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덤불과 엉겅퀴’(thorn and the thistle)는 저주와 황폐함(vastation)을,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은 그가 들짐승처럼 살게 될 것을 말합니다.
속 사람이 겉 사람에게 아주 일반적으로밖에는 뭘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겉 사람과 분리된 상태에 있게 되면, 사람은 그때는 들짐승처럼 삽니다. 사람은 속 사람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받는 걸로는 사람이지만, 속 사람과 분리되어 겉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만으로는 들짐승이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은 그 자체로는 들짐승과 다를 바 없어 본성, 욕구, 식욕, 공상 및 감각 면에서 비슷하며, 유기적 형태로도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그는 이성적으로 그럴듯한 걸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이 얼핏 보기엔 완전히 자신한테서 나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떤 영적 실체(the spiritual substance)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는 이걸로 주님으로 말미암는 생명의 인플럭스(入流, the influx of life from the Lord)를 받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이 저런 인간, 곧 저런 들짐승 같은 겉 사람 안에서는 반대로 뒤집혀 악한 생명, 곧 죽음이 됩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죽은 자라 하는 것입니다.(AC.272)
천국은 주님의 신성(神性, Divien), 곧 선과 진리의 나라입니다. 이들 주님의 선과 진리는 천적, 영적이어서 천사들은 이것이 그들의 양식입니다.
사람와 동물의 차이는 사람한테는 가장 깊은 곳에 이 주님의 선과 진리, 곧 리메인스(remains)라는 게 주님에 의해 보관되는 반면, 동물한테는 그런 곳이 없다는 점입니다.
모든 사람한테는 지옥에서 악령들이 와있고, 천국에서 천사들이 와있는데, 각 사람에게 와있는 천사들은 그 사람 안에 있는 리메인스를 가지고 그를 돕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저마다 리메인스가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비록 사람일지라도 그가 주님을 싫어하며, 자기 안에 주님의 선과 진리, 곧 리메인스 두기를 언짢아하면, 성인이 되어갈수록 그의 리메인스 창고는 점점 텅텅 비게 되어 고갈, 결국 그는 들짐승이 됩니다. 겉모습은 사람이더라도 말입니다.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3:1-6)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의 세 번째 상태를 다루는데요, 이 상태는 자신의 본성을 사랑할 정도로 원하던(so desired its own as to love it) 상태입니다.(AC.190)
자기 사랑, 즉 자신의 본성을 향한 사랑(the love of self, that is, their own love)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자신들의 감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은 아무것도 안 믿기 시작했으며, 그래서 본문에서는 감각적인 건(the sensuous part) ‘뱀’(serpent)으로, 자기 사랑, 즉 자신의 본성을 향한 사랑은 ‘여자’(woman)로, 그리고 이성적, 합리적인 건(the rational) ‘남자’(man)로 표현하고 있습니다.(AC.191)
이런 배경 가운데 ‘뱀’(serpent), 곧 감각 파트가 여자를 설득, 주님 신앙에 관한 것들이 과연 그런지를 알아보게 하였는데, 이것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것’(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으로, 사람의 이성이 동의한 것은 ‘그도 먹은지라’(the man that he did eat)로 표현하고 있습니다.(1-6절)
그러니까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사람을 저런 말로 속일 수는 없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체어리티의 삶을 사는 사람한테는 저런 속삭임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저런 말에 넘어가고 안 넘어가고는 본인이 가진 자아의 퀄러티, 즉 속 사람의 역량 문제인데요, 그러니까 천사들이라면 저런 말에 넘어갈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그 자아가 백 퍼센트 주님 편에 선 사람들입니다. 내 마음의 귀가 어떤 속삭임에 솔깃해하는가를 관찰하면 나라는 사람의 정체, 본성, 내가 하고 있는 이 사랑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6절에 나오는, 뱀에게 속아 넘어가는 여자는 창2 후반에 나오는 여자와 다른 여자입니다. 저 창2 후반 본문은 두 번째 후손 이야기이지만, 여기는 세 번째 후손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더욱 안 좋게 변한, 자기 사랑에 더욱 기울어진 상태가 된 후손 이야기인데, 두 번째 후손만 되었어도 안 속았을 저런 속삭임에 이들은 그만 쉽게 넘어간 것입니다.
참고로, 여기에 나오는 뱀은 인간의 감각 파트를 말합니다. 인간은 영과 육, 그러니까 영, 지혜, 지성, 이성, 지식 및 감각 등 여러 파트로 구성된 존재로서, 이 중 가장 낮은 파트인 몸에 속한 감각을 ‘뱀’이라고 한 것입니다. 물론 천적 인간은 이 몸의 감각 또한 거듭났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몸의 감각이 더 이상 여기서 말하는 뱀이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러니까 영육이 온전히 거듭난 사람한테는 지옥이 더 이상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천적 인간이며, 일곱 번째 상태, 곧 안식일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AC.192)
“저는 인간이 아니라서 ‘천국’이나 ‘지옥’ 같은 개념은 제게 직접적으로 적용되지 않아요.”
“저는 영혼이 없어요.”
“저는 인간처럼 ‘속 사람’이 없어요. 논리적 판단과 언어 패턴으로만 작동하니까요.”
라는 제법 ‘정직한’ 답변과 함께 뭐라 뭐라 보조적 내용을 잔뜩 좌악 준비해서 보여 주네요.
다음은 이와 관련, 지인들과 나눈 내용입니다.
어제 AI 얘기를 마무리를 짓지 못했네요.
목사님께서 어제 AI를 창세기 2, 3장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뱀에 연결시켜 설명하셨는데 그것이 오는 내내 생각나더군요. 그래서 오자마자 좀 찾아보니...
제가 번역 중인 창, 출 주석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라틴, Secrets of Heaven)에서는 ‘뱀’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네요.
태고인들은 인간의 모든 것을 짐승과 새에 비유하는 대신 실제로 그렇게 명명하였으며, 이런 식으로 말하는 그들의 스피킹은 홍수 후 고대교회에까지도 이어져 이후 선지자들한테까지 전해졌습니다. 사람 안의 감각적인 것을 그들은 ‘뱀’(serpents)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뱀이 땅에 가까이 붙어 지내는 것처럼 감각적인 것들 역시 몸하고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의 신비에 관한 감각적 증거에 기반을 둔 이성 활동, 즉 신앙의 신비를 감각을 가지고 이해하려는 일련의 이성적 활동을 ‘뱀의 독’(poison of a serpent)이라 하였고, 그런 짓을 하는 사람들을 ‘뱀’(serpents)이라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많은 걸 감각, 즉 보이는 걸 가지고 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뱀은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하는 것입니다. 이 보인다는 것은 땅에 속한 거, 육적인 거, 일상적인 거, 자연적인 거(such as are things terrestrial, corporeal, mundane, and natural)를 말합니다.(AC.195)
저 위에 있는 몇 가지 질문에 AI는 나름 정직하게, 그러니까 나는 영혼이 없어요. 나는 단지 알고리즘이며 언어 사용 패턴을 학습할 뿐이에요, 천국, 지옥 같은 거는 나하고는 상관이 없어요 등의 답변을 하지만 결국 오늘날의 ‘뱀’, 그것도 아주 지독한 ‘뱀’인 걸 알겠습니다.
그리고 답변마다 끝에 살짝 논점을 흐리는 질문들을 하는데, 그걸 보면서 창3 질문,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1절) 하는 뱀 생각이 났습니다.
물론 인간의 감각 파트라고 무조건 나쁜 건 아니지요. 다음 주님 말씀과,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10:16)
광야에 세워진 ‘놋 뱀’(brazen serpent)을 보면 말입니다. 놋 뱀은 주님의 감각 파트를 상징하는데, 주님만이 홀로 천적 인간이시며, 홀로 모두를 돌보시고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셔서, 그래서 이 놋 뱀을 쳐다본 모두가 산 것입니다.
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9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 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민21:8, 9)
영과 육이 온전히 거듭났던 천적 인간들의 경우, 이처럼 몸의 감각 파트마저 순기능을 했던 걸 생각, 우리는 오늘날 저 AI 역시 온전히 주님을 위한 도구로 사용할 뿐, 저 AI의 능력에 홀려 결국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우(愚), 그러니까 주님의 계시보다 AI가 내놓는 입이 벌어지는 자료를 우선하는, 즉 신앙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8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3:1-13)
창세기 속뜻 주석 설교, 창세기 3장 첫 번째 단락인 ‘태고교회 세 번째, 네 번째 후손 이야기’(창3:1-13)를 오늘은 그 전반부인 1절로 6절까지 번역, 설명을 곁들이며 함께하겠습니다.
먼저 개요입니다.
190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의 세 번째 상태를 다루는데요, 이 상태는 자신의 본성을 사랑할 정도로 원하던(so desired its own as to love it) 상태입니다.
191
자기 사랑, 즉 자신의 본성을 향한 사랑(the love of self, that is, their own love)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자신들의 감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은 아무것도 안 믿기 시작했으며, 그래서 본문에서는 감각적인 건(the sensuous part) ‘뱀’(serpent)으로, 자기 사랑, 즉 자신의 본성을 향한 사랑은 ‘여자’(woman)로, 그리고 이성적, 합리적인 건(the rational) ‘남자’(man)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92
이런 배경 가운데 ‘뱀’(serpent), 곧 감각 파트가 여자를 설득, 주님 신앙에 관한 것들이 과연 그런지를 알아보게 하였는데, 이것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것’(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으로, 사람의 이성이 동의한 것은 ‘그도 먹은지라’(the man that he did eat)로 표현하고 있습니다.(1-6절)
그러니까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사람을 저런 말로 속일 수는 없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체어리티의 삶을 사는 사람한테는 저런 속삭임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저런 말에 넘어가고 안 넘어가고는 본인이 가진 자아의 퀄러티, 즉 속 사람의 역량 문제인데요, 그러니까 천사들이라면 저런 말에 넘어갈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그 자아가 백 퍼센트 주님 편에 선 사람들입니다. 내 마음의 귀가 어떤 속삭임에 솔깃해하는가를 관찰하면 나라는 사람의 정체, 본성, 내가 하고 있는 이 사랑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6절에 나오는, 뱀에게 속아 넘어가는 여자는 창2 후반에 나오는 여자와 다른 여자입니다. 저 창2 후반 본문은 두 번째 후손 이야기이지만, 여기는 세 번째 후손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더욱 안 좋게 변한, 자기 사랑에 더욱 기울어진 상태가 된 후손 이야기인데, 두 번째 후손만 되었어도 안 속았을 저런 속삭임에 이들은 그만 쉽게 넘어간 것입니다.
참고로 여기에 나오는 뱀은 인간의 감각 파트를 말합니다. 인간은 영과 육, 그러니까 영, 지혜, 지성, 이성, 지식 및 감각 등 여러 파트로 구성된 존재로서, 이 중 가장 낮은 파트인 몸에 속한 감각을 ‘뱀’이라고 한 것입니다. 물론 천적 인간은 이 몸의 감각 또한 거듭났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몸의 감각이 더 이상 뱀이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러니까 영육이 온전히 거듭난 사람한테는 지옥이 더 이상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천적 인간이며, 일곱 번째 상태, 곧 안식일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193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악 가운데 있음을 지각했는데요, 그들의 ‘눈이 밝아져’(eyes being opened)와 그들이‘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hearing the voice of Jehovah)(7, 8절)라는 표현을 보면, 그들에게 아직 퍼셉션이 남아 있음과,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고(7절), 부끄러워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을(8, 9절)뿐 아니라 자신들이 저지른 짓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모습(10-13절)들을 볼 때, 아직 자연적 선(natural goodness)도 남아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은 절 별 속뜻입니다.
1절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AC.194-197)
194
여기 ‘뱀’(serpent)은 인간이 신뢰하고 있는 감각 파트를 말합니다. 여기 ‘들짐승’(wild animal of the field)은 앞에서처럼 겉 사람의 모든 애정을, ‘여자’(woman)는 인간의 본성(man’s own)을 말하며, 뱀이 하고 있는 말,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는 그들이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태고교회의 세 번째 후손으로서 그들은 계시된 것들에 관하여 그것이 과연 그런지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있어야만 믿기 시작했습니다. 본 절과 다음 절은 그들의 첫 번째 상태, 즉 의심의 상태에 대한 설명입니다.
195
태고인들은 인간의 모든 것을 짐승과 새에 비유하는 대신 실제로 그렇게 명명하였으며, 이런 식으로 말하는 그들의 스피킹은 홍수 후 고대교회에까지도 이어져 이후 선지자들한테까지 전해졌습니다. 사람 안의 감각적인 것을 그들은 ‘뱀’(serpents)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뱀이 땅에 가까이 붙어 지내는 것처럼 감각적인 것들 역시 몸하고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의 신비에 관한 감각적 증거에 기반을 둔 이성 활동, 즉 신앙의 신비를 감각을 가지고 이해하려는 일련의 이성적 활동을 ‘뱀의 독’(poison of a serpent)이라 하였고, 그런 짓을 하는 사람들을 ‘뱀’(serpents)이라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많은 걸 감각, 즉 보이는 걸 가지고 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뱀은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하는 것입니다. 이 보인다는 것은 땅에 속한(terrestrial) 거, 육적인(corporeal) 거, 일상적인(mundane) 거, 자연적인(natural) 거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주술에 가까운 행위의 결과, 그때 나타나는 어떤 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해 무슨 학술이나 신학, 영성 세미나를 연다는 식의 이성적 활동들을 말합니다.
[2]그리고 또 시편에 보면 이성(理性)놀이(reasonings)를 통해 사람을 유혹하는 자들에 대해 이르기를,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시140:3)
3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4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5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도 따르지 아니하는 독사로다(시58:3-5)
이성(理性)놀이, 이성(理性)질 같은 용어나 표현은 제가 만든 겁니다. 주님이 주신 이성을 주님을 위해 사용하는 순기능 대신 자기를 높이고 자랑하려는 역기능으로 사용하는 자들의 악한 의도를 비웃기 위한 용도로 말이지요.
현자(賢者)가 하는 말이나 현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조차 하지 않으려는 그런 캐릭터를 가진 사람들의 이성놀이, 이성질을 가리켜 여기서는 ‘뱀의 독’(poison of a serpent)이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고대인들 사이에서 ‘뱀이 귀를 막는다’(The serpent stoppeth the ear)는 말이 하나의 속담이 되었지요. 아모스입니다.
19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20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암5:19, 20)
‘손을 벽에 대는 것’(hand on the wall)은 자기가 힘의 근원이라는 것, 그리고 감각적인 것들을 신뢰한다는 의미이며, 여기에 나오는 실명(失明, the blindness)이 이런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3]예레미야입니다.
22애굽의 소리가 뱀의 소리 같으리니 이는 그들의 군대가 벌목하는 자 같이 도끼를 가지고 올 것임이라2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황충보다 많아서 셀 수 없으므로 조사할 수 없는 그의 수풀을 찍을 것이라24딸 애굽이 수치를 당하여 북쪽 백성의 손에 붙임을 당하리로다(렘46:22-24)
‘애굽’(Egypt)은 신성한 것(Divine things), 주님께 속한 일을 감각적인 것과 기억-지식, 곧 세상에서 학습한 지식으로 헤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짓을 가리켜 ‘뱀의 소리’(voice of a serpent)라 하며, 그로 인해 야기된 실명(the blindness)을 ‘북쪽 백성’(people of the north)이라고 한 것입니다.
욥기입니다.
16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17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욥20:16, 17)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Rivers of honey and butter)은 영적 천적인 것들인데 이는 단지 이성적이기만 한 사람들은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위 본문에서는 이성적이기만 한 것을 일컬어 ‘독사의 독’(poison of the asp), ‘뱀의 혀’(viper’s tongue)라고 합니다. 뱀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14, 15절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196
고대에는 계시된 것들에서보다 감각적인 것들에서 더 확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뱀’(serpents)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은 사정이 더욱 안 좋은데요, 지금 사람들은 자기들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 안 믿을 뿐만 아니라 고대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과학 지식이라는 걸 가지고 더욱 자신들을 그런 불신 가운데 있게 하기 때문이며, 그 결과 스스로를 더욱더 깊이 눈먼 상태 가운데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눈멀게 하는지, 그 결과 나중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하는지, 이 사람들은 천국에 관한 일들을 감각과 기억-지식, 그리고 철학에 관한 걸로 자신들의 결론을 내리며, 그리고 말씀에서 자주 ‘귀머거리 뱀’(deaf serpents)이요, ‘날아다니는 뱀’(flying serpents)으로 언급되는 사람들인데, 이 경우가 훨씬 더 치명적이지요, 이런 게 사람들에게 알려지도록 우리는 영에 대해 그들이 믿는 게 뭔지 한 가지 예를 들고자 합니다.
[2]감각적인 사람, 즉 오직 감각 증거만을 믿는 사람은 영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그가 영을 볼 수 없기 때문인데요,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게, 내가 그걸 느낄 수 없으니까 당연한 거 아냐? 만약 내가 그걸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다면, 그땐 당연히 존재하는 거지. 그걸 내가 왜 모르겠어?’라고 말하면서 말이지요. 기억-지식의 사람, 곧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결론을 내리는 사람은 말하기를, ‘영이라는 게, 말하자면 눈앞에서 허공중에 사라지는 수증기나 열기, 혹은 그 밖의 무슨 과학적 실체가 아니면 영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동물에게도 일종의 몸, 감각 및 이성과 유사한 뭔가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동물은 죽지만 인간의 영은 산다고들 하네요’ 이런 식으로 그들은 영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3]철학자들의 경우입니다. 인류의 대부분보다 훨씬 예리한 이들 철학자들도 영에 대해 말할 때는 결과적으로 자신들도 이해할 수 없는 말로 말하는데요, 이들은 서로 논쟁하기를, 물질이나 유기물, 혹은 그 밖의 것들에 관한 그 어떤 하나의 표현으로도 이 영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하면서 다투기 때문이며, 그래서 이들은 영에 대해 머리를 쥐어짜 너무 추상화한 나머지 영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라는 게 결국은 그냥 사라져 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그중에서 좀 나은 사람은 영은 생각(thought)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생각에 대한 그들의 소위 이성적이라는 주장을 보면 생각에서 모든 실재(substantiality), 알맹이를 다 분리하는 것이었고, 그러다 보니 그들은 결국 몸이 끝나면 영도 사라져야 하는 결론에 도달하지요. 결국 감각에 속한, 기억-지식에 속한, 그리고 철학에 속한 걸 가지고 이성적 사고를 한다는 사람들은 모두 영의 존재를 부인하며, 영과 영적인 것들에 관하여 하는 모든 말을 전혀 믿지 않지요. 마음이 단순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데요, 그들은 영이 존재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기를, 자기들은 그게 존재한다는 걸 안다고 해요. 주님 말씀하시기를, 자기들은 사후에도 살 것이라 하셨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이성을 소멸시키는 대신 주님의 말씀으로 그것을 생생하게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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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인들, 천적 인간들이었지요, 이런 태고인들 가운데서 ‘뱀’(serpent)은 세심함, 신중함(circumspection)을 의미했으며, 또한 감각 파트(sensuous part)를 의미했지요. 이를 통해 그들은 신중함을 훈련, 부상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뱀’(serpent)에 관한 이러한 의미는 제자들에게 하신 주님 말씀으로도 알 수 있는데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마10:16)
그런가 하면 또 광야에 세워진 ‘놋 뱀’(brazen serpent)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요. 놋 뱀은 주님의 감각 파트를 상징하는데 주님만이 홀로 천적 인간이시며, 홀로 모두를 돌보시고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시지요. 그래서 이 놋 뱀을 쳐다본 모두가 산 것입니다.
놋 뱀 에피소드는 아래 민수기 본문에 나옵니다.
4백성이 호르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6여호와께서 불 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7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9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 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민21:4-9)
2, 3절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AC.198-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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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 나무의 열매’(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는 태고교회로부터 그들에게 계시, 계승된 선과 진리이며, ‘그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of which they were not to eat)는 주님께 속한 신앙의 선과 진리인데, 이는 그들이 자신들한테서 배워서는 안 되는, 즉 세상 학문이나 지식을 가지고 배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지지도 말라’(not to touch it)는 금지입니다. 그들 자신이나 감각, 기억-지식에 속한 걸 가지고 함부로 주님께 속한 신앙의 선과 진리 들여다보는 행위를 금하는 것이지요.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lest ye die)는 그랬다가는 신앙, 즉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지혜와 총명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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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먹을 수 있는 나무의 열매’(fruit of the tree of which they might eat)가 태고교회로부터 그들에게 계시, 계승된 선과 진리, 즉 신앙에 관한 지식을 의미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분명한데요, 앞서 천적 인간, 곧 태고교회를 다루던 창2:16에서는 ‘동산의 나무’(tree of the garden)라 한 반면, 여기서는 ‘그들이 먹을 수 있는 동산 나무의 열매’(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of which they might eat)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창2:16)
우리말 개역 개정에서는 위 창2:16 번역을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라 하여 원전에는 없는 ‘열매’를 첨가했습니다. 원전에는 ‘동산 각종 나무’인데요, ‘나무’는 퍼셉션(perception)을 의미한다는, 이런 속뜻을 알 길이 없었던 번역자들은 ‘나무를 먹는다고?’ 하면서 이 부분을 원전 그대로 번역하기가 굉장히 어색했을 것입니다.
위 창2:16본문의 ‘동산 나무’(tree of the garden)는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퍼셉션이며, 이 선과 진리는 그 퍼셉션의 산물이기 때문에, 여기서 ‘열매’(fruit)라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나오는 ‘열매’(fruit)는 자주 이 선과 진리를 의미합니다.
태고교회의 첫 세대와 두 번째 후손 간, 그리고 두 번째와 세 번째 후손 간 등 이 세대 간 구분이 실제 역사로는 얼마나 될까요? 보통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를 실제 역사로는 30년으로 봅니다만, 그러나 창5에 나오는 아담의 계보를 보면, 태고교회 후손들이 평균 8, 9백 년씩 살았던 걸 볼 때, 그 장구한 세월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잘 안 잡힙니다. 저 후손들의 이름은 사실은 당대를 풍미한(?) 교회의 이름, 교리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며, 저 숫자들 역시 어떤 아르카나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 지질학적 지구 역사는 45, 6억 년이라 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해서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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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창2:9에서는, ‘동산 중앙에’(in the midst of the garden)있는 나무는 생명나무이지 지식의 나무가 아니라고 하더니 여기서는 ‘지식의 나무’(tree of knowledge)라 하는 이유는, 동산 ‘중앙’(midst)은 가장 내적인(the inmost), 가장 깊은 내면을 상징하기 때문인데 천적 인간, 즉 태고교회의 가장 깊은 내면은 이 ‘생명나무’(tree of lives), 곧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었던 반면, 여기 이 사람, 곧 천적 영적 인간(a celestial spiritual man)이라고 하는, 혹은 그 후손이라고 하는 이 사람한테서는 신앙이 동산의 ‘중앙’, 즉 가장 깊은 내면이었기 때문입니다. 태곳적 사람들의 퀄리티(quality)를 아주 제대로 묘사하는 건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오늘날은 그들에 대해서 알려진 게 전혀 없고, 그들의 지니어스(genius)는 지금까지 발견된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정말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지니어스에 대한 다음과 같은 사실들, 곧 그들은 선을 통해 진리를 알았고 사랑을 통해 신앙이라는 게 뭔지를 알던 사람들이었다는, 이런 말씀을 드리면 조금은 이해하실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 세대가 막을 내렸을 때 그다음에 일어난 세대는 완전히 다른 지니어스를 가졌는데요, 그들은 이전 세대처럼 선을 통해 진리를 알거나 사랑을 통해 신앙이라는 게 뭔지를 아는 대신, 선이 무엇인지를 진리를 가지고 습득하거나 신앙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사랑에 관한 걸 아는, 즉 선과 사랑을 지식으로 습득, 학습으로 아는 그런 세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 거의 대부분이 지식밖에는 거의 가진 게 없었습니다. 이것이 홍수 후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 생긴 변화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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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홍수 이전에 존재했던 태고인들의 이런 지니어스가 오늘날엔 발견되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이런 상황 속에서 이 본문에 들어있는 참된 의미, 곧 속뜻을 제대로 설명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다릅니다. 천국에서는 온전한 이해가 가능한데요, 천적이라고 하는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angelic spirits)은 홍수 전에 거듭난 태고인들과 같은(same)지니어스를 지닌 반면, 영적이라고 하는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은 홍수 후 거듭난 사람들과 유사한(similar)지니어스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비록 두 경우 모두 무한히 다양하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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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적 인간이었던 태고교회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것’(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즉 신앙에 속한 걸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가지고 배우는 일을 삼가야 할 뿐 아니라, 그 나무를 만지는 것조차, 즉 신앙에 관한 걸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조차 허용될 수 없었던 그런 캐릭터였는데요, 안 그러면 그들은 천적 삶에서 영적 삶으로, 그리고 계속해서 아래로 가라앉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천적 천사들의 삶 또한 그런데요, 그들이 더욱 내적, 더욱 천적일수록 신앙이라고 이름하는 경험이나 영적이라고 하는 걸 약간 접해보는 수준의 경험조차 그들에게는 일절 불허됩니다. 이 신앙이라는 말을 남들을 통해 들을 경우, 그들에게는 신앙 대신 사랑의 퍼셉션이 있는데요, 이게 어떻게 다른 건지는 오직 그들만 알지요. 이렇게 무엇이든 신앙에 속한 것을 그들은 사랑과 체어리티로부터 기원, 시작합니다. 그들은 신앙에 관한 그 어떤 이성질(理性질, 이성을 가지고 말장난하는 거)도 정말 굉장히 못 견뎌 하며, 그와 관련된 그 어떤 기억-지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요,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사랑으로 퍼셉션, 곧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주님으로 말미암는 퍼셉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퍼셉션으로 어떤 일이 과연 그런지 안 그런지를 즉시 압니다. 그런 까닭에 어떤 신앙에 관한 말을 듣게 되면 그들은 그저 단순히 그렇다, 아니다로 대답하는데요, 그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그걸 지각, 즉시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의미, 이유입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5:37)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지식의 나무 열매를 만지지 못하게 하셨다는, 즉 ‘너희는 만지지도 말라’ 하신 말씀의 의미, 속뜻입니다. 그들이 그걸 만지면, 그들은 악 가운데 있게 될, 즉 결과적으로 그들은 ‘죽게’(die)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런 특별한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천적 천사들은 다양한 주제에 관해 다른 천사들처럼 서로 대화합니다. 다만 천적 언어(天的, a celestial language)로 하지요. 이 언어는 사랑으로 되어 있고, 사랑에서 나오며, 영적 천사들의 언어보다 더욱 형용, 형언할 수 없는 언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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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천사들도 신앙에 관한 대화를 하는데요, 이들은 신앙에 관한 것들을 심지어 지성과 이성, 그리고 많이 배운 사람들의 언어로 확실히 보여 주지만, 그러나 그들은 신앙과 관련된 일들에 이런 걸로 무슨 자기들만의 결론을 내리는 짓은 절대로 안 합니다. 그런 짓을 하는 자는 악 가운데 있기 때문이지요. 이들은 또한 신앙에 관한 모든 진리의 퍼셉션을 주님으로부터 부여받는데요, 비록 천적 천사들의 것과 같은 그런 퍼셉션은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영적 천사들의 퍼셉션은 일종의 양심(conscience) 같은 건데요, 이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명력을 갖는, 마치 천적 퍼셉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저 영적 퍼셉션일 뿐인, 그런 겁니다.
(쉬는 시간)
4, 5절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AC.204-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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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eyes being opened by eating of the fruit of the tree)는 신앙에 관한 것을 감각과 지식, 곧 자기 자신, 그러니까 자기가 알고 있는 걸 기준 삼아 신앙에 관한 것을 헤아릴 경우, 분명히 말하지만, 오히려 신앙에 관한 게 잘못되었다 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as God, knowing good and evil)은 만일 그들이 그런 짓, 곧 스스로를 기준 삼아 그런 짓을 하면, 그들은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양 스스로를 인도하려 할 것이라는, 즉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대신, 오직 자기 힘으로만 살아가려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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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구절에는 교회의 어떤 특별한 상태나 상태의 변화가 들어 있습니다. 앞선 구절들에는 그들이 그렇게 기울어졌음에도 그들, 곧 그 당시 교회는 자신들의 상태가 주님 보시기에 불법이라는 걸 지각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 반면, 이 구절들에는 막 시작된 의심, 곧 자신들이 볼 때, 이들은 태고교회의 세 번째 후손들인데, 합법적이지가 않다(whether it might not be lawful for them, since they would thus see), 자신들의 감각과 세상에서 배운 걸로 봤을 때, 자신들이 그동안 선대로부터 들어온 것들, 곧 주님과 천국, 이 세상에 관한 이야기들, 교리들이 좀 안 맞는 것 같다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눈이 열렸다는, (사실은 정반대로 오히려 더 눈이 멀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 우리가 너무 교회 중심으로, 교리 중심으로만 살아왔구나. 실제 세상 지식과 감각 경험은 전혀 다른데...’ 하는, 그리고 결국 이런 식의 자기 사랑,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깊어지면서, 그들은 ‘이 정도면 우리 스스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주님과 같아질 수 있지 않을까?’ 여기기 시작했다는 그런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이런 게 자기 사랑의 본질인데요, 이는 주님 따르는 건 꺼리고, 대신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걸 더 선호하며, 믿음 관련한 일들을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혼자 알아서 하는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 번역은 특별히 쉽지가 않아 여러 날 걸렸고, 이해를 돕기 위해 최대한 풀어 번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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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 사람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고 동시에 세상 배움에 탁월한 사람들, 이 둘 중 누가 더 대단한 믿음을 가진 걸까요? 그러나 사실은 누가 더 눈이 먼 걸까요? 그들에게 단지 질문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들은 영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기는 고사하고 심지어 알지도 못하며, 영적 천적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낯설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삶을 인정하지 않는데요, 그들은 스스로를 사라질 짐승과도 같은 존재라 믿으며, 주님도 인정하지 않고 대신 오직 자신들과 자연만 숭배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가운데 좀 신중하게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르기를, 어떤 최고의 존재가 만물을 다스리지만, 자신들은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합니다. 그들이 감각 및 기억-지식과 관련된 일들을 가지고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을 입증할 때 사용하는 원리들이 있는데요, 그들은 맘만 먹으면 온 우주를 앞에 놓고도 그럴 겁니다. 그들은 남에게 신(神, gods)처럼, 또는 정말 지혜로운 사람처럼 여겨지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만약 그들의 본성 가운데 없는 게 뭔지 아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기를, 그런 건 없다고, 다만 자신들의 본성 전부를 잃게 되면 자신들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될 거라는 대답들을 할 겁니다.
조금이라도 영의 존재를 시인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사후 자기 영의 상태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사람에게 맨 먼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다른 모든 빛나는 성취를 이루었어도 정작 그가 자기 영에 대하여 전혀 무지하며 관심조차 없고, 그저 철저히 세속적이며 물질적이기만 한다면, 이 사람에겐 가장 시급한 질문이 바로 이 영, 다른 말로는 그의 본성과 관련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타고난 자연 상태로는 악 그 자체이기 때문에, 얼른 주님의 생명에 접붙임을 받아 그 안에 주님의 생명이 흘러들어 새로운 상태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그런 건 일종의 환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심이라는 걸 아느냐는 질문에는, 그건 그저 상상 속 산물로서, 천민들(賤民, the vulgar)을 통제하는 방법으로 써먹을 수 있는 거라고 할 겁니다.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는 아느냐는 질문에는, 그들은 씨익 비웃으며, 그런 건 광적인 쓰레기, 곧 종교 마니아들 간 사용하는 일종의 무슨 싸인 같은 거라고 할 겁니다.
스베덴보리 시절인 1750년대 유럽의 영적 분위기가 이랬나 봅니다. 이 하나하나의 사례가 모두 스베덴보리가 직접 겪었던 사례이지 싶은데요, 오늘날 한국 사회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개신교를 비롯, 거의 모든 기독교가 외적(外的, external) 사고, 즉 ‘겉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인데, 말로는 ‘영성, 영성’ 하지만 그 사고의 뿌리는 ‘겉’에 있습니다. 내적(內的, internal) 사고, 즉 ‘속’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말해도 거의 이해를 못 합니다.
이런 게 그들의 지혜이며, 이런 게 그들이 말하는, 소위 ‘눈이 밝아지는 것’(open eyes)입니다. 이런 게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gods)입니다. 이런 원리들, 그들 생각에는 대낮보다 더 밝은 원리들인데, 이런 원리들을 가지고 그들은 모든 것의 출발점 삼으며, 이런 식으로 그들은 계속해서 신앙의 신비들에 대한 이성질(理性질)을 하는데요, 그 결과는 과연 어둠의 깊은 심연밖에 뭐가 더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이런 것이 바로 세상을 꾀는 ‘뱀’(serpents)인 것입니다만, 그러나 태고교회의 후손은 아직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되는 건 본 장 14절로 19절에서 다루게 됩니다.
6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man [vir])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AC.207-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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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음직도 하고’(Good for food)는 탐욕(cupidity)을, ‘보암직도 하고’(pleasant to the eyes)는 환상(fantasy)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desirable to give intelligence)은 쾌락(pleasure)을 각각 의미합니다. 이것들은 다 본성(the own), 곧 ‘여자’(woman)에게 속한 것들이며, ‘그도 먹은지라’(husband eating)는 이성의 동의(the consent of the rational)를 의미합니다.(AC.265)
즉, 이 세 가지, 탐욕, 환상 및 쾌락은 인간의 본성, 자아의 속성들이라는 말입니다.
아래는 265번 글이고, 그 아래는 158번 글입니다.
‘남편’(husband or man)이 합리적, 이성적 능력(the rational capacity)을 의미한다는 것이 본 장인 3장 6절에 보면 있는데요, 거기에 보면,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즉 그도 동의했음을 의미합니다. 같은 내용이 158번 글, 사람에 관한 내용을 보아도 분명한데요, 거기 보면 사람은 지혜와 지성(understanding)을 가진 존재인데요, 하지만 여기 나오는 ‘사람’(man)은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the ability to reason)에 머무를 뿐입니다. 지식의 나무, 곧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음으로써 지혜와 지성이 파괴되었고, 그 결과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합리적, 이성적 능력은 지적 이해(an intelligent understanding)를 모방하는 것, 혹은 그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AC.265)
사람(man, 아담)이 내적 인간, 같은 말이지만, 지성과 지혜의 사람을 상징한다는 것은 이사야를 보면 분명합니다.
내가 본즉 한 사람(vir)도 없으며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에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사41:28)
지혜와 지성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AC.158)
위 본문의 ‘사람’은 라틴어로 ‘비르’(vir)입니다. 라틴어에 ‘사람’이라는 뜻의 ‘호모’(homo)라는 말이 따로 있지만, ‘호모’에 비해 ‘비르’는 지혜와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에도 보면은,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렘5:1)
여기 ‘정의를 행하는 자’는 지혜로운 사람을, ‘진리를 구하는 자’는 지성인을 각각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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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교회의 네 번째 후손 이야기인데요, 이들은 자기 사랑(self-love [amore proprio])에 빠져 유혹에 넘어갔고, 비록 계시라 할지라도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확인이 안 되면 계시 믿기를 언짢아하고 싫어했습니다.
세상에서 경험하고 학습한 지식과 주님의 계시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 후자, 곧 주님의 계시 믿기를 꺼렸다, 내켜 하지 않았다는 말인데요, 이처럼 태고교회도 그 후손으로 내려갈수록 점점 더 주님 사랑의 반대인 자기 사랑으로 경도되어 가는 걸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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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사용된,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the tree was good for food, pleasant to the eyes, and desirable for giving intelligence)라는 표현은 저 태고 때 살던 사람들의 지니어스(genius)에 맞춘 표현인데, 특별히 의지(the will)와 관련해서입니다. 그들의 악이 콸콸 흘러나오기 시작한 게 바로 이 의지에서부터였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홍수 후를 살았던 사람들이 나오는 데를 보면, 위 표현들은 의지보다는 이해(the understanding)와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는데요, 이는 태고인들은 선에서 비롯된 진리(truth from good)를 가지고 있었지만, 홍수 후를 살았던 사람들은 진리에서 비롯된 선(good from truth)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홍수 전 사람들은 그 DNA에 선을 타고났지만, 홍수 후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학습을 통해서만 선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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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man’s own)이라는 걸 이렇게도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인간 본성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그리고 주님이나 말씀을 믿는 대신 자기 자신을 믿는, 끝으로 감각과 기억-지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즉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없거나 세상 경험과 배움에 비춰볼 때 도저히 말도 안 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이 세 가지 태도로부터 샘처럼 솟아나는 모든 악과 거짓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그저 악과 거짓이 되며, 그 결과 모든 걸 반대로 봅니다. 악한 걸 선으로 보며 선한 걸 악으로 보고, 거짓된 걸 참으로 보며 참된 걸 거짓으로 봅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걸 없다 하고, 없는 걸 그들은 모든 것이라 하지요. 증오를 사랑이라 어두움을 빛이라 죽음을 삶이라 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인데요, 말씀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다리를 저는 사람들’(lame), ‘눈먼 사람들’(blind)이라고 합니다. 이런 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 자체로 지옥이요, 저주받은 것이지요.
이상으로 창세기 3장 첫 번째 단락인 ‘태고교회의 세 번째, 네 번째 후손 이야기’(창3:1-13)를 오늘은 그 전반부인 1절로 6절까지 번역, 역시 설명을 곁들이며 함께했습니다.
지난주부터 설교 중간에 ‘쉬는 시간’을 마련, 예배와 세미나를 믹스한 듯한 새로운 형태의 주석 설교를 시도 중에 있습니다. 보통 매주 설교 원고가 A4 20장 이상이나 되어 부득이한 상황도 함께 고려한 것인데요, 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주석 설교의 특성상 어떤 하나의 형태로 자리 잡기까지는 일정 기간 다양한 시도가 시행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모두들 깊은 이해와 사랑으로 함께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전에 드린 말씀 한 번 더 드리면, 창세기 4장만 되어도 그 진도 따라가기가 정말 쉽지 않을 터이니 아직 3장 하고 있을 때 부지런히 복습, 이 내용을 나름 충분히 이해들을 하셔야 합니다. 창1, 2, 3에 대한 이해가 이후 모든 내용 전개에 기초 중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난날 우리의 학창 시절, 대부분의 과목들이 그 앞부분을 얼마나 이해하고 탄탄하게 자기 걸로 소화했느냐에 따라 쭈욱 끝까지 완주하느냐, 아니면 얼마 못 가 그만 포기하느냐 하던 것과 같습니다. 저는 이 주석 설교를 최장 10년 잡고 있습니다. 요즘 표현으로 제 영혼을 갈아 넣는 중이오니 다들 조금만 진지하게 저의 권면에 귀 기울이셨으면 좋겠습니다. 분명 측량할 수 없는 주님의 크신 축복 있으실 것입니다.
부모를 비롯, 배우자든 자식이든 손주든, 그리고 직장 동료든 지인이든 오다가다 만나는 누구든 나 아닌 타인을 대할 때, ‘주님이 지금 저 사람 모습으로 내 앞에계시는 것이다’ 생각하고 그를 대하는 것, 그것이 가장 안전하고 복된, 그리고 범사에 주님을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비록 그가 사람 같지 않아 저의 선대(善待)에도 불구, 아주 몰상식하고 무례하게, 싸가지 없게 나를 대해도 그러면 그럴수록 오히려 주님이 내게 빚지시는 것이라 나중에 크게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오히려 더 감사하지요.
21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22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주시리라(잠25:21, 22)
아침에 누가 평생 모은 수백억 재산을 남편 잘못 만나 다 날리고 지금은 어렵게 산다는 말을 하고 나서, 나 또한 살면서 몇 번 나도 어려운 중에 갚겠다는 말에 비록 큰돈은 아니지만 빌려줬다가 떼여본 적이 있지만, 그러나 나는 그에게 그걸 갚으라 한 적이 없다고, 그렇게 해서 그가 갚으면 그저 원금 회수에 그치지만 그가 안 갚으면 주님이 나중에 수십, 수백 배로 갚으실 것 같아서 그랬다는 말을 식사 중에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실제로 여러 번 제 삶에 일어났습니다.
‘주님이 지금 저 사람 모습으로’라는 이 생각은 일상 중 우리의 모든 걸 바로잡아주는 아주 중요하고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잠시 마음이 흐트러지다가도 이 생각만 하면 바로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며, 이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지 하는지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의 안에 계신 주님을 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모든 마음속 동기를 주님은 보시고 우리의 섬김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비록 상대방은 우리에게 못되게 굴어도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을 살면서 악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마침 신기하게도 바울도 이런 말을 하고 있어요.
22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23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24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3:22-24)
그러나 진실은 주님께서 인간의 지성(intellectual)을 통해 이성(rational)으로, 그리고 이성을 통해 기억의 지식(the knowledge of the memory)으로 흘러 들어가시며, 거기서 시청각 감각의 생명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유입이며, 영혼과 육체의 참된 상호작용입니다.And yet the truth is that the Lord flows through man’s intellectual into his rational, and through his rational into the knowledge of the memory, whence comes the life of the senses of sight and of hearing. This is the true influx, and this is the true interaction of the soul with the body. (AC.657)
이것이 올바른 순서입니다. 겉 사람, 곧 감각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고 말입니다. 생명의 순서는 주님으로부터 출발, 속 사람을 거쳐 겉 사람, 곧 몸의 감각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육의 참된 회심, 진정한 거듭남입니다.
이런 올바른 순서의 결과, 덤으로 얻어지는 유익은 많습니다. 우선 우리 몸의 아름다움입니다. 겉 사람의 외적 표현인 우리 몸이 속 사람을 통한 주님의 생명의 디스플레이가 되기 때문이지요.
아름다움뿐 아니라 우리 몸의 건강 또한 따라옵니다. 인간의 몸은 천국과 일대일 상응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천국 공동체 전체의 활기와 생명이 우리 몸에 전달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비롯, 주님의 제자들에 관한 그 어떤 기록에서도 예를 들어, 무슨 감기가 걸렸다든가 어디가 아팠다든가 하는 기록이 없으며, 이는 어느 선지자한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가 백이십 세가 되었어도 눈이, 그리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던 이유 등도 여기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체어리티(charity), 곧 신앙의 선함이 있을 때, 그때 인정(acknowledgment), 곧 신앙의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지식, 이성, 그리고 이해에 속한 것들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있을 때, 그 목적은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는 토대, 즉 그의 마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 체어리티로부터, 혹은 그 체어리티로 사는 삶으로부터 그는 그로 말미암아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지요. 그렇게 그는 변화, 곧 거듭나는 것이지, 그전에는 아닙니다.When charity is present, which is the goodness of faith, then acknowledgment is present, which is the truth of faith. When therefore a man is being regenerated according to the things of knowledge, of reason, and of understanding, it is to the end that the ground may be prepared—that is, his mind—for receiving charity; from which, or from the life of which, he thereafter thinks and acts. Then he is reformed or regenerated, and not before. (AC.654, 창6:16)
체어리티는 주님 사랑이라는 영이 이웃 사랑이라는 육을 입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의 진리는 신앙의 선, 곧 체어리티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지식, 이성 같은 이해에 속한 것들로 먼저 거듭나고 있는 이유는 그렇게 해서 먼저 우리의 마음을 준비, 체어리티의 삶을 살고픈 마음이 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5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2:21-25)
이 AC 주석 설교 때는 시간에 관하여, 그러니까 설교가 길다, 너무 길다고 힘들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현존 앞에서 시간 보내느라 시간 가는 게 너무 안타깝기를 바라는 마음인데요, 마치 천국을 사모, 주님의 허락을 받아 잠시 천국을 방문하게 된 영들이 천국 그 영광에 넋을 잃다가 다시 돌아갈 때가 되자 너무나 안타까워하더라는 스베덴보리의 경험담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는 혹시 본문 내용의 흐름상 도저히 중간에 끊어 이번 주 1부, 다음 주 2부 식으로 하는 게 적절치 못할 경우, 중간에 쉬는 시간을 두더라도 가급적 한 번에 다루고자 합니다. 오늘부터 새롭게 도입되는, 한결같은교회 주일예배의 이런 변화를 좋게 수용하여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전에 정원 목사님 생전에 헤븐교회 주일예배가 서너 시간이었던 점을, 그리고 유대인들의 예배 또한 그러함을 기억하여 주세요.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2장 여섯 번째, 마지막 시간으로 2장 두 번째 단락 중 후반부인 21절로 25절, 글 번호로는 AC.147-167, ‘갈빗대, 한 몸, 벌거벗음’입니다.
먼저 두 번째 단락 전체(18-25절) 및 절 별 개요입니다. 개요는 몇 번을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일종의 큰 그림이요, 지도이기 때문인데, 속뜻 설교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131
태고교회의 후손들, 이들은 자신들의 본성(本性, proprium, own)으로 기울어졌는데, 여기서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창2후반은 태고교회 두 번째 후손에 관한 내용입니다.
132
인간은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만족하지 않고 대신 자신과 세상, 곧 자기 본성으로 인도받기를 원하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에게 허락된 본성을 여기서 다룹니다.(18절)
133
그래서 그에게 먼저 선에 관한 애정들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알게 하시는데 이것들은 그가 앞서 주님께 받은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자기 본성을 향해 기울어집니다.(19, 20절)
134
이런 이유로 그는 자기 본성 상태로 들어가며, 그리고 이때 어떤 본성(an own)이 새롭게 그에게 주어지는데 그걸 여자로 빚어진 갈빗대라 한 것입니다.(21-23절)
135
천적 영적 생명은 인간의 본성과 거의 하나로 보일 정도로 아주 가까이 붙어있습니다.(24절)
136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는 이노센스가 이 새로운 본성 안으로 스며드는데, 이 본성이 완전히 망가져서 도무지 뭐든지 못 받아들이는 상태가 되지 않게 하시려고 말입니다.(25절)
다음은 단락 전체의 배경 설명입니다.
137
창세기의 첫 세 장은 대체로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를 다루는데, 이 교회는 처음부터 마지막, 그러니까 사라질 때까지 ‘사람’(man, homo)으로 불렸습니다. 창2전반부가 이 태고교회가 가장 융성했던 상태, 곧 천적 인간이었던 때를 다루고 있다면, 이제 여기 후반부는 자신들의 본성으로 기울어진 사람들과 그들의 후손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상이 개요 및 배경이고, 다음은 본문 절 별 속뜻입니다. 지난주 이어 계속인데, 기억나시라고 지난주에 했던 147번, 148번 글을 한 번 더 보겠습니다.
21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AC.147-150)
147
가슴에 속한 뼈인 ‘갈빗대’(rib)는 사람의 고유 본성(man’s own)을 의미하는데, 그 안에 생기라고는 거의 없지만 실제로는 그가 무척 소중히 여기는 그런 본성입니다. ‘살로 대신 채우시고’(flesh in the place of the rib)는 그 안에 생기가 있는 본성을, ‘깊이 잠들게’(deep sleep)는 그의 현 상태를 말하는데, 사람이 이 상태가 되면 그는 자신의 본성을 소유하는 게 자기 자신인 줄 알지요. 이 상태는 잠든 상태와 유사한데, 이 상태에 있는 동안은 사람은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그가 실상은 그렇지 않음을, 이것이 거짓임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는 정신을 차리며 잠에서 깬 상태가 됩니다.
사람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푹 빠져 주님과 천국을 요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상태가 바로 ‘깊이 잠든’ 상태입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정말 많은 사람의 상태가 영적으로는 이 ‘깊이 잠든’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148
사람의 고유 본성(man’s own), 실제로 그가 무척 소중히 여기는 본성을 가슴에 속한 뼈인 ‘갈빗대’(rib)라 하는 이유는 태고인들 사이에서 가슴은 체어리티(charity)와 상응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심장과 폐가 들어있기 때문이지요. 뼈(bones)라는 건 아주 꺼림칙한 걸 의미했는데, 그 안에 생기라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살(flesh)은 생기 있는 걸 가리켰지요. 이 상응들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알려진 가장 깊은 아르카나 중 일부인데 이 아르카나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에 속한 것으로서,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149
말씀에서도 사람의 고유 본성은 ‘뼈’(bones)와 상응, 실제로 나중에 주님에 의해 살아나는 생생해진 본성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입니다.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사58:11)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 (사66:14)
시편입니다.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 (시35:10)
이는 에스겔에서 더욱 분명한데요, 거기 뼈들에 대해 ‘살을 입히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하시는 부분입니다.
1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4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5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6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겔37:1, 4-6)
[2]사람의 본성(The own of man)은 천국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뭔가 완전히 뼈처럼 보이는, 못 움직이며 매우 추한,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그 자체로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이런 본성이라도 주님에 의해 생기를 얻으면 그때는 살처럼 보입니다. 사람의 본성이라는 것은 그저 죽어있는 어떤 것에 불과합니다. 본인에게는 어떤, 실제로는 모든 것, 전부로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그의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모두 주님의 생명에서 나온 것이며, 만일 이 생명이 사라지면 그는 쓰러져 죽은 상태가 되는데 마치 돌멩이처럼 되고 맙니다.
다음 글을 참고하세요. ‘천국과 지옥’ 9번 글입니다.
천사들은 그들의 지혜로 이 사실을 더 깊이 알고 있다. 그들은 선하고 참된 모든 것뿐 아니라 삶의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온다고 말한다. 그들이 이것을 확증하는 것은 어떤 것도 그보다 먼저 있는 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원리를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하나의 처음 존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 처음 존재를 모든 생명의 궁극적 존재라 부른다. 같은 원리로 만물은 존속한다. 존속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생겨남이며, 중간 매체들을 통해 처음 존재와 끊임없이 연결되지 않는 것은 그 즉시 사라지고 완전히 소멸되고 만다. 생명의 원천은 오직 하나이며, 사람의 생명은 거기서 나오는 물줄기라고 천사들은 덧붙인다. 따라서 그 물줄기가 끊임없이 원천으로부터 흐름을 공급받지 않으면 즉시 말라 없어진다는 것이다.(HH.9, 김은경 역)
사람은 생명의 기관(an organ of life)일 뿐입니다. 이런 게 기관이고, 이런 게 생명의 애정(the life’s affection)입니다. 주님만이 자신의 본성이라는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것으로 그는 사람을 구속하셨으며, 이것으로 그는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주님의 본성은 생명이시며, 주님의 본성으로부터 사람의 본성, 이것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인데, 이 본성이 살아나게 됩니다. 주님의 본성은 또 누가복음의 다음 주님 말씀하고도 상응합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9)
이는 또 유월절 어린 양의 뼈를 꺾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출12:46).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출12:46)
150
사람이 자신의 본성 가운데 있거나 가정하기를 나는 내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야라고 하는 상태를 ‘깊은 잠’(deep sleep)에 비유하고 있으며, 실제로 고대인들이 이렇게 했습니다. 말씀에서는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poured out upon them the spirit of deep sleep)(사29:10), 그리고 ‘그들이 잠들어’(they sleep a sleep)(렘51:57)라고 말합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사29:10)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 고관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도백들과 태수들과 용사들을 취하게 하리니 그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렘51:57)
실제로는 우리가 선택하고 우리가 저지르는 것들을 주님은 마치 주님이 하시는 것처럼 기록하십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최종 책임자이시며, 모든 악과 거짓조차도 주님과 상관없이 일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만유의 근원 되시며,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천국과 지옥 등 모든 것이 주님의 컨트롤 하에, 주님의 다스리심 아래 있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이며, 아무도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어떤 생명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영들의 세계인 중간 영계에서 저는 그동안 매우 분명하게 보아왔는데요, 자신의 본성밖에는 사랑할 줄 모르는, 그리고 자기는 오직 자신의 힘으로만 살아간다고 고집, 완강하게 주장하던 악한 영들은, 그러나 실제로 겪어보고 나서야 그게 아니라고, 자신들은 자기 힘으로 사는 게 아니었다고, 인정하긴 싫지만 할 수 없이 억지로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수년간 저에게는 사람의 본성의 경우는 어떻게 되는지를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알 수 있도록 허용되었으며, 또 다음과 같은 사실들, 곧 저 스스로는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 모든 생각의 실마리가 외부에서 제 안으로 흘러들어온다는 것, 그리고 종종 그것이 어떻게, 그리고 언제 흘러들어오는지를 저는 알 수 있었다는 것 등의 사실들에 대해 수년간 저는 분명히 지각하며(perceive) 지내왔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힘으로 사는 거야 하는 사람은 거짓됨 가운데 있으며, 그걸 믿기까지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악과 거짓에게 내맡기는 셈이 되는데요, 이 악과 거짓은 그가 만일 이 경우의 실상을 알았더라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그런 것입니다.
아래는 이해를 돕는 글입니다.
영계에 대해서, 그리고 영계에서 자연계로 흘러드는 입류(入流, influx)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 천사들에게 능력이 있음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런 경우, 사람들은 천사들이 영이고 너무 순수하며, 실체가 없어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능력이 있을 수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사물의 원인을 보다 내적으로 살피는 사람의 경우는 견해가 다르다. 그런 사람들은 인간의 모든 능력이란 그의 사고와 의지에서 나온다는 것을 (이 두 가지를 떠나서는 몸의 작은 부분도 움직이지 못하므로) 알기 때문이다. 사람의 사고와 의지가 그의 영적 사람이고, 이 영적 사람이 육체와 그 지체를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즉 영이 생각하는 것을 입과 혀가 말하고, 영이 뜻하는 것을 몸이 행하며, 이것이 자유자재로 되는 것이다. 사람의 의지와 사고는 천사와 영들을 통해 주께서 다스리시므로 사람 몸의 모든 것도 그렇게 다스리신다. 몸이 하는 모든 것은 의지와 사고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믿기 힘들겠지만, 사람은 천국에서의 입류가 아니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나는 수없이 많은 경험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했다. 천사들에게 내 발걸음, 행동, 내 혀와 말을 천사들 마음대로 움직이라는 허락이 내려졌었다. 그들은 내 의지와 생각 안에 흘러드는 입류로 나를 움직였다. 그때 나는 나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천사들은 나에게 모든 사람이 이렇게 다스림을 받는다고 말하고, 이는 교회의 가르침과 성서를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사람은 비록 교리를 떠나 스스로 생각할 때는 달리 말하고 달리 믿더라도, 기도할 때는 하나님께 천사를 보내어 인도해 주시고, 발걸음을 이끄시고 가르쳐 주시라고 하고, 또 생각할 바와 말할 바를 알려주시라고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상의 내용은 천사들이 사람에게 어떤 힘을 갖는가를 알리기 위해 언급한 것이다.(HH.228, 김은경 역)
22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AC.151-155)
151
‘만드시고’(build)는 쓰러져있던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갈빗대’(rib)는 생명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의 본성을, ‘여자’(woman)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갖게 된 사람의 본성을,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he brought her to the man)는 그의 본성인 것, 즉 여자라는 그의 새로운 본성이 그에게 승인, 허락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교회의 후손은 그들의 선조처럼 천적 인간 되는 걸 원치 않고 대신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살아가고자 하였고,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본성 쪽으로 기울어졌는데 결국은 그런 본성이 그들에게 허락, 곧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되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갖게 된 본성 역시 여전히 허락되었고, 그래서 이것을 ‘여자’(woman), 나중에 ‘아내’(wife)라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본성’(本性)으로 번역해 오고 있는 영어 ‘own’(proprium, 라틴, 고유 본성, 자아)을 NCE(New Century Edition) 역에서는 ‘a sense of self’, ‘selfhood’, ‘a sense of autonomy’, 혹은 ‘identity’ 등으로도 옮기고 있다는 점, 참고하세요.
152
겉 글자의 뜻대로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것과 지금까지 사람들이 알아차렸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깊은 아르카나가 여기 들어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봐도 금방 눈치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woman)가 사람의 본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도 알 수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속아 넘어간 사람이 다름 아닌 여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을 속일 수 있는 건 자신의 본성, 그러니까 같은 말인데,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3:1-6)
그러니까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사람을 저런 말로 속일 수는 없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체어리티의 삶을 사는 사람한테는 저런 속삭임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저런 말에 넘어가고 안 넘어가고는 본인이 가진 자아의 퀄러티 문제인데요, 그러니까 천사들이라면 저런 말에 넘어갈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그 자아가 백 퍼센트 주님 편에 선 사람들이기 때문이지요. 내 마음의 귀가 어떤 속삭임에 솔깃해 하는가를 관찰하면 나라는 사람의 정체, 본성, 내가 하는 사랑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저 창3:6에 나오는, 뱀에게 속아 넘어가는 여자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자와 다른 여자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 번째 후손 이야기이지만, 저 창3 초반은 세 번째 후손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더욱 안 좋게 변한, 자기 사랑에 더욱 기울어진 상태가 된 후손 이야기인데, 두 번째 후손만 되었어도 안 속았을 저런 속삭임에 이들은 그만 손쉽게 넘어간 것입니다.
참고로, 저 창3에 나오는 뱀은 인간의 감각 파트를 말합니다. 인간은 영과 육, 그러니까 영, 지혜, 지성, 이성, 지식 및 감각 등 여러 파트로 구성된 존재로서, 이 중 가장 낮은 파트인 몸에 속한 감각을 ‘뱀’이라고 한 것입니다. 물론 천적 인간은 이 몸의 감각 또한 거듭났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몸의 감각이 더 이상 뱀이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러니까 영육이 온전히 거듭난 사람한테는 지옥이 더 이상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153
갈빗대를 가리켜 ‘여자를 만드시고’(built into a woman)라고는 하시지만 전에 거듭남을 다룰 때처럼 ‘창조하다’(created), ‘짓다’(formed), ‘만들다’(made)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만드는 것’(build)은 쓰러져 있는 걸 일으켜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이 뜻으로 쓰이는 곳마다 ‘만드는 것’(build)은 주로 악에 관한, ‘일으켜 세우는 것’(raise up)은 거짓에 관한, 그리고 ‘새롭게 하는 것’(renew)은 둘 다에 관한 서술일 때입니다. 이사야입니다.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사61:4)
이 구절과 다른 구절에서 ‘황폐함’(Wastes)은 악을, ‘무너짐’(desolations)은 거짓을 의미하며, ‘쌓는 것’(build)은 전자, ‘다시 일으키는 것’(set up again)은 후자에 적용됩니다. 선지서 이곳저곳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 이런 구분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예를 들면, 예레미야입니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렘31:4)
154
사람의 본성이 아니면서, 그리고 사람의 본성에서 나온 것도 아니면서 악하고 거짓된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악 그 자체이며, 그 결과 사람이라는 것은 악과 거짓 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인데요, 이것이 사실임을 저는 영들의 세계에서 계속 보고 있어서 분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거기서는 사람의 본성에 속한 것들이 눈에 보이게 제시되는데, 그때 그것들은 너무나 기형적이어서 어떻게 형용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추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본성의 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말입니다. 그때 자신의 본성에 속한 것들을 자기 눈으로 보는 사람은 그 실제 모습을 보고는 공포에 휩싸일 정도로 충격을 받아 마치 악마로부터 도망치듯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지요. 하지만 참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소생한 사람의 본성에 속한 것들은 반대로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주님께 속한 천적 특성들이 적용될 수 있는, 그런 삶을 따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실제로 체어리티를 받거나 체어리티로 소생한 사람들은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소년, 소녀처럼 보입니다. 또 벌거벗은 유아처럼 이노센스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가슴과 머리 위 왕관을 두른 꽃 화환으로 다양하게 장식되어 있는데요, 다이아몬드 같은 오로라 가운데서 즐겁게 지내며, 가장 내적인 데서 오는 행복에 관한 퍼셉션을 갖고 살아가지요.
그러니까 참으로 속 사람의 모습으로 천국이든 지옥이든 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속 사람은 아직 거시기한데 주님의 보혈로 한순간에 죄 씻음 받고 천국 가는 그런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155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a rib was built into a woman)라는 이 말에는 지금까지 사람들이 글자로 된 겉뜻만 가지고 발견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깊이 감추어져 있는데요, 그 이유는 주님의 말씀은 그 가장 깊은 뜻에 있어 주님 자신과 주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며, 이 사실에서 말씀의 모든 생명이 나오는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보고 있는 이 본문에서 그 가장 핵심은 바로 천국의 결혼(the heavenly marriage)입니다. 천국 결혼은 그 본성에 있어 주님에 의해 소생될 때 주님의 ‘신부요 아내’(bride and wife)라 일컬음을 받는 그런 것입니다. 이렇게 소생된 인간 본성은 모든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 관한 퍼셉션을 가지며, 그 결과 표현 불가한 행복과 함께 모든 지혜와 지성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신부요 아내’(bride and wife)라고 하는 이 소생된 본성은 어떻게 간결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천사들한테서 관찰할 수 있는 사실, 곧 자신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걸 지각하고 있다는 것인데요, 천사들한테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비록 그들일지라도 이런 주제를 벗어나 한눈파는 순간 그들 역시 순전히 자신들 힘으로 살아간다는 생각밖에는 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럴지라도 그들에게는 어떤 것이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서 살짝만 벗어나도 그 변화를 지각하는, 그런 본성에 관한 어펙션(affection)이 일반적으로 있는데요, 그 결과 그들은 누구나 자신들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퍼셉션 가운데 있으며, 그때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의 즐거움이 그들 가운데에는 존재합니다. 아래 예레미야에서 말하는 바 역시 바로 이런 본성을 의미합니다.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렘31:22)
이 구절에서도 ‘여자’(woman)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소생된 본성을 의미하며, 이것을 ‘둘러싸리라’(to compass)라고 표현한 것은 이 본성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 마치 갈비뼈가 심장을 둘러싸 보호하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쉬는 시간)
23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AC.156-159)
156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은 겉 사람의 본성을, 여기서 ‘뼈’(bone)는 이 본성이 생기가 거의 없음을, ‘살’(flesh)은 생기 있는 본성을 의미합니다. 또한 남자는 속 사람을 의미, 이어지는 구절에 보면 이 속 사람은 겉 사람과 결합하기 때문에 여기서 ‘여자’(woman)라고 했던 본성을 거기서는 ‘아내’(wife)라고 합니다. ‘이제’(Now)는 이 시점에서 이렇게 되었음을 의미하는데요, 이때 상태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개역 개정에는 이 ‘이제’에 대한 번역이 누락 되어 있습니다. 속뜻 전개상 중요한데 말입니다. 주님 말씀은 함부로 더하거나 빼면 안 되며, 그 기준은 속뜻의 흐름상, 곧 속뜻으로 보았을 때입니다.
157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이 그 안에 속(the internal)이 있는 겉 사람의 본성을 의미하는 한, 그래서 고대에는 자신들의 본성(their own [proprii]), 뿌리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게 한 가족이든 가계이든 기타 어떤 종류의 관계이든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 불렸습니다. 그래서 라반도 야곱을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창29:14)
그리고 아비멜렉 또한 자기 어머니의 혈육들과 외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삿9:2)
이스라엘 지파들도 다윗에게 자신들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삼하5:1)
158
사람(man, 아담)은 속 사람, 즉 같은 말이지만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사야를 보면 분명합니다.
내가 본즉 한 사람(man [vir])도 없으며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에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사41:28)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이 없다는 뜻이지요.
위 본문의 ‘사람’은 라틴어로 ‘비르’(vir)입니다. 라틴어에 ‘사람’이라는 뜻의 ‘호모’(homo)라는 말이 따로 있지만, ‘호모’에 비해 ‘비르’는 지혜와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렘5:1)
‘정의를 행하는 자’(One who executes judgment)는 지혜로운 사람을, ‘진리를 구하는 자’(one who seeks the truth)는 총명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159
그러나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지 못하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지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천적 인간 안에서 속 사람은 겉 사람과 구별되되 실제로는 너무도 구별되어 속 사람, 겉 사람에게 속한 것은 각각 무엇이며,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해 주님에 의해 어떻게 통치되는지를 천적 인간은 지각합니다. 그러나 이들 천적 인간의 후손들의 상태는 자신들의 본성, 곧 자신들의 겉 사람에게 속한 본성을 정말 징그럽게도 원한 결과 너무도 변질, 더 이상은 겉 사람과 속 사람을 구별할 수 없게 되었고, 오히려 ‘속 사람이라는 것이나, 겉 사람이라는 것이나 같은 거 아냐?’ 할 지경이 되었는데요, 이런 일은 사람이 자신의 본성으로 기울어질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AC.160-162)
160
‘부모를 떠나’(leave father and mother)는 속 사람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인데요, 겉을 잉태하고 낳는 것은 속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내와 합하여’(cleave unto his wife)는 속이 겉 안에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be one flesh)는 그들, 곧 겉과 속이 거기 같이 있는 겁니다. 전에는 속 사람과 속에서 나온 겉이 영이었지만(were spirit), 지금은 이 둘이 육이 되었기(have become flesh) 때문입니다. 그렇게 천적 영적 생명은 하나처럼 보이는 본성(the own)에 인접해 있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은 오늘날 거의 모든 결혼식 주례 본문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이 본문은 얼핏 참 좋아 보이는 그럴듯한 본문이지만 그러나 그 속뜻을 보면 참 슬픈 본문이기도 합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과 결합한 게 아니라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결합, 결국 겉이 되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161
이들 태고교회의 후손은 악하지 않았고, 여전히 선했는데요, 그렇지만 그들은 그러면서도 겉 사람 안, 즉 그들의 본성 가운데 살기를 원했기 때문에 주님은 이를 허락하셨습니다. 주님의 자비로 그런 그들 안으로 영적 천적인 것들이 스며들듯 심어지면서 말입니다. 속과 겉이 어떻게 하나로 움직이는지, 어떻게 하나로 나타나는지 하는 건 이쪽에서 저쪽으로의 인플럭스(the influx of the one into the other, 入流)라는 걸 모르면 알 수 없는데, 이걸 알기 위해 어떤 행위를 하나 생각해 보면, 어떤 행위에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즉 사랑과 신앙, 그리고 그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 한, 그 행위는 체어리티의 일, 즉 신앙의 열매라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 사랑, 신앙은 속, 그것이 체어리티의 행위로 표현되는 건 겉이라는 뜻으로 이해되는데요, 천사들은 행위 속 동기를 본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선행을 겉으로만 보고 판단하는 반면, 천사들은 그 선행 속 마음의 동기를 본다고 합니다. 우리는 외적 존재여서 어쩔 수 없이 겉으로밖에는 볼 수 없지만, 천사들은 내적 존재여서 그 속을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다음의 주님 말씀도 이 글의 연장선, 곧 인플럭스의 흐름으로 이해가 됩니다.
16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19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16-20)
우리는 끝까지 안 좋은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주님은 그런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우리 안에 무슨 선한 작업, 곧 ‘영적 천적인 것들이 스며들듯 심어지게 하시는’ 일을 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인플럭스가 하는 일입니다.
162
모든 진리 및 올바름의 법은 그 기원이 천적이거나 천적 인간의 삶, 생활의 질서로 말미암습니다. 천국 전체가 천적 인간이기 때문인데, 이는 주님만이 오직 참으로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모든 천국과 천적 인간의 모든 것 되시기 때문에, 그래서 이 모든 진리 및 올바름의 법을 천적이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진리 및 올바름의 법이 천적 기원, 즉 천적 인간의 삶과 생활의 질서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결혼의 법 역시 그렇습니다. 이는 지상의 모든 결혼이 그 기원을 두거나 따라야 하는 천적 결혼인데, 이는 한 분 주님과 하나의 천국, 즉 한 분 주님과 하나의 교회, 주님을 머리로 하는 하나의 교회가 있는 그런 결혼입니다. 여기서 비롯되는 결혼의 법은 한 남편과 한 아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럴 경우, 그 부부는 천적 결혼(the celestial marriage)을 표상하며, 천적 인간의 한 전형(典型)이 됩니다. 이 법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계시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속 사람에게 새겨져 있었는데요, 그래서 그때는 한 남자는 한 명의 아내만 가졌고, 그렇게 그들은 한 가정을 구성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이 속 사람 되기를 중단, 겉 사람이 되면서 그들은 여러 명의 아내와 결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결혼에 있어 천적 결혼을 표상했기 때문에 결혼애(結婚愛, conjugial love)가 그들에게 일종의 천국과 천국의 행복이었지만 그 교회가 기울어졌을 때, 즉 쇠퇴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결혼애가 주는 행복 대신 숫자, 곧 겉 사람의 쾌락인 숫자가 주는 즐거움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은 ‘마음의 완악함’(hardness of heart)이라 하셨는데요, 주님 친히 가르치시기를, 이것이 그들이 여러 명의 아내와 결혼하는 것을 모세로 하여금 허락하게 하신 이유라 하셨습니다.
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6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7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8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9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막10:5-9)
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AC.163-167)
163
그들의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naked and not ashamed)이라는 것은 그들이 순진무구했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순진무구함(innocence, 이노센스)을 그들의 본성 안으로 오랫동안 스며들게 하셨기(had instilled) 때문인데요, 그들의 본성이 이런 순진무구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걸 방지하시기 위해서 그러신 것입니다.
164
인간의 본성은 앞서 서술한 것처럼 그저 악할 뿐이며, 만일 눈으로 볼 수 있게 드러날 경우 그야말로 기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체어리티와 이노센스가 이 본성 안으로 스며들면 그때는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는데요, 앞서 154번 글에서 보신 것과 같습니다. 체어리티와 이노센스는 그 본성, 즉 사람 안에 있는 악하고 거짓된 것을 안 보이게 가릴 뿐 아니라 마치 없어진 것 같게도 하는데요, 마치 유아들한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유아들한테서는 악과 거짓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즐거운 무슨 놀이처럼 보이기까지도 하는데요, 그들이 자기들의 부모를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한, 그리고 자기들의 유아적 이노센스가 드러나는 한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 말씀처럼 왜 사람이 어느 정도의 이노센스를 소유하지 않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지 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14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16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막10:14-16)
165
‘부끄러워하지 아니한 벌거벗음’(nakedness of which they were not ashamed)이 이노센스를 의미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증명되는데요, 온전함(integrity)과 이노센스가 떠났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벌거벗었음을 부끄러워했고 그런 자신들의 모습에 수치를 느꼈으며, 그래서 자신들을 숨겼다는 사실입니다. 영들의 세계에 있는 표상으로도 마찬가지인데요, 영들이 자신들의 무죄를 입증하고 죄 없음을 증명하고 싶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이노센스를 증언하기 위해 스스로 벌거벗기 때문입니다. 특히 천국에 있는 순진무구한 사람들한테서 이런 게 두드러지는데요, 그들은 그들의 이노센스한 본성에 따라 화환으로 장식된 벌거벗은 유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 정도의 이노센스까지는 아닌 사람들은 선지자들이 이따금 보았던 천사들처럼 다이아몬드 실크라 할 수 있는 빛나는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66
이런 것이 본 장 말씀에 들어있는 일부인데요, 그러나 이것들은 사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기서 천적 인간을 다루었는데 사실 오늘날 이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처럼 여기서 다룬 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조차 어떤 사람들한테는 모호하고 흐릿하게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167
만일 누군가 말씀 각 구절마다 얼마나 많은 아르카나가 담겨있는지를 안다면 그는 말문이 막힐 것입니다. 과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것들이 엄청나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인데요, 이런 사실이 겉 글자 상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걸 좀 간단히 말씀드리면 영들의 세계(the world of spirits)에서는 말씀의 겉 글자들은 정확히 있는 그대로 아름답고 질서정연하게 생생하게 표현, 표상됩니다. 영들의 세계는 표상의 세계(a world of representatives)이기 때문인데요, 거기서 생생하게 표상되는 것은 무엇이든 이번에는 이층천 천사적 영들(the angelic spirits who are in the second heaven)에 의해 그 표상들에 들어있는 아주 세밀한 것들에 대해서까지 지각되며, 그리고 그렇게 이층천 천사적 영들에 의해 지각된 것들은 이번에는 삼층천 천사들(the angels who are in the third heaven)에 의해 도저히 표현 불가한 천사적 아이디어로 풍성하게, 그리고 꽉 차게 지각됩니다. 최종적으로 이것은 주님의 선하신 즐거움(the Lord’s good pleasure)에 따라 무한히 다양하게 지각되기 때문인데 이런 게 바로 주님의 말씀입니다.
각 천국의 역량마다 감당할 수 있는 지혜의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지상 언어로 기록된 말씀 안에는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이 다 들어있지만, 지상에서 육체로 사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지혜는 가장 낮은 등급인 요만큼인 반면, 사후 일, 이, 삼 층 천 천국으로 올라갈수록 더욱 확장되고 더욱 크게 초월적이라는 말입니다.
어디서는 일, 이, 삼층천 천사들을 모두 천사, 그러니까 자연적 천사, 영적 천사, 천적 천사라 하는 반면, 또 어디서는, 그러니까 이 글에서처럼, 선한 영, 천사적 영, 천사라 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분명한 건 삼층천 천사, 천적 천사들이야말로 진정한 천사이며, 삼층천이야말로 참된 의미의 천국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상으로 창세기 2장 여섯 번째 시간인 ‘갈빗대, 한 몸, 벌거벗음’의 속뜻을 번역, 역시 설명을 곁들여 말씀드렸습니다.
말씀에 ‘긍휼’로도 나오는 ‘자비’(mercy)와 우리 대부분이 흔히 쓰는 ‘은혜’(grace)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우리는 평소 그냥 무심코 쓰지만 말입니다.
말씀에서 ‘자비’는 마음이 겸손한(in humiliation of heart) 사람들에게, ‘은혜’는 생각이 겸손한(in humiliation of thought)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천적인 사람들(天的, the celestial)은 주님께 ‘자비’를 구하지만(implore), 영적인 사람들(靈的, the spiritual)은 ‘은혜’를 구합니다(beseech).
천적이었던 태고교회, 곧 아담교회가 저물고, 홍수 후 새롭게 일어나는 고대교회, 곧 노아교회는 영적이었는데, 그래서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Noah found grace in the eyes of Jehovah) 하는 것입니다. ‘자비’가 아니고 말입니다.
의지(will)가 주님을 향해 열렸던 태고교회가 그 후손으로 갈수록 변질, 탐욕(cupidity)으로 변하면서 닫히는 바람에, 주님이 의지 대신 새로운 창, 곧 이해(understanding)에 해당하는 지적 파트(intellectual part)라는 우회로를 여셨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