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2026/08/09)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8,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 88, ‘내 진정 사모하는입니다.

 

오늘 일종의 쉬어가는 주로 AC 글 번호로는 314번에서 323번입니다. AC 3 뒤와 창4 , 그러니까 사후 사람이 영생에 들어가는 것’, 그리고 사후 사람이 영혼, 즉 영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내용을 함께 다루겠습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오늘은 창세기 본문이 필요 없는 AC 리딩 시간이지만, 3과 창4의 연결 시간이기도 하므로 창3:24와 창4:1을 묶어 봉독하겠습니다.

 

2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3:24; 4:1)

 

제목은

 

사람이 영생에 들어간다는 것과 영으로 산다는 것

 

이며, 다음은 오늘 범위인 AC.314-323 요약입니다.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AC.314-319)

 

AC.314-319는 사람이 죽은 뒤 어떻게 천사들의 인도를 받고, 자신의 내적 사랑과 삶의 질에 따라 점차 천국 또는 지옥을 향해 나아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후 처음 의식을 회복한 사람에게는 빛의 사용이 허락되고, 영적 천사들은 그가 원하는 것을 가능한 한 친절하게 도우며,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저세상의 일을 알려 줍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섭리의 중요한 원리가 드러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진리를 한꺼번에 강요하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상태와 수용 능력, 그리고 자유를 존중하시며,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씩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러한 가르침과 인도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내적 성향 때문에 천사들의 가르침을 원하지 않게 되고, 결국 스스로 천사들에게서 멀어지려 합니다. 중요한 것은 천사들이 그 사람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의 사랑과 성향에 따라 그들에게서 떠난다는 점입니다. 천사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친절히 돕고 가르치며, 가능한 한 천국으로 인도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천국의 사랑은 결코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이 끝까지 존중됩니다.

 

이후 사람은 다시 선한 영들의 공동체로 인도되어 도움을 받지만, 세상에서 형성된 그의 삶이 그들과 함께 머물 수 없는 성격이라면 그곳에서도 스스로 떠나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여러 차례 반복되며, 마침내 그는 자신의 세상에서의 삶과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마치 자기 자신의 삶을 다시 발견한 것처럼 느끼며, 결국 자신이 평생 사랑해 온 것이 무엇이었는지가 온전히 드러납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은 외부에서 강제로 배정되는 장소라기보다, 사람이 자신의 가장 깊은 사랑을 따라 스스로 찾아가는 영적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또한 사후의 인도 과정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속도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더 천천히, 어떤 사람은 더 빨리 천국으로 나아가며, 심지어 죽은 직후 거의 곧바로 천국으로 올려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주님의 사랑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각 사람이 지상에서 얼마나 천국의 사랑과 질서에 맞는 삶을 이미 형성하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AC.318의 첫 번째 사례는 이를 잘 보여 줍니다. 한 사람은 처음에는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여전히 세상에 있다고 생각했으며, 집과 재산을 모두 잃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걱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천적 천사들의 큰 친절을 받은 뒤, 그의 마음에서 나온 생각은 이 큰 사랑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였습니다. 바로 이 반응을 통하여 그가 지상에서도 이미 신앙의 체어리티 가운데 살았던 사람임이 드러났고, 그는 곧바로 천국으로 올려졌습니다. 사후에 새로운 성품이 생긴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형성된 사랑이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입니다.

 

AC.319에서는 또 다른 사람이 천사들에 의해 곧바로 천국으로 옮겨져 주님께 받아들여지고 천국의 영광을 보게 된 사례를 덧붙입니다. 이를 통해 스베덴보리는 사후의 길에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일반적인 질서가 있지만, 그 질서가 기계적으로 동일한 기간과 단계로 진행되는 것은 아님을 보여 줍니다. 이미 세상에서 천국의 삶을 자신의 내적 삶으로 형성한 사람에게는 긴 준비가 거의 필요하지 않을 수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는 보다 긴 정리와 준비의 과정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사람을 인도하고 받아들이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며, 천사들은 그 섭리를 수행하는 사랑의 봉사자들입니다.

 

따라서 AC.314-319의 핵심은 사후의 심판이 외부에서 내려지는 일방적인 판결이 아니라, 사람의 내적 사랑이 드러나고, 그 사랑과 맞는 공동체를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능한 한 사람을 천국으로 이끄시지만, 결코 그의 자유를 빼앗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자신이 세상에서 형성한 사랑을 따라 결국 자신의 영원한 삶의 자리를 찾아가며, 이미 천국의 사랑 가운데 살아온 사람에게 죽음은 천국의 삶이 중단 없이 계속되는 하나의 전환일 뿐입니다.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AC.320-323)

 

AC.320-323은 사람이 죽은 뒤에도 여전히 이전과 같은 사람으로 살아가며, 오히려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완전한 감각과 사고 능력을 지니게 된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사람이 저세상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여전히 이 세상에 있으며, 심지어 아직도 육체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죽음이 의식의 단절이 아니라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죽는 순간에도 기억과 생각, 욕망과 애정, 성격과 사랑을 그대로 지닌 채 영계로 들어가므로, 자신이 여전히 같은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AC.321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영의 감각과 사고와 말하는 능력이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육체를 벗으면 인간성이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분명하고 실제적으로 드러납니다. 다만 영들은 이러한 변화를 처음부터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며, 주님께서 성찰의 빛을 허락하실 때, 비로소 자신의 현재 상태와 지상에서의 상태를 비교하여 그 차이를 깨닫게 됩니다.

 

AC.322는 이를 시각, 청각, 후각, 촉각, 애정, 사고와 언어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영들은 지상의 한낮의 빛과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밝은 빛 가운데 보고, 육체의 청각으로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하게 들으며, 후각과 촉각 역시 훨씬 더 완전하게 사용합니다. 특히 모든 감각은 어떤 의미에서 촉각과 관련되며, 지옥의 고통과 괴로움 역시 영적 감각이 더욱 직접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경험됩니다. 따라서 영계는 감각이 사라진 추상적 세계가 아니라, 지상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실제적인 세계입니다.

 

또한 영들은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맑고 분명하게 생각하며, 그들의 하나의 관념 안에는 지상에서의 수많은 관념에 해당하는 풍부한 내용이 담길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말 역시 생각과 애정에 훨씬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지상의 언어보다 훨씬 더 예리하고 명료하게 의미를 전달합니다. 이는 감각과 사고의 실제 주체가 육체가 아니라 영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눈과 귀, 뇌와 혀는 영이 자연계에서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며, 육체를 벗은 뒤에는 그 영적 능력이 자연적 기관의 제약 없이 더욱 자유롭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뛰어난 능력이 그 자체로 선함이나 지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악한 영들도 뛰어난 감각과 사고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자기 사랑과 거짓을 위해 사용하며, 선한 영들과 천사들은 같은 능력을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를 위해 사용합니다. 따라서 사후에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얼마나 잘 보고 듣고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그 모든 능력이 어떤 사랑을 섬기고 있느냐입니다. 생명의 질은 감각과 사고 능력 자체보다 그것들이 무엇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추구하는지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러한 관점은 육체적 장애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빛을 줍니다. 육체의 눈이나 귀가 제한되어 있다고 해서 영 자체가 손상된 것은 아닙니다. 감각의 근원은 영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연계에서 특정 감각 기관에 제약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도 영으로서는 온전한 인간 구조를 지니며, 사후에는 육체의 제한에서 벗어나 그동안 영 안에 있었던 감각과 생각과 교통의 능력을 더욱 자유롭게 나타내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육체적 장애가 사람의 proprium이나 자기 사랑을 자동으로 제거하는 것도 아닙니다. 장애가 있든 없든 모든 사람은 동일하게 주님의 거듭남이 필요합니다.

 

마지막 AC.323은 이러한 설명을 실제 사례로 이어 주는 짧은 전환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의 끝, 그러니까 창4 끝에서, 지상에 있을 때 영과 사후의 삶을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의 사례를 제시하겠다고 예고합니다. 즉 영은 희미하고 비현실적이며 육체가 없으면 감각이나 사고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사후 자신의 실제 경험을 통하여 그러한 관념이 틀렸음을 어떻게 깨닫게 되는지를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결국 AC.320-323의 중심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사람의 참된 인간성은 육체에 있지 않고 영에 있으며, 죽음은 그 인간성을 약화시키는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육체의 제약을 벗겨 그 본래 상태를 더 분명히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사람은 죽은 뒤에도 여전히 같은 사람으로 보고, 듣고, 생각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오히려 그 모든 능력은 더욱 완전해집니다. 따라서 죽음은 생명의 소멸이 아니라, 영이 자신의 본래 세계에서 더 충만하고 실제적인 삶을 시작하는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314, 창3 뒤,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AC.314-319)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Man’s Entrance Into Eternal Life AC.314 되살아난(resuscitated) 사람, 곧 영혼이 주위를 둘러볼 수 있도록 빛의 사용이 허락되면, 앞에서 말한 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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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5, 창3 뒤, ‘사람의 사후 운명은 자신의 내적 사랑과 자유로운 선택으로 결정’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5 그러나 되살아난 사람, 곧 영혼이 가르침 받기를 원하지 않는 성향이라면, 그는 천사들의 무리로부터 떠나기를 원하게 됩니다. 천사들은 이를 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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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6, 창3 뒤, ‘사람이 사후 자신의 영원한 거처에 이르게 되는 과정’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6 영혼이 이처럼 그 천사들에게서 스스로 멀어지면, 그는 선한 영들에게 받아들여지며,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도 온갖 친절한 도움을 받습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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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7, 창3 뒤, ‘저마다 다 다른 속도로 진행되는 사후의 여정’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7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천국을 향하여 더 천천히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은 더 빨리 나아갑니다. 나는 죽은 직후 곧바로 천국으로 올려진 사람들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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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8, 창3 뒤, ‘사후 거의 곧바로 천국에 올라간 처음 사례’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8 어떤 영 하나가 내게 와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는 얼마 전에 막 세상을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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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9, 창3 뒤, ‘두 번째 사례’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9 나는 또 다른 한 사람도 보았는데, 그는 천사들에 의해 곧바로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는 주님께 받아들여졌고, 천국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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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0, 창4 앞,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AC.320-323)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AC.320 영혼(soul)으로서의 삶, 곧 죽은 뒤 처음 영계에 들어가는 신참, 신생 영들(novitiate spirits)의 삶에 관한 일반적인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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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1, 창4 앞, ‘사후 두 번째 상태, 삶의 질이 더 완전해짐’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1 두 번째 일반적인 사실은, 영은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감각 기능을 훨씬 더 뛰어나게 사용하며,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 또한 훨씬 더 탁월하다는 것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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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2, 창4 앞, ‘시각, 청각, 후각, 촉각, 욕망과 애정, 사고와 말의 능력의 확장’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2 영들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그릇된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수천 번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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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3, 창4 앞, ‘창4 앞(AC.320-322)의 구체적 사례를 뒤(AC.443-448)에서 제시하겠다고’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3 이 장의 끝에서는,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의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하겠습니다. At the end of the chapter, several examples will be g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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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보충 리딩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은 리딩 글 수도 적고, 대부분 요약에서 대략 다 다루어서 아래 심화들만 보충적으로 추가 리딩하시면 되겠습니다.

 

 

AC.314, 심화 1,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말하기’

AC.314.심화 1.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말하기’ 그들은 언제나 그 사람의 상태와 자유를 존중, 그가 진심으로 필요로 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을 제공합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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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6, 심화 1, ‘주님이 신생 영에게 일련의 코스를 밟게 하시는 이유’

AC.316.심화 1. ‘주님이 신생 영에게 일련의 코스를 밟게 하시는 이유’ 사람의 자유와 선택을 존중하시는 주님은 왜 사후 처음 눈 뜨는 영에게 이후 진행될 전체 코스를 설명, 너는 이 코스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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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2, 심화 1, ‘공주농아교회를 생각하며’

AC.322.심화 1. ‘공주농아교회를 생각하며’ 이 글을 읽으면서 반대로 농아(聾啞)인들, 그러니까 못 듣고, 말 못 하는 분들 생각과, 그분들을 대상으로 목회하시는, 저의 친구 목사님 생각이 났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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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주부터 창4 시작합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8-09(D1)

 

2663, 10, 창3.10, 2026-08-09(D1)-주일예배(창3 뒤, 창4 앞, AC.314-323), ‘사람이 영생에 들어간다는 것과 영으로 산다는 것’.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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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8/02, 창3:23-24, AC.305-313, 성찬), ‘그룹들, 두루 도는 불 칼,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 오늘(2026/08/02)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41, ‘내 영혼아 주 찬양하여라’,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성찬), 찬87,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입니다. 오늘은 창3 아홉 번째, 본문은 창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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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첫 강의를 듣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것이 일반적인 의미의 ‘강의’라기보다 새로운 공동체를 출범시키면서 그 정체성을 설명하는 일종의 오리엔테이션이라는 점입니다. 강사는 한국 개신교 안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수도 전통을 다시 세워 보고 싶다는 상당히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도사학교를 단순한 신학교나 성경공부 모임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부하고 시험을 치고 책을 읽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보다 훨씬 깊은 곳에는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놓여 있습니다. 이 선명한 문제의식, 곧 ‘한국 개신교에 수도(修道)가 필요하다. 그리고 수도는 지식을 더 쌓는 일이 아니라 사람 자체가 달라지는 일이어야 한다.’ 이것이 첫 강의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이 강의를 상당히 호의적으로 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역시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지식의 축적에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사람에게 알려지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지만, 아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이해한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고, 의지에서 행위로 나오며, 마침내 삶의 습관과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무엇을 알고 있는가’보다 훨씬 근본적인 질문은 ‘무엇을 사랑하는가’, 그리고 ‘그 사랑에 따라 어떻게 사는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수도사학교가 처음부터 ‘또 하나의 신학 공부’를 지향하지 않고, ‘사람의 변화’를 지향했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장점입니다.

 

강의에서 반복적으로 느껴지는 또 하나의 문제의식은 한국 개신교의 ‘목회자 중심적 성공 모델’에 대한 불만입니다. 교회를 크게 하고, 사람을 모으고, 조직을 확장하고, 목회자로서 사회적 위치를 얻는 것과 복음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반드시 같은 일이 아니라는 문제의식입니다. ‘,,’ 같은 표현을 비롯, 강사는 교회가 물질과 성공을 좇으면서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가능성을 상당히 강하게 경계합니다. 이것은 표현의 강약을 떠나서 매우 성경적인 문제제기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깊어집니다. 교회의 타락은 먼저 제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가 뒤집히면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진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높이고 세상을 소유하기 위해 종교와 진리를 사용하기 시작할 때, 겉으로는 여전히 교회이고, 설교와 예배와 성경이 존재하더라도 속에서는 이미 질서가 전도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수도를 요청하는 이유를 단순히 ‘가톨릭에는 수도원이 있으니 개신교에도 수도원이 하나쯤 있어야 한다’는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더 깊은 동기는 ‘목회 성공이라는 궤도 밖에서 하나님 앞에 한 사람으로 서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귀한 문제의식입니다. 목사라는 직함도, 교회의 크기도, 설교 능력도, 학위도 잠시 내려놓고, ‘나는 실제로 어떤 사람인가’를 하나님 앞에서 묻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도 매우 가까운 곳에서 만납니다. 영계에서는 직함이나 사회적 외관이 그 사람의 본질을 결정하지 않고,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왔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수도사학교의 방향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강의에서는 상당한 정도로 훈련과 절제와 고행이 강조됩니다. 수도원 생활의 엄격함, 추위와 배고픔, 단순한 음식, 침묵, 걷기, 불편한 잠자리, 금식과 같은 경험들이 소개되고, 실제 교육과정에서도 독서와 글쓰기뿐 아니라 몸으로 견디고 경험하는 훈련이 중요하게 취급됩니다. 강사가 경험한 여러 수도원과 수도자들의 이야기도 이런 맥락에서 등장합니다. 심지어 수십 년 동안 한 장소에서 수도생활을 한 사람들, 죽을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깊은 경외도 느껴집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몸을 가진 존재이고, 삶의 습관을 바꾸려면 일정한 규율도 필요합니다. 자기 욕망을 무조건 따라가지 않는 훈련 역시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도 거듭남에는 반드시 시험이 따르며, 사람은 자기 안의 악한 욕망과 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절제와 훈련 자체를 부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현대 그리스도교가 지나치게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된다’는 방향으로 흐르면서 삶의 훈련을 잃어버렸다면, 수도 전통이 그것을 일깨워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구별이 하나 생깁니다. ‘고생하는 것’과 ‘거듭나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배가 고프다고 proprium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추운 곳에서 잔다고 자기 사랑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침묵한다고 내면의 교만이 저절로 죽는 것도 아니고, 세상과 떨어져 산다고 세상 사랑이 자동으로 정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은 수도생활 자체를 자기 공로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들과 다르다. 나는 세상을 버렸다. 나는 금식한다. 나는 고행한다. 나는 수도자다’라는 새로운 형태의 proprium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세속적 자아를 버리고 종교적 자아를 얻은 것뿐이지, 진정한 자기 부인이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바로 여기서 이 강의를 읽는 중요한 열쇠가 생깁니다. 수도사학교가 추구하는 외적 훈련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어야 합니다. 침묵도 수단이고, 금식도 수단이며, 독서도 수단이고, 공동생활도 수단입니다. 심지어 수도원도 수단입니다.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사람이 자기 안의 악을 주님 앞에서 보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여 물리치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자신의 의지와 삶 안에 자리 잡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수도원이 도움이 된다면 수도원은 귀한 장소가 됩니다. 그러나 수도원 자체가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첫 학기 과정에서 독서와 글쓰기를 상당히 강조했다는 것도 새롭게 보입니다. 강의 후반부에서 강사는 A4 용지를 기준으로 요약하고, 인상 깊은 내용을 정리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과 연결하여 쓰게 하는 식의 과제를 설명합니다. 한 달에 일정량의 글을 제출하게 하고, 많은 책을 읽게 하는 상당히 강도 높은 과정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책을 많이 읽으라는 뜻보다 ‘읽은 것이 자기 삶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쓰라’는 중요한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바로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진리는 기억에만 머물러서는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억에 들어온 진리가 이해의 대상이 되고, 자신의 상태를 비추는 빛이 되며, 의지와 행위에 연결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다만 여기에도 한 단계가 더 필요합니다. ‘내 삶과 연결한다’는 것이 단순한 자기성찰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진리는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분석하기 위한 심리학적 도구가 아니라, 무엇이 주님의 질서이고, 무엇이 그 질서에 반하는지를 분별하게 하는 빛입니다. 그러므로 독서 후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무엇을 느꼈는가’만이 아니라 ‘이 진리가 내 안에서 어떤 악과 거짓을 드러내는가’, ‘나는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주님께서는 나를 어떤 선으로 이끄시는가’가 되어야 합니다. 이 단계까지 들어가면 수도사학교의 독서와 글쓰기 훈련은 단순한 인문학적 독서가 아니라 거듭남을 위한 자기성찰로 훨씬 깊어질 수 있습니다.

 

공동체 역시 그렇습니다. 혼자 있을 때에는 자신의 성품을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일하고, 불편을 견디며 다른 사람에게 맞추어야 할 때, 비로소 자기 안에 숨어 있던 성냄, 경쟁심, 인정 욕구, 지배욕, 질투, 조급함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수도 공동체의 진정한 가치는 세상에서 도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할 수 없게 만드는 데 있을 수 있습니다. 혼자 산속에 앉아 있을 때는 자신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여러 사람과 부딪히며 살아 보면 자신이 얼마나 자기 뜻대로 되어야 편안한 사람인지 금방 드러납니다. 이 점에서 공동생활은 매우 강력한 영적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도 한 가지 더 나아갑니다. 공동체 안에서 드러난 악을 단순히 억누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규칙 때문에 화를 참는 것과 화를 내고 싶어 하는 자기 안의 악을 죄로 인정하여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은 다릅니다. 전자는 행동 교정일 수 있지만 후자는 거듭남입니다. 수도학교의 엄격한 규칙이 사람을 단정하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규칙 자체가 사람의 속 사람을 새롭게 할 수는 없습니다. 속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외적 규율은 그 역사를 위한 질서를 제공할 뿐입니다.

 

이 점에서 첫 강의에서 느껴지는 ‘강한 사람을 만들겠다’는 분위기도 조심스럽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고, 많은 책을 읽고, 어려운 훈련을 통과하며,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사람을 만들겠다는 열정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강사는 과정 중 많은 사람이 떨어져 나갈 수 있다는 것도 예상하고 있으며, 끝까지 남는 소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천국적인 사람은 반드시 의지가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자기 힘을 강하게 만든 사람’이 아니라 ‘자기 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약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힘으로 악을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고, 싸우는 힘 자체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어쩌면 실패했을 때가 아니라 성공했을 때일지도 모릅니다. 금식에 성공하고, 침묵에 성공하고, 독서량을 채우고, 남들이 포기한 훈련을 끝까지 견디고, 마침내 ‘수도사’라는 이름까지 얻었을 때, proprium은 그것을 자신의 의로 취하기 쉽습니다. ‘나는 해냈다’가 되는 순간입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은 갈수록 ‘주님께서 하셨다’는 인식이 깊어지는 과정입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듯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승리는 자신의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수도의 외적 엄격함보다 훨씬 어려운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첫 강의 중 역사 부분은 조금 다르게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니므롯, 세미라미스, 담무스, 태양신 숭배, 바벨론 종교가 이후의 여러 종교와 기독교에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상당히 큰 역사적 틀로 제시됩니다. 여기서 강사가 말하고자 하는 영적 메시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순수한 하나님 신앙이 인간의 욕망과 권력, 우상숭배와 결합하면서 변질되고, 교회 역시 언제든 그 길을 갈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이 경고 자체는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그러나 세미라미스와 담무스를 중심으로 고대 바벨론 종교에서 후대의 가톨릭 및 기독교 관습을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역사 서술은 이 자료만으로 사실이라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이 부분의 역사적 사실성은 별도의 검증 대상으로 남겨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바벨론’을 어떻게 보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바벨론의 핵심은 단순히 어떤 고대 종교의 계보가 아닙니다. 영적으로 ‘바벨론’은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사람을 지배하려는 사랑, 곧 종교적인 것을 자기 권력과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상태와 깊이 연결됩니다. 이렇게 보면 바벨론은 밖에만 있지 않습니다. 가톨릭 안에서만 찾을 수도 없고, 특정 교단에만 돌릴 수도 없습니다. 개신교 목사에게도 바벨론이 있을 수 있고, 수도자에게도 있을 수 있으며, 심지어 ‘나는 타락한 교회를 떠나 순수한 수도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자신을 높이려는 순간, 바벨론의 원리는 그 사람 안에서 다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첫 강의의 역사적 도식을 오히려 훨씬 더 날카로운 영적 질문으로 바꾸어 줍니다. ‘어느 교회가 바벨론인가?’가 아니라 ‘내 안의 바벨론은 무엇인가?’입니다. ‘어느 종교가 타락했는가?’가 아니라 ‘나는 주님의 것을 이용하여 나 자신을 높이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 강의에 더해 줄 수 있는 중요한 깊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강사가 수도 전통을 개신교가 다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는 방식입니다. 수도원이 가톨릭보다 먼저 존재했던 기독교적 유산이며, 그러므로 개신교가 수도 전통 자체를 가톨릭적인 것으로 치부하여 버릴 필요가 없다는 문제의식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여기에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실제로 기도, 침묵, 절제, 독신 또는 단순한 생활, 공동체 생활, 노동과 묵상 등 수도적 요소들은 기독교 역사 안에서 오랫동안 존재해 왔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어느 교파가 수도원의 소유권을 갖느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형식 안에 어떤 영이 들어 있느냐입니다.

 

그러므로 수도복을 입는 것도 같은 원리로 볼 수 있습니다. 강의 후반에는 과정을 마친 사람과 수도복, 수도사로서의 정체성 등에 관한 이야기도 등장합니다. 수도복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겸손과 헌신을 기억하게 하는 표지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특별한 사람이라는 의식을 강화하는 표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옷이 아니라 애정입니다. 같은 수도복을 입은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나는 주님의 종이다’라는 마음으로 입을 수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나는 보통 신자와 다른 특별한 영적 사람이다’라는 마음으로 입을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동일하지만 영적으로는 전혀 다른 상태입니다.

 

여기서 수도사학교의 이름 자체도 흥미로워집니다. 나중에 ‘수도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명칭 변경 이상의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수도사’를 만드는 학교보다 ‘수도’를 배우는 학교라는 표현이 오히려 본질에 가까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수도는 특정 신분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명칭 변경의 실제 이유를 단정하는 말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바라본 의미입니다. 진정한 수도는 ‘나는 수도사다’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하는 데 있지 않고, 날마다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주님 앞에 내어놓으며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첫 강의에서 가장 귀하게 보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사는 완성된 체계를 가르치는 사람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국 개신교 안에서 거의 해 보지 않은 일을 ‘우리끼리 시작한다’, ‘전통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도 ‘아무의 전통을 우리가 만들어 가야 되지’라는 취지의 말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는 개척자의 서툶과 동시에 진정성이 있습니다. 이미 정답을 가지고 학생들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경험하고 배우면서 길을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첫 학기 일정표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완성된 수도원 규칙서라기보다 ‘한국 개신교 안에서 수도적 삶을 어떻게 실제로 가르쳐 볼 것인가’를 처음 실험해 본 흔적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이것을 전부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부분을 살릴 수 있습니다. 침묵은 자기 말이 얼마나 많은지를 발견하게 할 수 있고, 금식은 욕망의 힘을 보게 할 수 있으며, 공동생활은 proprium을 드러내고, 독서는 이해를 열며, 글쓰기는 자신의 상태를 성찰하게 하고, 노동은 관념적인 신앙을 실제 삶으로 끌어내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을 어디로 향하게 하느냐입니다. 이 훈련들이 ‘훌륭한 수도자’를 만드는 방향으로 향하면 자기완성의 종교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거듭나게 하시도록 내 안의 악과 거짓을 발견하고 물리치는 삶’으로 향한다면 매우 유익한 외적 질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가 수도 전통에 던지는 가장 큰 질문이 나옵니다. ‘왜 세상을 떠나야 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천국 이해에서는 세상에서 맡은 직업과 책임을 성실히 수행하고, 이웃에게 유용한 일을 하면서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삶이 매우 중요합니다. 거듭남의 현장은 반드시 수도원이 아닙니다. 가정도 수도원이 될 수 있고, 직장도 수도원이 될 수 있으며, 목회 현장도 수도원이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책임을 감당하며 돈을 사용하고 갈등을 해결하고 용서하고 봉사하는 그 복잡한 일상 속에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실제 모습이 끊임없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수도원은 거듭남을 위한 특별한 ‘훈련장’이 될 수는 있어도, 거듭남의 최종 목적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 수도사학교가 품었던 이상과 스베덴보리 사이에는 생각보다 상당히 넓은 접점이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을 만드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사람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 지식을 삶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것, 자기 욕망을 그대로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 물질과 성공에 사로잡힌 종교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 실제 훈련과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 등은 서로 깊이 만납니다. 차이는 ‘그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설명하는 데서 생깁니다.

 

수도사학교에서는 그것을 상당 부분 ‘훈련을 통한 사람 만들기’로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한층 안쪽으로 들어갑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거듭나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우고, 자신을 살피고, 악을 죄로 인정하고, 그것과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듯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악을 제거하시고, 새로운 의지를 심으시며,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수도의 가장 깊은 자리는 산속 수도원의 독방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입니다. 거기에서 ‘내가 원하는 것’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만납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첫 강의를 한 문장으로 이렇게 읽어도 좋겠습니다. ‘이 강의는 세상을 버리는 수도자를 만들려는 시도라기보다, 세상에 삼켜지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만들고 싶었던 한 개신교 목회자의 몸부림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보탭니다. ‘그러나 사람이 정말 버려야 할 것은 세상 그 자체가 아니라, 세상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사랑하는 proprium이며, 사람이 정말 들어가야 할 수도원은 외딴 장소 이전에 주님 앞에 열리는 자신의 내면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첫 강의를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역사 설명에는 검토해야 할 부분이 있고, 금욕과 외적 훈련에는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으며, 수도자라는 특별한 신분을 강조할 경우 생길 수 있는 위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 흐르는 질문은 매우 진지합니다. ‘목회자가 되고도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성경을 많이 알고도 자기 욕망대로 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교회가 커지고도 하나님에게서 멀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수도사학교는 그 답을 ‘수도’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질문에 아주 깊은 곳에서 답합니다. 다시 시작해야 할 곳은 ‘’입니다. 진리가 기억에서 이해로, 이해에서 의지로, 의지에서 행위로 내려와 마침내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은 자신의 proprium이 얼마나 완강한지를 발견하고, 수많은 시험을 통과합니다. 외적으로는 평범한 가정생활을 하고, 직업을 가지고 살아도 그 사람 안에서는 치열한 수도생활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평생 수도원에 살아도 자기 사랑을 붙들고 있다면 내적인 수도는 시작되지도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첫 강의와 첫 학기 일정표를 함께 놓고 보면, 어쩌면 이 학교가 처음부터 찾고 있었던 가장 깊은 것은 ‘수도사’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이 되는 것’,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실제로 살아가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 갈망은 귀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갈망을 더 안쪽으로 인도합니다. 수도복에서 삶으로, 고행에서 회개로, 자기훈련에서 주님의 역사하심으로, 세상으로부터의 분리에서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분리로, 그리고 ‘특별한 수도자’가 되는 데서 ‘주님으로부터 새롭게 된 사람’이 되는 데로 말입니다. 저는 이 첫 강의의 가장 아름다운 가능성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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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교의 중심은 매우 분명합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를 교회의 성장이나 성공, 은사나 신비 체험, 신학적 지식, 심지어 선교적 업적 자체에 두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두자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빌3:14의 ‘푯대를 향하여’를 중심에 놓고, 요단강에 발을 담그는 제사장들, 애굽으로 돌아가는 모세, 골리앗에게 달려가는 다윗, 아합 앞에 서는 엘리야의 모습을 연이어 제시하면서 이제 막 출발하는 교회가 처음부터 방향을 정확히 정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를 ‘GPS’라는 친숙한 비유로 설명합니다. 출발점에서 좌표가 조금만 어긋나도 먼 훗날에는 전혀 다른 곳에 도착하므로 교회의 좌표를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로 설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 전체를 관통하는 이 중심 명제는 매우 귀합니다.

 

특히 설교 초반에 제시되는 교회상은 주목할 만합니다. 설교자는 건물이나 숫자보다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고, 죄인이 들어와도 과거 때문에 정죄하거나 배척하지 않으며, 부자나 유명인이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특별대우를 받는 대신 연약한 사람이 사랑받고, 서로의 것을 나누며, 직분과 서열보다 겸손과 순결과 거룩함이 존중받는 교회를 꿈꿉니다. 반대로 직분과 권위, 시기와 경쟁, 험담과 배척으로 가득한 교회를 매우 강하게 비판합니다. 표현은 때때로 거칠지만 그가 지향하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교회는 외적 규모나 사회적 힘으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실제로 살아 있느냐에 따라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교회 이해와 상당히 가까운 곳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교회는 본질적으로 건물이나 교단, 조직 자체가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사람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있는가에 있습니다. 따라서 수천 명이 모이고 거대한 조직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 자체로 천국적인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니며, 아주 작은 공동체라고 해서 교회성이 약한 것도 아닙니다. 외적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은 그 외적 형식 안에 내적인 것이 살아 있을 때입니다. 설교자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보다 ‘한 죄인이 회개하는 것’을 더 귀하게 여기자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깊은 울림을 줍니다.

 

설교자가 예수님 곁에 세리와 죄인들과 사회적으로 멸시받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부분도 중요합니다. 그의 요지는 ‘과거가 더러웠던 사람이 교회에 들어왔을 때 그의 과거를 계속 꼬리표처럼 붙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관용 이상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사람은 현재 자연계에서 드러나는 이력만으로 규정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그 사람의 의지와 사랑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가입니다. 과거에 어떤 악 가운데 있었더라도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서며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다면,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바로 그 자리에서 진행됩니다. 그러므로 회개한 사람의 과거를 끊임없이 끄집어내어 현재의 그 사람을 규정하는 것은 거듭남이라는 복음의 본질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설교가 가장 힘 있게 전개되는 곳은 바울에 관한 부분입니다. 설교자는 바울에게 선교도, 신유도, 신비 체험도, 신학도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위대한 선교사였고 놀라운 능력을 경험했으며 ‘셋째 하늘’에 관한 체험도 있었고 뛰어난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모든 것보다 ‘그리스도를 얻는 것’을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3:8 이하의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를 중심으로 설교가 깊어집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 서신은 스베덴보리가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는 ‘말씀’의 책들과 동일한 방식의 내적 의미, 곧 연속적인 아르카나를 지닌 책으로 다루어지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빌3의 각 문구를 창세기나 출애굽기, 선지서나 복음서처럼 상응을 따라 속뜻으로 풀어 가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바울의 말이 영적으로 무가치하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여기서 표현된 ‘그리스도를 얻고자 한다’는 신앙적 고백은 매우 귀하며, 그 내용을 주님의 가르침과 스베덴보리가 밝힌 거듭남의 질서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삼는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많이 생각하거나 예수님에 대해 뜨거운 감정을 갖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의 계명을 사랑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는다는 것 역시 외적인 행동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가 사람의 의지와 삶 안에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의 푯대’라는 선언은 결국 ‘내 사랑의 질서가 주님의 질서를 닮아 가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타인을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유용한 일을 기쁨으로 행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 이것이 거듭남의 실제 내용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 설교가 강조하는 ‘내가 죽는 것’도 조금 더 깊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기를 원했다는 것을 매우 강하게 표현하면서, 고난과 죽음을 마치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돌에 맞은 바울이 다시 성으로 들어간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죽고 싶어서’라고까지 표현하고, 뒤에서는 ‘내가 죽기를 미치도록 갈망하고’라는 강렬한 말을 사용합니다. 설교자의 의도가 육체적 죽음이나 자살을 권하는 것이 아님은 문맥상 분명합니다. 그 자신도 이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영적으로 정돈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죽어야 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는 악과 거짓의 지배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격을 파괴하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인격을 살리십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자기 존재를 혐오하라는 말이 아니며, 고통 자체를 사랑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상태,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보다 앞세우는 상태, 자신의 지성과 의를 신뢰하는 상태가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가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것이 거듭남이며, 이것이 영적인 의미에서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따라서 설교 후반의 ‘고통이 오면 뛰어가서 환영하십시오’라는 권면은 그 열정은 이해하면서도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고통 자체를 선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고난은 때로 시험의 장이 되고, 주님께서는 그 시험을 통해 우리의 악과 거짓을 드러내시고 정화하시며 선을 더욱 굳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고통을 일부러 찾아다니거나 부당한 학대를 계속 허용하거나 자신에게 해를 가하는 상황을 ‘십자가’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고통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서도 주님을 의지하고 악에 악으로 대응하지 않으며 진리와 선을 선택할 때 그 시험이 거듭남을 섬기게 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셨으므로 나도 고난받아야 한다’보다 더 깊은 질문은 ‘예수님께서는 고난 가운데서 무엇을 이루셨는가’입니다. 주님의 전 생애는 지옥들과 싸우시고 인성을 신성하게 하시는 계속적인 시험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따른다는 것은 육체적 고통의 양을 주님과 비슷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올라오는 악과 거짓의 충동과 싸우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시험과 거듭남의 핵심입니다.

 

설교자가 벧전2를 인용하여 예수님께서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다’는 점을 강조하는 부분은 이러한 의미에서 매우 아름답습니다. 악을 악으로 되갚지 않는 것은 천국적 삶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상대방의 죄를 내가 짊어지고 내가 죽어야 한다’는 설교자의 표현은 신학적으로 구별해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다른 사람의 죄를 대속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악에 복수하지 않고 그것을 견딜 수는 있으며, 용서하고 그 사람의 회복을 바랄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의 악 자체를 내가 대신 담당하여 구속하는 것은 주님께 속한 일입니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대속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 가운데 이웃을 대하는 것입니다.

 

또한 용서는 악을 악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반복적으로 해를 입으면서도 무조건 참는 것이 언제나 사랑인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진리를 말하고 경계를 세우며 악이 더 진행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오히려 그 사람을 향한 체어리티일 수 있습니다. 천국의 사랑에는 따뜻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질서가 있습니다. 사랑과 진리는 분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보완된다면 설교자가 말하는 ‘욕을 당하고도 욕하지 않는 삶’은 훨씬 건강하고 깊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설교 후반부에서 다시 교회 이야기로 돌아가는 것도 좋습니다. 설교자는 ‘자기 의로 충만한 의인’보다 자기 죄를 알고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는 사람이 인정받는 교회, 큰소리치는 사람이 아니라 종처럼 섬기는 사람이 큰 자로 여김받는 교회,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사실보다 한 영혼이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는 교회를 꿈꿉니다. 여기에는 복음서에서 반복되는 주님의 가르침과 통하는 매우 중요한 직관이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지상의 지위와 명성이 질서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외적 신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랑이 어떠한지가 중요합니다. 섬김을 사랑하는 사람은 높아지려 하지 않지만 바로 그 때문에 천국의 질서 안에서는 큰 자가 됩니다.

 

다만 ‘자기 의는 전혀 없고 내 죄밖에 없다’는 표현 역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조금 더 섬세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선을 인간 자신의 공로로 돌리지 않는 것은 옳습니다. 모든 참된 선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거듭난 인간에게 실제로 선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단지 죄인으로 남겨 두고 외부에서 의를 덮어씌우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와 이해를 실제로 새롭게 하십니다.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행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본래 주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난 삶의 아름다운 역설입니다. ‘내가 행하지만 그것의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설교에서 가장 귀한 문장인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입니다’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문장의 깊이가 훨씬 더 깊어집니다. 예수님을 목표로 한다는 것은 단지 그분에 관한 지식을 늘리는 것도, 감동적인 체험을 많이 갖는 것도, 기적과 능력을 경험하는 것도 아닙니다. 설교자 자신이 선교와 신유와 신비 체험과 신학을 모두 궁극적 목표에서 내려놓은 것은 바로 이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이 있다고 해서 사람이 반드시 천국적이 되는 것도 아니며, 없다고 해서 주님에게서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비 체험 자체를 경계하거나 낮게 보는 방향으로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 역시 중요한 균형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방대한 영계 경험을 한 사람이라는 사실만 생각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문제는 영적 체험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것이 사람을 어디로 이끄느냐입니다. 환상이나 계시나 놀라운 체험을 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게 된다면 그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허락하신 영적 체험이 그를 더욱 겸손하게 하고, 주님을 사랑하게 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게 하고, 말씀을 더욱 사랑하게 한다면 그 열매를 함부로 멸시할 이유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체험이냐 이성이냐’라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그것이 선과 진리의 질서 안에 있는가입니다.

 

설교자가 교회의 미래를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로 가득한 교회’라고 그리는 마지막 장면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 말은 ‘모두가 비슷한 종교적 말투와 행동을 갖게 되는 공동체’를 뜻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 가운데 이루어지는 하나입니다. 각 사람은 서로 다른 성품과 은사와 유용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두가 하나의 중심, 곧 주님을 향합니다. 마치 인체의 서로 다른 기관들이 하나의 생명을 섬기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는 모두가 똑같아지는 곳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을 따라 서로를 섬기면서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이 점에서 설교 초반과 마지막은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어떤 교회를 꿈꾸는가’를 묻고, 마지막에는 성도들에게 눈을 감고 그 교회를 상상해 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놓습니다. 이것은 목회적 호소로서 힘이 있습니다. 교회의 출발점에서 건물과 숫자와 영향력이 아니라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 갈 것인가’를 묻는 것은 언제나 필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름다운 공동체 이상을 공유하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각 사람의 속 사람에서 실제로 거듭남이 진행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악을 보고 인정하며, 그것이 죄이기 때문에 주님 앞에서 피하고, 주님께 선을 행할 힘을 구하며, 실제 생활에서 이웃에게 선을 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반복되면서 외적인 신앙이 내적인 신앙이 되고, 알고 있던 진리가 삶의 선과 결합합니다. 그때 교회는 조직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 설교의 ‘GPS’ 비유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바꾸어 말한다면 이렇습니다. 목적지를 ‘예수님’이라고 입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매 순간 내가 걷는 길이 그 목적지와 일치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는가, 아니면 진리가 나를 변화시키도록 허용하는가. 내가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는가, 아니면 유용한 사람이 되려 하는가.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속으로 계속 정죄하는가, 아니면 진실을 분별하면서도 그의 최종 상태는 주님께 맡기는가. 내가 가진 신학과 체험과 은사를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는 데 사용하는가, 아니면 이웃을 섬기는 데 사용하는가. 바로 이런 일상의 작은 선택들이 실제 GPS의 경로가 됩니다.

 

그래서 이 설교의 가장 좋은 부분은 역설적으로 가장 단순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입니다.’ 이 문장을 굳이 고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우리에게 ‘그렇다면 예수님을 향해 간다는 것이 실제로 무엇인가’를 더욱 세밀하게 보여 줍니다. 그것은 고통을 많이 겪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며, 신비 체험을 부정하거나 반대로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신학적으로 누구보다 정확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 자신의 실제 삶에서 그것을 행하는 사람으로 조금씩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푯대를 향하여’라는 제목도 새로운 깊이를 갖습니다. 푯대는 단순히 저 멀리 바라보는 목표가 아닙니다. 주님은 목적지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향해 내딛는 매 걸음의 생명이십니다.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려 애쓸 때, 나보다 약한 사람을 이용하지 않고 보호할 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정직을 선택할 때,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길 때, 우리는 이미 그 푯대를 향하여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설교는 전체적으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 폐기하거나 경계해야 할 설교라기보다, 상당히 귀한 중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몇몇 강한 표현들을 거듭남과 시험, proprium, 체어리티,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조금 더 깊고 안전하게 다듬어 들으면 좋은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교회의 성공보다 예수 그리스도’, ‘직분보다 겸손’, ‘정죄보다 용서’, ‘유명인보다 회개하는 한 영혼’, ‘자기 자랑보다 섬김’을 앞세우는 방향은 소중합니다. 여기에 ‘자기 죽음’을 자기혐오가 아니라 proprium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거듭남으로, ‘고난’을 추구해야 할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허락하실 때 선과 진리가 굳어지는 시험의 장으로, ‘그리스도를 닮음’을 외적인 고난의 모방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삶으로 이해한다면 설교의 중심 메시지는 오히려 더욱 풍성해집니다.

 

마지막으로 이 설교가 던지는 질문은 결국 이것 하나로 모입니다.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로 삼고 있는가?’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질문을 다른 질문으로 바꾸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게 만듭니다. ‘내가 주님을 푯대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 나의 사랑, 생각, 말, 판단, 돈의 사용, 사람을 대하는 태도, 용서, 정직, 섬김과 유용한 삶에서 실제로 나타나고 있는가?’ 그렇다면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종교적 영웅이 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자신의 proprium에서 한 걸음 물러나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자신의 삶이 되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들이 하나둘 모일 때, 설교자가 그토록 간절히 꿈꾸었던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이 가득한 교회’도 비로소 외적인 이상이 아니라 이 땅에서 천국을 조금씩 드러내는 실제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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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영상은 ‘강문호 수도사 이야기 : 채널설립이유’라는 제목으로, 강문호 목사님이 앞으로 자신이 접한 수도사들의 삶과 수도원에 얽힌 이야기들을 한 편씩 소개하겠다는 취지를 밝히는 영상입니다. 공개된 정교회 자료와 예루살렘 교회 관련 자료를 대조해 보면 영상에서 소개하는 첫 인물은 4세기 팔레스타인 수도 전통의 중요한 인물인 성 카리톤(Chariton the Confessor)입니다. 카리톤은 예루살렘으로 가던 길에 강도들에게 붙잡혀 그들의 동굴에 결박된 채 갇혔고, 강도들이 다시 약탈하러 나간 사이 뱀이 포도주 그릇에 독을 남겼으며, 돌아온 강도들이 그 포도주를 마시고 죽었다는 전승이 전해집니다. 카리톤은 살아남은 뒤 강도들이 모아 둔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과 교회 및 수도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고, 자신이 구원받은 그 자리에서 수행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그곳에 파란 라브라(Pharan Lavra)가 형성되었고, 그는 뒤에도 두 곳의 라브라를 더 세운 것으로 전해집니다. 따라서 영상에서 ‘이스라엘 최초의 수도원’이라고 표현한 부분은 조금 넓은 표현이며, 보다 정확하게는 유대 광야의 초기 라브라 수도 전통을 연 매우 중요한 공동체라고 이해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Orthodox Church in America)

 

먼저 이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볼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은 기적 자체보다 카리톤의 반응입니다. 강도들이 갑자기 죽고 자신이 살아난 사건은 매우 극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전승에서 더 중요한 것은 카리톤이 살아남은 뒤, 그 사건을 자신의 특별함을 증명하는 표징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강도들이 모아 둔 재물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과 교회와 수도 공동체를 위해 사용했으며, 자신이 살아남은 장소에서 수행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기적을 자신의 명예로 돌리는 대신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중요합니다. 영적 체험의 가치는 그 체험이 얼마나 놀라웠는가에 있지 않고, 그 결과 사람의 사랑과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Orthodox Church in America)

 

스베덴보리는 기적이나 초자연적 현상이 그 자체로 사람을 거듭나게 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사람은 놀라운 일을 보고 잠시 두려워하거나 감동할 수 있지만, 그 감정이 지나간 뒤에도 이전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적보다 중요한 것은 자유 가운데 받아들인 진리와 그것을 따라 변화된 삶입니다. 카리톤 이야기가 영적으로 의미 있는 이유도 뱀이 독을 풀어 강도들이 죽었다는 기이한 사건 때문이라기보다, 자신에게 다시 주어진 생명을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사용했다는 데 있습니다. ‘내가 살아났다’는 놀라움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카리톤처럼 강도의 동굴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지 않았더라도 하루하루 생명을 받고 살아갑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생명의 원천이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형식입니다. 생명 자체는 오직 주님에게 있으며, 사람은 매 순간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생각하고 사랑하고 행동합니다. 사람은 그것을 자기 생명처럼 느끼도록 창조되었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다면 그다음 질문은 자연스럽게 ‘이 생명을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가 됩니다.

 

카리톤이 강도들의 재물을 자신의 소유로 삼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과 교회 등을 위해 사용했다는 전승도 이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재물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떤 사랑으로 어떤 쓰임을 위해 사용하는가입니다. 같은 재물이 자기 안전과 명예와 지배를 확대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강도들에게 재물은 탐욕과 폭력의 목적이었지만, 카리톤에게 넘어온 뒤 그 재물의 쓰임이 바뀌었다는 점은 상징적으로도 흥미롭습니다. 동일한 자연적 재물이 사랑의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성격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영상에서 강문호 목사님이 수도사들의 이야기를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의 초인간적인 이야기’처럼 소개하는 부분은 수도 전통에 대한 강한 감탄을 보여 줍니다. 실제로 극단적인 금욕과 고독, 기도와 희생의 삶을 살아간 수도사들의 이야기는 현대인에게 상당한 충격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참된 영성은 사람을 ‘초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 안의 본래 질서가 주님으로부터 회복되어 더욱 참된 인간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천사들도 인간과 다른 종류의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자연계에서 살다가 영계로 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수도자의 위대함도 인간적인 삶을 초월했다는 데 있지 않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벗어나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변화된 만큼에 있습니다.

 

따라서 수십 년 동안 동굴에서 기도했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영적으로 높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 수도자가 사막에서 평생 기도하는 삶과 한 사람이 가정에서 배우자와 자녀를 책임지고, 직장에서 정직하게 일하며, 반복되는 갈등 속에서 자기 분노와 이기심을 이겨 가는 삶 가운데 어느 것이 주님 보시기에 더 깊은지는 외적인 형태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장소와 형식이 아니라 지배적인 사랑입니다. 수도원에서 살아도 자신의 proprium을 사랑할 수 있고, 세상 한복판에서 살아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카리톤의 이야기 가운데 오히려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사람들이 자신에게 몰려들자 더 깊은 고독을 찾아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는 전승입니다. 정교회 자료에는 그가 사람들의 칭찬을 피하고 고독을 원하여 더 깊은 광야로 물러났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에게 영적 지도를 구하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았으며, 결국 다른 수도 공동체들도 세웠습니다. 고독을 사랑하면서도 사람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도와 쓰임의 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참된 고독은 사람을 이웃으로부터 도피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자신을 비운 뒤, 다시 이웃에게 더 순수한 쓰임을 행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Orthodox Church in America)

 

영상에서 특히 중요한 문장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은 아닌데 하나님의 소리만 나와야 한다’는 취지의 표현입니다. 이 말은 잘 이해하면 매우 아름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꾸어 말하면,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은 그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진실한 말을 하고 선한 일을 행할 때, 겉으로는 그 사람이 말하고 그 사람이 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선 자체와 진리 자체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사람은 그것을 받아 자유롭게 행하는 그릇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소리’가 난다는 것은 그의 말투가 특별하거나 신비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본질적으로는 그 사람의 말을 들은 뒤, 사람들의 시선이 그 사람에게 머물지 않고 주님께 향한다는 뜻이어야 합니다. 설교를 듣고 ‘저 목사님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만 남는 것과 ‘주님은 정말 이런 분이시구나’라는 깨달음이 남는 것은 매우 다릅니다. 전자는 사람에게 시선이 고정될 수 있지만, 후자는 사람을 통하여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매우 엄중한 영적 문제가 시작됩니다. ‘나에게서 하나님의 소리가 나야 한다’는 말이 어느 순간 ‘사람들이 나에게서 하나님의 특별한 음성을 듣는다’는 자기 인식으로 바뀌면, 그 순간 주님께 돌려져야 할 것이 proprium으로 돌아올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proprium은 세속적 자랑에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영적 체험, 말씀 지식, 기도생활, 목회 성공, 심지어 겸손과 희생까지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나는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습니다’라는 자기 의식이 생길 수 있을 만큼 proprium은 미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소리만 나와야 한다’는 문장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조금 더 완성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주님의 선과 진리가 흘러나와야 하지만, 정작 그 사람 자신은 그 선과 진리를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때에는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 선의 근원과 힘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내적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거듭해서 강조하는 중요한 영적 질서입니다.

 

영상에서 강문호 목사님은 이스라엘의 여러 수도원을 방문하면서 그곳에 얽힌 ‘아름다운 이야기, 기적의 이야기, 하나님 이야기’를 모았고, 그것을 앞으로 하나씩 소개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작업은 분명 가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랜 기독교 역사 안에서 실제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을 어떻게 주님께 돌렸는지를 보는 것은 오늘의 신앙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적의 이야기’와 ‘하나님 이야기’는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닙니다. 기적이 많이 등장한다고 하나님이 더 많이 드러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특별한 현상은 거의 없어도 한 사람이 수십 년 동안 정직하게 악을 피하고 이웃을 섬겼다면, 그 삶에서 주님의 섭리가 훨씬 깊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도 섭리는 대개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게 움직입니다. 사람은 극적인 기적에서는 쉽게 하나님의 손길을 찾지만, 평범한 일상의 질서와 자유로운 선택 속에서 이루어지는 주님의 섭리는 잘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아주 미세한 방법으로 그를 선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사들의 기적담을 들을 때에도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구나’에 머무르기보다, ‘그 일을 통해 이 사람의 사랑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카리톤 이야기도 바로 그렇게 읽는 편이 좋습니다. 독사와 포도주와 강도들의 죽음이라는 극적인 장면이 이야기의 중심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 가장 중요한 장면은 그 이후입니다. 그는 살아남았고, 재물을 나누었으며, 자신에게 다시 주어진 생명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몰려들 때에도 자신의 명성을 붙들기보다 다시 고독을 찾았다고 전해집니다. 적어도 전승이 보여 주려는 이상은 ‘기적을 경험한 특별한 인간’이 아니라, 살아남은 생명을 하나님께 돌려드린 인간입니다. (Orthodox Church in America)

 

여기에서 수도생활의 본질도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수도원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장소가 아닙니다. 수도복 역시 사람의 내적 상태를 바꾸어 주지 않습니다. 고독과 금식과 기도와 노동은 거듭남을 돕는 외적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그 수단을 통하여 실제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약해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라지 않는다면 수도의 외적 형식만 남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수도복을 입지 않고 세상 가운데 살더라도 자신의 악을 죄로 여기며 피하고, 맡겨진 쓰임을 정직하게 감당하며, 자신에게 있는 모든 선을 주님께 돌리는 사람이라면 그는 깊은 의미에서 내적 수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소개된 수도사 이야기를 ‘초인간적인 사람의 놀라운 일화’로만 받아들이기보다, ‘한 사람의 삶의 중심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라는 관점에서 읽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는 더 잘 맞습니다. 살아남았다는 사실보다 살아남은 뒤 어떻게 살았는지가 중요하고, 수도원을 세웠다는 사실보다 왜 세웠는지가 중요하며,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는 사실보다 그 사람들이 그를 통해 누구를 바라보게 되었는지가 중요합니다.

 

결국 이 영상의 가장 좋은 핵심은 ‘하나님의 사람에게서는 하나님의 소리가 나야 한다’는 문장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거기에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조건을 덧붙입니다. 그 사람에게서 주님의 소리가 날수록 그 사람 자신은 더욱 뒤로 물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름이 커지는 만큼 주님의 이름도 함께 커지는 것이 아니라, 참된 영적 질서에서는 사람이 투명해질수록 그를 통하여 주님이 더욱 분명히 보입니다.

 

따라서 이 영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성 카리톤의 이야기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가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기적 자체가 아니라, 다시 받은 생명과 재물을 자신의 것으로 움켜쥐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쓰임으로 돌렸다는 데 있으며, 참된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 특별함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통하여 주님의 선과 진리가 드러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상 속 ‘하나님은 아닌데 하나님의 소리만 난다’는 표현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마지막 한 문장을 덧붙인다면 저는 이렇게 쓰고 싶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소리가 나는 사람은 자신에게서 들리는 그 선한 소리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SY.49, 강문호 목사, ‘갈보리교회 은퇴사’ (20191201)

※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 영상은 강문호 목사님이 충주봉쇄수도원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시작하면서 전한 첫 인사입니다. 오랫동안 섬기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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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 영상은 강문호 목사님이 충주봉쇄수도원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시작하면서 전한 첫 인사입니다. 오랫동안 섬기던 교회를 떠나 수도생활에 들어간 뒤, 이전 교회의 성도들에게 영상으로 인사를 전하면서, 후임 목회자와 새로 세워지는 직분자들을 축하하고, 지난 목회를 함께해 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앞으로 자신이 걸어가려는 새로운 사역의 방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영상은 어떤 특정한 성경 본문을 강해하는 설교라기보다 한 목회자가 오랜 담임목회를 마치고, 새로운 삶의 단계로 들어서면서 자신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소망을 밝히는 인사말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먼저 영상에서 인상 깊은 것은 이전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애정과 감사입니다. ‘여러분들은 영상으로나마 제 얼굴을 보는데 저는 여러분을 보지 못해서 너무 안타깝다’는 첫 인사에는 오래 함께했던 공동체를 향한 그리움이 묻어 있습니다. 이어 후임 목회자를 자신보다 훌륭한 목회자로 기대한다고 축복하고, 장로들과 부목사들, 전도사들, 선교회와 교사들, 찬양대와 성도들에게 감사하면서 ‘모두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었다’는 취지로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이러한 감사는 귀한 태도입니다. 사람은 홀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수많은 서로 다른 쓰임들이 하나를 이루는 질서이며, 천국에서도 어느 한 존재가 모든 것을 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목회 역시 여러 사람의 기도와 노동과 조언과 봉사가 결합되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지난 세월을 자신의 업적으로만 기억하지 않고, 함께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은 천국의 공동체적 질서와도 잘 어울립니다.

 

후임 목회자를 향해 ‘저보다 훌륭해서 잘되리라고 믿는다’는 취지로 말하는 부분도 의미가 있습니다. 한 시대의 자신의 역할이 끝났음을 인정하고, 다음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은 영적으로도 중요한 일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모든 직분과 역할은 사람이 영원히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어떤 쓰임을 위해 일정 기간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자신의 사역을 붙잡기보다 새로운 사람에게 기꺼이 넘기고, 그가 더 잘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적어도 표현된 내용 자체로 보면, 자신의 역할을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의 쓰임으로 이해하려는 방향과 맞닿아 있습니다.

 

영상의 중심은 이후 자신의 새로운 삶을 소개하는 부분으로 옮겨갑니다. 강 목사님은 이제 한 교회의 담임목회라는 범위를 넘어 수도원과 연결된 새로운 사역을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여러 나라의 수도원들과 네트워크를 만들고, 은퇴한 목회자들이 함께 모여 ‘평생 새벽기도, 평생 연구, 평생 후학들을 가르침, 평생 노동, 그리고 그 노동으로 얻은 것을 통한 평생 선교’를 하며 죽는 날까지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는 비전을 밝힙니다. 여기에는 은퇴를 사역의 종료로 생각하지 않고, 삶의 마지막까지 어떤 쓰임을 계속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쓰임’이라는 관점에서 매우 흥미롭게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국의 삶은 무위도식하는 삶이 아니라 끊임없는 쓰임의 삶입니다. 천사들도 각자의 사랑과 지혜에 따라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주는 일을 행합니다. 그러므로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단순히 쉬는 삶만을 이상으로 삼기보다, 기도하고 연구하고 가르치고 노동하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는 열망 자체는 귀합니다. 특별히 영상에서 기도와 연구뿐 아니라 ‘노동’을 수도생활의 중요한 부분으로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영적 삶은 머릿속의 명상이나 종교적 감정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유용한 삶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쓰임’에서 중요한 것은 그 규모보다 그 내적 목적입니다. 수도원이 몇 개 세워지고, 몇 나라와 연결되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통하여 실제로 사람 안에 선과 진리가 자라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큰 일을 했다는 이유로 더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충실하게 수행한 사람이 귀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작은 공동체를 섬기는 일이나 한 사람을 돌보는 일도 그 사랑과 쓰임이 참되다면 큰 조직을 세우는 것보다 결코 영적으로 작지 않습니다.

 

영상에는 ‘봉쇄수도원’이라는 독특한 삶의 방식도 소개됩니다. 일정한 특별한 경우 외에는 수도원 밖으로 나가지 않고, 사람들과의 접촉도 제한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겠다는 것입니다. 고독과 침묵은 오래된 기독교 수도 전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으며, 분주한 외적 활동에서 물러나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는 시간은 분명 유익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때때로 무리를 떠나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람과 활동으로 가득했던 오랜 목회생활을 마친 뒤, 일정 기간 깊은 고독을 선택하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외적으로 세상에서 물러나는 것 자체를 더 높은 영적 상태로 보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거듭남은 대부분 실제 삶의 관계와 책임 가운데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혼자 있을 때에는 자신의 인내와 겸손을 확인하기가 쉽지만, 다른 사람과 부딪히고 의견이 다르며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 비로소 자기 안의 분노와 지배욕,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고독은 거듭남을 돕는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거듭남은 아닙니다. 수도원의 문을 닫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사랑이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며, 사람과의 만남을 줄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만나는 사람을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상에서 특히 생각해 볼 부분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고, 만나야 할 사람이 많아져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사람들만 만나느라 분주하면 너를 만나 주지 않겠다’는 취지의 말씀을 받았다고 소개하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우선 귀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사역의 분주함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대신할 수 없다는 자각입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이유로 끝없이 사람을 만나고 행사를 진행하면서, 정작 자신의 내면은 점점 메말라 갈 수도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종교적인 일로 가득하지만, 내적으로는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역설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활동을 줄이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려는 결심에는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개인이 기도 가운데 경험한 어떤 내적 음성이나 생각을 곧바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으로 확정하는 데에는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사람의 생각과 감정에는 여러 근원의 인플럭스가 작용하며, 자연계에 사는 동안 사람은 그 근원을 명확하게 식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강한 내적 감동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주님의 뜻과 일치하는지는 말씀의 진리, 이성적인 분별, 그리고 그 결과 맺히는 선한 열매를 통해 확인되어야 합니다. 개인적인 체험을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 체험 자체가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강 목사님은 자신의 사역이 한 교회와 한 나라를 넘어 여러 나라의 수도원으로 확장되고, 더 나아가 ‘땅을 넘어 하늘까지’, ‘이 세상과 저세상까지’ 연결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취지로 말합니다. 이 표현은 문자 그대로의 영계 교통을 주장한다기보다 자신의 수도 사역을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싶다는 포부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자연계와 영계의 관계가 실제로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은 몸으로는 자연계에 살지만 그의 내면은 이미 영계와 연결되어 있고, 모든 선과 진리의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흘러옵니다. 따라서 지상의 삶은 영원한 세계와 단절된 삶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연계와 영계를 연결하는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특별한 수도생활이나 어떤 영적 훈련이 인간에게 두 세계를 연결하는 권능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이미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있으며, 상응의 질서를 통해 영계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저세상과 연결될 것인가’보다 ‘이미 주님으로부터 흘러오는 선과 진리를 이 세상에서 어떻게 받아 살아낼 것인가’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영계를 보고 천사들과 대화했지만, 그의 저작에서 영적 삶의 핵심은 영계를 보는 능력이 아니라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주님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영상 전체를 통하여 느껴지는 한 가지 강한 흐름은 ‘남은 생애를 그냥 보내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오랜 목회를 마치고도 기도와 연구, 후학 교육과 노동과 선교를 계속하며 죽는 날까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에는 분명 귀한 면이 있습니다. 사람의 노년 역시 주님께서 주신 생명의 한 시기이며, 그때에도 경험과 지혜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삶의 어느 시기도 그 자체로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의 조건 안에서 어떤 선한 쓰임을 행하는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수도생활이든 목회든 선교든 모든 외적인 사역에는 하나의 공통된 영적 기준이 있습니다. ‘이 일을 통해 나의 자아가 커지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커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세속적 성공을 내려놓고도 종교적 성공을 사랑할 수 있고, 물질적 명예에서 물러난 뒤에도 영적 명예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외적인 형식 자체보다 그 안에 흐르는 사랑의 성질을 봅니다. 수도원이라는 장소도, 기도와 연구라는 활동도, 선교라는 이름도 자동으로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한 사랑의 쓰임이 될 때 거룩해집니다.

 

그런 점에서 이 첫 인사 영상은 한 목회자가 자신의 이전 사역을 감사 가운데 내려놓고, 새로운 삶의 단계로 들어가려는 모습을 담은 영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전 교회를 축복하고, 함께한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자신은 앞으로 고독과 기도, 연구와 교육, 노동과 선교를 결합한 수도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러한 열망을 먼저 존중하면서도, 수도의 본질을 외적인 봉쇄나 활동의 규모에 두지 않습니다. 참된 수도는 사람이 어디에 사느냐보다 그의 마음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에 있으며, 참된 사역은 얼마나 큰 일을 이루느냐보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얼마나 순수하게 이웃의 유익으로 돌리는가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 첫 영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담임목회를 마치고 고독과 기도, 연구와 노동, 후학 양성과 선교라는 새로운 쓰임의 삶으로 들어가려는 결심은 귀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참된 수도의 완성은 세상에서 얼마나 멀리 물러났는가가 아니라, 자기 사랑에서 얼마나 벗어나 주님과 이웃을 위한 쓰임의 사람이 되어 가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입니다.

 

 

 

SY.50, 강문호 목사, ‘이스라엘 첫 수도원, 채리톤’ (20191208)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영상은 강문호 목사님이 수도사로 임명받은 뒤, 수도생활을 하면서 접하게 된 수도사들의 이야기를 앞으로 유튜브를 통해 하나씩 소개하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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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21

죽음 이후의 세계와 중간영계 : 천국과 지옥은 가는 장소이기 전에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2강의 출발점은 매우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강사는 우리가 흔히 죽은 사람을 곧바로 ‘천국에 갔다’고 표현하지만, 실제 영계에는 그보다 훨씬 세밀한 질서와 과정이 있다고 설명하면서 강의를 시작합니다. 이 문제의식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매우 반갑게 만날 수 있는 지점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람이 육체의 죽음과 동시에 곧바로 최종적인 천국이나 지옥의 공동체에 정착한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먼저 영들의 세계, 곧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영계에 들어가며, 거기서 지상생활 동안 형성된 내적 상태가 점차 드러나는 과정을 거칩니다. 따라서 이 강의가 죽음 이후의 세계를 단순히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는 두 공간으로만 보지 않고 그 사이의 과정과 질서를 설명하려 한다는 점은 중요한 장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처음부터 하나의 중요한 기준을 세워 둘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간영계는 구원 여부를 다시 결정하는 두 번째 기회의 장소가 아닙니다. 사람이 지상에서 형성한 지배적 사랑이 사후에 점차 드러나는 곳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차이입니다. 사람은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자유와 이성 가운데 선과 악을 선택하고, 반복된 선택을 통하여 자기 사랑의 방향을 형성합니다. 육체가 죽는다고 그 사람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육체와 사회적 환경 때문에 가려져 있던 그의 참된 내면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중간영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새로운 사람을 만드는 일’이라기보다 지상에서 이미 되어 온 사람이 ‘실제로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내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죽음에 관한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을 크게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는 흔히 죽음을 하나의 거대한 경계선으로 생각합니다. 이쪽에서는 지상의 삶을 살다가 죽는 순간 갑자기 전혀 다른 영적 세계로 옮겨지고, 그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천국이나 지옥으로 배치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랑의 형성’입니다. 죽음은 사람의 지배적 사랑을 바꾸는 사건이 아니라 그것을 가리고 있던 자연적 몸을 벗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영원을 준비하는 가장 중요한 시간은 바로 지금의 지상생활입니다.

 

강사가 영계의 여러 영역과 상태를 설명하려는 이유도 결국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죽은 뒤 곧바로 모든 것이 단순하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실제 내적 상태가 드러나는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과정을 어떤 복잡한 사후 행정 절차처럼 이해하지 않습니다. 영계에서는 외적 조건보다 내적 사랑이 질서를 결정합니다. 같은 사랑을 가진 영들은 서로를 끌어당기고, 서로 반대되는 사랑을 가진 영들은 함께 머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최종적으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는 것은 외부에서 강제로 어느 장소에 배치되는 것이라기보다 그 사람이 사랑하는 것에 따라 자기에게 맞는 공동체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상태’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분명 실제 영계의 공동체와 장소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장소를 결정하는 것은 상태입니다. 천국에 있는 천사가 천국적인 이유는 천국이라는 좌표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의 선을 사랑하는 천국적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지옥의 영이 지옥적인 이유도 어떤 지하 공간에 갇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질서 밖에서 지배적 사랑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영계의 공간은 내적 상태와 상응합니다. 자연계에서는 서로 미워하는 두 사람이 같은 방에 앉아 있을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내적 상태가 완전히 드러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다른 사랑들은 오래 함께 머물 수 없습니다.

 

이 원리는 죽음 이후의 심판도 매우 다르게 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생애를 장부처럼 검토하신 뒤 ‘너는 천국’, ‘너는 지옥’이라고 외적으로 판결하시는 장면만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모든 심판은 주님의 신적 질서 아래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심판의 핵심은 사람의 실제 사랑이 드러나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향하여 갑니다. 선을 사랑하는 사람은 선이 있는 곳에서 숨을 쉬듯 편안함을 느끼고, 악을 사랑하는 사람은 천국의 선과 진리를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에는 놀라운 역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도 지옥으로 던지고 싶어 하지 않으시지만, 악을 자기 생명으로 만든 영은 천국에 머무는 것을 오히려 고통스럽게 느낍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구원’이라는 말도 훨씬 깊어집니다. 구원은 단순히 죽은 뒤 지옥 대신 천국이라는 좋은 장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을 억지로 천국 한가운데 데려다 놓는다고 해서 그가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의 모든 기쁨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숨 막히는 상태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지상에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것은 단순히 ‘천국 입장 자격’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사랑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사경회가 계속 강조하는 ‘연단’의 의미도 중요해집니다. 강사는 지상의 삶을 사람이 영원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보고, 여러 시험과 고난을 통하여 죄와 정욕이 다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매우 귀합니다. 신앙을 단순한 교리적 동의나 일회적 결단에 머물게 하지 않고 실제 사람의 변화와 연결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 역시 거듭남 없는 천국을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연단의 목적을 ‘천국에 들어갈 점수를 쌓는 것’이나 ‘특별히 높은 영적 등급에 도달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연단과 시험의 목적은 사랑의 질서가 바뀌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분노한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처음에는 그는 자기 분노를 정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이 잘못했으니 내가 화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면서 자기 분노 안에 있는 지배욕과 자기애를 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분노가 올라올 때 그것을 자기의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거절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싸움이 반복되면서 어느 순간 그는 단순히 화를 참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선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으로 조금씩 변화됩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외적 행동의 억제에서 시작하여 사랑 자체의 질서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얼마나 많은 시험을 통과했는가?’가 아니라 ‘그 시험을 통하여 내 사랑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입니다. 고난을 많이 겪었다고 자동으로 거듭나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 때문에 오히려 더 완고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고난 가운데 자기 힘의 한계를 알고 주님을 의지하며 다른 사람의 아픔을 더 이해하게 된다면 그 고난은 거듭남의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고난 자체를 사랑하시거나 고난을 목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허용된 어려움까지도 가능한 한 영원한 선을 위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강의에서 다루는 중간영계의 의미도 이 관점에서 보면 더욱 명확해집니다. 중간영계에서는 사람이 지상에서 쌓아 놓은 외적 모습이 점차 벗겨집니다. 지상에서는 신분, 직책, 학력, 명성, 말솜씨, 종교적 지식 등이 사람의 실제 내면을 가릴 수 있습니다. 목회자라고 해서 반드시 내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며, 평범한 성도라고 해서 영적으로 낮은 것도 아닙니다. 매우 경건한 언어를 사용하면서 내적으로는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품을 수도 있고, 신학적 지식은 많지 않아도 진실하게 이웃의 선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연계에서는 이 둘을 정확히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후에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중간영계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가 바로 외적 사람과 내적 사람의 일치입니다. 사람은 점차 자기가 실제로 사랑하는 것을 그대로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게 됩니다. 위선적 외피를 계속 유지할 수 없습니다. 선한 사람에게는 외적 결함과 잘못된 관념들이 제거되면서 그 안에 있던 선이 더 자유롭게 드러나고, 악한 사람에게는 외적으로 선하게 보이게 했던 위장과 억제가 벗겨지면서 그가 실제로 사랑했던 악이 드러납니다.

 

이것은 두려운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매우 위로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두려운 이유는 우리가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모습으로 영원을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로가 되는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의 외적인 미숙함만 보고 판단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리를 잘못 알고 있을 수 있고, 성격적으로 거칠거나 표현이 서툴 수도 있으며, 여러 약점 때문에 외적으로 완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진심으로 주님을 향하고 선을 사랑한다면 주님께서는 그 선을 보십니다. 사후에는 선과 어울리지 않는 거짓과 결함이 제거되고 그 사람 안의 참된 선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매우 바른 교리를 알고 경건한 말을 하며 종교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라도 그 모든 것을 자기 명예와 지배를 위해 사용했다면 사후에는 그 내적 사랑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심판의 중심은 ‘무엇을 알고 있었는가?’만이 아니라 ‘무엇을 사랑했는가?’입니다. 물론 진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목적은 선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면서 그 진리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지배하는 데 기쁨을 느낀다면 진리가 오히려 proprium의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점은 이 사경회처럼 영적 성숙과 성결을 강하게 강조하는 전통을 바라볼 때도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수도적 훈련, 금식, 기도, 말씀 공부, 자기부인, 절제는 모두 귀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그 자체로 천국적 상태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그 모든 훈련을 통하여 자기애가 약해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깊어져야 합니다. 오래 기도한 결과 다른 사람에게 더 온유해졌는가, 많은 말씀을 배운 결과 자기 판단을 덜 절대화하게 되었는가, 절제와 자기부인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더 품게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수도적 훈련의 참된 열매는 ‘나는 많이 훈련받은 사람’이라는 자기의식이 아니라 체어리티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강사가 영계의 여러 상태를 세밀하게 구분하려는 노력과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 사이에는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차이도 있습니다. 영계의 구조를 많이 아는 것 자체가 영적 성숙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게 천국과 영들의 세계와 지옥을 기록했지만, 그 목적은 사람들에게 사후세계에 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모든 설명은 결국 ‘그러므로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로 돌아옵니다. 천국의 공동체를 백 가지 알아도 이웃을 미워한다면 그 지식은 사람을 천국적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오히려 영계에 관한 참된 지식은 현재의 삶을 비추어야 합니다. ‘사후에는 같은 사랑을 가진 영들이 서로 모인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가장 즐거운가?’를 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험담하고 우월감을 나눌 때 즐거운가, 아니면 선한 쓰임과 진리를 나눌 때 즐거운가? ‘사후에는 내적 상태가 드러난다’는 것을 알았다면 ‘나는 지금 사람들에게 보이는 나와 주님 앞의 내가 얼마나 같은가?’를 물어야 합니다. 영계의 지식은 이렇게 자기 성찰로 이어질 때 비로소 생명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공용복 선생 시절부터 이 사경회가 강조해 온 실제적인 자기부인과 연단의 전통을 이해하는 데도 좋은 접점을 제공합니다. 이 전통의 가장 귀한 부분은 영계를 많이 아는 데 있지 않고,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 삶으로 살아내려 했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핵심진리’를 반복해서 배우는 목적도 결국 그 진리가 사람의 삶이 되는 데 있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 전통을 바라볼 때에도 먼저 그 열망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연단의 목표가 자기 완성이나 영적 특권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임을 더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중간영계라는 개념은 여기에서 우리에게 아주 실제적인 질문 하나를 던집니다. ‘지금 나에게서 모든 외적 조건이 벗겨진다면 무엇이 남을 것인가?’ 목사라는 직함도, 수도사라는 이름도, 교단도, 학력도, 책도, 블로그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도 모두 사라지고 오직 내가 실제로 사랑하는 것만 남는다면 나는 어떤 사람일 것인가? 이것이 사후세계에 관한 질문이면서 동시에 오늘의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국에서는 인간의 진정한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분명해집니다. 자연계에서는 외적인 조건들이 우리를 규정하지만 영계에서는 사랑이 우리를 규정합니다. 그래서 천국의 천사들은 모두 서로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획일적인 인간을 만들지 않으십니다. 각 사람의 고유한 성향과 재능과 경험을 정결하게 하여 고유한 쓰임으로 만드십니다. 거듭남은 ‘나’를 없애는 과정이 아니라 proprium의 지배를 제거하여 주님께서 처음부터 의도하신 참된 ‘나’가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자기부인이라는 말도 새롭게 이해하게 합니다. 자기부인은 인격과 개성과 자유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보다 자기를 앞세우는 proprium의 지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자기부인은 사람을 무색무취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자유롭고 고유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천국에서 모든 천사가 서로 다른데도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두가 같아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르면서도 중심이 한 분 주님이시기 때문에 하나가 됩니다.

 

따라서 2강의 첫 부분에서 다루는 ‘죽음 이후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주는 가장 깊은 대답은 단순히 ‘먼저 중간영계로 갑니다’가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대답은 ‘사람은 자기가 되어 온 사랑의 상태로 들어갑니다’입니다. 중간영계는 그 사랑이 드러나는 과정이고, 천국과 지옥은 그 사랑이 완전히 자기에게 맞는 공동체를 찾은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죽음 이후의 세계를 준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영계의 지도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사랑이 천국의 질서를 향하도록 주님의 도움 가운데 거듭나는 것입니다.

 

2강 1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단순하게 천국이나 지옥이라는 최종 장소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중간영계에서 지상생활 동안 형성된 내적 사랑과 실제 성질이 드러나는 과정을 거친다는 강사의 문제의식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와 중요한 접점을 가지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과정을 사후에 구원의 기회를 다시 얻는 과정이나 외부적 심사 절차라기보다 자연계에서 자유롭게 형성한 지배적 사랑이 외적 가림을 벗고 드러나 그 사랑과 상응하는 공동체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따라서 천국과 지옥을 단순한 사후의 장소보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또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지배하는 영원한 생명의 상태로 보며, 결국 사후세계에 관한 모든 지식의 목적도 ‘죽은 뒤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호기심보다 ‘나는 지금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되어 가고 있는가?’라는 거듭남의 질문으로 돌아가야 함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2강의 첫 문을 열면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영계의 복잡한 구조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람은 죽어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 오히려 자신이 실제로 사랑해 온 사람이 됩니다. 지상에서는 감출 수 있었던 것이 영계에서는 드러나고, 억지로 유지하던 것은 벗겨지며, 실제로 사랑했던 것이 삶 전체를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영원을 준비하는 일은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기 전에 사랑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보면 ‘연단’도, ‘광야’도, ‘자기부인’도, 이후 2강에서 계속 등장하게 될 ‘흰옷’, ‘할례’, ‘생명과’, ‘감추인 만나’, ‘새 이름’, ‘이긴 자’도 결국 하나의 질문 아래 놓입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하여 내 사랑의 중심이 정말 달라지고 있는가?’입니다. 자기애가 조금씩 물러나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면, 바로 거기서부터 천국은 사후의 먼 장소가 아니라 이미 한 사람 안에서 시작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2

세 천국과 새 예루살렘’ : 천국의 높고 낮음은 계급이 아니라 사랑의 차이입니다

2강의 흐름은 사람이 죽은 뒤 중간영계에서 자신의 내적 상태가 드러난다는 설명에서, 그 이후 천국의 구조와 그 안에서 서로 다른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강사는 천국이 단순히 하나의 동일한 공간이 아니라 서로 다른 단계와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하고, 특히 ‘새 예루살렘 성’과 ‘만국’을 구별하면서 지상에서 더 깊은 성결과 연단을 통과한 ‘이긴 자’, 곧 ‘처음 익은 열매’가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고 다른 구원받은 성도들은 만국에 속하게 된다는 구조를 제시합니다. 여기에는 2강 전체를 관통하는 강사의 중요한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구원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사람의 영원한 상태가 똑같아지는 것은 아니며, 지상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았고 얼마나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변화되었는가는 사후의 상태와도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의식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을 획일적인 하나의 세계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천국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공동체가 있으며, 크게는 세 천국으로 구별됩니다. 가장 내적인 천적 천국, 그 다음의 영적 천국, 그리고 보다 외적인 자연적 천국입니다. 이것은 천국에 실제적인 질서와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고 구원받으면 모두 완전히 동일한 천국 상태가 된다’는 식의 단순한 천국관보다, 강사가 지상에서 형성된 영적 상태와 사후 상태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통찰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차이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세 천국의 차이는 ‘누가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해서 높은 등급을 획득했는가’라는 공로적 서열이 아닙니다. 더구나 천국 안에서 어떤 사람들은 특별히 성공한 신자들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보다 덜 성공한 신자들이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세 천국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사람이 어떤 방식과 깊이로 받아들이는가에 따른 서로 다른 영적 상태입니다. 가장 내적인 천적 천국의 천사들은 주님 사랑의 선을 가장 깊은 차원에서 받아들이며, 영적 천국의 천사들은 이웃 사랑의 선과 그에 속한 진리를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자연적 천국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기 상태에 맞게 받아들입니다. 모두가 천국에 있으며 모두가 자기 상태 안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립니다.

 

따라서 ‘높은 천국’이라는 말을 자연계의 계급 개념으로 이해하면 곧바로 오해가 생깁니다. 지상에서는 높은 자리가 더 많은 권력과 명예와 특권을 뜻합니다. 그래서 ‘첫째 천국’, ‘둘째 천국’, ‘셋째 천국’이라고 하면 자연적 사고는 곧 일등석, 이등석, 삼등석 같은 그림을 만듭니다. 그러나 천국은 정반대입니다. 더 내적인 천국에 있을수록 자기 자신을 더 낮게 여기며, 모든 선과 지혜와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지각합니다. 더 높다는 것은 더 많은 특권을 소유한다는 뜻이 아니라 더 깊이 사랑하고 더 자유롭게 섬긴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천국 질서와도 정확히 맞닿습니다. 세상에서는 높은 자가 다른 사람을 지배하지만, 주님의 나라에서는 큰 자가 섬기는 자가 됩니다. 따라서 천국에서 가장 높은 천사는 자기 자신을 가장 위대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천사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에게 아무 선도 없고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가장 깊이 인정하는 천사입니다. 이것이 천국적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영적 체계가 사람으로 하여금 ‘나는 다른 신자보다 높은 단계에 있다’는 의식을 강화한다면, 바로 그 순간 그 체계는 천국의 높음을 자연계의 높음으로 바꾸어 놓을 위험이 있습니다.

 

강사가 말하는 ‘처음 익은 열매’와 ‘이긴 자’도 이 원리 안에서 조심스럽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상에서 더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고 더 깊은 연단을 통과하며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강조하는 것은 귀합니다. 문제는 그것을 하나의 고정된 영적 계급으로 만들 때입니다. ‘일반 성도’가 있고, 그 위에 ‘광야 성도’가 있으며, 그 위에 ‘이긴 자’ 또는 ‘처음 익은 열매’가 있다는 식으로 사람들을 배열하기 시작하면, 원래 자기부인을 위해 시작된 영성이 오히려 새로운 proprium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는 아직 일반 성도가 아니라 이긴 자의 반열에 들어갔다’는 의식 자체가 매우 정교한 영적 자기애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사람을 외부에서 이렇게 등급화하는 데 매우 신중합니다. 한 사람의 실제 영적 상태를 아시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외적으로 대단한 수도적 훈련이나 특별한 체험이 없어 보여도 오랜 세월 자기에게 맡겨진 가족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일하며, 다른 사람의 유익을 자기 유익보다 앞세우고, 자기 잘못을 인정하며 살아왔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오랜 금식과 기도와 많은 영적 체험을 말하는 사람이 내적으로는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나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사랑을 품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자연계에서는 이 둘의 실제 내적 상태를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외적인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삶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사랑은 행위를 통하여 형태를 얻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실제로 행하면서 그 사랑을 자기 생명으로 만듭니다. 따라서 천국의 차이는 임의적인 보상의 차이가 아니라 지상에서 자유롭게 형성된 사랑의 차이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더 좋은 천국을 상으로 주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덜 좋은 천국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은 자신이 주님의 인도 아래 받아들인 선의 질에 가장 완전하게 맞는 천국 공동체에서 살아갑니다.

 

여기에는 매우 아름다운 원리가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아무도 다른 사람의 천국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자연계에서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높은 자리에 있거나 더 많은 것을 가지면 비교와 질투가 생기지만, 천국에서는 각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선과 쓰임 안에서 충만한 기쁨을 누립니다. 눈이 손을 부러워하지 않고 귀가 눈이 되려고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각 기관이 자기 기능을 충실히 수행할 때 몸 전체가 하나가 됩니다. 천국 역시 하나의 ‘가장 큰 사람’, 곧 막시무스 호모(Maximus Homo)의 형태를 이루며, 수많은 공동체가 서로 다른 기관과 기능처럼 하나의 주님 아래 조화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다양성은 불평등이 아니라 완전한 질서입니다. 모든 천사가 똑같다면 오히려 천국은 천국일 수 없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선은 무한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형태 역시 무수히 다양합니다. 어떤 공동체는 지혜와 관련된 선을 더 뚜렷하게 나타내고, 어떤 공동체는 순진함과 관련된 선을, 어떤 공동체는 서로를 돌보고 섬기는 특정한 쓰임의 선을 나타냅니다. 그 모든 다양성이 서로 경쟁하지 않고 하나의 주님을 중심으로 조화를 이룰 때 천국의 아름다움이 이루어집니다.

 

이 관점은 강사가 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을 특정한 이긴 자들이 들어가는 가장 높은 영역으로 설명하는 부분에도 중요한 보완을 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새 예루살렘’은 근본적으로 어떤 특별한 천국 도시의 명칭이기 전에 ‘새 교회’를 의미합니다. 계시록 마지막에 하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주님께서 이전 교회의 종말 이후 세우시는 새로운 교회를 표상합니다. 그 성의 성벽과 문과 기초석과 길과 생명수의 강과 생명나무까지 모두 새 교회의 선과 진리, 교리와 삶의 여러 측면을 상응적으로 나타냅니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는 사람’과 ‘성 밖 만국에 있는 사람’을 곧바로 천국의 상위 계급과 하위 계급으로 나누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계시록의 도시는 자연적 도시가 아니라 교회의 교리와 질서를 표상하고, ‘성 안’과 ‘성 밖’ 역시 단순한 지리적 위치보다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특히 계시록을 문자적 영계 지도로 바꾸어 읽기 시작하면 금으로 된 거리, 열두 문, 열두 기초석, 성의 길이와 너비와 높이 같은 모든 것을 자연적 구조물로 설명해야 하는 어려움이 생깁니다. 그러나 상응으로 읽으면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완전한 영적 체계를 이룹니다.

 

예루살렘이 말씀에서 교회를 표상하는 이유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연적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었고, 성전에서는 여호와를 예배했으며, 이스라엘의 종교생활이 그곳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은 말씀의 속뜻에서 주님을 예배하는 교회, 특히 교회의 교리와 관련됩니다. 그렇다면 ‘새 예루살렘’은 새로운 도시 건설보다 새로운 교회의 형성을 뜻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참된 교회의 교리와 생명이 인간의 지성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로부터 내려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라는 작업 자체에도 매우 중요한 원리를 줍니다. 새 교회는 스베덴보리라는 한 사람을 높이는 교회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술도 목적은 자신을 중심에 세우는 데 있지 않고 말씀의 속뜻을 열어 주님을 더 분명하게 보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의 중심은 어떤 인간적 교리 체계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계시록이 마지막에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모든 교리와 모든 진리의 목적은 결국 주님과의 결합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강사가 ‘이긴 자’를 강조하는 것도 한 단계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긴 자가 특별한 천국 도시의 특권적 주민이 되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주님의 나라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핵심입니다. 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이 새 교회를 나타낸다면, 개인적 차원에서는 그 교회의 질서가 한 사람 안에 세워지는 것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거짓이 물러가고 진리가 그의 생각을 다스리며, 자기애가 물러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그의 의지를 다스리기 시작할 때, 그 사람 안에도 일종의 ‘새 예루살렘’의 질서가 세워집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나는 그 성 안에 들어갈 등급인가?’가 아닙니다. ‘그 성이 나타내는 주님의 질서가 지금 내 안에 세워지고 있는가?’입니다. 이것은 작은 차이처럼 보이지만 영성의 방향을 완전히 바꿉니다. 전자의 질문은 자칫 자기의 영적 위치에 관심을 갖게 하지만, 후자의 질문은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보고 주님의 질서를 받아들이게 합니다. 전자는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를 묻고, 후자는 ‘주님께서 내 안에서 무엇을 이루고 계시는가?’를 묻습니다.

 

강사가 천국의 여러 상태를 설명하면서 지상의 삶을 중요하게 보는 것은 그래서 귀합니다. 사람은 사후에 아무런 관계도 없는 천국 상태를 갑자기 받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살아가는 방식이 영원의 형태를 만들어 갑니다. 그러나 여기서 ‘행위’ 역시 공로적 점수가 아니라 사랑의 표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신다’고 하실 때, 외적인 행위의 숫자만 세시는 것이 아닙니다. 행위 안에는 의지와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헌금도 사랑에서 할 수 있고 명예욕에서 할 수 있으며, 같은 설교도 영혼의 선을 위해 할 수 있고 자기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할 수 있습니다. 영계에서는 그 내적 질이 드러납니다.

 

이 점에서 천국의 ‘상급’이라는 말도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을 행한 대가로 외부에서 보너스처럼 주어지는 것이 천국의 상급이 아닙니다. 선 자체 안에 기쁨이 있습니다. 이웃의 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이 잘되는 것을 보는 것 자체에서 기뻐합니다. 쓰임을 사랑하는 사람은 쓰임을 행하는 것 자체에서 행복합니다. 이것이 천국적 상급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더 높은 천국의 상태는 더 많은 특권을 받는 상태가 아니라 더 깊은 선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선 자체에서 더 내적인 기쁨을 누리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수도적 연단과 성결을 추구하는 목적도 더욱 선명해집니다. ‘나는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야 한다’, ‘나는 처음 익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는 목표가 사람에게 강한 동기를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목표 안에 ‘다른 성도보다 높은 곳에 가겠다’는 사랑이 섞이는 순간 천국적 목적과 충돌합니다. 천국에서는 높아지고 싶은 사람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져 섬기기를 기뻐하는 사람이 더 내적인 선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연단은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한 훈련이 아니라 높은 자리를 원하던 자기애에서 자유로워지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긴 자’라는 표현의 역설을 보게 됩니다. 세상에서 이긴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앞선 사람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이긴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긴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주님의 힘으로 거절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승자는 자기 이름을 높이지만, 천국의 승자는 모든 승리를 주님께 돌립니다. 세상에서 높은 사람은 섬김을 받지만, 천국에서 높은 사람은 섬기는 데서 기쁨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이기는 자’를 세상의 승자 개념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시흥영성수련원의 오랜 수도적 전통을 바라볼 때에도 매우 소중한 분별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이어진 기도와 절제와 연단, 자기부인의 전통이 귀한 이유는 그것이 사람을 특별한 영적 계급으로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자기 중심성을 내려놓고 주님과 이웃을 향하도록 돕는다면 귀한 것입니다. 수도적 삶의 가장 아름다운 열매는 ‘나는 남들과 다르다’가 아니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깊은 겸손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겸손은 반드시 다른 사람을 향한 온유와 체어리티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천국의 세 단계와 수많은 공동체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천국의 질서를 아는 것입니다. 그 질서는 ‘더 높은 자가 더 많이 소유한다’가 아니라 ‘더 깊이 사랑하는 자가 더 많이 섬긴다’는 질서입니다. 이것은 자연계의 질서를 뒤집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천국은 천국입니다. 자기 높임이 사라지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모든 관계의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2강 2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구원받은 모든 사람의 사후 상태가 획일적으로 동일한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형성된 영적 상태에 따라 차이가 있으며, 특별히 연단을 통과하여 이긴 자와 처음 익은 열매가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고 다른 구원받은 성도들은 만국에 속한다는 강사의 설명은 천국에 실제적인 상태의 차이와 질서가 있다는 점에서는 중요한 통찰을 지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천적·영적·자연적 세 천국의 차이를 영적 공로에 따른 상·중·하 계급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랑의 질과 깊이의 차이로 이해하고, ‘새 예루살렘’ 역시 특별한 영적 엘리트가 거주하는 천국의 최상위 도시라기보다 주님에게서 내려오는 신적 진리와 그 진리에 따른 삶으로 이루어진 새 교회를 표상하는 것으로 보며, 따라서 참된 ‘이긴 자’란 다른 성도보다 높은 위치를 획득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여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기 생명의 중심이 되어 가는 사람이라고 이해할 때 천국의 질서와 새 예루살렘의 아르카나가 더욱 깊게 열립니다.’

 

결국 천국의 높고 낮음을 결정하는 것은 ‘얼마나 특별한 사람이 되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였는가?’입니다. 천국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천사가 자신을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이미 그 상태에 있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주님 가까이 있는 존재일수록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고 싶다’는 소망의 가장 깊은 형태는 ‘가장 높은 천국에 가고 싶다’가 아니라 ‘주님의 질서가 제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새 예루살렘’은 죽은 뒤 찾아가야 할 먼 도시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안에서 시작되는 주님의 나라가 됩니다. 자기 의가 한 걸음 물러나고 진리가 그 자리를 차지할 때, 지배하려는 사랑이 한 걸음 물러나고 섬기는 사랑이 그 자리를 차지할 때,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싶은 마음이 물러나고 그의 선을 기뻐하는 마음이 생겨날 때, 새 예루살렘의 질서가 조금씩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의 세 천국과 수많은 공동체에 관한 지식도 결국 우리를 그 한 가지 삶으로 데려가야 합니다. ‘어느 천국에 갈 것인가?’를 넘어서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를 묻게 하는 것, 바로 거기에서 영계에 관한 지식은 호기심을 넘어 거듭남의 진리가 됩니다.



2 3

흰옷과 세마포, ‘옷을 빠는 것’ : 성결은 죄를 덮어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실제로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2강의 흐름은 중간영계와 천국의 여러 상태, 새 예루살렘에 관한 설명에서 이제 계시록이 반복해서 말하는 ‘흰옷’과 ‘세마포’로 옮겨갑니다. 강사는 이 부분에서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합니다. 계시록에는 흰옷을 입은 사람들,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사람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사람들이 등장하며, 강사는 이것을 단순한 천국의 의복 묘사가 아니라 지상에서 이루어진 성결의 상태와 연결합니다. 특히 계시록 19장의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직접 설명되는 점을 중요하게 받아들여, 천국에서 입는 옷과 지상에서의 실제 삶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 방향은 2강 전체에서 강사가 붙들고 있는 핵심, 곧 구원은 입술의 신앙고백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의 변화와 성결로 나타나야 한다는 주장과 이어집니다.

 

이 문제의식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옷’은 대체로 진리를 표상합니다. 사람의 몸을 옷이 둘러싸듯, 내적인 선은 진리를 통하여 외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선은 의지와 사랑에 속하고, 진리는 그 선이 어떤 형태로 생각되고 표현되고 행해져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천사들이 입는 옷은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그들의 내적 상태와 상응합니다. 영계에서는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과 상응하기 때문에 천사의 의복 역시 그가 가진 진리의 상태에 따라 나타납니다. 더 내적인 지혜 가운데 있는 천사들의 옷은 더욱 빛나고 아름답게 보이며, 그 빛남 역시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가 선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강사가 천국의 옷을 지상에서의 삶과 연결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지상에서 선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사후에 더 좋은 옷을 상으로 받는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상응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천국의 옷은 외부에서 지급되는 포상물이 아니라 사람의 내적 상태가 외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천사가 희고 빛나는 옷을 입는 까닭은 그가 지상에서 선행 점수를 많이 쌓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선을 받아들이고 그 선에서 나오는 진리를 삶으로 살아온 결과 그 진리가 그의 생명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는 바로 그 내적 상태가 의복이라는 외적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왜 옷이 ‘희다’고 할까요? 말씀에서 흰색은 빛과 관계하고, 빛은 신적 진리와 관계합니다. 그러므로 흰옷은 정결한 진리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정결한 진리’라는 말을 단순히 ‘정확한 교리를 많이 알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거짓 교리를 버리고 참된 교리를 아는 것은 중요하지만,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사람이 진리를 많이 알면서 그것을 자기 우월감을 세우거나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지배하는 데 사용한다면, 그 진리는 그의 기억 속에는 있어도 아직 흰옷이 되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아는 것이 많지 않아도 알고 있는 진리를 따라 정직하게 살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그 진리는 그의 선과 결합되어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계시록에서 ‘세마포’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설명되는 것도 바로 이 점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행위구원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 행위가 그 자체로 인간을 구원한다는 뜻이 아니라, 내적 사랑과 신앙은 반드시 삶으로 형태를 얻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는지는 결국 그의 삶에서 드러납니다. 선을 사랑한다면서 계속 악을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친다면 그 사랑은 아직 실제 생명이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주님의 진리를 받아 악을 죄로 알고 거절하며 선을 행하려고 애쓴다면, 그 진리가 삶의 옷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사가 강조하는 ‘옷을 빠는 것’이라는 표현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계시록 7장에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고 하고, 계시록 22장에는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라고 합니다. 강사는 이 말씀들을 성도의 실제 정결과 성화의 과정으로 읽습니다. 즉 사람에게 아직 죄와 정욕과 불결함이 있으므로 그것이 씻겨야 하고, 그렇게 옷을 깨끗하게 한 사람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을 실제 정결과 연결하려는 강사의 강조는 가볍게 지나칠 부분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씻음’은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은 무엇이 씻기는가입니다. 사람이 자기 노력으로 자기 영혼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님께 합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결하게 하는 진리와 선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은 말씀을 통하여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 배우고, 그 진리의 빛 가운데 자기 악을 보며, 주님의 힘을 구하여 그 악을 거절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에는 주님의 역사와 인간의 응답이 함께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능력을 주시지만 인간은 그 능력을 받아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악과 싸워야 합니다.

 

이것은 ‘어린양의 피에 옷을 씻는다’는 역설적인 표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자연적으로 생각하면 피로 옷을 씻으면 오히려 붉게 물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계시록에서는 어린양의 피에 씻었더니 옷이 희어졌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표현 자체가 이것을 자연적 피와 자연적 세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말씀에서 주님의 ‘피’는 가장 깊은 의미에서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 특별히 인간을 구원하고 새롭게 하는 진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피에 옷을 씻는다는 것은 주님의 신적 진리를 받아 거짓과 악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 지점에서 보혈에 관한 일반적인 기독교적 표현과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의 중요한 차이도 나타납니다. ‘예수의 피가 내 죄를 덮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이제 내 죄를 보지 않으신다’는 식으로만 이해하면, 인간의 실제 내적 상태가 변하지 않아도 법적인 신분만 바뀌면 된다는 방향으로 갈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구속은 인간의 죄를 단순히 외적으로 가리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지옥을 정복하시고 인성을 신성하게 하심으로써 인간이 악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 구속의 능력을 받아 실제로 악에서 돌이키고 거듭나는 것이 구원의 삶입니다.

 

따라서 ‘옷을 씻는다’는 것은 죄가 그대로 있는데 흰 천으로 덮어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거짓된 생각과 악한 삶이 실제로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완전무결한 존재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평생에 걸쳐 진행되는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매우 외적인 악부터 보게 됩니다. 거짓말, 부정직, 음란한 행동, 폭력 같은 명백한 악을 죄로 알고 멀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그보다 더 내적인 것들이 드러납니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싶은 마음, 자기 판단을 절대화하는 태도, 선을 행하고도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는 마음 등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마치 옷의 큰 얼룩을 먼저 씻은 뒤 밝은 빛 아래에서 보니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작은 얼룩들이 새롭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이 반드시 ‘나는 이제 훨씬 깨끗한 사람이다’라는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빛이 더 밝아질수록 자기 안의 proprium이 얼마나 깊은지를 더 분명히 보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겸손으로 이어집니다. 영적으로 성숙할수록 자기의 완전함을 크게 말하기보다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점은 강사가 2강에서 계속 발전시키는 ‘완전한 성결’과 ‘이긴 자’의 개념을 바라볼 때 특히 중요합니다. 강사는 광야의 연단을 통하여 죄성이 제거되고 옷이 깨끗해진 사람을 ‘이긴 자’의 상태와 연결합니다. 여기에는 죄를 실제로 이겨야 한다는 매우 강한 윤리적 진지함이 있습니다. 신앙을 죄에 대한 면허증처럼 사용하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충분히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성결을 ‘내 안에서 죄의 가능성이 완전히 제거되어 이제 나는 죄 없는 단계에 들어갔다’는 자기 판정으로 이해한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악은 인간에게서 마치 뿌리째 뽑혀 존재하지 않게 되는 방식으로 제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악을 억제하시고 사람이 그 악에서 돌아서 선을 사랑하도록 새 의지를 형성하십니다. 인간에게 있는 유전적이고 획득된 악은 주님의 질서 아래 밀려나 지배력을 잃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의 특징은 ‘내게 이제 악이 없다’가 아니라 ‘악이 올라올 때 그것을 내 생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의 힘으로 거절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작은 차이가 아니라 성결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납니다. 자신을 ‘이미 완전히 씻긴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아직 씻기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다른 사람을 아래로 내려다볼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매 순간 주님의 진리와 선을 받아야 깨끗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안다면 다른 사람의 연약함 앞에서도 더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자신 역시 주님의 자비가 아니면 설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흰옷은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높게 보이게 하는 옷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공로를 가리고 주님의 선과 진리만 드러나게 하는 옷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의가 ‘흰옷’과 ‘세마포’를 ‘옳은 행실’과 연결하는 부분에서는 특히 ‘행실’의 내적 근원을 보아야 합니다. 같은 선행이라도 그 근원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칭찬을 받기 위해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한 거래의 마음으로 헌금할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은 자기 교회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외적 행동은 선해 보이지만 내적 목적에는 proprium이 강하게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이웃에게 필요한 일을 조용히 하고 그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지 않는다면 그 행위 안에는 전혀 다른 영적 질이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의 옳은 행실’은 단순한 행동 목록이 아니라 선한 사랑이 진리를 통하여 형태를 얻은 삶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체어리티를 단순한 자선행위로 제한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의 선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 사랑이 각 사람의 직업과 관계와 책임 속에서 올바른 쓰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는 것도, 직장에서 정직하게 맡은 일을 하는 것도, 목회자가 자기 명예보다 성도의 영적 선을 먼저 생각하는 것도, 상인이 속이지 않고 거래하는 것도 모두 체어리티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천국적 삶은 특별한 종교행위 안에만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수도적 성결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수도생활이나 사경회, 금식과 철야, 장시간의 기도는 인간이 자기 욕망을 돌아보고 말씀 앞에 자신을 세우는 귀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수단의 결과가 일상의 체어리티로 나타나야 합니다. 수련원에서 며칠 동안 깊은 은혜를 받고 돌아왔는데 가족에게는 여전히 거칠고, 교회에서는 자기 의견과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며, 사회생활에서는 정직하지 않다면 아직 옷의 정결이 실제 삶 전체로 이어졌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특별한 체험을 말하지 않아도 일상에서 점점 더 온유하고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이 되어 간다면, 그 사람의 옷은 실제로 씻기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시흥영성수련원의 오랜 수도적 전통과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상당히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자기부인과 연단을 중시하는 전통은 ‘옷을 빨아야 한다’는 계시록의 강한 요청을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믿기만 하면 되었으니 삶은 상관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소중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진지함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결의 방향을 더욱 내적으로 가져갑니다. 외적 욕망의 절제에서 더 깊이 들어가 자기 의와 영적 우월감과 공로의식까지 씻겨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마지막까지 씻겨야 하는 얼룩이 ‘나는 깨끗하다’는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육체적 욕망이나 세속적 욕심은 비교적 쉽게 악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자기 신앙이 옳다는 자부심이나 다른 사람보다 더 성숙하다는 의식은 선한 것처럼 붙들 수 있습니다. 특히 많은 기도와 연단과 성경 공부를 한 사람에게는 이 유혹이 더욱 미세하게 들어올 수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들과 다르다’, ‘나는 더 깊은 진리를 안다’, ‘나는 더 많은 대가를 지불했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종교적 proprium의 매우 깊은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장면도 이와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미 목욕한 사람은 온몸을 다시 씻을 필요는 없지만 발은 씻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에서 ‘발’은 인간의 가장 낮은 자연적 차원과 관계합니다. 사람은 주님을 알고 진리를 받아들였어도 일상생활에서 자연적 욕망과 자기중심성이 계속 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발을 씻어야 합니다. 거듭남은 한 번의 거대한 정결 체험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실제 삶에서 이루어지는 정결입니다.

 

이 원리를 알면 ‘흰옷을 입었는가, 아직 입지 못했는가?’를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여 영적 등급을 판단하기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게 됩니다. ‘오늘 내 옷에는 무엇이 묻었는가?’라고 묻게 됩니다. 오늘 누군가의 말을 듣다가 왜 그렇게 불쾌했는가,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왜 화가 났는가, 선을 행한 뒤 왜 알아주기를 바랐는가, 다른 사람의 성공을 보며 왜 마음이 불편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런 작은 순간들이 실제로 옷을 빠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옷을 씻는 물과 피, 곧 정결하게 하는 진리는 우리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비추어 주셔야 자기 상태를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빛으로 자기를 보면 대부분 자기 행동을 정당화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진리가 들어오면 이전에는 당연하게 여기던 것이 악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는 원래 성격이 이렇다’고 하던 것이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하는 자기애로 보이고, ‘나는 진리를 지키는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태도 속에 자기 의와 지배욕이 섞여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신적 진리의 씻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피로 옷을 씻는다는 것은 주님의 구속을 믿는 것과 주님의 진리에 따라 실제로 회개하는 것을 분리할 수 없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구속을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가 악과 싸울 수 있고, 그분의 신적 진리를 받아들여 악을 보고 거절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자력으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아무런 실제 변화 없이 ‘피가 다 덮었다’고 선언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시고 인간은 그 구원을 자유롭게 받아 실제 삶으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보면 흰옷과 세마포는 매우 아름다운 복음의 표상이 됩니다. 흰옷은 ‘나는 죄가 없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나를 악과 거짓에서 건져 진리 안에서 살게 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세마포가 빛나는 것은 인간의 공로가 빛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선이 진리를 통하여 삶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자기 옷을 자랑하지 않는 것처럼 거듭난 사람도 자기 성결을 자랑할 이유가 없습니다. 옷의 빛은 근원적으로 주님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2강 3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의 흰옷과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어린양의 피에 옷을 씻는 사람들과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사람들을 지상에서의 실제 성결과 옳은 행실에 연결하여, 구원은 단순한 신앙고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정욕에서 실제로 정결해지는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하는 강사의 설명은 신앙과 삶을 분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통찰을 지니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옷’을 선을 둘러싸고 표현하는 진리로, 그 옷의 ‘흰빛’을 선과 결합하여 정결해진 신적 진리의 빛으로, ‘어린양의 피에 씻음’을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를 받아 악과 거짓에서 실제로 정결해지는 거듭남으로 이해하고, 성결 역시 인간 안에서 악의 가능성이 완전히 소멸되어 스스로 완전한 존재가 되는 상태라기보다 주님의 힘으로 악을 죄로 알고 거절하면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새 의지가 점차 지배권을 얻는 과정으로 볼 때, 흰옷과 세마포의 아르카나는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구속과 인간의 실제 회개와 삶이 결합되는 더욱 깊은 의미로 열립니다.’

 

결국 흰옷에 관한 말씀 앞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나는 흰옷을 받은 특별한 사람인가?’가 아닐 것입니다. ‘주님의 진리가 오늘 내 삶의 무엇을 씻고 있는가?’입니다. 어제까지 악인 줄 몰랐던 것을 오늘 악으로 보게 되었다면 이미 빛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 거절한다면 옷을 씻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조금 더 정직함과 온유함과 체어리티가 들어온다면 옷이 조금 더 희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결의 가장 분명한 표지는 ‘나는 성결해졌다’는 자기 확신보다 사랑의 변화일 것입니다. 오래 기도할수록 더 온유해지고, 말씀을 깊이 알수록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게 되며, 연단을 많이 받을수록 약한 사람에게 더 자비로워지고, 선을 많이 행할수록 자기 공로를 덜 생각하게 된다면, 그 사람의 옷에는 주님의 빛이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성결을 말할수록 사람을 더 쉽게 등급화하고 자기 위치를 높게 여기게 된다면, 아직 씻어야 할 매우 미세한 얼룩이 남아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옷을 빠는 것’은 평생의 거듭남을 보여 주는 참으로 아름다운 형상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옷을 버리고 전혀 다른 사람의 옷을 입히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은 진리가 실제 선과 결합하도록 끊임없이 정결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진리가 기억 속의 교리에서 삶의 진리로 바뀌고, 삶의 진리가 사랑과 하나가 될수록 사람의 옷은 밝아집니다. 천국에서 빛나는 세마포는 바로 지상에서부터 시작된 그 거듭남의 삶이 영계에서 그 본래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4

영적 할례와 광야의 연단 : 제거되어야 하는 것은 가 아니라 나를 지배하려는 proprium입니다

2강의 앞부분에서 중간영계와 세 천국, 새 예루살렘, 흰옷과 세마포를 살펴본 강의는 이제 한층 더 직접적으로 ‘성결’의 문제 안으로 들어갑니다. 강사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성도를 단지 죄 사함을 받은 상태에 머물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광야의 연단을 통하여 그 안의 죄성과 정욕을 실제로 처리하시며, 이것을 구약의 ‘할례’와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육체의 할례에서 몸의 일부를 잘라 내듯 영적 할례에서도 사람 안의 죄성이 잘려 나가야 하며, 이 과정을 충분히 통과한 사람이 ‘이긴 자’가 되어 생명과와 감추인 만나를 먹고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상태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강사의 ‘핵심진리’ 체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앞에서 말한 흰옷과 세마포가 성결의 외적 형상이라면, 이제 할례와 광야는 그 성결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 강의가 죄를 단순히 ‘용서받으면 끝나는 것’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은 충분히 귀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죄의 용서와 죄에서의 실제적인 변화 사이를 구별하려 합니다. 사람이 예수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면서 여전히 자기 욕망과 정욕과 분노와 교만을 아무 거리낌 없이 따라 살아간다면 그것을 완성된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가 필요하고 ‘연단’이 필요하며 ‘할례’가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신앙이 실제 인간의 성품과 삶을 바꾸어야 한다는 이 강한 요청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구원을 단순한 법정적 선언이나 지적 신앙으로 보지 않고, 악을 죄로 알고 멀리하며 주님에게서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는 거듭남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할례’ 역시 실제로 깊은 영적 의미를 가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할례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불결한 사랑들을 제거하는 것을 표상합니다. 특별히 할례가 생식기관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도 우연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생식과 출생은 영적으로 선과 진리가 생겨나는 것, 곧 거듭남과 관계합니다. 그런데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불결한 욕망이 그 생성을 가로막습니다. 따라서 포피를 제거하는 할례는 자연적 육체의 일부를 잘라 내는 의식 자체에 궁극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거듭나기 위해 자기 안의 불결한 사랑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표상합니다. 구약의 외적 할례가 신약에서 ‘마음의 할례’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영적 할례’를 성결과 연결하는 방향은 상당히 깊은 접점을 갖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잘려 나가는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칫하면 거듭남을 ‘내 안에 있는 죄성이라는 어떤 덩어리를 완전히 잘라 내어 더 이상 악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상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사의 설명에는 때때로 이러한 이미지가 상당히 강하게 나타납니다. 광야의 연단을 충분히 통과하면 사람 안의 죄성이 제거되고, 그 결과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않은 ‘이긴 자’의 상태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죄의 지배에서 실제로 벗어나야 한다는 뜻에서는 귀하지만,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에서는 여기에 중요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의 proprium, 곧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느끼는 고유한 것은 그 자체로 자기애와 거짓에 기울어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인간의 인격이나 개성, 자유와 이성을 제거하여 ‘나’를 없애는 과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proprium을 억지로 파괴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악으로 보고 자유롭게 거절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의지, 곧 천국적 proprium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의 질서를 형성하십니다. 사람은 여전히 자기 의지로 사랑하고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며 자기 손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느끼지만, 거듭날수록 모든 선한 의지와 참된 생각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영적 할례에서 잘려 나가야 할 것은 인간의 ‘자기’ 자체가 아니라, 그 자기를 주님에게서 독립된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게 하는 proprium의 지배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자기를 죽인다’, ‘자아가 죽어야 한다’, ‘나는 없어져야 한다’는 표현을 문자적으로 밀어붙이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고유성과 자유까지 부정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을 없애기 위해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인간답게 만들기 위해 거듭나게 하십니다. 자기애와 거짓이 지배할수록 인간은 오히려 노예가 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일수록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됩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천국의 다양성과도 연결됩니다. 천국에 들어간다고 모든 사람이 똑같은 성격과 똑같은 생각과 똑같은 모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각 천사는 자연계에서보다 훨씬 더 뚜렷한 고유성을 가집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개성을 없애지 않으시고 정결하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주신 따뜻함, 어떤 사람에게 주신 치밀함, 어떤 사람에게 주신 용기와 추진력, 또 어떤 사람에게 주신 섬세함과 사려 깊음은 제거되어야 할 ‘자아’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모든 것이 자기애를 섬기는가, 주님과 이웃의 선을 섬기는가입니다. 강한 추진력이 지배욕의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쓰임을 위한 힘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말솜씨가 자기 명예의 수단이 될 수도 있고 진리를 전달하는 쓰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영적 할례는 그 능력 자체를 잘라 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사용하려는 불결한 사랑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과정에서 ‘광야’가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광야는 매우 복합적인 표상을 갖지만, 거듭남의 문맥에서는 시험과 정화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뒤 곧바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고 광야를 통과했던 것처럼, 사람도 악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겠다고 결심했다고 해서 곧바로 천국적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애굽에서 몸은 나왔지만 애굽의 욕망은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그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시작한 인간의 모습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도 이전의 욕망을 여전히 그리워합니다.

 

그래서 광야는 단순한 고생의 장소가 아니라 사람의 실제 사랑이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모든 일이 잘될 때에는 누구나 자기가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뜻과 반대되는 일이 일어나고, 인정받지 못하고, 계획이 무너지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기다려야 할 때 비로소 무엇을 실제로 사랑하는지가 드러납니다. ‘나는 주님의 뜻을 원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했는지, ‘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 사람이 나를 인정해 주기를 원했는지가 시험 가운데 드러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는 주님께서 인간을 괴롭히시는 장소가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도 감추어져 있던 proprium이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든 고난을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내신 ‘연단 프로그램’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자연계에는 인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생기는 고통도 있고, 다른 사람의 악으로 인한 고통도 있으며, 질병과 사고와 자연적 조건에서 오는 고통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악이나 고통 그 자체를 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신적 섭리는 그것들을 허용하시되, 허용된 것 가운데서도 가능한 한 인간의 영원한 선을 이루도록 역사합니다. 따라서 ‘고난이 많을수록 영적으로 높은 사람’이라는 생각도 경계해야 합니다. 고난의 양이 거듭남의 깊이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자유롭게 응답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수도적 연단을 이해하는 데 특히 중요합니다. 금식하고, 절제하고, 편안함을 포기하고, 일정한 규율 아래 자신을 훈련하는 것은 proprium을 드러내는 매우 유익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먹지 못할 때 짜증이 올라오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 불평이 나오며,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아야 할 때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보면서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자기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적 규율은 일종의 거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편함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굶었다는 사실, 잠을 적게 잤다는 사실, 오랜 시간 기도했다는 사실이 자동으로 영적 할례를 이루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외적 고행을 많이 한 뒤 ‘나는 이만큼 대가를 치렀다’는 의식이 생긴다면 proprium은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을 뿐 여전히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세속적 자랑은 버렸는데 영적 자랑이 생기고, 돈에 대한 우월감은 버렸는데 기도시간에 대한 우월감이 생기며, 사회적 지위 대신 영적 단계로 사람을 비교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겉으로는 자기를 부인했지만 훨씬 더 미세한 proprium이 살아남은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주님께서는 외적인 악뿐 아니라 종교적 proprium까지 보여 주십니다.

 

이 점에서 영적 할례는 단 한 번의 사건이라기보다 거듭남 전체를 관통하는 원리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비교적 거친 욕망을 잘라 냅니다. 명백한 부정직과 음란, 폭력, 탐욕 같은 것들을 죄로 알고 멀리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더 미세한 것들이 드러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 자기 의견을 관철하려는 마음, 자신이 옳다는 데서 느끼는 쾌감, 선을 행하고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면 ‘나는 이제 상당히 거듭났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기의식까지 다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영적 할례의 결과는 ‘이제 내 안에는 죄성이 없다’는 자신감보다 겸손에 가깝습니다. 주님의 빛이 밝아질수록 자기 안에 얼마나 많은 것이 주님의 질서와 어긋나 있는지를 더 잘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망으로 이어지는 자기혐오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은 인간에게 자기 자신을 미워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나온 악을 악으로 인정하면서도 주님께서 새로운 생명을 주실 수 있음을 신뢰하게 합니다. 자기혐오는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을 수 있지만, 참된 회개는 시선을 주님께 돌립니다.

 

여기에서 강사가 말하는 ‘죄성이 제거된다’는 표현을 가장 선하게 받아들이는 방법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인간에게서 악의 모든 가능성이 존재론적으로 사라진다는 뜻보다, 이전에 인간을 지배하던 악이 더 이상 지배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훨씬 가까워집니다. 예전에는 분노가 올라오면 곧바로 그것을 정당화하고 행동했지만,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분노가 올라와도 ‘이것은 주님의 질서가 아니다’라고 보고 거절할 수 있게 됩니다. 악한 충동이 전혀 떠오르지 않아서 선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악임을 알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선한 것입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거듭난 사람에게 악한 생각이 다시 올라오는 것 자체를 ‘아직 죄성이 제거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면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내면을 검사하며 불안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이 있다는 사실은 반드시 거듭남의 실패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험은 선과 진리가 어느 정도 자리 잡았기 때문에 반대되는 악과 거짓이 충돌하면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영적 싸움이 있다는 것은 두 세력이 모두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며, 그 가운데 인간은 주님의 힘을 받아 어느 쪽에 동의할 것인지 자유롭게 선택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시험을 중요하게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시험을 통하여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더 깊이 결합됩니다. 진리를 단지 알고 있을 때와 그 진리를 지키기 위해 실제 욕망과 싸워 본 뒤에는 그 진리의 깊이가 다릅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을 아는 것과, 실제로 나를 깊이 상하게 한 사람을 앞에 두고 복수하고 싶은 욕망과 싸우면서 용서를 선택하는 것은 다릅니다. 후자의 과정에서 진리는 단순한 기억 지식에서 삶의 진리로 내려옵니다. 이것이 시험이 거듭남에 쓰이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광야는 반드시 ‘특별한 수도생활’에서만 경험되는 것도 아닙니다. 일상생활 자체가 거대한 광야가 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배우자와 부딪힐 때, 자녀 때문에 자기 계획을 포기해야 할 때,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정직을 지켜야 할 때, 교회에서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묵묵히 해야 할 때, 그 모든 순간에 proprium이 드러납니다. 오히려 일상은 도망갈 수 없기 때문에 매우 실제적인 영적 훈련장이 됩니다.

 

이것은 수도생활과 일상생활을 경쟁시키려는 뜻이 아닙니다. 수도적 환경은 집중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말씀과 기도에 전념할 수 있는 귀한 장점이 있고, 일상생활에는 관계와 책임 속에서 사랑을 실제로 살아야 하는 고유한 시험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이 이루어지는가입니다. 수도원 안에서도 proprium을 키울 수 있고, 시장과 직장과 가정에서도 깊이 거듭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특정한 생활양식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사랑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광야에서의 ‘죽음’이라는 표현도 조심스럽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죽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가 아니라 자기애의 지배입니다. ‘내 뜻대로 되어야 행복하다’,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야 가치가 있다’, ‘내 판단이 옳아야 한다’, ‘내가 한 선은 내 공로다’라는 proprium의 주장들이 하나씩 힘을 잃어 가는 것이 영적 죽음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생명이 살아납니다. 그래서 거듭남에는 죽음과 부활이 동시에 있습니다. 옛사람이 약해지고 새사람이 강해집니다.

 

그러므로 자기부인은 자기파괴가 아닙니다. 참된 자기부인은 오히려 인간을 자기애의 감옥에서 해방합니다. 인정받아야만 행복한 사람은 사람들의 평가에 묶여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어야 평안한 사람은 환경의 노예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높아야 만족하는 사람은 끊임없는 비교 속에 삽니다. 그러나 이런 proprium의 요구가 약해지면 사람은 훨씬 자유로워집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되어도 기뻐할 수 있고,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평안을 잃지 않으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천국적 자유입니다.

 

그리고 이 자유는 인간의 의지력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 악을 거절해야 하지만, 실제 이기는 힘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균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주님이 다 하시니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사라지고, ‘내가 연단해서 내 죄성을 제거한다’고 하면 자기 공로가 들어옵니다. 거듭남에서는 사람이 싸우지만 주님께서 이기십니다. 사람은 문을 열지만 생명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긴 자’라는 말도 다시 빛을 얻습니다. 이긴 자는 영적으로 강한 자기 자신을 완성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힘으로는 악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알고 주님의 힘을 받아 악을 거절하는 법을 배운 사람입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내가 이겼다’는 의식보다 ‘주님께서 건져 주셨다’는 고백이 깊어집니다. 만일 연단의 끝에서 인간의 자기 확신이 더 강해진다면 무언가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된 연단의 끝에는 proprium의 강화가 아니라 주님에 대한 의존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여호수아 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 다시 할례를 받는 장면도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광야를 통과했다고 자동으로 가나안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다시 언약의 표지가 필요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시험을 많이 경험했다는 사실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시험을 통하여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불결함이 실제로 제거되고 주님의 질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광야 경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광야를 통하여 무엇이 잘려 나갔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시흥영성수련원의 수도적 전통에서 강조해 온 ‘연단’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을 때 그 가치를 축소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욱 깊게 가져갈 수 있습니다. 연단은 단순히 육체를 힘들게 하고 욕망을 억제하는 훈련을 넘어, 사람 안에 숨어 있는 자기애와 자기 의와 공로의식까지 주님의 빛 앞에 드러내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외적인 정욕을 이겼는데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마음이 더 강해졌다면 아직 광야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이전보다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더 이해하고, 자기 판단을 덜 절대화하며, 선을 행하고도 공로를 주님께 돌리게 되었다면 광야는 실제로 그 사람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결’을 분별하는 매우 실제적인 기준이 됩니다. 성결은 특별한 표정이나 말투나 생활양식으로 먼저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자기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비판받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자기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이 칭찬받을 때 함께 기뻐할 수 있는가, 아무도 보지 않을 때에도 정직한가에 드러납니다. 이런 곳에서 proprium의 지배가 약해지고 있다면 영적 할례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2강 4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구약의 할례를 성도의 영적 성결과 연결하고, 광야의 연단을 통하여 인간 안의 죄성과 정욕이 잘려 나가 이긴 자의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고 강조하는 강사의 설명은 죄 사함을 실제 삶의 변화와 분리하지 않고 신앙을 거듭남으로 이끌려 한다는 점에서 매우 귀한 통찰을 지니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할례를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불결한 사랑들의 제거로, 광야를 그 사랑들이 드러나 주님의 선과 진리와 싸우는 시험의 상태로 이해하되, 거듭남을 인간의 인격이나 자유 또는 악의 가능성 자체를 잘라 없애는 과정으로 보기보다 proprium에서 나오는 악이 지배권을 잃고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의지와 천국적 사랑이 점차 지배권을 얻는 과정으로 보며, 따라서 참된 자기부인은 ‘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생명의 주인이고 선의 근원이다’라는 proprium의 환상을 내려놓는 것이고, 참된 이김 역시 연단을 통하여 강한 자기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힘 없이는 아무 악도 이길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실제로 악을 거절하는 데 있음을 볼 때, 영적 할례와 광야의 아르카나가 더욱 깊게 열립니다.’

 

결국 광야가 우리에게 묻는 것은 ‘얼마나 고생했는가?’가 아닙니다. ‘무엇이 달라졌는가?’입니다. 이전보다 더 많이 참을 수 있게 되었는가보다, 이전보다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이전보다 욕망을 더 강하게 억제할 수 있는가보다, 다른 사람의 선을 더 진심으로 기뻐하게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이전보다 자신을 더 혹독하게 다룰 수 있는가보다,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영적 할례의 가장 깊은 칼끝은 마지막에 바로 이곳을 향할 것입니다. ‘나는 이제 많이 연단받았다’, ‘나는 많이 버렸다’, ‘나는 상당히 성결해졌다’, ‘나는 이긴 자에 가까워졌다’고 말하고 싶은 그 미세한 proprium입니다. 그것마저 주님 앞에서 내려놓을 때 사람에게 남는 것은 자기 성취가 아니라 감사입니다. ‘제가 해냈습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여기까지 붙드셨습니다’가 됩니다. 그때 광야는 인간을 강한 자기로 만드는 곳이 아니라 자기 힘을 내려놓고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곳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영적 할례’가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거듭남의 방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5

생명나무, 감추인 만나와 흰 돌 :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자기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2강은 중간영계와 천국의 질서에서 시작하여 흰옷과 세마포, 영적 할례와 광야의 연단을 거쳐 이제 계시록 일곱 교회에 주어진 ‘이기는 자의 약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갑니다. 강사는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에만 머무르지 않고 광야의 연단을 통과하여 죄성과 정욕이 처리된 ‘이긴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계시록에서 주님께서 이긴 자들에게 약속하신 여러 복을 실제적인 영적 상급으로 설명합니다. 그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이 ‘생명나무의 열매’, ‘감추인 만나’, ‘흰 돌’입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이것들이 일반적인 구원과는 구별되는, 연단을 통과한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복과 깊이 연결됩니다. 앞에서 살펴본 새 예루살렘, 흰옷, 세마포, 영적 할례가 모두 이 지점으로 모여드는 셈입니다.

 

먼저 에베소 교회에 주어진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는 약속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명나무’는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표상입니다. 이미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 한가운데 등장하는 생명나무에서부터 계시록 22장의 새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말씀의 처음과 마지막을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생명나무는 근본적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생명, 더 깊게는 주님 자신과 그분에게서 오는 천적 사랑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어떤 신비한 천국의 과실 하나를 먹고 특별한 영적 능력을 얻는다는 뜻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 그것이 자기 생명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먹는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자연계에서 음식은 몸 밖에 있을 때에는 아직 우리의 생명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고 소화하여 몸과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우리의 생명을 유지합니다. 말씀의 속뜻에서도 ‘먹는 것’은 이와 상응합니다. 선과 진리를 단순히 보고 아는 것을 넘어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생명과 결합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주님 사랑에 관한 교리를 많이 안다는 뜻이 아니라, 실제로 그 사랑을 받아 삶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2강 전체에서 강사가 강조해 온 ‘삶으로 이루어지는 성결’과도 매우 중요한 접점을 가집니다.

 

다만 여기에서 ‘누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가?’라는 질문을 둘러싸고 차이가 생깁니다. 강사는 ‘이긴 자’라는 특정한 상태에 도달한 성도에게 생명나무의 열매가 주어진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구원과 이긴 자의 상급 사이에 비교적 뚜렷한 구별을 둡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천국 안의 특별한 계급에게만 지급되는 영적 음식으로 보기보다, 악과 거짓을 주님의 힘으로 이기면서 주님의 선을 실제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내적 상태로 읽습니다. ‘이긴 자’가 생명나무를 먹는 까닭은 어떤 영적 시험에 합격하여 보상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악의 사랑을 거절했기 때문에 이제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여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상급’이라는 말의 의미를 바꾸어 놓습니다. 자연적 사고에서 상급은 일을 마친 뒤 외부에서 추가로 받는 보상입니다. 시험을 잘 보면 상을 받고, 일을 많이 하면 임금을 더 받습니다. 그러나 천국적 상급은 본질적으로 선 자체 안에 있는 기쁨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님과 결합되는 것보다 더 큰 상급은 없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웃의 선을 이루는 것보다 더 큰 상급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명나무의 열매는 선행의 대가로 지급되는 천국의 상품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그 사랑 자체가 기쁨과 생명이 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원리는 ‘감추인 만나’에서도 더욱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버가모 교회에 주님께서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겠다’고 하십니다. 만나라고 하면 우리는 곧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떠올립니다. 애굽에서 나온 백성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이 사건 자체가 2강에서 계속 강조하는 ‘광야’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힘으로 광야에서 생명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매일 하늘에서 주어지는 양식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만나에는 인간의 영적 생명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공급된다는 매우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만나는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선, 곧 사람이 자기 공로 없이 주님에게서 받아들이는 사랑과 선의 기쁨을 나타냅니다. 특히 ‘감추인 만나’라는 표현은 그 선의 내적인 성격을 더욱 강조합니다. 자연적 눈에는 보이지 않고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과의 결합 가운데 누리는 내적인 선과 평화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데서 오는 기쁨도 아니고, 영적 성취를 자랑하는 데서 오는 만족도 아닙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선을 행하는 것 자체가 기쁘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 자체가 양식이 되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천국적 사랑이 깊어지면 선을 행하는 것은 더 이상 의무만이 아닙니다. 그것이 기쁨이 됩니다. 처음 거듭남을 시작할 때에는 악을 거절하는 것이 매우 힘들 수 있습니다. 용서하기 싫지만 말씀 때문에 용서하려 하고, 정직하게 행동하면 손해를 보지만 진리 때문에 정직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선이 사람 안에 깊이 자리 잡을수록 이전에 힘들게 순종하던 것이 점차 기쁨이 됩니다. 선 자체에서 맛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만나를 먹는 것’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합니다. 천국적 기쁨은 자연적 인간에게 잘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유익을 얻는 데서만 기쁨을 느끼는 사람에게 ‘아무 대가 없이 다른 사람의 선을 위해 섬기는 것이 행복하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지배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에게 섬기는 기쁨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에서 생명을 얻는 사람에게 아무도 모르게 선을 행하는 기쁨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면 이전에는 맛을 느끼지 못했던 선에서 새로운 맛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감추인 만나가 그의 생명 안에 열리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광야의 의미도 다시 깊어집니다. 광야는 단순히 인간을 괴롭게 만드는 곳이 아니라 ‘무엇으로 사는가’를 배우는 곳입니다. 애굽에는 고기 가마와 음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연적 욕망을 만족시키는 삶을 표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는 그것에 의지할 수 없습니다. 매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나를 받아야 합니다. 영적으로도 사람은 거듭남 과정에서 이전에 자기를 행복하게 했던 인정, 성공, 지배, 소유 같은 것들이 더 이상 참된 양식이 아님을 배웁니다. 그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로 사는 법을 배웁니다. 그래서 광야의 목적은 사람을 굶기는 것이 아니라 음식의 종류를 바꾸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연단의 깊이는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했느냐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새 양식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세상적 즐거움을 많이 끊었는데 마음에는 기쁨이 없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마음만 강해졌다면 아직 만나의 맛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전에는 자기 유익에서만 기쁨을 느끼던 사람이 점차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 진리를 행하는 일, 맡겨진 쓰임을 충실히 하는 일에서 기쁨을 느끼기 시작한다면 그의 영적 입맛 자체가 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행동의 변화일 뿐 아니라 ‘무엇을 달게 느끼는가’의 변화입니다.

 

이어지는 ‘흰 돌’ 역시 매우 아름다운 표상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기는 자에게 감추인 만나와 함께 흰 돌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강사는 이 흰 돌을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실제적인 표지와 연결하고, 그 위에 기록된 새 이름과 함께 이긴 자의 특별한 신분과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에도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것’이라는 강사의 일관된 구조가 있습니다. 그러나 상응의 관점에서는 흰 돌을 외적인 신분증이나 천국의 특별한 표찰처럼 이해하기보다 그 안에 담긴 영적 의미를 먼저 보게 됩니다.

 

말씀에서 ‘돌’은 진리와 관계합니다. 특별히 기초가 되고 확고하게 세워진 진리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십계명이 돌판에 기록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신적 진리가 인간의 삶에 확고하게 자리 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돌이 ‘희다’고 합니다. 흰색은 앞에서 흰옷을 살펴보았듯 빛과 진리의 정결함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흰 돌은 선과 결합하여 정결해지고 확고해진 진리를 생각하게 합니다. 단순히 머리로 알고 있는 교리가 아니라 시험을 통과하면서 삶에 새겨진 진리입니다.

 

예를 들어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진리를 책에서 읽고 동의하는 것과, 오랜 세월 자기 공로와 싸우면서 실제로 선을 행한 뒤에도 그것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처음에는 그 진리가 기억 속의 문장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시험을 통과하면서 그 진리가 의지와 결합하면 마치 돌에 새겨진 것처럼 그 사람의 삶의 원리가 됩니다.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흰 돌’은 싸움을 마친 뒤 외부에서 받는 메달보다, 싸움을 통하여 진리가 그의 생명 안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상태로 이해할 때 훨씬 깊어집니다.

 

그리고 바로 그 흰 돌 위에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는 새 이름’이 기록됩니다. ‘이름’은 말씀에서 단순한 호칭보다 그 사람 또는 사물의 질 전체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새 이름은 거듭남을 통하여 새롭게 형성된 영적 성질을 뜻합니다. 사람이 악과 거짓의 지배 아래 있을 때의 사랑과 생각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면서 달라지면 그는 실제로 ‘새 사람’이 됩니다. 기억이 없어지고 전혀 다른 인격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을 지배하는 사랑의 중심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이름이 바뀌는 여러 장면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사래가 사라가 되며,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는 것은 단순한 개명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름의 변화는 상태와 성질의 변화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흰 돌 위의 새 이름 역시 거듭남을 통하여 주님께서 한 사람 안에 이루신 새로운 영적 상태와 관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거듭남이 얼마나 고유한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은 형태로 만드시지 않습니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유전적 성향과 환경, 자유로운 선택과 시험, 쓰임이 다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각 사람을 인도하여 형성하시는 천국적 성질도 고유합니다. 같은 진리를 믿고 같은 주님을 사랑하지만 천국의 천사들이 모두 서로 다른 이유입니다. 주님은 획일성을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다양성을 하나의 질서 안에 결합하십니다.

 

이 점은 수도적 영성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영적 훈련에는 일정한 공동 규율이 필요할 수 있지만, 그 규율의 목적이 모든 사람을 똑같은 영적 성격으로 만드는 데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 깊은 침묵이 유익할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적극적인 섬김이 더 중요한 훈련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에 대한 애착과 싸워야 하고, 어떤 사람은 인정욕과 싸워야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자기 판단을 절대화하는 습관과 싸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다루시는 지점이 서로 다르므로 거듭남의 길도 기계적으로 동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긴 자’의 표준을 지나치게 외적으로 고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특정한 광야 과정, 특정한 체험, 특정한 수준의 금식이나 기도, 특정한 영적 현상을 경험해야 이긴 자가 된다고 규정하기 시작하면 주님께서 각 영혼을 고유하게 인도하시는 섭리를 하나의 인간적 틀 안에 넣을 위험이 있습니다. 말씀은 분명 모든 사람에게 악을 죄로 알고 멀리하며 선을 행하라고 가르치지만,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서 어떤 순서와 방식으로 그 일을 이루시는지는 무한히 다양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생명나무와 감추인 만나와 흰 돌은 서로 떨어진 세 가지 상품이 아닙니다. 하나의 거듭남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보여 줍니다. ‘생명나무’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생명이 중심에 있고, ‘감추인 만나’에서는 그 선을 받아 누리는 내적인 기쁨이 나타나며, ‘흰 돌’에서는 그 선과 결합된 진리가 사람 안에 확고하게 자리 잡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 이름’에서는 그 결과 그 사람의 영적 성질 자체가 새롭게 형성되는 모습을 봅니다. 하나는 생명, 하나는 양식, 하나는 진리, 하나는 새로운 인격의 질을 보여 주지만 모두 주님과의 결합이라는 하나의 중심을 향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이긴 자의 상급’이라는 말도 훨씬 아름답게 들립니다. 주님께서는 ‘네가 고생했으니 이제 특별한 물건 몇 가지를 주겠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거절한 사람에게 선을 주시고, 거짓을 버린 사람에게 진리를 주시며, 자기애의 즐거움을 버린 사람에게 천국적 사랑의 기쁨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선과 진리가 그의 생명이 되도록 하십니다. 결국 상급은 주님께서 주시는 어떤 것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 자체입니다.

 

이 원리는 신앙생활의 동기도 점검하게 합니다. ‘이긴 자가 되면 특별한 상을 받는다’는 생각은 사람을 열심히 살도록 자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동기가 계속 외적 보상에 머물러 있다면 아직 자연적 수준의 신앙일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상을 받기 위해 착한 일을 시작할 수 있듯 신앙 초기에는 천국의 복이나 상급을 바라보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선 자체를 사랑하게 되어야 합니다. 결국에는 ‘상을 받기 위해 선을 행한다’에서 ‘선하기 때문에 선을 행한다’로 옮겨가야 합니다.

 

천국의 천사들이 선을 행하면서 ‘이 일을 하면 내 천국 등급이 올라갈까?’라고 계산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의 선을 이루는 것 자체가 기쁨입니다. 어머니가 사랑하는 자녀를 돌본 뒤 ‘이만큼 돌봤으니 보상을 얼마 받을까?’라고 계산하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랑은 자기 안에 보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의 선을 이루는 것이 곧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흥영성수련원의 오랜 연단과 자기부인의 전통도 이 지점에서 더욱 깊은 방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긴 자가 되어야 한다’, ‘생명과를 먹어야 한다’,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야 한다’는 목표가 강력한 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단이 깊어질수록 그 목표 자체도 정결해져야 합니다. ‘내가 이긴 자가 되고 싶다’에서 ‘주님을 더 사랑하고 싶다’로, ‘특별한 상급을 받고 싶다’에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고 싶다’로, ‘높은 천국에 가고 싶다’에서 ‘어디에서든 주님께서 맡기신 쓰임을 기쁘게 하고 싶다’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연단이 실제로 proprium을 다루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이때 ‘감추인 만나’는 매우 아름다운 분별 기준이 됩니다. 연단을 많이 받은 뒤 무엇에서 기쁨을 느끼는가를 보면 됩니다. ‘나는 이만큼 훈련받았다’는 사실에서 기쁨을 느끼는가, 아니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선을 행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가? ‘나는 이긴 자의 반열에 속한다’는 자기 인식이 기쁜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주님에게 가까워지는 것을 보는 것이 기쁜가? 후자의 기쁨이 자라난다면 감추인 만나의 맛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흰 돌’ 역시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수많은 말씀을 들은 뒤 내 안에 실제로 무엇이 ‘돌’처럼 자리 잡았는가? 설교의 문장들이 기억에 많이 남았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시험이 왔을 때 그 진리가 나를 붙들어야 합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을 선택하고, 상처를 받더라도 복수를 거절하며, 칭찬받지 못해도 맡은 쓰임을 계속하고, 선을 행한 뒤 공로를 주님께 돌릴 수 있다면 진리가 조금씩 흰 돌처럼 삶의 기초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2강의 앞부분들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중간영계에서 결국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사랑했는가입니다. 세 천국의 차이는 주님의 선을 받아들이는 사랑의 질과 관계합니다. 흰옷과 세마포는 선과 결합된 진리가 삶에 나타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영적 할례는 그 선과 진리를 방해하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불결함이 제거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생명나무와 감추인 만나와 흰 돌은 그 결과 주님의 사랑과 선과 진리가 실제로 인간의 생명이 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것들은 서로 다른 교리 조각이 아니라 하나의 거듭남을 여러 방향에서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2강 5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광야의 연단과 영적 할례를 통하여 죄성과 정욕이 처리된 이긴 자에게 생명나무의 열매와 감추인 만나와 흰 돌이 특별한 상급으로 주어진다는 강사의 설명은 신앙의 목적을 단순한 죄 사함에 머물게 하지 않고 실제 성결과 주님이 약속하신 영적 복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힘을 지니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생명나무를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사랑과 생명으로, 그 열매를 먹는 것을 그 선을 받아 자기 생명으로 삼는 것으로, 감추인 만나를 자기 공로 없이 주님에게서 받아 누리는 내적인 천국적 선과 그 기쁨으로, 흰 돌을 선과 결합하여 삶 안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정결한 진리로, 그 위의 새 이름을 거듭남을 통하여 형성된 각 사람의 고유한 새로운 영적 성질로 이해하며, 따라서 이 모든 것을 특정한 영적 계급에 외적으로 지급되는 별개의 특전들이라기보다 악과 거짓을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는 사람 안에 주님의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실제 생명이 되어 가는 하나의 거듭남의 여러 모습으로 볼 때,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의 아르카나가 더욱 깊게 열립니다.’

 

결국 생명나무와 만나와 흰 돌이 가리키는 중심에는 ‘주님에게서 받음’이 있습니다. 생명은 주님에게서 받고, 양식도 주님에게서 받고, 진리도 주님에게서 받으며, 그 결과 형성되는 새 사람의 모든 선한 것 역시 주님에게서 받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여 영적으로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에게서 나온 선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순간순간 흘러들어온다는 사실을 더 깊이 알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감추인 만나’의 역설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proprium은 무엇인가를 자기 것으로 소유할 때 기뻐하지만, 천국적 사람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할 때 자유로워집니다. ‘내가 이루었다’고 붙들 필요도 없고, ‘내가 이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고 불안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필요한 생명을 오늘 주님께 받고, 오늘 필요한 진리를 오늘 받아 살아가면 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이 다음 날의 만나까지 쌓아 둘 수 없었던 것처럼 영적 생명도 주님에게서 계속 받아야 합니다. 어제의 은혜로 오늘을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이긴 자의 모습은 손에 많은 상급을 들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빈손으로 주님 앞에 서서 끊임없이 받는 사람일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도, 감추인 만나도, 흰 돌도 결국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을수록 그는 ‘나는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기보다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에 더 가까워집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광야와 할례를 통과한 사람이 마침내 배우게 되는 가장 깊은 승리이며, 계시록이 말하는 ‘이기는 자’의 가장 천국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6

새 이름과 둘째 사망, 그리고 이긴 자의 열두 가지 축복 : 모든 약속의 끝은 더 높은 나가 아니라 주님과의 결합입니다

2강의 마지막 부분에서 강사는 지금까지 길게 살펴온 ‘이긴 자가 받는 축복’을 마무리합니다. 앞에서 생명나무의 열매, 감추인 만나와 흰 돌을 다룬 데 이어 흰 돌 위에 기록되는 ‘새 이름’을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서머나 교회에 주어진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을 해석합니다. 그리고 이로써 자신이 정리한 ‘이긴 자가 받는 열두 가지 축복’을 모두 살펴보았다고 선언합니다. 실제 강의에서도 3시간 16분경 강사는 ‘이렇게 해서 이긴 자들에게 받는 열두 가지 축복을 다 살펴봤습니다’라고 정리합니다. 따라서 이번 6부는 단순히 마지막 두 항목만 설명하는 부분이 아니라, 3시간이 넘는 2강 전체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다시 한곳에 모아 보는 결론이기도 합니다.

 

먼저 ‘새 이름’입니다. 계시록 2장 17절에서 주님께서는 이기는 자에게 ‘흰 돌’을 주시고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강사는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것처럼 이긴 자 역시 새로운 이름을 받는다고 이해합니다. 특히 강사는 여기서 상당히 구체적인 견해를 제시합니다. 이긴 자, 곧 교회 시대의 ‘처음 익은 열매’는 아직 지상에서 육체로 살아 있을 때 새 이름을 받고, 다른 구원받은 성도들은 천국에 들어간 뒤 새 이름을 받을 것이라고 봅니다. 동시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분은 그렇게 안 믿어도 상관없습니다’, ‘구원하고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함으로써 자기 견해를 구원의 절대 조건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해석과 구원의 본질을 구별하는 태도는 해설자로서도 존중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름’은 대단히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말씀에서 이름은 단순히 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한 호칭에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의 ‘질’, 곧 그의 사랑과 신앙과 삶으로 형성된 영적 성질 전체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새 이름을 받는다’는 말씀의 중심도 자연계에서 사용하던 김 아무개, 이 아무개라는 이름 대신 영계에서 새로운 호칭 하나를 배정받는 데 있다고 보기보다, 거듭남을 통하여 그 사람의 영적 성질 자체가 새로워지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 더 깊습니다. 앞의 5부에서 살펴본 ‘흰 돌’이 선과 결합하여 사람 안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진리를 나타낸다면, 그 돌 위에 새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그 진리가 이제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새로운 영적 성질과 생명이 되었다는 의미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보면 ‘새 이름’은 죽은 뒤에만 관계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새 이름은 지상에서부터 형성됩니다. 이 점에서는 강사가 ‘이긴 자는 살아 있을 때 새 이름을 받는다’고 강조한 직관 속에 매우 의미 있는 요소가 있습니다. 다만 ‘살아 있는 동안 영계에서 사용할 문자적인 이름 하나를 미리 받는다’는 방향보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실제로 새로운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간다는 방향으로 이해하면 훨씬 깊어집니다. 예전에는 자기 이익이 모든 선택의 기준이었던 사람이 점차 이웃의 선을 생각하게 되고, 인정받는 데서 기쁨을 느끼던 사람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쓰임을 행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며, 자기 판단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던 사람이 진리 앞에서 자기 잘못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 이미 ‘새 이름’이 형성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옛사람을 조금 개선하는 것’보다 더 깊은 변화입니다. 물론 기억과 인격과 고유한 개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보존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지배하는 중심 사랑이 바뀝니다. 이것이 새 이름입니다.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랑으로 사는 사람, 같은 기억과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자기 영광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의 선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새 사람’이고, 계시록의 표현을 빌리면 ‘새 이름’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다’는 말씀은 한 사람의 거듭남이 얼마나 고유한지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외적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볼 수 있습니다. 누가 얼마나 기도하고 금식하는지, 얼마나 성경을 많이 읽고 봉사하는지, 어떤 신앙체험을 했는지는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서 무엇을 다루고 계시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가장 큰 광야는 재물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인정욕이며, 어떤 사람에게는 자기 의, 어떤 사람에게는 분노, 어떤 사람에게는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 가운데 주님께서 형성하시는 새로운 영적 성질 역시 각 사람에게 고유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의 영적 등급을 쉽게 판단하지 못하게 합니다. 외적으로 보아 매우 평범한 사람이 주님 앞에서는 깊은 싸움을 통과하고 있을 수 있고, 많은 영적 체험을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는 아직 자기 인정욕과 싸우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의 질서는 사람을 인간의 눈으로 ‘일반 성도’, ‘광야 성도’, ‘이긴 자’라고 쉽게 분류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섬세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한 사람의 전체 사랑과 의도와 자유로운 선택의 역사를 완전히 아십니다. ‘받는 자밖에는 알 사람이 없는 새 이름’이라는 말씀에는 바로 이러한 영혼의 고유성과 주님의 섭리의 은밀함도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강사는 2강의 마지막 약속인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로 갑니다. 강사는 성경에 두 종류의 사망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째 사망은 육체가 죽는 것이고, 둘째 사망은 영혼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한 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합니다. 일반적으로 구원받은 성도 역시 지옥에 가지 않는다면 왜 주님께서 특별히 ‘이긴 자’에게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고 약속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강사는 그 답을 자신의 종말론적 시간표 안에서 찾습니다. 계시록 9장에서 무저갱이 열리고 황충으로 묘사된 악령들이 올라와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괴롭히는데, 이긴 자들은 그 대환란에 들어가지 않고 휴거되기 때문에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이 악령들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사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를 대환란을 면제받고 휴거된다는 ‘간접적인 표현’으로 해석합니다.

 

이 대목에서는 강사의 미래주의적 계시록 해석과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의 차이가 상당히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계시록의 무저갱과 황충과 불못과 둘째 사망을 미래 어느 시기에 자연계에서 일어날 사건들의 암호로 읽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교회와 인간의 영적 상태, 그리고 영계에서 악과 거짓이 드러나고 심판받는 상태를 상응적 형상으로 보여 줍니다. 따라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말씀 역시 대환란 직전에 휴거되어 특정한 다섯 달의 악령 재앙을 피한다는 의미보다 훨씬 내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게 됩니다.

 

말씀에서 ‘죽음’은 육체적 죽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영적 죽음의 상태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사람은 육체적으로 멀쩡하게 살아 있으면서도 자기애와 세상 사랑, 악과 거짓을 자기 생명으로 삼아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육체의 죽음을 통과한 사람도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 안에 있다면 더욱 충만하게 살아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신 말씀도 이런 깊은 차원을 열어 줍니다. 자연적 몸의 죽음이 참된 생명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둘째 사망’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지옥이라는 형벌 장소에 던져 다시 죽이시는 사건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애와 거짓을 지배적 생명으로 선택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천국적 생명과 스스로 분리된 상태의 완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옥은 주님께서 사람을 미워하여 가두시는 곳이 아니라 악을 사랑하는 영들이 자기 사랑과 상응하는 곳을 찾아가는 상태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도 지옥에 가기를 원하지 않으시지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거부하고 자기애의 즐거움을 자기 생명으로 굳힌 영은 천국의 사랑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말씀은 놀랍도록 깊은 거듭남의 약속이 됩니다. 사람이 주님의 힘으로 자기 안의 악과 거짓과 싸우면서 그것을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점차 지배적 사랑으로 받아들이면 그 사람의 참된 생명은 더 이상 지옥에 속하지 않습니다. 육체의 죽음도 그 생명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연적 몸이 벗겨지면 지상에서 형성된 그 내적 생명이 더욱 자유롭게 드러납니다. ‘둘째 사망이 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미래의 재앙 하나를 피한다는 약속을 넘어,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그 사람 안에 형성되어 악과 거짓의 영적 죽음이 더 이상 그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약속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기는 자’의 의미가 다시 중요해집니다. 2강 전체에서 강사는 이긴 자를 일반 성도와 구별되는 특별한 성결의 상태로 설명해 왔습니다. 광야를 통과하고 죄성과 정욕이 제거되어 생명과를 먹으며, 흰옷을 입고, 감추인 만나와 흰 돌과 새 이름을 받고,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이 체계에는 신앙을 안일하게 만들지 않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믿었으니 이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신앙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실제로 악과 싸우고 삶이 변해야 한다고 촉구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2강 전체에서 거듭 인정해야 할 중요한 장점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긴 자를 별도의 영적 엘리트 계급으로 고정하기보다 모든 거듭남의 본질을 보여 주는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계시록의 ‘이김’은 먼저 다른 성도들을 앞서는 경쟁에서의 승리가 아닙니다. 내 안에서 주님에게 반대되는 악과 거짓에 대한 승리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 독립적으로 이루어 낸 승리조차 아닙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실제로 싸워야 하지만, 이기는 능력은 전적으로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참된 이긴 자는 ‘나는 다른 성도보다 더 높은 단계에 올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 없이는 나는 아무 악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아는 사람입니다.

 

이 점은 2강 전체를 읽을 때 가장 조심스럽게 붙들어야 할 균형 가운데 하나입니다. 강사가 성결과 연단을 매우 강하게 강조하는 것은 귀하지만, 그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영적 위치를 계속 측정하게 한다면 오히려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나는 아직 광야 단계인가?’, ‘나는 생명과를 먹었는가?’, ‘나는 이긴 자인가?’, ‘나는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사람인가?’라는 질문이 지나치게 커지면 시선이 주님보다 자기 영적 상태에 집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의 목적은 끊임없이 자기 등급을 확인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오늘 주어진 악을 죄로 알고 거절하고 선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기 등급을 판단하기 어려워집니다. 주님의 빛이 더 밝아질수록 자기 안의 proprium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외적인 죄 몇 가지를 이기고 나면 상당히 깨끗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더 깊은 빛이 들어오면 자기 의와 인정욕, 지배욕, 공로의식 같은 훨씬 미세한 것들이 보입니다. 그래서 천적 상태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높은 사람이다’라는 의식보다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인식이 깊어집니다. 이것이 천국의 높음이 자연계의 높음과 정반대인 이유입니다.

 

여기서 2강 전체에서 살펴본 ‘이긴 자의 축복들’을 다시 바라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납니다. 생명나무의 열매, 감추인 만나, 흰 돌, 새 이름, 흰옷,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 것,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는 것, 주님의 보좌와 관련된 약속,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 새벽별,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 것 등은 얼핏 보면 이긴 자가 하나씩 획득하는 여러 개의 독립적인 상급처럼 보입니다. 강사 역시 이것들을 ‘열두 가지 축복’으로 묶어 설명하고 마지막에 그 목록을 다시 확인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모든 약속을 하나의 거듭난 생명을 서로 다른 상응적 형상으로 보여 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생명나무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생명을 봅니다. 감추인 만나에서는 그 선을 받아들이면서 누리는 내적인 천국의 기쁨을 봅니다. 흰 돌에서는 선과 결합하여 확고하게 된 진리를 보고, 새 이름에서는 그 선과 진리를 통하여 새롭게 형성된 영적 성질을 봅니다. 흰옷과 세마포에서는 그 내적 선이 진리를 통하여 삶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봅니다. 성전의 기둥에서는 주님의 교회와 천국 안에서 굳게 서는 진리와 쓰임을 생각할 수 있고, 생명책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에 속하게 된 상태를 봅니다. 그리고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약속에서는 악과 거짓의 생명이 더 이상 그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는 상태를 봅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중심은 하나입니다. ‘주님과의 결합’입니다.

 

따라서 이 열두 가지를 천국에 들어간 뒤 각각 따로 지급되는 열두 개의 상품처럼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거듭나면 그 하나의 생명이 여러 측면에서 나타납니다. 마치 햇빛 하나가 여러 색과 형태로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에서는 생명나무이고, 내적인 기쁨에서는 만나이며, 진리에서는 흰 돌이고, 새롭게 된 성질에서는 새 이름이며, 삶으로 나타난 진리에서는 흰옷입니다. 결국 모든 약속은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 사시고 그 사람이 주님 안에서 산다’는 하나의 사실을 여러 상응으로 풀어 보여 줍니다.

 

이렇게 보면 ‘상급’의 개념도 마지막으로 정리됩니다. 이긴 자가 받는 최고의 상급은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천국에 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상급이고, 이웃의 선에서 더 깊은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상급이며, 선을 행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 되는 것이 상급입니다. 천국적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질 보상을 계산하면서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선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행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내가 무엇을 받을 것인가?’라는 관심은 줄어들고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내가 이웃에게 어떤 선한 쓰임이 될 수 있는가?’라는 관심이 커집니다.

 

이 점에서 시흥영성수련원의 오랜 수도적 전통과 2강의 강한 ‘이긴 자’ 영성은 매우 소중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부인과 절제, 연단과 순종을 강조하는 전통은 오늘날 신앙을 단순한 위로나 축복의 수단으로만 받아들이는 경향에 강한 도전을 줍니다. 실제로 자기 안의 악과 싸우지 않으면서 성결을 말할 수 없고, 삶의 변화 없이 거듭남을 말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 역시 바로 이 진지함을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가 그 연단의 마지막 대상 가운데 하나가 ‘연단받은 나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육체적 정욕을 버리는 것보다 어쩌면 더 어려운 것이 영적 공로를 버리는 것일 수 있습니다. 재물을 자랑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쉽게 알면서도 ‘나는 많이 기도했다’, ‘나는 많은 연단을 받았다’, ‘나는 깊은 진리를 안다’, ‘나는 일반 성도와 다르다’는 생각은 경건한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 proprium이 자기 생명을 주장하는 방식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광야의 마지막에는 ‘나는 이긴 자다’라는 자기의식마저 주님 앞에 내려놓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역설적으로 ‘이긴 자’라는 말의 가장 깊은 뜻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긴 자는 자기 자신을 가장 강하게 만든 사람이 아니라 자기 힘에 대한 신뢰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자기 욕망을 이겼지만 그 승리를 자기 공로로 만들지 않는 사람, 진리를 깊이 알지만 그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지 않는 사람, 많은 연단을 통과했지만 아직 연약한 사람을 더 따뜻하게 품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천국적 승리의 열매라면, ‘이긴 자’라는 말은 영적 특권의 명칭이 아니라 깊은 겸손의 명칭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마지막 약속이 참으로 아름답게 2강 전체를 닫습니다. 자기애는 결국 영적 죽음으로 향하지만 주님 사랑은 생명으로 향합니다. proprium은 모든 것을 자기에게 끌어오려 하지만 천국적 사랑은 모든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립니다. 전자는 스스로를 중심에 놓으면서 점점 고립되고, 후자는 주님을 중심에 모시면서 다른 사람들과 더욱 깊이 결합합니다. 그러므로 둘째 사망을 이긴다는 것은 단순히 지옥의 형벌을 면제받는 것보다 더 깊이, 죽음의 사랑에서 생명의 사랑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2강 6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긴 자가 흰 돌 위에 기록된 새 이름을 받으며 마지막으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고, 이로써 이긴 자에게 약속된 열두 가지 축복이 완성된다는 강사의 설명은 신앙을 실제 성결과 영적 싸움으로 이끌고 주님의 약속을 진지하게 붙들게 한다는 점에서 큰 힘을 지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새 이름’을 특정한 영적 계급에게 부여되는 새로운 호칭보다 거듭남을 통하여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 형성하시는 고유한 새로운 사랑과 신앙과 쓰임의 영적 성질로, ‘둘째 사망’을 미래 대환란 중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황충 악령의 재앙보다 더 깊이 자기애와 거짓을 지배적 생명으로 삼아 주님의 천국적 생명과 분리되는 상태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음’을 주님의 힘으로 악과 거짓을 거절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지배적 생명이 된 사람에게 영적 죽음이 더 이상 지배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생명나무와 감추인 만나와 흰 돌과 새 이름과 흰옷과 생명책을 비롯한 이긴 자의 모든 약속 역시 서로 독립된 특전의 목록이라기보다 주님과 결합된 하나의 천국적 생명이 여러 상응으로 펼쳐진 것으로 읽을 때, 2강 전체의 중심이 ‘얼마나 높은 단계에 이르렀는가?’에서 ‘얼마나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 실제로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로 옮겨집니다.’

 

이제 2강 전체를 돌아보면 처음의 중간영계에서 마지막 둘째 사망까지 하나의 선이 이어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중간영계에서 그가 지상에서 형성한 내적 사랑이 드러납니다. 천국의 서로 다른 상태도 그 사랑의 질과 관계합니다. 흰옷과 세마포는 선과 결합한 진리가 삶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영적 할례와 광야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불결함이 드러나고 다루어지는 거듭남의 과정을 보여 줍니다. 생명나무와 감추인 만나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인간의 생명과 기쁨이 되고, 흰 돌과 새 이름에서는 그 선과 진리가 한 사람의 고유한 영적 성질로 굳어집니다. 그리고 둘째 사망이 해하지 못한다는 마지막 약속에서는 그렇게 주님에게서 받은 생명이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이 긴 2강을 다 듣고 난 뒤 우리에게 남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이긴 자의 열두 가지 축복 가운데 몇 가지를 받았는가?’가 아닐 것입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되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할수록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말씀을 많이 알수록 이웃에게 더 체어리티를 행하게 되었는가, 연단을 많이 받을수록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더 이해하게 되었는가, 선을 행할수록 자기 공로를 덜 생각하게 되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영적 성장의 참된 표지는 자기 등급에 대한 확신보다 사랑의 변화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 앞에서 2강의 ‘이긴 자’라는 표현도 가장 아름다운 자리로 돌아옵니다. 이긴 자는 ‘나는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늘도 자기 안에 올라오는 악을 보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넘어졌을 때 악을 정당화하지 않고 다시 주님께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자기 힘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 싸우면서도 그 힘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그의 마지막 말은 ‘제가 이겼습니다’보다 ‘주님께서 이기셨습니다’에 가까워집니다.

 

그렇다면 2강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어도 좋겠습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감추인 만나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흰 돌과 새 이름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흰옷의 빛도 주님에게서 오며, 둘째 사망을 이기는 생명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이 할 일은 그 생명을 받을 수 있도록 악을 죄로 알고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며, 받은 진리를 실제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수록 사람은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는 의식보다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더욱 바라보게 됩니다.’ 바로 그때 ‘이긴 자’의 열두 가지 축복은 열두 개의 상급을 소유한 인간의 영광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주님의 생명이 점점 충만해지는 하나의 거대한 약속으로 읽힐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오직 주님이 계십니다.

 

 

 

SY.53,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3강 (7/28),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3강 1부요한계시록 6장의 ‘네 말’과 심판을 어떻게 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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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34,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1강 (7/27),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1강 1부‘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본 제79차 심령부흥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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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 영상은 단순한 사찰 소개가 아니라, 불교의 핵심 사상을 사찰과 불화, 불상, 의식, 그리고 붓다의 생애를 따라가며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강의입니다. 시작부터 인간이 왜 늙고 병들고 죽는가라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 해답을 찾은 존재로 붓다를 소개하면서, 시청자를 ‘깨달음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이후 화엄사, 송광사, 통도사, 흥국사 등을 차례로 순례하며, 화엄사상, 사성제, 팔상도, 법화경, 관세음보살 신앙, 정토신앙 등을 하나의 큰 흐름으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먼저 높이 평가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 영상은 인간이 단순히 복을 받기 위해 종교를 찾는 존재가 아니라, 삶의 근본적인 괴로움을 해결하려는 존재라는 점을 매우 진지하게 다룹니다. ‘우리는 왜 늙고 병들고 죽는가’, ‘괴로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집착을 어떻게 내려놓을 것인가’와 같은 질문은 인간의 영혼을 향한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람 안에는 영원한 생명을 향한 갈망이 있으며, 그 갈망은 결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는 불교의 구도 정신과 스베덴보리의 영적 탐구는 서로 대화할 수 있는 공통 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영상은 화엄사상을 매우 아름답게 소개합니다. ‘꽃 한 송이도 절대적 가치를 가진다’,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설명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모든 피조물이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담는 그릇이며, 자연계의 모든 사물은 영적인 실재를 반영하는 ‘상응’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풀 한 포기, 돌 하나에도 의미가 있다는 시선 자체는 스베덴보리도 깊이 공감할 것입니다. 다만 그 이유는 조금 다릅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성 속에서 의미를 가지는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모든 존재의 의미는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과 사랑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영상의 중심에는 ‘일체개고’, 곧 ‘모든 것은 괴로움’이라는 사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흥미로운 보완을 제시합니다. 그는 인간이 느끼는 괴로움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는 상태에서는 괴로움이 필연적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괴로움은 존재 자체의 본질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가 뒤집힌 결과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창조 자체는 선하며, 괴로움은 창조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 인간 의지의 왜곡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세상은 본질적으로 고통’이라는 불교의 전제와 ‘세상은 본래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인간이 질서를 잃었다’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은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영상은 붓다의 생애를 통해 고행과 깨달음을 설명합니다. 특히 극단적인 고행을 버리고, 중도를 선택하는 장면을 중요한 전환점으로 소개합니다. 스베덴보리도 외적인 금욕 자체를 영성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참된 변화는 외적 고행보다 내적 사랑의 변화에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단순히 육체를 괴롭히는 수행은 사람을 천사로 만들지 못하며, 오히려 사랑과 진리 안에서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이 거듭남의 본질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런 점에서는 극단을 버리고 내면을 돌아보라는 영상의 메시지와 일정 부분 만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영상은 ‘모든 고통은 집착에서 온다’는 사성제를 반복하여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자기 자신만을 중심으로 삼는 ‘proprium’이 모든 영적 문제의 뿌리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권면은 일정 부분 자기애를 버리라는 성경적 권면과도 닿아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을 향해 비우는가’에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집착을 비워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목적이라면,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자기 사랑을 비우고 그 자리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채우는 것이 목적입니다. 단순한 비움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 전환이 핵심입니다.

 

영상은 ‘과거에도 집착하지 말고, 현재에도 집착하지 말고, 미래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설법도 소개합니다. 이것 역시 상당히 깊은 통찰입니다. 스베덴보리도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보다 현재 순간에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살아가는 삶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의 지속적인 생명 유입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현재는 단순한 순간이 아니라, 주님께서 끊임없이 생명을 공급하시는 접점입니다.

 

후반부에서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 아미타불, 극락정토, 명부와 시왕 심판 등 한국 불교에서 매우 친숙한 신앙 요소들이 소개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세계관과는 상당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은 죽은 뒤 어떤 재판정에서 판결을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사랑 자체가 곧 자신의 세계를 결정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외부에서 선고되는 장소가 아니라, 자신이 평생 사랑한 것이 완전히 드러나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시왕의 심판이나 극락왕생이라는 개념은 스베덴보리의 사후 세계 이해와는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상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붓다 혼자 존귀하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존귀하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매우 따뜻하며 인간 존엄성을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모든 인간은 주님의 형상을 받을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며, 그래서 누구나 존귀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존귀함은 인간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끊임없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생명을 받는 그릇이라는 점이 중요한 차이입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부분은 불상과 불화를 ‘절대적인 대상이 아니라 방편’이라고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이는 불상을 우상 자체로 보기보다, 깨달음을 기억하게 하는 상징으로 이해하려는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외적 형상 자체보다 그 형상이 무엇을 향하게 하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는 참된 예배는 외적인 상징보다 주님 자신께 향해야 하며, 모든 상징은 결국 그분을 가리키는 데 그 의미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전체적으로 이 영상은 불교를 단순한 종교 의식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괴로움에 대한 철학과 수행의 길’로 매우 품위 있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정 종교를 공격하거나 다른 신앙을 배척하기보다, 사찰의 문화와 수행, 예술과 교리를 조화롭게 연결한 점도 돋보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이 영상은 인간의 내면을 깊이 성찰하고 자기 중심성을 내려놓으려는 진지한 구도 정신을 잘 보여 줍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깨달음 자체보다 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은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는 존재인가, 아니면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끊임없이 흘러들어올 때 비로소 참된 생명을 얻는 존재인가?’ 그는 후자를 선택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구원은 인간의 수행이 완성하는 길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며 사랑 안에서 새롭게 되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그렇다고 이 영상의 구도 정신을 가볍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진심으로 진리를 찾고 자기 욕망을 돌아보려는 이러한 갈망은,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주님께서 모든 사람 안에 심어 두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증이 다양한 문화와 종교 속에서 나타나는 한 모습으로도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SY.46, 봉쇄수도원, ‘캄캄한 새벽, 촛불 하나에 의지, 한국의 수도원을 가다’

※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 영상은 일반적인 교리 설명이 아니라 ‘수도자의 삶’ 자체를 조명하는 다큐멘터리입니다. 영상이 반복해서 강조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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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 영상은 일반적인 교리 설명이 아니라 ‘수도자의 삶’ 자체를 조명하는 다큐멘터리입니다. 영상이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정결·청빈·순명’, ‘침묵’, ‘기도와 노동’, ‘공동체’,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요소들이 특정 종교만의 독창적인 발명이라기보다, 인간이 ‘세속적 욕망을 넘어 더 높은 삶을 추구하려는 역사’ 속에서 매우 넓게 발견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을 이해할 때는 단순히 ‘가톨릭은 이런 종교다’라는 관점보다, ‘인간은 왜 수행과 절제를 통해 신성을 찾으려 하는가’라는 더 큰 틀에서 바라보는 것이 오히려 내용 전체를 더 잘 이해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 수도자들의 삶이 외적인 규율 이전에 하나의 ‘사랑의 방향’을 형성하려는 노력이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결국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갈립니다. 따라서 수도원에서 반복되는 침묵과 노동, 절제는 단순히 금욕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향하는 사랑을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바꾸려는 훈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영상이 말하는 수도 생활의 핵심과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가 상당 부분 만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외적인 수행 자체에는 언제나 신중합니다. 그는 어떤 수도복을 입었는지, 얼마나 오래 침묵했는지, 얼마나 많은 재산을 포기했는지가 사람을 천국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진정한 변화는 ‘속 사람’이 주님에 의해 새롭게 되는 거듭남에 있으며, 외적인 금욕은 그것을 돕는 수단일 수는 있어도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영상 속 수도자의 삶은 존중받을 만한 진지한 영적 노력으로 볼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곧 영적 완성을 의미한다고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영상에서 매우 인상적인 부분은 ‘노동하고 기도하고, 다시 노동하고 기도하는 반복’입니다. 이것은 고대 베네딕토회가 말한 ‘기도하고 일하라’라는 정신을 잘 보여 줍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러한 구조는 동방정교회의 헤시카즘(Hesychasm)에서도 어느 정도 발견됩니다. 정교회 수도자들도 끊임없는 ‘예수 기도’를 통해 마음을 정화하려 하며, 노동 역시 수행의 일부로 받아들입니다. 수행 방식은 다르지만, ‘마음을 하나의 중심으로 모으는 삶’이라는 점에서는 상당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시야를 불교로 넓혀 보면 더욱 흥미로운 비교가 가능합니다. 불교 역시 계율, 명상, 공동체 생활, 청빈, 독신을 강조합니다. 선종에서는 노동 자체가 수행이며, 침묵은 깨달음을 위한 중요한 환경입니다. 영상 속 수도원 풍경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불교 선방을 떠올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여기서 중요한 차이가 하나 드러납니다. 불교 수행은 궁극적으로 ‘집착의 소멸’과 ‘자아의 해체’를 지향하는 경우가 많지만,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개성이 사라지는 것을 완성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 사람이 주님 안에서 더욱 자신다운 존재가 되며, 사랑 속에서 더욱 독특한 인격으로 살아가는 것이 천국의 모습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수행이라는 형식은 비슷해 보여도, 궁극적인 목표는 상당히 다를 수 있습니다.

 

영상 후반부에서 수도자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현지 종교를 존중하며, 강압적 개종보다 사랑의 삶 자체를 선교로 이해하는 장면은 특히 주목할 만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선한 삶을 매우 중요하게 보며,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과 종교 안에서도 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인도하신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이 부분은 오히려 종교 간의 대립을 완화하는 매우 성숙한 시각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스베덴보리는 궁극적인 진리는 주님에게서 나온다고 보지만, 동시에 각 사람은 자신이 가진 빛 안에서 선을 사랑하는 만큼 주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부분은 ‘순명’입니다. 영상은 순명을 수도 생활의 절정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순명에도 두 단계가 있습니다. 하나는 권위에 대한 외적 순종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선을 선택하는 내적 자유입니다. 천국에서는 후자가 중심입니다. 그래서 외적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보다, 진리를 사랑하여 기쁨으로 순종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단계가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영상의 순명은 아름다운 이상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 순명이 사랑에서 비롯된 자유인지 단순한 제도적 복종인지에 따라 영적 의미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수도자들의 독신에 대한 설명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영상은 독신을 ‘밖으로 확장된 사랑’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상당히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참된 독신은 이웃을 위한 더 넓은 봉사가 가능하게 하는 경우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볼 것입니다. 다만 그는 천국에서는 참된 부부애가 가장 높은 사랑 가운데 하나라고 설명하기 때문에, 독신 자체를 더 높은 영성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혼 여부가 아니라 사랑의 질입니다.

 

결국 이 영상은 가톨릭 수도원의 삶을 소개하지만, 더 넓게 보면 인류가 오래전부터 공유해 온 ‘수행의 전통’을 보여 주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교회 수도원도, 불교 선원도, 힌두교의 수행 공동체도, 심지어 일부 수피(Sufi) 공동체까지도 침묵과 절제, 공동체, 노동, 기도라는 공통된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더 높은 삶을 갈망해 왔음을 보여 주는 하나의 역사적 증거이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 영상을 바라보면, 이러한 다양한 수행 전통은 모두 인간 안에 있는 자기중심성을 넘어 더 높은 사랑을 향해 나아가려는 진지한 시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스베덴보리는 외적인 수행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에 의해 속 사람이 변화되는 거듭남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완전한 목적에 도달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영상은 특정 종교를 찬양하거나 비판하는 자료라기보다,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고 더 높은 삶을 추구해 왔는지를 보여 주는 귀한 기록으로 읽을 수 있으며, 그 위에 스베덴보리의 영적 인간론을 겹쳐 볼 때, 비로소 외적 수행과 내적 거듭남의 관계가 더욱 입체적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SY.47, 불교, ‘절, 붓다의 세상’

※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 영상은 단순한 사찰 소개가 아니라, 불교의 핵심 사상을 사찰과 불화, 불상, 의식, 그리고 붓다의 생애를 따라가며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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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45, 오정현 목사,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이유’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번 설교에서 오정현 목사는 로마서 8장 28절을 중심으로 자신의 평생 목회와 삶을 관통했던 신앙의 원리를 풀어갑니다. 설교의 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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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번 설교에서 오정현 목사는 로마서 828절을 중심으로 자신의 평생 목회와 삶을 관통했던 신앙의 원리를 풀어갑니다. 설교의 핵심은 비교적 분명합니다. 사람은 미래를 알지 못하고 수많은 고난을 겪지만, 하나님께서 결국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믿음으로 끝까지 신앙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설교는 개인적인 고난, 목회의 어려움, 다윗의 삶, 그리고 자신의 인생 경험을 엮어 청중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주려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이러한 점은 많은 성도들에게 위로가 되는 메시지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설교가 끊임없이 ‘영적으로 성공하는 삶’을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적 성공’은 세속적인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과 끝까지 동행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람의 참된 성공은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그의 속 사람이 얼마나 주님의 형상을 닮아 갔는가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설교가 성도들의 시선을 세상의 형통보다 하나님께 돌리려 한다는 점은 충분히 긍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함께 읽어 보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표현은 단순히 ‘나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이 결국 좋은 결과가 된다’는 뜻보다 조금 더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주님은 결코 악을 만드시거나 고난을 보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악은 인간과 악한 영들의 자유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그 악마저도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선으로 돌려 사용하십니다. 즉 선을 위해 악을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발생한 악으로부터 가능한 가장 큰 선을 끌어내시는 것입니다. 이 미묘한 차이는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설교를 들으며 한 가지를 더 생각하게 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속에서 살아간다면, 그 사람에게도 로마서 828절이 그대로 적용될까요? 바울도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조건을 먼저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조건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악을 죄로 여기며 버리고 선을 행하려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섭리는 모든 사람을 향하지만, 그 섭리가 온전히 열매를 맺는 것은 주님의 인도를 받아들이려는 사람 안에서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은 숙명론이나 낙관주의가 아니라, 주님과 동행하는 삶 안에서 경험되는 영적 실제가 됩니다.

 

설교 중 오정현 목사는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도 잘 모르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이것 역시 스베덴보리의 설명과 상당히 조화를 이룹니다. 사람은 눈앞의 이익은 보지만 영원은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는 어떤 고난이 사실은 그의 교만을 낮추고, 이웃을 이해하게 만들며,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현재만 보지만, 주님은 영원을 보십니다. 그래서 섭리는 언제나 영원을 기준으로 일하십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설교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하나님이 다 아신다’는 표현도 더욱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가장 깊은 의도와 사랑, 그리고 영원한 운명까지 모두 보신다는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생각보다 사랑이, 사랑보다 의도가 더 깊은 차원이라고 설명합니다. 주님은 그 가장 깊은 곳까지 보시며,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천국 쪽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다 아신다’는 말은 단순한 정보의 문제가 아니라, 섭리와 사랑의 문제입니다.

 

한편 이번 설교는 로마서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 독자라면 한 가지를 자연스럽게 덧붙여 생각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복음서와 창세기 등 말씀 자체에는 천적인 아르카나가 담겨 있지만,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의 서신은 교회를 위한 교훈과 권면으로 기록되었으며, 동일한 방식의 내적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로마서를 창세기나 복음서와 동일한 방식으로 깊은 상응 해석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복음서에서 이미 밝히 드러난 주님의 가르침을 실제 삶에 적용하는 권면으로 이해하는 편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 더 가깝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설교 역시 로마서 자체를 신비롭게 해석하기보다, 그 안에 담긴 신앙의 원리를 삶으로 연결하려는 설교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번 설교의 중심부에서 오정현 목사는 반복해서 한 문장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다 아신다.’ 그는 이 한 문장이 다윗의 삶을 지탱했고, 자신의 목회와 인생도 붙들어 주었다고 고백합니다. 이어서 그는 시편 139편을 인용하며,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말과 길을 모두 아시는 분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에게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이 다 아신다’는 믿음으로 자신을 맡기라고 권면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상당히 의미 있는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은 사람의 겉모습보다 그의 가장 깊은 사랑과 의도를 보십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지만, 주님은 그 생각을 낳는 사랑까지 아십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을 설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주님은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된 위로입니다. 사람은 이해하지 못해도 주님은 이해하시고, 사람은 오해해도 주님은 오해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걸음을 더 나아갈 필요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 아신다’는 말이 ‘그러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섭리가 인간의 자유를 결코 없애지 않는다고 거듭 설명합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지만, 사람은 여전히 매 순간 선택해야 합니다. 악을 버릴 것인가, 자기 사랑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인도를 받아들일 것인가를 선택하는 자유는 끝까지 남겨 두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다 아신다’는 신앙은 수동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담대하게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설교에서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하나님께는 찰떡처럼 붙고 사람에게는 독립하라’는 표현입니다. 오정현 목사는 많은 사람들이 반대로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는 독립하려 하고,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의존하기 때문에 상처와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우자와 부모, 자녀보다 먼저 하나님께 붙어야 인간관계도 건강해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단순한 인간관계의 기술이 아니라 신앙의 질서를 회복하자는 권면입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도 놀라울 만큼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그는 모든 참된 사랑에는 질서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이며, 셋째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이 순서가 뒤집히면 모든 사랑이 왜곡됩니다. 사람을 하나님보다 앞세우면 결국 그 사랑은 집착이 되고, 소유욕이 되고, 두려움이 됩니다. 반대로 주님을 가장 먼저 사랑할 때 비로소 배우자도, 자녀도, 친구도 주님 안에서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에서 말하는 ‘사람에게 독립한다’는 표현은 사람을 무시하거나 관계를 끊으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을 하나님 대신 붙드는 우상이 되지 않게 하라는 권면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를 더 덧붙입니다. 사람에게 독립한다는 것은 사람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도 주님의 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사람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사랑은 감정의 기복에 따라 흔들리지 않고, 상대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무너지지도 않습니다. 사랑의 중심이 사람에게서 주님께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설교에서는 ‘이미 결정된 것을 붙잡고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는 권면이 나옵니다. 부모, 출신 지역, 외모, 학력, 과거와 같은 것은 이미 결정된 것이므로 거기에 평생 매여 살지 말고, 앞으로 더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경상도 사투리와 발음, 서울대학교에 가지 못했다며 한탄하는 성도의 사례 등을 들어 설명하면서, 사람은 과거보다 현재의 선택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역시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와 잘 연결됩니다. 그는 사람을 과거의 존재가 아니라 ‘지금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존재인가’로 봅니다. 천국도, 지옥도 과거의 실수 하나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사람이 어떤 사랑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는가가 결정적입니다. 그래서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지금의 사랑은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가능성입니다.

 

결국 이 부분의 설교는 성도들에게 시선을 과거에서 현재로 돌리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에 한마디를 더 덧붙였을 것입니다. ‘현재’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새로운 기회를 주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의 섭리가 쉼 없이 사람의 자유 안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과거를 되돌리시지는 않지만, 오늘의 선택을 통해 영원을 새롭게 만들어 가십니다. 따라서 이미 결정된 것을 붙잡고 절망하기보다, 지금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려는 작은 선택 하나가 영원 전체를 바꾸는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설교는 중반 이후부터 시선을 현재의 삶에서 영원으로 넓혀 갑니다. 오정현 목사는 ‘현재의 모습이 인생의 결론이 아니다’라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합니다. 그는 기독교의 역사관은 시작과 끝이 분명한 역사관이며, 성도는 눈앞의 현실만이 아니라 마지막 결론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실패나 고난을 인생 전체로 판단하지 말고, 주님 앞에 서는 마지막 날을 기준으로 자신을 바라보라고 권면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특히 깊은 울림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거의 모든 저작이 결국 하나의 사실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연계의 삶은 영원을 위한 준비 기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인간의 육신의 삶을 끝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삶은 사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지금의 삶은 그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짧은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현재의 고난이나 성공은 영원이라는 거대한 시간 속에서는 하나의 과정일 뿐입니다.

 

그래서 설교에서 말하는 ‘지금은 한 점 같은 인생’이라는 표현은 매우 의미 있게 들립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자연계의 시간과 공간은 영계에서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영계에서는 시간보다 상태가 중요합니다. 사람이 몇 년을 살았는가보다 어떤 사랑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이 점에서 현재를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라는 설교의 방향은 스베덴보리의 관점과도 상당 부분 만납니다.

 

설교는 이어 대한민국의 역사와 기독교의 역할을 언급하며 역사 전체를 높은 곳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역사적 해석과 평가가 함께 들어가는데, 이러한 부분은 청중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중요한 것은 특정 국가나 시대에 대한 평가보다, 주님의 섭리가 언제나 인류 전체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방향으로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섭리가 특정 민족이나 국가에만 머무르지 않고 모든 민족과 모든 종교 안에서도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이끌어 가신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역사를 바라볼 때도 한 나라의 흥망보다 인류 전체를 향한 섭리라는 더 넓은 시야를 함께 갖는 것이 균형 있는 접근이 될 것입니다.

 

이후 설교는 죽음을 다루는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오정현 목사는 예수 믿는 사람에게 죽음은 형벌이 아니라 영광의 궁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 땅의 삶은 순례자의 삶’이며 ‘천국이 본향’이라고 설명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또한 ‘죽음은 벽이 아니라 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성도들에게 소망을 심어 줍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은 사람이라면 더욱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의 저서,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에서 사람이 죽는 순간 존재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 새로운 세계에서 눈을 뜬다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곧바로 인식하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영계에서 삶을 이어 갑니다. 거기에는 계속해서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고, 집이 있으며, 일상이 있으며, 무엇보다 자신이 평생 사랑하던 것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세계가 펼쳐집니다.

 

다만 여기에서 한 가지 차이도 보입니다. 설교는 죽음을 주로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표현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조금 더 신중하게 설명합니다. 죽음 자체가 곧바로 천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은 영계로 들어가는 문이며, 그 이후 사람은 중간영계를 거치면서 자신의 참된 사랑이 드러나고, 그 사랑과 같은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다시 말해 죽음은 목적지가 아니라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출발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만, 동시에 지금 어떤 사랑을 선택하며 살아가는가는 더욱 중요해집니다.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오정현 목사는 다시 로마서 8장으로 돌아갑니다. 그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에서 말하는 ‘’이 무엇인지 질문하면서, 그 답을 29절에서 찾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는 것, 곧 주님을 닮아 가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현재의 환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으며, 모든 고난은 결국 우리를 더욱 주님께 가까이 이끄는 과정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이번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로마서 828절의 ‘’을 건강이나 성공, 문제 해결, 형통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정현 목사는 그것을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최고의 선은 단순한 행복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를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여, 천국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상태이며, 그 상태는 바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 속에서 형성됩니다.

 

결국 이번 부분의 설교는 성도들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원하는 선은 무엇인가?’ 만일 내가 원하는 선이 문제 해결이나 형통에만 머문다면, 고난은 언제나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고의 선이 주님의 형상을 닮아 가는 것이라면, 지금의 이해할 수 없는 시간조차도 언젠가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설교가 전하려는 중심 메시지이며, 스베덴보리 역시 평생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했던 섭리의 한 중요한 원리이기도 합니다.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오정현 목사는 다시 로마서 8장과 고린도후서 4장을 연결합니다. 그는 바울이 말한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는 말씀과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가벼운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한다’는 말씀을 중심으로, 성도의 삶에는 결코 의미 없는 고난이 없다고 강조합니다. 누구에게나 질병이 있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으며, 가족의 문제와 억울한 일들이 있지만, 그것이 마지막 결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사람은 더욱 주님을 닮아 가고, 영원한 영광을 준비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대목은 많은 성도들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실제로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 가운데 하나가 ‘왜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고난을 허락하시는가’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그 질문에 대해, 현재보다 영원을 바라보면 비로소 고난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답합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이 오래도록 붙들어 온 중요한 위로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문제를 조금 더 세밀하게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이 고난 자체를 계획하거나 보내시는 분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악과 고통은 인간의 자유와 지옥의 영향 속에서 발생합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이미 일어난 악과 고난 속에서도 사람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가장 큰 선을 이루도록 끊임없이 역사하십니다. 다시 말해 고난은 주님의 작품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가 회복해 가시는 대상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섭리의 특징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모든 고난을 직접 계획하셨다고 생각하면, 사람은 사랑의 하나님과 현실의 고통 사이에서 쉽게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주님은 오직 선만을 원하시며, 인간의 자유 때문에 발생한 악조차 구원의 재료로 바꾸어 사용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환난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환난 속에서도 역사하시는 주님의 선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설교는 이어서 바울의 말을 인용하며, ‘환난은 가볍고 영광은 무겁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실제로 환난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암 투병도, 가족의 죽음도, 배신도, 실패도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 역시 그것을 몰라서 한 말은 아닙니다. 그는 태장과 투옥, 난파와 박해를 직접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환난을 ‘가볍다’고 말한 것은 고난 자체가 가볍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무게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인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영계를 설명하면서 매우 비슷한 관점을 제시합니다. 자연계에서 수십 년 동안 겪은 고난은 영원의 시간 속에서는 극히 짧은 준비 기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천국의 행복은 자연계에서는 비교할 대상조차 없을 만큼 크다고 여러 차례 설명합니다. 그래서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현재의 삶은 씨앗을 심는 계절과 같습니다. 씨앗을 심는 동안에는 땀과 인내가 필요하지만, 열매를 거두는 때가 오면 그 모든 수고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번 설교에서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영광의 중한 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표현입니다. 오정현 목사는 건강이나 물질의 응답은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깊은 영광은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고난 가운데서도 끝까지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혜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지혜를 얻기 위한 책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기 위한 말씀으로 읽어야 한다는 마이크 펜스의 일화를 소개하며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이 부분 역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은 단순히 지식을 늘리기 위한 책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말씀이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진리는 기억 속에 머무를 때는 아직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의지로 내려가 삶이 될 때, 비로소 사람의 것이 됩니다. 그는 이를 ‘진리가 선이 된다’고 표현합니다. 다시 말해 말씀을 아는 것보다 말씀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이번 설교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정현 목사는 반복해서 ‘주님을 더 사랑하라’, ‘말씀을 더 순종하라’, ‘현재보다 영원을 바라보라’고 권면합니다. 이 세 가지는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다만 표현과 설명의 방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오정현 목사는 복음주의 설교자의 언어로 이를 풀어내고, 스베덴보리는 상응과 섭리, 자유와 사랑이라는 보다 체계적인 영적 원리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두 접근 모두 성도의 시선을 자기 자신보다 주님께 돌리려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된 방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번 설교를 한 문장으로 정리해 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사건이 자동으로 선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인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어떤 사건도 결국 영원을 준비하는 재료가 될 수 있다.’ 이 한 문장은 이번 설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과 스베덴보리가 설명한 섭리의 원리를 함께 아우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설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질문을 향해 나아갑니다. ‘인생의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어떻게 끝까지 믿음을 지킬 것인가?’ 오정현 목사는 자신의 70년 인생과 목회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 답을 세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다 아신다’, 둘째, ‘지금은 결론이 아니다’, 셋째, ‘최고의 선은 주님을 닮아 가는 것이다’. 이 세 축을 중심으로 그는 성도들에게 현재의 형편보다 하나님의 섭리와 영원을 바라보라고 권면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볼 때도 이 설교에는 분명히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요소들이 적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성도들의 시선을 세상의 성공보다 영적인 성장으로 돌리려는 점,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도록 권면하는 점, 죽음을 두려움이 아니라 영원을 향한 관문으로 바라보게 하는 점은 많은 독자들에게 신앙적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신앙을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삶의 순종으로 연결하려는 방향 역시 충분히 공감할 만한 부분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저작과 함께 읽을 때에는 몇 가지를 조금 더 분명히 구분하면 더욱 균형 잡힌 이해가 가능합니다.

 

첫째는 섭리의 문제입니다. 설교에서는 모든 일이 결국 선을 이룬다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선을 이루시는 방식에 대해 매우 섬세하게 설명합니다. 주님은 악을 계획하시거나 고난을 보내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과 지옥이 만들어 낸 악 속에서도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가능한 가장 큰 선으로 이끌어 가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고난 자체가 선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도 역사하시는 주님의 섭리가 선입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둘째는 ‘주님을 닮아 간다’는 의미입니다. 설교는 그것을 신앙생활의 최고의 선으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여기에 깊이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단순한 인격 수양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닮는다는 것은 자신의 proprium을 날마다 내려놓고, 주님의 선과 진리가 자신의 사랑과 의지가 되도록 허용하는 과정입니다. 다시 말해 겉모습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의 사랑 자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입니다.

 

셋째는 죽음에 대한 이해입니다. 설교는 죽음을 ‘영광의 궁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신앙적 소망을 강조하는 데 매우 효과적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그 과정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죽음 이후 사람은 곧바로 자신의 영원한 처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중간영계에서 자신의 내면이 드러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곳에서 평생 사랑해 온 것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지고, 그 사랑과 같은 공동체를 향해 자연스럽게 나아갑니다. 그래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자신의 참된 사랑이 완전히 드러나는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넷째는 이번 설교의 본문 자체에 관한 부분입니다. 오정현 목사는 로마서를 매우 깊이 풀어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독자라면 한 가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복음서와 창세기 등 주님께서 직접 주신 말씀에는 천적인 아르카나가 담겨 있지만, 사도들의 서신은 교회의 신앙과 생활을 위한 권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로마서를 창세기처럼 상응의 층위를 따라 해석하기보다는, 복음서에서 이미 계시된 주님의 가르침을 실제 신앙생활에 적용하는 지침으로 읽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 더 가깝습니다. 이러한 관점을 알고 이번 설교를 들으면, 로마서 자체의 신비를 탐구하기보다 그 권면을 삶에 적용하려는 설교자의 의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설교 전반에 흐르는 목회자의 진정성입니다. 자신의 약점과 실패, 사투리, 고난, 그리고 일흔을 맞는 심정을 솔직하게 나누면서 성도들에게 ‘나도 여러분과 같은 길을 걸어왔다’고 말하는 모습은 설교를 더욱 친근하게 만듭니다. 스베덴보리도 진리는 삶을 통해 증명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경험을 통해 말씀을 증언하려는 태도는 설교의 설득력을 높여 주는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번 설교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미리 정해 놓으시는 분이라기보다, 우리가 자유 안에서 겪는 모든 사건 속에서도 끝까지 우리를 천국의 사랑으로 이끄시는 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은 단순한 낙관주의도 아니고, 운명론도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시면서, 그 자유가 끝내 천국을 향하도록 쉼 없이 역사하시는 주님의 섭리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 섭리의 최종 목적은 문제 해결이나 세상적 형통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형상을 닮아 참된 천국의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번 설교는 복음주의 목회자의 언어로 영원을 바라보게 하는 메시지였으며, 스베덴보리의 저작과 함께 읽을 때에는 섭리와 자유, 거듭남과 천국이라는 더 깊은 차원까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설교라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SY.44, 구원파, ‘사망의 길, 생명의 길’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번 강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 주제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것은 ‘사람은 왜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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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번 강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 주제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것은 ‘사람은 왜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강사는 자신의 신앙 경험을 소개하며, 어느 순간부터 성경이 단순한 책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청중에게도 무조건 자신의 말을 믿으라고 하지 않고, 베뢰아 사람들처럼 ‘성경이 그러한가’ 직접 확인해 보라고 권합니다. 이 출발점은 매우 건강한 자세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에서도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의 설교까지도 말씀과 대조해 보았다는 점에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성경 자체를 기준으로 삼으려는 태도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자세이며, 특정 교단이나 특정 설교자에게만 의존하지 말라는 점에서는 충분히 귀 기울일 만한 내용입니다.

 

이어 강사는 성경을 읽다 보면 ‘하라’는 명령들이 많이 나오지만, 계시록 마지막에 나오는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는 말씀을 예로 들며,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주어져 있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창세기의 선악과와 연결하여,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인간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상당 부분 공감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유가 없다면 사랑도 없고, 사랑이 없다면 인간도 존재할 수 없다고까지 말합니다. 그의 저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틴 Arcana Coelestia, 영어 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 1749-1756, , 출 속뜻 주석, 10,837개 글)에서는 인간이 주님께로 돌이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유 가운데 있어야 하며, 강제로 선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거듭남이 아니라고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의지는 단순히 죄를 선택할 자유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허락된 가장 거룩한 선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강의에서는 자유의지가 주로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권리’라는 의미로 제시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자유를 보다 깊은 영적 구조 속에서 설명합니다. 인간은 항상 천국으로부터 오는 선한 영향과 지옥으로부터 오는 악한 영향 사이에 서 있으며, 그 어느 한쪽으로도 완전히 강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유는 인간 자신의 독립적인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거듭남을 위해 끊임없이 유지해 주시는 영적 균형 상태입니다. 즉, 자유는 단순한 선택권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 유지되는 영적 평형입니다. 이 차이는 비슷해 보이지만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강사는 이어 인생을 여행에 비유합니다. 누구나 태어나지만, 어디를 향해 가는지 분명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말합니다. 젊은 사람도 갑자기 죽을 수 있고, 노인도 오래 살 수 있으며, 결국 모든 사람은 죽음이라는 문 앞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종교마다 사후 세계에 대한 설명은 다르지만, 성경은 분명한 답을 제시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상당히 진지하며, 오늘날 죽음을 철저히 외면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오히려 필요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삶의 목적도 깊이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인간의 삶은 영원을 준비하는 기간이라고 말합니다. 다만 그는 죽음을 단순히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는 관문’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의 저작들에서는 사람이 육체를 떠나는 순간에도 의식은 그대로 이어지며,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고 느끼고, 자신의 사랑과 삶의 방향에 따라 자연스럽게 영계에서의 길이 결정된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죽음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자연계에서 영계로 옮겨 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어디로 갈 것인가’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마지막 순간의 선언보다도, 평생 형성된 사랑의 방향이 그대로 드러나는 결과라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일관된 설명입니다.

 

또 하나 인상적인 부분은, 강사가 가룟 유다를 예로 들며 지옥의 실재를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지옥 자체를 부정하거나 상징으로만 이해하려는 경향도 있지만, 강사는 예수께서 누구보다 분명하게 지옥을 말씀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이것 역시 성경 본문을 존중하려는 태도라는 점에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여기에서도 조금 다릅니다. 그는 지옥을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내시는 형벌의 장소라기보다, 끝까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만을 선택한 사람들이 스스로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공동체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누구도 지옥으로 보내기를 원하지 않으시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천국으로 이끄시려 합니다. 그러나 사랑 자체가 바뀌지 않으면, 천국의 분위기 자체가 오히려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되기 때문에 결국 자신과 같은 사랑을 가진 영들과 함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자유를 동시에 보존하려는 스베덴보리 신학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1부의 전반적인 내용을 정리하면, 이 강의는 성경을 진지하게 읽어야 한다는 권면,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 삶의 목적, 죽음 이후의 실재를 강하게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 자체는 오늘날 신앙이 단순한 문화나 습관으로 흐르기 쉬운 시대에 충분히 의미 있는 질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러한 주제들은 단순히 ‘천국과 지옥 중 어디로 갈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사랑과 의지가 어떻게 주님의 사랑으로 새롭게 형성되어 가고 있는가라는 훨씬 깊은 거듭남의 과정으로 확장됩니다. 결국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미래의 목적지를 두려워하는 삶이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서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점차 형성되어 가는 삶이라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강의는 점차 ‘인간은 왜 태어났는가’라는 질문에서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으로 옮겨갑니다. 강사는 사람이 단순히 육체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과 혼과 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 안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본성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몸은 늙고 쇠하지만 영혼은 사라지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영원을 향한 갈망을 심어 두셨기 때문에 사람은 본능적으로 영원한 것을 찾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전도서의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인간을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존재로 이해하려는 점에서는 충분히 공감할 만한 내용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인간을 영원한 존재로 설명합니다. 다만 그는 인간을 ‘영과 혼과 몸’이라는 삼분법으로 체계화하기보다, 자연계의 몸과 영계의 몸, 그리고 그 안에서 역사하는 생명이라는 관점으로 설명합니다. 그의 저작에서는 인간의 생명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며, 육체는 자연계에서 사용하는 가장 바깥 도구일 뿐입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생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육체를 벗는 것이며, 인간 자신은 곧바로 영적인 몸으로 살아갑니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은 육체가 아니라 사랑하고 생각하는 존재 자체이며, 그것이 바로 영원히 계속되는 인간입니다. 이런 점에서 강의와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서도 설명의 구조는 상당히 다릅니다.

 

강사는 이어 다윗과 예레미야의 말씀을 인용하며,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길을 가는 것 같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길을 보고 계신다고 설명합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인간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셨으며, 어느 길을 선택할지는 각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강조합니다. 강의 전반에 반복되는 핵심 단어가 바로 ‘’입니다. 사람의 길, 하나님의 길, 생명의 길, 사망의 길이 계속 대비됩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은 흥미로운 깊이를 더해 줍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은 단순한 이동 경로나 종교적 선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길은 ‘삶의 진리’, 곧 사람이 실제로 살아가는 방식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생명의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며, ‘사망의 길’은 거짓과 자기 사랑이 지배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길은 교단이나 종교의 이름이 아니라 사랑과 사고방식, 그리고 일상에서의 선택 전체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어느 교회에 다니느냐보다 어떤 사랑 속에서 살아가느냐가 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이후 강사는 예수님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설명을 이어갑니다. 절벽을 건너는 원숭이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인간은 스스로는 지옥을 넘어설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친히 길이 되어 주셨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그 길을 밟기 위해 태어났고, 진리를 배우기 위해 태어났으며, 결국 영생을 얻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강의 전체에서 가장 중심적인 메시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예수님을 유일한 생명의 근원으로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곧 길이다’라는 말씀을 조금 더 내적으로 해석합니다. 길은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과 진리 자체가 길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 곧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앙과 삶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안다고 해서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삶이 될 때 비로소 그 길 위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그의 여러 저작에서 반복되는 ‘선 없는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니다’라는 교리와도 연결됩니다.

 

강의는 또한 사람들이 대부분 육체를 위한 양식만을 구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말씀하셨다고 강조합니다. 현대인의 삶을 돌아보아도 이 말씀은 여전히 큰 울림을 줍니다. 우리는 대부분 먹고사는 문제, 성공과 건강, 재산과 인간관계에 대부분의 시간을 사용하지만, 영혼을 위한 양식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하기 쉽습니다. 강사가 이 점을 강하게 지적하는 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권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도 말씀을 영혼의 양식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말씀은 단순히 정보를 주는 책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과 연결되시는 살아 있는 통로입니다. 말씀을 읽을 때 그 안의 속뜻은 천사들에게는 천국의 언어로 이해되고, 사람에게는 거듭남을 위한 힘으로 작용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성경은 단순히 교리를 배우기 위한 책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사랑과 의지를 조금씩 변화시키는 살아 있는 수단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성경을 읽는 목적은 지식을 늘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더 깊이 결합되는 데 있습니다.

 

2부에서 가장 반복되는 주제는 결국 ‘’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그 길은 특정 교단으로 들어가는 길도 아니고, 특정 신앙 체험 하나를 얻는 길도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날마다 사람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거듭남의 길이며, 진리를 배우고 선을 실천하면서 사랑이 조금씩 변화되는 긴 여정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어느 날 갑자기 도착하는 목적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 점이 이번 강의와 스베덴보리 신학이 만나는 지점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의는 중반부에 들어서면서 점차 핵심 주제를 ‘거듭남’으로 집중시킵니다. 앞에서는 인간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설명했다면, 이제는 ‘그 길에 실제로 들어가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강사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를 중심으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는 말씀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그리고 거듭남은 단순히 종교생활을 오래 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받는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성경은 바로 그 거듭남을 위해 기록된 책이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 역시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거듭남’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입니다. 다만 양자의 차이는 ‘거듭남이 무엇인가’에 있습니다. 강의에서는 비교적 한 시점에 일어나는 결정적인 변화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이후의 삶도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전체적인 강조점은 ‘거듭난 순간’에 놓여 있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을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평생 계속되는 영적 성장의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사람 안의 자기 사랑이 조금씩 약해지고,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이 조금씩 자라나는 모든 과정이 거듭남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주님을 닮아가고 있는가가 훨씬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강사는 이어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로다’라는 요한복음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는 성경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영생을 얻게 하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 성경이 단순한 역사책이나 윤리책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위한 책이라는 점은 기독교 신앙 전체가 공유하는 핵심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다시 한층 깊은 설명을 덧붙입니다. 그는 말씀의 모든 부분이 주님을 증거한다는 데 동의하지만, 그것은 단지 예언이나 직접적인 메시아 언급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말씀 전체에는 주님의 영화(榮化)와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 담겨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어떤 본문은 역사처럼 보이고, 어떤 본문은 율법처럼 보이며, 어떤 본문은 예언처럼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모두 주님과 교회, 그리고 인간의 영적 변화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말씀의 아르카나’입니다.

 

강의는 이어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설명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거듭난 사람만이 그것을 볼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설명과 상당히 가까운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무엇보다도 ‘상태(state)로 설명합니다. 천국은 우선 마음속에서 시작됩니다. 사람이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일수록 그 사람 안에 이미 천국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죽은 후에도 자연스럽게 천국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는 말씀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영적 실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천국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역사하시며, 거듭남은 바로 그 천국이 사람 안에 형성되는 과정입니다.

 

한편 강의는 이 시점부터 구원의 기회를 상당히 긴박하게 제시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더 이상 기회가 없으며, 지금 결단하지 않으면 늦는다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며, 살아 있는 동안만이 선택의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청중에게 긴장감을 주는 설교 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전개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자연계에서의 삶이 영원을 준비하는 결정적인 기간이라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가 묘사하는 사후 세계는 조금 다릅니다. 사람은 육체를 떠난 직후 곧바로 자신의 내면이 드러나는 과정을 거치며, 그동안 겉으로만 억눌러 두었던 사랑이 점차 외적으로 나타납니다. 결국 천국과 지옥은 외부에서 내려지는 형벌보다, 자신이 평생 사랑한 것이 완전히 드러난 결과입니다. 다시 말해, 심판은 임의적인 판결이 아니라 자기 삶의 진실이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함께 설명하려는 스베덴보리 특유의 관점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강의 전체에서 ‘영생’이라는 단어가 매우 자주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강사는 인간이 태어난 목적을 한마디로 ‘영생을 얻기 위함’이라고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이 표현 자체는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영생을 단순히 끝없이 오래 사는 시간의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영생은 주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 들어와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영생은 죽은 후에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과 결합되는 순간부터 이미 시작됩니다. 천국은 끝없는 시간이 아니라 끝없는 사랑의 상태이며, 영생은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3부를 정리하면, 이번 강의는 거듭남과 영생을 중심으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매우 진지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보면, 거듭남은 단 한 번의 극적인 체험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 이어지는 영적 성장의 여정이며, 영생은 미래의 보상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주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서 역사하기 시작하는 현재의 실재입니다. 따라서 참된 신앙은 ‘나는 이미 거듭났는가’라는 확신에 머무르기보다, ‘오늘도 주님께서 내 안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 가고 계시는가’를 날마다 돌아보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강의 후반부에 이르면 설교의 무게중심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강사는 인간의 가장 큰 문제를 ‘성경을 등한히 여기는 것’으로 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셨음에도 사람들은 세상의 일에는 모든 관심을 기울이면서 정작 하나님의 말씀에는 무관심하다고 반복해서 지적합니다. 학교에서는 생존 경쟁과 성공하는 방법은 가르쳐도, 사람이 왜 태어났고 어디로 가는지는 가르쳐 주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만이 인생의 답을 가지고 있으며, 성경을 외면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비극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스베덴보리 역시 깊이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그는 저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틴 Arcana Coelestia, 영어 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참 그리스도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에서 말씀을 단순한 종교 서적이 아니라, 주님과 천국이 인간에게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로 설명합니다. 말씀이 거룩한 이유는 종이가 거룩해서도, 문자 자체가 신비해서도 아니라, 그 안에 주님의 신성이 가장 깊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멀리하는 것은 단순히 종교생활을 소홀히 하는 정도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스스로 멀어지는 일이 됩니다. 이 점에서는 강의와 스베덴보리의 시선이 상당히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차이도 나타납니다. 강의는 성경을 읽는 목적을 주로 ‘영생을 얻기 위한 길을 발견하는 것’에 둡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는 말씀을 읽는 목적을 조금 더 내면적으로 설명합니다. 말씀은 사람에게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책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와 이해를 동시에 변화시키는 살아 있는 도구입니다. 다시 말해, 말씀을 읽는 목적은 ‘천국에 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 이전에, ‘천국의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말씀은 인간의 사고를 교정하는 동시에 사랑을 변화시키며, 결국 사람 자체를 새롭게 만드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강사는 이어 좁은 문과 넓은 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설명합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좁은 문을 특정 교회나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오해한다고 말하며,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분명히 선을 긋습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앞선 강의보다 한층 균형 잡힌 설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좁은 문을 특정 조직이나 종파와 동일시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믿음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좁은 문’은 더욱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문은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 진리의 입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좁다는 것은 주님께서 일부러 어렵게 만들어 놓으셨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자기 확신을 내려놓는 일이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옳다고 여기고,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상태에서는 천국의 사랑이 들어올 공간이 없습니다. 따라서 좁은 문이란 결국 ‘옛 사람’을 내려놓는 문입니다. 이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자기 자신을 붙들고 있는 사람에게는 매우 좁게 느껴집니다.

 

강의는 또 하나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아버지의 유언장을 끝까지 듣지 않고 뛰쳐나간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아들을 사랑하여 엄청난 유산을 남겨 두었지만, 아들은 자신의 감정만 앞세우다가 가장 중요한 내용을 듣지 못하고, 모든 유산을 잃게 됩니다. 강사는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 인간을 위한 놀라운 축복을 모두 기록해 두셨는데, 사람들은 끝까지 읽지 않고, 끝까지 듣지 않고, 중간에 포기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비유는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은 성경 전체를 읽어 본 적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자신의 선입견만으로 판단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을 끝까지 읽고 묵상하는 삶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다만 그는 한 가지를 더 덧붙입니다. 말씀을 끝까지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말씀은 삶 속에서 실천될 때 비로소 열립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곳곳에서 그는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를 행하는 것’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이해만 하는 사람은 아직 바깥뜰에 머물러 있지만, 말씀을 실제 삶 속에서 사랑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비로소 말씀의 속뜻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말씀은 독서가 아니라 삶이 될 때 가장 깊이 이해됩니다.

 

이 강의를 들으며 한 가지 흥미롭게 느껴지는 점도 있습니다. 강사는 거의 한 시간 동안 계속해서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자신의 논지를 전개합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가 개인 경험이나 사회 이야기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과 비교하면, 본문 자체를 중심에 두려는 태도는 분명 장점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여기에도 한 가지 아쉬움이 남습니다. 수많은 성경 구절이 인용되지만, 각각의 본문이 왜 그런 순서로 기록되었는지, 그 안에 공통으로 흐르는 내적 의미는 무엇인지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말씀은 서로 연결된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인데, 문자적 교훈 중심으로 접근하면 그 유기적인 구조를 놓치기 쉽습니다.

 

4부를 정리하면, 이번 부분은 성경의 권위와 말씀의 중요성, 좁은 문,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삶을 매우 힘 있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보면, 이러한 권면은 더욱 풍성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말씀은 단지 구원의 조건을 알려 주는 안내서가 아니라, 사람 안에 천국을 형성하는 살아 있는 주님의 임재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정보를 얻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자신의 삶을 조금씩 새롭게 빚어 가도록 자신을 내어드리는 과정입니다. 결국 좁은 문은 어떤 교단의 문이 아니라, 매일 자신의 ‘proprium’을 내려놓고, 주님의 생명이 들어오도록 마음을 여는 문이라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할 것입니다.

 

 

강의의 마지막 부분은 지금까지 이어 온 모든 내용을 하나의 결론으로 모읍니다. 강사는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함이며, 성경은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주어진 책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그는 사람이 자신의 생각과 경험만 붙들고 살아가면, 결국 하나님의 길을 발견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낮추고,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받아들이면 비로소 왜 살아야 하는지, 왜 태어났는지를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마지막 기도 역시 ‘이번 기회에 거듭날 수 있도록’이라는 간절한 호소로 마무리됩니다. 설교 전체를 관통하는 흐름은 결국 ‘성경으로 돌아오라’, ‘예수께 돌아오라’, ‘영생을 준비하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먼저 긍정적으로 볼 부분은, 이 강의가 인간의 삶을 단순히 세상 성공이나 현실적 행복으로 축소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가 건강, 형통, 축복, 성공에 무게를 두는 반면, 이 강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 이후의 영원, 하나님의 심판, 거듭남, 말씀, 영생을 이야기합니다. 삶을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이러한 시도는 분명 성경이 우리에게 던지는 중요한 질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또한 성경을 직접 읽고 확인하라는 권면 역시, 사람보다 말씀을 기준으로 삼으려는 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이 강의를 전체적으로 바라보면, 몇 가지 중요한 한계도 함께 드러납니다.

 

첫 번째는 ‘구원’이 지나치게 한 시점의 체험으로 집중되는 경향입니다. 강의는 거듭남을 매우 중요하게 말하지만, 전체적인 흐름은 ‘거듭난 순간’에 상당한 비중을 둡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을 평생 계속되는 영적 변화로 설명합니다. 오늘 거듭났다고 해서 내일도 자동으로 같은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매일 자신의 악을 보고 버리며, 주님의 선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이어져야 합니다. 그는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곳곳에서 거듭남은 한순간이 아니라 인간 생애 전체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주님의 역사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참된 질문은 ‘나는 언제 거듭났는가’보다 ‘나는 지금도 거듭나고 있는가’입니다.

 

두 번째는 성경 이해가 거의 전적으로 문자적 의미에 머물러 있다는 점입니다. 강의는 수십 개의 성경 구절을 인용하지만, 대부분 교훈과 논증의 자료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말씀의 가장 깊은 생명은 문자 아래 감추어진 속뜻에 있습니다. 창세기의 선악과도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인간 의지의 변질을 말하며, 생명나무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애굽은 자연적 지식을, 광야는 영적 시험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응의 세계를 통해 보면 성경은 단편적인 교훈집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일관된 영적 드라마가 됩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심판이 다소 외적인 판결처럼 들린다는 점입니다. 강의에서는 죽음 이후 기회가 없으며, 심판을 받아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물론 자연계에서의 삶이 영원을 준비하는 결정적 시기라는 점에는 스베덴보리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는 심판을 하나님께서 임의로 판결을 내리시는 사건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 안에 평생 형성된 사랑이 더 이상 감추어질 수 없게 드러나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천국은 사랑의 결과이며, 지옥도 사랑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지옥으로 보내지 않으시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천국으로 이끄시려 하시지만, 사람이 끝까지 자기 사랑만 붙들면, 결국 자기와 같은 사랑을 가진 영들과 함께하게 됩니다. 심판은 외부의 판결이라기보다 내면의 진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큰 차이는 ‘예수를 믿는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강의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이라고 반복하여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신약성경의 핵심 선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믿는다’는 말을 단순히 교리적 동의나 확신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진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사랑하며, 실제 행동으로 살아낼 때, 비로소 믿음은 살아 있는 믿음이 됩니다. 그래서 그는 ‘신앙과 체어리티는 분리될 수 없다’고 끊임없이 말합니다. 신앙은 길을 보여 주고, 체어리티는 그 길을 실제로 걷게 합니다. 둘은 마치 빛과 열처럼 결코 나뉠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번 강의가 ‘구원파’ 계열에서 나온 설교라는 점도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의에는 성경에 대한 존중, 영생에 대한 진지한 강조, 회개와 거듭남의 필요성 등 귀 기울일 내용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시각에서는 특정한 구원의 확신이나 결정적인 체험 자체보다, 그 이후 평생에 걸쳐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거듭남의 과정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주님은 인간을 단번에 완성하시기보다,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사랑과 진리 안으로 조금씩 이끌어 가십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은 과거 어느 날의 체험을 기억하는 데 머물지 않고, 오늘도 자신을 살피며 주님의 인도를 따르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이 강의는 ‘영생을 준비하라’는 절박한 외침으로 끝납니다. 스베덴보리도 그 외침 자체는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그는 한마디를 덧붙일 것입니다. 영생은 죽은 뒤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금 이 순간 주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서 역사하기 시작할 때 시작됩니다. 천국은 미래에만 있는 장소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우리의 의지와 삶 속에 자리 잡는 만큼 이미 현재 안에서 형성되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궁극적인 목적도 단순히 ‘천국에 들어가기 위함’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천국의 사람이 되어 가기 위함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번 강의가 던지는 질문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더욱 깊고 넓은 영적 차원으로 확장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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