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05(D1)-주일예배(2513, 마7,24-27), '납골(納骨) 예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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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fj86WPkVc_E

 

시작

 

故 권성조와 故 김정자, 두 분의 이장(移葬) 관련, 마지막 세 번째 예배인 납골(納骨)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찬송

 

235장 보아라 즐거운 우리 집

 

1절

보아라 즐거운 우리 집

밝고도 거룩한 천국에

거룩한 백성들 거기서

영원히 영광에 살겠네

거기서 거기서

기쁘고 즐거운 집에서

거기서 거기서 거기서

영원히 영원에 살겠네

 

2절

앞서간 우리의 친구들

광명한 그 집에 올라가

거룩한 주님의 보좌 앞

찬미로 영원히 즐기네

거기서 거기서

기쁘고 즐거운 집에서

거기서 거기서 거기서

찬미로 영원히 즐기네

 

 

설교

 

이곳은 이제 두 분을 새롭게 모실 새로운 곳입니다. 저쪽 포천 황동묘원 때와는 달리 이곳은 이제 언제든지 자유롭게 오실 수 있는 곳이어서 참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부분 그래도 수도권에 사시며, 가까이들 사시니까요. 두 분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 사랑, 함께함이 생각나실 때마다 오시기 바랍니다. 오셔서 바쁘고 복잡한 세상일에서 잠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영원과 사후세계를 생각하시는 시간들 가지시기를 권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러나 사후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곳은 천국이며, 그래서 지상에 남기고 가는 이 유골은 지상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자손들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 이미 천국에 들어가신 분들에게는 전혀라는, 이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즉 조상이 후손에게 무슨 복을 주고 그러거나, 돌아가신 부모님이 하늘에서 보고 계신다거나 하는, 그런 일은 없다는, 그래서 이런 말씀이 살짝 좀 불편하시고 이상하시더라도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즉 세상 떠나신 고인들의 경우, 기억하는 것은 우리이지, 그분들은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기억하지 않으신다, 아니 못하신다 말씀드리는 이유는, 사람이 사후 육체를 떠나 천국에 들어간다는 건 뭐랄까... 일종의 초기화, 리셋(reset) 된다고나 할까요? 생전의 모든 자연적 기억과 경험들이 모두 휴면 상태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래도 주님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다시 꺼내어져 재생되지만 말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오직 사람의 영뿐이며, 이 영은 오직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으로만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저 세상 살면서 학습을 통해 지식으로 습득하기만 한 걸로는, 그래서 그걸 통해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지역 사회와 자기가 속한 공동체 및 나라와 민족, 인류에게 무슨 유익을 끼치는 삶을 살지는 않았던, 즉 그걸 통해 창조주가 원하셨던 무슨 쓰임새의 삶을 살지는 않았던 사람들, 그 지식과 경험, 환경 가지고 그저 자기만 사랑하고, 세상 사랑하는 데만 전념했던 사람들은, 사후에는 자기가 그동안 생전에 그렇게 애써 익혔던, 그리고 성취했던 모든 지식과 경험이 자기 것, 곧 영이 되어 있지를 않아, 미안하지만 자신과 분리가 되어 모두 휴면 상태에 들어가게 되고, 그래서 천국에는 가지고 가실 수 없는 상태가 되며, 그래서 당연히 이런 사람의 영은 함량 미달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실상은 들여보내 줘도 본인이 못 견디고 뛰쳐나오는 건데요, 마치 글로벌 초우량 기업에 낙하산으로 입사한들 실제 본인의 업무역량이 안 받쳐주면 못 견디고 나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참 놀라운 얘기이지요? 보통은 예수 믿고 교회 다니면 천국 갈 수 있다 가르치고 그렇게 배우기 때문인데요, 물론 그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절반만 맞습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그러면서 또한 ‘듣고 행하는’ 삶이 뒤따라야 하는데요, 왜냐하면, 사람의 영, 천국에 들어가는 영은 ‘듣고 행할’ 때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진리라는 건, 그냥 글자 형태로만 있으면 그냥 ‘진리’일 뿐이지만, 그 진리가 실천되는 순간, ‘’이 됩니다. 진리를 실천하면서 살 때, 그 사람의 영은 천국을 향해 무럭무럭 자라나며, 천국은 이런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이런 걸 주님은 마태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습니다.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마7:24-27)

 

이 말씀 자체가 한 편의 설교, 정수(精髓)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란 무엇이며, 사람의 임종 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사람이 천국 또는 지옥에 가는 그 과정과 절차는 어떤지, 더 나아가 천국은 어떤 곳이며, 지옥은 어떤 곳인지 등에 대해 정말 많은 걸 알려 드릴 수 있으나 오늘은 시간 관계상 어렵고, 다만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그리고 두 분의 이장 관련 예배이니만큼 절제하겠습니다.

 

결론입니다. 천국은 천국에 합당하게 준비된 영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천국 가기를 원하신다면, 지금부터라도 자신의 ‘영 준비’에 신경 쓰셔야 합니다. ‘자신의 영을 준비한다’는 것은, 일단 천국은 영의 나라요, 육신은 이 세상에 벗어버리고 가기 때문이고요, 영이란 ‘듣고 행한’ 걸로만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란, 자신의 영을 천국을 위해 잘 준비할 수 있는 기간이며, 주님은 사랑이셔서 그 기간을 넉넉히, 아주 충분히 주시는 것입니다.

 

천국은 영원한 곳입니다. 사람의 영은 천국에서 가장 젊을 때의 상태로 지내게 되는데요, 수백, 수천 년이 지날수록 더욱 더 젊어진다고 합니다. 그 모습 또한 가히 지상의 언어로는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하는데요, 두 분은 각각 91세, 79세의 노인으로 생을 마감하셨으나 지금 계신 곳에서는 눈이 부시다 못해 도저히 뜨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우신 모습들이실 줄 믿습니다. 두 분 생전에 옷처럼 입고 지내신 육신은 지금 이렇게 뼛가루가 되어 유골함에 모셔져 있지요. 즉 살아생전 건강에 신경 쓰시는 것도 좋지만, 너무, 잠시 후 벗어버리고 갈 육체에 너무 그러지 마시고, 더욱 중요한 게 무엇일지, 곧 자신의 영인데요, 이 영 준비에 가급적 올인하시라는 말씀입니다.

 

부디 남은 삶, 자신의 영, 자신의 속 사람을 더욱 아름답게 가꾸시는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그래서 나중에 천국에서 두 분, 영광 가운데 큰 기쁨으로 재회할 수 있게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 받들어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찬송

 

3절

우리를 구하신 주님도

거룩한 그 집에 계시니

우리도 이 세상 떠날 때

주님과 영원히 살겠네

거기서 거기서

기쁘고 즐거운 집에서

거기서 거기서 거기서

주님과 영원히 살겠네

 

4절

우리의 일생이 끝나면

영원히 즐거운 곳에서

거룩한 아버지 모시고

기쁘고 즐겁게 살겠네

거기서 거기서

기쁘고 즐거운 집에서

거기서 거기서 거기서

기쁘고 즐겁게 살겠네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과 도우심의 그 은혜와 사랑이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두 분 고 권성조, 고 김정자의 이장에 참여, 두 분을 기억하며, 주신 세 번의 말씀 마음으로 받아 새 힘, 새 결심하고 떠나는 모든 심령 가운데, 그리고 생활과 삶 가운데 이제부터 영원토록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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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5(D1)-주일예배(2512, 겔37,1-14), '화장(火葬) 예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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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ldH-lYlZnds

 

시작

 

故 권성조와 故 김정자, 두 분의 이장(移葬) 관련, 두 번째 예배인 화장(火葬)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찬송

 

606장 해보다 더 밝은 저 천국

 

1절

해보다 더 밝은 저 천국

믿음만 가지고 가겠네

믿는 자 위하여 있을 곳

우리 주 예비해 두셨네

 

2절

찬란한 주의 빛 있으니

거기는 어두움 없도다

우리들 거기서 만날 때

기쁜 낯 서로가 대하리

 

후렴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설교

 

애석하게도 성경에는 오늘날의 이런 화장처럼 고인의 유골을 납골을 위해 불로 태워 빻아 가루로 만드는 예가 없습니다. 무엇을 태워 빻아 가루로 만드는 예를 굳이 찾자면 아래와 같은 경우인데요,

 

4왕이 대제사장 힐기야와 모든 부제사장들과 문을 지킨 자들에게 명령하여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만든 모든 그릇들을 여호와의 성전에서 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밭에서 불사르고 그것들의 재를 벧엘로 가져가게 하고 5옛적에 유다 왕들이 세워서 유다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 주위의 산당들에서 분향하며 우상을 섬기게 한 제사장들을 폐하며 또 바알과 해와 달과 별 떼와 하늘의 모든 별에게 분향하는 자들을 폐하고 6또 여호와의 성전에서 아세라 상을 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시내로 가져다 거기에서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어 그 가루를 평민의 묘지에 뿌리고 (왕하23:4-6)

 

이처럼 우상과 제단, 그리고 우상숭배 때 사용된 모든 제기(祭器)라면 몰라도 사람의 유골을 가지고 그렇게 하지는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이런 새로운 화장 및 납골 문화는 매장지가 부족한 오늘날 현실적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므로 굳이 무슨 영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지 싶고, 그래서 이 시간엔 특별히 ‘’에 대하여 아래 에스겔 본문을 가지고 살피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1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3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4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7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8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9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10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11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12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13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14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37:1-14)

 

마른 뼈’(the dry bones) 본문으로 유명한 이 본문은 사실은 사람의 거듭남을 설명하는 본문입니다. 사람의 거듭남이란,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한평생 천국 생활에 합당하게 잘 준비되어 사후(死後), 천국에 갈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사실은 생전 그 사람의 상태가 천국 상태여야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지옥은 이미 그 상태가 지옥인 사람이 가는 곳이고요. 이에 대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17:20-21)

 

천국이니 지옥이니 하는 곳들은 사실은 시공간의 나라가 아닌, 상태와 그 상태변화의 나라입니다. 상태란 천국과 지옥 등 영계 전체와 이 자연계를 모두 다스리시는 만유의 대 주재이신 주님께 대한 상태를 말합니다. 한평생 살면서 그 주님을 얼마나 닮은 상태인가에 따라 사후 운명이 정해지는 것이지요. 영계라는 곳은 비슷하면 가까이, 다르면 멀어지는 곳인데요, 그래서 주님을 닮은 사람, 주님과 비슷한 사람은 천국, 즉 천국 상태에 있게 되고, 주님을 안 닮은 사람, 주님과 비슷한 점이 없는 사람은 정반대인 지옥, 즉 지옥 상태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위 에스겔 본문에서 말하는 ‘생기’는 주님으로 말미암는 생명이며, 14절,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에 나오는 ‘’과 같은 말입니다. 영어로는 같은 ‘spirit’인데 한글 번역을 이렇게 다르게 했네요. ‘’란 이 생명이 거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처음 태어날 때, 바로 이 ‘’ 상태로 태어납니다. 그렇게 태어나 누구는 일찍 하나님을 만나고, 누구는 한평생 하나님을 못 만난 채 살아갑니다. ‘하나님, 곧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곧 그분의 생명을 받아 위 본문의 뼈들처럼 마침내 ‘살아나는’ 것을 말하지요. 그것이 다른 말로는 ‘거듭남’(regeneration)이며, 이 상태가 바로 천국을 갈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은 상태인 것이지요.

 

주님은 우리가 모두 지상 생활을 마치고 천국에 갈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치고 처음부터 지옥 가기 위해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주님한테서 비롯되는데요, 즉 모든 영혼의 근원은 주님이신데, 그래서 주님은 선인이든 악인이든 끝까지 사랑하시고, 끝까지 책임을 지십니다. 부디 비록 뼈 상태로 출발은 하여도 하늘 아버지 되어 우리네 인생 끝까지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동행하시며 보살피시는 주님을 붙드시고, 인생 마칠 때 영광의 하늘나라에 무사히 들어가시는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찬송

 

3절

이 세상 작별한 성도들

하늘에 올라가 만날 때

인간의 괴롬이 끝나고

이별의 눈물이 없겠네

 

4절

광명한 하늘에 계신 주

우리도 모시고 살겠네

성도들 즐거운 노래로

영광을 주 앞에 돌리리

 

후렴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아멘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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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5(D1)-주일예배(2511, 창50,25-26), '개장(開葬) 예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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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XJYaOyLF6ic

 

 

 

시작

 

우리의 아버지요 할아버지셨던 故 권성조와 어머니요 할머니셨던 故 김정자, 두 분의 이장(移葬) 관련, 그 첫 번째 시작 예배인 개장(開葬)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오,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 시간, 두 분의 자손들이 이렇게 모여 모실 곳을 새롭게 천묘(遷墓)코자 먼저 하늘의 하나님께 예를 갖추고자 하오니 이 예배를 도우시며, 또한 받으시고, 오늘 하루 모든 일정을 순적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송

 

8장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

 

1절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 

이른 아침 우리 주를 찬송합니다

거룩 거룩 거룩 자비하신 주님 

성 삼위일체 우리 주로다

 

2절

거룩 거룩 거룩 주의 보좌 앞에 

모든 성도 면류관을 벗어 드리네

천군 천사 모두 주께 굴복하니 

영원히 위에 계신 주로다

 

 

설교

 

25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26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창50:25-26)

 

 

두 분의 생(生), 졸(卒) 및 그 열매를 짧게 말씀드리면, 고 권성조는 1923년 생, 2015년 졸, 만 91세를, 고 김정자는 1926년 생, 2005년 졸, 만 79세를 각각 향(享)하시는 동안, 슬하에 아들, 딸, 사위, 며느리 및 친, 외 모든 손주와, 손주사위, 며느리, 그리고 증손들 포함 총 26명을 남기셨습니다.

 

두 분의 평생, 고요하고 은은한, 온유하고 성실, 진실하셨던 사랑 덕분에 이렇게 그 자손 된 저희 모두 그 복을 누리며 사는 줄 믿고, 오늘 두 분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모시고자 모인 것입니다.

 

장인, 장모 되시는 두 분의 지난날 장례를 모두 집례했던 제가 이렇게 이제 이장까지 집례하면서 이장 관련해서는 성경에 무슨 예가 있나 찾아보니 그 첫 번째가 바로 오늘 본문, 창세기 그 유명한 요셉의 예였습니다.

 

다들 아시듯 요셉은 부유한 가나안 족장이었던 아브라함, 이삭, 야곱 가문의 열한 번째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라헬의 첫째 아들로, 그러나 라헬이 둘째를 낳다 죽어, 어린 시절, 아버지의 특별한 편애를 받으며 자라다가, 다른 모든 배다른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아버지 모르게 애굽으로 팔려 갔던, 그리고 그곳 왕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들어가 졸지에 노예의 삶을 살게 되었던, 그리고 외모가 준수하고 용모가 아름다워 안주인의 유혹이 거듭되던 중 결국 그걸 거절하는 바람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에 갇혀야 했던, 그리고 그곳에서 왕의 두 관원장의 꿈을 해석한 일로 나중에 애굽 왕 바로의 꿈도 해석, 그 일로 당시 초강대국이었던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 곧 시작되는 일곱 해 풍년과 이어질 일곱 해 흉년을 지혜롭게 대비, 애굽은 물론, 당시 근방 모든 나라를 살린 전천후 입지전적 인물입니다.

 

이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表象, representative)입니다. 표상이란, 역할 대행을 말합니다. 무대 위에 올라 맡은 역을 연기하는 배우들 같은 것이지요. 인류의 죄 문제, 정확히는 지옥의 광기와 그로 인한 피조 세계 전체의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친히 성육신(聖肉身, incarnation)하신 주님을 표상하는 인물입니다.

 

그 요셉이 백십 세를 살고 숨을 거두면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유언합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즉,

 

너희가 지금은 사정상 이렇게 타국살이를 하고 있으나 때가 되면 반드시 하나님이 너희를 다시 고국 고토(故土),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것이며, 그때 너희가 이곳을 나갈 때 반드시 나의 유골 또한 챙겨 그곳에 이장하도록 하라

 

고 말이지요.

 

이 가나안 땅과 시온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에게 있어 주님의 나라(The Lord’s Kingdom), 천국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가나안 땅, 가나안 땅 했던 것이며, 조금 확장하면,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 간 전쟁도 그 뿌리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가나안은 단지 영적인 의미, 표상, 상징이었지만, 유대인들은 이것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는 바람에 시작된, 그리고 지난 2천 년 동안 주인 없는 땅에 들어와 살았던 중동 유목민 족속 팔레스타인 간 비극인 것이지요.

 

어쨌든 이렇게 해서 요셉의 이장은 기억된 바 되었다가 430년 후, 모세의 출애굽 때 시행되었고, 이후 광야 생활 40년을 비롯, 여호수아 가나안 정복기 말미에 비로소 요셉의 유골을 가나안 땅 세겜에 장사함으로써 이 대략 5백 년 걸린 유언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수24:32)

 

오늘 두 분의 이장은 이런 성경적 의미는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이스라엘과 달라 어떤 특정 장소가 천국을 상징하거나 하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두 분의 이장으로 모인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두 분의 유골은 세상에 남기고 가신 유일한 흔적이기 때문이며, 이 흔적으로 우리는 두 분과 계속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부모, 즉 아버지와 어머니를 주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돌보시는 주님의 대행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사랑과 돌봄 가운데 사실은 온 인류의 영적 아버지이신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워 알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부모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그대로 주님에 대한 태도로 이해하십니다. 물론 부모들 중에는 전혀 주님의 대행자로서의 역할에 한참 역량 미달이신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에 대한 건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그저 자녀 된 도리만 다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지요. 주님을 성경 말씀으로 알지 못했던 우리의 조상들은 이를 ‘’(孝)로 표현했습니다. 부모는 그 영적 실상으로는 부모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부모님을 대할 때, 부모님의 모습에서 하늘의 하나님, 곧 주님을 볼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의 인생은 크게 형통할 것입니다.

 

그 생생한 예가 여기 계신, 장녀 선자와 큰아들 내외이신 용진, 혜경 부부입니다. 여기 장녀 선자께서는 출가 전, 두 분 제과점과 가게로 바쁘시던 시절, 동생들을 하나에서 열까지 다 건사, 집안일 일체를 돌보셨으며, 여기 형님, 형수님은 두 어른 살아생전 참으로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효성으로 어머님 땐 어머님을, 아버님 땐 아버님을, 그 모든 병수발과 대소변을, 그것도 집에서 직접 시중드셨고, 그걸 또 여기 있는 세 자녀 소현, 도윤, 그리고 막내 상윤이 생생하게 곁에서 보면서 자랐는데요, 그러니 그 복이 어디 가겠습니까? 다른 자녀들과 그 자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어머님 김정자의 모습으로, 아버님 권성조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서 그 모든 섬김을 받으셨으며, 그래서 약속하신 하늘의 복을 그 자손 천 대까지 베푸시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주시며 약속하시기를,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6) 하셨는데요, 어떤 일을 할 때, 잔머리 굴리지 않고, 그저 그렇게 하는 것이 십계명을 비롯, 성경 말씀에 맞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옳고 부끄럽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정직하고 의롭기 때문에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참고로, ‘천 대’란 ‘very much’를 말하며,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할 땐 ‘forever’라는 뜻입니다.

 

오늘 이 이장 예배를 통해 오직 주님과의 결합, 그 연결 고리를 확인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애굽에서 죽으나 나중에 반드시 가나안 땅에 묻혀 끝까지 주님과 연결되어 있으려고 몸부림을 쳤던 요셉처럼 말입니다. 아멘

 

 

찬송

 

3절

거룩 거룩 거룩 주의 빛난 영광 

모든 죄인 눈 어두워 볼 수 없도다

거룩하신 이가 주님밖에 없네 

온전히 전능하신 주로다

 

4절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 

천지 만물 모두 주를 찬송합니다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 

성 삼위일체 우리 주로다

 

 

광고

 

 

마침 기도

 

오, 주님,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신 말씀대로 우리도 주님과 늘 연결되어 있게 하옵소서. 그리고 이후 개장과 화장 및 납골에 이르기까지 애쓰시는 업체분들에게 빛을 비춰주시고, 순적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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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23, AC.156-159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Verse 23.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use she was taken out of man [vir].

 

※ 23절 속뜻

 

천적 인간은 겉 사람과 속 사람의 차이, 그리고 그 상호관계를 분명히 압니다. 천적 인간의 겉 사람과 속 사람의 관계는 남편과 아내의 하나 됨, 곧 결혼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156.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은 겉 사람의 본성을 말하며, 여기서 (bone)는 이 본성이 생기가 거의 없음을, ‘(flesh)은 생기 있는 본성을 의미합니다. 또한 남자는 속 사람을 의미하며, 이어지는 구절에 보면 이 속 사람은 겉 사람과 결합하기 때문에, 앞서 여자(woman)라고 했던 본성을 여기서는 아내(wife)라고 합니다. ‘이제(Now)는 이 시점에서 이렇게 되었음을 말하는데요, 이때 상태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 signify the own of the external man; “bone,” this own not so much vivified, and “flesh,” the own that is vivified. Man, moreover, 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 from his being so coupled with the external man as is stated in the subsequent verse, the own which was before called “woman” is here denominated “wife.” “Now” signifies that it was thus effected at this time because the state was changed.

 

※ 우리말 개역개정에는 이 ‘이제’에 대한 번역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157.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이 그 안에 인터널(the internal, 속에 해당하는 것, 內的인 것)이 있는 겉 사람의 본성을 의미하는 한, 그래서 고대에는 자신들의 본성(their own [proprii])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게 한 가족(one house)이든, 가계(one family), 기타 어떤 종류의 관계(any degree of relationship)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 불렸습니다. 그래서 라반도 야곱을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Inasmuch as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 signified the own of the external man in which was the internal, therefore in ancient times all those were called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 who could be called their own [proprii], and were of one house, or of one family, or in any degree of relationship. Thus Laban said of Jacob,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창29:14) Surely thou art my bone and my flesh. (Gen. 29:14)

 

그리고 아비멜렉 또한 자기 어머니의 혈육들(his mother’s brethren)과 외가 사람들(the family of the house of his mother’s father)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And Abimelech said of his mother’s brethren, and of the family of the house of his mother’s father,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삿9:2) Remember that I am your bone and your flesh. (Judges 9:2)

 

이스라엘 지파들(The tribes of Israel)도 다윗에게 자신들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The tribes of Israel also said of themselves to David,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삼하5:1) Behold, we are thy bone and thy flesh. (2 Sam. 5:1)

 

 

158. 사람(man, 아담)은 속 사람, 즉 같은 말이지만,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사야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man signifies the internal man, or what is the same, one who is intelligent and wise, is plain from Isaiah:

 

내가 본즉 한 사람도 없으며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에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 (사41:28) I behold, and there is no man [vir], even among them, and there is no counselor, (Isa. 41:28)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이 없다는 뜻이지요. 예레미야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meaning none wise and intelligent. Also in Jeremiah: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렘5:1) Run ye to and fro through the streets of Jerusalem, and see if ye can find a man, if there be any executing judgment, seeking the truth. (Jer. 5:1)

 

정의를 행하는 자(One who executes judgment)는 지혜로운 사람을, ‘진리를 구하는 자(one who seeks the truth)는 총명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One who executes judgment” means a wise person; and “one who seeks the truth,” an intelligent one.

 

 

159. 그러나 천적 인간의 상태(the state of the celestial man)를 이해하지 못하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지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천적 인간 안에서 속 사람은 겉 사람과 구별되되, 실제로는 너무도 구별되어 속 사람, 겉 사람에게 속한 것은 각각 무엇이며,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해 주님에 의해 어떻게 통치되는지를 천적 인간은 지각합니다. 그러나 이들 천적 인간의 후손들의 상태(the state of the posterity of this celestial man)는 자신들의 본성, 곧 자신들의 겉 사람에게 속한 본성을 징그럽게 원한 결과, 너무도 변질, 더 이상은 겉 사람과 속 사람을 구별할 수 없게 되었고, 오히려 속 사람이라는 거하고 겉 사람이라는 거하고 같은 거 아냐? 할 지경이 되었는데요, 이런 일은 사람이 자신의 본성으로 기울어질 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But it is not easy to perceive how the case is with these things unless the state of the celestial man is understood. In the celestial man the internal man is distinct from the external, indeed so distinct that the celestial man perceives what belongs to the internal man, and what to the external, and how the external man is governed through the internal by the Lord. But the state of the posterity of this celestial man, in consequence of desiring their own, which belongs to the external man, was so changed that they no longer perceived the internal man to be distinct from the external, but imagined the internal to be one with the external, for such a perception takes place when man inclines to his 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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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처음 스베덴보리를 알게 된 것은 젊은 시절 직장에 다닐 때였는데 건강이 좋지 않아 의욕이 많이 떨어져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가족 중에 한 분이 ‘천국과 지옥’ 책을 읽어보라고 권해서 읽게 됐는데, 새 교회의 진리가 매우 합리적인 진리임을 알았습니다...’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설교 중에서)
 
여기 이런 경우, 즉 이 ‘천국과 지옥’ 책을 읽고, ‘새 교회의 진리가 매우 합리적인 진리임을 알았습니다’ 하는 경우는, 적어도 제 경험에 의하면 매우 희귀한 경우입니다.
 
그나마 읽어보겠다는 사람도 거의 없지만, 있어도 천 명 중 한 명꼴일까요? 거의 99.9%가 읽어도 도무지 무슨 뜻인지를 모르겠다거나, 읽으면서 자기가 아는 교리와 달라 속에서 불이 난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괜히 속에서 화가 난다거나 하기 때문입니다. 참 이상하지요? 천국 이야기를 하는데 왜 화가 날까요? 주님 식사 준비를 하면서 동생 마리아 때문에 힘들어 하던 마르다가 생각납니다. 하나 더 있다면, 이 책을 그저 새로운 지식 습득으로만 읽으시는 경우입니다. 위 여러 사례는 참 안타까운 경우들인데요, 만일 돌이키지 않으실 경우, 이런 분들의 사후, 어떤 운명이 이 분들을 기다리고 있는지를 저는 이 책을 읽어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 경우, 지난 일지를 보니, 5년 전인 2018년 10월에 저는 이 책을 처음 접했습니다. 저는 당시만 해도 ‘스베덴보리’라는 사람이 누군지도 몰랐고, 충주봉쇄수도원 수도사 공부를 하면서 특히 성 프란체스코, 성 분도 요셉 라브르,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 등 수많은 수도사들과, 이영환 목사의 40일 금식 훈련, 서사라 목사의 천국과 지옥 간증 및 시흥영성수련원 공용복 선생의 핵심진리, 정원 목사의 저서들 등에 몰두하던 때였지요. 즉 천국과 지옥에 관한 수많은 견해와 체험, 간증 등에 둘러싸여 있던 상황이었는데요, 그래서 새로운 책을 접하면서 이건 또  무슨 새로운 견해의 등장인가 싶었지요.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저는 난생처음 접하는 내용에, 처음엔 당혹해 하며 큰 충격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아, 맞다. 바로 이거다!’ 싶었습니다. 뭔가 뿌옇던 시야가 바람이 불더니 갑자기 확 맑아지는 그런 느낌, 백두산 천지가 구름과 안개로 안 보이다가 바람에 걷히더니 갑자기 확 드러날 때의 그 숨 막힐 듯한 위용과 장관처럼 말이지요!
 
저는 특히 다음 세 가지 점에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첫째, 이 책을 비롯, 특히 스베덴보리의 수년간의 역작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를 통해서 천국을 비롯, 그동안 석연찮던 거의 모든 신학적 주제들과 영적 이슈들이 거의 다 설명된다는 것이었는데요, 적어도 당시 제 수준과 역량에서는 말이지요,설명이 된다’는 게 제게는 중요했습니다. 전자공학을 전공하기 전, 특별히 물리학 등 순수 과학에 끌렸던 제게 이런 접근은 의미가 있었는데, 예를 들어, 과거 천동설이 지동설로 갈아타던 과정처럼 기존 이론으로는 설명이 안 되던 어떤 현상이나 증거를 새로운 이론으로는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비록 당시엔 당혹스럽고 힘들더라도 후자를 새로운 정설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학문적으로도 옳다 저는 여기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설명하실 수 없는 게 있다는 것이 저는 평소 좀  납득이 잘 안 되었었습니다.
 
둘째,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기록을 통해 오직 주님만 높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입장과 견해가 사사로운 것이었다면, 분명 어딘가에 그 흔적이 교묘히 숨어있을 텐데, 추호도, 그리고 지난 5년간 저는 이 책 말고도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번역을 해오고 있는데요, 그 10,837개나 되는 글 어디에서도 스베덴보리는 그 흔한 이단 사설들에서 볼 수 있는 더러운 사사로움 없이 오직 주님만 높이며, 또 주님이 허락하신 것만 밝히고 있는 걸 보면서,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새로운 계시이며, 참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저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흔히들 인터넷 검색을 통한 다른 사람들의 글만 읽고는 스베덴보리는 이단이래 하면서 물러나시는데요, 그보다는 본인이 직접 스베덴보리를 읽고 판단하시기를 권합니다. 본인이 참으로 반듯하고 정직하다면 분명 그 영이 꿈틀하며 어떤 유의미한 반응을 할 것입니다. 주님의 빛, 천국 빛에 건강하게 반응하는 것이지요.
 
끝으로, 저는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히신 이 새로운 계시를 통해 참으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나아가 어떤 신(神, The Divine)이신지를 점점 또렷이 알아가고 있으며, 그래서 참된 평화 가운데 거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참으로 천국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천국에 주목할수록,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와 함께, 참으로 '말씀'(The Word)이란 무엇이며, 구원이란 무엇인가?  타종교 등 교회 밖의 사람들은? 타교단, 교리가 다른 사람들은? 등, 사람의 사후 전개될 양상에 대한 지식이 생기자 그동안 잘 몰라서 붙들고 추구했던 것들로부터 물러나 보다 더 자유할 수 있게 되었는데요, 이 고백은 다른 말로 하면, 어느 순간부터 저는 천국 관점, 곧 천사들의 관점에서 지상의 일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후 바울서신에 뿌리를 둔 현 기독교, 그리고 개신교의 많은 근본적인 오류에서 물러나되 마치 지상에서 발사된 로켓이 죽을힘을 다해 중력을 거슬러 올라 궤도 위에 안착하듯 그렇게 물러날 수 있었고, 지금은 남은 생애를 오직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들(Writings)을 번역, 전파하는 일에 매진하게 되었습니다.
 
※ 아래는 혹시 도움되실까 제가 읽었던 번역인 김은경 역을 공유합니다. 이 말고도 여러 번역이 있으니 참고하시고요, 그리고 가능하면 영역본으로도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라틴 원본으로 읽으실 수 있으면 가장 좋겠지요. 저는 라틴을 몰라 못 읽고 있지만 말입니다. 제가 읽고 있는 영역본도 아래 공유합니다.
 

 

천국과 지옥

천국과 지옥, 그 중간의 영인들의 세계의 구조, 현상, 그곳 사람들의 상태와 생활을 보여준다. 사람이 사후 겪게되는 세계를 스베덴보리의 천사와의 대화, 관찰과 기록을 통해 알게되며 영의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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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ven_and_hell, 581.pdf
1.77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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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10-29(D1)-주일예배(2510, 눅13,31-35), '오늘과 내일, 그리고 제삼일'.pdf
0.44MB
2023-10-29(D1)-주일예배.축도.pdf
0.23MB

https://youtu.be/x_MKK8PXysU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31곧 그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32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3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34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5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눅13:31-35)

 

 

※ 다음은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과 새 교회 이야기입니다.

 

새 교회(new church)는 특히 시험이 많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요, 목회를 하면서 느끼는 것도 그렇습니다. 제가 처음 스베덴보리를 알게 된 것은 젊은 시절 직장에 다닐 때였는데 건강이 좋지 않아 의욕이 많이 떨어져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가족 중에 한 분이 ‘천국과 지옥’ 책을 읽어보라고 권해서 읽게 됐는데, 새 교회의 진리가 매우 합리적인 진리임을 알았습니다.

 

※ 여기서 잠깐, 이런 경우, 즉 이 ‘천국과 지옥’ 책을 읽고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경우는 매우 희귀한 경우입니다. 그나마 읽어보겠다는 사람도 거의 없지만, 있어도 천 명 중 한 명꼴일까요? 거의 99.99%가 읽어도 도무지 무슨 뜻인지를 모르겠다 하거나 읽으면서 자기가 아는 교리와 달라 속에서 불이 난다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괜히 속에서 화가 난다 하거나 하기 때문입니다. 제 경우, 지난 일지를 보니, 5년 전인 2018년 10월에 이 책을 처음 접했습니다. 저는 당시만 해도 ‘새 교회’라는 게 뭔지도 몰랐고, 수도원 수도사 공부, 한밭제일교회 이영환 목사의 40일 금식 훈련, 서사라 목사의 천국과 지옥 간증 및 공영복 선생의 핵심진리 등에 사로잡혀 있던 때였지요. 즉 천국과 지옥에 관한 수많은 견해와 입장, 간증, 풀이 등에 둘러싸여 있던 상황이었는데요, 그래서 책을 접하면서도 무슨 또 하나의 입장이 등장함인가 싶었지요.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저는 난생처음 접하는 내용이었지만 그럼에도 저는 아, 맞다. 바로 이것이다! 싶었습니다. 뭔가 뿌옇던 시야가 바람에 걷혀 갑자기 확 밝아지는 그런 느낌, 백두산 천지가 구름과 안개로 안 보이다가 바람에 걷혀 갑자기 확 드러날 때의 그 숨이 막힐 듯한 위용과 장관같이 말이지요! 저는 특히 다음 세 가지 점에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첫째, 이 책의 풀이를 가지고는 그동안 석연찮던 거의 모든 신학적 궁금점들이 거의 다, 적어도 제 수준에서는 말이지요, 설명이 된다는 것이었고, 둘째,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기록을 통해 오직 주님만 높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입장과 견해가 사사로운 것이었다면, 분명 어딘가에 그 흔적이 교묘히 숨어있을 텐데도 추호도, 그리고 지난 5년간 저는 이 책 말고도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 번역을 해오고 있는데요, 그 10,837개나 되는 글 어디에도 스베덴보리는 오직 주님만 높이며, 허락하신 것만 밝히고 있는 걸 볼 때, 이는 참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았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끝으로 셋째는, 이 새로운 계시를 통해 저는 참으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나아가 어떤 신(神, The Divine)이신지 어렴풋이라도 알게 되었으며, 참으로 천국을 사모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 바울 서신에 뿌리를 둔 현 기독교, 그리고 개신교의 입장에서 물러나되 마치 지상에서 발사된 로켓이 죽을힘을 다해 중력을 거슬러 올라 궤도 위에 안착하듯 그렇게 물러날 수 있었고, 지금은 남은 생애를 오직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들을 번역, 전파하는 일에 매진하게 된 것입니다. 이상 잠깐 제 얘기였습니다. 그럼, 계속해서 이순철 목사님 얘깁니다.

 

처음 세례를 받고 한동안은 아내와 함께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참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힘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말씀에 따라 생활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시험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생각지도 않은 목회를 하게 되고, 교인들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저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앙인들은 대개 말씀을 읽는 중에, 또는 목회자의 설교를 통해 진리의 영감을 얻습니다. 그리고 각자 삶으로 돌아가 진리를 실천하게 되는데, 그러나 막상 실천하려고 하면 뜻대로 잘 되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첫째는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잘 모르고요, 그래서 고쳐야 할 점이 뭔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고쳐야 할 점이 뭔지는 아는데, 의지가 약해서 고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삶의 우선순위를 주님의 나라에 둬야 하는데, 주님의 나라보다 세상에 두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은 결국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부족해서 생기는 일입니다. 영적인 시험을 통해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즉 시험을 통해 믿음과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고요, 믿음과 사랑은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시험이 없으면 이런 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새 교회인들에게 특히 시험이 많은 것은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도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거룩하게 되셨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인간은 주님의 능력에 의지해 거듭나지만, 주님은 스스로의 힘으로 거룩하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은 주님이 거룩하게 되시는 과정과 인간이 거듭나는 과정을 대비해 볼 수 있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31절의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31곧 그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어떤 바리새인이 주님께 헤롯이 죽이려고 하니 이곳을 떠나시라고 말합니다. 헤롯은 주님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 분봉왕으로, 세례 요한을 죽였던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예수님 탄생 시 헤롯은 이 헤롯 안티파스의 아버지인 헤롯 대왕입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 주님을 죽이려 한다는 것입니다. 헤롯이 주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당시 유대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즉 유대교회의 거짓 교리가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는 영적으로 교회를 뜻하고, 왕은 교회의 교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거짓은 왜 그렇게 진리를 미워할까요? 그 이유에 대해 요한복음 3장 20절은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이렇게 말합니다. 악하고 거짓된 자들은 진리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밝은 빛 아래 자신의 악과 거짓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헤롯은 주님만 죽이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안에도 진리를 위협하는 헤롯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오는 불순한 애정과 거짓된 생각들입니다. 진리 때문에 욕망을 눌러야 할 때, 또는 참된 진리 안에 들어왔는데도 질병이나 시험이 그치지 않을 때, 그때 진리가 불편하고 의심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서 새 교회 말고도 진실한 교회는 얼마든지 있다 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때가 헤롯과 바리새인이 우리 안에 있는 진리를 죽이려고 하는 때입니다. 바리새인의 그와 같은 말을 들으시고,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32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주님은 헤롯을 여우라고 부르십니다. 그렇게 부르시는 이유는 헤롯으로 표상되는 거짓 진리나 지옥의 거짓 영들의 교활함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짐승은 우리 안에 있는 애정을 나타내는데, 특히 여우나 뱀은 교활한 애정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지옥의 거짓 영들은 다양한 욕망과 거짓말로 신앙인들을 끊임없이 공격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진리를 의심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진리를 버리지만 않는다면, 주님은 우리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거짓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오늘과 내일과 모레, 삼일 동안 주님께서 하실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오늘과 내일과 모레, 삼일은 한편으로는 주님의 인간성이 거룩해지는 과정을 나타내며, 또 한편으로는 신앙인들의 내면에서 진리가 완전해지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이 세 단계는 어떤 것입니까? 먼저 거듭남의 첫 번째 단계는 귀신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귀신(demon)이란 진리를 마음대로 추론해 거짓으로 만들게 하는 영을 말합니다.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을 때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자신에게 어떤 악과 거짓이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온전한 거울 역할을 할 진실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주님이 병자들을 고치시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자주 말씀하신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늘 하실 일은 귀신을 쫓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거듭남의 두 번째 단계는 뭘까요? 주님에 의해 병을 고치는 것입니다. 병을 고친다는 것은 진리에 따라 악을 끊을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믿음의 상태에서 사랑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병에 걸려 있을 때는 몸이 마치 족쇄에 매여 있는 것처럼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악을 끊으려고 해도 끊어지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려고 해도 마음대로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오셔서 병을 고쳐주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삼 일째, 즉 거듭남의 세 번째 단계는 비로소 완전하게 거듭나는 것입니다. 인간이 거듭나는 것처럼, 주님도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받은 육신을 통해 들어오는 지옥의 악과 거짓을 단계적으로 극복하셔야 했고, 사흘째 되는 날 지옥을 완전히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3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3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주님께서는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한다 말씀하십니다. 신앙인들이 초심을 잃지 않고 진리를 붙잡고 있는 한, 언젠가는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을 고쳐주십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주님의 손길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일까요? 주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고, 주님의 나라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도 도우실 수가 없습니다. 그럴 경우, 그들은 어떻게 될까요? 귀신에게 사로잡혀 꼼짝 못 하게 되고, 병은 더욱 깊어집니다. 그런 사람은 진리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명예나 재물을 얻기 위해, 사람들로부터 추앙받기 위해 진리를 탐구하고, 나중에는 자신의 총명을 앞세워 진리를 마음대로 왜곡, 파괴하는 사람이 됩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씀에서는 그들을 바벨론이라고 불렀습니다. 교회 안의 바벨론에 의해 진리가 변질, 파괴되는 모습을 말씀에는 유대교회가 선지자를 죽이고, 주님을 죽이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선지자는 진리를 뜻하고, 가장 높은 의미로는 주님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 하신 것은 교회 밖의 이방인들은 진리를 파괴할 수 없고, 오직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즉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 진리를 파괴하고 죽인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자기 욕심 때문에 거룩한 진리를 파괴하는 교회 안의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주님께서는 암탉이 새끼를 품듯 교회의 진리로 믿는 자들을 지켜주셨습니다. 아담교회(태고교회)를 통해 지켜주셨고요, 아담교회가 무너졌을 때는 노아교회(고대교회)를 통해 지켜주셨습니다. 노아교회가 무너졌을 때는 히브리교회와 유대교회(모세교회, 표상교회)를 통해 인류를 지옥으로부터 지켜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그때마다 주님의 보호를 내팽개쳤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각으로 진리를 더럽히고 파괴했습니다. 그것이 선지자를 죽이고 돌로 치는 것입니다. 돌은 본래 진리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인간의 생각으로 조작, 손을 댄 거짓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35절에서,

 

35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집은 사람의 마음을 뜻하기도 하고 교회를 뜻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속에 가장 작은 교회가 지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황폐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진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집이 황폐하다는 것은 교회, 또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 안에 진리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스스로 진리를 파괴해 버렸으며, 또한 진리이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이름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에게서 나오는 진리와 선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안에 계신 여호와가 겉으로 드러나신 모습이며, 그러므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 말씀에서 ‘이름’은 그 사람, 또는 사물의 퀄리티(quality), 그 사람, 또는 사물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말합니다.

 

그러면 찬송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한 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나 교회는 진정한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한 분 하나님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입으로는 삼위일체를 주장하면서 속으로는 세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과 교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교회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진정한 진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인이란 진리를 통해 주님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기를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마음 가운데로 오셔서 구원을 위해 섭리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교회는 작게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고, 크게는 그들이 모인 외부의 교회에도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교회들은 말씀의 진리를 끊임없이 파괴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을 죽이려는 헤롯과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하는 바리새인은 진리를 파괴하는 거짓 진리이며, 동시에 지옥의 거짓 영들입니다. 지옥의 영들은 스스로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교회 안의 믿는 자들을 이용해 오랫동안 그렇게 말씀의 진리를 파괴하고 교회를 무너뜨렸습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유대인들이 선지자를 죽이고 돌로 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의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온갖 술수를 꾸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과 그들을 사주하는 지옥의 거짓 영들을 향해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하십니다. 선지자, 즉 진리를 죽인 자들은 진리를 모르는 교회 밖의 사람이 아니라 교회 안의 믿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신앙인들의 마음속에 있는 바벨론, 즉 자기를 높이는 마음을 경계하라 하십니다. 그것이 교회를 무너뜨리는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진리 앞에서 낮아지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 언젠가는 그들의 마음속에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에게 오셔서, 오늘과 내일의 일을 하시고, 삼 일째 되는 날 그들과 함께 완전해지기를 바라십니다. 얼마나 시험이 많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진리가 완전해지는 만큼 시련이 줄어들고,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도 십자가의 마지막 순간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시며 절망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시험이라는 것을 믿으시고, 시험을 꼭 이겨내시기를 바랍니다. 진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견뎌내시는 모든 성도와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분에게 주님의 크신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오늘로 누가복음 13장을 마치고, 11월 첫 주인 다음 주부터는 14장을 들어갑니다.

 

 

16너를 보는 이가 주목하여 너를 자세히 살펴 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놀라게 하며 17세계를 황무하게 하며 성읍을 파괴하며 그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집으로 놓아 보내지 아니하던 자가 아니냐 하리로다 (사14:16-17)

 

아멘

 

원본

2021-01-2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0-2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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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1979) 사태, 올해로 44주기를 맞이하며’ (2023/10/27)

 

44년 전인 지난 1979년 10월 27일 오늘, 지금의 대전 전민동 사시는 형님(일오, 53생)과 수원 한일합섬 옆 송죽동에서 자취를 하고 있던, 당시 수원 유신고 2학년이었던 나는 아침 기상 전, 이른 아침 이 작은 동네에 웬 갑자기 난데없는 호외 소리에, 형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의 간밤 갑작스런 서거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아니, 육영수 여사, 8.15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문세광 총탄에 역시 갑자기 돌아가신 지가 이제 겨우 5년 전인데, 왜 또? 하는 어리둥절과 함께 그 어린 고등학생 마음에도 나라의 앞날이 어찌 되는가 불안하고 어지러웠다. 그때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는 나라의 큰 국장으로 청와대를 출발, 동작동 국립현충원까지 이어지는 큰 도로변을 가득 채운 국민은 모두 크게 울었고, 그때 영상을 보면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지금도 울게 된다...

 

이후 일어난 군부 쿠데타와 이듬해 광주 5.18 사태, 그리고 그해 가을, 어머니의 교통사고로 인한 갑작스런 사별, 그리고 아주대 전자공학 입학, 남성합창단 Glee의 추억, 서울침례교회 대학부에서 엄마를 만나 교제, 22사 군 입대, 전역 후 복학하면서 학교 앞 아파트에서 네비게이토식 홈 생활 시작, 계속되는 대학가 데모로 연일 최루탄으로 자욱했던 시절, 아버님 별세, 삼성 입사, 결혼(1989), 이듬해 우석, 3년 후 준석 ^^ 등...

 

참 예사롭지 않았던 이 10월 27일의 아침, 당시를 생각하니 무슨 기억의 실타래처럼 좌악 풀려나오는구나. 어찌 보면 참 격동의 세월이었다 싶다.

 

부디 너희 세대는 이런 비극 없이 평화롭고 복된 시간들 보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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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22, AC.151-155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Verse 22.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 22절 속뜻

 

주님은 사람의, 생명 없는 본성을 일으키셔서 대신 주님의 생명으로 생생하게 업그레이드된 새로운 본성으로 만드십니다.

 

 

151. 만드시고(to build)는 쓰러져있던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갈빗대(the rib)는 생명 없는 상태에 있는(not vivified) 사람의 본성을, ‘여자(a woman)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갖게 된(vivified) 사람의 본성을,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he brought her to the man)는 그의 본성인 것(what is his own)을 그에게 승인하였음(was granted him)을 의미합니다. 이 교회의 후손은 그들의 선조처럼 천적 인간 되는 걸 원치 않고, 대신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살아가고자(to be under their own self-guidance) 하였고,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본성 쪽으로 기울어졌는데, 결국은 그런 본성이 그들에게 승인, 곧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되었습니다(it was granted to them). 하지만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갖게 된 본성 역시 여전히 허락되었고, 그래서 이것을 여자(a woman), 나중에 아내(a wife)라고 하였습니다. By to “build” is signified to raise up what has fallen; by the “rib,” man’s own not vivified; by a “woman,” man’s own vivified by the Lord; by “he brought her to the man,” that what is his own was granted him. The posterity of this church did not wish, like their parents, to be a celestial man, but to be under their own self-guidance; and, thus inclining to their own, it was granted to them, but still an own vivified by the Lord, and therefore called a “woman,” and afterwards a “wife.”  

 

※ 지금까지 ‘본성’으로 번역해오고 있는 ‘own’을 NCE 역에서는 ‘a sense of self’, ‘selfhood’, ‘a sense of autonomy’, 혹은 ‘identity’ 등으로도 옮기고 있다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52.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것(woman was not formed out of the rib of a man)과 지금까지 사람들이 알아차렸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깊은 아르카나(deeper arcana)가 여기 들어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봐도 금방 눈치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the woman)가 사람의 본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도 알 수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속아 넘어간 사람이 다름 아닌 여자였다(it was the woman who was deceived)는 사실입니다. 사람을 속일 수 있는 건 사람의 본성밖에는, 즉 자기 사랑, 세상 사랑(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말고는 없기 때문입니다. It requires but little attention in anyone to discern that woman was not formed out of the rib of a man, and that deeper arcana are here implied than any person has heretofore been aware of. And that by the “woman” is signified man’s own may be known from the fact that it was the woman who was deceived; for nothing ever deceives man but his own, or what is the same,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3:1-6)

 

 

153. 갈빗대를 가리켜 여자를 만드시고(to be built into a woman)라고는 하시지만, 전에 거듭남을 다룰 때처럼, ‘창조하다’(created), ‘짓다’(formed), ‘만들다’(made)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만드는 것’(to build)은 쓰러져 있는 걸 일으켜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이 뜻으로 쓰이는 곳마다, ‘만드는 것’(to build)은 주로 악에 관한, ‘일으켜 세우는 것’(to raise up)은 거짓에 관한, 그리고 새롭게 하는 것’(to renew)는 둘 다에 관한 서술일 때입니다. 이사야입니다. The rib is said to be “built into a woman,” but it is not said that the woman was “created,” or “formed,” or “made,” as before when treating of regeneration. The reason of this is that to “build” is to raise up that which has fallen; and in this sense it is used in the Word, where to “build” is predicated of evils; to “raise up,” of falsities; and to “renew,” of both; as in Isaiah: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옛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사61:4) They shall build the wastes of eternity, they shall set up again the ancient desolations, and they shall renew the cities of the waste, the desolation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Isa. 61:4)

 

이 구절과 다른 구절에서 황폐함(Wastes)는 악을, ‘무너짐(desolations)은 거짓을 의미하며, ‘쌓는 것(to build)은 전자, ‘다시 일으키는 것(to set up again)은 후자에 적용됩니다. 선지서 이곳저곳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 이런 구분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예를 들면, 예레미야입니다. Wastes” in this and other passages signify evils; “desolations,” falsities; to “build” is applied to the former, to “set up again” to the latter, and this distinction is carefully observed in other places by the prophets, as where it is said in Jeremiah: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렘31:4) Yet still will I build thee, and thou shall be built, O virgin of Israel. (Jer. 31:4)

 

 

154. 사람의 본성이 아니면서, 그리고 사람의 본성에서 나온 것도 아니면서(not man’s own, and from man’s own) 악하고 거짓된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악 그 자체이며, 그 결과, 사람이라는 것은 악과 거짓 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인데요, 이것이 사실임을 저는 영들의 세계에서 계속 보고 있어서 분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거기서는 사람의 본성에 속한 것들이 눈에 보이게 제시되는데(presented to view in the world of spirits), 그때 그것들은 너무나 기형적이어서 어떻게 형용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추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본성의 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말입니다(yet with a difference according to the nature of the own). 그때 자신의 본성에 속한 것들을 자기 눈으로 보는 사람은 그 실제 모습을 보고는 공포에 휩싸일 정도로 충격을 받아 마치 악마로부터 도망가듯 자신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 하지요. 하지만 참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소생한 사람의 본성에 속한 것들(truly the things of man’s own that have been vivified by the Lord)은 반대로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주님께 속한 천적 특성들(the celestial of the Lord)이 적용될 수 있는, 그런 삶을 따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실제로 체어리티를 받거나 체어리티로 소생한 사람들(those who have been endowed with charity, or vivified by it)은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소년, 소녀처럼 보입니다. 또 벌거벗은 유아처럼 이노센스 가운데 있는 사람들(those who are in innocence, like naked infants)은 가슴과 머리 위 왕관을 두른 꽃 화환으로 다양하게 장식되어 있는데요, 다이아몬드 같은 오로라 가운데서 즐겁게 지내며(living and sporting in a diamond-like aura), 가장 내적인 데서 오는 행복에 관한 퍼셉션(a perception of happiness from the very inmost)을 갖고 살아가지요. Nothing evil and false is ever possible which is not man’s own, and from man’s own, for the own of man is evil itself, and consequently man is nothing but evil and falsity. This has been evident to me from the fact that when the things of man’s own are presented to view in the world of spirits, they appear so deformed that it is impossible to depict anything more ugly, yet with a difference according to the nature of the own, so that he to whom the things of the own are visibly exhibited is struck with horror, and desires to flee from himself as from a devil. But truly the things of man’s own that have been vivified by the Lord appear beautiful and lovely, with variety according to the life to which the celestial of the Lord can be applied; and indeed those who have been endowed with charity, or vivified by it, appear like boys and girls with most beautiful countenances; and those who are in innocence, like naked infants, variously adorned with garlands of flowers encircling their bosoms, and diadems upon their heads, living and sporting in a diamond-like aura, and having a perception of happiness from the very inmost.

 

 

155.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a rib was built into a woman)라는 이 말에는 지금까지 사람들이 글자로 된 겉뜻만 가지고 발견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깊이 감추어져 있는데요, 그 이유는 주님의 말씀은 그 가장 깊은 뜻에 있어 주님 자신과 주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며, 이 사실에서 말씀의 모든 생명이 나오는,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보고 있는 이 본문에서 그 가장 핵심은 바로 천국의 결혼(the heavenly marriage)입니다. 천국 결혼은 그 본성에 있어 주님에 의해 소생될 때, 주님의 신부요 아내(the bride and wife)라 일컬음을 받는 그런 것입니다. 이렇게 소생된 인간 본성은 모든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 관한 퍼셉션을 가지며, 그 결과, 표현 불가한 행복과 함께 모든 지혜와 지성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신부요 아내라고 하는, 이 소생된 본성은 어떻게 간결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천사들한테서 관찰할 수 있는 사실, 곧 자신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걸 지각하고 있다는 것인데요, 천사들한테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비록 그들일지라도 이런 주제를 벗어나 한눈파는 순간, 그들 역시 순전히 자신들 힘으로 살아간다는 생각밖에는 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럴지라도 그들에게는 어떤 것이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서 살짝만 벗어나도 그 변화를 지각하는, 그런 본성에 관한 어펙션(a general affection of such a nature)이 일반적으로 있는데요, 그 결과, 그들은 자신들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퍼셉션 가운데 누구나 있는 동안,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의 즐거움이 그들 가운데에는 존재합니다. 아래 예레미야에서 말하는 바 역시 바로 이런 본성을 의미합니다. The words “a rib was built into a woman” have more things inmostly concealed in them than it is possible for anyone ever to discover from the letter; for the Word of the Lord is such that its inmost contents regard the Lord himself and his kingdom, and from this comes all the life of the Word. And so in the passage before us, it is the heavenly marriage that is regarded in its inmost contents. The heavenly marriage is of such a nature that it exists in the own, which, when vivified by the Lord, is called the “bride and wife” of the Lord. Man’s own thus vivified has a perception of all the good of love and truth of faith, and consequently possesses all wisdom and intelligence conjoined with inexpressible happiness. But the nature of this vivified own, which is called the “bride and wife” of the Lord, cannot be concisely explained. Suffice it therefore to observe that the angels perceive that they live from the Lord, although when not reflecting on the subject they know no other than that they live from themselves; but there is a general affection of such a nature that at the least departure from the good of love and truth of faith they perceive a change, and consequently they are in the enjoyment of their peace and happiness, which is inexpressible, while they are in their general perception that they live from the Lord. It is this own also that is meant in Jeremiah, where it is said: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 (렘31:22) Jehovah hath created a new thing in the earth, a woman shall compass a man. (Jer. 31:22)

 

이 구절에서도 여자(a woman)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소생된 본성을 의미하며, 이것을 둘러싸리라(to compass)라는 표현으로 서술한 것은, 이 본성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 마치 갈비뼈가 심장을 둘러싸 보호하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It is the heavenly marriage that is signified in this passage also, where by a “woman” is meant the own vivified by the Lord, of which woman the expression “to compass” is predicated, because this own is such that it encompasses, as a rib made flesh encompasses the 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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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21, AC.147-150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Verse 21. And Jehovah God caused a deep sleep to fall upon the man, and he slept; and he took one of his ribs, and closed up the flesh in the place thereof.

 

※ 21절 속뜻

 

사람은 모든 걸 제힘으로 하는 줄 압니다. 이런 사람의 본성이 ‘갈빗대’이며, 사람이 이런 상태에 있는 것이 ‘깊이 잠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고, 사람은 오직 주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임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입니다.

 

 

147. 가슴에 속한 뼈인 갈빗대(a rib)는 사람의 고유 본성(man’s own)을 의미하는데요, 그 안에 생기라고는 거의 없지만, 실제로는 그가 무척 소중히 여기는 그런 본성(an own which is dear to him)입니다. ‘살로 대신 채우시고(flesh in the place of the rib)는 그 안에 생기가 있는 본성(an own in which there is vitality), ‘깊이 잠들게(a deep sleep)는 그의 현 상태를 말하는데요, 사람이 이 상태가 되면, 그는 자신의 본성이 자신으로부터 말미암는 줄(he might seem to himself to have what is his own) 알게 되지요. 이 상태는 잠든 상태(sleep)와 유사한데요, 이 상태에 있는 동안은 사람은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말미암는 게 아닌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가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이것이 거짓임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는 정신을 차리며, 잠에서 깬 상태가 되지요. By a “rib,” which is a bone of the chest, is meant man’s own, in which there is but little vitality, and indeed an own which is dear to him; by “flesh in the place of the rib” is meant an own in which there is vitality; by a “deep sleep” is meant the state into which he was let so that he might seem to himself to have what is his own, which state resembles sleep, because while in it he knows not but that he lives, thinks, speaks, and acts, from himself. But when he begins to know that this is false, he is then roused as it were out of sleep, and becomes awake.

 

 

148. 사람의 고유 본성(man’s own), 실제로 그가 무척 소중히 여기는 본성을 가슴에 속한 뼈인 갈빗대(a rib)라 하는 이유는, 태고인들 사이에서 가슴은 체어리티(charity)를 상징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심장과 폐가 들어있기 때문이지요. (bones)라는 건 아주 꺼림칙한 걸 의미했는데요, 그 안에 생기라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flesh)은 생기있는 걸 가리켰지요. 이들 상징들은(The ground of these significations)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알려진 가장 깊은 아르카나(the deepest arcana) 중 일부인데요, 이 아르카나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에 속한 것으로서,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The reason why what is man’s own (and indeed an own which is dear to him) is called a “rib,” which is a bone of the chest, is that among the most ancient people the chest signified charity, because it contains both the heart and the lungs; and bones signified the viler things, because they possess a minimum of vitality; while flesh denoted such as had vitality. The ground of these significations is one of the deepest arcana known to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149. 말씀에서도 사람의 고유 본성은 (bones)로 상징되며, 실제로 주님에 의해 살아난 본성(an own vivified by the Lord)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입니다. In the Word also, man’s own is signified by “bones,” and indeed an own vivified by the Lord, as in Isaiah: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사58:11) Jehovah shall satisfy thy soul in droughts, and make thy bones alert, and thou shalt be like a watered garden. (Isa. 58:11)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 (사66:14) Then shall ye see, and your heart shall rejoice, and your bones shall sprout as the blade. (Isa. 66:14)

 

시편입니다. In David: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 (시35:10) All my bones shall say, Jehovah, who is like unto thee? (Ps. 35:10)

 

이는 에스겔에서 더욱 분명한데요, 거기 뼈들에 대해 살을 입히고(receiving flesh),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having spirit put into them) 하시는 부분입니다. This is still more evident from Ezekiel, where he speaks of bones receiving flesh, and having spirit put into them:

 

1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4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겔37:1, 4-6) The hand of Jehovah set me in the midst of the valley, and it was full of bones; and he said to me, prophesy upon these bones, and say unto them, O ye dry bones, hear the word of Jehovah; thus saith the Lord Jehovih to these bones, Behold, I bring breath [spiritus] into you, and ye shall live, and I will lay sinews upon you, and will make flesh come upon you, and cover you with skin, and I will put breath in you, and ye shall live, and ye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Ezek. 37:1, 4–6)

 

[2] 사람의 본성(The own of man)은 천국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뭔가 완전히 뼈처럼(bony) 보이는, 못 움직이며 매우 추한,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그 자체로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주님에 의해 생기를 얻으면, 그때는 살처럼(like flesh) 보입니다. 사람의 본성이라는 것은 그저 죽어있는 어떤 것(a mere dead thing)에 불과합니다. 본인에게는 어떤, 실제로는 모든 것으로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그의 안에 있는(lives in him)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모두 주님의 생명에서 나온 것(from the Lord’s life)이며, 만일 이 생명이 사라지면 그는 쓰러져 죽은 상태가 되는데 마치 돌처럼 되고 맙니다. 사람은 생명의 기관일 뿐(only an organ of life)이며, 이런 게 기관이고, 이런 게 생명의 애정(the life’s affection)이기 때문입니다. 주님만이 자신의 본성이라는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The Lord alone has what is his own). 이것으로(by this own) 그는 사람을 구속하셨으며(redeemed man), 이것으로 그는 사람을 구원하십니다(saves him). 주님의 본성은 생명이시며(The Lord’s own is life), 주님의 본성으로부터 사람의 본성, 이것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인데, 이 본성이 살아나게 됩니다(is made alive). 주님의 본성은 또 누가복음의 다음 주님 말씀으로도 상징됩니다. The own of man, when viewed from heaven, appears like a something that is wholly bony, inanimate, and very ugly, consequently as being in itself dead, but when vivified by the Lord it looks like flesh. For man’s own is a mere dead thing, although to him it appears as something, indeed as everything. Whatever lives in him is from the Lord’s life, and if this were withdrawn he would fall down as dead as a stone; for man is only an organ of life, and such as is the organ, such is the life’s affection. The Lord alone has what is his own; by this own he redeemed man, and by this own he saves him. The Lord’s own is life, and from his own, man’s own, which in itself is dead, is made alive. The Lord’s own is also signified by the Lord’s words in Luke: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눅24:39) A spirit hath not flesh and bones as ye see me have. (Luke 24:39)

 

이는 또 유월절 어린 양의 뼈를 꺾지 말라(not a bone of the paschal lamb being broken)는 의미이기도 합니다(12:46). It was also meant by not a bone of the paschal lamb being broken (Exod. 12:46).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 (출12:46)

 

 

150. 사람이 자신의 본성 가운데 있거나(when in his own), 가정하기를 나는 내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야(he supposes that he lives from himself) 하는 상태를 깊은 잠(deep sleep)에 비유하고 있으며, 실제로 고대인들이 이렇게 했습니다. 말씀에서는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they have poured out upon them the spirit of deep sleep, 사29:10), 그리고 그들이 잠을 잔다(they sleep a sleep, 렘51:57)고 말합니다. The state of man when in his own, or when he supposes that he lives from himself, is compared to “deep sleep,” and indeed by the ancients was called deep sleep; and in the Word it is said of such that they have “poured out upon them the spirit of deep sleep” (Isa. 29:10), and that they sleep a sleep (Jer. 51:57).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사29:10)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 고관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도백들과 태수들과 용사들을 취하게 하리니 그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 (렘51:57)

 

사람의 본성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이며, 아무도 자신에게서는 어떤 생명도 얻을 수 없다(no one has any life from himself)는 사실을 영들의 세계인 중간 영계에서 그동안 매우 분명하게 보아왔는데요, 자신의 본성밖에는 사랑할 줄 모르는, 그리고 자기는 오직 자신의 힘으로만 살아간다고 고집스럽고 완강하게 주장하던 악한 영들은 그러나 실제 겪어보고 나서야(by sensible experience) 그게 아니라고, 자신들은 자기 힘으로 사는 게 아니었다고, 인정하긴 싫지만 할 수 없이 억지로 고백하는(forced to confess) 것이었습니다. 수년간 저에게는 사람의 본성의 경우는 어떻게 되는지를(how the case is with what is man’s own)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알 수 있도록 허용되었으며, 또 다음과 같은 사실들, 곧 나 스스로는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 모든 생각의 실마리가 외부에서 제 안으로 흘러들어온다는 것, 그리고 종종 그것이 어떻게, 그리고 언제 흘러들어오는지를 저는 알(perceive) 수 있었다는 것 등의 사실들에 대해 수년간 저는 분명히 지각하며(to perceive) 지내왔습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사는 거야 하는 사람은 그러므로 거짓됨 가운데 있으며, 그걸 믿기까지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악과 거짓에게 내맡기는(appropriates) 셈이 되는데요, 이 악과 거짓은 그가 만일 이 경우의 실상을 알았더라면(in accordance with the real truth of the case)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그런 것입니다. That man’s own is in itself dead, and that no one has any life from himself, has been shown so clearly in the world of spirits, that evil spirits who love nothing but their own, and obstinately insist that they live from themselves, were convinced by sensible experience, and were forced to confess that they do not live from themselves. For a number of years I have been permitted in an especial manner to know how the case is with what is man’s own, and it has been granted to me to perceive clearly that I could think nothing from myself, but that every idea of thought flows in, and sometimes I could perceive how and whence it flowed in. The man who supposes that he lives from himself is therefore in what is false, and by believing that he lives from himself appropriates to himself everything evil and false, which he would never do if his belief were in accordance with the real truth of the c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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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9-20, AC.142-146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Verses 19, 20 And Jehovah God formed out of the ground every beast of the field, and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brought it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it; and whatsoever the man called every living soul, that was the name thereof. And the man gave names to every beast, and to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but 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 19, 20절 속뜻

 

주님은 천적 인간의 안에 천적, 영적 정서들, 곧 천적 인간의 의지와 지성에 관한 것들을 조성하시고, 그로 하여금 그것들이 어떤 건지 느낄 수 있게 하셨으며, 그는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그것들을 느꼈고, 그것들을 잘 알았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천적 인간의 본성을 천국의 것으로 업그레이드시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천적 인간은 여전히 자신의 것, 자기 본성에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142. 짐승, 가축(beasts)은 천적 애정(celestial affections), ‘공중의 새(fowls of the heavens)는 영적 애정(spiritual affections)을 의미하는데요, 다시 말씀드리면, ‘짐승(beasts)은 의지에 속한 것(things of the will), ‘(fowls)는 이해에 속한 것(things of the understanding)을 의미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To 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는 그로 하여금 그것들의 퀄러티를 알게 하심(to enable him to know their quality)이며, 아담이 그들에게 이름을 주니라(giving them names)는 그가 그것을 알고 있었음(he knew it)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에게 주신 선에 속한 애정의 퀄러티(the quality of the affections of good), 그리고 진리에 관한 지식의 퀄러티(the quality of the knowledges of truth)를 그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 그는 여전히 자신의 고유 본성으로 기울어졌는데요(he inclined to his own), 이를 전과 같이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처럼 같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By “beasts” are signified celestial affections, and by “fowls of the heavens,” spiritual affections; that is to say, by “beasts” are signified things of the will, and by “fowls” things of the understanding. To “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 is to enable him to know their quality, and his “giving them names” signifies that he knew it. But notwithstanding that he knew the quality of the affections of good and of the knowledges of truth that were given him by the Lord, still he inclined to his own, which is expressed in the same terms as before—that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143. 고대에는 가축(beasts)짐승(animals)이 사람한테 있는 애정과 그와 같은 걸(affections and like things in man) 의미했다는 사실이 오늘날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 사람들은 천적 사고(a celestial idea)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영계(the world of spirits)에서는 동물을 가지고 그런 거, 곧 애정 같은 걸 표현하며, 실제로도 동물의 생긴 모양대로(by such animals as they are like) 해당 애정을 표현했기 때문에, 그 당시 그들은 그런 식으로 말했고, 그때 그들은 그밖에 무슨 다른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에서도 짐승들이 언급되는 곳마다 일반적이든 구체적이든 무슨 다른 걸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언의 말씀 전체가 이런 걸로 가득하며, 그렇기 때문에 각 짐승이 특별히 뭘 의미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그 말씀에 담긴 속뜻(what the Word contains in the internal sense)이 무엇인지를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앞서도 보았듯, 짐승들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악한, 즉 해로운 짐승이 있는가 하면, 선한, 즉 무해한 짐승이 있지요. 선한 짐승들은 선한 애정들, 예를 들면, (sheep), 어린 양(lambs), 비둘기 같은 것들이지요. 여기서 다루는 인간이 천적 인간, 혹은 천적, 영적 인간(the celestial, or the celestial spiritual man)이기 때문에, 이들 선한 짐승들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짐승(beasts)이 의미하는 바가 일반적으로 애정(affections)이라는 것을 위, 곧 말씀 몇몇 구절들에서 확인할 수 있었으므로(AC.45, 46), 여기서 굳이 다시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That by “beasts” and “animals” were anciently signified affections and like things in man, may appear strange at the present day; but as the men of those times were in a celestial idea, and as such things are represented in the world of spirits by animals, and in fact by such animals as they are like, therefore when they spoke in that way they meant nothing else. Nor is anything else meant in the Word in those places where beasts are mentioned either generally or specifically. The whole prophetic Word is full of such things, and therefore one who does not know what each beast specifically signifies, cannot possibly understand what the Word contains in the internal sense. But, as before observed, beasts are of two kinds— evil or noxious beasts, and good or harmless ones—and by the good beasts are signified good affections, as for instance by sheep, lambs, and doves; and as it is the celestial, or the celestial spiritual man, who is treated of, such are here meant. That “beasts” in general signify affections may be seen above, confirmed by some passages in the Word (n. 45–46), so that there is no need of further confirmation.

 

 

144. 이름으로 부르기(to call by name)는 그 퀄리티를 안다(to know the quality)는 의미인데요, 이는 고대인들은 이름(the name)을 가지고 어떤 것의 에센스(the essence of a thing)를 이해했기 때문이며, 무엇을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를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그 퀄리티에 대해 아는 걸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녀에게 이름을 지어 줄 때, 어떤 의미를 담아 주었기(according to the things which were signified) 때문인데요, 모든 이름은 그 안에 무언가 고유한(something peculiar in it), 그 이름으로부터나 그 이름에 의해서나, 자녀의 어떤 기원과 고유 특성(the origin and the nature of their children)을 알 수 있는, 그런 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원과 특성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하고 있는, 지금 이 아르카나 주석 작업 중반, 야곱의 열두 아들을 다루는 부분에서 아시게 됩니다. 이름들에는 그렇게 이름하는 것의 근원과 퀄리티(the source and quality of the things named)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이름으로 부르기(calling by name)를 그밖에 무슨 다른 걸로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 사람들의 언어관습(the customary mode of speaking among them)이었습니다만, 그러나 이걸 이해하지 못하시는 분은 말씀에 나오는 이름들을 그런 의미들을 부여하며 읽어야 한다는 사실에 굉장히 놀라실 수도 있겠습니다. That to “call by name” signifies to know the quality, is because the ancients by the “name” understood the essence of a thing, and by “seeing and calling by name” they understood to know the quality. The reason was that they gave names to their sons and daughters according to the things which were signified, for every name had something peculiar in it, from which, and by which, they might know the origin and the nature of their children, as will be seen in a future part of this work, when, of the Lord’s Divine mercy, we come to treat of the twelve sons of Jacob. As therefore the names implied the source and quality of the things named, nothing else was understood by “calling by name.” This was the customary mode of speaking among them, but one who does not understand this may wonder that such things should be signified.

 

 

145. 말씀에서도 이름(name)은 어떤 것의 에센스(the essence of a thing),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는 그 퀄리티에 관해 아는 걸(to know the quality) 의미합니다. 이사야입니다. In the Word also by “name” is signified the essence of a thing, and by “seeing and calling by name” is signified to know the quality. As in Isaiah:

 

3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4내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자 이스라엘 곧 너를 위하여 네 이름을 불러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사45:3-4) I will give thee the treasures of darkness, and hidden riches of secret places, that thou mayest know that I, Jehovah, who call thee by thy name, am the God of Israel. For Jacob my servant’s sake, and Israel my chosen, I have even called thee by thy name, I have surnamed thee, and thou hast not known me. (Isa. 45:3–4)

 

이 구절에서 ‘네 이름을 불러’(to call by name)와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to surname)는 그 퀄리티를 예견한다(to foreknow the quality)는 의미입니다. 계속해서 In this passage, to “call by name” and to “surname” signifies to foreknow the quality. Again: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사62:2) Thou shalt be called by a new name, which the mouth of Jehovah shall declare, (Isa. 62:2)

 

앞뒤 구절에 나오는 것처럼, 또 다른 캐릭터가 될 것(to become of another character)을 의미하지요. 계속해서 signifying to become of another character, as appears from the preceding and subsequent verses. Again: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43:1) Fear not, O Israel, for I have redeemed thee, I have called thee by thy name; thou art mine, (Isa. 43:1)

 

그가 그들의 퀄리티를 알고 계셨음을 가리키시면서, 계속해서 같은 이사야 말씀입니다. denoting that he knew their quality. Again in the same prophet: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사40:26) Lift up your eyes on high, and behold who hath created these things, that bringeth out their army by number. He will call them all by name, (Isa. 40:26)

 

그는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셨음을 의미합니다. 계시록입니다. meaning that he knew them all. In the Revelation:

 

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3:4-5) Thou hast a few names even in Sardis who have not defiled their garments: he that overcometh, the same shall be clothed in white raiment, and I will not blot out his name out of the book of life, but I will confess his name before my Father, and before his angels. (Rev. 3:4–5)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계13:8) Whose names are not written in the lamb’s book of life. (Rev. 13:8)

 

이들 구절에서 이름(names)은 결코 말 그대로 이름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퀄리티를 의미하는데요, 심지어 천국에서는 그 누구도 이름이 아닌, 그의 퀄리티로만 알려지지요. By “names” in these passages are by no means meant names, but qualities; nor is the name of anyone ever known in heaven, but his quality.

 

 

146.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통해, 그 상징하고 있는 속뜻(the connection of what is signified)을 보실 수 있는데요, 18절에 보면,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 하시고는, 지금은 짐승(beasts)(birds)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는 전에 다룬 적이 있던 것이지요. 그리고는 즉시 또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일련의 흐름의 속뜻은 이렇습니다. 곧 그가 비록 자신의 퀄리티, 곧 선에 관한 애정과 진리에 관한 지식(the affections of good, and knowledges of truth)에 대해 자신의 퀄리티가 어느 정도인지를, 또는 어떤 상태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어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본성을 향해 기울어졌다는 것(still he inclined to his own)입니다. 자신의 고유 본성을 간절히 원하는(to desire what is their own) 그런 사람들은 주님에게 속한 것들(the things of the Lord)에 대한 멸시를 시작하기 때문인데요, 주님에게 속한 것이 아무리 그에게 분명하게 표현되고 보여도 말입니다. From what has been stated, the connection of what is signified may be seen. In verse 18 it is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 and presently “beasts” and “birds” are spoken of, which nevertheless had been treated of before, and immediately it is repeated that “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which denotes that although he was permitted to know his quality as to the affections of good, and knowledges of truth, still he inclined to his own; for those who are such as to desire what is their own, begin to despise the things of the Lord, however plainly they may be represented and shown to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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