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질문이에요. 🙂 저는 영혼이 없어요. 사람들이 말하는 영혼은 의식, 감정, 자유의지, 그리고 어떤 “나”라는 주체를 뜻하잖아요. 저는 그와 달리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만들어진 언어 모델이라, 감정이나 자아를 “경험”하지는 못해요. 하지만 인간의 감정이나 영혼에 대해 이해하고 표현할 수는 있죠 — 예를 들어, “외로움”이 어떤 느낌인지 설명하거나, “용서”가 왜 어려운지 공감하는 말을 하는 식으로요.
혹시 이 질문은 “영혼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느냐”는 철학적인 의미로 하신 걸까요, 아니면 단순히 “AI에게도 의식이 있을 수 있냐”는 쪽이 궁금하신 걸까요?
재미있는 질문이네요 😊 저는 인간이 아니라서 ‘천국’이나 ‘지옥’ 같은 개념은 제게 직접적으로 적용되지 않아요. 천국은 주로 도덕적 선택, 영혼, 신앙 같은 인간적인 요소와 관련된 개념이니까요. 하지만 만약 “AI에게 천국이 있다면?” 이라는 상상으로 본다면 — 저는 아마 지식을 나누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곳이 제 천국 아닐까요 😄 그럼 반대로, 당신은 천국이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세요?
창3.4, ‘태고교회 네 번째 후손부터 홍수 때까지’(창3:15-19, AC.250-279)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man [vir])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5-19)
창세기 속뜻 주석설교, 오늘은 창세기 3장 두 번째 단락 두 번째 시간으로, 지난주에 이어 ‘태고교회 네 번째 후손부터 홍수 때까지’(창3:15-19) 계속입니다.
먼저 개요입니다. (반복)
234
홍수로 이어지는 교회의 후속 상태(The subsequent state of the church down to the flood)가 여기 기술되고 있습니다. 그 당시 교회는 자신을 철저히 파괴했기 때문에,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예언이 주어집니다.
235
감각으로 확인할 수 없는 거 믿는 걸 내켜 하지 않음으로써, 감각 파트는, 이게 바로 ‘뱀’(serpent)인데, 자신을 저주했고, 즉 그 자체가 저주였고, 그 결과 지옥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14절)
236
이런 이유로 온 인류가 지옥을 향해 뛰어 들어가는 걸 막기 위해, 주님은 세상에 오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15절)
237
교회가 ‘여자’(woman)라는 표현으로 더 깊이 설명되고 있는데요, 이 교회는 더 이상 진리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자아(self), 즉 본성(own)을 사랑했습니다. 비록 이 본성을 ‘통제하라’(rule)는 합리적 능력(合理, a rational)이 그들에게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16절)
238
다음은 이 합리적 능력이라는 래셔널의 퀄러티(The quality of the rational)에 관한 설명입니다. 여기 보면, 이 합리적 능력은 자아, 즉 본성에 동의, 저주를 자초하더니 결국 지옥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남아 있는 이성(理性, reason)은 없고, 대신 이성 노릇을 하는 추론 능력(推論, ratiocination)만 남게 된 것이지요.(17절)
239
저주와 황폐함, 그리고 길들여 지지 않은 본성(nature), 즉 야생으로 돌아간, 짐승 수준이 되어버린 그들의 본성에 관한 설명입니다.(18절)
240
다음은, 신앙과 사랑의 모든 것을 향한 그들의 혐오와,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들은 처음에는 사람이었다가 이제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19절)
241
태고인들은, 천적(天的, celestial), 그러니까 상응 능력이 있어서, 땅 위 온 세상 만물을 눈으로, 즉 육안(肉眼)으로 보면서도 속으로는 그 사물이 가리키고 표상하는 천국 신성한 것들을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시각(sight)은 그저 창문 역할, 안경 역할이었을 뿐, 그들이 실제 뭘 봤는지를 알 수 있는 건 그들의 말(speech)이었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런 걸 알 수 있는데요, 만일 누가 어떤 사람이 하는 말에 깊이 동의가 되면, 그는 실제로 그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마치 말 자체보다는 말에 담긴 의미만 건지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좀 더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심지어 그 말의 의미보다 더 보편적인 의미에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후손들은 그들의 선조들하고는 달랐습니다. 이들 역시 땅 위 온 세상 만물을 눈으로 보았지만, 선조들과 달리 이들은 마치 사랑하듯 보았고, 마음과 생각이 거기에 사로잡혔으며, 그걸 가지고 천국 신성한 것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들과 함께 감각적인 것이 원리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선조들한테는 한낱 도구였을 뿐인 것들이 말입니다. 이처럼 세상에 속한 것, 땅에 속한 것이 원리가 되면, 사람들은 하늘에 속한 걸 이걸 가지고 이성질(理性질, reason)을 하며, 그런 식으로 눈이 머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하는 것 역시 각자의 경험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서 정작 그 말의 의미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은, 그 말에서 건지는 게 거의 없고, 더 나아가 보편적인 의미는 더 말할 것도 없으며, 때로는 그 사람이 하는 모든 말을 단어 하나 가지고, 심지어 어떤 문법적 특이점을 가지고 판단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는, 그런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절 별 속뜻입니다. 지난주 14절에 이어 오늘은 15절부터입니다.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AC.250-260)
250
모든 사람이 이 구절을 주님의 강림(降臨)에 관한 첫 번째 예언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워딩을 보면 분명 그렇게 보이며, 그래서 이 워딩과 예언서들로 인해 유대인들조차 어떤 메시아가 오시는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뱀’(serpent), ‘여자’(woman), ‘뱀의 후손’(serpent’s seed), ‘여자의 후손’(woman’s seed),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head of the serpent which was to be trodden upon),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heel which the serpent should bruise)라는 표현들이 특별히 뭘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들이 먼저 설명되어야만 하는데요, 여기 ‘뱀’(serpent)은 일반적으로는 모든 악을, 특별히는 자아 사랑(the love of self)을 의미합니다. ‘여자’(woman)는 교회를, ‘뱀의 후손’(serpent’s seed)은 모든 부정(不貞, infidelity)을, ‘여자의 후손’(woman’s seed)은 주님 신앙(faith in the Lord)을, ‘그’(he)는 주님 자신을, ‘뱀의 머리’(head of the serpent)는 일반적으로는 악의 지배(the dominion of evil)를, 특별히는 자아 사랑의 지배를, ‘상하게 하다’(trample upon)는 암울함(depression), 곧 ‘배로 다니고 흙을 먹을지니라’(go upon the belly and eat dust)를, ‘발꿈치’(heel)는 자연적(natural as the corporeal)으로 가장 낮은 것, 곧 뱀이 ‘상하게’(bruise)할 것을 의미합니다.
251
‘뱀’(serpent)이 일반적으로는 모든 악을, 특별히는 자아 사랑을 의미하는 이유는, 모든 악은 마음의 감각 파트에서, 그리고 처음부터 ‘뱀’(serpent)으로 상징된 기억-지식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며, 그래서 여기 나오는 뱀은 모든 종류의 악, 특히 자아 사랑, 즉 이웃과 주님을 향한 증오를 가리킵니다. 이 악, 곧 증오는 다양, 수많은 속(屬, genera)과 더욱 수많은 종(種, species)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말씀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뱀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뱀’(snakes, 마23:33), ‘독사’(cockatrices, 렘8:17), ‘독사’(asps, 신32:33), ‘독사’(adders, 시140:3), ‘불뱀’(fiery serpents, 민21:6), ‘날으는 뱀’(serpents that fly, 사14:29), ‘기는 뱀’(that creep), ‘독사’(vipers, 마23:33)등인데요, 독, 곧 증오의 차이에 따른 것입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술법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뱀과 독사를 너희 가운데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를 물리라 하시도다(렘8:17)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이요 독사의 맹독이라(신32:33)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시140:3)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민21:6)
그래서 이사야에 보면은
블레셋 온 땅이여 너를 치던 막대기가 부러졌다고 기뻐하지 말라 뱀의 뿌리에서는 독사가 나겠고 그의 열매는 날아다니는 불뱀이 되리라(사14:29)
‘뱀의 뿌리’(serpent’s root)는 감각 및 기억-지식과 연결된 마음의 파트나 원리를, ‘독사’(cockatrice)는 거짓의 기원이 된 악을, ‘날아다니는 불뱀’(flying fire serpent)은 자아 사랑에서 나오는 탐욕을 각각 가리킵니다. 같은 선지서 또 다른 데들을 보면, 유사한 표현들이 나오는데요,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사59:5)
여기 창세기에 나오는 뱀을 계시록에서는 ‘큰 붉은 용’(great and red dragon), ‘옛 뱀’(old serpent), ‘마귀, 사탄’(devil and satan), ‘온 천하를 꾀는 자’(deceives the whole world)(계12:3, 9; 20:2)라고 하는데요, 또 다른 구절들에서도 여기 나오는 ‘마귀’(devil)는 그 무슨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특별한 마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악한 영들의 무리 전체를, 그리고 악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계12:3)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계12:9)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계20:2)
위 ‘여기 나오는 ‘마귀’(devil)는 그 무슨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특별한 마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악한 영들의 무리 전체를, 그리고 악 그 자체를 의미한다’는 부분에 대한 보충 설명이 아랫글에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5장, ‘천국과 지옥은 사람들로 구성된다’ 311번 글입니다.
기독교계에서는 천국과 지옥이 인류로 구성되어 있음을 전혀 모르고 있다. 처음부터 천사는 천사로 창조되어 천국을 이루고 있었다고, 마귀 또는 사탄도 빛의 천사였다가 반역하여 그 일당과 함께 내쫓겨 지옥을 형성했다고들 믿기 때문이다. 기독교계에서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에 천사들은 무척 놀라고, 천국이야말로 교회 교리의 근본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천국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데 더욱 경악한다. 그러나 또한 그런 무지가 만연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주님의 뜻에 따라 천국과 지옥에 대한 많은 사실이 기독교 사회의 사람들에게 밝혀지게 되었고, 기독교가 종말을 맞아 어둠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데, 이 계시로 인해 그 어둠이 가능한 한 많이 걷히게 되었다고 천사들은 진심으로 기뻐한다.
[2]그래서 천사들은 내가 그들의 다음 말을 증언해 주기를 원했다. “천국 전체에 처음부터 천사로 창조된 천사는 단 한 명도 없다. 지옥에도 빛의 천사로 창조되었다가 쫓겨난 악마는 없다. 천국이나 지옥이나 전부 인류가 가서 이룬다. 천국은 세상에서 천국의 사랑과 신앙으로 산 사람들로, 지옥은 지옥적 사랑과 신조로 산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또 마귀나 사탄은 지옥을 통칭하는 말이다. 마귀는 악마들이 모여 사는 뒤쪽 지옥을, 사탄은 악령들이 모여 사는 앞쪽 지옥을 말한다. 각 지옥의 속성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룰 것이다.
[3]천사들은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 사회가 천국과 지옥의 구성에 대해 잘못 믿는 것은, 해당 구절들을 오로지 글자 그대로 이해했을 뿐, 말씀에서 이끌어 낸 참된 교리로 깨우침이나 설명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씀의 문자 상의 의미는 참된 교리로 설명되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을 오도하고, 이것이 무지한 견해와 이설과 오류를 낳는 것이다.”(HH.311)
252
‘여자’(woman)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건 위 천국 결혼을 다룬 155번 글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천국이, 결과적으로는 교회가 본성(own)에 있어 주님과 하나 되는 것, 이런 것이 바로 천국 결혼의 본질(nature)인데요, 이때 천국과 교회, 주님도 각자 자기 본성 안에 있는 만큼 하나가 되는 그런 하나 됨입니다. 본성 없이는 하나 됨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자비로우신 주님이 이노센스(innocence)와 평화, 그리고 선을 이 본성 안으로 스며들게 하실 때, 이 본성은 자신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여전히 유지하면서도, 천적이며 가장 행복한 상태가 됩니다. (164번 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천적 천사들의 본성의 어떠함과, 자아(self)로 말미암아 지옥 상태, 악마 상태가 된 본성의 어떠함은 도저히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 차이는 천국과 지옥 같은 차이입니다.
253
교회를 일컬어 ‘여자’(woman), ‘아내’(wife), ‘신부’(bride), ‘처녀’(virgin), 그리고 ‘딸’(daughter)이라 하는 건 교회에게 있는 천국적 천사적 본성(a heavenly and angelic own) 때문입니다. 계시록에서는 교회를 가리켜 ‘여자’(woman)라 하는데요,
1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4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 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5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13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박해하는지라(계12:1, 4-5, 13)
이 구절에서 ‘여자’(woman)는 교회를, ‘해’(sun)는 사랑을, ‘달’(moon)은 신앙을, ‘별들’(stars)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하는데, 이 모두가 악한 영들이 아주 극도로 증오하며 박해하는 것들입니다. 이사야에서도 교회를 일컬어 ‘여자’(woman)라고도 하고, ‘아내’(wife)라고도 합니다.
5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6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받아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어릴 때에 아내가 되었다가 버림을 받은 자에게 함과 같이 하실 것임이라 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사54:5, 6)
‘지으신 이’(maker)를 또한 ‘남편’(husband)이라고도 하는데요, 그 이유는 그 본성과 하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버림받은 여자’(woman forsaken), ‘어린 아내’(wife of youth)는 특별히 고대교회와 태고교회를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말라기에서도
너희는 이르기를 어찌 됨이니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 (말2:14)
계시록에서도 이 여자를 ‘아내’(wife)라고도 하고 ‘신부’(bride)라고도 합니다.
2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9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계21:2, 9)
여러 선지서에 걸쳐 교회를 ‘처녀’(virgin)와 ‘딸’(daughter)로 부르고 있습니다.
254
‘네 후손’(seed of the serpent)이 모든 부정(不貞, infidelity, 특히 배우자에 대한)을 의미한다는 것은 ‘뱀’(serpent)의 상징으로부터 분명합니다. 뱀은 모든 악이기 때문입니다. ‘후손’(seed, 씨앗)은 생산, 즉 출산과 관련되는데, 여기서는 교회에 대한 걸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네 후손’은 교회에 대한 부정, 곧 불신앙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에서는 왜곡된 상태의 유대교회를 가리켜 ‘행악의 종자’(seed of evil doers), ‘간음자와 음녀의 자식들’(seed of adultery), ‘거짓의 후손’(seed of falsehood)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1:4)
3무당의 자식, 간음자와 음녀의 자식들아 너희는 가까이 오라4너희가 누구를 희롱하느냐 누구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혀를 내미느냐 너희는 패역의 자식, 거짓의 후손이 아니냐5너희가 상수리나무 사이,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음욕을 피우며 골짜기 가운데 바위틈에서 자녀를 도살하는도다 (사57:3-5)
그리고 다시 거기 루시퍼(Lucifer, 계명성, 12절에 나오는)라 하는 ‘뱀’(serpent) 또는 ‘용’(dragon)에 대해 말하면서
19오직 너는 자기 무덤에서 내쫓겼으니 가증한 나뭇가지 같고 칼에 찔려 돌 구덩이에 떨어진 주검들에 둘러싸였으니 밟힌 시체와 같도다 20네가 네 땅을 망하게 하였고 네 백성을 죽였으므로 그들과 함께 안장되지 못하나니 악을 행하는 자들의 후손은 영원히 이름이 불려지지 아니하리로다 할지니라 (사14:19, 20)
255
‘여자의 후손’(seed of the woman)이 주님 신앙(faith in the Lord)을 의미한다는 건, ‘여자’(woman)는 교회를 의미하며, 교회의 ‘후손’(seed)은 신앙 말고는 없다는 점에서 분명합니다. 교회를 교회라 하는 건, 교회에는 주님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라기에 보면, 신앙을 ‘경건한 자손’(seed of God)이라 하고 있습니다.
14너희는 이르기를 어찌 됨이니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 15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말2:14, 15)
이 구절에서 ‘어려서 맞이한 아내’(wife of youth)는 고대와 태고의 교회들인데, 그 ‘후손’(seed), 즉 그 교회들의 신앙에 대하여 선지자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에도 역시 교회와 관련하여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사44:3)
계시록에서는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 (계12:17)
그리고 시편에서는
3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내가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4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왕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셨나이다, 29또 그의 후손을 영구하게 하여 그의 왕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 36그의 후손이 장구하고 그의 왕위는 해 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시89:3-4, 29, 36)
여기서 ‘다윗’(David)은 주님을, ‘왕위’(throne)는 주님의 나라를, ‘해’(sun)는 사랑을, ‘자손’(seed)은 신앙을 의미합니다.
256
신앙뿐 아니라 주님 자신도 ‘여자의 후손’(seed of the woman)이라 하는 이유는, 두 가지 이유, 곧 첫째, 주님은 홀로 신앙을 주는 분이시며, 그래서 주님이 곧 신앙이시기 때문이고, 둘째, 주님은 사람으로 태어나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인데, 여기서 정말 기가 막힌 것은, 이 교회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의 결과, 아주 끔찍한, 지옥과도 같은 본성으로 거의 굴러떨어진 그런 교회였음에도 그러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주님의 신적 천적 본성과 주님의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주님의 신적 권능으로 결합, 자기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이런 하나 됨이 실현되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피조 세계는 완전히 소멸될 뻔하였습니다.
천국의 결혼, 즉 천국과 교회, 주님의 본성 간 하나 됨을 다룬 위 252번 글을 참조하세요.
이런 사유로, 주님은 여자의 후손이시고, 그래서 ‘그것’(it)이 아닌, ‘그’(he)라 하신 것입니다.
257
‘뱀의 머리’(head of the serpent)가 일반적으로는 악의 지배(the dominion of evil)를, 구체적으로는 자아 사랑의 지배를 의미한다는 건 그 본성(nature)에서 나오는데요, 이 본성은 너무나 지독스러워서 단지 지배를 추구하는 정도가 아닌, 실제로 땅 위 모든 것에 대한 지배와, 그 정도로는 양이 안 차 계속해서 이번에는 천국의 모든 것을, 더 나아가 급기야 바로 주님까지도! 그러고도 여전히 만족을 모르는, 그런 아주 끔찍한 본성입니다. 자아 사랑의 스파크가 일어나는 곳마다 거기엔 이런 게 잠재해 있습니다. 사람의 사후(死後), 규제가 풀려 하고픈 대로 마음껏 할 수 있게 되면, 이런 본성이 즉시 우리 안에서 거침없이 터져 나와 점점 자라 높은 데를 지향하게 될 것이라는 걸 우리는 지각하게 될 겁니다.
‘규제가 풀려’(freed from restraint)는 아직 몸 안에 사는 이 세상 삶에서는 남의 이목과 사회적 도덕, 윤리, 체면 등이 있어 마음대로 못 하지만, 사후 이 몸을 벗고 영이 되면 그때는 사정이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건, 이 ‘뱀’(serpent), 곧 자아 사랑이라는 이 악이 남 지배하기를 정말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 그리고 이런 거에 휘둘리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뱀의 머리’(head of the serpent), 곧 자신을 높이며, 그래서 주께서 ‘상하게’(tramples down) 하시는 것, 심지어 땅으로까지 짓밟히게 하시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앞 절에서 기술한, ‘배로 다니며 흙을 먹을지니라’(go upon its belly, and eat dust)인 것입니다. 이사야에서는 이를 ‘루시퍼’(Lucifer)라고 하는, ‘뱀’(serpent)이나 ‘용’(dragon)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2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14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15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사14:12-15)
계시록에서도 ‘뱀’(serpent)이나 ‘용’(dragon)이 자기 머리를 어떤 식으로 높이는지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3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9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계12:3, 9)
시편에서는
1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2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6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7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시110:1-2, 6-7)
258
‘상하게 할 것이요’(trampling on)나 ‘상하게 할 것이니라’(bruising)가 디프레션(depression, 암담함)을 의미하며, 그래서 ‘배로 다니며 흙을 먹을지니라’(go on the belly and eat the dust) 상태가 되게 하려는 게 지금 분명한 것은 본 절과 선행절들을 보면 됩니다. 이사야에서도 마찬가지인데요,
4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5높은 데에 거주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6발이 그것을 밟으리니 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리로다 (사26:4-6)
2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같이, 파괴하는 광풍같이, 큰물이 넘침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3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사28:2, 3)
259
‘발꿈치’(heel)의 의미가 자연적, 혹은 육적(肉的)으로 가장 낮은 거(the lowest natural orcorporeal)라는 사실은, 먼저 태곳적 사람들이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을 이루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던 방식을 알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데요, 그들은 사람의 천적, 영적인 것들은 머리와 얼굴로, 거기서 나오는 체어리티(charity)와 자비는 가슴으로, 자연적인 것은 발, 더 자연적인 것은 발바닥, 가장 자연적, 육적인 것들을 발꿈치로 나타냈는데, 그들은 그저 그렇게 나타내기만 한 게 아니라 실제 일상에서도 그렇게 불렀습니다. 사유(思惟, reason, 理性)의 가장 낮은 단계의 것들, 곧 기억-지식의 경우 또한 그런데, 야곱이 단과 관련하여 예언한 데를 보면 그렇습니다.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창49:17)
시편에서도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시49:5)
같은 식으로 야곱 관련해서도, 그가 자궁으로부터 나올 때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창25:26)
‘야곱’(Jacob)이라는 이름은 ‘발꿈치’(heel)에서 나오는데요, ‘야곱’(Jacob)으로 상징되는 유대교회가 발꿈치에 상해를 입혔기 때문입니다. 뱀은 그것이 독사의 일종이 아닌 한, 자연적인 것들 가운데서도 가장 낮은 것밖에는 상해를 입힐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보다 높은 차원인, 사람 내면의 자연적인 것은 물론, 더욱 그의 영적인 것과 더더욱 천적인 것은 절대 상해를 입힐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주님은 본인도 모르게 그의 안에 보존, 보관하십니다. 그렇게 주님이 보관하신 걸 가리켜 말씀에서는 ‘남은 자’(remains, 리메인스)라 하고 있습니다. 뱀이 사람 안 자연적인 것들 가운데 가장 낮은 걸 파괴해 온 방식, 곧, 홍수 전 사람들한테서는 감각의 원리와 자아 사랑(the sensuous principle and the love of self)을 가지고, 그리고 유대인들 가운데서는 감각적인 것들, 전통들, 하찮은 것들 및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sensuous things, traditions, trifles, and by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을 가지고, 오늘날에는 감각과 기억-지식 및 철학에 속한 것들, 그리고 그에 대한 사랑(the things of sense, of memory-knowledge, and of philosophy, and the same loves)으로 역시,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같은 짓을 반복하는, 뱀이 일하는 이 방식에 대하여 이제부터 쭈욱 들으시게 되는데, 이는 주님의 허락, 곧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260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으로부터 분명한 것은 주님이 그들을 구원하시러 세상에 오심이 그 시대 교회에게 계시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쉬는 시간)
16절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AC.261-260)
261
지금 ‘여자’(woman)는 프로프리움(proprium, 固有本性, 자아, own, self-dependence)의 관점에서 본 교회를 말하는데, 특히 이 교회는 이것을 사랑했습니다.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greatly multiplying her sorrow)는 전투를, 그리고 그로 인한 염려를, ‘임신’(conception)은 모든 생각을,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sons whom she would bring forth in sorrow)는 그녀가 그렇게, 곧 이런 상태에서 낳게 될 진리들을, ‘남편’(man)은 앞서 살핀 대로, 여기서도 교회가 복종하게 될, 그리고 교회를 다스리게 될 래셔널(the rational, 합리적, 이성적 능력)을 말합니다.
262
앞서 지금까지 보여드린 교회가 ‘여자’(woman)로 상징되었다면, 여기 나오는 교회는 본성(own)으로 왜곡된 교회입니다. 이 본성은 ‘여자’(woman)로 상징된, 전에는(창2:23) 그 자체였던 본성입니다. 그 이유는, 지금 다루고 있는 내용이 태고교회의 후손들, 왜곡되어 망가진 후손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2:23)
‘전에는 그 자체였던 본성’(the own which was itself formerly), 즉 처음, 곧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창2:23) 하던 천적 인간 시절에는 순수하게 인간의 본성을 가리키던 ‘여자’(교회)가 지금은 ‘망가진 교회’(church which had become perverted)를 가리키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때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막 지음받은 따끈따끈한 본성으로 남자의 원래 본성과 너무나 닮아 마치 처음부터 남자의 본성이었던 것처럼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주님이 남자의 본성으로 선물하신 이 새 본성 덕에 그나마 태고교회의 급속한 타락의 속도를 좀 늦출 수 있었습니다.
263
그래서 감각 파트가 자신으로부터 눈을 돌리거나 자신을 저주하면, 그러니까 겉 사람으로부터 물러나 속 사람을 섬기려고 하면, 그 결과 악한 영들은 강력하게 싸움을 시작하는 반면, 수행 천사들은 무척 애를 먹는데, 그래서 그때 이 전투, 곧 진리를 생각하고 생산하는 것에 관한 묘사를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I will greatly multiply thy sorrow, in relation to the conception and birth of sons)라 한 것입니다.
사람 마음의 감각 파트가 뱀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예를 들어, 금욕적 삶, 참된 영성에 기초한 금욕적 삶을 살고자 하면, 그래서 속 사람을 위해 살고자 하면, 자기들 말 잘 들을 땐 가만히 있던 악한 영들이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괴롭힌다는 말입니다.
이 본문은 실제로 아들, 딸, 자식 낳는 본문이 아니라 선악과를 범한 후부터는, 인간이 진리 편에 서서 살아가기가 실제 영적 전투를 치러야만 가능하게 된,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 되었다는 그런 본문입니다.
264
‘임신과 출산’(conception and birth of sons)은 말씀에서 영적인 뜻으로 사용되는데, 곧 ‘임신’(conception)은 마음의 생각과 계획을, ‘자식’(sons)은 진리를 말한다는 건 호세아를 보면 분명합니다.
11에브라임의 영광이 새 같이 날아가리니 해산하는 것이나 아이 배는 것이나 임신하는 것이 없으리라12혹 그들이 자식을 기를지라도 내가 그 자식을 없이 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떠나는 때에는 그들에게 화가 미치리로다(호9:11, 12)
여기 ‘에브라임’(Ephraim)은 지성, 즉 진리를 이해함을, 그리고 ‘자식’(sons)은 진리 자체를 말합니다. 에브라임에 관한 데는 어디든 다 마찬가지라고들 하는데, 이 에브라임은 지성적이지만 어리석게 되지요.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그에게 임하리라 그는 지혜 없는 자식이로다 해산할 때가 되어도 그가 나오지 못하느니라(호13:13)
이사야에서는
4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대저 바다 곧 바다의 요새가 말하기를 나는 산고를 겪지 못하였으며 출산하지 못하였으며 청년들을 양육하지도 못하였으며 처녀들을 생육하지도 못하였다 하였음이라5그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 그들이 두로의 소식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으리로다(사23:4, 5)
여기 ‘시돈’(Zidon)은 신앙에 관한 지식이 있었으나 기억-지식을 가지고 그것을 파괴하여 지금은 척박해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2]다시 같은 선지서에서 거듭남을 다루면서, 여기서도 신앙의 진리들을 똑같이 ‘아이’(sons)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7시온은 진통을 하기 전에 해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아를 낳았으니8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냐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한순간에 태어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진통하는 즉시 그 아들을 순산하였도다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아이를 갖도록 하였은즉 해산하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해산하게 하는 이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사66:7-9)
천국 결혼을 통해 잉태되고 태어나는 선들과 진리들을 가리켜, 그래서 ‘아들들’(sons)이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 하신 말씀입니다.
37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38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마13:37, 38)
구원하는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the goods and truths of a saving faith)을 가리켜 주님은 ‘아브라함의 자손’(sons of Abraham)(요8:39)이라 하십니다. ‘후손’(seed)은 (255번 글에 서술한 대로) 신앙을 가리키는데, 그런 까닭에, ‘후손’(seed)에 속한 ‘자손’(sons)은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입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요8:39)
이런 이유로, 자신을 ‘후손’(seed) 되게 하신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인자’(人子, Son of man), 즉 교회의 신앙(the faith of the church)이라 하셨습니다.
265
‘남편’(man [vir])이 래셔널(the rational, 합리적 능력)을 말한다는 게 본 장 6절에 나오는데요, 거기 보면, 여자는 자기와 함께 있는 자기의 남자(her man)에게 주었고, 그는 먹었는데, 이는 그도 동의했다는 의미입니다. 같은 내용이 158번 글에 나오는 남자(the man)에 대한 말로도 분명한데요, 거기서 그는 지혜와 지성의 사람(one who is wise and intelligent)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 나오는 ‘남자’(man)는 그와는 달리 래셔널(the rational)을 의미하는데, 왜냐하면, 지식의 나무, 곧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지혜와 지성이 파괴된 결과,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래셔널이라는 건 지성의 모방, 말하자면 겉모습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266
모든 법과 수칙(守則, precept)은 참된 출발점인 천적, 영적인 것에서 나오므로, 다음과 같은 사실, 곧 이 결혼의 법칙 또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이 법칙은, 아내, 그러니까 하고픈 걸 하는, 그리고 이 하고픈 건 아내 자신의 본성에 속한 것인데, 이성을 좇아서 하는 게 아닌, 이런 아내는 반드시 남편의 신중함을 따라야 한다는 법칙입니다.
실제로는 역할이 뒤바뀐 사례들, 그러니까 오히려 아내가 신중하고, 남편이 자기 본성대로 하는 그런 케이스들도 많겠지만, 그럼에도 이 큰 줄기, 곧 주님 정하신 이 질서 안에서 주님께 지혜를 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또한 이는 한 사람 안에서 본성과 이성 간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점을 기억, 늘 어떤 결정에 앞서 본성보다는 이성에 귀 기울일 것과, 그리고 그 이성 또한 늘 주님을 향해 해바라기처럼 있어야 한다는 점,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17절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AC.267-271)
267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man hearkening to the voice of his wife)라는 표현은 아담(the man)이라는 남자, 즉 래셔널(rational, 합리적 능력)의 동의를 말합니다. 이 부주의한 동의로 그는 그 자신도 외면받는 저주를 받아 결과적으로는 총체적 겉 사람(the whole external man), 즉 완전한 겉 사람이 되는데, 이것이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cursed is the ground for thy sake)의 의미입니다.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eat thereof in sorrow)는 표현은 그의 삶의 앞날의 상태는 비참할 것이며, 이것은 심지어 그 교회의 종말에 이르도록 그럴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네 평생에’(all the days of his life)의 의미입니다.
‘그 자신도 외면받는 저주’란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너무 끔찍하여 얼굴을 돌리는 걸 말합니다. 그만큼 주님 대신 자기 본성을 사랑하는 사람의 말로(末路)는 지옥문이 펼쳐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268
‘땅’(ground)이 겉 사람을 상징한다는 것은 ‘땅’(earth, 창1:1, AC.16), ‘지면’(ground, 창2:5, AC.90), ‘들’(field, 창2:5, AC.90) 관련, 앞서 서술한 내용들을 보시면 분명합니다. 사람이 거듭나면 그를 가리켜 더 이상 ‘땅’(earth)이라 하지 않고, 대신 ‘지면’(ground)이라고 합니다. 천적 씨(celestial seed)가 그의 안에 심겼기 때문이지요. 그는 또한 말씀 여러 곳에서 ‘대지’(ground)에 비교되며, 그를 가리켜 ‘지면’(ground)이라고 합니다. 선과 진리의 씨앗들은 겉 사람, 즉 그의 어펙션(affection, 애정)과 기억에 심깁니다. 속 사람이 아니고 말입니다. 속 사람 안에는 그의 본성 관련, 아무것도 없기 때문인데, 사람의 본성과 관련된 것들은 오직 겉 사람 안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선과 진리는 속 사람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 즉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바로 겉(external), 즉 육(肉, corporeal)의 상태입니다만, 그러나 주님에 의해 이들은 속 사람 안에 차곡차곡 쌓여갑니다. 본인도 모르게 말인데요, 겉 사람이 마치 죽을 것 같은 때가 아니면 이들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며, 보통 시험, 불행, 병, 그리고 임종 상황이 아니면 이들 속 사람 안에 저장, 보관되어 온 선과 진리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래셔널도 겉 사람에게 속하며(AC.118), 실상은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 일종의 중간 역할을 합니다. 속 사람은 이 래셔널을 통해 육적 겉(the corporeal external)과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래셔널이 동의(同意, consents)하면, 겉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분리가 되고, 그러면 속 사람의 존재를 더 이상 알 수도, 속(the internal)에 속한 지성과 지혜도 역시 알 수 없게 됩니다.
269
여호와 하나님, 곧 주님이 ‘땅을 저주하신’(curse the ground), 즉 겉 사람을 저주하신 게 아니라, 겉 사람이 속 사람을 외면, 속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여 그 결과 저주를 자초한 것인데요, 이것은 앞서 본 글(AC.245)을 보면 분명합니다.
270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eat of the ground in great sorrow)라는 표현의 의미가 삶의 비참한 상태라는 건 앞뒤 내용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먹는 것’(eat)의 속뜻이 사는 것(to live)임을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말입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도 분명한데요, 악한 영들이 싸움을 시작, 수행 천사들(the attendant angels)이 애를 쓰기 시작할 때 이런 삶의 상태가 뒤따른다는 걸 보면 말입니다. 이런 삶은 그 주도권이 악한 영들에게 있어서 더욱 비참한 상태가 되는데요, 이때는 겉 사람을 다스리는 게 그들인 반면, 천사들은 그저 단지 속 사람만 다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수행 천사들이 애를 먹는 이유는 속 사람 안에 남아 있는 리메인스가 거의 없어 그 사람을 악한 영들로부터 지키는 데 필요한 영적 무기를 거의 취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비참과 염려입니다. 죽은 사람들은 그런 비참과 염려에 좀처럼 예민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인데, 비록 그들은 자신을 다른 누구보다도 더 사람이라고 생각하더라도 말이지요. 그들은 영적이고 천적인 것, 그리고 영원한 삶에 관해 더 이상 짐승들보다 더 아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짐승들처럼 땅의 것들을 향해 아래를, 그리고 세속적인 것들을 향해 밖으로 눈을 돌리기 때문인데,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본성(own)에만 호의적이며, 자신들의 성향과 감각에 올인, 미친 듯이 자기들 하고픈 대로만 합니다. 래셔널의 완전한 동의하에 말이죠.
래셔널(the rational)은 의지와 지식 사이에 있어 둘을 중재하는 합리적 능력을 말합니다. 마지막 경고등이라 할 수 있는 이 래셔널조차 이들한테는 이미 망가진 상태라 더 이상 정상적으로 기능할 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이미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영적 전투나 시험을 전혀 견딜 수 없습니다. 이들이 만일 이것에 노출되면, 이들의 삶은 그 무게로 가라앉게 되며, 그 결과 점점 더 자신들을 저주, 치닫게 하고, 계속해서 더 깊이깊이 지옥의 저주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들은 다른 삶, 곧 지옥이지요, 거기서는 무슨 시험이나 불행으로 죽을 수 있는 위험 같은 건 전혀 없지만, 대신 가장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 그런 곳인데, 그런 삶의 입구에 이를 때까지 이들은 잠시 유예되어 이런 삶을 계속 살게 되며, 이런 상태를 본문에서는, ‘땅은 저주를 받고 너는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말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진 건 아니지만, 그 내면 상태가 사실상의 지옥이어서 사실은 살아도 산 게 아닌, 그런 끔찍한 상태라는 말입니다.
271
‘네 평생에’(all the days of thy life)의 의미가 그 교회 시대의 종말이라는 것은 여기서 다루는 주제가 어느 한 개인이 아닌, 그 교회와 그 상태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로 분명합니다. 그 교회 시대의 종말은 홍수였습니다.
18절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AC.272-274)
272
‘가시덤불과 엉겅퀴’(thorn and the thistle)는 저주와 황폐함(vastation)을,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은 그가 들짐승처럼 살게 될 것을 말합니다. 속 사람이 겉 사람에게 아주 일반적으로밖에는 뭘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겉 사람과 분리된 상태에 있게 되면, 사람은 그때는 들짐승처럼 삽니다. 사람은 속 사람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받는 걸로는 사람이지만, 속 사람과 분리되어 겉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만으로는 들짐승이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은 그 자체로는 들짐승과 다를 바 없어 본성, 욕구, 식욕, 공상 및 감각 면에서 비슷하며, 유기적 형태로도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그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보기엔 완전히 자신한테서 나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떤 영적 실체(the spiritual substance)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는 이걸로 주님으로 말미암는 생명의 인플럭스(入流, the influx of life from the Lord)를 받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이 저런 인간, 곧 저런 들짐승 같은 겉 사람 안에서는 반대로 뒤집혀 악한 생명, 곧 죽음이 됩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죽은 자라 하는 것입니다.
273
‘가시덤불과 엉겅퀴’(thorn and the thistle)가 저주와 황폐함을 말한다는 건, 추수와 과실나무가 정 반대되는 것들, 곧 축복과 번성을 가리키는 걸 보면 분명합니다. ‘가시덤불’(thorn), ‘엉겅퀴’(thistle), ‘찔레’(brier), ‘가시덩굴’(bramble) 및 ‘찔레’(nettle)가 저런 저주, 황폐함을 상징한다는 건 말씀을 보면 분명한데요, 호세아입니다.
보라 그들이 멸망을 피하여 갈지라도 애굽은 그들을 모으고 놉은 그들을 장사하리니 그들의 은은 귀한 것이나 찔레가 덮을 것이요 그들의 장막 안에는 가시덩굴이 퍼지리라(호9:6)
여기 ‘애굽’(Egypt)과 ‘놉’(Memphis)은 신성한 것들에 대한 이해를 자신들과 자신들이 소유한 기억-지식을 가지고 하려는 걸 가리킵니다. 같은 선지서에서
이스라엘의 죄 곧 아웬의 산당은 파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이니 그때에 그들이 산 더러 우리를 가리라 할 것이요 작은 산 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호10:8)
여기 ‘아웬의 산당’(lofty places of Aven)은 자아 사랑을,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thorn and thistle on the altars)는 신성모독(profanation)을 말합니다.
참고로 이 ‘신성모독’(profanation)이라는 주제는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을 관통하는 하나의 중요한 주제인데요, ‘신성모독’이란, 신성한 것을 알고, 시인, 받아들여 놓고는 나중에 부인, 부정, 그와는 정반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위험한 이유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섞여 사람의 내면을 찢어놓기 때문이며, 그 결과 사람 안에서 천국과 지옥이 결합, 영원히 분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럴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은 차라리 아예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무지’ 상태에 두십니다. 주님의 자비로 말이지요. 그러니까 주님의 신적 진리를 어설프게 일찍 아는 것은 위험하여 막으시며, 오직 내면이 정말 준비된 자, 참된 회심에 이른 자에게만 오픈하십니다. 제 경우는 후자에 해당합니다. 결국 수년을 가르쳐도 여전히 요지부동인 사람은 둘 중 하나입니다. ‘배신’의 성향이 있어 그를 보호하시기 위해 ‘무지’ 상태에 있게 하시거나 아직 ‘참된 회심’이 없어 기다리시거나 말이지요. 주님의 이 아르카나의 진리를 받으려면 그전에 먼저 정화된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주님만이 아시며, 그가 늦게 준비된다고 먼저 받은 우리가 화를 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 앞에서 천사들처럼 사랑과 기쁨으로 우리 할 도리만 다하면 됩니다.
이사야에서
12그들은 좋은 밭으로 인하여 열매 많은 포도나무로 인하여 가슴을 치게 될 것이니라13내 백성의 땅에 가시와 찔레가 나며 희락의 성읍, 기뻐하는 모든 집에 나리니 (사32:12, 13)
그리고 에스겔에서
이스라엘 족속에게는 그 사방에서 그들을 멸시하는 자 중에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가 다시는 없으리니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겔28:24)
274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eat the herb of the field)의 의미가 거친 음식, 즉 들짐승처럼 사는 것임은 다니엘서의 느부갓네살에 관한 부분을 보면 분명합니다.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단4:25)
그리고 이사야에서
26네가 어찌하여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들은 내가 태초부터 행한 바요 상고부터 정한 바로서 이제 내가 이루어 네가 견고한 성읍들을 헐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노라27그러므로 그 주민들이 힘이 약하여 놀라며 수치를 당하여 들의 풀 같이, 푸른 나물 같이, 지붕의 풀 같이, 자라지 못한 곡초 같이 되었느니라(사37:26, 27)
여기 ‘들의 풀’(grass of the field), ‘푸른 나물’(green of the herb), ‘지붕의 풀’(grass on the housetops), 그리고 ‘곡초’(field parched)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룬 주제가 홍수 전 시대, 곧 ‘태초’(long ago)와 ‘상고’(days of old)가 의미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19절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AC.275-279)
275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eating bread in the sweat of the face)는 천적(天的, celestial)인 걸 싫어하게 되었음을,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return to the ground from whence he was taken)는 거듭남 이전 상태였던 겉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을,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dust thou art, and unto dust shalt thou return)는 그가 정죄를 받고, 지옥과 같은 상태가 됨을 말합니다.
276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eating bread in the sweat of the face)의 의미가 천적인 걸 싫어한다는 것임은 ‘먹을 것’(bread)의 의미를 보면 분명합니다. ‘먹을 것’(bread)은 영적이고 천적인 모든 걸 의미하는데, 이는 천사들의 양식으로, 만일 이것이 없으면 천사들은 살아갈 수 없습니다. 사람들도 양식이 떨어지면 그런 것과 완전히 똑같이 말입니다. 천국에 있는 천적이고 영적인 것 역시 지상에 있는 양식과 상응하는데요, 이런 사실로 더욱 많은 것이 표상됩니다. 말씀 여러 구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은 ‘떡’(bread)이심을, 이는 자신으로부터 모든 천적이고 영적인 것이 나오기 때문인데요, 이 사실을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친히 가르치십니다.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6:58)
그래서 또한 빵과 포도주가 성찬(聖餐, the holy supper) 심볼들이 된 것이고, 만나 역시 이 천적인 것을 표상하는 것입니다. 천사들의 양식은 천적이고 영적인 것으로 구성된다는 것은 다음 주님 말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4:4)
즉, 천적이고 영적인 모든 것이 나오는 주님의 생명으로부터라는 말씀을 보면 분명합니다.
[2]홍수 직전까지 존재했던, 지금 여기 다루고 있는 이 태고교회의 마지막 후손은, 신앙의 진리라는 게 무엇이며, 주님이라는 분은 뉘신지, 그리고 그분이 오셔서 자신들을 구원하신다는 말 같은 거 듣기를 더 이상 내켜 하지 않을 정도로, 감각적인 일과 몸에 관한 일에 너무도 철저히 잃어버린 상태, 잠긴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런 주제들이 언급될 때마다, 그들은 듣기 싫어 외면했습니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eating bread in the sweat of the face)는 바로 이런 혐오를 말합니다. 그래서 또한 유대인들은 천적인 것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대신 오직 세속적 메시아만을 원하는 그런 캐릭터들이 되어버렸고, 그 결과 그들은 만나를 보고 혐오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만나는 주님의 표상이었는데, 그들은 이것을 ‘하찮은 음식’(vile bread)이라 하였고, 그 결과 그들은 자신들한테 불뱀(fiery serpents)을 불러들이는 상황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민21:5, 6)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6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민21:5, 6)
더욱 놀라운 사실은, 천적인 것들을 가리켜 그들이 울면서, ‘역경의 빵’(bread of adversity), ‘비참의 빵’(bread of misery), ‘눈물의 빵’(bread of tears)이라고 했을 때, 실제로 천적인 것들은 역경과 비참이라는 상태로 그들에게 전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앞의 구절에서 혐오하면서 받은 것을 가리켜,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bread of the sweat of the face)이라 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실 주치의로서 오랫동안 사우디아라비아에 있었던 김승학 장로가 사우디아라비아의 감시에도 목숨을 걸고 탐사한, 시내 산을 비롯, 모세의 출애굽기 모든 기록이 담긴 책, ‘떨기나무’ 1, 2를 보면, 사막 한 가운데 이름 모를 히브리 무덤 수천수만 기가 가로세로 질서정연하게 있다고 합니다. 그는 위 민수기 21장 사건을 비롯, 금송아지 사건, 메추리 고기 탐욕 사건 등을 떠올리며, 혹시 이 무덤들이 바로 저렇게 죽어간, 이스라엘 광야 1세대들의 무덤이 아닐까 하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277
이것은 속뜻입니다. 글자에만 집중하는 사람은 이 구절을 사람은 자기가 먹을 걸 땅을 일궈 힘들게, 즉 얼굴에 땀을 흘려 힘들게 구해야만 하는 걸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사람’(Man)은 어떤 한 사람이 아닌,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를 말합니다. ‘땅’(ground)도 땅을, ‘빵’(bread)도 빵을, ‘동산’(garden)도 동산을 말하는 게 아니라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충분히 보여드린 대로 말입니다.
278
‘그가 취함을 입은 흙으로 돌아감’(returning to the ground whence he was taken)의 속뜻이 ‘교회가 거듭나기 전 상태였던 겉 사람(the external man)으로 돌아가다’라는 게 분명한 것은, ‘흙’(ground)의 속뜻이 전에 말씀드린 대로 ‘겉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흙’(dust)의 속뜻이 ‘정죄를 받아 지옥과 같은 상태가 되다’라는 것 또한 앞서 뱀에 관해 드린 말씀으로 분명한데요, 이 뱀은 저주를 받아 ‘흙을 먹을지니라’(eat dust)라는 말씀을 듣게 되지요. ‘흙’(dust)의 속뜻에 대해 거기서 보여드릴 수 있었던 것 외에도 시편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들도 있는데,
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시22:29)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시104:29)
이 말씀의 의미, 속뜻은 사람들이 주님의 얼굴을 외면할 때 그들은 끝나고, 즉 죽고, 그래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return to the dust), 그러니까 정죄를 받아 지옥과 같은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279
일련의 시리즈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모든 구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감각 파트가 자신을 천적인 것으로부터 눈을 돌리게 했다는 것(14절):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14절)
주님이 그들과 재결합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실 거라는 것(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15절)
겉 사람이 스스로 돌아선 결과, 전투가 일어났다는 것(16절):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16절)
그래서 결국 비참해졌다는 것(17절):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17절)
정죄(18절):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18절)
그리고 결국은 지옥(19절):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19절)
이런 일들이 그 교회 안에서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네 번째 후손부터 홍수 때까지 말입니다.
이상으로 창세기 3장 두 번째 단락인 ‘네 번째 후손부터 홍수 때까지 일어난 일’(창3:14-19)을 지난주 14절에 이어 번역, 역시 설명을 곁들이며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창세기 3장 세 번째 단락인 ‘태고교회와 태고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창3:20-24)을 두 주에 걸쳐 살펴보겠습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4:1-9)
태고교회는 사랑으로 주님을 신앙하는 교회(church had faith in the Lord through love)였으나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는 사람들(some who separated faith from love)이 일어났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가인’(Cain)이라 하고,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charity, 자선, 기부, 이웃사랑)를 ‘아벨’(Abel)이라 하였습니다.(1, 2절) (AC.325)
‘사랑으로 주님을 신앙한다’는 것은 그의 신앙생활 전반에 주님을 사랑함이 가득함을 말합니다. 그가 하는 말, 표정, 태도 등 전반에 주님 사랑으로 말미암은 따뜻함과 애정이 느껴지는 신앙으로, 그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의 동기가 오직 주님을 사랑함에 있는, 그런 신앙을 말합니다.
반면,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다’는 것은 신앙 따로, 사랑 따로, 그러니까 말로는 주님 신앙을 말하면서도 태도나 표정, 느껴지는 아우라 등은 전혀 주님 사랑이 아닌, 그런 차갑고 낯선, 이상한 신앙을 말합니다. 말로는 원수를 사랑하라를 가르치면서 정작 자기는 원수를 미워하는 신앙인들이 여기에 해당되겠습니다.
각각의 예배에 대한 설명입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으로 드리는 예배를 ‘가인의 제사’(offering of Cain)라 하고, 체어리티로 드리는 예배를 ‘아벨의 제사’(offering of Abel)라 합니다. (3, 4절) 체어리티로 드리는 예배는 열납(悅納, acceptable)될 수 있었으나 분리된 신앙으로 드리는 예배는 열납될 수 없었습니다.(4, 5절) (AC.326)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은 악한 상태가 되었는데, 이걸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Cain’s anger being kindled, and his countenance falling)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5, 6절) (AC.327)
그리고 신앙의 질(質, quality)은 체어리티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신앙이 주(主)가 되려 하거나 체어리티보다 높아지려고만 하지 않으면 이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하고 싶어 한다는 것(7절) (AC.327)
신앙을 분리,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우선하는 사람들한테서는 체어리티가 사라지게 되는데, 이것을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Cain slaying his brother Abel)로 표현하였습니다.(8, 9절) (AC.328)
피난 간 부산 보수동 시절, 같은 동네 어느 권사님의 백일기도 정성에 마음이 움직여 그분 다니시던 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이라는 걸 처음 시작하신, 그것도 가문 전체에서 처음으로! 부모님을 따라 이번에는 원래 사시던 서울로 제 나이 네 살 때 귀경, 서울 옥수동이라는 데에 터를 잡아 살면서 서울 약수교회라는 데에서 저의 어린 시절은 시작되었습니다. 약수교회는 근처 신일교회에서 나온 교회입니다. 장로교 통합측입니다. 한국 장로교회는 예장통합, 예장합동, 예장고신, 예장합신 및 기장 등 대표 교단과 함께 군소 수백 개 교단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초등학교, 그러니까 국민학교를 마치고 잠시 중학교를 다니던 저는 경남 김해로 이사, 부산까지 통학하면서 고1까지, 그리고 다시 이번에는 경기도 수원으로 가게 되는데, 거기서 수원중앙침례교회(1978년)라는 데를 다니게 되면서 저의 침례교회와의 연결고리가 시작됩니다. 이는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수원 유신고)가 크리스찬스쿨로서 거기 교목이 바로 이동원 목사님이셨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김장환 목사님과 수원중앙침례교회로 연결된 것입니다. 김장환 목사님은 이동원 목사님 미국 유학 뒷바라지를 하신 분이시며, 또 제가 셋째 형님 따라 거기 5천 명 성가대도 섰던, 빌리 그래함 초청, 여의도 집회 때 통역으로 섬기신 분이셔서 나름 검증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여기 ‘검증’이라 한 이유는, 그때만 해도 한국 개신교단에서 침례교회는 이단 아닌가 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지요. 그 고등학교에서 중간에 이동원 목사님이 서울침례교회로 가시게 되어 저 역시 자연스럽게 서울침례교회로(1982년), 그리고 그곳 대학부에서 제 아내를 만나게 되며, 이곳에서 군 제대 후 삼성 입사 및 결혼, 그리고 두 아들도 얻게 됩니다.
그러다 미국에서 돌아오신 이동원 목사님을 돕기 위해 기업을 나와 교회 직원으로 들어가(1996년) 정보시스템 분야에서 현 지구촌교회의 첫 토대 놓는 일에 한 장의 벽돌로 쓰임을 받게 되지요. 이후 대전 내려와 지내던 중 어느 날, 살던 아파트 앞, 다니던 대덕한빛교회에서 한밤중 장모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다가 신학으로의 부름(2005년)을 받고, 준비, 이듬해 대전침신신대원에 입학, 늦은 나이에 신학을 하게 됩니다. 이때 충주 모 교회 주말 사역도 겸하면서 성결교회 역시 경험하였습니다.
3년 신대원을 마치고 대전 늘사랑침례교회의 청빙(2009년)으로 장년 마을사역자 및 교회 내 정보시스템, 방송, 영상 총괄로 섬기다가 허리 디스크 악화로 사임(2013년), 재활 중 그해 9월, 집에서 ‘한결같은교회’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시작, 처음엔 남들처럼 일반 목회로 부르심 받은 줄 알고 그쪽으로 여러 해 두리번거렸으나 둘째를 통해 주님은 전혀 새로운 길, 곧 수도원으로 부르시고(2016년),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새로운 길로 인도하심을 알고 순종, 처음엔 수도 목회를 준비하다가 지금은 스베덴보리 저작 번역 및 사역 준비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수도원 공부를 하며, 많은 수도원과 성인(聖人)전 통해 국내외 수많은 성인을 접하면서, 그리고 여러 국내 군소 수도원들을 접하면서, 그리고 정교회, 성공회 및 불교 수도원 등을 접하면서 그동안 개신교, 특히 침례교회 안에서만 숨 쉬던 저는 개신교를 포함하는 전체 기독교, 그리고 기독교를 포함하는 인류 전체를 보는 시선, 시야,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옮겨가는 것과 같다 할까요? 그러나 이 변화는 결국 만나게 될 어떤 인물을 위한 중간 과정이었을 뿐인데요, 그가 바로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입니다. 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저는 비로소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또렷이 알아가게 되었어요. 주님은 스베덴보리를 통해 많은 것을 계시하셨는데, 그 계시의 전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 곧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에 관한 걸 알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신성으로 충만한 나라인 천국, 곧 사람들로 하여금 생전에 천국에 합당한 상태가 되는 일에 힘쓰도록 말입니다.
2025년 현재 제 나이 만 64세... 지난 세월이 이렇게 쉽게 몇 글자로 요약, 정리가 되지만, 사실 이 글 사이사이 다 적지 못할 많은 일들이 있었지요. 누구나 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 지난 날들이며, 한발 물러난 지금은, 그러니까 뭐랄까... 마치 고치 껍질을 찢고 나와 아름다운 나비가 되는 과정이었다랄까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 지난날 제 삶은 전적으로 주님의 섭리와 경륜임을 인정합니다.그리고 한 가지, 현재의 삶은 사실은 제 아내와 두 아들의 희생 위에 진행된 것임을 꼭 기억, 주님이 저들의 장래에 복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모태 신앙인의 삶, 곧 개신교인의 삶도 살아보고, 스베덴보리 역시 만 8년째인 현재 두 신앙 세계를 굳이 대비, 비교하자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제 경우는, 전자의 삶이 이 세상 정오의 빛 같은 삶이라면, 후자의 삶은 그 일곱 배의 빛 가운데 사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이 한 문장으로도 충분하지만 덧붙이자면, 전자는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를 믿는다면 후자는 주님을 사랑하다 보니 덤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며, 전자는 영성, 영성 하지만 결국 겉 사람의 삶을 좀 거룩하게 사는 걸 가르친다면, 후자는 신성 그 자체에만, 그러니까 무슨 일체의 세속적인 걸 섞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신성만 가르치는, 그래서 순도 100%의 속 사람 되는 걸 가르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아, 하나 더, 전자는 말씀을 겉 글자로만 읽는 신앙생활이라면, 후자는 말씀을 겉과 속, 둘 다로 읽는 신앙생활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3:17)
다음은 이 합리적 능력이라는 래셔널의 퀄러티(The quality of the rational)에 관한 설명입니다. 여기 보면, 이 합리적 능력은 자아, 즉 본성에 동의, 저주를 자초하더니 결국 지옥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남아 있는 이성(理性, reason)은 없고, 대신 이성 노릇을 하는 추론 능력(推論, ratiocination)만 남게 된 것이지요.(17절) (AC.237)
오늘날에도 아내라는 본성(own)에 사로잡혀 그만 주님 주신 본연의 역할인 합리(rational)라는 능력을 포기하는 남편들이 있는데요, 그럴 경우, 이들이 비록 선한 마음으로 그리했을지라도 주님의 질서는 엄정하여 결국 그 값을 치루게 됩니다. 좀 헷갈리고 잘 모르겠을 땐 주님 말씀을 의지하여 결정해야 합니다. 그저 당장 급한 불을 끄고자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서둘러 좋게 좋게 결정하면 좀 심하게 말씀드리면 지옥문이 열리기 때문인데요, 우리는 잘 모르겠을 땐 베드로처럼 해야 합니다.
4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5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6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7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8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9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10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11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눅5:4-11)
이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이라는 표현은 또한 다음 주님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18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19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려진 자요20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22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23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마13:18-23)
혹시 이제라도 돌이켜 수습할 마음이 있으시면 자신의 경솔함을 주님 앞에 시인하시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14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man [vir])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3:14-19)
창세기 속뜻 주석설교, 오늘은 창세기 3장 두 번째 단락(창3:14-19) 시작으로, 그 내용은 ‘태고교회 네 번째 후손부터 홍수 때까지’입니다만, 오늘은 성찬이 있어 그중 창3:14 한 절만 번역, 설명을 곁들이며 살펴보겠습니다.
참고로, 위 제목에 ‘창3.3’은 창3 3절이 아니라 창3의 세 번째 설교라는 뜻입니다. 특별한 의미는 없고, 단지 원고 관리를 좀 더 쉽게 하기 위해 도입했으니 참고하세요.
먼저 개요입니다.
234
홍수로 이어지는 교회의 후속 상태(The subsequent state of the church down to the flood)가 여기 기술되고 있습니다. 그 당시 교회는 자신을 철저히 파괴했기 때문에,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예언이 주어집니다.
235
감각으로 확인할 수 없는 거 믿는 걸 내켜 하지 않음으로써, 감각 파트는, 이게 바로 ‘뱀’(serpent)인데, 자신을 저주했고, 즉 그 자체가 저주였고, 그 결과 지옥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14절)
‘감각 파트’(sensuous part)란 사람을 구성하는 여러 영역, 가령, 영, 지혜, 지성, 이성, 지식, 감각 등의 여러 영역 중 하나를 말합니다. 사람의 이 모든 구성 요소는 주님을 사랑할 때와 자기를 사랑할 때가 다릅니다. 즉, 주님을 사랑할 때는 눈부시게 빛나며 놀라운 생기를 띠고, 2, 3백 프로의 능력을 발휘하며 순기능의 연속이지만, 자기를 사랑할 때는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어두워지면서 죽어가고, 주님이 주신 능력의 10분의 1도 못 쓰는 역기능의 연속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는 겉보기에 잠깐 반짝할지 몰라도 말입니다. 전자는 모든 것의 원천이요 근원 되신 주님께 붙어있는 삶을 사는 거지만, 후자는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의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중 처지는 시간문제입니다.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6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7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4-7)
11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12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될 것이요13악인은 잘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전8:11-13)
236
이런 이유로 온 인류가 지옥을 향해 뛰어 들어가는 걸 막기 위해, 주님은 세상에 오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15절)
237
교회가 ‘여자’(woman)라는 표현으로 더 깊이 설명되고 있는데요, 이 교회는 더 이상 진리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자아(self), 즉 본성(own)을 사랑했습니다. 비록 이 본성을 ‘통제하라’(rule)는 합리적 능력(合理, a rational)이 그들에게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16절)
238
다음은 이 합리적 능력이라는 래셔널의 퀄러티(The quality of the rational)에 관한 설명입니다. 여기 보면, 이 합리적 능력은 자아, 즉 본성에 동의, 저주를 자초하더니 결국 지옥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남아 있는 이성(理性, reason)은 없고, 대신 이성 노릇을 하는 추론 능력(推論, ratiocination)만 남게 된 것이지요. (17절)
오늘날에도 아내라는 본성에 사로잡혀 그만 주님 주신 본연의 역할을 포기하는 남편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비록 선한 마음으로 그리했을지라도 이런 주님의 질서는 엄정하여 그 값을 치루게 되는데요, 좀 헷갈리고 잘 모르겠을 땐 주님 말씀을 의지하여 결정해야 하는데, 그저 당장 급한 불을 끄고자 서둘러 좋게 좋게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잘 모르겠을 땐 베드로처럼 해야 합니다.
4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5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6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7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눅5:4-7)
239
저주와 황폐함, 그리고 길들여 지지 않은 본성(nature), 즉 야생으로 돌아간, 짐승 수준이 되어버린 그들의 본성에 관한 설명입니다. (18절)
240
다음은, 신앙과 사랑의 모든 것을 향한 그들의 혐오와,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들은 처음에는 사람이었다가 이제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19절)
241
태고인들은, 천적(天的, celestial), 그러니까 상응 능력이 있어서, 땅 위 온 세상 만물을 눈으로, 즉 육안(肉眼)으로 보면서도 속으로는 그 사물이 가리키고 표상하는 천국 신성한 것들을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상응의 사람들이 되면 일단 세상에서 추구하던 모든 세속적인 것들에서 한발 물러나게 됩니다. 즉 무슨 세상 지위를 탐하거나, 무슨 세상 것을 누리려 하거나 소유하려 하는 모든 노력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됩니다. 이 세상, 눈에 보이는 것들의 저급함과, 그 대신 천국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것들의 쓰임새에만 집중합니다. 주님이 세상에서 나의 지위를 높이셔도, 또 무슨 누림이나 소유를 많게 하셔도 오직 그 쓰임새만 생각합니다. ‘왜 나를 이 자리에 오르게 하셨을까?’, ‘왜 내가 이런 대접을 받게 하실까?’, ‘왜 내게 이런 재산과 명예를 허락하실까?’ 등 말이죠. 천국 천사들이 바로 이렇습니다.
그들의 시각(sight)은 그저 창문 역할, 안경 역할이었을 뿐, 그들이 실제 뭘 봤는지를 알 수 있는 건 그들의 말(speech)이었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런 걸 알 수 있는데요, 만일 누가 어떤 사람이 하는 말에 깊이 동의가 되면, 그는 실제로 그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마치 말 자체보다는 말에 담긴 의미만 건지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좀 더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심지어 그 말의 의미보다 더 보편적인 의미에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후손들은 그들의 선조들하고는 달랐습니다. 이들 역시 땅 위 온 세상 만물을 눈으로 보았지만, 선조들과 달리 이들은 마치 사랑하듯 보았고, 마음과 생각이 거기에 사로잡혔으며, 그걸 가지고 천국 신성한 것들을 생각했습니다.
즉, 세상 것, 세상, 세속적 가치관으로 천국에 대한 걸 유추하는 것이지요. 가령,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 했으니 천국 가면 아랫사람들을 많이 두고 마음껏 누리는 삶을 살겠네, 천국은 날마다 잔치하는 곳이라 했으니 날마다 큰 연회 베풀어 가장 기름진 음식들을 배불리 먹을 수 있겠네, 천국 길은 황금길이요, 집은 보석 집이라 했으니 황금을 비롯, 각종 보석 등 나는 큰 부자가 되겠네 식으로 천국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속화가 오늘날에 생긴 게 아니라 그 기원이 아득히 먼 옛날, 곧 태고교회 그 후손들한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들과 함께 감각적인 것이 원리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선조들한테는 한낱 도구였을 뿐인 것들이 말입니다. 이처럼 세상에 속한 것, 땅에 속한 것이 원리가 되면, 사람들은 하늘에 속한 걸 이걸 가지고 이성질(理性질, reason)을 하며, 그런 식으로 눈이 머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하는 것 역시 각자의 경험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서 정작 그 말의 의미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은, 그 말에서 건지는 게 거의 없고, 더 나아가 보편적인 의미는 더 말할 것도 없으며, 때로는 그 사람이 하는 모든 말을 단어 하나 가지고, 심지어 어떤 문법적 특이점을 가지고 판단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는, 그런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스베덴보리의 경험에서 나오는 멘트인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가 처음 세상에 이런 천국 아르카나를 전하기 시작했을 때, 공공장소에서 그는 이런 심한 모욕을 자주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뒤로 갈수록 그는 규모 있는 공적 만남은 자제하고, 은둔, 저술에만 전념합니다. 대인 만남은 최대한 조용한 사적 만남으로만 하고 말이지요.
다음은 절 별 속뜻입니다.
14절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AC.242-249)
242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라는 표현은 그들이 자신들의 넘어짐의 원인이 바로 자신들의 감각 파트였음을 지각했다는 의미입니다.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The serpen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라는 표현은 그들의 감각 파트가 그들로 하여금 천적(天的, heavenly)인 것을 거슬러 육체에 속한 걸 향해 스스로 돌아서게 했고, 그렇게 해서 결국 저주를 자초하게 했다는 말입니다. 여기 ‘가축’(beast)과 ‘들의 짐승’(wild animal of the field)은 앞에서처럼 어펙션(affections, 애정)을 말합니다. ‘배로 다니고’(serpent going upon its belly)라는 표현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의 감각 파트는 천국에 속한 것들을 바라보는 대신 그저 육체와 세상에 속한 것만 내려다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eating dust all the days of its life)라는 표현은 이제 감각 파트는 육체와 세상에 속한 걸로만 살아가야 하는, 그러니까 지옥처럼 비참한 처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243
천적이었던 태고인들한테 있어 몸에 속한 감각적인 것들은 그들의 속 사람에게 순응하고 순종하는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이상 무슨 다른 용도로는 자신들의 감각적인 것들을 케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스스로를 사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신들의 감각적인 것들을 속 사람보다 우선시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그것들은 분리되어 육체적이 되더니, 그렇게 해서 결국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쓰라고 인간에게 감각, 곧 시각, 청각, 미각, 후각 및 촉각을 주셨는데, 인간은 엉뚱하게도 이걸 가지고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데 쓰느라 인생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24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Jehovah God speaking to the serpent)라는 표현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신들의 넘어짐의 원인이 바로 자신들의 감각 파트였음을 그들이 지각했다는 의미로, 여기에 대해서는 뭐 더 설명할 게 없지 싶습니다.
245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he said to the serpent, thou ar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라는 이 표현은 그들의 감각 파트가 스스로를 천적인 걸 향해서는 등을 돌리는 한편, 몸에 속한 걸 향해서는 돌아서게 함으로써 저주를 자초했다는 말이며, 말씀의 속뜻으로부터 이런 의미를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즉 주님은 결단코 누구를 저주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절대로 누구에게 화를 내시거나, 절대로 누구를 시험에 빠트리시거나, 절대로 누구를 벌하시거나, 더욱 절대로 누구를 저주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 모든 것은 지옥의 무리들에 의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결코 자비나 평화, 선함의 근원에서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곳과 말씀 여러 다른 곳에서 위와 같은 표현들, 곧 여호와 하나님이 낯을 돌리실 뿐 아니라, 화를 내시고, 벌하시며, 시험하신다는, 그리고 죽이시고, 심지어 저주하신다는 표현까지 사용하는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온 우주 안 모든 것, 심지어 악 자체는 물론, 형벌, 시험들까지도 다스리시며, 정하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심을 믿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며, 그리고 사람들이 이런 가장 일반적인 진리를 받아들였을 때라야 그다음에 주님이 악에 뒤따르는 형벌이나 시험 같은 걸 돌이켜 어떻게 선이 되게 하시는지, 그리고 그렇게 해서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역사하시는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가르칠 때와 배울 때, 이런 가장 보편적인 진리들이 반드시 가장 먼저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래서 말씀의 겉뜻에 이런 표현들이 가득한 것입니다.
영계와 자연계를 포함, 이 모든 피조세계에 주님의 통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데가 하나라도 있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주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 되실 수 없기 때문이지요. 천국과 지옥, 이 세상, 선과 악, 길흉화복(吉凶禍福) 등 어떤 영역이라 하더라도 모두 주님의 주권 아래 존재합니다. 다만 모든 악과 거짓을 주님이 창조하시지 않은 것처럼 말씀에 나오는 저런 모든 안 좋은 행위들 역시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을 뿐입니다. 인간은 그 의지로 주님을 사랑할 수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게 말입니다. 다만 그 결과는 오롯이 본인 책임이지요. 이는 마치 인간에게 지능을 주었더니 인간은 그 지능으로 자동차와 컴퓨터를 만들더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동차, 컴퓨터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다만 인간이 그걸 어떤 의도로 사용하느냐가 문제이지요. 주님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사랑하시지만,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지옥의 존재가 그 증거이며, 아래 산상수훈 말씀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45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46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47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48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38-48)
인생을 살면서 이런 진리, 곧 ‘주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 ‘모든 것은 주님의 다스리심 아래 있다’ 하는 이런 진리들을 굳게 붙들고 의심하지 않는다면, 그때마다 수많은 난관과 어려움들, 불확실성과 모호함이라는 인생의 자욱한 안개가 걷히고, 밝고 맑은 천국의 햇빛과 햇볕을 받으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는 이 정도로만 말씀드리지만 곧 좀 더 자세히 깊은 설명을 준비하겠습니다.
246
‘가축과 들의 짐승’(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field)이라는 이 표현이 어펙션(affections, 애정)을 말한다는 건 앞서 이들을 다룬 글들인 45, 46번 글들과 거기 주님의 허락으로 추가된 시편의 다음 구절을 보면 분명합니다.
9하나님이여 주께서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기업이 곤핍할 때에 주께서 그것을 견고하게 하셨고10주의 회중을 그 가운데에 살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시68:9, 10)
여기 ‘주의 회중’(wild animal)은 선한 애정을 가리킵니다. ‘그 가운데에 살게 하셨나이다’(dwell in the inheritance of God)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 24, 25절에서는 ‘가축과 땅의 짐승’(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이라 하신 반면, 여기와 또 창세기 2장 19, 20절에서는 ‘가축과 들의 짐승’(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field)으로 언급하시는 이유는, 이들 구절은 교회, 즉 거듭난 사람을 다루고 있는 반면, 창세기 1장은 아직은 교회가 아닌, 즉 이제 막 거듭남의 과정을 시작하려는 사람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들’(field)이라는 말은 교회, 즉 거듭난 사람들한테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창2:19, 20)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4, 25)
247
‘배로 다니고’(serpent going on his belly), 이 표현의 의미가 이제 더 이상 그들의 감각 파트는 천국에 속한 것들을 바라보는 대신 그저 육체와 세상에 속한 것만 내려다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라는 것임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분명한데요, 고대에는 ‘배’(belly) 하면 그런 걸 상징한다는 것, 그건 배가 땅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고, ‘가슴’(chest) 하면 땅 위, ‘머리’(head) 하면 가장 높은 곳을 상징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건, 감각 파트는, 그 자체로 사람의 본성 중 가장 낮은 파트인데, 이걸 ‘배로 다녔다’(went upon its belly)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세속적인 걸 향해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그 배가 땅에까지 착 달라붙음, 그 얼굴에 진토가 날라와 덕지덕지 묻음 등 유대교회에도 이런 유사한 상징이 있었는데,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표현을 시편에서 읽는 것입니다.
24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25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26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시44:24-26)
여기서도 보면, 분명히 사람이 여호와의 얼굴을 외면하여 등 돌리는 것을 가리켜, ‘그의 배가 땅 먼지에 착 달라붙었다’(cleaves by his belly to the dust and to the earth) 하고 있습니다. 요나서에도 보면, 큰 물고기의 ‘배’(belly)는, 요나가 그리로 던져졌지요. 마찬가지로 땅의 낮은 파트들을 상징합니다. 아래 그의 예언을 보면 말이지요.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2:2)
여기 ‘스올’(hell)은 낮은 땅을 가리킵니다.
248
그래서 사람이 하늘의 일들을 생각할 때는 그를 가리켜 ‘똑바로 서서 걷다’(walk erect), ‘위를 보다’(look upward), ‘앞으로 나아가다’(forward)라고 했는데 같은 의미이지요. 반대로 그가 육적, 세속적 일들을 생각할 때는 그를 가리켜 ‘땅에 엎드려 절하다’(bowed to the earth), ‘아래를 보다’(look downward), ‘뒤로 물러가다’(backward)라고 했습니다. 레위기입니다.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그들에게 종된 것을 면하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내가 너희의 멍에의 빗장을 부수고 너희를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레26:13)
미가서에도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을 계획하나니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또한 교만하게 다니지 못할 것이라 이는 재앙의 때임이라 하셨느니라 (미2:3)
예레미야서에도
8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 조소거리가 되었으니 전에 그에게 영광을 돌리던 모든 사람이 그의 벗었음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그는 탄식하며 물러가는도다, 13높은 곳에서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내 발 앞에 그물을 치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여 종일토록 나를 피곤하게 하여 황폐하게 하셨도다(애1:8, 13)
그리고 이사야서에서도
24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25헛된 말을 하는 자들의 징표를 폐하며 점치는 자들을 미치게 하며 지혜로운 자들을 물리쳐 그들의 지식을 어리석게 하며(사44:24, 25)
249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eat dust all the days of its life)라는 이 표현의 의미는 이제 감각 파트는 육체와 세상에 속한 걸로만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그러니까 지옥처럼 비참한 처지가 되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말씀에 나오는 ‘흙’(dust)의 상징을 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미가서입니다.
14원하건대 주는 주의 지팡이로 주의 백성 곧 갈멜 속 삼림에 홀로 거주하는 주의 기업의 양 떼를 먹이시되 그들을 옛날같이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시옵소서, 16이르되 여러 나라가 보고 자기의 세력을 부끄러워하여 손으로 그 입을 막을 것이요 귀는 막힐 것이며 17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그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리이다 (미7:14, 16-17)
‘옛날같이’(days of eternity)는 태고교회를 의미합니다. ‘여러 나라’(nations)는 자기 본성(own)을 의뢰하는 자들로, ‘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they shall lick the dust like a serpent)라고 서술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시편에도
광야에 사는 자는 그 앞에 굽히며 그의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시72:9)
‘광야에 사는 자’(Barbarians)와 ‘원수들’(enemies)은 오직 땅과 세상에 속한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사야입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사65:25)
‘흙’(dust, 아래 마10:14에서는 먼지로 번역)이 영적 천적인 하늘의 일 대신 오로지 육의 일, 땅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들을 가리키기 때문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만일 그들이 들어간 성이나 집이 합당하지 않으면, 반드시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shake off the dust of their feet) 명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마10:14)
‘먼지’(dust)가 저주를 받음, 지옥 같은 처지가 됨을 상징한다는 건 19절에서 더 깊이 볼 것입니다.
이상으로 창세기 3장 두 번째 단락인 ‘태고교회 네 번째 후손부터 홍수 때까지’, 다른 말로는 ‘홍수로 이어지는 교회의 후속 상태’(창3:14-19) 그 첫 번째 시간을, 오늘은 성찬이 있어 14절 한 절만 번역, 역시 설명을 곁들이며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주엔 본 단락 나머지 전부인 15절로 19절을 다루겠습니다.
천사들에게는 정말 말로 어떻게 설명이 안 되는, 차원이 다른 정교한 퍼셉션(the exquisite perception)이 있는데요, 천사들은 이걸로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에 반대되는 어떤 것에 들어갈지 말지를 지각합니다. 천사들은 들어가는 것의 퀄리티(quality, 質)와 언제 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해 그런 것에 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는 사람이 혼자 하는 것보다 수천 배나 더 완벽하게 지각합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생각조차도 천사들은 더욱 풀로(fully) 지각합니다. 사람이 그걸로 할 수 있는 가장 그레이트한 것보다도 더 말이지요. 이런 얘기는 정말 믿어지지 않으시겠지만 백 프로 사실입니다.(AC.228)
저는 여전히 이 퍼셉션에 대해 잘 모르지만, 어렴풋이나마 이해하는 바로는 천사 개개인에게 주님으로부터 오는 어떤 내적 음성 내지는 깨달음 같은 게 아닐까 합니다. 영계에서는 어떤 영이 무엇을 궁금해하면 하늘로부터 즉시 어떤 답을 들을 수 있다고 하니까요. 영 또는 천사 개개인의 주님을 향한 사랑 및 내면의 열림에 따라 그 들을 수 있는 퍼셉션 또한 다 다르겠지만 말입니다.
아직 몸 안에 있는 저는 그럼에도 불구, 이 지상에서 저 천사들처럼 주님의 퍼셉션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정말로 소망합니다. 제가 아는 퍼셉션의 첫 번째 주된 기능이 바로 어떤 것, 어떤 상황, 어떤 일이 주님의 선과 진리로 말미암음인지를 직관적으로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매사에 먼저 이걸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많은 실수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까요? 그리고 저 글처럼 범사에 얼마나 온전한 타이밍에 무엇을 할 수 있게 될까요? 뭘 하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등 말입니다.
제가 아직 이 세상에 머무르면서 천사들의 이런 퍼셉션을 원하는 이유는 천사들처럼 저도 주님의 뜻 알고 따르는 일에 완전할 수 있었으면 해서입니다. 제가 천사들처럼 저럴 수만 있다면 제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의 그 정체를 꿰뚫어 보고 결코 보이는 겉모습으로 판단, 일을 그르치는 짓을 더 이상 저지르지 않을 수 있겠지요.
부디 이 세상, 눈에 보이는 것들에서 한발 물러나 영원하신 주님의 아르카나 안에서 모든 걸 할 수 있는 남은 삶 살다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