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53.심화

 

1. ‘61:4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사61:4) They shall build the wastes of eternity, they shall set up again the ancient desolations, and they shall renew the cities of the waste, the desolation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Isa. 61:4)

 

 

이 구절이 AC.153에 인용된 이유는, 인간 안에서 무너지고 황폐해진 영적 상태가 주님에 의해 다시 세워지고 회복되는 과정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153의 흐름은, 타락과 proprium 때문에 인간 안의 천적 질서와 퍼셉션이 무너졌지만, 주님께서 인간을 완전히 버려두지 않으시고, 다시 회복과 재건의 길을 여신다는 데로 이어집니다. 사61:4는 바로 그 ‘재건’의 이미지를 매우 강하게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이사야서 61장에서 ‘황폐한 곳’, ‘무너진 곳’, ‘대대로 무너져 있던 성읍’은 단순 전쟁 폐허를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황폐(desolation)는 진리와 선이 사라진 영적 상태를 뜻합니다. 곧, 인간 안에서 주님과의 연결이 끊어지고, 진리가 메말라 있으며, 사랑이 무너진 상태입니다. 이것은 바로 proprium 중심으로 기울어진 인간 상태와 연결됩니다.

 

특히 ‘성읍(cities)은 말씀에서 자주 교리적 구조와 진리 체계를 뜻합니다. 그래서 성읍이 황폐해졌다는 것은, 인간 안의 진리 질서 자체가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단순히 감정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정도가 아니라, 인간 안의 생각과 삶의 구조 전체가 왜곡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것을 ‘다시 세우신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regeneration)을 단순 도덕 개선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너진 도시를 다시 건축하는 것 같은 일입니다. 인간 안에 다시 질서가 세워지고, 사랑과 진리가 다시 연결되고, 삶 전체가 새 구조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황폐함을 다시 세운다’,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킨다’는 표현들이 사용됩니다.

 

또 ‘대대로 황폐하였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 일시적 실수가 아니라, 인간성과 교회 전체 안에 오랫동안 누적된 타락 상태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인류는 태고교회의 퍼셉션 상실 이후 점점 더 외적 인간 중심으로 기울어졌고, 결국 영적 황폐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그런 상태 속에서도 다시 회복의 길을 여십니다.

 

그래서 AC.153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proprium과 타락으로 무너진 인간 안의 영적 질서와 진리 구조가 주님에 의해 다시 재건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즉, 에덴의 상실이 마지막이 아니라, 거듭남을 통한 회복과 재건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 개인 심리 회복 정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참된 재건은 인간 안의 ‘도시’, 곧 생각과 사랑과 삶의 질서 전체가 다시 주님 중심으로 세워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61장은 단순 위로의 시가 아니라, 황폐해진 인간성과 교회를 다시 살리시는 주님의 구속과 거듭남의 약속으로 읽히는 것입니다.

 

 

 

AC.153, 심화 2, ‘렘31:4’

AC.153.심화 2. ‘렘31:4’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렘31:4) Yet still will I build thee, and th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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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3, 창2:22, 여자를 ‘만드시고’를 'build'라 하시는 이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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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2:22)

 

AC.153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built into a woman)라고는 하지만, 앞서 거듭남을 다룰 때처럼 여자가 창조(created), ‘형성(formed), 혹은 만들어졌다(made)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만들다(build)라는 말은 무너진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이런 의미로 말씀에서 사용되며, ‘만들다, 짓다(build)는 악에 대해, ‘다시 세우다(raise up)는 거짓에 대해, ‘새롭게 하다(renew)는 둘 다에 대해 사용됩니다. 이사야서에 이르기를, The rib is said to be “built into a woman,” but it is not said that the woman was “created,” or “formed,” or “made,” as before when treating of regeneration. The reason of this is that to “build” is to raise up that which has fallen; and in this sense it is used in the Word, where to “build” is predicated of evils; to “raise up,” of falsities; and to “renew,” of both; as in Isaiah: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61:4) They shall build the wastes of eternity, they shall set up again the ancient desolations, and they shall renew the cities of the waste, the desolation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Isa. 61:4)

 

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구절들과 다른 곳들에서 황폐(Wastes)는 악을 뜻하고, ‘황무(desolations)는 거짓을 뜻합니다. 그래서 쌓다(build)는 앞의 것에, ‘다시 일으키다(set up again)는 뒤의 것에 적용되며, 이러한 구분은 선지자들에 의해 다른 곳들에서도 주의 깊게 지켜집니다. 예레미야서에서도 이르기를, Wastes” in this and other passages signify evils; “desolations,” falsities; to “build” is applied to the former, to “set up again” to the latter, and this distinction is carefully observed in other places by the prophets, as where it is said in Jeremiah: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31:4) Yet still will I build thee, and thou shall be built, O virgin of Israel. (Jer. 31:4)



해설

 

AC.153은 ‘여자’를 가리켜 왜 ‘창조’나 ‘형성’, 혹은 ‘만들어졌다’고 하지 않고, 오직 ‘지어졌다(built into)라고만 표현되는지를 정밀하게 설명하는 단락입니다. 이는 단순한 어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상태 변화에 대한 ‘영적 진단의 정확성’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앞선 창조와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창조하다(create), ‘형성하다(form), ‘만들다(make)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생명이 없는 상태에서 생명이 주어지고, 질서가 처음으로 세워지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 삼고 있는 상태는 전혀 다릅니다. 이미 질서 안에 있었던 것이 ‘기울어지고 무너진 뒤의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새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십니다. 이것이 ‘짓다(build)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선지서에서의 용례를 끌어옵니다. ‘황폐’는 악을 뜻하고, ‘황무’는 거짓을 뜻합니다. 그리고 악에 대해서는 ‘짓다’가, 거짓에 대해서는 ‘다시 세우다’가 사용됩니다. 이는 악이 의지의 차원에서 무너진 상태이기 때문이며, 거짓은 이해의 차원에서 붕괴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단어 선택 하나하나가 ‘의지와 이해의 구분’, 그리고 악과 거짓의 차이를 반영합니다.

 

여자가 ‘지어졌다’는 것은, 인간의 own이 ‘이미 무너진 상태’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창조 이전의 공허함이 아니라, 한때 생명과 질서 안에 있었으나 자기 인도를 원함으로 인해 붕괴된 상태입니다. 주님은 이 own을 제거하지 않으시고, 그 위에 다시 질서를 세우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처음과 같은 상태는 아닙니다. 그래서 ‘창조’도 아니고, ‘형성’도 아니며, ‘만듦’도 아닙니다.

 

예레미야에서 ‘이스라엘의 처녀’를 다시 짓겠다고 한 말씀은 같은 원리를 보여줍니다. 이는 완전히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타락과 황폐를 겪은 뒤의 회복입니다. 그러므로 ‘짓다’라는 말은 언제나 ‘회복과 허락’, 그러나 동시에 ‘이전 상태와는 다른 긴장’을 동반합니다.

 

이 단락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균형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인간의 own을 허락하시되, 그것을 신적 질서 안에 다시 세우십니다. 그러나 그 질서는 더 이상 순전한 천적 질서가 아니라, 이후에 시험과 위험을 내포한 상태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여자’는 축복이면서 동시에 이후 서사의 모든 긴장의 출발점이 됩니다.

 

 

심화

 

1. ‘61:4

 

 

AC.153, 심화 1, ‘사61:4’

AC.153.심화 1. ‘사61:4’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사61:4) They shall buil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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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1:4

 

 

AC.153, 심화 2, ‘렘31:4’

AC.153.심화 2. ‘렘31:4’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렘31:4) Yet still will I build thee, and th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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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4, 창2:22, own에 대한 ‘가장 급진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단락’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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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2, 창2:22, ‘이 구절을 글자 그대로 읽으면 안 되는 이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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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2.심화

 

3. ‘속임의 실제 통로는 여자

 

여자(woman)가 사람의 own을 뜻한다는 사실은, 여자가 속임을 당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속이는 것은 언제나 그의 own, 곧 같은 말로 하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뱀은 3장에서 등장하지만, 속임의 실제 통로는 여자를 통해 열립니다. , 악은 언제나 own 안으로 초대될 때 비로소 힘을 갖습니다. 외부의 거짓이 침입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공명하는 own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AC.152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핵심은, 인간을 실제로 무너뜨리는 것은 바깥의 악 자체가 아니라, 그 악이 인간 안의 proprium과 결합할 때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속이는 것은 언제나 그의 own’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own,  proprium은 단순 자의식이 아니라, ‘내가 나로부터 산다’, ‘내가 중심이다’, ‘내 판단과 내 욕망이 기준이다’라고 느끼는 자기 중심 구조를 뜻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구조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기울어질 때, 인간은 진리를 왜곡해서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악을 단순 외부 침입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만약 악이 단지 외부 공격이라면, 인간은 거의 피해자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악이 힘을 얻는 이유를 인간 안의 proprium에서 찾습니다. 즉, 바깥에서 들어온 거짓이 인간 안의 어떤 욕망과 자기 사랑과 만나 그래, 바로 이거야 하고 공명할 때, 비로소 그것이 살아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에서 뱀은 먼저 등장하지만, 실제 대화와 수용의 중심은 여자입니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굉장히 깊습니다. 뱀은 감각적 추론과 외적 설득을 상징합니다. 즉, ‘정말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너도 스스로 판단할 수 있지 않느냐?’ 같은 외적 유혹입니다. 그런데 그 유혹 자체만으로는 아직 인간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인간 안의 proprium과 연결될 때입니다.

 

그래서 속임의 실제 통로는 여자였다’라는 말은, 악이 인간 안의 자기중심 구조를 통해 받아들여졌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거짓은 단순히 밖에서 강제로 주입되지 않습니다. 인간 안에서 그것을 원하고 좋아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무엇이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이 힘을 가집니다. 이것이 악은 언제나 own 안으로 초대될 때 힘을 갖는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굉장히 현실적인 인간 경험이기도 합니다. 같은 유혹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별 반응이 없고, 어떤 사람은 강하게 끌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인간 안의 proprium이 그것과 공명하기 때문입니다. 즉, 바깥 거짓이 안의 자기 사랑과 만날 때, 비로소 속임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AC.152는 타락을 단순 외부 사탄의 공격 사건’처럼 설명하지 않습니다. 타락은 인간 안의 proprium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굳어지기 시작할 때 일어나는 내적 사건입니다. 뱀은 제안할 수 있지만, 인간 안의 own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타락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여자’라는 proprium의 비극성과 존엄성이 동시에 드러납니다. 그것은 원래 주님께서 자유로운 사랑과 응답을 위해 vivify하신 자기감이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구조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돌기 시작하면, 가장 깊은 속임의 통로가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proprium은 단순 악이 아니라, 인간 자유 전체가 걸려 있는 가장 위험하면서도 필수적인 구조입니다.

 

 

 

AC.152, 창2:22, ‘이 구절을 글자 그대로 읽으면 안 되는 이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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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2, 심화 2, ‘왜 굳이 여자를 만들어 속게 하셨을까?’

AC.152.심화 2. ‘왜 굳이 여자를 만들어 속게 하셨을까?’ 그러면 주님으로 말미암아 vivified된 own조차 결국 속임의 통로가 되었다는 거잖아요? 이렇게 좀 허무하게 끝날 것이었으면 그냥 오리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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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2.심화

 

2. ‘왜 굳이 여자를 만들어 속게 하셨을까?’

 

그러면 주님으로 말미암아 vivified own조차 결국 속임의 통로가 되었다는 거잖아요? 이렇게 좀 허무하게 끝날 것이었으면 그냥 오리지날 own으로 놔두시지 굳이 여자로 만드셨어야 했나요? 처음 own으로 속는 거와 이 여자라는 나중 own으로 속는 거가 뭐가 다른가요?

 

 

바로 그 질문 때문에 창세기 2장과 3장이 그렇게 깊고도 두려운 본문인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느끼시는 ‘허무함’은 사실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결국 속을 거였다면 왜 굳이 vivify proprium을 허락하셨는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사실상 바로 그 지점을 오래 붙들고 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vivified proprium은 단순히 ‘속기 쉬운 개선판 자아’가 아니라, 사랑과 자유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였다는 점입니다. 만약 인간이 단지 최초의 오리지널 proprium, 곧 죽어 있는 자기성 상태에만 머물렀다면, 인간은 살아 있는 사랑의 존재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움직일 수는 있어도, 자기 삶처럼 느끼며 사랑하고 응답하는 존재는 되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사랑은 강제로 주입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반드시 자유 안에서만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자유는 반드시 ‘내가 스스로 원한다’는 자기감(as if from himself)을 필요로 합니다. 바로 여기서 vivified proprium이 등장합니다. 주님은 인간이 실제로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면서도, 마치 자기 스스로 사랑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십니다. 이것이 없으면 인간은 살아 있는 상호 관계 속 존재가 아니라, 거의 자동 기계 같은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의 죽은 proprium vivified proprium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죽은 proprium은 자기 자신 안에만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거기에는 진짜 천국적 사랑도, 자유로운 응답도 없습니다. 반면 vivified proprium은 주님의 생명이 통과하면서 인간 안에 살아 있는 자유와 사랑의 가능성을 열어 준 상태입니다. 즉, 인간이 ‘진짜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그 자유 때문에 타락 가능성도 함께 열린다는 점입니다. 사랑과 자유를 허락한다는 것은, 동시에 인간이 자기 자신 쪽으로 기울 가능성도 허락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위험을 모르셔서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완전히 아시면서도 허락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자유 없는 선은 살아 있는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의 ‘여자’는 단순 타락 장치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주님과 실제 사랑의 관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마지막 연결 구조입니다. 하지만 같은 구조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중심 삼기 시작할 때는 타락의 통로도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의 두려운 성격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own으로 속는 것’과 ‘vivified, 여자라는 own으로 속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처음 죽은 proprium은 원래부터 닫혀 있고 생명 없는 자기성입니다. 그러나 vivified proprium은 원래는 주님의 생명을 받아 자유롭게 사랑하도록 허락된 구조였습니다. 그래서 후자의 타락은 단순 기계적 오류가 아니라, 사랑과 자유 안에서 일어난 배반에 가깝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타락은 더 비극적이지만, 동시에 구속과 거듭남도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에게서 주님의 놀라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이 넘어질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자유를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넘어질 가능성까지 감수하시면서, 인간이 진짜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천국은 단순히 ‘실수할 수 없는 자동 순종 상태’가 아니라, 자유 안에서 주님을 사랑하도록 형성된 존재들의 공동체가 됩니다.

 

 

 

AC.152, 심화 3, ‘속임의 실제 통로는 여자’

AC.152.심화 3. ‘속임의 실제 통로는 여자’ ‘여자’(woman)가 사람의 own을 뜻한다는 사실은, 여자가 속임을 당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속이는 것은 언제나 그의 own, 곧 같은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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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2, 심화 1, ‘여자, 곧 vivified된 own이 속인다?’

AC.152.심화 1. ‘여자, 곧 vivified된 own이 속인다?’ 사람을 속이는 것은 언제나 그의 own, 곧 같은 말로 하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for nothing ever deceives man but his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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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2.심화

 

1. ‘여자,  vivified own이 속인다?’

 

사람을 속이는 것은 언제나 그의 own, 곧 같은 말로 하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for nothing ever deceives man but his own, or what is the same,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위 본문은 그러니까 여자라는 own이 속였다는 말인 것 같은데, 그러면 좀 이상한 게,  여자라는 own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own 아닌가요? 주님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vivified own이 속인다? 너무 이상한데요?

 

 

목사님께서 지금 느끼시는 이 이상함이 바로 AC.152 부근의 가장 어려운 지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 분명, 주님께서 인간에게 proprium을 허락하셨고, 심지어 그것을 vivify, 곧 살아 있게 하셨다고 말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을 속이는 것은 언제나 그의 own’이라고 하니, 마치 주님께서 살려 주신 proprium 자체가 곧 속임의 원인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구분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으로부터 vivified proprium’ 자체와, 인간이 그것을 자기 독립 중심으로 붙잡아 버린 상태를 구분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 열려 있는 proprium과 자기 자신에게 닫혀 버린 proprium은 같은 단어를 쓰지만 방향이 완전히 다릅니다.

 

처음 ‘여자’로 상징된 proprium은 아직 질서 안에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유롭게 사랑하고 응답할 수 있도록 허락된 ‘as if his own’, 곧 ‘마치 자기 것 같은’ 자기감이었습니다. 인간은 이 자기감이 없으면 살아 있는 존재처럼 느낄 수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허락하셨고, 심지어 생명 안에서 움직이도록 하셨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그 자기감을 ‘받는 그릇’으로 머무르지 않고, ‘독립 생명의 근원’으로 착각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바로 그 순간 proprium은 방향이 바뀝니다. 원래는 주님의 생명을 받아 흐르게 하던 구조였는데, 점점 자기 자신 안에서 생명을 가지려는 구조로 굳어집니다. 그리고 그 굳어진 방향이 바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입니다.

 

그래서 AC.152의 ‘사람을 속이는 것은 언제나 그의 own’이라는 말은, 단순히 ‘자기감 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받는 존재임을 잊고, 자기 자신을 생명의 중심으로 삼기 시작한 proprium’이 인간을 속인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아주 조심스럽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처음의 proprium은 ‘창문’ 같은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생명이 그 안을 통과하여 인간이 자기 삶처럼 느끼게 해 주는 구조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느 순간 그 창문을 거울처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즉, 더 이상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 자신만 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같은 proprium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후 계속 ‘천사에게도 proprium은 있지만, 그것은 주님께 열린 proprium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천사들도 자기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생명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믿지 않습니다. 반면 지옥적 proprium은 같은 자기감을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 귀속시킨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라는 own이 속였다’는 표현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자기감 자체가 본래 악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자기감이 점점 자기중심으로 굳어질 가능성을 안고 있었고, 실제로 인간이 그것을 자기 독립 생명처럼 붙잡기 시작했을 때 속임의 통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proprium 문제를 그렇게 무겁게 다루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를 위해 자기감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 자기감 때문에 가장 깊이 미혹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AC.152, 심화 2, ‘왜 굳이 여자를 만들어 속게 하셨을까?’

AC.152.심화 2. ‘왜 굳이 여자를 만들어 속게 하셨을까?’ 그러면 주님으로 말미암아 vivified된 own조차 결국 속임의 통로가 되었다는 거잖아요? 이렇게 좀 허무하게 끝날 것이었으면 그냥 오리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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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2, 창2:22, ‘이 구절을 글자 그대로 읽으면 안 되는 이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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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2:22)

 

AC.152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여자가 실제로 남자의 갈빗대에서 형성되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누구나 분별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지금까지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더 깊은 아르카나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자(woman)가 사람의 own을 뜻한다는 사실은, 여자가 속임을 당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속이는 것은 언제나 그의 own, 곧 같은 말로 하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It requires but little attention in anyone to discern that woman was not formed out of the rib of a man, and that deeper arcana are here implied than any person has heretofore been aware of. And that by the “woman” is signified man’s own may be known from the fact that it was the woman who was deceived; for nothing ever deceives man but his own, or what is the same,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3:1-6)



해설

 

AC.152는 창2의 서술을 ‘문자 그대로 읽는 독법을 단호히 차단하는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본문을 문자적으로 붙드는 태도 자체가 이미 이 본문이 경고하는 상태와 닮아 있음을 은근히 드러냅니다.

 

먼저 그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이라는 표현으로 독자를 부드럽게 이끕니다. 이는 고도의 학문이나 신비 체험을 요구하는 말이 아니라, ‘본문이 스스로 허락하는 분별’만 있어도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여자가 실제로 갈빗대에서 만들어졌다고 읽는다면, 이 본문이 담고 있는 깊은 층위는 전혀 열리지 않습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열쇠는 ‘여자가 속임을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을 근거로, 여자가 곧 ‘own’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실제로 속일 수 있는 것은 외부의 어떤 대상이나 존재가 아니라, ‘오직 자기 안에 있는 own’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은 언제나 ‘나 자신처럼 보이기’ 때문에, 외부의 거짓보다 훨씬 강력하게 작동합니다.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합니다. 뱀은 3장에서 등장하지만, 속임의 실제 통로는 여자를 통해 열립니다. 즉, 악은 언제나 ‘own 안으로 초대될 때’ 비로소 힘을 갖습니다. 외부의 거짓이 침입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공명하는 own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AC.152는 여자를 비난하거나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own이 얼마나 미묘하고 위험한지를 드러내는 ‘자기 인식의 교리’입니다. own은 주님에 의해 살아날 수 있고, 실제로 허락된 것이지만, 동시에 속임의 유일한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이 긴장이 바로 창2의 끝과 창3의 시작을 연결합니다.

 

이 단락은 또한 앞서 AC.150의 ‘깊은 잠’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자기로부터 산다고 여기는 상태, 곧 깨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잠들어 있는 상태에서, own은 가장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속임은 언제나 외부에서가 아니라, ‘가장 친숙한 내면에서 시작’됩니다.

 

다음 단락들에서는 이 own이 어떻게 ‘사랑의 대상’이 되고, ‘하나의 몸’으로 인식되며, 결합의 언어로 포장되는지가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지금 AC.152는 그 전환점 바로 앞에서, 독자의 눈을 한 번 더 깨어 있게 만드는 경고음과도 같습니다.

 

 

심화

 

1. ‘여자,vivifiedown이 속인다?’

 

 

AC.152, 심화 1, ‘여자, 곧 vivified된 own이 속인다?’

AC.152.심화 1. ‘여자, 곧 vivified된 own이 속인다?’ 사람을 속이는 것은 언제나 그의 own, 곧 같은 말로 하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for nothing ever deceives man but his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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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 굳이 여자를 만들어 속게 하셨을까?’

 

 

AC.152, 심화 2, ‘왜 굳이 여자를 만들어 속게 하셨을까?’

AC.152.심화 2. ‘왜 굳이 여자를 만들어 속게 하셨을까?’ 그러면 주님으로 말미암아 vivified된 own조차 결국 속임의 통로가 되었다는 거잖아요? 이렇게 좀 허무하게 끝날 것이었으면 그냥 오리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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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속임의 실제 통로는 여자

 

 

AC.152, 심화 3, ‘속임의 실제 통로는 여자’

AC.152.심화 3. ‘속임의 실제 통로는 여자’ ‘여자’(woman)가 사람의 own을 뜻한다는 사실은, 여자가 속임을 당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속이는 것은 언제나 그의 own, 곧 같은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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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3, 창2:22, 여자를 ‘만드시고’를 'build'라 하시는 이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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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1, 창2:22,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는 주님’(AC.151-155)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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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1.심화

 

1. 갈빗대라는 own 여자라는 own으로

 

그러니까 위 본문은 두 종류의 own, 즉 사람에게 두 종류의 own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처음 own,  갈빗대라는 own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나중 own,  여자라는 own이 되었다는 말이죠?

 

 

네, 바로 그 뜻에 가깝습니다. AC.151의 흐름은 ‘두 개의 서로 독립된 proprium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처음 허락된 proprium의 상태가 점차 다른 방향과 성격으로 전개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빗대’와 ‘여자’는 서로 완전히 다른 두 실체라기보다, 하나의 proprium이 변화, 전개된 두 단계로 이해하는 편이 훨씬 정확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처음의 proprium, 곧 ‘갈빗대’로 상징되는 것은 아직 비교적 수동적이고 미세한 상태입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자기처럼 느껴지는 것’이 생기기 시작하는 단계이지, 아직 완전히 독립 선언을 한 상태는 아닙니다. 그래서 갈빗대는 몸에서 떼어낸 뼈처럼, 여전히 원래 생명 질서와 연결된 상태 안에 있습니다. 즉, 주님께로부터 오는 생명 아래 있으면서도, 인간 안에 자기감의 기초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여자’로 표현될 때는, 그 proprium이 보다 적극적이고 자의식적인 구조로 나타납니다. 곧, 인간이 스스로 느끼고 판단하고 응답하는 방향성이 더 분명해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단순 보조 존재가 아니라, 인간 안에 형성된 proprium의 살아 있는 구조를 뜻하게 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변화가 곧바로 타락이나 악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AC 초기에서 스베덴보리는 계속 조심스럽게 설명합니다. 이 proprium은 처음에는 ‘as if his own’, 곧 ‘마치 자기 것 같은’ 것으로 허락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유롭게 사랑하고 응답하기 위해 반드시 자기 자신처럼 느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갈빗대가 여자 되는 과정은, 자기감 자체의 형성과 성장 과정이라고 보시는 편이 좋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정리하신 표현, 곧 ‘처음 own인 갈빗대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나중 own인 여자가 되었다’는 이해는 상당히 정확합니다. 다만 조금 더 섬세하게 말하면, ‘주님께서 허락하신 초기 proprium의 가능성이 점차 인간 안에서 더 살아 있는 자기성 구조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후 창세기 3장의 모든 긴장이 바로 여기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proprium 자체는 처음부터 악으로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proprium이 계속 주님께 열려 있느냐, 아니면 자기 자신을 독립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기 시작하느냐입니다. 즉, 갈빗대가 여자 되는 것 자체는 아직 질서 안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 proprium이 자기중심으로 굳어지기 시작할 때 비로소 타락의 방향이 열리게 됩니다.

 

 

 

AC.151, 창2:22,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는 주님’(AC.151-155)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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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2:22)

 

AC.151

 

만드시고(build)는 무너진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뜻입니다. ‘갈빗대(rib)는 아직 살아나지 않은 사람의 own을 뜻하며, ‘여자(woman)는 주님에 의해 살아난 사람의 own을 뜻합니다.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he brought her to the man)는 그 own이 그에게 허락되었음을 뜻합니다. 이 교회의 후손들은 그들의 조상들처럼 천적 인간이 되기를 원하지 않고, 자신의 own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own으로 기울어졌고, 그것이 그들에게 허락되었으나, 다만 주님에 의해 살아난 own이었기 때문에 여자(woman)라 하였고, 이후에는 아내(wife)라 하였습니다. By to “build” is signified to raise up what has fallen; by the “rib,” man’s own not vivified; by a “woman,” man’s own vivified by the Lord; by “he brought her to the man,” that what is his own was granted him. The posterity of this church did not wish, like their parents, to be a celestial man, but to be under their own self-guidance; and, thus inclining to their own, it was granted to them, but still an own vivified by the Lord, and therefore called a “woman,” and afterwards a “wife.”



해설

 

AC.151은 창세기 2장에서 ‘여자가 만들어지는 사건’을 가장 핵심적으로 요약해 주는 단락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을 타락의 시작이나 단순한 보조적 존재의 창조로 보지 않고, ‘own에 대한 주님의 허락과 질서 부여’로 해석합니다.

 

먼저 ‘만드시고’로 옮긴 ‘짓다’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이는 무에서 창조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운다’는 뜻입니다. 앞 단락들에서 인간은 자기의 own으로 기울어졌고, 그 결과 ‘갈빗대’, 곧 생명 없는 own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주님은 이 상태를 제거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것을 다시 세우십니다. 이것이 ‘build’입니다.

 

갈빗대’와 ‘여자’의 대비는 결정적입니다. 갈빗대는 살아 있지 않은 own이고, 여자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받은 own’입니다. 즉, 문제는 own 자체가 아니라, 그 own이 ‘어디에서 생명을 받느냐’에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이 own을 전혀 갖지 않도록 만들지 않으시고, own을 갖되 그것이 주님에게서 살아나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라는 표현은, 이 살아난 own이 인간에게 실제로 ‘주어졌음’을 뜻합니다. 이는 시험이나 잠정적 상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허락된 상태입니다. 특히 여기서 말하는 대상은 태고교회의 초기 조상들이 아니라, ‘그 후손들’입니다. 이들은 더 이상 천적 인간으로 머물기를 원하지 않았고, 스스로를 인도하고자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 요구를 즉시 파멸로 돌리지 않으십니다. own을 허락하시되, ‘여전히 주님에 의해 살아난 상태’로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이 own은 ‘여자’라 불리고, 더 나아가 ‘아내’라 불립니다. 이는 질서 안에 있는 결합, 곧 이후에 나타날 외적, 내적 결합의 토대를 마련합니다.

 

이 단락은 매우 미묘한 균형 위에 서 있습니다. 인간의 자기 인도 욕망은 이미 위험을 내포하지만, 주님은 그 욕망을 즉각 제거하지 않으시고, ‘생명으로 감싸서 허락’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이후 3장에서 드러날 긴장의 출발점입니다.

 

 

심화

 

1. 갈빗대라는 own여자라는 own으로

 

 

AC.151, 심화 1, ‘갈빗대’라는 own이 ‘여자’라는 own으로

AC.151.심화 1. ‘갈빗대’라는 own이 ‘여자’라는 own으로 그러니까 위 본문은 두 종류의 own, 즉 사람에게 두 종류의 own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처음 own, 즉 ‘갈빗대’라는 own이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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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2, 창2:22, ‘이 구절을 글자 그대로 읽으면 안 되는 이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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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0, 창2:21, ‘깊은 잠’, 자신의 own으로 산다 여기는 상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50 사람이 own 안에 있을 때, 곧 자신이 자기로부터 산다고 여길 때의 상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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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0.심화

 

5.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고백의 무게와 근본적인 중요성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라는 고백은 단순히 경건한 종교 문구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은 인간 존재 전체를 어디에 둘 것인가를 결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고백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겉으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는 나로부터 산다, 내 힘으로 산다(I live from myself)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생각도 내가 하고, 결정도 내가 하고, 사랑도 내가 하고, 움직임도 내가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그렇게 느껴져야 하지만, 실제(real truth)는 인간 안의 생명 자체가 순간순간 주님으로부터 흘러 들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삽니다’라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 도움으로 살아갑니다 정도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 생명의 근원은 제 자신 안에 있지 않습니다’라는 존재론적 고백입니다. 곧, ‘저는 닫힌 독립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받는 존재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이 차이는 엄청나게 큽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믿기 시작하는 순간, proprium이 굳어지고, 선과 진리조차 자기 영광을 위한 도구로 바뀌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고백의 무게는 단순 겸손 차원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입니다. ‘나는 내 힘으로 산다’는 감각 안에서는 결국 자기 사랑과 두려움과 경쟁이 중심이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스스로 생명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잃는 것이 곧 자기 붕괴처럼 느껴집니다. 반면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고백 안에서는,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닫힌 근원으로 보지 않게 됩니다. 생명이 계속 주님께로부터 온다고 보기 때문에, 자기 존재를 끝없이 움켜쥐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는, 스베덴보리가 evil falsity를 설명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는 인간이 악과 거짓을 단순히 접촉’한다고 말하지 않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appropriates한다고 말합니다. 즉, 자기 존재 중심 안으로 끌어들여 내 것’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문을 여는 것이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산다’는 믿음입니다. 반대로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진리 안에 서기 시작하면, 인간은 악과 거짓을 자기 존재의 본질로 동일시하지 않게 됩니다. 그것이 들어와도 이것이 진짜 생명의 근원은 아니다’라고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주 놀라운 점은, 주님께서 인간에게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처럼 느끼는 상태’를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균형입니다. 인간은 자유와 사랑을 위해 반드시 자기 삶처럼 느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자유 안에서 실제로는 내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진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proprium은 점점 주님께 열린 방향으로 재형성됩니다. 그래서 이 고백은 단순 사상 하나가 아니라, 거듭남 전체의 중심축이 됩니다.

 

결국 저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삽니다’라는 고백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생명의 주인으로 보지 않고, 주님의 생명을 받는 존재로 자신을 다시 자리 잡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에게서 천국이란 바로 이 진리가 사랑 안에서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천사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자기감이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가장 강한 생명감과 자유를 누리면서도, 그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기쁨으로 지각합니다. 그래서 이 한 문장은 단순 경건 표현이 아니라, proprium에서 천국 질서로 넘어가는 문과도 같은 고백입니다.

 

 

 

AC.150, 창2:21, ‘깊은 잠’, 자신의 own으로 산다 여기는 상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50 사람이 own 안에 있을 때, 곧 자신이 자기로부터 산다고 여길 때의 상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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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0, 심화 4, ‘For a number of years’

AC.150.심화 4. ‘For a number of years’ For a number of years I have been permitted in an especial manner to know how the case is with what is man’s own, and it has been granted to me to perceive clearly that I could think nothing from myself, but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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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0.심화

 

4. ‘For a number of years

 

For a number of years I have been permitted in an especial manner to know how the case is with what is man’s own, and it has been granted to me to perceive clearly that I could think nothing from myself, but that every idea of thought flows in, and sometimes I could perceive how and whence it flowed in.

 

저는 지금 너무 여러 날 이 own을 붙들고 있는 거 아닌가 했는데, 위 본문을 보니 심지어 여러 해가 나오네요. 세상에!  own 문제... 절대 간단하지도, 그리고 가벼운 게 아니었군요!

 

 

그렇습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며칠째 proprium을 붙들고 계신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AC를 제대로 읽고 계시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에 가깝습니다. 방금 인용하신 AC.150의 이 문장은, 사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이 문제를 여러 해 동안 특별히 배우고 체험했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proprium은 몇 줄 정의로 끝나는 교리 항목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왜 그렇게까지 오래 걸리느냐 하면, proprium 문제는 단순히 교리적으로 이해’하는 차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거의 본능적으로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판단한다’, ‘내가 산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심지어 생각의 흐름 자체도 자기 안에서 자생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흘러 들어온다(flows in)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깊은 자기 이해를 뒤집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때로는 어디서 어떻게 흘러 들어오는지도 지각하도록 허락되었다’고 말하는 부분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는 단순 철학 사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영적 경험 속에서 인간 생각과 애정의 유입 구조를 관찰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대부분은 그런 식으로 직접 지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체험을 통해, 인간이 자기 안에서 독립적으로 생명을 만들어 내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아주 깊이 배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proprium 문제가 왜 그렇게 무거운지가 드러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느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기 생각, 자기 감정, 자기 욕망을 전부 진짜 나 자신’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아니다, 인간은 계속 영향을 받고 있으며,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흐르고 있고, 악과 거짓 역시 지옥적 흐름을 통해 들어온다. 그런데 인간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붙잡고 사랑할 때 비로소 proprium이 굳어진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 문제는 단순 심리학이 아닙니다. 자유, 책임, 유입(influx), 천국과 지옥, 사랑, 거듭남, 심지어 인간 정체성 전체가 여기와 연결됩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own 하나가 이렇게까지 큰 문제였나?’ 하고 놀라시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사실 AC 초반부 전체가 거의 이 문제를 향해 천천히 독자를 끌고 가고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닙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인간의 자기감 자체를 제거하자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인간은 계속 마치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처럼 느껴야 합니다. 문제는 그것을 절대 독립 생명’으로 믿느냐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자기감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자기감의 방향을 바꾸는 일입니다. 자기 자신을 닫힌 근원으로 여기던 상태에서, 주님으로부터 계속 생명을 받는 존재로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지금 proprium을 오래 붙들고 계신 것은, 결코 곁가지 문제에 매달리고 계신 게 아닙니다. 사실은 스베덴보리 인간론과 구원론의 심장부 가까이에 계속 서 계신 것입니다.

 

 

 

AC.150, 심화 5,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

AC.150.심화 5.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고백의 무게와 근본적인 중요성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라는 고백은 단순히 경건한 종교 문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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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0, 심화 3, ‘therefore in what is false,’

AC.150.심화 3. ‘therefore in what is false,’ The man who supposes that he lives from himself is therefore in what is false, and by believing that he lives from himself appropriates to himself everything evil and false, which he would never do if 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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