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C.레2, ‘고운 가루에 기름을 붓고 - 선과 진리가 하나 되어 삶의 예물이 되기까지’

 

1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2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가루 한 움큼과 기름과 그 모든 유향을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3그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4네가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이나 기름을 바른 무교전병을 드릴 것이요 5철판에 부친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지 말고 기름을 섞어 6조각으로 나누고 그 위에 기름을 부을지니 이는 소제니라 7네가 냄비의 것으로 소제를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와 기름을 섞어 만들지니라 8너는 이것들로 만든 소제물을 여호와께로 가져다가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으로 가져가서 9그 소제물 중에서 기념할 것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10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돌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11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12처음 익은 것으로는 그것을 여호와께 드릴지나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는 제단에 올리지 말지며 13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14너는 첫 이삭의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거든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네 소제를 삼되 15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위에 유향을 더할지니 이는 소제니라 16제사장은 찧은 곡식과 기름을 모든 유향과 함께 기념물로 불사를지니 이는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니라 (레2)

 

해설

레위기 1장이 피 흘리는 동물의 번제였다면 레위기 2장은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피도 없고 짐승의 죽음도 없습니다. 대신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이 등장하고, 화덕과 철판과 냄비에서 음식을 만들어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러나 두 장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레1의 번제가 사랑의 선으로부터 드리는 예배를 보여 주었다면, 레2의 소제는 그 사랑이 진리와 결합하여 인간의 삶 안에서 어떻게 구체적인 예배가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소제는 먹을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단순한 곡물 제사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결합하여 주님께 드려지는 삶의 예배를 표상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원전 가운데 하나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2177(창18:6)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소제가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고 유향을 더하여 드리는 제사였다고 설명하면서, 이러한 것들이 모두 사랑과 체어리티에 속한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표상했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그는 레위기 2장 전체가 소제를 어떻게 준비하는지를 다루는 장이라고 직접 언급합니다. 따라서 레2를 읽을 때 우리는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을 각각 따로 떨어진 상징으로 보는 데서 멈추지 말고, 그것들이 어떻게 하나의 소제가 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 재료는 ‘고운 가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고운 가루가 ‘선에서 나오는 진리’를 의미한다고 분명히 설명합니다(AC.9995, 출29:2). 그냥 진리가 아니라 ‘선에서 나오는 진리’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천국의 모든 진리와 선은 주님의 신적 선에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에서 비롯되며, 진리는 선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소제의 고운 가루는 머릿속에 저장된 교리 지식이나 성경 지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그 선을 표현하고 섬기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 고운 가루 위에 반드시 ‘기름’을 붓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기름은 사랑의 선, 특별히 주님을 향한 사랑의 선을 표상합니다. 그래서 고운 가루와 기름이 함께 있다는 것은 진리와 선이 결합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AC.10136(출29:40)은 고운 가루와 기름이 결합된 것을 ‘천적 선으로부터 나오는 영적 선’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진리가 사랑에서 나와 사랑을 섬길 때 그것은 더 이상 머릿속 지식에 머물지 않고 삶을 움직이는 진리가 됩니다.

 

여기에 다시 ‘유향’이 놓입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324(계5:8)은 레2:1-2를 직접 인용하면서 소제의 고운 가루는 진정한 진리를, 기름은 천적 사랑의 선을, 유향은 영적 사랑의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유향은 이웃을 향한 사랑, 곧 체어리티와 관계합니다. 그러므로 레2 첫 두 절에는 매우 아름다운 질서가 들어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의 선이 있고, 그 선에서 나오는 진리가 있으며, 그 사랑이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로 흘러갑니다. 소제는 이 세 가지가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예배가 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매우 실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진리를 많이 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소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운 가루에는 기름이 부어져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사랑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유향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웃에게 무정하다면 아직 소제의 질서가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은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로 흘러가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생활에서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그 사랑으로 이웃을 어떻게 대하는가’가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제사장은 그 가운데 ‘고운 가루 한 움큼과 기름과 그 모든 유향’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사릅니다. 여기서 ‘한 움큼’도 의미 없는 양의 규정이 아닙니다. AC.2177은 손이나 손바닥이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에 ‘한 움큼’은 힘을 의미하며, 소제에서 한 움큼을 취하는 것은 온 힘 또는 온 영혼으로 사랑하는 것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제단의 불은 사랑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소제의 일부를 한 움큼 취하여 불사르는 것은 인간이 가진 선과 진리가 사랑 안에서 주님께 돌려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것을 본문은 ‘기념물’이라고 부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잊으셨다가 그 연기를 맡고 기억하신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제 전체 가운데 주님께 드려지는 부분이 제단의 불 위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됩니다. 레1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불은 사랑을, 향기로운 냄새는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가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소제 역시 결국 사랑으로 돌아갑니다. 진리는 사랑에서 나오고, 사랑과 결합하며,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나고, 다시 사랑의 불 안에서 주님께 드려집니다.

 

그런데 소제 전체를 불사르지는 않습니다.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릴지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레1의 번제와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번제는 전부를 불살랐지만 소제는 일부만 제단 위에 드리고 나머지는 제사장들이 먹습니다. AC.2177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남은 소제를 먹는 것이 인간 편에서의 응답과 자기 것으로 받아들임, 그리고 그로 말미암는 사랑과 체어리티를 통한 결합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는 인간 바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받아들여 자신의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의미에서 ‘먹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제에는 ‘주님께 드림’과 ‘인간이 받아 삶으로 삼음’이라는 두 방향이 함께 있습니다.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기 삶에서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면서 ‘이 선은 내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주님께 돌립니다. 주님에게서 받고, 삶으로 받아들이며, 다시 주님께 돌리는 이 순환이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4절부터는 소제를 만드는 방법이 다양해집니다. 화덕에 굽기도 하고, 철판에 부치기도 하며, 냄비에서 만들기도 합니다. 어떤 것은 기름을 섞고 어떤 것은 기름을 바르며, 어떤 것은 조각으로 나눈 뒤 다시 기름을 붓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서로 다른 소제의 조리법까지도 각각 천국의 아르카나를 담고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실제로 AC.10137(출29:40)은 화덕, 철판, 냄비에서 만들어지는 여러 소제를 직접 언급하며, 소제의 모든 세부 규정 안에 신적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현재 확보된 직접 원전만으로 화덕·철판·냄비 각각을 레2의 문맥에서 세밀하게 구별하여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태와 준비 방식은 달라도 ‘고운 가루와 기름’이라는 중심 구조가 반복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사람마다 거듭남의 삶이 똑같은 외적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도 생각하게 합니다. 각 사람의 환경과 쓰임, 성품과 삶의 형편은 다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다양성 안에서 변하지 않는 중심은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어떤 모습의 소제든 고운 가루와 기름이 있어야 하듯, 참된 영적 삶에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그 선을 표현하는 진리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11절에서는 매우 강한 금지 명령이 등장합니다.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누룩뿐 아니라 꿀까지 금지한다는 것이 뜻밖입니다. 누룩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어도 꿀은 좋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거의 직접 해설합니다. AC.10137은 소제에 누룩과 꿀을 넣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면서, 누룩은 ‘악에서 나오는 거짓’을, 꿀은 세상 사랑의 즐거움이 많이 섞여 있는 외적 즐거움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것들이 천국의 선과 진리에 섞이면 그것들을 변질시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꿀 자체가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꿀이 자연적 선의 즐거움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문제는 그 즐거움이 거룩한 예배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섬기는 이유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인지, 아니면 인정받는 즐거움과 성공의 만족, 자기 의가 주는 기쁨, 세상적인 보상을 얻기 위한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외적으로는 똑같은 선행과 예배처럼 보여도 그 안에 무엇이 섞여 있는가에 따라 그 질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룩과 꿀은 금하면서 모든 소제에는 반드시 ‘소금’을 치라고 합니다. 더구나 그것을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레2의 가장 아름다운 상응 가운데 하나입니다. AC.9207(출22:22)은 레2:13을 직접 인용하면서 모든 예물에 소금을 넣는 것은 모든 예배 안에 ‘진리가 선을 갈망하고 선이 진리를 갈망하는 것’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언약은 결합을 의미하고, 소금은 그 결합을 향한 갈망을 의미하기 때문에 ‘언약의 소금’이라고 불렸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레2 전체의 중심을 다시 밝혀 줍니다. 고운 가루와 기름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하기를 원하고, 선은 진리를 통하여 자신을 표현하기를 원합니다. 참된 진리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참된 선은 진리를 통해 무엇이 실제로 선한지를 분별하고 행하기를 원합니다. 이 둘이 서로를 향하는 갈망이 ‘소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고 하십니다. 예배의 모든 것 안에 선과 진리가 서로 결합하려는 갈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4절부터는 ‘첫 이삭의 소제’가 등장합니다. 첫 이삭을 볶고 찧어서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유향을 더하여 드립니다. 말씀에서 처음 익은 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선과 진리의 근원을 어디에 두는가와 깊이 관계합니다. AC.9300(출23:19)은 첫 열매를 여호와의 집으로 가져오는 것이 교회의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만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주님께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첫 이삭을 드리는 행위에는 ‘이것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 것입니다’라는 인정이 들어 있습니다.

 

이 점에서 소제는 인간의 공로와 정반대에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깨달았을 때 ‘내가 알았다’고 생각하기 쉽고, 선한 일을 했을 때 ‘내가 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첫 열매를 주님께 드린다는 것은 그 진리도, 그 선을 행할 능력도, 그 선을 사랑하게 된 마음도 근원적으로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 자유롭게 자신의 삶으로 살아가지만, 그 생명의 근원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이제 레위기 2장 전체를 다시 보면 하나의 매우 아름다운 흐름이 나타납니다. 고운 가루가 있습니다. 선에서 나오는 진리입니다. 그 위에 기름이 부어집니다. 사랑의 선입니다. 유향이 놓입니다. 그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영적 선, 곧 체어리티입니다. 한 움큼이 사랑의 불 위에 올라가고, 남은 것은 제사장이 먹어 인간의 삶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악에서 나오는 거짓인 누룩은 제거되고, 세상 사랑에 물든 외적 즐거움인 꿀도 제단의 불에 섞이지 않습니다. 대신 모든 것에 소금이 들어갑니다. 진리와 선이 서로 결합하기를 갈망하는 ‘언약의 소금’입니다. 그리고 첫 이삭을 드리면서 이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레1과 레2는 아름답게 이어집니다. 레1이 ‘나의 전부가 사랑으로부터 주님께 드려지는가?’를 묻는다면, 레2는 한 걸음 더 구체적으로 ‘내가 알고 있는 진리는 사랑의 기름과 섞여 있는가?’, ‘주님을 향한 사랑은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의 유향으로 나타나는가?’, ‘내 예배에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누룩과 꿀이 섞여 있지 않은가?’, ‘내 안의 진리는 선과 결합하기를 갈망하는가?’, ‘그리고 내가 가진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는가?’라고 묻습니다.

 

소제는 피 없는 제사이지만 결코 가벼운 제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매일의 삶에 매우 가까운 제사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진리, 품는 사랑, 이웃에게 행하는 선, 일상의 수고와 쓰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누구의 것으로 인정하는가가 소제 안에 들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고운 가루만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 위에 기름이 부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선과 진리가 우리 안에서 실제 삶이 되어 다시 주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때 우리의 일상은 하나의 소제가 되고, 삶은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됩니다. (SWC.레2 해설)

 

심화

1. ‘왜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함께 놓았을까?’

 

SW.4 심화 1, ‘왜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함께 놓았을까?’

SW.4 심화1. ‘왜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함께 놓았을까?’ 레위기 2장의 소제를 가장 짧게 표현한다면 ‘고운 가루 + 기름 + 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 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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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 누룩과 꿀은 금하고 소금은 반드시 넣으라 하셨을까?’

 

SW.4 심화 2, ‘왜 누룩과 꿀은 금하고 소금은 반드시 넣으라 하셨을까?’

SW.4 심화2. ‘왜 누룩과 꿀은 금하고 소금은 반드시 넣으라 하셨을까?’ 레위기 2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규정 가운데 하나는 누룩과 꿀은 제단에서 불사르지 못하게 하면서 소금은 모든 소제에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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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왜 소제의 일부만 불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었을까?’

 

SW.4 심화 3, ‘왜 소제의 일부만 불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었을까?’

SW.4 심화3. ‘왜 소제의 일부만 불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었을까?’ 레위기 1장의 번제와 레위기 2장의 소제 사이에는 눈에 띄는 차이가 있습니다. 번제에서는 제물 전체를 제단 위에서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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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5, 레3,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 화목제에 감추어진 선과 진리의 결합’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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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3, 레1, ‘전부를 불살라 - 번제에 감추어진 거듭남의 아르카나’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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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1 심화

3. ‘왜 내장과 정강이까지 물로 씻어야 했을까?’

 

레위기 1장의 번제 규례 가운데 특별히 눈길을 끄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라는 규정입니다. 소의 번제에서도 나오고 양이나 염소의 번제에서도 똑같이 반복됩니다. 제물을 어차피 모두 불태울 것이라면 왜 굳이 내장과 정강이를 먼저 물로 씻어야 했을까요? 위생을 위한 절차라고만 보기에는 스베덴보리가 이 부분에 매우 구체적인 영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49(출29:17)는 ‘내장을 씻는 것’이 가장 낮은 것들의 정결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에게는 속 사람에서부터 가장 바깥의 자연적 삶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위가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낮은 것들은 자연계와 감각에 직접 접촉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자극과 자기 사랑, 세상 사랑, 감각의 즐거움과 오류가 쉽게 들어오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이어 AC.10050(출29:17)은 ‘정강이’를 자연적 인간의 외적인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내장과 정강이를 씻는다는 것은 단순히 인간의 생각이나 종교적 감정만 정결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낮고 바깥에 있는 자연적인 삶까지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영적인 변화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말씀을 더 잘 이해하고, 기도할 때 감동을 받으면 자신이 많이 변화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레위기 1장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내장과 정강이까지 씻으라’고 합니다. 가장 낮은 것과 가장 바깥의 것까지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내장과 정강이’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을 문자적으로 일대일 대응시킬 필요는 없지만 그 원리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충분히 적용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 무심코 튀어나오는 말, 돈을 사용하는 방식, 가족에게 보이는 태도, 아무도 보지 않을 때의 행동, 오래 굳어진 습관, 자기 이익이 걸렸을 때 내리는 선택, 다른 사람의 실수를 바라보는 마음, 몸의 감각적 즐거움을 다루는 방식 같은 것들입니다. 신앙생활과 별개라고 생각하기 쉬운 바로 이런 영역이 자연적 인간의 실제 삶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물로’ 씻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씻는 의식이 내적 정결을 표상하며, 물은 인간을 정결하게 하고 거듭나게 하는 신앙의 진리와 관계한다고 설명합니다(AC.9088, 출40:31). 따라서 우리의 자연적 삶을 씻는 물은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입니다. 진리는 단순히 머릿속에 저장되는 교리 지식이 아니라 우리 삶을 비추어 ‘이것은 악이다’, ‘이것은 피해야 한다’, ‘이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이다’라고 분별하게 하는 빛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에 의해 씻긴다는 것은 말씀을 많이 아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진리에 비추어 자기 삶을 살피고, 악이라고 알게 된 것을 실제로 피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이 악임을 아는 것과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은 다릅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진리를 아는 것과 실제로 원한을 내려놓기 위해 싸우는 것도 다릅니다. 체어리티를 이해하는 것과 불편한 이웃을 실제로 선하게 대하는 것도 다릅니다. 진리가 자연적 삶에 내려와 행동을 변화시키기 시작할 때 비로소 ‘씻음’이 일어납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장과 정강이를 없애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씻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자연적 인간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몸, 감각, 일, 재산, 인간관계, 취미와 일상생활 자체가 제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를 받으며 무질서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연적 인간을 파괴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정결하게 하셔서 속 사람을 섬기도록 질서를 회복하십니다.

 

그리고 씻긴 내장과 정강이는 마침내 다른 부분들과 함께 제단 위에서 불살라집니다. 이것이 참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처음에는 가장 낮고 바깥에 있어서 더럽혀지기 쉬웠던 것들이 진리의 물로 씻긴 후에는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번제의 일부가 됩니다. 인간의 가장 일상적이고 자연적인 삶까지 주님을 향한 사랑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신앙과 일상의 거리는 오히려 좁아집니다. 교회에 있을 때의 나와 집에 있을 때의 내가 달라서는 안 되고, 기도할 때의 나와 돈을 사용할 때의 내가 달라서는 안 되며, 말씀을 읽을 때의 나와 사람을 대할 때의 내가 서로 다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속에서 받아들인 선과 진리가 가장 바깥의 말과 행동에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레위기 1장의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으라’는 짧은 규례는 그래서 매우 실제적인 거듭남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고상한 부분만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가장 낮고 일상적인 부분까지 진리로 씻어 당신의 질서 안으로 가져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부분까지 사랑의 불 위에 놓일 때 비로소 번제는 ‘전부’가 됩니다.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 전체가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SWC.레1 심화 3)

 

 

 

SW.레1, ‘전부를 불살라 - 번제에 감추어진 거듭남의 아르카나’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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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3 심화 2, ‘번제는 정말 예수님의 대속 죽음을 의미하는가?’

SW.3 심화2. ‘번제는 정말 예수님의 대속 죽음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인이 레위기 1장의 번제를 읽으면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올립니다. 흠 없는 제물이 사람을 대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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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1 심화

1. ‘왜 하나님께서는 동물의 희생제사를 명하셨을까?’

 

레위기 1장을 처음 읽는 현대 독자에게 가장 먼저 생기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왜 하나님께서는 굳이 동물을 죽여 제물로 드리게 하셨을까?’입니다. 소와 양과 염소의 목을 따고,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몸을 각 뜨고, 그것을 불에 태우는 장면은 오늘날 우리의 감각으로는 상당히 낯설고 심지어 잔혹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정말 이런 동물의 죽음과 피와 불을 원하셨던 것일까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제사 자체가 예배의 본질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22(창8:20)는 번제와 희생제사가 내적 예배를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소와 양과 염소와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가 각각 서로 다른 천적인 것들을 표상했으며, 크게 보아 짐승들은 체어리티의 선을, 새들은 신앙의 진리를 표상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신 것은 짐승 자체가 아니라 그 짐승들이 표상하고 있는 인간 안의 선과 진리, 사랑과 체어리티와 신앙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성경 자체에서도 반복해서 드러납니다.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말합니다(삼상15:22). 미가 역시 수많은 번제물보다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을 말씀합니다(미6:6-8). 호세아에서는 더욱 직접적으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하십니다(호6:6). 스베덴보리가 AC.922(창8:20)에서 바로 이러한 말씀들을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외적 제사는 내적 예배를 담고 있을 때만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외적인 제사 형식이 필요했을까요? 고대의 표상교회에서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자연계의 사물과 행위들을 통해 표상되었습니다. 제단과 불과 피와 물, 그리고 서로 다른 종류의 동물들은 각각 천국의 실재를 표상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의 세세한 규례도 임의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희생제사와 번제의 각 과정 안에 ‘천국의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설명합니다(AC.10057, 출29:18). 최고 의미에서는 그것들이 주님의 영화에 관한 것이며, 상대적 의미에서는 인간의 거듭남과 정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레위기의 제사는 ‘죄를 지었으니 하나님께서 화가 나셨고, 그 화를 풀기 위해 동물을 죽여 피를 보여 드려야 한다’는 구조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피는 신적 진리를 표상하고(AC.10046, 출29:16), 물로 씻는 것은 진리에 의한 정결과 관계하며, 제단의 불은 사랑을 표상합니다. 짐승의 종류들 역시 인간 안의 서로 다른 선과 진리의 애정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제사 전체는 악과 거짓으로부터 인간이 정결하게 되고, 선과 진리가 그 안에 심어지고, 마침내 그것들이 결합하여 하나의 새로운 삶을 이루는 과정을 가시적인 의식으로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가장 분명하게 정리하는 것이 AC.10143(출29:42)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희생제사와 번제가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 선과 진리의 심음, 그리고 그 둘의 결합을 의미하며, 이 전체가 거듭남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단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궁극적으로 짐승에게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에게 관한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무엇을 정결하게 하시고, 무엇을 새롭게 하시며, 어떻게 인간을 당신과 결합시키시는지를 보여 주는 표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동물의 죽음 자체가 아닙니다. 그 외적 의식이 표상하고 있던 내적 실재였습니다. 인간이 악을 버리고,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며, 체어리티의 선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참된 제사였습니다. 외적 제사가 그 내적 실재와 분리되는 순간 제사는 껍데기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그토록 강하게 제사를 책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면서도 악을 행한다면 제사의 표상과 실제 삶이 완전히 분리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소와 양과 비둘기를 제단에서 불사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레위기의 제사가 우리와 무관해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는 그 외적 표상이 가리키던 실재를 우리의 삶에서 살아야 합니다.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며, 이웃을 사랑하고, 우리의 자연적인 삶까지 주님의 질서 안으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짐승의 번제는 사라졌지만 그것이 표상하던 ‘살아 있는 예배’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1장을 읽으며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제사를 명하셨을까?’라고 묻는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피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을 통하여 표상되는 인간의 거듭남이었습니다. 제단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궁극적으로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할 일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참된 제사는 짐승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악을 버리는 것이며, 참된 번제는 인간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가 주님의 사랑 안에서 새롭게 되어 삶 전체가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SWC.레1 심화 1)

 

 

 

SW.3 심화 2, ‘번제는 정말 예수님의 대속 죽음을 의미하는가?’

SW.3 심화2. ‘번제는 정말 예수님의 대속 죽음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인이 레위기 1장의 번제를 읽으면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올립니다. 흠 없는 제물이 사람을 대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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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1, ‘전부를 불살라 - 번제에 감추어진 거듭남의 아르카나’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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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 해설’(Swedenborg Word Commentary)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혀 주신 말씀의 상응과 속뜻,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의 질서에 비추어, 주님의 말씀 안에 이미 담겨 있는 선과 진리를 더욱 분명히 살피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작업의 시작과 중심과 마지막에 계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SWC.레1, ‘전부를 불살라 - 번제에 감추어진 거듭남의 아르카나’

 

1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3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4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5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6그는 또 그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7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제단 위에 불을 붙이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8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9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10만일 그 예물이 가축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11그가 제단 북쪽 여호와 앞에서 그것을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것의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12그는 그것의 각을 뜨고 그것의 머리와 그것의 기름을 베어낼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다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에 벌여 놓을 것이며 13그 내장과 그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14만일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이 새의 번제이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로 예물을 드릴 것이요 15제사장은 그것을 제단으로 가져다가 그것의 머리를 비틀어 끊고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피는 제단 곁에 흘릴 것이며 16그것의 모이주머니와 그 더러운 것은 제거하여 제단 동쪽 재 버리는 곳에 던지고 17또 그 날개 자리에서 그 몸을 찢되 아주 찢지 말고 제사장이 그것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레1)

 

해설

레위기를 펼치면 현대의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우 낯선 세계가 나타납니다. 소와 양과 염소를 잡고,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며,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고, 마침내 제물을 불태웁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제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므로 레위기 1장은 자칫 오래전에 폐지된 제사 규정을 기록한 장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으면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립니다. 스베덴보리는 번제와 희생제사의 의식과 절차 안에 ‘천국의 아르카나’가 있으며,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인성의 영화에 관한 것이고, 상대적 의미에서는 인간의 거듭남과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1장은 단순히 짐승을 어떻게 잡고 불사를 것인가를 가르치는 장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정결하게 하시고 선과 진리를 그 안에 심고 결합하셔서 마침내 인간 전체가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게 하시는가를 보여 주는 장입니다.

 

그런데 레위기의 첫 장은 인간이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로 시작합니다. 먼저 부르시는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출애굽기 마지막에서 성막이 완성되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한 뒤, 바로 이어지는 레위기의 첫 음성이 ‘부르심’이라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784(출27:20)는 ‘회막’이 주님의 임재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사의 출발점은 인간의 종교적 열심이 아니라 인간 가운데 임재하시는 주님입니다. 거듭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을 찾아내고 무엇인가를 드려 주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고 우리를 부르시며 인간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께 나아갑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인간이 가지고 나오는 것이 ‘예물’입니다. 첫 번째로 등장하는 것은 소의 번제입니다.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스베덴보리는 제사에 사용되는 동물들이 아무렇게나 선택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각각의 동물은 서로 다른 종류의 선과 진리, 그리고 서로 다른 예배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특별히 소 떼에 속한 동물들은 겉 또는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애정을 표상하며, 수송아지는 겉 또는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이노센스와 체어리티의 선을 의미합니다(AC.9391, 출24:5). 그러므로 번제는 우리의 종교적 생각이나 감정만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몸을 가지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실제 생활, 곧 말과 행동, 습관과 관계, 일상의 선택까지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번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습니다. 이것 역시 단순한 의식적 접촉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것이 전달과 이전과 받아들임을 표상한다고 설명하며, 머리는 전체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AC.10023, 출29:10). 따라서 이 장면에는 인간 자신과 번제가 표상하는 예배 사이의 결합이라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번제는 나와 상관없는 짐승 하나가 대신 죽는 외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번제가 표상하는 정결과 거룩하게 됨이 바로 나의 삶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나 자신이며, 나의 생각과 의지와 삶 전체입니다.

 

그 다음에는 피가 등장합니다.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스베덴보리는 제사의 피가 신적 진리를 표상한다고 설명하고(AC.10046, 출29:16), 그 피가 제단에 뿌려지는 것은 신적 진리와 신적 선의 결합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AC.10047, 출29:16). 이것은 거듭남의 매우 중요한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인간은 막연히 착해지고 싶다고 해서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가 우리 삶 안으로 들어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밝히고, 그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며 살아갈 때 정결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진리를 우리 안의 선과 결합하십니다. 그러므로 제단에 뿌려지는 피는 단순히 죽음의 흔적이 아니라 인간을 정결하게 하고 선과 진리가 결합하게 하는 신적 진리의 표상입니다.

 

이제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뜹니다. 이 두 행위에도 분명 내적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희생제사와 번제의 세세한 의식과 절차 안에 천국의 아르카나가 있으며, 그것들이 인간의 거듭남을 표상한다고 분명히 말하기 때문입니다(AC.10057, 출29:18). 그러나 여기서는 더 나아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가죽’이 말씀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바깥의 것을 표상한다는 원리는 확인할 수 있지만, 레1:6의 ‘가죽을 벗기는 행위’ 자체를 스베덴보리가 정확히 어떻게 적용하는지 충분한 직접 근거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럴듯한 의미를 만들어 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각을 뜨는 것’ 역시 의미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구체적인 상응은 현재로서는 보류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상응은 우리의 상상력이 아니라 말씀 안에 주님께서 두신 질서이므로, 확인되는 만큼만 읽는 것이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 충실합니다.

 

그러나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에서는 다시 매우 분명한 길이 열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제사의 내장을 씻는 것이 가장 낮은 것들의 정결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AC.10049, 출29:17), 이어 정강이는 자연적 인간의 외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AC.10050, 출29:17). 인간의 가장 낮고 자연적인 부분은 세상과 직접 접촉하기 때문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감각적 즐거움과 오류에 쉽게 물듭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도 정결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서 ‘물로 씻는 것’은 진리에 의한 정결과 관계합니다. 인간이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면서 악에서 돌이킬 때 자연적 인간도 점차 정결하게 됩니다.

 

여기서 레위기 1장의 거듭남 이해가 매우 실제적인 것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자연적 인간을 없애려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몸도 없애지 않으시고, 일상생활도 없애지 않으시며,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도 없애지 않으십니다. 그것들을 씻으십니다. 거짓과 악에 물든 것을 진리로 정결하게 하시고, 자연적 인간이 속 사람을 섬기며 주님의 선을 실제 삶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질서 안에 두십니다. 거듭남은 자연적인 것을 버리고 영적인 존재가 되는 과정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 안에서 바르게 표현되도록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질서 있게 결합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씻은 내장과 정강이는 버리지 않습니다. 제사장은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로 드립니다. 여기서 번제의 핵심이 드러납니다. ‘전부’입니다. 머리만도 아니고, 좋은 부분만도 아니며, 속 사람만도 아닙니다. 가장 낮은 자연적 부분까지 씻긴 후에는 모두 제단의 불 위로 올라갑니다. 스베덴보리는 ‘불’이 주님과 그분께 드리는 예배에 사용될 때 사랑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향기로운 냄새’는 주님께 기쁘고 받아들여지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신앙으로부터의 예배라고 설명하면서 바로 레1:9, 13, 17을 인용합니다(AC.925, 창8:21). 그러므로 번제의 마지막은 인간의 소멸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인간 전체가 정결해져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가는 상태가 번제가 지향하는 내적 실재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라는 표현도 문자적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짐승이 타는 냄새를 좋아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 향기로운 것은 제물의 연기가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사랑하며,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인간의 변화된 삶이 주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는 것입니다(AC.925, 창8:21).

 

10절부터는 양이나 염소의 번제가 이어집니다. 절차는 소의 번제와 매우 비슷하지만 제물의 종류가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소 떼의 동물들과 양 떼의 동물들을 구별하며, 전자가 겉 또는 자연적 인간 안의 선과 진리의 애정을 표상한다면 후자는 속 또는 영적 인간 안의 선과 진리의 애정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AC.9391). 이것은 번제가 인간의 겉 생활만이 아니라 속의 애정과 의도까지 관계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겉으로 선한 일을 하면서도 속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반대로 선한 뜻을 품고 있다고 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그것을 행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거듭남은 어느 한쪽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속과 겉이 함께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소의 번제에서 양과 염소의 번제, 다시 새의 번제로 이어지는 순서를 거듭남의 시간적인 ‘1단계, 2단계, 3단계’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각각의 제물이 서로 다른 종류의 선과 진리 및 예배 상태를 표상한다고 설명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레1의 배열 자체를 인간이 차례로 통과하는 세 단계라고 직접 설명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세 종류의 번제는 거듭나는 인간 전체 안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층위와 상태를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층위가 결국 하나의 목적, 곧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상태를 향한다는 것입니다.

 

14절에서는 다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제 짐승이 아니라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가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노아가 번제를 드린 창8:20을 해설하면서 레1:3-17을 직접 언급합니다. 그는 번제에 사용된 소와 어린양과 염소와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가 각각 특별한 천적인 것을 의미했으며, 큰 구별에서 짐승은 체어리티의 선을, 새는 신앙의 진리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AC.922, 창8:20). 또한 비둘기는 거듭나는 사람에게 있는 신앙의 진리와 선, 특별히 신앙의 이해에 속한 것들과 관계합니다(AC.870, 창8:8-9). 따라서 주님께서는 인간의 애정만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각과 이해, 곧 진리를 받아들이고 분별하는 능력까지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 역시 그 자체가 최종 목적은 아닙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거듭남의 완성은 아닙니다. 진리는 인간을 선으로 인도하고, 마침내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을 이루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새의 번제도 마지막에는 똑같이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로 끝납니다. 소의 번제도, 양이나 염소의 번제도, 새의 번제도 마지막 목적지는 같습니다. 서로 다른 선과 진리, 서로 다른 인간의 상태가 결국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새의 번제에는 ‘모이주머니와 그 더러운 것은 제거하여 제단 동쪽 재 버리는 곳에 던지고’, ‘날개 자리에서 그 몸을 찢되 아주 찢지 말고’라는 매우 특이한 규정도 있습니다. 이것들 역시 아무 의미 없는 절차는 아닐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희생제사와 번제의 세부 규정 안에 천국의 아르카나가 있다고 분명히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 확인된 원전만으로 ‘모이주머니는 이것이다’, ‘날개 자리에서 찢는 것은 이것이다’, ‘아주 찢지 않는 것은 이것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즉시 상징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확인된 상응에는 충실하고 아직 확인되지 않은 곳에서는 멈출 줄 아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제 레위기 1장 전체를 다시 보면 처음 보았던 피와 죽음과 불의 장면 뒤에서 하나의 놀라운 거듭남의 서사가 나타납니다. 주님께서 회막에서 인간을 부르십니다. 인간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께 나아갑니다. 번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자신과 그 예배가 결합합니다. 피, 곧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가 인간을 정결하게 하고 선과 결합합니다. 가장 낮은 자연적 삶까지 진리의 물로 씻깁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함께 질서 안으로 들어옵니다. 신앙의 진리와 체어리티의 선이 함께 주님께 향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전부’가 불 위에 놓입니다. 인간 전체가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전체 과정을 매우 간결하고 실제적으로 정리합니다. 희생제사와 번제는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 선과 진리의 심음, 그리고 선과 진리의 결합을 표상하며, 이것이 바로 거듭남이라고 설명합니다(AC.10143, 출29:42). 그리고 악과 거짓에서 정결해진다는 것은 그것들을 삼가고 피하며 싫어하는 것이고, 선과 진리가 심어진다는 것은 선하고 참된 것을 생각하고 의지하며 말하고 행하는 것이며, 선과 진리의 결합은 그것들로 이루어진 삶을 사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번제는 종교적 감정의 한 순간이나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결단에 머물지 않습니다. 실제 삶 전체가 주님의 선과 진리에 의해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1장이 오늘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나는 하나님께 무엇을 희생할 것인가?’보다 더 깊습니다. ‘내 안에서 아직 진리의 물로 씻기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내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하나가 되어 있는가?’, ‘내가 알고 있는 진리는 실제 선한 삶과 결합하고 있는가?’, ‘나의 가장 자연적이고 일상적인 삶까지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가?’, 그리고 ‘내 삶 전체는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고 있는가?’입니다.

 

번제와 희생제사 자체가 예배의 본질이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내적 예배를 표상하는 외적 형식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외적 제사가 내적 예배와 분리되면 참된 예배가 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AC.922). 그러므로 오늘날 동물의 번제가 사라졌다고 해서 레위기 1장의 말씀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 표상이 사라진 지금 우리는 그 표상 안에 감추어져 있던 내적 실재, 곧 실제 삶에서 이루어지는 거듭남을 읽어야 합니다.

 

레위기 1장의 번제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하시고, 선과 진리를 그 안에 심으시며, 그것들을 서로 결합하셔서 마침내 인간의 가장 깊은 애정에서 가장 바깥의 일상생활까지 주님을 향하게 하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때 인간의 예배는 더 이상 입술이나 의식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삶 전체가 예배가 됩니다. 이것이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라는 번제의 아르카나이며, 주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는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SWC.레1 해설)

 

심화

1. ‘왜 하나님께서는 동물의 희생제사를 명하셨을까?’

 

SW.3 심화 1, ‘왜 하나님께서는 동물의 희생제사를 명하셨을까?’

SW.3 심화1. ‘왜 하나님께서는 동물의 희생제사를 명하셨을까?’ 레위기 1장을 처음 읽는 현대 독자에게 가장 먼저 생기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왜 하나님께서는 굳이 동물을 죽여 제물로 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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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번제는 정말 예수님의 대속 죽음을 의미하는가?’

 

SW.3 심화 2, ‘번제는 정말 예수님의 대속 죽음을 의미하는가?’

SW.3 심화2. ‘번제는 정말 예수님의 대속 죽음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인이 레위기 1장의 번제를 읽으면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올립니다. 흠 없는 제물이 사람을 대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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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왜 내장과 정강이까지 물로 씻어야 했을까?’

 

SW.3 심화 3, ‘왜 내장과 정강이까지 물로 씻어야 했을까?’

SW.3 심화3. ‘왜 내장과 정강이까지 물로 씻어야 했을까?’ 레위기 1장의 번제 규례 가운데 특별히 눈길을 끄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라는 규정입니다.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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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2, ‘고운 가루에 기름을 붓고 - 선과 진리가 하나 되어 삶의 예물이 되기까지’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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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혀 주신 말씀의 상응과 속뜻,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의 질서에 비추어, 주님의 말씀 안에 이미 담겨 있는 선과 진리를 더욱 분명히 살피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작업의 시작과 중심과 마지막에 계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SW.2, 눅15:11-32, ‘돌아온 탕자와 큰아들’

 

11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눅15:11-32)

 

 

 

누가복음 15장의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기독교인에게 너무나 익숙한 말씀입니다. 흔히 이 비유를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 회개하여 돌아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받아 주신다’는 이야기로 읽습니다. 물론 그것이 이 비유의 가장 분명한 문자적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혀 주신 말씀의 상응과 거듭남의 질서에서 이 비유를 다시 살펴보면, 이 이야기는 단순히 집을 나갔다 돌아온 한 청년의 이야기를 넘어 한 인간이 주님에게서 받은 영적 재산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떠났다가 그것을 모두 잃은 뒤, 마침내 자기 자신에게서 돌아서 주님께 돌아와 다시 진리와 선으로 옷 입혀지는 거듭남의 이야기로 펼쳐집니다.

 

무엇보다 이번 비유에는 매우 든든한 직접 근거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9391(출24:5)에서 바로 이 돌아온 탕자를 직접 언급합니다. 그는 ‘탕자’가 ‘천국의 부요함, 곧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탕진한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가 아버지께 돌아와 자신은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고백한 것은 ‘마음의 회개와 자기를 낮춤’을 의미하며, 아버지가 입혀 준 ‘제일 좋은 옷’은 일반적인 진리들을, ‘살진 송아지’는 그 진리들에 상응하는 일반적인 선들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비유를 거듭남의 과정으로 읽는 것은 비유의 세부에 임의의 상응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 비유를 직접 그렇게 열어 준 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 AC는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틴 Arcana Coelestia, 영어 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 1749-1756, 창, 출 속뜻 주석, 총 10,837개 글)를 뜻하며, 숫자는 글 번호입니다. 괄호 안의 성경 장절은 해당 글이 다루는 말씀의 본문입니다.

 

비유는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요구합니다. 여기서 벌써 인간의 깊은 문제가 드러납니다. 아들이 가진 것은 본래 아버지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그것을 ‘내게 돌아올 분깃’으로 받아 들고 아버지를 떠납니다. 영적으로 보면 인간에게 있는 생명, 이해, 자유, 진리를 아는 능력, 선을 행할 능력은 모두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proprium은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느끼고 마침내 ‘내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모든 것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게 하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유가 있어야 사랑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을 행할 때 그것이 마치 내 선택과 내 행동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면 선을 자유롭게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내 것처럼’ 사용하는 것과 ‘내게서 나온 것’이라고 믿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둘째 아들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아버지와 분리하여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 합니다.

 

13절은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라고 합니다. ‘먼 나라’는 문자적으로는 아버지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이지만, 영적으로 읽으면 주님에게서 멀어진 인간의 상태를 매우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주님은 공간적으로 우리에게서 멀어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이 사랑과 삶에서 주님에게서 멀어집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와 선을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할수록 사람은 마음의 상태에서 ‘먼 나라’로 갑니다.

 

그곳에서 둘째 아들은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합니다. 여기에서 AC.9391의 직접 설명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탕자가 탕진한 것을 ‘천국의 부요함’, 곧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라고 밝힙니다. 사람은 말씀을 통해 많은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선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용서가 무엇인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위해 사용하거나 삶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면 영적으로 그것을 탕진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진리의 목적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천국의 재산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 없앤 후’ 흉년이 옵니다. 이 순서가 의미심장합니다. 재산을 다 없앤 뒤 흉년이 왔습니다. 외부에서 갑자기 불행이 닥쳐서 탕자가 타락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가진 것을 다 탕진한 상태에서 흉년이 닥치자 그의 내적 빈곤이 밖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영적 의미에서 흉년은 선과 진리가 결핍된 상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를 계속 삶에서 밀어내면 어느 순간 ‘먹을 것’이 없어집니다. 말씀을 알고 있는데도 마음은 굶주리고, 많은 것을 경험했는데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릅니다. 이것이 영적 궁핍입니다.

 

그 결과 둘째 아들은 그 나라 사람에게 붙어 살며 돼지를 치게 됩니다. 유대인의 청중에게 ‘돼지를 친다’는 것은 단순히 가난한 직업을 얻었다는 것보다 훨씬 강렬한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레위기의 정결 규례에서 돼지는 부정한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집에서 아들로 살던 사람이 이제 먼 나라에서 돼지를 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주님에게서 멀어져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욕망의 지배 아래 내려간 인간의 상태를 아주 강하게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더욱 처참한 것은 16절입니다.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천국의 양식이 아니라 돼지가 먹는 음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무엇인가로 채워져야 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로 채워지지 않으면 결국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오는 것들로 자신을 채우려 합니다. 인정, 소유, 쾌락, 우월감, 원망, 자기 합리화 같은 것들이 잠시 마음을 채우는 듯하지만 영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먹으려 하지만 배부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17절에서 이 비유 전체의 방향이 바뀝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개역개정의 이 표현은 참 좋습니다. 외적 환경이 먼저 바뀐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사람을 보내 데려온 것도 아닙니다. 아들의 내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보기 시작합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거듭남에서도 이 순간은 결정적입니다. 사람은 먼저 자기 상태를 보아야 합니다. 자신이 주님에게서 멀어져 있다는 사실, 자기 지혜와 자기 사랑으로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성찰의 시작이며 회개의 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아직 아버지 집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이미 좋은 사람이 된 뒤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보는 순간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는 말합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것은 단순한 후회와 회개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 후회는 돼지우리에서 ‘내가 왜 이렇게 되었지?’ 하고 슬퍼하는 데서 끝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일어나 아버지께 가는 것’입니다. 방향이 바뀝니다. 스베덴보리가 AC.9391에서 탕자의 귀환을 ‘마음의 회개와 자기를 낮춤’으로 설명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악에서 돌아서 주님께 향하는 실제적인 방향 전환입니다.

 

18절과 19절의 고백도 중요합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여기에는 변명도 자기 합리화도 없습니다. ‘환경이 나빴습니다’, ‘친구들을 잘못 만났습니다’, ‘아버지가 처음부터 재산을 주지 말았어야 했습니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악을 자기 것으로 인정합니다. 이것이 참된 회개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악을 죄로 여겨 피하려면 먼저 그것이 ‘나의 악’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결심한 뒤 아버지를 찾아 헤매는 장면이 길게 나오지 않습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들은 아직 멀리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미 그를 봅니다.

 

이 장면은 이 비유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들이 먼저 돌아서기는 했지만, 그가 아버지께 도착해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충분히 회개했음을 증명한 뒤 아버지가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먼저 보고, 측은히 여기고, 달려갑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완전히 깨끗해진 뒤에야 가까이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유 가운데 방향을 돌려 주님께 향하기 시작할 때, 이미 주님의 자비는 그 사람을 향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여기에는 심문이 없습니다. ‘재산을 얼마나 남겼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느냐?’며 조서를 작성하지도 않습니다. 먼저 안습니다. 이것은 죄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들은 이미 자기 죄를 보고 돌아섰습니다. 회개가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자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는 언제나 있었지만, 이제 아들이 그것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변화가 하나 있습니다. 아들은 돌아오기 전에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고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아버지 앞에 도착해서는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까지만 말합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는 말은 본문에서 사라집니다. 그 말을 꺼낼 틈도 없이 아버지가 종들에게 명령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아들은 ‘품꾼’의 자리라도 달라고 생각하지만 아버지는 그를 품꾼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시작하는 일은 ‘아들의 회복’입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깁니다.

 

바로 이 대목을 스베덴보리가 직접 풉니다. AC.9391에서 ‘제일 좋은 옷’은 ‘일반적인 진리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9, AE) AE.279(계5:1)에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제일 좋은 옷’은 일반적이고 주된 진리들을, ‘손의 가락지’는 속 또는 영적 사람 안에서 진리와 선의 결합을, ‘발의 신’은 겉 또는 자연적 사람 안에서 그와 같은 결합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둘, 곧 가락지와 신이 함께 ‘거듭남’을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이렇게 보면 아버지가 아들을 받아들이는 장면은 단순한 환영식이 아닙니다. 거듭남의 회복 장면입니다. 먼저 옷을 입힙니다. 말씀에서 옷은 진리와 관련됩니다. 벌거벗고 궁핍해진 사람에게 다시 진리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진리는 머리에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락지가 ‘손’에 끼워집니다. 손은 행위와 능력의 영역과 연결됩니다. 진리와 선이 속 사람 안에서 결합하고 그것이 삶의 행위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발’에 신을 신깁니다. 발은 자연적 삶의 가장 바깥 영역과 관계됩니다. 즉 거듭남은 마음속에서만 일어나는 신비한 변화가 아니라 일상생활의 가장 바깥 부분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에 돌아왔다고 해서 이야기가 ‘용서받았다’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다시 입히고, 연결하고, 걷게 합니다. 주님의 용서는 단순히 과거의 죄를 장부에서 지우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을 다시 질서 안으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진리로 옷 입히고,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고, 자연적 삶까지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고 합니다. 이것 역시 스베덴보리가 직접 해설합니다. AC.9391에서는 살진 송아지가 앞의 진리들에 상응하는 ‘일반적인 선들’을 의미한다고 하며, AE.279에서는 더 분명하게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제일 좋은 옷과 살진 송아지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옷은 진리이고 송아지는 선입니다. 돌아온 아들에게 진리만 다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가 향해야 할 선, 곧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이 회복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먹고 즐기자’는 말씀도 단순한 잔치 장면이 아닙니다. AE.279는 이것을 ‘결합과 천국의 기쁨’으로 설명합니다. 말씀에서 함께 먹는다는 것은 단순한 음식 섭취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선을 함께 받아들이고 나누는 결합을 나타냅니다. 아들은 먼 나라에서 쥐엄 열매조차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집에서는 살진 송아지를 함께 먹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대비입니까? 주님에게서 떠난 proprium의 삶이 주는 음식과 주님과의 결합 안에서 받는 천국의 음식이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그러므로 24절의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는 말씀이 비유의 중심에 놓입니다. 아들은 육체적으로 죽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아버지에게서 떠난 상태가 ‘죽음’이었고, 돌아와 다시 결합된 상태가 ‘삶’입니다. 영적 죽음과 영적 생명의 차이입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얼마나 활발히 활동하고 성공하고 즐기고 있느냐가 생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있느냐가 영적 생명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비유가 끝났다면 우리는 훨씬 편안했을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와 아버지가 서로 끌어안고 잔치를 벌이는 아름다운 장면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야기를 계속하십니다. ‘맏아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맏아들이야말로 이 비유를 단순한 ‘탕자의 회개 이야기’에서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바꾸어 놓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맏아들은 먼 나라에 가지 않았습니다. 재산을 창녀들과 함께 탕진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 집에 계속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말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외적으로 보면 모범적인 아들입니다. 그런데 동생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자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합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아버지 집 안에 있는 것’과 ‘아버지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은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맏아들은 몸으로는 아버지 곁에 있었지만 아버지가 왜 기뻐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는 동생을 ‘내 동생’이라고 부르지 않고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관계가 끊어져 있습니다. 그의 관심은 동생이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보다 ‘나는 이렇게 충성했는데 왜 저 사람에게 더 잘해 주느냐’는 비교와 공로에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문맥을 생각하면 이것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이 장은 세리와 죄인들이 주님께 가까이 나아오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수군거리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그리고 잃은 아들의 비유를 연이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둘째 아들만큼이나 맏아들도 이 비유의 중요한 대상입니다. ‘죄인과 함께 먹는 주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맏아들에게서 드러납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매우 엄중한 질문이 됩니다. 사람은 외적으로 종교적 질서를 잘 지키면서도 그 중심에 자기 공로가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이라는 말 안에는 순종의 기록이 가득하지만, 동시에 ‘그러므로 나는 받을 자격이 있다’는 자기 의가 숨어 있습니다. 선을 행하면서 그 선을 주님에게서 온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 공로로 붙잡으면, 다른 사람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자비를 기뻐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맏아들은 동생의 회복을 보면서 기뻐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의 문제입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다른 사람이 주님께 돌아오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러나 자기 공로를 중심에 놓는 신앙은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자비를 불공평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오래 섬겼는데 저 사람은 저렇게 살다가 돌아와서 왜 저런 환대를 받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버지는 둘째에게 했던 것과 비슷하게 맏아들에게도 ‘나옵니다.’ 둘째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버지가 달려 나갔고, 맏아들이 화가 나서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도 ‘아버지가 나와서 권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아버지는 먼 나라에 간 아들에게만 자비로운 분이 아닙니다. 자기 의와 분노 때문에 잔치에 들어오지 못하는 맏아들에게도 나아가십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사실 ‘잃어버린 아들’은 한 명만이 아닐 수 있습니다. 둘째는 아버지 집 밖의 먼 나라에서 잃어버렸고, 맏아들은 아버지 집 가까이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한 사람은 허랑방탕 속에서 주님에게서 멀어지고, 다른 사람은 자기 의와 공로의식 속에서 주님의 마음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맏아들도 정죄하지 않습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맏아들이 ‘이 아들’이라고 부른 사람을 다시 ‘네 동생’이라고 불러 줍니다. 끊어진 관계를 다시 이어 주는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체어리티의 본질을 다시 보게 됩니다. 주님께 돌아온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이 과거에 무엇을 했는가’를 끝없이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함께 기뻐하는 것이 천국의 기쁨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비유는 맏아들이 결국 잔치에 들어갔는지를 말하지 않고 끝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열린 결말입니다. 둘째 아들의 선택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의 선택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는 밖으로 나와 권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가 자기 공로와 분노를 내려놓고 아버지와 함께 동생의 회복을 기뻐하며 잔치에 들어갈 것인가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읽으며 우리는 둘째 아들에게만 자신을 대입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안에는 둘째도 있고 맏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내 것이라 여기며 먼 나라로 가려는 proprium도 있고,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proprium도 있습니다. 하나는 노골적으로 아버지를 떠나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 곁에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떠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중심을 ‘탕자’에게만 두면 오히려 가장 중요한 분을 놓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둘째가 재산을 요구할 때도 아버지가 있습니다. 둘째가 먼 나라에 있을 때도 아버지의 집은 그대로 있습니다. 둘째가 스스로 돌이킬 때 기억해 낸 것도 아버지의 집입니다. 아직 거리가 먼데 먼저 발견한 것도 아버지이고, 달려간 것도 아버지이며, 목을 안고 입을 맞춘 것도 아버지입니다.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긴 것도 아버지이며,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시작한 것도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맏아들이 분노하여 밖에 서 있을 때 다시 밖으로 나가 권하는 분도 아버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가는가’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그보다 더 근원적으로 ‘주님께서 잃어버린 인간을 어떻게 대하시는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빼앗아 억지로 집에 붙잡아 두지 않으십니다. 둘째가 떠나는 것도 허용하십니다. 그러나 떠났다고 사랑을 거두시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선택의 결과를 통해 자기 상태를 보고, 자유 가운데 돌이켜 주님께 향할 때 주님께서는 그를 품꾼으로 강등시키지 않으십니다. 다시 진리로 옷 입히고,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며, 자연적 삶까지 새롭게 하시고,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 안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이것이 AC.9391과 AE.279가 옷과 가락지와 신과 살진 송아지를 통해 우리에게 열어 보여 주는 거듭남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전에 우리가 나누었던 질문, 곧 ‘아버지는 둘째 모르게 사람을 보내 그가 사는 형편을 은밀히 살필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다시 떠올릴 수 있습니다. 문자적 이야기 안에서는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오히려 더 깊은 답이 보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먼 나라에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상태를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여 억지로 데려오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자유 가운데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고 할 수 있도록 섭리하시면서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방향을 돌리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됩니다. 사실 아버지는 처음부터 우리를 잊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비유를 우리 자신의 거듭남에 놓고 읽으면 질문은 아주 구체적으로 바뀝니다. ‘나는 지금 아버지에게서 받은 무엇을 내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가? 나는 어떤 선과 진리를 내 목적을 위해 탕진하고 있는가? 내 마음의 먼 나라는 어디인가? 나는 무엇으로 영혼의 배를 채우려 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돼지우리에서 내 처지를 한탄하고만 있는가, 아니면 실제로 일어나 아버지께 가고 있는가? 그리고 혹시 나는 이미 아버지 집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자비 때문에 화가 난 맏아들은 아닌가?’

 

그런데 이 모든 질문 끝에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은 결국 우리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이신 주님입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이 한 장면 안에 이 비유의 복음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먼 나라에서 돌아오지만, 구원은 인간이 먼 길을 완주하여 마침내 주님께 도달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이 자유 가운데 주님께로 방향을 돌릴 때, 주님께서 그를 향하여 오십니다. 그리고 그를 단지 과거의 상태로 돌려놓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다시 옷 입히고,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고, 삶의 가장 바깥까지 새롭게 하여 천국의 기쁨 안으로 들이십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죽어 있던 것이 살아나는 것이며, 잃었던 것이 주님에게 다시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기뻐하시는 분은 무엇보다 주님이십니다.

 

 

 

SW.3, 레1, ‘전부를 불살라 - 번제에 감추어진 거듭남의 아르카나’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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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1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13:1-23)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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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1, 마13:1-23, ‘씨 뿌리는 자의 비유’  (0) 2026.09.15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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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혀 주신 말씀의 상응과 속뜻,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의 질서에 비추어, 주님의 말씀 안에 이미 담겨 있는 선과 진리를 더욱 분명히 살피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작업의 시작과 중심과 마지막에 계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SW.1, 마13:1-23, ‘씨 뿌리는 자의 비유’

 

1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3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0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2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4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6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18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20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3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마13:1-23)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주님의 비유 가운데서도 특별합니다. 주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18절로 23절에서 그 의미까지 친히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비유를 읽는다는 것은 주님의 해설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하나 더 얹거나, 주님께서 설명하신 것보다 더 깊은 의미를 스베덴보리에게서 찾아내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친히 밝혀 주신 이 해설을 출발점으로 삼아,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혀 주신 말씀의 상응과 인간의 거듭남의 질서에 비추어, 주님의 이 말씀이 우리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빛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시며, 말씀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말씀 안에 주님께서 두신 질서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 안내자입니다.

 

이 비유의 문자적 문맥부터 살펴보면 구조가 매우 분명합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립니다. 그런데 씨가 떨어지는 곳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먹어 버리고, 어떤 씨는 돌밭에 떨어져 금방 싹이 나지만 뿌리가 없어 해가 뜨자 말라 버립니다. 어떤 씨는 가시떨기 가운데 떨어져 자라기는 하지만 가시가 기운을 막아 결실하지 못합니다. 마지막 씨는 좋은 땅에 떨어져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의미를 직접 설명하십니다. 씨는 ‘천국 말씀’이며,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와 좋은 땅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서로 다른 상태입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씨’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그것을 ‘천국 말씀’이라고 하셨으므로 씨의 의미는 이미 주님께서 밝혀 주셨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은 이것을 말씀 전체의 상응 안에서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AC.2851(창22:17)에서는 ‘씨’가 체어리티와 신앙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AC.3373(창26:3)에서는 주님에게서만 ‘천국의 씨’, 곧 모든 선과 진리가 나온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씨는 단순한 종교적 정보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과 진리이며, 특별히 사람 안에 심겨 그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 있는 말씀의 진리입니다. 씨 한 알 안에 장차 자라날 나무와 열매의 가능성이 들어 있듯, 주님의 진리 안에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고 마침내 선과 체어리티라는 열매를 맺게 할 천국의 생명력이 들어 있습니다.

 

※ AC는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틴 Arcana Coelestia, 영어 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 1749-1756, 창, 출 속뜻 주석, 총 10,837개 글)를 뜻하며, 숫자는 글 번호입니다. 괄호 안의 성경 장절은 해당 글이 다루는 말씀의 본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중심은 씨의 차이가 아닙니다. 같은 씨가 뿌려집니다. 씨 뿌리는 자도 같습니다. 차이는 ‘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6148(창47:26)에서 ‘땅’(ground)을 진리를 받아들이는 리셉터클, 곧 받아들이는 그릇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더 깊이 보면 그 받아들이는 능력 자체도 인간에게서 독립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의 인플럭스 때문에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좋은 땅인 사람이 자기 힘으로 좋은 땅이 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씨도 주시고, 그 씨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도 주십니다. 다만 인간에게는 그 씨를 자유롭게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 있는 리셉션의 상태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길가’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는다’고 하십니다. 길가는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 굳어진 곳입니다. 씨가 땅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표면에 그대로 놓여 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심지어 말씀에 관한 많은 지식을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이 말씀은 지금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내 안에서 무엇을 고치라고 하시는가?’라는 자리까지 들어오지 못한다면 씨는 아직 마음의 표면에 놓여 있는 셈입니다.

 

길가의 씨를 새들이 먹어 버렸다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말씀에서 새는 문맥에 따라 생각과 지적인 것들을 의미하며, 반대 의미에서는 진리를 파괴하는 거짓된 사고와 추론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자마자 자기 생각으로 재단하고, 자기 욕망에 맞게 해석하며, 자신에게 불편한 진리를 합리화해 버리는 상태를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씨는 분명 마음에 떨어졌지만 그 진리가 내 삶을 판단하기 전에 오히려 내가 그 진리를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말씀을 내가 듣는 것이 아니라 내 proprium이 말씀을 심문하기 시작하면 씨는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두 번째는 ‘돌밭’입니다. 이 사람은 길가보다 훨씬 더 나아간 것처럼 보입니다.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감동하고,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여 기뻐하며, 어떤 때는 자신의 삶이 완전히 달라질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결정적인 문제를 ‘그 속에 뿌리가 없다’고 하십니다. 여기에는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구별이 있습니다. 진리를 ‘아는 것’, 진리에 ‘감동받는 것’, 진리를 ‘행하는 것’은 서로 같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반복해서 밝히신 거듭남의 질서에서 진리는 이해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의지로 내려가 삶이 되어야 합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 374에서는 이것을 씨와 나무와 열매의 관계로 아주 아름답게 설명합니다. 씨 안에는 열매를 향한 목적이 들어 있고, 씨가 땅에서 올라와 가지와 잎을 이루는 것은 이해에 해당하며, 마침내 열매를 맺는 것은 선한 일을 행하는 것에 해당합니다. 즉 씨의 목적은 싹 자체가 아니라 열매입니다. 진리의 목적 역시 ‘내가 진리를 알게 되었다’는 데 있지 않고 그 진리가 내 의지를 변화시키고 삶에서 선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돌밭의 결정적인 시험은 ‘환난이나 박해’입니다. 이것을 외적인 종교박해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말씀의 진리가 내가 지금까지 사랑해 온 악과 충돌할 때 내적 싸움이 시작됩니다. ‘용서하라’는 말씀을 들을 때는 아름답지만 실제로 나에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해야 할 때는 다릅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도 들을 때는 거룩하지만 실제 내 자존심과 명예와 이익을 내려놓아야 할 때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됩니다. 바로 그때 진리에 뿌리가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진리가 나를 위로할 때만 사랑하고, 진리가 나를 고치려 할 때 거부한다면 아직 뿌리가 깊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새 예루살렘과 그 천국 교리』(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1758)에서 ‘시험’(temptation)을 거듭남의 중요한 과정으로 다루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거듭남은 진리를 많이 배우는 평탄한 지적 과정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와 선이 기존의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면서 새로운 사람이 형성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돌밭에서 중요한 것은 처음 싹이 얼마나 빨리 나왔느냐가 아닙니다. 뿌리가 어디까지 내려갔느냐입니다.

 

세 번째는 ‘가시떨기’입니다. 이 부분은 특별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AC.9144(출22:6)에서 스베덴보리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직접 인용하면서 ‘가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시를 ‘욕망에서 나오는 거짓들’과 연결하며, 특히 세상에 대한 염려와 세상적 욕망을 지지하는 거짓들이 사람의 내면을 닫아 버릴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바로 막4의 씨 뿌리는 자 비유, 곧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시’가 단순히 돈이나 재산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세상에서 직업을 가지고 일하며 재산을 관리하고 가족을 돌보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은 악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올바른 질서 안에서 ‘쓰임’(use)을 이루는 중요한 삶의 영역입니다. 문제는 세상의 것이 천국의 것을 섬기느냐, 천국의 것이 세상의 것을 섬기게 되었느냐입니다. AC.9144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적인 사랑이 될 때 그것들이 선과 진리를 소멸시키는 불처럼 작용한다고 설명합니다.

 

가시떨기의 무서운 점은 씨가 아예 없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씨도 자라고 가시도 자랍니다. 말씀도 있고 세상 사랑도 있습니다. 신앙도 있고 인정욕구도 있습니다. 예배도 드리고 자기중심적 욕망도 키웁니다. 성경도 읽고 재물과 체면과 성공도 마음의 중심에 놓습니다. 둘이 한동안 함께 자랍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쪽이 더 강한지가 드러납니다. 가시는 씨를 뽑아 버리지 않습니다. ‘기운을 막습니다.’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신앙과 체어리티에 관한 가르침과 정확히 만납니다. 진리는 그 자체를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신앙 역시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습니다. TCR.373-376에서는 체어리티와 신앙이 가능한 곳에서는 반드시 행위 안에서 함께 존재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머리에는 진리가 가득하지만 삶에서 선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아직 씨가 그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네 번째 ‘좋은 땅’에서 비로소 이 비유 전체의 목적이 나타납니다. 주님께서는 좋은 땅에 뿌려진 사람을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하시며 곧바로 ‘결실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깨달음’과 ‘결실’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는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참된 이해는 삶과 분리된 지적 이해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진리를 알고, 그것을 인정하고, 그 진리에 따라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선을 행할 때 진리가 사람의 것이 되어 갑니다.

 

스베덴보리가 『생명의 교리』(Doctrine of Life, 1763, Life) 2에서 바로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인용하는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그는 주님의 여러 말씀을 모아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의 관계를 보여 주면서,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말씀을 듣고 주의를 기울여 마침내 열매를 맺는 사람이라고 인용합니다. 따라서 좋은 땅의 핵심은 지식의 양이 아닙니다. ‘리셉션’, 곧 받아들임입니다. 그리고 그 받아들임이 실제 삶으로 내려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열매’는 무엇일까요? TCR.373은 사람의 내면이 그 사람의 행위 안에 나타난다고 설명하며, 체어리티와 신앙은 선한 행위 안에서 함께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같은 책 421에서는 영적 씨를 ‘말씀에서 나오는 교회의 진리’라고 부르며, 그것이 어떤 열매를 맺는지는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내적 동기에 따라 달라진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열매는 단순히 교회 봉사를 많이 한다거나 종교적 업적을 많이 남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가 사람 안에서 선이 되고, 그 선이 체어리티와 쓰임의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전체에는 ‘진리에서 선으로’라는 거듭남의 운동이 흐르고 있습니다. 씨는 진리입니다. 씨가 땅에 들어갑니다. 뿌리를 내립니다. 싹이 납니다. 자랍니다. 마침내 열매가 됩니다. 진리가 기억에 들어오고, 이해에 들어오고, 시험을 통과하고, 의지에 받아들여지고, 마침내 삶의 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수없이 설명하는 거듭남의 질서와 놀랍도록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을 단순히 세상 사람들을 네 부류로 나누는 분류표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한 사람 안에서 이 네 상태가 모두 발견될 수 있습니다. 어떤 진리 앞에서는 내가 좋은 땅인데 다른 진리 앞에서는 돌밭일 수 있습니다. 내가 듣기 좋아하는 말씀에는 마음을 활짝 열면서도 내 proprium을 건드리는 말씀에는 길가처럼 굳어 있을 수 있습니다. 재물에 대해서는 자유로운데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서는 가시떨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은 ‘너는 네 종류 중 어느 인간이냐?’라기보다 ‘내 말씀이 네 안의 어디까지 들어오고 있느냐?’일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9절의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과 16절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가 비유의 한가운데 놓여 있는 이유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AC.2701(창21:19)에서 스베덴보리는 바로 마13:16을 직접 인용하면서 ‘눈으로 본다’는 것이 이해하고 신앙하는 것을 의미하고, ‘귀로 듣는다’는 것이 순종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제자들이 복된 이유가 단순히 육신의 눈으로 주님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이해로 받아들이고 신앙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귀로 듣는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고 밝힙니다. AC.3863(창29:32)에서도 마13:13-17을 직접 인용하면서 ‘본다’는 것이 신앙에 속한 것을 알고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것과 관련됨을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은 단순히 ‘내 말을 잘 들어라’가 아닙니다. ‘이 말씀을 네 삶으로 받아들이라’는 부르심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다는 것은 진리를 이해하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라는 문제가 흐르고 있습니다. 씨는 계속 뿌려지고 있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듣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10절로 15절에서 제자들이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라고 묻는 대목도 새롭게 보입니다. 얼핏 읽으면 주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일부러 감추시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모든 역사는 구원을 향하고 있으며,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람은 자신이 실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따라 진리를 받습니다. 더 깊은 진리를 안다고 해서 반드시 더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악을 사랑하는 상태에서 거룩한 진리를 깊이 인정한 뒤 그것을 부인하고 모독하면 상태가 더욱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여러 곳에서 설명하는 ‘모독’(profanation)의 문제와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진리를 무차별적으로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그리고 그 진리가 그 사람에게 영원한 해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섭리하십니다. 그러므로 비유는 진리를 감추는 잔인한 암호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자유와 영적 상태를 보호하면서 진리를 전달하는 주님의 자비로운 형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문자적 이야기를 통해 누구나 들을 수 있게 하시면서도, 그 안의 더 깊은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사람에게 열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12절의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도 같은 질서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부자는 더 부자로 만들고 가난한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까지 빼앗으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받은 진리를 삶에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그 진리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받을 능력이 생깁니다. 하나의 진리를 실제로 행하면 그 진리가 다음 진리를 이해하는 문을 열어 줍니다. 반대로 알고 있는 진리를 계속 거부하면 지식은 남아 있을지라도 그 진리의 영적 생명은 사라져 갑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9, AE) 629(계11:1)에서도 ‘듣는 자에게 더 주어진다’는 말씀을 ‘듣는다’, 곧 순종하고 행하는 사람에게 영적 정서와 체어리티가 더해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흐름은 결국 ‘열매’로 모입니다. 씨 뿌리는 자는 씨를 뿌리는 데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씨의 목적은 열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목적 역시 우리가 성경에 관한 많은 정보를 가지게 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진리가 우리 안에서 선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하고, 이해가 의지와 결합하며, 앎이 삶이 되고, 마침내 주님에게서 받은 것이 이웃을 향한 쓰임으로 흘러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듯 지혜는 진리가 삶에 옮겨질 때 생깁니다. 진리가 생명으로 내려갈 때 비로소 열매가 됩니다.

 

그렇다면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는 무엇일까요? 여기서는 숫자의 세부 상응을 성급하게 확정하여 이 비유의 중심을 흐릴 필요는 없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좋은 땅에서도 결실의 정도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은 모습으로 만드시지 않습니다. 천국에서도 모든 천사가 동일하지 않고, 사람마다 받은 능력과 상태와 쓰임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육십 배, 어떤 사람은 삼십 배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왜 너는 저 사람처럼 백 배가 아니냐?’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 주어진 상태 안에서 실제로 열매가 맺혔느냐에 있습니다. 삼십 배도 열매입니다. 중요한 것은 비교가 아니라 결실입니다.

 

여기까지 오면 처음의 질문도 달라집니다. 우리는 흔히 이 비유를 읽으면서 ‘나는 길가인가, 돌밭인가, 가시떨기인가, 좋은 땅인가?’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혀 주신 거듭남의 질서에 비추어 보면 훨씬 더 구체적인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내게 주신 말씀 가운데 아직 내 마음의 길가에 놓여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떤 진리를 듣기는 하지만 내 삶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는가? 어떤 말씀은 기쁨으로 받았지만 실제 시험이 오자 포기하고 있는가? 어떤 진리는 이미 내 안에서 자라고 있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과 인정욕구와 proprium의 욕망이 그 기운을 막고 있는가? 그리고 어떤 진리는 이제 실제 체어리티와 쓰임이라는 열매를 맺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는 다른 사람을 분류하기 어려워집니다. ‘저 사람은 길가야. 저 사람은 돌밭이야’라고 판단하는 대신 내 마음의 밭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이 비유를 거듭남의 말씀으로 읽을 때 일어나는 중요한 변화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주 큰 희망이 있습니다. ‘땅은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길가는 영원히 길가일 필요가 없습니다. 굳은 땅은 갈아엎을 수 있습니다. 돌은 걷어 낼 수 있습니다. 가시는 뽑아낼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신을 좋은 땅으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씨도 주님에게서 오고, 그것을 받아들일 능력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우리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그 진리에 따라 살도록 끊임없이 이끄십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고 난 뒤 가장 마지막에 남는 분은 스베덴보리가 아니라 ‘씨 뿌리시는 주님’이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우리로 하여금 씨와 땅과 가시와 열매가 무엇인지 조금 더 분명히 보게 도울 뿐입니다. 씨를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땅을 부드럽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며, 돌과 가시를 발견하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우리가 그것들을 제거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씨가 자라 열매 맺게 하시는 생명 자체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네 종류의 사람을 판정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끊임없이 인간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으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길가가 되어도 주님은 씨를 뿌리시고, 돌밭이어도 뿌리시며, 가시떨기 가운데서도 뿌리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한 곳에서라도 그 씨가 받아들여져 뿌리를 내리고 자라 열매 맺기를 기다리십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이 말씀은 그래서 비유의 끝에 붙은 단순한 경구가 아닙니다. ‘내가 지금 네게 뿌리는 이 말씀을 이해에만 두지 말고 네 의지와 삶으로 받아들이라’는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주님께 고침을 받고, 마침내 열매를 맺는 것, 바로 이것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보여 주는 거듭남의 길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의 처음에도, 중간에도, 마지막에도 계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SW.2 ‘돌아온 탕자와 큰아들’(눅15:11-32)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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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2, 눅15:11-32, ‘돌아온 탕자와 큰아들’  (0)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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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에서 강사가 다루는 본문은 역대상 4장 9-10절의 유명한 ‘야베스의 기도’입니다. 한때 한국 교회에서도 ‘나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라는 구절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했던 기도입니다. 그 과정에서 ‘지경’은 사업의 확장, 재산의 증가, 사역의 성장, 영향력의 확대 같은 것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야베스의 기도가 대표적인 ‘복을 구하는 기도’로 자리 잡았습니다. 강사가 문제 삼는 것도 바로 이 지점입니다. 그는 히브리어 본문을 자세히 살피면서 마지막 구절을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고만 읽을 것이 아니라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게 하옵소서’라고도 읽을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그렇게 되면 야베스의 기도는 ‘하나님, 나를 잘되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에서 ‘하나님, 내가 남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로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볼 때 바로 이 방향 전환은 매우 주목할 만합니다.

 

먼저 히브리어 자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대상 4장 9절에서 야베스의 어머니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고 말하는데, 여기 사용된 히브리어 ‘오체브’(עֹצֶב)는 고통, 슬픔, 수고 같은 뜻을 가집니다. 그리고 ‘야베스’(יַעְבֵּץ)라는 이름과 이 단어 사이에는 분명한 언어유희가 있습니다. 실제로 여러 번역과 주석도 이 점을 인정합니다. 다만 영상에서 설명하듯 야베스라는 이름이 단순히 ‘오체브의 자음 순서를 바꾼 단어’라고 어원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조금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본문이 두 단어의 유사한 소리를 이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성경의 이름 풀이에서는 현대 언어학적 어원과 문학적인 언어유희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야베스라는 이름과 고통을 뜻하는 오체브 사이에 의도적인 말놀이가 있다’고 하는 정도가 가장 안전합니다. 더구나 고유명사 야베스의 첫 요드(י)를 곧바로 히브리어 미완료형의 접두사라고 분석하는 것 역시 지나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고유명사가 되면 그 자체로 이름이므로, 일반 동사의 활용형처럼 단순하게 역분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본문 저자가 ‘야베스 - 고통 - 근심’이라는 음성적 연결을 독자에게 의식시키고 있다는 강사의 큰 관찰은 옳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10절 끝의 ‘레빌티 오츠비’(לְבִלְתִּי עָצְבִּי)입니다. 여기의 ‘오츠비’는 ‘고통하다, 슬프게 하다’와 관련된 동사의 부정사 형태에 1인칭 단수 접미사가 붙은 것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부정사에 붙은 인칭 접미사는 문맥에 따라 행위의 주체처럼 이해되기도 하고 객체처럼 이해되기도 하기 때문에, 강사가 소개한 두 방향의 가능성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 영어 번역들도 갈립니다. NASB와 NET 같은 번역은 대체로 ‘그것이 나를 아프게 하지 않도록’, 곧 야베스가 고통받지 않도록이라는 방향으로 번역하지만, NKJV와 HCSB 계열은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도록’이라는 방향을 취한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강사가 말하는 ‘내가 고통을 야기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는 임의로 만들어 낸 번역은 아닙니다. 다만 영상에서 ‘킹제임스 번역이 저처럼 해석했다’고 말한 부분은 정확히는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통적인 KJV는 ‘that it may not grieve me’, 곧 ‘그것이 나를 근심하게 하지 않도록’이라고 번역하며, ‘that I may not cause pain’이라고 한 것은 NKJV입니다. 작은 차이 같지만 히브리어 해석을 중심으로 하는 영상이므로 이 구분은 중요합니다.

 

더구나 이 절의 히브리어는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습니다. ‘웨아시타 메라아’(וְעָשִׂיתָ מֵּרָעָה)라는 부분 자체가 해석상 어려움이 있는 표현입니다. 많은 번역본은 문맥을 따라 ‘나를 악에서 지켜 주시고’, ‘재앙으로부터 보호하시고’와 같이 이해하지만, 마소라 본문의 문법을 문자 그대로 풀면 매끄럽지 않습니다. NET 성경도 이 대목의 히브리어가 어렵다는 점을 주석에서 명시하고 다른 본문 가능성까지 논의합니다. 그러므로 10절 마지막을 하나의 문법 분석만으로 완전히 해결됐다고 말하기보다는, ‘본문 자체가 여러 해석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가운데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도록이라는 이해도 실제 번역 전통 속에 존재한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오래된 유대교 주석 전통에서는 대체로 야베스 자신에게 손해와 고통이 닥치지 않게 해 달라는 의미로 읽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남에게 고통을 주지 않게’라는 해석은 매우 아름답고 문법적으로 가능한 독법 가운데 하나이지만, 전통적 해석을 폐기하는 결정적 번역이라고까지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나에게 고통이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곧바로 기복주의라고 규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님께 보호와 건강과 평안과 생계와 필요한 자연적 복을 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무엇을 위해 구해지는가입니다. ‘나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가 ‘내 소유를 더 늘려 주십시오’, ‘나를 더 유명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내 사역을 남들보다 크게 만들어 주십시오’라는 자기중심적 욕망으로 변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맡기신 쓰임을 더 잘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자연적 조건과 능력과 기회를 구한다면 같은 말도 전혀 다른 기도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외적 행위 자체보다 그 행위 안에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목적으로 삼는지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야베스의 기도의 핵심은 ‘복을 구했느냐, 복을 구하지 않았느냐’가 아닙니다. ‘그 복의 중심에 누가 있는가’입니다. 우리의 proprium은 복조차도 자기 자신을 향하게 만듭니다. ‘주님, 나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라고 하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내가 더 인정받게 해 주십시오’, ‘내 이름이 더 높아지게 해 주십시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성공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같은 ‘지경’을 구하면서 ‘제가 더 많은 사람에게 선을 행할 수 있게 하시고, 더 큰 책임을 감당하게 하시며, 주님께 받은 것을 더 넓게 쓰게 하십시오’라고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똑같은 기도라 하더라도 내적 의미에서는 전혀 다른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강사가 마지막 구절을 ‘내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읽은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놀라울 만큼 잘 만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반복해서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것’을 기독교적 삶의 첫째요 본질적인 것으로 말합니다. ‘신적 섭리’ 265번에서도 악을 죄로 여겨 삼가는 것이 기독교 종교의 본질이라고 설명하며, ‘참된 기독교’ 535번에서는 체어리티의 첫째가 악을 피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나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 제 안에 있는 악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나가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제 말과 행동과 욕망 때문에 다른 사람이 상처받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 악을 단순히 억제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것이 주님께 죄임을 보고 돌이키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도록’이라는 기도조차 단순한 도덕적 착함을 넘어가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자신의 내면을 정결하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외적 삶에서 악을 죄로 여기고 싸우며 물리칠 때, 실제로 그 악의 욕망을 내면에서 제거하시는 분은 주님이라고 설명합니다.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1764) 145번은 사람이 악을 죄로 여기고 그것을 그만두기로 결심하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싸움이 시작되고, 그 과정에서 주님께서 악한 욕망을 제거하고 선의 애정을 심으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깊은 야베스의 기도는 ‘제가 남에게 피해를 안 끼치도록 제 성격을 잘 관리하겠습니다’가 아니라 ‘주의 손이 나와 함께하사, 제가 악을 행하지 않도록 하시고, 제 안에서 악을 일으키는 것까지 주님께서 다스려 주십시오’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야베스의 기도 가운데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라는 구절과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따라서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와 ‘주의 손이 나와 함께하게 하십시오’와 ‘악에서 지켜 주십시오’와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게 하십시오’를 서로 떨어진 네 가지 소원으로만 읽지 않고 하나의 거듭남의 흐름으로 읽어 볼 수도 있습니다. ‘주님, 제게 주신 선과 진리의 삶의 영역을 넓혀 주십시오. 그러나 그것을 제 힘으로 소유하려 하지 않게 하시고, 언제나 주님의 손이 저와 함께하게 하십시오. 제 안의 악이 그 넓어진 지경 안으로 흘러들지 않게 하시며, 제가 받은 능력과 영향력이 오히려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하는 도구가 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읽으면 ‘지경의 확대’는 성공의 확대가 아니라 쓰임의 확대가 됩니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더 많은 사람을 지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고, 재물이 많아질수록 더 많이 소유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며, 목회자의 영향력이 넓어질수록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은 영혼을 주님께 연결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대상 4장 10절에 스베덴보리가 직접 붙인 속뜻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거듭남과 쓰임의 교리 안에서 이 기도를 읽을 때 자연스럽게 열리는 적용입니다.

 

이 지점에서 한국 교회의 이른바 ‘야베스의 기도 열풍’도 조금 다르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는 사실 자체를 기복주의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지나칩니다. 성경에는 자연적 복을 구하는 기도가 있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연적 삶도 섭리하십니다. 그러나 자연적 복을 최종 목적으로 만들 때 신앙의 질서가 뒤집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을 섬겨야 합니다. 재물과 건강과 지위와 지식과 능력과 영향력은 모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선한 쓰임을 위한 수단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버릴 것이 아니라 그 기도의 중심을 바꾸어야 합니다. ‘내 지경을 넓혀 내 것을 크게 해 주십시오’가 아니라 ‘주님께서 제게 맡기실 수 있는 쓰임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영상의 가장 귀한 문장은 처음과 끝에 반복된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도록 그런 내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 이것은 매우 실제적인 회개의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저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저 사람 때문에 내가 고통받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시선을 다시 나 자신에게 돌리게 합니다. ‘그 사람의 악’은 그 사람이 주님 앞에서 다룰 문제이고, 내가 지금 살펴야 하는 것은 ‘내 안의 악’입니다. ‘나는 누구에게 고통을 주고 있지는 않은가? 내 proprium의 자존심과 지배욕과 인정욕과 탐욕과 분노와 냉혹함 때문에 가까운 사람이 힘들어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것을 보는 것이 자기 성찰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발견한 악을 ‘내 성격이 원래 그래’라고 합리화하지 않고 ‘이것은 주님께 죄입니다’라고 인정하고 피하려 할 때 거듭남이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것’을 그토록 강조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강사의 해석을 이렇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히브리어 주해 차원에서는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도록’이라는 번역을 유일한 정답으로 밀어붙이기에는 조심할 점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내가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이라는 해석 역시 충분한 문법적·번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실제 마소라 본문 자체에도 난해한 부분이 있습니다. 또한 영상에서 KJV와 NKJV를 혼동한 작은 오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강사가 야베스의 기도를 자기중심적인 복의 청원에서 타인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구하는 기도로 전환한 것은 매우 좋은 신학적 통찰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내게 고통이 없게 하옵소서’와 ‘내가 고통을 주지 않게 하옵소서’ 가운데 하나를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둘이 함께 갈 수 있습니다. ‘주님, 악으로부터 저를 보호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무엇보다 제가 악의 통로가 되지 않게 하십시오. 제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제 proprium의 지경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흘러갈 쓰임의 지경이 되게 하십시오. 주의 손이 저와 함께하시되, 그 손으로 제 주변의 장애물만 치워 달라고 하지 않게 하시고, 먼저 제 안의 악을 보게 하시며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하게 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야베스의 기도는 더 이상 ‘고통 없는 인생과 성공을 보장받는 주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을 받을수록 더 선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지경이 넓어질수록 더 많은 쓰임을 감당하게 하시며, 힘이 커질수록 아무도 해치지 않게 하시고, 무엇보다 그 모든 과정에서 주님의 손을 떠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는 거듭남의 기도가 됩니다. 저는 야베스의 짧은 기도를 오늘 우리가 다시 드린다면, 바로 이 지점까지 가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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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번 영상은 앞서 다루었던 2020년 1월 5일의 티혼 수도사 이야기와 상당 부분 겹칩니다. 다만 이번에는 티혼 수도사의 극단적 금욕생활뿐 아니라 그가 연결되어 소개되는 아토스의 이비론 수도원, 그곳의 공동생활과 식사 규칙, 기도와 금식, 그리고 강문호 수도사가 실제로 그곳에서 경험한 일들까지 함께 펼쳐집니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앞서 이미 살핀 ‘금욕과 거듭남’의 문제를 되풀이하기보다, 영상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과 하나 되는 삶’, ‘외적 질서와 내적 질서’, 그리고 ‘거룩한 공동체란 무엇인가’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역사적으로 한 가지는 구별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에서는 1884년 러시아에서 태어난 티혼 수도사가 여러 수도원을 찾아다닌 끝에 이비론 수도원에 이르러 그곳에서 수도한 인물처럼 소개됩니다. 그러나 현재 확인되는 정교회 자료에서 티혼 골렌코프(1884-1968)는 아토스의 카프살라에서 살았던 러시아계 은수자로, 말년에는 스타브로니키타 수도원에 속한 성십자가 켈리에서 살았으며, 훗날 성 파이시오스의 영적 스승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2026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청이 그를 공식 성인 명부에 올렸습니다. 그러므로 티혼을 이비론 수도원이 ‘배출한 대표적 수도사’로 직접 연결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는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Cloud of Witnesses) 이것은 영상의 영적 메시지를 무너뜨리는 문제가 아니라, 수도원과 인물의 실제 관계를 구별해 두자는 정도입니다.

 

영상의 티혼 수도사 묘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극단적인 금욕입니다. 잠들지 않기 위해 목에 끈을 걸고 밤새 기도하고, 아주 적은 음식만 먹으며, 딱딱한 잠자리와 한 장의 담요로 겨울과 여름을 지낸 것으로 소개됩니다. 또한 ‘탐식은 모든 죄가 들어오는 현관문’이라는 생각 아래 배부름을 경계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전해지는 티혼의 생애에서도 극심한 가난과 지속적인 기도와 금욕은 중요한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Cloud of Witnesses) 이런 삶을 바라볼 때 우리는 먼저 그 진지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기를 갈망하여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기도에 생애를 바친 사람의 열망 자체를 가볍게 볼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언제나 여기서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갑니다. 적게 먹는 것이 곧 탐욕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며, 딱딱한 침대에서 자는 것이 곧 proprium을 제거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하루에 열매 반쪽만 먹으면서도 자기 금욕을 자랑할 수 있고,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감사와 절제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음식의 양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지배하는 사랑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육체를 가능한 한 괴롭히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악한 욕망이 주님의 질서 아래 놓이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외적 절제는 내적 거듭남을 돕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지만, 둘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배부르면 음란해지고, 배부르면 교만해지고, 배부르면 자기 자랑을 하게 된다’는 영상의 설명도 이런 구별이 필요합니다. 과식과 탐식이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 영적 집중력을 흐릴 수 있다는 수도 전통의 경험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죄의 근원이 음식이나 배부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악의 뿌리는 인간의 proprium 안에서 주님과 이웃보다 자신을 사랑하려는 질서의 전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탐식을 절제했는데도 사람을 지배하려 하고, 인정받기를 원하고, 자기 공로를 높이고, 타인을 업신여긴다면 근본적인 싸움은 아직 남아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음식에 대한 절제도 결국 이러한 내적 악과 싸우는 데 봉사할 때 영적 의미를 갖습니다.

 

티혼과 동물들의 관계를 전하는 부분은 따뜻합니다. 여우가 찾아오고, 멧돼지 새끼들을 보호하며, 사냥꾼에게 동물을 숨겨 주고, 심지어 곤충들에게 자신의 피를 먹게 했다는 성인전적 이야기까지 소개됩니다. 이런 세부를 모두 역사적으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전달하려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수도자의 거룩함이 인간에게만 친절한 데서 끝나지 않고 피조물 전체에 대한 온유함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론에서도 동물은 인간의 다양한 애정들을 표상합니다. 그렇다고 실제 여우나 멧돼지를 곧바로 특정 애정과 일대일 대응시킬 필요는 없지만, 인간 안의 거칠고 자연적인 것까지 주님의 질서 아래 평화롭게 놓이는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장면으로는 충분히 읽을 수 있습니다.

 

영상은 이런 혹독한 훈련 끝에 티혼이 ‘하나님과 합일의 단계’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중요한 구별을 하나 더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동일해지는 의미에서 ‘합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생명 자체이시고 인간은 그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유한한 피조물입니다. 인간이 주님과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내 안의 선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더욱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참된 결합은 ‘내가 어떤 높은 영적 단계에 올랐다’는 자기의식보다, 자신의 생명과 선이 전적으로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점 더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영상 중간의 우물 이야기에서도 같은 원칙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가뭄으로 우물이 말랐을 때 성자의 초상화를 우물에 넣고 수도자들이 기도하자 물이 차올라 초상화가 떠올랐다는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그리고 강문호 수도사는 ‘기도는 응답이다. 기도는 안 되는 것을 되게 하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고, 닫힌 문을 연다’는 취지로 강조합니다. 이 이야기는 수도원 전승으로 받아들이면 충분하겠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본질을 ‘내가 바라는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능력’으로만 이해하면 기도가 어느새 인간의 뜻을 관철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참된 기도는 주님의 뜻을 내 뜻에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이 주님의 섭리와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응답이 내가 요구한 형태로 오지 않을 때에도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가 오히려 더 깊은 기도의 시험일 수 있습니다.

 

이번 영상에서 매우 흥미로운 부분은 이비론 수도원의 공동 식사입니다. 원장이 먹기 시작하면 모두 함께 먹고, 원장이 수저를 놓으면 아직 다 먹지 못했어도 모두 수저를 놓으며, 식사 중에는 한 사람이 성경을 읽어 육신의 양식과 영의 양식을 함께 취한다는 설명입니다. 여기에 담긴 질서와 절제는 충분히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수도원장이 모든 것의 표준’이라는 표현은 영적으로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동체의 운영에는 외적 질서가 필요하고 수도자는 자발적으로 그 질서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양심과 진리의 최종 기준은 인간 지도자가 아니라 주님과 말씀입니다. 인간 지도자에게 대한 순종이 주님께 대한 순종을 돕는 수단이라면 좋은 질서가 되지만, 지도자의 의지가 곧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면 외적 순종이 내적 자유를 침범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수도원 밖의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강제로 거듭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보존하시면서 그가 선과 진리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이끄십니다. 따라서 가장 깊은 순명은 ‘한 인간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지를 내려놓고 주님의 선과 진리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외적 규율이 그것을 훈련해 줄 수는 있지만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원장이 숟가락을 놓았기 때문에 나도 숟가락을 놓는 훈련보다 더 깊은 것은, 내 욕망이 ‘조금 더 먹고 싶다’, ‘내 뜻대로 하고 싶다’, ‘나는 예외이고 싶다’고 말할 때 그것을 주님의 질서 아래 놓는 내적 순종입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만난 일본 수도사가 ‘한국에서 온 수도사가 없다. 한국과 아토스의 고리를 만들어 달라’며 자신을 붙들었다는 일화도 흥미롭습니다. 여기에는 ‘한국에도 이런 수도 영성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강문호 수도사의 오랜 열망이 드러납니다. 영상 마지막에도 ‘우리나라에도 이런 교회 수도사들이 많이 배출되어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이 소망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대교회가 활동, 성장, 재정, 조직, 프로그램에 치우칠 때 기도와 절제와 하나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자는 요청은 귀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수도사가 많이 배출되는 것’과 ‘거듭난 사람이 많아지는 것’을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수도복을 입은 사람의 수가 많아져도 자기 사랑과 공로의식과 지배욕이 그대로라면 천국이 가까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수도사라는 이름을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사람이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서 자신의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정직한 쓰임을 행한다면 그는 실질적으로 천국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수도 영성을 바라보면서 계속 외적 형식과 내적 상태를 구별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의 ‘하나님하고 가까이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사막이 도시가 된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기 때문에 그곳이 아름답다’는 취지의 말은 상당히 좋습니다. 다만 ‘아름다운 사람’의 기준을 다시 주님께 돌려놓으면 훨씬 깊어집니다. 사람 자체가 스스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삶으로 흘러나올 때 그 사람을 통해 천국의 아름다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천국의 아름다움도 천사들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과 지혜가 외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번 영상은 앞서 살핀 티혼 수도사 이야기보다 조금 더 넓은 질문을 우리에게 남깁니다. ‘거룩한 수도자가 되는 법’보다 ‘거룩한 공동체가 어떻게 형성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극단적인 금식, 긴 기도, 엄격한 규칙, 침묵, 수도원장의 권위가 공동체를 특별하게 보이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적 공동체의 진정한 표지는 구성원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며, 상대의 자유를 존중하고, 자신의 공을 내려놓으며, 각자의 쓰임을 통해 전체의 선을 섬기는가에 있습니다. 외적 질서가 이러한 내적 질서를 보호한다면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외적 질서 자체가 거룩함의 증표가 되는 순간 수도원 역시 세상의 다른 조직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이번 영상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가장 주의 깊게 바라보게 되는 문장은 어쩌면 ‘지독한 훈련 끝에 드디어 하나님과 합일의 단계에 들어갔다’는 표현일 것입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지독하게 하면 도달하는 영적 고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의 악과 거짓을 인식하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버리며, 주님께서 우리 안에 새 의지와 새 이해를 형성하시도록 허용하는 평생의 과정입니다. 인간이 노력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 자체를 구원의 원인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가장 깊이 거듭난 사람일수록 ‘내가 여기까지 올라왔다’보다 ‘주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이끄셨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티혼의 극단적 금욕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이 영상에서 우리가 취할 결론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삶에서 받아들일 것은 ‘하나님을 무엇보다 우선하고 싶었던 갈망’, ‘욕망에 끌려다니지 않으려 했던 절제’, ‘기도를 삶의 중심에 두려 했던 태도’, ‘피조물에게까지 미친 온유함’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오늘 우리의 형편 속에서 더 내적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음식을 조금 덜 먹는 것보다 탐욕을 덜 먹이고, 말을 조금 덜 하는 것보다 자기 자랑을 덜 말하며, 세상을 떠나 동굴로 들어가는 것보다 자기 안의 proprium을 발견하고 주님께 맡기는 것이 더 깊은 수도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아토스의 숲과 수도원이 ‘천국 같은 곳’인 이유가 있다면 건물이나 금식 규칙이나 수도복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을 서로를 향한 사랑과 쓰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곳에 천국의 어떤 것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천국은 아토스에만 세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의 식탁에서도, 작은 교회에서도, 직장에서도, 병실에서도 주님의 질서가 인간의 의지와 생각 속에 받아들여지면 천국의 어떤 것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수도원의 외적 아름다움을 지나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바라보게 하는 더 깊은 수도원, 곧 인간 안에 주님께서 세우시는 내적 질서일 것입니다.

 

 

 

SY.96, 강문호 수도사, ‘바늘로 천국을 만들었다’ (20260901)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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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의 가장 큰 장점은 성막을 단순히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 시설로 보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보여 주는 하나의 거대한 상징 체계로 읽으려 한다는 점입니다. ‘성막 하나를 제대로 보면 성경 전체가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는 영상의 출발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 성막은 단순한 예표 정도가 아니라, 그 구조와 재료와 기구와 방향과 의식 하나하나가 천국과 주님,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에 상응하도록 주어진 거룩한 표상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을 자세히 설명하는 출애굽기의 긴 기록은 불필요한 건축 설명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에서는 인간이 어떻게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며 어떻게 천국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설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상은 먼저 ‘미쉬칸’, 곧 장막을 하나님께서 인간 가운데 거하시는 장소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높은 하늘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에게 가까이 오시고, 모세와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말씀하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방향은 매우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멀리 계신 하나님을 인간이 힘겹게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에게 끊임없이 가까이 오시는 주님을 인간이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사랑과 진리를 끊임없이 흘려보내십니다. 문제는 주님이 멀리 계신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그리고 거기서 나온 거짓들이 그 유입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의 ‘우리의 기도가 하늘까지 힘겹게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곁에 계신 그분께 건네는 대화일지도 모른다’는 표현은 아름답고도 의미 있는 통찰입니다.

 

그러나 에덴을 설명하는 부분부터는 조금 더 조심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은 아담을 ‘첫 번째 제사장’, 에덴을 ‘첫 번째 성전’으로 설명하면서, 창세기 2장의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는 표현과 성막 봉사에 사용되는 히브리어를 연결합니다. 성경신학적으로 흥미로운 연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에덴은 무엇보다 실제 지리적 정원이나 최초의 성전 건물을 가리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에덴동산은 태고교회 사람들의 내적 상태, 곧 사랑과 퍼셉션을 통해 주님과 직접 교통하던 천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에덴이 ‘성전’이었다고 말한다면 건축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태고교회 사람의 내면 자체가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깊습니다. 성막은 잃어버린 에덴이라는 장소를 복원하는 모형이라기보다, 인간 안에서 무너진 천국의 질서를 주님께서 다시 세우시는 과정을 표상한다고 보는 편이 스베덴보리에 더 가깝습니다.

 

영상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뒤 에덴 동쪽에 그룹과 불칼이 놓였고, 훗날 성막의 휘장에도 다시 그룹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연결하면서 ‘쫓아내신 것으로 끝내신 게 아니라 돌아올 길을 다시 짜고 계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연결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도 한 단계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의 그룹은 단순히 화난 하나님께서 인간의 귀환을 막기 위해 세워 놓으신 경비병이 아닙니다.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것은 타락한 인간이 거룩한 것에 함부로 접근하여 그것을 모독하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닫힌 길조차 심판만이 아니라 보호입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함에 접근하여 더 깊은 모독에 빠지는 것보다, 한동안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것이 오히려 구원의 섭리인 것입니다. 성막 휘장의 그룹 역시 그런 의미에서 ‘거룩한 것의 보호’를 나타냅니다.

 

성막 뜰의 동쪽 문 하나를 강조하는 부분도 흥미롭습니다. 영상은 ‘제사장이든 평민이든 족장이든 이 문 하나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들어가지 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예수만이 유일한 문’이라는 교리적 공식으로만 읽기보다, 상응적으로 보면 더욱 풍성해집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은 인간의 신분이나 지식이나 공로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특히 성경에서 ‘동쪽’은 주님과 주님을 향한 사랑에 상응합니다. 해가 뜨는 방향이라는 자연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영계에서 천사들이 주님을 영적 태양으로 바라보는 질서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막의 동쪽 입구는 단지 출입구 하나가 아니라 모든 영적 여정의 시작이 ‘주님을 향함’에 있음을 보여 주는 상응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번제단에 이르러서는 영상과 스베덴보리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영상은 제물을 가져온 사람이 양의 머리에 손을 얹을 때 ‘내 죄가 바로 그 순간 이 양에게로 옮겨가고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대속 신학에서 익숙한 설명이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죄가 어떤 법적 실체처럼 한 존재에게서 다른 존재에게 이전된다고 이해하지 않습니다. 죄는 인간의 의지와 사랑, 그리고 실제 삶에 속한 것이므로 다른 존재에게 법적으로 옮겨질 수 없습니다. 제물과 피는 죄의 물질적 이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려지는 사랑과 선,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정결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제사의 중심은 ‘죄인이 받을 형벌을 동물이 대신 받는다’는 데 있지 않고, 악으로 인해 무너진 인간의 질서가 주님께로 다시 돌아가고 회복되는 데 있습니다.

 

물두멍 역시 단순한 의식적 세척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성막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물로 씻는 것은 말씀의 진리로 삶을 정결하게 하는 것을 표상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물은 특히 자연적 차원에서의 진리에 상응합니다. 사람이 주님께 가까이 간다는 것은 어떤 신비로운 감정만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를 통해 자신의 실제 생각과 말과 행동을 살피고 고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영상이 ‘깨끗해져서 가는 것이 아니라 가면 그 자리에서 씻기는 구조’라고 말한 것은 목회적으로는 따뜻한 표현이지만,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여야 합니다. 주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인간을 받아 주시지만, 받아 주신 인간을 있는 모습 그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으십니다. 성막의 길은 받아들임의 길인 동시에 정결과 거듭남의 길입니다.

 

성소 안으로 들어가면 등잔대와 진설병과 분향단이 등장합니다. 영상은 등잔대를 ‘나는 세상의 빛’, 진설병을 ‘나는 생명의 떡’이라는 주님의 말씀과 연결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빛은 신적 진리를, 떡은 신적 선을 표상합니다. 인간에게 적용하면 등잔대의 빛은 이해를 밝혀 주는 진리이며, 떡은 의지를 살리고 영혼을 먹이는 사랑의 선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관통하는 ‘선과 진리’, 또는 ‘사랑과 지혜’의 결합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은 단순히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시는 분만도 아니고, 사랑만 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가 주님 안에서는 완전히 하나이며, 거듭나는 인간 안에서도 이 둘이 다시 결합되어야 합니다.

 

향 역시 영상이 기도와 연결한 것처럼 성경에서 기도를 표상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는 단순히 인간의 말이 위로 올라가는 모습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참된 기도는 인간의 입술에서 나온 문장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이 주님께 향하는 내적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향기가 올라간다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아름다운 문장을 들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주님을 향하는 선한 애정과 진실한 신앙을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말없이 드리는 기도도 기도이고, 때로는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몰라 침묵하는 것조차 주님을 향한 내적 애정이 있다면 깊은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지성소와 법궤에 대한 영상의 설명도 매우 인상적입니다. 다른 민족의 신전과 달리 이스라엘의 지성소에는 신상이 없고, 그룹 사이의 보이지 않는 공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낸다는 설명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어떤 자연적 형상으로 제한될 수 없는 분’이라는 중요한 진리를 보여 줍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는 여기서 놀라운 전환이 하나 더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시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보이지 않는 신성을 ‘아버지’, 나타난 신적 인성을 ‘아들’, 그리고 그분에게서 나오는 신적 활동을 ‘성령’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성막의 가장 깊은 곳에 임재하시는 여호와와 복음서에서 우리 가운데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서로 다른 두 신적 존재가 아니라 한 분 주님의 계시입니다.

 

여기에서 영상이 속죄소, 곧 카포렛 위에 피가 뿌려지는 장면을 ‘하나님이 위에서 내려다보실 때 보이는 건 깨어진 율법이 아니라 그 위를 덮은 피였다’고 설명하는 부분은 특별히 분별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 표현은 감동적이지만, 자칫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실제 악은 그대로 두시면서 피를 보고 법적으로 죄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신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은 그런 법적 선언이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의 죄를 못 본 체하지 않으시며, 다른 존재의 의를 인간에게 외적으로 덮어씌우지도 않으십니다. 인간이 주님의 능력으로 악을 실제로 멀리하고 선을 행할 수 있도록 변화시키십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덮음’이 있다면 죄를 감추어 하나님께 보이지 않게 하는 덮음이라기보다, 주님의 자비와 선이 인간의 악을 제어하고 정복하며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대속죄일의 반복과 그리스도의 ‘단번에’ 이루신 일을 연결하는 영상의 흐름 역시 히브리서에 충실한 전형적인 기독교 해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단번의 사건’을 형벌 대속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성난 아버지를 달래거나 인간에게 내려질 형벌을 대신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 인간에게 압도적으로 밀려 들어오던 지옥의 세력을 직접 만나 싸우고 정복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의 지상 생애 전체는 연속적인 시험과 승리의 과정이었으며, 십자가는 그 마지막 시험이자 마지막 승리였습니다. 동시에 주님께서는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이 입으신 인간성을 완전히 신성하게 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구속’과 ‘영화’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점에서 ‘휘장이 찢어졌다’는 영상의 장면은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더욱 깊어집니다. 휘장은 단순히 하나님께 들어가는 법적 장벽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성을 영화롭게 하심으로써 신성과 인성 사이의 모든 분리가 사라지고, 동시에 인간이 주님의 신적 인성을 통해 신성에 접근할 수 있는 완전한 길이 열린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인간은 알 수 없는 절대자를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신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화를 풀어 주신 순간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옥을 정복하시고 자신의 인성을 완전히 신성하게 하심으로 인간과 천국 사이의 질서를 회복하신 결정적인 승리입니다.

 

영상이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를 성막과 연결한 부분은 매우 좋습니다. ‘거하다’에 사용된 헬라어가 장막을 치는 이미지와 연결된다는 것은 요한복음의 성육신 이해를 풍성하게 합니다. 광야에서 장막 가운데 임재하셨던 여호와께서 마침내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흐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잠시 인간의 옷을 입으셨다가 벗으신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은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받은 유한한 인간적 요소를 시험과 승리를 통해 차례로 벗으시고, 그 자리에 자신 안의 신성으로부터 오는 신적 인간성을 입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다시 이전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신적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성막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실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영상은 에덴에서 성막으로, 성막에서 성육신으로, 십자가에서 요한계시록 21장의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로 이야기를 이어 갑니다. 이 큰 방향은 아름답습니다. 다만 마지막의 ‘더 이상 성막이 필요하지 않은 날’은 단순히 먼 미래에 물리적인 새 지구가 만들어지고 그곳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산다는 그림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요한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은 새 교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 교회의 선과 진리 가운데 거하시며, 궁극적으로는 거듭난 인간의 내면 가운데 거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막의 완성은 건축물이 사라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주님의 성전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상 전체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다시 바라보면, 성막은 ‘죄인이 피를 통해 법적으로 용서받아 하나님께 접근하는 과정’보다 훨씬 더 크고 깊은 것을 보여 줍니다. 뜰에서 성소로,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은 인간의 겉 사람에서 점점 더 깊은 속 사람으로 들어가는 거듭남의 여정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놋에서 은으로, 다시 금으로 깊어지는 재료의 변화 역시 자연적 차원에서 영적 차원으로, 다시 천적 차원으로 깊어지는 질서를 생각하게 합니다. 물로 씻는 것은 진리에 의한 정결이며, 등잔대의 빛은 신앙의 진리이고, 떡은 사랑의 선이며, 향은 그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올라가는 예배이고, 가장 깊은 지성소는 주님과 인간의 내적 결합을 향합니다.

 

따라서 영상의 마지막 문장, ‘하나님은 멀리 계신 적이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계셨던 겁니다’는 이 영상 전체에서 가장 아름답게 건질 수 있는 문장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붙이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향해 오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 사람을 자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다시 만드시기를 원하십니다. 성막의 목적은 우리가 잠깐 하나님을 방문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 자체가 주님의 거처가 되는 데 있습니다.

 

처음 에덴에서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 안에 살았습니다. 그 질서가 무너지자 주님은 표상적인 성막과 성전을 통해 다시 천국의 질서를 보여 주셨고, 마침내 친히 세상에 오셔서 지옥을 정복하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말씀을 통해 각 사람의 마음 안에서 또 하나의 성막을 세우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막의 마지막 질문은 ‘성막의 각 기구가 무엇을 예표하는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본질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지금 내 안에서 주님이 거하실 성막은 어떻게 세워지고 있는가?’

 

성막을 그렇게 읽기 시작하면 출애굽기의 낯설고 복잡한 치수와 재료와 기구와 의식들이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것들은 오래전에 사라진 종교 시설의 설계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한 사람의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그의 가장 깊은 속 사람까지 들어오시며 그를 거듭나게 하시는 질서의 표상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길의 중심에는 인간의 공로나 제물의 피 자체가 아니라 한 분 주님이 계십니다. 성막도 주님을 가리키고, 제사도 주님을 가리키며, 빛도 떡도 향도 법궤도 주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마침내 인간 가운데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결국 성막의 이야기는 ‘어떻게 죄인이 무서운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가?’의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깊게는 ‘어떻게 주님께서 타락한 인간 안으로 다시 들어오셔서 그를 천국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시는가?’의 이야기입니다. 그 관점에서 보면 성막은 건물이 아니라 거듭남의 지도이고, 지성소는 장소가 아니라 주님과 인간의 결합이며, 휘장이 열리는 것은 단순한 출입 허가가 아니라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까지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들어올 길이 다시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지금도 각 사람 안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SY.16, 말씀나침반, ‘하나님은 '이것' 때문에 사탄을 창조했다’ (20260329)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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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사도행전 9장의 다비다 이야기를 ‘바늘로 천국을 만들었다’는 하나의 이미지로 풀어냅니다. 다비다가 과부들을 위해 속옷과 겉옷을 만들어 주었다는 성경의 짧은 기록에서 출발하여, 바늘의 작음, 꿰매는 기능, 소리 없음,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 이어 줌, 완성품을 만들어 냄, 흔적을 남김, 한 땀 한 땀 일함, 직접 손에 쥐고 일함, 일을 마치고 사라짐이라는 열 가지 영성을 끌어냅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자기가 가진 아주 작은 것으로도 주변을 천국으로 만들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번 영상은 최근 영상들 가운데서도 특히 ‘쓰임’(use)이라는 중심 주제와 상당히 가까이 맞닿아 있습니다.

 

우선 다비다의 이야기를 ‘큰일을 한 사람’의 이야기보다 ‘자기 손에 있던 것으로 이웃에게 선을 행한 사람’의 이야기로 읽은 점은 매우 좋습니다. 다비다는 왕도 아니고 사도도 아니며, 거대한 조직을 세운 사람도 아닙니다. 성경이 기억하는 것은 그가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는 사실과, 그가 죽었을 때 과부들이 그에게서 받은 옷을 들고 울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쓰임’과 매우 가까운 장면입니다. 천국적인 삶은 반드시 거대한 일을 해야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능력과 형편을 가지고 실제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데서 나타납니다. 바늘 하나와 손재주가 누군가에게는 추위를 막아 주고, 존엄을 지켜 주며,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사랑의 표지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바늘은 작은데 큰 일을 한다’는 비유는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주님의 나라에서는 외적 크기보다 그 안에 담긴 사랑과 쓰임이 중요합니다. 세상에서는 수천 명을 움직이는 일을 ‘큰일’이라고 부르고 한 사람의 옷을 꿰매 주는 일을 ‘작은 일’이라고 부르기 쉽지만, 천국의 질서는 그렇게 단순히 규모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진실한 체어리티에서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이 주님 앞에서는 훨씬 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상의 ‘작은 것을 무시하지 말자’는 메시지는 단지 ‘작게 시작하면 나중에 큰일을 할 수 있다’는 성공론으로 끝나기보다, ‘작은 쓰임도 그 자체로 주님의 나라에 속한다’는 데까지 가면 더 깊어집니다.

 

‘바늘은 헤어진 곳을 꿰맨다’는 비유는 더 직접적으로 체어리티와 연결됩니다. 상한 것을 꿰매고, 아픈 곳을 어루만지고, 배고픈 것을 채워 준다는 설명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체어리티는 추상적인 호감이 아니라 구체적인 유익을 행하는 사랑입니다. 누군가의 삶이 찢어진 곳을 발견했을 때 정죄하기보다 가능한 범위에서 그것을 이어 주는 것, 관계가 끊어진 곳에서는 화해를 돕고, 가난한 곳에서는 필요한 것을 채우며, 외로운 사람에게는 곁이 되어 주는 것, 이것이 ‘바늘의 영성’을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 영적 삶으로 만드는 길입니다.

 

‘바늘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바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두 대목은 이번 영상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예수님은 드러나고 나는 드러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아주 중요한 원칙입니다. 선을 행하고 나서 ‘내가 이것을 했다’는 공로의식이 강해질수록 선 안에 proprium이 섞이기 쉽습니다. 선의 근원은 주님이고 인간은 그 선이 흘러가는 그릇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사람은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하기보다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늘은 옷을 다 만들고 나면 보이지 않는다’는 이미지는 이번 영상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만 여기에도 미세한 차이는 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외적으로 완전히 숨어야 한다는 규칙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쓰임은 공개적으로 해야 하고, 가르치는 사람은 앞에 서야 하며, 지도자는 책임 있게 자신의 이름으로 말해야 합니다. 문제는 ‘보이는가, 보이지 않는가’가 아니라 ‘누구의 영광을 구하는가’입니다. 사람들 앞에 서 있으면서도 마음으로는 주님께 공을 돌릴 수 있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봉사하면서도 마음속으로 ‘나는 참 겸손한 사람’이라고 자기를 높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감추어짐은 외적 익명성보다 내적 비공로성에 있습니다.

 

‘바늘은 이어 준다’는 부분도 좋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다비다와 과부들, 다비다와 예수, 과부들과 천국을 바늘이 이어 주었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비유적 표현으로 받아들이면 의미가 있습니다. 다비다가 만든 옷은 단지 직물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를 남겼습니다. 사람이 죽은 뒤 과부들이 그 옷을 들고 울었다는 것은 다비다가 그들의 삶 속에 실제 쓰임으로 남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공동체를 실제로 결속시키는 것도 교리적 구호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삶에서 만날 때입니다. 진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여 주고, 선은 그것을 행하게 하며, 체어리티는 사람과 사람을 살아 있는 관계로 연결합니다.

 

‘바늘은 완성될 때까지 일한다’, ‘한 땀 한 땀 순서를 지킨다’는 대목은 거듭남과 연결해서 읽을 만합니다. 거듭남은 한 번의 감동이나 한 번의 결단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질서 있는 과정입니다. 인간은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존재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의 악을 보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피하고, 그 자리에 선한 습관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반복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땀 한 땀’은 상당히 좋은 비유입니다. 다만 ‘매뉴얼대로, 규정대로’라는 표현은 영적 삶에서는 조금 조심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거듭남에는 주님의 질서가 있지만 모든 사람의 외적 과정이 동일한 매뉴얼을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섭리는 각 사람의 상태와 자유를 따라 놀랍도록 개별적으로 역사합니다.

 

‘바늘이 지나간 자리에는 실이 남는다’는 표현도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바울이 지나간 자리에는 교회가 남고, 사람 역시 어디를 지나갔든 어떤 흔적을 남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 역시 ‘업적을 남겨야 한다’는 쪽으로 흐르지만 않는다면 좋은 가르침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무엇을 남겼는가’보다 ‘어떤 상태를 남겼는가’가 중요합니다. 내가 지나간 자리에 내 이름과 기념물이 남는 것보다, 한 사람이 더 평안해지고, 한 관계가 회복되고, 한 사람이 주님께 더 가까워졌다면 그것이 훨씬 귀한 흔적입니다. 다비다가 남긴 가장 중요한 흔적은 바느질 공동체의 규모가 아니라 과부들이 몸으로 기억하고 있던 사랑이었습니다.

 

‘손은 일하고 마음은 하나님께 드린다’는 아홉 번째 원칙 역시 이번 영상에서 매우 좋은 문장입니다. 이것은 수도원적 영성과 일상적 쓰임을 연결할 수 있는 접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세상 일을 버리고 종교적 명상에만 몰두하는 삶보다, 자신의 직업과 가정과 사회적 의무 안에서 정직하게 쓰임을 행하는 삶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그러므로 바느질을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음식을 만들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청소하고, 가르치고, 운전하고, 돌보고, 행정을 하는 동안에도 주님의 선을 이웃에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다비다는 수도원 밖에서 수도 영성의 핵심을 살았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영상에는 성경 본문과 설교적 확대를 구별해야 할 부분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여제자는 다비다 한 명이다’라는 말은 사도행전 9장 36절에서 실제로 다비다에게 여성형 ‘제자’에 해당하는 표현이 사용된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그것을 근거로 다비다가 ‘예수님과 행동을 완전히 똑같이 하는 특별한 완전한 종’이라는 하나의 신분명처럼 설명하는 것은 본문보다 많이 나아간 해석입니다. 본문이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다비다가 제자였고 선행과 구제가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상은 설교적 적용으로 구별해서 듣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다비다의 회복과 고넬료 사건을 연결하여 ‘다비다의 바늘 하나 때문에 해외 선교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표현도 설교적 연결로서는 흥미롭지만, 사도행전 자체가 그렇게 인과관계를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베드로가 다비다 사건 이후 욥바에 머물렀고 그곳에서 고넬료의 사람들을 만나 가이사랴로 간 것은 본문 흐름상 맞습니다. 그러나 ‘다비다 때문에 이방 선교가 시작되었다’고 단정하면 성경이 말하는 것보다 한 걸음 더 나갑니다. 오히려 ‘다비다 사건을 계기로 베드로가 욥바에 머무르게 되었고, 바로 그 시기에 고넬료 사건이 이어진다. 하나의 쓰임이 주님의 섭리 안에서 예상하지 못한 다음 쓰임과 연결될 수 있다’ 정도로 말하면 훨씬 깊고 안전합니다.

 

죽은 다비다를 두고 사람들이 ‘베드로가 오면 반드시 살아날 것을 믿었다’고 해석하는 부분 역시 본문은 그렇게까지 분명히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은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했다고 기록하지만, 그들이 이미 확실하게 부활을 기대했다고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베드로의 기도를 통해 다비다가 살아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이전 사람들의 내면을 ‘반드시 살아날 것을 믿었다’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부분은 설교의 감동을 줄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말씀 자체와 우리의 아름다운 추론을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반면 영상 후반에 강문호 수도사가 다비다에 관한 후대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지금부터 이야기는 믿을 게 아니라 참고만 하는 전승, 전설’이라고 명확하게 선을 긋는 것은 매우 좋습니다. 다비다가 부활 후 더욱 열심히 구제했고 ‘욥바의 어머니’라 불렸다는 이야기, 사람들이 다비다의 집에 모여 ‘바늘 공동체’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성경과 같은 권위로 말하지 않고 전승으로 구별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런 구별은 중요합니다. 전승은 영적 묵상의 재료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을 계시된 사실과 동일한 층위에 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 영상에서 조금 더 주의 깊게 바라볼 부분은 후반전 이야기입니다. 다비다의 전승을 소개한 뒤 강문호 수도사는 모세, 예수, 아브라함을 들어 ‘후반전이 더 커야 한다’고 말하고, 자신의 아버지가 은퇴 후 29년 동안 해외에서 더 크게 일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자신도 ‘은퇴한 지 7년째인데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자신의 현재 활동을 연결합니다. 이 부분은 노년과 은퇴를 소극적 퇴장으로 여기지 않고 남은 삶에서도 쓰임을 찾자는 뜻에서는 매우 귀합니다. 사람은 몇 살이 되었든 주님께서 허락하신 상태 안에서 계속 이웃에게 유익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후반전은 앞보다 더 커야 한다’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조금 바꾸어 듣는 편이 좋겠습니다. 주님 앞에서 후반전이 더 ‘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책을 쓰고, 더 많은 나라를 다니고, 더 많은 일을 해야 영적으로 더 큰 삶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후반전은 오히려 외적으로 작아지면서 내적으로 더 깊어질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수천 명 앞에서 설교하던 사람이 노년에는 한 사람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것이 마지막 쓰임일 수도 있고,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병상에서 자신의 성급함과 자기의지를 내려놓는 것이 평생의 가장 깊은 거듭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영상 안에는 묘한 대비가 있습니다. 앞에서는 ‘바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일을 다 하면 바늘은 사라진다’, ‘예수님은 드러나고 나는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후반에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아버지의 큰 사역과 자신의 은퇴 후 활동을 예로 듭니다. 이것을 곧바로 모순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예화로 사용하는 것은 설교에서 흔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가장 조용히 비추어 볼 만한 자리이기도 합니다. ‘바늘의 영성’을 말하는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시험은 어쩌면 ‘내가 바늘처럼 일했다는 사실조차 말하고 싶어지는 마음’을 살피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proprium은 노골적인 자랑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나는 겸손합니다’, ‘나는 주님만 드러내고 싶습니다’, ‘나는 은퇴 후에도 쉬지 않고 일합니다’라는 종교적으로 선한 문장 안에도 아주 미세하게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강문호 수도사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 글을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에게 해당합니다. 참된 ‘바늘의 영성’은 내가 얼마나 많은 천국을 만들었는지를 세는 것이 아니라, 일을 마친 뒤 ‘이 일을 하게 하신 분도 주님이고, 선을 주신 분도 주님이며, 내가 한 것은 주님께서 주신 것을 받아 사용한 것뿐입니다’라고 더 깊이 인정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늘로 천국을 만들었다’는 제목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한 번 더 깊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천국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인간 안에 형성됩니다. 그러나 다비다의 바늘은 그 천국적 선이 자연계에서 하나의 구체적 쓰임으로 나타나는 도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다비다가 바늘로 천국을 만들었다’기보다 ‘주님께서 다비다의 사랑과 바늘을 통해 천국의 어떤 것을 이웃의 삶 가운데 나타내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번 영상에서 결국 ‘바늘’보다 ‘옷을 들고 울던 과부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비다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기록한 이력서가 남은 것이 아니라,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그의 사랑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한 인간의 쓰임에 대한 매우 아름다운 증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난 뒤 누군가가 ‘저 사람은 굉장한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것보다 ‘저 사람이 내가 힘들 때 나를 도와주었다’, ‘저 사람 때문에 내가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훨씬 천국적인 흔적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영상의 ‘바늘의 영성’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 받은 작은 능력을 가지고 상한 것을 이어 주며, 소리 없이 이웃의 필요를 채우고, 그 선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지 않은 채, 한 땀 한 땀 끝까지 쓰임을 행하는 것.’ 그렇게 살다가 일이 끝났을 때 바늘은 조용히 놓이고 옷만 남습니다. 그리고 더 깊이 보면 옷조차 우리의 공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손을 빌려 누군가에게 입혀 주신 사랑의 흔적일 것입니다.

 

 

 

SY.97, 강문호 수도사, ‘티흔 수도사’ (20200120)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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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94, 강문호 수도사, ‘미르사바 수도원’ (20200119)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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