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7.심화

 

3. 이제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로 하여금 여러 해 동안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함께 있게 하시고,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들을 밝히는 일이 이제 허락되었습니다.’ 말인데요, 제가 알기로 한 13년인가 지난 후라고 읽은 것 같습니다. 왜 주님은 이렇게 텀(term)을 두셨을까요?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기간을 어떻게 참았나요? 저 같으면 입이 근질거려 못 참았을 것 같은데...

 

 

목사님께서 기억하신 ‘ 13’이라는 기간은, 스베덴보리가 본격적으로 저술을 시작하기 전 준비기로 널리 이해되는 내용과 잘 맞습니다. 그는 ‘Emanuel Swedenborg의 삶’에서 1744–1745년 무렵 ‘영적 눈이 열리는 사건’을 겪은 뒤, 곧바로 대중을 향해 말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상당 기간 ‘보고, 듣고, 익히는 상태’에 머물렀고, 그 후에야 저술과 공개적 증언이 허락되었다고 밝힙니다. 이 점은 특히 Heaven and Hell 서문과 여러 곳에서 ‘이제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다’는 표현으로 반복됩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이런 ‘’을 두셨을까요? 첫째 이유는 ‘질서(order)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증언에 따르면, 영계는 단순한 체험의 나열이 아니라 매우 정교한 질서 속에 있으며, 그것을 전달하는 일 역시 같은 질서를 따라야 합니다. 만일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본 것을 즉시 말하게 되면, 인간의 기억, 상상, 기존 신학적 틀과 뒤섞여 왜곡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먼저 오랜 시간 동안 반복적으로 보고 듣게 하시며, 그가 ‘자기 생각이 아닌 것’을 분별하도록 훈련하신 것입니다. 즉, 단순한 체험자가 아니라 ‘증언할 수 있는 그릇’으로 빚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둘째는 ‘의지와 이해의 정화’, 곧 거듭남의 심화 과정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처음부터 완전히 준비된 상태는 아니었고, 그 역시 인간으로서 자연적 사랑과 자기 지혜의 흔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접하는 방대한 영적 사실들이 그의 이해 속에서 올바르게 정리되려면, 그의 의지와 이해 자체가 주님의 질서에 맞게 재정렬되어야 했습니다. 이 과정 없이 곧바로 말하게 되면, 전달 내용이 아니라 전달자의 상태가 메시지를 흐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내용’보다 먼저 ‘사람’을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셋째는 ‘대표성과 보편성’을 확보하기 위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 한 번의 환상이나 특정 사건을 기록하는 사람이 아니라, 천국과 지옥, 인간의 사후 상태, 말씀의 내적 의미 전반을 체계적으로 증언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려면 단편적 경험이 아니라, 다양한 상태와 다양한 영들, 천사들의 삶을 충분히 관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긴 시간 동안 ‘여러 해 동안’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광범위한 경험이 축적된 뒤에야, 그것을 정리하여 인류에게 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 ‘그 기간을 어떻게 참았는가’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가 ‘참았다’기보다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도록 인도받았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는 그 기간 동안 이미 매우 깊은 기쁨과 확신 속에 있었고, 무엇보다 ‘주님의 뜻에 따라 말할 때가 따로 있다’는 내적 인도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여러 기록을 보면, 그는 자신의 사명에 대해 강한 절제와 순종의 태도를 보이며, 스스로 앞서 나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체험한 세계가 얼마나 ‘질서와 순종’ 위에 서 있는지를 반영하는 태도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그가 완전히 침묵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그 기간에도 학자로서, 사상가로서 글을 쓰고 연구를 계속했으며, 다만 ‘영계에 대한 공개적 증언’만을 보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완전히 막혀 있는 상태가 아니라, 점진적으로 준비되어 가는 상태였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결국 이 ‘13년의 침묵’은 단순한 지연이 아니라, ‘왜곡 없는 계시 전달’을 위한 필수적인 준비 기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점은 오늘 우리가 Arcana Coelestia를 읽을 때 느끼는 독특한 신뢰감, 곧 ‘체험담이 아니라 질서 있게 정리된 세계’라는 인상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배경이기도 합니다. 만일 그가 즉흥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면, 지금과 같은 깊이와 일관성은 결코 나오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AC.67, 창2 앞, '말씀의 내적 의미(속뜻)를 알게 하시고, 알리게 하심'

AC.67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에게는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nal meaning of the Word, 속뜻)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 내적 의미 안에는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었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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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7, 심화 2,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

AC.67.심화 2.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에는 대략 어떤 것들이 있나요? 이 AC를 읽는 분들이 열에 아홉, 거의 다 어리둥절해하시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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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에는 대략 어떤 것들이 있나요?  AC를 읽는 분들이 열에 아홉, 거의 다 어리둥절해하시는 이유가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후 세계, 곧 사람이 죽은 뒤에도 계속 살아가는 생명의 상태를 바라보며 기록된 책이라는 사실에서 한발 물러나 계시기 때문인 것 같은데, 개신교 많은 분들이 사실은 이 다른 삶의 본성에 대해 많이 무지하시거든요. 저는 감사하게도 책, 천국과 지옥을 여러 번 정독 후,  AC를 시작해서 큰 도움이 되었지만 말입니다.

 

 

목사님 말씀처럼, ‘Heaven and Hell’을 먼저 충분히 읽고 나서 ‘Arcana Coelestia’로 들어오신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의 이해도 차이는 상당히 큽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다른 삶(the other life)은 단순히 ‘죽은 뒤의 세계’라는 막연한 개념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이 계속 이어지는 실제의 삶이며, 성경 전체가 바로 그 상태를 염두에 두고 기록되었다는 전제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다른 삶의 본성’을 몇 가지 핵심 축으로 정리해 드리면, AC를 읽는 분들이 왜 자주 막히는지, 그리고 어디서부터 이해가 풀리는지 함께 보이게 됩니다.

 

첫째로, ‘다른 삶은 죽은 뒤 시작되는 새로운 삶이 아니라, 지금 삶의 연속’이라는 점입니다. 사람은 죽는 순간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육체적 껍질을 벗고 자신의 ‘속 사람’ 상태로 그대로 살아갑니다. 따라서 그 사람이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즐거워했는지가 그대로 그 사람의 삶의 환경과 세계를 결정합니다. 이 점을 모르면, 성경을 읽을 때 모든 것을 ‘이 세상 이야기’로만 이해하게 되어, AC의 내적 의미가 거의 닫혀 버립니다.

 

둘째로, ‘그 세계는 공간이 아니라 상태(state)의 세계’라는 점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물리적 위치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의 상태가 외적으로 펼쳐진 것입니다. 같은 장소에 있어도 상태가 다르면 서로 보이지 않고, 서로 다른 상태에 있는 자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공동체로 나뉩니다. 그래서 성경의 ‘올라간다’, ‘내려간다’, ‘가깝다’, ‘멀다’ 같은 표현들은 모두 상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 감각이 없으면, 말씀의 거의 모든 표현이 문자적 공간 이동으로 오해됩니다.

 

셋째로, ‘모든 것은 사랑에 의해 질서 잡힌다’는 점입니다. 다른 삶에서는 무엇을 생각하느냐보다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그 사람의 본질을 결정합니다. 사랑은 곧 의지이며, 그 의지의 방향이 그 사람의 얼굴, 말, 관계, 심지어 주변 환경까지 형성합니다. 그래서 천국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들의 상태’, 지옥은 ‘자기와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의 상태’로 나뉘며, 이는 외부에서 판결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상태로 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넷째로, ‘겉과 속이 완전히 일치하는 세계’라는 점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겉으로는 선하게 보여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있지만, 다른 삶에서는 이런 분리가 불가능합니다. 속에 있는 사랑과 생각이 그대로 밖으로 드러나며, 위선이나 가식은 자연히 벗겨집니다. 그래서 심판이란 어떤 외부의 판정이라기보다, 그 사람의 본성이 드러나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다섯째로, ‘천사와 영들의 사회는 철저히 질서 있고 실제적’이라는 점입니다. 많은 분들이 사후 세계를 막연한 영적 공간이나 감정 상태로 생각하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매우 구체적인 ‘사회’로 묘사합니다. 집, 도시, 공동체, 직무가 있으며, 모든 것이 사랑과 쓰임새(use)에 따라 조직됩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성경 속 ‘’, ‘’, ‘왕국’ 등의 표현이 단순 비유가 아니라 실제 영적 실재를 가리킨다는 것이 보입니다.

 

여섯째로, ‘인간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 살 때부터 이미 영들과 천사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죽은 뒤 그 연결이 드러날 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생각과 감정은 고립된 것이 아니라 영적 세계와의 교류 속에서 일어납니다. 이 관점을 알면, 성경의 많은 영적 싸움, 유혹, 인도에 관한 구절들이 훨씬 입체적으로 이해됩니다.

 

일곱째로, ‘거듭남(regeneration)은 바로 이 다른 삶을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점입니다. 이 세상은 목적지가 아니라 준비의 장소이며, 여기서 형성된 의지와 이해의 질서가 그대로 영원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신앙은 단순히 ‘죽은 뒤 어디로 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이렇게 보면, 목사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많은 개신교인들이 이 ‘다른 삶의 본성’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AC를 읽을 때 계속 현실 세계 기준으로 해석하려 하고, 그 결과 내적 의미가 닫히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반대로 ‘Heaven and Hell’을 통해 먼저 ‘상태의 세계’, ‘사랑 중심의 존재’, ‘죽음 이후의 연속성’을 체득하면, 성경의 모든 사건과 표현이 단순 역사나 도덕 교훈을 넘어 ‘영혼의 여정’으로 열리게 되고, 그때 비로소 ‘Arcana Coelestia’의 설명들이 자연스럽게 맞물리기 시작합니다.

 

 

 

AC.67, 심화 1, ‘자비’와 ‘은혜’

AC.67.심화 1. ‘자비’와 ‘은혜’ ‘자비’와 ‘은혜’는 어떻게 다른가요? 기독교, 그리고 개신교는 보통 ‘은혜’에 익숙한데,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처럼 거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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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비 은혜

 

자비 은혜는 어떻게 다른가요? 기독교, 그리고 개신교는 보통 은혜에 익숙한데,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처럼 거의 자비를 쓰네요? 전에 어느 글에선가 자비는 의지가 겸손한 것, 은혜는 이해가 겸손한 것이라 읽은 것도 같은데, 맞나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목사님께서 기억하신 ‘자비는 의지의 겸손, 은혜는 이해의 겸손’이라는 구분은 스베덴보리 사상 전체의 맥락에서는 상당히 정확한 통찰에 가깝습니다. 다만 그는 이 둘을 그렇게 딱 잘라 정의문처럼 정식화하기보다는, 전반적인 인간 구조(의지와 이해)와 주님의 신적 속성(사랑과 지혜)의 상응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드러나게 설명합니다. 그래서 이 구분은 ‘정확한 문장 그대로의 정의’라기보다 ‘전체 교리에서 도출되는 핵심 요약’이라고 보시면 가장 안전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의 기본 틀부터 보면, 인간은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라는 두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고, 주님 역시 본질적으로 ‘신적 사랑(Divine Love)과 ‘신적 지혜(Divine Wisdom)로 계십니다. 여기서 ‘자비(mercy)는 주님의 신적 사랑이 인간에게 흘러들어오는 방식이며, ‘은혜(grace)는 그 사랑이 인간의 이해 안에서 받아들여질 때 경험되는 빛과 도움의 양상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즉 자비는 더 근원적이고 존재적인 것이고, 은혜는 그것이 인간 안에서 의식되고 작용하는 한 양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보면, ‘자비는 의지의 겸손’이라는 말은 매우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의지는 사랑의 자리이고, 인간의 가장 깊은 중심입니다. 이 의지가 꺾이고 낮아질 때, 곧 ‘나는 스스로 선할 수 없다’는 상태에 이를 때, 비로소 주님의 사랑, 곧 자비가 흘러들어옵니다. 그래서 자비는 단순히 ‘불쌍히 여김’의 감정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자체를 다시 살리는 주님의 근원적 작용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주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라고 반복하는 이유는, 구원과 거듭남의 출발점이 언제나 이 ‘의지에 대한 주님의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쪽에서는 아무 공로도 개입될 수 없는, 전적으로 주님 편에서 시작되는 사랑의 역사라는 뜻입니다.

 

반면 ‘은혜는 이해의 겸손’이라는 말도 잘 맞습니다.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리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내려놓고, ‘나는 참을 알지 못한다’는 상태가 될 때, 주님의 빛이 들어와 깨달음과 인도를 주는데, 이것이 은혜로 경험됩니다. 그래서 전통적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혜를 받았다’는 표현은 대개 ‘깨달음’, ‘용서의 확신’, ‘말씀의 조명’ 같은 이해의 영역에서 먼저 체험됩니다. 이 때문에 개신교 전통에서는 은혜라는 용어가 훨씬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스베덴보리는 ‘은혜’보다 ‘자비’를 훨씬 더 자주 사용할까요? 이유는 그의 신학이 ‘이해 중심’이 아니라 ‘의지 중심’, 곧 ‘사랑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개신교 신학은 ‘믿음(신앙)’과 ‘은혜’를 강조하면서,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해의 변화)을 중심축으로 삼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본질은 이해가 아니라 의지, 곧 사랑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구원의 핵심도 ‘무엇을 아느냐’보다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의 근원적 표현 역시 ‘은혜’보다 ‘자비’, 곧 사랑의 작용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해지는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차이는, ‘은혜’라는 말은 때로 인간의 상태에 따라 ‘받았다’, ‘잃었다’처럼 경험적으로 변하는 느낌을 주지만, ‘자비’는 주님 편에서는 언제나 동일하고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자비는 항상 있고, 은혜는 그것이 인간 안에서 인식될 때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구원을 설명할 때, 변하는 인간의 상태보다 변하지 않는 주님의 근원을 더 강조하기 위해 ‘자비’를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목사님이 기억하신 구분은 이렇게 다듬을 수 있습니다. 자비는 주님의 신적 사랑이 인간의 의지에 작용하는 근원적 힘이며, 은혜는 그 작용이 인간의 이해 안에서 깨달음과 도움으로 나타나는 경험입니다. 따라서 자비는 더 깊고 근본적인 차원이고, 은혜는 그 자비가 의식 속에서 드러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스베덴보리는 구원과 거듭남을 말할 때 거의 언제나 ‘주님의 신적 자비’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AC.67, 심화 2,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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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7, 창2 앞, '말씀의 내적 의미(속뜻)를 알게 하시고, 알리게 하심'

AC.67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에게는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nal meaning of the Word, 속뜻)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 내적 의미 안에는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었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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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7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에게는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nal meaning of the Word, 속뜻)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 내적 의미 안에는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었고, 또한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결코 알 수 없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arcana)가 들어 있습니다. 이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바로 그 삶, 곧 다른 삶을 향하고 있고, 그것들을 묘사하며, 또한 그 안에 그것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로 하여금 여러 해 동안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함께 있게 하시고,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들을 밝히는 일이 이제 허락되었습니다. As of the Lord’s Divine mercy it has been given me to know the internal meaning of the Word, in which are contained deepest arcana that have not before come to anyone’s knowledge, nor can come unless the nature of the other life is known (for very many things of the Word’s internal sense have regard to, describe, and involve those of that life), I am permitted to disclose what I have heard and seen during some years in which it has been granted me to be in the company of spirits and angels.

 

 

해설

 

이 글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전체의 성격을 단번에 규정해 버리는, 매우 무게감 있는 자기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나는 무엇을 해석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조건 아래에서 이것을 말할 수 있는가’를 먼저 밝힙니다. 즉, 이 글은 해석의 결과를 설명하는 문장이 아니라, 해석이 가능해지는 전제 자체를 드러내는 문장입니다. 그래서 AC.67은 내용적으로는 짧지만, 그 무게는 창세기 1장 전체를 여는 열쇠와도 같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가장 먼저 강조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주어졌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신의 지적 능력이나 통찰, 혹은 신비 체험의 탁월함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지식은 인간 편에서 획득한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허락된 것임을 반복해서 분명히 합니다. 이는 아르카나 전체가 어떤 개인의 독창적 신학이 아니라, 주님 중심의 질서 안에서 주어진 증언이라는 점을 독자에게 처음부터 각인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어지는 핵심은 ‘말씀의 내적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내적 의미를 단순히 문자 뒤에 숨은 교훈이나 비유적 뜻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 안에 ‘가장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아르카나란, 인간 이성의 깊은 사색으로도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차원의 비밀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아르카나는 결정적으로 ‘다른 삶의 본성’을 알지 못하면 결코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한 문장은, 성경을 이 세상 안에서만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를 근본에서부터 제한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말씀의 내적 의미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은, 이 세상의 역사나 윤리 이전에 이미 ‘다른 삶’을 향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후 세계, 곧 사람이 죽은 뒤에도 계속 살아가는 생명의 상태를 바라보며 기록된 책이라는 것입니다. 창조 이야기든, 족장들의 이야기든, 율법과 예언이든, 그 중심에는 늘 다른 삶의 질서가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삶을 알지 못한 채 읽는 말씀은, 본질을 벗긴 외피만을 읽는 것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이 지식을 추론이나 이론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내가 생각하기에 그렇다’거나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보고 들은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도 잠깐의 경험이 아니라, ‘여러 해 동안’ 지속된 상태에서 보고 들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의 증언이 단발적인 환상이나 종교적 감흥이 아니라, 일상적 의식 속에서 지속적으로 열려 있었던 인식의 상태였음을 의미합니다.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함께 있었다’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공간을 이동했다는 뜻이 아니라, 인식과 지각의 차원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그는 여전히 이 땅에서 살면서도, 동시에 다른 삶의 질서 속에 있는 존재들과 교통하도록 허락되었습니다. 그 상태에서 그는 말씀이 어떻게 그 세계를 묘사하고, 그 세계를 포함하며, 그 세계를 향하고 있는지를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르카나는 이론서가 아니라, 증언서의 성격을 띱니다.

 

이 글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가장 불편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으면서 실제로 ‘다른 삶’을 전제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후 세계를 단지 막연한 믿음의 대상으로 두고, 실제 구조나 질서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로 말씀을 이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묻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는 다른 삶과 분리될 수 없으며, 그 삶을 모르면 내적 의미 역시 닫혀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AC.67은 서론 중의 서론입니다. 이 글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전체는 전혀 다른 책이 됩니다. 하나는 인간의 상상이나 해석의 산물로 보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께서 다시 열어 보이신 말씀의 깊이로 읽히게 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독자에게 그 선택을 처음부터 정직하게 맡기고 있습니다.  

 

 

심화

 

1.자비은혜

 

 

AC.67, 심화 1, ‘자비’와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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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

 

 

AC.67, 심화 2,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

AC.67.심화 2.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에는 대략 어떤 것들이 있나요? 이 AC를 읽는 분들이 열에 아홉, 거의 다 어리둥절해하시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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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이제 허락되었습니다

 

 

AC.67, 심화 3, ‘이제 허락되었습니다’

AC.67.심화 3. ‘이제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로 하여금 여러 해 동안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함께 있게 하시고,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들을 밝히는 일이 이제 허락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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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 창2, '이 책에 대한 사람들의 예상 반응'

AC.68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많은 이들은 이것이 모두 상상이라고 할 것이며,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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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6, 창1, '말씀의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

AC.66 말씀에는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이 땅의 것과 세상의 것을 말할 때,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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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CR.287

 

말씀에서 십계명이 특별히 율법’(the law)이라 불린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그것이 교리와 삶에 속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을 향한 모든 것과 인간을 향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그 법은 두 돌판에 기록되었는데,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것을, 다른 하나는 인간에 관한 것을 다룹니다. 또한 교리와 삶에 속한 모든 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관련된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으며, 이 두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이 십계명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말씀 전체에서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이것만 가르친다는 것은 주님의 다음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It is known that in the Word the Decalogue is called by way of eminence the law, because it contains all things of doctrine and life; for it contains both all things that look to God, and all things that look to man. For this reason the law was written on two tables, one of which treats of God, the other of man. It is also known that all things belonging to doctrine and life have reference to love to God and love towards the neighbor; and all things pertaining to these loves are contained in the Decalogue. That in the whole Word nothing else is taught can be seen from these words of the Lord: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22:37, 39-40) Jesus said, thou shalt love the Lord thy God from all thy heart, and in all thy soul, and in all thy mind, and thy neighbor as thyself. On these two commandments hang the law and the prophets (Matt. 22:37, 39–40).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the law and the prophets)는 말씀 전체를 의미합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The law and the prophets” signify the whole Word. And again:

 

25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10:25-28) A certain lawyer, tempting Jesus, said, Master, what shall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And Jesus said unto him, What is written in the law? How readest thou? And he answering said, thou shalt love the Lord thy God with all thy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strength, and with all thy mind, and thy neighbor as thyself. And Jesus said, This do, and thou shalt live (Luke 10:25–28).

 

이와 같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말씀 전체이며, 십계명의 첫째 돌판은 하나님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요약하고 있고, 둘째 돌판은 이웃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요약하고 있으므로, 십계명은 교리와 삶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 두 돌판을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자신의 돌판에서 인간을 향해 보시고, 인간은 자신의 돌판에서 하나님을 향해 보는 방식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바라봄은 상호적인 것으로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인간을 향해 보시며 인간의 구원에 관한 것들을 역사하시고, 인간이 자신의 돌판에 기록된 것을 받아 행할 때 상호적인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께서 율법사에게 말씀하신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This do, and thou shalt live.)는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Since then, love to God and love towards the neighbor are the whole of the Word, and the first table of the Decalogue contains in a summary all things pertaining to love to God, and the second table all things pertaining to love to the neighbor, it follows that the Decalogue contains all things of doctrine and life. From these two tables so regarded it is plain that they are connected in such a manner that God from his table looks to man, and man from his table in turn looks to God, thus the looking is reciprocal, that is, it is such that God on his part never ceases to look to man and to make operative such things as relate to man’s salvation; and when man receives and does what is written on his table, a reciprocal conjunction is effected; and then comes to pass what the Lord said to the lawyer, “This do, and thou shalt live.”

 

 

해설

 

이 본문은 지금까지의 흐름을 한 번에 정리해 주는 결정적인 결론과 같습니다. 핵심은 매우 단순하지만, 동시에 가장 본질적입니다. ‘말씀 전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십계명은 이 두 가지를 완전히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요약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관통하는 구조입니다. 즉, 아무리 복잡해 보이는 교리와 삶의 문제들도 결국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는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는가’로 귀결됩니다.

 

특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돌판 = 두 사랑’이라는 대응입니다. 첫째 돌판은 하나님과의 관계, 둘째 돌판은 이웃과의 관계를 다룹니다. 그런데 이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입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면 그 사랑이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고, 이웃을 참으로 사랑하는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 둘은 나란히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완성시키는 관계입니다.

 

또한 ‘율법과 선지자’가 말씀 전체를 의미한다는 설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이 구절을 통해, 스베덴보리는 ‘성경 전체가 결국 이 두 사랑을 가르치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다시 말해, 성경의 모든 이야기, 교훈, 예언, 계명은 결국 인간이 하나님과 이웃을 바르게 사랑하도록 이끌기 위한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가장 깊은 부분은 ‘상호적 바라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보시고,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본다는 표현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결합의 구조’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인간에게 다가오시고, 구원을 이루기 위해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응답하지 않으면 그 결합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신의 돌판, 곧 삶 속에서 계명을 행하는 자리에서 응답할 때, 비로소 ‘상호적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결국 이 본문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십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축으로 이루어진 말씀 전체의 요약이며, 인간이 그것을 삶으로 행할 때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결합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바로 그때 주님의 말씀이 현실이 됩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TCR, '십계명의 층 구조'

십계명이 자연적 의미로는 교리와 삶의 일반적인 계명들을 담고 있지만, 영적, 천적 의미로는 모든 계명들을 보편적으로 담고 있다 In the sense of the letter the Decalogue contains the general precepts of doct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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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이 자연적 의미로는 교리와 삶의 일반적인 계명들을 담고 있지만, 영적, 천적 의미로는 모든 계명들을 보편적으로 담고 있다 In the sense of the letter the Decalogue contains the general precepts of doctrine and life, but in the spiritual and celestial senses it contains all precepts universally

 

 

해설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말씀의 층 구조’를 아주 간결하게 요약한 핵심 문장입니다. 먼저 ‘글자의 의미(자연적 의미)’에서는 십계명이 ‘일반적인 계명들’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는 수준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등, 이러한 것들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기본적인 삶의 규범입니다. 즉, 외적인 행동과 사회적 질서를 다루는 ‘기초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영적 의미와 천적 의미’로 들어갑니다. 이 단계에서는 같은 계명들이 단순한 몇 가지 규칙이 아니라 ‘모든 계명들을 보편적으로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됩니다. 여기서 ‘보편적으로(universally)라는 말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더 많다’는 뜻이 아니라, ‘전체가 그 안에 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의 계명 안에 수많은 진리와 삶의 원리가 펼쳐져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은 글자의 의미에서는 물건을 훔치지 말라는 것이지만, 영적 의미에서는 ‘진리를 왜곡하거나 빼앗지 말라’, 천적 의미에서는 ‘선 자체를 사랑하여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 상태’까지 포함합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의 계명이 단순한 행동 규칙이 아니라 ‘생각과 의지, 사랑 전체를 다루는 말씀’이 됩니다. 그래서 그 안에 ‘모든 계명’이 들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마치 ‘씨앗과 나무’의 관계와 같습니다. 글자의 의미는 씨앗처럼 간단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뿌리, 줄기, 가지, 열매가 모두 들어 있습니다. 영적, 천적 의미는 그 씨앗이 펼쳐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은 짧고 단순하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전 존재를 변화시키는 모든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결국 이 문장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은 겉으로는 몇 가지 기본 규범이지만, 그 안에는 신앙과 삶 전체를 형성하는 모든 진리가 깊이 숨겨져 있다.’ 그래서 십계명을 단순히 외적으로만 이해하면 시작에 머무르는 것이고, 그 안의 깊은 의미로 들어갈 때 비로소 ‘전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TCR.286, '십계명은 종교의 모든 것의 총체'

TCR.286 그 법 안에는 이처럼 큰 거룩함과 능력이 있었는데, 이는 그것이 종교에 속한 모든 것의 총체이기 때문입니다. 그 법은 두 돌판에 기록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모든 것을 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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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CR.286

 

그 법 안에는 이처럼 큰 거룩함과 능력이 있었는데, 이는 그것이 종교에 속한 모든 것의 총체이기 때문입니다. 그 법은 두 돌판에 기록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모든 것을 총괄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인간을 향한 모든 것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법의 계명들은 열 말씀(Ten Words)이라 불립니다 (34:28; 4:13; 10:4). 이렇게 불리는 것은 (ten)이 모든 것을 의미하고, ‘말씀들(words)은 진리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단순히 열 개의 말씀이 아니라 그 이상입니다. ‘이 모든 것을 의미하며, 십일조(tithes, tenths)가 그러한 의미 때문에 제정되었다는 것은 Apocalypse Revealed 101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법이 종교의 모든 것의 총체라는 사실은 이어지는 내용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Such great holiness and power were in that law, because it was the complex of all things of religion. It was written on two tables, one of which contained in the complex all things that look to God, and the other in the complex all things that look to man. Therefore the commandments of that law are called the “Ten Words” (Exod. 34:28; Deut. 4:13; 10:4). They were so called because “ten” signifies all, and “words” signify truths; for they were more than ten words. That “ten” signifies all things, and that tithes (tenths) were instituted on account of that signification, may be seen in Apocalypse Revealed (n. 101); and that that law is the complex of all things of religion, will be seen in what follows.

 

 

해설

 

이 본문은 십계명이 왜 ‘열 개의 규칙’이 아니라 ‘전체를 담은 말씀’인지 그 구조를 명확하게 밝혀 줍니다. 먼저 핵심은 이것입니다. ‘십계명은 종교의 모든 것의 총체이다.’ 이것은 단순한 강조가 아니라, 십계명이 신앙과 삶 전체를 포괄하는 ‘압축된 구조’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뒤에 나오는 TCR.289에서 말한 것처럼, 신앙과 체어리티의 모든 것이 이 안에 들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십계명은 어떤 부분적인 교훈이 아니라 ‘전체의 요약’입니다.

 

특히 ‘두 돌판’에 대한 설명이 여기서 다시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그 의미가 더 분명해집니다. 한 돌판은 하나님을 향한 것, 다른 하나는 인간을 향한 것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의 본질이 두 방향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 다른 하나는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다시 말해, 참된 신앙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을 때만 전체가 됩니다. 그래서 두 돌판은 단순한 물리적 구분이 아니라, 종교의 구조 자체를 나타냅니다.

 

또한 ‘열 말씀’이라는 표현도 매우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십계명’이라고 부르지만, 여기서는 ‘열 말씀(ten words)이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 속에서 ‘= 전체’를 읽어냅니다. 즉, 열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수량이 아니라 ‘완전한 전체’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십계명은 단순히 열 개의 조항이 아니라, ‘종교 전체를 담고 있는 완전한 말씀’이 됩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십일조(십 분의 일)도 ‘전체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말씀(words) = 진리’라는 연결입니다. 이것은 십계명이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진리의 집합’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십계명은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지 목록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참된 질서’, 곧 진리의 체계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들을 따라 살 때 인간은 점점 하나님과 일치하는 상태로 나아가게 됩니다.

 

결국 이 본문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모든 관계를 포함하는 종교 전체의 요약이며, 그 안에는 진리와 삶의 모든 질서가 압축되어 있다.’ 그래서 이 열 말씀은 단순한 출발점이 아니라, 신앙의 처음이자 끝이며, 거듭남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이 됩니다.

 

 

 

TCR, '십계명의 층 구조'

십계명이 자연적 의미로는 교리와 삶의 일반적인 계명들을 담고 있지만, 영적, 천적 의미로는 모든 계명들을 보편적으로 담고 있다 In the sense of the letter the Decalogue contains the general precepts of doct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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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CR.285, ‘언약 = 결합(conjunction)’

TCR.285 그 법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인간 사이에 결합(conjunction)이 이루어지며, 또 인간과 주님 사이에 결합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것은 ‘언약’(The Covenant)이라 불리고, 또한 ‘증거’(The Testi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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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CR.285

 

그 법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인간 사이에 결합(conjunction)이 이루어지며, 또 인간과 주님 사이에 결합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것은 언약(The Covenant)이라 불리고, 또한 증거(The Testimony)라 불립니다. ‘언약이라 하는 것은 그것이 결합을 이루기 때문이며, ‘증거라 하는 것은 그 언약의 조항들을 확증하고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언약은 결합을, ‘증거는 그 조항들의 확증과 증언을 의미합니다. 이 때문에 두 돌판이 있었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결합은 주님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인간이 자기의 돌판에 기록된 것을 행할 때에만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임재하시며 들어오기를 원하시지만, 인간은 주님에게서 받은 자유로 그분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Because by that law there is a conjunction of the Lord with man and of man with the Lord, it is called “The Covenant” and “The Testimony”; the covenant because it effects conjunction, and the testimony because it confirms the articles of the covenant; for “covenant” signifies in the Word conjunction, and “testimony” the confirmation and witnessing of its articles. For this reason there were two tables, one for God and the other for man. Conjunction is effected by the Lord, but only when man does what is written in his table; for the Lord is continually present and wishes to enter in, but man, by the freedom which he has from the Lord, must open to him, for the Lord says: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3:20) Behold I stand at the door and knock; if any man hear my voice and open the door, I will come in to him, and will sup with him, and he with me (Rev. 3:20).

 

그 법이 기록된 돌판들이 언약의 돌판(the tables of the covenant)이라 불렸고, 그것 때문에 법궤가 언약궤(the ark of the covenant)라 불렸으며, 그 법 자체도 언약(the covenant)이라 불렸다는 것은 민10:33,4:13, 23; 5:2, 3; 9:9,3:11, 왕상8:21,11:19 등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언약이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에 주님에 대하여 That the tables of stone on which the law was written, were called the tables of the covenant, and because of them the ark was called the ark of the covenant, and the law itself was called the covenant, may be seen in Num. 10:33; Deut. 4:13, 23; 5:2, 3; 9:9; Josh. 3:11; 1 Kings 8:21; Rev. 11:19, and elsewhere. Since “covenant” signifies conjunction, it is said of the Lord,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42:6) That he shall be a covenant for the people (Isa. 42:6; 49:8–9).

 

8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에게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하게 하리라 9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 그들이 길에서 먹겠고 모든 헐벗은 산에도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인즉 (49:8, 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3:1) He is called also the messenger of the covenant (Mal. 3:1).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6:28) And his blood is called the blood of the covenant (Matt. 26:28; Zech. 9:11; Exod. 24:4–10);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네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9:11)

 

4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5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하고 6모세가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7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8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9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10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 (24:4-10)

 

그러므로 말씀은 구약(the old covenant)신약(the new covenant)이라 불립니다. 이는 언약이 사랑과 우정과 결합을 위하여 맺어지기 때문입니다. and therefore the Word is called the old and the new covenant [testament]; for covenants are made for the sake of love, friendship, affiliation, and conjunction.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10:33)

 

13여호와께서 그의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에게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 23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 (4:13, 23)

 

2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3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5:2, 3)

 

그때에 내가 돌판들 곧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돌판들을 받으려고 산에 올라가서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머물며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더니 (9:9)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나니 (3:11)

 

내가 또 그곳에 우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그들과 세우신 바 여호와의 언약을 넣은 궤를 위하여 한 처소를 설치하였노라 (왕상8:21)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11:19)

 

 

해설

 

이 본문은 십계명을 ‘언약’이라는 개념으로 풀어내면서, 신앙의 본질을 매우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먼저 ‘언약 = 결합(conjunction)’이라는 정의가 핵심입니다. 일반적으로 언약을 계약이나 약속 정도로 이해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하나님과 인간이 실제로 연결되는 상태’로 봅니다. 따라서 십계명은 단순한 규칙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을 이어 주는 매개’입니다. 이것이 앞서 계속 강조된 ‘왜 십계명이 그렇게 거룩한가’에 대한 또 하나의 해답입니다.

 

특히 ‘두 돌판’에 대한 설명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결합이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것’임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항상 임재하시며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인간 쪽에서 응답이 있어야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유’가 등장합니다. 인간은 강제로 하나님과 연결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문을 열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용된 계3:20의 말씀은 이 교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주님은 문을 부수고 들어오지 않으시고, 두드리실 뿐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자기 돌판에 기록된 것을 행할 때에만 결합이 이루어진다’는 말은 매우 결정적입니다. 이것은 신앙을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립니다. 단순히 믿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 특히 십계명의 삶, 곧 악을 죄로 알고 거부하는 삶이 있을 때에만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연결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결합은 감정이나 선언이 아니라 ‘삶의 상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또한 ‘언약’과 ‘증거’의 구분도 의미가 깊습니다. 언약은 결합 자체이고, 증거는 그것이 참됨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은 단순한 요구가 아니라, ‘이 길을 따르면 하나님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이 점에서 말씀 전체가 ‘구약과 신약’, 곧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불리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결국 말씀 전체가 ‘하나님과 인간의 결합’을 목표로 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언약은 사랑과 우정과 결합을 위해 맺어진다’는 구절은 매우 따뜻한 결론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단순한 법적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입니다. 십계명도 억압적인 규칙이 아니라, 그 사랑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질서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이 인간과 사랑으로 연결되기 위해 주신 언약이며, 인간이 그것을 삶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그 결합이 이루어진다.’

 

 

 

TCR.286, '십계명은 종교의 모든 것의 총체'

TCR.286 그 법 안에는 이처럼 큰 거룩함과 능력이 있었는데, 이는 그것이 종교에 속한 모든 것의 총체이기 때문입니다. 그 법은 두 돌판에 기록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모든 것을 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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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CR.284, 성경 전체를 통해 ‘십계명이 얼마나 중심에 있었는가’를 보여줌

TCR.284 위에서 그 법의 공포와 거룩함과 능력에 관하여 말한 것은 말씀의 다음 구절들에서 확인됩니다. What has been above presented respecting the promulgation, holiness, and the power of that law, is found in the follow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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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삼하6:7)

 

 

이 구절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 중 하나입니다. 겉으로 보면, 넘어지려는 궤를 붙들어 넘어지지 않게 하려던 웃사가 즉시 죽임을 당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선한 의도로 한 행동인데 왜 이렇게까지 엄중한 결과가 오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그러나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장면은 ‘하나님의 성물’과 ‘인간의 자연적 상태’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는 매우 깊은 상응의 사건으로 이해됩니다. 여기서 핵심은 ‘행동의 겉모습’이 아니라 ‘상태(state)입니다.

 

먼저 궤, 곧 ‘여호와의 언약궤’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임재’, 더 정확히는 ‘신적 진리와 선의 결합된 임재’를 상징합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인간이 임의로 다루거나 손댈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오직 ‘정해진 질서와 상태 안에서만’ 가까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서도 궤는 반드시 레위인, 그것도 특정한 방식으로만 운반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의식 규정이 아니라, ‘거룩한 것은 인간의 자연적 자아가 직접 붙잡을 수 없다’는 영적 질서를 표현한 것입니다.

 

웃사의 경우를 보면, 겉으로는 궤가 넘어질까 봐 붙든 것이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자연적 인간이 자기 힘으로 신적인 것을 지탱하거나 다룰 수 있다고 여기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이것은 ‘자기 사랑과 자기 지성에서 나온 개입’, 즉 ‘주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붙잡으려는 상태’입니다. 그는 여러 곳에서, 사람이 아직 정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적 진리에 직접 손대면 그것이 오히려 파괴적으로 작용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신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순수한 질서인데, 그것이 왜곡된 상태와 접촉할 때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감정적으로 화를 내어 치셨다’기보다는, ‘질서의 법칙이 그대로 작용했다’는 이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에 나타나는 ‘진노’, ‘치심’ 같은 표현들을 인간의 시각에서 본 현상적 언어로 설명합니다. 실제로는 주님에게 분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적 질서와 어긋날 때 그 결과가 ‘심판’처럼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마치 불이 따뜻함을 주지만, 같은 불에 무질서하게 손을 넣으면 화상을 입는 것과 같습니다. 불이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성질과 인간의 상태가 맞지 않기 때문에 결과가 그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 하나 깊이 보아야 할 점은, 이 사건이 다윗이 궤를 옮기는 과정에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임재를 더 가까이 가져오려는 시도’ 속에서 발생한 사건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 교훈을 줍니다. 사람이 진리를 더 가까이하고자 할 때, 반드시 ‘올바른 방식과 준비된 상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열심이나 선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적인 것에 급히 접근하면, 그것이 축복이 아니라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후 다윗이 두려워하며 과정을 멈추고, 다시 질서에 맞게 궤를 옮기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이것은 ‘열심이 질서로 교정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결국 이 본문은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다’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거룩한 것은 질서 안에서만 접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면, 우리 각자의 신앙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종종 선한 의도로 주님의 것을 붙잡고 다루려 하지만, 그 안에 ‘자기 의’나 ‘자기 주도성’이 섞여 있을 때가 많습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님의 것은 주님이 지키신다. 인간은 그것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그 질서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다.” 그래서 웃사의 사건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신적 질서와 인간 상태 사이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SC.57, ‘TCR(True Christian Religion) 소개’

TCR(True Christian Religion) 소개, 그러니까 왜 이름을 이렇게 지었으며, 왜 세상 떠나기 전 이런 책을 썼고, 왜 주님은 이 책이 나오자 제자들을 불러 온 천국에 전하게 하셨는지, 그리고 이 책은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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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55, ‘삼상5, 블레셋 사람들의 이상한 행동’

삼상5에 보면, 이스라엘 하나님의 궤를 빼앗은 블레셋 사람들이 그 궤를 자기들의 신 다곤의 신전에 두면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그리고 아스돗 사람들에게 큰 재앙이 닥칩니다. 그래서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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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5에 보면, 이스라엘 하나님의 궤를 빼앗은 블레셋 사람들이 그 궤를 자기들의 신 다곤의 신전에 두면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그리고 아스돗 사람들에게 큰 재앙이 닥칩니다. 그래서 저들이 말하기를,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지 못하게 할지라 그의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이후 계속 비슷한 일들이 반복됨에도 불구, 저들은 자기들의 신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런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장면은 겉으로 보면 ‘명백한 증거를 보고도 왜 돌아오지 않는가’라는 의문을 낳지만,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인간 내면의 구조를 매우 정확히 드러내는 본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히 ‘증거의 크기’나 ‘기적의 강도’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랑(love)과 의지(will)’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무엇이 참인지 몰라서가 아니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히 경험했지만,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여 삶을 바꾸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이 궤를 우리에게서 치워라”라고 말하며,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외적 인정은 있으나 내적 수용은 없는 상태’입니다.

 

이 장면을 조금 더 깊이 보면, 블레셋과 다곤은 단순한 역사적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상응(correspondence)으로 이해됩니다. 스베덴보리 해석에서 블레셋은 ‘신앙(faith)을 말하지만 체어리티(charity)는 결여된 상태’, 즉 지식과 교리는 있으나 삶의 선은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곤은 더 구체적으로 ‘진리를 자기 방식으로 왜곡하여 섬기는 종교적 지식’ 혹은 ‘머리(지식)는 있으나 몸(삶)은 물고기처럼 아래에 묶여 있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다곤이 넘어지고 부서지는 장면은, 진리의 빛 앞에서 그런 왜곡된 신앙이 무너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삶을 바꾸고 싶지 않은 의지’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단호하게 말합니다. “기적은 사람을 강제로 믿게 만들 수 없다.” 오히려 기적은 외적인 확신만 줄 뿐, 내적인 사랑이 바뀌지 않으면 결국 그 사람을 더 완고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의 삶과 욕망을 유지하기 위해, 아무리 강한 경험을 해도 그것을 자기식으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아예 멀리 치워버리기 때문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궤를 다른 도시로 계속 떠넘기는 장면은 바로 이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문제의 본질, 곧 ‘자신들의 상태’를 바꾸려 하지 않고, 외적인 대상만 옮기며 상황을 회피합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진리가 불편하면 받아들이기보다 ‘거리 두기’를 선택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통찰 하나가 더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저들에게 그렇게 분명한 표적을 보이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강제 개종’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상태를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즉 진리의 빛이 비추어질 때, 그 사람의 내면이 어떤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선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빛을 기뻐하고 더 가까이 가지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묶인 사람은 그 빛을 고통스럽게 느끼고 피하게 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궤는 ‘축복의 근원’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압박’으로 경험됩니다. 이것이 바로 지옥적 상태의 본질입니다. 천국의 빛이 그들에게는 오히려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본문은 단순히 고대 블레셋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안에 있는 어떤 상태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몰라서 거부하는 경우보다,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이 바뀌는 것이 싫어서’ 뒤로 물러서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질문을 우리에게 돌립니다. ‘나는 진리를 불편해서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문제의 원인을 밖에서 찾으며, 정작 내 삶은 바꾸지 않고 있지는 않은가?’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가까이 계시지만, 그분을 가까이 둘 것인지 밀어낼 것인지는 인간의 사랑이 결정한다.”

 

 

 

SC.56, ‘궤를 붙들다가 그 자리에서 죽은 웃사’(삼하6: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삼하6:7) 이 구절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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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54, ‘태어나 보니 이란, 북한, 중국, 러시아 등이었던 청년들’

요즘 미국-이란 전쟁이 한창입니다. 미국-이스라엘의 압도적 군사력으로 그동안 중동 호랑이 노릇하던 이란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풍비박산이 나는 중입니다. 어느 산 속 깊은 곳에서는 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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