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24에서 라멕은 가인을 위한 벌이 일곱 배라면 자신을 위한 벌은 일흔일곱 배라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가인보다 라멕에게 훨씬 더 큰 보복이 가해진다는 선언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독자는 ‘주님께서라멕에게일흔일곱배로복수하신다는뜻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AC.432는 이 표현을 ‘정죄’라고 풀이합니다. 이 짧은 설명을 이해하려면 문자적 표현과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속뜻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이번 번호는 일흔일곱이라는 수를 실제 형벌의 횟수나 배율로 계산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키고,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으며, 그로 인해 정죄가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정죄가 곧 ‘일흔일곱배의보복’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에서 이 표현의 핵심은 정확한 수량이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신성모독과 그에 따른 정죄입니다.
또한 ‘보복’이라는 단어만을 근거로 주님께서 인간처럼 원한을 품고 복수하신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432가 직접 밝히는 속뜻은 정죄입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주님의 분노나 정죄의 작용에 관한 교리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보복’이라는 표현이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관한 더 넓은 설명은 관련 번호들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보복을 정죄라고 풀이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붙드는 것이 우선입니다.
가인의 일곱 배와 라멕의 일흔일곱 배를 비교할 때에도 주의가 필요합니다. 앞의 AC.396에서는 가인의 표가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보존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라멕이 그 신앙을 소멸시켰을 뿐 아니라 체어리티까지 소멸시킨 상태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두 표현을 함께 읽으면 가인에게서 다룬 신앙의 문제와 라멕에게서 드러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를 단순히 숫자만으로 계산하여 영적 상태의 정확한 크기를 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을 읽는 독자가 또 하나 조심해야 할 것은 ‘정죄’라는 표현을 곧바로 자신의 현재 상태에 적용하는 일입니다. 신앙에 관한 의문이 생기거나 체어리티를 실천하지 못한 일이 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자신이 일흔일곱 배의 보복을 받는 상태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이 나타내는 황폐와 신성모독의 상태를 풀이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신앙과 체어리티의 중요성을 일깨우지만, 각 개인의 최종적인 상태를 판단하도록 주어진 설명은 아닙니다.
결국 ‘일흔일곱배의보복’은 AC.432에서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데 따른 정죄를 나타냅니다. 이 표현을 실제 보복의 횟수로 계산하거나 주님의 인간적인 분노로 곧바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의 말이 가리키는 영적 상태를 밝히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AC.432심화2)
AC.432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 가장 낯설게 다가올 수 있는 말은 ‘신성모독’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성모독을 하나님을 욕하거나 거룩한 것을 조롱하는 말과 행동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키는 일을 신성모독이라고 부릅니다. 더 나아가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키는 일을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신성모독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 것일까요?
먼저 이번 번호의 대상은 교회 안에 있던 신앙과 체어리티입니다. 앞의 AC.429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신앙을,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라멕이 이 둘을 죽였다는 말은 그들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신성모독은 단순히 입으로 거룩한 것을 비난하는 행위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있던 거룩한 것들이 소멸되는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려면 ‘신앙을소멸시켰다’는 말과 ‘신앙이약해졌다’는 말을 구별해야 합니다.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질문하거나, 의심과 혼란을 겪거나, 자신의 신앙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일이 곧 이번 번호의 신성모독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이 나타내는 황폐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사람을죽였다’고 한 표현이 신앙의 소멸을 뜻한다고 밝힌 것도 같은 문맥입니다. 그러므로 독자가 자신의 일시적인 연약함을 곧바로 신성모독으로 판단하는 것은 이번 번호의 설명을 넘어섭니다.
그렇다면 체어리티의 소멸은 왜 ‘훨씬더큰’ 신성모독일까요? AC.432는 그 이유를 길게 논증하지 않지만, ‘신앙을통해태어나야할체어리티’라는 표현으로 중요한 관계를 보여 줍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무관하게 놓여 있는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소멸된 데 이어,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신앙의 소멸이 그 신앙과 연결된 사랑의 소멸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를 단순히 착한 일을 많이 하는 것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AC.430에서 스베덴보리는 참된 체어리티가 참된 순진무구와 분리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라멕이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에는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그것을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앞에서 밝혀 온 체어리티의 의미를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신성모독’이라는 말이 등장한다고 해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영적 상태를 쉽게 판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교리에 동의하지 않거나 사랑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가 라멕처럼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AC.432는 말씀의 속뜻에서 라멕이 나타내는 상태를 설명하는 번호입니다. 특정한 사람의 내면과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정하는 기준으로 이 한 번호를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결국 AC.432에서 신성모독은 교회 안에 있던 신앙과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가 소멸된 상태와 관련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을 소멸시키는 일을 신성모독이라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키는 일을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말씀은 신앙을 단지 보존해야 할 지식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그 신앙과 연결된 체어리티까지 함께 살펴보게 합니다. (AC.432심화1)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창4:24)
AC.432
이말씀은그들이‘가인’(Cain)이나타내는신앙을소멸시켰다는뜻입니다.그신앙에폭력을가하는것은신성모독이었습니다.동시에그들은신앙을통해태어나야할체어리티까지소멸시켰는데,이는훨씬더큰신성모독이었습니다.이로인해정죄가있었으며,이것이곧‘일흔일곱배의보복’(seventyandsevenfoldavengement)입니다. These words signify that they had extinguished the faith meant by “Cain,” to do violence to which was sacrilege, and at the same time had extinguished the charity which should be born through faith, a far greater sacrilege, and that for this there was condemnation, that is, a “seventyandsevenfoldavengement.”
해설
AC.432는 창4:24의 ‘가인을위하여는벌이칠배일진대라멕을위하여는벌이칠십칠배이리로다’라는 말씀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앞의 AC.427-431에서 스베덴보리는 라멕이 죽였다고 말한 ‘사람’이 신앙을,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상처’와 ‘타박상’은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이 설명들을 하나로 모아, 라멕의 말에 담긴 신성모독과 정죄의 의미를 밝힙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가인은 단순히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신앙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다는 것은 교회 안에 있던 신앙이 파괴되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신앙이 단지 인간이 만들어 낸 의견이 아니라 교회의 거룩한 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라멕의 상태는 신앙의 소멸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신앙을통해태어나야할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다고 말합니다. 앞의 AC.429에서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고 한 이유가 여기서 다시 중요해집니다. 라멕이 ‘사람’과 ‘어린아이’를 함께 죽였다는 것은 신앙뿐 아니라 그 신앙에서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후자를 ‘훨씬더큰신성모독’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독자가 주의할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단순히 지식과 행동의 두 항목으로 나누지 않는 것입니다. AC.432에서 문제 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신앙에 관한 내용을 조금 잘못 이해했거나 이웃을 충분히 돕지 못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 안의 거룩한 것인 신앙이 소멸되고,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된 상태를 말합니다. 앞의 번호들에서 ‘더이상성한곳이없다’고 설명한 황폐가 이번 번호에서는 신성모독과 정죄라는 표현으로 이어집니다.
‘훨씬더큰신성모독’이라는 말도 이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을 소멸시키는 일 자체가 신성모독이지만, 체어리티까지 소멸시키는 것은 그보다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신앙과 무관한 별개의 덕목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보여 줍니다. 신앙이 보존되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할 때,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를 함께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번 번호의 한 문장만으로 모든 종류의 죄와 신성모독에 대한 일반적인 서열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소멸로 인해 ‘정죄’가 있었으며, 그것이 ‘일흔일곱배의보복’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일흔일곱 배를 가인의 일곱 배보다 정확히 열한 배 무거운 형벌로 계산해서는 안 됩니다. AC.432가 직접 밝히는 것은 이 표현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데 따른 정죄를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보복’이라는 말만으로 주님께서 인간처럼 분노하여 복수하신다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이번 번호는 그 표현의 속뜻을 정죄라고 밝히지만, 정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관한 모든 설명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결국 AC.432는 라멕의 고백에 담긴 황폐의 의미를 한층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그들은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고,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각각 신성모독과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설명하며, 그 결과인 정죄를 ‘일흔일곱배의보복’이라고 풀이합니다. 따라서 라멕의 말은 단순히 더 큰 보복을 요구하는 선언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된 교회의 상태를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AC.432해설)
사1:6은 읽는 사람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말씀입니다. ‘발바닥에서머리까지성한곳이없다’는 표현은 몸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온몸이 상한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어 상처와 타박상과 새로 생긴 종기가 등장하고, 그것들을 짜내거나 싸매거나 기름으로 부드럽게 하지도 않았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AC.431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여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설명합니다. 독자에게 중요한 질문은 이 신체적 상처의 묘사가 라멕의 영적 상태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연결을 이해하려면 먼저 라멕의 말을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라멕은 ‘한사람’을 죽였고 ‘어린아이’를 죽였다고 말합니다. AC.429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신앙을,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뜻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AC.431에서는 사람에게 연결된 상처가 신앙의 황폐를, 어린아이에게 연결된 타박상이 체어리티의 황폐를 뜻한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라멕의 말에서 상처는 단순히 살인을 저지른 뒤 자신이 입은 육체적 부상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된 상태를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이사야의 말씀은 이러한 상태를 더 넓은 이미지로 보여 줍니다. 상처가 한 곳에만 있다면 몸의 다른 부분은 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읽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발바닥과 머리의 개별 상응을 새로 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몸 전체에 성한 곳이 없다는 묘사가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얼마나 심각한 상태로 나타내는지 살펴보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상처’, ‘타박상’, ‘종기’를 구별한다는 사실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상처를 신앙에, 타박상을 체어리티에, 종기를 그 둘 모두에 연결합니다. 우리 눈에는 모두 몸이 상한 모습을 나타내는 비슷한 말로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표현들이 저마다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이 구별을 알면 이사야의 말씀이 단순히 고통스러운 장면을 반복해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함께 나타내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한곳이없다’는 말을 읽는 우리는 무엇을 조심해야 할까요? 우선 이것을 자신이 겪는 모든 신앙의 흔들림에 그대로 적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답답하거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일을 후회하거나,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는 경험이 곧 라멕의 황폐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AC.431은 라멕이 나타내는 상태와 그 상태를 설명하는 말씀의 표현을 풀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연약함을 이 본문만으로 최종 판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또한 이사야가 상처를 싸매거나 기름으로 부드럽게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고 해서, AC.431이 그 상태의 회복 가능성에 대한 모든 것을 설명했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번호에서 상처와 타박상과 종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밝힙니다. 회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혹은 특정한 상태가 회복될 수 있는지에 관한 판단은 이번 번호의 직접적인 설명과 구별해야 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황폐의 심각성을 충분히 받아들이되, 본문이 말하지 않은 결론까지 덧붙이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발바닥에서머리까지성한곳이없다’는 말씀은 AC.431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보여 주는 강렬한 이미지입니다. 라멕의 ‘상처’와 ‘타박상’은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나타내며, 이사야의 ‘종기’는 그 둘 모두에 관해 쓰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따로 떼어 놓은 채 교회의 온전함을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살펴보게 됩니다. (AC.431심화1)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431
‘상처’(wound)와‘타박상’(bruise)이더이상성한곳이없음을뜻하고,‘상처’(wound)는신앙이황폐해졌음을,‘타박상’(bruise)은체어리티가황폐해졌음을뜻한다는사실은‘상처’가‘사람’(man)에관해,‘타박상’이‘어린아이’(littleone)에관해쓰였다는점에서분명하게드러납니다. 신앙의황폐와체어리티의황폐는이사야에서도같은표현들로묘사됩니다. That by a “wound” and a “bruise” is signified that there was soundness no longer, by a “wound” that faith was desolated, and by a “bruise” that charity was devastated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wound” is predicated of a “man,” and “bruise” of a “littleone.” The desolation of faith and the vastation of charity are described in the same terms in Isaiah:
이말씀에서‘상처’(wound)는황폐해진신앙에관해,‘타박상’(bruise)은황폐해진체어리티에관해,‘종기’(sore)는그둘모두에관해쓰였습니다. In this passage “wound” is predicated of faith desolated, “bruise” of charity devastated, and “sore” of both.
해설
AC.431은 라멕이 ‘내가한사람을죽여내게상처를입혔고,어린아이를죽여내게해를입혔다’고 한 말의 마지막 부분을 설명합니다. 앞의 AC.429에서는 ‘사람’이 신앙을,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뜻한다는 근거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그 두 표현에 각각 연결된 ‘상처’와 ‘타박상’의 의미를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표현이 더 이상 성한 곳이 없는 상태를 나타내며,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어 하나만 떼어 놓고 의미를 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상처’가 ‘사람’에 관해 쓰였고, ‘타박상’이 ‘어린아이’에 관해 쓰였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앞에서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나타낸다고 밝혔으므로, 그들에게 연결된 상처와 타박상도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는 말씀의 속뜻을 이해할 때 개별 표현뿐 아니라 표현들 사이의 관계도 함께 살펴야 함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해석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1:6을 인용합니다. 이사야는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고 상처와 타박상과 새로 생긴 종기뿐인 모습을 묘사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온몸이 상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가 묘사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인용은 라멕의 말에 나오는 상처와 타박상이 단순한 육체적 부상을 넘어 영적 상태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근거가 됩니다.
여기서 세 표현은 서로 구별됩니다. ‘상처’는 황폐해진 신앙을, ‘타박상’은 황폐해진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종기’는 신앙과 체어리티 둘 모두에 관해 쓰입니다. 이처럼 스베덴보리는 비슷해 보이는 상처의 표현들을 하나의 뜻으로 뭉뚱그리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서로 다른 표현이 사용된 데에는 그에 상응하는 의미의 구별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세 상처가 실제로 어떤 순서로 발생하는지, 각각 어떤 구체적인 악이나 거짓에 대응하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발바닥에서머리까지성한곳이없다’는 이사야의 표현도 중요합니다. 이 말씀은 상처가 한 부분에만 있다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에 성한 곳이 없다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인용하면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라멕의 고백을 단순히 신앙의 일부가 손상되었거나 체어리티가 잠시 약해진 상태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앞의 AC.427에서도 그는 상처와 타박상이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음을 뜻한다고 밝혔습니다.
이사야의 말씀은 상처들을 ‘짜내지도,싸매지도,기름으로부드럽게하지도않았다’고 이어집니다. 이러한 표현은 상처가 돌봄을 받지 못한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다만 AC.431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풀이하는 것은 상처와 타박상과 종기의 의미입니다. 짜내는 일이나 싸매는 일, 기름을 바르는 일의 개별 속뜻까지 이 번호에서 확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표현들을 곧바로 특정한 회복 과정에 일대일로 대응시키기보다, 우선 이사야가 묘사하는 상처의 심각성을 함께 읽는 것이 원문에 충실합니다.
이번 번호를 읽을 때 ‘황폐’와 일상적인 영적 연약함을 구별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누구나 자신의 신앙이 흔들리거나 이웃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431에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것은 라멕이 나타내는 황폐, 곧 신앙과 체어리티에 더 이상 성한 곳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 말씀을 자신의 모든 부족함에 즉시 적용하여 회복할 수 없는 상태라고 단정하는 것은 본문의 설명을 넘어섭니다. 특히 AC.431은 황폐의 의미를 밝히는 번호이지, 어떤 개인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정하는 번호가 아닙니다.
결국 AC.431은 라멕의 말에 등장하는 ‘상처’와 ‘타박상’이 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뜻하는지 설명합니다. 사람과 어린아이의 의미를 바탕으로 두 상처를 구별하고, 사1:6에서 같은 표현들이 사용된 사실을 통해 그 해석을 확인합니다. 이사야의 ‘성한곳이없다’는 말씀은 라멕이 나타내는 황폐의 심각성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신앙과 체어리티가 교회의 영적 온전함과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보게 됩니다. (AC.431해설)
AC.430의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사9:6을 인용합니다. 이사야는 ‘한아기가우리에게났고한아들을우리에게주신바되었다’고 말하며, 그분을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아이’라고 불리시는 이유를 주님이 순진무구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말씀은 앞에서 살펴본 어린아이의 의미를 주님 자신에게 연결합니다.
우리가 ‘아이’라는 말을 들을 때 흔히 떠올리는 것은 작고 연약하며 아직 자라는 중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아이로 불리시는 이유를 미숙함이나 부족함에서 찾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이 순진무구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주님을 ‘아이’라고 부르는 표현을 이해하려면, 어린아이의 외적인 모습뿐 아니라 그 표현이 나타내는 순진무구와 사랑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이 점은 같은 구절에 나오는 주님의 이름들을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아이로 불리시는 분이 동시에 기묘자와 모사, 하나님과 용사, 영존하시는 아버지와 평강의 왕이라고 불리십니다. 그러므로 ‘아이’라는 표현이 주님의 신적 능력이나 지혜를 낮추는 말일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주님께서 순진무구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시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참된 순진무구와 참된 체어리티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여러 말씀으로 확인했습니다. 마지막에 주님 자신을 ‘아이’라고 부르는 말씀을 인용한 것은 이러한 의미를 주님께 연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순진무구와 사랑을 설명하는 표현이 주님 자신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이 이번 번호의 마지막 논거가 됩니다.
이것은 눅18:15, 17을 읽을 때에도 도움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AC.430의 흐름에서 이 말씀을 읽으면,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를 단순히 나이가 어리거나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어린아이의 속뜻은 순진무구와 체어리티이며, 주님은 순진무구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며 주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저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그리워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번 번호가 밝히는 순진무구와 사랑의 의미를 주님 자신에게 연결하여 생각하는 일입니다. 다만 AC.430은 주님의 탄생과 신성에 관한 모든 교리를 설명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여기서는 주님이 ‘아이’라고 불리시는 이유를 순진무구 자체와 사랑 자체라는 두 표현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결국 AC.430의 마지막 인용은 어린아이의 속뜻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결론을 제시합니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나타내며, 주님께서는 순진무구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아이’라고 불리십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한아기’에 관한 말씀은 어린아이의 속뜻이 단순한 연령이나 외적인 모습에 머물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AC.430심화3)
AC.430에서 스베덴보리는 순진무구에 세 단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말씀에서는 그 단계들을 ‘젖먹이’, ‘유아’, ‘어린아이’라는 말로 구별한다고 설명합니다. 독자에게는 이 구별이 낯설 수 있습니다. 세 표현 모두 나이가 어린 존재를 가리키므로, 단순히 같은 뜻을 반복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들이 사랑의 서로 다른 모습을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먼저 젖먹이의 사랑은 어머니나 유모를 향한 부드러운 사랑에 비유됩니다. 젖먹이는 자신을 돌보는 이에게 의지하며 사랑을 받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관계를 통해 사랑의 한 단계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젖먹이가 어떤 교리를 알고 있거나 자신의 사랑을 말로 설명할 수 있느냐가 아닙니다. 어머니나 유모와 맺는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부드러운 사랑의 모습입니다.
유아의 사랑은 부모를 향한 사랑에 비유됩니다. 젖먹이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가까운 관계 안에서 나타나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를 별도의 단계로 구별합니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단계에서는 자신을 가르치는 사람을 향한 체어리티를 말합니다. 세 표현을 나란히 놓으면, 스베덴보리가 사랑을 추상적인 감정 하나로만 설명하지 않고 구체적인 관계를 통해 구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어린아이가가르치는사람을향해품는체어리티’라는 표현을 단순히 선생님의 말을 무조건 따르는 태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430은 교사에 대한 복종을 체어리티의 정의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린아이와 자신을 가르치는 사람의 관계를 사랑의 한 단계를 설명하는 비유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관계를 통해 어린아이가 나타내는 체어리티의 의미를 생각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세 단계를 실제 나이에 따라 누구나 반드시 거쳐야 하는 영적 성장표로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AC.430의 직접적인 설명은 말씀에서 젖먹이와 유아와 어린아이가 순진무구와 사랑의 세 단계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성인의 영적 상태를 실제 나이와 일대일로 대응시키거나, 한 단계에 있는 사람이 다른 단계에 있는 사람보다 반드시 더 거룩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이번 번호의 설명을 넘어섭니다.
이 구별은 렘44:7을 이해할 때 도움이 됩니다. 그 말씀에서는 ‘남자와여자’뿐 아니라 ‘유아와젖먹이’까지 끊어 버려 남은 것이 없게 하려느냐고 묻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남자와 여자가 이해력과 의지, 곧 진리와 선을 나타내며, 유아와 젖먹이는 사랑의 첫 단계들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진리와 선에 관한 표현뿐 아니라 사랑의 첫 단계들에 관한 표현까지 함께 담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도 바로 그 구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젖먹이와 유아와 어린아이는 말씀에서 단순히 같은 연령대를 반복하여 가리키는 표현이 아닙니다. AC.430에서 이들은 순진무구와 사랑의 세 단계를 나타내며, 어린아이는 특별히 체어리티와 연결됩니다. 이러한 구별을 알면 말씀에 등장하는 작은 표현 하나에도 서로 다른 영적 의미가 담겨 있다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430심화2)
우리는 ‘순진무구’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어린아이의 해맑은 표정이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AC.430에서 스베덴보리는 순진무구를 단순히 나이가 어리거나 경험이 적은 상태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참된 순진무구는 체어리티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참된 체어리티도 순진무구 없이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독자가 이번 번호를 이해하려면 먼저 이 두 가지가 왜 함께 언급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 경험이 적고 남을 쉽게 믿는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그에게 참된 체어리티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을 돕는 행동을 많이 한다고 해서, 그 행동의 내면까지 저절로 순진무구하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도움을 주면서도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려 할 수 있고, 상대방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는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겉모습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생각하도록 돕습니다.
AC.430은 이 두 가지의 관계를 ‘참된’ 순진무구와 ‘참된’ 체어리티라는 표현으로 밝힙니다. 순진무구가 참된 사랑과 분리될 수 없고, 체어리티도 순진무구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순진무구를 단순한 무지나 무력함으로, 체어리티를 단순한 외적 선행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둘의 구체적인 내적 구조를 모두 설명하지는 않지만, 어느 한쪽만을 떼어 내어 참된 영적 상태라고 부를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 관계를 생각하면 주님께서 어린아이들을 가까이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더 깊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른이 어린아이처럼 지식과 판단력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어린아이를 통해 밝히는 것은 순진무구와 체어리티에 관한 영적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이해하면서도,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신의 마음이 사랑과 분리되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제 라멕의 고백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AC.429에서 라멕이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었습니다. AC.430은 그 어린아이가 순진무구도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그렇다면 라멕의 황폐를 이해할 때 체어리티의 소멸만 따로 떼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체어리티와 참된 순진무구는 서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라멕이 나타내는 상태가 왜 심각한지 이해하는 데 이번 번호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읽으며 자신에게 순진무구가 조금이라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순간, 곧바로 자신이 라멕처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고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30은 순진무구와 체어리티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으며, 앞의 번호들은 라멕이 나타내는 황폐의 상태를 다루고 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는 일과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된 상태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AC.430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참된 순진무구와 참된 체어리티가 서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린아이의 속뜻을 이해하려면 그저 순수하고 해맑은 모습을 떠올리는 데 머물지 않고, 사랑과 연결된 순진무구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관계를 이해할 때 라멕이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이 왜 체어리티의 소멸을 나타내는지도 더 분명해집니다. (AC.430심화1)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430
말씀에서‘어린것’(alittleone),곧‘어린아이’(littlechild)는순진무구를뜻하며,체어리티도뜻합니다.참된순진무구는체어리티없이존재할수없고,참된체어리티도순진무구없이존재할수없기때문입니다. 순진무구에는세단계가있으며,말씀에서는이를‘젖먹이들’(sucklings),‘유아들’(infants),‘어린아이들’(littlechildren)이라는말로구별합니다.참된사랑과체어리티없이는참된순진무구도없으므로,‘젖먹이들’(sucklings),‘유아들’(infants),‘어린아이들’(littlechildren)은사랑의세단계도뜻합니다.곧젖먹이가어머니나유모를향해품는사랑과같은부드러운사랑,유아가부모를향해품는사랑과같은사랑,그리고어린아이가자신을가르치는사람을향해품는사랑과같은체어리티입니다.그래서이사야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A “littleone,” or “littlechild,” in the Word, signifies innocence, and also charity, for true innocence cannot exist without charity, nor true charity without innocence. There are three degrees of innocence, distinguished in the Word by the terms “sucklings,” “infants,” and “littlechildren”; and as there is no true innocence without true love and charity, therefore also by “sucklings,” “infants,” and “littlechildren” are signified the three degrees of love: namely, tender love, like that of a suckling toward its mother or nurse; love like that of an infant toward its parents; and charity, similar to that of a little child toward its instructor. Thus it is said in Isaiah:
여기서‘어린양’(lamb),‘어린염소’(kid),‘송아지’(calf)는순진무구와사랑의세단계를뜻하고,‘이리’(wolf),‘표범’(leopard),‘어린사자’(younglion)는그반대되는것들을뜻하며,‘어린아이’(littlechild)는체어리티를뜻합니다. 예레미야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Here a “lamb,” a “kid,” and a “calf” signify the three degrees of innocence and love; a “wolf,” a “leopard,” and a “younglion,” their opposites; and a “littlechild,” charity. In Jeremiah:
‘남자와여자’(manandwife)는이해력과의지에속한것들,곧진리와선을나타내며,‘유아와젖먹이’(infantandsuckling)는사랑의첫단계들을나타냅니다. ‘유아’(infant)와‘어린아이’(littlechild)가순진무구와체어리티를나타낸다는사실은누가복음에나오는주님의말씀에서도매우분명하게드러납니다. “Manandwife” denote things of the understanding and of the will, or of truth and of good; and “infantandsuckling,” the first degrees of love. That an “infant” and a “littlechild” denote innocence and charity is very evident from the Lord’s words in Luke:
AC.430은 라멕이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이 왜 체어리티의 소멸을 뜻하는지 설명합니다. 앞의 AC.429에서는 ‘사람’이 신앙을,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뿐 아니라 순진무구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참된순진무구는체어리티없이존재할수없고,참된체어리티도순진무구없이존재할수없다’는 말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중심은 어린 나이 자체가 아니라, 순진무구와 사랑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순진무구’는 단순히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잘못을 저지를 능력이 없는 상태와 구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순진무구의 완전한 정의를 제시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참된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어린아이의 모습이 순진무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모든 어린아이가 언제나 사랑과 체어리티를 완전하게 지니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서 어린아이는 우리가 살펴야 할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순진무구에 세 단계가 있다고 말하면서, 말씀의 ‘젖먹이’, ‘유아’, ‘어린아이’를 구별합니다. 젖먹이는 어머니나 유모를 향한 부드러운 사랑과 연결되고, 유아는 부모를 향한 사랑과 연결되며, 어린아이는 자신을 가르치는 사람을 향한 체어리티와 연결됩니다. 이 구별은 사랑이 단 하나의 모습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을 지닌다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모든 사람이 실제 나이에 따라 이 세 단계를 반드시 차례로 통과한다는 발달 이론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에서 사용된 세 표현의 영적 의미를 구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사11:6을 인용합니다. 이 구절에는 이리와 어린양, 표범과 어린 염소, 어린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등장하며, 마지막에는 어린아이가 그들을 인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린양과 어린 염소와 송아지가 순진무구와 사랑의 세 단계를, 이리와 표범과 어린 사자가 그 반대되는 것들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어린아이가그들을인도한다’는 말에서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뜻한다고 밝힙니다. 이 인용의 목적은 각 동물에 대해 별도의 상세한 상응표를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에서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렘44:7에서는 ‘남자와여자’에 이어 ‘유아와젖먹이’가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남자와 여자가 이해력과 의지에 속한 것들, 곧 진리와 선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유아와 젖먹이는 사랑의 첫 단계들을 나타냅니다. 이 구절의 문자적 문맥은 유다 백성의 악행과 그로 인한 멸절의 경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말씀 안에서 진리와 선뿐 아니라 사랑의 첫 단계들까지 언급되고 있음을 밝힙니다. 특히 원문 끝의 ‘남은것이아무것도없게하려느냐’는 표현은 이러한 상실의 심각성을 드러냅니다. 다만 AC.430은 여기서 리메인스의 교리를 별도로 풀이하지 않으므로, 그 개념을 자세히 설명하려면 관련 번호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눅18:15, 17에서는 주님께서 어린아이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어린아이가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는 사실의 근거로 제시합니다. 여기서 독자가 주목할 부분은 주님께서 단지 어린아이를 가까이하셨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와같이받아들인다’는 표현을 통해 어린아이가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상태와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순진무구와 체어리티가 천국의 삶과 무관한 부수적 성품이 아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사9:6을 인용하여 주님 자신이 ‘아이’라고 불리신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순진무구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앞의 구절들에서는 어린양과 어린아이, 젖먹이와 유아를 통해 순진무구와 사랑의 여러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그 의미를 주님 자신에게 연결합니다. 여기서 주님을 ‘아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의 능력이나 지혜가 미숙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같은 말씀에서 그분은 기묘자, 모사, 하나님, 용사,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고도 불리십니다.
이렇게 보면 AC.430은 ‘어린아이’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순진무구와 체어리티의 관계를 차례로 밝혀 갑니다. 먼저 두 가지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하고, 젖먹이와 유아와 어린아이를 통해 사랑의 세 단계를 구별합니다. 이어 이사야와 예레미야, 누가복음의 말씀을 통해 그 의미를 확인한 다음, 주님께서 순진무구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시라는 사실로 마무리합니다. 따라서 라멕이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단순히 어떤 선한 행동이 줄어들었다는 뜻을 넘어, 교회 안에서 순진무구와 분리될 수 없는 체어리티가 소멸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AC.430해설)
AC.429에서 처음 읽는 독자가 특히 멈칫할 만한 표현은 ‘신앙에서태어나는체어리티’입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문제를 강조했는데, 이번에는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태어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설명을 단순히 ‘어느쪽이먼저인가’라는 순서의 문제로만 읽으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려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우열이 아니라, 라멕이 소멸시킨 두 가지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이번 번호의 문맥을 살펴보겠습니다. 라멕은 ‘한사람’과 ‘어린아이’를 죽였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신앙으로 풀이하고, ‘어린아이’를 체어리티로 풀이합니다. 이어 신앙을 부인하고 죽이는 사람은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도 함께 부인하고 죽인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태어난다’는 표현은 여기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서로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히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에도 서로 다른 상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의 내용을 알고 그것이 참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아직 그 진리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고 살아가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배운 진리가 삶 속에서 사랑과 선행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그 신앙이 삶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예는 AC.429의 문장을 이해하기 위한 설명이지,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신앙의 모든 단계를 상세히 구분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점에서 ‘신앙에서태어나는체어리티’는 체어리티가 신앙에 비해 덜 중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과 체어리티를 떼어 놓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로 읽을 수 있습니다. 라멕의 고백에서 신앙을 죽이는 일은 체어리티를 죽이는 일과 함께 나타납니다. 신앙의 소멸을 말하면서 체어리티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설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 번호를 모든 사람의 거듭남에서 반드시 신앙이 시간적으로 먼저 생기고 체어리티가 나중에 생긴다는 공식으로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AC.429는 라멕의 말에 등장하는 ‘사람’과 ‘어린아이’의 의미를 설명하는 자리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 전체를 이해하려면 앞에서 다룬 가인과 아벨의 해설, 그리고 이어지는 번호들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한 문장의 표현을 떼어 내어 스베덴보리의 전체 설명을 대신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독자의 입장에서 이번 번호가 던지는 질문은 오히려 분명합니다. 내가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이 단지 알고 인정하는 데 머물러 있는지, 아니면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실제로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보게 하는 것입니다. 다만 자신의 연약함이나 일시적인 실패를 곧바로 라멕의 ‘소멸’과 동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설명하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된 황폐의 상태입니다.
결국 ‘신앙에서태어나는체어리티’라는 표현은 체어리티의 가치를 낮추기 위한 말이 아닙니다. AC.429에서는 신앙을 부인하고 소멸시키는 일이 그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의 소멸과도 연결된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이 관계를 이해하면 라멕이 ‘사람’과 ‘어린아이’를 함께 죽였다고 한 말이 왜 교회의 황폐를 나타내는지 조금 더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AC.429심화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