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렘23:7)Therefore,behold,the days come,says Jehovah,that they shall no more say,Jehovah lives,who brought up the sons of Israel out of the land of Egypt(Jer. 23:7);
스베덴보리가AC.290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이유는,말씀이 주님을‘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AC.290의 중심 주제는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천사와 사람을 비롯한 모든 존재의 생명이 오직 그분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이 구절의‘여호와의 사심으로’라는 표현이 바로 영어 본문의‘Jehovah lives’,곧‘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에 해당합니다.
렘23:7은 바로 앞에서 살펴본 렘16:14와 거의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두 본문 모두 과거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자신들을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기억하며,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맹세하였으나,장차 주님께서 더 크고 새로운 구원을 이루실 것을 예언합니다.따라서 이 구절은 단지 과거의 출애굽을 회상하는 말씀이 아니라,살아 계신 주님께서 시대마다 자기 백성을 속박에서 건져 내시고,생명의 상태로 회복시키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살아 계신 여호와’라는 표현은 단순히 여호와께서 존재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 가운데 한 분이 아니라,생명 자체(Life Itself)이십니다.사람과 천사는 생명을 받아 살아가지만,주님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십니다.그러므로‘여호와께서 살아 계신다’는 고백은 모든 생명과 구원,그리고 회복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렘23:7만 짧게 인용하였지만,그 의미는 이어지는 렘23:8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북쪽 땅과 그들이 쫓겨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시고,다시 그들의 땅에 살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역사적으로는 흩어진 백성의 귀환을 가리키지만,내적 의미로는 악과 거짓 가운데 흩어졌던 사람을 다시 모아 선과 진리의 질서 안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구원 역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살아 계신다’는 것은 정지된 속성이 아니라 실제로 구원하고 회복시키시는 신적 활동과 연결됩니다.살아 계신 주님은 사람을 단지 존재하게 하시는 데 그치지 않고,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깨우시며,악의 종살이에서 건져 내시고,선과 진리 안에서 다시 살게 하십니다.주님께서 생명 자체이시라는 사실은 이처럼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역사 속에서 나타납니다.
또한 출애굽과 포로에서의 귀환은 모두 거듭남의 과정을 나타냅니다. ‘애굽 땅’은 사람이 자연적 지식과 외적인 것에 매여 있는 상태와 관련되고,흩어졌던 여러 나라에서 돌아오는 것은 악과 거짓으로 분산되었던 생각과 애정이 주님의 질서 아래 다시 모이는 것을 나타냅니다.이 모든 회복을 이루시는 분이‘살아 계신 여호와’이시므로,사람은 자기 능력으로 영적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으로부터 받아 살아납니다.
이 구절은 렘5:2와도 의미 있는 대조를 이룹니다.렘5:2에서는 사람들이 입으로‘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맹세하면서도 실제로는 거짓되게 살았습니다.그러나 렘23:7-8에서는 살아 계신 여호와께서 실제로 백성을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일이 나타납니다.따라서 참된 고백은 단지‘주님께서 살아 계신다’고 말하는 데 있지 않고,생명 자체이신 주님의 구원을 받아 그분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렘23:7을 인용하는 이유는,말씀에서 주님만을‘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한다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동시에 이 구절은 주님께서 생명 자체이실 뿐 아니라,악과 거짓 가운데 흩어진 사람을 다시 모으고 영적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구원자이심을 보여 줍니다.그러므로 태고교회가‘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교회 자체에 생명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살아 계신 여호와,곧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4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보라 날이 이르리니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아니하고15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쫓겨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렘16:14, 15)Therefore,behold,the days come,says Jehovah,that it shall no more be said,Jehovah lives,who brought up the sons of Israel out of the land of Egypt;but,Jehovah lives,who brought up the sons of Israel from the land of the north,and from all the lands whither He had compelled them;and I will return them onto their ground that I gave unto their fathers(Jer. 16:14-15).
스베덴보리가AC.290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오직 주님만을 ‘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AC.290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 오직 주님이시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이 구절은 그 진리를 더욱 깊은 차원에서 보여 줍니다.
이 구절의 역사적 배경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기억하며, 주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장차 그보다 더 큰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며, 백성은 ‘북방 땅과 그 쫓겨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역사적으로는 포로에서의 귀환을 가리키지만, 영적으로는 주님께서 사람을 악과 거짓의 모든 속박에서 건져 내시는 더 큰 구원을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역시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이라는 표현입니다. 주님께서는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실 때도, 포로 된 백성을 다시 돌아오게 하실 때도 동일한 ‘살아 계신 여호와’이십니다. 다시 말해, 시대와 사건은 달라져도 생명의 근원은 언제나 오직 주님 한 분뿐입니다. 이것이AC.290의 중심 사상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또한 이 구절은 주님께서 단순히 생명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잃어버린 생명을 회복시키는 분이심을 보여 줍니다. 애굽에서의 구원은 종살이에서의 해방을 의미하고, 북방 땅과 여러 나라에서의 귀환은 흩어진 백성을 다시 모으시는 회복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이것은 사람이 악과 거짓 가운데 있다가 주님에 의해 다시 신앙과 생명의 상태로 인도되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특히 ‘북방’은 말씀에서 진리의 빛이 희미해진 상태나 영적 어둠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북방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다’는 것은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영적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을 다시 진리의 빛 가운데로 이끄시는 주님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그 결과 사람은 다시 ‘그들의 땅’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것은 영적으로는 본래 주님께서 의도하신 교회와 생명의 상태를 회복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이 구절은 ‘살아 계신 여호와’라는 이름과 함께, 그 살아 계신 주님께서 실제로 사람을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시는 분이라는 사실까지 보여 줍니다. 따라서 생명은 단순히 존재하는 힘이 아니라, 사람을 끊임없이 악에서 선으로, 거짓에서 진리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렘16:14-15를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이 주님을 ‘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부르는 또 하나의 중요한 증거를 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동시에 이 구절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께서 사람을 모든 영적 속박에서 구원하여 참된 생명의 상태로 회복시키시는 분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AC.290에서 말하는 ‘산’(living)은 단순히 존재를 유지하는 힘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끊임없이 새롭게 하시고, 당신께로 이끄시는 구원의 생명인 것입니다.
그들이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 살아 있는 여호와라는 내 이름으로 맹세하기를 자기들이 내 백성을 가리켜 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같이 하면 그들이 내 백성 가운데에 세움을 입으려니와(렘12:16)And it shall be,if learning they shall learn the ways of My people,to promise by My name,Living Jehovah,as they taught My people to promise by Baal,then shall they be built in the midst of My people(Jer. 12:16).
스베덴보리가AC.290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말씀에서 오직 주님만이‘살아 계신 여호와’로 불리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AC.290의 중심 주제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 오직 주님이시라는 것이며,이 구절은 그 사실을 잘 뒷받침하는 성경적 증거입니다.
이 구절의 역사적 배경은 이스라엘 주변 민족들에 대한 예언입니다.주님께서는 그들이 회개하여‘내 백성의 도’를 배우고,더 이상 바알을 두고 맹세하지 않고‘살아 있는 여호와라는 내 이름으로 맹세’한다면,그들도 주님의 백성 가운데 세움을 입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따라서 이 말씀은 이방 민족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음을 보여 주는 은혜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살아 있는 여호와라는 내 이름으로’라는 표현입니다.이는 단순한 맹세의 관용구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여호와’라는 이름은 주님께서 생명 자체(Life Itself)이시며,모든 생명의 유일한 근원이심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그러므로 이 표현은 생명이 바알이나 다른 어떤 존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오직 주님께만 있음을 선포하는 신앙고백입니다.
반대로‘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같이’는 거짓 신을 숭배했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영적으로는 생명의 근원을 주님이 아닌 다른 데서 찾는 모든 상태를 의미합니다.사람이 자기 자신이나 세상의 힘,거짓된 교리,또는 어떤 피조물을 생명의 근원처럼 의지할 때,그는 영적인 의미에서 바알을 따르는 것과 같은 상태에 있게 됩니다.
또한‘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라는 말씀도 중요합니다.주님께서는 단순히 입으로‘여호와께서 살아 계신다’말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먼저 주님의 도를 배우고,그 진리 안에서 살아가며,그 결과로‘살아 있는 여호와’를 고백하는 삶을 원하십니다.따라서 이 구절은 살아 있는 신앙이란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주님의 진리를 배우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신앙임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이유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AC.290에 인용합니다.그는 예레미야의 예언 자체를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말씀이 오직 주님만을‘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합니다.그리고 그 이름은 곧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모든 참된 생명이 오직 그분으로부터 나온다는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렘12:16은AC.290의 핵심 사상을 잘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사람은 생명의 근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도 되고,죽은 사람도 됩니다.주님을 생명 자체이신‘살아 계신 여호와’로 인정하고 그분의 길을 배우며 살아가는 사람은 참된 생명 안에 거하게 됩니다.바로 이 점을 밝히기 위하여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렘5:2)And though they say,Jehovah lives;still they promise falsely(Jer. 5:2).
스베덴보리가AC.290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오직 주님만이 참으로‘살아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그는 앞에서 생명은 오직 하나이며,그 생명은 주님으로부터만 나온다고 설명한 뒤,말씀이 실제로 주님을‘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부른다는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살아 계신’이라는 표현입니다.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단순히‘존재하고 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그것은 주님께서 생명 자체(Life Itself)이시며,모든 천사와 사람의 생명의 근원이심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따라서 말씀이 주님을‘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부르는 것은,모든 생명이 오직 그 분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문맥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백성은 입으로는‘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한다’고 말하지만,실제로는‘거짓 맹세’를 하고 있습니다.다시 말해,그들은‘살아 계신 여호와’를 입술로는 인정하면서도 삶으로는 그분을 부인하고 있었습니다.신앙의 고백은 있었지만,그 안에는 참된 생명이 없었습니다.
바로 이 점이AC.290의 내용과 연결됩니다.스베덴보리는 생명은 단순히‘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생명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 안에 있을 때,비로소 사람 안에 역사한다고 설명합니다.그러므로 입으로 아무리‘여호와께서 살아 계신다’말해도,주님과 실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그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또한 살아 있는 신앙과 죽은 신앙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살아 있는 신앙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의 삶 속에서 열매를 맺는 신앙입니다.반대로 죽은 신앙은 입술의 고백은 있지만,삶이 따르지 않는 신앙입니다.예레미야는 바로 이러한 상태를‘거짓 맹세’라는 말로 책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목적은 예레미야 시대의 죄악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그는 말씀에서 주님을‘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동시에,참된 생명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며,그 생명은 참된 신앙 안에서만 역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렘5:2는AC.290의 핵심 주제를 잘 뒷받침하는 말씀입니다.사람은 입술로 주님을 고백한다고 해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생명 자체이신 주님과 실제로 연결될 때,비로소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 됩니다.그래서 말씀은 오직 주님만을‘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하며,그분 안에 있는 사람만을 참된 의미에서‘산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창3:20)
AC.290
교회를 ‘모든 산 자의 어머니’(mother of all living)라고 하는 것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 대한 신앙을 그 교회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이미 앞에서 설명한 내용으로 분명합니다. 생명은 오직 하나이며, 모든 존재의 생명은 그 하나의 생명으로부터 옵니다. 또한 생명이라 할 만한 생명은 생명이신 주님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만 있을 수 있으며, 그 안에 생명이 있는 신앙도 오직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그 신앙 안에 계시지 않으면 그 신앙에는 생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말씀은 오직 주님만을 ‘살아 계신 분’(living)이라고 하며, ‘살아 계신 여호와’(living Jehovah)라고 합니다(렘5:2; 12:16; 16:14-15; 23:7; 겔5:11). That she was called the “mother of all living” in consequence of possessing faith in the Lord, who is life itself, is also evident from what has been already shown. There cannot be more than one life, from which is the life of all, and there can be no life, which is life, except through faith in the Lord, who is the life, nor can there be faith in which is life, except from him, consequently unless he is in it. On this account, in the Word, the Lord alone is called “living,” and is named the “living Jehovah” (Jer. 5:2; 12:16; 16:14, 15; 23:7; Ezek. 5:11);
그들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렘5:2) And though they say, Jehovah lives; still they promise falsely (Jer. 5:2).
그들이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 살아 있는 여호와라는 내 이름으로 맹세하기를 자기들이 내 백성을 가리켜 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같이 하면 그들이 내 백성 가운데에 세움을 입으려니와(렘12:16) And it shall be, if learning they shall learn the ways of My people, to promise by My name, Living Jehovah, as they taught My people to promise by Baal, then shall they be built in the midst of My people (Jer. 12:16).
14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보라 날이 이르리니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아니하고15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쫓겨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렘16:14, 15) Therefore, behold, the days come, says Jehovah, that it shall no more be said, Jehovah lives, who brought up the sons of Israel out of the land of Egypt; but, Jehovah lives, who brought up the sons of Israel from the land of the north, and from all the lands whither He had compelled them; and I will return them onto their ground that I gave unto their fathers (Jer. 16:14-15).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렘23:7) Therefore, behold, the days come, says Jehovah, that they shall no more say, Jehovah lives, who brought up the sons of Israel out of the land of Egypt (Jer. 23:7);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일로 내 성소를 더럽혔은즉 나도 너를 아끼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미약하게 하리니(겔5:11) Therefore, as I live, says the Lord Jehovih, shall it not be, because thou hast defiled My sanctuary with all thy detestable things, and with all thine abominations, that even I shall diminish thee; and My eye shall not spare, and even I will not have pity (Ezek. 5:11).
또한 ‘영원히 살아 계시는 이’(he that liveth to eternity)라고 하며(단4:34; 계4:10; 5:14; 10:6), “he that liveth to eternity” (Dan. 4:34; Rev. 4:10; 5:14; 10:6);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단4:34) And at the end of the days I, Nebuchadnezzar, lifted up my eyes to the heavens, and my knowledge returned to me, and I blessed the Most High and I praised and honored Him who lives to eternity, whose dominion is an eternal dominion, and His kingdom is with generation and generation (Dan.4:34);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계4:10) the twenty and four elders fell down before Him who sat on the throne, and worshiped Him who lives for ages of ages, and cast their crowns before the throne, saying (Rev. 4:10),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5:14) And the four animals said, Amen. And the twenty four elders fell down and worshiped Him who lives for ages of ages (Rev. 5:14).
세세토록 살아 계신 이 곧 하늘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계10:6) and swore by Him who lives for ages of ages, who created heaven, and the things in it, and the earth, and the things in it, and the sea, and the things in it, that time shall be no longer (Rev. 10:6).
‘생명의 원천’(fountain of life)이라고 하고(시36:9), the “fountain of life” (Ps. 36:9);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시36:9) For with Thee is the spring of lives; In Thy light shall we see light (Ps. 36:9).
‘생수의 근원’(fountain of living waters)이라고 합니다(렘17:13). the “fountain of living waters” (Jer. 17:1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렘17:13) O Jehovah, the hope of Israel, all who forsake Thee shall be ashamed, and they who turn aside away from Me shall be written in the earth, for they have forsaken Jehovah, the spring of living waters (Jer. 17:13).
주님으로 말미암아, 곧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얻는 천국은 ‘산 자의 땅’(land of the living)이라고 합니다(사38:11; 53:8; 겔26:20; 32:23-27, 32; 시27:13; 52:5; 142:5). Heaven (which lives by or from him) is called the “land of the living.” (Isa. 38:11; 53:8; Ezek. 26:20; 32:23–27, 32; Ps. 27:13; 52:5; 142:5)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리니 산 자의 땅에서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겠고 내가 세상의 거민 중에서 한 사람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하였도다(사38:11) I said, I shall not see Jah, Jah in the land of the living! I shall not look on man any more with the inhabitants of the world (Isa. 38:11)!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53:8) From restraint and from judgment He was taken; and who shall contemplate His generation? For He was severed from the land of the living; on account of the transgression of My people a plague was upon Him (Isa. 53:8);
내가 너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내려가서 옛적 사람에게로 나아가게 하고 너를 그 구덩이에 내려간 자와 함께 땅 깊은 곳 예로부터 황폐한 곳에 살게 하리라 네가 다시는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 되지 못하리니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라(겔26:20) and I shall bring thee down with those who go down into the pit, to the people of an age, and shall cause thee to dwell in the lower earth, as in waste places of an age, with those who go down into the pit, so that thou not be dwelt in; and I shall put elegance in the land of the living (Ezek. 26:20);
23그 무덤이 구덩이 깊은 곳에 만들어졌고 그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진 자 곧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던 자로다 24거기에 엘람이 있고 그 모든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져 지하에 내려간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였도다 25그와 그 모든 무리를 위하여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침상을 놓았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고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뉘었도다 26거기에 메섹과 두발과 그 모든 무리가 있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27그들이 할례를 받지 못한 자 가운데에 이미 엎드러진 용사와 함께 누운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이 용사들은 다 무기를 가지고 스올에 내려가서 자기의 칼을 베개로 삼았으니 그 백골이 자기 죄악을 졌음이여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용사의 두려움이 있던 자로다(겔32:23-27) whose graves are put in the flanks of the pit, and her assembly is around her grave; all of them slain, fallen by the sword, who put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Elam is there, and all her crowd around her grave, all of them slain, fallen by the sword, who have gone down uncircumcised to the lower earth, who put their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and they have borne their humiliation with those who go down to the pit. They have put a bed for her in the midst of the slain with all her crowd; her graves are all around him, all of them uncircumcised, slain by the sword, for their dismay was put in the land of the living, but they have borne their humiliation with them that go down to the pit. He is put in the midst of the slain. Meshech is there, Tubal, and all her crowd; her graves are all around him, all of them uncircumcised, pierced by the sword, for they put their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And they shall not lie with the mighty who are fallen of the uncircumcised, who are gone down to hell with their weapons of war; and they have put their swords under their heads, but their iniquities shall be on their bones, as they were the dismay of the mighty in the land of the living (Ezek. 32:23-27).
내가 바로로 하여금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게 하였으나 이제는 그가 그 모든 무리와 더불어 할례를 받지 못한 자 곧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이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32:32) For I have put My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and he shall be laid down in the midst of the uncircumcised with them that are slain with the sword, even Pharaoh and all his multitude, says the Lord Jehovih (Ezek. 32:32).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시27:13)
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시52:5)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시142:5)
또한 주님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산 자’(living)라고 합니다. 시편에And those are called “living” who are in faith in the Lord; as in David: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시66:9) Who putteth our soul among the living (Ps. 66:9).
또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생명책’(in the book of lives)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시69:28; 계13:8; 17:8; 20:15). And those who possess faith are said to be “in the book of lives”(Ps. 69:28), and “in the book of life.”(Rev. 13:8; 17:8; 20:15)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시69:28) Let them be wiped out of the Book of Lives, And not be written with the just (Ps. 69:2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계13:8) And all who dwell on the earth shall worship him, whose names are not written in the book of life of the Lamb slain from the founding of the world (Rev. 13: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사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놀랍게 여기리라(계17:8) The beast that thou sawest was and is not, and is about to come up out of the abyss, and to go away into destruction; and they who dwell on the earth shall marvel, whose names were not written on the book of life from the founding of the world, looking at the beast that was and is not, and yet is (Rev. 17:8).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계20:15) And if anyone was not found written in the book of life, he was cast into the lake of fire (Rev. 20:15).
그러므로 주님 신앙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살아난다’(made alive)고 합니다(호6:2; 시85:6). Wherefore also those who receive faith in him are said to be “made alive.” (Hos. 6:2; Ps. 85:6)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호6:2) After two days He will make us live; in the third day He will raise us up, and we shall live before Him (Hos. 6:2).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시85:6) Wilt Thou not return, wilt Thou not make us live, That Thy people may be glad in Thee? (Ps. 85:6)
반대로 주님 신앙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을 말씀은 ‘죽은 자’(dead)라고 합니다. 이사야에 말입니다. On the other hand it follows that those who are not in faith are called “dead”; as in Isaiah: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그들을 멸하사 그들의 모든 기억을 없이하셨음이니이다 (사26:14) The dead shall not live; the Rephaim shall not rise again, because thou hast visited and destroyed them (Isa. 26:14),
여기서 ‘죽은 자들’은 자기 사랑으로 부풀어 오른 사람들을 의미하며, ‘일어난다’(rise again)는 것은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말씀은 그들을 ‘죽임을 당한 자들’(pierced)이라고도 합니다(겔32:23-26, 28-31). meaning those who are puffed up with the love of self; to “rise again” signifies to enter into life. They are also said to be “pierced.” (Ezek. 32:23–26, 28–31)
23그 무덤이 구덩이 깊은 곳에 만들어졌고 그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진 자 곧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던 자로다 24거기에 엘람이 있고 그 모든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져 지하에 내려간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였도다 25그와 그 모든 무리를 위하여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침상을 놓았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고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뉘었도다 26거기에 메섹과 두발과 그 모든 무리가 있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겔32:23-26) whose graves are put in the flanks of the pit, and her assembly is around her grave; all of them slain, fallen by the sword, who put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Elam is there, and all her crowd around her grave, all of them slain, fallen by the sword, who have gone down uncircumcised to the lower earth, who put their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and they have borne their humiliation with those who go down to the pit. They have put a bed for her in the midst of the slain with all her crowd; her graves are all around him, all of them uncircumcised, slain by the sword, for their dismay was put in the land of the living, but they have borne their humiliation with them that go down to the pit. He is put in the midst of the slain. Meshech is there, Tubal, and all her crowd; her graves are all around him, all of them uncircumcised, pierced by the sword, for they put their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Ezek. 32:23-26).
28오직 너는 할례를 받지 못한 자와 함께 패망할 것임이여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우리로다 29거기에 에돔 곧 그 왕들과 그 모든 고관이 있음이여 그들이 강성하였었으나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있겠고 할례를 받지 못하고 구덩이에 내려간 자와 함께 누우리로다 30거기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내려간 북쪽 모든 방백과 모든 시돈 사람이 있음이여 그들이 본래는 강성하였으므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부끄러움을 품고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웠고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였도다 31바로가 그들을 보고 그 모든 무리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을 것임이여 칼에 죽임을 당한 바로와 그 온 군대가 그러하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32:28-31) And thou shalt be broken in the midst of the uncircumcised, and shalt lie with those slain by the sword. There is Edom, her kings, and all her chiefs, which with their might are put with those slain by the sword; they shall lie with the uncircumcised, and with those who go down to the pit. There be the princes of the north, all of them, and all the Zidonians, who have gone down with the slain; by their dismay they are ashamed of their might; and they lie uncircumcised with those slain by the sword, and bear their humiliation with those who go down to the pit. Pharaoh shall see them, and shall comfort himself over all his crowd; Pharaoh and all his host are slain by the sword, says the Lord Jehovih (Ezek. 32:28–31).
주님께서도 그들을 ‘죽은 자들’(dead)이라고 하셨습니다(마4:16; 요5:25; 8:21, 24, 51-52). They are also called “dead” by the Lord. (Matt. 4:16; John 5:25; 8:21, 24, 51, 52)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마4:16) the people who sat in darkness saw great light; and to them who sat in the country and shadow of death, light has risen (Matt. 4:16).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5) Amen, amen, I say to you, that an hour comes, and now is, when the dead shall hear the voice of the Son of God, and they who hear shall live (John 5:25).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요8:21) Then Jesus said again to them, I go, and you shall seek Me, and shall die in your sin. Whither I go, you cannot come (John 8:2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8:24) I said then to you that you shall die in your sins; for unless you believe that I am, you shall die in your sins (John 8:24).
51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52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요8:51, 52) Amen, amen, I say to you, If anyone keep My word, he shall not behold death for eternity. Then the Jews said to Him, Now we know that Thou hast a demon. Abraham is dead, and the prophets, and Thou sayest, If anyone keep My word, he shall not taste death into the ages (John 8:51, 52).
또한 말씀은 지옥을 ‘사망’(death)이라고 합니다 (사25:8; 28:15). Hell also is called “death.” (Isa. 25:8; 28:15)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사25:8) He shall swallow up death perpetually; and the Lord Jehovih shall wipe away the tear from all the faces; and the reproach of His people shall He remove from all the earth; for Jehovah has spoken (Isa. 25:8).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스올과 맹약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았고 허위 아래에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는도다 (사28:15) for you have said, We have cut a covenant with death, and with hell have we made a vision; when the whip of inundation passes through, it shall not come to us; for we will set a lie as our protection, and in falsity will we hide ourselves (Isa. 28:15).
해설
AC.290은 왜 태고교회를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하는지를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여기서 ‘산 자’는 단순히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호흡하고 움직이며 생각한다고 해서 곧 말씀의 의미로 살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생명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으며, 주님과 연결된 사람만이 영적으로 살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생명이 여럿일 수 없다 말합니다. 사람과 천사가 저마다 자기 생명을 따로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생명의 근원은 오직 하나입니다. 모든 존재는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생명을 받아 살아갑니다. 사람은 생명을 소유한 존재가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이며,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힘으로 생각하고 사랑하고 살아간다고 믿는 것은 겉으로 느껴지는 현상일 뿐, 생명의 실제 근원은 언제나 주님께 있습니다.
본문은 이어서 ‘생명이라 할 만한 생명’은 주님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신앙은 단순히 교리를 사실로 인정하는 지적 동의가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주님과 연결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신앙 안에 생명이 있으려면 그 신앙이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와야 하며, 주님께서 그 안에 계셔야 합니다. 주님과 분리된 신앙은 지식이나 확신일 수는 있어도 살아 있는 신앙은 아닙니다.
이 때문에 말씀은 오직 주님만을 ‘살아 계신 여호와’, ‘영원히 살아 계시는 이’, ‘생명의 원천’, ‘생수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이런 표현들은 모두 주님께서 생명을 다른 곳에서 받아 가지신 분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 그 자체이심을 보여 줍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이 나오고, 그 사랑으로부터 지혜와 진리가 나오며, 그 모든 것이 천사와 사람의 영적 생명이 됩니다.
천국을 ‘산 자의 땅’이라고 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천국이 살아 있는 것은 천사들이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기쁘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국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받아들여지고 살아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지상에 있으면서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인다면, 그는 이미 어느 정도 ‘산 자의 땅’에 속해 있는 셈입니다.
‘생명책’이라는 표현도 문자 그대로 어떤 장부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뜻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생명책에 있다는 것은 사람의 속 사람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새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살아난다’는 말씀 역시 육체가 다시 움직인다는 뜻이 아니라, 이전에는 닫혀 있던 영적 생명이 열리고, 주님과의 연결이 회복된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말씀에서 ‘죽은 자’는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몸은 살아 있어도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에 있습니다. 특히 사26:14의 ‘죽은 자들’은 자기 사랑으로 부풀어 오른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자기 사랑이 사람의 중심을 차지하면 주님의 생명이 들어올 자리가 닫히기 때문에, 그 상태를 말씀은 죽음이라고 합니다.
이 점에서 지옥을 ‘사망’이라고 하는 이유도 분명해집니다. 지옥의 영들도 존재하며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지만, 그들의 삶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생명을 거꾸로 받아 자기 사랑과 악으로 바꾼 상태입니다. 그들은 생명의 흐름 자체를 없앨 수는 없지만, 그것을 왜곡하여 죽음과 같은 삶으로 만듭니다. 그러므로 지옥은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생명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의지와 사랑이 돌아선 상태입니다.
AC.290의 중심은 ‘살아 있다’는 말의 영적 의미에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천국과 교회와 사람은 모두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받습니다. 태고교회를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하는 것은 그 교회가 생명의 근원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이고, 사람들을 그 생명으로 인도한 최초의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교회의 사명도 사람을 자기 조직이나 지식에 묶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생명 자체이신 주님께 연결하는 데 있습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마4:16)the people who sat in darkness saw great light;and to them who sat in the country and shadow of death,light has risen(Matt. 4:16).
이 말씀은 사9:2의 예언을 마태가 주님의 오심과 연결하여 인용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AC.290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에게 참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절은 생명의 근원이 오직 주님이심을 긍정적인 모습으로 가장 아름답게 증언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에서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흑암에 앉은 백성’과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흑암’은 진리의 결핍이나 거짓 가운데 있는 상태를, ‘사망’은 무엇보다 영적 죽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단순히 불행한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진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AC.290에서 말하는 ‘사람은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메시지의 출발점과도 연결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큰 빛을 보았다’, ‘빛이 비치었다’고 말씀하는 것은 단순히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에서 ‘빛’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를 의미하며, 그 신적 진리는 언제나 신적 선과 함께 사람에게 생명을 전달합니다. 다시 말해, 이 빛은 단순한 깨달음이 아니라 사람을 영적으로 살리는 주님의 생명 자체의 역사입니다.
특히 이 구절에서는 사람들이 먼저 빛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빛이 그들에게 비추었습니다. 이는 AC.290의 중심 메시지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생명은 사람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시작됩니다. 사람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수용자이며, 주님께서 먼저 빛과 생명을 보내실 때, 비로소 영적으로 살아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구절은 앞에서 AC.290에 인용된 호6:2와 시85:6을 더욱 완성하는 말씀입니다. 호세아는 ‘주께서 우리를 살리시며’라고 말하고, 시편은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라고 기도합니다. 마태복음은 그 약속과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안에서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보여 줍니다. 곧 주님 자신이 세상에 오셔서 영적 죽음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또한 앞에서 인용된 사26:14와 겔32의 여러 구절과도 선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이사야와 에스겔에서는 주님의 생명을 거부한 사람들이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묘사되었다면, 마태복음에서는 바로 그 죽음의 그늘 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빛을 비추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생명을 잃은 상태를 보여 주고, 다른 하나는 그 생명이 어떻게 회복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무엇보다 이 구절은 주님 자신이 생명의 근원이심을 드러냅니다. 주님은 단순히 생명에 대해 가르치시는 분이 아니라, 생명 자체이신 분으로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계신 곳에는 빛이 있고, 그 빛이 있는 곳에는 생명이 있으며, 그 생명이 있는 곳에는 거듭남과 천국이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AC.290 전체에서 설명하려는 핵심 진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마4:16을 AC.290에서 인용한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이 구절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에게 참된 생명을 주시는 분이 오직 주님뿐이심을 직접적으로 증언합니다. 사람은 흑암과 사망의 그늘 가운데 앉아 있을 뿐 스스로 빛을 만들어 낼 수도, 생명을 일으킬 수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신적 진리와 신적 선이 사람에게 비칠 때, 비로소 참된 생명이 시작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사람은 그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라는 AC.290의 중심 메시지를 가장 희망차고 복음적인 언어로 확증하는 중요한 성경 말씀입니다.
35. ‘요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5)Amen,amen,I say to you,that an hour comes,and now is,when the dead shall hear the voice of the Son of God,and they who hear shall live(John 5:25).
스베덴보리가 AC.290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사람에게 참된 생명을 주시는 분이 오직 ‘하나님의 아들’, 곧 주님뿐이심을 주님 자신의 말씀으로 직접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AC.290의 중심 메시지인 ‘사람은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가장 직접적으로 뒷받침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죽은 자들’은 무엇보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육체의 무덤 속에 있는 사람들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와 거짓 가운데 있어 주님의 생명과 분리된 사람들을 가리키십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에서 ‘죽음’은 먼저 영적 죽음을 의미한다고 반복하여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영적 생명의 회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라는 표현도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귀로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삶으로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음성은 곧 신적 진리이며,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 안으로 주님의 생명이 흘러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주는 것은 사람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과 그 말씀 안에 있는 신적 생명입니다.
이어지는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는 말씀은 AC.290의 핵심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죽은 자가 스스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주님의 음성이 있고, 그 음성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살아납니다. 생명의 시작은 언제나 주님에게 있으며, 사람은 그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계속 강조하는 ‘인플럭스’(influx)의 원리입니다.
이 구절은 바로 앞 절들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요5:21에서는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하시고, 이어서 26절에서는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 하십니다. 따라서 25절은 주님께서 생명 자체이시며, 사람에게 생명을 전달하시는 분이심을 설명하는 문맥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AC.290의 논지와 완전히 일치합니다.
또한 이 말씀은 앞에서 AC.290에 인용된 마4:16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다’고 하였고, 여기서는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난다’ 말씀합니다. 빛은 신적 진리를, 음성은 그 진리의 전달을 의미하며, 두 본문 모두 주님께서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동일한 역사를 서로 다른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또한 호6:2와 시85:6에서 ‘주께서 우리를 살리시며’,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라고 말한 예언과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구약에서는 여호와께서 살리신다 선포되었고,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음성으로 죽은 자들을 살리신다 선언하십니다. 이는 여호와와 주 예수 그리스도가 동일한 생명의 주님이심을 드러내는 중요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요5:25를 AC.290에서 인용한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본래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과, 오직 주님의 음성과 신적 진리를 받아들일 때만 참된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을 가장 권위 있게 선언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사람은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라는 AC.290의 중심 메시지를 주님 자신의 말씀으로 직접 확증하는 가장 중요한 성경 본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36. ‘요8: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요8:21)Then Jesus said again to them,I go,and you shall seek Me,and shall die in your sin.Whither I go,you cannot come(John 8:21).
스베덴보리가 AC.290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사람의 참된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죄 가운데 죽는 것’,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거부한 상태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은 앞에서 인용된 요5:25가 영적 생명을 긍정적으로 설명하였다면, 그 반대의 경우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죽으리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죽음의 원인이 육체의 소멸이 아니라 죄와 악 속에 머무는 상태임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죄란 단순히 어떤 행위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떠나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삼는 삶의 방향입니다. 그러므로 죄 가운데 죽는다는 것은 영적 생명을 잃은 상태를 뜻합니다.
또한 ‘내가 가리니’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영화되신 후에도 계속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전제합니다. 문제는 주님께 생명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데 있습니다. AC.290이 말하는 것처럼 생명은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지만, 사람이 악과 거짓을 붙들면 그 생명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다가’라는 표현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여기서 찾는다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지적 탐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찾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믿고 삶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외적으로는 주님을 찾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적으로는 자신들의 악과 거짓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죄 가운데 죽는다’는 선언을 듣게 됩니다.
이어지는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는 말씀 역시 공간적인 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은 장소보다 상태의 차이라고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계신 곳은 생명과 사랑, 그리고 진리의 상태인 반면, 죄 가운데 머무는 사람은 그 상태와 전혀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그곳에 이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 결합되지 않는 한, 누구도 주님이 계신 곳으로 갈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앞에서 AC.290에 인용된 마4:16과 요5:25와도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사망의 그늘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었고, 요5:25에서는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동일한 주님 앞에 있으면서도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주님의 빛과 음성은 동일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 생명과 죽음이 갈립니다.
또한 이 구절은 호6:2와 시85:6의 ‘주께서 우리를 살리신다’는 말씀과도 대조를 이룹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을 살리기를 원하시지만, 사람이 죄를 사랑하여 그 상태 안에 머물기를 선택하면 그 생명을 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죽음의 원인은 주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으로부터 스스로 등을 돌리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여러 곳에서 설명하는 영적 죽음의 본질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요8:21을 AC.290에서 인용한 이유는, 생명과 죽음이 모두 주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독립적인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므로, 주님과 결합되어 있을 때만 참으로 살아 있습니다. 반대로 죄 가운데 머물러 주님의 생명을 거부하면, 비록 육체는 살아 있어도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에 있게 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사람은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받을 때만 참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AC.290의 중심 메시지를 엄숙하게 확증하는 중요한 성경 말씀입니다.
37. ‘요8: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8:24)I said then to you that you shall die in your sins;for unless you believe that I am,you shall die in your sins(John 8:24).
스베덴보리가 AC.290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영적 생명은 오직 주님을 통하여 오는 것이며,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영적 죽음 가운데 머물게 된다는 사실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스스로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생명의 근원이 오직 주님이심을 선언하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말씀에서 ‘너희가 죽으리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두 번이나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반복하십니다. 이 반복은 참된 죽음이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적 죽음임을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은 단순히 죄를 한 번 범한 상태가 아니라, 악과 거짓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여 주님의 생명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죄 가운데 죽는다는 것은 곧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 단절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 구절의 중심은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이라는 말씀입니다. 원문의 ‘내가 그’(I am)는 단순히 예수라는 한 인물을 인정하는 차원을 넘어, 주님께서 영원하신 여호와, 곧 생명 자체이심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도 여러 저술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여호와의 이름이 주님 안에서 완전히 드러났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은 단순한 교리적 동의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 오직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또한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사실을 지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언제나 삶과 결합된 신앙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며,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가 끊임없이 흘러 들어옴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이 있을 때, 사람은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됩니다.
이 구절은 바로 앞의 요8:21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21절에서는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말씀하셨고, 24절에서는 왜 그렇게 되는지를 설명하십니다. 그 이유는 바로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입니다. 다시 말해, 영적 죽음의 근본 원인은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거부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AC.290이 말하는 생명의 본질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또한 이 말씀은 요5:25와도 아름다운 대조를 이룹니다. 요5:25에서는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서는 주님의 음성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살아나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여기서는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죄 가운데 죽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두 본문은 함께 읽을 때, 생명과 죽음이 모두 주님에 대한 사람의 응답과 관련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이 말씀은 또한 AC.290에 앞서 인용된 마4:16과도 연결됩니다.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큰 빛을 본 것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찾아오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빛이 비추어도 그것을 거부하면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게 됩니다. 따라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 오셨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그분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말씀 전체를 관통하는 영적 원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요8:24를 AC.290에서 인용한 이유는, 참된 생명과 영적 죽음의 갈림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므로, 생명 자체이신 주님을 믿고,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받아들일 때만 참으로 살아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을 거부하면 죄 가운데 머물게 되고, 그 결과는 영적 죽음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사람은 그분으로부터 끊임없이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라는 AC.290의 중심 메시지를 주님 자신의 선언으로 가장 명백하게 확증하는 중요한 성경 말씀입니다.
38. ‘요8:51-52’
51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52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요8:51, 52)Amen,amen,I say to you,If anyone keep My word,he shall not behold death for eternity.Then the Jews said to Him,Now we know that Thou hast a demon.Abraham is dead,and the prophets,and Thou sayest,If anyone keep My word,he shall not taste death into the ages(John 8:51, 52).
스베덴보리가 AC.290에서 이 말씀을 인용한 이유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적 죽음이며, 참된 생명은 오직 주님의 말씀 안에서만 얻어진다는 사실을 직접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은 AC.290의 핵심 메시지를 매우 분명하게 뒷받침합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만일 여기서 죽음을 육체의 죽음으로만 이해한다면,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아브라함도 죽었고, 선지자들도 모두 육체적으로 죽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결합이 끊어진 영적 죽음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도 말씀에서 ‘죽음’은 본질적으로 영적 죽음을 뜻한다고 일관되게 설명합니다.
특히 ‘내 말을 지키면’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암송하거나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신적 진리이며, 그 안에는 주님의 생명이 함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곧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는 두 표현도 같은 진리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강조합니다. 죽음을 ‘본다’는 것은 영적 죽음의 상태를 경험하는 것이며, 죽음을 ‘맛본다’는 것은 그 상태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사람은 비록 육체는 죽더라도 영적 죽음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생명이 이미 주님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반응은 문자적 이해와 영적 이해의 차이를 잘 보여 줍니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선지자들이 육체적으로 죽었다는 사실만을 생각,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육체의 생명이 아니라 영혼의 생명을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AC.290 역시 같은 관점에서, 사람의 참된 생명은 육체의 활동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드는 영적 생명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구절은 앞에서 AC.290에 인용된 요5:25와 요8:21, 24를 자연스럽게 이어 줍니다. 요5:25에서는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난다고 하셨고, 요8:21과 24에서는 주님을 거부하는 사람은 죄 가운데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는 그 반대로,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다고 선언하십니다. 이처럼 생명과 죽음의 기준은 언제나 주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마4:16의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다’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빛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되고,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반대로 빛을 거부하는 사람은 죄 가운데 머물며, 영적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이 모든 본문은 서로 다른 표현으로 동일한 진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요8:51-52를 AC.290에서 인용한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며, 오직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고 그 말씀을 삶으로 지킬 때만 영적 죽음을 이기고 참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육체의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주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은 영적 죽음을 결코 경험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사람은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그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라는 AC.290의 중심 메시지를 주님 자신의 선언으로 가장 분명하게 확증하는 중요한 성경 말씀입니다.
39. ‘사25:8’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사25:8) He shall swallow up death perpetually; and the Lord Jehovih shall wipe away the tear from all the faces; and the reproach of His people shall He remove from all the earth; for Jehovah has spoken (Isa. 25:8).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이사야 25장 8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사망(death)’이 단순한 육체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죽음을 의미하며, 주님께서 오심으로 그 죽음을 정복하시고 생명을 회복시키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산 자들’이라 불리고, 주님의 생명에서 분리된 사람들이 ‘죽은 자들’이라 불린다는 사실을 설명해 왔는데, 이 구절은 그러한 죽음이 결국 주님에 의해 폐하여진다는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은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만일 여기서 사망이 육체적 죽음을 의미한다면,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성취되지 않은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후에도 사람들은 계속 육체적으로 죽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여기서의 사망을 영적 죽음으로 이해합니다. 영적 죽음이란 주님에게서 분리된 상태, 곧 선과 진리의 생명을 잃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사망을 삼켜 버리신다(swallow up death)’는 것은, 인간을 지배하던 지옥의 권세와 영적 죽음의 세력을 정복하신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주님의 지상 생애는 단순한 도덕적 모범의 삶이 아니라 지옥 전체와의 끊임없는 전투였으며, 그 승리를 통해 인류에게 다시 천국으로 나아갈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망이 멸해진다는 것은 육체가 죽지 않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 생명이 다시 가능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말씀에서 눈물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영적 고통과 황폐함을 의미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상태에서는 불안과 두려움과 공허함이 생기지만, 주님의 생명이 다시 유입될 때 그러한 영적 슬픔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친히 눈물을 씻기신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는 말씀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수치는 단순한 체면 손상이 아니라, 선과 진리가 상실된 상태에서 오는 영적 부끄러움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수치가 제거된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을 다시 생명과 진리의 상태로 회복시키신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은 앞서 살펴본 요한복음 8장 51절의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개인의 차원에서 죽음이 정복되는 것이 말해졌다면, 여기서는 보다 보편적인 차원에서 사망 자체가 폐하여지는 것이 말해지고 있습니다. 둘 다 동일한 진리, 곧 주님께서 영적 죽음을 이기셨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사야 25장 8절을 AC.290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말하는 ‘생명’과 ‘죽음’의 참된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참된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분리되는 것이고, 참된 생명은 주님과 결합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심으로써 그 영적 죽음을 정복하셨고, 그 결과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죽음의 권세 아래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그분께서 영적 죽음을 영원히 멸하셨다’는 AC.290의 핵심 사상을 웅장하게 선언하는 말씀으로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40. ‘사28:15’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스올과 맹약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았고 허위 아래에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는도다 (사28:15) for you have said, We have cut a covenant with death, and with hell have we made a vision; when the whip of inundation passes through, it shall not come to us; for we will set a lie as our protection, and in falsity will we hide ourselves (Isa. 28:15).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이사야 28장 15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사망(death)’과 ‘스올(hell, 지옥)’이 단순한 육체적 죽음이나 무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과 악 가운데 있는 영적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산 자들’이라고 불리고, 주님의 생명에서 분리된 사람들이 ‘죽은 자들’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설명하였는데, 이 구절은 그러한 영적 죽음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사람들은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스올과 맹약하였다’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매우 이상한 표현입니다. 누가 실제로 죽음과 계약을 맺고 지옥과 조약을 체결하겠습니까? 바로 이 점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영적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서 ‘사망’은 영적 죽음, 곧 진리와 선을 거부한 상태를 의미하며, ‘스올’은 그러한 상태가 궁극적으로 연결되는 지옥적 삶을 의미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왜 그런 말을 하는가입니다. 그들은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라’고 말합니다. 즉 자신들은 안전하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 안전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본문은 ‘우리는 거짓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았고 허위 아래에 우리를 숨겼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들은 진리가 아니라 거짓을 의지하고 있으며, 그것을 안전과 보호의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것은 영적 죽음의 본질을 매우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영적 죽음은 단순히 진리를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거짓을 진리처럼 믿고 그 안에서 안전을 찾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이 죽어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신이 가장 안전하고 가장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이 구절은 앞서 살펴본 요한복음 8장 24절의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을 거부하면 죄 가운데서 죽게 되는데, 여기서는 그 죽음의 상태가 ‘거짓을 피난처로 삼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즉 죽음은 단순한 상태가 아니라 거짓과 악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왜 어떤 사람들이 ‘죽은 자들’이라고 불리는지도 설명해 줍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 대신 거짓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말씀에서는 이미 ‘사망과 언약한 자들’로 불립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죽음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사야 28장 15절을 AC.290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사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망은 단순한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거짓을 진리보다 사랑하고 주님보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는 ‘사망과 언약하고 스올과 맹약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AC.290의 중심 사상을 부정적인 측면에서 강하게 증언합니다. 주님은 생명 자체이시며, 그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산 자들입니다. 반대로 거짓과 허위를 피난처로 삼는 사람들은 비록 살아 있는 것처럼 보여도, 말씀의 의미에서는 이미 사망과 연합한 자들입니다. 이 때문에 이사야 28장 15절은 ‘생명’과 ‘죽음’의 영적 의미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증거 구절로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네 피의 어머니는 물가에 심긴 포도나무 같아서 물이 많으므로 열매가 많고 가지가 무성하며(겔19:10)Thy mother is like a vine in thy likeness,planted near the waters;she was fruitful and full of leaves because of many waters(Ezek. 19:10).
스베덴보리가AC.289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어머니’가 교회를 의미할 뿐 아니라, 특별히 ‘좋은 상태에 있는 교회’도 의미할 수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사50:1, 렘50:12, 겔16:45는 모두 타락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이 구절은 주님으로부터 풍성한 생명을 받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는 예입니다.
겔19의 역사적 배경은 유다 왕국의 몰락과 슬픔을 노래하는 애가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역사적 배경보다 그 안에 담긴 영적 의미에 주목합니다. 그는 이 구절에서 ‘어머니’가 고대교회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 역시 역사적 사건을 넘어, ‘어머니’가 교회를 나타내는 상응의 한 예가 됩니다.
여기서 교회는 ‘물가에 심긴 포도나무’로 묘사됩니다. 말씀에서 포도나무는 일반적으로 영적 교회를 상징합니다. 포도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받아들여 신앙의 열매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교회가 본래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또한 ‘물이 많으므로’라는 표현도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말씀에서 ‘물’은 진리를 의미하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그러므로 물가에 심겨 있고 물이 많다는 것은,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풍성한 진리 가운데 있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 ‘열매가 많고 가지가 무성한’ 포도나무가 됩니다. 이것은 교회가 진리 안에 있을 때 선한 삶과 풍성한 영적 열매가 나타남을 상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특별히 이 구절에서 ‘어머니’를 고대교회로 설명합니다. 반면 이어지는 문장에서는 ‘어머니’라는 이름은 무엇보다 태고교회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덧붙입니다. 이는 고대교회와 태고교회를 혼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겔19:10의 ‘어머니’는 문맥상 고대교회를 의미하지만, ‘어머니’라는 상징 자체는 최초의 교회이며 유일한 천적 교회였던 태고교회에서 가장 완전하게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스베덴보리는 여러 시대의 서로 다른 교회를 예로 들면서도 하나의 공통된 원리를 보여 줍니다. 곧 말씀에서 ‘어머니’는 시대와 대상이 달라져도 언제나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타락한 교회를, 어떤 경우에는 주님 안에서 열매 맺는 교회를 가리키지만, ‘어머니’라는 상응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겔19:10을 인용하는 이유는, ‘어머니’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긍정적인 모습으로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의 인용들이 타락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이 구절은 주님의 진리 가운데 심겨 풍성한 열매를 맺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를 통하여 ‘어머니’라는 표현이 말씀 전체에서 일관되게 교회를 나타내는 영적 상징임을 더욱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어머니의 딸이요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형의 동생이로다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요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며(겔16:45)Thou art thy mother’s daughter that loathed her man and her sons;your mother was a Hittite,and your father an Amorite(Ezek. 16:45),
스베덴보리가AC.289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말씀에서‘어머니’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이 구절은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의 타락을 책망하는 말씀이지만,스베덴보리는 그 안에서도‘어머니’라는 표현이 영적으로는 교회를 가리킨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특히 이 구절은 앞에서 인용한 사50:1이나 렘50:12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에서‘남편’(man, vir)은 주님과 천적인 모든 것을, ‘자녀’(sons)는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그렇다면‘어머니’역시 그 주님과 결합하고 신앙의 진리를 낳는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즉,이 구절은 스베덴보리 자신이 바로 뒤에서 제시하는 상응 해석의 근거가 되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남편을 싫어하였다’는 말씀은 단순히 부부 사이 갈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영적으로는 교회가 주님을 거부하고,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 선과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원래 교회는 주님과 결합,생명을 받아야 하지만,타락한 교회는 그 결합을 싫어하고,자기 사랑과 자기 지혜를 더 사랑하게 됩니다.
또한‘자녀를 싫어하였다’는 것은 신앙의 진리를 거부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말씀에서‘자녀’는 교회로부터 태어나는 신앙의 진리들을 상징합니다.따라서 이 구절은 교회가 주님뿐 아니라,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까지 함께 거절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이것은 교회의 타락이 단순한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선과 진리 자체를 거부하는 영적 문제임을 나타냅니다.
이어지는‘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요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라’는 말씀도 실제 혈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스베덴보리가 설명하듯이‘헷 사람’은 거짓을, ‘아모리 사람’은 악을 의미합니다.즉,타락한 교회는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교회가 아니라,거짓과 악을 자기 근원으로 삼는 교회가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상응 관계를 통하여‘어머니’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만일‘어머니’를 단순한 육신의 어머니로 이해한다면, ‘남편은 주님’, ‘자녀들은 신앙의 진리’, ‘헷 사람은 거짓’, ‘아모리 사람은 악’이라는 설명은 서로 연결될 수 없습니다.그러나‘어머니’를 교회로 이해하면,구절 전체가 하나의 일관된 영적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겔16:45를 인용하는 이유는 단순히‘어머니’라는 단어 하나를 예로 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그는 이 구절 전체를 통하여‘어머니는 교회’, ‘남편은 주님’, ‘자녀들은 신앙의 진리’라는 상응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따라서 이 말씀은‘어머니’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가장 풍성하고도 분명하게 증명하는 대표적인 성경 구절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너희의 어머니가 큰 수치를 당하리라 너희를 낳은 자가 치욕을 당하리라보라 그가 나라들 가운데의 마지막과 광야와 마른 땅과 거친 계곡이 될 것이며(렘50:12)Your mother is greatly ashamed;she that bare you was suffused with shame(Jer. 50:12).
스베덴보리가AC.289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말씀에서‘어머니’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이 구절의 역사적 배경은 바벨론에 대한 심판이지만,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바벨론 자체가 아니라‘어머니’라는 표현입니다.그는 이 구절을 통하여 말씀에서‘어머니’가 영적으로는 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말씀에서‘어머니’는 사람을 영적으로 낳고 기르는 교회를 상징합니다.육신의 어머니가 자녀를 낳아 기르듯이,교회는 말씀과 진리를 통하여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영적 생명으로 자라게 합니다.그러므로‘어머니’라는 표현은 한 개인이 아니라 영적 공동체,곧 교회를 가리킵니다.
이 구절에서‘너희의 어머니가 큰 수치를 당하리라’, ‘너희를 낳은 자가 치욕을 당하리라’는 말씀은 교회의 영적 상태를 묘사합니다.여기서‘수치’와‘치욕’은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를 잃어버리고 본래의 영광을 상실한 상태를 의미합니다.교회는 여전히 외형적으로 존재할 수 있지만,주님과의 결합을 잃으면 영적으로는 수치 가운데 있는 교회가 됩니다.
예레미야는 이 말씀을 바벨론에 대한 심판 가운데 기록하고 있지만,스베덴보리는 그 안에서도 변하지 않는 상응 원리를 봅니다.곧 말씀에서‘어머니’라는 표현은 역사적 배경이 어디이든 일관되게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따라서 그는 이 구절을‘어머니’가 교회를 뜻한다는 성경적 증거로 인용합니다.
또한 이 구절은 교회가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보여 줍니다.주님 안에 있는 교회는 영적 생명을 낳는 어머니가 되지만,선과 진리를 떠난 교회는 수치와 부끄러움 가운데 있는 어머니가 됩니다.따라서‘어머니’라는 상징은 교회의 존재뿐 아니라 그 영적 상태까지 함께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렘50:12를 인용하는 이유는,역사적으로는 바벨론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라 할지라도,그 안에 사용된‘어머니’라는 표현이 영적으로는 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이것은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역사적 배경을 넘어 일관된 상응의 질서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내가 너희의 어미를 내보낸 이혼 증서가 어디 있느냐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보라 너희는 너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팔렸고 너희의 어미는 너희의 배역함으로 말미암아 내보냄을 받았느니라(사50:1)Where is the bill of your mother’s divorcement(Isa. 50:1)?
스베덴보리가AC.289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말씀에서‘어머니’가 실제 육신의 어머니가 아니라 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이사야가 말하는‘너희의 어미’는 이스라엘 백성 각자의 어머니가 아니라,그들을 영적으로 낳고 길러야 했던 이스라엘 교회를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주님과 교회의 관계는 흔히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나타납니다.주님은 교회에 사랑과 선,진리와 생명을 주시고,교회는 그것을 받아들여 사람들 안에 신앙과 체어리티의 열매가 맺히게 합니다.그러므로 교회를‘아내’라고 할 때에는 주님과 결합, 그분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측면을 강조하고, ‘어머니’라고 할 때에는 그 생명을 사람들에게 전달, 영적으로 낳고 기르는 측면을 강조합니다.
사50:1의‘이혼 증서’는 주님과 교회의 결합이 끊어진 상태를 나타냅니다.그러나 이 구절은 주님께서 까닭 없이 교회를 버리셨다 말하지 않습니다.오히려‘이혼 증서가 어디 있느냐’물으심으로써,주님께서 먼저 교회를 내버리신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이어지는 말씀처럼,그들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원인은 그들 자신의 죄악과 허물에 있었습니다.교회가 선과 진리를 거부,스스로 주님과의 결합을 끊은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어머니의 이혼’은 교회 조직이 외적으로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성전과 제사,율법과 종교적 형식은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그러나 교회가 주님에 대한 사랑을 잃고,말씀의 진리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맞게 왜곡하면,외형은 남아 있어도 내적으로는 주님과 분리됩니다.이것이 영적 의미에서의 이혼입니다.
이 구절은‘어머니’라는 표현이 교회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특별히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개인의 육신의 어머니에게 주님이 이혼 증서를 주신다는 것은 문맥상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그러나‘어머니’를 교회로 이해하면,주님과 교회의 언약 관계,그 관계의 파괴,그리고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가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바로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어머니’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성경적 증거로 인용합니다.
또한 이 말씀에는 심판과 함께 주님의 자비도 담겨 있습니다.주님께서는 교회가 타락했다고 해서 먼저 관계를 끊으시는 분이 아닙니다.오히려 교회가 스스로 떠난 뒤에도 계속 돌아오라고 부르시며,자신의 악과 거짓을 인정,다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인도하십니다.그러므로‘이혼 증서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는‘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았다’는 주님의 뜻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사50:1을 인용하는 이유는,말씀에서‘어머니’가 사람을 영적으로 낳고 기르는 교회를 의미하며,교회가 주님과 분리되는 것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가 선과 진리를 거부했기 때문임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이 구절은 교회가‘어머니’라는 사실뿐 아니라,교회의 생명은 오직 주님과의 결합에 있으며,그 결합을 잃으면 외적 종교 형식이 남아 있어도 참된 교회는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 줍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창3:20)
AC.289
‘아내’(wife)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또한 가장 넓은 의미에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주님의 나라를 의미한다는 것도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머니’(mother) 역시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말씀에서는 교회를 매우 자주 ‘어머니’라고 합니다. 이사야에 보면, It has also been shown above that by “wife” is meant the church, and in the universal sense the kingdom of the Lord in the heavens and on earth; and from this it follows that the same is meant by “mother.” In the Word the church is very frequently called “mother,” as in Isaiah: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너희의 어미를 내보낸 이혼 증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보라 너희는 너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팔렸고 너희의 어미는 너희의 배역함으로 말미암아 내보냄을 받았느니라 (사50:1) Where is the bill of your mother’s divorcement (Isa. 50:1)?
예레미야에는In Jeremiah:
그러므로 너희의 어머니가 큰 수치를 당하리라 너희를 낳은 자가 치욕을 당하리라 보라 그가 나라들 가운데의 마지막과 광야와 마른 땅과 거친 계곡이 될 것이며 (렘50:12) Your mother is greatly ashamed; she that bare you was suffused with shame (Jer. 50:12).
에스겔에는In Ezekiel:
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어머니의 딸이요 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형의 동생이로다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요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며(겔16:45) Thou art thy mother’s daughter that loathed her man and her sons; your mother was a Hittite, and your father an Amorite (Ezek. 16:45),
여기서 ‘남편’(man, vir)은 주님과 천적인 모든 것을 의미하고, ‘자녀’(sons)는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헷 사람’(Hittite)은 거짓을, ‘아모리 사람’(Amorite)은 악을 의미합니다. where “man” [vir] denotes the Lord and all that is celestial; “sons,” the truths of faith; a “Hittite,” what is false: and an “Amorite,” what is evil.
역시 에스겔에In the same:
네 피의 어머니는 물가에 심긴 포도나무 같아서 물이 많으므로 열매가 많고 가지가 무성하며(겔19:10) Thy mother is like a vine in thy likeness, planted near the waters; she was fruitful and full of leaves because of many waters (Ezek. 19:10).
여기서 ‘어머니’(mother)는 고대교회를 의미합니다. 특히 ‘어머니’(mother)라는 이름은 태고교회에 가장 잘 어울립니다. 태고교회는 최초의 교회였으며, 유일한 천적 교회였기 때문에, 다른 어떤 교회보다도 주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Here “mother” denotes the ancient church. The term “mother” is more especially applicable to the most ancient church, because it was the first church, and the only one that was celestial, and therefore beloved by the Lord more than any other.
해설
AC.289은 왜 말씀에서 교회를 ‘어머니’라고 하는지를 설명하는 단락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아내’가 교회를 의미한다고 설명하였는데,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머니’ 역시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말씀에서 여인이나 어머니를 단순한 가족 관계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고 전달하는 교회의 상징으로 이해해야 함을 보여 줍니다.
말씀에서 ‘어머니’는 영적으로 사람을 낳고 기르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육신의 어머니가 자녀를 낳아 기르듯이, 교회는 말씀과 진리를 통하여 사람을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합니다. 따라서 ‘어머니’라는 이름은 단순히 출생의 근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사람에게 전달되는 통로를 의미합니다. 이런 이유로 말씀은 교회를 자주 ‘어머니’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보여 주기 위하여 여러 예언서를 인용합니다. 먼저 사50:1에서는 ‘너희 어미의 이혼 증서’가 언급됩니다. 여기서 ‘어미, 곧 어머니’는 이스라엘 교회를 의미합니다. 이혼은 주님께서 교회를 버리셨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가 스스로 주님을 떠나 언약을 깨뜨린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한 가정의 이야기가 아니라, 교회와 주님 사이의 영적 관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렘50:12에서도 ‘너희의 어머니가 큰 수치를 당하리라 너희를 낳은 자가 치욕을 당하리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어머니’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교회가 거짓과 악으로 말미암아 본래의 영광을 잃었기 때문에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묘사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이처럼 한 나라나 한 민족을 단순한 정치 공동체가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교회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겔16:45에서는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요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라고 합니다. 물론 실제 혈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헷 사람’은 거짓을, ‘아모리 사람’은 악을 의미합니다. 또한 ‘남편’(man, vir)은 주님과 천적인 모든 것을, ‘자녀’는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거짓과 악을 받아들인 교회가 주님과 신앙의 진리마저 싫어하게 된 영적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겔19:10에서는 ‘네 어머니는 물가에 심긴 포도나무 같아서’라고 합니다. 여기서 ‘어머니’는 고대교회를 의미합니다. 포도나무는 영적 교회를, 많은 물은 풍성한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고대교회가 한때 주님의 진리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던 상태를 보여 줍니다. 같은 ‘어머니’라는 표현이라도 문맥에 따라 태고교회, 고대교회, 이스라엘 교회 등 여러 교회를 가리킬 수 있지만, 공통적으로는 언제나 교회를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어머니’라는 이름은 무엇보다 태고교회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말합니다. 태고교회는 인류 최초의 교회였을 뿐 아니라, 유일한 천적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퍼셉션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를 직접 받아들이며 살았고, 이후의 모든 참된 교회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는 모든 교회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는 표현은 주님께서 어떤 교회는 더 사랑하시고 다른 교회는 덜 사랑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모든 사람과 모든 교회를 향하여 동일합니다. 다만 태고교회는 그 사랑을 가장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의 크기가 아니라,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교회의 상태입니다.
AC.289는 ‘어머니’라는 이름이 왜 교회를 의미하는지를 여러 성경 구절을 통하여 보여 줍니다. 교회는 사람에게 영적 생명을 낳고 기르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며, 그 생명의 근원은 언제나 생명 자체이신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어머니’를 만날 때에는 단순한 가족 관계를 넘어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고 전달하는 교회의 모습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