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후 눈 뜨면 주님 품에 안겨 있겠지?’ - 죽음 직후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예수 믿으니까 죽은 뒤 눈을 뜨면 곧바로 주님 품에 안겨 있겠지.’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에게는 아주 자연스럽고 따뜻한 기대입니다. 그리고 이 말에는 분명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죽음은 주님에게서 떨어져 미지의 세계로 내던져지는 사건이 아니며, 주님의 섭리와 보호는 죽음의 순간에도 중단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사후의 깨어남을 따라가 보면, 이 표현은 조금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죽자마자 눈을 뜨면 예수님께서 눈앞에 서 계시고, 내가 그분의 품에 문자 그대로 안긴다’고 단정하기보다는, ‘사후의 첫 순간부터 나는 주님의 보호와 인도 안에 있다’고 말하는 편이 훨씬 정확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에서 묘사하는 죽음 직후의 장면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육체의 기능이 멈춘 뒤에도 사람의 영은 살아 있으며, 천사들이 그 사람 곁에서 깨어남을 돕습니다. 처음에는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하며 아주 평화로운 상태 속에서 그 사람을 보호하고, 이후 그의 상태가 변화함에 따라 다른 천사들과 영들이 함께합니다. 다시 말해 죽음 직후의 사람은 홀로 버려지지 않습니다. 자연계의 육체를 벗는 그 가장 낯선 순간부터 천국의 질서 안에서 세심하게 보호받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눈을 뜨면 주님 품에 있다’는 표현은 영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천사들이 사람을 보호한다고 해도 그 보호의 근원은 천사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구별이 하나 있습니다. ‘주님의 품에 있다’는 것과 ‘나는 곧바로 천국의 최종 거처에 들어간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에는 ‘영들의 세계’(world of spirits)가 있습니다. 이것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중간 상태이며, 사람이 자연계에서 형성한 자신의 진정한 내면이 드러나는 곳입니다. 죽었다고 해서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도 인격도 사랑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자연계에서의 외적 모습과 상당히 비슷하지만, 점차 외면이 벗겨지고 그 사람의 실제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이 나타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인이니까 눈 뜨면 주님 품에 있겠지’라는 생각이 자칫 위험한 확신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나는 전도를 많이 했으니 구원받을 거야’, ‘나는 주님께 헌신적으로 살았으니 큰 상을 받을 거야’와 같은 원리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는지, 목회했는지, 성경을 많이 읽었는지, 주님의 이름을 얼마나 많이 불렀는지가 사후에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그 사람의 최종적 영적 상태를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결국 드러나는 것은 ‘나는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살았는가?’입니다.

 

그래서 사후세계에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자연계에서는 자신을 매우 신앙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외적인 신앙의 껍질이 벗겨진 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자신의 지배적 사랑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했고 화려한 신앙 경력도 없었던 사람이 실제로는 양심에 따라 살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기를 사랑했던 사람으로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사후에는 ‘나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했는가?’보다 ‘나는 실제로 어떤 사람이 되어 있었는가?’가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사후에 주님을 직접 만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천국의 중심이며 천국 전체를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천사들은 모두 주님을 바라보고, 천국의 모든 선과 진리와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따라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질서를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여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 가까이 간다’는 것도 공간적으로 몇 미터 앞에 계신 주님에게 가까이 가는 것보다 ‘내 사랑이 주님의 사랑과 얼마나 조화를 이루는가?’라는 상태의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역설이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사후에 갑자기 우리를 사랑하기 시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이미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죽은 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자연계에서 만들어 놓았던 수많은 외적인 것들이 벗겨지면서 ‘내가 주님의 사랑을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되어 있는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문제는 그 사랑을 받아들일 우리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주님 품’이라는 표현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으면 더욱 깊어집니다. 주님의 품은 단순히 사후에 한 번 경험하는 포옹이라기보다 주님의 사랑과 보호와 질서 안에 거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것은 죽은 뒤에 처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유용한 일’(use)을 기쁘게 행할 때 이미 주님의 품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남’(regeneration)이란 어쩌면 사후에 주님 품에 안길 준비라기보다, 지금부터 그 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의 순간을 두려워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의 사후 묘사를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상당한 위로가 있습니다. 죽음은 의식이 영원히 꺼지는 순간도 아니고, 영혼이 홀로 어둠 속으로 떨어지는 순간도 아닙니다. 자연계의 몸을 벗고 영적 감각이 열리면서 이미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던 영계를 의식하기 시작하는 전환입니다. 그리고 그 깨어남 자체가 주님의 질서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죽을 때 내가 혼자이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에 대해서는 ‘혼자가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나는 예수 믿었으니 눈 뜨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났고 천국행이 확정되어 있겠지’라고 생각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사후의 깨어남은 끝이라기보다 진실이 드러나는 시작입니다. 그곳에서는 교단도 직분도 평판도 종교적 이력도 우리의 내면을 가려 주지 못합니다. 내가 사랑한다고 말했던 주님을 실제로 사랑했는지, 내가 믿는다고 고백했던 진리를 실제 삶에서 받아들였는지, 체어리티(charity)가 내 삶 속에서 실제적인 선으로 나타났는지가 점점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나는 사후 눈 뜨면 주님 품에 안겨 있겠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의 순간에도 주님의 보호 밖으로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품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으로 자동 배정되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가 평생 받아들인 주님의 사랑과 선이 결국 우리 자신의 사랑이 되어 드러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죽어서 눈을 뜬 다음 주님 품에 안기는 것만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악을 하나씩 내려놓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람을 사랑하며, 자신의 자리에서 선한 ‘유용한 일’을 행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주님의 품 안에서 살아가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후에 전혀 낯선 주님을 처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부터 사랑하고 따르던 주님을 더 분명한 세계에서 계속 따라가는 것입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죽음 뒤에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나를 받아 주실 것인가가 아니라, 언제나 나를 받아들이고 계셨던 주님의 사랑을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며 받아들였는가입니다.’

 

 

 

SL.11,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실 때가 있지?’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실 때가 있지?’ - 주님은 내 편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시는 분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실 때가 있지?’ 신앙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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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9, ‘나는 주님께 헌신했으니 천국 가면 큰 상 받을 거야’

‘나는 주님께 헌신적인 삶을 살았으니 큰 상을 받을 거야’ - 천국의 상과 공로의 역설 ‘나는 주님께 헌신적인 삶을 살았으니 천국에서 큰 상을 받을 거야.’ 이 말은 ‘나는 전도를 많이 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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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님께 헌신적인 삶을 살았으니 큰 상을 받을 거야’ - 천국의 상과 공로의 역설

 

‘나는 주님께 헌신적인 삶을 살았으니 천국에서 큰 상을 받을 거야.’ 이 말은 ‘나는 전도를 많이 했으니 구원받을 거야’보다 한 단계 더 미묘한 문제를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실제로 ‘상’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2)고 하셨고,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27)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상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큰 상’이 무엇이며, 내가 그것을 어떤 마음으로 기대하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가장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상’과 ‘공로’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충성스럽게 살고 이웃에게 선을 행한 삶에는 분명히 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주님께 무엇인가를 해드렸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 대가를 지급하시는 방식의 상이 아닙니다. ‘나는 평생 목회했고, 이것도 포기했고, 저것도 희생했으며, 많은 사람을 섬겼으니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천국의 몫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헌신은 어느새 주님과의 거래가 될 수 있습니다. 선행의 중심에 주님이 아니라 ‘나의 공로’가 들어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품꾼 비유는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과 늦게 들어와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이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먼저 온 사람들은 불평합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마20:12). 그들의 계산은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이해됩니다. ‘나는 더 오래 일했으므로 더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계산법이 천국을 세상 임금체계처럼 바라보게 만듭니다. 주님과의 관계까지 ‘내가 이만큼 했으니 주님도 이만큼 주셔야 한다’는 방식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천국에서 모든 사람의 상태가 완전히 똑같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에는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상태와 기능, 그리고 행복의 정도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자연계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인 정도가 다르고, 거듭남(regeneration)의 과정에서 형성된 사랑과 지혜의 그릇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더 큰 사람’은 세상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더 높은 자리에 앉아 더 많은 특권을 누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과 이웃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더 기쁘게 섬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천국의 위대함은 지배받는 사람의 수가 아니라 섬길 수 있는 사랑의 크기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큰 상’의 의미 자체가 달라집니다. 천국의 상은 사랑과 선행 바깥에 별도로 붙는 보너스가 아닙니다. 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선을 행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 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 행복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 기쁨입니다. 결국 주님께서 주시는 상은 ‘내가 선을 행했으니 그 대가로 무엇을 받는다’기보다, 주님께서 내 안에 형성하신 선한 사랑이 천국에서 아무 방해 없이 펼쳐지며 그 사랑 자체의 기쁨을 누리는 데 더 가깝습니다.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역설이 생깁니다. 정말로 주님께 헌신한 사람일수록 ‘내가 주님을 위해 이렇게 많이 했다’는 생각은 오히려 약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이 행한 선의 근원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점점 더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평생 희생했다’기보다 ‘주님께서 평생 나를 붙드시고 나를 사용해 주셨다’고 보게 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수십 년을 헌신한 사람이라도 한 사람은 그것을 자기 공로의 장부에 기록하고, 다른 사람은 그것을 주님께 받은 은혜로 기억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차이가 ‘프로프리움’(proprium)의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17:10)고 말씀하신 것도 이런 관점에서 깊이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아무 가치도 없다는 자기비하를 요구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선을 행하고 난 뒤 그것을 자기 공로로 소유하지 말라는 말씀에 가깝습니다. ‘내가 이렇게 했으니 받을 권리가 있다’가 아니라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주님께 받은 은혜였다’는 태도입니다.

 

그렇다면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는 말씀과 모순되지 않을까요? 오히려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우리의 행위는 내면의 사랑이 현실에서 형태를 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단순히 선행 횟수를 세시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 속에서 어떤 사랑이 형성되었는지를 보십니다. 평생 헌신적인 일을 많이 했더라도 그 중심에 명예욕과 지배욕, 그리고 자기 의가 있었다면 외적 헌신과 내적 상태가 다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 가족을 돌보고 자신의 직업에 정직하며 이웃에게 필요한 선을 행하면서 주님 앞에서 깊은 거듭남을 이루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큰 상’과 앞에서 살펴본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은 서로 연결됩니다. 사람이 영계에 가지고 가는 것은 ‘나는 몇 년 목회했다’, ‘몇 명을 전도했다’, ‘얼마를 헌금했다’,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했다’는 공적 목록이 아닙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동안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 형성하신 사랑을 가지고 갑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성격과 깊이에 따라 천국에서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공동체와 ‘유용한 일’(use)을 발견하고, 거기에서 자신의 사랑과 상응하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실제로 사람마다 천국의 기쁨을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질문에는 매우 섬세한 대답이 필요합니다. ‘주님께 헌신적인 삶을 살았으니 큰 상이 있다’는 말 자체를 무조건 틀렸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도 상을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만큼 헌신했으니 남보다 더 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미 천국의 상을 세상의 보상체계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참된 천국의 상은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사랑하고 더 자유롭게 선을 행하며 더 큰 기쁨으로 주님의 ‘유용한 일’에 참여할 수 있는 상태라고 보는 편이 스베덴보리의 천국관에 훨씬 가깝습니다.

 

어쩌면 천국의 상에는 이런 놀라운 역설이 있습니다. ‘상을 받기 위해 선을 행하는 사람은 아직 상을 자기 것으로 바라보지만, 선 자체를 사랑하여 행하는 사람은 이미 그 선 안에서 상을 맛보기 시작합니다.’ 천국에 가서 갑자기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가운데 천국의 기쁨이 이미 사람 안에서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께 헌신적인 삶을 살았으니 큰 상을 받을 거야’라는 말은 이렇게 바꾸어 보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평생 나를 사용해 주셨다면 그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내가 행한 선 가운데 참으로 선한 것은 주님에게서 온 것이며, 내가 바라는 상은 남보다 높은 자리가 아니라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더욱 유용하게 섬길 수 있는 기쁨입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천국의 큰 상은 내가 주님께 많이 해드린 대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 안에 더 큰 사랑과 더 큰 유용함의 기쁨을 형성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앞선 글들과 함께 놓으면 하나의 흐름이 보입니다. ‘부자는 재산 때문에 구원받거나 멸망하지 않습니다. 전도자는 전도 실적 때문에 구원받지 않습니다. 헌신한 사람도 헌신의 공로 때문에 큰 상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남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그 모든 것을 하면서 내 안에 어떤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이 형성되었는가?’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외적인 종교적 성취보다 더 깊이 들여다보게 하는 지점입니다.

 

 

 

SL.10, ‘나는 사후 눈 뜨면 주님 품에 안겨 있겠지?’

‘나는 사후 눈 뜨면 주님 품에 안겨 있겠지?’ - 죽음 직후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예수 믿으니까 죽은 뒤 눈을 뜨면 곧바로 주님 품에 안겨 있겠지.’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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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8, ‘나는 하나님의 자녀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나는 하나님의 자녀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 신뢰와 영적 방임의 차이 ‘나는 하나님의 자녀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얼핏 들으면 매우 믿음 좋은 말처럼 들립니다.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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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나님의 자녀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 신뢰와 영적 방임의 차이

 

‘나는 하나님의 자녀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얼핏 들으면 매우 믿음 좋은 말처럼 들립니다. 실제로 이 말 안에는 귀한 진리도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미래가 궁극적으로 주님 손에 있으며,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통제하려 하지 않고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것은 신앙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말은 전혀 다른 두 방향으로 갈라질 수 있습니다. 하나는 참된 신뢰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책임을 주님께 떠넘기는 ‘영적 방임’입니다.

 

 

주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는 사람이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 능력과 선의 근원은 주님에게서 오지만, 사람에게는 마치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 그러니까 ‘무엇이 옳은지를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인 합리성과 ‘그렇게 이해한 것을 스스로 선택하여 행할 수 있는 능력’인 자유가 주어져 있습니다. 바로 그 자유 안에서 악을 거절하고 선을 선택할 때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하신다’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같은 말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는데 ‘나는 하나님의 자녀니까 하나님께서 알아서 먹여 주시겠지’ 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지 않는다면 그것을 곧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건강에 문제가 있는데 필요한 치료와 생활관리는 하지 않으면서 ‘주님께 맡겼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자녀의 문제를 발견하고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키우시겠지’ 하며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섭리를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유용한 일’(use), 곧 자신의 ‘쓰임새’를 방기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책임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책임 있는 선택과 행동을 섭리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영적 문제에서는 이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나는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까 결국 천국에는 가겠지’라는 생각이 악을 살펴보고 회개하며 거듭나는 삶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일종의 영적 안전보장처럼 생각한다면 앞서 살펴본 ‘영접 기도만 하면 구원받는가?’라는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입으로 주님을 영접했다고 고백하거나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그 고백이 실제 삶에서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마7: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regeneration)은 그래서 매우 역동적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강제로 천국 사람으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사람에게 진리를 보여 주시고 선을 행할 능력을 주시며 끊임없이 이끄시지만, 사람은 자신의 자유 안에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거짓말하려는 마음을 발견했다면 ‘주님께서 언젠가 고쳐 주시겠지’라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죄임을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실제로 거짓말하지 않으려고 싸워야 합니다. 미움과 탐욕, 음란과 교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싸움에서 사람이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최선을 다할 때, 실제로 악을 이길 힘을 공급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여기서 ‘프로프리움’(proprium)에 관한 절묘한 역설이 생깁니다. 사람은 자기 힘만 믿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자기에게 아무 역할도 없는 것처럼 행동해서도 안 됩니다. ‘내가 했다’고 생각하면 자기 의에 빠지고, ‘주님이 하시니까 나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영적 나태에 빠집니다. 바른 질서는 ‘나는 최선을 다해 행하되, 선을 행할 수 있었던 모든 능력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말하는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하되 그것이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하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신다’는 말은 언제 참된 신앙고백이 될까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뒤 결과를 주님께 맡길 때입니다. 진실하게 판단하고, 필요한 행동을 하고, 책임을 다하고, 기도하며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는 내가 통제할 수 없을 때 ‘이제는 주님께 맡깁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체념이 아니라 섭리에 대한 신뢰입니다. 내가 해야 할 것과 주님께 맡겨야 할 것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라는 말도 내면에서는 정반대일 수 있습니다. ‘나는 하기 싫으니 하나님이 하시겠지’라면 책임 회피가 될 수 있지만, ‘나는 주님 앞에서 오늘 해야 할 일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나 결과까지 내가 붙잡으려 하지 않고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겠습니다’라면 매우 건강한 신앙이 됩니다. 외적으로는 비슷한 말인데 그 안의 사랑과 의지가 다른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 자체도 특권보다 관계와 닮음의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하나님이 무슨 일이든 내 뜻대로 처리해 주신다’는 의미라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기보다 보호막처럼 이용하는 셈이 됩니다. 참된 자녀 됨은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 가는 데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유용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니까 아무렇게나 살아도 하나님이 책임지시겠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고 싶다’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섭리에 관한 매우 중요한 균형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하고,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 맡긴다’고만 말해도 아직 조금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는 ‘내가 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것조차 사실 주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가능한 것이지만, 주님은 내가 그것을 내 힘으로 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행하기를 원하신다’고 말해야 더욱 정확합니다.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섭리는 경쟁관계가 아닙니다. 인간이 자유롭게 선을 선택하는 바로 그 안에서 주님의 섭리가 역사합니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라는 말은 절반은 매우 아름답고 절반은 매우 위험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주님의 섭리를 신뢰한다’는 부분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러므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가 붙는 순간 신뢰가 방임으로 변합니다. 참된 신앙은 ‘주님께 맡긴다’는 말로 책임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오늘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힘을 받아 내가 해야 할 일을 다한 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결과를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스베덴보리답게 압축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해야 하지만, 모든 선한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바로 이 두 문장 사이에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라는 말이 참된 신뢰가 될 것인지, 영적 방임이 될 것인지를 가르는 경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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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혈연이면 영원히 혈연인가 - 천국에서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한번 부모와 자녀가 되었으면 영원히 부모와 자녀인가? 형제자매는 영원히 형제자매인가?’ 이 질문은 사후세계와 천국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우리는 가족을 너무나 중요한 관계로 경험하기 때문에 천국에서도 지금의 가족관계가 그대로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대답은 ‘혈연이라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지만, 혈연관계가 영원한 관계를 결정하지는 않는다’에 가깝습니다.

 

자연계에서 혈연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라는 관계는 우연히 붙은 이름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서로 사랑하고 돌보며 책임을 배우도록 주어진 질서입니다. 특히 부모가 어린 자녀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사랑에는 주님의 섭리가 깊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혈연을 하찮게 여긴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계에서 가족에게 맡겨진 책임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은 체어리티(charity)의 중요한 형태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영계에 들어가면 관계를 결정하는 원리가 달라집니다. 자연계에서는 ‘누구에게서 태어났는가?’가 가족을 결정하지만, 영계에서는 ‘무엇을 사랑하는가?’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결정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 공동체는 혈통이나 국적, 혹은 지상 소속에 따라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비슷한 사랑과 선을 가진 사람들이 주님의 질서에 따라 결합하여 이루어집니다. 결국 자연적 친족관계보다 ‘영적 친화성’이 더 근본적 관계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밖에서 찾나이다’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고 물으신 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2:47-50). 이것은 육신의 가족을 무시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혈연보다 더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같은 선과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영적 친족관계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부자지간이었다고 해서 영원히 ‘아버지는 위, 아들은 아래’라는 관계가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계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낳고 양육했지만, 아들도 성인이 되고 두 사람 모두 영계에 들어가면 각각 독립된 영적 인간입니다. 그때는 ‘누가 누구의 아버지였는가?’보다 각 사람이 어떤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을 형성했는지가 더 중요해집니다. 두 사람이 서로 비슷한 천국적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매우 가까이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 사랑이 크게 다르다면 혈연이라는 이유만으로 영원히 같은 공동체에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형제자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형제이지만, 영계에서는 두 사람의 내적 사랑이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선택하고 다른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자신의 지배적 사랑으로 만들었다면, 자연적 혈연이 그 영적 차이를 없앨 수 없습니다. 천국에 있는 사람이 ‘내 동생이 지옥에 있으니 나도 그곳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고 할 수도 없고, 반대로 혈연 때문에 지옥의 사람이 천국 공동체에 머무를 수도 없습니다. 각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삶과 상응하는 곳으로 갑니다.

 

그러면 천국에 간 사람이 지옥에 간 가족 때문에 영원히 슬퍼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가 곧 따라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별도의 주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천국의 행복이 기억상실에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지상에서의 혈연적 애착 때문에 천국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것도 아닙니다. 사후에는 사람과 관계를 바라보는 기준 자체가 자연적 혈연에서 영적 선과 주님의 질서로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천국에 간 부모는 지옥에 간 자녀 때문에 슬퍼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으로 따로 다루면 상당히 깊은 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후에 가족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에서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잃어버리는 존재가 아닙니다. 지상에서 알던 사람들을 만나고 알아보는 과정이 있으며, 가족이나 친지들도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재회’와 ‘영원한 결합’이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만나서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는 것과 영원히 같은 공동체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각 사람의 내면이 드러나고, 서로의 사랑이 조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가까워지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서로 다른 곳으로 향합니다.

 

이 원리를 생각하면 주님께서 자연계의 가족을 왜 그렇게 중요하게 주셨는지도 새롭게 보입니다. 가족은 영원히 유지해야 할 하나의 혈연집단이라기보다, 우리가 사랑과 책임, 희생과 용서와 돌봄을 배우도록 주어진 매우 중요한 ‘거듭남’(regeneration)의 자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소유하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한 독립된 영혼이 주님을 향하여 성장하도록 돌봅니다. 자녀 역시 부모에게 영원히 종속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연계의 가족관계는 영적인 사랑을 배우는 매우 중요한 학교인 셈입니다.

 

그래서 ‘한번 혈연이면 영원히 혈연인가?’라는 질문에는 두 층위로 답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내 아버지였고, 내 어머니였고, 내 아들이었고, 내 딸이었다는 지상의 역사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혈연관계가 영원히 우리의 관계를 결정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영원한 세계에서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것은 피가 아니라 사랑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함께 사랑하는 내적 조화입니다.

 

어쩌면 이것을 가장 간결하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자연계에서는 혈연이 우리를 가족으로 만나게 하지만, 영계에서는 사랑이 우리를 영원히 함께 있게 합니다.’

 

그리고 이 원리는 가족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귀하게 만듭니다. 지금 부모와 자녀이고 부부이며 형제자매라는 이유만으로 영원한 결합이 자동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함께 주님을 향해 살아가는 가운데 자연적 가족관계가 ‘영적인 관계’로 깊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경우는 지상에서 가족이었던 사람들이 단지 혈연 때문에 다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비슷한 천국적 사랑을 이루었기 때문에 영계에서도 서로 가까운 사람들이 되는 경우일 것입니다.

 

 

 

SL.8, ‘나는 하나님의 자녀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나는 하나님의 자녀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 신뢰와 영적 방임의 차이 ‘나는 하나님의 자녀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얼핏 들으면 매우 믿음 좋은 말처럼 들립니다.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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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6, ‘부자는 지옥 가나’

부자는 지옥에 가는가 - 재산이 아니라 사랑의 문제 ‘부자는 지옥에 가는가?’라는 질문은 복음서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주님께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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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는 지옥에 가는가 - 재산이 아니라 사랑의 문제

 

‘부자는 지옥에 가는가?’라는 질문은 복음서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주님께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고 말씀하셨고, 이어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3-24)고까지 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도 부자는 죽은 뒤 음부에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만 놓고 보면 마치 부유함 자체가 구원을 가로막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와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남기신 그의 저작들을 함께 보면 결론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자이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도 아니고, 가난하기 때문에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 자체가 재산의 많고 적음을 구원의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많은 가축과 은금을 소유한 부자였고, 욥 역시 큰 재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마태복음이 명시적으로 ‘부자’라고 부르는 사람이면서 주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부유함 자체를 악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가?’입니다. 재산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고 그것을 자기 존재의 안전과 가치, 그리고 행복의 근원으로 삼는다면 부는 영적인 위험이 됩니다. 그러나 재산을 자신과 가족을 돌보고 이웃과 사회에 유익을 끼치며 맡겨진 일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재산 자체가 천국을 가로막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 구별은 더욱 분명합니다. 사람이 사후에 가져가는 것은 집도, 토지도, 그리고 통장도 아닙니다.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동안 자신 안에 형성한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을 가지고 갑니다. 따라서 똑같이 많은 재산을 가진 두 사람도 내적으로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돈을 통해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자신의 쾌락과 명예를 높이는 것을 사랑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자신의 재산과 능력을 맡겨진 것으로 여기며 정직하게 사업하고 가족을 책임지며 많은 사람에게 ‘유용한 일’(use, 쓰임, 쓰임새)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둘 다 ‘부자’이지만 그 재산을 움직이는 내적인 사랑은 정반대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그토록 강하게 말씀하셨을까요? 마태복음 19장의 문맥을 보면 바로 앞에 부자 청년이 있습니다. 그는 계명을 지켰다고 말했지만 주님께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시자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떠났습니다(마19:21-22). 그 순간 그의 재산이 단순히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 ‘붙들고 있는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주님과 재물 가운데 어느 하나를 놓아야 하는 순간이 오자 재물을 놓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핵심은 재산의 액수보다 ‘마음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있습니다.

 

‘낙타와 바늘귀’도 같은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흔히 ‘바늘귀’가 예루살렘의 작은 성문이어서 낙타가 짐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으면 통과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 전해지지만, 이를 뒷받침할 확실한 역사적 근거는 없습니다. 본문의 자연스러운 뜻은 실제 낙타와 바늘구멍을 극단적으로 대비하여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놀라자 주님께서는 곧바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19:25-26)고 말씀하십니다. 이 마지막 말씀이 앞의 말씀을 푸는 열쇠입니다. 주님께서는 ‘부자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선언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벗어나 천국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주님께서는 사람의 사랑 자체를 변화시키실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으로 들어가면 ‘부자’의 의미는 물질적 재산을 넘어 더욱 넓어집니다. 말씀에서 ‘부’, ‘재물’, ‘보물’은 좋은 의미에서는 선과 진리의 지식, 곧 영적 부요함을 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 의미에서는 자신이 가진 지식과 능력, 자기 의와 자기 지혜를 자기 것으로 여기며 의지하는 상태를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프로프리움’(proprium)의 문제가 나타납니다. ‘내가 가지고 있다’, ‘내가 알고 있다’, ‘내가 이루었다’, ‘나는 옳다’는 것이 주님을 대신하여 마음의 중심을 차지하기 시작하면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도 영적 의미에서는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가 좋은 예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3:17). 여기서 문제는 단순히 라오디게아 사람들이 돈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는 영적 자기충족이 문제입니다.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야 하는 존재가 자신에게 이미 모든 것이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부유하지만 속으로는 가난할 수 있고, 반대로 겉으로는 가난하지만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적으로 부유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 역시 ‘부자 = 지옥, 가난한 사람 = 천국’이라는 경제적 구원론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부자의 문제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자기 문 앞에 누워 있는 나사로를 외면하면서 자신의 풍요를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의 재산이 체어리티(charity)로 흘러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많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보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웃을 보지 못하는 상태’가 문제입니다. 부가 자기 사랑 안에 갇히면 그것은 사람을 주님과 이웃에게서 멀어지게 하지만, 부가 이웃의 유익과 ‘유용한 일’을 위해 사용되면 같은 재산도 전혀 다른 기능을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부자’를 한 가지 의미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자적으로는 실제 재산이 많은 사람을 가리킬 수 있고, 좋은 의미에서는 선과 진리라는 영적 재산을 풍성하게 가진 사람을 뜻할 수 있으며, 반대 의미에서는 자신이 가진 재산과 지식, 능력을 자기 것으로 여기며 주님보다도 더 그것을 의지하는 사람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부자’가 등장할 때마다 먼저 그 문맥에서 어떤 종류의 ‘부’를 말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결국 주님께서 문제 삼으시는 것은 ‘소유’ 자체라기보다 ‘소유에 대한 사랑’입니다. 부유한 사람에게는 부를 주님보다 사랑하게 될 특별한 시험이 있고, 가난한 사람에게도 부를 탐내고 부자를 시기하며 재물을 삶의 궁극적인 행복으로 여기게 될 시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하다는 사실도 영적인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통장에 돈이 없으면서 마음 전체로 돈을 사랑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많은 재산을 소유하면서도 마음은 그것에 매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지옥에 가는가?’라는 질문에는 분명하게 ‘아닙니다’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죽은 뒤 그의 재산 목록을 조사하여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재산을 소유하고 사용하는 동안 그 사람 안에 ‘어떤 사랑이 형성되었는가’를 보십니다. 재산은 죽을 때 모두 남겨 두고 가지만, 그것을 사용하면서 형성된 사랑은 가지고 갑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부자는 돈이 많아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돈이 주님을 대신하여 마음의 주인이 될 때 영적인 위험에 빠집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죽을 때 우리가 가지고 가는 것은 재산이 아니라, 그 재산을 사랑하고 사용하면서 형성된 우리의 사랑입니다.’

 

 

 

SL.7, ‘한번 혈연은 영원한 혈연?’

한번 혈연이면 영원히 혈연인가 - 천국에서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한번 부모와 자녀가 되었으면 영원히 부모와 자녀인가? 형제자매는 영원히 형제자매인가?’ 이 질문은 사후세계와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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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5, ‘좌파도 구원 받을 수 있나’

좌파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 - 주님은 정치적 좌표로 사람을 심판하시는가 ‘좌파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다소 도발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들이대면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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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 - 주님은 정치적 좌표로 사람을 심판하시는가

 

‘좌파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다소 도발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들이대면 의외로 중요한 문제가 드러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물론입니다.’ 좌파라는 정치적 성향 자체가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지 않으며, 우파라는 정치적 성향 자체가 사람을 천국으로 보내지도 않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판단하시는 기준은 그 사람이 어느 정치 진영에 속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진리라고 받아들였으며 그것을 어떻게 삶으로 살았느냐에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좌파와 우파의 사상에는 아무런 영적 차이가 없다’거나 ‘어떤 정치사상이든 모두 똑같이 선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치사상도 진리와 거짓, 선과 악의 관점에서 분별해야 합니다. 개인의 자유와 책임, 약자 보호, 공동체적 연대, 법질서, 재산권, 국가 권력의 한계 등 정치가 다루는 문제에는 실제로 선과 진리의 문제가 얽혀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정책이나 이념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거짓을 정당화하고, 증오와 폭력을 조장하거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권리를 짓밟는다면 그것은 어느 진영에서 나왔든 비판하고 분별해야 합니다. 반대로 인간의 존엄을 보호하고 이웃의 유익을 증진하며 정의와 질서를 세우는 요소라면 어느 진영의 주장인지와 별개로 그 안의 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원리가 등장합니다. 사람에게 어떤 ‘거짓’이 있다는 것과 그 사람이 ‘거짓을 사랑한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이 태어난 시대와 나라, 가정과 교육, 사회환경에 따라 많은 생각을 받아들입니다. 정치적 신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진심으로 사회적 약자를 돕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 싶어서 좌파적 정책을 지지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자유와 책임, 법질서와 공동체의 안정을 지키는 것이 이웃에게 더 큰 유익이라고 생각하여 우파적 정책을 지지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같은 사회문제를 놓고 정반대의 정책을 지지한다고 해서 어느 한쪽의 영원한 상태까지 정치적 선택만으로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정책 판단에는 사실에 대한 오해도 있을 수 있고, 경제와 사회에 대한 판단 착오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치가 영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왜 그것을 지지하는가?’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진심으로 돕고 싶어서 복지 확대를 지지하는 것과, 부유한 사람에 대한 증오와 시기 때문에 그들의 재산을 빼앗고 싶어 하는 것은 외적으로 비슷한 정책을 지지하더라도 내면에서는 다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유시장과 재산권을 인간의 자유와 사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 지지하는 것과, 자신의 재산과 특권만 지키면서 가난한 사람의 고통에는 무관심한 것도 전혀 다른 상태입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정치적 표어 뒤에 있는 바로 그 ‘사랑’입니다.

 

따라서 ‘좌파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곧 ‘우파면 구원받는가?’라는 질문을 불러옵니다.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보수적인 신학을 고백하고, 전통적인 가족관을 지지하고,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며, 공산주의를 강하게 반대한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거듭남의 증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 가치들을 말하면서도 자기 이익을 위해 거짓말하고, 사람을 멸시하며, 돈과 권력을 사랑하고,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증오한다면 정치적으로 아무리 ‘옳은 편’에 서 있다고 확신해도 그 사람의 내면까지 자동으로 옳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참된 이단은 누구인가?’에서 살펴본 원리와 정확히 같습니다. ‘올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는 것’과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이 동일하지 않듯, ‘올바른 정치적 판단을 하는 것’과 ‘천국적인 사랑을 가진 것’도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에 관한 설명을 적용하면 이 점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사람이 죽을 때 정당 가입증이나 투표 기록을 가지고 영계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계에서 자신 안에 형성한 사랑과 그 사랑에 결합된 진리 또는 거짓을 가지고 갑니다. 사후에는 외적 체면과 사회적 역할이 벗겨지면서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연계에서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졌던 두 사람이 내적으로는 모두 이웃의 유익을 사랑했을 수도 있고, 같은 정치 진영에서 나란히 활동했던 두 사람이 사후에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한 가지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정치적 신념이 ‘프로프리움’(proprium)과 결합하면 사람은 진리를 찾기보다 ‘우리 편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기 쉽습니다. 우리 편의 거짓에는 눈을 감고 상대편의 거짓에는 분노하며, 우리 편의 잘못은 사정을 이해해 주면서 상대편의 잘못은 그 사람 전체의 악함을 증명하는 증거로 사용합니다. 이때 좌파와 우파 가운데 어느 쪽에 서 있는가보다 더 심각한 영적 문제가 생깁니다. 진리 자체보다 ‘내 편’을 사랑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어느 진영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든 싫어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든 진리이며, 거짓 역시 내가 지지하는 진영에서 나왔다고 해서 진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정치적 분별을 없애는 렌즈가 아니라 오히려 더 엄격하게 만듭니다. 좌파의 주장도 살피고 우파의 주장도 살피되 같은 잣대를 적용해야 합니다. 사실은 사실대로 확인하고, 거짓은 어느 편의 것이든 거짓이라고 해야 하며, 선한 것은 상대편에서 발견되더라도 선하다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한 사람의 잘못된 정치적 판단을 발견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영원한 내면까지 우리가 판정해서는 안 됩니다. 정책과 사상은 분별할 수 있지만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는 주님께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결국 이렇게 바뀝니다. ‘좌파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가 아니라 ‘좌파든 우파든 무엇이 사람을 천국에 적합한 사람으로 만드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답은 정치적 진영이 아니라 ‘거듭남’(regeneration)을 향합니다. 사람이 주님을 향하고, 악을 죄이기 때문에 피하며, 진리를 배우고, 체어리티(charity)에 따라 이웃의 실제적인 유익을 구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정치 역시 그런 삶이 표현되는 여러 영역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따라서 가장 짧게 답한다면 이렇습니다. ‘좌파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우파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좌파라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우파라서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내 정치적 신념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봉사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증오와 두려움과 자기 의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고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을 자신에게 돌리는 순간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꽤 날카로워집니다. ‘상대편이 얼마나 틀렸는가?’를 묻기 전에 ‘나는 진리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사랑하는가?’를 묻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정치에 관한 가장 중요한 영적 분별은 바로 여기서 시작될 것입니다.

 

 

 

SL.6, ‘부자는 지옥 가나’

부자는 지옥에 가는가 - 재산이 아니라 사랑의 문제 ‘부자는 지옥에 가는가?’라는 질문은 복음서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주님께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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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4, ‘참된 이단’은 누구인가

‘참된 이단’은 누구인가 - 교리의 경계보다 더 깊은 주님의 판단 기독교에서 ‘이단’이라는 말은 대개 ‘정통 교리에서 벗어난 사람이나 집단’을 뜻합니다.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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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이단’은 누구인가

 

교회 안에서 ‘이단’이라는 말은 매우 무겁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이단으로 규정되면 그 순간부터 그가 하는 말은 거의 들을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사람의 신앙과 인격, 심지어 영원한 구원까지 이미 판정된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교회가 거짓된 가르침을 분별하고 성도들을 위험한 교리로부터 보호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진리와 거짓은 아무 차이가 없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느냐, 인간과 죄와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신앙의 방향과 삶이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리는 중요하지 않고 착하게만 살면 된다’고 말하는 것도 스베덴보리의 관점과는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교리가 참인가 거짓인가’를 판단하는 것과 ‘그 교리를 가진 사람이 주님 앞에서 어떤 영원한 상태에 있는가’를 판단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 사람이 고백하는 교리와 외적인 행동을 어느 정도 볼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왜 그것을 믿게 되었는지, 어떤 빛을 받았는지, 진리를 알 기회가 얼마나 있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왔는지를 보십니다. 인간이 내릴 수 있는 교리적 판정과 주님께서 내리시는 영적 심판 사이에는 우리가 함부로 넘어가서는 안 되는 경계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거짓을 가지고 있는 것’과 ‘거짓을 사랑하는 것’을 구별하는 일입니다. 사람은 태어난 환경과 교육, 교단과 문화의 영향으로 잘못된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신은 그것이 진리라고 진심으로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빛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며, 더 밝은 진리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의 내면을 단순히 현재의 교리적 오류만으로 판정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겉으로는 매우 정확한 교리를 고백하면서도 진리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보호하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신조를 정확히 암송하며, 이단과 정통을 능숙하게 구별하면서도 그 진리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거나 자신의 명예와 권위를 지키고, 자신에게 불리한 진리는 의도적으로 외면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문제는 단순히 머릿속에 어떤 문장이 들어 있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진리를 무엇을 위해 사용하느냐에 있습니다.

 

이 점을 잘 보여 주는 사람이 회심 전의 사울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버리려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은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을 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기고 교회를 박해하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행8:1-3). 훗날 그는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고백합니다(행26:9).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진실하게 믿고 있다는 사실과 그가 진리를 믿고 있다는 사실은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이야기는 동시에 우리에게 또 하나의 경고를 줍니다. 우리는 회심 전의 사울을 보고 ‘저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했으니 본질적으로 악한 사람이다’라고 최종 판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께서 그를 만나셨을 때 사울은 자신의 확신을 내려놓고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잘못이 사소했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볼 수 있었던 사울의 외적 모습만으로 그의 최종적인 내면까지 알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사울 안에서 우리가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의 위험이 드러납니다. 인간의 자기중심성은 종교 안에서도 작동합니다. ‘내가 믿는 교리가 참되다’는 고백이 어느 순간 ‘그러므로 나는 옳은 사람이다’로 바뀌고, 다시 ‘나와 다른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다’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것과 ‘내가 옳다는 사실’을 사랑하는 것은 겉으로 매우 비슷해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진리 쪽으로 움직이려 하지만, 자기의 옳음을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조차 자기 입장을 지키기 위해 사용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교리적 오류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거짓은 실제로 위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잔인하고 보복적인 분으로 이해하면 사람도 종교적 이름으로 잔인해질 수 있고, 구원을 한 번의 고백으로만 이해하면 거듭나는 삶을 가볍게 여길 수 있으며, 자신이 속한 집단만 하나님께 선택받았다고 믿으면 다른 사람을 멸시할 수도 있습니다. 진리는 우리의 길을 비추는 빛이며, 거짓은 그 길을 흐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리를 분별하고 오류를 바로잡는 일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거짓 교리를 가진 사람과 거짓 자체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거짓 가운데 있으면서도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선을 사랑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많은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악한 사랑을 섬기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이 진리를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하여 선을 보고, 그 선을 사랑하며, 실제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진리가 삶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 인간의 내면을 온전히 변화시킨 진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참된 이단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사람에게 붙이는 최종적인 낙인으로 사용하기보다 먼저 나 자신에게 돌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거짓을 가지고 있는가?’도 중요하지만 더 깊은 질문은 ‘나는 진리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사랑하는가?’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나를 더 겸손하게 하고 이웃을 더 사랑하게 하며 악을 죄로 알고 피하게 하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내 우월함을 확인하는 수단이 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 자신을 읽을 때에도 똑같이 적용해야 합니다. ‘나는 이제 스베덴보리를 알았으니 기존 교회 사람들보다 더 깊은 진리를 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바로 그 순간 스베덴보리의 가르침마저 종교적 프로프리움의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AC와 HH를 많이 읽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천국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 깊이 알고, 자신의 악을 더 분명히 보며,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체어리티(charity)로 살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리를 분별해야 합니다.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위험한 가르침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을 하면서도 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까지 대신 판결해서는 안 됩니다. ‘이 가르침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이 사람은 지옥에 갈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판단입니다. 전자는 우리가 진리를 분별하면서 해야 할 수 있는 일이고, 후자는 사람의 내면 전체를 아시는 주님께 속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어느 교단의 명부에 이름을 올렸는지, 어떤 신조를 정확하게 암송했는지, 사람들에게 정통이나 이단이라는 평가를 받았는지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받은 진리를 어떻게 대했는지, 더 밝은 진리가 왔을 때 받아들이려 했는지, 진리를 이용하여 자신을 높였는지 아니면 진리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는지, 그리고 결국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왔는지를 보십니다.

 

그래서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교리적 오류는 분명히 분별해야 하지만, 한 사람이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영원한 내면까지 우리가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 더 깊이 남겨 두고 싶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진리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사랑하는가?’

 

주님 앞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사람들이 나를 ‘이단’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리를 안다고 하면서도 그 진리가 요구하는 선한 삶을 거부하고, 결국 내 자기 사랑을 지키기 위해 진리마저 이용하는 것입니다.

 

 

 

SL.5, ‘좌파도 구원 받을 수 있나’

좌파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 - 주님은 정치적 좌표로 사람을 심판하시는가 ‘좌파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다소 도발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들이대면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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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3, ‘예수님 영접 기도’ 안 하면 구원 못 받나

‘예수님 영접 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가 - 기도문이 아니라 삶으로 받아들이는 주님 한국 개신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예수님을 영접했습니까?’라는 질문과 함께 일정한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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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영접 기도’ 안 하면 구원 못 받나

 

‘예수님을 영접하려면 이렇게 따라 기도하세요.’ 복음주의 교회에서 전도집회나 개인전도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매우 익숙한 장면입니다. ‘주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다. 지금 제 마음에 들어오셔서 저의 구주와 주님이 되어 주십시오.’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흔히 ‘영접 기도’라고 부르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 자체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을 믿으며 앞으로 주님을 따르겠다고 진심으로 고백한다면 그것은 매우 귀한 회심의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기도가 어느 순간 ‘구원이 성립되는 공식적인 절차’처럼 이해될 때 생깁니다. ‘나는 언제 영접 기도를 했으니까 구원받았다’, 혹은 반대로 ‘저 사람은 예수님을 좋아하고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만 영접 기도를 정확하게 한 적이 없으니 아직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을 영접한다’는 성경의 깊은 의미가 특정한 문장을 한 번 말하는 행위로 축소될 수 있습니다.

 

먼저 ‘영접 기도’라는 특정한 기도 형식과 성경이 말하는 ‘주님을 영접함’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오늘날 교회에서 사용하는 형태의 ‘영접 기도문’을 따라 해야 구원받는다는 명령이 없습니다. 물론 ‘영접한다’는 개념 자체는 분명 성경적입니다. 요한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합니다(요1:12). 따라서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구원에서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말하는 ‘영접’은 어떤 정해진 기도문을 낭독했다는 뜻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삶 전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계3:20도 영접 기도를 설명할 때 자주 사용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매우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직접적인 대상은 아직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불신자가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이미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문을 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한 번 주님을 영접했다고 고백했으니 이제 끝났다’는 생각을 흔듭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주님을 문밖에 세워 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롬10:9의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입술의 고백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진실한 신앙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특정한 문장을 한 번 말하면 그 순간부터 이후의 삶과 관계없이 구원이 법적으로 확정된다는 종교적 공식을 제시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를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단지 ‘주님’이라는 호칭을 입술로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분을 자신의 주로 받아들이는 것과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은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마7:21). 여기서 주님은 고백을 무가치하게 만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고백과 삶이 분리될 수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입술로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실제 삶에서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regeneration)이 중요한 빛을 줍니다. 거듭남은 어느 날 한 번의 기도로 완성되는 사건이 아니라 일생에 걸쳐 진행되는 과정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실제로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려 할 때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내면을 조금씩 새롭게 하십니다. 사람은 점점 자기 ‘프로프리움’(proprium)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상태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로 옮겨 갑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단지 ‘예수님, 제 마음에 들어오십시오’라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선과 진리로 오십니다. 내가 좋아하는 생각과 주님의 진리가 충돌할 때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내가 원하는 것이 악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버리며, 하기 싫더라도 이웃에게 행해야 할 선을 선택하는 것이 실제 삶에서 주님께 문을 여는 일입니다. ‘나의 생각보다 주님의 진리가 옳습니다. 나의 욕망보다 주님의 선이 더 중요합니다.’ 이렇게 살아가기 시작할 때 ‘영접’은 한순간의 고백에서 삶의 질서로 내려옵니다.

 

그렇다고 과거의 회심이나 영접 기도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영접 기도를 드린 바로 그날이 실제로 삶의 방향이 바뀐 중요한 순간일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 주님을 외면하던 사람이 진심으로 회개하며 ‘이제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고백했다면 그것은 매우 귀한 시작입니다. 다만 ‘시작’과 ‘완성’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씨앗을 심은 날은 중요하지만 씨앗을 심었다는 사실만으로 열매까지 이미 맺힌 것은 아닙니다. 그 고백이 이후의 삶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오늘날 교회가 사용하는 ‘영접 기도’를 정확하게 따라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주님께서 그를 외면하신다고 생각할 근거도 없습니다. 더 나아가 이것은 ‘그러면 자연계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들어 볼 기회조차 없었던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문제로 이어집니다. 만일 특정한 기도문이나 특정한 형태의 언어적 고백이 구원의 절대적인 형식 조건이라면 복음을 접할 기회 자체가 없었던 수많은 사람의 운명이라는 매우 어려운 문제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구원의 근원이 오직 주님에게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의 구원 역사를 교회의 외적 경계나 인간이 만든 종교적 절차 안에 가두지 않습니다. 교회 밖에서 태어나 예수님의 이름을 알지 못했더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종교적·도덕적 빛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며, 양심을 따라 진리를 받아들이려 살아간 사람은 사후에 더 분명한 진리를 배우고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예수님 없이도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지만, 주님께서 사람에게 다가가시는 길을 우리가 만든 하나의 절차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영접 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에는 ‘그렇지 않다’고 답할 수 있습니다. 영접 기도는 신앙의 아름답고 의미 있는 표현이며 어떤 사람에게는 실제 회심의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을 작동시키는 주문도 아니고, 한 번 발급받으면 이후의 삶과 관계없이 효력이 유지되는 천국 입장권도 아닙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나는 과거 어느 날 영접 기도를 했는가?’가 아니라 ‘나는 오늘 주님을 영접하며 살고 있는가?’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일 때, 악을 죄이기 때문에 피할 때, 이웃에게 선을 행할 때, 자기 뜻보다 주님의 뜻을 앞세울 때 우리는 실제 삶에서 주님께 문을 엽니다. 그리고 이것은 한 번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일생에 걸쳐 깊어지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구원은 특정한 영접 기도문을 한 번 따라 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구원의 유일한 근원이신 주님을 믿고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삶으로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더 짧게 압축한다면 이것이겠습니다.

 

‘참된 영접은 한 번의 기도가 아니라 일생에 걸친 거듭남입니다.’

 

 

 

SL.4, ‘참된 이단’은 누구인가

 

‘참된 이단’은 누구인가 - 교리의 경계보다 더 깊은 주님의 판단 기독교에서 ‘이단’이라는 말은 대개 ‘정통 교리에서 벗어난 사람이나 집단’을 뜻합니다.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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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2,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 가나’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에 가는가 - 마지막 행위와 영원한 운명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에 간다’고 단정하는 것은 성경적으로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신중하지 못한 말입니다. 자살은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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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면 무조건 지옥에 가는가 - 마지막 행위와 영원한 운명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에 간다’고 단정하는 것은 성경적으로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신중하지 못한 말입니다. 자살은 분명 생명을 스스로 끊는 매우 비극적인 행위이며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그의 생애 마지막 한 행위만 떼어 놓고 자동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인간은 다른 사람의 내면 전체를 알 수 없으므로, 특정한 사람이 자살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은 지옥에 갔다’고 판정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근본적인 기준은 ‘어떤 방식으로 죽었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랑을 자신의 삶으로 만들었는가’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난 뒤 자신이 지상에서 형성한 ‘지배적인 사랑’에 따라 살아갑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사람은 천국의 질서와 결합하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모든 것 위에 두며 악을 기꺼이 선택해 온 사람은 그와 상응하는 지옥의 질서에 이끌립니다. 따라서 죽음의 순간만으로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기계적으로 판정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인간관과 맞지 않습니다.

 

특히 자살이라는 외적인 행위가 같아 보여도 그 내면의 상태는 매우 다를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타인에게 복수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에서 자신의 생명을 끊을 수 있고, 누군가는 극심한 절망과 공포, 판단력의 붕괴 속에서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심각한 정신적 고통이나 질환으로 현실을 정상적으로 판단할 능력이 크게 손상된 경우도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모두 ‘자살’이라는 한 단어로 기록되지만, 주님 앞에서는 그 사람의 자유와 이성, 의도와 책임의 정도가 똑같을 수 없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악이 진정으로 사람의 것이 되려면 단순히 어떤 행동이 발생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그것이 악임을 알고도 자유롭게 원하고 선택하여 자기 삶의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문제가 함께 고려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자유와 합리적 판단 능력이 크게 훼손된 상태에서 일어난 행동과, 충분한 자유 속에서 악을 사랑하여 의도적으로 선택한 행동을 동일한 영적 책임으로 다룰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볼 수 없는 바로 그 내면을 보십니다.

 

성경에도 ‘자살한 사람은 반드시 지옥에 간다’는 교리는 없습니다. 성경에는 사울, 아히도벨, 시므리, 가룟 유다처럼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이 사례들로부터 ‘자살 = 자동적 지옥행’이라는 보편적 구원론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특히 어떤 죄 하나가 죽기 직전에 발생했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평생의 내적 삶과 주님과의 관계를 모두 지워 버린다는 식의 교리는 성경이 직접 가르치는 내용이 아닙니다.

 

흔히 ‘자살하면 회개할 시간이 없으므로 지옥에 간다’는 설명도 듣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구원을 지나치게 법률적이고 시간적인 공식으로 만드는 위험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평생 주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섬기다가 극심한 정신적 고통 속에서 판단력을 잃고 자신의 생명을 끊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마지막 몇 분 동안의 행위가 그 사람 안에서 오랫동안 형성된 모든 사랑을 자동적으로 뒤집어 놓는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반대로 마지막 순간에 특정한 말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평생 자발적으로 사랑해 온 악이 기계적으로 사라진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후의 상태는 그렇게 형식적인 계산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대편으로 지나가서도 안 됩니다. ‘그러니까 자살해도 괜찮다’는 결론은 전혀 아닙니다. 자연계에서의 생명은 주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것이며, 이 세상에서 사람은 자유롭게 선과 진리를 선택하면서 자신의 영원한 인격을 형성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생명을 의도적으로 끊는 것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자살을 낭만화하거나 고통에서 벗어나 영계로 옮겨 가는 하나의 방법처럼 생각하는 것은 특히 위험합니다. 죽음은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이 아니며,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역시 현세의 고통을 피해 가는 ‘비상구’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주님의 심판은 인간의 심판보다 훨씬 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외적인 행동을 봅니다. 주님께서는 그 행동이 나온 사랑과 의도, 그 순간의 자유, 이성의 상태, 그 사람이 감당했던 고통, 그리고 평생 형성되어 온 내면 전체를 아십니다. 따라서 유가족에게 ‘자살했으니 지옥 갔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알 수도 없고 판단할 권한도 없는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앞서 살펴본 ‘부자는 지옥에 가는가?’라는 질문과도 뜻밖에 같은 원리로 연결됩니다. ‘부자 = 지옥’, ‘가난한사람 = 천국’, ‘자살 = 지옥’처럼 하나의 외적 조건으로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판정하려는 것은 모두 지나치게 단순한 공식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계속해서 외적인 모습에서 그 사람의 ‘사랑’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는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깊이 ‘그 사람은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의도했으며, 얼마나 자유롭게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는가?’를 묻게 합니다.

 

그러므로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에 가는가?’라는 질문에는 분명하게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고 답해야 합니다. 동시에 ‘그러므로 자살은 영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자살이라는 행위의 심각성과 자살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판정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전자는 생명의 거룩함 때문에 엄중하게 보아야 하지만, 후자는 그 사람의 내면 전체를 아시는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자살이라는 마지막 행위 하나가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자동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평생 어떤 사랑을 형성했는지와 그 행위가 일어날 당시의 자유와 의도와 내면의 상태까지 완전하게 보시고 판단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아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태도도 정죄보다는 경외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자살이라는 비극을 가볍게 여기지 않되,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까지 대신 판결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모든 사정을 아시는 주님께 맡긴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것이 생명을 엄중하게 여기면서도 주님의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신뢰하는 태도입니다.

 

 

 

SL.3, ‘예수님 영접 기도’ 안 하면 구원 못 받나

‘예수님 영접 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가 - 기도문이 아니라 삶으로 받아들이는 주님 한국 개신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예수님을 영접했습니까?’라는 질문과 함께 일정한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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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1, ‘결혼을 꼭 해야 하나’

결혼은 꼭 해야 하는가 - 결혼의 의무보다 더 깊은 ‘결합’의 질서 성경은 결혼을 매우 귀하게 말합니다. 창세기 2장 18절에서 주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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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꼭 해야 하나’

 

성경은 결혼을 매우 귀하게 말합니다. 창2에서 주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말씀하시고(창2:18),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질서를 세우십니다(창2:24). 스베덴보리 역시 결혼을 단순히 인간 사회를 유지하거나 자녀를 낳기 위한 제도로 보지 않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참된 결합에는 더 깊은 영적 원형이 있으며, 그것은 ‘선’(good)과 ‘진리’(truth)의 결합이고, 가장 높은 차원에서는 주님과 교회의 결합에 그 근원을 둡니다. 이런 의미에서 결혼은 인간이 필요에 따라 만들어 낸 사회제도가 아니라 창조 질서 안에 놓인 매우 깊고 거룩한 결합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결혼이 창조 질서에 속한다’는 것과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서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성경 자체가 모든 개인에게 결혼을 의무로 부과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여러 이유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을 말씀하셨고(마19:12), 바울도 고전7에서 독신의 삶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주님께서 세우신 선하고 귀한 질서이지만, 결혼 여부 자체가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결혼하지 않았다고 해서 창조 질서에서 벗어난 사람도 아니며, 결혼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더 온전한 영적 상태에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결혼애’(Conjugial Love, 1768)를 통해 보면 이 문제는 한층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중요하게 보는 것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산다’는 외적 형태가 아니라 두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는 참된 ‘결합’입니다. 선은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는 선을 표현합니다. 참된 결혼 사랑도 이와 상응하여 두 사람이 서로를 소유하거나 이용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선을 원하고, 서로의 행복에서 자신의 행복을 발견하며, 점점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사랑입니다. 따라서 결혼의 영적 의미는 단순히 배우자를 ‘얻는 것’보다 자기중심적인 사랑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과 참으로 결합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결혼은 ‘거듭남’(regeneration)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한 사람과 평생을 함께 산다는 것은 낭만적인 감정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자기 뜻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고, 상대방의 필요를 자신의 필요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때도 있으며, 용서하고 기다리고 책임져야 할 때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결혼이 실제로 이런 모습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결혼이라는 외적 형태 안에서도 지배욕, 소유욕, 자기 사랑이 더욱 강하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혼인신고가 두 사람의 내면을 자동으로 하나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은 참된 결합이 이루어질 수 있는 귀한 질서이지만, 그 질서 안에서 실제로 어떤 사랑을 형성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이 ‘결합’의 질서에서 제외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독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의 직분에서 선한 쓰임을 행하며, 자기중심성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혼자가 편하니까’, ‘누구에게도 맞추고 싶지 않으니까’, ‘내 자유를 침해받고 싶지 않으니까’라는 이유로 모든 깊은 관계와 책임을 거부한다면 그 내면의 동기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제는 ‘결혼했는가, 하지 않았는가’보다 어떤 사랑을 선택하며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의 문제도 드러납니다. 인간의 프로프리움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끌어당기려 합니다. 배우자마저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사람’, ‘내 필요를 채워 줄 사람’으로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결혼했어도 참된 결합과는 멀어집니다. 반대로 결혼하지 않았더라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을 이웃을 위한 선과 유용한 일로 살아간다면, 그 사람 안에는 참된 결합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내적 토대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 여부라는 외적 상태만으로 한 사람의 영적 성숙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에 관한 설명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참된 결혼 사랑이 자연계에서 몇십 년 함께 사는 사회적 계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삶과 연결된다고 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결혼하지 못했다고 해서 결혼 사랑의 가능성이 영원히 닫히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에 적합한 내적 삶을 형성한 사람은 사후에도 자신과 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배우자와 결합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현세에서 결혼하지 않아도 천국에 가서 짝을 만나면 된다’는 식으로 가볍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현세에서 배우자를 확보했느냐가 아니라 내가 참된 결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느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성경적 질문이 따라옵니다. 주님께서는 부활에 관하여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2:30). 그렇다면 천국에는 결혼이 없다는 뜻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천국에서 남녀의 결합 자체가 사라진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의 문맥은 일곱 형제와 차례로 혼인한 한 여인이 부활 후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사두개인들의 질문입니다. 곧 지상의 혈통과 법적 관계를 그대로 영계에 옮겨 놓으려는 사고방식을 주님께서 바로잡으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의 혼인제도와 천국에서의 내적이고 영적인 결합을 구별합니다. 따라서 ‘천국에도 결혼이 있는가?’라는 문제는 별도로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지만, 적어도 마22:30 하나만으로 천국에서 모든 남녀의 결합이 사라진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 ‘결혼을 꼭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결혼은 주님께서 세우신 매우 귀한 창조 질서이며, 참된 결혼 사랑은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는 깊은 영적 질서에 상응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연계에서 반드시 결혼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결혼 여부가 구원을 결정하지도 않습니다. 결혼한 사람에게는 배우자를 소유하거나 이용하지 않고 서로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여기며 참된 결합을 이루어 가는 길이 있고, 결혼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선한 쓰임을 행하며 참된 결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 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질문을 조금 바꾸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반드시 결혼해야 하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 누군가와 참으로 하나 될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결혼의 궁극적인 의미는 단순히 배우자를 얻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랑에서 벗어나 선과 진리가 결합하듯 다른 사람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데 있습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결혼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중심성을 넘어 참된 결합의 사랑을 배울 수 있도록 주님께서 창조 질서 안에 두신 거룩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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