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5.심화

 

1.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42:3)

 

AC.25의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인간관과 거듭남 이해가 매우 잘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다’는 말이 단순히 ‘연약한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는 정도로 들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거듭남 과정에서 주님이 인간을 어떻게 다루시는가’라는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먼저 문자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갈대는 약한 식물입니다. 이미 상해 있는 갈대를 더 꺾어 버리면 완전히 부러집니다. 또 등불이 거의 꺼져 가는 상태에서 바람을 세게 불면 완전히 꺼집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겉뜻은 ‘이미 약해진 것을 더 파괴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매우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다룬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갈대와 등불을 ‘사람 안에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상응으로 봅니다. 갈대는 바람에 흔들리는 식물이기 때문에 흔히 ‘약하고 흔들리는 진리 상태’를 상징합니다. 사람이 아직 진리를 확실히 이해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상태입니다. 또 꺼져가는 등불은 ‘거의 사라질 듯한 선과 진리의 작은 불빛’을 의미합니다. 사람 안에 아직 완전히 죽지 않은 양심이나 선의 작은 흔적입니다.

 

이제 AC.25의 설명이 왜 나오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이 거듭나기 시작할 때, 그의 상태는 매우 불완전합니다. 생각 속에는 오류가 많고, 의지 속에는 욕정과 이기심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그것들을 ‘즉시 다 제거해 버리시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사람 전체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기존 삶 전체가 그 안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의 오류나 욕정을 바로 파괴하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그것들을 ‘조금씩 방향을 바꾸어 선과 진리를 향하도록 굽히십니다’. 바로 이것을 AC.25에서 설명합니다. 즉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약하고 불완전한 상태를 갑자기 부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의 동기는 아직 순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복을 받을 것 같아서 믿을 수도 있고, 어려움을 해결하고 싶어서 믿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동기는 완전히 순수한 사랑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즉시 없애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의 그런 동기를 사용하여 조금씩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이 바로 ‘굽히신다’는 뜻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정직하게 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하나님을 사랑해서라기보다 평판을 지키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그 행동을 통해 점점 더 깊은 선으로 인도하십니다. 결국 그 사람은 ‘이것이 옳기 때문에 정직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즉 처음의 불완전한 동기가 점차 더 좋은 방향으로 ‘변형, 즉 완전해지고 정화’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욕정(cupidities)도 이런 방식으로 다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욕정은 단번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대신 주님은 그것들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 사용’하십니다. 예를 들어 명예욕이 강한 사람은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선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은 점점 선 자체를 사랑하게 됩니다. 이렇게 욕정이 점차 더 높은 목적을 위해 사용됩니다.

 

그래서 AC.25는 인간 거듭남의 매우 중요한 원리를 말합니다. 주님은 인간을 변화시키실 때 ‘파괴 방식이 아니라 전환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즉 인간 안의 불완전한 요소들을 즉시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조금씩 선과 진리 쪽으로 돌리십니다.

 

이 점 때문에 이사야의 그 말씀이 매우 적절한 상징이 됩니다. 상한 갈대를 꺾어 버리면 끝입니다. 그러나 꺾지 않고 받쳐주면 다시 설 수 있습니다. 꺼져가는 등불을 끄면 완전히 어둠입니다. 그러나 보호하면 다시 밝아질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섭리 방식’입니다.

 

그래서 AC.25의 결론은 이렇게 이해하면 가장 쉽습니다. 사람 안에는 오류도 있고 욕정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들을 당장 없애 버리시지 않습니다. 대신 그것들을 조금씩 선과 진리의 방향으로 돌리시며 사람을 새롭게 만드십니다. 이것이 바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한다’는 말씀의 깊은 의미입니다.

 

주님은 사람을 고치실 때 부수어 버리지 않고, 그 사람이 가진 것을 사용하여 점점 더 좋은 방향으로 바꾸신다.’

 

 

 

AC.25, 창1:6-7,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6, 7) AC.25 ‘하늘을 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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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4.심화

 

1.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

 

기억 지식’이라는 표현은 처음 들으면 낯설게 느껴지지만, 사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아주 평범한 종류의 지식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가 라틴어로 ‘scientifica’, 영어로 ‘memory-knowledges’라고 부른 것은 특별한 신비한 지식이 아니라,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모든 사실 지식’을 말합니다. 즉 우리가 보고 듣고 배우고 읽으면서 머릿속에 쌓아 두는 정보들입니다.

 

가장 쉬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서울은 한국의 수도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또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또 성경에 대해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버지다’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기억 속에 저장된 지식’입니다. 우리가 필요할 때 꺼내 쓰지만, 그 자체가 곧 삶의 성품이나 사랑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이런 종류의 지식을 스베덴보리는 ‘기억 지식’이라고 부릅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학교 공부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역사 연도, 과학 공식, 지리 정보, 언어 단어, 직업 기술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의사는 의학 지식을, 목수는 목공 기술을, 목회자는 성경 지식을 많이 기억 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기억 속에 축적된 지식입니다. 바로 이런 것들을 통틀어 스베덴보리는 ‘memory-knowledges’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이 개념을 특별히 강조하는 이유는 ‘이 지식이 사람의 겉 사람(external man)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간을 크게 속 사람과 겉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겉 사람은 세상과 접촉하는 부분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공부하고 배우면서 지식을 쌓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기억 지식은 대부분 ‘겉 사람의 창고’에 저장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기억 지식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니고 쓸모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매우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진리와 선이 사람 안에 들어올 때, 그것을 담을 그릇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이해하려면 먼저 성경 이야기, 사람의 삶, 여러 상황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기억 지식입니다. 마치 씨앗이 자라기 위해 흙이 필요한 것처럼, 영적 진리가 작용하려면 기억 지식이 바탕이 됩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을 많이 읽어서 성경 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합시다. 아브라함 이야기, 모세 이야기, 복음서 이야기 등을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직 ‘기억 지식의 단계’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어느 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제 삶에서 실천하기 시작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그때 그 성경 지식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삶을 움직이는 진리’가 됩니다. 즉 기억 지식이 속 사람과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기억 지식을 종종 ‘재료’나 ‘도구’처럼 설명합니다. 목수가 집을 짓기 위해 나무와 연장을 사용하는 것처럼, 사람의 속 사람은 기억 지식을 사용하여 진리를 이해하고 선을 행합니다. 기억 지식은 그 자체가 영적 생명은 아니지만, ‘영적 생명이 활동할 수 있는 재료’가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기억 지식이 ‘선한 방향으로도, 잘못된 방향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지식이라도 어떤 사람은 그것을 통해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그 지식을 이용해 자기 생각을 정당화하거나 남을 이기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지식이 많다고 해서 곧 지혜로운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지혜는 지식이 ‘선한 사랑과 결합될 때’ 생깁니다.

 

초심자에게 가장 쉽게 설명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기억 지식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고, 책에서 읽고, 경험을 통해 얻는 ‘머릿속 정보 창고’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사랑과 연결되어 삶 속에서 사용될 때, 비로소 ‘지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기억 지식’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AC.24에서 주님이 ‘속 사람 안의 지식’과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을 구별하신다고 할 때의 뜻은 이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단순히 기억 속에 저장된 지식이 있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삶과 사랑과 연결된 진리’가 있습니다. 기억 지식은 겉 사람의 창고이고, 속 사람은 그 지식을 사용하여 진리와 선을 살아가는 곳입니다. 이런 구별을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의 글이 훨씬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AC.24, 창1:6-7,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AC.24-25)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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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심화

 

1. 저녁, 아침 설명과 단8:14, 26 인용

 

AC.22, As it is evening when there is no faith, and morning when there is faith, therefore the coming of the Lord into the world is called morning”; and the time when he comes, because then there is no faith, is called evening,” as in Daniel: The holy one said unto me, 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 two thousand and three hundred (Dan. 8:14, 26).에서 이 morning  evening을 단8:14, 26과 연결하는 게 여전히 좀 어리둥절합니다. 단순히 주야라는 표현이 나오기 때문인 건 아닐 텐데... 이 부분 좀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단순히 단8:14에 ‘evening’과 ‘morning’이라는 말이 나온다고 해서 곧바로 창1의 ‘저녁’과 ‘아침’에 mechanically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그렇게 연결하는 이유는, 그가 말씀 전체에 공통으로 흐르는 하나의 영적 언어, 곧 ‘상응의 질서’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1장에서 ‘저녁’과 ‘아침’이 한 번 정의되면, 이후 말씀의 다른 곳들에서도 그 표현은 같은 영적 구조 안에서 읽혀야 한다는 전제가 있는 것입니다. AC.22에서 스베덴보리가 먼저 세운 원리는 이것입니다. ‘저녁’은 빛이 약해진 상태, 곧 신앙이 거의 없거나 꺼져 가는 상태이고, ‘아침’은 다시 빛이 오는 상태, 곧 진리와 신앙의 빛이 살아나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저녁’과 ‘아침’은 단순한 시간 표시가 아니라 ‘교회와 인간의 영적 상태 변화’를 가리키는 표지입니다. 이 전제를 가지고 다니엘서로 가면, 거기서의 ‘저녁-아침’도 단지 시간 계산이 아니라 ‘신앙이 거의 사라진 상태로부터 다시 회복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점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핵심은 ‘주야라는 단어가 같으니까 연결한다’가 아니라, ‘저녁과 아침이 성경 안에서 반복해서 같은 영적 패턴을 가리킨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단8:14는 시간표를 넘어서 ‘황폐와 회복’의 리듬을 담고 있고, 창1은 그 리듬의 기본 문법을 먼저 보여 주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제 단8장의 문맥 자체를 보면 왜 스베덴보리가 이 본문을 끌어오는지가 더 분명해집니다. 다니엘 8장은 성소가 짓밟히고, 항상 드리는 제사가 중단되고, 진리가 땅에 던져지고, 거룩한 것들이 훼손되는 장면을 말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역사 속 박해와 성전 모독의 맥락이지만, 스베덴보리식으로 읽으면 이것은 곧 ‘교회 안에서 신앙의 빛이 꺼져 가는 상태’, 다시 말해 ‘저녁’입니다. 거룩한 것이 짓밟히고 진리가 흐려질 때, 그 상태는 시간상 밤이 아니라 영적으로 저녁이며 흑암입니다. 그런데 그 본문에서 ‘저녁에서 아침까지’ 또는 KJV 표현처럼 ‘unto evening-morning’이라는 말이 나오고, 그 뒤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거나 회복되는 말이 이어집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 이것은 단지 해가 지고 뜨는 자연의 시간이 아니라, 신앙이 무너진 상태에서 다시 회복되는 영적 상태의 전환을 말하는구나’ 하고 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8:14의 ‘저녁-아침’은 ‘신앙이 사라진 교회의 상태에서 주님에 의해 다시 빛이 회복되는 상태’의 압축어가 됩니다. AC.22에서 ‘주님이 세상에 오시는 때가 왜 저녁이냐’고 말할 때도 같은 논리가 작동합니다. 주님이 오셔야 할 만큼 교회가 이미 어두워졌기 때문에 그 시기는 ‘저녁’이고, 바로 그 오심으로 인해 새 빛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 오심은 ‘아침’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오심은 ‘저녁 같은 시대’ 속에 일어나는 ‘아침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연결 방식입니다.

 

조금 더 쉽게 비유하면, 창1은 ‘저녁-아침’이라는 단어의 뜻을 먼저 알려 주는 ‘사전’이고, 단8은 그 단어가 실제 역사와 교회 상태 속에서 어떻게 쓰이는지를 보여 주는 ‘실전 문장’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창1에서 ‘저녁’은 빛이 사라진 상태, ‘아침’은 빛이 회복된 상태라고 이미 뜻풀이가 주어졌기 때문에, 다니엘에서 성소가 짓밟히고 진리가 무너진 상황에 ‘저녁-아침’이 나오면, 그것은 곧 ‘황폐 후 회복’으로 읽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더 나아가 ‘주님의 오심’이라는 큰 축을 넣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에서 모든 회복의 중심 사건은 결국 주님의 오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침’이라는 말을 단순히 교회 개혁의 시점 정도로만 보지 않고, 가장 궁극적으로는 ‘주님이 오셔서 다시 빛이 되시는 때’로 읽습니다. 그러므로 단8:14를 창1과 연결하는 것은 억지 숫자 놀이나 단어 반복이 아니라, ‘신앙의 상실  주님의 개입  빛의 회복’이라는 성경 전체의 영적 패턴을 읽어낸 결과입니다.

 

성경에서 저녁은 단지 해가 진 시간이 아니라, 진리의 빛이 약해진 상태입니다. 아침은 단지 해가 뜨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이 다시 빛을 주시는 상태입니다. 다니엘서는 교회가 무너진 저녁을 말하고, 그 저녁 끝에 다시 오는 아침, 곧 회복을 말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저녁과 아침을 다니엘서의 저녁과 아침에 연결하는 것입니다.’

 

 

 

AC.22, 창1:5,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C.22-2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5) AC.22 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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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심화

 

1. 빛처럼 보였던’,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것들

 

AC.21, The darkness means all those things which, before man is conceived and born anew, have appeared like light, because evil has appeared like good, and the false like the true; yet they are darkness, consisting merely of the things proper to man himself, which still remain.에 나오는 빛처럼 보였던이나 사람 자신에게 고유한 것들, 곧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것들의 생생한 예, 구체적 사례들을 좀 알려주세요.

 

AC.21의 문장은 사실 매우 현실적인 인간 경험을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빛처럼 보였던 것’이라는 표현은, 사람이 거듭나기 전까지는 ‘자기 안에 있는 것들이 선하고 옳다고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사람에게는 어떤 생각과 행동이 매우 옳고 밝은 것처럼 느껴지는데, 더 깊은 빛 속으로 들어가 보면 그것이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AC.21에서 말하는 ‘빛처럼 보였던 어둠’입니다.

 

첫 번째로 가장 흔한 예는 ‘자기 의로움’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성실하게 살고, 교회도 잘 다니며, 도덕적으로도 큰 흠 없이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럽게 ‘나는 비교적 선하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은 그 사람에게는 매우 밝은 빛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더 깊은 자기 성찰을 하게 되면 이런 사실을 발견합니다. 자신이 선하게 살았다고 느꼈던 이유 가운데 상당 부분이 사실은 ‘자기만족과 자기 확신’이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저 사람들보다 낫다’, ‘나는 그래도 양심적으로 산다’ 같은 생각들이 그 선한 삶 속에 섞여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전에는 그것이 의로운 빛처럼 보였지만, 더 큰 빛 속에서는 그것이 ‘자기 사랑의 그림자’였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두 번째 예는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선행’입니다. 어떤 사람이 봉사를 많이 하고, 헌신적으로 일합니다. 겉으로 보면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정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이런 생각이 숨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신실한 사람으로 봐주면 좋겠다’, ‘내가 이렇게 헌신하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다.’ 이런 동기가 완전히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선행의 중심이 될 때 그 선은 사실 ‘자기 자신을 위한 선’이 됩니다. 그런데 당사자는 그것을 선한 일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빛처럼 보이는 어둠’이 됩니다.

 

세 번째 예는 ‘신앙적인 열심 자체가 빛처럼 보이는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적으로 매우 열심입니다. 전도도 많이 하고, 교리도 열심히 공부하며, 교회를 위해 많은 일을 합니다. 그런데 그 열심 속에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마음이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진리를 알고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 이런 마음은 매우 미묘해서 본인은 그것을 잘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을 ‘신앙의 열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깊은 빛 속으로 들어가면, 그것이 사실은 ‘신앙을 통한 자기 확증’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런 것들이 하나씩 드러난다고 설명합니다.

 

네 번째 예는 ‘도덕적 분노’입니다. 사람은 때로 불의한 일을 보면 강하게 분노합니다. 이 분노는 겉으로 보면 정의로운 감정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어느 정도는 그렇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분노 속에는 종종 ‘자기 감정이 상한 것’이 섞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나를 무시했을 때, ‘저 사람은 틀렸다’고 분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정의를 위한 분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에 생긴 감정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사람에게는 그것이 정의의 빛처럼 보이지만, 더 깊은 빛 속에서는 ‘자기 사랑의 그림자’로 보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람 자신에게 고유한 것들’, 즉 ‘proprium’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proprium은 단순히 인간의 개성이나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 것이 아닌, 인간 자신의 중심’을 가리킵니다. 이 중심은 대부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나오는 생각과 판단은 처음에는 매우 자연스럽고 옳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주님의 선과 진리와는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에서 처음 경험하는 빛이 바로 ‘자기 안에 있던, 그동안 빛처럼 보였던 것들이 사실은 어둠이었다는 사실을 보게 되는 빛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전까지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하는 경험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자연스럽고 옳다고 느껴졌다면, 이제는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지 질문하게 됩니다.

 

사람이 처음에는 자기 생각과 감정이 모두 옳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주님의 빛이 조금 더 들어오면, 이전에는 옳다고 느꼈던 것들 속에서도 ‘자기중심적 동기’가 섞여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때 사람은 처음으로 진짜 빛과 이전의 ‘빛처럼 보였던 것’을 구별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과정이 스베덴보리가 AC.21에서 말하는 ‘어둠이 드러나는 단계’입니다.

 

 

 

AC.21, 창1:4-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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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심화

 

2. 스베덴보리의 경험

 

위 심화 1번에 이어지는 질문인데요, 스베덴보리는 이런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본인이 직접 이런 과정을 밟은 건가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 연구에서 매우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인간 내면의 과정을 어떻게 그렇게 구체적으로 알았는가?’ 하는 문제는 결국 그의 저술이 어떤 경험과 근거에서 나온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대체로 세 가지 층위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가장 단순한 차원은 ‘개인적 영적 경험의 층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저술 여러 곳에서 자신이 단순한 사상가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통해 실제로 거듭남의 과정을 겪었다’고 말합니다. 특히 그의 개인 기록인 ‘Spiritual Diary’와 ‘Adversaria’ 같은 글들을 보면, 그는 자신이 겪는 생각의 변화, 유혹, 내적 싸움, 깨달음 등을 매우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기록들을 보면, 그가 단순히 교리를 정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영적 변화들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어떤 생각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영들의 영향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도 하고, 어떤 선한 감정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AC에서 설명하는 많은 심리적 과정들이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체험하고 관찰한 것들’이라는 점이 드러납니다.

 

두 번째 층위는 ‘영계 경험의 층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1740년대 중반 이후 영계가 열려서 천사들과 영들과 교통하게 되었다고 여러 번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그들과 수십 년 동안 교통하며, 인간 영혼의 상태, 거듭남의 과정, 선과 진리의 작용 등을 직접 관찰했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영계에서는 사람의 생각과 의도가 거의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어떤 선이 자기 사랑에서 나오는지, 어떤 선이 주님에게서 오는지 매우 분명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이런 관찰을 통해 그는 인간의 선이 어떻게 왜곡되는지, 왜 거듭남이 점진적으로 진행되는지, 왜 리메인스가 보호되어야 하는지 등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볼 때는 이것이 믿기 어려운 주장처럼 보일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 자신은 그의 신학 대부분이 이런 ‘영적 관찰을 통해 얻은 지식’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세 번째 층위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통해 얻은 이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을 읽을 때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그 안의 영적 의미가 열린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를 읽을 때, 그는 그것을 우주의 물리적 창조가 아니라 ‘인간 거듭남의 과정’으로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 해석은 단순한 상징적 해석이 아니라, 천사들이 말씀을 이해하는 방식과 동일한 방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창세기의 ‘여섯 날’을 인간 내면의 여섯 단계로 보고, 각 단계에서 일어나는 영적 상태들을 설명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성경의 여러 구절을 통해 인간 영혼의 구조와 거듭남의 과정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이 세 가지를 서로 분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설명이 ‘개인 경험, 영계 관찰, 그리고 말씀의 내적 의미’가 서로 일치하는 데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단순히 자기 경험만 말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성경 해석만 한 것도 아니며, 단순히 영적 체험만 말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서로 확인되면서 하나의 교리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 AC.20 같은 설명도 단순히 인간 심리를 추측해서 쓴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이 보기에는 ‘자신의 내적 경험과 영적 관찰, 그리고 말씀의 내적 의미가 모두 가리키는 동일한 원리’였습니다. 그는 사람이 처음에는 자기 선을 선으로 생각하다가, 점점 빛 속으로 들어가면서,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과정은 그가 자신에게서도 보았고, 영계에서도 관찰했으며, 성경의 창조 이야기 속에서도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한 신학자가 아니라 ‘영계를 관찰하는 자연과학자처럼 인간 영혼을 연구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인간 마음을 단순히 도덕적으로 평가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가 인간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왜 거듭남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지, 왜 자기 선이 먼저 무너져야 하는지를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AC.20 같은 문장은 바로 그런 연구의 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스베덴보리가 이런 내용을 알게 된 이유는 한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가 겹쳐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내적 경험, 영계에서의 관찰, 그리고 말씀의 내적 의미에 대한 통찰’이 서로 맞아떨어지면서 이런 설명이 나오게 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20, 창1:3,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 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어떤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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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 심화 1, ‘실제 사례들’

AC.20.심화 1. ‘실제 사례들’ AC.20, ‘But when man is conceived anew, he then begins for the first time to know that his goods are not goods, and also, as he comes more into the light, that the Lord is, and that he is good and truth it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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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심화

 

1. 실제 사례들

 

AC.20, But when man is conceived anew, he then begins for the first time to know that his goods are not goods, and also, as he comes more into the light, that the Lord is, and that he is good and truth itself.에 해당하는 구체적 사례를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실제 목회현장에선 이 마저도 정말 쉽지 않은, 정말 보기 힘든 경우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느끼는 어려움은 매우 현실적인 목회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AC.20의 문장은 읽으면 간단해 보이지만, 실제 인간 삶에서는 거의 드물게 보이는 변화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 상태는 갑자기 성인(聖人)이 되는 어떤 극적인 사건이라기보다, 사람이 조금씩 더 빛 속으로 들어가면서 ‘자기 자신을 다르게 보게 되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몇 가지 실제적인 유형을 통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AC.20의 문장을 다시 보면 두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선이 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시작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주님이 선과 진리 자체이심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두 단계는 사실 하나의 경험 안에서 이어집니다. 사람이 자기 선의 한계를 보게 될 때, 비로소 참된 선의 근원을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유형은 목회 현장에서 종종 만나는 ‘열심 있는 신앙인의 깨달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하고, 헌신도 많이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신앙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사람은 자기 마음속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봉사를 하면서도 인정받지 못하면 서운해지고,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헌신했다고 생각하면 마음속에 우월감이 올라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내가 하는 선한 일도 사실은 완전히 순수한 것은 아니구나’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바로 AC.20에서 말하는 첫 단계입니다.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선의 한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유형은 ‘실패를 통해 오는 깨달음’입니다. 어떤 사람이 평생 도덕적으로 살려고 노력해 왔다고 합시다. 그는 자신이 비교적 선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 사건에서 예상하지 못한 분노나 이기심이 폭발합니다. 그때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은 자기 사랑이 안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경험은 매우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내 힘만으로는 참된 선을 이루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험이 조금 더 깊어지면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됩니다. 사람이 자기 선의 한계를 깨달으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참된 선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두 번째 깨달음이 나타납니다. 즉 ‘주님이 선과 진리 자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교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예는 ‘용서의 경험’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큰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는 성경 말씀도 알고 있고, 용서해야 한다는 교리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는 마음이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점점 깨닫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마음을 바꾸어 주셔야 가능한 일이구나.’ 그러면 그 사람은 점점 기도하게 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전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AC.20이 말하는 두 번째 단계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느끼시는 것처럼 이런 변화는 실제로 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완벽한 성인(聖人)의 상태가 아니라 ‘빛이 조금 더 들어온 상태’입니다. 사람이 완전히 자신을 부정하는 단계까지 가는 것은 드물지만, 자기 선의 한계를 조금이라도 보는 순간 이미 거듭남의 과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빛 속으로 더 들어갈수록’ 이런 깨달음이 깊어진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정도로 시작합니다. 그다음에는 ‘내 선에도 자기 사랑이 섞여 있다’는 것을 봅니다. 더 깊어지면 ‘참된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선을 행할 때 자연스럽게 ‘주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인식’을 갖게 됩니다.

 

사람이 처음에는 ‘내가 선을 행한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자라면 ‘내 선에도 부족함이 있다’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더 깊어지면 ‘참된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바로 이런 ‘점진적인 빛의 증가’입니다.

 

그래서 AC.20의 문장은 어떤 이상적인 신앙인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조금씩 더 빛 속으로 들어갈 때 나타나는 ‘아주 현실적인 영적 경험의 방향’을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AC.20, 심화 2, ‘스베덴보리의 경험’

AC.20.심화 2. ‘스베덴보리의 경험’ 위 심화 1번에 이어지는 질문인데요, 스베덴보리는 이런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본인이 직접 이런 과정을 밟은 건가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 연구에서 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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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 창1:3,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 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어떤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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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심화

 

3. 리메인스 설명 중 왜곡되거나 오염된다 부분

 

AC.19 해설에 사람의 겉 사람이 활발하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움직이고 있는 동안에는, 리메인스가 전면에 나설 수 없습니다. 그것이 나오면 즉시 왜곡되거나 오염되기 때문입니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제 경우를 보더라도 과연 그런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오랜 세월, 교만, 곧 자기 사랑에 사로잡혀 먼 길을 돌아와야 했거든요... 저 표현 중 특히 왜곡되거나 오염된다는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이해하고 싶습니다.

 

윗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리메인스(remains) 교리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리메인스가 전면에 나서면 왜곡되거나 오염된다’는 말은 단순한 도덕적 경고가 아니라, 인간 마음의 구조와 영적 작용 방식에 관한 설명입니다. 이 점을 몇 단락으로 나누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리메인스’가 무엇인지 다시 짚는 것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리메인스는 사람이 살아오는 동안, 주님이 그의 속 사람 안에 저장해 두시는 ‘선과 진리의 씨앗들’, 다시 말해 어린 시절의 순진함, 선한 감정, 진리를 향한 기쁨,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 같은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주님이 보존해 두신 것이며,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에서 주님이 필요할 때 꺼내 사용하시는 영적 자산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리메인스를 인간 안에 있는 ‘천국의 씨앗’ 같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의 ‘겉 사람’, 곧 외적 마음입니다. 사람이 아직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외적 마음이 거의 전적으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의해 움직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사람의 생각과 판단 기준이 대부분 ‘나에게 유익한가’, ‘내 체면과 이익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속 사람 안에 있는 순수한 선과 진리가 밖으로 드러나게 되면, 그것들이 있는 그대로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왜곡’이라는 표현이 이해됩니다. 순수한 진리가 자기 사랑 속으로 들어오면, 사람은 그 진리를 ‘자기 목적을 위해 해석하고 이용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겸손’이라는 진리를 알게 되었는데, 그 진리를 진심으로 살기 위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마음으로 사용한다면, 그 진리는 이미 본래의 의미가 변형된 것입니다. 진리가 여전히 존재하기는 하지만, 중심이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기 때문에 진리가 ‘자기 확증의 도구’로 바뀌어 버립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왜곡’에 가까운 모습입니다.

 

오염’이라는 표현은 또 다른 차원을 설명합니다. 어떤 선한 감정이나 진리가 자기 사랑과 결합되면, 그 안에 ‘이기적 동기’가 섞이게 됩니다. 겉으로는 선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에서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 우월해지고 싶은 마음, 남보다 의롭다고 느끼고 싶은 마음이 함께 작동합니다. 그러면 그 선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순수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혼합된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오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리메인스를 매우 조심스럽게 보호하신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아직 자기 사랑 속에 깊이 있을 때는, 그 리메인스가 전면에 드러나지 않도록 ‘속 사람 깊은 곳에 보존해 두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씨앗이 아직 준비되지 않은 토양에 드러나면 밟히거나 썩어 버리기 쉬운 것처럼, 사람의 외적 삶이 어느 정도 정리되기 전에는 그 씨앗이 보호되는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황폐(vastation)라는 과정을 자주 말합니다. 앞서 다룬 바로 그 개념인데, 이것은 사람의 자기 확신과 거짓된 확신이 약화되는 과정입니다. 사람이 삶 속에서 여러 경험과 시련을 겪으면서 자기중심적 확신이 조금씩 무너질 때, 비로소 속에 있던 리메인스가 안전하게 작용할 수 있는 공간이 생깁니다. 그러면 주님이 그 리메인스를 사용하여 사람의 생각과 사랑을 새롭게 정리하십니다.

 

말씀하신 개인 경험도 사실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겪는 과정입니다. 오랜 시간 자기 확신 속에서 신앙을 이해하다가 어느 순간 그것이 무너지고, 더 깊은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으로 보면, 그때 속 사람 안에 오래 보존되어 있던 리메인스가 비로소 ‘겉 사람의 삶 속으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왜곡되거나 오염된다’는 말은 단순히 인간이 나쁘기 때문이라는 뜻이 아니라,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순수한 영적인 것들이 드러나면 그것들이 ‘자기 사랑의 틀 속에서 해석되고 사용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그 위험을 아시기 때문에 리메인스를 깊이 보호하시고, 사람이 조금씩 준비될 때마다 그것을 꺼내어 거듭남의 과정에 사용하신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AC.19, 창1:2,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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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심화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심화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 본문에 ‘By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가 나오는데, 여기서 move와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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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심화

 

2. move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 본문에 By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가 나오는데, 여기서 move brood가 나란히 나와요. 이게 좀 어색한데요, 이 둘이 어째서 나란히 나오는 건가요?

 

영어 문장만 보면 ‘move’와 ‘brood’가 서로 다른 뜻을 가진 단어인데, 나란히 붙어 있으니 왜 이렇게 설명하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단순한 영어 문장 문제가 아니라 ‘히브리어 원문, 성경 번역 전통,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이 함께 얽혀 있는 부분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왜 두 단어가 함께 나오는지 자연스럽게 풀립니다.

 

먼저 성경 원문을 보면 창1:2의 히브리어 표현은 ‘merachefet(מְרַחֶפֶת)입니다. 이 동사는 기본적으로 ‘떠 있다’, ‘흔들리다’, ‘진동하다’, ‘맴돌다’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영어 번역에서는 ‘the Spirit of God was moving over the waters’라고 번역합니다. 여기서의 move는 단순한 이동이라기보다 ‘부드럽게 움직이며 감싸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물 위를 스치듯이 감싸며 움직이는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를 보면 이 동사가 한 번 더 등장하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신32:11,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독수리가 자기 새끼 위에서 ‘날개를 퍼덕이며 보호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히브리어 표현은 바로 같은 동사입니다. 그 장면은 단순히 ‘움직인다’는 뜻이라기보다 ‘새가 알이나 새끼 위를 덮어 보호하며 따뜻하게 품는 모습’입니다.

 

바로 여기서 ‘brood’라는 번역이 나옵니다. 영어 ‘brood’는 ‘암탉이 알 위에 앉아 품어 생명이 자라도록 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그래서 일부 성경 해석 전통에서는 창1:2의 장면을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라 ‘생명을 준비시키는 보호와 따뜻한 덮음’으로 이해했습니다. 마치 암탉이 알을 품듯이 하나님의 영이 물 위에 임해 생명의 탄생을 준비한다는 이미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두 가지 뉘앙스를 ‘함께 살리기 위해 move brood를 나란히 사용한 것’입니다. 즉, 히브리어 단어 하나 안에 두 가지 이미지가 동시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움직이며 감싸는 이미지(move)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을 품어 키우는 이미지(brood)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의미를 모두 의식하고 설명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신학과도 잘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the spirit of God을 주님의 자비’라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 자비가 인간에게 작용하는 방식이 바로 이런 모습이라고 봅니다. 주님의 자비는 단순히 멀리서 움직이는 힘이 아니라 ‘생명이 태어나도록 보호하고 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는 ‘move’라는 말만 쓰지 않고,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라는 설명을 덧붙입니다.

 

이 이미지는 창세기 전체의 영적 의미와도 연결됩니다. 창세기 1장은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우주의 창조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거듭남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는 장면은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니라 ‘아직 혼돈 상태에 있는 인간의 마음 위에 주님의 자비가 임하는 장면’입니다. 이때 주님의 자비는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이 태어나도록 보호하고 준비하는 사랑’으로 작용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brood’라는 이미지가 매우 적절해집니다.

 

그래서 이 문장을 번역할 때 한국어로는 보통 이렇게 풀어 설명하면 자연스럽습니다. ‘운행하다’는 단순히 움직인다는 뜻이 아니라, ‘알을 품는 새처럼 생명이 태어나도록 따뜻하게 감싸며 움직이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주님의 자비가 인간의 혼돈 상태 위에서 ‘생명이 태어나도록 보호하고 준비하는 사랑으로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정리하면, move brood가 함께 나오는 이유는 영어 표현의 중복 때문이 아니라 ‘히브리어 원문의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는 ‘움직이며 감싸는 작용’, 다른 하나는 ‘생명을 품어 자라게 하는 보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이미지를 함께 사용하여 ‘주님의 자비가 인간의 거듭남을 준비하는 방식’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AC.19, 심화 1, ‘자비’(mercy)

AC.19.심화 1. ‘자비’(mercy) AC.19에도 ‘주님의 자비(mercy)’라는 표현이 나오네요. 대한민국 기독교인들은 개신교인들을 포함, 보통 ‘자비’보다 ‘은혜’에 익숙합니다. 심지어 ‘자비’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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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심화

 

1. 자비(mercy)

 

AC.19에도 주님의 자비(mercy)라는 표현이 나오네요. 대한민국 기독교인들은 개신교인들을 포함, 보통 자비보다 은혜에 익숙합니다. 심지어 자비하면 불교를 떠올리지요.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거의 대부분 자비를 말하네요.  자비 은혜’, 둘 사이 무슨 차이가 있어 그런 건가요?

 

실제로 스베덴보리 저작을 읽는 한국 독자들이 가장 자주 느끼는 낯섦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mercy’를 거의 항상 ‘자비’로 말한다는 점입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은혜’라는 표현이 압도적으로 익숙하기 때문에, ‘자비’라는 말을 보면 말씀하신 것처럼 불교적 어감이 먼저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mercy’를 사용하는 데에는 분명한 신학적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언어적 배경부터 보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 원문은 라틴어인데, 그가 사용하는 단어는 대부분 ‘misericordia’입니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 ‘연민’, ‘긍휼’을 뜻합니다. 영어 번역에서는 이것을 거의 항상 ‘mercy’로 옮겼습니다. 성경에서도 같은 단어가 자주 나옵니다. 예를 들어 시편이나 복음서에서 ‘주의 긍휼’, ‘주의 자비’ 같은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mercy는 사실 전통적인 성경 언어에 매우 가까운 표현입니다.

 

반면, 한국 교회에서 익숙한 ‘은혜’는 영어로 보통 ‘grace’에 해당합니다. 이 단어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개념인데, 특히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신학에서 중심 개념이 되었습니다. ‘은혜’는 주로 ‘값없이 주어지는 구원의 선물’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인간이 어떤 공로도 없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과 용서를 가리킬 때 많이 사용됩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표현이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서 두 단어의 뉘앙스 차이가 나타납니다. ‘은혜(grace)는 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물을 주신다’는 측면을 강조합니다. 반면 ‘자비(mercy)는 ‘하나님이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다’는 측면을 강조합니다. 쉽게 말하면, 은혜는 ‘주시는 사랑’, 자비는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에 가까운 표현입니다. 둘 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키지만, 강조점이 약간 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왜 ‘mercy’를 그렇게 자주 사용하는지를 이해하려면, 그의 인간관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매우 엄정하게 봅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을 만들어 낼 수 없고, 자신의 힘만으로는 거듭날 수 없으며, 끊임없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기울어지는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인간이 구원과 거듭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결국 ‘주님의 끊임없는 긍휼과 자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설명을 할 때마다 ‘주님의 자비로(in the Lord’s Divine mercy)라는 표현을 반복합니다.

 

이 표현에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영적 진리를 이해하는 것조차 자기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어떤 진리를 깨닫고, 어떤 선을 행하고, 거듭남의 길을 걷게 되는 것 자체가 ‘주님의 자비로운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글에서도 ‘주님의 자비로 이것을 설명할 것이다’, ‘주님의 자비로 이것이 더 분명해질 것이다’라는 식으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겸손한 표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의 신학적 확신을 보여 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할 때, ‘사랑(love)이라는 말을 가장 중심에 둡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타락한 인간에게 작용할 때 나타나는 모습이 바로 ‘자비(mercy)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자체는 사랑이지만, 그 사랑이 연약하고 비참한 인간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그것을 ‘자비’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글에서는 사랑과 자비가 거의 함께 등장합니다.

 

한국 교회 현실을 생각하면 문화적 차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자비’라는 말이 불교적 자비와 연결되어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에서도 ‘긍휼’, ‘자비’, ‘인애’ 같은 표현이 매우 많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한다’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mercy’는 불교적 의미라기보다 ‘성경의 긍휼 전통에 더 가까운’ 표현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 사랑을 강조하는 말이고, ‘자비’는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거듭남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오래 참고 인도하시는지를 강조하기 때문에 ‘자비’라는 표현을 특히 자주 사용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자비’와 ‘은혜’는 서로 경쟁하는 개념이 아니라, 사실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각도에서 설명하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가운데서 특히 인간을 향해 내려오는 ‘긍휼의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 ‘mercy’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AC.19, 심화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심화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 본문에 ‘By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가 나오는데, 여기서 move와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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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창1:2,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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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심화

 

2. 라틴어 vastatio의 영역 vastation desolation’(혹은 devastation’)의 비교

 

AC 포츠역 영어 vastation은 현대 사전엔 잘 안 나오고, 대신 desolation이 나오네요. vastation은 왜 사라졌을까요?

 

목사님께서 보신 현상이 정확합니다. 스베덴보리 영어 번역에서 자주 보이는 ‘vastation’이라는 단어는 오늘날 일반 영어 사전에서는 거의 사라졌고, 대신 ‘desolation’이 더 널리 사용됩니다. 이것은 의미가 사라졌다기보다 ‘단어의 사용 역사와 번역 전통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이 배경을 이해하면 AC를 읽을 때도 훨씬 도움이 됩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사실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 자신은 영어로 글을 쓴 것이 아니라 ‘라틴어로 저술했습니다. ‘Arcana Coelestia’의 원문 단어는 영어 ‘vastation’이 아니라 라틴어 ‘vastatio’입니다. 이 라틴어는 신학 전통에서 오랫동안 사용된 용어로, 성경의 예언서에 나오는 ‘황폐’, ‘폐허’, ‘비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특히 교부 시대와 중세 신학에서는 이 단어가 ‘영적 의미의 황폐 상태’를 설명하는 데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19세기 초에 스베덴보리 저작을 영어로 번역할 때, 번역자들은 라틴어 ‘vastatio’를 그대로 옮기기 위해 ‘vastation’이라는 영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당시 영어에는 이 단어가 실제로 존재했고, ‘황폐하게 함’ 또는 ‘파괴’라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영어 사용이 변했고, 일상 언어에서는 ‘desolation’이나 ‘devastation’ 같은 단어가 더 널리 쓰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vastation’은 점점 쓰이지 않게 되었고, 현대 영어에서는 거의 사라진 단어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번역자들이 굳이 ‘desolation’ 대신 ‘vastation’을 사용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두 단어는 비슷하지만, 뉘앙스가 조금 다릅니다. ‘desolation’은 결과 상태, 즉 이미 황폐해진 상태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vastation’은 ‘황폐하게 되는 과정’이나 ‘황폐하게 만드는 작용’을 더 강하게 느끼게 하는 단어였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황폐는 단순히 폐허 상태가 아니라 ‘욕정과 거짓이 약화되고 정리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번역자들이 ‘vastation’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AC에서 ‘vastation’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파괴나 폐허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서 그것은 ‘영적 정화 과정’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사람이 자기 확신과 거짓 신념을 내려놓게 되고, 이전에 의지하던 것들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면서 새로운 진리와 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는 상태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 저작에서는 ‘vastation’을 단순히 ‘황폐’라고 번역하면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파괴가 아니라 준비 과정’입니다.

 

오늘날 학술 번역에서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전통 번역을 그대로 유지해서 ‘vastation’을 계속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다른 하나는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desolation’이나 ‘spiritual desolation’으로 바꾸어 번역하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vastation’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특정한 기술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를 읽을 때는 이렇게 이해하면 가장 정확합니다. ‘vastation’은 단순한 파괴나 절망 상태가 아니라, ‘거짓과 욕정이 약화되면서 새로운 영적 질서를 준비하는 상태’입니다. 성경 이야기로 보면, 광야의 시간이나 탕자의 궁핍 같은 순간이 여기에 가까운 예가 됩니다. 겉으로 보면 황폐하지만, 사실은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정리하면 ‘vastation’이 현대 영어에서 사라진 것은 의미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언어 사용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 저작에서는 이 단어가 라틴어 ‘vastatio’의 번역으로서 특별한 신학적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전통적인 표현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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