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e Israelitish church the Decalogue was holiness itself
해설
이 문장은 매우 짧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상당히 깊습니다. 먼저 ‘거룩함 자체’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십계명을 ‘거룩한 것들 중 하나’ 정도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아예 ‘거룩함 그 자체’라고 단정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강조가 아니라, 십계명이 단지 많은 거룩한 것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거룩함의 중심, 기준, 본체와 연결된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십계명이 이렇게까지 절대적인 위치를 갖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십계명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가장 직접적으로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이 계명들은 단지 사회 질서를 위한 법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규정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이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는 일이 됩니다. 이 점에서 십계명은 ‘거룩한 삶의 출발점’이 아니라 ‘거룩함이 실제로 작동하는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교회’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상태와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교회에서 십계명이 거룩함 자체였다’는 말은, 그들의 종교 생활 전체가 십계명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구약에서 십계명은 법궤 안에 보관되고, 성막과 성전의 가장 중심에 놓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모든 예배와 의식, 그리고 삶이 이 계명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왜 십계명이 그렇게 중심에 놓였는지도 이해됩니다. 십계명은 인간이 반드시 피해야 할 ‘악의 기본 형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등, 이것들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인간 안의 사랑이 왜곡된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것들을 거부하는 것이 곧 ‘거룩함으로 들어가는 첫 단계’가 됩니다. 다시 말해, 거룩함은 어떤 신비한 체험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죄로 알고 그것을 끊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결국 이 문장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은 단지 지켜야 할 규칙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과 연결되는 통로이며, 그 자체로 거룩함이 역사하는 자리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교회에서 십계명은 다른 모든 것들보다 중심에 있었고, 그 자체로 가장 거룩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세상 어느 나라에도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둑질하고, 거짓 증거 하는 것이 악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악들이 법으로 막히지 않는다면, 왕국이든 공화국이든 어떤 조직된 사회도 유지될 수 없다는 것 또한 모두가 압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민족만이 다른 모든 민족보다 특별히 어리석어서 이러한 것들이 악하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누가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러한 법들이 어찌하여 여호와께서 친히 시내산에서 그처럼 기적적인 방식으로 공포하셨는지 누구나 의아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를 들어 보십시오. 그것은 이 법들이 단지 시민적 법이나 도덕적 법일 뿐 아니라, 또한 신적 법이라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거스르는 것은 단지 이웃, 곧 동료 시민이나 사회에 해를 끼치는 것일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법들은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공포하심으로써 종교의 법도 되었습니다. 분명히 여호와께서 명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종교의 일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며, 따라서 구원을 위하여 행해야 할 것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 계명들을 설명하기에 앞서, 그 거룩함에 관하여 먼저 몇 가지를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이 계명들 안에 종교가 들어 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There is not a nation in the whole world which does not know that it is wicked to murder, to commit adultery, to steal, and to bear false witness, and that kingdoms, republics, and every form of organized society, unless these evils were guarded against by laws, would be at an end. Who then can suppose that the Israelitish nation was so stupid beyond all others as not to know that these are evils? Anyone therefore may wonder that laws so universally known in the world should have been promulgated from Mount Sinai by Jehovah himself in so miraculous a way. But listen: they were promulgated in so miraculous a way to make known that these laws are not only civil and moral laws, but also Divine laws; and that acting contrary to them is not only doing evil to the neighbor, that is, to a fellow citizen and society, but is also sinning against God. Wherefore these laws, by their promulgation by Jehovah from Mount Sinai, were made also laws of religion. Evidently whatever Jehovah commands, he commands in order that it may be a matter of religion, and thus some thing to be done for the sake of salvation. But before these commandments are explained, something must be premised respecting their holiness to make it evident that religion is in them.
해설
이 대목은 십계명을 ‘완전히 새롭게’ 보게 만드는 아주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십계명을 ‘하나님이 처음 알려주신 도덕’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정반대로 말합니다. 이미 모든 민족이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거’가 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십계명은 ‘새로운 도덕의 발견’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사건’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왜 굳이 시내산에서 그렇게 장엄하고 기적적인 방식으로 주어졌는가’입니다. 그 답이 바로 이 문단의 중심입니다. 곧, 이 계명들이 단지 사회 질서를 위한 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속한 법’, 즉 ‘종교의 법’임을 각인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차이는 겉보기에는 아주 작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신앙 전체를 갈라놓는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같은 ‘도둑질하지 말라’라도, 그것을 단지 사회 규범으로 지키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의 죄’로 알고 거부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행위입니다. 전자는 외적인 삶의 유지에 머무르지만, 후자는 인간의 ‘속 사람’을 변화시키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말하는 ‘겉 사람과 속 사람의 차이’, 그리고 ‘거듭남’의 출발점입니다. 즉, 같은 행위라도 그 근거가 ‘사람을 두려워함’이냐 ‘하나님을 의식함’이냐에 따라 전혀 다른 영적 결과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죄의 정의’가 여기서 분명해진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악’이지만, 그것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식할 때 비로소 ‘죄’가 됩니다.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나는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묻습니다. ‘그것을 하나님 때문에 하지 않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아직 종교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문단의 마지막은 앞으로의 내용을 여는 문입니다. ‘이 계명들의 거룩함’을 먼저 말하겠다고 합니다. 이는 곧 십계명이 단순한 윤리 규범이 아니라 ‘그 안에 천국과 구원이 들어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밝히려는 준비입니다. 다시 말해, 십계명은 단지 ‘하지 말라’는 금지 목록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과 연결되고, 그 결과로 거듭남에 이르는 길의 가장 기초적인 틀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십계명은 모든 종교의 핵심이며, 동시에 모든 거듭남의 시작점입니다.
The Catechism or Decalogue Explained in Its External And Its Internal Sense
해설
이 짧은 제목 안에는 스베덴보리 신학의 핵심 구조가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먼저 ‘Catechism’(교리문답서)이라는 말은 단순한 설명서가 아니라 ‘신앙의 가장 기본을 가르치는 틀’을 의미합니다. 전통 교회에서도 교리문답은 신앙의 입문서 역할을 하는데,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자리에 ‘십계명’을 둡니다. 즉, 신앙의 시작은 어떤 교리 체계나 신학적 논증이 아니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와 같은 삶의 규범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미 방향이 분명해집니다. 신앙은 ‘무엇을 믿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Decalogue’(십계명)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단순히 열 가지 명령이라는 뜻을 넘어서, ‘하나님이 직접 주신 가장 기초적이고 보편적인 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래 TCR.282에서도 보듯, 이 계명들은 이미 인간 사회가 알고 있는 도덕이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주심으로써 ‘종교의 법’, 곧 ‘구원과 연결된 법’이 됩니다. 따라서 십계명은 단순한 윤리 규범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을 잇는 접점’이며, 인간이 실제로 변화되는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이 제목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외적 의미와 내적 의미’입니다. 외적 의미는 누구나 아는 그대로입니다.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내적 의미에서는 ‘미움, 증오, 복수심과 같은 것들도 모두 살인의 본질’로 봅니다. 마찬가지로 ‘간음하지 말라’는 외적으로는 육체적 행위를 금하지만, 내적으로는 ‘선과 진리를 더럽히는 모든 상태’, 또는 ‘사랑의 질서를 깨뜨리는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이렇게 보면 십계명은 단순한 행동 규칙이 아니라 ‘인간 내면 전체를 다루는 말씀’이 됩니다.
결국 이 제목이 말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십계명은 겉으로는 사회를 유지하는 법이지만, 속으로는 인간을 거듭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십계명을 단순히 설명하지 않고, ‘외적 의미 → 내적 의미’로 점점 깊이 들어가며 풀어냅니다. 이것은 곧 독자를 ‘겉 사람의 도덕’에서 ‘속 사람의 변화’로 이끄는 과정이며, 바로 그 점에서 이 부분 전체가 하나의 ‘거듭남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파일을 처음 열어 보시는 분은 아마 먼저 분량에 놀라실 것 같습니다. 창세기 1장 한 장을 다루는데 500쪽이 넘습니다. ‘천지창조한장을설명하는데무슨이야기가이렇게많을까?’ 하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저도 처음부터 이렇게 많은 분량을 계획했던 것은 아닙니다. 출발은 비교적 단순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이하AC)를 처음부터 차례로 우리말로 옮기고,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을 붙여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AC.1부터 한 글씩 읽어 가면서 번역만으로는 그냥 지나가기 어려운 질문들이 계속 생겼습니다. 어떤 질문은 짧은 해설만으로 충분했지만, 어떤 질문은 그 자리에서 조금 더 깊이 살펴보지 않으면 다음 글로 넘어가기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번역에 해설이 붙고, 해설에서 다시 질문이 생겨 심화가 붙으면서 지금의 분량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파일은 처음부터 한 권의 책으로 기획하여 집필한 결과물이라기보다, AC.1에서 AC.66까지 한 걸음씩 걸어가며 남긴 ‘읽기의기록’에 가깝습니다. 원문을 번역하다가 표현 하나에서 멈추기도 했고, 스베덴보리가 왜 이런 해석을 하는지 질문하기도 했으며, 처음 AC를 접하는 분이라면 어디에서 이해하기 어려울지를 생각하면서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제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다시 검토해야 했고, 처음에는 그럴듯해 보였던 설명을 AC전체의 문맥과 대조하면서 고치기도 했습니다. 이 파일에는 그런 과정까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 자료의 기본 구성은 ‘번역,해설,심화’입니다. 먼저 ‘번역’은 영어 AC본문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우리말로 옮기려는 부분입니다. 그다음 ‘해설’은 단순히 번역문을 다시 풀어쓰는 것이 아니라, 그 AC가 앞뒤 글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창세기 본문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리고 처음 읽는 독자가 어디에서 ‘이게무슨뜻이지?’ 하고 멈출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설명한 부분입니다. ‘심화’는 한 걸음 더 나아간 질문을 다룹니다. 본문을 이해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그렇다면이것은어떻게되는가?’라는 질문 가운데 해설 안에 모두 넣기에는 너무 큰 문제들을 따로 살펴본 것입니다.
그래서 심화까지 반드시 차례대로 모두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 읽으시는 분이라면 먼저 AC본문의 번역과 해설을 따라가시는 것만으로도 좋습니다. 읽다가 특별히 궁금한 주제가 나오면 그때 관련 심화를 읽으셔도 됩니다. 반대로 이미 AC를 어느 정도 읽어 오신 분이라면 관심 있는 글 번호나 심화 주제를 찾아 들어가셔도 됩니다. 500쪽이 넘는다고 해서 처음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 번에 ‘완독해야하는책’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 한 장에서 왜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1장을 읽는 방식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창세기 1장을 펼치면 천지창조를 만납니다. 흑암 가운데 빛이 생기고, 물과 물 사이에 궁창이 놓이며, 뭍이 드러나고 식물이 자랍니다. 해와 달과 별이 나타나고, 물고기와 새와 짐승이 생기며, 마침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읽는 말씀의 문자입니다.
그런데 AC는 그 문자 안에서 또 하나의 창조를 봅니다. ‘사람의거듭남’입니다. 아직 영적 생명이 없는 사람 안에 주님께서 새로운 생명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을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이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AC.6은 이것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밝힙니다. 여섯 날은 서로 무관한 여섯 가지 영적 교훈이 아니라, 인간이 거듭나는 동안 지나가는 ‘연속적인상태들’입니다. 처음에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에 있던 사람이 조금씩 주님에게서 오는 빛을 받고, 주님에게 속한 것과 자기 자신에게 속한 것이 구별되며, 선과 진리가 생겨나고, 마침내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이것을 알고 나면 창세기 1장의 풍경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빛이있으라’는 말씀을 읽으면서 자연계의 최초의 빛과 함께 ‘내안에는언제처음빛이비치기시작하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궁창이 물과 물을 나누는 장면에서는 ‘사람안에서는무엇이구별되어야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땅에서 식물이 돋고 씨를 맺고 열매를 맺는 것을 보면서는 ‘진리가사람안에서어떻게선한삶의열매가되는가?’를 묻게 됩니다. 해와 달과 별, 물고기와 새, 짐승과 사람도 더 이상 서로 떨어져 있는 창조물의 목록으로만 보이지 않고, 한 사람 안에 영적 생명이 조금씩 형성되어 가는 긴 흐름 속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창세기1장은천지창조에관한말씀이아니고인간의거듭남만을말한다는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자료는 그렇게 읽지 않습니다. 우리가 읽는 문자에는 분명 천지와 빛과 물과 땅과 광명체와 생물과 사람의 창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AC가 밝히려고 하는 것은 그 문자를 없애고 다른 이야기를 대신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자 안에 담긴 ‘속뜻’입니다. 이 자료에서도 이 점을 여러 차례 조심해서 구별했습니다. 창조의 말씀을 지우고 거듭남을 넣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말씀 안에서 인간의 새로운 창조가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 자료를 읽으실 때 처음부터 모든 ‘상응’을 외우려고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빛은이것,물은이것,나무는이것,새는이것’ 하는 식으로 대응표를 만들어 외우기 시작하면 오히려 창1전체의 생명 있는 흐름을 놓치기 쉽습니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표현이 하나의 거듭남 안에서 어떻게 서로 이어지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첫째 날과 둘째 날이 이어지고, 둘째 날이 셋째 날을 준비하며, 그렇게 여섯째 날까지 진행됩니다. 실제 파일에서도 ‘창1의여섯날은속뜻에서여섯개의서로떨어진교훈이아니라하나의거듭남이진행되는여섯연속적상태’라는 점을 중요하게 붙들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창1을 읽으며 가장 놀라웠던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창조의 순서가 곧 거듭남의 질서로 읽히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영적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자기 안에 무엇이 어둠인지조차 잘 모릅니다. 그러다가 빛이 비치고, 구별이 생기고, 무엇인가 싹트고, 진리가 자라고, 사랑과 신앙이 점차 생명의 중심으로 들어오며, 마침내 그 사람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삶 전체가 달라져 갑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이미 완성된 사람이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는 정도의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새로운 영적 질서를 이루시는 ‘새창조’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계속해서 중심에 계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안에 빛을 만들고, 자기 힘으로 선을 생산하고, 마침내 자기 노력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읽어 갈수록 ‘내가한다’고 생각하던 것의 생명이 실제로 어디에서 오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거듭남의 시작도 주님에게서 오고, 선과 진리의 생명도 주님에게서 오며, 시험 가운데 사람을 붙드시고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는 분도 주님입니다. 사람이 자유롭게 응답하고 싸우고 살아가지만 그 모든 영적 생명의 근원과 능력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이 점은 이 자료가 창1의 여섯 날을 읽으면서 계속 되돌아가는 중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다고 이 자료가 처음부터 끝까지 거듭남의 ‘단계’를 정리하는 교과서는 아닙니다. 오히려 작업을 진행하면서 ‘나는지금몇째날에있는가?’라고 자기 영적 수준을 판정하려는 읽기를 조심하게 되었습니다. 여섯 날은 사람에게 영적 등급표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생명을 어떤 질서 가운데 새롭게 하시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실제 삶에서는 여러 상태가 복잡하게 경험될 수 있고, 이미 배운 것처럼 보이는 문제를 다시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자료를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영적 수준을 재는 잣대로 사용하기보다, 거듭남의 방향과 질서를 배우는 데 사용하시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 이 파일에서 적지 않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이 ‘질문’입니다. AC를 처음 읽다 보면 정말 많은 질문이 생깁니다. ‘속사람과겉사람은무엇인가?’, ‘리메인스란무엇인가?’, ‘영적인간과천적인간은어떻게다른가?’, ‘왜같은짐승이어떤곳에서는선한것을뜻하고다른곳에서는악한것을뜻하는가?’, ‘형상과모양은무엇이다른가?’, ‘천상의결혼이란무엇인가?’, ‘왜주님께서는악과거짓을즉시없애지않으시는가?’, ‘천사들은말씀을어떻게지각하는가?’ 같은 질문들입니다.
이런 질문들을 가능하면 그냥 지나가지 않은 것이 이번 작업의 한 특징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질문에 곧바로 거대한 교리 체계를 가져와 답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작업이 진행될수록 오히려 ‘이AC가지금말하는만큼만충분히말하고,다음글의몫은다음글에남겨두는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어떤 설명이 스베덴보리의 이 글에 직접 있는 것인지, 관련 AC들을 통해 충분히 뒷받침되는 것인지, 아니면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인 설명이나 적용인지도 가능한 한 구별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자료는 처음 작성한 글을 그대로 모은 것만도 아닙니다. AC.1부터 AC.66까지 다시 검토하면서 번역과 해설, 심화 가운데 지나치게 나간 설명은 줄이고, 처음 읽는 분에게 꼭 필요한 설명은 오히려 보충했습니다. 성경 구절이나 다른 AC글 번호가 인용되었다고 해서 모두 별도의 심화로 남겨 두기보다, 그 인용이 왜 사용되었는지를 해설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면 그곳에서 소화했습니다. 반대로 본문을 읽은 독자가 정말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을 품을 만하고, 그 질문 자체로 독립적인 가치가 있는 경우에는 심화로 남겼습니다.
특히 성경과 AC의 관계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자료에서 AC는 성경을 대신하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의 표현을 AC에 맞추어 고치는 것도 이 작업의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먼저 말씀이 있고, AC는 그 말씀의 속뜻을 밝히고 설명하는 책이라는 순서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AC의 영어 인용과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개정의 표현이 다르더라도 의미상 문제가 없다면 익숙한 성경의 표현을 우선했고, 의미 차이가 실제로 중요할 때에는 성경을 AC의 문장에 맞추어 바꾸기보다 ‘개역개정은이렇게되어있지만스베덴보리는여기서이런표현을사용한다’고 차이를 밝히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파일 마지막 AC.66의 삼상2:3심화는 바로 그런 문제를 실제 사례로 다룹니다.
AC.64-66에 이르면 창1의 거듭남 이야기는 다시 ‘말씀’ 자체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 살펴본 것이 말씀의 속뜻이며, 그것이 말씀의 ‘가장참된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천사들은 우리가 읽는 나라와 성읍과 강과 사람의 이름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설명하고, 자신이 말씀을 읽을 때 그 내적 의미가 얼마나 아름답고 완전한 질서 가운데 지각되는지를 ‘영광’이라는 표현과 함께 전합니다. 마지막 AC.66에서는 말씀의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앞으로 성경의 모든 부분을 똑같은 방식으로 기계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안내도 남깁니다. 특히 태고교회의 표상적 스타일과 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스타일을 구별하는 설명은 앞으로 창세기를 계속 읽어 갈 때 매우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그러므로 AC.1-66은 창세기 1장의 마지막 절에서 끝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 부분을 다 읽고 나면 오히려 창세기 2장을 읽을 준비가 됩니다. 여섯째 날까지 진행된 거듭남이 그다음에는 어떤 상태로 들어가는지, ‘일곱째날’의 안식은 무엇인지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파일은 하나의 완결된 창1작업인 동시에 앞으로 계속될 긴 AC읽기의 첫걸음이기도 합니다.
이 자료를 처음 읽으시는 분께 한 가지를 권하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상응 하나하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심화까지 모두 읽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대신 한 가지 질문을 마음에 품고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한사람을어떻게새롭게창조하시는가?’
그 질문을 가지고 읽다 보면 ‘빛이있으라’가 조금 달리 들릴 수 있습니다. 궁창이 나뉘고 땅이 드러나며 씨가 싹트는 모습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이 빛나고 생물이 살아 움직이며 마침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는 장면들이 먼 옛날의 창조 이야기로만 머물지 않고, 지금도 한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이루고 계시는 새 창조의 질서와 연결되어 보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작업에는 ChatGPT가 함께했습니다. 번역을 비교하고, 문장을 다듬고, 앞뒤 AC의 문맥을 살피며, ‘처음읽는사람이라면여기에서무엇을궁금해할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자료를 ‘ChatGPT가AC를해석해준결과’라고 소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AC원문과 말씀 앞에서 계속 질문하고, 답을 다시 원문에 비추어 검토하며, 때로는 앞서 쓴 해설을 고치고 다시 쓰는 긴 협업의 결과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그래서 이 파일의 제목에도 ‘withChatGPT’라고 적었습니다. ‘byChatGPT’가 아니라 ‘withChatGPT’입니다. 이 작은 차이가 이번 작업의 성격을 잘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이 자료는 제 손에서만 읽히는 작업 노트를 넘어, 처음 AC를 접하는 분들과도 나누어 보려 합니다. 어떤 분에게는 낯설고, 어떤 대목에서는 쉽게 동의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서둘러 받아들이거나 서둘러 거부하기보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천천히 따라가 보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AC자체에 머무르기보다, AC가 계속해서 가리키는 말씀으로 돌아가 보셨으면 합니다.
500쪽이 넘는 긴 여정이지만, 그 시작은 아주 짧은 한 말씀입니다.
‘빛이있으라.’
그리고 어쩌면 창세기 1장을 속뜻으로 읽는 긴 여정은 결국 이 한 말씀을 우리 자신의 삶에서 듣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있는 한 사람에게 주님께서 빛을 주시고, 구별하시고, 생명을 싹트게 하시고, 사랑과 신앙을 자라게 하시며, 마침내 그 사람을 당신의 형상으로 빚어 가시는 과정 말입니다.
이 자료가 그 놀라운 말씀의 여정을 조금 더 깊이 따라가는 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4, ‘왕 되신 주’,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찬161, ‘할렐루야 우리 예수’입니다.
오늘은 창1 일곱 번째, 창1 마지막 시간으로, 본문은 26절로 31절, AC 글 번호로는 51번에서 66번입니다. 오늘로 창1 AC 리딩을 마칩니다. 그리고 특별히 오늘은 2026년 부활절입니다. 그래서 오늘 리딩 역시 ‘주님의 부활로 본 창1’ 관점으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30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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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의 완성과 다스림, 신앙과 사랑의 결합으로 나아가는 인간
이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본문 및 해설,그리고 심화 리딩 주일설교시작합니다.
다음 주부터는 창2 시작합니다. 오늘도 분량이 제법 되지요? 양면으로 60장이니 말입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다루어야 할 기초들이 좀 있어 어쩔 수 없지 싶습니다만, 그러나 이 말은 갈수록 줄어든다는 말도 됩니다. 그러니 희망(?)을 가지시기 바라며, 다만 향후 진도를 쭉쭉 빼기 위해서는 창1, 2, 3을 하는 지금, 그 기초들, 특히 심화에서 다루는 내용들을 정독 및 학습을 통해 정말 제대로 해 놓으셔야 합니다. 특별히 이 ‘심화’에서 다루는 이슈들은 제가 ‘만일 이 글을 완전 처음 접하시는 분들 입장에서는 어떤 점들이 걸리실까, 어떤 데서 어리둥절해들 하실까’ 기도하며 선정한 이슈들입니다. 그러니까 이 심화 부분들을 철저히 해두시면 앞으로 진도 뺄 때, 큰 어려움들 없으실 줄 믿습니다.
창1 AC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 버전 작업을 여러 달에 걸쳐 마쳤습니다.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인데... 이걸 아는 지인들에게 카톡으로 공유하는 게 맞을까요? 일단 블로그에는 실시간으로 글 단위 공유는 꾸준히 해오고 있지만... 정성을 쏟는 거에 비해 조회수나 좋아요는 거의 제로에 수렴합니다. 거의 아무도 안 보는 일을 하느라 시간을 써오고 있는 것이죠. 카톡 일대일 공유 역시 상황은 비슷합니다. 100명에게 보내던 걸 추려 20명에게 창1해설 버전을 보냈었는데 그나마 회신이라도 온 건 대여섯... 그냥 예의상인 것 같았습니다.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 그에 대한 진정성 어린, 그리고 제가 원하는 회신은 없습니다. 이 100여 명의 지인분들은 저의 평생 신앙 지인들 중 알곡들로 추린, 그러니까 마음을 주고받았다 저는 생각한 사람들인데도 그렇습니다. 해설 버전조차도 많이 어려운 건지... 이번 심화 버전 앞에서 제가 공유를 망설이는 이유는, 혹시 이것이 좀 미안한 표현이지만, 마치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주는’ 건 아닌지, 그래서 주님의 신적 진리를 모독하는 건 아닌지 하는 우려가 있어서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블로그에 글 하나 올려 자유롭게 원하는 사람은 받아 가게 하고, 저는 계속 창2, 창3... 진도 나가는 게 맞겠죠? 언젠가는 주님이 이 결과물들을 사용하실 줄 믿으면서...
목사님, 결론부터 먼저 조심스럽게 말씀드리면, 지금의 고민은 ‘전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전하는 것이 주님의 질서에 맞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경험, 곧 100명 중 극소수의 반응, 그마저도 깊지 않은 회신은 사실 실패의 신호가 아니라, 오히려 매우 정상적이고 건강한 ‘영적 분별의 데이터’라고 보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에마누엘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보여주는 원리는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강요되지 않으며, 준비된 상태에서만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진리가 널리 퍼지지 않는 것은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수용하는 상태의 문제입니다.
지금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은 매우 진지한 것이고, 실제로 스베덴보리 역시 이 원리를 강하게 말합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 깊은 진리를 무리하게 노출시키는 것은, 그 사람에게도 해가 되고, 진리 자체도 가볍게 취급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구분하셔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강요’와 ‘개방’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데 반복적으로 밀어 넣는 것은 분명 질서에 어긋나지만, 조용히 문을 열어 두고 원하는 사람이 들어오게 하는 것은 질서에 합당한 방식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지금 가장 적합한 방식은 이미 거의 마음속에서 정리하신 그 방향, 곧 ‘블로그에 두고, 원하는 사람이 스스로 찾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소극적 선택이 아니라, 매우 적극적인 ‘영적 질서에 순종하는 방식’입니다. 씨를 길바닥에 뿌리느냐, 아니면 밭에 심느냐의 차이입니다. 지금까지의 카톡 일괄 공유는 사실상 ‘길바닥에 뿌리는 방식’에 가까웠다면, 블로그는 ‘밭을 만들어 두는 방식’입니다. 밭은 당장 열매가 없어 보여도, 때가 되면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이것입니다. 목사님께서 기대하시는 ‘진정성 있는 회신’이 오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읽지 않아서라기보다, 읽더라도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스베덴보리의 글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상태를 요구하는 진리’이기 때문에, 그것을 접한 사람은 두 가지 반응 중 하나를 보입니다. 깊이 들어오거나, 아니면 조용히 물러나거나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후자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나쁘거나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아직 그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응 없음’은 거절이 아니라 ‘유보’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여기서 아주 중요한 전환이 하나 필요합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전했는데 왜 반응이 없을까’라는 방향이었다면, 이제는 ‘주님이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이 글을 사용하실까’로 중심을 옮기셔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삶을 보면, 그는 당대에 거의 이해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의 반응을 기준으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록하는 것’ 자체를 사명으로 보았고, ‘전달의 시기와 방식’은 주님의 영역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이 점이 목사님의 지금 상황과 매우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실천적으로는 이렇게 정리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대량 카톡 공유는 중단하셔도 좋습니다. 이것은 지금 단계에서는 효율도 낮고, 오히려 진리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둘째, 대신 블로그를 ‘저장소가 아니라 살아 있는 밭’으로 계속 가꾸십시오. 글의 밀도는 이미 충분하니, 이제는 접근성을 조금씩 보완하시는 것도 좋습니다. 예를 들어 ‘아주 쉬운 요약 버전’이나 ‘입문자를 위한 길잡이 글’을 간간이 추가하는 것입니다. 셋째, 정말로 마음이 향하는 소수, 그러니까 한두 명, 많아야 서너 명에게만 ‘개별적으로, 조용히’ 나누십시오. 그것도 ‘읽어 달라’가 아니라 ‘혹시 필요하시면 참고하시라’는 식으로 문을 열어 두는 방식으로요.
마지막으로, 목사님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지금 하시는 일은 ‘사람을 모으는 일’이 아니라 ‘진리를 보존하고 기록하는 일’에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언제나 외로워 보이고, 열매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 식으로 말하면, 이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저장되는 리메인스(remains)’와 같은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정확한 때에, 정확한 사람에게 연결됩니다.
그러니 목사님, 지금처럼 창2, 창3...으로 계속 나아가십시오. 그것이 가장 안전하고, 가장 깊고, 그리고 가장 ‘주님의 방식’에 가까운 길입니다. 그리고 블로그에 조용히 올려 두십시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지금은 ‘알려지는 시간’이 아니라 ‘쌓이는 시간’일 가능성이 큽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는 사람들은 부활절, 성탄절 같은 기독교 절기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에게 있어 부활절과 성탄절은 ‘폐지해야 할 외적 전통’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그 자체로 거룩한 절대 시간’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전체 사상을 관통하는 한 가지 원리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곧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을 담기 위해 존재한다’는 원리입니다. 그래서 절기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주님의 신적 사역의 상태들’을 사람들로 하여금 기억하고 묵상하게 하는 도구로서 의미를 갖습니다. 다시 말해, 성탄절은 단순히 예수님의 역사적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주님이 인간의 마음 안에 새롭게 태어나시는 상태’를, 부활절은 단순히 무덤에서 일어나신 사건이 아니라 ‘지옥과 싸워 이기시고 인간 안에 새로운 생명을 여시는 상태’를 상기시키는 표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보면, 그는 절기를 중심으로 신앙을 조직하지 않습니다. 그의 모든 초점은 ‘거듭남’, 곧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지속적인 영적 변화에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특정한 하루에 감정적으로 고양되는 것보다,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의 탄생과 고난과 부활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훨씬 더 본질적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있어 ‘참된 성탄’은 어떤 날짜가 아니라, 사람이 처음으로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순간이며, ‘참된 부활’은 사람이 자신의 악과 거짓과 싸워 그것을 이기고 새로운 삶으로 일어서는 모든 순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절기는 ‘일 년에 한 번’이 아니라 ‘영적으로는 수없이 반복되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스베덴보리가 절기를 무시하거나 거부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실제로 교회에 출석했고, 성찬에도 참여했으며, 당시 교회의 외적 질서를 존중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내적 태도’였습니다. 그는 외적 의식이 사람을 구원한다고 보지 않았지만,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주님께로 향하게 하는 데 쓰일 수 있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절기는 ‘지켜야만 하는 법’이 아니라, ‘올바르게 사용될 수 있는 수단’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향은 매우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는 사람이라면, 절기를 두 가지 층위에서 동시에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외적 층위’로서, 가족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기억하고 나누는 시간으로서의 절기입니다. 이것은 사랑과 질서의 차원에서 소중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적 층위’로서, 그 절기가 가리키는 영적 실재가 지금 내 삶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만일 이 두 번째가 없다면, 첫 번째는 공허한 형식이 되고 말고, 반대로 첫 번째를 완전히 버리면 사랑의 교통과 질서가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에게 부활절과 성탄절은 ‘지켜야 할 날’이라기보다 ‘깨어 있어야 할 의미’였습니다. 그는 날짜를 통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상태를 통해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도 방향을 제시합니다. 절기를 잊었다고 해서 영적으로 뒤처진 것이 아니며, 절기를 잘 챙겼다고 해서 자동으로 깊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내 안에서 주님의 탄생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리고 내 안에서 부활이 일어나고 있는가입니다.
목사님께서 AC를 붙들고 씨름하시는 그 시간 속에서, 만일 혼돈이 질서로 바뀌고, 어둠 속에 빛이 들어오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가장 실제적인 성탄이며, 가장 실제적인 부활입니다. 그 순간이 외적 절기와 내적 실재가 아름답게 하나로 만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삼상2:3)Speak what is high!high!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1 Sam. 2:3).
AC.66을 읽다가 가장 먼저 멈추게 되는 곳 가운데 하나가 삼상2:3입니다.개역개정은‘심히교만한말을다시하지말것이며오만한말을너희의입에서내지말지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그런데AC의 영어 인용은‘높은것을말하라,높은것을!옛것이네입에서나오게하라’는 식입니다.단어 몇 개가 다른 정도가 아니라 명령의 방향 자체가 거의 반대로 보입니다.그렇다면 어느 쪽이 맞는 것일까요?
먼저 우리의 성경을AC영어에 맞추어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삼상2:3의 히브리어 본문에는 금지를 나타내는 말이 있고,문맥 역시 한나가 교만과 오만을 경계하는 내용입니다.오늘날의 주요 영어 번역들도 대체로‘더이상그렇게교만하게말하지말라’, ‘오만한말이입에서나오지않게하라’는 방향으로 번역합니다.따라서 개역개정의‘심히교만한말을다시하지말것이며’는 히브리어 본문과 일반적인 번역 전통에 잘 맞습니다.
그러므로AC의 영어 문장을 보고‘개역개정번역자들이아르카나를몰라서잘못번역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더구나AC의 영어 인용을‘문자적번역보다더깊은내적의미의번역’이라고 부르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AC.66자체는‘이구절의문자적의미는사실높은것을말하라는뜻이다’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단지 태고교회의 스타일을 설명하면서 현재 우리가 보는 것과 매우 다른 형태로 삼상2:3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원칙 하나가 생깁니다.성경 본문과AC의 인용문이 현저하게 다를 때에는 두 문장을 억지로 하나로 만들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성경은 성경대로 정확하게 제시하고,AC가 어떤 형태로 그 말씀을 인용하는지도 그대로 보여 주며,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그래서 이번AC.66의 한국어 본문에서도 삼상2:3은 개역개정 그대로‘심히교만한말을다시하지말것이며오만한말을너희의입에서내지말지어다’로 두는 것이 좋습니다.바로 뒤의 영어 원문에는 스베덴보리가 사용한 인용형이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독자는 차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왜 이처럼 다른 형태의 문장을 인용했을까요?그 정확한 문헌적 배경을 확인하지 않은 채‘스베덴보리가히브리어를영적으로다시번역했기때문이다’라고 설명하는 것은 위험합니다.스베덴보리가 사용한 당시의 성경 텍스트나 번역 전통,인용 관행을 문헌적으로 더 조사해야 할 문제입니다.현 단계에서 확실한 것은AC.66의 영어 인용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히브리어 본문에 따른 일반적인 번역과 크게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런 차이가AC.66전체의 설명을 무너뜨리는 것일까요?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스베덴보리가 이 인용을 사용하는 목적은 태고교회의 스타일이‘높은것’과‘옛것’에 관계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따라서 이 특정 인용이 그의 설명에서 수행하는 역할은 분명합니다.다만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더 조심해야 합니다.인용된 성경의 실제 문자와AC가 사용하는 인용형을 같은 것처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성경과AC의 관계를 다루는 데 중요한 사례가 됩니다.AC를 존중한다는 것이 성경을AC의 표현에 맞추어 다시 번역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오히려 성경의 문자적 본문을 먼저 존중하고,스베덴보리가 그 말씀을 어떤 방식으로 인용하고 사용하는지를 그 다음에 정확하게 살피는 것이 좋습니다.의미 차이가 없다면 익숙한 성경 표현을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지만,이번 삼상2:3처럼 의미 차이가 너무 크다면 그 차이를 감추지 않고 설명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번 경우에는‘개역개정과AC가운데하나를선택해야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성경 번역에서는 개역개정의 문구를 유지합니다.동시에AC의 원문을 읽을 때에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높은것을말하라’는 형태로 인용했다는 사실도 그대로 인정합니다.그리고 그 차이가 왜 생겼는지는 확인 가능한 문헌적 근거 이상으로 추측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 사례가 성경보다AC를 높이는 방향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번역에는보이지않는진짜뜻을AC만알고있다’는 식으로 말하기 시작하면,말씀의 속뜻을 밝힌다는AC의 역할과 말씀 자체의 권위가 뒤집힐 수 있습니다.AC.66역시 결국‘말씀의네가지스타일’을 설명하는 글입니다.중심은AC의 문장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가장 안전하게 처리하는 방법은 단순합니다.삼상2:3은 개역개정 그대로 읽습니다.AC가 그와 다른 형태로 인용한다는 사실은 숨기지 않습니다.그리고 그 차이를‘성경은낮은문자,AC는높은영적번역’이라는 구조로 만들지 않습니다.바로 이런 태도가 말씀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텍스트도 정직하게 읽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에는전반적으로네가지서로다른스타일이있습니다.첫째는태고교회의스타일입니다.그들의표현방식은이땅의것과세상의것을말할때,그것들이표상하는영적이고천적인것들을동시에생각하는것이었습니다.그래서그들은단지표상으로표현했을뿐아니라,그것들을일종의역사적연속으로엮어더욱생명력있게하였는데,이런방식은그들에게더없이큰기쁨이었습니다.이런스타일을가리켜한나는예언가운데이렇게말했습니다. There are in the Word, in general, four different styles.The first is that of the most ancient church.Their mode of expression was such that when they mentioned terrestrial and worldly things they thought of th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which these represented.They therefore not only expressed themselves by representatives, but also formed these into a kind of historical series, in order to give them more life; 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very highest degree.This is the style of which Hannah prophesied, saying:
심히교만한말을다시하지말것이며오만한말을너희의입에서내지말지어다(삼상2:3)Speak what is high!high!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1 Sam. 2:3).
창조와에덴동산등에관한이모든내용,곧아브람시대까지의기록을모세는태고교회의후손들로부터전해받았습니다. These particulars concerning the creation, the garden of Eden, etc., down to the time of Abram, Moses had from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2] 둘째스타일은역사적스타일로,아브람이후의모세오경과여호수아,사사기,사무엘기,열왕기에나타납니다.이책들에서역사적사실들은문자적의미에나타난그대로입니다.그러나그모든것에는전체적으로도부분적으로도내적의미안에전혀다른것들이담겨있는데,이에대해서는주님의신적자비로이어지는글들에서그순서대로설명하겠습니다. 셋째스타일은예언적스타일입니다.이스타일은태고교회에서그토록높이존중되던스타일에서생겨났습니다.그러나태고교회의스타일처럼연결된역사적형식은아니고단절되어있으며,내적의미없이는거의이해할수없습니다.그내적의미안에는가장깊은아르카나가담겨있고,그것들은아름답게연결된질서를따라이어지며,겉사람과속사람,교회의여러상태,하늘자체를다루고,가장깊은의미에서는주님을다룹니다. 넷째스타일은다윗의시편에나타나는스타일로,예언적스타일과일상적인언어사이에놓여있습니다.그안에서는왕으로서의다윗이라는인격아래,내적의미에서는주님을다룹니다. The second style is historical, which is found in the books of Moses from the time of Abram onward, and in those of Joshua, Judges, Samuel, and Kings.In these books the historical facts are just as they appear in the sense of the letter; and yet they all contain, in both general and particular, quite other things in the internal sense,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in their order in the following pages.The third style is the prophetical one, which was born of that which was so highly venerated in the most ancient church.This style, however, is not in connected and historical form like the most ancient style, but is broken, and is scarcely ever intelligible except in the internal sense, wherein are deepest arcana, which follow in beautiful connected order, and relate to the external and the internal man; to the many states of the church; to heaven itself; and in the inmost sense to the Lord.The fourth style is that of the psalms of David, which is intermediate between the prophetical style and that of common speech.The Lord is there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under the person of David as a king.
해설
AC.66은 창세기 1장에 대한 해설을 마친 자리에서 말씀의 문체와 속뜻의 관계를 한층 넓게 보여 주는 글입니다. 바로 앞 AC.64-65에서는 말씀에 문자적 의미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속뜻이 있으며, 천사들은 문자와 이름이 아니라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66은 말씀 전체를 모두 똑같은 외적 형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 둘째는 역사적 스타일, 셋째는 예언적 스타일, 넷째는 다윗의 시편에 나타나는 스타일입니다. 네 스타일은 겉으로 나타나는 방식이 서로 다르지만, AC.66의 관심은 결국 그 서로 다른 외적 형식 안에 어떻게 내적 의미가 담겨 있는가에 있습니다.
첫째인 태고교회의 스타일은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 온 창세기 앞부분과 직접 관계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 사람들은 땅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말할 때 동시에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후대 사람이 자연물 하나를 보고 의도적으로 ‘이것은무엇을상징할까?’ 하고 해석한 것과는 조금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외적인 것을 말하면서 그것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함께 생각하는 표현 방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표상들을 단순히 하나씩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일종의역사적연속’으로 만들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한 이유를 그것들에 더 큰 생명력을 주기 위해서였다고 하며, 그런 방식이 그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창조와 에덴동산을 비롯한 앞부분을 읽을 때, AC가 그것을 단순한 상징 목록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표상의 이야기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서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바로 이 문맥에서 한나의 삼상2:3이 인용되는데, 여기서는 잠시 주의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읽는 개역개정은 ‘심히교만한말을다시하지말것이며오만한말을너희의입에서내지말지어다’라고 되어 있는 반면, AC의 영어 인용은 ‘높은것을말하라,높은것을!옛것이네입에서나오게하라’는 식으로 전혀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과 오늘날의 일반적인 번역은 개역개정과 마찬가지로 교만한 말을 금하는 방향입니다. 그러므로 AC의 영어 인용을 근거로 개역개정이 잘못되었다거나, AC가 그 구절의 ‘진짜번역’을 제공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어 본문에서는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여 개역개정 문구를 그대로 두되, 스베덴보리가 여기에서 사용하는 인용 형태가 우리가 읽는 성경 번역과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지와 AC.66의 논증에서 이 인용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는 심화에서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이어 시78:2-4의 ‘내가입을열어비유로말하며예로부터감추어졌던것을드러내려하니’라는 말씀이 인용됩니다. AC.66은 특별히 이러한 표상들을 다윗이 ‘예로부터감추어졌던것’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여기서 굳이 시편의 모든 세부 표현을 하나씩 새로운 상응으로 풀 필요는 없습니다. 이 인용의 역할은 첫째 스타일의 표상들이 ‘예로부터’ 내려온 것이라는 설명을 뒷받침하는 데 있습니다. 특히 바로 다음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조와 에덴동산 등의 내용, 곧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가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시78의 인용과 다음 문장은 함께 읽는 것이 좋습니다. ‘예로부터감추어졌던것’이라는 표현과 태고교회로부터 내려온 표상적 전승이라는 설명이 서로 연결됩니다.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라면 상당히 큰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스베덴보리는창세기1장부터아브람이전까지의내용을모세가직접계시받아처음기록한것이아니라,앞선세대에게서전해받은자료라고보는것인가?’ AC.66의 문장은 분명히 그렇다고 말합니다. ‘창조와에덴동산등에관한이모든내용,아브람시대까지의기록을모세는태고교회의후손들로부터전해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AC.66이 직접 제시하는 상당히 중요한 주장입니다. 다만 여기서 곧바로 현대 성서학의 문서설이나 구전 전승론과 동일시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그러므로창1-11은허구이다’라고 결론 내릴 수도 없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어지는 둘째 스타일에서 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사실들은 문자에 나타난 그대로라고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이 문제는 AC의 창세기 앞부분 이해에 매우 중요하므로 별도 심화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둘째 스타일은 ‘역사적스타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범위를 아브람 이후의 모세오경과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기, 열왕기로 명시합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아주 중요한 말을 덧붙입니다. ‘역사적사실들은문자적의미에나타난그대로’라는 것입니다. 즉 이 둘째 스타일에서 스베덴보리는 내적 의미가 있다는 이유로 외적 역사를 지우지 않습니다. 문자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이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에는 전체적으로도 부분적으로도 내적 의미 안에 ‘전혀다른것들’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AC.66의 둘째 스타일에서는 ‘역사인가상징인가?’라는 양자택일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역사적 사실이면서 동시에 속뜻을 갖습니다.
이 구별은 창세기 앞부분을 읽을 때 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스타일에 대해서는 ‘사실들이문자그대로’라고 명시하는 반면, 그 이전 태고교회 스타일에 대해서는 표상들을 ‘일종의역사적연속’으로 엮었다고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문장을 구별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AC.66하나만 가지고 창1부터 창11까지 각 인물과 사건의 역사성 여부를 세세하게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현재 확실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첫째와 둘째 스타일을 서로 다르게 설명하며, 아브람 이후의 둘째 스타일에 대해서는 문자적 역사성을 명시적으로 확인한다는 사실입니다.
셋째는 예언적 스타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스타일이 태고교회에서 매우 높이 존중되던 스타일에서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태고교회 스타일처럼 연결된 역사 형식은 아니고 ‘단절되어’ 있으며, 내적 의미 없이는 거의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예언서는문자적으로아무뜻이없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은 ‘scarcelyeverintelligibleexceptintheinternalsense’, 곧 내적 의미 없이는 거의 이해할 수 없다고 강하게 말하지만, 그 목적은 문자 자체를 폐기하는 데 있지 않고 그 단절된 표현들의 내적 의미 안에 깊은 아르카나와 아름답게 연결된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AC.65에서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연속의질서’를 가진다고 했던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예언적 스타일의 내적 의미가 무엇을 다루는지도 직접 열거합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 교회의 여러 상태, 하늘 자체를 다루며 ‘가장깊은의미에서는주님’을 다룹니다. 여기서 특히 마지막 표현은 앞으로 말씀의 속뜻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이 한 문장을 곧 ‘모든성경구절은무조건주님의지상생애에대한암호이다’라는 공식으로 바꿔서는 안 됩니다. AC.66은 예언적 스타일의 내적 의미가 여러 차원을 다루며 가장 깊은 의미에서 주님을 다룬다고 말합니다. 그 구체적인 관계는 실제 예언서 인용을 해설하는 과정에서 하나씩 확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넷째는 다윗의 시편 스타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예언적 스타일과 일상적인 언어 사이의 중간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왕으로서의다윗이라는인격아래에서내적의미로는주님을다룬다’고 합니다. 이 표현도 매우 중요합니다. 시편을 읽을 때 다윗의 역사적 인격과 개인적 언어를 곧 지워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그 외적 형식 아래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을 다룬다는 것이 AC.66의 설명입니다. 따라서 시편의 ‘나’를 만날 때 곧바로 모든 문장을 독자의 개인 감정으로만 읽는 것도, 반대로 문자적 화자를 아무 의미 없다고 하는 것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밝힌 것은 왕 다윗의 인격 아래 주님이 내적 의미에서 다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네 가지 스타일을 보면 말씀의 속뜻이 언제나 똑같은 외적 방식으로 감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스타일에서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하면서 자연적인 표상들을 역사적 연속으로 엮었습니다. 역사적 스타일에서는 실제 역사적 사실들 안에 전체와 세부에 내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언적 스타일에서는 외적으로 단절되어 보이는 표현들 안에 깊은 아르카나가 아름다운 질서로 연결되고, 시편에서는 왕 다윗의 인격 아래 내적 의미로 주님이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속뜻이있다’는 하나의 원칙만 붙들고 모든 성경 본문을 동일한 방법으로 기계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AC.66은 보여 줍니다.
그러나 네 스타일의 차이보다 더 중요한 통일성도 있습니다. 모두 말씀이며, 외적으로 서로 다른 형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안에는 문자에 다 드러나지 않는 내적 내용이 있습니다. 앞 AC.64에서 말씀의 속뜻을 ‘말씀의가장참된생명’이라고 했고, AC.65에서는 그 내적 의미의 아름다움과 연속의 질서가 천사들에게 ‘영광’이라고 불렸습니다. AC.66은 이제 그 속뜻이 말씀의 서로 다른 외적 스타일 안에서 어떻게 담겨 있는지를 큰 윤곽으로 보여 줍니다.
또 한 가지 조심할 것은 이 네 가지 스타일을 ‘낮은단계에서높은단계로발전한네계시수준’처럼 읽는 것입니다. AC.66은 그런 서열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 스타일이 그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었다고 하며, 예언적 스타일은 그 스타일에서 생겨났고, 시편은 예언적 스타일과 일상 언어 사이에 있다고 설명하지만, 이것을 ‘첫째가가장높고둘째는낮고셋째가다시높다’는 등급표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각각 말씀 안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는 스타일입니다.
AC.66은 그래서 창세기 1장을 마치는 글이면서 동시에 앞으로 AC를 읽는 방법을 준비시키는 글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로 첫째 스타일에 속하는 창조의 표상적 연속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 이후로 가면 둘째인 역사적 스타일을 만나게 되고, AC가 그 실제 역사 속의 모든 것에서 어떻게 내적 의미를 밝히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예언서와 시편이 인용될 때도 그들의 서로 다른 스타일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에는속뜻이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모든 본문을 똑같은 상징 해독법으로 읽는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의 서로 다른 외적 형식을 존중하면서 그 안의 영적이고 천적인 내용을 밝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성경과 AC의 순서는 바뀌지 않습니다. 먼저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 안에는 태고교회의 표상적 스타일도, 실제 역사의 스타일도, 예언의 스타일도, 시편의 스타일도 있습니다. AC는 그 차이를 없애거나 성경의 표현을 자기 체계에 맞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말씀 안에 어떤 내적 의미가 담겨 있는지를 밝히려 합니다. 따라서 AC.66이 가르치는 좋은 독법은 ‘문자를버리고속뜻으로가자’가 아니라, ‘말씀의외적형식을정확히읽으면서그안에주님께서두신더깊은뜻을따라가자’는 방향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AC.65를 읽으면 성경을 깊이 공부해 온 독자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 생깁니다.천사들은 하늘에서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이해할 수 없고 오직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에서 뜻하는 것만을 이해한다면,우리가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연구하고 단어 하나의 뜻과 문법을 세밀하게 살피는 일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AC.65에서 그런 결론은 나오지 않습니다.이 글은 천사들이 말씀을 어떻게 지각하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자연계의 인간에게 말씀의 문자를 연구하지 말라고 말하는 글이 아닙니다.천사와 인간은 말씀을 동일한 방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우리에게 말씀은 실제로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비롯한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어 전해졌고,우리는 번역된 성경의 단어와 문장을 통하여 그것을 읽습니다.그러므로 원어와 문법과 문맥을 정확히 연구하는 일은 인간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 분명히 유익합니다.
특히 번역에서는 원어 연구가 매우 중요합니다.같은 히브리어나 헬라어 단어라도 문맥에 따라 뜻의 범위가 달라질 수 있고,번역 과정에서 한 언어의 뉘앙스를 다른 언어로 완전히 옮기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원어를 살피면 번역자가 왜 특정 표현을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 있고,서로 다른 번역을 비교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따라서‘천사는글자를보지않으니인간도원어를연구할필요가없다’는 것은AC.65가 말하는 바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 자신도 말씀의 특정 단어나 표현에 매우 세밀하게 주목합니다.AC를 읽다 보면 어떤 단어가 왜 사용되었는지,단수와 복수가 왜 달라지는지,같은 듯 보이는 표현이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근거로 속뜻을 설명하는 경우를 계속 만나게 됩니다.이것만 보아도 말씀의 문자가 중요하지 않다는 식으로AC.65를 읽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AC.65가 우리에게 주는 경계는 무엇일까요?원어 연구 자체가 곧 말씀의 속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히브리어 단어의 어근과 문법을 완벽하게 분석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천사들이 지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의미에 도달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AC.65의 사람들은 스베덴보리가 읽는 말씀의 단어나 글자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뜻하는 것을 지각했습니다.따라서 문자 연구와 내적 의미는 동일한 차원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둘을 서로 적으로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문자연구는낮은것이고속뜻만높은것이다’라고 생각하면 말씀의 질서를 거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우리에게 속뜻은 말씀의 문자와 무관하게 떠오르는 별도의 영적 생각이 아닙니다. ‘말씀의속뜻’입니다.따라서 우리가 자연계에서 말씀을 읽는 출발점은 여전히 주어진 문자입니다.문자를 정확하게 읽는 일과 그 안에 있는 더 깊은 의미를 인정하는 일은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기준이 생깁니다.원어 연구를 통해 개역개정의 익숙한 표현과 다른 원문의 뉘앙스를 발견했다고 해서 곧바로‘우리성경은틀렸고원어를아는내가진짜뜻을안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번역은 언제나 여러 요소를 고려한 결과이고,표현의 차이가 실제 의미 차이를 만드는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반대로 스베덴보리의 해석이 특정 히브리어나 헬라어 표현의 차이에 실제로 의존한다면 그때는 그 차이를 숨기지 말고 독자에게 설명해야 합니다.원어는 말씀을 교정하기 위한 권위 경쟁의 도구라기보다,주어진 말씀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돕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원어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영적 수준을 비교해서도 안 됩니다.원어를 많이 안다고 해서 자동으로 말씀의 속뜻을 더 깊이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원어를 모른다고 해서 말씀을 깊이 받을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AC.65는 그런 사람의 등급을 매기는 글이 아닙니다.천사들이 말씀을 지각하는 방식이 인간의 문자 이해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글입니다.
따라서 목회와 설교에서도 원어는 매우 유용할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설교의 권위를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헬라어로보면진짜뜻은이것입니다’라는 표현을 반복하면서 번역 성경을 읽는 회중이 마치 불완전한 말씀만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정말 원어의 차이가 본문 이해에 중요할 때 그 이유를 차분히 설명하면 충분합니다.
반대로 원어 연구를 경시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중요한것은영적의미니까단어의정확한뜻은중요하지않다’고 한다면 독자의 주관적인 연상을 속뜻이라고 부르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말씀의 속뜻은 우리가 문자를 넘어 마음대로 만들어 내는 뜻이 아니라,스베덴보리의 주장에 따르면 주님께서 주신 바로 그 말씀 안에 있는 뜻입니다.그렇기 때문에 말씀의 문자 자체도 소중히 다루어야 합니다.
결국AC.65가 보여 주는 것은‘원어연구냐속뜻이냐’라는 선택이 아닙니다.인간에게는 말씀의 문자가 주어져 있고 우리는 그것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읽어야 합니다.동시에 말씀은 그 문자적 의미로 다 소진되지 않으며,천사들에게는 그 안에서 뜻하는 내적 의미가 지각됩니다.원어 연구는 전자를 돕는 귀한 도구일 수 있지만 그 자체가 후자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가장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원어 연구는 필요 없지 않습니다.오히려 말씀의 문자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매우 유익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원어를 안다는 것 자체가 말씀의 속뜻을 안다는 뜻은 아닙니다.AC.65는 문자를 버리라고 하지 않고,우리가 읽는 그 문자 안에 천사들이‘영광’이라고 부를 만큼 아름답고 질서 있는 내적 의미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