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is thine anger kindled?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창4:6)
AC.359
‘여호와께서가인에게이르시되’(JehovahsaiduntoCain)는양심이말해주었음을뜻합니다.그의‘분하여함은어찌됨이며안색이변함은어찌됨이냐’(angerwaskindled, andthathiscountenancefell)는앞에서와같이체어리티가떠났으며내적인것들이변했음을상징합니다. “JehovahsaiduntoCain,” means that conscience dictated; that his “angerwaskindled,andthathiscountenancefell,” signifies as before that charity had departed, and that the interiors were changed.
해설
AC.359는 짧은 글이지만 매우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바로 앞 AC.357-358에서 가인의 ‘분하여함’은 체어리티가 떠난 것을, ‘안색이변함’, 원어로는 ‘얼굴이떨어졌다’는 내적인 것들이 변한 것을 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는 바로 그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아직 아벨을 죽이기 전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그 상태가 최종적으로 굳어지기 전에 주님의 경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 ‘여호와께서가인에게이르시되’가 ‘양심이말해주었다’(conscience dictated)는 뜻이라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입니다. 이것은 얼핏 보면 지금까지 배운 내용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인은 홍수 이전 태고교회의 후손을 다루는 계열에 속하는데, 태고교회의 특징은 양심이 아니라 퍼셉션이었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선과 진리를 외부에서 배운 지식을 토대로 양심적으로 판단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선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내적으로 지각했습니다. 반면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는 이러한 퍼셉션 대신 진리의 지식을 기초로 양심이 형성됩니다. AC.310은 이 차이를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AC.359의 ‘conscience’를 곧바로 홍수 후 고대교회에 속한 영적 인간의 양심과 똑같은 것으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스베덴보리가 사용한 ‘conscience’라는 말을 임의로 ‘perception’으로 고쳐서도 안 됩니다. 본문은 분명히 ‘consciencedictated’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가인이라는 상태가 태고교회의 처음 상태와도 다르고, 홍수 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과도 다르다는 사실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가인은 태고교회의 순수한 천적 상태를 표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교회 안에서 본래 사랑과 하나였던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구별되고, 점차 분리되어 독립적인 교리가 되어 가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가인의 시대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온전히 보존된 상태가 아니라 그것이 점차 쇠퇴하고 무너져 가는 과정에 속합니다. 앞서 창3을 살펴볼 때에도 타락한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 퍼셉션이 크게 약해졌지만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이 점에서 AC.359의 ‘양심이말해주었다’는 표현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가인에게 아직 홍수 후 영적 인간에게 주어질 새로운 질서의 양심이 완성되어 있었다는 뜻이라기보다, 체어리티에서 벗어나고 있는 그에게 여전히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내적으로 알리고 제지하는 어떤 딕테이트(dictate)가 있었다는 뜻으로 조심스럽게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실제로 앞의 AC.224에서도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자비와 평화와 모든 선이 ‘퍼셉션을가진사람들에게는내적딕테이트의원인이되고,비록다른방식이기는하지만양심을가진사람들에게도마찬가지’라고 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내적 딕테이트가 인간의 서로 다른 영적 상태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여짐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창4:6의 ‘네가분하여함은어찌됨이며안색이변함은어찌됨이냐’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가인의 상태를 모르셔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그의 내적 상태가 잘못된 방향으로 변하고 있음을 스스로 보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체어리티가 떠나면서 분노가 일어났고 내적인 것들이 변했지만, 그에게는 아직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고 돌이킬 가능성이 남아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주님의 섭리가 드러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이 분노하지 못하도록 그의 자유를 강제로 빼앗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그가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아무 말씀 없이 내버려 두시지도 않습니다. 분노가 일어나고 내적인 것들이 변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왜?’라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면서도 악이 실제 행위로 굳어지기 전에 돌이킬 길을 열어 두시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AC.359의 중심은 ‘가인에게양심이있었다’는 사실 자체보다, 체어리티에서 떠나고 있는 가인에게도 주님의 내적 경고가 계속되고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다음 절에서 그 경고는 더욱 구체적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가인은 아직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가고 있지만 아직 체어리티가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닙니다. 바로 그 결정적인 틈에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할 때에는 여기서 시대적 차이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이 아니므로 그들의 퍼셉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말씀의 진리를 통하여 형성하시는 양심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분노와 질투와 자기 의가 일어날 때, ‘왜내가이렇게분노하는가?’, ‘지금내가지키려는것이주님의진리인가,아니면나의proprium인가?’, ‘내안에서체어리티가떠나고있는것은아닌가?’라고 묻게 하는 양심의 경고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다만 이것은 AC.359의 가인이 오늘날 우리와 동일한 종류의 양심을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그 말씀의 원리를 오늘날 우리의 영적 구조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결국 AC.359는 매우 중요한 순간을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가떠났습니다.내적인것들이변했습니다.그런데여호와께서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고 해서 주님의 자비와 섭리가 먼저 그를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악을 선택하기 전에 그것을 보게 하시고 돌이킬 길을 마련하십니다. 가인의 이야기는 바로 이제 그 경고를 받아들일 것인지 거절할 것인지의 갈림길에 들어섭니다.
‘안색이변했다’(facesfalling)는것이내적인것들이변했음을의미한다는것은‘얼굴’(face)과얼굴이‘떨어짐’(falling)의의미에서분명합니다.고대인들에게얼굴은내적인것들을의미했는데,내적인것들이얼굴을통하여빛나기때문입니다.태고교회사람들은얼굴이내적인것들과완전히일치하는사람들이어서,누구든사람의얼굴을보고그가어떤성품과마음을가진사람인지를알수있었습니다.그들은얼굴로는한가지를나타내면서속으로는다른것을생각하는일을괴물같은것으로여겼습니다.가장과기만은당시혐오스러운것으로여겨졌으며,그러므로내적인것들이‘얼굴’로의미되었습니다.체어리티가얼굴에서빛날때에는얼굴이‘들렸다’(liftedup)고하였고,그반대의경우에는얼굴이‘떨어졌다’(fall)고하였습니다.그러므로축복의말씀에서처럼주님께서도사람을향하여‘그얼굴을드신다’(liftsuphisfacesuponman)고표현됩니다. That by the “facesfalling” is signified that the interiors were change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face” and of its “falling.”The face, with the ancients, signified internal things, because internal things shine forth through the face; and in the most ancient times men were such that the face was in perfect accord with the internals, so that from a man’s face everyone could see of what disposition or mind he was.They considered it a monstrous thing to show one thing by the face and think another.Simulation and deceit were then considered detestable, and therefore the things within were signified by the face.When charity shone forth from the face, the face was said to be “liftedup”; and when the contrary occurred, the face was said to “fall”; wherefore it is also predicated of the Lord that he “liftsuphisfacesuponman,” as in the benediction (Num. 6:26; and in Ps. 4:6),
여호와는그얼굴을네게로향하여드사평강주시기를원하노라(민6:26)
여호와여주의얼굴을들어우리에게비추소서(시4:6)
이말씀들은주님께서인간에게체어리티를주신다는것을의미합니다.얼굴이‘떨어진다’(facefalling)는것이무엇을뜻하는지는예레미야에서알수있습니다. by which is signified that the Lord gives charity to man.What is meant by the “facefalling,” appears from Jeremiah:
‘여호와의얼굴’(faceofJehovah)은자비입니다.주님께서어떤사람을향하여‘그얼굴을드신다’(liftsuphisface)는것은자비로그에게체어리티를주신다는것을의미하고,그반대가얼굴을‘떨어뜨리는것’(makesthefacetofall),곧인간의얼굴이떨어지는것입니다. The “faceofJehovah” is mercy, and when he “liftsuphisface” upon anyone, it signifies that out of mercy he gives him charity; and the reverse when he “makesthefacetofall,” that is, when man’s face falls.
해설
AC.358은 창4:5의 ‘안색이변하니’를 설명합니다. 개역개정의 ‘안색이변하다’는 자연스러운 번역이지만, 스베덴보리가 해설하는 표현은 훨씬 구체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facesfalling’, 곧 ‘얼굴이떨어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려면 먼저 왜 ‘얼굴’이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의미하며, 얼굴이 ‘들리는것’과 ‘떨어지는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로 앞 AC.357에서 가인의 ‘분노가타올랐다’는 것은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의미했습니다. 이제 AC.358은 그 결과를 한 단계 더 깊이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가 떠나자 단순히 감정 하나가 변한 것이 아니라 ‘내적인것들’ 자체가 변했고, 그것이 ‘얼굴이떨어졌다’는 말씀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고대인들에게 ‘얼굴’이 내적인 것들을 의미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내적인것들이얼굴을통하여빛나기때문’입니다. 특히 태고교회 사람들은 얼굴과 내적인 것이 완전히 일치하여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가 어떤 성품과 마음을 가진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들이 표정을 잘 읽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천적 상태에서는 내적 사랑과 외적 표현 사이에 오늘날과 같은 분리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얼굴로는 한 가지를 나타내면서 속으로는 다른 것을 생각하는 ‘가장과기만’을 괴물 같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다만 이것을 오늘날의 사회생활에 그대로 적용하여 속에 있는 감정을 무엇이든 얼굴과 말로 드러내야 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여 감정을 절제하는 것과 상대를 속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거짓된 모습을 만드는 것은 다릅니다. 거듭남의 목표도 악한 속마음을 그대로 외부에 표출하여 속과 겉을 일치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면 자체를 변화시키셔서 속에서 선을 사랑하고 겉에서도 그 선을 행하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이 배경에서 ‘얼굴이들린다’와 ‘얼굴이떨어진다’는 표현의 의미가 열립니다. 체어리티가 얼굴에서 빛날 때에는 얼굴이 ‘들렸다’고 하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얼굴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따라서 가인의 ‘안색이변했다’는 것은 단순히 화가 나서 얼굴빛이 어두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되는 상태에서 체어리티가 떠남으로써 내적인 것들이 변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도 가인의 진행 과정이 보입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가 생기며, 체어리티 없는 행위와 예배가 나타납니다. 이어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가 분노로 드러나고, 이제 그 결과 내적인 것들이 변합니다. 곧이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이러한 내적 변화가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의 소멸로 나아가는 것을 보여 줍니다.
민6:26과 시4:6을 인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분명해집니다. ‘여호와는그얼굴을네게로향하여드사평강주시기를원하노라’, ‘여호와여주의얼굴을들어우리에게비추소서’라는 말씀에서 주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얼굴을드신다’는 것은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께서인간에게체어리티를주신다’는 뜻입니다. 자연적인 의미에서 ‘얼굴을든다’고 하면 자신감이나 당당함을 생각하기 쉽지만, 여기서는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과 정반대입니다. 인간의 얼굴이 참으로 들리는 것은 자기 사랑으로 자신을 높일 때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가 그의 내적인 것들 안에 받아들여져 그것이 외적인 삶을 통하여 빛날 때입니다. 그러므로 ‘주의얼굴을들어우리에게비추소서’라는 기도 역시 주님께서 우리를 외면하고 계시다가 마음을 바꾸어 다시 바라봐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우리가 받아들여 그것이 우리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렘3:12은 같은 사실을 반대 방향에서 보여 줍니다. 개역개정은 ‘나의노한얼굴을너희에게로향하지아니하리라’고 번역하지만, 스베덴보리가 인용한 표현은 문자적으로 ‘내얼굴을너희에게떨어뜨리지아니하리라’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 ‘나는긍휼이있는자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여호와의얼굴’과 ‘자비’를 연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그는 매우 간결하게 ‘여호와의얼굴은자비’라고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얼굴을 드신다는 것은 자비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시는 것이고, 얼굴을 떨어뜨린다는 것은 그 반대의 외관을 나타냅니다. 민6:26과 시4:6, 렘3:12은 서로 따로 떨어진 증거 구절들이 아니라 ‘얼굴’, ‘자비’, ‘체어리티’, ‘들림과떨어짐’의 상응을 하나로 밝혀 주는 인용들입니다.
여기서 바로 앞 AC.357의 ‘여호와의진노’와 동일한 원리가 다시 나타납니다. AC.357에서는 말씀에서 여호와께 분노와 진노가 돌려지지만 실제 분노는 인간에게 속한 것이며, 인간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가운데 주님의 질서에 반발할 때 마치 주님께서 분노하시는 것처럼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AC.358에서도 주님의 얼굴 자체가 실제로 들렸다가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어떤 때에는 자비로운 얼굴로 인간을 바라보다가 인간이 잘못하면 노한 얼굴로 바꾸시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그 반대가 얼굴을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한 뒤 곧바로 ‘곧인간의얼굴이떨어지는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변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아니라 인간의 상태입니다. 주님의 얼굴은 자비이며 그 자비는 변하지 않지만, 인간이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 그의 내적인 것들이 달라집니다.
이 점은 가인의 경우를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주님께서 먼저 가인에게 얼굴을 떨어뜨리셨기 때문에 가인의 얼굴이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가인이 체어리티에서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것들이 변한 것입니다. 주님은 여전히 자비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시는 분이시지만,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그 체어리티에 반발합니다. 따라서 한쪽에는 ‘주님께서얼굴을드심’, 곧 자비로 체어리티를 주시는 끊임없는 신적 사랑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인간의얼굴이떨어짐’, 곧 그 체어리티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내적인 것들이 변하는 상태가 있습니다. 이 대비를 붙들면 ‘하나님께서왜가인을외면하셨는가?’라는 질문의 방향도 달라집니다. 주님께서 먼저 사랑을 거두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질서에서 돌아선 것입니다.
AC.358에서 태고교회 사람들의 얼굴과 내면의 일치를 설명하는 것도 이런 점에서 중요합니다. 다만 여기서 ‘태고교회전체가이지점에서곧바로속과겉이완전히분리된인간상태로바뀌었다’고 너무 크게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358이 직접 말하는 것은 고대인들에게 얼굴이 내적인 것을 의미했던 이유와 태고시대의 특별한 상태입니다. 가인은 태고교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의 질서가 무너져 가는 특정 계열과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이 번호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상태에서 체어리티가 떠남으로 내적인 것들이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변화가 이후 태고교회의 쇠퇴 과정과 연결되지만, 이 한 번호만으로 당시 모든 사람의 내적·외적 상태를 동일하게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얼굴’의 상응은 거듭남을 생각할 때에도 아름다운 방향을 보여 줍니다. 주님의 얼굴은 자비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얼굴을 드신다는 것은 자비로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그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면 내적인 것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변화하고, 그 선이 말과 행동과 관계와 일상의 쓰임을 통하여 외적으로 나타납니다. 태고교회에서 내적인 것들이 얼굴을 통하여 빛났듯이, 거듭나는 인간에게서도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선은 외적 삶을 통하여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그 선의 근원은 인간 자신의 proprium이 아니라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인간의 얼굴이 ‘들리는’ 것도 결국 자기 힘으로 자신을 높인 결과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체어리티를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결국 AC.358의 핵심은 ‘얼굴은내적인것들이빛나는자리’라는 데 있습니다. 체어리티가 있을 때 얼굴은 들리고, 체어리티가 떠날 때 얼굴은 떨어집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얼굴을 드신다는 것은 자비로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뜻이며, 주님의 얼굴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얼굴, 곧 인간의 내적인 상태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안색이변함’은 단순한 표정 변화가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 줍니다. AC.357이 ‘분노’를 통하여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를 보여 주었다면, AC.358은 그 결과 인간의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그 가인에게 ‘네가분하여함은어찌됨이며안색이변함은어찌됨이냐’고 말씀하십니다. 내적인 것들이 이미 변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주님의 부르심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가인의분노가타올랐다’(Cain’sangerwaskindled)는것이체어리티가떠났음을의미한다는것은,뒤에서그가그의아우아벨을죽였다고기록된사실에서분명합니다.아벨은체어리티를의미합니다.분노는자기사랑과그욕망들에반대되는모든것으로부터생겨나는일반적인결과입니다.이것은악한영들의세계에서분명하게지각됩니다.그곳에는주님을향한일반적인분노가존재하는데,그이유는악한영들에게체어리티가없고증오가운데있기때문입니다.자기사랑(amoriproprio)과세상사랑에호의적이지않은것은무엇이든반발을일으키며,이것이분노로나타납니다.말씀에서는‘분노’(anger),‘진노’(wrath),심지어‘격노’(fury)까지도여호와께자주돌려지지만,그것들은인간에게속한것이며,앞에서언급한이유로그렇게보이기때문에여호와께돌려지는것입니다.그러므로시편에는다음과같이기록되어있습니다. That “Cain’sangerwaskindled” signifies that charity had departed is evident from what is afterwards related of his killing his brother Abel, by whom is signified charity.Anger is a general resulting from whatever is opposed to self-love and its cupidities.This is plainly perceived in the world of evil spirits, for there exists there a general anger against the Lord, in consequence of evil spirits being in no charity, but in hatred, and whatever does not favor self-love [amori proprio] and the love of the world, excites opposition, which is manifested by anger.In the Word, “anger,” “wrath,” and even “fury,” are frequently predicated of Jehovah, but they are of man, and are attributed to Jehovah because it so appears, for a reason mentioned above.Thus it is written in David:
여호와께서실제로누구에게분노를보내시는것이아니라,사람들이그것을자기자신에게불러들이는것입니다.또한주님께서악한천사들을그들에게보내시는것이아니라,인간이그들을자기에게로끌어당기는것입니다.그러므로주님께서‘그의노여움이나아갈길을닦으시고그들의목숨이죽음을면하지못하게하셨다’(hathweighedapathforhisanger,andwithheldnottheirsoulfromdeath)고덧붙여말한것입니다.또한이사야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Not that Jehovah ever sends anger upon anyone, but that men bring it upon themselves; nor does he send evil angels among them, but man draws them to himself.And therefore it is added, that he “hathweighedapathforhisanger,andwithheldnottheirsoulfromdeath”; and therefore it is said in Isaiah,
이로부터‘분노’(anger)는악을의미하며,같은말로하면체어리티가떠난상태를의미한다는것이분명합니다.whence it is evident that “anger” signifies evils, or what is the same, a departure from charity.
해설
AC.357은 앞의 AC.355에서 짧게 제시했던 ‘분노는체어리티가떠났음을뜻한다’는 말을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번호는 가인의 분노만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의 악한 분노가 어디에서 생기는지, 악한 영들이 왜 주님께 분노하는지, 더 나아가 사랑 자체이신 여호와께 왜 말씀에서는 ‘분노’와 ‘진노’와 ‘격노’가 있는 것처럼 기록되는지까지 하나로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의 분노가 체어리티의 떠남을 뜻한다는 근거를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서 찾습니다. 가인은 결국 아벨을 죽이고, 아벨은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이분노했다’는 것은 체어리티가 이미 떠난 상태가 드러나고 있으며,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를 내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가 하나의 교리로 인정되며, 체어리티 없는 예배가 생기고, 이제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가 분노로 나타난 뒤 마침내 아벨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분노의 근원을 ‘자기사랑과그욕망들에반대되는모든것’에서 찾습니다. 이것을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자연적인 분노가 곧 자기 사랑이라는 일반 공식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불의와 악에 대한 정당한 분개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AC.357이 직접 다루는 것은 가인이 표상하는 악한 상태에서 나오는 분노입니다. 자기 사랑이 지배적 사랑이 되면 자기 뜻, 자기 이익, 자기 명예, 자기 판단이 관철되기를 원하고, 그것에 반대되는 것이 나타날 때 반발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가인에게 적용하면 그의 분노는 단순히 ‘동생의제물은받아주셨는데내것은받아주지않으셨다’는 형제간의 질투를 넘어섭니다. 가인이 의미하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체어리티보다 우위를 차지하려 하지만, 주님의 질서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입니다. 바로 그 질서가 가인의 자기주장과 충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 곧 체어리티 자체가 가인에게 불편한 것이 되고 마침내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까지 나타납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분노를 살필 때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이 ‘진리를지키기위해’ 분노한다고 생각할 때에도 실제로 지키려는 것이 주님의 진리인지, 아니면 자기의 교리적 위치와 명예와 판단인지 자기 안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원리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악한영들의세계’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는 그곳에 ‘주님을향한일반적인분노’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들을 미워하거나 공격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체어리티가 없고 증오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호의적이지 않은 모든 것이 그들에게 반발을 일으킵니다. 주님은 변하지 않으시고 주님의 사랑과 선도 변하지 않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존재의 상태가 다릅니다. 주님과 천국의 질서를 사랑하는 천사에게는 그 질서가 기쁨과 평안이지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지배적으로 삼은 악한 영에게는 같은 질서가 자기 욕망을 제한하는 것으로 경험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그들에게 분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주님과 그분의 질서에 반발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AC.357은 말씀에 나타나는 ‘여호와의진노’라는 매우 중요한 문제로 나아갑니다.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분노하시고 진노하시며 심지어 격노하시는 것처럼 표현된 곳이 많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이 ‘인간에게속한것이며,그렇게보이기때문에여호와께돌려지는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돌아서 악 가운데 들어가면 그 결과로 고통과 심판을 경험하며, 인간의 관점에서는 마치 하나님께서 진노하여 벌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말씀의 문자에는 이러한 외관에 따라 주님께서 행하시는 것처럼 표현되는 경우가 있지만, 속뜻에서는 악의 원인이 주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질서에서 돌아선 데 있음을 밝혀 줍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시78:49-50을 인용한 이유가 중요합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여호와께서 ‘맹렬한노여움과진노와분노’를 보내시고 심지어 ‘재앙의천사들’을 보내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인용 직후 이것을 직접 해석합니다. ‘여호와께서실제로누구에게분노를보내시는것이아니라,사람들이그것을자기자신에게불러들이는것입니다.또한주님께서악한천사들을그들에게보내시는것이아니라,인간이그들을자기에게로끌어당기는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편 인용은 단순한 보조 구절이 아니라 ‘여호와의진노’라는 말씀의 외관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것입니다. 이어지는 사45:24에서는 오히려 ‘그에게노하는자’가 부끄러움을 당한다고 말합니다. 시편의 문자에서는 여호와께서 인간에게 노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사야에서는 인간이 여호와께 노합니다. AC.357은 이 두 표현을 통하여 실제 분노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악한천사들을보내시는것이아니라인간이그들을자기에게로끌어당긴다’는 말도 주의 깊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의식적으로 악한 영을 불러들인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의 성질에 따른 영적 결합을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에서는 같은 성질의 사랑이 서로 결합합니다. 사람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증오와 복수와 기만 같은 악을 자기 삶의 지배적 사랑으로 받아들일수록 그와 같은 사랑 가운데 있는 악한 영들과 내적으로 가까워집니다. 반대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사랑하고 체어리티 가운데 살수록 천국의 질서와 가까워집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악을 방치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악을 제한하시고 인간을 선으로 이끄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여 선을 강요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유 가운데 선택한 사랑의 결과가 허용되는 것과 주님께서 악 자체를 만들어 보내시는 것은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시78:50의 ‘그는진노로길을닦으사’라는 표현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자에서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진노가 나아갈 길을 직접 마련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을 주님께서 악과 형벌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내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선택한 악의 결과가 진행되도록 허용되는 것이 인간에게는 주님께서 직접 행하신 것처럼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의 기원은 결코 주님에게 있지 않습니다. 동시에 이것이 악의 결과나 심판 자체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악은 실제 결과를 낳습니다. 다만 그 결과의 원인을 주님의 보복적 분노에서 찾지 않는 것입니다.
이 모든 설명은 결국 다시 가인의 분노로 돌아옵니다. 창4:5에서 먼저 분노하는 분은 여호와가 아니라 가인입니다. 주님의 질서가 가인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가인이 나타내는 자기중심적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의 질서에 반발합니다. 앞의 AC.352-354에서 아벨의 ‘기름’은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했고, 그 모든 사랑이 주님에게서 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AC.357에서는 자기 사랑(amori proprio)이 등장합니다. 한쪽에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자기를 중심에 두는 사랑이 있습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의 갈등은 단순한 형제간의 갈등을 넘어, 무엇이 신앙과 삶을 지배할 것인가 하는 서로 반대되는 사랑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AC.357마지막에서 ‘분노’가 ‘악’을 의미하며, 같은 말로 하면 ‘체어리티가떠난상태’를 의미한다고 한 결론은 이 번호 전체를 압축합니다. 체어리티가 떠난 자리에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면 자기 욕망에 반대되는 것을 미워하고 공격하는 상태가 생깁니다. 가인의 분노는 바로 그 내적 상태가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다른 사람의 분노를 판정하는 도구로 사용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살피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무엇이내안에서거슬렸기에내가이렇게분노하는가?내가지키려는것은주님의선과진리인가,아니면내뜻과명예와판단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분노는 때때로 자기 안에서 무엇이 지배적 사랑이 되어 있는지를 드러내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AC.357은 동시에 주님에 관한 매우 중요한 진리를 보여 줍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악을 보내시는 분이 아니며, 악한 천사를 보내어 인간을 괴롭히시는 분도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사랑과 선 자체이십니다. 변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입니다. 인간이 체어리티에서 자기 사랑으로 돌아설 때 자기와 같은 악과 결합하고 그 결과를 경험하면서, 변함없는 주님의 질서조차 자기에게 대적하는 진노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이야기는 ‘분노하시는하나님과반항하는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주님 앞에서 인간이 체어리티를 떠나 자기 사랑으로 향할 때 그의 내면과 영적 환경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가인’(Cain)이사랑에서분리된신앙,또는그러한분리가가능하다고인정하는교리를의미한다는것과,‘그의제물을돌아보지않으셨다’(tohisofferinghelookednot)는것이그의예배가받아들여질수없었음을의미한다는것은앞에서설명했습니다. That by “Cain” is signified faith separated from love, or a doctrine that admits of this separation; and that “tohisofferinghelookednot” signifies that his worship was not acceptable, has been shown before.
해설
AC.356은 새로운 내용을 전개하기보다 바로 앞 AC.355의 첫 두 내용을 확인하고 정리하는 짧은 연결 단락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두 가지 모두 ‘앞에서설명했다’고 밝힙니다. 첫째,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또는 그러한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를 의미합니다. 둘째, ‘그의제물을돌아보지않으셨다’는 것은 그러한 신앙에서 나온 예배가 받아들여질 수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번호의 역할은 이미 나온 내용을 다시 길게 설명하는 데 있다기보다, 이제 AC.357과 AC.358에서 이어질 ‘분노’와 ‘안색이변함’의 속뜻을 설명하기 위한 전제를 분명하게 세우는 데 있습니다.
특히 ‘가인’의 의미에는 단순히 신앙과 사랑이 실제 삶에서 분리되어 있는 상태뿐 아니라 ‘그러한분리가가능하다고인정하는교리’까지 포함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삶에서는 아직 체어리티가 충분히 나타나지 않는 것과, 사랑과 체어리티가 없어도 신앙은 그 자체로 참된 신앙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분리가 하나의 교리적 원리로 정당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신앙과 사랑을 개념적으로 ‘구별’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과 사랑을 구별하여 이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그 생명인 사랑에서 떼어 내고도 온전한 신앙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분리’에 있습니다.
‘그의제물을돌아보지않으셨다’는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가인이라는 개인을 주님께서 미워하시거나 그의 제물을 보고 감정적으로 거절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의 AC.349에서 살펴본 것처럼 외적 예배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그것들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라는 내적 생명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는 외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어도 살아 있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주님께서는신앙은기뻐하지않으시고체어리티만기뻐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AC.353은 오히려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이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에서분리된신앙’입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의 대비는 ‘신앙대체어리티’가 아니라 ‘체어리티에서분리된신앙’과 ‘체어리티와결합되어생명을얻는신앙’의 대비입니다. 아벨이 의미하는 체어리티는 신앙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에 생명을 줍니다.
이렇게 보면 AC.356은 짧지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중요한 연결점입니다. 지금까지는 ‘가인이무엇을의미하는가’, ‘그의제물은무엇을의미하는가’, ‘왜그예배가받아들여질수없는가’를 설명했다면, 이제부터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인간의 내적인 것들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가 드러납니다. 가인은 제물을 계속 드리고 있으므로 외적인 종교생활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예배의 내적 생명인 체어리티가 떠나면 외적인 예배만으로 그 결핍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상태에서 ‘가인이몹시분하여안색이변했다’는 다음 말씀이 이어집니다. 따라서 AC.356이 다시 확인하는 핵심은 단순합니다.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홀로 살아 있을 수 없으며, 예배 역시 체어리티에서 생명을 얻을 때 살아 있는 예배가 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랑과 선의 생명은 인간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But to Cain and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창4:5)
AC.355
앞에서말한바와같이‘가인’(Cain)은사랑에서분리된신앙,또는그러한분리가가능하다고인정하는교리를의미합니다.그의‘제물을돌아보지않으셨다’(offeringnotbeinglookedto)는것은앞에서와같이그의예배가받아들여질수없었음을의미합니다.‘가인이몹시분하여그의안색이변했다’(Cain’sangerbeingkindledexceedingly,andhisfacesfalling)는것은내적인것들이변했음을의미합니다.‘분노’(anger)는체어리티가떠났음을뜻하고,‘안색’(faces)은내적인것들을뜻하는데,그것들이변할때안색이‘떨어졌다’(fall)고말합니다. By “Cain,” as has been stated, is signified faith separated from love, or such a doctrine as admits of the possibility of this separation; by his “offeringnotbeinglookedto” is signified as before that his worship was unacceptable.By “Cain’sangerbeingkindledexceedingly,andhisfacesfalling” is signified that the interiors were changed.By “anger” is denoted that charity had departed; and by the “faces,” the interiors, which are said to “fall” when they are changed.
해설
AC.355부터 창4:5의 속뜻이 시작됩니다. 앞의 AC.346-354에서는 가인과 아벨의 제물을 통하여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와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의 차이를 살펴보았습니다. 가인에게도 행위와 예배가 있었지만 그 안에는 체어리티의 생명이 없었고, 아벨의 예배에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의 생명이 있었습니다. 이제 말씀의 초점은 ‘그차이가드러난뒤가인에게어떤변화가일어나는가?’로 옮겨갑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몹시분하여안색이변했다’는 말씀을 단순히 한 개인이 화를 냈다는 심리 묘사로 읽지 않고, 체어리티가 떠나면서 ‘내적인것들이변하는’ 교회적 상태의 변화로 읽습니다.
먼저 AC.355는 ‘가인’의 의미를 다시 확인하면서 중요한 표현 하나를 덧붙입니다. 가인은 ‘사랑에서분리된신앙’뿐 아니라 ‘그러한분리가가능하다고인정하는교리’를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단순한 생활상의 부족보다 더 깊은 문제가 들어 있습니다. 사람이 신앙을 고백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충분한 체어리티를 보이지 못하는 것과, ‘신앙은사랑과체어리티에서분리되어도여전히참된신앙일수있다’고 교리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분리가 하나의 원리로 정당화됩니다. 그렇게 되면 체어리티는 더 이상 신앙의 생명으로 여겨지지 않고, 있어도 좋고 없어도 되는 부수적인 것으로 밀려날 수 있습니다.
이 흐름을 이해할 때 ‘처음에는단순한구별이었는데나중에분리가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 조심해야 합니다. 신앙과 사랑을 개념적으로 구별하는 것 자체는 악이 아닙니다. 오히려 후대의 인간에게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무엇인지 구별하여 배우는 일이 필요합니다. 가인의 문제는 AC.338에서 이미 신앙을 사랑 안에서 살아 있는 것으로만 보지 않고 ‘그자체로하나의것’으로 인식하고 인정하기 시작한 데서 나타납니다. AC.347이 처음의 가인 교리가 후에 이른 상태만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고 한 것도, 처음에는 신앙이 사랑에서 그렇게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흐름은 정상적인 구별이 자동으로 악이 된 것이 아니라, 신앙의 독립성이 인정되고 그 분리가 점점 멀어져 마침내 분리 자체를 허용하는 교리로 굳어지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그의제물을돌아보지않으셨다’는 말씀도 앞의 설명과 연결됩니다. AC.349에서 ‘제물’은 예배를 의미했고, AC.354에서는 체어리티에 기초한 아벨의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가인이라는 개인에게 화가 나셔서 그의 제사를 거부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예배가 주님의 질서와 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선이 아벨에게는 열리고 가인에게는 닫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서로 다른 것은 인간 쪽의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체어리티와 결합된 예배에는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흐를 수 있지만,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는 그 생명의 질서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가인이몹시분하였다’는 반응이 나타납니다. AC.355는 이 ‘분노’를 ‘체어리티가떠났음’으로 풀이합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모든 분노가 곧 체어리티의 소멸을 뜻한다는 일반적인 심리 공식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상태에서 분노는 체어리티가 더 이상 그 안에서 살아 있지 않음을 드러냅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자신의 독립성과 우위를 주장할수록 체어리티는 설 자리를 잃습니다.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가 자기주장을 방해하는 것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의 분노는 단순히 ‘내제물이받아들여지지않았다’는 서운함보다 훨씬 깊은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렇다고 분노라는 감정 자체를 언제나 악이라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불의와 악을 보고 일어나는 정당한 분개도 있을 수 있고, 자연적인 인간의 감정은 매우 복합적입니다. AC.355가 직접 말하는 것은 그러한 일반적인 감정론이 아니라 ‘가인’의 속뜻 안에서 분노가 체어리티의 떠남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여 ‘저사람이화를냈으니체어리티가없다’고 판단하기보다, 자기 안에서 신앙이나 교리적 확신이 사랑과 체어리티를 밀어내면서 분노와 적대감을 낳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펴보는 데 사용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이어지는 ‘안색이변했다’는 말씀은 이 변화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줍니다. 영어 원문의 ‘hisfacesfalling’은 문자적으로는 ‘그의얼굴들이떨어졌다’는 표현인데, 스베덴보리는 ‘얼굴들’(faces)이 내적인 것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얼굴에 관한 상응을 AC.355보다 지나치게 앞서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 번호가 직접 밝히는 결론을 붙드는 것입니다. 곧 ‘가인의안색이변했다’는 것은 ‘내적인것들이변했다’는 뜻입니다. 체어리티의 떠남은 단지 외적인 태도 하나가 달라진 정도가 아니라 사람의 내적 상태 자체에 변화가 일어났음을 나타냅니다. 얼굴이 그 내적인 것을 표상하기 때문에 내적인 것이 변하면 얼굴이 ‘떨어졌다’고 표현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355는 가인의 진행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지금까지의 흐름은 교리나 예배의 문제로만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신앙에서 죽은 행위가 나오며, 그 행위에서 체어리티 없는 예배가 나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분리는 인간의 내적인 것들 자체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신앙과 사랑의 관계를 뒤집는 것이 단지 머릿속의 신학적 오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계속 붙들고 살아갈 때 애정과 의지의 방향까지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내적인 변화가 다음 단계에서 체어리티를 의미하는 아벨을 실제로 소멸시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AC.338부터 이 지점까지를 연결하면 그 흐름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신앙은 본래 태고교회의 사랑 안에서 살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인으로 표상되는 상태에서는 신앙이 ‘그자체로하나의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앙은 사랑에서 더욱 멀리 분리되고, 마침내 그러한 분리가 가능하다는 교리까지 형성됩니다. 그 신앙에서도 행위가 나오고 예배도 이루어지지만 체어리티가 없으므로 그 행위와 예배에는 내적 생명이 없습니다. 이제 AC.355에서는 체어리티가 떠나고 내적인 것들이 변합니다. 그리고 이 흐름은 결국 창4:8의 ‘가인이그의아우아벨을쳐죽이니라’, 곧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따라서 아벨의 죽음은 아무런 내적 과정 없이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오래 진행되어 온 분리의 마지막 결과입니다.
이 때문에 AC.355는 교리와 삶의 관계에 대해서도 중요한 경고를 줍니다. 교리의 오류가 모두 즉시 사람을 악하게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은 많은 것을 불완전하게 알고도 선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교리가 악한 삶을 정당화하거나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며, 그러한 분리를 계속해서 옳다고 확증하게 한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교리는 우리가 무엇을 참이라고 여기고 무엇을 선이라고 판단하는지를 형성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붙들고 있는 거짓된 질서는 결국 애정과 삶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가인의 교리가 위험한 것은 단순히 한 문장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신앙을 그 생명인 사랑에서 떼어 내는 방향으로 사람을 이끌기 때문입니다.
특히 종교적 확신을 가지고 있을 때 이 점은 더욱 중요합니다. 가인은 종교를 버린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여호와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외적인 예배가 계속되고 있음에도 그 안에서는 체어리티가 떠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읽으며 바른 교리를 고백한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의 내적 상태가 언제나 바르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진리를 알수록 그 진리가 나를 주님 앞에서 낮추고 있는지, 이웃의 선을 기뻐하게 하는지, 자신의 악을 살펴 피하게 하는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쓰임으로 나아가게 하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다면 진리는 자기 우월감의 근거가 아니라 사랑이 어떻게 바르게 행해야 하는지를 밝혀 주는 빛이 됩니다.
다만 여기서 ‘다른사람의선을기뻐할수있는가’를 체어리티의 유일한 심리적 척도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체어리티는 단순히 따뜻한 감정을 많이 느끼는 상태보다 깊습니다. AC.351에서 보았듯 그것은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고, 그의 어려움을 자기와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사랑입니다. 따라서 체어리티가 살아 있다는 것은 감정 표현의 정도보다 이웃의 참된 유익을 원하고 그것을 위해 실제로 선을 행하려는 방향에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체어리티의 근원 역시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AC.355마지막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아직 아벨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가인의 내적인 것들이 이미 변했고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가 드러났지만, 창4:6에서 여호와께서는 바로 그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분하여함은어찌됨이며안색이변함은어찌됨이냐.’ 이것은 다음 AC.359이하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게 되지만, 이미 중요한 방향을 보여 줍니다. 인간의 상태가 악해지고 내적인 것들이 변하고 있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곧바로 그를 버리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하시고 경고하시며, 악이 완전히 행위로 굳어지기 전에 돌이킬 길을 제시하십니다. 그러므로 AC.355의 어두운 변화는 주님의 부르심이 끝났다는 선언이 아니라, 그 부르심이 더욱 절실해지는 지점입니다.
결국 AC.355의 중심은 ‘가인이화를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핵심은 ‘체어리티가떠났고,그결과내적인것들이변했다’는 데 있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하나의 독립적인 것으로 인정되고, 그 분리가 교리적으로 허용되며, 그 상태에서 행위와 예배가 계속될 때, 결국 체어리티 자체가 밀려나고 인간의 내적 상태가 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참됨은 교리적 정확성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으며, 그 생명은 실제 이웃의 선을 위한 삶과 쓰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AC.355는 아벨이 죽기 직전, 가인의 ‘얼굴’이 먼저 변했다는 말씀을 통하여 체어리티의 소멸은 언제나 외적인 행위 이전에 내적인 질서의 변화와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4
‘여호와께서아벨과그의제물을돌아보셨다’(JehovahlookedtoAbel,andtohisoffering)는것은체어리티에속한것들과체어리티에기초한모든예배가주님을기쁘시게한다는것을의미합니다.이는‘아벨’(Abel)과그의‘제물’(offering)에관하여앞에서이미설명한바와같습니다. That “JehovahlookedtoAbel,andtohisoffering,” signifies that the things of charity, and all worship grounded therein, are pleasing to the Lord, has been explained before, as regards both “Abel,” and his “offering.”
해설
AC.354는 매우 짧으며, 사실상 AC.350-353전체를 한 문장으로 마무리하는 결론입니다. 새로운 상응을 제시하기보다 창4:4의 마지막 부분인 ‘여호와께서아벨과그의제물을돌아보셨다’는 말씀의 속뜻을 다시 확인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그의 ‘제물’은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벨이라는 개인이 가인보다 더 사랑받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내적 상태와 예배가 주님의 질서와 하나를 이루는가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표현은 ‘체어리티에기초한모든예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지 체어리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지 않고, 예배가 무엇에 기초하고 있는가를 말합니다. 이것은 AC.349에서 밝힌 ‘외적인것은내적인것들로부터생명을얻으며,곧그것들을통하여주님에게서생명을얻는다’는 원리와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외적인 예배의 형식이 아무리 온전해 보여도 그 안에 체어리티라는 내적 생명이 없다면 그것만으로 살아 있는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외적인 예배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를 내적 생명으로 받아 그것을 표현한다면, 그 외적인 것 역시 살아 있는 예배가 됩니다. 그러므로 외적 예배와 내적 예배 가운데 어느 하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올바른 질서가 중요합니다.
AC.350-353은 바로 이 질서를 차례로 밝혀 왔습니다. AC.350은 ‘아벨’이 체어리티이고 ‘양떼의처음난것’이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을, ‘기름’이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개괄했습니다. AC.351은 체어리티를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로 설명했고, AC.352는 모든 사랑이 주님에게서 오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다고 했습니다. AC.353은 ‘기름’이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하며,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AC.354의 ‘여호와께서아벨과그의제물을돌아보셨다’는 말씀은 이 모든 내용을 하나로 묶습니다. 아벨의 예배가 살아 있는 까닭은 체어리티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 체어리티와 사랑의 생명이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을기쁘시게한다’는 표현도 조심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보시고 기분이 좋아지시고 가인의 제물을 보시고 마음이 상하셨다는 식으로 인간의 변화하는 감정을 주님께 그대로 투사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과 선은 변하지 않습니다. 차이는 인간이 그 사랑과 선을 어떤 상태에서 받아들이느냐에 있습니다.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들이는 질서 안에 있으므로 ‘주님을기쁘시게하는것’으로 표현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는 그 생명의 질서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돌아보심’과 ‘돌아보지않으심’은 변하는 주님의 사랑보다 서로 다른 인간의 내적 상태를 드러내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과 아벨의 두 제물을 가르는 기준도 더욱 선명해집니다. 가인 역시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에게도 행위가 있었고 외적인 예배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예배를드렸느냐,드리지않았느냐’가 아닙니다. 더구나 곡식보다 동물 제물이 본질적으로 우월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AC.348-349에서 살펴보았듯 가인의 ‘땅의소산’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를, 그의 ‘제물’은 거기에서 나온 예배를 의미합니다. 반면 아벨의 제물은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입니다. 결국 두 제물을 가르는 것은 ‘무엇을드렸는가?’보다 ‘그예배가어디에서생명을얻고있는가?’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아벨의 예배를 인간의 공로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아벨에게 체어리티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스스로 가인보다 더 훌륭한 예배를 만들어 주님께 드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AC.352가 ‘모든사랑은주님에게서오는것이며,인간에게서오는것은조금도없다’고 했고, AC.353도 ‘기름’이 의미하는 천적인 것이 주님께 속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란 인간이 자기에게서 좋은 것을 생산하여 주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들이고 그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 선에 따라 살아가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사랑하고 선을 행하지만 그 사랑과 선의 생명을 자기 proprium에 돌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다시 분명하게 해 줍니다. 지금까지 가인과 아벨을 읽으면서 반복해서 보았듯 스베덴보리의 요점은 ‘신앙보다행위가중요하다’거나 ‘신앙대신체어리티를가져야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AC.353은 오히려 ‘신앙역시사랑에서비롯될때에는천적’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생명을 받을 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배도 체어리티에 기초할 때 살아 있는 예배가 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 예배와 삶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오는 하나의 생명 안에서 올바른 질서를 이루는가입니다.
AC.354는 바로 다음 AC.355로 넘어가기 직전의 중요한 경계이기도 합니다. 창4:4에서는 ‘여호와께서아벨과그의제물은받으셨으나’라고 했고, 창4:5에서는 ‘가인과그의제물은받지아니하신지라가인이몹시분하여안색이변하니’라고 이어집니다. 따라서 AC.354에서 먼저 ‘돌아보심’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다음에 나오는 ‘돌아보지않으심’을 주님의 거절이나 편애로 오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벨에게는 체어리티에 기초한 살아 있는 예배가 있고, 가인에게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예배가 있습니다. 말씀은 이 두 내적 상태의 차이를 ‘돌아보셨다’와 ‘돌아보지않으셨다’는 표현으로 드러냅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를 돌아볼 때도 AC.354는 매우 간단하면서 깊은 기준을 줍니다. 말씀을 정확하게 읽고 교리를 바르게 이해하며 찬송하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는 것은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외적 예배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그릇이 되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릴수록 자기 안의 악을 더 분명히 보고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하게 되는지, 진리를 알수록 이웃의 참된 선과 유익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는지, 받은 은사와 지식을 자기 우월감보다 쓰임을 위해 사용하게 되는지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외적인 행위로 다른 사람의 내면을 판단하라는 기준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신앙과 예배를 주님 앞에서 살펴보는 기준입니다.
결국 AC.354는 AC.350-353의 긴 설명을 매우 단순한 한 문장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체어리티에속한것들과체어리티에기초한모든예배가주님을기쁘시게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처음 난 것은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이며, 기름은 주님께 속한 천적인 사랑의 선입니다. 그러므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이 체어리티가 되고, 그 체어리티가 신앙과 행위와 예배에 생명을 주는 질서가 살아 있음을 뜻합니다. 참된 예배의 생명은 외적인 형식 자체에도, 인간 자신의 경건이나 공로에도 있지 않습니다. 그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인간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어 신앙과 예배 속에 살아 있을 때, 그것이 바로 아벨의 제물이 표상하는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강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상당히 강한 긴장 속에서 진행됩니다. 정동수 목사는 이동원 목사의 지구촌교회 창립기념 설교를 계기로, 떼제 공동체와 관상기도, 가톨릭과 개신교의 일치, 에큐메니즘, 유진 피터슨과 레노바레 운동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 비판합니다. 그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단순히 ‘기도방법하나가마음에들지않는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에게 이것은 결국 ‘다른복음’의 문제이며, 교회가 성경에서 떠나 종교통합과 신비주의로 이동하는 ‘배도’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의 ‘다른복음’, 고린도후서 11장의 ‘다른예수, 다른영, 다른복음’, 요한이서의 ‘그리스도의교리’를 가져와 자신의 비판을 뒷받침합니다.
이처럼 정동수 목사의 문제의식 자체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사랑’, ‘화해’, ‘포용’, ‘넓은마음’이라는 아름다운 말 아래서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를 더 이상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 문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모든 종교적 차이를 지워 버리고 ‘무엇을믿든착하게만살면된다’는 식의 무차별주의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에게 선과 진리는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선만 있고 진리가 없어도 안 되고, 진리만 있고 선이 없어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번 강의가 제기하는 ‘넓은마음이라는이름으로진리의경계까지없애도되는가?’라는 질문은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도 반드시 진지하게 받아야 할 질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정동수 목사와 스베덴보리의 길은 크게 갈라집니다. 정동수 목사는 ‘진리의경계’를 거의 교리적 소속과 정통성의 경계로 설정합니다.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와 개신교가 함께 예배하는 것을 종교통합으로 보고, 그것을 사실상 ‘다른복음’과 연결합니다. 더 나아가 강의 마지막에는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의 교리를 그대로 믿으면 구원이 없다고 단정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진리의 경계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경계는 사람이 어느 교단 명부에 속해 있는가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번 강의를 읽는 데 가장 중요한 차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세계에 관한 방대한 기록에서 사람을 ‘가톨릭’, ‘개신교’, ‘유대교’, ‘이방인’이라는 지상의 명칭만으로 나누어 구원을 판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각 종교 안에는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있으며, 특히 종교를 이용하여 사람의 양심을 지배하거나 자신에게 신적 권위를 돌리는 것은 매우 심각하게 비판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어떤 교회적 환경에서 태어났고 어떤 교리를 배웠다는 사실과,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어떻게 살았는가는 구별합니다. 그의 저서,‘천국과지옥’에서 반복되는 중요한 원리도 결국 사람이 사후에 자기의 지배적 사랑에 따라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단순히 지상에서 가입했던 교파의 연장선이 아닙니다.
따라서 정동수 목사의 ‘가톨릭신자는그교리를그대로믿으면구원이없다’는 식의 결론은 스베덴보리의 구원 이해와 상당히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라면 먼저 그 사람이 알고 있는 진리가 무엇인지, 그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았는지,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보아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는 사람을 선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교리는 구원의 목적이 아니라 삶을 인도하는 수단입니다. 교리적으로 많은 것을 정확히 알고 있으면서 자기애와 세상 사랑 속에서 사는 사람보다, 제한된 진리밖에 모르면서도 자신이 아는 진리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이 주님께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이 점을 먼저 세워 놓고 이동원 목사의 ‘하나님의넓은마음’이라는 표현을 보아야 합니다. 이 표현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상당히 아름다운 진실이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인간이 만든 교파의 울타리보다 훨씬 큽니다. 주님은 개신교라는 명칭 아래 있는 사람만 돌보시는 분이 아니며,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 합니다. 심지어 참된 종교에 관하여 거의 아무것도 알 기회가 없었던 사람에게도 그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선과 진리를 공급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마음은우리의교파적마음보다넓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스베덴보리에게 낯선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한 문장이 뒤따라야 합니다. ‘주님의마음이넓다는것과주님께서진리와거짓을구별하지않으신다는것은전혀다른말입니다.’ 사랑은 진리를 폐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적 사랑은 신적 지혜와 영원히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리를 동일하게 참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넓은마음’은 아닙니다. 가톨릭과 개신교와 동방정교회 사이에 실제 교리적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정직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교황권, 성인에 대한 기도, 성찬 이해, 칭의, 교회론 등에 실제 차이가 있는데 ‘우리는다똑같으니아무차이도중요하지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화해라기보다 진리 문제의 회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떼제 공동체에서 서로 다른 전통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기도한다는 사실 자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이 문제에서도 양극단을 피해야 합니다. ‘함께기도했으니모든교리가참이라고인정한것이다’라고 단정할 수도 없고, 반대로 ‘함께기도했으니아무문제도없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임이 실제로 무엇을 고백하고 무엇을 지향하며, 참여자가 그 가운데서 무엇을 받아들이느냐입니다. 정동수 목사는 떼제를 ‘가짜들끼리같이모이는’ 곳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이렇게 집단적으로 판정하는 데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외적 형식만 보고 그곳에 모인 수많은 사람의 영적 상태를 우리가 알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강의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예레미야 24장의 ‘좋은무화과’와 ‘나쁜무화과’입니다. 정동수 목사는 이동원 목사가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넓은마음’을 끌어낸 것을 ‘설교왜곡’이라고 비판합니다.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바벨론으로 보내신 목적이 ‘넓은마음을배우게하기위해서’였다는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자가 먼저 하고 싶은 말을 정해 놓은 다음 성경 본문을 그것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설교왜곡’이라고 정의합니다. 이 지적은 상당히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 역시 본문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여기서 우리 자신에게도 똑같은 경고를 적용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라고 해서 어느 본문에든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집어넣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문자의 뜻을 정직하게 읽어야 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역사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본문의 직접적인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 뒤에야 말씀의 속뜻을 살펴야 합니다. 속뜻은 문자적 의미를 무시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자 안에 주님께서 넣어 두신 더 깊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24장에서 좋은 무화과는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들을, 나쁜 무화과는 남아 있거나 심판 아래 놓인 이들을 가리킵니다. 놀라운 것은 인간의 눈에는 정반대로 보였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포로가 된 사람들이 실패자이고 예루살렘에 남은 사람들이 살아남은 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포로로 끌려간 이들을 오히려 ‘좋은무화과’라고 하십니다.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징계를 통하여 보존하시고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만으로도 매우 깊은 영적 원리가 보입니다. 인간이 불행이라고 판단하는 사건이 반드시 영적 파멸은 아니며, 인간이 안전이라고 생각하는 상태가 반드시 영적 안전도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서 ‘무화과’라는 표상은 스베덴보리의 성경 해석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말씀에서 무화과는 대체로 자연적 선, 곧 사람의 외적·자연적 삶에서 나타나는 선과 관련됩니다. 포도나무가 보다 영적인 선과 연결되고 올리브가 보다 천적인 선과 연결되는 것과 비교하면, 무화과는 인간의 자연적인 차원에서 나타나는 선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의 대비는 단순히 ‘좋은사람과나쁜사람’이라는 도덕적 구분보다 더 깊게, 사람의 자연적 삶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선하게 형성되었는가 아니면 부패했는가 하는 문제까지 열어 줍니다.
그렇게 보면 바벨론 포로라는 사건도 색다르게 보입니다. 포로 생활 자체가 선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유다의 오랜 우상숭배와 불순종으로 인한 심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심판 가운데서도 리메인스를 보존하십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가운데 다시 교회를 일으킬 수 있는 남은 것을 지키십니다. ‘좋은무화과’는 바로 그런 보존과 회복의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악을 선이라고 부르지 않으면서도 그 악의 결과 가운데서 선을 끌어내십니다.
이 점에서는 이동원 목사가 고난을 통하여 더 넓은 시야를 배우는다는 방향으로 적용한 것이 본문의 문자에 직접 쓰여 있지는 않더라도, ‘고난을통한변화’라는 적용 자체를 곧바로 성경 왜곡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조금 더 살펴볼 여지가 있습니다. 설교에는 본문 해석과 오늘의 적용이라는 두 단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적용은 본문의 문장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적용이 본문의 중심 흐름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가, 아니면 본문을 발판으로 전혀 다른 주장을 하는가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이동원 목사의 실제 설교 전체 문맥을 놓고 따져야 공정합니다. 이번 원고가 제시한 비판자의 설명만으로 그의 설교 전체를 최종 판정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오히려 정동수 목사 자신에게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본문에없는것을가져와자기가하고싶은말을하면설교왜곡’이라고 매우 좋은 원칙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후 예레미야에서 ‘하늘의여왕’을 가져와 현대 가톨릭의 마리아 칭호와 직접 연결하고, 따라서 예레미야를 설교한다면 가톨릭의 마리아 숭배와 종교통합을 버리라고 설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동일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당시 말한 ‘하늘의여왕’과 후대 가톨릭에서 마리아에게 사용된 ‘하늘의여왕’이라는 칭호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두 대상을 곧바로 동일시할 수 있는가? 이것 역시 본문 밖의 역사적·신학적 연결을 사용한 ‘적용’입니다.
이것은 정동수 목사의 결론이 반드시 틀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해석의 일관성입니다. 이동원 목사가 본문에서 현대 교회의 화해를 적용하는 것은 ‘본문에없는것을넣은것’이라 비판하면서, 자신은 같은 예레미야에서 현대 가톨릭의 마리아론을 끌어오는 것이 자동적으로 허용된다면 해석 기준이 비대칭적이 됩니다. 설교자를 분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해석 원칙을 자기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하는지 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는 여기서 매우 유익한 제3의 길을 제공합니다. 역사적 문맥은 역사적 문맥대로 존중하면서, 그 안에 있는 영적 의미는 인간의 자의적인 연상으로 찾지 않고 말씀 전체의 상응을 통해 살펴보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하늘의여왕’을 단순히 2천여 년 뒤 특정 교단의 명칭으로 바로 점프시키는 것보다, 우상숭배가 인간 내면에서 무엇인지 먼저 묻는 것입니다. 사람이 주님에게 속해야 할 사랑과 경배를 자기 자신이나 세상의 어떤 대상에게 돌릴 때 무엇이 일어나는가? 이것이 모든 시대의 사람에게 적용되는 속뜻의 질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강의에서 계속 등장하는 ‘배도’ 역시 단순히 교단 이동이나 에큐메니즘 참여보다 훨씬 깊은 문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가장 심각한 배도는 입으로 주님을 고백하면서 삶에서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교리가 아무리 정통이어도 체어리티가 죽어 있으면 신앙도 살아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천국의비밀’에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 반복해서 나타나는 원리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하기 시작하면 결국 아벨, 곧 체어리티를 죽입니다. 그러므로 ‘다른복음’을 경계하는 사람은 동시에 ‘나는올바른교리를가지고있다는확신때문에다른사람을멸시하고있지는않은가?’도 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이번 강의의 언어를 돌아보게 합니다. ‘가짜목사’, ‘쓰레기’, ‘마귀가만든것’, ‘가짜들끼리모인다’, ‘침례교의침자도모르는사람’ 같은 표현이 반복됩니다. 교리적 오류를 강하게 비판하는 것과 사람을 멸시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진리를 위한 열심도 그 안의 정서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선에서 나오는 열심은 진리를 보호하면서도 사람의 구원을 원합니다. 자기애에서 나오는 열심은 진리를 방패 삼아 상대를 공격하고 이기는 데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둘 다 매우 강한 말을 할 수 있지만 속의 불은 서로 다릅니다.
그렇다고 ‘사랑해야하므로오류를지적하지말자’는 뜻도 아닙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체어리티는 무조건 상대의 말을 인정하는 온순함이 아닙니다. 악을 악이라고 하고 거짓을 거짓이라고 하는 것도 이웃 사랑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어떤 가르침이 사람을 영적으로 해친다면 그것을 밝히는 것이 오히려 체어리티일 수 있습니다. 다만 목적이 중요합니다. ‘저사람을무너뜨리기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거짓에서벗어나선과진리안으로들어오도록하기위해서’여야 합니다. 이것이 논쟁에서 가장 어려운 지점입니다.
이제 관상기도 문제를 보겠습니다. 강사는 관상기도, 침묵기도, 향심기도, 호흡기도 등을 거의 하나의 범주로 묶고, 불교·힌두교의 명상 및 만트라와 연결합니다. 반복적인 말을 계속하면 이성적 사고가 정지되고 의식을 잃게 되며, 수동적인 상태가 되어 외부 영적 존재에게 열리고 결국 ‘마귀가쑥들어온다’고 설명합니다. 촛불을 바라보거나 호흡을 조절하는 것 역시 같은 위험의 통로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는 매우 세심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영계와 실제로 연결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혼자 생각하고 느끼는 독립된 섬이 아니라 영들과 천사들을 통해 영계와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영향’이라는 개념 자체를 스베덴보리에게 낯선 것으로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부분만 보면 강사의 경계심이 스베덴보리와 접점을 갖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평상시에도 영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정 기도법을 사용해야 비로소 영이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섭리 아래 인간이 자유와 이성 안에서 보존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촛불을 켰다는 사실, 몇 분 침묵했다는 사실, 짧은 기도문을 반복했다는 사실만으로 ‘마귀가들어오는통로가열렸다’고 단정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와도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정말 중요한 경계선은 ‘자유와이성을훼손하는가’입니다. 사람을 무비판적 수동성으로 몰아가고, 자신의 이성을 내려놓게 하고, 어떤 내적 음성이나 느낌을 곧바로 하나님의 직접 계시라고 믿게 만드는 수행이라면 분명 위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파괴하여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선택하여 그것을 삶으로 행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이 점에서는 강사가 ‘정신을똑바로차리고말씀을묵상해야한다’고 강조하는 데 중요한 진실이 있습니다.
하지만 ‘침묵’ 자체는 악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고 잠시 침묵하면서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 역시 그 자체로 비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그 침묵 속에서 무엇을 하는가입니다. 자기 생각을 완전히 제거하여 무의식 상태로 들어가려 하는 것과, 방금 읽은 말씀을 주님 앞에서 조용히 되새기며 자신을 살피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외형은 둘 다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일 수 있지만 내적 활동은 정반대일 수 있습니다.
반복기도도 같은 구별이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헛된반복’을 경계하신 것은 분명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반복이 곧 ‘헛된반복’은 아닙니다. 같은 시편을 반복해서 읽는 것, ‘주님, 저를불쌍히여기소서’라고 진심으로 여러 번 기도하는 것, 찬송의 후렴을 반복하는 것을 그 자체만으로 힌두교 만트라와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핵심은 말의 횟수보다 그 말 안에 있는 의도와 의식입니다. 의미를 제거하고 의식을 변형시키기 위한 기계적 반복과, 마음을 주님께 돌리며 의미를 더욱 깊이 새기는 반복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의도’와 ‘목적’에 관한 가르침으로 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같은 외적 행위라도 목적이 다르면 영적으로 전혀 다른 행위가 됩니다. 한 사람은 침묵 속에서 자기 안의 신성을 발견하려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침묵 속에서 주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낮출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반복을 통해 의식을 지우려 하고, 다른 사람은 같은 말씀을 반복하며 그 의미를 마음에 새길 수 있습니다. 외적 형식만으로 내적 상태를 판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떼제 찬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악의 구조가 단순하고 짧은 문장을 반복한다고 해서 그 구조 자체가 곧 악령을 불러들이는 장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음악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영적으로 선한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그찬양이사람의애정을어디로이끄는가? 주님을향한겸손과사랑으로이끄는가, 아니면자기감정의황홀경자체를사랑하게하는가? 그리고그정서가이후의삶에서체어리티로이어지는가?’
이 기준은 통성기도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조용한 기도만 위험하고 큰소리 기도는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큰소리로 열정적으로 기도하면서도 자기 감정에 도취될 수 있고, 조용히 침묵하면서도 깊은 회개 가운데 주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외적인 기도 형식보다 그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이 본질입니다.
강의에서 ‘설교없는예배’에 대한 비판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로마서 10장의 ‘신앙은들음에서난다’를 근거로 말씀 선포가 반드시 있어야 하며, 성경을 읽고 5~10분 침묵하는 것을 ‘설교’라고 부르는 것은 성경적 설교관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문제에서도 말씀을 가르치는 직무의 중요성은 충분히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워야 하고,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감정적 체험만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말씀 자체는 인간 설교자의 설명보다 더 근원적인 거룩함을 지닙니다. 설교자는 말씀의 주인이 아니라 봉사자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봉독한 뒤 잠시 조용히 그 말씀을 생각하는 시간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말씀 선포를 폐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설교가 있느냐 없느냐보다 ‘사람이말씀의진리를배우고그것을삶에적용하도록인도받고있는가’입니다. 훌륭한 설교도 사람을 자기 숭배로 이끌 수 있고, 짧은 말씀 봉독 하나가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대목은 역설적으로 이번 강의 자체에도 적용됩니다. 강사는 성도들에게 ‘유명한목사가말한다고무조건아멘하지말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원칙은 이동원 목사에게만 적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강의를 하는 강사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해야 합니다. ‘이동원목사가유명하다고믿지말라’가 옳다면 ‘이동원목사를비판하는유명한목사가말한다고그대로믿지도말라’ 역시 옳습니다. 모든 주장을 말씀과 사실과 이성 앞에서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이번 강의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분별의 원칙입니다. ‘누가말했는가?’보다 ‘무엇을말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좋아하는사람이말했는가?’보다 ‘그말이참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베덴보리가말했다’는 이유만으로 생각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말씀 전체를 어떻게 연결하고 주님과 천국과 인간의 거듭남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유진 피터슨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이러한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강사는 유진 피터슨을 ‘신비주의자’, ‘이단’이라고 규정하고 ‘메시지’를 ‘쓰레기’라고까지 표현합니다. 여기서는 한 사람의 저작과 신학 전체를 특정 연관관계 몇 가지로 한꺼번에 판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저자의 특정 주장에 문제가 있다면 그 주장을 구체적으로 살피면 됩니다. 리처드 포스터나 댈러스 윌라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사람과관계가있으므로저사람도잘못되었다’는 연쇄적인 방식보다 각각의 가르침을 실제 내용에 따라 검토하는 편이 더 공정합니다.
특히 ‘누구이름이나오면가지말라’는 방식의 분별은 성도들에게 단기적으로는 편리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분별력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이름 목록만 외우면 되기 때문입니다. 참된 분별은 ‘이사람은금지된사람인가?’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이가르침은인간의자유와이성을존중하는가, 주님께로향하게하는가, 말씀의진리와조화를이루는가, 체어리티의삶으로열매맺게하는가’를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번 강의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인 가톨릭과 구원의 문제로 돌아가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로마 가톨릭의 교황권과 성인 숭배, 인간에게 신적 권위를 돌리는 문제를 결코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밝히기’에서 바벨론에 관한 해설을 읽어 보면 그 비판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종교를 이용하여 사람의 영혼과 천국에 대한 권세를 자기에게 돌리는 사랑을 심각한 악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는포용적이니까가톨릭교리에아무문제가없다고보았다’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큰 오해입니다.
그러나 그 비판은 ‘가톨릭신자는모두지옥간다’는 결론과 전혀 같지 않습니다. 교리 체계의 오류를 비판하는 것과 그 안에 태어나 살아온 개개인의 영원한 운명을 판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놀라울 정도로 섬세한 부분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알지 못했던 진리에 대해 같은 방식으로 책임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각 사람이 받은 빛과 기회 안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십니다.
이것은 동방정교회뿐 아니라 불교, 이슬람교 등 기독교 밖의 사람들을 바라볼 때도 적용됩니다. ‘천국과지옥’에서 스베덴보리는 교회 밖의 민족들, 곧 이방인들의 구원 가능성을 분명히 다룹니다. 그들이 기독교인이 아니었다는 이유만으로 정죄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종교 안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선한 삶을 살며 양심에 따라 행동했다면 사후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번 강의 마지막의 ‘구원은기독교안에만있다’는 문장은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중요한 수정이 필요합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구원은오직주님에게서만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도 단호합니다. 그러나 ‘오직주님을통해구원받는다’와 ‘지상에서특정한기독교교리체계에소속된사람만구원받는다’는 같은 문장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 기회를 얻지 못했더라도 그가 받아들인 선과 진리의 근원은 궁극적으로 주님입니다. 그리고 사후에 그 근원이 누구인지를 배우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구원론은 놀랍도록 넓으면서 동시에 철저하게 주님 중심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넓은마음’이라는 이번 논쟁의 표현이 다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은 정말 넓습니다. 그러나 ‘아무거나괜찮다’는 의미에서 넓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선과 진리 안으로 인도하시려 하기 때문에 넓습니다. 불교인도, 무슬림도, 가톨릭 신자도, 개신교 신자도 사랑하시지만 그들 안에 있는 모든 거짓을 사랑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사랑하시되 거짓에서는 건져 내시고, 선을 보존하시며, 더 온전한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에큐메니즘과 잘못된 종교통합도 구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교리차이는아무의미가없으니모두똑같다’고 하는 것은 진리를 희생한 통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서로다른교리를가지고있지만상대를악마화하지않고, 함께대화하면서무엇이참인지찾고, 가능한선에서는협력하며, 최종적인심판은주님께맡긴다’는 태도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는 후자와 훨씬 가깝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번 강의의 장점과 한계를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장점은 매우 분명합니다. 교회의 화해와 포용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진리의 문제를 덮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 설교자가 본문을 자기 주장에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 유명한 목사의 말도 성도가 분별해야 한다는 경고, 감정적·신비적 체험이 말씀의 진리를 대신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는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고가 지나치게 확대되면서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침묵을 곧 관상기도로, 관상기도를 곧 동양 종교의 명상으로, 반복 찬양을 곧 만트라로, 만트라적 반복을 곧 의식 상실로, 의식의 이완을 곧 마귀의 침입으로 연결하는 일련의 논증에는 단계마다 별도의 검증이 필요합니다. 또한 떼제에 참여한 사람들을 ‘가짜’로 묶고,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의 사람들에게 구원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분별’에서 ‘심판’으로 넘어갈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보여 주는 영적 세계는 오히려 우리에게 더 큰 경외심과 신중함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겉모습은 볼 수 있지만 그 사람의 내적 사랑 전체를 볼 수 없습니다. 누가 천국에 속했고 누가 지옥에 속했는지는 주님께서 아십니다. 우리는 교리를 살필 수 있고 행동의 선악을 판단할 수 있으며 위험한 가르침을 경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 자체를 최종적으로 판결하는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의렌즈’를 사용하는 우리 자신에게도 매우 중요한 경고입니다. 스베덴보리를 읽다 보면 기존 기독교의 여러 교리가 얼마나 다르게 보이는지 경험하게 됩니다. 삼위일체, 믿음만의 구원, 속죄, 부활, 천국과 지옥, 최후의 심판, 말씀의 속뜻 등 거의 모든 핵심 주제가 새롭게 보입니다. 바로 그때 가장 조심해야 할 유혹이 ‘나는이제알았고저들은모른다’는 우월감입니다. 그것이 들어오는 순간 진리를 많이 아는 것이 오히려 proprium의 먹이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보여 주시는 목적은 다른 사람을 정죄할 자격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먼저 우리 자신을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저사람이왜틀렸는가?’가 아니라 ‘이말씀이내안에서무엇을드러내는가?’입니다. 예레미야 24장의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도 결국 내 안의 문제입니다. 내 자연적 삶 안에서 주님께 순종하는 선은 무엇이며, 이미 부패하여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내가 붙들고 있는 예루살렘은 정말 주님의 도성인가, 아니면 내가 안전하다고 착각하는 proprium의 성인가? 때로는 내가 실패라고 생각하는 ‘바벨론포로’ 같은 경험을 통해 주님께서 오히려 내 안의 리메인스를 보존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읽기 시작하면 ‘좋은무화과한광주의소망’이라는 본문은 특정 목사의 에큐메니즘을 공격하기 위한 무기가 되기 전에 우리 자신의 거듭남을 비추는 말씀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을 열어 보이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말씀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판정하는 책이기 전에 나를 심판하고 고치고 거듭나게 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결국 이번 강의를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바라보며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넓은마음이냐, 진리수호냐’라는 양자택일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는 사랑과 진리가 결코 싸우지 않습니다. 신적 사랑은 신적 지혜와 하나이며, 선은 진리와 결혼해야 합니다. 진리를 버린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니고, 사랑을 잃은 진리는 살아 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리적 차이를 분명하게 말하면서도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잘못된 영성을 경계하면서도 침묵과 묵상 자체를 악마화하지 않아야 합니다. 가톨릭의 교리적 문제를 비판하면서도 가톨릭 신자의 영혼을 우리가 대신 심판하지 않아야 합니다. 에큐메니즘의 위험을 살피면서도 다른 전통의 그리스도인을 만나는 것 자체를 배도로 규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목사의 설교를 분별하라고 가르치면서 그 목사를 비판하는 또 다른 유명한 목사의 말 역시 똑같은 기준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넓은마음’이라는 말을 가장 안전하게 이해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그 넓음은 진리를 희석시키는 넓음이 아니라, 진리를 가지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사랑의 넓음입니다. 주님은 거짓을 참이라고 부르실 만큼 넓으신 분이 아니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까지 버리지 않고 참으로 이끄실 만큼 넓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렌즈’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분별도 바로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붙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리에는경계가있습니다. 그러나주님의자비에는우리가함부로그을수있는경계가없습니다.’ 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잃으면 한쪽에서는 무차별적인 종교혼합으로 흐르고, 다른 한쪽에서는 교리적 정죄와 영적 우월감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한 시간의 강의를 다 듣고 난 뒤 우리에게 남아야 할 질문은 ‘이동원목사는배도한목사인가?’ 하나만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어야 합니다. ‘나는진리를사랑하기때문에거짓을경계하는가, 아니면내가옳다는것을확인하기위해다른사람의오류를찾고있는가?’ 그리고 또 하나, ‘나는사람을사랑한다는이유로진리의차이를흐리고있는가, 아니면진리를사랑하면서도그진리가궁극적으로사람을살리기위한주님의것임을기억하고있는가?’
이 두 질문 사이에서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이 하나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넓지만흐리지않고, 분명하지만정죄하지않는’ 분별에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이번 논쟁을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바라보면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붙들고 싶은 지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설교는 마태복음 21장의 ‘열매없는무화과나무’ 사건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 성전의 외형적 종교성과 어린아이 같은 신앙, 하나님과의 친밀함, 그리고 기도에 대한 신뢰로 나아갑니다. 설교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문장은 사실 매우 단순합니다. ‘하나님자신보다하나님이주시는것을더사랑하지말라.’ 박요한 목사는 어린아이에게 ‘엄마가전부’인 것처럼 신앙인에게도 하나님이 전부가 되어야 한다고 반복합니다. 이 중심은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보아도 상당히 깊은 지점을 건드립니다. 다만 설교 후반부의 ‘무엇이든지믿고구하면반드시받는다’는 적용으로 갈수록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중요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먼저 박요한 목사가 무화과나무 사건을 문자 그대로만 읽지 않고 ‘표면성이면에는영적인의미가있다’고 말한 대목은 매우 주목할 만합니다. 박요한 목사는 예수께서 배가 고프셔서 열매를 찾으셨는데 열매가 없자 화가 나서 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으로만 읽으면 이해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그래서 무성한 잎은 있으나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당시 예루살렘 종교의 상태와 연결합니다. 성전과 제사와 제사장과 종교적 형식은 화려하지만 정작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라는 ‘열매’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는 방식과 상당히 가까이 다가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 속의 나무와 잎과 열매는 단순한 자연물이 아닙니다. 특히 ‘열매’는 사람이 알고 믿는 것을 실제 선한 삶으로 가져가는 것, 곧 선과 체어리티의 실제적인 산출과 깊이 연결됩니다.
따라서 이 설교의 ‘잎은무성한데열매가없다’는 진단은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잎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교리도 필요하고, 말씀에 관한 지식도 필요하며, 예배의 형식도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열매를위한잎’이 아니라 그 자체로 종교의 목적이 될 때입니다. 사람이 말씀을 많이 알고, 신앙에 관한 말을 많이 하고, 예배와 기도와 찬양에 열심이어도 그것이 삶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살며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영적으로는 잎만 무성한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무화과나무 사건을 오늘의 교회에 적용한다면 ‘예배를화려하게하지말자’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예배와찬양과설교와기도가실제삶에서어떤열매를맺고있는가?’입니다.
이 지점에서 박요한 목사가 대형 연합집회, 수많은 직함, 화려한 찬양대와 찬양 형식을 비판하는 문제도 조금 조심스럽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박요한 목사가 무엇을 염려하는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의 명예와 직함과 외형이 앞서는 종교는 분명 위험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화려함’ 자체와 ‘악’을 동일시하기 어렵습니다. 소박한 예배라고 해서 자동으로 내적 예배가 되는 것도 아니고, 장엄하고 아름다운 예배라고 해서 자동으로 외적 예배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핵심은 그 외적 형식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입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찬양대를없애야한국교회가산다’는 식의 결론보다는 ‘찬양대가있든없든그것이주님을사랑하고이웃을사랑하는내적예배를담고있는가’를 묻는 편이 더 본질적입니다.
설교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 가운데 하나는 어린아이에 관한 해설입니다. 박요한 목사는 어린아이도 장난감과 좋은 것을 좋아하지만 엄마가 보이지 않는 순간 그것들을 내려놓고 엄마를 찾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영적 통찰이 있습니다. 문제는 세상의 좋은 것을 누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재산과 직업과 가정과 건강과 성취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주님과그것들가운데어느것이목적이고어느것이수단인가’입니다. 어린아이 비유를 이 관점에서 읽으면, 장난감을 가지고 즐겁게 노는 것은 괜찮지만 ‘엄마보다장난감이더중요해지는순간’ 질서가 뒤집힙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은 주님에게서 받아 선하게 사용하는 동안에는 축복이지만, 그것이 주님을 대신하여 삶의 궁극적 목적이 되면 우상이 됩니다.
이것은 설교 중 출애굽기 33장의 모세와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은 주시겠지만 친히 함께 올라가지는 않겠다고 하시자 모세가 ‘주께서친히가지아니하시려거든우리를이곳에서올려보내지마옵소서’라고 대답합니다. 박요한 목사는 이것을 ‘가나안보다하나님을원하는신앙’으로 읽습니다. 바로 이 대목이 이번 설교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영적 중심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주시는가나안’보다 ‘하나님자신’을 원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조금 더 깊이 표현한다면, 천국조차 주님과 분리된 독립적인 보상이 아닙니다. 천국의 본질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 그 안에서 사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없이천국만얻겠다’는 것은 영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말입니다.
어린아이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이해를 더하면 이 설교는 더욱 깊어집니다. 어린아이가 천국적인 것은 단순히 지적으로 미숙하기 때문도 아니고, 부모에게 무엇이든 달라고 조르기 때문도 아닙니다. 어린아이에게 나타나는 순진무구함의 핵심에는 ‘자기자신으로부터살지않는상태’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개념인 proprium과 정반대 방향입니다. ‘내가안다’, ‘내가할수있다’, ‘내힘으로산다’는 자기중심적 독립성이 아니라 자신에게 생명과 선이 공급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어린아이같은신앙’은 지성을 포기하는 신앙도,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신앙도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나자신에게서선할수없으며모든선과진리는주님에게서온다’는 깊은 인정에 가깝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박요한 목사가 ‘어린아이는어머니로부터모든것을공급받는다’고 한 것은 매우 좋은 비유입니다. 다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에게서 ‘모든것을공급받는다’는 말의 가장 깊은 뜻은 반드시 돈과 성공과 건강과 소원의 성취를 공급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가장 근원적으로는 생명, 선을 사랑할 능력, 진리를 볼 빛, 악과 싸울 힘, 그리고 거듭남에 필요한 모든 것을 순간순간 주님에게서 받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연적인 생명뿐 아니라 영적인 생명에서도 스스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마음으로 인정하는 것이 어린아이의 상태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설교 후반부의 기도론은 이 렌즈에서 한 번 더 정교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박요한 목사는 자신의 경제적 어려움과 오랜 기도 끝에 유튜브가 크게 성장한 경험을 들려주면서 ‘기도는반드시응답된다’, ‘무엇이든지믿고구한것은다받는다’고 강조합니다. 개인적으로 체험한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하는 고백 자체는 소중합니다. 어려운 시절에도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증언 역시 귀합니다. 그러나 한 개인에게 경제적인 회복과 성공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마태복음 21장 22절의 보편적 해석 원리로 확장하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믿음으로 오래 기도했는데도 병이 낫지 않은 사람, 사업이 회복되지 않은 사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은 ‘내가어린아이처럼믿지못했기때문인가?’라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응답은 우리의 욕망을 무제한으로 실현해 주시는 데 있지 않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는 신적 섭리 안에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무엇이든 요구한다고 해서 사랑하는 엄마가 문자 그대로 무엇이든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이가 엄마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엄마는 아이가 원하는 것과 아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구별합니다. 그러므로 박요한 목사가 사용한 ‘엄마만믿어’라는 표현은 역설적으로 기도 응답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됩니다. 어린아이의 믿음은 ‘엄마에게조르면내가원하는것은반드시얻는다’가 아니라 ‘엄마가나를사랑하기때문에엄마에게나를맡길수있다’에 더 가깝습니다.
이렇게 보면 ‘무엇이든지믿고구하는것은다받으리라’는 말씀도 ‘내욕망을강한확신으로밀어붙이면현실이된다’는 공식이 아닙니다.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의 기도 자체가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주님, 이것을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만 점차 ‘주님, 이것이제게정말선한것이라면허락하시고그렇지않다면제뜻을고쳐주십시오’라는 기도로 변합니다. 결국 가장 깊은 기도는 주님의 뜻과 사람의 뜻이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응답의 절정은 ‘내뜻대로이루어졌다’가 아니라 ‘내뜻이주님의뜻을사랑하게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에서 ‘성령충만’을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고 사모하는 상태로 설명한 부분 역시 매우 좋습니다. 방언이나 봉사나 종교적 활동 하나를 성령 충만의 결정적 표지로 삼지 않고 ‘하나님한분이면만족합니다’라는 방향으로 가져간 것은 이번 설교의 중요한 장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붙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감정적인 친밀감에서 끝나지 않고 결국 ‘주님이원하시는것을행하기를기뻐하는것’으로 나타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계명을 사랑하고, 그 계명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즐거워함’과 ‘이웃에게선을행함’은 서로 경쟁하는 두 영성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이 안과 밖으로 나타나는 두 모습입니다.
반면 설교 중 몇몇 단정적인 표현은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구별해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교 전체를 ‘예수님이씨를말려버린이단종교’라고 규정하는 표현이나, 특정 음악가·연예인들의 약물 문제를 감정적 공연 방식과 직접적인 인과관계로 연결하는 설명, 점이나 타로를 본 사람의 영 안으로 곧바로 악령이 들어와 영혼을 갉아먹는다고 설명하는 방식 등은 설교의 중심 메시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주장들이 아닙니다. 특히 무화과나무의 심판을 역사적 유대인 전체에 대한 주님의 저주로 확대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특정 민족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표상했던 ‘교회의영적상태’를 읽는 것입니다. 그렇게 읽어야 그 말씀이 오늘 우리 자신에게도 살아 있는 심판과 경고가 됩니다. ‘저유대인들이열매없는무화과나무였다’고 끝내면 말씀은 남을 판단하는 도구가 되지만, ‘혹시지금내안에잎만무성하고열매없는무화과나무가있지않은가?’라고 읽으면 말씀이 거듭남의 말씀이 됩니다.
설교 첫머리에서 언급한 엘리사와 아이들 사건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박요한 목사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자적 사건 앞에서 ‘성격이불같은사람도하나님이사용하시는구나’라고 나름의 답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이런 본문일수록 문자적 사건에 나타난 인물의 성격을 중심으로 교훈을 끌어내기보다 말씀의 표상과 상응을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박요한 목사 자신이 무화과나무에서는 ‘표면성이면의영적인의미’를 찾으면서 엘리사 사건에서는 문자적 인물의 성격으로 해석한 것은 방법론적으로 조금 일관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두 사건을 함께 놓으면 ‘문자만으로이해하기어려운말씀일수록속뜻이왜필요한가’를 보여 주는 좋은 사례가 됩니다.
결국 이번 설교의 가장 귀한 부분은 ‘기도하면원하는것을얻는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깊은 중심은 박요한 목사 자신이 앞부분에서 이미 말했습니다. ‘가나안도하나님이함께하지않으시면필요없습니다.’ 이것을 끝까지 밀고 가면 설교 전체가 하나로 연결됩니다. 무화과나무의 문제도 ‘하나님없는종교’이고, 성전의 문제도 ‘하나님없는종교적외형’이며, 어린아이의 아름다움도 ‘엄마없는좋은것을원하지않는것’이고, 모세의 위대함도 ‘하나님없는가나안을거절한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도의 절정 역시 ‘하나님없는응답’을 원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렌즈’로 이번 설교를 한 문장으로 다시 읽는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어린아이같은신앙이란주님께무엇이든요구하면무엇이든얻어내는신앙이아니라, 주님에게서모든생명과선이온다는것을인정하며,주님자신을모든선물보다더사랑하고, 그사랑을삶의열매로맺어가는신앙입니다.’ 그렇게 읽을 때 무화과나무의 ‘열매’, 어린아이의 ‘엄마’, 모세의 ‘주께서친히가지아니하시려거든’, 그리고 예수께서 가르치신 ‘믿고구하는기도’가 한 줄로 이어집니다. 잎만 무성한 종교에서 열매 맺는 신앙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사랑하는 데서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는 데로, 자기 능력을 의지하는 어른의 proprium에서 모든 선을 주님에게서 받는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번 설교에서 ‘스베덴보리의렌즈’가 가장 밝게 비추어 줄 수 있는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영상은 앞서 살펴본 개별 수도사 이야기들과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은퇴 후 약 7년 동안 수도원에서 무엇을 해왔는지 돌아보고, 수도학교와 잇사갈 성경대학, 봉쇄학당, 수도 영성가 연구, 방문객 교육과 부흥회 사역 등을 소개한 뒤, 자신이 생각하는 수도원 운동의 방향을 ‘청빈, 거룩, 오직예수’라는 세 가지 말로 압축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편은 하나의 수도 일화라기보다 강문호 수도사가 생각하는 ‘개신교수도원운동의자기소개와비전’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볼 때도 개별 사실 하나하나를 따지는 것보다 이 세 축이 과연 사람을 어디로 이끌려 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하겠습니다.
영상은 은퇴를 앞두고 ‘후반전이더아름답게해달라’고 기도했다는 고백에서 시작합니다. 이 출발점에는 귀한 것이 있습니다. 은퇴를 인생의 퇴장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남은 생애를 어떻게 주님께 드릴 것인가를 묻는 태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인간의 영적 성장은 특정 나이에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평생 계속되며, 이 세상에서 시작된 변화는 영원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노년은 단순히 지난 업적을 정리하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proprium, 곧 자기 자신에게 속한 것을 더욱 내려놓고 주님께로 향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후반전이더아름다워야한다’는 강문호 수도사의 소망은 충분히 공감할 만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아름다운후반전이란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나 더 던집니다. 많은 일을 이루는 것이 아름다운 후반전일까요, 아니면 사람이 점점 더 주님 앞에서 작아지는 것이 아름다운 후반전일까요? 물론 둘은 서로 배척되지 않습니다. 수도원을 세울 수도 있고, 학교를 만들 수도 있고, 수백 권의 자료를 집필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모든 외적 성취가 무엇을 향하고 있느냐입니다. 거듭남의 관점에서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얼마나많은일을이루었는가?’보다 ‘그일을하는동안자기사랑과세상사랑이얼마나주님의질서아래놓였는가?’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수도원을 알기 위해 이스라엘의 수많은 수도원을 방문하고 여러 나라의 수도원을 답사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도원에 대한 자신의 선입견이 깨졌다고 고백합니다. 이 대목 역시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이 속한 개신교 전통 밖으로 나가 오래된 기독교 수도 전통을 직접 보고 배우려 했다는 것은 적어도 ‘우리에게없는것이다른전통에는있을수있다’는 열린 태도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개신교가 종교개혁 이후 수도원 제도와 상당히 멀어진 것을 생각하면, 오래된 기독교 전통 안에서 기도와 절제, 침묵, 공동생활, 노동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려는 시도 자체는 귀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서도 외적 수도생활과 내적 거듭남을 구별합니다. 수도원을 많이 방문했다고 수도의 본질을 아는 것은 아니며, 수도복을 입었다고 수도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봉쇄된 공간에 오래 머물렀다고 내면의 자기 사랑까지 봉쇄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과의 접촉을 줄이면 이전에는 외부 활동에 가려져 있던 proprium이 더 선명하게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수도의 시험은 ‘얼마나세상을떠났는가?’가 아니라 ‘세상을떠난그자리에서자기자신으로부터얼마나떠나고있는가?’에 있습니다.
영상에 나오는 새벽 4시의 기도실 이야기도 같은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연 속 작은 기도실에 들어가 예수의 형상 아래 머리를 대고 ‘오늘안수해주세요’라고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한다는 모습에는 주님께 의탁하려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어떤 형상 자체에 능력이 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마음을 주님께 향하게 하는 외적 도움으로 사용된다면 그 자체를 굳이 문제 삼을 이유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상이 아니라 그 순간 마음이 향하는 대상입니다. 더 나아가 아침에 주님의 인도를 구했다면 하루 동안 실제로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님의 계명 아래 두려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기도실에서의 ‘주님, 저를지켜주세요’가 생활 속에서는 ‘주님, 제뜻보다주님의뜻을따르게해주세요’가 되어야 합니다.
이어지는 수도학교 이야기는 강문호 수도사의 사역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개신교 안에 수도사를 양성하는 학교를 만들고, 그 가운데 일부가 실제 수도사의 길을 택하고, 다시 일부가 수도원을 세우는 흐름을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도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무조건 긍정하거나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수도제도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지만,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 기도와 자기 성찰, 절제와 쓰임을 훈련하는 환경이 될 수는 있습니다. 반대로 수도제도 자체가 영적 우월감이나 특별한 신분의식으로 변한다면 오히려 거듭남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제도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제도 안에서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따라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선을 행할 때 거룩함이 형성됩니다.
성경 연구에 대한 열정도 이번 영상의 큰 축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한번성경만깊이파보자’, ‘오직예수공부만해보자’며 여러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여 수백 권의 소책자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경이 놀라울 정도로 깊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고백합니다.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깊게 만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은 인간이 그 문자만 읽어서는 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품고 있으며, 그 안에는 천국과 연결되는 내적 의미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은생각했던것보다훨씬깊다’는 발견 자체는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도 크게 공감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을 깊이 안다는 것은 희귀한 자료를 많이 알고, 고대 문헌을 많이 읽고, 사람들이 처음 듣는 정보를 많이 찾아낸다는 것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깊이는 궁극적으로 ‘얼마나놀라운정보를발견했는가?’에 있지 않고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을 더 알고, 자기 안의 악을 발견하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삶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을 그토록 방대하게 펼쳐 보인 목적도 지적 경탄을 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이 주님과 천국과 인간의 거듭남을 어떻게 품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경악할만큼새로운성경지식’은 종착지가 아니라 출발점이어야 합니다. 그 지식이 사람의 생명을 바꾸지 못한다면 아직 말씀은 머리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영상 후반부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강문호 수도사가 마지막 때를 대비하는 수도원 영성을 ‘청빈, 거룩, 오직예수’라는 세 가지로 정리하는 대목입니다. ‘돈대신청빈, 음란대신거룩, 배교대신오직예수’라는 구도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강렬하고 기억하기 쉬운 표어입니다. 그리고 각각에는 분명 기독교적 가치가 있습니다. 재물의 지배에서 자유로워지고, 성적 욕망의 무질서를 다스리며, 주님에게서 떠나지 않으려는 삶은 모두 중요한 영적 과제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세 가지를 조금 다르게 깊이 들어갑니다. 먼저 ‘청빈’의 반대는 단순히 돈이 아닙니다. 돈 자체는 악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재물을 사랑하고 그것을 자기 자신을 높이는 수단으로 삼는 사랑입니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도 그것을 주님의 질서에 따라 선한 쓰임에 사용할 수 있으며, 아무 재산이 없어도 돈을 몹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적 청빈보다 더 깊은 것은 ‘소유에대한내적자유’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내 힘과 내 영광의 증거로 붙들지 않고, 주님에게서 맡겨진 것으로 보며 쓰임에 따라 사용하는 것입니다.
‘음란대신거룩’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적 절제는 중요하지만, 거룩은 단순한 금욕보다 훨씬 큽니다. 외적 행동을 억제했다고 내적 욕망까지 정돈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결혼애의 질서는 오히려 매우 중요하며, 성 자체를 부정하거나 육체를 악한 것으로 보는 것이 거룩은 아닙니다. 거룩은 사랑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도자의 독신도 그 자체가 더 높은 거룩함을 보증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욕망을 중심에 놓지 않고 사랑을 주님의 질서 아래 두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배교대신오직예수’는 세 표어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구호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오직예수’를 반복한다고 주님 중심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그분의 이름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너희가나를사랑하면나의계명을지키리라’는 말씀처럼, 주님을 향한 사랑은 결국 삶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오직예수’의 가장 깊은 형태는 ‘내가아니라주님’입니다. 내 지식이 아니라 주님, 내 업적이 아니라 주님, 내 사역의 성공이 아니라 주님, 내가 세운 제도와 내가 만든 책과 내가 이룬 결과가 아니라 그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신 주님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번 영상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영상에는 ‘내가방문했다’, ‘내가수도원을세웠다’, ‘내가자료를만들었다’, ‘내가학교를세웠다’는 식의 개인적 경험과 성취가 자연스럽게 많이 등장합니다. 이것 자체를 곧바로 자기 자랑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사역을 소개하는 영상이라면 당연히 자신이 한 일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렌즈’는 그보다 한 단계 안쪽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모든일을누가이루셨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사람이 선한 일을 많이 할수록 더욱 깊어져야 할 고백은 ‘내가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허락하시고이끄셨으며, 나는쓰임을위해사용된도구일뿐이다’라는 고백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 처음의 ‘후반전이아름답게해달라’는 기도와 마지막의 ‘오직예수’는 사실 하나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후반전은 앞선 전반전보다 더 많은 업적을 쌓는 후반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참으로 아름다운 후반전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기 이야기는 조금씩 작아지고 주님 이야기가 점점 커지는 후반전일 수 있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내가무엇을이루어야하는가?’가 중요했다면, 영적 노년에는 ‘주님께서나를통해무엇을이루셨으며, 나는얼마나그분앞에서비워지고있는가?’가 더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수도원의 존재 이유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수도원은 세상에서 도망치는 장소도 아니고, 특별히 거룩한 사람들이 모여 자신들의 거룩함을 증명하는 장소도 아닐 것입니다. 수도원이 참으로 교회를 섬기려 한다면, 그곳은 사람이 조용히 자기 proprium을 직면하고, 주님 앞에서 그것을 내려놓으며, 다시 세상 속 이웃을 더 잘 사랑하고 섬기도록 준비되는 장소여야 합니다. 외적 침묵이 내적 침묵으로, 외적 청빈이 내적 자유로, 외적 독신과 절제가 사랑의 질서로, 성경 연구가 삶의 거듭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 제시된 ‘청빈, 거룩, 오직예수’를 ‘스베덴보리의렌즈’로 조금 다듬어 다시 말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소유하지않는것’보다 ‘소유에사로잡히지않는것’, ‘욕망을억누르는것’보다 ‘사랑의질서가회복되는것’, 그리고 ‘오직예수라고말하는것’보다 ‘자기대신주님이중심이되게하는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이루어진다면 수도원은 교회와 경쟁하는 또 하나의 제도가 아니라 교회를 섬기는 귀한 영적 훈련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번 영상에서 가장 오래 붙들 만한 말은 처음에 나왔던 ‘후반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인생의 후반전은 단순한 제2의 성공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점점 더 ‘나’에게서 ‘주님’으로 중심이 옮겨가는 시간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는가보다 주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가 크게 보이고, 내가 얼마나 알려졌는가보다 내가 얼마나 주님의 선한 쓰임에 사용되었는지가 중요해지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가장 아름다운 수도의 열매는 수도원 숫자도, 제자의 숫자도, 책의 숫자도 아닐 것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한 사람의 말과 표정과 삶에서 ‘그사람’보다 ‘주님’이 더 잘 보이게 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오직예수’라는 고백이 마침내 한 인간 안에서 이루어 낸 가장 아름다운 후반전일 것입니다.
그이유는그교회가내적인것조차인정하지않았으며,천적인것은더더욱인정하지않는그러한교회였기때문입니다. This was because that church was such that it did not even acknowledge internal, much less celestial things.
[2] ‘기름’(fat)이천적인것들과체어리티의선들을의미한다는것은선지서에서도분명합니다.이사야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That “fat” signifies celestial things, and the goods of charity, is evident in the prophets; as in Isaiah:
여기서‘기름진것’이문자그대로의기름을뜻하는것이아니라천적·영적선을뜻한다는것은매우분명합니다.시편에서도다음과같이말합니다. where it is very evident that fatness is not meant, but celestial spiritual good.So in David:
여기서‘살진것’(fatness)과‘생명의원천’(fountainoflives)은사랑에속한천적인것을의미하고,‘복락의강물’(riverofdeliciousnesses)과‘빛’(light)은사랑에서비롯된신앙에속한영적인것을의미합니다.다시시편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Here “fatness” and the “fountainoflives” signify the celestial, which is of love; and the “riverofdeliciousnesses,” and “light,” the spiritual, which is of faith from love.Again in David:
[3] 천적인것들은헤아릴수없이많은종류와,그보다도더헤아릴수없이많은세부종류로이루어져있기때문에,모세가백성앞에서읊은노래에서는그것들을다음과같이총괄적으로묘사합니다. As celestial things are of innumerable genera, and still more innumerable species, they are described in general in the song which Moses recited before the people:
이러한표현들의의미는속뜻을통하지않고서는누구도알수없습니다.속뜻이없다면‘소의엉긴젖’(butterofkine),‘양의젖’(milkofsheep),‘어린양의기름’(fatoflambs),‘숫양과염소의기름’(fatoframsandgoats),‘바산의아들들’(sonsofBashan),‘밀의콩팥의기름’(fatofthekidneysofwheat),‘포도의피’(bloodofthegrape)와같은표현들은단지말들에지나지않을것입니다.그러나이모든표현하나하나는천적인것들의종류와세부종류를의미합니다. It is impossible for anyone to know the signification of these expressions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Without the internal sense, such expressions as the “butterofkine,” the “milkofsheep,” the “fatoflambs,” the “fatoframsandgoats,” the “sonsofBashan,” the “fatofthekidneysofwheat,” and the “bloodofthegrape,” would be words and nothing more, and yet they all and each signify genera and species of celestial things.
해설
AC.353은 앞의 AC.350에서 아벨이 드린 ‘기름진것’이 ‘천적인것자체이며,이것역시주님께속한다’고 한 내용을 자세히 풉니다. 첫 문장부터 핵심은 분명합니다. ‘천적인것은사랑에속한모든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기름’은 단순히 풍요롭고 좋은 것을 막연하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속한 천적인 선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앞 AC.352의 ‘모든사랑은주님에게서오는것이며,인간에게서오는것은조금도없습니다’라는 선언과 연결됩니다. 아벨이 드린 ‘기름’의 생명도 인간 자신의 선함이나 공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에 있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매우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신앙역시사랑에서비롯될때에는천적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과 아벨을 통하여 살펴본 신앙과 사랑의 관계를 정확하게 정리해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신앙을 낮추거나 배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반대로 신앙이 사랑에서 비롯되고 사랑과 결합되어 있다면 그 신앙 역시 천적인 성질을 가집니다. 이어 ‘체어리티는천적인것입니다.체어리티의모든선도천적인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사랑,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 체어리티, 체어리티의 선은 서로 경쟁하는 별개의 종교 요소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 안에서 서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문제는 ‘신앙을가졌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그 생명인 사랑에서 떼어 내어 독립적인 것으로 만든 데 있습니다.
이 때문에 희생 제사에서는 여러 종류의 기름이 특별히 거룩한 것으로 구별되어 제단 위에서 불살라졌습니다. 출29장과 레3장, 4장, 8장에는 간을 덮는 기름, 콩팥 위의 기름, 내장을 덮는 기름 등이 매우 세밀하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문자만 보면 왜 이런 신체 부위의 기름까지 세세하게 구별하는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53은 그 기름들이 천적인 것과 체어리티의 선을 표상했기 때문에 거룩하게 여겨졌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이 번호만을 근거로 간의 기름은 정확히 어떤 사랑이고 콩팥의 기름은 또 어떤 선이라고 세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밝히는 범위는 여러 종류의 기름이 천적인 것들을 표상했으며, 그것들이 거룩하여 제단 위에 드려졌다는 데 있습니다.
그 기름들이 ‘여호와께향기로운화제의음식’이라고 불린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자연적인 음식이나 기름을 필요로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외적인 제사가 내적인 사랑과 선을 표상하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된 것입니다. AC.349에서 이미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제단 위 기름의 거룩함은 물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표상하는 천적인 사랑과 선에 있습니다. 자연적인 제물은 그 내적 실재를 담아 보여 주는 표상적 그릇입니다.
같은 이유로 유대 백성이 기름을 먹지 못하도록 한 규례도 설명됩니다. AC.353은 그 이유를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그 교회가 ‘내적인것조차인정하지않았으며,천적인것은더더욱인정하지않는’ 성격의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모든 유대인 개인의 내면을 일률적으로 단정하는 말로 확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표상교회로서의 그 교회의 일반적 성격과 기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장 내적인 사랑의 선을 표상하는 기름을 인간이 자기 것으로 취하는 대신 여호와께 속한 것으로 구별한 규례는, 표상적으로 보아 천적인 선이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다는 질서를 보존합니다.
[2]에서 스베덴보리는 제사법에서 선지서와 시편으로 이동하여 ‘기름진것’이 천적인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여러 말씀으로 확인합니다. 사55:2에서는 ‘기름진것’으로 영혼이 즐거움을 얻고, 렘31:14에서는 제사장의 마음이 ‘기름’으로 흡족해지는 것이 주님의 선으로 백성이 만족하는 것과 나란히 놓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기름은 문자적인 지방이나 풍성한 음식만을 뜻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연이어 인용하는 목적은 각각의 구절에 별개의 교리를 붙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 안에서 ‘기름’과 ‘기름진것’이 영혼을 만족시키는 천적·영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을 하나의 논증으로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시36:8-9은 그 관계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살진것’과 ‘생명의원천’을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으로, ‘복락의강물’과 ‘빛’을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으로 풀이합니다. 여기서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서로 끊어진 두 세계가 아닙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비롯되는 질서 안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히 ‘주의빛안에서우리가빛을보리이다’라는 말씀은 이 문맥에서 인간의 신앙과 진리의 빛이 독립적인 자기 지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신앙역시사랑에서비롯될때에는천적’이라는 AC.353첫머리의 선언과도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시63:5에서도 ‘기름진것’은 영혼을 만족시키는 천적인 것을, ‘찬송하는입술’은 영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민18:12에서는 땅의 첫 열매까지 ‘기름’이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앞의 AC.352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처음 난 것이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을 의미했고, 여기서는 기름이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벨이 ‘양떼의처음난것과그기름진것’을 드렸다는 짧은 표현 안에는 두 가지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거룩한 것도 주님께 속하고, 그 거룩함 안에 있는 사랑의 선과 생명도 주님께 속합니다. 아벨의 예배는 인간이 자기 안에서 만들어 낸 선을 주님께 자랑스럽게 내놓는 예배가 아니라, 자기 안의 모든 참된 선과 사랑의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예배입니다.
[3]에서 신32:14가 인용되면서 AC.353은 한 단계 더 넓은 원리를 밝힙니다. ‘천적인것들은헤아릴수없이많은종류와,그보다도더헤아릴수없이많은세부종류로이루어져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노래에는 ‘소의엉긴젖’, ‘양의젖’, ‘어린양의기름’, ‘바산에서난숫양과염소’, ‘밀의콩팥의기름’, ‘포도의피’와 같이 매우 다양한 자연적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각각이 천적인 것들의 서로 다른 종류와 세부 종류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다만 AC.353은 각각이 정확히 어느 종류의 천적 선을 뜻하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소의엉긴젖은이것’, ‘양의젖은저것’, ‘바산의숫양은이것’이라는 식으로 우리가 상응표를 더 만들어 붙이는 것은 스베덴보리보다 앞서 나가는 해석이 됩니다.
오히려 여기서 붙들어야 할 더 큰 원리는 천적인 사랑과 선의 헤아릴 수 없는 다양성입니다. 우리는 ‘사랑’, ‘선’, ‘체어리티’라는 말을 하나의 단순한 성질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실제 삶에서 무수한 형태와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한 사람을 위로하는 선과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선, 어린아이를 돌보는 선과 공동체의 질서를 지키는 선, 진리를 가르치는 선과 말없이 필요한 일을 감당하는 선은 모두 선에 속하면서도 그 질과 쓰임은 서로 다릅니다. 이것은 AC.353이 직접 각각의 사례를 열거한 것은 아니지만, ‘천적인것들의헤아릴수없는종류와세부종류’라는 원리를 우리의 삶에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예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획일적인 하나의 행동 양식이 아니라 각 사람과 공동체의 상태와 쓰임에 따라 무수한 형태로 받아들여집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읽는 방법에도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기름= 사랑’, ‘빛= 신앙’과 같은 기본적인 대응을 아는 것은 유익하지만, 상응을 단순한 암호표처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AC.353자체가 기름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천적인 것에는 헤아릴 수 없는 종류와 세부 종류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연물이 어떤 문맥에서, 어떤 다른 표상들과 함께, 어떤 교회적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상응은 자연물에 영적 단어 하나를 기계적으로 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천국의 무수한 질서와 인간의 내적 상태가 자연계의 형상 안에 표현되는 살아 있는 관계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신32:14의 표현들을 두고 ‘속뜻이없다면단지말들에지나지않을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밀의콩팥의기름’이나 ‘포도의피’와 같은 표현은 문자적으로만 보면 매우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53은 그러한 낯선 세부조차 말씀 안에서 무의미하게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천적인 실재의 종류와 세부 종류를 담고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 문자적 의미가 무가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의 문자 안에 속뜻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 문자적 형상 하나하나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말씀의 속뜻은 문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문자 안에 담긴 천국의 실재를 열어 보여 줍니다.
다시 창4:4의 아벨에게 돌아오면 이 긴 설명의 목적이 선명해집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양떼의처음난것’은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이며, ‘기름’은 역시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 곧 사랑에 속한 선입니다. 따라서 아벨의 제물은 ‘내가좋은것을만들어주님께드린다’는 인간 중심의 예배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모든 참된 사랑과 선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예배를 나타냅니다. 가인에게도 소산과 제물이 있었지만 그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행위와 예배였습니다. 반면 아벨의 제물에는 체어리티와 사랑의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인정이 있습니다. 두 제물의 차이는 자연적인 재료가 아니라 내적 생명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AC.353의 핵심을 단지 ‘기름은천적인것을의미한다’는 상응 하나로만 기억해서는 부족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천적인 것이 ‘사랑에속한모든것’이며, 그 사랑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신앙도 사랑에서 비롯될 때 살아 있고 천적이며,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의 모든 선 역시 그 사랑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과 예배와 행위 안에 ‘기름’이 있는가를 묻는다는 것은, 그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의 생명이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예배를 충실히 드리며 많은 일을 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 안에서 주님의 사랑이 이웃을 향한 선과 쓰임으로 살아 움직이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아벨이 드린 ‘기름’은 바로 그 살아 있는 사랑의 생명을 보여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