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인간관계가 어려워지고 상대방의 부당한 태도로 자신의 앞날까지 불안해질 때, 그리스도인은 ‘이런상황에서어떻게하는것이성경적인가? 참고견디는것이믿음인가, 아니면그관계에서벗어나는것이지혜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선택이란 반드시 더 많은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것은 선악의 문제이지만,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어떤 길을 선택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는 지혜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잘못된 행동을 분별했다고 해서 반드시 상대방을 설득하거나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그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지혜로울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선택을 하든 정직하고 책임 있게 행동하며, 자신도 악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슬기로운자는재앙을보면숨어피하여도어리석은자들은나아가다가해를받느니라’(잠22:3) 잠언은 위험을 알아보고 피하는 사람을 슬기롭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어려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견디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지만, 모든 고통을 무조건 참는 것이 성경적 인내는 아닙니다. 실제로 위험하거나 부당한 관계가 반복된다면 적절한 거리를 두는 것도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물론 일시적인 갈등과 지속적인 위협은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위험이 분명한데도 믿음이라는 이유로 계속 그곳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주신 판단력과 분별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능력을 사용하여 악을 피하고 선한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참된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charity)가 단순한 호의나 무조건적인 관용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참된 사랑에는 무엇이 상대방과 공동체를 위한 선인지 분별하는 지혜가 함께해야 합니다. 악을 방치하거나 부당한 요구를 계속 받아들이는 것이 반드시 사랑은 아닙니다. 상대방을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거리를 둘 수 있고, 복수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용서하는 것과 계속 함께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또한 사랑한다는 것이 상대방의 잘못된 행동에 무조건 협력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때로는 분명한 경계를 세우는 것이 자신과 상대방 모두를 위한 선한 행동일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자는온갖말을믿으나슬기로운자는자기의행동을삼가느니라’(잠14:15) 갈등이 깊어지면 사람은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거나, 반대로 분노 때문에 성급하게 행동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잠언이 말하는 지혜는 자신의 감정에 끌려가지 않고 상황을 신중하게 살피는 것입니다. 믿을 만한 사람들의 조언을 듣고, 필요한 사실을 확인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지와 그 결과를 충분히 생각해야 합니다. 상대방과 직접 부딪힐수록 갈등이 커진다면 적절한 공식 절차나 제삼자의 도움을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정당한 절차를 따르는 것은 상대방을 배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충돌을 줄이면서도 자신의 책임과 권리를 지키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신중함은 결정을 끝없이 미루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확인한 뒤 책임 있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마음으로자기의길을계획할지라도그의걸음을인도하시는이는여호와시니라’(잠16:9) 주님의 인도하심을 믿는다는 것은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고 특별한 응답만 기다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이해를 사용하여 진리를 분별하고, 자신의 의지로 그 진리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자유로운 판단과 책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따라서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다면 기도하면서 동시에 현실적인 준비도 해야 합니다. 가능한 길을 살피고, 각 선택의 결과를 생각하며, 정직하고 책임 있는 방법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반드시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서로 다른 선택이 모두 정당할 수 있으며, 중요한 것은 어떤 동기로, 어떤 방법으로, 무엇을 이루기 위해 행동하느냐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선과진리의결합’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선은 사랑과 의지에 관계되고, 진리는 지혜와 이해에 관계됩니다. 선한 의도가 있어도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이 잘못되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으며,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이기심이나 복수심을 위해 사용한다면 참된 선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미워하지 않겠다는 마음은 선한 의도이지만, 그렇다고 부당한 행동까지 모두 받아들이는 것은 지혜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는 생각은 정당하지만, 그 과정에서 부정직한 방법을 사용하거나 상대방에게 보복하려 한다면 그것 역시 옳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선택 앞에서는 ‘내가원하는것이참으로선한가?’와 함께 ‘그선을이루려는방법도진실하고지혜로운가?’를 물어야 합니다. 참된 지혜는 선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 선을 올바르게 실천하는 진리가 결합할 때 나타납니다.
결국 성경적인 삶이란 언제나 더 어려운 길을 선택하거나 더 많은 고통을 견디는 삶이 아닙니다. 때로는 머무르는 것이 인내이고, 때로는 떠나는 것이 지혜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권리를 양보하는 것이 사랑이지만, 때로는 정당한 권리를 지키는 것이 자신과 이웃을 위한 선한 행동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두려움이나 분노가 아니라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잠언은 ‘너는마음을다하여여호와를신뢰하고네명철을의지하지말라너는범사에그를인정하라그리하면네길을지도하시리라’(잠3:5–6)고 말씀합니다. 이는 자신의 판단을 전혀 사용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지혜를 절대화하지 않고 모든 참된 지혜의 근원이신 주님을 인정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이나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행동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부당하게 행동하더라도 자신까지 부당하게 행동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을믿는다는것은생각하기를멈추는것이아니라, 주님께받은지혜로분별하고주님께받은자유로선을선택하며살아가는것입니다.
‘천주교회에속해있다는것이참된신앙의중요한보증이다.’ 이 명제에는 천주교 신자가 자신이 속한 교회를 바라보는 신앙적 확신과, 그 확신이 잘못 이해될 때 발생할 수 있는 영적인 위험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천주교는 자신을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역사적이고 가시적인 연속체로 이해하며, 사도적 계승과 성사, 교도권과 전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진리와 은총이 보존되고 전달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천주교 신자에게 교회에 속한다는 것은 단순히 특정한 종교단체의 회원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질서 안에 머물며, 교회가 보존해 온 신앙의 유산을 받아들이고, 성사와 전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보다 오랫동안 전해져 온 신앙의 가르침을 존중하고, 공동체 안에서 함께 주님을 섬기려는 귀중한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교회가 참된 신앙을 가르치는 공동체라는 사실과, 그 교회에 속한 사람이 실제로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같은 것일까요? 바른 교회의 가르침을 듣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 가르침이 자신의 내면에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더 나아가 특정 교회의 역사적 정통성과 제도적 권위가 그 구성원 개개인의 영적 상태까지 보증할 수 있을까요? 이번 문제의 핵심은 참된 교회가 어디에 있는가보다, 교회에 속해 있다는 외적인 사실과 그 사람 안에 참된 교회의 생명이 존재한다는 내적인 사실을 어떻게 구별해야 하는가에 있습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을 정확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CatechismoftheCatholicChurch)836–838항은 가톨릭교회와의 일치를 설명하면서, 신앙고백과 성사와 교회 통치 및 친교의 유대 안에서 교회와 온전히 결합한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837항은 교회에 온전히 결합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체어리티 안에 머물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명시합니다. 그 사람은 교회의 품 안에 외적으로 머물러 있을 뿐, 마음으로는 참되게 속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인류의빛’(LumenGentium)14항 역시 교회의 자녀들이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은총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구원받지 못할 뿐 아니라 더 엄중한 판단을 받게 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천주교는 교회에 등록하고 세례를 받고 미사에 참석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의 구원이 자동으로 보장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의 가르침과 성사생활이 인간 안에서 사랑과 선한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천주교회에속해있다는것이참된신앙의중요한보증이다’라는 명제를 천주교의 공식 교리 자체로 단정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 명제는 교회가 보존하고 전달하는 구원의 수단들에 대한 신뢰가, 일부 신자들의 의식 속에서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한 확신으로 바뀔 때 발생할 수 있는 신앙적 통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통념은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체어리티의 필요성과도 긴장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공식 교리가 이러한 위험을 경계한다고 해서, 교회 소속에 대한 신앙적 확신이 잘못된 방향으로 발전할 가능성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역사와 권위, 전통과 규모에서 심리적인 안정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특히 그 공동체가 자신을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라고 이해하고 사도들로부터 이어지는 역사적 계승과 신앙의 연속성을 강조한다면, 그 안에 속한 신자들은 자신이 올바른 신앙의 길 위에 있다는 확신을 갖기 쉽습니다. 물론 이러한 확신은 신앙의 지속성과 안정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확신의 근거가 점차 주님과의 실제적인 결합에서 교회 제도에 대한 소속감으로 옮겨갈 때입니다. 처음에는 ‘우리교회는주님의진리를가르치므로나는그가르침에따라살아야한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우리교회는참된교회이므로나는이미참된신앙안에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 문장은 비슷해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앞의 문장은 교회의 가르침을 자신의 삶에 적용해야 할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뒤의 문장은 교회의 권위와 정통성을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한 보증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수단에서, 자신의 영적 안전을 확인하는 외적인 근거로 변할 위험이 있습니다. 결국 문제는 교회에 대한 신뢰 자체가 아니라, 그 신뢰를 자신의 참된 신앙에 대한 확신으로 옮겨 놓는 데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위험을 이미 여러 곳에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마7:21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향하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지는 22절과 23절에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주님께서 그들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주님의 이름을 알고 그 이름으로 종교적 활동을 했다는 사실과, 실제로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왔다는 사실이 동일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또한 요8:31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말에 거해야 참으로 자신의 제자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약1:22역시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참된 신앙의 표지는 외적인 종교적 정체성에만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알고 인정하는 일이 실제적인 순종과 사랑의 삶으로 이어지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이 아무리 귀중하더라도 그 가르침이 인간의 의지와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그 사람에게 주어진 진리는 아직 살아 있는 신앙으로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참된 교회에 속한다는 사실과 참된 교회의 생명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일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예루살렘과그천적교리’(TheNewJerusalemandItsHeavenlyDoctrine, NJHD, 1758) NJHD.241–248에서 교회의 본질을 설명합니다. 특히 NJHD.242는 교회가 주님에게서 오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에 의하여 성립한다고 가르치며, NJHD.243은 말씀에서 비롯된 교리가 필요하지만, 교리만으로는 인간 안에 교회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교리에 따른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리가 왜 중요한지를 분명히 하는 가르침입니다. 교리는 인간이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무엇이 참되고 거짓인지를 분별하도록 가르치며, 주님께서 어떤 삶을 원하시는지 알려 줍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 진리를 이해 속의 지식으로만 보존하고 실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진리는 아직 그의 생명과 온전히 결합되지 않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웃 사랑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설명하면서도 실제로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멸시한다면, 그의 이해에는 사랑에 관한 진리가 있을지라도 의지에는 그 사랑이 살아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교리적 이해에 부족함이 있더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 한다면, 그 사람 안에는 주님의 생명이 실제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정통성이나 교리적 정확성을 개인의 참된 신앙과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참된 교회의 생명은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실제적인 삶으로 나타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천국의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1798과 AC.8152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AC.1798에서 스베덴보리는 교회들이 교리적인 차이로 나뉘어 서로 다른 이름을 갖게 되었음을 언급하면서, 사랑과 체어리티를 신앙의 중심에 둔다면 그러한 차이가 교회를 분열시키는 근본적인 이유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그는 모든 교리가 동일하게 참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리의 차이는 여전히 검토되어야 하며, 잘못된 교리는 인간의 신앙과 삶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리적 차이를 근거로 다른 공동체 전체를 배척하거나, 자기 공동체만이 참된 신앙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고 여기는 태도는 경계해야 합니다. 특히 AC.8152에서 스베덴보리는 참된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신앙의 선, 곧 체어리티가 본질적인 것이며, 그것이 교리와 삶에서 첫자리를 차지한다고 가르칩니다. 이어 교회를 이루는 것은 삶이지 교리 자체가 아니며, 교리도 삶이 되는 만큼 교회를 이룬다고 설명합니다. 이 말씀은 이번 명제의 핵심을 매우 정확하게 드러냅니다. 인간의 이해 안에 있는 진리는 그 자체로 아직 그의 생명이 아닙니다. 그 진리가 의지 안에 받아들여지고 실제적인 삶의 원리가 될 때, 비로소 인간 안에 참된 교회의 생명이 형성됩니다. 따라서 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나 정통 교리를 인정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 안에 참된 신앙이 존재한다고 보증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천주교의 오랜 역사와 풍부한 전통, 성사와 전례, 수도생활과 자선활동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이러한 것들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동안 외적인 질서와 형식을 통하여 영적인 것을 배우고 실천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예배의 질서는 인간이 주님께 마음을 향하도록 도울 수 있으며, 기도문은 신앙을 표현하는 언어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인간이 선과 악을 분별하도록 도울 수 있고, 자선과 봉사는 이웃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수단이 인간의 내적인 사랑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그 궁극적인 목적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같은 미사에 참여하고 같은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내적인 상태는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종교적 의무를 충실히 지키면서도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은 교리적인 지식이 충분하지 않더라도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자신의 악을 피하려 노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단할 수 없지만, 외적인 종교생활의 풍부함이 반드시 내적인 거듭남의 정도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종교적 활동의 외적인 모습만이 아니라 그 활동을 움직이는 내적인 사랑입니다. 교회가 참으로 인간에게 유익한 것은 그 사람을 자기 제도에 의존하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도록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천주교와 스베덴보리 사이의 중요한 접점도 존재합니다. 천주교의 공식 교리 자체가 체어리티 없는 교회 소속은 구원을 보증하지 못한다고 가르친다는 점에서, 교리와 삶을 분리해서는 참된 교회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가까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 전통이 교회의 본질과 성사의 역할을 이해하는 방식까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천주교는 가톨릭교회 안에 신앙과 성사와 교회 통치의 온전한 질서가 보존되어 있다고 가르치며, 그러한 교회적 일치를 신앙생활의 중요한 요소로 이해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참된 교회를 이루는 본질적인 요소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결합에 두며, 외적인 교회의 소속보다 인간 안에서 실제로 거듭남이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번 명제에서는 이 교회론 전체를 다시 논증하기보다, 공식 교리와 신앙적 통념을 구별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교회 소속만으로 구원을 보증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오류로 검토해야 할 것은 가톨릭교회의 모든 교회론이 아니라, 교회가 지닌 권위와 은총의 수단에 대한 신뢰를 자신의 내적인 영적 상태에 대한 보증으로 바꾸는 이해입니다. 교회가 참된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 가르침이 개개인의 삶에서 참된 생명이 되었다는 사실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천주교 밖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개신교 신자 역시 자신이 성경 중심의 정통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나 오랫동안 예배에 참석하고 봉사해 왔다는 사실에서 신앙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목회자는 자신이 정통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안수를 받았으며 오랜 세월 말씀을 가르쳐 왔다는 사실을 자신의 영적 성숙에 대한 근거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러한 외적인 경력과 지위는 참된 신앙을 자동으로 증명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고 새로운 교회에 관한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도 자신이 상응론과 내적 의미를 이해한다는 이유로 영적으로 더 높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동일한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프로프리움’(proprium)은 종교적인 이름과 지식을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진리를 많이 알게 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자기 안의 악을 더욱 세밀하게 발견하고, 자신이 받은 빛에 따라 살아가야 할 책임을 깊이 느껴야 합니다. 참된 교회에 관한 가르침은 다른 공동체를 내려다보는 기준이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기준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참된 교회를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 교회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이 문제를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생각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4절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포도나무와 가지 사이의 살아 있는 결합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속한다는 이름을 가졌더라도 실제로 생명을 공급받지 못한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 속한 사람이라는 종교적인 이름이 있더라도, 주님의 선과 진리를 실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이름 자체가 참된 신앙의 생명을 보증하지는 못합니다. 교회는 인간에게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분과 결합하도록 돕는 거룩한 공동체여야 하지만, 그 교회에 속한다는 외적인 사실이 주님과의 실제적인 결합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나는어느교회에속해있는가?’에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그교회를통하여배운주님의진리가나의이해와의지안에서살아움직이고있는가?나는그진리의빛으로악을피하고이웃을사랑하며선한쓰임을행하고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교회가 부여하는 종교적 신분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인간 안에서 실제적인 생명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SL.RC.004해설)
창5에서 에녹의 마지막은 다른 족장들과 확연히 다릅니다. 아담에서 야렛까지는 모두 ‘죽었더라’로 끝나지만, 에녹에게는 ‘그가더이상있지아니하였으니하나님이그를데려가셨기때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히11:5은 ‘믿음으로에녹은죽음을보지않고옮겨졌으니하나님이그를옮기심으로다시보이지아니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전통에서는 흔히 에녹이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옮겨진 특별한 인물이라고 이해해 왔습니다. 그런데 AC.520-521에서 스베덴보리는 창5:24의 속뜻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하나님이그를데려가셨다’는 것은 에녹이 만든 교리가 ‘후대의쓰임을위해보존되었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에녹이라는 개인이 하나님께 옮겨졌다는 문자적 의미를 부정하는 것일까요? 여기서는 먼저 AC가 무엇을 설명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5를 해설하면서 스베덴보리의 주된 관심은 개별 인물들의 전기를 복원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람’,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이라는 이름들을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여러 교회로 해석하고, 그들의 ‘날들’과 ‘연수’를 교회의 때와 상태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에녹이하나님과동행하였다’, ‘그가더이상있지아니하였다’, ‘하나님이그를데려가셨다’는 말씀 역시 같은 흐름 안에서 에녹 교회의 상태와 그 교회가 남긴 교리의 운명을 설명하는 말씀으로 풀이합니다.
그 속뜻의 흐름은 매우 분명합니다. AC.519에 따르면 에녹이라 불린 사람들은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것들을 모아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 목적은 후대 사람들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AC.520에서는 ‘하나님과동행하였다’가 이 신앙에 관한 교리를 나타내고, ‘하나님이그를데려가셨다’는 것은 그 교리가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되었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AC.521은 그 이유까지 밝힙니다. 주님께서는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이 장차 소멸하고, 이후의 인류가 교리를 통해 선과 진리를 배워야 할 것을 예견하셨으므로 에녹의 교리를 보존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속뜻에서 ‘데려가심’의 핵심은 ‘사라짐’이 아니라 ‘보존’입니다.
이것은 에녹에게 왜 다른 족장들과 달리 ‘죽었더라’는 표현이 사용되지 않았는지도 설명해 줍니다. 창5에서 ‘죽음’은 각 교회의 고유한 상태가 끝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에녹의 경우에는 그 교회가 형성한 것이 그 상태의 종말과 함께 완전히 없어져서는 안 되었습니다. 에녹이라는 교회 자체의 시대는 지나가더라도 그들이 정리한 교리는 후대에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에녹에 대해 단순히 ‘죽었더라’고 하지 않고 ‘그가더이상있지아니하였으니하나님이그를데려가셨기때문이다’라는 특별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속뜻에서 이것은 한 교회의 소멸보다 그 교회가 남긴 것을 주님께서 거두어 보존하셨다는 데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속뜻을 곧바로 ‘그러므로에녹이라는개인도없었고,에녹이하나님께옮겨지는사건도전혀없었다’는 명제로 바꾸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AC.520-522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설명하고 있는 것은 창5:24의 ‘내적의미(internalsense)’입니다. 그의 관심은 이 구절의 모든 역사적·문자적 가능성을 하나씩 판정하는 데 있지 않고, 이 말씀이 천국적 의미에서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넘어 개인 에녹의 역사성이나 그에게 일어난 자연적 사건의 세부를 우리가 대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AC의 해석에서 창5:24의 중심적인 속뜻이 ‘에녹교리의보존’이라는 사실입니다.
히11:5은 이 문제를 더욱 흥미롭게 만듭니다. 신약은 창5:24를 인용하면서 에녹이 ‘죽음을보지않고옮겨졌다’고 말하고 그의 믿음을 증거합니다. 이것은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따라 에녹을 신앙의 인물로 읽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창5:24안에 더 깊은 속뜻이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에서는 문자적 의미와 내적 의미가 서로 경쟁하여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제거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문자적 의미는 내적 의미를 담고 지탱하는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히11이 문자적 의미에서 에녹의 믿음과 옮겨짐을 말한다고 해서, 창세기의 속뜻에서 에녹이 한 교회와 그 교리의 보존을 나타낸다는 설명이 자동으로 배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여기서도 두 층위를 억지로 하나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히11:5이 강조하는 것은 에녹의 믿음이며, AC.520-521이 강조하는 것은 에녹으로 의미된 교리의 보존입니다. 전자는 신약이 문자적 서술을 사용하여 믿음의 삶을 가르치는 것이고, 후자는 창세기의 계보 안에 들어 있는 교회사의 속뜻을 밝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서는에녹이실제로옮겨졌다고했으니AC의해석은틀렸다’거나, 반대로 ‘AC가교리의보존이라고했으니히브리서의에녹이야기는역사적의미가없다’고 어느 한쪽을 성급하게 지워 버리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문자와 속뜻의 관계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AC.520-522에서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데려가셨다’는 표현을 통해 드러나는 주님의 섭리입니다. 에녹의 시대에는 이미 퍼셉션이 매우 약해져 있었습니다. AC.522에 따르면 그들의 퍼셉션은 ‘아무런명료함이없는일종의일반적이고흐릿한퍼셉션’이었으며, 그래서 마음은 자기 바깥에 있는 교리적인 것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변화가 어디까지 진행될지를 아셨습니다. 언젠가 인간은 태고교회처럼 내적인 길을 통해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지 못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퍼셉션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그 안에 있던 선과 진리가 교리의 형태로 보존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에녹의 ‘옮겨짐’을 속뜻에서 바라보면 매우 아름다운 섭리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인간의 상태가 쇠퇴하여 어떤 영적 능력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될 때에도 주님께서는 그 능력과 함께 모든 선과 진리가 사라지도록 두지 않으십니다. 한 시대가 직접 누렸던 것을 다음 시대가 받을 수 있는 형태로 바꾸어 보존하십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살아 있는 퍼셉션이었던 것이 에녹을 통해 교리가 되었고, 그 교리는 퍼셉션을 잃게 될 후대 사람들이 다시 선과 진리를 배울 수 있도록 보존되었습니다. 이것이 AC.521이 말하는 ‘어둠을통해빛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에녹을하나님이데려가셨다는것은무엇을의미하는가?’라는 질문에 AC의 속뜻을 따라 답하면, ‘주님께서에녹으로의미된교리를후대의쓰임을위해보존하셨다는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에녹이 어디로 갔는가보다 주님께서 무엇을 남기셨는가입니다. 퍼셉션의 시대가 저물어도 주님은 그 시대에 주셨던 선과 진리를 잃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다음 시대가 받을 수 있는 교리의 형태로 보존하셨습니다. 인간의 상태는 변하고 교회의 형태도 바뀌지만, 사람이 다시 선과 진리를 알고 주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미리 준비하고 보존하시는 분, AC.520-522에서 ‘하나님이그를데려가셨다’는 말씀은 바로 그러한 주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AC.520-522심화1)
AC.519에서 에녹 교회의 사람들이 한 일은 매우 특별합니다. 그들은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퍼셉션의대상이었던것들’을 모아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할 수 있었는데, 왜 그것을 굳이 교리로 만들어야 했을까요? 살아 있는 퍼셉션이 있다면 기록된 교리나 외적인 기준은 오히려 불필요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AC.464에서도 스베덴보리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퍼셉션이 있었으므로 에녹이 만든 교리가 실제로 사용되지는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에녹의 교리는 현재의 필요보다 ‘미래의필요’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창5의 교회들을 따라오면서 우리는 그 변화가 한순간에 일어난 것이 아님을 보았습니다. 최초의 태고교회에서는 선으로부터 진리를 명료하게 퍼셉션했지만, 후대 교회로 내려가면서 퍼셉션은 점차 더 일반적이고 흐릿해졌습니다. 게난에 이르면 그 변화가 분명해지고, 마할랄렐에서는 쓰임에서 오는 기쁨보다 진리들에서 오는 기쁨을 더 좋아하는 상태가 나타났으며, 야렛은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의 중간 상태에 있었습니다. 인간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알아볼 수 없게 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AC.519의 한 표현이 중요해집니다. 에녹의 사람들이 교리를 만든 목적은 그것이 ‘무엇이선이고무엇이진리인지를아는기준’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퍼셉션이 살아 있을 때에는 사람 안에 그러한 분별의 기준이 살아 있었습니다. 선을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퍼셉션이 사라진 뒤에도 사람이 자기 생각과 욕망을 선과 진리의 기준으로 삼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전 교회들이 주님으로부터 퍼셉션했던 것들을 보존하여, 후대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배울 수 있게 하는 새로운 방식이 필요했습니다. 에녹의 교리는 바로 이러한 필요에 응답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퍼셉션에서 교리로의 변화에는 두 측면이 함께 있습니다. 인간 편에서 보면 이것은 분명 이전보다 낮아진 상태를 보여 줍니다. 살아 있는 퍼셉션으로 알던 것을 이제는 외적으로 주어진 가르침을 통해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라는 관점에서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납니다. 인간이 이전의 내적 능력을 잃어 간다고 해서 주님께서 선과 진리에 이르는 길까지 닫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받을 수 있는 방식에 맞추어 그 길을 새롭게 마련하십니다. 직접 퍼셉션할 수 있을 때에는 퍼셉션으로 인도하시고, 그것이 사라져 갈 때에는 이전에 주신 선과 진리를 교리의 형태로 보존하여 후대가 그것을 통해 배울 수 있게 하십니다. 인간의 상태는 낮아져도 주님의 인도하심은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 자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에녹의 교리는 인간이 머리로 만들어 낸 추상적인 신학 체계에서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그 재료는 앞선 교회들이 실제로 ‘퍼셉션했던것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먼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살아 있는 선과 진리가 있었고, 그다음 그것이 교리의 형태로 정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래의 질서는 ‘교리에서생명으로’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받은생명이교리로보존되는것’이었습니다. 이후 사람들이 그 교리를 배우게 되었을 때에도 목적은 단순히 많은 진리를 아는 데 있지 않고, 그 진리를 통해 다시 선을 알고 선한 삶으로 나아가는 데 있었습니다.
이 점은 AC.519가 ‘하나님과동행하다’를 단순히 ‘교리를알다’라고 하지 않고, ‘신앙의교리에따라가르치고사는것’이라고 설명하는 데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에녹에게 교리는 박물관에 보관된 과거의 퍼셉션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알고, 그것을 가르치며, 그에 따라 살아가기 위한 기준이었습니다. 따라서 교리가 삶에서 분리되는 순간 에녹이 교리를 만든 본래 목적에서도 멀어지게 됩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하나님과동행함’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삶의 길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오늘날 말씀과 교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적용도 있습니다. 우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직접 퍼셉션하는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마음에이렇게느껴진다’, ‘내안에서이런확신이든다’는 것 자체를 진리의 최종 기준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말씀과 말씀으로부터 나온 참된 교리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욕망을 살펴야 합니다. 에녹의 교리가 필요해진 이유 자체가 인간의 내적 퍼셉션이 더 이상 안전한 기준이 될 수 없게 되어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퍼셉션을 오늘날 개인의 직감이나 강한 내적 확신과 곧바로 동일시하여 그것을 말씀이나 교리보다 앞세우는 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오히려 거꾸로 이해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반대편의 위험도 있습니다. 말씀과 교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삶과 분리하는 것입니다. 앞서 마할랄렐 교회에서 보았듯이 쓰임의 기쁨보다 진리들에서 오는 기쁨을 더 좋아하기 시작하는 것 자체가 이미 질서의 변화를 보여 주었습니다. 교리는 선과 진리를 분별하고 그것에 따라 살도록 주어진 것이지,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만족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교리가 퍼셉션을 대신하게 된 이후에도 주님의 목적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지식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 선으로 인도하고 마침내 그 선이 삶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에녹은 태고교회의 쇠퇴 과정 가운데 있으면서도 동시에 주님의 놀라운 보존의 섭리를 보여 주는 교회입니다. 인간에게서 어떤 내적 능력이 사라져 갈 때 주님께서는 그와 함께 선과 진리까지 사라지게 두지 않으십니다. 한 시대가 직접 받을 수 있었던 것을 다음 시대가 받을 수 있는 형태로 옮겨 보존하십니다. 퍼셉션으로 받았던 것이 교리가 되고, 그 교리가 후대에게 선과 진리를 분별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녹의 출현은 단순히 ‘퍼셉션의시대가끝나고교리의시대가시작되었다’는 교회사적 변화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상태가 달라질 때마다 그 상태에 맞는 방법으로 계속 다가오시며, 사람이 다시 선과 진리를 알고 그에 따라 살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하시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줍니다. 에녹이 ‘하나님과동행하였다’는 말씀 안에는 바로 이러한 주님의 보존과 인도하심이 담겨 있습니다. (AC.518-519심화1)
개신교 신앙생활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평생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거나 심지어 악하게 살았더라도,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특히 임종을 앞둔 사람을 위해 기도하거나 복음을 전할 때 강하게 나타납니다. 가족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어떻게든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목회자는 병상 곁에서 복음을 전하고, 환자가 짧게라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 구원의 확신을 전하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한 영혼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사랑과, 인간의 어떠한 죄보다 주님의 자비가 크다는 귀중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이 ‘어떤삶을살았든죽기직전에예수님을믿는다고말하기만하면천국에간다’는 공식으로 굳어진다면, 우리는 매우 중요한 질문을 놓치게 됩니다. 과연 천국은 마지막 순간에 특정한 신앙고백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들어가는 장소일까요? 그리고 인간이 평생 사랑하며 형성해 온 내면의 생명은 죽기 직전의 몇 마디 말로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것일까요?
먼저 이 문제에서도 개신교의 모든 전통을 하나로 묶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주의 신앙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강조하며,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도 회개의 기회가 열려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진실한 회개와 단순한 입술의 고백을 동일하게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참된 회심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내적 변화라고 보며, 웨슬리안 전통에서도 회개와 믿음의 진정성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다만 실제 전도와 목회 현장에서는 이러한 신학적 구별이 단순화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죽기전에예수님만영접하면된다’는 말이 반복되면서, 마치 마지막 순간의 신앙고백 자체에 구원을 보장하는 특별한 효력이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 검토하려는 것은 임종 직전의 진실한 회개가 가능하냐는 질문을 넘어, 그 회개를 한순간의 언어적 고백으로 축소하고, 인간의 실제 내적 상태와 분리해 이해하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가장 대표적인 성경적 근거는 눅23:39-43에 등장하는 십자가 위의 행악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예수님을 비방했지만, 다른 사람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께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에게 낙원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 장면은 기독교 역사에서 마지막 순간의 회개와 구원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본문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실제로 이 말씀은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도 주님의 자비가 닫혀 있지 않다는 강력한 희망을 줍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행악자가 단순히 ‘예수님을믿습니다’라는 말을 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정당한 형벌을 받을 만한 것이었다고 인정했고, 예수님께는 잘못이 없다고 고백했으며,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자신의 죄에 대한 인정, 그리고 예수님을 향한 신뢰가 함께 나타납니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내면을 완전하게 아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을 근거로 어떤 사람이든 죽기 직전에 신앙고백만 하면 그 내면의 상태와 관계없이 자동으로 구원받는다고 일반화하는 것은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범위를 넘어서는 해석입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구원이 무엇인가를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천국과지옥’(HeavenandHell, HH, 1758)은 인간이 죽음 이후에도 자신의 생명을 계속 지니며, 지상에서 형성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이 사후의 삶을 결정한다고 설명합니다(HH.470–484). 특히 HH.476은 사람이 죽은 뒤에도 자신의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온 신앙을 지니며, 그것들이 그의 행위와 삶 안에 실제로 담겨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어지는 HH.477은 인간의 지배적인 사랑이 사후에도 지속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지배적인 사랑(ruling love)이란 사람이 일시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나 순간적 결심이 아니라, 오랜 시간 자신의 의지와 선택을 통해 형성해 온 생명의 중심적인 방향입니다. 어떤 사람이 평생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해치는 것을 즐거워했다면, 그러한 사랑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생명의 성향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기뻐했다면, 그 사랑 역시 그의 내면에 형성된 생명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과 지옥은 외적 신앙고백의 유무만으로 결정되는 보상과 처벌의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 실제로 어떠한 사랑을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였는가에 따라 들어가게 되는 영적 상태입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볼 때, 죽기 직전의 신앙고백은 그것이 아무리 진지하게 들리더라도 그 사람의 내면 전체를 자동으로 변화시키는 행위가 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기독교’(TrueChristianReligion, TCR, 1771)에서 입술로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참된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설명합니다(TCR.516–519). 특히 TCR.529에서는 고통과 두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슬퍼하는 말을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그 사람 안에 자리 잡은 악한 사랑이 제거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참된 회개는 자신의 악을 살피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TCR.528–531).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지막 요소인 새로운 삶입니다. 단순한 후회와 회개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는 것과, 자신의 악이 주님의 뜻에 반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악 자체를 미워하게 되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전자는 자신의 고통이나 처벌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될 수 있지만, 후자는 선과 진리에 대한 새로운 애정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임종 직전의 고백을 평가할 때도 그 사람이 얼마나 절박하게 말했는가보다, 그 고백이 어떠한 내적 사랑에서 나왔는가가 더욱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는 참된 회개가 불가능하다는 뜻일까요? 반드시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내면을 완전하게 알지 못하며, 주님께서 그 사람의 생애 전체에 걸쳐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겉으로는 오랫동안 주님을 거부하며 살아온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도 양심과 선한 애정, 진리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보존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천국의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 어린 시절부터 선과 진리의 상태들을 보존하시며, 이것들이 이후의 영적 생명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합니다(AC.561, 661). 이러한 리메인스(remains)의 관점에서 보면, 마지막 순간에 드러나는 신앙고백이 반드시 그 순간 처음으로 생겨난 내적 변화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거나 억눌려 있던 선한 애정과 진리를 향한 마음이 죽음을 앞두고 비로소 드러날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특정한 임종 고백이 실제로 그러한 상태에서 나왔는지를 우리가 판정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사람 안에 무엇이 보존되어 있었으며, 마지막 순간의 고백이 얼마나 진실한 내적 응답이었는지는 오직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과, 마지막 순간에 인간의 지배적인 사랑이 아무런 내적 과정 없이 완전히 뒤바뀔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는 HH.480에서 인간이 죽은 뒤에는 지상에서 형성한 지배적인 사랑이 지속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사후에는 지상에서처럼 외적 삶을 통해 자신을 새롭게 형성하는 개혁과 거듭남의 과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이 가르침을 깊이 생각하면, 지상에서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자유와 합리성을 주시고, 자연계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진리를 배우고 악을 멀리하며 선을 행할 기회를 허락하십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사랑이 형성되고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평생 악을 사랑하며 살아온 사람이 죽기 직전에 천국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 순간 자신의 악한 사랑을 모두 버리고 천국의 사랑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존재로 바뀌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천국은 특정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들어갈 수 있는 외적 장소가 아니라, 천국의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생명이 있어야 참으로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깊은 질문이 생깁니다. 만일 평생 악하게 살았던 사람이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그 고백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면, 천국에서 그는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지상에서 즐거워하던 악한 욕망과 이웃을 해치려는 사랑을 그대로 지닌 채 천국에 들어간다면, 그는 천국의 삶을 기뻐할 수 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천국의 기쁨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데서 비롯되며, 지옥의 영들이 즐거워하는 것은 그와 반대되는 사랑입니다(HH.481). 따라서 악한 사랑을 그대로 지닌 사람이 천국의 환경에 놓인다고 해서 천국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에게 천국의 선과 진리는 자신의 내적 성향과 충돌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 사람을 받아들이기 싫어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시지만, 인간이 스스로 사랑하게 된 생명의 성향을 무시하고 천국의 기쁨을 강제로 주입하지는 않으십니다.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장소를 옮기는 일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천국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하나님의은혜라면무엇이든가능하지않은가?’라는 반론을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주님의 신성한 능력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전능하심을 인간의 자유와 거듭남이라는 질서를 무시하는 능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섭리’(DivineProvidence, DP, 1764)는 주님께서 인간을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개혁하시고 거듭나게 하신다고 가르칩니다(DP.71, 82–86). 인간이 주님의 사랑을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이려면, 그 사랑을 이해하고 자유롭게 선택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원하지 않는 사랑을 억지로 그 사람의 중심적 사랑으로 만들어 놓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만일 인간이 평생 악을 사랑하도록 자신을 형성했는데도 죽기 직전의 고백 한마디로 그 사랑이 강제로 제거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와 인격을 존중하면서 구원하시는 주님의 섭리와 조화되기 어렵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인간의 실제 생명을 변화시키는 은혜이지, 변화되지 않은 생명을 변화된 것으로 간주하는 외적 선언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무한함을 믿는 것과 구원의 영적 질서를 무시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죽기 직전의 신앙고백을 가볍게 여기거나 임종을 앞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불필요하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임종의 순간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이 붙들고 있던 것들이 얼마나 덧없는지 깨달으며, 주님 앞에서 겸손해질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시간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평생 들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던 진리가 그 순간 비로소 마음에 깊이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남아 있던 신앙과 양심이 마지막 순간에 다시 살아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임종을 앞둔 사람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자신의 죄를 정직하게 돌아보며 주님께 마음을 열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사람에게 특정한 신앙고백을 받아 냈다는 사실만으로 천국행을 보증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환자의 의식이 흐려져 있거나 말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구원의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입술에서 나오는 소리만 들으시는 분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에 있는 사랑과 의지와 생각을 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임종의 자리에서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은 구원을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증언하고 그 사람을 주님의 섭리에 맡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유가족을 위로하는 방식에도 중요한 변화를 가져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다면, 우리는 그 고백을 귀하게 여기고 주님께서 그 사람의 내면에서 역사하셨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근거로 그 사람이 반드시 천국에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반대로 평생 교회를 다니지 않았거나 마지막 순간에 신앙고백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판단하는 것 역시 옳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HH.318–328에서 지상에서 기독교를 알지 못한 사람도 자신의 종교와 양심에 따라 선하게 살아왔다면 주님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가르침은 구원이 인간의 외적인 종교적 소속이나 특정한 언어적 고백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물론 이러한 이해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자동으로 보장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실제 내면을 아시며, 그 사람이 자신에게 허락된 진리와 선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완전하게 아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실한 위로는 ‘마지막에영접기도를했으니무조건천국에갔다’거나 ‘그기도를하지못했으니구원받지못했다’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완전한 사랑과 지혜로 인도하시는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결국 ‘죽기직전에라도예수님믿는다고하면천국간다’는 말에서 우리가 보존해야 할 진리는 주님의 자비에는 인간이 정해 놓은 시간적 한계가 없으며,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도 주님께 나아갈 소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로잡아야 할 오류는 마지막 순간의 언어적 고백이 평생 형성된 내면의 사랑과 관계없이 천국을 보장한다는 생각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마지막 말만 들으시는 분이 아니라, 그의 생애 전체를 보시고 그 안에 어떤 사랑이 형성되었는지를 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에도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언젠가마지막순간에회개하면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오늘의 삶을 미루어도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오늘의 삶은 단순히 죽음을 준비하는 대기 시간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진리를 받아들이며, 어떤 악을 멀리하고, 어떤 선을 행하는가를 통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형성되는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마지막 순간에 사용할 수 있는 구원의 공식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 자신입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순간에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은 마지막까지 미루어 둘 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 시작해야 할 일입니다. (PR.004해설)
‘세례를받아천주교신자가되면하느님의자녀가된다.’ 이 말은 천주교 신앙생활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가르침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세례를 단순히 신앙 공동체에 가입하는 의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원죄가 씻기고 새로운 생명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결합하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아직 말을 하지 못하고 신앙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유아에게도 세례를 베풉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은총을 베푸신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세례라는 외적인 의식이 이루어지는 순간, 인간의 내적인 생명에도 실제적인 영적 출생이 완성되는 것일까요? 물로 머리를 씻고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과, 주님을 사랑하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하는 새로운 생명이 인간의 내면에 형성되는 것은 같은 사건일까요? 더 나아가 ‘하느님의자녀가된다’라는 말은 새로운 종교적 신분이 부여되었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생명을 받아 실제로 그분을 닮은 존재로 변화되어 간다는 뜻입니까? 이 질문의 목적은 세례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세례가 무엇을 의미하며, 그 세례가 가리키는 참된 영적 출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을 정확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CatechismoftheCatholicChurch)1265항은 세례를 받은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하느님의 양자가 되며, 그리스도의 지체와 성령의 성전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어 1266항은 세례를 통하여 성화의 은총과 의화의 은총이 주어지고, 하느님을 믿고 바라고 사랑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덕과 성령의 선물이 부여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1272항은 세례가 그리스도께 속한다는 지워지지 않는 영적인 인호를 남긴다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천주교는 세례를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 실제로 역사하는 성사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세례받은 사람이라면 이후 어떻게 살아도 자동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받은 은총은 신앙생활 속에서 성장해야 하며, 인간은 그 은총에 응답하고 죄를 피하며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또한 천주교는 유효한 세례를 받은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자들도 그리스도와 일정한 친교 안에 있다고 인정합니다. 따라서 이 명제를 ‘천주교신자만하느님의자녀가된다’라는 배타적인 주장으로 이해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실제 쟁점은 세례라는 성사적 행위 자체가 인간에게 새로운 영적 신분과 은총을 부여한다는 천주교의 이해가,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거듭남의 질서와 어떻게 다른가 하는 데 있습니다.
성경은 세례와 새로운 출생을 긴밀하게 연결합니다. 요3:3에서 주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시고, 5절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천주교는 이 말씀을 세례의 필요성과 성사적 은총을 설명하는 중요한 근거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6절에서 주님께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영적 출생이 자연적인 사건이나 외적인 신분 변화와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또한 요1:12–13에서는 주님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며, 그들이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새로운 출생의 근원은 인간의 종교적 행위나 제도적 소속이 아니라 주님 자신입니다. 물론 이러한 말씀들이 세례와 거듭남의 관계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물과 성령, 외적인 씻음과 내적인 새 생명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더욱 깊이 살펴보도록 이끕니다. 세례가 영적인 출생을 나타내는 거룩한 의식이라는 사실과, 그 의식의 시행이 곧 영적 출생의 완성이라는 주장은 구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기독교’(TrueChristianReligion, TCR, 1771) TCR.667–691에서 세례의 의미와 쓰임을 체계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세례의 첫 번째 쓰임이 기독교회로 들어가는 입문과 동시에 영계의 기독교인들 가운데 연결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TCR.677–680). 두 번째 쓰임은 구속자이시며 구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인정하며 그분을 따르게 하는 것이고(TCR.681–683), 세 번째이자 궁극적인 쓰임은 인간이 거듭나는 것입니다(TCR.684–687). 이 세 가지를 함께 살펴보면 스베덴보리가 세례를 단순한 종교적 가입 절차로 축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는 주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의식이며 자연계에서 행해지는 세례는 영계의 질서와도 실제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첫 번째 쓰임과 세 번째 쓰임을 구별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기독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실제로 거듭나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전자는 새로운 영적 삶을 향한 입문이며, 후자는 그 입문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세례가 인간을 거듭남의 길로 인도할 수는 있지만, 세례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거듭남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의 참된 가치는 그 의식 자체에 머물지 않고, 그것이 인간을 주님께 인도하여 어떤 새로운 생명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가에 있습니다.
이러한 구별은 유아 세례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TCR.677에서 스베덴보리는 아직 합리적으로 사고할 능력이 없고 신앙에 관한 것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유아들도 세례를 받는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례의 첫 번째 쓰임이 기독교회로 들어가는 입문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고 설명합니다. 아직 선과 악을 분별하거나 의식적으로 회개할 능력이 없는 아이가 세례받는 순간 이미 영적인 거듭남을 완성했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유아 세례에 실제적인 영적 쓰임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세례받은 아이들이 영계에서 기독교인들과 연결되며, 주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그 아이들이 장차 주님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보호하고 준비시키신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자연계의 세례가 영계와 무관한 단순한 표시가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아이가 성장하여 자신의 이해와 의지를 사용하기 시작하면, 그의 영적 상태는 점차 자신이 무엇을 믿고 사랑하며 어떤 삶을 선택하는가와 깊이 연결됩니다. 따라서 세례받았다는 사실이 이후의 모든 삶을 대신해 주지는 않습니다. 유아 세례는 거듭남의 완성이 아니라 거듭남을 향한 거룩한 시작이며, 주님께서는 그 아이가 성장하는 동안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계속 인도하십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상응론이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천국의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4255은 세례가 교회와 교회에 속한 것들로 들어가는 입문을 나타내며, 동시에 거듭남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세례의 물은 영적으로 진리를 의미하고, 물로 씻는 행위는 진리를 통하여 인간의 악과 거짓이 제거되는 정결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자연적인 물이 육체의 더러움을 씻는다고 해서 인간의 의지에 자리 잡은 자기 사랑과 탐욕과 미움과 교만을 실제로 씻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내적인 악은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의 빛으로 자신의 악을 발견하며,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 그 악을 죄로 여겨 피할 때 점차 제거됩니다. 이 과정에서 진리는 단순히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려 주는 지식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이해를 밝히고 의지를 변화시키는 수단이 됩니다. 따라서 세례의 물이 나타내는 참된 씻음은 자연적인 물질 자체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가 인간 안에서 실제로 역사할 때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례가 단순한 상징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세례에는 자연계와 영계를 연결하는 실제적인 영적 쓰임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례가 나타내는 영적 실재와 세례라는 외적인 행위를 서로 혼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례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주님의 진리를 통하여 정결해지고 실제로 거듭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자녀가된다’라는 말의 가장 깊은 의미는 무엇일까요? 스베덴보리는 TCR.684에서 세례의 궁극적인 쓰임을 거듭남이라고 설명하면서, 인간을 실제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 구속자이시며 구원자이신 주님이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스스로 새로운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는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여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실제로 악을 제거하시고 선한 생명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러한 변화는 단번에 완성되는 종교적 신분의 변경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자유와 합리성을 사용하는 가운데 평생 계속되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천국과지옥’(HeavenandHell, HH, 1758) HH.329–345에서 어린아이들이 죽음 이후 주님의 인도 아래 천국에서 양육받고 성장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이 가르침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 특정한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완성되거나 제한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세례를 받은 아이뿐 아니라 세례를 받지 못한 아이도 주님의 사랑과 섭리 밖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구원을 원하시며, 각 사람을 그가 처한 상태와 환경에 따라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표현은 단순히 종교적인 소속을 가리키는 신분 명칭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 가장 깊은 의미는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사랑과 지혜를 반영하는 존재로 실제로 변화되어 간다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천주교의 세례론과 스베덴보리의 가르침 사이에는 인정해야 할 공통점과 중요한 차이가 함께 존재합니다. 양쪽 모두 세례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며, 그 의미가 단순한 외적 가입 절차보다 깊다고 인정합니다. 또한 세례받은 사람이 이후에도 신앙 안에서 성장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세례 자체가 성화의 은총과 의화의 은총을 부여하고, 인간을 하느님의 양자로 만들며, 지워지지 않는 영적인 인호를 남긴다고 가르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세례의 실제적인 영적 쓰임을 인정하면서도, 세례의 첫 번째 쓰임인 교회로의 입문과 궁극적인 쓰임인 거듭남을 명확하게 구별합니다. 이 차이는 단순히 세례를 중요하게 여기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사의 시행 자체가 인간 안에서 어떤 영적 변화를 이루는가, 그리고 그 성사가 가리키는 실제적인 거듭남이 어떻게 완성되어 가는가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영적 출생은 세례라는 외적인 의식의 시행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이해와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그가 점차 악을 피하고 선을 사랑하는 존재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문제는 실제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경고를 줍니다. 어떤 사람이 어린 시절 세례를 받고 평생 천주교 신자로 살아왔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세례명을 소중히 여기고 주일마다 미사에 참석하며 여러 성사생활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그의 신앙생활에 귀중한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일상생활에서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악을 행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나는세례받은하느님의자녀다’라는 사실에 안심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그러한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우리가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필요한 것이 세례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반복적인 확인이 아니라, 세례가 가리키는 참된 회개와 거듭남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또한 이 문제는 천주교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개신교 신자 역시 자신이 세례를 받았거나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고백한 순간 구원과 하나님의 자녀 됨이 이미 확정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이후의 실제적인 거듭남을 부차적인 문제로 여길 수 있습니다. 심지어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도 자신이 세례와 거듭남의 영적 의미를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영적으로 더 성숙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진리를 알고 있다는 사실과 그 진리가 자신의 삶 안에서 실제로 살아 있다는 사실은 서로 다릅니다. 세례의 영적 의미를 이해했다면, 그 이해는 자신을 높이는 지식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더욱 겸손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주님께서 세례를 통하여 인간에게 보여 주시는 거룩한 목적을 생각해야 합니다. 물은 육체를 씻지만, 주님의 진리는 인간의 이해를 밝히고 그가 자신의 악을 발견하도록 돕습니다. 세례는 한 번 이루어지는 외적인 의식일 수 있지만, 주님의 진리로 마음을 씻고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평생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되지만, 그 사실을 영적 성장의 완성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세례는 주님께서 인간을 새로운 삶으로 부르시는 거룩한 시작이며,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해와 의지를 사용하여 진리를 배우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과정에서 인간을 실제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요1:12-13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자녀 됨은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는 일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종교적 신분을 바꾸는 일보다 훨씬 깊으며, 주님의 생명이 인간 안에 받아들여져 새로운 사랑과 새로운 삶이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으로 물어야 할 질문은 ‘나는언제세례를받았는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나는그세례가나타내는거듭남의길을지금도걸어가고있는가?주님께서주시는진리로자신의악을발견하고피하며,주님의사랑을받아이웃을위한선한쓰임으로나아가고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참된 생명은 외적인 의식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 안에 이루어 가시는 실제적인 거듭남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SL.RC.003해설)
개신교 신앙생활에서 ‘한번구원받으면영원히구원받는다’는 말은 많은 신자에게 깊은 위로와 확신을 주는 표현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므로,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어떤 실패와 죄를 경험하더라도 최종적으로 구원을 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은 특히 자신의 연약함과 반복되는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신자들에게 큰 위안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사랑하신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시며, 인간의 부족함 때문에 자신의 구원 약속을 철회하지 않으신다는 믿음에는 분명 귀중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이미구원받았으므로이후에어떤삶을살더라도천국에가는것은확정되어있다’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인간이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실제 상태를 구별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구원을 과거 어느 시점에 획득한 영원한 자격으로 이해하면, 성경이 그토록 강조하는 회개와 거듭남, 끝까지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은 구원의 본질이 아니라 부차적인 문제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먼저 이 명제를 개신교 전체의 공식 교리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개혁주의 전통은 흔히 ‘성도의견인’(PerseveranceoftheSaints)이라고 부르는 교리를 가르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7장은 하나님께서 참으로 부르시고 거룩하게 하신 사람들은 은혜의 상태에서 완전히 또는 최종적으로 떨어져 나가지 않으며,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끝까지 보존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참된 신자도 심각한 죄에 빠지고 한동안 그 죄 가운데 머물 수 있으며, 그 결과 양심이 상하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따라서 엄밀한 개혁주의 견인 교리는 ‘한때예수님을믿는다고고백했으니이후에무슨짓을해도괜찮다’는 무조건적인 면죄부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반면 웨슬리안·알미니안 전통은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먼저 역사하지만 인간은 그 은혜에 대한 응답을 거부하고 믿음에서 떠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결국 개신교 안에서도 구원의 영원한 보장에 관한 이해는 서로 다릅니다. 우리가 이 글에서 검토하려는 것은 이러한 교리적 차이를 무시한 채, ‘한번구원받았으면이후의삶과관계없이모든것이확정되었다’고 받아들이는 신앙적 통념입니다.
성경에서 영원한 구원의 확신을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말씀은 요10:28-29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양들에게 영생을 주시며 그들을 자신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롬8:38-39역시 사망이나 생명이나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들은 주님의 사랑과 구원하시는 능력이 인간의 연약함이나 세상의 위협보다 무한히 크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같은 요10:27에서 자신의 양들이 자신의 음성을 듣고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요15:4-6에서는 자신 안에 거하라고 명하시며,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양들을 지키시는 능력과 그 양들이 실제로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상태를 분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진리와, 사람이 주님을 떠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문제는 같은 차원에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히6:4-6과 10:26-29에는 한때 영적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라도 의도적으로 진리를 거스르고 악으로 돌아설 때 발생하는 심각한 위험이 경고되어 있습니다. 벧후2:20-22역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사람이 다시 그것에 얽매이는 상태를 경고합니다. 물론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이러한 본문들을 참된 중생자의 구원 상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외적으로 신앙에 참여했으나 참된 구원에 이르지 못한 사람에 관한 경고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반면 다른 개신교 전통에서는 실제 신자에게도 배교의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이처럼 해석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어느 입장에서든 성경의 경고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약속은 회개와 순종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허가증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이 문제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구원의 의미 자체가 더욱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섭리’(DivineProvidence, DP, 1764)는 주님의 섭리가 지향하는 목적이 인간의 구원이며, 인간이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개혁되고 거듭나야 한다고 설명합니다(DP.71, 82–86). 여기서 구원이란 단순히 인간의 이름이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의 명단에 기록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주님에 의해 변화되고, 악을 사랑하던 사람이 선을 사랑하며, 거짓을 즐기던 사람이 진리를 기뻐하는 새로운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의 내면에서 실제로 일어나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제거하여 강제로 천국의 생명을 주입하지는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자유롭게 받아들이지 않은 사랑은 그 사람 자신의 사랑이 될 수 없고, 이해를 거치지 않은 진리는 그 사람의 생명과 결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부여하시는 외적인 신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를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가운데 실제로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께서 한번 시작하신 구원의 역사를 인간이 거부할 수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은 결코 인간에 대한 구원의 뜻을 철회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으며, 주님은 모든 사람을 가능한 한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끊임없이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와 합리성은 구원의 첫 순간에만 허락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 전체에서 존중되어야 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한때 진리를 받아들이고 선을 행하기 시작했더라도, 이후 자신의 자유로 악을 사랑하고 진리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돌아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사람을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의 삶을 통해 주님의 인도를 거스르는 방향을 선택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자신의 악을 마치 스스로 제거하는 것처럼 노력해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제거하고 선을 주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라고 설명합니다(DP.100–128).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획득한다는 뜻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과 분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구원을 단번에 획득한 뒤 잃어버릴 수 있는 물건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번구원받으면영원히구원받는다’는 명제가 구원을 영구적인 소유물처럼 이해하는 위험을 지닌다면, 반대로 ‘죄를지을때마다구원을잃었다가회개하면다시얻는다’는 생각 역시 구원의 본질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순간에 구원을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에서 어떤 사랑이 형성되고 있으며 그 사랑이 어떠한 삶을 만들어 내고 있느냐입니다. 사람이 악을 행했다고 해서 그 순간 곧바로 모든 영적 생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되며, 그 과정에는 수많은 시험과 넘어짐, 회개와 회복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모든 과정에서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반복되는 연약함 때문에 자신의 구원이 매번 취소되는 것처럼 두려워할 필요도 없지만, 과거의 신앙고백 하나만을 근거로 자신의 현재 삶을 돌아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천국과지옥’(HeavenandHell, HH, 1758)에 나타나는 지배적인 사랑의 가르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죽은 뒤에도 지상에서 형성한 자신의 사랑과 그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을 지니고 살아간다고 설명합니다(HH.476). 특히 HH.477에서는 인간의 지배적인 사랑이 사후에도 계속되며, 그 사랑이 그의 영원한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지배적인 사랑이란 그 사람이 일시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나 특정한 순간의 생각이 아니라, 그의 의지와 삶 전체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중심적인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이 입술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실제로는 자신만을 사랑하고 이웃을 지배하며 해치는 것을 즐거워한다면, 그 사람의 내면을 지배하는 것은 신앙고백의 내용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많은 실패와 연약함이 있더라도 악을 죄로 여기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선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서는 전혀 다른 내적 생명이 형성됩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것은 단순히 어느 날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 이루어 가신 생명이 실제로 어떤 사랑으로 자리 잡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렇게 보면 ‘구원이취소된다’는 표현 자체도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합니다. 취소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유효하다고 선언하신 구원을 인간의 잘못 때문에 나중에 철회하시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은 인간을 구원하기로 하셨다가 마음을 바꾸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과 구원하시는 뜻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문제는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내적 상태입니다. 마치 태양이 끊임없이 빛과 열을 보내지만 창문을 닫거나 빛을 가리는 쪽으로 돌아서면 그 빛과 열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이러한 비유가 인간의 자유와 구원의 신비를 모두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주님께서 사랑을 거두시기 때문에 사람이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 사랑을 거부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생명을 형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욱 적절한 질문은 ‘한번받은구원이취소될수있는가?’보다 ‘주님께서주시는구원의생명을사람이실제로받아들이고있는가?’입니다.
이것은 목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어떤 신자가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면서도 반복적인 죄와 악한 습관 때문에 괴로워한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에게 ‘한번구원받았으니아무걱정하지않아도된다’고만 말한다면,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실제로 악을 멀리하도록 돕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계속그렇게죄를지으면구원을잃는다’고만 말한다면, 그는 주님의 사랑을 신뢰하기보다 자신의 구원 상태를 끊임없이 의심하며 두려움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느 쪽도 충분한 목회적 돌봄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당신을포기하지않으십니다.그러므로낙심하지말고다시주님께나아가십시오.자신의악을정직하게살피고그것을죄로인정하며,주님의힘으로조금씩그악에서벗어나십시오’라고 권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이러한 권면은 주님의 사랑을 축소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회개와 책임을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붙드신다는 진리는 우리가 그분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따르도록 격려하는 말씀이어야지, 그 손길을 외면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보증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 명제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주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느냐에 있습니다. ‘한번구원받으면무슨일이있어도구원은취소되지않는다’는 말이 주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라면, 우리는 그 안에 담긴 진리를 존중해야 합니다. 주님은 인간의 실패 때문에 사랑을 거두시는 분이 아니며, 한때 죄에 빠졌다고 해서 돌아오는 사람을 거절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말이 인간이 이후에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삶을 살든 그 내적 상태와 관계없이 천국의 생명을 영원히 보장받았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주님의 구원을 지나치게 외적인 것으로 이해한 결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은 단지 우리가 죽은 뒤 천국이라는 장소에 들어가도록 허락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천국의 생명을 이루시고, 우리가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기쁘게 받아들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구원의 확신은 과거에 어떤 종교적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에만 근거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도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그 사랑에 응답하여 살아가는 데서 더욱 깊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이미 확보했다고 생각하는 구원의 자격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를 구원하고 계시는 주님 자신입니다. (PR.003해설)
‘교회밖에는구원이없다.’ 이 짧은 문장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강력하면서도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교회론적 명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라틴어로는 ‘ExtraEcclesiamNullaSalus’라고 하며, 3세기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와 관련하여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명제는 본래 교회의 일치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을 강조하는 신학적 맥락에서 사용되었지만, 역사 속에서는 종종 눈에 보이는 교회 조직의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배타적 주장으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천주교에서 이 명제는 교회가 구원의 역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며,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이 교회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를 설명하는 중요한 교리적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여러 의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천주교 신자가 아닌 개신교인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이름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 다른 종교 안에서 양심에 따라 선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모두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입니까? 무엇보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까, 아니면 교회라는 제도에 속하게 하시기 위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이 질문은 천주교의 배타성을 비판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구원의 근원과 교회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묻게 합니다.
먼저 오늘날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은 ‘교회밖에는구원이없다’라는 명제를 천주교 신자가 아닌 사람은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CatechismoftheCatholicChurch)846항은 이 명제를 긍정적 형태로 설명하면서, 모든 구원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서 그분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온다고 가르칩니다. 이어 847항은 자기 잘못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은총의 도움을 받아 양심에 따라 그분의 뜻을 실천하려는 사람들도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밝힙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 ‘인류의빛’(LumenGentium)14항과 16항 역시 이러한 구별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가톨릭교회가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에 필요한 교회로 세워졌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그 교회에 들어가거나 그 안에 머물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오늘날 천주교의 입장은 모든 비가톨릭 신자를 무조건 배제하는 단순한 제도적 배타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보편성과 가톨릭교회의 구원적 필요성을 동시에 주장하는 구조입니다. 이 점을 정확하게 인정하지 않으면 천주교가 실제로 가르치지 않는 내용을 만들어 놓고 비판하는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욱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천주교가 자기 밖에 있는 사람들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구원을 궁극적으로 가톨릭교회의 구원적 질서와 연결하여 설명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주님께서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는 유일한 분이라는 사실과, 그러한 구원이 특정한 역사적 교회의 제도적 질서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요14:6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으며, 행4:12에서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들에서 ‘주님외에는구원이없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과 ‘특정한역사적교회제도와의관계밖에는구원이없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교회가 말씀을 보존하고 주님을 증언하며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치는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역할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곧 주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교회의 제도적 경계에 종속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가 참으로 주님의 교회라면, 사람들을 자기 자신에게 묶어 두기보다 주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교회의 가치는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의 숫자나 제도적 권위가 아니라, 그 교회를 통하여 사람들이 얼마나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게 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지옥’(HeavenandHell, HH, 1758)HH.318에서 이 문제에 관하여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그는 교회 밖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말씀을 가지고 있지 않고 주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견해를 소개한 뒤, 그러한 사람들도 구원받는다는 사실은 주님의 자비가 보편적이라는 점에서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주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며,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므로 모든 인간의 구원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은 주님의 자비가 모든 개인에게 미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어느 나라와 시대에 태어날지,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나 어떤 종교적 환경에서 성장할지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외적 조건이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면, 주님의 사랑과 공의가 인간이 선택할 수 없었던 역사적 조건에 종속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이 사랑 자체이시며 그 사랑의 본질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은 복음을 직접 접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도 그들이 가진 종교와 양심을 통하여 신적인 것을 인정하고 선하게 살아갈 기회를 마련하십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동일하게 참되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구원하시는 섭리가 인간의 종교적 환경에 의하여 차단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보편적 구원 섭리는 HH.328에서 더욱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교회가 온 지구에 퍼져 있으며, 각자의 종교 안에서 신적인 것을 인정하고 체어리티(charity)의 선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도 주님의 교회에 속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알 수 있는 교회의 특별한 역할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교회를 인체의 심장과 폐에, 다른 종교 안의 사람들을 여러 기관과 지체에 비유합니다. 심장과 폐가 온몸의 생명 유지에 특별한 역할을 담당하듯, 말씀을 가진 교회도 인류 전체의 영적 생명에 특별한 쓰임을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비유는 교회의 독점적인 구원 권한을 주장하기 어렵게 합니다. 심장과 폐는 몸 전체를 위하여 존재하지, 몸의 다른 기관들을 배제하기 위하여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가진 교회에 특별한 영적 빛을 주셨다면, 그것은 그 교회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배제하라는 뜻이 아니라 더 많은 진리를 알고 선을 행하며 인류 전체를 섬기는 쓰임을 담당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교회의 영적 특권은 곧 영적 책임이 됩니다. 더 많은 진리를 받은 사람일수록 그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하며, 그 빛을 자기 우월감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는 ‘천국의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1032에서도 확인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노아와 맺으신 언약을 설명하면서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지닌 사람들과 결합하시며, 여기에는 교회 안의 사람들뿐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도 포함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교리적 차이를 근거로 자기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구원을 부정하려는 태도 역시 경계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떤 종교적 명칭을 가지고 있는가보다 그의 내면에 실제로 어떤 사랑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스베덴보리가 진리에 대한 이해를 불필요하게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선은 진리를 통하여 그 방향을 발견하고, 진리는 선과 결합할 때 생명을 얻습니다. 다만 사람이 자기 잘못 없이 더 밝은 진리를 배우지 못한 경우, 주님께서는 그가 알고 있는 진리와 선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를 이끄실 수 있습니다. 또한 HH.321–325항은 기독교 밖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사후에 주님에 관한 가르침을 받으며, 선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설명합니다. 이것은 지상에서 특정 종교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곧 영원한 배제를 뜻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사후의 가르침이 지상에서 형성된 사랑의 방향을 무조건 뒤집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의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이미 형성되어 있던 선을 향한 사랑과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종교적 명칭만이 아니라, 인간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르침은 결국 어느 종교를 믿든 선하게만 살면 모두 천국에 간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은 단순히 사회적으로 착한 사람이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참된 선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시며, 인간은 자신이 아는 진리에 따라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체어리티 역시 단순한 친절이나 자선활동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적인 것을 인정하고 선을 사랑하는 내적인 삶의 성향이며, 실제적인 행동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따라서 다른 종교 안에 있는 사람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는 말은 선과 악의 구별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인 종교적 소속보다 인간의 내적인 사랑과 삶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 인간은 죽음 이후에도 지상에서 형성된 지배적 사랑의 방향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후의 가르침을 통하여 더 밝은 진리를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지상에서 어떻게 살아도 죽은 뒤에 얼마든지 자신을 바꿀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구원 섭리는 보편적이지만 인간의 자유와 삶의 책임까지 없애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천주교와 스베덴보리 사이의 차이를 정확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양쪽 모두 구원의 근원이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 있으며, 복음을 알지 못한 사람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또한 신앙이 실제적인 삶과 결합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그러한 구원까지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관련하여 이해하며, 가톨릭교회 안에 구원의 수단들이 온전히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보편적인 교회가 인류 전체에 걸쳐 존재하며, 그 교회에 속한다는 것의 본질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체어리티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차이는 단순히 천주교는 배타적이고 스베덴보리는 포용적이라는 정도로 정리할 수 없습니다. 더욱 근본적으로는 교회의 본질을 어디에 두고, 주님의 구원하시는 역사와 제도적 교회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천주교가 교회의 성사적 질서와 역사적 연속성을 구원론 안에서 본질적인 요소로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는 주님과 인간의 실제적인 결합을 중심으로 교회를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교회는 구원의 근원을 소유하는 기관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와 사랑을 인간에게 전하고 그 생명을 받아들이도록 돕는 거룩한 수단으로 이해됩니다.
이러한 구별은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천주교 신자가 자신은 참된 교회 안에 있으므로 영적으로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듯이, 개신교 신자도 자신이 정통교회에 속해 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으므로 구원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도 자신은 참된 교리를 알고 있으므로 다른 사람보다 주님께 더 가까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에는 모두 같은 위험이 숨어 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자신의 종교적 지식이나 소속에 대한 확신으로 대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구원 여부를 판단하는 일에는 신중해야 하지만, 자기 자신이 받은 진리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지는 진지하게 살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 밖에 있다는 이유로 그의 구원을 부정하기 전에, 먼저 자신은 교회 안에서 배운 사랑과 진리를 실제로 살아 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가 인간을 위하여 존재한다면, 교회에 속한 사람의 첫 번째 책임은 다른 사람의 구원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진리를 통하여 더욱 깊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처음의 명제로 돌아옵니다. ‘교회밖에는구원이없다.’ 이 말은 구원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으며, 모든 구원받은 사람이 궁극적으로 주님의 영적인 공동체에 속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때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교회’를 특정한 역사적 제도와 동일시하고, 그 제도와의 관계를 구원의 보편적인 조건으로 삼는다면 주님의 교회가 지닌 영적 본질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의 교회는 인간이 설정한 종교적 경계보다 크고, 주님의 사랑은 인간이 이해하는 구원의 경로보다 깊습니다. 그렇다고 교리와 교회생활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진리를 배운 사람은 그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하며, 교회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알리고 그분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인도하는 책임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결국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다른 사람의 구원 여부를 판단하는 권위를 갖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진리의 빛에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주님의 사랑을 실제로 살아 내는 것입니다. 교회는 구원의 문을 자기 소유로 선언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주님을 증언하고 그분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SL.RC.002해설)
개신교 신앙생활에서 ‘영접기도’만큼 익숙하면서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은 기도는 흔치 않습니다. 전도자가 복음을 설명한 뒤 상대방에게 예수님을 영접하겠느냐고 묻고, 상대방이 동의하면 정해진 기도문을 한 문장씩 따라 하도록 인도합니다. ‘주예수님,저는죄인입니다.저의죄를용서하시고제마음에들어오셔서저의구주와주님이되어주십시오.’ 기도가 끝나면 전도자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축하하며, 때로는 그날의 날짜를 기록해 두라고 권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수많은 사람이 처음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을 향해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 자체로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기도를하지않으면구원받을수없다’고 생각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본래 주님께 나아가도록 돕기 위해 마련된 기도가 어느새 구원에 반드시 필요한 절차처럼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과연 주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특정한 기도문을 반드시 말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을까요?
먼저 역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에서 널리 사용하는 영접기도, 곧 ‘죄인의기도’(Sinner'sPrayer)는 초대교회부터 동일한 형식으로 전해 내려온 기도가 아닙니다. 회개와 신앙고백의 전통은 초기 기독교부터 존재했지만, 전도집회에서 결신을 요청하고 일정한 기도문을 따라 하도록 하는 방식은 근대 부흥운동과 복음전도 문화 속에서 발전했습니다. 특히 19세기 이후의 부흥집회와 20세기 대중전도 활동을 거치면서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모든 개신교 교단이 영접기도를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개신교 신학자와 목회자도 기도문을 따라 하는 행위 자체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검토하려는 것은 개신교 전체의 공식 교리라기보다, 특정한 전도 방식이 오랫동안 반복되면서 신자들의 의식 속에 사실상 구원의 필수 절차처럼 자리 잡은 현상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이 문제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사도행전 2장 37, 38절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우리가어찌할꼬’라고 묻자,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권합니다. 사도행전 16장 30, 31절에서 빌립보 간수가 바울과 실라에게 구원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자, 그들은 ‘주예수를믿으라그리하면너와네집이구원을받으리라’고 대답합니다. 로마서 10장 9, 10절 역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어디에도 모든 사람이 동일한 문장으로 영접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규정은 없습니다. 성경은 회개와 믿음, 주님을 향한 고백과 삶의 변화를 가르치지만, 구원을 특정한 기도문을 암송하거나 따라 말하는 행위에 결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영접기도를 드리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사람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성경이 명시하지 않은 조건을 인간이 덧붙이는 일이 됩니다.
여기서 특별히 살펴볼 본문은 누가복음 23장 39–43절에 등장하는 십자가 위의 강도입니다. 그는 전도자의 안내를 받아 영접기도를 드리지 않았고, 교회의 정식 절차를 거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예수님께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낙원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 본문은 구원을 받기 위해 정해진 기도문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반대편 극단으로 넘어가, 죽기 직전 몇 마디 고백만 하면 그 사람의 실제 내적 상태와 관계없이 구원이 자동으로 확정된다고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강도의 내면을 아셨지만,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강도의 짧은 고백 안에 어떤 참된 회개와 신뢰가 있었는지 그 깊이를 완전히 판단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의 핵심은 마지막 순간에 사용할 수 있는 간단한 구원 공식을 발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종교적 절차에 갇히지 않으시며, 그 사람의 실제 내면을 아시고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참된기독교’(TrueChristianReligion, TCR, 1771)는 이 문제를 더 깊은 차원에서 조명합니다. 그는 구원하는 신앙이 주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라고 설명하며(TCR.337), 사람이 주님께 나아가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갈 때 신앙이 형성된다고 가르칩니다(TCR.343–348). 여기에는 중요한 순서가 있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은 시작이며,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는 것은 그 시작을 밝히는 과정이고,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것은 배운 진리가 인간의 생명과 결합되는 과정입니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를 나머지와 완전히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영접기도는 주님께 나아가는 마음을 표현하는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문을 따라 말한 사실 자체가 참된 믿음을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입술로 주님을 부르면서도 실제 의지로는 여전히 악을 사랑할 수 있으며, 반대로 아직 기독교 언어와 기도 형식을 배우지 못했더라도 자신이 아는 진리에 충실하고 악을 죄로 여기며 선을 행하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외적 신앙 형식 자체보다 그 형식을 통해 실제로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스베덴보리의 회개론에서 더욱 뚜렷해집니다. 그는 TCR.510–511에서 회개를 인간 안에 교회가 성립하는 첫 번째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TCR.516–519에서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참된 회개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TCR.528–531에서는 실제적인 회개란 자신을 살피고,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인정하며, 주님께 기도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단순한 죄책감이나 종교적 감정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며,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그 악으로부터 돌아서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기도는 결코 불필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일은 회개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참된 의미는 정해진 문장을 정확히 말하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의 의지와 삶을 실제로 주님께 돌이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입술의 고백과 생명의 회개를 구별하는 기준입니다.
그렇다면 영접기도를 한 번도 드리지 않은 사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조차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의 구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의 구원론이 전통적인 배타적 구원 이해와 구별되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지옥’(HeavenandHell, HH, 1758) HH.318–328에서 교회 밖에서 태어난 사람도 자신의 종교에 따라 선하게 살고, 자신이 아는 범위 안에서 신성, 그러니까 신적인 것을 인정하며, 양심에 따라 살아간다면 천국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가 동일한 진리를 가르친다거나, 주님을 믿는 신앙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모든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며, 주님을 명시적으로 알지 못한 사람도 구원받는다면 그 역시 주님에 의해 구원받습니다. 다만 지상에서 특정 종교에 속했는지, 특정 기도문을 사용했는지가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자동으로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신성한 사랑과 섭리는 인간이 태어난 시대와 지역, 종교적 환경이라는 외적 조건보다 훨씬 깊은 차원에서 역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접기도가 무의식 속에서 교리화될 때 발생하는 또 하나의 문제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교회가 정해 놓은 절차를 통과해야만 작동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아직영접기도를하지않았으니하나님과아무관계가없다’고 믿거나, 다른 사람이 ‘저사람은영접기도를하지않았으니구원받지못했다’고 단정한다면, 이미 구원을 주님의 신성한 사랑과 지혜보다 인간의 종교적 형식에 더 강하게 연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이 마련한 형식에 의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선과 진리의 생명을 끊임없이 공급하시며, 각 사람이 자신의 자유 안에서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인도하십니다. 사람이 진리를 모르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와, 진리를 알고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이유는 서로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차이를 모두 아십니다. 따라서 누군가의 구원을 판단할 때 단지 영접기도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보시는 인간 내면의 깊이를 외적인 한 가지 사실로 축소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영접기도를 없애야 한다거나 전도 현장에서 더 이상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진지하게 주님께 나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의 용서와 인도를 구하도록 돕는 것은 얼마든지 유익합니다. 처음 신앙을 시작하는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라 도움을 요청한다면, 목회자가 함께 기도문을 만들어 주거나 한 문장씩 인도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기도 자체가 아니라 기도에 부여하는 의미입니다. 기도가 끝난 뒤 ‘이제영접기도를했으니모든것이끝났다’고 말하는 것과, ‘이제주님께마음을열었으니말씀을배우고그말씀대로살아가면서주님과더욱깊이결합해갑시다’라고 권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전자는 기도라는 사건을 구원의 완성처럼 받아들이게 만들 위험이 있지만, 후자는 기도를 거듭남의 출발점으로 이해하게 합니다. 전도와 목회의 목적은 사람에게 어떤 종교적 절차를 완료했다는 안도감을 주는 데 있지 않고,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결국 ‘영접기도를하지않으면구원받을수없다’는 생각에서 우리가 바로잡아야 할 것은 기도의 중요성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이해입니다. 주님께 나아가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구원을 간구하는 일은 분명히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 소중한 행위가 하나의 필수적인 종교 형식으로 절대화될 때, 우리는 그 형식이 본래 가리키던 실체를 놓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의 입술에서 특정한 기도문이 한 번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과 삶이 실제로 그분을 향해 열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모든 사람을 당신께로 부르시며, 각 사람이 자신의 형편과 이해의 수준 안에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거듭남의 길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나는영접기도를했는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나는지금도주님께나아가고있는가?내입술의기도가내의지의변화로이어지고있는가?내가고백한주님께서실제로내삶의주님이되어가고계시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구원의 본질은 인간이 어떤 기도문을 완성했다는 사실에 있지 않고, 오직 주님께서 인간 안에 새로운 생명을 이루어 가시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영접기도는 주님께 나아가고 믿음을 고백하는 유익한 수단이 될 수 있지만,구원에 반드시 필요한 성경적 절차는 아닙니다.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며,그 구원은 믿음과 회개,체어리티와 거듭남을 통해 인간의 실제 생명 안에서 이루어집니다.기도문을 사용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