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19, 퍼셉션(perception), 양심(conscience), 그리고 이성(reason, rational faculty, the rational)에 대하여

 

 

창세기 2장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구분 가운데 하나는 ‘퍼셉션’, ‘양심’, ‘이성’이 무엇이며, 어떻게 다른가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도 흐려지고, 창3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퍼셉션은 천적 인간의 고유한 상태입니다. 그것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즉시 지각하는 내적 감지입니다. 이것은 추론의 결과가 아니며, 외부 자료를 모아 판단하는 과정도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해 직접 흘러들어오는 빛 안에서 ‘, 이것이 선이구나’ 하고 아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퍼셉션은 ‘안다’기보다 ‘느낀다’에 가깝지만, 그 느낌은 감정처럼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자명한 인식이기 때문에 따로 설명하거나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빛 가운데 서 있을 때 굳이 빛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창2의 에덴 상태이며, 천적 인간의 평안한 지각입니다.

 

그러나 영적 인간의 상태는 다릅니다. 영적 인간에게는 퍼셉션 대신 ‘양심’이 주어집니다. 양심은 말씀을 통해 배운 진리를 기준으로 작동합니다. 그래서 양심은 항상 어떤 긴장과 싸움을 동반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내적 소리가 들리지만, 동시에 겉 사람의 욕망과 충돌합니다. 그래서 양심은 싸우는 빛입니다. 퍼셉션이 즉시, 즉각적이고, 평온한 지각이라면, 양심은 갈등 속에서 자신을 제어하게 하는 힘입니다. 영적 인간은 퍼셉션처럼 즉각적으로 선을 지각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말씀에서 배운 진리를 붙들고 자기 자신을 다스립니다. 이 상태는 창1의 여섯째 날과 연결되며,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성과 기억 지식은 또 다른 차원의 기능입니다. 이성은 비교, 분석, 논증하는 능력이며, 기억 지식은 감각과 경험을 통해 쌓인 자료들입니다. 이것들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상 질서 안에서는 매우 유익합니다. 정상 질서는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곧 주님으로부터 사랑이 흘러들어오고, 사랑 안에서 퍼셉션이라는 지각이 생기며, 그 지각을 따라 이해와 이성이 정렬되고, 마지막으로 기억 지식이 살아납니다. 이것이 창2의 네 강의 질서이며, 지혜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질서가 거꾸로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기억 지식에서 출발하여 이성으로 판단하고, 그다음에 믿음을 재단하려 할 때, 이성은 빛을 돕는 도구가 아니라 빛을 의심하는 도구가 됩니다. 이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구조이며, 창3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날 타락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퍼셉션은 싸움이 없는 빛, 양심은 싸우며 붙드는 빛, 이성은 방향에 따라 빛을 돕기도 하고 어둠을 강화하기도 하는 능력이라고 말입니다. 창2는 퍼셉션의 시대를 보여 주고, 창3은 이성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을 보여 줍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대개 퍼셉션의 상태는 아니며, 양심과 이성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목표는 이성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위에서 오는 빛에 복종하도록 질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먼저 자리를 잡고, 그 안에서 우리의 이해와 사고가 정렬될 때, 우리는 비록 천적 인간은 아닐지라도, 그 질서를 따라 걷는 영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SC.20, '지은 죄에 대해 스스로를 벌주기'에 대해

SC.20, 과거 수도원의 수도사들을 비롯, 사람이 무슨 죄를 지으면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벌을 주며 고행을 마다 않았던 여러 예를 들며, 우리도 그러고 살자는 어느 수도원장의 유튜브를 보았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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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18, ‘profanation’(신성모독)에 관하여

SC.18, Emanuel Swedenborg의 ‘Arcana Coelestia’에서 말하는 ‘profanation’에 대하여 Emanuel Swedenborg의 ‘Arcana Coelestia’에서 말하는 ‘profanation’(신성모독, 神性冒瀆)은 단순한 신성모독이라는 외적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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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9)

 

AC.104

 

오늘날에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퍼셉션이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어떤 내적 감각으로서, 어떤 것이 그 상황, 그 순간에서 참인지, 그리고 선인지를 분별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에는 매우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 퍼셉션은 천사들에게서는 매우 완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무엇이 참이고 선인지, 무엇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무엇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온 것인지를 알게 합니다. 또한 그들은 어떤 사람이 다가오기만 해도, 그리고 그의 생각 가운데 단 하나만으로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차립니다. 영적 인간에게는 퍼셉션이 없고, 대신 양심(conscience)이 있습니다. 죽어 있는 인간에게는 양심조차 없습니다. 그리고 매우 많은 사람들이 양심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며, 퍼셉션이 무엇인지는 더더욱 알지 못합니다. At this day it is unknown what perception is. It is a certain internal sensation, from the Lord alone, as to whether a thing is true and good; and it was very well known to the most ancient church. This perception is so perfect with the angels, that by it they are aware and have knowledge of what is true and good; of what is from the Lord, and what from themselves; and also of the quality of anyone who comes to them, merely from his approach, and from a single one of his ideas. The spiritual man has no perception, but has conscience. A dead man has not even conscience; and very many do not know what conscience is, and still less what perception is.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장에서 반복해서 등장해 온 핵심 개념, 곧 ‘퍼셉션(perception)을 정면으로 정의하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단호하게 말합니다. 오늘날에는 퍼셉션이 무엇인지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고 말입니다. 이는 안내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상태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진단입니다.

 

퍼셉션은 감정도 아니고, 직관도 아니며, 추론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감각입니다. 이 감각은 어떤 것이 그 상황에서 참인지, 어떤 것이 그 순간 선한지를 ‘즉각적으로 분별’하게 합니다. 논증이나 판단 과정을 거치지 않습니다. 퍼셉션은 느끼는 것에 가깝지만, 그 느낌은 감정이 아니라 자명한 인식이므로, 따로 설명하거나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이 퍼셉션이 삶의 기본 감각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옳은지를 배우지 않았고, 무엇이 선한지를 토론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적 인간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이 다루는 인간은, 계율이나 교리 이전의 인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퍼셉션이 천사들한테서는 더욱 완전하다고 말합니다. 천사들은 퍼셉션을 통해 참과 선을 알 뿐만 아니라, 그 근원이 어디인지를 압니다. 즉,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인지를 즉시 구별합니다. 이는 인간에게 매우 낯선 능력입니다. 우리는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를 거의 묻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천사들은 누군가가 다가오기만 해도, 그리고 그 사람의 생각 가운데 단 하나만으로도, 그의 성품(quality)을 알아차립니다. 이는 정보 수집이나 관찰의 결과가 아니라, ‘퍼셉션의 자연스러운 작용’입니다. 생명이 생명을 알아보는 방식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인간 상태를 세 단계로 나누어 대비합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퍼셉션이 있습니다. 영적 인간에게는 퍼셉션은 없고, 대신 양심이 있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구분입니다. 양심은 퍼셉션의 대체물이 아닙니다. 양심은 교리와 가르침을 통해 형성된 ‘내적 규범’입니다. 그것은 옳고 그름을 알려 주지만, 즉각적이지 않고, 때로는 갈등과 고통을 동반합니다.

 

반면 퍼셉션은 갈등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분별이 아니라 ‘인식’입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에게는 싸움이 없고, 영적 인간에게는 싸움이 있습니다. 양심은 영적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장치이지만, 퍼셉션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죽어 있는 인간’을 언급합니다. 죽어 있는 인간에게는 양심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상태에 대한 진술입니다. 그는 외적 규범이나 사회적 압력에 의해 행동할 수는 있지만, 내적으로는 선과 진리를 살아 있는 것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이 양심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퍼셉션은 더더욱 모른다고 말합니다. 이는 절망의 선언이 아니라, ‘현실 진단’입니다. 창세기 2장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장은 우리가 이미 잃어버린 감각을 전제로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AC.104는 이렇게 말합니다. 퍼셉션은 잃어버린 신비가 아니라,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생명의 감각이라고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직접 알지 못하지만, 말씀은 여전히 그 감각의 자리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AC.105, 창2:9, ‘동산 가운데에’(in the midst of the garden)는 속 사람의 의지 안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5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는 사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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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3, 창2:9, ‘나무들’이 퍼셉션을 의미하는 이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3 여기서 ‘나무들’이 퍼셉션을 의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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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9)

 

AC.103

 

여기서 나무들이 퍼셉션을 의미하는 이유는, 이 글이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인간이 다루어질 때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주제로 다루느냐에 따라, 그에 대응하여 사용되는 술어의 성격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 “trees” here signify perceptions is that the celestial man is treated of, but it is otherwise when the subject is the spiritual man, for on the nature of the subject depends that of the predicate.

 

해설

 

이 짧은 문장은, 지금까지 읽어 온 모든 상응 해설에 ‘해석 원칙의 열쇠’를 쥐여 주는 매우 중요한 단락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상응이 고정된 사전처럼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같은 ‘나무’라는 표현이라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어떤 인간 상태가 논의되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핵심 문장은 이것입니다. ‘주제(subject)의 성격에 따라 술어(predicate)의 성격이 달라진다.’

 

지금 창세기 2장은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습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과 퍼셉션의 상태로 사는 인간입니다. 따라서 이 장에서 등장하는 ‘나무’는 지식이나 교리가 아니라, ‘직접적인 인식, 곧 퍼셉션’을 의미하게 됩니다. 나무가 퍼셉션을 뜻하는 것은 나무라는 상징 때문이 아니라, ‘천적 인간이라는 주제’ 때문입니다.

 

반대로, 만일 같은 ‘나무’라는 말이 영적 인간을 다루는 문맥에서 등장한다면, 그 의미는 달라집니다. 영적 인간에게 중심적인 것은 퍼셉션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 곧 이해와 교리입니다. 그래서 그 경우의 ‘나무’는 지식, 교리, 혹은 기억 지식과 연결된 의미를 띠게 됩니다. 상응은 대상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결정’됩니다.

 

이 원칙은 성경 해석 전반에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특정 단어 하나를 떼어 놓고 ‘항상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말하는 방식은, 스베덴보리적 해석이 아닙니다. 그는 언제나 묻습니다. ‘지금 여기서 말씀이 다루고 있는 인간의 상태는 무엇인가?’

 

이렇게 보면, AC.102에서 설명된 ‘나무는 퍼셉션’이라는 해석도 절대적 정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천적 인간을 전제로 할 때에만’ 성립하는 정의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창세기 2장은 특별합니다. 이 장은 역사나 교리의 설명이 아니라, 인간이 가장 본래적인 상태에 있을 때의 내적 구조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또한, 왜 창세기 1장과 2장이 같은 창조 이야기를 전혀 다른 언어로 말하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주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1장은 영적 인간의 형성과 질서를, 2장은 천적 인간의 생명과 퍼셉션을 다룹니다. 그래서 같은 자연적 표현이 전혀 다른 깊이와 결을 띱니다.

 

AC.103은 이렇게 말합니다. 상응은 단어에 붙어 있는 꼬리표가 아니라, 말씀이 바라보고 있는 ‘인간 상태 전체에 의해 살아나는 의미’라고 말입니다. 이 원칙을 붙들고 있을 때, 창세기의 상징들은 더 이상 혼란이 아니라 질서가 됩니다.

 

 

 

AC.102, 창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AC.102-106)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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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o behold, and good for food; the tree of lives also,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2:9)

 

AC.102

 

나무(a tree)는 퍼셉션(perception)을 의미하고,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a tree desirable to behold)는 진리에 대한 퍼셉션(the perception of truth), ‘먹기에 좋은 나무(a tree good for food)는 선에 대한 퍼셉션(the perception of good)을 의미합니다.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는 사랑과 그로부터 나오는 신앙(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는 감각적인 것에서 나오는 신앙, 곧 그저 기억 지식에서 나올 뿐인 신앙(faith derived from what is sensuous, that is, from mere memory-knowledge)을 의미합니다. A “tree” signifies perception; a “tree desirable to behold,” the perception of truth; a “tree good for food,” the perception of good; the “tree of lives,”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faith derived from what is sensuous, that is, from mere memory-knowledge.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장의 상징 언어가 어디까지 정밀하게 인간의 내적 구조를 가리키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핵심적인 설명입니다. 흔히 우리는 에덴동산의 나무들을 도덕적 시험 장치로만 이해해 왔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나무들을 ‘인간 안에 존재하는 인식과 생명 방식’으로 읽습니다. 여기서 동산은 지성이었고, 이제 그 동산 안의 나무들은 퍼셉션 자체입니다.

 

먼저 ‘나무’가 퍼셉션을 의미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퍼셉션은 지식이나 추론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직접 알아차리는 내적 감각입니다. 나무는 땅에 뿌리를 두고 위로 자라 열매를 맺습니다. 이처럼 퍼셉션은 사랑이라는 토양에서 뿌리를 내리고, 이해와 삶의 열매로 자라납니다. 그래서 동산의 중심 요소는 길이나 건물이 아니라, 나무입니다.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라는 설명은, 진리가 먼저 ‘보이는 것’으로 다가온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진리는 이해의 차원에서 빛처럼 인식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진리는 분석 결과가 아니라, 보자마자 ‘, 이것이구나’ 하고 알아차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반면 ‘먹기에 좋은 나무’는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먹는다는 것은 자기 생명 안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선은 단순히 옳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이루는 양분’입니다. 그래서 선에 대한 퍼셉션은 이해보다 더 깊은 차원, 곧 의지와 사랑의 차원에 속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선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생명의 흐름입니다.

 

이제 중심에 놓인 ‘생명나무’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사랑과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순서입니다. 신앙이 먼저가 아니라, 사랑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서 신앙이 흘러나옵니다. 이것이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입니다. 복수형 ‘생명들(lives)은, 이 사랑에서 나오는 모든 생명의 차원들을 포함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생명의 중심은 이 나무입니다.

 

이에 대비되는 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이것은 선과 악 자체를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지식의 출처’가 문제입니다. 이 나무는 감각적인 것, 곧 그저 기억 지식에서 나올 뿐인 신앙을 의미합니다. 이는 외적 경험과 정보, 추론에 근거한 신앙입니다. 그것은 영적 인간에게는 필요하지만, 천적 인간에게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대비가 드러납니다. ‘생명나무’는 위에서 아래로, 주님 → 사랑 → 신앙의 질서로 흘러옵니다. 반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아래에서 위로, 감각 → 기억 지식 → 판단이라는 질서를 따릅니다. 문제는 지식 자체가 아니라, ‘그 지식이 생명의 중심 자리를 차지할 때’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단순히 “이 나무는 좋고, 저 나무는 나쁘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모든 퍼셉션이 사랑에서 나오지만, 만일 사람이 감각과 기억 지식을 생명의 근원으로 삼기 시작하면, 그는 질서를 거꾸로 세우게 된다고 말입니다.

 

AC.102는 이렇게 창세기 2장의 나무들을 인간 내면의 지도처럼 펼쳐 보입니다. 에덴동산의 중심에는 사랑에서 나온 생명의 퍼셉션이 있고, 그 주변에는 진리와 선의 다양한 퍼셉션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디에서 보느냐’입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보고, 그 사랑이 그의 모든 퍼셉션을 살립니다.

 

 

 

AC.103, 창2:9, ‘나무들’이 퍼셉션을 의미하는 이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3 여기서 ‘나무들’이 퍼셉션을 의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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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1, 창2:8, 겔43:1-2로 본 '동쪽은 주님'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101 ‘동쪽’이 주님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에스겔에 이르기를, That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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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2:8)

 

AC.101

 

동쪽이 주님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에스겔에 이르기를, That the Lord is the “east” also appears from the Word, as in Ezekiel:

 

1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쪽을 향한 문이라 2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 4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43:1-2, 4) He brought me to the gate, even the gate that looketh the way of the east, and behold the glory of the God of Israel came from the way of the east; and his voice was as the voice of many waters, and the earth shone with his glory (Ezek. 43:1–2, 4).

 

주님께서 동쪽이시기 때문에, 성전을 짓기 이전의 표상적인 유대 교회에서는 기도할 때 얼굴을 동쪽으로 향하는 거룩한 관습이 널리 행해졌습니다. It was in consequence of the Lord’s being the “east” that a holy custom prevailed in the representative Jewish church, before the building of the temple, of turning their faces toward the east when they prayed.

 

해설

 

이 글은 앞서 AC.98–100에서 확립된 ‘동쪽은 주님’이라는 상응을, ‘명시적 성경 본문과 실제 교회 관습’을 통해 확증하는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상응을 추상 개념으로 제시하지 않고, 언제나 말씀과 교회의 실제를 통해 뿌리내리게 합니다. 여기서 ‘동쪽’은 더 이상 상징적 방향이 아니라, ‘신적 임재가 나타나는 방향’입니다.

 

에스겔의 장면은 매우 장엄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으로부터 오고, 그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영광으로 땅이 빛납니다. 이는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와 선의 충만한 유입’을 묘사한 것입니다. ‘많은 물소리’는 풍성한 진리의 울림을, ‘땅이 빛났다’는 것은 겉 사람까지도 그 영광의 영향을 받았음을 뜻합니다.

 

이 장면은 왜 ‘동쪽’이 주님을 의미하는지를 직관적으로 보여 줍니다. 빛은 동쪽에서 떠오르고, 생명은 그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서 동쪽은 자연 현상이 아니라, ‘사랑과 생명의 근원’입니다. 주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며, 그 사랑이 처음 비추는 방향이 곧 동쪽입니다.

 

이 상응이 교회의 실제 관습으로 이어졌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성전이 세워지기 이전, 유대 교회에서 사람들이 기도할 때 얼굴을 동쪽으로 향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무의식적으로라도 ‘기도의 방향을 주님께 맞추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는 단순한 전통이나 형식이 아니라, 표상적 교회의 핵심 태도였습니다.

 

이 관습은 또한 외적 행위가 내적 인식을 담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얼굴을 동쪽으로 향하는 것은, 몸의 방향을 바꾸는 행위이지만, 그 내적 의미는 ‘사랑과 생명의 근원을 향해 마음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표상적 교회에서는 외적 행위 하나하나가 내적 실재를 담고 있었기에, 이런 관습은 살아 있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AC.101은 이렇게 말합니다. 동쪽은 단순한 방향이 아니라, 주님이 오시는 방향이며, 사람의 지성과 사랑이 열리는 출발점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이 동쪽에 심어졌고, 그래서 천적 인간의 지성은 언제나 동쪽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AC.100, 창2:8, 사51:3으로 본 '에덴은 사랑, 동산은 지성'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100 ‘동산’(a garden)이 지성(intelligence)을 의미하고, ‘에덴’(Eden)이 사랑(love)을 의미한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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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2:8)

 

AC.100

 

동산(a garden)이 지성(intelligence)을 의미하고, ‘에덴(Eden)이 사랑(love)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사야서에서도 드러납니다. That a “garden” signifies intelligence, and “Eden” love, appears also from Isaiah: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51:3) Jehovah will comfort Zion, he will comfort all her waste places, and he will make her wilderness like Eden, and her desert like the garden of Jehovah; joy and gladness shall be found therein, confession and the voice of singing (Isa. 51:3).

 

이 구절에서 사막(wilderness), ‘기뻐함(joy), ‘감사함’(confession)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 곧 사랑에 속한 것들을 표현하는 말들이고, ‘광야(desert), ‘즐거워함(gladness), ‘창화하는 소리(the voice of singing)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 곧 이해에 속한 것들을 표현하는 말들입니다. 앞의 것들은 에덴과 관련되고, 뒤의 것들은 동산과 관련됩니다. 왜냐하면 이 예언자에게서는 같은 사물을 두 표현으로 말하는 경우가 계속해서 나타나는데, 그중 하나는 천적인 것을,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the garden in Eden)이 더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뒤에 나오는 10절의 설명에서 볼 수 있습니다. In this passage, “wilderness,” “joy,” and “confession” are terms expressive of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or such as relate to love; but “desert,” “gladness,” and “the voice of singing,” of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or such as belong to the understanding. The former have relation to “Eden,” the latter to “garden”; for with this prophet two expressions constantly occur concerning the same thing, one of which signifies celestial, and the other spiritual things. What is further signified by the “garden in Eden,” may be seen in what follows at verse 10.

 

해설

 

이 글은 앞서 AC.98–99에서 제시된 정의를, ‘말씀 자체의 내부 구조’를 통해 확증하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자신의 해석을 설명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이사야서의 문체 자체가 이미 ‘에덴 = 사랑’, ‘동산 = 지성’이라는 구조를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는 아르카나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 의미는 해설자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는 질서라는 점을 드러냅니다.

 

이사야 513절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황폐함이 회복되는 과정이 두 겹의 언어로 묘사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는 ‘사막을 에덴 같게’라는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라는 표현입니다. 겉으로 보면 반복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 반복을 ‘천적 차원과 영적 차원의 병행 서술’로 읽습니다.

 

사막(wilderness), ‘기뻐함(joy), ‘감사함(confession)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 다시 말해 ‘사랑에 직접 속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사막은 비어 있는 상태이지만, 동시에 주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나오는 기쁨과 감사는, 이해를 거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바로 흘러나온 반응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은 ‘에덴’, 곧 사랑과 연결됩니다.

 

반면 ‘광야(desert), ‘즐거워함(gladness), ‘창화하는 소리(the voice of singing)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 곧 ‘이해와 지성의 차원’에 속합니다. 광양 역시 메마른 곳이지만, 질서가 회복될 때 그곳은 ‘동산’이 됩니다. 즐거움과 노래는 감정과 표현의 형태를 띠며, 이는 사랑 자체라기보다는, 사랑에서 흘러나온 인식과 이해의 반향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은 ‘동산’, 곧 지성과 연결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이 서로 분리된 두 종류의 인간으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같은 회복의 과정이 ‘두 차원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사랑의 차원에서는 에덴이 회복되고, 이해의 차원에서는 동산이 회복됩니다. 이 둘은 경쟁하지 않고, 질서 안에서 함께 작동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사야의 문체를 하나의 규칙으로 설명합니다. 같은 사물을 두 표현으로 말하되, 하나는 천적인 것을,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수사 기법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구조를 동시에 담아내기 위해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반복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층위를 동시에 열어 줍니다.

 

이 글은 또한, 왜 ‘에덴동산’이라는 결합 표현이 필요한지를 설명합니다. 에덴만 있으면 사랑은 있으되 이해가 드러나지 않고, 동산만 있으면 지성은 있으되 생명의 근원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천적 인간의 상태는, 사랑과 지성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질서로 결합된 상태이기에, 반드시 ‘에덴동산’으로 불려야 합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독자를 다음 글로 이끕니다. ‘에덴동산’이 더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10절에서 다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이는 지금까지의 설명이 결론이 아니라, ‘더 구체적인 전개를 위한 토대’임을 알려 줍니다. 곧 강들과 흐름, 그리고 지성의 세부 구조로 이어질 준비가 된 것입니다.

 

AC.100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은 이미 스스로를 해석하고 있으며,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질서는 예언서의 문체 속에 고요히, 그러나 정밀하게 새겨져 있다고 말입니다.

 

 

 

AC.101, 창2:8, 겔43:1-2로 본 '동쪽은 주님'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101 ‘동쪽’이 주님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에스겔에 이르기를, That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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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9, 창2:8, ‘동방의 에덴동산’(a garden in Eden in the east)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99 영적 인간한테 있어서의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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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2:8)

 

AC.99

 

영적 인간한테 있어서의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심에도 불구하고,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지성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람 자신으로부터, 곧 기억 지식과 이성을 통하여 나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와 다릅니다.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의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시며,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싸움이 없기 때문에, 그는 이것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이와 같이, 영적 인간한테는 거꾸로 되어 있던 질서가, 이제 천적 인간한테 있어서는 회복된 것으로 묘사되며, 이 질서, 곧 이 사람을 동방의 에덴동산(a garden in Eden in the east)이라 부릅니다. 최고 의미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창설하신 동산(the garden planted by Jehovah God in Eden in the east)은 주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또한 보편적 의미에서는, 이것은 주님의 나라, 그리고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놓이게 되는 하늘을 의미합니다. 이때 그의 상태는, 그가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있으며, 마치 그들 가운데 하나인 것과 같습니다. 이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도 동시에 하늘에 있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그의 모든 생각과 생각의 관념들, 심지어 그의 말과 행동들까지도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으며, 그 안에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각각의 것 안에 주님의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퍼셉션을 가질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Life, or the order of life, with the spiritual man, is such that although the Lord flows in, through faith, into the things of his understanding, reason, and memory [in ejus intellectualia, rationalia, et scientifica], yet as his external man fights against his internal man, it appears as if intelligence did not flow in from the Lord, but from the man himself, through the things of memory and reason [per scientifica et rationalia]. But the life, or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is such that the Lord flows in through love and the faith of love into the things of his understanding, reason, and memory, and as there is no combat between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he perceives that this is really so. Thus the order which up to this point had been inverted with the spiritual man is now described as restored with the celestial man, and this order, or man, is called a “garden in Eden in the east.” In the supreme sense, the “garden planted by Jehovah God in Eden in the east” is the Lord himself. In the inmost sense, which is also the universal sense, it is the Lord’s kingdom, and the heaven in which man is placed when he has become celestial. His state then is such that he is with the angels in heaven, and is as it were one among them; for man has been so created that while living in this world he may at the same time be in heaven. In this state all his thoughts and ideas of thoughts, and even his words and actions, are open, even from the Lord, and contain within them what is celestial and spiritual; for each one [of these] has the Lord’s life within it, which enables him to have perception.

 

 

해설

 

이 글은 AC.98에서 제시된 ‘에덴동산’의 구조를, ‘생명의 질서’라는 관점에서 정밀하게 해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도덕성이나 경건의 정도로 설명하지 않고, 오직 ‘유입이 어떻게 인식되는가’라는 문제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깊고도 실제적인 구분입니다.

 

먼저 영적 인간의 상태가 설명됩니다. 주님은 실제로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십니다. 이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식입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이 유입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걸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마치 자신이 기억 지식과 이성을 사용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즉, 유입은 있지만, 출처가 가려져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 영적 인간은 지성을 가지고 있으나, 그 지성은 항상 ‘내가 이해했다’, ‘내가 판단했다’는 감각을 동반합니다. 이는 교만의 문제라기보다, 아직 질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이 여전히 주도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생명의 흐름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꾸로 된 질서’입니다.

 

이에 반해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는 완전히 다릅니다. 주님은 사랑과 사랑의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때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더 이상 싸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성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퍼셉션합니다’. 그는 ‘,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구나’ 하고 즉각적으로 압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천적 인간은 더 많은 정보를 갖기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차이는 오직 하나, ‘질서가 회복되었는가’입니다. 생명은 위에서 아래로,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거쳐 지성으로 흘러갑니다. 천적 인간은 이 흐름을 막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있는 그대로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에덴동산’의 실체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회복된 질서, 혹은 그 사람 자체를 ‘동방의 에덴동산’이라고 부릅니다. 동쪽은 주님, 에덴은 사랑, 동산은 지성입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지성으로 흘러드는 생명의 질서가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장소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의 상태’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의미의 층위를 한 단계씩 올립니다. 최고 의미에서는 이 동산이 주님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모든 생명과 질서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보편적 의미에서는, 이것이 주님의 나라, 그리고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놓이게 되는 하늘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에덴동산은 개인 안에도 있고, 교회 전체 안에도 있으며, 하늘 전체 안에도 있습니다.

 

이제 놀라운 진술이 나옵니다. 천적 인간은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있으며, 마치 그들 가운데 하나인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는 사후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동시에 하늘에 있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인간 창조의 본래 목적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의 모든 생각과 생각의 관념들, 심지어 말과 행동까지도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습니다. 이는 무의식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깨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각각의 것 안에 주님의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습니다. 사람이 퍼셉션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각 생각과 말과 행동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퍼셉션은 특별한 은사가 아니라, ‘생명이 올바른 질서로 흐를 때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상태’입니다.

 

AC.99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적 인간은 더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생명의 출처를 숨기지 않고 그대로 느끼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 곧 그 질서 자체가 바로 ‘동방의 에덴동산’입니다.

 

 

 

AC.100, 창2:8, 사51:3으로 본 '에덴은 사랑, 동산은 지성'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100 ‘동산’(a garden)이 지성(intelligence)을 의미하고, ‘에덴’(Eden)이 사랑(love)을 의미한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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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8, 창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AC.98-101)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창2:8) AC.98 ‘동산’(a garden)은 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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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2:8)

 

AC.98

 

동산(a garden)은 지성(intelligence)을 의미하고, ‘에덴(Eden)은 사랑(love), ‘동쪽(the east)은 주님(the Lord), 그 결과 동방의 에덴동산(the garden of Eden eastward)은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천적 인간의 지성(the intelligence of the celestial man, which flows in from the Lord through love)을 의미합니다. By a “garden” is signified intelligence; by “Eden,” love; by the “east,” the Lord; consequently by the “garden of Eden eastward” is signified the intelligence of the celestial man, which flows in from the Lord through love.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장의 공간 언어가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로 귀결되는지를 단 한 문장으로 압축해 줍니다. 지금까지 사람의 형성, 생명, 평화, 호흡을 따라왔다면, AC.98은 그 모든 것이 ‘어떤 질서로 인식과 이해로 열리는가’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지성’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 지성은 결코 중립적 이성이나 분석 능력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동산’을 지성으로 규정합니다. 동산은 무질서한 숲이 아니라, 돌봄과 질서가 있는 공간입니다. 이는 지성이 단순한 정보의 집합이 아니라, ‘정돈되고 살아 있는 이해의 장’임을 뜻합니다. 천적 인간의 지성은 추론을 통해 쌓아 올린 체계가 아니라, 이미 살아 있는 생명이 질서를 이루어 펼쳐진 공간입니다.

 

에덴’이 사랑을 의미한다는 설명은 결정적입니다. 지성의 근원이 사랑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지성이 사랑과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서 천적 지성은 사랑에서 나오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습니다. 에덴 없는 동산은 있을 수 없고, 사랑 없는 지성은 천적 지성이 아닙니다.

 

여기에 ‘동쪽’이 더해집니다. 동쪽은 주님을 의미합니다. 이는 빛이 떠오르는 방향이라는 상징을 넘어, ‘모든 생명과 인식의 근원’을 가리킵니다. 동쪽이 주님을 의미한다는 것은, 천적 지성이 자기 안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동방의 에덴동산’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위치 설명이 아닙니다. 이는 지성의 발생 경로를 정확히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지성으로 흘러든다는 질서입니다. 이 순서는 뒤바뀔 수 없습니다. 지성이 먼저 오고 사랑이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먼저이고 지성은 그 결과’입니다.

 

이 점에서 천적 인간의 지성은 영적 인간의 지성과 분명히 구별됩니다. 영적 인간의 지성은 진리에서 출발하여 사랑으로 향합니다. 그래서 그는 배우고, 분별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지성은 사랑에서 출발합니다. 그는 먼저 기뻐하고, 그다음에 압니다. 그의 이해는 판단이 아니라 ‘퍼셉션의 확장’입니다.

 

이 단락은 또한, 에덴동산이 잃어버린 과거의 장소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다시 형성될 수 있는 상태’임을 분명히 합니다. 에덴은 지리적 기억이 아니라, 사랑이 주님을 향해 열릴 때마다 다시 열리는 자리입니다. 그때 지성은 억지로 밝히는 빛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빛이 됩니다.

 

AC.98은 이렇게 말합니다. 천적 인간의 지성은 스스로 만든 동산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해 흘러들어와 형성된 에덴의 동산이라고 말입니다. 이 지성 안에서는, 아는 것이 곧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이 곧 보는 것이 됩니다.

 

 

 

AC.99, 창2:8, ‘동방의 에덴동산’(a garden in Eden in the east)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99 영적 인간한테 있어서의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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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7, 창2:7, 생명이 ‘숨 쉼’(breathing)과 ‘숨’(breath)으로 묘사되는 이유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7 생명이 ‘숨 쉼’(breathing)과 ‘숨’(breath)으로 묘사되는 이유는, 태고교회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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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2:7)

 

AC.97

 

생명이 숨 쉼(breathing)(breath)으로 묘사되는 이유는, 태고교회의 사람들이 사랑과 신앙의 상태들을 호흡의 상태들(states of respiration)로 퍼셉션했기 때문입니다. 이 호흡의 상태들은 그들의 후손들 가운데서 점차 변화되었습니다. 이 호흡에 관해서는, 오늘날에는 그러한 것들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아직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태고 사람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고, 또한 저세상, 즉 내세에 있는 사람들도 이것을 알고 있으나,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영, 곧 생명을 바람(wind)에 비유한 이유입니다. 주님께서도 사람의 거듭남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요한복음에서 같은 비유를 사용하십니다.주1 The reason why life is described by “breathing” and by “breath” is also that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perceived states of love and of faith by states of respiration, which were successively changed in their posterity. Of this respiration nothing can as yet be said, because at this day such things are altogether unknown.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well acquainted with it, and so are those who are in the other life, but no longer anyone on this earth, and this was the reason why they likened spirit or life to “wind.” The Lord also does this when speaking of the regeneration of man, in John:1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3:8) The wind bloweth where it listeth, and thou hearest the voice thereof, and knowest not whence it cometh, or whither it goeth; so is everyone that is born of the spirit (John 3:8).

 

시편에서도 So in David: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33:6) By the word of Jehovah were the heavens made, and all the army of them by the breath of his mouth (Ps. 33:6).

 

29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30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104:29, 30) Thou gatherest their breath, they expire, and return to their dust;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29–30).

 

(the breath [spiraculum])이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뜻하는 것은 욥기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That the “breath” [spiraculum] is used for the life of faith and of love, appears from Job: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32:8) He is the spirit in man, and the breath of Shaddai giveth them understanding (Job 32:8).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33:4) The spirit of God hath made me, and the breath of Shaddai hath given me life (Job 33:4).

 

 

주1, 원어 헬라어에는 바람(wind), ‘(spirit) (breath)이 모두 같은 단어(Ψυχή 프쉬케)로 표현되어 있다. 히브리어로는 רוח 루아흐. In the original languages, “wind,” “spirit,” and “breath” are all expressed by the same word. [Reviser]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7절의 ‘’이라는 표현을, 단순한 상징 설명을 넘어 ‘태고교회 인간의 실제 삶의 방식’으로까지 끌어올립니다. AC.96에서 ‘콧구멍’이 퍼셉션과 연결되었다면, AC.97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호흡 자체가 영적 상태와 직결되어 있었다’는 매우 급진적인 진술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이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생각’이나 ‘판단’으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호흡의 변화로 퍼셉션했다’고 말합니다. 이는 오늘날의 인간에게는 거의 상상조차 어려운 상태입니다. 우리는 감정이 바뀌면 호흡이 달라진다고 말하지만, 태고교회 사람들은 그 반대였습니다. ‘호흡 상태 자체가 곧 영적 상태의 표지’였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호흡에 대해 ‘오늘날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고까지 말합니다. 이는 자신이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오늘날 인간의 감각과 의식 구조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땅에서는 더 이상 그 경험의 토대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세상, 곧 영계에서는 여전히 이 사실이 자명하다고 말합니다. 이 대비는 태고교회와 오늘날 인간 사이의 거리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이 맥락에서 ‘’이나 ‘생명’을 ‘바람’에 비유한 성경의 언어가 이해됩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작용하고, 그 움직임은 느낄 수 있으나 통제할 수 없습니다. 이는 영적 생명의 성질과 정확히 맞아떨어집니다. 그래서 태고의 언어에서 ‘’, ‘’, ‘바람’은 서로 긴밀히 연결된 표현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에서 거듭남을 ‘바람’에 비유하신 말씀은, 이 태고교회의 언어를 직접적으로 되살리는 장면입니다. 영으로 난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 수 없다는 말씀은, 그 사람이 무질서하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 생명은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추적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거듭남은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살아감의 상태, 사는 상태입니다.

 

다윗의 시편 인용은 이 구조를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합니다. 하늘과 그 모든 군대, 곧 ‘만상’이 여호와의 ‘입 기운’으로 지어졌다는 말은, 창조의 근원이 ‘영적 생명’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숨이 거두어지면 모든 것은 흩어지고, 다시 보내지면 새로 창조됩니다. 이는 자연의 순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유입과 철수’라는 영적 원리를 말합니다.

 

시편 104편에서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라는 표현은, 앞서 창세기 2장에서 말한 ‘’ 곧 겉 사람이 새로워지는 것과 정확히 호응합니다. 숨, 곧 영이 보내질 때, 겉 사람은 다시 생명을 입습니다. 이는 AC.94–95에서 말한 구조의 시편적 표현입니다.

 

마지막으로 욥기의 인용은 이 모든 논의를 인간 내부로 다시 끌어옵니다. 사람 안에 있는 영과, 전능자의 숨이 주는 깨달음과 생명은,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가리킵니다. 깨달음은 신앙의 생명이고, 생명 자체는 사랑의 생명입니다. 이 둘은 모두 ‘’이라는 하나의 상징 아래 묶입니다.

 

AC.97은 이렇게 말합니다. 생명을 숨으로 말하는 성경의 언어는 비유가 아니라, ‘한때 실제였던 인간 경험의 흔적’이라고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직접 체험하지 못하지만, 말씀은 여전히 그 구조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숨은 지금도, 다른 방식으로 사람 안에 불어오고 있습니다.

 

이 단락에 이르면, ‘’은 더 이상 시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사람에게 끊임없이 유입되는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가리키는, 가장 깊고 오래된 언어입니다.

 

 

 

AC.96,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의 속뜻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6 ‘여호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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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18, Emanuel SwedenborgArcana Coelestia에서 말하는 profanation에 대하여

 

 

Emanuel Swedenborg의 ‘Arcana Coelestia’에서 말하는 ‘profanation’(신성모독, 神性冒瀆)은 단순한 신성모독이라는 외적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의식적으로 결합시키는 상태’를 가리키는 깊은 영적 개념입니다.

 

profanation은 사람이 이미 알고 인정한 신적 진리를, 이후에 의도적으로 거슬러 악한 삶과 결합시키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단순한 무지나 실수, 연약함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알고도’, 그리고 ‘내적으로 접촉하고도’ 그것을 배반하는 데 있습니다. 즉 진리와 악이 한 인격 안에서 혼합되는 것이 profanation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하늘과 지옥은 본질적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인간 안에서도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은 질서 있게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profanation은 이 둘을 한 사람 안에서 결합시킴으로써 영적 질서를 파괴합니다. 그 결과, 내면이 분열되고 찢기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단순한 죄와 구별되는 점입니다. 죄는 회개로 분리될 수 있지만, profanation은 결합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는 ‘태고교회’의 몰락을 설명하면서 profanation을 중심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진리를 직접 지각하는 상태에 있었으나, 점차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선택하면서 내면의 진리와 외적 삶이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의 ‘홍수’는 단순한 자연 사건이 아니라, 이런 혼합이 극에 달해 ‘광적인 욕망과 확신’이 사람을 덮어버린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것이 profanation의 집단적 결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profanation에도 여러 등급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가장 깊은 것은 진리를 사랑으로 받아들여 의지와 결합시킨 뒤, 그것을 배반하는 경우입니다. 이해 차원에서만 인정했던 진리를 나중에 떠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덜 깊습니다. 왜냐하면 의지와 결합되지 않은 진리는 아직 사람의 중심과 하나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매우 중요한 통찰을 제시합니다. 주님은 사람이 profanation에 빠지지 않도록 섭리로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 깊은 진리를 주지 않으시고, 때로는 진리를 잊게 하시기도 합니다. 심지어 진리를 모르는 상태가, 알고도 모독하는 것보다 덜 해롭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무지를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과 악의 혼합을 막으려는 자비의 관점입니다.

 

유다는 주님을 알고 따르면서도 배반함으로써 깊은 profanation의 예로 제시됩니다. 반면 베드로는 연약함으로 부인했지만, 내면의 사랑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기에 회복이 가능했습니다. 또한 바벨탑은 신적 진리를 자기 영광과 권세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종교적 profanation의 상징으로 해석됩니다.

 

profanation에 빠진 사람은 사후에 선과 악 사이를 오가며 고통받는 상태에 놓일 수 있다고 설명됩니다. 이는 단순한 지옥의 고통과는 다른, 내적 분열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주님의 자비가 끝까지 작용하여 가능한 한 이런 상태를 막으신다고 강조합니다.

 

profanation 교리는 공포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진리는 지식이 아니라 삶이며, 삶과 결합된 진리는 거룩합니다. 그것을 자기 사랑의 도구로 삼지 않을 때, 진리는 사람을 살립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용하면 내면의 질서가 무너집니다.

 

거룩한 것은 주님의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겸손히 받고 삶으로 지켜야 한다는 점이 profanation 교리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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