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창2:5, 6)
AC.92
싸움이 그치거나, 혹은 욕망들과 거짓들로 인해 일어났던 불안이 사라질 때에, 겉 사람이 누리는 평화의 평온함(the tranquility of peace)이 어떠한 것인지는, 오직 평화의 상태를 알고 있는 사람들만이 알 수 있습니다. 이 상태는 모든 기쁨에 대한 관념을 능가할 만큼 즐거운 것이어서, 단지 싸움이 그친 상태일 뿐만 아니라, 내적 평화로부터 나오는 생명이 겉 사람에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미치는 상태입니다. 이때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태어나는데, 그것들은 평화의 기쁨으로부터 생명을 받습니다. The nature of the tranquility of peace of the external man, on the cessation of combat, or of the unrest caused by cupidities and falsities, can be known only to those who are acquainted with a state of peace. This state is so delightful that it surpasses every idea of delight: it is not only a cessation of combat, but is life proceeding from interior peace, and affecting the external man in such a manner as cannot be described; the truths of faith, and the goods of love, which derive their life from the delight of peace, are then born.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 설명되어 온 ‘안식’과 ‘평온함’을, 가장 내밀한 체험의 언어로 풀어 주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이 평온함이 무엇인지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것은 정의하거나 전달할 수 있는 정보가 아니라, ‘오직 ‘알게 되는’ 상태’, 곧 직접 겪은 사람만이 아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는 분명히 선을 긋습니다. 이 평온함은 단순히 싸움이 없어진 상태가 아닙니다. 싸움이 없다는 것은 소극적 설명일 뿐입니다. 이 상태의 본질은, ‘내적 평화로부터 나오는 생명’이라는 데 있습니다. 즉, 이것은 공백이나 정지의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생명이 가장 깊은 근원에서부터 자유롭게 흐르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가 모든 기쁨의 관념을 능가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과장이나 수사가 아닙니다. 그가 말하는 기쁨은 감정적 흥분이나 만족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제자리를 찾았을 때 오는’ 기쁨입니다. 욕망과 거짓으로 인한 불안이 사라졌다는 것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방어하거나 정당화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로 오는 기쁨은, 무엇을 얻어서 생기는 기쁨이 아니라, ‘방해가 사라져서 드러나는’ 기쁨입니다.
이 평온함의 핵심은, 내적 평화가 겉 사람에게 ‘미친다’(affecting)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내적 평화는 속 사람 안에 머무는 추상적 상태가 아니라, 겉 사람의 사고, 감정, 행동 전반에 실제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나 그 방식은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섬세합니다. 강요나 명령, 규범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 ‘자연스러운 생명의 흐름’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 상태에서는 겉 사람이 더 이상 긴장하거나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지 않고, 무엇이 옳은지를 따로 증명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겉 사람은 속 사람의 평화를 그대로 받아, 그 안에서 움직입니다. 이 때문에 이 상태는 설명될 수 없고, 오직 체험될 수만 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 상태에서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이는 앞서 영적 단계에서 다루어졌던 진리와 선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이전에는 진리와 선이 노력과 선택의 산물이었다면, 이제는 ‘평화의 기쁨에서 태어나는 생명’입니다.
여기서 ‘태어난다’(are born)라는 표현이 결정적입니다. 이는 진리와 선이 더 이상 외부에서 주입되거나 학습된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된다는 뜻입니다. 그 생명의 근원은 신앙의 논리나 도덕적 결단이 아니라, ‘평화 자체의 기쁨’입니다. 평화가 생명을 낳고, 그 생명이 진리와 선의 형태로 드러납니다.
이 글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천적 상태에서의 삶은, 더 잘 싸우는 삶이 아니라, ‘싸움이 끝난 뒤에 비로소 시작되는’ 삶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삶의 특징은 고요함이지만, 결코 무기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장 깊고 충만한 생명 활동입니다.
AC.92는 안식을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정의합니다. 안식은 멈춤이 아니라, 평화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이 겉 사람 전체를 적시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 속에서, 진리와 선은 더 이상 의무가 아니라, ‘기쁨에서 태어난 열매’가 됩니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창2:5, 6)
AC.9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무엇을 내포하는지는, 사람이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되어 가는 동안 그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면, 결코 인식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매우 깊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영적 상태에 있는 동안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으므로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천적 상태가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므로 싸움이 그치고, 평온함이 따르게 됩니다. (87번을 보십시오) 이 평온함이 ‘비’와 ‘안개’로 의미됩니다. 이는 그것이 마치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이 물을 받아 적셔지는 수증기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평온함, 곧 평화에서 태어난 이 상태가, ‘들의 초목’과 ‘밭의 채소’라 불리는 것들을 산출합니다. 이것들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천적 영적 기원에서 나온 이성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들입니다. But what these things involve cannot possibly be perceived unless it is known what man’s state is while from being spiritual he is becoming celestial, for they are deeply hidden. While he is spiritual, the external man is not yet willing to yield obedience to and serve the internal, and therefore there is a combat; but when he becomes celestial, then the external man begins to obey and serve the internal, and therefore the combat ceases, and tranquility ensues (see n. 87). This tranquility is signified by “rain” and “mist,” for it is like a vapor with which the external man is watered and bedewed from the internal; and it is this tranquility, the offspring of peace, which produces what are called the “shrub of the field,” and the “herb of the field,” which, specifically, are things of the rational mind and of the memory [rationalia et scientifica] from a celestial spiritual origin.
해설
이 단락은 AC.90에서 언급된 ‘안개 같은 평온함’이 무엇인지를, 인간의 내면 상태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한층 더 깊이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분명히 말합니다. 이 모든 설명은, 사람이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옮겨 가는 중간 국면’을 알지 못하면 이해될 수 없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개념 설명이 아니라 ‘경험적 전이 상태’에 대한 설명입니다.
영적 상태에 있는 동안,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긴장이 존재합니다. 겉 사람은 진리를 알고 인정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기쁘게 섬기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겉 사람은 여전히 자기 방식, 자기 판단, 자기 습관을 고집하려 하고, 속 사람의 질서에 완전히 자신을 맡기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싸움이 생깁니다. 이 싸움은 선과 악 사이의 추상적 대결이 아니라, ‘순종할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매우 실제적인 긴장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천적 상태로 들어서면, 이 관계가 바뀝니다. 겉 사람이 더 이상 억지로 굴복하는 위치에 있지 않고, 속 사람을 섬기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순종이 강요가 아니라 기쁨이 되는 순간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싸움은 끝납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맞서 싸울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은 속 사람의 질서를 자기 생명의 질서로 인식하게 됩니다.
이렇게 싸움이 끝난 뒤에 오는 상태가 바로 ‘평온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평온함을 단순한 정서적 안정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관계가 바로잡힌 결과입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위계와 질서가 회복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따르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평온함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질서의 결과’입니다.
이 평온함이 ‘비’와 ‘안개’로 표현됩니다. 여기서 비는 폭우나 강수량 많은 비가 아닙니다. 곧 ‘안개’라고 불릴 만큼 부드럽고 은은한 것입니다. 이는 겉 사람이 외적 교훈이나 명령에 의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조용히 흘러나오는 생명의 영향으로 적셔진다는 뜻입니다. 겉 사람은 이제 스스로를 방어하거나 긴장하지 않고, 이 영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이 비유는 매우 섬세합니다. 안개는 소리를 내지 않고, 경계를 넘나들며, 모든 것을 고르게 적십니다. 천적 상태에서의 평온함도 이와 같습니다. 그것은 어떤 결단의 순간이나 극적 체험으로 드러나지 않고, 어느새 삶 전체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언제부터 싸움이 끝났는지를 정확히 말하기 어렵지만, 이미 평온 속에 머물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평온함, 곧 평화에서 태어난 상태가 ‘들의 초목’과 ‘밭의 채소’를 산출합니다. 이는 겉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이 더 이상 자기 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이제 겉 사람의 생각과 행위는, 속 사람에서 흘러나온 생명의 자연스러운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구체적으로 ‘이성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이성과 기억 지식이 ‘천적 영적 기원’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즉, 같은 이성, 같은 지식이라도, 그 근원이 다릅니다. 영적 단계에서는 이성과 지식이 진리를 분별하기 위한 도구였다면, 천적 단계에서는 사랑을 섬기기 위한 도구가 됩니다. 이성은 더 이상 판단의 주인이 아니라, 사랑의 봉사자가 됩니다.
그래서 AC.91은 이렇게 말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겉 사람은 더 이상 저항하거나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평온 속에 있으며, 그 평온함이 이성과 기억 지식을 적셔 줍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모든 외적 산출물은, 억지로 만들어진 선이 아니라, ‘평화에서 태어난 열매’입니다.
이 글은 천적 상태의 깊이를 가장 조용한 언어로 보여 줍니다. 싸움이 끝난 뒤에 오는 것은 공백이 아니라, 평화의 자궁에서 태어나는 새로운 삶의 형태입니다. 그리고 그 삶은, 안개처럼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겉 사람 전체를 적셔 갑니다.
‘노아의 홍수’의 속뜻을 설명해 주세요. 노아의 홍수는 실제 역사적으로 있었던 게 아니라는 말에 이 말을 처음 들었던 저도 그랬고, 거의 모든 개신교인, 기독교인들이 마음이 철컹 닫힐 것 같아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노아의 홍수의 속뜻을 설명할 때 가장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는 ‘노아의 홍수는 거짓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성경의 목적이 자연사나 지질학적 사건을 기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영적 역사, 곧 인간 내면의 상태 변화를 계시하는 데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전제를 놓치지 않으면, 홍수 이야기는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노아의 홍수는 자연 현상에 대한 기록이기 이전에, 인류의 내적 생명이 전면적으로 붕괴된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선과 진리의 ‘남은 것들’, 곧 ‘리메인스’(remains)가 인간 안에서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하고, ‘무시무시한 욕구와 확신’(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에 의해 질식된 상태가 바로 홍수로 표현됩니다. 여기서 물은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의 내적 상태가 스스로를 압도하고 잠식한 결과를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그래서 홍수는 하나님의 분노나 충동적인 심판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인간의 내면이 더 이상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그 상태는 스스로를 유지할 수 없으며, 그 붕괴는 홍수라는 언어 외에는 달리 표현될 수 없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인간이 ‘스스로 질식한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이 지점에서 많은 성도들이 묻게 됩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홍수가 있었던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가장 정직하고 안전한 대답은, 성경은 홍수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말하려는 책이 아니라, 왜 그런 언어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는지를 말하려는 책이라는 설명입니다. 성경은 사건의 형태보다 그 사건이 상징하는 영적 실재를 계시합니다.
태고의 사람들은 오늘날처럼 추상 개념으로 사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영적 상태를 자연 이미지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내적 붕괴는 땅이 무너지는 것으로, 선과 진리의 질식은 물에 잠기는 것으로, 전면적 혼돈은 홍수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영적으로 ‘홍수 같은 상태’는 자연적으로도 ‘홍수’라는 말로 표현되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가장 태고한 사람들의 표현 방식’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성경은 틀린 책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 읽어 왔던 책이 됩니다. 성경은 한 번도 스스로를 과학 교과서나 역사 연대기로 소개한 적이 없습니다. 성경은 자연의 언어로 영적 진실을 말하는 책이며, 그 언어를 문자 그대로만 붙잡을 때 오히려 성경의 진리가 가려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노아는 살아남았는가라는 질문이 이어집니다. 노아는 도덕적으로 특별히 착한 개인이어서 살아남은 인물이 아닙니다. 노아는 홍수 이후에도 유지 가능한 새로운 인간 형식, 새로운 교회 상태를 대표합니다. 직접적인 퍼셉션(perception)에 의존하지 않고, 외적 진리와 양심을 통해 주님과 연결되며, 리메인스를 보존할 수 있는 인간 형식이 바로 노아로 상징됩니다.
따라서 노아의 홍수는 사람을 죽인 사건이 아니라, 사람의 형식이 바뀐 사건입니다. 이전의 인간 형식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고, 주님께서는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방식으로 살 길을 여셨습니다. 홍수는 끝이 아니라 전환이며, 멸절이 아니라 보존을 위한 단절입니다.
목회적으로는 이렇게 설명해 주어도 충분합니다. 노아의 홍수는 하나님이 화가 나서 사람들을 쓸어버린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이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방식으로 구원의 길을 여신 이야기입니다. 이 설명은 성경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이해를 깊게 만듭니다.
마지막으로 꼭 붙들어야 할 한 문장은 이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는 하나님의 심판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가 선택한 유일한 보존의 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관점으로 읽을 때, 홍수는 더 이상 두려운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의 우리를 살리고 있는 이야기로 다가오게 됩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4)
AC.307에서 스베덴보리는 ‘홍수’가 자연적 재난이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태고교회 말기에 인간 내면에서 일어난 전면적 붕괴 상태’를 가리킨다고 분명히 합니다. 그 붕괴의 핵심이 바로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왜곡된 욕구와 확신)입니다. 여기서 홍수는 물의 범람이 아니라, 왜곡된 욕구와 확신이 인간의 내면(internal, 속) 전 영역을 덮어 버린 상태를 뜻합니다. 즉,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더 이상 위에서 아래로 질서 있게 작동하지 않고, 아래에서 위로 뒤집혀 폭주하는 상황을 상징합니다.
먼저 ‘insane cupidities’는 태고교회의 마지막 단계에서 나타난 ‘의지의 붕괴’를 뜻합니다. 태고교회는 본래 사랑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지각하는 천적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욕구 자체가 질서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판단하기 시작하면서, 사랑은 주님을 향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되었고, 그 결과 욕구는 더 이상 제어되지 않는 상태로 변했습니다. 이 욕구들은 단순히 강해진 것이 아니라,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분별할 능력 자체를 잃었기 때문에 ‘광적’(insane)이라고 불립니다.
여기에 결합된 것이 ‘persuasions’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잘못된 생각이나 오류가 아니라, ‘자기 욕구를 절대적으로 옳다고 느끼게 만드는 내적 확신’입니다. AC.307의 문맥에서 이 확신은 외부의 어떤 진리도, 주님의 어떤 경고도 침투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더 이상 ‘설득될 수 없는 존재’가 되며, 자신이 보고 느끼는 것만이 전부라고 굳게 믿습니다. 이 확신은 의지의 광기와 결합하여, 악을 악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고, 오히려 그것을 지혜와 자유로 착각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홍수를 바로 이 상태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이유는, 이 두 요소가 인간 전체를 ‘완전히 잠식’하기 때문입니다. 홍수처럼 물이 점점 차오르듯, 왜곡된 욕구와 확신은 처음에는 부분적으로 작용하다가, 결국 인간의 사고, 감정, 기억, 판단을 전부 덮어 버립니다. 이 상태에서는 어떤 진리도 숨 쉴 공간이 없으며, 남아 있던 내적 생명의 통로들이 모두 차단됩니다. 그래서 홍수는 ‘죽음’의 상징이 됩니다.
중요한 점은, 이 홍수가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솟아났다는 점’입니다. 물은 성경에서 보통 진리나 지식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진리가 완전히 전도되어, 인간의 기억 지식과 감각적 사고가 통제 없이 넘쳐흐르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지식들은 본래 질서 안에서는 유익했으나, 자기 사랑과 결합되자 생명을 살리는 물이 아니라, 질식시키는 물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가 곧 ‘홍수’가 되는 이유입니다.
AC.307에서 이 상태는 창3:24의 생명나무 길 차단과 직접 연결됩니다. 이런 상태의 인간이 생명나무에 접근한다면,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선과 진리를 자기 욕구와 확신으로 오염시키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홍수를 허용하시고, 동시에 새로운 인간 유형, 곧 노아로 상징되는 영적 인간을 일으키십니다. 이는 멸망이 목적이 아니라, ‘완전한 붕괴를 막기 위한 최종적 분리와 재구성’입니다.
결국 AC.307에서 ‘홍수’는 역사 이전의 한 사건이 아니라, ‘천적 인간이 자기 인도로 완전히 전도될 때 도달하는 종말 상태’를 뜻합니다.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는 그 상태의 정확한 내적 정의이며, 홍수는 그것이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총체적 상징입니다. 이 점에서 홍수는 심판이기 이전에, 주님의 섭리가 더 이상 그 상태를 그대로 두지 않으셨다는 표지입니다.
이 해석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신앙이 자기 확신과 욕구에 완전히 잠식될 때, 인간은 여전히 살아 있으나 내적으로는 홍수 가운데 있는 상태가 됩니다. AC.307은 바로 그 지점을 향해, 홍수라는 강렬한 상징으로 우리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4)
‘their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에서 ‘cupidities’는 단순한 욕망이나 정욕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솟아나는 통제 불가능한 욕구’, 곧 의지의 왜곡을 뜻합니다. 이것이 ‘insane’으로 수식되는 이유는, 이 욕구들이 더 이상 이성이나 양심의 조절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욕구는 질서 안에서 목적을 향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욕구는 목적 자체가 자기 자신이며, 만족을 위해서라면 어떤 진리나 선도 훼손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이는 강한 욕망이 아니라, ‘영적 질서로부터 이탈한 의지의 광기’입니다.
‘persuasions’는 단순한 생각이나 의견이 아니라, ‘그 욕구들을 정당화하고 절대화하는 내적 확신’을 가리킵니다. 이 확신은 외부로부터 설득된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신념이며, 한 번 굳어지면 어떤 반대 증거나 진리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persuasion’은 오류라기보다 ‘진리를 밀어내는 능동적 상태’로, 스스로를 참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강박적 확신입니다.
이 두 요소가 결합될 때, 인간의 내적 상태는 매우 위험해집니다. ‘insane cupidities’가 의지를 장악하고, ‘persuasions’가 이해를 장악하여, 의지와 이해가 함께 거짓된 방향으로 완전히 합류합니다. 이 상태에서는 악을 행하면서도 그것이 악이라는 인식이 사라지고, 오히려 선을 행한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말하는 ‘자기 기만의 완성 단계’입니다.
창3:24에서 이 표현이 등장하는 맥락은 매우 중요합니다.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는 그룹과 불 칼은, 인간이 더 이상 그 상태로는 생명에 접근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즉, 이 ‘광적인 욕구와 확신’의 상태로 생명나무,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선과 진리에 접근한다면, 그것을 더럽히고 파괴하게 되기 때문에 길이 차단됩니다. 차단은 형벌이 아니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마지막 자비’입니다.
따라서 ‘their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는 단순히 타락한 인간의 도덕적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이성의 붕괴 상태’를 가리킵니다. 욕구는 방향을 잃고, 확신은 검증을 거부하며, 그 결과 인간은 스스로를 가장 지혜롭다고 여기면서 가장 깊은 어둠 속에 머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창3의 종결부에서 인간이 에덴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던 근본 이유입니다.
이 표현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신앙과 진리를 감각과 지식으로 재단하고, 자기 확신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상태가 바로 이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의 현대적 형태입니다. 그러므로 창3:24는 과거의 신화적 장면이 아니라, ‘신앙이 자기 인도로 전도될 때 필연적으로 도달하는 종착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And there was no shrub of the field as yet in the earth, and there was no herb of the field as yet growing, because Jehovah God had not caused it to rain upon the earth. And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And he made a mist to ascend from the earth, and watered all the faces of the ground.(창2:5, 6)
AC.90
‘들에는 초목’(the shrub of the field)과 ‘밭에는 채소’(the herb of the field)는 일반적으로 그의 겉 사람이 산출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겉 사람은 그가 영적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땅’(earth)이라 하지만, 천적 상태가 되면 ‘들’(ground)이라 하고, 또한 ‘밭’(field)이라 합니다. 곧이어 ‘안개’(mist)라 하게 될 ‘비’(rain)는, 싸움이 그친 뒤에 오는 평화의 평온함을 의미합니다. By the “shrub of the field” and the “herb of the field” are meant in general all that his external man produces. The external man is called “earth” while he remains spiritual, but “ground” and also “field” when he becomes celestial. “Rain,” which is soon after called “mist,” is the tranquility of peace when combat ceases.
해설
이 글은 창2:5-6에 나오는 자연적 이미지들을, 인간 내적 상태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아주 간결하게 풀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초목’(shrub)과 ‘채소’(herb)를 식물학적 대상으로 보지 않고, ‘겉 사람한테서 나오는 모든 것의 총칭’으로 읽습니다. 즉, 이는 행동, 말, 습관, 외적 사고, 삶의 열매 전반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산출물이 ‘겉 사람’한테서 나온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겉 사람을 폄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겉 사람이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봅니다. 다만 그 열매의 성격은, 겉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달라집니다. 그래서 같은 겉 사람이라도, 영적 상태일 때와 천적 상태일 때 부르는 이름이 달라집니다.
영적 상태에 있을 때, 겉 사람은 ‘땅’이라 합니다. 땅은 아직 경작의 방향이 외부 규범과 진리 중심으로 잡혀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때의 겉 사람은 아직도 싸움과 선택, 분별의 긴장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산출하는 것들, 곧 ‘초목’과 ‘채소’는 존재할 수는 있지만, 아직 풍성하거나 안정된 상태는 아닙니다.
그러나 겉 사람이 천적 상태로 들어가면, 더 이상 ‘땅’이라 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는 ‘들’(ground) 혹은 ‘밭’(field)이라 합니다. 이는 단어 하나의 변화가 아니라, ‘겉 사람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뜻합니다’. 밭은 이미 목적과 질서가 정해진 땅입니다. 씨가 무엇인지 알고, 어디에 뿌려야 하는지가 분명한 상태입니다. 겉 사람은 이제 속 사람의 사랑과 퍼셉션을 그대로 받아,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습니다.
이 차이는, 겉 사람의 산출물이 더 이상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는 데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겉 사람의 행위는 애써 만들어낸 선이 아니라, ‘속에서 흘러나온 선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들의 초목’과 ‘밭의 채소’는 억지로 키운 식물이 아니라, 제때에 자연스럽게 자라는 생명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비’와 ‘안개’라는 이미지를 통해, 이 변화의 정서를 섬세하게 덧붙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비는, 영적 단계에서의 교훈이나 진리의 강한 주입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안개’라 불릴 만큼 부드러운 것입니다. 이 안개는 싸움이 그친 뒤에 찾아오는 ‘평화의 평온함’을 뜻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천적 상태에서 오는 평화는, 감정의 고조나 강렬한 체험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조용하고, 넓게 퍼지며, 모든 것을 적셔 주는 안개와 같습니다. 이는 더 이상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성취의 흥분이 아니라, ‘질서가 자리를 잡았을 때의 고요함’입니다.
그래서 이 안개는 겉 사람을 적십니다. 밭이 된 겉 사람은 이 평화의 평온함을 그대로 받아, 무리 없이 열매를 맺습니다. 더 이상 비가 내려야만 살 수 있는 메마른 땅이 아니라, 이미 수분을 머금은 밭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외적 행위 하나하나가 긴장이나 계산에서 나오지 않고, 평온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AC.90은 이렇게 말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겉 사람은 더 이상 문제의 영역이 아니라, ‘표현의 영역’이 된다고 말입니다. 싸움은 이미 끝났고, 평화는 안개처럼 조용히 내려와 모든 것을 감싸고 있습니다. 이 평온함 속에서, 겉 사람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속 사람의 질서를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이 글은 짧지만, 천적 삶의 분위기를 가장 잘 전해 주는 대목 중 하나입니다. 천적 상태는 웅장하거나 극적인 상태가 아니라, 조용하고 안정된 생명의 흐름입니다. 그리고 그 흐름은, ‘온 지면을 적시는’ 안개처럼,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모든 것을 살립니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창2:4)
AC.89
‘하늘과 땅의 내력’(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은 천적 인간의 형성(formations)입니다. 여기서 그의 형성이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이어지는 모든 세부 사항들로부터 매우 분명한데요, 아직 풀이 자라지 않았다는 말과, 땅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 그러하며, 또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다는 말과, 그 뒤에 모든 짐승과 하늘의 새를 만드셨다고 한 말도 그러합니다. 이는 그들의 형성이 앞 장에서 이미 다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여기서는 다른 사람이 다루어지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의 사실로부터 더욱 분명해집니다. 곧 이제 처음으로 주님의 호칭을 ‘여호와 하나님’(Jehovah God)이라 하신다는 점입니다. 앞의 구절들, 즉 영적 인간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단지 ‘하나님’(God)으로만 부르셨지요. 또한 이제는 ‘땅’(ground)과 ‘밭’(field)이 언급되는데, 앞의 구절들에서는 오직 ‘땅’(earth)만 언급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 절에서는 ‘하늘’(heaven)이 먼저 언급된 뒤에 ‘땅’(earth)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땅’이 먼저 나오고 ‘하늘’이 뒤따릅니다. 그 이유는 ‘땅’이 겉 사람을, ‘하늘’이 속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영적 인간에게서는 개혁이 ‘땅’, 곧 겉 사람에서 시작되지만,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천적 인간에게서는 속 사람, 곧 ‘하늘’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are the formations of the celestial man. That his formation is here treated of is very evident from all the particulars which follow, as that no herb was as yet growing; that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as well as that Jehovah God formed man, and afterwards, that he made every beast and bird of the heavens, notwithstanding that the formation of these had been treated of in the foregoing chapter; from all which it is manifest that another man is here treated of. This however is still more evident from the fact that now for the first time the Lord is called “Jehovah God,” whereas in the preceding passages, which treat of the spiritual man, he is called simply “God”; and, further, that now “ground” and “field” are mentioned, while in the preceding passages only “earth” is mentioned. In this verse also “heaven” is first mentioned before “earth,” and afterwards “earth” before “heaven”; the reason of which is that “earth” signifies the external man, and “heaven” the internal, and in the spiritual man reformation begins from “earth,” that is, from the external man, while in the celestial man, who is here treated of, it begins from the internal man, or from “heaven.”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장이 어디에서 새롭게 시작되는지를 분명히 선언하는 전환점입니다. 창2:4에 나오는 ‘하늘과 땅의 내력’이라는 표현은, 흔히 창조 기사 전체의 요약이나 반복으로 오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국면의 시작’으로 읽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내력’(nativities)은 시간적 족보가 아니라, ‘상태의 형성과 전개’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내력’을 천적 인간의 형성으로 규정합니다. 이는 앞 장에서 다루어진 영적 인간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이 차이는 사소한 문장 배열이나 단어 선택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본문 전체의 구조 속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아직 풀이 자라지 않았고, 땅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는 말은, 단순한 자연 상태의 묘사가 아니라, ‘새로운 형성이 아직 외적 단계로 나타나지 않았음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고, 그 뒤에 짐승과 새를 만드셨다고 다시 말하는 점도 중요합니다. 이는 앞 장에서 이미 다루어진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언급되는 이유는, ‘같은 외적 형상이지만 전혀 다른 내적 상태’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동일한 표현이 사용되었어도, 그 안에서 언급되는 사람은 다른 사람입니다.
이 차이는 하나님의 이름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 앞 장, 곧 영적 인간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주님이 단지 ‘하나님’으로만 불리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처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 이름의 변화는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여호와’는 사랑과 존재의 근원을, ‘하나님’은 진리와 질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사랑과 진리가 하나로 결합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는 곧 천적 인간의 상태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땅’과 ‘밭’이 함께 언급되는 점도 중요합니다. 앞 장에서는 오직 ‘땅’만 언급되었습니다. ‘땅’은 겉 사람을 뜻하지만, ‘밭’은 그 겉 사람 안에서 이미 경작과 수용이 가능한 상태를 뜻합니다. 이는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이 이미 속 사람의 질서에 의해 준비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또 하나의 섬세한 표지는 단어의 순서입니다. 이 절에서는 ‘하늘’이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땅’이 나옵니다. 그러나 곧이어 다시 ‘땅’이 먼저 나오고 ‘하늘’이 뒤따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순서의 변화마저도 의미 없는 반복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것을 ‘형성의 방향’을 보여주는 지표로 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개혁이 겉 사람에서 시작됩니다. 즉, 행동과 사고의 외적 질서가 먼저 정돈되고, 그 뒤에 속 사람이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는 ‘땅’이 먼저 등장합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에게서는 반대입니다. 형성은 속 사람, 곧 ‘하늘’에서 시작됩니다. 사랑과 퍼셉션이 먼저 주어지고, 그다음에 겉 사람이 자연스럽게 그 질서를 따르게 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두 종류의 사람이 단지 성숙도의 차이가 아니라, ‘형성의 방식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영적 인간은 외적 순종과 진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지만, 천적 인간은 속에서 주어진 생명과 사랑이 밖으로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AC.89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앞 장의 연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 곧 천적 인간의 형성이라는 것입니다. 이 선언을 이해하지 못하면, 창세기 2장은 창세기 1장의 반복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를 이해하는 순간, 창세기 2장은 반복이 아니라 ‘가장 깊은 차원의 인간 이야기’로 열립니다.
이 지점부터 창세기 2장은, 더 이상 질서가 세워지는 과정을 말하지 않고, ‘사랑에서 비롯된 생명이 어떻게 구체화되는가’를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AC.89는 그 문을 여는 문장입니다.
오늘날 로또하는 기독교인들, 특별히 뭘 좀 해 볼려고 해도 종잣돈 자체가 없어 힘들어하는 아들들을 위해 로또 생각을 하는 기독교인, 그러나 한편으로 아들들을 향하신 주님의 계획에 혹시 차질을 빚는 건 아닐까, 간섭하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고민하는 기독교인을 위해 스베덴보리는 무슨 말을 할까요? 기독교인들은 로또하면 안 되나요?
이 질문을 스베덴보리의 자리에서 듣는다면, 그는 아마 이전보다 더 깊고 조용한 어조로 말을 건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단순한 경제적 절박함이나 부모의 애정만이 아니라, ‘주님의 계획을 내가 방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신앙적 두려움이 함께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마음을 매우 귀하게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먼저 이렇게 말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네가 지금 두려워하는 것은 돈의 부족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를 해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이 지점에서 그는 이 기독교인을 가볍게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고민 자체가 이미 섭리를 믿고 있다는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곧바로 한 단계 더 깊은 질문으로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지금 너는 주님의 섭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스베덴보리에게 섭리는 인간의 선한 의도를 필요로 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조급한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아들들을 위해 길을 열어주고 싶어 하는 마음은 섭리에 속하지만, 그 길을 ‘우연과 확률이라는 비질서적 수단으로 앞당기려는 시도’는 섭리를 돕는 것이 아니라 흔들 수 있다고 그는 보았을 것입니다. 특히 ‘혹시 내가 간섭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때는, 이미 그 선택이 섭리의 리듬과 어긋나고 있다는 내적 신호로 보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계획은 네가 돕지 않아도 무너지지 않는다.’ 이것은 냉정한 말이 아니라 오히려 위로에 가까운 말입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조급함보다 훨씬 크고, 인간의 불안보다 훨씬 정교합니다. 아들들의 종잣돈이 없는 현재의 상태 역시 섭리의 한 부분일 수 있으며, 그것이 반드시 실패나 지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그는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로또를 하면 안 되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이 경우에도 스베덴보리는 규칙으로 답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로또를 산다고 해서 네가 즉시 섭리를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네 마음을 어디에 고정시키는지는 분명히 살펴보아야 한다.’ 로또는 주님의 계획을 기다리는 인내를 강화하기보다, 그 인내를 단축시키고 싶게 만드는 방향으로 마음을 끌고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이미 ‘이게 혹시 주님의 일에 내가 간섭하는 건 아닐까’라는 질문이 마음에 떠오른 상태라면,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단순한 양심의 소리가 아니라 ‘섭리가 보내는 미세한 경고음’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부모에게 이렇게 권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들의 미래를 대신 해결해 주려 하지 말고, 함께 섭리를 신뢰하는 법을 가르쳐라.’ 돈을 마련해 주는 것보다, 기다리는 법과 질서를 존중하는 태도를 함께 견디는 것이 더 깊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주님의 계획을 앞당기는 것이 아니라 ‘그 계획이 작동하도록 조용히 공간을 남겨두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아마 이렇게 정리했을 것입니다. ‘이 질문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네가 로또보다 섭리를 더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다.’ 스베덴보리는 이 기독교인을 향해 ‘하면 안 된다’고 단정하지 않으면서도, 분명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이 선택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네가 주님의 계획을 얼마나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대부분의 신앙인은 이미 마음속으로 방향을 알고 있다고 그는 보았을 것입니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2, 3)
AC.88
영적 인간이 천적 상태가 될 때, 그를 가리켜 ‘하나님의 일’(the work of God)이라고 합니다. 이는 오직 주님께서 그를 위하여 싸우셨고, 그를 창조하시고, 형성하시며,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 ‘하나님이 그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셨다’(God finished his work on the seventh day)라고 하시고, 또 ‘그의 하시던 모든 일에서 안식하셨다’(he rested from all his work)라고 하시는 등 두 번이나 반복하시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선지자들에 의해서 사람은 여러 차례 ‘여호와의 손과 손가락의 일’(the work of the hands and of the fingers of Jehovah)이라 불립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에서, 거듭난 사람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데를 보면 그렇습니다. When the spiritual man becomes celestial, he is called the “work of God,” because the Lord alone has fought for him, and has created, formed, and made him; and therefore it is here said, “God finished his work on the seventh day”; and twice, tha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By the prophets man is repeatedly called the “work of the hands and of the fingers of Jehovah”; as in Isaiah, speaking of the regenerate man: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18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21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또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이 일을 옛부터 듣게 한 자가 누구냐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사45:11-12, 18, 21) Thus hath said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and his former, Seek ye signs of me, signs concerning my sons, and concerning the work of my hands command ye me. I have made the earth, and created man upon it; I, even my hands have stretched out the heavens, and all their army have I commanded. For thus hath said Jehovah that createth the heavens, God himself that formeth the earth and maketh it; he establisheth it, he created it not a void, he formed it to be inhabited; I am Jehovah and there is no God else besides me (Isa. 45:11–12, 18, 21).
이로부터 새 창조, 곧 거듭남은 오직 주님의 일임이 분명합니다. ‘창조하다’(to create), ‘형성하다’(to form), ‘만들다’(to make)라는 표현들은 위의 구절에서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createth the heavens, God himself that formeth the earth and maketh it)라는 말씀처럼 구별되어 사용되었고, 같은 이사야 다른 곳에서도 동일하게 구별되어 사용됩니다. 예컨대, Hence it is evident that the new creation, or regeneration, is the work of the Lord alone. The expressions to “create,” to “form,” and to “make,” are employed quite distinctively, both in the above passage—“creating the heavens, forming the earth, and making it”—and in other places in the same prophet, as: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43:7) 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 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 I have formed him, yea, I have made him (Isa. 43:7),
이러한 구별은 창세기 앞 장과 본 장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며, 여기 본문에서도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안식하시니라’(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라고 표현됩니다. 내적 의미에서 이러한 표현들은 언제나 서로 구별된 뜻을 전달하며, 주님을 ‘창조자’(creator), ‘지으신 이’(former), ‘만드시는 이’(maker)로 부르는 경우에도 동일합니다. and also in both the preceding and this chapter of Genesis; as in the passage before us: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In the internal sense this usage always conveys a distinct idea; and the case is the same where the Lord is called “creator,” “former,” or “maker.”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장의 안식이라는 주제를 다시 한번 더 깊은 중심으로 끌어당깁니다. AC.87이 싸움의 종식과 주님의 싸우심을 강조했다면, AC.88은 그 결과로서 ‘사람의 정체성 자체가 어떻게 바뀌는가’를 다룹니다. 천적 인간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한다는 말은, 그가 이제 자기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이는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존재론적 진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사람이 천적 상태에 이르는 과정에서 싸운 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결과물 역시 사람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일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일’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하신 어떤 외적 업적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이루신 상태’를 가리킵니다. 사람 자신이 곧 주님의 일이며, 주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본문에서 ‘하나님이 그의 일을 마치셨다’는 말과 ‘그의 모든 일에서 쉬셨다’는 말이 반복됩니다. 반복은 강조가 아니라 구조를 드러냅니다. 주님의 일은 외부 세계의 창조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의 새 창조이며, 그 일이 마쳐질 때에 안식이 옵니다. 안식은 일이 끝났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일이 사람 안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옵니다.
이 점을 밝히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선지서들을 폭넓게 인용합니다. 사람을 ‘여호와의 손과 손가락의 일’이라 부르는 표현들은, 인간을 독립적 존재로 세우려는 사상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특히 이사야에서 거듭난 사람을 가리켜 ‘내 손의 일’이라고 부르는 대목은, 거듭남이 자기 계발이나 도덕적 향상의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거듭남은 ‘새로운 창조 행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창조하다’, ‘형성하다’, ‘만들다’라는 세 동사가 구별되어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문학적 변주나 수사적 반복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 세 표현이 각각 ‘서로 다른 내적 국면’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창조는 목적의 설정이고, 형성은 질서의 구성이며, 만들기는 실제 삶의 실현입니다. 이 구별은 창세기 1–2장의 전 구조를 관통하는 핵심 원리입니다.
이사야의 구절에서 하늘을 창조하고, 땅을 형성하며, 그것을 거주하게 만들었다는 표현은, 우주에 대한 설명이면서 동시에 인간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늘과 땅은 사람 안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뜻하며, 거주하게 만든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 안에 머무실 수 있는 상태로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새 창조는 단지 새출발이 아니라, ‘주님이 거하실 처소가 다시 세워지는 일’입니다.
이 모든 논의는 한 결론으로 모입니다. 거듭남은 오직 주님의 일이라는 결론입니다. 인간은 동의하고 받아들이며 따르지만, 창조의 주체는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을 ‘창조자’, ‘형성자’, ‘만드시는 이’로 부르는 모든 표현은, 각각 다른 국면에서 동일한 진리를 가리킵니다.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 주님의 작품이라는 진리입니다.
AC.88은 안식의 의미를 다시 한번 정제합니다. 안식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내가 더 이상 나 자신을 만들려고 애쓰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때 비로소 주님의 일이 내 안에서 온전히 드러나며, 나는 ‘하나님의 일’로서 쉬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안식은 종교적 개념이 아니라, 존재의 안정 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그 안정은, 주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됩니다.
※ 오늘 부를 찬송가는 순서대로 찬29, ‘성도여 다 함께’와 찬434, ‘귀하신 친구 내게 계시니’입니다.
오늘은 창세기 5장 여섯 번째, 마지막 시간으로 본문은 32절 한 절, AC 글 번호로는 534번에서 536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창5:32)
이 본문을
노아, 그리고
셈, 함, 야벳의 속뜻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준비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주님이 빛을 비추셔서 이 시간 우리 영과 육이 활짝 열려 모두 들을 귀 만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은 매우 짧습니다.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라는 한 절이지요.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한 절에 창세기 전체의 큰 전환점이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가계 기록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종말 이후에도 주님께서 교회를 완전히 끊어 버리지 않으셨다는 선언이며, 한 교회 안에서 서로 다른 성향과 방향을 지닌 세 흐름이 동시에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AC 본문과 그 해설을 그대로 인용, 함께 읽어보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합니다. 특별히 오늘 AC 본문은 534, 535, 536 셋밖에 안 될뿐더러 특별히 최근 새롭게 시작한 해설 버전을 실제로 접하실 수 있는 시간도 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세 글을 리딩 후, 요약 정리하겠습니다. 먼저 AC.534입니다.
534
‘노아’(Noah)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고대교회(the ancient church)를 의미합니다. ‘셈, 함, 야벳’(Shem, Ham, and Japheth)은 세 고대교회를 의미하는데, 이들의 부모가 되는 교회가 바로 ‘노아’라 하는 고대교회입니다. By “Noah,” as has been said, is signified the ancient church. By “Shem, Ham, and Japheth” are signified three ancient churches, the parent of which was the ancient church called “Noah.”
해설
이 글은 노아 이후 전개될 교회 역사의 ‘기본 구조를 한 문장으로 제시하는 핵심 진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노아를 하나의 교회 상태로 규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노아 교회가 이후 여러 교회의 ‘부모’가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고대교회가 단일한 형태로 오래 지속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서로 다른 성격의 교회들이 갈라져 나왔음을 뜻합니다.
앞서 태고교회에서는 하나의 중심적 교회 흐름이 여러 단계로 약화되며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노아 이후의 고대교회에서는 양상이 달라집니다. 동일한 교리적 토대 위에 서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방향과 강조점을 지닌 교회들이 동시에 존재하게 됩니다. 셈, 함, 야벳은 바로 그 분화를 대표하는 이름들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 세 교회가 서로 무관하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모두 노아 교회에서 나왔으며, 같은 뿌리를 공유합니다. 즉, 퍼셉션의 교회가 아니라 교리의 교회라는 공통 기반 위에 서 있습니다. 차이는 그 교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무엇을 중심에 두느냐에 있습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말하면, 이는 매우 현실적인 교회 이해를 제공합니다. 하나의 참된 교회에서 출발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다른 교회 형태들이 생겨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문제는 분화 자체가 아니라, 그 분화가 여전히 같은 근원에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셈, 함, 야벳을 모두 고대교회로 부르며, 이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 글에서 ‘부모’라는 표현은 다시 한번 중요합니다. 부모는 자녀의 모든 선택을 대신하지는 않지만, 생명과 구조를 제공합니다. 마찬가지로 노아 교회는 이후 교회들이 존재할 수 있는 기본 틀과 신앙 구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후의 교회들은 이 틀 안에서 각기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그래서 AC.534는 단순한 족보 설명이 아니라, ‘고대교회 전체를 조망하는 지도’와도 같습니다. 노아라는 하나의 중심에서 셈, 함, 야벳이라는 세 갈래가 뻗어 나가고, 이 세 갈래는 이후 인류 영적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교회 유형의 원형이 됩니다.
535
‘노아’(Noah)라 하는 교회를 홍수 이전의 교회들 가운데 하나로 봐서는 안 된다는 점은, 29절에서 그를 가리켜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comfort them from their work and the toil of their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라고 한 데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 ‘위로’(comfort)란, 그 교회가 살아남아 지속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 관해서는, 이후 주님의 신적 자비로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That the church called “Noah” is not to be numbered among the churches that were before the flood, appears from verse 29, where it is said that it should “comfort them from their work and the toil of their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 The “comfort” was that it should survive and endure. But concerning Noah and his sons,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해설
이 글은 노아의 교회가 태고교회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라, ‘이미 다른 질서에 속한 교회’임을 명확히 선 긋는 대목입니다. 앞서까지의 흐름만 보면, 노아가 태고교회의 연속선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분명히 말합니다. 노아의 교회는 홍수 이전의 교회들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 근거는 29절에 나오는 ‘위로’라는 표현입니다. 이 위로는 단순히 고통을 덜어 주는 의미가 아니라, ‘존속과 지속’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노아의 교회는 사라질 교회가 아니라 남겨질 교회이며, 심판을 통과해 이어질 교회입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와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태고교회는 라멕에 이르러 완전히 역할을 마쳤고, 더 이상 이어질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라는 표현이 다시 언급되는 이유도 분명해집니다. 태고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는 이 수고와 고됨이 교회 자체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노아에게서는 같은 표현이 ‘위로’와 연결됩니다. 이는 상태가 같다는 뜻이 아니라, ‘같은 조건 속에서도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 차이가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 교회의 성격에서 나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에 기반한 교회였기 때문에, 퍼셉션이 사라지면 교회 자체가 더 이상 성립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노아의 교회는 교리에 기반한 교회입니다. 퍼셉션이 사라진 조건 속에서도, 교리를 통해 질서를 유지하고 신앙을 보존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수고와 고됨’ 속에서도, 노아의 교회는 무너지지 않고 지속됩니다. 참고로, 여기 ‘수고와 고됨’은 주님의 선과 진리 아는 일이 예전엔 퍼셉션으로 즉시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지만, 점점 기울다가 라멕의 때쯤 이르자 ‘수고와 고됨’의 일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노아는 태고교회의 회복 버전이 아니라, ‘전혀 다른 교회 유형의 시작점’입니다. 따라서 노아를 태고교회의 한 인물로 설교하거나, 태고적 신앙을 되살린 인물로 묘사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관점과 어긋납니다. 노아는 퍼셉션을 되찾은 사람이 아니라, 퍼셉션 이후의 시대를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된 교회의 대표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지점에서 자세한 설명을 미루고, ‘뒤에서 더 말씀드리겠다’고 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노아와 그의 아들들은 단순한 후속 인물이 아니라, 고대교회의 구조 전체를 설명하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 장에서는 위치만 정리하고, 본격적인 내용은 이후에 펼치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AC.535는 짧지만 결정적입니다. 노아는 태고교회의 끝이 아니라, ‘홍수 이후를 살아갈 교회의 시작’입니다. 이 한 문장을 통해, 독자는 창세기 전반부의 큰 전환점을 분명히 인식하게 됩니다. 이제 이야기는 멸망을 향해 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보존과 지속, 그리고 새로운 교회의 전개를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536
앞선 글들에서 홍수 이전 존재하였던 교회들이 지녔던 퍼셉션에 관하여 많은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날에는 이 ‘퍼셉션’(perception)이라는 것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아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지속적인 계시의 한 형태로 상상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인간에게 본래 심겨진 어떤 것으로 여기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상상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퍼셉션은 사랑의 신앙(the faith of love)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바로 그 천적인 것이며, 보편적 천국(universal heaven) 안에는 무한한 다양성을 지닌 퍼셉션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퍼셉션이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어지는 글들에서 천국에 존재하는 주요한 퍼셉션의 종류들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As in the foregoing pages much has been said about the perception possessed by the churches that existed before the flood, and as at this day perception is a thing utterly unknown, so much so that some may imagine it to be a kind of continuous revelation, or to be something implanted in men; others that it is merely imaginary, and others other things; and as perception is the very celestial itself given by the Lord to those who are in the faith of love, and as there is perception in the universal heaven of endless variety: therefore in order that there may be among men some conception of what perception is, of the Lord’s Divine mercy I may in the following pages describe the principal kinds of perception that exist in the heavens.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는 동시에, ‘이후 전개될 매우 중요한 설명을 위한 문턱’을 형성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독자의 상태를 정확히 짚어 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퍼셉션은 더 이상 살아 있는 경험이 아니라, 개념조차 모호한 대상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퍼셉션을 오해하는 여러 방식들을 차분히 나열합니다.
어떤 이들은 퍼셉션을 마치 끊임없이 주어지는 계시처럼 생각합니다. 이는 퍼셉션을 외부에서 갑자기 주어지는 초자연적 정보로 이해하는 태도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퍼셉션을 인간에게 본래부터 심겨진 본능이나 직관 정도로 여깁니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퍼셉션이라는 말 자체를 비현실적인 상상으로 치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오해가 퍼셉션이 더 이상 지상 교회의 경험 속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것임을 암시합니다.
그는 여기서 퍼셉션의 본질을 매우 분명하게 규정합니다. 퍼셉션은 사랑의 신앙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천적인 것이라고 말입니다. 즉, 퍼셉션은 인간의 능력도 아니고, 훈련의 산물도 아니며, 타고난 감각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과의 결합 상태, 곧 사랑과 신앙의 상태 안에서 주어지는 인식입니다. 이 점에서 퍼셉션은 계시와도 다르고, 본능과도 다르며, 상상과는 더더욱 다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이 단일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천국 전체에는 끝없는 다양성을 지닌 퍼셉션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퍼셉션이 획일적인 기준이나 동일한 느낌이 아니라, 각 천적 공동체와 각 개인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주어지는 살아 있는 인식임을 뜻합니다. 앞서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미세하고 개별적’이라고 설명되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글의 중요한 전환점은, 스베덴보리가 이제 ‘설명 방식 자체를 바꾸겠다고 선언’하는 데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주로 지상 교회, 특히 태고교회의 상태를 통해 퍼셉션을 간접적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천국에 실제로 존재하는 퍼셉션의 종류들을 직접 설명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는 퍼셉션이 추상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며 질서와 구조를 지닌 인식이라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태도를 가르쳐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을 신비화하지도 않고, 도덕화하지도 않으며, 인간의 능력으로 축소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퍼셉션을 ‘주님께서 주시는 천적 질서의 일부’로 다루며, 가능한 한 오해 없이 전달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전달 방식 역시, 계시적 선언이 아니라 설명과 분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 글은 또한 독자에게 하나의 약속처럼 읽힙니다. 퍼셉션이 무엇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스베덴보리는 가능한 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그 실체를 보여 주겠다고 말합니다. 이는 퍼셉션을 회복하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퍼셉션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게 함으로써, 오늘날의 신앙이 스스로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도록 돕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AC.536은 단순한 서론이 아니라, 이후 천국론과 인식론 전체로 이어지는 중요한 연결 고리입니다. 퍼셉션이 사라진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퍼셉션이 무엇이었는지를 바르게 알게 하는 것 자체가 이미 큰 신앙적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네, 이상입니다. 전에는 AC 본문만 제공, 간간이 설명을 곁들였다면, 지금은 아예 AC 글 하나하나를 문장 단위, 표현 단위, 그리고 전반적으로 해설하고 있어 나름 한결 읽어나가기가 편하지 않으실까 싶습니다. 이 해설의 초벌은 ChatGPT가 하고, 제가 검수를 거쳐 최종 싣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론 무척 조심스럽고, 그래서 더욱더 주님의 빛 비추심을 힘써 구하게 됩니다.
그럼, 이제 이런 배경을 가지고 간략한 요약 및 정리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첫째, 노아는 ‘새로운 교회’이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등장한 ‘완전히 다른 사람’은 아닙니다.
AC.534, 535에 따르면 노아는 홍수 이전 교회들 가운데 하나로 분류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퍼셉션의 교회가 끝나버린 이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세워지는 고대교회의 출발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아가 갑자기 등장한 전혀 새로운 인간형은 아닙니다. 노아는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남은 것들’, 곧 ‘리메인스’(remains)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단절’이 아니라 ‘보존’을 통해 다음 시대를 여십니다. 퍼셉션이 사라졌다고 해서 인간을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퍼셉션 없이도 살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여신 것입니다. 노아는 더 이상 ‘보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고 붙드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배움과 붙듦의 출발점에는, 여전히 태고교회에서 남겨진 선과 진리의 리메인스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지만, 동시에 ‘주님의 끈질긴 연속성’을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남겨 두십니다. 교회가 무너질 때조차, 완전히 무너지게 두지 않으십니다.
둘째, 셈, 함, 야벳은 ‘세 아들’이 아니라 ‘세 교회의 유형’입니다.
본문은 노아가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AC.534는 분명히 말합니다. 이 이름들은 개인이 아니라, 노아 교회로부터 갈라져 나올 세 고대교회를 가리킵니다. 한 교회 안에서 세 갈래의 흐름이 동시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현실적인 그림입니다. 하나의 교회, 하나의 말씀, 하나의 복음 안에서도 사람들의 수용 방식은 같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내적 신앙으로, 어떤 이는 외적 순종으로, 어떤 이는 신앙의 외피만 붙들며 살아갑니다. 셈, 함, 야벳은 바로 이런 차이들을 대표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 세 아들이 ‘같은 날 태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분열이 시간차를 두고 생긴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잠재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노아 교회는 퍼셉션의 교회가 아니기에, 모든 사람이 동일한 내적 인식에 의해 하나로 묶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리는 필요해졌고, 그 교리를 받아들이는 방식의 차이가 곧 교회의 차이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은 오늘 교회의 모습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같은 예배, 같은 말씀, 같은 성경을 듣고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살아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차이를 주님 앞에서 어떻게 관리하느냐입니다.
셋째, 노아의 오백 세는 ‘지연’이 아니라 ‘준비의 시간’입니다.
본문은 굳이 노아의 나이를 밝힙니다. ‘오백 세 된 후에’ 아들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지나치게 늦은 출산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교회의 상태와 준비의 완성으로 봅니다.
퍼셉션의 교회는 즉각적이었지만, 노아의 교회는 축적과 형성의 교회입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억이 쌓여야 하고, 교리가 정리되어야 하며, 선과 진리를 구분하는 훈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오백이라는 수는 그런 ‘충분히 성숙된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신앙의 열매는 서두른다고 맺히지 않습니다. 주님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교회를 급히 확장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충분히 기다리시고, 충분히 다지신 후에 다음 세대를 여십니다.
오늘 본문은 조급함을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빨리 결과를 보고 싶어 하는 신앙, 빨리 열매를 증명하고 싶어 하는 태도는 노아의 길이 아닙니다. 노아는 묵묵히 준비하다가, 때가 되었을 때 비로소 다음 세대를 맞이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짧지만, 매우 깊은 선언입니다. 퍼셉션의 시대는 끝났지만, 교회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보는 신앙은 사라졌지만, 배우는 신앙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의 교회 안에서 서로 다른 세 흐름이 태어났지만, 그 모든 시작은 여전히 주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노아는 홍수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한 인물이 아니라, ‘퍼셉션 이후의 인간은 어떻게 구원받는가’에 대한 주님의 대답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 대답 위에 서 있습니다. 배우고, 붙들고, 살아내는 교회의 자리에 말입니다.
네, 창세기 이후 진도는 여기서 이렇게 잠시 멈추고, 맨 앞 첫 세 장인 창1부터 창3까지를 해설 버전으로 다음 주부터 다시 한 후, 이후 진도인 창6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우리가 AC 해설 버전 설교를 창4부터 시작한 관계로 이 부분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같은 데를 여러 번 반복하는 것에 대해 마음이 좀 불편하실 수도 있으나, 그러나 최근 한국기행에서 각 분야 장인들의 삶을 보셨듯 여기엔 주님의, 우리를 곁에서 붙드심이 있으신 줄 믿습니다. 힘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의 내면을 아르카나로 아주 깊이, 그리고 충분히 다지셔서 우리 위에 큰 빌딩을 세우시려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기초공사를 오래오래 하시는 걸 보면 말입니다.
성경 전체를 떠받치는 반석은 창세기요, 그 안에서도 첫 세 장은 반석 중의 반석입니다. 여기에 주님과 천국, 그리고 교회를 향한, 그리고 우리 인간을 향한 모든 것이 들어 있기 때문인데요, 저는 AC 일을 이 부분에서만 만 7년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부족한데요, 그러나 뭐랄까...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든든함이 생겼습니다. 요동치 않는 그 어떤 것인데요, 여러분에게도 이런 변화가 생길 줄 믿습니다.
제가 나누어드린 창1 번역 및 해설본을 곁에 두고, 읽고 또 읽고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주님이 곁에 계심을 마음으로 영으로 느끼실 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비록 한 절이지만 이 한 절 안에 담아두신 주님의 깊은 아르카나를 살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은혜와 자비를 더하심,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 아담으로 시작된 태고교회의 종말에 이번엔 노아를 준비, 인류의 소멸을 막으시고, 비록 이젠 전과는 다른 신인류가 되었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계속 주님과 연결되고 이어지게 하시는 사랑과 섭리, 경륜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주님, 이런 주님의 사랑을 저희도 본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시대든 교회든, 더 나아가 각 개인이든 주님은 우리의 최악의 상황과 상태 속에서도 한 줄기, 한 줌, 한 조각 리메인스를 찾아 그걸로 새롭게 이어가시는 것을 보면서 저희도 주님처럼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고 대신 사랑의 인내와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는 노아 이후 인류이오니 저희 역시 저희와 다른 사람들, 곧 저희 곁의 셈, 함, 야벳의 사람들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무엇을 하든지, 무슨 생각을 하든지 늘 주님처럼 사랑으로, 그리고 사랑이라는 출발점에서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을 사랑하오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