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5의 속죄제에서 가장 따뜻한 장면 가운데 하나는 제물이 사람의 형편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형편이 되는 사람은 어린양이나 염소를 드리지만, ‘그의힘이어린양을바치는데에미치지못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조차 감당할 수 없으면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가져오면 됩니다. 실제로 레5:7과 11은 경제적 능력에 따라 이 대체 제물을 명시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가 보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은 인간이 가진 외적인 재산의 크기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어린양을 드릴 수 없는 사람에게 비둘기의 길이 있고, 비둘기조차 드릴 수 없는 사람에게 고운 가루의 길이 있습니다. 제물의 외적 크기는 달라도 ‘제사장이그를위하여속죄한즉그가사함을받으리라’는 결론은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없는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실제로 가진 상태 안에서 당신께 돌아올 길을 열어 주시는 분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833(창15:10)은 레5:7-8을 직접 인용하면서 속죄제에 사용된 비둘기 역시 제사의 상응 질서 안에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값싼 제물을 드린 사람의 예배가 값비싼 제물을 드린 사람보다 영적으로 열등하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각 제물은 서로 다른 영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중요한 것은 외적 가격이 아니라 그 사람이 주님 앞에서 실제로 응답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마지막 단계입니다. 동물도 새도 없이 ‘고운가루’만으로 속죄제가 됩니다. 이것은 레위기의 제사에서 피가 매우 중요하다고 해서 모든 개별 속죄제에 반드시 동물의 피가 있어야만 사함이 가능했다고 단순화할 수 없음을 본문 자체가 보여 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레5:11-13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은 고운 가루를 가져오며, 제사장은 그것의 한 움큼을 제단에서 불사르고 그를 위하여 속죄하며, 본문은 똑같이 ‘그가사함을받으리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속죄 이해와도 잘 어울립니다. 구원의 능력이 동물의 물질적 피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제사가 주님의 신적 구원 역사와 인간의 정결을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외적인 제물은 달라질 수 있지만 실제로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가진 것이 적은 사람이라고 해서 주님의 정결과 사함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 우리에게도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주님께 나아가기 위해 무엇인가 충분히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이 더 좋아져야 하고, 마음이 더 깨끗해져야 하고, 기도도 더 잘해야 하며, 회개도 더 깊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회개는 완성된 사람이 주님께 가져가는 제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완성해 가시도록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그분께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5의 제물은 점점 작아지지만 사함은 작아지지 않습니다. 어린양을 가진 사람에게도 길이 있고, 비둘기밖에 없는 사람에게도 길이 있으며, 한 줌의 고운 가루밖에 없는 사람에게도 길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제물의 시장가격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진실하게 악을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오는가입니다. 거듭남의 문턱에는 ‘이만큼가진사람만들어올수있다’는 표지판이 없습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에게까지 정결과 사함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 레5의 아름다운 아르카나 가운데 하나입니다. (SW.7레5심화1)
레위기 5장은 4장의 속죄제를 이어가면서 거듭남의 길을 한층 더 실제적인 삶 속으로 끌어옵니다. 레4에서 반복된 핵심 표현은 ‘그가범한죄를깨달으면’이었습니다. 인간은 먼저 자기 안의 악을 보아야 하며, 말씀의 진리가 그것을 비출 때 비로소 회개가 시작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레5에서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중하나에허물이있을때에는아무일에잘못하였노라자복하고.’ 깨닫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그것을 자기의 죄라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 후반의 속건제에 이르면 한 걸음이 더 이어집니다. 잘못으로 손상된 것을 ‘보상’하고 거기에 오분의 일을 더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레5전체에는 ‘깨달음→자복→정결→보상→사함’이라는 매우 실제적인 회개의 흐름이 있습니다.
1절로 4절은 그 회개가 필요한 구체적인 삶의 상황들을 보여 줍니다. 알고 있는 사실을 증언하지 않는 것, 부정한 짐승이나 사람의 부정에 접촉하는 것, 함부로 맹세하는 것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서로 전혀 다른 문제처럼 보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죄는 단지 눈에 띄는 악행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 침묵에도, 자기도 모르게 접촉한 부정에도,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도 영적인 결과가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1절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거짓말을 직접 하지 않았다고 해서 언제나 진실한 것은 아닙니다. 진실을 말해야 할 때 알고도 침묵함으로 거짓이 힘을 얻도록 만들 수도 있습니다. 4절의 함부로 한 맹세 역시 말의 책임을 보여 줍니다. 거듭남은 예배 시간의 종교적 상태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보고도 침묵하는지, 무엇에 접촉하는지, 어떤 말을 생각 없이 내뱉는지까지 다룹니다.
그런데 2절과 3절에는 레4에서 보았던 ‘부지중’이라는 문제가 다시 등장합니다. 인간은 어떤 부정에 접촉하고도 그것을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것을깨달았을때에는허물이있을것이요’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인간이 알지 못한 것을 빌미 삼아 정죄하신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에게는 아직 자기가 보지 못하는 악과 거짓의 영향이 있으며, 주님께서 말씀의 빛으로 그것을 보여 주실 때 새로운 책임과 새로운 회개의 가능성이 시작된다는 데 있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9(출29:14)는 속죄제가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깨닫는 것은 정결의 시작입니다. 아직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되었을 때 인간은 그것을 숨기거나 변명할 것인지, 아니면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피할 것인지를 선택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5절의 ‘자복’이 등장합니다. 레4에서는 주로 ‘깨달음’이 강조되었다면 레5에서는 ‘잘못하였노라자복하고’라고 합니다. 영적으로 이 둘은 같지 않습니다. 자기 안에서 잘못된 것을 발견하는 것과 ‘이것은나의죄입니다’라고 인정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악을 발견하고도 환경 탓, 다른 사람 탓, 성격 탓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그사람이먼저그랬기때문에’, ‘나는원래성격이이렇기때문에’, ‘상황이어쩔수없었기때문에’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복은 그 모든 설명을 넘어 ‘이것은내가주님앞에서피해야할악입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회개는 죄를 입술로 열거하는 행위 자체에 머물지 않습니다. 악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실제로 그것을 피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레5의 자복은 단순한 종교적 죄책감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출발점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레5는 매우 아름다운 장면을 보여 줍니다. 속죄제물을 드려야 하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형편이 되는 사람은 암컷 어린양이나 염소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의힘이어린양을바치는데에미치지못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마저 힘들면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실제 본문 자체가 제물의 경제적 차등을 분명히 규정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고대의 복지 규정 이상으로 깊은 인상을 줍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정결의 길이 재산에 의해 막히지 않는 것입니다. 어린양을 드릴 수 없는 사람에게 비둘기의 길이 열리고, 비둘기조차 드릴 수 없는 사람에게 한 줌의 곡식으로 나아갈 길이 열립니다. 누구도 ‘나는가진것이없어서주님께돌아갈수없다’고 말할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비둘기가 등장하는 것도 레1에서 이미 보았던 상응과 연결됩니다. AC.870(창8:8-9)은 비둘기를 거듭나는 사람 안의 신앙의 진리와 선에 연결하며, 제사에서 비둘기가 사용된 사실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AC.1833(창15:10)은 레5:7-8의 속죄제까지 직접 인용하면서 제사에서 새를 완전히 둘로 나누지 않았던 규정에 영적 의미가 있음을 밝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난한 사람이 더 낮은 가치의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소나 양이 표상하는 선의 상태와 새가 표상하는 진리와 신앙의 상태가 서로 다를 뿐, 주님께서는 각 사람이 실제로 받을 수 있고 응답할 수 있는 상태에서 정결의 길을 여십니다. 거듭남에는 획일적인 한 가지 외적 형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 놀라운 것은 비둘기조차 드릴 수 없는 사람에게 고운 가루를 속죄제물로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레2에서 고운 가루는 소제의 중심이었고, 거기에는 기름과 유향이 함께 놓였습니다. ‘계시록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324(계5:8)는 레2:1-2를 직접 인용하면서 고운 가루는 순수한 진리를, 기름은 천적 사랑의 선을, 유향은 영적 사랑의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레5의 가난한 사람의 속죄제에서는 같은 고운 가루를 가져오면서도 ‘기름을붓지말며유향을놓지말라’고 합니다. 본문도 그 이유를 단호하게 ‘이는속죄제인즉’이라고 밝힙니다. 여기서는 레2의 소제처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기쁨의 예배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드러나 정결되어야 하는 상태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다만 현재 확보한 스베덴보리 원전에서 레5:11의 ‘기름과유향의부재’를 각각 직접 해설하는 대목은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그 세부를 지나치게 확대하여 단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같은 고운 가루라도 제사의 문맥이 달라지면 그 전체적인 의미와 쓰임도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은 레위기의 제사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한 원칙을 가르쳐 줍니다. 상응은 사전처럼 ‘고운가루=진리,기름=선,유향=이것’이라고 낱말을 대입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각각의 상응은 전체 계열과 문맥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레2에서는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이 더해져 선과 진리의 결합과 예배를 나타냈지만, 레5에서는 같은 고운 가루가 죄로부터의 정결이라는 전혀 다른 제사 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제사의 세세한 규정마다 천국의 아르카나가 있다고 말한 이유를 조금씩 이해하게 됩니다. 한 가지 재료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과 함께 있고, 무엇이 빠져 있으며, 어떤 제사 안에서 사용되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14절부터는 새로운 제사인 ‘속건제’가 시작됩니다. 첫 경우는 ‘여호와의성물에대하여부지중에범죄’한 경우입니다. 흠 없는 숫양을 가져오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잘못한 성물에 대해 ‘보상’하고 거기에 ‘오분의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주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속죄제와 구별되는 속건제의 매우 중요한 특징이 나타납니다. 죄는 인간의 내면에 부정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실제 관계와 질서에 손상을 일으킬 수 있으며, 그런 경우 회개는 ‘잘못했습니다’라는 말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가능한 것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빼앗은 것이 있으면 돌려주고, 손상시킨 것이 있으면 회복하며, 잘못된 관계에서 내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다면 그것을 감당해야 합니다. 레5의 속건제는 회개가 실제 삶의 회복으로 이어져야 함을 보여 줍니다.
특히 ‘오분의일을더하여’라는 규정은 그냥 임의의 벌금이 아닙니다. AC.649(창6:15)는 레5:16을 직접 인용하면서 보상 후 더하는 ‘오분의일’을 최소한의 추가분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말씀에서 ‘다섯’이 ‘어떤것,조금’을 의미하는 용례 가운데 하나로 제시합니다. 그런데 ‘계시록해설’ 548(계9:5)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레5:16을 비롯한 여러 ‘오분의일’ 규정을 직접 열거하면서, 양과 관련된 문맥에서 ‘오분의일’이 ‘충분한만큼’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레5의 보상은 단지 원상복구를 계산적으로 해 놓고 끝내는 최소주의적 회개가 아닙니다. 잘못을 바로잡기에 충분하도록 회복하려는 방향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AC의 모든 ‘오분의일’ 용례를 곧바로 동일한 세부 상응으로 합쳐서는 안 됩니다. 레5:16에 대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보상이 실제적이어야 하며, 거기에 추가분까지 요구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회개를 매우 구체적으로 만듭니다.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해 놓고 하나님께만 ‘용서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으로 충분할까요? 남의 것을 부당하게 취하고도 마음으로 회개했다고 끝낼 수 있을까요? 거짓말로 관계를 손상시켰다면 가능한 범위에서 진실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모든 잘못을 과거 그대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지나간 시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도 있습니다. 그러나 속건제가 보여 주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참된 회개에는 ‘내가할수있는회복은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따라옵니다. 사함은 책임을 없애는 핑계가 아니라 책임을 정직하게 감당할 수 있게 하는 은혜입니다.
17절로 19절에서는 다시 ‘부지중’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여호와의계명중하나를부지중에범하여도허물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레4와 레5전반의 주제를 다시 확인합니다. 인간이 아직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악이 선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것을 깨닫게 하실 때 정결의 길이 열립니다. 그리고 이 장 전체를 지나며 그 길은 점점 구체적으로 깊어집니다. ‘몰랐다’에서 ‘깨달았다’로, ‘깨달았다’에서 ‘자복한다’로, ‘자복한다’에서 ‘속죄한다’로, 그리고 실제 손상이 있는 경우에는 ‘보상한다’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죄책감을 점점 더 무겁게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인간을 악의 지배에서 실제로 자유롭게 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레5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회개는진실해질수록구체적이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내 안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보게 됩니다. 그다음 그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내가잘못했습니다’라고 인정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형편과 상태에 맞게 정결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리고 내 죄가 실제로 무엇인가를 손상시켰다면 가능한 범위에서 그것을 회복하게 하십니다. 그 모든 과정의 끝에 반복되는 말씀은 레4와 같습니다. ‘제사장이그의허물을위하여속죄한즉그가사함을받으리라.’ 사함은 현실을 외면하는 선언이 아니라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건져 내어 다시 선과 진리의 질서 안으로 돌려놓으시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레4가 우리에게 ‘그가범한죄를깨달으면’이라고 말했다면 레5는 묻습니다. ‘깨달은다음에는무엇을할것인가?’입니다. 레5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잘못하였노라자복하고’, 그리고 바로잡을 것이 있다면 바로잡으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악을 인정하고 피하며, 손상시킨 것을 가능한 만큼 회복하고, 다시 선과 진리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 이것이 속죄제에서 속건제로 이어지는 거듭남의 길입니다. 회개는 마음속 후회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참된 회개는 마침내 삶의 방향을 바꾸고, 가능한 곳에서는 깨어진 것을 다시 세우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SW.7레5해설)
레위기 4장의 속죄제에는 얼핏 보면 매우 이상한 대비가 있습니다. 같은 수송아지인데 일부는 제단으로 올라가고 일부는 진영 밖으로 나갑니다. 내장과 콩팥 주변의 ‘기름’은 거룩한 제단 위에서 불사르지만, 가죽과 고기와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과 똥, 곧 나머지 전체는 진영 밖으로 가져가 불사릅니다.
왜 같은 제물 안에서 이렇게 정반대의 처리가 이루어질까요?
여기에는 매우 분명한 상응이 있습니다. 레3에서 살펴본 것처럼 기름은 선을 표상합니다. 그래서 속죄제에서도 기름은 버려지지 않고 제단으로 올라갑니다. 인간이 정결하게 된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과 거짓은 제거되지만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보존되고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반면 수송아지의 나머지를 진영 밖에서 불사르는 장면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 매우 직접적으로 설명합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8(출29:14)은 수송아지의 살과 가죽과 똥을 진영 밖에서 불사르는 것이 그것들이 표상하는 악들을 지옥에 내어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진영은 천국과 교회를 표상하고, 따라서 진영 밖은 천국과 교회가 아닌 곳, 곧 지옥을 표상합니다.
이어 AC.10040은 속죄제 수송아지의 살이 여기서는 사랑의 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악’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같은 ‘살’이라는 상응도 문맥에 따라 정반대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속죄제라는 문맥에서는 제거되어야 할 악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원칙을 가르쳐 줍니다. ‘살은언제나이것’, ‘불은언제나이것’, ‘동물은언제나이것’처럼 기계적으로 대응시키면 안 됩니다. 말씀의 문맥과 계열이 중요합니다. 같은 자연적 대상도 선한 계열에서는 긍정적 의미를, 악한 계열에서는 반대 의미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레4의 수송아지는 바로 이 원리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기름은 제단으로 올라갑니다. 악을 표상하는 것은 진영 밖으로 나갑니다. 이것이 정결입니다.
우리의 회개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격 전체를 없애 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개성이나 재능이나 자연적 삶 자체를 파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악한 사랑과 거짓을 분리하여 물러나게 하시고, 주님에게서 받은 선한 것들은 보존하고 정결하게 하십니다.
예를 들어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의지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자기 뜻을 관철하려는 지배욕은 제거되어야 하지만, 정결하게 된 강한 의지는 선한 일을 끝까지 수행하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지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지성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보다 우월해지려는 교만은 진영 밖으로 나가야 하지만, 정결하게 된 이해는 진리를 보고 다른 사람을 돕는 귀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인간을 무색무취하게 만드는 과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주신 고유한 능력과 쓰임을 없애지 않으시고 그것을 정결하게 하여 선을 섬기게 하십니다. 버려져야 하는 것은 악이며, 주님에게서 온 선은 주님께 돌려집니다.
여기서 ‘진영밖’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악은 조금 고쳐서 성소 안에 보관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악으로 인정했다면 그것과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미움을 ‘정의감’이라고 이름 붙여 보관하고, 지배욕을 ‘책임감’이라고 이름 붙여 보관하며, 자기 자랑을 ‘간증’이라고 이름 붙여 성소 안에 들여놓아서는 안 됩니다.
진리가 그것이 악임을 보여 주었다면 진영 밖으로 내보내야 합니다. 이것이 ‘악을죄로여겨피하는것’의 실제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여기서도 자신의 힘으로 악을 지옥에 던질 수 없습니다. 악을 보고 인정하고 피하려는 것은 인간이 해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물러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이 주님을 바라보며 악을 거부할 때 주님께서 그 악을 인간의 중심에서 밀어내십니다.
그래서 레4의 장면은 매우 역동적입니다. 한쪽에서는 기름이 제단의 불꽃 속으로 올라갑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악을 표상하는 것들이 진영 밖으로 나갑니다. 선은 주님께 돌려지고 악은 제거됩니다.
바로 이것이 속죄제의 정결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단지 ‘용서받은죄인’이라는 이름 아래 그대로 두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 안의 질서를 바꾸어 가십니다. 악은 밖으로, 선은 주님께로 향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레4의 속죄제는 우리에게 아주 실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내안에서제단으로올라가야할것은무엇이며,진영밖으로나가야할것은무엇인가?’입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선은 감사함으로 그분께 돌리고, 말씀의 빛에서 악으로 드러난 것은 붙들거나 변명하지 말고 피해야 합니다. 이 두 움직임이 함께 일어날 때 인간의 자연적 삶은 조금씩 정결하게 되고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SW.6레4심화3)
레위기 4장의 속죄제를 읽을 때 기독교인은 자연스럽게 십자가를 떠올립니다. 죄를 범한 인간 대신 흠 없는 제물이 죽고 피가 흘려지며, 마지막에는 ‘제사장이그를위하여속죄한즉그가사함을받으리라’고 선언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속죄제를 ‘죄인이받아야할형벌을무죄한제물이대신받는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익숙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레4를 읽으면 강조점이 상당히 달라집니다. 제물의 죽음과 피를 단순한 형벌의 이전으로 읽기보다 ‘인간을악과거짓에서정결하게하시는주님의구원역사’로 읽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임의로 속죄제의 뜻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9(출29:14)는 속죄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매우 직접적으로 설명합니다. 그것은 ‘악과거짓으로부터의정결’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설명에서 레4:3, 8, 14, 20, 21, 24, 25, 29, 33, 34를 직접 근거로 제시합니다.
이 한 문장은 레4를 바라보는 시선을 크게 바꿉니다. 속죄의 핵심이 ‘누가형벌을받는가?’보다 ‘인간에게서무엇이제거되는가?’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의 근본 문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화가 나셔서 누군가를 처벌해야만 용서하실 수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인간 자신이 악과 거짓 안에 있음으로써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구원하려면 실제로 악과 거짓이 물러나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의 십자가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는 주님께서 세상에서 겪으신 모든 시험의 마지막이며, 그 시험들을 통하여 지옥을 이기시고 당신의 인성을 완전히 영화롭게 하신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지옥을 정복하시고 당신의 인성을 신적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인간에게 악과 거짓을 이길 능력이 주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속죄제의 제물은 단순히 ‘하나님이죄인대신벌하신희생물’이라는 그림보다 훨씬 깊게 주님을 가리킵니다. 제사의 가장 높은 의미에는 주님의 영화가 있고, 상대적 의미에는 인간의 거듭남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악과 지옥의 세력을 이기신 그 신적 역사가 인간에게 적용될 때 인간 안에서는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과 거듭남으로 나타납니다.
피의 의미도 여기에서 달라집니다. 피는 단순히 ‘누군가죽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AC.4735는 구약의 성별·속죄·정결 의식에 사용된 피가 주님의 신적 인간에게서 발출하는 거룩한 것, 곧 신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하며 레4:6-7, 17-18, 25, 30, 34를 직접 열거합니다.
왜 진리가 속죄에서 중요할까요? 진리가 인간에게 악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없으면 인간은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진리는 단순히 죄를 폭로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인간을 선으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AC.2832(창22:13)는 레4의 제단 뿔에 피를 바르는 규정을 직접 인용하면서 모든 속죄와 정결이 진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이유는 진리가 선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사함’도 단순한 법정 선언으로 축소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악을 계속 사랑하고 붙들면서도 다른 누군가가 형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악을 없는 것으로 보아 주신다는 식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은 인간을 실제로 구원하기 원하시며, 그것은 인간이 악에서 돌이켜 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포함합니다.
물론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신을 정결하게 할 수 없습니다. 레4의 피를 휘장 앞에 ‘일곱번’ 뿌리는 것은 바로 그것을 보여 줍니다. AC.716(창5:24)은 레4:2-3, 6을 직접 인용하면서 일곱이 거룩함을 의미하는 것은 속죄가 오직 주님에게 속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정결의 능력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아무 역할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죄를 깨달아야 하고, 인정해야 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면서 악을 강제로 제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주님의 진리에 응답할 때 악을 물러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레4의 긴 제사 절차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죄를 깨닫고, 주님 앞에 가져오고, 진리로 정결하게 되고, 악이 제거되고, 선이 회복되며, 그 결과 ‘사함을받으리라’는 선언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속죄와사함은죄의형벌을대신받는것인가,악에서정결하게되는것인가?’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분명히 후자에 중심을 둡니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의 결과가 인간에게 실제로 무엇을 이루는지를 더 깊이 묻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죄인인데도 죄인이 아닌 것으로 간주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의 지배에서 실제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속죄제의 마지막에 ‘사함을받으리라’는 말씀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함은 악을 사랑한 채 형벌만 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와 신적 선을 받아 악의 지배에서 풀려나 주님과 다시 결합되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속죄제는 바로 그 정결과 회복의 아르카나를 외적인 제사의 언어로 보여 줍니다. (SW.6레4심화2)
레위기 4장을 읽으면 현대 독자에게 가장 먼저 생기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일부러지은죄도아닌데왜속죄해야하는가?’입니다. 레4는 반복해서 ‘부지중에범하여’라고 말합니다. 제사장도, 온 회중도, 족장도, 평민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여호와의 계명을 범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지중에지은죄’라는 말은 인간에게 책임이 전혀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억지로 죄로 계산하신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인간의 영적 상태에 관한 매우 깊은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는 아직 자기가 보지 못하는 악과 거짓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생각보다 잘 모릅니다. 어떤 행동을 선한 의도에서 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훨씬 컸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바르게가르친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상대를 지배하고 싶었던 마음이 섞여 있었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지킨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의견을 사랑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까지 그 사람에게 그 악은 상당 부분 ‘부지중’에 있습니다.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악이 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미움은 내가 그것을 미움이라고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사랑이 되지 않으며, 교만은 내가 교만하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겸손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진리를 주십니다. 진리는 단지 교리를 많이 알게 하기 위한 빛이 아니라 인간 자신을 비추는 빛입니다. 그 빛이 삶에 들어오면서 어느 날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레4가 반복해서 ‘그가범한죄를깨달으면’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죄를 깨닫는 순간은 정죄의 끝이 아니라 회개의 시작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9(출29:14)는 속죄제가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레4의 속죄제 규정들을 직접 인용합니다. 따라서 속죄제의 목적은 인간을 죄책감 속에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발견된 악과 거짓에서 인간을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깨닫기전’과 ‘깨달은후’입니다. 아직 보지 못할 때와 주님께서 보여 주신 뒤의 상태는 같지 않습니다. 보지 못했던 악을 보게 된 뒤에도 그것을 붙들고 정당화한다면 이제 문제는 더 깊어집니다. 반대로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피하기 시작하면 거듭남이 진행됩니다.
그래서 영적 성장은 ‘나는이제죄가별로없다’는 느낌으로 측정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더 미세한 동기와 욕망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퇴보의 표시가 아닙니다. 더 밝은 빛이 들어왔기 때문에 전에는 보이지 않던 먼지가 보이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발견했을 때 낙심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왜아직도이런것이내안에있는가?’라는 자기혐오가 아니라 ‘주님께서이것을왜지금보여주셨는가?’입니다. 보여 주셨다면 피할 수 있도록 보여 주신 것입니다.
레4의 속죄제는 바로 그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은 먼저 죄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깨닫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진리를 통하여 정결하게 되고 악이 물러나며, 마침내 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부지중에지은죄도왜속죄가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 때문에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직 알지 못하는 악에서도 우리를 건져 내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죄를 보게 하시는 것은 정죄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말씀의 빛에서 보게 되는 순간, 거듭남의 새로운 문이 열립니다. (SW.6레4심화1)
레위기 4장에 들어서면 제사의 분위기가 크게 달라집니다. 레1의 번제에서는 사랑의 선으로부터 주님께 드리는 예배를 보았고, 레2의 소제에서는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삶의 예물이 되는 모습을 보았으며, 레3의 화목제에서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통하여 주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결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레4에서는 처음부터 ‘죄’가 전면에 등장합니다. ‘누구든지여호와의계명중하나라도그릇범하였으되.’ 그리고 이 한 장에서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 이스라엘 온 회중, 족장, 평민 한 사람의 경우를 차례로 다룹니다.
그렇다면 속죄제는 무엇을 표상할까요? 이 문제에서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이 매우 직접적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9(출29:14)는 ‘속죄제’를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이라고 설명하면서, 바로 그 근거로 레4:3, 8, 14, 20, 21, 24, 25, 29, 33, 34를 직접 열거합니다. 따라서 레4를 읽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처음부터 분명합니다. 속죄제는 단순히 형벌을 면제받기 위한 제사가 아니라 ‘악과거짓으로부터인간이정결하게되는것’을 표상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의 죄는 어떤 법적 장부에 기록된 항목만이 아닙니다. 죄는 인간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이며, 그것이 인간을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따라서 구원은 죄의 기록만 지워지는 일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 안의 악과 거짓이 물러나고, 그 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받아들여지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AC.10122(출29:36)는 속죄제가 ‘자연적인간안의악과거기에서나오는거짓을계속해서제거하는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인간 안의 악과 거짓은 완전히 없어져 인간 자신의 본성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물러나 있게 된다고 덧붙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에서 말하는 정결입니다.
레4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부지중에’ 범한 죄입니다. 제사장도, 온 회중도, 족장도, 평민도 처음에는 자신이 범한 것을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족장과 평민의 경우 특별히 ‘그가범한죄를누가그에게깨우쳐주면’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악을 회개할 수 없습니다. 먼저 악이 악이라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말씀의 진리가 인간의 삶을 비추면서 이전에는 당연하게 여기던 생각과 욕망과 행동이 주님의 질서에 어긋난다는 것을 깨닫게 할 때 비로소 실제적인 회개가 시작됩니다.
따라서 ‘죄를깨닫는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우리는 흔히 죄책감이 없는 상태를 평안이라고 생각하지만,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보지 못하던 악을 보게 되는 것이 주님께서 인간을 정결하게 하시는 시작일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읽다가 내 안의 교만을 발견하고, 어떤 관계를 돌아보다가 내가 품어 온 미움을 발견하며, 선을 행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안에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섞여 있었음을 발견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불편하지만 바로 그 발견에서 회개의 문이 열립니다.
흥미롭게도 레4에서는 죄를 범한 사람의 위치에 따라 제물과 피의 처리 방식이 달라집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했을 때와 온 회중이 범죄했을 때에는 수송아지를 드리고, 그 피를 회막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고 향단 뿔들에 바릅니다. 반면 족장이나 평민 한 사람이 범죄했을 때에는 피를 회막 안으로 가져가지 않고 번제단 뿔에 바릅니다. 이 차이는 우연한 의식상의 변형이 아닙니다. 대표교회의 모든 세부에는 서로 다른 영적 상태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지나치게 빨리 ‘제사장=이것,회중=저것,족장=이것,평민=저것’이라고 세밀한 상응을 만들어 내지는 않겠습니다. 현재 확보한 원전이 확실하게 보여 주는 핵심은 죄와 정결이 인간의 서로 다른 차원에 영향을 미치며, 그에 따라 정결의 표상도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특히 제사장과 온 회중의 경우 피가 성소 깊숙이 들어간다는 사실은 그 죄의 영향이 예배와 교회의 더 내적인 차원에까지 미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제사장은 수송아지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 성소의 휘장 앞에 ‘일곱번’ 뿌립니다. ‘일곱’은 말씀에서 거룩한 것을 의미합니다. AC.716(창5:24)은 바로 레4:2-3, 6의 속죄제를 인용하면서, 피를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도록 한 것은 속죄가 오직 주님에게 속하며 따라서 거룩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기 죄를 씻는 것이 아닙니다. 정결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여기서 휘장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AC.9670(출26:31)은 성막의 휘장이 지성소와 성소 사이를 나누면서 동시에 이어 주는 ‘결합의중간것’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지성소가 가장 내적인 천국과 주님을 향한 사랑의 선을, 그 바깥 성소가 영적 천국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의 선을 표상한다면 휘장은 그 둘을 이어 주는 중간입니다. 따라서 레4에서 피가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려지는 장면은 정결하게 하는 신적 진리가 인간의 내적 삶 깊은 곳까지 미치는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어 피는 향단의 뿔에 발라집니다. 이것 역시 매우 분명한 상응이 있습니다. AC.2832(창22:13)는 ‘뿔’이 선에서 나오는 진리의 능력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며, 바로 레4:3, 7의 제사장 속죄제와 레4:22, 25의 족장 속죄제, 레4:27, 30, 34의 개인 속죄제를 직접 인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성별과 정결과 속죄가 진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진리가선으로인도하기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악은 막연한 종교적 감정으로 제거되지 않습니다. ‘나는죄인입니다’라고 느끼는 것만으로는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진리가 필요합니다. 말씀의 진리가 ‘이것은악이다’, ‘이생각은주님의질서와맞지않는다’, ‘이행동은이웃을해친다’고 구체적으로 보여 줄 때 인간은 비로소 악과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단의 뿔, 곧 ‘선에서나오는진리의능력’에 피가 발라지는 장면은 속죄와 정결에서 진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줍니다.
‘계시록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316(계5:6)역시 레4:7, 25, 30, 34를 직접 인용하면서, 속죄와 정결이 제단의 뿔에서 이루어진 이유는 모든 속죄와 정결이 ‘선에서나오는진리’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향단 자체는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가 주님께 받아들여지고 높여지는 것을 표상하고, 그 뿔은 그 선에서 나오는 진리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레4의 피는 단순히 죽음의 형벌을 대신 치렀다는 표지로만 읽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피의 긍정적이고 가장 깊은 의미는 주님의 신적 인간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입니다. AC.4735는 구약의 성별과 속죄와 정결에서 피가 사용된 수많은 경우 가운데 레4:6-7, 17-18, 25, 30, 34도 직접 열거하면서, 피가 주님의 신적 인간에게서 나오는 거룩한 것, 곧 신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제 레3에서 살펴보았던 ‘기름’이 다시 등장합니다. 속죄제에서도 내장의 기름, 콩팥의 기름, 간에 덮인 꺼풀을 떼어 번제단 위에서 불사릅니다. 레3에서 확인했듯 기름은 선을 표상합니다. 이것은 속죄가 악을 찾아내고 제거하는 부정적인 과정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악과 거짓을 물러나게 하신 뒤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주십니다. 정결의 목적은 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채워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교리가 아주 중요합니다. 거듭남은 ‘악을하지않는사람’이 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도둑질하지 않는 것에서 정직으로, 미워하지 않는 것에서 체어리티로, 거짓말하지 않는 것에서 진실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악을 피하는 것은 선이 들어올 자리를 만드는 것이며, 그 자리에 주님께서 선을 심으십니다. 그래서 속죄제에서도 기름은 여전히 제단의 불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온 회중을 위한 수송아지의 나머지는 전혀 다른 처리를 받습니다. 가죽과 고기와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과 똥까지 ‘송아지의전체’를 진영 밖 정결한 곳으로 가져가 불사릅니다. 이것 역시 매우 강한 원전 근거가 있습니다. AC.10038(출29:14)은 이 수송아지의 살과 가죽과 똥을 진영 밖에서 불사르는 것이 그것들이 표상하는 악들을 지옥으로 내보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진영’은 천국과 교회를 표상하므로 ‘진영밖’은 천국과 교회가 아닌 곳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속죄의 또 하나의 중요한 면을 봅니다. 악은 거룩하게 만들어 제단에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악은 악으로 인식되어 물러나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악을 선으로 변장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분리하여 제거하십니다. 반면 그 인간 안에서 주님께 속한 선은 보존되고 제단으로 올라갑니다. 그래서 같은 수송아지 안에서도 ‘기름’은 제단 위에서 불살라지고, 악을 표상하는 나머지는 진영 밖으로 나갑니다.
이것이 실제 회개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악을 설명하고 합리화합니다. ‘성격이원래그렇다’, ‘상대가먼저그렇게했다’, ‘다들그렇게산다’, ‘그정도는죄가아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악을 드러냈을 때 필요한 것은 악을 자기 안에 계속 보관하면서 종교적으로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진영 밖으로 내보내는 것입니다. 악을 죄로 인정하고 피하며, 주님께 그것을 제거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레4의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죄를 범한 사람이 누구이든 속죄의 길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도 죄를 범할 수 있고, 온 회중도 잘못될 수 있으며, 족장도, 평민 한 사람도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직분이 높다고 죄에서 자유로운 것도 아니고, 공동체 전체가 동의한다고 그것이 반드시 진리인 것도 아니며, 평범한 개인의 죄가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말씀의 진리는 모든 사람을 비춥니다.
동시에 각 사람에게 요구되는 제물이 다릅니다. 제사장과 온 회중은 수송아지, 족장은 숫염소, 평민은 암염소 또는 암양을 드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제사에 사용되는 서로 다른 동물이 서로 다른 선과 진리의 상태를 표상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각 동물을 레4의 네 계층에 기계적으로 대응시켜 세부 의미를 만들어 내지는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똑같은 외적 방식으로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상태와 책임에 맞게 정결의 길을 마련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마지막에는 반복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제사장이그를위하여속죄한즉그가사함을받으리라.’ 여기서 ‘사함’을 단순히 하나님께서 장부에서 죄목을 지워 주시는 것으로만 이해하면 레4전체의 긴 정결 의식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속죄제가 표상하는 것은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입니다. 따라서 사함은 악을 붙들고 있으면서 법적 선언만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진리를 받아 악에서 돌이킬 때 주님께서 그 악을 물러나게 하시고 인간을 선과 진리 안으로 이끄시는 구원의 과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레4의 영적 질서는 그래서 매우 실제적입니다. 처음에는 ‘부지중’입니다. 보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죄를 ‘깨닫습니다’. 진리가 비춥니다. 그다음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남의 것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피가 뿌려지고 제단의 뿔에 발라집니다. 신적 진리가 정결하게 하는 능력으로 역사합니다. 기름은 제단 위에서 불살라집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회복됩니다. 악에 해당하는 것은 진영 밖으로 내보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함을받으리라’는 말씀이 옵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놀라운 그림입니다. 죄를 보지 못하던 사람이 말씀의 빛에서 죄를 보고,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으로 피하며, 악과 거짓이 물러난 자리에 선과 진리를 받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4의 속죄제는 죄책감에 인간을 붙잡아 두는 제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죄를 발견한 인간에게 ‘여기에서나올길이있다’고 보여 주는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레4를 읽으며 우리가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죄인인가?’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나는지금까지보지못했던어떤악을주님께서말씀을통해보여주고계시는가?’, ‘그것을정말죄라고인정하는가?’, ‘나는그것을설명하고합리화하고있는가,아니면진영밖으로내보내려하는가?’, ‘그악이물러난자리에어떤선을주님께서심기원하시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레4에서 가장 희망적인 말은 어쩌면 ‘죄를범하지않으리라’가 아니라 ‘그가범한죄를깨달으면’일지도 모릅니다. 아직 보지 못하는 악이 있다는 사실은 두렵지만, 주님께서 그것을 보여 주시는 순간부터 정결의 길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죄를 깨닫게 하시는 진리도 주님에게서 오고, 악과 거짓을 제거하시는 능력도 주님에게서 오며, 그 자리에 선을 심으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말씀은 선언합니다. ‘제사장이그를위하여속죄한즉그가사함을받으리라.’ 이것이 속죄제 안에 감추어진 거듭남의 아르카나입니다. (SW.6레4해설)
심화
1.‘부지중에지은죄도왜속죄가필요할까?’
레위기 4장을 읽으면 현대 독자에게 가장 먼저 생기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일부러지은죄도아닌데왜속죄해야하는가?’입니다. 레4는 반복해서 ‘부지중에범하여’라고 말합니다. 제사장도, 온 회중도, 족장도, 평민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여호와의 계명을 범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지중에지은죄’라는 말은 인간에게 책임이 전혀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억지로 죄로 계산하신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인간의 영적 상태에 관한 매우 깊은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는 아직 자기가 보지 못하는 악과 거짓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생각보다 잘 모릅니다. 어떤 행동을 선한 의도에서 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훨씬 컸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바르게가르친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상대를 지배하고 싶었던 마음이 섞여 있었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지킨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의견을 사랑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까지 그 사람에게 그 악은 상당 부분 ‘부지중’에 있습니다.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악이 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미움은 내가 그것을 미움이라고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사랑이 되지 않으며, 교만은 내가 교만하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겸손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진리를 주십니다. 진리는 단지 교리를 많이 알게 하기 위한 빛이 아니라 인간 자신을 비추는 빛입니다. 그 빛이 삶에 들어오면서 어느 날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레4가 반복해서 ‘그가범한죄를깨달으면’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죄를 깨닫는 순간은 정죄의 끝이 아니라 회개의 시작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9(출29:14)는 속죄제가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레4의 속죄제 규정들을 직접 인용합니다. 따라서 속죄제의 목적은 인간을 죄책감 속에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발견된 악과 거짓에서 인간을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깨닫기전’과 ‘깨달은후’입니다. 아직 보지 못할 때와 주님께서 보여 주신 뒤의 상태는 같지 않습니다. 보지 못했던 악을 보게 된 뒤에도 그것을 붙들고 정당화한다면 이제 문제는 더 깊어집니다. 반대로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피하기 시작하면 거듭남이 진행됩니다.
그래서 영적 성장은 ‘나는이제죄가별로없다’는 느낌으로 측정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더 미세한 동기와 욕망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퇴보의 표시가 아닙니다. 더 밝은 빛이 들어왔기 때문에 전에는 보이지 않던 먼지가 보이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발견했을 때 낙심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왜아직도이런것이내안에있는가?’라는 자기혐오가 아니라 ‘주님께서이것을왜지금보여주셨는가?’입니다. 보여 주셨다면 피할 수 있도록 보여 주신 것입니다.
레4의 속죄제는 바로 그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은 먼저 죄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깨닫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진리를 통하여 정결하게 되고 악이 물러나며, 마침내 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부지중에지은죄도왜속죄가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 때문에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직 알지 못하는 악에서도 우리를 건져 내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죄를 보게 하시는 것은 정죄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말씀의 빛에서 보게 되는 순간, 거듭남의 새로운 문이 열립니다. (SW.6레4심화1)
레위기 3장은 ‘너희는기름과피를먹지말라’는 매우 강한 명령으로 끝납니다. 더구나 이것은 한 번의 제사에만 적용되는 임시 규정이 아니라 ‘너희의모든처소에서너희대대로지킬영원한규례’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기름과 피를 특별히 먹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이 질문에는 스베덴보리가 놀랄 만큼 직접적인 답을 줍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3(출29:22)은 제사와 번제에서 모든 피를 제단에 붓고 모든 기름을 제단 위에서 불살랐던 이유를 설명하면서 ‘피’는 신적 진리를, ‘기름’은 신적 선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 레3:17의 ‘너희는기름과피를먹지말라’를 직접 인용합니다. 즉 레3마지막 절의 의미를 추측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피가 신적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상응입니다. 주님의 피 역시 가장 높은 의미에서 주님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와 관계합니다. 기름은 신적 선, 곧 신적 사랑의 선과 관계합니다. 따라서 피와 기름은 제사의 수많은 요소 가운데서도 특별히 거룩하게 구별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먹지말라’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실제 음식 규정이었지만 그 안의 영적 의미는 훨씬 깊습니다. 신적 선과 신적 진리는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생각하고 원하고 행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고유한 생명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서 proprium의 문제가 나타납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선을 행하고 나면 ‘내가했다’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진리를 깨달으면 ‘내가안다’고 생각하고 싶어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올바르게 살면 자신의 선함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신앙생활과 봉사와 체어리티까지 자기 공로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레3은 말합니다. ‘모든기름은여호와의것이니라.’ 선은 네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고 합니다. 선도 주님의 것이며 진리도 주님의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교리에서는 인간이 자유롭게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해야 합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선을 행할 힘과 진리를 볼 수 있는 빛이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모든것이주님에게서오니나는아무것도할필요가없다’고 하는 것도 잘못이고, ‘내가선을행했으니이것은내선이다’라고 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인간은 전력을 다해 선을 행하되 그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립니다. 진리를 열심히 배우고 이해하되 그 빛의 근원을 주님께 돌립니다.
그래서 기름과 피를 먹지 않는다는 규정은 매우 깊은 겸손을 가르칩니다. 겸손은 ‘나는아무가치가없다’고 자신을 깎아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겸손은 내 안의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레3의 마지막 한 절이 장 전체를 닫는 완벽한 결론이 됩니다.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내장과 콩팥과 간 주변의 기름을 떼어 제단 위에서 불사른 모든 과정이 결국 한 고백을 향합니다. ‘선은주님의것입니다.진리도주님의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인정 안에서 참된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내가 선의 주인이 되려는 욕망과 진리의 주인이 되려는 교만을 내려놓을수록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내 안에서 자유롭게 결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름과피를먹지말라’는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살아 있습니다. 선을 행하되 그 선을 먹어 자기 공로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되 그 진리를 먹어 자기 지혜의 소유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과 진리를 받아 삶으로 살되 언제나 그 근원을 주님께 돌리라는 것입니다.
레3의 마지막 고백은 그래서 아주 단순하면서도 깊습니다. ‘모든기름은여호와의것이니라.’ 내가 행한 선 가운데 참으로 선한 것은 주님에게서 왔고, 내가 깨달은 진리 가운데 참으로 진리인 것은 주님에게서 왔습니다. 이것을 마음으로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주님과의 화목과 결합을 보존하는 깊은 겸손입니다. (SW.5레3심화3)
레위기 3장을 처음 읽는 사람에게 가장 낯선 부분은 아마 제물의 내장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대목일 것입니다. ‘내장에덮인기름’, ‘내장에붙은모든기름’, ‘두콩팥과그위의기름’, ‘간에덮인꺼풀’이 소와 양과 염소의 제사에서 거의 똑같이 반복됩니다. 현대 독자에게는 굳이 성경이 이런 해부학적인 세부까지 기록해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곳에서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이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57(출29:19)은 제사와 번제의 수많은 세부 규정을 열거하면서 ‘누가조금이라도계몽된이성으로생각한다면이런세부안에천국의아르카나가감추어져있음을보지못하겠는가?’라고 묻습니다. 그는 특별히 내장의 기름, 간의 기름, 콩팥과 그 위의 기름을 제단에서 불사르는 규정을 직접 언급합니다.
먼저 기름은 선을 표상합니다. AC.10029(출29:13)는 제물의 기름을 선과 연결합니다. 그리고 제사의 문맥에서는 인간의 자연적 또는 겉 사람 안에 받아들여져 진리와 결합할 수 있도록 마련된 선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름을 요구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동물의 가장 좋은 지방 부위를 요구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 안의 선이 그 근원인 주님께 돌려지는 것을 표상합니다.
그런데 기름의 위치에 따라 의미가 더 세밀해집니다. AC.10072(출29:22)는 ‘내장을덮은기름’을 ‘가장낮은것들안에있는선’이라고 설명합니다. 내장은 인간의 가장 낮고 바깥쪽 자연적 삶과 관계합니다. 그러므로 내장의 기름은 주님의 선이 인간의 고상한 종교적 생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온 상태를 보여 줍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생각하면 이것이 얼마나 실제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는 경건하지만 집에 돌아가면 가족에게 거칠 수 있습니다. 교리는 정확히 설명하면서 돈 문제에서는 자기 이익만 좇을 수 있습니다. 사랑과 체어리티를 말하면서 운전할 때나 인터넷에서 다른 사람에게 분노를 쏟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영역들이 바로 우리의 자연적 삶의 ‘낮은곳’입니다. 거듭남은 이런 곳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간에 덮인 꺼풀은 또 다른 층위를 보여 줍니다. AC.10073(출29:22)은 이것을 ‘정결하게된자연적인간의내적선’이라고 설명합니다. 간은 피를 정화하는 기관이므로 상응에서도 정결과 관계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뿐 아니라 그 행동을 낳는 자연적 인간 안쪽의 정서와 동기까지 정결하게 하십니다.
콩팥은 더욱 흥미롭습니다. AC.10074(출29:22)는 콩팥을 ‘정결하게된자연적인간의내적진리’와 연결하고, 그 위의 기름을 그 진리에 속한 선과 연결합니다. 그리고 AC.10032은 콩팥이 몸 안에서 걸러 내고 정화하는 기능을 하는 것처럼 영적으로는 ‘살피고,정결하게하고,바로잡는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주님께서 ‘콩팥과마음’을 살피신다는 식의 표현이 등장합니다. 마음이 사랑의 선과 관계한다면 콩팥은 인간 안의 진리를 살피고 분별하는 것과 관계합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만이 아니라 그 행동 속에 어떤 진리와 어떤 동기가 있었는지가 주님 앞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제 레3의 장면을 다시 바라보면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제사장이 내장과 콩팥과 간 주변의 기름을 하나하나 떼어내는 장면은 단순한 도축 과정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연적 삶의 가장 깊고 낮은 곳까지 주님의 선과 진리가 들어가 살피고, 정결하게 하고, 바로잡는 거듭남의 과정을 표상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정결하게 된 것들이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제단 위의 불로 올라간다는 점입니다. 자연적 인간 자체를 없애 버리는 것이 거듭남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과 감각과 일상생활과 직업과 인간관계를 버리고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정결하게 되어 주님의 사랑을 섬기는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래서 레3의 반복은 오히려 아름답습니다. ‘내장의기름도,간의꺼풀도,콩팥과그위의기름도.’ 주님께서는 인간의 어느 한 부분만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보여 드리는 종교적 모습만이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의 생각과 욕망과 습관까지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화목은 표면적인 평온이 아닙니다. 인간의 깊은 곳과 낮은 곳까지 선과 진리가 정결하게 되고 서로 결합하여, 속과 겉이 함께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3의 낯선 내장 규정은 오히려 매우 실제적인 거듭남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겉’만 고치시는 분이 아니라 가장 깊고 가장 낮은 곳까지 정결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SW.5레3심화2)
‘화목제’라는 이름을 들으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사이가나빠진인간이제물을드려하나님과다시사이좋게되는제사’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더 강하게 표현하면 인간의 죄 때문에 분노하신 하나님께 제물을 드려 그분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제사처럼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391(출24:5)은 이스라엘 백성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장면을 해설하면서, 이것이 ‘선으로부터,그리고선에서나오는진리로부터드리는주님에대한예배’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번제가 특별히 사랑의 선으로부터 드리는 예배를 의미한다면, 제사는 선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로부터 드리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화목제의 중심에도 선과 진리가 함께 있습니다.
레3의 의식 자체가 이것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제물의 피는 제단 사방에 뿌려지고 기름은 제단 위에서 불살라집니다. AC.10033(출29:22)은 피가 신적 진리를, 기름이 신적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화목제의 중심에는 ‘신적진리와신적선’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은 무엇일까요? 하나님 쪽에서 인간을 미워하시다가 제물을 보고 마음을 바꾸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변해야 하는 쪽은 인간입니다. 인간 안의 악과 거짓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그 결과 인간 스스로 주님과의 결합에서 멀어집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진리를 통해 인간에게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를 보여 주십니다. 인간이 그 진리에 따라 악을 죄로 여겨 피하기 시작하면 주님께서 선을 심으실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진리가 선과 결합되면서 인간의 의지와 이해, 사랑과 신앙,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점차 하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화목’은 단순한 감정적 관계 회복보다 훨씬 깊습니다. 그것은 ‘결합’입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에게 받아들여지고,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가 서로 결합함으로써 인간이 주님과 결합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화목제에서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는 행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AC.10047(출29:16)은 피를 제단 둘레에 뿌리는 것이 신적 진리와 신적 선의 결합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의 거듭남 역시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시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화목제를 ‘하나님의분노를달래는제사’로만 읽으면 레3의 가장 깊은 아름다움을 놓칠 수 있습니다. 화목제는 오히려 주님께서 인간을 다시 당신과 결합시키시는 거듭남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인간 안에서 악과 거짓이 물러가고, 주님의 진리가 받아들여지고, 그 진리가 선과 결합하며, 그 선이 삶의 가장 바깥쪽까지 내려올 때 인간은 점점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 결과가 ‘평화’입니다. 성경의 평화는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인간의 내면에서 서로 싸우던 것들이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와 하나가 되는 상태와 깊이 관계합니다. 진리와 선이 하나가 되고,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의 방향을 향하며, 인간의 뜻이 점차 주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게 될 때 평화가 옵니다.
따라서 화목제는 ‘내가무엇을드려하나님을내편으로만들것인가?’를 묻는 제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내안에서무엇을바로잡으셔야내가다시그분의생명을온전히받을수있는가?’를 묻게 하는 제사입니다.
화목은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에 의해 변화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진리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고, 그 진리를 선과 결합시키시며, 마침내 우리의 사랑과 생각과 행동이 하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게 하실 때 우리는 주님과의 결합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화목제의 깊은 중심입니다. (SW.5레3심화1)
레위기 3장에 들어서면 세 번째 제사인 ‘화목제’가 등장합니다. 레1에서는 번제를, 레2에서는 소제를 살펴보았습니다. 번제에서는 제물 전체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졌고, 소제에서는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더하여 일부를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나머지를 제사장들이 받았습니다. 이제 화목제에서는 다시 동물과 피가 등장하지만, 번제와는 제사의 구조가 다릅니다. 제물 전체를 불사르지 않고 특별히 ‘기름’을 떼어 제단 위에서 불사릅니다. 그리고 장 마지막에는 ‘너희는기름과피를먹지말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레3을 여는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는 ‘왜화목제에서는피와기름이이토록중요하게다루어지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제사에 사용되는 짐승들이 아무 의미 없이 선택된 것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823(창15:9)은 소, 염소, 숫양, 어린양,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 등이 각각 고유한 의미를 가졌으며, 바로 그 때문에 한 종류를 다른 종류로 임의로 바꾸어 드릴 수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일상의 번제, 안식일과 절기의 제사, 자원제와 서원제, 화목제, 속죄와 정결의 제사마다 특정 동물이 정해져 있었던 것은 각각 다른 천적·영적 상태를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레3에서는 소와 양과 염소가 차례로 등장합니다. 레1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소 떼에 속한 동물은 겉 또는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정서를, 양 떼에 속한 동물은 속 또는 영적 인간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정서를 표상합니다. AC.9391(출24:5)은 소와 송아지가 자연적 인간의 선과 관계하고, 양과 어린양 등이 속 또는 영적 인간의 선과 관계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레3의 화목제 역시 인간의 어느 한 부분만을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결합은 속 사람에서만 이루어지고 겉 사람은 그대로 남는 일이 아니라, 속과 겉이 함께 질서 안으로 들어오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화목제에서는 ‘수컷이나암컷이나’ 드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번제에서는 수컷을 요구했지만 화목제에서는 둘 다 허용됩니다. 이것이 의미 있는 차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현재 확보한 직접 원전만으로 레3의 수컷과 암컷을 각각 세밀하게 나누어 단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우리가 이미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제물의 종류와 성별까지도 대표교회의 제사에서 아무 의미 없는 규정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원전이 직접 밝혀 주는 데까지만 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그 머리에 안수합니다. 레1에서 살펴본 것처럼 안수는 단순히 손을 얹는 의식이 아닙니다. AC.10023(출29:10)은 머리에 손을 얹는 것이 전달과 받아들임, 곧 커뮤니케이션과 리셉션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머리는 전체를 대표하기 때문에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행위에는 그 제사가 예배자의 전 존재와 관계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화목은 바깥에서 어떤 의식 하나를 행함으로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일과 관계합니다.
제물을 잡으면 제사장들이 그 피를 ‘제단사방에’ 뿌립니다. 피는 신적 진리를 표상합니다. 그리고 제단은 주님의 신적 선과 그분께 드리는 예배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는 것은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바로 여기에서 화목제의 깊은 중심이 드러납니다. AC.10047(출29:16)은 제단 둘레에 피를 뿌리는 것이 신적 선과 신적 진리의 결합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며, 인간의 거듭남 역시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를 결합하시는 과정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화목’을 단순히 ‘하나님께화가나셨는데제물을드려마음을풀어드린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교리에서 주님과 인간의 결합을 방해하는 것은 주님 편의 분노가 아니라 인간 안의 악과 거짓입니다. 인간이 진리를 받아 악을 피하고, 그 진리가 선과 결합될 때 인간은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더 온전히 받을 수 있게 됩니다. 화목제의 피가 제단 사방에 뿌려지는 장면은 바로 이 ‘진리와선의결합’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런데 레3에서 특별히 반복되는 것은 ‘기름’입니다. 소를 드릴 때도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을 떼어내고, 양을 드릴 때도 기름진 꼬리와 내장의 기름을 떼어내며, 염소를 드릴 때도 같은 명령이 반복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마침내 ‘모든기름은여호와의것이니라’고 선언합니다. 왜 기름이 이토록 중요할까요?
AC.10033(출29:22)은 이 문제에 대해 매우 분명한 답을 줍니다. 제사의 ‘피’는 신적 진리를, ‘기름’은 신적 선을 표상합니다. 그래서 제사의 모든 피가 제단에 드려지고 모든 기름이 제단 위에서 불살라졌습니다. 레3의 기름은 단순히 고대인들이 가장 좋은 부위를 하나님께 바쳤다는 정도를 넘어섭니다. 기름은 선을,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적 선을 표상하기 때문에 여호와께 속한 것으로 구별된 것입니다.
여기서 레3의 구조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피와 기름이 함께 있습니다. 신적 진리와 신적 선입니다. 피는 제단 사방에 뿌려지고 기름은 제단의 불에 올라갑니다. 진리와 선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레2에서도 고운 가루와 기름을 통해 선과 진리의 결합을 보았는데, 레3에서는 그것이 피와 기름이라는 더욱 강렬한 표상으로 다시 나타납니다. 말씀의 진리는 인간을 선으로 이끌기 위해 주어지고, 선은 진리를 통하여 자신의 올바른 형태와 방향을 얻습니다. 거듭남은 이 둘이 인간 안에서 하나가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냥 ‘기름을떼어내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어느 부위의 기름인지 매우 세밀하게 지정하신다는 점입니다. ‘내장에덮인기름’, ‘내장에붙은모든기름’, ‘두콩팥과그위의기름’, ‘간에덮인꺼풀’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얼핏 보면 현대 독자에게 가장 낯설고 불필요해 보이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세부에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아르카나가 들어 있습니다.
AC.10072(출29:22)는 내장을 덮는 기름이 ‘가장낮은것들안에있는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내장은 자연적 인간의 가장 낮은 것들과 관계하고, 그 위의 기름은 그 가장 낮은 차원까지 내려와 있는 선을 표상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이 인간의 고상한 종교적 생각에만 머물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말투, 습관, 돈을 쓰는 방식, 일상의 관계, 몸과 감각의 즐거움을 다루는 방식처럼 삶의 가장 바깥쪽까지 주님의 선이 내려와야 합니다.
간에 덮인 꺼풀도 의미가 있습니다. AC.10073(출29:22)은 그것을 ‘정결하게된자연적인간의내적선’과 연결합니다. 간이 몸에서 피를 정화하는 기능을 하는 것처럼 이 표상에도 정결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외적인 행동만 조금 고치시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인간 안쪽에 숨어 있는 동기와 정서까지 정결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이 있습니다. AC.10074(출29:22)는 콩팥이 ‘정결하게된자연적인간의내적진리’를, 그 위의 기름은 그 진리에 속한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AC.10032은 콩팥의 기능에서 그 상응을 설명하면서, 콩팥은 살피고 정결하게 하고 바로잡는 진리와 관계한다고 말합니다. 말씀에서도 주님께서 ‘마음과뜻을살피신다’고 할 때 원문에서 콩팥이 등장하는 경우가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레3의 제단 위에는 단순히 동물의 지방 조직이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상응의 언어로 보면 인간의 자연적 삶 가장 깊은 곳까지 선과 진리가 들어와 정결하게 되고, 그 정결해진 선과 진리가 사랑의 불 안에서 주님께 돌려지는 모습입니다. 주님과의 화목은 인간의 일부만 주님께 드리고 나머지는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상태가 아닙니다. 속 사람에서 시작된 주님의 질서가 자연적 인간의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오는 것입니다.
양의 화목제에서는 한 가지 독특한 것이 더 등장합니다. ‘미골에서벤기름진꼬리’입니다. 이 역시 아무 의미 없는 세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제사의 세세한 부위까지 천국의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현재 확보한 직접 원전만으로 레3의 ‘기름진꼬리’ 자체의 의미를 충분히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기름=선’이라는 확실한 원칙을 넘어 꼬리의 세부 의미를 임의로 만들어 내지 않겠습니다.
제사장은 이 기름들을 제단 위의 ‘번제물위에서’ 불사릅니다. 이 표현도 중요합니다. 화목제가 번제와 완전히 별개의 세계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제단 위에 있는 번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번제가 사랑의 선으로부터 드리는 예배를 표상한다면, 화목제 역시 그 사랑의 질서 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진정한 화목과 결합은 사랑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본문은 이것을 ‘여호와께드리는음식’이라고도 부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실제로 음식을 필요로 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제사와 번제가 ‘떡’ 또는 음식이라고 불린 이유가 그 안에서 표상된 천적 선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AC.10079(출29:23)는 떡이 사랑의 선을 의미하며, 제사와 번제 역시 이러한 이유로 ‘떡’이라 불렸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고기와 지방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표상하는 사랑의 선과 그 선에서 나오는 참된 예배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향기로운냄새’가 됩니다. 레1과 레2에서 반복해서 만났던 표현입니다. 향기로운 냄새는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예배를 표상합니다. 주님께서 동물의 타는 냄새를 좋아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가 주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진다는 뜻입니다. 결국 레1의 번제, 레2의 소제, 레3의 화목제는 서로 다른 제사이면서도 모두 한곳을 향합니다.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되고, 그 사람의 삶이 사랑에서 나오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17절은 이 모든 것을 하나의 강력한 명령으로 마무리합니다. ‘너희는기름과피를먹지말라.’ AC.10033은 바로 레3:17을 직접 인용하면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피는 신적 진리를, 기름은 신적 선을 표상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취하여 먹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신적 선과 신적 진리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영적 삶에 매우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내가 어떤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내가알아냈다’고 생각하고, 어떤 선을 행했다고 해서 ‘내가선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영적으로 피와 기름을 자기 것으로 취하려는 위험에 빠집니다. 인간은 선과 진리를 받아 자유롭게 살아야 하지만 그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선도 주님의 것이고 진리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레3은 ‘모든기름은여호와의것이니라’고 선언합니다.
화목제의 핵심은 결국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신적 진리를 주시고, 그 진리를 통해 인간을 정결하게 하시며, 인간 안의 진리와 선을 결합시키십니다. 그 결합이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높은 곳에서 자연적 삶의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옵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선과 진리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심을 인정합니다. 바로 그때 주님과 인간 사이에 참된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레3앞에서 우리는 ‘나는하나님과화목한가?’라는 질문만 할 것이 아니라 조금 더 깊이 물어야 합니다. ‘내가알고있는진리가선과결합되어있는가?’, ‘내자연적삶의가장낮은부분까지주님의선과진리가내려와있는가?’, ‘나는내가행하는선을나의공로로여기고있지는않은가?’, ‘내가아는진리를나의지혜로여기고있지는않은가?’입니다.
레1에서 우리는 전부를 불살라 주님께 드리는 번제를 보았습니다. 레2에서는 고운 가루와 기름이 하나가 되는 소제를 보았습니다. 이제 레3에서는 피와 기름, 곧 진리와 선이 함께 제단에 드려지는 화목제를 봅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자기에게서 선과 진리를 찾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욱 깊이 인정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레3의 마지막 선언은 화목제 전체를 꿰뚫는 고백이 됩니다. ‘모든기름은여호와의것이니라.’ 우리의 선도 주님의 것이고, 우리의 진리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 선과 진리가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우리의 삶은 주님과 결합하는 화목의 삶이 됩니다. (SW.5레3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