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우리가 선을 행할 때 우리와 결합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 모두, 이웃들을 선대하며, 사랑으로 공손, 겸손히 선을 행해야 하겠습니다.
천국에서 주님을 사랑함이란 주님을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의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웃을 사랑함이란 이웃 안에 깃든 주님의 신성을 사랑하는 것이며, 더 확장하면, 지으신 모든 피조물에 깃든 주님의 신성을 예의 바르게 대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모든 것 안에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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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동네 한 바퀴 산책 직전, 영감(靈感) 있어 그 자리에서 바로 윗글을 어느 카톡 방에서 나눈 후, 산책 마치고 우리 아파트 라인 현관으로 들어오는데...
웬 살짝 허름한 잠바 차림의 다소 작은 키, 오동통한 마스크 차림 아가씨가 저 앞에서 급히 제게 다가오며 묻습니다.
“여기가 택배인가요?”
말도 좀 어눌한데다 질문 자체가 좀 이상하여 그 연유를 살피니 자기는 네팔에서 왔는데 지금 서울로 피아노를 보내야 해서 택배 보내는 데를 찾아왔다는군요!
연유마저 참 뚱딴지같아 할 수 없이 좀 더 자세히 보니... 보낸다는 피아노는 다름 아닌 길쭉하니 얇은 키보드였고, 그걸 박스 포장, 택배로 보낼 생각이었는데, 택시 기사가 뭘 잘못 알고 우리 아파트 바로 우리 동에 내려 주고 간 모양입니다. 아이고...
혹시 마침 아파트 마당에 와있는 택배 차량이 있나 보니 한 대도 없고... 그렇다고 아가씨가 제시하는 ‘로젠택배 전민 지점’이라는 데로 가시라 할 수도 없고... 근처 우체국 택배 관련해서는 송강 시장 곁 간이우편취급국이 유일한데, 아가씨가 이 키보드를 들고 거기까지 걸어가기엔...
나는 어떤 예정에 없던 돌발상황 같은 것에 참 약한 사람이라 살짝 좀 망설여지는 순간, 아까 올린 윗글이 생각나면서 ‘아, 혹시 어쩌면 지금 주님이 이 네팔 아가씨 모습으로 내 앞에 계심인지도 모르겠다...’ 하는 생각에!
“아가씨, 여기 잠깐 있어요. 내, 얼른 가서 지하 주차장 차 꺼내 올 테니까... 내가 데려다 줄께요. 내가 지금 차 키가 없어 먼저 키 가지러 가야 해 ^^”
걸어가기엔 한참이지만 차로는 금방이어서 금방 도착, 주정차 금지 구역이라 양쪽 깜빡이 켜고 얼른 내려 주고 나는 출발해야 하는데, 이 아가씨...
잠깐만 기다리실 수 있으셔요? 하는 눈치가 뭔가 고마움의 선물을 사러 가려는... 그래서 한사코 아이고, 나는 괜찮아, 아가씨, 돈 아껴야지... 하는데도 아니라고 하면서 키보드는 둔 채 얼른 내려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한참 만에 나타나서는 페레로 로체 초콜렛을 선물하며 하는 말,
“아저씨, 정말 고맙습니다. 아저씨가 마치 아버지 같으셔서고요, 마침 오늘이 저희 네팔 명절이에요, 거기다 이틀 후 저는 캐나다에 가요. 겸사겸사 고맙고 감사해서 드리니 받아주세요.” 하는 취지의 말을...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래요, 아가씨, 잘 먹을께요. 그리고 캐나다 잘 가고...”
“네, 감사합니다.”
“안녕”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 무슨 일인가... 어안이 벙벙...
‘아, 이웃을 사랑함이 이런 거구나! 저 아가씨 안에 계신 주님을 정성을 다해 모신다는 게 이런 거구나...’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Verse 18,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
※ 18절 속뜻
주님의 인도 아래 살되 무슨 로봇이나 갓난아이처럼 아주 작은 것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그런 유약한 상태가 아닌, 건강한 자아, 성장한 자아를 가지고 자발적으로 주님의 인도 아래 천사들처럼 사는 것, 이를 위해 주님은 천적 인간에게 자치를 허락하시며, 그의 자치를 돕도록 도우십니다. 이것을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신 것입니다.
138. ‘혼자’(alone)는 사람이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만족하는 대신, 자기 자신(self)과 세상의 인도를 받으며 살기를 간절히 원했음을,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은 사람의 고유 본성(man’s own)을 의미하는데, 이는 뒤에서 ‘여자가 된 갈빗대’(a rib built into a woman)라고 하는 것입니다.By “alone” is signified that he was not content to be led by the Lord, but desired to be led by self and the world; by a “help as with him” is signified man’s own, which is subsequently called a “rib built into a woman.”
139. 고대에는 천적 인간들로서 주님의 인도하심 아래(under the Lord’s guidance as celestial men) ‘홀로 산다’(to dwell alone)는 말을 듣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악이나 악령에 감염되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이것을 또한 유대교회에서는 가나안 족속들을 몰아낸 후, 이스라엘이 혼자 사는 걸로 표상하고 있지요. 그래서 말씀에서 주님의 교회를 종종 ‘홀로, 혼자’(alone)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에서처럼 말입니다.In ancient times those were said to “dwell alone” who were under the Lord’s guidance as celestial men, because such were no longer infested by evils, or evil spirits. This was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also by their dwelling alone when they had driven out the nations. On this account it is sometimes said of the Lord’s church, in the Word, that she is “alone,” as in Jeremiah: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는 일어나 고요하고도 평안히 사는 백성 곧 성문이나 문빗장이 없이 홀로 사는 국민을 치라 (렘49:31) Arise, get you up to a quiet nation that dwelleth confidently, saith the Lord, which hath neither gates nor bar; they dwell alone. (Jer. 49:31)
모세오경에서는In the prophecy of Moses: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신33:28) Israel hath dwelt confidently alone. (Deut. 33:28)
그리고 계속해서 발람의 예언을 보면 더 분명하게 드러나지요.And still more clearly in the prophecy of Balaam: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민23:9) Lo, the people dwelleth alone, and shall not be reckoned among the nations, (Num. 23:9)
여기 ‘여러 민족’(nations)은 악을 의미합니다. 이 태고교회 후손은 홀로 살기, 즉 천적 인간이 되거나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 하거나 하지 않고, 대신 유대교회와 마찬가지로 여러 민족 중 하나 되기를, 즉 열방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지내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이 이것, 곧 악을 원했기 때문에,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하신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원한다는 얘기는 이미 악 가운데 있다는 얘기이기 때문인데, 그렇게 그들은 원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where “nations” signify evils.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disposed to dwell alone, that is, to be a celestial man, or to be led by the Lord as a celestial man, but, like the Jewish church, desired to be among the nations. And because they desired this, it is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for he who desires is already in evil, and it is granted him.
※ 그러므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는 그 속뜻으로 다시 표현하면, ‘태고교회의 후손은 천적 인간으로서 오직 주님의 인도하심만으로 살기를 원치 않았다’가 되겠습니다.
140.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사람의 고유 본성(man’s own)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것의 본질(the nature of this own) 및 그 이어지는 내용 둘 다를 보면 분명합니다. 여기서 다루는 교회인(the man of the church)은 성품이 괜찮았으므로 어떤 또 하나의 본성(an own)이 그에게 주어졌는데, 이 새로운 본성은 마치 처음부터 그 자신의 것처럼 보이는(it appeared as it were his own) 그런 본성이었고, 그래서 ‘돕는 배필’이라고 한 것입니다.That by “a help as with him” is signified man’s own, is evident both from the nature of this own, and from what follows. As however the man of the church who is here treated of was well disposed, an own was granted him, but of such a kind that it appeared as it were his own, and therefore it is said “a help as with him.”
141. 인간의 고유 본성(man’s own)에 관해 세 종류의 인간, 곧 육적, 세속적 인간(the corporeal and worldly man)과 영적 인간(the spiritual man), 그리고 천적 인간(the celestial man)을 가지고 설명할 때, 무수히 많은 걸 말할 수 있습니다. 먼저 육적, 세속적 인간의 경우, 그의 본성은 그가 가진 전부로서, 그는 자기 자신밖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그는 만일 자기가 이걸 잃으면 자기는 소멸하고 말 것이라고 여길 정도입니다. 두 번째인 영적 인간도 비슷한데요, 비록 그가 주님은 만유의 생명이시며, 사람들에게 지혜와 이해할 수 있는 능력(wisdom and understanding)을 주시고, 그 결과, 생각하는 능력과 그걸 행할 수 있는 힘(the power to think and to act)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그의 이런 지식은 아직은 그의 입술 상의 고백일 뿐 마음으로 이어지는 믿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주님은 만유의 생명이시며, 생각하고 행동할 힘 주시는 분이심을 알아차리는데요(discerns), 그는 이것이 사실임을 실제로 지각하기(perceives) 때문입니다. 그는 결코 자신의 본성을 원치 않는데요, 분명 그에게도 주님이 주신 어떤 본성, 곧 선하고 진실한 것을 아는 모든 퍼셉션(all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 및 모든 행복과 결합한 본성이 있는데도 말입니다. 천사들이 바로 이런 본성 가운데 있으며, 그래서 그들은 동시에 가장 내적인 평화와 평온(the highest peace and tranquility) 가운데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본성 안에 주님의 것들(hings which are the Lord’s)이 있기 때문인데, 주님은 그들의 본성을 다스리시거나, 혹은 그들의 본성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이 본성은 가장 천적인 본성 그 자체(the veriest celestial itself)이지만, 그러나 육적 인간의 것은 지옥적입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나중에 더 말씀드리겠습니다.Innumerable things might be said about man’s own in describing its nature with the corporeal and worldly man, with the spiritual man, and with the celestial man. With the corporeal and worldly man, his own is his all, he knows of nothing else than his own, and imagines, as before said, that if he were to lose this own he would perish. With the spiritual man also his own has a similar appearance, for although he knows that the Lord is the life of all, and gives wisdom and understanding, and consequently the power to think and to act, yet this knowledge is rather the profession of his lips than the belief of his heart. But the celestial man discerns that the Lord is the life of all and gives the power to think and to act, for he perceives that it is really so. He never desires his own, nevertheless an own is given him by the Lord, which is conjoined with all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 and with all happiness. The angels are in such an own, and are at the same time in the highest peace and tranquility, for in their own are those things which are the Lord’s, who governs their own, or them by means of their own. This own is the veriest celestial itself, whereas that of the corporeal man is infernal. But concerning this own more hereafter.
22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23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4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5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그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28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29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눅13:22-30)
종교를 가진 세상 모든 민족은 십계명과 비슷한 내용의 계율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므로 종교 때문에 그 계율대로 사는 사람은 구원을 받고, 그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떨어진다. 종교 때문에 계율대로 산 사람은 사후에 천사들에 의해 가르침을 받을 때 진리를 받아들이고, 주님을 인정한다. (삶의 교리 65)
※ 오늘 설교 원본에서는 새 교회, 곧 스베덴보리를 통하신 주님의 계시를 따르는 사람들의 교회인 새 교회가 한국 땅에 세워진 역사를 돌아보고 계시는데요, 필요할 것 같아 그대로 인용합니다.
※ 아, 참고로, 스베덴보리를 통하신 주님의 계시를 따르는 교회를 새 교회라 하는 이유는, 다시 오실, 정확히는 말씀의 속뜻으로 오시는 주님의 새로운 교회를 새 교회(The New Church), 새 예루살렘 교회라 하기 때문이며, 이 교회는 태고교회, 고대교회, 유대교회 및 기독교회를 거쳐 인류 다섯 번째 마지막 교회가 될 것입니다.
전남 광주 빛고을 새 교회 분들의 얘기에 따르면, 정인보 목사님이 처음 새 교회 진리로 예배를 드린 것은 1958년 광주 YMCA 강당에서부터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2년이 지난 1960년에 지금의 학동에 교회를 세우게 됐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빛고을 새 교회입니다. 그러면 서울 새 교회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정인보 목사님에게서 새 교회 신학을 배우신 양규대 목사님이 1986년 1월, 자택에서 처음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서울 새 교회의 시작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지난 2019년 1월 12일, 서울 녹번동에 서울 새 교회 건물을 짓고 헌당 예배를 드렸습니다. 생각해보면 헌당 예배를 드린 2019년은 광주에서 처음 새 교회가 시작된 해로부터 61년째 되는 해이고요, 양규대 목사님이 서울 새 교회를 개척한 해로부터는 33년째 되는 해입니다, 숫자가 의미하는 바가 뭔가 특별해 보입니다. 새 교회에서 6이라는 수는 내적 싸움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든 사람이든 거듭나기 위해서는 자기와의 싸움이 필요한데요, 사람마다 타고난 자아가 있는데 그것이 처음에는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한국 새 교회의 지난 60년은 교회의 사람들이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기를 내려놓는 긴 싸움의 기간이었다 생각됩니다.
※ 위 양규대 목사님은 지난 2015년 서울 새 교회 담임을 사임, 2016년 12월, 그동안 청주 새 교회 담임으로 섬기시던 이순철 목사님을 청빙,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펼쳐질 날들은 어떤 시간일까요? 단언하건대 사랑 없는 신앙이 사랑의 신앙, 체어리티(charity, 仁愛)의 신앙으로 바뀌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진리를 처음 받아들일 때는 그냥 지식으로만 받아들이다가 진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점점 진리에 대한 사랑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양날의 검과 같아서 사용하기에 따라 사람을 살리는 검이 되기도 하고, 사람을 죽이는 검이 되기도 하지요. 만약 우리의 진리가 지식적인 진리, 사랑 없는 진리에 계속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사람을 죽이는 진리가 될 것이지만, 그러나 진리 안에 사랑이 생기면, 그 진리는 우리 자신을 살리고 이웃을 살리는 그런 진리가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진리만 있고 선이 없는 자, 또는 신앙은 있는데 체어리티의 삶은 없는 자의 사후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2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2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말씀에서 성이나 예루살렘은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각 성과 마을, 예루살렘으로 다니시며 가르치셨다는 것은 주님은 각 사람이 이해하는 교리, 또는 말씀의 속뜻을 통해 진리를 가르치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속뜻이나 교리를 모르면 말씀 안에 숨어있는 진리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어느 분에게 스베덴보리 신학 서적 한 권을 드리면서 읽어보시기를 권했습니다만 그러나 그분은 대강 훑어보고는 다 아는 내용이라며, 읽어볼 생각이 없어 보이시더군요. 그러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게 중요하지, 진리, 진리 하는 게 뭐 그리 중요하냐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진리를 모르면 이웃을 올바로 사랑하기가 어렵습니다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요, 진리가 없는 사랑은 오히려 상대를 불편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진리가 내재된 사랑입니다. 그것은 마치 꽃향기가 문득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과 같은 은은한 사랑입니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강렬한 향기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서로 지혜롭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는 말씀의 속뜻인 교리를 통해서만 터득할 수 있는 것이며, 그래서 주님께서는 각 성과 예루살렘을 다니시며 진리를 가르쳐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23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주님이 여행을 하시는 동안, 어떤 사람이 주님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영어 성경의 번역은 “주여 구원받을 자가 거의 없지 않습니까”입니다.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와 “구원받을 자가 거의 없지 않습니까”는 뉘앙스가 조금 다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가끔 자기 자신이나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보며 느끼는 것이, 사람은 참으로 바뀌기가 어렵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세상 사람 중에 구원받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하는 비관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바로 그런 순간이 “주여 구원받을 자가 거의 없지 않습니까”라고 주님께 묻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그런 생각을 들으시고, 24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4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주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떤 걸까요? 아시는 것처럼, 우리 각 사람에게는 적어도 둘 이상의 천사와 지옥의 영들이 함께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시는 것은 그중 지옥의 영은 멀리하고, 천사들의 인도를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사들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그 능력으로 매일 같이 순간순간 거듭남의 여정을 걸어가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할 때 도저히 바뀔 것 같지 않던 우리의 성품이나 말투, 의지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천사들의 진리와 선, 곧 주님이 천사들을 통해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려면 자아의 욕망을 밀어내야 하는데, 그것은 아주 힘든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아의 욕망은 마음에서 가깝고, 천사들의 진리와 선은 너무 높은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사들의 손을 잡는 것, 곧 천사들의 인도를 따르는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반대로 지옥의 영이 내미는 손을 잡는 것은 그냥 내 평소 욕심대로 하면 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 길은 쉽고도 넓은 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나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당신과 함께 깨어 기도하기를 원했으나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깊이 잠든 제자들에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말씀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안타까운 심정이 고스란히 담긴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동안 새 교회를 거쳐 갔던 수많은 교우들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들이 다시 돌아와 이 교회를 가득 메우기를 바랍니다. 25절에서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5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누구나 마음속에 있는 천국의 문, 또는 지옥의 문을 자유롭게 열거나 닫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후에는 그럴 수 없습니다. 세상에 살 때 굳게 닫힌 문은 사후 영계에 가면 다시는 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집주인이 문을 닫은 후,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는데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주님이 열어 주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살 때 그들이 스스로 천국의 문을 닫아 버린, 그것도 영원히 닫아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에서 닫힌 문은 사후에는 영원히 열리지 않습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열린 문은 사후에도 영원히 열려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자 문을 두드리던 자들이 다음과 같은 하소연을 합니다.
26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말씀에서 “주 앞에서”라고 할 때 “주”는 말씀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말씀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또 먹고 마신다 했는데, 먹는 것은 이웃에게 선을 가르치는 것이고요, 마시는 건 진리를 가르치는 걸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 앞에서 먹고 마셨다는 건 말씀의 지식을 가지고 이웃에게 선과 진리를 가르쳤다는 뜻입니다. 또 주가 길거리에서 우리를 가르치셨다 했는데, 이 말은 그들이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웠다는 뜻입니다. 길거리(street)는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사후 영계에서 천국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 중에는 세상 살 때 주님을 믿었던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당연히 천국에 들어간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행악하는 자라 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세상에 살 때 입으로만 주님을 믿는다 하고, 실제로는 주님을 믿지도, 사랑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부부끼리 말로는 서로 사랑한다 하면서 남편은 아내의 말을, 아내는 남편의 말을 전혀 귀담아듣지 않는다면 그들이 진정으로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이일까요? 주님과 우리하고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로만 주님을 믿는다 하고, 실제로는 주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주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27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그래서 주님은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천국에 데려다 놔도 그곳에서 살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도박꾼, 마약을 하는 사람, 난봉꾼, 사기꾼, 강도 이런 사람들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순진한 사람들과 천국에서 함께 살라 하면 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천국과 지옥을 구별해 놓으신 것은 지옥에 속한 사람들을 벌주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세상 살 때의 애정대로 영원히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입으로만 주님을 믿는다고 하고 행하지는 않는 사람들이 기꺼이 진리를 배우고 이웃에게 가르치는 것을 즐긴다면 그것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단지 세상의 명예와 재물을 사랑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나를 떠나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2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8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여기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누굴까요? 그들은 세상에 살 때, 인애, 체어리티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사후에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 하십니다. 반면, 믿음만의 구원을 주장하면서, 그러나 체어리티를 실천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천국 밖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간다 했습니다. 슬피 우는 것은 그들의 악을 뜻하고요, 이를 간다는 것은 그들의 거짓을 뜻합니다.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며 서로 다툴 때, 천국 밖에서 그 소리를 들으면 마치 이를 가는 소리처럼 들린다고 합니다. 이는 우리 몸의 가장 바깥에 있습니다. 잇몸보다도 밖에 있으니까요. 그래서 영적으로 볼 때는 가장 낮은 차원의 진리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를 간다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세상 논리로 진리를 비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서 주님을 믿었고, 그러므로 마땅히 천국에 들어간다 믿었던 사람들이 사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때, 그들은 그렇게 울며 이를 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악과 거짓으로부터 나오는 소리입니다.
주님께서 끝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9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동쪽과 서쪽, 남쪽, 북쪽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한다고 합니다. 동쪽과 서쪽, 남쪽과 북쪽은 각각 빛의 상태, 즉 진리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빛이 가장 밝기로는 동쪽과 남쪽이겠지요. 그에 비해 서쪽은 희미한 빛이 있는 곳이고요, 북쪽은 빛이 아주 없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동쪽과 남쪽, 서쪽에서 오는 사람들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나타내고, 북쪽에서 오는 사람은 교회의 진리에 대해 무지한 교회 밖의 이방인들이지만, 그러나 마음속에 체어리티가 있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가 있다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가 있다 하셨을까요? 천국을 향해 가는 길은 무슨 경주를 하듯 등수가 매겨지는 일이기 때문일까요? 그런 게 아니고요,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는 비록 교회 밖 이방인이었어도 체어리티의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들은 사후, 천사들로부터 천국의 교리를 배울 때, 무슨 거부감 없이 바로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들의 마음속에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인 체어리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는 자는 누굴까요? 이들은 교회 안에 있었던 사람들인데 다만 믿기만 하고, 체어리티의 삶을 살지는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은 나중에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겉으로만 주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고, 속으로는 전혀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던, 그래서 결국은 위선의 삶을 산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체어리티가 없는, 그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사후에 어떻게 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말씀에는 그들이 사후에 천국 문밖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간다 했습니다. 말씀의 다른 곳에서는 그들을 등의 기름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어리석은 처녀들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말로만 주님을 사랑한다 하고, 실제로는 전혀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국으로 가는 삶, 즉 체어리티의 삶이란 그렇게나 힘든 일일까요? “천국과 지옥” 528번 글은, 천국으로 가는 삶은 생각만큼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도 정직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야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때문인데, 다만 차이가 있다면 세상 사람들은 세상 재물이나 지위에 목표를 두고, 천국을 지향하는 사람은 주님과 이웃 사랑에 목표를 둘 뿐입니다. 그러므로 목표만 조금 바꾸면 주님이 원하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의 내면에서 천국문은 열리고, 지옥문은 닫힙니다. 천국으로 가는 여행은 그렇게 시작이 됩니다.
일단 거듭나는 길에 들어서면 그동안의 잘못된 행동 양식들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빠르게 바뀌지는 않습니다. 아주 천천히 바뀝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조바심을 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나는 바뀌지가 않지?, 왜 이렇게 나는 실수를 많이 하고 지혜롭지 못할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비록 느리더라도 지금 현재 천국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구원은 등수를 매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느리게 가더라도 천국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 상태에서 주님께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하고,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향해 지지를 보내야 할 것입니다.
※ 저 역시 여전히 잘 안 고쳐지는, 매일 밤 결심하지만, 다음 날이면 또 되풀이하고 마는 악습들이 있습니다. 가령 유튜브를 비롯, 너무 세상 뉴스에 귀를 쫑긋 세우는 바람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그런 모습입니다. 특히나 더 이런 거에 제 마음이 힘든 이유는, 저는 좀 어서 영감이 계발되어 영안이 열렸으면 좋겠는데, 제가 계속 이 세상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영적, 천적인 것에 관해서는 희미해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저는 하루 5 미리 움직인 거에도 감사합니다. 비록 달팽이처럼 정말 느리고 답답하게 하루 5 미리를 움직이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날마다 계속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주님이 동행하시며, 천사들을 통해 저를 거들어 주시며, 격려하시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천국이 아니라 지옥을 향할 때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느껴질 때는 주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고백하고, 겸손하게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주님의 손을 붙잡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천국을 바라보는 삶은 세상 것들을 모두 버리고, 오로지 묵상과 기도에 힘쓰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과 담쌓고 주님만 바라보고 사는 삶이 아니라 세상일과 의무를 다하고, 그렇게 해서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일에 기여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그래서 저는 저희 사모와 우리 두 아들이 오히려 더 큰 상 받을 줄 믿습니다. 세 사람의 삶 가운데는 실천과 기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천국을 지향하는 삶이며, 쓰임 받는 삶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 때, 주님께서는 수시로 세상의 기쁨을 허용하십니다. 세상 사는 동안에는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을 통해 천국을 지향하는 삶의 에너지를 얻을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지향하는 삶은 세상을 버리는 삶이 아니라 세상을 직면하는 삶이며, 그것을 통해 세상을 천국으로 바꾸는데 기여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세상에서 주님의 나라를 준비하는 삶은 생각보다 그렇게 힘든 삶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 자신의 모습이 5년 전 또는 10년 전의 모습에 비해 긍정적으로 변했다면 먼저 주님께 감사하고, 스스로를 격려, 칭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남은 한 해에 더욱 힘을 내어 분발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가 신앙에서 체어리티를 분리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7:13-14)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And Jehovah God formed out of the ground every beast of the field, and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brought it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it; and whatsoever the man called every living soul, that was the name thereof.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And the man gave names to every beast, and to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but 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And Jehovah God caused a deep sleep to fall upon the man, and he slept; and he took one of his ribs, and closed up the flesh in the place thereof.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use she was taken out of man [vir].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25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THE CONTENTS
131. 태고교회의 후예, 후손(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자신들의 고유 본성을 향해 기울어졌던(inclined to their own) 저들의 이야기를 여기서 다루고 있습니다.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inclined to their own,(주3) is here treated of.
132. 사람은 주님의 인도하심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에 더해 자기 자신과 세상, 즉 자신의 고유 본성으로도(also by himself and the world, or by his own) 인도받기를 원하는데요, 이런 이유로 여기서는 사람에게 허락된 그의 고유 본성(the own which was granted him)을 다루고 있습니다. (18절)Since man is such as not to be content to be led by the Lord, but desires to be led also by himself and the world, or by his own, therefore the own which was granted him is here treated of (verse 18).
133. 그리고 먼저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에 대한 애정과 진리에 대한 지식(the affections of good and the knowledges of truth) 아는 것이 그에게 주어졌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는 자신의 고유 본성으로 이끌립니다. (19-20절)And first it is given him to know the affections of good and the knowledges of truth with which he is endowed by the Lord; but still he inclines to his own (verses 19–20).
134. 그런 이유로 그는 자신의 고유 본성 상태(a state of his own)에 놓이게 되며, 이때 어떤 본성(an own)이 그에게 제공되는데, 본문에서는 이 본성을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the rib built into a woman)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21-23절)Wherefore he is let into a state of his own, and an own is given him, which is described by the rib built into a woman (verses 21 to 23).
135.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은 사람의 고유 본성(the man’s own)에 인접, 하나(a one)로 나타납니다. (24절) Celestial and spiritual life are adjoined to the man’s own, so that they appear as a one (verse 24).
136.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는 이노센스(innocence from the Lord)가 이 본성에 서서히 심어지고(instilled into this own), 그렇게 해서 이 본성은 계속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25절)And innocence from the Lord is instilled into this own, so that it still might not be unacceptable (verse 25).
THE INTERNAL SENSE
137. 창세기 처음 세 장은 전반적으로는 태고교회, 곧 ‘사람’(man [homo])이라고 하는, 태고교회의 첫 시기부터 끝, 곧 멸망하던 시기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본 장 전반부에서는 이 교회가 가장 융성하던 상태(its most flourishing state), 곧 천적 인간이었던 때(when it was a celestial man)를 다루고 있다면, 후반부인 여기에서는 자신들의 본성에 이끌린 사람들(those who inclined to their own)과, 그들의 후손을 다루고 있습니다.The first three chapters of Genesis treat in general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is called “man” [homo] from its first period to its last, when it perished; the preceding part of this chapter treats of its most flourishing state, when it was a celestial man; here it now treats of those who inclined to their own, and of their posterity.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Verse 17.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 17절 속뜻
주님의 신비는 오직 퍼셉션으로만 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적인 것이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126. 이 말씀은 방금 설명한 말씀과 함께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하는데요, 그것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모든 퍼셉션(every perception derived from the Lord)을 가지고 참되고 선한 것(what is true and good)에 익숙해지는 것은 허용되지만, 자아와 세상에서 나오는(from self and the world) 걸 가지고 그러면 안 된다는, 즉 우리는 감각과 기억에 속한 것들(the things of sense and of the memory [per sensualia et scientifica])을가지고 신앙의 신비들(the mysteries of faith)을 알아보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신앙의 천적인 것(the celestial of faith)이 파괴되기 때문입니다.These words, taken together with those just explained, signify that it is allowable to become acquainted with what is true and good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derived from the Lord, but not from self and the world; that is, we are not to inquire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and of the memory [per sensualia et scientifica], for in this case the celestial of faith is destroyed.
127. 감각과 기억에 속한 걸 가지고 신앙의 신비를 알아보고 싶어 하는 것은 다음 장에서 다룰,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 몰락(the fall of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의 원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모든 교회가 그렇게 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생활, 삶, 생명(life)의 거짓뿐 아니라 악도 함께 오기 때문입니다.A desire to investigate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and of the memory was not only the cause of the fall of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as treated of in the following chapter, but it is also the cause of the fall of every church; for hence come not only falsities, but also evils of life.
128. 세속적이고 육적인 사람(The worldly and corporeal man, 肉的)은 속으로 말하기를, 내가 만일 신앙과 그 관련된 모든 걸 감각(the things of sense), 즉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있게 해서 나로 하여금 믿게 하거나, 아니면, 기억(those of the memory [scientifica]), 즉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지식과 일반 상식을 가지고 나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게 하거나 하지 않으면 나는 안 믿을꺼야라고 말이지요. 또 그는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서로 절대 반대일 리 없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스스로 굳게 확신하는데요, 그는 이렇게 천국과, 그리고 신에 속한 것(what is celestial and Divine)을 감각에 속한 걸 가지고 배우기를(being instructed from things of sense) 원하는데, 이는 마치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만큼이나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가 이런 식으로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면 원할수록 그는 더욱더 스스로를 눈멀게 하여 결국엔 아무것도, 심지어 어떤 영적인 것(anything spiritual)의 존재와 영생(eternal life)의 존재에 대해서조차 믿지 않게 되는데요, 이런 결과는 그가 가정하고 있는 원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to ea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이며, 누구든지 더 많이 먹을수록 그는 더욱 죽게 되지요. 그러나 세상이 아닌, 주님을 통해서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he who would be wise from the Lord, and not from the world)은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곧 말씀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들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반드시 믿어야 한다고 말이지요. 그는 이런 원리로 자신의 생각(thoughts)을 조절하며, 계속해서 이성, 지식, 감각 및 자연에 속한 것들을 통해(by things of reason, of knowledge, of the senses, and of nature [per rationalia, scientifica, sensualia et naturalia]) 결국 자신의 선택이 맞다 확신합니다. 아니다 싶은 것들은 버리면서 말입니다.The worldly and corporeal man says in his heart, If I am not instructed concerning the faith, and everything relating to it,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so that I may see, or by means of those of the memory [scientifica], so that I may understand, I will not believe; and he confirms himself in this by the consideration that natural things cannot be contrary to spiritual. Thus he is desirous of being instructed from things of sense in what is celestial and Divine, which is as impossible as it is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for the more he desires to grow wise by such means, the more he blinds himself, till at length he believes nothing, not even that there is anything spiritual, or that there is eternal life. This comes from the principle which he assumes. And this is to “ea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of which the more anyone eats, the more dead he becomes. But he who would be wise from the Lord, and not from the world, says in his heart that the Lord must be believed, that is, the things which the Lord has spoken in the Word, because they are truths; and according to this principle he regulates his thoughts. He confirms himself by things of reason, of knowledge, of the senses, and of nature [per rationalia, scientifica, sensualia et naturalia], and those which are not confirmatory he casts aside.
129. 인간은 그가 세운 원리, 원칙(the principles he assumes)에 의해 지배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다 아는데요, 심지어 그 원칙이 거짓이어도 그의 모든 지식과 이성 능력은 그 원칙을 편듭니다(all his knowledge and reasoning favor his principles). 그 원칙을 지지하려는 수많은 생각(innumerable considerations)이 그의 마음에 더해지고, 그렇게 해서 그는 그 거짓 원칙을 확신하는 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원칙, 가령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는 그 어떤 것도 믿어서는 안 돼!’(a principle that nothing is to be believed until it is seen and understood)와 같은 원칙을 가진 사람은 결코 믿음이라는 걸 가질 수가 없는데요, 왜냐하면,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은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있거나 머릿속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참된 질서, 순서(the true order)는 사람이 주님, 곧 주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뒤따르는 모든 것으로 말미암아 지혜로워지는 것(for man to be wise from the Lord, that is, from his Word, and then all things follow)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는 눈이 밝아지는데(enlightened), 심지어 이성과 기억-지식에 관한 것들(in matters of reason and of memory-knowledge [in rationalibus et scientificis])까지도 그렇게 됩니다. 그런다고 무슨 과학 배우는 걸 결코 금하거나 하지는 않는데요, 과학은 삶에 매우 유용하며 즐겁기 때문이며, 심지어 그가 신앙 안에 있지만 세상 학자들처럼 생각하고 말해도 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 가지, 그렇다 하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믿기’(to believe the Word of the Lord)라는 원칙 안에서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학자들 세계에서 쓰는 말로 영적, 천적 진리들을 확증해야 한다는 것(to confirm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s by natural truths, in terms familiar to the learned world)입니다. 그렇게 그의 출발점은 주님이셔야 하며, 결코 자기 자신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전자는 생명이지만, 후자는 죽음이기 때문이지요.Everyone may know that man is governed by the principles he assumes, be they ever so false, and that all his knowledge and reasoning favor his principles; for innumerable considerations tending to support them present themselves to his mind, and thus he is confirmed in what is false. He therefore who assumes as a principle that nothing is to be believed until it is seen and understood, can never believe, becaus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cannot be seen with the eyes, or conceived by the imagination. But the true order is for man to be wise from the Lord, that is, from his Word, and then all things follow, and he is enlightened even in matters of reason and of memory-knowledge [in rationalibus et scientificis]. For it is by no means forbidden to learn the sciences, since they are useful to his life and delightful; nor is he who is in faith prohibited from thinking and speaking as do the learned of the world; but it must be from this principle—to believe the Word of the Lord, and, so far as possible, confirm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s by natural truths, in terms familiar to the learned world. Thus his starting point must be the Lord, and not himself; for the former is life, but the latter is death.
130. 세상을 통해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He who desires to be wise from the world)은 그의 ‘동산’(garden)에 감각과 기억-지식에 관한 것들(the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이 있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이 그의 ‘에덴’(Eden)이며, 그의 ‘동쪽’(east)은 서쪽, 곧 자기 자신(himself)입니다. 그에게 있어 ‘유브라데 강’(river Euphrates)은 그가 가진 모든 기억-지식인데 이는 정죄 받는 것(all his memory-knowledge, which is condemned)입니다. 그의 ‘두 번째 강’(second river), 거기에 ‘앗수르’(Assyria)가 있는데,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 못 차리게 하는, 거짓을 낳는 논리 능력(infatuated reasoning productive of falsities)입니다. 그의 ‘세 번째 강’(third river), ‘구스’(Ethiopia)지요, 악과 악으로 말미암는 거짓에 관한 원리들인데, 이게 그가 가진 신앙 지식들(the principles of evil and falsity thence derived, which are the knowledges of his faith)입니다. 그의 ‘네 번째 강’(fourth river)은 거기서 나오는 지혜(the wisdom thence derived)이며, 말씀에서는 이걸 ‘마법’(magic)이라고 하지요. 이런 이유로 ‘애굽’(Egypt)은, 애굽은 기억-지식을 말하는데, 이는 나중에 마법이 되는 지식들(memory-knowledge—after the knowledge became magical)을 말하지요, 결론적으로 애굽은 그런 사람, 곧 말씀에서 볼 수 있듯, 자아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he desires to be wise from self)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에 관해 에스겔에서는,He who desires to be wise from the world has for his “garden” the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are his “Eden”; his “east” is the west, or himself; his “river Euphrates” is all his memory-knowledge, which is condemned; his “second river,” where is “Assyria” is infatuated reasoning productive of falsities; his “third river,” where is “Ethiopia” is the principles of evil and falsity thence derived, which are the knowledges of his faith; his “fourth river” is the wisdom thence derived, which in the Word is called “magic.” And therefore “Egypt”—which signifies memory-knowledge—after the knowledge became magical, signifies such a man, because, as may be seen from the Word, he desires to be wise from self. Of such it is written in Ezekiel:
3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9애굽 땅이 사막과 황무지가 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네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 하도다 (겔29:3, 9) Thus hath said the Lord Jehovih, Behold, I am against thee, Pharaoh king of Egypt, the great whale that lieth in the midst of his rivers, who hath said, My river is mine own, and I have made it for myself. And the land of Egypt shall be for a solitude, and a waste, and they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because he hath said, The river is mine, and I have made it. (Ezek. 29:3, 9)
같은 선지서에서, 그런 사람들을 ‘지옥에 있는 에덴의 나무들’(trees of Eden in hell)이라고도 하는데요, 그 본문에서 바로(Pharaoh), 애굽인이지요, 바로 역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Such men are also called “trees of Eden in hell,” in the same prophet, where also Pharaoh, or the Egyptian, is treated of in these words:
16내가 그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스올에 떨어뜨리던 때에 백성들이 그 떨어지는 소리로 말미암아 진동하게 하였고 물을 마시는 에덴의 모든 나무 곧 레바논의 뛰어나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지하에서 위로를 받게 하였느니라, 18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에덴의 나무들 중에서 어떤 것과 같은고 그러나 네가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지하에 내려갈 것이요 거기에서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누우리라 이들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라 (겔31:16, 18) When I shall have made him descend into hell with them that descend into the pit; to whom art thou thus made like in glory and in greatness among the trees of Eden? yet shalt thou be made to descend with the trees of Eden into the lower earth, in the midst of the uncircumcised, with them that be slain by the sword. This is Pharaoh and all his crew, (Ezek. 31:16, 18)
여기서 ‘에덴의 나무들’(the trees of Eden)은 말씀에서 나오는 지식들(knowledges [scientifica et cognitiones] from the Word)을 가리키는데, 저들, 곧 스스로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런 지식들조차 이성 능력을 발휘(by reasonings),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서만 가까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말씀, 곧 주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입니다.where the “trees of Eden” denote knowledges [scientifica et cognitiones] from the Word, which they thus profane by reasonings.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Verse 16.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 우리말 번역은 원문에는 없는 ‘열매’를 추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라 함으로써 아르카나가 더욱 흐릿하게, 안 보이게 하는 아주 큰 실수를 범했습니다. 성경 번역자들이 말씀을 속뜻으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 16절 속뜻
주님은 천적 인간에게 퍼셉션을 늘 공급하시되 마치 해가 대지를 환히 늘 비추듯 원 없이 누리게 하셨습니다. 천적 인간은 천지에 가득한 주님의 신성에 하늘의 천사들처럼 이 퍼셉션을 가지고 반응하였습니다.
125. ‘각종 나무의 열매를 임의로 먹되’(To eat of every tree)는 퍼셉션(perception)을 통해 선하고 참된 것(what is good and true)을 아는 것입니다. 앞에서 관찰한 것처럼, ‘나무’(a tree)는 퍼셉션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To “eat of every tree” is to know from perception what is good and true; for, as before observed, a “tree” signifies perception.
※ ‘나무의 열매’라고 번역했지만, 사실은 그냥 ‘나무’입니다. 원본엔 없는 ‘열매’를 추가한 건 실제로 ‘나무’를 먹는다고 하면 굉장히 이상하고 어색해서가 아닐까 싶은데요. 이런 게 말씀을 속뜻, 그러니까 아르카나(arcana)를 전혀 모른 채 겉뜻으로만 번역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퍼셉션을 받았고, 그 퍼셉션으로 자기들 기억 속 소중히 여기고 있던 것들의 참되고 선한 여부를 들여다보다가(reflected on) 그 가운데 혹시 무슨 거짓된 것이 드러나면, 즉시 그 사실을 지각, 피했고, 심지어 공포심을 느낄 정도였는데요, 그런 게 또 천사들의 상태이지요. 그러나 태고교회의 이 퍼셉션을 대신해서 그 후 이 참되고 선한 것에 관한 지식은 전에 계시되어 온 것으로부터 계승되더니, 계속해서 그 다음에는 말씀 안에 계시된 것으로부터 계승되었습니다.They had from the Lord continual perception, so that when they reflected on what was treasured up in the memory they instantly perceived whether it was true and good, insomuch that when anything false presented itself, they not only avoided it but even regarded it with horror: such also is the state of the angels. In place of this percep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however, there afterwards succeeded the knowledge [cognitio] of what is true and good from what had been previously revealed, and afterwards from what was revealed in the Word.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Verse 15, And Jehovah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 15절 속뜻
주님이 천적 인간에게 주신 모든 것은 소유하라고 주신 게 아니라 누리라고 주신 것입니다. 천적 인간은 소유가 아닌 누림의 사람입니다.
122. ‘에덴동산’은 설명드린 대로, 천적 인간의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가 의미하는 것은, 곧 그가 그 모든 것을 누리는 건(to enjoy all these things) 허락하시지만, 그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건(to possess them as his own) 금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지요.By the “garden of Eden” are signified all things of the celestial man, as described; by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is signified that it is permitted him to enjoy all these things, but not to possess them as his own, because they are the Lord’s.
123. 천적 인간(The celestial man)은 모든 것이 전체적이든 개별적이든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acknowledges)합니다. 그가 그런 사실을 퍼셉션으로 지각(perceives)하기 때문이지요. 영적 인간(The spiritual man)도 마찬가지로 인정하지만, 그러나 그는 입으로(with the mouth) 합니다. 그는 그걸 말씀에서 배워서(has learned) 하기 때문입니다. 세속적이고 육적인 인간(The worldly and corporeal man)은 기꺼이로도 억지로도 당최 인정하지를 않는데요(neither acknowledges nor admits), 그는 무엇이든 자기한테 있으면 자기 것(his own)이라고 하며, 만일 그걸 잃으면 자기는 완전히 망할 걸로 여깁니다.The celestial man acknowledges, because he perceives, that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re the Lord’s. The spiritual man does indeed acknowledge the same, but with the mouth, because he has learned it from the Word. The worldly and corporeal man neither acknowledges nor admits it; but whatever he has he calls his own, and imagines that were he to lose it, he would altogether perish.
124. 지혜, 지성, 이성, 그리고 지식(wisdom, intelligence, reason, and knowledge [scientia])이 사람에게서가 아닌 주님에게서임은 주님이 가르치신 모든 걸 보면 아주 분명한데요,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자신을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를 두르고, 농부들에게 세로 준 집주인에 비유하신 것과(21:33),That wisdom, intelligence, reason, and knowledge [scientia] are not of man, but of the Lord, is very evident from all that the Lord taught; as in Matthew, where the Lord compares himself to a householder who planted a vineyard, and hedged it round, and let it out to husbandmen (21:33);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마21:33)
아래 요한복음에서 하신 말씀들처럼 말입니다.and in John:
13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요16:13-14) The Spirit of truth shall guide you into all truth; for he shall not speak of himself, but what things soever he shall hear, he shall speak; he shall glorify me, for he shall receive of mine, and shall declare it unto you. (John 16:13–14)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요3:27) A man can receive nothing except it be given him from heaven. (John 3:27)
이것이 정말 그렇다는 것은 천국 아르카나(the arcana of heaven)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That this is really so is known to everyone who is acquainted with even a few of the arcana of heaven.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Verse 14, And the name of the third river is Hiddekel; that is it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yria; and the fourth river is Euphrates.
※ 14절 속뜻
주님이 천적 인간에게 수여하시는 지성의 세 번째, 네 번째 특징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의 합리적 영역으로 흐르는 이성과 그 경계인 지식, 세상 팩트에 기반을 둔 지식입니다.
118. ‘힛데겔 강’(The river Hiddekel)은 이성, 즉 이성의 명석함(reason, or the clearsightedness of reason)입니다. ‘앗수르’(Asshur)는 이성적인 마음(the rational mind)이고, ‘앗수르 동쪽으로 흐르는 강’(the river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hur)은 이성의 명석함이 주님에게서 나와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의 이성적인 마음(the rational mind, which is of the external man) 안으로 들어가는 걸 의미합니다. ‘유브라데’(Phrath, or Euphrates)는 기억-지식(memory-knowledge), 즉 맨 끝, 경계(the ultimate or boundary)입니다.The “river Hiddekel” is reason, or the clearsightedness of reason. “Asshur” is the rational mind; the “river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hur” signifies that the clearsightedness of reason comes from the Lord through the internal man into the rational mind, which is of the external man; “Phrath,” or Euphrates, is memory-knowledge, which is the ultimate or boundary.
119. ‘앗수르’가 이성적인 마음, 즉 인간의 이성(the rational mind, or the rational of man)을 의미한다는 것은 선지서들, 에스겔 같은 선지서를 보면 아주 분명합니다.That “Asshur” signifies the rational mind, or the rational of man, is very evident in the prophets, as in Ezekiel:
3볼지어다 앗수르 사람은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숲의 그늘 같으며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레바논 백향목이었느니라 4물들이 그것을 기르며 깊은 물이 그것을 자라게 하며 강들이 그 심어진 곳을 둘러 흐르며 둑의 물이 들의 모든 나무에까지 미치매 (겔31:3-4) Behold, Asshur was a cedar in Lebanon, with fair branches and a shady grove, and lofty in height; and her offshoot was among the thick boughs. The waters made her grow, the deep of waters uplifted her, the river ran round about her plant. (Ezek. 31:3–4)
이성을 ‘레바논 백향목’이라 하고 있으며,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은 기억 지식들, 곧 이 매우 큰 곤경 가운데 있는 지식들입니다.The rational is called a “cedar in Lebanon”; the “offshoot among the thick boughs,” signifies the knowledges of the memory, which are in this very plight.
※ 개역개정 4판 번역이 좀 엉뚱한데요, 영어 표현 번역은 the offshoot among the thick boughs, 즉 ‘빽빽한 가지들 가운데 난 새 가지’입니다.
※ ‘이 매우 큰 곤경 가운데 있는’(which are in this very plight)이라는 이 부분 역시 지금의 저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서술입니다. 에스겔 31장 전체를 읽어보면, 애굽에 대한 책망을 하시면서, 앗수르가 이러했음에도 그 역시 이랬거든 하물며 너는... 이라는, 그 속뜻으로는 인간의 이성조차 이랬거든 하물며 기억-지식에 불과한 너는... 이라는 내용이어서 이런 전반적인 문맥을 통해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이것은 이사야를 보면 더욱 명료해집니다. This is still clearer in Isaiah:
23그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24그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25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사19:23-25) In that day shall there be a path from Egypt to Asshur, and Asshur shall come into Egypt, and Egypt into Asshur, and the Egyptians shall serve Asshur. In that day shall Israel be the third with Egypt and with Asshur, a blessing in the midst of the land, that Jehovah Zebaoth shall bless, saying, Blessed be Egypt my people, and Asshur the work of my hands, and Israel mine inheritance. (Isa. 19:23–25)
‘애굽’은 위 본문과 다른 여러 구절에서 기억-지식(memory-knowledges)을, ‘앗수르’는 이성(reason)을, 그리고 ‘이스라엘’은 지성(ntelligence)을 의미합니다.By “Egypt” in this and various other passages is signified memory-knowledges, by “Asshur” reason, and by “Israel” intelligence.
120. ‘애굽’과 마찬가지로 ‘유브라데’ 또한 기억-지식(memory-knowledges) 및 이들 지식이 나오는 감각적인 것들(the sensuous things from which these knowledges come)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미가 같은 선지서를 보면 분명합니다.As by “Egypt,” so also by “Euphrates,” are signified memory-knowledges, and also the sensuous things from which these knowledges come. This is evident from the Word in the prophets, as in Micah:
10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리니 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 그가 거리의 진흙 같이 밟히리니 그것을 내가 보리로다 11네 성벽을 건축하는 날 곧 그날에는 지경이 넓혀질 것이라 12그날에는 앗수르에서 애굽 성읍들에까지, 애굽에서 강까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 산에서 저 산까지의 사람들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나 (미7:10-12) My she-enemy hath said, Where is Jehovah thy God? The day in which he shall build thy walls [macerias], that day shall the decree be far removed; that day also he shall come even to thee from Asshur, and to the cities of Egypt, and to the river [Euphrates]. (Micah 7:10–12)
그래서 선지서들에서 주님의 오심(the coming of the Lord)과 관련하여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사 그로 하여금 천적 인간과 같이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레미야입니다.So did the prophets speak concerning the coming of the Lord who should regenerate man so that he might become like the celestial man. In Jeremiah: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며 또 네가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냐 (렘2:18) What hast thou to do in the way of Egypt, to drink the waters of Sihor? Or what hast thou to do in the way of Asshur, to drink the waters of the river [Euphrates]? (Jer. 2:18)
여기서 ‘애굽’과 ‘유브라데’는 함께 기억-지식을, ‘앗수르’는 이런 기억-지식을 가지고 하는 합리적 사고능력, 추리, 추론(reasonings thence derived)을 의미합니다. 시편입니다. where “Egypt” and “Euphrates” likewise signify memory-knowledges, and “Asshur” reasonings thence derived. In David:
8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11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시80:8, 11) Thou hast made a vine to go forth out of Egypt; Thou hast cast out the nations; Thou hast planted her; Thou hast sent out her shoots even to the sea, and her twigs to the river (Euphrates), (Ps. 80:8, 11)
여기서 ‘강’(the river Euphrates)의 의미는 감각적인 것과 기억에 속한 것(what is sensuous and of the memory. [sensuali et scientifico])입니다. 유브라데는 앗수르를 향한 이스라엘 영토의 경계(the boundary of the dominions of )였는데, 이는 기억 지식(the knowledge of the memory)이 영적 천적 인간의 지성과 지혜(the intelligence and wisdom of the spiritual and celestial man)의 경계인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의 의미 또한 같습니다. where also the “river Euphrates” signifies what is sensuous and of the memory. [sensuali et scientifico] For the Euphrates was the boundary of the dominions of Israel toward Assyria, as the knowledge of the memory is the boundary of the intelligence and wisdom of the spiritual and celestial man. The same is signified by what was said to Abraham: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창15:18) Unto thy seed will I give this land, from the river of Egypt unto the great river, the river Euphrates. (Gen. 15:18)
이들 두 경계는 같은 걸 의미합니다.These two boundaries have a like signification.
121. 천적 질서의 본질(The nature of celestial order), 곧 생명은 어떻게 진행하는가(how the things of life proceed) 하는 것은 이들 강들로부터, 즉 ‘동’이신 주님으로부터(from the Lord, who is the East)임이 분명하며, 주님으로부터 지혜(wisdom)가, 지혜를 통해 지성(intelligence)이, 지성을 통해 이성(reason), 그리고 그렇게 이성을 사용하여 이번에는 기억 지식(the knowledges of the memory)이 생생해지는 등 이런 순서로 진행한다는 사실 또한 분명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질서, 순서(the order of life)이며, 그런 것이 천적 인간들(celestial men)이고, 그래서 이스라엘 장로들(the elders of Israel)이 천적 인간들을 표상했기 때문에, 그들을 가리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인정 받는 자들’(wise, intelligent, and knowing)이라 한 것입니다(신1:13, 15).The nature of celestial order, or how the things of life proceed, is evident from these rivers, namely, from the Lord, who is the “East,” and that from him proceeds wisdom, through wisdom intelligence, through intelligence reason, and so by means of reason the knowledges of the memory are vivified. This is the order of life, and such are celestial men; and therefore, since the elders of Israel represented celestial men, they were called “wise, intelligent, and knowing” (Deut. 1:13, 15).
13너희의 각 지파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인정 받는 자들을 택하라 내가 그들을 세워 너희 수령을 삼으리라 한즉, 15내가 너희 지파의 수령으로 지혜가 있고 인정 받는 자들을 취하여 너희의 수령을 삼되 곧 각 지파를 따라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과 조장을 삼고 (신1:13, 15)
그래서 궤를 만든 브살렐을 이렇게 말한 것이지요.Hence it is said of Bezaleel, who constructed the ark, that he was: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출31:3)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출35:31)
1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신 자들은 모두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 2모세가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그 마음에 여호와께로부터 지혜를 얻고 와서 그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를 부르매 (출36:1-2) Filled with the spirit of God, in wisdom, in understanding, and in knowledge [scientia], and in all work. (Exod. 31:3; 35:31; 36:1–2)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Verse 13, And the name of the second river is Gihon; the same is it that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Cush.
※ 13절 속뜻
주님이 천적 인간에게 수여하시는 지성의 두 번째 특징은,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에 관한 모든 지식으로, ‘기혼’이라 하였으며, 이런 걸 담을 수 있는 천적 인간의 마음의 역량을 가리켜 ‘구스 땅’이라 하였습니다.
116. ‘기혼’(Gihon)이라 하는 ‘둘째 강’(The second river)은 지식(the knowledge [cognitio])을 의미하는데, 이 지식은 선한 것과 참된 것(the good and the true), 즉 사랑과 신앙에 관한 모든 지식을 말합니다. ‘구스 땅’(the land of Cush)은 마음, 즉 역량(the mind or faculty)을 의미합니다. 마음은 의지와 이해(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로 되어 있는데요, 첫째 강에 관해 드린 말씀이 의지에 관한 내용이었다면, 이 둘째 강은 이해에 관한, 즉 선에 관한 지식을 이해하고, 진리에 관한 지식을 이해하는(the understanding to which belong the knowledges [cognitiones]of good and of truth) 내용입니다.The “second river,” which is called “Gihon,” signifies the knowledge [cognitio] of all things that belong to the good and the true, or to love and faith, and the “land of Cush” signifies the mind or faculty. The mind is constituted of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and what is said of the first river has reference to the will, and what of this one to the understanding to which belong the knowledges [cognitiones] of good and of truth.
117. 더욱 ‘구스 땅’, 즉 에디오피아는 금과 보석 및 향신료(spices)로 풍부했는데요, 이는 전에 말씀드린 대로, 선과 진리 및 여기서 나오는 감사할 만한 것들(the things thence derived which are grateful), 곧 사랑과 신앙 관련 지식에서 나오는 것들(those of the knowledges of love and faith)을 말합니다. 이는 위 113번 글에서 인용한 구절들(사60:6, 마2:1, 11, 시72:15)을 보면 분명합니다.The “land of Cush,” or Ethiopia, moreover, abounded in gold, precious stones, and spices, which, as before said, signify good, truth, and the things thence derived which are grateful, such as are those of the knowledges of love and faith. This is evident from the passages above cited (n. 113) from Isa. 60:6; Matt. 2:1, 11; Ps. 72:15.
허다한 낙타, 미디안과 에바의 어린 낙타가 네 가운데에 가득할 것이며 스바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사60:6)
1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11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마2:1, 11)
그들이 생존하여 스바의 금을 그에게 드리며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리로다 (시72:15)
말씀에서 ‘구스’나 ‘에디오피아’(Ethiopia), 그리고 또 ‘스바’(Sheba)가 의미하는 것이 비슷하다는 것은 스바냐 같은 선지서들을 보면 분명한데요, 가령, 스바냐에 ‘구스 강’(the rivers of Cush)이라고 언급된 부분입니다.That similar things are meant in the Word by “Cush” or “Ethiopia,” and also by “Sheba,” is evident from the prophets, as in Zephaniah, where also the “rivers of Cush” are mentioned:
5그 가운데에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9그 때에 내가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한 가지로 나를 섬기게 하리니 10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강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바칠지라 (습3:5, 9-10) In the morning he will give his judgment for light; for then will I turn to the people with a clear language, that they may all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to serve him with one shoulder; from the passage of the rivers of Cush my suppliants shall bring mine offering. (Zeph. 3:5, 9–10)
그리고 다니엘에서 북으로는 리비아, 남으로는 구스의 왕을 말하는 부분입니다.And in Daniel, speaking of the king of the north and of the south:
그가 권세로 애굽의 금은과 모든 보물을 차지할 것이요 리비아 사람과 구스 사람이 그의 시종이 되리라 (단11:43) He shall have power over the treasures of gold and of silver, and over all the desirable things of Egypt; and the Lybians and the Ethiopians shall be under his steps, (Dan. 11:43)
여기 ‘애굽’(Egypt)은 세상에서 학습하는 지식인 기억-지식(memory-knowledges)을, ‘구스’(the Ethiopians)는 주님으로 말미암는 지식(knowledges)을 가리킵니다. where “Egypt” denotes memory-knowledges, and the “Ethiopians” knowledges.
[2]에스겔에서도 그렇습니다.So in Ezekiel:
스바와 라아마의 상인들도 너의 상인들이 됨이여 각종 극상품 향 재료와 각종 보석과 황금으로 네 물품을 바꾸어 갔도다 (겔27:22) The merchants of Sheba and Raamah, these were thy merchants, in the chief of all spices, and in every precious stone, and in gold, (Ezek. 27:22)
같은 식으로 이들을 가지고 신앙 관련 지식(knowledges [cognitiones] of faith)을 의미하고 있는데요, 그렇게 시편에서도 주님에 대해, 그리고 그 결과, 천적 인간에 대해 말하면서 by whom in like manner are signified knowledges [cognitiones] of faith. So in David, speaking of the Lord, consequently of the celestial man:
7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10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조공을 바치며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시72:7, 10) In his days shall the righteous flourish, and abundance of peace until there shall be no moon; the kings of Tarshish and of the isles shall bring presents; the kings of Sheba and Seba shall offer a gift. (Ps. 72:7, 10)
앞뒤 구절들과 함께 살펴보면, 이 말씀들은 신앙에 속한 천적인 것들(celestial things of faith)을 의미합니다. 스바 여왕에 관한 말씀 또한 그런데요, 열왕기상을 보면 그녀는 솔로몬 왕에게 와서 어려운 것들을 물으며, 그에게 향신료와 금, 그리고 보석들을 가져왔습니다. (왕상10:1-2). These words, as is plain from their connection with the preceding and subsequent verses, signify celestial things of faith. Similar things were signified by the queen of Sheba, who came to Solomon, and proposed hard questions, and brought him spices, gold, and precious stones (1 Kings 10:1–2).
1스바의 여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로 그를 시험하고자 하여 2예루살렘에 이르니 수행하는 자가 심히 많고 향품과 심히 많은 금과 보석을 낙타에 실었더라 그가 솔로몬에게 나아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말하매 (왕상10:1-2)
이는 선지서들을 비롯, 말씀의 역사 관련 부분들(the historical parts of the Word)에 들어있는 모든 것은 아르카나(arcana, 秘義)를 의미, 표상 및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For all things contained in the historical parts of the Word, as well as in the prophets, signify, represent, and involve arcana.
모친 별세 소식에 불현듯 지난날 유신고 시절인 1980년 9월 30일 밤, 당시 기숙사 사감이셨던 ○○○ 선생님 전화 받고 우리 A동 같은 방 모두 사감실 올라가 내 어머니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 접하고는, 룸메이트들이었던 자네와 ○○, ○○이 등과 함께 전원, 그 밤, 성 빈센트 병원 장례식장을 찾아간 기억이 마치 비디오를 보듯 생생하게 떠오르더군... 벌써 햇수로 43년 전 일이야 ^^
목사로서 몇 가지만 간단히 적음세.
① 오늘이 사흘째지? 이제 어머니께서는 영계에서 천사들의 도움을 받아 눈을 뜨시게 되고, 몇 가지 절차를 밟으신 후, 드디어 생전에 먼저 떠나보내셨던 모든 그리운 분들, 곧 부모님 및 여러 혈육들, 친구, 지인들 등, 먼저 가신 모든 분과 재회하시는 너무나 반가운 시간들을 가지실 걸세.
② 처음엔 지상의 모습 그대로이셔서 어머니를 기억하던 모든 분들이 알아보시겠지만 서서히 어머니의 내면, 곧 속 사람이 주가 되고, 외면, 곧 겉 사람은 휴면 상태에 들어가면서 어머니는 천국으로 올라가실 준비를 마치게 되지. 이때 어머니의 모습은 우리가 생전에 결코 본 적 없던 놀랍도록 아름다운 천사의 모습이라네. 어머니의 일생이 선한 삶이셨다면 말일세.
③ 우리의 육체는 사실 우리의 영이 잠시 이 지상 생활을 하기 위해 빌려 입었던 거라, 이렇게 말하면 좀 불경스러울까?, 무슨 특별한 의미는 없어. 죽음이란 다음 세계인 영계로 이사 가는 거니까 말일세.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이기 때문에 굳이 지상에 묻어둔 육체를 다시 찾을 일은 없어. 육체의 다시 살아남, 곧 우리가 부활이라 믿고 있는 그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 곧 우리 주님의 부활로 족하며, 또 반드시 그래야만 하네. 우리의 부활은 이렇게 지상에서 잠들었다가 영계에서 깨어나는 것을 말하지.
④ 그럼에도 우리가 이렇게 슬퍼하고, 보내드리는 예를 다하는 이유는 그것이 옳기 때문이며, 그것이 그동안 부모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머무르시며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에 대한 감사와 애정의 표현이기 때문이라네. 거듭 부모는 사실은 부모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늘 계셨던 주님이시며, 그래서 부모에 대한 태도는 곧 주님에 대한 태도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더러 십계명에서조차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하신 것이네.
거듭 모친을 떠나보내는 자네와 모든 유족을 주님이 크게 위로하시며, 또 이후 모든 일정에 크게 은혜 베푸시기를 기도하네.
어머니를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였을 참 진실한 친구 ○○에게 주께서 천 대까지 은혜 베푸시기를 간구하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