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1:20)

 

AC.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 속한 기억-지식을 뜻하고, ‘새들(birds)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하는데, 이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합니다. ‘물 속에서 돌아다니는 것들(creeping things of the waters), 곧 ‘물고기들(fishes)이 기억-지식을 뜻한다는 사실은 이사야를 보면 분명합니다. By 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 are signified the memory-knowledge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by “birds” in general, rational and intellectual things, of which the latter belong to the internal man. That 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s,” or “fishes,” signify memory-knowledges is plain from Isaiah:

 

2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어 바다를 마르게 하며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하며 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갈하여 죽으리라 3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 (50:2, 3) I came and there was no man; at my rebuke I dry up the sea, I make the rivers a wilderness; their fish shall stink because there is no water and shall die for thirst; I clothe the heavens with blackness (Isa. 50:2–3).

 

[2] 그러나 이 의미는 에스겔을 보면 더 분명한데, 거기서 주님은 새 성전, 곧 일반적으로는 새 교회를, 그리고 교회에 속한 사람인 거듭난 사람을 묘사하십니다.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주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But it is still plainer from Ezekiel, where the Lord describes the new temple, or a new church in general, and the man of the church, or a regenerate person; for everyone who is regenerate is a temple of the Lord:

 

8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또 이 강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47:8-10) The Lord Jehovih said unto me, These waters that shall issue to the boundary toward the east, and shall come toward the sea, being led into the sea, and the waters shall be healed;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 living soul that shall creep forth, whithersoever the water of the rivers shall come, shall live, and there shall be exceeding much fish, because those waters shall come thither, and they shall heal, and everything shall live whither the river come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fishers shall stand upon it from En-gedi 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 shall they be; their fish shall be according to its kind, as the fish of the great sea, exceeding many (Ezek. 47:8–10).

 

여기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의 어부들(Fishers from En-gedi unto En-eglaim)과 ‘그물 치는 것(spreading of nets)은 자연적인 사람을 신앙의 진리로 가르칠 사람들을 뜻합니다. Fishers from En-gedi un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 signify those who shall instruct the natural man in the truths of faith.

 

[3]새들(birds)이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한다는 점도 선지자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이사야에 보면, That “birds” signify things rational and intellectual is evident from the prophets; as in Isaiah: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 (46:11) Calling a bird from the east, the man of my counsel from a distant land (Isa. 46:11).

 

예레미야에서도 And in Jeremiah: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4:25)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5).

 

에스겔서에서는 In Ezekiel:

 

22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23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17:22, 23) I will plant a shoot of a lofty cedar, and it shall lift up a branch, and shall bear fruit, and be a magnificent cedar; and under it shall dwell every fowl of every wing, in the shadow of the branches thereof shall they dwell (Ezek. 17:22–23).

 

그리고 호세아에서는 새 교회, 곧 거듭난 사람에 대해 말하면서, And in Hosea, speaking of a new church, or of a regenerate man: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2:18) And in that day will I make a covenant for them with the wild beast of the field, and with the fowls of heaven, and with the moving thing of the ground (Hos. 2:18).

 

여기서 ‘들짐승(wild beast)이 실제 짐승을 뜻하지 않고, ‘(bird)도 실제 새를 뜻하지 않는다는 점은, 주님께서 그것들과 ‘새 언약을 맺는다(make a new covenant)고 하는 것만 봐도 누구나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That “wild beast” does not signify wild beast, nor “bird” bird, must be evident to everyone, for the Lord is said to “make a new covenant” with them.

 

 

해설

 

이 글은 다섯째 날에 등장하는 생명체들이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매우 정밀하게 풀어 줍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생명이 있는 것들’이 등장하지만, 그 생명은 무작위적인 생명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구조에 정확히 대응되는 생명입니다. 물 속 기는, 그러니까 돌아다니는 것들, 곧 물고기들은 겉 사람에 속한 기억-지식을 뜻하고, 새들은 이성적, 지적 작용을 뜻합니다.

 

먼저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이 기억-지식을 뜻한다는 설명은, 지식이 생겨나는 자리와 방식에 주목하게 합니다. 기억-지식은 겉 사람의 영역에 속하며,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축적됩니다. 그것은 물처럼 유동적이고, 방향이 정해지지 않으면 쉽게 썩거나 말라 버립니다. 이사야에서 바다가 말라 물고기가 죽는 장면은, 지식이 생명의 흐름과 분리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물이 없다는 것은 단순한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의 유입이 끊어진 상태를 뜻합니다.

 

에스겔의 새 성전 환상은 이 의미를 한층 더 분명하게 합니다. 거기서 물은 성전에서 흘러나와 바다로 들어가고, 그 결과 바다가 치유되며 물고기가 넘쳐납니다. 이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가 인간의 기억 영역으로 흘러들어 갈 때, 그 지식들이 비로소 살아난다는 뜻입니다. 물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많아진다는 표현은, 지식이 무질서하게 쌓이는 것이 아니라, 질서 안에서 분류되고 기능을 갖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어부들’과 ‘그물을 펼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상징입니다. 이는 단순한 전도가 아니라, 자연적인 사람, 곧 겉 사람을 신앙의 진리로 가르치는 사역을 뜻합니다. 어부는 바다에서 생명을 끌어올리는 사람이며, 그물은 진리를 질서 있게 적용하는 수단입니다. 여기서 기억-지식은 버려지거나 초월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과 질서를 통해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 글은 이어서 ‘새들’의 의미를 다룹니다. 새들은 물에서 나오지 않고 하늘을 날며, 이는 생각이 지식의 차원을 넘어 이성과 지성의 차원으로 올라간 상태를 뜻합니다. 이사야에 ‘동쪽에서 부르는 새’는 사랑의 근원에서 나오는 지적 인식을 뜻하며, 예레미야에서 새들이 날아가 버린 상태는 지성과 판단력이 사라진 황폐한 상태를 뜻합니다.

 

에스겔의 백향목 아래 깃드는 새들의 모습은, 진리의 질서가 세워질 때 지성과 이해가 그 안에서 안식을 얻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는 억지로 붙잡힌 생각이 아니라, 진리의 그늘 아래에서 자연스럽게 머무는 이해입니다. 호세아에서 들짐승과 새들과 기는 것들과 언약을 맺는 장면도 같은 맥락입니다. 주님은 인간 안의 모든 층위, 곧 감각적, 자연적, 지적 기능과 새 질서를 맺으십니다.

 

그래서 이 글은 강조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짐승과 새는 자연적 존재가 아닙니다. 만일 그것들이 문자 그대로의 동물이라면, 주님께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이 언약은 인간 안의 생명 구조와 맺는 언약입니다.

 

AC.40은 다섯째 날의 생명이 단순한 ‘생물의 창조’가 아니라, 기억-지식과 지성의 생명화를 뜻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지식은 버려지지 않고, 지성은 억제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흐름 안에서 새롭게 살아납니다. 이 글은 신앙이 무지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질서 안에서 지성과 지식을 되살리는 과정임을 깊이 있게 보여 줍니다.

 

 

 

AC.41, 창1:20, ‘사람 본성에 속한 것’ vs '주님에게서 오는 것'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1 사람의 본성(own, proprium)에 속한 것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으며, 그것을 눈으로 볼 수

bygrace.kr

 

AC.39, 창1:20,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AC.39-41)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of the heavens. (1:20)

 

AC.39

 

큰 광명체들이 불이 붙어 속 사람 안에 놓이고, 겉 사람이 그 빛을 받게 되면, 그러면 사람은 비로소 살기 시작합니다. 그 이전까지는 그를 가리켜 거의 살아있다 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때는 그가 선을 행해도 그 선은 자기에게서 나온 걸로 알았고, 진리를 말해도 그 진리 역시 자기에게서 나온 거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사람이란 자기 자신으로서는 죽어 있으며, 그 안에는 악과 거짓밖에 없기 때문에, 자기에게서 나오는 건 그게 무엇이든 생명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로부터는 그 자체로 선한 그런 선을 절대로 행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선한 것을 생각하거나, 선한 것을 원하거나, 따라서 선한 것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온다는 사실은, 신앙의 교리로 보아도 누구에게나 분명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After the great luminaries have been kindled and placed i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receives light from them, then the man first begins to live. Heretofore he can scarcely be said to have lived, inasmuch as the good which he did he supposed that he did of himself, and the truth which he spoke that he spoke of himself; and since man of himself is dead, and there is in him nothing but what is evil and false, therefore whatsoever he produces from himself is not alive, insomuch that he cannot, from himself, do good that in itself is good. That man cannot even think what is good, nor will what is good, consequently cannot do what is good, except from the Lord, must be plain to everyone from the doctrine of faith, for the Lord says in Matthew: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13:37)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the son of man (Matt. 13:37).

 

또한 선은 오직 하나뿐인 참된 선의 근원에서만 올 수 있는데, 주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Nor can any good come except from the real fountain of good, which is one only, as he says in another place: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8:19) None is good save one, God (Luke 18:19).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사람을 다시 살리실 때, 곧 거듭남으로 생명으로 일으키실 때에는, 처음에는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도록 허락하십니다. 이때 사람은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며, 그런 방식이 아니고서는 그를 이끌어 나중에 모든 선과 모든 진리가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더 나아가 퍼셉션으로 알 수 있도록 인도하실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동안, 그의 진리와 선은 ‘(tender grass),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그리고 마지막으로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에 비유되는데, 이것들은 모두 생명이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사랑과 신앙으로 생명을 얻게 되고,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과 자기가 말하는 모든 진리가 주님께서 이루시는 것임을 믿게 되면, 그는 먼저 ‘물 속의 기는 것들(creeping things of the water)과 ‘땅 위를 나는 새들(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에 비유되고, 또한 ‘짐승들(beasts)에 비유되는데, 이것들은 모두 생명이 있는 것들이며, 이것들을 가리켜 ‘생물(living souls)이라고 합니다. Nevertheless when the Lord is resuscitating man, that is, regenerating him, to life, he permits him at first to suppose that he does what is good and speaks what is true from himself, for at that time he is incapable of conceiving otherwise, nor can he in any other way be led to believe, and afterwards to perceive, that all good and truth are from the Lord alone. While man is thinking in such a way his truths and goods are compared to the “tender grass,” and also to the “herb yielding seed,” and lastly to the “tree bearing fruit,” all of which are inanimate; but now that he is vivified by love and faith, and believes that the Lord works all the good that he does and all the truth that he speaks, he is compared first to 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 and to the “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 and also to “beasts,” which are all animate things, and are called “living souls.”

 

 

해설

 

이 글은 넷째 날 이후에 비로소 ‘생명’이 시작된다는 점을 인간의 거듭남 관점에서 분명히 밝힙니다. 앞선 단계들에서 사람은 빛을 받고, 선과 진리를 배우며, 겉으로는 신앙적이고 선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상태를 아직 ‘살아있다’, 즉 ‘살아있는 상태’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그 사람이 여전히 선과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서는 죽어 있으며, 그 안에는 악과 거짓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비하하려는 표현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정확히 규정하는 말입니다. 생명은 주님에게서만 오기 때문에, 그 근원과 단절된 상태에서는 아무리 선해 보이는 행위도 본질적으로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는 참된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이 점은 성경 말씀으로도 확증됩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이시며,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선과 진리의 근원이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들을 단순한 교리적 인용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구조를 설명하는 핵심 근거로 사용합니다.

 

그럼에도 이 글은 매우 중요한 전환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사람을 거듭남으로 이끄실 때, 처음부터 그에게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그런 성숙한 태도를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지요. 오히려 처음에는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도록 허락하십니다. 이는 사람의 한계 때문이며, 동시에 주님의 지혜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런 단계가 아니고서는 다음 단계로 인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의 선과 진리는 연한 풀과 씨 맺는 채소, 그리고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됩니다. 이것들은 성장과 생산성을 지니고 있지만, 아직 못 움직이는, 생명 없는 것들로 묘사됩니다. 이는 선과 진리가 아직 사랑과 신앙의 생명으로 살아 움직이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준비는 되었지만,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사랑과 신앙이 결합하고, 사람이 선과 진리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게 될 때는, 상황은 근본적으로 달라집니다. 그때부터 사람은 생명 있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물 속의 기는 것들, 하늘을 나는 새들, 그리고 짐승들은 모두 움직이고, 반응하고, 생명을 표현하는 존재들입니다. 이때 비로소 사람은 ‘생물(living souls)이 됩니다.

 

이 글은 거듭남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매우 섬세한 주님의 섭리 안에서 단계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사람의 오해조차도 주님은 사용하십니다. 자기가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는 그 상태조차, 더 깊은 진리와 퍼셉션으로 이끌기 위한 통로가 됩니다. 그래서 이 글은 인간의 무능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주님의 자비와 지혜를 가장 깊이 드러내는 글입니다.

 

 

 

AC.40, 창1:2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 '새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 속한 기

bygrace.kr

 

AC.38, 창1:18-19,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ourth day. (1:18, 19)

 

AC.38

 

(day)은 선을, ‘(night)은 악을 뜻하며, 그래서 선(goods)을 가리켜서는 ‘낮의 일(works of the day)이라 하고, 악(evils)을 가리켜서는 ‘밤의 일(works of the night)이라 합니다. 또한 ‘(light)은 진리를, ‘어둠(darkness)은 거짓을 뜻합니다. 주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By the “day” is meant good, by the “night,” evil; and therefore goods are called works of the day, but evils works of the night; by the “light” is meant truth, and by the “darkness” falsity, as the Lord says:

 

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1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3:19, 21) Men loved darkness rather than light. He that doeth truth cometh to the light (John 3:19, 21).

 

 

해설

 

이 글은 앞선 논의를 한 문장으로 응축한 핵심 정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스베덴보리는 낮과 밤, 빛과 어둠, 해와 달을 시간이나 자연 현상으로 읽지 말고, 인간 내면의 상태와 삶의 질서로 읽어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해 왔습니다. AC.38은 그 모든 설명을 매우 간결한 대응 관계, 상응 관계로 정리합니다. 낮은 선이고, 밤은 악이며, 빛은 진리이고, 어둠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과 악이 추상적인 도덕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행위’로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선을 가리켜서는 ‘낮의 일’이라 하고, 악은 ‘밤의 일’이라 합니다. 이는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는 그가 무엇을 행하는지를 통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낮에 속한 사람은 선을 행하고, 밤에 속한 사람은 악을 행합니다. 상태는 행동 속에서 가시화됩니다.

 

빛과 어둠의 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은 단순한 지적 명료함이 아니라 진리이며, 어둠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거짓입니다. 진리는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드러내고 밝히는 성질을 가지지만, 거짓은 자기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숨기고 흐리게 만드는 성질을 가집니다. 그래서 빛은 스스로를 감추지 않고, 어둠은 늘 자신을 가리려 합니다.

 

이 점을 주님의 말씀은 아주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고 하십니다. 이는 사람들이 진리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피한다는 뜻입니다. 진리는 삶을 바꾸라고 요구하기 때문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머물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불편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연스럽게 어둠을 선택합니다.

 

반대로 주님은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행한다’는 말이 결정적입니다. 진리는 생각 속에만 머물 때는 빛이 되지 않습니다. 삶 속에서 행해질 때 비로소 빛이 됩니다. 그래서 빛은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입니다.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숨지 않고 드러나며, 자신의 삶이 빛 가운데 놓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글은 신앙과 행위의 관계를 다시 한번 분명히 합니다. 선은 낮에 속하고, 진리는 빛에 속합니다. 그런데 낮과 빛은 언제나 함께 움직입니다. 마찬가지로 선과 진리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선 없는 진리는 빛 없는 낮이 될 수 없고, 진리 없는 선은 방향 없는 열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낮–선–행위와 빛–진리–인식을 하나의 묶음으로 제시합니다.

 

AC.38은 우리에게 아주 실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 내가 행하고 있는 것은 낮의 일인가, 밤의 일인가. 그리고 내가 붙들고 있는 생각은 빛에 속한 진리인가, 아니면 어둠에 속한 거짓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판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방향 전환을 위한 질문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빛으로 나오라고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AC.38은 창세기 1장의 언어를 통해, 인간 삶의 가장 기본적인 영적 분별 기준을 제시합니다. 낮과 밤, 빛과 어둠은 멀리 있는 상징이 아니라, 매일의 선택과 행위 속에서 계속해서 드러나는 현재의 상태입니다.

 

 

 

AC.39, 창1:20,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AC.39-41)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

bygrace.kr

 

AC.37, 창1:14-17,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7

 

광명체들로 하여금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고 합니다. 이 말 속에는 지금 당장 다 펼쳐 보일 수 없을 만큼 많은 아르카나가 담겨 있지만, 문자적 의미만 보면 그런 깊은 뜻은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다만 이것만 말씀드리는 걸로 충분한데요, 곧,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는 일반적으로도, 또 개별적으로도 교대(alternations)라는 게 있으며, 이것이 날과 해의 변화(changes)에 비유된다는 점입니다. 날의 변화는 아침에서 정오로, 다시 저녁으로, 그리고 밤을 거쳐 다시 아침으로 진행합니다. 해의 변화도 이와 같아서, 봄에서 여름으로, 다시 가을로, 그리고 겨울을 지나 다시 봄으로 진행합니다. 여기서 열과 빛의 변화가 생기고, 또한 땅의 산물들도 이에 따라 달라집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교대 역시 이러한 변화에 비유됩니다. 이런 교대와 다양함(varieties)이 없다면 삶은 단조로워지고, 결국 생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게 됩니다. 또한 선과 진리는 분별되거나 구별될 수 없고, 더 나아가 퍼셉션될 수도 없습니다. 이런 교대(alternations)를 선지자들은 ‘규례(ordinances, [statuta])라 하는데, 예레미야에 보면 나옵니다. It is said that the luminaries shall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In these words are contained more arcana than can at present be unfolded, although in the literal sense nothing of the kind appears. Suffice it here to observe that there are alternations of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which are compared to the changes of days and of years. The changes of days are from morning to midday, thence to evening, and through night to morning; and the changes of years are similar, being from spring to summer, thence to autumn, and through winter to spring. Hence come the alternations of heat and light, and also of the productions of the earth. To these changes are compared the alternations of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without such alternations and varieties would be uniform, consequently no life at all; nor would good and truth be discerned or distinguished, much less perceived. These alternations are in the prophets called “ordinances” [statuta], as in Jeremiah:

 

3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셨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정하였고 바다를 뒤흔들어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36이 법도가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끊어져 영원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35, 36) Said Jehovah, who giveth the sun for a light by day, and the ordinances of the moon and of the stars for a light by night, . . . these statutes shall not recede from before me (Jer. 31:35–3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33:25) Said Jehovah, If my covenant of day and night stand not, and if I have not appointed the ordinances of heaven and earth (Jer. 33:25).

 

이러한 것들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창세기 822절에서 더 말씀드릴 것입니다. But concerning these things, of the Lord’s Divine mercy, at Genesis 8: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8:22)

 

※ 관련 글 번호는 AC.930-937입니다.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에서 광명체들이 맡는 역할을 시간 측정의 기능으로 축소시키는 해석을 분명히 넘어서게 합니다. ‘징조’, ‘계절’, ‘’, ‘’라는 표현은 단순한 천문학적 주기가 아니라, 영적 생명 안에서 반복되는 상태의 변화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한 문장 안에 매우 많은 아르카나가 담겨 있다고 말하면서, 그 전부를 지금은 펼치지 않고 핵심 원리만 제시합니다.

 

그 핵심은 이것입니다.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에는 반드시 교대(alternations)가 있으며, 이 교대는 날과 해의 변화와 정확히 대응된다는 점입니다. 아침에서 밤으로, 봄에서 겨울로 이어지는 자연의 변화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상태 변화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빛과 열이 증감하듯이, 신앙과 사랑도 강해졌다 약해졌다를 반복합니다.

 

이 교대는 퇴보나 실패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명의 필수 조건입니다. 만일 이런 변화가 없다면, 삶은 하나의 평면으로 굳어버리고, 생명이라 부를 수도 없는 상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조로움은 곧 무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우리는 흔히 항상 밝고 항상 뜨거운 상태를 이상으로 생각하지만, 그런 상태는 실제로는 분별도 성장도 낳지 못합니다.

 

선과 진리가 인식되고 구별되며, 더 나아가 퍼셉션되기 위해서는 대비가 필요합니다. 낮이 있어야 밤을 알고, 겨울이 있어야 봄의 생명을 압니다. 영적 삶에서도 마찬가지로, 빛의 상태와 그늘의 상태가 교차하면서 비로소 사람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교대를 선지자들은 ‘규례(ordinances)로 부른다고 말합니다. 규례란 인간이 임의로 정한 법칙이 아니라, 주님께서 창조와 섭리 속에 세워 두신 변하지 않는 질서입니다. 낮과 밤의 교대, 하늘과 땅의 규례는 단순한 자연법칙이 아니라, 영적 생명에까지 미치는 주님의 질서입니다.

 

예레미야의 인용은 이 점을 강하게 확증합니다. 해와 달과 별의 규례가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지 않는다는 말은, 영적 상태의 교대 역시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불안해할 수는 있지만, 그 질서 자체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주님은 낮과 밤의 언약을 깨지 않으시듯, 영적 생명의 교대도 중단시키지 않으십니다.

 

이 글은 영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위로를 줍니다. 신앙이 약해지는 시기, 사랑이 식은 것처럼 느껴지는 시기는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하나의 ‘’ 혹은 ‘겨울’일 수 있습니다. 그 상태는 규례 안에 있으며, 다시 아침과 봄으로 이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그 교대 자체를 거부하지 않고, 주님의 질서 안에서 통과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주제를 창세기 822절에서 다시 자세히 다룰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거기서 씨 뿌림과 거둠, 더위와 추위, 낮과 밤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는 바로 여기서 말한 교대의 질서가 영원히 지속된다는 선언입니다. AC.37은 그 선언을 준비하는 기초로서, 광명체의 역할을 생명의 리듬이라는 관점에서 확정해 줍니다.

 

 

 

AC.38, 창1:18-19,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bygrace.kr

 

AC.36, 창1:14-17, 신앙이란 '주님 사랑', '이웃 사랑'에 순종하는 것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먼저 ‘love to the Lord’와 ‘love toward the neighbor’의 차이는 단순한 번역상의 문제가 아니라,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떠받치는 구조적 차이입니다. 이 두 표현에서 전치사가 다른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된 것으로, 사랑의 방향과 작동 방식을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to’는 직접적인 향함, 곧 근원으로의 수직적 방향을 나타내고, ‘toward’는 어떤 방향을 따라 나아가는 움직임, 곧 삶 속에서 전개되는 수평적 흐름을 나타냅니다.

 

love to the Lord’는 사람의 사랑이 직접 주님을 향해 올라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경외, 신뢰, 의존, 순종, 예배를 포함하는 사랑으로, 인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먼저 사람 안에 심어 주셔야만 가능한 사랑이며, 그래서 이 사랑은 언제나 위로부터 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랑을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 보며, 모든 참된 사랑의 방향을 정하는 원천으로 이해합니다.

 

반면 ‘love toward the neighbor’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삶의 관계 속으로 흘러나오는 방식을 가리킵니다. 이 사랑은 구체적이고 실천적이며, 이웃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돕는 실제 삶의 행위 속에서 드러납니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 단순한 인간적 친절이나 도덕적 선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이웃 사랑은 언제나 주님 사랑에서 비롯된 결과이며, 그래서 직접적인 향함이 아니라 ‘toward’, 곧 방향성을 지닌 흐름으로 표현됩니다.

 

이 두 사랑의 관계를 신학적으로 정리하면, 주님 사랑은 근원이고 이웃 사랑은 그 근원에서 흘러나온 결과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이웃을 참으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경우의 이웃 사랑은 결국 자기 만족이나 인정 욕구, 혹은 도덕적 우월감으로 변질됩니다. 반대로, 이웃 사랑 없이 주님 사랑을 말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말이나 생각에 머무를 뿐, 생명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두 사랑을 결코 분리하지 않으면서도, 결코 동일시하지도 않습니다. 주님 사랑은 사랑의 방향을 결정하고, 이웃 사랑은 그 방향이 올바른지를 검증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 사랑은 보이지 않지만, 이웃 사랑은 반드시 보입니다. 이웃 사랑은 주님 사랑의 시험대이며, 그 사랑이 실제로 살아 있는지를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삶의 차원에서 보면,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은, 그 고백이 실제 관계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하며, 어느 하나도 홀로 설 수 없습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love to the Lord’는 사랑의 근원이고, ‘love toward the neighbor’는 그 사랑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AC의 언어로 말하면, 주님 사랑은 하늘을 향한 방향이고, 이웃 사랑은 그 하늘이 땅 위에 세워지는 방식입니다.

 

이 구분을 붙들고 계시면, 신앙과 사랑, 그리고 행위의 관계가 구조적으로 정리되어 더 이상 혼동되지 않을 것입니다.  

 

2026-01-14(D4)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세상을 떠날 때까지 27년간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나?

저는 지난 2018년 11월부터 스베덴보리 관련 블로그를 시작했습니다만... 지금까지 구독자도, 그리고 글 조회 수나 좋아요 수도 여전히 한 자리 내지는 없기도 합니다. 저는 지난 만 7년을 정말 오

bygrace.kr

 

왜 에벨(Eber, 창10:24-25, 창11:14-16)의 때를 기준으로 나누나?

스베덴보리가 AC.470에서 ‘이 장부터 11장, 곧 에벨의 때까지 이름들은 결코 사람을 뜻하지 않고 실제적인 것들, 곧 상태들을 뜻한다’고 단언하는 것은, 창세기 1–11장을 해석하는 데 있어 하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6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사람들은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신앙을 단지 생각이라고 여기고, 어떤 이들은 주님을 향한 생각이라고 여기며, 또 어떤 이들은 신앙의 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신앙 교리에 포함된 모든 것을 아는 것과 인정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 특히 그 교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에 순종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 교리가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 곧 사람이 반드시 순종해야 할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love to the Lord)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사람이 이 사랑 안에 있지 않다면, 그는 신앙 안에 있지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해 주님은 너무도 분명하게 가르치셔서, 조금도 의심할 여지를 남기지 않으십니다. 마가복음입니다. They who have separated faith from love do not even know what faith is. When thinking of faith, some imagine it to be mere thought, some that it is thought directed toward the Lord, few that it is the doctrine of faith. But faith is not only a knowledge and acknowledgment of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comprises, but especially is it an obedience to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teaches. The primary point that it teaches, and that which men should obey, is love to the Lord, and love toward the neighbor, for if a man is not in this, he is not in faith. This the Lord teaches so plainly as to leave no doubt concerning it, in Mark: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12:29-31) The foremost of all the commandments is,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is one Lord; therefore thou shalt love the Lord thy God with all thy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mind, and with all thy strength: this is the foremost commandment; and the second is like, namely this, thou shalt love thy neighbor as thyself; there is none other commandment greater than these (Mark 12:29–31).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앞의 계명을 ‘크고 첫째 되는 계명(first and great commandment)이라 하시며,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on these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라고 하십니다 (22:37-41).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law and the prophets)는 신앙의 보편적 교리이며, 말씀 전체를 뜻합니다. In Matthew, the Lord calls the former of these the “first and great commandment,” and says that “on these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 (Matt. 22:37–41) The “law and the prophets” are the universal doctrine of faith, and the whole Word.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22:37-40)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그는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해 온 전통적 이해를 근본에서부터 해체합니다. 신앙을 단지 생각, 주님을 향한 생각, 혹은 교리 체계로 이해하는 모든 방식은, 신앙의 본질을 비껴간 것이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보기에 이런 오해는 우연이 아닙니다. 사랑이 신앙에서 분리될 때, 신앙은 필연적으로 지적 활동으로 축소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신앙을 사변적 사고로 여기고, 어떤 사람은 경건한 생각이나 태도로 여기며, 어떤 사람은 올바른 교리를 소유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이해는 공통된 한계를 갖습니다. 삶을 바꾸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핵심을 ‘순종(obedience)이라는 말로 단정합니다. 신앙은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앎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교리가 가르치는 바를 실제 삶에서 따르지 않는다면, 그 교리를 아무리 정확히 알고 있어도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때 순종은 외적 규율 준수가 아니라, 삶의 방향이 교리가 가리키는 사랑의 질서와 일치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신앙 교리가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주저 없이 두 가지를 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love to the Lord)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이 둘이 신앙의 중심이며, 이것이 빠지면 신앙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 사랑 안에 있지 않다면, 그는 신앙 안에 있지 않다고 말입니다.

 

이 주장은 윤리적 강조가 아니라, 구조적 진술입니다. 신앙의 모든 내용은 이 두 사랑으로 수렴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을 인정하고 그 질서 안에 머무는 것이며,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질서가 삶의 관계 속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이 둘이 분리되면, 신앙은 머물 곳을 잃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을 자신의 해석으로 주장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 자체로 확증합니다. 마가복음에서 주님은 모든 계명의 첫째와 둘째를 분명히 밝히십니다. 이 말씀은 계명의 목록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계명 전체의 구조를 드러냅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나란히 놓인 두 규범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 질서의 두 측면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더 나아가 ‘온 율법과 선지자’가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구약 전체, 곧 말씀 전체가 이 사랑의 질서를 설명하고 인도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별개의 체계가 아니라, 사랑을 향해 흐르는 하나의 강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율법과 선지자’를 신앙의 보편적 교리이자 말씀 전체라고 정의합니다. 신앙의 교리는 복잡한 체계로 흩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국 사랑을 가르치고, 사랑으로 살도록 이끄는 하나의 목적을 가집니다.

 

AC.36은 신앙을 다시 삶의 자리로 돌려놓습니다. 신앙은 고백이 아니라 순종이며, 순종은 두려움에서 나오지 않고 사랑에서 나옵니다. 이 글은 독자에게 묻습니다. 내가 신앙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나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AC.37, 창1:14-17,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bygrace.kr

 

AC.35, 창1:14-17, 사람 안의 두 역량, ‘의지와 이해’(will and understanding)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5

 

사람에게는 두 가지 타고나는 역량(faculties), 곧 의지와 이해(will and understanding)가 있습니다. 이해가 의지의 지배를 받을 때, 이 둘은 함께 하나의 마음을 이루며, 그 결과 하나의 생명이 됩니다. 이때에는 사람이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을 동시에 생각하고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의지와 어긋날 때에는, 그러니까 신앙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신앙과 반대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경우인데요, 이때는 하나의 마음이 둘로 나뉘는데, 하나, 곧 이해는 스스로를 하늘로 높이려 하고, 다른 하나, 곧 의지는 지옥을 향해 기울어지지요. 그런데 모든 행위에서 실제로 행동하는 쪽은 의지이기 때문에,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 그 사람 전체는 곧장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Man has two faculties: will and understanding. When the understanding is governed by the will they together constitute one mind, and thus one life, for then what the man wills and does he also thinks and intends. But when the understanding is at variance with the will (as with those who say they have faith, and yet live in contradiction to faith), then the one mind is divided into two, one of which desires to exalt itself into heaven, while the other tends toward hell; and since the will is the doer in every act, the whole man would plunge headlong into hell if it were not that the Lord has mercy on him.

 

 

해설

 

이 글은 앞선 AC.34의 논의를 인간의 내적 구조 차원으로 더욱 구체화합니다. 사랑과 신앙이 하나라는 말은 추상적인 선언이 아니라, 인간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두 기능, 곧 의지와 이해의 관계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감정과 이성의 단순한 결합체로 보지 않고, 의지와 이해라는 두 작용이 하나의 생명을 이루는 존재로 봅니다.

 

이해가 의지에 의해 다스려질 때, 사람 안에는 하나의 마음이 형성됩니다. 이 상태에서는 사람이 원하는 것, 행하는 것, 생각하는 것, 의도하는 것이 서로 어긋나지 않습니다. 삶은 일관되고, 내면과 외면이 갈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과 신앙이 결합한 상태이며,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생명의 구조입니다.

 

반대로, 이해가 의지와 분리되거나 의지에 맞설 때, 인간의 내면은 분열됩니다. 신앙을 말로는 고백하지만, 삶으로는 부정하는 상태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때 이해는 하늘을 말하고, 의지는 땅을 향하거나 그보다 더 낮은 곳을 향합니다. 사람은 머리로는 옳은 것을 알고 말할 수 있지만, 가슴으로는, 그러니까 실제 삶은 그와 정반대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분열을 단순한 모순이나 미성숙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것을 극도로 위험한 상태로 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행위에서 실제로 움직이고 결정하는 주체는 이해가 아니라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이해는 방향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의지입니다. 그래서 의지가 사랑 없는 방향으로 기울어 있으면, 이해가 아무리 하늘을 말해도 사람 전체는 그 방향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의지와 이해가 분열된 상태가 그대로 방치된다면, 사람 전체는 머리를 곤두박질치듯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위협의 언어가 아니라, 영적 질서에 대한 냉정한 진술입니다. 생명은 사랑이 있는 곳으로 흐르며, 의지는 그 흐름의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글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자비를 분명히 언급합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상태만으로 판단된다면, 의지와 이해가 어긋난 대부분의 사람은 설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즉시 버리지 않으시고, 자비로 붙들어 주십니다. 이 자비는 이해를 통해 의지를 서서히 교정하고, 사랑과 신앙이 다시 하나로 결합하도록 이끄는 힘입니다.

 

AC.35는 결국 인간의 신앙 문제를 도덕적 평가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로 다룹니다. 신앙이 말에만 머무를 때 왜 위험한지, 사랑 없는 신앙이 왜 겨울과 같은지를, 의지와 이해의 관계를 통해 명확히 보여 줍니다. 이 글은 독자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지금 내 이해와 내 의지는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도록 말입니다.

 

 

 

AC.36, 창1:14-17, 신앙이란 '주님 사랑', '이웃 사랑'에 순종하는 것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bygrace.kr

 

AC.34, 창1:14-17, ‘사랑과 신앙’, 겨울철 햇빛, 봄철 햇볕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4

 

사랑과 신앙은 분리될 수 없는데, 이는 둘이 하나요, 동일한 것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광명체들(luminaries)을 언급하실 때, 그것들을 하나로 간주,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으라(Let there be [sit]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라고 라틴어 단수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주님의 허락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천적 사랑 안에 있는 천사들은, 주님한테서 오는 그 사랑으로 인해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 있는데,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그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랑 없이 신앙의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은,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 속에 있어, 하늘의 뜰 첫 문턱에도 가까이 가지 못하고 다시 물러납니다. 이들 가운데는 주님의 계명대로 살지 않으면서도, 자기는 주님을 믿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두고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시기를, Love and faith admit of no separation, because they constitute one and the same thing; and therefore when mention is first made of “luminaries” they are regarded as one, and it is said, “Let there be [sit]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Concerning this circumstance it is permitted me to relate the following wonderful particulars. The celestial angels, by virtue of the celestial love in which they are from the Lord, are from that love in all the knowledges of faith, and are in such a life and light of intelligence that scarcely anything of it can be described. But, on the other hand, spirits who are in the knowledge of the doctrinals of faith, without love, are in such a coldness of life and obscurity of light that they cannot even approach the first threshold of the court of the heavens, but flee back again. Some of them, while not living according to his precepts, say that they have believed in the Lord, and it was of such that the Lord said in Matthew: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7:21, 22, 끝까지) Not everyone that saith unto me, Lord, Lord, shall enter into the kingdom of the heavens, but he that doeth my will: many will say to me in that day, Lord, Lord, have we not prophesied through thy name (Matt. 7:21–22, to the end).

 

[2]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신앙 안에도 있으며, 그렇게 해서 천적 생명 안에 있지만, 자기는 신앙이 있다 말하면서도 사랑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의 생명은 겨울철 햇빛과 같아 아무것도 자라지 않고 모든 것이 얼어붙어 죽은 것과 같습니다. 반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봄철 햇볕과 같아, 태양의 열로 인해 모든 것이 자라고 번성합니다.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도 정확히 이와 같은데, 이런 것들은 보통 말씀에서 세상과 땅 위에 있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또한 신앙이 전혀 없는 상태와 사랑 없는 신앙은, 주님께서 세대의 종말을 예고하시면서 ‘겨울(winter)에 비유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Hence it is evident that those who are in love are also in faith, and thereby in heavenly life, but not those who say they are in faith, and are not in the life of love. The life of faith without love is like the light of the sun without heat, as in the time of winter, when nothing grows, but all things are torpid and dead; whereas faith proceeding from love is like the light of the sun in the time of spring, when all things grow and flourish in consequence of the sun’s fructifying heat. It is precisely similar in regard to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 which are usually represented in the Word by such as exist in the world and on the face of the earth. No faith and faith without love are also compared by the Lord to “winter,” where he foretell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in Mark:

 

18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19이는 그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13:18, 19) Pray ye that your flight be not in the winter, for those shall be days of affliction (Mark 13:18–19).

 

여기서 ‘(flight)은 마지막 때를 뜻하며, 또한 각 사람이 죽을 때를 뜻합니다. ‘겨울’은 사랑이 없는 삶이고, ‘환난의 날(day of affliction)은 저세상에서의 그 비참한 상태를 말합니다. Flight” means the last time, and also that of every man when he dies. “Winter” is a life destitute of love; the “day of affliction” is its miserable state in the other life.

 

※ 여기 이 ‘(flight)은 휴거를 말합니다. 휴거는 특히 개신교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겉 글자의 뜻 그대로 이해를 했기 때문인데요, 같은 본문의 마태복음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24:31)

 

AC.4060번 글을 보면, 이 말씀은 새 교회의 일어남을 의미합니다. ‘택하신 자들’은 사랑의 선, 신앙의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사방에서’는 선과 진리의 모든 상태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는 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즉 휴거란, 종말의 때임에도 불구, 여전히 사랑과 신앙의 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주님의 새 교회 세우시는 걸 의미하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갑자기 사람들이 공중으로 들림 받고 하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태고교회 종말의 때에, 그런 암흑과도 같은 상황에서도 노아라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주님 신앙을 이어가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즉 그들을 리메인스처럼 보관하셨다가 결정적일 때 쓰신 것입니다. //

 

 

해설

 

이 글은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가장 단호하고도 경험적으로 확증하는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이 단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정도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 처음 ‘광명체들’이 언급될 때, 복수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실재처럼 단수로 다루어집니다. 사랑과 신앙은 분리될 수 없는, 한 생명의 두 작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리를 단순한 논증으로 제시하지 않고, 영계에서 직접 본 경험을 통해 설명합니다. 천적 사랑 안에 있는 천사들은, 그 사랑 자체로 인해 신앙의 모든 지식 안에 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신앙을 따로 배우거나 점검하지 않아도,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진리를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생명과 지성의 빛은 너무도 충만해서 인간의 언어로는 거의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사랑 없이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의 상태는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그들은 생명이 차갑고, 빛이 어두워서, 하늘의 문턱에도 접근하지 못합니다. 이는 신앙의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생명의 방향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지식의 시험장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 안에 있는 곳입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엄중한 말씀을 인용합니다. 주님을 입으로 부르고, 심지어 예언과 종교적 활동을 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조차, 사랑의 삶이 없으면 하늘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는 신앙의 내용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삶이 그 신앙과 결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믿었다는 고백보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는가’를 기준으로 삼으십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결론을 명확히 합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신앙 안에도 있으며, 그로써 천적 생명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있다 말하면서도 정작 사랑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실제로는 그 생명에 들어와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중간 지대가 없습니다.

 

이 차이는 자연의 비유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겨울철 햇빛과 같습니다. 빛은 있지만 열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자라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굳어 있고, 생명은 잠든 상태가 아니라 사실상 죽어 있습니다. 반대로 사랑에서 나온 신앙은 봄철 햇볕과 같습니다. 빛과 열이 함께 작용하여, 모든 것이 살아나고 자라며 열매를 맺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비유가 단순한 설명을 넘어, 말씀의 보편적 표현 방식임을 강조합니다.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은 늘 자연의 질서로 표현됩니다. 왜냐하면 자연 세계의 질서 자체가 영적 질서의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겨울’에 도망하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은, 이 글의 의미를 개인의 마지막 순간까지 확장합니다. ‘(flight, 비행, 도피, 휴거)은 세상의 끝일 뿐 아니라, 각 사람이 죽음으로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을 뜻합니다. 사랑 없는 상태, 곧 겨울 같은 삶으로 그 순간을 맞이하는 것은, 저세상에서 매우 비참한 상태로 이어집니다.

 

AC.34는 신앙의 진위를 가르는 가장 분명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신앙은 말로 증명되지 않고, 지식으로도 증명되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의 삶 안에서만, 신앙은 살아 있는 빛이 됩니다.

 

 

 

AC.35, 창1:14-17, 사람 안의 두 역량, ‘의지와 이해’(will and understanding)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bygrace.kr

 

AC.33, 창1:14-17, ‘사랑’, 생명과 기쁨의 근원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3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사랑도 없이는 생명이라는 게 있을 수도, 그리고 사랑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기쁨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음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합니다. 만일 사랑(loves), 같은 말이지만 욕망(desires)을 제거한다면, 욕망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이것을 생생히 본 적이 있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the loves of self and of the world)에도 어떤 생명과 기쁨의 모습 같은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은 참된 사랑과는 전적으로 반대됩니다. 참된 사랑이란 사람이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만큼, 그만큼 이웃을 미워하게 되고, 그 결과 주님을 미워하게 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사랑이 아니라 미움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이며, 참된 기쁨은 그 생명에서 나오는 기쁨입니다. 참된 사랑은 하나뿐이므로, 참된 생명도 하나뿐입니다. 그 하나의 생명에서 참된 기쁨과 참된 행복이 흘러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천국(heavens)의 천사들이 누리는 기쁨과 행복입니다. It is in everyone’s power very well to know that no life is possible without some love, and that no joy is possible except that which flows from love. Such however as is the love, such is the life, and such the joy: if you were to remove loves, or what is the same thing, desires—for these are of love—thought would instantly cease, and you would become like a dead person, as has been shown me to the life. The loves of self and of the world have in them some resemblance to life and to joy, but as they are altogether contrary to true love, which consists in a man’s loving the Lord above all things, and his neighbor as himself, it must be evident that they are not loves, but hatreds, for in proportion as anyone loves himself and the world, in the same proportion he hates his neighbor, and thereby the Lord. Wherefore true love is love to the Lord, and true life is the life of love from him, and true joy is the joy of that life. There can be but one true love, and therefore but one true life, whence flow true joys and true felicities, such as are those of the angels in the heavens.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생명과 사랑의 관계를 가장 단순하면서도 단호하게 정리합니다. 생명은 사랑 없이 존재할 수 없고, 기쁨은 사랑에서 흘러나오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앙적 선언이기 이전에, 인간 존재에 대한 보편적 관찰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돌아보면, 삶이 살아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에는 언제나 어떤 사랑, 어떤 욕망이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을 단순한 논증이 아니라, 영적 체험에 근거해 말합니다. 사랑과 욕망이 제거되면 생각이 즉시 멈추고, 사람은 죽은 사람과 같은 상태가 된다는 것을 실제로 봤다고 말합니다. 이는 생각이 이성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시작된다는 그의 일관된 인간 이해를 드러냅니다. 사랑이 멈추면 생각도 멈춥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나옵니다. 모든 사랑이 참된 사랑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도 겉으로는 생명과 기쁨을 닮은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은 거기서 열정과 만족을 느끼고,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그냥 닮은 것’이라고 부르며, 본질적으로는 참된 사랑과 반대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참된 사랑의 정의에 있습니다. 참된 사랑은 주님을 무엇보다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정의 앞에 서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은 즉시 그 정체가 드러납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만큼, 그는 필연적으로 이웃을 수단화하거나 배제하게 되고, 결국 주님이 질서로 세워 놓으신 사랑의 방향에 거슬러 서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것들을 사랑이 아니라 미움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이 말은 감정의 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의 문제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바깥을 향해 흐르는데, 자기 사랑은 모든 것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깁니다. 이 방향성의 전도(顚倒)가 곧 미움입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이 강해질수록,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이웃을 미워하게 되고, 그 근원에서 주님을 거부하게 됩니다.

 

이러한 구분 위에서 스베덴보리는 다시 한번 핵심을 정리합니다. 참된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이며, 참된 기쁨은 그 생명에서 흘러나오는 기쁨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중간 단계나 타협이 없습니다. 사랑이 둘일 수 없듯이, 참된 생명도 둘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참된 기쁨과 참된 행복 역시 하나의 근원에서만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의 천사들이 누리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외적 조건이나 성취에서 오지 않으며, 비교나 경쟁에서도 오지 않습니다. 사랑의 방향이 주님을 향해 바로 서 있을 때, 그 자체로 흘러나오는 생명의 상태입니다.

 

AC.33은 넷째 날의 ‘광명체’ 논의를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립니다. 빛과 열, 사랑과 신앙의 문제는 결국 삶이 어디에서 생명을 얻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이 글은 독자에게 단순하지만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 나를 살아 있게 만드는 사랑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사랑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AC.34, 창1:14-17, ‘사랑과 신앙’, 겨울철 햇빛, 봄철 햇볕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bygrace.kr

 

AC.32, 창1:14-17, ‘두 큰 광명체’인 해는 사랑, 달은 신앙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2

 

사랑과 신앙을 처음에는 함께 ‘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이라 하고, 그다음에는 사랑을 ‘더 큰 광명체(greater luminary), 신앙을 ‘더 작은 광명체(lesser luminary)라 합니다. 또한 사랑을 가리켜서는 ‘낮을 다스린다(rule by day) 하고, 신앙을 가리켜는 ‘밤을 다스린다(rule by night)고 합니다. 이런 내용이 바로 아르카나(arcana)인데, 특히 이 마지막 시대에 숨겨져 있는 것을 이제 제가 설명해도 좋다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가 있었습니다. 이 아르카나가 특히 이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는 이유는, 지금이 세대의 종말(the consummation of the age)이기 때문이며, 이때에는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친히 예고하신 바와 같습니다. Love and faith are first called “great luminaries,” and afterwards love is called a “greater luminary,” and faith a “lesser luminary”; and it is said of love that it shall “rule by day,” and of faith that it shall “rule by night.” As these are arcana which are hidden, especially in this end of days, it is permitted of the Lord’s Divine mercy to explain them. The reason why these arcana are more especially concealed in this end of days is that now i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when there is scarcely any love, and consequently scarcely any faith, as the Lord himself foretold in the evangelists in these words: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24:29) The sun shall be darkened, and the moon shall not give her light, and the stars shall fall from heaven, and the powers of the heavens shall be shaken (Matt. 24:29).

 

여기서 ‘(sun)는 사랑, 곧 어두워지는 사랑을, ‘(moon)은 신앙, 특히 빛을 내지 못하는 신앙을, ‘별들(stars)은 신앙 관련 지식(the knowledges of faith), 즉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러니까 하늘의 권능들(virtues and powers of the heavens) 의미합니다. By the “sun” is here meant love, which is darkened; by the “moon” faith, which does not give light; and by the “stars,” the knowledges of faith, which fall from heaven, and which are the “virtues and powers of the heavens.”

 

[2]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습니다.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합니다. 온 천국은 사랑의 천국이며, 천국(heavens)에는 사랑의 생명 외에 다른 생명은 없습니다. 모든 천국 행복이 여기서 나오는데, 그 그레이트(great)함은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 어떤 인간의 생각으로도 결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영향을 받는 이들은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모든 사랑과, 그 결과 모든 생명, 곧 사랑에서만 나오는 모든 생명과 모든 행복이 오직 주님에게서만 온다는 사실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합니다(perceive). 그들은 자신에게서 나오는 사랑이나 생명이나 행복은 조금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압니다. 모든 사랑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은, 주님의 변화산 사건에서 큰 광명체, 곧 ‘(sun)로도 표현되었습니다. 기록되기를, The most ancient church acknowledged no other faith than love itself. The celestial angels also do not know what faith is except that which is of love. The universal heaven is a heaven of love, for there is no other life in the heavens than the life of love. From this is derived all heavenly happiness, which is so great that nothing of it admits of description, nor can ever be conceived by any human idea. Those who are under the influence of love, love the Lord from the heart, but yet know, declare, and perceive, that all love, and consequently all life—which is of love alone—and thus all happiness, come solely from the Lord, and that they have not the least of love, of life, or of happiness, from themselves. That it is the Lord from whom all love comes was also represented by the great luminary or “sun” at his transfiguration, for it is written: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17:2) His face did shine as the sun, and his raiment was white as the light (Matt. 17:2).

 

얼굴은 가장 안쪽의 것들을 뜻하고, 옷은 거기서 나오는 것들을 뜻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신성(the Lord’s Divine)은 ‘(sun), 곧 사랑으로, 그의 인성(his human)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 곧 ‘(light)으로 상징되었습니다. Inmost things are signified by the face, and the things that proceed from them by the raiment. Thus the Lord’s Divine was signified by the “sun,” or love; and his human by the “light,” or wisdom proceeding from love.

 

 

해설

 

이 단락은 넷째 날의 핵심을 가장 깊은 차원에서 풀어 주는 부분입니다. 사랑과 신앙을 가리켜 왜 처음에는 함께 ‘큰 광명체들’이라 하고, 그다음에는 사랑은 더 크고 신앙이 더 작다고 하는지가 여기서 분명해집니다. 이는 가치 평가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질서에 대한 설명입니다. 사랑은 생명의 근원이고, 신앙은 그 생명이 인식과 이해의 차원에서 드러나는 방식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사랑이 우선합니다.

 

사랑을 가리켜 ‘낮을 다스린다’ 하는 말은, 인간의 밝은 상태, 곧 생명이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상태를 이끈다는 뜻입니다. 반면 신앙을 가리켜 ‘밤을 다스린다’ 하는 말은, 아직 완전한 빛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게 하는 기능을 한다는 뜻입니다. 밤에는 해가 없지만 달과 별이 길을 비추듯이, 신앙은 사랑이 완전히 지배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인간을 붙잡아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아르카나가 특히 ‘이 마지막 시대’에 숨겨져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입니다. 지금은 사랑이 거의 사라진 시대이기 때문에, 사랑을 신앙의 본질로 이해하는 시각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지식이나 교리로만 이해되고, 사랑은 부차적인 덕목으로 밀려났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사랑이 신앙의 생명이라는 사실이 안 보이게 됩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24장에서 하신 말씀은 바로 이 상태를 가리킵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으며 별이 떨어진다는 말은, 자연 재난의 예고가 아니라, 교회와 인간 내면의 상태 진단입니다. 사랑이 식으면 신앙은 빛을 잃고, 신앙의 지식들조차 삶과 연결되지 못한 채 흩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하늘의 덕과 능력이 흔들리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에 대한 언급은 이 글의 방향을 분명히 합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과 분리된 어떤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사랑을 살았고, 그 사랑 안에서 진리를 보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사랑에서 나온 신앙’ 외의 신앙 개념 자체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의 상태입니다.

 

천국이 사랑의 천국이라는 말은, 천국이 감정적으로 따뜻한 장소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 방식의 문제입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생명이 사랑에서 나오며, 그 사랑이 곧 생명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행복은 외부 조건에서 오지 않고, 사랑 그 자체에서 흘러나옵니다. 인간의 언어와 상상력이 그 행복을 담아낼 수 없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의 영향을 받는 이들이 갖는 태도는 매우 특징적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동시에 그 사랑이 자기에게서 나왔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사랑과 생명과 행복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알고, 말하며, 지각합니다. 이것이 참된 겸손이며, 참된 자유입니다.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없다는 인식은 무력함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 끊임없이 공급된다는 확신입니다.

 

마지막으로 변화산 사건은 이 모든 내용을 하나의 장면으로 요약합니다. 주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났다는 말은, 주님의 가장 안쪽 본질이 사랑임을 뜻합니다. 그의 옷이 빛처럼 희어졌다는 말은, 그 사랑에서 지혜와 진리가 흘러나와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얼굴과 옷의 구분은, 신적 본질인 신성과 그것의 발현인 인성을 구분하면서도 분리하지 않습니다.

 

AC.32는 결국 이것을 말합니다. 신앙은 빛이지만, 빛은 해에서 옵니다. 신앙은 생명을 비추지만, 생명은 사랑에 있습니다. 이 질서를 잃을 때 교회는 어두워지고, 이 질서를 회복할 때 인간 안에 다시 아침이 옵니다.

 

 

 

AC.33, 창1:14-17, ‘사랑’, 생명과 기쁨의 근원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bygrace.kr

 

AC.31, 창1:14-17, ‘큰 광명체들’, 곧 '해, 달, 별'의 속뜻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