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IS.002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알라에게는 동등한 존재도, 신적 아들도 없다’ - 신적 아들 됨과 하나님의 본질

 

해설

이슬람은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시며, 그분에게는 동등한 존재도 없고 어떤 신적 아들도 있을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꾸란 112:1–4는 하나님이 한 분이시고, 모든 존재가 그분께 의존하지만 그분은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으시며, 누구를 낳지도 않으셨고 누구에게서 태어나지도 않으셨으며, 그분과 동등한 존재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꾸란 19:35 역시 하나님이 아들을 두신다는 것은 그분의 존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며, 4:171은 예수를 메시아이자 하나님의 사도로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주장을 거부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하나님의 절대적 유일성을 강조하는 ‘타우히드’(tawhid)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인정할 수 있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한 별개의 신적 존재는 없으며, 신성은 여러 신에게 나뉘거나 분배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슬람이 이러한 진리에서 출발하여 신적 아들 됨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별도로 검토해야 할 문제입니다.

 

먼저 이슬람이 부정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슬람은 하나님이 인간처럼 자녀를 낳으신다는 생각을 거부할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신성을 인정하는 기독교의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통 기독교 역시 하나님이 육체적인 방법으로 아들을 낳으셨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양자의 차이를 단순히 하나님에게 생물학적인 아들이 있는가 하는 문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문맥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고(출4:22),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립니다(요1:12).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때에는 그분의 탄생과 신성,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더욱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됩니다. 결국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하나님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신적 존재를 뜻하는가, 아니면 한 분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방식을 뜻하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의 교리’(Doctrine of the Lord, DL, 1763) 19항에서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은 주님이 세상에 오실 때 입으신 인성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영원 전부터 성부와 구별되어 존재하는 또 하나의 아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영원부터 계셨다고 가르칩니다. 눅1:35에서 천사는 마리아에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근거로 주님의 인성이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잉태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린다고 설명합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92항에서도 세상에 오시기 위해 하나님이 입으신 인성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은 여호와와 나란히 존재하는 별개의 신적 인격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입으신 인성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전통적인 기독교의 신적 아들 이해와 구별하여 강조하는 핵심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이슬람의 문제 제기와 흥미로운 접점을 가지면서도 결정적인 차이를 드러냅니다. 이슬람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지키기 위해 신적 아들의 존재를 거부하고, 스베덴보리 역시 하나님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또 하나의 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인간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주님이 지상 생애의 시험과 승리를 통하여 마리아에게서 받으신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주의 교리’ DL.59에서는 주님이 어머니에게서 받은 인간적인 것을 벗으시고 신적 인성을 입으셨다고 하며, DL.60에서는 주님 안의 하나님과 인간이 영혼과 몸처럼 둘이 아니라 한 인격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인간의 거듭남과 주님의 영화는 구별해야 합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 거듭나지만, 그 인성 자체가 신성이 되지는 않습니다. 반면 주님은 자신의 신적 능력으로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육신과 영화는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이 된 사건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인간으로 오셔서 그 인성을 신성과 완전히 하나 되게 하신 사건입니다.

 

이 점에서 이슬람의 신적 아들 부정에 담긴 진리와 오류의 경계가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에게 그분과 동등한 별개의 신적 존재가 없다는 가르침은 참됩니다. 또한 하나님이 피조물의 방식으로 자녀를 낳으시거나, 어떤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신성을 얻어 하나님과 동등하게 된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것도 옳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인성을 입으실 수 없다는 결론으로 나아간다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중요한 진리를 부정하게 됩니다. 성육신은 인간이 하나님으로 높아진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요1:14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선언하고, 골2:9는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들에 비추어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 외에 또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이 아니라, 신적 인성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슬람의 교리적 한계는 하나님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한 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하셨다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신성을 인정하는 일과 인간의 구원을 판단하는 일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318–328항에서 기독교 밖의 사람들도 자신이 알고 있는 종교적 진리에 따라 선하게 살아왔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으며 정직과 자비를 실천하고, 악을 피하며,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아가는 무슬림의 내적 생명을 우리가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것이 이슬람과 기독교의 교리가 동일하게 참되다거나, 주님의 신성을 인정하는 것과 부정하는 것이 아무 차이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교리적 진리의 충만함과 그 교리를 믿는 사람의 내적 상태는 서로 구별해야 합니다. 주님은 각 사람이 어떤 진리를 알고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사랑하고 삶으로 실천했는지를 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슬람의 신적 아들 부정이라는 교리를 성경과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 비추어 분별할 수 있지만, 그 교리를 믿는 개별 인간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판단은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이 문제는 기독교인 자신의 신앙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면서 실제로는 그분을 성부 하나님보다 낮은 또 하나의 신적 존재처럼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각각 독립된 인격으로 생각하면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고백하는 데 머물고 있지는 않습니까? 스베덴보리는 참된 신적 일체성이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주님은 요14:9에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외에 또 다른 하나님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를 안다고 해서 신앙이 완성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신성을 인정하는 참된 믿음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따라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며,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결국 이슬람의 ‘신적 아들’ 부정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중요한 질문은 단순히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는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정확히 누구이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분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예배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인간으로 오셨으며, 그 인성을 영화롭게 하여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하나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IS.002 해설)

 

요약

이슬람이 하나님에게 동등한 별개의 신적 존재가 없으며, 하나님이 피조물처럼 자녀를 낳으시는 분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것은 참된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신적 아들 됨과 성육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교리적 오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별개로 존재하는 또 하나의 신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세상에 오시기 위해 입으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참된 신적 일체성은 성육신을 부정하는 데서가 아니라,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하나임을 인정하는 데서 온전히 이해됩니다.

 

 

 

IS.003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유일성을 올바르게 나타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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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001. ‘알라는 오직 한 분이며, 그분 외에는 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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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IS.001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알라는 오직 한 분이며, 그분 외에는 신이 없다’ - 유일신 신앙과 신적 일체성

 

해설

이슬람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고백은 ‘알라는 오직 한 분이며, 그분 외에는 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의 숫자가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은 유일하시고, 어떤 존재와도 비교할 수 없으며, 모든 피조물은 그분께 의존하지만 그분은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신적 유일성의 교리를 ‘타우히드’(tawhid)라고 합니다. 꾸란 112:1-4은 하나님이 한 분이시며, 누구를 낳지도 않으셨고, 누구에게서 태어나지도 않으셨으며, 그분과 동등한 존재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슬람은 이를 근거로 하나님 외의 어떤 존재도 궁극적인 예배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인정할 수 있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신성은 나뉘거나 여러 신에게 분배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알라’(Allah)라는 이름 자체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알라는 아랍어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며, 아랍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을 이렇게 부릅니다. 따라서 이슬람은 알라를 믿고, 기독교는 전혀 다른 이름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식의 구별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같은 말로 하나님을 부른다고 해서 두 종교의 하나님 이해가 동일한 것도 아닙니다. 이슬람은 하나님의 절대적 유일성과 초월성을 강조하면서 신적 아들 됨과 성육신을 거부합니다. 반면 기독교는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심을 고백하면서도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핵심적인 차이는 하나님의 이름이나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한 분 하나님은 누구시며, 어떻게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는가?’라는 질문에 있습니다.

 

성경 역시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신6:4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라고 선언하며, 사45:5는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8–9항에서 하나님이 계시며, 그분이 한 분이시라는 인식이 인간의 영혼에 신적으로 유입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9항에서는 이슬람 신자들도 한 분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명시합니다. 이것은 이슬람의 유일신 고백을 단순히 기독교 밖의 잘못된 주장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근거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진리는 특정 종교가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보편적 신적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 분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하는 것과 그분의 본성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서로 구별해야 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스베덴보리 역시 전통적인 기독교의 삼위일체 이해를 비판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주의 교리’(Doctrine of the Lord, DP, 1764) 54–60항에서 하나님은 본질에서뿐 아니라 인격에서도 한 분이시라고 설명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서로 독립된 세 신적 인격으로 이해하면서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고백하면, 실제 생각 속에는 세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문제의식은 이슬람의 삼위일체 비판과 일정 부분 만납니다. 그러나 두 입장의 결론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슬람은 신적 아들 됨과 성육신을 거부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인간으로 오셨으며 그분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칩니다. 성부는 주님 안의 신성 자체이고, 성자는 그분의 신적 인성이며, 성령은 그분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입니다. 이것들은 서로 다른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신적 삼위입니다.

 

이 차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슬람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친밀함, 자비와 영적 교제를 강조하므로, 그 신앙을 단순히 멀리 계신 절대자에 대한 복종으로만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실 뿐 아니라 인간이 알고 사랑하며 다가갈 수 있도록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사실입니다. 요1:14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선언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것은 하나님과 별개의 신적 존재가 인간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인성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지상 생애의 시험과 승리를 통하여 그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또 하나의 신이 아니라,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바로 그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유일신 신앙에는 분명한 진리가 있으면서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중요한 신학적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 외의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은 참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예배하는 것은 또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적 인성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요10:30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시고, 요14:9에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러한 신적 일체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근거입니다. ‘주의 교리’ DP.60 역시 하나님과 인간이 주님 안에서 둘이 아니라 한 인격을 이룬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신학적 한계는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강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한 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하셨다는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교리의 한계를 분별하는 것과 그 종교에 속한 사람들의 구원을 판단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318–328항에서 기독교 밖에 있는 사람들도 자신이 알고 있는 종교에 따라 선하게 살아왔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참된 기독교’ TCR.832에서는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인정하고, 종교적 신념에 따라 정의를 사랑하며, 선을 행하는 이슬람 신자들의 천국에 관하여 직접 언급합니다. 물론 그 설명에서도 주님에 대한 인정이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따라서 이 가르침을 모든 종교의 교리가 동일하게 참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살고, 이웃을 돕고, 악을 피하며,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아가는 무슬림을 단순히 기독교의 교리를 고백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정죄해서도 안 됩니다. 교리의 진위는 분별하되, 개별 인간의 내적 상태와 영원한 운명은 오직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이 첫 번째 문항은 기독교인 자신에게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고 고백하면서 실제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서로 다른 세 신처럼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삶에서는 자기 자신과 세상의 이익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유일신 신앙은 하나님의 숫자를 하나라고 고백하는 데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한 분 하나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그분의 계명을 따라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완성됩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유일신 고백에 담긴 진리는 존중해야 하지만, 신적 일체성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성육신하신 주님을 아는 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입니다. 결국 이 문항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은 ‘하나님은 몇 분이신가?’가 아니라, ‘내가 믿고 예배하는 그 한 분 하나님은 누구시며, 나는 그분을 얼마나 참되게 알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가?’입니다. (IS.001 해설)

 

요약

이슬람의 유일신 고백은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시라는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 한 분 하나님은 성육신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부·성자·성령은 그분 안에 있는 신적 삼위입니다. 이슬람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인정하면서도 성육신과 주님의 신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교리적 한계를 지닙니다. 다만 이러한 신학적 차이를 이유로 이슬람 신자 개인의 내적 신앙이나 구원을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IS.002 ‘알라에게는 동등한 존재도, 신적 아들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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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PR.007 | 개신교인(Protestants)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착하게 사는 것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구원에서 훨씬 중요하다’ - 믿음과 선한 삶은 비교할 대상인가, 하나의 영적 생명인가?

 

해설

개신교 신앙에서 ‘착하게 사는 것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구원에서 훨씬 중요하다’는 말은 매우 익숙한 신앙 표현입니다. 교회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 온 사람이라면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거나 ‘구원은 착한 행실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여러 차례 들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인간이 자신의 도덕적 성취나 선행을 근거로 구원의 자격을 얻을 수 없으며, 구원의 유일한 근원이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어떤 신자는 믿음과 선한 삶을 마치 서로 경쟁하는 두 가지 구원의 조건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일은 영원한 생명을 결정하는 본질적인 문제이고, 착하게 사는 일은 그보다 중요성이 낮은 도덕적인 문제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이웃을 해치고 자신의 악을 고치려 하지 않는 사람과,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양심에 따라 정직하고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비교하면서, 전자는 구원받았지만 후자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쉽게 판단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질문은 단순히 믿음과 선행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며, 선하게 산다는 것은 영적으로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둘을 서로 경쟁하는 구원의 조건으로 이해하지 않고, 참된 믿음과 참된 선이 결합하여 하나의 영적 생명을 이룬다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먼저 전통적인 개신교의 믿음과 선행에 관한 가르침을 정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인간이 자신의 행위나 공로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해 구원받는다고 강조해 왔습니다. 엡2:8-9는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롬3:28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말씀은 인간이 자신의 도덕적 성취를 구원의 근거로 삼을 수 없다는 중요한 진리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개신교가 참된 믿음과 선한 삶을 서로 분리하여 가르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6장 2항은 선행을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의 열매와 증거로 설명하며, 제16장 3항은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이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에게서 온다고 가르칩니다. 같은 장 7항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행위도 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일 수 있고 자신과 타인에게 유익할 수 있지만, 신앙의 근원과 목적이라는 측면에서는 영적으로 부족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개신교의 공식적인 입장을 ‘예수님만 믿으면 착하게 살 필요가 없다’는 주장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부정확합니다. 다만 실제 신앙생활에서 믿음과 선행을 설명할 때, 믿음은 구원에 직접 관계되지만 선행은 부차적인 문제라는 인식이 형성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검토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우선순위의 설정 자체입니다. 참된 믿음과 참된 선한 삶이 본래 하나를 이루는 것이라면,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구원에서 더 중요하다고 비교하는 방식부터 다시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주님을 믿는 일이 구원에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요3:16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며,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요14:6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자신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근원은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선행이 아니라 오직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신을 믿는 일이 실제 삶과 분리되어도 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마7:21에서는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가르치십니다. 또한 요14:15에서는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의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며, 요15:12에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 마25:31-46의 양과 염소에 관한 말씀에서도 주님께서는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나그네를 영접하며, 병든 사람과 옥에 갇힌 사람을 돌아보는 삶을 중요하게 다루십니다. 물론 이러한 본문들만으로 믿음과 행위에 관한 모든 신학적 논쟁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주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생명이 그분을 향한 신앙고백과 무관한 외적인 선행만을 뜻하지 않는 것처럼, 실제적인 사랑과 선한 삶이 없는 신앙고백만을 뜻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삶의 교리’(Doctrine of Life, DL, 1763) DL.1에서 모든 종교는 삶에 관계되며, 종교적인 삶의 본질은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선을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거나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도덕적인 행동을 많이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삶은 그가 사랑하는 것에 따라 형성되며, 그 사랑이 실제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무엇을 믿는다고 고백하는가와 그가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행하는가는 서로 무관하지 않습니다. DL.2에서는 사람이 말씀을 읽으면서 종교가 실제 삶에 관계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설명하며, DL.9에서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참으로 선한 일을 할 수 없다는 중요한 원리를 밝힙니다. 이 두 가르침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종교의 생명은 선을 행하는 데 있지만, 그 선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선한 삶을 강조한다고 해서 인간이 스스로 착한 사람이 되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선은 주님에게서 오며, 인간은 그 선을 자신의 자유 안에서 받아들여 실제로 살아가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과 ‘착하게 사는 것’을 서로 경쟁시키는 질문은 본래 하나를 이루어야 할 두 가지를 분리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 주님을 참되게 믿는 사람은 그분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가 자신의 의지 안에서 선과 결합하도록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336에서 더욱 분명하게 설명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고대인들이 믿음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인가를 두고 논의했다고 전하면서, 믿음의 진리는 시간적으로 먼저이지만 체어리티의 선은 목적에서 먼저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무엇이 옳은지 먼저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해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진리와 믿음은 시간적으로 앞섭니다. 그러나 인간이 진리를 배우는 궁극적인 목적은 단순히 더 많은 지식을 갖거나 올바른 교리를 설명할 수 있게 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진리를 사랑하고 실제로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성전과 집을 짓는 일, 정원을 가꾸는 일, 밭을 경작하는 일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성전을 지을 때 기초를 놓고 벽을 세우는 일이 먼저 이루어지지만, 그 모든 작업의 목적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습니다. 밭을 경작할 때 땅을 고르고 씨를 뿌리는 일이 먼저 이루어지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열매를 얻는 데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먼저 진리를 배우고 믿음을 형성하지만, 그 모든 과정의 목적은 선을 사랑하고 실천하는 영적 생명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이 시간적으로 먼저라고 해서 체어리티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한 것은 아니며, 체어리티가 목적에서 먼저라고 해서 주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불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TCR.355-361에서는 믿음과 체어리티가 서로 분리되면 어느 것도 참된 영적 생명을 가질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TCR.362-367에서는 주님과 체어리티와 믿음이 인간 안에서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과 체어리티가 단순히 서로 협력하는 두 가지 종교적 활동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믿음은 진리와 관계되고, 체어리티는 선과 관계되며, 진리와 선은 인간의 이해와 의지 안에서 결합하여 하나의 영적 생명이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주님께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믿는다면, 그에게는 사랑에 관한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의 이웃을 속이거나 해치는 일을 즐거워하면서도 그 행동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면, 그 진리는 아직 그의 의지 안에서 선과 결합하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이기심과 거짓을 멀리하며, 이웃에게 유익한 일을 행하려 노력한다면 그 진리는 그의 삶 안에서 살아 있는 믿음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과 체어리티는 별도로 보관해 놓았다가 어느 하나를 구원의 조건으로 선택하는 두 가지 요소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진리와 선이 서로 결합하는 하나의 생명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믿음이 선한 삶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말은 참된 믿음의 목적과 본질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살펴야 할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착하게 사는 것과 영적으로 선하게 사는 것은 언제나 동일한 것일까요? 스베덴보리는 그렇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 정직하게 행동할 수 있고,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법을 준수할 수도 있으며, 사회적 명예를 얻기 위해 많은 사람을 돕기도 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외적으로 유익하고 사회적으로 존중받을 만하지만, 그 행동을 움직이는 내적인 사랑이 반드시 주님에게서 오는 참된 선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DL.9-17에서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참된 선을 행할 수 없으며, 실제로 선한 행위처럼 보이는 것이라도 그 근원과 목적을 살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외적인 선행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직한 거래와 공정한 판단, 어려운 사람을 돕는 행동은 사회에 실제로 유익하며, 그 유익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그러한 행위가 영적으로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는 그 행위가 어디에서 비롯되었으며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와 관계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착하게 살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받는다’는 말 역시 스베덴보리의 관점을 정확하게 나타내지 못합니다. 그는 외적인 도덕성을 구원의 독립적인 근거로 삼지 않습니다. 참된 영적 선은 주님에게서 오며, 인간이 자기중심적인 악을 멀리하고 그 선을 받아들일 때 자신의 생명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행동이 참된 체어리티에 해당하는지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는 TCR.373-377에서 체어리티와 믿음이 선한 행위 안에서 함께 존재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TCR.374에서는 체어리티를 선을 의도하는 것으로, 선행을 그러한 선한 의도에서 실제로 선을 행하는 것으로 구별합니다. 인간은 단순히 마음속으로 이웃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 사랑을 실제 행동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또한 TCR.375-376에서는 믿음과 체어리티가 가능한 경우 실제 행위로 나타나지 않으면 인간의 생각 안에만 머무르는 불완전한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선행의 숫자를 늘릴수록 영적으로 더 높은 사람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TCR.422는 참된 체어리티를 자신이 맡은 직무와 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공정하고 성실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공직자는 공정하게 판단하고, 상인은 정직하게 거래하며, 일하는 사람은 속임수 없이 자신의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목회자는 말씀의 진리를 가르쳐 사람들이 선한 삶을 살도록 돕는 것이 체어리티의 중요한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한 삶은 특별한 종교 활동이나 자선사업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일상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감당하며, 다른 사람에게 실제로 유익한 일을 행하는 것이 중요한 영적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믿는 일과 착하게 사는 일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단순히 교회 안의 신앙 활동과 교회 밖의 도덕적인 행동을 비교할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가 일상적인 삶에서 어떻게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이해는 실제 신앙생활에서 흔히 나타나는 하나의 모순을 돌아보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유일한 구주로 믿고, 교회의 중요한 교리에 동의하며, 예배와 기도에도 열심히 참여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일터에서는 다른 사람을 속이고, 가족에게는 모욕적인 말을 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있으므로 구원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교회에 다니지 않지만, 자신의 직업에서 정직하게 행동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양심에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이러한 두 사람을 비교할 때 우리는 흔히 ‘착한 불신자보다 믿는 죄인이 구원에 더 가깝다’는 식으로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와 같은 단순한 비교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첫 번째 사람이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두 번째 사람의 선한 행동이 어떤 내적인 사랑에서 나오는지 우리는 완전하게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신앙고백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의지가 선과 결합되어 있다고 판단할 수 없으며, 기독교 신앙고백이 없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전혀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신앙적 소속이나 교리적 확신을 근거로 다른 사람보다 영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로 얼마나 사랑하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기독교 밖에 있는 사람들의 구원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단순히 착한 사람도 천국에 갈 수 있는가 하는 감상적인 질문이 아닙니다. 주님의 구원이 얼마나 보편적인가,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처한 종교적 환경 안에서 어떻게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318에서 교회 밖에 태어난 사람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의 자비는 모든 사람에게 미치며, 어떤 사람이 기독교의 말씀과 주님에 관한 지식을 접하지 못한 것이 반드시 그 사람 자신의 잘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며, 사람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종교적 환경 안에서 신성을 인정하고 내적인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동일하게 참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주님만이 모든 구원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일관되게 강조합니다. 다만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주님의 구원에서 제외된다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이는 기독교 밖의 사람도 자신의 양심과 종교적 가르침에 따라 선을 받아들이며, 사후에 주님에 관한 진리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모든 선한 사람이 자신의 도덕적 공로로 구원받는다는 뜻도 아니고, 예수님을 명시적으로 고백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을 정죄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구원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시지만, 그 주님의 자비와 섭리는 인간이 생각하는 종교적 경계보다 넓게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주님을 믿는다는 말의 의미를 더욱 깊이 살펴보게 합니다. 기독교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신성을 인정하며 말씀의 진리를 배우는 것은 매우 귀중한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이 자신의 구원을 자동으로 보장하거나 다른 사람보다 영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은 진리를 아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할 책임도 더욱 분명하게 갖게 됩니다. 눅12:48에서 주님께서는 많이 받은 사람에게 많이 요구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약1:22는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지 말고 행하는 자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따라서 주님을 믿는 일은 단순히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자신을 구별하는 신앙적 표지를 획득하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신에게 알려 주신 진리를 실제로 받아들이고, 그 진리를 따라 악을 멀리하며 선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일입니다. 기독교인에게 주어진 진리의 지식이 크다면, 그만큼 자신의 사랑과 행동을 돌아보아야 할 이유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여기서 복음을 전하는 일의 의미 역시 달라집니다. 복음 전도는 단순히 사람들에게 특정한 신앙고백을 하게 하여 구원받은 사람의 수를 늘리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알고, 그분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며, 실제로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도록 돕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착하게 사는 것’이라는 일상적인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법을 지키며,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 착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도덕적인 삶은 분명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참된 선한 삶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이 외적으로 올바른지뿐 아니라, 그 행동을 움직이는 사랑과 목적이 무엇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정직하게 거래하는 이유가 단지 적발되어 처벌받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라면, 그는 외적으로는 정직하게 행동하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여전히 이익을 위해 속이고 싶은 마음을 품고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을 속이는 일이 주님의 말씀에 반하는 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누구도 자신을 감시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정직하게 행동하려 한다면 그의 정직은 더 깊은 영적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을 근거로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그 내면의 동기를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지배적인 사랑을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을 살필 때 외적인 행동에 만족하지 않고, 그 행동을 움직이는 사랑까지 주님의 진리 앞에 비추어 보는 일입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단순히 사회적으로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얻는 데 있지 않고, 악을 죄로 인정하고 멀리하면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이웃을 위한 실제적인 쓰임으로 나타내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의 중요성이 오히려 더욱 분명해집니다. 어떤 사람은 스베덴보리가 선한 삶을 강조한다는 사실을 듣고,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보다 착하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앞의 오류를 반대 방향으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과 분리된 인간 자신의 선행이 구원을 만들어 낸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TCR.336에서 설명하듯 믿음의 진리는 인간이 선을 알고 받아들이도록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인간이 주님의 진리를 알지 못하면 무엇이 참된 선인지 분별하기 어렵고, 자신의 악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는 일도 충분히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또한 TCR.373-377에 따르면 체어리티와 믿음은 선한 행위 안에서 함께 존재해야 합니다. 여기서 선한 행위는 믿음에 덧붙여지는 공로가 아니며, 믿음도 선행을 정당화하기 위한 종교적인 명분이 아닙니다. 주님을 향한 참된 믿음이 인간의 이해를 밝히고, 그 믿음과 결합한 체어리티가 의지 안에서 선을 사랑하게 하며, 그 사랑이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과 선한 삶은 구원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를 놓고 경쟁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믿음이 체어리티와 분리되면 살아 있는 믿음이 될 수 없고, 체어리티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와 분리되면 자신의 영적 방향을 온전히 유지할 수 없습니다. 두 가지는 주님에게서 오는 하나의 생명이 인간의 이해와 의지, 그리고 실제 삶 안에서 서로 결합하는 관계에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가 천국을 어떤 곳으로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는 일이고, 착하게 사는 것은 천국에 들어간 뒤 받을 상급과 관계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특정한 자격을 얻은 사람들이 외적으로 들어가는 장소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인 천사들의 생명과 질서가 이루는 세계입니다. ‘천국과 지옥’ HH.528-535에서는 천국에 이르는 삶이 세상을 떠나 특별한 종교 활동에만 몰두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에서 자신의 직무와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면서 영적인 생명을 받아들이는 삶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HH.470-484에서는 사후의 인간이 지상에서 형성한 사랑과 삶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이 천국의 사랑과 전혀 맞지 않더라도 어떤 신앙고백을 했다는 이유로 천국에 머무를 수 있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여 자신의 삶을 새롭게 하고, 그 사랑을 따라 살아가는 천국의 생명을 지니게 되는 일과 관계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을 믿는 일과 선하게 사는 일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과 천국에 들어간 뒤의 보상을 나누는 두 가지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을 참되게 믿는다는 것은 그분에게서 오는 천국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일이며, 그 생명이 실제 사랑과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는 것이 선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착하게 사는 것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구원에서 훨씬 중요합니까? 이 말에는 구원의 근원이 인간 자신의 도덕적 성취나 선행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공로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으며, 모든 참된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믿음과 선한 삶을 서로 경쟁하는 두 가지 구원의 조건처럼 생각하고, 믿음의 고백이 실제적인 사랑과 선한 삶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고 이해하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믿음의 진리가 시간적으로 먼저이지만 체어리티의 선은 목적에서 먼저이며, 참된 믿음과 체어리티는 선한 행위 안에서 하나를 이룬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사회적으로 착하게 보이는 행동과 주님에게서 오는 참된 선을 구별하면서, 외적인 선행만으로 인간의 영적 상태를 단정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앙고백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내면이 이미 선과 결합되어 있다고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더 중요한가, 착하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한가?’가 아닙니다. ‘나는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실제로 그분의 말씀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내 의지와 행동 안에서 선한 생명이 되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로 이웃에게 실제로 유익한 일을 행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참된 믿음은 선한 삶을 대신하지 않으며, 참된 선한 삶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믿음과 진리를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가 자신의 사랑과 결합하여 실제로 선한 삶으로 나타나도록 하는 일입니다. 결국 구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과 선행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믿음과 체어리티가 인간 안에서 하나의 영적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믿음과 선한 삶, 그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참된 구원의 의미입니다. (PR.007 해설)

 

요약

 

‘착하게 사는 것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구원에서 훨씬 중요하다’는 고백에는 구원이 인간의 도덕적 공로나 선행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과 선한 삶을 서로 경쟁하는 두 가지 구원의 조건으로 생각하고, 믿음의 고백이 실제적인 사랑과 선한 삶을 대신할 수 있다고 이해한다면 오류가 됩니다. 전통적인 개신교의 공식 교리 역시 참된 믿음이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스베덴보리는 ‘삶의 교리’(Doctrine of Life, DL, 1763) DL.1-2에서 종교의 본질이 삶에 있으며 그 생명은 선을 행하는 데 있다고 설명하면서도, DL.9-17에서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참된 선을 행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336에서는 믿음의 진리가 시간적으로 먼저이지만 체어리티의 선은 목적에서 먼저라고 설명합니다. TCR.355-367은 믿음과 체어리티가 주님 안에서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치며, TCR.373-377은 이 둘이 실제 선한 행위 안에서 결합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TCR.422는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와 일상적인 관계에서 공정하고 성실하게 행동하는 것이 참된 체어리티의 중요한 표현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외적으로 착하게 보이는 행동이 언제나 영적인 선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그 행동을 움직이는 내적인 사랑과 목적을 살펴야 합니다. 동시에 기독교 신앙고백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에서 제외할 수도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318은 교회 밖에 태어난 사람들에게도 주님의 보편적인 자비와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구원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시지만, 그분의 구원은 단순한 신앙적 소속이나 교리적 고백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결국 참된 믿음과 참된 선한 삶은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를 비교할 대상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와 선이 인간의 이해와 의지 안에서 결합하여 하나의 영적 생명을 이루는 관계입니다. 주님을 참되게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여 악에서 돌아서고,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실제로 행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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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07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고해성사를 통해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면 죄를 용서받는다’ - 죄를 용서하는 권세는 사제에게 있는가, 오직 주님께 있는가?

 

해설

‘고해성사를 통해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면 죄를 용서받는다.’ 이것은 천주교의 ‘고해성사’(告解聖事, Sacrament of Penance and Reconciliation)에 관한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세례 이후에 지은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 및 교회와 화해하기 위하여 사제를 찾아가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사제는 고백을 듣고 필요한 권고와 보속을 제시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죄경을 선언합니다. 천주교는 이러한 성사적 과정을 통하여 신자가 실제로 죄의 용서를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하나님과 이웃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사죄경을 듣는 일과 주님께서 실제로 죄를 용서하시는 일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사죄의 선언이 이루어진 순간 인간의 내적 악도 제거되는 것일까요? 사제에게 고백하는 행위는 참된 회개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죄 사함의 통로이기도 할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죄의 용서를 주님에 의한 실제적 거듭남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사제의 직무를 존중하면서도 주님께만 속한 죄 사함의 권능을 어떻게 구별해야 할까요? 이번 문제는 죄를 고백하는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고백과 회개, 사죄 선언과 실제적 죄의 용서가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별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1422–1424항은 고해성사를 회개와 참회, 고백과 용서, 화해의 성사로 설명합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교회의 친교를 손상시켰을 때 이 성사를 통하여 용서와 화해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주교가 사제에게 하나님과 독립된 죄 사함의 권능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교리서 1441항은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이 오직 하나님뿐이라고 명시합니다. 다만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직무를 맡기셨으며, 그 직무가 주교들과 사제들에게 이어졌다고 설명합니다. 1461항은 사제가 성품성사에 따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죄의 권한을 행사한다고 가르치며, 1466항은 고해 사제가 하나님의 용서를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라 그 용서를 섬기는 사람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천주교의 고해성사를 사제가 자신의 능력으로 죄를 없애는 제도라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의 공식적인 이해에서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사제는 그 용서를 성사적으로 전달하는 직무를 수행합니다. 두 전통의 실제적인 차이는 사제가 독립적인 신적 권능을 소유하는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만 속한 죄 사함의 권능이 사제의 사죄 선언을 통하여 성사적으로 행사된다는 천주교의 이해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일치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또한 천주교는 입술로 죄를 고백하기만 하면 아무런 회개 없이 자동으로 용서받는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448항은 참회자의 통회와 고백, 보속, 그리고 교회의 직무를 통한 사죄를 고해성사의 중요한 요소로 설명합니다. 특히 1451항은 ‘통회’(痛悔, contrition)를 자신이 지은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1452항은 하나님을 모든 것보다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완전한 통회가 대죄의 용서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가능한 한 빨리 성사적 고백을 하겠다는 결심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1456항은 양심 성찰을 통하여 기억해 낸 중대한 죄들을 사제에게 고백하도록 규정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의 고해성사에는 죄의 인정과 진정한 뉘우침, 새로운 삶에 대한 결심이 함께 포함됩니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죄를 외면하거나 정당화하지 말고 그것을 인정하고 돌이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실제적인 회개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과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사죄를 받는 절차를 죄의 용서를 얻는 통상적인 성사적 통로로 규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천주교는 두 요소를 하나의 성사 안에서 연결하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각각의 영적 의미를 구별하여 살펴야 합니다.

 

천주교가 사제의 사죄권을 설명할 때 중요하게 제시하는 성경은 요20:22-23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면서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마16:18-19에서 베드로에게 주어진 천국 열쇠와 매고 푸는 권세, 마18:18에서 제자들에게 주어진 권세도 교회의 화해와 사죄 직무에 연결하여 해석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이 죄의 용서와 교회의 책임에 관한 중요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에게 주어진 권한과 후대에 발전한 개별 고백 및 성사적 사죄 제도가 모든 세부 내용에서 동일한 것인지는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447항 역시 교회 역사에서 참회의 구체적인 방식이 달라졌으며, 오늘날과 같은 사제와 신자 사이의 개별적인 고백 방식이 오랜 과정을 거쳐 정착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고해성사의 모든 절차가 요20에 직접 명시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천주교는 사도적 직무와 교회의 전통을 통하여 이러한 제도가 발전했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성경의 권위에 관한 말씀을 인간에게 독립적인 죄 사함의 권능을 부여하는 것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그에게서 천국 열쇠와 매고 푸는 권세의 근원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믿음과 진리입니다.

 

이 문제에서 중요한 직접적인 근거는 스베덴보리의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9410항입니다. 그는 마16:18-19와 마18:18의 말씀을 해설하면서, 베드로는 주님에게서 오는 믿음을 표상하며 천국 열쇠는 진리에서 비롯되는 권능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국을 열고 닫는 권능은 어떤 인간이 자신의 지위에 따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믿음과 진리에 속하며, 궁극적으로 주님 자신에게만 있습니다. AC.9410:2–3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자기 권한으로 다른 사람을 천국에 들이거나 천국에서 제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이어 4절에서는 어떤 인간도 스스로 죄 하나를 풀어 줄 수 없으며, 죄가 풀리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 새로운 생명을 이루시는 거듭남을 통해서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사제의 사죄권을 검토하는 데 중요한 직접 근거입니다. 다만 이 본문에서 스베덴보리가 비판하는 것은 특히 인간이 자신에게 주님 고유의 구원 권능이 있다고 주장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천주교가 사제에게 하나님과 독립된 권능이 있다고 가르친다는 증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정확한 논점은 천주교가 인정하는 사제의 종속적인 성사적 권한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의 유일한 죄 사함의 권능 사이에 어떤 신학적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죄의 실제적인 제거는 사제의 직무나 선언 자체보다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사죄를 받는 행위 자체를 잘못된 것으로 보았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539항이 매우 중요한 답을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양심의 짐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교회의 성직자에게 자신의 죄를 하나하나 고백하고 사죄를 받아 마음의 부담을 덜어 내는 것이 해롭지 않다고 명시합니다. 그러한 실천이 자신을 성찰하고 날마다 저지르는 악을 돌아보는 습관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자연적 고백’(natural confession)이라고 부르며, 주님 앞에서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영적 고백’(spiritual confession)과 구별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는 사제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모든 행위를 무가치하거나 해로운 것으로 규정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사죄를 받는 행위가 양심의 안정을 돕는 유익한 쓰임을 지닐 수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또한 TCR.567:7에서는 가톨릭 신자들이 자신을 성찰하고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실천을 언급하면서, 그러한 자기 성찰조차 회피하는 개혁교회 신자들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 두 본문을 스베덴보리가 가톨릭의 성사적 사죄권 전체를 승인했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사제 앞에서 이루어지는 고백의 자연적·목회적 유익을 인정하면서도, 실제적인 죄의 용서와 거듭남은 주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분명히 구별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TCR.528–531과 538–539항에 나타나는 실제적인 회개의 가르침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회개가 자신의 죄를 막연하게 인정하거나 입술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먼저 자신을 성찰하여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인정하며, 주님께 악을 이길 힘을 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탐욕과 거짓말, 분노와 교만을 고백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러한 악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면 참된 회개의 목적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TCR.538항은 죄의 고백을 구주이신 주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한다고 명시하며, 539항은 자기 성찰 후에 주님께 악을 물리칠 능력과 선을 행할 마음을 구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이미 인간의 죄를 알고 계시므로 죄를 일일이 열거하여 알려 드릴 필요가 없으며, 주님은 자비 자체이시므로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인간 안에 있는 죄의 성향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죄는 인간이 악에서 돌아서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만큼 제거됩니다. 따라서 참된 고백은 단순히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말하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 앞에서 그 악을 인정하고 실제로 돌이키는 영적 과정입니다. 사제 앞에서의 고백이 이러한 성찰을 도울 수는 있지만, 그 고백 자체가 내적인 회개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죄의 용서와 거듭남의 관계는 AC.9444–9449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설명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저지른 죄가 그 사람의 생명에 뿌리내려 있으므로 주님께서 새로운 생명을 주시지 않는 한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AC.9445에서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선을 행하거나 진리를 생각할 수 없으며, 오직 주님만이 인간을 죄에서 벗어나게 하실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AC.9448에서는 주님께서 인간을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 안에 머물게 하시고 악과 거짓에서 멀어지게 하시는 것이 죄의 용서라고 정의합니다. 또한 AC.9449는 죄가 용서된 상태의 표지로 하나님을 하나님 때문에 예배하고, 이웃을 이웃 때문에 섬기며, 악을 피하고 미워하는 삶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죄의 용서가 단순히 어떤 선언에 따라 인간의 법적 상태가 바뀌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사랑과 의지, 이해와 삶을 실제로 변화시키시는 역사와 관계됩니다. 물론 천주교도 사죄 이후의 회개와 성화를 중요하게 가르치므로, 이 차이를 천주교는 삶의 변화를 불필요하게 여기고 스베덴보리만 삶의 변화를 강조한다는 식으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두 전통의 차이는 회개의 필요성 자체보다, 사제의 성사적 사죄 선언에 어떠한 영적 효력을 부여하며 그것을 주님의 실제적인 죄 사함과 어떻게 연결하는가에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죄의 고백이 실제 목회 현장에서 어떤 쓰임을 지녀야 하는가를 생각하도록 이끕니다.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혼자 인정하기 어려울 수 있으며, 신뢰할 수 있는 영적 지도자에게 죄를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는 가운데 양심의 깨달음과 위로를 얻기도 합니다. 약5:16은 서로 죄를 고백하며 기도하라고 권합니다. 또한 자신의 죄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그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며 가능한 범위에서 피해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진정한 회개의 중요한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고백하거나 영적 지도자의 조언을 받는 일과, 주님께서 인간의 악을 실제로 제거하시는 일은 구별해야 합니다. 목회자나 사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죄를 성찰하도록 도우며 회개와 화해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권위로 인간의 내적인 악을 없애거나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사죄경을 듣고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는 사실이 그의 모든 악한 성향이 이미 제거되었다는 증거도 아닙니다. 반대로 그가 여전히 자신의 약함과 싸우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회개가 무가치하다고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점진적으로 거듭나게 하시며, 그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의 악을 반복해서 돌아보고 다시 주님의 도움을 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영적 지도자의 참된 역할은 자신에게 죄 사함의 권능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고,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여 실제적인 회개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해성사의 참된 가치를 판단하려면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눅15의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서 아들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아버지에게 돌아갑니다. 이 비유의 중심은 어떤 인간적인 중재자가 아들의 죄를 제거하는 데 있지 않고, 돌아온 아들을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은 인간이 죄를 고백하기 전부터 그의 모든 내적인 상태를 알고 계시며, 그가 악에서 벗어나 선의 삶으로 돌아오기를 언제나 원하십니다. 따라서 참된 죄의 고백은 주님의 마음을 설득하여 원래 베풀지 않으려 하셨던 용서를 얻어 내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받아 그 악에서 돌이키며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사제나 목회자, 신앙 공동체는 이러한 회개의 과정에서 귀중한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스베덴보리 역시 사제 앞에서의 고백과 사죄가 양심의 부담을 덜어 주는 자연적인 쓰임을 지닐 수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도움을 주님께서 이루시는 실제적인 죄의 제거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가톨릭의 고해성사를 모든 경우에 무의미한 종교 의식으로 규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안에는 자기 성찰과 죄의 인정, 뉘우침과 화해라는 중요한 선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분별해야 할 것은 그러한 유익과 사제의 성사적 사죄권에 관한 신학적 주장 사이의 차이입니다. 참된 죄의 용서는 오직 주님의 자비에서 비롯되며, 인간이 그분의 도움으로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아갈 때 실제적인 구원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결국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시며, 고백과 회개의 궁극적인 목적은 용서를 선언받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사람이 실제로 새롭게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RC.007 해설)

 

요약

‘고해성사를 통해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라는 명제에는 인간이 자신의 죄를 성찰하고 인정하며 뉘우치고 하나님과 이웃에게 화해해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천주교는 고해성사를 단순히 사제에게 죄를 말하면 자동으로 용서받는 절차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참된 통회와 고백, 보속과 사죄를 함께 강조하며,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고 사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의 직무를 수행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공식적인 구별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AC.9410:2–4에서 천국 열쇠와 매고 푸는 권세가 인간에게 독립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믿음과 진리에 속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AC.9444–9449에서는 죄의 용서가 주님께서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멀어지게 하시고 선과 진리 안에 머물게 하시는 실제적인 거듭남과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사제 앞에서의 고백과 사죄를 모두 부정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TCR.539에서는 양심의 짐을 덜기 위하여 교회의 성직자에게 죄를 고백하고 사죄를 받는 행위가 해롭지 않으며, 자기 성찰의 습관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명시합니다. 그러나 이를 자연적 고백으로 구별하고, 주님 앞에서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실제로 돌이키는 영적 고백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TCR.567:7 역시 가톨릭 신자들의 자기 성찰과 고백 관행을 언급하면서 실제적인 회개를 회피하는 개혁교회 신자들을 비판합니다. 따라서 오류의 핵심은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거나 성직자의 조언과 위로를 받는 행위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사제의 성사적 사죄 선언을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이루시는 실제적인 죄의 제거와 어떠한 관계로 이해해야 하는가에 있습니다. 천주교는 사제의 권한을 주님에게서 받은 종속적인 직무로 설명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죄의 실제적인 제거가 오직 주님에 의한 회개와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루어진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사제의 고백 청취와 사죄가 목회적인 유익을 지닐 수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죄의 용서를 성사적으로 성립시키는 권능이라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참된 고백은 주님 앞에서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그 악에서 돌이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며, 모든 죄의 용서와 구원의 근원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RC.008. ‘대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은 채 죽으면 지옥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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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PR.006 | 개신교인(Protestants)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나는 여전히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보시고 나를 의롭다고 하신다’ - 의롭다 하심은 신분의 변화인가, 인간의 내면을 새롭게 하시는 구원인가?

 

해설

개신교 신앙에서 ‘나는 여전히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보시고 나를 의롭다고 하신다’는 고백은 구원의 은혜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의를 이룰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가 믿는 사람에게 전가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의로운 사람으로 받아들이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인간이 자신의 선행이나 도덕적 성취를 근거로 구원을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자신의 죄와 연약함 때문에 괴로워하는 신자에게 위로와 소망을 줍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은 실제로 내 안에 의로운 변화가 일어났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내가 여전히 죄를 사랑하고 있더라도 그리스도의 의를 나의 것으로 인정해 주신다는 뜻입니까? 만일 그리스도의 의가 나에게 전가되었다면, 내 안에서 여전히 작용하는 악한 사랑과 욕망은 구원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전통적인 칭의 교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설명을 제시합니다. 그는 모든 참된 의와 선이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주님께서 이루신 의가 인간의 실제 영적 상태와 무관하게 그 사람의 소유인 것처럼 계산될 수 있다는 생각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주님의 의를 인정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의가 인간에게 어떻게 주어지고 인간 안에서 어떤 실제적인 변화를 이루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전통적인 개신교의 칭의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특히 루터교와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칭의를 구원의 핵심적인 사건으로 강조해 왔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1장 1항은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의를 주입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죄를 용서하시고 그리스도의 순종과 공의를 그에게 전가하심으로써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고 받아들이신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전가’(imputation)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믿는 사람의 의로 간주하신다는 신학적 개념입니다. 이 전통에서 칭의의 근거는 인간 안에서 이루어진 도덕적 변화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과 구속의 공로이며, 믿음은 그 의를 받아들이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통적인 개신교가 거듭남이나 성화를 불필요하게 여긴다는 뜻은 아닙니다. 같은 신앙고백 제11장 2항은 의롭다 하심을 받는 믿음이 결코 홀로 있지 않으며 사랑으로 역사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제13장은 성화를 죄의 지배가 약화되고 인간이 거룩함 안에서 성장하는 실제적인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개신교의 공식 교리를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셨으므로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는 주장으로 소개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는 신학적 구조 안에서, 실제 신자들이 칭의의 선언을 자신의 내면 상태와 지나치게 분리하여 이해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바로 이 분리가 가능해지는 근본적인 전제, 곧 그리스도의 의를 인간의 실제 사랑과 삶에서 분리하여 전가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을 의롭다고 하신다는 말씀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롬3:24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선언하며, 롬4:5는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믿음이 의로 여겨진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고후5:21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신 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가르칩니다. 전통적인 개신교 신학은 이러한 말씀들을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와 칭의의 중요한 근거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같은 바울은 롬6:1-4에서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계속 머물러도 되는지를 묻고,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답하면서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생명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또한 고후5:17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롭다 하심과 새로운 생명이 성경에서 서로 무관한 주제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러한 본문들을 함께 읽는다고 해서 전통적인 전가 교리가 저절로 반박되는 것은 아닙니다. 개혁주의 신학도 칭의와 성화가 구별되지만 분리될 수 없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의가 단지 법정에서 인정되는 신분에만 관계되는지, 아니면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여 실제로 새로운 사람이 되는 일과도 본질적으로 연결되는지를 질문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626-631에서 당시 교회의 믿음과 의의 전가에 관한 가르침을 검토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는 사람에게 전가함으로써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설명이 믿음과 구원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게 만든다고 비판합니다. 특히 TCR.640-642에서는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합니다. 이 주장은 인간에게 주님의 의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인간에게 있는 모든 참된 의와 선은 주님에게서 오지만, 주님께서 자신의 신적 능력으로 이루신 구속의 공로 자체가 다른 사람에게 이전되어 그 사람의 공로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 주님께서 지옥의 세력을 정복하시고 인성을 영화하신 일은 오직 주님께서 이루실 수 있었던 신적 역사입니다. 인간은 그 구속의 은혜를 받을 수 있지만, 주님의 신적 공로 자체를 자신의 소유처럼 가질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지혜를 배워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는 있어도, 그 사람이 실제로 경험하고 이해하여 얻은 지혜를 자신의 내면에 아무런 변화 없이 단순히 이전받을 수는 없는 것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의 지혜와 주님의 신적 공로를 완전히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러한 비유는 어떤 선이나 의가 실제로 인간의 생명이 되는 일과, 다른 존재에게 속한 의를 외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계산하는 일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전가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TCR.643-646에서 그는 전가가 존재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외적으로 이전하는 방식이 아니라 선과 악, 그리고 믿음에 관한 전가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전가의 기준이 인간의 실제 영적 상태와 관계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믿는다고 말하는가뿐 아니라, 그 믿음이 어떤 사랑과 결합되어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TCR.654-657에서는 참된 믿음이 선과 결합되어 있으면 영원한 생명에 관계되지만, 믿음이 악과 결합되어 있으면 그 반대의 상태에 이른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믿음의 내용만으로 인간의 영원한 상태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이 인간의 사랑과 의지 안에서 어떤 생명으로 존재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다만 여기서 선과 악이 전가된다는 말을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동을 점수처럼 계산하여 상벌을 결정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TCR.650-653에서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선을 주시고자 하시며, 지옥에서는 악이 흘러들어온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구원은 인간의 공로를 심사하여 보상하는 일이 아닙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얼마나 받아들이고, 그와 반대되는 악을 얼마나 자신의 사랑으로 삼았는가 하는 실제 영적 상태와 관계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전가는 외적인 법적 계산보다 인간 안에서 형성된 사랑과 생명의 상태를 드러내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인간의 이해와 의지를 구별할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TCR.658-660에서 스베덴보리는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의지가 인간의 영적 상태를 결정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이해를 통해 많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이 옳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실제로 사랑하고 선택하는 일은 의지와 관계됩니다. 어떤 사람이 정직이 중요하다고 믿으며 거짓말을 죄라고 가르친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는 정직에 관한 성경의 말씀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이 자신을 구원한다고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이 걸려 있을 때마다 거짓말을 선택하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계속 정당화한다면 그의 이해에 있는 진리는 아직 의지 안에서 선과 결합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내적 상태를 결정하는 것은 단순히 무엇을 알고 말하는가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무엇을 사랑하고 의도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순간적으로 떠오른 악한 생각이나 원치 않는 유혹이 곧 그 사람의 지배적인 사랑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어떤 생각을 자신의 의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즐거워하며 실제로 실현하려 하는가를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의로움은 자신이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데 머물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자신의 의지와 사랑을 실제로 변화시키는 데서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죄 사함과 칭의는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스베덴보리는 TCR.611-614에서 인간이 거듭나는 만큼 악이 제거되며, 이 제거가 죄 사함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악이 제거된다는 것은 인간이 과거에 받아들였던 모든 악한 성향이 존재 자체를 잃고 완전히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악에서 물러나게 하시고, 그 악이 더 이상 그의 생명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선 안에 보존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구별은 이번 문항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전통적인 개신교의 칭의에서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일이 강조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죄 사함과 거듭남에서는 주님께서 인간의 실제 영적 상태를 변화시키시고 그를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일이 강조됩니다. 두 전통 모두 구원의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다고 인정하지만, 그 은혜가 인간에게 적용되는 방식을 다르게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법적인 용어를 영적인 용어로 바꾸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때 그리스도의 의를 외적으로 인정해 주시는가, 아니면 주님에게서 오는 의와 선이 인간의 내면에 받아들여져 실제로 새로운 생명이 되는가 하는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새로운 생명이 인간을 독립적인 의의 근원으로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거듭난 사람에게 있는 모든 참된 선과 의는 여전히 주님에게서 옵니다.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이 실제로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모든 악한 성향을 완전히 제거해야 비로소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거듭남의 의미와 다릅니다. 인간은 자연적인 출생으로부터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으며, 거듭남 이후에도 과거의 악한 성향이 다시 움직일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성향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 악을 자신의 사랑으로 받아들이는지, 아니면 주님의 도움으로 멀리하고 있는지를 살피는 일입니다. TCR.614가 설명하듯 주님께서는 인간을 악에서 물러나게 하시고 선 안에 보존하십니다. 따라서 거듭난 사람이란 다시는 유혹을 경험하지 않거나 자신의 내면에서 악한 생각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악을 죄로 인정하고 멀리하며, 점차 선과 진리를 자신의 삶에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이 점에서 ‘나는 여전히 죄인이다’라는 고백에도 구별이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아직 악한 성향이 남아 있으며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고백을 자신의 악을 계속 사랑하고 행해도 괜찮다는 이유로 사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참된 겸손은 자신의 악을 인정한다는 말에 머무르지 않고, 그 악에서 돌아서기 위해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이해는 실제 신앙생활에서 자신의 구원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며 그리스도의 의가 자신에게 전가되었다고 믿고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구원이 자기 선행에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깊은 평안을 누립니다. 그러나 동시에 가족과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자신의 행동을 고치려 하지 않으면서, 자신은 여전히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보시므로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경우 그는 구원의 은혜를 자신의 악에서 돌아서는 힘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의 현재 상태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할 위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자신이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확신을 충분히 갖지 못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때마다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실제로 행동을 바꾸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는 두 사람 가운데 누가 최종적으로 구원받을 것인지 단정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내면을 지배하는 사랑과 그 영적 상태를 완전하게 아시는 분은 주님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원리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의롭다는 확신의 강도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자신의 의지와 삶에서 실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자신을 살필 필요가 없다는 안심으로 이어져서는 안 되며, 오히려 주님께서 지금도 자신을 악에서 건져 내고 새롭게 하신다는 사실을 신뢰하면서 회개와 거듭남의 길을 계속 걷게 해야 합니다.

 

이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하면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한다’는 말의 의미도 새로워집니다. 전통적인 개신교에서는 이 표현이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 하나님 앞에 선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자신의 공로를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는 귀중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인간은 자기 자신을 의의 근원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의를 의지한다는 것은 그분의 의가 나에게 외적으로 전가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데 머무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신적 사랑과 지혜를 통하여 나를 새롭게 하시고, 내 안에 있는 악을 멀리하도록 도우시며, 선을 사랑하고 실천할 수 있는 생명을 공급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DP.100-128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악을 죄로 인정하고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멀리해야 하지만, 그 모든 참된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이 주님의 공로와 경쟁하는 것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더라도 그 선을 자기 자신의 공로로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선을 행할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이유로 실제로 행해야 할 책임을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은 우리가 아무런 변화 없이 의로운 사람으로 간주되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실제로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나는 여전히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보시고 나를 의롭다고 하십니까? 이 고백에는 인간이 자신의 공로나 도덕적 성취를 근거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할 수 없으며, 모든 참된 의와 구원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연약함과 죄 때문에 절망하는 사람이 주님의 자비를 신뢰하도록 돕는 귀중한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의가 인간의 실제 영적 상태와 무관하게 그 사람의 의로 계산되며, 그 결과 인간은 자신의 내면이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가와 관계없이 의로운 사람으로 받아들여진다고 이해하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신적 구속의 공로는 인간에게 외적으로 이전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속으로 열린 길에서 인간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에서 돌아섬으로써 실제 구원의 생명이 형성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단지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인정하셨는가?’가 아닙니다. ‘나는 지금 주님의 의와 선을 실제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내 안에 남아 있는 악한 사랑과 욕망을 죄로 인정하고 멀리하려 하는가? 그리고 내가 알고 믿는 진리가 내 의지와 행동을 변화시켜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참된 의로움은 인간이 자신의 공로를 쌓아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니고, 실제 내면의 변화와 무관하게 외적으로만 소유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가 인간의 자유로운 수용을 통해 의지와 사랑 안에 결합하고, 그 결과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한다는 것은 자신이 여전히 죄인이라는 사실에 안주하는 일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 자신을 의로운 삶으로 새롭게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그분의 사랑과 지혜 안에서 실제로 거듭나는 일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그리스도의 의와 전가, 그리고 의롭다 하심과 실제적인 거듭남의 관계입니다. (PR.006 해설)

 

요약

 

‘나는 여전히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보시고 나를 의롭다고 하신다’는 고백에는 인간이 자신의 선행이나 공로로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모든 참된 의와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개혁주의의 전통적인 칭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순종과 의가 믿는 사람에게 전가되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전통 역시 참된 믿음이 사랑으로 역사해야 하며, 칭의와 성화가 구별되지만 분리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640-642에서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인간에게 외적으로 전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전가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며, TCR.643-646에서는 인간의 실제 선과 악, 그리고 믿음에 관한 전가를 설명합니다. 또한 TCR.654-657은 믿음이 선과 결합하는가 악과 결합하는가에 따라 영적 상태가 달라진다고 가르치며, TCR.658-660은 단순한 생각보다 의지와 사랑이 인간의 영적 상태를 결정한다고 설명합니다. TCR.611-614에 따르면 죄 사함은 악이 완전히 소멸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악에서 물러나게 하시고 선 안에 보존하시는 거듭남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의를 의지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자신의 실제 내면과 무관하게 계산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데 머무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선과 진리를 인간에게 공급하시고, 인간이 그 생명을 자유롭게 받아들여 악에서 돌아서며 실제로 새로운 사람이 되는 일과 관계됩니다. 결국 참된 의로움은 인간 자신의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실제 변화 없이 외적으로 소유하는 것도 아니라, 주님의 신적 사랑과 지혜가 인간의 의지와 삶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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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06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세례는 원죄를 씻어 주고 사람을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 - 물로 씻는 의식과 실제적인 거듭남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해설

‘세례는 원죄를 씻어 주고 사람을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 이것은 천주교의 ‘세례성사’(洗禮聖事, Sacrament of Baptism)에 관한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천주교는 세례를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는 첫 번째 성사이며, 인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은총의 통로라고 가르칩니다. 아직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아기에게도 세례를 베푸는 것은 이러한 이해와 관계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의 상태에 있으므로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죄에서 벗어나거나 구원받을 수 없으며, 오직 주님의 은총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몇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세례를 받는 순간 인간의 내적인 사랑과 의지가 실제로 변화되는 것일까요? 아직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없는 아기도 세례를 받으면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세례를 주님께서 제정하신 중요한 성례로 인정하면서도, 참된 거듭남은 주님의 능력으로 인간의 악이 제거되고 선과 진리의 삶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세례의 성사적 의미와 실제 거듭남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이번 명제는 세례의 필요성을 단순히 인정하거나 부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의 본질과 주님의 은총, 그리고 인간이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을 이해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입장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1213항은 세례를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의 기초이자 성령 안에서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인간은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결합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1262–1263항은 세례의 중요한 효과가 죄의 정화와 성령 안에서의 새로운 출생이며, 세례를 통하여 원죄와 이전의 개인적인 죄가 용서된다고 설명합니다. 1265항은 세례받은 사람이 은총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천주교는 세례를 단순히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거나 교회에 가입하는 의식으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세례는 하나님께서 실제로 은총을 베푸시는 성사이며, 그 안에서 인간에게 새로운 영적 생명이 주어진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천주교가 세례를 받는 순간 인간의 모든 악한 성향이 사라지고 이후에는 죄를 지을 위험도 없어진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교리서 1264항은 세례 이후에도 죄로 기우는 성향인 ‘사욕편정’(邪慾偏情, concupiscence)이 남는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1272항은 세례의 지워지지 않는 영적인 표지가 남더라도 죄로 인하여 그 구원적 열매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천주교의 입장을 ‘세례만 받으면 이후의 삶과 관계없이 자동으로 구원받는다’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 역시 세례 이후의 회개와 영적 성장, 사랑의 실천을 중요하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세례 자체를 통하여 죄의 용서와 은총에 의한 새로운 출생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원죄’(原罪, original sin)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천주교는 원죄를 각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실제로 저지른 개인적인 죄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404–405항은 원죄를 원래의 거룩함과 의로움이 결핍된 상태로 설명하며, 그것은 자신이 직접 저지른 행위가 아니라 타락한 인간 본성 안에서 전해진 상태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동시에 천주교는 이러한 상태가 인류 최초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서 비롯되었다고 이해합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차이가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520항에서 아담 한 사람의 범죄가 모든 후손에게 전달되었다는 전통적인 설명을 비판합니다. 그는 아담을 인류 최초의 한 개인이 아니라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를 나타내는 표상적 인물로 해석하며, 에덴동산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말씀도 그 교회의 영적 상태를 설명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악한 성향을 지니는 이유를 아담 한 개인의 범죄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인간에게 선천적인 악의 성향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설명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악을 향한 성향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사실과, 그 성향을 아담 한 사람에게서 유전된 원죄의 상태로 이해하는 것은 서로 다르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TCR.521에서 인간이 부모에게서 물려받는 악을 ‘유전악’(遺傳惡, hereditary evil)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유전되는 것은 인간 자신이 실제로 저지른 죄가 아니라 악을 향한 성향입니다. 인간은 부모와 조상에게서 여러 가지 악한 성향을 물려받지만, 그 성향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그 모든 악을 자신이 실제로 행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사후에 유전악 자체로 심판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실제로 받아들이고 행한 악에 따라 심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러한 악의 성향은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과정을 통하여 제어되고 변화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유전된 죄책을 어떤 의식으로 제거하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 안에 존재하는 악의 성향이 어떻게 주님의 능력으로 다스려지고 그 사람이 실제적인 선의 삶으로 나아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천주교 역시 원죄를 물로 씻어 내는 물질적인 오염처럼 이해하지 않습니다. 천주교는 세례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원죄의 상태가 제거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두 전통의 차이는 물에 어떤 물리적 능력이 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의 기원과 세례의 성사적 효력, 실제적인 거듭남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신학적 차이입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천주교의 원죄와 스베덴보리의 유전악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거나,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타락한 성향 자체를 부정했다고 오해하게 됩니다.

 

이제 스베덴보리가 세례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TCR.667–691에서 세례를 하나의 독립된 장으로 다루며 그 영적 의미와 쓰임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세례를 무의미한 종교 의식으로 여기거나 폐기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세례를 성찬과 함께 주님께서 제정하신 중요한 성례로 인정합니다. 다만 TCR.670–673에서 세례의 물로 씻는 행위가 나타내는 것은 악과 거짓에서 정화되는 ‘영적 씻음’(spiritual washing)이라고 설명합니다. 자연적인 물은 인간의 몸을 씻을 수 있지만, 인간의 마음과 의지에 자리 잡은 악을 직접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몸을 아무리 씻어도 그 사람 안에 있는 도둑질과 강도질의 성향까지 씻겨 나가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TCR.673에서는 내면이 악과 거짓에서 정화되지 않는다면 외적인 씻음만으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그의 비판은 세례를 베푸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외적인 의식이 인간의 내적 변화와 관계없이 죄를 제거한다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세례의 참된 의미는 물에 어떤 독립적인 구원의 능력이 있다는 데 있지 않고, 주님께서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정화하시고 새로운 삶으로 이끄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세례가 단순히 인간의 결심을 보여 주는 상징에 불과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세례가 영계의 질서와 연결되는 실제적인 쓰임을 지닌다고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TCR.677–687에서 세례의 세 가지 쓰임을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첫째, 세례는 사람을 기독교회에 입문시키며 동시에 영계의 기독교인들과 연결되게 합니다(TCR.677–680). 둘째, 세례는 사람이 구속주이자 구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인정하며 그분을 따르도록 하는 쓰임을 지닙니다(TCR.681–683). 셋째이자 궁극적인 쓰임은 그 사람이 주님에 의하여 거듭나는 것입니다(TCR.684–687). 이 세 가지는 서로 독립된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질서 안에서 연결됩니다. 교회에 입문하는 것은 주님을 알고 인정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주님을 인정하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며 거듭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는 단순히 교회 명부에 이름을 올리는 의식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안에 자연계와 영계가 연결되는 실제적인 영적 쓰임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러한 쓰임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세례를 받는 순간 인간의 내적인 악이 제거되어 거듭남이 완성된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특히 TCR.684–685에서는 세례의 궁극적인 목적이 주님에 대한 믿음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를 통하여 실제로 거듭나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세례의 세 가지 쓰임은 바로 이러한 목적을 향하여 연결되며, 앞선 두 가지 쓰임은 궁극적인 거듭남 안에서 그 의미를 완성합니다. 따라서 세례의 가치는 외적인 의식이 지닌 영적 질서와 그 의식이 가리키는 실제적인 거듭남을 함께 이해할 때 분명해집니다.

 

이러한 이해는 유아세례에서 더욱 중요해집니다. 천주교는 가톨릭교회 교리서 1250항에서 유아도 원죄의 상태로 태어나므로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은총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TCR.677에서 유아가 아직 자신의 이해와 의지로 믿음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따라서 유아가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아이의 내적인 이해와 의지가 이미 새로워졌으며 거듭남이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스베덴보리가 유아세례를 무의미하게 생각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세례를 통하여 유아가 기독교회에 입문하고 영계의 기독교인들과 연결되며, 주님께서 천사들을 그 아이에게 배정하여 주님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보호하신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스베덴보리가 세례를 단순한 인간의 종교적 선언보다 깊은 영적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영계의 연결이 장래의 구원과 거듭남을 자동으로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가 성장하여 자신의 이해와 의지를 사용하게 될 때에는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거듭남을 위한 중요한 시작이 될 수 있지만, 그 시작을 곧 완성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천주교의 성사적 새 출생과 스베덴보리의 실제적인 거듭남 사이의 차이가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성경 역시 세례의 외적인 씻음과 실제적인 영적 출생의 관계를 생각하도록 이끕니다. 요3:3-8에서 주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으며,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천주교는 이 말씀을 세례성사의 중요한 근거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에 따르면 말씀에서 ‘물’은 진리를 나타내며, ‘성령’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의 역사와 관계됩니다. 따라서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말씀은 외적인 물의 의식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진리와 사랑으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영적 과정을 드러냅니다. 행2:38에서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권하며, 벧전3:21은 세례를 단순히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와 연결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세례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세례가 외적인 씻음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도 성경 본문과 스베덴보리의 속뜻 해석을 구별해야 합니다. 요3장의 물과 성령을 영적인 진리와 주님의 역사로 이해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 원리에 근거한 해석이며, 그 자체가 천주교의 세례 해석을 역사적으로 반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세례의 외적인 표지가 실제로 악과 거짓에서 정화되는 내적인 삶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죄의 용서와 거듭남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TCR.611–614에서 죄의 용서와 제거가 거듭남의 과정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죄의 용서는 인간이 행한 모든 악이 단순히 사라져 과거의 상태와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악에서 멀어지게 하시고 선 안에 머물게 하시는 과정과 관계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악을 죄로 인정하고 그것을 피하며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만큼 그 악의 지배에서 벗어납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인간 자신의 독립적인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악을 제거하고 인간을 새롭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이 자유 가운데 진리를 받아들이고 마치 자기 자신이 행하는 것처럼 악을 피하며 선을 실천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죄의 용서와 거듭남은 인간의 사랑과 의지, 이해와 삶이 실제로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천주교 역시 세례 이후에 회개와 성화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세례 때 원죄와 이전의 죄가 실제로 용서되고 은총에 의한 새 출생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죄의 제거와 영적 출생의 실제적인 성취를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지속적인 과정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두 전통의 차이는 세례 이후에 선하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보다, 세례 자체에 어떤 영적인 효력을 부여하고 그 효력과 실제 거듭남을 어떻게 연결하는가 하는 문제에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세례 이후의 신앙생활을 이해할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어떤 사람은 어릴 때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자신의 악을 돌아보거나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일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세례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교만과 탐욕, 이기심과 분노를 돌아보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모두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같지만, 그들의 영적인 상태가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러한 차이는 중요합니다. 참된 거듭남은 과거에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현재 그 사람 안에서 어떤 선과 진리의 삶을 이루고 계시는가와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세례를 받은 사람의 내면을 다른 사람이 임의로 판단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의 가장 깊은 사랑과 영적인 상태는 주님께서 아십니다. 다만 세례를 받은 사람은 자신이 이미 모든 영적 과정을 완성했다고 생각하기보다, 주님께서 자신을 어떤 삶으로 부르셨는지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세례는 주님을 알고 인정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나아가도록 부르는 거룩한 시작입니다. 그 시작이 참된 열매를 맺으려면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실천하는 삶이 뒤따라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세례의 참된 가치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세례를 주님께서 제정하신 중요한 성례로 인정하며, 그 안에 교회로의 입문과 영계의 질서, 주님을 인정하고 거듭남으로 나아가는 실제적인 영적 쓰임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세례를 단순히 인간이 만들어 낸 형식이나 불필요한 의식으로 여기는 것은 그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례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이 세례를 받는 순간 인간의 모든 악이 제거되고 거듭남이 완성된다고 믿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은 외적으로 깨끗해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내적으로 선과 진리를 사랑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마23:25-26에서 주님께서는 잔과 대접의 겉만 깨끗하게 하는 사람들을 책망하시면서 먼저 안을 깨끗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세례의 영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도 적용됩니다. 겉 사람의 씻음은 속 사람의 정화를 가리켜야 하며, 그 외적인 표지는 실제로 거듭나는 삶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세례받은 사람은 자신의 과거 세례를 구원의 완성으로 여기기보다, 주님께서 자신을 악과 거짓에서 정화하시고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이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례의 참된 가치는 물로 씻는 외적인 행위와 그 행위가 나타내는 영적인 정화를 구별하면서, 그 둘을 주님께서 정하신 질서 안에서 함께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세례는 거듭남의 길을 가리키는 거룩한 입문이며, 그 길에서 실제로 인간을 정화하고 새롭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RC.006 해설)

 

요약

‘세례는 원죄를 씻어 주고 사람을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라는 명제에는 인간이 주님의 은총으로 죄에서 정화되고 영적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천주교는 세례를 통하여 원죄와 이전의 개인적인 죄가 용서되고 성령 안에서 새로운 출생이 이루어진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세례 후에도 죄로 기우는 성향이 남으며 지속적인 회개와 성화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므로, 이를 세례만 받으면 이후의 삶과 관계없이 자동으로 구원받는다는 주장으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천주교의 원죄는 개인이 직접 저지른 죄가 아니라 원래의 거룩함과 의로움이 결핍된 상태를 의미하므로, 스베덴보리의 유전악과 동일한 개념으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TCR.520–521에서 아담 한 개인의 죄가 모든 인간에게 전달되었다는 전통적인 설명을 비판하며, 인간이 부모에게서 물려받는 것은 자신이 실제로 저지른 죄가 아니라 악을 향한 성향이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TCR.670–673에서는 세례의 물로 씻는 행위가 악과 거짓에서 정화되는 영적 씻음을 나타내지만, 외적인 씻음 자체가 인간의 내적인 악을 제거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세례를 무의미한 의식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TCR.677–687에서 세례의 첫째 쓰임은 기독교회로의 입문과 영계의 기독교인들과의 연결, 둘째 쓰임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인정하며 따르는 것, 셋째이자 궁극적인 쓰임은 주님에 의한 거듭남이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세례가 거듭남과 관계된다는 사실이나 세례를 통하여 실제적인 영적 쓰임이 이루어진다는 점에 있지 않습니다. 세례의 외적인 의식 자체에 원죄의 제거와 새로운 영적 출생을 직접 성립시키는 성사적 효력을 부여하고, 그것을 실제적인 악의 제거와 구별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다만 천주교가 세례에 의한 은총의 새 출생과 그 이후의 지속적인 성화를 구별한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세례는 거듭남의 시작과 목적을 가리키며 영계와 연결되는 실제적인 쓰임을 지니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은 세례받은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죄의 용서와 거듭남은 주님께서 인간의 이해와 의지, 사랑과 삶을 실제로 변화시키시는 과정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세례의 참된 가치는 외적인 의식의 효력만이 아니라 그 의식이 가리키는 영적 정화와 거듭남의 삶에 있으며, 인간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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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PR.005 | 개신교인(Protestants)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죄를 지어도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는 다시 용서해 주신다’ - 보혈의 능력과 죄 사함의 속뜻, 용서는 어떻게 인간의 생명이 되는가?

 

해설

개신교 신앙에서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고백은 매우 익숙하고 소중한 신앙 표현입니다. 신자들은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깨달을 때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피를 기억하며, 그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반복해 온 잘못 때문에 괴로워하다가도 예수님의 보혈이 모든 죄를 씻어 준다는 말씀을 떠올리며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습니다. 이러한 믿음에는 인간이 자신의 공로로 죄를 없앨 수 없으며, 죄 사함과 구원의 모든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우리의 죄를 이미 모두 씻어 놓았으므로, 우리가 다시 죄를 지을 때마다 그 사실을 믿고 용서를 구하면 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죄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으신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인간이 실제로 그 죄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뜻입니까?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질문을 통해 보혈과 죄 사함의 의미를 더욱 깊이 살펴보도록 이끕니다. 그는 주님의 십자가와 구속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보혈을 죄에 대한 형벌의 대가나 인간의 악을 자동적으로 없애 주는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은 말씀의 속뜻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고 설명합니다.

 

먼저 개신교의 보혈과 죄 사함에 관한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엡1:7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며, 요일1:7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히9:14는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말씀에 근거하여 개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피 흘리심이 죄 사함의 결정적인 근거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개신교 전체가 보혈을 의지한다는 말만 하면 아무런 회개 없이 죄를 용서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5장 2항은 참된 회개가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며 그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제15장 3항은 회개가 죄의 대가나 용서의 공로가 될 수는 없지만, 회개 없이는 누구도 죄 사함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보혈을 의지하면 용서받는다’는 말 자체를 개신교의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이 실제 신앙생활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주님의 자비를 의지하여 죄에서 돌아서려는 사람에게 이 고백은 참된 소망이 될 수 있지만, 자신의 악을 계속 정당화하면서도 용서는 언제나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회개를 미루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피는 생명과 깊이 관계됩니다. 레17:11은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으며, 피가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구약의 제사에서 피가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것도 이러한 생명과 속죄의 관계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마26:28에서 자신의 피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피에 관한 성경의 표현을 단순한 장식이나 아무 의미 없는 종교적 상징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실제로 십자가에서 고난받고 피를 흘리셨으며, 그 사건은 인간의 구원과 깊이 관계됩니다. 다만 피의 문자적인 의미를 인정하는 것과, 그 피가 말씀의 속뜻에서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살피는 일은 구별해야 합니다. 요6:53-56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생명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면 인간이 주님의 실제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이상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요6:63에서 자신이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설명하십니다. 따라서 주님의 살과 피는 단순히 물질적인 육체와 혈액에 관한 표현에 머물지 않고, 인간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들이는 영적 현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이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4735에서 피가 거룩한 진리를 나타낸다고 설명하며, AC.10026에서는 주님의 피를 그분의 신적 선에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와 연결합니다. 여기서 신적 진리는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지식이나 교리적 설명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신적 사랑에서 나와 인간을 밝히고 정화하며 새로운 생명으로 이끄는 진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계시록 해설’(Apocalypse Revealed, AR, 1766) AR.379에서 계7:14의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는 말씀을 해설하면서, 어린양의 피가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를 나타내며, 옷을 희게 씻는 것은 진리로 악에서 비롯된 거짓을 깨끗하게 하고 주님에 의해 개혁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보혈의 의미를 단순히 죄에 대한 형벌이 이미 치러졌다는 사실에서 찾는 것과 다른 접근입니다. 주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주님의 신적 진리가 인간 안에 받아들여져 거짓을 밝히고 악을 드러내며, 그 사람이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되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보혈의 능력은 인간이 자신의 죄를 그대로 붙들고 있어도 그 죄를 보이지 않게 덮어 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를 통해 인간이 실제로 악과 거짓에서 깨끗하게 되는 데 있습니다. 이 해석은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피를 흘리셨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 사건과 성경의 표현이 담고 있는 영적 의미를 더욱 깊이 이해하도록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와 인간의 구속은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115-117에서 구속의 본질을 지옥의 세력을 정복하고 천국의 질서를 회복하여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신 주님의 역사로 설명합니다. 또한 TCR.126-131에서는 십자가의 수난을 주님께서 겪으신 마지막 시험이며, 그 시험을 통하여 인성의 영화가 완성된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성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리셔야 할 형벌을 성자에게 대신 집행하신 사건으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직접 인성을 취하여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악의 세력과 싸우셨으며, 십자가의 마지막 시험에서 완전히 승리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직접 이루신 구속의 역사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혈을 의지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에 주님께서 흘리신 피가 자신의 죄에 대한 법적인 대가로 계산되었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속하시고 지금도 악에서 구원하시는 주님 자신을 믿고, 그분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 진리의 능력으로 자신의 악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승리를 인간이 자신의 공로로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로 열어 주신 구원의 길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일은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죄 사함의 실제적인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TCR.611-614에서 인간이 거듭나는 만큼 죄가 제거되며, 바로 이러한 제거가 죄 사함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제거’라는 말을 죄가 인간의 존재에서 완전히 뿌리 뽑혀 다시는 나타날 가능성이 없어지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TCR.614는 사람이 실제로 자신의 것으로 만든 악은 남아 있지만, 주님께서 그 사람을 악에서 물러나게 하시고 선 안에 보존하신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죄 사함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죄를 기억하지 않기로 결정하시거나, 이미 치러진 형벌을 근거로 죄에 대한 책임을 장부에서 지워 버리시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악의 지배에서 물러나게 하시고, 그가 선과 진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시는 실제적인 구원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그 죄를 계속 사랑하고 행하기를 원한다면, 그는 입술로 용서를 구하고 있을지라도 아직 그 악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것을 미워하며 주님의 도움으로 멀리하려 한다면, 그는 주님의 용서하시는 자비를 실제 삶 안에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은 회개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가 인간의 거듭남 안에서 실제로 나타나는 일입니다.

 

특히 TCR.614에는 보혈과 죄 사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례가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장 낮은 천국에 있던 한 영이 자신은 그리스도의 피로 죄가 완전히 씻겨 없어졌기 때문에 죄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했던 일을 전합니다. 그는 자신의 죄가 사라졌다고 믿었지만, 자신의 이전 악한 성향을 다시 경험하게 되자 그것들이 실제로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결과 그는 인간과 천사가 모두 주님에 의해 악에서 물러나 선 안에 보존된다는 새로운 이해를 받아들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영이 천국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보혈과 죄 사함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그 오류 때문에 천국에서 배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교리적 오류를 발견하더라도 그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동시에 그 사례는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완전히 없애 버렸다는 믿음과, 주님께서 인간을 악에서 물러나게 하시고 선 안에 보존하신다는 진리 사이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죄 사함의 핵심은 과거의 악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되는 데 있지 않고, 그 악이 더 이상 인간의 생명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주님께서 그를 보존하시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보혈을 의지한다는 고백은 자신의 죄가 이미 사라졌다는 확신에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서 지금도 자신을 악에서 보호하시고 새로운 삶으로 이끄신다는 사실에 대한 신뢰로 깊어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죄를 반복해서 짓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지만, 오랫동안 익숙해진 습관이나 강한 유혹 때문에 같은 죄를 다시 범할 수 있습니다. 그때 그는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며 다시 용서를 구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단지 죄를 반복했다는 이유로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거듭남은 모든 악한 성향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과정이 아니며, 인간은 오랫동안 자신의 악과 싸우면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은 죄를 반복하지만 그 죄에서 벗어나기 원하는 상태와, 죄를 계속 행할 생각으로 미리 용서를 기대하는 상태입니다. 전자는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넘어지더라도 악을 죄로 인정하고 다시 일어서려는 상태이지만, 후자는 주님의 자비를 자신의 악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TCR.528-531에서 참된 회개가 자기 자신을 살피고 죄를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TCR.523에서는 죄를 의도적으로 정당화하고 고집하는 상태와, 악을 멀리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으나 무지나 강한 욕망 때문에 넘어지는 상태를 구별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몇 번 넘어졌는가만이 아니라, 자신의 악을 어떤 태도로 대하고 있으며 실제로 그 악에서 돌아서기를 원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주님의 자비는 반복해서 넘어지는 사람에게 절망하라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 악에서 돌아서도록 돕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 자비를 악을 계속 행해도 괜찮다는 보증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죄 사함을 실제 삶에 적용할 때 또 하나 살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큰 상처를 주고 난 뒤 주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았다고 믿는다면, 그 일로 모든 문제가 끝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일과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끼친 피해에 책임을 지는 일은 구별되지만 서로 무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거짓말 때문에 다른 사람이 손해를 보았다면 가능할 때 그 손해를 바로잡아야 하며, 자신의 폭언이나 부당한 행동으로 가족이 상처를 입었다면 그 잘못을 인정하고 행동을 바꾸어야 합니다. 물론 모든 피해가 원상회복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용서를 구했다고 해서 상대방이 곧바로 신뢰를 회복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참된 회개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가능한 범위에서 그 잘못을 바로잡고 같은 악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실제적인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용서와 인간 사회에서의 책임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죄인을 사랑하시고 그가 악에서 돌아서기를 원하시지만, 그 사랑이 악으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의 고통을 무시하거나 가해자의 책임을 면제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사랑과 진리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자신의 악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피해를 입은 사람의 입장을 헤아리며, 가능한 선한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이끕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한다는 것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악에서 실제로 돌아설 수 있도록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요일1:9의 말씀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주님께서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죄를 사하시는 일과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일이 함께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죄 사함을 단순히 잘못에 대한 형벌이 면제되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깨끗하게 하신다는 말씀의 실제적인 의미를 충분히 살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속뜻에서 정결하게 된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를 받아들여 악과 거짓을 멀리하고, 그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또한 요8:11에서 주님께서는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에게 자신도 정죄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자비가 인간의 악을 그대로 허용하는 방임과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주님의 용서는 인간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 주며, 그 길을 실제로 걸어가도록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보혈을 의지하고 죄 사함을 구한다는 것은 단순히 마음의 죄책감을 덜어 내는 종교적인 절차가 아닙니다. 주님의 자비를 믿고 자신의 죄를 정직하게 인정하며, 그분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를 받아들여 다시는 그 악을 사랑하지 않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는 일입니다. 여기서 용서는 인간의 변화와 분리되지 않으며, 인간의 변화 역시 주님의 용서하시는 자비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죄를 지어도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는 다시 용서해 주십니까? 이 고백에는 인간이 자신의 죄를 스스로 없앨 수 없으며, 용서와 구원의 모든 근원이 주님에게 있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넘어졌을 때에도 주님의 자비를 신뢰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보혈을 의지한다는 사실만으로 죄가 자동적으로 씻겨 사라진다거나, 주님의 용서를 확신하기만 하면 자신의 악을 계속 붙들고 있어도 된다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피가 속뜻에서 신적 진리를 나타내며, 그 진리가 인간의 악과 거짓을 깨끗하게 하고 거듭남으로 인도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죄 사함은 악이 인간의 존재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를 악에서 물러나게 하시고 선 안에 보존하시는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단지 ‘나는 예수님의 보혈로 용서받았는가?’가 아닙니다. ‘나는 주님의 보혈이 나타내는 신적 진리를 실제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 악에서 돌아서려 하고 있는가? 그리고 주님께서 열어 주신 새로운 생명의 길에서 이전과 다른 사랑과 선택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참된 죄 사함은 주님의 자비를 믿는 고백과 실제적인 회개가 분리되지 않는 곳에서 인간의 생명이 됩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한다는 것은 이미 용서받았다는 사실에 안심하여 악을 계속 행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를 구속하시고 지금도 악에서 건져 내시는 주님을 신뢰하면서 그분의 사랑과 진리 안에서 새롭게 살아가는 일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보혈과 죄 사함, 그리고 용서가 실제로 인간의 생명이 되는 영적 의미입니다. (PR.005 해설)

 

요약

 

‘죄를 지어도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는 다시 용서해 주신다’는 고백에는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죄를 없앨 수 없으며, 죄 사함과 구원의 모든 근원이 주님에게 있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보혈을 의지한다는 사실만으로 악이 자동적으로 씻겨 사라지거나, 실제적인 회개 없이도 용서를 확신할 수 있다고 이해한다면 오류가 됩니다. 개신교의 공식적인 가르침 역시 회개를 죄 사함의 공로로 삼지 않으면서도, 회개 없이 용서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4735와 AC.10026에서 피가 거룩한 진리, 특히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를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계시록 해설’(Apocalypse Revealed, AR, 1766) AR.379에서는 어린양의 피로 옷을 희게 씻는 것이 주님의 신적 진리를 통해 악에서 비롯된 거짓을 깨끗하게 하고 개혁되는 것을 뜻한다고 해설합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611-614에 따르면 죄 사함은 인간 안의 악이 완전히 소멸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악에서 물러나게 하시고 선 안에 보존하시는 역사입니다. 특히 TCR.614에는 그리스도의 피로 죄가 완전히 씻겨 없어졌다고 생각하던 천국의 한 영이 자신의 오해를 깨닫는 사례가 등장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보혈을 의지한다는 것은 과거에 흘리신 피가 죄에 대한 법적인 대가로 계산되었다는 사실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신 구속을 신뢰하고 그분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를 받아들여 자신의 악에서 돌아서는 일입니다. 반복해서 죄를 짓는다고 해서 반드시 참된 회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죄를 계속 행할 생각으로 미리 용서를 기대하는 태도는 참된 회개와 구별해야 합니다. 결국 용서는 단순히 죄책감을 없애 주는 선언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악의 지배에서 물러나게 하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거듭남의 역사이며, 보혈의 참된 능력은 바로 그 신적 사랑과 진리가 인간의 삶에서 실제로 받아들여지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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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40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의 발현과 메시지는 신자들의 회개와 신심에 도움을 줄 수 있다’ – 영적 체험의 유익함은 그 메시지가 실제로 마리아에게서 왔다는 증거인가?

 

해설

‘마리아의 발현과 메시지는 신자들의 회개와 신심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이것은 천주교의 마리아 신앙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성모 발현’(聖母發現, Marian apparition)과 ‘사적 계시’(私的啓示, private revelation)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천주교에는 마리아가 특정한 사람들에게 나타나 기도와 회개, 평화와 보속을 권고했다는 오랜 전승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루르드와 포르투갈의 파티마는 널리 알려진 사례이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메주고리예 역시 많은 신자가 순례하는 장소입니다. 이러한 발현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마리아가 자신들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증언하며, 그 메시지를 접한 신자들 가운데 신앙을 회복하고 회개와 기도생활에 새로운 열정을 갖게 되었다는 사례들도 전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어떤 메시지를 통하여 회개했다는 사실이 그 메시지를 전한 존재가 실제로 마리아였다는 증거가 될까요? 특별한 모습이나 음성을 경험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현상이 객관적인 영계의 사건이라고 확정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 역시 영계를 보고 천사와 영들을 만났다고 기록했는데, 그의 영적 경험과 천주교의 성모 발현을 어떤 기준으로 비교해야 할까요? 이번 명제는 영적 체험의 가능성을 처음부터 부정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체험의 진실성과 메시지의 신학적 정확성, 그리고 그로부터 나타나는 회개와 사랑의 열매를 구별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67항은 교회 역사에서 여러 사적 계시가 보고되었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교회의 권위에 의하여 인정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적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공적 계시와 동일한 권위를 지니지 않으며, 새로운 구원의 진리를 추가하거나 기존의 계시를 완성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사적 계시는 특정한 시대에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계시를 더욱 충실하게 살아가도록 도울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천주교가 마리아의 모든 발현과 메시지를 성경과 동일한 신적 권위로 받아들이라고 가르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설령 교회가 어떤 발현과 관련된 신심을 인정하더라도 모든 신자가 그 발현을 반드시 믿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구별에는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에 필요한 진리는 이미 주님의 계시 안에 있으며, 특별한 체험이나 새로운 메시지가 그 계시를 대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별도의 질문이 남습니다. 어떤 메시지가 신앙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과 그 메시지를 실제로 마리아가 전달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적 계시의 권위를 성경보다 낮게 인정하더라도, 그 발현의 초자연적 출처가 실제로 확인되었는지는 다시 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 2024년 5월 17일 바티칸 신앙교리부가 발표한 ‘초자연적 현상으로 추정되는 사건의 판별을 위한 규범’(Norms for Proceeding in the Discernment of Alleged Supernatural Phenomena)은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이 규범은 발현이나 환시, 특별한 메시지를 검토할 때 그 내용이 신앙과 도덕에 부합하는지, 체험자의 진실성과 태도는 어떠한지, 그리고 회개와 기도, 이웃 사랑과 같은 실제적인 열매가 나타나는지를 살피도록 합니다. 특히 ‘장애 없음’(Nihil obstat)이라는 긍정적인 결론은 관련 신심과 순례를 허용하거나 장려할 수 있다는 의미이지, 그 발현이 실제로 하늘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확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는 천주교가 스스로 긍정적인 영적 열매와 초자연적 출처의 진실성을 구별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원칙은 2024년 9월 19일 발표된 메주고리예 관련 문서 ‘평화의 모후’(The Queen of Peace)에도 적용되었습니다. 신앙교리부는 메주고리예를 통한 회개와 화해, 기도와 신앙의 회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발현 자체의 초자연적 진실성을 확정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마리아의 메시지라고 전해지는 내용 가운데 일부에는 신학적으로 부정확하거나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표현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따라서 어떤 신자가 특정한 순례지에서 참된 회개를 경험했다는 사실과 그곳에서 보고된 모든 발현과 메시지가 실제로 마리아에게서 왔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신앙적 유익함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것이 발현의 모든 세부 내용과 초자연적 출처를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역시 특별한 영적 현상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말고 분별하도록 가르칩니다. 요일4:1은 모든 영을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시험하라고 권합니다. 살전5:20–21은 예언을 멸시하지 말되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마24:24에서 주님께서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며 사람들을 미혹할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어떤 현상이 놀랍고 특별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출처를 신적으로 확정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영적 현상을 분별한다는 것이 그와 관련된 사람을 곧바로 거짓말쟁이나 악한 사람으로 규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체험자는 자신이 경험한 것을 진실하게 증언할 수 있지만, 그 체험의 원인과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기억과 감각, 기대와 신앙적 배경은 체험을 해석하는 과정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체험자의 진실성과 체험의 객관적인 사실 여부, 메시지의 신학적 타당성을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특별한 체험 안에 참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그 전체를 참되다고 인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분별은 놀라운 현상 자체에 매료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이 주님의 진리와 일치하며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지 살피는 데 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영적 발현의 가능성을 살펴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에서 인간이 죽은 후에도 완전한 인간의 형상을 지니고 영계에서 살아간다고 설명합니다. 영계의 천사와 영들은 서로 보고 듣고 말하며 실제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연계의 인간이 영적인 존재를 지각하거나 영계와 관계된 특별한 경험을 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 자신은 오랫동안 영계의 여러 존재와 만나고 대화한 경험을 기록했으며,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827항에서는 자신이 영계에서 마리아를 보았다고도 전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론을 따른다는 이유로 모든 영적 발현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의 직접적인 기록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능성과 실제적인 진실성은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마리아를 보았다고 기록했다는 사실이 후대에 보고된 모든 성모 발현의 진실성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빛나는 여인의 모습을 보았거나 자신을 마리아라고 소개하는 존재의 말을 들었다고 주장하더라도, 그 경험만으로 실제로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나타났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영적 존재의 모습과 정체, 그 존재가 전달하는 메시지의 출처는 각각 검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HH.249는 중요한 직접 근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당시 인간이 영들과 직접 대화하도록 허락되는 일이 드물며, 그러한 교통에는 위험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영들이 자신이 인간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특히 악한 영들이 그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해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종교적인 문제에 지나치게 몰두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내적인 체험에 사로잡히는 상태도 주의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적 환시나 특별한 체험이 반드시 악령에게서 비롯된다고 판정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어떤 사람이 특별한 모습을 보거나 메시지를 들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을 참된 천국의 계시라고 받아들이는 일에는 위험이 따를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영계와의 교통은 인간의 호기심이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허락과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따라서 성모 발현을 신앙의 특별한 은총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그 현상을 어떤 근거로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체험을 추구하는 태도 자체가 올바른 영적 질서에 속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특별한 체험의 존재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과 그 체험을 무조건 추구하거나 신적 진리의 확실한 근거로 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영적 일기’(Spiritual Diary, SD) 1647항은 이 문제를 더욱 깊이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그는 자신이 표상과 환시, 영들과 천사들의 대화를 통하여 여러 가지를 경험했지만, 실제로 자신에게 진리를 가르치신 분은 영이나 천사 자체가 아니라 오직 주님이었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영들이 여러 가지를 가르치려 할 때 거짓된 내용이 섞여 있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그들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이 진술은 스베덴보리가 영적 체험을 했다는 사실보다 더욱 중요한 원칙을 보여 줍니다. 영계의 존재가 어떤 말을 한다고 해서 그 말이 곧바로 신적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TCR.779에서 그는 새 교회의 교리를 어떤 천사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말씀을 읽는 가운데 받았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영적 경험을 근거로 성모 발현의 메시지 역시 특별한 신적 권위를 지닌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적용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나타났으며 얼마나 놀라운 체험이 일어났는가보다, 그 경험을 통하여 주장되는 진리가 실제로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의 기록에서도 영적 경험과 그 안에서 받아들이는 신적 진리는 구별되며, 모든 참된 진리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이 원칙은 발현 메시지의 내용을 검토할 때도 중요합니다. 성모 발현으로 전해지는 메시지들에는 기도와 회개, 죄에서 돌아서는 삶, 사랑과 평화, 이웃을 위한 희생을 강조하는 내용이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권고는 그 자체로 성경의 가르침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메시지 안에 참된 내용이 들어 있다는 사실과 그 메시지가 실제로 마리아에게서 왔다는 사실은 구별해야 합니다. 참된 내용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인간에게 전달될 수 있으며, 어떤 체험에 대한 해석이 부정확하더라도 그 안에 성경과 일치하는 진리가 포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회개와 사랑을 권고하는 메시지 안에 특정한 발현 장소나 발현자에게 지나친 종교적 권위를 부여하거나, 주님께 직접 나아가는 신앙을 흐리게 하는 내용이 함께 들어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따라서 메시지를 통째로 받아들이거나 통째로 부정하기보다 개별적인 내용을 분별해야 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거듭남’(regeneration)은 특별한 감동이나 종교적 열정을 경험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참된 거듭남은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배우고, 자신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실천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발현 메시지를 듣고 눈물을 흘리거나 특별한 평안을 느낀 것이 회개의 출발점이 될 수는 있지만, 실제적인 영적 변화는 그 이후의 삶에서 무엇을 사랑하고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통하여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특별한 체험의 감동보다 그 체험 이후에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거듭남이 더욱 중요합니다.

 

이 문제는 발현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그 메시지를 따르는 신자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으로도 이어집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마리아를 보았다고 주장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반드시 거짓말을 하거나 사람들을 속이려 한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그 사람이 매우 경건하고 겸손하며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체험을 신적인 사건이라고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일을 진실하게 설명하면서도 그 의미나 원인을 잘못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발현과 관련된 신심 가운데 실제적인 회개와 사랑의 열매가 나타났더라도, 그러한 열매가 발현의 모든 세부 내용과 메시지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사람의 진실성과 메시지의 정확성, 그리고 영적 열매의 가치를 구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과 의도를 완전하게 알고 계시지만, 우리는 그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그가 전하는 내용 가운데 말씀의 진리와 일치하는 것은 인정하고 일치하지 않는 것은 분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요구하는 태도는 모든 특별한 체험을 조롱하거나 무조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체험에 과도한 권위를 부여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존재할 수 있는 진리와 선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는 주님께 맡기되, 그가 전하는 메시지와 신학적 주장은 말씀에 따라 검토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특별한 영적 현상에 대한 관심이 말씀 자체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어떤 신자는 성경을 읽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일보다 새로운 발현과 메시지에 더 큰 열정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또한 특정한 시기와 장소에 주어진 경고나 약속을 신앙의 중심에 놓고,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중요한 영적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영적 생명을 위한 가장 중요한 진리는 이미 주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가르치시고, 그 말씀을 받아들여 살아가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더라도 그것이 말씀을 대신하거나 말씀보다 높은 권위를 차지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영적 체험이라면 인간의 시선을 체험 자체나 특정한 전달자에게 붙들어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 향하게 해야 하며, 새로운 신비에 대한 호기심보다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마리아가 요2:5에서 하인들에게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권한 것처럼, 신앙의 올바른 방향은 특별한 전달자에게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결국 발현과 메시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은 그것이 얼마나 신비롭고 놀라운가가 아니라, 주님의 진리에 부합하며 인간을 회개와 사랑, 거듭남의 삶으로 이끄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한 열매가 나타났더라도 발현의 초자연적 진실성은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특별한 체험을 성급하게 부정해서도 안 되지만, 그것을 말씀보다 높은 권위로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참된 신앙은 새로운 메시지를 찾아다니는 데 있지 않고,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말씀을 깊이 이해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SL.RC.040 해설)

 

요약

‘마리아의 발현과 메시지는 신자들의 회개와 신심에 도움을 줄 수 있다’라는 명제는 그 가능성 자체에서 반드시 오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발현과 관련된 메시지나 신심을 통하여 신자가 자신의 악을 돌아보고 기도생활을 회복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주교 역시 사적 계시를 그리스도의 완성된 공적 계시와 동일한 권위로 가르치지 않으며, 2024년의 판별 규범에서는 긍정적인 영적 열매와 발현 자체의 초자연적 진실성을 구별합니다. 따라서 천주교가 모든 성모 발현을 반드시 믿어야 할 신앙의 진리로 선언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어떤 메시지가 신자들에게 유익했다는 사실만으로 실제로 마리아가 나타나 그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HH.249에서 영들과 직접 교통하는 일의 위험을 경고하며, SD.1647에서는 영들이 전달하는 내용을 그대로 믿지 않고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TCR.779에서는 새 교회의 교리를 천사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말씀을 통하여 받았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특별한 종교적 체험을 통하여 회개와 신앙의 회복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발현의 초자연적 출처를 충분한 근거 없이 확정하거나, 그 메시지를 말씀과 동일하거나 더 높은 권위로 받아들이며, 특정한 발현자나 장소에 특별한 영적 권능을 부여하는 데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모든 성모 발현이 실제로 거짓이거나 악한 영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별적인 체험의 출처와 성격은 충분한 근거 없이 단정해서는 안 되며, 그 안에 담긴 진리와 오류도 구별해야 합니다. 참된 회개와 거듭남은 특별한 현상을 경험하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을 실천하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성모 발현과 메시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기준은 체험자의 확신이나 현상의 신비로움보다, 그 내용이 주님의 말씀에 부합하며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모든 영적 체험과 메시지는 말씀의 진리 아래에서 분별해야 하며, 인간의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유일한 근원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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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39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에게 특별한 공경을 드리는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과 다르다’ – 공경과 흠숭의 구별은 실제 신앙의 내면에서도 유지되는가?

 

해설

‘마리아에게 특별한 공경을 드리는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과 다르다.’ 이것은 천주교가 마리아 신심을 설명할 때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신학적 원칙 가운데 하나입니다. 천주교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성인들에게 표하는 공경을 구별하며, 마리아에게는 다른 성인들보다 특별한 공경을 드릴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마리아에게 기도를 청하거나 성모상 앞에서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고, 그것만으로 그 사람이 마리아를 하나님과 동등한 신으로 숭배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흠숭과 공경의 차이는 사용하는 명칭에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실제로 누구를 모든 생명과 구원의 근원으로 인정하고 의지하는가에 있는 것일까요? 특별 공경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종교적 행위가 올바른 것으로 인정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예배가 외적인 의식보다 그 안에 담긴 내적인 사랑과 신앙에 있다고 가르치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마리아 공경의 의미와 한계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요? 이 문제는 단순히 천주교의 종교적 관습을 평가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인간에 대한 존경이 어떻게 구별되는지, 그리고 그 구별이 실제 신앙의 삶에서도 유지되는지를 묻는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용어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전통적인 가톨릭 신학에서는 하나님께만 드리는 ‘흠숭’(欽崇, latria), 천사와 성인들에게 드리는 ‘공경’(恭敬, dulia), 그리고 마리아에게 드리는 ‘특별 공경’(特別恭敬, hyperdulia)을 구별합니다. 흠숭은 하나님을 창조주이자 모든 생명과 구원의 근원으로 인정하고 그분께 드리는 예배를 뜻합니다. 공경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베푸신 은총과 그들이 보여 준 거룩한 삶을 존중하는 것이며, 특별 공경은 주님의 어머니였던 마리아의 독특한 역할과 복됨을 특별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흠숭과 공경이 단순히 경배의 강도에 따라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에게 드리는 공경이 아무리 특별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흠숭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공경한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창조주나 신적 존재로 인정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천주교의 특별 공경은 일반적인 역사적 인물에 대한 존경보다 넓은 종교적 의미를 지니며, 성모 축일과 묵주기도, 전구 요청 등의 신심 행위까지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공경과 흠숭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원칙을 인정하는 것과 그 원칙 아래 이루어지는 모든 종교적 행위가 올바르다고 판단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러한 구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66항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 항목은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로서 특별한 공경을 받지만, 그 공경은 성육신하신 말씀과 성부와 성령께 드리는 흠숭과 본질적으로 다르며 오히려 그 흠숭을 증진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67항은 마리아에 관한 가르침과 신심에서 지나친 과장과 편협한 축소를 모두 피하고, 참된 신앙에 근거하지 않은 헛된 믿음을 경계하도록 권고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971항 역시 마리아에 대한 특별 공경이 하나님께 드리는 흠숭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1997년 10월 22일의 교리교육에서 마리아에 대한 공경이 다른 성인들에게 드리는 공경보다 특별하지만, 하나님께만 드리는 흠숭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고 밝혔습니다. 이러한 공식적인 가르침에는 인정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만 속하는 영광과 권능이 있으며, 아무리 복된 인간이라도 창조주와 동일한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주교가 이러한 구별을 공식적으로 선언한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실제 신심 행위가 언제나 그 원칙에 일치한다고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리의 내용과 개인의 신앙적 이해, 그리고 구체적인 종교 행위는 각각 살펴야 합니다.

 

성경 역시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예배와 인간에게 표할 수 있는 존경을 구별합니다. 출20:3–5는 다른 신들을 두지 말고 우상을 만들어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섬기지 말라고 명령하며, 마4:10에서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분만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모든 참된 예배의 궁극적인 대상이 하나님 한 분이심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이 인간에 대한 존경 자체를 금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과 신앙의 선배들을 기억하고 그 믿음을 본받으라는 히13:7의 권고는 인간에게 표할 수 있는 올바른 존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마리아 역시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된 복된 여인이었으며, 눅1:48에서 이후의 모든 세대가 자신을 복되다고 일컬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복되다고 인정하고 그의 믿음과 순종을 존중하는 일 자체를 우상숭배라고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를 복되다고 일컫는 것과 그에게 기도하며 특별한 영적 보호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동일한 행위가 아닙니다. 성경이 어떤 사람을 존경하도록 가르친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에게 종교적 청원을 드려도 된다는 결론이 자동으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공경과 흠숭을 구별하는 문제는 외적인 명칭을 넘어 실제로 누구에게 어떤 종류의 영적 권능을 기대하는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차이는 성모상과 성화 앞에서 이루어지는 신심 행위를 살펴볼 때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천주교는 성모상 자체를 신으로 섬긴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모상과 성화는 마리아의 믿음과 주님의 성육신을 기억하도록 돕는 종교적 표상이며, 형상에 표하는 존경은 궁극적으로 그 형상이 나타내는 인물을 향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어떤 신자가 성모상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외적인 모습만으로 그가 실제로 마리아를 하나님처럼 섬긴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무릎을 꿇거나 절하는 행위는 문맥에 따라 예배뿐 아니라 존경과 간청을 표현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형상이 기억과 묵상의 도구라는 설명과 그 형상에 특별한 영적 능력이 있다고 믿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특정한 성모상이나 성지에 독립적인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그 형상 앞에서 기도하면 마리아가 자신의 필요를 특별하게 해결해 준다고 기대한다면 그 믿음은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형상이나 몸의 자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에게 능력을 기대하고 그 능력이 어디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겉으로 비슷한 행위를 하더라도 그 안에 담긴 믿음과 의도는 다를 수 있으며, 인간은 다른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을 완전하게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외적인 신심 행위의 의미를 검토하되,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까지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문제를 더욱 깊이 살펴보도록 이끕니다. 그는 참된 예배가 단순한 기도문이나 찬송, 몸의 자세와 종교적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외적인 행위 안에 담긴 사랑과 신앙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구별은 ‘속 사람’(internal man)과 ‘겉 사람’(external man)의 관계와 연결됩니다. 인간은 겉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의 영광과 이익을 추구할 수 있으며, 반대로 짧고 단순한 기도 안에서도 주님을 향한 깊은 사랑과 믿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종교 행위의 영적 가치를 판단하려면 그 행위가 겉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뿐 아니라 무엇을 향하여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지 살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2–12에서 천국의 하나님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시며, 천국의 모든 선과 진리가 그분에게서 비롯된다고 가르칩니다. 천사들은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선과 진리를 만들어 내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천사와 성인의 믿음과 사랑을 존중하는 일은 가능하지만, 그들에게 주님께만 속한 신적 권능을 기대하거나 그들을 구원의 근원처럼 의지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참된 공경은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선과 진리를 인정하는 것이며, 참된 예배는 그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신 주님께 자신을 열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에 대한 존경과 주님께 드리는 예배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원칙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도 일치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당시 로마 가톨릭의 마리아 신심에 대하여 강한 비판도 남겼습니다. 그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94에서 마리아를 다른 모든 성인보다 높이고 여신이나 성인들의 여왕처럼 받드는 신심을 비판합니다. 또한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기보다 마리아의 아들로 이해하는 경향이 주님의 참된 신성에 관한 이해를 흐리게 한다고 지적합니다. 다만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평가와 천주교의 공식 교리 내용을 구별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마리아를 실제로 여신이라고 가르치지 않으며, 마리아에게 드리는 특별 공경이 하나님께 드리는 흠숭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TCR.94를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마리아를 여신으로 인정했다는 증거처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비판은 마리아의 자연적인 모성을 지나치게 높이는 과정에서 주님의 유일한 신성이 흐려지고, 인간이 주님께만 돌려야 할 영광과 의존을 피조물에게 옮길 위험에 관한 것입니다. 그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마리아에게 어떤 명칭을 사용하는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신앙의 실제적인 중심이 주님께 있는가, 아니면 마리아라는 특별한 피조물에게 옮겨 가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따라서 특별 공경이라는 명칭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신심의 모든 내용과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문제는 앞서 살펴본 마리아의 전구 및 묵주기도와도 연결됩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에게 드리는 특별 공경이 하나님께 드리는 흠숭과 다르다고 가르치면서, 동시에 그에게 신자들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청하는 행위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공경과 흠숭이 교리적으로 구별된다는 사실과 그러한 청원이 실제 영계의 질서에 부합한다는 주장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TCR.824–825에서 지상의 사람들이 천국의 성인들에게 드리는 기도를 그 성인들이 알고 듣는다는 생각을 직접 비판합니다. 따라서 마리아에게 드리는 청원을 흠숭이 아니라 특별 공경이라고 부른다는 사실만으로 그 행위의 타당성이 입증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천주교는 모든 전구와 은총이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속에 종속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2025년 바티칸 신앙교리부의 ‘신자들의 어머니’(Mater Populi Fidelis) 역시 마리아를 그리스도와 나란히 서는 구원자처럼 이해하거나, 주님의 자비가 부족하므로 마리아가 인간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경계합니다. 이러한 공식적인 구별은 인정해야 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 설명을 넘어, 천국의 특정한 인간에게 직접 종교적 청원을 드리는 행위 자체가 참된 영적 교통의 질서에 부합하는지 검토해야 합니다. 이처럼 마리아를 존중하는 일반적인 태도와 마리아에게 직접 기도를 청하는 구체적인 행위는 구별하여 평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를 특별히 존중한다는 것은 실제로 어떤 의미를 지녀야 할까요? 성경은 마리아의 믿음과 순종을 중요한 모범으로 제시합니다. 눅1:38에서 마리아는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고 부르며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눅1:46–47에서는 자신의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하나님 자신의 구주를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요2:5에서 하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권합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마리아는 자신에게 특별한 신적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사람들이 자신에게 머물도록 이끌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도록 권합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존중하는 가장 분명한 길은 그가 보여 준 믿음과 순종을 기억하고 본받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존중이 그에게 독립적인 영적 권능을 기대하거나 직접적인 종교적 청원을 드려야 한다는 뜻으로 확대될 필요는 없습니다. 한 인간의 아름다운 믿음을 인정하는 것과 그 인간을 영적인 의존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참된 위대함은 특별한 호칭이나 독립적인 거룩함에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여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마리아의 복됨 역시 이러한 영적 원리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공경과 흠숭의 구별을 실제 신앙의 내면에 적용해야 합니다. 어떤 신자가 하나님께만 흠숭을 드린다고 고백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마리아가 주님보다 더 자비롭고 자신의 기도를 더 잘 들어주며 특별한 능력으로 자신을 보호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신앙에는 공식적인 교리와 실제적인 의존 사이의 긴장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능성을 근거로 모든 천주교 신자가 마리아를 하나님처럼 섬긴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마리아를 기억함으로써 주님의 성육신과 구속을 더욱 깊이 묵상하고 그분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마리아에 대한 공경이 주님께 직접 나아가는 신앙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가능성을 구별하되 다른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은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강조하는 참된 예배의 중심은 주님 한 분을 향한 사랑과 믿음,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선을 행하는 삶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드리는 흠숭과 인간에게 표하는 공경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하지만, 그 구별은 이름을 다르게 붙이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실제 기도의 대상과 영적 의존의 방향에서도 유지되어야 합니다. 결국 마리아를 비롯한 모든 피조물을 올바르게 존중하는 길은 그들에게서 나타나는 선과 진리의 근원이 오직 주님이심을 인정하고, 모든 예배와 구원의 소망을 주님 한 분께 돌리는 데 있습니다. (SL.RC.039 해설)

 

요약

‘마리아에게 특별한 공경을 드리는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과 다르다’라는 명제의 기본적인 구별 자체는 오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만 드리는 흠숭과 인간에게 표하는 존경은 본질적으로 달라야 하며, 이러한 원칙은 성경과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도 부합합니다. 천주교는 ‘흠숭’(latria), ‘공경’(dulia), ‘특별 공경’(hyperdulia)을 구별하고, 마리아를 하나님과 동등한 신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따라서 천주교의 모든 마리아 공경을 신적 숭배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리적 구별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마리아에게 드리는 모든 종교적 청원과 신심이 자동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HH.2–12에서 천국의 모든 생명과 권능이 주님에게서 비롯된다고 가르치며, TCR.94에서는 마리아를 지나치게 높이는 당시의 신심을 비판합니다. 또한 TCR.824–825에서는 천국의 성인들에게 직접 기도를 드리는 관행이 영계의 질서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마리아를 복된 여인으로 기억하고 그의 믿음과 순종을 존중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특별 공경이라는 이름 아래 그에게 주님께만 속한 영적 권능을 기대하거나, 주님께 돌려야 할 실제적인 신앙적 의존을 다른 피조물에게 옮기는 데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모든 마리아 공경을 반드시 우상숭배라고 판정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의 내면은 주님께 맡기되, 그가 믿고 실천하는 교리와 행위는 말씀의 진리에 따라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명제는 ‘공경과 흠숭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원칙에서는 참되지만, ‘따라서 마리아에게 드리는 모든 특별 공경과 종교적 청원은 올바르다’는 결론으로 확대할 때에는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판정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께 드리는 흠숭과 인간에게 표하는 존경을 구별하고, 모든 선과 진리와 구원의 근원을 주님 한 분에게서 찾으며,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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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38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묵주기도를 바치며 마리아의 전구를 청하는 것은 올바른 신심이다’ – 주님의 생애를 묵상하는 기도와 마리아에게 청원하는 기도는 같은 영적 질서에 속하는가?

 

해설

‘묵주기도를 바치며 마리아의 전구를 청하는 것은 올바른 신심이다.’ 이것은 천주교에서 오랫동안 실천해 온 ‘묵주기도’(默珠祈禱, Rosary)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묵주기도는 일정한 수의 구슬을 이용하여 정해진 기도문을 반복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생애에 관한 신비를 묵상하는 기도입니다. 천주교 신자들에게 묵주기도는 주님의 성육신과 가르침, 고난과 부활을 마음에 새기며 마리아의 ‘전구’(轉求, intercession)를 청하는 중요한 신심 행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몇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묵주기도는 예수님을 향한 기도일까요, 마리아를 향한 기도일까요? 성경의 말씀을 묵상하는 행위와 마리아에게 직접 전구를 요청하는 행위는 동일한 영적 의미를 지닐까요? 정해진 기도문을 여러 차례 반복하는 것이 주님께 깊이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러한 반복에 포함된 모든 기도 내용도 올바르다고 보아야 할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참된 예배와 기도가 주님 한 분을 향해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묵주기도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묵상과 마리아를 향한 직접적인 청원을 어떻게 구별해야 할까요? 이번 문제는 단순히 천주교의 기도 관습을 평가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기도가 무엇이며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 그리고 외적인 신앙 행위가 어떻게 참된 내적 예배로 이어지는지를 묻는 문제입니다.

 

먼저 묵주기도의 구성과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묵주기도는 일반적으로 십자가의 성호와 사도신경으로 시작하여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등을 바치며 정해진 신비를 묵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한 단에서는 주님의 기도 한 번과 성모송 열 번, 영광송 등을 바치며, 통상 다섯 단을 하나의 묵주기도 단위로 삼습니다. 묵주기도의 신비는 주님의 성육신과 탄생을 묵상하는 환희의 신비, 공생활과 복음 선포를 묵상하는 빛의 신비, 고난과 십자가를 묵상하는 고통의 신비, 부활과 영광을 묵상하는 영광의 신비로 이루어집니다. 전통적으로는 환희·고통·영광의 세 신비가 사용되었으며, 200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빛의 신비를 추가로 제안하여 오늘날 널리 사용하는 네 묶음의 구성이 갖추어졌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살펴보면 묵주기도가 처음부터 끝까지 마리아의 이름만 부르는 기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묵주의 구슬은 기도의 순서를 기억하고 집중을 돕는 도구이며, 각 단에서 묵상하는 중심 사건은 주님의 성육신과 구속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묵주기도의 영적 의미를 평가하려면 성경에 근거한 묵상과 실제로 반복하는 기도문의 대상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천주교 역시 묵주기도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설명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2년 10월 16일 교황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Rosarium Virginis Mariae) 1항에서 묵주기도가 마리아적인 성격을 지니지만 본질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기도라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12항에서는 묵주기도가 ‘관상’(觀想, contemplation)을 잃으면 그 본래 의미를 상실하고 기계적인 반복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26항은 반복되는 기도문이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더욱 깊게 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하며, 28항은 묵주기도가 하나의 묵상 방법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나아가 묵주의 구슬을 부적이나 마술적인 물건처럼 취급하는 태도도 경계합니다. 따라서 천주교의 공식적인 가르침은 기도문을 많이 반복하거나 묵주를 오래 사용하면 자동으로 특별한 은총을 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인 기도가 주님의 생애를 깊이 이해하고 그분을 사랑하며 말씀대로 살아가는 내적인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도에는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마음을 집중하고 말씀을 반복하여 기억하는 훈련이 필요하며, 주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깊이 묵상하는 행위는 신앙생활에 유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묵주기도 전체를 처음부터 무의미한 반복이나 우상숭배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 안에 담긴 성경적 묵상의 가치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판단입니다.

 

그러나 묵주기도의 중심을 이루는 ‘성모송’(聖母誦, Hail Mary)을 살펴보면 별도의 문제가 나타납니다. 성모송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앞부분은 눅1:28의 천사의 인사와 눅1:42의 엘리사벳의 축복에 근거합니다. 마리아가 은총을 받은 여인이며 주님께서 그와 함께하신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낳은 예수님이 복되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성경에 직접 근거하며, 마리아에게 주어진 특별한 소명을 인정하고 그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주님을 찬양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성모송의 뒷부분은 마리아에게 지금과 죽을 때에 죄인인 자신들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청하는 내용입니다. 이 부분은 성경의 인사를 그대로 낭독하는 것이 아니라, 후대 교회의 신심 안에서 발전한 직접적인 전구 요청입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2676–2677항 역시 이 두 부분을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앞부분에서는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베푸신 은총을 찬양하고, 뒷부분에서는 마리아의 모성적 전구에 자신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모송 전체가 성경 구절을 그대로 낭독하는 기도라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는 성경에 근거한 축복과 후대 교회가 발전시킨 전구 요청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묵주기도의 성경적 묵상과 마리아를 향한 청원의 타당성을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반복하여 묵상하는 행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시1:2는 복 있는 사람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한다고 가르치며, 마26:44에는 주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같은 말씀으로 다시 기도하신 사실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마6:7에서 주님께서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근거로 모든 반복 기도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경계하신 것은 같은 말을 다시 하는 형식 자체보다, 말을 많이 해야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신다고 생각하는 외적인 기도 태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속 사람’(internal man)과 ‘겉 사람’(external man)에 관한 가르침도 이러한 구별을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참된 예배는 단순히 입술의 말과 몸의 동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외적인 행위 안에 담긴 사랑과 신앙에 있습니다. 인간은 겉으로 기도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의 욕망만을 추구할 수 있으며, 반대로 짧고 단순한 기도 안에서도 주님을 향한 깊은 사랑과 믿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반복되는 기도문이나 묵주의 사용은 그것이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자신의 악을 돌아보며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인도할 때 유익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적인 반복에 특별한 효력이 있다고 믿거나 기도의 횟수 자체를 신앙의 목표로 삼는다면 예배의 질서가 뒤집힐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반복하는가보다 무엇을 생각하며 누구를 향하여 기도하고, 그 기도가 삶의 어떤 변화로 이어지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묵주기도의 그리스도 중심적 묵상과 마리아의 전구가 만납니다. 천주교는 묵주기도를 통하여 마리아와 함께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고, 마리아의 전구를 청함으로써 그리스도께 더욱 가까이 나아간다고 설명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 16항과 33항에서 마리아의 모성적 전구가 묵주기도의 중요한 요소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묵주기도의 그리스도 중심성을 인정한다는 이유로 그 안에 마리아를 향한 직접적인 청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는 두 요소가 서로 조화를 이룬다고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는 일과 천국의 마리아에게 전구를 요청하는 일은 서로 다른 영적 행위입니다. 주님의 성육신과 가르침, 고난과 부활을 묵상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을 주님의 사랑과 진리로 향하게 합니다. 반면 마리아에게 직접 전구를 요청하는 행위는 그가 지상의 신자들이 드리는 청원을 실제로 알고 들을 수 있다는 전제를 포함합니다. 이러한 전제는 마리아가 복된 여인이었다는 사실이나 주님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에서 자동으로 도출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묵주기도의 묵상에 담긴 진리를 인정하면서도, 마리아를 직접적인 기도 요청의 대상으로 삼는 부분은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 스베덴보리는 매우 직접적인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그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824–825항에서 천국의 성인들이 지상에서 자신들에게 드리는 기도를 듣는다고 생각하는 관행을 비판합니다. TCR.824에서는 지상에서 성인으로 공경받던 사람들이 영계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며, 자신들이 지상의 사람들에게서 기도와 공경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TCR.825에서는 성인들에게 드리는 청원이 실제로 그들에게 들리지 않는다고 명확하게 말합니다. 이 설명은 천국의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거나 주님의 섭리 안에서 선한 쓰임을 감당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천사들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 인간을 보호하고 돕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천사들의 도움과 그들에게 직접 기도하는 행위는 다른 문제입니다. 영계와 자연계 사이의 참된 교통은 주님의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며, 인간이 원하는 특정한 영적 존재를 자유롭게 불러 자신의 간구를 전달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따라서 TCR.824–825는 묵주기도에 포함된 마리아를 향한 청원을 검토하는 데 중요한 직접 근거가 됩니다. 다만 이 항목들은 성인에게 드리는 기도에 관한 일반적인 가르침이지, 묵주기도 전체의 구성과 목적을 직접 분석한 해설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묵주기도의 성경 묵상에 대한 평가와 그 안에 포함된 전구 요청에 대한 판단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다른 성인들과 달리 지상의 기도를 들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천주교는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자 교회의 영적 어머니이므로 그의 전구가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저작에서 마리아에게 그러한 예외적인 기도 청취 능력이 주어졌다고 가르치는 근거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TCR.827에서 자신이 영계에서 마리아와 만났으며, 마리아가 주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예배한다고 말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인간으로 나타나며, 모든 신자의 청원을 듣고 은총을 전달하는 독립적인 권위자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 기록이 마리아의 모든 천상 활동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가 어떠한 사랑이나 선한 쓰임도 감당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천주교 역시 마리아를 주님과 동등한 신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천주교가 말하는 전구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재에 종속된 것으로 이해되며, 2025년 바티칸 신앙교리부의 ‘신자들의 어머니’(Mater Populi Fidelis)도 이러한 구별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두 전통의 실제적인 차이는 마리아가 독립적인 신적 권능을 지녔는가의 문제에만 있지 않습니다. 천국의 특정한 인간에게 직접 청원하는 행위 자체가 참된 영적 교통의 질서에 부합하는가 하는 점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TCR.824–825에 비추어 보면, 마리아에게 직접 전구를 요청하는 관행은 그러한 질서와 일치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구별은 묵주기도를 바치는 사람들의 실제적인 신앙생활을 이해할 때에도 중요합니다. 어떤 신자는 묵주기도를 통하여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고, 어떤 사람은 반복되는 기도 속에서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을 가라앉히며 주님께 마음을 돌릴 수 있습니다. 가족이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고 화해의 마음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무조건 거짓되거나 무가치하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지닌 불완전한 이해 가운데서도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참된 선과 진리를 통하여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하여 실제적인 위로와 평안을 경험했다는 사실이 그 기도에 포함된 모든 교리적 전제가 참되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반대로 교리적 오류를 발견했다고 해서 그 기도 가운데 이루어진 모든 진실한 회개와 사랑의 경험까지 부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서 사람의 내면과 기도의 내용을 구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마음과 사랑을 완전하게 알고 계시지만, 우리는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그가 믿고 실천하는 내용이 말씀의 진리와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묵주기도를 바치는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단하는 일과 묵주기도의 신학적 내용을 평가하는 일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묵주기도의 긍정적인 요소를 보존하면서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욱 온전한 기도의 방향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 핵심은 외적인 형식보다 기도의 대상과 내용에 있습니다. 주님의 성육신과 탄생을 묵상하고, 그분의 가르침과 고난을 기억하며, 부활과 인성의 영화(榮化, glorification)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귀중한 영적 훈련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정해진 시간에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말씀을 반복하여 기억하는 것도 신앙생활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묵상을 위하여 반드시 마리아에게 전구를 요청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주님께 직접 기도할 수 있으며,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요14:13–14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단순히 기도 끝에 정해진 말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성과 그분의 말씀에 담긴 진리를 인정하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가려는 마음과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기도는 특별한 형식을 이용하여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마음을 주님의 사랑과 진리에 열어 드리는 행위입니다. 주님의 생애를 묵상하는 기도는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갈 때 더욱 깊은 영적 의미를 지닙니다.

 

마지막으로 묵주기도의 가치를 판단할 때 우리가 붙들어야 할 중심은 주님과 인간 사이의 직접적인 영적 관계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을 알고 계시며, 인간이 자신의 고통과 필요를 말씀드리기 전에 이미 그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는 분입니다. 인간이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하여 다른 어떤 피조물의 특별한 자비나 영향력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묵주기도에 담긴 주님의 성육신과 구속의 역사에 대한 묵상은 존중할 수 있지만, 마리아에게 직접 전구를 요청하는 부분까지 동일한 수준의 신적 진리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외적인 반복과 묵주의 사용 역시 그 자체로 거룩하거나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사랑과 믿음을 표현하고 인간의 마음을 어디로 인도하는가에 따라 평가해야 합니다. 우리는 묵주기도를 바치는 신자들의 진실한 마음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지만, 기도의 내용과 대상은 말씀의 진리와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에 비추어 분별해야 합니다. 마리아가 요2:5에서 하인들에게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라고 권한 것처럼, 참된 신앙의 방향은 언제나 마리아 자신에게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반복되는 기도를 넘어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 바로 여기에 참된 기도의 목적이 있습니다. 결국 올바른 신심의 중심은 묵주의 구슬이나 기도의 횟수, 특정한 성인의 전구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 한 분을 바라보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여 선을 행하는 삶에 있습니다. (SL.RC.038 해설)

 

요약

‘묵주기도를 바치며 마리아의 전구를 청하는 것은 올바른 신심이다’라는 명제에는 주님의 성육신과 가르침, 고난과 부활을 지속적으로 묵상하고 기도의 훈련을 통하여 신앙을 깊게 하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천주교는 묵주기도를 본질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관상기도로 설명하며, 외적인 반복이나 묵주 자체에 마술적인 효력이 있다는 생각을 경계합니다. 이러한 공식적인 이해는 정확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모송에는 성경에 근거한 마리아에 대한 축복뿐 아니라, 천국의 마리아에게 직접 전구를 요청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두 요소는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TCR.824–825에서 천국의 성인들이 지상에서 자신들에게 드리는 기도를 알고 듣는다는 생각을 직접 비판합니다. 따라서 그의 관점에서 묵주기도에 담긴 주님의 생애에 대한 묵상은 유익한 영적 훈련이 될 수 있지만, 마리아에게 직접 청원하는 부분은 참된 영적 교통의 질서와 일치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또한 반복되는 기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외적인 형식과 반복 횟수에 특별한 효력이 있다고 믿거나, 그 안에 담긴 기도의 내용과 대상을 올바르게 분별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묵주기도 전체를 직접 분석하여 반박했다고 주장할 근거는 부족합니다. 그의 직접적인 비판은 성인들에게 드리는 청원에 관한 것이며, 묵주기도 전체에 대한 평가는 그 가르침과 내적 예배의 원리에 근거한 신학적 적용입니다. 그러므로 오류의 핵심은 묵주를 사용하거나 주님의 생애를 반복하여 묵상하는 행위 자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묵상과 마리아에게 직접 전구를 청하는 행위를 하나의 신심으로 결합하고, 후자를 정당한 기도의 방식으로 확정하는 데 있습니다. 참된 기도는 주님께 직접 마음을 열고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 말씀에 따라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 있습니다. 묵주기도를 바치는 사람의 내면은 주님께 맡기되, 그 기도의 내용과 영적 질서는 말씀에 따라 분별해야 합니다. 모든 참된 기도와 예배의 중심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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