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3 1

요한계시록 6장의 네 말과 심판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번 3강은 찬송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로 문을 엽니다. 강사는 ‘오직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이어지는 기도에서도 ‘진리의 영으로 저희들을 충만케 하여 주옵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이것은 뒤이어 전개되는 복잡한 종말론적 도식보다 먼저 붙들어야 할 이 강의의 영적 중심입니다. 강사가 무엇보다 주님을 삶의 가장 귀한 분으로 모시고자 하며, 말씀을 통해 자신과 청중이 변화되기를 원한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 출발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의 중심은 어떤 종말 시간표를 정확하게 아는 데 있지 않고, 주님을 인정하고 사랑하며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사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후의 해석에서 상당한 차이가 발견되더라도, 이 강의의 첫 고백 자체는 소중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앞서 살펴본 요한계시록 4장을 ‘총사령부’, 5장을 어린양이신 ‘총사령관’이 등장하는 장으로 정리한 뒤, 6장을 ‘무엇으로 심판하실 것인가’, 곧 ‘심판의 재료’를 보여 주는 장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일곱 인을 떼는 과정 자체를 7년 대환란으로 보지 않고, 대환란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봅니다. 첫째부터 넷째 인에서는 백마·홍마·흑마·청황마라는 네 가지 심판의 재료가 제시되고, 다섯째 인에서는 순교자의 수가 채워지며, 여섯째 인에서는 천재지변 가운데 고통받는 인류가 나타나고, 일곱째 인이 떼어질 때 비로소 일곱 나팔과 함께 본격적인 7년 대환란이 시작된다는 구조입니다. 강사는 이를 스가랴 6장의 네 종류의 말과 요한계시록 7장의 ‘사방의 바람’까지 서로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여기까지는 강사 자신의 계시록 독법입니다. 이 해석 안에는 주목할 만한 장점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한 절씩 고립시켜 읽지 않고, 4장부터 8장까지의 구조와 스가랴의 환상을 함께 놓고 성경 전체의 연결을 찾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말’, ‘바람’, ‘인’, ‘나팔’과 같은 이미지가 서로 무관한 장식물이 아니라 어떤 영적 의미를 전달한다고 보는 태도는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와도 일정 부분 접점을 가집니다. 성경의 환상적 이미지에는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를 찾으려면 다른 말씀과의 관계를 살펴야 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가까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부터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강사의 해석과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들어갑니다. 차이는 ‘상징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양쪽 모두 상징을 인정합니다. 진짜 차이는 ‘그 상징이 무엇과 상응하는가’에 있습니다. 강사는 백마·홍마·흑마·청황마를 앞으로 자연계에서 일어날 공의의 심판·전쟁·기근·사망이라는 사건들과 연결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의 말들을 인간의 영적 상태, 더 정확히는 교회 안에서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라는 문제와 연결합니다. 여기서부터 같은 요한계시록 6장을 바라보면서도 두 해석은 전혀 다른 풍경을 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은 말씀에 대한 이해, 곧 진리를 이해하는 지적 능력과 상응합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6장에 갑자기 만들어진 해석 원리가 아닙니다. 성경 전체에서 말이 지닌 상응을 따라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 19장의 백마도 같은 원리로 풉니다.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라는 환상은 단순히 미래 어느 날 주님께서 실제 흰색 말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광경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의 속뜻을 열어 주시고 말씀에 대한 참된 이해를 회복시키시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백마’는 말씀에 대한 참된 이해이며, 그 위에 타신 분은 말씀 자체이신 주님입니다.

 

이 점에서 흥미롭게도 강사와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 6장의 백마 탄 자를 ‘사탄’으로 보지 않는다는 데서는 만납니다. 강사는 백마 탄 자를 공의로 심판하시는 예수님과 연결하면서, 이를 사탄으로 해석하는 일부 종말론적 해석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백마를 악한 존재의 상징으로 보지 않습니다. 다만 그 이유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흰색은 진리를 나타내고, 말은 말씀의 이해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첫째 인을 뗄 때 나타나는 백마는 ‘전쟁을 시작하는 어떤 존재’라기보다 교회 가운데 존재하는 말씀에 대한 참된 이해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6장의 네 말은 각각 따로 떨어진 네 사건이라기보다 하나의 연속적인 영적 쇠퇴를 보여 줍니다. 이것이 이번 3강 1부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스베덴보리의 렌즈’입니다. 처음에는 말씀을 바르게 이해합니다. 이것이 백마입니다. 그러나 그다음에는 선과 사랑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붉은 말입니다. 이어서 진리에 대한 이해가 빈곤해지고 왜곡됩니다. 이것이 검은 말입니다. 마침내 선도 진리도 사라져 영적 생명 자체가 죽은 상태에 이릅니다. 이것이 청황색 말입니다. 그러므로 백마 → 홍마 → 흑마 → 청황마의 진행은 외부 세계에서 ‘공의 → 전쟁 → 기근 → 죽음’이 차례로 일어나는 시간표라기보다, 교회가 말씀의 참된 이해로부터 점차 사랑과 진리를 잃어 마침내 영적으로 황폐해지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둘째 인의 ‘붉은 말’도 훨씬 내면적인 의미를 갖게 됩니다. 본문은 붉은 말을 탄 자가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한다고 말합니다. 강사는 이를 실제 전쟁으로 읽고, 나아가 미래의 세계적 전쟁 및 아마겟돈과 연결합니다. 물론 전쟁은 인류의 악이 자연계에 나타나는 참혹한 결과이므로 영적 의미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전쟁’은 더 근본적으로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의 영적 싸움을 나타냅니다. 특히 ‘땅에서 화평을 제한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사랑과 체어리티가 사라지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사랑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같은 성경을 가지고도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진리는 상대를 살리는 빛이 아니라 상대를 정죄하는 칼이 됩니다.

 

여기에는 매우 실제적인 영적 통찰이 있습니다. 교회가 말씀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말한다고 해서 반드시 ‘백마의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에 대한 지식이 사랑과 결합되어 있을 때 비로소 그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사랑이 떠나면 신앙의 언어는 그대로 남아 있어도 그 안에서 ‘화평’이 사라집니다.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입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면 진리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확증과 정죄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붉은 말은 단지 먼 미래의 세계대전을 예언하는 그림이 아니라, 오늘 우리 자신의 신앙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영적 사건입니다.

 

셋째 인을 떼었을 때 나타나는 ‘검은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사는 검은색을 기근과 연결하고,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라는 말씀을 실제적인 흉년과 식량 부족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으로 보면 여기서 기근은 단순히 먹을 양식이 부족한 상태가 아니라 선과 진리의 결핍입니다. 성경에서 ‘먹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생명으로 만드는 것이며, ‘양식’은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선과 진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영적인 기근은 성경책이 없어지는 상태가 아닙니다. 성경은 여전히 있고 설교도 계속되고 신학도 풍성한데, 그 말씀을 통해 실제로 사랑과 선을 공급받지 못하는 상태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의 교회를 돌아볼 때 매우 엄중한 의미를 가집니다. 성경책이 넘쳐나고 설교와 강의가 인터넷에 가득하다고 해서 반드시 영적 풍년인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말씀을 통해 자신의 악을 보고 회개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에 따라 실제 삶을 고쳐 가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정보는 풍성하면서도 영적으로는 기근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성경 지식은 많지 않더라도 알고 있는 진리 하나를 붙들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 안에는 주님께서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실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리는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보다 ‘그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삶이 되었는가’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계시록 6장을 ‘심판의 재료를 보여 주는 장’이라고 표현한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달리 받아들이면 뜻밖에도 깊은 의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다만 ‘재료’가 자연계의 전쟁·기근·천재지변이라기보다, 심판 때 드러나는 인간과 교회의 내적 상태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외부에서 갑자기 어떤 재앙을 던져 사람을 파괴하시는 행위가 아니라, 그동안 사람 안에 형성되어 온 것이 빛 가운데 드러나는 것입니다. 무엇을 사랑했는지, 무엇을 진리로 받아들였는지, 알고 있는 진리를 어떻게 살았는지가 드러나는 것이 심판입니다.

 

이 관점에서는 ‘인을 떼신다’는 표현도 중요해집니다. 봉인된 것은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인이 떼어지면 감추어져 있던 것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어린양께서 인을 떼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을 파괴하기 위한 재앙을 하나씩 방출하신다는 뜻이라기보다, 말씀과 교회의 내적 상태를 밝히 드러내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빛 앞에서는 감추어진 것이 드러납니다. 겉으로는 신앙이 좋아 보였지만 실제로 무엇을 사랑했는지, 진리를 말했지만 그 진리를 자기 유익을 위해 사용했는지, 혹은 부족한 지식 가운데서도 선을 사랑하며 살았는지가 드러납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심판은 ‘폭로’이면서 동시에 ‘분별’입니다.

 

이 지점은 시흥영성수련원 사경회가 오랫동안 강조해 온 ‘말씀대로 실제로 살아야 한다’는 수도적 영성과도 깊은 접점이 있습니다. 말씀을 많이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받은 말씀을 삶에서 순종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강조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과 상당히 가까이 다가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말씀을 삶으로 옮기는 과정 자체가 인간 안의 영적 질서를 변화시키는 ‘거듭남’이라고 설명합니다. 진리를 알고, 그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기를 반복할 때 주님께서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점차 질서 안에 놓으십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6장을 읽으면서 우리가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제3차 세계대전은 언제 일어나는가?’, ‘7년 대환란은 언제 시작되는가?’, ‘첫째 인은 이미 떼어졌는가?’가 아닐 수 있습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지금 내 안의 말은 무슨 색인가?’입니다. 나는 말씀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 진리를 사랑과 결합시키고 있는가, 아니면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과의 화평을 잃어버리고 있는가, 혹은 진리를 많이 말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영적인 기근 가운데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환상을 자기 밖의 미래 사건으로만 돌려놓으면 우리는 구경꾼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환상을 자신의 영적 상태를 비추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요한계시록은 갑자기 현재의 말씀이 됩니다.

 

또 하나 조심스럽게 짚어야 할 부분은 강사가 말하는 ‘7년 대환란은 모든 인류의 죄를 없이 하시는 7년간의 번제 기간’이라는 설명입니다. 이 표현은 강사의 종말론 체계 안에서는 의미가 있겠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죄는 외부의 환난을 겪는다고 자동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지만, 고난 자체가 악을 제거하지는 않습니다. 같은 고난을 겪고도 어떤 사람은 더욱 선해지고 어떤 사람은 더욱 완고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난 속에서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서며, 그 악을 실제 삶에서 피하려 하는 자유로운 선택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인간의 악을 강제로 뽑아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보존하시면서, 진리를 보여 주시고 악을 보게 하시며, 사람이 자유롭게 그 악을 거부하도록 끊임없이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목적을 파괴 그 자체로 이해하기보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도록 하는 신적 질서의 회복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깊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지옥에 보내기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끝까지 천국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끝내 사랑하는 악을 놓지 않으면, 사후에는 그 사랑과 상응하는 공동체를 스스로 찾아가게 됩니다. 천국과 지옥은 결국 사람이 평생 무엇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았는지가 완전히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강의 중에는 또 ‘성도들의 기도의 분량이 다 차야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행하신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강사는 요한계시록 8장의 향과 성도들의 기도를 근거로 이것을 심판이 시작되는 조건과 연결합니다. 이 부분도 문자적으로 ‘기도가 일정량 누적되면 하나님께서 재앙을 시작하신다’고 이해하기보다는, 기도가 나타내는 영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향은 예배와 기도, 특별히 주님께 올라가는 영적 애정과 상응합니다. 따라서 향연이 올라간다는 것은 단순한 기도 횟수의 축적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에서 선과 진리를 향한 애정이 주님께 향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렇게 읽으면 요한계시록의 장면은 훨씬 내면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결국 3강 1부에서 강사는 요한계시록 6장의 네 말을 앞으로 임할 심판의 네 가지 ‘바람’, 곧 공의·전쟁·기근·사망의 심판으로 읽으며 이를 7년 대환란 직전의 준비 과정에 배치합니다. 이에 비해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같은 네 말을 교회와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상태의 변화로 읽습니다. 백마는 말씀에 대한 참된 이해, 붉은 말은 선과 사랑의 상실, 검은 말은 진리의 황폐, 청황색 말은 마침내 선과 진리가 모두 사라진 영적 죽음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두 해석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나 이 차이를 ‘어느 쪽이 맞고 어느 쪽이 틀렸다’는 식으로만 다루기보다, 강사가 외적 역사 속에서 발견하려 한 심판의 질서를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내면과 교회의 영적 역사 속으로 더 깊이 가져간다고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차이가 이번 사경회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이유를 가장 잘 보여 줍니다. 강사는 우리에게 ‘다가올 환난에 준비되어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질문을 없애지 않고 오히려 더 가까이 가져옵니다. ‘그 환난이 오기 전에 준비되어 있는가?’를 넘어 ‘오늘 주님께서 네 안의 인을 떼어 네 내면을 보여 주신다면 무엇이 드러나겠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말씀을 알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그 말씀을 사랑하고 있는가, 사랑한다고 말하는가만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내고 있는가, 신앙을 고백하는가만이 아니라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가를 묻습니다.

 

그렇게 보면 요한계시록의 심판은 먼 미래의 공포스러운 사건만이 아닙니다. 말씀의 빛이 오늘 나에게 임하여 내 속의 거짓과 악을 드러내고, 그것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매일의 작은 심판이 먼저 있습니다. 이 심판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마지막 심판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밝히시는 것은 멸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며, 드러내시는 것은 정죄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자유롭게 악에서 돌아서도록 하시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3강 첫머리에서 함께 부른 찬송의 고백이 오히려 이 모든 복잡한 종말론을 꿰뚫는 가장 단순하고 깊은 결론이 됩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사람이 실제로 이 고백대로 살아간다면, 요한계시록이 궁극적으로 준비시키려는 사람도 바로 그런 사람일 것입니다.



3 2

씨 뿌리는 비유와 네 가지 마음밭

이번 3강 2부에서는 강사가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를 중심으로 지금까지 배운 ‘핵심진리’를 종합하기 시작합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의 일곱 비유를 서로 떨어진 이야기들이 아니라 하나의 체계로 읽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서론, 겨자씨·누룩·진주와 보화·가라지 비유를 본론, 그물 비유를 결론처럼 배열하고, 이것이 앞으로 공부할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과 666을 이해하는 준비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이 사경회의 독특한 종말론적 체계가 이미 상당히 들어와 있습니다. 특히 ‘14만 4천’을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성장한 성도들로, ‘666’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장 어두운 영혼들과 연결하려는 방향이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이 가운데 먼저 귀하게 받아들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강사가 성경 공부의 목적을 단순한 지식 습득에 두지 않고 ‘영적인 목표’, ‘신앙의 방향’, ‘영적 가치관’을 분명히 하는 데 둔다는 점입니다. 강사는 ‘무엇을 추구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세상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고 영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영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와 상당히 깊은 곳에서 만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을 결정하는 가장 깊은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느냐입니다. 사람은 결국 자신의 지배적 사랑, 곧 생명의 중심을 이루는 사랑에 따라 형성되며, 사후에도 바로 그 사랑이 그 사람의 영적 방향을 결정합니다.

 

다만 마태복음 13장을 곧바로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 대 666’을 해석하기 위한 일종의 암호표로 사용하는 부분에서는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와 요한계시록 사이에 깊은 내적 연결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연결은 ‘겨자씨 비유 = 14만 4천의 성장’, ‘누룩 비유 = 14만 4천의 행실’, ‘가라지 = 666’과 같이 인물 집단을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방식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은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영적 상태, 그리고 가장 깊게는 주님과 그분의 나라를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따라서 어떤 비유를 특정 종말 집단의 정체를 밝히는 열쇠로 제한하면, 오히려 그 비유가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보편적인 영적 의미가 좁아질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부분의 핵심인 ‘씨 뿌리는 비유’로 들어오면 오히려 강사의 설명과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가 상당히 가까워집니다. 강사는 씨를 ‘하나님의 말씀, 복음의 진리’, 씨가 떨어지는 밭을 ‘사람의 마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길가·돌밭·가시밭·좋은 밭이라는 네 상태를 사람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서로 다른 마음 상태로 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설명하신 비유의 문자적 의미에 충실한 해석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씨’라는 표현 자체가 매우 깊습니다. 씨에는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은 씨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땅에 받아들여져야 하고, 뿌리를 내려야 하며, 자라고 마침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말씀의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듣는 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기억하는 것도 시작입니다. 이해하는 것도 아직 완성이 아닙니다.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삶이 되고, 그 진리로부터 선이 행해질 때 비로소 ‘열매’가 맺힙니다. 그러므로 씨 뿌리는 비유는 사실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이라고 부르는 과정 전체를 놀랍도록 간결하게 보여 주는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밭’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 조금 더 세밀하게 말하면,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되는 인간의 내면입니다. 같은 씨가 뿌려집니다. 씨 자체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다릅니다. 어떤 씨는 새가 먹고, 어떤 씨는 잠깐 자랐다가 말라 버리고, 어떤 씨는 가시에 눌리며, 어떤 씨는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합니다. 차이는 씨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그릇’에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는 동일하지만,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강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말을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밭이 어디에 해당하는지 스스로 정확하게 알지 못하며, 하나님께서 ‘시험해 보는 과정’을 통해 그것을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험을 영적 성장 과정과 연결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상당히 깊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시험하신다’는 표현의 의미를 조금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넘어뜨리기 위해 시험을 보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영적 시험, 곧 temptation은 지옥으로부터 오는 악과 거짓의 공격을 주님께서 허용하시는 가운데, 인간 안에 이미 존재하던 것이 드러나고 주님께서 그것을 이기도록 인도하시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평안할 때에는 자신이 어떤 밭인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나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나는 세상보다 천국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존심이 심하게 상했을 때, 손해를 보게 되었을 때,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돈과 명예와 안락함 가운데 하나를 포기해야 할 때 비로소 마음밭의 상태가 드러납니다. 바로 이 점에서 강사가 말하는 ‘시험을 통해 자신의 밭이 드러난다’는 설명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네 가지 밭을 반드시 세상 사람들을 네 부류로 영원히 고정하여 나누는 분류표로만 볼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은 넷 중 하나에 해당한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어느 시점에서 사람의 주된 상태를 그렇게 구별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네 밭을 한 사람의 거듭남 과정 안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아직 길가 같은 부분도 있고, 돌밭 같은 부분도 있으며, 가시떨기가 우거진 부분도 있습니다. 동시에 주님께서 오래 갈아엎고 준비하셔서 좋은 땅이 된 부분도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씨 뿌리는 비유가 타인을 분류하는 말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비추는 말씀이 됩니다. ‘저 사람은 길가다’, ‘저 사람은 돌밭이다’, ‘나는 좋은 밭이다’라고 판정하는 순간 이 비유의 칼날이 밖으로 향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주님의 말씀이 아직 들어가지 못하고 튕겨 나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어떤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였다가 어려움이 오자 버렸는가?’, ‘내가 알고 있는 말씀 가운데 세상 염려와 자기애 때문에 열매 맺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이 비유는 거듭남의 말씀이 됩니다.

 

먼저 ‘길가’는 말씀이 내면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강사는 길가가 사람들이 계속 밟고 다녀 딱딱해진 땅인 것처럼,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강퍅한 마음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중요한 것은 진리가 내면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귀로 들을 수 있습니다. 설교를 듣고 성경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기억의 표면을 스쳐 지나가고 자신의 삶과 무관한 정보로 머문다면, 씨는 아직 ‘땅속’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는 표현도 의미심장합니다. 성경에서 새는 문맥에 따라 생각과 지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좋은 의미의 새도 있지만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된 사고, 곧 진리를 빼앗아 가는 잘못된 추론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말씀을 들은 직후 자신의 기존 욕망에 맞추어 ‘그 말씀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요즘 세상에 그렇게 살면 손해만 보지’, ‘그건 나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야’라고 합리화하기 시작하면, 막 뿌려진 진리가 내면에 들어가기 전에 거짓된 추론에 의해 사라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새가 씨를 먹는’ 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다음의 ‘돌밭’은 더욱 미묘합니다. 이 사람은 말씀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즉시 기쁨으로’ 받습니다. 문제는 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상당히 자주 볼 수 있는 상태입니다. 설교를 듣고 감동하고, 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어떤 진리를 발견하고 크게 기뻐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자신의 사랑과 의지를 바꾸는 데까지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말씀 때문에 손해를 보거나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견디지 못합니다. 진리가 감정에는 닿았지만 생명에는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뿌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식물의 뿌리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뿌리가 식물 전체를 지탱합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종교 활동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혼자 있을 때 무엇을 사랑하는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어떤 선택을 하는가,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진리를 따르는가 하는 내면의 상태입니다. 거기에 진리가 뿌리를 내릴 때 신앙은 외부 환경에 따라 쉽게 말라 버리지 않습니다.

 

강사가 좋은 밭을 설명하면서 ‘더 겸손하고, 더 충성하고, 더 인내하고, 더 온전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부분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또한 ‘적당히 천국만 가면 되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해야 한다고 권합니다. 세상의 쾌락이나 성공을 최고의 가치로 삼지 말고 ‘좁은 길’을 선택해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표현의 체계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이 실천적 강조는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상당히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다만 강사가 이것을 ‘생명책이라는 저금통장’에 선행과 인내가 상급으로 적립되는 것처럼 설명하는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조금 달리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의 상태는 선행을 많이 해서 점수를 많이 쌓은 결과라기보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형성하신 사랑과 지혜의 상태입니다. 선한 행위는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행위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천국의 공로를 적립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행위 속에서 사람의 사랑이 실제 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같은 선행이라도 자기 명예를 위해 한 것과 이웃의 유익을 사랑해서 한 것은 외적으로는 같아 보여도 내적으로 전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행위’ 또는 ‘일’을 그토록 중요하게 다루면서도 공로 사상을 경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얼마나 많이 했는가’만 계산하지 않습니다. 무엇으로부터 했는가가 중요합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했는가, 아니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의 선을 원하여 했는가입니다. 결국 행위는 사랑의 외적 형상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는지는 실제 행위 가운데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말하는 ‘밝은 빛’도 이렇게 이해하면 한층 깊어집니다.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은 단순히 신앙적 업적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가 그의 이해를 밝히고, 그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실제 생활로 흘러나오는 사람입니다. 빛은 진리이고, 그 빛을 따뜻하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빛만 있고 따뜻함이 없다면 겨울 햇빛과 같을 수 있습니다. 진리는 많이 알지만 체어리티가 없다면 영적 생명을 자라게 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사랑한다고 하면서 진리를 원하지 않는다면 방향을 잃기 쉽습니다. 거듭남은 이 둘, 곧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이 결합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씨 뿌리는 비유에서 ‘열매’가 최종적으로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좋은 땅을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하시면서 그 결과를 ‘결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씨가 목적이 아니며 싹도 목적이 아니고 줄기와 잎도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열매가 목적입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을 듣는 것, 공부하는 것, 이해하는 것, 교리를 정리하는 것 모두 중요하지만 그것 자체가 최종 목적은 아닙니다. 그것을 통하여 사람이 선하게 되고, 주님의 사랑이 그의 삶을 통하여 이웃에게 흘러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 점에서 이번 강의가 계속 강조하는 ‘영적 성장’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매우 아름답게 다시 읽을 수 있습니다. 영적 성장은 특별한 체험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며, 비밀스러운 종말론적 지식을 많이 아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중심성이 조금씩 물러가고 주님의 뜻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던 사람을 용서하게 되고, 자기 자존심 때문에 참지 못하던 것을 진리를 위해 참게 되고,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보다 그 사람에게 실제로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는 변화입니다. 이런 변화가 바로 씨가 자라고 열매를 맺는 모습입니다.

 

따라서 이번 3강 2부에서 특별히 소중한 것은 ‘14만 4천이 누구인가’를 설명하려는 종말론적 도식 자체라기보다, 그 도식 아래에서 강사가 계속 붙들고 있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강사는 가장 밝은 빛을 따라 살고, 좁은 길을 선택하며, 세상적 가치보다 영적 가치를 추구하고, 인내와 겸손과 사랑 가운데 성장해야 한다고 권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바로 이 대목을 더 깊이 붙듭니다. 그리고 ‘특별한 종말의 성도 집단에 들어가기 위해 그렇게 살아야 한다’기보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원하시는 거듭남의 삶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면 ‘좋은 밭’도 특별한 소수에게 처음부터 주어진 우월한 마음이 아닙니다. 밭은 갈아야 합니다. 돌을 골라내야 하고 가시를 뽑아야 하며 굳은 땅을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심장을 새롭게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로운 협력을 통하여 그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악을 죄로 알고 피하려고 힘쓰며,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로 행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때 실제로 악을 제거하고 선을 심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읽으면서 ‘나는 네 밭 가운데 어디인가?’라고 묻는 것도 필요하지만, 거기에서 멈출 필요는 없습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오늘 주님께서 내 밭의 어느 부분을 갈고 계시는가?’일 것입니다. 아직 딱딱한 길가가 있다면 부드럽게 하시고, 돌이 있다면 드러내어 치우게 하시며, 가시가 있다면 뽑게 하시고, 이미 좋은 땅이 된 곳에는 더 많은 씨를 심으십니다. 거듭남은 단번에 ‘좋은 밭 사람’이라는 판정을 받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평생에 걸쳐 인간의 내면을 천국에 적합한 땅으로 만들어 가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번 3강 2부의 중심은 의외로 단순해집니다. ‘나는 14만 4천에 속하는가?’보다 먼저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열매를 맺고 있는가?’입니다. ‘마지막 때 시간표를 얼마나 정확하게 아는가?’보다 먼저 ‘오늘 내게 주어진 진리를 얼마나 삶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강사가 서두에서 말한 ‘영적인 목표와 방향’, ‘영적 가치관’이라는 표현과도 자연스럽게 만납니다.

 

결국 좋은 밭의 가장 깊은 특징은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씨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씨의 생명은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열매를 가능하게 하는 생명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이 할 일은 그 생명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진리를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함으로써 주님께서 일하실 길을 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밭을 내어 드릴 때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라는 차이는 있어도 주님께서는 각 사람 안에서 그가 받을 수 있는 만큼의 천국을 이루어 가십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는 종말을 계산하기 위한 비유를 넘어, 지금 이 순간 우리 각 사람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거듭남의 비유’가 됩니다.



3 3

돌밭과 가시떨기에서 좋은 땅으로 : 말씀의 뿌리, 시험, 세상 염려와 참된 결실

3강 3부에서는 앞서 살펴본 씨 뿌리는 비유가 한층 더 실제적인 신앙생활의 문제로 들어갑니다. 2부에서 길가와 돌밭, 가시떨기와 좋은 땅이라는 네 가지 마음밭의 큰 구조를 살펴보았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왜 어떤 사람에게서는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가’, ‘왜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인 사람도 시험이 오면 넘어지는가’, ‘왜 신앙생활을 오래 했는데도 열매가 막힐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강사가 이 비유를 단순히 불신자와 신자를 나누는 비유로만 다루지 않고 영적 성장과 시험, 그리고 실제 삶의 열매라는 방향으로 가져가는 것은 이 사경회의 전체적인 영성과도 잘 어울립니다. 이곳에서 반복되는 ‘연단’, ‘인내’, ‘순종’, ‘좁은 길’, ‘사랑의 실천’이라는 언어가 씨 뿌리는 비유와 만나기 때문입니다.

 

돌밭의 특징은 씨를 받지 않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을 ‘즉시 기쁨으로’ 받습니다. 이것이 길가와 돌밭의 중요한 차이입니다. 길가에서는 씨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지만, 돌밭에서는 싹까지 납니다. 외적으로 보면 상당히 좋은 신앙의 시작처럼 보입니다. 말씀을 듣고 감동하고, 기도하기 시작하며, 새로운 결심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집회나 수련회에서 큰 은혜를 경험하고 자신의 삶이 완전히 달라진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상태에 대해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처음의 기쁨이 거짓이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기쁨이 아직 충분히 깊은 곳까지 내려가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 ‘뿌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의 진리가 기억에 들어가는 것과 이해에 들어가는 것, 그리고 마침내 의지와 사랑에 들어가는 것은 서로 다른 단계입니다. 어떤 진리를 듣고 ‘맞다’고 인정하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 그 진리를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 때문에 자기 욕망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전혀 다른 문제가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을 대할 때 악으로 악을 갚지 않는 것은 다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에 아멘 하는 것과 자신의 이익과 주님의 뜻이 충돌할 때 후자를 선택하는 것도 다릅니다. 진리가 여기까지 내려오면 비로소 뿌리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시험은 말씀을 파괴하는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말씀이 어디까지 뿌리내렸는지를 드러내는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평안할 때에는 자기 신앙의 실제 깊이를 알기 어렵습니다. 누구나 사랑을 말할 수 있고, 겸손을 말할 수 있으며, 주님을 의지한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욕을 받았을 때에도 상대를 악으로 대하지 않을 수 있는지, 자신의 옳음이 인정받지 못할 때에도 평안을 지킬 수 있는지, 예상하지 못한 손해가 생겼을 때에도 주님의 섭리를 신뢰할 수 있는지를 통해 그 진리가 단순히 기억과 이해에 있는지 아니면 의지 안으로 내려가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경회가 강조하는 ‘연단’은 씨 뿌리는 비유의 ‘뿌리’와 깊이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시험에 대해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을 더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넘어뜨리려고 악을 보내 시험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 시험은 지옥으로부터 오는 악과 거짓의 공격이며, 주님께서는 그것을 일정한 범위 안에서 허용하시고 그 가운데 사람을 지키시며 선한 결과를 이루십니다. 인간에게는 시험이 마치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그 시험 가운데 싸울 힘과 진리, 보호와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연단을 귀하게 여긴다고 해서 고통 자체를 거룩하게 여기거나 일부러 고통을 찾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고난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주님을 의지하고 악과 거짓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선과 진리를 붙들 때 고난이 거듭남의 쓰임으로 바뀝니다.

 

이 구별은 수도적 영성을 이해할 때에도 중요합니다. 금식과 절제, 침묵과 순종, 불편을 감수하는 훈련 자체가 사람을 천국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외적 훈련이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다루고, 자기 뜻보다 주님의 뜻을 구하며, 이웃을 더 사랑하도록 돕는다면 귀한 쓰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만큼 견뎠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희생했다’, ‘나는 더 깊은 영적 훈련을 받았다’는 자기 공로로 바뀌면 바로 그 수도적 훈련이 새로운 proprium의 토양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연단의 결과를 판별하는 가장 좋은 기준은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가’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주님을 의지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는가’입니다. 이 점에서 공용복 선생으로부터 이어진 이 사경회의 수도적 강조를 존중하면서도, 그 연단의 내적 목적을 거듭남의 관점에서 더욱 분명하게 할 수 있습니다.

 

돌밭 다음에는 가시떨기가 등장합니다. 여기서는 씨가 싹만 내는 정도가 아니라 어느 정도 자랍니다. 그러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 상태는 어쩌면 돌밭보다 더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돌밭에서는 환난이나 박해가 왔을 때 곧 넘어지므로 문제가 비교적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가시떨기에서는 신앙생활 자체가 계속될 수 있습니다. 예배도 드리고, 말씀도 읽으며, 교회생활도 합니다. 씨가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다른 것들이 함께 자라서 말씀의 생명을 압박한다는 데 있습니다.

 

‘세상의 염려’라는 말도 세상일을 걱정하는 모든 것을 악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자녀를 돌보고, 직업을 성실하게 수행하며, 노후를 준비하는 것은 자연계에서 필요한 일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적 삶은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영적 삶을 섬겨야 할 질서입니다. 문제는 질서가 뒤집힐 때입니다. 자연적인 것이 목적이 되고 영적인 것이 수단이 되는 순간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유가 사업이 잘되기 위해서이고, 기도하는 이유가 건강과 성공을 얻기 위해서이며, 교회생활의 목적이 사회적 관계와 자기 평판을 위한 것이라면 외적으로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도 실제 중심에는 세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재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돈은 자연계에서 수많은 쓰임을 가능하게 하는 유용한 수단입니다. 가족을 돌보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선한 사업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재물의 유혹’, 곧 재물이 주는 안전감과 우월감과 자유를 주님보다 더 사랑하게 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재물을 소유하는 것과 재물이 사람을 소유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재산이 많으면서도 그것을 주님께 받은 쓰임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고, 반대로 가진 것이 많지 않으면서도 온 마음이 돈을 향할 수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것은 통장 잔액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입니다.

 

가시떨기의 또 다른 특징은 ‘말씀을 막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매우 실제적인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세상 사랑과 자기애가 반드시 말씀을 공개적으로 부정해야만 진리를 파괴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을 인정하면서 그 말씀을 끊임없이 뒤로 밀어낼 수 있습니다. ‘맞는 말씀이지. 하지만 지금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조금 더 여유가 생기면 그렇게 살겠다’, ‘지금 이 문제만 해결되면 그때 주님께 더 충실하겠다’고 하면서 진리에 따른 삶을 계속 연기할 수 있습니다. 씨는 살아 있지만 가시가 더 빨리 자랍니다. 그렇게 몇 년, 몇십 년이 지나면 신앙의 언어는 남아 있어도 열매가 매우 적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가시떨기를 단순히 ‘세상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판정하기보다 우리 각자의 삶 속에 들어와 보게 합니다. 목회자에게도 가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 성장과 사역의 성취가 어느 순간 주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도 가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 아는 기쁨보다 ‘내가 더 깊은 것을 안다’는 만족이 커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도 당연히 가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르카나를 발견하는 기쁨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이어지지 않고, 다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고 자신이 더 높은 진리를 가졌다고 느끼는 데 머문다면 귀한 진리의 씨 주변에 아주 미세한 가시가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다른 사람을 확대해서 보는 렌즈이기 전에 자기 자신을 비추는 렌즈여야 합니다. 이것은 이번 시흥영성수련원 사경회를 해설하는 작업에서도 계속 지켜야 할 원칙입니다. 강사의 종말론적 도식과 스베덴보리의 해석이 다른 곳을 발견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우리의 영적 우월성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은 진리를 접했다면 그만큼 더 겸손하고, 더 온유하며, 더 체어리티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높은 진리가 높은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진리는 지식으로만 남을 수 있습니다.

 

이제 좋은 땅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좋은 땅은 처음부터 아무 돌도 없고 아무 가시도 없는 완벽한 인간을 의미한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자연계에서도 좋은 밭은 농부가 손을 대지 않아도 저절로 만들어지는 땅이 아닙니다. 굳은 땅을 갈고, 돌을 골라내고, 잡초를 뽑으며, 물을 대고, 씨를 심고, 오랜 시간을 기다립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매우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인간의 마음도 주님께서 그렇게 경작하십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악을 드러내시고, 말씀의 진리를 통해 그것이 악임을 알게 하시며, 실제 생활에서 그것을 피할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악을 거절할 때 조금씩 돌이 치워지고 가시가 뽑힙니다.

 

여기서 인간의 자유로운 협력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니까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내가 노력해서 나를 좋은 밭으로 만들었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을 설명할 때 반복하는 중요한 원리는 사람이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해야 하지만, 실제 능력과 선은 모두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자유가 없으면 사랑이 형성될 수 없고, 주님의 힘이 없으면 인간은 어떤 악도 실제로 이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좋은 땅에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이 있다는 것도 경쟁적 상급표처럼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천국에는 모두가 똑같은 정도의 선과 지혜를 가져야 한다는 획일성이 없습니다. 사람마다 주님께 받을 수 있는 그릇과 쓰임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삼십 배, 어떤 사람은 육십 배, 어떤 사람은 백 배를 맺지만 중요한 것은 각자가 주님께 받은 것에 따라 충실하게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천국의 완전함은 모든 천사가 똑같아지는 데 있지 않고, 서로 다른 수많은 선과 쓰임이 주님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강사가 ‘더 밝은 빛’, ‘더 큰 상급’을 향해 나아가라고 권면하는 부분을 이해할 때에도 유익합니다. 그 권면을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영적 경쟁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나는 삼십 배가 아니라 백 배짜리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욕망 속에 자기 우월감이 들어오면 좋은 밭을 만들려다가 오히려 새로운 가시를 심을 수 있습니다. 참된 천국적 열망은 ‘내가 더 높은 사람이 되겠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하나도 헛되게 하지 않고 가능한 한 온전히 받아 이웃을 섬기는 데 사용하고 싶다’는 열망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지옥적 사랑도 높은 곳을 원합니다.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보다 위에 있기 위해서’ 높은 곳을 원합니다. 천국적 사랑도 더 큰 것을 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이 사랑하고 더 유용하게 섬기기 위해서’ 원합니다. 겉으로는 둘 다 열심이고 희생적일 수 있지만 내적 동기는 정반대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행위만이 아니라 그 행위 안에 있는 사랑을 보십니다.

 

강의에서 강조하는 ‘좁은 길’ 역시 이런 관점에서 이해하면 좋습니다. 좁은 길은 일부러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길이 아닙니다. 자연적 인간에게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거스르는 길이 좁게 느껴집니다. 복수하고 싶은데 용서하는 길, 인정받고 싶은데 드러나지 않는 자리에서 섬기는 길, 자기 이익을 챙길 수 있는데 정직을 선택하는 길, 자기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데 관계의 선을 위해 말을 절제하는 길이 좁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길을 오래 걸으면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좁았던 길이 점점 자유의 길이 됩니다. 악의 욕망에 끌려 다니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에서 일어나는 ‘즐거움의 변화’입니다. 처음에는 선을 행하는 것이 의무이고 자기부인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새 의지를 형성해 가시면 선을 행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 됩니다. 용서하는 것이 억지가 아니라 평안이 되고, 섬기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 기쁨이 되며,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 억압이 아니라 자유가 됩니다. 그때 좋은 땅은 단순히 ‘말씀을 잘 지키는 사람’의 상태를 넘어, 말씀대로 사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의 상태가 됩니다.

 

이 점에서 이 사경회의 수도적 전통이 강조해 온 ‘연단’도 그 최종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연단의 목적은 평생 이를 악물고 자신을 억누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자기 욕망을 거슬러 싸워야 하지만, 주님께서 거듭나게 하실수록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의지가 형성됩니다. 결국 천국에서는 아무도 억지로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합니다. 그러므로 수도적 훈련의 가장 아름다운 결실은 ‘나는 이렇게 많이 참았다’가 아니라 ‘이제는 예전과 달리 이것이 기쁘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씨 뿌리는 비유는 ‘리메인스’와도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사람이 경험한 순수한 사랑, 선한 정서, 말씀을 통해 받은 진리, 부모나 교사에게서 배운 선한 것들을 내면에 보존하십니다. 사람이 그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여도 주님께서는 보존하십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러한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사람을 악과 거짓에서 끌어내실 때 매우 중요한 토대가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현재 마음밭이 매우 굳어 보인다고 해서 우리는 그 사람을 쉽게 단정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 안에 무엇을 보존하고 계시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를 크게 바꿉니다. ‘저 사람은 길가니까 안 된다’, ‘저 사람은 돌밭이라 오래 못 간다’, ‘저 사람은 가시밭이다’라고 판정하기보다 주님께서 그 사람의 밭을 어떻게 경작하고 계시는지를 알 수 없음을 인정하게 합니다. 오늘은 돌밭처럼 보여도 내일 큰 시험을 통해 돌이 드러나 제거될 수 있고, 오랫동안 가시에 눌려 있던 씨가 어느 순간 주님의 섭리 가운데 다시 살아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섭리를 생각하면 씨 뿌리는 비유는 사람을 네 종류로 나누는 비유라기보다, 주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얼마나 오래 참고 경작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비유로도 읽힙니다.

 

그렇게 보면 이번 3강 3부에서 강사가 강조하는 영적 성장과 연단, 좁은 길과 결실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하여 더욱 깊은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됩니다. 말씀의 씨가 들어오고, 시험을 통해 돌이 드러나며, 세상 염려와 자기애라는 가시가 드러나고, 사람이 주님의 힘을 의지하여 그것들을 피할 때 밭이 조금씩 좋은 땅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그 좋은 땅에서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실제 삶의 열매가 됩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씨 뿌리는 비유 앞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지금 좋은 밭인가 아닌가?’라는 자기 판정만은 아닐 것입니다. 더 살아 있는 질문은 ‘주님께서 오늘 내 안에서 어떤 돌을 보여 주고 계시는가? 어떤 가시를 뽑으라고 하시는가? 이미 알고 있는 어떤 진리를 이제 실제 삶으로 옮기라고 하시는가?’일 것입니다. 바로 그 질문에 하루하루 응답하는 것이 밭을 내어 드리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강사의 권면과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상당히 가까운 자리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더 겸손하고, 더 충성하고, 더 인내하고, 더 사랑하라’는 권면을 자기 공로를 쌓기 위한 명령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께서 내 안에 심으신 씨가 충분히 열매 맺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라는 초청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삼십 배든 육십 배든 백 배든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닙니다. 그 열매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좋은 밭은 ‘나는 좋은 밭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님께 자기 밭을 내어 드리는 사람일 것입니다. 돌이 드러나면 인정하고, 가시가 보이면 뽑으려 하며, 말씀이 자기 욕망과 충돌할 때 말씀 편을 선택하고, 그렇게 하면서도 ‘내가 해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하셨다’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 안에서 말씀은 더 이상 머리에만 있는 씨가 아니라 의지에 뿌리를 내리고 삶으로 열매 맺는 생명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이 사경회가 강조해 온 ‘연단을 통과한 신앙’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볼 때 발견할 수 있는 가장 깊고 아름다운 의미 가운데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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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와 누룩,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 : 영적 성장의 본질

3강 4부에서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시작된 ‘영적 성장’이라는 주제가 겨자씨와 누룩,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의 비유를 통하여 더욱 깊어집니다. 앞에서 네 가지 마음밭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질문은 ‘좋은 밭에 떨어진 씨는 어떻게 자라는가’, 그리고 ‘그 성장이 사람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로 옮겨갑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의 여러 비유를 서로 연결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성장하고, 무엇을 가장 귀한 가치로 발견하며, 결국 어떤 삶을 선택하게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이 사경회가 계속 강조해 온 ‘영적 목표’, ‘연단’, ‘좁은 길’, ‘온전한 사랑’이라는 주제가 여기에서 보다 적극적인 성장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겨자씨 비유입니다. 겨자씨는 시작할 때에는 매우 작지만 자라면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게 됩니다. 강사는 이것을 성도의 영적 성장과 연결합니다. 처음 신앙을 받아들였을 때에는 작고 연약하지만 말씀을 받고 순종하며 시험과 연단을 통과하면서 점차 성장하여 마침내 다른 사람에게까지 유익을 주는 신앙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향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거듭남 역시 처음부터 완성된 천국적 인간이 되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께서 작은 시작으로부터 사람 안에 새로운 생명을 형성하시고 그것을 점차 자라게 하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작다’는 것은 단순히 신앙 지식이 적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거듭남의 시작은 인간에게 매우 미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행동을 어느 날 ‘이것이 정말 주님 앞에서 옳은가?’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작은 양심의 움직임, 미워하던 사람에게 악으로 갚지 않으려는 작은 결심,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기보다 인정하려는 작은 움직임도 겨자씨와 같을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대단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 것이고 사람이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인다면 그 안에는 천국 전체를 향하여 자랄 수 있는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영적 성장을 평가하는 기준도 바꾸어 놓습니다. 사람은 흔히 눈에 띄는 변화와 특별한 체험을 영적 성장으로 생각합니다. 기도를 오래 하고, 성경을 많이 알고, 큰 사역을 하며,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성장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선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 근본적인 성장은 사람의 ‘사랑의 질서’가 바뀌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하던 사람이 조금씩 이웃의 선을 생각하게 되고, 자기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사람이 주님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아주 작은 변화처럼 보여도 영계에서는 이것이 훨씬 큰 변화일 수 있습니다.

 

겨자씨가 ‘나무’가 된다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말씀에서 나무는 사람의 지각과 지식, 그리고 그로부터 형성되는 영적 생명과 관련됩니다. 씨였던 진리가 사람 안에서 자라 하나의 질서를 이루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각각 떨어져 있던 진리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연결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악을 죄로 알고 피하라’, ‘용서하라’, ‘정직하라’는 말씀들이 따로따로 존재하다가 어느 순간 하나의 생명 체계를 이루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왜 이것을 해야 하지?’를 일일이 계산하지 않고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행하기 시작합니다. 씨가 나무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든다’는 말씀도 아름답습니다. 앞서 길가의 씨를 먹어 버린 새는 반대 의미에서 거짓된 사고와 추론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좋은 의미입니다. 말씀에서 새는 사고와 이해에 속한 것들을 나타낼 수 있으므로, 나무의 가지에 새들이 깃든다는 것은 사람 안에 선한 생명이 형성되면서 수많은 진리와 생각들이 그 생명 안에서 제자리를 찾는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참된 영적 성장은 생각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각과 지식과 이성이 선한 사랑을 섬기도록 질서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도적 영성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점입니다. 자기부인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자기 개성을 없애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신 이해와 재능과 개성을 자기애를 위해 사용하지 않고 선한 쓰임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개성이 제거된 사람들의 세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각 사람이 지상에서보다 훨씬 더 분명한 고유성을 가지면서도 그 고유성이 공동의 선을 섬깁니다. 따라서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된다는 것은 ‘작은 나’가 ‘대단한 나’로 커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생명이 충분히 성장하여 다른 생명들을 품을 수 있는 쓰임이 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다음으로 강사가 다루는 누룩의 비유는 영적 성장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 줍니다.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누룩을 넣어 ‘전부 부풀게’ 합니다. 겨자씨가 눈에 보이는 외적 성장의 이미지라면 누룩은 안에서부터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누룩은 반죽 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게 작용하지만 마침내 반죽 전체를 변화시킵니다. 강사는 이것을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제로 행함으로써 사람 전체가 변화되는 과정과 연결합니다. 이 부분 역시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좋은 이미지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거듭남은 사람의 종교적 영역 하나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에 예배드리는 부분, 성경 읽는 부분, 기도하는 부분만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그의 생각과 감정, 인간관계, 직업생활, 돈을 사용하는 태도,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방식까지 변화되어야 합니다. 누룩이 반죽 전체로 퍼지듯 진리가 사람의 삶 전체에 스며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교회에서는 매우 경건하지만 가정과 직장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면 아직 누룩이 반죽 전체에 퍼졌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변화의 주체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뜯어고쳐 천국적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은 그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진리에 반대되는 악을 발견할 때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피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때 실제로 사람 안의 질서를 변화시키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기 변화에 대해 자랑하기보다 더욱 주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내가 이만큼 수련해서 이렇게 되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데려오셨다’는 고백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 사경회의 수도적 전통과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에 매우 중요한 접점과 동시에 경계선이 생깁니다. 오랫동안 자기부인과 절제, 순종과 인내를 강조해 온 전통은 사람의 삶 전체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매우 귀한 통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훈련이 ‘내가 나를 거룩하게 만들었다’는 자기 공로로 돌아가는 순간 방향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참된 수도적 훈련이라면 시간이 갈수록 자신이 강한 사람이라는 의식보다 주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인식이 깊어져야 할 것입니다. 연단이 깊어질수록 proprium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약해져야 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눈보다 이해하고 품는 사랑이 깊어져야 합니다.

 

이어서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이 두 비유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모든 것을 상대화시킬 만큼 귀한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기뻐하며 돌아가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고, 좋은 진주를 구하던 상인은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자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것을 삽니다. 강사는 이것을 영적 가치관의 문제와 연결합니다. 무엇이 정말 귀한 것인지 발견한 사람은 이전에 귀하게 여기던 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사경회가 반복해서 강조해 온 ‘세상적인 가치와 영적인 가치’라는 구분이 다시 나타납니다. 사람이 세상의 성공과 재물과 명예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면 그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힘을 사용합니다. 반대로 천국과 영원한 생명, 주님과의 관계를 가장 귀한 것으로 발견하면 삶의 우선순위가 달라집니다. 강사가 좁은 길과 희생, 자기부인을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가치의 전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보화’와 ‘진주’를 더욱 깊이 말씀의 선과 진리와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진주’는 진리를 나타내는 아름다운 표상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가치는 단순히 희귀한 지식을 알게 되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진리는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고 그의 삶을 선하게 만들기 때문에 귀합니다. 따라서 가장 귀한 진리를 발견했다는 것은 ‘남들이 모르는 비밀을 알았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전 생애를 새롭게 질서 지을 만큼 주님의 진리를 실제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사용하는 우리 자신에게도 특별히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알게 되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세계가 열리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인물과 장소와 숫자가 인간의 거듭남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정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해야 할 일은 그것을 가지고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소유를 다 파는’ 것입니다. 곧 기존의 자기중심적 가치와 생각을 내려놓고 발견한 진리에 따라 삶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아르카나를 많이 아는 것보다 그 아르카나 때문에 한 가지 악이라도 실제로 피하게 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표현도 문자적으로 모든 재산을 처분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뜻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에서 소유는 사람이 자기 것이라고 붙들고 있는 생각과 사랑까지 포함하는 깊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버리기 어려운 소유는 때로 돈이 아니라 ‘내가 옳다’는 생각입니다. 자기 명예, 자기 공로, 자기 판단, 자기 방식, 심지어 자기가 오랫동안 붙들어 온 종교적 확신도 주님의 진리 앞에서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proprium의 문제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가 proprium을 그토록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선과 지혜를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느끼고 싶어 합니다. ‘내 생각’, ‘내 선’, ‘내 신앙’, ‘내 의’, ‘내 공로’를 붙들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천국의 가장 깊은 질서는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팔아 값진 진주를 산다’는 말씀은 가장 깊게는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는 질서를 내려놓고 주님의 선과 진리를 생명의 중심으로 받아들이는 변화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때 ‘기뻐하여 돌아가’ 자기 소유를 판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천국적 자기부인은 이를 악물고 모든 것을 빼앗기는 상태가 아닙니다. 더 귀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이전의 것을 기꺼이 내려놓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손에 쥔 돌멩이를 억지로 빼앗기면 울지만, 더 아름다운 것을 보여 주면 스스로 돌을 놓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방식도 이와 비슷합니다. 단순히 ‘세상을 사랑하지 마라’, ‘자기를 부인하라’고 강제로 빼앗으시는 것이 아니라 천국적 사랑의 더 큰 기쁨을 조금씩 맛보게 하십니다. 그러면 이전에 그렇게 중요했던 것들이 점차 덜 중요해집니다.

 

이것은 앞서 3부에서 살펴본 ‘즐거움의 변화’와도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악을 포기하는 것이 손해처럼 느껴집니다. 복수하지 않는 것이 억울하고, 인정받으려는 욕망을 내려놓는 것이 손해 같으며, 자기 뜻을 포기하는 것이 죽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선한 사랑을 형성해 가시면 그보다 더 깊은 평안과 기쁨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부인은 단순한 상실이 아니라 더 귀한 것을 얻기 위한 자유로운 내려놓음이 됩니다.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기뻐하여’ 모든 것을 판다는 말씀은 바로 이 천국적 자유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수도적 자기부인의 건강한 기준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자기부인이 사람을 점점 어둡고 경직되고 타인에게 엄격하게 만든다면 그 열매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대로 자기부인을 통하여 더 자유로워지고,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다른 사람에게 너그러워지고, 자기 명예가 손상되어도 이전보다 평안하며, 주님과 이웃의 선을 더 기뻐하게 된다면 그 훈련은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빈 껍데기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옥적 즐거움을 비우고 천국적 즐거움으로 채우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겨자씨, 누룩, 보화, 진주를 하나의 흐름으로 놓으면 이번 3강 4부의 구조가 매우 아름답게 보입니다. 겨자씨는 ‘생명의 시작과 성장’을 보여 줍니다. 누룩은 ‘그 생명이 사람 전체로 퍼지는 변화’를 보여 줍니다.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는 ‘그 변화가 가능해지는 가치의 전환’을 보여 줍니다. 결국 사람이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느냐에 따라 무엇을 선택할지가 결정되고, 반복된 선택이 그의 사랑을 형성하며, 그 사랑이 그의 영적 생명을 결정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사후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계에서 자유롭게 선택하고 살아온 사랑이 사후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지금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지가 중요합니다. 입으로는 ‘주님이 가장 귀합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실제 선택에서는 계속 자기 명예와 이익을 먼저 선택한다면 아직 보화를 충분히 발견하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완전하지 않고 자주 넘어지더라도 선택의 방향이 점차 주님과 이웃의 선을 향한다면 주님께서 그 사람의 사랑을 변화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영적 목표’를 반복하여 강조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목표가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목표를 ‘가장 높은 등급의 성도가 되는 것’이나 ‘특별한 14만 4천에 들어가는 것’으로 제한하지 않습니다. 가장 높은 목표는 주님과 결합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가 자기 생명이 되며, 그 생명으로 이웃에게 쓰임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의 위대함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데 있지 않고 더 큰 사랑으로 더 많은 쓰임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백 배의 결실’도, ‘가장 밝은 빛’도, ‘값진 진주’도 모두 다른 사람보다 높은 영적 지위를 얻는 언어로 이해하기보다 주님에게서 더 많은 선과 진리를 받아 더 온전히 살아내는 상태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이렇게 하면 강사가 강조하는 ‘최선을 다해 영적으로 성장하라’는 권면의 힘을 잃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자기 공로나 영적 경쟁으로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목표는 ‘내가 얼마나 높은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게 주신 생명이 얼마나 자유롭게 흘러가고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 사경회 전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하나의 접점이 있습니다. 공용복 선생으로부터 이어져 온 이 수도적 전통이 ‘세상보다 영적인 것을 택하라’, ‘자기를 부인하라’, ‘좁은 길을 가라’, ‘연단을 통과하라’고 반복해 왔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언어를 거듭남이라는 더 내적인 구조 안에 놓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을 버린다는 것은 자연계를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을 영적인 것 아래 두는 것이고, 자기를 죽인다는 것은 인간의 인격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proprium의 지배를 내려놓는 것이며, 좁은 길을 간다는 것은 고통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거슬러 주님의 선과 진리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수도원에 들어가느냐 세상 가운데 사느냐가 가장 중요한 구분도 아닙니다. 사람은 수도원 안에서도 자기애와 명예욕을 키울 수 있고, 세상 한가운데서 직업과 가정을 돌보면서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외적 장소보다 내적 질서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정한 ‘세상 포기’는 세상의 쓰임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자기 목적을 위해 사랑하는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오히려 천국적 인간일수록 자연계의 맡겨진 책임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그것을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쓰임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3강 4부를 읽으면서 ‘나는 겨자씨가 얼마나 크게 자랐는가?’라고만 묻기보다 ‘내 사랑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를 물어야겠습니다. ‘내 안에 누룩이 얼마나 퍼졌는가?’, 곧 신앙이 예배 시간뿐 아니라 가정과 인간관계와 돈과 말과 생각에까지 들어가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무엇을 보화와 진주로 여기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위해 기꺼이 다른 것을 포기하는지를 보면 그가 실제로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결국 겨자씨의 비밀은 크기에 있지 않고 그 안의 생명에 있습니다. 누룩의 비밀은 양에 있지 않고 안에서부터 전체를 변화시키는 힘에 있습니다. 보화와 진주의 비밀은 값비싸다는 데만 있지 않고 그것을 발견한 사람의 가치체계 전체를 바꾸어 놓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비유의 중심에는 주님께서 계십니다. 씨의 생명도 주님에게서 오고, 누룩처럼 사람 안에서 역사하는 진리의 힘도 주님에게서 오며, 우리가 발견해야 할 궁극적인 보화도 주님과 그분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영적 성장이란 결국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되었는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작은 겨자씨 하나처럼 시작된 주님의 진리가 내 안에서 자라고, 누룩처럼 삶 전체로 퍼지고, 마침내 주님과 그분의 나라가 다른 모든 것보다 귀한 보화가 되어 삶의 우선순위 전체가 달라지는 이야기입니다. 그때 사람은 억지로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여’ 내려놓습니다. 더 귀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변화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거듭남이며, 이번 3강 4부에서 강사가 말하는 ‘영적 성장’을 가장 깊은 자리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3 5

이긴 자’, 인 맞은 종, 144천과 생명수 : 가장 밝은 빛과 주님과의 결합

3강 5부에 이르면 강의의 무게중심이 마태복음 13장의 여러 비유를 설명하는 데서, 그 비유들을 통해 지금까지 말해 온 ‘영적 성장의 최종 목표가 무엇인가’를 밝히는 쪽으로 옮겨갑니다. 강사는 앞선 강의에서 다룬 ‘영적 성장론’과 성화된 신앙인들의 생애를 다시 불러오면서,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의 일곱 교회에 반복되는 ‘이기는 자’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특히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권면이 일곱 번 반복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것은 교회 시대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매우 중요한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긴 자’를 연단을 통과하여 정결해진 성도,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살아간 성도, 더 나아가 요한계시록의 ‘인 맞은 종’과 14만 4천에 연결합니다.

 

여기서 먼저 이 강의의 중심 의도를 충분히 살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가 14만 4천이라는 숫자 자체에 호기심을 집중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14만 4천에 들어가는가?’라는 질문 아래 실제로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입니다. 말씀을 인내로 지키고, 시험과 연단 가운데 악과 싸우며, 자기중심적인 삶을 버리고, 주님을 사랑하고, 마침내 ‘이긴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성화된 신앙인들의 삶을 ‘이렇게 살아라’고 보여 주는 모델로 제시하고, 영적 성장의 길에는 출애굽에서 완덕에 이르는 과정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부분을 해설할 때 14만 4천의 숫자 해석만 놓고 스베덴보리와 비교한다면 오히려 강사가 전달하려는 실천적 중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기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다만 누구를 이기는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가장 깊은 의미에서 이겨야 할 대상은 밖에 있는 세상이나 다른 종교인이나 다른 교리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를 거스르는 악과 거짓입니다. 그리고 그 악과 거짓의 뿌리에는 proprium, 곧 모든 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며 자기를 중심에 놓으려는 인간의 고유한 자기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에서 ‘이기는 자’라는 말은 영적 경쟁에서 다른 성도보다 높은 등급에 올라간 사람이라기보다, 주님의 능력으로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대적하여 그것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가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욱 깊습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아주 현실적인 예를 듭니다. 자신이 ‘이긴 자’인지 알려면 극단적으로 말해 누군가에게 모욕을 당해 보면 알 수 있다는 취지의 설명입니다. 평소에는 자신이 상당히 성화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 생기면 즉시 내면의 상태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표현은 다소 익살스럽고 강하지만, 그 안에 담긴 영적 통찰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사람의 영적 상태는 평안할 때의 자기평가보다 자기 사랑이 공격받을 때 무엇이 올라오는지를 통해 더 잘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앞서 씨 뿌리는 비유에서 살펴본 ‘시험’의 의미와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말씀을 듣고 ‘나는 용서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 모욕을 당했을 때 용서하는 것은 다릅니다. ‘나는 겸손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자신의 의견이 무시되었을 때 평정을 유지하는 것도 다릅니다. ‘나는 주님만 의지한다’고 고백하는 것과 모든 자연적 안전망이 흔들릴 때에도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것은 다릅니다. 시험은 사람에게 없던 악을 새로 만들어 넣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안에 있던 사랑의 상태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이러한 드러남이 필요합니다.

 

다만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참았다’는 외적 행동만으로 이김을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겉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반드시 악을 이긴 것은 아닙니다. 속에서는 증오와 복수심을 품으면서 체면 때문에 참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처음에는 분노가 올라왔지만 그것이 죄임을 알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상대에게 악을 행하지 않으려 싸울 수도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 아직 분노를 느꼈다고 해서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로 그곳에서 영적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악한 충동이 한 번도 올라오지 않는 상태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올라오는 악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의 진리에 따라 거절하는 데서 진행됩니다.

 

따라서 ‘이긴 자’는 한 번도 넘어져 본 적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넘어질 때마다 자기 악을 보고 주님께 돌아가 다시 싸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싸움이 거듭될수록 처음에는 억지로 참던 사람이 점차 참는 것을 덜 힘들어하고, 마침내 상대의 선을 실제로 원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단순한 자기통제와 거듭남의 차이입니다. 자기통제는 겉 행동을 억제할 수 있지만 거듭남은 사랑 자체의 방향을 변화시킵니다.

 

강사는 이어서 이러한 ‘이긴 자’를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 곧 ‘인 맞은 종’과 연결합니다. 특히 자신이 강조하는 ‘생명수의 부어짐’ 또는 생명수의 강력한 영적 체험을 인 맞은 종의 중요한 표지로 제시하며, 그러한 경험을 하는 사람은 극소수라고 설명합니다. 다른 대목에서는 허드슨 테일러가 주님과의 깊은 일치와 내면에서 강물처럼 흐르는 생명을 경험했다고 고백한 내용을 소개한 뒤, 이를 ‘생명수 유입’을 경험한 인 맞은 종의 사례로 해석합니다.

 

바로 이 부분은 이번 재해설에서 상당히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가 말하는 ‘생명수’는 주님과의 깊은 결합에서 오는 영적 생명과 충만을 표현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 자체에는 매우 귀한 것이 있습니다. 신앙이 단순한 교리적 동의에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서 실제 자기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상태를 갈망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안다’에서 ‘주님으로 산다’로 나아가려는 갈망입니다. 수도적 영성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도 외적 금욕 자체가 아니라 이런 주님과의 깊은 결합이라면, 그 방향은 충분히 존중할 수 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생명수’가 매우 중요한 상응이라는 점입니다. 물은 일반적으로 진리를 나타내며, 특히 ‘생명수’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 그리고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서 오는 영적 생명을 나타냅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서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생명은 인간 자신에게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옵니다. 그러므로 ‘생명수가 흐른다’는 이미지는 상응의 관점에서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생명수의 유입은 반드시 어떤 특별한 감각적·신비적 체험을 경험해야만 확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내면에서 강물이 흐르는 것 같은 압도적인 체험을 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그의 영적 등급이나 천국의 위치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영적 체험은 실제일 수도 있고, 사람에게 큰 전환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욱 안전하고 본질적인 기준은 그 체험 이후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었는가’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영적 세계와 인간의 내면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강렬한 감정, 환상, 음성, 황홀감, 몸의 특별한 감각이 반드시 그 자체로 천국적 상태를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그런 체험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주님에게서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평생 조용히 자기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고, 맡겨진 일을 정직하게 행하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선을 선택해 온 사람이 오히려 매우 깊은 천국적 생명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 맞은 종’을 특정한 신비 체험을 가진 극소수와 동일시하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계시록의 ‘인’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어떤 외적인 표식이나 일회적 영적 체험이라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의 생명 안에 받아들여져 확고하게 자리 잡은 상태와 관련됩니다. ‘이마’ 역시 중요합니다. 얼굴은 인간의 내적 애정을 나타내고, 특히 이마는 사랑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보이지 않는 표식이 영적 신체에 찍혀 있다는 것보다, 주님에 대한 사랑과 그분의 진리가 그 사람의 가장 깊은 생명의 성격이 되었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더 내적입니다.

 

‘이름’도 말씀에서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이름은 그 존재의 질과 성품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과 어린양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있다’는 것은 주님의 신적 성품, 곧 그분의 사랑과 진리가 그들의 사랑 안에 새겨져 있다는 뜻이 됩니다. 강사는 필라델피아 교회의 이긴 자와 14만 4천을 연결하면서 이마에 하나님과 어린양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아름다운 이미지를 외적 신분 표시에서 내적 생명의 형성으로 가져갑니다.

 

그러면 ‘14만 4천’이라는 숫자도 자연스럽게 다시 보입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14만 4천이 교회 시대 가운데 가장 밝은 빛으로 살고 연단을 완성하여 큰 환난을 면제받으며 휴거되는 특별한 성도들의 집단입니다. 강사는 이들을 천국에서 가장 큰 상급을 받는 사람들로 설명하고, 시온산 및 새 예루살렘과 연결합니다. 이 체계 안에서 14만 4천은 사실상 영적 성장의 최고 단계에 도달한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숫자를 전혀 다르게 읽습니다.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은 자연적 산술로 정확히 144,000명의 특별한 사람을 세는 숫자가 아닙니다. 12는 신앙과 사랑에 속한 모든 것, 곧 교회의 모든 것을 나타내며, 12에 12를 곱한 144는 그 충만함을 나타냅니다. 여기에 천이 결합되면서 그 의미가 더욱 충만하게 표현됩니다. 따라서 14만 4천은 특정한 소수 엘리트 성도들의 정원이라기보다, 주님의 새 교회에 속하여 선과 진리를 받아들인 모든 사람의 완전한 총체를 표상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숫자 해석의 차이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14만 4천을 ‘가장 높은 극소수의 영적 엘리트’로 이해하면 신앙생활이 자칫 등급 경쟁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일반 구원만 받아서는 안 된다. 14만 4천에 들어가야 한다’는 열망은 처음에는 거룩한 열심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미세하게 자기 우월감과 결합할 위험이 있습니다. ‘나는 다른 성도보다 더 연단받았다’, ‘나는 특별한 체험을 했다’, ‘나는 더 밝은 빛 가운데 있다’는 생각이 들어오는 순간, 영적 성장을 추구하면서 오히려 proprium이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강사가 말하는 ‘더 높은 것을 사모하라’는 권면 자체를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방향을 바꾸면 됩니다. ‘다른 사람보다 높은 천국에 가기 위해 더 거룩해져야 한다’가 아니라 ‘주님을 더 사랑하고, 더 많은 진리를 받아들이며, 더 온전히 이웃에게 쓰임 있기 위해 거듭나기를 원한다’가 되는 것입니다. 전자는 자기의 높음을 바라보고, 후자는 주님의 선이 더 많이 흘러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천국에서 ‘큰 자’의 의미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의 높음은 지배의 높음이 아니라 사랑과 쓰임의 깊이입니다. 더 높은 천사는 더 많은 사람을 자기 아래 두는 천사가 아니라, 더 큰 사랑과 지혜로 더 넓은 쓰임을 행하는 천사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선과 지혜가 자기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더욱 분명히 압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높아질수록 오히려 겸손해집니다.

 

이 원리를 적용하면 강사가 반복해서 말하는 ‘가장 밝은 빛’도 더욱 아름답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은 ‘나는 남들보다 밝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빛이 밝아질수록 자기 안에 있는 어둠을 더 잘 보는 사람입니다. 자연계에서도 밝은 햇빛이 들어오면 어두울 때 보이지 않던 먼지가 보이듯, 주님의 진리가 밝게 비칠수록 사람은 자기 안의 미세한 자기애와 거짓을 더 분명히 발견합니다. 그래서 참된 영적 성장은 자기 확신을 크게 만들기보다 회개를 깊게 합니다.

 

강사는 일곱 교회 가운데 특별히 필라델피아 교회를 높이 평가하면서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라는 말씀을 큰 환난의 면제와 연결합니다. 그리고 필라델피아의 이긴 자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받는 것을 14만 4천과 연결합니다. 이 해석의 역사적·종말론적 도식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다르지만,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는 부분은 매우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기억한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진리를 삶에 보존하는 것입니다. 특히 시험 가운데 진리를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사랑하기 어려운 순간에 사랑의 편을 선택하고, 정직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거짓말하면 유리한 순간에 정직을 선택하며,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복수하고 싶은 순간에 용서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때 진리는 단순히 기억 속에 저장된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행위 안에 ‘새겨진’ 말씀이 됩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참된 ‘인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강사가 ‘나는 세 번까지 참는데 네 번째에는 못 참는다. 이제 네 번째까지 참아 가야 한다’는 식으로 인내를 설명하는 것도 재미있으면서 실제적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참는 횟수를 하나씩 늘려 천국 점수를 올리는 과정은 아닙니다. 더 깊은 목표는 ‘참아야 하는 나’에서 ‘사랑하기 때문에 참을 수 있는 나’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를 악물고 참습니다. 다음에는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참습니다. 더 깊어지면 상대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예전 같으면 상처받았을 일에도 자기 자존심이 덜 반응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사랑 자체를 변화시키고 계시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긴 자’의 가장 깊은 표지는 초자연적 능력이나 특별한 체험보다 사랑의 변화입니다. 이전에는 자기에게 잘해 주는 사람만 사랑했는데 이제는 불편한 사람의 선도 생각할 수 있게 되고, 이전에는 인정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했는데 이제는 이름 없이 섬기는 것을 기뻐하며, 이전에는 자기 옳음을 증명해야 했는데 이제는 상대의 구원과 공동의 선을 위해 자기 말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겉으로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계에서는 이런 변화가 가장 실제적인 변화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이번 3강 재작업에서 특별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후의 가르침’ 문제로 들어갈 준비가 이루어집니다. 지상에서 모든 사람이 동일한 정도의 교리적 지식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깊은 신학을 공부하고, 어떤 사람은 매우 단순한 신앙만 알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종교적 환경 자체가 달라 기독교의 교리를 제대로 접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천국은 이 지상에서 정확한 교리 지식을 얼마나 많이 습득했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는 그렇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사후 중간영계에서 선한 영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가르침을 받는다는 사실은 바로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은 지상에서 몰랐던 ‘구원 공식’을 죽은 뒤에 처음 듣고 그것에 지적으로 동의함으로써 구원을 얻는 과정이 아닙니다. 사후에 사람의 지배적 사랑이 근본적으로 뒤집히는 것도 아닙니다. 자연계는 의지와 사랑의 기본 방향이 형성되는 곳입니다. 사후의 가르침은 이미 선을 사랑하는 사람 안에 있는 선과 그에 맞는 진리를 결합하여, 그가 천국의 질서에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과정입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지상에서 단순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정직하고 자비롭게 살았지만 복잡한 교리를 배우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에게 선한 사랑이 형성되어 있다면, 사후에는 그 선과 조화되는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은 진리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지상에서 성경과 신학을 많이 알았지만 실제 사랑이 자기애와 지배욕에 있었다면, 사후에 더 많은 진리를 설명해 준다고 해서 그것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자기 사랑에 맞지 않으면 거절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의 가르침은 ‘몰랐던 정답을 외우게 하는 보충수업’이 아닙니다. 이미 사람 안에 형성된 선한 사랑이 그 사랑에 합당한 진리를 만나 완전해지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선과 진리의 결합을 그렇게 중요하게 말하는 이유입니다. 선만으로는 방향을 분명히 알기 어렵고, 진리만으로는 생명이 없습니다. 선은 진리를 원하고 진리는 선을 향합니다. 천국은 바로 그 둘이 결합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관점은 오히려 이번 사경회가 그토록 강조해 온 ‘삶’의 중요성을 더욱 깊게 만들어 줍니다. 사후에도 가르침이 있다고 해서 ‘그럼 이 땅에서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죽은 다음 배우면 되겠네’가 되지 않습니다. 정반대입니다. 사후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바탕 자체가 지상에서 형성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어떤 것을 반복하여 선택하고 사랑했는지가 사후에 어떤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자연계의 삶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점에서 강사의 ‘연단을 통하여 이긴 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조와 스베덴보리의 사후 교육은 서로 뜻밖에 깊은 접점을 가집니다. 강사는 지상에서 연단을 통과하여 정결해지고 좋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지상에서 사람의 사랑과 의지가 형성되는 것을 결정적으로 중요하게 봅니다. 다만 ‘완성’을 이해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지상에서 모든 교리적 이해와 영적 성장을 완전히 끝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을 향하고 선을 사랑하는 기본적인 생명의 방향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후에도 천사들은 영원히 지혜와 사랑 가운데 성장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졸업장을 받은 완성품들이 들어가는 정지된 박물관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주님에게서 더 많은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며 성장하는 살아 있는 나라입니다. 천사도 영원히 더 지혜로워질 수 있고 더 깊은 사랑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기쁨은 ‘내가 얼마나 높은 천사가 되었는가’에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더 많이 받아 더 온전히 쓰임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14만 4천을 바라보는 시선도 바꾸어 놓습니다. ‘나는 그 특별한 수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라는 불안이나 영적 경쟁보다 ‘나는 지금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얼마나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그리고 ‘생명수 체험을 했는가?’보다 ‘생명수가 내 삶에서 실제 열매가 되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생명수가 정말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왔다면 그 물은 사람을 살립니다. 그의 말이 부드러워지고, 판단이 자비로워지고, 자기 고집이 약해지고, 진리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함께 깊어져야 합니다.

 

이 기준은 신비 체험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호해 줍니다. 어떤 사람이 실제로 깊은 기도 가운데 주님의 임재와 생명을 강력하게 경험했다면 그것은 귀한 은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을 자기 영적 신분을 증명하는 훈장으로 삼지 않고, 그 경험으로 인해 더 겸손하고 더 사랑하며 더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비로소 그 체험은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체험은 씨가 될 수 있지만 열매는 삶에서 확인됩니다.

 

또한 이것은 시흥영성수련원과 같은 수도적 공동체의 역할을 생각하는 데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강사는 혼자서 영적 싸움을 잘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사경회에 다시 모여 ‘충전’하고, 각자의 처소로 돌아가 다시 싸워 이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상당히 실제적입니다. 사람은 혼자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해서 언제나 그것을 살아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공동 예배와 말씀, 서로의 간증과 권면, 함께하는 기도는 사람이 다시 방향을 주님께 돌리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천국은 철저히 공동체적입니다. 천사는 혼자 완전해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각 천사는 자신과 상응하는 공동체 안에서 다른 천사들과 연결되고, 공동의 쓰임 안에서 더 큰 한 사람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영적 성숙을 ‘나 혼자 높은 단계에 도달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이미 천국의 질서와 어긋납니다. 참된 성숙은 사람을 고립시키지 않고 더 깊은 관계와 쓰임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다만 공동체 역시 사람을 대신하여 거듭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사경회에서 큰 은혜를 받고 ‘충전’되어 돌아가도 실제 생활에서 자신의 악을 만나고 그것을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는 일은 각 사람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강사가 ‘각자 처소에 가서 열심히 영적인 싸움을 해서 이기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집회가 목적이 아니라 삶이 목적입니다. 수도원이 목적이 아니라 거듭남이 목적입니다. 말씀 공부가 목적이 아니라 그 말씀이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3강 5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종합하면, 강사가 말하는 ‘이긴 자’, ‘인 맞은 종’, ‘14만 4천’, ‘생명수’, ‘가장 밝은 빛’이라는 여러 표현은 모두 한 중심으로 모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 안에 들어와 그의 사랑과 생각과 삶을 점차 변화시키고, 마침내 그 사람의 생명의 성격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 ‘인’은 외적인 신분표가 아니라 생명에 새겨진 주님의 질서가 되고, ‘생명수’는 특별한 체험만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삶으로 흘러드는 것이 되며, ‘이긴 자’는 다른 성도보다 우월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의 지배를 주님의 힘으로 거절해 온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이기는가’입니다. 인간의 의지력이 최종적으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의 중심에는 언제나 어린양이 계십니다. 사람이 싸우기는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 싸워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이기게 하는 힘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참된 이김의 마지막 고백은 ‘내가 이겼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기게 하셨다’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가장 밝은 빛’을 추구한다는 말도 전혀 다른 울림을 갖습니다. 높은 자리를 탐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주님의 빛을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것이며, 그 빛으로 남을 비추기 전에 먼저 자기 안의 어둠을 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인 맞은 종’이 되고 싶다는 갈망도 특별한 신분을 얻으려는 갈망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 곧 그분의 사랑과 진리가 자기 생명에 깊이 새겨지기를 원하는 갈망이 됩니다. ‘생명수’를 원한다는 것도 특별한 신비 체험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자기 안으로 흘러와 말과 행동과 관계와 쓰임 전체를 살려 내기를 원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3강 5부의 가장 깊은 질문은 ‘나는 14만 4천에 속하는가?’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의 이름이 지금 내 이마, 곧 내 사랑에 새겨지고 있는가?’입니다. ‘나는 특별한 생명수 체험을 했는가?’보다 ‘주님의 생명이 오늘 나를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고 있는가?’입니다. ‘나는 이긴 자인가?’보다 ‘오늘 드러난 이 악 하나를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고 있는가?’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강사가 그토록 강조하는 ‘이긴 자가 되라’는 권면의 힘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훨씬 더 가까워집니다. 종말의 어느 날 특별한 성도가 되기 위한 명령이 아니라 오늘 하루 내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싸움에서 주님 편에 서라는 말씀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작은 승리들이 거듭될 때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시고, 생명수를 흐르게 하시며, 마침내 그 사람을 천국의 선과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준비시키십니다. 사후의 가르침조차 그때 전혀 낯선 무엇을 억지로 집어넣는 일이 아니라, 지상에서 주님께 향하기 시작한 그 사랑을 더욱 밝은 진리로 완성해 가는 일이 됩니다. 이것이 이번 3강 5부에서 ‘이긴 자’와 ‘인 맞은 종’을 바라볼 때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열어 주는 가장 깊은 지평이라고 하겠습니다.



3 6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세 차례의 영적 싸움과 이기는 자’ : 거듭남의 전 과정

3강 6부에서는 지금까지 다루어 온 ‘영적 성장’이 출애굽의 여정과 본격적으로 결합됩니다. 강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겪은 싸움을 크게 세 단계로 나누고, 이것을 성도의 영적 성장 단계와 연결합니다. 첫 번째는 바로의 군대에 쫓기는 단계, 두 번째는 아말렉과 직접 싸우는 단계, 세 번째는 아모리 왕들과 바산 왕 옥을 비롯한 강한 세력들과 싸우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이를 요한일서의 ‘아이들’, ‘청년들’, ‘아비들’의 단계와 연결하면서, 처음에는 악의 세력 앞에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던 사람이 점차 싸울 수 있게 되고, 마침내 강한 적과도 싸워 이긴 뒤 가나안에 들어가는 과정을 ‘이기는 자’가 되어 가는 영적 성장으로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이번 3강 전체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가장 흥미롭게 만나는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강사가 제시하는 ‘바로의 추격 = 아이 단계, 아말렉 = 청년 단계, 아모리·바산과의 전쟁 = 아비 단계’라는 일대일 도식 자체가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과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출애굽의 역사를 단순한 고대 이스라엘의 민족 이동사가 아니라 한 사람의 영적 성장과 싸움의 과정으로 읽으려 한다는 방향에서는 놀랄 만큼 가까워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출애굽기는 그 깊은 속뜻에서 인간이 주님에 의해 악과 거짓의 속박에서 해방되고, 수많은 시험을 통과하여 마침내 선과 진리가 결합된 거듭난 상태로 인도되는 과정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강사의 해석을 먼저 충분히 따라가면서 그 아래에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겹쳐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강사가 말하는 첫 번째 상태는 바로의 군대에 쫓기는 이스라엘입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은 싸우지 못합니다. 애굽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군사적 훈련도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있고 뒤에서는 바로의 군대가 추격합니다. 백성은 두려워하며 모세를 원망합니다. 강사는 이것을 아직 영적으로 어린 성도가 악의 세력 앞에서 제대로 싸울 힘이 없는 상태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장면이 거듭남 초기의 인간을 매우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사람은 진리를 처음 받아들이고 ‘이제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곧바로 이전의 악한 습관과 사랑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를 받아들인 뒤에야 이전에는 잘 보이지 않던 악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기도 합니다. 애굽에서 나오기 전에는 바로의 지배가 일상이었지만, 나오기 시작하자 바로가 추격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거듭남을 시작했기 때문에 싸움이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싸움이 생겼다는 것이 반드시 뒤로 물러났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전에는 악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싸울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 이제 서로 반대되는 두 질서가 만나면서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갖기 시작한 뒤 자신의 악이 더 많이 보이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전에는 화를 내면서도 그것이 크게 문제라고 느끼지 않았는데, 말씀을 받아들인 뒤에는 작은 분노까지 마음에 걸립니다. 예전에는 자기 명예를 위해 행동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여겼는데, 이제는 그 동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악이 갑자기 더 많아졌기 때문이라기보다 빛이 들어왔기 때문에 어둠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 점을 모르면 거듭남의 초기 단계에서 ‘나는 왜 신앙생활을 할수록 더 형편없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느껴질까?’ 하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말씀은 그래서 의미심장합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거듭남의 초기에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악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먼저 배우게 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시는 분임을 경험해야 합니다. 이것은 수동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이어서 백성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길을 여시고 인간은 그 길을 걸어갑니다. 구원은 주님께서 이루시지만 인간에게는 주님께서 열어 주신 길로 자유롭게 걸어가는 응답이 요구됩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아말렉이 공격해 왔을 때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일방적으로 도망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가 사람들을 선택하여 직접 싸웁니다. 모세는 산 위에서 손을 들고 있고, 여호수아와 백성은 아래에서 전쟁합니다. 강사는 이것을 영적으로 어느 정도 성장하여 이제 악과 직접 싸울 수 있게 된 ‘청년’의 단계로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악 앞에서 두려워 도망치던 사람이 이제는 훈련을 받아 싸워 이기기도 하고 때로는 지기도 하면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매우 중요한 거듭남의 원리를 발견합니다. 사람은 주님께서 모든 것을 하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론에서 반복되는 핵심 원리입니다. 사람이 ‘주님이 다 하시니까 나는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하면 자유와 이성이 사용되지 않으며, 악을 자신의 선택으로 거절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내 의지력으로 이 악을 이기겠다’고 하면 proprium에 의존하게 됩니다. 올바른 질서는 ‘나는 최선을 다해 싸우지만 실제 힘은 주님에게서 온다’입니다.

 

아말렉과의 싸움은 이 두 요소를 아주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아래에서는 여호수아가 실제로 칼을 들고 싸웁니다. 그러나 위에서는 모세의 손이 들려 있어야 합니다. 손이 내려가면 아말렉이 이기고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깁니다. 문자 그대로만 보면 기이한 전쟁 장면이지만, 상응으로 읽으면 인간의 실제 노력과 주님에게서 오는 능력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은 아래에서 싸워야 하지만 승리의 능력은 위에서 옵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악습을 끊는 문제를 매우 실제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이 눈에 들어옵니다. 어떤 악습은 성령의 도움으로 비교적 쉽게 끊어지지만, 어떤 악습은 우리의 의지를 들여 계속 싸우면서 끊게 하시는 훈련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과하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라는 말씀을 들고, 주일 설교를 들은 뒤 제목조차 잊어버리는 데서 끝나지 말고 한 주간 그 말씀을 계속 되새기고 묵상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 대목은 매우 귀하게 받아들일 만합니다. 특히 ‘악습에 따라 싸움의 양상이 다르다’는 관찰은 실제 거듭남에서도 맞닿는 부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악을 한꺼번에 인간에게 보여 주시지 않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차례로 드러내십니다. 어떤 외적 악은 비교적 빨리 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악 아래 숨어 있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뿌리는 훨씬 오래 걸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거짓말이라는 외적 행동을 끊는 것보다 ‘나는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깊은 명예욕을 다루는 것이 훨씬 어려울 수 있습니다. 분노를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보다 ‘내가 무시당해서는 안 된다’는 자기 사랑을 다루는 것이 더 깊은 싸움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싸움이 반드시 쉬워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깊은 악이 드러나면서 전쟁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이것이 강사가 말하는 세 번째 단계와도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 같은 강력한 적들과 싸웁니다. 강사는 이것을 영적으로 성숙한 ‘아비’의 단계, 곧 더욱 깊은 연단과 싸움을 통과하는 단계로 설명합니다. 초기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악과 싸웠다면, 성장할수록 인간의 더 깊은 사랑과 동기 속에 숨어 있는 악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 초신자보다 자기 자신을 더 부족하게 느끼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이상합니다. 더 오래 신앙생활을 했으니 자신이 더 거룩하다고 느껴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로 깊은 영적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서는 반대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빛이 더 깊이 들어갈수록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자기애와 자기 의, 자기 공로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성장은 ‘나는 이제 꽤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는 자기 확신을 키우기보다 주님의 자비가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를 더 깊이 알게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아이들’, ‘청년들’, ‘아비들’이라는 강사의 구분도 영적 우열의 계급표처럼 이해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천국의 성장은 누가 더 높은 계급인가를 겨루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서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더 깊은 것을 열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어린 단계에는 어린 단계에서 필요한 보호와 은혜가 있고, 청년 단계에는 싸움과 힘이 있으며, 아비의 단계에는 더 깊은 지혜와 사랑이 있습니다. 어느 단계에서도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가나안’의 의미가 중요해집니다. 강사는 세 차례의 싸움을 통과하고 가나안에 들어간 성도를 ‘이기는 자’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가나안은 매우 중요한 표상입니다.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나라와 교회, 인간 안에서는 천국적·영적 생명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간다는 것은 지리적으로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인간의 생명의 중심이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합니다.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모든 싸움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도 이스라엘은 요단을 건넌 뒤에 오히려 가나안 족속들과 계속 싸워야 했습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어느 순간 완덕에 도달하면 더 이상 악과 싸울 필요가 없는 상태’로 이해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사람은 지상에 사는 동안 계속해서 거듭납니다. 더 나아가 사후 천국에서도 영원히 사랑과 지혜 가운데 완전해져 갑니다. 유한한 피조물이 무한하신 주님의 선과 지혜를 끝까지 받아들이는 과정에는 종착점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기는 자’도 완성된 무결점 인간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힘으로 악과 거짓의 지배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긴 악보다 내일 더 깊은 악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악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나타날 때 누구의 편에 서는가입니다. 악을 자기 것으로 사랑하고 변호하는가, 아니면 그것이 주님의 질서에 반대됨을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 거절하는가입니다.

 

여기서 강사가 ‘말씀을 가까이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도 더욱 깊어집니다. 영적 싸움에서는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 인간 스스로 결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proprium은 놀라울 만큼 자기 자신을 합리화합니다. 내가 미워하는 것은 ‘정의감’이라고 부르고, 내 고집은 ‘신념’이라고 부르며, 명예욕은 ‘사명감’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말씀은 단순히 싸울 때 힘을 주는 격려문이 아니라 무엇이 실제 선이고 진리인지를 밝혀 주는 빛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는 말씀에서 ‘발’이라는 표현도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발은 인간의 가장 바깥 자연적 삶, 곧 실제 행위의 차원과 관계합니다. 말씀이 ‘발의 등’이라는 것은 진리가 단지 높은 신학적 사색을 밝히는 빛이 아니라 오늘 내가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빛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이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이 관계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이 욕망을 따라가야 하는지 거절해야 하는지와 같은 실제 삶의 자리에서 말씀이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강사가 주일에 들은 말씀을 한 주간 계속 되새기라고 권하는 것은 매우 실제적인 영적 훈련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말씀을 단순히 반복해서 기억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진리를 기억에 보존하는 이유는 그것을 실제 상황에서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다가 어느 순간 ‘아, 바로 이 상황에서 내가 이 말씀대로 해야 하는구나’ 하는 때가 옵니다. 그때 진리가 기억에서 삶으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사람이 그 진리를 따라 실제로 행동할 때 진리는 선과 결합합니다.

 

이것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입니다. 말씀을 알고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이웃을 향한 선한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다고 선행만 있으면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선은 진리를 통해 방향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진리를 주시고, 그 진리를 따라 선을 행하게 하시며, 마침내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이 결합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거듭납니다.

 

이렇게 보면 출애굽 여정 전체는 단순한 ‘연단 코스’보다 훨씬 풍성한 의미를 갖습니다. 애굽은 속박입니다. 홍해는 이전 상태와의 결정적 분리입니다. 광야는 진리를 배우고 시험을 통하여 그것을 삶으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만나와 물은 그 과정에서 주님께서 공급하시는 선과 진리입니다. 아말렉과 여러 적들은 거듭남을 방해하는 악과 거짓입니다. 요단은 새로운 상태로 들어가는 경계이고, 가나안은 주님의 나라가 사람 안에 형성되는 상태입니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주체는 인간의 의지력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하심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서 계속 반복되는 ‘여호와께서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이 자기 지혜로 길을 찾아 가나안에 도착한 것이 아닙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앞서 갔습니다. 만나도 그들이 만든 것이 아니고 반석의 물도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싸움에서는 그들이 칼을 들었지만 승리는 여호와께로부터 왔습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전 과정이 주님의 역사임을 보여 주는 아름다운 표상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역할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실제로 애굽에서 나와야 했고, 홍해 앞에서 앞으로 걸어가야 했으며, 만나를 거두어야 했고, 아말렉과 싸워야 했으며, 요단을 건너야 했습니다. 이것이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하는 인간의 자유입니다. 주님은 인간을 돌처럼 끌고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자유롭게 진리를 선택하고 선을 행하게 하시며, 그 자유 안에서 주님과 결합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강사가 말하는 ‘악습을 끊는 훈련’도 매우 균형 있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아직 마음으로는 이것을 좋아하니까 억지로 끊는 것은 위선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악을 좋아하는 욕망이 남아 있더라도 그것이 죄임을 알고 행하지 않으려고 싸우는 것은 거듭남의 중요한 시작입니다. 처음에는 의지와 행동 사이에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싸움을 통하여 새로운 의지를 형성해 가시면 언젠가는 이전에 좋아했던 악 자체를 싫어하게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으로 악을 끊었다고 해서 거듭남이 끝난 것도 아닙니다. 술이나 도박이나 음란 같은 눈에 띄는 악습을 끊는 것은 매우 귀하지만, 그 아래에 있는 지배욕과 자기애, 교만, 타인에 대한 멸시가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외적인 애굽에서 끌어내신 뒤 광야를 지나 더 깊은 적들과 만나게 하십니다. 이 과정이 때로 길고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영적 성장에는 ‘세월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강의 첫머리에서도 복음의 씨가 싹이 되고 이삭이 되고 마침내 익은 열매가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합니다. 거듭남은 조급하게 완성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해치지 않으시면서 수많은 상태와 경험을 통하여 사랑의 질서를 바꾸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 변화도 없는 것 같은 기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땅 위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겨울 동안에도 뿌리에서는 일이 일어나듯, 주님의 섭리는 사람이 의식하지 못하는 깊은 곳에서도 계속됩니다.

 

이 점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중요합니다. ‘왜 저 사람은 아직 저 모양인가’라고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영적 여정의 어느 지점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바로의 군대 앞에서 떨고 있는 단계인지, 아말렉과 싸우다가 넘어지는 단계인지, 아니면 겉으로는 평범해 보여도 매우 깊은 내적 싸움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더구나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 보존해 두신 리메인스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성장론은 다른 사람의 등급을 매기는 도구가 아니라 서로를 오래 참고 돕게 하는 지혜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이번 사경회의 수도적 전통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연단’, ‘좁은 길’, ‘자기부인’, ‘싸워 이김’을 강조해 온 것은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여정을 실제 신앙생활에 적용하려는 강한 실천적 영성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강사 자신도 성결수도회 수도사로서 공용복 선생 시절부터 이 전통 안에 함께해 온 분이라는 배경을 알고 들으면, ‘광야’와 ‘연단’이라는 말이 단순한 강단의 수사가 아니라 오랫동안 삶으로 붙들어 온 언어일 수 있음을 존중하게 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수도적 연단을 한 가지 방향으로 더 깊게 가져갑니다. 연단의 목적은 ‘강한 영적 전사’를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기 의지가 강해져 웬만한 고난은 다 버티는 사람이 되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더 깊이 알고 주님의 힘에 의지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이 악을 이겨야 한다’고 싸웠다면, 깊어질수록 ‘주님께서 아니시면 나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때 더 힘 있게 싸울 수 있습니다.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를 한 사람의 거듭남으로 읽으면 이것이 선명해집니다. 처음에는 바로가 너무 커 보이고 이스라엘은 너무 약해 보입니다. 그러나 여정이 계속될수록 사람이 강해진다기보다 ‘여호와께서 싸우신다’는 사실을 점점 배우게 됩니다. 아말렉과 싸우면서도 모세의 손이 들려 있어야 하고, 여리고 앞에서는 인간의 군사 전략보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자기 능력을 더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더 신뢰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계시록의 ‘이기는 자’와 다시 만납니다. 이기는 자는 자신의 영적 근육이 가장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어린양과 함께 있기 때문에 이기는 사람입니다. 계시록 전체가 결국 보여 주는 승리는 인간의 승리가 아니라 주님의 승리입니다. 사람은 그 승리에 참여합니다. 주님 편에 서서 싸우고, 진리를 선택하고, 악을 거절하면서 주님께서 이루신 승리를 자기 생명 안에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3강 6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애굽에서 나와 바로의 추격을 받고, 광야에서 아말렉과 싸우며, 더 강한 적들과의 전쟁을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의 여정은 단지 성도가 몇 단계의 연단 코스를 통과하여 영적 강자가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한 인간을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속박에서 끌어내어 진리를 가르치시고, 시험 가운데 그 진리를 삶으로 만들게 하시며, 사람이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악과 거짓을 거절하게 하시는 가운데 실제 모든 승리는 주님께로부터 받게 하시고, 마침내 선과 진리가 결합된 천국적 질서를 그 사람 안에 이루어 가시는 거듭남의 아르카나입니다.’

 

그리고 이 해설의 끝에서 가장 오래 남았으면 하는 것은 강사의 매우 소박한 권면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훈련을 해야 된다.’ 이 말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 가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생명줄입니다. 광야에서는 길을 잃기 쉽고, 자기 생각이 주님의 뜻처럼 느껴질 때도 있으며, 악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그때 우리의 ‘발에 등’이 됩니다. 아주 먼 미래를 한꺼번에 비추는 탐조등이라기보다, 오늘 내딛어야 할 한 걸음을 보여 주는 등입니다. 오늘 이 사람에게 화를 낼 것인가 참을 것인가, 이 일을 정직하게 처리할 것인가 편법을 택할 것인가, 내 자존심을 지킬 것인가 관계의 선을 지킬 것인가, 받은 상처를 붙들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를 비춥니다. 그리고 그 한 걸음을 주님의 힘으로 옮길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애굽에서 멀어지고 가나안을 향해 갑니다.

 

결국 ‘이기는 자’가 되는 길은 어떤 거대한 마지막 시험에서 한 번 영웅적으로 승리하는 데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주어진 작은 진리 하나를 실제로 살아내고, 내일 또 하나의 악이 드러나면 그것을 주님 앞에 인정하며,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고, 그러면서 점점 자기 힘보다 주님의 힘을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길을 오래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사람은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가나안을 향해 걸어온 줄 알았는데, 사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자기 손을 꼭 붙잡고 이끌고 계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강의 첫머리에서 함께 부른 ‘예수님 내 손을 꼭 잡아 주소서’라는 찬송이 그래서 3강 6부 전체의 영적 내용을 뜻밖에 정확하게 압축하고 있습니다.



3 7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시온산, 144: 천국의 장소와 상태, 그리고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

3강 7부에서는 앞에서 계속 다루어 온 ‘이기는 자’의 문제가 계시록 3장 12절의 약속 가운데 특히 ‘새 예루살렘의 이름’으로 집중됩니다. 강사는 생활 속의 작은 일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강조한 뒤, ‘작은 것이 쌓이고 쌓여 이것이 열매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고 나서 ‘두 번째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넘어가, 이기는 자에게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록해 주신다는 약속을 풀이하기 시작합니다. 이 흐름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강사에게 ‘새 예루살렘’은 단순한 종말론적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이 땅에서 실제로 연단을 통과하고 이긴 사람이 마침내 들어가게 되는 최고의 천국적 목적지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앞부분에서 강사가 ‘이김’을 거창한 순교나 위대한 업적보다 일상생활의 작은 사랑과 연결한 것은 이번 3강 가운데서도 특히 귀하게 받아들일 만한 대목입니다. 보기 싫은 사람을 만났을 때 얼굴을 돌리지 않고 먼저 다가가 반갑게 인사하는 것, 가족 가운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을 때 오히려 정성스럽게 대하는 것, 배우자가 맞는 말을 기분 나쁘게 했을 때 자기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 같은 매우 구체적인 예를 듭니다. 강사는 이것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바로 이런 작은 승리들이 쌓여 ‘익은 열매’가 된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을 만큼 중요합니다. 거듭남은 대부분 거대한 사건보다 아주 작은 선택들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평생 한두 번 경험할 극적인 사건보다 매일 수십 번 만나는 작은 선택들이 그의 사랑을 형성합니다. 말을 한마디 더 할 것인가 참을 것인가, 상대의 허물을 들추어낼 것인가 덮어 줄 것인가, 나에게 돌아올 이익을 먼저 생각할 것인가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먼저 생각할 것인가, 인정받지 못했을 때 마음속으로 상대를 깎아내릴 것인가 자기애의 움직임을 보고 거절할 것인가 하는 선택들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작은 선택이 단순한 ‘착한 행동 점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람 안에는 어떤 자극을 받으면 자동적으로 반응하려는 오래된 proprium의 경향이 있습니다. 무시당하면 화를 내고 싶고, 손해를 보면 보복하고 싶으며, 자존심이 상하면 상대를 낮추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그 순간 말씀의 진리가 떠오르고, 사람이 ‘이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자기 욕망을 거절한다면 아주 작은 사건 속에서 실제 영적 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밖에서 보면 인사 한 번 하고 지나간 일에 불과할 수 있지만, 영적으로는 자기애가 한 걸음 물러나고 주님의 질서가 한 걸음 들어온 사건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큰 것보다 생활 속의 작은 것으로 승부를 보자’고 말한 것은 상당히 깊은 영적 통찰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영적 성격은 추상적인 신앙 고백이 아니라 반복되는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의지 안에 형성됩니다. 진리를 한 번 아는 것과 그 진리를 반복하여 행하는 것은 다릅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기억에 있고, 다음에는 이해에 있으며, 실제로 행하기 시작하면 의지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 기쁨이 되면 진리와 선이 결합합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이런 흐름 뒤에서 강사는 계시록 3장 12절의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리라’를 다룹니다. 강사는 이 가운데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특별히 천국의 특정한 장소와 연결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가나안 전체가 천국을 표상한다면 예루살렘은 그 가운데 왕이 거하는 도성, 곧 수도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 역시 천국 전체가 아니라 ‘천국의 수도’이며, 이기는 자들이 특별히 그곳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여기서 상당히 구체적인 공간적 천국관을 제시합니다. 계시록 21장의 새 예루살렘의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다는 말씀을 정육면체의 실제 공간적 구조로 이해하고, 그것을 천국 안의 특별한 중심 도성으로 봅니다. 이어서 구약의 모리아산, 시온산, 예루살렘을 동일한 장소가 시대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린 것으로 설명하면서, 이것을 천국에도 적용합니다. 지상의 모형에서 모리아산이 시온산이 되고 예루살렘이 되었듯, 현재 천국의 수도가 ‘시온산’이며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되면 그것이 ‘새 예루살렘’이라 불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강사의 해석 사이에 상당히 큰 차이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차이는 어느 쪽을 공격하거나 재단하는 방식보다 ‘말씀의 표상을 어디까지 자연적 공간으로 읽고, 어디서부터 영적 상태로 읽을 것인가’라는 차이로 설명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강사는 가나안과 예루살렘의 지리적 구조를 천국의 실제 지리적 구조에 비교적 직접적으로 대응시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가나안과 예루살렘, 시온을 모두 상응에 따라 영적인 상태와 교회,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님의 나라와 관련하여 읽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새 예루살렘’은 특히 중요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천국 안에 있는 거대한 정육면체 형태의 수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교회’를 표상합니다. 계시록 21장에서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도 어떤 물질적 도시가 우주 공간을 통과하여 지상으로 내려온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를 이루는 모든 선과 진리가 인간에게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천국을 통하여 내려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이라는 이름 자체의 상응에서부터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 예루살렘은 교회를 나타내며, 특히 교회의 교리와 진리의 측면을 나타냅니다. 그곳에 성전이 있고 예배가 이루어지며, 율법과 가르침이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은 주님께서 새롭게 세우시는 교회, 곧 주님과 그분의 말씀에 관한 참된 이해와 그 이해에 따른 생명이 새롭게 형성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은 먼저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야 할 도시라기보다 ‘어떤 상태인가?’를 물어야 할 영적 실재입니다.

 

이 차이는 계시록 전체를 읽는 방법과 직결됩니다. 계시록의 성, 문, 성벽, 보석, 금, 강, 생명나무, 숫자와 치수를 자연계의 건축물과 동일한 방식으로 읽으면 계시록은 미래 천국의 지리와 건축을 묘사하는 책이 됩니다. 그러나 상응으로 읽으면 그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과 진리, 그것을 받아들이는 교회와 인간의 상태를 보여 주는 하나의 거대한 영적 그림이 됩니다. 성벽에도 의미가 있고, 열두 문에도 의미가 있으며, 열두 기초석과 각종 보석에도 의미가 있고, 성의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다는 것에도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다’는 것은 정육면체의 천국 건축물을 정확하게 측량하도록 주어진 정보라기보다, 새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의 완전하고 조화로운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보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 더 가깝습니다. 계시록의 숫자는 자연적 산술을 위한 숫자가 아니라 영적 질과 상태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을 몇 리, 몇 킬로미터 크기의 실제 도성으로 계산하기 시작하면 문자적 형상은 선명해질 수 있지만, 그 안에 감추어진 아르카나는 오히려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시온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강사는 시온산을 현재 천국의 수도 이름으로 이해하고, 장차 그것이 새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으로 바뀐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시온은 예루살렘과 아주 가까우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영적 의미를 가집니다. 일반적으로 ‘시온’은 교회와 천국 가운데에서도 사랑의 선, 특히 주님을 향한 천적 사랑과 관련되고, ‘예루살렘’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진리와 교리에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시온과 예루살렘은 단순히 같은 장소의 옛 이름과 새 이름이라기보다 선과 진리,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가르침이라는 서로 구별되면서 결합되는 영적 실재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에서 매우 아름다운 부분입니다. 성경에서 ‘시온과 예루살렘’이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단순한 시적 반복만은 아닙니다. 시온은 선과 사랑에 속한 것을, 예루살렘은 진리와 신앙에 속한 것을 나타내며, 둘이 함께 언급될 때에는 교회의 선과 진리가 결합된 전체 상태가 표현될 수 있습니다. 결국 천국의 본질도 장소보다 이 결합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고 그 선에 합당한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상태가 천국입니다.

 

따라서 ‘시온산에 선 14만 4천’이라는 장면도 훨씬 깊어집니다. 강사는 계시록 14장의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서 있는 14만 4천을 ‘교회 시대 이긴 자들’, 곧 ‘인 맞은 종들’로 이해합니다. 그들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계시록 3장 12절에서도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이름과 주님의 새 이름을 기록하겠다고 했으므로 양쪽을 동일한 집단으로 연결합니다. 이 논리 안에서 강사는 결국 ‘이긴 자 = 인 맞은 종 = 14만 4천 = 시온산에 서는 사람 =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사람’이라는 하나의 체계를 세웁니다.

 

이 체계는 강사의 ‘핵심진리’ 전체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을 해설하면서 단순히 ‘스베덴보리와 다르다’고 지나가면 강의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강사가 왜 그토록 ‘연단’, ‘이김’, ‘완덕’, ‘익은 열매’를 강조하는지 여기에서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단순히 훌륭한 신앙인이 되기 위한 덕목이 아니라, 그의 종말론적 체계 안에서는 실제로 14만 4천의 ‘이긴 자’가 되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위한 과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중요한 보완을 제공합니다. 계시록의 14만 4천은 정확히 그 숫자만큼의 특별한 사람을 선발한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에서 ‘12’는 신앙과 사랑에 속한 모든 것, 따라서 교회에 속한 모든 것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수입니다. 열두 지파, 열두 사도, 새 예루살렘의 열두 문과 열두 기초석이 모두 이 구조 안에 있습니다. 144는 12 곱하기 12이고, 144,000은 그 의미가 충만하게 확대된 것입니다. 따라서 14만 4천은 ‘구원받은 최고 등급의 정확히 144,000명’이라기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새 교회를 이루는 사람들의 충만한 전체를 표상한다고 보는 것이 상응에 더 가깝습니다.

 

강사는 실제로 ‘14만 4천이면 너무 적지 않느냐’는 질문을 예상하면서 ‘적지 않다’고 말하고, 그 숫자를 실제 예정된 수로 이해합니다. 또한 아직 구원이 완성되지 않고 광야 과정에 있는 사람들과, 가나안에 들어간 14만 4천의 ‘인 맞은 종’을 구별합니다. 이 부분은 강사의 체계에서는 자연스럽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상당히 조심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적 성장을 자연적 숫자의 정원과 결합하는 순간 ‘나는 그 수 안에 들어가는가?’라는 경쟁적·선발적 신앙이 생길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계시록의 초점은 천국의 정원 제한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사람을 일정 숫자까지만 받아들이고 문을 닫는 사랑이 아닙니다. 천국은 모든 사람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몇 명을 받아 주시는가가 아니라 사람이 어떤 사랑을 자기 생명으로 만들었는가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기뻐하는 사람은 천국의 분위기를 기뻐하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합니다. 따라서 천국의 가장 깊은 분별은 ‘명단에 들어갔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랑이 그 사람의 생명이 되었는가?’입니다.

 

이 점에서 계시록 3장 12절의 ‘이름을 기록한다’는 말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름’은 단순한 명칭이나 신분증이 아닙니다. 말씀에서 어떤 존재의 ‘이름’은 그 존재의 질, 곧 그 성품과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이 사람에게 기록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문자적 이름 몇 글자가 영적 이마에 쓰인다는 의미를 넘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그 사람의 생명 안에 받아들여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리라’는 말씀 역시 ‘새 예루살렘에 입장할 자격증을 붙여 주겠다’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새 예루살렘이 주님의 새 교회와 그 교회의 진리와 선을 나타낸다면, 그 이름이 사람에게 기록된다는 것은 그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의 질이 그 사람 안에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 자신이 ‘새 예루살렘적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전환입니다. 질문이 ‘나는 죽어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을까?’에서 ‘새 예루살렘이 지금 내 안에 내려오고 있는가?’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21장은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합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위로부터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와 그의 생각과 사랑과 행위를 새롭게 질서 지을 때, 작은 의미에서 새 예루살렘이 그 사람 안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다’는 것과 ‘새 예루살렘이 사람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서로 떨어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이 지상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이면 사후에는 그 내적 상태와 상응하는 천국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천국에서 장소는 상태와 상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영계에서는 비슷한 사랑과 진리의 상태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 가까이 있고, 다른 상태의 사람들은 멀리 있는 것처럼 나타납니다. 영계의 공간은 자연계의 물리적 공간과 동일하지 않고 내적 상태를 표현하는 공간입니다.

 

이 원리를 알면 강사가 말하는 ‘천국의 수도’라는 표현도 완전히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자연계의 서울이나 워싱턴처럼 중앙정부가 위치한 물리적 수도로 상상하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가장 중심적인 선과 진리가 가장 충만하게 나타나는 영적 질서라는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는 실제 공동체들이 있고 장소처럼 경험되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배치는 거리와 좌표보다 사랑과 지혜의 상태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중심’이라는 말 역시 영적으로는 주님과의 결합 상태를 중심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서 있다’는 표현이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중요한 것은 ‘시온산의 주소가 어디인가?’가 아니라 ‘어린양과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천국 되게 하는 것은 황금길도, 보석 성벽도, 거대한 도성도 아닙니다. 주님의 임재입니다. 그리고 그 임재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이 천국입니다. 따라서 14만 4천이 시온산에 서 있다는 말씀의 중심은 특별한 엘리트들이 최고급 천국의 수도에 입성했다는 데 있기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인 교회의 충만한 전체가 어린양과 결합해 있다는 데 있습니다.

 

또 그들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이마는 얼굴 가운데에서도 특히 사랑과 의지의 상태와 관련됩니다. 얼굴이 인간의 내적 애정을 나타낸다면 이마는 그 중심적인 사랑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이마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지적 기억 속에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사랑과 그분에게서 오는 선이 그들의 지배적 사랑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3강 7부 앞부분의 ‘작은 승리’와 뒷부분의 ‘이마에 기록된 이름’이 사실 하나의 이야기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처음에는 전혀 다른 주제처럼 보입니다. 한쪽에서는 보기 싫은 사람에게 먼저 인사하라고 하고, 배우자가 기분 나쁘게 맞는 말을 했을 때 참으라고 합니다. 다른 쪽에서는 시온산과 새 예루살렘과 14만 4천이라는 거대한 계시록의 환상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둘 사이에 놀라운 연결이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의 이름은 바로 그런 작은 선택들을 통해 사람 안에 기록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영적 이마에 도장이 ‘꽝’ 찍혀 천국의 특별 시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미워하고 싶은 순간에 사랑을 선택하고, 자기 유익을 구하고 싶은 순간에 이웃의 선을 생각하고,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순간에 진리를 선택하고, 자기 공로를 주장하고 싶은 순간에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는 선택들이 쌓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선과 진리가 조금씩 인간의 의지 안에 새겨집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작은 게 쌓이고 쌓이고 쌓여 가지고 익은 열매가 된다’고 말한 것은 오히려 ‘이름이 기록된다’는 계시록의 상응을 설명하는 데 매우 좋은 실천적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이름은 단순히 적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집니다. 주님의 이름을 입술로 부르는 것과 주님의 성품이 사람의 생명에 새겨지는 것은 다릅니다. 주님의 이름을 생명에 기록한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와 정직과 겸손과 쓰임의 질서가 사람의 실제 선택 속에서 자기 것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도 ‘자기 것이 된다’는 표현은 조심해야 합니다. 선 자체가 인간의 소유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선은 영원히 주님의 것입니다. 천사들도 자기 안의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사가 천사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자기 안의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온다는 것을 기쁘게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선이 ‘생명이 된다’는 것은 그것을 자기 공로로 소유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그것에 따라 사는 것을 사랑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점에서 강사의 ‘이기는 자’ 개념도 한층 부드럽고 깊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기는 자는 영적 전쟁에서 높은 점수를 얻어 14만 4천의 제한된 정원 안에 선발되는 사람이기 전에, 날마다 자기 안의 proprium과 싸우면서 주님께서 이기시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가장 큰 승리는 ‘내가 이겼다’는 의식마저 내려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 승리자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시흥영성수련원의 수도적 영성이 강조해 온 ‘자기부인’과도 아주 깊은 자리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자기부인의 최종 목적은 고통을 많이 견디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특별한 영적 등급을 획득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려는 질서를 내려놓고 주님께서 중심이 되시는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광야 연단’도 자기 의지를 강철처럼 단련하는 과정이라기보다 자기 의지를 주님의 질서 아래 놓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 됩니다. 이 사경회의 오랜 수도적 전통을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가장 깊이 보태 줄 수 있는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강사는 이어 ‘광야 연단 과정 속에서 자기 옷, 자기 행실을 깨끗하게 빨아서 정결해진 행실이 되었기 때문에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권세를 받는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도 매우 귀한 핵심이 있습니다. 계시록의 ‘옷’이 인간의 삶과 관계된다는 통찰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의복은 인간의 내적인 것을 감싸고 표현하는 진리, 그리고 그 진리에 따른 외적 삶과 관계합니다. 그러므로 옷을 깨끗하게 한다는 이미지를 실제 삶의 정결과 연결하는 방향은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그 옷을 사람이 자기 힘으로 깨끗하게 만들어 입장 자격을 획득한다고 이해하면 자기 공로의 위험이 생깁니다. 계시록의 다른 곳에서는 사람들이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고 합니다. 중심은 언제나 어린양입니다. 인간은 회개하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악을 제거하시고 선을 주시는 실제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은 ‘나는 광야에서 충분히 연단받아 이 자격을 얻었다’고 말하기보다 ‘주님께서 나를 수없이 넘어지는 가운데 붙들어 여기까지 인도하셨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은 ‘익은 열매’의 의미도 바꾸어 놓습니다. 익은 열매는 완벽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실제 행위 안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열매는 나무가 자기 자신에게 먹이려고 맺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존재에게 양식이 됩니다. 따라서 영적 열매의 가장 분명한 표지는 다른 사람에게 쓰임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연단을 받았는가보다 그 연단을 통해 내가 얼마나 더 온유하고 자비롭고 정직하고 유용한 사람이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천국의 ‘높은 곳’을 생각할 때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새 예루살렘이 천국의 수도이고 14만 4천의 이긴 자들이 그곳에 들어가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높음은 지위의 높음보다 사랑과 쓰임의 깊이입니다. 가장 높은 천사는 가장 많은 권력을 가진 천사가 아니라 가장 깊이 주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 때문에 가장 넓은 쓰임을 기쁨으로 행하는 천사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가장 낮게 여깁니다. 자기 안의 모든 선이 주님의 것임을 가장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기록된다’는 약속은 어떤 의미에서는 ‘천국 시민권’보다 훨씬 더 큰 약속입니다. 단순히 좋은 장소에 보내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와 상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사람을 외적으로 집어넣는다고 천국이 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 안에 천국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선과 진리의 결합이 그 사람의 생명이 되어야 그 사람은 천국의 분위기 속에서 숨 쉬듯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가장 깊은 준비는 새 예루살렘이 먼저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주님의 진리가 내 이해를 새롭게 하고, 그 진리에서 오는 선이 내 의지를 새롭게 하며, 그 선과 진리가 결합하여 내 실제 삶을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그때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은 먼 미래의 사건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거듭나는 인간 안에서 작은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3강 7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기는 자에게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록하신다는 말씀은 연단을 완성한 정확히 14만 4천 명의 특별한 성도가 천국의 물리적 수도에 입성할 자격을 얻는다는 뜻으로만 읽기보다, 주님께서 사람 안의 자기애와 거짓을 이기시고 그 사람이 자유롭게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새 교회의 질서가 그의 사랑과 삶에 새겨지며, 마침내 그 내적 상태와 상응하는 천국의 공동체 안에서 어린양과 결합하게 된다는 아르카나로 읽을 때 더욱 깊어집니다.’

 

그리고 이번 7부에서는 뜻밖에도 강사가 앞에서 한 아주 소박한 말이 가장 오래 남습니다. ‘작은 게 쌓이고 쌓이고 쌓여 가지고 익은 열매가 된다.’ 이것은 거대한 새 예루살렘 환상을 우리의 오늘 하루와 연결해 줍니다. 새 예루살렘은 계시록 마지막 장면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기 싫은 사람에게 먼저 웃으며 인사하는 그 순간, 배우자의 옳은 말을 자존심 때문에 거부하지 않는 그 순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정직을 선택하는 그 순간, 내 유익보다 다른 사람의 선을 먼저 생각하는 그 순간, 그리고 그 모든 일을 한 뒤 ‘내가 잘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도우셨다’고 마음을 돌리는 그 순간, 새 예루살렘의 한 조각이 우리 안으로 내려옵니다.

 

그렇게 작은 선택이 쌓이고, 진리가 선과 결합하며, 선이 점차 사랑이 되어 갈 때 주님의 ‘이름’은 더 이상 성경책의 글자에만 있지 않고 사람의 생명에 기록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이기는 자에게 내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리라’는 약속의 가장 아름다운 성취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새 예루살렘으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를 새 예루살렘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3 8

천년왕국, 첫째 부활과 왕 노릇’ : 주님의 나라와 부활의 참된 의미

3강 8부에서는 앞서 다룬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14만 4천에 관한 설명에서 자연스럽게 계시록 20장의 ‘천년왕국’으로 넘어갑니다. 강사는 광야의 연단 가운데 ‘자기 옷’, 곧 자기 행실을 깨끗하게 하여 익은 열매가 된 이기는 자에게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권세가 주어진다고 정리한 뒤, 계시록 20장 1절 이하의 천년왕국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종말론적 체계에서는 예수님께서 지상 재림하시고 아마겟돈 심판을 행하신 뒤 이 땅에 실제적인 ‘천년 그리스도 왕국’, 곧 메시아 왕국을 세우십니다. 따라서 이번 8부는 앞서의 개인적 영적 성장론이 본격적인 미래 종말론의 시간표와 결합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눈여겨볼 것은 강사가 ‘천년왕국’을 말하면서 지상의 천국을 주장하는 여러 이단적 재림주 운동과 자기 해석을 분명하게 구별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강사는 ‘이단들이 쓰는 단골 메뉴’ 가운데 하나가 영계의 천국은 말하지 않고 ‘내가 재림 메시아로 왔으니 이 땅에 지상천국을 이루겠다’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의 주님의 승천과 재림 말씀을 근거로 그러한 자칭 재림주들을 배격합니다. 이 부분은 중요합니다. 강사의 천년왕국론을 단순히 ‘지상천국론’이라는 한 단어로 묶어 버리면 강의 자체가 의도적으로 구별하고 있는 지점을 놓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여기서 한 걸음 더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참된 재림은 무엇인가?’, 그리고 ‘주님의 나라는 어디에 어떻게 임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재림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 주님께서 자연계의 구름을 타고 지상에 다시 나타나시는 사건이고, 그 뒤 실제적인 메시아 왕국이 이 땅에 천 년 동안 세워집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재림은 주님께서 다시 육체를 입고 자연계에 오시는 두 번째 성육신이나 자연적 구름을 타고 물리적으로 내려오시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의 속뜻이 열리고 그 안에 계신 주님께서 신적 진리로 새롭게 나타나시는 영적 강림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큽니다. 그러나 이것을 곧바로 ‘어느 해석은 틀리고 어느 해석은 맞다’는 식으로 처리하기보다, 두 해석이 계시록의 언어를 바라보는 층위가 다르다고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강사는 계시록의 사건들을 미래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날 일들의 모형과 예언으로 읽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사건들의 자연적 형상 안에서 교회와 인간의 내적 상태, 그리고 주님의 신적 질서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봅니다. 앞서 새 예루살렘을 실제 천국의 수도로 보는 것과 주님의 새 교회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차이도 바로 여기에서 생겼습니다.

 

계시록 20장의 ‘천 년’도 같은 원리로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말씀의 숫자는 대부분 자연적 산술을 목적으로 주어진 숫자가 아닙니다. 특히 ‘천’은 정확히 1,000년이라는 시간 단위를 가리키기보다 많음, 충만함, 완전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천년왕국’을 달력으로 정확히 1,000년 동안 존속하는 미래의 지상 정치체제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숫자 ‘천’이 나타내는 영적 상태의 충만함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계시록을 읽는 방향을 크게 바꾸어 놓습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질문은 ‘천년왕국은 언제 시작되는가?’, ‘휴거 전인가 후인가?’, ‘누가 그 왕국에 들어가는가?’, ‘그곳에서 누가 왕 노릇하는가?’가 됩니다. 그러나 속뜻으로 들어가면 질문은 ‘주님의 통치가 인간 안에 이루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악과 거짓의 세력이 결박된다는 것은 어떤 상태인가?’, ‘첫째 부활은 무엇인가?’,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로 바뀝니다. 계시록의 관심이 미래 연표에서 현재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강사가 지금까지 반복해서 강조한 ‘연단’과 ‘이김’을 생각하면 오히려 이 내적 독법이 강의의 실천적 중심을 더 깊게 살려 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나라가 먼 미래에만 세워지는 것이라면 지금의 영적 싸움은 그 미래 왕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기 위한 준비가 되기 쉽지만, 주님의 나라가 지금 인간 안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영적 싸움 자체가 이미 그 나라가 임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자기애의 요구를 거절하고 주님의 진리에 순종할 때, 바로 그만큼 내 안에서 자기의 왕국이 물러나고 주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천국은 먼저 장소이기 전에 상태입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의 사랑과 생각을 다스리는 상태가 천국이며,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악과 거짓이 지배하는 상태가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왕이 되신다’는 것은 단지 먼 미래에 예루살렘에 왕좌를 설치하신다는 의미에 앞서, 인간 안에서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지배적인 원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왕 노릇한다’는 계시록의 표현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자연적인 왕 노릇은 다른 사람 위에 서서 명령하고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의 ‘왕 노릇’은 그런 지배와 정반대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천국의 권세는 다른 사람을 자기 뜻 아래 굴복시키는 권세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로 악과 거짓을 다스리고, 그 진리를 통해 선한 쓰임을 행하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리라’는 말씀을 어떤 특별한 성도들이 미래 천년왕국에서 정치적 통치권을 받아 다른 사람들을 다스린다는 그림으로만 읽으면 천국적 ‘왕권’의 본질을 놓칠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한다는 것은 먼저 자기 밖의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무질서를 주님의 진리 아래 두는 것입니다. 분노가 올라와도 분노가 왕이 되지 못하게 하고, 명예욕이 올라와도 명예욕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하며, 탐욕이 올라와도 그것이 삶의 방향을 정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다스리고 사랑이 목적이 되는 질서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강사가 강조해 온 ‘이기는 자’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진정한 왕은 다른 사람을 이긴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이 자기를 지배하지 못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실제 승리자는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신적 진리로 악과 거짓을 굴복시키십니다. 인간은 주님의 편에 서서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싸웁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사람이 가장 깊이 아는 것은 ‘이 권세는 내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계시록의 ‘보좌’도 단순한 왕실 의자로만 볼 수 없습니다. 보좌는 심판과 통치, 그리고 그 통치를 이루는 신적 진리와 관련됩니다. 사람이 보좌에 앉는다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다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할 권력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 악과 거짓을 분별하는 상태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천국마저 지상의 권력구조처럼 상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천국은 지상 왕국을 크게 확대해 놓은 곳이 아닙니다. 천국에는 질서와 등급과 통치가 있지만, 그 모든 질서는 사랑과 쓰임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높은 천사는 낮은 천사를 지배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높은 사랑과 지혜를 가진 만큼 더 넓은 쓰임을 행합니다. 천국의 통치는 자기 확대가 아니라 쓰임의 확대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가장 높은 자들은 자신을 가장 낮게 여깁니다.

 

이 점은 시흥영성수련원의 수도적 영성이 강조해 온 ‘자기부인’과도 아주 중요한 접점을 가집니다. 자기부인이 깊어질수록 ‘내가 남보다 높은 영적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욕망까지 내려놓아야 합니다. 만일 연단과 금욕과 순종을 오래 한 결과 ‘나는 일반 성도와 다르다’, ‘나는 이긴 자다’, ‘나는 더 높은 천국에 갈 사람이다’라는 의식이 강해진다면, 외적인 proprium은 억제했을지 몰라도 더 미세한 영적 proprium이 자라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깊은 연단을 거친 사람이 갈수록 부드러워지고,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이해하며, 자기 선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게 된다면 그 연단은 천국적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강사가 이번 사경회 전체에서 반복하는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개회기도에서도 ‘자기와의 싸움’, 환경과의 싸움 가운데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고, 순간순간 회개하며 감사함으로 봉사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드려집니다. 이 기도에는 이 사경회의 영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있습니다. 종말론적 시간표가 아무리 상세하더라도 이 공동체가 실제로 요구하는 삶은 결국 자기와 싸우고, 회개하고, 성령의 도움을 구하며, 봉사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 실천적 중심을 놓치지 않는 것이 공정한 해설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계시록 20장의 ‘첫째 부활’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문자적 미래주의에서는 첫째 부활을 미래 어느 시점에 죽었던 특정 성도들이 육체적으로 먼저 부활하는 사건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강사의 천년왕국 체계에서도 부활은 종말의 시간표 속에 배치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부활 자체를 먼저 전혀 다른 차원에서 봅니다. 인간은 자연적 육체가 죽은 뒤 오랜 세월 무덤에서 무의식적으로 기다렸다가 먼 미래에 다시 살아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연적 몸이 죽으면 영은 영계에서 깨어나 계속 살아갑니다.

 

따라서 ‘첫째 부활’ 역시 무덤 속 육체가 먼저 일어나는 장면만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깊게는 사람이 자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명에서 영적 생명으로 일어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를 형성하시고, 사람이 악과 거짓의 지배에서 벗어나 선과 진리를 사랑하기 시작할 때 그는 이미 어떤 의미에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영적 죽음과 영적 생명은 자연적 심장이 뛰느냐 멈추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지배하는 상태가 영적 죽음이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생명이 되는 상태가 영적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 자체가 하나의 부활입니다. 사람이 회개할 때마다 죽은 부분에서 일어납니다. 미움에서 사랑으로 옮겨 갈 때 일어나고, 거짓에서 진리로 옮겨 갈 때 일어나며, 자기 공로에서 주님의 은혜로 옮겨 갈 때 일어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계시록의 부활은 먼 미래의 기적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안에서 시작되어야 할 영적 현실입니다.

 

이것은 강사가 앞서 ‘구원이 완성되었다’, ‘광야 과정을 통과했다’,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표현한 것과도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어느 순간 인간이 완덕의 선을 넘어 더 이상 거듭날 필요가 없는 완성품이 된다고 보기보다, 주님께로 향하는 지배적 사랑이 형성되고 그 사랑이 계속해서 더 깊어지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천사들조차 영원히 사랑과 지혜에서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구원의 완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상당히 중요합니다. 만일 ‘나는 구원이 완성되었다’는 확신이 ‘이제 나는 익은 열매이며 저 사람은 아직 광야에 있다’는 판단으로 이어지면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내적 상태를 볼 수 없습니다. 더구나 자기 자신의 가장 깊은 동기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주님만이 그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성장할수록 자기 위치를 확정하는 것보다 오늘 주어진 악을 죄로 알고 피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강사가 ‘14만 4천도 많은 숫자’라고 하면서 그 수를 실제로 예정된 수로 이해하는 부분도 앞서 살펴본 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상응적으로 다시 읽게 됩니다. 천년이 정확한 1,000년을 반드시 뜻하지 않는 것처럼 14만 4천도 정확한 인원수를 반드시 뜻하지 않습니다. 계시록의 숫자는 영적 상태의 질과 충만함을 표현합니다. 이 원칙을 일관되게 적용하면 계시록은 ‘몇 명’, ‘몇 년’, ‘몇 달’, ‘몇 나라’의 계산에서 벗어나 훨씬 더 깊은 영적 구조를 드러냅니다.

 

그렇다고 계시록에서 역사적 사건의 차원을 완전히 지워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계시록이 교회의 역사적 상태와 마지막 심판, 새 교회의 도래를 다룬다고 봅니다. 다만 그 사건들은 자연계의 국제정치 시간표로만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영계에서 이루어지는 심판과 교회의 영적 상태 변화라는 차원에서 이해됩니다. 이 점은 강사의 미래주의적 계시록 해석과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의 가장 큰 차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마지막 심판’은 자연계의 지구가 불타 없어지고 모든 죽은 육체가 무덤에서 일어나 한 장소에 모이는 사건이 아닙니다. 심판은 영계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람은 죽은 즉시 영으로 살아 있으며, 자신의 지배적 사랑이 드러남에 따라 결국 자신과 상응하는 천국이나 지옥으로 갑니다. 그리고 보편적인 마지막 심판은 영계에 오랫동안 형성되어 있던 거짓된 영적 사회들이 분리되고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는 사건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천년왕국을 지상의 국제정치적 왕국으로 세밀하게 구성해야 할 필요도 줄어듭니다. 주님의 나라는 본질적으로 영적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의 나라가 인간 안에 임하면 자연계에도 결과가 나타납니다. 더 정직한 사회, 더 자비로운 관계, 더 정의로운 제도, 더 선한 쓰임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천국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외적 제도를 아무리 완벽하게 만들어도 인간의 사랑이 자기중심적이면 그 제도는 결국 변질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지상천국’에 대한 강사의 경계와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뜻밖에 만납니다. 강사는 자칭 재림주가 나타나 ‘내가 이 땅에 지상천국을 만들겠다’고 하는 것을 이단의 전형적 주장으로 경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외적 사회체제를 바꾸는 것만으로 천국을 만들 수 없다고 봅니다. 천국은 인간의 내면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자기애와 지배욕이 그대로인데 완벽한 제도만 만들면 그 제도는 결국 그 사랑을 표현하는 도구가 됩니다.

 

따라서 주님의 나라는 먼저 ‘누가 통치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내 삶에서 돈이 왕인가, 명예가 왕인가, 내 의견이 왕인가, 아니면 주님의 선과 진리가 왕인가입니다. 이 질문 앞에서는 천년왕국이 더 이상 먼 미래의 종말론적 호기심으로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내 안에서 어느 나라가 세워지고 있는가의 문제가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강사가 개회 설교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를 중심으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그리고 빛의 열매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강조한 것도 다시 주목할 만합니다. 이것은 사실 천년왕국의 가장 깊은 의미와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왕이신 나라는 사람들이 종말론적 지식을 많이 가진 나라가 아니라 주님의 빛이 그들의 삶에서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는 열매로 나타나는 나라입니다.

 

강사는 또한 성령께서는 ‘진리를 통해서 역사하신다’고 강조하고, 흐리고 세상적이며 기복적이고 정욕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순수하고 누룩이 섞이지 않는 밝은 진리’를 통해 영성이 살아나고 삶이 밝아지며 회개가 일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 역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상당히 가까운 지점입니다. 진리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사람 안의 악과 거짓을 드러내고 선한 삶으로 인도하는 빛이어야 합니다. 진리를 많이 알았는데 삶이 더 교만해지고 다른 사람을 더 쉽게 정죄하게 된다면 그 진리는 아직 생명과 결합되지 못한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밝은 진리’를 무엇으로 판별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단순히 더 세밀하고 비밀스러운 종말 시간표를 알고 있다는 것이 반드시 더 밝은 진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리의 밝음은 그 진리가 주님과 그분의 사랑을 얼마나 분명히 드러내고, 인간을 악에서 떠나 선한 삶으로 인도하는가와 관계합니다. 높은 진리는 높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는 오히려 자기 지성의 우월감을 키우는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번 사경회 전체를 해설하면서 계속 붙들어야 할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이 사경회에는 강한 종말론적 확신과 독특한 계시록 해석이 있습니다. 동시에 자기부인, 회개, 사랑, 봉사, 연단, 성결이라는 매우 실제적인 영적 요청도 있습니다. 이 둘 가운데 후자를 가볍게 여기면서 전자의 교리적 차이만 비판하면 이 사경회의 실제 영성을 제대로 읽지 못합니다. 반대로 실천적 열심이 귀하다고 해서 모든 종말론적 도식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할 일은 좋은 것은 충분히 알아보고, 문자적 해석이 속뜻을 가릴 수 있는 곳에서는 조용히 더 깊은 층을 열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3강 8부의 ‘천년왕국’은 폐기해야 할 주제가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이 들어가야 할 주제입니다. ‘천 년이 정말 1,000년인가?’만 묻는 데서 멈추지 않고 ‘주님의 통치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누가 그때 왕 노릇하는가?’에서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이 왕 노릇하고 있는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첫째 부활은 언제 일어나는가?’에서 ‘나는 지금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년왕국은 갑자기 오늘의 문제가 됩니다. 화를 내고 싶은 순간에 주님의 진리가 내 분노를 다스리면 그 작은 영역에서 주님께서 왕이 되십니다. 돈 때문에 진리를 타협하고 싶은 순간에 정직을 선택하면 그 자리에서 주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내 의견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상대의 선을 먼저 생각하면 자기 왕국이 조금 무너지고 주님의 왕국이 조금 더 세워집니다. 남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악을 거절할 때 첫째 부활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강사가 말한 ‘작은 것이 쌓이고 쌓여 익은 열매가 된다’는 설명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천년왕국과 새 예루살렘이라는 거대한 계시록의 환상이 결국 한 사람의 작은 일상과 만나는 것입니다. 미래에 주님께서 왕이 되실 것을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먼저 오늘 자기 안에서 주님께 왕좌를 내어 드려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먼저 말씀의 신적 진리가 자기 생각과 사랑 안으로 오시도록 받아들여야 합니다.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새 예루살렘의 선과 진리가 자기 삶 안으로 내려오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천년왕국의 문자적 그림을 내적 의미로 옮기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이것은 종말의 긴장감을 약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종말을 훨씬 더 가까이 가져오기 위해서입니다. 자연적 미래주의에서는 종말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날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종말’은 낡은 자기중심적 질서가 끝나고 주님의 새로운 질서가 시작될 때마다 우리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교회 전체에도 그러하고 개인에게도 그러합니다.

 

3강 8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20장의 천년왕국과 첫째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한다는 말씀은 예수께서 미래 어느 시점에 자연계로 다시 내려오셔서 정확히 천 년 동안 지상 정치왕국을 세우시고 특별히 선발된 성도들에게 통치권을 나누어 주신다는 시간표로만 읽기보다, 마지막 심판을 통하여 악과 거짓의 거짓된 지배가 무너지고 주님의 신적 선과 진리에서 오는 새로운 교회의 질서가 세워지며, 개인 안에서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지배에서 일어나 주님의 선과 진리가 다스리는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가는 거듭남의 아르카나로 읽을 때 그 속뜻이 더욱 깊이 열립니다.’

 

그리고 이번 8부에서 특히 귀하게 남길 것은 ‘왕 노릇’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높은 영적 단계에 올라가 다른 사람을 다스리기 위해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의 지옥적 사랑들이 더 이상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거듭납니다. 그러고 나면 놀랍게도 사람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도 점차 잃어버립니다. 천국적 사랑은 지배하려 하지 않고 섬기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깊이 거듭난 사람은 ‘나는 왕이 되었다’고 느끼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만이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자기 지혜도, 자기 의도, 자기 공로도 왕좌에서 내려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앉습니다. 그때 비로소 사람은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합니다. 자기가 왕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참된 왕이신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결국 천년왕국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언제입니까?’보다 ‘누가 지금 나를 다스리고 있습니까?’일 수 있습니다. 그 답이 조금씩 ‘나’에서 ‘주님’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 그것이 바로 강사가 말하는 광야의 연단과 이김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더욱 깊이 읽었을 때 보이는 거듭남의 길이며, 계시록의 천년왕국이 우리의 오늘과 만나는 자리라고 하겠습니다.



3 9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그리고 천년왕국의 세 부류’ : 부활, 천국의 다양성, 그리고 쓰임의 질서

3강 9부에서는 앞서 살펴본 천년왕국의 논의가 한층 더 구체화됩니다. 강사는 고린도전서 15장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리고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라는 말씀을 근거로 부활의 순서를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이시며, 그 다음에는 주님의 강림 때 그분에게 ‘붙은 자들’이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사는 자신이 앞서 세운 ‘공중 강림’과 ‘지상 재림’의 구분을 적용하여, 공중 강림 때 휴거되는 성도들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고, 이들이 천년왕국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왕 노릇한다고 설명합니다. 나머지는 둘째 부활에 속한다고 구별합니다.

 

이어서 강사는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성도들을 ‘세 부류’로 나눕니다. 이 구분은 그의 ‘핵심진리’ 체계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사람들 가운데 왕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고, 그 왕들을 보필하는 사람이 있으며, 일반 백성으로서 땅을 분배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형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에 들어갈 때의 구조에서 찾습니다. 곧 ‘제사장’, ‘레위인’, ‘땅을 분배받는 일반 백성’이라는 세 부류가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세 종류의 성도들을 미리 보여 주는 모형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이번 3강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매우 흥미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천국에 서로 다른 상태와 쓰임이 있다’는 강사의 기본 직관은 스베덴보리의 천국 이해와 상당히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왕-왕을 보필하는 자-일반 백성’이라는 지상 왕국의 신분구조로 이해하는 데서는 상당한 차이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고 질서정연하지만, 그 다양성은 특권과 신분의 서열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종류, 그리고 그 사랑에서 나오는 ‘쓰임’의 차이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먼저 강사의 논리를 조금 더 충분히 따라가 보겠습니다. 강사는 계시록 14장의 시온산에 있는 14만 4천을 ‘처음 익은 열매’라고 부르는 데 주목합니다. 만일 익은 열매가 한 종류뿐이라면 굳이 ‘처음’이라는 말을 붙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 익은 열매’가 있다면 두 번째와 세 번째 익은 열매도 있다는 논리입니다. 그리고 그 수가 세 종류인 이유를 구약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에서 찾습니다. 제사장, 레위인, 땅을 분배받은 일반 백성이라는 세 종류가 있었으므로 천국에도 세 종류의 익은 열매가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두 번째 익은 열매를 순교자들과 연결합니다.

 

이러한 해석법의 장점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구약과 신약, 특히 출애굽-광야-가나안의 구조와 계시록을 하나의 구속사적 그림으로 연결하려고 합니다. 구약의 사건을 단순한 과거 역사로 끝내지 않고 신약의 영적 실재를 미리 보여 주는 모형으로 읽으려는 것입니다. 이 방향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와 성막, 제사장, 레위인, 가나안, 예루살렘 등을 모두 더 깊은 영적 실재를 표상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다만 ‘표상한다’는 것이 곧 자연적 구조가 미래에 그대로 재현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이 중요한 차이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에 제사장과 레위인과 일반 백성이 있었으므로 천년왕국에도 정확히 그에 상응하는 세 계급의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고 읽는 것은 ‘모형’을 자연적 차원에서 반복시키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표상의 핵심은 자연적 형상 안에 감추어진 영적 실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질문은 ‘천국에서 누가 제사장 계급이고 누가 레위인 계급인가?’보다 ‘제사장과 레위인과 이스라엘 백성이 각각 어떤 영적 선과 진리, 그리고 쓰임을 표상하는가?’가 됩니다.

 

특히 말씀에서 ‘제사장’과 ‘왕’은 매우 중요한 두 축을 이룹니다. 제사장적인 것은 선과 사랑에 관계하고, 왕적인 것은 진리와 신앙에 관계합니다. 주님께서 왕이시며 동시에 제사장이신 것도 그분 안에 신적 선과 신적 진리가 완전히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표현 역시 천국에서 다른 사람 위에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특별 계급을 뜻하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보여 주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왕 노릇’이라는 표현을 다시 정확하게 붙들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8부에서도 살펴보았듯, 천국적 왕권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권력이 아닙니다.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이 더 이상 자기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주님의 진리가 다스리는 상태입니다. 자연적 왕은 백성을 지배하지만 영적 의미의 왕은 진리로 거짓을 다스립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한다’는 것은 천국에서 많은 부하를 거느린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 안에서 악과 거짓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만일 천국을 지상의 왕국처럼 상상하면 신앙생활의 동기 속에 아주 미세한 야망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일반 백성보다 높은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나는 첫째 부활에 들어야 한다’, ‘나는 14만 4천 안에 들어야 한다’, ‘나는 새 예루살렘의 더 높은 자리에 가야 한다’는 식입니다. 처음에는 거룩한 열심처럼 보이지만 그 밑바닥에 자기 높임이 숨어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질서는 정반대입니다. 천국에서 높아진다는 것은 더 많은 사람 위에 올라간다는 뜻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섬길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랑이 깊을수록 쓰임이 넓어지고, 지혜가 클수록 다른 사람의 선을 더 섬세하게 도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의 높은 천사일수록 자신을 높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안의 모든 선과 지혜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 분명하게 압니다.

 

이 점에서 강사의 ‘세 부류’라는 직관을 완전히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계급’에서 ‘쓰임’으로 옮겨 읽으면 매우 풍성해집니다. 천국에는 실제로 무수히 많은 서로 다른 공동체와 쓰임이 있습니다. 모든 천사가 똑같은 일을 하지 않습니다. 가르치는 천사도 있고, 어린아이를 돌보는 천사도 있으며, 새로 영계에 온 사람을 돕는 천사도 있고, 다른 공동체와 연결되는 쓰임을 맡는 천사도 있습니다. 천국 전체가 한 사람과 같은 ‘가장 큰 사람’, 곧 막시무스 호모(Maximus Homo)를 이루기 때문에 각각의 공동체는 서로 다른 기관과 기능에 상응합니다.

 

사람의 몸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심장과 폐와 눈과 손과 발은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심장이 손보다 ‘높은 계급’이고 발이 눈보다 ‘낮은 계급’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몸의 질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각각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전체 생명을 위해 서로 필요합니다. 손이 눈이 되려고 하지 않고 눈이 심장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쓰임을 완전하게 수행할 때 전체 몸이 건강합니다. 천국의 질서도 이와 같습니다.

 

따라서 제사장, 레위인, 일반 백성이라는 구약의 세 구분 역시 ‘누가 더 높은가?’보다 ‘각각 어떤 쓰임을 맡았는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사장은 성소의 예배와 관련된 쓰임을 맡았고, 레위인은 성막과 제사장의 봉사를 돕는 여러 쓰임을 맡았으며, 각 지파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서 자기 기업을 받아 생활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이스라엘을 이루었습니다. 누구 하나만으로 이스라엘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강사의 모형론이 훨씬 천국적으로 열립니다. ‘천국에는 세 계급이 있다’가 아니라 ‘주님의 나라에는 서로 다른 선과 진리와 쓰임들이 질서 있게 결합되어 있다’가 됩니다. 그리고 이 원리는 바로 시흥영성수련원과 같은 실제 신앙 공동체를 생각할 때도 의미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말씀을 가르치고, 누군가는 기도하고, 누군가는 식사를 준비하고, 누군가는 청소하고, 누군가는 방문자를 맞으며,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공동체를 유지합니다. 천국적 관점에서는 어느 쓰임이 더 화려한가보다 그 쓰임이 주님과 이웃을 위한 사랑에서 이루어지는가가 중요합니다.

 

이 점은 수도생활에도 특히 중요합니다. 수도적 공동체에서는 오랜 연단을 받은 사람, 가르치는 사람, 지도하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권위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공동체에는 질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천국적 권위는 언제나 쓰임을 위한 권위여야 합니다. ‘내가 오래 연단받았으므로 너보다 높다’가 아니라 ‘내가 더 많이 받았으므로 더 많이 섬겨야 한다’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외적 질서가 내적 천국의 질서와 상응하게 됩니다.

 

이제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의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강사는 첫째 부활을 휴거 성도들, 특히 천년왕국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왕 노릇할 어린양의 신부들과 연결하고, 그 밖의 부활을 둘째 부활로 구별합니다. 이것은 강사의 종말 시간표 안에서는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부활 자체에 대한 전제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사람은 죽은 뒤 육체와 함께 무덤에서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마지막 날에 다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 육체가 죽으면 영은 영계에서 깨어나 계속 살아갑니다. 그 사람은 여전히 자신이 자기 자신임을 알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말하고, 다른 영들을 만나며 살아갑니다. 오히려 자연계에서보다 훨씬 더 온전한 인간적 감각과 사고를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죽었던 자연적 육체가 먼 미래에 다시 살아나는 것에 중심이 있지 않고, 사람이 자연계의 몸을 벗고 영적 생명으로 일어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계시록 20장의 ‘첫째 부활’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해석은 특히 중요합니다. ‘첫째 부활’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먼저 무덤에서 일어나는 한 집단의 육체 부활이라기보다, 주님께로부터 영적 생명을 받아 천국의 생명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부활의 핵심은 몸의 재조립보다 생명의 방향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는 표현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사람이 자연적으로 살아 있다고 해서 반드시 영적으로 살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만을 생명으로 삼고 있다면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웃을 사랑하며 악을 죄로 알고 피하는 사람이 되어 갈 때 그는 영적으로 살아납니다.

 

따라서 거듭남 자체가 이미 ‘부활’의 시작입니다. 이것은 부활을 사후의 일에서 현재의 삶으로 끌어옵니다. ‘나는 첫째 부활에 참여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나는 지금 죽은 상태에서 살아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뀝니다. 미움에서 사랑으로, 거짓에서 진리로, 자기중심성에서 쓰임으로, 자기 공로에서 주님의 은혜로 옮겨 가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그리고 이 변화는 한 번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강사가 계속 강조하듯 광야 여정이 있습니다.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고, 어떤 시험을 통과한 뒤 더 깊은 시험을 만나며, 한때 이긴 줄 알았던 악이 다시 나타나기도 합니다. 강의에서도 성도들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인내해야 하며, 오늘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신앙의 여정을 계속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권면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직선적인 상승이 아닙니다. 때로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가 뒤로 물러나는 것처럼 보이고, 밝은 상태 뒤에 어두운 상태가 오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의 교대를 매우 중요하게 다룹니다. 사람이 언제나 동일한 영적 고양 상태에 있다면 자신의 자유 안에서 선을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때로 주님의 임재가 선명하게 느껴지고, 때로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 상태를 지나면서 사람의 자유가 보존되고 그의 사랑이 실제로 무엇을 선택하는지가 드러납니다.

 

강사가 ‘열 개 중 하나도 응답이 없으면 주님이 싫어질 때도 있다’고 상당히 솔직하게 말하는 것도 이런 인간의 실제 상태를 보여 줍니다. 신앙은 언제나 감정적으로 뜨겁고 확신에 가득 찬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기도 응답도 없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를 붙들고, 선이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과정에서 신앙은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첫째 부활’은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지는 영적 특권이라기보다 사람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지배적이 되어 가는 과정과 연결됩니다. 예전에는 자기 뜻이 거절되면 곧바로 화를 냈지만 이제는 잠시 멈출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지만 이제는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지만 이제는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변화 하나하나가 영적 생명이 죽은 proprium을 밀어내며 일어나는 작은 부활입니다.

 

강사는 또한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세 번째 부류 가운데 ‘살아서 육체를 가지고 들어가는 성도들’을 말하고, 이들을 통해 천년왕국의 백성이 다시 생육하고 번성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는 강사의 천년왕국이 얼마나 구체적인 자연계의 왕국으로 이해되고 있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부활체를 입은 사람들과 자연적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 한 왕국 안에 함께 존재하고, 자연적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 자녀를 낳아 인구가 증가한다는 그림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부분 역시 자연적 미래 사건으로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영계에서는 자연계와 같은 방식의 생물학적 출산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결혼은 존재하지만 자연계처럼 육체적 자녀를 출산하는 결혼이 아닙니다. 천국에서 결혼의 결실은 선과 진리의 새로운 출생, 곧 사랑과 지혜와 쓰임의 증가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말씀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열쇠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자녀가 많아지는 것을 뜻하지만 속뜻에서는 선과 진리의 증가를 나타냅니다. ‘생육’은 선의 증가와, ‘번성’은 진리의 증가와 관련하여 사용됩니다. 태고교회와 고대교회의 사람들에게 자녀와 후손의 언어가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가 태어나고 증가하는 것을 표상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에서 생육하고 번성한다’는 것을 영적으로 읽으면 매우 아름다워집니다. 주님의 나라가 사람 안에 세워질수록 사랑에서 더 많은 선이 태어나고, 그 선을 섬기는 더 많은 진리가 생겨납니다. 한 가지 참된 사랑에서 수많은 선한 행동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시작하면 그 사랑에서 인내도 나오고, 용서도 나오고, 배려도 나오고, 정직도 나오며, 필요한 때에는 바르게 권면하는 지혜도 나옵니다. 하나의 선한 사랑이 수많은 ‘자손’을 낳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사가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근거로 ‘대환난을 눈앞에 둔 사람들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에 몰두할 때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적용하는 부분은 강사의 강한 임박한 종말의식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이 부분은 강의의 종말론적 체계 안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지만, 보편적인 신앙생활의 원리로 곧바로 확대하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바울의 특정 권면을 모든 시대의 결혼과 가정생활에 대한 일반적 축소 명령으로 읽으면 성경 전체가 말하는 결혼과 가정의 선한 쓰임을 충분히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결혼 자체를 매우 높은 영적 표상으로 봅니다. 참된 결혼 사랑은 선과 진리의 결합에 상응하고, 더 깊게는 주님과 교회의 결합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자연계의 부부 사랑과 가정은 단지 종말이 가까우므로 가능한 한 줄여야 할 자연적 부담이 아니라, 올바른 질서 안에서는 거듭남의 중요한 장이 될 수 있습니다. 배우자를 통해 자기애가 드러나고, 용서와 인내와 책임과 섬김을 배우며, 자녀를 통해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다른 생명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법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번 강의 전체에서 강사가 가장 실제적인 연단의 예로 자주 드는 것도 부부와 가족관계입니다. 보기 싫은 사람에게 먼저 인사하고, 배우자가 맞는 말을 했을 때 자기 자존심을 내려놓고, 가까운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이김’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가정은 종말을 기다리느라 영적 삶에서 밀어내야 할 영역이라기보다 바로 그 ‘이김’이 가장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광야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 ‘둘째 부활’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특별한 성도들과 나머지 둘째 부활 사이에 시간적·신분적 구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계시록의 ‘첫째’와 ‘둘째’를 단순한 시간표의 두 시점으로만 읽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계시록은 영적 상태의 질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둘째 사망’이라는 표현과 함께 읽으면 이것이 더 분명해집니다. 자연적 죽음은 모든 사람이 겪습니다. 그러나 둘째 사망은 자연적 몸의 죽음이 아니라 악과 거짓을 자기 생명으로 선택함으로써 천국의 생명과 완전히 반대되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첫째 부활의 복됨도 자연적 몸이 남보다 먼저 일어나는 특권보다, 주님의 생명을 받아 둘째 사망이 그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첫째 부활과 둘째 사망은 서로 대조되는 영적 언어가 됩니다. 한쪽에서는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살아나고, 다른 쪽에서는 자기애와 거짓이 그의 지배적 생명이 됩니다. 사람은 지상에서 날마다 이 두 방향 가운데 하나를 향해 자기 생명의 성격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은 전혀 낯선 판결이 갑자기 외부에서 내려오는 사건이 아닙니다. 사람이 평생 자유롭게 사랑해 온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을 임의로 천국에 넣고 다른 사람을 지옥에 던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 자신이 자유롭게 형성한 지배적 사랑이 그 사람의 영원한 방향을 결정합니다. 다만 그 자유와 생명과 선을 선택할 모든 능력 자체는 끊임없이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원리는 강사가 말하는 ‘세 부류의 익은 열매’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열매의 차이는 천국의 계급장을 의미하기보다 사람이 받아들인 선의 서로 다른 질을 생각하게 합니다. 천국의 모든 사람이 똑같은 정도와 형태의 사랑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이 중심인 천적 선에 속하고, 어떤 사람은 이웃 사랑이 중심인 영적 선에 속하며, 또 어떤 사람은 보다 외적인 순종과 쓰임 가운데 선을 받아들입니다. 천국에는 이러한 무수한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천국의 세 천국, 곧 천적 천국, 영적 천국, 자연적 천국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강사의 ‘제사장-레위인-일반 백성’과 기계적으로 일대일 대응시키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두 체계의 출발점과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만 ‘천국은 단조로운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깊이의 사랑과 진리를 가진 무수한 공동체들이 완전한 질서를 이루는 곳’이라는 점에서는 중요한 접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경쟁을 만들지 않습니다. 자연계에서는 높은 자리를 보면 올라가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각 사람이 자기 사랑과 쓰임에 가장 알맞은 공동체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영적 천사가 천적 천사의 상태를 억지로 차지하려 하지 않고, 어느 공동체도 다른 공동체의 쓰임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주어진 쓰임을 행하는 기쁨 자체가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상급’을 이해할 때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좁은 길을 가는 어려움과 함께 ‘상급의 진리’를 강조하는 흐름이 나타납니다. 상급을 말하는 것 자체는 성경적입니다. 문제는 상급을 세상의 보상체계처럼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나는 더 많이 희생했으므로 더 높은 자리와 더 많은 권세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상급에 자기 공로가 섞입니다.

 

천국의 참된 상급은 선 자체를 행하는 기쁨입니다. 이웃을 사랑한 사람이 천국에서 받는 상급은 ‘사랑했으니 이제 특별한 지위를 받는다’가 아니라, 더 완전하게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사랑한 사람의 상급은 더 깊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며, 쓰임을 사랑한 사람의 상급은 더 넓고 깊은 쓰임을 기쁨으로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상급은 천국적 사랑의 능력이 더욱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왕 같은 제사장’의 가장 큰 상급도 왕좌가 아닙니다. 더 깊이 사랑하고 더 지혜롭게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상의 왕과 천국의 왕을 가르는 결정적 차이입니다. 지상의 왕은 많은 사람에게 섬김을 받지만 천국적 왕은 더 많은 사람을 섬깁니다. 주님께서 바로 그 원형이십니다. 만왕의 왕이신 분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여기서 3강 전체의 ‘연단’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왜 광야에서 연단받는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입니다. 왜 자기부인을 하는가? 영적 강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proprium이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지배하려는 힘을 잃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말씀을 배우는가? 남보다 더 많이 알아 우월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분별하여 실제로 선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의 중 ‘성경은 밀어붙이는 게 아니에요. 자기를 죽여야 돼’라고 말하는 부분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설교가 맞는지 틀리는지만 검사하는 신앙을 경계하면서, 중요한 것은 지식의 축적 자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충분히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자기를 죽인다’는 표현은 다시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의 인격과 개성, 자유와 이성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고유한 개성은 천국에서도 영원히 보존됩니다. 죽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으로 삼고,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며, 자기 지혜를 진리의 최종 기준으로 삼으려는 proprium의 지배입니다. 이것이 내려갈수록 오히려 주님께서 주신 참된 인간성이 살아납니다.

 

강사가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 있느냐가 중요하다’, ‘성경 책 가지고 싸우고 신학 가지고 싸우는 것보다 주님이 나를 모른다고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물론 진리와 교리는 중요합니다. 잘못된 진리는 삶의 방향도 잘못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목적이 사랑과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사람의 외적 기억에 머물 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생명책도 실제 천국 어딘가에 놓인 거대한 명부에 사람 이름이 적혀 있는 것으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책’은 사람의 내적 상태가 기록된 것을 나타냅니다. 인간이 사랑하고 의도하고 생각하고 행한 모든 것은 그의 영에 새겨집니다. 그래서 사후에는 숨길 수 없습니다. 자기 생명 자체가 책이 됩니다. 어떤 외부의 심판자가 증거자료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무엇을 사랑했는지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어떤 명단에 등록되었다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그 사람의 성품에 새겨졌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7부에서 살펴본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록한다’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질을 나타냅니다. 결국 문제는 ‘내 이름이 어느 명단에 있는가?’만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내 삶에 얼마나 기록되고 있는가?’입니다.

 

그렇다면 첫째 부활도, 생명책도, 왕 같은 제사장도, 세 부류의 익은 열매도 하나의 중심으로 모입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종말론의 모든 그림이 결국 인간의 생명으로 돌아옵니다.

 

이 점에서 이번 3강의 강사가 천년왕국과 14만 4천,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을 매우 구체적인 미래 시간표로 설명하면서도 계속해서 ‘오늘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라’, ‘작은 죄까지 철저하게 회개하라’, ‘자기를 죽여야 한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라’고 삶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교리적 구조에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상당한 거리가 있지만, 실제 목회적 권면에서는 다시 거듭남의 핵심에 가까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강의를 해설할 때 어느 한쪽만 보면 안 됩니다. 천년왕국의 자연적 시간표만 보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와의 차이가 매우 크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표를 통해 강사가 성도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보면 ‘끝까지 악과 싸우라’, ‘자기를 부인하라’, ‘작은 죄도 회개하라’, ‘주님을 사랑하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라’는 실천적 중심이 보입니다. 이 중심은 충분히 존중하면서, 그 실천을 떠받치는 계시록의 문자적 도식은 상응의 빛 아래에서 한층 깊게 읽어 볼 수 있습니다.

 

3강 9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왕 같은 제사장과 그를 보필하는 자와 일반 백성, 그리고 세 종류의 익은 열매라는 강사의 천년왕국 구조는 미래 지상왕국의 신분과 부활 순서를 문자적으로 확정하는 도식으로만 읽기보다, 주님께서 서로 다른 사랑과 진리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각각의 쓰임에 맞게 거듭나게 하시고, 그들이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의 지배에서 일어나 주님의 선과 진리 안에서 생명을 얻으며, 서로 다른 쓰임을 통해 하나의 천국을 이루게 하시는 영적 질서의 표상으로 읽을 때 더욱 깊어집니다.’

 

그리고 이번 9부에서 가장 오래 붙들 만한 것은 어쩌면 ‘세 부류’가 아니라 ‘한 나라’라는 사실일 것입니다. 제사장도 있고 레위인도 있고 땅을 분배받은 백성도 있지만 모두 하나의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몸에는 눈도 있고 손도 있고 발도 있지만 모두 하나의 몸입니다. 천국에도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과 자연적 천국이 있고 그 안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동체가 있지만 모두 하나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목표는 ‘나는 어느 등급까지 올라갈 것인가?’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선과 진리를 가지고 나는 어떤 쓰임을 할 것인가?’입니다. 천국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쓰임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쓰임 안에서 자기 자신을 잊을수록 더욱 천국적이 됩니다.

 

강사가 말한 ‘왕 같은 제사장’도 이렇게 읽으면 전혀 다른 빛을 띱니다. 왕관을 쓰고 다른 사람 위에 앉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로 먼저 자기 안의 악을 다스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왕관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영광의 왕관이 아니라 주님께 돌려 드릴 왕관입니다.

 

결국 첫째 부활의 가장 깊은 표지는 ‘남보다 먼저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무엇으로 살아났는가?’일 것입니다. 자기애로 살아 있는 사람인가,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나는 사람인가. 다른 사람 위에 서고 싶은 사람인가, 다른 사람에게 쓰임이 되고 싶은 사람인가. 자기 공로를 쌓는 사람인가,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점 더 깊이 인정하는 사람인가.

 

그렇게 보면 천년왕국의 ‘세 부류’는 경쟁의 세 등급이 아니라 천국의 놀라운 다양성을 생각하게 하는 하나의 출발점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각 사람의 고유한 성품과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서로 다른 선과 진리와 쓰임 안에서 완성해 가십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다름을 하나로 만드는 것은 동일한 계급도, 동일한 지식도, 동일한 수도적 훈련도 아닙니다. 오직 한 분 주님에게서 흘러오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왕’은 섬기고, ‘제사장’은 자기 공로를 내려놓으며, ‘백성’은 자기 쓰임을 기뻐합니다. 바로 그때 서로 다른 모든 사람이 한 천국을 이루게 됩니다.



3 10

세 종류의 익은 열매에서 두아디라 교회의 약속까지 : 추수,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별

3강 10부에서는 지금까지 길게 이어져 온 ‘이기는 자’, ‘광야 연단’, ‘14만 4천’, ‘순교자’, ‘천년왕국’의 논의가 ‘세 종류의 익은 열매’라는 구조로 최종 정리되고, 이어서 계시록 2장의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약속으로 넘어갑니다. 강사는 계시록 14장의 14만 4천을 ‘처음 익은 열매’, 교회 시대와 대환난 가운데 순교하는 이들을 ‘두 번째 익은 열매’, 대환난을 살아서 통과하여 지상 재림하신 주님께 추수되는 성도들을 ‘세 번째 익은 열매’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이 세 부류를 구약의 가나안에 들어간 제사장, 레위인, 땅을 분배받은 일반 백성이라는 세 부류와 연결합니다. 그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목적이 익은 열매를 추수하는 데 있다. 따라서 우리도 처음이나 두 번째나 세 번째나 익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3강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강사가 지금까지 왜 그토록 ‘익어야 한다’, ‘연단받아야 한다’, ‘이겨야 한다’, ‘광야를 통과해야 한다’고 강조했는지가 여기에서 하나로 모이기 때문입니다. 강사의 종말론적 체계에서 신앙생활은 단순히 죽어서 천국에 가는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어느 정도까지 익었느냐에 따라 마지막 때의 추수와 천년왕국에서의 위치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익은 열매’는 이 강의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먼저 이 핵심을 충분히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신앙의 목적은 단순히 교리를 알고 입으로 믿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진리가 삶 속에서 선으로 열매 맺어야 합니다. 씨가 뿌려졌다고 농사가 끝나는 것이 아니며, 싹이 났다고 추수하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의 진리가 기억에 들어오고, 이해되고, 사람이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시험 가운데 그것을 따라 살며, 마침내 선한 삶이 그의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말하는 ‘익음’은 거듭남과 매우 가까운 실천적 직관을 담고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익은 열매’를 세 종류의 종말론적 신분집단으로 고정하기보다,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가 실제 생명으로 결합되는 것으로 읽습니다. 말씀에서 ‘열매’는 매우 자주 선한 행위와 쓰임, 더 깊게는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표상합니다. 나무가 그 본질을 열매로 드러내듯 인간의 내적 사랑도 결국 삶의 행위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신 말씀은 사람의 신앙이 무엇인지는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떤 생명을 사는지를 통해 드러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익었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아직 설익은 열매와 익은 열매의 차이는 단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영적으로는 진리가 얼마나 의지와 결합했느냐의 차이입니다. 처음에는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압니다. 다음에는 그것이 옳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마음은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말씀 때문에 억지로라도 선하게 행동하려고 합니다. 이것도 매우 귀한 시작입니다. 그런데 오랜 거듭남을 거치면서 어느 순간 상대를 불쌍히 여기고 그의 선을 진심으로 바라게 됩니다. 진리가 사랑과 결합한 것입니다. 열매가 익어 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 ‘익음’은 완벽함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번 강의의 ‘완덕’, ‘익은 열매’, ‘이기는 자’를 이해할 때 꼭 붙들어야 할 구별입니다. 익었다는 것은 더 이상 결점이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명을 지배하는 방향이 주님께로 향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전히 약함이 있고 실수도 할 수 있지만, 악을 악이라고 인정하고 그것을 변호하지 않으며 주님의 도움으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선을 억지로만 행하는 데서 조금씩 선 자체를 사랑하는 방향으로 옮겨 갑니다. 강사는 첫 번째 익은 열매인 14만 4천이 추수된 뒤 두 번째 익은 열매인 순교자들이 추수되고, 마지막으로 대환난을 살아서 통과한 세 번째 성도들이 추수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순교자들에 대해서는 오순절 이후 교회 시대 동안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순교했으나 14만 4천의 처음 익은 열매 반열에는 들어가지 못한 이들이며, 그들의 수가 채워질 때까지 기다린다고 풀이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천국의 가장 거룩한 곳부터 채워 가시는 모습’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에는 강사의 천국관이 매우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천국이 일정한 공간적 구조와 등급을 가지고 있고, 그 높은 곳부터 자격을 갖춘 성도들이 차례로 채워진다는 그림입니다. 앞에서 보았던 ‘새 예루살렘은 천국의 수도’, ‘14만 4천은 그곳에 들어가는 이긴 자들’,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설명도 모두 이 구조와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천국에는 분명히 높고 낮음이 있으며 세 천국과 무수한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말하는 것 역시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지상의 신분계급처럼 외적으로 부여되는 차이가 아닙니다. 각 사람이 받아들인 사랑과 지혜의 질에 따른 내적 차이입니다. 더 깊은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랑과 상응하는 천국에 있고, 보다 외적인 선 가운데 있는 사람은 그 선과 상응하는 천국에 있습니다. 어느 누가 행정적으로 사람을 등급별로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내적 상태 자체가 그에게 맞는 공동체를 찾게 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거룩한 곳부터 채워진다’는 표현도 ‘먼저 선발된 엘리트들이 최고층 천국의 정원을 채운다’는 방식보다, 주님께서 각 사람을 그의 사랑과 선의 질에 따라 가장 적합한 천국의 쓰임과 공동체로 인도하신다는 방향으로 읽으면 훨씬 부드러워집니다. 천국의 차이는 경쟁의 결과가 아니라 상응의 결과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천국적 삶에서는 ‘저 사람보다 더 높은 곳에 가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천국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높은 곳을 원하는 사랑은 이미 자기 우월과 지배의 요소를 포함합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자기보다 높은 천국에 있는 천사를 시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에게 주어진 선과 쓰임 안에서 완전한 기쁨을 누립니다. 이 원리를 ‘익은 열매’에 적용하면 경쟁의 문제가 사라집니다. 사과가 포도가 되려고 애쓸 필요가 없고 포도가 무화과가 되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 주신 선이 충분히 열매 맺는 것입니다. 천국은 똑같은 열매만 가득한 창고가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선들이 하나의 주님 아래 조화를 이루는 나라입니다.

 

특히 ‘순교자’를 두 번째 익은 열매라는 고정된 신분으로 이해하는 문제도 여기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순교는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숭고한 신앙의 증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기 생명까지 내어놓으면서 주님을 부인하지 않은 사람들의 충성은 가볍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죽음의 방식 자체가 자동적으로 영적 등급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 상태를 결정하는 것은 그 행위가 어떤 사랑에서 나왔느냐입니다. 겉으로 같은 순교처럼 보여도 사람의 내면은 다를 수 있습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놓는 것과, 자기 종교집단의 명예나 자기 의를 증명하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것은 내적으로 같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외적 사건보다 그 안의 사랑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순교의 영적 가치는 죽음 자체에 있다기보다 그 죽음 안에 있는 사랑과 충성에 있습니다.

 

더 나아가 ‘순교’에는 일상적인 영적 의미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가 문자적으로 목숨을 잃는 순교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모든 거듭나는 사람은 자기 proprium의 어떤 것을 날마다 죽이는 경험을 합니다.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도 작은 죽음이고, 자기 주장을 포기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작은 죽음이며, 미움을 품고 싶은 욕망을 거절하는 것도 자기중심적 생명에 대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반드시 문자적 순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악을 죄로 알고 거절하는 삶 전체가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이 의미에서 수도적 전통이 강조해 온 ‘자기부인’은 거듭남과 매우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 사랑을 방해하는 자기중심적 의지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강사는 세 번째 익은 열매를 ‘7년 대환난을 인내하고 말씀을 지키며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우상에게 절하지 않은 채 살아남아 육체로 환난을 통과한 성도들’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첫째, 둘째, 셋째 익은 열매가 차례로 추수되어 천국이 채워진다고 정리합니다. 이 부분에서도 강사의 핵심은 결국 ‘끝까지 지키는 신앙’입니다. 이 실천적 중심은 충분히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끝까지’라는 말은 거듭남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어느 한때 뜨거운 신앙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평생 형성하는 지배적 사랑이 중요합니다. 한때 선한 감정을 느꼈다는 것, 한때 큰 은혜를 체험했다는 것, 한때 열심히 봉사했다는 것이 곧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형성하시는 선이 그의 실제 생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딘다’는 것도 인간의 이를 악문 의지력만을 의미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나는 반드시 끝까지 버티겠다’고 하면 그 힘 자체가 proprium이 될 수 있습니다. 강의의 시작 기도에서 ‘헌신과 수고를 통한 주님의 나라에 봉사할 때 하늘로부터 주시는 새 힘으로 하게 하시고 자기 의지로 하지 않도록 붙잡아 달라’고 기도한 것은 그래서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매우 중요하게 붙들 수 있는 표현입니다. ‘자기 의지로 하지 않도록.’ 수도적 연단에서 이 한 문장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금식도 자기 의지로 할 수 있고, 철야기도도 자기 의지로 할 수 있으며, 오랜 수도생활도 자기 의지로 견딜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부인조차 ‘나는 이만큼 나를 부인했다’는 새로운 자기 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외적인 연단보다 더 깊은 연단은 ‘내가 하고 있다’는 의식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선을 행할 때 마치 자기 힘으로 행하는 것처럼 해야 하지만, 실제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가르칩니다.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문제가 생깁니다. ‘주님이 하시니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거듭남에 필요한 자유로운 협력이 사라지고, ‘내가 해냈다’고 하면 자기 공로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악과 싸우면서도 승리 후에는 ‘주님께서 하셨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익은 열매’의 매우 중요한 표지일 수 있습니다. 덜 익었을 때에는 자기 선을 자랑하기 쉽습니다. ‘나는 이것을 끊었다’, ‘나는 이 시험을 이겼다’, ‘나는 이만큼 기도한다’, ‘나는 이런 깊은 진리를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자기 안에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더 분명히 압니다. 열매가 익을수록 가지가 오히려 아래로 숙여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익은 열매’와 겸손은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익은 사람은 자기가 익었다고 쉽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안의 악을 더 섬세하게 보며 주님의 자비를 더 필요로 합니다. 다른 사람의 미숙함을 보아도 쉽게 정죄하지 않습니다. 자신도 얼마나 오랜 시간 주님께 붙들려 여기까지 왔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이번 사경회의 수도적 전통을 바라볼 때에도 매우 중요한 분별 기준이 됩니다. 연단의 결과가 사람을 강퍅하게 하고 다른 신앙인들을 쉽게 ‘덜 익은 사람’, ‘광야에 있는 사람’, ‘낮은 반열’로 분류하게 한다면 그 연단에는 다시 살펴볼 부분이 있습니다. 반대로 연단을 오래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약함에 더 인내하고, 더 부드러워지고, 더 적게 자기 공로를 말하며, 더 많이 섬긴다면 그 열매에는 천국적인 것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공동체가 오랫동안 강조해 온 ‘연단’과 ‘자기부인’을 가장 선한 방향으로 이해하려면 결국 이 열매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강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전환을 합니다. ‘요렇게 해서 이제 살펴봤습니다’라고 지금까지의 세 종류의 익은 열매에 관한 설명을 마치고, 두아디라 교회의 이기는 자에게 주신 약속으로 넘어갑니다. 두 가지 축복, 곧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별’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계시록 2장 26절 이하의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전환은 3강 전체의 주제인 ‘이기는 자’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앞에서는 ‘누가 익은 열매인가?’를 설명했다면 이제는 ‘이긴 자에게 무엇을 주시는가?’를 다루는 것입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이 권세가 천년왕국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실제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 역시 먼저 내적으로 읽습니다. 말씀에서 ‘나라들’, 곧 ‘만국’은 좋은 의미에서는 선들, 반대 의미에서는 악들과 관계합니다. ‘다스린다’는 것은 영적 의미에서 진리로 악과 거짓을 질서 아래 두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기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진다는 것은 다른 민족과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권력을 받는다는 의미에 앞서, 주님의 진리로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다스릴 능력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앞서 ‘왕 노릇’의 의미와 같습니다. 천국적 권세의 첫 대상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 안에 들어오는 지옥의 영향, 곧 악과 거짓입니다. 다른 사람을 완벽하게 통제하면서 자기 분노 하나 다스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천국적 왕권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에게 명령할 수 있으면서 명예욕의 명령에는 꼼짝없이 복종한다면 그는 실제로 왕이 아니라 자기 욕망의 종입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아무 직위도 없는 사람이 자기 안의 탐욕과 미움과 복수심을 주님의 진리로 거절할 수 있다면 영적으로는 왕의 권세를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능력 자체는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계시록은 이 권세를 이기는 자가 ‘얻어낸다’고 하기보다 주님께서 ‘주신다’고 합니다. 이어 ‘철장으로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는 강한 표현이 나옵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미래의 성도들이 철장으로 이방 나라들을 강압적으로 통치하는 장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응으로 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열립니다. ‘철’은 자연적 차원에 있는 진리, 곧 삶과 행위에 적용되는 강한 진리를 나타낼 수 있고, ‘막대기’ 또는 ‘지팡이’는 권능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철장’은 자연적 삶의 차원에서 악과 거짓을 제어하는 진리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질그릇’ 역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릇은 무엇인가를 담는 것이며, 질그릇은 흙으로 만들어진 가장 외적이고 자연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질그릇을 깨뜨린다는 것은 사람을 폭력적으로 파괴한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 외적이고 거짓된 형식들이 무너지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자기 합리화, 잘못된 신앙의 형식, 악을 감싸고 있던 거짓된 논리들이 주님의 진리 앞에서 깨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개인의 거듭남에 적용하면 아주 실제적입니다. 사람은 자기 악을 보호하기 위해 수많은 ‘질그릇’을 만듭니다. ‘다들 그렇게 산다’, ‘나는 원래 성격이 그렇다’, ‘저 사람이 먼저 잘못했다’, ‘이 정도는 죄가 아니다’, ‘목회를 위해서 어쩔 수 없다’, ‘좋은 목적이니까 괜찮다’와 같은 합리화들입니다. 악한 사랑이 그 안에 담겨 있는 동안 사람은 그 그릇을 소중히 지킵니다.

 

그런데 말씀의 진리가 강하게 들어오면 그 그릇이 깨집니다. ‘아, 이것은 상황 때문이 아니라 내 자존심 때문이었구나.’ ‘나는 정의를 위해 화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무시당한 것이 싫었던 것이구나.’ ‘사명을 위한 열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구나.’ 이런 깨달음이 일어날 때 질그릇 하나가 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장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무서운 통치의 그림이 아니라 오히려 거듭남의 매우 정밀한 그림이 될 수 있습니다. 진리는 때때로 우리를 위로하지만 때로는 아주 단단하게 우리의 거짓을 깨뜨립니다. 말씀은 언제나 부드러운 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거짓을 깨뜨려야 할 때에는 철장처럼 단호하게 작용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사람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얽매고 있는 거짓을 파괴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목회와 가르침에서도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철장’을 문자적으로 모방하여 지도자가 사람들에게 강압적 권위를 행사하면 위험합니다. ‘나는 진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너희를 다스릴 권세가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종교적 지배욕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주님의 진리는 사람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거짓을 드러내지만 사람이 자유롭게 그것을 인정하고 버리도록 이끄십니다. 그래서 참된 영적 권위는 사람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는 힘이 아니라 그 사람이 주님께 자유롭게 순종하도록 돕는 힘입니다. 좋은 목회자는 성도를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좋은 영적 스승은 제자가 평생 자기에게 의존하도록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말씀 앞에 서서 주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이 점에서 수도적 전통의 ‘순종’ 역시 세심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외적 순종은 훈련의 유익한 수단이 될 수 있지만 최종 목적은 인간 지도자의 뜻에 완전히 종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인 순종은 주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인간의 권위는 그 순종을 돕는 한에서만 영적 권위입니다. 이것이 지켜지면 수도적 순종은 proprium을 내려놓는 귀한 훈련이 될 수 있지만, 이것이 뒤집히면 사람을 지배하는 종교적 권력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아디라 교회의 두 번째 약속이 ‘새벽별’입니다. 이 표현은 이번 3강 전체의 마지막 부분을 아주 아름답게 밝힐 수 있는 상징입니다. 계시록 22장에서 주님께서는 친히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새벽별은 주님 자신과 관련됩니다.

 

새벽별은 밤이 완전히 끝난 뒤 뜨는 별이 아닙니다. 아직 어둠이 남아 있을 때 나타나 곧 아침이 올 것을 알립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상응입니다. 시험 가운데 있는 사람은 아직 완전한 낮에 있지 않습니다. 악과 거짓의 어둠이 있고, 주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지며, 무엇이 어떻게 될지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둠 가운데 작은 빛이 나타납니다. 진리가 마음에 들어오고 희망이 생기며 주님의 임재가 다시 느껴집니다. 이것이 새벽별의 상태를 생각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별’은 천사적인 의미에서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 그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영적 빛과 관련됩니다. 별이 밤하늘을 비추듯 진리의 지식은 아직 완전한 영적 낮에 이르지 못한 사람에게 방향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새벽별’은 단순한 지식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밤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에도 이런 새벽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어떤 악과 싸웠는데 전혀 변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 같고, 같은 시험이 반복되며, 자신이 정말 변하고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전 같으면 크게 화냈을 상황에서 마음이 조금 덜 흔들립니다. 예전에는 미워했던 사람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예전에는 억지로 했던 선을 조금 기쁘게 행합니다. 아직 대낮은 아니지만 새벽별이 뜬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기는 자에게 새벽별을 주겠다’고 하신 약속을 매우 개인적으로 읽을 수 있는 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기는 사람에게 단지 외적 상급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진리와 사랑, 궁극적으로는 주님 자신의 임재를 주십니다. 상급의 본질이 주님입니다.

 

이것은 ‘상급’에 대한 이번 사경회의 강조를 매우 아름답게 보완할 수 있습니다. 강사는 좁은 길을 걸으면 상급이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합니다. 그 말 자체는 충분히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천국적 상급의 가장 깊은 형태는 더 높은 지위나 더 큰 통치권이 아니라 주님과의 더 깊은 결합입니다.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은 ‘왕좌’가 아니라 ‘새벽별’, 곧 주님 자신입니다. 이렇게 보면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별’이라는 두 약속의 순서도 의미심장합니다. 먼저 악과 거짓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지고, 그 다음 새벽별이 주어집니다. 거듭남에서도 사람이 주님의 힘으로 악과 거짓을 거절할수록 내면이 깨끗해지고, 깨끗해진 만큼 주님의 빛을 더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악을 버리는 것과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의 과정의 두 면입니다.

 

단순히 악을 끊는 것이 거듭남의 목적은 아닙니다. 빈집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들어오시도록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미움을 버리는 목적은 단지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입니다. 거짓을 버리는 목적은 단지 오류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기애의 지배를 내려놓는 목적은 자아가 텅 빈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그 자리를 채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수도적 자기부인 역시 ‘없애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자기 욕망을 끊고, 자기 뜻을 내려놓고, 세상 즐거움을 절제하는 것 자체가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그 빈자리에 무엇이 들어오는가가 중요합니다. 더 많은 주님 사랑, 더 깊은 이웃 사랑, 더 넓은 쓰임이 들어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부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업적이 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3강 처음부터 이어져 온 ‘광야’의 의미도 완성됩니다. 광야는 사람이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닙니다.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지나가는 곳입니다. 연단도 목적지가 아닙니다. 사랑이 목적지입니다. 자기부인도 목적지가 아닙니다. 주님과의 결합이 목적입니다. 싸움도 목적지가 아닙니다. 평화가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 평화는 싸움을 전혀 경험하지 않은 사람의 평화와 다릅니다. 악을 모르기 때문에 평안한 것이 아니라, 악과 싸우면서 주님만이 승리자이심을 배운 뒤 주님께 자신을 맡기는 평화입니다. 이것이 거듭남 이후의 안식이며, 창세기의 일곱째 날과도 연결되는 천국적 평화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3강을 통해 계속 말해 온 ‘익은 열매’는 매우 좋은 표현입니다. 다만 ‘어느 반열에 들어갈 만큼 익었는가?’보다 ‘무엇으로 익어 가고 있는가?’를 물으면 더욱 깊어집니다. 지식으로 익는가, 자기 확신으로 익는가, 종말론적 정보로 익는가가 아니라 사랑과 쓰임으로 익고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무의 크기를 보시기보다 열매를 보십니다. 얼마나 오래 교회에 다녔는지, 얼마나 많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특별한 체험을 했는지, 얼마나 혹독한 연단을 받았는지 그 자체가 마지막 기준은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을 통해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더 정직해졌는가, 더 온유해졌는가, 더 쉽게 용서하게 되었는가, 다른 사람의 선을 더 기뻐하게 되었는가,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되었는가입니다. 이것이 ‘익음’입니다.

 

그래서 3강 10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처음 익은 열매 14만 4천, 순교자인 두 번째 익은 열매, 대환난을 살아서 통과하는 세 번째 익은 열매라는 구분과 이기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별을 주신다는 말씀은 미래 천년왕국에 들어갈 성도들을 세 신분으로 나누고 그 가운데 높은 반열에 특별한 통치권을 부여하는 종말론적 구조로만 읽기보다, 주님께서 각 사람을 그의 고유한 선과 쓰임에 따라 거듭나게 하시고, 말씀의 진리로 그 사람 안의 악과 거짓의 지배를 깨뜨리시며, 마침내 그 모든 싸움과 자기부인의 목적이 다른 사람 위에 높아지는 데 있지 않고 새벽별이신 주님 자신과 더욱 깊이 결합되는 데 있음을 보여 주는 거듭남의 아르카나로 읽을 때 더욱 깊어집니다.’

 

그리고 이번 10부에서, 더 나아가 이번 3강 전체에서 가장 귀하게 남길 수 있는 것은 강사의 ‘익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는 절박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절박함 자체를 버릴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절박함의 방향을 조금 바꾸어 줍니다. ‘나는 첫째인가, 둘째인가, 셋째인가?’를 묻기보다 ‘오늘 내 안에서 주님의 진리가 선한 열매가 되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그 질문은 훨씬 조용하지만 훨씬 피하기 어렵습니다. 종말 시간표는 공부할 수 있지만, 보기 싫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14만 4천의 정체를 논할 수 있지만, 내 자존심 하나 내려놓는 것은 어렵습니다. 천년왕국의 세 부류를 설명할 수 있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정직하기는 어렵습니다.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을 구별할 수 있지만, 오늘 내 안의 죽은 사랑 하나가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래서 ‘익은 열매’의 최종적인 표지는 지식의 많음보다 사랑의 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익을수록 사람은 이상하게도 자기를 덜 높입니다. 가지가 열매 때문에 아래로 숙여지듯, 주님의 선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이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도 안전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다스리고 싶은 욕망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때 ‘새벽별’도 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 빛으로 빛나고 싶은 욕망이 사라지고 오직 주님의 빛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3강이 처음부터 말해 온 ‘이기는 자’란 가장 강한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끝까지 버틴 사람도 아니며, 남보다 높은 영적 반열을 차지한 사람도 아닙니다. 날마다 자기 안의 악과 거짓 앞에서 주님의 진리를 선택하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며, 선을 행하되 그것을 자기 공로로 여기지 않고, 마침내 자기 삶의 중심에서 proprium이 내려오고 주님께서 왕이 되시도록 허용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단지 ‘무엇’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주십니다. ‘내가 또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 이 약속을 그렇게 읽으면 3강 전체를 관통했던 연단과 자기부인과 이김과 익은 열매와 상급이 마지막에 한곳으로 모입니다. 광야의 끝에 있는 것은 높은 지위가 아니라 주님이며, 이김의 상급도 주님이고, 천국의 기쁨도 주님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마침내 알게 되는 가장 깊은 사실은 이것일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붙들고 여기까지 온 줄 알았는데, 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께서 나를 붙들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SY.57,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4강 (7/28), 시흥영성수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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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48,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2강 (7/27),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2강 1부‘모형적 진리’와 구원의 여정 - 출애굽은 지나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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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3

 

이 장의 끝에서는,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의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하겠습니다. At the end of the chapter, several examples will be given of those who during their abode in this world had thought otherwise.

 

 

해설

 

AC.323은 한 문장으로 된 매우 짧은 글이지만, AC.320-322에서 다룬 내용을 다음에 이어질 실제 영계 경험과 연결해 주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여기서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이란, 사람이 죽은 뒤에도 지금과 같은 인간으로 살아가며,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는 모든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완전한 감각과 사고 능력을 지닌다는 사실을 지상 생애 동안 믿지 않았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AC.320에서는 사람이 저세상에 들어간 직후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삶의 연속성이 완전하다는 것을, AC.321에서는 영의 감각과 사고와 말하는 능력이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AC.322에서는 그것을 시각, 청각, 후각, 촉각, 애정, 사고와 언어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AC.323은 이제 이러한 설명을 교리적 진술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실제 사례를 통하여 확인하겠다고 예고하는 글입니다.

 

특히 ‘during their abode in this world’를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이라고 옮긴 데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abode’에는 단순히 이 세상에서 ‘살았다’는 것보다 잠시 ‘머물렀다’는 뉘앙스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인간관에서 지상의 육체적 삶은 인간 존재의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삶의 첫 단계입니다. 사람은 잠시 자연계에 머물면서 자신의 사랑과 삶의 방향을 형성하고, 육체를 벗은 뒤에는 그 생명이 영계에서 계속됩니다. 따라서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나 단절이 아니라, 자연계에서 영계로 삶의 장이 옮겨지는 사건입니다. AC.320에서 사람이 사후에도 자신을 여전히 같은 사람으로 느끼는 이유도 바로 이 생명의 연속성 때문입니다.

 

또한 여기서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주장을 단순한 추론이나 신학적 사변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AC.322에서 그는 ‘저는 수천 번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그 반대임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AC.323에서는 지상에 있을 때, 영의 실재와 사후의 감각적 삶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실제로 사후에 어떤 경험을 하게 되었는지를 제시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믿지 않았으니 벌을 받았다’는 식의 이야기를 예고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관념에 갇혀 있던 사람이 육체를 벗은 뒤 자신이 여전히 보고 듣고 생각하며 살아 있음을 직접 경험하면서 기존의 관념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323AC.320-322 전체의 중요한 결론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지상에서 영을 육체보다 덜 실제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영을 연기나 기운처럼 막연한 것으로 상상하거나, 사후의 삶을 의식만 희미하게 남아 있는 상태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전하는 영계는 정반대입니다. 육체가 더 실제적이고 영이 덜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영이 본래적인 인간이며, 육체는 그 영이 자연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잠시 사용하는 가장 바깥 형체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벗는 것은 인간적인 감각과 사고를 잃는 일이 아니라, 그것들을 제한하던 자연적 조건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바로 앞 AC.322와 연결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육체의 눈과 귀가 실제로 보고 듣는 주체가 아니라 영이 그것들을 통하여 보고 들었던 것이라면, 육체를 벗었다고 해서 시각이나 청각 자체가 사라질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자연적 기관의 제한이 사라지면서 영적 감각은 더욱 분명하고 완전하게 활동합니다. 그래서 사후에 자신이 여전히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지상에서 ‘육체가 감각의 주체’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는 자신의 옛 관념을 바로잡는 직접적인 경험이 됩니다.

 

따라서 AC.323의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이라는 짧은 표현에는 상당히 넓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후세계를 부정했던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은 존재하더라도 육체가 없으면 인간다운 감각과 사고를 할 수 없다고 여겼던 사람들까지 포함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제 그들이 저세상에서 자기 자신의 생생한 존재를 통하여 무엇을 깨닫게 되는지를 실제 사례로 보여 주려 합니다. AC.323은 짧지만, AC.320-322의 ‘사후에도 나는 여전히 나이며, 오히려 더 분명하게 보고 듣고 생각하고 살아간다’는 메시지를 실제 영계 경험으로 넘겨주는 하나의 문턱과 같은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22, 창4 앞, ‘시각, 청각, 후각, 촉각, 욕망과 애정, 사고와 말의 능력의 확장’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2 영들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그릇된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수천 번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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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8/09)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8,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 88, ‘내 진정 사모하는입니다.

 

오늘 일종의 쉬어가는 주로 AC 글 번호로는 314번에서 323번입니다. AC 3 뒤와 창4 , 그러니까 사후 사람이 영생에 들어가는 것’, 그리고 사후 사람이 영혼, 즉 영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내용을 함께 다루겠습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오늘은 창세기 본문이 필요 없는 AC 리딩 시간이지만, 3과 창4의 연결 시간이기도 하므로 창3:24와 창4:1을 묶어 봉독하겠습니다.

 

2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3:24; 4:1)

 

제목은

 

사람이 영생에 들어간다는 것과 영으로 산다는 것

 

이며, 다음은 오늘 범위인 AC.314-323 요약입니다.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AC.314-319)

 

AC.314-319는 사람이 죽은 뒤 어떻게 천사들의 인도를 받고, 자신의 내적 사랑과 삶의 질에 따라 점차 천국 또는 지옥을 향해 나아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후 처음 의식을 회복한 사람에게는 빛의 사용이 허락되고, 영적 천사들은 그가 원하는 것을 가능한 한 친절하게 도우며,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저세상의 일을 알려 줍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섭리의 중요한 원리가 드러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진리를 한꺼번에 강요하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상태와 수용 능력, 그리고 자유를 존중하시며,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씩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러한 가르침과 인도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내적 성향 때문에 천사들의 가르침을 원하지 않게 되고, 결국 스스로 천사들에게서 멀어지려 합니다. 중요한 것은 천사들이 그 사람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의 사랑과 성향에 따라 그들에게서 떠난다는 점입니다. 천사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친절히 돕고 가르치며, 가능한 한 천국으로 인도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천국의 사랑은 결코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이 끝까지 존중됩니다.

 

이후 사람은 다시 선한 영들의 공동체로 인도되어 도움을 받지만, 세상에서 형성된 그의 삶이 그들과 함께 머물 수 없는 성격이라면 그곳에서도 스스로 떠나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여러 차례 반복되며, 마침내 그는 자신의 세상에서의 삶과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마치 자기 자신의 삶을 다시 발견한 것처럼 느끼며, 결국 자신이 평생 사랑해 온 것이 무엇이었는지가 온전히 드러납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은 외부에서 강제로 배정되는 장소라기보다, 사람이 자신의 가장 깊은 사랑을 따라 스스로 찾아가는 영적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또한 사후의 인도 과정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속도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더 천천히, 어떤 사람은 더 빨리 천국으로 나아가며, 심지어 죽은 직후 거의 곧바로 천국으로 올려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주님의 사랑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각 사람이 지상에서 얼마나 천국의 사랑과 질서에 맞는 삶을 이미 형성하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AC.318의 첫 번째 사례는 이를 잘 보여 줍니다. 한 사람은 처음에는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여전히 세상에 있다고 생각했으며, 집과 재산을 모두 잃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걱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천적 천사들의 큰 친절을 받은 뒤, 그의 마음에서 나온 생각은 이 큰 사랑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였습니다. 바로 이 반응을 통하여 그가 지상에서도 이미 신앙의 체어리티 가운데 살았던 사람임이 드러났고, 그는 곧바로 천국으로 올려졌습니다. 사후에 새로운 성품이 생긴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형성된 사랑이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입니다.

 

AC.319에서는 또 다른 사람이 천사들에 의해 곧바로 천국으로 옮겨져 주님께 받아들여지고 천국의 영광을 보게 된 사례를 덧붙입니다. 이를 통해 스베덴보리는 사후의 길에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일반적인 질서가 있지만, 그 질서가 기계적으로 동일한 기간과 단계로 진행되는 것은 아님을 보여 줍니다. 이미 세상에서 천국의 삶을 자신의 내적 삶으로 형성한 사람에게는 긴 준비가 거의 필요하지 않을 수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는 보다 긴 정리와 준비의 과정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사람을 인도하고 받아들이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며, 천사들은 그 섭리를 수행하는 사랑의 봉사자들입니다.

 

따라서 AC.314-319의 핵심은 사후의 심판이 외부에서 내려지는 일방적인 판결이 아니라, 사람의 내적 사랑이 드러나고, 그 사랑과 맞는 공동체를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능한 한 사람을 천국으로 이끄시지만, 결코 그의 자유를 빼앗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자신이 세상에서 형성한 사랑을 따라 결국 자신의 영원한 삶의 자리를 찾아가며, 이미 천국의 사랑 가운데 살아온 사람에게 죽음은 천국의 삶이 중단 없이 계속되는 하나의 전환일 뿐입니다.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AC.320-323)

 

AC.320-323은 사람이 죽은 뒤에도 여전히 이전과 같은 사람으로 살아가며, 오히려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완전한 감각과 사고 능력을 지니게 된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사람이 저세상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여전히 이 세상에 있으며, 심지어 아직도 육체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죽음이 의식의 단절이 아니라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죽는 순간에도 기억과 생각, 욕망과 애정, 성격과 사랑을 그대로 지닌 채 영계로 들어가므로, 자신이 여전히 같은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AC.321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영의 감각과 사고와 말하는 능력이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육체를 벗으면 인간성이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분명하고 실제적으로 드러납니다. 다만 영들은 이러한 변화를 처음부터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며, 주님께서 성찰의 빛을 허락하실 때, 비로소 자신의 현재 상태와 지상에서의 상태를 비교하여 그 차이를 깨닫게 됩니다.

 

AC.322는 이를 시각, 청각, 후각, 촉각, 애정, 사고와 언어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영들은 지상의 한낮의 빛과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밝은 빛 가운데 보고, 육체의 청각으로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하게 들으며, 후각과 촉각 역시 훨씬 더 완전하게 사용합니다. 특히 모든 감각은 어떤 의미에서 촉각과 관련되며, 지옥의 고통과 괴로움 역시 영적 감각이 더욱 직접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경험됩니다. 따라서 영계는 감각이 사라진 추상적 세계가 아니라, 지상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실제적인 세계입니다.

 

또한 영들은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맑고 분명하게 생각하며, 그들의 하나의 관념 안에는 지상에서의 수많은 관념에 해당하는 풍부한 내용이 담길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말 역시 생각과 애정에 훨씬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지상의 언어보다 훨씬 더 예리하고 명료하게 의미를 전달합니다. 이는 감각과 사고의 실제 주체가 육체가 아니라 영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눈과 귀, 뇌와 혀는 영이 자연계에서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며, 육체를 벗은 뒤에는 그 영적 능력이 자연적 기관의 제약 없이 더욱 자유롭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뛰어난 능력이 그 자체로 선함이나 지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악한 영들도 뛰어난 감각과 사고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자기 사랑과 거짓을 위해 사용하며, 선한 영들과 천사들은 같은 능력을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를 위해 사용합니다. 따라서 사후에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얼마나 잘 보고 듣고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그 모든 능력이 어떤 사랑을 섬기고 있느냐입니다. 생명의 질은 감각과 사고 능력 자체보다 그것들이 무엇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추구하는지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러한 관점은 육체적 장애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빛을 줍니다. 육체의 눈이나 귀가 제한되어 있다고 해서 영 자체가 손상된 것은 아닙니다. 감각의 근원은 영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연계에서 특정 감각 기관에 제약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도 영으로서는 온전한 인간 구조를 지니며, 사후에는 육체의 제한에서 벗어나 그동안 영 안에 있었던 감각과 생각과 교통의 능력을 더욱 자유롭게 나타내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육체적 장애가 사람의 proprium이나 자기 사랑을 자동으로 제거하는 것도 아닙니다. 장애가 있든 없든 모든 사람은 동일하게 주님의 거듭남이 필요합니다.

 

마지막 AC.323은 이러한 설명을 실제 사례로 이어 주는 짧은 전환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의 끝, 그러니까 창4 끝에서, 지상에 있을 때 영과 사후의 삶을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의 사례를 제시하겠다고 예고합니다. 즉 영은 희미하고 비현실적이며 육체가 없으면 감각이나 사고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사후 자신의 실제 경험을 통하여 그러한 관념이 틀렸음을 어떻게 깨닫게 되는지를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결국 AC.320-323의 중심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사람의 참된 인간성은 육체에 있지 않고 영에 있으며, 죽음은 그 인간성을 약화시키는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육체의 제약을 벗겨 그 본래 상태를 더 분명히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사람은 죽은 뒤에도 여전히 같은 사람으로 보고, 듣고, 생각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오히려 그 모든 능력은 더욱 완전해집니다. 따라서 죽음은 생명의 소멸이 아니라, 영이 자신의 본래 세계에서 더 충만하고 실제적인 삶을 시작하는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314, 창3 뒤,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AC.314-319)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Man’s Entrance Into Eternal Life AC.314 되살아난(resuscitated) 사람, 곧 영혼이 주위를 둘러볼 수 있도록 빛의 사용이 허락되면, 앞에서 말한 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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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5, 창3 뒤, ‘사람의 사후 운명은 자신의 내적 사랑과 자유로운 선택으로 결정’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5 그러나 되살아난 사람, 곧 영혼이 가르침 받기를 원하지 않는 성향이라면, 그는 천사들의 무리로부터 떠나기를 원하게 됩니다. 천사들은 이를 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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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6, 창3 뒤, ‘사람이 사후 자신의 영원한 거처에 이르게 되는 과정’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6 영혼이 이처럼 그 천사들에게서 스스로 멀어지면, 그는 선한 영들에게 받아들여지며,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도 온갖 친절한 도움을 받습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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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7, 창3 뒤, ‘저마다 다 다른 속도로 진행되는 사후의 여정’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7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천국을 향하여 더 천천히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은 더 빨리 나아갑니다. 나는 죽은 직후 곧바로 천국으로 올려진 사람들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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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8, 창3 뒤, ‘사후 거의 곧바로 천국에 올라간 처음 사례’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8 어떤 영 하나가 내게 와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는 얼마 전에 막 세상을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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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9, 창3 뒤, ‘두 번째 사례’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9 나는 또 다른 한 사람도 보았는데, 그는 천사들에 의해 곧바로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는 주님께 받아들여졌고, 천국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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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0, 창4 앞,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AC.320-323)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AC.320 영혼(soul)으로서의 삶, 곧 죽은 뒤 처음 영계에 들어가는 신참, 신생 영들(novitiate spirits)의 삶에 관한 일반적인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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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1, 창4 앞, ‘사후 두 번째 상태, 삶의 질이 더 완전해짐’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1 두 번째 일반적인 사실은, 영은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감각 기능을 훨씬 더 뛰어나게 사용하며,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 또한 훨씬 더 탁월하다는 것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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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2, 창4 앞, ‘시각, 청각, 후각, 촉각, 욕망과 애정, 사고와 말의 능력의 확장’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2 영들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그릇된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수천 번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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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3, 창4 앞, ‘창4 앞(AC.320-322)의 구체적 사례를 뒤(AC.443-448)에서 제시하겠다고’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3 이 장의 끝에서는,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의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하겠습니다. At the end of the chapter, several examples will be g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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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보충 리딩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은 리딩 글 수도 적고, 대부분 요약에서 대략 다 다루어서 아래 심화들만 보충적으로 추가 리딩하시면 되겠습니다.

 

 

AC.314, 심화 1,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말하기’

AC.314.심화 1.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말하기’ 그들은 언제나 그 사람의 상태와 자유를 존중, 그가 진심으로 필요로 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을 제공합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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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6, 심화 1, ‘주님이 신생 영에게 일련의 코스를 밟게 하시는 이유’

AC.316.심화 1. ‘주님이 신생 영에게 일련의 코스를 밟게 하시는 이유’ 사람의 자유와 선택을 존중하시는 주님은 왜 사후 처음 눈 뜨는 영에게 이후 진행될 전체 코스를 설명, 너는 이 코스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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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2, 심화 1, ‘공주농아교회를 생각하며’

AC.322.심화 1. ‘공주농아교회를 생각하며’ 이 글을 읽으면서 반대로 농아(聾啞)인들, 그러니까 못 듣고, 말 못 하는 분들 생각과, 그분들을 대상으로 목회하시는, 저의 친구 목사님 생각이 났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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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주부터 창4 시작합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8-09(D1)

 

2663, 10, 창3.10, 2026-08-09(D1)-주일예배(창3 뒤, 창4 앞, AC.314-323), ‘사람이 영생에 들어간다는 것과 영으로 산다는 것’.pdf
0.81MB

 

 

 

주일예배(2026/08/02, 창3:23-24, AC.305-313, 성찬), ‘그룹들, 두루 도는 불 칼,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 오늘(2026/08/02)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41, ‘내 영혼아 주 찬양하여라’,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성찬), 찬87,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입니다. 오늘은 창3 아홉 번째, 본문은 창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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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첫 강의를 듣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것이 일반적인 의미의 ‘강의’라기보다 새로운 공동체를 출범시키면서 그 정체성을 설명하는 일종의 오리엔테이션이라는 점입니다. 강사는 한국 개신교 안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수도 전통을 다시 세워 보고 싶다는 상당히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도사학교를 단순한 신학교나 성경공부 모임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부하고 시험을 치고 책을 읽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보다 훨씬 깊은 곳에는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놓여 있습니다. 이 선명한 문제의식, 곧 ‘한국 개신교에 수도(修道)가 필요하다. 그리고 수도는 지식을 더 쌓는 일이 아니라 사람 자체가 달라지는 일이어야 한다.’ 이것이 첫 강의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이 강의를 상당히 호의적으로 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역시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지식의 축적에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사람에게 알려지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지만, 아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이해한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고, 의지에서 행위로 나오며, 마침내 삶의 습관과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무엇을 알고 있는가’보다 훨씬 근본적인 질문은 ‘무엇을 사랑하는가’, 그리고 ‘그 사랑에 따라 어떻게 사는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수도사학교가 처음부터 ‘또 하나의 신학 공부’를 지향하지 않고, ‘사람의 변화’를 지향했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장점입니다.

 

강의에서 반복적으로 느껴지는 또 하나의 문제의식은 한국 개신교의 ‘목회자 중심적 성공 모델’에 대한 불만입니다. 교회를 크게 하고, 사람을 모으고, 조직을 확장하고, 목회자로서 사회적 위치를 얻는 것과 복음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반드시 같은 일이 아니라는 문제의식입니다. ‘,,’ 같은 표현을 비롯, 강사는 교회가 물질과 성공을 좇으면서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가능성을 상당히 강하게 경계합니다. 이것은 표현의 강약을 떠나서 매우 성경적인 문제제기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깊어집니다. 교회의 타락은 먼저 제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가 뒤집히면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진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높이고 세상을 소유하기 위해 종교와 진리를 사용하기 시작할 때, 겉으로는 여전히 교회이고, 설교와 예배와 성경이 존재하더라도 속에서는 이미 질서가 전도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수도를 요청하는 이유를 단순히 ‘가톨릭에는 수도원이 있으니 개신교에도 수도원이 하나쯤 있어야 한다’는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더 깊은 동기는 ‘목회 성공이라는 궤도 밖에서 하나님 앞에 한 사람으로 서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귀한 문제의식입니다. 목사라는 직함도, 교회의 크기도, 설교 능력도, 학위도 잠시 내려놓고, ‘나는 실제로 어떤 사람인가’를 하나님 앞에서 묻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도 매우 가까운 곳에서 만납니다. 영계에서는 직함이나 사회적 외관이 그 사람의 본질을 결정하지 않고,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왔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수도사학교의 방향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강의에서는 상당한 정도로 훈련과 절제와 고행이 강조됩니다. 수도원 생활의 엄격함, 추위와 배고픔, 단순한 음식, 침묵, 걷기, 불편한 잠자리, 금식과 같은 경험들이 소개되고, 실제 교육과정에서도 독서와 글쓰기뿐 아니라 몸으로 견디고 경험하는 훈련이 중요하게 취급됩니다. 강사가 경험한 여러 수도원과 수도자들의 이야기도 이런 맥락에서 등장합니다. 심지어 수십 년 동안 한 장소에서 수도생활을 한 사람들, 죽을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깊은 경외도 느껴집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몸을 가진 존재이고, 삶의 습관을 바꾸려면 일정한 규율도 필요합니다. 자기 욕망을 무조건 따라가지 않는 훈련 역시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도 거듭남에는 반드시 시험이 따르며, 사람은 자기 안의 악한 욕망과 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절제와 훈련 자체를 부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현대 그리스도교가 지나치게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된다’는 방향으로 흐르면서 삶의 훈련을 잃어버렸다면, 수도 전통이 그것을 일깨워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구별이 하나 생깁니다. ‘고생하는 것’과 ‘거듭나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배가 고프다고 proprium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추운 곳에서 잔다고 자기 사랑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침묵한다고 내면의 교만이 저절로 죽는 것도 아니고, 세상과 떨어져 산다고 세상 사랑이 자동으로 정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은 수도생활 자체를 자기 공로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들과 다르다. 나는 세상을 버렸다. 나는 금식한다. 나는 고행한다. 나는 수도자다’라는 새로운 형태의 proprium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세속적 자아를 버리고 종교적 자아를 얻은 것뿐이지, 진정한 자기 부인이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바로 여기서 이 강의를 읽는 중요한 열쇠가 생깁니다. 수도사학교가 추구하는 외적 훈련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어야 합니다. 침묵도 수단이고, 금식도 수단이며, 독서도 수단이고, 공동생활도 수단입니다. 심지어 수도원도 수단입니다.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사람이 자기 안의 악을 주님 앞에서 보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여 물리치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자신의 의지와 삶 안에 자리 잡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수도원이 도움이 된다면 수도원은 귀한 장소가 됩니다. 그러나 수도원 자체가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첫 학기 과정에서 독서와 글쓰기를 상당히 강조했다는 것도 새롭게 보입니다. 강의 후반부에서 강사는 A4 용지를 기준으로 요약하고, 인상 깊은 내용을 정리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과 연결하여 쓰게 하는 식의 과제를 설명합니다. 한 달에 일정량의 글을 제출하게 하고, 많은 책을 읽게 하는 상당히 강도 높은 과정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책을 많이 읽으라는 뜻보다 ‘읽은 것이 자기 삶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쓰라’는 중요한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바로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진리는 기억에만 머물러서는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억에 들어온 진리가 이해의 대상이 되고, 자신의 상태를 비추는 빛이 되며, 의지와 행위에 연결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다만 여기에도 한 단계가 더 필요합니다. ‘내 삶과 연결한다’는 것이 단순한 자기성찰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진리는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분석하기 위한 심리학적 도구가 아니라, 무엇이 주님의 질서이고, 무엇이 그 질서에 반하는지를 분별하게 하는 빛입니다. 그러므로 독서 후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무엇을 느꼈는가’만이 아니라 ‘이 진리가 내 안에서 어떤 악과 거짓을 드러내는가’, ‘나는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주님께서는 나를 어떤 선으로 이끄시는가’가 되어야 합니다. 이 단계까지 들어가면 수도사학교의 독서와 글쓰기 훈련은 단순한 인문학적 독서가 아니라 거듭남을 위한 자기성찰로 훨씬 깊어질 수 있습니다.

 

공동체 역시 그렇습니다. 혼자 있을 때에는 자신의 성품을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일하고, 불편을 견디며 다른 사람에게 맞추어야 할 때, 비로소 자기 안에 숨어 있던 성냄, 경쟁심, 인정 욕구, 지배욕, 질투, 조급함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수도 공동체의 진정한 가치는 세상에서 도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할 수 없게 만드는 데 있을 수 있습니다. 혼자 산속에 앉아 있을 때는 자신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여러 사람과 부딪히며 살아 보면 자신이 얼마나 자기 뜻대로 되어야 편안한 사람인지 금방 드러납니다. 이 점에서 공동생활은 매우 강력한 영적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도 한 가지 더 나아갑니다. 공동체 안에서 드러난 악을 단순히 억누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규칙 때문에 화를 참는 것과 화를 내고 싶어 하는 자기 안의 악을 죄로 인정하여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은 다릅니다. 전자는 행동 교정일 수 있지만 후자는 거듭남입니다. 수도학교의 엄격한 규칙이 사람을 단정하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규칙 자체가 사람의 속 사람을 새롭게 할 수는 없습니다. 속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외적 규율은 그 역사를 위한 질서를 제공할 뿐입니다.

 

이 점에서 첫 강의에서 느껴지는 ‘강한 사람을 만들겠다’는 분위기도 조심스럽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고, 많은 책을 읽고, 어려운 훈련을 통과하며,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사람을 만들겠다는 열정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강사는 과정 중 많은 사람이 떨어져 나갈 수 있다는 것도 예상하고 있으며, 끝까지 남는 소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천국적인 사람은 반드시 의지가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자기 힘을 강하게 만든 사람’이 아니라 ‘자기 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약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힘으로 악을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고, 싸우는 힘 자체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어쩌면 실패했을 때가 아니라 성공했을 때일지도 모릅니다. 금식에 성공하고, 침묵에 성공하고, 독서량을 채우고, 남들이 포기한 훈련을 끝까지 견디고, 마침내 ‘수도사’라는 이름까지 얻었을 때, proprium은 그것을 자신의 의로 취하기 쉽습니다. ‘나는 해냈다’가 되는 순간입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은 갈수록 ‘주님께서 하셨다’는 인식이 깊어지는 과정입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듯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승리는 자신의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수도의 외적 엄격함보다 훨씬 어려운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첫 강의 중 역사 부분은 조금 다르게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니므롯, 세미라미스, 담무스, 태양신 숭배, 바벨론 종교가 이후의 여러 종교와 기독교에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상당히 큰 역사적 틀로 제시됩니다. 여기서 강사가 말하고자 하는 영적 메시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순수한 하나님 신앙이 인간의 욕망과 권력, 우상숭배와 결합하면서 변질되고, 교회 역시 언제든 그 길을 갈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이 경고 자체는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그러나 세미라미스와 담무스를 중심으로 고대 바벨론 종교에서 후대의 가톨릭 및 기독교 관습을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역사 서술은 이 자료만으로 사실이라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이 부분의 역사적 사실성은 별도의 검증 대상으로 남겨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바벨론’을 어떻게 보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바벨론의 핵심은 단순히 어떤 고대 종교의 계보가 아닙니다. 영적으로 ‘바벨론’은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사람을 지배하려는 사랑, 곧 종교적인 것을 자기 권력과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상태와 깊이 연결됩니다. 이렇게 보면 바벨론은 밖에만 있지 않습니다. 가톨릭 안에서만 찾을 수도 없고, 특정 교단에만 돌릴 수도 없습니다. 개신교 목사에게도 바벨론이 있을 수 있고, 수도자에게도 있을 수 있으며, 심지어 ‘나는 타락한 교회를 떠나 순수한 수도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자신을 높이려는 순간, 바벨론의 원리는 그 사람 안에서 다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첫 강의의 역사적 도식을 오히려 훨씬 더 날카로운 영적 질문으로 바꾸어 줍니다. ‘어느 교회가 바벨론인가?’가 아니라 ‘내 안의 바벨론은 무엇인가?’입니다. ‘어느 종교가 타락했는가?’가 아니라 ‘나는 주님의 것을 이용하여 나 자신을 높이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 강의에 더해 줄 수 있는 중요한 깊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강사가 수도 전통을 개신교가 다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는 방식입니다. 수도원이 가톨릭보다 먼저 존재했던 기독교적 유산이며, 그러므로 개신교가 수도 전통 자체를 가톨릭적인 것으로 치부하여 버릴 필요가 없다는 문제의식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여기에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실제로 기도, 침묵, 절제, 독신 또는 단순한 생활, 공동체 생활, 노동과 묵상 등 수도적 요소들은 기독교 역사 안에서 오랫동안 존재해 왔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어느 교파가 수도원의 소유권을 갖느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형식 안에 어떤 영이 들어 있느냐입니다.

 

그러므로 수도복을 입는 것도 같은 원리로 볼 수 있습니다. 강의 후반에는 과정을 마친 사람과 수도복, 수도사로서의 정체성 등에 관한 이야기도 등장합니다. 수도복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겸손과 헌신을 기억하게 하는 표지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특별한 사람이라는 의식을 강화하는 표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옷이 아니라 애정입니다. 같은 수도복을 입은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나는 주님의 종이다’라는 마음으로 입을 수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나는 보통 신자와 다른 특별한 영적 사람이다’라는 마음으로 입을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동일하지만 영적으로는 전혀 다른 상태입니다.

 

여기서 수도사학교의 이름 자체도 흥미로워집니다. 나중에 ‘수도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명칭 변경 이상의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수도사’를 만드는 학교보다 ‘수도’를 배우는 학교라는 표현이 오히려 본질에 가까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수도는 특정 신분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명칭 변경의 실제 이유를 단정하는 말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바라본 의미입니다. 진정한 수도는 ‘나는 수도사다’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하는 데 있지 않고, 날마다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주님 앞에 내어놓으며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첫 강의에서 가장 귀하게 보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사는 완성된 체계를 가르치는 사람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국 개신교 안에서 거의 해 보지 않은 일을 ‘우리끼리 시작한다’, ‘전통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도 ‘아무의 전통을 우리가 만들어 가야 되지’라는 취지의 말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는 개척자의 서툶과 동시에 진정성이 있습니다. 이미 정답을 가지고 학생들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경험하고 배우면서 길을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첫 학기 일정표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완성된 수도원 규칙서라기보다 ‘한국 개신교 안에서 수도적 삶을 어떻게 실제로 가르쳐 볼 것인가’를 처음 실험해 본 흔적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이것을 전부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부분을 살릴 수 있습니다. 침묵은 자기 말이 얼마나 많은지를 발견하게 할 수 있고, 금식은 욕망의 힘을 보게 할 수 있으며, 공동생활은 proprium을 드러내고, 독서는 이해를 열며, 글쓰기는 자신의 상태를 성찰하게 하고, 노동은 관념적인 신앙을 실제 삶으로 끌어내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을 어디로 향하게 하느냐입니다. 이 훈련들이 ‘훌륭한 수도자’를 만드는 방향으로 향하면 자기완성의 종교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거듭나게 하시도록 내 안의 악과 거짓을 발견하고 물리치는 삶’으로 향한다면 매우 유익한 외적 질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가 수도 전통에 던지는 가장 큰 질문이 나옵니다. ‘왜 세상을 떠나야 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천국 이해에서는 세상에서 맡은 직업과 책임을 성실히 수행하고, 이웃에게 유용한 일을 하면서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삶이 매우 중요합니다. 거듭남의 현장은 반드시 수도원이 아닙니다. 가정도 수도원이 될 수 있고, 직장도 수도원이 될 수 있으며, 목회 현장도 수도원이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책임을 감당하며 돈을 사용하고 갈등을 해결하고 용서하고 봉사하는 그 복잡한 일상 속에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실제 모습이 끊임없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수도원은 거듭남을 위한 특별한 ‘훈련장’이 될 수는 있어도, 거듭남의 최종 목적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 수도사학교가 품었던 이상과 스베덴보리 사이에는 생각보다 상당히 넓은 접점이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을 만드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사람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 지식을 삶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것, 자기 욕망을 그대로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 물질과 성공에 사로잡힌 종교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 실제 훈련과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 등은 서로 깊이 만납니다. 차이는 ‘그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설명하는 데서 생깁니다.

 

수도사학교에서는 그것을 상당 부분 ‘훈련을 통한 사람 만들기’로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한층 안쪽으로 들어갑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거듭나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우고, 자신을 살피고, 악을 죄로 인정하고, 그것과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듯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악을 제거하시고, 새로운 의지를 심으시며,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수도의 가장 깊은 자리는 산속 수도원의 독방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입니다. 거기에서 ‘내가 원하는 것’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만납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첫 강의를 한 문장으로 이렇게 읽어도 좋겠습니다. ‘이 강의는 세상을 버리는 수도자를 만들려는 시도라기보다, 세상에 삼켜지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만들고 싶었던 한 개신교 목회자의 몸부림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보탭니다. ‘그러나 사람이 정말 버려야 할 것은 세상 그 자체가 아니라, 세상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사랑하는 proprium이며, 사람이 정말 들어가야 할 수도원은 외딴 장소 이전에 주님 앞에 열리는 자신의 내면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첫 강의를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역사 설명에는 검토해야 할 부분이 있고, 금욕과 외적 훈련에는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으며, 수도자라는 특별한 신분을 강조할 경우 생길 수 있는 위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 흐르는 질문은 매우 진지합니다. ‘목회자가 되고도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성경을 많이 알고도 자기 욕망대로 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교회가 커지고도 하나님에게서 멀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수도사학교는 그 답을 ‘수도’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질문에 아주 깊은 곳에서 답합니다. 다시 시작해야 할 곳은 ‘’입니다. 진리가 기억에서 이해로, 이해에서 의지로, 의지에서 행위로 내려와 마침내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은 자신의 proprium이 얼마나 완강한지를 발견하고, 수많은 시험을 통과합니다. 외적으로는 평범한 가정생활을 하고, 직업을 가지고 살아도 그 사람 안에서는 치열한 수도생활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평생 수도원에 살아도 자기 사랑을 붙들고 있다면 내적인 수도는 시작되지도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첫 강의와 첫 학기 일정표를 함께 놓고 보면, 어쩌면 이 학교가 처음부터 찾고 있었던 가장 깊은 것은 ‘수도사’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이 되는 것’,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실제로 살아가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 갈망은 귀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갈망을 더 안쪽으로 인도합니다. 수도복에서 삶으로, 고행에서 회개로, 자기훈련에서 주님의 역사하심으로, 세상으로부터의 분리에서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분리로, 그리고 ‘특별한 수도자’가 되는 데서 ‘주님으로부터 새롭게 된 사람’이 되는 데로 말입니다. 저는 이 첫 강의의 가장 아름다운 가능성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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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영상은 ‘강문호 수도사 이야기 : 채널설립이유’라는 제목으로, 강문호 목사님이 앞으로 자신이 접한 수도사들의 삶과 수도원에 얽힌 이야기들을 한 편씩 소개하겠다는 취지를 밝히는 영상입니다. 공개된 정교회 자료와 예루살렘 교회 관련 자료를 대조해 보면 영상에서 소개하는 첫 인물은 4세기 팔레스타인 수도 전통의 중요한 인물인 성 카리톤(Chariton the Confessor)입니다. 카리톤은 예루살렘으로 가던 길에 강도들에게 붙잡혀 그들의 동굴에 결박된 채 갇혔고, 강도들이 다시 약탈하러 나간 사이 뱀이 포도주 그릇에 독을 남겼으며, 돌아온 강도들이 그 포도주를 마시고 죽었다는 전승이 전해집니다. 카리톤은 살아남은 뒤 강도들이 모아 둔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과 교회 및 수도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고, 자신이 구원받은 그 자리에서 수행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그곳에 파란 라브라(Pharan Lavra)가 형성되었고, 그는 뒤에도 두 곳의 라브라를 더 세운 것으로 전해집니다. 따라서 영상에서 ‘이스라엘 최초의 수도원’이라고 표현한 부분은 조금 넓은 표현이며, 보다 정확하게는 유대 광야의 초기 라브라 수도 전통을 연 매우 중요한 공동체라고 이해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Orthodox Church in America)

 

먼저 이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볼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은 기적 자체보다 카리톤의 반응입니다. 강도들이 갑자기 죽고 자신이 살아난 사건은 매우 극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전승에서 더 중요한 것은 카리톤이 살아남은 뒤, 그 사건을 자신의 특별함을 증명하는 표징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강도들이 모아 둔 재물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과 교회와 수도 공동체를 위해 사용했으며, 자신이 살아남은 장소에서 수행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기적을 자신의 명예로 돌리는 대신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중요합니다. 영적 체험의 가치는 그 체험이 얼마나 놀라웠는가에 있지 않고, 그 결과 사람의 사랑과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Orthodox Church in America)

 

스베덴보리는 기적이나 초자연적 현상이 그 자체로 사람을 거듭나게 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사람은 놀라운 일을 보고 잠시 두려워하거나 감동할 수 있지만, 그 감정이 지나간 뒤에도 이전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적보다 중요한 것은 자유 가운데 받아들인 진리와 그것을 따라 변화된 삶입니다. 카리톤 이야기가 영적으로 의미 있는 이유도 뱀이 독을 풀어 강도들이 죽었다는 기이한 사건 때문이라기보다, 자신에게 다시 주어진 생명을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사용했다는 데 있습니다. ‘내가 살아났다’는 놀라움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카리톤처럼 강도의 동굴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지 않았더라도 하루하루 생명을 받고 살아갑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생명의 원천이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형식입니다. 생명 자체는 오직 주님에게 있으며, 사람은 매 순간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생각하고 사랑하고 행동합니다. 사람은 그것을 자기 생명처럼 느끼도록 창조되었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다면 그다음 질문은 자연스럽게 ‘이 생명을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가 됩니다.

 

카리톤이 강도들의 재물을 자신의 소유로 삼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과 교회 등을 위해 사용했다는 전승도 이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재물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떤 사랑으로 어떤 쓰임을 위해 사용하는가입니다. 같은 재물이 자기 안전과 명예와 지배를 확대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강도들에게 재물은 탐욕과 폭력의 목적이었지만, 카리톤에게 넘어온 뒤 그 재물의 쓰임이 바뀌었다는 점은 상징적으로도 흥미롭습니다. 동일한 자연적 재물이 사랑의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성격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영상에서 강문호 목사님이 수도사들의 이야기를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의 초인간적인 이야기’처럼 소개하는 부분은 수도 전통에 대한 강한 감탄을 보여 줍니다. 실제로 극단적인 금욕과 고독, 기도와 희생의 삶을 살아간 수도사들의 이야기는 현대인에게 상당한 충격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참된 영성은 사람을 ‘초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 안의 본래 질서가 주님으로부터 회복되어 더욱 참된 인간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천사들도 인간과 다른 종류의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자연계에서 살다가 영계로 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수도자의 위대함도 인간적인 삶을 초월했다는 데 있지 않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벗어나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변화된 만큼에 있습니다.

 

따라서 수십 년 동안 동굴에서 기도했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영적으로 높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 수도자가 사막에서 평생 기도하는 삶과 한 사람이 가정에서 배우자와 자녀를 책임지고, 직장에서 정직하게 일하며, 반복되는 갈등 속에서 자기 분노와 이기심을 이겨 가는 삶 가운데 어느 것이 주님 보시기에 더 깊은지는 외적인 형태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장소와 형식이 아니라 지배적인 사랑입니다. 수도원에서 살아도 자신의 proprium을 사랑할 수 있고, 세상 한복판에서 살아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카리톤의 이야기 가운데 오히려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사람들이 자신에게 몰려들자 더 깊은 고독을 찾아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는 전승입니다. 정교회 자료에는 그가 사람들의 칭찬을 피하고 고독을 원하여 더 깊은 광야로 물러났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에게 영적 지도를 구하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았으며, 결국 다른 수도 공동체들도 세웠습니다. 고독을 사랑하면서도 사람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도와 쓰임의 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참된 고독은 사람을 이웃으로부터 도피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자신을 비운 뒤, 다시 이웃에게 더 순수한 쓰임을 행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Orthodox Church in America)

 

영상에서 특히 중요한 문장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은 아닌데 하나님의 소리만 나와야 한다’는 취지의 표현입니다. 이 말은 잘 이해하면 매우 아름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꾸어 말하면,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은 그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진실한 말을 하고 선한 일을 행할 때, 겉으로는 그 사람이 말하고 그 사람이 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선 자체와 진리 자체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사람은 그것을 받아 자유롭게 행하는 그릇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소리’가 난다는 것은 그의 말투가 특별하거나 신비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본질적으로는 그 사람의 말을 들은 뒤, 사람들의 시선이 그 사람에게 머물지 않고 주님께 향한다는 뜻이어야 합니다. 설교를 듣고 ‘저 목사님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만 남는 것과 ‘주님은 정말 이런 분이시구나’라는 깨달음이 남는 것은 매우 다릅니다. 전자는 사람에게 시선이 고정될 수 있지만, 후자는 사람을 통하여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매우 엄중한 영적 문제가 시작됩니다. ‘나에게서 하나님의 소리가 나야 한다’는 말이 어느 순간 ‘사람들이 나에게서 하나님의 특별한 음성을 듣는다’는 자기 인식으로 바뀌면, 그 순간 주님께 돌려져야 할 것이 proprium으로 돌아올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proprium은 세속적 자랑에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영적 체험, 말씀 지식, 기도생활, 목회 성공, 심지어 겸손과 희생까지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나는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습니다’라는 자기 의식이 생길 수 있을 만큼 proprium은 미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소리만 나와야 한다’는 문장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조금 더 완성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주님의 선과 진리가 흘러나와야 하지만, 정작 그 사람 자신은 그 선과 진리를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때에는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 선의 근원과 힘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내적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거듭해서 강조하는 중요한 영적 질서입니다.

 

영상에서 강문호 목사님은 이스라엘의 여러 수도원을 방문하면서 그곳에 얽힌 ‘아름다운 이야기, 기적의 이야기, 하나님 이야기’를 모았고, 그것을 앞으로 하나씩 소개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작업은 분명 가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랜 기독교 역사 안에서 실제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을 어떻게 주님께 돌렸는지를 보는 것은 오늘의 신앙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적의 이야기’와 ‘하나님 이야기’는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닙니다. 기적이 많이 등장한다고 하나님이 더 많이 드러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특별한 현상은 거의 없어도 한 사람이 수십 년 동안 정직하게 악을 피하고 이웃을 섬겼다면, 그 삶에서 주님의 섭리가 훨씬 깊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도 섭리는 대개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게 움직입니다. 사람은 극적인 기적에서는 쉽게 하나님의 손길을 찾지만, 평범한 일상의 질서와 자유로운 선택 속에서 이루어지는 주님의 섭리는 잘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아주 미세한 방법으로 그를 선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사들의 기적담을 들을 때에도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구나’에 머무르기보다, ‘그 일을 통해 이 사람의 사랑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카리톤 이야기도 바로 그렇게 읽는 편이 좋습니다. 독사와 포도주와 강도들의 죽음이라는 극적인 장면이 이야기의 중심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 가장 중요한 장면은 그 이후입니다. 그는 살아남았고, 재물을 나누었으며, 자신에게 다시 주어진 생명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몰려들 때에도 자신의 명성을 붙들기보다 다시 고독을 찾았다고 전해집니다. 적어도 전승이 보여 주려는 이상은 ‘기적을 경험한 특별한 인간’이 아니라, 살아남은 생명을 하나님께 돌려드린 인간입니다. (Orthodox Church in America)

 

여기에서 수도생활의 본질도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수도원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장소가 아닙니다. 수도복 역시 사람의 내적 상태를 바꾸어 주지 않습니다. 고독과 금식과 기도와 노동은 거듭남을 돕는 외적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그 수단을 통하여 실제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약해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라지 않는다면 수도의 외적 형식만 남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수도복을 입지 않고 세상 가운데 살더라도 자신의 악을 죄로 여기며 피하고, 맡겨진 쓰임을 정직하게 감당하며, 자신에게 있는 모든 선을 주님께 돌리는 사람이라면 그는 깊은 의미에서 내적 수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소개된 수도사 이야기를 ‘초인간적인 사람의 놀라운 일화’로만 받아들이기보다, ‘한 사람의 삶의 중심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라는 관점에서 읽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는 더 잘 맞습니다. 살아남았다는 사실보다 살아남은 뒤 어떻게 살았는지가 중요하고, 수도원을 세웠다는 사실보다 왜 세웠는지가 중요하며,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는 사실보다 그 사람들이 그를 통해 누구를 바라보게 되었는지가 중요합니다.

 

결국 이 영상의 가장 좋은 핵심은 ‘하나님의 사람에게서는 하나님의 소리가 나야 한다’는 문장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거기에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조건을 덧붙입니다. 그 사람에게서 주님의 소리가 날수록 그 사람 자신은 더욱 뒤로 물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름이 커지는 만큼 주님의 이름도 함께 커지는 것이 아니라, 참된 영적 질서에서는 사람이 투명해질수록 그를 통하여 주님이 더욱 분명히 보입니다.

 

따라서 이 영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성 카리톤의 이야기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가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기적 자체가 아니라, 다시 받은 생명과 재물을 자신의 것으로 움켜쥐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쓰임으로 돌렸다는 데 있으며, 참된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 특별함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통하여 주님의 선과 진리가 드러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상 속 ‘하나님은 아닌데 하나님의 소리만 난다’는 표현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마지막 한 문장을 덧붙인다면 저는 이렇게 쓰고 싶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소리가 나는 사람은 자신에게서 들리는 그 선한 소리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SY.49, 강문호 목사, ‘갈보리교회 은퇴사’ (20191201)

※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 영상은 강문호 목사님이 충주봉쇄수도원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시작하면서 전한 첫 인사입니다. 오랫동안 섬기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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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 영상은 강문호 목사님이 충주봉쇄수도원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시작하면서 전한 첫 인사입니다. 오랫동안 섬기던 교회를 떠나 수도생활에 들어간 뒤, 이전 교회의 성도들에게 영상으로 인사를 전하면서, 후임 목회자와 새로 세워지는 직분자들을 축하하고, 지난 목회를 함께해 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앞으로 자신이 걸어가려는 새로운 사역의 방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영상은 어떤 특정한 성경 본문을 강해하는 설교라기보다 한 목회자가 오랜 담임목회를 마치고, 새로운 삶의 단계로 들어서면서 자신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소망을 밝히는 인사말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먼저 영상에서 인상 깊은 것은 이전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애정과 감사입니다. ‘여러분들은 영상으로나마 제 얼굴을 보는데 저는 여러분을 보지 못해서 너무 안타깝다’는 첫 인사에는 오래 함께했던 공동체를 향한 그리움이 묻어 있습니다. 이어 후임 목회자를 자신보다 훌륭한 목회자로 기대한다고 축복하고, 장로들과 부목사들, 전도사들, 선교회와 교사들, 찬양대와 성도들에게 감사하면서 ‘모두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었다’는 취지로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이러한 감사는 귀한 태도입니다. 사람은 홀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수많은 서로 다른 쓰임들이 하나를 이루는 질서이며, 천국에서도 어느 한 존재가 모든 것을 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목회 역시 여러 사람의 기도와 노동과 조언과 봉사가 결합되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지난 세월을 자신의 업적으로만 기억하지 않고, 함께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은 천국의 공동체적 질서와도 잘 어울립니다.

 

후임 목회자를 향해 ‘저보다 훌륭해서 잘되리라고 믿는다’는 취지로 말하는 부분도 의미가 있습니다. 한 시대의 자신의 역할이 끝났음을 인정하고, 다음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은 영적으로도 중요한 일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모든 직분과 역할은 사람이 영원히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어떤 쓰임을 위해 일정 기간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자신의 사역을 붙잡기보다 새로운 사람에게 기꺼이 넘기고, 그가 더 잘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적어도 표현된 내용 자체로 보면, 자신의 역할을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의 쓰임으로 이해하려는 방향과 맞닿아 있습니다.

 

영상의 중심은 이후 자신의 새로운 삶을 소개하는 부분으로 옮겨갑니다. 강 목사님은 이제 한 교회의 담임목회라는 범위를 넘어 수도원과 연결된 새로운 사역을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여러 나라의 수도원들과 네트워크를 만들고, 은퇴한 목회자들이 함께 모여 ‘평생 새벽기도, 평생 연구, 평생 후학들을 가르침, 평생 노동, 그리고 그 노동으로 얻은 것을 통한 평생 선교’를 하며 죽는 날까지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는 비전을 밝힙니다. 여기에는 은퇴를 사역의 종료로 생각하지 않고, 삶의 마지막까지 어떤 쓰임을 계속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쓰임’이라는 관점에서 매우 흥미롭게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국의 삶은 무위도식하는 삶이 아니라 끊임없는 쓰임의 삶입니다. 천사들도 각자의 사랑과 지혜에 따라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주는 일을 행합니다. 그러므로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단순히 쉬는 삶만을 이상으로 삼기보다, 기도하고 연구하고 가르치고 노동하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는 열망 자체는 귀합니다. 특별히 영상에서 기도와 연구뿐 아니라 ‘노동’을 수도생활의 중요한 부분으로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영적 삶은 머릿속의 명상이나 종교적 감정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유용한 삶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쓰임’에서 중요한 것은 그 규모보다 그 내적 목적입니다. 수도원이 몇 개 세워지고, 몇 나라와 연결되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통하여 실제로 사람 안에 선과 진리가 자라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큰 일을 했다는 이유로 더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충실하게 수행한 사람이 귀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작은 공동체를 섬기는 일이나 한 사람을 돌보는 일도 그 사랑과 쓰임이 참되다면 큰 조직을 세우는 것보다 결코 영적으로 작지 않습니다.

 

영상에는 ‘봉쇄수도원’이라는 독특한 삶의 방식도 소개됩니다. 일정한 특별한 경우 외에는 수도원 밖으로 나가지 않고, 사람들과의 접촉도 제한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겠다는 것입니다. 고독과 침묵은 오래된 기독교 수도 전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으며, 분주한 외적 활동에서 물러나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는 시간은 분명 유익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때때로 무리를 떠나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람과 활동으로 가득했던 오랜 목회생활을 마친 뒤, 일정 기간 깊은 고독을 선택하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외적으로 세상에서 물러나는 것 자체를 더 높은 영적 상태로 보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거듭남은 대부분 실제 삶의 관계와 책임 가운데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혼자 있을 때에는 자신의 인내와 겸손을 확인하기가 쉽지만, 다른 사람과 부딪히고 의견이 다르며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 비로소 자기 안의 분노와 지배욕,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고독은 거듭남을 돕는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거듭남은 아닙니다. 수도원의 문을 닫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사랑이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며, 사람과의 만남을 줄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만나는 사람을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상에서 특히 생각해 볼 부분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고, 만나야 할 사람이 많아져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사람들만 만나느라 분주하면 너를 만나 주지 않겠다’는 취지의 말씀을 받았다고 소개하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우선 귀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사역의 분주함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대신할 수 없다는 자각입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이유로 끝없이 사람을 만나고 행사를 진행하면서, 정작 자신의 내면은 점점 메말라 갈 수도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종교적인 일로 가득하지만, 내적으로는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역설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활동을 줄이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려는 결심에는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개인이 기도 가운데 경험한 어떤 내적 음성이나 생각을 곧바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으로 확정하는 데에는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사람의 생각과 감정에는 여러 근원의 인플럭스가 작용하며, 자연계에 사는 동안 사람은 그 근원을 명확하게 식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강한 내적 감동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주님의 뜻과 일치하는지는 말씀의 진리, 이성적인 분별, 그리고 그 결과 맺히는 선한 열매를 통해 확인되어야 합니다. 개인적인 체험을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 체험 자체가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강 목사님은 자신의 사역이 한 교회와 한 나라를 넘어 여러 나라의 수도원으로 확장되고, 더 나아가 ‘땅을 넘어 하늘까지’, ‘이 세상과 저세상까지’ 연결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취지로 말합니다. 이 표현은 문자 그대로의 영계 교통을 주장한다기보다 자신의 수도 사역을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싶다는 포부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자연계와 영계의 관계가 실제로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은 몸으로는 자연계에 살지만 그의 내면은 이미 영계와 연결되어 있고, 모든 선과 진리의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흘러옵니다. 따라서 지상의 삶은 영원한 세계와 단절된 삶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연계와 영계를 연결하는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특별한 수도생활이나 어떤 영적 훈련이 인간에게 두 세계를 연결하는 권능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이미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있으며, 상응의 질서를 통해 영계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저세상과 연결될 것인가’보다 ‘이미 주님으로부터 흘러오는 선과 진리를 이 세상에서 어떻게 받아 살아낼 것인가’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영계를 보고 천사들과 대화했지만, 그의 저작에서 영적 삶의 핵심은 영계를 보는 능력이 아니라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주님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영상 전체를 통하여 느껴지는 한 가지 강한 흐름은 ‘남은 생애를 그냥 보내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오랜 목회를 마치고도 기도와 연구, 후학 교육과 노동과 선교를 계속하며 죽는 날까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에는 분명 귀한 면이 있습니다. 사람의 노년 역시 주님께서 주신 생명의 한 시기이며, 그때에도 경험과 지혜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삶의 어느 시기도 그 자체로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의 조건 안에서 어떤 선한 쓰임을 행하는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수도생활이든 목회든 선교든 모든 외적인 사역에는 하나의 공통된 영적 기준이 있습니다. ‘이 일을 통해 나의 자아가 커지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커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세속적 성공을 내려놓고도 종교적 성공을 사랑할 수 있고, 물질적 명예에서 물러난 뒤에도 영적 명예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외적인 형식 자체보다 그 안에 흐르는 사랑의 성질을 봅니다. 수도원이라는 장소도, 기도와 연구라는 활동도, 선교라는 이름도 자동으로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한 사랑의 쓰임이 될 때 거룩해집니다.

 

그런 점에서 이 첫 인사 영상은 한 목회자가 자신의 이전 사역을 감사 가운데 내려놓고, 새로운 삶의 단계로 들어가려는 모습을 담은 영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전 교회를 축복하고, 함께한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자신은 앞으로 고독과 기도, 연구와 교육, 노동과 선교를 결합한 수도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러한 열망을 먼저 존중하면서도, 수도의 본질을 외적인 봉쇄나 활동의 규모에 두지 않습니다. 참된 수도는 사람이 어디에 사느냐보다 그의 마음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에 있으며, 참된 사역은 얼마나 큰 일을 이루느냐보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얼마나 순수하게 이웃의 유익으로 돌리는가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 첫 영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담임목회를 마치고 고독과 기도, 연구와 노동, 후학 양성과 선교라는 새로운 쓰임의 삶으로 들어가려는 결심은 귀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참된 수도의 완성은 세상에서 얼마나 멀리 물러났는가가 아니라, 자기 사랑에서 얼마나 벗어나 주님과 이웃을 위한 쓰임의 사람이 되어 가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입니다.

 

 

 

SY.50, 강문호 목사, ‘이스라엘 첫 수도원, 채리톤’ (20191208)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영상은 강문호 목사님이 수도사로 임명받은 뒤, 수도생활을 하면서 접하게 된 수도사들의 이야기를 앞으로 유튜브를 통해 하나씩 소개하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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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21

죽음 이후의 세계와 중간영계 : 천국과 지옥은 가는 장소이기 전에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2강의 출발점은 매우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강사는 우리가 흔히 죽은 사람을 곧바로 ‘천국에 갔다’고 표현하지만, 실제 영계에는 그보다 훨씬 세밀한 질서와 과정이 있다고 설명하면서 강의를 시작합니다. 이 문제의식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매우 반갑게 만날 수 있는 지점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람이 육체의 죽음과 동시에 곧바로 최종적인 천국이나 지옥의 공동체에 정착한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먼저 영들의 세계, 곧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영계에 들어가며, 거기서 지상생활 동안 형성된 내적 상태가 점차 드러나는 과정을 거칩니다. 따라서 이 강의가 죽음 이후의 세계를 단순히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는 두 공간으로만 보지 않고 그 사이의 과정과 질서를 설명하려 한다는 점은 중요한 장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처음부터 하나의 중요한 기준을 세워 둘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간영계는 구원 여부를 다시 결정하는 두 번째 기회의 장소가 아닙니다. 사람이 지상에서 형성한 지배적 사랑이 사후에 점차 드러나는 곳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차이입니다. 사람은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자유와 이성 가운데 선과 악을 선택하고, 반복된 선택을 통하여 자기 사랑의 방향을 형성합니다. 육체가 죽는다고 그 사람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육체와 사회적 환경 때문에 가려져 있던 그의 참된 내면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중간영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새로운 사람을 만드는 일’이라기보다 지상에서 이미 되어 온 사람이 ‘실제로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내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죽음에 관한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을 크게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는 흔히 죽음을 하나의 거대한 경계선으로 생각합니다. 이쪽에서는 지상의 삶을 살다가 죽는 순간 갑자기 전혀 다른 영적 세계로 옮겨지고, 그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천국이나 지옥으로 배치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랑의 형성’입니다. 죽음은 사람의 지배적 사랑을 바꾸는 사건이 아니라 그것을 가리고 있던 자연적 몸을 벗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영원을 준비하는 가장 중요한 시간은 바로 지금의 지상생활입니다.

 

강사가 영계의 여러 영역과 상태를 설명하려는 이유도 결국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죽은 뒤 곧바로 모든 것이 단순하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실제 내적 상태가 드러나는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과정을 어떤 복잡한 사후 행정 절차처럼 이해하지 않습니다. 영계에서는 외적 조건보다 내적 사랑이 질서를 결정합니다. 같은 사랑을 가진 영들은 서로를 끌어당기고, 서로 반대되는 사랑을 가진 영들은 함께 머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최종적으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는 것은 외부에서 강제로 어느 장소에 배치되는 것이라기보다 그 사람이 사랑하는 것에 따라 자기에게 맞는 공동체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상태’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분명 실제 영계의 공동체와 장소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장소를 결정하는 것은 상태입니다. 천국에 있는 천사가 천국적인 이유는 천국이라는 좌표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의 선을 사랑하는 천국적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지옥의 영이 지옥적인 이유도 어떤 지하 공간에 갇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질서 밖에서 지배적 사랑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영계의 공간은 내적 상태와 상응합니다. 자연계에서는 서로 미워하는 두 사람이 같은 방에 앉아 있을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내적 상태가 완전히 드러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다른 사랑들은 오래 함께 머물 수 없습니다.

 

이 원리는 죽음 이후의 심판도 매우 다르게 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생애를 장부처럼 검토하신 뒤 ‘너는 천국’, ‘너는 지옥’이라고 외적으로 판결하시는 장면만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모든 심판은 주님의 신적 질서 아래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심판의 핵심은 사람의 실제 사랑이 드러나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향하여 갑니다. 선을 사랑하는 사람은 선이 있는 곳에서 숨을 쉬듯 편안함을 느끼고, 악을 사랑하는 사람은 천국의 선과 진리를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에는 놀라운 역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도 지옥으로 던지고 싶어 하지 않으시지만, 악을 자기 생명으로 만든 영은 천국에 머무는 것을 오히려 고통스럽게 느낍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구원’이라는 말도 훨씬 깊어집니다. 구원은 단순히 죽은 뒤 지옥 대신 천국이라는 좋은 장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을 억지로 천국 한가운데 데려다 놓는다고 해서 그가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의 모든 기쁨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숨 막히는 상태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지상에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것은 단순히 ‘천국 입장 자격’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사랑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사경회가 계속 강조하는 ‘연단’의 의미도 중요해집니다. 강사는 지상의 삶을 사람이 영원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보고, 여러 시험과 고난을 통하여 죄와 정욕이 다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매우 귀합니다. 신앙을 단순한 교리적 동의나 일회적 결단에 머물게 하지 않고 실제 사람의 변화와 연결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 역시 거듭남 없는 천국을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연단의 목적을 ‘천국에 들어갈 점수를 쌓는 것’이나 ‘특별히 높은 영적 등급에 도달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연단과 시험의 목적은 사랑의 질서가 바뀌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분노한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처음에는 그는 자기 분노를 정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이 잘못했으니 내가 화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면서 자기 분노 안에 있는 지배욕과 자기애를 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분노가 올라올 때 그것을 자기의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거절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싸움이 반복되면서 어느 순간 그는 단순히 화를 참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선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으로 조금씩 변화됩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외적 행동의 억제에서 시작하여 사랑 자체의 질서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얼마나 많은 시험을 통과했는가?’가 아니라 ‘그 시험을 통하여 내 사랑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입니다. 고난을 많이 겪었다고 자동으로 거듭나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 때문에 오히려 더 완고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고난 가운데 자기 힘의 한계를 알고 주님을 의지하며 다른 사람의 아픔을 더 이해하게 된다면 그 고난은 거듭남의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고난 자체를 사랑하시거나 고난을 목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허용된 어려움까지도 가능한 한 영원한 선을 위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강의에서 다루는 중간영계의 의미도 이 관점에서 보면 더욱 명확해집니다. 중간영계에서는 사람이 지상에서 쌓아 놓은 외적 모습이 점차 벗겨집니다. 지상에서는 신분, 직책, 학력, 명성, 말솜씨, 종교적 지식 등이 사람의 실제 내면을 가릴 수 있습니다. 목회자라고 해서 반드시 내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며, 평범한 성도라고 해서 영적으로 낮은 것도 아닙니다. 매우 경건한 언어를 사용하면서 내적으로는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품을 수도 있고, 신학적 지식은 많지 않아도 진실하게 이웃의 선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연계에서는 이 둘을 정확히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후에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중간영계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가 바로 외적 사람과 내적 사람의 일치입니다. 사람은 점차 자기가 실제로 사랑하는 것을 그대로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게 됩니다. 위선적 외피를 계속 유지할 수 없습니다. 선한 사람에게는 외적 결함과 잘못된 관념들이 제거되면서 그 안에 있던 선이 더 자유롭게 드러나고, 악한 사람에게는 외적으로 선하게 보이게 했던 위장과 억제가 벗겨지면서 그가 실제로 사랑했던 악이 드러납니다.

 

이것은 두려운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매우 위로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두려운 이유는 우리가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모습으로 영원을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로가 되는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의 외적인 미숙함만 보고 판단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리를 잘못 알고 있을 수 있고, 성격적으로 거칠거나 표현이 서툴 수도 있으며, 여러 약점 때문에 외적으로 완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진심으로 주님을 향하고 선을 사랑한다면 주님께서는 그 선을 보십니다. 사후에는 선과 어울리지 않는 거짓과 결함이 제거되고 그 사람 안의 참된 선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매우 바른 교리를 알고 경건한 말을 하며 종교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라도 그 모든 것을 자기 명예와 지배를 위해 사용했다면 사후에는 그 내적 사랑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심판의 중심은 ‘무엇을 알고 있었는가?’만이 아니라 ‘무엇을 사랑했는가?’입니다. 물론 진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목적은 선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면서 그 진리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지배하는 데 기쁨을 느낀다면 진리가 오히려 proprium의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점은 이 사경회처럼 영적 성숙과 성결을 강하게 강조하는 전통을 바라볼 때도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수도적 훈련, 금식, 기도, 말씀 공부, 자기부인, 절제는 모두 귀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그 자체로 천국적 상태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그 모든 훈련을 통하여 자기애가 약해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깊어져야 합니다. 오래 기도한 결과 다른 사람에게 더 온유해졌는가, 많은 말씀을 배운 결과 자기 판단을 덜 절대화하게 되었는가, 절제와 자기부인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더 품게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수도적 훈련의 참된 열매는 ‘나는 많이 훈련받은 사람’이라는 자기의식이 아니라 체어리티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강사가 영계의 여러 상태를 세밀하게 구분하려는 노력과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 사이에는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차이도 있습니다. 영계의 구조를 많이 아는 것 자체가 영적 성숙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게 천국과 영들의 세계와 지옥을 기록했지만, 그 목적은 사람들에게 사후세계에 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모든 설명은 결국 ‘그러므로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로 돌아옵니다. 천국의 공동체를 백 가지 알아도 이웃을 미워한다면 그 지식은 사람을 천국적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오히려 영계에 관한 참된 지식은 현재의 삶을 비추어야 합니다. ‘사후에는 같은 사랑을 가진 영들이 서로 모인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가장 즐거운가?’를 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험담하고 우월감을 나눌 때 즐거운가, 아니면 선한 쓰임과 진리를 나눌 때 즐거운가? ‘사후에는 내적 상태가 드러난다’는 것을 알았다면 ‘나는 지금 사람들에게 보이는 나와 주님 앞의 내가 얼마나 같은가?’를 물어야 합니다. 영계의 지식은 이렇게 자기 성찰로 이어질 때 비로소 생명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공용복 선생 시절부터 이 사경회가 강조해 온 실제적인 자기부인과 연단의 전통을 이해하는 데도 좋은 접점을 제공합니다. 이 전통의 가장 귀한 부분은 영계를 많이 아는 데 있지 않고,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 삶으로 살아내려 했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핵심진리’를 반복해서 배우는 목적도 결국 그 진리가 사람의 삶이 되는 데 있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 전통을 바라볼 때에도 먼저 그 열망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연단의 목표가 자기 완성이나 영적 특권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임을 더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중간영계라는 개념은 여기에서 우리에게 아주 실제적인 질문 하나를 던집니다. ‘지금 나에게서 모든 외적 조건이 벗겨진다면 무엇이 남을 것인가?’ 목사라는 직함도, 수도사라는 이름도, 교단도, 학력도, 책도, 블로그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도 모두 사라지고 오직 내가 실제로 사랑하는 것만 남는다면 나는 어떤 사람일 것인가? 이것이 사후세계에 관한 질문이면서 동시에 오늘의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국에서는 인간의 진정한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분명해집니다. 자연계에서는 외적인 조건들이 우리를 규정하지만 영계에서는 사랑이 우리를 규정합니다. 그래서 천국의 천사들은 모두 서로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획일적인 인간을 만들지 않으십니다. 각 사람의 고유한 성향과 재능과 경험을 정결하게 하여 고유한 쓰임으로 만드십니다. 거듭남은 ‘나’를 없애는 과정이 아니라 proprium의 지배를 제거하여 주님께서 처음부터 의도하신 참된 ‘나’가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자기부인이라는 말도 새롭게 이해하게 합니다. 자기부인은 인격과 개성과 자유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보다 자기를 앞세우는 proprium의 지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자기부인은 사람을 무색무취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자유롭고 고유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천국에서 모든 천사가 서로 다른데도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두가 같아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르면서도 중심이 한 분 주님이시기 때문에 하나가 됩니다.

 

따라서 2강의 첫 부분에서 다루는 ‘죽음 이후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주는 가장 깊은 대답은 단순히 ‘먼저 중간영계로 갑니다’가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대답은 ‘사람은 자기가 되어 온 사랑의 상태로 들어갑니다’입니다. 중간영계는 그 사랑이 드러나는 과정이고, 천국과 지옥은 그 사랑이 완전히 자기에게 맞는 공동체를 찾은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죽음 이후의 세계를 준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영계의 지도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사랑이 천국의 질서를 향하도록 주님의 도움 가운데 거듭나는 것입니다.

 

2강 1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단순하게 천국이나 지옥이라는 최종 장소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중간영계에서 지상생활 동안 형성된 내적 사랑과 실제 성질이 드러나는 과정을 거친다는 강사의 문제의식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와 중요한 접점을 가지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과정을 사후에 구원의 기회를 다시 얻는 과정이나 외부적 심사 절차라기보다 자연계에서 자유롭게 형성한 지배적 사랑이 외적 가림을 벗고 드러나 그 사랑과 상응하는 공동체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따라서 천국과 지옥을 단순한 사후의 장소보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또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지배하는 영원한 생명의 상태로 보며, 결국 사후세계에 관한 모든 지식의 목적도 ‘죽은 뒤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호기심보다 ‘나는 지금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되어 가고 있는가?’라는 거듭남의 질문으로 돌아가야 함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2강의 첫 문을 열면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영계의 복잡한 구조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람은 죽어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 오히려 자신이 실제로 사랑해 온 사람이 됩니다. 지상에서는 감출 수 있었던 것이 영계에서는 드러나고, 억지로 유지하던 것은 벗겨지며, 실제로 사랑했던 것이 삶 전체를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영원을 준비하는 일은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기 전에 사랑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보면 ‘연단’도, ‘광야’도, ‘자기부인’도, 이후 2강에서 계속 등장하게 될 ‘흰옷’, ‘할례’, ‘생명과’, ‘감추인 만나’, ‘새 이름’, ‘이긴 자’도 결국 하나의 질문 아래 놓입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하여 내 사랑의 중심이 정말 달라지고 있는가?’입니다. 자기애가 조금씩 물러나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면, 바로 거기서부터 천국은 사후의 먼 장소가 아니라 이미 한 사람 안에서 시작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2

세 천국과 새 예루살렘’ : 천국의 높고 낮음은 계급이 아니라 사랑의 차이입니다

2강의 흐름은 사람이 죽은 뒤 중간영계에서 자신의 내적 상태가 드러난다는 설명에서, 그 이후 천국의 구조와 그 안에서 서로 다른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강사는 천국이 단순히 하나의 동일한 공간이 아니라 서로 다른 단계와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하고, 특히 ‘새 예루살렘 성’과 ‘만국’을 구별하면서 지상에서 더 깊은 성결과 연단을 통과한 ‘이긴 자’, 곧 ‘처음 익은 열매’가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고 다른 구원받은 성도들은 만국에 속하게 된다는 구조를 제시합니다. 여기에는 2강 전체를 관통하는 강사의 중요한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구원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사람의 영원한 상태가 똑같아지는 것은 아니며, 지상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았고 얼마나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변화되었는가는 사후의 상태와도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의식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을 획일적인 하나의 세계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천국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공동체가 있으며, 크게는 세 천국으로 구별됩니다. 가장 내적인 천적 천국, 그 다음의 영적 천국, 그리고 보다 외적인 자연적 천국입니다. 이것은 천국에 실제적인 질서와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고 구원받으면 모두 완전히 동일한 천국 상태가 된다’는 식의 단순한 천국관보다, 강사가 지상에서 형성된 영적 상태와 사후 상태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통찰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차이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세 천국의 차이는 ‘누가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해서 높은 등급을 획득했는가’라는 공로적 서열이 아닙니다. 더구나 천국 안에서 어떤 사람들은 특별히 성공한 신자들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보다 덜 성공한 신자들이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세 천국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사람이 어떤 방식과 깊이로 받아들이는가에 따른 서로 다른 영적 상태입니다. 가장 내적인 천적 천국의 천사들은 주님 사랑의 선을 가장 깊은 차원에서 받아들이며, 영적 천국의 천사들은 이웃 사랑의 선과 그에 속한 진리를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자연적 천국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기 상태에 맞게 받아들입니다. 모두가 천국에 있으며 모두가 자기 상태 안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립니다.

 

따라서 ‘높은 천국’이라는 말을 자연계의 계급 개념으로 이해하면 곧바로 오해가 생깁니다. 지상에서는 높은 자리가 더 많은 권력과 명예와 특권을 뜻합니다. 그래서 ‘첫째 천국’, ‘둘째 천국’, ‘셋째 천국’이라고 하면 자연적 사고는 곧 일등석, 이등석, 삼등석 같은 그림을 만듭니다. 그러나 천국은 정반대입니다. 더 내적인 천국에 있을수록 자기 자신을 더 낮게 여기며, 모든 선과 지혜와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지각합니다. 더 높다는 것은 더 많은 특권을 소유한다는 뜻이 아니라 더 깊이 사랑하고 더 자유롭게 섬긴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천국 질서와도 정확히 맞닿습니다. 세상에서는 높은 자가 다른 사람을 지배하지만, 주님의 나라에서는 큰 자가 섬기는 자가 됩니다. 따라서 천국에서 가장 높은 천사는 자기 자신을 가장 위대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천사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에게 아무 선도 없고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가장 깊이 인정하는 천사입니다. 이것이 천국적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영적 체계가 사람으로 하여금 ‘나는 다른 신자보다 높은 단계에 있다’는 의식을 강화한다면, 바로 그 순간 그 체계는 천국의 높음을 자연계의 높음으로 바꾸어 놓을 위험이 있습니다.

 

강사가 말하는 ‘처음 익은 열매’와 ‘이긴 자’도 이 원리 안에서 조심스럽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상에서 더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고 더 깊은 연단을 통과하며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강조하는 것은 귀합니다. 문제는 그것을 하나의 고정된 영적 계급으로 만들 때입니다. ‘일반 성도’가 있고, 그 위에 ‘광야 성도’가 있으며, 그 위에 ‘이긴 자’ 또는 ‘처음 익은 열매’가 있다는 식으로 사람들을 배열하기 시작하면, 원래 자기부인을 위해 시작된 영성이 오히려 새로운 proprium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는 아직 일반 성도가 아니라 이긴 자의 반열에 들어갔다’는 의식 자체가 매우 정교한 영적 자기애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사람을 외부에서 이렇게 등급화하는 데 매우 신중합니다. 한 사람의 실제 영적 상태를 아시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외적으로 대단한 수도적 훈련이나 특별한 체험이 없어 보여도 오랜 세월 자기에게 맡겨진 가족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일하며, 다른 사람의 유익을 자기 유익보다 앞세우고, 자기 잘못을 인정하며 살아왔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오랜 금식과 기도와 많은 영적 체험을 말하는 사람이 내적으로는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나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사랑을 품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자연계에서는 이 둘의 실제 내적 상태를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외적인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삶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사랑은 행위를 통하여 형태를 얻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실제로 행하면서 그 사랑을 자기 생명으로 만듭니다. 따라서 천국의 차이는 임의적인 보상의 차이가 아니라 지상에서 자유롭게 형성된 사랑의 차이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더 좋은 천국을 상으로 주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덜 좋은 천국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은 자신이 주님의 인도 아래 받아들인 선의 질에 가장 완전하게 맞는 천국 공동체에서 살아갑니다.

 

여기에는 매우 아름다운 원리가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아무도 다른 사람의 천국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자연계에서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높은 자리에 있거나 더 많은 것을 가지면 비교와 질투가 생기지만, 천국에서는 각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선과 쓰임 안에서 충만한 기쁨을 누립니다. 눈이 손을 부러워하지 않고 귀가 눈이 되려고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각 기관이 자기 기능을 충실히 수행할 때 몸 전체가 하나가 됩니다. 천국 역시 하나의 ‘가장 큰 사람’, 곧 막시무스 호모(Maximus Homo)의 형태를 이루며, 수많은 공동체가 서로 다른 기관과 기능처럼 하나의 주님 아래 조화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다양성은 불평등이 아니라 완전한 질서입니다. 모든 천사가 똑같다면 오히려 천국은 천국일 수 없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선은 무한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형태 역시 무수히 다양합니다. 어떤 공동체는 지혜와 관련된 선을 더 뚜렷하게 나타내고, 어떤 공동체는 순진함과 관련된 선을, 어떤 공동체는 서로를 돌보고 섬기는 특정한 쓰임의 선을 나타냅니다. 그 모든 다양성이 서로 경쟁하지 않고 하나의 주님을 중심으로 조화를 이룰 때 천국의 아름다움이 이루어집니다.

 

이 관점은 강사가 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을 특정한 이긴 자들이 들어가는 가장 높은 영역으로 설명하는 부분에도 중요한 보완을 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새 예루살렘’은 근본적으로 어떤 특별한 천국 도시의 명칭이기 전에 ‘새 교회’를 의미합니다. 계시록 마지막에 하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주님께서 이전 교회의 종말 이후 세우시는 새로운 교회를 표상합니다. 그 성의 성벽과 문과 기초석과 길과 생명수의 강과 생명나무까지 모두 새 교회의 선과 진리, 교리와 삶의 여러 측면을 상응적으로 나타냅니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는 사람’과 ‘성 밖 만국에 있는 사람’을 곧바로 천국의 상위 계급과 하위 계급으로 나누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계시록의 도시는 자연적 도시가 아니라 교회의 교리와 질서를 표상하고, ‘성 안’과 ‘성 밖’ 역시 단순한 지리적 위치보다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특히 계시록을 문자적 영계 지도로 바꾸어 읽기 시작하면 금으로 된 거리, 열두 문, 열두 기초석, 성의 길이와 너비와 높이 같은 모든 것을 자연적 구조물로 설명해야 하는 어려움이 생깁니다. 그러나 상응으로 읽으면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완전한 영적 체계를 이룹니다.

 

예루살렘이 말씀에서 교회를 표상하는 이유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연적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었고, 성전에서는 여호와를 예배했으며, 이스라엘의 종교생활이 그곳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은 말씀의 속뜻에서 주님을 예배하는 교회, 특히 교회의 교리와 관련됩니다. 그렇다면 ‘새 예루살렘’은 새로운 도시 건설보다 새로운 교회의 형성을 뜻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참된 교회의 교리와 생명이 인간의 지성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로부터 내려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라는 작업 자체에도 매우 중요한 원리를 줍니다. 새 교회는 스베덴보리라는 한 사람을 높이는 교회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술도 목적은 자신을 중심에 세우는 데 있지 않고 말씀의 속뜻을 열어 주님을 더 분명하게 보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의 중심은 어떤 인간적 교리 체계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계시록이 마지막에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모든 교리와 모든 진리의 목적은 결국 주님과의 결합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강사가 ‘이긴 자’를 강조하는 것도 한 단계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긴 자가 특별한 천국 도시의 특권적 주민이 되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주님의 나라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핵심입니다. 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이 새 교회를 나타낸다면, 개인적 차원에서는 그 교회의 질서가 한 사람 안에 세워지는 것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거짓이 물러가고 진리가 그의 생각을 다스리며, 자기애가 물러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그의 의지를 다스리기 시작할 때, 그 사람 안에도 일종의 ‘새 예루살렘’의 질서가 세워집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나는 그 성 안에 들어갈 등급인가?’가 아닙니다. ‘그 성이 나타내는 주님의 질서가 지금 내 안에 세워지고 있는가?’입니다. 이것은 작은 차이처럼 보이지만 영성의 방향을 완전히 바꿉니다. 전자의 질문은 자칫 자기의 영적 위치에 관심을 갖게 하지만, 후자의 질문은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보고 주님의 질서를 받아들이게 합니다. 전자는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를 묻고, 후자는 ‘주님께서 내 안에서 무엇을 이루고 계시는가?’를 묻습니다.

 

강사가 천국의 여러 상태를 설명하면서 지상의 삶을 중요하게 보는 것은 그래서 귀합니다. 사람은 사후에 아무런 관계도 없는 천국 상태를 갑자기 받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살아가는 방식이 영원의 형태를 만들어 갑니다. 그러나 여기서 ‘행위’ 역시 공로적 점수가 아니라 사랑의 표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신다’고 하실 때, 외적인 행위의 숫자만 세시는 것이 아닙니다. 행위 안에는 의지와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헌금도 사랑에서 할 수 있고 명예욕에서 할 수 있으며, 같은 설교도 영혼의 선을 위해 할 수 있고 자기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할 수 있습니다. 영계에서는 그 내적 질이 드러납니다.

 

이 점에서 천국의 ‘상급’이라는 말도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을 행한 대가로 외부에서 보너스처럼 주어지는 것이 천국의 상급이 아닙니다. 선 자체 안에 기쁨이 있습니다. 이웃의 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이 잘되는 것을 보는 것 자체에서 기뻐합니다. 쓰임을 사랑하는 사람은 쓰임을 행하는 것 자체에서 행복합니다. 이것이 천국적 상급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더 높은 천국의 상태는 더 많은 특권을 받는 상태가 아니라 더 깊은 선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선 자체에서 더 내적인 기쁨을 누리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수도적 연단과 성결을 추구하는 목적도 더욱 선명해집니다. ‘나는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야 한다’, ‘나는 처음 익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는 목표가 사람에게 강한 동기를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목표 안에 ‘다른 성도보다 높은 곳에 가겠다’는 사랑이 섞이는 순간 천국적 목적과 충돌합니다. 천국에서는 높아지고 싶은 사람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져 섬기기를 기뻐하는 사람이 더 내적인 선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연단은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한 훈련이 아니라 높은 자리를 원하던 자기애에서 자유로워지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긴 자’라는 표현의 역설을 보게 됩니다. 세상에서 이긴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앞선 사람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이긴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긴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주님의 힘으로 거절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승자는 자기 이름을 높이지만, 천국의 승자는 모든 승리를 주님께 돌립니다. 세상에서 높은 사람은 섬김을 받지만, 천국에서 높은 사람은 섬기는 데서 기쁨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이기는 자’를 세상의 승자 개념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시흥영성수련원의 오랜 수도적 전통을 바라볼 때에도 매우 소중한 분별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이어진 기도와 절제와 연단, 자기부인의 전통이 귀한 이유는 그것이 사람을 특별한 영적 계급으로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자기 중심성을 내려놓고 주님과 이웃을 향하도록 돕는다면 귀한 것입니다. 수도적 삶의 가장 아름다운 열매는 ‘나는 남들과 다르다’가 아니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깊은 겸손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겸손은 반드시 다른 사람을 향한 온유와 체어리티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천국의 세 단계와 수많은 공동체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천국의 질서를 아는 것입니다. 그 질서는 ‘더 높은 자가 더 많이 소유한다’가 아니라 ‘더 깊이 사랑하는 자가 더 많이 섬긴다’는 질서입니다. 이것은 자연계의 질서를 뒤집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천국은 천국입니다. 자기 높임이 사라지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모든 관계의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2강 2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구원받은 모든 사람의 사후 상태가 획일적으로 동일한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형성된 영적 상태에 따라 차이가 있으며, 특별히 연단을 통과하여 이긴 자와 처음 익은 열매가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고 다른 구원받은 성도들은 만국에 속한다는 강사의 설명은 천국에 실제적인 상태의 차이와 질서가 있다는 점에서는 중요한 통찰을 지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천적·영적·자연적 세 천국의 차이를 영적 공로에 따른 상·중·하 계급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랑의 질과 깊이의 차이로 이해하고, ‘새 예루살렘’ 역시 특별한 영적 엘리트가 거주하는 천국의 최상위 도시라기보다 주님에게서 내려오는 신적 진리와 그 진리에 따른 삶으로 이루어진 새 교회를 표상하는 것으로 보며, 따라서 참된 ‘이긴 자’란 다른 성도보다 높은 위치를 획득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여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기 생명의 중심이 되어 가는 사람이라고 이해할 때 천국의 질서와 새 예루살렘의 아르카나가 더욱 깊게 열립니다.’

 

결국 천국의 높고 낮음을 결정하는 것은 ‘얼마나 특별한 사람이 되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였는가?’입니다. 천국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천사가 자신을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이미 그 상태에 있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주님 가까이 있는 존재일수록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고 싶다’는 소망의 가장 깊은 형태는 ‘가장 높은 천국에 가고 싶다’가 아니라 ‘주님의 질서가 제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새 예루살렘’은 죽은 뒤 찾아가야 할 먼 도시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안에서 시작되는 주님의 나라가 됩니다. 자기 의가 한 걸음 물러나고 진리가 그 자리를 차지할 때, 지배하려는 사랑이 한 걸음 물러나고 섬기는 사랑이 그 자리를 차지할 때,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싶은 마음이 물러나고 그의 선을 기뻐하는 마음이 생겨날 때, 새 예루살렘의 질서가 조금씩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의 세 천국과 수많은 공동체에 관한 지식도 결국 우리를 그 한 가지 삶으로 데려가야 합니다. ‘어느 천국에 갈 것인가?’를 넘어서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를 묻게 하는 것, 바로 거기에서 영계에 관한 지식은 호기심을 넘어 거듭남의 진리가 됩니다.



2 3

흰옷과 세마포, ‘옷을 빠는 것’ : 성결은 죄를 덮어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실제로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2강의 흐름은 중간영계와 천국의 여러 상태, 새 예루살렘에 관한 설명에서 이제 계시록이 반복해서 말하는 ‘흰옷’과 ‘세마포’로 옮겨갑니다. 강사는 이 부분에서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합니다. 계시록에는 흰옷을 입은 사람들,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사람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사람들이 등장하며, 강사는 이것을 단순한 천국의 의복 묘사가 아니라 지상에서 이루어진 성결의 상태와 연결합니다. 특히 계시록 19장의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직접 설명되는 점을 중요하게 받아들여, 천국에서 입는 옷과 지상에서의 실제 삶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 방향은 2강 전체에서 강사가 붙들고 있는 핵심, 곧 구원은 입술의 신앙고백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의 변화와 성결로 나타나야 한다는 주장과 이어집니다.

 

이 문제의식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옷’은 대체로 진리를 표상합니다. 사람의 몸을 옷이 둘러싸듯, 내적인 선은 진리를 통하여 외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선은 의지와 사랑에 속하고, 진리는 그 선이 어떤 형태로 생각되고 표현되고 행해져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천사들이 입는 옷은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그들의 내적 상태와 상응합니다. 영계에서는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과 상응하기 때문에 천사의 의복 역시 그가 가진 진리의 상태에 따라 나타납니다. 더 내적인 지혜 가운데 있는 천사들의 옷은 더욱 빛나고 아름답게 보이며, 그 빛남 역시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가 선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강사가 천국의 옷을 지상에서의 삶과 연결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지상에서 선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사후에 더 좋은 옷을 상으로 받는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상응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천국의 옷은 외부에서 지급되는 포상물이 아니라 사람의 내적 상태가 외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천사가 희고 빛나는 옷을 입는 까닭은 그가 지상에서 선행 점수를 많이 쌓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선을 받아들이고 그 선에서 나오는 진리를 삶으로 살아온 결과 그 진리가 그의 생명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는 바로 그 내적 상태가 의복이라는 외적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왜 옷이 ‘희다’고 할까요? 말씀에서 흰색은 빛과 관계하고, 빛은 신적 진리와 관계합니다. 그러므로 흰옷은 정결한 진리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정결한 진리’라는 말을 단순히 ‘정확한 교리를 많이 알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거짓 교리를 버리고 참된 교리를 아는 것은 중요하지만,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사람이 진리를 많이 알면서 그것을 자기 우월감을 세우거나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지배하는 데 사용한다면, 그 진리는 그의 기억 속에는 있어도 아직 흰옷이 되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아는 것이 많지 않아도 알고 있는 진리를 따라 정직하게 살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그 진리는 그의 선과 결합되어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계시록에서 ‘세마포’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설명되는 것도 바로 이 점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행위구원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 행위가 그 자체로 인간을 구원한다는 뜻이 아니라, 내적 사랑과 신앙은 반드시 삶으로 형태를 얻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는지는 결국 그의 삶에서 드러납니다. 선을 사랑한다면서 계속 악을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친다면 그 사랑은 아직 실제 생명이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주님의 진리를 받아 악을 죄로 알고 거절하며 선을 행하려고 애쓴다면, 그 진리가 삶의 옷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사가 강조하는 ‘옷을 빠는 것’이라는 표현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계시록 7장에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고 하고, 계시록 22장에는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라고 합니다. 강사는 이 말씀들을 성도의 실제 정결과 성화의 과정으로 읽습니다. 즉 사람에게 아직 죄와 정욕과 불결함이 있으므로 그것이 씻겨야 하고, 그렇게 옷을 깨끗하게 한 사람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을 실제 정결과 연결하려는 강사의 강조는 가볍게 지나칠 부분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씻음’은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은 무엇이 씻기는가입니다. 사람이 자기 노력으로 자기 영혼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님께 합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결하게 하는 진리와 선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은 말씀을 통하여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 배우고, 그 진리의 빛 가운데 자기 악을 보며, 주님의 힘을 구하여 그 악을 거절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에는 주님의 역사와 인간의 응답이 함께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능력을 주시지만 인간은 그 능력을 받아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악과 싸워야 합니다.

 

이것은 ‘어린양의 피에 옷을 씻는다’는 역설적인 표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자연적으로 생각하면 피로 옷을 씻으면 오히려 붉게 물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계시록에서는 어린양의 피에 씻었더니 옷이 희어졌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표현 자체가 이것을 자연적 피와 자연적 세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말씀에서 주님의 ‘피’는 가장 깊은 의미에서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 특별히 인간을 구원하고 새롭게 하는 진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피에 옷을 씻는다는 것은 주님의 신적 진리를 받아 거짓과 악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 지점에서 보혈에 관한 일반적인 기독교적 표현과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의 중요한 차이도 나타납니다. ‘예수의 피가 내 죄를 덮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이제 내 죄를 보지 않으신다’는 식으로만 이해하면, 인간의 실제 내적 상태가 변하지 않아도 법적인 신분만 바뀌면 된다는 방향으로 갈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구속은 인간의 죄를 단순히 외적으로 가리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지옥을 정복하시고 인성을 신성하게 하심으로써 인간이 악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 구속의 능력을 받아 실제로 악에서 돌이키고 거듭나는 것이 구원의 삶입니다.

 

따라서 ‘옷을 씻는다’는 것은 죄가 그대로 있는데 흰 천으로 덮어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거짓된 생각과 악한 삶이 실제로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완전무결한 존재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평생에 걸쳐 진행되는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매우 외적인 악부터 보게 됩니다. 거짓말, 부정직, 음란한 행동, 폭력 같은 명백한 악을 죄로 알고 멀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그보다 더 내적인 것들이 드러납니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싶은 마음, 자기 판단을 절대화하는 태도, 선을 행하고도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는 마음 등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마치 옷의 큰 얼룩을 먼저 씻은 뒤 밝은 빛 아래에서 보니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작은 얼룩들이 새롭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이 반드시 ‘나는 이제 훨씬 깨끗한 사람이다’라는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빛이 더 밝아질수록 자기 안의 proprium이 얼마나 깊은지를 더 분명히 보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겸손으로 이어집니다. 영적으로 성숙할수록 자기의 완전함을 크게 말하기보다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점은 강사가 2강에서 계속 발전시키는 ‘완전한 성결’과 ‘이긴 자’의 개념을 바라볼 때 특히 중요합니다. 강사는 광야의 연단을 통하여 죄성이 제거되고 옷이 깨끗해진 사람을 ‘이긴 자’의 상태와 연결합니다. 여기에는 죄를 실제로 이겨야 한다는 매우 강한 윤리적 진지함이 있습니다. 신앙을 죄에 대한 면허증처럼 사용하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충분히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성결을 ‘내 안에서 죄의 가능성이 완전히 제거되어 이제 나는 죄 없는 단계에 들어갔다’는 자기 판정으로 이해한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악은 인간에게서 마치 뿌리째 뽑혀 존재하지 않게 되는 방식으로 제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악을 억제하시고 사람이 그 악에서 돌아서 선을 사랑하도록 새 의지를 형성하십니다. 인간에게 있는 유전적이고 획득된 악은 주님의 질서 아래 밀려나 지배력을 잃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의 특징은 ‘내게 이제 악이 없다’가 아니라 ‘악이 올라올 때 그것을 내 생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의 힘으로 거절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작은 차이가 아니라 성결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납니다. 자신을 ‘이미 완전히 씻긴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아직 씻기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다른 사람을 아래로 내려다볼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매 순간 주님의 진리와 선을 받아야 깨끗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안다면 다른 사람의 연약함 앞에서도 더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자신 역시 주님의 자비가 아니면 설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흰옷은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높게 보이게 하는 옷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공로를 가리고 주님의 선과 진리만 드러나게 하는 옷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의가 ‘흰옷’과 ‘세마포’를 ‘옳은 행실’과 연결하는 부분에서는 특히 ‘행실’의 내적 근원을 보아야 합니다. 같은 선행이라도 그 근원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칭찬을 받기 위해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한 거래의 마음으로 헌금할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은 자기 교회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외적 행동은 선해 보이지만 내적 목적에는 proprium이 강하게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이웃에게 필요한 일을 조용히 하고 그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지 않는다면 그 행위 안에는 전혀 다른 영적 질이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의 옳은 행실’은 단순한 행동 목록이 아니라 선한 사랑이 진리를 통하여 형태를 얻은 삶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체어리티를 단순한 자선행위로 제한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의 선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 사랑이 각 사람의 직업과 관계와 책임 속에서 올바른 쓰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는 것도, 직장에서 정직하게 맡은 일을 하는 것도, 목회자가 자기 명예보다 성도의 영적 선을 먼저 생각하는 것도, 상인이 속이지 않고 거래하는 것도 모두 체어리티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천국적 삶은 특별한 종교행위 안에만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수도적 성결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수도생활이나 사경회, 금식과 철야, 장시간의 기도는 인간이 자기 욕망을 돌아보고 말씀 앞에 자신을 세우는 귀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수단의 결과가 일상의 체어리티로 나타나야 합니다. 수련원에서 며칠 동안 깊은 은혜를 받고 돌아왔는데 가족에게는 여전히 거칠고, 교회에서는 자기 의견과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며, 사회생활에서는 정직하지 않다면 아직 옷의 정결이 실제 삶 전체로 이어졌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특별한 체험을 말하지 않아도 일상에서 점점 더 온유하고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이 되어 간다면, 그 사람의 옷은 실제로 씻기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시흥영성수련원의 오랜 수도적 전통과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상당히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자기부인과 연단을 중시하는 전통은 ‘옷을 빨아야 한다’는 계시록의 강한 요청을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믿기만 하면 되었으니 삶은 상관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소중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진지함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결의 방향을 더욱 내적으로 가져갑니다. 외적 욕망의 절제에서 더 깊이 들어가 자기 의와 영적 우월감과 공로의식까지 씻겨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마지막까지 씻겨야 하는 얼룩이 ‘나는 깨끗하다’는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육체적 욕망이나 세속적 욕심은 비교적 쉽게 악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자기 신앙이 옳다는 자부심이나 다른 사람보다 더 성숙하다는 의식은 선한 것처럼 붙들 수 있습니다. 특히 많은 기도와 연단과 성경 공부를 한 사람에게는 이 유혹이 더욱 미세하게 들어올 수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들과 다르다’, ‘나는 더 깊은 진리를 안다’, ‘나는 더 많은 대가를 지불했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종교적 proprium의 매우 깊은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장면도 이와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미 목욕한 사람은 온몸을 다시 씻을 필요는 없지만 발은 씻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에서 ‘발’은 인간의 가장 낮은 자연적 차원과 관계합니다. 사람은 주님을 알고 진리를 받아들였어도 일상생활에서 자연적 욕망과 자기중심성이 계속 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발을 씻어야 합니다. 거듭남은 한 번의 거대한 정결 체험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실제 삶에서 이루어지는 정결입니다.

 

이 원리를 알면 ‘흰옷을 입었는가, 아직 입지 못했는가?’를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여 영적 등급을 판단하기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게 됩니다. ‘오늘 내 옷에는 무엇이 묻었는가?’라고 묻게 됩니다. 오늘 누군가의 말을 듣다가 왜 그렇게 불쾌했는가,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왜 화가 났는가, 선을 행한 뒤 왜 알아주기를 바랐는가, 다른 사람의 성공을 보며 왜 마음이 불편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런 작은 순간들이 실제로 옷을 빠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옷을 씻는 물과 피, 곧 정결하게 하는 진리는 우리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비추어 주셔야 자기 상태를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빛으로 자기를 보면 대부분 자기 행동을 정당화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진리가 들어오면 이전에는 당연하게 여기던 것이 악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는 원래 성격이 이렇다’고 하던 것이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하는 자기애로 보이고, ‘나는 진리를 지키는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태도 속에 자기 의와 지배욕이 섞여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신적 진리의 씻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피로 옷을 씻는다는 것은 주님의 구속을 믿는 것과 주님의 진리에 따라 실제로 회개하는 것을 분리할 수 없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구속을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가 악과 싸울 수 있고, 그분의 신적 진리를 받아들여 악을 보고 거절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자력으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아무런 실제 변화 없이 ‘피가 다 덮었다’고 선언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시고 인간은 그 구원을 자유롭게 받아 실제 삶으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보면 흰옷과 세마포는 매우 아름다운 복음의 표상이 됩니다. 흰옷은 ‘나는 죄가 없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나를 악과 거짓에서 건져 진리 안에서 살게 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세마포가 빛나는 것은 인간의 공로가 빛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선이 진리를 통하여 삶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자기 옷을 자랑하지 않는 것처럼 거듭난 사람도 자기 성결을 자랑할 이유가 없습니다. 옷의 빛은 근원적으로 주님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2강 3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의 흰옷과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어린양의 피에 옷을 씻는 사람들과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사람들을 지상에서의 실제 성결과 옳은 행실에 연결하여, 구원은 단순한 신앙고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정욕에서 실제로 정결해지는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하는 강사의 설명은 신앙과 삶을 분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통찰을 지니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옷’을 선을 둘러싸고 표현하는 진리로, 그 옷의 ‘흰빛’을 선과 결합하여 정결해진 신적 진리의 빛으로, ‘어린양의 피에 씻음’을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를 받아 악과 거짓에서 실제로 정결해지는 거듭남으로 이해하고, 성결 역시 인간 안에서 악의 가능성이 완전히 소멸되어 스스로 완전한 존재가 되는 상태라기보다 주님의 힘으로 악을 죄로 알고 거절하면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새 의지가 점차 지배권을 얻는 과정으로 볼 때, 흰옷과 세마포의 아르카나는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구속과 인간의 실제 회개와 삶이 결합되는 더욱 깊은 의미로 열립니다.’

 

결국 흰옷에 관한 말씀 앞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나는 흰옷을 받은 특별한 사람인가?’가 아닐 것입니다. ‘주님의 진리가 오늘 내 삶의 무엇을 씻고 있는가?’입니다. 어제까지 악인 줄 몰랐던 것을 오늘 악으로 보게 되었다면 이미 빛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 거절한다면 옷을 씻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조금 더 정직함과 온유함과 체어리티가 들어온다면 옷이 조금 더 희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결의 가장 분명한 표지는 ‘나는 성결해졌다’는 자기 확신보다 사랑의 변화일 것입니다. 오래 기도할수록 더 온유해지고, 말씀을 깊이 알수록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게 되며, 연단을 많이 받을수록 약한 사람에게 더 자비로워지고, 선을 많이 행할수록 자기 공로를 덜 생각하게 된다면, 그 사람의 옷에는 주님의 빛이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성결을 말할수록 사람을 더 쉽게 등급화하고 자기 위치를 높게 여기게 된다면, 아직 씻어야 할 매우 미세한 얼룩이 남아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옷을 빠는 것’은 평생의 거듭남을 보여 주는 참으로 아름다운 형상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옷을 버리고 전혀 다른 사람의 옷을 입히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은 진리가 실제 선과 결합하도록 끊임없이 정결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진리가 기억 속의 교리에서 삶의 진리로 바뀌고, 삶의 진리가 사랑과 하나가 될수록 사람의 옷은 밝아집니다. 천국에서 빛나는 세마포는 바로 지상에서부터 시작된 그 거듭남의 삶이 영계에서 그 본래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4

영적 할례와 광야의 연단 : 제거되어야 하는 것은 가 아니라 나를 지배하려는 proprium입니다

2강의 앞부분에서 중간영계와 세 천국, 새 예루살렘, 흰옷과 세마포를 살펴본 강의는 이제 한층 더 직접적으로 ‘성결’의 문제 안으로 들어갑니다. 강사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성도를 단지 죄 사함을 받은 상태에 머물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광야의 연단을 통하여 그 안의 죄성과 정욕을 실제로 처리하시며, 이것을 구약의 ‘할례’와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육체의 할례에서 몸의 일부를 잘라 내듯 영적 할례에서도 사람 안의 죄성이 잘려 나가야 하며, 이 과정을 충분히 통과한 사람이 ‘이긴 자’가 되어 생명과와 감추인 만나를 먹고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상태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강사의 ‘핵심진리’ 체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앞에서 말한 흰옷과 세마포가 성결의 외적 형상이라면, 이제 할례와 광야는 그 성결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 강의가 죄를 단순히 ‘용서받으면 끝나는 것’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은 충분히 귀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죄의 용서와 죄에서의 실제적인 변화 사이를 구별하려 합니다. 사람이 예수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면서 여전히 자기 욕망과 정욕과 분노와 교만을 아무 거리낌 없이 따라 살아간다면 그것을 완성된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가 필요하고 ‘연단’이 필요하며 ‘할례’가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신앙이 실제 인간의 성품과 삶을 바꾸어야 한다는 이 강한 요청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구원을 단순한 법정적 선언이나 지적 신앙으로 보지 않고, 악을 죄로 알고 멀리하며 주님에게서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는 거듭남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할례’ 역시 실제로 깊은 영적 의미를 가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할례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불결한 사랑들을 제거하는 것을 표상합니다. 특별히 할례가 생식기관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도 우연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생식과 출생은 영적으로 선과 진리가 생겨나는 것, 곧 거듭남과 관계합니다. 그런데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불결한 욕망이 그 생성을 가로막습니다. 따라서 포피를 제거하는 할례는 자연적 육체의 일부를 잘라 내는 의식 자체에 궁극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거듭나기 위해 자기 안의 불결한 사랑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표상합니다. 구약의 외적 할례가 신약에서 ‘마음의 할례’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영적 할례’를 성결과 연결하는 방향은 상당히 깊은 접점을 갖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잘려 나가는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칫하면 거듭남을 ‘내 안에 있는 죄성이라는 어떤 덩어리를 완전히 잘라 내어 더 이상 악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상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사의 설명에는 때때로 이러한 이미지가 상당히 강하게 나타납니다. 광야의 연단을 충분히 통과하면 사람 안의 죄성이 제거되고, 그 결과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않은 ‘이긴 자’의 상태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죄의 지배에서 실제로 벗어나야 한다는 뜻에서는 귀하지만,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에서는 여기에 중요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의 proprium, 곧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느끼는 고유한 것은 그 자체로 자기애와 거짓에 기울어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인간의 인격이나 개성, 자유와 이성을 제거하여 ‘나’를 없애는 과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proprium을 억지로 파괴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악으로 보고 자유롭게 거절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의지, 곧 천국적 proprium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의 질서를 형성하십니다. 사람은 여전히 자기 의지로 사랑하고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며 자기 손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느끼지만, 거듭날수록 모든 선한 의지와 참된 생각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영적 할례에서 잘려 나가야 할 것은 인간의 ‘자기’ 자체가 아니라, 그 자기를 주님에게서 독립된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게 하는 proprium의 지배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자기를 죽인다’, ‘자아가 죽어야 한다’, ‘나는 없어져야 한다’는 표현을 문자적으로 밀어붙이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고유성과 자유까지 부정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을 없애기 위해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인간답게 만들기 위해 거듭나게 하십니다. 자기애와 거짓이 지배할수록 인간은 오히려 노예가 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일수록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됩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천국의 다양성과도 연결됩니다. 천국에 들어간다고 모든 사람이 똑같은 성격과 똑같은 생각과 똑같은 모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각 천사는 자연계에서보다 훨씬 더 뚜렷한 고유성을 가집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개성을 없애지 않으시고 정결하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주신 따뜻함, 어떤 사람에게 주신 치밀함, 어떤 사람에게 주신 용기와 추진력, 또 어떤 사람에게 주신 섬세함과 사려 깊음은 제거되어야 할 ‘자아’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모든 것이 자기애를 섬기는가, 주님과 이웃의 선을 섬기는가입니다. 강한 추진력이 지배욕의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쓰임을 위한 힘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말솜씨가 자기 명예의 수단이 될 수도 있고 진리를 전달하는 쓰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영적 할례는 그 능력 자체를 잘라 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사용하려는 불결한 사랑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과정에서 ‘광야’가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광야는 매우 복합적인 표상을 갖지만, 거듭남의 문맥에서는 시험과 정화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뒤 곧바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고 광야를 통과했던 것처럼, 사람도 악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겠다고 결심했다고 해서 곧바로 천국적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애굽에서 몸은 나왔지만 애굽의 욕망은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그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시작한 인간의 모습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도 이전의 욕망을 여전히 그리워합니다.

 

그래서 광야는 단순한 고생의 장소가 아니라 사람의 실제 사랑이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모든 일이 잘될 때에는 누구나 자기가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뜻과 반대되는 일이 일어나고, 인정받지 못하고, 계획이 무너지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기다려야 할 때 비로소 무엇을 실제로 사랑하는지가 드러납니다. ‘나는 주님의 뜻을 원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했는지, ‘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 사람이 나를 인정해 주기를 원했는지가 시험 가운데 드러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는 주님께서 인간을 괴롭히시는 장소가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도 감추어져 있던 proprium이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든 고난을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내신 ‘연단 프로그램’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자연계에는 인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생기는 고통도 있고, 다른 사람의 악으로 인한 고통도 있으며, 질병과 사고와 자연적 조건에서 오는 고통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악이나 고통 그 자체를 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신적 섭리는 그것들을 허용하시되, 허용된 것 가운데서도 가능한 한 인간의 영원한 선을 이루도록 역사합니다. 따라서 ‘고난이 많을수록 영적으로 높은 사람’이라는 생각도 경계해야 합니다. 고난의 양이 거듭남의 깊이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자유롭게 응답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수도적 연단을 이해하는 데 특히 중요합니다. 금식하고, 절제하고, 편안함을 포기하고, 일정한 규율 아래 자신을 훈련하는 것은 proprium을 드러내는 매우 유익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먹지 못할 때 짜증이 올라오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 불평이 나오며,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아야 할 때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보면서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자기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적 규율은 일종의 거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편함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굶었다는 사실, 잠을 적게 잤다는 사실, 오랜 시간 기도했다는 사실이 자동으로 영적 할례를 이루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외적 고행을 많이 한 뒤 ‘나는 이만큼 대가를 치렀다’는 의식이 생긴다면 proprium은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을 뿐 여전히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세속적 자랑은 버렸는데 영적 자랑이 생기고, 돈에 대한 우월감은 버렸는데 기도시간에 대한 우월감이 생기며, 사회적 지위 대신 영적 단계로 사람을 비교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겉으로는 자기를 부인했지만 훨씬 더 미세한 proprium이 살아남은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주님께서는 외적인 악뿐 아니라 종교적 proprium까지 보여 주십니다.

 

이 점에서 영적 할례는 단 한 번의 사건이라기보다 거듭남 전체를 관통하는 원리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비교적 거친 욕망을 잘라 냅니다. 명백한 부정직과 음란, 폭력, 탐욕 같은 것들을 죄로 알고 멀리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더 미세한 것들이 드러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 자기 의견을 관철하려는 마음, 자신이 옳다는 데서 느끼는 쾌감, 선을 행하고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면 ‘나는 이제 상당히 거듭났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기의식까지 다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영적 할례의 결과는 ‘이제 내 안에는 죄성이 없다’는 자신감보다 겸손에 가깝습니다. 주님의 빛이 밝아질수록 자기 안에 얼마나 많은 것이 주님의 질서와 어긋나 있는지를 더 잘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망으로 이어지는 자기혐오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은 인간에게 자기 자신을 미워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나온 악을 악으로 인정하면서도 주님께서 새로운 생명을 주실 수 있음을 신뢰하게 합니다. 자기혐오는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을 수 있지만, 참된 회개는 시선을 주님께 돌립니다.

 

여기에서 강사가 말하는 ‘죄성이 제거된다’는 표현을 가장 선하게 받아들이는 방법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인간에게서 악의 모든 가능성이 존재론적으로 사라진다는 뜻보다, 이전에 인간을 지배하던 악이 더 이상 지배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훨씬 가까워집니다. 예전에는 분노가 올라오면 곧바로 그것을 정당화하고 행동했지만,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분노가 올라와도 ‘이것은 주님의 질서가 아니다’라고 보고 거절할 수 있게 됩니다. 악한 충동이 전혀 떠오르지 않아서 선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악임을 알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선한 것입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거듭난 사람에게 악한 생각이 다시 올라오는 것 자체를 ‘아직 죄성이 제거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면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내면을 검사하며 불안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이 있다는 사실은 반드시 거듭남의 실패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험은 선과 진리가 어느 정도 자리 잡았기 때문에 반대되는 악과 거짓이 충돌하면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영적 싸움이 있다는 것은 두 세력이 모두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며, 그 가운데 인간은 주님의 힘을 받아 어느 쪽에 동의할 것인지 자유롭게 선택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시험을 중요하게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시험을 통하여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더 깊이 결합됩니다. 진리를 단지 알고 있을 때와 그 진리를 지키기 위해 실제 욕망과 싸워 본 뒤에는 그 진리의 깊이가 다릅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을 아는 것과, 실제로 나를 깊이 상하게 한 사람을 앞에 두고 복수하고 싶은 욕망과 싸우면서 용서를 선택하는 것은 다릅니다. 후자의 과정에서 진리는 단순한 기억 지식에서 삶의 진리로 내려옵니다. 이것이 시험이 거듭남에 쓰이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광야는 반드시 ‘특별한 수도생활’에서만 경험되는 것도 아닙니다. 일상생활 자체가 거대한 광야가 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배우자와 부딪힐 때, 자녀 때문에 자기 계획을 포기해야 할 때,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정직을 지켜야 할 때, 교회에서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묵묵히 해야 할 때, 그 모든 순간에 proprium이 드러납니다. 오히려 일상은 도망갈 수 없기 때문에 매우 실제적인 영적 훈련장이 됩니다.

 

이것은 수도생활과 일상생활을 경쟁시키려는 뜻이 아닙니다. 수도적 환경은 집중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말씀과 기도에 전념할 수 있는 귀한 장점이 있고, 일상생활에는 관계와 책임 속에서 사랑을 실제로 살아야 하는 고유한 시험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이 이루어지는가입니다. 수도원 안에서도 proprium을 키울 수 있고, 시장과 직장과 가정에서도 깊이 거듭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특정한 생활양식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사랑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광야에서의 ‘죽음’이라는 표현도 조심스럽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죽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가 아니라 자기애의 지배입니다. ‘내 뜻대로 되어야 행복하다’,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야 가치가 있다’, ‘내 판단이 옳아야 한다’, ‘내가 한 선은 내 공로다’라는 proprium의 주장들이 하나씩 힘을 잃어 가는 것이 영적 죽음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생명이 살아납니다. 그래서 거듭남에는 죽음과 부활이 동시에 있습니다. 옛사람이 약해지고 새사람이 강해집니다.

 

그러므로 자기부인은 자기파괴가 아닙니다. 참된 자기부인은 오히려 인간을 자기애의 감옥에서 해방합니다. 인정받아야만 행복한 사람은 사람들의 평가에 묶여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어야 평안한 사람은 환경의 노예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높아야 만족하는 사람은 끊임없는 비교 속에 삽니다. 그러나 이런 proprium의 요구가 약해지면 사람은 훨씬 자유로워집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되어도 기뻐할 수 있고,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평안을 잃지 않으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천국적 자유입니다.

 

그리고 이 자유는 인간의 의지력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 악을 거절해야 하지만, 실제 이기는 힘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균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주님이 다 하시니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사라지고, ‘내가 연단해서 내 죄성을 제거한다’고 하면 자기 공로가 들어옵니다. 거듭남에서는 사람이 싸우지만 주님께서 이기십니다. 사람은 문을 열지만 생명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긴 자’라는 말도 다시 빛을 얻습니다. 이긴 자는 영적으로 강한 자기 자신을 완성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힘으로는 악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알고 주님의 힘을 받아 악을 거절하는 법을 배운 사람입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내가 이겼다’는 의식보다 ‘주님께서 건져 주셨다’는 고백이 깊어집니다. 만일 연단의 끝에서 인간의 자기 확신이 더 강해진다면 무언가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된 연단의 끝에는 proprium의 강화가 아니라 주님에 대한 의존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여호수아 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 다시 할례를 받는 장면도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광야를 통과했다고 자동으로 가나안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다시 언약의 표지가 필요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시험을 많이 경험했다는 사실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시험을 통하여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불결함이 실제로 제거되고 주님의 질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광야 경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광야를 통하여 무엇이 잘려 나갔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시흥영성수련원의 수도적 전통에서 강조해 온 ‘연단’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을 때 그 가치를 축소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욱 깊게 가져갈 수 있습니다. 연단은 단순히 육체를 힘들게 하고 욕망을 억제하는 훈련을 넘어, 사람 안에 숨어 있는 자기애와 자기 의와 공로의식까지 주님의 빛 앞에 드러내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외적인 정욕을 이겼는데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마음이 더 강해졌다면 아직 광야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이전보다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더 이해하고, 자기 판단을 덜 절대화하며, 선을 행하고도 공로를 주님께 돌리게 되었다면 광야는 실제로 그 사람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결’을 분별하는 매우 실제적인 기준이 됩니다. 성결은 특별한 표정이나 말투나 생활양식으로 먼저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자기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비판받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자기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이 칭찬받을 때 함께 기뻐할 수 있는가, 아무도 보지 않을 때에도 정직한가에 드러납니다. 이런 곳에서 proprium의 지배가 약해지고 있다면 영적 할례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2강 4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구약의 할례를 성도의 영적 성결과 연결하고, 광야의 연단을 통하여 인간 안의 죄성과 정욕이 잘려 나가 이긴 자의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고 강조하는 강사의 설명은 죄 사함을 실제 삶의 변화와 분리하지 않고 신앙을 거듭남으로 이끌려 한다는 점에서 매우 귀한 통찰을 지니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할례를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불결한 사랑들의 제거로, 광야를 그 사랑들이 드러나 주님의 선과 진리와 싸우는 시험의 상태로 이해하되, 거듭남을 인간의 인격이나 자유 또는 악의 가능성 자체를 잘라 없애는 과정으로 보기보다 proprium에서 나오는 악이 지배권을 잃고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의지와 천국적 사랑이 점차 지배권을 얻는 과정으로 보며, 따라서 참된 자기부인은 ‘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생명의 주인이고 선의 근원이다’라는 proprium의 환상을 내려놓는 것이고, 참된 이김 역시 연단을 통하여 강한 자기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힘 없이는 아무 악도 이길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실제로 악을 거절하는 데 있음을 볼 때, 영적 할례와 광야의 아르카나가 더욱 깊게 열립니다.’

 

결국 광야가 우리에게 묻는 것은 ‘얼마나 고생했는가?’가 아닙니다. ‘무엇이 달라졌는가?’입니다. 이전보다 더 많이 참을 수 있게 되었는가보다, 이전보다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이전보다 욕망을 더 강하게 억제할 수 있는가보다, 다른 사람의 선을 더 진심으로 기뻐하게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이전보다 자신을 더 혹독하게 다룰 수 있는가보다,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영적 할례의 가장 깊은 칼끝은 마지막에 바로 이곳을 향할 것입니다. ‘나는 이제 많이 연단받았다’, ‘나는 많이 버렸다’, ‘나는 상당히 성결해졌다’, ‘나는 이긴 자에 가까워졌다’고 말하고 싶은 그 미세한 proprium입니다. 그것마저 주님 앞에서 내려놓을 때 사람에게 남는 것은 자기 성취가 아니라 감사입니다. ‘제가 해냈습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여기까지 붙드셨습니다’가 됩니다. 그때 광야는 인간을 강한 자기로 만드는 곳이 아니라 자기 힘을 내려놓고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곳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영적 할례’가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거듭남의 방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5

생명나무, 감추인 만나와 흰 돌 :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자기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2강은 중간영계와 천국의 질서에서 시작하여 흰옷과 세마포, 영적 할례와 광야의 연단을 거쳐 이제 계시록 일곱 교회에 주어진 ‘이기는 자의 약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갑니다. 강사는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에만 머무르지 않고 광야의 연단을 통과하여 죄성과 정욕이 처리된 ‘이긴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계시록에서 주님께서 이긴 자들에게 약속하신 여러 복을 실제적인 영적 상급으로 설명합니다. 그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이 ‘생명나무의 열매’, ‘감추인 만나’, ‘흰 돌’입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이것들이 일반적인 구원과는 구별되는, 연단을 통과한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복과 깊이 연결됩니다. 앞에서 살펴본 새 예루살렘, 흰옷, 세마포, 영적 할례가 모두 이 지점으로 모여드는 셈입니다.

 

먼저 에베소 교회에 주어진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는 약속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명나무’는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표상입니다. 이미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 한가운데 등장하는 생명나무에서부터 계시록 22장의 새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말씀의 처음과 마지막을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생명나무는 근본적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생명, 더 깊게는 주님 자신과 그분에게서 오는 천적 사랑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어떤 신비한 천국의 과실 하나를 먹고 특별한 영적 능력을 얻는다는 뜻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 그것이 자기 생명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먹는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자연계에서 음식은 몸 밖에 있을 때에는 아직 우리의 생명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고 소화하여 몸과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우리의 생명을 유지합니다. 말씀의 속뜻에서도 ‘먹는 것’은 이와 상응합니다. 선과 진리를 단순히 보고 아는 것을 넘어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생명과 결합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주님 사랑에 관한 교리를 많이 안다는 뜻이 아니라, 실제로 그 사랑을 받아 삶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2강 전체에서 강사가 강조해 온 ‘삶으로 이루어지는 성결’과도 매우 중요한 접점을 가집니다.

 

다만 여기에서 ‘누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가?’라는 질문을 둘러싸고 차이가 생깁니다. 강사는 ‘이긴 자’라는 특정한 상태에 도달한 성도에게 생명나무의 열매가 주어진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구원과 이긴 자의 상급 사이에 비교적 뚜렷한 구별을 둡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천국 안의 특별한 계급에게만 지급되는 영적 음식으로 보기보다, 악과 거짓을 주님의 힘으로 이기면서 주님의 선을 실제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내적 상태로 읽습니다. ‘이긴 자’가 생명나무를 먹는 까닭은 어떤 영적 시험에 합격하여 보상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악의 사랑을 거절했기 때문에 이제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여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상급’이라는 말의 의미를 바꾸어 놓습니다. 자연적 사고에서 상급은 일을 마친 뒤 외부에서 추가로 받는 보상입니다. 시험을 잘 보면 상을 받고, 일을 많이 하면 임금을 더 받습니다. 그러나 천국적 상급은 본질적으로 선 자체 안에 있는 기쁨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님과 결합되는 것보다 더 큰 상급은 없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웃의 선을 이루는 것보다 더 큰 상급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명나무의 열매는 선행의 대가로 지급되는 천국의 상품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그 사랑 자체가 기쁨과 생명이 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원리는 ‘감추인 만나’에서도 더욱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버가모 교회에 주님께서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겠다’고 하십니다. 만나라고 하면 우리는 곧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떠올립니다. 애굽에서 나온 백성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이 사건 자체가 2강에서 계속 강조하는 ‘광야’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힘으로 광야에서 생명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매일 하늘에서 주어지는 양식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만나에는 인간의 영적 생명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공급된다는 매우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만나는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선, 곧 사람이 자기 공로 없이 주님에게서 받아들이는 사랑과 선의 기쁨을 나타냅니다. 특히 ‘감추인 만나’라는 표현은 그 선의 내적인 성격을 더욱 강조합니다. 자연적 눈에는 보이지 않고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과의 결합 가운데 누리는 내적인 선과 평화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데서 오는 기쁨도 아니고, 영적 성취를 자랑하는 데서 오는 만족도 아닙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선을 행하는 것 자체가 기쁘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 자체가 양식이 되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천국적 사랑이 깊어지면 선을 행하는 것은 더 이상 의무만이 아닙니다. 그것이 기쁨이 됩니다. 처음 거듭남을 시작할 때에는 악을 거절하는 것이 매우 힘들 수 있습니다. 용서하기 싫지만 말씀 때문에 용서하려 하고, 정직하게 행동하면 손해를 보지만 진리 때문에 정직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선이 사람 안에 깊이 자리 잡을수록 이전에 힘들게 순종하던 것이 점차 기쁨이 됩니다. 선 자체에서 맛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만나를 먹는 것’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합니다. 천국적 기쁨은 자연적 인간에게 잘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유익을 얻는 데서만 기쁨을 느끼는 사람에게 ‘아무 대가 없이 다른 사람의 선을 위해 섬기는 것이 행복하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지배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에게 섬기는 기쁨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에서 생명을 얻는 사람에게 아무도 모르게 선을 행하는 기쁨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면 이전에는 맛을 느끼지 못했던 선에서 새로운 맛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감추인 만나가 그의 생명 안에 열리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광야의 의미도 다시 깊어집니다. 광야는 단순히 인간을 괴롭게 만드는 곳이 아니라 ‘무엇으로 사는가’를 배우는 곳입니다. 애굽에는 고기 가마와 음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연적 욕망을 만족시키는 삶을 표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는 그것에 의지할 수 없습니다. 매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나를 받아야 합니다. 영적으로도 사람은 거듭남 과정에서 이전에 자기를 행복하게 했던 인정, 성공, 지배, 소유 같은 것들이 더 이상 참된 양식이 아님을 배웁니다. 그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로 사는 법을 배웁니다. 그래서 광야의 목적은 사람을 굶기는 것이 아니라 음식의 종류를 바꾸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연단의 깊이는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했느냐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새 양식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세상적 즐거움을 많이 끊었는데 마음에는 기쁨이 없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마음만 강해졌다면 아직 만나의 맛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전에는 자기 유익에서만 기쁨을 느끼던 사람이 점차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 진리를 행하는 일, 맡겨진 쓰임을 충실히 하는 일에서 기쁨을 느끼기 시작한다면 그의 영적 입맛 자체가 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행동의 변화일 뿐 아니라 ‘무엇을 달게 느끼는가’의 변화입니다.

 

이어지는 ‘흰 돌’ 역시 매우 아름다운 표상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기는 자에게 감추인 만나와 함께 흰 돌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강사는 이 흰 돌을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실제적인 표지와 연결하고, 그 위에 기록된 새 이름과 함께 이긴 자의 특별한 신분과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에도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것’이라는 강사의 일관된 구조가 있습니다. 그러나 상응의 관점에서는 흰 돌을 외적인 신분증이나 천국의 특별한 표찰처럼 이해하기보다 그 안에 담긴 영적 의미를 먼저 보게 됩니다.

 

말씀에서 ‘돌’은 진리와 관계합니다. 특별히 기초가 되고 확고하게 세워진 진리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십계명이 돌판에 기록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신적 진리가 인간의 삶에 확고하게 자리 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돌이 ‘희다’고 합니다. 흰색은 앞에서 흰옷을 살펴보았듯 빛과 진리의 정결함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흰 돌은 선과 결합하여 정결해지고 확고해진 진리를 생각하게 합니다. 단순히 머리로 알고 있는 교리가 아니라 시험을 통과하면서 삶에 새겨진 진리입니다.

 

예를 들어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진리를 책에서 읽고 동의하는 것과, 오랜 세월 자기 공로와 싸우면서 실제로 선을 행한 뒤에도 그것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처음에는 그 진리가 기억 속의 문장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시험을 통과하면서 그 진리가 의지와 결합하면 마치 돌에 새겨진 것처럼 그 사람의 삶의 원리가 됩니다.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흰 돌’은 싸움을 마친 뒤 외부에서 받는 메달보다, 싸움을 통하여 진리가 그의 생명 안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상태로 이해할 때 훨씬 깊어집니다.

 

그리고 바로 그 흰 돌 위에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는 새 이름’이 기록됩니다. ‘이름’은 말씀에서 단순한 호칭보다 그 사람 또는 사물의 질 전체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새 이름은 거듭남을 통하여 새롭게 형성된 영적 성질을 뜻합니다. 사람이 악과 거짓의 지배 아래 있을 때의 사랑과 생각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면서 달라지면 그는 실제로 ‘새 사람’이 됩니다. 기억이 없어지고 전혀 다른 인격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을 지배하는 사랑의 중심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이름이 바뀌는 여러 장면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사래가 사라가 되며,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는 것은 단순한 개명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름의 변화는 상태와 성질의 변화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흰 돌 위의 새 이름 역시 거듭남을 통하여 주님께서 한 사람 안에 이루신 새로운 영적 상태와 관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거듭남이 얼마나 고유한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은 형태로 만드시지 않습니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유전적 성향과 환경, 자유로운 선택과 시험, 쓰임이 다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각 사람을 인도하여 형성하시는 천국적 성질도 고유합니다. 같은 진리를 믿고 같은 주님을 사랑하지만 천국의 천사들이 모두 서로 다른 이유입니다. 주님은 획일성을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다양성을 하나의 질서 안에 결합하십니다.

 

이 점은 수도적 영성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영적 훈련에는 일정한 공동 규율이 필요할 수 있지만, 그 규율의 목적이 모든 사람을 똑같은 영적 성격으로 만드는 데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 깊은 침묵이 유익할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적극적인 섬김이 더 중요한 훈련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에 대한 애착과 싸워야 하고, 어떤 사람은 인정욕과 싸워야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자기 판단을 절대화하는 습관과 싸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다루시는 지점이 서로 다르므로 거듭남의 길도 기계적으로 동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긴 자’의 표준을 지나치게 외적으로 고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특정한 광야 과정, 특정한 체험, 특정한 수준의 금식이나 기도, 특정한 영적 현상을 경험해야 이긴 자가 된다고 규정하기 시작하면 주님께서 각 영혼을 고유하게 인도하시는 섭리를 하나의 인간적 틀 안에 넣을 위험이 있습니다. 말씀은 분명 모든 사람에게 악을 죄로 알고 멀리하며 선을 행하라고 가르치지만,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서 어떤 순서와 방식으로 그 일을 이루시는지는 무한히 다양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생명나무와 감추인 만나와 흰 돌은 서로 떨어진 세 가지 상품이 아닙니다. 하나의 거듭남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보여 줍니다. ‘생명나무’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생명이 중심에 있고, ‘감추인 만나’에서는 그 선을 받아 누리는 내적인 기쁨이 나타나며, ‘흰 돌’에서는 그 선과 결합된 진리가 사람 안에 확고하게 자리 잡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 이름’에서는 그 결과 그 사람의 영적 성질 자체가 새롭게 형성되는 모습을 봅니다. 하나는 생명, 하나는 양식, 하나는 진리, 하나는 새로운 인격의 질을 보여 주지만 모두 주님과의 결합이라는 하나의 중심을 향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이긴 자의 상급’이라는 말도 훨씬 아름답게 들립니다. 주님께서는 ‘네가 고생했으니 이제 특별한 물건 몇 가지를 주겠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거절한 사람에게 선을 주시고, 거짓을 버린 사람에게 진리를 주시며, 자기애의 즐거움을 버린 사람에게 천국적 사랑의 기쁨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선과 진리가 그의 생명이 되도록 하십니다. 결국 상급은 주님께서 주시는 어떤 것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 자체입니다.

 

이 원리는 신앙생활의 동기도 점검하게 합니다. ‘이긴 자가 되면 특별한 상을 받는다’는 생각은 사람을 열심히 살도록 자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동기가 계속 외적 보상에 머물러 있다면 아직 자연적 수준의 신앙일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상을 받기 위해 착한 일을 시작할 수 있듯 신앙 초기에는 천국의 복이나 상급을 바라보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선 자체를 사랑하게 되어야 합니다. 결국에는 ‘상을 받기 위해 선을 행한다’에서 ‘선하기 때문에 선을 행한다’로 옮겨가야 합니다.

 

천국의 천사들이 선을 행하면서 ‘이 일을 하면 내 천국 등급이 올라갈까?’라고 계산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의 선을 이루는 것 자체가 기쁨입니다. 어머니가 사랑하는 자녀를 돌본 뒤 ‘이만큼 돌봤으니 보상을 얼마 받을까?’라고 계산하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랑은 자기 안에 보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의 선을 이루는 것이 곧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흥영성수련원의 오랜 연단과 자기부인의 전통도 이 지점에서 더욱 깊은 방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긴 자가 되어야 한다’, ‘생명과를 먹어야 한다’,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야 한다’는 목표가 강력한 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단이 깊어질수록 그 목표 자체도 정결해져야 합니다. ‘내가 이긴 자가 되고 싶다’에서 ‘주님을 더 사랑하고 싶다’로, ‘특별한 상급을 받고 싶다’에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고 싶다’로, ‘높은 천국에 가고 싶다’에서 ‘어디에서든 주님께서 맡기신 쓰임을 기쁘게 하고 싶다’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연단이 실제로 proprium을 다루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이때 ‘감추인 만나’는 매우 아름다운 분별 기준이 됩니다. 연단을 많이 받은 뒤 무엇에서 기쁨을 느끼는가를 보면 됩니다. ‘나는 이만큼 훈련받았다’는 사실에서 기쁨을 느끼는가, 아니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선을 행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가? ‘나는 이긴 자의 반열에 속한다’는 자기 인식이 기쁜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주님에게 가까워지는 것을 보는 것이 기쁜가? 후자의 기쁨이 자라난다면 감추인 만나의 맛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흰 돌’ 역시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수많은 말씀을 들은 뒤 내 안에 실제로 무엇이 ‘돌’처럼 자리 잡았는가? 설교의 문장들이 기억에 많이 남았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시험이 왔을 때 그 진리가 나를 붙들어야 합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을 선택하고, 상처를 받더라도 복수를 거절하며, 칭찬받지 못해도 맡은 쓰임을 계속하고, 선을 행한 뒤 공로를 주님께 돌릴 수 있다면 진리가 조금씩 흰 돌처럼 삶의 기초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2강의 앞부분들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중간영계에서 결국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사랑했는가입니다. 세 천국의 차이는 주님의 선을 받아들이는 사랑의 질과 관계합니다. 흰옷과 세마포는 선과 결합된 진리가 삶에 나타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영적 할례는 그 선과 진리를 방해하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불결함이 제거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생명나무와 감추인 만나와 흰 돌은 그 결과 주님의 사랑과 선과 진리가 실제로 인간의 생명이 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것들은 서로 다른 교리 조각이 아니라 하나의 거듭남을 여러 방향에서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2강 5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광야의 연단과 영적 할례를 통하여 죄성과 정욕이 처리된 이긴 자에게 생명나무의 열매와 감추인 만나와 흰 돌이 특별한 상급으로 주어진다는 강사의 설명은 신앙의 목적을 단순한 죄 사함에 머물게 하지 않고 실제 성결과 주님이 약속하신 영적 복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힘을 지니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생명나무를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사랑과 생명으로, 그 열매를 먹는 것을 그 선을 받아 자기 생명으로 삼는 것으로, 감추인 만나를 자기 공로 없이 주님에게서 받아 누리는 내적인 천국적 선과 그 기쁨으로, 흰 돌을 선과 결합하여 삶 안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정결한 진리로, 그 위의 새 이름을 거듭남을 통하여 형성된 각 사람의 고유한 새로운 영적 성질로 이해하며, 따라서 이 모든 것을 특정한 영적 계급에 외적으로 지급되는 별개의 특전들이라기보다 악과 거짓을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는 사람 안에 주님의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실제 생명이 되어 가는 하나의 거듭남의 여러 모습으로 볼 때,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의 아르카나가 더욱 깊게 열립니다.’

 

결국 생명나무와 만나와 흰 돌이 가리키는 중심에는 ‘주님에게서 받음’이 있습니다. 생명은 주님에게서 받고, 양식도 주님에게서 받고, 진리도 주님에게서 받으며, 그 결과 형성되는 새 사람의 모든 선한 것 역시 주님에게서 받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여 영적으로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에게서 나온 선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순간순간 흘러들어온다는 사실을 더 깊이 알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감추인 만나’의 역설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proprium은 무엇인가를 자기 것으로 소유할 때 기뻐하지만, 천국적 사람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할 때 자유로워집니다. ‘내가 이루었다’고 붙들 필요도 없고, ‘내가 이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고 불안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필요한 생명을 오늘 주님께 받고, 오늘 필요한 진리를 오늘 받아 살아가면 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이 다음 날의 만나까지 쌓아 둘 수 없었던 것처럼 영적 생명도 주님에게서 계속 받아야 합니다. 어제의 은혜로 오늘을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이긴 자의 모습은 손에 많은 상급을 들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빈손으로 주님 앞에 서서 끊임없이 받는 사람일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도, 감추인 만나도, 흰 돌도 결국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을수록 그는 ‘나는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기보다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에 더 가까워집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광야와 할례를 통과한 사람이 마침내 배우게 되는 가장 깊은 승리이며, 계시록이 말하는 ‘이기는 자’의 가장 천국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6

새 이름과 둘째 사망, 그리고 이긴 자의 열두 가지 축복 : 모든 약속의 끝은 더 높은 나가 아니라 주님과의 결합입니다

2강의 마지막 부분에서 강사는 지금까지 길게 살펴온 ‘이긴 자가 받는 축복’을 마무리합니다. 앞에서 생명나무의 열매, 감추인 만나와 흰 돌을 다룬 데 이어 흰 돌 위에 기록되는 ‘새 이름’을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서머나 교회에 주어진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을 해석합니다. 그리고 이로써 자신이 정리한 ‘이긴 자가 받는 열두 가지 축복’을 모두 살펴보았다고 선언합니다. 실제 강의에서도 3시간 16분경 강사는 ‘이렇게 해서 이긴 자들에게 받는 열두 가지 축복을 다 살펴봤습니다’라고 정리합니다. 따라서 이번 6부는 단순히 마지막 두 항목만 설명하는 부분이 아니라, 3시간이 넘는 2강 전체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다시 한곳에 모아 보는 결론이기도 합니다.

 

먼저 ‘새 이름’입니다. 계시록 2장 17절에서 주님께서는 이기는 자에게 ‘흰 돌’을 주시고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강사는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것처럼 이긴 자 역시 새로운 이름을 받는다고 이해합니다. 특히 강사는 여기서 상당히 구체적인 견해를 제시합니다. 이긴 자, 곧 교회 시대의 ‘처음 익은 열매’는 아직 지상에서 육체로 살아 있을 때 새 이름을 받고, 다른 구원받은 성도들은 천국에 들어간 뒤 새 이름을 받을 것이라고 봅니다. 동시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분은 그렇게 안 믿어도 상관없습니다’, ‘구원하고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함으로써 자기 견해를 구원의 절대 조건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해석과 구원의 본질을 구별하는 태도는 해설자로서도 존중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름’은 대단히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말씀에서 이름은 단순히 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한 호칭에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의 ‘질’, 곧 그의 사랑과 신앙과 삶으로 형성된 영적 성질 전체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새 이름을 받는다’는 말씀의 중심도 자연계에서 사용하던 김 아무개, 이 아무개라는 이름 대신 영계에서 새로운 호칭 하나를 배정받는 데 있다고 보기보다, 거듭남을 통하여 그 사람의 영적 성질 자체가 새로워지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 더 깊습니다. 앞의 5부에서 살펴본 ‘흰 돌’이 선과 결합하여 사람 안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진리를 나타낸다면, 그 돌 위에 새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그 진리가 이제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새로운 영적 성질과 생명이 되었다는 의미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보면 ‘새 이름’은 죽은 뒤에만 관계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새 이름은 지상에서부터 형성됩니다. 이 점에서는 강사가 ‘이긴 자는 살아 있을 때 새 이름을 받는다’고 강조한 직관 속에 매우 의미 있는 요소가 있습니다. 다만 ‘살아 있는 동안 영계에서 사용할 문자적인 이름 하나를 미리 받는다’는 방향보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실제로 새로운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간다는 방향으로 이해하면 훨씬 깊어집니다. 예전에는 자기 이익이 모든 선택의 기준이었던 사람이 점차 이웃의 선을 생각하게 되고, 인정받는 데서 기쁨을 느끼던 사람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쓰임을 행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며, 자기 판단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던 사람이 진리 앞에서 자기 잘못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 이미 ‘새 이름’이 형성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옛사람을 조금 개선하는 것’보다 더 깊은 변화입니다. 물론 기억과 인격과 고유한 개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보존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지배하는 중심 사랑이 바뀝니다. 이것이 새 이름입니다.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랑으로 사는 사람, 같은 기억과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자기 영광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의 선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새 사람’이고, 계시록의 표현을 빌리면 ‘새 이름’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다’는 말씀은 한 사람의 거듭남이 얼마나 고유한지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외적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볼 수 있습니다. 누가 얼마나 기도하고 금식하는지, 얼마나 성경을 많이 읽고 봉사하는지, 어떤 신앙체험을 했는지는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서 무엇을 다루고 계시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가장 큰 광야는 재물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인정욕이며, 어떤 사람에게는 자기 의, 어떤 사람에게는 분노, 어떤 사람에게는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 가운데 주님께서 형성하시는 새로운 영적 성질 역시 각 사람에게 고유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의 영적 등급을 쉽게 판단하지 못하게 합니다. 외적으로 보아 매우 평범한 사람이 주님 앞에서는 깊은 싸움을 통과하고 있을 수 있고, 많은 영적 체험을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는 아직 자기 인정욕과 싸우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의 질서는 사람을 인간의 눈으로 ‘일반 성도’, ‘광야 성도’, ‘이긴 자’라고 쉽게 분류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섬세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한 사람의 전체 사랑과 의도와 자유로운 선택의 역사를 완전히 아십니다. ‘받는 자밖에는 알 사람이 없는 새 이름’이라는 말씀에는 바로 이러한 영혼의 고유성과 주님의 섭리의 은밀함도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강사는 2강의 마지막 약속인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로 갑니다. 강사는 성경에 두 종류의 사망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째 사망은 육체가 죽는 것이고, 둘째 사망은 영혼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한 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합니다. 일반적으로 구원받은 성도 역시 지옥에 가지 않는다면 왜 주님께서 특별히 ‘이긴 자’에게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고 약속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강사는 그 답을 자신의 종말론적 시간표 안에서 찾습니다. 계시록 9장에서 무저갱이 열리고 황충으로 묘사된 악령들이 올라와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괴롭히는데, 이긴 자들은 그 대환란에 들어가지 않고 휴거되기 때문에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이 악령들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사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를 대환란을 면제받고 휴거된다는 ‘간접적인 표현’으로 해석합니다.

 

이 대목에서는 강사의 미래주의적 계시록 해석과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의 차이가 상당히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계시록의 무저갱과 황충과 불못과 둘째 사망을 미래 어느 시기에 자연계에서 일어날 사건들의 암호로 읽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교회와 인간의 영적 상태, 그리고 영계에서 악과 거짓이 드러나고 심판받는 상태를 상응적 형상으로 보여 줍니다. 따라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말씀 역시 대환란 직전에 휴거되어 특정한 다섯 달의 악령 재앙을 피한다는 의미보다 훨씬 내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게 됩니다.

 

말씀에서 ‘죽음’은 육체적 죽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영적 죽음의 상태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사람은 육체적으로 멀쩡하게 살아 있으면서도 자기애와 세상 사랑, 악과 거짓을 자기 생명으로 삼아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육체의 죽음을 통과한 사람도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 안에 있다면 더욱 충만하게 살아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신 말씀도 이런 깊은 차원을 열어 줍니다. 자연적 몸의 죽음이 참된 생명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둘째 사망’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지옥이라는 형벌 장소에 던져 다시 죽이시는 사건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애와 거짓을 지배적 생명으로 선택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천국적 생명과 스스로 분리된 상태의 완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옥은 주님께서 사람을 미워하여 가두시는 곳이 아니라 악을 사랑하는 영들이 자기 사랑과 상응하는 곳을 찾아가는 상태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도 지옥에 가기를 원하지 않으시지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거부하고 자기애의 즐거움을 자기 생명으로 굳힌 영은 천국의 사랑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말씀은 놀랍도록 깊은 거듭남의 약속이 됩니다. 사람이 주님의 힘으로 자기 안의 악과 거짓과 싸우면서 그것을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점차 지배적 사랑으로 받아들이면 그 사람의 참된 생명은 더 이상 지옥에 속하지 않습니다. 육체의 죽음도 그 생명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연적 몸이 벗겨지면 지상에서 형성된 그 내적 생명이 더욱 자유롭게 드러납니다. ‘둘째 사망이 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미래의 재앙 하나를 피한다는 약속을 넘어,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그 사람 안에 형성되어 악과 거짓의 영적 죽음이 더 이상 그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약속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기는 자’의 의미가 다시 중요해집니다. 2강 전체에서 강사는 이긴 자를 일반 성도와 구별되는 특별한 성결의 상태로 설명해 왔습니다. 광야를 통과하고 죄성과 정욕이 제거되어 생명과를 먹으며, 흰옷을 입고, 감추인 만나와 흰 돌과 새 이름을 받고,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이 체계에는 신앙을 안일하게 만들지 않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믿었으니 이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신앙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실제로 악과 싸우고 삶이 변해야 한다고 촉구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2강 전체에서 거듭 인정해야 할 중요한 장점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긴 자를 별도의 영적 엘리트 계급으로 고정하기보다 모든 거듭남의 본질을 보여 주는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계시록의 ‘이김’은 먼저 다른 성도들을 앞서는 경쟁에서의 승리가 아닙니다. 내 안에서 주님에게 반대되는 악과 거짓에 대한 승리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 독립적으로 이루어 낸 승리조차 아닙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실제로 싸워야 하지만, 이기는 능력은 전적으로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참된 이긴 자는 ‘나는 다른 성도보다 더 높은 단계에 올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 없이는 나는 아무 악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아는 사람입니다.

 

이 점은 2강 전체를 읽을 때 가장 조심스럽게 붙들어야 할 균형 가운데 하나입니다. 강사가 성결과 연단을 매우 강하게 강조하는 것은 귀하지만, 그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영적 위치를 계속 측정하게 한다면 오히려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나는 아직 광야 단계인가?’, ‘나는 생명과를 먹었는가?’, ‘나는 이긴 자인가?’, ‘나는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사람인가?’라는 질문이 지나치게 커지면 시선이 주님보다 자기 영적 상태에 집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의 목적은 끊임없이 자기 등급을 확인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오늘 주어진 악을 죄로 알고 거절하고 선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기 등급을 판단하기 어려워집니다. 주님의 빛이 더 밝아질수록 자기 안의 proprium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외적인 죄 몇 가지를 이기고 나면 상당히 깨끗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더 깊은 빛이 들어오면 자기 의와 인정욕, 지배욕, 공로의식 같은 훨씬 미세한 것들이 보입니다. 그래서 천적 상태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높은 사람이다’라는 의식보다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인식이 깊어집니다. 이것이 천국의 높음이 자연계의 높음과 정반대인 이유입니다.

 

여기서 2강 전체에서 살펴본 ‘이긴 자의 축복들’을 다시 바라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납니다. 생명나무의 열매, 감추인 만나, 흰 돌, 새 이름, 흰옷,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 것,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는 것, 주님의 보좌와 관련된 약속,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 새벽별,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 것 등은 얼핏 보면 이긴 자가 하나씩 획득하는 여러 개의 독립적인 상급처럼 보입니다. 강사 역시 이것들을 ‘열두 가지 축복’으로 묶어 설명하고 마지막에 그 목록을 다시 확인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모든 약속을 하나의 거듭난 생명을 서로 다른 상응적 형상으로 보여 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생명나무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생명을 봅니다. 감추인 만나에서는 그 선을 받아들이면서 누리는 내적인 천국의 기쁨을 봅니다. 흰 돌에서는 선과 결합하여 확고하게 된 진리를 보고, 새 이름에서는 그 선과 진리를 통하여 새롭게 형성된 영적 성질을 봅니다. 흰옷과 세마포에서는 그 내적 선이 진리를 통하여 삶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봅니다. 성전의 기둥에서는 주님의 교회와 천국 안에서 굳게 서는 진리와 쓰임을 생각할 수 있고, 생명책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에 속하게 된 상태를 봅니다. 그리고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약속에서는 악과 거짓의 생명이 더 이상 그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는 상태를 봅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중심은 하나입니다. ‘주님과의 결합’입니다.

 

따라서 이 열두 가지를 천국에 들어간 뒤 각각 따로 지급되는 열두 개의 상품처럼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거듭나면 그 하나의 생명이 여러 측면에서 나타납니다. 마치 햇빛 하나가 여러 색과 형태로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에서는 생명나무이고, 내적인 기쁨에서는 만나이며, 진리에서는 흰 돌이고, 새롭게 된 성질에서는 새 이름이며, 삶으로 나타난 진리에서는 흰옷입니다. 결국 모든 약속은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 사시고 그 사람이 주님 안에서 산다’는 하나의 사실을 여러 상응으로 풀어 보여 줍니다.

 

이렇게 보면 ‘상급’의 개념도 마지막으로 정리됩니다. 이긴 자가 받는 최고의 상급은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천국에 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상급이고, 이웃의 선에서 더 깊은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상급이며, 선을 행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 되는 것이 상급입니다. 천국적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질 보상을 계산하면서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선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행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내가 무엇을 받을 것인가?’라는 관심은 줄어들고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내가 이웃에게 어떤 선한 쓰임이 될 수 있는가?’라는 관심이 커집니다.

 

이 점에서 시흥영성수련원의 오랜 수도적 전통과 2강의 강한 ‘이긴 자’ 영성은 매우 소중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부인과 절제, 연단과 순종을 강조하는 전통은 오늘날 신앙을 단순한 위로나 축복의 수단으로만 받아들이는 경향에 강한 도전을 줍니다. 실제로 자기 안의 악과 싸우지 않으면서 성결을 말할 수 없고, 삶의 변화 없이 거듭남을 말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 역시 바로 이 진지함을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가 그 연단의 마지막 대상 가운데 하나가 ‘연단받은 나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육체적 정욕을 버리는 것보다 어쩌면 더 어려운 것이 영적 공로를 버리는 것일 수 있습니다. 재물을 자랑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쉽게 알면서도 ‘나는 많이 기도했다’, ‘나는 많은 연단을 받았다’, ‘나는 깊은 진리를 안다’, ‘나는 일반 성도와 다르다’는 생각은 경건한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 proprium이 자기 생명을 주장하는 방식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광야의 마지막에는 ‘나는 이긴 자다’라는 자기의식마저 주님 앞에 내려놓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역설적으로 ‘이긴 자’라는 말의 가장 깊은 뜻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긴 자는 자기 자신을 가장 강하게 만든 사람이 아니라 자기 힘에 대한 신뢰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자기 욕망을 이겼지만 그 승리를 자기 공로로 만들지 않는 사람, 진리를 깊이 알지만 그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지 않는 사람, 많은 연단을 통과했지만 아직 연약한 사람을 더 따뜻하게 품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천국적 승리의 열매라면, ‘이긴 자’라는 말은 영적 특권의 명칭이 아니라 깊은 겸손의 명칭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마지막 약속이 참으로 아름답게 2강 전체를 닫습니다. 자기애는 결국 영적 죽음으로 향하지만 주님 사랑은 생명으로 향합니다. proprium은 모든 것을 자기에게 끌어오려 하지만 천국적 사랑은 모든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립니다. 전자는 스스로를 중심에 놓으면서 점점 고립되고, 후자는 주님을 중심에 모시면서 다른 사람들과 더욱 깊이 결합합니다. 그러므로 둘째 사망을 이긴다는 것은 단순히 지옥의 형벌을 면제받는 것보다 더 깊이, 죽음의 사랑에서 생명의 사랑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2강 6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긴 자가 흰 돌 위에 기록된 새 이름을 받으며 마지막으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고, 이로써 이긴 자에게 약속된 열두 가지 축복이 완성된다는 강사의 설명은 신앙을 실제 성결과 영적 싸움으로 이끌고 주님의 약속을 진지하게 붙들게 한다는 점에서 큰 힘을 지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새 이름’을 특정한 영적 계급에게 부여되는 새로운 호칭보다 거듭남을 통하여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 형성하시는 고유한 새로운 사랑과 신앙과 쓰임의 영적 성질로, ‘둘째 사망’을 미래 대환란 중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황충 악령의 재앙보다 더 깊이 자기애와 거짓을 지배적 생명으로 삼아 주님의 천국적 생명과 분리되는 상태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음’을 주님의 힘으로 악과 거짓을 거절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지배적 생명이 된 사람에게 영적 죽음이 더 이상 지배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생명나무와 감추인 만나와 흰 돌과 새 이름과 흰옷과 생명책을 비롯한 이긴 자의 모든 약속 역시 서로 독립된 특전의 목록이라기보다 주님과 결합된 하나의 천국적 생명이 여러 상응으로 펼쳐진 것으로 읽을 때, 2강 전체의 중심이 ‘얼마나 높은 단계에 이르렀는가?’에서 ‘얼마나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 실제로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로 옮겨집니다.’

 

이제 2강 전체를 돌아보면 처음의 중간영계에서 마지막 둘째 사망까지 하나의 선이 이어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중간영계에서 그가 지상에서 형성한 내적 사랑이 드러납니다. 천국의 서로 다른 상태도 그 사랑의 질과 관계합니다. 흰옷과 세마포는 선과 결합한 진리가 삶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영적 할례와 광야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불결함이 드러나고 다루어지는 거듭남의 과정을 보여 줍니다. 생명나무와 감추인 만나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인간의 생명과 기쁨이 되고, 흰 돌과 새 이름에서는 그 선과 진리가 한 사람의 고유한 영적 성질로 굳어집니다. 그리고 둘째 사망이 해하지 못한다는 마지막 약속에서는 그렇게 주님에게서 받은 생명이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이 긴 2강을 다 듣고 난 뒤 우리에게 남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이긴 자의 열두 가지 축복 가운데 몇 가지를 받았는가?’가 아닐 것입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되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할수록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말씀을 많이 알수록 이웃에게 더 체어리티를 행하게 되었는가, 연단을 많이 받을수록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더 이해하게 되었는가, 선을 행할수록 자기 공로를 덜 생각하게 되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영적 성장의 참된 표지는 자기 등급에 대한 확신보다 사랑의 변화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 앞에서 2강의 ‘이긴 자’라는 표현도 가장 아름다운 자리로 돌아옵니다. 이긴 자는 ‘나는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늘도 자기 안에 올라오는 악을 보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넘어졌을 때 악을 정당화하지 않고 다시 주님께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자기 힘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 싸우면서도 그 힘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그의 마지막 말은 ‘제가 이겼습니다’보다 ‘주님께서 이기셨습니다’에 가까워집니다.

 

그렇다면 2강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어도 좋겠습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감추인 만나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흰 돌과 새 이름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흰옷의 빛도 주님에게서 오며, 둘째 사망을 이기는 생명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이 할 일은 그 생명을 받을 수 있도록 악을 죄로 알고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며, 받은 진리를 실제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수록 사람은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는 의식보다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더욱 바라보게 됩니다.’ 바로 그때 ‘이긴 자’의 열두 가지 축복은 열두 개의 상급을 소유한 인간의 영광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주님의 생명이 점점 충만해지는 하나의 거대한 약속으로 읽힐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오직 주님이 계십니다.

 

 

 

SY.53,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3강 (7/28),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3강 1부요한계시록 6장의 ‘네 말’과 심판을 어떻게 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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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34,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1강 (7/27),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1강 1부‘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본 제79차 심령부흥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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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 영상은 단순한 사찰 소개가 아니라, 불교의 핵심 사상을 사찰과 불화, 불상, 의식, 그리고 붓다의 생애를 따라가며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강의입니다. 시작부터 인간이 왜 늙고 병들고 죽는가라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 해답을 찾은 존재로 붓다를 소개하면서, 시청자를 ‘깨달음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이후 화엄사, 송광사, 통도사, 흥국사 등을 차례로 순례하며, 화엄사상, 사성제, 팔상도, 법화경, 관세음보살 신앙, 정토신앙 등을 하나의 큰 흐름으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먼저 높이 평가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 영상은 인간이 단순히 복을 받기 위해 종교를 찾는 존재가 아니라, 삶의 근본적인 괴로움을 해결하려는 존재라는 점을 매우 진지하게 다룹니다. ‘우리는 왜 늙고 병들고 죽는가’, ‘괴로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집착을 어떻게 내려놓을 것인가’와 같은 질문은 인간의 영혼을 향한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람 안에는 영원한 생명을 향한 갈망이 있으며, 그 갈망은 결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는 불교의 구도 정신과 스베덴보리의 영적 탐구는 서로 대화할 수 있는 공통 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영상은 화엄사상을 매우 아름답게 소개합니다. ‘꽃 한 송이도 절대적 가치를 가진다’,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설명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모든 피조물이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담는 그릇이며, 자연계의 모든 사물은 영적인 실재를 반영하는 ‘상응’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풀 한 포기, 돌 하나에도 의미가 있다는 시선 자체는 스베덴보리도 깊이 공감할 것입니다. 다만 그 이유는 조금 다릅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성 속에서 의미를 가지는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모든 존재의 의미는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과 사랑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영상의 중심에는 ‘일체개고’, 곧 ‘모든 것은 괴로움’이라는 사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흥미로운 보완을 제시합니다. 그는 인간이 느끼는 괴로움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는 상태에서는 괴로움이 필연적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괴로움은 존재 자체의 본질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가 뒤집힌 결과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창조 자체는 선하며, 괴로움은 창조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 인간 의지의 왜곡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세상은 본질적으로 고통’이라는 불교의 전제와 ‘세상은 본래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인간이 질서를 잃었다’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은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영상은 붓다의 생애를 통해 고행과 깨달음을 설명합니다. 특히 극단적인 고행을 버리고, 중도를 선택하는 장면을 중요한 전환점으로 소개합니다. 스베덴보리도 외적인 금욕 자체를 영성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참된 변화는 외적 고행보다 내적 사랑의 변화에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단순히 육체를 괴롭히는 수행은 사람을 천사로 만들지 못하며, 오히려 사랑과 진리 안에서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이 거듭남의 본질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런 점에서는 극단을 버리고 내면을 돌아보라는 영상의 메시지와 일정 부분 만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영상은 ‘모든 고통은 집착에서 온다’는 사성제를 반복하여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자기 자신만을 중심으로 삼는 ‘proprium’이 모든 영적 문제의 뿌리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권면은 일정 부분 자기애를 버리라는 성경적 권면과도 닿아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을 향해 비우는가’에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집착을 비워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목적이라면,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자기 사랑을 비우고 그 자리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채우는 것이 목적입니다. 단순한 비움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 전환이 핵심입니다.

 

영상은 ‘과거에도 집착하지 말고, 현재에도 집착하지 말고, 미래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설법도 소개합니다. 이것 역시 상당히 깊은 통찰입니다. 스베덴보리도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보다 현재 순간에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살아가는 삶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의 지속적인 생명 유입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현재는 단순한 순간이 아니라, 주님께서 끊임없이 생명을 공급하시는 접점입니다.

 

후반부에서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 아미타불, 극락정토, 명부와 시왕 심판 등 한국 불교에서 매우 친숙한 신앙 요소들이 소개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세계관과는 상당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은 죽은 뒤 어떤 재판정에서 판결을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사랑 자체가 곧 자신의 세계를 결정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외부에서 선고되는 장소가 아니라, 자신이 평생 사랑한 것이 완전히 드러나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시왕의 심판이나 극락왕생이라는 개념은 스베덴보리의 사후 세계 이해와는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상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붓다 혼자 존귀하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존귀하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매우 따뜻하며 인간 존엄성을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모든 인간은 주님의 형상을 받을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며, 그래서 누구나 존귀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존귀함은 인간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끊임없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생명을 받는 그릇이라는 점이 중요한 차이입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부분은 불상과 불화를 ‘절대적인 대상이 아니라 방편’이라고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이는 불상을 우상 자체로 보기보다, 깨달음을 기억하게 하는 상징으로 이해하려는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외적 형상 자체보다 그 형상이 무엇을 향하게 하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는 참된 예배는 외적인 상징보다 주님 자신께 향해야 하며, 모든 상징은 결국 그분을 가리키는 데 그 의미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전체적으로 이 영상은 불교를 단순한 종교 의식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괴로움에 대한 철학과 수행의 길’로 매우 품위 있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정 종교를 공격하거나 다른 신앙을 배척하기보다, 사찰의 문화와 수행, 예술과 교리를 조화롭게 연결한 점도 돋보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이 영상은 인간의 내면을 깊이 성찰하고 자기 중심성을 내려놓으려는 진지한 구도 정신을 잘 보여 줍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깨달음 자체보다 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은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는 존재인가, 아니면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끊임없이 흘러들어올 때 비로소 참된 생명을 얻는 존재인가?’ 그는 후자를 선택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구원은 인간의 수행이 완성하는 길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며 사랑 안에서 새롭게 되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그렇다고 이 영상의 구도 정신을 가볍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진심으로 진리를 찾고 자기 욕망을 돌아보려는 이러한 갈망은,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주님께서 모든 사람 안에 심어 두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증이 다양한 문화와 종교 속에서 나타나는 한 모습으로도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SY.46, 봉쇄수도원, ‘캄캄한 새벽, 촛불 하나에 의지, 한국의 수도원을 가다’

※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 영상은 일반적인 교리 설명이 아니라 ‘수도자의 삶’ 자체를 조명하는 다큐멘터리입니다. 영상이 반복해서 강조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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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 영상은 일반적인 교리 설명이 아니라 ‘수도자의 삶’ 자체를 조명하는 다큐멘터리입니다. 영상이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정결·청빈·순명’, ‘침묵’, ‘기도와 노동’, ‘공동체’,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요소들이 특정 종교만의 독창적인 발명이라기보다, 인간이 ‘세속적 욕망을 넘어 더 높은 삶을 추구하려는 역사’ 속에서 매우 넓게 발견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을 이해할 때는 단순히 ‘가톨릭은 이런 종교다’라는 관점보다, ‘인간은 왜 수행과 절제를 통해 신성을 찾으려 하는가’라는 더 큰 틀에서 바라보는 것이 오히려 내용 전체를 더 잘 이해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 수도자들의 삶이 외적인 규율 이전에 하나의 ‘사랑의 방향’을 형성하려는 노력이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결국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갈립니다. 따라서 수도원에서 반복되는 침묵과 노동, 절제는 단순히 금욕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향하는 사랑을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바꾸려는 훈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영상이 말하는 수도 생활의 핵심과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가 상당 부분 만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외적인 수행 자체에는 언제나 신중합니다. 그는 어떤 수도복을 입었는지, 얼마나 오래 침묵했는지, 얼마나 많은 재산을 포기했는지가 사람을 천국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진정한 변화는 ‘속 사람’이 주님에 의해 새롭게 되는 거듭남에 있으며, 외적인 금욕은 그것을 돕는 수단일 수는 있어도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영상 속 수도자의 삶은 존중받을 만한 진지한 영적 노력으로 볼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곧 영적 완성을 의미한다고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영상에서 매우 인상적인 부분은 ‘노동하고 기도하고, 다시 노동하고 기도하는 반복’입니다. 이것은 고대 베네딕토회가 말한 ‘기도하고 일하라’라는 정신을 잘 보여 줍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러한 구조는 동방정교회의 헤시카즘(Hesychasm)에서도 어느 정도 발견됩니다. 정교회 수도자들도 끊임없는 ‘예수 기도’를 통해 마음을 정화하려 하며, 노동 역시 수행의 일부로 받아들입니다. 수행 방식은 다르지만, ‘마음을 하나의 중심으로 모으는 삶’이라는 점에서는 상당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시야를 불교로 넓혀 보면 더욱 흥미로운 비교가 가능합니다. 불교 역시 계율, 명상, 공동체 생활, 청빈, 독신을 강조합니다. 선종에서는 노동 자체가 수행이며, 침묵은 깨달음을 위한 중요한 환경입니다. 영상 속 수도원 풍경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불교 선방을 떠올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여기서 중요한 차이가 하나 드러납니다. 불교 수행은 궁극적으로 ‘집착의 소멸’과 ‘자아의 해체’를 지향하는 경우가 많지만,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개성이 사라지는 것을 완성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 사람이 주님 안에서 더욱 자신다운 존재가 되며, 사랑 속에서 더욱 독특한 인격으로 살아가는 것이 천국의 모습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수행이라는 형식은 비슷해 보여도, 궁극적인 목표는 상당히 다를 수 있습니다.

 

영상 후반부에서 수도자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현지 종교를 존중하며, 강압적 개종보다 사랑의 삶 자체를 선교로 이해하는 장면은 특히 주목할 만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선한 삶을 매우 중요하게 보며,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과 종교 안에서도 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인도하신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이 부분은 오히려 종교 간의 대립을 완화하는 매우 성숙한 시각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스베덴보리는 궁극적인 진리는 주님에게서 나온다고 보지만, 동시에 각 사람은 자신이 가진 빛 안에서 선을 사랑하는 만큼 주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부분은 ‘순명’입니다. 영상은 순명을 수도 생활의 절정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순명에도 두 단계가 있습니다. 하나는 권위에 대한 외적 순종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선을 선택하는 내적 자유입니다. 천국에서는 후자가 중심입니다. 그래서 외적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보다, 진리를 사랑하여 기쁨으로 순종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단계가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영상의 순명은 아름다운 이상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 순명이 사랑에서 비롯된 자유인지 단순한 제도적 복종인지에 따라 영적 의미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수도자들의 독신에 대한 설명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영상은 독신을 ‘밖으로 확장된 사랑’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상당히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참된 독신은 이웃을 위한 더 넓은 봉사가 가능하게 하는 경우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볼 것입니다. 다만 그는 천국에서는 참된 부부애가 가장 높은 사랑 가운데 하나라고 설명하기 때문에, 독신 자체를 더 높은 영성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혼 여부가 아니라 사랑의 질입니다.

 

결국 이 영상은 가톨릭 수도원의 삶을 소개하지만, 더 넓게 보면 인류가 오래전부터 공유해 온 ‘수행의 전통’을 보여 주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교회 수도원도, 불교 선원도, 힌두교의 수행 공동체도, 심지어 일부 수피(Sufi) 공동체까지도 침묵과 절제, 공동체, 노동, 기도라는 공통된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더 높은 삶을 갈망해 왔음을 보여 주는 하나의 역사적 증거이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 영상을 바라보면, 이러한 다양한 수행 전통은 모두 인간 안에 있는 자기중심성을 넘어 더 높은 사랑을 향해 나아가려는 진지한 시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스베덴보리는 외적인 수행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에 의해 속 사람이 변화되는 거듭남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완전한 목적에 도달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영상은 특정 종교를 찬양하거나 비판하는 자료라기보다,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고 더 높은 삶을 추구해 왔는지를 보여 주는 귀한 기록으로 읽을 수 있으며, 그 위에 스베덴보리의 영적 인간론을 겹쳐 볼 때, 비로소 외적 수행과 내적 거듭남의 관계가 더욱 입체적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SY.47, 불교, ‘절, 붓다의 세상’

※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 영상은 단순한 사찰 소개가 아니라, 불교의 핵심 사상을 사찰과 불화, 불상, 의식, 그리고 붓다의 생애를 따라가며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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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45, 오정현 목사,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이유’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번 설교에서 오정현 목사는 로마서 8장 28절을 중심으로 자신의 평생 목회와 삶을 관통했던 신앙의 원리를 풀어갑니다. 설교의 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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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번 설교에서 오정현 목사는 로마서 828절을 중심으로 자신의 평생 목회와 삶을 관통했던 신앙의 원리를 풀어갑니다. 설교의 핵심은 비교적 분명합니다. 사람은 미래를 알지 못하고 수많은 고난을 겪지만, 하나님께서 결국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믿음으로 끝까지 신앙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설교는 개인적인 고난, 목회의 어려움, 다윗의 삶, 그리고 자신의 인생 경험을 엮어 청중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주려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이러한 점은 많은 성도들에게 위로가 되는 메시지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설교가 끊임없이 ‘영적으로 성공하는 삶’을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적 성공’은 세속적인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과 끝까지 동행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람의 참된 성공은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그의 속 사람이 얼마나 주님의 형상을 닮아 갔는가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설교가 성도들의 시선을 세상의 형통보다 하나님께 돌리려 한다는 점은 충분히 긍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함께 읽어 보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표현은 단순히 ‘나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이 결국 좋은 결과가 된다’는 뜻보다 조금 더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주님은 결코 악을 만드시거나 고난을 보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악은 인간과 악한 영들의 자유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그 악마저도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선으로 돌려 사용하십니다. 즉 선을 위해 악을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발생한 악으로부터 가능한 가장 큰 선을 끌어내시는 것입니다. 이 미묘한 차이는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설교를 들으며 한 가지를 더 생각하게 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속에서 살아간다면, 그 사람에게도 로마서 828절이 그대로 적용될까요? 바울도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조건을 먼저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조건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악을 죄로 여기며 버리고 선을 행하려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섭리는 모든 사람을 향하지만, 그 섭리가 온전히 열매를 맺는 것은 주님의 인도를 받아들이려는 사람 안에서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은 숙명론이나 낙관주의가 아니라, 주님과 동행하는 삶 안에서 경험되는 영적 실제가 됩니다.

 

설교 중 오정현 목사는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도 잘 모르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이것 역시 스베덴보리의 설명과 상당히 조화를 이룹니다. 사람은 눈앞의 이익은 보지만 영원은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는 어떤 고난이 사실은 그의 교만을 낮추고, 이웃을 이해하게 만들며,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현재만 보지만, 주님은 영원을 보십니다. 그래서 섭리는 언제나 영원을 기준으로 일하십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설교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하나님이 다 아신다’는 표현도 더욱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가장 깊은 의도와 사랑, 그리고 영원한 운명까지 모두 보신다는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생각보다 사랑이, 사랑보다 의도가 더 깊은 차원이라고 설명합니다. 주님은 그 가장 깊은 곳까지 보시며,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천국 쪽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다 아신다’는 말은 단순한 정보의 문제가 아니라, 섭리와 사랑의 문제입니다.

 

한편 이번 설교는 로마서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 독자라면 한 가지를 자연스럽게 덧붙여 생각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복음서와 창세기 등 말씀 자체에는 천적인 아르카나가 담겨 있지만,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의 서신은 교회를 위한 교훈과 권면으로 기록되었으며, 동일한 방식의 내적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로마서를 창세기나 복음서와 동일한 방식으로 깊은 상응 해석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복음서에서 이미 밝히 드러난 주님의 가르침을 실제 삶에 적용하는 권면으로 이해하는 편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 더 가깝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설교 역시 로마서 자체를 신비롭게 해석하기보다, 그 안에 담긴 신앙의 원리를 삶으로 연결하려는 설교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번 설교의 중심부에서 오정현 목사는 반복해서 한 문장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다 아신다.’ 그는 이 한 문장이 다윗의 삶을 지탱했고, 자신의 목회와 인생도 붙들어 주었다고 고백합니다. 이어서 그는 시편 139편을 인용하며,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말과 길을 모두 아시는 분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에게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이 다 아신다’는 믿음으로 자신을 맡기라고 권면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상당히 의미 있는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은 사람의 겉모습보다 그의 가장 깊은 사랑과 의도를 보십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지만, 주님은 그 생각을 낳는 사랑까지 아십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을 설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주님은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된 위로입니다. 사람은 이해하지 못해도 주님은 이해하시고, 사람은 오해해도 주님은 오해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걸음을 더 나아갈 필요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 아신다’는 말이 ‘그러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섭리가 인간의 자유를 결코 없애지 않는다고 거듭 설명합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지만, 사람은 여전히 매 순간 선택해야 합니다. 악을 버릴 것인가, 자기 사랑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인도를 받아들일 것인가를 선택하는 자유는 끝까지 남겨 두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다 아신다’는 신앙은 수동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담대하게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설교에서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하나님께는 찰떡처럼 붙고 사람에게는 독립하라’는 표현입니다. 오정현 목사는 많은 사람들이 반대로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는 독립하려 하고,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의존하기 때문에 상처와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우자와 부모, 자녀보다 먼저 하나님께 붙어야 인간관계도 건강해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단순한 인간관계의 기술이 아니라 신앙의 질서를 회복하자는 권면입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도 놀라울 만큼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그는 모든 참된 사랑에는 질서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이며, 셋째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이 순서가 뒤집히면 모든 사랑이 왜곡됩니다. 사람을 하나님보다 앞세우면 결국 그 사랑은 집착이 되고, 소유욕이 되고, 두려움이 됩니다. 반대로 주님을 가장 먼저 사랑할 때 비로소 배우자도, 자녀도, 친구도 주님 안에서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에서 말하는 ‘사람에게 독립한다’는 표현은 사람을 무시하거나 관계를 끊으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을 하나님 대신 붙드는 우상이 되지 않게 하라는 권면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를 더 덧붙입니다. 사람에게 독립한다는 것은 사람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도 주님의 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사람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사랑은 감정의 기복에 따라 흔들리지 않고, 상대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무너지지도 않습니다. 사랑의 중심이 사람에게서 주님께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설교에서는 ‘이미 결정된 것을 붙잡고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는 권면이 나옵니다. 부모, 출신 지역, 외모, 학력, 과거와 같은 것은 이미 결정된 것이므로 거기에 평생 매여 살지 말고, 앞으로 더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경상도 사투리와 발음, 서울대학교에 가지 못했다며 한탄하는 성도의 사례 등을 들어 설명하면서, 사람은 과거보다 현재의 선택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역시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와 잘 연결됩니다. 그는 사람을 과거의 존재가 아니라 ‘지금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존재인가’로 봅니다. 천국도, 지옥도 과거의 실수 하나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사람이 어떤 사랑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는가가 결정적입니다. 그래서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지금의 사랑은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가능성입니다.

 

결국 이 부분의 설교는 성도들에게 시선을 과거에서 현재로 돌리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에 한마디를 더 덧붙였을 것입니다. ‘현재’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새로운 기회를 주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의 섭리가 쉼 없이 사람의 자유 안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과거를 되돌리시지는 않지만, 오늘의 선택을 통해 영원을 새롭게 만들어 가십니다. 따라서 이미 결정된 것을 붙잡고 절망하기보다, 지금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려는 작은 선택 하나가 영원 전체를 바꾸는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설교는 중반 이후부터 시선을 현재의 삶에서 영원으로 넓혀 갑니다. 오정현 목사는 ‘현재의 모습이 인생의 결론이 아니다’라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합니다. 그는 기독교의 역사관은 시작과 끝이 분명한 역사관이며, 성도는 눈앞의 현실만이 아니라 마지막 결론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실패나 고난을 인생 전체로 판단하지 말고, 주님 앞에 서는 마지막 날을 기준으로 자신을 바라보라고 권면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특히 깊은 울림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거의 모든 저작이 결국 하나의 사실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연계의 삶은 영원을 위한 준비 기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인간의 육신의 삶을 끝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삶은 사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지금의 삶은 그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짧은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현재의 고난이나 성공은 영원이라는 거대한 시간 속에서는 하나의 과정일 뿐입니다.

 

그래서 설교에서 말하는 ‘지금은 한 점 같은 인생’이라는 표현은 매우 의미 있게 들립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자연계의 시간과 공간은 영계에서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영계에서는 시간보다 상태가 중요합니다. 사람이 몇 년을 살았는가보다 어떤 사랑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이 점에서 현재를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라는 설교의 방향은 스베덴보리의 관점과도 상당 부분 만납니다.

 

설교는 이어 대한민국의 역사와 기독교의 역할을 언급하며 역사 전체를 높은 곳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역사적 해석과 평가가 함께 들어가는데, 이러한 부분은 청중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중요한 것은 특정 국가나 시대에 대한 평가보다, 주님의 섭리가 언제나 인류 전체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방향으로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섭리가 특정 민족이나 국가에만 머무르지 않고 모든 민족과 모든 종교 안에서도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이끌어 가신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역사를 바라볼 때도 한 나라의 흥망보다 인류 전체를 향한 섭리라는 더 넓은 시야를 함께 갖는 것이 균형 있는 접근이 될 것입니다.

 

이후 설교는 죽음을 다루는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오정현 목사는 예수 믿는 사람에게 죽음은 형벌이 아니라 영광의 궁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 땅의 삶은 순례자의 삶’이며 ‘천국이 본향’이라고 설명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또한 ‘죽음은 벽이 아니라 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성도들에게 소망을 심어 줍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은 사람이라면 더욱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의 저서,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에서 사람이 죽는 순간 존재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 새로운 세계에서 눈을 뜬다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곧바로 인식하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영계에서 삶을 이어 갑니다. 거기에는 계속해서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고, 집이 있으며, 일상이 있으며, 무엇보다 자신이 평생 사랑하던 것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세계가 펼쳐집니다.

 

다만 여기에서 한 가지 차이도 보입니다. 설교는 죽음을 주로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표현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조금 더 신중하게 설명합니다. 죽음 자체가 곧바로 천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은 영계로 들어가는 문이며, 그 이후 사람은 중간영계를 거치면서 자신의 참된 사랑이 드러나고, 그 사랑과 같은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다시 말해 죽음은 목적지가 아니라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출발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만, 동시에 지금 어떤 사랑을 선택하며 살아가는가는 더욱 중요해집니다.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오정현 목사는 다시 로마서 8장으로 돌아갑니다. 그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에서 말하는 ‘’이 무엇인지 질문하면서, 그 답을 29절에서 찾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는 것, 곧 주님을 닮아 가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현재의 환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으며, 모든 고난은 결국 우리를 더욱 주님께 가까이 이끄는 과정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이번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로마서 828절의 ‘’을 건강이나 성공, 문제 해결, 형통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정현 목사는 그것을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최고의 선은 단순한 행복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를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여, 천국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상태이며, 그 상태는 바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 속에서 형성됩니다.

 

결국 이번 부분의 설교는 성도들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원하는 선은 무엇인가?’ 만일 내가 원하는 선이 문제 해결이나 형통에만 머문다면, 고난은 언제나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고의 선이 주님의 형상을 닮아 가는 것이라면, 지금의 이해할 수 없는 시간조차도 언젠가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설교가 전하려는 중심 메시지이며, 스베덴보리 역시 평생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했던 섭리의 한 중요한 원리이기도 합니다.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오정현 목사는 다시 로마서 8장과 고린도후서 4장을 연결합니다. 그는 바울이 말한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는 말씀과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가벼운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한다’는 말씀을 중심으로, 성도의 삶에는 결코 의미 없는 고난이 없다고 강조합니다. 누구에게나 질병이 있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으며, 가족의 문제와 억울한 일들이 있지만, 그것이 마지막 결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사람은 더욱 주님을 닮아 가고, 영원한 영광을 준비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대목은 많은 성도들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실제로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 가운데 하나가 ‘왜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고난을 허락하시는가’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그 질문에 대해, 현재보다 영원을 바라보면 비로소 고난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답합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이 오래도록 붙들어 온 중요한 위로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문제를 조금 더 세밀하게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이 고난 자체를 계획하거나 보내시는 분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악과 고통은 인간의 자유와 지옥의 영향 속에서 발생합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이미 일어난 악과 고난 속에서도 사람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가장 큰 선을 이루도록 끊임없이 역사하십니다. 다시 말해 고난은 주님의 작품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가 회복해 가시는 대상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섭리의 특징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모든 고난을 직접 계획하셨다고 생각하면, 사람은 사랑의 하나님과 현실의 고통 사이에서 쉽게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주님은 오직 선만을 원하시며, 인간의 자유 때문에 발생한 악조차 구원의 재료로 바꾸어 사용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환난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환난 속에서도 역사하시는 주님의 선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설교는 이어서 바울의 말을 인용하며, ‘환난은 가볍고 영광은 무겁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실제로 환난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암 투병도, 가족의 죽음도, 배신도, 실패도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 역시 그것을 몰라서 한 말은 아닙니다. 그는 태장과 투옥, 난파와 박해를 직접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환난을 ‘가볍다’고 말한 것은 고난 자체가 가볍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무게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인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영계를 설명하면서 매우 비슷한 관점을 제시합니다. 자연계에서 수십 년 동안 겪은 고난은 영원의 시간 속에서는 극히 짧은 준비 기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천국의 행복은 자연계에서는 비교할 대상조차 없을 만큼 크다고 여러 차례 설명합니다. 그래서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현재의 삶은 씨앗을 심는 계절과 같습니다. 씨앗을 심는 동안에는 땀과 인내가 필요하지만, 열매를 거두는 때가 오면 그 모든 수고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번 설교에서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영광의 중한 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표현입니다. 오정현 목사는 건강이나 물질의 응답은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깊은 영광은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고난 가운데서도 끝까지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혜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지혜를 얻기 위한 책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기 위한 말씀으로 읽어야 한다는 마이크 펜스의 일화를 소개하며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이 부분 역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은 단순히 지식을 늘리기 위한 책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말씀이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진리는 기억 속에 머무를 때는 아직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의지로 내려가 삶이 될 때, 비로소 사람의 것이 됩니다. 그는 이를 ‘진리가 선이 된다’고 표현합니다. 다시 말해 말씀을 아는 것보다 말씀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이번 설교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정현 목사는 반복해서 ‘주님을 더 사랑하라’, ‘말씀을 더 순종하라’, ‘현재보다 영원을 바라보라’고 권면합니다. 이 세 가지는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다만 표현과 설명의 방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오정현 목사는 복음주의 설교자의 언어로 이를 풀어내고, 스베덴보리는 상응과 섭리, 자유와 사랑이라는 보다 체계적인 영적 원리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두 접근 모두 성도의 시선을 자기 자신보다 주님께 돌리려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된 방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번 설교를 한 문장으로 정리해 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사건이 자동으로 선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인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어떤 사건도 결국 영원을 준비하는 재료가 될 수 있다.’ 이 한 문장은 이번 설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과 스베덴보리가 설명한 섭리의 원리를 함께 아우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설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질문을 향해 나아갑니다. ‘인생의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어떻게 끝까지 믿음을 지킬 것인가?’ 오정현 목사는 자신의 70년 인생과 목회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 답을 세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다 아신다’, 둘째, ‘지금은 결론이 아니다’, 셋째, ‘최고의 선은 주님을 닮아 가는 것이다’. 이 세 축을 중심으로 그는 성도들에게 현재의 형편보다 하나님의 섭리와 영원을 바라보라고 권면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볼 때도 이 설교에는 분명히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요소들이 적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성도들의 시선을 세상의 성공보다 영적인 성장으로 돌리려는 점,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도록 권면하는 점, 죽음을 두려움이 아니라 영원을 향한 관문으로 바라보게 하는 점은 많은 독자들에게 신앙적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신앙을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삶의 순종으로 연결하려는 방향 역시 충분히 공감할 만한 부분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저작과 함께 읽을 때에는 몇 가지를 조금 더 분명히 구분하면 더욱 균형 잡힌 이해가 가능합니다.

 

첫째는 섭리의 문제입니다. 설교에서는 모든 일이 결국 선을 이룬다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선을 이루시는 방식에 대해 매우 섬세하게 설명합니다. 주님은 악을 계획하시거나 고난을 보내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과 지옥이 만들어 낸 악 속에서도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가능한 가장 큰 선으로 이끌어 가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고난 자체가 선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도 역사하시는 주님의 섭리가 선입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둘째는 ‘주님을 닮아 간다’는 의미입니다. 설교는 그것을 신앙생활의 최고의 선으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여기에 깊이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단순한 인격 수양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닮는다는 것은 자신의 proprium을 날마다 내려놓고, 주님의 선과 진리가 자신의 사랑과 의지가 되도록 허용하는 과정입니다. 다시 말해 겉모습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의 사랑 자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입니다.

 

셋째는 죽음에 대한 이해입니다. 설교는 죽음을 ‘영광의 궁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신앙적 소망을 강조하는 데 매우 효과적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그 과정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죽음 이후 사람은 곧바로 자신의 영원한 처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중간영계에서 자신의 내면이 드러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곳에서 평생 사랑해 온 것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지고, 그 사랑과 같은 공동체를 향해 자연스럽게 나아갑니다. 그래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자신의 참된 사랑이 완전히 드러나는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넷째는 이번 설교의 본문 자체에 관한 부분입니다. 오정현 목사는 로마서를 매우 깊이 풀어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독자라면 한 가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복음서와 창세기 등 주님께서 직접 주신 말씀에는 천적인 아르카나가 담겨 있지만, 사도들의 서신은 교회의 신앙과 생활을 위한 권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로마서를 창세기처럼 상응의 층위를 따라 해석하기보다는, 복음서에서 이미 계시된 주님의 가르침을 실제 신앙생활에 적용하는 지침으로 읽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 더 가깝습니다. 이러한 관점을 알고 이번 설교를 들으면, 로마서 자체의 신비를 탐구하기보다 그 권면을 삶에 적용하려는 설교자의 의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설교 전반에 흐르는 목회자의 진정성입니다. 자신의 약점과 실패, 사투리, 고난, 그리고 일흔을 맞는 심정을 솔직하게 나누면서 성도들에게 ‘나도 여러분과 같은 길을 걸어왔다’고 말하는 모습은 설교를 더욱 친근하게 만듭니다. 스베덴보리도 진리는 삶을 통해 증명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경험을 통해 말씀을 증언하려는 태도는 설교의 설득력을 높여 주는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번 설교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미리 정해 놓으시는 분이라기보다, 우리가 자유 안에서 겪는 모든 사건 속에서도 끝까지 우리를 천국의 사랑으로 이끄시는 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은 단순한 낙관주의도 아니고, 운명론도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시면서, 그 자유가 끝내 천국을 향하도록 쉼 없이 역사하시는 주님의 섭리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 섭리의 최종 목적은 문제 해결이나 세상적 형통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형상을 닮아 참된 천국의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번 설교는 복음주의 목회자의 언어로 영원을 바라보게 하는 메시지였으며, 스베덴보리의 저작과 함께 읽을 때에는 섭리와 자유, 거듭남과 천국이라는 더 깊은 차원까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설교라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SY.44, 구원파, ‘사망의 길, 생명의 길’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번 강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 주제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것은 ‘사람은 왜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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