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19, ‘퍼셉션’(perception), ‘양심’(conscience), 그리고 ‘이성’(reason, rational faculty, the rational)에 대하여
창세기 2장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구분 가운데 하나는 ‘퍼셉션’, ‘양심’, ‘이성’이 무엇이며, 어떻게 다른가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도 흐려지고, 창3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퍼셉션은 천적 인간의 고유한 상태입니다. 그것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즉시 지각하는 내적 감지입니다. 이것은 추론의 결과가 아니며, 외부 자료를 모아 판단하는 과정도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해 직접 흘러들어오는 빛 안에서 ‘아, 이것이 선이구나’ 하고 아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퍼셉션은 ‘안다’기보다 ‘느낀다’에 가깝지만, 그 느낌은 감정처럼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자명한 인식이기 때문에 따로 설명하거나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빛 가운데 서 있을 때 굳이 빛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창2의 에덴 상태이며, 천적 인간의 평안한 지각입니다.
그러나 영적 인간의 상태는 다릅니다. 영적 인간에게는 퍼셉션 대신 ‘양심’이 주어집니다. 양심은 말씀을 통해 배운 진리를 기준으로 작동합니다. 그래서 양심은 항상 어떤 긴장과 싸움을 동반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내적 소리가 들리지만, 동시에 겉 사람의 욕망과 충돌합니다. 그래서 양심은 싸우는 빛입니다. 퍼셉션이 즉시, 즉각적이고, 평온한 지각이라면, 양심은 갈등 속에서 자신을 제어하게 하는 힘입니다. 영적 인간은 퍼셉션처럼 즉각적으로 선을 지각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말씀에서 배운 진리를 붙들고 자기 자신을 다스립니다. 이 상태는 창1의 여섯째 날과 연결되며,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성과 기억 지식은 또 다른 차원의 기능입니다. 이성은 비교, 분석, 논증하는 능력이며, 기억 지식은 감각과 경험을 통해 쌓인 자료들입니다. 이것들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상 질서 안에서는 매우 유익합니다. 정상 질서는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곧 주님으로부터 사랑이 흘러들어오고, 사랑 안에서 퍼셉션이라는 지각이 생기며, 그 지각을 따라 이해와 이성이 정렬되고, 마지막으로 기억 지식이 살아납니다. 이것이 창2의 네 강의 질서이며, 지혜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질서가 거꾸로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기억 지식에서 출발하여 이성으로 판단하고, 그다음에 믿음을 재단하려 할 때, 이성은 빛을 돕는 도구가 아니라 빛을 의심하는 도구가 됩니다. 이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구조이며, 창3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날 타락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퍼셉션은 싸움이 없는 빛, 양심은 싸우며 붙드는 빛, 이성은 방향에 따라 빛을 돕기도 하고 어둠을 강화하기도 하는 능력이라고 말입니다. 창2는 퍼셉션의 시대를 보여 주고, 창3은 이성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을 보여 줍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대개 퍼셉션의 상태는 아니며, 양심과 이성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목표는 이성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위에서 오는 빛에 복종하도록 질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먼저 자리를 잡고, 그 안에서 우리의 이해와 사고가 정렬될 때, 우리는 비록 천적 인간은 아닐지라도, 그 질서를 따라 걷는 영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SC.18, Emanuel Swedenborg의 ‘Arcana Coelestia’에서 말하는 ‘profanation’에 대하여
Emanuel Swedenborg의 ‘Arcana Coelestia’에서 말하는 ‘profanation’(신성모독, 神性冒瀆)은 단순한 신성모독이라는 외적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의식적으로 결합시키는 상태’를 가리키는 깊은 영적 개념입니다.
profanation은 사람이 이미 알고 인정한 신적 진리를, 이후에 의도적으로 거슬러 악한 삶과 결합시키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단순한 무지나 실수, 연약함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알고도’, 그리고 ‘내적으로 접촉하고도’ 그것을 배반하는 데 있습니다. 즉 진리와 악이 한 인격 안에서 혼합되는 것이 profanation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하늘과 지옥은 본질적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인간 안에서도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은 질서 있게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profanation은 이 둘을 한 사람 안에서 결합시킴으로써 영적 질서를 파괴합니다. 그 결과, 내면이 분열되고 찢기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단순한 죄와 구별되는 점입니다. 죄는 회개로 분리될 수 있지만, profanation은 결합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는 ‘태고교회’의 몰락을 설명하면서 profanation을 중심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진리를 직접 지각하는 상태에 있었으나, 점차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선택하면서 내면의 진리와 외적 삶이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의 ‘홍수’는 단순한 자연 사건이 아니라, 이런 혼합이 극에 달해 ‘광적인 욕망과 확신’이 사람을 덮어버린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것이 profanation의 집단적 결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profanation에도 여러 등급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가장 깊은 것은 진리를 사랑으로 받아들여 의지와 결합시킨 뒤, 그것을 배반하는 경우입니다. 이해 차원에서만 인정했던 진리를 나중에 떠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덜 깊습니다. 왜냐하면 의지와 결합되지 않은 진리는 아직 사람의 중심과 하나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매우 중요한 통찰을 제시합니다. 주님은 사람이 profanation에 빠지지 않도록 섭리로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 깊은 진리를 주지 않으시고, 때로는 진리를 잊게 하시기도 합니다. 심지어 진리를 모르는 상태가, 알고도 모독하는 것보다 덜 해롭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무지를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과 악의 혼합을 막으려는 자비의 관점입니다.
유다는 주님을 알고 따르면서도 배반함으로써 깊은 profanation의 예로 제시됩니다. 반면 베드로는 연약함으로 부인했지만, 내면의 사랑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기에 회복이 가능했습니다. 또한 바벨탑은 신적 진리를 자기 영광과 권세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종교적 profanation의 상징으로 해석됩니다.
profanation에 빠진 사람은 사후에 선과 악 사이를 오가며 고통받는 상태에 놓일 수 있다고 설명됩니다. 이는 단순한 지옥의 고통과는 다른, 내적 분열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주님의 자비가 끝까지 작용하여 가능한 한 이런 상태를 막으신다고 강조합니다.
profanation 교리는 공포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진리는 지식이 아니라 삶이며, 삶과 결합된 진리는 거룩합니다. 그것을 자기 사랑의 도구로 삼지 않을 때, 진리는 사람을 살립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용하면 내면의 질서가 무너집니다.
거룩한 것은 주님의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겸손히 받고 삶으로 지켜야 한다는 점이 profanation 교리의 핵심입니다.
The Word cannot be understood except by means of doctrine from the Word.
교회의 교리는 반드시 말씀으로부터 나와야 한다(3464, 5402, 6832, 10763, 10765). 교리 없이 말씀은 이해되지 않는다(9025, 9409, 9424, 9430, 10324, 10431, 10582). 참된 교리는 말씀을 읽는 자들에게 등불과 같다(10401). 참되고 순수한 교리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열린 사람들(those who are in enlightenment from the Lord)로부터 나와야 한다(2510, 2516, 2519, 2524, 10105). 말씀은 열린 자가 형성한 교리에 의해 이해된다(10324). 열린 자들은 스스로 말씀으로부터 교리를 형성한다(9382, 10659). 교회의 교리로 가르치고 배우는 자들과, 말씀의 겉뜻만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자들 사이의 차이에 대하여 보라(9025). 교리 없이 말씀의 겉뜻 안에만 있는 자들은 신적 진리에 관한 어떤 이해에도 이르지 못한다(9409, 9410, 10582). 그들은 많은 오류에 빠질 수 있다(10431). The doctrine of the church must be from the Word (n. 3464, 5402, 6832, 10763, 10765). The Word without doctrine is not understood (n. 9025, 9409, 9424, 9430, 10324, 10431, 10582). True doctrine is a lamp to those who read the Word (n. 10401). Genuine doctrine must be from those who are in enlightenment from the Lord (n. 2510, 2516, 2519, 2524, 10105). The Word is understood by means of doctrine formed by one enlightened (n. 10324). They who are in enlightenment form for themselves doctrine from the Word (n. 9382, 10659). What is the difference between those who teach and learn from the doctrine of the church, and those who teach and learn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of the Word alone (n. 9025). They who are in the sense of the letter of the Word without doctrine, do not come into any understanding concerning Divine truths (n. 9409, 9410, 10582). They may fall into many errors (n. 10431).
진리를 진리 자체를 위하여 사랑하는 자들은, 성인이 되어 자기 이해로 볼 수 있게 되면, 단지 자기 교회의 교리 안에 머물지 않고, 그것이 참된지 아닌지를 말씀으로부터 살핀다 (5402, 5432, 6047).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누구나 타인과 자기 출생지로부터 진리를 갖게 될 것이며, 유대인으로 태어났든 헬라인으로 태어났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6047). 그러나 말씀의 겉뜻으로부터 신앙에 관한 것이 된 그런 것들은 충분히 살핀 뒤에야 비로소 버려야 하며, 성급히 소멸되어서는 안 된다 (9039). They who are in the affection of truth for the sake of truth, when they become adults, and can see from their own understanding, do not simply abide in the doctrinals of their churches, but examine from the Word whether they be true or not (n. 5402, 5432, 6047). Otherwise everyone would have truth from another, and from his native soil, whether he were born a Jew or a Greek (n. 6047). Nevertheless such things as are become matters of faith from the literal sense of the Word, are not to be extinguished till after a full view (n. 9039).
교회의 참된 교리는 체어리티와 신앙의 교리이다 (2417, 4766, 10763, 10765). 신앙의 교리가 교회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삶, 곧 체어리티가 교회를 이룬다 (809, 1798, 1799, 1834, 4468, 4677, 4766, 5826, 6637). 교리들은 사람이 그것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그것들이 단지 기억과 사고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을 위한 것임은 누구나 알 수 있다 (1515, 2049, 2116). 오늘날 교회들에서는 신앙의 교리가 가르쳐지고, 체어리티의 교리는 도덕 철학이라 불리는 학문으로 밀려나 거절되고 있다 (2417).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삶, 곧 체어리티로 인정받는다면 교회는 하나가 될 것이다 (1285, 1316, 2982, 3267, 3445, 3451, 3452). 체어리티의 교리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교리보다 얼마나 더 우월한지 보라 (4844). 체어리티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은 천적인 것들에 대하여 무지 가운데 있다 (2435). 오직 신앙의 교리만을 붙들고 체어리티의 교리는 붙들지 않는 자들은 오류에 빠지는데, 다음에 그 오류들이 또한 묘사되어 있다 (2383, 2417, 3146, 3325, 3412, 3413, 3416, 3773, 4672, 4730, 4783, 4925, 5351, 7623–7677, 7752–7762, 7790, 8094, 8313, 8530, 8765, 9186, 9224, 10555). The true doctrine of the church is the doctrine of charity and faith (n. 2417, 4766, 10763, 10765). The doctrine of faith does not constitute the church, but the life of faith, which is charity (n. 809, 1798, 1799, 1834, 4468, 4677, 4766, 5826, 6637). Doctrinals are of no account, unless one lives according to them; and everyone may see they are for the sake of life, and not merely for the memory and thought thence derived (n. 1515, 2049, 2116). In the churches at this day the doctrine of faith is taught, and not the doctrine of charity, the latter being rejected to a science, which is called moral philosophy (n. 2417). The church would be one, if they should be acknowledged as men of the church from the life, thus from charity (n. 1285, 1316, 2982, 3267, 3445, 3451, 3452). How much superior the doctrine of charity is to that of faith separate from charity (n. 4844). They who know nothing concerning charity, are in ignorance with respect to heavenly things (n. 2435). They who only hold the doctrine of faith, and not that of charity, fall into errors; which errors are also described (n. 2383, 2417, 3146, 3325, 3412, 3413, 3416, 3773, 4672, 4730, 4783, 4925, 5351, 7623–7677, 7752–7762, 7790, 8094, 8313, 8530, 8765, 9186, 9224, 10555).
오직 신앙의 교리 안에만 있고, 신앙의 삶, 곧 체어리티 안에는 아닌 자들을 가리켜 옛날에는 ‘무할례자’(the uncircumcised), 혹은 ‘블레셋 사람’(Philistines)이라고 불렀다 (3412, 3413, 3463, 8093, 8313, 9340). 고대인들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교리를 붙들었고, 신앙의 교리를 그것에 종속시켰다 (2417, 3419, 4844, 4955). They who are only in the doctrine of faith, and not in the life of faith, which is charity, were formerly called the uncircumcised, or Philistines (n. 3412, 3413, 3463, 8093, 8313, 9340). The ancients held the doctrine of love to the Lord and of charity towards the neighbor, and made the doctrine of faith subservient thereto (n. 2417, 3419, 4844, 4955).
열린 자가 형성한 교리는 그 후에 이성과 학문적인 것들에 의해 확증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더 충만히 이해되고 굳게 세워진다 (2553, 2719, 2720, 3052, 3310, 6047). 이 주제에 관하여는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51번을 보라.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자들은 교회 안의 교리적인 것들은 무슨 이성적 통찰 없이 그저 단순히 믿어야 하는 것들이라고 한다 (3394). Doctrine formed by one enlightened may afterwards be confirmed by things rational and scientific; and that thus it is more fully understood, and is corroborated (n. 2553, 2719, 2720, 3052, 3310, 6047). See more on this subject in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 51). They who are in faith separate from charity would have the doctrinal of the church simply believed, without any rational intuition (n. 3394).
지혜로운 사람의 표지는 교리를 확증하는 데 있지 않고, 그전에 먼저 그것이 참인지를 보는 데 있다. 이것이 열린 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경우다 (1017, 4741, 7012, 7680, 7950). 확증의 빛은 자연적 빛이다. 영적 빛이 아니며, 심지어 악한 자에게도 있을 수 있다 (8780). 모든 것, 심지어 거짓까지도 진리처럼 보이게 하려고 아주 단단히 확증될 수 있다 (2482, 2490, 5033, 6865, 8521). It is not the mark of a wise man to confirm a dogma, but to see whether it be true before it is confirmed; and that this is the case with those who are in enlightenment (n. 1017, 4741, 7012, 7680, 7950). The light of confirmation is a natural light, and not spiritual, and may exist even with the evil (n. 8780). All things, even falsities, may be so far confirmed, as to appear like truths (n. 2482, 2490, 5033, 6865, 8521).
해설
말씀은 거룩하지만, 그 거룩함이 사람에게 자동으로 이해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교리 없이 말씀을 읽으면 이해에 이르지 못한다고 단언합니다. 이것은 교리가 말씀보다 위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으로부터 길어 올린 질서 있는 진리의 체계가 있어야 비로소 말씀의 세부들이 제자리를 찾는다는 뜻입니다. 교리는 지도와 같고, 말씀은 광대한 땅과 같습니다. 지도가 없이 광야에 들어가면 길을 잃기 쉽듯, 교리 없이 말씀을 읽으면 각 구절이 흩어져 보이거나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교리는 사람의 사유에서 임의로 만들어진 체계가 아니라, ‘열림’(enlightenment) 가운데 형성된 것이어야 합니다. 열림은 주님께서 이해의 내면, 곧 속을 여시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리는 단순한 학문적 산물이 아니라, 삶과 사랑의 질서 속에서 주님께 인도받으며 형성된 것입니다. 이런 교리만이 등불처럼 말씀을 밝혀 줍니다. 반대로 글자만 붙들고, 즉 말씀을 겉뜻으로만, 그리고 교리 없이 읽으면 사람은 자기 애정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고, 심지어 거짓도 진리처럼 확증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진리 자체를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은 성인이 되면 자신이 속한 교회의 교리를 그대로 반복하는 데 머물지 않고, 말씀으로 그것을 시험합니다. 이것은 반항이 아니라 성숙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태어난 문화와 전통에 따라 자동적으로 ‘자기 교회 진리’를 갖게 될 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스베덴보리는 신중함을 요구합니다. 겉뜻으로 보고 신앙에 관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들은 충분히 살피기 전에는 성급히 버려서는 안 됩니다. 참된 검토는 파괴가 아니라 정화입니다.
이 WH.8의 중심은 체어리티와 신앙의 관계에 있습니다. 교회의 참 교리는 체어리티와 신앙의 교리이지만, 교회를 실제로 이루는 것은 신앙의 교리가 아니라 ‘신앙의 삶’, 곧 체어리티입니다. 신앙이 머리에만 머물면 교회는 분열되지만, 체어리티가 삶이 되면 교회는 하나가 됩니다. 고대 교회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중심에 두고 신앙을 그에 종속시켰다는 말은, 교리의 중심이 사랑이어야 함을 뜻합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블레셋과 같고, 지식은 있어도 생명은 없는 상태입니다.
또한 열림(enlightenment) 가운데 형성된 교리는 이후 이성과 학문으로 확증될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질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열림이 있고, 그다음 이성적 확증이 있지만, 반대로 먼저 확증하고 나중에 진리를 찾으려 하면, 그것은 자연적 빛 안에서의 논증, 논쟁에 머무를 뿐입니다. 확증의 빛은 악한 자에게도 있을 수 있으며, 모든 거짓도 체계적으로 세워지면 진리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무엇을 확증할 것인가를 먼저 묻지 않고, 그것이 참인가를 먼저 봅니다. 이것이 열린 자의 표지입니다.
결국 WH.8은 말씀과 교리, 사랑과 신앙, 열림과 이성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말씀은 근원이고, 교리는 그로부터 나오며, 체어리티는 교리를 살아 있게 하고, 열림은 그 모든 것을 올바른 질서 안에 두는 하늘의 빛입니다. 이런 질서 안에서만 말씀은 이해되고, 교회는 실제가 됩니다.
AC.19(창1:2) 본문 중 리메인스에 관한 설명 가운데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습니다’라는 설명이 나오는데 이게 무슨 뜻인가요?
AC.19에서 리메인스가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는 표현은, 거듭남의 구조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입니다.
먼저 ‘리메인스’(remains)가 무엇인지부터 분명히 해야 합니다.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사람 안에 몰래 간직해 두신 선과 진리의 씨앗입니다. 어린 시절의 순진함, 양심의 흔적, 말씀을 들으며 잠시 감동받았던 기억, 이웃을 향한 따뜻한 마음 같은 것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것들은 우리의 ‘겉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속 사람’ 안에 저장해 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이 ‘빛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고 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겉 사람이 아직 자기 본성과 세상 사랑에 강하게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잘 살 수 있다고 믿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확신하고, 세상적 성공과 자아 만족을 선이라고 여기고 있는 동안에는, 리메인스가 활동할 공간이 없습니다. 햇빛은 이미 떠 있지만, 짙은 안개가 그것을 가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겉의 일들이 황폐해진다’는 말은, 인생이 무너진다는 뜻이 아니라, 겉 사람의 자만과 자기 신뢰가 흔들린다는 뜻입니다. 실패, 상실, 유혹, 고난, 양심의 가책 같은 경험을 통해 사람이 자기 힘의 한계를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그때 겉 사람의 주장들이 잠잠해집니다. AC에서는 이것을 ‘황폐’ 또는 ‘정적 상태’라고 부릅니다. 겉의 소리가 낮아질 때, 속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황폐’는 파괴가 아니라 정리입니다. 겉 사람의 허위와 교만이 약해질 때, 주님께서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비로소 작용합니다. 그때 사람이 문득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선은 선이지’, ‘그래도 진리는 중요하지’,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등, 이런 깨달음이 바로 리메인스가 빛 가운데 나오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영적 법칙과 같습니다. 낮이 오기 전에는 밤이 있습니다. 씨앗이 싹트기 전에는 껍질이 갈라집니다. 겉 사람의 확신이 무너지지 않으면, 속 사람의 생명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때로 우리 인생을 ‘조용히 비우시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중요한 점은, 리메인스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겉 사람이 아무리 거칠어도, 주님은 속 사람 안에 선과 진리의 씨앗을 남겨 두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빛’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겉의 강한 집착이 약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AC.19에 나오는 저 표현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혹 지금 어떤 황폐를 겪고 있다면,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수 있습니다. 겉 사람이 조용해질 때, 속 사람 안의 리메인스가 깨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빛이 있으라’는 말씀이 실제가 됩니다.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8, ‘성도들아 찬양하자’와 찬63, ‘주가 세상을 다스리니’입니다.
오늘부터 해설 버전 누락분 창세기 1장부터 3장입니다. 창3 마치면 창6으로 원래대로 이번엔 쭈욱 나갑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창11절로 2절, AC 글 번호로는 16번에서 19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1, 2)
이 본문을
혼돈 위에 임하시는 주님의 영, 거듭남의 시작
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 AC)에 주목하여 귀 기울이고자 합니다.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오늘은 창1:1-2에 해당하는 AC.16-19를 그 번역과 해설로 접하면서, 거의 설교와도 같은 해설의 어떠함을 다시 한번 맛보고, 거기서 우리 모두 주님의 음성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네, 이상입니다. 어떻습니까?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AC 원문 번역과 특히 그 해설을 그대로 읽었는데요,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해설 없이 읽을 때는 정말 어려웠지만, 지금은 이렇게 해설로 풀어 주니까 글 하나하나가 다 무슨 설교 같지 않으신지요? 이 AC를 붙들고 어떻게 하면 좀 더 쉽게, 좀 더 와닿게 풀어 번역할 수 있을까 거의 6, 7년을 솔직히 몸부림을 쳐온 저로서는 뒤늦게 이 ChatGPT라는 AI의 도움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릅니다. 지난 세월이 헛수고는 아니었던 것이, 그래도 이 AI의 초벌 결과물을 문장 하나하나, 사용된 단어, 표현 하나하나의 적절함과 적당함을 살필 수 있는 안목을 그동안 주님은 제 안에 조성하셔서, 이 AI로 하여금 본연의 비서 역할에만, 도우미 역할에만 머무르게 하신다는 점입니다. 이 점은 의외로 매우 중요하며, 그래서 주님께 감사하고, 그래서 이 ChatGPT라는 AI를 믿고 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유능한 비서가 생기는 바람에 그동안 엄두도 못 냈던 나머지, 그러나 무척 중요한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들 역시 부지런히 번역 및 해설 작업을 병행, 제 블로그(https://bygrace.kr)에 수시로 올리고 있으니 참고하세요. 지난주 새롭게 시작한 저작들은 ‘최후의 심판’(Last Judgment, 1758, LJ), ‘백마’(白馬, White Horse, 1758, WH) 등인데, 이 비교적 짧은 글들은 AC가 배경으로 깔고 들어가는 다른 중요한 개념들을 매우 깊고 넓게 다져 주는 글들입니다. 이 글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여러분의 내면은 탄탄한, 그리고 빛나는 계시의 지식으로 눈부시게 빛날 것입니다.
앞으로도 너무 많은 분량만 아니면 가급적 AC를 원본 및 해설 그대로 읽고자 합니다. 사실 말이 해설이지 형식만 조금 고치면 그대로 설교와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해설 없이 원본만 읽던 시절도 있었음을 생각하면, 지금은 그런 우리의 우직한 모습을 기뻐하신 주님의 큰 선물이라 생각합니다. ‘진리를 진리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들, 그리고 신적 진리들에 따라 살기를 사랑하는 자들이 주님에 의해 인도되는 자들’(AC.10578, 10645, 10829)이라는 위로의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The Word is not understood except by those who are enlightened.
인간의 이성적 능력(rational faculty)은 주님에 의해 열리지(enlightened) 않으면 신성(Divine)은 물론, 심지어 영적인 것들조차 이해할(comprehend) 수 없습니다 (n. 2196, 2203, 2209, 2654). 그러므로 열린 자들만이 말씀을 이해합니다 (n. 10323). 주님은 열린 자들로 하여금 진리들을 이해하게(understand)하시고,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것들을 분별하게(discern) 하십니다 (n. 9382, 10659). 말씀은 문자적 의미 안에서 일관되지 않게 보이고, 어떤 곳에서는 스스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n. 9025). 그러므로 열리지 않은 자들에 의해, 그들이 어떤 의견이나 이단을 확증하기 위하여, 또는 어떤 세속적, 육체적 사랑을 변호하기 위하여 그렇게 해석되고 적용될 수 있습니다 (n. 4738, 10339, 10401). The human rational faculty cannot comprehend Divine, nor even spiritual things, unless it be enlightened by the Lord (n. 2196, 2203, 2209, 2654). Thus they only who are enlightened comprehend the Word (n. 10323). The Lord enables those who are enlightened to understand truths, and to discern those things which appear to contradict each other (n. 9382, 10659). The Word in its literal sense appears inconsistent, and in some places seems to contradict itself (n. 9025). And therefore by those who are not enlightened, it may be so explained and applied, as to confirm any opinion or heresy, and to defend any worldly and corporeal love (n. 4738, 10339, 10401).
진리와 선에 대한 사랑으로 말씀을 읽는 자들은 열리지만, 명예나 이익, 영광을 사랑하여, 곧 자기 사랑으로 말씀을 읽는 자들은 열리지 않습니다 (n. 9382, 10548–10550). 선한 삶 가운데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진리에 대한 애정 안에 있는 자들이 열립니다 (n. 8694). 자기의 내면이 열려 있는 자들, 곧 그 속 사람이 하늘의 빛으로 들어 올려질 수 있는 자들이 열립니다 (n. 10401, 10402, 10691, 10694).열림(Enlightenment)이란 실제로 마음의 내적 부분이 열리는 것이며, 동시에 하늘의 빛으로 들어 올려지는 것입니다 (n. 10330). 말씀을 거룩한 것으로 여기는 자들에게는, 비록 그들 자신은 알지 못하더라도, 속(the internal), 곧 주님으로부터 거룩한 것이 흘러 들어옵니다 (n. 6789). 주님에 의해 인도되는 자들, 곧 자기 자신에 의해 인도되지 않는 자들만이 열려 말씀 안에서 진리들을 봅니다 (n. 10638). 진리를 진리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들, 그리고 신적 진리들에 따라 살기를 사랑하는 자들이 주님에 의해 인도되는 자들입니다 (n. 10578, 10645, 10829). 말씀은 사람의 사랑과 신앙의 삶에 따라 그 안에서 살아납니다 (n. 1776). 자기 자신의 지성에서 나온 것들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한테 고유한 것, 즉 인간의 본성(proprium)으로부터는 아무 선도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n. 8941, 8944). 거짓 교리를 많이 확증해 온 자들은 열릴 수 없습니다 (n. 10640). They are enlightened from the Word who read it from the love of truth and good, but not they who read it from the love of fame, of gain, or of honor, thus from the love of self (n. 9382, 10548, 10549, 10550) They are enlightened who are in the good of life, and thereby in the affection of truth (n. 8694). They are enlightened whose internal is open, thus who as to their internal man are capable of elevation into the light of heaven (n. 10401, 10402, 10691, 10694). Enlightenment is an actual opening of the interiors of the mind, and also an elevation into the light of heaven (n. 10330). There is an influx of holiness from the internal, that is, from the Lord through the internal, with those who regard the Word as holy, though they themselves are ignorant of it (n. 6789). They are enlightened, and see truths in the Word, who are led by the Lord, but not they who are led by themselves (n. 10638). They are led by the Lord, who love truth because it is truth, who also are they that love to live according to Divine truths (n. 10578, 10645, 10829). The Word is vivified with man according to the life of his love and faith (n. 1776). The things derived from one’s own intelligence have no life in themselves, because from man’s proprium there is nothing good (n. 8941, 8944). They cannot be enlightened who have much confirmed themselves in false doctrine (n. 10640).
열리는 것은 이해입니다 (n. 6608, 9300).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그릇입니다 (n. 6242, 6608, 10659). 교회의 모든 교리에 관하여, 이해의 관념들(ideas)과 그로부터 나오는 사유(the thought)의 관념들이 있으며, 그에 따라 교리가 지각됩니다(perceived) (n. 3310, 3825). 세상에서 사는 동안 인간의 관념들은 자연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인간은 자연 안에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진리 자체를 위하여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그 자연적 관념들 안에 영적 관념들이 감추어져 있으며, 인간은 죽은 후 그 영적 관념들 안으로 들어갑니다 (n. 3310, 5510, 6201, 10236, 10240, 10550). 어떤 주제에 관하여 이해와 그로부터의 사유의 관념이 없이는 어떠한 지각도 있을 수 없습니다 (n. 3825). It is the understanding which is enlightened (n. 6608, 9300). The understanding is the recipient of truth (n. 6242, 6608, 10659). In regard to every doctrine of the church, there are ideas of the understanding and of the thought thence, according to which the doctrine is perceived (n. 3310, 3825). The ideas of man during his life in the world are natural, because man then thinks in the natural; but still spiritual ideas are concealed therein with those who are in the affection of truth for the sake of truth, and man comes into these ideas after death (n. 3310, 5510, 6201, 10236, 10240, 10550). Without ideas of the understanding, and of the thought thence, on any subject, there can be no perception (n. 3825).
신앙에 속한 것들에 관한 관념들은 내세에서 드러나며, 그 어떠함(quality)이 천사들에게 보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관념들이 사랑의 애정에서 나오는 정도에 따라 다른 이들과 결합됩니다 (n. 1869, 3320, 5510, 6201, 8885). 그러므로 이성적 인간이 아니고서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것에 대한 관념도 없이, 그 주제에 대한 이성적 통찰도 없이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지각과 애정의 생명이 전혀 없는 말들을 기억 속에 간직하는 것에 불과하며,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n. 2533).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열리는 걸 허용합니다 (n. 3619, 9824, 9905, 10548). Ideas concerning the things of faith are laid open in the other life, and their quality is seen by the angels, and man is then conjoined with others according to those ideas, so far as they proceed from the affection which is of love (n. 1869, 3320, 5510, 6201, 8885). Therefore the Word is not understood except by a rational man; for to believe anything without an idea thereof, and without a rational view of the subject, is only to retain in the memory words destitute of all the life of perception and affection, which is not believing (n. 2533). It is the literal sense of the Word which admits of enlightenment (n. 3619, 9824, 9905, 10548).
해설
이 글은 ‘백마’의 주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적용하는 부분입니다. 백마는 이해였고, 이제 그 이해가 어떻게 열리는지가 설명됩니다. 인간의 이성은 자율적으로 신적 진리를 꿰뚫을 수 없습니다. 열린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능력의 증가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의 유입입니다. 말씀의 모순처럼 보이는 부분도, 열릴 때 비로소 질서 안에서 보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난해함은 결함이 아니라, 열릴 것을 요구하는 구조입니다.
열림의 조건은 지적 재능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입니다. 진리를 진리 자체로 사랑하는가, 아니면 명예와 이익을 위하여 이용하는가에 따라 빛의 유입이 달라집니다. 자기 사랑에서 읽는 자는 말씀을 왜곡하여 자신의 입장을 강화합니다. 그러나 선한 삶 가운데 있는 자, 곧 사랑 안에 있는 자는 내면이 열려 하늘의 빛으로 들어 올려집니다. 열린다는 것은 마음의 내면이 실제로 열리는 사건이며, 이는 단지 감정적 고양이 아니라 존재 구조의 상승입니다.
이해는 진리의 그릇입니다. 교리는 관념 속에서 형성됩니다. 관념이 없으면 믿음도 없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선언입니다. 맹목적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진리를 이해하려는 이성적 노력은 믿음의 적이 아니라, 믿음의 필수 요소입니다. 다만 그 이해가 자기 지성에서 나오느냐, 주님의 빛에서 나오느냐가 문제입니다. 인간한테 있는 고유한 것(proprium), 즉 인간의 본성에는 생명이 없고, 주님의 빛이 들어올 때만 이해가 살아 있습니다.
내세에서 관념이 드러난다는 언급은, 신앙이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실제적인 사고 구조임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자신이 품고 있던 신앙의 관념들에 따라 다른 이들과 결합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이해하는 방식은 영원한 결합을 결정합니다. ‘백마’가 이해라면, 그 말이 어디를 향해 달렸는지가 곧 인간의 영원한 방향입니다.
마지막으로, 열림은 문자적 의미 안에서 일어납니다. 내적 의미는 문자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문자 안에서 열립니다. 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은 문자 속에 서 있고, 열리는 것은 그 문자를 통해 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사랑과 진리의 애정으로 읽는 자에게, 주님은 백마를 타고 오십니다. 이해가 열리고, 모순은 질서가 되며, 말씀이 살아납니다.
‘진리를 진리 자체를 위하여 사랑한다’는 것은, 진리가 나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나의 입장을 강화해 주기 때문에, 나를 높여 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참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진리가 나를 기쁘게 하든 아프게 하든, 나를 드러내 주든 낮추든,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빛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이는 진리를 ‘수단’으로 쓰지 않고, 진리를 ‘목적’으로 여기는 태도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말씀이 나의 습관이나 생각을 바로잡을 때, 그것이 불편하더라도 ‘그래도 이것이 참이라면 나는 배우겠다’라고 반응하는 것이 진리를 진리로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반대로, 말씀을 읽으면서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면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라고 접근한다면, 그것은 이미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성경을 읽어도, 속으로는 자기를 확증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 말하면, 이는 ‘자기 사랑’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의 빛’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진리로 사랑하는 사람은, 아직 다 이해하지 못해도 진리를 존중합니다. 그는 진리를 통해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은 곧 삶으로 이어집니다. 진리를 진리로 사랑하는 사람은 ‘옳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옳은 대로 살고자’ 합니다. 여기서 이해와 삶이 연결됩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겸손입니다. 진리를 진리로 사랑하는 사람은 ‘나는 아직 모른다’는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배우기를 기뻐합니다. 그는 진리를 자기 소유물로 만들려 하지 않고, 진리 앞에서 배우는 자로 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진리를 진리 자체를 위하여 사랑하는 자가 곧 주님에 의해 인도되는 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방향이 이미 자기 자신이 아니라 진리, 곧 주님 쪽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매우 단순하지만 깊은 질문으로 드러납니다. ‘나는 왜 이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가?’ 내가 설교를 잘하기 위해서인가,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정말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알고 싶어서인가? 진리를 진리로 사랑하는 마음은 조용하고 단순하지만, 그 안에 하늘의 빛이 스며듭니다. 그런 마음에서 말씀을 읽을 때, 비로소 내면의 열림(enlightenment)이 시작됩니다.
말씀의 필요성과 탁월성The necessity and excellence of the Word.
자연의 빛으로는 주님에 관하여, 천국과 지옥에 관하여, 인간이 죽은 후의 생명에 관하여, 그리고 인간이 영적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신적 진리들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n. 8944, 10318–10320).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해 보면 분명해집니다. 곧 많은 사람들, 심지어 학식 있는 사람들까지도, 말씀이 있는 곳에서 태어나 그것에 의해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들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n. 10319). 인간이 천국을 위하여 태어났기때문에 (n. 1775), 하늘로부터의 어떤 계시가 반드시 필요하였고, 그래서 세상의 모든 시대마다 계시가 있었습니다(n. 2895). From the light of nature nothing is known concerning the Lord, concerning heaven and hell, concerning the life of man after death, nor concerning the Divine truths by which man acquires spiritual and eternal life (n. 8944, 10318, 10319, 10320). This may appear manifest from the consideration, that many, and among them men of learning, do not believe those things, although they are born where the Word is, and are thereby instructed concerning them (n. 10319). Therefore it was necessary that there should be some revelation from heaven because man was born for heaven (n. 1775). Therefore in every age of the world there has been a revelation (n. 2895).
이 지상에서 차례로 주어진 여러 종류의 계시에 대하여는 n.10355,10632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홍수 이전, 이른바 황금시대라 불리던 태고인들에게는 직접적인 계시(an immediate revelation)가 있었고, 그로부터 신적 진리(Divine truth)가 그들의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n. 2896). 홍수 이후에 존재하였던 고대 교회들에는 역사적이고 예언적인 말씀(a historical and prophetical Word)이 있었습니다 (n. 2686, 2897). 그 교회들에 관하여는 ‘새 예루살렘과 그 천적 교리’(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 247)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역사적 부분은 ‘여호와의 전쟁들’(the Wars of Jehovah)이라 하였고, 예언적 부분은 ‘선포들’(Enunciations)이라 하였습니다 (n. 2897). 그 말씀은 영감(inspiration)에 있어서 우리 말씀과 같았으나, 그 교회들에 맞게 조정되어 있었습니다 (n. 2897). 그 말씀은 모세에 의하여 언급되었으나 (n. 2686, 2897), 지금은 잃어버려졌습니다 (n. 2897). 또한 발람의 예언들(the prophecies of Balaam)에서 보이는 것처럼 다른 이들에게도 예언적 계시(Prophetical revelations)가 주어졌습니다(n. 2898). Of the various kinds of revelation which have successively been made on this earth (n. 10355, 10632). To the most ancient men, who lived before the flood, whose time was called the golden age, there was an immediate revelation, and thence Divine truth was inscribed on their hearts (n. 2896). The ancient churches, which existed after the flood, had a historical and prophetical Word (n. 2686, 2897): concerning which churches see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 247). Its historical parts were called the Wars of Jehovah, and its prophetical parts, Enunciations (n. 2897). That Word as to inspiration was like our Word, but accommodated to those churches (n. 2897). It is mentioned by Moses (n. 2686, 2897). But that Word is lost (n. 2897). Prophetical revelations were also made to others, as appears from the prophecies of Balaam (n. 2898).
말씀은 그 모든 부분과 각각의 세부(particular part)에 이르기까지 신적(Divine)입니다 (n. 639, 680, 10321, 10637). 말씀은 점 하나와 획 하나(every point and iota)에 이르기까지 신적이며 거룩하다는 것이 경험을 통해 증명되었습니다 (n. 1349). 오늘날 말씀이 획 하나에 이르기까지 영감되었다고 설명되는 방식에 관하여는 n.1886에서 볼 수 있습니다. The Word is Divine in all and every particular part (n. 639, 680, 10321, 10637). The Word is Divine and holy as to every point and iota, from experience (n. 1349). How it is explained at this day that the Word is inspired as to every iota (n. 1886).
교회는 특별히 말씀이 있는 곳,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이 알려지고 신적 진리들이 계시되는 곳에 존재합니다 (n. 3857, 10761). 그러나 말씀이 있는 곳에서 태어나고, 그로 말미암아 주님이 알려지는 곳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곧 교회에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속하는 자들은 말씀에서 나온 진리들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거듭난 자들, 곧 그 안의 진리들에 따라 사는 자들, 따라서 사랑과 신앙의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n. 6637, 10143, 10153, 10578, 10645, 10829). The church is especially where the Word is, and where the Lord is thereby known, and Divine truths are revealed (n. 3857, 10761). But it does not follow from thence, that they are of the church, who are born where the Word is, and where the Lord is thereby known; but they who, by means of truths from the Word, are regenerated by the Lord, who are they who live according to the truths therein, consequently who lead a life of love and faith (n. 6637, 10143, 10153, 10578, 10645, 10829).
해설
이 글은 ‘백마’라는 상징 논의를 넘어, 왜 말씀이 반드시 필요한가라는 근본 문제로 나아갑니다. 자연의 빛, 곧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주님, 천국, 사후 생명,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진리를 알 수 없다고 단정합니다. 이는 이성의 부정이 아니라, 이성의 한계 규정입니다. 인간은 천국을 위하여 태어났으나, 천국에 관한 지식은 하늘로부터 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계시는 선택이 아니라 필연입니다.
여기서 계시의 역사적 연속성이 제시됩니다. 태고교회에는 직접 계시가 있었고, 진리가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함에 따라 외적 말씀이 필요해졌고,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에는 역사적, 예언적 형태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그 말씀이 지금은 사라졌다는 언급은, 계시가 한 번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시대마다 주어졌음을 보여 줍니다. 이는 계시의 점진성과 섭리적 질서를 강조합니다.
말씀이 ‘점 하나와 획 하나까지’ 신적이라는 선언은 내적 의미 교리의 토대입니다. 만일 말씀의 일부만 신적이라면, 내적 의미도 부분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세부가 신적이라면, 모든 세부가 영적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문자 자체를 경시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무한한 깊이가 있음을 말합니다. 내적 의미는 문자와 분리된 다른 책이 아니라, 문자 속에 내재한 차원입니다.
교회의 정의도 재정의됩니다. 교회는 지리적 공간이나 제도적 조직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주님이 알려지고 그 진리에 따라 사는 사람들의 상태입니다. 단순히 말씀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로 거듭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백마’는 단지 이해의 상징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 조건입니다. 이해가 열릴 때 교회가 살아 있습니다.
이 글은 계시, 말씀, 교회, 거듭남을 하나의 구조로 연결합니다. 계시는 인간이 천국을 위해 태어났기 때문에 주어졌고, 말씀은 그 계시의 기록이며, 교회는 그 말씀에 따라 사는 자들의 공동체이며, 거듭남은 그 진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탁월성은 단지 권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데 있습니다.
The Word and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sections 1–5)
WH.5
‘백마’(the White Horse)가 말씀의 영적 곧 내적 의미에 관한 이해를 뜻하기 때문에, 말씀과 그 내적 의미에 관하여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the Arcana Coelestia)에서 밝혀진 몇 가지 사항들을 여기에 덧붙입니다. 왜냐하면 그 저작에서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모든 내용이 말씀의 영적 곧 내적 의미에 따라 해설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Since “the White Horse” signifies the understanding of the Word as to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those particulars concerning the Word and that sense, which are shown in the Arcana Coelestia, are here subjoined: for in that work the whole contents of Genesis and Exodus are explained according to the spiritual or internal sense of the Word.
해설
이 글은 ‘백마’ 전체 구조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지금까지는 ‘말 = 이해’라는 상응을 성경과 영계의 표상으로 증명해 왔다면, 이제는 그 이해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 주겠다는 선언입니다. 곧 ‘백마’는 단순한 상징 해설이 아니라, 이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안에서 실천적으로 구현된 해석 방법의 이름입니다. 이해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말씀 전체를 꿰뚫어 보는 실제적인 능력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절제된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는 새로운 체계를 제시한다고 말하지 않고, 이미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내적 의미로 해설한 작업을 참고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백마’의 교리가 단지 상징적 주장에 그치지 않고, 방대한 본문 주해 작업 속에서 검증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 전체가 영적 의미에 따라 설명될 수 있었다면, 말씀 전체도 동일한 법칙 아래 이해될 수 있다는 전제가 서 있습니다.
목회적으로 보아도 이 문장은 의미심장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는 몇 구절에만 적용되는 특별한 비밀이 아니라, 성경 전반에 흐르는 질서라는 점을 밝히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백마라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그 말이 실제로 달린 길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백마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말씀을 새롭게 읽는 방식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WH.5는 일종의 연결 고리입니다. 상징의 증명에서 실제 해석으로, 선언에서 실천으로 넘어가는 지점입니다. ‘백마’가 말씀의 내적 의미에 대한 이해라면, 이제 독자는 그 이해가 어떻게 본문 전체를 열어 가는지를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이는 교회의 마지막 때에 열릴 새 이해가 추상적 계시가 아니라, 구체적 본문 해석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보여 주는 매우 간결하면서도 결정적인 문장입니다.
The Word and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sections 1–5)
WH.4
‘병거’(chariots)와 ‘말’(horses)이 이러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은 고대 교회들에서는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교회들은 표상 교회들(representative churches)이었고, 그들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는 상응과 표상의 학문(the science of correspondences and representations)이 모든 학문 중 으뜸이었기 때문입니다. ‘말’이 이해를 뜻한다는 의미는 그 교회들로부터 주변의 지혜로운 이들, 심지어 그리스에 이르기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지혜와 총명의 신(their God of wisdom and intelligence)을 태양에 두고 그것을 묘사할 때, 불의 병거와 네 마리의 불말을 그것에 돌렸습니다. 또한 바다의 신(the God of the sea)을 묘사할 때에는, 바다가 이해에서 나온 학문들(sciences derived from the understanding)을 뜻하기 때문에, 그에게도 말들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이해로부터 학문이 나오는 기원을 묘사할 때에는, 날개 달린 말을 그려, 그 말이 발굽으로 샘을 터뜨리고, 그 샘가에 ‘학문들’(the sciences)이라 불리는 아홉 처녀가 앉아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였습니다. That such is the signification of “chariots” and “horses” was well known in the ancient churches; for those churches were representative churches, and with those who were in them, the science of correspondences and representations was the chief of all sciences. The signification of the horse, as being understanding, was derived by the wise round about, even to Greece, from those churches. Hence it was, when they would describe the sun, in which they placed their God of wisdom and intelligence, that they attributed to it a chariot and four horses of fire. And when they would describe the God of the sea, since by the sea were signified sciences derived from the understanding, that they also attributed horses to him. And when they would describe the origin of the sciences from the understanding, they represented it by a winged horse, which with its hoof broke open a fountain, at which sat nine virgins called the sciences.
이는 고대 교회들로부터 ‘말’(the horse)은 이해를 뜻하고, ‘날개’(wings)는 영적 진리를 뜻하며, ‘발굽’(the hoof)은 이해에서 나온 학문적인 것을 뜻하고, ‘샘’(a fountain)은 학문들이 흘러나오는 교리(doctrine from which sciences are derived)를 뜻한다는 지식을 전해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트로이 목마’(the Trojan horse)로 불리는 것도 다른 의미가 아니라,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이해로 고안해 낸 인위적인 계책을 뜻합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고대인들에게서 전해진 방식에 따라 이해를 묘사할 때에는 날아다니는 말이나 페가수스로 형상화하는 것이 보통이며, 교리는 샘으로, 학문은 처녀들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말’이 신비적 의미에서 이해를 뜻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더구나 이러한 상징들이 이방인들에게 고대 표상 교회들로부터 전해졌다는 사실은 더욱 알지 못합니다. For from the ancient churches they received the knowledge that “the horse” signifies the understanding; “wings,” spiritual truth; “the hoof,” what is scientific from the understanding; and “a fountain,” doctrine from which sciences are derived. Nor is anything else signified by “the Trojan horse,” than an artificial contrivance devised by their understanding for the purpose of destroying the walls. Even at this day, when the understanding is described after the manner received from those ancients, it is usual to figure it by a flying horse or Pegasus; so, likewise, doctrine is described by a fountain, and the sciences by virgins; but scarcely anyone knows that “the horse,” in the mystic sense, signifies the understanding; still less that those significatives were derived by the Gentiles from the ancient representative churches.
해설
이 글은 상응의 학문이 단지 성경 해석의 도구가 아니라, 인류 문명 전반에 영향을 미친 원형적 지식이었다는 점을 밝히는 대목입니다. 고대 교회는 자연과 영계 사이의 상응을 알고 있었고, 그 지식이 모든 학문의 기초였습니다. ‘말 = 이해’라는 상응은 그들 사이에서 자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상징은 후대의 상상이 아니라, 잊혀진 지혜의 흔적입니다.
그리스 신화 속 태양신의 불병거와 네 말은 단순한 시적 장식이 아니라, 지혜와 총명의 근원이 하늘의 빛에서 나온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태양은 사랑, 불은 그 열기, 말은 이해를 뜻합니다. 바다의 신에게 말이 귀속된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바다는 지식의 집합을 상징하며, 지식은 이해를 통해 정리됩니다. 그러므로 신화는 왜곡되었으나, 그 근저에는 상응의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
날개 달린 말, 곧 페가수스가 발굽으로 샘을 터뜨리는 장면은 매우 깊은 상응을 담고 있습니다. 날개는 영적 진리, 말은 이해, 발굽은 이해의 제일 바깥 작용, 샘은 교리입니다. 곧 영적 진리로 상승한 이해가 교리의 원천을 열고, 그로부터 학문이 흘러나온다는 구조입니다. 아홉 처녀는 학문과 예술의 분화된 형태를 뜻합니다. 이는 고대 상응 지식이 신화적 상징으로 변형된 사례입니다.
트로이 목마 또한 이해로 고안된 계책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말이 단순한 전쟁 도구가 아니라, 전략적 지성을 상징하는 형상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는 상응의 기억이 문화 속에 남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오늘날에도 이해를 날아오르는 말로, 교리를 샘으로, 학문을 처녀로 형상화하는 관습이 남아 있지만, 그 영적 기원은 거의 잊혔습니다.
이 글의 핵심은, 상응의 지식이 인류의 공통 유산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방 문화의 상징도 근원적으로는 고대 표상 교회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의미는 잊히고 형상만 남았습니다. 그러므로 ‘백마’의 교리는 새로운 발명이 아니라, 잃어버린 고대 지혜의 회복입니다. 이해는 언제나 말로, 교리는 병거로, 사랑은 불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영계의 구조이며, 성경과 인류 문화 속에 동시에 흔적을 남긴 상응의 법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