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4:22)

 

AC.424

말씀에서 세공업자(artificer) 지혜롭고 총명하며 지식을 갖춘 사람을 뜻합니다. 여기서 놋과 쇠를 다루는 모든 세공업자(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자연적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계시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By anartificerin the Word is signified a wise, intelligent, and well-informed [sciens] man, and here by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are signified those who are acquainted with natural good and truth. As in John:

 

21이에 천사가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이르되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22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안에서 보이지 아니하고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18:21, 22) With violence shall that great city Babylon be thrown down, and shall be found no more at all. And the voice of harpers, and musicians, and of pipers, and trumpeters, shall be heard no more at all in her; and no artificer, of whatsoever craft, shall be found any more in her. (Rev. 18:2122)

 

여기서 거문고 타는 자들(harpers) 앞에서와 같이 진리들을, 나팔 부는 자들(trumpeters) 신앙의 선들을 뜻합니다. 어떠한 종류의 세공업자(artificer of any craft)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 또는 선과 진리에 관한 기억지식을 가리킵니다.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Harpershere as above signify truths; “trumpeters,the goods of faith; anartificer of any craft,one who knows, or the memory-knowledge of truth and good. In Isaiah:

 

19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20궁핍한 자는 거제를 드릴 때에 썩지 아니하는 나무를 택하고 지혜로운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세우느니라 (40:19, 20) The artificer melteth a graven image, and the smelter spreadeth it over with gold, and casteth silver chains; he seeketh unto him a wise artificer, to prepare a graven image that shall not be moved, (Isa. 40:1920)

 

말씀은 자기 상상으로 거짓, 새긴 우상(graven image) 만들어 내고, 그것을 진리처럼 보이도록 가르치는 사람들에 관한 것입니다. 예레미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speaking of those who from fantasy forge for themselves what is falseagraven imageand teach it so that it appears true. In Jeremiah:

 

1이스라엘 집이여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8그들은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니 우상의 가르침은 나무뿐이라 9다시스에서 가져온 은박과 우바스에서 가져온 금으로 꾸미되 기술공과 은장색의 손으로 만들었고 청색 자색 옷을 입었나니 이는 정교한 솜씨로 만든 것이거니와 (10:1, 8-9) At the same time as they are infatuated they grow foolish, the doctrine of vanities, it is but a stock. Silver beaten out is brought from Tarshish, and gold from Uphaz, the work of the artificer, and of the hands of the smelter; blue and raiment; they are all the work of the wise, (Jer. 10:1, 89)

 

이는 거짓을 가르치면서 자기 생각으로 만들어 것을 꾸미기 위해 말씀에서 여러 내용을 모아들이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래서 말씀은 그것을 헛된 것들의 교훈(doctrine of vanities)이자 지혜로운 자들의 작품(work of the wise)이라고 부릅니다. 고대에는 이러한 사람들을 우상을 만드는 세공업자들로 표상했습니다. 그들은 우상, 거짓을 만들어 놓고 금으로 장식하여 선처럼 보이게 하며, 은으로 장식하여 진리처럼 보이게 합니다. 또한 청색 실과 옷으로 꾸미는데, 이는 겉으로 보기에 거짓과 일치하는 듯한 자연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signifying one who teaches falsities, and collects from the Word things with which to forge his invention, wherefore it is called adoctrine of vanities,and thework of the wise.Such persons were represented in ancient times by artificers who forge idols, that is, falsities, which they adorn with gold, that is, with a semblance of good; and with silver, or an appearance of truth; and with blue and with raiment, or such natural things as are in apparent agreement.

 

해설

AC.424는 앞의 AC.421-423에서 설명한 두발가인의 의미를 세공업자라는 말에 집중하여 밝힙니다. 두발가인은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나타내며, ‘은 자연적 선을, ‘는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세공업자가 지혜와 총명과 지식을 갖춘 사람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놋과 쇠를 다루는 모든 세공업자는 자연적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세공업자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 계시록과 이사야, 예레미야의 말씀을 차례로 인용합니다.

 

먼저 계18:21-22는 바벨론이 무너진 뒤 거문고와 퉁소와 나팔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고 세공업자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에서 거문고 타는 자들을 진리들로, ‘나팔 부는 자들을 신앙의 선들로 풀이합니다. 이어 어떠한 종류의 세공업자는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 또는 선과 진리에 관한 기억지식을 뜻한다고 밝힙니다. 앞의 AC.420에서 악기들이 선과 진리에 관련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면, 이번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과 세공업자가 함께 등장하는 말씀을 통해 세공업자의 의미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예언 전체를 해설하지 않으므로, 이 인용만으로 그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지식이 실제로 어떻게 되었는지까지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서 사40:19-20은 세공업자가 새긴 우상을 만드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앞의 계시록 인용에서 세공업자는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 또는 그 기억지식을 나타냈지만, 이사야에서는 세공업자가 거짓을 만들어 내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우상을 사람이 자기 상상으로 만들어 낸 거짓이라고 설명합니다. 세공업자는 그렇게 만든 것을 진리처럼 보이도록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핵심은 세공 기술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자기 생각으로 만든 거짓을 지식과 이해를 동원하여 그럴듯하게 꾸미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지혜로운 장인이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참된 지혜에 대한 칭찬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의 장인은 흔들리지 않을 우상을 만들기 위해 불려 온 사람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을 거짓을 만들어 진리처럼 보이게 하는 사람들에 관한 말씀으로 풀이합니다. 이는 사람이 지식을 갖추고 정교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가르치는 내용의 참됨까지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다만 흔들리지 않는 우상이 어떤 특정한 교리 체계나 논증 방식을 뜻한다고까지 이번 번호가 세부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10:1, 8-9는 이 문제를 한층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이 말씀에는 헛된 것들의 교훈’, ‘나무토막’, 다시스에서 가져온 은, 우바스에서 가져온 금, 세공업자와 금을 다루는 자, 청색 실과 옷이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이 거짓을 가르치는 사람이 자기 생각으로 만들어 낸 것을 꾸미기 위해 말씀에서 여러 내용을 모아들이는 상태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말씀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의 내용들을 가져와 자신이 만들어 놓은 거짓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모습을 고대의 우상 제작에 연결합니다. 세공업자들은 우상을 만들어 놓고 금으로 장식하여 선처럼 보이게 하며, 은으로 장식하여 진리처럼 보이게 합니다. 청색 실과 옷은 그 거짓과 겉으로 일치하는 듯한 자연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금과 은은 거짓 자체를 뜻한다기보다, 거짓에 선과 진리의 외관을 입히는 데 사용됩니다. 특히 청색 실과 옷에 관해서는 이번 번호가 겉으로 보기에 일치하는 듯한 자연적인 것들이라고 설명하는 데 그치므로, 이를 근거 없이 특정한 영적 상태나 교리로 더 세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세 인용을 함께 읽으면 세공업자라는 표현이 왜 중요한지 분명해집니다. 세공업자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과 이해를 나타내지만, 그 지식을 사용하는 사람이 언제나 참된 것을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계시록의 인용은 세공업자가 선과 진리에 관한 기억지식과 관련된다는 점을 보여 주고,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인용은 사람이 그러한 지식과 이해를 동원하여 거짓을 만들어 내거나 꾸밀 수도 있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세공업자라는 단어 하나에 고정된 도덕적 평가를 붙이기보다, 그가 무엇을 만들고 가르치는지에 따라 문맥을 살피게 합니다.

 

이 설명은 두발가인을 이해하는 데도 필요합니다. AC.421에서 두발가인은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나타냈고, AC.423에서는 이전부터 있던 자연적인 것들이 이제 내적인 것들에 적용되었기 때문에 그를 아버지가 아닌 스승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그 스승이 가르치는 대상인 세공업자들이 자연적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이와 동시에 말씀에 관한 지식이 있다는 사실과 그 지식을 참되게 사용한다는 사실을 구별하게 합니다. 말씀의 내용을 모아 설명하더라도, 그것이 이미 정해 놓은 거짓을 꾸미는 데 사용된다면 헛된 것들의 교훈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AC.424의 중심은 세공업자가 지혜와 총명과 지식을 갖춘 사람을 뜻하며, 두발가인과 관련해서는 자연적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우상 제작 장면은 지식이 거짓을 진리처럼 보이게 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지식을 많이 갖추었는가뿐 아니라, 그 지식으로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드러내려 하는가를 함께 살펴보게 됩니다. (AC.424 해설)

 

심화

1. 말씀을 인용하면서도 어떻게 거짓을 가르칠 있는가?’

 

AC.424 심화 1, ‘말씀을 인용하면서도 어떻게 거짓을 가르칠 수 있는가?’

AC.424 심화1. ‘말씀을 인용하면서도 어떻게 거짓을 가르칠 수 있는가?’ 렘10:8-9에서 우상은 다시스의 은과 우바스의 금, 청색 실과 옷으로 화려하게 꾸며집니다. 스베덴보리는 AC.424에서 이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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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5, 창4:22, ‘놋은 왜 자연적 선을 의미하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5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놋’(brass)이 자연적 선을 뜻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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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3, 창4:22, ‘두발가인은 왜 ‘아버지’가 아니라 ‘스승’이라고 불리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3두발가인은 야발과 유발의 경우처럼 ‘아버지’(father)가 아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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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4:22)

 

AC.423

두발가인은 야발과 유발의 경우처럼 아버지(father) 아니라 온갖 기구를 만드는 자의 스승(instructor of every artificer)이라고 불립니다. 이유는 이전에는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 내적인 것들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야발과 유발에게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러한 내적인 것들이 그때 처음 생겨났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반면 자연적인 것들, 외적인 것들은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이제 내적인 것들에 적용되었으므로 두발가인을 아버지 아니라 온갖 기구를 만드는 자의 스승이라고 부릅니다. Tubal-Cain is called theinstructor of every artificer,and not thefather,as was the case with Jabal and Jubal; and the reason is that before there were no celestial and spiritual or internal things. And the termfatheris applied to Jabal and Jubal, to denote that such internal things then first began to exist; whereas natural or external things did exist before, but were now applied to internal things, so that Tubal-Cain is not called thefather,but the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해설

AC.423은 창4:20-22에서 야발과 유발에게는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두발가인에게는 스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앞의 AC.421에서 두발가인은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그 교리가 왜 새로운 것의 아버지가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가르치는 스승으로 표현되는지 밝힙니다. 핵심은 내적인 것들이 처음 생겨나는 일과, 이전부터 있던 외적인 것들이 그 내적인 것들에 적용되는 일의 차이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야발과 유발에게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들이 나타내는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 곧 내적인 것들이 그때 처음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처음이라는 말은 인류 역사상 사랑과 신앙이 그때 비로소 생겨났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423은 앞에서 설명해 온 교회의 상태를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그 교회에 내적인 것들이 생겨나는 과정을 가리킨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반면 자연적인 것들, 곧 외적인 것들은 그전에도 존재했습니다. 그러므로 두발가인이 나타내는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는 내적인 것들과 똑같은 의미에서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달라진 것은 외적인 것들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것들이 내적인 것들에 적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차이 때문에 두발가인을 아버지가 아닌 스승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적용되었다는 표현을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AC.423은 자연적인 것들이 내적인 것들에 적용되었다고 말하지만, 그 적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앞의 AC.422에서 내적 교회는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로, 외적 교회는 자연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밝힌 내용을 함께 읽으면, 이번 번호가 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계속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외적인 것들이 이전부터 있었다는 사실과 그것들이 이제 내적인 것들에 적용된다는 사실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구별은 자연적인 것들을 무조건 낮게 보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해석도 경계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들이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이유로 그것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번 번호에서는 그 자연적인 것들이 내적인 것들에 적용되었다고 말합니다. 다만 자연적인 것들이 내적인 것들에 적용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교회의 모든 외적인 것이 이미 온전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번호가 직접 설명하는 범위는 두발가인에게 스승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입니다.

 

결국 AC.423에서 아버지스승의 차이는 단순한 호칭의 차이가 아닙니다. ‘아버지는 이 새 교회에서 천적·영적인 내적 요소들이 처음 생겨났음을 나타내고, ‘스승은 이전부터 존재하던 자연적·외적 요소들이 이제 내적인 것들에 적용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두발가인이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는 앞 번호의 설명도 이 구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423 해설)

 

 

 

AC.424, 창4:22, ‘세공업자는 왜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을 뜻하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4말씀에서 ‘세공업자’(artificer)는 지혜롭고 총명하며 지식을 갖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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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2, 창4:22, ‘레아와 라헬은 왜 외적 교회와 내적 교회를 나타내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2이 새 교회가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지는 유대교회를 통해 알 수 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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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4:22)

 

AC.422

교회가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지는 유대교회를 통해 있습니다. 유대교회에는 내적 교회와 외적 교회가 모두 있었는데, 내적 교회는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로, 외적 교회는 자연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라헬은 내적 교회를, 레아는 외적 교회를 표상했습니다. 그러나 야곱(Jacob), 정확히 말해 말씀에서 야곱이라는 이름으로 가리키는 그의 후손들은 오직 외적인 것들, 외적인 예배만을 원했으므로, 야곱은 라헬보다 먼저 레아를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눈이 흐릿한 레아는 유대교회를, 라헬은 이방인들 가운데 세워지는 교회를 표상했습니다. 때문에 예언서에서 야곱 가지 의미로 쓰입니다. 하나는 왜곡된 상태의 유대교회를, 다른 하나는 이방인들의 참된 외적 교회를 가리킵니다. 내적 교회를 의미할 때에는 그를 이스라엘(Israel)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How the case was with this new church may be seen from the Jewish church, which was both internal and external; the internal church consisting of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and the external church of natural things. The internal church was represented by Rachel, and the external by Leah. But as Jacob, or rather his posterity understood byJacobin the Word, were such as to desire only external things, or worship in externals, therefore Leah was given to Jacob before Rachel; and by blear-eyed Leah was represented the Jewish church, and by Rachel a new church of the gentiles. For this reasonJacobis taken in both senses in the prophets, in one denoting the Jewish church in its perverted state, and in the other the true external church of the gentiles. When the internal church is signified, he is calledIsrael”; but of these matters, by the Divine mercy of the Lord, more will be said hereafter.

 

해설

AC.422는 앞의 AC.421에서 언급한 교회의 상태를 이해하기 위해 유대교회를 예로 듭니다. AC.421은 씰라가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두발가인이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나아마가 그 교회 밖에 있는 비슷한 교회 또는 교리를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이러한 구별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어떻게 서로 다른지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차이를 레아와 라헬, 야곱과 이스라엘이라는 말씀의 인물들을 통해 설명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유대교회에 내적 교회와 외적 교회가 모두 있었다고 말합니다. 내적 교회는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로, 외적 교회는 자연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내적 교회와 외적 교회는 단순히 서로 다른 두 종교 단체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 번호는 한 교회의 내적 차원과 외적 차원을 구별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사랑과 신앙에 속하는 천적·영적 차원과, 그것들이 외적인 삶과 예배에서 나타나는 자연적 차원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별을 레아와 라헬에 연결합니다. 라헬은 내적 교회를, 레아는 외적 교회를 표상합니다. 29장의 문자적 이야기에서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여 그를 아내로 맞이하려 했지만, 라반은 먼저 레아를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건을 단순한 혼인 순서로만 읽지 않고,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에 관한 교회의 상태를 나타내는 기록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레아와 라헬의 구별은 두 여성의 개인적인 가치나 영적 우열에 관한 평가가 아니라, 이들이 말씀 안에서 표상하는 교회의 서로 다른 측면에 관한 설명입니다.

 

그렇다면 왜 야곱은 라헬보다 먼저 레아를 아내로 맞이했습니까?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야곱으로 가리키는 그의 후손들이 오직 외적인 것들, 곧 외적인 예배만을 원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야곱이라는 이름은 창세기의 한 인물만이 아니라, 말씀에서 그 이름으로 나타내는 그의 후손들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외적 예배 자체가 아니라, 내적인 것 없이 외적인 것만을 원하는 상태입니다. 외적 예배는 내적 교회와 연결될 수 있지만, 외적인 형식만을 추구할 때에는 그 관계가 달라집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눈이 흐릿한 레아가 유대교회를, 라헬이 이방인들 가운데 세워지는 새 교회를 표상한다고 말합니다. 29:17은 레아의 눈에 관해 언급하지만, 이번 번호는 눈의 세부적인 속뜻을 따로 풀이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눈이 흐릿하다는 표현을 근거로 유대인 개개인의 이해력이나 신앙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대상은 말씀에 표상된 교회의 상태입니다. 또한 라헬이 이방인들 가운데 세워지는 새 교회를 나타낸다는 설명은 앞에서 라헬이 내적 교회를 표상한다고 한 내용과 연결하여 읽어야 합니다.

 

이러한 구별 때문에 예언서의 야곱이라는 이름도 언제나 한 가지 뜻으로만 사용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어떤 곳에서는 왜곡된 상태의 유대교회를, 다른 곳에서는 이방인들의 참된 외적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라는 이름이 등장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구절의 속뜻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름이 어떤 문맥에서 사용되었는지, 어떤 교회의 상태를 나타내는지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같은 이름이 서로 다른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점은 말씀의 속뜻을 읽을 때 중요한 주의사항입니다.

 

반면 내적 교회를 의미할 때에는 이스라엘이라고 부른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이 번호에서 야곱과 이스라엘의 구별은 외적 교회와 내적 교회의 구별에 연결됩니다. 다만 이것을 야곱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나쁘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좋다는 식의 공식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번 번호에서 야곱도 이방인들의 참된 외적 교회를 의미할 수 있다고 밝히기 때문입니다. 외적 교회라는 사실 자체가 곧 왜곡된 교회라는 뜻은 아닙니다.

 

결국 AC.422는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교회의 내적 차원과 외적 차원을 구별합니다. 라헬은 내적 교회를, 레아는 외적 교회를 표상하며, 야곱이라는 이름은 문맥에 따라 왜곡된 상태의 유대교회 또는 이방인들의 참된 외적 교회를 나타냅니다. 내적 교회를 의미할 때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외적인 예배가 있다는 사실과 그 예배가 내적인 사랑과 신앙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구별하여 살펴보게 됩니다. (AC.422 해설)

 

 

 

AC.423, 창4:22, ‘두발가인은 왜 ‘아버지’가 아니라 ‘스승’이라고 불리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3두발가인은 야발과 유발의 경우처럼 ‘아버지’(father)가 아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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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1, 창4:22, ‘두발가인과 나아마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AC.421-426)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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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Tubal-Cain was Naamah. (4:22)

 

AC.421

앞서 말했듯이, 씰라(Zillah)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합니다. 놋과 쇠로 온갖 기구를 만드는 자의 스승(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두발가인(Tubal-Cain)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brass) 자연적 선을, (iron)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두발가인의 누이(the sister of Tubal-Cain) 나아마(Naamah) 그와 비슷한 교회, 교회 밖에 있는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의미합니다. ByZillahis signified, as previously stated, the mother of the natural things of the new church; by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the doctrine of natural good and truth, “brassdenoting natural good, andironnatural truth. ByNaamah, the sister of Tubal-Cainis signified a similar church, or the doctrine of natural good and truth outside of that church.

 

해설

AC.421은 창4:22에 등장하는 씰라와 두발가인, 나아마의 속뜻을 설명합니다. 앞서 야발과 유발을 통해 사랑의 천적인 것들과 신앙의 영적인 것들을 살펴보았다면, 이번에는 자연적인 것들로 시선이 옮겨갑니다. 스베덴보리는 두발가인을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로 해석하고, 놋과 쇠가 각각 자연적 선과 자연적 진리를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이로써 라멕의 자손들에 관한 기록은 교회의 서로 다른 측면을 설명하는 흐름을 이어갑니다.

 

먼저 씰라는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자연적인 것들은 앞서 다룬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에 비해 사람의 외적인 삶과 관련된 차원을 가리킵니다. 다만 자연적이라는 말이 곧 악하거나 영적인 것과 무관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자연적인 것들 안에도 선과 진리가 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러므로 자연적인 것을 단순히 극복하거나 버려야 할 대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두발가인놋과 쇠로 온갖 기구를 만드는 자의 스승이라는 설명과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를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로 해석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두발가인을 단순히 금속을 다루는 기술자로 풀이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창세기의 문자적 기록은 그가 놋과 쇠를 다루는 기술과 관련된 인물임을 말하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기록의 속뜻에서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읽어 냅니다. ‘스승이라는 표현 역시 이번 번호의 해석이 단순한 기술이나 물건이 아니라 교리에 관한 것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렇다면 자연적 선과 자연적 진리는 무엇입니까? 이번 번호는 두 개념의 구체적인 사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놋과 쇠가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만 밝힙니다. 따라서 자연적 선을 특정한 선행 하나로, 자연적 진리를 특정한 지식 하나로 좁혀서는 안 됩니다. 우선 자연적인 차원에도 선과 진리의 구별이 있으며, 두발가인이 그 둘에 관한 교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은 자연적 선을, ‘는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두 금속은 문자적으로는 기구를 만드는 재료이지만, 속뜻에서는 자연적인 차원의 선과 진리를 구별하여 나타냅니다. 앞의 AC.419에서 수금과 퉁소가 각각 영적 진리와 영적 선을 나타냈던 것처럼, 이번 번호에서는 놋과 쇠가 자연적 선과 자연적 진리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악기와 금속의 의미를 하나의 기계적인 대응표로 만들기보다는, 각각의 말씀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힌 뜻을 따라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아마는 두발가인의 누이로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나아마가 그와 비슷한 교회, 교회 밖에 있는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교회 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두발가인과 나아마가 모두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련되지만, 스베덴보리는 둘을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나아마는 앞서 말한 교회 밖에 있는, 그와 비슷한 교회 또는 교리를 나타냅니다. 다만 이번 번호만으로 그 교회가 역사적으로 어떤 집단인지, 왜 교회 밖에 있다고 표현하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교회의 삶이 내적인 사랑과 신앙에 관한 가르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차원에도 선과 진리가 있으며, 그것들에 관한 교리도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이번 번호가 자연적인 선과 진리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는 라멕의 자손들에 관한 기록이 교회의 어떤 측면을 나타내는지 밝히는 데 초점을 둡니다.

 

결국 AC.421의 핵심은 두발가인이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놋과 쇠가 각각 자연적 선과 자연적 진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씰라는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하고, 나아마는 그 교회 밖에 있는 비슷한 교회 또는 교리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이 짧은 번호를 통해 자연적인 것들 역시 교회의 선과 진리에 관한 설명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AC.421 해설)

 

 

 

AC.422, 창4:22, ‘레아와 라헬은 왜 외적 교회와 내적 교회를 나타내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2이 새 교회가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지는 유대교회를 통해 알 수 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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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0, 창4:21, ‘말씀에 여러 악기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20말씀에는 여러 가지 악기가 언급되며, 각 악기에는 저마다 고유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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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0 심화

3. ‘23:16 잊힌 음녀에 관한 말씀인데 신앙의 지식을 설명하는 인용되었는가?

 

AC.420에서 스베덴보리는 수금과 노래가 신앙에 속하는 것들과 그 지식들에 관련된다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사23:16을 인용합니다. ‘수금을 가지고 성읍에 두루 다니며 아름답게 연주하고 많은 노래를 불러서 네가 다시 기억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앞서 인용된 시편들이 주님을 찬양하는 장면을 담고 있는 것과 달리, 이 구절은 이사야 23장의 두로에 관한 예언 안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 문자적 문맥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사야 23장은 두로에 대한 경고와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23:15-16에서는 두로가 잊히는 기간에 관해 말한 뒤, 잊힌 음녀가 수금을 가지고 성읍을 돌아다니며 노래하여 다시 기억되게 하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음녀가 노래를 통해 다시 사람들의 기억에 남으려는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 수금과 노래가 등장한다고 해서, 그 장면 전체를 곧바로 거룩한 찬양이나 선한 예배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왜 이 구절을 인용했을까요? AC.420에서 그가 직접 밝힌 인용 목적은 신앙에 속하는 것들과 지식들에 관한 표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두로에 관한 예언 전체를 해설하지도 않고, 잊힌 음녀가 의미하는 바를 상세히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수금과 노래가 신앙의 지식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말씀의 한 사례로 이 구절을 제시합니다. 따라서 이 인용을 이해할 때에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설명한 범위와 우리가 더 알고 싶은 내용을 구별해야 합니다.

 

앞의 AC.419에서 수금은 영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밝혔습니다. AC.420에서도 수금과 비파 같은 악기들이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에 관련된다고 설명합니다. 23:16의 수금 역시 이러한 논의 안에서 인용됩니다. 그러나 수금이 진리와 관련된다고 해서 그것을 사용하는 인물이 반드시 참된 진리 안에 있다거나, 그가 부르는 노래가 반드시 선한 찬양이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어떤 표현이 진리에 관한 지식과 관련된다는 사실과, 그 지식이 어떤 상태에서 사용되는가는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기존 심화에서는 이 구절을 잃어버린 진리의 지식들이 다시 회복되고 기억되는 과정으로 설명했습니다. 이는 별도로 검토해 볼 수 있는 해석이지만, AC.420 자체는 그와 같은 회복의 과정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특히 잊힌 음녀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예언의 문맥을 고려하면, ‘다시 기억되게 하라는 말을 곧바로 영적인 회복으로 확정하는 데에는 추가적인 근거가 필요합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수금과 노래가 신앙의 지식과 관련된다는 인용 목적을 분명히 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구절은 말씀의 속뜻을 살필 때 문자적 문맥을 보존하는 일이 왜 중요한지도 보여 줍니다. 같은 악기라도 찬양 시편에 등장할 수 있고, 두로에 관한 경고의 말씀에 등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금은 진리라는 대응 관계를 알고 있다고 해서 그 구절 전체의 뜻까지 자동으로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표현의 속뜻을 살피는 일과 그 표현이 놓인 문맥을 이해하는 일은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밝힌 내용은 그중 수금과 노래가 신앙의 지식에 관련된다는 점입니다.

 

결국 사23:16AC.420의 다른 찬양 구절들과 달리, 경고와 예언의 문맥 안에서도 수금과 노래가 신앙의 지식에 관련된 표현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수금과 노래의 속뜻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지, 잊힌 음녀의 모든 행동을 선한 예배로 바꾸어 읽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힌 의미를 분명히 붙들면서, 두로와 음녀와 성읍의 더 자세한 속뜻은 해당 예언을 다루는 충분한 근거가 있을 때 살펴보아야 합니다. (AC.420 심화 3)

 

 

 

AC.420, 창4:21, ‘말씀에 여러 악기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20말씀에는 여러 가지 악기가 언급되며, 각 악기에는 저마다 고유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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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0 심화 2, ‘시150:3-5에는 왜 이렇게 많은 악기가 등장하는가?’

AC.420 심화2. ‘시150:3-5에는 왜 이렇게 많은 악기가 등장하는가?’ 시150:3-5에는 나팔, 비파, 수금, 소고, 현악기, 퉁소, 제금 등 여러 악기가 연이어 등장합니다. 문자적으로는 다양한 악기를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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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0 심화

2. ‘150:3-5에는 이렇게 많은 악기가 등장하는가?

 

150:3-5에는 나팔, 비파, 수금, 소고, 현악기, 퉁소, 제금 등 여러 악기가 연이어 등장합니다. 문자적으로는 다양한 악기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권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420에서 이 말씀을 인용한 뒤, 이 악기들이 찬양의 대상이 된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악기에 고유한 의미가 없다면 이렇게 많은 종류의 악기가 언급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입니다. 이번 심화의 출발점은 바로 이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표상적 예배에 사용된 악기들이 서로 다른 것을 나타냈다고 설명했습니다. 수금과 비파, 노래와 그와 비슷한 악기들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찬양하는 데 사용되었고, 나팔과 같은 관악기들은 신앙의 거룩한 것들, 곧 천적인 것들을 찬양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시150편의 악기들을 모두 단순히 찬양의 기쁨이라는 하나의 뜻으로만 묶으면,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악기들 사이의 구별을 놓치게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개별 의미도 있습니다. 앞의 AC.419는 수금이 영적 진리를, 퉁소가 영적 선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AC.420은 시149:3을 설명하면서 소고는 선을, 수금은 진리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시150편에 등장하는 수금과 소고, 퉁소를 읽을 때에는 이러한 설명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악기가 언급되는 모든 구절에서 세부 의미가 언제나 완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된다고 단정하기보다는, 각 구절의 문맥과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제금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150편에는 큰 소리 나는 제금과 즐거운 외침의 제금이 함께 등장합니다. 그러나 AC.420은 두 제금의 개별적인 속뜻을 밝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각 악기에 고유한 의미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의미들은 적절한 곳에서 설명하겠다고 예고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번호만을 근거로 제금이 특정한 종류의 선이나 진리를 의미한다고 확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뜻이 있다는 사실과 그 뜻을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은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여러 악기가 함께 등장한다는 사실을 곧바로 천국의 완전한 합주에 관한 상세한 묘사로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AC.420의 마지막 문단은 천사들과 영들이 소리를 선과 진리의 차이에 따라 구별하고, 서로 일치하는 소리만 받아들인다고 말합니다. 이 설명은 악기의 소리와 영적인 것들 사이에 관계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시150편의 각 악기가 천국의 어떤 공동체나 어떤 상태에 해당하는지까지 이 번호가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본문이 밝히는 범위 안에서 악기들의 다양성과 고유한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예배에서 사용하는 악기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으로도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420은 오늘날 어떤 악기를 사용해야 한다거나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예배 규칙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것은 말씀에 기록된 악기들의 표상적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근거로 특정 악기의 영적 우열을 정하거나, 악기의 종류만으로 예배의 진정성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외적 악기의 소리와 그것이 말씀 안에서 나타내는 영적인 의미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시150:3-5에 많은 악기가 등장하는 이유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각각의 악기가 신앙의 선과 진리에 관한 고유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이 번호는 그 모든 의미를 완전히 밝히지는 않지만, 말씀의 악기들을 의미 없는 반복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원칙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이미 밝혀진 수금과 소고와 퉁소의 의미를 붙들면서, 아직 설명되지 않은 악기들의 속뜻은 관련된 말씀과 저작의 근거를 확인할 때까지 열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AC.420 심화 2)

 

 

 

AC.420 심화 3, ‘사23:16은 잊힌 음녀에 관한 말씀인데 왜 신앙의 지식을 설명하는 데 인용되었는가

AC.420 심화3. ‘사23:16은 잊힌 음녀에 관한 말씀인데 왜 신앙의 지식을 설명하는 데 인용되었는가?’ AC.420에서 스베덴보리는 수금과 노래가 신앙에 속하는 것들과 그 지식들에 관련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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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0 심화 1, ‘시147:7에서 여호와와 하나님, 감사와 수금 찬양이 구별되는 이유는?’

AC.420 심화1. ‘시147:7에서 여호와와 하나님, 감사와 수금 찬양이 구별되는 이유는?’ 시147:7은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응답하며 수금으로 우리 하나님께 찬송할지어다’라고 말합니다. 문자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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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0 심화

1. 147:7에서 여호와와 하나님, 감사와 수금 찬양이 구별되는 이유는?’

 

147:7감사함으로 여호와께 응답하며 수금으로 우리 하나님께 찬송할지어다라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같은 주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나란히 놓인 구절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AC.420에서 이 두 표현을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감사는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관련되므로 여호와가 언급되고, ‘수금으로 찬송함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되므로 하나님이 언급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짧은 구절에서도 그는 사용된 표현의 차이에 주목합니다.

 

먼저 감사(confession)는 이번 번호에서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관련됩니다. 여기서 천적인 것들은 앞서 설명한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단순히 정해진 말을 입 밖으로 내는 행위로만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의 감사가 신앙의 천적인 것에 관련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읽을 때에는 감사의 말 자체만이 아니라, 그 감사가 관련되는 사랑과 선의 측면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반면 수금으로 찬송함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됩니다. AC.419에서 수금은 영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시147:7의 수금 찬양은 앞서 밝힌 악기의 속뜻과 이어집니다. 이 구절에는 감사와 수금 찬양이 함께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둘을 같은 의미의 반복으로 보지 않습니다. 각각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에 관련되는 표현으로 구별합니다.

 

이 구별과 함께 여호와하나님이라는 이름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감사와 관련하여 여호와, 수금 찬양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언급된다고 직접 말합니다. 다만 이것을 근거로 말씀의 모든 여호와하나님을 문맥과 관계없이 하나의 공식에 대입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는 시147:7의 두 표현이 왜 구별되어 사용되었는지에 관한 설명을 먼저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의 AC.418에서 스베덴보리는 마음의 애정이 천적이고 그 결과로 나오는 노래가 영적이라고 말했습니다. 147:7에 관한 설명도 그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감사가 신앙의 천적인 것과 관련되고, 수금 찬양이 신앙의 영적인 것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두 설명을 합쳐 감사는 언제나 내면에만 있고 찬양은 언제나 외면에만 있다는 식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직접 제시된 것은 두 표현이 각각 어떤 것과 관련되는가 하는 구별입니다.

 

이 구절은 예배의 언어를 읽는 우리의 태도에도 도움을 줍니다. 감사와 찬송을 단순히 비슷한 종교적 표현으로 지나칠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표현 하나하나가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일상적인 감사와 찬송을 엄격하게 분리하여 어느 한쪽만 천적이고 다른 쪽만 영적이라고 판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구절의 속뜻을 통해 사랑과 신앙에 속하는 것들이 말씀 안에서 구별되어 표현될 수 있음을 이해하면 됩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시147:7을 인용한 이유는 감사와 수금 찬양이 각각 신앙의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에 관련되며, 그에 따라 여호와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같은 주님을 향한 한 구절의 예배 안에서도 서로 다른 의미가 표현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사랑과 신앙의 구별을 살피면서도, 그 둘이 함께 주님께 향하는 예배의 문맥 안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됩니다. (AC.420 심화 1)

 

 

 

AC.420 심화 2, ‘시150:3-5에는 왜 이렇게 많은 악기가 등장하는가?’

AC.420 심화2. ‘시150:3-5에는 왜 이렇게 많은 악기가 등장하는가?’ 시150:3-5에는 나팔, 비파, 수금, 소고, 현악기, 퉁소, 제금 등 여러 악기가 연이어 등장합니다. 문자적으로는 다양한 악기를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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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0, 창4:21, ‘말씀에 여러 악기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20말씀에는 여러 가지 악기가 언급되며, 각 악기에는 저마다 고유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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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4:21)

 

AC.420

말씀에는 여러 가지 악기가 언급되며, 악기에는 저마다 고유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적절한 곳에서 설명하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시편이 말한 것만을 인용하겠습니다. In the Word mention is made of various instruments, each having its own signification, as will be shown, of the Lords Divine mercy, in its proper place; here however we shall adduce only what is said in David: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27:6) I will sacrifice in the tent of Jehovah sacrifices of shouting, I will sing, yea, I will sing praises unto Jehovah, (Ps. 27:6)

 

여기서 장막(tent) 천적인 것을 표현하고, 즐거운 외침(shouting), 노래함(singing), 찬송함(singing praises)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을 표현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where bytentis expressed what is celestial, and byshouting,” “singing,andsinging praises,what is spiritual thence derived. Again:

 

1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바로다 2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3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 4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진실하시도다 (33:1-4) Sing unto Jehovah, O ye righteous, for his praise is comely for the upright; confess ye to Jehovah on the harp, sing unto him with the psaltery, an instrument of ten strings. Sing unto him a new song, play skillfully with a loud noise; for the Word of Jehovah is right, and all his work is in the truth, (Ps. 33:14)

 

말씀은 신앙의 진리들을 나타내며, 이러한 것들이 바로 진리들에 관하여 말해진 것입니다. denoting the truths of faith, concerning which these things are said.

 

[2] 영적인 것들,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은 수금과 비파, 노래와 그와 비슷한 악기들로 찬양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거룩한 것들, 천적인 것들은 나팔과 같은 관악기들로 찬양되었습니다. 때문에 성전에서는 그렇게 많은 악기가, 그렇게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주제나 주제를 각각 특정한 악기로 찬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결과 악기들은 그것들로 찬양되는 대상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이해되게 되었습니다. Spiritual things, or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were celebrated with the harp and psaltery, with singing and analogous instruments, but the holy or celestial things of faith were celebrated with wind instruments, such as trumpets and the like; and this was why so many instruments were used about the temple and so often, in order that this or that subject might be celebrated with certain instruments; and in consequence of this the instruments came to be taken and understood for the subjects that were celebrated with them.

 

[3] 다른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gain:

 

22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23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71:22, 23) I will confess to thee with the psaltery, even thy truth, O my God; unto thee will I sing praises with the harp, O thou holy one of Israel; my lips shall sing when I sing praises unto thee, and my soul which thou hast redeemed, (Ps. 71:2223)

 

여기서도 신앙의 진리들이 의미됩니다. 다른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where also the truths of faith are signified. Again: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 (147:7) Answer to Jehovah in confession, sing praises upon the harp unto our God; (Ps. 147:7)

 

감사(confession)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관련되므로 여호와(Jehovah) 언급됩니다. 반면 수금으로 찬송함(sing praises upon the harp)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되므로 하나님(God) 언급됩니다. 다른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confessionhas respect to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and therefore mention is made ofJehovah”; and tosing praises upon the harphas reference to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whereforeGodis spoken of. Again: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149:3) Let them praise the name of Jehovah in the dance, let them sing praises unto him with the timbrel and harp, (Ps. 149:3)

 

여기서 소고(timbrel) 선을, 수금(harp) 진리를 의미하며, 그들은 이것들로 찬양합니다. where thetimbrelsignifies good, and theharptruth, which they praise.

 

[4] 다른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gain:

 

3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4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5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150:3-5) Praise God with the sound of the trumpet; praise him with the psaltery and harp; praise him with the timbrel and dance; praise him with stringed instruments and the organ; praise him upon the loud cymbals; praise him upon the cymbals of shouting. (Ps. 150:35)

 

악기들은 찬양의 대상이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을 나타냅니다. 각각의 악기에 고유한 의미가 없다면, 이렇게 많은 종류의 악기가 여기에 언급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됩니다. 다른 곳에서는 선과 진리의 지식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hese instruments denote the goods and the truths of faith which were the subjects of praise; for let no one believe that so many different instruments would have been here mentioned unless each had a distinct signification. Again, referring to the knowledges of good and truth:

 

3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4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43:3, 4) O send out thy light and thy truth, let them lead me, let them bring me unto the mountain of thy holiness, and to thy habitations, and I will go in to the altar of God, unto God, the gladness of my exultation; yea, I will confess unto thee upon the harp, O God, my God. (Ps. 43:3, 4)

 

[5] 이사야에서는 신앙에 속하는 것들과 지식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In Isaiah, referring to the things that are of faith, and the knowledges thereof:

 

잊어버린 되었던 음녀여 수금을 가지고 성읍에 두루 다니며 기묘한 곡조로 많은 노래를 불러서 너를 다시 기억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23:16) Take a harp, go about the city, play well, sing many songs, that thou mayest be called to remembrance. (Isa. 23:16)

 

같은 내용이 요한계시록의 글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표현됩니다. The same is expressed still more plainly in John: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대접을 가졌으니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5:8) The four animals and the four and twenty elders fell down before the lamb, having every one of them harps, and golden vials full of incense offerings, which are the prayers of the saints, (Rev. 5:8)

 

여기서 생물들과 장로들이 실제로 거문고를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거문고(harps) 신앙의 진리들을, 향이 가득한 대접(golden vials full of incense offerings) 신앙의 선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이 누구에게나 분명해야 합니다. 다윗은 악기 연주를 찬송(praises) 감사(confessions)라고 부릅니다(42:5, 69:31). where it must be evident to everyone that the animals and elders had not harps, but that byharpsare signified the truths of faith, and bygolden vials full of incense offerings,” the goods of faith. In David the performances on the instruments are calledpraisesandconfessions.” (Ps. 42:5; 69:31)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2:5)

 

30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31이것이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것이라 (69:30, 31)

 

요한계시록의 다른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d in another place in John:

 

2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거문고를 타는 같더라 3그들이 보좌 앞과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14:2, 3) I heard a voice from heaven as the voice of many waters, and I heard the voice of harpers harping with their harps, and they sang a new song. (Rev. 14:23)

 

다른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d in another place: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15:2) I saw them standing by the sea of glass having the harps of God. (Rev. 15:2)

 

가지 언급할 만한 사실이 있습니다. 천사들과 영들은 소리들이 선과 진리에 관련하여 어떻게 다른지에 따라 소리들을 구별합니다. 노래와 악기에서 나는 소리뿐 아니라 목소리도 그렇게 구별합니다. 그리고 서로 일치하는 소리만 받아들입니다. 이는 소리들, 따라서 악기들의 소리가 선과 진리의 성질 본질과 조화를 이루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It is worthy of mention that angels and spirits distinguish sounds according to their differences with respect to good and truth, not only those produced in singing and by instruments, but also those of voices; and they admit none but such as are in accord, so that there may be a concord of the sounds, and consequently of the instruments, with the nature and essence of the good and the true.

 

해설

AC.420은 앞의 AC.418-419에서 설명한 악기의 속뜻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확인합니다. AC.419에서 스베덴보리는 수금이 영적 진리를, 퉁소가 영적 선을 의미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그 설명을 한 악기에만 한정하지 않고, 말씀에 등장하는 여러 악기가 저마다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악기의 뜻을 여기서 밝히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악기와 노래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어떻게 나타내는지 보여 주는 것이 이번 번호의 중심입니다.

 

먼저 시27:6에서 장막은 천적인 것을, ‘즐거운 외침노래함찬송함은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을 표현합니다. 앞서 야발의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관련되고, 유발의 악기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된다고 설명한 내용이 이 시편 안에서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과 노래가 단순히 예배 장소와 예배 행위를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천적인 것과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의 관계를 표현한다고 봅니다. 이어 인용한 시33:1-4에서는 수금과 열 줄 비파, 새 노래가 등장한 뒤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모든 일은 진실하시도다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이 신앙의 진리들에 관한 말씀이라고 밝힙니다. 악기와 노래가 언급되는 문맥 자체가 말씀의 정직함과 주님이 행하시는 일의 진실함에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표상적 예배에서 악기들이 구별되어 사용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은 수금과 비파, 노래와 그와 비슷한 악기들로 찬양되었고, 신앙의 거룩한 것들, 곧 천적인 것들은 나팔과 같은 관악기들로 찬양되었습니다. 성전에서 많은 악기가 사용된 것은 단순히 음악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찬양하는 대상에 따라 특정한 악기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그 결과 악기 자체가 그것으로 찬양되는 영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이는 모든 악기가 같은 뜻을 지닌다는 말이 아니라, 서로 다른 악기들이 서로 다른 것을 표상한다는 뜻입니다.

 

71:22-23은 이러한 설명을 다시 확인합니다. 비파와 수금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말씀 안에 주의 진리가 직접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147:7에서는 한층 세밀한 구별이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감사가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관련되므로 여호와가 언급되고, ‘수금으로 찬송함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되므로 하나님이 언급된다고 설명합니다. 같은 구절 안에서도 감사와 수금 찬양,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149:3에서는 소고가 선을, ‘수금이 진리를 의미한다고 직접 밝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악기들의 소리를 감상하여 의미를 추측하는 일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해당 말씀에서 구별하여 밝힌 선과 진리의 의미를 살피는 일입니다.

 

150:3-5에는 나팔, 비파, 수금, 소고, 현악기, 퉁소, 제금 등 여러 악기가 연이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각각에 고유한 의미가 없다면 이렇게 많은 종류의 악기가 말씀에 언급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이 모든 악기의 개별 의미를 하나씩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앞에서 밝혀진 의미들을 바탕으로 이 시편이 신앙의 여러 선과 진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이해하되, 아직 설명되지 않은 악기의 뜻까지 임의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시43:3-4주의 빛과 주의 진리로 시작하여 거룩한 산과 처소, 하나님의 제단과 수금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선과 진리의 지식들에 관한 구절로 인용합니다. 여기서는 수금이 등장하는 찬양이 주님의 빛과 진리에 의한 인도라는 문맥 안에 놓여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23:16은 앞의 찬양 시편들과 성격이 다릅니다. 이사야 23장은 두로에 관한 예언이며, 인용된 구절은 잊힌 음녀에게 수금을 가지고 성읍을 돌아다니며 노래하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도 신앙에 속하는 것들과 그 지식들에 관한 말씀으로 인용합니다. 따라서 수금과 노래가 등장한다고 해서 그 장면을 곧바로 선한 예배나 진리의 회복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이 여기서 사용된 이유는 수금과 노래가 신앙의 지식과 관련된 표현이라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해당 예언 전체의 속뜻을 설명하려면 두로와 음녀에 관한 문맥을 별도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인용에서는 진리와 선의 구별이 더욱 직접적으로 나타납니다. 5:8에서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가진 거문고는 신앙의 진리들을, ‘향이 가득한 대접은 신앙의 선들을 의미한다고 스베덴보리는 밝힙니다. 같은 예배 장면 안에 진리와 선이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어 시42:5와 시69:31을 통해 다윗이 악기 연주를 찬송감사라고 부르는 용례를 제시합니다. 14:2-3에서는 하늘의 거문고 소리와 새 노래를, 15:2에서는 유리 바닷가에 선 이들이 가진 하나님의 거문고를 인용합니다. 이 구절들은 앞서 설명한 현악기와 신앙의 진리 사이의 관계를 뒷받침합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새 노래나 유리 바다의 세부적인 속뜻까지 풀어 주지는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천사들과 영들이 소리를 선과 진리의 차이에 따라 구별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노래와 악기 소리뿐 아니라 목소리도 구별하며, 서로 일치하는 소리만 받아들입니다. 소리와 악기가 선과 진리의 성질 및 본질에 조화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설명은 앞서 제시한 악기의 상응이 단순한 문학적 비유가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이해한 영계의 질서와도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이 번호는 어떤 음높이나 악기 소리가 어떤 선과 진리에 해당하는지 구체적인 목록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상의 음악을 듣고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정하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결국 AC.420은 말씀의 악기들이 단순한 음악 도구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각각 신앙의 선과 진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여러 구절로 설명합니다. 시편의 장막과 노래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관계를, 소고와 수금은 선과 진리의 구별을,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은 신앙의 진리와 선이 함께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의 천사와 영들에 관한 설명은 소리의 조화가 선과 진리의 성질과 관련된다는 점을 밝힙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찬양의 외적 소리만이 아니라, 그 찬양이 표현하는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를 함께 살펴보게 됩니다. (AC.420 해설)

 

심화

1. 147:7에서 여호와와 하나님, 감사와 수금 찬양이 구별되는 이유는?’

 

AC.420 심화 1, ‘시147:7에서 여호와와 하나님, 감사와 수금 찬양이 구별되는 이유는?’

AC.420 심화1. ‘시147:7에서 여호와와 하나님, 감사와 수금 찬양이 구별되는 이유는?’ 시147:7은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응답하며 수금으로 우리 하나님께 찬송할지어다’라고 말합니다. 문자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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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50:3-5에는 이렇게 많은 악기가 등장하는가?

 

AC.420 심화 2, ‘시150:3-5에는 왜 이렇게 많은 악기가 등장하는가?’

AC.420 심화2. ‘시150:3-5에는 왜 이렇게 많은 악기가 등장하는가?’ 시150:3-5에는 나팔, 비파, 수금, 소고, 현악기, 퉁소, 제금 등 여러 악기가 연이어 등장합니다. 문자적으로는 다양한 악기를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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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3:16 잊힌 음녀에 관한 말씀인데 신앙의 지식을 설명하는 인용되었는가?

 

AC.420 심화 3, ‘사23:16은 잊힌 음녀에 관한 말씀인데 왜 신앙의 지식을 설명하는 데 인용되었는가

AC.420 심화3. ‘사23:16은 잊힌 음녀에 관한 말씀인데 왜 신앙의 지식을 설명하는 데 인용되었는가?’ AC.420에서 스베덴보리는 수금과 노래가 신앙에 속하는 것들과 그 지식들에 관련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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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1, 창4:22, ‘두발가인과 나아마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AC.421-426)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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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9, 창4:21, ‘수금은 신앙의 진리를, 퉁소는 신앙의 선을 의미하는 이유’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19천적인 것들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인 것처럼, 영적인 것들은 신앙의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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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9 심화

1. 신앙의 선을 아는 것과 선대로 살아가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AC.419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 진리와 선을 모두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곧이어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천적인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두 문장을 함께 읽으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신앙에 선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면, 그 선대로 살아가는 일을 왜 다시 천적인 것으로 구별하는 것입니까?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먼저 스베덴보리가 무엇이 선한지 이해하는 선대로 살아가는 을 구별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람은 무엇이 참된지 배울 수 있고, 무엇이 선한지도 배울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이해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선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신앙의 지식들이 진리와 선을 모두 포함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은 참된 명제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선한 것이 무엇인지도 알려 줍니다.

 

그러나 무엇이 선한지 아는 것과 실제로 그 선대로 살아가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에 동의하면서도 정작 이웃을 대할 때에는 자신의 이익이나 감정만을 앞세울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에서도 이웃에게 선하게 대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경우의 차이는 선에 관한 지식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천적인 이라고 구별한 이유를 이 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구별을 신앙은 지식에 불과하고 사랑만 중요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AC.419는 신앙에 진리와 선이 모두 포함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이해하는 일은 그 자체로 신앙에 속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다만 그러한 이해가 실제 삶과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선을 가르친다는 사실과, 사람이 그 선대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의 AC.418에서 스베덴보리는 마음의 애정이 천적이고 그 결과로 나오는 노래가 영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신앙에 관한 지식이 진리와 선을 포함하지만,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은 천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두 번호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관계를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앞에서는 애정과 그 표현의 관계를, 여기서는 신앙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일과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일을 설명합니다. 이 두 설명을 하나의 기계적인 공식으로 합치기보다는, 각각의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구별하는지 살피는 것이 좋습니다.

 

이 구별은 신앙생활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어떤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귀한 일이지만, 그것만으로 그 교리가 자신의 삶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실제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이유로 진리와 선을 배우는 일을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됩니다. 신앙은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 가르치며, 사람은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문제 앞에 서게 됩니다. AC.419는 이 두 가지를 혼동하지 않도록 돕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천적인 것이라는 설명을, 사람이 자신의 힘만으로 선을 실천하면 천적인 상태에 도달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전체적인 가르침에서 참된 선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이번 번호 역시 인간의 독립적인 선행 능력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관한 지식과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일을 구별하는 데 초점을 둡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읽을 때에는 선한 삶의 근원을 자신에게 돌리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들이는 문제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결국 AC.419는 신앙의 선을 아는 것과 그 선대로 살아가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신앙은 진리와 선을 모두 가르치지만, 그 가르침을 이해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은 이 말씀을 통해 신앙의 지식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그 지식이 자신의 삶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살펴보게 됩니다. 신앙이 가르치는 선을 이해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여 그 선대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AC.419 심화 1)

 

 

 

AC.419, 창4:21, ‘수금은 신앙의 진리를, 퉁소는 신앙의 선을 의미하는 이유’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19천적인 것들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인 것처럼, 영적인 것들은 신앙의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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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4:21)

 

AC.419

천적인 것들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인 것처럼, 영적인 것들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입니다. 신앙에는 무엇이 참된 것인지만이 아니라 무엇이 선한 것인지도 이해하는 일이 속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들은 둘을 모두 포함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천적인 것입니다. 신앙에는 가지가 모두 포함되므로, 그것들은 수금과 퉁소라는 악기로 의미됩니다. 수금은 누구나 알듯이 현악기이므로 영적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퉁소는 현악기와 관악기의 중간에 해당하므로 영적 선을 의미합니다. As celestial things are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derivative goods, so spiritual things are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for it belongs to faith to understand not only what is true, but also what is good. The knowledges of faith involve both. But to be such as faith teaches is celestial. As faith involves both of these, they are signified by two instruments, the harp and the organ. The harp, as everyone knows, is a stringed instrument, and therefore signifies spiritual truth; but the organ, being intermediate between a stringed instrument and a wind instrument, signifies spiritual good.

 

해설

AC.419는 앞의 AC.417-418에서 밝힌 유발의 속뜻을 한층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유발이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것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두 악기를 함께 언급한 이유를 밝히고, 수금과 퉁소가 각각 무엇을 나타내는지 구별합니다. 수금은 영적 진리를, 퉁소는 영적 선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유발의 기록은 신앙을 단순히 참된 것을 아는 일로만 이해하지 않도록 이끕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을 구별합니다. 천적인 것들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이며, 영적인 것들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입니다. 이는 앞서 야발과 유발을 구별한 설명과 이어집니다. 야발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유발은 같은 교회의 영적인 것들에 관한 교리를 나타냅니다. 두 형제의 기록을 함께 읽으면 사랑에 관한 교리와 신앙에 관한 교리가 각각 어떤 내용을 다루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문장은 신앙에는 무엇이 참된 것인지만이 아니라 무엇이 선한 것인지도 이해하는 일이 속한다는 설명입니다. 우리는 신앙에 관한 지식이라고 하면 흔히 교리의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일부터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 참된 것과 선한 것을 모두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신앙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만이 아니라 무엇이 선한지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내용을 이해하는 일에서 선에 관한 지식을 제외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곧이어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천적인 이라고 말합니다. 이 문장은 신앙의 선을 이해하는 일과 실제로 선하게 살아가는 일을 구별합니다. 무엇이 선한지 알고 그것을 이해하는 일은 신앙에 속하지만,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은 천적인 것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의 선을 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그 선을 삶에서 실현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앎과 삶을 구별하면서도, 신앙이 가르치는 선이 실제 삶과 무관한 지식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제 수금과 퉁소라는 두 악기가 등장하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 진리와 선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두 악기로 의미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수금이 현악기이므로 영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반면 퉁소는 현악기와 관악기의 중간에 해당하므로 영적 선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 악기 구분은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현대 악기 분류에 맞추어 퉁소를 특정 악기로 확정하거나, 그 악기의 구조에서 새로운 상응을 만들어 내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앞의 AC.418에서는 마음의 애정이 천적이고 그 결과로 나오는 노래가 영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그 설명을 이어받아 영적인 것 안에도 진리와 선이 함께 있음을 밝힙니다. 노래와 악기가 영적인 것을 나타낸다는 설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수금과 퉁소가 각각 영적 진리와 영적 선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유발에 관한 짧은 기록은 신앙의 내용을 더욱 세밀하게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성도들이 이 말씀을 읽을 때에는 나는 무엇이 참된지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나는 무엇이 선한지도 이해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천적인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진리와 선을 이해하는 일은 그 가르침을 삶에서 받아들이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앎에서 삶으로 나아가는 거듭남의 전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관한 지식과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일을 구별하는 데 초점을 둡니다.

 

결국 AC.419의 핵심은 신앙에 진리와 선이 모두 포함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진리와 선을 아는 일과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일이 구별된다는 사실입니다. 수금과 퉁소는 신앙의 두 측면을 나타내며, 유발은 이러한 영적인 것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신앙을 참된 것을 아는 데에만 한정하지 않고, 선을 이해하며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일까지 함께 살펴보게 됩니다. (AC.419 해설)

 

심화

1. 신앙의 선을 아는 것과 선대로 살아가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AC.419 심화 1, ‘신앙의 선을 아는 것과 그 선대로 살아가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AC.419 심화1. ‘신앙의 선을 아는 것과 그 선대로 살아가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AC.419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 진리와 선을 모두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곧이어 신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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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0, 창4:21, ‘말씀에 여러 악기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20말씀에는 여러 가지 악기가 언급되며, 각 악기에는 저마다 고유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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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8, 창4:21, ‘수금과 퉁소는 왜 신앙의 영적인 것들을 의미하는가?’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18앞 절은 사랑에 속하는 천적인 것들을 다루었지만, 이 절은 신앙에 속하는 영적인 것들을 다루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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