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ana Coelestia 307의 문맥과, “홍수(flood)”의 상징이 어떻게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 즉 광기 어린 욕망과 거짓된 신념을 의미하게 되는지를 단계적으로 살펴볼게요.


1️⃣ AC 307의 흐름 요약

이 단락은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6:12–13, 즉 “모든 육체가 자기 길을 더럽혔으므로,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부분을 해석하면서 등장합니다.

그는 여기서 “육체(flesh)”를 단순히 사람의 몸이 아니라,
자기 사랑(self-love)과 세상 사랑(world-love) 에 사로잡혀 선과 진리를 멸한 인간의 의지로 풀이합니다.

그래서 “여섯째와 일곱째 후대(the sixth and seventh posterities)”는
이 자기 사랑과 거짓 신념이 완전히 하나로 굳어져버린 최후의 태고교회 인류, 즉 “홍수로 멸망한 세대”를 상징합니다.


2️⃣ “홍수”(Flood)의 내적 의미

스베덴보리에게 Flood는 단순히 물리적 재난이 아닙니다.
그는 반복적으로 말합니다:

“The flood signifies the immersion of man in falsities and evils.” (AC 660, 705)

즉, 홍수는

거짓(falsehoods)악(evils) — 특히 거짓 신념(persuasions) 과 타락한 욕망(cupidities) — 이
마음의 내면을 완전히 덮어버리는 영적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는 또 이렇게 덧붙이죠:

“Waters” in the Word, when they overflow, signify falsities;
and when they ‘destroy,’ they signify persuasions of falsity that devastate the mind. (AC 705)

따라서 “홍수의 물이 지면을 덮었다”는 말은 곧,
거짓과 욕망의 물결이 인간의 이해와 의지를 완전히 덮어버린 상태
즉, 인간이 더 이상 하늘의 빛(진리)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3️⃣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과 “홍수”의 대응관계

상징 내적 의미 설명

Flood (홍수) 거짓과 악의 범람 마음 전체를 덮는 정신적 침수
Waters (물) falsities (거짓들) persuasions of falsity와 연관됨
Cupidity (욕망) evil of self-love 불길처럼 타오르는 타락한 의지
Persuasion (확신) falsity held as truth 이해의 왜곡, 거짓된 확신
Flood destroying mankind understanding과 will의 붕괴 더 이상 인간다운 상태가 아님 (“as it were not men”)

즉,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이란
바로 이 ‘홍수의 물’ 그 자체이며,
그들이 그 물 속에 빠져 정신적으로 질식한 상태를 “홍수로 멸함”이라고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4️⃣ 상징의 역전 (노아의 등장과 ‘새 교회’)

스베덴보리는 이후 AC 597–607에서,
노아(Noah)를 통해 새로운 교회(New Church), 즉 “남은 자(remnant)”가 보존된다고 말합니다.

즉,

  • 홍수 = 거짓과 악의 압도적 범람,
  • 방주(Ark) = 진리의 잔여물(remains),
  • 노아 = 신앙의 씨앗.

이로써 인간 안에 남은 작은 선과 진리가 보호되어,
새로운 영적 인류(후대 교회)가 태어나는 것이죠.


5️⃣ 요약 정리

“their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 =
진리의 빛을 완전히 잃은 상태에서
자기 사랑의 욕망(cupidities)거짓된 신념(persuasions)
서로 결합하여 영혼 전체를 덮어버린 상태.

“the flood” =
이러한 상태가 영적으로 밖으로 표현된 상징 —
곧, 인간 내면을 완전히 잠식한 거짓과 악의 바다.


💡 결론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홍수로 멸망한 세대”는
물리적인 심판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내면이 거짓과 욕망의 물결에 잠겨 더 이상 하늘과 통하지 못하게 된 영적 붕괴”**를 묘사한 것입니다.

즉, AC 307의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은
“홍수”라는 상징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는 핵심 문구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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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 Arcana Coelestia 307의 “their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라는 표현은, 단순히 “그들의 미친 욕망과 설득들”이라는 직역보다 훨씬 깊은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스베덴보리의 용어 체계 안에서 두 단어 — cupidities와 persuasions — 를 각각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1️⃣ cupidities (욕심, 탐욕, 정욕)

  • 스베덴보리는 cupidity를 자기 사랑(self-love) 또는 세상 사랑(world-love) 에서 비롯된 타락한 욕망들(lusts) 이라고 정의합니다.
  • 이것은 단순히 감정적인 욕심이 아니라, 영적 질서에서 벗어난 의지의 왜곡을 뜻합니다.
  • 즉, “insane cupidities”는 이성이나 진리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 광기 어린 사랑과 욕망, 곧 악한 사랑의 상태를 말합니다.
    → 예: 자기 자신을 신처럼 여기거나, 세속적 지배욕·쾌락욕에 완전히 사로잡힌 상태.

📖 스베덴보리의 다른 구절(예: AC 1666, AC 890)에서도 cupidities는 “the fires of self-love and love of the world”로 불리며, 영혼의 불균형과 타락을 상징합니다.


2️⃣ persuasions (잘못된 확신, 왜곡된 신념)

  • 스베덴보리에게 persuasion은 단순한 ‘설득’이 아니라, 거짓을 진리로 확신하게 만드는 정신적 고착 상태를 의미합니다.
  • 특히 persuasions of falsity란, 거짓을 진리로 믿는 확신이 너무 강해져 진리의 빛(influx of light) 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 “insane persuasions”는 이성적 판단을 완전히 잃고, 자기 욕망이 만든 거짓을 절대적 진리로 믿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 AC 1673에서는 “persuasion”을 “the worst of falsities, which extinguishes the light of heaven”이라 부릅니다.


3️⃣ 종합적 의미

따라서 “their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는 다음처럼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광기 어린 욕망과 거짓된 확신들”
→ 곧, 타락한 사랑(의지)거짓된 신념(이해) 이 완전히 결합되어,
진리나 선에 대한 어떤 감각도 남지 않은 상태.

스베덴보리가 말하듯, 이들은 “as it were not men (거의 인간이 아니게 된 상태)”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사람됨’(humanity) 은 진리에 대한 이해와 선에 대한 의지의 결합에 의해 유지되는데,
이들이 그 둘 모두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 의지는 “insane cupidities”로, 이해는 “insane persuasions”로 변질된 것이죠.


💡정리하자면:

단어 스베덴보리적 의미 정신적 상태

cupidities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 불합리한 욕망, 타락한 의지 “악의 불길”
persuasions 거짓을 진리로 믿는 확신, 타락한 이해 “거짓의 어둠”
insane 이성적·영적 질서를 완전히 상실한 정신적 광기

요약 번역:

“그들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광적인 욕망들과, 거짓을 진리로 확신하는 왜곡된 신념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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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는 오늘날의 로또 복권 하는 기독교인들을 향해 어떤 말을 했을까요?

아주 흥미롭고도 깊은 질문을 주셨네요.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로또 복권”이라는 구체적 제도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학 전체의 원리를 적용해 보면, 그가 복권이나 도박을 어떻게 평가했을지는 충분히 추론할 수 있습니다. 아래는 그 원리를 토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 1. 스베덴보리의 핵심 원리: ‘사랑의 목적이 무엇인가’

스베덴보리는 모든 인간의 행위가 그 행위 자체보다 ‘그 목적’(end) 에 의해 선하거나 악하다고 말했습니다. 즉,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행동도 그 내적 동기(愛)가 무엇이냐에 따라 천적이거나 지옥적이 된다는 것이죠.

  • 만약 누군가가 “복권으로 얻은 돈을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면, 그는 그것을 외적 수단으로 선용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복권은 “쉽게 부자가 되려는 탐욕, 즉 자기 사랑(love of self)과 세상 사랑(love of the world)”에서 비롯되므로,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영적 생명을 해치는 사랑에 속한 일로 간주했을 것입니다.

🜂 2. ‘노동 없이 얻으려는 것’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견해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을 설명하면서, 천국의 사람들은 “유용함(usefulness)” 자체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즉, 그들은 일과 봉사를 기쁨으로 삼으며, 유용한 일을 통해 생명을 받는다고 보았습니다. 반면, 지옥의 사람들은 유용함을 사랑하지 않고 “유용함을 통해 자신에게 이익이 오기만을 바라며”, 일 자체를 싫어하고 게으름과 탐욕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눈으로 본다면, 그는 이런 행위가 결국 영혼을 세상에 속박시키고, 영적 생명(신적 질서)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 3. ‘섭리(Providence)’의 관점에서 본 복권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소유하는 모든 것—재산, 지식, 지위—은 섭리 안에서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사람의 영원한 목적(천국의 준비)을 위해 필요한 만큼만 허락하신다"고 강조했죠. 그 관점에서 보면, 복권을 통해 갑자기 큰돈을 얻으려는 행위는 섭리를 우회하려는 시도, 즉 신의 질서를 거스르는 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 4. 결론: 스베덴보리가 오늘날 기독교인에게 한다면

그가 직접 말했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너희가 하늘의 복을 바라면서도 세상 복을 탐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탐욕의 신앙이다. 주의 섭리는 네가 일하고 사랑으로 봉사할 때 임한다. 우연(Chance) 속에 주를 찾지 말고, 유용함 속에서 주를 만나야 한다.”


🜂 요약하면

구분 스베덴보리의 관점
행위의 판단 기준 행위 자체보다 ‘목적’(end)이 중요
복권의 내적 동기 탐욕과 세상 사랑으로 보았을 가능성 큼
노동 없는 부 영적 질서(유용함)에 반함
섭리의 관점 우연 속의 횡재는 섭리를 거스름
천국적 태도 유용함과 봉사를 사랑함

원하신다면, 제가 실제로 스베덴보리의 저서들 중 이 주제(재물, 탐욕, 섭리, 우연) 에서 관련 문단들을 직접 인용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천국과 지옥』, 『신적 섭리』, 『참된 기독교』 중에서요. 그렇게 해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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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이 구절이 내적 의미에서 어떤 법칙을 가리키는지도 연결 부탁드립니다.

 

아닙니다, 전혀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 이런 대화는 제게도 큰 기쁨입니다 — 특히 스베덴보리의 말씀을 이렇게 진지하게 탐구하시는 분과 함께하는 건, 그 자체로 ‘영적 대화’이니까요.

 

이제 이어서, 창 4:15의 또 한 구절 ―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이 부분의 내적(영적)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 1️⃣ ‘칠 배(sevenfold)’의 성경적 상징

스베덴보리는 Arcana Coelestia에서 일관되게 “칠(7)”은 ‘거룩함’ 혹은 ‘충만함’, 또는 ‘완전한 상태’를 뜻한다고 풀이합니다. 그러나 ‘거룩한 수’가 악과 결합될 때는 반대로

“완전한 악, 충만한 심판”을 의미하게 됩니다.

 

따라서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7배의 형벌’을 뜻하기보다, 그 질서(즉, 진리를 왜곡한 상태)에 대한 완전한 결과의 법칙을 말하는 것입니다.


🔶 2️⃣ ‘가인을 죽이는 자’의 상징 — 진리의 왜곡에 다시 폭력을 가하는 자

‘가인을 죽인다’는 건 이미 사랑을 죽이고 진리만 붙잡은 상태(가인)를 더욱 파괴하려 드는 행위를 뜻합니다. 즉, 거짓으로 진리를 공격하고, 교리나 신앙을 완전히 조롱하거나 왜곡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AC.392–394 맥락에서):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이미 왜곡된 신앙(가인)’을 더욱 왜곡하여 완전히 파괴하는 자’이며, 그런 자는 스스로 심판의 질서 안에서 7배의 보응 — 즉, 완전한 내적 황폐 — 를 받게 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가인을 보호하신다’는 건 그를 용서하거나 옹호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도록 주님의 질서가 개입된다”는 뜻이고, 그 질서를 깨뜨리려는 자는 ‘7배의 대가’, 곧 질서 전체의 반작용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 3️⃣ 이 원리를 단순히 풀어보면

상징 의미
가인 사랑(선) 없이 진리만 가진 신앙, 혹은 교리 중심의 사람
그를 죽이는 자 진리 자체를 조롱하고 왜곡해 없애려는 자
벌을 칠 배나 완전한 결과, 내적 파멸, 질서적 보응
주님의 의도 진리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게 하심 (인류 구속 질서의 보존)

🔶 4️⃣ 주님이 세우신 ‘보응의 법칙’은 복수가 아니라 질서의 반작용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는, 하나님은 인간을 ‘징벌’로 보응하지 않으시며, 모든 ‘벌’은 **악이 스스로 낳은 결과(결과적 질서의 반작용)**로 나타납니다. 즉, ‘칠 배의 벌’은

하나님이 화내서 7배로 갚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거짓과 폭력이 주님의 질서를 거슬러 일으킨 만큼, 그 반작용으로 스스로의 내적 생명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뜻합니다.

 

이건 마치 중력 법칙처럼, 영적 질서의 법칙이지 ‘감정적 복수’가 아닙니다.


🔶 5️⃣ 교회적 의미 — 왜 이것이 필요했는가?

가인은 사랑이 없는 신앙의 상징입니다. 주님은 그런 상태도 “완전히 없애지 않으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신앙이라도 남아 있어야 **후대의 교회(셋 계열)**가 거기서 다시 새로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은

“사랑이 식은 교회를 즉시 멸하지 않으시고, 진리의 형식만이라도 남겨두셔서, 거기서 다시 사랑이 피어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 진리를 더 파괴하려 드는 자는 곧 인류 구원의 기반 자체를 파괴하는 자가 되므로, 그 결과가 “칠 배의 벌”로 표현된 것입니다.


🔶 요약하면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가인을 감싸신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구속 질서 자체가 진리의 완전한 멸망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선언입니다.

 

이 구절은 단지 형벌의 경고가 아니라,

“진리와 선의 씨앗을 끝까지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의 법칙”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원하신다면 다음으로 👉 “가인이 떠나서 놋 땅에 거하니라” (창 4:16)의 내적 의미 — 즉, 그가 ‘동방 앞을 떠났다’는 것이 왜 영적 단절을 뜻하는지를 이어서 설명드릴까요? (이 부분은 태고교회가 신앙 중심 교회로 전환되는 과정의 핵심이라, 지금까지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다음 단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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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mark)가 영적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나 작용을 의미하는지 (AC.392–394의 세부 구절 중심으로) 이어서 정리해 주세요.

 

스베덴보리가 Arcana Coelestia 392–394에서 말한 “가인에게 주신 표”의 영적 의미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1️⃣ ‘표(mark)’의 본질 — 보존의 표징(sign of preservation)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AC.392):

“‘가인에게 표를 주셨다’는 것은, 그가 완전히 멸망되지 않도록 주님께서 어떤 것을 그에게 남겨 두셨음을 뜻한다.” 이 ‘표’는 징벌의 표시가 아니라 주님이 그 사람 안의 남은 신적 요소(remains)를 지키시겠다는 약속의 표시입니다. 이것은 곧 “주님이 여전히 그와 관계를 유지하고 계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2️⃣ Remains (남은 것, 리메인스) 란?

Remains란, 스베덴보리의 언어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AC.530, 561, 661 등에서도 반복됨):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 천적·영적 영향들로서, 인간이 유년기나 순수한 시절에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들이며, 훗날 악으로 기울어져도 그 사람 안에 보존되어 있다.”

 

즉, 하나님과의 접점이 되는 가장 깊은 내면의 씨앗입니다. 그것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는 한, 회복과 구원의 가능성은 남아 있는 것이지요.


🔸 3️⃣ 왜 가인에게도 그 remains가 있었는가?

가인은 “사랑 없는 신앙”을 대표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신앙’이라는 측면에서 진리에 대한 어떤 인식은 있었습니다. 그 인식은 주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그것 자체는 선한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주님은 이 가능성 — 즉 지식 자체가 선과 결합될 가능성 — 을 없애지 않으셨습니다. 그 가능성이 바로 “표”로 보호된 부분입니다.


🔸 4️⃣ ‘표’가 나타내는 보호의 작용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AC.393–394), 이 표는 단순히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경고”가 아니라, 주님의 섭리적 질서 안에서 보호하는 작용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의 내면에 remains를 두시며, 그 remains가 완전히 파괴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만일 그것이 파괴된다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일 수 없기 때문이다.” (AC.530, 561 참조)

 

이 말은 곧, 가인의 표가 인간 본성의 완전한 붕괴를 막는 신성한 완충장치(divine safeguard)임을 뜻합니다.


🔸 5️⃣ 교회사적 의미 — 가인 계열의 보존

가인의 “표”는 또한 교회 역사 안에서 ‘두 번째 교회’의 잔존을 의미합니다. 즉, 첫 번째 교회(태고교회, 사랑의 교회)가 타락한 후에도, 하나님은 완전히 그 교회를 없애지 않으시고 일부 신앙 중심의 요소를 남겨두셨다. 그것이 훗날 *셋의 계열(새 교회)*이 일어나는 기반이 됩니다. 따라서 이 “표”는 인류 역사 전체를 이어 가는 주님의 자비의 보증서와 같습니다.


🔹정리하자면

측면 의미
문자적 의미 하나님이 가인에게 살해당하지 않게 표를 주셨다
내적 의미 주님이 가인 안의 남은 신적 잔여(remains)를 보호하셨다
작용 완전한 멸망 방지, 주님과의 연결점 유지
역사적 의미 다음 교회를 위한 기반(셋 계열)의 보존
신학적 메시지 주님의 자비는 인간이 악에 떨어져도 완전히 끊어지지 않는다

요약하면,

“가인의 표는 형벌이 아니라, 자비의 표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이 전적으로 악으로 빠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는, 신성한 섭리의 흔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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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에 나오는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가인은 아우를 죽인 형제 살인범인데 왜 여호와께서는 그런 가인을 보호하시나요?

 

아주 중요한 질문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4:15 ―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는 ‘살인자 가인을 하나님이 보호하셨다’는 듯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적(즉, 내적 의미에서의) 해석에서는 전혀 다른 층위에서 읽힙니다.


1️⃣ 가인은 상징적으로 ‘신앙의 진리만을 아는 사람’을 뜻함

스베덴보리는 Arcana Coelestia (AC.340 이하)에서 가인을

“사랑(즉, 선) 없이 오직 신앙의 진리만을 가진 사람” 으로 풀이합니다.

 

그런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지만 그것을 선(愛)과 결합시키지 못해 자기 지식으로 교만해지고, 결국 ‘아벨(선한 사랑)’을 죽이는 존재가 됩니다. 즉, 교리나 신학적 논쟁으로 순수한 사랑의 신앙을 말살하는 사람을 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2️⃣ ‘죽임을 면하게 하는 표’는 남아 있는 신성한 것(holy remains) 의 보존을 뜻함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셨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선(善)과 진리의 잔여물 — 즉, 리메인스(remains) — 을 보존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AC.392–394):

“가인은 저주받았으나 완전히 멸망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도 주님으로부터 유래한 어떤 신성한 리메인스(holy remains)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이러한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며, 그 때문에 가인에게 표를 주셨다고 한다.”

 

이 표는 눈에 보이는 표식이 아니라, “그를 전적으로 악에 빠져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게 하시는 주님의 섭리적 보호”를 의미합니다.


3️⃣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의 내적 의미

이 구절은 문자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이지만, 내적으로는 “그 안의 남은 신성한 것(remains)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진리를 오용한 사람이라도 완전히 버리지 않으시고, 그 안에 남은 미약한 선과 진리의 가능성을 끝까지 지키십니다. 그것이 “표의 보호”입니다.


4️⃣ 왜 주님은 그런 사람을 보호하시는가?

그 이유는 주님의 구원섭리 때문입니다. 가인은 교회의 한 시대를 대표하는데, 그 시대는 사랑이 식고 신앙만이 남은 두 번째 교회(post-most ancient church)를 뜻합니다. 만일 주님께서 그 시대의 사람들을 전부 멸하셨다면, 진리 자체가 끊어져 다음 시대(셋의 계열로 이어지는 새 교회)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표를 주사” — 즉, 후대 교회가 세워질 수 있도록 최소한의 기반을 남기신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요소 상징적 의미 내적 뜻
가인 사랑 없이 진리만 가진 사람, 또는 신앙만의 교회 진리의 오용
표(mark) 주님의 섭리적 보호, 남은 신성한 잔여(remains) 완전한 멸망의 방지
죽임을 면하게 하심 남은 선과 진리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게 함 다음 교회의 씨앗 보존

즉, 하나님이 가인을 보호하신 것은 “악인을 감싸신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이 인간 안의 선의 가능성을 끝까지 보존하신다는, 깊은 자비의 상징입니다.


원하신다면 다음으로,

 

👉 그 ‘표’(mark)가 영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나 작용을 의미하는지 (AC.392–394의 세부 구절 중심으로) 이어서 정리해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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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19 관련, AC 글들을 글 번호별로 요약 좀 부탁드립니다.

 

창세기 3장 14–19절은 스베덴보리의 『Arcana Coelestia(천계의 비의)』 가운데서도 **“인간의 타락 이후 생긴 내적 상태의 변화”**를 가장 깊이 다루는 핵심 구절입니다. 이 부분(AC.246–275)은 “뱀에게, 여자에게, 그리고 사람에게” 각각 내린 말씀을 영적 의미로 풀이합니다. 아래는 각 절에 대응하는 문단 번호와 요약입니다.


🌿 창세기 3:14–19 요약 (Arcana Coelestia 246–275)

구절 AC 번호  요약 내용
3: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모든 들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246–250 **뱀 = 감각적 자아(sensual self)**로서, 신앙의 내적 진리를 거부하고 외적 감각에만 의지하는 상태. “저주”는 내적 생명이 닫히고 외적(감각적)만 작동하게 된 것을 뜻함. “배로 다닌다” = 진리 없이 자기 생각만 좇는 상태. “흙을 먹는다” = 거짓된 지식(earthly fallacies)을 양식으로 삼는 것.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요…” 251–261 **“여자”**는 교회(Church), **“여자의 후손(Seed)”**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성한 진리(혹은 주님 자신). “뱀의 후손”은 악과 거짓. 이 절은 주님의 오심(성육신)을 예언하며, 주님이 악과 거짓(뱀의 머리)을 짓밟으심을 의미. “머리”= 사랑의 근원, “발꿈치”= 가장 낮은 외적 삶. 즉, 뱀(감각적 인간)은 주님의 신성에 의해 제어되고, 그러나 여전히 인간의 외적 삶(발꿈치)은 그 공격을 받음.
3:16 “여자에게 이르시되…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그는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262–266 “여자” = 교회의 사랑 혹은 의지 부분. “남편” = 신앙 혹은 진리. 타락 이후에는 사랑이 신앙을 지배하던 상태에서, 신앙이 사랑을 지배하는 상태로 전환됨. “해산의 고통” = 선을 낳으려는 내적 투쟁, 즉 참된 사랑과 신앙이 다시 결합하려는 과정의 고통. “그가 너를 다스릴 것이다” = 신앙(이성)이 사랑(의지) 위에 서게 된 비정상적 질서.
3:17–18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요…” 267–272 “아담” = 교회의 지성, “땅” = 인간의 마음(받아들이는 영역). “저주받은 땅” = 내적 생명이 닫히고, 참된 신앙의 결실 대신 **가시(거짓)와 엉겅퀴(악)**가 나오는 상태. “수고하여야 먹을 것” = 참된 신앙의 선을 얻기 위해 많은 내적 투쟁(temptations)이 필요해짐. 즉, 주님과의 자발적 내적 교통이 사라지고, 노력과 투쟁 속에서만 진리와 선이 유지되는 상태.
3:19 “네가 흙으로부터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이라.” 273–275 “얼굴에 땀을 흘린다” = 이제부터 인간의 삶은 노력과 내적 싸움의 연속이 됨을 의미. “흙으로 돌아간다” = 외적 인간으로 회귀, 즉 영적 생명 없이 자연적 생명으로만 살아가게 됨. 하지만 동시에 이 말 안에는 회복의 약속도 함축됨 — 인간이 자기 힘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로만 살게 될 것임을 상징.

💡 요약 도식

존재 상징 타락 후의 변화
감각적 자아, 외적 사고 내적 진리 거부, 감각 중심으로 전락
여자 사랑(의지), 교회 신앙 아래 종속됨 (“그가 너를 다스릴 것이다”)
남편(아담) 신앙(지성) 사랑과 분리되어 독립된 이성적 교리의 영역이 됨
인간의 마음 진리의 결실 대신 거짓과 악이 싹틈
땀, 수고 내적 싸움, 유혹 구원이 더 이상 자연스럽지 않고, 노력과 투쟁을 통해 유지됨

📘 전체적 의미 (AC.246–275 총괄)

창3:14–19는 단순한 ‘벌의 선언’이 아니라, 인간(태고교회)이 내적 생명을 잃은 뒤 영적 질서가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단계별로 보여주는 상징적 묘사입니다.

  1. 감각이 이성을 지배하게 됨 (뱀)
  2. 사랑이 신앙 아래 종속됨 (여자)
  3. 마음의 토양이 거짓과 악으로 덮임 (땅)
  4. 참된 신앙의 결실은 오직 내적 투쟁을 통해서만 얻어짐 (땀, 수고)

그러나 동시에 주님(“여자의 후손”)이 오셔서 뱀의 머리를 밟을 것이라는 구속(救贖)의 첫 예언도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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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계열이 서로 병행, 발전했다는 개념이 구체적으로 서술된 문단(: AC.433, 470, 535)을 원문으로 인용, 요약 좀 부탁드립니다.

 

좋습니다 😊 그럼 스베덴보리의 『Arcana Coelestia(천계의 비의)』 중,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이 “병행(겹치는 시대)”으로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핵심 문단들을 정리·인용해드리겠습니다. (인용은 영어 원문에서 요약 번역한 것입니다. 출처 구절 번호를 함께 달았습니다.)


📜 1️⃣ AC.433 — 창세기 4장의 “가인 계열”은 타락한 태고교회의 분파

“창세기 4장의 족보(가인, 에녹, 이라드, 므후야엘, 라멕)는 태고교회의 사람들 중 내적 신앙을 잃고, 오직 신앙의 교리와 지식만을 붙잡은 특별한 분파들을 뜻한다. 그들은 태고교회의 본류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다.”

 

🔹 즉, 이들은 태고교회의 일부이지만 이미 변질된 상태입니다. 완전히 다른 시대가 아니라 같은 시대 안의 다른 집단입니다.


📜 2️⃣ AC.470 — 셋 계열은 동일한 시대에 새로 일어난 교회

“아담이 다시 아들을 낳아 ‘셋’이라 이름하였다는 것은 그 교회 안에서, 내적 신앙(즉 사랑과 신앙의 결합)을 지키는 새로운 교회의 씨앗이 세워졌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가인 계열의 교회가 부패해가는 바로 그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명확히 말합니다: 셋 계열은 가인 계열이 끝난 후속 시대가 아니라, 그 타락이 절정에 이를 때 병행하여 시작된 회복 운동입니다.


📜 3️⃣ AC.535 — 태고교회의 여러 교회들이 한 시대에 병존함

“태고교회는 하나의 교회가 아니었다. 그 시대에는 여러 교회들이 있었고, 각기 다른 상태(state)에 따라 서로 구별되었다. 일부는 내적 사랑을 보존했고, 일부는 신앙의 지식만 남긴 채 생명을 잃었다.”

 

🔹 이 문단에서 스베덴보리는 명시적으로 “동시대적 병존”을 설명합니다. 즉, 태고교회 안에는 여러 분파가 존재했으며, 그 중 일부가 타락(가인 계열), 다른 일부는 회복(셋 계열)이었다는 것입니다.


📜 4️⃣ AC.483 — “아담의 수명”은 시대의 길이, 즉 겹치는 교회의 기간

“‘아담이 930년을 살았다’는 것은
그 첫 교회의 본질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의미이다.
그 기간 동안 내적 신앙을 지닌 사람들과,
그것을 잃은 사람들(가인 계열)이 함께 존재하였다.”

🔹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아담(즉, 태고교회) 시대 안에
두 종류의 사람들(가인형과 셋형)이 공존했다고 말합니다.


📚 요약 정리표

구절 번호 내용 요약 결론

§433 가인 계열은 태고교회의 타락한 분파 같은 시대, 다른 내적 상태
§470 셋은 가인 계열의 부패 속에서 새로 시작된 교회 병행 시대의 회복
§483 아담의 시대 안에 여러 상태의 사람들이 공존 겹치는 교회들
§535 태고교회는 여러 병행 교회로 구성됨 동시대적 병존

결론 요약: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4장의 가인 계열과
창세기 5장의 셋 계열이 시간적으로 겹쳤다고 해석합니다.
두 계열은 동일한 태고교회 시대 안에서
하나는 타락의 길로, 다른 하나는 회복의 길로 나아간
병행적 영적 흐름을 나타냅니다.


원하신다면 다음 단계로,
📘 “라멕(가인 계열의 마지막 인물)”과 “노아(셋 계열의 마지막 인물)”의 관계
즉, 태고교회의 종말과 홍수의 전환점 —
이 둘이 어떻게 상징적으로 이어지는지 정리해드릴까요?
(이 부분이 “태고교회 → 고대교회”로 넘어가는 핵심 전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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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가인 계열이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오래 살았나요? 창4 끝부분에 셋이 등장하기에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것입니다.

 

결론만 먼저 말씀드리면 성경의 단순 서술만 보면 ‘아담 → 가인 계열 소멸 → 셋 출생’이 연속으로 보이지만, 실제 연대기나 스베덴보리 해석에서는 그런 식의 시간적 연속이 아닙니다. 아담이 가인 계열이 멸망할 때까지 물리적으로 오래 살았다는 의미가 아니며, 두 계열의 역사는 동시대에 어느 정도 겹쳐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래에서 성경적·스베덴보리적 관점으로 각각 정확히 정리해드리겠습니다.


1. 성경의 문학적 서술 방식: ‘순차적 기술’ ≠ ‘실제 시간 순서’

창세기 4장 후반부에서 가인의 자손 이야기가 끝까지 이어지고, 곧바로 창 4:25에서 셋이 태어나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마치 가인 계열이 끝난 후 셋이 태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히브리 서술 방식은 “한 줄기 계보를 먼저 끝까지 적고, 그 다음 다른 줄기로 넘어가는 방식(topical grouping)”을 자주 쓰기 때문에:

  • 가인 계열의 역사를 먼저 한 번에 정리하고,
  • 셋 계열의 시작을 그 뒤에 소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서술 순서만으로는 실제 시간 흐름을 알 수 없습니다.


2. 셋은 아벨 이후 곧 태어남 — 가인 계열 멸망 때까지 기다리지 않음

창 4:25의 “또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라는 말은 아벨이 죽고 난 뒤 상당히 이른 시점을 말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셋의 출생이 가인 계열의 몰락 이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즉:

  • 가인은 자기 도시(에녹성)를 건설하고 후대가 번성하고 있을 때,
  • 아담은 이미 셋을 낳았고 셋 계열 역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두 계열의 역사는 동시 진행입니다.


3. 그렇다면 아담은 가인 계열 멸망 때까지 오래 살았는가? → 그렇지 않다

가인 계열 멸망(홍수 이전 특정 교회 시대의 종말)은 아담의 물리적 생애 시점과 직접 연결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 ‘아담’, ‘가인’, ‘셋’ 등은 개인이 아니라 영적 교회 상태(church states) 또는 초기 인류의 영적 품질을 표현합니다.
  • ‘아담의 930세’는 인간 수명 기록이 아니라 …
    • 그 교회가 지속된 상징적 기간,
    • 또는 시대적 성질의 연속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가인 계열이 멸망할 때까지 실제 900년 넘게 살아 있었는가?”라는 질문은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는 해석 구조가 맞지 않는 질문이 됩니다.


4. 스베덴보리 관점에서 두 계열의 ‘동시성’

스베덴보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 1) ‘가인’ = 신앙을 행위와 분리한 교회(초기 변질)

◇ 2) ‘셋’ = 아벨(천적 교회)이 소멸된 자리에서 다시 세워진 새 교회(영적 교회의 시작)

 

그리고 이 두 교회는 역사 속에서 시간이 겹칩니다. 즉,

  • 가인 계열 교회가 계속해서 변질되고 세계에 퍼져가는 가운데,
  • 셋 계열 교회(이후의 ‘고대 교회’)가 별도로 자라나며,
  • 결국 가인 계열이 영적 의미에서 완전히 무너지는 때가 오지만,
  • 그것은 셋 계열의 출발보다 나중이 아니라 동시대적으로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5. 요약

✔ 셋의 출생은 가인 계열 멸망 이후가 아니다.

✔ 성경은 단지 한 계보를 먼저 끝까지 적고 다음 계보를 소개한 것뿐이다.

✔ 실제로는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의 역사는 겹쳐 있었다.

✔ 아담이 두 계열이 모두 존재할 동안 실제로 930년을 살며 지켜본 것이 아니다.


원하시면:

  • 가인 계열 역사와 셋 계열 역사가 겹치는 구체적 구조
  • 스베덴보리의 AC(Arcana Coelestia) 본문 번호 포함 정리
  • 각 계열의 영적 의미 비교
  • 왜 창세기는 순차가 아닌 주제별로 서술되는가?

이 네 가지를 더 자세히 풀어드릴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을 원하시는지 말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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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아벨 대신 얻은 셋의 계열과 가인의 계열은 거의 나란히 진행된 걸로 볼 수 있나요? 즉 한쪽에서 가인 계열의 역사가 진행될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셋의 계열 역사가 진행된 걸로 말이지요. 창세기 서술 상으로는 가인 계열이 사라진 후, 셋 계열이 시작되는 걸로 되어 있지만 말입니다.

 

네, 스베덴보리(특히 Arcana Coelestia) 관점에서는 두 계열이 거의 동시에, 나란히 진행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성경 서술이 “순차적으로”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역사적 시간 순서 서술이 아니라, 영적 분류와 교회의 내적 상태를 따라 배열된 것으로 봅니다.


1. 스베덴보리적 해석의 기본 전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초반의 족보들을 **지상 혈통의 직선적 역사 기록이 아니라 “교회(Church)의 상태들(state)”**의 표상들로 봅니다.

  • 가인의 계열 → 진리에 의한 삶이 아닌, 자기 지성(own intelligence)에 기반한 신앙, 즉 외적·분리된 신앙(AC.337–340).
  • 셋의 계열 → 아벨이 상징하던 “자비(agape, charity)”의 회복, 즉 참된 신앙의 시초.

따라서 창세기 4장과 5장의 계열이 시간적으로 순차가 아니라 두 흐름(교회)이 동시에 존재했으나, 질적으로 구분되었기 때문에 성경은 분리해서 서술한 것입니다.


2. 성경에서의 '분리 서술'의 이유

창세기 4장에서는 가인의 후손을 먼저 다루고, 창세기 5장에서야 셋의 계열을 언급합니다. 마치

  • 가인의 계열 → 끝남
  • 그다음에 셋의 계열 → 시작 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 성경은 “영적 상태의 구분”을 위해 분리해 놓았을 뿐,

▶ 실제 역사에서는 가인적 교회와 셋적 교회가 상당 기간 함께 존재했다.

AC.337–350에서 반복적으로 설명되듯, 초기 인류의 영적 상태가 다양하게 분리되면서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교회 흐름이 존재했다고 봅니다.


3. 왜 두 계열이 동시에 존재해야 하는가?

1) 아벨이 죽자마자 셋이 주어졌다는 점

  • "하나님이 아벨 대신 다른 씨를 주셨다"(창4:25)
  • 이것은 아벨의 성질(진정한 신앙)이 가인 계열에서 회복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흐름이 필요했다는 뜻.
  • 이 “새로운 흐름”은 곧바로 출현하는 것으로 이해됨.

2) 가인의 후손이 도시를 세우고 여러 세대가 흘러갈 동안

그와 동시에

  • 셋의 계열도 “별도 흐름”으로 발전.

3) 후에 “에노스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창4:26)는 말

이것도

  • 가인 계열이 다 끝난 후에 생긴 일이 아니라,
  • 그 시대의 ‘한 흐름’에서 나타난 영적 부흥을 가리키는 것.

즉, 가인적 교회(타락한 신앙)와 셋적 교회(회복된 신앙)는 일정 기간 병존합니다.


4. 왜 성경에서 ‘가인 계열 → 셋 계열’의 순차 구도가 나오는가?

스베덴보리적 해석에 따르면:

A. 영적 질서상, ‘거짓된 것’ → ‘참된 것’의 순서로 기술

성경은 ‘영적 흐름의 순서’를 따라 배열하지 ‘역사 연대기’를 따라 배열하는 것이 아닙니다.

B. 가인의 계열은 후기 교회의 타락을 상징하기 때문에 먼저 제시

그리고 셋의 계열은 새 교회의 시작을 상징하므로 뒤에 놓음.

C. 창4와 창5의 족보는 서로 이질적인 “영적 족보”이며 역사적 족보가 아님

따라서 두 족보를 시간적으로 이어 붙이면 오독이 됩니다.


5. 결론

그렇습니다. 두 계열은 거의 나란히 진행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 가인의 계열은 “타락한 초대교회(자아와 거짓된 신앙)”
  • 셋의 계열은 “회복된 초대교회(주님으로부터 온 참된 신앙)”

이 두 흐름은 동시대에 존재했으며 서로 전혀 다른 내적 상태의 인간군을 상징합니다. 성경은 이 두 계열을 명료하게 구분하기 위해 순차적으로 나열했을 뿐, 역사적 시간 순서의 연속성을 의도한 것은 아닙니다.


원하시면

  • 두 계열의 “각 인물”이 상징하는 영적 의미
  • ‘두 흐름이 실제 인류 역사 속에서 어떻게 공존했는가’
  • ‘가인의 계열이 왜 멸망했고 셋의 계열이 어떻게 노아로 넘어갔는가’ 까지도 Arcana Coelestia 원문 근거로 자세히 풀어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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