10339, 10401).
진리와 선에 대한 사랑으로 말씀을 읽는 자들은 열리지만, 명예나 이익, 영광을 사랑하여, 곧 자기 사랑으로 말씀을 읽는 자들은 열리지 않습니다 (n. 9382, 10548–10550). 선한 삶 가운데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진리에 대한 애정 안에 있는 자들이 열립니다 (n. 8694). 자기의 내면이 열려 있는 자들, 곧 그 속 사람이 하늘의 빛으로 들어 올려질 수 있는 자들이 열립니다 (n. 10401, 10402, 10691, 10694).열림(Enlightenment)이란 실제로 마음의 내적 부분이 열리는 것이며, 동시에 하늘의 빛으로 들어 올려지는 것입니다 (n. 10330). 말씀을 거룩한 것으로 여기는 자들에게는, 비록 그들 자신은 알지 못하더라도, 속(the internal), 곧 주님으로부터 거룩한 것이 흘러 들어옵니다 (n. 6789). 주님에 의해 인도되는 자들, 곧 자기 자신에 의해 인도되지 않는 자들만이 열려 말씀 안에서 진리들을 봅니다 (n. 10638). 진리를 진리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들, 그리고 신적 진리들에 따라 살기를 사랑하는 자들이 주님에 의해 인도되는 자들입니다 (n. 10578, 10645, 10829). 말씀은 사람의 사랑과 신앙의 삶에 따라 그 안에서 살아납니다 (n. 1776). 자기 자신의 지성에서 나온 것들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한테 고유한 것, 즉 인간의 본성(proprium)으로부터는 아무 선도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n. 8941, 8944). 거짓 교리를 많이 확증해 온 자들은 열릴 수 없습니다 (n. 10640). They are enlightened from the Word who read it from the love of truth and good, but not they who read it from the love of fame, of gain, or of honor, thus from the love of self (n. 9382, 10548, 10549, 10550) They are enlightened who are in the good of life, and thereby in the affection of truth (n. 8694). They are enlightened whose internal is open, thus who as to their internal man are capable of elevation into the light of heaven (n. 10401, 10402, 10691, 10694). Enlightenment is an actual opening of the interiors of the mind, and also an elevation into the light of heaven (n. 10330). There is an influx of holiness from the internal, that is, from the Lord through the internal, with those who regard the Word as holy, though they themselves are ignorant of it (n. 6789). They are enlightened, and see truths in the Word, who are led by the Lord, but not they who are led by themselves (n. 10638). They are led by the Lord, who love truth because it is truth, who also are they that love to live according to Divine truths (n. 10578, 10645, 10829). The Word is vivified with man according to the life of his love and faith (n. 1776). The things derived from one’s own intelligence have no life in themselves, because from man’s proprium there is nothing good (n. 8941, 8944). They cannot be enlightened who have much confirmed themselves in false doctrine (n. 10640).
열리는 것은 이해입니다 (n. 6608, 9300).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그릇입니다 (n. 6242, 6608, 10659). 교회의 모든 교리에 관하여, 이해의 관념들(ideas)과 그로부터 나오는 사유(the thought)의 관념들이 있으며, 그에 따라 교리가 지각됩니다(perceived) (n. 3310, 3825). 세상에서 사는 동안 인간의 관념들은 자연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인간은 자연 안에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진리 자체를 위하여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그 자연적 관념들 안에 영적 관념들이 감추어져 있으며, 인간은 죽은 후 그 영적 관념들 안으로 들어갑니다 (n. 3310, 5510, 6201, 10236, 10240, 10550). 어떤 주제에 관하여 이해와 그로부터의 사유의 관념이 없이는 어떠한 지각도 있을 수 없습니다 (n. 3825). It is the understanding which is enlightened (n. 6608, 9300). The understanding is the recipient of truth (n. 6242, 6608, 10659). In regard to every doctrine of the church, there are ideas of the understanding and of the thought thence, according to which the doctrine is perceived (n. 3310, 3825). The ideas of man during his life in the world are natural, because man then thinks in the natural; but still spiritual ideas are concealed therein with those who are in the affection of truth for the sake of truth, and man comes into these ideas after death (n. 3310, 5510, 6201, 10236, 10240, 10550). Without ideas of the understanding, and of the thought thence, on any subject, there can be no perception (n. 3825).
신앙에 속한 것들에 관한 관념들은 내세에서 드러나며, 그 어떠함(quality)이 천사들에게 보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관념들이 사랑의 애정에서 나오는 정도에 따라 다른 이들과 결합됩니다 (n. 1869, 3320, 5510, 6201, 8885). 그러므로 이성적 인간이 아니고서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것에 대한 관념도 없이, 그 주제에 대한 이성적 통찰도 없이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지각과 애정의 생명이 전혀 없는 말들을 기억 속에 간직하는 것에 불과하며,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n. 2533).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열리는 걸 허용합니다 (n. 3619, 9824, 9905, 10548). Ideas concerning the things of faith are laid open in the other life, and their quality is seen by the angels, and man is then conjoined with others according to those ideas, so far as they proceed from the affection which is of love (n. 1869, 3320, 5510, 6201, 8885). Therefore the Word is not understood except by a rational man; for to believe anything without an idea thereof, and without a rational view of the subject, is only to retain in the memory words destitute of all the life of perception and affection, which is not believing (n. 2533). It is the literal sense of the Word which admits of enlightenment (n. 3619, 9824, 9905, 10548).
해설
이 글은 ‘백마’의 주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적용하는 부분입니다. 백마는 이해였고, 이제 그 이해가 어떻게 열리는지가 설명됩니다. 인간의 이성은 자율적으로 신적 진리를 꿰뚫을 수 없습니다. 열린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능력의 증가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의 유입입니다. 말씀의 모순처럼 보이는 부분도, 열릴 때 비로소 질서 안에서 보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난해함은 결함이 아니라, 열릴 것을 요구하는 구조입니다.
열림의 조건은 지적 재능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입니다. 진리를 진리 자체로 사랑하는가, 아니면 명예와 이익을 위하여 이용하는가에 따라 빛의 유입이 달라집니다. 자기 사랑에서 읽는 자는 말씀을 왜곡하여 자신의 입장을 강화합니다. 그러나 선한 삶 가운데 있는 자, 곧 사랑 안에 있는 자는 내면이 열려 하늘의 빛으로 들어 올려집니다. 열린다는 것은 마음의 내면이 실제로 열리는 사건이며, 이는 단지 감정적 고양이 아니라 존재 구조의 상승입니다.
이해는 진리의 그릇입니다. 교리는 관념 속에서 형성됩니다. 관념이 없으면 믿음도 없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선언입니다. 맹목적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진리를 이해하려는 이성적 노력은 믿음의 적이 아니라, 믿음의 필수 요소입니다. 다만 그 이해가 자기 지성에서 나오느냐, 주님의 빛에서 나오느냐가 문제입니다. 인간한테 있는 고유한 것(proprium), 즉 인간의 본성에는 생명이 없고, 주님의 빛이 들어올 때만 이해가 살아 있습니다.
내세에서 관념이 드러난다는 언급은, 신앙이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실제적인 사고 구조임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자신이 품고 있던 신앙의 관념들에 따라 다른 이들과 결합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이해하는 방식은 영원한 결합을 결정합니다. ‘백마’가 이해라면, 그 말이 어디를 향해 달렸는지가 곧 인간의 영원한 방향입니다.
마지막으로, 열림은 문자적 의미 안에서 일어납니다. 내적 의미는 문자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문자 안에서 열립니다. 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은 문자 속에 서 있고, 열리는 것은 그 문자를 통해 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사랑과 진리의 애정으로 읽는 자에게, 주님은 백마를 타고 오십니다. 이해가 열리고, 모순은 질서가 되며, 말씀이 살아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