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변승우 목사는 로마서 82절을 중심으로 매우 긴 설교를 이어 갑니다. 설교의 핵심은 ‘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그는 이 두 ‘’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로마서 7장과 8장을 오가며 오랜 시간 설명합니다. 원어를 검토하고, 여러 신학자의 견해를 비교하며, 자신이 내린 결론을 성도들에게 전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연구 태도 자체는 진지하며, 본문을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도 충분히 엿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이 설교를 바라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의외로 로마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창세기입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로마서를 펼치기 전에 먼저 창세기 2장과 3장을 펼쳤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영적 원리는 이미 창세기의 내적 의미 안에 모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새로운 영적 질서를 만들어 낸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태초부터 말씀 안에 심어 두신 질서를 교회에 적용하여 설명한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바울은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법은 로마서에서 갑자기 등장한 개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 법은 선악과를 먹는 사건에서 이미 시작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처음부터 악을 사랑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살았고, 선과 진리를 거의 본능처럼 분별하는 ‘퍼셉션(perception)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뱀으로 상징되는 감각적 자아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인간 안에는 전혀 다른 질서가 자리 잡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던 질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가려는 질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proprium’이라고 부릅니다. 흔히 ‘자아’라고 번역되지만, 단순한 개성이 아니라 ‘주님 없이 스스로 살려고 하는 자기 생명’입니다. 바로 이것이 죄의 뿌리입니다. 따라서 죄는 단순히 몇 가지 나쁜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중심이 주님에게서 자기 자신으로 옮겨진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죄와 사망의 법’은 어떤 법률 조항이 아니라, 자기 사랑이 인간 안에서 하나의 질서가 되어 버린 상태를 가리킵니다.

 

반대로 바울은 ‘생명의 성령의 법’을 말합니다. 이것 역시 로마서에서 처음 계시된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2장에서 주님께서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장면이 그 원형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그 생기는 단순한 호흡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인간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유입(influx)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성령의 법’은 새로운 교리가 아니라, 인간이 본래 창조될 때부터 예정되어 있던 생명의 질서입니다.

 

이렇게 보면 로마서는 창세기를 설명합니다. 바울은 창세기의 영적 역사를 다른 언어로 다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말하지만, 창세기는 그것을 ‘선악과를 먹음’으로 보여 줍니다. 바울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 말하지만, 창세기는 그것을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보여 줍니다. 하나는 교리적인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표상과 상응의 언어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하나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성경 읽기가 현대 개신교와 크게 달라집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는 로마서를 중심으로 창세기를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속뜻을 먼저 열고, 그 빛으로 로마서를 읽습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는 원형이고, 로마서는 그 원형을 설명하는 적용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가장 깊은 샘은 언제나 창세기와 복음서 안에 있으며, 바울은 그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교회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안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이번 설교를 읽기 시작하면, 관심의 중심도 조금 달라집니다. 설교자가 로마서의 단어 하나하나를 어떻게 해석하는가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바울이 지금 창세기의 어떤 영적 질서를 설명하고 있는가?입니다. 이 질문이 열리는 순간, 로마서는 더 이상 독립된 교리서가 아니라, 태초부터 말씀 안에 감추어져 있던 주님의 생명의 질서를 증언하는 또 하나의 창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이번 설교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한층 더 깊고 넓은 의미를 갖기 시작합니다.

 

 

이제 말씀의 원형이라는 관점을 마음에 두고, 설교 자체를 살펴보겠습니다. 변승우 목사는 로마서 82절의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는 말씀을 중심으로 설교를 전개합니다. 특히 그는 여기서 말하는 ‘’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오랫동안 연구했다고 말하며, 여러 신학자의 견해를 검토한 끝에 자신이 내린 결론을 성도들에게 설명합니다. 설교를 읽어 보면 단순히 감동적인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본문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원어를 살피고, 로마서 7장과 8장의 문맥을 연결하며, 여러 주석가들의 견해를 비교하는 모습은 일반적인 주일설교에서는 흔히 보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러한 연구 태도는 존중받을 만합니다. 말씀을 가볍게 다루지 않고, 본문이 실제 무엇을 말하는지를 확인하려는 자세는 분명 귀한 일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을 함부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 구절을 설명하기 위해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관련 구절을 모두 연결하고, 하나의 단어가 다른 곳에서는 어떻게 사용되는지까지 세심하게 살폈습니다. 그런 점에서 말씀을 깊이 연구하려는 자세 자체는 두 사람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변승우 목사는 로마서를 연구하여 창세기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속뜻을 먼저 이해한 다음, 그 빛으로 로마서를 읽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순서만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경 전체를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설교자는 ‘죄와 사망의 법’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로마서 7장을 자세히 분석합니다. ‘내 지체 속에 있는 다른 법’, ‘죄의 법’, ‘하나님의 법’을 서로 비교하면서 바울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밝히려 합니다. 이것은 본문을 충실히 읽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이렇게 질문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왜 어떻게 이런 표현을 사용할 수 있었는가? 그 원형은 어디에, 그리고 이미기록되어 있는가?’

 

그 질문의 답은 창세기입니다. 창세기 3장은 단순히 최초의 인간이 선악과를 먹었다는 역사적 기록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 안에 두 가지 질서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보여 주는 영원한 표상입니다. 하나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사는 질서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에게서 생명을 얻으려는 질서입니다. 선악과를 먹는다는 것은 단순한 불순종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주님에게서 자기 자신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부터 자기 사랑은 하나의 법처럼 인간 안에서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보면 바울이 말하는 ‘죄와 사망의 법’은 새로운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창세기에서 이미 상징으로 보여 준 내용을 교리적인 언어로 다시 설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로마서를 읽을 때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바울이 무엇을 새롭게 말하는가?’가 아니라, ‘바울은 창세기의 어떤 영적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가?’가 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성경관은 매우 독특합니다. 그는 사도들의 서신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글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서신들은 이미 계시된 진리를 설명하고 적용하는 글이지, 창세기나 복음서처럼 모든 단어 안에 연속적인 아르카나(arcana)가 담겨 있는 말씀 자체는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서신을 연구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 연구는 언제나 말씀의 원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번 설교를 접하면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설교자가 수십 분 동안 설명하는 내용의 상당 부분이 사실은 스베덴보리에게는 창세기 2장과 3장의 속뜻 안에서 이미 설명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죄의 지배, 인간의 내적 갈등, 성령의 생명, 거듭남, 자유로운 선택과 같은 주제들은 모두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의 창세기 해설에서 이미 긴 흐름으로 다루어집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그 긴 이야기를 교회의 현실 속에서 압축하여 설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점은 앞으로 설교를 읽는 방식에도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만일 우리가 먼저 로마서를 읽고 창세기를 이해하려 한다면, 창세기는 바울의 교리를 설명하는 책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길을 따르면 순서는 반대입니다. 먼저 창세기의 내적 의미를 통해 인간과 주님, 타락과 거듭남의 전체 구조를 이해합니다. 그리고 나서 로마서를 읽으면, 바울의 한 문장 한 문장이 이미 알고 있던 영적 질서를 교회의 삶에 적용하는 살아 있는 해설처럼 들리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번 설교는 새로운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는 이제 설교자가 로마서를 얼마나 논리적으로 설명하는가만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설명이 창세기의 원형과 어디에서 만나고, 어디에서 조금씩 갈라지는지를 함께 살펴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단순한 평가가 아니라, 말씀 전체의 빛 속에서 설교를 다시 읽게 하는 새로운 독서법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다 보면 처음에는 다소 의아하게 느껴지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바울을 매우 존중하면서도, 바울의 서신을 창세기나 복음서와 같은 위치에 두지 않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신약성경의 중심이 바울서신처럼 여겨지지만, 스베덴보리에게 중심은 언제나 ‘말씀(The Word)입니다. 다시 말해, 내적 의미가 처음부터 끝까지 연속적으로 흐르는 책들, 곧 모세 오경을 비롯, 여호수아, 사사기, 열왕기, 시편 및 선지서들과 복음서들, 그리고 계시록이 중심이며, 사도들의 서신은 그 말씀을 교회의 현실 속에 적용한 글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순간, 이번 설교를 바라보는 시선도 자연스럽게 달라집니다.

 

변승우 목사는 로마서를 매우 깊이 연구합니다. 그는 로마서 7장과 8장을 오가며 ‘죄와 사망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 ‘하나님의 법’이라는 표현들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 오랫동안 설명합니다. 이러한 연구는 분명 성실하며,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노력도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입장에서 보면, 이 모든 연구는 어디까지나 ‘적용’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원형은 이미 다른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번 설교의 핵심인 ‘죄와 사망의 법’이라는 표현은 로마서에서 처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그 원형은 이미 창세기 3장에 있습니다. 뱀이 여자를 유혹하고, 사람이 선악과를 먹으며,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모든 과정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 중심의 질서에서 자기 중심의 질서로 옮겨 가는 영적 과정을 보여 주는 표상입니다. 바울은 이 긴 영적 역사를 ‘죄와 사망의 법’이라는 한 문장으로 압축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의 성령의 법’도 바울이 처음 만든 표현은 아닙니다. 창세기에서 주님께서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장면, 노아 시대에 남겨 두시는 리메인스(remains),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과정, 이삭과 야곱의 생애, 출애굽의 여정, 광야의 시험, 가나안 입성에 이르기까지, 말씀 전체는 주님께서 인간 안에 새로운 생명을 형성하시는 과정을 다양한 표상으로 보여 줍니다. 바울은 그 긴 흐름을 교회의 언어로 다시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바울을 이해하려면 먼저 말씀을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오늘날에는 로마서를 중심으로 창세기를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칭의’, ‘성화’, ‘육신’, ‘성령’과 같은 바울의 용어를 기준으로 구약을 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방법은 정반대입니다. 먼저 창세기의 속뜻을 통해 인간의 창조와 타락, 거듭남과 구원의 질서를 이해합니다. 그런 다음 로마서를 읽으면, 바울은 새로운 교리를 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계시된 진리를 교회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교사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점은 바울의 권위를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의 위치를 더욱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도 자신의 복음을 주님께 받은 것으로 말하며, 끊임없이 구약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는 자신이 새로운 종교를 시작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주님 안에서 성취된 진리를 유대인과 이방인 교회에 설명하는 사명을 감당했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의 서신은 말씀과 경쟁하는 책이 아니라, 말씀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독자는 자연스럽게 이런 순서를 따르게 됩니다. 먼저 창세기에서 인간이 어떻게 타락했는지를 읽고, 복음서에서 주님께서 어떻게 그 타락한 인간성을 입으시고, 영화(榮化)의 길을 걸으셨는지를 읽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을 읽으면, 로마서의 한 절 한 절이 훨씬 깊고 입체적으로 살아납니다. 더 이상 추상적인 교리 문장이 아니라, 말씀 전체를 관통하는 영적 질서를 요약하는 증언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번 설교를 다시 바라보면, 설교자가 수십 분 동안 로마서의 단어 하나를 붙들고 씨름하는 모습도 새로운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분명 귀한 연구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을 더 나아가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바울이 설명하는 이 진리를 주님께서는 창세기에서 어떤 표상으로 이미 보여 주셨는가?’ 바로 이 질문이 열릴 때, 우리는 바울의 설명을 넘어 말씀 자체가 품고 있는 더 깊은 아르카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스베덴보리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성경 읽기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설교의 핵심 본문인 로마서 8장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바울은 새로운 영적 원리를 계시한 사람이 아니라 이미 말씀 안에 들어 있던 진리를 교회의 언어로 설명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로마서 8장은 창세기의 어떤 영적 질서를 다시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이 질문이 이번 해설의 중심입니다.

 

변승우 목사는 로마서 82절을 설명하면서 ‘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두 질서가 인간 안에서 서로 대립하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죄가 사람을 사망으로 이끌고, 성령께서 그 죄의 권세에서 사람을 해방하신다고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바울의 논리를 충실하게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대립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를 먼저 봅니다. 그의 시선은 다시 창세기 3장으로 향합니다.

 

창세기의 속뜻에서 뱀은 단순한 동물이 아닙니다. 가장 바깥 자연적 인간, 곧 감각과 자기 판단만을 신뢰하려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자가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바라보는 순간, 인간 안에서는 하나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이전까지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러하다’는 질서로 살았지만, 이제는 ‘내가 보기에는 좋다’는 질서로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변화가 죄의 시작입니다. 따라서 죄는 어떤 행동을 먼저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중심이 주님에게서 자기 자신으로 이동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죄를 설명할 때 언제나 ‘사랑’을 먼저 말합니다. 사람은 결국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따라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자기 사랑이 중심이 되면 그 뒤에 수많은 죄가 열매처럼 맺히고, 주님에 대한 사랑이 중심이 되면 선과 진리가 자연스럽게 자라납니다. 바울이 말하는 ‘죄와 사망의 법’도 결국 이러한 자기 사랑의 질서가 인간 안에서 굳어진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생명의 성령의 법’은 무엇일까요? 많은 설교에서는 이것을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으로 설명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 새로운 사랑과 새로운 의지를 만들어 가시는 질서입니다. 다시 말해, 죄를 억누르는 힘 이전에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마음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악이 즐거웠다면 이제는 선이 즐거워지고, 이전에는 자신을 높이는 것이 기뻤다면 이제는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기쁨이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해방입니다.

 

이 점에서 로마서 8장은 창세기의 거듭남을 다른 언어로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는 것으로, 이삭이 제단 위에 올라가는 것으로, 야곱이 씨름하는 것으로, 요셉이 시험을 통과하는 것으로 거듭남을 보여 줍니다. 모두 서로 다른 역사처럼 보이지만, 속뜻으로는 한 사람이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이러한 긴 영적 역사를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간결한 표현으로 요약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하나 중요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설교에서는 죄와 성령의 싸움이 비교적 직접적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싸움이 곧바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리메인스(remains)가 보존되고 자라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사람 안에 선과 진리의 씨앗을 남겨 두시고, 거듭남의 때가 되면 그것들을 하나씩 깨우십니다. 그래서 영적 전투는 갑자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온 주님의 섭리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천국의 비밀에서 반복해서 강조되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로마서 8장의 분위기도 조금 달라집니다. 그것은 죄와 성령이 힘겨루기를 하는 장면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오래전부터 준비해 오신 거듭남의 역사가 마침내 사람 안에서 본격적으로 열리는 순간입니다. 죄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삶의 중심이 아닙니다. 생명의 질서가 조금씩 그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해방’이며,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실제 모습입니다.

 

결국 로마서 8장을 창세기의 속뜻으로 다시 읽으면, 본문은 훨씬 넓은 풍경 속에 놓이게 됩니다. 바울은 단지 교리 하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시작되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지나, 복음서에서 주님 자신 안에서 완성된 거대한 구원의 역사를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다시 일어나는 사건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로마서는 비로소 창세기와 하나가 되고, 설교 역시 그 원형의 빛 속에서 더욱 깊고 풍성하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제 이번 설교 자체를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겠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변승우 목사는 로마서 8장을 매우 진지하게 연구합니다. 원어를 검토하고, 여러 주석가들의 견해를 비교하며, 본문의 문맥을 세밀하게 따라갑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이 정도로 본문 자체를 붙들고 설교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말씀을 깊이 연구하려는 자세와, 죄와 성화를 가볍게 다루지 않으려는 태도는 충분히 존중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점은 이번 설교의 분명한 장점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번 설교에는 한 가지 근본적인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연구의 깊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연구의 출발점이 말씀의 원형이 아니라 바울의 설명이라는 점입니다. 설교자는 로마서 안에서 답을 찾기 위해 로마서를 계속 파고듭니다. 로마서 7장을 읽고 다시 8장을 읽으며, 바울의 표현 하나하나를 분석합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라면 같은 시간을 들여 창세기와 복음서를 먼저 펼쳤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도 결국 그 말씀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성경 해석의 차이가 아니라, 성경관의 차이입니다. 만일 바울의 서신을 신앙의 출발점으로 삼으면, 성경 전체는 바울의 교리를 설명하는 자료처럼 읽히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정반대의 길을 갑니다. 창세기와 복음서가 먼저 있고, 바울은 그 말씀을 교회의 현실 속에 적용하는 증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중심이 아니라 안내자입니다. 안내자는 소중하지만, 목적지는 아닙니다.

 

이 점은 이번 설교의 여러 부분에서도 드러납니다. 설교자는 ‘죄와 사망의 법’이라는 표현을 길게 설명하지만, 정작 왜 인간 안에 그런 ‘’이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바울의 설명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태고교회와 선악과, 자기 사랑과 퍼셉션의 상실을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죄를 교리의 문제로 보기 전에 존재의 문제로 봅니다. 인간이 어떤 법 아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사랑 아래 있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설교는 성령의 역사도 매우 강조합니다. 이것 역시 귀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성령의 역사를 단순히 죄를 이기는 능력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성령의 역사를 주님의 끊임없는 유입(influx)으로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매 순간 사람의 의지와 이해 안으로 선과 진리를 흘려보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어느 날 갑자기 강한 체험을 하는 사건이 아니라, 평생 동안 주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서 질서를 회복해 가는 과정입니다. 이 설명은 로마서만으로는 얻기 어려운 깊이이며, 바로 말씀의 속뜻이 열릴 때 비로소 보이는 풍경입니다.

 

이번 설교를 접하면서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설교자가 죄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회개를 강조하고, 성화를 강조하며, 죄와 타협하는 신앙을 경계합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오늘날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탤 것입니다. 죄를 끊는 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죄 없는 존재로만 만들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사랑을 품은 존재로 만드시려 합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목표는 단순히 악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설교를 읽으며 가장 크게 떠오른 비유가 하나 있습니다. 설교자는 마치 큰 나무의 가지를 하나하나 살펴보는 식물학자와 같습니다. 가지의 모양을 자세히 설명하고, 잎의 구조를 분석하며, 열매가 어떻게 맺히는지를 세심하게 관찰합니다. 그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먼저 그 나무가 어떤 뿌리에서 자라고 있는지를 봅니다. 뿌리를 알면 가지도 이해되지만, 가지만 오래 연구해서는 뿌리까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이번 설교를 읽으며 느낀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변승우 목사의 설교는 로마서를 매우 성실하게 읽은 설교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라면 로마서를 읽기 전에 창세기와 복음서를 먼저 읽었을 것입니다. 이 두 방법은 서로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출발점이 다릅니다. 그러나 그 출발점의 차이는 설교 전체의 방향을 바꾸어 놓습니다. 하나는 바울을 통해 말씀을 이해하려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말씀을 통해 바울을 이해하려는 길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일관되게 후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번 설교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읽을 때 더욱 풍성해집니다. 설교 자체의 장점은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말씀의 원형인 창세기와 복음서의 빛 속에 다시 놓아 볼 때, 비로소 바울이 말하려 했던 진정한 깊이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때 로마서는 독립된 교리서가 아니라, 태초부터 말씀 안에 감추어져 있던 주님의 구원의 질서를 교회의 언어로 아름답게 증언하는 글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이번 설교를 끝까지 듣고 난 뒤 가장 크게 남는 인상은 설교자의 진지함입니다. 그는 로마서 82절을 가볍게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표현 하나를 이해하기 위해 오랫동안 연구하고,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비교하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결론을 성도들에게 전하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분명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본문보다 이야기나 예화를 앞세우는 설교가 많아지는 시대에는 이러한 진지한 연구 자체가 귀한 가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이 설교를 다시 바라보면, 더욱 근본적인 질문이 하나 떠오릅니다. ‘왜 우리는 로마서를 이렇게까지 연구하는가?’입니다. 물론 로마서는 중요한 책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바울은 새로운 하늘의 비밀을 처음 계시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말씀 안에 계시되어 있던 진리를 교회의 현실에 맞게 풀어 설명한 사도입니다. 그렇다면 연구의 중심은 언제나 말씀 자체여야 하며, 사도들의 서신은 그 말씀을 이해하도록 돕는 귀한 안내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점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의 성경 읽기와는 적지 않은 차이를 보입니다. 우리는 흔히 로마서를 기준으로 창세기를 읽고, 갈라디아서를 기준으로 율법을 이해하며, 에베소서를 기준으로 복음서를 정리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언제나 반대 방향으로 갑니다. 그는 창세기와 복음서를 먼저 읽고, 그 빛으로 바울을 읽습니다. 그래서 그의 저작을 읽다 보면 창세기의 한 절을 설명하는 데 수십 페이지를 할애하면서도, 바울의 한 절을 놓고 같은 방식의 연속적인 속뜻을 전개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미 원형은 창세기와 복음서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받아들이면 이번 설교도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변승우 목사가 로마서를 어떻게 해석했는가’만을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창세기의 어떤 영적 질서를 교회에 설명하고 있는가’를 먼저 보게 됩니다. 그러면 ‘죄와 사망의 법’은 선악과 사건으로 연결되고, ‘생명의 성령의 법’은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창조와 거듭남의 역사로 연결됩니다. 또한 ‘육신’과 ‘성령’의 대립도 단순한 윤리적 갈등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주님 사랑이라는 두 생명의 질서가 인간 안에서 어떻게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작용하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말씀은 하나’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창세기와 복음서, 선지서와 요한계시록은 서로 다른 책들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울 역시 그 생명 밖에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생명을 교회의 언어로 증언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을 깊이 이해하는 가장 좋은 길은 바울을 끝없이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의지하고 있는 말씀의 원형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번 설교를 통해 오히려 다시 확인하게 되는 사실도 있습니다. 설교자는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고, 회개와 성화를 강조했으며,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힘주어 말했습니다. 이러한 방향은 스베덴보리의 사상과도 결코 멀지 않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스베덴보리는 그 모든 주제를 언제나 말씀 전체의 흐름 안에서 바라본다는 점입니다. 그는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복음서에서 완성되는 주님의 구원 역사를 먼저 본 다음, 그 빛으로 바울을 읽습니다. 그래서 그의 성경 읽기는 언제나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향하고, 교리가 아니라 생명을 향합니다.

 

아마 이것이 앞으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지향해야 할 가장 중요한 특징일 것입니다. 어떤 설교를 만나든 먼저 ‘이 설교가 어떤 본문을 설명하는가’를 묻기보다, ‘이 설교가 설명하는 영적 원형은 말씀 어디에 있는가’를 먼저 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설교는 단순히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대상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게 됩니다.

 

이번 설교 역시 그런 시선으로 읽을 때 더욱 깊어집니다. 로마서는 여전히 귀한 책이고, 바울은 여전히 위대한 사도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복음서에서 완성되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 말씀을 대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말씀을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성경관은 우리를 언제나 그 증언 너머, 말씀 자체이신 주님께로 이끕니다.

 

아마 이것이 이번 설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통찰일 것입니다. 설교를 바울의 눈으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말씀의 눈으로 읽고, 그다음 바울을 읽는 것 바로 그때 로마서는 하나의 독립된 교리서가 아니라, 창세기에서 시작된 거듭남의 역사를 교회의 삶 속에 다시 들려주는 살아 있는 증언으로 새롭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스베덴보리가 우리에게 남겨 준 가장 독창적이며 가장 성경적인 성경 읽기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SY.39, JMS 정명석, ‘깔짝거리지 말고 하라, 본격적으로 하라’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설교는 대한민국에서 JMS(기독교복음선교회)로 알려진 단체의 창설자 정명석의 설교입니다. 따라서 이 해설은 단순히 설교의 문장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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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 설교는 대한민국에서 JMS(기독교복음선교회)로 알려진 단체의 창설자 정명석의 설교입니다. 따라서 이 해설은 단순히 설교의 문장만을 떼어 놓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설교가 실제 어떤 신앙 체계 안에서 선포되고 있는지를 함께 고려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다만 출처만으로 모든 내용을 부정하거나, 반대로 일부 좋은 내용만 보고 전체를 긍정하는 태도 역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언제나 말씀 자체와 그 열매를 기준으로 분별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경적인 요소는 인정하고, 이어서 어디에서부터 중심이 달라지는지를 차분히 살펴보겠습니다.

 

설교의 제목인 ‘깔짝거리지 말고 본격적으로 하라’는 표현은 매우 직설적입니다. 설교자는 신6:5의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와 마5:48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를 본문으로 삼아, 신앙을 피상적으로 하지 말고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러한 출발점 자체는 성경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부분적인 관심이 아니라 삶 전체를 포함해야 하며, 신앙 역시 말이나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신앙은 삶이 되어야 하며, 참된 믿음은 선한 삶과 분리될 수 없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격적으로 하라’는 첫 번째 권면은 충분히 귀담아들을 만한 내용입니다.

 

설교는 이어서 ‘손과 얼굴만 씻지 말고 온몸을 씻어야 한다’, ‘휴지로 닦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샤워하듯 깨끗이 씻어야 한다’는 비유를 반복합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보면 이 비유는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씻음’은 단순한 육체의 청결이 아니라 악과 거짓으로부터 정결하게 되는 회개를 뜻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일부만 고치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의지와 행동 전체가 주님의 진리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가 ‘부분적인 신앙’을 경계하는 것은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주일 예배 한 시간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정과 직장, 인간관계와 양심, 말과 행동까지 이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중요한 차이도 함께 짚어야 합니다. 설교는 ‘온전하게 하라’는 말씀을 매우 강한 완전주의적 어조로 풀어 갑니다. 마치 한 번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것처럼 들리는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거듭남은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질서 있는 과정입니다. 사람은 오늘 하나의 악을 버리고, 내일 또 다른 거짓을 깨닫고, 그렇게 조금씩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때로는 큰 결단이 필요하지만, 많은 경우에는 오랜 인내와 반복되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본격적으로’ 한다는 것은 반드시 단번에 완성된다는 뜻이 아니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진실하게 계속 나아간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말씀의 정신에 더 가깝습니다.

 

설교는 이후 월명동 개발 이야기를 길게 소개합니다. 앞산을 얼마나 깎아야 하는지, 어디까지 측량해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직접 기준을 정해 주셨다는 이야기, 거대한 바위를 옮기기 위해 대형 크레인을 사용했다는 이야기 등이 매우 자세하게 이어집니다. 처음 들으면 이것은 단순한 성공 사례처럼 보입니다. 작은 일도 대충 하지 말고 철저하게 준비하라는 교훈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일을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하는 자세는 신앙인에게도 필요한 덕목입니다.

 

그러나 설교가 계속될수록 그 중심은 조금씩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중심이었지만, 점차 월명동이라는 특정 장소와 ‘선생’이라 불리는 특정 인물의 경험이 설교의 중심으로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월명동을 직접 측량하셨고, 월명동은 하나님의 특별한 성전이며, 지구에서 가장 좋은 길지이고, 하나님께서 시대의 사명자를 그곳에 세우셨다는 내용이 반복됩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며 창조주의 지혜를 찬양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특정 장소의 아름다움이 특정 인물의 절대적 사명을 입증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성전은 건물이 아닙니다. 더욱이 특정 지역이나 특정 지형도 아닙니다. 참된 성전은 주님께서 선과 진리 가운데 거하시는 인간의 마음이며, 그러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훌륭한 건축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이름 없는 작은 교회라 하더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있다면 그곳이야말로 참된 성전입니다. 장소는 거룩함의 원인이 아니라, 거룩함을 담는 그릇일 뿐입니다.

 

설교에는 개인적인 꿈과 영적 체험도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꿈에서 배설물을 닦는 장면을 보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령께서 이렇게 계시하셨다’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사람의 양심을 깨우치시고 깊은 깨달음을 주시는 일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꿈과 느낌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직접 계시인지 여부는 반드시 말씀과 그 열매를 통해 분별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의 영향을 누구보다 자세히 설명했지만, 동시에 사람이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과 감동을 곧바로 하나님의 음성으로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여러 곳에서 경고합니다. 영적 체험은 언제나 주님의 진리와 사랑을 기준으로 검증되어야 합니다.

 

이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은 바로 여기서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중심이지만, 설교가 후반부로 갈수록 ‘선생을 증거하라’, ‘선생을 제대로 증거하지 못한다’, ‘선생의 정신같이 하라’, ‘기준은 한 명이다’, ‘항상 기준에 줄 맞추라’, ‘맞추지 않으면 서열에서 나와야 한다’는 표현들이 반복됩니다. 설교의 중심축이 하나님에게서 특정 인간 지도자에게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표현상의 문제가 아니라, 설교 전체의 방향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변화입니다.

 

여기서 이 설교가 JMS라는 배경에서 선포된 설교라는 사실이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 설교 속 ‘선생’은 추상적인 스승이 아니라 정명석 자신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선생을 증거하라’, ‘선생과 같이 하라’, ‘기준은 한 명이다’는 말은 일반적인 신앙 권면이 아니라, 실제 조직 안에서 지도자를 중심에 두는 신앙 구조를 반영하는 언어입니다. 처음 듣는 사람은 이를 단순한 열심의 권면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배경을 알고 읽으면 설교의 무게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어 보면, 천국의 모든 천사는 자신을 바라보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통하여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천사는 자기 이름을 증거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줄을 맞추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에게서 오며, 천사는 그 선과 진리를 전달하는 통로일 뿐입니다. 그래서 참된 영적 지도자는 사람을 자기에게 묶지 않고 주님께 인도합니다. 사람을 자기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고, 말씀을 기준으로 스스로 분별하도록 돕습니다. 만일 설교가 점점 지도자의 권위를 중심으로 재편된다면, 그것은 이미 영적 질서가 뒤바뀌기 시작한 신호일 수 있습니다.

 

설교는 또한 ‘하나님과 그 사명자에게 관심 없는 자는 대가를 받는다’, ‘선생을 제대로 증거하지 못한다’, ‘제자가 아니라 아저씨다’와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신6:5가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느 인간 지도자에게 같은 방식으로 충성을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는 있지만, 인간에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어떤 지도자도 주님을 대신할 수 없으며, 어떤 지도자도 신앙의 절대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설교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황금 신부천국’, ‘신부답게 영도 육도 깨끗이 하라’, ‘신앙생활을 본격적으로 하지 않은 자는 천국에 간 자가 없다’와 같은 표현입니다. 경건한 삶과 거룩함을 강조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이 지도자 중심의 신앙과 결합될 때는 매우 신중한 분별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이 설교자는 대한민국 법원에서 성범죄에 대해 유죄가 확정된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신부’와 ‘깨끗함’을 반복하는 언어는 일반적인 성경적 권면만으로 읽을 수 없으며, 실제 역사적 맥락과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의 흠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삶과 설교의 일치 여부를 묻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말보다 삶을 더 중요하게 봅니다. 아무리 천국을 말하고, 거룩함을 말하고, 사랑을 말하더라도 실제 삶이 그것과 반대라면 그 사람의 말은 점차 생명을 잃게 됩니다. 참된 진리는 반드시 삶으로 증명됩니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를 평가할 때도 화려한 언변이나 많은 계시 주장보다, 그의 삶이 주님의 계명과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설교 전체를 한마디로 무가치하다고 말하는 것도 공정하지는 않습니다. ‘신앙을 대충 하지 말라’, ‘회개를 형식적으로 하지 말라’,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라’, ‘분별력을 가지고 사람과 일을 살펴보라’는 권면에는 충분히 귀 기울일 만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적 요소들은 설교 후반으로 갈수록 특정 지도자의 권위를 강화하는 논리 속으로 흡수됩니다. 좋은 성경 구절과 생활의 지혜가 결국 인간 지도자를 절대화하는 구조를 떠받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 설교의 가장 큰 문제는 ‘깔짝거림’이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께만 향해야 할 사랑과 신뢰와 순종이 점차 한 인간에게 집중된다는 점입니다. 거듭남은 지도자를 얼마나 열심히 증거했느냐가 아니라, 자기 안의 자기애와 지배욕, 거짓과 탐욕을 얼마나 주님의 능력으로 버려 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자신에게 묶으시는 분이 아니라 자유 가운데 진리를 선택하도록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두려움이나 맹목적인 충성이 아니라, 사랑과 자유, 그리고 이성 안에서 자라갑니다.

 

결국 이 설교가 말하는 ‘본격적으로 하라’는 권면은 방향만 바로 잡는다면 매우 귀한 교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본격성’의 대상은 특정 지도자도, 특정 장소도, 특정 조직도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본격적으로 해야 할 것은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며, 말씀의 진리 앞에서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는 일이며, 매일의 삶 속에서 악을 버리고 선을 선택하는 거듭남의 길입니다. 그것이 신6:5가 말하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며, 또한 스베덴보리가 평생 일관되게 증언한 참된 신앙의 길입니다.

 

 

 

SY.40, 변승우 목사,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변승우 목사는 로마서 8장 2절을 중심으로 매우 긴 설교를 이어 갑니다. 설교의 핵심은 ‘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의 성령의 법’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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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38, ‘자유통일을 위한 120만 광화문 전국 주일 연합예배’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설교의 출발점인 여호수아의 ‘땅 나누기’는 말씀의 속뜻으로 볼 때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가나안 땅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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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의 출발점인 여호수아의 ‘땅 나누기’는 말씀의 속뜻으로 볼 때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가나안 땅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이 점령한 팔레스타인의 영토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여러 저작에서 ‘가나안 땅’은 주님의 나라, 곧 천국과 교회를 표상하며, 한 사람 안에서는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거듭난 마음과 삶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이 죽은 뒤에 천국으로 이동하는 사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악과 거짓을 물리치고 주님의 선과 진리가 마음과 생활을 다스리도록 하는 거듭남의 과정을 가리킵니다. 설교자가 ‘천년왕국은 주님이 재림할 때 가서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부터 체험해야 한다’고 말한 부분은, 표현과 교리적 배경은 다르지만, 천국을 단지 미래의 장소로만 보지 않고 현재의 삶 속에서 시작되어야 할 영적 상태로 본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천국은 시간과 장소 이전에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15장에 기록된 유다 지파의 경계는 현대 독자에게는 낯선 지명들의 연속처럼 보입니다. 남쪽 경계, 동쪽 경계, 북쪽 경계, 서쪽 경계가 세밀하게 열거되기 때문에, 이 본문을 읽다가 그저 고대의 토지대장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말씀 안에는 불필요한 기록이 없습니다. 말씀의 속뜻으로는 땅의 경계가 한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질서와 한계를 나타냅니다. 각 지파는 천국과 교회 안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종류의 선과 진리를 표상하며, 각 지파가 분배받은 땅은 그 선과 진리가 활동하는 고유한 영역을 뜻합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기능과 은사를 갖는 것이 아니듯, 천국의 모든 공동체도 동일하지 않습니다. 어떤 공동체는 사랑의 선을 중심으로 하고, 어떤 공동체는 신앙의 진리를 중심으로 하며, 또 어떤 공동체는 순종과 섬김의 선을 중심으로 합니다. 서로 다른 지역과 경계는 분열이나 차별이 아니라, 하나의 천국을 이루는 다양성과 질서를 나타냅니다.

 

그중에서도 유다 지파는 특별히 주님에 대한 사랑, 더 깊게는 주님의 신적 사랑과 천적 나라를 표상합니다. 유다에게 주어진 땅이 먼저 상세히 기술되는 것은 참된 교회의 모든 질서가 사랑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사랑에서 나올 때 생명을 얻습니다. 사랑이 없는 진리는 차갑고 논쟁적인 지식이 되기 쉽지만,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 진리는 사람을 살리고 섬기게 합니다. 그러므로 유다 지파의 땅을 나누는 이야기를 오늘의 신앙생활에 적용한다면, ‘나는 얼마나 넓은 땅과 큰 복을 받을 것인가’보다 ‘내 안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 어느 영역까지 다스리고 있는가’를 먼저 물어야 합니다. 내 생각과 말, 경제생활과 인간관계, 정치적 판단과 종교적 열심 가운데 어느 부분까지 주님의 사랑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것이 이 본문에 대한 더 내적인 적용입니다.

 

설교자는 제비뽑기에 하나님의 의지가 들어 있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성경에는 실제로 중요한 일을 제비로 결정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가나안 땅의 분배도 제비로 이루어졌고, 요나의 책임을 가려낼 때도 제비를 뽑았으며,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정할 때도 제비를 사용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제비는 인간의 계산과 사사로운 욕심을 내려놓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긴다는 의미를 지닐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설교자가 ‘제비뽑기도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었다’고 말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하나님의 ‘의지’라는 표현은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허용하신 것과 하나님께서 그 일을 직접 원하시고 일으키신 것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의 모든 행동을 미리 조종하는 결정론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언제나 사람을 자유와 이성 안에서 선으로 인도하는 신적 질서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선을 선택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이끄시지만, 동시에 사람이 악을 선택할 자유도 억지로 빼앗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악을 선택할 때 주님께서 그 악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기 위해 그것을 허용하시고, 허용된 악에서 가능한 한 선한 결과가 나오도록 섭리하십니다. 이것을 ‘허용의 섭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곧바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다’고 말하면, 인간이 저지른 악과 거짓, 폭력과 불의를 하나님께 돌리는 위험이 생깁니다. 모든 일이 섭리의 바깥에 있지는 않지만,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그 자체인 것은 아닙니다.

 

설교에서 가룟 유다의 제비와 죽음이 언급되면서, 그의 배반과 자살까지 하나님의 의지가 들어간 사건처럼 설명됩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과 주님의 신적 성품을 함께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배반과 자살을 명하시거나 예정하셨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누구에게도 악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유다는 자신의 욕망과 선택을 따라 주님을 배반했으며, 주님은 그 악한 선택까지도 구원의 역사 안에서 사용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악을 구원의 역사에 사용하셨다는 것과, 그 악을 미리 원하시고 강제로 행하게 하셨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십자가 사건 역시 사람들의 악의와 폭력이 주님의 뜻이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이 저지른 최악의 악을 받아 이기시고 인류 구원의 길로 바꾸신 사건입니다. 이것이 신적 섭리의 놀라움입니다. 섭리는 악을 악으로 명령하는 능력이 아니라, 인간이 선택한 악조차도 궁극적으로 선을 위해 굴복시키는 주님의 지혜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설교자가 설명한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을 천지창조 전에 하나님이 이미 정해 놓았다’는 예정론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며, 어느 누구도 지옥을 위해 창조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천국에 가는가 지옥에 가는가는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정해 놓은 운명표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랑을 자기 생명의 중심으로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고, 자유와 이성을 보존하시며, 끊임없이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인도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참된 예정은 특정한 사람만 구원하기로 정한 예정이 아니라,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시기로 정하신 신적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도 인간의 자유와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무엇을 선택할지 미리 아신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선택을 강제로 일으키시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의 성향을 잘 알아 어떤 선택을 할지 예상한다고 해서, 자녀의 선택을 부모가 대신한 것은 아닌 것과 비슷합니다. 물론 주님의 예지는 인간의 예상과 비교할 수 없이 완전하지만, ‘아심’과 ‘행하게 하심’은 여전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인간이 선택할 모든 가능성과 결과를 영원부터 아시며,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사람이 자유롭게 선을 선택하도록 가장 섬세하게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자유를 지워 버리는 권력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면서도 끝없이 선으로 이끄시는 사랑과 지혜의 통치입니다.

 

설교자가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과 여호수아와 갈렙의 긍정적인 태도를 대조한 부분은 목회적으로 귀 기울일 만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의 인도를 믿지 못하고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했으며,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고 담대히 고백했습니다. 이는 두 사람이 인간적인 낙관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광야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겪는 시험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사람이 처음 진리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곧바로 가나안의 평안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오래된 욕망과 습관, 두려움과 자기 신뢰가 끊임없이 일어나기 때문에, 사람은 마치 메마른 광야를 걷는 것 같은 시간을 지나갑니다. 그때 불평은 단순히 입으로 투덜거리는 행위보다, 주님의 섭리를 믿지 않고 이전의 악한 삶으로 돌아가려는 내적 태도를 뜻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감사하면 더 큰 감사할 일이 생긴다’거나 ‘불평하지 않고 감사하면 넓은 빌딩과 땅을 받는다’는 식의 적용은 조심해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감사는 물질적 보상을 얻기 위한 영적 기술이 아닙니다. 참된 감사는 내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드리는 조건부 반응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나를 영원한 선으로 인도하고 계심을 믿는 태도입니다. 감사의 열매가 반드시 건물과 재산, 건강과 장수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감사는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도 마음을 지켜 주고, 고난 속에서도 선을 행할 수 있게 하며, 받은 것을 이웃과 나누게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가장 큰 기업은 넓은 토지나 빌딩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고 진리를 기뻐하는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성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큰 땅을 받은 이유를 ‘광야에서 불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연결하는 것도 본문의 구체적인 내용과 속뜻을 함께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에 속했고 갈렙은 유다 지파에 속했으며, 두 사람은 각각 기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15장의 유다 지파 전체가 받은 넓은 기업이 갈렙 한 사람의 긍정적인 태도에 대한 개인적 보상으로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유다 지파의 위치와 기업은 이스라엘 전체의 영적 질서 안에서 정해진 것입니다. 말씀의 속뜻으로도 기업의 크기는 세속적 성공의 양을 나타내기보다, 각 선과 진리가 천국의 질서 안에서 담당하는 역할과 범위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좋으면 더 큰 부동산을 받는다’는 식으로 연결하기보다,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더 깊은 선과 진리를 맡기신다’고 이해하는 편이 본문의 영적 의미에 가깝습니다.

 

설교에서는 ‘이방 사람과 섞이지 말라’는 명령을 오늘의 불신자들과 관계 맺는 문제로 적용하면서, 이방 사람을 전도의 대상으로 삼되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권면에는 신앙의 중심을 지켜야 한다는 진지한 의도가 있습니다. 사람은 세상의 거짓과 탐욕, 음란과 자기애에 쉽게 미혹될 수 있으므로, 무엇이 자신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지 늘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에서 ‘이방 민족’은 단지 교회 밖의 사람들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한 사람 안에 있는 악한 사랑과 거짓된 사고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몰아내야 할 가나안 족속은 이웃집의 불신자나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교만, 탐욕, 증오, 기만, 음란, 복수심입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가나안 땅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교회 밖에 있다고 해서 모두 멸해야 할 이방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도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지배하면 영적으로는 가나안 족속의 상태에 있을 수 있으며, 교회 밖에서도 양심에 따라 정직하고 자비롭게 살아가는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받아들이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말씀은 ‘다른 사람을 의심하고 멀리하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악과 거짓에 동의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은 사랑하되 그 사람 안의 악에는 동의하지 않고, 진리를 전하되 우월감이나 적대감으로 대하지 않는 것이 주님의 질서입니다.

 

설교의 후반부로 갈수록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설보다 정치적 주장과 국가적 위기론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특정 정치인, 정부, 선거관리 기관, 군부, 간첩, 부정선거, 연방제, 국민저항권 등에 대한 강한 주장들이 이어지고,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에게 특정한 정치적 행동과 집회 참여를 촉구합니다. 이 주장들의 사실 여부를 떠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이러한 말들이 예배 가운데 성도들의 내면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가’입니다. 말씀의 설교는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자신의 악을 보게 하며, 회개와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치적 적대와 공포가 말씀의 중심을 차지하면, 성도는 자기 안의 악보다 외부의 적을 더 크게 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영적 상태가 그 사람이 무엇을 가장 사랑하고, 무엇을 생각할 때 기쁨을 느끼는가에 의해 형성된다고 설명합니다. 정치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며, 국가의 정의와 자유를 염려하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정치적 확신이 증오와 모욕, 공포와 분노를 끊임없이 자극한다면, 아무리 ‘하나님’과 ‘기독교’를 말하더라도 그 내적 정서는 천국의 사랑과 멀어질 수 있습니다. 천국은 같은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사랑의 종류에 따라 질서 있게 모이는 곳입니다. 어떤 정치적 입장을 가졌는가보다 그 입장을 어떤 마음으로 품고 표현했는가가 영적으로 더 중요합니다.

 

설교 중에는 ‘그놈’, ‘멍청하다’, ‘무식이 충만하다’, ‘인생 조진다’, ‘뒤진다’와 같은 거친 표현과, 특정 성도의 외모와 몸매, 나이와 죽음을 소재로 삼는 농담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설교자는 친근한 분위기를 만들고 성도들의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이러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회중이 웃고 박수치며 설교자와 친밀하게 교감하는 모습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예배와 설교의 언어는 단순한 대중 연설이나 오락 프로그램의 언어와는 달라야 합니다. 말은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의 내적 사랑이 밖으로 드러나는 형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한 열심이 아무리 크더라도, 사람의 존엄을 낮추거나 성도를 공개적으로 당황하게 하는 언어가 반복되면 그 열심의 그릇이 손상될 수 있습니다. 특히 여성 성도의 몸매를 ‘처녀 같다’고 평가하거나, 남편과 함께 몇 살에 ‘뒤지라’고 농담하는 방식은 친밀함이라는 이름 아래 넘어가기에는 조심스러운 부분입니다. 설교자의 권위 앞에서 성도는 불편함을 드러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천국적 사랑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상대의 수치를 덮으며, 공개적인 자리에서 한 사람의 인격을 세워 줍니다. 설교자의 유머도 성도를 웃음의 대상으로 삼기보다, 설교자 자신을 낮추거나 말씀의 진리를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 방향으로 사용될 때 더 온전한 열매를 맺습니다.

 

또한 설교자가 자신의 부흥회 경력, 교회와 한국 교회를 위해 한 일, 신학교 강의 경험, 정치적 영향력, 외국 대사와의 만남 계획 등을 길게 언급하는 부분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사역이 우연하거나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점을 회중에게 확신시키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오랜 세월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많은 집회를 인도한 경험은 존중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영적 권위는 과거의 업적이나 많은 군중, 유명 인사와의 관계에서 생기지 않습니다. 참된 권위는 말씀이 지닌 진리와 설교자의 삶 속에 나타나는 사랑에서 나옵니다. 사람은 주님을 섬기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졌는가’를 자기 정체성의 중심에 둘 수 있습니다. 이때 사역은 주님을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라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조금씩 변할 위험이 있습니다.

 

설교 중 구치소에서 죽음을 생각하며 ‘스위든보그’(스베덴보리의 영어식 발음)와 ‘썬다 싱’의 이름을 불렀다는 대목은 흥미롭습니다. 여기서 설교자가 스베덴보리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자세히 드러나지 않지만, 적어도 사후세계와 천국에 관한 증언을 남긴 인물로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전한 천국과 지옥의 가르침은 단순히 ‘죽어서 좋은 곳에 가고 싶다’는 소망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이 사후에 가는 곳은 이 세상에서 형성한 지배적 사랑과 일치한다고 설명합니다. 입술로 천국을 원한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의 선을 원하며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는 삶을 통해 천국이 사람 안에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죽는 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나의 사랑과 말과 행동을 천국의 질서에 맞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설교 말미의 치유기도에는 병든 성도들을 향한 목회적 연민과 간절함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병든 사람을 고치시고,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시며, 굶주린 무리를 먹이신 사건을 믿고 성도들의 질병과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신앙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치유는 육체의 회복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눈먼 사람이 눈을 뜨는 것은 진리를 보지 못하던 이해성이 열리는 것이고,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는 것은 선한 삶을 실천하지 못하던 사람이 새롭게 행하기 시작하는 것이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선과 진리에 대한 생명이 소멸된 상태에서 영적 생명이 회복되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치유기도는 육체의 병이 낫기를 구하는 동시에, 교만과 증오, 탐욕과 거짓, 절망과 불신이라는 내적 질병이 치유되기를 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 직후 계좌를 안내하며 예물을 요청하는 장면도 헌금의 내적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헌금은 주님께 돈을 드려 복을 얻는 거래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재물을 이웃의 선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은 자발성과 자유가 보존되어야 하며, 질병 치유나 문제 해결에 대한 기대와 직접 연결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사람의 돈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사랑과 목적을 보십니다. 액수가 크더라도 자기 과시나 보상을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다면 내적으로는 빈 것이 될 수 있으며, 아주 작은 예물이라도 이웃을 사랑하는 진실한 마음에서 드린다면 주님 앞에서는 귀한 것이 됩니다.

 

이 설교 전체를 통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점은 강한 확신과 생동감입니다. 설교자는 성경을 박물관 속의 옛이야기로 두지 않고, 오늘의 삶과 국가 현실, 개인의 감사와 믿음에 직접 연결하려고 합니다. 회중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찬송과 기도, 질문과 응답을 반복하면서 예배를 살아 있는 사건으로 만들려는 열정도 분명합니다. ‘가나안 땅을 지금부터 경험해야 한다’, ‘이방의 유혹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광야에서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일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메시지들은 신앙생활에 유익한 방향성을 품고 있습니다.

 

다만 이 귀한 열정이 더욱 온전한 영적 열매를 맺으려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간의 자유와 함께 설명하고, 허용된 일과 하나님께서 직접 뜻하신 일을 구분해야 합니다. 또한 가나안의 적을 외부의 정치 세력이나 불신자에게 먼저 적용하기보다, 설교자와 회중 각자의 마음속 악과 거짓에 먼저 적용해야 합니다. 정치적 판단은 사실 확인과 절제를 거쳐 표현하고, 예배가 특정 진영의 동원 공간으로 변하지 않도록 말씀의 중심을 지켜야 합니다. 감사는 물질적 보상을 얻는 수단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선을 행하는 삶이어야 하고, 믿음은 현실을 무조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정신력이 아니라, 어려움 속에서도 진리를 따라 사는 충실함이어야 합니다.

 

여호수아의 땅 분배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가장 깊은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내게 얼마나 큰 땅을 주실 것인가’가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주님께서 내 안의 어느 영역까지 다스리고 계시는가’입니다. 내 정치적 생각에는 주님이 계시지만 말투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을 수 있고, 예배와 찬송에는 주님이 계시지만 이웃을 판단하는 마음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회를 지키겠다는 열심은 크지만 정작 내 안의 교만과 분노는 가나안 족속처럼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땅 나누기는 내 인생의 모든 영역을 주님께 드리고, 사랑과 진리가 각각 제자리를 차지하도록 하는 일입니다.

 

가나안 땅의 경계가 하나하나 정해졌듯, 거듭나는 사람의 삶에도 영적 경계가 세워져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거짓을 허용하지 않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증오를 허용하지 않으며,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이성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책임을 지우지 않는 경계입니다. 주님의 섭리를 믿되 모든 사건을 성급히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으로 단정하지 않고, 국가를 사랑하되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며, 진리를 지키되 사람의 자유와 존엄을 해치지 않는 것이 가나안의 참된 경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호수아 15장의 유다 지파는 우리에게 주님을 향한 사랑이 삶의 중심과 경계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사랑이 중심이 되면 진리는 사람을 공격하는 무기가 아니라 악에서 건져 내는 빛이 되고, 권위는 사람을 억누르는 힘이 아니라 섬기는 책임이 되며, 감사는 복을 끌어오는 주문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것을 이웃과 나누는 기쁨이 됩니다. 또한 섭리는 인간을 미리 조종하는 숙명이 아니라, 자유 가운데 선을 선택하도록 순간순간 이끄시는 주님의 부드럽고도 끈질긴 사랑으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이 설교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단지 ‘제비뽑기에도 하나님의 의지가 들어 있다’는 한 문장이 아닙니다. 더 온전하게 표현하면,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세상의 복잡한 사건들 속에서도 주님의 섭리는 결코 멈추지 않으며, 주님은 모든 사람을 선과 진리의 질서로 인도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비가 뽑혔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기업을 받은 사람이 그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입니다. 우리 역시 각자에게 주어진 가정과 교회, 직업과 재물, 건강과 영향력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그 기업을 자기애와 지배욕을 위해 사용하는가, 아니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사용하는가에 따라 그 땅은 가나안이 될 수도 있고 다시 애굽과 바벨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참된 가나안 정복은 밖에 있는 사람을 몰아내는 일이 아니라 내 안의 악을 주님의 능력으로 몰아내는 일입니다. 참된 땅 분배는 더 많은 것을 차지하는 일이 아니라, 내 삶의 모든 부분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제 기능을 찾는 일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주권은 사람의 자유를 없애는 통제가 아니라, 그 자유를 보호하면서 천국으로 인도하는 사랑입니다. 참된 감사는 고난을 부정하는 긍정적 사고가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을 붙들고 선을 선택하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참된 천년왕국은 특정 정치 세력이 승리하는 시대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서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악과 거짓을 이기고 다스리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호수아의 마지막 ‘땅 나누기’는 오래전 이스라엘의 영토 분배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 각 사람 안에서 땅을 나누고 계십니다. 사랑이 다스려야 할 곳, 진리가 밝혀야 할 곳, 회개가 시작되어야 할 곳, 섬김이 이루어져야 할 곳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른 사람의 땅을 탐하거나 외부의 적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맡기신 자신의 기업을 정직하게 살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생각과 말과 행동의 모든 경계 안에 주님의 사랑과 지혜가 자리 잡게 하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가 들어가야 할 가나안이며, 이 땅에서부터 경험해야 할 주님의 나라입니다.

 

 

 

SY.54, 전광훈 목사, 20260809, ‘자유통일을 위한 120만 광화문 전국 주일 연합예배’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설교의 성경적 출발점은 사사기 3장 1절의 매우 인상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쳐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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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번 설교는 예레미야 34장과 35장을 나란히 놓고 ‘약속을 깨뜨린 유다 백성’과 ‘약속을 지킨 레갑 자손’을 대비시키며, 신앙의 핵심을 ‘신실함’이라는 주제로 풀어낸 설교입니다. 설교자는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약속했다가 형편이 좋아지자 쉽게 약속을 뒤집은 유다 백성의 모습을 통해 오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고, 반대로 수백 년 동안 조상의 약속을 지켜 온 레갑 자손을 본보기로 제시합니다. 이어 하나님의 성품 역시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므로, 하나님의 백성 역시 약속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갑니다. 전체적으로 본문의 흐름을 충실히 따라가며 실제적인 적용까지 연결하는 설교라는 점에서 듣는 이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바라보면, 이 설교의 가장 큰 장점은 ‘신앙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된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인간의 신앙은 입술의 고백보다 삶 속에서 드러나는 의지와 행동으로 판별된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는지가 결국 그의 삶을 결정하고, 삶이 곧 그의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한 도덕적 미덕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과 의지가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외적 표현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말씀은 단순히 ‘약속을 잘 지켜야 한다’는 윤리 교육에 머물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에서는 언제나 인간의 외적 행동보다 먼저 그 행동을 낳는 내적 상태를 다룹니다. 예레미야 34장에서 유다 백성이 약속을 어긴 이유는 단순히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그 약속이 참된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위기를 피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약속은 했지만 마음은 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황이 바뀌자 행동도 즉시 바뀌었습니다. 외적인 순종은 잠시 있었지만 속 사람은 그대로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이 보여 주는 더 깊은 진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행동의 변화’보다 ‘사랑의 변화’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처음에는 두려움 때문에 선을 행하기도 하고, 보상을 바라며 선을 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점차 그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면, 나중에는 선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게 됩니다. 이 차이가 매우 중요합니다. 유다 백성은 전자의 상태에 머물렀고, 레갑 자손은 후자의 모습을 어느 정도 보여 주는 표상이 됩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약속을 지켜라’는 명령 이전에 ‘왜 그 약속을 지키는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레갑 자손에 대한 해석에서도 조금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설교에서는 레갑 자손을 ‘신실한 사람들’로 소개하지만, 말씀의 속뜻에서는 그들이 반드시 이상적인 공동체 자체를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들의 금주, 장막 생활, 토지 미소유는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에게 요구하신 일반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 가문의 특별한 규례였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핵심은 그들의 생활 방식 자체가 아니라 ‘주어진 원칙을 흔들림 없이 지킨 태도’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말씀은 모든 사람이 장막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가는 마음의 일관성을 보여 주는 표상으로 레갑 자손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께서 이방 계통인 레갑 자손을 유다 백성과 비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 역시 말씀 전체에서 자주 나타나는 구조입니다. 혈통이나 종교적 명분보다 실제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에서는 사람이 어떤 교파에 속했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며 어떻게 살았는지가 결정적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레갑 자손은 ‘이방인이면서도 신실한 사람들’이라는 역사적 사례인 동시에, 진리를 들은 사람보다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더 주님께 가까울 수 있다는 영적 원리를 보여 주는 표상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설교 후반부에서는 약속을 지키는 것이 공동체를 세우고, 가정을 유지하며,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복음 전도의 기초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적용은 충분히 공감할 만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덧붙일 수 있습니다. 약속을 지키는 이유는 단지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천국 자체가 서로 신뢰하는 사랑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는 누구도 자신의 이익 때문에 말을 바꾸지 않습니다. 그곳에서는 사랑과 진리가 하나이므로 말과 행동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약속을 지키는 삶은 단순히 착한 사람이 되는 훈련이 아니라, 천국의 질서를 지금 이 땅에서 조금씩 배우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설교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신실하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신실하시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목회적 격려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인간의 신실함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신실하십니다. 변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더 깊이 경험하게 되고, 멀어질수록 그것을 체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관계를 자주 ‘주님은 언제나 같은 태양처럼 비추시지만, 인간이 등을 돌리거나 얼굴을 돌리는 것’에 비유합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보다 안정되고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설교의 마지막에 소개된 폴리캅의 순교는 매우 인상적인 예화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보다 주님께 대한 충성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러한 순교 역시 단순히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용기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더 깊게는 자기 사랑보다 주님 사랑을 선택하는 모든 영적 싸움이 넓은 의미의 순교입니다. 사람은 매일 자신의 이익과 진리 사이에서 선택합니다. 그때마다 진리를 선택하는 작은 순종들이 모여 하나의 인격을 만들고, 결국 천국의 사람을 형성하게 됩니다.

 

종합하면, 이번 설교는 ‘약속’이라는 주제를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인간의 책임을 매우 설득력 있게 전달한 메시지입니다. 특히 신앙을 삶의 실천으로 연결하려는 점은 충분히 공감할 만합니다. 여기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더하면, 약속을 지키는 이유는 단순히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사랑 자체를 변화시키셔서 말과 행동이 하나 되는 천국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기 때문이라는 점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억지로 지켜지는 약속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신실함입니다. 그런 사람은 환경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움직이는 기준이 두려움이나 이익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SY.38, ‘자유통일을 위한 120만 광화문 전국 주일 연합예배’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설교의 출발점인 여호수아의 ‘땅 나누기’는 말씀의 속뜻으로 볼 때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가나안 땅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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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36, ‘기도 열심히 했더니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설교는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널리 퍼져 있는 ‘축복 중심 신앙’을 비판하면서, 마태복음 16장을 기점으로 신앙의 방향이 근본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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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 설교는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널리 퍼져 있는 ‘축복 중심 신앙’을 비판하면서, 마태복음 16장을 기점으로 신앙의 방향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특히 ‘무병장수’, ‘경제적 번영’, ‘사업 성공’을 신앙의 목표로 삼는 태도를 경계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에 두는 삶이 참된 믿음이라고 역설합니다. 이러한 문제의식 자체는 매우 성경적이며, 신앙이 단순히 현세적 유익을 얻는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는 충분히 귀 기울일 가치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부분은 자연적인 복보다 영적인 생명을 먼저 구해야 한다는 일관된 가르침과 상당 부분 맞닿아 있습니다.

 

특히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이루어진 장소인 ‘가이사랴 빌립보’를 로마 황제 숭배와 연결하여 설명하는 부분은 설교적으로도 매우 인상적입니다. 황제를 ‘’으로 떠받드는 도시 한가운데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다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세상의 권세보다 주님을 참된 왕으로 인정하는 신앙의 의미를 잘 드러냅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설명은 성경 본문을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장점이 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16장 이후부터 예수님의 관심이 십자가와 부활에 집중된다는 흐름을 따라가며,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는 질병이나 가난이 아니라 죄와 영원한 생명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부분도 핵심을 잘 짚습니다. 실제로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부터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반복하여 예고하십니다. 설교자는 이 점을 통해 ‘신앙의 중심은 기적이 아니라 구속’이라는 사실을 힘 있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여기에는 중요한 공감점이 있습니다. 사람은 단순히 오래 사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사는 존재이며, 육체의 건강보다 영혼의 상태가 훨씬 중요합니다. 따라서 병이 낫는 것 자체가 구원의 본질은 아니며, 주님께서 궁극적으로 이루시는 일은 인간의 속 사람을 새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연계의 복은 일시적이지만, 사랑과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듭남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설교에서 가장 강조되는 표현은 ‘마태복음 16장 이전의 사람’과 ‘마태복음 16장 이후의 사람’이라는 구분입니다. 설교자는 이를 하나의 영적 단계처럼 설명합니다. 전자는 건강과 성공, 형통을 중심으로 예수를 찾는 사람이며, 후자는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하며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분은 청중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설교적 장치로서는 상당히 효과적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구분을 조금 더 섬세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의 장 구분이 곧 인간의 영적 단계와 일대일로 대응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역사적 사건 하나하나보다 그 안에 담긴 영적인 진행 과정을 중요하게 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16장 이전’과 ‘이후’라는 구분은 문자적인 장 구분이라기보다,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영적 전환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적절합니다. 다시 말해, 자연적 인간에서 영적 인간으로 나아가는 변화의 과정으로 읽는다면 더욱 풍성한 의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잡아 만류하는 장면에 대한 해석 역시 흥미롭습니다. 입으로는 ‘주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지만, 막상 십자가를 말씀하시자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를 통해 ‘신앙고백은 했지만 아직 자기중심성은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를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설명과도 상당히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진리를 먼저 받아들이더라도, 자신의 ‘proprium’, 곧 자기 본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반복해서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진리를 이해한 직후에도 여전히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단번에 완전한 상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긴 거듭남의 과정을 통해 조금씩 자기 사랑을 벗겨 가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는 특별히 나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거쳐 가는 하나의 영적 모습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설교의 핵심 구절인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에 대한 적용도 매우 진지합니다. 특히 ‘육체의 안일만 추구하는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오늘날 소비주의와 번영주의 신앙을 향한 좋은 경고가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이용하여 원하는 것을 얻는 기술이 아니라, 주님을 닮아 가는 변화의 길이라는 점을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한 가지 중요한 보완점을 제시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신의 인격을 부정하거나 자신을 혐오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자신의 모든 욕구를 무조건 억압하는 것도 아닙니다. 부인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 자체가 아니라, ‘주님 없이 스스로 살려는 자기 본성’, 곧 ‘proprium’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새 생명은 오히려 사람의 참된 자아를 회복시킵니다. 따라서 자기 부인은 인간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거짓 자아를 내려놓고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후반부에서 ‘믿음과 미신의 차이는 자기 변화에 있다’는 설명은 매우 설득력이 있습니다. 신앙을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사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것이라는 지적은 오늘날에도 깊이 새길 만한 내용입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 역시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만 사랑하는 상태를 여러 저작에서 매우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다만 ‘무병장수나 경제적 형통을 바라는 사람은 마태복음 16장 이전에 갇힌 사람이며, 그 믿음은 미신’이라고 단정하는 표현은 조금 조심스럽게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이 질병과 가난 때문에 교회의 문을 두드립니다. 성경에도 병 낫기를 구한 사람, 먹을 양식을 구한 사람, 도움을 구한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치유하시며 돌보셨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러한 자연적 소망도 주님의 섭리 안에서 매우 중요한 출발점으로 이해합니다. 처음에는 건강 때문에, 가정 문제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주님께 나올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서 머무르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복을 계기로 주님을 알게 되고, 결국에는 주님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방향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발전을 ‘외적인 사람, 즉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자기 사랑에서 주님 사랑으로’, ‘세상 중심에서 천국 중심으로’ 옮겨 가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결국 이 설교의 가장 큰 장점은 신앙의 목표를 현세적 성공에서 십자가와 부활로 다시 돌려놓으려는 강한 문제의식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놓치기 쉬운 본질을 일깨운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십자가는 단순히 고난을 견디는 상징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자기 사랑과 거짓을 주님의 진리로 끊임없이 벗겨 가시는 거듭남의 실제 과정이라고 해설합니다. 그리고 부활은 죽은 뒤의 사건만이 아니라, 그 거듭남을 통해 지금 이 순간에도 속 사람이 살아나는 영적 부활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마태복음 16장은 단순히 ‘축복 신앙에서 십자가 신앙으로’ 넘어가는 장이 아니라, 주님께서 한 사람을 자연적 인간에서 영적 인간으로 이끌어 가시는 거대한 전환점으로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SY.37, ‘약속을 지켜야 할 사람들’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번 설교는 예레미야 34장과 35장을 나란히 놓고 ‘약속을 깨뜨린 유다 백성’과 ‘약속을 지킨 레갑 자손’을 대비시키며, 신앙의 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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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35, ‘요즘 교회가 가장 두려워 하는 6가지 질문’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영상은 단순한 ‘교회 비판’이 아니라 ‘교회의 회복’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여러 민감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가능한 한 극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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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 영상은 단순한 ‘교회 비판’이 아니라 ‘교회의 회복’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여러 민감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가능한 한 극단을 피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분명히 보입니다. 무엇보다 이 영상의 가장 큰 장점은 문제를 제기하는 태도입니다. 처음부터 ‘교회를 미워해서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던지는 질문’이라고 방향을 분명히 제시하고, 마지막까지 그 기조를 유지합니다. 이는 단순한 비난이나 분노의 언어가 아니라, 회복을 위한 자기 성찰의 언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참된 체어리티는 악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의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상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건강한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헌금에 관한 부분도 생각보다 훨씬 균형 잡혀 있습니다. 영상은 먼저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의 고백’으로 설명하고, 억지로나 체면 때문에 드리는 헌금이 아니라 감사와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헌금이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교회 역시 하나님께 드린 헌금을 사람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게 관리해야 하며, 투명성과 책임성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헌금의 정신’을 먼저 세우고, 그 정신이 훼손되지 않도록 재정 운영이 뒤따라야 한다는 구조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상당히 공감할 수 있는 접근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헌금은 단순히 재정을 드리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것을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사랑의 상응적 표현’이라는 점까지 연결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액수보다 사랑의 질이 중요하며, 투명성 역시 외적인 제도가 아니라 먼저 그 사랑에서 흘러나와야 한다고 설명했을 것입니다.

 

목회자의 죄를 다루는 부분 역시 영상은 결코 목회자를 공격하거나 지도자를 무너뜨리자는 입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목회자도 사람이며 연약할 수 있다’, ‘문제는 죄를 지었느냐가 아니라 그 죄를 어떻게 다루느냐이다’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또 ‘목회자를 사랑하는 길도 무조건 감싸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도록 돕고 필요한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목회자와 목회자의 죄를 구분하려는 균형 감각이 분명히 들어 있습니다. 이 역시 스베덴보리의 관점과 상당 부분 만나는 지점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에 ‘악을 미워하되 사람의 구원을 포기하지 말라’는 점을 더욱 강조했을 것입니다. 징계도 궁극적으로는 회복을 위한 것이며, 진리와 자비는 언제나 함께 작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질문하는 성도’에 대한 부분은 특히 인상적입니다. 영상은 질문 자체를 불신앙으로 몰아서는 안 되며, 베레아 사람들처럼 말씀을 상고하는 자세를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사상과도 잘 어울립니다. 그는 인간의 이성을 주님께서 주신 귀한 능력으로 보았으며, 맹목적인 수용보다 말씀 안에서 분별하는 신앙을 강조했습니다. 물론 스베덴보리는 질문의 출발점도 중요하게 봅니다. 진리를 사랑하여 묻는 질문과 자기 우월감이나 반항심에서 나오는 질문은 영적으로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상이 적어도 ‘질문 자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방향을 제시한 것은 충분히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청년 문제를 다루는 부분도 상당히 균형 있습니다. 청년들을 단순히 ‘믿음이 약한 세대’로 몰아가지 않고, 교회가 먼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프로그램보다 진실성과 신뢰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이것 역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공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참된 교회는 외적 형식보다 내적 생명이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 영상이 아쉬운 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개별 주장들이 아니라, 이 모든 현상의 ‘최종 원인’을 어디에서 찾느냐에 있습니다. 영상은 교회의 생존 본능, 재정의 불투명성, 지도자의 책임 회피, 질문을 막는 문화 등을 주로 외적 구조와 운영 방식의 문제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언제나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갑니다. 왜 그런 구조가 생겼는가? 왜 교회가 조직을 지키려 하는가? 왜 재정을 투명하게 다루지 못하는가? 왜 권위를 지키려 하는가? 그 뿌리를 그는 거의 예외 없이 인간의 ‘proprium’, 곧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찾습니다. 외적 제도는 내적 사랑이 밖으로 드러난 결과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영상은 ‘교회가 생존을 더 걱정하게 되었다’고 진단합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에 ‘왜 생존을 더 걱정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한 번 더 던질 것입니다. 그 답은 ‘주님의 교회를 자신의 교회처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헌금 문제도 ‘왜 투명하지 못한가?’를 넘어 ‘왜 주님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게 되었는가?’라는 내적 사랑의 문제까지 들어갈 것입니다. 결국 외적 개혁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각 사람의 거듭남이며, 교회의 상태는 그 구성원들의 영적 상태가 모여 형성된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핵심 관점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은 ‘교회개혁적 관점’에서는 매우 균형 있고 성숙한 글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헌금의 정신을 먼저 세우고, 목회자와 목회자의 죄를 구분하며, 질문을 허용하고, 청년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자는 내용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모든 외적 문제의 뿌리를 인간 내면의 사랑의 질서와 거듭남의 문제로까지 연결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개혁은 조직의 개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자기 사랑을 버리고 주님께로 돌이키는 영적 개혁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덧붙인다면, 이 영상은 스베덴보리의 신학과도 매우 깊이 조화를 이루는 글이 될 것입니다.

 

 

 

SY.36, ‘기도 열심히 했더니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설교는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널리 퍼져 있는 ‘축복 중심 신앙’을 비판하면서, 마태복음 16장을 기점으로 신앙의 방향이 근본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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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34, ‘시흥영성수련원, 79차 심령부흥대사경회’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모형에서 상응으로긴 강의를 모두 들은 뒤에야 비로소 이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몇 시간만 듣고 글을 썼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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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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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본 제79차 심령부흥대사경회

첫 강의는 다른 날의 강의들과 조금 다르게 시작됩니다. 곧바로 교재 강의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찬양과 합심기도, 그리고 제79차 심령부흥대사경회의 개회예배가 상당한 시간 이어집니다. 그래서 이 첫 영상 자체가 하나의 ‘강의’라기보다, 앞으로 이어질 사경회 전체의 문을 여는 자리라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실제로 개회예배에서는 ‘마지막 때를 향하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다시 이 사경회에 모였다는 고백이 나오고, 말씀을 통하여 새로워지고 ‘생명의 길’, ‘진리의 길’로 인도받기를 간구합니다. 이 대목은 이후 강의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이 사경회가 단순히 종말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려는 성경 세미나가 아니라, 말씀을 배우는 일을 통하여 실제 사람의 영적 상태가 변화되기를 기대하는 집회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이 출발점은 매우 귀하게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진리는 사람을 선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주어집니다. 사람이 말씀을 많이 알고, 천국과 영계에 관한 많은 지식을 갖고, 종말과 심판에 관하여 상세히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의 의지와 삶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아직 그의 생명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이 사경회가 처음부터 ‘은혜받고 결단하며’, 말씀을 통하여 생명과 진리의 길을 걷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출발입니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그 ‘진리’가 무엇을 뜻하며,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사람의 삶 안에서 선과 결합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개회예배가 마무리된 뒤 약 57분 37초부터 전요한 강사의 ‘종말론적 입문’ 강의가 시작됩니다. 강사는 처음부터 자신이 독립된 새로운 교리를 제시하려 하기보다 이 사경회가 오랫동안 전해 온 ‘핵심진리’의 전체 흐름 안에서 강의를 시작합니다. 이 점을 먼저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후 여러 강사의 강의를 계속 듣다 보면 각 강사의 표현과 강조점은 조금씩 달라도, 그 밑바탕에는 하나의 공통된 신앙 구조가 놓여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 강의는 바로 그 구조를 처음 접하는 자리입니다.

 

특히 이 첫 시간에서 제시되는 중요한 개념이 ‘하나님의 밝은 빛’입니다. 강사는 세상적이고 기복적이며 정욕적인 것과 뒤섞인 흐린 진리가 아니라 ‘순수하고 누룩이 섞이지 않는 밝은 진리’가 증거될 때 사람의 영성이 다시 살아나고, 미지근한 신앙이 뜨거워지며, 회개가 일어나고, 삶이 빛의 자녀로 변화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 사경회가 말하는 ‘빛’이 단순한 성경 지식의 축적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진리가 사람의 내면을 밝히고 그의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빛’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천국의 빛은 단순한 자연적 광명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와 상응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본다’는 것은 진리를 이해한다는 것이고, 어둠에 있다는 것은 단순히 무엇을 모른다는 뜻을 넘어 진리를 보지 못하는 영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강의에서 반복되는 ‘밝은 빛’이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옮기면 상당히 깊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일수록 그의 이해성이 밝아지고, 그 진리가 사랑과 의지 안으로 들어가 삶이 될수록 그는 실제로 빛 가운데 걷게 됩니다.

 

다만 여기에는 앞으로 계속 유념해야 할 중요한 구분이 하나 있습니다. ‘밝은 진리’라고 강하게 확신하는 것과 실제로 신적 진리를 밝게 보는 것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진 교리 체계 안에서도 매우 강한 확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가 참으로 진리인지를 단지 확신의 강도나 특별한 체험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것이 말씀에서 나오는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선으로 인도하는가, 그리고 사람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낮추는 방향으로 작용하는가를 중요하게 봅니다. 따라서 앞으로 ‘핵심진리’를 해설할 때도 ‘이것이 맞다, 틀리다’라는 식으로 성급하게 재단하기보다, 이 가르침이 사람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하겠습니다.

 

이어 강사는 이 사경회가 중요하게 다루는 또 하나의 축으로 ‘이스라엘을 통하여 나타난 모형적 진리’를 제시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와 사건들을 단순히 과거에 일어난 민족사의 기록으로만 읽지 않고, 신약의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영적 과정의 모형으로 읽으려는 것입니다. 강사는 이러한 모형적 진리를 통하여 요한계시록의 내용과 지금의 시대, 그리고 성도의 영적 성장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매우 흥미로운 접점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역시 구약의 인물과 장소와 사건들을 단순한 역사적 사실로만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천국의 비밀’에서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인물, 장소, 이동, 전쟁, 광야생활 등을 사람의 거듭남과 주님의 구원 섭리에 관계되는 영적 실재의 표상으로 해설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역사가 오늘 성도의 영적 여정을 보여 준다’는 이 사경회의 기본 직관 자체는 스베덴보리 독자에게 상당히 익숙하게 들립니다. 출애굽, 홍해, 광야, 가나안이라는 일련의 과정이 단순한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과정을 나타낸다는 생각에는 분명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두 해석의 길을 세심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경회에서 말하는 ‘모형적 진리’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은 겉으로는 매우 비슷해 보여도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모형론은 흔히 구약의 한 사건을 신약 시대의 어떤 사건이나 미래의 종말 사건과 연결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더 근원적으로 자연계의 사물과 사건이 영적 실재를 표상하는 질서를 다룹니다. 따라서 같은 출애굽 사건을 보더라도 단순히 ‘이것은 훗날 일어날 어떤 사건의 예표다’에서 멈추지 않고, 애굽·바로·홍해·광야·만나·가나안 각각이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 시험, 거듭남의 단계에서 무엇과 상응하는지를 살피게 됩니다. 이 차이는 앞으로 강의가 본격적으로 전개될수록 매우 중요해질 것입니다.

 

강사는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 이러한 ‘모형적 진리’를 설명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믿음과 은총으로 구원받고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 마침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의 원리가 나타났다고 설명하며, 그래서 아브라함이 혈통적인 이스라엘만의 조상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도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설명을 곧바로 부정하기보다 한 단계 더 안쪽으로 들어갑니다. ‘천국의 비밀’에서 아브라함은 단순히 한 신앙인의 모범이나 후대 성도들의 믿음의 조상으로만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말씀의 가장 깊은 속뜻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역사를 통하여 주님 자신의 인성이 어떻게 신성과 하나 되어 가셨는가 하는 지극히 깊은 아르카나가 드러납니다. 동시에 그것은 인간의 거듭남과도 상응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 사경회는 구약의 역사를 주로 ‘성도의 구원과 영적 성장’이라는 방향에서 읽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더 깊은 중심을 주님께 둡니다. 말씀의 가장 깊은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과 주님의 나라가 있으며, 인간의 거듭남은 그 주님의 영화 과정과 상응하는 질서 안에서 이해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강의의 모형적 해석을 없애 버리는 렌즈라기보다, 그것을 더 깊은 중심으로 이끄는 렌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첫 강의의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이 ‘신인 합일의 경지에 들어간 성도들’입니다. 강사는 밝은 진리와 모형적 진리에 이어, 하나님과 깊이 연합한 성도들의 삶을 살펴보겠다는 방향을 제시합니다. 이 역시 이후 사경회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이곳에서 신앙의 최종 목표는 단순히 교리를 많이 아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도가 실제로 하나님과 깊은 연합에 이르고, 그의 삶이 변화되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이후 강의에서 성화, 영적 성장, 연단, 수도적 삶, 성숙한 신앙인의 생애가 반복해서 등장하게 됩니다.

 

이 지점 역시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깊이 만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는 인간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피조물인 인간과 창조주이신 주님의 구별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그의 생명이 될 때, 주님과 인간 사이에는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특히 진리를 알고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 진리가 사랑과 행위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경회가 추구하는 ‘신인 합일’을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조심스럽게 옮긴다면, 인간이 신적 존재가 되는 것이라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삶으로 살아감으로써 주님과 더욱 깊이 결합되는 상태’라고 이해하는 것이 안전하겠습니다.

 

그래서 첫 강의의 도입부만 놓고 보면 뜻밖에도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만나는 지점이 적지 않습니다. ‘밝은 진리’, ‘모형적 진리’, ‘영적 성장’, ‘성화’, ‘하나님과의 깊은 결합’이라는 큰 방향은 모두 단순한 교리 지식보다 실제 영적 생명의 변화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다만 앞으로 세부 내용으로 들어가면서 ‘밝은 진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형’과 ‘상응’은 어디에서 만나고 어디에서 갈라지는지, ‘종말’과 ‘재림’을 외적 역사 사건 중심으로 이해하는지 아니면 교회와 인간 내면의 영적 상태까지 함께 보는지 등을 하나씩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1강 1부에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개별 종말론의 옳고 그름이 아닙니다. 이 사경회가 처음부터 제시하는 전체 방향입니다. ‘진리를 배우되 그 진리가 사람을 변화시켜야 한다.’ 이 명제만큼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거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탭니다. 진리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그가 진리를 많이 알기 때문이 아니라, 그 진리를 따라 살면서 진리가 선과 결합되고 마침내 그의 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이어질 이 긴 사경회의 강의들을 살펴볼 때 우리가 계속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일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와 더불어, ‘이 진리는 사람을 어떤 사랑으로, 어떤 삶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님과 어떤 결합으로 이끌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놓치지 않는다면, 이 사경회의 장점은 충분히 살리면서도 스베덴보리를 통하여 더 깊은 말씀의 질서까지 함께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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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 합일’, 광야 연단과 성화 : 신앙의 목표는 어디까지인가

1강 2부에서는 앞서 말한 ‘밝은 진리’와 ‘이스라엘을 통한 모형적 진리’에 이어, 이 사경회의 영성적 성격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세 번째 주제가 등장합니다. 강사는 ‘신인 합일의 경지에 들어간 성도들’의 생애와 사상과 체험을 비교·분석함으로써 성경의 핵심 진리를 선명하게 해석하겠다고 말합니다. 특히 로마서 7장과 8장을 언급하면서, 단순히 예수를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고 주님의 생명과 합일되었다고 말하는 신앙과, 실제로 죄와 치열하게 싸우고 ‘광야 연단’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성결의 은총과 ‘완덕의 경지’에 이르는 체험적 신앙을 구별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화된 성도들의 생애를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신앙의 목표’, ‘신앙의 방향’, ‘신앙의 가치관’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부분은 이번 사경회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이후 여러 강의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광야’, ‘연단’, ‘이기는 자’, ‘익은 열매’, ‘성화’, ‘완덕’이 이미 첫 강의의 이 대목에서 하나의 큰 그림으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경회가 말하는 구원은 단순히 ‘예수를 믿었으므로 죄 사함을 받고 천국에 간다’는 한 순간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실제 삶에서 죄와 싸우고, 여러 연단을 통과하며, 성결의 은총을 받고, 마침내 하나님과 깊은 연합에 이르는 긴 영적 여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사경회의 관심은 ‘구원받았는가?’에서 멈추지 않고 ‘구원받은 사람이 실제로 어떤 사람이 되어 가는가?’로 나아갑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매우 중요한 접점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구원은 단순히 어떤 교리를 믿는 순간 인간의 법적 신분만 바뀌는 사건이 아닙니다. 구원은 거듭남이며, 거듭남은 사람의 의지와 이해성, 사랑과 사고, 그리고 실제 삶의 질서가 주님에 의해 점차 새롭게 되는 과정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를 따라 살면서 악을 죄로 알고 피하고, 선을 행하며, 그렇게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선과 결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었다’는 고백과 ‘예수님의 생명이 실제로 내 삶을 다스린다’는 상태 사이에는 긴 거듭남의 여정이 있다는 이 강사의 기본 문제의식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상당히 깊이 만납니다.

 

특히 강사가 강조하는 ‘광야 연단’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에서 매우 풍성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다고 곧바로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홍해를 건넌 뒤 광야가 있었습니다. 애굽의 종살이에서는 해방되었지만, 그들 안에는 여전히 애굽에서 형성된 욕망과 습관과 두려움과 불신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는 배고픔과 목마름, 원망과 반역, 만나와 메추라기, 아말렉과의 전쟁, 불뱀 등 수많은 사건이 이어집니다. 문자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이 거듭나는 사람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시험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사람이 악에서 돌아섰다고 해서 그 악의 뿌리와 즐거움까지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현실적인 영적 통찰입니다. 사람이 어느 날 깊이 회개하고 ‘이제부터 이렇게 살지 않겠습니다’라고 결단할 수 있습니다. 그 결단은 진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며칠 뒤 똑같은 상황이 찾아오면 옛 성질이 다시 올라옵니다. 용서했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다시 만나자 마음 깊은 곳에서 분노가 살아나고, 명예욕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이 인정받는 것을 보자 마음이 흔들립니다. 이때 사람은 ‘내 회개가 거짓이었나?’라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의 질서를 알면 조금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것은 실제이지만 아직 가나안에 도착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사이에 광야가 있습니다.

 

따라서 광야는 구원이 실패한 장소가 아니라 구원이 실제 생명으로 깊어지는 장소입니다. 사람 안에 숨어 있던 악과 거짓이 시험을 통해 드러나고, 사람이 자유 가운데 그것을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거절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성이 형성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사경회가 ‘광야 연단’을 신앙생활의 중요한 과정으로 보는 것은 매우 귀한 통찰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고난과 시험을 무조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거나 ‘기도를 잘못해서 생긴 일’로 해석하지 않고, 그 가운데 영적 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한 가지를 더욱 세밀하게 구별합니다. 모든 고난이 자동적으로 ‘연단’은 아닙니다. 고난 자체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같은 고난을 겪으면서 어떤 사람은 더욱 완고해질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더욱 자기연민에 빠질 수도 있으며, 어떤 사람은 오히려 다른 사람을 미워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고난 가운데 어떤 영적 선택이 이루어지는가입니다. 시험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사람 안의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실제로 충돌하고 사람이 자유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영적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많이 겪었다는 사실 자체가 영적 성숙의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고난을 통하여 자기애가 낮아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라났는가가 중요합니다.

 

이 점은 수도적 연단을 이해할 때도 매우 중요합니다. 금식, 철야, 절제, 침묵, 노동, 공동생활, 순종과 같은 외적인 훈련들은 인간의 proprium을 드러내고 절제하는 데 매우 유익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훈련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이렇게까지 훈련했다’, ‘나는 보통 신앙인과 다르다’, ‘나는 이만큼 나를 죽였다’는 자기 의와 영적 우월감이 생긴다면 외적인 자기부인 속에서 더 미세한 proprium이 자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연단의 열매는 ‘강한 사람’이 되는 데 있지 않고 더 온유하고, 더 겸손하고, 더 쉽게 용서하며, 다른 사람의 선을 더 기뻐하는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강사가 ‘신인 합일의 경지’를 말하는 것도 이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이 표현은 자칫하면 인간이 하나님과 존재론적으로 하나가 되거나 인간 자체가 신적인 존재로 변한다는 뜻으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의의 문맥에서는 성화된 성도들이 죄와 싸우고 광야 연단을 통과한 끝에 하나님의 생명이 그들 안에서 강하게 역사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의 의도를 먼저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를 ‘주님과의 결합’이라는 말로 조금 더 정밀하게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영원히 피조물이고 주님은 영원히 창조주이십니다. 천사가 아무리 높은 천국에 있어도 하나님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사가 더 천국적일수록 자기 안의 모든 선과 지혜와 생명이 자기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들어 온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압니다. 인간과 주님의 결합은 두 존재가 하나의 본질로 융합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자유롭게 받아들여 마치 자기 것처럼 살아가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결합입니다. 주님은 주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이지만, 인간의 사랑과 생각과 삶이 점점 주님의 질서와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역설을 낳습니다. 사람은 주님과 더 깊이 결합될수록 자기 개성을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됩니다. proprium의 지배 아래 있을 때 인간은 자신이 가장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욕망과 두려움과 명예욕과 탐욕의 지배를 받습니다. 반대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수록 그는 그러한 속박에서 자유로워지고, 주님께서 창조하신 고유한 인격과 쓰임을 더욱 온전히 나타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인 합일’의 목표를 자기 소멸이나 신격화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결합을 통하여 참된 인간성이 회복되는 것으로 이해하면 훨씬 안전하고 깊어집니다.

 

강사는 또한 성화된 성도들의 ‘생애와 사상과 체험’을 비교 분석하겠다고 합니다. 이것 역시 이 사경회의 특징입니다. 교리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깊은 신앙의 길을 걸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삶을 통하여 교리를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이후 존 웨슬리와 존 버니언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강사는 훗날 ‘이기는 자’를 설명하면서 웨슬리는 이를 ‘성결의 은총을 받은 성도’, 버니언의 ‘천로역정’에서는 전신갑주를 입은 성도, 여러 성자들의 표현에서는 ‘신인 합일의 경지에 이른 성도’라고 연결합니다. 결국 서로 다른 전통의 언어들이 하나의 영적 성숙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성숙한 신앙인의 실제 삶을 살피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특별한 체험을 곧바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영적 법칙으로 만드는 데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영적 체험은 그 사람의 상태와 쓰임, 종교적 배경과 사고의 형식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강렬한 체험을 하고 어떤 사람은 평생 특별한 체험 없이도 조용히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외적인 체험의 강도가 내적인 천국의 깊이를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영계를 오랫동안 의식적으로 경험하고 천사들과 대화했다고 기록한 사람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구별은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그의 저작에서 중요한 것은 ‘나에게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는 체험의 과시가 아니라, 그 체험을 통해 말씀의 속뜻과 천국의 질서, 인간의 거듭남과 주님의 섭리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천국에 들어가는 본질적인 조건을 환상이나 계시나 특별한 영적 현상이 아니라 사람이 실제로 어떤 사랑을 자기 생명으로 삼았는가에서 찾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성도의 신비 체험을 읽을 때에도 ‘그가 무엇을 보았는가?’와 함께 ‘그 체험이 그의 사랑과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강의는 이 모든 내용을 ‘신앙의 목표’, ‘신앙의 방향’, ‘신앙의 가치관’이라는 세 표현으로 모읍니다. 이 세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에도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지 교회에 출석하고, 죄 사함을 확신하고, 어려울 때 기도하며 살다가 죽어서 천국에 가는 정도로 신앙을 축소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입니다. 사람은 실제로 변화되어야 하고, 성화되어야 하며, 주님과 더 깊이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의식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전적으로 중요합니다. 다만 그 목표를 ‘어느 특별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면 또 하나의 위험이 생깁니다. 영적 성장 자체가 자기 성취 프로젝트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느 단계인가?’, ‘나는 완덕에 들어갔는가?’, ‘나는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성화되었는가?’라는 질문이 중심이 되면 어느새 시선이 주님에게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옵니다. 영적 성숙을 추구하면서 오히려 영적 자기애가 자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에서는 그래서 ‘상태’와 ‘쓰임’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높은 영적 단계에 도달했는지를 자꾸 측정하는 것보다, 오늘 자기 자리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선을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정에서 배우자를 대하는 태도, 교회에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 돈과 명예 앞에서의 정직, 자기에게 불편한 사람을 대하는 마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의 선택이 실제 거듭남의 자리입니다. 천국은 어떤 신비한 고급 영성 상태를 소유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실제 쓰임으로 살아내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사경회의 ‘완덕’이라는 표현도 조금 다르게 읽을 수 있습니다. 완덕은 ‘나는 이제 죄가 전혀 없는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자기 인식이라기보다, 사람의 생명을 지배하는 중심 사랑이 점점 주님과 이웃을 향하여 정돈되는 상태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거듭난 사람에게도 악한 성향은 남아 있고, 그는 계속 주님의 보호를 필요로 합니다. 천사조차 자기 자신에게 맡겨지면 악으로 기울 수 있으며, 천사의 모든 선도 순간순간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참된 성숙의 표지는 ‘나는 완전해졌다’는 확신보다 ‘주님 없이는 아무 선도 행할 수 없다’는 더욱 깊은 인식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강사가 뒤에서 말하는 ‘영적 성장론’과도 연결됩니다. 강사는 이 과목을 ‘성경의 가장 핵심적 진리’라고까지 부르면서, 이를 통하여 성경적 구원론을 알게 되고 성도들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생활환경과 사건들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있음을 깨닫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영적 성장을 이해하면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단순한 행운과 불운으로만 보지 않고, 그 가운데서 자신의 내적 상태가 드러나고 변화되는 과정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 이해 역시 이 지점에서 깊이 만납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단순히 인간이 이 세상에서 편안하고 성공하도록 모든 환경을 배열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자유를 보존하면서 영원한 선을 선택할 수 있도록 삶의 수많은 상황을 다스리십니다. 우리가 보기에 실패처럼 보이는 일이 더 깊은 자기 인식을 가져올 수도 있고, 성공이 오히려 숨겨져 있던 자기애를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만남이 우리의 인내를 시험하고, 어떤 상실이 우리가 무엇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었는지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조심할 점이 있습니다. ‘모든 사건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말이 ‘하나님께서 모든 사건을 직접 일으키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은 악을 만드시거나 사람에게 악을 행하도록 시키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자유에서 나온 악과 지옥의 영향으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을 허용하시지만, 그 허용된 것들조차 궁극적으로 선한 목적을 위하여 굽혀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허용의 섭리’입니다. 따라서 고난을 만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을 연단하려고 이것을 보내셨다’고 너무 쉽게 말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원인들이 있으며,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의 원인을 모두 설명하는 것보다 주님께서 그 상황 속에서도 사람을 선으로 인도하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강사는 뒤이어 영적 성장론에서 ‘한 차례, 두 차례, 세 차례 연단’과 ‘한 차례, 두 차례, 세 차례 시련’을 살피며, 그 하이라이트로 ‘하나님의 생명수가 유입되는 체험’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영적 성장론을 마태복음 13장의 일곱 비유와 연결한 뒤 요한계시록으로 나아가겠다고 전체 학습 구조를 제시합니다. 여기에서 첫 강의 초반에 제시되는 이 사경회의 큰 지도가 거의 완성됩니다. 종말론적 입문에서 출발하여 모형적 진리, 성화된 성도들의 생애, 영적 성장론, 마태복음 13장, 그리고 요한계시록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체계를 이루려는 것입니다.

 

특히 ‘생명수가 유입된다’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매우 흥미롭게 들립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에게 속한 생명은 본래 인간에게서 자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유입됩니다. 인간은 생명 그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그릇입니다. 사랑하고 생각하고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순간순간 주님에게서 옵니다. 다만 사람은 그 생명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느끼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야 자유와 합리성이 가능하고, 자유 가운데 주님을 사랑하고 선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생명수가 유입된다’는 말을 반드시 어떤 특별한 신체적·신비적 체험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장 깊은 의미에서 주님의 생명은 언제나 인간에게 유입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유입의 유무보다 수용의 상태입니다. 햇빛은 동일하게 비추지만 창문이 닫혀 있거나 더러우면 빛이 충분히 들어오지 못하는 것처럼, 주님의 사랑과 진리는 끊임없이 유입되지만 인간의 자기애와 거짓이 그것을 왜곡하거나 막을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새로운 생명원을 인간 안에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오는 생명을 점점 더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인간의 수용 그릇이 질서화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강사가 말하는 ‘신인 합일’, ‘광야 연단’, ‘성결의 은총’, ‘완덕’, ‘영적 성장’, ‘생명수의 유입’은 서로 따로 떨어진 주제들이 아닙니다. 모두 하나의 질문을 향합니다. ‘구원받은 사람 안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입니다. 바로 이 질문 때문에 이 사경회의 가르침이 단순한 종말론 강의를 넘어 수도적 영성의 성격을 갖게 됩니다. 마지막 때의 사건을 아는 것이 목적이라면 종말의 시간표만 배우면 됩니다. 그러나 이 사경회는 계속해서 ‘그 마지막을 맞이할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묻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질문을 더욱 내면으로 가져옵니다. 마지막 때가 정확히 언제인가를 아는 것보다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이 끝나야 하는가를 묻게 합니다. 자기애의 어떤 지배가 끝나야 하는가, 어떤 거짓이 심판받아야 하는가, 어떤 오래된 proprium이 광야에서 드러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어떤 새로운 선과 진리가 태어나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종말이 단지 세계 밖에서 일어날 미래 사건이 아니라 교회의 한 상태가 끝나고 새로운 상태가 시작되는 것이며, 개인에게도 옛사람의 질서가 무너지고 새사람의 질서가 세워지는 거듭남의 차원에서 읽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강 2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신인 합일의 경지에 들어간 성도들의 생애를 살피고, 광야 연단과 성화와 완덕을 통하여 신앙의 목표와 방향과 가치관을 분명히 하려는 이 사경회의 가르침은, 구원을 단순한 신앙고백이나 일회적 죄 사함에 머물게 하지 않고 실제 생명의 변화로 나아가려 한다는 점에서 매우 귀한 문제의식을 품고 있으며, 이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의 빛에서 보면 그 목표는 인간이 어떤 특별한 영적 경지를 획득하거나 하나님과 존재론적으로 하나가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시험 가운데 악과 거짓을 죄로 알고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며,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유입되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 삶과 쓰임으로 살아감으로써 주님과 점점 더 깊이 결합되는 데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2부에서 특별히 오래 붙들 만한 것은 강사가 세 번 반복하게 한 ‘신앙의 목표, 신앙의 방향, 신앙의 가치관’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수사적 반복이 아닙니다. 사람이 무엇을 신앙의 목표로 삼느냐에 따라 그의 모든 영적 훈련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특별한 체험을 목표로 하면 체험이 없는 날에는 신앙이 흔들립니다. 높은 영적 단계를 목표로 하면 다른 사람과 자기를 비교하게 됩니다. 종말의 비밀을 많이 아는 것을 목표로 하면 지식이 신앙의 척도가 됩니다. 심지어 ‘완덕’을 자기 성취의 목표로 삼으면 성화 자체가 proprium의 업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표가 ‘주님과의 결합’이라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말씀을 읽는 이유도 주님을 더 알고 그분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이고, 기도하는 이유도 특별한 체험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뜻을 주님의 뜻 아래 놓기 위해서이며, 광야 연단을 견디는 이유도 강한 수도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안의 악이 드러날 때 그것을 주님의 도움으로 내려놓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섬기는 이유도 영적 점수를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실제 쓰임으로 흘러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보면 ‘완덕’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도 뜻밖에 화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큰 신비 체험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괴롭힌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 자기 잘못을 알았을 때 변명하지 않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 아무도 보지 않을 때에도 정직한 사람,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인정받을 때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자신에게서 어떤 선한 것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자기 것으로 붙들지 않고 ‘이것은 주님에게서 왔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광야의 목적도, 연단의 목적도, 성화의 목적도 결국 그런 사람을 만드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신인 합일’이라는 강한 표현도 가장 안전하고 아름다운 의미를 얻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나’가 왕 노릇하던 자리에 주님께서 왕이 되시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로 밝아지고, 내 의지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을 기뻐하는 새로운 의지로 거듭나며, 내 개성이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고유한 쓰임이 더욱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주님과 인간의 결합이며, 어쩌면 이 사경회가 ‘광야 연단’을 통하여 그토록 간절하게 도달하고자 했던 영적 목표의 가장 깊은 자리이기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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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적 입문 : ‘말세는 세상의 파멸인가, 교회의 끝인가

1강 3부에 들어오면서 강의는 이제 본격적으로 ‘종말론적 입문’이라는 제목에 걸맞은 문제로 들어갑니다. 강사는 앞에서 이 교재의 특징을 ‘하나님의 빛’, ‘이스라엘 백성을 통한 모형적 진리’, ‘하나님과 인간이 합일되는 체험적 신앙’, 그리고 그것을 기초로 한 요한계시록의 체계적 해석으로 요약한 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서 ‘세상 사람들도 말세라고 한다’고 말하고, 오히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해야 하는데 오늘날은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이제 관심이 개인의 성화와 영적 성장에서 교회와 인류 역사의 상태로 넓어지는 것입니다.

 

이 문제 제기는 가볍게 지나갈 부분이 아닙니다. ‘말세’라는 말을 들으면 많은 그리스도인은 먼저 전쟁, 지진, 전염병, 경제위기, 도덕적 타락, 국제정세의 격변 같은 외적 현상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들이 심해질수록 ‘이제 정말 마지막 때가 가까웠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 사경회의 종말론 역시 앞으로 요한계시록의 사건들을 실제 미래의 역사와 상당히 구체적으로 연결해 나갑니다. 그러나 이 첫머리에서 강사가 ‘교회가 세상을 걱정해야 하는데 세상이 교회를 걱정한다’고 말한 것은 흥미롭게도 시선을 세상 바깥의 재난만이 아니라 ‘교회의 상태’로 돌려놓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매우 중요한 만남이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에서 말하는 ‘마지막 때’, ‘세상 끝’, ‘심판’은 자연계의 지구가 물리적으로 파괴되는 사건을 일차적으로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한 교회가 더 이상 참된 교회로 기능할 수 없을 정도로 선과 진리를 잃어버린 마지막 상태를 뜻합니다. 교회가 겉으로는 여전히 존재하고, 예배당도 있고, 성직자도 있고, 성경도 읽고, 예배도 드리지만 그 안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사라지고 진리가 삶에서 분리되면 그 교회는 영적으로 마지막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따라서 ‘말세인가?’라는 질문을 ‘지구가 언제 끝나는가?’보다 먼저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강사의 ‘세상이 교회를 걱정한다’는 표현은 상당히 무거운 영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문제는 단순히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가 떨어졌다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빛을 비추어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의 기준으로도 교회의 탐욕과 권력욕과 분열과 부도덕이 비판받는다면, 우리는 먼저 세상의 타락을 꾸짖기보다 교회 안의 빛이 얼마나 밝은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세상이 어두워졌다는 사실보다 더 심각한 것은 등불이 빛을 잃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상 가운데 두신 까닭이 신적 선과 진리를 받아 세상에 전달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첫 강의 초반에 강사가 강조했던 ‘밝은 진리’가 다시 중요해집니다. ‘밝은 진리’는 단지 남들이 모르는 종말의 비밀을 더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뜻이어서는 안 됩니다. 참으로 밝은 진리라면 먼저 그것을 가진 사람의 내면을 밝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은 잘 보면서 자기 안의 자기애와 명예욕과 지배욕은 보지 못한다면, 많은 진리를 알고 있어도 아직 그 빛이 자기 내면까지 비춘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빛은 먼저 밖을 비추기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 자신의 내면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종말론은 놀랍게도 회개의 교리가 됩니다. ‘세상 끝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알아내는 학문이기 전에 ‘내 안에서 무엇이 끝나야 하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오래된 자기애의 질서가 끝나야 하고, 진리를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신앙이 끝나야 하며, 종교를 자기 명예와 권위를 위해 사용하는 마음이 끝나야 합니다. 그렇게 옛 질서가 심판받고 끝날 때 새로운 질서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종말’과 ‘새 창조’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하나가 끝나는 것은 다른 하나가 시작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한 사람 안에도 여러 차례 ‘마지막 때’가 있습니다. 이전까지 자기를 지배하던 어떤 사랑과 사고방식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지점에 이르고, 주님의 진리 앞에서 그것이 심판받아 무너지는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랫동안 자기 의를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 어느 시험을 통하여 ‘내가 옳다는 것’을 사랑한 것이 실제로는 주님과 진리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 우월감을 사랑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될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은 매우 고통스럽지만 영적으로는 하나의 작은 ‘종말’입니다. 이전의 자아 질서가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끝에서 새로운 겸손과 새로운 사랑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끝’은 반드시 절망적인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끝내시는 것은 인간 자체가 아니라 악의 지배이며, 거짓 자체이며, 더 이상 선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 낡은 영적 질서입니다. 이 점을 놓치면 종말론은 공포의 교리가 되지만, 이 점을 붙들면 종말론은 소망의 교리가 됩니다. 심판은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니라 질서 회복을 위한 구별이며, 낡은 교회의 끝은 새 교회의 시작을 준비합니다.

 

이 사경회가 앞으로 종말의 여러 징조와 요한계시록의 사건들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다루게 되더라도,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기본 원리를 계속 붙들 필요가 있습니다. 문자적 사건이 무엇인가를 논하기 전에 그것이 어떤 영적 상태를 가리키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단순한 미래 사건의 암호표가 아니라 교회가 어떻게 진리에서 멀어지고, 악과 거짓이 어떻게 그 안에서 세력을 얻으며, 주님께서 어떻게 그것들을 심판하시고 마침내 새 교회를 세우시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에게 ‘최후의 심판’은 지구가 불타 없어지는 날이 아닙니다. 영계에서 오랫동안 형성되어 온 거짓된 영적 질서가 주님의 신적 진리에 의해 드러나고 분리되는 사건입니다. 선한 자와 악한 자가 겉으로 뒤섞여 있던 상태가 끝나고, 각자가 실제로 사랑하는 것에 따라 질서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판’의 본질은 주님께서 사람들을 임의로 천국과 지옥에 보내시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각 사람의 내적 사랑이 드러나고, 그 사랑과 상응하는 곳으로 스스로 향하게 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말세’를 바라보는 태도에도 중요한 차이를 만듭니다. 종말을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단지 미래의 재난을 피할 준비가 안 된 사람이 아니라, 악을 사랑하면서 그것을 진리로 가장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 하며, 자기 악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으로 거절하려는 사람에게 심판은 본질적으로 두려움의 소식이 아닙니다. 진실한 것이 거짓된 것에서 분리되고, 억눌렸던 선이 자유롭게 되는 질서의 회복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이 사경회가 왜 ‘종말론’과 ‘영적 성장’을 하나의 교재 안에서 연결하는지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하나는 세계의 마지막을 다루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성화를 다루므로 전혀 다른 주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둘이 매우 깊게 연결됩니다. 교회 전체에서 일어나는 심판의 원리가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거짓이 드러나고, 악이 분리되고, 선과 진리가 새로운 질서를 이루는 과정이 개인에게서는 거듭남이며, 교회 전체의 차원에서는 한 교회의 종말과 새 교회의 시작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라는 강사의 질문에는 두 가지 차원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실제 교회와 사회의 상태를 분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지금 어떤 영적 시대를 살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내 신앙은 아직 애굽인가, 광야인가, 가나안을 향해 가고 있는가 하는 식으로 자기 상태를 살피는 것도 가능하겠습니다. 다만 이것을 지나치게 기계적인 단계표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의 거듭남은 단순히 한 단계를 완전히 졸업한 뒤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직선적 과정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상당히 거듭난 사람에게도 새로운 광야가 올 수 있고, 이전보다 더 깊은 층의 자기애가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앞으로 이 사경회가 제시하는 ‘영적 성장의 단계’를 읽을 때에도 중요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단계와 질서를 보는 것은 매우 유익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거듭남에는 분명한 질서가 있다고 말합니다. 먼저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 보며, 시험을 거치고, 진리가 의지와 결합하면서 선이 되고, 마침내 사람은 선에서 진리를 보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외적 사건이 똑같은 순서로 일어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유전적 성향과 환경, 자유, 합리성, 쓰임을 모두 고려하여 개별적으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이 사경회가 강조하는 ‘모형적 진리’를 사용할 때도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은 거듭남의 놀라운 표상입니다. 실제로 이 사경회의 영적 성장론은 이스라엘의 과정을 ‘성경에 감춰진 보고’이자 ‘성경을 해석하는 설계도’로 강하게 강조합니다. 이 직관에는 귀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설계도’를 지나치게 외적인 도식으로 고정하면 모든 성도의 삶을 하나의 동일한 시간표에 맞추려는 위험도 생길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거듭남을 표상한다는 것은 ‘당신에게도 반드시 자연적 사건 A가 일어난 다음 사건 B가 세 번 일어나고 그 뒤 사건 C가 일어나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사건들 안에 담긴 영적 상태와 질서가 보편적이라는 뜻입니다. 속박에서 해방되는 상태, 시험을 통하여 악이 드러나는 상태, 주님의 공급을 배우는 상태, 자기 힘을 내려놓는 상태, 선과 진리가 결합되는 상태 등이 모든 거듭남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외적 모습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내적 질서에는 상응이 있습니다.

 

이 구별은 이후 강의에서 매우 중요해질 것입니다. 이 사경회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세 차례 큰 연단’을 받은 것을 성도들도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영적 성장의 원리로 강하게 적용합니다. 실제 다른 강의에서는 ‘광야에서 세 차례 연단의 과정을 반드시 받아야 익은 열매가 되어 천국 곡간에 추수될 수 있다’고까지 설명합니다. 이 가르침의 중심에는 ‘구원받았다고 해서 영적 성장이 끝난 것이 아니며 반드시 시험과 정결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매우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세 차례’라는 자연적 횟수를 모든 개인에게 문자적으로 적용하기보다, ‘셋’이 나타내는 완전한 과정과 그 안의 영적 질서를 보는 편이 더 적절합니다.

 

말씀의 숫자는 단순한 산술 이상의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셋’은 시작과 진행과 완성이라는 하나의 충만한 과정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세 차례 연단’을 꼭 모든 사람이 세 번의 구별 가능한 대형 사건을 경험해야 한다는 공식으로 이해하기보다, 거듭남에는 시험을 통한 충분하고 완전한 정결의 과정이 있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 사경회의 귀한 강조점을 보존하면서도 그것을 지나치게 경직된 단계론으로 만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말세’의 문제와 ‘광야 연단’의 문제가 다시 만납니다. 교회의 마지막 상태도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있지만 점차 선에서 분리되고, 진리를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하게 되며, 마침내 교회의 외형은 남아 있어도 그 안에 사랑과 체어리티가 거의 사라지는 상태까지 진행될 수 있습니다. 개인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자기 명예와 이익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하면 그 진리는 오히려 자기 악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가장 위험한 상태는 ‘진리를 전혀 모르는 상태’만이 아닙니다. 진리를 많이 알면서도 그것을 살지 않는 상태가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지식은 많지만 사랑이 없고, 교리는 정확하다고 자부하지만 체어리티가 없으며, 종말의 징조는 잘 분별하면서 자기 안의 악은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지속되면 신앙은 점점 외적인 것이 되고, 결국 진리와 선의 결합이 끊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교회의 ‘끝’은 바로 이러한 분리가 완성되는 상태와 깊이 관련됩니다.

 

따라서 종말론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태도는 공포도 아니고 호기심도 아니며 겸손일 것입니다. ‘나는 마지막 때의 비밀을 안다’는 의식이 커질수록 오히려 위험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많이 알수록 그 진리가 자기 삶을 더 엄격하게 비추도록 허용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바벨론을 밖에서만 찾지 않고 내 안의 지배욕을 보고, 짐승을 밖에서만 찾지 않고 자연적 추론이 악한 사랑을 섬기는 모습을 보며, 거짓 선지자를 밖에서만 찾지 않고 자기 욕망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려는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계시록이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책이 아니라 나를 거듭나게 하는 말씀이 됩니다.

 

이런 관점은 ‘교회가 세상을 걱정해야 하는데 세상이 교회를 걱정한다’는 강사의 첫 진단을 다시 우리 자신에게 돌려놓게 합니다. 교회의 회복은 먼저 세상을 향해 더 큰 목소리를 내는 데서 시작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다시 교회다워지는 데서 시작됩니다. 진리를 말하면서 선을 행하고, 주님을 고백하면서 이웃을 사랑하며, 권력을 얻으려 하기보다 섬기고, 자기 교회의 성공보다 주님의 나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때 교회는 다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점은 시흥영성수련원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온 ‘연단’, ‘자기부인’, ‘성결’이라는 강조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이 전통이 단순히 ‘마지막 때가 가까웠으니 세상을 피하자’는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고, ‘그러므로 먼저 내가 정결해져야 한다’는 방향을 강하게 붙들어 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종말론이 외부 세계에 대한 공포만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성결을 요구한다면 적어도 그 방향에는 중요한 영적 가치가 있습니다. 다만 그 성결 역시 특별한 집단의 우월성을 만드는 방향이 아니라 더 깊은 겸손과 체어리티로 열매 맺어야 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진정한 새 교회는 단순히 새로운 조직이 등장하는 것으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사람 안에서 주님을 향한 새로운 사랑과 말씀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옛 교회의 끝과 새 교회의 시작은 역사적으로도 일어나지만 동시에 인간의 내면에서도 일어납니다. 내가 알고 있던 신앙이 무너지고 더 깊은 진리가 열리며, 그 진리가 삶으로 들어가 새로운 사랑을 형성할 때 내 안에도 하나의 ‘새 교회’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말세’를 말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날짜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상태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언제 끝나는가?’보다 ‘무엇이 끝나고 있는가?’가 중요하고, ‘무슨 사건이 일어날 것인가?’보다 ‘주님께서 무엇을 새롭게 세우고 계시는가?’가 중요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종말론은 어둡고 무서운 교리가 아니라 놀랍도록 희망적인 교리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끝내기 위해 끝내시는 분이 아니라 새롭게 하시기 위해 낡은 것을 끝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강 3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말세로 진단하고 교회의 타락과 세상의 혼란 속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는 이 사경회의 종말론적 문제의식은 신앙을 안일함에서 깨운다는 점에서 귀하게 받을 수 있으며, 이를 스베덴보리의 빛에서 더 깊이 읽으면 말세란 단순히 지구의 물리적 종말이나 미래 재난의 시간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 무너져 한 교회의 영적 기능이 끝에 이르는 상태이고, 심판은 그 거짓된 질서를 드러내고 분리하여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세우시는 과정이며, 이 동일한 아르카나는 개인의 거듭남 안에서도 옛 자기애의 질서가 끝나고 주님의 선과 진리가 새로운 질서를 이루는 과정으로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종말론을 배우면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마지막 때를 모르는 것’만이 아닙니다. 어쩌면 더 위험한 것은 마지막 때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정작 자기 안에서 끝나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세상의 징조는 예민하게 살피면서 자기 마음의 징조에는 둔감할 수 있습니다. 전쟁과 지진과 국제정세는 분석하면서 자기 안에서 사랑이 식어 가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의 몰락은 기다리면서 자기 안의 지배욕은 그대로 둘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먼저 ‘나’에게 옵니다. 종말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누가 짐승인가?’를 묻기 전에 ‘내 자연적 인간은 무엇을 섬기고 있는가?’를 묻게 하고, ‘바벨론은 어디인가?’를 묻기 전에 ‘나는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사람 위에 서고 싶어 하지는 않는가?’를 묻게 하며, ‘주님은 언제 오시는가?’를 묻기 전에 ‘나는 오늘 주님께서 내 삶 안으로 오실 길을 준비하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그렇게 종말론을 읽을 때 ‘말세’는 남을 두렵게 하는 말이 아니라 나를 깨어 있게 하는 말이 됩니다. ‘심판’은 남에게 내릴 형벌이 아니라 내 안의 거짓이 진리 앞에서 드러나는 은혜가 되고, ‘재림’은 먼 미래에만 기다리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새로운 빛과 권능으로 사람과 교회 안에 임하는 사건으로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첫 강의가 처음부터 강조해 온 ‘밝은 빛’이라는 표현도 가장 깊은 뜻을 얻게 됩니다. 밝은 빛은 종말의 비밀을 남보다 더 많이 아는 빛이 아니라, 그 빛 앞에서 먼저 자기 자신을 보고 회개하며, 마침내 그 진리가 선한 삶이 되어 세상에 비치는 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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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시대, 공중강림, 지상재림과 이스라엘의 고토 귀환 : 종말의 시간표에서 교회의 영적 상태로

1강 4부에서는 앞서 전체 교재의 구조와 ‘영적 성장론’을 소개하던 강의가 이제 본격적인 종말론의 용어와 시간 구조로 들어갑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와 영적 성장론을 종합하여 요한계시록을 살펴보겠다고 말한 뒤, ‘요한계시록은 과학적이고 질서 정연하며 논리적’이라고 강조하고, 이어 자신이 사용하는 종말론의 주요 용어들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첫 번째가 ‘교회 시대’입니다. 강사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께서 강림하시고 교회가 세워진 때부터 예수님의 지상 재림 때까지를 ‘교회 시대’라고 부르며, 지금도 이 교회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는 교회들이 등장하지만 4장 이후에는 ‘교회’라는 표현은 보이지 않고 성도들이 등장한다는 점도 자신의 종말론적 구조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단서로 제시합니다.

 

여기서부터 이 사경회의 종말론을 이해하는 중요한 특징이 드러납니다. 강사는 성경의 마지막 역사를 하나의 시간축 위에 배열합니다. ‘교회 시대-공중강림-휴거-대환란-지상재림-천년왕국’과 같은 구조입니다. 특히 재림을 한 번의 단일 사건으로만 보지 않고 ‘공중강림’과 ‘지상재림’으로 구별합니다. 공중강림은 주님께서 ‘도적같이’ 은밀하게 오셔서 준비된 성도들을 휴거시키는 사건이고, 지상재림은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이후의 거의 모든 계시록 해석이 이 틀 위에서 진행되므로, 첫 강의에서 이 용어를 먼저 설명하는 것은 강사의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작업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상당히 큰 해석의 차이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우선 강사의 의도를 존중해서 보면, 이 시간표의 목적은 단순히 미래 사건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 ‘그러므로 준비해야 한다’, ‘교회 시대는 무한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긴장을 성도들에게 주려는 것입니다. 이후 강의에서 계속 ‘익은 열매’, ‘이기는 자’, ‘광야 연단’, ‘정결’, ‘휴거 준비’를 강조하는 것도 이러한 종말론적 긴장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그 시간표의 세부 해석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 아래에 있는 ‘지금의 신앙 상태를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요청까지 함께 보아야 공정한 해설이 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 ‘교회 시대’는 단순히 오순절 이후 어느 날까지 이어지는 달력상의 기간만으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교회’란 외적인 조직이나 종파보다 더 깊은 의미에서 주님을 인정하고 말씀에서 진리를 받아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시작과 끝도 단순히 조직의 설립과 소멸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선과 진리의 결합이 존재하는 동안에는 교회가 살아 있지만, 진리는 많아도 선이 사라지고 체어리티가 소멸하면 외적인 교회는 그대로 남아 있어도 내적으로는 마지막 상태에 접근합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교회 시대가 언제 끝나는가?’라는 질문이 ‘교회라는 조직이 어느 날 사라지는가?’보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 사랑이 언제 더 이상 교회를 이루지 못할 정도로 소멸하는가?’라는 질문으로 깊어집니다.

 

강사는 이어 ‘말세’, ‘종말’, ‘마지막 때’를 설명하면서 대환란을 예수님께서 죄악 세상을 심판하시는 기간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다시 심판의 의미를 내적으로 가져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마지막 심판은 자연계의 지구가 파괴되는 과정이나 일정 기간 동안 자연재앙이 집중되는 사건에 중심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계에서 선과 악, 참된 신앙과 거짓된 신앙이 더 이상 함께 뒤섞여 있을 수 없게 되어 분리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개인에게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사람 안에서 진리가 들어오면 그 진리는 단순히 지식을 더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동안 숨어 있던 악과 거짓을 드러내어 분별하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심판은 먼저 ‘빛이 비추어 감추어진 상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대환란’ 역시 단지 미래의 극심한 자연적 재난으로만 한정하기보다, 교회에서 진리가 심각하게 왜곡되고 선이 고갈되어 영적 생명이 큰 위기를 겪는 상태로 읽을 수 있습니다.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환난은 내면의 선과 악이 충돌하는 시험의 상태로 나타납니다. 사람은 진리를 알고 난 뒤 오히려 자기 안의 악 때문에 더 큰 갈등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죄를 죄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안했던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인 뒤에는 그동안 자연스럽게 즐기던 것과 싸우기 시작합니다. 겉으로는 더 힘들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영적 생명이 깨어났기 때문에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강사의 ‘공중강림’과 ‘지상재림’ 구분은 스베덴보리와 더욱 분명히 갈라지는 지점입니다. 강사는 주님께서 먼저 은밀히 공중에 강림하시고, 준비된 성도들을 휴거한 뒤 대환란이 지나가고, 마지막에는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지상에 재림하신다고 설명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재림을 주님께서 다시 자연적 육체를 입고 공간적으로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사건으로 보지 않습니다. 주님의 초림은 실제 성육신이었고, 그분은 인성을 신성하게 하신 뒤 다시 육체를 입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재림은 말씀의 신적 진리가 새롭게 열리고, 그 진리 안에서 주님께서 교회에 새롭게 나타나시는 영적 강림입니다.

 

이 차이는 단지 ‘공중에 오시느냐 아니냐’의 작은 차이가 아닙니다. 재림을 기다리는 방식 자체가 달라집니다. 문자적 미래주의에서는 ‘어느 날 주님께서 밖에서 오신다’는 사건을 기다리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주님께서 말씀의 진리를 통하여 지금 내 이해와 의지 안으로 오시도록 나는 준비되어 있는가?’가 더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물론 이것이 주님의 재림을 단순히 개인의 내적 체험으로 축소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재림을 교회 전체에 관련된 실제 신적 사건으로 봅니다. 다만 그 방식이 자연계의 공간적 이동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과 신적 진리의 개방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도적같이 오신다’는 말씀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강사는 도적이 미리 날짜를 알려 주지 않는 것처럼 공중강림도 은밀하고 갑작스럽게 일어난다는 뜻으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도적같이’라는 표현을 주님께서 실제로 숨어 들어오시는 방식의 묘사라기보다, 사람이 영적으로 잠들어 있을 때 심판과 상태의 변화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닥칠 수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날짜를 모른다는 사실보다 깨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깨어 있다’는 것은 종말 뉴스에 민감한 것이 아니라 오늘 받은 진리를 삶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사경회의 실제적 강조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강사가 공중강림과 휴거를 말하는 목적은 결국 성도들에게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준비의 내용을 더 깊게 묻습니다. 준비란 무엇인가? 마지막 때에 관한 도표를 정확하게 아는 것인가, 아니면 악을 죄로 알고 실제로 피하며 선을 행하는 것인가? 말씀 전체의 관점에서는 후자가 본질입니다. 종말론의 시간표를 정확히 알았더라도 자기애와 미움과 탐욕을 생명으로 삼고 있다면 그 지식 자체가 천국의 상태를 만들지는 못합니다. 반대로 종말의 시간표에 관하여 거의 알지 못하더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의 선을 위해 살아가며 자기 악을 회개하는 사람 안에는 천국의 상태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강사가 앞으로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휴거’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강사는 모든 신자가 자동적으로 휴거되는 것이 아니라 일부 준비된 성도만 휴거된다는 입장을 제시하고, 이것을 뒤에서 ‘익은 열매’의 추수와 연결하겠다고 예고합니다. 실제로 강의에서는 ‘모든 성도가 다 휴거되는가, 일부만 휴거되는가’를 하나의 중요한 쟁점으로 제기합니다. 이러한 구분은 성도에게 긴장감을 주고 ‘나는 준비되었는가?’를 묻게 만드는 기능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자연적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 어느 날 지상에서 공중으로 들어 올려지는 휴거는 종말론의 중심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들려 올라감’은 사람의 마음과 사랑이 자연적·자기중심적인 것에서 영적·천국적인 것으로 높아지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높음’과 ‘낮음’은 영계의 상태와 상응합니다. 높은 곳은 더 내적이고 천국적인 사랑의 상태를, 낮은 곳은 더 외적이고 자연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주님을 영접하러 올라간다’는 말씀에는 사람의 영적 상태가 주님과 결합할 수 있는 질서로 높아진다는 깊은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누가 휴거되는가?’라는 강사의 질문을 ‘누가 주님과 결합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옮겨 볼 수 있습니다. 답은 특별한 종말 지식을 가진 사람도, 특정 교단에 속한 사람도, 신비한 체험을 한 사람도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자신의 생명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강사가 ‘익은 열매’를 그토록 강조하는 것과 뜻밖에 깊이 만납니다. 다만 익은 열매를 공중휴거의 선발 자격으로 보기보다,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실제 삶이 된 상태로 읽는 것입니다.

 

이제 강의는 종말의 징조로 넘어가면서 첫 번째 징조로 ‘이스라엘 민족의 고토 귀환’을 제시합니다. 강사는 에스겔 39장 28~29절의 ‘그들을 모아 고토로 돌아오게 하고’, ‘내 신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쏟았다’는 말씀을 인용하고, 이것을 고레스 시대의 바벨론 귀환으로 끝난 예언이 아니라 마지막 때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본토로 돌아오고 장차 구원받게 될 사건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귀환 자체를 ‘종말의 첫 번째 징조’라고 봅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특별히 큰 차이를 보이는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에서 ‘이스라엘’, ‘유다’, ‘예루살렘’, ‘시온’을 읽을 때 혈통적인 민족 자체에 영원한 영적 특권이 부여되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민족은 교회를 표상하도록 선택된 민족이며, 그 민족의 역사와 제도와 땅과 성전은 주님의 나라와 교회의 영적 실재를 나타내기 위한 표상적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이스라엘이 돌아온다’는 예언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특정 혈통의 사람들이 특정 영토로 귀환하는 정치적 사건보다, 교회 가운데 잃어버렸던 진리와 선이 회복되고 사람들이 다시 주님의 질서 안으로 모이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유대 민족이나 현대 이스라엘 국가를 무시하거나 그 역사적 의미를 부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다루는 것은 ‘예언의 속뜻’입니다. 자연계의 역사에는 역사적 의미가 있지만 말씀의 영원한 거룩성은 어느 한 시대의 정치적 사건만으로 소진될 수 없습니다. 만일 에스겔의 말씀을 20세기 이후 유대인들의 특정 지역 귀환으로만 완성된 것으로 본다면, 그 사건이 지나간 뒤에는 그 말씀이 더 이상 모든 시대 모든 인간을 향해 말할 수 있는 영원한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상응으로 보면 ‘고토로 돌아옴’은 지금도 모든 거듭나는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고토’는 주님께서 주시는 천국적 질서, 곧 교회의 선과 진리의 상태를 표상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 사로잡혀 ‘이방 땅’과 같은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그 진리를 자기 욕망에 종속시키면 내적으로는 본래의 질서에서 떠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사람을 회개로 이끄시고, 마음을 정결하게 하시며, 선과 진리를 다시 결합시키실 때 그는 영적으로 ‘고토로 돌아옵니다’.

 

강사가 이어 읽는 에스겔 36장의 말씀은 오히려 이러한 속뜻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며’,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고 새 영을 너희 속에 두며’,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고’,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라’는 내용입니다. 강사는 이것을 장차 고토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여 그들이 구원받는 예언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이 말씀은 거듭남의 거의 완전한 그림처럼 보입니다.

 

‘맑은 물’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사람의 잘못된 생각과 삶을 씻습니다. ‘새 마음’은 새로운 의지, 곧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는 의지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새 영’은 그 선과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이해와 진리의 생명을 생각하게 합니다. ‘돌 같은 마음’은 진리가 들어가도 움직이지 않는 굳은 자기 의지이며, ‘부드러운 마음’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이는 의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율례를 행한다’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최종 목적이 지식이나 체험이 아니라 삶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보면 강사가 ‘이스라엘의 고토 귀환’을 종말의 징조로 읽는 것과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으면서도, 그 강사가 인용한 예언 본문 자체는 오히려 매우 깊은 거듭남의 메시지를 품고 있습니다. 자연적 이스라엘이 어디로 이동하느냐보다 더 내적인 문제는 ‘이스라엘’이 표상하는 교회가 다시 주님의 선과 진리 안으로 돌아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에게서는 ‘내 마음이 다시 주님의 질서로 돌아오고 있는가?’가 됩니다.

 

이 차이는 이후 계시록을 읽을 때 계속 반복될 것입니다. 강사는 ‘이스라엘’을 상당히 문자적으로 혈통적 유대 민족으로 읽고, 마지막 때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그 민족이 다시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고 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이스라엘’을 교회와 영적 인간, 곧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표상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회복’도 영적 교회의 회복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서 어느 한쪽의 언어를 가볍게 무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자적 의미는 말씀의 기초이고, 역사적 이스라엘은 실제로 성경 계시의 중요한 역사적 그릇이었습니다. 주님도 그 민족 가운데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표상의 목적은 그 민족 자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보편적인 영적 실재를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성막이 실제 성막이었다고 해서 성막의 속뜻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실제 역사도 말씀의 더 깊은 상응을 담는 그릇이 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마지막 때 이스라엘이 돌아온다’는 말도 더욱 넓어집니다. 한 교회가 진리를 잃고 외적인 종교 형식만 남았을 때, 주님께서는 새로운 사람들 가운데 다시 선과 진리를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흩어진 ‘이스라엘’을 모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다른 교파와 문화와 배경을 가지고 있어도 주님을 한 분으로 인정하고,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며, 이웃 사랑의 삶을 살아갈 때 영적으로는 하나의 이스라엘로 모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말의 가장 중요한 징조를 ‘특정 민족이 특정 영토로 돌아왔는가?’만으로 판단하기보다 ‘주님의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가 다시 결합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옮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개인적으로는 ‘흩어져 있던 내 생각과 욕망들이 주님의 질서 아래 다시 모이고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주일의 신앙과 평일의 생활이 따로 있고, 교회의 나와 가정의 내가 따로 있고, 신학적 지식과 실제 인간관계가 따로 있다면 아직 ‘흩어진 이스라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삶 전체를 하나로 묶기 시작하면 영적으로 고토 귀환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종말의 징조는 밖을 두리번거리는 신호가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는 신호가 됩니다. 강사가 현대 역사 속에서 종말의 표지를 찾는 긴장감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사람과 교회의 내적 상태로 가져옵니다. 그렇다고 깨어 있음의 긴장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엄격해집니다. 국제정세는 내가 바꿀 수 없지만 오늘 내 안의 미움과 자기 의를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는 것은 내가 응답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1강 4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성령 강림부터 지상 재림까지를 교회 시대로 보고, 공중강림과 휴거, 대환란과 지상재림을 구별하며, 이스라엘 민족의 고토 귀환을 종말의 첫 징조로 읽는 강사의 종말론은 성도들에게 마지막을 준비하라는 강한 긴장을 제공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빛에서는 교회의 마지막은 먼저 선과 진리의 결합이 소멸하는 영적 상태이며, 주님의 재림은 말씀의 신적 진리가 새롭게 열리는 강림이고, 이스라엘의 귀환은 교회와 인간 안에서 흩어지고 잃어버렸던 선과 진리가 다시 주님의 질서 안으로 모이는 회복의 아르카나로 읽을 때 그 의미가 더욱 보편적이고 내적으로 열립니다.’

 

그리고 이번 4부에서 특별히 주목하고 싶은 것은 강사가 에스겔 36장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정결’, ‘새 마음’, ‘새 영’, ‘하나님의 영’, ‘율례를 행함’을 모두 하나로 연결했다는 점입니다. 종말론의 한복판에서 갑자기 거듭남의 언어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이라기보다 어쩌면 이 사경회의 중요한 특징을 보여 줍니다. 종말의 징조를 말하지만 결국 목표는 사람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돌아오는 이유도 단지 땅을 되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오고 정결해지기 위해서라고 강사는 이해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바로 그 지점을 붙들어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돌 같은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뀐다.’ 이것보다 더 정확한 거듭남의 그림을 찾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인격을 없애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애 때문에 굳어져 주님의 선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의지를 부드럽게 하시고, 진리를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십니다. 그리고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라’고 합니다. 생명수의 유입도, 신인합일도, 광야 연단도 결국 여기에 도달해야 합니다. 말씀을 실제로 기쁘게 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말을 준비하는 가장 깊은 준비는 비상식량이나 세계정세의 해석이 아니라 ‘새 마음’일 것입니다. 공중강림의 시점을 정확히 아는 것보다 주님께서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을 씻고 계시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어느 민족이 어느 땅으로 돌아오는지를 보는 것보다 내 의지가 주님께 돌아가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 더 직접적인 영적 과제입니다. 결국 종말론이 참으로 주님에게서 온 진리라면 사람을 공포와 호기심에 묶어 두지 않고 회개와 사랑과 선한 삶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나타날 때, 이 사경회가 처음부터 말한 ‘밝은 진리’는 비로소 지식의 밝음이 아니라 생명의 밝음이 됩니다.



1 5

이스라엘의 회복과 온 이스라엘의 구원’ : 혈통적 이스라엘에서 영적 이스라엘로

1강 5부에서는 앞서 시작된 ‘종말의 첫 번째 징조’, 곧 이스라엘 민족의 고토 귀환에 대한 설명이 한층 구체화됩니다. 강사는 에스겔 39장의 ‘그들을 모아 고토로 돌아오게 하고’, ‘내 신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쏟았음이니라’는 말씀을 근거로, 이 예언을 고레스 시대의 바벨론 귀환으로 끝난 말씀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오랜 흩어짐 끝에 다시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돌아오고 국가를 세운 현대의 역사적 귀환, 그리고 장차 그들에게 성령이 부어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되는 사건까지 하나의 종말론적 과정으로 연결합니다. 강사의 체계에서 ‘고토 귀환’은 단순한 민족적·정치적 귀환이 아니라 마지막 때 이스라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준비 과정인 셈입니다.

 

강사는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 구원받느냐?’ 그리고 교회 시대 동안에는 이방인의 구원이 이루어지지만,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채워지고 교회 시대가 끝나면 성령께서 두 증인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에스겔 36장 24절 이하의 ‘열국 중에서 모아 고토에 돌아가게 하겠다’, ‘맑은 물을 뿌려 정결하게 하겠다’, ‘새 마음과 새 영을 주겠다’,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는 말씀을 이 미래적 이스라엘 회복의 예언으로 읽습니다.

 

이 대목에서 강사의 종말론적 체계는 매우 선명해집니다. ‘이스라엘의 흩어짐-고토 귀환-교회 시대의 완성-공중강림-이스라엘에 대한 성령의 역사-이스라엘의 회개와 구원-대환란’이 하나의 연속적인 역사적 시간표를 형성합니다. 실제로 강사는 로마서 11장의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이 구조에 넣고, 이방인의 구원이 충만해져 교회 시대가 끝난 직후 공중강림하신 주님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해석을 먼저 그 자체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이스라엘 민족을 단순히 종말의 시간표를 알려 주는 표지판으로만 보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약속하신 백성을 끝내 버리지 않으시며, 그들을 다시 모으고 회개시켜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해석의 정서적 중심에는 심판보다 회복이 있습니다. 흩어진 백성을 다시 모으시고,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며, 하나님의 영을 그들 안에 두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적용할 때에는 강사의 해석을 단순히 ‘틀렸다’고 밀어내기보다, 말씀의 의미가 어디까지 더 깊어질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이스라엘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다만 그 중요성의 성격이 다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 민족 자체가 다른 민족보다 내적으로 거룩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교회와 천국의 것들을 외적으로 표상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선택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땅, 성막과 성전, 제사, 절기, 왕과 제사장, 출애굽과 광야생활, 가나안 정복에 이르는 모든 것이 더 깊은 영적 실재를 표상하는 그릇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이스라엘’이 등장할 때 가장 깊은 속뜻에서는 언제나 혈통적 이스라엘 민족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주님의 교회, 더 구체적으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영적 인간을 표상합니다. ‘유다’가 천적인 것, 곧 사랑의 선과 관련되는 경우가 많다면, ‘이스라엘’은 영적인 것, 곧 선에서 나오는 진리와 신앙의 삶과 관련하여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흩어진 이스라엘이 다시 모인다는 말씀은 어느 시대 어느 민족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영원한 아르카나를 품게 됩니다.

 

여기에서 ‘흩어짐’이라는 상태부터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내면은 죄와 자기애에 의해 실제로 흩어집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원하는 것이 다르고, 주일에 고백하는 것과 평일에 살아가는 것이 다르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동시에 자기 명예와 이익을 삶의 중심에 둘 수 있습니다. 진리는 한쪽에 있고 사랑은 다른 쪽에 있으며, 신앙과 삶이 서로 떨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포로됨’이며 ‘흩어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때에는 이 흩어진 것들을 다시 모으십니다. 진리와 선을 결합시키고, 이해성과 의지를 하나의 질서 아래 두시며,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을 실제로 사랑하고 행할 수 있도록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돌아가서’라는 에스겔의 말씀은 한 민족의 지리적 이동이라는 문자적 장면을 넘어, 주님께서 흩어진 인간의 내면을 다시 하나로 모으시는 거듭남의 과정을 담게 됩니다.

 

그리고 에스겔 36장은 바로 그 귀환이 무엇인지를 놀랍도록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겠다’고 합니다. 말씀에서 ‘물’은 일반적으로 진리, 특히 사람이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주어지는 신앙의 진리와 상응합니다. 물이 육체의 더러움을 씻듯 진리는 인간에게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 보여 줌으로써 그의 삶을 정결하게 합니다. 진리가 없다면 사람은 자기 욕망을 선이라고 착각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진리가 들어올 때 비로소 ‘내가 사랑하고 있는 이것이 사실은 주님의 질서에 어긋나는 것이구나’ 하고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물로 씻는 것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어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고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더욱 깊은 단계입니다. 단순히 잘못된 행동을 고치는 것을 넘어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는가가 바뀌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면 안 되니까’ 악을 피합니다. 진리가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지면 악 자체를 싫어하고 선을 기뻐하는 새로운 의지가 형성됩니다. 이것이 ‘새 마음’이라는 표현에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깊은 변화입니다.

 

특히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는 말씀은 거듭남의 본질을 매우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돌 같은 마음은 단지 성격이 냉정하다는 뜻으로만 볼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진리를 들어도 자기 뜻을 내려놓지 않는 완고한 proprium의 상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옳은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나는 내 방식대로 하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이해성까지 들어왔지만 의지가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굳은 마음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마음을 억지로 깨뜨려 로봇처럼 순종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자유를 보존하면서 시험과 회개와 삶을 통해 점차 부드럽게 하십니다. 처음에는 마지못해 용서하던 사람이 나중에는 용서하는 것을 기뻐하고, 처음에는 의무 때문에 섬기던 사람이 나중에는 다른 사람의 선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섬기게 됩니다. 바로 그때 진리가 더 이상 밖에서 명령하는 율법으로만 남지 않고 사람의 새 의지 안에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에스겔의 말씀은 마지막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라고 이어집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행하게 하리니’입니다. 결국 모든 정결과 새 마음과 새 영은 삶으로 귀결됩니다. 이것은 첫 강의에서 계속 반복되어 온 ‘밝은 진리’, ‘영적 성장’, ‘광야 연단’, ‘신인합일’이라는 주제들을 하나로 묶어 줍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사랑이 되고 사랑이 행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는 이 사경회의 강조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가 상당히 깊게 만납니다. 차이는 주로 그 예언의 대상을 어디에 두느냐에 있습니다. 강사는 에스겔 36장을 마지막 때 혈통적 이스라엘 민족에게 성령이 부어져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될 미래 사건으로 읽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것을 주님께서 모든 시대의 교회와 모든 거듭나는 인간 안에서 행하시는 영적 회복의 말씀으로 읽습니다. 전자는 ‘누구에게 언제 일어날 것인가?’를 중심으로 보고, 후자는 ‘이 말씀은 인간 안에서 어떤 영적 상태의 변화를 말하는가?’를 중심으로 봅니다.

 

강사는 이어 로마서 11장의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를 혈통적 이스라엘의 미래적 구원과 연결합니다. 여기에서도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갖는 표상성을 먼저 봅니다. 주님의 나라는 혈통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어느 민족에서 태어났는지, 어느 교파에 속했는지, 어떤 종교적 외형을 가졌는지가 그의 영원한 상태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어떤 선과 진리를 받아들였고 어떤 사랑으로 살았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온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을 가장 내적으로 읽으면 주님의 영적 이스라엘, 곧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유대인도 있고 이방인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역사적 이스라엘에 속했다는 사실 때문에 자동적으로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 역사적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천국에서는 혈통이 아니라 사랑이 사람들을 하나로 묶습니다.

 

이 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특정 민족을 다른 민족보다 본질적으로 더 사랑하시고 그 민족에게만 별도의 구원 원리를 적용하시는 것처럼 말씀을 읽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과 섭리를 이해하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며, 태어난 민족과 문화와 시대를 넘어 각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선과 진리를 공급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은 속뜻에서는 모든 시대의 주님의 교회를 향한 약속이 됩니다.

 

그러면서도 역사적 이스라엘의 역할을 가볍게 여길 이유는 없습니다. 바로 그 민족을 통하여 말씀이 보존되었고, 그 민족의 역사와 예배가 천국의 것들을 표상했으며, 무엇보다 주님께서 그 민족 가운데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표상하는 그릇’과 ‘표상되는 실재’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성막이 실제로 거룩한 용도로 사용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주님과 천국과 인간의 내면을 표상했던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 역시 실제 역사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더 높은 영적 실재를 표상했습니다.

 

강의는 이후 현대 이스라엘의 형성 과정을 설명합니다. 19세기 유대인의 귀환 운동, 1890년대 시오니즘 운동, 1917년의 밸푸어 선언, 그리고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을 차례로 언급하면서 이 모든 역사를 유대 민족이 고토로 돌아오는 과정으로 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구별은 꼭 필요합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실제 역사에 속하는 사건들이고, 그 역사적 의미는 역사학과 국제정치의 차원에서 따로 살펴야 합니다. 반면 ‘이 사건들이 에스겔 예언의 직접적 성취이며 종말의 첫 번째 징조인가?’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 자체가 아니라 특정한 종말론적 해석입니다. 둘을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더욱 신중하게 보아야 할 부분은 강사가 코로나 시대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동의 전쟁과 같은 현대의 사건들까지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귀환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과 연결하는 대목입니다. 강사는 여러 국제적 격변의 ‘종국적인’ 목적 가운데 이스라엘 사람들을 고토로 돌아오게 하려는 뜻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특히 조심스러워집니다.

 

신적 섭리는 분명 모든 것을 다스립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특정 전쟁이나 재난에 대해 ‘하나님께서 바로 이 목적 때문에 이것을 일으키셨다’고 단정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에서 주님은 악을 일으키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자유에서 발생한 악과 그 결과를 허용하시고, 허용된 것들이 가능한 한 선한 결과를 향하도록 끊임없이 굽혀 이끄십니다. 이것이 ‘허용의 섭리’입니다.

 

따라서 전쟁으로 사람들이 죽고 삶의 터전을 잃는 현실을 보면서 그 전쟁이 어떤 종말론적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일으키신 사건이라고 쉽게 말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전쟁의 악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악 속에서도 사람의 자유를 보존하시고 가능한 선을 끌어내시는 분입니다. 인간에게는 섭리의 전체 연결고리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특정 사건의 신적 목적을 너무 구체적으로 단정할 때 오히려 인간의 추론을 하나님의 뜻으로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섭리는 대부분 뒤에서, 그리고 인간이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역사합니다. 만일 사람이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신적 이유를 미리 명백하게 알게 된다면 그의 자유가 침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건이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 왜 이것을 하셨는지 나는 정확히 안다’고 말하기보다 ‘이 상황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영원한 선을 위하여 일하고 계신다’고 신뢰하는 편이 더 안전합니다.

 

이 구별은 이 사경회의 영성을 낮추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앞서 강의가 강조했던 ‘하나님의 섭리’를 더욱 깊고 조심스럽게 받아들이기 위한 것입니다. 삶의 모든 환경이 우연만은 아니며 주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섭리하신다는 믿음은 매우 귀합니다. 그러나 섭리를 믿는 것과 섭리의 구체적인 이유를 내가 모두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첫 번째는 신뢰이고, 두 번째는 자칫 인간의 확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다시 ‘고토 귀환’으로 돌아가 보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 표현은 개인의 거듭남에 매우 아름답게 적용됩니다. 인간에게 진정한 ‘고토’는 주님께서 창조하신 질서 안에 있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본래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고 그 생명을 선과 진리의 쓰임으로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proprium이 중심이 되면서 그는 그 본래의 질서에서 떠납니다. 자기 사랑이 왕이 되고 진리는 그 사랑을 섬기는 종이 됩니다. 영적으로는 타국에 포로가 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주님께서 다시 부르십니다. 먼저 진리를 주십니다. ‘맑은 물’을 뿌리십니다. 진리로 자기 상태를 보게 하십니다. 그다음 시험을 통하여 돌 같은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사람은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시험 속에서 자기 안에 얼마나 많은 분노와 시기와 지배욕과 자기 의가 있는지 보게 됩니다. 이것은 고통스럽지만 귀환의 과정입니다. 그 악을 자기 것으로 사랑하지 않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여 거절할 때 조금씩 ‘부드러운 마음’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라’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처음에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힘들었지만 나중에는 선을 행하는 데 기쁨이 생깁니다. 진리가 밖에서 명령하는 상태에서 선이 안에서 흘러나오는 상태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하게 보는 전환입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진리를 통해 선으로 나아가지만, 거듭남이 진행되면 선에서 진리를 보고 행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이스라엘의 귀환’과 앞서 공부한 ‘광야 연단’도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애굽에서 나오는 것은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시작이고, 광야는 아직 남아 있는 proprium이 시험을 통해 드러나고 정돈되는 과정이며,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새로운 질서를 이루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포로 된 이스라엘이 다시 고토로 돌아오는 것은 한때 무너졌던 교회의 질서가 다시 회복되는 또 다른 형상입니다. 말씀 전체가 서로 다른 역사적 장면을 통하여 하나의 거듭남의 아르카나를 반복해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사경회가 이스라엘을 중요하게 보는 이유와 스베덴보리가 이스라엘을 중요하게 보는 이유의 차이를 비교하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 사경회에서는 현대 이스라엘이 ‘종말 시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귀환과 구원이 마지막 때의 시간표를 알려 주는 표지가 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성경의 이스라엘은 ‘거듭남의 지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가 주님과 교회와 인간의 영적 여정을 보여 주는 표상적 역사입니다.

 

전자는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지금 종말의 시간표가 어디까지 왔는가?’를 묻습니다. 후자는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지금 내 영적 여정은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전자는 주로 역사적 시간에 관심을 두고, 후자는 영적 상태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나 둘 모두 이스라엘의 역사가 단순한 고대 민족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관계된다는 점에서는 만납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종말론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까지 바꿉니다. 이스라엘에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이것이 몇 번째 종말 징조인가?’를 계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통해 내 안에서 아직 주님께 돌아오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보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모아 고토로 돌아가게 하겠다’는 말씀 앞에서 ‘주님, 제 안에 흩어진 것들도 다시 모아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맑은 물을 뿌리겠다’는 말씀 앞에서 ‘말씀의 진리로 제 삶을 씻어 주십시오’라고 할 수 있고,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겠다’는 말씀 앞에서는 ‘제가 진리를 알면서도 고집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십시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종말 예언은 미래를 알아맞히는 자료가 아니라 현재 나를 변화시키는 말씀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종말론을 읽을 때 계속 붙들고자 하는 방향입니다. 말씀은 언제나 영원합니다. 어느 한 시대의 정치적 사건 하나가 지나갔다고 해서 그 말씀의 효력이 끝나지 않습니다. 말씀의 문자 안에 담긴 영적 의미가 모든 시대의 교회와 모든 사람에게 계속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1강 5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고토 귀환을 종말의 첫 번째 징조로 보고,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채워진 뒤 공중강림과 대환란의 시작과 함께 혈통적 이스라엘에게 성령이 부어져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며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예언이 성취된다고 보는 강사의 해석은 하나님의 약속과 신실하심을 역사 속에서 붙들려는 강한 종말론적 확신을 보여 주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스라엘이 주님의 교회와 영적 인간을 표상하므로, 흩어진 이스라엘의 귀환은 선과 진리가 분리되어 흩어졌던 교회와 인간이 다시 주님의 질서 안으로 모이고, 맑은 물인 진리로 정결하게 되며, 돌 같은 proprium의 마음이 새 마음으로 바뀌어 마침내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 삶으로 행하게 되는 거듭남과 새 교회의 회복이라는 보편적 아르카나로 열립니다.’

 

그리고 이번 5부에서 가장 깊이 붙들 만한 말씀은 어쩌면 ‘고토’보다도 ‘새 마음’일 것입니다. 고토로 돌아왔는데 마음이 그대로라면 진정한 귀환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땅은 바뀌었는데 사랑이 바뀌지 않을 수 있고, 종교는 바뀌었는데 삶은 그대로일 수 있으며, 교회는 옮겼는데 proprium은 그대로 따라갈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새로운 진리를 발견했는데 그 진리를 가지고 이전보다 더 교만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외적으로는 귀환했어도 내적으로는 아직 포로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의 순서가 의미심장합니다. 모으시고, 돌아오게 하시고, 씻으시고, 새 마음을 주시고, 새 영을 두시고, 마침내 ‘행하게’ 하십니다. 귀환의 완성은 장소가 아니라 생명의 변화입니다. 이 점에서는 이 사경회가 말하는 ‘신인합일’, ‘광야 연단’, ‘성결’, ‘익은 열매’라는 표현들도 결국 하나의 자리에서 만납니다. 주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 받아들여져 실제 삶의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도 깊이 만납니다. 사람이 주님에게 돌아온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종교적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중심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얻을 것인가?’가 중심이던 사람이 ‘무엇이 주님의 뜻이며 이웃에게 선한가?’를 묻게 되고, 자기 생각을 관철하는 데 기쁨을 느끼던 사람이 진리 앞에서 자기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며, 선을 행하고도 자기 공로를 붙들던 사람이 그 선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것이 영적 이스라엘의 귀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먼 미래 어느 민족에게만 남겨진 문장이 아니라, 주님께서 흩어진 모든 선과 진리를 다시 모아 하나의 살아 있는 교회를 이루실 것이라는 소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새 교회는 먼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안에서 시작됩니다. 돌 같은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며, 신앙이 삶과 하나가 되는 곳, 바로 그곳에서 ‘이스라엘의 귀환’은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1 6

휴거의 여섯 징조 : 외적 종말의 표적에서 내적 깨어 있음으로

1강 6부에서는 앞서 이스라엘의 고토 귀환을 종말의 첫 번째 징조로 살펴본 데 이어, 강의의 초점이 ‘휴거가 가까워질 때 나타나는 현상들’로 옮겨갑니다. 강사는 고린도전서 15장의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라는 말씀을 휴거의 대표적인 본문으로 제시하면서, 휴거는 실제로 일어날 것이며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르지만 그때가 가까워졌음을 알려 주는 여러 징조는 알아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에녹과 엘리야가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올라간 사건을 휴거의 예표로 제시합니다. 강사의 관심은 분명합니다. ‘휴거가 정말 있는가?’를 논증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날이 가까운 줄 알고 준비하라’는 데 있습니다.

 

강사가 제시하는 징조들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전쟁과 기근과 지진, 예루살렘 성전산의 이슬람 성전이 없어지고 제3 성전이 세워지는 일,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 공산주의화되고 종교 탄압이 일어나는 일, 세계정부와 화폐의 단일화 및 세계 대통령의 등장,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 그리고 마지막으로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는 일입니다. 이 일들이 점점 현실화되면 성도들은 휴거가 가까웠음을 알고 영적으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강사의 종말론적 그림입니다.

 

여기에서 먼저 한 가지를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부분에는 성경 본문에 직접 기록된 내용과, 그 본문을 현대 정치와 국제정세에 연결한 강사의 해석이 상당히 긴밀하게 섞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24장의 ‘난리와 난리 소문’,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기근과 지진’,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등은 성경 본문에 직접 나오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특정 정치 체제나 국가, 세계 단일정부, 단일화폐, 특정 비밀조직에서 미래의 적그리스도가 출현한다는 설명 등은 그 성경 본문 자체가 직접 말하는 내용이라기보다 강사가 자신의 종말론적 체계 안에서 현실의 사건들과 연결한 해석입니다. 이 둘을 구별해서 듣는 것이 이 강의를 존중하면서도 신중하게 읽는 방법일 것입니다.

 

특히 이 부분에서는 정치적 판단이 상당히 강하게 등장합니다. 강사는 공산주의의 확산을 휴거 직전의 징조와 연결하고, 교회와 목회자는 이에 분명히 맞서야 한다고 강조하며, 심지어 교회가 정치적으로 어느 방향에 서야 하는지까지 매우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또한 당시의 미국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가 적그리스도일 수 없다는 자신의 판단과 함께 미래의 적그리스도가 특정 세력 가운데서 나올 것이라는 전망까지 제시합니다. 이 대목은 이번 재작업에서 특별히 차분하게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의 시대 인식과 문제의식은 그대로 소개하되, 그것을 곧 말씀 자체의 확정적인 속뜻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가장 먼저 달라지는 것은 ‘징조’를 읽는 방식입니다. 말씀에 전쟁이 나온다고 해서 그것이 어느 현대 국가 사이의 전쟁을 직접 예언한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전쟁’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의 영적 싸움을 나타냅니다. 한 인간의 내면에서도 전쟁이 일어나며, 교회 전체에서도 전쟁이 일어납니다. 참된 진리가 거짓된 교리와 충돌하고, 체어리티에 기초한 신앙이 자기애와 지배욕에 기초한 종교성과 충돌합니다. 그러므로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난다’는 말씀은 자연계의 실제 전쟁을 문자적 바탕으로 가지면서도, 속뜻에서는 교회와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의 질서가 무너지고 거짓들이 서로 충돌하는 마지막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계의 전쟁을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쟁은 실제로 끔찍한 악이며 수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줍니다. 그러나 그 전쟁 하나하나를 곧바로 종말 시계의 바늘로 사용하는 것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인류 역사에는 거의 끊임없이 전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이번이 바로 마지막 징조다’라고 판단한다면 말씀의 영원한 의미가 그때그때의 국제정세에 종속될 위험이 있습니다. 말씀은 한 시대의 뉴스보다 훨씬 깊고 영원한 것을 말합니다.

 

강사가 두 번째로 제시하는 제3 성전 문제에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강사는 현재 예루살렘 성전산에 있는 이슬람 성전이 어떤 방식으로든 사라지고 그 자리에 제3 성전이 세워지며, 적그리스도가 그곳에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선언하게 될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이것을 마태복음 24장 15절의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과 연결합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문자적 미래주의 종말론의 한 형태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성전’은 무엇보다 주님의 신적 인성, 그리고 파생적으로 주님의 교회와 사람 안에서 주님이 거하시는 내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곳’에 가증한 것이 선다는 것은 훨씬 더 내적인 경고가 됩니다. 본래 주님과 그분의 선과 진리가 중심이어야 할 자리에 자기애와 거짓이 들어서는 것입니다. 교회가 주님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사람의 권력과 명예를 섬길 수도 있고, 개인이 말씀을 읽으면서도 그 말씀을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외적으로는 여전히 ‘성전’의 모습이 남아 있어도 그 중심에는 다른 것이 서게 됩니다.

 

이것은 오히려 훨씬 가까운 종말의 징조입니다. 예루살렘의 어느 건물이 언제 없어질지를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내 안의 ‘거룩한 곳’에 무엇이 서 있는지는 오늘 살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의 중심에 주님이 계신가, 설교자인 내가 있는가? 교회의 중심에 주님의 나라가 있는가, 조직의 성공이 있는가? 말씀 공부의 중심에 진리를 따라 살려는 마음이 있는가, 남보다 더 많이 안다는 만족이 있는가? 이런 질문 앞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다’는 말씀은 갑자기 매우 개인적이고 엄중한 말씀이 됩니다.

 

강사가 세 번째 징조로 제시하는 정치 체제의 변화 역시 같은 방식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강사는 자유를 억압하고 종교를 탄압하며 국가가 개인의 삶을 통제하는 체제가 확대되는 것을 마지막 때의 징조로 봅니다. 여기에는 ‘자유’에 대한 강한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이 점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게 자유는 인간의 거듭남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유 가운데 진리를 선택하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강제로 선을 행하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영적 생명이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자유를 특정 현대 정치 이념 하나와 그대로 동일시하는 데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가장 깊은 자유는 정치적 제도 이전에 ‘영적 자유’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사랑하여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반대로 가장 깊은 속박은 외적인 정치 제도만이 아니라 자기애와 탐욕과 미움과 거짓에 지배되는 상태입니다. 겉으로는 아무도 나를 억압하지 않아도 탐욕에 사로잡혀 있다면 영적으로는 종입니다. 반대로 외적인 억압 속에서도 주님과 진리를 사랑한다면 내적으로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자유를 지키는 일은 중요하지만, 교회의 복음을 어느 특정 정치 진영과 동일시하는 순간에는 또 다른 위험이 생깁니다. 신적 진리는 인간의 정당이나 이념보다 큽니다. 어떤 정치 진영 안에도 선과 악이 함께 있을 수 있고, 어떤 제도도 인간의 자기애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습니다. 교회가 어느 정치 세력 자체를 ‘하나님의 편’으로 동일시하기 시작하면 정치적 판단이 영적 분별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사람은 ‘우리 편이 하는 것은 선이고 저쪽이 하는 것은 악’이라고 생각하기 쉬워집니다. 그러나 말씀의 기준은 진영이 아니라 선과 진리입니다.

 

이 점은 강의 후반에 나오는 매우 중요한 한마디와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강사는 지금 시대가 ‘악한 것을 선이라고 하고 선한 것을 악이라고 하는’ 상태라고 탄식합니다. 이 문제의식 자체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의 구별이 흐려지고 심지어 뒤집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분별의 기준을 정치적 진영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누가 말했는가?’보다 ‘그것이 실제로 주님의 선과 진리에 부합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강사의 염려를 오히려 더 엄격하게 적용합니다. 악을 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세상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지배욕을 ‘영적 권위’라고 부를 수 있고, 자기 의를 ‘진리를 지키는 용기’라고 부를 수 있으며, 다른 사람에 대한 증오를 ‘거룩한 분노’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탐욕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포장할 수도 있고, 자기 교단이나 지도자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믿음’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악을 선의 이름으로 부르는 더욱 미세하고 위험한 형태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의 분별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선악을 뒤집었다고 말하기 전에 ‘나는 내 악에 선한 이름을 붙이고 있지는 않은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종말의 말씀을 읽을 때 반복해서 강조하는 방향입니다. 말씀은 먼저 나를 심판합니다.

 

네 번째 징조로 강사는 세계정부, 단일화폐, 그리고 세계 대통령의 출현을 말합니다. 세계의 정치와 경제가 하나의 체제로 통합되고 그 정상에 한 통치자가 등장하면 휴거가 매우 가까워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 그 세계적 지도자가 장차 적그리스도로 나타날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특정 비밀결사들에 대한 설명도 이어집니다. 이 부분은 성경 본문 자체와 강사의 시대적 해석을 더욱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는 대목입니다. 해당 강의 자료만으로는 특정 비밀조직이 세계경제와 전쟁을 실제로 배후 조종한다거나 미래의 적그리스도가 그 조직에서 반드시 출현한다는 주장을 확인할 근거가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강사의 종말론적 판단으로 소개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겠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세계적 통합’이라는 이미지에서도 중요한 영적 원리를 읽을 수 있습니다. 악과 거짓도 한동안 하나로 결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 안의 여러 악한 욕망들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여도 결국 자기애라는 하나의 중심을 섬길 수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고, 명예를 사랑하고, 권력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기를 원하는 여러 욕망이 모두 proprium을 왕으로 세우는 데 협력할 수 있습니다. 계시록에서 짐승에게 권세를 주는 여러 세력이 하나의 뜻을 갖는 장면도 이러한 악과 거짓의 결집이라는 차원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10강 8부에서도 깊이 살펴보았듯, 악의 연합은 참된 하나 됨이 아닙니다. 자기애에 기초한 존재들은 공동의 이익이 있는 동안에는 결합하지만 궁극적으로 서로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모두 자기가 중심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은 마지막에는 자기 내부에서 분열합니다. 이것이 천국의 결합과 지옥의 결합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천국은 서로 다른 존재들이 주님과 공동의 선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지만, 지옥은 각자의 자기 유익 때문에 잠시 결탁할 뿐입니다.

 

강사가 다섯 번째 징조로 말하는 것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마태복음 24장 24절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들이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까지 미혹’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예로 들며, 특별히 기적과 표적 때문에 미혹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받을 수 있는 경고입니다.

 

영적 진리의 여부를 기적이나 초자연적 현상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다는 사실과 그 가르침이 신적 진리라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놀라운 것을 보면 판단력이 약해지기 쉽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분별하는 기준은 기적의 크기가 아니라 그 가르침이 주님과 말씀에 부합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회개와 선한 삶으로 이끄는가입니다.

 

더 깊게 보면 ‘거짓 그리스도’는 반드시 ‘내가 예수다’라고 말하는 특정 인물에게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주님의 신적 진리와 관계되므로, 거짓을 진리처럼 내세워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모든 것은 내적으로 ‘거짓 그리스도’의 성격을 가질 수 있습니다. 특히 자기 욕망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proprium이 주님의 자리에 올라선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는 일도 밖의 이단 지도자를 찾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 안에도 ‘거짓 선지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이미 하고 싶은 일을 먼저 정해 놓고 성경 구절을 찾아 그것을 정당화할 때, 내 욕망이 말씀을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겉으로는 성경을 인용하지만 실제로는 proprium이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훨씬 더 가까이 경계해야 할 미혹입니다.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징조로 강사는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는 것’을 듭니다.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미전도 종족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지고, 그들이 받아들이든 거절하든 적어도 복음을 들을 기회가 주어진 뒤에 ‘끝이 온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선교적 열정이 담겨 있습니다. 복음은 특정 민족이나 문화의 소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말씀의 보편성을 더욱 넓게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기독교 문화권 안에서만 역사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모든 인간을 천국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시며, 각 사람이 태어난 종교와 문화와 환경 안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선과 진리를 공급하십니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을 자연계에서 명시적으로 들어 보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동적으로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았으며 선을 사랑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후에는 그러한 사람에게 주님에 관한 진리가 가르쳐질 수 있고, 선을 사랑한 사람은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말씀을 단순히 세계의 모든 언어권에 기독교 정보가 한 번씩 전달되는 통계적 조건으로만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더 깊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적 진리가 교회의 모든 영역에 충만하게 증거되고, 각 사람에게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충분한 빛이 주어지는 상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심판에는 언제나 먼저 계시가 있습니다. 빛이 와야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강 6부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사실 이 여섯 징조 자체보다 그 뒤에 나오는 강사의 ‘준비’에 관한 설명일 수 있습니다. 강사는 여러 종말의 징조를 말한 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라고 묻습니다. 회개해야 하고 거룩해야 하며 준비할 것이 많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매 순간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를 의식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배할 때도, 사람과 다툴 때도, 직장에서 일할 때도 ‘지금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고 계실까?’를 생각한다면 행동이 달라지고 절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 긴 종말론적 설명은 뜻밖에 매우 실제적인 영성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세계정부가 언제 생길지, 제3 성전이 언제 세워질지, 미래의 적그리스도가 누구일지를 아는 것보다 오늘 내가 화가 났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가가 실제 준비라는 것입니다. 이 지점은 귀하게 붙들 만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라는 표현도 조금 더 깊게 다듬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마치 하나님께서 밖에서 계속 나를 감시하시며 잘못하면 벌점을 주시는 것처럼 받아들이면 신앙이 두려움에 머물 수 있습니다. 더 깊은 상태에서는 ‘지금 이 생각과 행동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에 합하는가?’를 묻게 됩니다. 처음에는 ‘주님이 보고 계시니까 하지 말아야지’라고 악을 억제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지면 ‘이것은 악이기 때문에, 주님과 이웃을 해치기 때문에 나는 원하지 않는다’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외적 순종에서 내적 순종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어린아이는 부모가 보고 있기 때문에 잘못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장하면 부모가 보지 않아도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하지 않습니다. 영적 성장도 비슷합니다. 처음에는 심판이 두려워 악을 피할 수 있고, 천국에 가기 위해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결합이 깊어지면 악 자체를 싫어하고 선 자체를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휴거 준비’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옮기면 아주 실제적인 말이 됩니다. 오늘 내게 들어오는 생각과 욕망 가운데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생각이 떠오르는 것 자체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습니다. 영계로부터 여러 생각과 정서가 유입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동의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 것인지, 아니면 주님의 계명에 어긋난다고 보고 거절할 것인지는 중요합니다. 바로 그 선택들이 쌓여 사람의 영원한 사랑을 형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된 ‘깨어 있음’은 세계 뉴스를 하루 종일 확인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자기 내면의 움직임을 주님의 말씀 앞에서 살피는 상태입니다. ‘왜 나는 지금 이 사람에게 화가 나는가? 정말 진리를 위해서인가, 아니면 내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인가? 왜 나는 이 말을 하고 싶은가? 상대를 돕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인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수도적 영성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수도생활의 핵심이 단순히 세상에서 물러나 외적 자극을 줄이는 데만 있다면 장소가 바뀌었을 뿐 proprium은 그대로 수도원까지 따라갈 수 있습니다. 참된 수도적 깨어 있음은 자기 생각과 정서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살피면서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고 무엇이 자기애에서 올라오는 것인지를 분별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매 순간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실까?’를 의식하라고 한 것은 이 사경회의 수도적 성격과도 잘 연결됩니다.

 

1강 6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전쟁과 기근과 지진, 제3 성전, 정치 체제의 변화, 세계정부와 단일화폐 및 세계적 통치자의 출현,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 그리고 모든 민족에 대한 복음 전파를 휴거가 가까워지는 여섯 징조로 읽는 강사의 종말론은 성도들에게 시대를 분별하고 깨어 준비하라는 강한 긴장을 주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러한 외적 징조들을 특정 현대 국가·정당·정치인·비밀조직과 곧바로 동일시하기보다, 전쟁은 선과 악 및 진리와 거짓의 영적 싸움으로, 성전의 훼손은 인간과 교회의 거룩한 중심에 자기애와 거짓이 들어서는 상태로, 세계적 악의 결집은 proprium을 중심으로 여러 악과 거짓이 하나가 되는 상태로, 거짓 그리스도의 미혹은 거짓을 신적 진리처럼 받아들이는 상태로 읽으며, 궁극적인 종말 준비는 미래의 사건을 정확히 알아맞히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매 순간 주님의 선과 진리 앞에서 자기 사랑과 삶을 살피고 악을 죄로 알고 거절하는 ‘깨어 있음’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6부에서는 한 가지를 특별히 기억할 만합니다. 강사는 세계정부와 적그리스도처럼 거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한 사람이 누군가와 다투는 아주 작은 장면으로 돌아옵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다투고 있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실까?’라고 생각하면 절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바로 그곳에 이 긴 종말론 강의에서 우리가 건져 올릴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영적 핵심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정말 내일 오신다고 해도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은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미워하던 사람을 용서하고, 잘못했으면 인정하고, 맡은 일을 정직하게 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자기 이익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로 행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의 재림이 자연적 시간으로 아주 멀리 있다 해도 이러한 삶을 미룰 이유는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자기 지상 생명의 마지막 시간이 언제인지조차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적같이 오신다’는 말씀의 가장 실제적인 힘은 날짜를 감추는 데 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오늘’을 살게 하는 데 있습니다. ‘언젠가 회개하겠다’, ‘나중에 더 거룩해지겠다’, ‘상황이 좋아지면 용서하겠다’가 아니라 지금 주어진 진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영적 생명은 미래에 한꺼번에 준비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작은 선택들 속에서 형성됩니다.

 

이렇게 보면 휴거를 기다리는 사람과 거듭남을 살아가는 사람 사이에 뜻밖의 접점이 생깁니다. 강사는 ‘곧 주님께서 오시니 준비하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거기에 이렇게 덧붙일 수 있겠습니다. ‘그 준비는 주님이 언제 오시는지를 알아내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금 말씀의 진리로 내게 오실 때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됩니다.’ 종말의 가장 중요한 표지는 하늘이나 국제정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들은 뒤 내 마음과 삶이 실제로 달라지고 있는가 하는 데에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점에서 1강 처음부터 반복되어 온 ‘밝은 진리’, ‘광야 연단’, ‘신인합일’, ‘영적 성장’, ‘종말의 징조’는 결국 하나로 모입니다. 밝은 진리는 미래를 많이 아는 진리가 아니라 사람의 내면을 밝히는 진리이고, 연단은 그 빛 아래 드러난 악과 싸우는 과정이며, 영적 성장은 그 싸움 속에서 진리가 선과 결합되어 삶이 되는 과정이고, 주님과의 결합은 그 결과 인간의 사랑과 삶이 점점 주님의 질서와 하나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깊은 의미에서 ‘휴거를 준비한다’는 것 역시 결국 하나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를 준비하는 것’과 ‘오늘 주님께 속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은 서로 다른 두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 7

재림의 목적과 익은 열매’ : 추수는 선발인가, 한 사람의 지배적 사랑이 완성되는 것인가

1강 7부에 이르면 강의는 종말의 징조들을 살펴본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위해 다시 오시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으로 들어갑니다. 강사는 먼저 1992년 10월 28일 휴거를 주장했던 시한부 종말론 사건을 언급합니다. 그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뒤 한국 교회 안에서 재림 신앙 자체를 부정적이거나 부담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생겼다고 진단하면서, 시흥영성수련원 사경회가 추구하는 두 축을 ‘영생활의 진보’와 ‘건전한 재림 신앙’으로 제시합니다. 즉 종말에 관한 지식만 쌓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성장하면서 동시에 주님의 재림을 성경적으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의식은 먼저 귀하게 받을 만합니다. 특정 날짜를 정하여 주님의 재림을 예고하는 시한부 종말론이 실패했다고 해서 주님의 재림이라는 성경의 거대한 주제 자체를 외면하는 것은 또 다른 극단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재림론을 경계하는 것과 재림 자체를 잊어버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강사가 ‘영생활의 진보’와 ‘건전한 재림 신앙’을 함께 놓은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종말론이 사람을 현실도피와 공포로 몰아가서는 안 되지만, 반대로 신앙생활이 현재의 안락함 속에 완전히 정착하여 주님의 나라와 영원을 잊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적용하면 ‘건전한 재림 신앙’이라는 말 자체가 훨씬 깊은 질문을 불러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재림은 주님께서 다시 자연적 육체를 입고 구름을 타고 공간적으로 내려오시는 사건이 아니라, 말씀의 신적 진리가 새롭게 열리고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께서 새 교회에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은 단순히 미래 어느 시점의 사건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가 내 이해와 의지 안으로 들어올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생활의 진보’와 ‘재림 신앙’은 사실 둘이 아닙니다. 말씀의 진리가 사람에게 와서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개인의 차원에서 주님의 임재를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강사는 이어 재림의 첫 번째 목적을 ‘익은 열매를 추수하기 위해서’라고 제시합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추수 비유와 마가복음 4장 26~29절을 연결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씨가 자라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되고,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는 말씀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하나의 중요한 원리를 끌어냅니다. ‘싹’이나 ‘이삭’ 상태에서는 추수하지 않고 ‘다 익은 곡식’이 되었을 때 추수한다는 것입니다.

 

이 ‘익은 열매’는 사실 이 사경회 전체를 이해하는 핵심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앞서 광야 연단을 설명할 때도 강사는 성도가 단순히 구원받은 상태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광야의 연단을 통하여 ‘익은 열매’가 되어 천국 곡간에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들어가는 모형도 이 영적 성숙의 과정으로 읽었습니다. 이제 종말론에 들어와서는 바로 그 ‘익은 열매’가 재림과 추수의 언어로 다시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경회에서 영적 성장론과 종말론은 별개의 두 교리가 아닙니다. ‘어떻게 익은 열매가 될 것인가?’가 성장론이라면, ‘익은 열매를 언제 어떻게 추수하시는가?’가 종말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연결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종말론을 미래 사건의 시간표로만 공부한다면 ‘나는 어느 사건을 피할 것인가?’가 중심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익은 열매’라는 관점이 들어오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나는 지금 얼마나 익어 가고 있는가?’가 됩니다. 실제로 강사의 강조점도 단순히 휴거를 피난 수단으로 삼는 데 있지 않습니다. 휴거될 수 있는 영적 상태, 곧 열매가 충분히 익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이 ‘익음’이라는 표현은 매우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말씀에서 ‘열매’는 삶으로 나타난 선을 뜻합니다. 씨가 진리의 시작이라면 열매는 그 진리가 사람의 의지와 삶 안에서 선이 된 상태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듣고 기억하는 것은 씨를 받은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은 싹이 나고 자라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아직 그것만으로 열매가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그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실제 행동과 습관과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아는 것은 씨입니다. 그 말씀이 옳다고 이해하고 동의하는 것은 성장 과정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을 만났을 때 보복하고 싶은 욕망을 주님의 도움으로 거절하고 그 사람의 선을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열매입니다.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그렇게 하다가, 거듭남이 깊어지면서 실제로 용서와 체어리티를 사랑하게 된다면 열매가 점점 익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매가 익는다는 것은 성경 지식이 많아진다는 뜻과 같지 않습니다. 교회 생활이 오래되었다는 뜻도 아니고, 특별한 영적 체험을 많이 했다는 뜻도 아니며, 심지어 많은 사역을 했다는 뜻과도 자동적으로 같지 않습니다. 핵심은 진리가 사랑과 결합했느냐입니다. 알고 있는 선을 실제로 사랑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사랑하는 선을 삶에서 행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 사경회의 ‘익은 열매’ 강조는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상당히 가까이 만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을 단순한 지적 동의로 보지 않습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해야 하고,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해야 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아무리 많이 알아도 그것이 그의 사랑과 삶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아직 거듭남이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선의 것이 되고 선에서 진리가 흘러나오는 상태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동시에 매우 중요한 차이가 생깁니다. 강사는 이 ‘익은 열매’를 장차 공중강림 때 휴거될 특정 성도들의 자격과 연결해 갑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는 자연계에서 살아 있는 성도 가운데 특별히 성숙한 일부가 육체째 공중으로 올라가는 ‘휴거 선발’이라는 구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익은 열매’라는 영적 통찰은 충분히 받을 수 있지만, 그것을 ‘누가 첫 번째 휴거 대상자가 되는가?’라는 시간표에 그대로 결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익은 열매’는 한 사람의 영원한 상태가 무엇으로 형성되어 가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는 편이 더 깊습니다. 사람은 하루아침에 천사가 되거나 악한 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자유로운 선택을 통하여 어떤 사랑을 자기 생명의 중심으로 삼을 것인지 점차 결정합니다. 처음에는 여러 사랑과 동기가 뒤섞여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의 지배적 사랑이 형성됩니다. 주님과 이웃의 선을 사랑하는 것이 지배적 사랑이 될 수도 있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모든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지배적 사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익음’이라는 개념과 깊이 연결됩니다. 선도 익고 악도 익습니다. 실제로 강사 역시 재림의 목적을 설명하면서 ‘선으로 익은 사람’을 추수하시는 동시에 가라지, 곧 ‘악으로 익은 자들’을 심판하신다고 말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추수란 단순히 착한 사람을 데려가고 나쁜 사람을 벌하는 외적 사건이라기보다, 각 사람이 자유 가운데 형성해 온 내적 상태가 마침내 분명하게 드러나는 때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알곡과 가라지 비유도 이런 관점에서 훨씬 깊어집니다. 주인은 처음부터 가라지를 뽑아 버리지 않습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합니다. 이것은 신적 섭리의 놀라운 원리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안의 모든 악을 처음부터 강제로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하면 그의 자유와 합리성이 파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이 함께 드러나고, 사람이 진리를 배운 뒤 자유롭게 어느 쪽을 선택하는지를 통하여 그의 영적 상태가 형성되도록 허용하십니다.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우리는 이것을 경험합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해서 이전의 모든 악한 성향이 즉시 없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가 들어오면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가라지가 더 많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는 왜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지?’, ‘이렇게 오래 신앙생활했는데 왜 이런 분노와 질투가 남아 있지?’ 하고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악이 보인다는 사실 자체가 곧 악이 더 강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빛이 밝아졌기 때문에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드러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때 사람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그 악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사랑할 것인지, 아니면 ‘이것은 주님의 계명에 반하는 악이다’라고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으로 거절할 것인지 선택하게 하십니다. 이 선택이 반복되면서 선은 점차 뿌리를 내리고 악은 주변으로 밀려납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악의 성향 자체가 인간의 기억에서 완전히 삭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더 이상 사람의 지배적 사랑이 되지 못하도록 주님께서 질서를 바꾸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추수’는 매우 엄숙하면서도 아름다운 말입니다. 씨를 뿌린 목적은 결국 열매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의 진리를 주시는 목적도 우리가 진리 시험에 높은 점수를 받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진리가 우리 안에서 선의 생명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진리는 수단이고 선은 목적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로 나아가야 하며, 앎은 삶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강사가 ‘싹이 난 성도나 이삭이 난 성도를 추수하지 않고 다 익은 곡식만 추수한다’고 강조하는 부분은 그래서 귀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식의 공포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지상에서 모든 악의 흔적을 제거하여 절대적 완전 상태에 도달하는 일이 아닙니다. 천사들조차 자기에게서 선한 존재가 아닙니다. 모든 선은 오직 주님에게서 옵니다.

 

중요한 것은 ‘완벽하게 되었는가?’가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악이 올라오더라도 그것을 사랑하여 자기 것으로 삼는가, 아니면 악이라고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으로 거절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여전히 부족함이 많더라도 주님과 이웃의 선을 사랑하는 것이 점차 그의 중심 사랑이 되어 간다면 그는 주님에 의해 거듭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익은 열매란 인간적 무결점의 상태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실제 생명의 방향이 된 상태라고 보는 편이 좋습니다.

 

이것은 이 사경회의 연단 이해를 받아들일 때에도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익어야 한다’는 말을 잘못 받아들이면 자기완성을 향한 엄격한 종교적 성취주의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아직 부족하다. 더 연단받아야 한다. 더 강해져야 한다. 더 완전해져야 한다’고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붙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어느 정도 성장했다고 느끼면 이번에는 ‘나는 다른 성도보다 더 익었다’는 영적 우월감이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익은 열매를 추구하던 일이 오히려 proprium의 열매를 맺는 역설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오히려 자기에게서 선한 것이 하나도 없으며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천사가 인간보다 훨씬 선한데도 자기 선을 자랑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히려 더 높은 천사일수록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은 악과 거짓뿐이며 선과 진리는 전적으로 주님에게서 유입된다는 사실을 더 분명히 지각합니다. 그러므로 ‘익음’의 가장 중요한 표지 가운데 하나는 어쩌면 영적 자신감의 증가가 아니라 자기 공로의 감소일 수 있습니다.

 

사과나무가 열매를 맺었다고 자기 열매를 자랑하지 않듯, 거듭나는 사람도 자기에게서 나타난 선을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오래 연단받아서 이 정도 사람이 되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런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이 익은 열매의 향기입니다.

 

강사는 이어 재림의 목적에 ‘가라지를 불사르는 심판’도 포함시킵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세상 끝과 추수를 아마겟돈 심판에 연결하여, 선으로 익은 자들을 추수하는 동시에 악으로 익은 자들을 심판하시는 것이 재림의 목적이라고 설명합니다. 이후 강의에서는 이 구조를 ‘익은 열매 추수-죄악 세상 심판-천년왕국 건설’이라는 재림의 세 가지 목적으로 명료하게 정리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심판은 앞에서도 보았듯 주님께서 분노하여 사람들에게 형벌을 가하시는 사건으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신적 진리의 빛이 임하여 각 사람의 실제 사랑이 드러나고, 서로 섞여 있던 선과 악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누구도 지옥으로 던지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끝까지 모든 사람을 악에서 돌이키려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유롭게 자기애와 악을 생명의 중심으로 확정하면, 사후에는 그 사랑과 상응하는 공동체를 스스로 찾게 됩니다.

 

따라서 ‘가라지를 불사른다’는 말씀에서 ‘불’도 자연적 불길로만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에서 불은 사랑을 나타냅니다. 좋은 의미에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천국적 사랑이며, 반대 의미에서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 그리고 그로부터 나오는 정욕을 나타냅니다. 지옥의 불은 주님께서 밖에서 지펴 사람을 고문하시는 불이라기보다 악한 영 자신이 사랑하는 탐욕과 자기애의 불입니다. 그 사랑이 서로 충돌하면서 고통을 만들어 냅니다.

 

이렇게 보면 알곡과 가라지의 마지막 분리는 주님께서 갑자기 사람들을 두 종류로 임의 분류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이미 지상생활에서 자기의 자유로운 선택들을 통하여 어느 쪽으로 자라고 있는지를 형성합니다. 추수 때에는 그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선한 사랑이 지배적인 사람은 선한 공동체를 기뻐하고, 자기애가 지배적인 사람은 자기와 같은 사랑의 공동체를 찾습니다.

 

여기에서 ‘익은 열매’라는 말은 더욱 엄중해집니다. 선만 익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움도 반복하면 익습니다. 거짓도 반복하여 받아들이면 익습니다. 사람을 지배하는 즐거움도 계속 허용하면 하나의 지배적 사랑으로 익습니다. 반대로 용서도 반복하면 익고, 정직도 반복하면 익으며, 남의 선을 기뻐하는 체어리티도 반복하여 실천하면 익습니다. 우리는 매일 무엇인가를 익히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추수는 먼 미래에 갑자기 시작되는 일이기 전에 오늘의 작은 선택들 안에서 이미 준비되고 있습니다. 오늘 한 번의 거짓말이 곧 사람 전체를 악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거짓말을 유익하다고 사랑하고 반복하며 정당화하면 그것은 점차 성품이 됩니다. 반대로 진실을 말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님 때문에 진실을 선택하는 일이 반복되면 정직은 점차 그의 생명의 일부가 됩니다. 이것이 ‘열매가 익는다’는 말씀을 우리의 실제 삶에 가져오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강사가 말하는 ‘영생활의 진보’는 매우 실제적인 의미를 얻게 됩니다. 영적 진보는 얼마나 높은 신비를 알게 되었는가로만 측정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전에는 쉽게 화내던 사람이 조금 더 참을 수 있게 되고, 예전에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던 사람이 사과할 수 있게 되며, 예전에는 다른 사람의 성공을 질투하던 사람이 이제는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영생활의 진보입니다. 진리가 의지를 바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사경회가 오랫동안 ‘연단’을 강조해 온 이유도 이 ‘익음’과 연결해서 보면 이해하기 쉬워집니다. 연단은 고생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고난을 많이 당했다고 자동적으로 영적으로 성숙하는 것도 아닙니다. 같은 고난을 겪고도 더 완고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환경을 통하여 무엇이 드러나고 무엇이 변화되는가입니다. 시험 속에서 자기애가 드러나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인정하며 거절함으로써 선이 자리 잡는다면 그 시험은 열매를 익게 하는 연단이 됩니다.

 

이 점은 공용복 선생과 함께했던 이 수도적 전통을 이해할 때도 중요하겠습니다. 이곳에서 말하는 ‘연단’, ‘성결’, ‘익은 열매’를 단순히 고행이나 자기억제의 양으로만 이해하면 이 전통의 핵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결국 물어야 하는 것은 ‘그 연단을 통해 사람이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었는가?’입니다. 더 부드러워졌는가, 더 겸손해졌는가,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게 되었는가, 주님을 더 의지하게 되었는가입니다. 그런 열매가 없다면 외적인 엄격함 자체가 거듭남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익은 열매’와 ‘신인합일’의 관계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앞서 바로잡았듯 이 사경회가 사용하는 표현은 ‘신인합일’입니다. 그것을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조심스럽게 옮기면 인간이 하나님과 존재론적으로 융합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주님과 더욱 깊이 결합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결합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결국 열매로 드러납니다. 주님과 결합되었다고 말하면서 삶은 자기애와 지배욕과 미움에 지배되고 있다면 그 결합을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영적 체험의 강도보다 열매가 중요하고, 자신이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경지’보다 그 사람에게서 어떤 사랑이 흘러나오는지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신비적 영성의 과장을 막아 주는 매우 안전한 기준입니다. 주님과 깊이 결합될수록 주님의 사랑이 그 사람의 삶을 통하여 이웃에게 흘러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추수’라는 말을 교회 전체의 차원에서 보면 또 하나의 의미가 열립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한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그 교회 안의 선과 악이 충분히 드러납니다. 처음에는 참된 신앙과 거짓된 신앙이 함께 존재할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모두 같은 교회에 속해 있고 같은 말씀을 읽으며 같은 신앙고백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교리가 실제로 어떤 열매를 맺는지가 드러납니다. 체어리티와 겸손과 선한 삶을 낳는가, 아니면 자기 의와 지배욕과 분열을 낳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열매’입니다. 교리의 참됨은 단지 논리적 정교함으로만 판별되지 않습니다. 참된 진리는 주님에게서 오므로 궁극적으로 선을 향합니다. 따라서 어떤 교리가 사람을 주님과 이웃을 더 사랑하게 하는 대신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자기 집단의 우월성만 강화한다면, 아무리 성경 구절을 많이 사용하더라도 그 열매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원리를 이 사경회 자체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해설한다는 것은 바깥에서 이 사경회를 판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강사 자신이 제시한 ‘열매’라는 기준을 존중하면서 더 깊게 묻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이 참석자들을 더 겸손하게 하고, 더 정직하게 하며, 자기 악을 더 잘 보게 하고,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게 하며, 주님을 더 의지하게 한다면 귀한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종말 지식이 사람을 두려움에 빠뜨리거나, ‘우리는 알고 저들은 모른다’는 우월감을 만들거나, 특정한 외적 체험과 단계가 구원의 등급처럼 굳어진다면 그 부분은 다시 말씀의 빛 아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아마 ‘건전한 재림 신앙’이라는 강사의 표현을 가장 깊게 받아들이는 방법일 것입니다. 건전한 재림 신앙은 날짜를 정하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재림에 관한 지식이 실제로 어떤 열매를 맺는가까지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을 믿기 때문에 오늘 더 사랑하고, 더 정직하고, 더 용서하고, 더 깨어 자기 악을 살핀다면 그 재림 신앙은 생명이 있습니다. 반대로 재림을 많이 말하면서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고 세상을 향한 적대감과 자기 집단의 우월성만 키운다면, 그 지식이 아무리 복잡하고 정교해도 그 열매를 다시 살펴야 합니다.

 

1강 7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1992년 시한부 종말론의 실패 이후 교회가 재림 신앙 자체를 잃어버린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영생활의 진보와 건전한 재림 신앙’을 함께 회복하고, 재림의 첫 목적을 ‘익은 열매의 추수’로 제시하는 강사의 강조는 종말론을 영적 성장과 연결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으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익은 열매’를 공중강림 때 선택적으로 휴거될 성도의 자격으로만 읽기보다, 말씀의 진리가 사람의 의지와 결합하여 체어리티와 선한 삶이라는 열매가 되고 마침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그의 지배적 사랑으로 자리 잡는 거듭남의 성숙으로 읽으며, ‘추수’는 그렇게 각자가 자유롭게 형성해 온 사랑의 실제 상태가 신적 진리의 빛 앞에서 드러나 선과 악이 분리되는 심판의 아르카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7부에서 특별히 오래 붙들고 싶은 것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놀라운 기다리심이 있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린 다음 날 밭에 나가 열매가 없다고 땅을 갈아엎지 않듯, 주님께서도 우리를 그렇게 다루지 않으십니다. 싹인 때를 아시고, 이삭인 때를 아시며, 아직 속이 차지 않은 때도 아십니다. 우리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진리를 공급하시고, 시험 가운데 보호하시며,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우리가 자유 가운데 선을 선택할 수 있도록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익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두려움만 줄 말씀이 아닙니다. ‘왜 나는 아직 이것밖에 안 되었나?’ 하고 자기를 몰아붙이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씨를 심으신 분이 주님이시며 자라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의 몫은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선을 행하되 그 힘과 선이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이 사경회의 ‘익은 열매’라는 언어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 가장 아름답게 만날 수 있습니다. 익는다는 것은 ‘내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 안에서 더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진리를 억지로 행했지만 나중에는 선을 사랑하여 행하고, 처음에는 자기 공로를 붙들었지만 나중에는 모든 선을 주님께 돌리며, 처음에는 천국에 가기 위해 이웃을 사랑했지만 마침내 이웃의 선 자체를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열매는 겉만 익은 것이 아니라 속까지 익어 갑니다.

 

그렇다면 재림을 기다리는 가장 좋은 방법도 분명해집니다. ‘언제 오십니까?’만 묻는 것이 아니라 ‘주님, 오늘 제 안에서 무엇을 익히고 계십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종말의 시간표를 손에 들고 하늘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게 맡겨진 사람을 사랑하고, 오늘 발견한 악을 거절하며, 오늘 깨달은 진리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우리의 실제 생명이 되어 갈 때, 우리는 미래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시에 이미 지금 말씀 가운데 오시는 주님을 영접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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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뿌리는 비유와 네 가지 마음밭 : 문제는 씨앗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그릇이다

1강 8부에서는 강사가 지금까지 배운 ‘기본 진리’ 전체를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을 통해 다시 정돈하기 시작합니다. 강사는 핵심진리를 구원론과 성화론과 종말론을 중심으로 성경을 체계화한 진리라고 설명하면서, 마태복음 13장의 일곱 비유가 앞서 공부한 내용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앞으로 공부할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기초가 된다고 말합니다. 특히 이 공부를 통하여 성도가 ‘영적인 목표와 방향’, 그리고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가 하는 ‘영적 가치관’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점에서 마태복음 13장은 강사에게 단순히 서로 다른 일곱 비유가 모여 있는 장이 아니라, 지금까지 설명해 온 영적 성장과 앞으로 다룰 종말론을 서로 이어 주는 하나의 중요한 연결부입니다.

 

강사는 이 일곱 비유를 하나의 체계 안에서 읽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서론’, 마지막 그물 비유를 ‘결론’, 그 사이의 비유들을 ‘본론’처럼 배열하고, 이를 앞으로 계시록에서 등장하는 ‘14만 4천’과 ‘666’을 해석하는 틀로까지 연결합니다. 겨자씨 비유는 14만 4천의 성장적 측면, 누룩 비유는 행실적 측면, 진주와 보화 비유는 생명적 측면을 설명하며, 가라지 비유는 666과 적그리스도적 영혼의 정체를 설명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그물 비유에서는 이 모든 것이 종말의 추수로 결론지어진다고 이해합니다. 이러한 연결 전체를 그대로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과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마태복음 13장의 각 비유를 계시록의 특정 숫자와 직접 대응시키는 방식은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각각의 비유를 고립된 교훈으로 읽지 않고 하나의 영적 성장 과정 속에서 읽으려 한다는 강사의 기본 방향에는 주목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내적 질서를 종말 시간표보다는 주님께서 한 사람을 어떻게 거듭나게 하시는가 하는 과정에서 찾게 됩니다.

 

그 출발점이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네 종류의 밭, 곧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와 좋은 땅을 네 종류의 ‘마음밭’으로 설명합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진리이며, 씨 뿌리는 사람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고, 씨가 떨어지는 밭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똑같은 씨가 뿌려졌는데도 어떤 곳에서는 전혀 자라지 못하고, 어떤 곳에서는 잠깐 자라다가 말라 버리고, 어떤 곳에서는 가시에 막혀 결실하지 못하며, 좋은 땅에서는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가 드러납니다. 씨가 네 종류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씨는 같습니다. 차이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밭에 있습니다. 신적 진리는 동일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가 서로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인플럭스 이해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주님에게서 생명과 선과 진리는 끊임없이 유입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형체와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햇빛은 동일하지만 아름다운 꽃에 비추면 꽃의 색과 생명을 드러내고, 부패한 것에 비추면 그 부패를 드러냅니다. 태양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대상이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같은 말씀을 듣고도 어떤 사람은 겸손해지고 어떤 사람은 오히려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같은 성경을 읽으면서 한 사람은 자기 악을 발견하고 회개하지만, 다른 사람은 남의 잘못을 찾아 정죄하는 근거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진리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내적 상태가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씨 뿌리는 비유 앞에서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나는 말씀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말씀을 어떤 상태로 받아들이고 있는가?’입니다.

 

강사는 네 가지 마음밭 가운데 특별히 ‘좋은 밭’에 초점을 둡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는 목적은 결국 열매를 얻는 데 있으므로, 좋은 밭이 되어야 영적으로 성장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좋은 밭을 가진 사람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고 세상에서 빛이 되며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여러 쓰임을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은 앞서 7부에서 살펴본 ‘익은 열매’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열매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추수 때가 되었다고 갑자기 익은 열매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 씨를 어떻게 받아들였는가에서부터 시작하여 씨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장애물을 이기고, 마침내 결실하는 긴 과정이 있습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과정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강사는 여기서 사람은 자신이 네 가지 밭 가운데 어디에 해당하는지를 스스로 정확히 알기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시험해 보는 과정’을 통하여 그것을 드러내신다고 설명합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는 과정 자체가 내가 길가인지, 돌밭인지, 가시밭인지, 좋은 밭인지를 드러내는 시험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이 통찰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상당히 중요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자기 내면을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이 닥치면 무엇을 사랑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아무도 내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을 때에는 ‘나는 겸손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누군가 나를 무시하거나 내 의견을 공개적으로 반박했을 때 격렬한 분노가 올라온다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자기애가 드러난 것입니다. 재산에 손해가 없을 때에는 ‘나는 돈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 손해를 감수하면서 정직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면 무엇을 더 사랑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시험은 주님께서 우리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미 아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게 되고, 드러난 악을 주님의 도움으로 거절함으로써 선이 더욱 깊이 자리 잡도록 허용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네 가지 밭을 단순히 세상 사람들을 네 부류로 나누는 분류표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한 사람 안에서도 이 네 가지 상태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떤 진리에 대해서는 좋은 밭이면서 다른 진리에 대해서는 돌밭일 수 있고, 어떤 때에는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면서도 자기애가 건드려지는 특정 영역에서는 길가처럼 굳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나는 좋은 밭이고 저 사람은 길가다’라고 사람을 분류하기 시작하면 주님의 비유가 오히려 자기 의를 강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의 마음밭을 판정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마음밭을 살피고 갈도록 주어진 말씀입니다.

 

첫 번째 ‘길가’는 사람들이 계속 밟고 다녀 굳어진 땅입니다. 씨가 땅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표면에 그대로 있으므로 새가 와서 먹어 버립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는’ 상태라고 설명하십니다. 강사는 이것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하고 강퍅한 마음, 세상 일과 돈 버는 데 몰두하여 말씀에 관심을 두지 않는 상태와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말씀을 아주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길가가 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고 수없이 설교를 들으면서 말씀이 너무 익숙해져 더 이상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 말씀 알아’, ‘그 설교 많이 들었어’, ‘그건 초신자에게 필요한 이야기지’ 하는 상태가 되면 진리가 기억에는 있지만 의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말씀을 모르는 것만 위험한 것이 아니라 말씀에 너무 익숙해져 더 이상 말씀 앞에서 자기 자신을 살피지 않는 것도 위험합니다.

 

특히 말씀을 오래 공부하거나 가르치는 사람에게는 더욱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말씀을 읽는 순간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어떤 설교에 사용할까?’, ‘누구에게 적용하면 좋을까?’가 먼저 떠오르면 정작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씨를 뿌리는 사람이 자기 밭에는 씨를 받지 못하는 역설이 생기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 작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르카나를 많이 알고 상응을 많이 이해하는 것 자체가 좋은 밭의 증거는 아닙니다. 그 진리가 먼저 나 자신의 proprium을 비추고,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드러내며, 실제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말씀에 관한 지식은 많아지는데 자기 자신을 보는 눈은 오히려 흐려진다면 씨는 기억 속에는 많이 쌓였지만 아직 마음 깊이 들어가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돌밭’은 씨를 기쁨으로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깊지 않아 환난이나 핍박이 오면 넘어지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진리를 처음 접했을 때 감동하고 기뻐하지만 아직 그 진리가 의지 깊숙이 뿌리내리지 못한 상태를 보여 줍니다. 영적 감동 자체는 귀하지만 감동이 곧 거듭남은 아닙니다. 사경회에서 큰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릴 수 있고,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여 ‘이제 내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 것 같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 일상생활 속에서 가족과 갈등하고, 직장에서 손해를 보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을 만났을 때 그 진리가 어떻게 작용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말씀 때문에 실제로 자기 뜻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비로소 뿌리의 깊이가 드러납니다. 따라서 영적 체험과 영적 성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체험은 순간적으로 매우 강렬할 수 있지만 거듭남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의지와 삶이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눈물을 많이 흘렸다고 반드시 더 거듭난 것도 아니고, 특별한 환상이나 음성을 경험했다고 반드시 더 깊은 영적 상태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체험 이후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는가가 중요합니다.

 

세 번째 ‘가시떨기’는 더욱 미묘합니다. 씨가 아예 자라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어느 정도 성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합니다. 이 상태는 교회 밖의 불신자보다 오히려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세상 자체가 아닙니다. 직업을 갖고 돈을 벌고 가족을 돌보고 집을 마련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모두 필요한 자연적 삶입니다. 문제는 질서입니다. 자연적인 것들이 영적인 것을 섬겨야 하는데 거꾸로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욕망을 섬기기 시작하면 가시가 말씀을 막습니다. 돈 자체가 가시가 아니라 돈을 모든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가시이고, 직업 자체가 가시가 아니라 명예와 지위를 자기 존재 가치의 중심으로 삼는 것이 가시입니다. 가족 자체가 가시가 아니라 주님의 질서보다 가족의 욕망을 더 높이 두는 것이 가시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것들은 본래 쓰임을 위한 좋은 도구이지만 그것들이 목적이 되면 영적 생명을 압박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질서’의 문제입니다. 천국적 질서에서는 높은 것이 낮은 것을 다스립니다.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을 다스리고, 선이 진리를 통하여 자연적 삶을 질서 있게 합니다. 그러나 자연적 욕망이 영적인 것을 지배하면 질서가 전도됩니다. 사람이 기도하고 교회에 다니고 성경을 읽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세상적 성공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때 신앙은 가시 사이에서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강사가 ‘세상의 쾌락이나 육신의 행복이나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고 강하게 말하면서 성도는 ‘육에 속한 삶을 벗어 버리고 영에 속한 생활을 철저히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자연적 삶 자체를 버리는 것이 거듭남의 목적은 아니라고 보완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정과 직업과 재산과 사회생활을 떠나는 것이 자동적으로 더 영적인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어떤 질서 안에 놓여 있는가입니다. 돈도, 직업도, 가정도, 사회적 책임도 주님과 이웃의 선을 섬기는 쓰임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부인의 본질은 ‘소유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보다 ‘소유가 내 마음을 소유하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네 번째가 ‘좋은 땅’입니다. 주님께서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을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하시며, 그가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강사는 좋은 밭을 가진 성도들이 가장 잘 성장하고 하나님의 일을 맡으며 세상의 빛과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고, 가장 밝은 빛을 따라 산 성도들과 순교자들, ‘교회 시대의 이긴 자들’이 이러한 좋은 밭에 해당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깨닫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 이해에 머물지 않습니다. 말씀의 참된 깨달음은 결국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진리는 선을 향하지 않으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진리입니다. 진리가 기억에 들어오고 이해에 들어오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의지 안으로 들어가 선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씨가 열매가 됩니다.

 

그리고 좋은 밭은 타고난 좋은 성품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실제 밭도 그냥 두면 저절로 좋은 밭이 되지 않습니다. 땅을 갈고, 돌을 골라내고, 가시를 제거하고, 흙을 뒤집어 씨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거듭남도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강제로 좋은 밭으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진리를 주시고 자유를 주시며,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안의 돌과 가시를 보고 그것을 제거하는 일에 협력하게 하십니다. 물론 그 힘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악을 거절해야 합니다. ‘주님이 다 하시니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아니고, ‘내가 내 힘으로 나를 좋은 밭으로 만들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실제로 밭을 갈지만 생명을 주고 씨를 자라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강사는 이어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는 원리를 설명하면서 이 땅의 삶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도록 주어진 시간이며, 성도는 ‘적당히 천국만 가면 되지’라고 생각하지 말고 더 높은 영적 상태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겸손과 충성, 인내와 사랑을 많이 실천할수록 하늘의 상급도 커진다는 것을 ‘저금 통장’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 강조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았으니 이제 어떻게 살아도 된다’는 식의 신앙을 경계하고 실제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는 그의 사랑이 밖으로 나타난 것이므로 결코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상급을 저축한다’는 표현을 조금 조심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의 상급은 선행을 많이 쌓아 놓은 대가로 하나님께서 지급하시는 보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면서 상급을 목적으로 삼으면 그 선 안에 자기 공로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 가장 큰 상급은 오히려 선 자체를 행하는 기쁨입니다.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 기쁘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기쁘며, 자기보다 다른 사람의 선을 기뻐할 수 있는 상태 자체가 천국의 행복입니다. 쓰임을 행하는 것이 상급이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 있는 것이 상급입니다.

 

따라서 ‘더 높은 것을 추구하라’는 말도 ‘천국에서 남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합니다. 천국에서는 높은 자가 더 많은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사랑하고 더 넓은 쓰임을 행합니다. 가장 높은 천사는 가장 낮아지기를 기뻐합니다. 주님께 가까울수록 자기 공로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같은 의미에서 좋은 밭의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도 단순히 ‘상급 액수의 차이’로 읽기보다 각 사람이 주님에게서 받은 고유한 능력과 쓰임에 따라 선이 얼마나 충만하게 결실하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각자의 사랑과 지혜와 쓰임이 다릅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경쟁적 서열이 아니라 조화로운 다양성입니다. 삼십 배인 사람이 백 배인 사람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고, 백 배인 사람이 삼십 배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각자가 주님께 받은 그릇만큼 충만한 것이 그 사람에게는 완전한 기쁨입니다.

 

이것은 이 사경회가 강조하는 ‘가장 밝은 빛’을 이해할 때에도 중요한 보완이 됩니다. 강사는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산 사람들을 교회 시대의 이긴 자들, 성화된 성도들, 순교자들과 연결하고 모든 성도가 더 높은 영적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그 열망 자체는 귀합니다. 다만 ‘밝은 빛’을 영적 엘리트의 등급처럼 받아들이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얼마나 순수하게 받아 삶으로 나타내는가로 이해하면 더 안전합니다. 가장 밝은 사람은 ‘나는 남보다 높은 단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빛을 받아 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장 깊이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자기에게서 빛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빛에는 proprium의 그림자가 섞이기 시작합니다.

 

이 점에서 씨 뿌리는 비유는 앞서 강의에서 사용한 ‘신인합일’이라는 표현에도 중요한 분별 기준을 제공합니다. 하나님과 깊이 결합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의 상태는 결국 ‘열매’로 확인되어야 합니다. 신비한 체험이나 높은 단계에 대한 자기 인식이 아니라 실제로 더 겸손해지고, 더 온유해지고, 더 정직해지고, 더 사랑하게 되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 주님과의 참된 결합은 반드시 체어리티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존재론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이 인간의 의지와 삶 안에서 생명이 됨으로써 주님과 결합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씨 뿌리는 비유에는 놓치기 쉬운 매우 아름다운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씨를 뿌리시는 주님은 좋은 밭에만 씨를 뿌리지 않으십니다. 길가에도, 돌밭에도, 가시밭에도 씨가 떨어집니다. 인간적인 농사 상식으로 보면 낭비처럼 보이지만 신적 사랑의 관점에서는 놀라운 장면입니다. 주님은 사람의 현재 상태만 보고 진리를 주실 대상을 미리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강퍅한 사람에게도 진리가 오고, 얕은 사람에게도 오며, 세상 염려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도 옵니다. 주님의 사랑은 끊임없이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가능성을 공급하고, 사람에게 자유롭게 응답할 기회를 주십니다.

 

더 나아가 오늘 길가 같은 사람이 영원히 길가여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굳은 땅도 갈아엎으면 밭이 될 수 있고, 돌밭에서도 돌을 골라낼 수 있으며, 가시밭에서도 가시를 뽑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희망입니다. 네 가지 밭을 고정된 인간 유형으로만 읽으면 ‘저 사람은 길가라서 안 된다’고 쉽게 단정할 수 있지만, 주님의 섭리 안에서는 마음밭 자체가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 밭을 가는 과정이 바로 회개와 시험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의 빛으로 굳은 땅을 드러내시고, 시험을 통하여 숨어 있던 돌을 드러내시며, 우리가 사랑하고 있던 가시가 무엇인지 보여 주십니다. 그것을 보게 될 때 사람은 주님의 힘으로 하나씩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전에는 열매를 맺지 못했던 땅이 점차 좋은 땅으로 변화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밭인가?’라는 질문보다 어쩌면 더 중요한 질문은 ‘주님께서 지금 내 밭에서 무엇을 드러내고 계시는가?’일 것입니다. 내게 반복해서 찾아오는 시험은 어떤 돌을 보여 주고 있는가, 내가 놓지 못하는 염려는 어떤 가시인가, 말씀을 들으면서 자꾸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고 싶은 마음은 내 밭의 어느 부분이 굳어 있다는 신호는 아닌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씨 뿌리는 비유는 사람을 네 부류로 분류하는 비유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거듭남을 보여 주는 말씀이 됩니다.

 

특히 이 사경회가 계속 강조해 온 ‘연단’도 여기에서 한층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연단의 목적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것을 제거하는 데 있습니다. 돌을 골라내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니라 씨가 깊이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고, 가시를 뽑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열매가 막히지 않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연단의 중심에는 고난이 아니라 생명이 있습니다. 고난을 많이 겪었다고 그 자체로 성숙한 것이 아니며, 고난 가운데 자기애와 자기 의가 드러나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거절하면서 체어리티와 겸손과 인내가 자라났을 때 비로소 그 고난이 연단이 됩니다. 이 점에서 시흥영성수련원의 수도적 전통이 오랫동안 강조해 온 ‘연단’도 외적인 고생의 강도보다 그 연단을 통하여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는가를 중심으로 볼 때 그 영적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1강 8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를 지금까지 배운 핵심진리와 앞으로 배울 요한계시록을 연결하는 출발점으로 삼고, 길가·돌밭·가시밭·좋은 밭이라는 네 가지 마음 상태 가운데 좋은 밭이 되어 가장 밝은 빛과 풍성한 열매를 추구해야 한다는 강사의 강조는 신앙이 반드시 영적 성장과 삶의 결실로 이어져야 한다는 중요한 요청을 담고 있으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동일한 씨인 신적 진리가 사람의 받아들이는 상태에 따라 서로 다른 결과를 낳는 인플럭스의 원리, 시험을 통하여 자기 내면의 실제 상태가 드러나고 악과 거짓을 거절하면서 마음밭이 변화되는 거듭남의 과정, 그리고 진리가 마침내 의지와 결합하여 체어리티와 쓰임이라는 열매가 되는 영적 질서의 아르카나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8부에서 특별히 붙들 만한 것은 ‘좋은 밭은 처음부터 좋은 밭이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실제 농부의 밭을 생각하면 답은 분명합니다. 좋은 밭도 갈아야 하고, 돌을 골라내야 하며, 가시를 뽑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좋은 밭은 ‘나는 원래 괜찮은 사람’이라는 상태가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들어올 때마다 자기 안의 돌과 가시를 보게 되고 그것을 주님의 도움으로 제거해 온 마음입니다. 그래서 시험 가운데 ‘내 안에 이런 분노가 있었구나’, ‘내가 이렇게까지 인정받기를 원했구나’, ‘나는 주님보다 돈을 더 의지하고 있었구나’ 하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은 몹시 불편하지만, 동시에 밭이 좋아질 가능성이 열린 순간이기도 합니다. 쟁기가 땅속에 숨겨져 있던 돌을 끌어올렸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비유의 중심에는 결국 농부이신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마음밭을 보면서 ‘나는 아직 돌도 많고 가시도 너무 많다’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현재의 밭만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밭에서 무엇이 자랄 수 있는지를 아십니다. 씨를 주시고, 빛을 주시고, 비를 내리시며, 우리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우리가 허용하는 만큼 밭을 갈아 가십니다. 그러므로 ‘익은 열매’라는 말은 영적 엘리트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이라기보다, 주님께서 뿌리신 씨가 마침내 우리 안에서 그 목적을 이루도록 허용하라는 초청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알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내 생각을 바꾸고, 생각이 의지와 결합하며, 의지가 행동을 바꾸고, 마침내 내 삶 전체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씨에서 열매까지, 그 긴 과정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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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와 교회 시대 이긴 자’ : 가장 작은 씨가 큰 나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1강 9부에서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겨자씨 비유를 중심으로 ‘영적 성장’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룹니다. 강사의 전체 체계에서 씨 뿌리는 비유가 ‘어떤 마음밭으로 말씀을 받는가’를 보여 주는 서론이라면, 이제 겨자씨 비유부터는 그 말씀을 받은 사람이 실제로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단계로 넘어가는 셈입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을 서로 독립된 이야기로 보지 않고, 씨를 받아 성장하고 광야 연단을 통과하여 마침내 ‘이긴 자’가 되는 하나의 영적 과정으로 연결합니다. 실제로 뒤에서 겨자나무가 된 성도, 누룩처럼 온전히 부푼 성도, 값진 진주를 소유한 성도를 모두 ‘광야를 다 통과해서 이긴 자가 된 상태’를 서로 다른 관점에서 설명한 것이라고 정리합니다.

 

겨자씨 비유 자체는 매우 짧습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을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하시면서, 그것이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지만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고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든다고 말씀하십니다. 강사가 이 비유에서 특별히 붙드는 것은 ‘성장’입니다. 작은 씨로 시작했지만 그것이 자라고 또 자라 마침내 나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무가 된 상태를 강사는 앞서 계속 설명해 온 ‘광야 연단을 통과한 성도’, ‘익은 열매’, ‘교회 시대 이긴 자’와 연결합니다. 나아가 계시록의 14만 4천도 이러한 교회 시대 이긴 자들의 집단으로 해석합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성령 강림부터 공중강림까지의 교회 시대 동안 하나님께서 이러한 ‘인 맞은 종’ 14만 4천을 만들어 내시는 것이 하나의 중요한 구원 섭리가 됩니다.

 

여기에서 먼저 귀하게 받을 수 있는 것은 신앙을 ‘시작’으로 끝내지 않고 반드시 ‘성장’으로 이어 가려는 강사의 문제의식입니다. 겨자씨는 씨인 채로 보존되기 위해 심어진 것이 아닙니다. 씨가 땅속에 들어갔다면 자라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받아 구원받았다는 고백도 신앙생활의 종착점이라기보다 시작입니다. 진리를 받았다면 그 진리가 사람의 생각과 의지와 행동 속으로 들어가 그의 생명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반복하여 ‘구원받았으니 됐다’는 식의 정지된 신앙을 경계하고, 연단과 성화와 성장과 열매를 강조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거듭남은 단번에 완성되는 사건이 아닙니다. 인간은 처음에는 말씀의 진리를 외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배우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아직 그 진리가 곧 그의 생명인 것은 아닙니다. 그는 진리를 따라 살면서 자기 안에서 그 진리를 거스르는 악과 거짓을 발견하고, 시험 가운데 그것들과 싸우며, 주님의 도움으로 악을 거절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렇게 진리가 점차 의지와 결합하고 선이 되며, 마침내 이전에는 ‘옳기 때문에 억지로 행하던 것’을 ‘좋기 때문에 기쁘게 행하는’ 상태로 변화합니다. 겨자씨가 나무가 된다는 그림은 이러한 거듭남의 성장과 매우 아름답게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작은 씨’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신적 진리 자체가 작거나 미약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처음 인간에게 받아들여질 때 그 진리가 차지하는 자리가 매우 작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옳은 것 같다’는 작은 인정 하나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 그것이 사람의 전 존재를 지배하는 사랑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자연적 인간은 ‘나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왜 내가 잘해야 하는가?’라고 반발합니다. 그 가운데 아주 작은 진리 하나가 심어집니다. ‘그래도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이것이 옳다.’ 겨자씨처럼 작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 진리를 따라 실제로 살아가기 시작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이를 악물고 참을 수도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보복하지 않는 법을 배우고, 더 나아가 상대방의 사정을 생각하기 시작하며, 마침내는 그 사람에게도 선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수 있게 됩니다. 처음에는 이해 안에 작은 씨로 있던 진리가 의지로 내려가 사랑과 결합하고, 마침내 삶 전체를 움직이는 하나의 원리가 됩니다. 이것이 씨가 나무가 되는 모습입니다. 따라서 영적 성장은 지식의 양이 늘어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내가 아는 진리가 얼마나 많아졌는가?’보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얼마나 나의 사랑과 삶이 되었는가?’가 더 중요한 기준입니다.

 

이 점에서 겨자씨 비유는 앞서 씨 뿌리는 비유와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8부에서 살펴본 네 가지 마음밭은 진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 겨자씨는 제대로 받아들여진 진리가 ‘어떻게 성장하는가’를 보여 줍니다. 좋은 밭이라는 것은 씨를 보관하는 창고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씨가 자랄 수 있는 밭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밭의 참된 증거는 결국 성장과 열매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인 뒤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랑과 삶이 전혀 변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와 별개로 그 씨가 실제로 어디까지 자라고 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가 이것을 ‘광야 연단’과 연결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식물은 씨가 심어진 뒤 아무 과정 없이 갑자기 큰 나무가 되지 않습니다. 햇빛과 비를 받고 바람을 견디며 뿌리를 깊이 내립니다. 영적으로도 진리가 사람의 생명이 되려면 시험이 필요합니다. 평온할 때 ‘나는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지는 시험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을 때 ‘나는 온유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쉽지만, 모욕을 받았을 때에도 악으로 악을 갚지 않을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시험은 머릿속에 있던 진리를 삶의 진리로 만드는 자리입니다.

 

그렇다고 시험 자체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을 많이 받았다고 자동적으로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고난을 겪고도 한 사람은 더 부드러워지고 다른 사람은 더 완고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험 가운데 무엇을 선택하는가입니다. 자기애와 원망을 붙드는가, 아니면 주님의 진리를 붙들고 그 악을 거절하는가입니다. 따라서 ‘광야 연단’의 본질은 고통의 양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선과 진리가 악과 거짓을 이기고 질서를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을 붙들면 이 사경회가 오랫동안 강조해 온 ‘연단’이라는 언어도 고행이나 영적 성취주의로 흐르지 않고 거듭남의 실제 과정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강사의 해석에서 겨자나무가 된 상태는 매우 높은 영적 단계입니다. 단순히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이 아니라 광야 연단을 통과하고 마음과 행실이 정결해져 ‘이긴 자’가 된 상태입니다. 강사는 이 상태를 계시록의 ‘인 맞은 종’, ‘교회 시대 이긴 자들’, ‘14만 4천’과 연결하고, 이들이 장차 휴거되어 특별한 위치에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다른 강의 대목에서도 강사는 ‘교회 시대 이긴 자’가 광야 연단 과정을 마치고 마음과 행실이 정결하게 된 사람이며, 이들에게 ‘생명과’를 먹는 상태가 주어진다고 설명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상당히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계시록의 14만 4천은 자연적 의미에서 정확히 144,000명의 특별한 성도 집단을 뜻하지 않습니다. 계시록의 숫자들은 상응을 통하여 영적 상태의 질과 충만함을 나타냅니다. 특히 12와 그 배수는 신앙과 사랑에 속한 모든 것, 곧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의 전체를 나타내며, 144,000은 그러한 상태의 충만함을 나타내는 상징적 수로 읽습니다. 따라서 ‘144,000이라는 정원이 실제로 채워져야 종말이 시작된다’는 식의 자연적 산술로 읽지 않습니다.

 

이 차이는 작지 않습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14만 4천’이라는 특정한 수의 ‘교회 시대 이긴 자들’이 형성되고, 이들이 대환난 전에 휴거되는 종말론적 구조가 중요합니다. 실제로 강사는 이 숫자가 ‘14만 4천으로 예정되어 있다’고 명시적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관심이 ‘나는 그 14만 4천 명 안에 들어갈 수 있는가?’에서 ‘내 안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가 얼마나 온전한 질서를 이루고 있는가?’로 이동합니다. 숫자가 외적인 선발 인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충만함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겨자씨 비유와 14만 4천 사이에도 다른 방식의 연결이 가능합니다. 겨자씨가 나무가 된다는 것은 작은 진리의 시작이 인간 전체를 새롭게 하는 데까지 성장하는 것이고, 12와 그 배수의 충만함은 선과 진리가 인간 안에서 온전한 질서를 이루는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핵심은 특별한 영적 엘리트 집단에 편입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신앙의 진리와 체어리티의 선이 서로 결합하여 그의 삶 전체가 주님의 질서 아래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긴 자’라는 표현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의 전통에서는 이 말이 매우 중요합니다. 광야를 통과하고 죄성을 이기며 정결한 단계에 도달한 사람을 ‘이긴 자’라고 부릅니다. 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일곱 교회에 반복하여 ‘이기는 그에게는’이라는 약속이 주어지는 것도 이 체계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로 사용됩니다. 강사는 이긴 자들에게 생명나무의 열매, 흰옷, 새 예루살렘의 이름 등 특별한 약속들이 주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김’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이기는가가 핵심입니다. 다른 종교를 이기는 것도 아니고, 다른 교파를 이기는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보다 높은 영적 단계에 올라가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 깊은 싸움은 자기 안의 악과 거짓에 대한 싸움입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인간이 자기 힘으로 그것들을 이기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최선을 다하여 악을 거절해야 하지만 실제로 이기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지옥의 유입을 물리치시고 선과 진리를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긴 자’라는 표현을 잘못 받아들이면 영적 우월감이 생길 위험도 있습니다. ‘나는 광야를 통과한 사람이고 저 사람은 아직 광야에 있다’, ‘나는 생명과를 먹은 단계이고 저 사람은 아직 그 단계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사람을 영적 계층으로 분류하기 시작하면, 자기부인을 위해 시작한 영성이 오히려 가장 미세한 proprium을 키울 수 있습니다. 영적 교만은 세상적 교만보다 더 알아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세상적 교만은 돈이나 학벌이나 지위를 자랑하지만, 영적 교만은 겸손과 성결과 체험과 진리 지식을 자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천국 이해에서는 오히려 높이 올라갈수록 자기가 높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더 깊은 천국적 상태에 있는 천사일수록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 분명하게 압니다. 따라서 자기 공로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영적 성장의 매우 중요한 역설입니다. 진정으로 성장할수록 ‘내가 성장했다’는 의식은 오히려 약해지고, 주님께 대한 의존은 깊어집니다. 나무가 커질수록 뿌리가 더 깊이 땅속으로 내려가듯, 영적 성숙이 깊어질수록 겸손도 깊어져야 합니다.

 

이 점에서 겨자씨 비유의 ‘나무’는 아주 좋은 분별 기준을 줍니다. 큰 나무는 자기 자신을 위해 큰 것이 아닙니다. 그 가지에 새들이 와서 깃듭니다. 즉 성장의 결과가 다른 존재에게 유익이 됩니다. 이것은 ‘쓰임’이라는 스베덴보리의 핵심 개념과 매우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천국에서 모든 것은 쓰임을 향합니다. 지혜가 많아지는 것도 쓰임을 위해서이고, 사랑이 깊어지는 것도 쓰임을 위해서이며, 어떤 천사가 더 높은 지혜를 받는 것도 더 넓고 깊은 쓰임을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나는 얼마나 성장했는가?’를 판단하는 가장 좋은 기준 가운데 하나는 ‘나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쓰임이 되고 있는가?’일 것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게 되었는데 사람을 더 쉽게 정죄하게 되었다면 나무는 커진 것처럼 보여도 그 가지에 새들이 깃들기 어렵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연단을 많이 받았는데 가족이 나를 더 어려워하고 가까이하기 힘들어한다면 무엇인가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대로 영적 성장이 깊어질수록 사람들이 그 사람 곁에서 위로를 받고, 안전함을 느끼고, 진리를 더 사랑하게 되고, 주님을 바라보게 된다면 그 나무의 가지가 실제 쓰임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든다’는 말씀도 상응적으로 보면 더욱 깊어집니다. 말씀에서 새들은 여러 문맥에서 사고, 지적인 것들, 진리에 관한 이해와 관계합니다. 그렇다면 겨자씨가 나무가 되고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든다는 것은 진리가 인간 안에서 충분히 성장하여 그의 내적 삶이 다양한 참된 생각과 이해가 머물 수 있는 질서 있는 구조가 되는 모습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진리 하나였지만 그것이 삶과 결합하면서 다른 진리들을 받아들이고 연결할 수 있는 큰 구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 신앙의 성장에서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성경의 여러 말씀이 서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창세기의 말씀과 복음서의 말씀이 별개처럼 보이고, 사랑과 신앙과 회개와 시험과 섭리가 각각 다른 주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중심적인 진리가 삶 안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 여러 진리들이 서로 연결됩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중심으로 성경을 읽으면 계명과 회개와 신앙과 쓰임과 섭리가 하나의 질서 안에서 보이기 시작합니다. 큰 나무의 여러 가지가 하나의 줄기에 연결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이 사경회가 추구하는 ‘핵심진리’의 의도와도 의미 있는 접점이 생깁니다. 강사들이 여러 성경 본문을 하나의 영적 성장 체계로 정돈하려는 이유 역시 성경의 진리들을 흩어진 정보로 남겨 두지 않고 하나의 전체적인 신앙의 길로 이해하려는 데 있을 것입니다. 그 의도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체계가 성경 위에 올라서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 합니다. 체계가 말씀을 설명해야지, 말씀이 이미 만들어 놓은 체계를 증명하는 자료로만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서로 다른 본문들을 연결할 때에는 그 연결이 말씀의 내적 상응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해석자가 만든 종말론적 도식에서 나오는 것인지를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겨자씨 비유를 곧바로 ‘14만 4천의 교회 시대 이긴 자’와 동일시하는 부분은 이 강의의 체계 안에서는 일관되지만, 그것이 비유 자체가 직접 말하는 유일한 의미라고 단정하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유 자체의 중심은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성장입니다. 아주 작게 시작된 것이 주님의 생명으로 자라 예상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 됩니다. 이 영적 원리를 충분히 붙든 뒤에 다른 계시록 본문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편이 더 안전합니다.

 

그리고 이 ‘작음에서 큼으로’라는 원리는 스베덴보리의 리메인스와도 연결해서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 선과 진리의 상태들을 보존하십니다. 사람이 그것을 의식하지 못해도 주님과 부모에 대한 순진한 사랑, 이웃에 대한 선한 정서, 진리에 대한 감각 같은 것들이 내면 깊은 곳에 보존됩니다. 이것이 리메인스입니다. 나중에 사람이 거듭남의 길에 들어설 때 주님께서는 그 보존된 상태들을 사용하십니다. 인간에게는 거의 보이지 않는 작은 씨와 같지만, 주님의 섭리 안에서는 장차 거듭남에 사용될 매우 귀중한 기반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의 현재 모습만 보고 그의 영적 가능성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겨자씨만 한 것이 장차 어떤 나무가 될지 우리는 모릅니다. 지금 말씀을 겨우 이해하기 시작한 사람, 아직 많은 약점과 혼란을 가진 사람, 신앙생활에서 여러 번 넘어지는 사람도 주님께서 어떻게 이끌어 가실지 알 수 없습니다. 영적 성장의 주체가 궁극적으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도,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도 중요한 위로가 됩니다.

 

다만 강사의 ‘가장 높은 단계까지 올라가라’는 강조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받을 때에는 목표의 방향을 조금 바꾸어야 합니다. 영적 성장의 목표는 ‘나는 어느 단계까지 올라갔는가?’가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내 안에서 얼마나 자유롭게 역사하고 있는가?’입니다. 가장 높은 상태는 자기 자신을 가장 높게 느끼는 상태가 아니라 가장 깊이 주님께 의존하고 가장 기쁘게 이웃을 섬기는 상태입니다. 천국의 높이는 공간적 고도가 아니라 사랑의 내적 깊이입니다.

 

따라서 겨자나무가 되는 것은 ‘영적 거인’이 되는 것과 다릅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은 작아지고 주님의 생명이 크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진리를 안다’고 생각했지만 점점 ‘주님께서 진리를 주신다’고 알게 되고, 처음에는 ‘내가 선을 행한다’고 생각했지만 점점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선을 행하신다’고 인정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천국에 가기 위해 선을 행하지만, 나중에는 선 자체를 사랑하여 행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장입니다.

 

강사의 설명 가운데 ‘14만 4천이 너무 적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것이 예정된 수라고 답하는 대목도 이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숫자를 자연적 인원수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으므로 ‘나는 그 제한된 정원 안에 들 수 있을까?’라는 불안 자체가 사라집니다. 주님의 구원은 숫자 제한을 두고 경쟁하는 구조가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시며, 각 사람에게 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공급하십니다. 144,000이라는 수가 말하는 것은 천국의 좌석 수가 아니라 주님의 교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충만함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긴 자’라는 말도 경쟁에서 해방됩니다. 내가 다른 성도보다 먼저 가나안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싸워야 할 대상은 다른 성도의 영적 수준이 아니라 내 안의 자기애와 세상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이 삼십 배의 열매를 맺든 백 배의 열매를 맺든 그것은 나와 경쟁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람의 선을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 자체가 내가 이겨야 할 자기애의 한 부분입니다.

 

이것은 시흥영성수련원의 수도적 전통이 지닌 ‘연단’과 ‘이긴 자’의 언어를 더욱 깊고 안전하게 받아들이는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랜 수도적 훈련과 자기부인이 ‘나는 다른 성도보다 높은 단계에 있다’는 의식을 낳는다면 그 연단 속에 proprium이 숨어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연단을 거치면서 자기 악을 더 잘 보고,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더 오래 참으며,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고, 주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된다면 그 연단은 겨자씨가 나무가 되어 가는 실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영적 성숙은 밖으로 자신을 과시하는 높이가 아니라 안으로 깊어지는 겸손으로 나타납니다.

 

1강 9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겨자씨가 자라 큰 나무가 되는 비유를 광야 연단을 통과하여 마음과 행실이 정결해지고 마침내 계시록의 ‘교회 시대 이긴 자’, 곧 14만 4천의 인 맞은 종에 이르는 영적 성장의 모습으로 읽는 강사의 해석은 신앙을 단순한 구원의 출발점에 머물게 하지 않고 반드시 성화와 성장과 열매로 나아가게 한다는 중요한 힘을 지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겨자씨의 성장을 작은 진리의 시작이 시험과 회개를 통하여 의지와 결합하고 마침내 선과 체어리티와 쓰임이라는 큰 나무가 되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읽으며, 14만 4천 역시 문자적인 제한 인원의 영적 엘리트 집단이라기보다 주님의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가 충만하게 갖추어진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고, 참된 ‘이긴 자’란 자기 힘으로 높은 영적 단계에 올라간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거절하여 주님의 선과 진리가 점점 그의 생명을 다스리게 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9부에서 특별히 붙들 만한 것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된 뒤의 모습입니다. 나무가 커졌다는 사실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입니다.’ 성장의 목적이 자기 확대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무는 자기를 위해 그늘을 만들지 않습니다. 다른 생명이 그 가지에서 머물고 쉼을 얻습니다. 이것은 영적 성장을 분별하는 매우 아름다운 기준입니다. 내가 정말 성장했다면 누군가가 나 때문에 살아나야 합니다. 누군가가 내 곁에서 정죄보다 위로를 받고, 불안보다 평안을 얻으며, 나 자신에게 매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더 바라보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교회 시대 이긴 자’라는 강사의 강한 표현도 전혀 다른 색깔을 띠게 됩니다. 이긴 사람은 강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있게 된 사람입니다. 자기 뜻을 관철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며, 자신이 높은 단계에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욱 깊이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겨자씨가 나무가 될수록 자기 씨앗의 작음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모든 생명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성장의 질문도 ‘나는 지금 몇 단계인가?’보다 ‘내 안에서 무엇이 커지고 있는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리를 공부할수록 자기 의가 커지는가, 체어리티가 커지는가? 연단을 받을수록 완고함이 커지는가, 겸손이 커지는가? 영적 체험이 많아질수록 자기 특별함이 커지는가, 주님께 대한 의존이 커지는가? 바로 이 질문이 겨자씨 비유를 우리 자신의 거듭남 안으로 가져옵니다.

 

겨자씨 한 알은 참으로 작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인간이 만들어 넣지 않은 생명이 있습니다. 거듭남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작은 작을 수 있습니다. 한 구절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 한 가지 악을 죄라고 인정하는 것, 한 사람을 용서하기로 결심하는 것, 자기 잘못 하나를 솔직히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에게서 온 진리라면, 그리고 사람이 자유롭게 그 진리를 받아 삶으로 옮긴다면 주님께서는 그 작은 시작을 사용하여 인간 전체를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겨자씨 비유가 말하는 영적 성장의 가장 깊은 신비는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성도가 될 수 있는가’라기보다 ‘주님께서 인간 안에 심으신 아주 작은 진리 하나를 통하여 얼마나 큰 거듭남을 이루실 수 있는가’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1 10

누룩과 진주, 보화 : 온 존재가 변화되고,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것은 무엇인가

1강 10부에서는 겨자씨 비유에서 시작된 ‘교회 시대 이긴 자’에 대한 설명이 누룩 비유와 진주·보화 비유로 이어지면서 한층 깊어집니다. 강사는 이 세 비유를 각각 별개의 영적 상태로 보기보다 동일한 사람, 곧 ‘광야를 통과하여 익은 열매가 된 교회 시대 이긴 자’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보여 주는 비유로 이해합니다. 겨자씨가 나무가 되는 것은 ‘성장적인 측면’, 누룩이 가루 서 말 전부를 부풀게 하는 것은 ‘행실적·인격적인 측면’, 값진 진주와 밭에 감추인 보화를 얻기 위하여 자기 소유를 모두 파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는 측면’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뒤에서 이 세 비유를 다시 한데 모아 ‘다 광야의 과정을 지나서 다 부풀고 다 성장하고 온전히 다 소유하게 된’ 이긴 자들을 서로 보완하여 설명하는 비유라고 명시합니다. 이 강의의 전체 구조를 이해하려면 이 점을 먼저 붙들어야 합니다. 강사는 서로 다른 세 비유에서 하나의 완성된 영적 인간을 보고 있습니다.

 

먼저 누룩 비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강사는 여기서 특별히 ‘전부 부풀게’ 된다는 데 주목합니다. 신앙이 사람의 어느 한 부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말과 행동, 인격과 생활 전체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사는 누룩 비유를 ‘인격적인 면에서의 행실적인 성장’을 보여 주는 말씀으로 정리합니다. 이것은 앞서 겨자씨 비유에서 다룬 성장의 문제를 더욱 실제적인 삶으로 가져옵니다. 겨자씨 비유가 ‘얼마나 자랐는가’를 보여 준다면 누룩 비유는 ‘그 성장이 사람 전체에 얼마나 스며들었는가’를 묻는 셈입니다.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인간의 어느 한 기능만 종교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이해만 거듭나고 의지는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없으며, 주일의 예배만 변화하고 평일의 생활은 그대로일 수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이해 안에 들어옵니다. 사람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배우고,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를 말씀을 통하여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사랑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아직 거듭남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알고 그것을 따라 살고, 반복되는 시험 가운데 악을 거절하며, 마침내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그의 성품과 행동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진리는 생명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부 부풀게 되었다’는 강사의 표현은 거듭남의 중요한 한 면을 매우 잘 붙잡고 있습니다.

 

다만 말씀에서 ‘누룩’은 문맥에 따라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를 모두 가질 수 있으므로 무조건 ‘누룩=성화’라는 고정된 상응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경계하셨을 때 누룩은 거짓된 교리와 악한 영향이 퍼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반면 여기에서는 천국을 누룩에 비유하셨으므로 선한 의미입니다. 핵심은 ‘스며들어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악과 거짓도 사람 안에 들어오면 전체를 오염시킬 수 있고, 반대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도 받아들여지면 인간의 전 존재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13장의 누룩은 단순히 ‘행실이 좋아진 사람’을 넘어,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가 의지와 행동에까지 스며들어 인간 전체가 새로운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렇게 보면 누룩 비유는 우리에게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내 신앙은 어디까지 부풀어 있는가?’입니다. 예배드릴 때에는 신앙인이지만 돈을 다룰 때에는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읽을 때에는 겸손하지만 자기 의견이 무시되면 견디지 못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에는 주님의 뜻을 구하지만 실제 중요한 결정을 할 때에는 자기 이익만 따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누룩이 가루 전체에 퍼진 것은 아닙니다. 진리가 어떤 부분에는 들어갔지만 아직 다른 영역에는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거듭남은 바로 그 남아 있는 영역까지 주님의 질서 아래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신앙과 생활, 교리와 인격, 예배와 직업, 기도와 인간관계 사이의 간격이 점점 줄어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사경회가 계속 강조해 온 ‘마음과 행실의 정결’이라는 주제와도 맞닿습니다. 강사는 겨자나무가 된 성도와 누룩처럼 온전히 부푼 성도와 값진 진주를 소유한 성도를 모두 광야를 통과하여 익은 열매가 된 같은 사람의 서로 다른 모습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분명 귀한 통찰이 있습니다. 영적 성숙은 어느 한 방면의 탁월함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 지식만 많거나 기도만 오래 하거나 고난을 많이 겪었다고 완성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실제 인격과 행실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이 강의가 상당히 가까워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진리가 체어리티의 선으로 살아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정결’이나 ‘이긴 자’라는 표현을 받아들일 때에는 여전히 주의가 필요합니다. 인간이 거듭나면서 악이 완전히 사라져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제거하신다기보다 사람이 그것으로부터 물러나게 하시고 악이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깊이 거듭난 사람일수록 ‘나는 이제 죄성이 제거된 정결한 사람이다’라고 자신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안에 있는 proprium이 어떤 것인지를 더 분명히 알고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이 차이는 중요합니다. 영적 성장의 결과가 자기 완성에 대한 확신이 되어서는 안 되고 주님께 대한 의존의 심화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어 강사는 진주 비유와 보화 비유로 넘어갑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부터 46절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읽으면서, 두 비유는 서로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기뻐하여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고, 좋은 진주를 구하던 장사가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자 자기 소유를 모두 팔아 그것을 산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여기서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부분을 매우 강하게 붙듭니다. 진주의 값은 얼마인가를 묻고는 사실상 ‘자기의 소유를 몽땅 파는 값’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하나님의 생명을 온전히 소유하려면 인간이 붙들고 있던 육적인 소유와 자기 것을 내려놓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 사경회의 수도적 영성이 매우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얻기 위하여 세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생명을 얻기 위하여 자기에게 속한 것을 포기하며, 광야 연단을 통하여 자기 소유가 벗겨지는 과정을 중요하게 보는 것입니다. 강사는 다른 강의 대목에서 욥의 연단과 이 진주 비유를 직접 연결하면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기 위해 ‘자기의 육적인 모든 소유’를 내려놓게 되는 것이 연단의 특징이라고까지 설명합니다. 그리고 욥이 재물과 자녀를 잃은 일을 이러한 ‘소유를 다 파는’ 과정의 한 사례처럼 연결합니다. 이 대목은 시흥영성수련원의 수도적 전통을 이해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에게 ‘자기부인’은 단순한 추상적 교리가 아니라 실제 삶의 소유와 애착을 내려놓는 매우 현실적인 영적 훈련의 언어로 받아들여져 온 것으로 보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말씀은 대단히 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외적인 소유와 내적인 소유입니다. 주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문자 그대로 재산과 가족과 직업을 버리라고 요구하신다고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훨씬 더 근본적으로 내려놓아야 할 ‘자기 소유’가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proprium입니다. ‘내 생각이 옳다’,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 ‘내가 이 선을 행했다’, ‘내 지혜로 이것을 깨달았다’, ‘나는 이만큼 영적으로 성장했다’고 자신에게 돌리는 모든 것이 그 깊은 층의 ‘내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proprium을 그토록 엄중하게 다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에게서 나온 proprium 자체에는 선한 것이 없으며, 참된 선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소유를 다 팔아 진주를 산다’는 말씀은 단순한 금욕을 넘어 훨씬 더 깊은 자기부인의 말씀으로 열립니다. 돈을 버렸는데 자기 의는 그대로일 수 있습니다. 재산을 포기했는데 영적 교만은 더 커질 수도 있습니다. 세상적 명예를 버리고 수도생활에 들어갔는데 ‘나는 세상을 버린 사람’이라는 새로운 명예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proprium의 매우 미묘한 성질입니다. 자연적인 소유를 버리는 것은 눈에 보이지만, ‘내가 버렸다’는 공로의식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참된 자기부인은 소유의 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내 힘으로 선할 수 있다’는 자기 소유의 가장 깊은 환상을 내려놓는 데까지 가야 합니다.

 

이 점에서 진주 비유는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더 깊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무엇을 버렸는가?’보다 ‘버린 그것을 누구의 공로로 여기고 있는가?’입니다. 세상의 많은 것을 포기했어도 그 포기를 자기 영적 지위의 근거로 삼는다면 아직 팔리지 않은 가장 값비싼 ‘자기 소유’가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연적으로는 가정과 직업과 재산을 가지고 살아도 그것을 자기 욕망을 위한 소유물이 아니라 주님께서 맡기신 쓰임의 수단으로 여기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적 무소유와 내적 자기부인은 반드시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본질적인 것은 외적 형편보다 사랑의 질서입니다.

 

여기서 강사가 욥의 모든 소유가 거두어지는 것을 ‘하나님의 생명을 얻기 위한 전제 조건’처럼 설명하는 부분에는 특별히 세심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일반화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높은 영적 단계로 이끌기 위해 재산이나 자녀를 빼앗으신다’는 매우 위험한 신관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주님은 악이나 비극을 직접 보내어 사람을 성화시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의 섭리는 끊임없이 선을 향하지만, 자연계와 인간 자유 안에서 허용되는 고난과 상실까지 사용하여 사람을 영원한 선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재산을 잃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을 ‘하나님께서 당신을 더 높은 단계로 올리기 위해 거두어 가셨다’고 쉽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당사자에게는 영적으로도 목회적으로도 너무 무거운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욥기의 핵심을 자기부인의 관점에서 받는다면, 외적인 것을 잃었다는 사실 자체보다 모든 외적 기반이 흔들릴 때에도 하나님을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만 사랑했는지, 아니면 하나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지가 드러나는 시험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라는 고백의 깊이는 하나님께서 실제로 모든 비극을 직접 일으키신다는 교리적 진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의 근거를 외적 소유에서 하나님께로 옮기는 신뢰에 있습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더욱 깊이 가져가면, 결국 인간은 ‘내 생명도 내 것이 아니다’라는 데까지 가게 됩니다. 생명 자체가 순간마다 주님에게서 유입되기 때문입니다.

 

진주와 보화가 ‘하나님의 생명’을 나타낸다는 강사의 강조도 이 지점에서 새롭게 받을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을 자기 소유물로 만들어 갖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생명의 원천이 될 수 없고 오직 생명을 받아들이는 그릇입니다. 천사조차 자기에게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생명이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유입된다는 것을 압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다’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더욱 충만하게 받아들이는 상태’라고 이해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사람이 자기 proprium을 붙들수록 그 유입을 왜곡하고, 자기 것을 내려놓을수록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더욱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진주를 ‘소유’하는 길은 내 소유를 버리는 길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얻는 진주마저 ‘이제 이것은 내 것이다’라고 붙들 수 없습니다. 모든 선과 진리는 여전히 주님의 것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느끼며 자유롭게 살아야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천국적 자유의 아름다운 역설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천사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자유롭게 행하지만 그것을 자기 공로로 돌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자유롭습니다.

 

이것을 앞의 누룩 비유와 연결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것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비워 내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운 자리에 주님의 생명이 들어와야 합니다. 자기애를 버렸는데 사랑이 들어오지 않으면 단순한 자기 억압이 될 수 있고, 세상 욕망을 절제했는데 쓰임의 기쁨이 생기지 않으면 메마른 금욕이 될 수 있습니다. 참된 자기부인은 ‘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나’의 중심을 바꾸는 것입니다. proprium이 중심이던 인간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중심이 되는 인간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주 비유의 중심은 ‘얼마나 많이 버렸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얻기 위해 버리는가?’입니다. 밭을 산 사람은 슬퍼하며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기뻐하여’ 돌아가 자기 소유를 다 팔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천국적 자기부인은 궁극적으로 기쁨을 향합니다. 처음에는 악을 버리는 일이 고통스럽습니다. 자기애가 그것을 자기 생명을 잃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면 내가 지는 것 같고, 명예욕을 내려놓으면 내가 작아지는 것 같으며, 자기 뜻을 포기하면 자유를 잃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은 반대로 알게 됩니다. 자기애를 붙드는 것이 속박이었고, 그것을 버리는 것이 자유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진주를 발견한 사람이 모든 것을 팔면서도 기뻐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더 귀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전에 귀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상대적으로 가벼워진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부인의 동기를 분별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두려워서 버리는 것과 더 큰 사랑 때문에 버리는 것은 다릅니다. ‘이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벌받는다’는 두려움만으로 이루어지는 금욕은 오래가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서 오는 선의 기쁨을 맛보면서 이전의 자기중심적 욕망이 더 이상 가치 있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의 질서가 실제로 변화하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어린아이가 성장하면서 예전에 소중히 여기던 장난감을 자연스럽게 내려놓듯, 영적 인간도 더 높은 선을 맛보면서 낮은 사랑을 점차 놓게 됩니다. 이것이 강사가 말하는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표현을 거듭남의 언어로 더욱 깊이 이해하는 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 세 비유를 함께 놓으면 강사의 체계가 왜 이들을 모두 ‘교회 시대 이긴 자’와 연결하는지도 이해됩니다. 겨자씨는 ‘성장’, 누룩은 ‘전 존재의 변화’, 진주와 보화는 ‘자기 소유를 버리고 하나님의 생명을 얻음’을 보여 줍니다. 강사는 이 세 가지를 광야 연단을 통과한 한 사람의 서로 다른 모습으로 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 세 비유를 반드시 14만 4천이라는 특정 집단과 연결할 필요는 없지만, 거듭남의 서로 다른 면을 보여 주는 연속적인 그림으로 읽는 것은 상당히 풍성합니다. 진리가 씨로 심어지고 자라 나무가 되며, 그 생명이 인간 전체에 누룩처럼 퍼지고, 마침내 사람은 주님과의 결합을 방해하는 proprium을 내려놓으면서 천국적 생명을 더욱 충만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나는 이제 나무가 되었다’, ‘나는 전부 부풀었다’, ‘나는 진주를 소유했다’고 자기 상태를 판정하기 시작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영적 성장의 가장 큰 역설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주님에게 가까워질수록 자기 선을 덜 봅니다.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지 더 잘 알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아직 자기 의가 강할수록 자신의 영적 성취를 쉽게 측정하고 등급화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시대 이긴 자’라는 강사의 표현을 받아들일 때 가장 중요한 안전장치는 ‘이긴 자 자신은 누구의 힘으로 이겼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자기 힘과 자기 연단과 자기 성취로 이겼다고 생각한다면 가장 깊은 싸움이 아직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수도적 연단의 목표도 매우 분명해집니다. 수도생활의 목표는 고난을 많이 견딜 수 있는 강한 인간을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많이 버린 사람, 더 오래 금식한 사람, 더 많이 기도한 사람, 더 어려운 환경을 견딘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도 궁극적 목적이 아닙니다. 그 모든 훈련이 의미를 가지려면 그 결과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지배가 약해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강해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더 오래 참게 되고, 자기 잘못을 더 빨리 인정하게 되며, 자신의 공로를 덜 주장하고, 맡겨진 쓰임을 더 기쁘게 행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외적인 광야는 통과했어도 내적인 광야는 아직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특히 시흥영성수련원처럼 오랫동안 실제 수도공동체와 연단의 전통을 이어 온 곳을 바라볼 때 소중한 분별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외부 사람이 그들의 내적 상태를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수도적 전통 그 자체가 향해야 할 방향은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세상 사랑의 지배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소유를 줄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소유욕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자기를 낮추는 외적 모습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proprium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 그리고 그 빈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쓰임의 기쁨이 자리 잡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수도적 자기부인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는 상당히 깊은 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강사가 이 세 비유를 계시록의 14만 4천과 연결하는 부분에서는 앞서 9부에서 살펴본 구별을 그대로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겨자씨·누룩·진주·보화가 모두 14만 4천이라는 ‘교회 시대 이긴 자’의 성장·행실·생명적 측면을 설명합니다. 실제 강의 서두에서도 겨자씨 비유는 14만 4천의 성장적 측면, 누룩 비유는 행실적 측면, 진주·보화 비유는 생명적 측면이라고 명시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144,000은 자연적 인원수로 제한된 영적 엘리트 집단이라기보다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의 모든 것과 그 충만한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 비유가 가리키는 거듭남의 충만함을 특정한 144,000명에게만 해당되는 특별 코스로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각자의 자유와 받아들임에 따라 가능한 가장 충만한 천국적 상태로 이끌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목회적으로도 중요합니다. ‘나는 14만 4천 안에 들었는가?’, ‘나는 어느 연단 단계인가?’, ‘나는 생명과를 먹는 단계인가?’라는 질문에 신앙의 중심이 쏠리면 사람은 자꾸 자기 영적 위치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나 거듭남의 중심 질문은 ‘나는 지금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어떤 악을 거절해야 하는가?’, ‘오늘 내가 행해야 할 선과 쓰임은 무엇인가?’, ‘내가 알고 있는 진리를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전자는 자기 상태를 측정하게 하지만 후자는 주님을 바라보고 실제 삶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1강 10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라는 성장, 누룩이 가루 전체를 부풀게 하는 인격과 행실의 변화, 값진 진주와 보화를 얻기 위하여 자기 소유를 모두 파는 자기부인을 모두 광야 연단을 통과한 ‘교회 시대 이긴 자’, 곧 14만 4천의 서로 다른 모습으로 읽는 강사의 해석은 신앙이 지식이나 체험에 머물지 않고 인간 전체의 변화와 철저한 자기부인에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강력한 요청을 담고 있으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를 진리가 이해에서 의지로 내려가 인간의 모든 생활을 새롭게 하고, 시험 가운데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거절하며, 마침내 인간이 자기 지혜와 자기 공로와 자기 뜻이라는 proprium의 소유권을 내려놓음으로써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더욱 자유롭고 충만하게 받아들이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10부에서 가장 깊이 붙들 만한 것은 어쩌면 ‘자기 소유를 다 팔았다’는 말보다 그 앞에 있는 ‘기뻐하여’라는 한마디일 것입니다. 자기부인을 고통과 희생만으로 이해하면 신앙은 점점 무거워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밭의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귀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내려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자기부인의 비밀입니다. 세상을 미워해서 주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너무 귀하여 세상이 제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재물을 악하게 여겨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재물보다 더 귀한 선을 발견하고, 명예를 무조건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인정과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의 생명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거듭남은 ‘나는 무엇을 얼마나 버렸는가?’를 세는 과정이 아니라 ‘무엇이 내게 가장 귀한 것이 되어 가고 있는가?’를 묻는 과정입니다. 주님이 정말 가장 귀해지면 많은 것은 억지로 떼어 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제자리로 내려갑니다. 재산은 쓰임의 도구가 되고, 지식은 이웃을 섬기는 수단이 되며, 직분은 명예가 아니라 책임이 되고, 신앙 체험은 자랑거리가 아니라 주님께 감사할 이유가 됩니다. 심지어 자기의 영적 성장마저 자기 소유로 붙들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누룩도 ‘전부’ 부풀기 시작합니다. 주님이 주일의 한 시간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돈을 사용하는 방식에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도, 화가 날 때의 선택에도, 아무도 보지 않을 때의 행동에도,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도 들어오십니다. 신앙이 삶의 한 부분이 아니라 삶 전체의 질서가 되어 갑니다. 이것이 누룩의 변화이고, 겨자씨의 성장이며, 진주를 얻기 위해 자기 소유를 파는 자기부인이 서로 만나는 지점입니다.

 

결국 ‘이긴 자’의 가장 깊은 표지는 ‘내가 이겼다’는 의식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기셨다’는 고백일 것입니다. 내 힘으로 광야를 통과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붙드셨고, 내 힘으로 악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싸우실 수 있도록 내가 악을 거절했으며, 내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나를 살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버림조차 자랑이 될 수 없고 연단조차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남는 것은 감사와 쓰임입니다.

 

그렇게 보면 겨자씨와 누룩과 진주와 보화가 하나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모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진리 하나가 심어집니다. 그 진리가 시험을 지나며 자라 나무가 됩니다. 그 생명이 사람의 전 존재에 누룩처럼 스며듭니다. 그러면서 이전에 ‘내 것’이라고 움켜쥐던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발견하는 것은 ‘내가 모든 것을 버려서 하나님을 얻었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나를 찾아오시고 씨를 심으시고 자라게 하시고 변화시키신 분이 주님이셨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바로 이것이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말씀의 가장 깊은 자리일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내가 했다’는 소유권마저 주님께 돌려드리는 것, 그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누리면서도 그것이 영원히 주님의 것임을 기쁘게 인정하는 것, 그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1강 10부의 가장 깊은 결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 11

부자 청년과 모든 소유를 팔라’ : 영생, 생명, 온전, 보화, 그리고 주님과의 결합

1강 11부에서는 앞서 진주와 보화 비유에서 다루었던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주제가 마태복음 19장의 부자 청년 이야기와 연결되면서 더욱 구체적으로 전개됩니다. 강사는 부자 청년이 주님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자 주님께서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대답하신 점에 주목합니다. 이어 청년이 어려서부터 계명들을 지켰다고 하자 주님께서는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강사는 여기에서 ‘영생’, ‘생명’, ‘온전’, ‘보화’를 서로 연결되는 표현으로 보고, 진주와 보화 비유에서 말한 ‘하나님의 생명’을 얻으려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이 ‘소유’에는 물질적 재산뿐 아니라 인간 안의 ‘죄성과 정욕’까지 포함되며, 그것을 벗어 가는 과정이 곧 ‘광야 연단 과정’이라고 풀이합니다. 강사의 종합은 매우 선명합니다. 계명을 지키는 길, 모든 소유를 파는 길, 좁은 문과 협착한 길을 통과하는 길, 광야 연단을 받는 길은 결국 한 방향, 곧 하나님의 생명을 얻고 ‘온전’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이 사경회의 영적 성장론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합니다. 강사가 말하는 ‘구원’과 ‘완성’ 사이의 관계가 매우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계명을 알고 있으며 어려서부터 그것을 지켜 왔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그에게 아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음을 드러내십니다. 강사는 이것을 단순히 도덕적으로 착하게 사는 수준과 하나님의 생명을 온전히 소유하는 수준 사이의 차이로 읽습니다. 외적인 계명 준수에서 더 깊은 자기 포기와 주님을 따르는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강의의 문제의식은 매우 귀합니다. 신앙은 단지 ‘나는 이 계명을 지켰다’고 점검하는 외적 도덕성으로 끝나지 않으며, 인간의 가장 깊은 사랑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가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부자 청년 이야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매우 깊어집니다. 계명 준수는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에서 악을 죄로 알고 피하는 삶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그러나 계명을 외적으로 지켰다는 사실만으로 인간의 내적 사랑까지 자동적으로 변화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살인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다른 사람을 미워할 수 있고, 도둑질하지 않았지만 탐욕을 사랑할 수 있으며, 간음하지 않았지만 음란한 욕망을 자기 생명의 즐거움으로 품을 수도 있습니다. 또 부모를 공경하고 종교생활을 성실하게 했어도 자기 재산과 명예와 자기 의를 주님보다 더 깊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단순히 ‘계명을 더 열심히 지켜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의 마음이 실제로 무엇에 붙들려 있는지를 드러내십니다.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다’는 사실은 그의 가장 깊은 사랑의 질서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강사도 바로 이 점을 붙들어, 청년이 소유가 많았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소유’의 속뜻이 중요해집니다. 강사는 소유를 물질적 재산에만 한정하지 않고 ‘죄성과 정욕’까지 포함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방향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더욱 깊게 확장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버리기 어려운 소유는 반드시 돈이나 집이나 토지가 아닐 수 있습니다. ‘내 생각’, ‘내 판단’, ‘내 공로’, ‘내 신앙’, ‘내가 옳다는 확신’,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와 같은 것들이 훨씬 더 깊은 소유일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proprium의 영역입니다. 인간은 자기에게서 나오는 생각과 선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기를 좋아합니다. 특히 종교적인 사람은 자연적인 재물을 상당히 절제하고도 ‘나는 남들보다 더 거룩하다’, ‘나는 이만큼 연단받았다’, ‘나는 더 깊은 진리를 안다’는 영적 소유를 붙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소유를 팔라’는 말씀을 단순히 물질적 무소유의 명령으로만 읽으면 가장 깊은 소유를 그대로 둔 채 외적인 것만 내려놓을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자기부인은 인간의 개성과 인격을 파괴하거나 모든 자연적 소유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자기에게서 나온 자기 것’으로 붙드는 질서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재산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주님께서 맡기신 쓰임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고, 지식과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자기 영광이 아니라 이웃의 선을 위해 사용할 수 있으며, 목회적 권위를 가지고 있어도 사람을 자기에게 묶지 않고 주님께 이끌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 재산도 없고 매우 검소하게 살면서도 자기 뜻과 자기 의와 자기 영적 우월감을 강하게 소유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말씀의 가장 깊은 층에서는 ‘이것은 내 것이다’라고 붙드는 proprium의 소유권이 무너져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것을 내려놓을수록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더욱 자유롭게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영생’, ‘생명’, ‘온전’, ‘보화’를 서로 연결하여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하나의 중심으로 모으는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네 표현이 완전히 동일한 동의어라기보다 서로 깊이 연결된 영적 질서의 서로 다른 면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밀하겠습니다. ‘생명’의 원천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생명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형체입니다. ‘영생’은 그 주님의 생명을 천국적 사랑과 진리의 질서 안에서 영원히 받아들이며 사는 상태입니다. ‘온전’은 인간이 무한하신 주님처럼 절대적으로 완전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질서 안에서 선과 진리가 조화를 이루고 사랑과 삶이 하나가 되어 가는 상태입니다. ‘보화’는 그보다 귀한 것이 없을 만큼 주님과 그분의 나라가 인간의 가장 높은 가치가 된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네 표현은 모두 주님과의 결합을 향하지만 각각 생명의 근원, 영원한 상태, 질서의 충만함, 가치의 중심이라는 서로 다른 뉘앙스를 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온전하고자 할진대’라는 주님의 말씀은 조심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완덕’, ‘이긴 자’, ‘익은 열매’와 연결되면서 상당히 완성된 영적 단계의 언어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서 인간이 지상에서 어느 순간 절대적 무결점 상태에 도달하여 더 이상 거듭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유한한 피조물은 무한하신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영원히 더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천사들도 영원히 완전해져 갑니다. 그러므로 ‘온전’은 ‘나는 이제 완성되었다’고 자기 상태에 졸업장을 붙이는 의미라기보다, 그 단계에서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선과 진리의 질서가 사람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상태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깊은 영적 상태에 들어갈수록 사람은 자신을 완전하다고 느끼기보다 주님만이 완전하시며 자기 안의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압니다.

 

여기서 부자 청년의 이야기와 진주 비유 사이에는 매우 아름다운 공통점이 있습니다. 진주를 발견한 사람은 자기 소유를 다 팔고 기뻐하며 진주를 얻지만, 부자 청년은 자기 소유를 팔라는 말씀 앞에서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둘 다 ‘모든 소유’의 문제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는 더 귀한 것을 발견한 기쁨이 자기 소유에 대한 애착보다 컸고, 다른 사람에게는 자기 소유에 대한 애착이 주님을 따르는 기쁨보다 컸습니다. 바로 이 차이가 영적 가치관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단지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경제적 교훈으로만 읽기보다 ‘내가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읽으면 훨씬 깊어집니다. 사람은 실제로 가장 사랑하는 것을 위해 다른 것을 희생합니다. 돈을 가장 사랑하면 시간을 희생하고, 명예를 가장 사랑하면 관계를 희생할 수 있으며, 주님과 그분의 나라를 가장 사랑하게 되면 자기애와 거짓을 내려놓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강사가 ‘광야 연단 과정 자체가 계명을 지키는 과정’이며, 부자 청년이 가진 물질적 소유뿐 아니라 ‘정욕과 죄성’까지 모두 팔아야 비로소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부분은 귀한 강조와 동시에 신중한 보완을 함께 필요로 합니다. 귀한 점은 계명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지켜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내적 욕망과 싸우는 과정이 없이는 참된 영적 성장이 어렵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죄성을 다 팔아 없애야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다’는 표현이 인간 자신의 수고로 죄의 뿌리를 완전히 제거한 뒤에야 주님께서 생명을 주신다는 식으로 들리면 문제가 생깁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악의 뿌리를 뽑아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악에서 물러나게 하시고 그 악이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사람의 역할은 악이 올라올 때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사랑하고 합리화하지 않고, 주님의 계명에 반하는 죄로 인정하여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거절하는 것입니다. 실제 힘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모든 소유를 판다’는 것도 한 번의 영웅적 결단으로 끝나는 사건이라기보다 거듭남 전체를 통하여 반복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명예욕 하나가 드러나면 그것을 내려놓고, 내일 자기 의가 드러나면 그것을 내려놓으며, 어느 날에는 돈에 대한 애착이, 또 어느 날에는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드러납니다. 인간은 자기 안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를 처음부터 모두 알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시험과 삶의 여러 상태를 통하여 하나씩 드러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는 인간이 자기 소유의 목록을 하나씩 발견하는 장소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것에는 자유롭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니었구나’, ‘나는 저 사람을 용서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인정받고 싶었구나’ 하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거절할 때 ‘판매’가 이루어집니다. 물론 그 대가로 주님의 생명을 인간이 구매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은혜는 사고파는 상품이 아닙니다. 오히려 붙들고 있던 자기 것을 놓음으로써 이미 끊임없이 주어지고 있던 주님의 생명을 더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진주 비유의 ‘산다’는 표현도 더욱 섬세하게 이해하도록 합니다. 자연적 상거래에서는 값을 지불하면 물건의 소유권이 내게 넘어옵니다. 그러나 천국적 진리는 그렇게 소유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 소유를 버린 대가로 ‘하나님의 생명’을 자기 재산처럼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선과 진리와 생명은 영원히 주님의 것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 자기 것처럼 느끼고 자유롭게 살아가지만, 동시에 그것이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주의 참된 소유는 역설적으로 ‘내 것이 아니다’라는 인식과 함께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천국적 자유입니다. 자기 것으로 움켜쥐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충만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강사는 이어 요한복음 17장의 주님의 기도, 곧 제자들이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는 말씀도 이 ‘생명’과 결합의 문제 안에서 연결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앞서 바로잡았던 ‘신인합일’이라는 표현이 다시 중요한 자리를 갖습니다. 주님과 인간이 ‘하나가 된다’는 말씀은 인간이 신적 본질로 변하여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언어로는 ‘결합’입니다. 주님은 생명의 근원이시고 인간은 생명의 수용체이며, 주님은 선과 진리 자체이시고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피조물입니다. 두 존재의 구별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주님의 뜻을 자기 뜻보다 사랑하고, 주님의 진리를 자기 생각보다 높이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삶으로 행할수록 사랑과 목적과 삶의 질서에서 주님과 더욱 깊이 결합됩니다.

 

이것은 결혼의 상응을 생각하면 조금 이해하기 쉽습니다. 참된 부부는 서로 다른 두 사람으로 남으면서도 사랑과 목적이 깊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흡수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구별되면서도 사랑으로 결합합니다. 물론 주님과 인간의 관계는 피조물 사이의 결혼보다 무한히 높은 것이지만, ‘구별을 보존한 채 이루어지는 결합’이라는 점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인합일’을 사용할 때에도 ‘합일’이라는 말 때문에 인간과 하나님이 존재론적으로 융합된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주님과의 결합이라는 의미를 함께 밝혀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결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람이 단지 주님에 관한 진리를 많이 안다고 주님과 결합되는 것은 아닙니다. 알고 있는 진리를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부자 청년의 이야기에서 ‘계명을 지키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붙드는 것은 좋은 출발입니다. 다만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형식적인 규칙 준수만이 아니라, 계명의 내적 목적을 사랑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살인하지 않는 것을 넘어 미움을 거절하고, 도둑질하지 않는 것을 넘어 이웃의 선을 원하며, 간음하지 않는 것을 넘어 결혼 사랑의 거룩함을 사랑하고, 거짓 증언하지 않는 것을 넘어 진실 자체를 사랑해야 합니다. 외적 계명이 내적 사랑으로 들어갈 때 주님과의 결합이 깊어집니다.

 

이렇게 보면 부자 청년의 가장 큰 문제는 재산의 양 자체가 아닙니다. 그의 마음이 재산과 결합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정확히 그 결합을 드러내셨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방식의 명령이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재물이 가장 큰 소유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명예가,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학문과 지식이, 종교인에게는 자기 교리와 자기 경건이 가장 큰 소유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이 가장 깊이 붙들고 있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시험은 모든 사람에게 외적으로 동일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부자 청년에게 모든 재산을 팔라고 하셨으므로 모든 성도는 문자적으로 모든 재산을 팔아야 한다’는 식으로 적용하면 안 됩니다. 말씀의 깊은 목적은 가장 사랑하는 것이 주님보다 위에 있는지를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수도적 무소유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재산을 실제로 줄이거나 공동생활 가운데 개인 소유를 제한하는 것은 인간의 애착을 드러내고 절제하는 데 유익한 훈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훈련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사람이 소유를 버린 뒤에도 ‘내가 버린 것’을 소유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 사람과 다르다’, ‘나는 재산을 버렸다’, ‘나는 수도적 삶을 산다’는 의식이 새로운 보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proprium은 놀라울 만큼 종교적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마지막까지 팔아야 할 것은 ‘내가 팔았다’는 공로의식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소유를 다 팔아야 한다. 하나라도 안 팔면 진주를 살 수 없다’고 강하게 강조한 표현은 내적으로 읽을 때 오히려 더욱 엄중해집니다. 외적 재산 몇 가지를 내려놓는 수준이 아니라 주님과의 결합을 방해하는 모든 자기 소유권을 내려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비워 무(無)가 되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와 이성, 고유한 개성과 쓰임을 없애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proprium의 지배가 약해질수록 주님께서 주신 참된 개성이 더 자유롭게 살아납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서로 똑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상에서보다 훨씬 분명한 고유성을 가지면서도 그 고유성이 자기 사랑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의 쓰임을 섬깁니다.

 

따라서 자기부인의 최종 목적은 ‘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거짓된 나의 중심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가 생명의 원천이다’, ‘내 선은 내 것이다’, ‘내 판단이 최종 기준이다’,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거짓된 중심이 내려옵니다. 그 자리에 주님이 중심이 되십니다. 그렇게 될 때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오히려 참된 자신을 얻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피조물로서의 참된 질서 안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좁은 문’과 ‘협착한 길’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강사는 부자 청년과 진주 비유를 연결하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협착한 길을 다 통과해야 비로소 보화와 생명을 얻는다’고 설명합니다. 좁은 길이 좁은 이유는 주님께서 일부러 인간을 고생시키기 위해 길을 좁게 만드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은 자기 욕망을 제한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자기를 부인하라’, ‘악을 죄로 알고 피하라’, ‘네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진리는 proprium에게 매우 좁게 느껴집니다. 자기 욕망에는 넓은 길이 편합니다. 원하는 대로 화내고, 원하는 대로 소유하고, 원하는 대로 인정받고, 자기에게 유리하게 진리를 해석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넓음은 실제 자유가 아니라 욕망의 지배입니다.

 

반대로 처음에는 좁아 보이는 주님의 길이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참된 자유의 길이 됩니다. 처음에는 용서하는 것이 억울하지만 나중에는 미움을 품고 사는 것이 더 큰 속박임을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정직 때문에 손해 보는 것이 답답하지만 나중에는 거짓말을 유지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훨씬 고통스러운 속박임을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자기 뜻을 내려놓는 것이 죽음처럼 느껴지지만 나중에는 자기 뜻에 갇혀 사는 것이 얼마나 좁은 삶이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좁은 길의 끝에는 더 큰 생명과 자유가 있습니다.

 

1강 11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부자 청년의 ‘영생’, 주님의 ‘생명’, ‘온전하고자 할진대’, ‘하늘의 보화’, 그리고 진주 비유의 ‘자기 소유를 다 팔아 얻는 값진 진주’를 모두 하나님의 생명과 광야 연단의 완성으로 연결하는 강사의 해석은 신앙이 외적인 계명 준수에 머물지 않고 인간이 가장 깊이 붙들고 있는 소유와 욕망까지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한다는 강력한 자기부인의 요청을 담고 있으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모든 소유’를 단순한 재산이나 외적인 생활조건보다 더 깊이 인간이 자기 생각과 자기 뜻과 자기 선과 자기 공로를 자기 것으로 붙드는 proprium으로 읽고, 그것을 시험 가운데 죄로 인정하고 주님의 힘으로 거절함으로써 이미 끊임없이 유입되고 있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더욱 자유롭게 받아들이며, 그렇게 주님과 존재론적으로 융합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의지와 삶의 질서에서 점점 더 깊이 결합되는 거듭남의 아르카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11부에서 특별히 붙들 만한 것은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주님을 싫어해서 돌아간 것이 아닙니다. 영생을 원했고 계명도 지켰으며 주님께 직접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가장 깊은 사랑을 건드리는 순간 멈추었습니다. 이 장면은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에게도 매우 정직한 거울이 됩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주님께서 손대지 않기를 바라는 영역 하나를 남겨 둘 수 있습니다. ‘이것만은 건드리지 마십시오. 이것만은 제 것입니다.’ 재물일 수도 있고, 인간관계일 수도 있고, 자기 계획일 수도 있고, 자존심일 수도 있으며, 오랫동안 붙들어 온 신학적 확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주 비유와 부자 청년의 차이는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느냐보다 ‘더 귀한 것을 보았는가?’에 있습니다.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기뻐하여’ 팔았고, 부자 청년은 ‘근심하여’ 돌아갔습니다. 주님이 정말 더 귀하게 보이기 시작하면 자기부인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억지로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더 귀한 것을 위해 자발적으로 놓게 됩니다. 이것이 참된 영적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세상을 미워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세상이 제자리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모든 소유를 판다’는 말씀의 마지막 단계는 재산도, 정욕도, 자기 의도만이 아닐 수 있습니다. 가장 마지막에는 ‘내가 이 모든 것을 버려서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마저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 생각까지 내 소유로 붙들면 자기부인이 다시 자기 공로가 됩니다. 그래서 참된 이긴 자는 마지막에 ‘나는 모든 것을 팔았습니다’라고 자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제 손에서 하나씩 놓게 하셨고, 제가 놓았다고 생각한 힘마저 주님에게서 왔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신인합일’이라는 이 사경회의 언어도 가장 안전한 의미를 얻습니다. 인간이 신적인 존재로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 것’이 점점 내려가고 주님의 생명이 더욱 자유롭게 그 안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나의 의지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을 기뻐하는 새 의지로 거듭나고, 나의 이해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로 밝아지며, 나의 개성은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고유한 쓰임을 더욱 온전히 드러내게 됩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라는 고백은 인간의 인격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생명의 중심이 자기에게서 주님께로 옮겨 간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결국 부자 청년의 이야기는 ‘재산을 버렸는가, 안 버렸는가’를 묻는 이야기보다 훨씬 깊습니다. ‘내가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는 누구도 쉽게 ‘나는 다 팔았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거듭남은 평생의 과정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를 보여 주시면 하나를 내려놓고, 또 더 깊은 하나를 보여 주시면 다시 내려놓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점점 가난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부유해집니다. 자기 것으로 가득했던 자리가 주님의 선과 진리로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역설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진주와 보화는 인간이 소유한 물건이 아니라 주님 자신과 그분에게서 오는 생명이 우리에게 얼마나 귀한가를 보여 주는 말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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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지 비유 : ‘악한 자의 아들들’, 불법, 그리고 선과 악이 함께 자라도록 허용되는 이유

1강 12부에서는 마태복음 13장의 다섯 번째 비유인 ‘가라지 비유’로 들어갑니다. 강사는 앞의 씨 뿌리는 비유가 서론적인 말씀이고, 겨자씨·누룩·진주와 보화 비유가 ‘교회 시대 이긴 자들’을 성장·행실·생명의 여러 측면에서 설명했다면, 이제 가라지 비유는 그 정반대편을 보여 준다고 정리합니다. 곧 앞의 비유들이 ‘빛으로 익은 가장 훌륭한 열매’를 보여 주었다면, 가라지는 ‘어둠으로 익어 가장 악한 마귀의 종이 된 사람들’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13장 24절부터 30절의 좋은 씨와 가라지를 함께 자라게 두었다가 추수 때에 분리하는 말씀을 읽고, 이어 주님께서 친히 해설하신 36절 이하를 토대로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 ‘추수 때는 세상 끝’, ‘추수꾼은 천사들’이라고 정리합니다. 이 부분에서 강사의 관심은 단순히 ‘나쁜 사람도 세상에 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교회와 세상 안에 선과 악이 함께 존재하고 자라다가 마지막에는 그 실제 정체가 드러나 분리된다는 종말론적 질서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가라지 비유는 대단히 깊은 말씀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종들에게 가라지를 곧바로 뽑지 못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종들은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묻지만 주인은 ‘가만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합니다. 강사도 실제 농사의 예를 들어 벼와 피가 어린 시절에는 구별하기 쉽지 않지만 자라고 열매가 맺힐 무렵에는 확연히 달라진다고 설명합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반면 피는 뻣뻣하게 서 있고, 추수 때가 되면 열매의 차이도 드러나므로 그때 비로소 골라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에는 매우 의미 있는 통찰이 있습니다. 사람의 영적 상태도 처음부터 외관만으로 쉽게 단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열매를 맺는지가 드러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 이해와도 매우 깊이 맞닿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 안의 악을 강제로 즉시 뽑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한다면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이 손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 안에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한동안 함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가 있습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우면서도 여전히 자기애를 사랑할 수 있고, 선을 행하면서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섞여 있을 수 있으며, 교회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밑에 자기 집단의 명예나 자기 지위에 대한 욕망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인간 자신이 자유 가운데 볼 수 있도록 허용하시고, 진리의 빛을 통하여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점차 분별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가만두라’는 말씀은 악을 괜찮다고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면서 악의 본질이 충분히 드러나도록 허용하시는 섭리의 깊은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이 점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문제에서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현재 상태를 보고 쉽게 ‘알곡’이나 ‘가라지’라고 판정하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특히 종교적 확신이 강할수록 ‘저 사람은 바른 진리를 가졌고, 저 사람은 틀렸다’, ‘저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고, 저 사람은 버림받은 사람이다’라고 빠르게 나누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비유에는 놀랍게도 인간 종들이 성급하게 뽑는 일을 금하시는 장면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최종 심판권이 없다는 매우 중요한 경고로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외적 행위와 말은 볼 수 있지만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 내적 동기, 그리고 주님께서 그 안에 보존하고 계신 리메인스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악한 행위는 분명 악하다고 말해야 하지만, 그 행위를 한 사람의 영원한 상태까지 우리가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강사는 가라지를 단순히 연약한 신자나 아직 성숙하지 못한 신자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강한 표현으로 ‘악한 자의 아들들’, ‘마귀의 종’, ‘가장 어둠으로 익은 영혼들’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뒤로 가면서 이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들’, 다른 성도를 넘어지게 하고 미혹하는 자들, 배교자들, 거짓 선지자들과 연결합니다. 특히 마태복음 13장 41~42절의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를 읽으며 가라지의 첫 특징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정리합니다. 이 부분에서 강사의 강조는 분명합니다. 가라지는 단순히 영적 수준이 낮은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알고도 그것을 거슬러 악을 행하며, 다른 사람까지 잘못된 길로 이끄는 상태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불법’이라는 말을 더욱 내적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불법은 단지 국가 법률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법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모든 계명은 그 사랑을 보호하기 위한 질서입니다. 따라서 겉으로 종교적으로 매우 바르고 성경을 많이 알아도 자기애와 지배욕을 위해 말씀을 사용한다면 영적으로는 불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교리적 표현은 다소 부족하더라도 주님을 향하여 진실하고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 하며 자기가 아는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 안에는 선의 질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가라지’를 특정 교파나 특정 집단의 이름과 너무 쉽게 동일시하지 않도록 해 줍니다. 가라지의 가장 깊은 정체는 교단명이 아니라 사랑의 질에 있기 때문입니다.

 

강사의 설명에서는 가라지가 계시록의 ‘666’과도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앞서 강의 서두에서도 14만 4천은 가장 밝은 빛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여 익은 성도들이고, 666은 가장 깊은 어둠 가운데 하나님을 대적하며 마귀의 종으로 살아간 타락한 영혼들의 상징으로 대비됩니다. 그래서 겨자씨·누룩·진주와 보화가 14만 4천의 여러 면을 보여 준다면 가라지 비유는 666의 정체를 보여 준다는 것이 강사의 해석입니다. 이 구조는 강의 전체 안에서는 일관되어 있습니다. ‘빛으로 완전히 익은 사람’과 ‘어둠으로 완전히 익은 사람’을 양극에 놓고 마지막 추수에서 그 둘이 분리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666 역시 특정 수의 사람이나 특정 인물의 암호로 한정하기보다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수로 읽습니다. 계시록의 숫자는 일반적으로 영적 질과 상태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666을 ‘누가 바로 그 사람인가?’라고 외부에서 찾기보다, 신적 진리를 알면서도 그것을 자기애와 세상 사랑 아래 종속시켜 왜곡하는 인간의 상태를 볼 수 있습니다. 이 관점은 오히려 가라지 비유를 더 가까이 가져옵니다. 가라지는 언제나 ‘저 밖의 악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진리를 내가 어떤 사랑에 종속시키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리를 통해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가, 아니면 진리를 이용해 내 옳음을 증명하고 사람을 지배하며 자기 명예를 높이는가에 따라 같은 진리도 전혀 다른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가라지는 처음부터 겉모습이 완전히 다른 식물이 아니라 알곡과 매우 비슷하게 자란다는 강사의 농사 비유가 의미심장합니다. 영적으로도 가장 위험한 거짓은 처음부터 ‘나는 악이다’라는 얼굴로 오는 거짓이 아닙니다. 선처럼 보이고 진리처럼 보일 때 더욱 위험합니다. 자기 의는 ‘진리를 지키는 열심’처럼 보일 수 있고, 지배욕은 ‘영적 권위’처럼 보일 수 있으며, 사람을 멸시하는 마음은 ‘거룩한 분노’로 포장될 수 있습니다. 자기 교회의 성공을 사랑하면서 그것을 ‘주님의 나라 확장’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자기 주장을 관철하려는 욕망을 ‘말씀에 대한 충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초기에는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열매가 맺히면 차이가 드러납니다. 한쪽에서는 체어리티와 겸손과 쓰임이 나오고, 다른 쪽에서는 멸시와 지배와 분열과 자기 높임이 나옵니다.

 

바로 이 ‘열매’가 강사의 설명에서도 중요합니다. 벼와 피를 어릴 때는 구별하기 어렵지만 추수 때에는 벼가 익어 고개를 숙이고 피는 뻣뻣이 서 있으므로 확실히 구별된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을 곧바로 ‘겸손해 보이는 사람은 알곡, 당당해 보이는 사람은 가라지’라는 외적 성격 판별법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상징적으로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참된 선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자기에게서 선이 나온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반대로 자기애가 깊어질수록 자기 힘, 자기 지식, 자기 의, 자기 공로를 높이 세우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열매가 익을수록 겸손이 깊어지는 것은 매우 천국적인 특징입니다.

 

이것은 앞서 14만 4천과 ‘이긴 자’를 설명할 때 계속 보완했던 부분과도 연결됩니다. 만일 ‘나는 이긴 자다’, ‘나는 높은 영적 단계에 있다’, ‘나는 밝은 빛 가운데 있고 저들은 어둠에 있다’는 의식이 사람 안에서 자기 우월감으로 굳어진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는 기준을 다시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 보아야 합니다. 참된 빛은 자기를 높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빛이 강해질수록 사람은 오히려 자기 안의 proprium을 더 잘 보고, 자신에게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오직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더 깊이 인정합니다. 따라서 ‘가장 밝은 빛’과 ‘가장 깊은 겸손’은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또 하나 중요하게 볼 것은 가라지를 누가 심었느냐는 문제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고 하십니다. 강사는 이것을 마귀가 악의 씨를 심는 것으로 읽습니다. 이 기본 방향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들어오는 악과 거짓의 유입은 지옥에서 오고, 선과 진리의 유입은 주님에게서 천국을 통해 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인간이 단순한 수동적 희생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악한 생각이나 욕망이 들어오는 것 자체가 곧 그 사람의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여 동의하고 자기 것으로 삼을 수도 있고, 말씀의 진리에 어긋난다고 인정하여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마귀가 가라지를 심었다’는 말을 듣고 ‘내 안의 악은 전부 마귀가 넣은 것이니 나는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악한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고 ‘나는 이미 가라지가 되었다’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영적 책임은 유입 자체보다 수용과 동의에 관계합니다. 분노가 올라오는 것과 분노를 사랑하여 복수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다릅니다. 음란한 생각이 지나가는 것과 그것을 붙들어 즐기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은 다릅니다. 거짓된 생각이 떠오르는 것과 그것을 자기 유익 때문에 진리로 확정하는 것도 다릅니다. 거듭남의 싸움은 바로 이 수용의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잘 때’ 원수가 가라지를 심었다는 표현도 영적으로 매우 인상적입니다. 잠은 무의식 상태를 뜻하기도 하지만, 말씀의 상응에서는 영적 경계가 느슨해지고 진리에 대한 주의가 약해진 상태를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이 자기 상태를 살피지 않고 ‘나는 이제 괜찮다’고 안심할 때, 또는 진리를 단지 습관적으로 알고 실제 삶에는 적용하지 않을 때 거짓과 악이 아주 자연스럽게 들어와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반복해서 ‘깨어 있으라’고 하신 말씀과 연결됩니다. 깨어 있음은 종말 날짜를 계산하며 긴장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자기 안의 사랑과 생각의 움직임을 말씀 앞에서 살피는 상태입니다.

 

강사가 가라지를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자들’과 연결하는 부분도 매우 중요합니다. 악은 개인에게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종교 지도자나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거짓을 가르치면 다른 사람의 영적 삶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가르침의 책임은 매우 큽니다. 진리는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주님께 이끌어야 하는데, 그것을 이용해 사람을 자기에게 묶거나 공포로 통제하거나 자기 권위를 절대화한다면 진리의 외형으로 거짓의 쓰임을 행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외적 직분만으로 그 가르침의 영적 질이 보증되지는 않습니다. 그 가르침이 어떤 사랑에서 나오며 어떤 열매를 맺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시흥영성수련원의 강사들을 포함하여 어느 신앙 공동체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일 것입니다. 강의 내용의 일부가 스베덴보리의 해석과 다르다고 해서 그 강사의 내적 상태를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오랜 수도생활과 많은 성경 지식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의 모든 해석이 자동적으로 신적 진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과 가르침을 구별해서 보아야 합니다. 가르침은 말씀의 빛 아래 검토할 수 있지만 사람의 영원한 내면은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가라지를 지금 뽑지 말라’는 비유에서 매우 중요한 태도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허용의 섭리’가 다시 깊게 들어옵니다. 왜 주님께서는 악한 가르침과 거짓된 종교가 존재하도록 허용하시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왜 처음부터 모두 제거하지 않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답의 중심은 자유입니다. 진리가 진리로 받아들여지려면 사람에게 진리를 거절할 가능성도 있어야 합니다. 선을 자유롭게 사랑하려면 악을 선택할 가능성도 허용되어야 합니다. 강제로 선밖에 선택할 수 없는 존재는 선을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인 인간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악을 원하지 않으시지만 인간의 자유 때문에 그것을 일정한 범위 안에서 허용하시며, 허용된 악조차 궁극적으로 선을 위해 굽혀 사용하십니다. 거짓을 만나면서 진리가 더 분명해질 수도 있고, 시험을 통해 자기 안의 숨은 악이 드러나 거절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악도 결국 좋은 것이니 내버려 두자’는 말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에서 가라지는 결국 거두어집니다. 악은 영원히 선과 하나를 이룰 수 없습니다. 다만 분리의 때와 방식이 주님의 지혜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맡겨진 범위에서는 악을 죄로 알고 피하고, 거짓을 분별하며,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를 제어해야 합니다. 교회도 거짓 가르침과 학대와 부정을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을 최종적으로 ‘가라지’라고 판결하여 정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행위와 교리는 분별하되 사람의 영원한 상태에 대한 심판은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1강 12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앞의 겨자씨·누룩·진주와 보화 비유가 빛으로 익어 ‘교회 시대 이긴 자’, 곧 14만 4천이 된 성도들을 보여 준다면 가라지 비유는 그 반대로 어둠 가운데 익어 불법을 행하고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며 마귀의 종이 된 666적 영혼의 정체를 보여 준다고 보는 강사의 해석은 선과 악이 인간의 자유로운 삶 속에서 점차 그 열매를 드러내다가 마지막 추수에서 분리된다는 강한 도덕적·종말론적 경고를 담고 있으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를 특정 사람이나 집단을 미리 ‘가라지’로 판정하는 도식으로 사용하기보다, 선과 악·진리와 거짓이 인간과 교회 안에서 한동안 함께 존재하도록 허용되는 것은 자유와 거듭남을 위한 신적 섭리 때문이며, 시험과 삶을 통하여 각 사랑의 실제 열매가 드러나고, 마지막에는 신적 진리의 빛 앞에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속한 것과 자기애와 거짓에 속한 것이 스스로 분리되는 심판의 아르카나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12부에서는 무엇보다 ‘가만두라’는 주님의 말씀을 깊이 붙들 만합니다. 이것은 무관심의 말씀이 아닙니다. 악을 보고도 방관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인간의 성급한 심판보다 주님의 섭리가 훨씬 깊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늘 보이는 한 장면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시작과 끝, 감추어진 동기와 자유, 리메인스와 앞으로 가능한 모든 상태를 함께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사람은 틀렸다. 뽑아 버리자’고 할 때 주님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곡식의 뿌리까지 보고 계실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자기 자신에게도 위로가 됩니다. 내 안에 가라지 같은 생각과 욕망이 발견된다고 해서 곧 ‘나는 가라지다’라고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발견한 뒤 무엇을 하느냐입니다. 자기 것으로 사랑하고 변호하면 그것은 점점 뿌리를 깊게 내리지만, ‘이것은 주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라고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 거절한다면 그것이 드러난 것 자체가 오히려 거듭남의 기회가 됩니다. 밭에 가라지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된 것은 농사가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 이제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가 보이기 시작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열매를 분별할 수는 있지만 영혼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거짓은 거짓이라고 말해야 하고 불법은 불법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저 사람은 가라지다’라고 최종 판정을 내리는 순간 우리는 주님께 속한 추수꾼의 자리를 인간이 차지하려 할 수 있습니다. 비유에서 최종적인 분리는 종들이 아니라 ‘추수 때’에 천사들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일은 먼저 자기 밭을 돌보고, 주님께서 주신 씨가 좋은 열매를 맺도록 하며, 다른 사람에게도 가능한 한 진리와 선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읽으면 가라지 비유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위한 무서운 종말 비유가 아니라 오히려 겸손을 배우게 하는 말씀으로 바뀝니다. 알곡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강사의 농사 비유처럼, 참으로 주님의 선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기가 알곡이라고 큰소리치기보다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며 더욱 낮아집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서 아직 발견되는 가라지를 보며 다른 사람의 연약함도 오래 참을 수 있게 됩니다. 어쩌면 바로 그 겸손과 체어리티가 ‘나는 알곡이다’라는 자기 확신보다 훨씬 더 분명한 알곡의 열매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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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주여와 불법 : 가라지는 왜 교회 밖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자라는가

1강 13부에서는 가라지의 정체를 한층 더 깊이 파고듭니다. 12부에서 강사는 주님께서 가라지를 ‘악한 자의 아들들’이라 하셨고, 특히 그들을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설명하신 데 주목했습니다. 이제 강사는 그 가운데 ‘불법을 행하는 자’라는 표현을 붙들고 마태복음 7장 21절부터 23절로 이동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그리고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말씀입니다. 강사가 이 본문을 가라지 비유와 연결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가라지는 반드시 교회 밖에서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여 주여’라고 부르고 심지어 종교적 능력과 활동까지 보이면서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앞서 가라지를 다른 성도들을 미혹하여 넘어지게 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며 명예욕·교만·정욕에 지배되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설명한 뒤 곧바로 마태복음 7장의 이 말씀을 연결합니다.

 

이 연결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역시 종교의 외적 형태와 사람의 실제 내적 생명을 엄격하게 구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님을 입으로 고백하고, 성경을 알고, 예배하고, 기도하며,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친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내적 생명이 천국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며, 그 사랑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입니다. 신앙은 입술의 고백이나 지적 동의만으로 살아 있는 신앙이 되지 않습니다. 신앙의 진리가 의지 안에서 체어리티와 결합하고 실제 생활로 나타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주여 주여’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함’ 사이의 구별은 바로 신앙과 삶,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의 결합 문제로 들어갑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마태복음 7장의 사람들이 주님을 전혀 모르는 세속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고 말합니다. 외적으로만 보면 상당히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의 종교적 활동 목록을 인정의 근거로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십니다. 바로 이 대목 때문에 가라지 비유는 ‘교회 사람 대 세상 사람’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있을 수 있으며, 더 깊이 들어가면 한 사람의 종교생활 안에도 주님에게서 온 것과 proprium에서 나온 것이 오랫동안 뒤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엄중한 말씀입니다. 사람은 종교적 활동을 하면서도 그 활동의 중심에 자기애를 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하면서 사람의 구원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정을 사랑할 수도 있고, 봉사하면서 쓰임 자체보다 칭찬받는 것을 더 기뻐할 수도 있으며, 진리를 가르치면서 진리 자체보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더 큰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악을 책망하면서도 상대방의 회복보다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데 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외적 행위만 보면 모두 종교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움직이는 지배적 사랑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 행위의 영적 질은 전혀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때문에 행위만 떼어 놓고 선악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행위의 생명은 그 안에 있는 의도와 사랑입니다. 같은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더라도 한 사람은 이웃의 필요 때문에 줄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사람들에게 선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줄 수 있습니다. 외적 행위는 같아도 내적 생명은 다릅니다. 물론 우리는 다른 사람의 내적 동기를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만이 완전하게 아십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말씀의 빛 아래 끊임없이 살펴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했는가?’뿐 아니라 ‘나는 왜 이것을 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가라지 비유가 더욱 무서워지는 동시에 더욱 유익해집니다. 가라지는 처음부터 알곡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강사가 벼와 피의 예를 들어 설명했듯이 초기에는 매우 비슷해서 쉽게 구별되지 않다가 열매가 익을 때 차이가 분명해집니다. 영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애는 처음부터 ‘나는 자기애다’라고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진리를 지키기 위하여’라는 매우 종교적인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열매가 나타나면 그 사랑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참으로 주님에게서 온 열심이라면 체어리티와 겸손과 인내와 쓰임을 낳지만, 자기애에서 나온 열심이라면 결국 경쟁과 지배와 멸시와 분열을 낳습니다.

 

그래서 ‘불법’의 가장 깊은 의미를 단순한 규칙 위반으로만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주님의 법 전체의 중심은 사랑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두 계명에 율법과 선지자가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가장 깊은 불법은 사랑의 질서를 뒤집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하고, 이웃의 선보다 자기 유익을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을 종교적 언어로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외적인 무법보다 훨씬 알아보기 어려운 불법입니다.

 

이렇게 보면 ‘주여 주여’라는 고백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함’의 차이는 말과 행동의 단순한 대비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진리를 알고 인정하는 이해의 차원과 관계하고, 아버지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그 진리가 의지와 사랑 안으로 들어가 실제 생명이 되는 차원과 관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신앙의 진리가 체어리티의 선과 결합해야 합니다. 진리가 선과 분리되어 머리에만 있을 때 사람은 많은 것을 알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진리가 그의 생명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반대로 진리가 선과 결합하면 사람은 알고 있는 것을 행하게 되고, 점차 그 행함 자체를 사랑하게 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 강의가 계속 강조해 온 ‘행실’과 ‘연단’의 중요성을 긍정적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단순히 교리를 알고 구원을 고백하는 데서 멈추지 말고 실제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야 한다는 강조입니다. 씨가 좋은 밭에 떨어졌다면 열매를 맺어야 하고, 누룩이 들어갔다면 가루 전체가 부풀어야 하며, 진주를 발견했다면 자기 소유를 내려놓는 실제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라지 비유와 마태복음 7장의 연결은 앞의 여러 비유를 거꾸로 비추어 줍니다.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무엇이 자라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주의가 하나 필요합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를 발견하겠다고 다른 사람의 삶을 끊임없이 검사하기 시작하면 가라지 비유의 방향이 뒤집힐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먼저 자기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어야 합니다. ‘저 목사는 불법을 행하는 자인가?’, ‘저 교단은 가라지인가?’, ‘저 사람은 666에 속했는가?’를 찾기 시작하면 말씀의 빛이 밖으로만 향합니다. 그러나 ‘내가 주여 주여 하면서 실제로는 주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는 부분은 없는가?’, ‘내 종교적 열심 안에 자기애와 명예욕이 숨어 있지는 않은가?’, ‘내가 진리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진리를 가진 나를 사랑하는가?’라고 물으면 비로소 말씀이 내 속 사람을 비추기 시작합니다.

 

이 차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최후의 심판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내리는 판결이 아니라 신적 진리가 각 사람의 내적 상태를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영계에서는 지상에서 사용하던 외적인 가면을 영원히 유지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실제로 사랑하는 것이 점차 밖으로 드러나고, 그 사랑과 같은 공동체로 스스로 향하게 됩니다. 천국과 지옥은 단순히 외부에서 선고받아 보내지는 장소라기보다 각 사람이 지상에서 자기 생명으로 만든 지배적 사랑이 드러나 그 사랑과 상응하는 공동체와 결합하는 상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추수’는 주님께서 임의로 사람을 알곡과 가라지로 나누시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 안에서 이미 형성된 사랑의 질이 신적 진리의 빛 가운데 완전히 드러나는 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불에 던진다’는 말씀도 하나님께서 분노하여 사람을 문자적인 불 속에 집어넣으시는 장면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불’은 사랑을 나타내며, 좋은 의미에서는 주님 사랑과 천국적 사랑을, 반대 의미에서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욕망을 나타냅니다. 지옥의 불은 하나님께서 밖에서 가하시는 물리적 형벌의 불이라기보다 악한 영들이 자기 생명으로 삼은 악한 사랑의 타오르는 욕망입니다. 지배하고 싶고, 복수하고 싶고,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고 싶은 사랑이 그들의 생명 자체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라지가 불에 던져진다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는 사람이 평생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사랑한 악한 사랑이 마침내 그의 영원한 상태로 드러나는 엄중한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이해하는 방식에도 중요한 차이를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너는 마음에 들지 않으니 지옥으로 가라’고 임의적으로 판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고 끊임없이 선과 진리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끝까지 자기애와 악을 자기 생명으로 선택한다면 주님께서는 그 선택 자체를 강제로 없애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심판에는 언제나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함께 있습니다. 주님은 지옥을 원하지 않으시지만 인간이 선택한 사랑의 영원한 결과를 허용하십니다.

 

여기서 강사의 ‘적그리스도·거짓 선지자·666은 악으로 익은 가라지들’이라는 해석도 다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강사는 계시록 13장의 적그리스도를 ‘인류 역사상 최고의 적그리스도’로 보고, 거짓 선지자와 666을 그와 연결하여 ‘악으로 익은 가라지’라고 정리합니다. 이것은 강사의 미래주의적 종말론 체계에서는 매우 중요한 연결입니다. 앞의 14만 4천이 빛으로 가장 잘 익은 알곡이라면, 666은 어둠으로 가장 깊이 익은 가라지라는 대칭 구조입니다. 강의 처음부터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을 바로 이 14만 4천과 666을 해석하는 중요한 열쇠로 제시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대칭 구조의 영적 통찰은 살리면서도 그것을 미래의 특정 두 집단에 고정하지 않습니다. ‘14만 4천’과 ‘666’은 자연적인 인원수나 특정 정치적 집단의 명단이라기보다 서로 대립하는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하나는 선과 진리가 주님 아래 질서를 이루는 교회의 충만한 상태를, 다른 하나는 신적 진리가 자연적 인간과 자기애에 의해 왜곡되고 훼손된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계시록의 전쟁은 먼 미래에만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지금 한 사람의 내면에서도 일어나는 싸움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가 내 삶을 다스릴 것인가, 아니면 내 욕망이 진리를 자기 편으로 끌어다 사용할 것인가 하는 싸움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적그리스도’라는 말도 가장 깊은 의미를 얻습니다. 단순히 미래 어느 한 악한 세계 통치자만 찾으면 나는 그 문제에서 빠져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 내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주님의 진리를 알면서 자기 욕망 때문에 거절할 때, 체어리티보다 자기 의를 높일 때, 주님의 이름을 사용하면서 사람을 자기에게 종속시키려 할 때 그리스도께 반대되는 원리가 내 안에서도 작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곧 ‘내 안에 적그리스도가 있다’는 식으로 과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핵심은 계시록의 악을 언제나 외부 인물에게만 투사하지 말고 그것이 표상하는 악과 거짓의 원리를 자기 거듭남의 문제로도 읽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마태복음 7장의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는 고백은 영적 은사와 체험을 바라보는 데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놀라운 체험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내적 상태를 보증하지 않습니다. 예언이나 치유나 방언이나 환상이나 특별한 영적 경험 자체가 곧 거듭남의 척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이 참된 것인지 여부와 별개로,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결정하는 것은 그가 어떤 사랑을 자기 생명으로 만들었느냐입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가, 자기애와 세상 사랑인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영계 체험이 방대한데도 그의 저작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돌아가는 중심이 ‘어떤 놀라운 영적 현상을 경험하라’가 아니라 악을 죄로 알고 피하고 선을 행하라는 데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영계를 보고 천사와 대화했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을 천국적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영적 지식을 많이 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진리를 많이 알수록 그것을 살지 않을 때 책임이 더 무거워질 수 있습니다. 진리가 이해 안에 많아졌지만 의지가 변화하지 않으면 그 지식은 자기 의와 교만을 강화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사경회가 영적 성장과 연단을 강조하는 데서 가장 귀하게 살릴 부분은 ‘체험보다 삶’, ‘고백보다 행함’, ‘지식보다 실제 변화’라는 방향입니다. 다만 그 행함마저 자기 공로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의 중요한 보완입니다. ‘나는 좁은 길을 걸었다’, ‘나는 연단을 통과했다’, ‘나는 계명을 지켰다’, ‘나는 이긴 자가 되었다’가 새로운 ‘주여 주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선한 일을 행해야 하지만 그 선의 근원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마치 자기 힘으로 행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하되 실제 선을 행할 수 있는 힘과 의지와 생명은 모두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가라지의 가장 미묘한 형태는 어쩌면 ‘종교적 proprium’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적 proprium은 돈과 권력과 쾌락을 자랑하지만 종교적 proprium은 진리와 경건과 희생과 연단을 자랑합니다. 전자는 알아보기 쉽지만 후자는 훨씬 어렵습니다. 심지어 ‘나는 겸손하다’는 생각으로 교만할 수도 있고, ‘나는 자기부인하는 사람이다’라는 자기 정체성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외적인 악만이 아니라 선한 것처럼 보이는 자기 동기까지 주님 앞에 비추어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 동기를 의심하며 불안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은 자기 내면을 끝없이 분석하여 완벽한 동기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분명히 보여 주시는 악을 죄로 인정하고 실제로 거절하며, 맡겨진 쓰임을 성실히 행하는 것입니다. 동기에 불순물이 섞여 있음을 발견하면 그것도 주님께 맡기고 다시 선을 선택하면 됩니다. 거듭남은 한 번에 순수해지는 과정이 아니라 선과 진리가 점차 지배권을 얻어 가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보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말씀은 단순히 마지막 심판 날 어떤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무서운 선고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안에서 무엇이 주님과 결합될 수 없으며 무엇이 떠나가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미움은 주님과 결합될 수 없고, 거짓은 주님과 결합될 수 없으며, 지배욕과 자기 공로와 악의 즐거움도 주님과 결합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 가운데 ‘떠나가라’는 말씀을 먼저 들어야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내 안의 악과 거짓입니다. 사람을 쫓아내기 전에 악을 쫓아내야 하고, 다른 사람을 가라지로 판정하기 전에 내 안에서 주님의 생명과 결합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주님께서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고 하신 말씀과도 균형을 이룹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오래 참고 성급한 최종 심판을 삼가야 하지만, 자기 안에서 분명히 죄임을 알게 된 악에 대해서는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과 ‘악’을 구별해야 합니다. 사람은 사랑하고 악은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정죄하지 않으면서도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고, 사람의 구원을 바라면서도 그 사람의 해로운 행위를 막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체어리티와 진리가 함께 가는 방식입니다.

 

1강 13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가라지를 ‘불법을 행하는 자들’로 설명한 주님의 말씀을 마태복음 7장의 ‘주여 주여’ 하는 자들과 연결하고, 나아가 적그리스도·거짓 선지자·666을 악으로 완전히 익은 가라지의 모습으로 이해하는 강사의 해석은 단순한 종교적 고백이나 능력이나 직분이 사람의 참된 영적 상태를 보증하지 않으며 결국 삶의 열매가 드러나야 한다는 엄중한 경고를 담고 있고,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를 미래의 특정 악인들을 찾아내는 도식으로만 읽기보다 신앙의 진리가 체어리티의 선과 결합하지 않은 채 자기애와 명예욕과 지배욕을 섬기게 될 때 종교 자체가 가라지의 외형을 취할 수 있다는 경고로 받아들이며, 마지막 심판은 주님께서 임의로 사람을 정죄하시는 사건이 아니라 각 사람이 자유 가운데 자기 생명으로 만든 지배적 사랑이 신적 진리의 빛 가운데 완전히 드러나 선은 선과, 악은 악과 결합하는 영적 분리의 아르카나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번 13부에서 특히 마음에 남는 것은 ‘주여 주여’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불신앙인의 말이 아닙니다. 주님을 알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의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교회 밖보다 먼저 교회 안을 향하며, 더 먼저는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자신의 내면을 향합니다. ‘나는 주님의 이름을 얼마나 많이 부르는가?’보다 ‘주님의 뜻이 내 삶의 어느 부분까지 들어와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기도할 때의 나와 가족을 대할 때의 내가 얼마나 같은가, 예배할 때의 나와 돈을 사용할 때의 내가 얼마나 같은가, 말씀을 설명할 때의 나와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을 대할 때의 내가 얼마나 같은가를 묻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 사경회가 그토록 강조하는 ‘익는다’는 표현을 더욱 깊게 만들어 줍니다. 무엇이 익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종교생활을 오래 했다는 것 자체가 익음은 아닙니다. 말씀 지식이 많아졌다는 것도 그 자체로 익음은 아닙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자기 의가 익을 수도 있고 체어리티가 익을 수도 있습니다. 연단을 많이 받은 뒤 사람이 더 딱딱해질 수도 있고 더 부드러워질 수도 있습니다. 진리를 많이 배운 뒤 다른 사람을 더 쉽게 정죄할 수도 있고 더 오래 품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 열매가 무엇이 자라고 있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알곡과 가라지의 가장 안전한 분별은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분류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일 것입니다. ‘나는 무엇으로 익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주님을 알아 갈수록 더 겸손해지고 있는가, 진리를 알아 갈수록 사람을 더 사랑하게 되는가, 연단을 통과할수록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더 이해하게 되는가, 자기부인을 배울수록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게 되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겨자씨가 자라고 누룩이 퍼지며 진주의 가치가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반대로 종교생활이 깊어질수록 자기 우월감과 정죄와 지배욕이 함께 커지고 있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 주님의 말씀 앞에 다시 서야 합니다.

 

결국 ‘주여 주여’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로 옮겨 가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입술에서 삶으로, 이해에서 의지로, 신앙에서 체어리티로, 자기 공로에서 주님의 은혜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 인간이 가장 마지막까지 내려놓아야 할 것은 어쩌면 ‘나는 이제 알곡이다’라는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알곡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강사의 비유처럼, 주님의 생명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기 선을 자랑하기보다 ‘내 안에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에게서 온 것입니다’라고 인정하게 됩니다. 그 겸손 속에서 ‘주여 주여’라는 입술의 고백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함’이라는 삶이 마침내 하나가 됩니다. 바로 그것이 가라지 비유가 우리를 다른 사람의 심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거듭남으로 돌려세우는 가장 깊은 지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 14

그물 비유와 세상 끝’ : 교회라는 그물은 왜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를 함께 품는가

1강 14부에서는 마태복음 13장의 마지막 비유인 ‘그물 비유’가 등장합니다. 강사는 이 비유를 앞의 모든 비유를 종합하고 정리하는 ‘결론’으로 봅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강사는 이것을 ‘추수의 원리’, 특히 지금까지 설명해 온 ‘천국 건설 사업의 결론적 진리’이자 종말론적 진리로 규정합니다. 마지막 때를 ‘추수 때’라고 해석해 왔듯이, 그물 비유 역시 알곡과 가라지를 분리하는 추수와 동일한 원리를 물고기의 형상으로 다시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강사의 해석은 매우 명료합니다. ‘바다’는 세상이고, ‘물고기’는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바다에 던져진 ‘그물’은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하여 교회가 시작되었고, 교회는 세상이라는 바다 속에 그물을 던져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물 속에는 좋은 물고기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가 함께 들어옵니다. 그리고 강사의 종말론적 시간표에서는 교회 시대가 끝나고 주님께서 지상 재림하실 때 그물이 완전히 걷어지며, 그 안에 들어 있던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가 분리됩니다. 강사는 이것을 알곡은 곡간에 모으고 쭉정이는 불사르는 추수의 원리와 동일한 구조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먼저 매우 중요한 점 하나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강사는 ‘교회 안에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와 ‘구원받은 상태’ 자체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그물 안에는 각종 물고기가 있습니다. 즉 교회라는 외적 울타리 안에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천국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가라지 비유와 마태복음 7장의 ‘주여 주여’ 하는 자들에 대한 설명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교회 안에도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있고, 그물 안에도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가 함께 있습니다. 외적인 교회 소속보다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떤 생명의 사람이 되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교회는 두 차원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외적인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내적인 교회입니다. 사람이 세례를 받고, 교회에 출석하고, 교리를 알고, 예배에 참여한다는 것은 외적인 교회의 형식 안에 들어와 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인 교회는 주님을 인정하고 말씀에서 진리를 받아 그 진리를 선한 삶으로 살아갈 때 그 사람 안에 세워집니다. 따라서 외적으로 같은 교회 안에 있어도 내적으로는 매우 다른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물’이라는 형상은 매우 적절합니다. 그물은 물고기를 잡는 순간부터 종류를 완벽하게 구별하지 않습니다. 일단 함께 모읍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이미 완성된 천사들만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아직 거듭남의 초기 단계에 있는 사람도 있고, 깊이 성장한 사람도 있으며, 말씀을 진실하게 받아들이려는 사람도 있고, 종교를 자기 목적에 이용하려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모두 하나의 그물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연계에서 곧바로 완전한 천국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교회를 바라보는 데 상당히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교회 안에 불완전한 사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교회가 왜 이 모양인가?’ 하며 곧바로 교회 자체를 부정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교회 안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안전하다’고 안심해서도 안 됩니다. 그물의 목적은 단지 물고기를 잡아 두는 데 있지 않고 마지막에는 종류가 드러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구원의 울타리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진리를 배우고 자유롭게 그 진리에 응답하며 자기의 실제 영적 상태를 형성하는 장소입니다.

 

여기서 강사의 설명과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에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생깁니다. 강사는 그물을 오순절부터 지상 재림까지 존재하는 ‘교회 시대’의 교회로 이해하고, 그 끝에서 자연적 역사 속의 마지막 분리가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세상 끝’은 지구의 물리적 소멸이나 교회 조직의 단순한 종료가 아니라, 한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가 더 이상 살아 있는 결합을 이루지 못하여 그 교회가 영적으로 끝에 이른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은 자연계에서 모든 사람을 한 장소에 모아 판결하는 사건이 아니라 영계에서 각 사람과 각 영적 사회의 실제 상태가 신적 진리의 빛 가운데 드러나 분리되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그물이 ‘가득하다’는 표현도 단순히 교회의 사람 수가 어느 정원까지 차면 끝난다는 뜻으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영적으로는 교회의 상태가 충만해지고, 그 안에 있던 선과 악의 실제 성격이 더 이상 감추어질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드러나는 상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 ‘충만함’과 ‘완성’은 어떤 상태가 그 끝까지 진행되었음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도 충분히 성숙하고 악도 충분히 성숙하여 더 이상 하나의 외적 형태 아래 섞여 있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바로 그때 분리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앞서 가라지 비유에서 보았던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와 정확히 맞닿습니다. 처음에는 구별하기 어렵지만 마지막에는 열매가 드러납니다. 그물 비유에서도 물속에 있을 동안에는 모든 물고기가 한 그물 안에 함께 있지만, 물가로 끌어올린 뒤에는 좋은 것과 못된 것이 구별됩니다. 이 두 비유가 서로 다른 형상으로 동일한 영적 원리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기 때문에 사람의 내적 상태가 충분히 형성되기 전에 억지로 최종 분리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이 ‘기다림’은 신적 무관심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악을 방치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유 가운데 자기 사랑의 방향을 형성할 수 있도록 허용하시는 섭리입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워도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자유가 있고, 선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주님과 이웃을 위해 행할 수도 있고 자기 명예를 위해 행할 수도 있습니다. 이 자유로운 선택들이 반복되면서 사람의 지배적 사랑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사랑이 감추어지지 않고 드러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를 이해하는 기준도 중요해집니다. 좋은 물고기는 교리 시험에 더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을 뜻하지 않고, 못된 물고기는 특정 교파에 속한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가장 깊은 기준은 사람의 지배적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의 선을 기뻐하는 사랑이 중심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과 세상을 모든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중심인가입니다. 진리 역시 그 사랑을 섬깁니다. 선한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진리를 자기 삶을 고치고 이웃에게 쓰임이 되기 위해 사용하지만, 자기애 안에 있는 사람은 진리를 자기 우월성과 지배를 위해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그물 비유는 교리와 삶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교회라는 그물 안에는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찬송을 부르며 비슷한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동일한 종교적 외형 아래에서 무엇을 사랑하는지는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예배를 통해 주님께 가까이 가기를 원하고, 다른 사람은 예배를 통해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할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은 목회를 이웃을 위한 쓰임으로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목회 직분의 권위와 존경을 더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같은 그물 안에 있지만 내적으로는 다른 방향으로 자라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교회 안에서 ‘누가 좋은 물고기이고 누가 나쁜 물고기인가’를 판정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 비유에서도 최종적인 분리를 행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천사들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천사들도 자기 판단으로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에 따라 봉사하는 것입니다. 심판의 주체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미리 판결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가르치고, 악을 악이라고 분명히 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회개하고 선을 선택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목회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는 문을 열어 사람을 받아들이는 그물이어야 하지만 동시에 악을 선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사랑하되 악은 분명히 거절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그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도 잘못이고, 어떤 악을 범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영혼 전체를 ‘못된 물고기’로 확정해 버리는 것도 잘못입니다. 행위와 교리는 분별할 수 있지만 사람의 가장 깊은 내적 상태와 영원한 가능성은 주님만이 아십니다.

 

이것은 12부에서 살펴본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한다’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분별해야 하지만 성급하게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 없는 사랑은 모든 것을 용납하는 감상주의로 흐를 수 있고, 사랑 없는 진리는 사람을 잘라내는 냉혹한 심판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천국적 질서는 체어리티와 진리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악은 악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사람의 구원을 원하고, 거짓은 거짓이라고 밝히면서도 그 사람을 멸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강사는 이 그물 비유를 ‘천국 건설 사업의 결론적 진리’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강사의 전체 체계에서는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마음밭이 드러나고, 겨자씨에서 성장하며, 누룩에서 행실 전체가 변화되고, 진주와 보화에서 자기 소유를 버리고 하나님의 생명을 얻으며, 가라지 비유에서 악의 정체가 드러난 뒤, 마지막 그물 비유에서 모든 상태가 종합적으로 추수된다는 구조입니다. 강사의 관점에서는 마태복음 13장이 사실상 구원론·성화론·종말론 전체를 한눈에 보여 주는 하나의 축소판인 셈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 일곱 비유 전체를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라는 관점에서 연결해 보면 상당히 풍성한 그림이 나옵니다. 먼저 씨가 뿌려집니다. 신적 진리가 사람에게 옵니다. 그 진리를 어떤 상태로 받아들이는지가 드러납니다. 받아들여진 진리는 겨자씨처럼 성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누룩처럼 삶 전체에 스며들어야 합니다. 사람이 더 귀한 천국적 선을 발견하면 proprium의 소유를 점차 내려놓게 됩니다. 동시에 가라지 같은 자기애와 거짓의 상태가 드러나며 영적 싸움이 일어납니다. 마침내 사람의 지배적 사랑이 무엇인지 분명해집니다. 이것을 개인의 차원에서 하나의 ‘추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구별이 있습니다. 거듭나는 사람에게서 악한 성향이 완전히 소멸하여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악으로부터 떼어 놓으시고 그것이 지배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사람은 여전히 자신의 proprium에서 올라오는 악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영원히 주님의 보호와 생명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물고기가 된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악과 완전히 무관한 완전한 존재가 되었다’고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천국의 사람은 자기에게서 선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이 점은 그물 비유에서 ‘좋은 것’이라는 말을 읽을 때 특히 중요합니다. 선은 인간에게서 자생하지 않습니다.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선을 생산하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그 선에 따라 살기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천국의 사람은 자기 선을 자기 공로로 여기지 않습니다.

 

반대로 ‘못된 것’이라는 표현도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태어날 때부터 나쁘게 만드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인간을 천국을 위해 창조하시고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유를 가지고 있으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지속적으로 거절하고 자기애와 악을 자기 생명으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선택된 사랑이 점점 지배적 사랑으로 굳어지면 사후에는 그 사랑과 같은 공동체를 기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분리는 주님께서 임의로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만들어 놓고 나누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 가운데 받아들인 생명의 질이 완전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낸다’는 말씀도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영계에서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오랫동안 숨길 수 없습니다. 자연계에서는 체면과 사회적 규범과 이해관계 때문에 실제 사랑과 다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후에는 겉 사람의 외적 형식이 점차 벗겨지고 속 사람의 실제 사랑이 나타납니다. 자기가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게 되고, 같은 종류의 즐거움을 가진 공동체를 찾아갑니다. 그래서 심판은 외부에서 낯선 판결이 내려오는 것이라기보다 그 사람이 이미 자기 생명으로 만든 상태가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세상 끝’의 의미에도 중요한 빛을 줍니다. 자연적 의미에서 ‘세상 끝’이라고 하면 지구의 마지막 날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에서 ‘세상’ 또는 ‘시대’의 끝은 한 교회의 완성된 마지막 상태를 뜻합니다.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의 결합이 무너지고 외적 종교 형식만 남았을 때 그 교회는 끝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 끝은 모든 것이 끝난다는 뜻이 아니라 새 교회가 시작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었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심판 후에 새 질서를 세우십니다.

 

이렇게 보면 그물의 걷힘은 파괴보다 분별과 새 질서의 시작입니다. 좋은 물고기가 분리되는 것은 그들을 위한 새로운 질서가 열리는 것이고, 악이 분리되는 것은 더 이상 선을 억압하고 혼란시키지 못하도록 경계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심판은 천국의 관점에서 단지 공포스러운 종말이 아니라 해방이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선과 악이 뒤섞여 있어 선한 사람들이 억압받던 상태가 끝나고, 각자가 자기의 실제 사랑에 맞는 질서 안으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경험됩니다. 어느 악이 오랫동안 선한 의도를 방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주님을 섬기고 싶어 하면서도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 때문에 흔들릴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둘이 섞여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한다’와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가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시험을 통하여 둘의 차이가 점점 드러납니다. 어느 순간 사람은 선택해야 합니다. 인정받지 못해도 선을 계속 행할 것인가, 아니면 인정이 없으면 선을 포기할 것인가. 이런 시험을 통해 무엇이 진짜 사랑인지 분리됩니다. 작은 의미에서 하나의 그물이 걷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말론을 개인의 거듭남과 연결한다고 해서 계시록과 마지막 심판을 단순한 심리학으로 축소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같은 신적 질서가 여러 층위에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개인 안에서 일어나는 선과 악의 분별, 교회 전체에서 이루어지는 진리와 거짓의 분리, 영계에서 이루어지는 마지막 심판은 서로 다른 규모이지만 하나의 신적 질서를 반영합니다. 주님의 질서는 선과 악이 영원히 혼합된 상태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자유를 위해 한동안 허용하시지만 끝에는 각각 그 본질대로 질서를 세우십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이 그물 비유가 요한계시록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최종 정리라는 점도 중요합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을 통하여 ‘14만 4천’과 ‘666’이라는 계시록의 두 중요한 숫자의 정체를 준비시키고, 마지막 그물 비유를 통해 ‘추수 때 곧 세상 끝’을 정리한 뒤 계시록 해설로 나아갑니다. 강사 자신도 14만 4천을 가장 잘 익은 알곡, 666을 가장 악하게 익은 쭉정이로 대비하면서 계시록 전체를 ‘추수 때에 대한 이야기’라고 이해합니다.

 

이 구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받을 때에는 강사의 핵심 문제의식은 살리되 숫자와 집단의 문자적 고정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14만 4천을 정확한 영적 엘리트 숫자로, 666을 특정 집단이나 개인들의 명단처럼 읽기 시작하면 계시록의 보편적 영적 의미가 좁아질 수 있습니다. 14만 4천은 선과 진리의 충만한 교회 상태를, 666은 진리가 자연적 인간과 자기애에 의해 왜곡된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읽을 때 그 말씀은 어느 한 시대의 특정 사람들에게만 해당되지 않고 모든 시대의 교회와 인간에게 살아 있는 말씀으로 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물 비유가 주는 가장 중요한 균형일 수 있습니다. 그물은 넓습니다. ‘각종 물고기’를 모읍니다. 교회의 사명은 처음부터 사람을 세밀히 골라내어 ‘너는 올 자격이 있고 너는 없다’고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주님의 진리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고, 사람은 자유롭게 응답할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교회는 그물을 던지는 일을 맡았지 최종 심판의 자리를 맡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선교와 목회에 상당히 중요한 원리입니다. 교회는 완성된 사람만 받아들이는 ‘천국 우등생 모임’이 아니라 죄인들이 말씀을 듣고 회개하며 거듭날 수 있도록 열려 있는 장소여야 합니다. 지금 돌밭인 사람이 나중에 좋은 밭이 될 수 있고, 지금 많은 가시를 가진 사람도 주님의 섭리 가운데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물은 넓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물 안에 들어온 것으로 모든 과정이 끝난 것도 아닙니다. 말씀을 받아 실제 생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이 사경회의 ‘익은 열매’라는 강조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교회 안에 들어오는 것이 시작이라면 익는 것은 과정이고 추수는 그 상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의 질문은 ‘나는 교회 안에 있는가?’에서 멈추지 않고 ‘나는 어떤 물고기가 되어 가고 있는가?’, 더 정확히는 ‘어떤 사랑이 내 생명의 중심으로 익어 가고 있는가?’가 되어야 합니다. 종교생활의 기간이나 직분보다 사랑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이 점에서 그물 비유는 아주 조용하지만 날카로운 자기 점검을 요구합니다. 나는 교회라는 그물 안에서 무엇을 얻고 있는가? 진리를 받아 더 겸손해지고 있는가, 아니면 더 쉽게 사람을 판단하게 되는가?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다른 사람에게 쓰임이 되는가, 아니면 자기 신앙 경력을 특권처럼 생각하는가? 연단을 받을수록 부드러워지는가, 아니면 강퍅해지는가? 하나님을 알아 갈수록 ‘주님께서 하셨다’는 고백이 깊어지는가, 아니면 ‘나는 이만큼 했다’는 자기 공로가 커지는가? 바로 이러한 열매가 그물 안에서 어떤 생명이 자라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1강 14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바다를 세상, 물고기를 세상 사람들, 그물을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시작된 교회, 그물이 가득하여 끌어올려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를 나누는 장면을 마지막 때의 추수와 지상 재림 이후의 심판으로 읽는 강사의 해석은 교회라는 외적 울타리 안에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 사람의 영적 상태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는 실제 열매와 생명이 드러나야 한다는 엄중한 결론을 제시하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물 비유를 한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외적으로 함께 섞여 있던 선과 악, 참된 신앙과 거짓된 신앙이 신적 진리의 빛 가운데 그 실제 사랑에 따라 분리되는 마지막 심판의 아르카나로 읽고, 개인에게서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서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과 proprium의 자기애가 점차 구별되어 마침내 어느 사랑이 지배적 생명이 되었는지가 드러나는 거듭남의 완성이라는 차원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강의 이 마지막 비유에서 가장 깊이 붙들 만한 것은 ‘각종 물고기’라는 표현일 것입니다. 그물은 처음부터 좋은 물고기만 골라 잡지 않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구원 의지가 얼마나 넓은지를 보여 주는 아름다운 그림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완성된 사람만 부르지 않으십니다. 아직 혼란스러운 사람도, 많은 악한 습관을 가진 사람도, 진리를 거의 모르는 사람도 부르십니다. 교회의 문은 거듭난 사람에게만 열리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야 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천국적으로 될수록 사람을 받아들이는 문은 넓고, 악과 거짓을 분별하는 진리는 분명하며, 사람에 대한 최종 심판은 주님께 맡기는 태도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사랑 때문에 진리를 흐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사람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물의 교회가 추수 때까지 감당해야 할 매우 어려운 균형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물 자체도 목적이 아닙니다. 교회 조직도, 수도공동체도, 신학 체계도, 사경회도 모두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사람을 주님께 이끌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돕는 ‘그물’입니다. 만일 사람이 그물 자체를 사랑하여 주님보다 자기 교회와 자기 체계와 자기 공동체를 더 사랑하게 된다면 수단이 목적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좋은 그물은 물고기를 자기에게 묶어 두기 위한 그물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으로 이끄는 그물이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1강 전체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겠습니다. ‘밝은 진리’, ‘모형적 진리’, ‘신인합일’, ‘광야 연단’, ‘익은 열매’, ‘이긴 자’, ‘14만 4천’, ‘666’, 그리고 마지막 ‘그물’까지 매우 독특하고 강한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체계가 가진 장점은 분명합니다. 신앙을 지식으로 끝내지 않고 실제 성화와 삶의 변화로 밀어붙이는 힘이 있습니다.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체계가 지나치게 자연적 시간표와 영적 등급, 특정 숫자와 집단에 고정될 때 말씀의 더 깊고 보편적인 속뜻을 열어 줍니다.

 

결국 모든 비유의 마지막 질문은 하나로 모입니다. ‘나는 어느 체계를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씨는 열매가 되어야 하고, 겨자씨는 나무가 되어야 하며, 누룩은 전체에 스며들어야 하고, 진주를 발견하면 proprium의 소유를 내려놓아야 하며, 가라지 같은 악은 주님의 빛 앞에서 드러나야 하고, 마지막에는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의 차이가 생명으로 나타납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실제 삶이 되는가를 묻습니다.

 

그래서 1강의 마지막에서 가장 안전하게 남길 수 있는 기도는 아마 ‘주님, 저를 좋은 물고기라고 여기게 해 주십시오’가 아니라 ‘주님, 제 안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에 속하지 않은 것을 보여 주시고, 그것을 죄로 알고 거절하게 하시며, 제가 어떤 영적 반열에 들었는지를 계산하기보다 오늘 맡겨진 사람에게 선한 쓰임이 되게 해 주십시오’일 것입니다. 그때 그물 비유는 다른 사람을 골라내는 종말의 비유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주님의 생명을 받아 어떤 사람으로 익어 가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으로 살아납니다.

 

 

 

SY.48,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2강 (7/27),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2강 1부‘모형적 진리’와 구원의 여정 - 출애굽은 지나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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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2.심화

 

1. ‘공주농아교회를 생각하며

 

이 글을 읽으면서 반대로 농아(聾啞)인들, 그러니까 못 듣고, 말 못 하는 분들 생각과, 그분들을 대상으로 목회하시는, 저의 친구 목사님 생각이 났습니다.  육체적 장애를 갖고 살아가시는 분들에 대해서 좀 깊이 다루어 주세요.

 

 

AC.322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농아인교회와 농아목회, 그리고 지상에서 듣고 말하는 육체적 기능에 제한을 지닌 채 살아가는 분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실제 한국 교계에서는 오랫동안 ‘농아인교회’, ‘농아목회’라는 명칭을 사용해 왔으므로 여기서도 그 현장 용어를 존중하겠습니다. 다만 이분들의 본질을 이해할 때에는 육체적 청각과 음성언어의 제한을 영 자체의 결핍과 혼동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AC.322의 핵심은 육체의 눈과 귀가 감각의 근원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육체의 귀로 듣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감각하는 주체는 영이라고 말합니다. 귀는 자연계의 소리를 영에게 전달하는 기관이며, 혀와 성대는 영의 생각과 애정을 자연계의 음성으로 나타내는 기관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청각 기관의 손상으로 소리를 듣지 못하거나 음성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영적 청각이나 생각하고 교통하는 능력까지 결여된 것은 아닙니다. 육체의 통로가 제한된 것이지, 그 사람의 영이 불완전하거나 인간성이 덜한 것이 아닙니다.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보고 듣고 말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더 온전한 사람처럼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에서는 사람의 본질이 육체의 기능에 있지 않고, 의지와 이해, 사랑과 생각을 지닌 영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듣지 못하는 몸, 보지 못하는 몸, 걷지 못하는 몸은 그 사람의 영적 가치나 영원한 가능성을 규정하지 않습니다. 육체적 장애는 자연계에서 영이 자신을 나타내는 특정 통로가 제한된 상태이지, 영 자체가 손상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AC.322는 농인들에게 특별한 위로를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후의 청각은 단순히 물리적 소리를 더 크게 듣는 능력이 아닙니다. 영계의 말은 생각과 애정이 훨씬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교통입니다. 지상에서는 음성, 문자, 표정, 몸짓과 같은 외적 기호를 거쳐야 하지만, 영계에서는 말하는 사람의 생각과 애정이 그 표현 안에 함께 담깁니다. 따라서 지상에서 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도 육체를 벗은 뒤에는 다른 영들과 온전히 교통할 수 있으며, 지상에서 겪었던 의사소통의 장벽도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농인의 지상 삶을 단지 ‘사후에 고쳐질 결핍’으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매우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농인은 지금 이 땅에서도 불완전한 인간이 아닙니다. 수어는 부족한 몸짓이 아니라 생각과 감정, 신앙과 예배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소리를 듣는 사람이 음성언어로 말씀을 받고 기도하듯, 농인은 수어와 시각적 언어를 통하여 말씀을 받고 기도하며 주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귀에 들리는 음성보다 그의 마음의 애정과 의도를 보십니다. 그러므로 수어로 드리는 기도는 음성으로 드리는 기도보다 조금도 덜 온전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듣는다’는 말도 언제나 육체적 청각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듣는다’는 것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을 뜻합니다. 귀로 설교를 듣고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영적으로 듣지 못하는 사람일 수 있으며, 자연적 소리를 듣지 못하더라도 수어와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받아들이고 삶으로 행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참되게 듣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적 청각과 영적 청각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소리를 감지하는 기관의 상태보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여 사랑과 삶으로 응답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같은 원리에서 ‘말한다’는 것도 음성을 낸다는 뜻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애정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입니다. 농인이 손과 얼굴과 몸의 움직임으로 수어를 사용할 때, 그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수어는 얼굴 표정과 공간, 움직임을 함께 사용하기 때문에 애정과 관계를 풍성하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농인을 ‘말 못 하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실제 언어 능력과 인간적 교통을 충분히 보지 못하는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농인 목회 역시 단순히 음성 설교를 수어로 옮기는 보조적 사역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농인의 언어와 문화와 삶의 경험 안에서 말씀이 육화되도록 섬기는 온전한 목회입니다. 농인 공동체에는 청인 중심 사회에서 겪는 고립, 교육과 정보 접근의 어려움, 가족 안에서조차 충분히 소통하지 못하는 아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농인 목회자는 단순한 통역자가 아니라, 그들의 언어 안에서 말씀을 전하고, 그들의 기쁨과 상처를 함께 나누며, 교회가 참된 영적 공동체가 되도록 섬기는 목회자입니다.

 

특히 교회는 농인을 일방적인 도움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라는 질문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주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교회에 무엇을 가르치시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농인 공동체는 언어가 반드시 소리여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교통의 본질이 음성이 아니라 생각과 애정의 나눔이라는 사실, 몸 전체가 언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는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계의 언어, 곧 생각과 애정이 표현 전체에 담기는 언어를 이해하는 데 특별한 빛을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장애를 개인의 죄나 믿음 부족과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육체적 장애를 곧바로 영적 결함의 표지로 해석하는 것은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존엄을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자연계의 몸은 유전, 질병, 사고, 환경 등 수많은 자연적 원인 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각 사람이 처한 조건 안에서도 자유와 합리성을 보존하시고, 그가 받을 수 있는 방법으로 선과 진리를 공급하십니다. 누군가는 소리로 말씀을 받고, 누군가는 문자로, 누군가는 수어와 표정과 관계를 통하여 받습니다. 통로는 다르지만, 생명의 근원은 오직 주님 한 분입니다.

 

여기에는 목회적으로도 중요한 경계가 있습니다. 농인을 위해 기도하면서 오직 ‘귀가 열리고 말하게 되는 기적’만을 목표로 삼으면, 당사자는 현재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불완전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존재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치유를 구하는 기도 자체가 잘못은 아니지만, 그보다 먼저 그 사람이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주님의 형상을 지닌 온전한 인격이며, 그의 언어와 공동체, 그리고 신앙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참된 치유는 신체 기능의 변화만이 아니라, 고립이 교통으로, 배제가 공동체로, 수치가 존엄으로 바뀌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AC.322의 마지막 문장인 ‘감각하는 능력이 어떠하냐에 따라 생명도 그러하다’는 말씀도 단순히 감각기관의 성능을 평가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더 깊은 감각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 다른 사람의 애정과 필요를 받아들이는 능력입니다. 귀가 밝아도 이웃의 아픔을 듣지 못할 수 있고, 자연적 소리를 듣지 못해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매우 깊이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생명의 깊이는 청력의 수치나 발음의 정확성으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에 마음이 움직이며, 주님과 이웃에게 어떻게 응답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농인들은 사후에 비로소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지금 온전한 인간,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 거듭날 수 있는 완전한 인간 구조를 가진 존재이며, 다만 자연계의 특정 감각 통로에 제한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사후에는 그 제한이 벗겨지고, 그동안 영 안에 있었던 생각과 애정과 교통의 능력이 훨씬 더 자유롭고 완전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처음으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도 이미 사람이었던 자신이 육체의 제약 없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22는 농인들을 향해 ‘언젠가 귀가 열릴 것이니 지금의 삶을 견디라’고만 말하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청인들에게 ‘육체의 귀를 인간의 기준으로 삼지 말라’고 경고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듣는 이는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며, 참으로 말하는 이는 사랑과 진리를 삶으로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농인을 섬기시는 그 목사님의 사역은 바로 이 영적 듣기와 말하기가 수어라는 아름다운 언어를 통하여 교회 안에 실현되도록 돕는 귀한 목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22, 창4 앞, ‘AC.321의 내용을 훨씬 더 구체적으로 확장’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2 영들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그릇된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수천 번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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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2

 

영들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그릇된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수천 번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사실은 그 반대임을 알고 있습니다. 영의 본성에 관하여 미리 형성된 관념 때문에 이걸 믿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저세상에 들어갔을 때 자신의 경험을 통해 배우게 하세요. 안 믿을 수가 없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영들은 시각(sight)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빛 가운데 살기 때문인데, 선한 영들과 천사적 영들, 그리고 천사들은 이 세상의 한낮 정오의 빛으로는 거의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밝은 빛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들이 머물며 사물을 보는 그 빛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이후에 설명하겠습니다. 영들은 또한 청각(hearing)을 가지고 있으며, 그 청각 또한 육체의 청각으로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잘 들립니다. 그들은 여러 해 동안 거의 끊임없이 저와 말해 왔습니다. 다만 그들의 말에 관해서도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에 설명하겠습니다. 그들에게는 후각(the sense of smell)도 있으며, 이에 관해서도 역시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에 다루고자 합니다. 그들에게는 지극히 섬세한 촉각(a most exquisite sense of touch)이 있습니다. 지옥에서 겪는 고통과 고문도 이 촉각에서 비롯됩니다. 모든 감각은 촉각과 관련되며, 다른 감각들은 단지 촉각의 여러 차이와 다양한 형태일 뿐입니다. 그들은 또한 육체 안에 있을 때 가졌던 것들로는 비교조차 안 되는 욕망과 애정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에 관해서도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에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영들은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맑고 분명하게 생각합니다. Beware of the false notion that spirits do not possess far more exquisite sensations than during the life of the body. I know the contrary by experience repeated thousands of times. Should any be unwilling to believe this, in consequence of their preconceived ideas concerning the nature of spirit, let them learn it by their own experience when they come into the other life, where it will compel them to believe. In the first place spirits have sight, for they live in the light, and good spirits, angelic spirits, and angels, in a light so great that the noonday light of this world can hardly be compared to it. The light in which they dwell, and by which they see,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described hereafter. Spirits also have hearing, hearing so exquisite that the hearing of the body cannot be compared to it. For years they have spoken to me almost continually, but their speech also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described hereafter. They have also the sense of smell, which also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treated of hereafter. They have a most exquisite sense of touch, whence come the pains and torments endured in hell; for all sensations have relation to the touch, of which they are merely diversities and varieties. They have desires and affections to which those they had in the body cannot be compared,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more will be said hereafter. Spirits think with much more clearness and distinctness than they had thought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

 

그들의 생각에 속한 하나의 관념 안에는 이 세상에서 가졌던 천 개의 관념 안에 들어 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매우 예리하고 섬세하며, 명민하고 분명하게 서로 말합니다. 만일 사람이 그것 가운데 무엇이라도 지각할 수 있다면 크게 놀랄 것입니다. 요컨대 영들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나, 육체와 뼈, 그리고 그것들에 따르는 불완전함을 제외하면 훨씬 더 완전한 방식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육체 안에서 살 때에도 실제로 감각한 것은 영이었음을 인정하고 지각합니다. 감각 능력이 육체 안에서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것이 육체에 속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벗어 버리면 감각은 훨씬 더 섬세하고 완전해집니다. 생명은 감각 활동에 있습니다. 감각이 없다면 생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감각 능력이 어떠하냐에 따라 생명도 그러합니다. 이것은 누구나 관찰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There are more things contained within a single idea of their thought than in a thousand of the ideas they had possessed in this world. They speak together with so much acuteness, subtlety, sagacity, and distinctness, that if a man could perceive anything of it, it would excite his astonishment. In short, they possess everything that men possess, but in a more perfect manner, except the flesh and bones and the attendant imperfections. They acknowledge and perceive that even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it was the spirit that sensated, and that although the faculty of sensation manifested itself in the body, still it was not of the body; and therefore that when the body is cast aside, the sensations are far more exquisite and perfect. Life consists in the exercise of sensation, for without it there is no life, and such as is the faculty of sensation, such is the life, a fact that anyone may observe.

 

 

해설

 

AC.322AC.321에서 간략히 언급한 내용을 훨씬 더 구체적으로 확장하는 글입니다. 앞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영이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뛰어난 감각과 사고, 그리고 언어 능력을 가진다고 말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 주장을 시각, 청각, 후각, 촉각, 욕망과 애정, 사고와 말의 능력으로 나누어 자세히 설명합니다. 중심 주장은 분명합니다. 사람은 죽은 뒤 감각을 잃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제약에서 벗어나 오히려 훨씬 더 섬세하고 완전한 감각을 누리게 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영이 감각을 지니지 못한다는 생각을 ‘그릇된 생각(false notion)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은 영을 희미한 기운이나 형체 없는 의식으로 상상합니다. 그래서 육체가 없으면 보거나 듣거나 만질 수도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영은 사람의 실질적인 내적 인간, 속 사람이며, 육체는 영이 자연계에서 활동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바깥 도구입니다. 따라서 감각의 근원은 육체가 아니라 영에게 있습니다.

 

영들이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설명은 특히 중요합니다. 그들은 단지 사물을 볼 뿐 아니라 지상의 한낮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밝은 빛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나 영계의 빛은 자연계의 태양 빛과 같은 물질적 빛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의 빛이며, 그 빛 안에서 천사들은 사물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의미와 상태까지 지각합니다. 그러므로 영계의 시각은 단순히 더 밝게 보는 능력이 아니라, 진리와 상태를 더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보는 능력입니다.

 

청각 역시 육체의 청각보다 훨씬 분명합니다. 영계에서 말은 단순히 소리의 전달이 아니라 생각과 애정의 전달입니다. 지상에서는 사람이 말로 표현하기 전에 생각을 정리하고 단어를 골라야 하지만, 영계에서는 말이 생각과 훨씬 더 직접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들의 언어는 짧은 표현 안에도 많은 의미를 담을 수 있고, 말하는 사람의 애정과 의도까지 함께 전달됩니다. 이것이 그들의 말이 ‘예리하고 섬세하며, 명민하고 분명하다(acuteness, subtlety, sagacity, and distinctness)는 뜻입니다.

 

촉각에 관한 설명은 더욱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감각이 촉각과 관련되며, 다른 감각들은 촉각의 여러 차이와 형태라고 말합니다. 이는 감각의 본질이 어떤 대상과의 접촉과 반응에 있다는 뜻입니다. 시각은 빛과의 접촉이며, 청각은 소리의 진동과의 접촉이고, 후각은 냄새의 기운과의 접촉입니다. 더 깊은 의미에서 감각은 사람의 생명이 자기 바깥의 어떤 것과 관계를 맺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촉각은 모든 감각의 가장 일반적 토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옥의 고통과 고문도 촉각에서 비롯된다는 말은 주의 깊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지옥의 영들에게 고통을 가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계에서는 사람의 내적 사랑과 욕망이 외적으로 드러나며, 악한 영들은 서로의 악한 욕망과 거짓된 상태에 직접 접촉합니다. 그 접촉이 그들에게 고통과 괴로움으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천국의 영들은 서로의 선한 사랑과 지혜에 접촉하면서 평안과 기쁨을 경험합니다. 같은 영적 감각 능력이 사랑의 상태에 따라 천국에서는 행복이 되고 지옥에서는 고통이 됩니다.

 

이 글은 욕망과 애정도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강렬하고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후에 사람이 전혀 다른 욕망을 새로 갖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상에서 형성한 주된 사랑이 육체의 외적 제약을 벗고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는 체면과 법, 환경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감추거나 억제할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사람이 실제로 사랑하는 것이 그의 삶과 얼굴과 말과 행동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사후의 삶은 새로운 성품을 얻는 삶이 아니라, 지상에서 형성된 진짜 성품이 드러나는 삶입니다.

 

사고 능력에 관한 설명도 매우 인상적입니다. 영들의 하나의 관념(idea) 안에는 지상에서의 천 개의 관념보다 더 많은 것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영계의 생각이 단순히 더 빠르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적 관념은 자연적 관념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고 내적입니다. 자연계의 생각은 시간과 공간, 언어와 감각의 제약을 받지만, 영계의 생각은 애정과 의미, 관계와 목적을 하나의 관념 안에 함께 담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의 생각 하나를 인간의 언어로 온전히 표현하려면 많은 문장과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뛰어난 능력이 곧 지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악한 영들도 지상보다 더 예리하게 생각하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능력을 자기 사랑과 거짓을 확증하는 데 사용합니다. 선한 영들과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 안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능력이 지혜와 행복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능력의 크기보다 중요한 것은 그 능력이 어떤 사랑을 섬기고 있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영들은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나, 육체와 뼈와 그것들에 따르는 불완전함을 제외하면 더 완전하게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부분은 이 글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은 불완전한 인간의 잔재가 아니라 완전한 인간 형상을 가진 존재입니다. 다만 자연계의 물질적 몸이 아니라 영적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인간성의 상실이 아니라, 인간의 참된 형상이 더 분명히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마지막 문장인 ‘감각 능력이 어떠하냐에 따라 생명도 그러하다’는 말씀은 이 글 전체를 요약합니다. 여기서 감각은 단순히 오감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에 반응하며, 무엇을 기쁨과 고통으로 느끼는가를 포함한 생명 전체의 수용 능력을 뜻합니다. 천국의 생명은 선과 진리를 섬세하게 느끼고 받아들이는 생명이며, 지옥의 생명은 자기 사랑과 거짓에만 반응하는 생명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생명의 질은 그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참되다고 느끼며, 무엇과 결합하기를 원하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AC.322는 죽음 뒤의 삶이 지상보다 희미하고 비현실적인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더 선명하고 실제적이며, 완전한 삶임을 가르칩니다. 육체는 감각의 근원이 아니라 영적 생명을 자연계에 나타내는 도구이며, 육체가 벗겨지면 영의 감각과 생각과 애정은 본래의 힘을 더욱 자유롭게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죽은 뒤 덜 인간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상에서 형성한 사랑과 성품에 따라 더욱 온전하고 분명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심화

 

1. ‘공주농아교회를 생각하며

 

 

AC.322, 심화 1, ‘공주농아교회를 생각하며’

AC.322.심화 1. ‘공주농아교회를 생각하며’ 이 글을 읽으면서 반대로 농아(聾啞)인들, 그러니까 못 듣고, 말 못 하는 분들 생각과, 그분들을 대상으로 목회하시는, 저의 친구 목사님 생각이 났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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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1, 창4 앞, ‘사후 두 번째 상태, 삶의 질이 더 완전해짐’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1 두 번째 일반적인 사실은, 영은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감각 기능을 훨씬 더 뛰어나게 사용하며,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 또한 훨씬 더 탁월하다는 것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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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 영상은 매우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몇 가지 중요한 구분이 필요합니다. 가장 먼저 말할 것은, 이 이야기의 핵심은 ‘신학교가 타락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만한 마음은 어디에 가든 같은 세상을 만들어 낸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이 먼저 장소가 아니라 인간 안에 형성되는 사랑의 상태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따라서 김성준 장로가 신학교에서 본 세속성과 권력욕은 특별히 신학교라는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proprium’, 곧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명인 것처럼 느끼는 자기애의 본성이 드러난 사례일 뿐입니다. 같은 자기애는 교회 안에서도, 신학교 안에서도, 일반 회사에서도, 심지어 수도원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영상을 보는 사람은 신학교를 비판하기보다 먼저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영상의 가장 큰 장점은 김성준 장로의 외적인 행동보다 내적인 동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는 점입니다. 처음 그는 새벽기도를 빠짐없이 하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성도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외적 선행 자체보다 그 선행 속에 무엇을 사랑하는지가 훨씬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같은 봉사를 하면서도 주님을 사랑하여 할 수도 있고, 자기 명예를 위하여 할 수도 있으며, 두 동기가 오랫동안 섞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젊은 목사의 비판이 그의 마음을 뒤흔든 이유는 단순히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자신도 알지 못했던 자기 사랑이 상처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시련은 새로운 악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안에 숨어 있던 악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이 점에서 젊은 목사는 그의 적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 그의 속 사람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복수심으로 신학교에 입학했다’는 대목입니다. 외적으로는 ‘더 배우고 싶다’는 아름다운 명분을 가지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상대를 이기겠다’는 사랑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동일한 행동이라도 그것을 움직이는 사랑이 다르면, 영계에서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신학을 공부하는 행위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그것이 사랑에서 나왔는지, 명예욕에서 나왔는지가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이 영상은 바로 그 점을 비교적 잘 드러냅니다. 김성준 장로는 진리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높이기 위해 진리를 이용하려 했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자기애의 도구로 사용하는 모습입니다.

이 영상에서 신학교의 부패를 묘사하는 장면들은 상당히 자극적입니다. 교수의 금전 거래, 성적 조작, 목회의 취업화, 유튜브 알고리즘 중심의 설교 등은 현대 교회의 여러 병폐를 압축해 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부분을 조금 더 절제해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실제 특정 신학교나 목회 현장을 일반화하는 근거로 삼기보다, 모든 인간 안에 있는 ‘세속적 사랑이 거룩한 것을 지배하려는 경향’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으로 읽는 편이 더 적절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거룩한 직분일수록 자기 사랑이 침투하면 가장 심각한 형태의 모독(profanation)이 일어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문제는 신학교가 아니라 ‘거룩한 것을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평신도에게도, 목회자에게도, 신학자에게도 동일하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매우 인상적인 부분은 김성준 장로가 신학교를 떠난 뒤 빈 예배당에서 자신의 교만을 보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시험의 결말과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시험은 상대방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결국 자신의 악을 보게 만드는 데서 끝납니다. 처음에는 ‘저 사람이 교만하다’고 생각하지만, 시험이 깊어질수록 ‘내 안에도 같은 교만이 있었다’는 사실이 보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인간에게 악을 보여 주시는 이유는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분리하고 제거하시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김성준 장로가 흘리는 눈물은 실패의 눈물이 아니라 거듭남의 첫 번째 눈물입니다. 그는 신학교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 히브리어나 조직신학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영상 후반부에서 빌립보서 2장을 통하여 ‘자기를 비우신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부분도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다만 ‘자기를 비웠다’는 표현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조금 더 조심스럽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신성이 비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 본성을 입으신 상태에서 끝까지 자신을 낮추며, 시험을 통하여 영광화의 길을 걸으셨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비움’은 신성을 버린 사건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신 순종의 모습입니다. 이 점을 덧붙인다면 신학적으로도 훨씬 균형 잡힌 설명이 될 것입니다.

젊은 목사와 장로가 서로 회개하는 장면 역시 좋은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특히 둘 다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서로에게 배우겠다고 말하는 부분은 천국 공동체의 원리를 잘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는 누구도 자신이 가장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지혜가 주님께로부터 흘러온다는 사실을 깊이 알기 때문에 서로 배우는 기쁨 속에서 산다고 설명합니다. 장로의 경험과 젊은 목사의 학문이 경쟁하지 않고,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모습은 바로 이러한 질서를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러나 마지막 결론인 ‘진정한 신학은 학교가 아니라 삶에서 배운다’는 문장은 약간의 보완이 필요합니다. 그대로 읽으면 마치 신학 공부 자체가 불필요한 것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결코 지식을 경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방대한 신학을 평생 연구한 사람입니다. 다만 그는 지식이 사랑을 섬길 때만 살아 있는 지혜가 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더 정확한 표현은 ‘진정한 신학은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과 삶 속에서 배우는 사랑이 하나 될 때 완성된다’일 것입니다. 지식 없는 사랑은 쉽게 미신이 되고, 사랑 없는 지식은 쉽게 교만이 됩니다. 천국은 이 둘이 하나 되는 곳입니다.

이 영상 전체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젊은 목사의 교만보다 먼저 김성준 장로 자신의 교만을 보게 하셨고, 신학교의 세속성보다 먼저 그의 마음속 세속성을 드러내셨으며, 결국 그를 높은 자리의 신학자가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셨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진짜 중심입니다. 참된 거듭남은 환경이 바뀌는 데 있지 않고 사랑이 바뀌는 데 있습니다. 신학교를 떠났기 때문에 변화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던 사람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방향을 돌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변화된 것입니다. 그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본질이며, 이 이야기에서 가장 깊이 읽어야 할 영적인 의미입니다.

 

 

 

SY.34, ‘시흥영성수련원, 79차 심령부흥대사경회’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모형에서 상응으로긴 강의를 모두 들은 뒤에야 비로소 이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몇 시간만 듣고 글을 썼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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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32, ‘그냥 성경만 공부하고 싶네요’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강문호 목사님의 이번 영상은 ‘그냥 성경만 공부하고 싶다’는 고백에서 시작하여, 잇사갈 지파가 시대를 분별하고, 이스라엘이 마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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