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천국과 지옥, 고통과 구원, 그리고 삶의 의미’

이번 영상은 앞의 영상보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았을 때 훨씬 더 직접적인 대화가 가능한 내용입니다. 천국과 지옥, 사후세계, 예수를 알지 못한 사람의 구원, 양심, 하나님의 섭리, 고통과 악, 부활, 그리고 마지막에는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까지 다루기 때문입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김학철 교수가 전통적인 한국 개신교의 천국·지옥 이미지를 해체하려는 과정에서 제시하는 몇몇 통찰이 스베덴보리와 놀라울 만큼 가까워지는 한편, 결정적인 몇 지점에서는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멀어진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은 단순히 ‘맞다, 틀리다’로 평가하기보다, 김학철 교수가 무엇을 해체하려 하는지 먼저 이해하고, 그 해체 이후 스베덴보리가 어떤 더 넓은 그림을 제시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담의 출발점은 ‘익숙함을 의심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오랫동안 성경을 읽었다고 해서 성경을 잘 아는 것도 아니며, 모태신앙이라고 해서 기독교를 잘 아는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능력이 사라지는 순간 종교와 고전은 생명력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이 태도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경험 자체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평생 읽어 온 창세기의 익숙한 문장들이 전혀 다른 깊이를 가진 말씀으로 다시 열립니다. ‘빛’, ‘물’, ‘땅’, ‘나무’, ‘동산’, ‘뱀’, ‘여자’, ‘가인’, ‘아벨’ 같은 너무나 익숙한 말들이 인간의 거듭남과 천국의 질서를 담은 말씀으로 새롭게 읽힙니다. 그러므로 ‘나는 성경을 안다’는 확신보다 말씀 앞에서 계속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김학철 교수의 지적은 충분히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해집니다. 김학철 교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천당과 지옥’의 이미지 상당 부분이 성경 자체에서 직접 나온 것이 아니라 문화적·종교적 번역 과정에서 형성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천당’이나 ‘지옥’이라는 한국어 자체가 동아시아 종교문화의 영향을 받은 말이며, 단테의 ‘신곡’ 같은 작품이 서구인의 지옥 이미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의 ‘바실레이아’를 오늘날의 영토적 국가 개념보다 ‘통치’ 또는 ‘질서’로 이해해야 한다면서,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주로 ‘죽어서 가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여기에 임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까지는 스베덴보리와 만나는 중요한 지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을 단순히 우주의 어느 장소에 있는 물리적 공간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천국과 지옥’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핵심 가운데 하나는 천국이 본질적으로 ‘상태’라는 것입니다. 물론 영계에는 공간처럼 경험되는 질서가 있습니다. 천국의 공동체들이 있고, 집과 길과 산과 정원 같은 것들도 실제적으로 지각됩니다. 그러나 그 공간은 자연계의 공간과 같은 것이 아니라 영들의 내적 상태가 외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질서와 통치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김학철 교수의 설명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김학철 교수가 ‘신약 성서는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이 사실 거의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천국은 죽은 다음에 가는 곳이 아니다’라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에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분명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단지 사후세계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사후세계의 실재가 기독교에서 주변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는 천국과 지옥을 인간의 종교적 상상이나 후대 문화가 만들어 낸 이미지로 보지 않고, 자연계와 함께 창조 질서를 이루는 실제 영계로 설명합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천국은 장소인가, 상태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양자택일이 아닙니다. 천국은 ‘상태가 공간으로 나타나는 세계’라고 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자연계에서는 서로 미워하는 두 사람도 같은 방에 앉아 있을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내적 상태가 서로 완전히 반대되는 영들이 지속적으로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이 공간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단순히 ‘죽어서 올라가는 저 위의 장소’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단순한 은유나 현재적 하나님의 통치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 세계이되 자연계와 전혀 다른 법칙, 곧 사랑과 애정과 상응에 따라 형성되는 세계입니다.

 

이 차이는 지옥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김학철 교수는 ‘게헨나’가 힌놈의 골짜기와 관련된 말이며, 고대의 우상숭배와 인신공양, 부정함과 죽음의 이미지가 지옥의 표현과 결합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역사적·언어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에는 의미 있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에서 다시 ‘상응’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불, 유황, 어둠, 구더기, 악취 같은 지옥의 표현이 등장한다고 해서 반드시 자연계의 물리적인 불과 유황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단순한 고대인의 문학적 상상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지옥적 사랑과 거짓의 실제 상태에 ‘상응’하는 표현입니다.

 

가령 천국의 불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 사랑에 상응하지만, 지옥의 불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욕망과 증오에 상응합니다. 같은 ‘불’이라는 이미지가 사랑의 성질에 따라 정반대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문자적 지옥 이미지를 그대로 물질화하지도 않고, 반대로 그것을 신화나 은유로 해체해 버리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문자 그대로의 불지옥이 아니다’와 ‘지옥은 실재하지 않는다’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영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는 ‘이순신 장군은 구원받았을까?’라는 질문입니다. 김학철 교수는 로마서 2장의 양심을 이야기하고, 유스티누스의 ‘로고스의 씨앗’을 소개하며, 마태복음 25장의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주님께 행한 것이라는 말씀을 들어 ‘예수를 역사적으로 알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자동적으로 지옥에 간다고 말할 수 없다’는 방향으로 설명합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한국 개신교의 구호가 성경 전체의 구원론을 정확하게 압축한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는 스베덴보리와의 접점이 매우 큽니다. 스베덴보리는 기독교 세계 밖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해서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는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았는가, 악을 악으로 여기고 선을 행하려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선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사후에 천사들에게 진리를 배우고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반대로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성경과 교리를 많이 알고 있어도 실제 삶의 지배적 사랑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었다면, 그 외적 신앙고백 자체가 천국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순신 장군이 예수를 몰랐으므로 지옥에 갔다’는 식의 단순한 판정은 스베덴보리의 구원 이해와도 맞지 않습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선행을 많이 하면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핵심은 행위의 외형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입니다.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빛 안에서 양심을 따라 선을 사랑하고 행했다면, 그 선의 근원은 본인이 당시 명시적으로 알지 못했더라도 궁극적으로 주님께 있습니다. 사후에는 그 선 안에 있는 사람에게 진리가 주어지고, 그는 자신이 이미 사랑하고 있었던 선의 근원이 주님이셨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최근 ‘아벨’과 체어리티를 읽으며 살펴보고 있는 내용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이름으로만 ‘신앙’을 소유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독립적인 구원의 자격증처럼 될 때, 바로 가인으로 상징되는 문제가 시작됩니다. 반대로 사람이 가진 진리의 양은 제한되어 있더라도 그가 선을 사랑하고 양심에 따라 살고 있다면, 그 안에는 주님께서 이후 진리와 결합시키실 수 있는 토대가 있습니다.

 

그다음 ‘고통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함부로 설명하지 말라’는 부분도 매우 귀합니다. 김학철 교수는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그런 겁니다’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울부짖음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시편에는 하나님을 향한 탄원과 절규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예수께서도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시편의 탄원을 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고통받는 사람의 질문을 억압하는 책이 아니라 때로는 그 사람과 함께 울어 주는 책이라는 설명입니다.

 

이 부분은 목회적으로 매우 중요하며,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와도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섭리를 안다고 생각할수록 더욱 조심해야 할 말이 바로 ‘다 뜻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신적 섭리의 개별적인 연결고리를 현재의 시점에서 모두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건 하나만 보지만 주님은 그 사람의 영원한 생명과 자유, 수많은 사람의 관계와 선택, 그리고 미래의 가능성까지 동시에 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왜 이 일을 허용하셨는지 제가 압니다’라고 쉽게 말하는 것은 오히려 섭리를 깊이 이해한 태도와 거리가 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스베덴보리적 구별이 하나 더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허용하신 것’과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악과 고통을 하나님께서 직접 보내신 것으로 생각하면 신적 사랑의 본질과 충돌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오직 선만을 의도하시며, 악을 일으키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가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악이 허용될 수밖에 없고, 주님의 섭리는 허용된 악에서 가능한 한 선을 끌어내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역사합니다.

 

이 점에서 영상의 ‘고양이 스케일링’ 비유처럼 ‘우리가 악이라고 보는 것이 사실은 더 큰 하나님의 선일 수도 있다’는 설명은 일정 부분 도움이 되지만, 모든 고통에 그대로 적용하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고양이의 스케일링은 보호자가 직접 의도한 고통이며 그 자체가 치료의 과정입니다. 그러나 살인, 학대, 전쟁, 배신 같은 악을 하나님께서 인간의 유익을 위해 직접 계획한 ‘영적 스케일링’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이 매우 섬세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은 악을 선을 위한 수단으로 창조하지 않으시지만, 인간이 자유 속에서 일으킨 악을 허용하시면서도 그 악이 영원한 파괴로 끝나지 않도록 끊임없이 선한 방향으로 굽히십니다.

 

영상에서 하나님의 전능을 ‘사랑의 전능성’이라고 표현하는 부분도 흥미롭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기계적으로 프로그램해 놓고 인간을 움직이는 분이 아니라 인간을 파트너로 불러 혼돈에 질서를, 어둠에 빛을, 눈물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시는 분이라는 설명입니다. 이 가운데 ‘사랑의 전능성’이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신관과 상당히 잘 어울립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적 사랑, 신적 지혜, 신적 능력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전능은 사랑과 반대되는 자의적인 힘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이 원하고 지혜가 아는 것을 능력으로 이루십니다.

 

다만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세계를 만들어 가는 파트너’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조금 조심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주님과 동등한 창조의 공동주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선을 행할 능력과 진리를 이해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야 자유로운 응답이 가능하지만, 실제 선과 진리의 생명은 모두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proprium을 매우 세밀하게 다루는 이유입니다. 인간은 ‘내가 선을 행한다’고 느끼면서 살아야 하지만 동시에 ‘선의 근원은 내가 아니라 주님’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을 때 자유와 겸손이 동시에 보존됩니다.

 

영상에서 부활을 ‘사후 정산’이라고 표현하는 부분에서는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큰 차이가 나타납니다. 김학철 교수는 역사적 배경을 따라 유대교의 부활 신앙이 불의하게 죽은 의인들에게 하나님께서 결국 정의를 회복해 주신다는 신정론적 희망과 연결되어 발전했다고 설명합니다. 역사학적 설명으로서는 의미가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사후생을 단순히 역사적 종교관념의 발전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인간은 육체가 죽은 직후에도 인간으로서 계속 살아 있으며, 의식과 사고와 기억과 애정을 가지고 영계에서 깨어납니다. 사후세계는 먼 미래에 이루어질 추상적인 ‘정산’이 아니라 죽음 직후부터 이어지는 실제적인 인간 생명의 연속입니다.

 

특히 지금 우리가 AC.320 이후에서 읽었던 내용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사람이 죽은 뒤에도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너무나 생생하게 느끼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며, 감각과 사고와 언어가 자연계에서보다 오히려 더 분명해진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에서 ‘성경의 사후세계 관심은 거의 없다’는 진술과 AC.320 이하에서 스베덴보리가 증언하는 영계의 모습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두 관점을 억지로 일치시키기보다 그 차이를 그대로 인정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러나 고통의 ‘원인을 설명하는 것보다 그 고통받는 사람을 돕는 것이 먼저’라는 김학철 교수의 강조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두고 ‘이 사람의 죄인가, 부모의 죄인가?’라는 인과관계의 질문에 매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일이 나타날 방향을 바라보셨다는 설명, 그리고 불교의 ‘독화살 비유’를 가져와 원인을 모두 알아낸 뒤에야 사람을 도우려 해서는 안 된다는 설명은 앞 영상에서 말한 ‘사랑의 급진성’과도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바꾸면 이것은 ‘쓰임’과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고통받고 있을 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신학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하는 것보다 지금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떤 선한 쓰임이 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로는 설명보다 함께 앉아 있는 것이 쓰임이고, 때로는 음식을 가져다주는 것이 쓰임이며, 때로는 그의 말을 판단하지 않고 듣는 것이 쓰임입니다. 진리는 쓰임을 위해 존재합니다. 진리를 가지고 고통받는 사람을 압도한다면 진리의 목적을 거꾸로 사용하는 셈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영상 후반의 아우슈비츠와 하나님의 고통에 관한 부분에서는 조금 더 신학적 주의가 필요합니다. 김학철 교수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을 소개하면서 ‘하나님이 전능한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와 같이 고통당하면서 죽는다’는 발상을 언급합니다. 이것은 현대 신학의 특정한 문제의식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전능을 포기해야 하나님의 사랑을 보존할 수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신적 사랑과 신적 전능은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우리가 ‘전능’을 무엇으로 이해하느냐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전능은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면서 악을 강제로 제거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려는 인간의 자유를 매 순간 물리적으로 차단하신다면 인간은 인간일 수 없으며, 사랑도 사랑일 수 없습니다. 사랑은 자유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전능은 자유를 보존하면서도 인간을 가능한 한 악에서 선으로 이끄시고, 지옥이 인간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질서를 유지하시는 전능입니다. 이것은 힘이 부족해서 악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목적 때문에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행복을 추구하지 말라’는 부분은 이번 영상 가운데 스베덴보리와 가장 아름답게 만나는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김학철 교수는 ‘인간은 행복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행복을 직접 추구하면 오히려 행복을 얻기 어렵고, 자신이 삶을 지속할 만한 가치를 실제로 행할 때 행복은 ‘선물처럼’ 따라온다고 말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을 돕고 돌보고 사랑하며 자신의 가치가 누군가에게 실제 기쁨이 될 때 삶의 의미가 발생하고, 그 의미가 고난을 견디게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쓰임’(use)이라는 개념과 매우 가까이 놓아볼 수 있습니다. 천국의 행복은 천사들이 ‘행복해지고 싶다’고 끊임없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천사들은 선한 쓰임을 사랑하고, 그 쓰임을 행하는 기쁨 가운데 삽니다. 그 결과로 천국의 기쁨이 흘러듭니다. 행복은 목적이라기보다 사랑이 올바른 방향으로 흐를 때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김학철 교수가 소개한 ‘너는 살면서 기쁨을 발견했느냐, 그리고 그 기쁨이 다른 사람에게도 기쁨이 되었느냐?’라는 이야기는 비록 성경의 직접적인 가르침은 아니지만, 스베덴보리의 천국관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천국의 기쁨은 고립된 개인의 쾌락이 아니라 서로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느끼는 사랑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자기 행복만을 추구할수록 천국의 질서에서 멀어지고, 다른 사람의 선과 행복을 기뻐할수록 천국적 사랑에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마지막 한 걸음을 더 들어가야 합니다. ‘타인에게 기여하면 삶의 의미가 생긴다’는 것만으로는 아직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에 완전히 이른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타인을 도우면서도 자기 공로를 사랑할 수 있고, 자신의 선함을 확인하기 위해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쓰임의 가장 깊은 질은 ‘무엇을 했느냐’뿐 아니라 ‘무엇을 사랑해서 그것을 했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결국 다시 지배적 사랑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영상에는 매우 흥미로운 흐름이 있습니다. 앞부분에서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익숙한 관념을 의심하라’고 말하고, 중간에서는 ‘예수를 명시적으로 알지 못한 사람도 양심과 사랑에 따라 살았다면 하나님의 구원에서 배제된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말하며, 후반에서는 ‘고통의 원인을 모두 설명하려 하기보다 함께 울고 사랑하라’고 하고, 마지막에는 ‘행복을 직접 추구하지 말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은 ‘종교적 관념보다 삶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이번 영상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이 옵니다. 스베덴보리도 끊임없이 삶을 봅니다. 무엇을 믿는다고 말했는가보다 무엇을 사랑했는가, 무엇을 알았는가보다 그것으로 어떻게 살았는가를 봅니다. 사후에 사람을 천국이나 지옥으로 이끄는 것도 외적인 종교 명칭이 아니라 그의 ‘지배적 사랑’입니다. 죽음은 그 사랑을 갑자기 다른 것으로 바꾸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연계의 외적 제약이 벗겨지면서 사람이 실제로 사랑했던 것이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이 대담과 스베덴보리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도 나타납니다. 김학철 교수는 사후세계에 대한 전통적 이미지를 해체하면서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로 관심을 돌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전자의 오류를 해체하면서도 사후세계 자체를 조금도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영원히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사후세계가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의 삶은 영계와 분리된 별개의 삶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첫 단계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번 영상의 천국과 지옥에 관한 핵심을 다시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착하면 천국 가고 나쁘면 지옥 간다’는 말은 너무 단순합니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사후세계 이미지일 뿐이다’라는 방향 역시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정확한 것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를 자유롭게 형성하고 있으며, 죽음 뒤에는 그 사랑에 상응하는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선행에 대한 외적 상금이 아니며 지옥은 잘못에 대한 외적 형벌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판결하여 강제로 지옥에 던지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평생 자유롭게 형성한 지배적 사랑이 사후에 그에게 맞는 공동체를 찾습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과 같은 생명을 가진 이들과 함께 있는 것을 기뻐하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와 같은 사랑을 가진 이들에게 끌립니다. 천국과 지옥은 그래서 ‘상벌’이기 전에 ‘사랑의 귀결’입니다.

 

이 점을 알면 영상의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에도 훨씬 깊은 답이 가능해집니다. 핵심은 그가 지상에서 ‘예수’라는 이름을 들었느냐 듣지 못했느냐만이 아닙니다.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빛 안에서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양심으로 받아들였으며, 그것을 따라 어떻게 살았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내면을 완전히 아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정인의 사후 운명을 함부로 판정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이것은 ‘무엇을 믿어도 상관없다’는 상대주의도 아닙니다.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이며, 사후에 선한 사람은 그 근원을 더 분명하게 배우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번 영상에서 가장 오래 남겨 둘 만한 질문은 ‘천국과 지옥이 정말 있습니까?’보다 마지막에 나온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라면 두 질문이 사실 하나라고 할 것입니다. 천국은 죽은 뒤 갑자기 시작되는 낯선 삶이 아니라 지금 내가 사랑하고 선택하고 행하는 것 속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오늘 진실보다 체면을 사랑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의 행복보다 내 우월함을 사랑하고 있는지, 용서보다 복수를 사랑하고 있는지, 아니면 조금씩이라도 진실과 선과 쓰임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해 가고 있는지, 그것이 천국과 지옥의 질문입니다. 사후세계에 대한 지식이 중요한 이유도 죽은 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다면 나는 오늘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를 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담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한 가지 중요한 보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김학철 교수가 말하듯 천국을 단순한 사후의 보상 장소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도 시작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끝나지도 않습니다. 자연계에서 시작된 인간의 내적 생명은 죽음을 넘어 계속되며, 여기에서 형성된 사랑은 영계에서 더욱 분명한 자신의 형체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있습니다’라고만 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묻도록 우리를 이끌 것 같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천국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그리고 ‘지금 당신이 사랑하는 그것과 영원히 함께 살아도 좋습니까?’ 천국과 지옥을 가장 진지하게 생각하는 방법은 사후세계의 지도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 안에서 어떤 사랑이 나의 주인이 되어 가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서 천국과 지옥은 이미 시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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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5 심화

1. ‘가인’도 신앙이고, ‘셋’도 신앙이라면, 무엇이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가?

 

AC.335는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가인도 ‘신앙’을 의미하고 셋도 ‘신앙’을 의미한다면, 무엇이 한 신앙을 가인으로 만들고 다른 신앙을 셋으로 만드는 것일까요? ‘신앙’이라는 이름 자체만으로는 그 신앙의 질을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가인에게도 신앙에 속한 것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그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체어리티와 구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체어리티보다 높여 주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체어리티가 소멸되었고, 그 분리된 상태는 점차 왜곡되어 마지막에는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반면 셋은 ‘주님께서 주신 새로운 신앙’이며,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집니다. 따라서 셋으로 의미되는 신앙의 특징은 신앙 자체를 최종 목적으로 삼지 않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신앙을 사용하여 사람 안에 체어리티를 형성하실 수 있는 신앙입니다.

 

이것은 AC.328에서 제시된 원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 교리를 알고 있는지, 얼마나 정확한 신조를 고백하는지, 얼마나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지만으로는 그 신앙의 내적 질을 충분히 알 수 없습니다. 그 신앙이 실제로 어떤 사랑과 삶을 낳는지가 중요합니다.

 

다만 이 원리를 다른 사람의 내면을 판정하는 잣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외적 행동 몇 가지를 보고 그의 신앙 전체가 참인지 거짓인지 최종적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AC.328의 원리는 무엇보다 자신의 신앙을 살피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믿는 진리가 실제로 나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사람으로 하여금 악을 죄로 알고 피하게 하며, 주님의 뜻을 자기 뜻보다 앞세우게 하고,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게 합니다. 그렇다고 체어리티를 단순히 외적인 선행의 양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의도하고 행하는 내적 사랑이며, 외적인 행위는 그 사랑이 삶 속에서 나타나는 형식입니다.

 

따라서 가인과 셋의 차이는 ‘교리를 가진 신앙’과 ‘교리가 없는 사랑’의 차이가 아닙니다. 셋 역시 신앙입니다. 신앙과 진리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진리가 어떤 질서 안에 놓여 있는가입니다. 진리가 선을 향하고 신앙이 체어리티의 형성을 향할 때 신앙은 자신의 참된 기능을 수행합니다.

 

이 점에서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긴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더 정확하게는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신다고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체어리티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신앙을 이용하여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선과 체어리티의 근원은 주님이며, 신앙의 진리는 주님께서 그 선을 인간 안에 형성하시는 수단이 됩니다.

 

그러므로 셋의 신앙도 인간의 공로가 아닙니다. AC.335는 ‘새로운 신앙이 주님에 의해 주어졌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가인의 실패 이후 인간이 스스로 더 나은 종교 체계를 만들어 셋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셨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목적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말씀을 배우는 목적은 단지 더 많은 정보를 아는 데 있지 않습니다. 교리를 정확히 이해하는 목적도 논쟁에서 이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의 생각을 바로잡고, 악을 보게 하며, 선을 의도하고 행하는 삶으로 이끄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신앙이 사람을 더 교만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을 낮추어 보게 하며, 자기 옳음을 지키는 도구가 된다면 그 방향을 경계해야 합니다. 반대로 진리를 더 알수록 자신 안의 악을 더 분명히 보고, 주님의 자비를 더 의지하며, 이웃의 유익을 더 지혜롭게 구하게 된다면 그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AC와 말씀의 속뜻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이 질문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속뜻과 상응을 많이 안다는 사실 자체가 셋의 신앙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그 지식이 자신의 영적 우월감을 키우면 가인의 방향으로 기능할 수 있고, 반대로 그 진리가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더 의지하며 실제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셋의 방향으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내 안의 가인, 내 안의 셋’이라는 표현을 너무 문자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가인과 셋은 본래 태고교회 안의 서로 다른 교리적, 교회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우리는 그 속뜻에서 드러나는 영적 원리를 자신의 신앙생활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역사적 표상과 개인적 적용을 구별하면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셋의 새로운 신앙을 곧바로 홍수 이후 영적 인간의 신앙 질서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셋과 에노스는 여전히 태고교회 문맥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우선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셨다’는 AC.335의 직접 진술을 중심에 두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AC.336에서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가 ‘에노스’라고 불립니다. 이것은 셋의 신앙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셋에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셋의 목적은 에노스, 곧 체어리티가 심어진 새로운 교회적 상태로 이어지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가?’라는 질문에 AC.335는 매우 분명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 것은 신앙이 자기 자신을 얼마나 크게 주장하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얼마나 살아 있게 하실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가인의 신앙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고, 셋의 신앙은 체어리티가 심어질 수 있는 길이 되었습니다. 둘 다 ‘신앙’이지만 그 생명과 방향은 전혀 다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의 표지는 신앙 자체를 높이는 데 있지 않고,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인간 안에 선과 체어리티를 이루실 수 있도록 올바른 질서 안에 놓이는 데 있습니다.

 

 

 

AC.335, 창4:25, ‘셋’(Seth)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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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0 심화

1. 주님께서는 왜 ‘가인’을 보호하셨는가?

 

AC.330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부분은 역시 ‘가인의 표’입니다. 지금까지의 흐름만 보면 가인은 부정적인 것의 연속입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했고, 그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였으며, 마침내 아벨을 죽여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 결과 교리는 왜곡되고 거짓과 악이 생겨났으며, 사람들은 주님에게서 자신을 돌이켜 영원한 죽음의 위험에 놓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그런 가인을 없애지 않으시고 오히려 보호하셨을까요?

 

AC.330은 그 이유를 한 문장으로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인이 보호받은 것은 그가 잘했기 때문도 아니고,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주님께 인정받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에 속한 것이 장차 인간의 거듭남에 다시 사용되어야 했기 때문에 보존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가인의 표’를 단순히 ‘살인자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라는 도덕적 교훈으로만 읽으면 AC.330이 말하는 더 깊은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물론 문자적 이야기에서는 보호라는 모습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러나 속뜻에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신앙의 보존’입니다.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이라 하더라도 신앙에 속한 것 자체가 완전히 사라져서는 안 되었습니다. 훗날 체어리티가 다시 인간에게 심어질 때 바로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져야 했을까요? 여기에는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와 이후 인간의 상태 사이의 변화가 배경에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퍼셉션이 있었습니다. 사랑이 먼저였고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참된지를 지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천적 상태가 상실되어 가면서 인간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받아들여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선으로 인도되는 길이 필요하게 됩니다.

 

다만 AC.330 한 번호만으로 이 이후의 거듭남 질서 전체가 완성되어 설명되었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서 직접 말하는 핵심은 ‘체어리티가 이후 신앙을 통하여 심어질 것이므로 신앙이 보존되었다’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과 이후 영적 인간의 차이는 뒤의 AC에서 더욱 상세하게 전개됩니다. AC.330은 그 큰 전환을 미리 보여 주는 중요한 단서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렇게 보면 ‘신앙은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되었다’는 말의 의미도 분명해집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보호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은 장차 체어리티로 이끄는 기능 때문에 보호받았습니다. 신앙의 목적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해야 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그 진리가 삶 안에서 선이 되고 체어리티로 살아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328과 AC.330은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AC.328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신앙이 자신을 주된 것으로 세우고 체어리티보다 높이려 한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결국 아벨을 죽여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에도 주님께서는 가인마저 소멸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신앙을 보존하여 장차 다시 체어리티와 결합될 길을 남겨 두십니다.

 

여기서 창3 마지막 장면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잘못된 상태에서 취하여 거룩한 것을 모독하지 않도록 생명나무의 길이 보호되었습니다. AC.330의 가인의 표와 동일한 상응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두 장면 모두 인간의 타락 가운데서도 주님의 섭리가 구원의 길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질서를 무너뜨려도 주님께서는 그 상태에 맞추어 다시 생명으로 이어질 길을 마련하십니다.

 

특히 ‘아벨은 죽었지만 가인은 보존된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체어리티가 없어도 신앙만 남으면 된다’는 뜻으로 읽으면 AC.330의 의미가 완전히 뒤집힙니다. 가인이 보존된 이유는 아벨이 필요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다시 아벨에 해당하는 체어리티가 인간에게 심어질 길을 남겨 두기 위해서입니다. 신앙의 보존은 체어리티의 포기가 아니라 체어리티의 미래를 위한 보존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원리를 줍니다. 우리가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연구하며 진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려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신앙과 지식의 목적은 결국 삶입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하여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는다면 신앙이 보존된 본래의 목적을 잃게 됩니다.

 

특히 아르카나를 공부하는 우리에게 ‘가인의 표’는 의미심장한 경고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을 알고 상응을 이해하며 교리를 정확하게 배우는 일은 귀하지만, 그 지식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보존하시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까닭은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의 의지와 삶이 변화되고 체어리티가 우리 안에 심어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AC.325부터 AC.330까지를 하나로 읽으면 창4의 흐름이 매우 선명해집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며,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지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높아지며, 마침내 체어리티가 소멸됩니다. 이어 교리가 왜곡되고 거짓과 악이 생겨나며 영원한 죽음의 위험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가장 어두운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가인의 표’를 두십니다.

 

인간은 하나였던 것을 갈라놓았지만 주님께서는 그 갈라진 것 가운데서도 다시 생명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을 보존하십니다. 이것이 가인의 표에 담긴 섭리입니다. 신앙은 신앙 자체를 위해 보존된 것이 아니라, 언젠가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인간 안에 심어지도록 하기 위해 보존되었습니다. 그러므로 AC.330의 가장 깊은 중심에는 인간의 타락보다 한 걸음 앞서 구원의 길을 남겨 두시는 주님의 섭리가 놓여 있습니다.

 

 

 

AC.330, 창4:10-16, 창4:10-16 전체의 속뜻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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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8 심화

1.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다

 

이 한 문장은 오늘날 신앙을 돌아보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의 신앙을 그의 신앙 고백이나 성경 지식, 교리적 입장, 기도와 예배의 열심으로 판단합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AC.328은 그보다 더 깊은 곳을 보라고 합니다. 그 신앙이 그 사람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신앙이 실제로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악을 멀리하게 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기게 한다면 그 신앙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반대로 신앙을 강하게 주장할수록 더 교만해지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며, 자기의 옳음을 세우고,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바로 그 열매가 그 신앙의 질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행위를 보고 구원 여부를 판단하자’는 단순한 도덕주의와도 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는 겉으로 착한 일을 많이 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사랑하고, 그 선에 따라 이웃에게 유익을 행하려는 내적 애정입니다. 따라서 겉으로 많은 선행을 하면서도 속으로 자기 명예와 공로를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참된 체어리티가 아닐 수 있습니다. 반대로 눈에 띄는 큰일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자리에서 정직하게 의무를 행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이웃의 유익을 진실하게 바란다면 그 안에 체어리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체어리티가 신앙의 내적 질을 보여 줍니다.

 

특히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말은 기억해 둘 만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처음 접하면 자칫 ‘신앙보다 체어리티가 중요하니 결국 신앙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아닌가?’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28은 정반대를 말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오직 신앙이 ‘주된 것’이 되어 자신을 체어리티 위에 세우는 데 있습니다. 참된 질서는 신앙 없는 체어리티도, 체어리티 없는 신앙도 아니라 둘의 결합입니다. 다만 그 결합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선이 주된 것이고, 진리는 그 선을 섬기며, 사랑이 생명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 형체와 방향을 줍니다.

 

따라서 AC.325에서 시작된 흐름을 여기까지 이어 보면 매우 선명합니다. 처음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고, 그 사랑과 신앙은 하나였습니다. 그 후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가인’이 되었고, 체어리티는 ‘아벨’이라 불렸습니다. 분리는 예배에까지 이어졌고, 가인의 상태는 점차 악해졌습니다. 그러나 AC.328에 이르러 주님께서는 아직 한 번 더 길을 열어 놓으십니다. ‘아벨’은 아직 ‘가인’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신앙이 자기 자리를 낮추고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한다면 아직 회복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끝내 자신을 주된 것으로 높이고 체어리티 위에 서려 한다면, 다음에 일어날 일은 이미 예고되어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4의 비극은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해서 일어난 비극이 아니라, 본래 하나여야 할 둘 사이의 질서가 뒤집힘으로써 일어난 비극입니다.

 

 

 

AC.328,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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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7강 1부

씨 뿌리는 비유와 네 가지 마음밭

이번 강의에서 김경동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의 일곱 비유 전체를 지금까지 공부한 ‘기본진리’를 종합하는 하나의 체계로 봅니다. 그 가운데 ‘씨 뿌리는 비유’를 서론으로, 겨자씨·누룩·진주와 보화·가라지 비유를 본론으로, 그물 비유를 결론으로 배치합니다. 무엇보다 강사가 이 강의를 시작하면서 강조하는 것은 ‘신앙의 목표와 방향’이며, 그 중심에는 ‘영적 가치관’이 있습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고, 영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영적인 것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단순히 예수를 믿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겸손하고 충성하며 인내하고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영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출발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매우 귀중합니다. 다만 강사는 곧 이 구조를 ‘14만 4천’과 ‘666’, 그리고 장차 있을 종말의 사건들과 연결하는데, 이 부분은 뒤에서 본격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선 씨 뿌리는 비유 자체에 집중하면,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의 질서와 상당히 깊게 만나는 부분이 드러납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13장 3절 이하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씨앗’을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진리, ‘씨 뿌리는 사람’을 복음 전도자, ‘밭’을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이라는 네 가지 밭을 사람들의 서로 다른 마음 상태로 설명합니다. 주목할 것은 강사가 이 비유의 초점을 ‘좋은 땅’과 ‘열매’에 둔다는 점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는 목적은 씨 자체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얻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는 목적 역시 사람이 말씀을 알고 기억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으로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의 신학과 매우 가까이 만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말씀의 ‘씨’는 단순한 종교적 정보가 아닙니다. 말씀에서 씨는 무엇보다 진리, 특히 사람의 마음속에 심겨 장차 선이 될 수 있는 진리를 표상합니다. 씨에는 이미 식물 전체가 될 가능성이 들어 있지만, 씨가 실제로 땅에 들어가 싹트고 자라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그 가능성은 실현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거듭남이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이해 안으로 들어오고, 거기서 의지와 결합하며, 마침내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말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이 바로 이 과정입니다. ‘씨’인 진리가 ‘열매’인 선한 삶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누가 구원받고 누가 구원받지 못하는가’를 가르는 네 부류의 사람에 관한 이야기로만 읽으면 그 의미가 다소 좁아질 수 있습니다. 강사는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은 넷 중 하나에 해당한다’고 설명하고, 영적 성장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각 사람이 어느 밭인지를 시험하여 드러내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목회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설명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의 관점에서 보면 네 밭은 서로 다른 네 종류의 사람을 나타내는 동시에, 한 사람 안에서 말씀이 받아들여지는 서로 다른 상태들을 보여 주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완성된 ‘좋은 땅’으로 시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를 드러내시고 제거하시면서 우리 안에 좋은 땅을 이루어 가십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타인을 분류하기 위한 말씀이기 전에 ‘지금 내 안에서 주님의 말씀은 어디에 떨어지고 있는가’를 묻게 하는 말씀입니다.

 

첫 번째 ‘길가’는 강사의 설명대로 매우 단단한 상태입니다. 길은 사람들이 계속 밟고 다니므로 씨가 땅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강사는 이것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강퍅한 마음, 세상일과 돈에 몰두하여 복음에 관심조차 없는 마음으로 설명합니다. 씨가 떨어져도 마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결국 ‘새’ 곧 악한 자가 와서 빼앗아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에는 충분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길가’를 단순히 교회 밖의 불신자에게만 대응시키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에게도 얼마든지 ‘길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수십 년 들어도 그 말씀이 내면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으며 교리를 알고 있어도, 그것을 자기 삶과 연결하지 않는다면 말씀은 여전히 마음의 표면에 머물러 있습니다. 특히 자기 확신과 proprium이 단단해져 있을수록 말씀은 깊이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이미 ‘나는 안다’, ‘나는 옳다’, ‘내 판단이 맞다’는 것이 굳어져 있으면, 말씀은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주님의 음성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확인하는 자료가 되기 쉽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길가’는 반드시 무신론자나 불신자만의 상태가 아닙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있는 신앙인에게도 생길 수 있는 영적 상태입니다.

 

여기서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는 표현도 흥미롭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새는 일반적으로 사고와 지적인 것들을 표상하며, 문맥에 따라 참된 사고를 나타내기도 하고 거짓된 사고와 추론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씨를 먹어 버리는 새는 사람에게 들어온 말씀의 진리를 거짓된 사고와 추론이 빼앗아 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말씀을 들었지만 곧 자기 욕망에 맞는 논리를 만들어 그것을 무효화하고, 불편한 진리를 합리화하여 밀어내며, 결국 말씀을 듣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는다’는 것은 단순히 외부에서 마귀가 달려와 무엇인가를 훔쳐 간다는 그림보다 훨씬 내적인 사건이 됩니다. 지옥으로부터 유입되는 거짓과 악이 사람 자신의 proprium과 호응하면서 진리가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돌밭’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여기서는 씨가 아예 거절되지는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뿌리가 없습니다. 강사는 이것을 신앙생활을 시작한 뒤 연단과 시험이 찾아왔을 때 드러나는 상태로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은혜를 받고 기뻐하며 교회도 열심히 다니지만,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면 그 사람이 실제로 얼마나 깊이 뿌리내렸는지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거듭남의 관점에서 중요한 통찰입니다. 처음 진리를 접할 때 느끼는 기쁨과 감동 자체가 곧 그 진리가 자기 생명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리가 사람의 것이 되려면 단순히 이해되고 좋아지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영적 시험은 사람이 이미 배운 진리가 실제 삶의 선택과 충돌할 때 일어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들으며 감동하는 것과 실제로 나를 모욕한 사람 앞에서 자기애를 내려놓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용서하라’는 말씀에 아멘 하는 것과 정말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용서하는 것 사이에도 깊은 골짜기가 있습니다. 바로 그 골짜기에서 진리는 뿌리를 내립니다. 따라서 강사가 연단을 영적 성장의 중요한 과정으로 강조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시험’에 관한 가르침과 상당한 접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시험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밭이 어떤지를 ‘알아보기 위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사람의 모든 상태를 아십니다. 시험은 오히려 사람 자신에게 자기 상태를 드러내며, 동시에 악과 거짓을 분리하고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평상시에는 자신이 얼마나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 붙들려 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위협받는 순간 안에 숨어 있던 것이 올라옵니다. 그러므로 시험은 일종의 영적 진단인 동시에 수술입니다. 단순히 ‘당신은 돌밭입니다’라고 판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돌을 걷어 내어 좋은 땅으로 만들기 위한 주님의 섭리 안의 과정입니다.

 

세 번째 ‘가시떨기’는 더욱 미묘합니다. 길가에서는 씨가 들어가지 못했고, 돌밭에서는 들어갔지만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가시떨기에서는 씨가 자랍니다. 문제는 다른 것도 함께 자란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하는 상태라고 직접 설명하셨습니다. 따라서 가시떨기의 가장 큰 위험은 신앙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랑이 함께 자라는 것’입니다. 주님도 사랑하지만 세상도 사랑하고, 천국도 원하지만 자기 성공도 포기하지 않으며, 말씀을 따르고 싶지만 자기 뜻 역시 놓고 싶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세상 사랑’ 자체를 무조건 악으로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직업을 갖고 돈을 벌고 가족을 돌보고 사회에서 책임을 다하는 것은 그 자체로 악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질서입니다. 세상의 것들이 목적이 되고 주님과 이웃 사랑이 수단이 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반대로 재물과 지위와 능력이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수단이 되면 그것들은 선한 용도(use)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시’의 본질은 돈 자체가 아니라 마음을 점령한 사랑의 우선순위입니다. 겉으로 같은 재산을 가지고 있어도 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이웃을 섬기는 수단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자기 존재의 목적일 수 있습니다. 천국은 외적 소유의 양보다 그 소유를 움직이는 사랑의 질서를 봅니다.

 

마지막 ‘좋은 땅’에 이르면 이 강의의 핵심이 선명해집니다. 좋은 땅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이며, 그 결과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합니다. 강사는 좋은 밭을 가진 성도들이 잘 성장하여 좋은 열매를 맺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시며, 세상에서 빛과 향기가 되게 하신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이들을 더욱 밝은 빛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과 연결하면서, 성도들에게 ‘적당히 천국만 가면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더욱 높은 영적 성장을 추구하라고 권면합니다. 더 겸손하고, 더 충성하고, 더 인내하며, 더 온전한 사랑을 실천하고, 편안하고 자기 입맛에 맞는 길보다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는 좁은 길을 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이번 강의에서 특별히 귀하게 받아들일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천국은 단순히 어떤 교리를 믿고 죽은 뒤 들어가는 장소가 아닙니다. 천국은 사람 안에 형성된 사랑과 생명의 상태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자신이 사랑하고 선택하고 행한 것들을 통해 자기 생명의 형상을 만들어 갑니다. 그러므로 ‘열매’가 중요합니다. 씨가 진리라면 열매는 그 진리가 삶 안에서 선으로 실현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행위구원’과도 다릅니다. 열매는 사람이 자기 힘으로 공로를 쌓아 천국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그것에 협력하여 살아감으로써 맺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강사가 ‘생명책’을 일종의 ‘저금통장’에 비유하면서 선행을 하면 상급이 쌓이고 더 큰 인내와 희생을 하면 더 많이 저축된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부분은 교육적으로는 이해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조금 다듬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의 상급은 외적으로 선행의 개수를 계산하여 쌓아 두었다가 사후에 지급하는 보상이라기보다, 선을 사랑하여 행하는 과정에서 그 사람 안에 형성된 천국적 생명 자체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더 겸손해진 사람은 ‘겸손의 점수’를 적립한 것이 아니라 겸손한 천국적 성품이 그의 생명이 된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여 자신을 희생한 사람은 희생의 공로를 저축한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내적 그릇이 넓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말씀은 단순한 외적 보상체계보다 훨씬 깊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고 행한 바로 그것의 사람이 되어 영계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또한 좋은 땅을 특별한 목회자나 선교사, 순교자 같은 사람들에게만 연결할 필요도 없습니다. 강사는 좋은 밭을 가진 성도에게 하나님께서 목회와 선교 같은 ‘하나님의 사업’을 맡기신다고 설명하지만, 스베덴보리의 용도(use)의 관점에서는 평범한 일상생활 역시 얼마든지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나는 자리가 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으로 돌보고, 직장인이 정직하게 자기 일을 하고, 상인이 이웃에게 정당한 거래를 하며, 어려운 사람을 돕고, 맡겨진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도 모두 체어리티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직분의 크기보다 그 일을 움직였던 사랑의 질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씨 뿌리는 비유 전체를 하나로 묶어 보면 매우 아름다운 거듭남의 그림이 나타납니다. ‘길가 → 돌밭 → 가시떨기 → 좋은 땅’을 단순히 네 종류의 인간 명단으로만 읽지 않고, 주님께서 한 사람의 마음을 경작하시는 과정으로도 읽어 보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말씀이 내 삶 깊숙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이것이 길가입니다. 다음에는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아직 자기 생명이 되지 못합니다. 이것이 돌밭입니다. 그다음에는 말씀도 자라고 있지만 자기애와 세상 사랑도 함께 자라 서로 경쟁합니다. 이것이 가시떨기입니다. 마침내 주님께서 시험과 회개와 순종을 통해 돌을 걷어 내시고 가시를 제거하시면서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선과 결합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비로소 ‘좋은 땅’이 되어 열매가 맺힙니다.

 

그러므로 좋은 땅은 타고나는 마음이 아니라 ‘경작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농부가 밭을 갈고 돌을 걷어 내고 가시를 뽑고 거름을 주듯, 주님께서는 사람의 평생에 걸쳐 그 내면을 경작하십니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그 경작에 자유롭게 협력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악을 죄로 알고 피하고, 진리를 배우며, 배운 진리를 실제 삶에서 행하고, 넘어지면 회개하여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이 과정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씨 뿌리는 비유에서 정말 중요한 질문은 ‘나는 네 밭 가운데 어느 밭인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깊은 질문은 ‘오늘 주님께서 내 마음의 어느 돌을 걷어 내고 계시며, 어느 가시를 뽑고 계시는가?’입니다.

 

이렇게 보면 김경동 강사가 강조하는 ‘영적 성장’, ‘좁은 길’, ‘자기희생’, ‘인내’, ‘온전한 사랑’, ‘육에 속한 삶을 벗고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상당 부분 소중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더 높은 상급을 얻기 위한 영적 실적 쌓기’로 이해하기보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진리를 선으로, 신앙을 체어리티로, 앎을 삶으로 바꾸어 가시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이해하면 훨씬 깊어집니다. 좋은 땅의 최종 표지는 많은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결국 씨 뿌리는 비유의 중심에는 ‘말씀이 사람 안에서 어떻게 생명이 되는가’라는 거대한 주제가 놓여 있습니다. 씨는 주님에게서 옵니다. 생명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햇빛과 비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밭을 주님께 내어 드리고, 돌과 가시가 드러날 때 그것을 붙들고 있지 않아야 합니다. 그때 말씀은 단순히 머릿속의 진리로 머무르지 않고 사랑과 행위 속으로 내려와 열매가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열매가 그 사람 안에 형성된 천국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강의가 ‘씨 뿌리는 비유’를 전체 기본진리의 서론으로 놓은 것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이후에 나올 겨자씨의 ‘성장’, 누룩의 변화, 진주와 보화의 가치, 가라지와 그물의 분별도 결국 이 첫 질문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뿌리시는 말씀의 씨가 내 안에서 과연 무엇이 되고 있는가?’ 씨 뿌리는 비유는 바로 이 질문을 우리 각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던지고 있습니다.

 

 

7강 2부

겨자씨와 ‘장성한 나무’ : 영적 성장의 단계와 다른 생명을 품는 쓰임

씨 뿌리는 비유에서 네 가지 마음밭과 좋은 땅의 결실을 살펴본 강사는 이제 마태복음 13장의 두 번째 비유인 겨자씨 비유로 넘어갑니다. 강의 전체의 체계에서 씨 뿌리는 비유가 ‘서론’이라면 겨자씨·누룩·진주와 보화·가라지 비유는 ‘본론’이고, 마지막 그물 비유가 ‘결론’입니다. 또한 강사는 이 가운데 겨자씨·누룩·진주와 보화 비유를 ‘교회 시대 이긴 자들’, 곧 계시록의 ‘14만 4천’과 연결하면서, 겨자씨는 그들의 ‘성장적인 측면’, 누룩은 ‘행실적인 측면’, 진주와 보화는 ‘생명적인 측면’을 각각 보여 준다고 설명합니다. 이 해석 체계는 앞으로 요한계시록 강의로 넘어가기 위한 매우 중요한 다리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부터는 강사의 영적 성장론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이 어디에서 만나는지를 살피는 동시에, 마태복음의 비유를 계시록의 특정 숫자와 직접 연결하는 방식은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의 겨자씨 비유는 매우 짧습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강사가 특별히 붙드는 것은 겨자씨가 처음에는 매우 작지만 마침내 ‘나무’가 된다는 사실과, 그 나무의 가지에 ‘공중의 새들이 와서 깃든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를 영적으로 성장한 성도가 마침내 다른 성도들을 양육하고 천국 건설을 위해 쓰임 받는 모습으로 풀이합니다. 뒤이어 누룩 비유로 넘어가면서도 겨자씨 비유를 ‘교회 시대 이긴 자들은 장성한 겨자나무로 만들어져 천국 건설 사업에서 성도들을 양육하는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쓰인다’는 내용으로 다시 요약합니다.

 

이 대목에서 먼저 귀하게 보아야 할 것은 강사가 ‘영적 성장’을 자기완성으로 끝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씨가 자라 나무가 되는 목적은 단순히 ‘나는 이렇게 큰 나무가 되었다’고 자기 성장을 과시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 수 있어야 합니다. 곧 다른 생명을 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매우 중요한 ‘쓰임’의 개념과 만납니다. 천국의 모든 것은 쓰임을 향하며,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 들어오는 궁극적인 목적도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의 선을 위해 살아가는 천국적 존재가 되게 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생명은 본질적으로 사랑이며, 사랑은 반드시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사랑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랑은 완성된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뜻을 행하려 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그의 참된 선을 원하며, 그 선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천국의 천사들은 끝없는 관조 속에서 자기 행복만 누리는 존재들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위해 쓰임을 행하는 존재들입니다. 천국 전체가 하나의 ‘가장 큰 사람’(Grand Man, Maximus Homo)을 이루며, 각 공동체와 천사가 그 안에서 서로 다른 쓰임을 담당합니다. 겨자씨가 자라 가지를 내고 그 가지에 다른 생명들이 깃드는 그림은 이런 의미에서 매우 아름다운 적용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른 성도들을 양육한다’는 말을 곧바로 목회자나 지도자가 되는 것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강의에서는 목양적 쓰임이 상당히 강조되지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쓰임은 훨씬 넓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바르게 사랑하는 것도 쓰임이고, 교사가 학생에게 진실한 지식을 전하는 것도 쓰임이며, 직장에서 자기 일을 정직하게 수행하는 것도 쓰임이고, 아픈 사람을 돌보고 외로운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도 쓰임입니다. 주님께서 한 사람을 ‘나무’로 성장시키셨다고 해서 반드시 그에게 많은 제자를 붙이시거나 종교적 지도자의 자리를 맡기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주 평범한 일상에서도 한 사람의 생명이 다른 사람에게 쉴 곳이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겨자씨의 모습과 더 잘 어울립니다. 겨자씨는 처음부터 거대한 것이 아닙니다. 아주 작습니다. 천국의 시작도 대개 그렇습니다. 사람이 처음으로 악한 일을 ‘주님께 죄가 되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작은 결심, 손해를 보면서도 한 번 정직을 선택하는 것, 미워하던 사람에게 한 번 친절하게 대하는 것, 자기 공로를 드러내고 싶지만 조용히 물러서는 것, 이런 작은 선택들 속에 천국의 씨가 들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그 씨 안에는 장차 큰 나무가 될 생명의 질서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리메인스와도 생각해 볼 만한 접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어릴 때부터 경험한 사랑과 순진함, 선과 진리의 상태들을 그의 내면 깊은 곳에 보존하십니다. 사람은 그것들을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것도 아니고 평소에는 그 존재조차 알지 못하지만, 주님께서는 훗날 거듭남 가운데 그것들을 사용하십니다. 겨자씨처럼 작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존되었던 주님의 선물이 때가 되면 새로운 영적 생명의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겨자씨 비유의 ‘씨’를 곧바로 리메인스와 동일시해서는 안 되지만, ‘작게 시작된 주님의 것이 훗날 큰 영적 생명으로 자란다’는 질서에서는 아름다운 접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강사는 이러한 성장을 설명하면서 지금까지 배운 ‘영적 성장론’을 다시 불러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과 광야 여정을 한 사람의 신앙 성장 과정에 대한 ‘모형’으로 읽습니다. 애굽에서 나오는 것은 세상적·육적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시작이고, 광야는 여러 시험과 연단을 통과하는 과정이며, 마침내 익은 열매가 되어 하나님의 곡간에 들어갈 준비를 갖추게 된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이 과정에서 ‘광야에서 세 차례 연단의 과정을 반드시 받아야 익은 열매가 되어 천국 곡간에 추수될 수 있다’고 말하고, 이스라엘의 역사와 더불어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을 영적 성장의 단계를 보완해서 보여 주는 자료로 사용합니다.

 

바로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출애굽과 광야 여정을 인간의 거듭남으로 읽는 기본 방향 자체는 스베덴보리에게 매우 익숙한 것입니다. 오히려 ‘천국의 비밀’에서 출애굽기의 속뜻을 따라가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향하는 모든 과정은 인간의 구원과 거듭남에 관한 내적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애굽, 바로, 홍해, 만나, 반석의 물, 시내산, 성막, 광야의 여러 사건은 단순히 옛 이스라엘의 민족사가 아니라 말씀의 속뜻에서는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과정의 여러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광야-가나안’을 신앙생활의 영적 여정으로 읽는 강사의 기본 직관에는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운 것이 있습니다. 다만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 과정은 인간이 미리 정해진 몇 개의 단계표를 차례로 통과하는 방식으로 단순화할 수 없습니다. 특히 ‘세 차례 연단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는 식으로 고정된 공식을 만드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말씀 안에는 분명 질서가 있지만, 그 질서가 모든 사람에게 외적으로 똑같은 사건과 횟수로 반복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시험은 훨씬 유기적입니다. 사람마다 지배적 사랑과 타고난 성향, 교육, 환경, 받아들인 진리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주님께서 허용하시는 시험의 형태와 깊이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매우 격렬한 내적 시험을 통과하고, 어떤 사람은 일상의 작은 선택들을 통해 오랫동안 변화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몇 번째 연단인가?’가 아니라 그 시험 가운데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악과 거짓이 드러나고, 사람이 주님의 도움으로 그것에 저항하여 선과 진리가 더욱 깊이 결합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아주 중요합니다. 영적 성장의 단계를 지나치게 외적으로 체계화하면 사람은 자기 상태를 끊임없이 측정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첫 번째 연단인가, 두 번째 연단인가?’, ‘나는 가나안에 들어갔는가?’, ‘나는 익은 열매인가?’, ‘나는 겨자나무가 되었는가?’ 하는 식입니다. 그러다 보면 원래 자기부인을 위해 주어진 영적 성장론이 역설적으로 proprium의 새로운 재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더 높은 단계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오는 순간 영적 성장을 추구하는 바로 그 열심 속에 자기애가 숨어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영적 성장은 오히려 자기 높이를 잊어 가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사람이 주님께 가까워질수록 자기가 선의 근원이 아님을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천사들이 인간보다 훨씬 지혜롭고 선하면서도 모든 선과 진리를 주님께 돌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장 높은 천사일수록 ‘내가 얼마나 높은 단계에 있는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기에게 주시는 선을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해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표지는 ‘자기가 큰 나무임을 아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명들이 그 가지에서 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강의가 ‘천로역정’을 끌어오는 것도 이해할 만합니다. 강사는 장망성을 떠난 기독도가 천성을 향해 가는 여정을 신앙의 단계들을 잘 보여 주는 이야기로 보고,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여정과 서로 보완해서 보면 신앙의 각 단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천로역정’이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 말씀은 아니지만, 한 사람이 죄와 세상의 도시를 떠나 시험과 유혹을 지나 천성을 향해 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신앙 여정에 대한 매우 강력한 비유적 그림을 제공합니다.

 

다만 여기서도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한 가지 구별을 유지합니다. ‘천로역정’은 영적 교훈을 주는 훌륭한 기독교 문학이지만, 창세기와 출애굽기처럼 모든 세부가 신적 질서에 따라 속뜻을 담고 있는 ‘말씀’은 아닙니다. 따라서 ‘천로역정’의 어떤 장면과 출애굽기의 어떤 사건이 비슷하다고 해서 두 텍스트가 같은 상응적 권위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는 인간이 영적 진리를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자 안에 연속적인 내적 의미가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이 구별을 지키면서 읽으면 ‘천로역정’은 오히려 훌륭한 보조 그림이 될 수 있습니다.

 

강사는 이어 팔복도 영적 성장의 단계와 연결합니다. 원고에서는 이를 ‘8단 진복’으로 부르면서 여덟 복을 여덟 단계의 성장 과정처럼 바라보려는 시도를 합니다. 여기에도 흥미로운 통찰과 함께 주의점이 있습니다. 팔복의 순서가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말씀에서 순서는 우연하지 않으며, ‘심령이 가난한 자’에서 시작하여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에 이르는 흐름에는 분명 영적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신앙인이 반드시 1단계부터 8단계까지 차례대로 통과해야 하는 외적 성장표로 고정하기보다,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함께 형성되어 가는 천국적 애정들의 질서로 읽는 편이 더 깊습니다.

 

예를 들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단순히 영적 성장의 초급 단계라는 의미를 넘어 자기에게서 선과 진리가 나오지 않음을 인정하고 주님을 필요로 하는 상태입니다. ‘온유함’은 일정 단계를 통과한 뒤 획득하는 자격증 같은 것이 아니라 자기 의지를 주님의 질서 아래 두는 천국적 성품입니다. ‘마음이 청결함’, ‘화평하게 함’,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음’ 역시 서로 완전히 분리된 계단이라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사람 안에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영적 생명은 사다리처럼 올라가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의 나무가 뿌리·줄기·가지·잎·열매를 함께 이루며 자라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겨자씨 비유 자체가 영적 성장에 관한 더 안전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준다고 봅니다. 겨자씨는 자기 성장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씨 안에 주어진 생명의 질서에 따라 뿌리를 내리고 자랍니다. 땅에서 수분과 양분을 받고 하늘에서 빛과 열을 받아 자랍니다. 인간의 거듭남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배운 진리를 삶에서 행합니다. 그러는 동안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실제 성장을 이루십니다.

 

여기서 ‘빛’과 ‘열’이라는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언어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천국의 빛은 신적 진리이고 천국의 열은 신적 사랑입니다. 식물이 자연계의 빛과 열 없이는 자랄 수 없듯, 인간의 영도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와 사랑 없이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진리만 있고 사랑이 없으면 생명이 없으며, 사랑이라고 하면서 진리가 없으면 방향을 잃습니다. 선과 진리, 사랑과 지혜가 결합될 때 비로소 생명이 성장합니다. 이것은 지금 AC 창세기 4장에서 살펴보고 있는 ‘신앙과 사랑의 분리’라는 문제와도 깊은 곳에서 연결됩니다. 신앙은 독립하여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겨자씨가 ‘나무’가 된다는 것은 단순한 양적 성장이 아닙니다. 성경을 더 많이 알고, 더 오래 기도하고, 더 많은 사역을 맡고, 더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반드시 영적 성장과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나무가 커진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더욱 깊이 결합되고, 그 결과 다른 사람에게 실제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자라는 것입니다. 영향력은 커졌는데 사랑은 작아질 수도 있고, 지식은 많아졌는데 겸손은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적인 의미에서 나무가 자란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강사가 반복해서 ‘겸손’, ‘충성’, ‘인내’, ‘온전한 사랑’을 성장의 표지로 말하는 것은 그래서 귀합니다. 외적 규모보다 내적 성품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덕목들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결국 지배적 사랑의 변화에 도달합니다.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은 ‘내가 무엇을 얻을 것인가?’보다 ‘무엇이 선한가?’,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이웃에게 무엇이 유익한가?’를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 성장의 실제 방향입니다.

 

특히 겨자나무의 가지에 새들이 와서 깃든다는 장면은 이 관점에서 아름답습니다. 강사는 이것을 다른 성도들을 양육하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이 적용을 살리면서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덧붙이면, 말씀에서 ‘새’는 문맥에 따라 생각, 지적 인식, 진리에 관한 이해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 안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가 나무처럼 질서 있게 성장하면 그 안에는 여러 진리의 인식과 생각들이 깃들 자리가 생긴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진리 하나를 받아들였지만 그것이 삶과 결합하면서 점점 더 많은 진리들이 서로 연결되고, 마침내 하나의 살아 있는 영적 구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성경 지식이 많아지는 것과 다릅니다. 처음에는 진리들이 서로 떨어져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 신앙, 회개, 섭리, 천국, 체어리티, 쓰임 등에 관한 여러 교리를 각각 알고 있지만 그것들이 하나의 생명으로 연결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 진리들이 선 안에서 서로 연결됩니다. 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계명의 중심인지, 왜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될 수 없는지, 왜 악을 죄로 알고 피하는 것이 필요한지, 왜 쓰임이 천국적 사랑의 표현인지가 하나의 살아 있는 질서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작은 겨자씨가 가지 많은 나무가 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나무가 되라’는 권면을 ‘큰 사람이 되라’는 말로 들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다른 생명이 쉴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에 가깝습니다. 사람을 만나면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고, 그 곁에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이야기를 끊임없이 해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용히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지식을 과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진리를 알면서도 상대의 상태에 맞추어 필요한 만큼만 나누는 사람이 있습니다. 후자의 모습에서 겨자나무의 ‘그늘’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참된 영적 권위가 무엇인지도 보여 줍니다. 영적 권위는 다른 사람을 자기 아래 두는 능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주님을 향하도록 돕는 능력입니다. 자기에게 사람들을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주님께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목양자는 ‘내 제자’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양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나무의 가지에 새들이 깃들지만 새들이 나무의 소유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무는 그들에게 잠시 쉴 자리와 보호를 제공합니다.

 

이 점에서 겨자씨 비유를 ‘14만 4천’과 연결하는 강사의 해석은 그 의도를 이해하면서도 일단 한 걸음 유보하여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강사는 겨자씨를 ‘14만 4천의 성장적인 측면’으로 명확히 규정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계시록의 14만 4천은 문자 그대로 특별히 높은 수준에 도달한 144,000명의 영적 엘리트를 뜻하지 않습니다. 이 숫자는 상응적으로 읽어야 하며, 계시록의 문맥 안에서 주님을 인정하고 선과 진리가 결합된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충만한 전체를 나타내는 방향으로 이해됩니다. 이 부분은 곧 계시록 본 강의에 들어가면 충분히 다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 단계에서 더 중요한 것은 강사가 왜 겨자씨 비유를 14만 4천과 연결하려 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의 관심은 숫자 자체보다 ‘이긴 자’, ‘성숙한 성도’,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람’에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겨우 구원받는 수준에서 멈추지 말고, 주님을 닮아 성숙하고, 자신을 희생하며, 다른 영혼을 섬길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중심 의도는 충분히 귀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다만 ‘더 높은 단계의 성도’라는 언어를 천국의 서열 경쟁으로 바꾸지 않고, ‘더 깊이 자기 자신을 잊고 더 자유롭게 주님의 쓰임이 되는 사람’이라는 방향으로 읽어 주면 훨씬 천국적인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겨자씨 비유의 역설이 빛납니다. 천국에서 ‘큰 사람’은 자기가 커지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섬기기 때문에 큰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겨자씨는 가장 작은 씨에서 시작하여 큰 나무가 됩니다. 천국적 성장은 바로 이 역설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자기 자신이 커지려 할수록 천국에서는 작아지고,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의 선이 흘러가도록 할수록 다른 생명을 품을 수 있는 큰 그릇이 됩니다.

 

그렇게 보면 겨자씨 비유는 ‘핵심진리’의 영적 성장론을 정화하고 깊게 해 주는 매우 좋은 중심 그림이 될 수 있습니다. ‘몇 단계까지 올라갔는가?’보다 ‘얼마나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었는가?’보다 ‘얼마나 다른 사람의 선을 위한 쓰임이 되고 있는가?’, ‘얼마나 높은 성도가 되었는가?’보다 ‘얼마나 자기 자신을 낮추고 주님의 사랑이 지나가는 통로가 되었는가?’를 묻게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겨자씨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성장의 크기’보다 ‘성장의 방향’입니다. 시작은 작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 하나가 마음에 심깁니다. 그 진리를 삶에서 행하면 뿌리가 내립니다. 시험을 통과하면서 뿌리는 더 깊어집니다. 선과 진리가 결합하면서 줄기가 생기고 가지가 뻗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생명은 자기 자신에게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그늘과 쉼을 제공하는 쓰임으로 확장됩니다. 그때 겨자씨는 비로소 ‘나무’가 됩니다.

 

그러므로 7강 2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은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영적 성장은 사람이 높은 단계의 존재가 되어 자기 완성을 이루는 과정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작은 선과 진리가 시험과 삶을 통하여 그의 생명이 되고, 마침내 그 생명이 다른 사람의 선을 위한 쓰임으로 확장되어 가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강의는 이 ‘장성한 겨자나무’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나무가 얼마나 자랐는가에서 이제 ‘그 사람의 삶 전체가 얼마나 변화되었는가’로 시선을 옮깁니다. 바로 ‘가루 서 말 속에 들어가 마침내 전부를 부풀게 한 누룩’입니다. 강사도 겨자씨를 ‘성장적인 측면’으로 정리한 뒤 누룩을 ‘행실적인 측면’으로 전환합니다. 다음 7강 3부에서는 이 누룩 비유를 중심으로, ‘행실의 정결’이라는 ‘핵심진리’의 강조가 스베덴보리의 ‘겉 사람의 질서화’, 그리고 선과 진리가 삶 전체로 내려가는 거듭남과 어떻게 만나고 또 어디에서 구별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7강 3부

누룩과 ‘행실의 정결’ : 속에서 시작하여 삶 전체로 퍼지는 거듭남

겨자씨 비유에서 강사가 주목한 것은 ‘성장’이었습니다. 작은 겨자씨가 자라 나무가 되고, 마침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드는 것처럼 영적으로 성장한 성도가 다른 사람을 품고 양육하는 쓰임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강의는 마태복음 13장 33절의 누룩 비유로 넘어가면서 시선을 조금 바꿉니다. 겨자씨가 ‘얼마나 자랐는가’를 보여 준다면 누룩은 ‘그 성장이 실제 삶을 얼마나 변화시켰는가’를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이를 ‘14만 4천의 행실적인 측면’이라고 표현하면서,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을 영적으로 성장하여 행실이 정결해진 성도의 모습으로 풀이합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충분히 살려 볼 만한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신앙은 사람의 머릿속 한 부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결국 그의 생활 전체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룩 비유는 매우 짧습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강사가 특별히 주목하는 말은 ‘전부’입니다. 누룩은 반죽 한구석만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적은 양이 들어가지만 시간이 지나면 반죽 전체에 퍼집니다. 그래서 강사는 누룩을 ‘행실’과 연결합니다. 신앙이 깊어졌다고 하면서 종교적인 몇몇 행동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활과 인격 전체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강조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성경을 많이 알고 기도를 오래 하며 영적인 체험을 많이 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실제 생활이 이전과 다르지 않다면 그 신앙이 어디까지 생명 안으로 들어왔는지를 다시 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로 볼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속 사람에서 받아들인 선과 진리가 겉 사람 안으로 내려와 그곳의 생각과 욕망, 말과 행동을 질서 있게 만드는 과정입니다. 사람은 처음 진리를 배울 때 그것을 이해성으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옳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앎과 삶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이해성에서는 용서가 옳다는 것을 알지만 의지에서는 여전히 미워할 수 있고, 정직이 옳다는 것을 알지만 실제 이익이 걸리면 거짓을 선택하고 싶을 수 있습니다. 이때 진리는 아직 사람 전체에 퍼진 것이 아닙니다. 가루 한 부분에 누룩이 들어갔지만 아직 반죽 전체가 변화되지 않은 것과도 같습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진리가 사람의 더 깊은 곳으로 계속 내려가는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나는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고 압니다. 그다음 실제 상황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억제합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힘듭니다. 자기 이익을 잃을 수도 있고 체면이 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며 반복하여 악을 죄로 알고 피하다 보면 어느 순간 정직이 단순한 규칙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 되어 갑니다. 이전에는 ‘거짓말하면 안 되니까 하지 않는다’였다면 점차 ‘거짓 자체가 싫고 진실한 것이 좋기 때문에 하지 않는다’로 변화합니다. 진리가 이해성에서 의지로 내려온 것입니다. 바로 이때 누룩이 더 깊이 퍼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악을 죄로 알고 피하라’는 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마음을 직접 선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오늘부터 나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결심한다고 해서 곧 겸손한 사랑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만이 실제 행동으로 나오려 할 때 ‘이것은 주님의 질서에 반하는 악이다’라고 인정하고 그것을 행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때 복수하지 않고, 거짓말하고 싶은 유혹이 올 때 거짓말하지 않으며, 자기 공로를 드러내고 싶을 때 그것을 억제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유롭게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그 안에서 악한 애정을 점차 약하게 하시고 새로운 선한 애정을 형성하십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행실의 정결’이라는 강사의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외적 행동이 깨끗해지는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겉으로 술을 마시지 않고, 욕설을 하지 않고, 헌금을 많이 하고, 봉사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곧 내면까지 정결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명예를 위해서도 선한 행동을 할 수 있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도 희생할 수 있으며, 천국에서 큰 상을 받겠다는 자기 유익 때문에도 봉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적 행위가 같아도 그 행위를 움직이는 사랑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의도’를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선한 행위의 영혼은 그 안에 있는 사랑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는 선과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는 선은 외관상 비슷해도 영적으로는 서로 다릅니다. 따라서 행실의 정결은 행동 목록을 깨끗하게 만드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일으키는 사랑이 정결해지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누룩이 반죽의 표면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속까지 스며드는 것과 같습니다.

 

이 점에서 누룩 비유는 앞의 좋은 밭 비유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좋은 밭의 특징은 ‘열매’였습니다. 진리가 실제 선한 삶으로 나타나야 했습니다. 누룩 비유는 그 열매가 어떻게 가능해지는지를 다른 방향에서 보여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의 진리가 사람 안에 들어와 생각과 의지 전체에 퍼지면, 마침내 삶에서도 새로운 행동이 나타납니다. 선한 행동은 외부에서 억지로 붙인 장식이 아니라 안에서 변화된 생명이 밖으로 나타난 열매가 됩니다.

 

여기서 누룩이라는 상징 자체를 조금 조심해서 볼 필요도 있습니다. 성경을 오래 읽은 독자라면 ‘누룩은 보통 나쁜 것을 뜻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고, 다른 성경 문맥에서도 누룩은 악이나 거짓이 퍼져 나가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응은 하나의 사물에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의미만 붙이는 단순한 상징 사전이 아닙니다. 문맥과 관계에 따라 좋은 의미와 반대 의미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주님께서 직접 ‘천국은 … 누룩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시므로, 누룩의 ‘퍼져 나가 전체를 변화시키는 성질’이 천국의 긍정적인 질서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사용할 때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돌은 이것’, ‘새는 이것’, ‘물은 이것’, ‘누룩은 이것’이라고 단어 하나에 뜻 하나를 기계적으로 대응시키는 것은 상응을 제대로 이해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같은 불도 주님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고 지옥의 자기애를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같은 사자도 주님의 신적 능력을 나타낼 수 있고 파괴적인 거짓의 힘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것이 무엇을 표상하는가는 그 사물이 놓여 있는 말씀의 전체 문맥과 내적 연결 속에서 보아야 합니다. 상응은 암호표가 아니라 영적 세계와 자연적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살아 있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강사는 누룩을 ‘행실적인 측면’과 연결하면서 특히 ‘정결’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앞서 계속 설명해 온 연단과 연결합니다. 사람은 여러 시험을 거치면서 세상적이고 육적인 것들이 벗겨지고, 점차 주님을 닮은 성품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강사가 반복하여 제시하는 덕목은 겸손, 충성, 인내, 사랑, 자기희생 등입니다. 이런 덕목들을 단순히 도덕적 품성 목록으로 보는 것보다 거듭남 가운데 형성되는 ‘새 의지’의 표현으로 보면 훨씬 깊어집니다.

 

예를 들어 겸손은 자신을 가치 없는 사람으로 깎아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겸손은 선과 진리의 근원이 자기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는 자기 능력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능력의 근원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충성 역시 사람이나 조직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쓰임을 주님 앞에서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입니다. 인내는 고통을 많이 견뎠다는 영적 실적이 아니라 어려움 가운데서도 선과 진리를 포기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사랑 역시 감정적인 따뜻함에 머물지 않고 상대방의 실제 선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강사가 말하는 ‘행실의 정결’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 매우 깊은 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핵심진리’의 설명에서는 여러 연단을 통과하여 마침내 ‘성화된 성도’, ‘이긴 자’, ‘익은 열매’가 되는 상태가 비교적 뚜렷한 단계처럼 제시됩니다. 그리고 강사는 이들을 계시록의 14만 4천과 연결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거듭남은 살아 있는 동안 계속되는 과정이며, 인간이 ‘나는 이제 완전히 정결해졌다’고 자기 상태를 확정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더 깊이 거듭날수록 자기 안에 남아 있는 proprium을 더 섬세하게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할수록 실제로는 더 선해지지만, 자기 눈에는 오히려 자기의 부족함이 더 잘 보일 수 있습니다. 밝은 방에 들어갈수록 먼지가 더 잘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의 빛이 희미할 때는 자기 안의 거친 악 몇 가지만 보이지만, 빛이 밝아지면 이전에는 선이라고 생각했던 행동 안에도 자기 인정 욕구와 공로의식과 지배욕이 섞여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거듭남은 ‘나는 이제 성화되었다’는 자기 확신보다 ‘주님 없이는 아무 선도 행할 수 없다’는 더욱 깊은 겸손으로 사람을 이끕니다.

 

따라서 누룩이 ‘전부 부풀게 했다’는 말씀을 인간이 어느 시점에서 완전무결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읽기보다, 천국의 질서가 사람의 삶 전체를 향하여 확장된다는 의미로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전에는 신앙이 주일예배와 기도 시간에만 관련되어 있었다면, 이제는 돈을 사용하는 방식에도 들어옵니다. 가족과 대화하는 방식에도 들어옵니다. 직장에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도 들어옵니다. 인터넷에서 무엇을 보고 어떤 말을 쓰는지에도 들어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들었을 때 그것을 퍼뜨리는가 덮어 주는가 하는 데에도 들어옵니다. 진리는 점점 더 많은 삶의 영역을 비춥니다.

 

이것이 ‘전부’의 의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종교적인 부분만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 전체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렇다고 자연적인 모든 것을 없애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적인 것을 질서 안에 놓으십니다. 사람이 가진 재능, 지식, 직업 능력, 인간관계, 재산, 성격까지 모두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새로운 사랑 아래 놓여 쓰임을 위해 사용되게 하십니다. 이전에는 자기 명예를 위해 사용하던 지성을 이제 진리를 섬기는 데 사용하고, 자기 만족을 위해 사용하던 재물을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점은 강의에서 자주 등장하는 ‘육적인 것을 버린다’는 표현을 이해할 때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적인 것 자체는 악하지 않습니다. 자연계도 주님의 창조이며 인간의 몸과 감각과 자연적 애정도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문제는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지배하는 데 있습니다. 자연적인 것이 주인이 되면 사람은 보이는 것과 감각적 쾌락과 세상적 이익만을 기준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이루어지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가 자연적 욕망과 생각들을 질서 있게 다스립니다.

 

그러므로 ‘육을 버린다’는 것을 몸과 세상을 미워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자연적인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돈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쓰임을 위해 사용하고, 몸은 학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수행하는 도구로 돌보며, 가족 사랑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가족만 사랑하는 폐쇄적인 사랑에서 더 넓은 이웃 사랑의 질서 안에 놓습니다.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섬길 때 자연적인 것 역시 선한 것이 됩니다. 이것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올바른 질서입니다.

 

누룩 비유에는 또 하나 아름다운 특징이 있습니다. 변화가 조용히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겨자나무는 밖으로 자라는 모습이 눈에 보이지만 누룩은 반죽 안에서 보이지 않게 작용합니다. 거듭남에도 이런 면이 있습니다. 큰 영적 체험이나 극적인 사건만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날마다 반복되는 작은 선택 가운데서 주님께서 조용히 사람의 애정을 바꾸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번 참는 것, 한 번 정직하게 말하는 것, 한 번 자기 주장을 내려놓는 것, 한 번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 보는 것, 이런 작은 선택들이 수년간 쌓이면서 어느 날 돌아보면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거듭남을 너무 쉽게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누룩은 안에서 일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아직 많은 부족함이 보여도 그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오래 작업하고 계실 수 있습니다. 반대로 겉으로 매우 경건해 보여도 내면에서는 자기애가 여전히 중심을 차지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보시지만 우리는 대부분 외적인 것만 봅니다. 그러므로 영적 성장을 말할수록 타인에 대한 판단은 오히려 줄어들어야 합니다.

 

여기서 ‘14만 4천’이라는 강사의 표현도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만일 이것을 ‘우리 가운데 특별히 성화에 성공한 최상위 성도 144,000명’이라는 식으로 이해한다면, 영적 성장론은 쉽게 서열론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록의 숫자를 상응적으로 읽으면 전혀 다른 방향이 열립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수는 자연계의 통계 숫자를 알려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적 상태의 질을 표현합니다. 따라서 14만 4천은 문자적 인원수를 세기보다 선과 진리의 충만함, 그리고 주님께 속한 사람들의 완전한 전체라는 방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 부분은 뒤의 계시록 본 강의에서 충분히 다루겠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강사가 14만 4천에게 부여한 특징 가운데 ‘행실이 정결하다’는 부분을 살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기독교 신앙이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생명의 변화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신앙만’을 끊임없이 경계합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되지 않으면 살아 있는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고, 체어리티는 실제 삶의 선한 행위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믿는가?’와 ‘어떻게 사는가?’를 분리할 수 없습니다.

 

다만 순서를 정확히 해야 합니다. 선한 행실을 많이 해서 자기 힘으로 천국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따라 행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십니다. 시간이 지나면 처음에는 억지로 행하던 선이 점차 기쁨이 됩니다. 이것이 천국적 자유입니다. 악을 하고 싶은데 억지로 참는 단계에서, 선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기쁘게 행하는 단계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룩은 ‘외적 도덕성’보다 훨씬 깊은 것을 보여 줍니다. 반죽의 모양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의 상태가 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거듭남은 사람이 종교적으로 보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랑 자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보았지만 점차 주님과 이웃을 중심으로 보게 됩니다. 이전에는 ‘나에게 무엇이 이익인가?’가 첫 질문이었다면 ‘무엇이 선한가?’가 첫 질문이 되어 갑니다. 바로 이것이 지배적 사랑의 변화입니다.

 

그리고 지배적 사랑이 바뀌면 다른 것들이 따라 바뀝니다. 생각이 바뀌고, 말이 바뀌며, 인간관계가 바뀌고, 돈을 사용하는 방식이 바뀌며, 시간을 사용하는 방식도 바뀝니다. 이것이 누룩이 반죽 전체를 변화시키는 모습과 같습니다. 사람은 억지로 수백 가지 행동규칙을 외워서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중심 사랑이 변화됨으로써 삶의 여러 부분이 새로운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렇게 보면 겨자씨와 누룩 비유는 서로 아주 아름답게 보완됩니다. 겨자씨는 생명이 ‘자라는 것’을 보여 주고, 누룩은 그 생명이 ‘스며드는 것’을 보여 줍니다. 겨자씨는 작은 시작이 큰 쓰임으로 확장되는 모습을 보여 주고, 누룩은 작은 천국적 생명이 사람의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나는 바깥으로 뻗어 가는 성장이고 다른 하나는 안으로 스며드는 변화입니다. 참된 거듭남에는 둘 다 필요합니다.

 

사람의 영향력만 커지고 내면이 변화되지 않으면 겨자나무처럼 커 보일 수는 있어도 천국적 나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내면의 경건만 강조하면서 다른 사람을 위한 쓰임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역시 완전한 천국적 생명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선은 안에서는 사랑과 성품을 변화시키고 밖에서는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내적 변화와 외적 쓰임은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행실의 정결’이라는 말을 가장 깊이 이해하면, 그것은 흠 하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람의 삶 전체를 점점 더 자유롭게 사용하실 수 있는 상태가 되어 간다는 뜻입니다. 내 지성이 주님의 진리를 위해 쓰이고, 내 말이 다른 사람을 세우는 데 쓰이며, 내 손과 발이 선한 일을 위해 움직이고, 내가 가진 재물과 시간과 능력이 쓰임을 위해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 전체가 주님의 질서 아래 들어갈수록 누룩은 ‘전부’를 부풀게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강의는 매우 자연스럽게 다음 비유로 넘어갑니다. 사람이 그렇게 성장하고 삶 전체가 변화되었다면, 그 변화의 가장 깊은 곳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살 수 있었으며, 무엇이 그렇게 귀했기에 자기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답을 강사는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에서 찾습니다. 사람이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얻고 싶은 가장 귀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7강 3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참된 신앙은 인간의 종교적인 한 부분을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흘러들어가 생각과 의지, 말과 행동, 관계와 쓰임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삶 전체를 새로운 질서 안에 놓는 거듭남입니다.’ 누룩은 아주 작지만 마침내 ‘전부’를 변화시킵니다. 주님의 나라 역시 그렇게 사람 안에 임합니다.

 

이제 7강 4부에서는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를 중심으로 강사가 말하는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특히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들어가면 proprium과 아주 깊이 연결됩니다. 무엇을 버려야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가, 외적인 재산과 관계를 버리는 것과 자기 소유의식을 버리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생명이 어떻게 사람에게 ‘자기 것처럼’ 주어지는가 하는 문제까지 이어질 수 있겠습니다.

 

 

7강 4부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 :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것과 하나님의 생명

누룩 비유에서 강사는 ‘행실의 정결’을 보았다면, 이제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 비유에서는 그보다 더 깊은 질문으로 들어갑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부터 46절에서 한 사람은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고, 좋은 진주를 구하던 장사는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한 뒤 역시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것을 삽니다. 강사는 이 두 비유가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보고, 특히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표현을 강하게 붙듭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진주의 값은 자기 소유를 몽땅 파는 값’입니다. 하나라도 붙들고 있으면 그 진주를 살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강사는 이 ‘진주’와 ‘보화’를 단순히 복음이나 진리, 믿음, 천국, 구원이라고 해석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보는 것이 비유의 초점에 더 맞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마태복음 19장의 부자 청년 이야기를 연결하여, 영생을 얻기 원하는 청년에게 주님께서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을 진주 비유의 보충 설명처럼 사용합니다. 강사의 해석에서 물질적 소유뿐 아니라 ‘죄성과 정욕’까지도 인간이 붙들고 있는 ‘소유’이며, 그것을 내려놓는 과정이 광야 연단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의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핵심진리’의 성장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진주와 보화는 단순히 귀중한 교리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을 얻기 위하여 자기에게 속한 것을 내려놓는 전체적인 자기부인의 과정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대목은 proprium의 문제와 아주 깊이 만납니다. 인간에게 가장 깊은 ‘자기 소유’는 반드시 재산이나 물건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 생각’, ‘내 판단’, ‘내 선’, ‘내 공로’, ‘내 지혜’, ‘내 의’, ‘내 삶은 내 것이다’라고 여기는 모든 자기 소유의식이 더 깊은 차원의 proprium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타락한 인간의 own, 곧 proprium은 자기 자신을 선과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는 상태와 밀접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말씀을 거듭남의 깊은 층위에서 읽으면, 단순한 무소유나 재산 포기보다 훨씬 근본적인 자기 포기가 보입니다. 자기에게서 선과 진리와 생명이 나온다는 착각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모든 재산을 버렸다고 해서 proprium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다’, ‘나는 남들보다 더 희생했다’는 새로운 자기 의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많은 재산과 책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영광이 아니라 선한 쓰임을 위해 관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단순히 ‘얼마나 버렸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그 사람의 사랑을 지배하고 있는가’입니다. 외적 소유를 포기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더 깊은 목적은 소유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바로 세우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강사의 ‘진주의 값은 자기 소유 전부’라는 강한 표현은 영적으로 매우 도전적이면서도, 동시에 문자적으로 적용할 때는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얻기 위해 반드시 가족과 재산과 직업을 모두 잃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제로 강의의 다른 부분에서는 세 번째 연단 과정의 특징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얻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모든 육적 소유를 걷어가신다’고 말하며 욥의 재산과 자녀 상실을 예로 듭니다. 이 표현을 그대로 일반화하면 매우 무거운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모든 거듭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재산과 가족을 실제로 빼앗으셔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악과 고통 그 자체를 목적으로 인간에게 보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허용된 사건들을 선을 위해 사용하실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생명을 얻기 위해 반드시 모든 외적 소유를 잃어야 한다’는 고정된 공식을 세우기는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실제 물질적 손실이 proprium을 드러내는 시험이 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명예나 인정욕구, 자기 지혜, 관계에 대한 집착이 훨씬 더 깊은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루시는 것은 외적 목록보다 그 사람이 무엇을 가장 사랑하고 붙들고 있는가입니다.

 

그래서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말씀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빈털터리가 되어야 한다’기보다 ‘주님보다 더 높이 두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방향에서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돈이 그것일 수도 있고, 명예가 그것일 수도 있으며, 자기 교리가 그것일 수도 있고, 자신의 영적 체험이 그것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나는 옳다’는 확신조차 값진 진주보다 더 붙들고 있다면 자기 소유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proprium은 종교적인 모습을 입고도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강사는 부자 청년의 ‘소유’를 물질뿐 아니라 ‘죄성과 정욕’까지 넓혀 읽습니다. 이 적용의 방향에는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따르는 데 실제로 방해가 되는 것은 소유물 자체보다 그것을 향한 애정과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돈을 가진 것이 문제가 아니라 돈을 자기 안전과 가치의 최종 근거로 삼는 것이 문제이고, 몸을 가진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감각적 쾌락이 주님의 질서보다 위에 놓이는 것이 문제입니다. 죄성과 정욕을 ‘소유’라고 부르는 강사의 언어는 다소 독특하지만,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에서는 proprium과 대화할 수 있는 지점이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이 악을 ‘버리는’ 방식도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악을 제거하여 깨끗한 존재가 된 뒤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먼저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의 빛으로 악을 악이라고 보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그 악을 행하지 않으려고 할 때 주님께서 실제로 그 악을 분리하십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싸워야 하지만, 승리의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따라서 ‘내 소유를 다 팔아야 진주를 살 수 있다’는 말씀도 거래처럼 이해하면 안 됩니다. 내가 충분히 희생했기 때문에 그 대가로 하나님의 생명을 구매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산다’는 행위 자체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나타낸다고 보는 편이 좋습니다. 사람은 무엇이 가장 귀한지를 발견한 뒤 다른 것의 상대적 가치를 새롭게 봅니다.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기뻐하여’ 자기 소유를 팝니다. 이 ‘기뻐하여’라는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강요당하여 빼앗긴 것이 아니라 더 큰 가치를 보았기 때문에 작은 것을 놓는 것입니다. 천국의 생명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버리는 것이 큰 희생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평안의 가치를 실제로 맛보기 시작하면, 이전에 그렇게 귀하게 붙들던 것들이 점차 작아 보입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자기부인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자유가 되어 갑니다.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변화입니다. 처음에는 ‘복수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 때문에 억지로 참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미움 자체가 얼마나 자신을 묶고 있었는지를 깨닫고, 용서하는 것이 더 자유롭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정직 때문에 손해 보는 것이 아깝지만, 나중에는 정직한 양심의 평안이 돈보다 더 귀하게 느껴집니다. 처음에는 자기 공로를 내려놓는 것이 허전하지만, 나중에는 모든 선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편안합니다. 값진 진주를 발견한 것입니다.

 

강사는 진주를 찾아다니는 장사의 모습을 광야 길을 가는 신앙인의 모습과 연결합니다. ‘생명, 생명, 영원한 생명’을 찾아 장망성을 떠나는 ‘천로역정’의 기독도, 광야를 지나 가나안을 향하는 이스라엘의 여정, 그리고 일시적으로 생명의 내주합일을 경험하는 과정까지 하나의 성장 구조로 연결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생명을 찾는 갈망’이라는 강한 중심이 있습니다. 사람이 천국의 진리를 조금 맛본 뒤 그보다 더 깊은 생명을 찾기 위해 계속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다’는 표현을 조금 조심스럽게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을 자기 안에 독립적인 소유물로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은 언제나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유입됩니다. 인간은 그 생명을 받아들이는 그릇입니다. 천사도 자기에게서 사랑하고 생각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천사와 인간이 그 생명을 완전히 자기 것처럼 느끼도록 하십니다. 그래야 자유와 상호적인 결합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다’는 말을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옮긴다면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점점 더 자유롭고 온전하게 받아들이게 된다’고 표현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주님의 생명이 인간에게 양도되어 인간 자신의 독립적 재산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내 생명은 내 것이다’라는 proprium을 내려놓을수록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더 자유롭게 흘러들어옵니다. 이것이 매우 놀라운 역설입니다. 자기 것을 붙들수록 빈곤해지고, 자기 것을 내려놓을수록 풍성해집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적 proprium’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타락한 proprium은 ‘선은 나에게서 나온다’, ‘지혜는 내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거듭난 사람에게 주시는 새로운 proprium은 전혀 다릅니다. 사람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사랑하고 행하지만, 동시에 그 근원이 자기에게 있지 않음을 압니다. 그래서 천사는 선을 자기 것처럼 행하면서도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참된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값진 진주를 얻는다는 것은 자기 인격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거짓된 자기 소유를 내려놓고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자기성을 받는 것입니다. ‘내가 없어지고 하나님만 남는다’는 식의 존재론적 합일이 아니라, 주님과의 결합 안에서 사람이 더욱 참된 인간이 되어 갑니다. 자기애의 압박에서 벗어나고, 사람의 평가에서 더 자유로워지며,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생명이 그 사람 안에서 더욱 투명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진주와 보화의 ‘가치’라는 주제도 중요합니다. 사람은 결국 자신이 가장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위해 다른 것들을 정리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가장 귀하기 때문에 건강과 관계와 양심까지 희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가 가장 귀해서 진실까지 희생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과 주님의 나라가 가장 귀해지면 돈과 명예와 편안함은 그 아래에 놓입니다. 버려야 할 것이면 버리고, 사용할 수 있으면 쓰임을 위해 사용합니다. 이것이 지배적 사랑의 질서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얼마나 많이 버렸는가’를 묻기보다 ‘무엇이 나에게 가장 값진 진주인가’를 묻습니다. 이것은 훨씬 근원적인 질문입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오래 했는가, 얼마나 많은 봉사를 했는가보다, 실제 선택의 순간에 무엇을 더 귀하게 여기는가가 중요합니다. 주님의 뜻과 내 체면이 충돌할 때 어느 쪽을 택하는가, 진실과 이익이 충돌할 때 어느 쪽을 택하는가, 체어리티와 자기 의가 충돌할 때 어느 쪽을 붙드는가가 그 사람의 진짜 보화를 드러냅니다.

 

강사가 이 비유를 ‘14만 4천의 생명적인 측면’이라고 보는 이유도 여기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14만 4천은 단순히 어떤 교리를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소유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생명을 실제로 소유한 ‘이긴 자들’입니다. 이 구조는 뒤의 계시록 해설에서 본격적으로 검토해야겠지만, 지금은 그 안의 영적 의도를 살릴 수 있습니다. 신앙의 최종 목적은 특별한 숫자 집단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실제 내 사랑과 삶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다만 ‘14만 4천’이라는 표지를 붙이는 순간 한 가지 위험이 생길 수 있습니다. ‘나는 그 생명을 얻었는가’, ‘나는 이긴 자인가’, ‘나는 다른 성도보다 더 높은 단계에 있는가’라는 자기 측정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값진 진주 비유의 방향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진주를 얻으려면 ‘자기 소유’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나는 진주를 얻은 특별한 사람이다’라는 의식 자체가 새로운 proprium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깊어질수록 자신의 단계보다 주님의 선하심을 더 바라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부자 청년 이야기도 같은 빛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계명을 지켰다고 말합니다. 겉으로 상당히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의 가장 깊은 애착을 건드리시자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문제는 그가 돈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보다, 돈이 그의 의지 안에서 주님보다 더 깊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외적인 도덕성 아래 숨어 있던 지배적 사랑을 드러냈습니다. 이것이 시험입니다.

 

우리에게도 ‘네 소유를 다 팔라’는 말씀은 각기 다른 곳을 건드릴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돈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자녀일 수 있으며, 어떤 사람에게는 목회적 성공이나 학문적 명성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나는 이 신학이 옳다고 확신한다’는 자기 지성의 소유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이런 것들을 무조건 없애는 것이 아니라, 어느 것도 주님보다 위에 두지 않는 질서입니다. 필요하면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하고, 계속 가지고 있어도 주님의 쓰임을 위해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자기 소유를 다 판다’와 ‘자기부인’은 서로 만납니다. 자기부인은 자기 자신을 혐오하거나 인간적 필요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최종 목적으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내 욕망과 내 판단과 내 유익이 주님의 선과 진리보다 우선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자기부인은 사람이 점점 작아져 무기력해지는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애의 속박에서 벗어나 주님의 선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강사가 강조하는 ‘좁은 길’과도 연결됩니다. 좁은 길은 고생 그 자체가 영적으로 훌륭하기 때문에 선택하는 길이 아닙니다. 주님보다 더 사랑하던 것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에 좁게 느껴지는 길입니다. 자기애가 강할수록 그 길은 좁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질서가 바뀌면 같은 길이 자유의 길이 됩니다. 처음에는 ‘잃는다’고 느꼈던 것이 나중에는 ‘벗어난다’고 느껴집니다.

 

따라서 이 비유에서 ‘팔았다’는 말과 ‘기뻐하였다’는 말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자기부인과 기쁨은 반대가 아닙니다. 천국적 자기부인은 더 큰 선을 발견했기 때문에 작은 것을 놓는 기쁨입니다. 세상 사랑만 있을 때는 주님의 계명이 손실로 느껴질 수 있지만, 주님 사랑이 자라면 계명은 자유가 됩니다. ‘값진 진주’의 가치를 실제로 안 사람에게는 그 진주를 얻기 위해 내려놓는 것이 궁극적으로 손해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천국의 기쁨’ 이해와도 잘 만납니다. 천국의 기쁨은 외적인 보상으로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 안에 있습니다. 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기쁨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웃의 행복이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값진 진주를 얻는다는 것은 천국적 사랑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을 받으면 이전의 가치 체계가 바뀝니다.

 

이렇게 보면 진주와 보화 비유는 앞의 겨자씨와 누룩을 한층 더 깊게 묶어 줍니다. 겨자씨는 생명이 자라는 모습을 보여 주었고, 누룩은 그 생명이 삶 전체에 스며드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 진주와 보화는 ‘왜 그 생명이 그렇게 자라고 퍼질 수 있는가’를 보여 줍니다.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주님의 나라가 가장 귀한 보화가 되면 사람의 다른 모든 사랑이 그 아래에서 새로운 질서를 찾습니다.

 

따라서 7강 4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값진 진주를 얻기 위해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외적 소유를 잃어야 한다는 뜻이라기보다, 자기에게서 생명과 선과 지혜가 나온다고 여기는 proprium과 주님보다 더 귀하게 붙들고 있는 모든 지배적 애착을 내려놓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생명의 가장 귀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거듭남의 결단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가지 역설을 꼭 남겨 두고 싶습니다. 인간은 ‘자기 것’을 내려놓으면 자기를 잃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때 비로소 참된 자기를 얻습니다. 타락한 proprium의 지배에서는 사람이 욕망과 두려움과 인정욕구의 노예가 되지만, 주님으로부터 받은 새로운 의지 안에서는 선을 사랑하여 자유롭게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값진 진주를 얻는 것은 인간성이 사라지는 사건이 아니라 인간성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비로소 온전히 살아나는 사건입니다.

 

이제 강의는 이 밝은 세 비유, 곧 겨자씨의 ‘성장’, 누룩의 ‘행실’, 진주와 보화의 ‘생명’과 정반대편에 ‘가라지’를 놓습니다. 강사의 전체 도식에서는 앞의 비유들이 ‘14만 4천’의 모습을 보여 준다면 가라지는 ‘666’의 정체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7강 5부에서는 가라지 비유를 중심으로, ‘알곡과 가라지’, ‘좋은 씨와 악한 씨’, ‘추수와 세상 끝’을 먼저 충분히 살펴보고, 강사가 이것을 왜 ‘14만 4천과 666’이라는 양극적 구도로 읽는지,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석에서는 ‘666’과 마지막 심판이 어떻게 전혀 다른 내적 의미로 열리는지를 차분히 살펴보겠습니다.

 

 

7강 5부

가라지 비유와 ‘666’ : 빛과 어둠의 분리, 그리고 ‘세상 끝’의 의미

이제 강의는 밝은 쪽에서 어두운 쪽으로 급격히 방향을 바꿉니다. 앞의 겨자씨, 누룩, 진주와 보화 비유를 강사는 ‘교회 시대 이긴 자들’, 곧 14만 4천의 성장·행실·생명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 주는 말씀으로 보았습니다. 반면 가라지 비유는 그 정반대편에 놓입니다. 강사는 ‘교회 시대 이긴 자들이 빛으로 익은 가장 훌륭한 열매라면, 가라지는 어둠으로 익은 가장 악한 마귀의 종’이라고 규정합니다. 따라서 이번 가라지 비유는 단순히 ‘교회 안에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라, 강사의 전체 체계에서는 14만 4천과 666, 빛과 어둠, 익은 알곡과 익은 악의 열매가 서로 갈라지는 결정적인 지점입니다.

 

강사는 먼저 주님께서 비유 자체를 해설하신 마태복음 13장 후반을 따라갑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며,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입니다. 그리고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 추수 때는 세상 끝, 추수꾼은 천사들이라고 봅니다. 이 기본 틀 자체는 주님의 직접 해설을 따라가는 것이므로 분명합니다. 다만 강사는 여기서 더 나아가 ‘밭’을 세상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 더 넓게는 교회 공동체로도 볼 수 있다고 설명하고, 가라지의 씨를 잘못된 교리, 사상, 정욕적인 사상, 이단적 사상 등으로 연결합니다.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상당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가라지를 사람 자체에만 붙이는 것보다, 사람 안에 들어와 자라는 거짓과 악의 씨로 보는 것이 훨씬 내적인 독법이기 때문입니다.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물론 사람의 상태를 가리키지만, 그 상태는 거짓과 악이 그의 생명 안에서 자라 지배적 사랑이 된 결과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처음부터 ‘가라지 인간’으로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천국을 위해 창조하시지만, 인간이 자유 가운데 악과 거짓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그것을 자기 생명으로 만들 때 점차 악한 상태가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가라지 비유를 읽을 때 가장 위험한 것은 ‘저 사람은 가라지다’라고 쉽게 사람에게 낙인을 찍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강사 자신도 이 점을 어느 정도 경계합니다. 교회에서 누군가 문제를 일으킨다고 해서 ‘가라지 같은 사람’이라고 쉽게 부르곤 하지만, 강사가 말하는 가라지는 단순히 행실이 부족하거나 목회자에게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라 결국 불에 던져지는 구원받지 못한 영혼을 가리키므로, 사람의 몇몇 부족한 행실만 보고 함부로 가라지라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 절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외적 행동만 보고 한 사람의 영원한 내적 상태를 우리가 확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절제를 더욱 강하게 유지합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내적 목적과 지배적 사랑을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처음에는 그것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말씀의 심판 이미지는 다른 사람을 분류하기 전에 먼저 자기 안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누가 가라지인가?’보다 ‘내 안에서 지금 어떤 가라지 씨가 자라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자기 의, 명예욕, 교리적 우월감, 사람을 지배하고 싶은 마음, 진리를 사랑과 분리하여 자기 무기로 사용하는 마음도 모두 가라지와 같은 거짓과 악의 씨가 될 수 있습니다.

 

강사는 가라지가 어릴 때는 곡식과 잘 구별되지 않다가 자라서 열매가 나타나야 비로소 구별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가라지 비유는 ‘영적 성장론’을 중심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릴 때는 잘 모르지만 어느 정도 자라면 벼인지 가라지인지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 관찰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의 내적 사랑은 시간이 지나며 삶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한두 번의 행동보다 반복되는 선택과 사랑의 방향이 그 사람의 실제 생명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선과 악 모두에 해당됩니다. 처음에는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이 겉으로 비슷해 보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친절한데 그 친절이 체어리티에서 나온 것인지, 사람의 인정을 얻기 위한 것인지 바로 알기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이 진리를 강하게 말하는데 그것이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인지, 자기 지성을 자랑하기 위함인지 역시 쉽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열매가 나타납니다. 사랑은 반드시 자기와 같은 행위를 낳고, 반복되는 행위는 결국 그 사랑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신 말씀도 같은 원리입니다.

 

강사의 전체 도식에서 가라지는 곧 ‘666’과 연결됩니다. 그는 14만 4천을 ‘가장 밝은 빛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간 사람들’, 666을 ‘가장 어두운 가운데 하나님을 대적하며 마귀의 종으로 산 사람들’이라고 대비시킵니다. 더 뒤에서는 가라지를 ‘성령님은 떠나고 마귀의 영이 합일된 사람’, ‘배교자, 음녀, 불법을 행하는 자’와 같은 강한 언어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이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강사의 계시록 독법 사이에 매우 중요한 차이가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666은 특정한 인간 집단을 표시하는 숫자나 미래의 어떤 적그리스도 인물의 비밀 번호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의 숫자는 자연적 숫자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적 상태의 질을 나타냅니다. 특히 ‘짐승의 수’ 666은 신앙을 체어리티와 분리하여, 신앙만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상태와 교리를 매우 깊게 표상합니다. 따라서 ‘666인 사람들’을 외부에서 찾아내는 것보다, ‘내 안에서 신앙을 사랑과 삶으로부터 분리하는 666적 상태가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 훨씬 스베덴보리적인 접근입니다.

 

이것은 지금 AC 창세기 4장에서 읽고 있는 ‘가인’과도 놀랍게 연결됩니다. 가인은 신앙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표상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으면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기 독립성을 주장하며 사랑을 밀어내기 시작하면 ‘가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가라지와 666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을 때 가장 깊은 경계는 ‘밖에 있는 이단적 사람’을 찾아내는 데 있지 않고, 우리 안에서 진리가 사랑과 분리되고 신앙이 생명에서 떨어져 나가는 상태를 경계하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가라지의 정체가 훨씬 가까워집니다. 내가 정통 교리를 정확히 알고 있다고 하면서 이웃을 멸시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으면서 자기보다 다른 해석을 가진 사람을 증오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 아래 자기 의와 분노를 정당화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문제는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가 사랑과 분리된 것입니다. 진리가 체어리티를 섬기지 않고 proprium을 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상태가 계속 자라면 겉으로는 종교적이지만 안에서는 전혀 다른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강사는 ‘추수 때는 세상 끝’이라고 강조하면서, 마지막 때 주님께서 ‘익은 열매를 추수하시고, 죄악 세상을 심판하시고, 그 뒤 죄 없는 천년왕국을 건설하신다’고 설명합니다.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가라지는 꺼지지 않는 불에 던지는 것이 종말의 추수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강사의 문자적 종말론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입니다. 그에게 ‘세상 끝’은 미래의 역사적 종말, 대환난, 재림, 천년왕국으로 이어지는 시간표 안에 놓여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상당히 다른 지평이 열립니다. 성경의 ‘세상 끝’ 또는 ‘시대의 완성’은 자연계와 지구가 파괴되는 물리적 종말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교회가 선과 진리를 거의 완전히 상실하여 더 이상 교회로 기능할 수 없게 된 마지막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때 영계에서 마지막 심판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교회가 시작됩니다. 따라서 ‘세상 끝’은 우주의 끝이 아니라 한 영적 시대의 완성입니다.

 

이 차이는 단순히 종말의 날짜를 다르게 보는 정도의 차이가 아닙니다. 말씀을 읽는 방식 자체의 차이입니다. 문자적 독법에서는 예언된 사건이 자연계 역사에서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를 중심으로 묻게 됩니다. 반면 상응적 독법에서는 그 자연적 이미지들이 어떤 영적 상태와 교회의 변화를 표상하는지를 묻습니다. 그래서 ‘추수’ 역시 단지 미래 어느 날 지상에서 사람들을 두 집단으로 나누는 사건이라기보다, 선과 악의 상태가 완전히 성숙하여 더 이상 함께 있을 수 없게 되는 영적 분리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는 말씀은 무엇을 뜻할까요? 여기에는 매우 깊은 섭리의 원리가 있습니다. 주님은 악을 즉시 뽑아 없애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선과 악이 사람 안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고, 성급하게 하나를 제거하면 아직 형성되지 않은 선까지 손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거듭나는 동안 주님께서는 그의 자유를 보존하시며 선과 악을 점차 구별시키십니다. 어느 것이 정말 선에서 나오는지, 어느 것이 자기애에서 나오는지 시간이 지나면서 분명해집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삶에서도 그대로 경험됩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자기 열심이 모두 주님 사랑에서 나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그 속에 인정받고 싶은 욕망, 사람에게 칭찬받고 싶은 마음, 자기 교리가 옳음을 증명하고 싶은 욕망이 섞여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만일 주님께서 처음부터 모든 자기애를 한꺼번에 제거하셨다면 사람은 감당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질서 있게, 사람이 자유롭게 볼 수 있는 만큼 드러내시고 제거하십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다가 추수 때 분리되는 그림은 이런 거듭남의 섭리와도 연결해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라지 비유의 심판은 단지 ‘악한 사람을 벌하는 것’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서 선과 악을 분리하십니다. 사람의 지배적 사랑이 무엇인지 완전히 드러나면, 그와 맞지 않는 외관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사후 중간영계에서도 중요한 원리입니다. 사람은 죽은 직후 곧바로 완전히 드러난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이 점차 벗겨지고 실제 내적 사랑이 드러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 결과 선을 사랑한 사람은 천국을 향하고 악을 사랑한 사람은 자신과 같은 사랑이 있는 지옥 공동체를 향합니다.

 

이 점에서 ‘꺼지지 않는 불’도 단순히 하나님께서 밖에서 가하는 물리적 형벌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지옥의 불은 자기애와 세상 사랑, 특히 지배하고 파괴하려는 악한 욕망의 불을 표상합니다. 악한 사람이 지옥에 가서 전혀 새로운 형벌을 외부에서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상에서 사랑하고 형성한 바로 그 욕망 안에서 살아갑니다. 자기애의 불이 그 사람 자신의 삶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심판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임의적으로 형벌을 부과하는 사건이라기보다, 그 사람의 사랑의 질이 드러나고 그것에 맞는 상태로 가는 질서입니다.

 

여기서 강사가 ‘가라지’를 너무 쉽게 부르면 안 된다고 한 부분은 오히려 더욱 빛납니다. 사람이 아직 자연계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회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가라지와 같은 거짓을 붙들고 있어도 내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고, 오늘 자기애에 깊이 빠져 있어도 주님의 섭리 가운데 돌이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살아 있는 사람에게 ‘너는 가라지다’라고 영원한 판정을 내리는 것은 주님의 자리까지 넘어가는 일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교리나 행동의 질을 분별하는 것이지, 한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확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강사의 가라지 해설에는 ‘잘못된 교리나 사상, 정욕적인 사상, 이단적 사상’을 씨와 연결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이 부분은 분별 있게 받아들일 만합니다. 거짓 교리는 단지 머릿속의 잘못된 정보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악한 사랑과 결합하면 삶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됩니다. 예를 들어 자기 욕망을 하나님 뜻이라고 합리화하거나, 자기 지도자의 절대 권위를 교리화하여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자기 집단만 구원받는다고 하여 다른 사람을 멸시하게 만드는 교리는 실제 영적 가라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올바른 교리 자체가 자동으로 알곡을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교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도 자기애와 결합하면 그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높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알곡’과 ‘가라지’를 단순히 ‘정통교리 대 이단교리’로만 나누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사랑과 결합되어 실제 선한 생명이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교리는 씨이고, 사랑과 삶이 열매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가라지 비유와 앞의 좋은 밭 비유가 다시 연결됩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는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중요했고, 가라지 비유에서는 ‘무엇이 자라 어떤 열매가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사람은 처음에 진리를 잘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여도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사랑과 결합했는지가 드러납니다. 진리가 체어리티와 결합하면 알곡이 되고, 거짓과 자기애가 결합하면 가라지가 됩니다.

 

강사의 전체 구조에서 14만 4천은 ‘빛으로 익은 사람’, 666은 ‘어둠으로 익은 사람’입니다. 이 표현 자체는 매우 강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숫자보다 ‘익는다’는 말에 주목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반복하여 사랑하고 선택한 것으로 ‘익어 갑니다.’ 하루아침에 천국적 사람이 되지도 않고 하루아침에 지옥적 사람이 되지도 않습니다. 작은 선택들이 쌓이고, 그 선택들이 애정을 강화하며, 애정이 지배적 사랑이 되어 갑니다. 그래서 오늘의 작은 선택이 중요합니다.

 

‘추수’는 바로 그 성숙의 끝입니다. 더 이상 외관으로 감출 수 없을 만큼 사랑의 질이 분명해진 상태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말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매우 희망적인 말씀입니다. 거듭나는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가라지를 분리하시고 알곡을 보존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할 때마다 작은 추수가 일어납니다. 자기 안에서 거짓 하나를 발견하고 버릴 때, 악한 욕망 하나를 죄로 인정하여 피할 때, 주님께서 선과 악을 분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만 바라보며 두려워하기보다 지금의 ‘작은 심판’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의 빛이 오늘 나를 비출 때 변명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문제다’라고 밖을 보기 전에 ‘내 안에 어떤 가라지가 있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세상 끝’도 단지 미래의 공포스러운 사건이 아니라 오늘 내 안에서 낡은 영적 질서가 끝나는 사건으로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자기 의가 끝나고 겸손이 시작될 수 있고, 미움의 시대가 끝나고 용서의 시대가 시작될 수 있으며, 신앙만 주장하던 상태가 끝나고 체어리티와 결합된 살아 있는 신앙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은 미래를 취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현재의 내적 삶 안으로 끌어옵니다.

 

그렇게 보면 강사의 ‘마지막 때를 준비하라’는 권면 역시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종말의 날짜를 계산하거나 특정한 국제 정세를 지켜보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준비는 내 사랑의 상태를 살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오신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어느 종말론 도표를 정확히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내 생명이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일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666’에 대한 태도도 달라집니다. 밖에 있는 악인을 지목하는 숫자가 아니라 내 안에서 신앙을 사랑과 분리시키는 상태, 진리를 자기 지배의 도구로 만드는 상태, 하나님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상태를 경계하는 표지가 됩니다. 이렇게 읽으면 666은 훨씬 불편하지만 훨씬 유익한 말씀이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붙이는 숫자보다 자기 안을 비추는 거울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강사가 가라지를 ‘잘 자라다가 불법을 행하여 가라지가 된 사람’과 연결하는 방식입니다. 뒤의 계시록 강해에서도 그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다가 지워지는 사례와 가라지를 연결합니다. 이 부분은 강사의 구원론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처음 신앙 안에 있었다고 해서 끝까지 자동적으로 안전한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악과 거짓을 사랑하면 타락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이 역시 ‘한 번의 신앙고백’보다 삶의 지속적인 방향을 중요하게 본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을 ‘생명책에 이름이 적혔다가 행실 때문에 지워지는 행정적 기록’처럼 이해하기보다, ‘책’ 자체를 사람의 내적 생명과 기억, 곧 그가 실제로 살아낸 것의 기록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깊습니다. 하나님의 기억이 부족해서 기록을 수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삶 자체가 그의 영적 책이 됩니다. 사람이 사랑하고 의도하고 행한 것이 영계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생명책은 결국 살아낸 생명입니다.

 

따라서 7강 5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가라지인가’를 판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씨가 내 안에서 자라고 있는가’, ‘그 씨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내 신앙은 사랑과 결합되어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강사의 가라지 비유가 종말론적 분별을 강조한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분별을 먼저 인간의 내면으로 가져옵니다.

 

7강 5부를 한 문장으로 모으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가라지는 단지 밖에 있는 악한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표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악과 거짓이 사랑되어 생명으로 자라난 상태를 보여 주며, 추수는 그 사랑의 질이 완전히 드러나 선과 악이 분리되는 심판의 질서입니다.’

 

그리고 그 분리는 두려움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의 가라지를 뽑아 내시고 알곡을 보존하시는 구원의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 앞에서 가장 안전한 기도는 ‘주님, 저 사람이 가라지인지 보여 주십시오’가 아니라 ‘주님, 제 안에서 주님의 씨와 함께 자라고 있는 가라지를 보게 하시고, 그것이 제 생명이 되기 전에 분리하여 주십시오’일 것입니다.

 

이제 강의는 마지막 ‘그물 비유’로 나아가면서 마태복음 13장 전체를 결론짓습니다. 그물 안에는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가 함께 들어오고, 마지막에 분리가 이루어집니다. 강사는 이를 다시 14만 4천과 666, 천국에 들어갈 사람과 버려질 사람의 최종 분리로 읽습니다. 다음 7강 6부에서는 이 그물 비유를 중심으로 ‘교회 안에 들어왔다’는 것과 ‘천국적 생명을 가진다’는 것의 차이, 마지막 심판의 실제 의미, 그리고 마태복음 13장 전체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어떻게 종합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7강 6부

그물 비유와 ‘추수’ : 교회 안에 모였다는 것과 천국적 생명을 가진다는 것

가라지 비유에서 선과 악이 한 밭에서 함께 자라다가 추수 때 분리되는 모습을 보았다면, 이제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의 마지막 비유인 ‘그물 비유’로 들어갑니다. 강사 자신도 이 비유를 ‘종합 정리’라고 부릅니다.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는 말씀을 읽은 뒤, 이 그물 비유는 앞의 추수 비유와 같은 원리이며 ‘천국 건설 사업의 결론적 진리’, 곧 종말론적인 진리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씨 뿌리는 비유에서 시작한 마태복음 13장 전체가 여기서 하나의 결론을 얻습니다. 씨가 뿌려지고, 성장하고, 열매를 맺으며, 마지막에는 그 열매의 질이 드러나 분리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강사의 해석은 매우 선명합니다. ‘바다’는 세상이고, ‘물고기’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물’은 교회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교회가 시작되어 세상의 영혼들을 복음으로 모으기 시작했고, 그 그물이 가득 찰 때까지가 ‘교회 시대’이며, 세상 끝에 그물을 걷어 올려 그 안의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를 구별한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전도자들과 선교사들의 헌신을 그물을 던져 영혼을 모으는 활동으로 보고, 오순절에서 마지막 종말까지를 하나의 ‘그물 치는 기간’으로 이해합니다.

 

먼저 이 해석 안에서 귀하게 보아야 할 것은 ‘교회의 존재 이유’를 영혼의 구원과 연결한다는 점입니다. 교회는 자기 조직을 보존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 말씀을 전하고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사도 바울, 리빙스턴, 허드슨 테일러, 그리고 조선에 와서 복음을 전했던 여러 선교사들의 헌신을 언급하면서, 이런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 그물이 넓게 펼쳐졌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외적 사명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존중할 만한 강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들어가면 ‘그물=교회’라는 설명을 조금 더 깊게 볼 수 있습니다. 자연계의 교회 조직 안에 들어왔다는 것과 천국적 생명을 가진다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그물에는 ‘각종 물고기’가 함께 들어옵니다. 좋은 물고기만 들어오는 특별한 그물이 아닙니다. 그물 안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사람이 말씀과 교리와 예배와 신앙 공동체의 영향권 안에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그의 내적 사랑을 천국적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자동으로 거듭난 것도 아니고, 교회 등록을 했다고 곧 천국적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목사나 장로가 되었다고 해서 내적 상태까지 선해졌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반대로 교회의 외적 경계 밖에 있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내면에 선과 진리가 전혀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교회의 참된 본질은 주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사는 선과 진리의 삶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물 비유는 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심하지 못하게 합니다. ‘나는 그물 안에 있는가?’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나는 어떤 물고기가 되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외적 교회는 사람을 말씀과 예배와 성례의 질서 안으로 모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랑과 삶으로 만들 것인가는 결국 각 사람의 자유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그물은 모으지만 거듭남은 사람의 내면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점에서 씨 뿌리는 비유와 그물 비유가 정확히 연결됩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는 같은 씨가 여러 밭에 떨어졌습니다. 말씀 자체는 동일했지만 받아들이는 마음에 따라 결과가 달랐습니다. 그물 비유에서는 같은 그물 안으로 여러 물고기가 들어옵니다. 같은 교회에 있고 같은 말씀을 듣지만 영적 생명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처음과 마지막 비유가 서로를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강사는 그물이 가득 찬 뒤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를 골라내는 것을 앞의 알곡과 가라지의 추수와 같은 원리로 봅니다. ‘알곡은 모아 곡간에,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라는 구조가 그물에서도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의 후반에서 다시 마태복음 13장의 일곱 비유를 종합하면서, 좋은 밭이 되고 영적으로 성장하며 누룩처럼 전체가 변화되고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과정과 함께, 가라지와 좋은 물고기·나쁜 물고기의 추수를 하나의 큰 틀로 다시 정리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분리’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새로 만들어 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미 형성된 상태를 드러내고 서로 다른 것을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알곡을 그날 갑자기 알곡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물고기를 그날 갑자기 좋거나 나쁘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그동안 형성되어 온 생명의 질이 마지막에 분명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사후 인간의 상태를 설명하는 방식과 잘 맞습니다. 사람은 죽은 뒤 완전히 다른 존재로 갑자기 바뀌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형성한 자신의 내적 사랑을 가지고 영계에 들어갑니다. 처음에는 지상에서 익숙했던 외적 태도와 사회적 습관이 어느 정도 남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외적인 것이 벗겨지고 그 사람의 실제 지배적 사랑이 드러납니다. 그렇게 선을 사랑한 사람은 선과 같은 이들에게, 악을 사랑한 사람은 악과 같은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심판’은 주님께서 어느 날 사람에게 전혀 낯선 판정을 외부에서 부과하시는 일이라기보다, 그 사람의 내적 생명이 드러나는 일입니다. 그물에서 물고기를 꺼내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누는 것은 하나님이 자의적으로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각자가 자유롭게 형성한 사랑의 질에 따라 그와 맞는 상태가 분리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심판에 대한 공포를 약화시키기 위한 설명이 아닙니다. 오히려 심판을 훨씬 더 현실적으로 만듭니다. 만일 심판이 먼 미래에 하나님께서 갑자기 내리시는 판결이라면 사람은 그날만 준비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사랑하고 선택하고 반복하는 것이 곧 내 영원한 생명을 만들어 간다면, 오늘의 작은 선택 하나가 이미 심판과 연결됩니다.

 

내가 어떤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반복하면 거짓이 점점 내 성품이 되고, 미움을 붙들고 살면 미움이 내 생명에 깊이 들어옵니다. 반대로 손해가 있어도 진실을 선택하고, 복수할 수 있어도 악을 거부하고, 자기 공로보다 주님을 높이는 선택을 반복하면 선이 점차 내 생명의 방향이 됩니다. 이것이 추수를 준비하는 실제 삶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를 이해하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강사는 ‘그물을 처음 칠 때부터 물고기가 가득 찰 때까지’를 교회 시대로 보고, 세상 끝에 그물이 걷히며 추수가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강사의 문자적·역사적 종말론의 중심 구조입니다. 오순절 이후 일정한 교회 시대가 이어지고, 미래의 지상 재림과 종말적 사건을 통해 그 교회 시대가 끝난다는 것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시대의 끝’은 자연계의 역사가 완전히 멈추는 날이라기보다 하나의 교회가 선과 진리를 상실하여 더 이상 참된 교회로 기능할 수 없게 되는 마지막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때 마지막 심판이 영계에서 이루어지고 새로운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래서 ‘끝’은 모든 것의 소멸이 아니라 한 영적 질서의 완성과 새로운 질서의 시작입니다.

 

이 차이는 상당히 큽니다. 강사의 독법에서는 ‘언제 그물이 가득 차는가?’, ‘언제 교회 시대가 끝나는가?’, ‘그 다음 어떤 종말 사건이 일어나는가?’라는 역사적 시간표가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독법에서는 ‘교회가 언제 내적으로 선과 진리를 잃었는가?’, ‘말씀의 참된 의미가 언제 가려졌는가?’, ‘주님께서 새 교회를 어떻게 일으키시는가?’가 더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전자는 외적 역사에 초점을 두고, 후자는 영적 상태에 초점을 둡니다.

 

그렇다고 강사의 종말론적 긴장 자체를 무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언젠가 분리가 있다’, ‘지금의 삶이 영원한 결과와 연결된다’, ‘신앙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경고는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긴장을 없애기보다 방향을 조금 바꿉니다. ‘종말의 날짜를 얼마나 정확히 알고 있는가?’에서 ‘오늘 내 생명이 어떤 방향으로 형성되고 있는가?’로 옮기는 것입니다.

 

또한 그물 안의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의 구별은 교회의 외적 규모를 보는 눈도 바꾸어 줍니다. 교회에 사람이 많이 모였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천국의 성장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물 안에 물고기가 많아졌다는 것과 좋은 물고기가 많아졌다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참된 성장은 숫자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선과 진리 가운데 살아가는가에서 드러납니다.

 

이것은 목회와 선교를 평가하는 데에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모았는가보다, 그 사람들에게 주님의 진리가 얼마나 생명이 되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전도는 사람을 단순히 조직 안으로 이동시키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로 인도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을 자기에게 붙잡아 두기 위한 그물이 아니라 주님께 인도하는 도구입니다. 이 차이는 작지 않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에게 교회의 교리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교리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기 위해 존재합니다. 진리를 알고 그것에 따라 선을 행함으로써 사람이 주님과 결합하도록 돕는 것이 교리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자기 교리의 정확성만을 자랑하면서 체어리티가 사라진다면, 외적으로는 매우 견고한 그물처럼 보여도 그 안에서 실제 천국적 생명이 형성되고 있는지는 다시 물어야 합니다.

 

여기서 앞서 다룬 ‘14만 4천과 666’의 문제가 다시 연결됩니다. 강사의 구조에서는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이 계시록을 해석하기 위한 준비이며, 특히 14만 4천과 666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강사는 14만 4천을 최고의 알곡, 666을 가장 악한 쭉정이와 연결하고, 그물 비유를 이 둘이 마지막에 분리되는 결론적 장면으로 봅니다. 이 연결은 강의 전체에서 매우 일관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여기에서 숫자 중심의 구도를 ‘사랑의 질’ 중심으로 옮깁니다. 14만 4천과 666을 사람에게 붙이는 영적 등급표처럼 보지 않습니다. 14만 4천은 주님에게 속한 선과 진리의 충만한 상태와 전체를, 666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시키는 왜곡된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그물에서 마지막에 드러나는 것은 ‘누가 특별한 숫자 집단에 속했는가’보다 ‘그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살아 있는 생명이 되었는가’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마태복음 13장 전체를 가장 깊게 하나로 묶는 질문일 수 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는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보았습니다. 겨자씨에서는 ‘그 진리가 얼마나 자라고 쓰임이 되는가’를 보았습니다. 누룩에서는 ‘그 진리가 삶 전체에 얼마나 스며드는가’를 보았습니다. 진주와 보화에서는 ‘무엇을 가장 귀하게 사랑하는가’를 보았습니다. 가라지에서는 ‘거짓과 악이 어떻게 함께 자라 마침내 자기 정체를 드러내는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그물에서는 ‘결국 어떤 생명이 형성되었는가’가 드러납니다.

 

이렇게 보면 마태복음 13장은 하나의 긴 거듭남의 이야기처럼 읽을 수도 있습니다. 말씀의 씨가 인간에게 들어옵니다. 처음에는 여러 장애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다루시며 좋은 밭을 만드십니다. 생명은 겨자씨처럼 자라고 누룩처럼 안으로 퍼집니다. 사람의 가치관이 바뀌어 주님과 주님의 나라가 값진 진주와 보화가 됩니다. 동시에 악과 거짓도 드러나 가라지와 구별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실제 형성된 사랑과 생명의 질이 드러납니다.

 

여기서 한 가지 꼭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물 비유를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말씀으로 읽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 사람은 좋은 물고기, 저 사람은 나쁜 물고기’라고 분류하기 시작하면, 말씀의 빛이 곧바로 밖을 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을 주신 첫 목적은 언제나 우리의 거듭남입니다. ‘나는 교회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으로 안심하고 있지는 않은가?’, ‘진리를 실제로 살아내고 있는가?’, ‘내 삶에서 가장 지배적인 사랑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먼저입니다.

 

또한 이 비유는 다른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을 너무 쉽게 ‘그물 밖’ 또는 ‘나쁜 물고기’로 보는 태도에도 제동을 겁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교회 밖에서도 자기 종교 안에서 아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며 선을 사랑한 사람은 사후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 기독교 안에 있으면서 악을 사랑하면 교회 소속 자체가 그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보시는 ‘좋은 물고기’의 기준은 인간이 붙인 종교 명칭보다 훨씬 깊습니다. 그 사람이 실제로 선을 사랑했는가, 아는 진리에 따라 살았는가, 주님에게서 오는 더 밝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인가를 보십니다.

 

이것은 전도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전도의 목적을 정화합니다. 다른 사람을 ‘우리 집단’으로 끌어오기보다 더 밝은 진리를 나누고, 그 사람이 주님과 더 깊이 결합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진리는 선을 위한 것이고 교회는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강사가 선교사들의 희생을 언급한 부분도 이런 관점에서 더욱 귀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단지 교인 수를 늘리기 위해 먼 나라로 간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걸고 자신이 귀하게 여긴 복음을 전하려 했다는 사실에는 분명 숭고한 사랑과 헌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헌신을 가볍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 전달의 최종 목적이 무엇인가를 더 분명히 합니다. 진리가 사람 안에서 선이 되고 체어리티가 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사의 전체 구조에서 보면, 이 그물 비유를 끝으로 ‘기본진리’의 한 큰 부분이 사실상 마무리됩니다. 강사도 뒤에서 다시 씨 뿌리는 비유에서 그물 비유까지를 요약하며 ‘좋은 밭이 되고, 영적으로 성장하고, 누룩처럼 내면 전체가 변화되고, 진주와 보화처럼 하나님의 생명을 얻으며, 가라지와 좋은·나쁜 물고기가 마지막에 추수된다’는 식으로 되짚습니다. 따라서 이 그물은 마태복음 13장 해설의 마지막 비유일 뿐 아니라, 이후 본격적인 요한계시록 강해로 넘어가기 위한 문이기도 합니다.

 

이 전환은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을 가지고 14만 4천과 666, 추수, 마지막 때의 개념을 미리 정돈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바로 그 틀을 가지고 요한계시록을 읽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나오는 계시록 해설에서는 ‘핵심진리’의 종말론적 전제가 훨씬 더 직접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14만 4천을 실제 제한된 수의 ‘교회 시대 이긴 자’로 보는지, 대환난과 휴거를 어떻게 배열하는지, 새 예루살렘을 어떤 성도 집단과 연결하는지 등이 본격적으로 나타납니다. 실제 강의 후반에는 14만 4천이 모두 인쳐지면 교회 시대가 끝나고 대환난이 시작된다는 매우 구체적인 시간표가 제시됩니다.

 

따라서 이후 해설에서는 지금까지보다 더욱 세심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는 주님의 말씀 자체이고, 그 안에는 속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근거로 만들어 낸 하나의 종말론적 시간표는 말씀 자체와 구별해야 합니다. ‘핵심진리’의 해석은 존중하여 정확히 따라가되, 그것이 곧 말씀의 아르카나라고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밝힘’과 ‘계시록 해설’에서는 같은 숫자와 장면들이 어떤 영적 상태와 교회의 변화를 표상하는지 차분히 비추면 됩니다.

 

특히 앞으로는 ‘문자 그대로인가, 속뜻인가’라는 단순한 양자택일보다 ‘문자는 무엇을 담는 그릇인가?’라는 질문이 중요하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문자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자 안에 속뜻이 있고, 그 문자를 통하여 영적·천적 의미가 연결된다고 봅니다. 문제는 문자에서 멈춰 그 안의 모든 자연적 이미지와 숫자와 장소와 사건을 미래의 물리적 사건으로만 읽어 버리는 데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 그물 비유는 이후 계시록을 읽기 전에 매우 좋은 기준 하나를 제공합니다. ‘그물’, ‘바다’, ‘물고기’, ‘물가’, ‘좋은 것’, ‘못된 것’, ‘천사’, ‘불’이라는 자연적 이미지들이 모두 단순한 미래 사건의 소품만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영적 실재를 표현하는 자연적 그릇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이미 그러하다면, 상징과 수와 환상이 훨씬 더 밀집된 요한계시록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7강 6부의 마지막에서 이 질문을 남겨 두고 싶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천사와 말과 짐승과 별과 수와 성과 전쟁은 과연 장차 자연계에 그대로 나타날 사건들을 미리 찍어 놓은 사진일까요, 아니면 주님께서 자연적 형상들을 통하여 영적인 교회의 상태와 천국과 지옥의 실재를 보여 주시는 말씀일까요?’ 이제부터 두 독법이 본격적으로 마주하게 됩니다.

 

7강 6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물에 들어왔다는 것은 외적으로 교회의 영향 안에 들어왔음을 보여 줄 수 있지만, 마지막에 드러나는 것은 교회 소속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말씀의 진리와 선을 받아 어떤 사랑의 생명을 형성했는가이며, 심판은 바로 그 내적 생명의 질이 드러나 서로 같은 것끼리 분리되는 영적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3장의 결론은 ‘교회 안에 있으라’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깊은 결론은 ‘교회 안에서 주님의 말씀이 네 생명이 되게 하라’입니다. 좋은 밭이 되고, 작은 씨가 자라며, 누룩처럼 삶 전체가 변화되고, 값진 진주를 발견하여 사랑의 질서가 바뀌고, 자기 안의 가라지가 분리되어 마침내 천국적 생명이 형성되는 것, 그것이 이 모든 비유가 향하는 실제적인 방향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제 7강 7부부터는 본격적으로 ‘요한계시록 강해를 위한 기초적 견해들’로 넘어가겠습니다. 이 지점부터는 ‘핵심진리’의 문자적 종말론과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속뜻 해석 사이의 차이가 훨씬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므로, 이전보다 더 조심스럽게 ‘먼저 강사의 논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다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비추는’ 방식으로 이어가겠습니다.

 

 

7강 7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 요한계시록을 읽기 전에 무엇을 먼저 보아야 하는가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을 모두 살펴본 강의는 이제 본격적으로 ‘제2부 요한계시록 강해’로 넘어갑니다. 강사는 앞선 기본진리와 마태복음 13장 비유 해설이 바로 이 요한계시록을 읽기 위한 준비였다고 봅니다. 특히 그에게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 것인가’, ‘어떤 사건들이 어떤 시간적 순서로 진행될 것인가’를 알려 주는 종말론의 종합적인 책이며, 그 핵심을 풀기 위해서는 14만 4천과 666이라는 두 숫자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전제가 이미 앞 강의에서 세워졌습니다. 따라서 지금부터의 계시록 해설은 단순히 본문 한 절씩을 읽는 작업이 아니라, 지금까지 강사가 구축해 온 ‘교회 시대-이긴 자-14만 4천-대환난-휴거-천년왕국’이라는 전체 구조를 실제 계시록 본문 위에 적용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의는 요한계시록 1장 1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에서 출발합니다. 강사는 이 표현을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마지막 때 일어날 일을 주셨고, 예수께서 그것을 천사를 통해 밧모섬의 사도 요한에게 보여 주셨으며, 요한은 다시 교회와 성도들에게 전한다는 계시의 전달 구조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는 표현에서 ‘반드시’는 이 계시가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한다고 설명합니다. 사도 요한에 대해서는 단순한 기록자가 아니라 매우 신실한 제자이며 이미 ‘이긴 자’의 상태를 지나 ‘완덕의 경지’로 나아가던 사람으로 높게 평가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서 첫 문장,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오히려 계시록 전체를 푸는 가장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무엇보다 ‘적그리스도의 계시’도 아니고 ‘대환난의 계시’도 아니며 ‘세계 종말의 계시’도 아닙니다. 그 첫 이름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따라서 이 책의 중심은 미래의 재난 목록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누구이신지, 주님의 신성이 교회 안에서 어떻게 계시되고, 그 진리를 거부하거나 받아들이는 교회의 상태가 어떻게 드러나며, 마침내 주님께서 새 교회를 어떻게 세우시는가에 있습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계시록 전체를 읽는 방향을 바꿉니다. 사람은 계시록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언제 전쟁이 나는가?’, ‘누가 적그리스도인가?’, ‘666은 누구인가?’, ‘휴거는 언제인가?’를 묻기 쉽습니다. 강의도 상당 부분 이런 시간적·역사적 질문을 중심에 놓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보다 먼저 ‘이 모든 말씀 속에서 주님이 어떻게 계시되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계시록의 궁극적인 주제는 공포가 아니라 주님이며, 파괴가 아니라 구원이고, 세상의 종말 그 자체가 아니라 옛 교회의 마지막과 새 교회의 시작입니다.

 

강사가 요한계시록을 ‘마지막 때의 비밀’과 ‘마지막 때의 중요한 시간표’가 체계적으로 정돈된 책이라고 이해하는 것도 이 강의 전체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이것은 한국 개신교 종말론에서 익숙한 독법과도 상당히 닿아 있습니다. 여러 장면을 미래 역사에서 일어날 사건들로 보고, 그것들을 시간 순서대로 배열하여 하나의 종말론적 시간표를 구성하는 방식입니다. 계시록 6장의 인, 7장의 인 맞은 자, 나팔 심판, 대환난, 휴거, 재림, 천년왕국 등을 서로 연결하여 ‘언제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밝히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접근과 상당히 다른 길을 갑니다. 계시록은 분명 장래의 일을 다루지만 그 ‘장래’는 자연계의 정치적·군사적 사건을 미리 암호화한 달력이라기보다, 기독교회가 내적으로 쇠퇴하여 마지막에 이르고 마지막 심판을 거친 뒤 새 예루살렘으로 표상되는 새 교회가 세워지는 영적 과정입니다. 계시록의 말, 별, 인, 나팔, 짐승, 용, 바벨론, 전쟁, 천년, 새 예루살렘은 모두 실제 말씀의 형상들이지만, 그 안에 연속적인 속뜻이 있으며 그 속뜻은 교회의 선과 진리, 신앙과 체어리티, 천국과 지옥의 상태를 다룹니다.

 

그렇다고 문자적 의미를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문자는 속뜻을 담는 기초이자 그릇입니다. 문자 없이는 속뜻도 인간에게 전달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문자를 문자 그대로 미래의 자연적 사건으로만 고정할 때입니다. 예를 들어 ‘별이 땅에 떨어진다’는 말씀을 실제 천체가 지구에 충돌하는 장면으로만 읽으면, 말씀에서 ‘별’이 영적 지식과 선과 진리에 대한 인식을 나타내는 내적 의미가 가려질 수 있습니다. 계시록이 환상으로 기록된 이유 자체가 자연적 형상 속에 영적 실재를 담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강의가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영계에 대한 지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하는 대목은 매우 눈에 띕니다. 다른 강의 자료에서도 강사는 계시록에 영계에 관한 내용들이 들어 있으며, 영계의 환경과 사건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계시록을 바르게 해석하기 어렵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접점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요한이 자연적 육안으로만 장면들을 본 것이 아니라 영이 열려 영계의 실제 표상적 장면들을 보았다고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접점에서 두 해석은 다시 갈라집니다. ‘영계를 알아야 한다’는 전제는 비슷하지만, 그 영계에서 본 장면들을 어떻게 읽느냐가 다릅니다. 강의는 상당수 장면을 다시 자연계에서 일어날 미래 사건의 예고와 연결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요한이 영계에서 본 장면 자체가 교회의 영적 상태를 표상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다시 말하면 영계의 장면을 본 뒤 그것을 다시 지상 정치사의 암호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장면 자체가 신적 진리를 표상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요한계시록의 독특한 언어가 조금 자연스러워집니다.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고, 해와 달이 빛을 잃으며, 용이 여자를 쫓고, 바다에서 짐승이 올라오고, 천사가 큰 쇠사슬로 용을 묶고,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 성이 내려옵니다. 이것을 모두 자연계에서 동일한 모습으로 일어날 사건의 예고라고 보면 수많은 난점이 생깁니다. 그러나 영계는 자연적 형상이 영적 상태에 따라 즉시 나타나는 세계라는 사실을 알면, 이런 환상은 오히려 영적 실재를 표현하는 매우 정확한 언어가 됩니다.

 

예를 들어 천국에서 ‘빛’은 단순한 광선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에 상응하고, ‘열’은 신적 사랑에 상응합니다. ‘옷’은 사람이 가진 진리와 그 진리로 형성된 외적 상태를, ‘성’은 교리 체계를, ‘성전’은 주님의 신적 인성과 천국과 교회를, ‘산’은 사랑을, ‘바다’는 보다 외적이고 자연적인 지식의 영역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계시록의 장면은 마치 그림으로 된 신학처럼 읽힐 수 있습니다. 각각의 형상이 서로 상응하면서 하나의 연속적인 영적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르카나’와도 연결됩니다. 요한계시록은 스베덴보리가 명백히 말씀의 속뜻이 있는 성경에 포함시키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을 읽을 때 단어 하나와 숫자 하나, 배열과 순서까지도 함부로 지나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바울 서신을 깊이 읽을 때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사도들의 서신에서는 깊은 신학적 교훈과 영적 적용을 얻을 수 있지만, 각 단어가 연속적인 상응에 따라 천국적·영적 의미를 담고 있는 아르카나의 말씀은 아닙니다. 반면 계시록은 바로 그러한 말씀입니다. 이 때문에 앞으로의 해설에서는 강사의 적용만을 검토하기보다 실제 ‘계시록 밝힘’과 ‘계시록 해설’의 내적 의미를 훨씬 적극적으로 비추는 것이 적절하겠습니다.

 

강사는 1장 1절의 전달 구조에서 ‘하나님 → 예수 그리스도 → 천사 → 요한 → 교회와 성도’라는 순서를 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도 삼위일체 이해와 관련하여 중요한 보완이 생깁니다. 이 표현을 하나님 아버지라는 한 신적 인격이 다른 신적 인격인 예수에게 정보를 넘겨주는 장면처럼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세 신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신성 자체, 신적 인성,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신적 활동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라는 말씀도 영원부터 서로 분리되어 있던 두 신적 인격 사이의 정보 전달이라기보다, 주님의 신성 자체가 신적 인성을 통하여 계시되는 질서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문제는 요한계시록 1장을 읽다 보면 곧 매우 중요해집니다.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시작하지만 뒤로 가면 요한이 본 ‘인자 같은 이’의 모습이 구약에서 여호와께 사용되던 표현들과 놀랍게 겹칩니다. ‘처음이요 마지막’, ‘알파와 오메가’, ‘전능한 자’라는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주님론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계시록의 주님은 아버지 곁에 있는 두 번째 신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신성이 당신의 신적 인성 안에서 완전히 나타나신 한 분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단순히 ‘예수께서 알려 주신 미래 정보’라는 뜻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누구이신가가 드러나는 계시’라고도 읽을 수 있습니다. 영어의 ‘Revelation of Jesus Christ’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라는 두 방향을 함께 품을 수 있는 것처럼, 말씀 전체의 흐름을 보면 두 의미는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계시하시는 내용의 중심이 결국 주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 관점은 계시록을 읽는 정서 자체를 바꿉니다. 요한계시록을 펼칠 때 ‘무서운 일이 얼마나 일어날까?’라는 두려움보다 ‘주님께서 당신 자신과 교회의 상태를 어떻게 드러내시는가?’라는 기대가 앞설 수 있습니다. 일곱 인과 나팔과 재앙조차 공포를 위한 장면이라기보다 선과 진리를 파괴한 교회의 내적 상태를 드러내는 신적 진리의 빛입니다. 빛이 어두움을 드러내는 것은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강사가 ‘반드시 속히 될 일’을 미래 사건의 확실성과 임박성으로 읽는 것도 자연스러운 문자적 독법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계시록을 2천 년 가까이 읽어 온 독자라면 누구나 느끼는 질문이 있습니다. ‘속히’라면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가 하는 것입니다. 문자적 시간표로만 읽을수록 이 표현은 어려워집니다. 반면 말씀의 영적 의미에서 ‘속히’는 단순한 달력상의 짧은 기간만을 뜻하지 않고 신적 질서 안에서 반드시 이루어질 것, 그리고 상태가 준비될 때 확실하게 일어날 것을 나타내는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말씀의 속뜻은 특정 미래 세대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이 오직 역사 최후의 몇 년 동안 살아갈 사람들에게만 직접 해당되는 책이라면 지난 2천 년 동안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에게는 주변적인 책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계시록이 교회의 영적 상태와 인간 안에서 벌어지는 선과 악의 싸움까지 품고 있다면 모든 시대의 독자에게 현재적인 말씀이 됩니다. ‘바벨론’은 단지 미래 어느 국가나 종교조직만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이용해 지배하려는 사랑을 경고하고, ‘용’은 단지 미래에 출현할 괴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세 분으로 나누고 신앙을 삶에서 분리시키는 거짓과 싸우는 교회의 문제를 비춥니다. ‘새 예루살렘’ 역시 미래 어느 날 하늘에서 물리적 도시가 내려오는 것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우시는 새 교회와 그 안의 새 교리를 보여 줍니다.

 

바로 이 때문에 ‘시간표’와 ‘상태’의 차이를 앞으로 계속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계시록을 주로 시간의 순서로 읽습니다. 무엇이 먼저, 무엇이 다음, 어느 사건 뒤에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묻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물론 계시록에도 하나의 연속적인 질서가 있다고 보지만, 그 질서는 단순한 역사적 연표보다 영적 상태들의 연속입니다. 한 교회가 어떻게 진리를 잃고, 신앙과 체어리티가 어떻게 분리되며, 외적인 경건 아래 악이 어떻게 숨고, 마지막 심판을 통해 그것들이 분리되고, 새 교회가 어떻게 주님에게서 내려오는가 하는 상태의 진행입니다.

 

그렇다고 강사의 ‘시간적 질서를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 자체를 가볍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아무렇게나 주제별로 해체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중요한 감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배열은 우연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배열의 의미를 자연계 역사에서만 찾을 것인지, 말씀 자체가 보여 주는 영적 상태의 질서에서 찾을 것인지가 관건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후자에 더 깊은 무게를 둡니다.

 

사도 요한을 ‘이긴 자’와 ‘완덕’의 사람으로 보는 강사의 높은 평가도 흥미롭습니다. 요한이 주님과 특별히 가까웠고, 밧모섬에서 영이 열려 계시를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가 어느 영적 등급에 도달했는지를 외부에서 확정하는 것보다, 왜 바로 요한을 통하여 이 말씀이 기록되었는가를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요한’은 말씀에서 선한 행실 또는 체어리티와 관련된 교회의 모습을 표상하는 중요한 인물로 나타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최종적으로 회복되는 새 교회의 계시가 요한을 통하여 주어진 것도 깊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5강과 6강에서 계속 보아 온 한 주제가 다시 돌아옵니다. ‘진리가 생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사의 계시록 해설이 아무리 문자적 종말론과 연결되어 있다 해도 그 궁극적인 목적은 단순한 미래 예측에 있지 않습니다. 마지막 때를 알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실천적 긴장이 강의 처음부터 존재합니다. 이것은 충분히 살릴 만합니다. 종말론이 호기심과 공포만 생산하고 사람의 사랑과 삶을 바꾸지 못한다면, 그 종말론은 신앙의 본래 목적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 더욱 직접적인 질문을 붙입니다. ‘계시록을 얼마나 정확히 해석했는가?’보다 ‘계시록을 통해 주님의 진리를 받아 내 안의 무엇이 달라졌는가?’입니다. 일곱 교회를 공부하면서 다른 교회의 문제를 분석하는 데 그칠 것인지, 내 안의 처음 사랑이 식은 에베소 상태와 이름은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사데 상태와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상태를 볼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용과 짐승을 연구하면서 세상의 특정 인물을 찾을 것인지, 내 신앙 안에서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과 자기 지성을 신성시하는 거짓을 발견할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계시록은 먼 미래를 들여다보는 망원경이면서 동시에 지금 자기 내면을 보는 거울이 됩니다. 아니,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오히려 거울의 성격이 훨씬 강합니다. 계시록에 나타나는 교회의 마지막 상태가 한 사람의 영적 생명에서도 반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알고도 살지 않으면 진리가 점차 생명을 잃고, 사랑과 분리된 신앙이 중심이 되며, 외적 경건만 남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 상태를 심판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시는 것이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 역시 단지 세계 역사의 마지막 몇 년만을 가리키는 말로 남지 않습니다. 한 사람에게도 낡은 신앙 상태의 ‘마지막’이 있습니다. 자기 공로를 붙들던 상태가 끝나고 주님에게 모든 선을 돌리는 새로운 상태가 시작될 수 있으며, 교리를 사랑보다 앞세우던 상태가 끝나고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결합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거대한 교회의 역사와 한 인간의 거듭남을 서로 상응하는 질서 안에서 함께 비춥니다.

 

따라서 7강 7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 14만 4천이나 666의 세부 해석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먼저 ‘계시록을 어떤 종류의 책으로 읽을 것인가’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강사는 ‘마지막 때 일어날 사건과 시간표를 밝히는 계시’라는 관점에서 출발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교회의 마지막 상태와 마지막 심판, 그리고 주님께서 세우실 새 교회를 자연적 형상과 상응으로 계시한 말씀’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합니다. 두 독법은 같은 계시록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출발점에서부터 상당히 다른 길을 걷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곧바로 대립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강사가 가지고 있는 ‘계시록을 삶과 분리하지 않으려는 긴장’, ‘주님의 재림을 실제로 기다리는 진지함’, ‘성도가 마지막까지 이겨야 한다는 요청’은 충분히 귀하게 받아들이면서, 스베덴보리가 열어 주는 속뜻을 통해 그 긴장을 외적 사건의 공포에서 내적 거듭남의 긴장으로 더 깊게 옮길 수 있습니다.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은 날짜를 기다리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주님의 신적 진리가 내 마음과 교회 안에 오시도록 준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재림 자체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두 번째 오심은 자연계의 구름을 타고 다시 육체로 내려오시는 동일한 방식의 재현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이 열림으로써 신적 진리가 새롭게 나타나는 오심입니다. ‘구름’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이며 ‘영광’은 그 안의 내적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을 속뜻으로 읽기 시작하는 바로 그 작업 자체가 재림의 본질과 깊이 연결됩니다. 계시록을 읽어 장차 주님이 언제 오실지 계산하는 것과, 그 말씀의 속뜻을 통해 지금 주님이 신적 진리로 오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재림을 바라보는 전혀 다른 두 방향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첫 문장은 갈수록 더 크게 들립니다. 계시록의 중심은 짐승도 아니고 666도 아니며, 대환난도 아닙니다. 어린양이신 주님입니다. 처음과 마지막이신 주님,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님, 교회들을 다니시는 주님, 마지막에 새 예루살렘의 빛과 성전이 되시는 주님입니다. 계시록을 제대로 읽을수록 두려움보다 주님이 더 크게 보여야 하고, 악의 세력보다 주님의 승리가 더 크게 보여야 하며, 미래의 사건보다 지금 주님과 결합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보여야 합니다.

 

7강 7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때의 사건을 알려 주는 책이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교회의 영적 상태를 계시하며, 그 환상과 숫자와 사건들은 말씀의 상응을 통하여 옛 교회의 종말과 마지막 심판, 그리고 주님께서 세우시는 새 교회의 출현을 보여 주는 신적 말씀입니다.’

 

이제 이 서론을 지나면 강의는 계시록 1장의 ‘인자 같은 이’의 환상과 곧이어 2장과 3장의 일곱 교회로 들어갑니다. 특히 강사는 일곱 교회 편지의 대상을 ‘그 교회의 목회자에게 해당하는 말씀’, ‘그 교회 안의 특정 성도들에게 해당하는 말씀’, ‘교회 시대 모든 성도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으로 구별해야 한다고 보며, 일곱 교회를 일곱 역사적 시대에 기계적으로 대응시키는 해석을 오히려 비판합니다. 이 부분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7강 8부에서는 바로 이 ‘일곱 교회’의 의미와 ‘이기는 자’, 그리고 스베덴보리에게 일곱 교회가 실제로 무엇을 표상하는지를 중심으로 이어가겠습니다.

 

 

7강 8부

일곱 교회와 ‘이기는 자’ : 교회를 나누는 일곱 시대인가, 인간과 교회의 일곱 영적 상태인가

이제 강의는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의 소아시아 일곱 교회로 들어갑니다. 강사는 먼저 일곱 교회 편지를 읽을 때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인가’를 구별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어떤 말씀은 그 교회의 ‘사자’, 곧 목회자에게 직접 해당하고, 어떤 말씀은 그 교회 안의 몇몇 특정 성도에게 해당하며, 마지막에 반복되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이라는 약속은 교회 시대의 모든 성도에게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머나·버가모·두아디라·사데·빌라델비아·라오디게아를 차례로 일곱 역사적 ‘교회 시대’에 대응시키는 흔한 해석에 대해서는 오히려 ‘상당히 곤란한 해석’이라고 말합니다. 각각의 말씀에는 분명한 대상이 있는데 그것을 모두 시대별 교회로 뭉뚱그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뒤에서는 강사의 문자적 종말론과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석이 크게 갈라지지만, 적어도 일곱 교회를 단순한 교회사 연대표로 읽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생각보다 중요한 접점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강사는 일곱 교회를 본문에 나오는 순서 그대로만 다루지 않고, 자신이 세운 ‘이기는 자’의 체계를 잘 정돈하기 위해 순서를 일부 바꾸어 설명하기도 합니다. 강사 자신도 ‘원래 계시록에는 이 순서로 되어 있지만 우리는 이긴 자들의 내용을 정돈하고 계시록을 쉽게 해석하기 위해 다른 순서로 살펴보겠다’고 밝힙니다. 이것은 말씀의 순서 자체를 속뜻의 질서로 보는 스베덴보리의 접근과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요한계시록은 단어만이 아니라 배열과 연속도 신적 질서에 속하기 때문에, 일곱 교회의 순서 역시 임의로 바꾸어도 같은 속뜻이 유지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강사의 재배열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설명하려는 ‘이기는 자의 축복’을 교육적으로 정리하기 위한 방식이지, 말씀 자체의 내적 순서를 밝히는 상응 해석이라고 볼 수는 없겠습니다.

 

그럼에도 강사의 관심이 ‘교회 시대를 맞추는 것’보다 ‘누가 이기는 자인가’를 밝히는 데 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강사는 일곱 교회 편지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이기는 자’라는 표현을 붙들고, 그렇다면 ‘무엇과 싸워 이긴다는 말인가?’를 묻습니다. 그 직전 강의에서도 사람 안의 육적인 애정과 욕망, 세상에 대한 욕심과 자랑, 그리고 그것을 자극하는 마귀의 역사를 영적 싸움의 대상으로 보고, 신앙인이 비록 이겼다가 지기도 하지만 회개하면서 계속 싸워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 ‘점진적으로 점진적으로’ 이겨 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앞 강들에서 계속 보아 온 ‘핵심진리’의 매우 중요한 장점이 다시 나타납니다. ‘이기는 자’를 어떤 교리적 정답을 가진 사람보다 실제로 악과 싸우는 사람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긴다’는 말은 거듭남의 핵심적인 언어입니다. 다만 싸움의 본질을 더욱 정교하게 보면,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마귀를 격파하여 영적 영웅이 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영적 시험에서 실제로 싸우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을 마치 자기 힘인 것처럼 받아 악과 거짓에 저항합니다. 인간에게 싸움이 실제 자기 싸움처럼 느껴져야 자유와 결합이 가능하지만, 승리의 모든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따라서 참된 ‘이기는 자’일수록 ‘내가 이겼다’는 공로의식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기게 하셨다’는 인식이 깊어집니다.

 

이것은 계시록 전체에서도 아주 중요한 원리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중심적 승리자는 인간이 아니라 어린양이신 주님입니다. 주님께서 지옥 전체를 이기셨기 때문에 인간도 그분 안에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기는 자’란 특별한 영적 능력으로 자기 자신을 완성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승리를 받아들여 자기 안의 악과 거짓에 끝까지 저항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인간의 시험은 주님의 시험과 승리에서 능력을 받습니다.

 

강사는 일곱 교회 각각의 편지를 매우 실제적인 대상으로 읽으려 합니다. 이를테면 사데 교회에서는 목회자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는 책망을 받는 한편, 그 교회 안에는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따로 있어 주님과 함께 흰옷을 입고 다니겠다는 약속을 받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한 교회의 지도자와 그 안의 모든 성도의 영적 상태를 동일시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관찰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교회의 간판과 지도자의 상태와 개별 성도의 내적 상태는 반드시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조금 더 넓혀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 조직이 외적으로 쇠퇴하고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 안에서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신이 아는 진리에 따라 선하게 사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교리가 비교적 바른 교회 안에서도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외적 소속만으로 한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정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것을 어떻게 살았는가입니다.

 

특히 사데 교회의 ‘흰옷’은 강사가 ‘행실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에게 주시는 축복’으로 이해하며, ‘이기는 자’에게도 같은 흰옷의 약속이 주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옷’은 사람이 입고 있는 진리, 더 정확히는 선을 둘러싸고 표현하는 진리를 나타냅니다. ‘흰색’은 빛에서 오는 진리의 순수함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흰옷을 입는다’는 것은 단순히 선행 점수가 높아 천국에서 흰색 예복을 지급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순수한 진리 안에 있게 된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실제 선과 결합되어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천국의 옷이 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외적인 ‘행실’만으로 흰옷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행실 안에 있는 사랑과 진리가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기 명예를 위해 매우 깨끗한 행실을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흰옷은 겉으로 흠 없는 도덕적 이미지를 뜻하기보다 주님의 진리가 사람의 선한 생명을 감싸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옷을 더럽힌다는 것도 단순히 몇 가지 도덕적 실수를 했다는 차원을 넘어, 받아들인 진리를 악한 삶으로 훼손하고 거짓과 결합시키는 것을 뜻할 수 있습니다.

 

강사는 일곱 교회에 주어진 약속들을 모아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으로 체계화합니다. 그의 강의에서는 이런 축복들을 여러 항목으로 정리하며, 생명나무의 열매,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음, 감추인 만나, 흰 돌과 새 이름,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 흰옷,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됨,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주님의 새 이름을 기록받음,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는 것 등을 서로 연결해 읽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궁극적으로 ‘교회 시대 이긴 자들’에게 주시는 약속으로 봅니다. 강의 후반에는 이 약속들을 종말론적 휴거와 대환난 면제에까지 연결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표현을 계시록 9장의 무저갱 황충의 해에서 면제되는 것, 나아가 대환난에 들어가지 않고 휴거되는 것과 연결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강사의 해석이 상당히 갈라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둘째 사망’은 미래 대환난의 특정 재앙에 노출되느냐 면제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사망, 곧 악과 거짓 안에 굳어져 주님과 천국의 생명으로부터 스스로 분리되는 상태와 관계됩니다. 따라서 ‘둘째 사망이 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연계에서 특정 재난을 피한다는 의미보다,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안에 있어 지옥적 사랑의 영원한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생명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천국 어딘가에 있는 초자연적인 과일나무에서 특정 자격을 얻은 사람들이 열매를 먹는다는 뜻에 머물지 않습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생명나무’는 주님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퍼셉션의 생명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한다’는 약속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을 자기 생명으로 받아 누리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도 ‘이기는 자’의 상급은 외부에서 덧붙여지는 경품 같은 것이 아니라 그가 주님과 결합하면서 실제로 들어가게 된 천국적 상태 자체입니다.

 

‘감추인 만나’도 같은 방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만나는 주님께서 인간에게 공급하시는 천국적 선과 생명을 표상합니다. ‘감추인’ 만나라고 하는 것은 자연적 감각에는 드러나지 않는 내적인 천국의 선, 주님과의 결합 가운데 경험되는 선의 기쁨을 생각하게 합니다. 따라서 이것 역시 ‘이기는 자’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는다는 뜻 이전에, 시험을 통과하여 주님과 결합한 사람에게 열리는 내적인 생명의 상태입니다.

 

‘흰 돌’과 ‘새 이름’ 역시 흥미롭습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존재의 질과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새 이름’은 천국에서 사용할 새로운 비밀 별명을 받는다는 뜻이기보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형성하신 새로운 영적 질, 곧 거듭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 상태는 실제로 그것을 받아 살아 본 사람 외에는 내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사랑의 기쁨은 사랑하는 사람만 알고, 선을 행하는 천국적 기쁨 역시 그 선을 사랑하는 사람만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한다’는 약속도 강사가 매우 중요하게 취급합니다. 그는 성도들이 하나하나 천국의 건축 재료처럼 모여 하나님의 성전이 완성되어 간다는 그림으로 설명합니다. 이 적용은 이해하기 쉽고 목회적으로 아름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상응적 의미를 더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 성전은 가장 깊게는 주님의 신적 인성을 표상하고, 그로부터 천국과 교회를 나타냅니다. 기둥은 그것을 받쳐 주고 굳건하게 하는 진리와 선의 힘을 생각하게 합니다. 따라서 ‘성전의 기둥이 된다’는 것은 천국 건축의 물리적 부품이 된다는 의미보다, 주님의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 가운데 굳게 서서 그것을 받들고 있는 상태라고 보는 편이 깊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강사의 종말론에서 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는 3장 10절의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를 빌라델비아 교회 사자 개인에게만 적용하면 문제가 생긴다고 봅니다. 그 사람은 약 1900년 전 사람인데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대환난에서 어떻게 면제받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델비아 교회 사자에게 주어진 약속은 사실 그를 하나의 ‘샘플’로 하여 교회 시대 전체의 ‘익은 열매’, 곧 이긴 자들에게 주어진 약속이며, 마지막 시대의 이긴 자들은 대환난에서 면제되어 휴거된다는 식으로 확대합니다. 이것은 강사의 계시록 시간표를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논리입니다.

 

이 논리는 강사의 체계 안에서는 일관성이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빌라델비아 사자에게 미래의 대환난 면제를 약속했다면 그 약속이 교회 시대 모든 이긴 자에게 확장되어야 하고, 그 가운데 종말에 살아 있는 이긴 자가 실제로 대환난 면제를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시험의 때’를 우선 미래의 몇 년짜리 세계적 대환난으로 고정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시간과 장소는 영적 상태를 담는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시험의 때에서 지킨다’는 것은 주님의 진리를 충실히 지킨 사람들이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거짓과 악이 강하게 일어날 때에도 주님의 보호 아래 보존된다는 내적 의미를 갖습니다.

 

그리고 그 보호는 반드시 자연적 고통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선한 사람들도 박해받고 고통받았습니다. 사도들과 순교자들은 외적 고난을 면제받지 않았습니다. 천국적 보호의 가장 깊은 의미는 외적 시련이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시련 가운데서도 영혼의 선과 진리가 파괴되지 않도록 주님께서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환난 면제=신체적·역사적 고난의 면제’라는 독법과 상당히 다른 방향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큰 환난’에 관한 강사의 해석도 같은 문제를 드러냅니다. 그는 초대교회 시대 두아디라의 영적 음행에 대한 경고를 미래 대환난과 연결하려면 역시 교회 시대 전체를 하나의 묶음으로 보아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빌라델비아의 충성된 상태에는 대환난 면제의 약속이, 두아디라의 영적 음행에는 대환난에 들어가게 된다는 경고가 교회 시대 전체의 성도들에게 적용된다고 봅니다. 이 해석 역시 강사의 큰 종말론 틀에서는 자연스럽지만, 스베덴보리에게 ‘환난’은 진리가 거짓에 의해 공격받고 선이 악에 의해 시험받는 영적 상태로 읽혀야 하므로 반드시 미래의 동일한 역사 사건에 모두 연결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오히려 강사의 매우 귀한 말 하나를 살려야겠습니다. 강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반복된 범죄를 보며 ‘욕할 게 하나도 없다. 그 모습이 내 모습이다’라는 취지로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곱 교회를 읽는 올바른 태도와도 잘 맞습니다. 에베소의 처음 사랑이 식은 것을 ‘저 교회의 문제’로 읽지 않고 내 안에서 사랑보다 교리와 수고가 앞서고 있지는 않은지 보는 것입니다. 두아디라의 음행을 다른 교파의 타락으로만 읽지 않고 내 안에서 주님 사랑이 다른 사랑들과 섞이고 있지는 않은지 보는 것입니다. 사데의 죽은 상태를 유명한 대형교회의 문제로만 보지 않고 내 신앙이 외적인 이름만 살아 있고 실제 사랑은 죽어 있지 않은지 묻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의 미지근함을 현대교회에만 적용하지 않고 내 안에서 진리를 알면서도 실제로는 편안함과 자기 만족을 더 사랑하는 상태를 살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일곱 교회 해석이 빛을 발합니다. 일곱 교회는 단순한 일곱 역사적 지역교회의 기록만도 아니고, 교회사 전체를 일곱 시대에 나눈 암호도 아닙니다. ‘일곱’은 말씀에서 충만함과 전체를 나타내므로, 이 교회들은 주님의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종류의 사람과 모든 영적 상태를 포괄적으로 나타냅니다. 즉 ‘에베소형 사람’, ‘서머나형 사람’이라는 심리 유형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인정하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는 여러 상태 전체가 일곱 교회를 통해 표상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곱 교회는 오늘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에베소처럼 진리를 분별하고 수고는 하지만 ‘처음 사랑’을 잃을 수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서머나처럼 외적으로 가난하고 시험을 받지만 내적으로 부요할 수 있습니다. 버가모처럼 진리를 붙들면서도 거짓과 악을 일부 허용할 수도 있고, 두아디라처럼 사랑과 선행이 있으면서도 잘못된 애정과 교리를 용납할 수도 있습니다. 사데처럼 외적인 신앙 이름은 살아 있지만 내면은 잠든 상태가 될 수도 있고, 빌라델비아처럼 작은 능력으로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굳게 서는 상태가 있을 수 있으며, 라오디게아처럼 자기 지혜와 자기 의로 부요하다고 여기면서 실제로는 영적으로 빈곤한 상태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일곱 교회가 매우 가까워집니다. 2천 년 전 소아시아 교회의 문제가 오늘 한 인간 안에서 되풀이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모든 상태에 정확히 맞는 말씀을 하십니다. 칭찬할 것은 칭찬하시고, 잘못된 것은 드러내시며, 회개를 촉구하시고, 끝에는 반드시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인간을 정죄하기보다 거듭나게 하시려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특히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반복은 주목할 만합니다. 편지는 각각 한 교회에 보내졌지만 결론은 ‘교회에게’가 아니라 복수형으로 ‘교회들에게’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 교회의 말씀이 다른 교회와 무관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강사가 ‘교회 시대 모든 성도에게 적용되는 말씀’이 있다고 보는 데에는 바로 이 반복이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더 나아가 각 교회가 교회 전체 안의 하나의 영적 상태를 나타내므로, 일곱 편지 전체가 모든 거듭나는 사람에게 필요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말 역시 자연적 청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서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인지하는 것보다 순종하여 받아들이는 것과 깊이 관련됩니다. 진리를 들었는데 삶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영적으로는 아직 충분히 들은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요청과 ‘이기는 자’라는 약속은 서로 연결됩니다. 진리를 참으로 듣는 사람은 그 진리가 자기 악과 충돌할 때 그것을 따라 싸우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듣는 것-싸우는 것-이기는 것-받는 것’이라는 하나의 질서가 보입니다. 먼저 주님의 진리를 듣습니다. 그 진리가 자기 안의 거짓과 악을 드러냅니다. 그때 시험과 싸움이 일어납니다. 주님을 의지하여 악과 거짓에 저항하면 진리가 선과 결합하면서 새로운 상태가 형성됩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상태 자체가 주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입니다. 생명나무, 감추인 만나, 흰옷, 새 이름, 성전의 기둥, 보좌는 서로 따로 떨어진 경품 목록이 아니라 주님과의 결합이 깊어질 때 사람에게 열리는 천국적 생명의 여러 측면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상급’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이기는 자가 생명나무를 받는 것은 전투에서 몇 승을 했기 때문에 상을 지급받는 방식이 아닙니다.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사랑 자체가 그의 ‘생명나무’가 됩니다. 순수한 진리를 받아 선과 결합했기 때문에 그 진리가 ‘흰옷’이 됩니다. 새로운 영적 상태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새 이름’을 얻습니다. 주님의 교회 안에서 진리와 선 가운데 굳건해졌기 때문에 ‘기둥’이 됩니다. 주님의 사랑과 지혜에 결합하여 주님의 통치, 곧 선으로부터 진리를 다스리는 질서에 참여하기 때문에 ‘보좌에 함께 앉는다’고 표현됩니다.

 

그러므로 이기는 자의 가장 깊은 특징은 ‘강한 사람’이 아니라 ‘결합된 사람’입니다. 자기 힘이 강해진 사람이 아니라 주님과 더 깊이 결합한 사람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이기는 자의 축복은 모두 주님과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주님이 생명이시고, 주님이 만나이시며, 주님이 성전이시고, 주님이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일곱 교회는 어떤 영적 엘리트를 가려내기 위한 선발시험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거듭남의 말씀입니다. 에베소에도 ‘이기는 자’가 나올 수 있고, 사데에도, 심지어 미지근한 라오디게아에도 회개하여 이기는 자가 나올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에게만 편지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교회 한가운데서 ‘회개하라’, ‘굳게 잡으라’, ‘죽도록 충성하라’, ‘열심을 내라’고 부르십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긴 자’는 처음부터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끝까지 거듭남의 길에 머문 사람입니다.

 

그래서 강사가 ‘지기도 하지만 회개하면서 계속 이기기를 추구해야 한다’, ‘포기해서는 안 된다’, ‘점진적으로 이기게 된다’고 말한 부분은 이번 일곱 교회 해설에서 특히 귀하게 들립니다. 이것은 ‘이긴 자’를 완전무결한 성화의 단계로만 보는 긴장을 어느 정도 풀어 줍니다. 실제 거듭남은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넘어졌을 때 악을 정당화하지 않고 다시 주님께 돌아오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마디를 더 보탤 수 있겠습니다. 사람이 주님께 가까워질수록 싸움이 끝난 영적 영웅처럼 자신을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더 깊이 압니다. 그래서 참된 승리는 proprium이 자기 승리를 자랑할 수 없는 승리입니다. 사람은 싸웠지만 주님께서 이기셨습니다. 사람이 선을 행했지만 선은 주님에게서 왔습니다. 바로 이것이 천국적 겸손입니다.

 

따라서 7강 8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일곱 교회는 일곱 개의 교회사 시대를 기계적으로 암호화한 목록이라기보다 주님의 교회와 한 인간의 거듭남 안에 나타날 수 있는 모든 영적 상태를 충만하게 보여 주며, ‘이기는 자’란 자기 힘으로 높은 영적 등급에 오른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 안의 악과 거짓에 주님의 능력으로 저항하여 선과 진리가 결합된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대목에서 강사의 해석과 스베덴보리가 의외로 만나는 한 지점을 다시 보고 싶습니다. 강사는 일곱 교회를 시대별 표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경계하고, 편지마다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인가’를 자세히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그 대상들이 어떤 영적 상태를 표상하는가’를 묻습니다. 하나는 본문의 구체성을 보존하고, 다른 하나는 그 구체성 안에서 보편적인 속뜻을 엽니다. 두 접근을 서둘러 적대시키기보다 이 접점에서부터 차분히 계시록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제 남은 7강 9부와 10부에서는 강사의 종말론 체계가 훨씬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특히 일곱 교회의 ‘이기는 자’ 약속이 ‘14만 4천’, 하나님의 ‘인’, 대환난 면제와 휴거, 그리고 계시록의 종말 시간표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실제 강의에서 강사는 계시록 7장의 인 맞은 14만 4천을 ‘교회 시대 이긴 자들’로 보고, 교회 시대 동안 그 수가 채워지며 그 뒤 대환난이 시작된다는 매우 구체적인 구조를 제시합니다. 7강 9부에서는 바로 이 ‘14만 4천과 하나님의 인’을 중심으로, 먼저 ‘핵심진리’의 논리를 충분히 따라간 뒤 스베덴보리에게 ‘인침’, ‘이스라엘 열두 지파’, ‘12×12×1000’, 그리고 ‘14만 4천’이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지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7강 9부

‘하나님의 인’과 14만 4천 : 특별한 성도 집단인가, 선과 진리가 충만하게 결합된 교회인가

이제 강의는 일곱 교회에 주어진 ‘이기는 자’의 약속에서 계시록 7장의 ‘인 맞은 자 14만 4천’으로 넘어갑니다. 여기에서 지금까지 흩어져 있던 강사의 종말론적 구조가 매우 선명하게 하나로 모입니다. 강사는 계시록 7장에 천국에 들어가는 두 부류의 성도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인을 맞은 14만 4천’, 곧 교회 시대 동안 만들어지는 ‘이긴 자들’이고, 두 번째는 ‘셀 수 없는 큰 무리’, 곧 대환난을 통과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들입니다. 그리고 땅의 사방 바람을 천사들이 붙잡고 있는 기간을 ‘교회 시대’로 보면서, 하나님의 종 14만 4천이 모두 인침 받을 때까지 대환난의 바람이 불지 못하도록 붙들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이것은 강사의 전체 계시록 해석에서 매우 중요한 열쇠입니다. 14만 4천은 단지 계시록 7장에 갑자기 등장하는 한 집단이 아닙니다. 앞서 마태복음 13장에서 좋은 밭에 떨어진 씨가 장성한 겨자나무가 되고, 누룩처럼 삶 전체가 변화되며, 값진 진주를 얻기 위해 자기 소유를 다 내려놓는 사람들, 그리고 일곱 교회 편지에서 ‘이기는 자’라고 불린 바로 그 사람들이 계시록 7장에서는 ‘인 맞은 종들’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등장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강사는 나중에 계시록 14장의 시온산 장면까지 연결하여, 이들의 이마에는 아버지의 이름과 어린양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것이 곧 하나님의 소유임을 표시하는 ‘도장’이라고 설명합니다.

 

강사는 이 ‘인’을 매우 실제적인 ‘도장’의 이미지로 풉니다. 인감도장을 문서에 찍으면 ‘이것은 내 것이다’, ‘내가 이것을 보증한다’는 뜻이 되듯, 하나님께서 사람의 이마에 당신의 인을 찍으신다는 것은 그 사람이 완전히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표시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인을 맞은 사람은 죄 문제가 해결되고, 광야 연단을 통과하여 ‘완전한 극상품의 포도 열매’처럼 된 사람이며, 교회 시대의 이긴 자라고 설명합니다. 강의에서는 ‘그 이마에도 하나님의 왕의 도장이 찍혀 있다’, ‘완전한 극상품의 포도 열매가 되었다’는 상당히 강한 표현까지 나옵니다. 이 언어에는 ‘핵심진리’의 성화론 전체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은 단순히 세례를 받았다는 표시도 아니고,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했다는 표시도 아니라, 연단과 성화를 통해 생명이 완성된 사람에게 찍히는 최종적인 하나님의 승인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인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영적 의미를 가집니다. 다만 여기서부터 두 해석이 상당히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친다’는 것은 어떤 제한된 숫자의 최고급 성도에게 하나님께서 최종 인증 도장을 찍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말씀에서 인은 무엇인가가 확정되고 구별되어 보존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특히 이마는 사람의 가장 중심적인 사랑, 곧 지배적 사랑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가장 깊은 사랑과 의지가 주님께 향해 있고, 주님의 선과 진리가 그의 생명에 받아들여져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이름’의 상응과도 연결됩니다. 말씀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존재의 질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이름과 어린양의 이름이 이마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천국에 가면 실제 이마에 글자가 새겨진다는 뜻보다, 주님의 신성과 신적 인성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상태가 그 사람의 내적 생명 자체에 새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인’은 외적 표지가 아니라 내적 사랑의 질입니다.

 

그렇다면 강사의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표현과 스베덴보리의 해석은 전혀 만날 수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 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진리를 받아들이며 살아갈수록 그는 실제로 주님의 것이 되어 갑니다. 다만 이것을 법적 소유권 이전처럼 생각하기보다 사랑의 결합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내 것’이라고 도장을 찍으시는 외적 승인보다, 사람의 의지와 이해성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면서 주님과 결합하는 상태가 핵심입니다.

 

이 차이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만일 ‘인을 맞았다’를 ‘나는 최종 합격했다’, ‘나는 이미 완성되었다’는 자기 의식으로 받아들이면, 오히려 proprium이 종교적 형태로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주님과 결합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기 완성을 자랑하기보다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가장 깊이 ‘인 맞은’ 사람일수록 ‘나는 특별한 사람이다’보다 ‘내 안의 선은 주님의 것이다’라는 인식이 강해질 것입니다.

 

이제 문제의 핵심인 ‘14만 4천’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강사는 이 숫자를 실제 정해진 숫자로 받아들입니다. 교회 시대 이긴 자들의 숫자가 14만 4천으로 예정되어 있으며, 그 숫자가 다 차면 교회 시대가 끝나고 대환난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실제 강의에서 ‘숫자가 14만 4천으로 예정돼 있습니다’라고 명시적으로 말하고, 이들이 시온산의 새 예루살렘에 있는 인 맞은 종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지점에서 ‘핵심진리’의 해석은 상당히 문자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숫자를 전혀 다르게 읽습니다. 14만 4천은 144,000명의 제한된 개인을 뜻하지 않습니다. ‘12’는 말씀에서 교회의 선과 진리에 속한 모든 것, 또는 신앙과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나타냅니다. ‘144’는 12×12이므로 같은 의미가 더욱 충만하게 나타난 것이고, ‘천’은 많음과 충만함을 더합니다. 따라서 144,000은 주님에게 속한 교회의 모든 사람, 더 정확히는 선과 진리가 충만하게 결합된 사람들의 완전한 전체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계시록의 이 숫자를 문자적인 인원수로 읽기보다 ‘열둘과 같은 영적 의미를 더욱 충만하게 나타내는 수’로 설명합니다. (Swedenborg Foundation)

 

이때 ‘열두 지파’ 역시 문자적인 유대인 혈통 열두 지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계시록 7장은 유다, 르우벤, 갓, 아셀 등 열두 지파에서 각각 12,000명씩 인침 받았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교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모든 종류를 표상합니다. 각각의 지파가 서로 다른 천국적·영적 질을 나타내면서, 그 전체가 하나의 완전한 교회를 이룹니다. 따라서 ‘각 지파에서 12,000명씩’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실제 혈통별로 정확히 숫자를 채우신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를 이루는 모든 선과 진리의 상태가 빠짐없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충만하게 보존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14만 4천’은 영적 엘리트 집단을 가리키는 숫자에서 ‘교회의 충만한 전체’를 나타내는 숫자로 바뀝니다. 그리고 이 변화는 매우 중요합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14만 4천이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산 최고 수준의 성도들’이며, 그 밖에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따로 있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14만 4천 자체는 주님에게 속한 교회의 모든 상태와 사람을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표상입니다. 이것은 ‘천국 안의 최상위 144,000명’이라는 별도 계급을 만들지 않습니다.

 

강사는 계시록 7장 9절 이하의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대환난 통과자들과 연결합니다. 그래서 계시록 7장을 ‘대환난을 면제받은 14만 4천’과 ‘대환난을 통과한 셀 수 없는 큰 무리’라는 두 부류로 나눕니다. 실제 강의에서 이 구분은 매우 분명합니다. 첫째는 ‘큰 환난 면제받은 인 맞은 14만 4천’, 둘째는 ‘큰 환난 통과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14만 4천은 대환난 이전에 이미 영적으로 완성되어 보호받는 특별 집단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는 이런 식의 ‘환난 전 면제 집단’과 ‘환난 통과 집단’이라는 시간적 구분이 없습니다. 계시록의 ‘큰 환난’은 자연계의 미래 몇 년간 벌어질 세계적 재난만을 뜻하지 않고, 선과 진리가 거짓과 악에 의해 심하게 공격받는 교회의 마지막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환난에서 나온 큰 무리’는 특정 미래 세대의 생존자만을 뜻하기보다, 시험과 거짓의 공격 가운데서도 주님을 붙들고 선과 진리를 보존한 사람들의 상태로 보아야 합니다.

 

이 점에서 계시록을 ‘시간표’로 읽느냐 ‘상태의 질서’로 읽느냐의 차이가 다시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강사의 해석에서는 14만 4천이라는 숫자가 실제로 채워지는 시점이 있고, 그 뒤에 대환난이라는 다음 사건이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144,000은 시간표의 ‘정원’이 아니라 교회의 충만함을 나타내는 영적 수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한 명이 채워져야 종말이 시작된다’는 식으로 읽지 않습니다.

 

이 차이를 단순히 ‘문자 해석 대 상징 해석’이라고만 표현하면 조금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숫자의 영적 의미는 임의적인 상징화가 아니라 말씀 전체에 일관되게 작용하는 상응의 질서입니다. ‘12’가 왜 교회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지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 열두 사도, 새 예루살렘의 열두 문과 열두 기초석, 생명나무의 열두 열매 등 말씀 전체에서 반복됩니다. 새 예루살렘 성벽의 높이가 ‘144규빗’인 것도 같은 질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144를 사람 곧 천사의 척도라고 한 계시록 21장의 말씀까지 연결하여, 이 숫자가 자연적 측량보다 교회의 모든 진리와 선의 질을 나타낸다고 봅니다. (Sacred Texts)

 

따라서 ‘14만 4천’은 계시록 안에서 고립된 숫자가 아닙니다. 열두 지파, 열두 사도, 열두 별, 열두 문, 열두 기초, 144규빗 등이 하나의 영적 문법을 이룹니다. 이 숫자들은 모두 주님의 교회가 선과 진리의 충만한 질서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을 알면 왜 요한계시록에서 숫자를 단순한 통계 숫자로만 읽기 어려운지가 분명해집니다.

 

강사는 14만 4천을 ‘처음 익은 열매’라고도 강조합니다. 계시록 14장에서 이들은 어린양과 함께 시온산에 서 있고 ‘처음 익은 열매’라고 불립니다. 강사는 여기서 ‘처음’이라는 말이 있으므로 두 번째와 세 번째 익은 열매도 있어야 한다고 보고, 이를 순교자와 다른 천국 백성의 여러 등급과 연결합니다. 더 나아가 구약의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제사장, 레위인, 일반 백성의 세 종류가 있었다는 ‘모형적 이치’와 연결하여 천국에도 세 종류의 익은 열매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핵심진리’ 특유의 모형론이 매우 선명하게 나타나는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처음 익은 열매’를 우선 시간상 가장 먼저 천국에 들어간 최고 계급이라는 뜻으로 읽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첫 것’, ‘처음 난 것’, ‘첫 열매’는 주님께 속한 것, 가장 중심적인 것, 선에서 나오는 진리 또는 주님에게 성별된 것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처음 익은 열매’라는 표현을 곧바로 천국 백성의 세 등급을 만드는 근거로 사용하는 데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더욱이 제사장·레위인·일반 백성의 구분을 천국의 세 계급과 일대일 대응시키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연속적인 상응 해석과는 다른 ‘핵심진리’의 모형적 적용입니다.

 

다만 강사가 강조하고 싶은 중심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장 온전히 드려진 사람’, ‘말씀의 씨가 충분히 익어 열매가 된 사람’, ‘자기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이 영적 열망 자체는 귀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열망을 없애지 않고 ‘특별 계급에 들어가라’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가 내 생명 안에서 온전히 결합되게 하라’로 방향을 조금 바꿉니다.

 

여기서 ‘시온산’의 의미도 중요합니다. 강사는 계시록 14장의 시온산을 ‘천국의 수도’, 더 구체적으로는 완성된 새 예루살렘 성과 연결하며, 14만 4천이 어린양과 함께 그곳에 서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시온’과 ‘예루살렘’은 같은 장소의 서로 다른 명칭 정도가 아닙니다. 말씀에서 ‘시온’은 특히 주님 사랑의 천적 교회, 선의 측면을 나타내고, ‘예루살렘’은 진리와 교리의 측면에서 교회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둘은 서로 깊이 결합되어 있지만 상응상 완전히 같은 의미는 아닙니다.

 

또한 ‘새 예루살렘’은 천국 전체의 수도에 해당하는 물리적 성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계시록 21장과 22장의 새 예루살렘을 주님께서 세우시는 새 교회, 특히 그 교회의 새 교리로 해석합니다. ‘새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온다는 것은 주님께서 형성하신 새 천국으로부터 새 교회의 신적 진리가 자연계의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에서도 새 예루살렘은 명백히 ‘새 교회’를 뜻한다고 설명됩니다. (Sacred Texts)

 

이 차이 역시 계시록 전체에서 계속 중요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강사는 시온산, 새 예루살렘, 천국, 어린양의 신부 등을 실제 영계 안의 일정한 장소와 성도 집단의 배치로 읽으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영계의 실제성을 누구보다 강하게 인정하면서도, 계시록에 나타난 장소와 건축물을 영적인 교회 상태와 교리를 나타내는 상응으로 읽습니다. ‘영계가 실제 존재한다’는 데서는 양쪽이 매우 가까운데, ‘계시록이 그 영계를 어떻게 묘사하는가’를 읽는 방식에서는 꽤 큰 차이가 생깁니다.

 

강사의 ‘도장’ 비유로 다시 돌아가면 한 가지 귀한 점도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인을 아무에게나 찍는 것이 아니며, 그 사람의 삶이 실제로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강조합니다. 이것은 신앙고백과 실제 삶을 분리하지 않으려는 ‘핵심진리’의 일관된 관심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으니 자동적으로 인 맞았다’가 아니라, 실제 연단과 정결과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신앙과 삶을 결합하려는 진지한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그 중심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완전히 죄 문제가 해결된 사람에게 최종 도장을 찍는다’는 식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그 사람의 의지와 이해성에 결합되어 그의 지배적 사랑을 이루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조차 사람의 독립적 완성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순간순간 생명을 받아들이는 결합입니다.

 

이 점에서 ‘인을 맞았다’와 ‘완성되었다’를 너무 쉽게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계속 거듭납니다. 더 깊은 진리가 열릴수록 더 깊은 proprium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도 완전해짐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은 ‘이제 더 이상 성장할 것이 없다’는 졸업장이 아니라, 그 사람의 중심 사랑이 주님께 속하고 선과 진리 가운데 보존되는 상태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그리고 이 관점은 영적인 서열 의식도 막아 줍니다. 14만 4천을 ‘최정예 성도 144,000명’으로 읽으면 자연스럽게 ‘나는 거기에 들어가는가?’, ‘누가 더 높은가?’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144,000을 선과 진리의 충만한 전체로 읽으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내 안에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선과 진리가 얼마나 결합되고 있는가?’가 됩니다. 경쟁이 아니라 결합의 문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에는 분명 세 천국이 있고 상태의 차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이 영적 성적표를 경쟁한 결과 만들어진 계급이 아닙니다. 각 사람의 지배적 사랑과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른 질서입니다. 천적 천국의 천사가 영적 천국의 천사보다 ‘더 잘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각 천사는 자기에게 맞는 쓰임과 공동체에서 완전한 기쁨을 누립니다. 그래서 천국의 다양성은 서열 경쟁이 아니라 조화입니다.

 

이것은 14만 4천 문제를 읽을 때 특히 필요한 균형입니다. 강사가 ‘더 높은 영적 목표를 추구하라’고 독려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목표가 ‘남보다 높은 천국에 가는 것’이 되면 proprium이 개입할 수 있습니다. 참된 영적 성장의 목적은 더 높은 자리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주님을 사랑하고 더 자유롭게 이웃을 위한 쓰임이 되는 것입니다.

 

또 강사는 14만 4천이 완성되면 심판이 시작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지상에 죄 없는 세상으로 나타날 것을 모든 피조물이 고대한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로마서 8장의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고대한다’는 말씀을 이 14만 4천과 직접 연결합니다. 이것도 ‘핵심진리’의 전체 종말 시간표 안에서는 이해되는 연결이지만, 로마서의 본문 자체가 계시록 14만 4천을 직접 말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더욱이 스베덴보리에게 바울 서신은 계시록처럼 단어 하나하나에 연속적인 아르카나가 담긴 말씀은 아니므로, 서로 다른 본문들을 이런 식으로 일대일 모형 관계로 연결할 때에는 더 절제가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원칙 하나가 다시 확인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성경 구절을 많이 연결하는 것 자체보다 그 연결이 말씀의 내적 상응에 근거하는가를 봅니다. 비슷한 단어나 주제가 나온다고 해서 자동으로 동일한 영적 실재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계시록은 자체의 연속적인 속뜻이 있으므로, 그 속뜻을 다른 문헌이나 서신의 구절로 임의로 재구성하기보다 계시록 자체의 상응적 연속을 따라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이 14만 4천 해설에서 가장 귀하게 남는 질문 하나는 있습니다. ‘나는 누구의 이름을 이마에 가지고 사는가?’입니다. 문자적인 글자나 표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가장 깊은 사랑과 목적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돈의 이름인가, 명예의 이름인가, 자기 의의 이름인가, 아니면 주님의 이름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마가 지배적 사랑을 나타낸다면, 결국 사람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의 이름을 영적으로 이마에 쓰고 살아간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인침’은 어느 먼 미래의 특별 의식이 아니라 오늘의 선택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의 진리를 알고 그것을 사랑하여 행할 때 그 진리가 점차 내 의지에 새겨집니다. 처음에는 계명을 외적으로 지키지만, 점차 그 계명이 내 사랑이 됩니다. ‘도둑질하지 말라’에서 ‘정직을 사랑한다’로, ‘원수를 사랑하라’에서 실제로 그의 선을 바라는 상태로 이동합니다. 말씀은 돌판에서 마음판으로 옮겨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인은 삶에 새겨지는 신적 질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7강 9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14만 4천은 문자적으로 정원이 제한된 최상위 성도 집단이라기보다 주님께 속한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가 충만하게 결합된 모든 상태와 사람들의 완전한 전체를 표상하며, 이마의 하나님의 인은 외적 인증표가 아니라 주님 사랑과 주님의 진리가 사람의 지배적 사랑과 생명에 새겨진 상태를 나타냅니다.’ (Swedenborg Foundation)

 

강사의 표현을 살려 조금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의 도장이 찍힌다’는 말의 가장 깊은 뜻은 ‘하나님께서 이 사람은 합격이라고 외부에서 판정하셨다’보다 ‘이 사람의 삶과 사랑 안에 주님의 것이 실제로 새겨졌다’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흔적은 이마에 보이는 글자보다 훨씬 분명하게 삶에서 나타납니다. 사랑에서, 진실함에서, 겸손에서, 쓰임에서, 그리고 자기 선을 자기 것으로 돌리지 않는 데서 나타납니다.

 

이제 7강의 마지막 10부에서는 이 모든 구조를 한데 모아야 하겠습니다. 강사는 14만 4천을 시온산의 ‘처음 익은 열매’, 새 예루살렘의 성도, 하나님의 인 맞은 종, 이기는 자와 연결하고, 그들과 셀 수 없는 큰 무리, 순교자, 천년왕국과 새 예루살렘을 하나의 천국 구조 안에 배치합니다. 여기서 ‘핵심진리’의 천국론과 종말론이 가장 압축적으로 나타납니다. 마지막 10부에서는 ‘시온산-14만 4천-처음 익은 열매-새 예루살렘-천년왕국’의 연결을 충분히 따라간 뒤, 스베덴보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천년’, 그리고 주님의 재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종합하면서 7강 전체를 마무리하겠습니다.

 

 

7강 10부

시온산, 처음 익은 열매, 새 예루살렘과 천년왕국 : ‘핵심진리’의 종말론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종합하다

7강의 마지막에 이르면 강사의 전체 구조가 거의 완성됩니다. 지금까지 그는 일곱 교회의 ‘이기는 자’, 계시록 7장의 ‘인 맞은 종 14만 4천’, 계시록 14장의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선 자들’, 그리고 계시록 21장의 ‘새 예루살렘’을 하나의 연속선상에서 읽어 왔습니다. 강의 후반에서 그는 14만 4천을 ‘교회 시대 이긴 자들’의 다른 이름으로 보고, 이들이 시온산에 서 있으며, 이기는 자에게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록해 주신다는 말씀을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권세를 주신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또한 이들은 광야 연단 가운데 자기 옷, 곧 행실을 깨끗이 빨아 ‘익은 열매’가 되었기 때문에 그 권세를 얻는다고 설명합니다. 이로써 앞선 여러 강에서 반복되었던 ‘좋은 밭-연단-성화-이기는 자-익은 열매-14만 4천’이라는 구조가 이제 ‘시온산-새 예루살렘’까지 이어집니다.

 

여기서 강사는 매우 독특한 ‘천국 지리’를 제시합니다. 가나안 땅 전체가 천국의 모형이고 예루살렘은 가나안의 수도였으므로, 새 예루살렘도 천국 전체가 아니라 ‘천국의 수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구원받은 사람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교회 시대의 ‘이긴 자들’이 그 성에 들어가며, 다른 천국 백성은 그 밖의 ‘만국’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강사는 실제로 ‘천국 전체가 새 예루살렘 성이 아니다’, ‘새 예루살렘은 천국의 수도’라고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이긴 자들이 그곳에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이 해석은 이후 ‘처음 익은 열매’, ‘두 번째 익은 열매’, ‘세 번째 익은 열매’라는 천국 백성의 세 부류 구분과도 연결됩니다.

 

강사는 또 모리아산, 시온산, 예루살렘을 역사적으로 같은 장소의 서로 다른 이름처럼 연결합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는 모리아산, 다윗 시대에는 시온산, 솔로몬 시대에 예루살렘 성이 완성되면서 예루살렘으로 불렸다는 흐름을 제시한 뒤, 이것을 천국의 모형으로 옮겨 ‘완성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천국의 수도를 새 예루살렘이라 부르지만 그 전까지는 시온산이라 부른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계시록 14장에서 14만 4천이 어린양과 함께 서 있는 시온산과 계시록 21장의 새 예루살렘을 사실상 동일 장소의 서로 다른 단계적 명칭으로 봅니다. 이것은 ‘핵심진리’의 모형론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작동하는지를 잘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먼저 ‘시온’과 ‘예루살렘’은 말씀에서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지만 영적 의미상 단순히 같은 장소의 옛 이름과 새 이름으로만 환원되지는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시온’은 주님 사랑과 천적 선의 측면에서 교회를, ‘예루살렘’은 진리와 교리의 측면에서 교회를 나타냅니다. 둘은 선과 진리처럼 하나의 교회를 이루지만, 상응적으로는 서로 다른 측면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시온산=미완성 새 예루살렘’, ‘새 예루살렘=완성된 시온산’이라는 식의 시간적 명칭 변경으로만 이해하면 말씀 안의 선과 진리의 내적 관계가 지나치게 공간적 구조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은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수도’인 거대한 물리적 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마지막 심판 뒤에 세우시는 ‘새 교회’를 표상하며, 특히 그 새 교회의 교리와 그 교리를 받아 살아가는 교회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요한이 그 성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본 까닭도 중요합니다. 자연계의 특정 지점으로 물리적인 도시가 낙하한다는 뜻이라기보다, 새 하늘에서 형성된 신적 진리와 교회 질서가 인간에게 주어짐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은 천국 안의 특권층이 들어가는 수도라기보다, 주님의 신적 진리를 받아들이는 새 교회 자체에 관한 말씀이라고 보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중심 해석입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공간 해석의 차이가 아닙니다. ‘새 예루살렘에 누가 들어가는가?’라는 질문의 성격 자체가 달라집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이긴 자’가 되어 특별한 성화 단계에 도달한 14만 4천이 천국 수도의 거주권을 얻는다는 그림이 강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새 예루살렘 안에 있다’는 것이 주님의 새 교회의 선과 진리 안에 있다는 뜻이 됩니다. 곧 주님을 한 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신앙과 체어리티를 결합하여 살며, 말씀의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초점이 영적 특권의 장소에서 교회의 생명과 교리의 질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강사의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한다’는 영적 긴장을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더 높은 천국의 특별 구역에 입성해야 한다’는 방향보다 ‘주님께서 세우시는 새 교회의 선과 진리를 실제 생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방향으로 옮기면 훨씬 깊어집니다.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사람에게 기록된다는 것도 특정 도시의 출입 자격증이 그의 이마에 찍힌다는 뜻보다, 그 교회의 진리와 생명의 질이 그 사람 안에 새겨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강사는 이어 계시록 14장의 14만 4천이 ‘처음 익은 열매’라고 불리는 데 특별히 주목합니다. ‘처음’이라는 말이 붙었으니 두 번째와 세 번째 익은 열매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왜 세 종류까지만 있는지를 구약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 구조에서 찾습니다. 제사장, 레위인, 땅을 분배받은 일반 백성이라는 세 부류가 가나안에 들어갔으므로, 천국에도 세 종류의 익은 열매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14만 4천, 두 번째는 순교자들, 그리고 세 번째는 그 밖의 천국 백성이라는 구조입니다. 이 부분은 강사의 성경 해석이 단지 몇 구절의 문자적 의미에 머무르지 않고 ‘모형적 이치’를 통하여 하나의 거대한 체계를 만드는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여기에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흥미로운 접점과 차이가 함께 있습니다. 접점은 ‘처음 익은 열매’, ‘제사장’, ‘레위인’, ‘가나안’ 같은 구약의 표현들이 실제로 더 깊은 영적 실재를 표상한다는 감각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가나안을 천국과 교회를 표상하는 땅으로 읽고, 제사장과 레위인에게도 각각 깊은 상응이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성경의 역사적 제도가 영적 실재를 표상한다는 큰 방향은 분명히 만납니다.

 

그러나 차이는 그 상응을 연결하는 방식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제사장, 레위인, 일반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세 구분을 그대로 ‘천국에 들어가는 세 계급’으로 대응시키지는 않습니다. 제사장직은 특히 주님의 신적 선과 사랑, 왕직은 신적 진리, 레위인은 그 둘을 섬기며 연결하는 여러 영적 기능과 관련하여 읽힙니다. 이것은 ‘세 종류의 천국 주민 명단’이라기보다 선과 진리의 천국적 질서에 관한 상응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 세 부류가 있었으니 천국에도 정확히 세 종류의 익은 열매가 있다’는 방식은 ‘핵심진리’의 모형론이지, 스베덴보리의 연속적인 아르카나 해석과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처음 익은 열매’라는 말도 단순히 영적 성적 순위의 ‘1등 그룹’을 뜻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말씀에서 ‘처음 난 것’, ‘첫 열매’는 주님에게 성별된 것, 주님께 속한 것, 선에서 처음 나오는 진리 등과 관련된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특히 계시록 14장의 14만 4천이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처음 익은 열매’라고 불린다는 것은 그들이 다른 천국 백성보다 먼저 입성한 최상위 계급이라는 것보다, 주님에게 온전히 속한 교회의 선과 진리의 상태를 나타내는 방향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점에서 ‘처음 익은 열매’를 시간 순서보다 ‘질’의 문제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의 ‘처음’은 언제나 자연적 달력의 첫 번째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심적이고 근원적인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14만 4천의 ‘첫 열매’를 특별계급론으로 굳히기보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가 교회 안에서 온전한 질서로 형성된 상태라고 읽으면 계시록 전체의 상응적 흐름과 더 잘 맞습니다.

 

강사의 전체 종말론에서 이제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이 등장합니다. 바로 ‘천년왕국’입니다. 강사는 예수님의 재림 목적 가운데 하나를 이 땅의 죄악 세상을 심판한 뒤 ‘불행도 없고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와 질서와 행복으로 가득한 천년왕국’을 지상에 세우시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마귀가 천 년 동안 결박되고, 그 기간 동안 죄 없는 왕국이 이 땅에 이루어진 뒤 이후의 사건들이 계속된다는 문자적인 천년왕국 이해입니다. 이 부분에서 ‘핵심진리’의 재림대망신앙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는 계시록 20장의 ‘천 년’을 문자적인 1,000년의 지상 왕국으로 읽지 않습니다. 말씀의 수는 상태의 질과 충만함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천’은 일정하고 충만한 상태 또는 많은 것을 나타내며, ‘천 년 동안 왕 노릇한다’는 것도 자연계에서 정확히 1,000년간 정치적 통치가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설에서는 이 ‘천 년’과 첫째 부활 등을 마지막 심판 이전 영계에서 보존되고 보호받았던 선한 영들의 상태와 연결하여 풉니다. 따라서 지상에 사탄이 물리적으로 봉쇄되어 죄가 사라진 정치·사회적 왕국이 천 년 동안 유지된다는 구도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더 근본적으로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나라는 본질적으로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닙니다. 물론 천국적 질서가 자연계 사회에도 영향을 주어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왕국 자체는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 안에서 선과 진리가 다스리는 영적 나라입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을 기다린다는 것도 ‘언젠가 외부 세계가 완벽한 사회가 되기를 기다린다’는 것보다 주님께서 지금 우리 안에서 자기애와 거짓의 지배를 꺾으시고 사랑과 진리로 다스리시도록 받아들이는 문제로 더 깊어집니다.

 

이것은 재림 이해와도 직접 연결됩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주님께서 장차 자연계에 다시 오셔서 대환난을 끝내시고 악한 세상을 심판하시며 천년왕국을 세우십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두 번째 오심은 주님께서 다시 자연적 육체를 입고 공간적으로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을 열어 신적 진리를 새롭게 계시하시고 그 진리를 통하여 옛 교회를 심판하고 새 교회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림의 중심은 물리적 출현보다 ‘신적 진리의 오심’입니다.

 

여기서 ‘구름을 타고 오심’의 의미가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구름’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영광’은 그 문자 안의 신적 진리, 곧 속뜻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인자가 구름을 타고 권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은 주님의 신적 진리가 말씀의 문자 안에서 새롭게 드러나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지금 하는 ‘말씀의 속뜻을 여는 작업’은 단순한 성경 연구가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재림의 본질과 매우 깊이 연결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7강 전체가 흥미롭게 뒤집힙니다. 강사의 목표는 ‘재림을 준비하도록 계시록의 시간표를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재림을 준비하는 길이 미래 시간표를 더 세밀하게 계산하는 데 있지 않고, 지금 주님의 신적 진리를 받아들여 사랑과 삶으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재림은 ‘언제 오시는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께서 지금 말씀을 통하여 내 안에 오실 때 나는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가?’의 문제가 됩니다.

 

이렇다고 해서 ‘핵심진리’가 강조하는 긴장과 깨어 있음을 약화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긴장을 더 가까이 가져올 수 있습니다. 미래의 대환난이 몇 년 뒤인지 알 수 없더라도 오늘 죽음이 올 수 있고, 더 근본적으로 오늘 내 안에서 진리와 악이 충돌합니다. 오늘 내게 주어진 진리를 거절하면 오늘의 작은 재림을 거절한 셈이고, 진리를 받아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면 주님께서 오늘 내 안에서 새로운 질서를 세우십니다.

 

강사의 ‘새 예루살렘 성에는 이긴 자들이 들어간다’는 강조도 이렇게 바꾸어 보면 더욱 깊어집니다.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다’는 것은 특정한 하늘 도시의 입주권을 얻는 것보다 새 교회의 진리와 선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입구는 미래에 처음 열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주님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행하는 가운데 열립니다. 사람이 새 예루살렘의 사람이 되는 것은 죽은 뒤 주소지가 바뀌는 것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그 사람 안에서 교회의 새 진리와 사랑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사가 새 예루살렘의 크기를 실제 정육면체의 거대한 천국 도시로 이해하려는 부분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강의에서는 성의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다는 말씀을 실제 정육면체 구조로 읽고, 그 방대한 크기를 근거로 천국 수도의 실제 공간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그 측량은 물리적 건축 치수가 아니라 교회의 선과 진리의 질과 충만함을 나타냅니다. 길이, 너비, 높이는 각기 영적 차원을 나타내며, 성의 수치들도 모두 상응적 의미를 가집니다.

 

특히 새 예루살렘이 정육면체와 같은 형상을 가진다는 점은 구약 성막과 성전의 ‘지성소’가 정육면체였다는 사실과도 깊은 연결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엄청나게 큰 정육면체 도시’로 보기보다 주님의 임재, 거룩함, 선과 진리의 완전한 결합이라는 영적 질서 안에서 보는 것이 말씀 전체의 상응과 더 잘 맞습니다. 새 예루살렘 전체가 마치 확장된 지성소와 같은 형상을 가진다는 것은 새 교회 안에서 주님의 임재가 얼마나 충만하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 주는 아름다운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강사의 ‘천국 수도’라는 감각에는 한편으로 흥미로운 영적 직관이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을 ‘주님이 왕으로 계시는 가장 중심적인 곳’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중심성을 공간적 수도보다 사랑과 진리의 중심성으로 옮깁니다. 주님께서 왕으로 계시는 곳은 가장 높은 궁전이 있는 지리적 수도이기 전에,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가장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교회와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강사가 말한 ‘우리 같은 사람은 새 예루살렘에 못 들어간다’는 표현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겸손한 자기평가처럼 들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새 예루살렘=최상급 성도만 들어가는 특수 구역’이라는 전제를 반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새 예루살렘은 영적 엘리트만을 위한 비밀 도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새 교회로 부르시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같은 상태와 같은 쓰임을 갖지는 않지만, 핵심은 ‘나는 최고 등급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주님의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는가?’입니다.

 

이렇게 보면 천국의 다양성도 경쟁에서 해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세 천국과 무수한 공동체의 차이를 분명히 말합니다.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과 자연적 천국의 상태는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쪽이 다른 쪽을 부러워하는 서열 구조가 아닙니다. 각 사람은 자기 지배적 사랑과 쓰임에 가장 잘 맞는 천국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립니다. 손이 눈이 되지 못했다고 불행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가장 큰 사람을 이루는 각각의 기관이 서로 다른 쓰임을 행하면서 하나를 이룹니다.

 

따라서 ‘더 높은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는 욕망보다 ‘주님께서 나를 어떤 사랑과 쓰임으로 지으셨는가’를 찾는 것이 훨씬 천국적입니다. 영적 성장도 ‘최상위 14만 4천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시는 선과 진리를 더 충실히 받아 자신의 쓰임을 온전히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강사가 계속 강조해 온 겸손과 충성, 인내와 사랑을 오히려 더 순수하게 보존해 줍니다.

 

이제 7강 전체를 처음부터 되돌아보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보입니다. 이 긴 강의에는 두 개의 흐름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하나는 매우 귀한 ‘생명과 성장’의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매우 정교한 ‘종말 시간표’의 흐름입니다. 전자는 말씀을 듣고 좋은 밭이 되며, 겨자씨처럼 성장하고, 누룩처럼 삶 전체가 변화되고, 자기 소유를 내려놓아 값진 진주를 얻으며, 악과 싸워 이기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인이 생명에 새겨지는 과정입니다. 후자는 14만 4천의 예정된 숫자가 채워지고, 대환난이 시작되며, 휴거와 심판과 천년왕국이 이어지고, 마지막에는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이 완성된다는 구조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첫 번째 흐름을 상당 부분 귀하게 받아들이면서 두 번째 흐름을 근본적으로 다시 읽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렇게 읽을 때 첫 번째 흐름은 오히려 더 깊어집니다. 종말의 사건들이 먼 미래의 외적 시간표에서 인간과 교회의 내적 상태로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14만 4천’은 제한된 최정예 성도의 인원수에서 선과 진리가 충만하게 결합된 교회의 전체로 바뀝니다. ‘하나님의 인’은 최종 합격 도장에서 주님 사랑과 진리가 지배적 사랑에 새겨진 상태로 바뀝니다. ‘시온산’은 천국 수도의 임시 이름에서 주님 사랑과 천적 선의 교회 상태로 깊어집니다. ‘새 예루살렘’은 천국의 물리적 수도에서 주님께서 세우시는 새 교회와 그 교리로 열립니다. ‘천 년’은 자연계의 정확한 천년 통치에서 영적 상태의 충만함으로 바뀝니다. ‘재림’은 미래 어느 날 공간적으로 내려오시는 사건만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 안에서 신적 진리로 오시는 주님의 현존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핵심진리의 모든 종말론은 틀렸다’고 재단하는 방식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강의가 붙들고 있는 진지함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강사는 사람들이 세상에 취해 살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실제로 살며, 자기 욕망과 싸우고, 이기는 자가 되어, 재림을 기다리며 준비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이 문제의식은 귀합니다. 우리가 조정해야 할 것은 그 영적 열망이 아니라 그 열망을 담고 있는 성경 해석의 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틀을 바깥에서 안으로 옮깁니다. ‘재림이 언제인가?’에서 ‘주님의 진리가 지금 내 안에 오고 있는가?’로, ‘14만 4천 안에 들어가는가?’에서 ‘선과 진리가 내 안에서 결합되고 있는가?’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가?’에서 ‘새 예루살렘의 선과 진리가 내 생명이 되고 있는가?’로, ‘천년왕국은 언제 시작되는가?’에서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지금 내 삶을 다스리고 있는가?’로 옮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말론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현재적으로 만듭니다. 먼 미래의 사건은 오늘 미룰 수도 있지만, 현재 내 안에 일어나는 주님의 심판과 재림은 미룰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들었을 때 그것을 거절할 것인지 받아들일 것인지, 오늘 자기애와 체어리티가 충돌할 때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가 이미 영원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7강의 처음, 마태복음 13장의 ‘좋은 밭’으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사실 7강의 모든 종말론은 그 작은 씨 한 알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말씀의 씨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결국 겨자나무가 되고 누룩이 되고 진주가 되고 알곡이 되며, 마지막에는 그 사람의 영원한 생명이 됩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가장 실제적인 방법은 계시록의 연표를 완벽히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게 주어진 말씀의 씨를 좋은 땅으로 받아 열매 맺는 것입니다.

 

이것이 강사의 ‘이긴 자’ 개념도 가장 건강하게 살리는 길입니다. 이긴 자는 종말 시간표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이 드러날 때 주님의 힘으로 그것을 피하고, 진리를 사랑과 결합하여 실제 삶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승리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승리의 힘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처음 익은 열매’ 역시 그런 의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에게 심으신 씨가 마침내 사랑과 선한 삶이라는 열매가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익었다’는 것은 지식을 많이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생명의 질이 형성되었다는 뜻입니다. 진리가 의지로 내려가고, 의지가 행동이 되며, 선을 행하는 것이 점차 기쁨이 된 상태입니다. 이런 의미의 ‘익은 열매’를 사모하라는 강사의 권면은 충분히 오래 붙들어도 좋겠습니다.

 

다만 그 열매를 자기 공로로 재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첫째 열매인가, 둘째인가, 셋째인가’, ‘나는 새 예루살렘 안인가 바깥인가’라고 끊임없이 자기 영적 위치를 계산하기 시작하면, 열매 속으로 다시 proprium이 들어옵니다. 천국적 사람은 자기 등급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천사는 자기 천국의 높이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쓰임을 행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이렇게 보면 ‘핵심진리’의 영적 성장론에 스베덴보리가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보완은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더 높이 올라가라’보다 ‘더 깊이 주님에게서 받아라’입니다. ‘더 완전한 자가 되라’보다 ‘자기에게서 선이 나온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선을 더 자유롭게 받아들여라’입니다. 그러면 영적 성장은 계속되면서도 자기완성의 긴장은 줄어들고, 겸손과 자유는 오히려 깊어집니다.

 

반대로 ‘핵심진리’가 스베덴보리를 읽는 우리에게 던질 수 있는 질문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게 깊은 속뜻을 알고 있는데, 그 진리가 실제 당신의 행실을 얼마나 변화시켰습니까?’입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새 예루살렘이 새 교회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14만 4천의 수의 의미를 정확히 설명하고, 천년왕국의 내적 의미를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실제 체어리티와 쓰임이 되지 않는다면, 씨는 여전히 열매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저는 7강 전체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한 대화를 만들어 준다고 봅니다. ‘핵심진리’의 문자적 종말론은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속뜻과 크게 갈라지지만, ‘말씀은 반드시 생명이 되어야 한다’는 그 강한 요구는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를 읽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경고가 됩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의 속뜻은 ‘핵심진리’의 연단과 종말론이 자칫 외적 단계와 시간표, 영적 등급의 체계로 굳어지는 것을 풀어 주고, 그것을 주님과 인간의 내적 결합이라는 더 깊은 자리로 데려갑니다.

 

그래서 두 관점을 경쟁시키기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핵심진리’는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 자라라, 이겨라, 열매 맺으라’고 강하게 외치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외침에 ‘그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네 안에서 결합되는 거듭남이며, 그 승리와 열매의 모든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고 깊이를 더합니다.

 

7강 전체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미래의 종말 시간표를 계산하기 위한 암호문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가 교회와 인간의 내적 상태를 드러내고, 선과 악을 분리하며, 마지막 심판을 거쳐 선과 진리가 결합된 새 교회를 세우시는 과정을 자연적 형상과 수와 장소의 상응으로 계시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계시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준비는 아주 실제적입니다. 좋은 밭이 되는 것, 말씀의 작은 씨를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 진리가 누룩처럼 생활 전체에 스며들게 하는 것, 주님보다 더 귀하게 붙들고 있는 proprium을 내려놓는 것, 자기 안의 가라지를 발견할 때 회개하는 것, 시험에서 주님의 힘으로 선과 진리를 붙드는 것, 그리고 받은 선을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쓰임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삶이 ‘재림을 대망하는 삶’의 가장 깊은 모습일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새 예루살렘은 먼 천국의 수도가 아니라 벌써 우리 앞에 내려오고 있습니다. 주님의 진리가 말씀에서 열리고, 그 진리를 사람이 자유롭게 받아들여 사랑과 삶으로 만들 때 새 예루살렘의 첫 돌이 그 사람 안에 놓입니다. 주님의 나라가 ‘볼 수 있게 임하는 것’만을 기다리는 동안 놓칠 수 있는 매우 조용한 오심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이 오심이야말로 계시록이 마지막에 보여 주는 가장 큰 소망입니다.

 

이렇게 해서 7강은 10부로 마무리할 수 있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시작하여 겨자씨의 성장과 쓰임, 누룩의 삶 전체의 변화, 진주와 보화의 자기부인, 가라지와 그물의 분리, 요한계시록의 서론과 일곱 교회의 ‘이기는 자’, 하나님의 인과 14만 4천을 지나, 마지막에는 시온산·처음 익은 열매·새 예루살렘·천년왕국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긴 흐름의 중심에는 결국 하나의 질문이 남습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심으신 진리가 지금 지식에 머물러 있는가, 아니면 사랑과 쓰임이라는 생명으로 익어 가고 있는가?’ 이 질문을 붙들고 7강을 마치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SY.61,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8강 (7/30),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8강 1부‘일곱 인’과 네 말, 그리고 종말을 읽는 두 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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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59,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6강 (7/29),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6강 1부마태복음 13장, 씨 뿌리는 비유와 ‘마음밭’이번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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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5강 1부

‘말씀을 아는 것’에서 ‘말씀으로 사는 것’으로 : 연단과 양심의 빛을 중심으로

이번 5강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강사가 신앙을 단순히 ‘진리를 알고 믿는 일’에 머물게 하지 않고, 그것을 실제 삶으로 가져가려 한다는 점입니다. 강의의 중요한 명제는 아주 분명합니다. ‘선한 지식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생활을 함으로써 연단을 받는다’, 그리고 ‘선한 말씀을 실천하지 않으면 연단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그 말씀대로 실제로 살려고 하는 순간 사람 안에 있던 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을 알 때에는 사랑하는 사람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분노가 올라오고, 참으라는 말씀을 들을 때에는 동의하지만 실제로 참아야 할 상황이 오면 불평과 짜증이 솟아납니다. 강사는 바로 이 지점을 ‘연단’이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대목은 이번 강의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리는 단순히 기억 속에 저장되는 지식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진리는 의지와 행위 안으로 들어가야 하며, 그렇게 삶이 된 진리만이 사람에게 실제로 속한 것이 됩니다. 사람이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아는 것과 실제로 사랑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머리로 알고 있는 진리가 삶의 구체적인 상황 속으로 내려오는 순간, 그 진리와 반대되는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여기서 영적 싸움, 곧 시험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말하는 ‘말씀을 실천하려 하면 불편한 환경이 온다’는 설명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의 구조와 상당히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이 일부러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불편한 환경을 만들어 보내신다기보다, 섭리 가운데 허용된 삶의 환경을 통하여 이미 사람 안에 숨어 있던 것이 드러난다고 이해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읽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어떤 사람을 ‘원수’로 만들어 보내신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강의 후반에서도 강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 그럴 때 하나님은 반드시 원수를 붙여 주신다’고 매우 강하게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말을 조금 다듬는다면, ‘주님은 우리가 받은 진리가 실제 삶이 될 수 있도록 섭리하시며, 그 과정에서 우리 안에 있는 진리와 반대되는 사랑들이 드러나는 상황을 허용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핵심은 외부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 때문에 내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는가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화나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하여 내 안에 이미 있던 분노와 자기애가 드러난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강사의 다음 설명이 더욱 의미 있어집니다. 연단받을 환경이 왔을 때 불평과 짜증이 올라오고 그것을 그대로 말과 행동으로 옮긴다면 연단의 기회를 피한 것이라고 강사는 말합니다. 그리고 그때 나타나는 것을 철저히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켜 ‘빛의 열매’를 맺는 과정이 영성 훈련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회개론과 연결하여 읽을 만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회개는 단순히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감정적 행위가 아닙니다. 자기 안의 어떤 악을 실제로 보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다시 그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 싸우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삶에서 악이 드러나는 순간은 반드시 실패의 순간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악을 보고 주님 앞에서 다룰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는 거듭남의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강의가 말하는 ‘양심의 빛’도 이 흐름 안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양심을 사람의 ‘지성, 감정, 의지’를 밝혀 주는 기능으로 설명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양심의 빛이 밝아진다고 말합니다. 이어 히브리서 5장 14절의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을 인용하여, 말씀을 실천하고 연단받을수록 양심이 밝아져 선과 악을 더욱 선명하게 분별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도 중요한 영적 통찰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깊어진다는 것은 단지 더 많은 교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치던 것을 점차 분별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양심’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퍼셉션’을 구별하면 이번 강의를 더욱 정교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 있었던 것은 퍼셉션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선이며 참인지를 내적인 방식으로 지각했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양심입니다. 양심은 사람이 말씀으로부터 받아들인 진리와 선이 내면에 자리 잡아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은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는 절대적인 판별 장치가 아닙니다. 어떤 진리를 받아들였느냐에 따라 양심의 질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잘못된 종교적 가르침을 깊이 받아들인 사람은 그것을 어겼을 때 실제로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양심의 소리니까 하나님의 소리다’라고 곧바로 등치할 수는 없습니다. 양심 자체도 말씀의 참된 진리에 의해 형성되고 정화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연단을 받을수록 양심의 빛이 더욱 밝아져서 선과 악을 더욱 선명하게 분별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좋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 따라 살면서 악을 죄로 여기고 물리칠수록, 주님께서 그의 내면을 더욱 열어 주시며 그 결과 선과 악, 참과 거짓을 더욱 섬세하게 분별하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밝아지는 것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어떤 영적 감각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내면의 상태입니다.

 

특히 강의가 ‘말씀의 실천’을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거예요. 말씀을 실천하는 거예요’라고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신학을 이해하는 데에도 핵심적인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그토록 경계하는 것이 바로 사랑과 분리된 신앙, 곧 삶과 분리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것 자체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가 선으로 옮겨지고, 선이 행위가 되며, 그것이 반복되어 삶의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강의의 ‘말씀 → 실천 → 내적 저항의 발견 → 회개 → 변화 → 더욱 밝아진 분별’이라는 흐름은 거듭남의 실제적인 면을 상당히 잘 포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이 천국에 들어갈 만큼 100% 완전히 밝아져야 한다’는 강사의 표현에서는 조금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99.9도 안 되고 100% 완전히 양심이 밝아져야’ 가나안, 곧 하나님의 낙원에 들어간다고 강하게 말합니다. 이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사람이 지상에서 모든 악의 성향을 완전히 제거하고 완전무결한 상태에 도달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그렇게 수학적인 완전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떤 사랑을 자신의 주된 사랑으로 삼았는가, 다시 말해 그의 생명을 지배하는 사랑이 무엇인가입니다. 사람 안에는 악으로 기울어지는 proprium이 남아 있으며, 천사들도 자신들에게 있는 모든 선과 진리가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자기 힘으로 100% 정결해진 사람들의 나라’라기보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의 선을 사랑하는 것이 생명의 중심이 되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나라라고 하는 편이 더 가깝습니다.

 

이 차이는 은혜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합니다. 인간이 자기 안의 악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완벽하게 제거한 다음 그 공로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악을 죄로 여기고 싸우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실제로 악을 물리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승리의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인간의 협력과 책임을 조금도 제거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구원의 능력과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강의의 ‘연단’이라는 말도 조금 더 깊어집니다. 연단은 고난 그 자체가 아닙니다. 힘든 일을 많이 겪었다고 자동으로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동일한 고난을 겪고도 어떤 사람은 더욱 자기중심적이 되고, 어떤 사람은 더욱 온유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환경 속에서 주님이 보여 주시는 진리를 붙들고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악과 거짓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연단의 본질은 ‘고난의 양’이 아니라 ‘그 고난 가운데 이루어지는 내적 선택’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보면 강사가 뒤에서 말하는 ‘원수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는 이 자기가 원수입니다’라는 말은 이번 5강 1부 전체를 꿰뚫는 중요한 문장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물론 스베덴보리는 영계의 악한 영들과 지옥의 인플럭스를 실제적인 것으로 가르치므로 모든 악을 단순히 인간 심리 내부의 현상으로 환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지옥이 사람을 강제로 악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악의 인플럭스가 사람 안의 자기애와 세상 사랑, 곧 타락한 proprium과 결합할 때 그것이 ‘나의 악’으로 활동합니다. 따라서 영적 싸움의 중심은 언제나 ‘저 사람이 문제다’에서 ‘이 일을 통해 내 안에서 무엇이 드러나고 있는가’로 이동해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의 가장 깊은 연단은 원수가 사라지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 때문에 드러난 내 안의 미움, 보복심, 인정받고 싶은 욕망, 자기 의, 우월감과 싸우는 데 있습니다. 상대방을 고치는 것보다 먼저 자기 눈의 들보를 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강의 역시 뒤이어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주려고 하기보다는 자신 속에 있는 들보를 자꾸 보고 고치려고 노력해야 된다’고 말하며, 이것을 ‘우리의 옛사람 애굽의 근성을 죽이는’ 과정, ‘자아를 깨뜨려 가시는’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이 대목 역시 표현상의 차이를 잠시 내려놓으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실제와 매우 가까운 방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결국 5강 1부에서 건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진리는 삶 속에 들어가야 비로소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드러낸다.’ 말씀을 읽을 때에는 자신이 사랑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이 나타날 때 비로소 내 사랑의 실제 상태가 드러납니다.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하다가 무시당했을 때 분노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물질에 초연하다고 생각하다가 손해를 볼 상황이 되면 마음이 흔들립니다. 바로 그 순간이 실패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네 안에 아직 이것이 있다’고 보여 주시는 거듭남의 현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강의가 말하는 ‘말씀의 실천 → 연단 → 양심의 밝아짐 → 선악의 분별’이라는 큰 흐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충분히 귀 기울일 가치가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100% 완전 정결을 달성해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식의 인간적 완성론으로 가져가기보다, ‘말씀의 진리가 삶이 되고, 그 삶 속에서 악이 드러나며, 사람이 주님을 의지하여 그 악을 죄로 여기고 물리치는 가운데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성이 형성된다’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이해하면 훨씬 깊어집니다. 연단의 목적은 사람이 스스로 완전한 사람이 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기에게서는 아무 선도 나오지 않음을 점점 더 알고, 그러면서도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더욱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양심의 빛이 밝아진다’는 것은 결국 ‘내가 밝아진다’기보다, 내 안에서 주님의 빛을 가리던 것들이 하나씩 물러난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아름답고, 또한 더 스베덴보리적입니다.

 

 

5강 2부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 : ‘광야의 세 차례 연단’과 거듭남의 여정

5강 1부에서 강사는 ‘말씀을 실천해야 연단을 받는다’는 원리를 설명했습니다. 말씀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없으며, 그 말씀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려 할 때 비로소 자기 안에 숨어 있던 죄성과 정욕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회개하면서 양심의 빛이 점점 밝아지고 선악을 더욱 분명하게 분별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강의는 이 개인적인 경험을 성경 전체의 거대한 그림 하나에 올려놓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가는 여정입니다. 강사는 이것을 단순한 이스라엘 민족의 고대 역사로 읽지 않고 한 사람이 구원받고 성장하여 마침내 ‘익은 열매’가 되는 영적 성장의 모형으로 읽습니다. 특히 광야에서 세 차례의 중요한 전투가 있었다는 데 주목하면서 이것을 인간이 반드시 거쳐야 할 ‘세 차례 연단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이 대목에 이르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가지고 읽는 독자는 아마 상당히 놀라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역사적 사건을 인간의 영적 성장 과정으로 읽으려는 기본 방향 자체가 스베덴보리에게 매우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두 해석의 세부 내용은 앞으로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애굽-광야-가나안’을 단지 수천 년 전 민족사의 지리적 이동으로만 읽지 않고 인간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구원과 거듭남의 질서로 읽는다는 발상 자체에는 매우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강사의 도식에서 애굽은 사람이 아직 육적이고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상태와 연결됩니다. 출애굽은 거기에서 벗어나 구원의 길에 들어선 사건이며, 광야는 구원받은 사람이 실제로 훈련되고 연단받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하게 자리 잡은 상태, 곧 ‘익은 열매’와 ‘이기는 자’의 상태로 연결됩니다. 강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다고 즉시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반드시 광야를 통과했다는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신앙을 고백하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곧바로 완성된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아주 중요한 곳에서 만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사람이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였다는 사실과 실제로 거듭났다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거듭남을 위한 필수적인 시작이지만, 그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사랑이 되고 실제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거듭남에는 반드시 시험이 따릅니다. 사람이 진리를 알고 있기만 할 때에는 자기 안에 있는 반대되는 사랑들이 그대로 숨어 있을 수 있지만, 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하면 옛 의지와 새로운 의지 사이의 충돌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배우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을 만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원수를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도 읽을 때에는 아름답지만 실제로 깊은 상처를 준 사람 앞에서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됩니다. ‘재물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에 동의하면서도 실제 손해가 닥치면 마음 깊은 곳에서 무엇을 의지하고 있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일종의 빛과 같습니다. 빛이 들어오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광야가 필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사는 특히 이 광야의 여정을 ‘세 차례 연단’으로 구조화합니다. 첫 번째는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 오는 사건, 두 번째는 아말렉과의 전투, 세 번째는 가나안 입성을 앞둔 강력한 적들과의 전투입니다. 다른 부분에서는 이 세 단계를 요한일서의 ‘아이들-청년들-아비들’의 성장 단계와 연결하기도 합니다. 첫 번째 연단에서는 이스라엘이 거의 싸우지 못하고 두려움 가운데 도망가며, 두 번째에서는 실제로 적과 싸워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단계로 성장하고, 세 번째에서는 더욱 강한 적들과 싸우며 마침내 가나안 입성을 준비하는 단계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설명에서 흥미로운 것은 영적 성장을 ‘악이 점점 줄어들어 편안해지는 과정’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성장할수록 더 깊은 싸움이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싸울 힘조차 없어서 도망가던 사람이 조금 성장하면 실제로 싸우기 시작하고, 더 성장하면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적과 맞닥뜨립니다. 이것은 영적 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는 중요한 역설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했는데 왜 시험이 더 깊어지는가, 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악이 오히려 더 많이 보이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퇴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깊은 층이 열리고 있기 때문에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드러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점에서도 스베덴보리의 거듭남론과 상당히 깊은 접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시험이 속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불일치에서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속사람을 열어 가실수록, 겉 사람 안에 자리 잡고 있던 반대되는 악과 거짓이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게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어느 정도 선과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에게 일어납니다. 싸움이 있으려면 싸울 두 편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편에는 주님께서 심어 놓으신 선과 진리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인간의 proprium과 결합된 악과 거짓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초기에 별다른 내적 갈등이 없었다고 해서 반드시 영적으로 건강했다는 뜻은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충분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갈등 자체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들어오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말이 마음에 걸리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자기중심적인 행동이 보이기 시작하며, 이전에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자기애의 표현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양심의 형성과 함께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여기에서 강사가 ‘세 차례’라는 숫자를 실제 영적 성장의 고정된 단계처럼 사용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조금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떤 사건이 세 번 나타났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반드시 정확히 세 차례의 큰 시험을 거친다고 문자적으로 공식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셋’은 말씀의 상응 안에서 완전한 과정,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어지는 것과 관련된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세 차례 전투’를 인간 거듭남의 완전한 시험 과정의 표상으로 읽을 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의 영적 생애를 정확히 세 번의 시험으로 나누는 심리적 시간표로 고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생애 가운데 몇 번의 매우 큰 시험을 경험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작은 시험들이 오랜 기간 계속될 수 있습니다. 한 사람 안에서도 동일한 악이 여러 형태로 되풀이되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각 사람을 인도하시는 방식은 그 사람의 유전적 성향, 삶의 환경, 받아들인 진리와 선, 자유의 상태에 따라 다릅니다. 그러므로 ‘세 차례’의 깊은 영적 의미를 존중하되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획일적인 단계표로 만들지는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하나 매우 중요한 것은 ‘누가 싸우는가’입니다. 출애굽기의 첫 번째 위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합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다가 갈라지고 길이 열립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거듭남의 가장 근본적인 비밀 하나를 떠올리게 합니다. 인간은 싸우지만 실제 승리를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초기에 사람은 자기 안의 악이 얼마나 강한지조차 잘 모릅니다. ‘앞으로 착하게 살면 되지’, ‘화를 내지 않으면 되지’, ‘욕심을 버리면 되지’ 하고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싸움에 들어가면 자기 의지력이 얼마나 약한지 발견합니다. 하지 않으려고 했던 말을 또 하고, 용서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떠오르면 다시 분노하고,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던 명예욕이 다른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러면서 사람은 점점 중요한 사실을 배웁니다. ‘나는 나를 거듭나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깨달음은 절망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하신다’는 사실을 배우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자기 힘으로 홍해를 가른 것이 아니듯, 인간도 자기 힘으로 자기 proprium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열린 길을 실제로 걸어가야 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반복하여 말하는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이라는 원리가 여기에 아주 잘 들어맞습니다. 인간은 실제로 결단하고 싸우고 악을 거절해야 하지만, 그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관점에서 광야는 ‘내가 얼마나 강한 영적 사람이 되는가’를 증명하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내 힘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배우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만나가 주어지고, 반석에서 물이 나옵니다. 자기 힘으로 생산한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받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선과 진리는 인간의 고유한 소유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에게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제 선했다고 해서 오늘도 자동으로 선한 것이 아닙니다. 어제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오늘도 자기 힘으로 그 진리를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생명은 계속 주님에게서 흘러와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말하는 ‘연단’은 단순한 정신력 강화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광야에서 강한 사람이 되어 마침내 자기 힘으로 가나안을 정복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주님의 인도를 따르는 새로운 사람이 형성되는 이야기입니다. 외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점점 전쟁을 잘하는 백성이 되지만, 속뜻에서는 인간이 점점 자기 힘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악과 싸우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강사가 ‘영적 할례를 받아 흰옷을 입고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 ‘익은 열매가 되어야 천국 곳간에 추수될 수 있다’고 말하는 부분도 나옵니다. 이 표현은 이후 강의에서 매우 중요해지므로 지금부터 정확히 구별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의 체계에서 가나안 입성은 상당히 완성된 성화 상태를 가리킵니다. 죄성이 제거되고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을 이루며 ‘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광야의 세 연단은 그 완전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단계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가나안’은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가나안은 주님의 나라, 교회, 천국적인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이 가나안에 들어갔다는 것을 ‘그 사람 안에서 모든 악의 가능성이 존재론적으로 제거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지배 질서가 바뀌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예전에는 proprium에서 나오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사람을 지배했지만, 거듭남을 통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중심을 이루게 됩니다. 악은 더 이상 그 사람이 자유롭게 사랑하고 선택하는 생명의 중심이 아닙니다.

 

이것은 작은 차이처럼 보이지만 성화에 대한 태도를 크게 바꿉니다. ‘나는 세 번째 연단까지 통과했으므로 이제 익은 열매다’라는 자기 인식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적 자기확신 자체가 새로운 proprium의 통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직 부족합니다’라고 말하는 겸손조차 자기 영성을 드러내는 수단이 될 수 있을 만큼 proprium은 섬세합니다. 그래서 거듭날수록 사람은 자기 완성도를 측정하기보다 주님께 더욱 의존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강사의 ‘아이-청년-아비’라는 성장 도식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영적 어린아이의 상태에서는 아직 자기 힘이 없습니다. 청년의 상태에서는 실제로 싸우기 시작합니다. 아비의 상태에서는 더 깊은 선과 지혜가 형성됩니다. 이것을 기계적인 세 단계로 고정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거듭남에 실제로 서로 다른 상태들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좋은 그림이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도 거듭남을 하나의 순간적 사건이 아니라 여러 상태의 연속으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AC를 읽는 독자에게는 여기서 더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성경의 역사적 이야기들은 바로 이런 식으로 인간의 거듭남을 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여정, 야곱의 삶, 요셉의 이야기, 출애굽, 광야, 가나안 정복이 단지 각각 떨어진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말씀의 속뜻에서 주님의 영화와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연속적인 아르카나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공용복 선생의 전승이 출애굽과 광야를 인간의 영적 성장 과정으로 읽으려 했다는 사실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볼 때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두 방식의 중요한 차이도 나타납니다. ‘핵심진리’는 성경의 여러 사건을 영적 성장의 모형으로 연결하면서도 그 연결을 주로 신앙적 유비와 성경구절 간의 조합을 통해 구축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말씀 전체에 일정한 상응의 질서가 있으며, 인물·장소·숫자·사건 하나하나가 그 질서 안에서 연속적인 속뜻을 이룬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보기에는 ‘둘 다 출애굽을 영적 성장으로 해석한다’고 할 수 있지만, 그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신학적 토대는 상당히 다릅니다.

 

이 차이를 알고 읽으면 오히려 공용복 선생의 전승을 더 공정하게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와 비슷하니 결국 같은 것이다’라고 성급하게 동일시할 필요도 없고, 세부 해석이 다르다고 해서 그 안의 영적 통찰까지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먼저 ‘이 해석은 무엇을 보려고 했는가’를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스베덴보리의 상응과 속뜻의 질서를 통해 어디까지 더 깊어질 수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번 부분에서 그 공통된 핵심은 매우 분명합니다. ‘애굽에서 나왔다고 곧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오늘의 신앙 언어로 바꾸면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했다고 해서 거듭남의 모든 과정이 끝난 것은 아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시작입니다. 그 진리가 삶이 되어야 하고, 삶 속에서 자기 안의 악이 드러나야 하며,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을 의지하여 싸워야 합니다. 이 긴 과정이 광야입니다.

 

그렇다고 광야가 구원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에 광야가 있습니다. 만나도 광야에서 주어졌고, 반석의 물도 광야에서 주어졌으며, 구름기둥과 불기둥도 광야에서 함께했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없는 곳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의존이 벗겨지고 주님의 인도를 배우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시험을 겪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반드시 주님에게서 멀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때로는 오히려 주님께서 더 깊은 곳을 다루고 계신다는 표시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점은 5강 1부에서 다룬 ‘양심의 빛’과도 연결됩니다. 빛이 밝아질수록 자기 안의 어둠이 더 많이 보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성장할수록 ‘나는 점점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 간다’고 느끼기보다 오히려 자기 안의 proprium이 얼마나 깊은지 더 잘 보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여 주시는 분이 바로 그것에서 건져내시는 주님이심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번 5강 2부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출애굽은 거듭남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며, 광야는 주님께서 진리를 삶으로 만드시기 위해 인간의 proprium을 드러내고 질서 있게 하시는 과정이고, 가나안은 자기 힘으로 완전해진 인간의 상태가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그의 생명을 다스리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이렇게 보면 강사가 말하는 ‘세 차례 연단’도 훨씬 풍성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지금 몇 번째 연단에 있는가?’를 계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이 상황에서 주님께서 내 안의 무엇을 보여 주고 계시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첫 번째이든 두 번째이든 세 번째이든, 또는 우리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수많은 작은 시험 가운데 하나이든, 모든 거듭남의 싸움에서 실제로 싸우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그분이 열어 주신 길을 자유롭게 걸어갈 뿐입니다.

 

다음 5강 3부에서는 강사가 이 ‘세 차례 연단’을 훨씬 구체적으로 펼쳐 가는 부분을 따라가겠습니다. 특히 ‘바로의 군대-아말렉-가나안 입성 전의 강적들’이 각각 무엇을 의미한다고 보는지, 그리고 ‘아이-청년-아비’라는 성장 단계와 어떻게 연결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여기부터는 공용복 선생의 실제 연단 사례도 점차 등장하기 때문에, ‘핵심진리’가 말하는 영적 성장론의 독특한 구조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5강 3부

첫째, 둘째, 셋째 연단 : 싸움의 대상이 점점 깊어지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5강 2부에서는 강사가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여정을 한 사람의 영적 성장 과정으로 읽는 큰 구조를 살펴보았습니다. 애굽을 떠나는 것은 구원의 시작이고, 광야는 말씀을 실제 삶에 적용하면서 자기 안의 죄성과 정욕이 드러나고 연단받는 과정이며, 가나안은 그 과정을 지나 ‘익은 열매’, 곧 ‘이기는 자’가 되는 상태로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강사는 이 광야의 과정을 조금 더 세분하여 ‘세 차례 연단’이라는 독특한 구조로 설명합니다. 첫째 연단은 애굽에서 나온 직후 바로의 군대에게 추격당하는 사건, 둘째 연단은 광야에서 아말렉과 싸우는 사건, 셋째 연단은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에서 더욱 강력한 적들과 싸우는 사건입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전투가 세 번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강사는 이 세 전투를 통하여 신앙이 성장함에 따라 인간이 죄와 싸우는 방식과 깊이가 달라진다고 봅니다.

 

첫 번째 연단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사실상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애굽에서는 오랫동안 종으로 살았고, 이제 막 바로의 지배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뒤에서는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 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두려워하며 모세를 원망합니다. 이 단계에서 백성은 스스로 싸워 승리할 능력이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여셔야 합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이스라엘은 그 길을 지나가며, 뒤따라 들어온 애굽의 군대는 물에 잠깁니다. 강사는 이것을 영적으로 갓 출발한 사람의 상태와 연결합니다. 아직 죄와 직접 맞서 싸울 힘이 충분하지 않은 단계입니다.

 

이 그림은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깊은 악과 거짓의 습관 속에서 살아왔는지를 충분히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 믿었으니 이제 새사람이 되었다’는 기쁨이 큽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전의 성질과 욕망과 습관들이 다시 뒤쫓아오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는데 옛것이 그대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낙심하기도 합니다. ‘나는 구원받았는데 왜 아직도 이런 생각이 올라오는가? 왜 예전 성질이 그대로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서 중요한 구별 하나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겉 사람 안에 축적되어 있던 악과 거짓의 질서가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가 들어오면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불일치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속사람 쪽에서는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는데 겉 사람에는 오래된 습관과 애정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이 둘이 실제로 질서를 이루도록 하는 긴 과정입니다. ‘애굽에서 나왔다’는 사실과 ‘애굽이 내 안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첫 번째 연단에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이스라엘이 자기 능력으로 애굽 군대를 무찌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거듭남론에 비추어 보면 아주 중요한 원리가 드러납니다. 거듭남의 모든 싸움에서 실제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은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기 위해 실제로 노력해야 하지만,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자신을 거듭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거듭남마저 proprium의 사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연단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다가 갈라졌을 때 이스라엘은 그 길을 실제로 걸어가야 했습니다. 가만히 애굽 쪽에 머물러 있으면서 하나님이 알아서 가나안으로 옮겨 주시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에서 반복하여 강조하는 매우 독특한 균형과 연결됩니다. 사람은 악과 싸울 때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싸워야 하지만, 실제 능력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인플럭스가 여기에서 함께 작용합니다.

 

이제 두 번째 연단으로 가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이스라엘은 아말렉과 실제로 싸웁니다. 첫 번째 연단에서는 도망하던 백성이 이제는 전투에 참여합니다. 강사는 이것을 영적으로 성장한 ‘청년’의 단계와 연결합니다. 신앙의 초기에는 무엇이 죄인지조차 잘 몰랐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말씀을 알고 선악을 분별하며 실제로 죄와 싸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양심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아말렉과의 싸움에는 매우 흥미로운 장면이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아래에서 싸우고 모세는 산 위에서 손을 듭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깁니다. 결국 아론과 훌이 모세의 두 손을 받쳐 주고 이스라엘이 승리합니다. 이 장면은 인간이 실제로 싸우지만 승리의 근원이 인간의 전투 능력 자체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매우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사건에 훨씬 깊은 아르카나가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인물과 사건 하나하나는 상응을 통해 속뜻을 품고 있으며, 아말렉과의 전쟁 역시 단순한 도덕적 교훈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모세의 손을 들면 기도가 강해져 이긴다’는 식으로 단순화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현재 강의가 말하려는 영적 성장의 문맥에서는 한 가지 중요한 원리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아래에서 실제로 싸우지만 승리는 위에서 옵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이라는 원리와 잘 연결됩니다.

 

여기서 ‘청년’의 영성에는 한 가지 위험도 있습니다. 싸우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면 자신이 강해졌다고 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나는 아무것도 못 합니다’라고 하던 사람이 몇 가지 욕망을 이기고, 기도생활이 안정되고, 말씀도 많이 알고, 다른 사람에게 신앙적인 조언도 할 수 있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나는 이제 꽤 영적인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생길 수 있습니다. 자연적인 자기애가 종교적인 자기애로 옷을 갈아입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proprium 개념으로 보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proprium은 반드시 돈과 성욕과 명예 같은 노골적인 욕망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나는 진리를 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영적으로 깊다’, ‘나는 시험을 많이 이겼다’, ‘나는 성화되었다’는 생각 속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적 욕망과 싸우는 것보다 종교적인 모습을 입은 proprium을 발견하는 일이 오히려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적 성장이란 ‘점점 내가 강해지는 것’과 반드시 같은 뜻은 아닙니다. 겉으로는 실제로 더 절제할 수 있고, 더 분별할 수 있고, 더 안정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오히려 ‘이 모든 것이 내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구나’를 더욱 깊이 알아 가야 합니다. 천국의 사람은 자기 능력이 커졌다고 느껴 주님에게서 독립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욱 자유롭게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 번째 연단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준비가 됩니다. 강사의 구조에서 세 번째 연단은 가장 깊고 강한 싸움입니다. 이제 단순히 애굽에서 도망치거나 광야에서 아말렉 하나와 싸우는 정도가 아닙니다. 가나안에 가까워질수록 더 강한 적들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강사는 영적으로 성숙한 ‘아비’의 단계와 연결하고, 결국 죄성의 깊은 뿌리까지 다루어 ‘익은 열매’가 되는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역설이 나타납니다. 가나안에서 멀리 있을 때보다 가나안에 가까워질수록 싸움이 더 어려워집니다. 만일 영적 성장을 단순히 ‘점점 문제가 없어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그림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이 층층이 열리는 과정이라고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눈에 잘 보이는 악부터 다루어집니다. 거짓말, 음란, 탐욕, 노골적인 분노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어느 정도 질서 안에 들어오면 더 미세한 동기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자기 판단을 고집하는 마음, 다른 사람을 은근히 낮추는 마음, 선을 행하고도 그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는 마음 등이 드러납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오래했는데 이전보다 자기 안의 악이 더 많이 보인다고 해서 반드시 더 악해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빛이 더 깊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것일 수 있습니다. 어두운 방에서는 먼지가 보이지 않지만 햇빛이 강하게 들어오면 공중에 떠다니는 미세한 먼지까지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먼지가 보인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보았을 때 어떻게 하느냐입니다.

 

이 점은 5강 1부에서 살펴본 ‘양심의 빛’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양심의 빛이 밝아질수록 선악을 더 세밀하게 분별하게 된다는 강사의 설명은 이런 의미에서는 매우 깊습니다. 처음에는 행동의 선악만 보입니다. 그 다음에는 말의 선악이 보입니다. 더 나아가 말과 행동을 낳은 동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는 옳은 말을 했지만 왜 그 말을 했는가? 상대를 살리기 위해서였는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는가?’라는 데까지 들어갑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목적’의 중요성이 드러납니다. 인간의 행위는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목적, 그 목적에서 나오는 생각과 수단, 그리고 최종적인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외적으로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을 움직이는 목적에 따라 영적인 질은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도 그 사람의 선을 위해서일 수 있고, 자기 지식을 과시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헌금도 체어리티에서 할 수 있고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할 수도 있습니다. 설교도 주님과 교회를 위해 할 수 있고 자기 명성을 위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 번째 연단을 단순히 ‘더 무서운 사건이 일어난다’고 이해하기보다 ‘더 깊은 사랑의 층이 시험받는다’고 이해하면 훨씬 의미가 깊어집니다. 겉 행동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행동을 움직이는 사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거듭남의 핵심은 행동 목록 몇 가지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지배적 사랑이 변화되는 데 있습니다.

 

다만 강사가 이 세 번째 연단을 지나면 ‘죄성의 뿌리가 제거되고 익은 열매가 된다’고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중요한 구별을 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실제적이며 매우 깊은 변화입니다.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 선이 사람의 생명의 중심이 되는 변화가 실제로 일어납니다. 그러나 인간의 proprium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소멸하여 그 사람에게 더 이상 어떤 악의 가능성도 남지 않는다는 식으로 이해하지는 않습니다.

 

천사도 자기 자신에게서 선한 것이 아닙니다. 천사는 자기 안으로 주님에게서 선이 흘러들어 온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천사입니다. 만일 주님으로부터의 인플럭스가 한순간이라도 끊긴다면 누구도 스스로 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완성은 ‘이제 나는 완전히 선한 존재가 되었다’가 아니라 ‘나는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자유롭게 인정하며 그 선 안에서 살기를 사랑한다’는 상태에 더 가깝습니다.

 

이것이 ‘익은 열매’라는 말을 읽을 때도 중요한 균형이 됩니다. 열매는 분명 익어야 합니다. 진리가 단지 지식으로 머물러서는 안 되고 선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열매가 자기 자신을 익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무가 생명을 받아 열매를 맺듯 인간도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선을 행합니다. 따라서 익은 열매가 된 사람일수록 ‘내가 이루었다’고 생각하기보다 ‘주님께서 하셨다’고 인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강사가 첫째·둘째·셋째 연단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핵심도 결국 ‘싸움 없이 성숙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이 부분은 충분히 귀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신앙을 단순히 마음의 위로나 천국 입장권으로 이해하지 않고, 실제 인간의 성품과 사랑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았다는 고백 이후에도 광야가 있고, 말씀을 실제로 살면서 자기 안의 악과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분명하게 합니다. 싸움 자체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고난을 겪었다

 

 

 

5강 4부

‘내 속에 거하는 죄’와 전적 부패 : 죄성은 인간의 가장 깊은 영에 뿌리박힌 실체인가

5강은 이제 연단이 왜 필요한가를 설명하기 위해 인간 안의 죄 문제 그 자체로 깊이 들어갑니다. 앞에서는 말씀을 실천하려 할 때 비로소 자기 안에 숨어 있던 것이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이제 강사는 그 ‘숨어 있던 것’의 정체를 ‘죄성’이라고 부르면서 로마서 7장 20절,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를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강사의 해석에 따르면 사람이 선을 행하려고 결단했는데도 범죄할 환경이 주어지면 마음속에서 ‘죄의 법’이 일어나 결국 자신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의 ‘영 속 가장 깊은 곳에 죄성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신학적으로 ‘완전 타락’, ‘전적 부패’라고 설명합니다.

 

강사는 이 말을 단순히 ‘사람은 죄를 많이 짓는다’는 정도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훨씬 구조적으로 이해합니다. ‘원죄가 영 속에 뿌리박혀서 범죄할 기회가 주어지면 마음에 죄의 법칙이 능력으로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죄의 종노릇하는 상태’가 바로 완전 타락과 전적 부패라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그 죄성이 잠잠해 있어서 자신도 그것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특정한 환경이 주어지면 그것이 발동하여 마음을 지배하고 마침내 행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강의에서 든 예를 따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라는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 ‘앞으로는 오래 참아야겠다’고 결심합니다. 그 진리가 양심에 새겨졌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자기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참습니다. 두 번째도 참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쯤 되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분노가 폭발합니다. 강사는 바로 그 순간을 ‘죄성이 발동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말씀을 몰랐을 때에는 그것이 죄인지조차 의식하지 못했지만, 말씀을 철저히 지키려고 하자 오히려 자기 안에 말씀을 거역하는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매우 중요한 영적 관찰이 담겨 있습니다. 말씀의 빛이 들어오기 전에는 자기 안의 어둠을 모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성질대로 살면서 화를 낼 때에는 ‘원래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생각합니다. 인정받으려는 욕망도 ‘누구나 그렇지’ 하고 지나갑니다.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조금 사실을 왜곡하는 것도 ‘세상살이가 다 그렇지’라고 합리화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실제로 살려고 하면 이전에는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갑자기 문제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죄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진리가 죄를 드러낸 것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빛은 어둠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빛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미 있던 어둠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에서도 진리가 이해성 안에 들어오면 그 진리와 반대되는 의지의 상태가 점차 드러납니다. ‘나는 이 진리가 참되다는 것을 아는데 왜 내 마음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가?’라는 갈등이 생깁니다. 이것은 오히려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단계입니다. 선과 악이 구별되지 않던 상태에서 이제 둘이 서로 분리되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핵심진리’의 인간론과 스베덴보리의 인간론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강사는 죄성을 ‘내 영 속에 뿌리박힌 것’, 더 나아가 ‘영의 밑바닥 가장 깊은 곳에 뿌리박힌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다른 강의에서도 음란성, 시기, 혈기, 아집, 교만 같은 죄성이 인간 안에 뿌리박혀 있다가 기회가 주어지면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설명하고, 이것을 ‘원죄’, ‘부패성’, ‘유전죄’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인간의 가장 내적인 영 자체에 악의 실체가 뿌리를 박고 있다는 그림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부분을 상당히 조심스럽게 다듬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가장 깊은 곳, 곧 inmost는 악이 뿌리박혀 있는 장소라기보다 주님께서 인간 안으로 유입하시는 가장 깊은 입구와 관련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서 생명을 갖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매 순간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가장 깊은 생명 자체를 ‘죄악으로 오염된 핵’처럼 이해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인간 구조와 잘 맞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차이입니다. 인간에게 유전적 악이 있다는 사실을 스베덴보리가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AC 전체에서 유전적 악의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유전되는 것은 조상의 죄에 대한 법적 ‘죄책’이 그대로 자손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향한 성향, 곧 악을 사랑하기 쉬운 경향입니다. 따라서 ‘아담이 죄를 지었으므로 그 죄책이 모든 인간에게 그대로 전가되었다’는 전통적인 원죄론과는 다릅니다. 인간은 조상의 죄 때문에 정죄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유 가운데 받아들이고 자기 삶으로 만든 악에 대하여 책임을 집니다.

 

이 점에서는 오히려 공용복 선생의 설명 가운데 흥미로운 접점도 보입니다. 강의 자료에서 ‘원죄’라고 할 때 단순히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그 행위 자체’를 원죄라고 하지 않고, 그 타락을 통하여 인간에게 들어온 ‘죄성’, 곧 ‘부패성·유전죄’를 원죄라고 구별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행위 자체는 그들의 ‘자범죄’이고, 이후 인간에게 유전되는 죄의 성향을 원죄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죄성이 들어왔다’는 구조는 스베덴보리와 다르지만, 조상의 범죄 행위 자체와 후손에게 이어지는 악의 성향을 구별하려 한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해석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 차이는 더욱 커집니다. 아담은 지구상 최초의 한 남자를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라 태고교회, 곧 인류의 가장 오래된 교회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한 사람 아담이 역사적으로 선악과를 먹었고 그 순간 어떤 죄성이라는 것이 인류의 영 속으로 들어왔다’는 구조 자체가 AC의 창세기 속뜻과는 맞지 않습니다. 창세기 3장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떠나 감각과 자기 이성, 곧 proprium을 신뢰하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타락해 갔는가를 말씀의 속뜻으로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유전적 악은 일종의 ‘영적 유전자 속 죄 물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 세대를 거쳐 축적되어 내려오는 사랑과 애정의 기울어짐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으려는 경향, 세상을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하려는 경향을 갖습니다. 이것이 실제 생활에서 자유롭게 받아들여지고 반복될 때 개인의 실제 악이 됩니다. 반대로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여 그것을 죄로 여기고 거부하면 그 악은 비록 유전적 경향으로 존재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을 지배하지 못하게 됩니다.

 

여기서 ‘proprium’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느낍니다.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선하다’, ‘내가 옳다’고 느낍니다. 이 자기 것이라는 감각 자체가 인간에게 자유와 책임이 있기 위해 필요하지만, 인간이 그것을 실제 자기 소유라고 믿고 주님에게서 독립하려 할 때 proprium은 악과 거짓의 토대가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죄론은 ‘내 영의 가장 깊은 곳에 악한 물질이 박혀 있다’는 그림보다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생명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려는 proprium의 질서’에 초점을 둡니다.

 

그런데 이 설명을 잘못 들으면 ‘그렇다면 인간에게 악은 별로 심각하지 않다는 말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얼마나 깊고 집요하게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지를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자신을 거듭나게 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핵심진리’와 만납니다. 강사는 완전 타락과 전적 부패를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구원할 수 없는 죄 상태’라고 설명하면서 결국 ‘나는 어쩔 수 없구나’라고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 고백의 방향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악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도 한 가지 균형을 놓치지 않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이 ‘그러므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악과 싸울 때에는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싸워야 합니다. 분노가 올라오면 말을 삼켜야 하고, 거짓말할 기회가 생기면 진실을 말해야 하며, 탐욕이 올라오면 실제 행동에서 그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싸움이 끝난 뒤에는 ‘내가 내 의지력으로 이겼다’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능력을 주셨다’고 인정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역사 사이의 균형입니다.

 

그래서 강의가 말하는 ‘죄성이 환경을 만나면 발동한다’는 관찰은 스베덴보리의 시험론으로 조금 바꾸어 읽으면 상당히 유익해집니다. 평소에는 자기 안의 어떤 악한 애정을 모르고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손해를 보거나, 무시당하거나, 성적 유혹을 받거나, 권력을 가질 기회가 생기거나, 자기 의견을 관철할 수 있는 상황이 오면 숨어 있던 사랑이 밖으로 드러납니다. 환경이 그 악을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그 환경을 통하여 이미 자기 안에 있던 것이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런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만으로 자기 상태를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죄를 지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권력이 없는 사람이 권력욕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고, 돈이 없는 사람이 자기는 돈에 초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도 자기를 비판하지 않을 때 자기가 온유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환경이 달라지면 자신도 몰랐던 것이 드러납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삶의 환경은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강사가 ‘범죄할 기회가 주어지면 죄성이 발동한다’고 설명하는 부분에서 우리가 충분히 건질 수 있는 통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그때 올라오는 모든 생각과 충동을 곧바로 ‘나 자체’라고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인간에게는 영계로부터 끊임없는 인플럭스가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애정과 생각은 천국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유입되고, 악한 애정과 거짓은 지옥으로부터 유입됩니다. 인간은 그 사이에서 자유 가운데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 것인가를 선택합니다.

 

이 사실은 죄와 싸우는 사람에게 의외로 큰 자유를 줍니다. 갑자기 악한 생각이 떠올랐다고 해서 ‘내 영의 가장 깊은 곳이 이것이구나’ 하고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음란한 생각이 스쳤다고 해서 ‘내 본질은 음란한 인간이구나’, 누군가에 대한 미움이 순간적으로 올라왔다고 해서 ‘내 참된 자아는 살인적인 인간이구나’라고 곧바로 규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올라왔을 때 내가 그것을 기뻐하며 붙잡고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이것은 주님의 뜻과 맞지 않는다’고 거절하는가입니다.

 

이 구별은 정말 중요합니다. 유혹과 죄를 동일시하면 신앙생활은 끝없는 자기혐오로 갈 수 있습니다. 시험 가운데 악한 충동이 나타난다는 사실 자체와 그 악을 자유롭게 사랑하고 실행하는 것은 다릅니다. 오히려 악이 올라올 때 그것을 보고 괴로워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한다는 사실은 이미 그 사람 안에 그 악과 싸우는 다른 생명이 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싸움이 있다는 것은 양편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로마서 7장의 ‘내 속에 거하는 죄’를 ‘내 존재의 가장 깊은 본질이 죄다’라고 읽는 것과 ‘내가 선을 원하면서도 나를 끌어당기는 악한 성향이 여전히 겉 사람 안에 있다’고 읽는 것은 영적으로 상당히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전자는 ‘나는 본질적으로 죄 덩어리다’라는 자기규정으로 갈 수 있지만, 후자는 ‘내 안에는 내가 싸워야 할 유전적이고 실제적인 악이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 악과 나를 분리하여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고 계신다’는 거듭남의 관점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우리가 AC에서 계속 만나게 되는 ‘리메인스’를 함께 생각하면 더욱 중요해집니다. 인간 안에 악의 경향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선과 진리의 상태들을 인간 안에 은밀히 보존하십니다. 인간 자신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주님께서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 리메인스를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완전히 부패하여 안에는 오직 죄밖에 없는 존재’라고만 묘사하면 AC가 말하는 인간의 내적 구조 가운데 매우 중요한 절반을 놓치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전적 부패’라는 말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사용할 때 주의가 필요합니다. 만일 이 말이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서 어떤 선도 만들어 낼 수 없으며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뜻이라면 상당 부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존재의 모든 층위가 악으로만 이루어져 있고 주님께서 보존하신 선의 리메인스조차 없으며 자유와 합리성도 사실상 파괴되었다’는 뜻이라면 스베덴보리와는 맞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리 타락한 인간에게도 자유와 합리성을 보존하시며, 바로 그것을 통하여 그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죄성은 마귀의 것’이라는 강의의 설명입니다. 앞선 강의에서 강사는 정욕은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를 보존하도록 주신 기능이지만 ‘죄성은 마귀의 것’이라고 매우 분명하게 구별했습니다. 이 말은 죄를 하나님의 창조물로 돌리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매우 중요한 직관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오며 악과 거짓은 지옥에서 유입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악은 인간의 참된 창조 목적에 속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는 상당히 가까운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악이 마귀에게서 어떤 ‘죄성 물질’처럼 인간의 영 속으로 이동해 들어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악한 영들의 인플럭스는 인간의 자유를 강제로 파괴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그것에 동의하고 사랑하며 반복하여 자기 삶으로 만들 때 그것이 그의 실제 악이 됩니다.

 

이것은 책임의 문제에서도 중요합니다. ‘죄성이 마귀의 것이니 내가 죄를 지은 것은 결국 마귀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자기에게 유입되는 악을 마치 자기 것처럼 느끼면서 그것을 자유롭게 거부할 수 있도록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악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면 책임이 생깁니다. 반대로 선을 행하더라도 그 선의 공로를 자기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악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되 선에 대해서는 공로를 주장하지 않는 이 독특한 구조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강의가 말하는 ‘나는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존재구나. 나는 정말 비참한 신세구나’라는 자기 인식도 어느 지점까지는 의미가 있지만, 그 자리에 너무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의 목적은 자기혐오가 아니라 주님을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악하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나에게는 주님이 필요하다’로 가야 합니다.

 

더 깊이 말하면, 스베덴보리에게 회개의 빛은 사람을 자기 자신에게 고정시키지 않습니다. 자기 안의 악을 끝없이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보게 하신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어둠을 발견한 이유는 빛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이 보이는 순간에도 동시에 빛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공용복 선생의 ‘죄성’ 개념과 스베덴보리의 ‘유전적 악·proprium·인플럭스’는 완전히 동일하지 않지만 상당히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공용복 선생의 전승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죄는 훨씬 깊다. 환경만 주어지면 숨어 있던 것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자기 힘을 믿지 말고 철저히 회개하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그렇다. 그러나 그 악을 당신 존재의 가장 깊은 본질과 동일시하지 말라. 당신의 가장 깊은 생명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으며,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자유와 합리성을 지켜 주시면서 악을 당신에게서 분리해 내어 새로운 의지와 이해성을 형성하신다’고 덧붙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보완이 이번 5강에서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죄성의 깊이’를 강조하는 강의는 자칫 듣는 사람을 ‘내 안에는 죄밖에 없다’는 쪽으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의 거듭남론은 인간의 타락을 조금도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그보다 먼저, 그리고 더 깊은 곳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인간 안에서 악이 깊다고 해도 주님의 역사는 그보다 더 깊습니다. 인간의 유전적 악이 오래되었다 해도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는 그 사람의 어린 시절부터 이미 앞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 때문에 연단이 가능합니다. 인간이 오직 악뿐이라면 싸움 자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악과 악 사이에는 영적 시험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심어 놓으셨기 때문에 그것과 반대되는 악이 움직일 때 갈등이 생깁니다. ‘나는 화를 내고 싶지만 그러면 안 된다’, ‘보복하고 싶지만 용서해야 한다’, ‘거짓말하면 유리하지만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고통스러운 갈등 자체가 이미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5강 1부의 ‘양심’, 2부의 ‘광야’, 3부의 ‘세 차례 연단’, 그리고 이번 4부의 ‘죄성’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말씀의 진리가 양심에 들어옵니다. 그러자 그 진리와 반대되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것을 통하여 광야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싸움이 깊어질수록 더 깊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사람은 점점 ‘내 힘으로는 이것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을 의지하는 참된 거듭남이 시작됩니다.

 

따라서 ‘전적 부패’를 ‘나는 존재 자체가 오직 악이다’라는 선언으로 읽기보다, ‘나의 proprium에서는 참된 선이 나올 수 없으므로 모든 선을 주님에게서 받아야 한다’는 고백으로 읽는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상당히 깊은 의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절망이 아니라 자기 의존의 종말입니다. 그리고 자기 의존이 끝나는 자리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생명이 시작됩니다.

 

이제 5강은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그렇게 깊은 죄성이 있다면 성화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 죄성은 실제로 뿌리째 없어질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런 사람이 바로 핵심진리가 말하는 ‘이기는 자’, ‘익은 열매’인가?’입니다. 5강 5부에서는 바로 이 지점을 따라가면서, 공용복 선생의 ‘죄성 제거와 성화’와 스베덴보리의 ‘악의 제거, 혹은 악에서의 분리와 거듭남’ 사이에 있는 매우 중요한 차이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5강 5부

‘이기는 자’와 ‘익은 열매’ : 성화의 완성은 죄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상태인가

5강은 이제 지금까지의 연단론을 하나의 분명한 목표점으로 모읍니다. 강사는 교회시대의 성도들에게 신앙의 목표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는 상태가 아니라, 육체가 살아 있는 동안 세 차례의 광야 연단을 통과하면서 마음과 행실이 정결해지고 마침내 ‘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강의에서는 이런 사람을 이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곧 ‘생명수가 흐르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성도라고 표현하고, 신앙의 목표를 ‘익은 열매가 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또한 웨슬리의 ‘완전 성화’, 존 번연의 ‘전신갑주를 입은 성도’, 여러 성인들의 ‘신인 합일’ 등을 서로 다른 표현이지만 같은 영적 완성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묶습니다.

 

여기서 먼저 귀하게 보아야 할 것은 강사가 구원을 하나의 순간적 사건으로 축소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믿었다’, ‘구원받았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실제적인 성장이 있어야 하고, 죄와 싸우며 사랑과 성품이 변화되고, 결국 삶 전체가 주님의 뜻에 가까워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기는 자’는 단지 어떤 교리적 자격을 획득한 사람이 아니라 실제 영적 싸움을 통과한 사람입니다. 강사는 고린도전서의 경주 이미지를 가져와 구원받은 성도가 광야의 연단을 지나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면 ‘이기는 자’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강조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신앙을 단순한 지적 동의로 보지 않고, 진리가 삶이 되어야 하며 악과 거짓을 실제로 물리치는 거듭남의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강의는 ‘이기는 자’를 상당히 완결된 상태로 말합니다. 세 차례 연단을 모두 통과하고 마음과 행실이 정결해진 성도,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 ‘익은 열매’가 된 사람입니다. 이런 표현을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이 사람 안에서는 죄성 자체가 완전히 제거되어 더 이상 악의 뿌리가 남지 않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공용복 선생의 전승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 사이에 섬세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분명 실제적인 변화입니다. 단지 하나님이 ‘너를 의롭다고 간주한다’는 외적 선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와 이해성이 실제로 새로워지고, 악을 사랑하던 사람이 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 역시 성화나 거듭남을 약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를 ‘유전적 악과 proprium이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없어지는 것’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사람 안의 악은 주님의 역사로 억제되고 분리되며, 새로운 선의 질서가 중심을 차지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악의 ‘존재 가능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악이 더 이상 그 사람의 자유롭고 기쁜 사랑의 중심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천사에게 적용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천사는 선한 존재이지만 자기 자신에게서 선한 것이 아닙니다. 천사는 자기에게 있는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온다는 사실을 압니다. 자기 proprium만을 본다면 그 안에는 선이 없다는 사실도 압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완성은 ‘나는 이제 완전히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자기확신이 아니라 ‘나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자유롭게 받아 그 선 안에서 살기를 사랑한다’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기는 자’라는 말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을 때 중요한 것은 ‘무엇을 이겼는가’입니다. 단순히 욕망 몇 가지를 억제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깊게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질서가 무너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질서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김은 자기 의지력의 승리가 아니라 사랑의 질서가 바뀐 결과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익은 열매’라는 표현은 오히려 아주 좋은 비유가 됩니다. 열매는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나무가 뿌리로부터 생명을 받아 충분한 시간 동안 자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거듭남도 한순간의 결단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사람의 생각과 의지와 행동 안으로 점점 깊이 들어가면서 이루어집니다. 익은 열매란 단순히 죄를 많이 안 짓는 사람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람이 된 상태에 더 가깝습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처음 익은 열매’뿐 아니라 ‘두 번째, 세 번째 익은 열매’도 있다고 말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영적 성장이 단일한 한 시점에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다른 과정과 시기가 있다는 점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구조로 보입니다. 다만 ‘첫 열매’, ‘둘째 열매’, ‘셋째 열매’를 고정된 등급표처럼 이해하면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에는 무수한 차이와 상태가 있지만 그것은 인간이 자기 영적 등급을 측정하고 자랑하기 위한 체계가 아닙니다. 각 사람은 주님께 받은 사랑과 진리, 그리고 쓰임에 따라 서로 다른 완전성을 이룹니다.

 

특히 ‘이기는 자’라는 말에는 영적 자부심의 위험이 숨어 있습니다. 자신이 ‘이기는 자’라는 확신을 갖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새로운 proprium이 생길 수 있습니다. ‘나는 일반 성도와 다르다’, ‘나는 세 번째 연단까지 통과했다’, ‘나는 익은 열매다’, ‘나는 성화된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생기면, 자연적 명예욕이 종교적 명예욕으로 옷을 갈아입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영적 성숙의 중요한 표지를 오히려 자기 상태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 데서 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모든 선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변화를 전혀 알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은 어느 정도 자기가 예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용서하지 못했던 일을 이제는 조금 더 빨리 내려놓고, 예전에는 인정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 흔들림이 줄고, 예전에는 자기 이익만 보았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의 선을 함께 생각합니다. 이런 변화는 실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내가 완성되었다’는 자기 판정으로 바꾸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강의가 웨슬리의 ‘완전 성화’, 존 번연의 ‘전신갑주’, 가톨릭 영성의 ‘신인 합일’을 하나의 큰 그림 안에 배치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여기에는 서로 다른 전통의 언어 속에서 하나의 공통된 실재를 찾으려는 태도가 있습니다. 곧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서 출발하여 실제로 변화되고, 더 깊은 내적 연합과 성숙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핵심진리’의 가장 독특한 특징 가운데 하나로 보입니다. 교파별 용어를 그대로 절대화하기보다 그 배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성장’의 구조를 찾으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태도에 상당한 공감을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외적 교파나 교리의 차이만으로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고 보지 않습니다. 사람이 실제로 어떤 선을 사랑하고 어떤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였는지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서로 다른 신학 전통 안에서도 실제 선을 사랑하고 주님을 향해 살았던 사람은 천국적 상태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다른 표현이지만 어떤 공통된 영적 성장의 실재를 가리킬 수 있다’는 강사의 직관은 꽤 넓고 포용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인 합일’이라는 표현은 특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말을 존재론적인 합일로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와 맞지 않습니다. 인간은 영원히 피조물이고 주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천사도 하나님이 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결합(conjunction)은 있지만 동일화(identity)는 없습니다. 인간은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 주님과 결합하지만, 그 결합이 깊어질수록 오히려 모든 생명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다는 것을 더 분명히 압니다. 따라서 ‘신인 합일’을 ‘주님의 생명이 인간 안에 자유롭게 흐르고,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이 그 생명과 조화를 이루는 결합’으로 이해한다면 상당 부분 대화할 수 있지만, 인간의 존재가 신성과 하나의 본질이 된다는 뜻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 점은 ‘내주합일’이라는 표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매우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본질이 인간의 본질과 혼합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받는 그릇’입니다. 주님은 사랑과 진리로 끊임없이 유입하시고, 인간은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결합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더 참된 인간이 되지만 주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공용복 선생의 전승이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다’고 말할 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표현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내 안에 이제 신적인 생명이 본질적으로 자리 잡았으므로 나는 악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다’고 읽는 경우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내 생명의 중심이 proprium의 지배에서 벗어나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로 바뀌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강의가 말하는 ‘면류관’의 의미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이기는 자가 믿음의 경주를 마치고 면류관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것을 외적 상급으로만 이해하면 ‘내가 열심히 노력했으니 하나님께서 그 대가로 상을 주신다’는 공로 사상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상급은 선을 행하는 삶 자체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에서 선을 행하는 사람은 그 선의 쓰임 안에서 이미 천국의 기쁨을 맛봅니다. 따라서 면류관은 인간의 공로에 대한 외적 보상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선의 기쁨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익은 열매’와도 잘 연결됩니다. 열매가 익었다고 해서 나무가 자기 공로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생명을 받아 맺은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을 행하고 사랑의 열매를 맺지만 그 생명은 주님에게서 왔습니다. 인간이 해야 할 일은 그 생명을 막는 악을 죄로 여기고 물리치며 주님의 인플럭스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강의에는 ‘성화는 살아 있을 때 이루어지는가, 죽은 뒤 이루어지는가’라는 문제도 등장합니다. 일부는 성화를 사후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강사는 살아 있는 동안에도 성화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깊게 만납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계의 삶은 사람의 근본적인 사랑이 형성되는 결정적인 시기입니다. 사후에는 지상에서 형성된 지배적 사랑이 드러나고 확정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실제로 거듭나야 한다’는 강조는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 사후에도 선한 영들이 가르침을 받고 외적인 거짓과 오류가 정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배적 사랑 자체를 근본적으로 뒤집는 새로운 회개의 인생이 사후에 다시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상에서 선을 사랑한 사람은 사후에 잘못 배운 교리를 벗고 더 참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지만, 지상에서 악을 자기 생명으로 사랑한 사람이 단지 죽은 뒤 진리를 배워 천국적인 사람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화의 근본적인 방향은 살아 있는 동안 형성되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기는 자’라는 말은 미래의 특별한 몇 사람을 가리키는 영적 계급 명칭으로 보기보다, 지금 삶 가운데 주님의 힘으로 악과 거짓을 물리치고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모든 거듭남의 방향으로 읽는 편이 좋습니다. 어떤 사람은 더 일찍, 어떤 사람은 더 늦게, 어떤 사람은 더 많은 시험을 거치지만, 핵심은 모두 같습니다. 자기 사랑이 중심에서 내려오고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가 중심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완전’의 의미도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완전하다는 것은 ‘더 이상 성장할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에서도 지혜와 사랑은 영원히 증대합니다. 피조물은 무한하신 주님을 영원히 더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국적 완전은 정지된 완성이 아니라 계속 열려 있는 완전성입니다. 사람의 상태에 맞게 질서가 이루어졌지만 그 질서는 영원히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익은 열매’라는 표현은 다시 매우 적절해집니다. 익은 열매는 생명이 끝난 열매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품고 있는 열매입니다. 그 안에는 씨가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성숙은 종착점이 아니라 더 깊은 생명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큰 시험을 통과했다고 해서 더 이상 배울 것도 자랄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더 자유롭게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5강 5부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공용복 선생의 ‘이기는 자’ 개념에 덧붙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말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기는 자는 자기 힘으로 죄성을 완전히 소멸시킨 영적 강자가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 주님의 선을 자기 삶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이겼다는 사실보다 누가 이기게 하셨는지를 더 깊이 압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해하면 ‘익은 열매’, ‘완전 성화’, ‘전신갑주’, ‘신인 합일’, ‘이기는 자’라는 서로 다른 표현들을 무리 없이 한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모든 표현의 가장 깊은 핵심은 인간의 자기완성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인간의 실제 삶 안에서 열매 맺는 것입니다. 악을 하지 않는 데서 멈추지 않고 선을 사랑하고, 진리를 아는 데서 멈추지 않고 진리를 행하며, 신앙을 고백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체어리티가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강의가 ‘신앙의 목표는 익은 열매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익음’을 자기 상태에 대한 최종 판정으로 사용하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가 얼마나 실제 삶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으로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그 순간 ‘익은 열매’는 영적 엘리트의 표지가 아니라 모든 거듭나는 사람이 향하는 겸손한 목표가 됩니다.

 

이제 5강은 이 추상적인 ‘이기는 자’의 개념을 실제 인물들의 삶으로 옮겨 갑니다. 강사는 소화 데레사처럼 크고 위대한 일을 하기보다 작은 일에서 자기부인과 사랑을 실천한 사람들을 예로 들면서, ‘이기는 자’가 거대한 영적 업적을 이룬 사람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순간들을 잘 감당한 사람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자료에서도 소화 데레사를 ‘크고 위대한 일을 해서 성화된 것이 아니라 작은 일을 잘 감당해서 익은 열매가 된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5강 6부에서는 바로 이 ‘작은 승리’와 ‘일상의 성화’를 중심으로 이어가겠습니다.



 

5강 6부

‘작은 일’에서 이기는 사람 : 소화 데레사와 생활 속 자기부인

5강은 지금까지 상당히 높은 언어를 사용해 왔습니다. ‘이기는 자’, ‘익은 열매’, ‘완전 성화’, ‘세 차례 연단’,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남’ 같은 표현들입니다. 이런 말들을 계속 듣다 보면 독자는 자칫 영적 성숙을 아주 특별한 체험이나 극적인 희생, 혹은 소수의 사람만 도달할 수 있는 높은 경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강의는 여기서 방향을 아주 현실적인 자리로 돌립니다. ‘큰 원수’보다 ‘작은 원수’, ‘큰 승리’보다 ‘작은 승리’, ‘위대한 업적’보다 ‘작은 일’을 강조하면서 소화 데레사를 소개합니다. 강사는 생활 속에서 종종 ‘작은 원수들’이 생기며, 그때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사랑은 오래 참고’ 같은 말씀을 붙들고 순간순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승리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큰 것은 잘 주어지지 않고 작은 것들이 주어진다’는 취지로 말합니다.

 

이 대목은 5강 전체의 무게중심을 아주 중요한 방향으로 돌려놓습니다. ‘이기는 자’가 누구인가를 말하면서 거대한 영적 전쟁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의 영적 상태는 대단한 집회나 특별한 체험보다 생활 속의 작은 자극 앞에서 더 잘 드러날 수 있습니다. 나를 무시하는 말 한마디, 내 뜻을 거스르는 작은 일, 피곤한데 누군가 부탁하는 상황, 별것 아닌 섭섭함,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의 반응 같은 것입니다. 이런 자리에서는 사람 앞에 내놓을 만한 ‘영적 업적’도 없고, 누구에게 인정받을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 사람 안에 실제로 무엇이 있는지가 더 정직하게 드러납니다.

 

강사가 소화 데레사를 예로 드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강의에서는 그녀를 ‘크고 위대한 일을 해서 성화된 성도가 된 것이 아니라 작은 일을 잘 감당해서 익은 열매가 된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그리고 ‘소화’라는 말이 ‘작은 꽃’을 뜻한다고 설명하면서, 자신은 주님을 위해 큰 꽃처럼 화려하고 위대한 일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작은 일들을 통하여 주님께 기쁨을 드리고자 했다고 소개합니다. 강의가 소화 데레사의 전 생애와 신학을 학문적으로 다루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자리에서는 ‘작은 일의 충실함’이라는 영성의 한 특징을 예로 들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대목은 상당히 중요한 접점을 갖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인간의 가장 내적인 의지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반드시 자연적 삶의 최종적인 행동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선이 생각 속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실제 행위가 되어야 하며, 진리도 단지 기억과 이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삶의 진짜 시험장은 결국 일상입니다. 교회 안에서 경건한 마음을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집에 돌아가 배우자에게 어떻게 말하는가,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하는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맡은 일을 어떻게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작은 일’은 사실 영적으로 작지 않습니다. 자연계에서의 아주 작은 행위 안에 그 사람의 내적 사랑이 최종적으로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의 마지막 그릇입니다. 따라서 마음속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생각을 해도 그것이 실제 행동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면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반대로 아주 작은 행동이라도 그 안에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가 들어 있다면 그 행위는 단순히 작은 외적 행동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강의에서는 아주 사소한 예까지 듭니다. 피곤해서 아침에 일어나기 싫을 때가 있는데, 바로 그런 순간에도 자기부인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예를 문자적으로 ‘몇 시에 일어났느냐’의 영성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핵심은 훨씬 깊습니다. ‘내가 지금 원하는 것’과 ‘내가 해야 할 선한 쓰임’이 충돌할 때 무엇을 선택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몸에 필요한 충분한 휴식은 선한 질서에 속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게으름 때문에 맡은 책임을 외면한다면 다른 문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부인은 몸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낮은 욕구가 높은 목적을 방해할 때 그것을 질서 아래 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한 가지 중요한 균형을 줄 수 있습니다. 자기부인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 몸을 돌보고 적절히 쉬며, 건강을 유지하고, 자기에게 맡겨진 삶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문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최종 목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잠을 줄이고, 음식을 줄이고, 몸을 괴롭게 하는 것 자체가 영적 성장의 척도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주님과 이웃을 더 잘 섬기기 위한 질서 안에 있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이 구별은 소화 데레사 같은 성인의 금욕적 실천을 읽을 때도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자기 시대와 수도원 전통 안에서 행한 구체적인 수행을 그대로 복제한다고 해서 같은 영적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강의에서도 ‘어떤 영성가는 두 끼만 먹었다고 하면 나도 두 끼 먹어야지’ 하는 식으로 따라가는 예가 등장합니다. 이런 열심이 영적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강사는 긍정적으로 말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외적 행위보다 그 행위의 목적과 사랑을 먼저 물어야 합니다. 같은 두 끼 식사라도 한 사람에게는 절제의 훈련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자기 영성을 과시하는 proprium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의 후반에는 이 ‘작은 승리’를 아주 직접적으로 풀어냅니다. 보기 싫은 사람이 왔을 때 얼굴을 돌리지 않고 먼저 다가가 반갑게 대하는 것, 집에서 ‘원수 같은’ 사람에게 오히려 반찬을 더 정성스럽게 해 주는 것, 배우자가 맞는 말을 기분 나쁘게 했을 때 즉시 방어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 등을 ‘이기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표현은 매우 생활적이고 때로는 웃음을 섞지만, 강의의 핵심은 명확합니다. ‘이긴다’는 것은 큰 악령을 쫓아내거나 놀라운 능력을 행하는 것보다, 바로 눈앞에서 자기 사랑의 충동을 꺾고 사랑의 행동을 선택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 이해와 상당히 잘 만납니다. 체어리티는 막연한 따뜻한 감정이 아닙니다. 이웃의 실제 선을 원하는 것이며, 그것이 구체적인 쓰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에게 호감이 있을 때 잘해 주는 것은 자연적 애정으로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그 사람의 선을 위해 공정하고 친절하게 행동하는 것은 더 깊은 차원의 질서를 요구합니다. 바로 그때 ‘내 기분’보다 ‘무엇이 선한가’를 선택하게 됩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에게 무조건 더 잘해 주라’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체어리티는 악 자체를 돕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지속적으로 폭력이나 착취를 행하고 있다면 그 악을 멈추게 하는 것이 오히려 그 사람과 피해자 모두에게 더 선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진리와 함께 가야 합니다. 상대가 하는 모든 일을 참아 주는 것이 곧 사랑은 아닙니다. 때로는 분명하게 경계를 세우는 것이 체어리티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선 강의에서 남편의 폭력 같은 사례가 나왔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중요합니다. 자기부인과 오래 참음을 강조하다 보면 피해자가 폭력을 계속 견뎌야 하는 것처럼 오해할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자기 proprium의 보복심을 물리치는 것과 악한 행위를 방치하는 것을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악은 악이라고 말할 수 있고, 용서하면서도 안전을 위해 거리를 둘 수 있습니다. 사랑은 무질서한 순응이 아니라 선과 진리에 따른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원수에게 반찬을 더 맛있게 해 준다’는 강의의 재미있는 예도 그 행동 자체를 규칙으로 만들기보다 그 안의 영적 원리를 보아야 합니다. 핵심은 ‘저 사람이 싫으니 나도 일부러 못되게 해야지’ 하는 보복의 proprium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적 반감이 올라와도 그 반감이 행동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선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작은 자기부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5강 3부에서 말했던 ‘세 번째 연단’의 깊이를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큰 악을 버리는 것은 비교적 분명합니다. 도둑질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작은 일에 들어가면 훨씬 미세한 proprium이 드러납니다. 표정 하나, 말투 하나, 상대를 은근히 무시하는 태도, 내가 옳다는 것을 꼭 확인받으려는 마음 같은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회적 법으로는 거의 문제 되지 않지만 영적 삶에서는 사랑의 질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작은 일’을 잘 감당한다는 것은 도덕적 완벽주의에 빠져 모든 표정과 감정을 감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의 방향이 점점 자연적 삶의 작은 부분까지 내려온다는 뜻입니다. 큰 원칙에서만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작은 순간에도 주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 말 한마디를 꼭 해야 하는가?’, ‘내가 지금 상대를 살리려는가 아니면 이기려는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지금 정말 필요한가?’라고 잠깐 멈출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쓰임’이라는 개념은 아주 풍성한 보완을 줍니다. 영적 삶의 중심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자기 악을 발견하고 피한 뒤에는 실제 선한 쓰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남편에게 화를 안 내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 관계에 도움이 되는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싫어하는 사람을 욕하지 않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범위에서 그 사람의 실제 선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게으름을 이기는 것도 ‘나는 나를 이겼다’는 성취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 맡겨진 일을 유용하게 행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 차이는 영적 삶을 자기수련 중심에서 사랑 중심으로 옮겨 놓습니다. ‘나는 오늘 몇 번 자기를 부인했는가?’를 계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부인조차 자기 영적 성취의 목록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내 주변 사람에게 어떤 선이 실제로 이루어졌는가?’입니다. 자기부인은 그 선을 방해하는 자기 사랑을 비켜 세우기 위한 수단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화 데레사의 ‘작은 꽃’이라는 이미지는 아름답게 읽을 수 있습니다. 꽃은 자기가 얼마나 큰지를 비교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피어납니다. 주님 앞에서 영적 가치는 세상에서 얼마나 큰 일을 했는가와 반드시 비례하지 않습니다. 유명한 설교자와 이름 없는 성도, 큰 기관의 책임자와 가정에서 조용히 가족을 돌보는 사람의 외적 규모는 전혀 다르지만, 주님은 그 행위 안에 있는 사랑과 목적을 보십니다.

 

이것은 천국의 쓰임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설명과도 잘 연결됩니다. 천국은 모두가 같은 일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각 사람은 자기 사랑과 지혜에 맞는 서로 다른 쓰임을 수행합니다. 어떤 쓰임도 전체와 연결되어 있으며, 겉으로 작아 보이는 쓰임이라고 해서 천국에서는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크기가 아니라 그 쓰임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의 질서 안에 있는가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일에 충실하라’는 말은 ‘작은 사람으로 만족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큰 책임을 맡기시면 그것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다만 큰 책임을 맡았다고 더 천국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책임이 클수록 자기 명예와 지배욕이 섞일 가능성도 커집니다. 그래서 큰 쓰임일수록 더 깊은 자기부인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목회와 사역에도 매우 직접적인 적용이 있습니다. 수천 명 앞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일이 어떤 순간에는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큰 행사에서 사랑을 외치는 것보다 가까운 사람에게 짜증을 내지 않는 것이 더 실제적인 시험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에게 축복기도를 하면서도 자기와 의견이 다른 한 사람을 속으로 멸시한다면 아직 사랑이 자연적 삶의 작은 곳까지 내려오지 않은 것입니다. 바로 이런 부분이 ‘작은 승리’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닌 이유입니다.

 

또한 강사는 ‘작은 일 정도는 우리가 기도하면서 신경 쓰면 할 수 있다’는 취지로 격려합니다. 여기에도 좋은 목회적 감각이 있습니다. 거듭남을 너무 거대한 목표로만 제시하면 사람은 시작도 하기 전에 지칠 수 있습니다. ‘완전 성화해야 한다’, ‘익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너무 크게 들릴 때, 오늘 내 앞에 있는 작은 하나를 보는 것입니다. 오늘 한 번 말을 참는 것, 한 번 먼저 사과하는 것, 한 번 정직하게 말하는 것, 한 번 남의 공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탭니다. 그 작은 선을 행할 때도 ‘내 힘으로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분노를 참았지만 그 힘은 주님에게서 왔고, 내가 친절을 선택했지만 그 선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이것을 인정할수록 작은 승리가 proprium의 먹이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나는 이런 것도 이기는 사람이다’가 아니라 ‘이번에도 주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패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일에 또 화를 냈다고 해서 ‘나는 거듭남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인가 보다’라고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패를 보고 변명하지 않고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다음 기회에 다시 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듭남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과정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자기 악을 더 분명히 보고 주님에게 돌아오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작은 원수’라는 강사의 표현도 흥미롭습니다. 사실 영적 의미에서 그 작은 원수는 외부의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 드러나는 내 안의 반응일 수 있습니다. 상대방은 한마디 했는데 내 안에서 하루 종일 분노가 계속된다면, 문제의 중심은 그 한마디만이 아닙니다. 인정받고 싶은 사랑, 무시당하기 싫은 proprium, 내가 옳아야 한다는 고집이 함께 움직였을 수 있습니다. 외부의 ‘작은 원수’가 내 안의 더 깊은 원수를 보여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 역시 상대방에게 억지로 좋은 감정을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닙니다. 감정은 즉시 명령으로 바뀌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과 별개로 악한 행동을 하지 않고, 그 사람의 실제 선을 해치지 않으며, 가능한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내 안의 미움과 보복심을 점차 질서 있게 하시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먼저 의지와 행동에서 시작되어 나중에는 애정 자체까지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앞서갑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성내지 말아야 한다’, ‘자기 유익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진리를 알고 그것 때문에 행동을 조절합니다. 아직 마음은 따라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계속 주님을 의지하여 진리에 따라 행하면, 어느 순간 선을 행하는 것 자체를 기뻐하는 새로운 애정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순한 억압과 거듭남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소화 데레사의 ‘작은 길’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다면, 작은 고행들의 수집이라기보다 ‘진리가 자연적 삶의 아주 작은 곳까지 선으로 내려오는 길’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 식탁에서의 말 한마디, 싫은 사람을 마주쳤을 때의 태도, 누군가의 결점을 보았을 때의 반응 같은 곳까지 주님의 질서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천국은 거대한 관념 속에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작은 자연적 선택들 속에서 인간의 생명에 자리 잡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번 강의를 보면서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핵심진리’의 높은 단계론이 여기서는 갑자기 매우 낮고 평범한 자리로 내려옵니다. ‘익은 열매’가 되려면 엄청난 환상을 보아야 한다거나 거대한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작은 일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실제 영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스베덴보리는 한 가지 중요한 중심을 계속 붙들게 합니다. 작은 자기부인의 목적도 결국 자기부인 그 자체가 아닙니다. 사랑과 쓰임입니다. 내가 참았다는 사실보다 그 참음으로 상대에게 선이 이루어졌는가가 중요합니다. 내가 희생했다는 사실보다 그 희생 안에 주님의 사랑이 있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자기부인이 사랑을 위한 길이 아니라 자기 영성을 증명하는 목표가 되는 순간 다시 proprium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5강 6부의 중심을 한 문장으로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기는 자는 반드시 큰 전쟁에서 이름을 남긴 사람이 아니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작은 순간마다 자기 사랑보다 선을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 작은 승리의 생명조차 자기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 승리가 이웃을 향한 실제 쓰임으로 이어질 때 작은 행위 안에 천국의 질서가 자리 잡습니다.’

 

이제 강의는 이러한 ‘작은 승리’에서 다시 더 깊은 자기부인의 문제로 들어갑니다. 특히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자기 판단과 고집,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다르게 대하려는 마음, 그리고 ‘자아가 많이 깨어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다룹니다. 원고에서도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 더 잘해 주고 자신을 거스르는 사람에게는 덜해 주고 싶은 마음을 ‘자기’의 문제로 직접 지적합니다. 5강 7부에서는 바로 이 ‘자아가 깨어진다’는 표현과 proprium의 관계를 중심으로 충분히 이어가겠습니다.




5강 7부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 : 남을 보는 사람에서 자기를 보는 사람으로

5강 6부에서는 소화 데레사를 통하여 ‘작은 일에서 이기는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큰 순교나 특별한 영적 사건이 아니라, 보기 싫은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고, 배우자의 기분 나쁜 말을 보복으로 되갚지 않으며, 일상의 아주 작은 순간마다 자기 유익보다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실제 영성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제 강의는 그보다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자아가 많이 깨어진 사람’과 ‘자아가 잘 깨어지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강사가 여기서 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구를 먼저 보는가?’입니다. 자아가 강한 사람은 상대를 먼저 보고, 자아가 깨어진 사람은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본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를 예로 듭니다. 대체로 목회자에게 잘 순종하는 성도도 있지만, 무엇을 하자고 해도 늘 반대하고 ‘들이받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성도의 가정에 어려움이 생겨 도움이 필요해졌다고 해 보자는 것입니다. ‘자아가 많이 깨어진 목회자’라면 과거에 자신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따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주셨구나’ 하고 도울 수 있지만, 자아가 많이 깨어지지 않았다면 마음과 행동 어딘가에 차별이 드러난다고 강사는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목회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로 돌립니다.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는 더 잘해 주고 싶고, 나를 들이받는 사람에게는 덜해 주고 싶은 마음’이 우리 안에 있으며, 바로 그것이 ‘자아’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proprium과 상당히 가까운 곳을 건드립니다. 다만 앞서 여러 번 구별했듯 강의가 사용하는 ‘자아’와 스베덴보리의 proprium을 완전히 동일한 용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유익한 사람을 더 사랑하고, 나를 거스르는 사람에게는 선을 덜 베풀고 싶어 하는 마음’, ‘상대의 태도에 따라 내 사랑의 양이 달라지는 상태’는 자기 사랑의 질서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proprium과 매우 밀접합니다.

 

자연적인 인간에게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에게 마음이 가고, 나를 비난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이 닫힙니다. 나를 인정해 주면 더 도와주고 싶고, 나에게 상처를 주면 ‘왜 내가 저 사람까지 도와야 하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적 공정성으로만 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상대가 내게 얼마나 유익한가를 기준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저 사람이 나에게 어떤 사람인가?’보다 ‘지금 무엇이 선한가?’를 더 중요하게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누가 나에게 아무리 악을 행해도 무조건 똑같이 대해 주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에는 반드시 분별이 있습니다. 악한 사람의 악을 돕는 것은 체어리티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거리를 두어야 하고, 어떤 경우에는 책임을 물어야 하며, 어떤 경우에는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단호하게 제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행동의 내적 목적이 ‘저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다’가 아니라 ‘무엇이 실제 선인가’여야 합니다.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은 분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보복과 자기 유익이 판단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강의는 이어 더 아픈 예를 듭니다. 오랫동안 정성껏 돌보아 주고 신앙생활을 도왔던 성도에게 목회자가 ‘배신’을 당하는 경우입니다. 마음이 쓰리고 아픈 것은 당연하지만, 강사는 그 사람을 미워하기보다 ‘내가 하나님보다 그 사람을 더 의지해서 그랬나 보다’라고 자기 쪽을 먼저 돌아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은 매우 강합니다. 왜냐하면 사건의 원인을 모두 자기 잘못으로 돌리라는 뜻으로 읽으면 위험하지만, ‘상대가 잘못했다는 사실과 별개로 그 일을 통해 드러난 내 안의 의존과 기대도 볼 수 있다’는 뜻으로 읽으면 상당히 깊은 자기 성찰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꼭 구별해야겠습니다. 상대방의 배신은 상대방의 책임입니다. 다른 사람의 불의까지 ‘내 자아 때문이었다’고 떠안는 것은 건전한 회개가 아닙니다. 특히 폭력이나 착취, 학대 같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자기 성찰은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자기비난이 아닙니다. ‘저 사람의 악은 저 사람의 책임이지만, 이 사건을 통하여 내 안에서는 무엇이 드러났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과도한 사람 의존, 인정 욕구, 보답에 대한 기대, 자기 판단에 대한 확신 같은 것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상대의 악과 나의 proprium을 동시에 구별하여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강의의 또 하나 인상적인 문장은 ‘자아가 깨진 사람일수록 자기를 본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설교 시간에 조는 성도를 예로 듭니다. 자아가 강한 목회자는 ‘어떻게 설교 시간에 저렇게 자는가’ 하고 성도를 탓할 수 있지만, 자아가 깨어진 목회자는 ‘내 설교가 부족해서 조는가 보다’ 하고 먼저 자기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반대로 성도 역시 ‘목사님 설교가 형편없다’고 먼저 판단하기보다 ‘내가 기도가 부족한가?’라고 자신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 역시 문자적인 공식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설교가 매우 부실할 수도 있고, 성도가 전날 밤새 일했기 때문에 졸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건의 원인을 무조건 자기에게 돌리는 것은 진리의 판단이 아닙니다. 그러나 강사가 말하는 영적 태도의 핵심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어떤 문제가 생기면 본능적으로 자기 결백을 확보하고 상대방의 잘못부터 찾습니다. ‘나는 맞고 저 사람이 문제다’라는 방향입니다. 그런데 자아가 깨어질수록 그 자동적인 방향이 조금씩 바뀌어 ‘혹시 내가 볼 것은 없는가?’라는 질문이 먼저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회개론과 아주 깊게 만납니다. 회개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는 진리에서 시작합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이 말씀은 우리 장로님이 들어야 하는데’, ‘저 목사가 이것을 알아야 하는데’, ‘우리 배우자가 이 말씀대로 해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먼저 나를 비추어야 합니다. 가인의 이야기를 읽으며 세상의 잘못된 교회를 찾기 전에 내 안에서 사랑과 분리된 신앙이 있는지를 보고, 바리새인을 읽으며 다른 사람의 위선을 판단하기 전에 내 안의 자기 의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본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집착한다는 뜻과는 다릅니다. 이것도 중요합니다. 자기 성찰이 지나치면 모든 상황에서 ‘내 탓인가?’만 반복하며 신경증적인 자기분석에 빠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회개는 자기 자신을 끝없이 분석하라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악을 보게 되었을 때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을 의지하여 피하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보고 난 다음에는 다시 주님과 이웃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자기성찰은 목적이 아니라 거듭남을 위한 수단입니다.

 

강의의 앞부분에서도 이와 비슷한 원리가 이미 나왔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에게 쫓기는 큰 어려움을 겪은 뒤에는 어떤 일이 생기면 ‘누구 때문’이라고 남을 탓하기보다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을까?’ 하며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특히 혈기와 아집과 고집이 강하고 자기반성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사람일수록 연단의 시간이 길어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이번 7부의 ‘자아가 깨어진 사람은 자기를 본다’는 주제가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 5강의 성장론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기준임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속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로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겉 사람의 proprium은 언제나 외부를 향합니다. ‘저 사람이 나를 이렇게 했다’, ‘환경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내가 화를 낸 것은 저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물론 외적 원인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그 외적 원인을 부정하면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다. 저 사람이 그런 행동을 했다. 그런데 왜 그 일이 내 안에서 이런 반응을 불러일으켰는가?’라는 두 번째 질문이 생깁니다. 이 두 번째 질문이 속사람을 향한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내 의견을 무시했습니다. 상대방이 무례했던 것은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그 일 때문에 마음이 상해 있다면 그 사건은 내 안의 다른 것을 보여 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존중받아야 한다’, ‘내 판단은 인정받아야 한다’, ‘사람들이 나를 가볍게 보면 안 된다’는 사랑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랑 자체를 보는 순간 외부 사건이 영적 거울이 됩니다. 그때 상대방은 더 이상 나의 거듭남을 방해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 안의 무언가를 드러내 준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상대방의 악을 정당화하면 안 됩니다. ‘저 사람이 나를 모욕한 덕분에 내가 거듭났으니 그 모욕은 선한 일이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악은 여전히 악입니다. 주님의 섭리는 악을 선으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악을 허용하시면서도 그 결과를 선을 위해 돌리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강의가 모든 생활 환경이 연단과 성장에 사용될 수 있다고 보는 장점은 살리되, ‘그러니 악한 일이 일어난 것도 하나님이 직접 시키신 것이다’라는 식으로 가면 섭리를 오해하기 쉽습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허용의 섭리’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은 악을 원하시지 않지만 인간의 자유 때문에 그것을 허용하실 수 있으며, 허용된 악 속에서도 가능한 한 선한 결과를 이끌어 내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나를 배신한 사건에서 ‘주님께서 저 사람에게 나를 배신하라고 시키셨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벌어진 그 사건을 사용하여 내 안의 사람 의존이나 명예욕, 보복심을 보게 하시고 거기서 나를 이끌어 내실 수 있습니다. 이 구별을 하면 ‘모든 것이 연단이다’라는 강의의 언어도 훨씬 안전하고 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강사는 ‘자아’의 정체를 죄성과 정욕의 지배를 받는 마음과 행실, 곧 ‘옛사람’과 연결하여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청년의 단계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본격적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하며, 말도 함부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말을 하려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도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은 어떤 신비한 심리 현상이라기보다 말과 태도와 반응이 실제로 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proprium의 지배가 약해지는 것은 반드시 외적 삶에서 나타납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무조건 말하지 않아도 되고,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즉시 공격하지 않으며, 상대가 나를 칭찬하지 않아도 선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이 중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자유로워집니다. 다른 사람의 반응에 덜 지배받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자아가 깨어진다’는 표현 자체도 조금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들으면 인간의 자아 자체를 부수어 없애야 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주님께서 없애시는 것은 인간의 인격이나 자유로운 개성이 아닙니다. 오히려 거듭날수록 사람은 더 참된 개인이 됩니다. 사라져야 하는 것은 ‘나에게서 생명이 나오고, 내가 선의 근원이며,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여기는 타락한 proprium의 지배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무색무취한 존재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모두 서로 다릅니다. 사랑의 종류도 다르고, 지혜의 형태도 다르고, 맡은 쓰임도 다릅니다. 주님과 더 깊이 결합할수록 오히려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성이 더 아름답게 드러납니다. 따라서 ‘자아가 깨어진다’는 말을 ‘개성이 없어진다’, ‘자기 의견이 없어야 한다’, ‘지도자에게 무조건 복종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이번 강의가 목회자에 대한 순종을 예로 들기 때문에 이 구별은 더욱 중요합니다. 목회자에게 잘 순종하는 것이 곧 자아가 깨진 증거도 아니고, 목회자의 의견에 이견을 제시한다고 자아가 강한 것도 아닙니다. 목회자도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양심과 진리에 따라 정중하게 다른 의견을 말하는 것은 필요할 수 있습니다. 핵심은 ‘동의했느냐 반대했느냐’가 아니라 그 동기를 보는 것입니다. 자기 고집 때문에 무조건 반대하는 것과 진리를 위해 양심적으로 이견을 제시하는 것은 다릅니다. 반대로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무조건 순종하는 것 역시 참된 자기부인은 아닐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유와 이성이 거듭남의 필수 조건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강제로 선해질 수 없습니다. 진리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받아들여 자기 생명처럼 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의 역할은 사람의 자유를 대신하여 판단해 주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 사람이 주님 앞에서 자유롭게 분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 관점이 들어가면 강의가 말하는 ‘순종’도 사람에 대한 맹목적 복종보다는 주님의 진리 앞에서 자기 고집을 내려놓는 것으로 읽는 편이 좋겠습니다.

 

또 하나 귀한 것은 강사가 이 자아의 문제를 목회자에게 먼저 적용한다는 점입니다. 자신에게 비협조적인 성도를 나중에 차별하지 않는가, 설교 중 조는 성도를 보면서 즉시 그 사람을 탓하지 않는가, 자신이 돌보던 사람에게 배신당했을 때 미움으로 반응하지 않는가를 묻습니다. ‘자아가 깨어져야 한다’는 말을 성도 통제의 도구로만 사용하지 않고 목회자 자신의 내면에 적용한다는 점은 분명히 살려서 읽을 만합니다.

 

이것은 앞서 공용복 선생의 제자들에게서 느끼셨다는 ‘핵심진리에 자기 개인의 것을 함부로 섞지 않으려 하는 태도’와도 어느 정도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자기 생각과 권위를 앞세우기보다 받은 것을 지키려고 하는 태도가 실제 자기부인과 연결될 때에는 귀한 덕목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전승에 대한 충실함 역시 스스로 진리를 살피는 자유와 분별을 막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7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자아가 깨어진 사람일수록 자기를 본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일 것입니다. 이것을 ‘무슨 일이 생겨도 다 내 잘못이라고 하라’고 이해하면 위험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기에 앞서, 이 사건을 통해 드러난 내 안의 악과 거짓을 먼저 살펴라’라고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의 회개론과 매우 깊이 만납니다. 남의 티보다 자기 들보를 먼저 보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한 가지를 추가합니다. 자기 들보를 본 뒤에는 그것을 붙들고 자기혐오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가져가야 합니다. ‘내가 역시 형편없는 사람이구나’가 회개의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주님, 제 안에 이것이 있음을 봅니다. 이것을 죄로 여기고 피하고 싶습니다. 제게 힘을 주십시오’가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실제 삶에서 다르게 행동해 보는 것입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복수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해도 맡은 선을 계속하고, 잘못을 지적받으면 한 번쯤 변명하지 않고 들어보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작은 행동들 속에서 proprium의 지배가 실제로 약해집니다.

 

그러므로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은 자기를 멸시하는 상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삶의 중심으로 삼지 않는 상태라고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나를 칭찬하느냐 비난하느냐, 나에게 유익하냐 손해냐가 선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대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이웃에게 실제로 선한 것은 무엇인가’를 묻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자기 사랑의 질서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5강 전체의 ‘성화’가 다시 생활 속으로 내려옵니다. 성화는 어떤 특별한 체험 뒤에 ‘나는 이제 성화되었다’고 선언하는 상태보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 앞에서 자기 유익이 아니라 선을 선택하는 데 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익은 열매’라는 거대한 표현이 결국 ‘내게 잘해 주지 않은 사람에게도 필요한 선을 베풀 수 있는가?’라는 아주 작은 질문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번 강의에서 매우 귀한 긴장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5강 7부의 중심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proprium의 지배가 약해진 사람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잘못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악을 보면서도 그 사건을 통해 드러난 자기 안의 자기 사랑을 함께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한 문장을 더 붙인다면, ‘그 사람은 자기 잘못을 보는 데서 끝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받아 실제로 다른 행동을 선택합니다.’

 

이제 강의는 이 ‘자아가 깨어짐’을 더욱 적극적인 사랑의 상태로 연결하면서, 단순히 상대에게 보복하지 않는 수준을 넘어 원수와 같은 사람에게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가를 묻고, 성화된 사람들에게 나타난다고 보는 ‘아가페 사랑’과 실제 인물들의 사례로 옮겨 갑니다. 원고에서도 ‘나를 미워하고 비난하고 무시하는 사람과도 화평함을 누리는 것’, 그리고 성화된 성도의 목표가 단순한 건강과 물질의 복이 아니라 그런 사람까지 사랑할 수 있는 데 있다는 강한 표현이 나옵니다. 5강 8부에서는 바로 이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과 ‘아가페’, 그리고 그것을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 및 천적 사랑과 어떻게 구별하여 볼 것인지를 중심으로 이어가겠습니다.


 

5강 8부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 : 아가페 사랑과 체어리티, 그리고 성화의 실제 모습

5강은 이제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을 더욱 적극적인 사랑의 문제로 가져갑니다. 앞에서는 문제가 생겼을 때 남을 먼저 탓하기보다 자기 안을 돌아보고,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자기 유익을 기준으로 차별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이제 강사는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를 미워하고, 비난하고, 무시하는 사람과도 화평할 수 있는가’, 더 나아가 그런 사람에게도 사랑을 베풀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강의가 성화의 실제 모습을 매우 높은 신비 체험이나 특별한 은사보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상태’에서 찾으려 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앞에서 말한 ‘이기는 자’, ‘익은 열매’, ‘자아가 깨어짐’이 결국 사랑이라는 한 지점으로 모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5강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세 차례 연단’과 ‘이기는 자’를 단순히 강한 영적 전사가 되는 과정으로 읽었다면, 여기서 그 의미가 수정됩니다. 무엇을 이긴다는 것입니까? 결국 다른 사람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사랑을 가로막는 것을 이기는 것입니다. 혈기와 아집과 고집, 보복심과 자기 의, 인정받으려는 욕망,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만 사랑하고 싶은 자연적 애정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의가 말하는 성화의 목표는 ‘나는 죄가 없다’고 선언할 수 있는 상태보다, 자기를 거스르는 사람 앞에서도 사랑을 잃지 않는 상태 쪽으로 이동합니다. 이 방향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체어리티(charity)를 생각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의 모든 진리는 궁극적으로 체어리티를 향해야 합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그 진리가 사람의 의지 안으로 들어가 선이 되고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은 이웃을 향한 실제적인 사랑과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매우 깊은 교리를 알고 특별한 영적 체험을 했다고 해도, 가까운 사람을 멸시하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미워하며 자기에게 손해를 준 사람에게 보복하려 한다면 그 지식과 체험만으로 그의 영적 상태를 높게 평가할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인간의 사랑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시험하는 매우 깊은 말씀이 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적인 애정으로도 가능합니다. 나를 인정해 주고 도와주며 내 편이 되어 주는 사람에게 좋은 감정을 갖는 데 반드시 거듭남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자연적인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않는 사람, 심지어 나를 싫어하고 비난하는 사람 앞에서조차 그 사람의 실제 선을 원할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사랑의 근거가 ‘저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해 주었는가’에서 ‘무엇이 주님 앞에서 선한가’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강의가 이것을 ‘아가페 사랑’이라는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연적 호감이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사랑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아가페’라는 단어 자체에 어떤 특별한 영적 능력이 있다고 보기보다, 그 사랑의 실제 질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 역시 단순한 감정적 호감이 아닙니다. 체어리티의 본질은 이웃의 선을 사랑하는 것이며, 더 깊게는 이웃 안에 있는 주님의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체어리티는 감정의 따뜻함보다 훨씬 깊고 질서 있는 사랑입니다.

 

이 때문에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도 원수에게 반드시 따뜻한 감정을 느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목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을 떠올렸는데 여전히 마음이 아프고 불편하다고 해서 곧 ‘나는 원수를 사랑하지 못했으므로 거듭나지 않았다’고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감정은 기억과 자연적 마음의 상태에 따라 상당 기간 남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감정을 이유로 상대에게 악을 행하려 하는가, 아니면 주님 앞에서 보복을 내려놓고 그 사람의 실제 선을 원하려 하는가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를 심하게 모욕했습니다. 그 일을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이 아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 사람이 망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주님 앞에서 거절하고, 가능하다면 그 사람이 자기 악에서 돌이켜 선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면 이미 사랑의 방향은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상대를 좋아한다는 것과 다릅니다. 체어리티는 사람의 악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악에서 벗어나 선 가운데 있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는 것과 원수의 악을 용납하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사랑은 악을 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계속 거짓말하고 사람을 해치고 있다면 그의 행동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반드시 사랑은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의 모든 잘못을 ‘사랑하니까’ 허용한다면 결국 자녀에게 해가 될 수 있습니다. 사회 역시 범죄를 방치하는 것이 범죄자를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악을 제지하고 책임을 묻는 일이 그 사람과 공동체의 선을 위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특징입니다. 체어리티는 무분별한 친절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가 결합된 사랑입니다. 따라서 누구에게나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사랑도 아닙니다. 선한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방식과 악을 행하고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그의 악을 돕지 않는 것이 오히려 사랑일 수 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사랑하지만 그 사람 안의 악까지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강의가 말하는 ‘원수와도 화평한다’는 것도 더욱 정교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화평은 반드시 관계를 이전 상태로 복구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신뢰가 깨졌다면 신뢰를 다시 쌓는 데 시간이 필요할 수 있고, 어떤 관계는 안전을 위해 거리를 두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용서는 할 수 있지만 이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마음에서 상대를 파괴하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주님의 질서에 맡길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화평의 중요한 형태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아가 깨어진다’는 앞부분의 가르침과 ‘원수를 사랑한다’는 이번 부분이 연결됩니다. proprium은 상처를 받으면 즉시 자기 정당화를 시작합니다. ‘내가 얼마나 잘해 줬는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나’, ‘반드시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상처받았다는 사실 자체와는 다른 문제입니다. 상처는 실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proprium은 그 상처를 붙잡아 자기 의와 보복심을 키우는 재료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에서 중요한 것은 ‘나는 상처받지 않는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상처받았을 때 그 상처를 무엇으로 만드는가입니다. 자기 의를 강화하는 재료로 만드는가, 아니면 주님께 가져가 자기 안에 일어나는 미움과 보복심을 보게 되는 계기로 삼는가입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씀은 바로 이 깊은 곳까지 내려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자기비난으로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에게 실제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아직 그 사람을 생각하면 두렵고 괴로운데 ‘나는 사랑이 없어서 이렇다’고 자신을 정죄할 필요는 없습니다. 상처의 회복과 영적 용서는 서로 관련되지만 반드시 같은 속도로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듯, 거듭남의 과정도 사람의 상태를 따라 질서 있게 이루어집니다. 억지로 ‘나는 저 사람을 사랑한다’고 감정을 만들어 내는 것이 거듭남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작은 시작도 중요합니다. ‘저 사람이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올라왔을 때 그것을 붙잡지 않는 것, 그 사람을 다른 사람들에게 험담하여 무너뜨리고 싶은 욕망을 거절하는 것, 그 사람에게 실제 선한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일부러 마음속에서 저주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5강 6부에서 살펴본 ‘작은 일에서 이기는 것’의 연장선입니다.

 

그렇게 보면 ‘원수 사랑’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영웅적인 덕목이 아닙니다. 작은 자기부인이 오랫동안 축적되면서 사랑의 질서가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 한 번 보복하지 않고, 내일 한 번 험담하지 않고, 다음에는 그 사람의 실제 선을 조금이나마 바랄 수 있게 되고, 더 나아가 필요할 때 선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진리가 먼저 행동을 이끌다가 점차 새로운 애정이 형성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이것을 거듭남의 매우 중요한 구조로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해성에 받아들인 진리가 의지를 제어합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직 마음에서는 미워하면서도 악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이때에는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주님을 의지하여 진리에 따라 살면 주님께서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십니다. 그러면 이전에는 억지로 하던 선을 나중에는 사랑해서 하게 됩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이 변화가 매우 중요합니다. 단지 화를 억누르는 것과 화를 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처음에는 ‘화를 내면 안 된다’는 진리 때문에 입을 다물지만, 거듭남이 깊어지면 상대를 해치고 싶지 않은 마음 자체가 생깁니다. 처음에는 ‘용서해야 한다’는 의무 때문에 용서하려 하지만, 나중에는 상대가 악에서 벗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됩니다. 이것이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선이 되는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강의가 말하는 ‘성화된 사람’의 모습과 상당히 가까운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는 상당히 가까운 접점이 있습니다. 성화를 단순히 ‘죄성이 제거된 상태’라는 형이상학적 설명보다, ‘자기에게 악을 행한 사람에게도 선을 원할 수 있는 사랑이 형성된 상태’라는 실제 삶의 모습으로 설명할 때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 훨씬 가까워집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 여기에도 끝은 없습니다. 오늘 원수를 사랑할 수 있었다고 해서 ‘이제 나는 완전 성화되었다’고 판정할 수 없습니다. 사람 안에는 훨씬 더 깊은 자기 사랑의 층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랑이 깊어질수록 자신에게 있는 사랑이 얼마나 주님에게서 오는지를 더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래서 천사는 ‘나는 사랑이 많은 존재다’라고 자기 사랑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압니다.

 

여기서 강의가 말하는 ‘아가페’와 스베덴보리의 천적 사랑을 그대로 동일시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적(celestial) 사랑은 단순히 인간적 사랑보다 더 강한 사랑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 사랑이 의지 자체의 중심이 되어 선을 행하는 것이 기쁨인 상태와 관련됩니다. 영적(spiritual) 인간은 진리를 통해 선으로 인도되는 반면, 천적 인간은 선에서 진리를 퍼셉션하는 질서에 있습니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했으니 천적 인간이다’라고 단순히 연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강의가 ‘사랑’을 신앙의 최고 열매로 놓는 방향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특히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경계하는 것이 사랑과 분리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아무리 정교해도 체어리티와 분리되면 생명이 없습니다. 반대로 진리가 삶 속에서 체어리티가 될 때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바로 창세기 4장에서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가인과 아벨’의 깊은 주제와도 연결되는 대목입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합니다. 신앙이 아벨을 죽일 때, 곧 교리가 사랑을 밀어낼 때 교회는 내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보면 ‘원수를 사랑한다’는 문제는 단순히 높은 윤리적 명령 하나가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실제로 결합되어 있는지를 드러내는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정통 교리를 지킨다고 하면서 나와 다른 사람을 증오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정확하게 안다고 하면서 나를 비판한 사람을 평생 용서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문제는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의 분리입니다. 바로 그 분리를 주님께서 거듭남 가운데 다시 결합시키십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가 다른 종교나 다른 교파의 사람들을 바라볼 때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나와 교리적으로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 안의 선까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어떤 종교적 명칭 아래 있었느냐보다 그가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았으며 선을 사랑했는가를 중요하게 봅니다. 물론 거짓은 진리가 아니므로 사후에는 바로잡혀야 합니다. 그러나 선을 사랑한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올바른 교리를 알고 있으면서 악을 사랑한 사람은 그 지식 자체로 천국적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씀은 교리적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도 적용됩니다. 상대의 오류를 오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멸시하거나 그의 멸망을 기뻐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를 말하는 목적도 상대를 이기는 데 있지 않고 그 사람의 선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진리를 무기로 사용하면 진리 자체는 옳더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랑은 지옥적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목회자에게 특히 무거운 문제입니다. 설교에서 잘못된 교리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판 속에 ‘나는 저 사람보다 옳다’는 기쁨이 들어 있다면 proprium이 진리를 이용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사랑한다는 이유로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도 체어리티가 아닙니다. 진리와 사랑은 함께 가야 합니다. 사랑 없는 진리는 상처를 주는 칼이 되고, 진리 없는 사랑은 악을 방치하는 감상주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의 결합은 단순한 신학적 개념이 아닙니다. 실제 생활에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와 ‘왜 그것을 말하는가’가 결합하는 것입니다. 상대에게 필요한 진리를 말하되 그 사람을 낮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선을 위해 말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침묵하는 것이 사랑이고, 때로는 말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기준은 자기 감정이 아니라 쓰임과 선입니다.

 

이 관점에서 ‘원수와 화평한다’는 말도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외적으로 갈등하면서도 내적으로 상대의 선을 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불의를 막기 위해 법적 절차를 밟으면서도 그 사람을 증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리적 오류를 강하게 반박하면서도 그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려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리와 체어리티가 함께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이기는 자’의 의미가 다시 달라집니다. 이기는 자는 모든 논쟁에서 상대를 굴복시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논쟁하면서 자기 안에서 올라오는 멸시를 이기는 사람입니다. 원수를 없애는 사람이 아니라 원수를 대하면서 자기 안의 미움을 이기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폭로하는 데 능한 사람이 아니라 그 잘못을 보면서도 자신의 proprium을 함께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5강 앞부분에서 강사가 ‘원수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는 이 자기가 원수’라고 했던 말이 여기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얻습니다. 외부의 원수가 사라져도 proprium이 그대로라면 다른 사람이 다시 원수가 됩니다. 오늘 이 사람과 화해해도 자기 사랑이 그대로라면 내일 다른 사람이 나를 건드렸을 때 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궁극적으로 다루시는 것은 외부의 모든 사람을 내 마음에 맞게 바꾸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대하는 내 사랑의 질서를 바꾸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언제나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정만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악을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는 사람도 아닙니다. 상처를 전혀 받지 않는 사람도 아닙니다. 오히려 악을 분명히 보면서도 악으로 악을 갚지 않고, 진리를 붙들면서도 상대를 멸시하지 않으며, 필요하면 거리를 두면서도 그의 파멸을 기뻐하지 않고, 가능한 한 그 사람이 선으로 돌아오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체어리티의 훨씬 현실적인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인간의 proprium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억지로 ‘나는 원수를 사랑해야 해’라고 자기 감정을 조작해서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그 사랑을 막는 자기 사랑과 보복심을 죄로 여기고 피할 때 조금씩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원수 사랑도 결국 은혜이며 동시에 거듭남의 싸움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공용복 선생의 전승에서 말하는 ‘성화’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드러납니다. 성화를 ‘내 안의 죄성이 100% 제거되었다’는 자기 상태에 대한 선언보다, ‘전에는 미워할 수밖에 없던 사람에게 이제 선을 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랑의 변화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 변화는 실제이고, 삶에서 확인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자기 자랑의 근거가 아니라 주님의 역사를 인정하게 하는 열매입니다.

 

따라서 5강 8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악을 선이라고 부르는 것도, 상처를 받지 않는 것도, 모든 관계를 이전처럼 회복하는 것도 아닙니다. 악을 악이라고 분별하면서도 그 사람의 실제 선을 원하고, 자기 안의 미움과 보복심을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며, 가능한 자리에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사랑이 신앙을 살아 있게 하는 체어리티입니다.

 

이제 5강은 이러한 성화와 사랑을 실제 인물들의 삶에 더욱 구체적으로 비추기 시작합니다. 특히 강의 후반의 중요한 축인 이용도 목사의 삶과 영적 체험이 점차 전면에 등장하며, 그의 1929년 체험을 ‘세 번째 연단’의 승리와 ‘생명의 내주합일’이라는 ‘핵심진리’의 틀 안에서 해석합니다. 5강 9부에서는 이 부분을 서둘러 스베덴보리와 동일시하지 않고, 먼저 강의가 이용도 목사의 체험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충분히 따라간 뒤 ‘내주합일’, ‘그리스도의 생명’, ‘성화’를 스베덴보리의 ‘결합(conjunction)’ 및 주님의 인플럭스와 비교해 보겠습니다.



 

5강 9부

이용도 목사의 ‘생명’과 ‘내주합일’ :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5강은 이제 후반부의 중요한 인물인 이용도 목사에게로 들어갑니다. 앞에서 강사는 ‘말씀의 실천-연단-양심의 밝아짐-세 차례 연단-자아의 깨어짐-이기는 자-익은 열매-원수 사랑’이라는 긴 흐름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이용도 목사의 삶과 체험을 이 전체 구조의 실제 사례 가운데 하나로 제시합니다. 특히 그의 1929년 무렵의 깊은 영적 체험을 세 번째 연단을 통과한 사건으로 보고, 그 이후 나타난 그의 삶과 메시지를 ‘그리스도의 생명의 내주합일’이라는 언어로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강의의 관심은 단순히 이용도 목사가 얼마나 유명한 부흥사였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한 인간이 깊은 연단을 통과한 뒤 ‘내가 사는 것’에서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으로 변화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먼저 강의가 말하는 ‘생명’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생명은 단순히 사람이 살아 있다는 생물학적 생명이 아닙니다. 또한 어떤 신학적 명제를 알고 있다는 지적 신앙도 아닙니다. 강사가 이용도 목사를 통해 강조하려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결국 ‘그리스도의 생명’을 실제 인간의 삶 속에 나타내는 데까지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에서 멈추지 않고, 그분의 사랑과 성품이 사람 안에 실제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주’라는 말과 ‘합일’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 문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대단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교리를 많이 아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에게 받아들여져 그의 생명이 되는 데 있습니다. 진리가 기억에만 있으면 아직 인간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이해성으로 들어오고, 의지와 결합하고, 마침내 행동과 쓰임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그때 사람은 진리를 ‘아는’ 사람에서 진리를 ‘사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강의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사이에는 분명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주합일’이라는 표현에 들어가면 반드시 하나를 구별해야 합니다. 인간과 주님의 결합이 ‘두 존재가 하나의 존재로 섞이는 것’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과 인간 사이에는 결합(conjunction)이 있지만 존재의 혼합이나 동일화는 없습니다. 인간은 영원히 피조물이며 주님은 영원히 창조주이십니다. 가장 높은 천국의 천사라 해도 신성 그 자체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과 더 깊이 결합할수록 자기에게 있는 선과 진리와 생명이 모두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압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말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다면, ‘내 존재가 그리스도의 존재와 섞여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나의 의지와 이해성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점점 더 자유롭게 받아들이며, 그 결과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주님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이 결합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아름다운 역설이 있습니다. 주님과 결합할수록 인간의 개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온전해집니다. 이것은 5강 7부에서 살펴본 ‘자아가 깨어진다’는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인격을 부수어 무색무취한 존재로 만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제거되어야 하는 것은 인격 자체가 아니라 자기에게서 생명이 나온다고 믿고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끌어당기는 타락한 proprium의 지배입니다. 그것이 약해질수록 주님께서 창조하신 그 사람의 고유한 인격과 쓰임은 오히려 더 자유롭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천국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천국의 천사들이 모두 똑같은 생각과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무수한 천사들이 모두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의 천국을 이룹니다. 각각의 사랑과 지혜와 쓰임이 다릅니다. 그런데 그 다양성이 분열을 만들지 않는 것은 모두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하나의 생명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과 하나 된다’는 것은 개성을 잃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주님의 질서 안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고유한 쓰임을 온전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용도 목사의 ‘생명’ 강조는 상당히 의미 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교리적 정통성을 주장하는 것과 그 교리가 실제 생명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는 사랑이시다’라고 정확하게 고백하면서 사람을 미워할 수 있고, ‘십자가’를 설교하면서 자기 명예를 위해 살 수도 있으며, ‘성령’을 말하면서 자기 뜻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진위는 결국 생명에서 드러납니다. 무엇을 고백하는가뿐 아니라 그 고백이 그 사람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그토록 심각하게 보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신앙의 진리는 선을 향합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하지 않으면 아직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여 삶이 될 때 비로소 사람 안에 영적인 것이 형성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라는 표현을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이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의 삶으로 변화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론과 상당히 가까운 지점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 하나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을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사라지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하시므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식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완전히 자기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야 자유롭게 생각하고 선택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수동적인 도구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거듭날수록 사람은 더욱 자유롭게 행동합니다. 악의 욕망에 끌려다니는 것은 참된 자유가 아닙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반드시 폭발해야 하고, 탐욕이 생기면 반드시 따라가야 하며, 인정받지 못하면 견딜 수 없는 사람은 겉으로 자유로워 보여도 실제로는 자기 욕망에 매여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지면 ‘나는 화가 나지만 화를 따라가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손해를 보지만 정직을 선택할 수 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악으로 갚지 않을 수 있다’는 새로운 자유가 생깁니다.

 

그 자유 속에서 주님의 생명이 사람의 생명이 되어 갑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표현을 정확히 해야 합니다. 주님의 생명이 인간에게 이전되어 인간 자신의 독립적인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언제나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유입됩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그릇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인플럭스 교리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비유하자면 눈은 빛을 받아 봅니다. 눈 안에 태양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빛이 들어오지 않으면 눈은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 사랑하고 생각합니다. 거듭남은 그 유입을 방해하는 악과 거짓이 제거되고 그릇이 질서 있게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과의 결합이 깊어질수록 주님의 생명이 더 자유롭게 나타납니다.

 

이렇게 보면 ‘내주합일’이라는 강한 표현을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조금 더 안전하게 바꿀 수 있습니다. ‘신성과 인간 본질의 합일’이라기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와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 사이의 결합’입니다. 주님은 주님으로 계시고 인간은 인간으로 있으면서, 인간이 주님의 생명을 더욱 충만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결합은 추상적인 신비 상태가 아니라 사랑과 진리가 실제 삶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용도 목사의 체험을 평가할 때도 체험 자체보다 그 이후의 열매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강렬한 신비 체험을 했다고 해서 그 사실만으로 그것이 주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환상을 보았거나 음성을 들었거나 극심한 영적 황홀경을 경험했다는 사실 자체는 영적 진위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와 인간의 교통 가능성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무분별한 영적 체험을 더욱 조심스럽게 다루게 합니다.

 

영적 체험의 진위를 살피는 중요한 기준은 그것이 사람을 어디로 데려가는가입니다. 그 체험 이후 사람이 자기를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게 되는가, 아니면 더욱 겸손해지는가?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 하는가, 아니면 섬기는가? 자기에게 주어진 특별한 계시를 자랑하는가, 아니면 주님의 말씀과 선한 삶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가? 원수를 더 미워하게 되는가, 아니면 사랑하려 하는가? 체험이 proprium을 강화하는가, 아니면 그 지배를 약하게 하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 기준은 지금까지 5강이 말해 온 흐름과도 잘 맞습니다. ‘세 번째 연단을 통과했다’는 증거가 어떤 초자연적 현상 그 자체라면 5강 앞부분의 긴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강의는 계속해서 ‘자기를 본다’, ‘자아가 깨어진다’, ‘작은 일에서 이긴다’, ‘원수를 사랑한다’를 강조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용도 목사의 체험 역시 그 체험 자체보다 그것이 그의 사랑과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다고 강의가 보는지를 중심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용도 목사의 ‘그리스도의 생명’이라는 강조가 의미를 갖습니다. 신앙의 중심이 ‘그리스도에 관한 말’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는 삶’으로 옮겨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도덕주의와도 다릅니다. 착하게 살아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면 그 생명이 반드시 사랑과 선한 행위라는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선행은 구원의 값을 지불하는 인간의 공로가 아닙니다. 선행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인간 안에 받아들여졌다는 외적 열매입니다. 따라서 ‘행위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행위로 구원을 산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사랑이 있으면 행위가 나옵니다. 살아 있는 신앙이면 체어리티가 나타납니다. 열매가 나무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와 오늘날의 ‘십자가 복음’을 이해할 때도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십자가는 물론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단지 ‘예수께서 내 죄값을 대신 지불하셨으므로 나는 믿기만 하면 된다’는 하나의 법정적 공식으로만 축소하면, 그리스도인의 실제 거듭남과 삶이 주변으로 밀려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십자가는 인류의 형벌을 대신 받아 아버지의 진노를 만족시키신 사건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지옥 전체와 마지막까지 싸우시고 이기시며 당신의 인성을 완전히 영화하신 최후의 시험입니다. 그리고 그 승리 때문에 인간은 주님의 능력으로 자기 안의 악과 싸울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거듭남은 서로 경쟁하는 두 복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먼저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가 싸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인성을 영화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의 구원 사역에 무엇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이 실제 한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과 삶 안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이용도 목사의 ‘생명’ 강조를 읽으면 상당히 풍성해집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에서 멈추지 않고 ‘그 예수의 생명이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묻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사랑을 믿는다면 그 사랑이 내 원수 관계에서 무엇을 바꾸었는가, 십자가를 믿는다면 자기부인이 내 일상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부활을 믿는다면 옛사람과 다른 어떤 새로운 생명이 실제로 자라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을 지나치게 주관적인 내적 체험으로만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나는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느낀다’는 확신 자체가 객관적 기준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언제나 진리와 선이 함께 가야 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진리의 질서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강렬한 사랑과 일치감을 느껴도 그것이 말씀의 선과 진리에 반하고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며 자기 신격화로 이어진다면 경계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내주합일’과 ‘신인합일’이라는 표현은 특별히 신중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인간이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므로 이제 내 말이 곧 하나님의 말이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엄청난 영적 위험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주님과 결합이 깊은 사람일수록 오히려 자기 생각과 주님의 진리를 함부로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들어오는 모든 생각을 신적 인플럭스라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의 proprium이 얼마나 쉽게 종교적 언어를 입을 수 있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결합에는 오히려 겸손이 따라옵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니 나는 특별하다’가 아니라 ‘주님 없이는 나는 아무 선도 행할 수 없다’는 인식입니다. ‘내가 성화되었다’가 아니라 ‘내게 있는 선은 주님의 것입니다’라는 인식입니다. 천사가 자기 선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공용복 선생의 전승에서 말하는 ‘내주합일’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받아들일 때 가장 중요한 보완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합일’의 깊이는 인간이 얼마나 신적인 존재처럼 느껴지는가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proprium이 얼마나 중심에서 내려오고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얼마나 자유롭게 그의 삶을 움직이는가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 기준으로 이용도 목사를 보아야 합니다. 그의 1929년 체험을 정말 ‘세 번째 연단의 완성’이라고 객관적으로 확정할 수 있는가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핵심진리’의 해석입니다. 우리는 그 해석을 존중하여 먼저 그대로 이해하되, 스베덴보리의 계시를 근거로 이용도 목사의 사후 영적 상태나 거듭남의 정확한 단계를 판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살펴볼 수 있는 것은 기록으로 남아 있는 그의 말과 삶, 그리고 그것이 어떤 사랑의 방향을 보여 주는가 하는 정도입니다.

 

이 절제는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사람을 천국과 지옥으로 판정하는 렌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어떤 가르침과 삶 속에 있는 선과 진리를 발견하고, 동시에 그것을 스베덴보리가 밝힌 영적 질서 안에서 더 정확하게 구별해 보는 렌즈에 가깝습니다. 이용도 목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그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살려고 했는지를 충분히 듣고, 그 다음 어디에서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의 빛이 보이며 어디에서 신학적인 구별이 필요한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용도 목사의 ‘생명’ 강조는 우리가 귀 기울여 들을 가치가 충분합니다. 교리가 생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사는 것이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신앙의 궁극적 증거가 사람의 변화된 사랑과 삶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AC의 아주 근본적인 원리와 만납니다. 사람에게 참으로 속한 것은 단순히 그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고 살아낸 것입니다. 지식은 기억에서 분리될 수 있지만 사랑은 사람의 생명을 이룹니다. 죽음 이후에도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은 그가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종교 지식을 축적했는가가 아니라 그 지식을 통해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었는가입니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말을 가장 실제적으로 확인하는 자리는 특별한 체험의 순간만이 아닐 것입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해야 할 때, 내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할 때, 진실을 말하면 불리해질 때입니다. 바로 그 순간 ‘나의 생명’이 움직이는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지가 드러납니다.

 

따라서 5강 9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존재론적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오는 사랑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여 그것이 나의 의지와 생각과 행동 안에서 실제 생명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합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내가 그리스도처럼 되었다’고 생각하기보다 ‘내게 있는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욱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내주합일’의 가장 안전한 표지는 황홀경도, 환상도, 특별한 계시도 아닙니다. 체어리티입니다. 이전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가, 더 진실할 수 있는가, 더 자유롭게 선을 행할 수 있는가,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는가, 다른 사람을 덜 멸시하는가, 그리고 모든 선의 근원을 더욱 주님께 돌리는가입니다. 바로 그 열매에서 결합의 실제를 볼 수 있습니다.

 

5강의 마지막 10부에서는 이용도 목사의 사례를 포함하여 지금까지의 전체 강의를 한데 모으겠습니다. ‘핵심진리’가 말하는 ‘연단-죄성-자아의 깨어짐-성화-이기는 자-생명의 내주합일’이라는 큰 구조가 어디에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 깊이 만나는지, 그리고 ‘죄성의 완전 제거’, ‘전적 부패’, ‘세 차례 연단의 단계화’, ‘신인합일’ 등 어디에서는 분명한 구별이 필요한지를 종합하여 5강 전체를 마무리하겠습니다.



 

5강 10부

‘연단에서 생명까지’ : 5강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본 종합

5강은 처음부터 끝까지 결국 한 가지 질문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변화되는가?’입니다. 강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말씀의 실천’, ‘양심의 빛’, ‘광야의 연단’, ‘세 차례 연단’, ‘죄성’, ‘전적 부패’, ‘자아의 깨어짐’, ‘이기는 자’, ‘익은 열매’, ‘원수 사랑’, 그리고 마지막의 ‘그리스도의 생명’과 ‘내주합일’까지 긴 흐름을 이어 왔습니다. 이 모든 표현은 서로 별개의 주제가 아니라 하나의 영적 성장론 안에 놓여 있습니다. 사람이 단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데 머물지 않고, 말씀을 실제로 살면서 자기 안의 죄와 정욕이 드러나고, 그것을 회개하며, 자기중심성이 깨어지고, 마침내 사랑이 삶의 중심이 되는 상태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이 과정을 ‘익은 열매’가 되는 것으로 표현하고, 모든 성도가 연단을 받아야 하며 그 과정을 통해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실제 원고에서도 ‘연단을 받아야만 익은 열매가 되고, 익은 열매가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강한 언어가 반복됩니다.

 

이런 전체 방향을 먼저 충분히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5강의 가장 큰 장점은 신앙을 지식이나 신분으로만 다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구원받았다’는 선언만으로 충분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구원이 당신의 성품과 사랑과 일상에서 무엇을 바꾸었는가?’를 계속 묻습니다.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이 실제 삶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깊은 접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신앙은 사랑과 분리될 때 생명이 없으며, 진리는 선이 되고 행위가 되어야 실제 인간의 생명으로 들어갑니다.

 

5강의 첫 출발점인 ‘말씀의 실천’도 바로 그런 의미에서 중요했습니다. 강사는 말씀을 실천하려 할 때 오히려 자기 안의 죄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사랑을 배우면 사랑하지 못하는 자기 모습이 보이고, 인내를 배우면 참지 못하는 성질이 드러나며, 자기부인을 배우면 자기 뜻을 놓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연단’의 시작으로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를 조금 더 깊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이해성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전에는 구별되지 않던 선과 악이 구별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진리가 악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악을 비추어 드러낸 것입니다.

 

그래서 연단은 사람에게 새로운 악을 넣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숨어 있던 것이 나타나는 과정입니다. 강의에는 반복하여 ‘범죄할 환경이 주어지면 죄성이 발동한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 표현을 ‘삶의 환경 속에서 인간의 숨은 애정과 지배적 사랑이 모습을 드러낸다’고 조금 다듬어 볼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자신이 온유하다고 생각했는데 무시를 당하면 분노가 올라오고, 재물에 초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손해가 생기면 마음이 흔들립니다. 환경이 악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러나 5강의 ‘연단’과 스베덴보리의 ‘시험’을 그대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핵심진리’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도를 연단시키기 위하여 특정한 환경을 적극적으로 붙여 주신다는 표현이 상당히 강합니다. 더 나아가 천년왕국 말기에 마귀가 풀리는 것까지 ‘연단 경험이 없는 사람들을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주님의 섭리와 악의 허용을 더욱 세밀하게 구별합니다. 주님은 악을 일으키시지 않습니다. 인간과 지옥의 악을 자유 때문에 허용하시되, 그 허용된 악 가운데서도 가능한 한 선한 결과를 이끌어 내십니다. 따라서 누군가 나를 괴롭혔다고 해서 ‘주님이 저 사람에게 나를 괴롭히라고 시키셨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주님께서는 이미 발생한 그 사건을 사용하여 내 안의 자기애와 분노를 드러내고 그것에서 나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5강의 두 번째 큰 축은 ‘세 차례 연단’입니다. 출애굽 직후 바로의 추격, 광야에서의 아말렉 전쟁, 그리고 가나안 입성을 앞둔 강적들과의 전쟁을 인간의 영적 성장 세 단계와 연결했습니다. 실제 강의에서도 가나안 정복까지를 ‘세 번째 연단 과정’, 곧 광야 연단의 마지막 단계로 분명히 설명합니다. 이 구조는 ‘신앙생활이 진행될수록 싸움의 대상이 더 깊어진다’는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눈에 잘 보이는 행동의 죄를 다루지만, 점차 인정욕구, 자기 의, 아집, 자기 영성에 대한 자부심처럼 훨씬 미세한 proprium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상당히 잘 만납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반드시 ‘시험이 점점 적어진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 깊은 내면이 열리면서 이전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수준의 진리를 배우다가 나중에는 ‘내가 사실을 말하고 있지만 왜 이 말을 하는가? 상대를 살리려는가, 내가 옳음을 증명하려는가?’라는 목적의 차원까지 들어갑니다. 행동에서 의도로, 의도에서 사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만 모든 사람의 거듭남을 문자 그대로 ‘정확히 세 차례의 큰 연단’으로 공식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셋’은 완전한 과정,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어진 것을 나타내는 상응적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그것을 모든 신앙인의 생애에 적용되는 고정된 영적 단계표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사람마다 시험의 종류와 깊이와 순서는 매우 다릅니다. 그러므로 ‘세 차례’는 영적 성장의 완전한 과정을 보여 주는 하나의 도식으로 받아들이되, ‘나는 지금 두 번째인가 세 번째인가’를 판정하는 척도로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5강의 세 번째 큰 축은 ‘죄성’입니다. 강사는 인간이 선을 원하면서도 범죄하는 이유를 ‘영 속 가장 깊은 곳에 뿌리박힌 죄성’으로 설명하고, 이것을 ‘전적 부패’와 연결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가장 중요한 인간론적 보정을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도 인간의 유전적 악을 매우 심각하게 말하지만, 인간의 가장 깊은 inmost 자체를 악의 뿌리가 박힌 곳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은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유입되는 가장 내적인 입구와 관계됩니다.

 

또한 조상의 죄책 자체가 법적으로 후손에게 전가된다는 전통적인 원죄론도 스베덴보리와 맞지 않습니다. 유전되는 것은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입니다. 그리고 그 성향을 사람이 자유 가운데 받아들이고 실제 삶으로 만들 때 그것이 그 사람의 악이 됩니다. 따라서 인간은 유전적 악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조상의 죄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자기 안에 악한 충동이 스쳤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악한 사람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사랑하고 동의하며 자기 것으로 만드는가가 중요합니다.

 

여기에 인플럭스의 원리가 들어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영계와 연결되어 있으며,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천국을 통하여, 악과 거짓은 지옥에서 유입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그것이 모두 자기 생각과 자기 애정처럼 느껴집니다. 이 자유가 있어야 책임과 거듭남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악이 지옥에서 유입된다’는 말이 인간의 책임을 없애지 않습니다. 유입된 악을 사랑하여 받아들이면 자기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선을 행하더라도 그 선의 공로를 자기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선의 근원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5강의 ‘전적 부패’를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옮긴다면 ‘인간의 proprium에서는 참된 선이 나올 수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때 가장 가까워집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기 자신을 거듭나게 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인간 안에는 주님께서 보존하신 선과 진리의 리메인스도 전혀 없고,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도 사실상 파괴되었다’는 뜻이라면 스베덴보리와는 크게 달라집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리 타락한 사람에게도 자유와 합리성을 보존하시며, 어린 시절부터 리메인스를 저장하십니다. 인간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인간 자신의 선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그 안에서 은밀히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5강의 죄론은 ‘인간의 악이 얼마나 깊은가’를 매우 강하게 보여 주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거기에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그보다 더 깊다’는 말을 반드시 붙여야 합니다. 인간의 악만 깊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보존하신 선과 진리의 리메인스도 인간 자신이 모르는 깊은 곳에 있습니다. 실제 영적 시험이 가능한 것도 인간에게 오직 악만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심어 두신 선과 진리가 그 악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5강의 네 번째 큰 축인 ‘자아의 깨어짐’이 등장합니다. 강사는 자아가 깨어진 사람의 특징을 ‘문제가 생겼을 때 남을 보기보다 자기를 먼저 보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실제 강의에서 목회자가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는 성도라도 어려움을 당하면 차별하지 않고 돕는 사례, 자신을 배신한 사람을 미워하기보다 자기 안의 사람 의존을 돌아보는 사례 등이 나옵니다. 이 통찰은 proprium의 문제와 매우 가깝습니다.

 

다만 ‘모든 문제는 내 탓이다’라는 자기비난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상대가 실제로 악을 행했다면 그 악은 상대의 책임입니다.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여 모든 책임을 자기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잘못을 보면서도 동시에 ‘이 사건을 통해 내 안에서는 무엇이 드러났는가?’를 살필 수 있는 상태입니다. 상대의 악과 자기 proprium을 함께 구별하여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죄를 점점 외부에 놓기 쉽기 때문입니다. ‘저 교회가 문제다’, ‘저 목사가 문제다’, ‘저 사람이 자아가 강하다’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언제나 먼저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거짓 교리를 비판하면서 자기 안의 자기 의를 볼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사랑 없음을 지적하면서 자기 안의 냉혹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 자체가 proprium의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5강의 다섯 번째 큰 축은 ‘이기는 자’와 ‘익은 열매’입니다. 강사는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의 일곱 교회에 주어진 ‘이기는 자’의 약속들을 매우 중요하게 보고, 교회시대의 모든 성도에게 이기는 자가 되라는 요청이 주어졌다고 설명합니다. 또 익은 열매는 말씀을 ‘99%’가 아니라 ‘100%’ 실천하는 사람이며, 빛 가운데 철저하게 회개하여 빛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사람이라고 매우 강하게 표현합니다.

 

바로 이 ‘100%’의 언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특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신앙의 철저성을 강조하는 목회적 언어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문자 그대로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모든 유전적 악의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하여 절대적 무죄 상태에 도달해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와 맞지 않습니다. 천사는 자기 자신에게서 선한 존재가 아닙니다. 천사의 모든 선도 순간순간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천국적 완전함은 ‘나는 이제 자체로 완전하다’는 자립적 완성이 아니라, 주님의 선을 자유롭게 받아들여 그 선이 지배적 사랑이 된 상태입니다.

 

이 차이는 ‘악의 제거’라는 말에서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악이 제거된다는 것은 악이 인간에게서 독립적인 실체처럼 뽑혀 우주 밖으로 사라진다는 뜻이라기보다, 악이 분리되고 억제되어 더 이상 사람의 지배적 사랑과 생명을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전에는 악을 기뻐해서 행했지만 이제는 그 악을 죄로 여기고 싫어하며 선을 사랑합니다. 바로 이것이 실제적이고 깊은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익은 열매’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가장 아름답게 읽는 방식은 ‘완전히 무결한 사람’보다 ‘주님의 선이 그의 삶에서 실제 열매를 맺게 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열매는 나무가 자기 공로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받아 맺습니다. 인간도 주님에게서 선을 받아 행동과 쓰임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진정 익은 사람일수록 ‘내가 이루었다’보다 ‘주님께서 하셨다’는 인식이 깊어질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강의 중간에 등장하는 아주 소박한 일상 사례들이 오히려 ‘익은 열매’의 의미를 잘 보여 주었습니다. 강사는 자신도 자주 패배한다고 솔직히 말하며, 가정에서 말 한마디와 혈기 하나를 다루는 것을 실제 ‘이김’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기는 자’가 너무 높은 영적 계급처럼 들릴 수 있는 위험을 생활 속으로 다시 끌어내리기 때문입니다. 큰 신비 체험보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말을 절제하는 것, 나를 거스르는 사람에게 보복하지 않는 것, 작은 관계에서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실제 이김이라는 것입니다.

 

소화 데레사의 예도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크고 위대한 업적보다 작은 일에서 사랑을 실천한 것을 성화의 사례로 제시했습니다. 이런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쓰임’과 잘 연결됩니다. 거듭남은 종교적 순간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가정, 직업, 관계, 일상의 책임 안에서 나타납니다. 진리가 자연적 삶의 마지막 행동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선은 머리 안의 선이 아니라 실제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흐름이 원수 사랑으로 이어졌습니다. 5강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는 ‘성화’를 죄성 제거라는 추상적인 설명에서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선을 원할 수 있는 상태’라는 삶의 모습으로 옮겨 놓았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공용복 선생의 전승과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가 상당히 깊이 만납니다. 신앙의 완성은 결국 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다만 원수 사랑 역시 무분별한 용납과 같지 않습니다. 악을 악이라고 하지 않는 것이 사랑은 아닙니다. 폭력과 착취와 거짓을 그대로 허용하는 것도 사랑이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언제나 진리와 함께 갑니다. 악을 제지하면서도 상대의 파멸을 즐기지 않고, 필요한 책임을 물으면서도 보복심에 지배되지 않으며, 가능하다면 그 사람이 악에서 돌아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훨씬 현실적인 원수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5강이 사랑으로 깊어지는 끝자락에 이용도 목사가 등장합니다. 강사는 이용도 목사의 영성을 ‘수도적인 영성’,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주 합일되는 성화·성결의 복음’, ‘그리스도를 온전히 담는 복음’으로 설명하며, 기복신앙과 대조합니다. 이 표현은 5강 전체의 결론에 해당한다고 보아도 좋겠습니다. 결국 죄를 많이 분석하고 연단의 단계를 공부하는 이유는 죄 그 자체에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이 사람 안에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내주합일’을 결합(conjunction)의 언어로 보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주님과 존재론적으로 합쳐져 신적인 존재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에 받아들여져 그 사람의 삶을 점점 질서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며 그 생명을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인플럭스의 신비입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사랑한다고 느끼고 자기 힘으로 생각한다고 느끼지만, 실제 생명은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유입됩니다. 거듭남은 이 인플럭스가 더 잘 들어올 수 있도록 인간이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주님의 힘으로 물리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안에 있다’는 말의 가장 깊은 표지는 황홀한 체험보다 사랑과 진리의 열매일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이용도 목사에 대한 강사의 높은 평가도 절제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의는 그의 삶과 체험을 ‘세 번째 연단’, ‘성화’, ‘내주합일’의 틀로 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핵심진리’ 전통 안에서의 해석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용도 목사의 정확한 영적 단계나 사후 상태를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외적인 전기와 체험만으로 그의 내적인 지배적 사랑을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의 기록된 삶과 메시지에서 자기부인과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을 향하는 열매가 보이는지를 살펴볼 수 있을 뿐입니다.

 

이 절제는 공용복 선생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합니다. ‘핵심진리’에 깊은 진리가 많이 보인다고 해서 공용복 선생의 모든 체계가 스베덴보리와 동일하다고 할 수 없고, 반대로 몇몇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해서 그 안의 실제 영적 통찰을 가볍게 볼 필요도 없습니다. 이번 5강은 바로 그 균형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잘 보여 줍니다.

 

예를 들어 ‘말씀을 삶으로 살아야 한다’, ‘자기 안의 악과 싸워야 한다’, ‘자기를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 ‘원수에게까지 사랑을 넓혀야 한다’, ‘신앙은 실제 생명이 되어야 한다’는 강조는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 상당히 깊게 대화할 수 있습니다. 반면 ‘영의 가장 깊은 곳에 죄성이 뿌리박혀 있다’, ‘정확한 세 차례 연단을 통과한다’, ‘100% 정결한 익은 열매가 되어야 천국에 들어간다’, 문자적인 종말론적 시간표 등을 절대적인 영적 구조로 만드는 부분은 중요한 보정이 필요합니다.

 

특히 종말론의 차이는 작지 않습니다. 강의의 전체 성장론은 교회시대, 휴거, 대환란, 천년왕국 같은 문자적인 미래 시간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실제 자료에서는 일부 성도의 환난 전 휴거, 후 3년 반 등의 구조를 문자적인 종말 사건으로 설명하고, 천년왕국의 사람들까지 실제 역사적 인구 집단으로 다룹니다.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의 이런 이미지들을 교회의 영적 상태와 마지막 심판, 새 교회의 출현을 나타내는 상응적 말씀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두 체계가 분명히 갈라집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지적하는 목적은 ‘누가 더 성경적인가’를 놓고 논쟁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각각의 말이 사람의 영적 삶에 무엇을 하려는지를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핵심진리’의 종말론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지금 반드시 정결하게 살아야 한다’는 강력한 긴장을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은 그 긴장을 미래의 달력에서 현재의 내적 상태로 가져옵니다. ‘언젠가 대환란이 올 때 준비되어 있는가?’라는 질문보다 더 근원적으로 ‘오늘 당신 안에서 무엇이 주인인가?’를 묻게 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5강을 읽으면 종말의 긴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가까워집니다. 마지막 심판이 먼 미래의 공포스러운 사건만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거짓의 외관이 벗겨지고 실제 사랑이 드러나는 질서와도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고 영계에 들어가면 자기가 지상에서 형성한 사랑의 상태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5강 전체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가장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가?’입니다. 강의는 그것을 ‘죄성과 정욕을 이기고 있는가’라고 묻고, ‘자아가 깨어졌는가’라고 묻고, ‘익은 열매인가’라고 묻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주합일되었는가’라고 묻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같은 질문을 ‘당신의 지배적 사랑은 무엇인가?’라고 묻습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것으로 살아갑니다. 돈을 가장 사랑하면 진리조차 돈을 위해 사용할 수 있고, 자기 명예를 가장 사랑하면 종교조차 자기 영광을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중심이 되면 돈과 지위와 지식과 재능은 모두 쓰임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보다 무엇이 주인인가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기는 자’도 새롭게 이해됩니다. 이기는 자는 강한 의지력으로 모든 욕망을 정복한 영적 영웅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오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점점 생명의 중심이 된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여전히 자연적 욕구와 감정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더 이상 주인이 아닙니다.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 아래서 질서를 찾습니다.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격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과 개성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나를 삶의 최종 중심으로 삼는 proprium의 지배가 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다른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고,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며, 맡겨진 쓰임을 더 충실히 행할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도 상대의 악을 선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악은 막되 미워하지 않는 것, 진리를 말하되 멸시하지 않는 것, 거리를 두어야 할 때 거리를 두면서도 그의 파멸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과 진리가 결합된 체어리티입니다.

 

‘내주합일’도 인간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주님의 생명을 자기 소유처럼 독립적으로 갖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인정하면서, 그 사랑과 진리를 더욱 자유롭게 받아 실제 삶으로 표현하는 결합입니다.

 

그리고 ‘익은 열매’ 역시 자기 완성의 자격증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이 자연적 삶의 실제 열매까지 내려온 상태입니다. 그래서 익은 열매는 말로 자기 익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듯 삶에서 나타납니다. 말투에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돈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자신을 비판한 사람을 대하는 모습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하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여기에서 5강이 이용도 목사의 ‘생명’을 마지막에 배치한 것은 상당히 의미 있게 느껴집니다. 긴 죄론과 연단론의 마지막 목적이 ‘죄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싸우는 것도 사랑하기 위해서이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도 사랑하기 위해서이며, 진리를 배우는 것도 결국 그 진리가 선한 삶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이 점에서는 ‘핵심진리’의 5강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이 아주 아름답게 만납니다. ‘악을 피하는 것’이 마지막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하지 않는 신앙에서 행하는 신앙으로, 행하는 신앙에서 사랑하여 행하는 신앙으로 나아갑니다. 처음에는 ‘말씀 때문에 참습니다.’ 나중에는 ‘상대를 해치고 싶지 않아서 참습니다.’ 더 깊어지면 ‘그 사람의 선이 실제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지금 AC에서 읽고 있는 가인과 아벨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신앙은 필요합니다. 진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독립적 권위를 가지기 시작하면 ‘가인’이 됩니다. 반대로 진리가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삶을 섬기면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5강이 그토록 ‘말씀을 실제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던 이유도 결국 이 문제와 만납니다.

 

그래서 저는 5강 전체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거듭남은 사람이 연단을 많이 받아 자기 힘으로 완전한 존재가 되는 과정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를 실제 삶에 받아들이면서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이 드러날 때 그것을 주님의 힘으로 죄로 알고 물리치고, 그 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가 점점 생명의 중심으로 자리 잡아 마침내 선을 행하는 것이 자유와 기쁨이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공용복 선생의 전승이 여기에 던지는 아주 좋은 질문 하나는 그대로 남겨 두어도 좋겠습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그 말씀은 지금 당신의 생활에서 실제로 무엇이 되었습니까?’ 이것은 AC를 읽는 사람에게도 매우 필요한 질문입니다. 아르카나를 많이 알고, 상응과 퍼셉션과 인플럭스와 proprium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과, 그것들이 실제 우리의 말과 관계와 선택을 바꾸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핵심진리’에 되돌려 줄 수 있는 질문도 있습니다. ‘그 연단과 성화의 모든 과정에서 실제로 생명을 주시고 악을 물리치시는 분이 누구이며, 인간의 자연적 애정 전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를 어떻게 회복하시는가?’입니다. 이 질문이 들어가면 성화는 자기완성의 긴장에서 벗어나면서도 삶의 변화라는 엄중함은 그대로 유지됩니다.

 

그렇게 두 질문을 함께 붙들면 5강의 장점은 더욱 살아나고, 지나치게 단정적인 부분은 자연스럽게 보완됩니다. 인간은 실제로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변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욕망 없는 무감각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격과 자유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 없는 감상적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과 결합해야 합니다. 그러나 피조물이 신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결국 한 곳으로 돌아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사람 안에서 사랑과 진리와 쓰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5강의 ‘그리스도의 생명’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가장 깊고도 안전하게 읽을 수 있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서 5강은 10부로 마무리할 수 있겠습니다. 1부의 ‘말씀의 실천과 양심의 빛’에서 시작하여, 2부의 ‘출애굽-광야-가나안’, 3부의 ‘세 차례 연단’, 4부의 ‘죄성과 전적 부패’, 5부의 ‘이기는 자와 익은 열매’, 6부의 ‘작은 일의 승리’, 7부의 ‘자아가 깨어짐’, 8부의 ‘원수 사랑과 체어리티’, 9부의 ‘이용도 목사와 생명의 내주합일’을 지나, 마지막 10부에서는 그 모든 것을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실제 삶이 되는 거듭남’이라는 한 중심으로 모았습니다. 앞선 1강부터 이번 5강까지 계속 반복해서 나타나는 ‘핵심진리’의 가장 강한 문제의식도 이제 꽤 분명해진 것 같습니다. ‘무엇을 알고 믿는가’에서 멈추지 말고 ‘그 진리가 실제 당신의 생명이 되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 질문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오래 붙들어 볼 만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SY.59,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6강 (7/29), 시흥영성수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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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57,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4강 (7/28), 시흥영성수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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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5 심화

1.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

 

AC.325에서 특별히 깊이 살펴볼 표현은 ‘태고교회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는 첫 문장입니다. 오늘날의 신앙생활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말씀을 배우고, 그것을 믿고, 그 믿음에 따라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순서가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서는 그 질서가 달랐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을 가장 깊은 생명으로 가지고 있었으며,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참된지를 지각했습니다.

 

이것이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직접 연결됩니다. 퍼셉션은 밖에서 배운 교리를 하나씩 논증하고 판단하여 ‘이것이 참되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천적인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의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는 사랑과 신앙을 서로 독립된 것으로 생각하기 어려웠습니다. 사랑 안에 그 사랑에 속한 진리가 있었고, 진리는 자신을 낳은 사랑과 하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는 말은 단순히 ‘사랑도 하고 신앙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의 생명과 근원이 사랑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선에 속한 진리를 지각했고, 그 진리는 다시 선을 표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와 ‘어떻게 사는가’를 서로 다른 질문처럼 나누기 쉬운 것과 달리,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서는 사랑과 지각과 삶이 하나의 질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이 천적 질서를 오늘날 영적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 그대로 시간적인 순서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이 거기서 나왔다’고 해서, 오늘날 사람도 먼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충분히 가진 다음에야 진리를 배우고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영적 인간에게서는 오히려 먼저 말씀을 통하여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배우고, 진리를 신앙하며, 그것에 따라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시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은 거듭남의 방식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천적 인간은 선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질서를 가졌지만, 영적 인간은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인도됩니다. 그러나 최종적인 질서가 서로 반대인 것은 아닙니다. 영적 인간에게도 진리는 결국 선과 결합되어야 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길을 보여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이 아는 진리는 의지와 삶 안으로 들어가 선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체어리티가 신앙보다 중요하다’는 말을 ‘교리와 진리는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 인간에게 진리는 거듭남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무엇이 선인지 알지 못하면 올바르게 선을 행할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진리가 선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스스로 교회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가인의 원리가 시작됩니다. AC.325는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처음부터 신앙을 버린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과 분리하여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거짓을 거짓이라고 알면 경계하기 쉽지만, 참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전체적인 질서에서 떼어 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면 자신이 여전히 진리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리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퍼셉션이 약해진 사람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보존하며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한 교리가 필요합니다. 문제는 교리가 사랑과 삶에서 분리되는 것입니다. 교리를 많이 알고 성경의 속뜻을 깊이 이해하며 신앙 고백이 정확하더라도, 그것이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많이 알게 되는 것은 큰 은혜이지만, 그 지식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많이 보고 더 깊이 안다고 여기기 시작한다면 오히려 가인의 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아르카나를 아는 목적은 남보다 높은 영적 지식을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이웃을 더욱 지혜롭게 사랑하며 실제 쓰임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25의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는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할 때에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그대로 되찾으려 하기보다 그 안에 있는 영원한 질서를 붙들어야 합니다.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이시며,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배우는 진리가 삶으로 내려오고,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이 이웃을 향한 사랑과 쓰임으로 나타날 때 신앙과 체어리티는 다시 형제로 함께 있게 됩니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 ‘나는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만이 아닙니다. ‘내가 아는 진리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입니다.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고,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는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사랑에서 분리되고 신앙이 삶에서 떨어져 독립적인 것이 되기 시작한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 안의 가인이 태어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AC.325, 창4:1-2, 가인과 아벨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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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설교의 성경적 출발점은 사사기 3장 1절의 매우 인상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쳐 알게 하시려고’ 몇몇 민족을 남겨 두셨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말씀에서 곧바로 ‘전쟁을 알아야 한다’는 명제를 끌어내고, 그것을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안보 현실, 북한과 공산주의, 주한미군, 그리고 현재의 정치적 대결에 연결합니다. 이어 사사기 전체를 ‘번성→부패→징계→부르짖음→사사→회복→다시 번성’이라는 순환구조로 설명하고, 이것을 개인의 삶과 국가의 역사에 적용합니다. 설교의 성경적 골격 자체는 분명히 사사기의 중요한 특징 하나를 포착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떠남, 압제당함, 부르짖음, 사사가 일어남, 구원받음, 다시 타락함이라는 반복 구조로 진행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사사기 3장의 ‘전쟁을 알게 하심’은 설교자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을 가리킵니다. 말씀에 기록된 전쟁은 역사적으로 실제 있었던 전쟁이지만, 말씀의 속뜻에서 전쟁은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의 영적 싸움, 곧 시험을 표상합니다. 사람이 거듭나려면 반드시 이 싸움을 통과해야 합니다. 선이 무엇인지 알고 진리가 무엇인지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악한 욕망이 일어날 때 그것을 거절하고, 거짓된 생각이 밀려올 때 진리를 붙들며, 자기 뜻과 주님의 뜻이 충돌할 때 주님의 뜻을 선택하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전쟁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번 본문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호수아 시대에는 가나안 정복이 이루어졌지만, 모든 적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민족들은 그대로 남겨졌습니다. 자연적 의미만 보면 ‘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셨는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거듭남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놀랍도록 정확한 인간의 영적 현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처음 주님께 돌아왔다고 해서 자기 안의 모든 악한 성향이 단번에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씩 악을 보게 하시고, 싸우게 하시며, 이기게 하십니다. 아직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악은 당분간 잠잠하게 남겨 두십니다. 그것까지 한꺼번에 드러난다면 사람이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나안 족속을 남겨 두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악을 좋아하셔서 보존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와 영적 성장을 위해, 시험이 단계적으로 진행되도록 허용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지난 여호수아 설교에서 살펴본 ‘허용의 섭리’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뜻하시지 않지만, 악이 사람에게 드러나고 그것과 싸우는 과정까지 섭리 안에 사용하십니다. 사람이 자기 안에 어떤 악이 있는지도 모른다면 그것을 거절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험은 악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숨어 있던 악이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보면 사사기 3장 1절의 ‘전쟁을 알지 못한 자에게 전쟁을 알게 하려 하사’라는 말씀은 외부의 군사전쟁보다 먼저 영적 전쟁을 가리킵니다. 설교자가 ‘전쟁을 모르면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고 강하게 표현했는데, 그 표현을 영적으로 바꾸어 보면 오히려 깊은 진리가 됩니다. 거듭남을 진지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영적 싸움을 알게 됩니다. 자기애와 이웃 사랑이 충돌하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과 용서해야 한다는 진리가 충돌하며, 탐욕과 정직이 충돌하고, 자기 지혜를 믿고 싶은 마음과 주님의 지혜를 의지해야 한다는 신앙이 충돌합니다. 이 싸움을 한 번도 경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악을 아직 심각하게 대면하지 않았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전쟁’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다만 그 적은 먼저 북한이나 공산주의자나 특정 정당의 사람이 아니라, 내 안에서 주님을 대적하는 악과 거짓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번 설교와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에 중요한 갈림길이 나타납니다. 설교자는 성경의 ‘가나안 전쟁’을 거의 즉시 대한민국의 정치적·군사적 전쟁으로 옮겨 갑니다. 6·25전쟁, 북한, 주한미군, 특정 대통령과 정치세력, 광화문 집회가 계속해서 사사기의 ‘전쟁’과 겹쳐집니다. 그러나 말씀의 내적 의미는 방향이 반대입니다. 말씀은 밖의 적을 찾아내기 전에 내 안의 적을 찾아내도록 사람을 이끕니다.

 

이 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을 읽을 때 ‘블레셋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물으며 오늘날의 어떤 정치세력이나 종교집단을 지목하기 시작하면, 말씀은 쉽게 타인을 공격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내 안의 블레셋은 무엇인가?’라고 묻기 시작하면 말씀은 나를 회개시키는 거울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성경 해석이 일관되게 후자를 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의 전쟁은 궁극적으로 한 사람의 영혼 안에서 벌어지는 주님의 나라와 지옥 사이의 싸움입니다.

 

설교자가 제시한 ‘사사기의 사이클’도 이 관점에서 읽으면 훨씬 깊어집니다. 설교에서는 ‘번성하면 부패한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잘되고 형편이 좋아지면 교만해지고, 심지어 ‘여자 하나 가지고 못 살고 바람을 피게 된다’는 매우 현실적이고 자극적인 예도 듭니다. 그러고 나면 하나님께서 ‘매를 때리시고’, 징계를 받은 사람이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고 사사를 보내 회복시키며, 다시 번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반복되는 타락을 아주 쉽게 기억하게 만드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기의 실제 영적 사이클은 단순한 ‘경제적 번성→도덕적 부패→재난→기도→경제적 회복’이 아닙니다. 더 정확하게 보면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여김→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지배→거짓과 악에 사로잡힘→자기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음→주님께 도움을 구함→진리를 통한 구원→새로운 영적 자유’의 순환입니다.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번성’의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번성이 언제나 돈이 많아지고 사업이 잘되고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번성과 증가는 선과 진리가 많아지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고, 이웃을 섬기는 기쁨이 늘어나며, 말씀을 이해하는 빛이 밝아지는 것이 진정한 번성입니다. 그러므로 ‘번성하는 상태에 계속 있으라’는 설교자의 권면을 영적으로 바꾸어 말하면 대단히 좋은 권면이 됩니다. ‘주님께 받은 선을 자기 것으로 돌리지 말고 계속 주님께 돌려드리라’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타락은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은 평안해지면 여호와를 잊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영적 생활에서도 반복됩니다. 시험 가운데 있을 때는 간절히 기도하지만 문제가 해결되면 자기 힘으로 해결한 것처럼 느낍니다. 은혜를 받을 때에는 ‘주님이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선을 자기 성품과 능력으로 돌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proprium의 문제입니다. 사람의 proprium은 주님께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마침내 자기가 선하고 자기가 지혜롭다고 생각하려는 경향을 지닙니다.

 

따라서 ‘번성하면 부패한다’는 설교자의 관찰은 영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지점을 건드립니다. 그러나 문제는 번성 그 자체가 아닙니다. 선과 진리의 풍성함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내 것’으로 돌리는 순간입니다. 천사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과 지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부패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아주 가진 것이 적은 사람도 자기 것이 있다고 여기며 교만하면 부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패의 원인은 풍요가 아니라 appropriation, 곧 주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취하는 데 있습니다.

 

설교에서는 이어 ‘부패하면 하나님이 때리신다’, ‘뒤지도록 맞는다’는 표현을 반복합니다. 성경의 문자에는 실제로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가 그렇게 표현되는 곳이 많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구별을 합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분노하시거나 사람을 해치기 위해 매를 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랑 그 자체이며 자비 그 자체이십니다. 사람이 악에서 떠나지 않을 때 그 악 자체가 고통스러운 결과를 낳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허용하시면서도 가능한 한 사람을 구원 쪽으로 돌리십니다. 사람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이 때리셨다’고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사람이 주님의 질서에서 벗어난 결과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에게 압제당하는 것도 같은 구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악을 사랑하면 결국 그 악이 사람을 지배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욕망을 사용하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욕망이 나를 사용합니다. 처음에는 화를 필요할 때만 낸다고 생각하지만 나중에는 분노가 나를 끌고 갑니다. 처음에는 돈을 필요에 따라 추구하지만 나중에는 탐욕이 모든 판단을 지배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이방 민족의 압제’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적에게 넘겨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선택한 악이 마침내 그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이스라엘은 ‘부르짖습니다’. 설교자가 ‘부르짖음’을 강조하는 것은 사사기의 문자적 흐름을 잘 포착한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능력의 한계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주님을 진실하게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힘으로 된다고 생각하는 동안은 주님의 도움을 입술로만 구할 수 있지만, 자신의 무능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면 기도가 깊어집니다. 이 점에서 설교자가 ‘부르짖으라’고 반복하는 데는 목회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다만 ‘큰소리로 주여를 외치면 하나님께서 뜻을 바꾸신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기도의 능력은 음량에 있지 않습니다. 통성기도도 진실한 기도가 될 수 있고, 아무 소리 없는 묵상기도도 진실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의지의 방향입니다. 말없이 주님 앞에서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돌이키는 한 사람의 마음이 수천 명의 함성보다 더 깊은 기도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크게 ‘주여’를 외쳐도 자기 악을 그대로 사랑하고 있다면 그 외침 자체가 사람을 변화시키지는 않습니다.

 

또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신다’는 표현도 내적으로는 다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을 향한 주님의 뜻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입니다. 변하는 것은 사람의 상태입니다. 사람이 주님을 등지고 있을 때에는 주님의 사랑이 심판처럼 느껴지고, 사람이 돌아서 주님을 향하면 같은 사랑이 자비와 평화로 경험됩니다. 태양이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늘에서 햇빛 쪽으로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할 때 ‘하나님의 마음이 바뀌었다’기보다 사람이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바뀌었다고 보는 것이 더 깊은 설명입니다.

 

사사기의 다음 단계는 ‘사사를 보내 주심’입니다. 설교에서는 이것을 ‘오늘날의 선지자’를 보내 주시는 것으로 설명하고, 선지자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보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도 구별이 필요합니다. 성경의 선지자의 본질은 미래 사건을 예언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선지자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의 속뜻에서는 선지자가 ‘진리의 가르침’을 표상합니다. 그리고 사사는 그 진리에 따라 악과 거짓에서 사람을 해방시키는 주님의 구원 능력을 표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부르짖을 때 주님께서 ‘사사를 보내신다’는 것은 반드시 어떤 카리스마적 지도자 한 사람을 보내신다는 뜻으로 좁혀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말씀 한 구절을 통해서도, 양심을 통해서도, 한 사람의 조용한 충고를 통해서도, 때로는 실패와 고난을 통해서도 사람에게 구원의 진리를 보내십니다. 핵심은 그 사람을 특정 지도자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번 설교를 해설할 때 특별히 중요합니다. 예배 전 기도에서부터 특정 목회자를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특정 날짜의 광화문 집회와 정치적 승리를 하나님의 뜻과 직접 연결합니다. 이어 설교 중에도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세우신다는 말과 현재의 정치운동 지도력이 서로 가까이 놓입니다. 이 구조가 반복되면 회중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성경의 사사·선지자→오늘의 특정 지도자’라는 연결이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구약의 사사나 선지자의 표상을 오늘날 특정 개인에게 직접 이전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말씀의 표상은 먼저 주님 자신과,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과 진리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인간 지도자는 언제나 오류가 있을 수 있고 자기애의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라 해도 말씀의 ‘사사’나 ‘선지자’의 자리를 자신에게 직접 적용하기 시작하면,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의 경계가 흐려질 수 있습니다.

 

설교자가 ‘선지자는 앞으로 될 것을 미리 다 보는 사람’이라고 설명한 부분 역시 수정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참된 예언은 미래의 정치 사건을 맞히는 능력보다 훨씬 깊습니다. 말씀은 ‘악을 계속 사랑하면 결국 그 악의 종이 된다’, ‘회개하면 주님께서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하신다’, ‘자기 사랑의 마지막은 지옥이며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마지막은 천국이다’라는 영원한 미래를 보여 줍니다. 이것이 말씀의 예언적 성격입니다.

 

이번 설교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본문 자체가 놀랍도록 선명하게 ‘영적 전쟁’을 말할 수 있는 본문인데도, 그 전쟁이 거의 전부 정치적·군사적 전쟁으로 밖을 향해버린다는 점입니다. 사사기 3장 1절은 ‘전쟁을 알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깊이 파고들었다면 ‘왜 거듭나는 사람에게 시험이 필요한가’, ‘왜 주님은 우리의 모든 악한 성향을 한꺼번에 없애주시지 않는가’, ‘왜 신앙생활을 오래해도 반복해서 같은 악과 싸우는가’, ‘시험 가운데 천사들과 악한 영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사람의 자유는 어떻게 보존되는가’ 같은 매우 깊은 영적 주제들이 펼쳐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설교에서는 이 놀라운 내적 전쟁이 6·25전쟁과 북한, 주한미군, 특정 정치인, 광화문 집회로 빠르게 치환됩니다. 정치와 국가 문제를 설교에서 전혀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정의와 자유, 국가의 평화와 국민의 안전 역시 이웃 사랑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영적 전쟁을 특정 정치세력과의 전쟁으로 동일시하는 순간, 신앙적으로 매우 위험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지지하는 편은 하나님의 군대가 되고, 반대편은 가나안 족속이나 마귀의 세력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회개의 방향이 뒤집힙니다. ‘내 안의 무엇이 주님을 거역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저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내 안의 간첩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자기애와 탐욕과 거짓과 교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외부의 실제 사람들에게만 적용하면 말씀은 자기 성찰의 거울에서 정치적 무기로 변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번 설교에서는 정치적 상대를 향한 매우 강한 욕설과 모욕적 표현이 반복됩니다. 특정 인물을 향하여 ‘개자식’, ‘늙은 새끼’, ‘죽은 놈’ 등의 표현을 사용하고, 일부 정치인이나 공직자에게 극형이 필요하다는 발언까지 이어집니다. 이것을 단지 설교자의 독특한 화법이나 정치적 열정으로만 넘기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설교의 본문이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악과 싸우면서 내가 그 악과 같은 악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과 싸우다가 증오에 빠지고, 불의와 싸우다가 모욕과 복수를 사랑하게 된다면, 외적으로는 적과 싸우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그 적이 상징하는 악에게 패배하고 있는 셈입니다.

 

천국의 선은 악에 단호하면서도 사람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거짓을 분명히 드러내지만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는 데서 기쁨을 얻지 않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매우 엄하게 책망하셨지만 그들의 영원한 멸망을 즐거워하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도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향하여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전투성’은 증오가 강한 상태가 아니라, 악을 향해서는 타협하지 않으면서 사람을 향한 체어리티를 잃지 않는 상태입니다.

 

설교 중 ‘성경 전체가 다 정치로 되어 있다’, ‘아브라함도 위대한 정치가이고 모세도 정치가’라는 주장은 설교자의 정치신학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물론 성경에는 왕과 국가, 전쟁과 법, 사회질서와 권력이 많이 등장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중심이 정치라고 하는 것은 말씀의 본질을 지나치게 외적 차원으로 제한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중심은 주님과 그분의 나라,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입니다. 국가와 왕, 전쟁과 평화도 결국 이 영적 실재를 표상하기 때문에 말씀에 들어 있습니다.

 

특히 모세는 말씀 자체 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적 율법을 표상하는 인물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단순한 정치 지도자로 읽히지 않고,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인성과 그 인성이 신성과 하나 되어 가는 과정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이 인물들을 곧바로 현대 정치 지도자의 모델로 읽는 것은 말씀의 깊이를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설교 후반에 다시 등장하는 ‘천년왕국’도 같은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전천년·후천년·무천년설을 설명하면서 천년왕국을 매우 강조합니다. 지난 설교에서도 말했듯, ‘천년왕국을 죽은 뒤에만 기다리지 말고 이 땅에서부터 체험해야 한다’는 직관 자체에는 중요한 영적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의 ‘천 년’을 문자적인 천 년짜리 정치 체제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완전하고 충만한 어떤 영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주님의 나라가 사람 안에 임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은 어느 정당이 집권하거나 어떤 국가 체제가 세워졌을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 안에서 주님이 왕이 되실 때 시작됩니다. 자기애가 내려가고 주님 사랑이 올라오며, 거짓이 물러가고 진리가 다스리며, 복수하고 싶은 욕망보다 용서와 정의가 우위를 차지할 때 그 사람 안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이루는 공동체가 교회의 내적 모습이며, 궁극적으로 천국의 질서입니다.

 

이번 설교에서 반복되는 ‘회복’과 ‘번성’도 이 관점에서 새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설교자는 ‘나를 회복시켜 주옵소서, 나를 번성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도록 인도합니다. 이것이 건강과 물질, 사회적 성공의 회복을 뜻한다면 신앙의 범위가 좁아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회복은 인간 안에 잃어버린 천국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했는데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 거짓말을 당연하게 여기던 사람이 진실을 사랑하게 되는 것, 자기 이익밖에 모르던 사람이 다른 사람의 선을 기뻐하게 되는 것, 이것이 진정한 회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사사기의 사이클을 끝내는 길입니다. 사사기의 비극은 사이클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고 또 타락하고, 부르짖고 또 구원받고, 다시 타락합니다. 사사기 마지막에 가면 상황은 더 악화됩니다.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결국 인간 사사만으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더 깊은 구원이 필요합니다. 말씀 전체의 흐름으로 보면 이 반복은 궁극적으로 참된 구원자이신 주님을 기다리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거듭남의 과정과도 닮았습니다. 사람은 한 번의 회개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반복해서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며, 더 깊은 악이 드러나고 또 싸웁니다. 그러나 정확히 같은 원을 무한히 도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 순종한다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시험마다 조금씩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외적인 행동의 악과 싸우고, 다음에는 생각의 거짓과 싸우며, 더 나아가 그 밑에 있는 자기애와 지배욕의 뿌리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사기의 사이클은 절망의 사이클만은 아닙니다. 사람이 얼마나 쉽게 주님을 잊어버리는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사람이 아무리 반복해서 넘어져도 진심으로 주님께 돌아오면 주님께서는 다시 구원의 길을 여신다는 자비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서 설교자가 반복해서 강조한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는 메시지는 소중한 복음적 요소를 지닙니다. 다만 그것을 ‘큰소리로 기도하면 원하는 상황을 바꾸어 주신다’는 차원보다, ‘자기의 무능을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서면 주님께서 악의 속박에서 건져 주신다’는 차원으로 깊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의 찬송과 통성기도에서도 상당한 생명력은 느껴집니다. 설교자가 ‘찬송은 곡조 있는 설교’라고 표현한 것도 기억할 만합니다. 실제로 찬송은 진리를 정서와 결합시켜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전달하는 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음악과 노래는 정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진리가 단지 머리에만 있을 때보다 사랑과 정서에 결합될 때 사람의 생명에 더 깊이 들어갑니다. 이런 면에서 이 예배가 지적인 강의에 머물지 않고 회중의 정서 전체를 움직이려 한다는 점은 분명한 특징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분별이 필요합니다. 찬송과 통성기도로 마음이 강하게 고양된 직후 특정 정치적 주장과 집단행동이 하나님의 명령처럼 제시되면, 회중은 자신이 느끼는 종교적 감동과 특정 정치적 판단을 구분하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강한 정서적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신다’, ‘하나님이 보내신 지도자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반드시 승리한다’는 표현이 반복될수록 그 위험은 커집니다. 영적 감동이 있다고 해서 그 감동과 함께 제시된 모든 인간적 판단까지 신적인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계속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자유와 이성의 보존입니다. 주님은 사람을 강제로 믿게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의 이성을 압도하고 자유를 빼앗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참된 신앙은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받아들여 삶으로 선택할 때 그의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배 역시 회중에게 강한 감동을 주면서 동시에 각자가 말씀 앞에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분별할 수 있는 공간을 남겨 주어야 합니다.

 

끝으로 이번 설교 전체에서 가장 아깝게 느껴지는 것은 설교자가 잡은 본문의 핵심 자체는 상당히 좋았다는 점입니다. ‘사사기는 사이클로 되어 있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친다’, ‘번성 가운데 부패하지 말아야 한다’, ‘징계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세우시고 회복하신다’는 각각의 명제에는 깊이 발전시킬 수 있는 영적 씨앗들이 들어 있습니다. 자막에서도 설교자는 이 순환을 반복해서 ‘번성→부패→징계→부르짖음→사사→회복→번성’으로 요약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한 단계 더 안으로 들어가면, 이 사이클의 무대가 먼저 대한민국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전쟁은 내 안의 선과 악의 전쟁이며, 가나안 족속은 내 안에 남아 있는 악과 거짓이고, 압제는 내가 사랑한 악이 도리어 나를 지배하는 상태이며, 부르짖음은 자기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는 회개이고, 사사는 주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의 진리이며, 회복은 주님께서 내 의지와 이해성을 다시 질서 안으로 돌려놓으시는 거듭남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사사기는 정치적 전투의 교본보다 훨씬 더 무서운 책이 됩니다. 왜냐하면 적을 밖에서 찾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자가 문제다’, ‘저 정치인이 문제다’, ‘저 세력이 문제다’라고 말하기 전에, 말씀은 ‘네 안에서 아직 정복되지 않은 가나안 족속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다른 사람의 거짓에는 분노하면서 자신의 과장은 용납하고 있지는 않은지, 정치인의 교만은 비난하면서 자신의 영적 교만은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라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반대편 사람을 증오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사사기 3장이 가르치는 가장 깊은 ‘전쟁을 아는 법’입니다. 영적 전쟁을 아는 사람은 적을 향해 가장 큰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악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사람입니다. 강한 지도자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 자신의 proprium을 내려놓는 사람입니다. 외부의 승리를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험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싸우신다는 사실을 믿고 자신은 선과 진리의 편에 서는 사람입니다.

 

지난 여호수아 설교가 ‘땅을 분배받는 것’이었다면 이번 사사기 설교는 그 땅을 받은 뒤 ‘그 땅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거듭남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더 깊은 싸움이 시작됩니다.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를 계속 주님의 것으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자기 것으로 취하여 우상을 섬길 것인가 하는 싸움입니다.

 

그래서 이 설교에서 우리가 가져갈 가장 중요한 한 문장을 새롭게 만든다면, ‘전쟁을 알아야 한다’는 말을 이렇게 바꿀 수 있겠습니다. ‘거듭나는 사람은 자기 안에서 선과 악이 싸우는 영적 전쟁을 반드시 알게 되며, 그 싸움에서 자신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를 의지하여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사사기의 사이클’을 한 문장으로 다시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주님께 받은 선을 자기 것으로 돌릴 때 사람은 악의 지배 아래 들어가지만, 자신의 무능을 깨닫고 주님께 돌아서면 주님께서는 진리를 보내어 그를 다시 영적 자유와 선의 삶으로 회복시키십니다.’

 

바로 이것이 사사기의 전쟁을 오늘 우리의 전쟁으로 읽는 가장 내적인 길입니다.

 

 

 

SY.69, 전광훈 목사, 20260816, ‘자유통일을 위한 120만 광화문 전국 주일 연합예배’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1부, ‘하나님의 나라’와 ‘대한민국’이 하나로 겹쳐질 때이 긴 예배와 설교를 처음부터 따라가다 보면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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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38, 전광훈 목사, 20260802, ‘자유통일을 위한 120만 광화문 전국 주일 연합예배’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설교의 출발점인 여호수아의 ‘땅 나누기’는 말씀의 속뜻으로 볼 때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가나안 땅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이 점령한 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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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해설

2강 1부

죽음 이후의 세계와 중간영계 : 천국과 지옥은 ‘가는 장소’이기 전에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2강의 출발점은 매우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강사는 우리가 흔히 죽은 사람을 곧바로 ‘천국에 갔다’고 표현하지만, 실제 영계에는 그보다 훨씬 세밀한 질서와 과정이 있다고 설명하면서 강의를 시작합니다. 이 문제의식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매우 반갑게 만날 수 있는 지점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람이 육체의 죽음과 동시에 곧바로 최종적인 천국이나 지옥의 공동체에 정착한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먼저 영들의 세계, 곧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영계에 들어가며, 거기서 지상생활 동안 형성된 내적 상태가 점차 드러나는 과정을 거칩니다. 따라서 이 강의가 죽음 이후의 세계를 단순히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는 두 공간으로만 보지 않고 그 사이의 과정과 질서를 설명하려 한다는 점은 중요한 장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처음부터 하나의 중요한 기준을 세워 둘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간영계는 구원 여부를 다시 결정하는 두 번째 기회의 장소가 아닙니다. 사람이 지상에서 형성한 지배적 사랑이 사후에 점차 드러나는 곳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차이입니다. 사람은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자유와 이성 가운데 선과 악을 선택하고, 반복된 선택을 통하여 자기 사랑의 방향을 형성합니다. 육체가 죽는다고 그 사람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육체와 사회적 환경 때문에 가려져 있던 그의 참된 내면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중간영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새로운 사람을 만드는 일’이라기보다 지상에서 이미 되어 온 사람이 ‘실제로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내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죽음에 관한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을 크게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는 흔히 죽음을 하나의 거대한 경계선으로 생각합니다. 이쪽에서는 지상의 삶을 살다가 죽는 순간 갑자기 전혀 다른 영적 세계로 옮겨지고, 그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천국이나 지옥으로 배치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랑의 형성’입니다. 죽음은 사람의 지배적 사랑을 바꾸는 사건이 아니라 그것을 가리고 있던 자연적 몸을 벗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영원을 준비하는 가장 중요한 시간은 바로 지금의 지상생활입니다.

 

강사가 영계의 여러 영역과 상태를 설명하려는 이유도 결국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죽은 뒤 곧바로 모든 것이 단순하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실제 내적 상태가 드러나는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과정을 어떤 복잡한 사후 행정 절차처럼 이해하지 않습니다. 영계에서는 외적 조건보다 내적 사랑이 질서를 결정합니다. 같은 사랑을 가진 영들은 서로를 끌어당기고, 서로 반대되는 사랑을 가진 영들은 함께 머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최종적으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는 것은 외부에서 강제로 어느 장소에 배치되는 것이라기보다 그 사람이 사랑하는 것에 따라 자기에게 맞는 공동체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상태’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분명 실제 영계의 공동체와 장소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장소를 결정하는 것은 상태입니다. 천국에 있는 천사가 천국적인 이유는 천국이라는 좌표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의 선을 사랑하는 천국적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지옥의 영이 지옥적인 이유도 어떤 지하 공간에 갇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질서 밖에서 지배적 사랑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영계의 공간은 내적 상태와 상응합니다. 자연계에서는 서로 미워하는 두 사람이 같은 방에 앉아 있을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내적 상태가 완전히 드러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다른 사랑들은 오래 함께 머물 수 없습니다.

 

이 원리는 죽음 이후의 심판도 매우 다르게 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생애를 장부처럼 검토하신 뒤 ‘너는 천국’, ‘너는 지옥’이라고 외적으로 판결하시는 장면만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모든 심판은 주님의 신적 질서 아래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심판의 핵심은 사람의 실제 사랑이 드러나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향하여 갑니다. 선을 사랑하는 사람은 선이 있는 곳에서 숨을 쉬듯 편안함을 느끼고, 악을 사랑하는 사람은 천국의 선과 진리를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에는 놀라운 역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도 지옥으로 던지고 싶어 하지 않으시지만, 악을 자기 생명으로 만든 영은 천국에 머무는 것을 오히려 고통스럽게 느낍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구원’이라는 말도 훨씬 깊어집니다. 구원은 단순히 죽은 뒤 지옥 대신 천국이라는 좋은 장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을 억지로 천국 한가운데 데려다 놓는다고 해서 그가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의 모든 기쁨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숨 막히는 상태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지상에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것은 단순히 ‘천국 입장 자격’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사랑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사경회가 계속 강조하는 ‘연단’의 의미도 중요해집니다. 강사는 지상의 삶을 사람이 영원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보고, 여러 시험과 고난을 통하여 죄와 정욕이 다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매우 귀합니다. 신앙을 단순한 교리적 동의나 일회적 결단에 머물게 하지 않고 실제 사람의 변화와 연결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 역시 거듭남 없는 천국을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연단의 목적을 ‘천국에 들어갈 점수를 쌓는 것’이나 ‘특별히 높은 영적 등급에 도달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연단과 시험의 목적은 사랑의 질서가 바뀌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분노한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처음에는 그는 자기 분노를 정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이 잘못했으니 내가 화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면서 자기 분노 안에 있는 지배욕과 자기애를 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분노가 올라올 때 그것을 자기의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거절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싸움이 반복되면서 어느 순간 그는 단순히 화를 참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선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으로 조금씩 변화됩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외적 행동의 억제에서 시작하여 사랑 자체의 질서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얼마나 많은 시험을 통과했는가?’가 아니라 ‘그 시험을 통하여 내 사랑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입니다. 고난을 많이 겪었다고 자동으로 거듭나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 때문에 오히려 더 완고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고난 가운데 자기 힘의 한계를 알고 주님을 의지하며 다른 사람의 아픔을 더 이해하게 된다면 그 고난은 거듭남의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고난 자체를 사랑하시거나 고난을 목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허용된 어려움까지도 가능한 한 영원한 선을 위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강의에서 다루는 중간영계의 의미도 이 관점에서 보면 더욱 명확해집니다. 중간영계에서는 사람이 지상에서 쌓아 놓은 외적 모습이 점차 벗겨집니다. 지상에서는 신분, 직책, 학력, 명성, 말솜씨, 종교적 지식 등이 사람의 실제 내면을 가릴 수 있습니다. 목회자라고 해서 반드시 내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며, 평범한 성도라고 해서 영적으로 낮은 것도 아닙니다. 매우 경건한 언어를 사용하면서 내적으로는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품을 수도 있고, 신학적 지식은 많지 않아도 진실하게 이웃의 선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연계에서는 이 둘을 정확히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후에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중간영계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가 바로 외적 사람과 내적 사람의 일치입니다. 사람은 점차 자기가 실제로 사랑하는 것을 그대로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게 됩니다. 위선적 외피를 계속 유지할 수 없습니다. 선한 사람에게는 외적 결함과 잘못된 관념들이 제거되면서 그 안에 있던 선이 더 자유롭게 드러나고, 악한 사람에게는 외적으로 선하게 보이게 했던 위장과 억제가 벗겨지면서 그가 실제로 사랑했던 악이 드러납니다.

 

이것은 두려운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매우 위로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두려운 이유는 우리가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모습으로 영원을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로가 되는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의 외적인 미숙함만 보고 판단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리를 잘못 알고 있을 수 있고, 성격적으로 거칠거나 표현이 서툴 수도 있으며, 여러 약점 때문에 외적으로 완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진심으로 주님을 향하고 선을 사랑한다면 주님께서는 그 선을 보십니다. 사후에는 선과 어울리지 않는 거짓과 결함이 제거되고 그 사람 안의 참된 선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매우 바른 교리를 알고 경건한 말을 하며 종교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라도 그 모든 것을 자기 명예와 지배를 위해 사용했다면 사후에는 그 내적 사랑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심판의 중심은 ‘무엇을 알고 있었는가?’만이 아니라 ‘무엇을 사랑했는가?’입니다. 물론 진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목적은 선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면서 그 진리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지배하는 데 기쁨을 느낀다면 진리가 오히려 proprium의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점은 이 사경회처럼 영적 성숙과 성결을 강하게 강조하는 전통을 바라볼 때도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수도적 훈련, 금식, 기도, 말씀 공부, 자기부인, 절제는 모두 귀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그 자체로 천국적 상태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그 모든 훈련을 통하여 자기애가 약해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깊어져야 합니다. 오래 기도한 결과 다른 사람에게 더 온유해졌는가, 많은 말씀을 배운 결과 자기 판단을 덜 절대화하게 되었는가, 절제와 자기부인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더 품게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수도적 훈련의 참된 열매는 ‘나는 많이 훈련받은 사람’이라는 자기의식이 아니라 체어리티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강사가 영계의 여러 상태를 세밀하게 구분하려는 노력과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 사이에는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차이도 있습니다. 영계의 구조를 많이 아는 것 자체가 영적 성숙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게 천국과 영들의 세계와 지옥을 기록했지만, 그 목적은 사람들에게 사후세계에 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모든 설명은 결국 ‘그러므로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로 돌아옵니다. 천국의 공동체를 백 가지 알아도 이웃을 미워한다면 그 지식은 사람을 천국적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오히려 영계에 관한 참된 지식은 현재의 삶을 비추어야 합니다. ‘사후에는 같은 사랑을 가진 영들이 서로 모인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가장 즐거운가?’를 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험담하고 우월감을 나눌 때 즐거운가, 아니면 선한 쓰임과 진리를 나눌 때 즐거운가? ‘사후에는 내적 상태가 드러난다’는 것을 알았다면 ‘나는 지금 사람들에게 보이는 나와 주님 앞의 내가 얼마나 같은가?’를 물어야 합니다. 영계의 지식은 이렇게 자기 성찰로 이어질 때 비로소 생명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공용복 선생 시절부터 이 사경회가 강조해 온 실제적인 자기부인과 연단의 전통을 이해하는 데도 좋은 접점을 제공합니다. 이 전통의 가장 귀한 부분은 영계를 많이 아는 데 있지 않고,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 삶으로 살아내려 했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핵심진리’를 반복해서 배우는 목적도 결국 그 진리가 사람의 삶이 되는 데 있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 전통을 바라볼 때에도 먼저 그 열망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연단의 목표가 자기 완성이나 영적 특권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임을 더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중간영계라는 개념은 여기에서 우리에게 아주 실제적인 질문 하나를 던집니다. ‘지금 나에게서 모든 외적 조건이 벗겨진다면 무엇이 남을 것인가?’ 목사라는 직함도, 수도사라는 이름도, 교단도, 학력도, 책도, 블로그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도 모두 사라지고 오직 내가 실제로 사랑하는 것만 남는다면 나는 어떤 사람일 것인가? 이것이 사후세계에 관한 질문이면서 동시에 오늘의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국에서는 인간의 진정한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분명해집니다. 자연계에서는 외적인 조건들이 우리를 규정하지만 영계에서는 사랑이 우리를 규정합니다. 그래서 천국의 천사들은 모두 서로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획일적인 인간을 만들지 않으십니다. 각 사람의 고유한 성향과 재능과 경험을 정결하게 하여 고유한 쓰임으로 만드십니다. 거듭남은 ‘나’를 없애는 과정이 아니라 proprium의 지배를 제거하여 주님께서 처음부터 의도하신 참된 ‘나’가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자기부인이라는 말도 새롭게 이해하게 합니다. 자기부인은 인격과 개성과 자유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보다 자기를 앞세우는 proprium의 지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자기부인은 사람을 무색무취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자유롭고 고유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천국에서 모든 천사가 서로 다른데도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두가 같아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르면서도 중심이 한 분 주님이시기 때문에 하나가 됩니다.

 

따라서 2강의 첫 부분에서 다루는 ‘죽음 이후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주는 가장 깊은 대답은 단순히 ‘먼저 중간영계로 갑니다’가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대답은 ‘사람은 자기가 되어 온 사랑의 상태로 들어갑니다’입니다. 중간영계는 그 사랑이 드러나는 과정이고, 천국과 지옥은 그 사랑이 완전히 자기에게 맞는 공동체를 찾은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죽음 이후의 세계를 준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영계의 지도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사랑이 천국의 질서를 향하도록 주님의 도움 가운데 거듭나는 것입니다.

 

2강 1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단순하게 천국이나 지옥이라는 최종 장소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중간영계에서 지상생활 동안 형성된 내적 사랑과 실제 성질이 드러나는 과정을 거친다는 강사의 문제의식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와 중요한 접점을 가지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과정을 사후에 구원의 기회를 다시 얻는 과정이나 외부적 심사 절차라기보다 자연계에서 자유롭게 형성한 지배적 사랑이 외적 가림을 벗고 드러나 그 사랑과 상응하는 공동체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따라서 천국과 지옥을 단순한 사후의 장소보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또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지배하는 영원한 생명의 상태로 보며, 결국 사후세계에 관한 모든 지식의 목적도 ‘죽은 뒤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호기심보다 ‘나는 지금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되어 가고 있는가?’라는 거듭남의 질문으로 돌아가야 함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2강의 첫 문을 열면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영계의 복잡한 구조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람은 죽어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 오히려 자신이 실제로 사랑해 온 사람이 됩니다. 지상에서는 감출 수 있었던 것이 영계에서는 드러나고, 억지로 유지하던 것은 벗겨지며, 실제로 사랑했던 것이 삶 전체를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영원을 준비하는 일은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기 전에 사랑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보면 ‘연단’도, ‘광야’도, ‘자기부인’도, 이후 2강에서 계속 등장하게 될 ‘흰옷’, ‘할례’, ‘생명과’, ‘감추인 만나’, ‘새 이름’, ‘이긴 자’도 결국 하나의 질문 아래 놓입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하여 내 사랑의 중심이 정말 달라지고 있는가?’입니다. 자기애가 조금씩 물러나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면, 바로 거기서부터 천국은 사후의 먼 장소가 아니라 이미 한 사람 안에서 시작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2강 2부

세 천국과 ‘새 예루살렘’ : 천국의 높고 낮음은 계급이 아니라 사랑의 차이입니다

 

2강의 흐름은 사람이 죽은 뒤 중간영계에서 자신의 내적 상태가 드러난다는 설명에서, 그 이후 천국의 구조와 그 안에서 서로 다른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강사는 천국이 단순히 하나의 동일한 공간이 아니라 서로 다른 단계와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하고, 특히 ‘새 예루살렘 성’과 ‘만국’을 구별하면서 지상에서 더 깊은 성결과 연단을 통과한 ‘이긴 자’, 곧 ‘처음 익은 열매’가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고 다른 구원받은 성도들은 만국에 속하게 된다는 구조를 제시합니다. 여기에는 2강 전체를 관통하는 강사의 중요한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구원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사람의 영원한 상태가 똑같아지는 것은 아니며, 지상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았고 얼마나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변화되었는가는 사후의 상태와도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의식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을 획일적인 하나의 세계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천국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공동체가 있으며, 크게는 세 천국으로 구별됩니다. 가장 내적인 천적 천국, 그 다음의 영적 천국, 그리고 보다 외적인 자연적 천국입니다. 이것은 천국에 실제적인 질서와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고 구원받으면 모두 완전히 동일한 천국 상태가 된다’는 식의 단순한 천국관보다, 강사가 지상에서 형성된 영적 상태와 사후 상태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통찰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차이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세 천국의 차이는 ‘누가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해서 높은 등급을 획득했는가’라는 공로적 서열이 아닙니다. 더구나 천국 안에서 어떤 사람들은 특별히 성공한 신자들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보다 덜 성공한 신자들이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세 천국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사람이 어떤 방식과 깊이로 받아들이는가에 따른 서로 다른 영적 상태입니다. 가장 내적인 천적 천국의 천사들은 주님 사랑의 선을 가장 깊은 차원에서 받아들이며, 영적 천국의 천사들은 이웃 사랑의 선과 그에 속한 진리를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자연적 천국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기 상태에 맞게 받아들입니다. 모두가 천국에 있으며 모두가 자기 상태 안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립니다.

 

따라서 ‘높은 천국’이라는 말을 자연계의 계급 개념으로 이해하면 곧바로 오해가 생깁니다. 지상에서는 높은 자리가 더 많은 권력과 명예와 특권을 뜻합니다. 그래서 ‘첫째 천국’, ‘둘째 천국’, ‘셋째 천국’이라고 하면 자연적 사고는 곧 일등석, 이등석, 삼등석 같은 그림을 만듭니다. 그러나 천국은 정반대입니다. 더 내적인 천국에 있을수록 자기 자신을 더 낮게 여기며, 모든 선과 지혜와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지각합니다. 더 높다는 것은 더 많은 특권을 소유한다는 뜻이 아니라 더 깊이 사랑하고 더 자유롭게 섬긴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천국 질서와도 정확히 맞닿습니다. 세상에서는 높은 자가 다른 사람을 지배하지만, 주님의 나라에서는 큰 자가 섬기는 자가 됩니다. 따라서 천국에서 가장 높은 천사는 자기 자신을 가장 위대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천사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에게 아무 선도 없고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가장 깊이 인정하는 천사입니다. 이것이 천국적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영적 체계가 사람으로 하여금 ‘나는 다른 신자보다 높은 단계에 있다’는 의식을 강화한다면, 바로 그 순간 그 체계는 천국의 높음을 자연계의 높음으로 바꾸어 놓을 위험이 있습니다.

 

강사가 말하는 ‘처음 익은 열매’와 ‘이긴 자’도 이 원리 안에서 조심스럽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상에서 더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고 더 깊은 연단을 통과하며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강조하는 것은 귀합니다. 문제는 그것을 하나의 고정된 영적 계급으로 만들 때입니다. ‘일반 성도’가 있고, 그 위에 ‘광야 성도’가 있으며, 그 위에 ‘이긴 자’ 또는 ‘처음 익은 열매’가 있다는 식으로 사람들을 배열하기 시작하면, 원래 자기부인을 위해 시작된 영성이 오히려 새로운 proprium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는 아직 일반 성도가 아니라 이긴 자의 반열에 들어갔다’는 의식 자체가 매우 정교한 영적 자기애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사람을 외부에서 이렇게 등급화하는 데 매우 신중합니다. 한 사람의 실제 영적 상태를 아시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외적으로 대단한 수도적 훈련이나 특별한 체험이 없어 보여도 오랜 세월 자기에게 맡겨진 가족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일하며, 다른 사람의 유익을 자기 유익보다 앞세우고, 자기 잘못을 인정하며 살아왔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오랜 금식과 기도와 많은 영적 체험을 말하는 사람이 내적으로는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나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사랑을 품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자연계에서는 이 둘의 실제 내적 상태를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외적인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삶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사랑은 행위를 통하여 형태를 얻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실제로 행하면서 그 사랑을 자기 생명으로 만듭니다. 따라서 천국의 차이는 임의적인 보상의 차이가 아니라 지상에서 자유롭게 형성된 사랑의 차이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더 좋은 천국을 상으로 주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덜 좋은 천국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은 자신이 주님의 인도 아래 받아들인 선의 질에 가장 완전하게 맞는 천국 공동체에서 살아갑니다.

 

여기에는 매우 아름다운 원리가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아무도 다른 사람의 천국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자연계에서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높은 자리에 있거나 더 많은 것을 가지면 비교와 질투가 생기지만, 천국에서는 각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선과 쓰임 안에서 충만한 기쁨을 누립니다. 눈이 손을 부러워하지 않고 귀가 눈이 되려고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각 기관이 자기 기능을 충실히 수행할 때 몸 전체가 하나가 됩니다. 천국 역시 하나의 ‘가장 큰 사람’, 곧 막시무스 호모(Maximus Homo)의 형태를 이루며, 수많은 공동체가 서로 다른 기관과 기능처럼 하나의 주님 아래 조화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다양성은 불평등이 아니라 완전한 질서입니다. 모든 천사가 똑같다면 오히려 천국은 천국일 수 없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선은 무한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형태 역시 무수히 다양합니다. 어떤 공동체는 지혜와 관련된 선을 더 뚜렷하게 나타내고, 어떤 공동체는 순진함과 관련된 선을, 어떤 공동체는 서로를 돌보고 섬기는 특정한 쓰임의 선을 나타냅니다. 그 모든 다양성이 서로 경쟁하지 않고 하나의 주님을 중심으로 조화를 이룰 때 천국의 아름다움이 이루어집니다.

 

이 관점은 강사가 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을 특정한 이긴 자들이 들어가는 가장 높은 영역으로 설명하는 부분에도 중요한 보완을 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새 예루살렘’은 근본적으로 어떤 특별한 천국 도시의 명칭이기 전에 ‘새 교회’를 의미합니다. 계시록 마지막에 하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주님께서 이전 교회의 종말 이후 세우시는 새로운 교회를 표상합니다. 그 성의 성벽과 문과 기초석과 길과 생명수의 강과 생명나무까지 모두 새 교회의 선과 진리, 교리와 삶의 여러 측면을 상응적으로 나타냅니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는 사람’과 ‘성 밖 만국에 있는 사람’을 곧바로 천국의 상위 계급과 하위 계급으로 나누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계시록의 도시는 자연적 도시가 아니라 교회의 교리와 질서를 표상하고, ‘성 안’과 ‘성 밖’ 역시 단순한 지리적 위치보다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특히 계시록을 문자적 영계 지도로 바꾸어 읽기 시작하면 금으로 된 거리, 열두 문, 열두 기초석, 성의 길이와 너비와 높이 같은 모든 것을 자연적 구조물로 설명해야 하는 어려움이 생깁니다. 그러나 상응으로 읽으면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완전한 영적 체계를 이룹니다.

 

예루살렘이 말씀에서 교회를 표상하는 이유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연적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었고, 성전에서는 여호와를 예배했으며, 이스라엘의 종교생활이 그곳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은 말씀의 속뜻에서 주님을 예배하는 교회, 특히 교회의 교리와 관련됩니다. 그렇다면 ‘새 예루살렘’은 새로운 도시 건설보다 새로운 교회의 형성을 뜻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참된 교회의 교리와 생명이 인간의 지성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로부터 내려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라는 작업 자체에도 매우 중요한 원리를 줍니다. 새 교회는 스베덴보리라는 한 사람을 높이는 교회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술도 목적은 자신을 중심에 세우는 데 있지 않고 말씀의 속뜻을 열어 주님을 더 분명하게 보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의 중심은 어떤 인간적 교리 체계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계시록이 마지막에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모든 교리와 모든 진리의 목적은 결국 주님과의 결합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강사가 ‘이긴 자’를 강조하는 것도 한 단계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긴 자가 특별한 천국 도시의 특권적 주민이 되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주님의 나라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핵심입니다. 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이 새 교회를 나타낸다면, 개인적 차원에서는 그 교회의 질서가 한 사람 안에 세워지는 것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거짓이 물러가고 진리가 그의 생각을 다스리며, 자기애가 물러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그의 의지를 다스리기 시작할 때, 그 사람 안에도 일종의 ‘새 예루살렘’의 질서가 세워집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나는 그 성 안에 들어갈 등급인가?’가 아닙니다. ‘그 성이 나타내는 주님의 질서가 지금 내 안에 세워지고 있는가?’입니다. 이것은 작은 차이처럼 보이지만 영성의 방향을 완전히 바꿉니다. 전자의 질문은 자칫 자기의 영적 위치에 관심을 갖게 하지만, 후자의 질문은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보고 주님의 질서를 받아들이게 합니다. 전자는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를 묻고, 후자는 ‘주님께서 내 안에서 무엇을 이루고 계시는가?’를 묻습니다.

 

강사가 천국의 여러 상태를 설명하면서 지상의 삶을 중요하게 보는 것은 그래서 귀합니다. 사람은 사후에 아무런 관계도 없는 천국 상태를 갑자기 받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살아가는 방식이 영원의 형태를 만들어 갑니다. 그러나 여기서 ‘행위’ 역시 공로적 점수가 아니라 사랑의 표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신다’고 하실 때, 외적인 행위의 숫자만 세시는 것이 아닙니다. 행위 안에는 의지와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헌금도 사랑에서 할 수 있고 명예욕에서 할 수 있으며, 같은 설교도 영혼의 선을 위해 할 수 있고 자기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할 수 있습니다. 영계에서는 그 내적 질이 드러납니다.

 

이 점에서 천국의 ‘상급’이라는 말도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을 행한 대가로 외부에서 보너스처럼 주어지는 것이 천국의 상급이 아닙니다. 선 자체 안에 기쁨이 있습니다. 이웃의 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이 잘되는 것을 보는 것 자체에서 기뻐합니다. 쓰임을 사랑하는 사람은 쓰임을 행하는 것 자체에서 행복합니다. 이것이 천국적 상급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더 높은 천국의 상태는 더 많은 특권을 받는 상태가 아니라 더 깊은 선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선 자체에서 더 내적인 기쁨을 누리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수도적 연단과 성결을 추구하는 목적도 더욱 선명해집니다. ‘나는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야 한다’, ‘나는 처음 익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는 목표가 사람에게 강한 동기를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목표 안에 ‘다른 성도보다 높은 곳에 가겠다’는 사랑이 섞이는 순간 천국적 목적과 충돌합니다. 천국에서는 높아지고 싶은 사람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져 섬기기를 기뻐하는 사람이 더 내적인 선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연단은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한 훈련이 아니라 높은 자리를 원하던 자기애에서 자유로워지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긴 자’라는 표현의 역설을 보게 됩니다. 세상에서 이긴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앞선 사람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이긴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긴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주님의 힘으로 거절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승자는 자기 이름을 높이지만, 천국의 승자는 모든 승리를 주님께 돌립니다. 세상에서 높은 사람은 섬김을 받지만, 천국에서 높은 사람은 섬기는 데서 기쁨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이기는 자’를 세상의 승자 개념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시흥영성수련원의 오랜 수도적 전통을 바라볼 때에도 매우 소중한 분별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이어진 기도와 절제와 연단, 자기부인의 전통이 귀한 이유는 그것이 사람을 특별한 영적 계급으로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자기 중심성을 내려놓고 주님과 이웃을 향하도록 돕는다면 귀한 것입니다. 수도적 삶의 가장 아름다운 열매는 ‘나는 남들과 다르다’가 아니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깊은 겸손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겸손은 반드시 다른 사람을 향한 온유와 체어리티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천국의 세 단계와 수많은 공동체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천국의 질서를 아는 것입니다. 그 질서는 ‘더 높은 자가 더 많이 소유한다’가 아니라 ‘더 깊이 사랑하는 자가 더 많이 섬긴다’는 질서입니다. 이것은 자연계의 질서를 뒤집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천국은 천국입니다. 자기 높임이 사라지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모든 관계의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2강 2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구원받은 모든 사람의 사후 상태가 획일적으로 동일한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형성된 영적 상태에 따라 차이가 있으며, 특별히 연단을 통과하여 이긴 자와 처음 익은 열매가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고 다른 구원받은 성도들은 만국에 속한다는 강사의 설명은 천국에 실제적인 상태의 차이와 질서가 있다는 점에서는 중요한 통찰을 지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천적·영적·자연적 세 천국의 차이를 영적 공로에 따른 상·중·하 계급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랑의 질과 깊이의 차이로 이해하고, ‘새 예루살렘’ 역시 특별한 영적 엘리트가 거주하는 천국의 최상위 도시라기보다 주님에게서 내려오는 신적 진리와 그 진리에 따른 삶으로 이루어진 새 교회를 표상하는 것으로 보며, 따라서 참된 ‘이긴 자’란 다른 성도보다 높은 위치를 획득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여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기 생명의 중심이 되어 가는 사람이라고 이해할 때 천국의 질서와 새 예루살렘의 아르카나가 더욱 깊게 열립니다.’

 

결국 천국의 높고 낮음을 결정하는 것은 ‘얼마나 특별한 사람이 되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였는가?’입니다. 천국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천사가 자신을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이미 그 상태에 있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주님 가까이 있는 존재일수록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고 싶다’는 소망의 가장 깊은 형태는 ‘가장 높은 천국에 가고 싶다’가 아니라 ‘주님의 질서가 제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새 예루살렘’은 죽은 뒤 찾아가야 할 먼 도시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안에서 시작되는 주님의 나라가 됩니다. 자기 의가 한 걸음 물러나고 진리가 그 자리를 차지할 때, 지배하려는 사랑이 한 걸음 물러나고 섬기는 사랑이 그 자리를 차지할 때,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싶은 마음이 물러나고 그의 선을 기뻐하는 마음이 생겨날 때, 새 예루살렘의 질서가 조금씩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의 세 천국과 수많은 공동체에 관한 지식도 결국 우리를 그 한 가지 삶으로 데려가야 합니다. ‘어느 천국에 갈 것인가?’를 넘어서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를 묻게 하는 것, 바로 거기에서 영계에 관한 지식은 호기심을 넘어 거듭남의 진리가 됩니다.



2강 3부

흰옷과 세마포, ‘옷을 빠는 것’ : 성결은 죄를 덮어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실제로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2강의 흐름은 중간영계와 천국의 여러 상태, 새 예루살렘에 관한 설명에서 이제 계시록이 반복해서 말하는 ‘흰옷’과 ‘세마포’로 옮겨갑니다. 강사는 이 부분에서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합니다. 계시록에는 흰옷을 입은 사람들,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사람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사람들이 등장하며, 강사는 이것을 단순한 천국의 의복 묘사가 아니라 지상에서 이루어진 성결의 상태와 연결합니다. 특히 계시록 19장의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직접 설명되는 점을 중요하게 받아들여, 천국에서 입는 옷과 지상에서의 실제 삶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 방향은 2강 전체에서 강사가 붙들고 있는 핵심, 곧 구원은 입술의 신앙고백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의 변화와 성결로 나타나야 한다는 주장과 이어집니다.

 

이 문제의식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옷’은 대체로 진리를 표상합니다. 사람의 몸을 옷이 둘러싸듯, 내적인 선은 진리를 통하여 외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선은 의지와 사랑에 속하고, 진리는 그 선이 어떤 형태로 생각되고 표현되고 행해져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천사들이 입는 옷은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그들의 내적 상태와 상응합니다. 영계에서는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과 상응하기 때문에 천사의 의복 역시 그가 가진 진리의 상태에 따라 나타납니다. 더 내적인 지혜 가운데 있는 천사들의 옷은 더욱 빛나고 아름답게 보이며, 그 빛남 역시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가 선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강사가 천국의 옷을 지상에서의 삶과 연결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지상에서 선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사후에 더 좋은 옷을 상으로 받는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상응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천국의 옷은 외부에서 지급되는 포상물이 아니라 사람의 내적 상태가 외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천사가 희고 빛나는 옷을 입는 까닭은 그가 지상에서 선행 점수를 많이 쌓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선을 받아들이고 그 선에서 나오는 진리를 삶으로 살아온 결과 그 진리가 그의 생명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는 바로 그 내적 상태가 의복이라는 외적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왜 옷이 ‘희다’고 할까요? 말씀에서 흰색은 빛과 관계하고, 빛은 신적 진리와 관계합니다. 그러므로 흰옷은 정결한 진리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정결한 진리’라는 말을 단순히 ‘정확한 교리를 많이 알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거짓 교리를 버리고 참된 교리를 아는 것은 중요하지만,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사람이 진리를 많이 알면서 그것을 자기 우월감을 세우거나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지배하는 데 사용한다면, 그 진리는 그의 기억 속에는 있어도 아직 흰옷이 되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아는 것이 많지 않아도 알고 있는 진리를 따라 정직하게 살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그 진리는 그의 선과 결합되어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계시록에서 ‘세마포’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설명되는 것도 바로 이 점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행위구원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 행위가 그 자체로 인간을 구원한다는 뜻이 아니라, 내적 사랑과 신앙은 반드시 삶으로 형태를 얻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는지는 결국 그의 삶에서 드러납니다. 선을 사랑한다면서 계속 악을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친다면 그 사랑은 아직 실제 생명이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주님의 진리를 받아 악을 죄로 알고 거절하며 선을 행하려고 애쓴다면, 그 진리가 삶의 옷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사가 강조하는 ‘옷을 빠는 것’이라는 표현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계시록 7장에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고 하고, 계시록 22장에는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라고 합니다. 강사는 이 말씀들을 성도의 실제 정결과 성화의 과정으로 읽습니다. 즉 사람에게 아직 죄와 정욕과 불결함이 있으므로 그것이 씻겨야 하고, 그렇게 옷을 깨끗하게 한 사람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을 실제 정결과 연결하려는 강사의 강조는 가볍게 지나칠 부분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씻음’은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은 무엇이 씻기는가입니다. 사람이 자기 노력으로 자기 영혼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님께 합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결하게 하는 진리와 선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은 말씀을 통하여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 배우고, 그 진리의 빛 가운데 자기 악을 보며, 주님의 힘을 구하여 그 악을 거절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에는 주님의 역사와 인간의 응답이 함께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능력을 주시지만 인간은 그 능력을 받아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악과 싸워야 합니다.

 

이것은 ‘어린양의 피에 옷을 씻는다’는 역설적인 표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자연적으로 생각하면 피로 옷을 씻으면 오히려 붉게 물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계시록에서는 어린양의 피에 씻었더니 옷이 희어졌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표현 자체가 이것을 자연적 피와 자연적 세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말씀에서 주님의 ‘피’는 가장 깊은 의미에서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 특별히 인간을 구원하고 새롭게 하는 진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피에 옷을 씻는다는 것은 주님의 신적 진리를 받아 거짓과 악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 지점에서 보혈에 관한 일반적인 기독교적 표현과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의 중요한 차이도 나타납니다. ‘예수의 피가 내 죄를 덮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이제 내 죄를 보지 않으신다’는 식으로만 이해하면, 인간의 실제 내적 상태가 변하지 않아도 법적인 신분만 바뀌면 된다는 방향으로 갈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구속은 인간의 죄를 단순히 외적으로 가리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지옥을 정복하시고 인성을 신성하게 하심으로써 인간이 악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 구속의 능력을 받아 실제로 악에서 돌이키고 거듭나는 것이 구원의 삶입니다.

 

따라서 ‘옷을 씻는다’는 것은 죄가 그대로 있는데 흰 천으로 덮어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거짓된 생각과 악한 삶이 실제로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완전무결한 존재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평생에 걸쳐 진행되는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매우 외적인 악부터 보게 됩니다. 거짓말, 부정직, 음란한 행동, 폭력 같은 명백한 악을 죄로 알고 멀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그보다 더 내적인 것들이 드러납니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싶은 마음, 자기 판단을 절대화하는 태도, 선을 행하고도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는 마음 등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마치 옷의 큰 얼룩을 먼저 씻은 뒤 밝은 빛 아래에서 보니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작은 얼룩들이 새롭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이 반드시 ‘나는 이제 훨씬 깨끗한 사람이다’라는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빛이 더 밝아질수록 자기 안의 proprium이 얼마나 깊은지를 더 분명히 보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겸손으로 이어집니다. 영적으로 성숙할수록 자기의 완전함을 크게 말하기보다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점은 강사가 2강에서 계속 발전시키는 ‘완전한 성결’과 ‘이긴 자’의 개념을 바라볼 때 특히 중요합니다. 강사는 광야의 연단을 통하여 죄성이 제거되고 옷이 깨끗해진 사람을 ‘이긴 자’의 상태와 연결합니다. 여기에는 죄를 실제로 이겨야 한다는 매우 강한 윤리적 진지함이 있습니다. 신앙을 죄에 대한 면허증처럼 사용하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충분히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성결을 ‘내 안에서 죄의 가능성이 완전히 제거되어 이제 나는 죄 없는 단계에 들어갔다’는 자기 판정으로 이해한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악은 인간에게서 마치 뿌리째 뽑혀 존재하지 않게 되는 방식으로 제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악을 억제하시고 사람이 그 악에서 돌아서 선을 사랑하도록 새 의지를 형성하십니다. 인간에게 있는 유전적이고 획득된 악은 주님의 질서 아래 밀려나 지배력을 잃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의 특징은 ‘내게 이제 악이 없다’가 아니라 ‘악이 올라올 때 그것을 내 생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의 힘으로 거절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작은 차이가 아니라 성결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납니다. 자신을 ‘이미 완전히 씻긴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아직 씻기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다른 사람을 아래로 내려다볼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매 순간 주님의 진리와 선을 받아야 깨끗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안다면 다른 사람의 연약함 앞에서도 더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자신 역시 주님의 자비가 아니면 설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흰옷은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높게 보이게 하는 옷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공로를 가리고 주님의 선과 진리만 드러나게 하는 옷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의가 ‘흰옷’과 ‘세마포’를 ‘옳은 행실’과 연결하는 부분에서는 특히 ‘행실’의 내적 근원을 보아야 합니다. 같은 선행이라도 그 근원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칭찬을 받기 위해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한 거래의 마음으로 헌금할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은 자기 교회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외적 행동은 선해 보이지만 내적 목적에는 proprium이 강하게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이웃에게 필요한 일을 조용히 하고 그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지 않는다면 그 행위 안에는 전혀 다른 영적 질이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의 옳은 행실’은 단순한 행동 목록이 아니라 선한 사랑이 진리를 통하여 형태를 얻은 삶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체어리티를 단순한 자선행위로 제한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의 선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 사랑이 각 사람의 직업과 관계와 책임 속에서 올바른 쓰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는 것도, 직장에서 정직하게 맡은 일을 하는 것도, 목회자가 자기 명예보다 성도의 영적 선을 먼저 생각하는 것도, 상인이 속이지 않고 거래하는 것도 모두 체어리티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천국적 삶은 특별한 종교행위 안에만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수도적 성결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수도생활이나 사경회, 금식과 철야, 장시간의 기도는 인간이 자기 욕망을 돌아보고 말씀 앞에 자신을 세우는 귀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수단의 결과가 일상의 체어리티로 나타나야 합니다. 수련원에서 며칠 동안 깊은 은혜를 받고 돌아왔는데 가족에게는 여전히 거칠고, 교회에서는 자기 의견과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며, 사회생활에서는 정직하지 않다면 아직 옷의 정결이 실제 삶 전체로 이어졌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특별한 체험을 말하지 않아도 일상에서 점점 더 온유하고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이 되어 간다면, 그 사람의 옷은 실제로 씻기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시흥영성수련원의 오랜 수도적 전통과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상당히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자기부인과 연단을 중시하는 전통은 ‘옷을 빨아야 한다’는 계시록의 강한 요청을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믿기만 하면 되었으니 삶은 상관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소중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진지함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결의 방향을 더욱 내적으로 가져갑니다. 외적 욕망의 절제에서 더 깊이 들어가 자기 의와 영적 우월감과 공로의식까지 씻겨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마지막까지 씻겨야 하는 얼룩이 ‘나는 깨끗하다’는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육체적 욕망이나 세속적 욕심은 비교적 쉽게 악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자기 신앙이 옳다는 자부심이나 다른 사람보다 더 성숙하다는 의식은 선한 것처럼 붙들 수 있습니다. 특히 많은 기도와 연단과 성경 공부를 한 사람에게는 이 유혹이 더욱 미세하게 들어올 수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들과 다르다’, ‘나는 더 깊은 진리를 안다’, ‘나는 더 많은 대가를 지불했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종교적 proprium의 매우 깊은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장면도 이와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미 목욕한 사람은 온몸을 다시 씻을 필요는 없지만 발은 씻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에서 ‘발’은 인간의 가장 낮은 자연적 차원과 관계합니다. 사람은 주님을 알고 진리를 받아들였어도 일상생활에서 자연적 욕망과 자기중심성이 계속 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발을 씻어야 합니다. 거듭남은 한 번의 거대한 정결 체험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실제 삶에서 이루어지는 정결입니다.

 

이 원리를 알면 ‘흰옷을 입었는가, 아직 입지 못했는가?’를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여 영적 등급을 판단하기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게 됩니다. ‘오늘 내 옷에는 무엇이 묻었는가?’라고 묻게 됩니다. 오늘 누군가의 말을 듣다가 왜 그렇게 불쾌했는가,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왜 화가 났는가, 선을 행한 뒤 왜 알아주기를 바랐는가, 다른 사람의 성공을 보며 왜 마음이 불편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런 작은 순간들이 실제로 옷을 빠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옷을 씻는 물과 피, 곧 정결하게 하는 진리는 우리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비추어 주셔야 자기 상태를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빛으로 자기를 보면 대부분 자기 행동을 정당화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진리가 들어오면 이전에는 당연하게 여기던 것이 악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는 원래 성격이 이렇다’고 하던 것이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하는 자기애로 보이고, ‘나는 진리를 지키는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태도 속에 자기 의와 지배욕이 섞여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신적 진리의 씻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피로 옷을 씻는다는 것은 주님의 구속을 믿는 것과 주님의 진리에 따라 실제로 회개하는 것을 분리할 수 없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구속을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가 악과 싸울 수 있고, 그분의 신적 진리를 받아들여 악을 보고 거절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자력으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아무런 실제 변화 없이 ‘피가 다 덮었다’고 선언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시고 인간은 그 구원을 자유롭게 받아 실제 삶으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보면 흰옷과 세마포는 매우 아름다운 복음의 표상이 됩니다. 흰옷은 ‘나는 죄가 없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나를 악과 거짓에서 건져 진리 안에서 살게 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세마포가 빛나는 것은 인간의 공로가 빛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선이 진리를 통하여 삶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자기 옷을 자랑하지 않는 것처럼 거듭난 사람도 자기 성결을 자랑할 이유가 없습니다. 옷의 빛은 근원적으로 주님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2강 3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의 흰옷과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어린양의 피에 옷을 씻는 사람들과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사람들을 지상에서의 실제 성결과 옳은 행실에 연결하여, 구원은 단순한 신앙고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정욕에서 실제로 정결해지는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하는 강사의 설명은 신앙과 삶을 분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통찰을 지니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옷’을 선을 둘러싸고 표현하는 진리로, 그 옷의 ‘흰빛’을 선과 결합하여 정결해진 신적 진리의 빛으로, ‘어린양의 피에 씻음’을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를 받아 악과 거짓에서 실제로 정결해지는 거듭남으로 이해하고, 성결 역시 인간 안에서 악의 가능성이 완전히 소멸되어 스스로 완전한 존재가 되는 상태라기보다 주님의 힘으로 악을 죄로 알고 거절하면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새 의지가 점차 지배권을 얻는 과정으로 볼 때, 흰옷과 세마포의 아르카나는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구속과 인간의 실제 회개와 삶이 결합되는 더욱 깊은 의미로 열립니다.’

 

결국 흰옷에 관한 말씀 앞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나는 흰옷을 받은 특별한 사람인가?’가 아닐 것입니다. ‘주님의 진리가 오늘 내 삶의 무엇을 씻고 있는가?’입니다. 어제까지 악인 줄 몰랐던 것을 오늘 악으로 보게 되었다면 이미 빛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 거절한다면 옷을 씻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조금 더 정직함과 온유함과 체어리티가 들어온다면 옷이 조금 더 희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결의 가장 분명한 표지는 ‘나는 성결해졌다’는 자기 확신보다 사랑의 변화일 것입니다. 오래 기도할수록 더 온유해지고, 말씀을 깊이 알수록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게 되며, 연단을 많이 받을수록 약한 사람에게 더 자비로워지고, 선을 많이 행할수록 자기 공로를 덜 생각하게 된다면, 그 사람의 옷에는 주님의 빛이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성결을 말할수록 사람을 더 쉽게 등급화하고 자기 위치를 높게 여기게 된다면, 아직 씻어야 할 매우 미세한 얼룩이 남아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옷을 빠는 것’은 평생의 거듭남을 보여 주는 참으로 아름다운 형상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옷을 버리고 전혀 다른 사람의 옷을 입히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은 진리가 실제 선과 결합하도록 끊임없이 정결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진리가 기억 속의 교리에서 삶의 진리로 바뀌고, 삶의 진리가 사랑과 하나가 될수록 사람의 옷은 밝아집니다. 천국에서 빛나는 세마포는 바로 지상에서부터 시작된 그 거듭남의 삶이 영계에서 그 본래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강 4부

영적 할례와 광야의 연단 : 제거되어야 하는 것은 ‘나’가 아니라 나를 지배하려는 proprium입니다

 

2강의 앞부분에서 중간영계와 세 천국, 새 예루살렘, 흰옷과 세마포를 살펴본 강의는 이제 한층 더 직접적으로 ‘성결’의 문제 안으로 들어갑니다. 강사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성도를 단지 죄 사함을 받은 상태에 머물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광야의 연단을 통하여 그 안의 죄성과 정욕을 실제로 처리하시며, 이것을 구약의 ‘할례’와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육체의 할례에서 몸의 일부를 잘라 내듯 영적 할례에서도 사람 안의 죄성이 잘려 나가야 하며, 이 과정을 충분히 통과한 사람이 ‘이긴 자’가 되어 생명과와 감추인 만나를 먹고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상태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강사의 ‘핵심진리’ 체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앞에서 말한 흰옷과 세마포가 성결의 외적 형상이라면, 이제 할례와 광야는 그 성결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 강의가 죄를 단순히 ‘용서받으면 끝나는 것’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은 충분히 귀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죄의 용서와 죄에서의 실제적인 변화 사이를 구별하려 합니다. 사람이 예수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면서 여전히 자기 욕망과 정욕과 분노와 교만을 아무 거리낌 없이 따라 살아간다면 그것을 완성된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가 필요하고 ‘연단’이 필요하며 ‘할례’가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신앙이 실제 인간의 성품과 삶을 바꾸어야 한다는 이 강한 요청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구원을 단순한 법정적 선언이나 지적 신앙으로 보지 않고, 악을 죄로 알고 멀리하며 주님에게서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는 거듭남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할례’ 역시 실제로 깊은 영적 의미를 가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할례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불결한 사랑들을 제거하는 것을 표상합니다. 특별히 할례가 생식기관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도 우연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생식과 출생은 영적으로 선과 진리가 생겨나는 것, 곧 거듭남과 관계합니다. 그런데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불결한 욕망이 그 생성을 가로막습니다. 따라서 포피를 제거하는 할례는 자연적 육체의 일부를 잘라 내는 의식 자체에 궁극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거듭나기 위해 자기 안의 불결한 사랑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표상합니다. 구약의 외적 할례가 신약에서 ‘마음의 할례’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영적 할례’를 성결과 연결하는 방향은 상당히 깊은 접점을 갖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잘려 나가는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칫하면 거듭남을 ‘내 안에 있는 죄성이라는 어떤 덩어리를 완전히 잘라 내어 더 이상 악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상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사의 설명에는 때때로 이러한 이미지가 상당히 강하게 나타납니다. 광야의 연단을 충분히 통과하면 사람 안의 죄성이 제거되고, 그 결과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않은 ‘이긴 자’의 상태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죄의 지배에서 실제로 벗어나야 한다는 뜻에서는 귀하지만,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에서는 여기에 중요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의 proprium, 곧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느끼는 고유한 것은 그 자체로 자기애와 거짓에 기울어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인간의 인격이나 개성, 자유와 이성을 제거하여 ‘나’를 없애는 과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proprium을 억지로 파괴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악으로 보고 자유롭게 거절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의지, 곧 천국적 proprium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의 질서를 형성하십니다. 사람은 여전히 자기 의지로 사랑하고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며 자기 손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느끼지만, 거듭날수록 모든 선한 의지와 참된 생각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영적 할례에서 잘려 나가야 할 것은 인간의 ‘자기’ 자체가 아니라, 그 자기를 주님에게서 독립된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게 하는 proprium의 지배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자기를 죽인다’, ‘자아가 죽어야 한다’, ‘나는 없어져야 한다’는 표현을 문자적으로 밀어붙이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고유성과 자유까지 부정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을 없애기 위해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인간답게 만들기 위해 거듭나게 하십니다. 자기애와 거짓이 지배할수록 인간은 오히려 노예가 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일수록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됩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천국의 다양성과도 연결됩니다. 천국에 들어간다고 모든 사람이 똑같은 성격과 똑같은 생각과 똑같은 모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각 천사는 자연계에서보다 훨씬 더 뚜렷한 고유성을 가집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개성을 없애지 않으시고 정결하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주신 따뜻함, 어떤 사람에게 주신 치밀함, 어떤 사람에게 주신 용기와 추진력, 또 어떤 사람에게 주신 섬세함과 사려 깊음은 제거되어야 할 ‘자아’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모든 것이 자기애를 섬기는가, 주님과 이웃의 선을 섬기는가입니다. 강한 추진력이 지배욕의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쓰임을 위한 힘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말솜씨가 자기 명예의 수단이 될 수도 있고 진리를 전달하는 쓰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영적 할례는 그 능력 자체를 잘라 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사용하려는 불결한 사랑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과정에서 ‘광야’가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광야는 매우 복합적인 표상을 갖지만, 거듭남의 문맥에서는 시험과 정화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뒤 곧바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고 광야를 통과했던 것처럼, 사람도 악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겠다고 결심했다고 해서 곧바로 천국적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애굽에서 몸은 나왔지만 애굽의 욕망은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그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시작한 인간의 모습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도 이전의 욕망을 여전히 그리워합니다.

 

그래서 광야는 단순한 고생의 장소가 아니라 사람의 실제 사랑이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모든 일이 잘될 때에는 누구나 자기가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뜻과 반대되는 일이 일어나고, 인정받지 못하고, 계획이 무너지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기다려야 할 때 비로소 무엇을 실제로 사랑하는지가 드러납니다. ‘나는 주님의 뜻을 원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했는지, ‘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 사람이 나를 인정해 주기를 원했는지가 시험 가운데 드러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는 주님께서 인간을 괴롭히시는 장소가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도 감추어져 있던 proprium이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든 고난을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내신 ‘연단 프로그램’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자연계에는 인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생기는 고통도 있고, 다른 사람의 악으로 인한 고통도 있으며, 질병과 사고와 자연적 조건에서 오는 고통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악이나 고통 그 자체를 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신적 섭리는 그것들을 허용하시되, 허용된 것 가운데서도 가능한 한 인간의 영원한 선을 이루도록 역사합니다. 따라서 ‘고난이 많을수록 영적으로 높은 사람’이라는 생각도 경계해야 합니다. 고난의 양이 거듭남의 깊이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자유롭게 응답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수도적 연단을 이해하는 데 특히 중요합니다. 금식하고, 절제하고, 편안함을 포기하고, 일정한 규율 아래 자신을 훈련하는 것은 proprium을 드러내는 매우 유익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먹지 못할 때 짜증이 올라오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 불평이 나오며,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아야 할 때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보면서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자기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적 규율은 일종의 거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편함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굶었다는 사실, 잠을 적게 잤다는 사실, 오랜 시간 기도했다는 사실이 자동으로 영적 할례를 이루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외적 고행을 많이 한 뒤 ‘나는 이만큼 대가를 치렀다’는 의식이 생긴다면 proprium은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을 뿐 여전히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세속적 자랑은 버렸는데 영적 자랑이 생기고, 돈에 대한 우월감은 버렸는데 기도시간에 대한 우월감이 생기며, 사회적 지위 대신 영적 단계로 사람을 비교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겉으로는 자기를 부인했지만 훨씬 더 미세한 proprium이 살아남은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주님께서는 외적인 악뿐 아니라 종교적 proprium까지 보여 주십니다.

 

이 점에서 영적 할례는 단 한 번의 사건이라기보다 거듭남 전체를 관통하는 원리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비교적 거친 욕망을 잘라 냅니다. 명백한 부정직과 음란, 폭력, 탐욕 같은 것들을 죄로 알고 멀리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더 미세한 것들이 드러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 자기 의견을 관철하려는 마음, 자신이 옳다는 데서 느끼는 쾌감, 선을 행하고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면 ‘나는 이제 상당히 거듭났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기의식까지 다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영적 할례의 결과는 ‘이제 내 안에는 죄성이 없다’는 자신감보다 겸손에 가깝습니다. 주님의 빛이 밝아질수록 자기 안에 얼마나 많은 것이 주님의 질서와 어긋나 있는지를 더 잘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망으로 이어지는 자기혐오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은 인간에게 자기 자신을 미워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나온 악을 악으로 인정하면서도 주님께서 새로운 생명을 주실 수 있음을 신뢰하게 합니다. 자기혐오는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을 수 있지만, 참된 회개는 시선을 주님께 돌립니다.

 

여기에서 강사가 말하는 ‘죄성이 제거된다’는 표현을 가장 선하게 받아들이는 방법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인간에게서 악의 모든 가능성이 존재론적으로 사라진다는 뜻보다, 이전에 인간을 지배하던 악이 더 이상 지배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훨씬 가까워집니다. 예전에는 분노가 올라오면 곧바로 그것을 정당화하고 행동했지만,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분노가 올라와도 ‘이것은 주님의 질서가 아니다’라고 보고 거절할 수 있게 됩니다. 악한 충동이 전혀 떠오르지 않아서 선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악임을 알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선한 것입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거듭난 사람에게 악한 생각이 다시 올라오는 것 자체를 ‘아직 죄성이 제거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면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내면을 검사하며 불안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이 있다는 사실은 반드시 거듭남의 실패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험은 선과 진리가 어느 정도 자리 잡았기 때문에 반대되는 악과 거짓이 충돌하면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영적 싸움이 있다는 것은 두 세력이 모두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며, 그 가운데 인간은 주님의 힘을 받아 어느 쪽에 동의할 것인지 자유롭게 선택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시험을 중요하게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시험을 통하여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더 깊이 결합됩니다. 진리를 단지 알고 있을 때와 그 진리를 지키기 위해 실제 욕망과 싸워 본 뒤에는 그 진리의 깊이가 다릅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을 아는 것과, 실제로 나를 깊이 상하게 한 사람을 앞에 두고 복수하고 싶은 욕망과 싸우면서 용서를 선택하는 것은 다릅니다. 후자의 과정에서 진리는 단순한 기억 지식에서 삶의 진리로 내려옵니다. 이것이 시험이 거듭남에 쓰이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광야는 반드시 ‘특별한 수도생활’에서만 경험되는 것도 아닙니다. 일상생활 자체가 거대한 광야가 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배우자와 부딪힐 때, 자녀 때문에 자기 계획을 포기해야 할 때,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정직을 지켜야 할 때, 교회에서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묵묵히 해야 할 때, 그 모든 순간에 proprium이 드러납니다. 오히려 일상은 도망갈 수 없기 때문에 매우 실제적인 영적 훈련장이 됩니다.

 

이것은 수도생활과 일상생활을 경쟁시키려는 뜻이 아닙니다. 수도적 환경은 집중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말씀과 기도에 전념할 수 있는 귀한 장점이 있고, 일상생활에는 관계와 책임 속에서 사랑을 실제로 살아야 하는 고유한 시험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이 이루어지는가입니다. 수도원 안에서도 proprium을 키울 수 있고, 시장과 직장과 가정에서도 깊이 거듭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특정한 생활양식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사랑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광야에서의 ‘죽음’이라는 표현도 조심스럽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죽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가 아니라 자기애의 지배입니다. ‘내 뜻대로 되어야 행복하다’,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야 가치가 있다’, ‘내 판단이 옳아야 한다’, ‘내가 한 선은 내 공로다’라는 proprium의 주장들이 하나씩 힘을 잃어 가는 것이 영적 죽음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생명이 살아납니다. 그래서 거듭남에는 죽음과 부활이 동시에 있습니다. 옛사람이 약해지고 새사람이 강해집니다.

 

그러므로 자기부인은 자기파괴가 아닙니다. 참된 자기부인은 오히려 인간을 자기애의 감옥에서 해방합니다. 인정받아야만 행복한 사람은 사람들의 평가에 묶여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어야 평안한 사람은 환경의 노예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높아야 만족하는 사람은 끊임없는 비교 속에 삽니다. 그러나 이런 proprium의 요구가 약해지면 사람은 훨씬 자유로워집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되어도 기뻐할 수 있고,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평안을 잃지 않으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천국적 자유입니다.

 

그리고 이 자유는 인간의 의지력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 악을 거절해야 하지만, 실제 이기는 힘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균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주님이 다 하시니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사라지고, ‘내가 연단해서 내 죄성을 제거한다’고 하면 자기 공로가 들어옵니다. 거듭남에서는 사람이 싸우지만 주님께서 이기십니다. 사람은 문을 열지만 생명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긴 자’라는 말도 다시 빛을 얻습니다. 이긴 자는 영적으로 강한 자기 자신을 완성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힘으로는 악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알고 주님의 힘을 받아 악을 거절하는 법을 배운 사람입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내가 이겼다’는 의식보다 ‘주님께서 건져 주셨다’는 고백이 깊어집니다. 만일 연단의 끝에서 인간의 자기 확신이 더 강해진다면 무언가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된 연단의 끝에는 proprium의 강화가 아니라 주님에 대한 의존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여호수아 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 다시 할례를 받는 장면도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광야를 통과했다고 자동으로 가나안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다시 언약의 표지가 필요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시험을 많이 경험했다는 사실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시험을 통하여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불결함이 실제로 제거되고 주님의 질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광야 경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광야를 통하여 무엇이 잘려 나갔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시흥영성수련원의 수도적 전통에서 강조해 온 ‘연단’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을 때 그 가치를 축소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욱 깊게 가져갈 수 있습니다. 연단은 단순히 육체를 힘들게 하고 욕망을 억제하는 훈련을 넘어, 사람 안에 숨어 있는 자기애와 자기 의와 공로의식까지 주님의 빛 앞에 드러내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외적인 정욕을 이겼는데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마음이 더 강해졌다면 아직 광야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이전보다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더 이해하고, 자기 판단을 덜 절대화하며, 선을 행하고도 공로를 주님께 돌리게 되었다면 광야는 실제로 그 사람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결’을 분별하는 매우 실제적인 기준이 됩니다. 성결은 특별한 표정이나 말투나 생활양식으로 먼저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자기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비판받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자기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이 칭찬받을 때 함께 기뻐할 수 있는가, 아무도 보지 않을 때에도 정직한가에 드러납니다. 이런 곳에서 proprium의 지배가 약해지고 있다면 영적 할례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2강 4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구약의 할례를 성도의 영적 성결과 연결하고, 광야의 연단을 통하여 인간 안의 죄성과 정욕이 잘려 나가 이긴 자의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고 강조하는 강사의 설명은 죄 사함을 실제 삶의 변화와 분리하지 않고 신앙을 거듭남으로 이끌려 한다는 점에서 매우 귀한 통찰을 지니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할례를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불결한 사랑들의 제거로, 광야를 그 사랑들이 드러나 주님의 선과 진리와 싸우는 시험의 상태로 이해하되, 거듭남을 인간의 인격이나 자유 또는 악의 가능성 자체를 잘라 없애는 과정으로 보기보다 proprium에서 나오는 악이 지배권을 잃고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의지와 천국적 사랑이 점차 지배권을 얻는 과정으로 보며, 따라서 참된 자기부인은 ‘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생명의 주인이고 선의 근원이다’라는 proprium의 환상을 내려놓는 것이고, 참된 이김 역시 연단을 통하여 강한 자기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힘 없이는 아무 악도 이길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실제로 악을 거절하는 데 있음을 볼 때, 영적 할례와 광야의 아르카나가 더욱 깊게 열립니다.’

 

결국 광야가 우리에게 묻는 것은 ‘얼마나 고생했는가?’가 아닙니다. ‘무엇이 달라졌는가?’입니다. 이전보다 더 많이 참을 수 있게 되었는가보다, 이전보다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이전보다 욕망을 더 강하게 억제할 수 있는가보다, 다른 사람의 선을 더 진심으로 기뻐하게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이전보다 자신을 더 혹독하게 다룰 수 있는가보다,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영적 할례의 가장 깊은 칼끝은 마지막에 바로 이곳을 향할 것입니다. ‘나는 이제 많이 연단받았다’, ‘나는 많이 버렸다’, ‘나는 상당히 성결해졌다’, ‘나는 이긴 자에 가까워졌다’고 말하고 싶은 그 미세한 proprium입니다. 그것마저 주님 앞에서 내려놓을 때 사람에게 남는 것은 자기 성취가 아니라 감사입니다. ‘제가 해냈습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여기까지 붙드셨습니다’가 됩니다. 그때 광야는 인간을 강한 자기로 만드는 곳이 아니라 자기 힘을 내려놓고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곳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영적 할례’가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거듭남의 방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강 5부

생명나무, 감추인 만나와 흰 돌 :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자기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2강은 중간영계와 천국의 질서에서 시작하여 흰옷과 세마포, 영적 할례와 광야의 연단을 거쳐 이제 계시록 일곱 교회에 주어진 ‘이기는 자의 약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갑니다. 강사는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에만 머무르지 않고 광야의 연단을 통과하여 죄성과 정욕이 처리된 ‘이긴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계시록에서 주님께서 이긴 자들에게 약속하신 여러 복을 실제적인 영적 상급으로 설명합니다. 그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이 ‘생명나무의 열매’, ‘감추인 만나’, ‘흰 돌’입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이것들이 일반적인 구원과는 구별되는, 연단을 통과한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복과 깊이 연결됩니다. 앞에서 살펴본 새 예루살렘, 흰옷, 세마포, 영적 할례가 모두 이 지점으로 모여드는 셈입니다.

 

먼저 에베소 교회에 주어진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는 약속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명나무’는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표상입니다. 이미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 한가운데 등장하는 생명나무에서부터 계시록 22장의 새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말씀의 처음과 마지막을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생명나무는 근본적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생명, 더 깊게는 주님 자신과 그분에게서 오는 천적 사랑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어떤 신비한 천국의 과실 하나를 먹고 특별한 영적 능력을 얻는다는 뜻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 그것이 자기 생명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먹는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자연계에서 음식은 몸 밖에 있을 때에는 아직 우리의 생명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고 소화하여 몸과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우리의 생명을 유지합니다. 말씀의 속뜻에서도 ‘먹는 것’은 이와 상응합니다. 선과 진리를 단순히 보고 아는 것을 넘어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생명과 결합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주님 사랑에 관한 교리를 많이 안다는 뜻이 아니라, 실제로 그 사랑을 받아 삶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2강 전체에서 강사가 강조해 온 ‘삶으로 이루어지는 성결’과도 매우 중요한 접점을 가집니다.

 

다만 여기에서 ‘누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가?’라는 질문을 둘러싸고 차이가 생깁니다. 강사는 ‘이긴 자’라는 특정한 상태에 도달한 성도에게 생명나무의 열매가 주어진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구원과 이긴 자의 상급 사이에 비교적 뚜렷한 구별을 둡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천국 안의 특별한 계급에게만 지급되는 영적 음식으로 보기보다, 악과 거짓을 주님의 힘으로 이기면서 주님의 선을 실제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내적 상태로 읽습니다. ‘이긴 자’가 생명나무를 먹는 까닭은 어떤 영적 시험에 합격하여 보상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악의 사랑을 거절했기 때문에 이제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여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상급’이라는 말의 의미를 바꾸어 놓습니다. 자연적 사고에서 상급은 일을 마친 뒤 외부에서 추가로 받는 보상입니다. 시험을 잘 보면 상을 받고, 일을 많이 하면 임금을 더 받습니다. 그러나 천국적 상급은 본질적으로 선 자체 안에 있는 기쁨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님과 결합되는 것보다 더 큰 상급은 없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웃의 선을 이루는 것보다 더 큰 상급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명나무의 열매는 선행의 대가로 지급되는 천국의 상품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그 사랑 자체가 기쁨과 생명이 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원리는 ‘감추인 만나’에서도 더욱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버가모 교회에 주님께서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겠다’고 하십니다. 만나라고 하면 우리는 곧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떠올립니다. 애굽에서 나온 백성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이 사건 자체가 2강에서 계속 강조하는 ‘광야’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힘으로 광야에서 생명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매일 하늘에서 주어지는 양식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만나에는 인간의 영적 생명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공급된다는 매우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만나는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선, 곧 사람이 자기 공로 없이 주님에게서 받아들이는 사랑과 선의 기쁨을 나타냅니다. 특히 ‘감추인 만나’라는 표현은 그 선의 내적인 성격을 더욱 강조합니다. 자연적 눈에는 보이지 않고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과의 결합 가운데 누리는 내적인 선과 평화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데서 오는 기쁨도 아니고, 영적 성취를 자랑하는 데서 오는 만족도 아닙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선을 행하는 것 자체가 기쁘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 자체가 양식이 되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천국적 사랑이 깊어지면 선을 행하는 것은 더 이상 의무만이 아닙니다. 그것이 기쁨이 됩니다. 처음 거듭남을 시작할 때에는 악을 거절하는 것이 매우 힘들 수 있습니다. 용서하기 싫지만 말씀 때문에 용서하려 하고, 정직하게 행동하면 손해를 보지만 진리 때문에 정직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선이 사람 안에 깊이 자리 잡을수록 이전에 힘들게 순종하던 것이 점차 기쁨이 됩니다. 선 자체에서 맛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만나를 먹는 것’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합니다. 천국적 기쁨은 자연적 인간에게 잘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유익을 얻는 데서만 기쁨을 느끼는 사람에게 ‘아무 대가 없이 다른 사람의 선을 위해 섬기는 것이 행복하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지배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에게 섬기는 기쁨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에서 생명을 얻는 사람에게 아무도 모르게 선을 행하는 기쁨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면 이전에는 맛을 느끼지 못했던 선에서 새로운 맛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감추인 만나가 그의 생명 안에 열리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광야의 의미도 다시 깊어집니다. 광야는 단순히 인간을 괴롭게 만드는 곳이 아니라 ‘무엇으로 사는가’를 배우는 곳입니다. 애굽에는 고기 가마와 음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연적 욕망을 만족시키는 삶을 표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는 그것에 의지할 수 없습니다. 매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나를 받아야 합니다. 영적으로도 사람은 거듭남 과정에서 이전에 자기를 행복하게 했던 인정, 성공, 지배, 소유 같은 것들이 더 이상 참된 양식이 아님을 배웁니다. 그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로 사는 법을 배웁니다. 그래서 광야의 목적은 사람을 굶기는 것이 아니라 음식의 종류를 바꾸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연단의 깊이는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했느냐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새 양식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세상적 즐거움을 많이 끊었는데 마음에는 기쁨이 없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마음만 강해졌다면 아직 만나의 맛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전에는 자기 유익에서만 기쁨을 느끼던 사람이 점차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 진리를 행하는 일, 맡겨진 쓰임을 충실히 하는 일에서 기쁨을 느끼기 시작한다면 그의 영적 입맛 자체가 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행동의 변화일 뿐 아니라 ‘무엇을 달게 느끼는가’의 변화입니다.

 

이어지는 ‘흰 돌’ 역시 매우 아름다운 표상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기는 자에게 감추인 만나와 함께 흰 돌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강사는 이 흰 돌을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실제적인 표지와 연결하고, 그 위에 기록된 새 이름과 함께 이긴 자의 특별한 신분과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에도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것’이라는 강사의 일관된 구조가 있습니다. 그러나 상응의 관점에서는 흰 돌을 외적인 신분증이나 천국의 특별한 표찰처럼 이해하기보다 그 안에 담긴 영적 의미를 먼저 보게 됩니다.

 

말씀에서 ‘돌’은 진리와 관계합니다. 특별히 기초가 되고 확고하게 세워진 진리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십계명이 돌판에 기록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신적 진리가 인간의 삶에 확고하게 자리 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돌이 ‘희다’고 합니다. 흰색은 앞에서 흰옷을 살펴보았듯 빛과 진리의 정결함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흰 돌은 선과 결합하여 정결해지고 확고해진 진리를 생각하게 합니다. 단순히 머리로 알고 있는 교리가 아니라 시험을 통과하면서 삶에 새겨진 진리입니다.

 

예를 들어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진리를 책에서 읽고 동의하는 것과, 오랜 세월 자기 공로와 싸우면서 실제로 선을 행한 뒤에도 그것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처음에는 그 진리가 기억 속의 문장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시험을 통과하면서 그 진리가 의지와 결합하면 마치 돌에 새겨진 것처럼 그 사람의 삶의 원리가 됩니다.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흰 돌’은 싸움을 마친 뒤 외부에서 받는 메달보다, 싸움을 통하여 진리가 그의 생명 안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상태로 이해할 때 훨씬 깊어집니다.

 

그리고 바로 그 흰 돌 위에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는 새 이름’이 기록됩니다. ‘이름’은 말씀에서 단순한 호칭보다 그 사람 또는 사물의 질 전체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새 이름은 거듭남을 통하여 새롭게 형성된 영적 성질을 뜻합니다. 사람이 악과 거짓의 지배 아래 있을 때의 사랑과 생각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면서 달라지면 그는 실제로 ‘새 사람’이 됩니다. 기억이 없어지고 전혀 다른 인격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을 지배하는 사랑의 중심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이름이 바뀌는 여러 장면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사래가 사라가 되며,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는 것은 단순한 개명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름의 변화는 상태와 성질의 변화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흰 돌 위의 새 이름 역시 거듭남을 통하여 주님께서 한 사람 안에 이루신 새로운 영적 상태와 관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거듭남이 얼마나 고유한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은 형태로 만드시지 않습니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유전적 성향과 환경, 자유로운 선택과 시험, 쓰임이 다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각 사람을 인도하여 형성하시는 천국적 성질도 고유합니다. 같은 진리를 믿고 같은 주님을 사랑하지만 천국의 천사들이 모두 서로 다른 이유입니다. 주님은 획일성을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다양성을 하나의 질서 안에 결합하십니다.

 

이 점은 수도적 영성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영적 훈련에는 일정한 공동 규율이 필요할 수 있지만, 그 규율의 목적이 모든 사람을 똑같은 영적 성격으로 만드는 데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 깊은 침묵이 유익할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적극적인 섬김이 더 중요한 훈련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에 대한 애착과 싸워야 하고, 어떤 사람은 인정욕과 싸워야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자기 판단을 절대화하는 습관과 싸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다루시는 지점이 서로 다르므로 거듭남의 길도 기계적으로 동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긴 자’의 표준을 지나치게 외적으로 고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특정한 광야 과정, 특정한 체험, 특정한 수준의 금식이나 기도, 특정한 영적 현상을 경험해야 이긴 자가 된다고 규정하기 시작하면 주님께서 각 영혼을 고유하게 인도하시는 섭리를 하나의 인간적 틀 안에 넣을 위험이 있습니다. 말씀은 분명 모든 사람에게 악을 죄로 알고 멀리하며 선을 행하라고 가르치지만,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서 어떤 순서와 방식으로 그 일을 이루시는지는 무한히 다양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생명나무와 감추인 만나와 흰 돌은 서로 떨어진 세 가지 상품이 아닙니다. 하나의 거듭남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보여 줍니다. ‘생명나무’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생명이 중심에 있고, ‘감추인 만나’에서는 그 선을 받아 누리는 내적인 기쁨이 나타나며, ‘흰 돌’에서는 그 선과 결합된 진리가 사람 안에 확고하게 자리 잡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 이름’에서는 그 결과 그 사람의 영적 성질 자체가 새롭게 형성되는 모습을 봅니다. 하나는 생명, 하나는 양식, 하나는 진리, 하나는 새로운 인격의 질을 보여 주지만 모두 주님과의 결합이라는 하나의 중심을 향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이긴 자의 상급’이라는 말도 훨씬 아름답게 들립니다. 주님께서는 ‘네가 고생했으니 이제 특별한 물건 몇 가지를 주겠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거절한 사람에게 선을 주시고, 거짓을 버린 사람에게 진리를 주시며, 자기애의 즐거움을 버린 사람에게 천국적 사랑의 기쁨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선과 진리가 그의 생명이 되도록 하십니다. 결국 상급은 주님께서 주시는 어떤 것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 자체입니다.

 

이 원리는 신앙생활의 동기도 점검하게 합니다. ‘이긴 자가 되면 특별한 상을 받는다’는 생각은 사람을 열심히 살도록 자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동기가 계속 외적 보상에 머물러 있다면 아직 자연적 수준의 신앙일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상을 받기 위해 착한 일을 시작할 수 있듯 신앙 초기에는 천국의 복이나 상급을 바라보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선 자체를 사랑하게 되어야 합니다. 결국에는 ‘상을 받기 위해 선을 행한다’에서 ‘선하기 때문에 선을 행한다’로 옮겨가야 합니다.

 

천국의 천사들이 선을 행하면서 ‘이 일을 하면 내 천국 등급이 올라갈까?’라고 계산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의 선을 이루는 것 자체가 기쁨입니다. 어머니가 사랑하는 자녀를 돌본 뒤 ‘이만큼 돌봤으니 보상을 얼마 받을까?’라고 계산하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랑은 자기 안에 보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의 선을 이루는 것이 곧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흥영성수련원의 오랜 연단과 자기부인의 전통도 이 지점에서 더욱 깊은 방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긴 자가 되어야 한다’, ‘생명과를 먹어야 한다’,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야 한다’는 목표가 강력한 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단이 깊어질수록 그 목표 자체도 정결해져야 합니다. ‘내가 이긴 자가 되고 싶다’에서 ‘주님을 더 사랑하고 싶다’로, ‘특별한 상급을 받고 싶다’에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고 싶다’로, ‘높은 천국에 가고 싶다’에서 ‘어디에서든 주님께서 맡기신 쓰임을 기쁘게 하고 싶다’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연단이 실제로 proprium을 다루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이때 ‘감추인 만나’는 매우 아름다운 분별 기준이 됩니다. 연단을 많이 받은 뒤 무엇에서 기쁨을 느끼는가를 보면 됩니다. ‘나는 이만큼 훈련받았다’는 사실에서 기쁨을 느끼는가, 아니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선을 행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가? ‘나는 이긴 자의 반열에 속한다’는 자기 인식이 기쁜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주님에게 가까워지는 것을 보는 것이 기쁜가? 후자의 기쁨이 자라난다면 감추인 만나의 맛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흰 돌’ 역시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수많은 말씀을 들은 뒤 내 안에 실제로 무엇이 ‘돌’처럼 자리 잡았는가? 설교의 문장들이 기억에 많이 남았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시험이 왔을 때 그 진리가 나를 붙들어야 합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을 선택하고, 상처를 받더라도 복수를 거절하며, 칭찬받지 못해도 맡은 쓰임을 계속하고, 선을 행한 뒤 공로를 주님께 돌릴 수 있다면 진리가 조금씩 흰 돌처럼 삶의 기초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2강의 앞부분들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중간영계에서 결국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사랑했는가입니다. 세 천국의 차이는 주님의 선을 받아들이는 사랑의 질과 관계합니다. 흰옷과 세마포는 선과 결합된 진리가 삶에 나타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영적 할례는 그 선과 진리를 방해하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불결함이 제거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생명나무와 감추인 만나와 흰 돌은 그 결과 주님의 사랑과 선과 진리가 실제로 인간의 생명이 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것들은 서로 다른 교리 조각이 아니라 하나의 거듭남을 여러 방향에서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2강 5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광야의 연단과 영적 할례를 통하여 죄성과 정욕이 처리된 이긴 자에게 생명나무의 열매와 감추인 만나와 흰 돌이 특별한 상급으로 주어진다는 강사의 설명은 신앙의 목적을 단순한 죄 사함에 머물게 하지 않고 실제 성결과 주님이 약속하신 영적 복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힘을 지니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생명나무를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사랑과 생명으로, 그 열매를 먹는 것을 그 선을 받아 자기 생명으로 삼는 것으로, 감추인 만나를 자기 공로 없이 주님에게서 받아 누리는 내적인 천국적 선과 그 기쁨으로, 흰 돌을 선과 결합하여 삶 안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정결한 진리로, 그 위의 새 이름을 거듭남을 통하여 형성된 각 사람의 고유한 새로운 영적 성질로 이해하며, 따라서 이 모든 것을 특정한 영적 계급에 외적으로 지급되는 별개의 특전들이라기보다 악과 거짓을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는 사람 안에 주님의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실제 생명이 되어 가는 하나의 거듭남의 여러 모습으로 볼 때,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의 아르카나가 더욱 깊게 열립니다.’

 

결국 생명나무와 만나와 흰 돌이 가리키는 중심에는 ‘주님에게서 받음’이 있습니다. 생명은 주님에게서 받고, 양식도 주님에게서 받고, 진리도 주님에게서 받으며, 그 결과 형성되는 새 사람의 모든 선한 것 역시 주님에게서 받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여 영적으로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에게서 나온 선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순간순간 흘러들어온다는 사실을 더 깊이 알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감추인 만나’의 역설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proprium은 무엇인가를 자기 것으로 소유할 때 기뻐하지만, 천국적 사람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할 때 자유로워집니다. ‘내가 이루었다’고 붙들 필요도 없고, ‘내가 이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고 불안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필요한 생명을 오늘 주님께 받고, 오늘 필요한 진리를 오늘 받아 살아가면 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이 다음 날의 만나까지 쌓아 둘 수 없었던 것처럼 영적 생명도 주님에게서 계속 받아야 합니다. 어제의 은혜로 오늘을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이긴 자의 모습은 손에 많은 상급을 들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빈손으로 주님 앞에 서서 끊임없이 받는 사람일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도, 감추인 만나도, 흰 돌도 결국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을수록 그는 ‘나는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기보다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에 더 가까워집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광야와 할례를 통과한 사람이 마침내 배우게 되는 가장 깊은 승리이며, 계시록이 말하는 ‘이기는 자’의 가장 천국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강 6부

새 이름과 둘째 사망, 그리고 이긴 자의 열두 가지 축복 : 모든 약속의 끝은 ‘더 높은 나’가 아니라 주님과의 결합입니다

 

2강의 마지막 부분에서 강사는 지금까지 길게 살펴온 ‘이긴 자가 받는 축복’을 마무리합니다. 앞에서 생명나무의 열매, 감추인 만나와 흰 돌을 다룬 데 이어 흰 돌 위에 기록되는 ‘새 이름’을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서머나 교회에 주어진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을 해석합니다. 그리고 이로써 자신이 정리한 ‘이긴 자가 받는 열두 가지 축복’을 모두 살펴보았다고 선언합니다. 실제 강의에서도 3시간 16분경 강사는 ‘이렇게 해서 이긴 자들에게 받는 열두 가지 축복을 다 살펴봤습니다’라고 정리합니다. 따라서 이번 6부는 단순히 마지막 두 항목만 설명하는 부분이 아니라, 3시간이 넘는 2강 전체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다시 한곳에 모아 보는 결론이기도 합니다.

 

먼저 ‘새 이름’입니다. 계시록 2장 17절에서 주님께서는 이기는 자에게 ‘흰 돌’을 주시고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강사는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것처럼 이긴 자 역시 새로운 이름을 받는다고 이해합니다. 특히 강사는 여기서 상당히 구체적인 견해를 제시합니다. 이긴 자, 곧 교회 시대의 ‘처음 익은 열매’는 아직 지상에서 육체로 살아 있을 때 새 이름을 받고, 다른 구원받은 성도들은 천국에 들어간 뒤 새 이름을 받을 것이라고 봅니다. 동시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분은 그렇게 안 믿어도 상관없습니다’, ‘구원하고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함으로써 자기 견해를 구원의 절대 조건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해석과 구원의 본질을 구별하는 태도는 해설자로서도 존중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름’은 대단히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말씀에서 이름은 단순히 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한 호칭에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의 ‘질’, 곧 그의 사랑과 신앙과 삶으로 형성된 영적 성질 전체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새 이름을 받는다’는 말씀의 중심도 자연계에서 사용하던 김 아무개, 이 아무개라는 이름 대신 영계에서 새로운 호칭 하나를 배정받는 데 있다고 보기보다, 거듭남을 통하여 그 사람의 영적 성질 자체가 새로워지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 더 깊습니다. 앞의 5부에서 살펴본 ‘흰 돌’이 선과 결합하여 사람 안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진리를 나타낸다면, 그 돌 위에 새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그 진리가 이제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새로운 영적 성질과 생명이 되었다는 의미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보면 ‘새 이름’은 죽은 뒤에만 관계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새 이름은 지상에서부터 형성됩니다. 이 점에서는 강사가 ‘이긴 자는 살아 있을 때 새 이름을 받는다’고 강조한 직관 속에 매우 의미 있는 요소가 있습니다. 다만 ‘살아 있는 동안 영계에서 사용할 문자적인 이름 하나를 미리 받는다’는 방향보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실제로 새로운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간다는 방향으로 이해하면 훨씬 깊어집니다. 예전에는 자기 이익이 모든 선택의 기준이었던 사람이 점차 이웃의 선을 생각하게 되고, 인정받는 데서 기쁨을 느끼던 사람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쓰임을 행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며, 자기 판단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던 사람이 진리 앞에서 자기 잘못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 이미 ‘새 이름’이 형성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옛사람을 조금 개선하는 것’보다 더 깊은 변화입니다. 물론 기억과 인격과 고유한 개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보존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지배하는 중심 사랑이 바뀝니다. 이것이 새 이름입니다.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랑으로 사는 사람, 같은 기억과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자기 영광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의 선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새 사람’이고, 계시록의 표현을 빌리면 ‘새 이름’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다’는 말씀은 한 사람의 거듭남이 얼마나 고유한지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외적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볼 수 있습니다. 누가 얼마나 기도하고 금식하는지, 얼마나 성경을 많이 읽고 봉사하는지, 어떤 신앙체험을 했는지는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서 무엇을 다루고 계시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가장 큰 광야는 재물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인정욕이며, 어떤 사람에게는 자기 의, 어떤 사람에게는 분노, 어떤 사람에게는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 가운데 주님께서 형성하시는 새로운 영적 성질 역시 각 사람에게 고유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의 영적 등급을 쉽게 판단하지 못하게 합니다. 외적으로 보아 매우 평범한 사람이 주님 앞에서는 깊은 싸움을 통과하고 있을 수 있고, 많은 영적 체험을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는 아직 자기 인정욕과 싸우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의 질서는 사람을 인간의 눈으로 ‘일반 성도’, ‘광야 성도’, ‘이긴 자’라고 쉽게 분류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섬세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한 사람의 전체 사랑과 의도와 자유로운 선택의 역사를 완전히 아십니다. ‘받는 자밖에는 알 사람이 없는 새 이름’이라는 말씀에는 바로 이러한 영혼의 고유성과 주님의 섭리의 은밀함도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강사는 2강의 마지막 약속인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로 갑니다. 강사는 성경에 두 종류의 사망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째 사망은 육체가 죽는 것이고, 둘째 사망은 영혼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한 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합니다. 일반적으로 구원받은 성도 역시 지옥에 가지 않는다면 왜 주님께서 특별히 ‘이긴 자’에게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고 약속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강사는 그 답을 자신의 종말론적 시간표 안에서 찾습니다. 계시록 9장에서 무저갱이 열리고 황충으로 묘사된 악령들이 올라와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괴롭히는데, 이긴 자들은 그 대환란에 들어가지 않고 휴거되기 때문에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이 악령들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사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를 대환란을 면제받고 휴거된다는 ‘간접적인 표현’으로 해석합니다.

 

이 대목에서는 강사의 미래주의적 계시록 해석과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의 차이가 상당히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계시록의 무저갱과 황충과 불못과 둘째 사망을 미래 어느 시기에 자연계에서 일어날 사건들의 암호로 읽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교회와 인간의 영적 상태, 그리고 영계에서 악과 거짓이 드러나고 심판받는 상태를 상응적 형상으로 보여 줍니다. 따라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말씀 역시 대환란 직전에 휴거되어 특정한 다섯 달의 악령 재앙을 피한다는 의미보다 훨씬 내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게 됩니다.

 

말씀에서 ‘죽음’은 육체적 죽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영적 죽음의 상태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사람은 육체적으로 멀쩡하게 살아 있으면서도 자기애와 세상 사랑, 악과 거짓을 자기 생명으로 삼아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육체의 죽음을 통과한 사람도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 안에 있다면 더욱 충만하게 살아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신 말씀도 이런 깊은 차원을 열어 줍니다. 자연적 몸의 죽음이 참된 생명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둘째 사망’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지옥이라는 형벌 장소에 던져 다시 죽이시는 사건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애와 거짓을 지배적 생명으로 선택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천국적 생명과 스스로 분리된 상태의 완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옥은 주님께서 사람을 미워하여 가두시는 곳이 아니라 악을 사랑하는 영들이 자기 사랑과 상응하는 곳을 찾아가는 상태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도 지옥에 가기를 원하지 않으시지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거부하고 자기애의 즐거움을 자기 생명으로 굳힌 영은 천국의 사랑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말씀은 놀랍도록 깊은 거듭남의 약속이 됩니다. 사람이 주님의 힘으로 자기 안의 악과 거짓과 싸우면서 그것을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점차 지배적 사랑으로 받아들이면 그 사람의 참된 생명은 더 이상 지옥에 속하지 않습니다. 육체의 죽음도 그 생명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연적 몸이 벗겨지면 지상에서 형성된 그 내적 생명이 더욱 자유롭게 드러납니다. ‘둘째 사망이 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미래의 재앙 하나를 피한다는 약속을 넘어,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그 사람 안에 형성되어 악과 거짓의 영적 죽음이 더 이상 그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약속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기는 자’의 의미가 다시 중요해집니다. 2강 전체에서 강사는 이긴 자를 일반 성도와 구별되는 특별한 성결의 상태로 설명해 왔습니다. 광야를 통과하고 죄성과 정욕이 제거되어 생명과를 먹으며, 흰옷을 입고, 감추인 만나와 흰 돌과 새 이름을 받고,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이 체계에는 신앙을 안일하게 만들지 않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믿었으니 이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신앙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실제로 악과 싸우고 삶이 변해야 한다고 촉구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2강 전체에서 거듭 인정해야 할 중요한 장점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긴 자를 별도의 영적 엘리트 계급으로 고정하기보다 모든 거듭남의 본질을 보여 주는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계시록의 ‘이김’은 먼저 다른 성도들을 앞서는 경쟁에서의 승리가 아닙니다. 내 안에서 주님에게 반대되는 악과 거짓에 대한 승리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 독립적으로 이루어 낸 승리조차 아닙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실제로 싸워야 하지만, 이기는 능력은 전적으로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참된 이긴 자는 ‘나는 다른 성도보다 더 높은 단계에 올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 없이는 나는 아무 악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아는 사람입니다.

 

이 점은 2강 전체를 읽을 때 가장 조심스럽게 붙들어야 할 균형 가운데 하나입니다. 강사가 성결과 연단을 매우 강하게 강조하는 것은 귀하지만, 그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영적 위치를 계속 측정하게 한다면 오히려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나는 아직 광야 단계인가?’, ‘나는 생명과를 먹었는가?’, ‘나는 이긴 자인가?’, ‘나는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사람인가?’라는 질문이 지나치게 커지면 시선이 주님보다 자기 영적 상태에 집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의 목적은 끊임없이 자기 등급을 확인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오늘 주어진 악을 죄로 알고 거절하고 선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기 등급을 판단하기 어려워집니다. 주님의 빛이 더 밝아질수록 자기 안의 proprium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외적인 죄 몇 가지를 이기고 나면 상당히 깨끗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더 깊은 빛이 들어오면 자기 의와 인정욕, 지배욕, 공로의식 같은 훨씬 미세한 것들이 보입니다. 그래서 천적 상태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높은 사람이다’라는 의식보다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인식이 깊어집니다. 이것이 천국의 높음이 자연계의 높음과 정반대인 이유입니다.

 

여기서 2강 전체에서 살펴본 ‘이긴 자의 축복들’을 다시 바라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납니다. 생명나무의 열매, 감추인 만나, 흰 돌, 새 이름, 흰옷,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 것,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는 것, 주님의 보좌와 관련된 약속,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 새벽별,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 것 등은 얼핏 보면 이긴 자가 하나씩 획득하는 여러 개의 독립적인 상급처럼 보입니다. 강사 역시 이것들을 ‘열두 가지 축복’으로 묶어 설명하고 마지막에 그 목록을 다시 확인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모든 약속을 하나의 거듭난 생명을 서로 다른 상응적 형상으로 보여 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생명나무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생명을 봅니다. 감추인 만나에서는 그 선을 받아들이면서 누리는 내적인 천국의 기쁨을 봅니다. 흰 돌에서는 선과 결합하여 확고하게 된 진리를 보고, 새 이름에서는 그 선과 진리를 통하여 새롭게 형성된 영적 성질을 봅니다. 흰옷과 세마포에서는 그 내적 선이 진리를 통하여 삶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봅니다. 성전의 기둥에서는 주님의 교회와 천국 안에서 굳게 서는 진리와 쓰임을 생각할 수 있고, 생명책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에 속하게 된 상태를 봅니다. 그리고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약속에서는 악과 거짓의 생명이 더 이상 그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는 상태를 봅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중심은 하나입니다. ‘주님과의 결합’입니다.

 

따라서 이 열두 가지를 천국에 들어간 뒤 각각 따로 지급되는 열두 개의 상품처럼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거듭나면 그 하나의 생명이 여러 측면에서 나타납니다. 마치 햇빛 하나가 여러 색과 형태로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에서는 생명나무이고, 내적인 기쁨에서는 만나이며, 진리에서는 흰 돌이고, 새롭게 된 성질에서는 새 이름이며, 삶으로 나타난 진리에서는 흰옷입니다. 결국 모든 약속은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 사시고 그 사람이 주님 안에서 산다’는 하나의 사실을 여러 상응으로 풀어 보여 줍니다.

 

이렇게 보면 ‘상급’의 개념도 마지막으로 정리됩니다. 이긴 자가 받는 최고의 상급은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천국에 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상급이고, 이웃의 선에서 더 깊은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상급이며, 선을 행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 되는 것이 상급입니다. 천국적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질 보상을 계산하면서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선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행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내가 무엇을 받을 것인가?’라는 관심은 줄어들고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내가 이웃에게 어떤 선한 쓰임이 될 수 있는가?’라는 관심이 커집니다.

 

이 점에서 시흥영성수련원의 오랜 수도적 전통과 2강의 강한 ‘이긴 자’ 영성은 매우 소중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부인과 절제, 연단과 순종을 강조하는 전통은 오늘날 신앙을 단순한 위로나 축복의 수단으로만 받아들이는 경향에 강한 도전을 줍니다. 실제로 자기 안의 악과 싸우지 않으면서 성결을 말할 수 없고, 삶의 변화 없이 거듭남을 말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 역시 바로 이 진지함을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가 그 연단의 마지막 대상 가운데 하나가 ‘연단받은 나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육체적 정욕을 버리는 것보다 어쩌면 더 어려운 것이 영적 공로를 버리는 것일 수 있습니다. 재물을 자랑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쉽게 알면서도 ‘나는 많이 기도했다’, ‘나는 많은 연단을 받았다’, ‘나는 깊은 진리를 안다’, ‘나는 일반 성도와 다르다’는 생각은 경건한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 proprium이 자기 생명을 주장하는 방식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광야의 마지막에는 ‘나는 이긴 자다’라는 자기의식마저 주님 앞에 내려놓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역설적으로 ‘이긴 자’라는 말의 가장 깊은 뜻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긴 자는 자기 자신을 가장 강하게 만든 사람이 아니라 자기 힘에 대한 신뢰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자기 욕망을 이겼지만 그 승리를 자기 공로로 만들지 않는 사람, 진리를 깊이 알지만 그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지 않는 사람, 많은 연단을 통과했지만 아직 연약한 사람을 더 따뜻하게 품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천국적 승리의 열매라면, ‘이긴 자’라는 말은 영적 특권의 명칭이 아니라 깊은 겸손의 명칭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마지막 약속이 참으로 아름답게 2강 전체를 닫습니다. 자기애는 결국 영적 죽음으로 향하지만 주님 사랑은 생명으로 향합니다. proprium은 모든 것을 자기에게 끌어오려 하지만 천국적 사랑은 모든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립니다. 전자는 스스로를 중심에 놓으면서 점점 고립되고, 후자는 주님을 중심에 모시면서 다른 사람들과 더욱 깊이 결합합니다. 그러므로 둘째 사망을 이긴다는 것은 단순히 지옥의 형벌을 면제받는 것보다 더 깊이, 죽음의 사랑에서 생명의 사랑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2강 6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긴 자가 흰 돌 위에 기록된 새 이름을 받으며 마지막으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고, 이로써 이긴 자에게 약속된 열두 가지 축복이 완성된다는 강사의 설명은 신앙을 실제 성결과 영적 싸움으로 이끌고 주님의 약속을 진지하게 붙들게 한다는 점에서 큰 힘을 지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새 이름’을 특정한 영적 계급에게 부여되는 새로운 호칭보다 거듭남을 통하여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 형성하시는 고유한 새로운 사랑과 신앙과 쓰임의 영적 성질로, ‘둘째 사망’을 미래 대환란 중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황충 악령의 재앙보다 더 깊이 자기애와 거짓을 지배적 생명으로 삼아 주님의 천국적 생명과 분리되는 상태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음’을 주님의 힘으로 악과 거짓을 거절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지배적 생명이 된 사람에게 영적 죽음이 더 이상 지배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생명나무와 감추인 만나와 흰 돌과 새 이름과 흰옷과 생명책을 비롯한 이긴 자의 모든 약속 역시 서로 독립된 특전의 목록이라기보다 주님과 결합된 하나의 천국적 생명이 여러 상응으로 펼쳐진 것으로 읽을 때, 2강 전체의 중심이 ‘얼마나 높은 단계에 이르렀는가?’에서 ‘얼마나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 실제로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로 옮겨집니다.’

 

이제 2강 전체를 돌아보면 처음의 중간영계에서 마지막 둘째 사망까지 하나의 선이 이어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중간영계에서 그가 지상에서 형성한 내적 사랑이 드러납니다. 천국의 서로 다른 상태도 그 사랑의 질과 관계합니다. 흰옷과 세마포는 선과 결합한 진리가 삶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영적 할례와 광야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불결함이 드러나고 다루어지는 거듭남의 과정을 보여 줍니다. 생명나무와 감추인 만나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인간의 생명과 기쁨이 되고, 흰 돌과 새 이름에서는 그 선과 진리가 한 사람의 고유한 영적 성질로 굳어집니다. 그리고 둘째 사망이 해하지 못한다는 마지막 약속에서는 그렇게 주님에게서 받은 생명이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이 긴 2강을 다 듣고 난 뒤 우리에게 남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이긴 자의 열두 가지 축복 가운데 몇 가지를 받았는가?’가 아닐 것입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되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할수록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말씀을 많이 알수록 이웃에게 더 체어리티를 행하게 되었는가, 연단을 많이 받을수록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더 이해하게 되었는가, 선을 행할수록 자기 공로를 덜 생각하게 되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영적 성장의 참된 표지는 자기 등급에 대한 확신보다 사랑의 변화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 앞에서 2강의 ‘이긴 자’라는 표현도 가장 아름다운 자리로 돌아옵니다. 이긴 자는 ‘나는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늘도 자기 안에 올라오는 악을 보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넘어졌을 때 악을 정당화하지 않고 다시 주님께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자기 힘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 싸우면서도 그 힘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그의 마지막 말은 ‘제가 이겼습니다’보다 ‘주님께서 이기셨습니다’에 가까워집니다.

 

그렇다면 2강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어도 좋겠습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감추인 만나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흰 돌과 새 이름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흰옷의 빛도 주님에게서 오며, 둘째 사망을 이기는 생명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이 할 일은 그 생명을 받을 수 있도록 악을 죄로 알고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며, 받은 진리를 실제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수록 사람은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는 의식보다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더욱 바라보게 됩니다.’ 바로 그때 ‘이긴 자’의 열두 가지 축복은 열두 개의 상급을 소유한 인간의 영광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주님의 생명이 점점 충만해지는 하나의 거대한 약속으로 읽힐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오직 주님이 계십니다.

 

 

 

SY.53,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3강 (7/28),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3강 1부요한계시록 6장의 ‘네 말’과 심판을 어떻게 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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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34,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1강 (7/27),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1강 1부‘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본 제79차 심령부흥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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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해설

1강 1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본 제79차 심령부흥대사경회

첫 강의는 다른 날의 강의들과 조금 다르게 시작됩니다. 곧바로 교재 강의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찬양과 합심기도, 그리고 제79차 심령부흥대사경회의 개회예배가 상당한 시간 이어집니다. 그래서 이 첫 영상 자체가 하나의 ‘강의’라기보다, 앞으로 이어질 사경회 전체의 문을 여는 자리라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실제로 개회예배에서는 ‘마지막 때를 향하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다시 이 사경회에 모였다는 고백이 나오고, 말씀을 통하여 새로워지고, ‘생명의 길’, ‘진리의 길’로 인도받기를 간구합니다. 이 대목은 이후 강의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이 사경회가 단순히 종말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려는 성경 세미나가 아니라, 말씀을 배우는 일을 통하여 실제 사람의 영적 상태가 변화되기를 기대하는 집회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이 출발점은 매우 귀하게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진리는 사람을 선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주어집니다. 사람이 말씀을 많이 알고, 천국과 영계에 관한 많은 지식을 갖고, 종말과 심판에 관하여 상세히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의 의지와 삶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아직 그의 생명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이 사경회가 처음부터 ‘은혜받고 결단하며’, 말씀을 통하여 생명과 진리의 길을 걷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출발입니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그 ‘진리’가 무엇을 뜻하며,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사람의 삶 안에서 선과 결합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개회예배가 마무리된 뒤 전요한 강사의 ‘종말론적 입문’ 강의가 시작됩니다. 강사는 처음부터 자신이 독립된 새로운 교리를 제시하려 하기보다 이 사경회가 오랫동안 전해 온 ‘핵심진리’의 전체 흐름 안에서 강의를 시작합니다. 이 점을 먼저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후 여러 강사의 강의를 계속 듣다 보면 각 강사의 표현과 강조점은 조금씩 달라도, 그 밑바탕에는 하나의 공통된 신앙 구조가 놓여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 강의는 바로 그 구조를 처음 접하는 자리입니다.

 

특히 이 첫 시간에서 제시되는 중요한 개념이 ‘하나님의 밝은 빛’입니다. 강사는 세상적이고 기복적이며 정욕적인 것과 뒤섞인 흐린 진리가 아니라 ‘순수하고 누룩이 섞이지 않는 밝은 진리’가 증거될 때, 사람의 영성이 다시 살아나고, 미지근한 신앙이 뜨거워지며, 회개가 일어나고, 삶이 빛의 자녀로 변화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 사경회가 말하는 ‘빛’이 단순한 성경 지식의 축적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진리가 사람의 내면을 밝히고, 그의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빛’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천국의 빛은 단순한 자연적 광명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Divine Truth)와 상응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본다’는 것은 진리를 이해한다는 것이고, 어둠에 있다는 것은 단순히 무엇을 모른다는 뜻을 넘어 진리를 보지 못하는 영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강의에서 반복되는 ‘밝은 빛’이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옮기면 상당히 깊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일수록 그의 이해성(understanding), 즉 이해하는 능력이 밝아지고, 그 진리가 사랑과 의지 안으로 들어가 삶이 될수록 그는 실제로 빛 가운데 걷게 됩니다.

 

다만 여기에는 앞으로 계속 유념해야 할 중요한 구분이 하나 있습니다. ‘밝은 진리’라고 강하게 확신하는 것과 실제로 신적 진리를 밝게 보는 것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진 교리 체계 안에서도 매우 강한 확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가 참으로 진리인지를 단지 확신의 강도나 특별한 체험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것이 말씀에서 나오는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선으로 인도하는가, 그리고 사람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낮추는 방향으로 작용하는가를 중요하게 봅니다. 따라서 앞으로 ‘핵심진리’를 해설할 때도 ‘이것이 맞다, 틀리다’라는 식으로 성급하게 재단하기보다, 이 가르침이 사람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하겠습니다.

 

이어 강사는 이 사경회가 중요하게 다루는 또 하나의 축으로 ‘이스라엘을 통하여 나타난 모형적 진리’를 제시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와 사건들을 단순히 과거에 일어난 민족사의 기록으로만 읽지 않고, 신약의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영적 과정의 모형으로 읽으려는 것입니다. 강사는 이러한 모형적 진리를 통하여 요한계시록의 내용과 지금의 시대, 그리고 성도의 영적 성장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매우 흥미로운 접점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역시 구약의 인물과 장소와 사건들을 단순한 역사적 사실로만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천국의 비밀’(라틴 Arcana Coelestia, 영어 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 1749-1756, 창, 출 속뜻 주석, 총 10,837개 글)에서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인물, 장소, 이동, 전쟁, 광야생활 등을 사람의 거듭남과 주님의 구원 섭리에 관계되는 영적 실재의 표상으로 해설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역사가 오늘 성도의 영적 여정을 보여 준다’는 이 사경회의 기본 직관 자체는 스베덴보리 독자에게 상당히 익숙하게 들립니다. 출애굽, 홍해, 광야, 가나안이라는 일련의 과정이 단순한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과정을 나타낸다는 생각에는 분명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두 해석의 길을 세심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경회에서 말하는 ‘모형적 진리’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은 겉으로는 매우 비슷해 보여도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모형론은 흔히 구약의 한 사건을 신약 시대의 어떤 사건이나 미래의 종말 사건과 연결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더 근원적으로 자연계의 사물과 사건이 영적 실재를 표상하는 질서를 다룹니다. 따라서 같은 출애굽 사건을 보더라도 단순히 ‘이것은 훗날 일어날 어떤 사건의 예표다’에서 멈추지 않고, 애굽·바로·홍해·광야·만나·가나안 각각이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 시험, 거듭남의 단계에서 무엇과 상응하는지를 살피게 됩니다. 이 차이는 앞으로 강의가 본격적으로 전개될수록 매우 중요해질 것입니다.

 

강사는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 이러한 ‘모형적 진리’를 설명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믿음과 은총으로 구원받고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 마침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의 원리가 나타났다고 설명하며, 그래서 아브라함이 혈통적인 이스라엘만의 조상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도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설명을 곧바로 부정하기보다 한 단계 더 안쪽으로 들어갑니다. ‘천국의 비밀’에서 아브라함은 단순히 한 신앙인의 모범이나 후대 성도들의 믿음의 조상으로만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말씀의 가장 깊은 속뜻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역사를 통하여 주님 자신의 인성이 어떻게 신성과 하나 되어 가셨는가 하는 지극히 깊은 아르카나가 드러납니다. 동시에 그것은 인간의 거듭남과도 상응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 사경회는 구약의 역사를 주로 ‘성도의 구원과 영적 성장’이라는 방향에서 읽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더 깊은 중심을 주님께 둡니다. 말씀의 가장 깊은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과 주님의 나라가 있으며, 인간의 거듭남은 그 주님의 영화 과정과 상응하는 질서 안에서 이해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강의의 모형적 해석을 없애 버리는 렌즈라기보다, 그것을 더 깊은 중심으로 이끄는 렌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첫 강의의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이 ‘신인 합일의 경지에 들어간 성도들’입니다. 강사는 밝은 진리와 모형적 진리에 이어, 하나님과 깊이 연합한 성도들의 삶을 살펴보겠다는 방향을 제시합니다. 이 역시 이후 사경회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이곳에서 신앙의 최종 목표는 단순히 교리를 많이 아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도가 실제로 하나님과 깊은 연합에 이르고, 그의 삶이 변화되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이후 강의에서 성화, 영적 성장, 연단, 수도적 삶, 성숙한 신앙인의 생애가 반복해서 등장하게 됩니다.

 

이 지점 역시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깊이 만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는 인간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피조물인 인간과 창조주이신 주님의 구별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그의 생명이 될 때, 주님과 인간 사이에는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특히 진리를 알고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 진리가 사랑과 행위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경회가 추구하는 ‘신인 합일’을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조심스럽게 옮긴다면, 인간이 신적 존재가 되는 것이라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삶으로 살아감으로써 주님과 더욱 깊이 결합되는 상태’라고 이해하는 것이 안전하겠습니다.

 

그래서 첫 강의의 도입부만 놓고 보면 뜻밖에도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만나는 지점이 적지 않습니다. ‘밝은 진리’, ‘모형적 진리’, ‘영적 성장’, ‘성화’, ‘하나님과의 깊은 결합’이라는 큰 방향은 모두 단순한 교리 지식보다 실제 영적 생명의 변화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다만 앞으로 세부 내용으로 들어가면서 ‘밝은 진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형’과 ‘상응’은 어디에서 만나고 어디에서 갈라지는지, ‘종말’과 ‘재림’을 외적 역사 사건 중심으로 이해하는지 아니면 교회와 인간 내면의 영적 상태까지 함께 보는지 등을 하나씩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1강 1부에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개별 종말론의 옳고 그름이 아닙니다. 이 사경회가 처음부터 제시하는 전체 방향입니다. ‘진리를 배우되 그 진리가 사람을 변화시켜야 한다.’ 이 명제만큼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거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탭니다. 진리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그가 진리를 많이 알기 때문이 아니라, 그 진리를 따라 살면서 진리가 선과 결합되고, 마침내 그의 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이어질 이 긴 사경회의 강의들을 살펴볼 때, 우리가 계속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일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와 더불어, ‘이 진리는 사람을 어떤 사랑으로, 어떤 삶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님과 어떤 결합으로 이끌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놓치지 않는다면, 이 사경회의 장점은 충분히 살리면서도 스베덴보리를 통하여 더 깊은 말씀의 질서까지 함께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1강 2부

‘신인 합일’, 광야 연단과 성화 : 신앙의 목표는 어디까지인가

1강 2부에서는 앞서 말한 ‘밝은 진리’와 ‘이스라엘을 통한 모형적 진리’에 이어, 이 사경회의 영성적 성격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세 번째 주제가 등장합니다. 강사는 ‘신인 합일의 경지에 들어간 성도들’의 생애와 사상과 체험을 비교·분석함으로써 성경의 핵심 진리를 선명하게 해석하겠다고 말합니다. 특히 로마서 7장과 8장을 언급하면서, 단순히 예수를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고 주님의 생명과 합일되었다고 말하는 신앙과, 실제로 죄와 치열하게 싸우고 ‘광야 연단’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성결의 은총과 ‘완덕의 경지’에 이르는 체험적 신앙을 구별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화된 성도들의 생애를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신앙의 목표’, ‘신앙의 방향’, ‘신앙의 가치관’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부분은 이번 사경회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이후 여러 강의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광야’, ‘연단’, ‘이기는 자’, ‘익은 열매’, ‘성화’, ‘완덕’이 이미 첫 강의의 이 대목에서 하나의 큰 그림으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경회가 말하는 구원은 단순히 ‘예수를 믿었으므로 죄 사함을 받고 천국에 간다’는 한 순간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실제 삶에서 죄와 싸우고, 여러 연단을 통과하며, 성결의 은총을 받고, 마침내 하나님과 깊은 연합에 이르는 긴 영적 여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사경회의 관심은 ‘구원받았는가?’에서 멈추지 않고 ‘구원받은 사람이 실제로 어떤 사람이 되어 가는가?’로 나아갑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매우 중요한 접점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구원은 단순히 어떤 교리를 믿는 순간 인간의 법적 신분만 바뀌는 사건이 아닙니다. 구원은 거듭남이며, 거듭남은 사람의 의지와 이해성, 사랑과 사고, 그리고 실제 삶의 질서가 주님에 의해 점차 새롭게 되는 과정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를 따라 살면서 악을 죄로 알고 피하고, 선을 행하며, 그렇게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선과 결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었다’는 고백과 ‘예수님의 생명이 실제로 내 삶을 다스린다’는 상태 사이에는 긴 거듭남의 여정이 있다는 이 강사의 기본 문제의식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상당히 깊이 만납니다.

 

특히 강사가 강조하는 ‘광야 연단’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에서 매우 풍성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다고 곧바로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홍해를 건넌 뒤 광야가 있었습니다. 애굽의 종살이에서는 해방되었지만, 그들 안에는 여전히 애굽에서 형성된 욕망과 습관과 두려움과 불신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는 배고픔과 목마름, 원망과 반역, 만나와 메추라기, 아말렉과의 전쟁, 불뱀 등 수많은 사건이 이어집니다. 문자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이 거듭나는 사람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시험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사람이 악에서 돌아섰다고 해서 그 악의 뿌리와 즐거움까지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현실적인 영적 통찰입니다. 사람이 어느 날 깊이 회개하고 ‘이제부터 이렇게 살지 않겠습니다’라고 결단할 수 있습니다. 그 결단은 진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며칠 뒤 똑같은 상황이 찾아오면 옛 성질이 다시 올라옵니다. 용서했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다시 만나자 마음 깊은 곳에서 분노가 살아나고, 명예욕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이 인정받는 것을 보자 마음이 흔들립니다. 이때 사람은 ‘내 회개가 거짓이었나?’라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의 질서를 알면 조금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것은 실제이지만 아직 가나안에 도착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사이에 광야가 있습니다.

 

따라서 광야는 구원이 실패한 장소가 아니라 구원이 실제 생명으로 깊어지는 장소입니다. 사람 안에 숨어 있던 악과 거짓이 시험을 통해 드러나고, 사람이 자유 가운데 그것을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거절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성이 형성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사경회가 ‘광야 연단’을 신앙생활의 중요한 과정으로 보는 것은 매우 귀한 통찰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고난과 시험을 무조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거나 ‘기도를 잘못해서 생긴 일’로 해석하지 않고, 그 가운데 영적 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한 가지를 더욱 세밀하게 구별합니다. 모든 고난이 자동적으로 ‘연단’은 아닙니다. 고난 자체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같은 고난을 겪으면서 어떤 사람은 더욱 완고해질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더욱 자기연민에 빠질 수도 있으며, 어떤 사람은 오히려 다른 사람을 미워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고난 가운데 어떤 영적 선택이 이루어지는가입니다. 시험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사람 안의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실제로 충돌하고 사람이 자유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영적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많이 겪었다는 사실 자체가 영적 성숙의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고난을 통하여 자기애가 낮아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라났는가가 중요합니다.

 

이 점은 수도적 연단을 이해할 때도 매우 중요합니다. 금식, 철야, 절제, 침묵, 노동, 공동생활, 순종과 같은 외적인 훈련들은 인간의 proprium을 드러내고 절제하는 데 매우 유익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훈련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이렇게까지 훈련했다’, ‘나는 보통 신앙인과 다르다’, ‘나는 이만큼 나를 죽였다’는 자기 의와 영적 우월감이 생긴다면 외적인 자기부인 속에서 더 미세한 proprium이 자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연단의 열매는 ‘강한 사람’이 되는 데 있지 않고 더 온유하고, 더 겸손하고, 더 쉽게 용서하며, 다른 사람의 선을 더 기뻐하는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강사가 ‘신인 합일의 경지’를 말하는 것도 이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이 표현은 자칫하면 인간이 하나님과 존재론적으로 하나가 되거나 인간 자체가 신적인 존재로 변한다는 뜻으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의의 문맥에서는 성화된 성도들이 죄와 싸우고 광야 연단을 통과한 끝에 하나님의 생명이 그들 안에서 강하게 역사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의 의도를 먼저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를 ‘주님과의 결합’이라는 말로 조금 더 정밀하게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영원히 피조물이고 주님은 영원히 창조주이십니다. 천사가 아무리 높은 천국에 있어도 하나님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사가 더 천국적일수록 자기 안의 모든 선과 지혜와 생명이 자기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들어 온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압니다. 인간과 주님의 결합은 두 존재가 하나의 본질로 융합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자유롭게 받아들여 마치 자기 것처럼 살아가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결합입니다. 주님은 주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이지만, 인간의 사랑과 생각과 삶이 점점 주님의 질서와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역설을 낳습니다. 사람은 주님과 더 깊이 결합될수록 자기 개성을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됩니다. proprium의 지배 아래 있을 때 인간은 자신이 가장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욕망과 두려움과 명예욕과 탐욕의 지배를 받습니다. 반대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수록 그는 그러한 속박에서 자유로워지고, 주님께서 창조하신 고유한 인격과 쓰임을 더욱 온전히 나타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인 합일’의 목표를 자기 소멸이나 신격화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결합을 통하여 참된 인간성이 회복되는 것으로 이해하면 훨씬 안전하고 깊어집니다.

 

강사는 또한 성화된 성도들의 ‘생애와 사상과 체험’을 비교 분석하겠다고 합니다. 이것 역시 이 사경회의 특징입니다. 교리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깊은 신앙의 길을 걸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삶을 통하여 교리를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이후 존 웨슬리와 존 버니언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강사는 훗날 ‘이기는 자’를 설명하면서 웨슬리는 이를 ‘성결의 은총을 받은 성도’, 버니언의 ‘천로역정’에서는 전신갑주를 입은 성도, 여러 성자들의 표현에서는 ‘신인 합일의 경지에 이른 성도’라고 연결합니다. 결국 서로 다른 전통의 언어들이 하나의 영적 성숙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성숙한 신앙인의 실제 삶을 살피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특별한 체험을 곧바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영적 법칙으로 만드는 데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영적 체험은 그 사람의 상태와 쓰임, 종교적 배경과 사고의 형식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강렬한 체험을 하고 어떤 사람은 평생 특별한 체험 없이도 조용히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외적인 체험의 강도가 내적인 천국의 깊이를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영계를 오랫동안 의식적으로 경험하고 천사들과 대화했다고 기록한 사람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구별은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그의 저작에서 중요한 것은 ‘나에게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는 체험의 과시가 아니라, 그 체험을 통해 말씀의 속뜻과 천국의 질서, 인간의 거듭남과 주님의 섭리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천국에 들어가는 본질적인 조건을 환상이나 계시나 특별한 영적 현상이 아니라 사람이 실제로 어떤 사랑을 자기 생명으로 삼았는가에서 찾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성도의 신비 체험을 읽을 때에도 ‘그가 무엇을 보았는가?’와 함께 ‘그 체험이 그의 사랑과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강의는 이 모든 내용을 ‘신앙의 목표’, ‘신앙의 방향’, ‘신앙의 가치관’이라는 세 표현으로 모읍니다. 이 세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에도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지 교회에 출석하고, 죄 사함을 확신하고, 어려울 때 기도하며 살다가 죽어서 천국에 가는 정도로 신앙을 축소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입니다. 사람은 실제로 변화되어야 하고, 성화되어야 하며, 주님과 더 깊이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의식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전적으로 중요합니다. 다만 그 목표를 ‘어느 특별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면 또 하나의 위험이 생깁니다. 영적 성장 자체가 자기 성취 프로젝트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느 단계인가?’, ‘나는 완덕에 들어갔는가?’, ‘나는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성화되었는가?’라는 질문이 중심이 되면 어느새 시선이 주님에게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옵니다. 영적 성숙을 추구하면서 오히려 영적 자기애가 자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에서는 그래서 ‘상태’와 ‘쓰임’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높은 영적 단계에 도달했는지를 자꾸 측정하는 것보다, 오늘 자기 자리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선을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정에서 배우자를 대하는 태도, 교회에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 돈과 명예 앞에서의 정직, 자기에게 불편한 사람을 대하는 마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의 선택이 실제 거듭남의 자리입니다. 천국은 어떤 신비한 고급 영성 상태를 소유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실제 쓰임으로 살아내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사경회의 ‘완덕’이라는 표현도 조금 다르게 읽을 수 있습니다. 완덕은 ‘나는 이제 죄가 전혀 없는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자기 인식이라기보다, 사람의 생명을 지배하는 중심 사랑이 점점 주님과 이웃을 향하여 정돈되는 상태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거듭난 사람에게도 악한 성향은 남아 있고, 그는 계속 주님의 보호를 필요로 합니다. 천사조차 자기 자신에게 맡겨지면 악으로 기울 수 있으며, 천사의 모든 선도 순간순간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참된 성숙의 표지는 ‘나는 완전해졌다’는 확신보다 ‘주님 없이는 아무 선도 행할 수 없다’는 더욱 깊은 인식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강사가 뒤에서 말하는 ‘영적 성장론’과도 연결됩니다. 강사는 이 과목을 ‘성경의 가장 핵심적 진리’라고까지 부르면서, 이를 통하여 성경적 구원론을 알게 되고 성도들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생활환경과 사건들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있음을 깨닫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영적 성장을 이해하면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단순한 행운과 불운으로만 보지 않고, 그 가운데서 자신의 내적 상태가 드러나고 변화되는 과정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 이해 역시 이 지점에서 깊이 만납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단순히 인간이 이 세상에서 편안하고 성공하도록 모든 환경을 배열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자유를 보존하면서 영원한 선을 선택할 수 있도록 삶의 수많은 상황을 다스리십니다. 우리가 보기에 실패처럼 보이는 일이 더 깊은 자기 인식을 가져올 수도 있고, 성공이 오히려 숨겨져 있던 자기애를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만남이 우리의 인내를 시험하고, 어떤 상실이 우리가 무엇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었는지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조심할 점이 있습니다. ‘모든 사건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말이 ‘하나님께서 모든 사건을 직접 일으키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은 악을 만드시거나 사람에게 악을 행하도록 시키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자유에서 나온 악과 지옥의 영향으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을 허용하시지만, 그 허용된 것들조차 궁극적으로 선한 목적을 위하여 굽혀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허용의 섭리’입니다. 따라서 고난을 만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을 연단하려고 이것을 보내셨다’고 너무 쉽게 말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원인들이 있으며,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의 원인을 모두 설명하는 것보다 주님께서 그 상황 속에서도 사람을 선으로 인도하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강사는 뒤이어 영적 성장론에서 ‘한 차례, 두 차례, 세 차례 연단’과 ‘한 차례, 두 차례, 세 차례 시련’을 살피며, 그 하이라이트로 ‘하나님의 생명수가 유입되는 체험’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영적 성장론을 마태복음 13장의 일곱 비유와 연결한 뒤 요한계시록으로 나아가겠다고 전체 학습 구조를 제시합니다. 여기에서 첫 강의 초반에 제시되는 이 사경회의 큰 지도가 거의 완성됩니다. 종말론적 입문에서 출발하여 모형적 진리, 성화된 성도들의 생애, 영적 성장론, 마태복음 13장, 그리고 요한계시록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체계를 이루려는 것입니다.

 

특히 ‘생명수가 유입된다’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매우 흥미롭게 들립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에게 속한 생명은 본래 인간에게서 자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유입됩니다. 인간은 생명 그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그릇입니다. 사랑하고 생각하고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순간순간 주님에게서 옵니다. 다만 사람은 그 생명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느끼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야 자유와 합리성이 가능하고, 자유 가운데 주님을 사랑하고 선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생명수가 유입된다’는 말을 반드시 어떤 특별한 신체적·신비적 체험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장 깊은 의미에서 주님의 생명은 언제나 인간에게 유입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유입의 유무보다 수용의 상태입니다. 햇빛은 동일하게 비추지만 창문이 닫혀 있거나 더러우면 빛이 충분히 들어오지 못하는 것처럼, 주님의 사랑과 진리는 끊임없이 유입되지만 인간의 자기애와 거짓이 그것을 왜곡하거나 막을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새로운 생명원을 인간 안에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오는 생명을 점점 더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인간의 수용 그릇이 질서화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강사가 말하는 ‘신인 합일’, ‘광야 연단’, ‘성결의 은총’, ‘완덕’, ‘영적 성장’, ‘생명수의 유입’은 서로 따로 떨어진 주제들이 아닙니다. 모두 하나의 질문을 향합니다. ‘구원받은 사람 안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입니다. 바로 이 질문 때문에 이 사경회의 가르침이 단순한 종말론 강의를 넘어 수도적 영성의 성격을 갖게 됩니다. 마지막 때의 사건을 아는 것이 목적이라면 종말의 시간표만 배우면 됩니다. 그러나 이 사경회는 계속해서 ‘그 마지막을 맞이할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묻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질문을 더욱 내면으로 가져옵니다. 마지막 때가 정확히 언제인가를 아는 것보다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이 끝나야 하는가를 묻게 합니다. 자기애의 어떤 지배가 끝나야 하는가, 어떤 거짓이 심판받아야 하는가, 어떤 오래된 proprium이 광야에서 드러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어떤 새로운 선과 진리가 태어나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종말이 단지 세계 밖에서 일어날 미래 사건이 아니라 교회의 한 상태가 끝나고 새로운 상태가 시작되는 것이며, 개인에게도 옛사람의 질서가 무너지고 새사람의 질서가 세워지는 거듭남의 차원에서 읽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강 2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신인 합일의 경지에 들어간 성도들의 생애를 살피고, 광야 연단과 성화와 완덕을 통하여 신앙의 목표와 방향과 가치관을 분명히 하려는 이 사경회의 가르침은, 구원을 단순한 신앙고백이나 일회적 죄 사함에 머물게 하지 않고 실제 생명의 변화로 나아가려 한다는 점에서 매우 귀한 문제의식을 품고 있으며, 이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의 빛에서 보면 그 목표는 인간이 어떤 특별한 영적 경지를 획득하거나 하나님과 존재론적으로 하나가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시험 가운데 악과 거짓을 죄로 알고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며,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유입되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 삶과 쓰임으로 살아감으로써 주님과 점점 더 깊이 결합되는 데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2부에서 특별히 오래 붙들 만한 것은 강사가 세 번 반복하게 한 ‘신앙의 목표, 신앙의 방향, 신앙의 가치관’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수사적 반복이 아닙니다. 사람이 무엇을 신앙의 목표로 삼느냐에 따라 그의 모든 영적 훈련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특별한 체험을 목표로 하면 체험이 없는 날에는 신앙이 흔들립니다. 높은 영적 단계를 목표로 하면 다른 사람과 자기를 비교하게 됩니다. 종말의 비밀을 많이 아는 것을 목표로 하면 지식이 신앙의 척도가 됩니다. 심지어 ‘완덕’을 자기 성취의 목표로 삼으면 성화 자체가 proprium의 업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표가 ‘주님과의 결합’이라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말씀을 읽는 이유도 주님을 더 알고 그분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이고, 기도하는 이유도 특별한 체험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뜻을 주님의 뜻 아래 놓기 위해서이며, 광야 연단을 견디는 이유도 강한 수도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안의 악이 드러날 때 그것을 주님의 도움으로 내려놓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섬기는 이유도 영적 점수를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실제 쓰임으로 흘러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보면 ‘완덕’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도 뜻밖에 화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큰 신비 체험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괴롭힌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 자기 잘못을 알았을 때 변명하지 않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 아무도 보지 않을 때에도 정직한 사람,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인정받을 때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자신에게서 어떤 선한 것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자기 것으로 붙들지 않고 ‘이것은 주님에게서 왔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광야의 목적도, 연단의 목적도, 성화의 목적도 결국 그런 사람을 만드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신인 합일’이라는 강한 표현도 가장 안전하고 아름다운 의미를 얻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나’가 왕 노릇하던 자리에 주님께서 왕이 되시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로 밝아지고, 내 의지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을 기뻐하는 새로운 의지로 거듭나며, 내 개성이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고유한 쓰임이 더욱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주님과 인간의 결합이며, 어쩌면 이 사경회가 ‘광야 연단’을 통하여 그토록 간절하게 도달하고자 했던 영적 목표의 가장 깊은 자리이기도 할 것입니다.



1강 3부

종말론적 입문 : ‘말세’는 세상의 파멸인가, 교회의 끝인가

1강 3부에 들어오면서 강의는 이제 본격적으로 ‘종말론적 입문’이라는 제목에 걸맞은 문제로 들어갑니다. 강사는 앞에서 이 교재의 특징을 ‘하나님의 빛’, ‘이스라엘 백성을 통한 모형적 진리’, ‘하나님과 인간이 합일되는 체험적 신앙’, 그리고 그것을 기초로 한 요한계시록의 체계적 해석으로 요약한 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서 ‘세상 사람들도 말세라고 한다’고 말하고, 오히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해야 하는데 오늘날은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이제 관심이 개인의 성화와 영적 성장에서 교회와 인류 역사의 상태로 넓어지는 것입니다.

 

이 문제 제기는 가볍게 지나갈 부분이 아닙니다. ‘말세’라는 말을 들으면 많은 그리스도인은 먼저 전쟁, 지진, 전염병, 경제위기, 도덕적 타락, 국제정세의 격변 같은 외적 현상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들이 심해질수록 ‘이제 정말 마지막 때가 가까웠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 사경회의 종말론 역시 앞으로 요한계시록의 사건들을 실제 미래의 역사와 상당히 구체적으로 연결해 나갑니다. 그러나 이 첫머리에서 강사가 ‘교회가 세상을 걱정해야 하는데 세상이 교회를 걱정한다’고 말한 것은 흥미롭게도 시선을 세상 바깥의 재난만이 아니라 ‘교회의 상태’로 돌려놓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매우 중요한 만남이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에서 말하는 ‘마지막 때’, ‘세상 끝’, ‘심판’은 자연계의 지구가 물리적으로 파괴되는 사건을 일차적으로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한 교회가 더 이상 참된 교회로 기능할 수 없을 정도로 선과 진리를 잃어버린 마지막 상태를 뜻합니다. 교회가 겉으로는 여전히 존재하고, 예배당도 있고, 성직자도 있고, 성경도 읽고, 예배도 드리지만 그 안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사라지고 진리가 삶에서 분리되면 그 교회는 영적으로 마지막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따라서 ‘말세인가?’라는 질문을 ‘지구가 언제 끝나는가?’보다 먼저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강사의 ‘세상이 교회를 걱정한다’는 표현은 상당히 무거운 영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문제는 단순히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가 떨어졌다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빛을 비추어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의 기준으로도 교회의 탐욕과 권력욕과 분열과 부도덕이 비판받는다면, 우리는 먼저 세상의 타락을 꾸짖기보다 교회 안의 빛이 얼마나 밝은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세상이 어두워졌다는 사실보다 더 심각한 것은 등불이 빛을 잃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상 가운데 두신 까닭이 신적 선과 진리를 받아 세상에 전달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첫 강의 초반에 강사가 강조했던 ‘밝은 진리’가 다시 중요해집니다. ‘밝은 진리’는 단지 남들이 모르는 종말의 비밀을 더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뜻이어서는 안 됩니다. 참으로 밝은 진리라면 먼저 그것을 가진 사람의 내면을 밝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은 잘 보면서 자기 안의 자기애와 명예욕과 지배욕은 보지 못한다면, 많은 진리를 알고 있어도 아직 그 빛이 자기 내면까지 비춘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빛은 먼저 밖을 비추기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 자신의 내면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종말론은 놀랍게도 회개의 교리가 됩니다. ‘세상 끝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알아내는 학문이기 전에 ‘내 안에서 무엇이 끝나야 하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오래된 자기애의 질서가 끝나야 하고, 진리를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신앙이 끝나야 하며, 종교를 자기 명예와 권위를 위해 사용하는 마음이 끝나야 합니다. 그렇게 옛 질서가 심판받고 끝날 때 새로운 질서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종말’과 ‘새 창조’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하나가 끝나는 것은 다른 하나가 시작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한 사람 안에도 여러 차례 ‘마지막 때’가 있습니다. 이전까지 자기를 지배하던 어떤 사랑과 사고방식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지점에 이르고, 주님의 진리 앞에서 그것이 심판받아 무너지는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랫동안 자기 의를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 어느 시험을 통하여 ‘내가 옳다는 것’을 사랑한 것이 실제로는 주님과 진리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 우월감을 사랑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될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은 매우 고통스럽지만 영적으로는 하나의 작은 ‘종말’입니다. 이전의 자아 질서가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끝에서 새로운 겸손과 새로운 사랑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끝’은 반드시 절망적인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끝내시는 것은 인간 자체가 아니라 악의 지배이며, 거짓 자체이며, 더 이상 선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 낡은 영적 질서입니다. 이 점을 놓치면 종말론은 공포의 교리가 되지만, 이 점을 붙들면 종말론은 소망의 교리가 됩니다. 심판은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니라 질서 회복을 위한 구별이며, 낡은 교회의 끝은 새 교회의 시작을 준비합니다.

 

이 사경회가 앞으로 종말의 여러 징조와 요한계시록의 사건들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다루게 되더라도,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기본 원리를 계속 붙들 필요가 있습니다. 문자적 사건이 무엇인가를 논하기 전에 그것이 어떤 영적 상태를 가리키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단순한 미래 사건의 암호표가 아니라 교회가 어떻게 진리에서 멀어지고, 악과 거짓이 어떻게 그 안에서 세력을 얻으며, 주님께서 어떻게 그것들을 심판하시고 마침내 새 교회를 세우시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에게 ‘최후의 심판’은 지구가 불타 없어지는 날이 아닙니다. 영계에서 오랫동안 형성되어 온 거짓된 영적 질서가 주님의 신적 진리에 의해 드러나고 분리되는 사건입니다. 선한 자와 악한 자가 겉으로 뒤섞여 있던 상태가 끝나고, 각자가 실제로 사랑하는 것에 따라 질서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판’의 본질은 주님께서 사람들을 임의로 천국과 지옥에 보내시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각 사람의 내적 사랑이 드러나고, 그 사랑과 상응하는 곳으로 스스로 향하게 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말세’를 바라보는 태도에도 중요한 차이를 만듭니다. 종말을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단지 미래의 재난을 피할 준비가 안 된 사람이 아니라, 악을 사랑하면서 그것을 진리로 가장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 하며, 자기 악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으로 거절하려는 사람에게 심판은 본질적으로 두려움의 소식이 아닙니다. 진실한 것이 거짓된 것에서 분리되고, 억눌렸던 선이 자유롭게 되는 질서의 회복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이 사경회가 왜 ‘종말론’과 ‘영적 성장’을 하나의 교재 안에서 연결하는지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하나는 세계의 마지막을 다루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성화를 다루므로 전혀 다른 주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둘이 매우 깊게 연결됩니다. 교회 전체에서 일어나는 심판의 원리가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거짓이 드러나고, 악이 분리되고, 선과 진리가 새로운 질서를 이루는 과정이 개인에게서는 거듭남이며, 교회 전체의 차원에서는 한 교회의 종말과 새 교회의 시작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라는 강사의 질문에는 두 가지 차원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실제 교회와 사회의 상태를 분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지금 어떤 영적 시대를 살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내 신앙은 아직 애굽인가, 광야인가, 가나안을 향해 가고 있는가 하는 식으로 자기 상태를 살피는 것도 가능하겠습니다. 다만 이것을 지나치게 기계적인 단계표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의 거듭남은 단순히 한 단계를 완전히 졸업한 뒤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직선적 과정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상당히 거듭난 사람에게도 새로운 광야가 올 수 있고, 이전보다 더 깊은 층의 자기애가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앞으로 이 사경회가 제시하는 ‘영적 성장의 단계’를 읽을 때에도 중요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단계와 질서를 보는 것은 매우 유익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거듭남에는 분명한 질서가 있다고 말합니다. 먼저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 보며, 시험을 거치고, 진리가 의지와 결합하면서 선이 되고, 마침내 사람은 선에서 진리를 보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외적 사건이 똑같은 순서로 일어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유전적 성향과 환경, 자유, 합리성, 쓰임을 모두 고려하여 개별적으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이 사경회가 강조하는 ‘모형적 진리’를 사용할 때도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은 거듭남의 놀라운 표상입니다. 실제로 이 사경회의 영적 성장론은 이스라엘의 과정을 ‘성경에 감춰진 보고’이자 ‘성경을 해석하는 설계도’로 강하게 강조합니다. 이 직관에는 귀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설계도’를 지나치게 외적인 도식으로 고정하면 모든 성도의 삶을 하나의 동일한 시간표에 맞추려는 위험도 생길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거듭남을 표상한다는 것은 ‘당신에게도 반드시 자연적 사건 A가 일어난 다음 사건 B가 세 번 일어나고 그 뒤 사건 C가 일어나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사건들 안에 담긴 영적 상태와 질서가 보편적이라는 뜻입니다. 속박에서 해방되는 상태, 시험을 통하여 악이 드러나는 상태, 주님의 공급을 배우는 상태, 자기 힘을 내려놓는 상태, 선과 진리가 결합되는 상태 등이 모든 거듭남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외적 모습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내적 질서에는 상응이 있습니다.

 

이 구별은 이후 강의에서 매우 중요해질 것입니다. 이 사경회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세 차례 큰 연단’을 받은 것을 성도들도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영적 성장의 원리로 강하게 적용합니다. 실제 다른 강의에서는 ‘광야에서 세 차례 연단의 과정을 반드시 받아야 익은 열매가 되어 천국 곡간에 추수될 수 있다’고까지 설명합니다. 이 가르침의 중심에는 ‘구원받았다고 해서 영적 성장이 끝난 것이 아니며 반드시 시험과 정결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매우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세 차례’라는 자연적 횟수를 모든 개인에게 문자적으로 적용하기보다, ‘셋’이 나타내는 완전한 과정과 그 안의 영적 질서를 보는 편이 더 적절합니다.

 

말씀의 숫자는 단순한 산술 이상의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셋’은 시작과 진행과 완성이라는 하나의 충만한 과정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세 차례 연단’을 꼭 모든 사람이 세 번의 구별 가능한 대형 사건을 경험해야 한다는 공식으로 이해하기보다, 거듭남에는 시험을 통한 충분하고 완전한 정결의 과정이 있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 사경회의 귀한 강조점을 보존하면서도 그것을 지나치게 경직된 단계론으로 만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말세’의 문제와 ‘광야 연단’의 문제가 다시 만납니다. 교회의 마지막 상태도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있지만 점차 선에서 분리되고, 진리를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하게 되며, 마침내 교회의 외형은 남아 있어도 그 안에 사랑과 체어리티가 거의 사라지는 상태까지 진행될 수 있습니다. 개인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자기 명예와 이익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하면 그 진리는 오히려 자기 악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가장 위험한 상태는 ‘진리를 전혀 모르는 상태’만이 아닙니다. 진리를 많이 알면서도 그것을 살지 않는 상태가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지식은 많지만 사랑이 없고, 교리는 정확하다고 자부하지만 체어리티가 없으며, 종말의 징조는 잘 분별하면서 자기 안의 악은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지속되면 신앙은 점점 외적인 것이 되고, 결국 진리와 선의 결합이 끊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교회의 ‘끝’은 바로 이러한 분리가 완성되는 상태와 깊이 관련됩니다.

 

따라서 종말론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태도는 공포도 아니고 호기심도 아니며 겸손일 것입니다. ‘나는 마지막 때의 비밀을 안다’는 의식이 커질수록 오히려 위험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많이 알수록 그 진리가 자기 삶을 더 엄격하게 비추도록 허용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바벨론을 밖에서만 찾지 않고 내 안의 지배욕을 보고, 짐승을 밖에서만 찾지 않고 자연적 추론이 악한 사랑을 섬기는 모습을 보며, 거짓 선지자를 밖에서만 찾지 않고 자기 욕망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려는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계시록이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책이 아니라 나를 거듭나게 하는 말씀이 됩니다.

 

이런 관점은 ‘교회가 세상을 걱정해야 하는데 세상이 교회를 걱정한다’는 강사의 첫 진단을 다시 우리 자신에게 돌려놓게 합니다. 교회의 회복은 먼저 세상을 향해 더 큰 목소리를 내는 데서 시작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다시 교회다워지는 데서 시작됩니다. 진리를 말하면서 선을 행하고, 주님을 고백하면서 이웃을 사랑하며, 권력을 얻으려 하기보다 섬기고, 자기 교회의 성공보다 주님의 나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때 교회는 다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점은 시흥영성수련원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온 ‘연단’, ‘자기부인’, ‘성결’이라는 강조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이 전통이 단순히 ‘마지막 때가 가까웠으니 세상을 피하자’는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고, ‘그러므로 먼저 내가 정결해져야 한다’는 방향을 강하게 붙들어 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종말론이 외부 세계에 대한 공포만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성결을 요구한다면 적어도 그 방향에는 중요한 영적 가치가 있습니다. 다만 그 성결 역시 특별한 집단의 우월성을 만드는 방향이 아니라 더 깊은 겸손과 체어리티로 열매 맺어야 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진정한 새 교회는 단순히 새로운 조직이 등장하는 것으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사람 안에서 주님을 향한 새로운 사랑과 말씀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옛 교회의 끝과 새 교회의 시작은 역사적으로도 일어나지만 동시에 인간의 내면에서도 일어납니다. 내가 알고 있던 신앙이 무너지고 더 깊은 진리가 열리며, 그 진리가 삶으로 들어가 새로운 사랑을 형성할 때 내 안에도 하나의 ‘새 교회’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말세’를 말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날짜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상태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언제 끝나는가?’보다 ‘무엇이 끝나고 있는가?’가 중요하고, ‘무슨 사건이 일어날 것인가?’보다 ‘주님께서 무엇을 새롭게 세우고 계시는가?’가 중요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종말론은 어둡고 무서운 교리가 아니라 놀랍도록 희망적인 교리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끝내기 위해 끝내시는 분이 아니라 새롭게 하시기 위해 낡은 것을 끝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강 3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말세로 진단하고 교회의 타락과 세상의 혼란 속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는 이 사경회의 종말론적 문제의식은 신앙을 안일함에서 깨운다는 점에서 귀하게 받을 수 있으며, 이를 스베덴보리의 빛에서 더 깊이 읽으면 말세란 단순히 지구의 물리적 종말이나 미래 재난의 시간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 무너져 한 교회의 영적 기능이 끝에 이르는 상태이고, 심판은 그 거짓된 질서를 드러내고 분리하여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세우시는 과정이며, 이 동일한 아르카나는 개인의 거듭남 안에서도 옛 자기애의 질서가 끝나고 주님의 선과 진리가 새로운 질서를 이루는 과정으로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종말론을 배우면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마지막 때를 모르는 것’만이 아닙니다. 어쩌면 더 위험한 것은 마지막 때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정작 자기 안에서 끝나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세상의 징조는 예민하게 살피면서 자기 마음의 징조에는 둔감할 수 있습니다. 전쟁과 지진과 국제정세는 분석하면서 자기 안에서 사랑이 식어 가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의 몰락은 기다리면서 자기 안의 지배욕은 그대로 둘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먼저 ‘나’에게 옵니다. 종말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누가 짐승인가?’를 묻기 전에 ‘내 자연적 인간은 무엇을 섬기고 있는가?’를 묻게 하고, ‘바벨론은 어디인가?’를 묻기 전에 ‘나는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사람 위에 서고 싶어 하지는 않는가?’를 묻게 하며, ‘주님은 언제 오시는가?’를 묻기 전에 ‘나는 오늘 주님께서 내 삶 안으로 오실 길을 준비하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그렇게 종말론을 읽을 때 ‘말세’는 남을 두렵게 하는 말이 아니라 나를 깨어 있게 하는 말이 됩니다. ‘심판’은 남에게 내릴 형벌이 아니라 내 안의 거짓이 진리 앞에서 드러나는 은혜가 되고, ‘재림’은 먼 미래에만 기다리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새로운 빛과 권능으로 사람과 교회 안에 임하는 사건으로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첫 강의가 처음부터 강조해 온 ‘밝은 빛’이라는 표현도 가장 깊은 뜻을 얻게 됩니다. 밝은 빛은 종말의 비밀을 남보다 더 많이 아는 빛이 아니라, 그 빛 앞에서 먼저 자기 자신을 보고 회개하며, 마침내 그 진리가 선한 삶이 되어 세상에 비치는 빛입니다.



1강 4부

교회 시대, 공중강림, 지상재림과 이스라엘의 고토 귀환 : 종말의 시간표에서 교회의 영적 상태로

1강 4부에서는 앞서 전체 교재의 구조와 ‘영적 성장론’을 소개하던 강의가 이제 본격적인 종말론의 용어와 시간 구조로 들어갑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와 영적 성장론을 종합하여 요한계시록을 살펴보겠다고 말한 뒤, ‘요한계시록은 과학적이고 질서 정연하며 논리적’이라고 강조하고, 이어 자신이 사용하는 종말론의 주요 용어들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첫 번째가 ‘교회 시대’입니다. 강사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께서 강림하시고 교회가 세워진 때부터 예수님의 지상 재림 때까지를 ‘교회 시대’라고 부르며, 지금도 이 교회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는 교회들이 등장하지만 4장 이후에는 ‘교회’라는 표현은 보이지 않고 성도들이 등장한다는 점도 자신의 종말론적 구조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단서로 제시합니다.

 

여기서부터 이 사경회의 종말론을 이해하는 중요한 특징이 드러납니다. 강사는 성경의 마지막 역사를 하나의 시간축 위에 배열합니다. ‘교회 시대-공중강림-휴거-대환란-지상재림-천년왕국’과 같은 구조입니다. 특히 재림을 한 번의 단일 사건으로만 보지 않고 ‘공중강림’과 ‘지상재림’으로 구별합니다. 공중강림은 주님께서 ‘도적같이’ 은밀하게 오셔서 준비된 성도들을 휴거시키는 사건이고, 지상재림은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이후의 거의 모든 계시록 해석이 이 틀 위에서 진행되므로, 첫 강의에서 이 용어를 먼저 설명하는 것은 강사의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작업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상당히 큰 해석의 차이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우선 강사의 의도를 존중해서 보면, 이 시간표의 목적은 단순히 미래 사건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 ‘그러므로 준비해야 한다’, ‘교회 시대는 무한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긴장을 성도들에게 주려는 것입니다. 이후 강의에서 계속 ‘익은 열매’, ‘이기는 자’, ‘광야 연단’, ‘정결’, ‘휴거 준비’를 강조하는 것도 이러한 종말론적 긴장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그 시간표의 세부 해석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 아래에 있는 ‘지금의 신앙 상태를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요청까지 함께 보아야 공정한 해설이 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 ‘교회 시대’는 단순히 오순절 이후 어느 날까지 이어지는 달력상의 기간만으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교회’란 외적인 조직이나 종파보다 더 깊은 의미에서 주님을 인정하고 말씀에서 진리를 받아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시작과 끝도 단순히 조직의 설립과 소멸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선과 진리의 결합이 존재하는 동안에는 교회가 살아 있지만, 진리는 많아도 선이 사라지고 체어리티가 소멸하면 외적인 교회는 그대로 남아 있어도 내적으로는 마지막 상태에 접근합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교회 시대가 언제 끝나는가?’라는 질문이 ‘교회라는 조직이 어느 날 사라지는가?’보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 사랑이 언제 더 이상 교회를 이루지 못할 정도로 소멸하는가?’라는 질문으로 깊어집니다.

 

강사는 이어 ‘말세’, ‘종말’, ‘마지막 때’를 설명하면서 대환란을 예수님께서 죄악 세상을 심판하시는 기간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다시 심판의 의미를 내적으로 가져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마지막 심판은 자연계의 지구가 파괴되는 과정이나 일정 기간 동안 자연재앙이 집중되는 사건에 중심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계에서 선과 악, 참된 신앙과 거짓된 신앙이 더 이상 함께 뒤섞여 있을 수 없게 되어 분리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개인에게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사람 안에서 진리가 들어오면 그 진리는 단순히 지식을 더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동안 숨어 있던 악과 거짓을 드러내어 분별하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심판은 먼저 ‘빛이 비추어 감추어진 상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대환란’ 역시 단지 미래의 극심한 자연적 재난으로만 한정하기보다, 교회에서 진리가 심각하게 왜곡되고 선이 고갈되어 영적 생명이 큰 위기를 겪는 상태로 읽을 수 있습니다.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환난은 내면의 선과 악이 충돌하는 시험의 상태로 나타납니다. 사람은 진리를 알고 난 뒤 오히려 자기 안의 악 때문에 더 큰 갈등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죄를 죄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안했던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인 뒤에는 그동안 자연스럽게 즐기던 것과 싸우기 시작합니다. 겉으로는 더 힘들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영적 생명이 깨어났기 때문에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강사의 ‘공중강림’과 ‘지상재림’ 구분은 스베덴보리와 더욱 분명히 갈라지는 지점입니다. 강사는 주님께서 먼저 은밀히 공중에 강림하시고, 준비된 성도들을 휴거한 뒤 대환란이 지나가고, 마지막에는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지상에 재림하신다고 설명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재림을 주님께서 다시 자연적 육체를 입고 공간적으로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사건으로 보지 않습니다. 주님의 초림은 실제 성육신이었고, 그분은 인성을 신성하게 하신 뒤 다시 육체를 입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재림은 말씀의 신적 진리가 새롭게 열리고, 그 진리 안에서 주님께서 교회에 새롭게 나타나시는 영적 강림입니다.

 

이 차이는 단지 ‘공중에 오시느냐 아니냐’의 작은 차이가 아닙니다. 재림을 기다리는 방식 자체가 달라집니다. 문자적 미래주의에서는 ‘어느 날 주님께서 밖에서 오신다’는 사건을 기다리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주님께서 말씀의 진리를 통하여 지금 내 이해와 의지 안으로 오시도록 나는 준비되어 있는가?’가 더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물론 이것이 주님의 재림을 단순히 개인의 내적 체험으로 축소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재림을 교회 전체에 관련된 실제 신적 사건으로 봅니다. 다만 그 방식이 자연계의 공간적 이동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과 신적 진리의 개방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도적같이 오신다’는 말씀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강사는 도적이 미리 날짜를 알려 주지 않는 것처럼 공중강림도 은밀하고 갑작스럽게 일어난다는 뜻으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도적같이’라는 표현을 주님께서 실제로 숨어 들어오시는 방식의 묘사라기보다, 사람이 영적으로 잠들어 있을 때 심판과 상태의 변화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닥칠 수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날짜를 모른다는 사실보다 깨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깨어 있다’는 것은 종말 뉴스에 민감한 것이 아니라 오늘 받은 진리를 삶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사경회의 실제적 강조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강사가 공중강림과 휴거를 말하는 목적은 결국 성도들에게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준비의 내용을 더 깊게 묻습니다. 준비란 무엇인가? 마지막 때에 관한 도표를 정확하게 아는 것인가, 아니면 악을 죄로 알고 실제로 피하며 선을 행하는 것인가? 말씀 전체의 관점에서는 후자가 본질입니다. 종말론의 시간표를 정확히 알았더라도 자기애와 미움과 탐욕을 생명으로 삼고 있다면 그 지식 자체가 천국의 상태를 만들지는 못합니다. 반대로 종말의 시간표에 관하여 거의 알지 못하더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의 선을 위해 살아가며 자기 악을 회개하는 사람 안에는 천국의 상태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강사가 앞으로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휴거’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강사는 모든 신자가 자동적으로 휴거되는 것이 아니라 일부 준비된 성도만 휴거된다는 입장을 제시하고, 이것을 뒤에서 ‘익은 열매’의 추수와 연결하겠다고 예고합니다. 실제로 강의에서는 ‘모든 성도가 다 휴거되는가, 일부만 휴거되는가’를 하나의 중요한 쟁점으로 제기합니다. 이러한 구분은 성도에게 긴장감을 주고 ‘나는 준비되었는가?’를 묻게 만드는 기능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자연적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 어느 날 지상에서 공중으로 들어 올려지는 휴거는 종말론의 중심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들려 올라감’은 사람의 마음과 사랑이 자연적·자기중심적인 것에서 영적·천국적인 것으로 높아지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높음’과 ‘낮음’은 영계의 상태와 상응합니다. 높은 곳은 더 내적이고 천국적인 사랑의 상태를, 낮은 곳은 더 외적이고 자연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주님을 영접하러 올라간다’는 말씀에는 사람의 영적 상태가 주님과 결합할 수 있는 질서로 높아진다는 깊은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누가 휴거되는가?’라는 강사의 질문을 ‘누가 주님과 결합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옮겨 볼 수 있습니다. 답은 특별한 종말 지식을 가진 사람도, 특정 교단에 속한 사람도, 신비한 체험을 한 사람도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자신의 생명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강사가 ‘익은 열매’를 그토록 강조하는 것과 뜻밖에 깊이 만납니다. 다만 익은 열매를 공중휴거의 선발 자격으로 보기보다,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실제 삶이 된 상태로 읽는 것입니다.

 

이제 강의는 종말의 징조로 넘어가면서 첫 번째 징조로 ‘이스라엘 민족의 고토 귀환’을 제시합니다. 강사는 에스겔 39장 28~29절의 ‘그들을 모아 고토로 돌아오게 하고’, ‘내 신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쏟았다’는 말씀을 인용하고, 이것을 고레스 시대의 바벨론 귀환으로 끝난 예언이 아니라 마지막 때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본토로 돌아오고 장차 구원받게 될 사건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귀환 자체를 ‘종말의 첫 번째 징조’라고 봅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특별히 큰 차이를 보이는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에서 ‘이스라엘’, ‘유다’, ‘예루살렘’, ‘시온’을 읽을 때 혈통적인 민족 자체에 영원한 영적 특권이 부여되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민족은 교회를 표상하도록 선택된 민족이며, 그 민족의 역사와 제도와 땅과 성전은 주님의 나라와 교회의 영적 실재를 나타내기 위한 표상적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이스라엘이 돌아온다’는 예언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특정 혈통의 사람들이 특정 영토로 귀환하는 정치적 사건보다, 교회 가운데 잃어버렸던 진리와 선이 회복되고 사람들이 다시 주님의 질서 안으로 모이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유대 민족이나 현대 이스라엘 국가를 무시하거나 그 역사적 의미를 부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다루는 것은 ‘예언의 속뜻’입니다. 자연계의 역사에는 역사적 의미가 있지만 말씀의 영원한 거룩성은 어느 한 시대의 정치적 사건만으로 소진될 수 없습니다. 만일 에스겔의 말씀을 20세기 이후 유대인들의 특정 지역 귀환으로만 완성된 것으로 본다면, 그 사건이 지나간 뒤에는 그 말씀이 더 이상 모든 시대 모든 인간을 향해 말할 수 있는 영원한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상응으로 보면 ‘고토로 돌아옴’은 지금도 모든 거듭나는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고토’는 주님께서 주시는 천국적 질서, 곧 교회의 선과 진리의 상태를 표상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 사로잡혀 ‘이방 땅’과 같은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그 진리를 자기 욕망에 종속시키면 내적으로는 본래의 질서에서 떠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사람을 회개로 이끄시고, 마음을 정결하게 하시며, 선과 진리를 다시 결합시키실 때 그는 영적으로 ‘고토로 돌아옵니다’.

 

강사가 이어 읽는 에스겔 36장의 말씀은 오히려 이러한 속뜻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며’,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고 새 영을 너희 속에 두며’,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고’,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라’는 내용입니다. 강사는 이것을 장차 고토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여 그들이 구원받는 예언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이 말씀은 거듭남의 거의 완전한 그림처럼 보입니다.

 

‘맑은 물’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사람의 잘못된 생각과 삶을 씻습니다. ‘새 마음’은 새로운 의지, 곧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는 의지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새 영’은 그 선과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이해와 진리의 생명을 생각하게 합니다. ‘돌 같은 마음’은 진리가 들어가도 움직이지 않는 굳은 자기 의지이며, ‘부드러운 마음’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이는 의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율례를 행한다’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최종 목적이 지식이나 체험이 아니라 삶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보면 강사가 ‘이스라엘의 고토 귀환’을 종말의 징조로 읽는 것과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으면서도, 그 강사가 인용한 예언 본문 자체는 오히려 매우 깊은 거듭남의 메시지를 품고 있습니다. 자연적 이스라엘이 어디로 이동하느냐보다 더 내적인 문제는 ‘이스라엘’이 표상하는 교회가 다시 주님의 선과 진리 안으로 돌아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에게서는 ‘내 마음이 다시 주님의 질서로 돌아오고 있는가?’가 됩니다.

 

이 차이는 이후 계시록을 읽을 때 계속 반복될 것입니다. 강사는 ‘이스라엘’을 상당히 문자적으로 혈통적 유대 민족으로 읽고, 마지막 때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그 민족이 다시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고 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이스라엘’을 교회와 영적 인간, 곧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표상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회복’도 영적 교회의 회복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서 어느 한쪽의 언어를 가볍게 무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자적 의미는 말씀의 기초이고, 역사적 이스라엘은 실제로 성경 계시의 중요한 역사적 그릇이었습니다. 주님도 그 민족 가운데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표상의 목적은 그 민족 자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보편적인 영적 실재를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성막이 실제 성막이었다고 해서 성막의 속뜻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실제 역사도 말씀의 더 깊은 상응을 담는 그릇이 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마지막 때 이스라엘이 돌아온다’는 말도 더욱 넓어집니다. 한 교회가 진리를 잃고 외적인 종교 형식만 남았을 때, 주님께서는 새로운 사람들 가운데 다시 선과 진리를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흩어진 ‘이스라엘’을 모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다른 교파와 문화와 배경을 가지고 있어도 주님을 한 분으로 인정하고,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며, 이웃 사랑의 삶을 살아갈 때 영적으로는 하나의 이스라엘로 모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말의 가장 중요한 징조를 ‘특정 민족이 특정 영토로 돌아왔는가?’만으로 판단하기보다 ‘주님의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가 다시 결합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옮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개인적으로는 ‘흩어져 있던 내 생각과 욕망들이 주님의 질서 아래 다시 모이고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주일의 신앙과 평일의 생활이 따로 있고, 교회의 나와 가정의 내가 따로 있고, 신학적 지식과 실제 인간관계가 따로 있다면 아직 ‘흩어진 이스라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삶 전체를 하나로 묶기 시작하면 영적으로 고토 귀환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종말의 징조는 밖을 두리번거리는 신호가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는 신호가 됩니다. 강사가 현대 역사 속에서 종말의 표지를 찾는 긴장감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사람과 교회의 내적 상태로 가져옵니다. 그렇다고 깨어 있음의 긴장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엄격해집니다. 국제정세는 내가 바꿀 수 없지만 오늘 내 안의 미움과 자기 의를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는 것은 내가 응답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1강 4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성령 강림부터 지상 재림까지를 교회 시대로 보고, 공중강림과 휴거, 대환란과 지상재림을 구별하며, 이스라엘 민족의 고토 귀환을 종말의 첫 징조로 읽는 강사의 종말론은 성도들에게 마지막을 준비하라는 강한 긴장을 제공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빛에서는 교회의 마지막은 먼저 선과 진리의 결합이 소멸하는 영적 상태이며, 주님의 재림은 말씀의 신적 진리가 새롭게 열리는 강림이고, 이스라엘의 귀환은 교회와 인간 안에서 흩어지고 잃어버렸던 선과 진리가 다시 주님의 질서 안으로 모이는 회복의 아르카나로 읽을 때 그 의미가 더욱 보편적이고 내적으로 열립니다.’

 

그리고 이번 4부에서 특별히 주목하고 싶은 것은 강사가 에스겔 36장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정결’, ‘새 마음’, ‘새 영’, ‘하나님의 영’, ‘율례를 행함’을 모두 하나로 연결했다는 점입니다. 종말론의 한복판에서 갑자기 거듭남의 언어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이라기보다 어쩌면 이 사경회의 중요한 특징을 보여 줍니다. 종말의 징조를 말하지만 결국 목표는 사람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돌아오는 이유도 단지 땅을 되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오고 정결해지기 위해서라고 강사는 이해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바로 그 지점을 붙들어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돌 같은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뀐다.’ 이것보다 더 정확한 거듭남의 그림을 찾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인격을 없애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애 때문에 굳어져 주님의 선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의지를 부드럽게 하시고, 진리를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십니다. 그리고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라’고 합니다. 생명수의 유입도, 신인합일도, 광야 연단도 결국 여기에 도달해야 합니다. 말씀을 실제로 기쁘게 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말을 준비하는 가장 깊은 준비는 비상식량이나 세계정세의 해석이 아니라 ‘새 마음’일 것입니다. 공중강림의 시점을 정확히 아는 것보다 주님께서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을 씻고 계시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어느 민족이 어느 땅으로 돌아오는지를 보는 것보다 내 의지가 주님께 돌아가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 더 직접적인 영적 과제입니다. 결국 종말론이 참으로 주님에게서 온 진리라면 사람을 공포와 호기심에 묶어 두지 않고 회개와 사랑과 선한 삶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나타날 때, 이 사경회가 처음부터 말한 ‘밝은 진리’는 비로소 지식의 밝음이 아니라 생명의 밝음이 됩니다.



1강 5부

이스라엘의 회복과 ‘온 이스라엘의 구원’ : 혈통적 이스라엘에서 영적 이스라엘로

1강 5부에서는 앞서 시작된 ‘종말의 첫 번째 징조’, 곧 이스라엘 민족의 고토 귀환에 대한 설명이 한층 구체화됩니다. 강사는 에스겔 39장의 ‘그들을 모아 고토로 돌아오게 하고’, ‘내 신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쏟았음이니라’는 말씀을 근거로, 이 예언을 고레스 시대의 바벨론 귀환으로 끝난 말씀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오랜 흩어짐 끝에 다시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돌아오고 국가를 세운 현대의 역사적 귀환, 그리고 장차 그들에게 성령이 부어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되는 사건까지 하나의 종말론적 과정으로 연결합니다. 강사의 체계에서 ‘고토 귀환’은 단순한 민족적·정치적 귀환이 아니라 마지막 때 이스라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준비 과정인 셈입니다.

 

강사는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 구원받느냐?’ 그리고 교회 시대 동안에는 이방인의 구원이 이루어지지만,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채워지고 교회 시대가 끝나면 성령께서 두 증인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에스겔 36장 24절 이하의 ‘열국 중에서 모아 고토에 돌아가게 하겠다’, ‘맑은 물을 뿌려 정결하게 하겠다’, ‘새 마음과 새 영을 주겠다’,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는 말씀을 이 미래적 이스라엘 회복의 예언으로 읽습니다.

 

이 대목에서 강사의 종말론적 체계는 매우 선명해집니다. ‘이스라엘의 흩어짐-고토 귀환-교회 시대의 완성-공중강림-이스라엘에 대한 성령의 역사-이스라엘의 회개와 구원-대환란’이 하나의 연속적인 역사적 시간표를 형성합니다. 실제로 강사는 로마서 11장의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이 구조에 넣고, 이방인의 구원이 충만해져 교회 시대가 끝난 직후 공중강림하신 주님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해석을 먼저 그 자체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이스라엘 민족을 단순히 종말의 시간표를 알려 주는 표지판으로만 보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약속하신 백성을 끝내 버리지 않으시며, 그들을 다시 모으고 회개시켜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해석의 정서적 중심에는 심판보다 회복이 있습니다. 흩어진 백성을 다시 모으시고,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며, 하나님의 영을 그들 안에 두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적용할 때에는 강사의 해석을 단순히 ‘틀렸다’고 밀어내기보다, 말씀의 의미가 어디까지 더 깊어질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이스라엘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다만 그 중요성의 성격이 다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 민족 자체가 다른 민족보다 내적으로 거룩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교회와 천국의 것들을 외적으로 표상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선택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땅, 성막과 성전, 제사, 절기, 왕과 제사장, 출애굽과 광야생활, 가나안 정복에 이르는 모든 것이 더 깊은 영적 실재를 표상하는 그릇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이스라엘’이 등장할 때 가장 깊은 속뜻에서는 언제나 혈통적 이스라엘 민족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주님의 교회, 더 구체적으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영적 인간을 표상합니다. ‘유다’가 천적인 것, 곧 사랑의 선과 관련되는 경우가 많다면, ‘이스라엘’은 영적인 것, 곧 선에서 나오는 진리와 신앙의 삶과 관련하여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흩어진 이스라엘이 다시 모인다는 말씀은 어느 시대 어느 민족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영원한 아르카나를 품게 됩니다.

 

여기에서 ‘흩어짐’이라는 상태부터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내면은 죄와 자기애에 의해 실제로 흩어집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원하는 것이 다르고, 주일에 고백하는 것과 평일에 살아가는 것이 다르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동시에 자기 명예와 이익을 삶의 중심에 둘 수 있습니다. 진리는 한쪽에 있고 사랑은 다른 쪽에 있으며, 신앙과 삶이 서로 떨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포로됨’이며 ‘흩어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때에는 이 흩어진 것들을 다시 모으십니다. 진리와 선을 결합시키고, 이해성과 의지를 하나의 질서 아래 두시며,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을 실제로 사랑하고 행할 수 있도록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돌아가서’라는 에스겔의 말씀은 한 민족의 지리적 이동이라는 문자적 장면을 넘어, 주님께서 흩어진 인간의 내면을 다시 하나로 모으시는 거듭남의 과정을 담게 됩니다.

 

그리고 에스겔 36장은 바로 그 귀환이 무엇인지를 놀랍도록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겠다’고 합니다. 말씀에서 ‘물’은 일반적으로 진리, 특히 사람이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주어지는 신앙의 진리와 상응합니다. 물이 육체의 더러움을 씻듯 진리는 인간에게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 보여 줌으로써 그의 삶을 정결하게 합니다. 진리가 없다면 사람은 자기 욕망을 선이라고 착각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진리가 들어올 때 비로소 ‘내가 사랑하고 있는 이것이 사실은 주님의 질서에 어긋나는 것이구나’ 하고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물로 씻는 것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어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고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더욱 깊은 단계입니다. 단순히 잘못된 행동을 고치는 것을 넘어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는가가 바뀌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면 안 되니까’ 악을 피합니다. 진리가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지면 악 자체를 싫어하고 선을 기뻐하는 새로운 의지가 형성됩니다. 이것이 ‘새 마음’이라는 표현에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깊은 변화입니다.

 

특히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는 말씀은 거듭남의 본질을 매우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돌 같은 마음은 단지 성격이 냉정하다는 뜻으로만 볼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진리를 들어도 자기 뜻을 내려놓지 않는 완고한 proprium의 상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옳은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나는 내 방식대로 하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이해성까지 들어왔지만 의지가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굳은 마음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마음을 억지로 깨뜨려 로봇처럼 순종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자유를 보존하면서 시험과 회개와 삶을 통해 점차 부드럽게 하십니다. 처음에는 마지못해 용서하던 사람이 나중에는 용서하는 것을 기뻐하고, 처음에는 의무 때문에 섬기던 사람이 나중에는 다른 사람의 선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섬기게 됩니다. 바로 그때 진리가 더 이상 밖에서 명령하는 율법으로만 남지 않고 사람의 새 의지 안에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에스겔의 말씀은 마지막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라고 이어집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행하게 하리니’입니다. 결국 모든 정결과 새 마음과 새 영은 삶으로 귀결됩니다. 이것은 첫 강의에서 계속 반복되어 온 ‘밝은 진리’, ‘영적 성장’, ‘광야 연단’, ‘신인합일’이라는 주제들을 하나로 묶어 줍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사랑이 되고 사랑이 행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는 이 사경회의 강조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가 상당히 깊게 만납니다. 차이는 주로 그 예언의 대상을 어디에 두느냐에 있습니다. 강사는 에스겔 36장을 마지막 때 혈통적 이스라엘 민족에게 성령이 부어져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될 미래 사건으로 읽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것을 주님께서 모든 시대의 교회와 모든 거듭나는 인간 안에서 행하시는 영적 회복의 말씀으로 읽습니다. 전자는 ‘누구에게 언제 일어날 것인가?’를 중심으로 보고, 후자는 ‘이 말씀은 인간 안에서 어떤 영적 상태의 변화를 말하는가?’를 중심으로 봅니다.

 

강사는 이어 로마서 11장의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를 혈통적 이스라엘의 미래적 구원과 연결합니다. 여기에서도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갖는 표상성을 먼저 봅니다. 주님의 나라는 혈통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어느 민족에서 태어났는지, 어느 교파에 속했는지, 어떤 종교적 외형을 가졌는지가 그의 영원한 상태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어떤 선과 진리를 받아들였고 어떤 사랑으로 살았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온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을 가장 내적으로 읽으면 주님의 영적 이스라엘, 곧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유대인도 있고 이방인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역사적 이스라엘에 속했다는 사실 때문에 자동적으로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 역사적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천국에서는 혈통이 아니라 사랑이 사람들을 하나로 묶습니다.

 

이 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특정 민족을 다른 민족보다 본질적으로 더 사랑하시고 그 민족에게만 별도의 구원 원리를 적용하시는 것처럼 말씀을 읽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과 섭리를 이해하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며, 태어난 민족과 문화와 시대를 넘어 각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선과 진리를 공급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은 속뜻에서는 모든 시대의 주님의 교회를 향한 약속이 됩니다.

 

그러면서도 역사적 이스라엘의 역할을 가볍게 여길 이유는 없습니다. 바로 그 민족을 통하여 말씀이 보존되었고, 그 민족의 역사와 예배가 천국의 것들을 표상했으며, 무엇보다 주님께서 그 민족 가운데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표상하는 그릇’과 ‘표상되는 실재’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성막이 실제로 거룩한 용도로 사용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주님과 천국과 인간의 내면을 표상했던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 역시 실제 역사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더 높은 영적 실재를 표상했습니다.

 

강의는 이후 현대 이스라엘의 형성 과정을 설명합니다. 19세기 유대인의 귀환 운동, 1890년대 시오니즘 운동, 1917년의 밸푸어 선언, 그리고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을 차례로 언급하면서 이 모든 역사를 유대 민족이 고토로 돌아오는 과정으로 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구별은 꼭 필요합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실제 역사에 속하는 사건들이고, 그 역사적 의미는 역사학과 국제정치의 차원에서 따로 살펴야 합니다. 반면 ‘이 사건들이 에스겔 예언의 직접적 성취이며 종말의 첫 번째 징조인가?’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 자체가 아니라 특정한 종말론적 해석입니다. 둘을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더욱 신중하게 보아야 할 부분은 강사가 코로나 시대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동의 전쟁과 같은 현대의 사건들까지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귀환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과 연결하는 대목입니다. 강사는 여러 국제적 격변의 ‘종국적인’ 목적 가운데 이스라엘 사람들을 고토로 돌아오게 하려는 뜻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특히 조심스러워집니다.

 

신적 섭리는 분명 모든 것을 다스립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특정 전쟁이나 재난에 대해 ‘하나님께서 바로 이 목적 때문에 이것을 일으키셨다’고 단정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에서 주님은 악을 일으키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자유에서 발생한 악과 그 결과를 허용하시고, 허용된 것들이 가능한 한 선한 결과를 향하도록 끊임없이 굽혀 이끄십니다. 이것이 ‘허용의 섭리’입니다.

 

따라서 전쟁으로 사람들이 죽고 삶의 터전을 잃는 현실을 보면서 그 전쟁이 어떤 종말론적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일으키신 사건이라고 쉽게 말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전쟁의 악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악 속에서도 사람의 자유를 보존하시고 가능한 선을 끌어내시는 분입니다. 인간에게는 섭리의 전체 연결고리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특정 사건의 신적 목적을 너무 구체적으로 단정할 때 오히려 인간의 추론을 하나님의 뜻으로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섭리는 대부분 뒤에서, 그리고 인간이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역사합니다. 만일 사람이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신적 이유를 미리 명백하게 알게 된다면 그의 자유가 침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건이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 왜 이것을 하셨는지 나는 정확히 안다’고 말하기보다 ‘이 상황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영원한 선을 위하여 일하고 계신다’고 신뢰하는 편이 더 안전합니다.

 

이 구별은 이 사경회의 영성을 낮추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앞서 강의가 강조했던 ‘하나님의 섭리’를 더욱 깊고 조심스럽게 받아들이기 위한 것입니다. 삶의 모든 환경이 우연만은 아니며 주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섭리하신다는 믿음은 매우 귀합니다. 그러나 섭리를 믿는 것과 섭리의 구체적인 이유를 내가 모두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첫 번째는 신뢰이고, 두 번째는 자칫 인간의 확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다시 ‘고토 귀환’으로 돌아가 보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 표현은 개인의 거듭남에 매우 아름답게 적용됩니다. 인간에게 진정한 ‘고토’는 주님께서 창조하신 질서 안에 있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본래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고 그 생명을 선과 진리의 쓰임으로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proprium이 중심이 되면서 그는 그 본래의 질서에서 떠납니다. 자기 사랑이 왕이 되고 진리는 그 사랑을 섬기는 종이 됩니다. 영적으로는 타국에 포로가 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주님께서 다시 부르십니다. 먼저 진리를 주십니다. ‘맑은 물’을 뿌리십니다. 진리로 자기 상태를 보게 하십니다. 그다음 시험을 통하여 돌 같은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사람은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시험 속에서 자기 안에 얼마나 많은 분노와 시기와 지배욕과 자기 의가 있는지 보게 됩니다. 이것은 고통스럽지만 귀환의 과정입니다. 그 악을 자기 것으로 사랑하지 않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여 거절할 때 조금씩 ‘부드러운 마음’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라’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처음에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힘들었지만 나중에는 선을 행하는 데 기쁨이 생깁니다. 진리가 밖에서 명령하는 상태에서 선이 안에서 흘러나오는 상태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하게 보는 전환입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진리를 통해 선으로 나아가지만, 거듭남이 진행되면 선에서 진리를 보고 행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이스라엘의 귀환’과 앞서 공부한 ‘광야 연단’도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애굽에서 나오는 것은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시작이고, 광야는 아직 남아 있는 proprium이 시험을 통해 드러나고 정돈되는 과정이며,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새로운 질서를 이루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포로 된 이스라엘이 다시 고토로 돌아오는 것은 한때 무너졌던 교회의 질서가 다시 회복되는 또 다른 형상입니다. 말씀 전체가 서로 다른 역사적 장면을 통하여 하나의 거듭남의 아르카나를 반복해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사경회가 이스라엘을 중요하게 보는 이유와 스베덴보리가 이스라엘을 중요하게 보는 이유의 차이를 비교하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 사경회에서는 현대 이스라엘이 ‘종말 시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귀환과 구원이 마지막 때의 시간표를 알려 주는 표지가 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성경의 이스라엘은 ‘거듭남의 지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가 주님과 교회와 인간의 영적 여정을 보여 주는 표상적 역사입니다.

 

전자는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지금 종말의 시간표가 어디까지 왔는가?’를 묻습니다. 후자는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지금 내 영적 여정은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전자는 주로 역사적 시간에 관심을 두고, 후자는 영적 상태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나 둘 모두 이스라엘의 역사가 단순한 고대 민족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관계된다는 점에서는 만납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종말론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까지 바꿉니다. 이스라엘에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이것이 몇 번째 종말 징조인가?’를 계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통해 내 안에서 아직 주님께 돌아오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보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모아 고토로 돌아가게 하겠다’는 말씀 앞에서 ‘주님, 제 안에 흩어진 것들도 다시 모아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맑은 물을 뿌리겠다’는 말씀 앞에서 ‘말씀의 진리로 제 삶을 씻어 주십시오’라고 할 수 있고,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겠다’는 말씀 앞에서는 ‘제가 진리를 알면서도 고집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십시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종말 예언은 미래를 알아맞히는 자료가 아니라 현재 나를 변화시키는 말씀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종말론을 읽을 때 계속 붙들고자 하는 방향입니다. 말씀은 언제나 영원합니다. 어느 한 시대의 정치적 사건 하나가 지나갔다고 해서 그 말씀의 효력이 끝나지 않습니다. 말씀의 문자 안에 담긴 영적 의미가 모든 시대의 교회와 모든 사람에게 계속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1강 5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고토 귀환을 종말의 첫 번째 징조로 보고,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채워진 뒤 공중강림과 대환란의 시작과 함께 혈통적 이스라엘에게 성령이 부어져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며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예언이 성취된다고 보는 강사의 해석은 하나님의 약속과 신실하심을 역사 속에서 붙들려는 강한 종말론적 확신을 보여 주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스라엘이 주님의 교회와 영적 인간을 표상하므로, 흩어진 이스라엘의 귀환은 선과 진리가 분리되어 흩어졌던 교회와 인간이 다시 주님의 질서 안으로 모이고, 맑은 물인 진리로 정결하게 되며, 돌 같은 proprium의 마음이 새 마음으로 바뀌어 마침내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 삶으로 행하게 되는 거듭남과 새 교회의 회복이라는 보편적 아르카나로 열립니다.’

 

그리고 이번 5부에서 가장 깊이 붙들 만한 말씀은 어쩌면 ‘고토’보다도 ‘새 마음’일 것입니다. 고토로 돌아왔는데 마음이 그대로라면 진정한 귀환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땅은 바뀌었는데 사랑이 바뀌지 않을 수 있고, 종교는 바뀌었는데 삶은 그대로일 수 있으며, 교회는 옮겼는데 proprium은 그대로 따라갈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새로운 진리를 발견했는데 그 진리를 가지고 이전보다 더 교만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외적으로는 귀환했어도 내적으로는 아직 포로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의 순서가 의미심장합니다. 모으시고, 돌아오게 하시고, 씻으시고, 새 마음을 주시고, 새 영을 두시고, 마침내 ‘행하게’ 하십니다. 귀환의 완성은 장소가 아니라 생명의 변화입니다. 이 점에서는 이 사경회가 말하는 ‘신인합일’, ‘광야 연단’, ‘성결’, ‘익은 열매’라는 표현들도 결국 하나의 자리에서 만납니다. 주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 받아들여져 실제 삶의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도 깊이 만납니다. 사람이 주님에게 돌아온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종교적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중심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얻을 것인가?’가 중심이던 사람이 ‘무엇이 주님의 뜻이며 이웃에게 선한가?’를 묻게 되고, 자기 생각을 관철하는 데 기쁨을 느끼던 사람이 진리 앞에서 자기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며, 선을 행하고도 자기 공로를 붙들던 사람이 그 선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것이 영적 이스라엘의 귀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먼 미래 어느 민족에게만 남겨진 문장이 아니라, 주님께서 흩어진 모든 선과 진리를 다시 모아 하나의 살아 있는 교회를 이루실 것이라는 소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새 교회는 먼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안에서 시작됩니다. 돌 같은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며, 신앙이 삶과 하나가 되는 곳, 바로 그곳에서 ‘이스라엘의 귀환’은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1강 6부

휴거의 여섯 징조 : 외적 종말의 표적에서 내적 ‘깨어 있음’으로

1강 6부에서는 앞서 이스라엘의 고토 귀환을 종말의 첫 번째 징조로 살펴본 데 이어, 강의의 초점이 ‘휴거가 가까워질 때 나타나는 현상들’로 옮겨갑니다. 강사는 고린도전서 15장의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라는 말씀을 휴거의 대표적인 본문으로 제시하면서, 휴거는 실제로 일어날 것이며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르지만 그때가 가까워졌음을 알려 주는 여러 징조는 알아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에녹과 엘리야가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올라간 사건을 휴거의 예표로 제시합니다. 강사의 관심은 분명합니다. ‘휴거가 정말 있는가?’를 논증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날이 가까운 줄 알고 준비하라’는 데 있습니다.

 

강사가 제시하는 징조들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전쟁과 기근과 지진, 예루살렘 성전산의 이슬람 성전이 없어지고 제3 성전이 세워지는 일,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 공산주의화되고 종교 탄압이 일어나는 일, 세계정부와 화폐의 단일화 및 세계 대통령의 등장,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 그리고 마지막으로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는 일입니다. 이 일들이 점점 현실화되면 성도들은 휴거가 가까웠음을 알고 영적으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강사의 종말론적 그림입니다.

 

여기에서 먼저 한 가지를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부분에는 성경 본문에 직접 기록된 내용과, 그 본문을 현대 정치와 국제정세에 연결한 강사의 해석이 상당히 긴밀하게 섞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24장의 ‘난리와 난리 소문’,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기근과 지진’,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등은 성경 본문에 직접 나오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특정 정치 체제나 국가, 세계 단일정부, 단일화폐, 특정 비밀조직에서 미래의 적그리스도가 출현한다는 설명 등은 그 성경 본문 자체가 직접 말하는 내용이라기보다 강사가 자신의 종말론적 체계 안에서 현실의 사건들과 연결한 해석입니다. 이 둘을 구별해서 듣는 것이 이 강의를 존중하면서도 신중하게 읽는 방법일 것입니다.

 

특히 이 부분에서는 정치적 판단이 상당히 강하게 등장합니다. 강사는 공산주의의 확산을 휴거 직전의 징조와 연결하고, 교회와 목회자는 이에 분명히 맞서야 한다고 강조하며, 심지어 교회가 정치적으로 어느 방향에 서야 하는지까지 매우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또한 당시의 미국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가 적그리스도일 수 없다는 자신의 판단과 함께 미래의 적그리스도가 특정 세력 가운데서 나올 것이라는 전망까지 제시합니다. 이 대목은 이번 재작업에서 특별히 차분하게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의 시대 인식과 문제의식은 그대로 소개하되, 그것을 곧 말씀 자체의 확정적인 속뜻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가장 먼저 달라지는 것은 ‘징조’를 읽는 방식입니다. 말씀에 전쟁이 나온다고 해서 그것이 어느 현대 국가 사이의 전쟁을 직접 예언한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전쟁’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의 영적 싸움을 나타냅니다. 한 인간의 내면에서도 전쟁이 일어나며, 교회 전체에서도 전쟁이 일어납니다. 참된 진리가 거짓된 교리와 충돌하고, 체어리티에 기초한 신앙이 자기애와 지배욕에 기초한 종교성과 충돌합니다. 그러므로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난다’는 말씀은 자연계의 실제 전쟁을 문자적 바탕으로 가지면서도, 속뜻에서는 교회와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의 질서가 무너지고 거짓들이 서로 충돌하는 마지막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계의 전쟁을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쟁은 실제로 끔찍한 악이며 수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줍니다. 그러나 그 전쟁 하나하나를 곧바로 종말 시계의 바늘로 사용하는 것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인류 역사에는 거의 끊임없이 전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이번이 바로 마지막 징조다’라고 판단한다면 말씀의 영원한 의미가 그때그때의 국제정세에 종속될 위험이 있습니다. 말씀은 한 시대의 뉴스보다 훨씬 깊고 영원한 것을 말합니다.

 

강사가 두 번째로 제시하는 제3 성전 문제에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강사는 현재 예루살렘 성전산에 있는 이슬람 성전이 어떤 방식으로든 사라지고 그 자리에 제3 성전이 세워지며, 적그리스도가 그곳에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선언하게 될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이것을 마태복음 24장 15절의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과 연결합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문자적 미래주의 종말론의 한 형태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성전’은 무엇보다 주님의 신적 인성, 그리고 파생적으로 주님의 교회와 사람 안에서 주님이 거하시는 내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곳’에 가증한 것이 선다는 것은 훨씬 더 내적인 경고가 됩니다. 본래 주님과 그분의 선과 진리가 중심이어야 할 자리에 자기애와 거짓이 들어서는 것입니다. 교회가 주님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사람의 권력과 명예를 섬길 수도 있고, 개인이 말씀을 읽으면서도 그 말씀을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외적으로는 여전히 ‘성전’의 모습이 남아 있어도 그 중심에는 다른 것이 서게 됩니다.

 

이것은 오히려 훨씬 가까운 종말의 징조입니다. 예루살렘의 어느 건물이 언제 없어질지를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내 안의 ‘거룩한 곳’에 무엇이 서 있는지는 오늘 살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의 중심에 주님이 계신가, 설교자인 내가 있는가? 교회의 중심에 주님의 나라가 있는가, 조직의 성공이 있는가? 말씀 공부의 중심에 진리를 따라 살려는 마음이 있는가, 남보다 더 많이 안다는 만족이 있는가? 이런 질문 앞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다’는 말씀은 갑자기 매우 개인적이고 엄중한 말씀이 됩니다.

 

강사가 세 번째 징조로 제시하는 정치 체제의 변화 역시 같은 방식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강사는 자유를 억압하고 종교를 탄압하며 국가가 개인의 삶을 통제하는 체제가 확대되는 것을 마지막 때의 징조로 봅니다. 여기에는 ‘자유’에 대한 강한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이 점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게 자유는 인간의 거듭남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유 가운데 진리를 선택하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강제로 선을 행하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영적 생명이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자유를 특정 현대 정치 이념 하나와 그대로 동일시하는 데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가장 깊은 자유는 정치적 제도 이전에 ‘영적 자유’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사랑하여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반대로 가장 깊은 속박은 외적인 정치 제도만이 아니라 자기애와 탐욕과 미움과 거짓에 지배되는 상태입니다. 겉으로는 아무도 나를 억압하지 않아도 탐욕에 사로잡혀 있다면 영적으로는 종입니다. 반대로 외적인 억압 속에서도 주님과 진리를 사랑한다면 내적으로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자유를 지키는 일은 중요하지만, 교회의 복음을 어느 특정 정치 진영과 동일시하는 순간에는 또 다른 위험이 생깁니다. 신적 진리는 인간의 정당이나 이념보다 큽니다. 어떤 정치 진영 안에도 선과 악이 함께 있을 수 있고, 어떤 제도도 인간의 자기애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습니다. 교회가 어느 정치 세력 자체를 ‘하나님의 편’으로 동일시하기 시작하면 정치적 판단이 영적 분별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사람은 ‘우리 편이 하는 것은 선이고 저쪽이 하는 것은 악’이라고 생각하기 쉬워집니다. 그러나 말씀의 기준은 진영이 아니라 선과 진리입니다.

 

이 점은 강의 후반에 나오는 매우 중요한 한마디와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강사는 지금 시대가 ‘악한 것을 선이라고 하고 선한 것을 악이라고 하는’ 상태라고 탄식합니다. 이 문제의식 자체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의 구별이 흐려지고 심지어 뒤집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분별의 기준을 정치적 진영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누가 말했는가?’보다 ‘그것이 실제로 주님의 선과 진리에 부합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강사의 염려를 오히려 더 엄격하게 적용합니다. 악을 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세상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지배욕을 ‘영적 권위’라고 부를 수 있고, 자기 의를 ‘진리를 지키는 용기’라고 부를 수 있으며, 다른 사람에 대한 증오를 ‘거룩한 분노’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탐욕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포장할 수도 있고, 자기 교단이나 지도자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믿음’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악을 선의 이름으로 부르는 더욱 미세하고 위험한 형태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의 분별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선악을 뒤집었다고 말하기 전에 ‘나는 내 악에 선한 이름을 붙이고 있지는 않은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종말의 말씀을 읽을 때 반복해서 강조하는 방향입니다. 말씀은 먼저 나를 심판합니다.

 

네 번째 징조로 강사는 세계정부, 단일화폐, 그리고 세계 대통령의 출현을 말합니다. 세계의 정치와 경제가 하나의 체제로 통합되고 그 정상에 한 통치자가 등장하면 휴거가 매우 가까워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 그 세계적 지도자가 장차 적그리스도로 나타날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특정 비밀결사들에 대한 설명도 이어집니다. 이 부분은 성경 본문 자체와 강사의 시대적 해석을 더욱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는 대목입니다. 해당 강의 자료만으로는 특정 비밀조직이 세계경제와 전쟁을 실제로 배후 조종한다거나 미래의 적그리스도가 그 조직에서 반드시 출현한다는 주장을 확인할 근거가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강사의 종말론적 판단으로 소개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겠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세계적 통합’이라는 이미지에서도 중요한 영적 원리를 읽을 수 있습니다. 악과 거짓도 한동안 하나로 결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 안의 여러 악한 욕망들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여도 결국 자기애라는 하나의 중심을 섬길 수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고, 명예를 사랑하고, 권력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기를 원하는 여러 욕망이 모두 proprium을 왕으로 세우는 데 협력할 수 있습니다. 계시록에서 짐승에게 권세를 주는 여러 세력이 하나의 뜻을 갖는 장면도 이러한 악과 거짓의 결집이라는 차원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10강 8부에서도 깊이 살펴보았듯, 악의 연합은 참된 하나 됨이 아닙니다. 자기애에 기초한 존재들은 공동의 이익이 있는 동안에는 결합하지만 궁극적으로 서로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모두 자기가 중심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은 마지막에는 자기 내부에서 분열합니다. 이것이 천국의 결합과 지옥의 결합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천국은 서로 다른 존재들이 주님과 공동의 선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지만, 지옥은 각자의 자기 유익 때문에 잠시 결탁할 뿐입니다.

 

강사가 다섯 번째 징조로 말하는 것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마태복음 24장 24절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들이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까지 미혹’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예로 들며, 특별히 기적과 표적 때문에 미혹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받을 수 있는 경고입니다.

 

영적 진리의 여부를 기적이나 초자연적 현상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다는 사실과 그 가르침이 신적 진리라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놀라운 것을 보면 판단력이 약해지기 쉽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분별하는 기준은 기적의 크기가 아니라 그 가르침이 주님과 말씀에 부합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회개와 선한 삶으로 이끄는가입니다.

 

더 깊게 보면 ‘거짓 그리스도’는 반드시 ‘내가 예수다’라고 말하는 특정 인물에게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주님의 신적 진리와 관계되므로, 거짓을 진리처럼 내세워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모든 것은 내적으로 ‘거짓 그리스도’의 성격을 가질 수 있습니다. 특히 자기 욕망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proprium이 주님의 자리에 올라선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는 일도 밖의 이단 지도자를 찾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 안에도 ‘거짓 선지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이미 하고 싶은 일을 먼저 정해 놓고 성경 구절을 찾아 그것을 정당화할 때, 내 욕망이 말씀을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겉으로는 성경을 인용하지만 실제로는 proprium이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훨씬 더 가까이 경계해야 할 미혹입니다.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징조로 강사는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는 것’을 듭니다.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미전도 종족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지고, 그들이 받아들이든 거절하든 적어도 복음을 들을 기회가 주어진 뒤에 ‘끝이 온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선교적 열정이 담겨 있습니다. 복음은 특정 민족이나 문화의 소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말씀의 보편성을 더욱 넓게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기독교 문화권 안에서만 역사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모든 인간을 천국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시며, 각 사람이 태어난 종교와 문화와 환경 안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선과 진리를 공급하십니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을 자연계에서 명시적으로 들어 보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동적으로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았으며 선을 사랑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후에는 그러한 사람에게 주님에 관한 진리가 가르쳐질 수 있고, 선을 사랑한 사람은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말씀을 단순히 세계의 모든 언어권에 기독교 정보가 한 번씩 전달되는 통계적 조건으로만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더 깊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적 진리가 교회의 모든 영역에 충만하게 증거되고, 각 사람에게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충분한 빛이 주어지는 상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심판에는 언제나 먼저 계시가 있습니다. 빛이 와야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강 6부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사실 이 여섯 징조 자체보다 그 뒤에 나오는 강사의 ‘준비’에 관한 설명일 수 있습니다. 강사는 여러 종말의 징조를 말한 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라고 묻습니다. 회개해야 하고 거룩해야 하며 준비할 것이 많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매 순간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를 의식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배할 때도, 사람과 다툴 때도, 직장에서 일할 때도 ‘지금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고 계실까?’를 생각한다면 행동이 달라지고 절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 긴 종말론적 설명은 뜻밖에 매우 실제적인 영성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세계정부가 언제 생길지, 제3 성전이 언제 세워질지, 미래의 적그리스도가 누구일지를 아는 것보다 오늘 내가 화가 났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가가 실제 준비라는 것입니다. 이 지점은 귀하게 붙들 만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라는 표현도 조금 더 깊게 다듬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마치 하나님께서 밖에서 계속 나를 감시하시며 잘못하면 벌점을 주시는 것처럼 받아들이면 신앙이 두려움에 머물 수 있습니다. 더 깊은 상태에서는 ‘지금 이 생각과 행동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에 합하는가?’를 묻게 됩니다. 처음에는 ‘주님이 보고 계시니까 하지 말아야지’라고 악을 억제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지면 ‘이것은 악이기 때문에, 주님과 이웃을 해치기 때문에 나는 원하지 않는다’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외적 순종에서 내적 순종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어린아이는 부모가 보고 있기 때문에 잘못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장하면 부모가 보지 않아도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하지 않습니다. 영적 성장도 비슷합니다. 처음에는 심판이 두려워 악을 피할 수 있고, 천국에 가기 위해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결합이 깊어지면 악 자체를 싫어하고 선 자체를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휴거 준비’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옮기면 아주 실제적인 말이 됩니다. 오늘 내게 들어오는 생각과 욕망 가운데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생각이 떠오르는 것 자체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습니다. 영계로부터 여러 생각과 정서가 유입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동의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 것인지, 아니면 주님의 계명에 어긋난다고 보고 거절할 것인지는 중요합니다. 바로 그 선택들이 쌓여 사람의 영원한 사랑을 형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된 ‘깨어 있음’은 세계 뉴스를 하루 종일 확인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자기 내면의 움직임을 주님의 말씀 앞에서 살피는 상태입니다. ‘왜 나는 지금 이 사람에게 화가 나는가? 정말 진리를 위해서인가, 아니면 내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인가? 왜 나는 이 말을 하고 싶은가? 상대를 돕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인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수도적 영성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수도생활의 핵심이 단순히 세상에서 물러나 외적 자극을 줄이는 데만 있다면 장소가 바뀌었을 뿐 proprium은 그대로 수도원까지 따라갈 수 있습니다. 참된 수도적 깨어 있음은 자기 생각과 정서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살피면서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고 무엇이 자기애에서 올라오는 것인지를 분별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매 순간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실까?’를 의식하라고 한 것은 이 사경회의 수도적 성격과도 잘 연결됩니다.

 

1강 6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전쟁과 기근과 지진, 제3 성전, 정치 체제의 변화, 세계정부와 단일화폐 및 세계적 통치자의 출현,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 그리고 모든 민족에 대한 복음 전파를 휴거가 가까워지는 여섯 징조로 읽는 강사의 종말론은 성도들에게 시대를 분별하고 깨어 준비하라는 강한 긴장을 주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러한 외적 징조들을 특정 현대 국가·정당·정치인·비밀조직과 곧바로 동일시하기보다, 전쟁은 선과 악 및 진리와 거짓의 영적 싸움으로, 성전의 훼손은 인간과 교회의 거룩한 중심에 자기애와 거짓이 들어서는 상태로, 세계적 악의 결집은 proprium을 중심으로 여러 악과 거짓이 하나가 되는 상태로, 거짓 그리스도의 미혹은 거짓을 신적 진리처럼 받아들이는 상태로 읽으며, 궁극적인 종말 준비는 미래의 사건을 정확히 알아맞히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매 순간 주님의 선과 진리 앞에서 자기 사랑과 삶을 살피고 악을 죄로 알고 거절하는 ‘깨어 있음’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6부에서는 한 가지를 특별히 기억할 만합니다. 강사는 세계정부와 적그리스도처럼 거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한 사람이 누군가와 다투는 아주 작은 장면으로 돌아옵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다투고 있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실까?’라고 생각하면 절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바로 그곳에 이 긴 종말론 강의에서 우리가 건져 올릴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영적 핵심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정말 내일 오신다고 해도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은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미워하던 사람을 용서하고, 잘못했으면 인정하고, 맡은 일을 정직하게 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자기 이익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로 행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의 재림이 자연적 시간으로 아주 멀리 있다 해도 이러한 삶을 미룰 이유는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자기 지상 생명의 마지막 시간이 언제인지조차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적같이 오신다’는 말씀의 가장 실제적인 힘은 날짜를 감추는 데 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오늘’을 살게 하는 데 있습니다. ‘언젠가 회개하겠다’, ‘나중에 더 거룩해지겠다’, ‘상황이 좋아지면 용서하겠다’가 아니라 지금 주어진 진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영적 생명은 미래에 한꺼번에 준비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작은 선택들 속에서 형성됩니다.

 

이렇게 보면 휴거를 기다리는 사람과 거듭남을 살아가는 사람 사이에 뜻밖의 접점이 생깁니다. 강사는 ‘곧 주님께서 오시니 준비하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거기에 이렇게 덧붙일 수 있겠습니다. ‘그 준비는 주님이 언제 오시는지를 알아내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금 말씀의 진리로 내게 오실 때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됩니다.’ 종말의 가장 중요한 표지는 하늘이나 국제정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들은 뒤 내 마음과 삶이 실제로 달라지고 있는가 하는 데에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점에서 1강 처음부터 반복되어 온 ‘밝은 진리’, ‘광야 연단’, ‘신인합일’, ‘영적 성장’, ‘종말의 징조’는 결국 하나로 모입니다. 밝은 진리는 미래를 많이 아는 진리가 아니라 사람의 내면을 밝히는 진리이고, 연단은 그 빛 아래 드러난 악과 싸우는 과정이며, 영적 성장은 그 싸움 속에서 진리가 선과 결합되어 삶이 되는 과정이고, 주님과의 결합은 그 결과 인간의 사랑과 삶이 점점 주님의 질서와 하나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깊은 의미에서 ‘휴거를 준비한다’는 것 역시 결국 하나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를 준비하는 것’과 ‘오늘 주님께 속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은 서로 다른 두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강 7부

재림의 목적과 ‘익은 열매’ : 추수는 선발인가, 한 사람의 지배적 사랑이 완성되는 것인가

1강 7부에 이르면 강의는 종말의 징조들을 살펴본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위해 다시 오시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으로 들어갑니다. 강사는 먼저 1992년 10월 28일 휴거를 주장했던 시한부 종말론 사건을 언급합니다. 그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뒤 한국 교회 안에서 재림 신앙 자체를 부정적이거나 부담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생겼다고 진단하면서, 시흥영성수련원 사경회가 추구하는 두 축을 ‘영생활의 진보’와 ‘건전한 재림 신앙’으로 제시합니다. 즉 종말에 관한 지식만 쌓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성장하면서 동시에 주님의 재림을 성경적으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의식은 먼저 귀하게 받을 만합니다. 특정 날짜를 정하여 주님의 재림을 예고하는 시한부 종말론이 실패했다고 해서 주님의 재림이라는 성경의 거대한 주제 자체를 외면하는 것은 또 다른 극단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재림론을 경계하는 것과 재림 자체를 잊어버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강사가 ‘영생활의 진보’와 ‘건전한 재림 신앙’을 함께 놓은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종말론이 사람을 현실도피와 공포로 몰아가서는 안 되지만, 반대로 신앙생활이 현재의 안락함 속에 완전히 정착하여 주님의 나라와 영원을 잊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적용하면 ‘건전한 재림 신앙’이라는 말 자체가 훨씬 깊은 질문을 불러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재림은 주님께서 다시 자연적 육체를 입고 구름을 타고 공간적으로 내려오시는 사건이 아니라, 말씀의 신적 진리가 새롭게 열리고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께서 새 교회에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은 단순히 미래 어느 시점의 사건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가 내 이해와 의지 안으로 들어올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생활의 진보’와 ‘재림 신앙’은 사실 둘이 아닙니다. 말씀의 진리가 사람에게 와서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개인의 차원에서 주님의 임재를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강사는 이어 재림의 첫 번째 목적을 ‘익은 열매를 추수하기 위해서’라고 제시합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추수 비유와 마가복음 4장 26~29절을 연결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씨가 자라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되고,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는 말씀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하나의 중요한 원리를 끌어냅니다. ‘싹’이나 ‘이삭’ 상태에서는 추수하지 않고 ‘다 익은 곡식’이 되었을 때 추수한다는 것입니다.

 

이 ‘익은 열매’는 사실 이 사경회 전체를 이해하는 핵심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앞서 광야 연단을 설명할 때도 강사는 성도가 단순히 구원받은 상태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광야의 연단을 통하여 ‘익은 열매’가 되어 천국 곡간에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들어가는 모형도 이 영적 성숙의 과정으로 읽었습니다. 이제 종말론에 들어와서는 바로 그 ‘익은 열매’가 재림과 추수의 언어로 다시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경회에서 영적 성장론과 종말론은 별개의 두 교리가 아닙니다. ‘어떻게 익은 열매가 될 것인가?’가 성장론이라면, ‘익은 열매를 언제 어떻게 추수하시는가?’가 종말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연결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종말론을 미래 사건의 시간표로만 공부한다면 ‘나는 어느 사건을 피할 것인가?’가 중심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익은 열매’라는 관점이 들어오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나는 지금 얼마나 익어 가고 있는가?’가 됩니다. 실제로 강사의 강조점도 단순히 휴거를 피난 수단으로 삼는 데 있지 않습니다. 휴거될 수 있는 영적 상태, 곧 열매가 충분히 익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이 ‘익음’이라는 표현은 매우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말씀에서 ‘열매’는 삶으로 나타난 선을 뜻합니다. 씨가 진리의 시작이라면 열매는 그 진리가 사람의 의지와 삶 안에서 선이 된 상태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듣고 기억하는 것은 씨를 받은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은 싹이 나고 자라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아직 그것만으로 열매가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그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실제 행동과 습관과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아는 것은 씨입니다. 그 말씀이 옳다고 이해하고 동의하는 것은 성장 과정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을 만났을 때 보복하고 싶은 욕망을 주님의 도움으로 거절하고 그 사람의 선을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열매입니다.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그렇게 하다가, 거듭남이 깊어지면서 실제로 용서와 체어리티를 사랑하게 된다면 열매가 점점 익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매가 익는다는 것은 성경 지식이 많아진다는 뜻과 같지 않습니다. 교회 생활이 오래되었다는 뜻도 아니고, 특별한 영적 체험을 많이 했다는 뜻도 아니며, 심지어 많은 사역을 했다는 뜻과도 자동적으로 같지 않습니다. 핵심은 진리가 사랑과 결합했느냐입니다. 알고 있는 선을 실제로 사랑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사랑하는 선을 삶에서 행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 사경회의 ‘익은 열매’ 강조는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상당히 가까이 만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을 단순한 지적 동의로 보지 않습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해야 하고,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해야 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아무리 많이 알아도 그것이 그의 사랑과 삶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아직 거듭남이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선의 것이 되고 선에서 진리가 흘러나오는 상태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동시에 매우 중요한 차이가 생깁니다. 강사는 이 ‘익은 열매’를 장차 공중강림 때 휴거될 특정 성도들의 자격과 연결해 갑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는 자연계에서 살아 있는 성도 가운데 특별히 성숙한 일부가 육체째 공중으로 올라가는 ‘휴거 선발’이라는 구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익은 열매’라는 영적 통찰은 충분히 받을 수 있지만, 그것을 ‘누가 첫 번째 휴거 대상자가 되는가?’라는 시간표에 그대로 결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익은 열매’는 한 사람의 영원한 상태가 무엇으로 형성되어 가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는 편이 더 깊습니다. 사람은 하루아침에 천사가 되거나 악한 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자유로운 선택을 통하여 어떤 사랑을 자기 생명의 중심으로 삼을 것인지 점차 결정합니다. 처음에는 여러 사랑과 동기가 뒤섞여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의 지배적 사랑이 형성됩니다. 주님과 이웃의 선을 사랑하는 것이 지배적 사랑이 될 수도 있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모든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지배적 사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익음’이라는 개념과 깊이 연결됩니다. 선도 익고 악도 익습니다. 실제로 강사 역시 재림의 목적을 설명하면서 ‘선으로 익은 사람’을 추수하시는 동시에 가라지, 곧 ‘악으로 익은 자들’을 심판하신다고 말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추수란 단순히 착한 사람을 데려가고 나쁜 사람을 벌하는 외적 사건이라기보다, 각 사람이 자유 가운데 형성해 온 내적 상태가 마침내 분명하게 드러나는 때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알곡과 가라지 비유도 이런 관점에서 훨씬 깊어집니다. 주인은 처음부터 가라지를 뽑아 버리지 않습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합니다. 이것은 신적 섭리의 놀라운 원리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안의 모든 악을 처음부터 강제로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하면 그의 자유와 합리성이 파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이 함께 드러나고, 사람이 진리를 배운 뒤 자유롭게 어느 쪽을 선택하는지를 통하여 그의 영적 상태가 형성되도록 허용하십니다.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우리는 이것을 경험합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해서 이전의 모든 악한 성향이 즉시 없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가 들어오면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가라지가 더 많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는 왜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지?’, ‘이렇게 오래 신앙생활했는데 왜 이런 분노와 질투가 남아 있지?’ 하고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악이 보인다는 사실 자체가 곧 악이 더 강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빛이 밝아졌기 때문에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드러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때 사람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그 악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사랑할 것인지, 아니면 ‘이것은 주님의 계명에 반하는 악이다’라고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으로 거절할 것인지 선택하게 하십니다. 이 선택이 반복되면서 선은 점차 뿌리를 내리고 악은 주변으로 밀려납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악의 성향 자체가 인간의 기억에서 완전히 삭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더 이상 사람의 지배적 사랑이 되지 못하도록 주님께서 질서를 바꾸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추수’는 매우 엄숙하면서도 아름다운 말입니다. 씨를 뿌린 목적은 결국 열매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의 진리를 주시는 목적도 우리가 진리 시험에 높은 점수를 받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진리가 우리 안에서 선의 생명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진리는 수단이고 선은 목적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로 나아가야 하며, 앎은 삶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강사가 ‘싹이 난 성도나 이삭이 난 성도를 추수하지 않고 다 익은 곡식만 추수한다’고 강조하는 부분은 그래서 귀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식의 공포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지상에서 모든 악의 흔적을 제거하여 절대적 완전 상태에 도달하는 일이 아닙니다. 천사들조차 자기에게서 선한 존재가 아닙니다. 모든 선은 오직 주님에게서 옵니다.

 

중요한 것은 ‘완벽하게 되었는가?’가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악이 올라오더라도 그것을 사랑하여 자기 것으로 삼는가, 아니면 악이라고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으로 거절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여전히 부족함이 많더라도 주님과 이웃의 선을 사랑하는 것이 점차 그의 중심 사랑이 되어 간다면 그는 주님에 의해 거듭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익은 열매란 인간적 무결점의 상태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실제 생명의 방향이 된 상태라고 보는 편이 좋습니다.

 

이것은 이 사경회의 연단 이해를 받아들일 때에도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익어야 한다’는 말을 잘못 받아들이면 자기완성을 향한 엄격한 종교적 성취주의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아직 부족하다. 더 연단받아야 한다. 더 강해져야 한다. 더 완전해져야 한다’고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붙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어느 정도 성장했다고 느끼면 이번에는 ‘나는 다른 성도보다 더 익었다’는 영적 우월감이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익은 열매를 추구하던 일이 오히려 proprium의 열매를 맺는 역설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오히려 자기에게서 선한 것이 하나도 없으며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천사가 인간보다 훨씬 선한데도 자기 선을 자랑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히려 더 높은 천사일수록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은 악과 거짓뿐이며 선과 진리는 전적으로 주님에게서 유입된다는 사실을 더 분명히 지각합니다. 그러므로 ‘익음’의 가장 중요한 표지 가운데 하나는 어쩌면 영적 자신감의 증가가 아니라 자기 공로의 감소일 수 있습니다.

 

사과나무가 열매를 맺었다고 자기 열매를 자랑하지 않듯, 거듭나는 사람도 자기에게서 나타난 선을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오래 연단받아서 이 정도 사람이 되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런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이 익은 열매의 향기입니다.

 

강사는 이어 재림의 목적에 ‘가라지를 불사르는 심판’도 포함시킵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세상 끝과 추수를 아마겟돈 심판에 연결하여, 선으로 익은 자들을 추수하는 동시에 악으로 익은 자들을 심판하시는 것이 재림의 목적이라고 설명합니다. 이후 강의에서는 이 구조를 ‘익은 열매 추수-죄악 세상 심판-천년왕국 건설’이라는 재림의 세 가지 목적으로 명료하게 정리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심판은 앞에서도 보았듯 주님께서 분노하여 사람들에게 형벌을 가하시는 사건으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신적 진리의 빛이 임하여 각 사람의 실제 사랑이 드러나고, 서로 섞여 있던 선과 악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누구도 지옥으로 던지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끝까지 모든 사람을 악에서 돌이키려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유롭게 자기애와 악을 생명의 중심으로 확정하면, 사후에는 그 사랑과 상응하는 공동체를 스스로 찾게 됩니다.

 

따라서 ‘가라지를 불사른다’는 말씀에서 ‘불’도 자연적 불길로만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에서 불은 사랑을 나타냅니다. 좋은 의미에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천국적 사랑이며, 반대 의미에서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 그리고 그로부터 나오는 정욕을 나타냅니다. 지옥의 불은 주님께서 밖에서 지펴 사람을 고문하시는 불이라기보다 악한 영 자신이 사랑하는 탐욕과 자기애의 불입니다. 그 사랑이 서로 충돌하면서 고통을 만들어 냅니다.

 

이렇게 보면 알곡과 가라지의 마지막 분리는 주님께서 갑자기 사람들을 두 종류로 임의 분류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이미 지상생활에서 자기의 자유로운 선택들을 통하여 어느 쪽으로 자라고 있는지를 형성합니다. 추수 때에는 그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선한 사랑이 지배적인 사람은 선한 공동체를 기뻐하고, 자기애가 지배적인 사람은 자기와 같은 사랑의 공동체를 찾습니다.

 

여기에서 ‘익은 열매’라는 말은 더욱 엄중해집니다. 선만 익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움도 반복하면 익습니다. 거짓도 반복하여 받아들이면 익습니다. 사람을 지배하는 즐거움도 계속 허용하면 하나의 지배적 사랑으로 익습니다. 반대로 용서도 반복하면 익고, 정직도 반복하면 익으며, 남의 선을 기뻐하는 체어리티도 반복하여 실천하면 익습니다. 우리는 매일 무엇인가를 익히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추수는 먼 미래에 갑자기 시작되는 일이기 전에 오늘의 작은 선택들 안에서 이미 준비되고 있습니다. 오늘 한 번의 거짓말이 곧 사람 전체를 악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거짓말을 유익하다고 사랑하고 반복하며 정당화하면 그것은 점차 성품이 됩니다. 반대로 진실을 말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님 때문에 진실을 선택하는 일이 반복되면 정직은 점차 그의 생명의 일부가 됩니다. 이것이 ‘열매가 익는다’는 말씀을 우리의 실제 삶에 가져오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강사가 말하는 ‘영생활의 진보’는 매우 실제적인 의미를 얻게 됩니다. 영적 진보는 얼마나 높은 신비를 알게 되었는가로만 측정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전에는 쉽게 화내던 사람이 조금 더 참을 수 있게 되고, 예전에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던 사람이 사과할 수 있게 되며, 예전에는 다른 사람의 성공을 질투하던 사람이 이제는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영생활의 진보입니다. 진리가 의지를 바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사경회가 오랫동안 ‘연단’을 강조해 온 이유도 이 ‘익음’과 연결해서 보면 이해하기 쉬워집니다. 연단은 고생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고난을 많이 당했다고 자동적으로 영적으로 성숙하는 것도 아닙니다. 같은 고난을 겪고도 더 완고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환경을 통하여 무엇이 드러나고 무엇이 변화되는가입니다. 시험 속에서 자기애가 드러나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인정하며 거절함으로써 선이 자리 잡는다면 그 시험은 열매를 익게 하는 연단이 됩니다.

 

이 점은 공용복 선생과 함께했던 이 수도적 전통을 이해할 때도 중요하겠습니다. 이곳에서 말하는 ‘연단’, ‘성결’, ‘익은 열매’를 단순히 고행이나 자기억제의 양으로만 이해하면 이 전통의 핵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결국 물어야 하는 것은 ‘그 연단을 통해 사람이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었는가?’입니다. 더 부드러워졌는가, 더 겸손해졌는가,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게 되었는가, 주님을 더 의지하게 되었는가입니다. 그런 열매가 없다면 외적인 엄격함 자체가 거듭남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익은 열매’와 ‘신인합일’의 관계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앞서 바로잡았듯 이 사경회가 사용하는 표현은 ‘신인합일’입니다. 그것을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조심스럽게 옮기면 인간이 하나님과 존재론적으로 융합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주님과 더욱 깊이 결합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결합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결국 열매로 드러납니다. 주님과 결합되었다고 말하면서 삶은 자기애와 지배욕과 미움에 지배되고 있다면 그 결합을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영적 체험의 강도보다 열매가 중요하고, 자신이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경지’보다 그 사람에게서 어떤 사랑이 흘러나오는지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신비적 영성의 과장을 막아 주는 매우 안전한 기준입니다. 주님과 깊이 결합될수록 주님의 사랑이 그 사람의 삶을 통하여 이웃에게 흘러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추수’라는 말을 교회 전체의 차원에서 보면 또 하나의 의미가 열립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한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그 교회 안의 선과 악이 충분히 드러납니다. 처음에는 참된 신앙과 거짓된 신앙이 함께 존재할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모두 같은 교회에 속해 있고 같은 말씀을 읽으며 같은 신앙고백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교리가 실제로 어떤 열매를 맺는지가 드러납니다. 체어리티와 겸손과 선한 삶을 낳는가, 아니면 자기 의와 지배욕과 분열을 낳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열매’입니다. 교리의 참됨은 단지 논리적 정교함으로만 판별되지 않습니다. 참된 진리는 주님에게서 오므로 궁극적으로 선을 향합니다. 따라서 어떤 교리가 사람을 주님과 이웃을 더 사랑하게 하는 대신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자기 집단의 우월성만 강화한다면, 아무리 성경 구절을 많이 사용하더라도 그 열매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원리를 이 사경회 자체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해설한다는 것은 바깥에서 이 사경회를 판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강사 자신이 제시한 ‘열매’라는 기준을 존중하면서 더 깊게 묻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이 참석자들을 더 겸손하게 하고, 더 정직하게 하며, 자기 악을 더 잘 보게 하고,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게 하며, 주님을 더 의지하게 한다면 귀한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종말 지식이 사람을 두려움에 빠뜨리거나, ‘우리는 알고 저들은 모른다’는 우월감을 만들거나, 특정한 외적 체험과 단계가 구원의 등급처럼 굳어진다면 그 부분은 다시 말씀의 빛 아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아마 ‘건전한 재림 신앙’이라는 강사의 표현을 가장 깊게 받아들이는 방법일 것입니다. 건전한 재림 신앙은 날짜를 정하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재림에 관한 지식이 실제로 어떤 열매를 맺는가까지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을 믿기 때문에 오늘 더 사랑하고, 더 정직하고, 더 용서하고, 더 깨어 자기 악을 살핀다면 그 재림 신앙은 생명이 있습니다. 반대로 재림을 많이 말하면서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고 세상을 향한 적대감과 자기 집단의 우월성만 키운다면, 그 지식이 아무리 복잡하고 정교해도 그 열매를 다시 살펴야 합니다.

 

1강 7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1992년 시한부 종말론의 실패 이후 교회가 재림 신앙 자체를 잃어버린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영생활의 진보와 건전한 재림 신앙’을 함께 회복하고, 재림의 첫 목적을 ‘익은 열매의 추수’로 제시하는 강사의 강조는 종말론을 영적 성장과 연결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으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익은 열매’를 공중강림 때 선택적으로 휴거될 성도의 자격으로만 읽기보다, 말씀의 진리가 사람의 의지와 결합하여 체어리티와 선한 삶이라는 열매가 되고 마침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그의 지배적 사랑으로 자리 잡는 거듭남의 성숙으로 읽으며, ‘추수’는 그렇게 각자가 자유롭게 형성해 온 사랑의 실제 상태가 신적 진리의 빛 앞에서 드러나 선과 악이 분리되는 심판의 아르카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7부에서 특별히 오래 붙들고 싶은 것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놀라운 기다리심이 있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린 다음 날 밭에 나가 열매가 없다고 땅을 갈아엎지 않듯, 주님께서도 우리를 그렇게 다루지 않으십니다. 싹인 때를 아시고, 이삭인 때를 아시며, 아직 속이 차지 않은 때도 아십니다. 우리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진리를 공급하시고, 시험 가운데 보호하시며,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우리가 자유 가운데 선을 선택할 수 있도록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익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두려움만 줄 말씀이 아닙니다. ‘왜 나는 아직 이것밖에 안 되었나?’ 하고 자기를 몰아붙이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씨를 심으신 분이 주님이시며 자라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의 몫은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선을 행하되 그 힘과 선이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이 사경회의 ‘익은 열매’라는 언어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 가장 아름답게 만날 수 있습니다. 익는다는 것은 ‘내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 안에서 더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진리를 억지로 행했지만 나중에는 선을 사랑하여 행하고, 처음에는 자기 공로를 붙들었지만 나중에는 모든 선을 주님께 돌리며, 처음에는 천국에 가기 위해 이웃을 사랑했지만 마침내 이웃의 선 자체를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열매는 겉만 익은 것이 아니라 속까지 익어 갑니다.

 

그렇다면 재림을 기다리는 가장 좋은 방법도 분명해집니다. ‘언제 오십니까?’만 묻는 것이 아니라 ‘주님, 오늘 제 안에서 무엇을 익히고 계십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종말의 시간표를 손에 들고 하늘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게 맡겨진 사람을 사랑하고, 오늘 발견한 악을 거절하며, 오늘 깨달은 진리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우리의 실제 생명이 되어 갈 때, 우리는 미래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시에 이미 지금 말씀 가운데 오시는 주님을 영접하고 있는 것입니다.



1강 8부

씨 뿌리는 비유와 네 가지 마음밭 : 문제는 씨앗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그릇’이다

1강 8부에서는 강사가 지금까지 배운 ‘기본 진리’ 전체를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을 통해 다시 정돈하기 시작합니다. 강사는 핵심진리를 구원론과 성화론과 종말론을 중심으로 성경을 체계화한 진리라고 설명하면서, 마태복음 13장의 일곱 비유가 앞서 공부한 내용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앞으로 공부할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기초가 된다고 말합니다. 특히 이 공부를 통하여 성도가 ‘영적인 목표와 방향’, 그리고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가 하는 ‘영적 가치관’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점에서 마태복음 13장은 강사에게 단순히 서로 다른 일곱 비유가 모여 있는 장이 아니라, 지금까지 설명해 온 영적 성장과 앞으로 다룰 종말론을 서로 이어 주는 하나의 중요한 연결부입니다.

 

강사는 이 일곱 비유를 하나의 체계 안에서 읽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서론’, 마지막 그물 비유를 ‘결론’, 그 사이의 비유들을 ‘본론’처럼 배열하고, 이를 앞으로 계시록에서 등장하는 ‘14만 4천’과 ‘666’을 해석하는 틀로까지 연결합니다. 겨자씨 비유는 14만 4천의 성장적 측면, 누룩 비유는 행실적 측면, 진주와 보화 비유는 생명적 측면을 설명하며, 가라지 비유는 666과 적그리스도적 영혼의 정체를 설명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그물 비유에서는 이 모든 것이 종말의 추수로 결론지어진다고 이해합니다. 이러한 연결 전체를 그대로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과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마태복음 13장의 각 비유를 계시록의 특정 숫자와 직접 대응시키는 방식은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각각의 비유를 고립된 교훈으로 읽지 않고 하나의 영적 성장 과정 속에서 읽으려 한다는 강사의 기본 방향에는 주목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내적 질서를 종말 시간표보다는 주님께서 한 사람을 어떻게 거듭나게 하시는가 하는 과정에서 찾게 됩니다.

 

그 출발점이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네 종류의 밭, 곧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와 좋은 땅을 네 종류의 ‘마음밭’으로 설명합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진리이며, 씨 뿌리는 사람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고, 씨가 떨어지는 밭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똑같은 씨가 뿌려졌는데도 어떤 곳에서는 전혀 자라지 못하고, 어떤 곳에서는 잠깐 자라다가 말라 버리고, 어떤 곳에서는 가시에 막혀 결실하지 못하며, 좋은 땅에서는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가 드러납니다. 씨가 네 종류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씨는 같습니다. 차이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밭에 있습니다. 신적 진리는 동일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가 서로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인플럭스 이해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주님에게서 생명과 선과 진리는 끊임없이 유입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형체와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햇빛은 동일하지만 아름다운 꽃에 비추면 꽃의 색과 생명을 드러내고, 부패한 것에 비추면 그 부패를 드러냅니다. 태양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대상이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같은 말씀을 듣고도 어떤 사람은 겸손해지고 어떤 사람은 오히려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같은 성경을 읽으면서 한 사람은 자기 악을 발견하고 회개하지만, 다른 사람은 남의 잘못을 찾아 정죄하는 근거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진리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내적 상태가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씨 뿌리는 비유 앞에서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나는 말씀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말씀을 어떤 상태로 받아들이고 있는가?’입니다.

 

강사는 네 가지 마음밭 가운데 특별히 ‘좋은 밭’에 초점을 둡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는 목적은 결국 열매를 얻는 데 있으므로, 좋은 밭이 되어야 영적으로 성장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좋은 밭을 가진 사람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고 세상에서 빛이 되며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여러 쓰임을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은 앞서 7부에서 살펴본 ‘익은 열매’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열매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추수 때가 되었다고 갑자기 익은 열매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 씨를 어떻게 받아들였는가에서부터 시작하여 씨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장애물을 이기고, 마침내 결실하는 긴 과정이 있습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과정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강사는 여기서 사람은 자신이 네 가지 밭 가운데 어디에 해당하는지를 스스로 정확히 알기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시험해 보는 과정’을 통하여 그것을 드러내신다고 설명합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는 과정 자체가 내가 길가인지, 돌밭인지, 가시밭인지, 좋은 밭인지를 드러내는 시험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이 통찰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상당히 중요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자기 내면을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이 닥치면 무엇을 사랑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아무도 내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을 때에는 ‘나는 겸손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누군가 나를 무시하거나 내 의견을 공개적으로 반박했을 때 격렬한 분노가 올라온다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자기애가 드러난 것입니다. 재산에 손해가 없을 때에는 ‘나는 돈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 손해를 감수하면서 정직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면 무엇을 더 사랑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시험은 주님께서 우리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미 아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게 되고, 드러난 악을 주님의 도움으로 거절함으로써 선이 더욱 깊이 자리 잡도록 허용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네 가지 밭을 단순히 세상 사람들을 네 부류로 나누는 분류표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한 사람 안에서도 이 네 가지 상태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떤 진리에 대해서는 좋은 밭이면서 다른 진리에 대해서는 돌밭일 수 있고, 어떤 때에는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면서도 자기애가 건드려지는 특정 영역에서는 길가처럼 굳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나는 좋은 밭이고 저 사람은 길가다’라고 사람을 분류하기 시작하면 주님의 비유가 오히려 자기 의를 강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의 마음밭을 판정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마음밭을 살피고 갈도록 주어진 말씀입니다.

 

첫 번째 ‘길가’는 사람들이 계속 밟고 다녀 굳어진 땅입니다. 씨가 땅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표면에 그대로 있으므로 새가 와서 먹어 버립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는’ 상태라고 설명하십니다. 강사는 이것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하고 강퍅한 마음, 세상 일과 돈 버는 데 몰두하여 말씀에 관심을 두지 않는 상태와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말씀을 아주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길가가 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고 수없이 설교를 들으면서 말씀이 너무 익숙해져 더 이상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 말씀 알아’, ‘그 설교 많이 들었어’, ‘그건 초신자에게 필요한 이야기지’ 하는 상태가 되면 진리가 기억에는 있지만 의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말씀을 모르는 것만 위험한 것이 아니라 말씀에 너무 익숙해져 더 이상 말씀 앞에서 자기 자신을 살피지 않는 것도 위험합니다.

 

특히 말씀을 오래 공부하거나 가르치는 사람에게는 더욱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말씀을 읽는 순간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어떤 설교에 사용할까?’, ‘누구에게 적용하면 좋을까?’가 먼저 떠오르면 정작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씨를 뿌리는 사람이 자기 밭에는 씨를 받지 못하는 역설이 생기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 작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르카나를 많이 알고 상응을 많이 이해하는 것 자체가 좋은 밭의 증거는 아닙니다. 그 진리가 먼저 나 자신의 proprium을 비추고,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드러내며, 실제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말씀에 관한 지식은 많아지는데 자기 자신을 보는 눈은 오히려 흐려진다면 씨는 기억 속에는 많이 쌓였지만 아직 마음 깊이 들어가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돌밭’은 씨를 기쁨으로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깊지 않아 환난이나 핍박이 오면 넘어지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진리를 처음 접했을 때 감동하고 기뻐하지만 아직 그 진리가 의지 깊숙이 뿌리내리지 못한 상태를 보여 줍니다. 영적 감동 자체는 귀하지만 감동이 곧 거듭남은 아닙니다. 사경회에서 큰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릴 수 있고,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여 ‘이제 내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 것 같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 일상생활 속에서 가족과 갈등하고, 직장에서 손해를 보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을 만났을 때 그 진리가 어떻게 작용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말씀 때문에 실제로 자기 뜻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비로소 뿌리의 깊이가 드러납니다. 따라서 영적 체험과 영적 성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체험은 순간적으로 매우 강렬할 수 있지만 거듭남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의지와 삶이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눈물을 많이 흘렸다고 반드시 더 거듭난 것도 아니고, 특별한 환상이나 음성을 경험했다고 반드시 더 깊은 영적 상태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체험 이후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는가가 중요합니다.

 

세 번째 ‘가시떨기’는 더욱 미묘합니다. 씨가 아예 자라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어느 정도 성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합니다. 이 상태는 교회 밖의 불신자보다 오히려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세상 자체가 아닙니다. 직업을 갖고 돈을 벌고 가족을 돌보고 집을 마련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모두 필요한 자연적 삶입니다. 문제는 질서입니다. 자연적인 것들이 영적인 것을 섬겨야 하는데 거꾸로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욕망을 섬기기 시작하면 가시가 말씀을 막습니다. 돈 자체가 가시가 아니라 돈을 모든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가시이고, 직업 자체가 가시가 아니라 명예와 지위를 자기 존재 가치의 중심으로 삼는 것이 가시입니다. 가족 자체가 가시가 아니라 주님의 질서보다 가족의 욕망을 더 높이 두는 것이 가시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것들은 본래 쓰임을 위한 좋은 도구이지만 그것들이 목적이 되면 영적 생명을 압박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질서’의 문제입니다. 천국적 질서에서는 높은 것이 낮은 것을 다스립니다.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을 다스리고, 선이 진리를 통하여 자연적 삶을 질서 있게 합니다. 그러나 자연적 욕망이 영적인 것을 지배하면 질서가 전도됩니다. 사람이 기도하고 교회에 다니고 성경을 읽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세상적 성공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때 신앙은 가시 사이에서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강사가 ‘세상의 쾌락이나 육신의 행복이나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고 강하게 말하면서 성도는 ‘육에 속한 삶을 벗어 버리고 영에 속한 생활을 철저히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자연적 삶 자체를 버리는 것이 거듭남의 목적은 아니라고 보완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정과 직업과 재산과 사회생활을 떠나는 것이 자동적으로 더 영적인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어떤 질서 안에 놓여 있는가입니다. 돈도, 직업도, 가정도, 사회적 책임도 주님과 이웃의 선을 섬기는 쓰임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부인의 본질은 ‘소유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보다 ‘소유가 내 마음을 소유하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네 번째가 ‘좋은 땅’입니다. 주님께서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을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하시며, 그가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강사는 좋은 밭을 가진 성도들이 가장 잘 성장하고 하나님의 일을 맡으며 세상의 빛과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고, 가장 밝은 빛을 따라 산 성도들과 순교자들, ‘교회 시대의 이긴 자들’이 이러한 좋은 밭에 해당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깨닫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 이해에 머물지 않습니다. 말씀의 참된 깨달음은 결국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진리는 선을 향하지 않으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진리입니다. 진리가 기억에 들어오고 이해에 들어오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의지 안으로 들어가 선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씨가 열매가 됩니다.

 

그리고 좋은 밭은 타고난 좋은 성품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실제 밭도 그냥 두면 저절로 좋은 밭이 되지 않습니다. 땅을 갈고, 돌을 골라내고, 가시를 제거하고, 흙을 뒤집어 씨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거듭남도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강제로 좋은 밭으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진리를 주시고 자유를 주시며,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안의 돌과 가시를 보고 그것을 제거하는 일에 협력하게 하십니다. 물론 그 힘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악을 거절해야 합니다. ‘주님이 다 하시니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아니고, ‘내가 내 힘으로 나를 좋은 밭으로 만들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실제로 밭을 갈지만 생명을 주고 씨를 자라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강사는 이어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는 원리를 설명하면서 이 땅의 삶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도록 주어진 시간이며, 성도는 ‘적당히 천국만 가면 되지’라고 생각하지 말고 더 높은 영적 상태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겸손과 충성, 인내와 사랑을 많이 실천할수록 하늘의 상급도 커진다는 것을 ‘저금 통장’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 강조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았으니 이제 어떻게 살아도 된다’는 식의 신앙을 경계하고 실제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는 그의 사랑이 밖으로 나타난 것이므로 결코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상급을 저축한다’는 표현을 조금 조심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의 상급은 선행을 많이 쌓아 놓은 대가로 하나님께서 지급하시는 보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면서 상급을 목적으로 삼으면 그 선 안에 자기 공로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 가장 큰 상급은 오히려 선 자체를 행하는 기쁨입니다.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 기쁘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기쁘며, 자기보다 다른 사람의 선을 기뻐할 수 있는 상태 자체가 천국의 행복입니다. 쓰임을 행하는 것이 상급이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 있는 것이 상급입니다.

 

따라서 ‘더 높은 것을 추구하라’는 말도 ‘천국에서 남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합니다. 천국에서는 높은 자가 더 많은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사랑하고 더 넓은 쓰임을 행합니다. 가장 높은 천사는 가장 낮아지기를 기뻐합니다. 주님께 가까울수록 자기 공로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같은 의미에서 좋은 밭의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도 단순히 ‘상급 액수의 차이’로 읽기보다 각 사람이 주님에게서 받은 고유한 능력과 쓰임에 따라 선이 얼마나 충만하게 결실하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각자의 사랑과 지혜와 쓰임이 다릅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경쟁적 서열이 아니라 조화로운 다양성입니다. 삼십 배인 사람이 백 배인 사람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고, 백 배인 사람이 삼십 배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각자가 주님께 받은 그릇만큼 충만한 것이 그 사람에게는 완전한 기쁨입니다.

 

이것은 이 사경회가 강조하는 ‘가장 밝은 빛’을 이해할 때에도 중요한 보완이 됩니다. 강사는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산 사람들을 교회 시대의 이긴 자들, 성화된 성도들, 순교자들과 연결하고 모든 성도가 더 높은 영적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그 열망 자체는 귀합니다. 다만 ‘밝은 빛’을 영적 엘리트의 등급처럼 받아들이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얼마나 순수하게 받아 삶으로 나타내는가로 이해하면 더 안전합니다. 가장 밝은 사람은 ‘나는 남보다 높은 단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빛을 받아 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장 깊이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자기에게서 빛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빛에는 proprium의 그림자가 섞이기 시작합니다.

 

이 점에서 씨 뿌리는 비유는 앞서 강의에서 사용한 ‘신인합일’이라는 표현에도 중요한 분별 기준을 제공합니다. 하나님과 깊이 결합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의 상태는 결국 ‘열매’로 확인되어야 합니다. 신비한 체험이나 높은 단계에 대한 자기 인식이 아니라 실제로 더 겸손해지고, 더 온유해지고, 더 정직해지고, 더 사랑하게 되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 주님과의 참된 결합은 반드시 체어리티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존재론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이 인간의 의지와 삶 안에서 생명이 됨으로써 주님과 결합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씨 뿌리는 비유에는 놓치기 쉬운 매우 아름다운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씨를 뿌리시는 주님은 좋은 밭에만 씨를 뿌리지 않으십니다. 길가에도, 돌밭에도, 가시밭에도 씨가 떨어집니다. 인간적인 농사 상식으로 보면 낭비처럼 보이지만 신적 사랑의 관점에서는 놀라운 장면입니다. 주님은 사람의 현재 상태만 보고 진리를 주실 대상을 미리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강퍅한 사람에게도 진리가 오고, 얕은 사람에게도 오며, 세상 염려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도 옵니다. 주님의 사랑은 끊임없이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가능성을 공급하고, 사람에게 자유롭게 응답할 기회를 주십니다.

 

더 나아가 오늘 길가 같은 사람이 영원히 길가여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굳은 땅도 갈아엎으면 밭이 될 수 있고, 돌밭에서도 돌을 골라낼 수 있으며, 가시밭에서도 가시를 뽑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희망입니다. 네 가지 밭을 고정된 인간 유형으로만 읽으면 ‘저 사람은 길가라서 안 된다’고 쉽게 단정할 수 있지만, 주님의 섭리 안에서는 마음밭 자체가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 밭을 가는 과정이 바로 회개와 시험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의 빛으로 굳은 땅을 드러내시고, 시험을 통하여 숨어 있던 돌을 드러내시며, 우리가 사랑하고 있던 가시가 무엇인지 보여 주십니다. 그것을 보게 될 때 사람은 주님의 힘으로 하나씩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전에는 열매를 맺지 못했던 땅이 점차 좋은 땅으로 변화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밭인가?’라는 질문보다 어쩌면 더 중요한 질문은 ‘주님께서 지금 내 밭에서 무엇을 드러내고 계시는가?’일 것입니다. 내게 반복해서 찾아오는 시험은 어떤 돌을 보여 주고 있는가, 내가 놓지 못하는 염려는 어떤 가시인가, 말씀을 들으면서 자꾸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고 싶은 마음은 내 밭의 어느 부분이 굳어 있다는 신호는 아닌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씨 뿌리는 비유는 사람을 네 부류로 분류하는 비유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거듭남을 보여 주는 말씀이 됩니다.

 

특히 이 사경회가 계속 강조해 온 ‘연단’도 여기에서 한층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연단의 목적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것을 제거하는 데 있습니다. 돌을 골라내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니라 씨가 깊이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고, 가시를 뽑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열매가 막히지 않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연단의 중심에는 고난이 아니라 생명이 있습니다. 고난을 많이 겪었다고 그 자체로 성숙한 것이 아니며, 고난 가운데 자기애와 자기 의가 드러나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거절하면서 체어리티와 겸손과 인내가 자라났을 때 비로소 그 고난이 연단이 됩니다. 이 점에서 시흥영성수련원의 수도적 전통이 오랫동안 강조해 온 ‘연단’도 외적인 고생의 강도보다 그 연단을 통하여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는가를 중심으로 볼 때 그 영적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1강 8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를 지금까지 배운 핵심진리와 앞으로 배울 요한계시록을 연결하는 출발점으로 삼고, 길가·돌밭·가시밭·좋은 밭이라는 네 가지 마음 상태 가운데 좋은 밭이 되어 가장 밝은 빛과 풍성한 열매를 추구해야 한다는 강사의 강조는 신앙이 반드시 영적 성장과 삶의 결실로 이어져야 한다는 중요한 요청을 담고 있으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동일한 씨인 신적 진리가 사람의 받아들이는 상태에 따라 서로 다른 결과를 낳는 인플럭스의 원리, 시험을 통하여 자기 내면의 실제 상태가 드러나고 악과 거짓을 거절하면서 마음밭이 변화되는 거듭남의 과정, 그리고 진리가 마침내 의지와 결합하여 체어리티와 쓰임이라는 열매가 되는 영적 질서의 아르카나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8부에서 특별히 붙들 만한 것은 ‘좋은 밭은 처음부터 좋은 밭이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실제 농부의 밭을 생각하면 답은 분명합니다. 좋은 밭도 갈아야 하고, 돌을 골라내야 하며, 가시를 뽑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좋은 밭은 ‘나는 원래 괜찮은 사람’이라는 상태가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들어올 때마다 자기 안의 돌과 가시를 보게 되고 그것을 주님의 도움으로 제거해 온 마음입니다. 그래서 시험 가운데 ‘내 안에 이런 분노가 있었구나’, ‘내가 이렇게까지 인정받기를 원했구나’, ‘나는 주님보다 돈을 더 의지하고 있었구나’ 하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은 몹시 불편하지만, 동시에 밭이 좋아질 가능성이 열린 순간이기도 합니다. 쟁기가 땅속에 숨겨져 있던 돌을 끌어올렸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비유의 중심에는 결국 농부이신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마음밭을 보면서 ‘나는 아직 돌도 많고 가시도 너무 많다’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현재의 밭만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밭에서 무엇이 자랄 수 있는지를 아십니다. 씨를 주시고, 빛을 주시고, 비를 내리시며, 우리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우리가 허용하는 만큼 밭을 갈아 가십니다. 그러므로 ‘익은 열매’라는 말은 영적 엘리트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이라기보다, 주님께서 뿌리신 씨가 마침내 우리 안에서 그 목적을 이루도록 허용하라는 초청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알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내 생각을 바꾸고, 생각이 의지와 결합하며, 의지가 행동을 바꾸고, 마침내 내 삶 전체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씨에서 열매까지, 그 긴 과정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1강 9부

겨자씨와 ‘교회 시대 이긴 자’ : 가장 작은 씨가 큰 나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1강 9부에서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겨자씨 비유를 중심으로 ‘영적 성장’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룹니다. 강사의 전체 체계에서 씨 뿌리는 비유가 ‘어떤 마음밭으로 말씀을 받는가’를 보여 주는 서론이라면, 이제 겨자씨 비유부터는 그 말씀을 받은 사람이 실제로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단계로 넘어가는 셈입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을 서로 독립된 이야기로 보지 않고, 씨를 받아 성장하고 광야 연단을 통과하여 마침내 ‘이긴 자’가 되는 하나의 영적 과정으로 연결합니다. 실제로 뒤에서 겨자나무가 된 성도, 누룩처럼 온전히 부푼 성도, 값진 진주를 소유한 성도를 모두 ‘광야를 다 통과해서 이긴 자가 된 상태’를 서로 다른 관점에서 설명한 것이라고 정리합니다.

 

겨자씨 비유 자체는 매우 짧습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을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하시면서, 그것이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지만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고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든다고 말씀하십니다. 강사가 이 비유에서 특별히 붙드는 것은 ‘성장’입니다. 작은 씨로 시작했지만 그것이 자라고 또 자라 마침내 나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무가 된 상태를 강사는 앞서 계속 설명해 온 ‘광야 연단을 통과한 성도’, ‘익은 열매’, ‘교회 시대 이긴 자’와 연결합니다. 나아가 계시록의 14만 4천도 이러한 교회 시대 이긴 자들의 집단으로 해석합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성령 강림부터 공중강림까지의 교회 시대 동안 하나님께서 이러한 ‘인 맞은 종’ 14만 4천을 만들어 내시는 것이 하나의 중요한 구원 섭리가 됩니다.

 

여기에서 먼저 귀하게 받을 수 있는 것은 신앙을 ‘시작’으로 끝내지 않고 반드시 ‘성장’으로 이어 가려는 강사의 문제의식입니다. 겨자씨는 씨인 채로 보존되기 위해 심어진 것이 아닙니다. 씨가 땅속에 들어갔다면 자라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받아 구원받았다는 고백도 신앙생활의 종착점이라기보다 시작입니다. 진리를 받았다면 그 진리가 사람의 생각과 의지와 행동 속으로 들어가 그의 생명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반복하여 ‘구원받았으니 됐다’는 식의 정지된 신앙을 경계하고, 연단과 성화와 성장과 열매를 강조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거듭남은 단번에 완성되는 사건이 아닙니다. 인간은 처음에는 말씀의 진리를 외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배우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아직 그 진리가 곧 그의 생명인 것은 아닙니다. 그는 진리를 따라 살면서 자기 안에서 그 진리를 거스르는 악과 거짓을 발견하고, 시험 가운데 그것들과 싸우며, 주님의 도움으로 악을 거절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렇게 진리가 점차 의지와 결합하고 선이 되며, 마침내 이전에는 ‘옳기 때문에 억지로 행하던 것’을 ‘좋기 때문에 기쁘게 행하는’ 상태로 변화합니다. 겨자씨가 나무가 된다는 그림은 이러한 거듭남의 성장과 매우 아름답게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작은 씨’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신적 진리 자체가 작거나 미약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처음 인간에게 받아들여질 때 그 진리가 차지하는 자리가 매우 작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옳은 것 같다’는 작은 인정 하나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 그것이 사람의 전 존재를 지배하는 사랑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자연적 인간은 ‘나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왜 내가 잘해야 하는가?’라고 반발합니다. 그 가운데 아주 작은 진리 하나가 심어집니다. ‘그래도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이것이 옳다.’ 겨자씨처럼 작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 진리를 따라 실제로 살아가기 시작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이를 악물고 참을 수도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보복하지 않는 법을 배우고, 더 나아가 상대방의 사정을 생각하기 시작하며, 마침내는 그 사람에게도 선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수 있게 됩니다. 처음에는 이해 안에 작은 씨로 있던 진리가 의지로 내려가 사랑과 결합하고, 마침내 삶 전체를 움직이는 하나의 원리가 됩니다. 이것이 씨가 나무가 되는 모습입니다. 따라서 영적 성장은 지식의 양이 늘어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내가 아는 진리가 얼마나 많아졌는가?’보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얼마나 나의 사랑과 삶이 되었는가?’가 더 중요한 기준입니다.

 

이 점에서 겨자씨 비유는 앞서 씨 뿌리는 비유와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8부에서 살펴본 네 가지 마음밭은 진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 겨자씨는 제대로 받아들여진 진리가 ‘어떻게 성장하는가’를 보여 줍니다. 좋은 밭이라는 것은 씨를 보관하는 창고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씨가 자랄 수 있는 밭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밭의 참된 증거는 결국 성장과 열매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인 뒤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랑과 삶이 전혀 변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와 별개로 그 씨가 실제로 어디까지 자라고 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가 이것을 ‘광야 연단’과 연결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식물은 씨가 심어진 뒤 아무 과정 없이 갑자기 큰 나무가 되지 않습니다. 햇빛과 비를 받고 바람을 견디며 뿌리를 깊이 내립니다. 영적으로도 진리가 사람의 생명이 되려면 시험이 필요합니다. 평온할 때 ‘나는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지는 시험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을 때 ‘나는 온유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쉽지만, 모욕을 받았을 때에도 악으로 악을 갚지 않을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시험은 머릿속에 있던 진리를 삶의 진리로 만드는 자리입니다.

 

그렇다고 시험 자체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을 많이 받았다고 자동적으로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고난을 겪고도 한 사람은 더 부드러워지고 다른 사람은 더 완고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험 가운데 무엇을 선택하는가입니다. 자기애와 원망을 붙드는가, 아니면 주님의 진리를 붙들고 그 악을 거절하는가입니다. 따라서 ‘광야 연단’의 본질은 고통의 양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선과 진리가 악과 거짓을 이기고 질서를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을 붙들면 이 사경회가 오랫동안 강조해 온 ‘연단’이라는 언어도 고행이나 영적 성취주의로 흐르지 않고 거듭남의 실제 과정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강사의 해석에서 겨자나무가 된 상태는 매우 높은 영적 단계입니다. 단순히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이 아니라 광야 연단을 통과하고 마음과 행실이 정결해져 ‘이긴 자’가 된 상태입니다. 강사는 이 상태를 계시록의 ‘인 맞은 종’, ‘교회 시대 이긴 자들’, ‘14만 4천’과 연결하고, 이들이 장차 휴거되어 특별한 위치에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다른 강의 대목에서도 강사는 ‘교회 시대 이긴 자’가 광야 연단 과정을 마치고 마음과 행실이 정결하게 된 사람이며, 이들에게 ‘생명과’를 먹는 상태가 주어진다고 설명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상당히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계시록의 14만 4천은 자연적 의미에서 정확히 144,000명의 특별한 성도 집단을 뜻하지 않습니다. 계시록의 숫자들은 상응을 통하여 영적 상태의 질과 충만함을 나타냅니다. 특히 12와 그 배수는 신앙과 사랑에 속한 모든 것, 곧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의 전체를 나타내며, 144,000은 그러한 상태의 충만함을 나타내는 상징적 수로 읽습니다. 따라서 ‘144,000이라는 정원이 실제로 채워져야 종말이 시작된다’는 식의 자연적 산술로 읽지 않습니다.

 

이 차이는 작지 않습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14만 4천’이라는 특정한 수의 ‘교회 시대 이긴 자들’이 형성되고, 이들이 대환난 전에 휴거되는 종말론적 구조가 중요합니다. 실제로 강사는 이 숫자가 ‘14만 4천으로 예정되어 있다’고 명시적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관심이 ‘나는 그 14만 4천 명 안에 들어갈 수 있는가?’에서 ‘내 안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가 얼마나 온전한 질서를 이루고 있는가?’로 이동합니다. 숫자가 외적인 선발 인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충만함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겨자씨 비유와 14만 4천 사이에도 다른 방식의 연결이 가능합니다. 겨자씨가 나무가 된다는 것은 작은 진리의 시작이 인간 전체를 새롭게 하는 데까지 성장하는 것이고, 12와 그 배수의 충만함은 선과 진리가 인간 안에서 온전한 질서를 이루는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핵심은 특별한 영적 엘리트 집단에 편입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신앙의 진리와 체어리티의 선이 서로 결합하여 그의 삶 전체가 주님의 질서 아래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긴 자’라는 표현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의 전통에서는 이 말이 매우 중요합니다. 광야를 통과하고 죄성을 이기며 정결한 단계에 도달한 사람을 ‘이긴 자’라고 부릅니다. 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일곱 교회에 반복하여 ‘이기는 그에게는’이라는 약속이 주어지는 것도 이 체계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로 사용됩니다. 강사는 이긴 자들에게 생명나무의 열매, 흰옷, 새 예루살렘의 이름 등 특별한 약속들이 주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김’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이기는가가 핵심입니다. 다른 종교를 이기는 것도 아니고, 다른 교파를 이기는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보다 높은 영적 단계에 올라가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 깊은 싸움은 자기 안의 악과 거짓에 대한 싸움입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인간이 자기 힘으로 그것들을 이기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최선을 다하여 악을 거절해야 하지만 실제로 이기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지옥의 유입을 물리치시고 선과 진리를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긴 자’라는 표현을 잘못 받아들이면 영적 우월감이 생길 위험도 있습니다. ‘나는 광야를 통과한 사람이고 저 사람은 아직 광야에 있다’, ‘나는 생명과를 먹은 단계이고 저 사람은 아직 그 단계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사람을 영적 계층으로 분류하기 시작하면, 자기부인을 위해 시작한 영성이 오히려 가장 미세한 proprium을 키울 수 있습니다. 영적 교만은 세상적 교만보다 더 알아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세상적 교만은 돈이나 학벌이나 지위를 자랑하지만, 영적 교만은 겸손과 성결과 체험과 진리 지식을 자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천국 이해에서는 오히려 높이 올라갈수록 자기가 높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더 깊은 천국적 상태에 있는 천사일수록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 분명하게 압니다. 따라서 자기 공로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영적 성장의 매우 중요한 역설입니다. 진정으로 성장할수록 ‘내가 성장했다’는 의식은 오히려 약해지고, 주님께 대한 의존은 깊어집니다. 나무가 커질수록 뿌리가 더 깊이 땅속으로 내려가듯, 영적 성숙이 깊어질수록 겸손도 깊어져야 합니다.

 

이 점에서 겨자씨 비유의 ‘나무’는 아주 좋은 분별 기준을 줍니다. 큰 나무는 자기 자신을 위해 큰 것이 아닙니다. 그 가지에 새들이 와서 깃듭니다. 즉 성장의 결과가 다른 존재에게 유익이 됩니다. 이것은 ‘쓰임’이라는 스베덴보리의 핵심 개념과 매우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천국에서 모든 것은 쓰임을 향합니다. 지혜가 많아지는 것도 쓰임을 위해서이고, 사랑이 깊어지는 것도 쓰임을 위해서이며, 어떤 천사가 더 높은 지혜를 받는 것도 더 넓고 깊은 쓰임을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나는 얼마나 성장했는가?’를 판단하는 가장 좋은 기준 가운데 하나는 ‘나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쓰임이 되고 있는가?’일 것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게 되었는데 사람을 더 쉽게 정죄하게 되었다면 나무는 커진 것처럼 보여도 그 가지에 새들이 깃들기 어렵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연단을 많이 받았는데 가족이 나를 더 어려워하고 가까이하기 힘들어한다면 무엇인가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대로 영적 성장이 깊어질수록 사람들이 그 사람 곁에서 위로를 받고, 안전함을 느끼고, 진리를 더 사랑하게 되고, 주님을 바라보게 된다면 그 나무의 가지가 실제 쓰임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든다’는 말씀도 상응적으로 보면 더욱 깊어집니다. 말씀에서 새들은 여러 문맥에서 사고, 지적인 것들, 진리에 관한 이해와 관계합니다. 그렇다면 겨자씨가 나무가 되고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든다는 것은 진리가 인간 안에서 충분히 성장하여 그의 내적 삶이 다양한 참된 생각과 이해가 머물 수 있는 질서 있는 구조가 되는 모습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진리 하나였지만 그것이 삶과 결합하면서 다른 진리들을 받아들이고 연결할 수 있는 큰 구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 신앙의 성장에서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성경의 여러 말씀이 서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창세기의 말씀과 복음서의 말씀이 별개처럼 보이고, 사랑과 신앙과 회개와 시험과 섭리가 각각 다른 주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중심적인 진리가 삶 안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 여러 진리들이 서로 연결됩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중심으로 성경을 읽으면 계명과 회개와 신앙과 쓰임과 섭리가 하나의 질서 안에서 보이기 시작합니다. 큰 나무의 여러 가지가 하나의 줄기에 연결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이 사경회가 추구하는 ‘핵심진리’의 의도와도 의미 있는 접점이 생깁니다. 강사들이 여러 성경 본문을 하나의 영적 성장 체계로 정돈하려는 이유 역시 성경의 진리들을 흩어진 정보로 남겨 두지 않고 하나의 전체적인 신앙의 길로 이해하려는 데 있을 것입니다. 그 의도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체계가 성경 위에 올라서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 합니다. 체계가 말씀을 설명해야지, 말씀이 이미 만들어 놓은 체계를 증명하는 자료로만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서로 다른 본문들을 연결할 때에는 그 연결이 말씀의 내적 상응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해석자가 만든 종말론적 도식에서 나오는 것인지를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겨자씨 비유를 곧바로 ‘14만 4천의 교회 시대 이긴 자’와 동일시하는 부분은 이 강의의 체계 안에서는 일관되지만, 그것이 비유 자체가 직접 말하는 유일한 의미라고 단정하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유 자체의 중심은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성장입니다. 아주 작게 시작된 것이 주님의 생명으로 자라 예상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 됩니다. 이 영적 원리를 충분히 붙든 뒤에 다른 계시록 본문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편이 더 안전합니다.

 

그리고 이 ‘작음에서 큼으로’라는 원리는 스베덴보리의 리메인스와도 연결해서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 선과 진리의 상태들을 보존하십니다. 사람이 그것을 의식하지 못해도 주님과 부모에 대한 순진한 사랑, 이웃에 대한 선한 정서, 진리에 대한 감각 같은 것들이 내면 깊은 곳에 보존됩니다. 이것이 리메인스입니다. 나중에 사람이 거듭남의 길에 들어설 때 주님께서는 그 보존된 상태들을 사용하십니다. 인간에게는 거의 보이지 않는 작은 씨와 같지만, 주님의 섭리 안에서는 장차 거듭남에 사용될 매우 귀중한 기반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의 현재 모습만 보고 그의 영적 가능성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겨자씨만 한 것이 장차 어떤 나무가 될지 우리는 모릅니다. 지금 말씀을 겨우 이해하기 시작한 사람, 아직 많은 약점과 혼란을 가진 사람, 신앙생활에서 여러 번 넘어지는 사람도 주님께서 어떻게 이끌어 가실지 알 수 없습니다. 영적 성장의 주체가 궁극적으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도,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도 중요한 위로가 됩니다.

 

다만 강사의 ‘가장 높은 단계까지 올라가라’는 강조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받을 때에는 목표의 방향을 조금 바꾸어야 합니다. 영적 성장의 목표는 ‘나는 어느 단계까지 올라갔는가?’가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내 안에서 얼마나 자유롭게 역사하고 있는가?’입니다. 가장 높은 상태는 자기 자신을 가장 높게 느끼는 상태가 아니라 가장 깊이 주님께 의존하고 가장 기쁘게 이웃을 섬기는 상태입니다. 천국의 높이는 공간적 고도가 아니라 사랑의 내적 깊이입니다.

 

따라서 겨자나무가 되는 것은 ‘영적 거인’이 되는 것과 다릅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은 작아지고 주님의 생명이 크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진리를 안다’고 생각했지만 점점 ‘주님께서 진리를 주신다’고 알게 되고, 처음에는 ‘내가 선을 행한다’고 생각했지만 점점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선을 행하신다’고 인정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천국에 가기 위해 선을 행하지만, 나중에는 선 자체를 사랑하여 행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장입니다.

 

강사의 설명 가운데 ‘14만 4천이 너무 적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것이 예정된 수라고 답하는 대목도 이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숫자를 자연적 인원수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으므로 ‘나는 그 제한된 정원 안에 들 수 있을까?’라는 불안 자체가 사라집니다. 주님의 구원은 숫자 제한을 두고 경쟁하는 구조가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시며, 각 사람에게 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공급하십니다. 144,000이라는 수가 말하는 것은 천국의 좌석 수가 아니라 주님의 교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충만함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긴 자’라는 말도 경쟁에서 해방됩니다. 내가 다른 성도보다 먼저 가나안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싸워야 할 대상은 다른 성도의 영적 수준이 아니라 내 안의 자기애와 세상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이 삼십 배의 열매를 맺든 백 배의 열매를 맺든 그것은 나와 경쟁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람의 선을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 자체가 내가 이겨야 할 자기애의 한 부분입니다.

 

이것은 시흥영성수련원의 수도적 전통이 지닌 ‘연단’과 ‘이긴 자’의 언어를 더욱 깊고 안전하게 받아들이는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랜 수도적 훈련과 자기부인이 ‘나는 다른 성도보다 높은 단계에 있다’는 의식을 낳는다면 그 연단 속에 proprium이 숨어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연단을 거치면서 자기 악을 더 잘 보고,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더 오래 참으며,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고, 주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된다면 그 연단은 겨자씨가 나무가 되어 가는 실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영적 성숙은 밖으로 자신을 과시하는 높이가 아니라 안으로 깊어지는 겸손으로 나타납니다.

 

1강 9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겨자씨가 자라 큰 나무가 되는 비유를 광야 연단을 통과하여 마음과 행실이 정결해지고 마침내 계시록의 ‘교회 시대 이긴 자’, 곧 14만 4천의 인 맞은 종에 이르는 영적 성장의 모습으로 읽는 강사의 해석은 신앙을 단순한 구원의 출발점에 머물게 하지 않고 반드시 성화와 성장과 열매로 나아가게 한다는 중요한 힘을 지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겨자씨의 성장을 작은 진리의 시작이 시험과 회개를 통하여 의지와 결합하고 마침내 선과 체어리티와 쓰임이라는 큰 나무가 되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읽으며, 14만 4천 역시 문자적인 제한 인원의 영적 엘리트 집단이라기보다 주님의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가 충만하게 갖추어진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고, 참된 ‘이긴 자’란 자기 힘으로 높은 영적 단계에 올라간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거절하여 주님의 선과 진리가 점점 그의 생명을 다스리게 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9부에서 특별히 붙들 만한 것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된 뒤의 모습입니다. 나무가 커졌다는 사실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입니다.’ 성장의 목적이 자기 확대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무는 자기를 위해 그늘을 만들지 않습니다. 다른 생명이 그 가지에서 머물고 쉼을 얻습니다. 이것은 영적 성장을 분별하는 매우 아름다운 기준입니다. 내가 정말 성장했다면 누군가가 나 때문에 살아나야 합니다. 누군가가 내 곁에서 정죄보다 위로를 받고, 불안보다 평안을 얻으며, 나 자신에게 매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더 바라보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교회 시대 이긴 자’라는 강사의 강한 표현도 전혀 다른 색깔을 띠게 됩니다. 이긴 사람은 강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있게 된 사람입니다. 자기 뜻을 관철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며, 자신이 높은 단계에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욱 깊이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겨자씨가 나무가 될수록 자기 씨앗의 작음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모든 생명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성장의 질문도 ‘나는 지금 몇 단계인가?’보다 ‘내 안에서 무엇이 커지고 있는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리를 공부할수록 자기 의가 커지는가, 체어리티가 커지는가? 연단을 받을수록 완고함이 커지는가, 겸손이 커지는가? 영적 체험이 많아질수록 자기 특별함이 커지는가, 주님께 대한 의존이 커지는가? 바로 이 질문이 겨자씨 비유를 우리 자신의 거듭남 안으로 가져옵니다.

 

겨자씨 한 알은 참으로 작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인간이 만들어 넣지 않은 생명이 있습니다. 거듭남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작은 작을 수 있습니다. 한 구절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 한 가지 악을 죄라고 인정하는 것, 한 사람을 용서하기로 결심하는 것, 자기 잘못 하나를 솔직히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에게서 온 진리라면, 그리고 사람이 자유롭게 그 진리를 받아 삶으로 옮긴다면 주님께서는 그 작은 시작을 사용하여 인간 전체를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겨자씨 비유가 말하는 영적 성장의 가장 깊은 신비는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성도가 될 수 있는가’라기보다 ‘주님께서 인간 안에 심으신 아주 작은 진리 하나를 통하여 얼마나 큰 거듭남을 이루실 수 있는가’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1강 10부

누룩과 진주, 보화 : 온 존재가 변화되고,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것은 무엇인가

1강 10부에서는 겨자씨 비유에서 시작된 ‘교회 시대 이긴 자’에 대한 설명이 누룩 비유와 진주·보화 비유로 이어지면서 한층 깊어집니다. 강사는 이 세 비유를 각각 별개의 영적 상태로 보기보다 동일한 사람, 곧 ‘광야를 통과하여 익은 열매가 된 교회 시대 이긴 자’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보여 주는 비유로 이해합니다. 겨자씨가 나무가 되는 것은 ‘성장적인 측면’, 누룩이 가루 서 말 전부를 부풀게 하는 것은 ‘행실적·인격적인 측면’, 값진 진주와 밭에 감추인 보화를 얻기 위하여 자기 소유를 모두 파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는 측면’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뒤에서 이 세 비유를 다시 한데 모아 ‘다 광야의 과정을 지나서 다 부풀고 다 성장하고 온전히 다 소유하게 된’ 이긴 자들을 서로 보완하여 설명하는 비유라고 명시합니다. 이 강의의 전체 구조를 이해하려면 이 점을 먼저 붙들어야 합니다. 강사는 서로 다른 세 비유에서 하나의 완성된 영적 인간을 보고 있습니다.

 

먼저 누룩 비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강사는 여기서 특별히 ‘전부 부풀게’ 된다는 데 주목합니다. 신앙이 사람의 어느 한 부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말과 행동, 인격과 생활 전체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사는 누룩 비유를 ‘인격적인 면에서의 행실적인 성장’을 보여 주는 말씀으로 정리합니다. 이것은 앞서 겨자씨 비유에서 다룬 성장의 문제를 더욱 실제적인 삶으로 가져옵니다. 겨자씨 비유가 ‘얼마나 자랐는가’를 보여 준다면 누룩 비유는 ‘그 성장이 사람 전체에 얼마나 스며들었는가’를 묻는 셈입니다.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인간의 어느 한 기능만 종교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이해만 거듭나고 의지는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없으며, 주일의 예배만 변화하고 평일의 생활은 그대로일 수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이해 안에 들어옵니다. 사람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배우고,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를 말씀을 통하여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사랑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아직 거듭남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알고 그것을 따라 살고, 반복되는 시험 가운데 악을 거절하며, 마침내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그의 성품과 행동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진리는 생명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부 부풀게 되었다’는 강사의 표현은 거듭남의 중요한 한 면을 매우 잘 붙잡고 있습니다.

 

다만 말씀에서 ‘누룩’은 문맥에 따라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를 모두 가질 수 있으므로 무조건 ‘누룩=성화’라는 고정된 상응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경계하셨을 때 누룩은 거짓된 교리와 악한 영향이 퍼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반면 여기에서는 천국을 누룩에 비유하셨으므로 선한 의미입니다. 핵심은 ‘스며들어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악과 거짓도 사람 안에 들어오면 전체를 오염시킬 수 있고, 반대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도 받아들여지면 인간의 전 존재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13장의 누룩은 단순히 ‘행실이 좋아진 사람’을 넘어,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가 의지와 행동에까지 스며들어 인간 전체가 새로운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렇게 보면 누룩 비유는 우리에게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내 신앙은 어디까지 부풀어 있는가?’입니다. 예배드릴 때에는 신앙인이지만 돈을 다룰 때에는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읽을 때에는 겸손하지만 자기 의견이 무시되면 견디지 못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에는 주님의 뜻을 구하지만 실제 중요한 결정을 할 때에는 자기 이익만 따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누룩이 가루 전체에 퍼진 것은 아닙니다. 진리가 어떤 부분에는 들어갔지만 아직 다른 영역에는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거듭남은 바로 그 남아 있는 영역까지 주님의 질서 아래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신앙과 생활, 교리와 인격, 예배와 직업, 기도와 인간관계 사이의 간격이 점점 줄어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사경회가 계속 강조해 온 ‘마음과 행실의 정결’이라는 주제와도 맞닿습니다. 강사는 겨자나무가 된 성도와 누룩처럼 온전히 부푼 성도와 값진 진주를 소유한 성도를 모두 광야를 통과하여 익은 열매가 된 같은 사람의 서로 다른 모습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분명 귀한 통찰이 있습니다. 영적 성숙은 어느 한 방면의 탁월함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 지식만 많거나 기도만 오래 하거나 고난을 많이 겪었다고 완성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실제 인격과 행실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이 강의가 상당히 가까워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진리가 체어리티의 선으로 살아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정결’이나 ‘이긴 자’라는 표현을 받아들일 때에는 여전히 주의가 필요합니다. 인간이 거듭나면서 악이 완전히 사라져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제거하신다기보다 사람이 그것으로부터 물러나게 하시고 악이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깊이 거듭난 사람일수록 ‘나는 이제 죄성이 제거된 정결한 사람이다’라고 자신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안에 있는 proprium이 어떤 것인지를 더 분명히 알고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이 차이는 중요합니다. 영적 성장의 결과가 자기 완성에 대한 확신이 되어서는 안 되고 주님께 대한 의존의 심화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어 강사는 진주 비유와 보화 비유로 넘어갑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부터 46절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읽으면서, 두 비유는 서로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기뻐하여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고, 좋은 진주를 구하던 장사가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자 자기 소유를 모두 팔아 그것을 산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여기서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부분을 매우 강하게 붙듭니다. 진주의 값은 얼마인가를 묻고는 사실상 ‘자기의 소유를 몽땅 파는 값’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하나님의 생명을 온전히 소유하려면 인간이 붙들고 있던 육적인 소유와 자기 것을 내려놓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 사경회의 수도적 영성이 매우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얻기 위하여 세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생명을 얻기 위하여 자기에게 속한 것을 포기하며, 광야 연단을 통하여 자기 소유가 벗겨지는 과정을 중요하게 보는 것입니다. 강사는 다른 강의 대목에서 욥의 연단과 이 진주 비유를 직접 연결하면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기 위해 ‘자기의 육적인 모든 소유’를 내려놓게 되는 것이 연단의 특징이라고까지 설명합니다. 그리고 욥이 재물과 자녀를 잃은 일을 이러한 ‘소유를 다 파는’ 과정의 한 사례처럼 연결합니다. 이 대목은 시흥영성수련원의 수도적 전통을 이해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에게 ‘자기부인’은 단순한 추상적 교리가 아니라 실제 삶의 소유와 애착을 내려놓는 매우 현실적인 영적 훈련의 언어로 받아들여져 온 것으로 보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말씀은 대단히 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외적인 소유와 내적인 소유입니다. 주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문자 그대로 재산과 가족과 직업을 버리라고 요구하신다고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훨씬 더 근본적으로 내려놓아야 할 ‘자기 소유’가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proprium입니다. ‘내 생각이 옳다’,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 ‘내가 이 선을 행했다’, ‘내 지혜로 이것을 깨달았다’, ‘나는 이만큼 영적으로 성장했다’고 자신에게 돌리는 모든 것이 그 깊은 층의 ‘내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proprium을 그토록 엄중하게 다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에게서 나온 proprium 자체에는 선한 것이 없으며, 참된 선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소유를 다 팔아 진주를 산다’는 말씀은 단순한 금욕을 넘어 훨씬 더 깊은 자기부인의 말씀으로 열립니다. 돈을 버렸는데 자기 의는 그대로일 수 있습니다. 재산을 포기했는데 영적 교만은 더 커질 수도 있습니다. 세상적 명예를 버리고 수도생활에 들어갔는데 ‘나는 세상을 버린 사람’이라는 새로운 명예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proprium의 매우 미묘한 성질입니다. 자연적인 소유를 버리는 것은 눈에 보이지만, ‘내가 버렸다’는 공로의식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참된 자기부인은 소유의 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내 힘으로 선할 수 있다’는 자기 소유의 가장 깊은 환상을 내려놓는 데까지 가야 합니다.

 

이 점에서 진주 비유는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더 깊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무엇을 버렸는가?’보다 ‘버린 그것을 누구의 공로로 여기고 있는가?’입니다. 세상의 많은 것을 포기했어도 그 포기를 자기 영적 지위의 근거로 삼는다면 아직 팔리지 않은 가장 값비싼 ‘자기 소유’가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연적으로는 가정과 직업과 재산을 가지고 살아도 그것을 자기 욕망을 위한 소유물이 아니라 주님께서 맡기신 쓰임의 수단으로 여기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적 무소유와 내적 자기부인은 반드시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본질적인 것은 외적 형편보다 사랑의 질서입니다.

 

여기서 강사가 욥의 모든 소유가 거두어지는 것을 ‘하나님의 생명을 얻기 위한 전제 조건’처럼 설명하는 부분에는 특별히 세심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일반화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높은 영적 단계로 이끌기 위해 재산이나 자녀를 빼앗으신다’는 매우 위험한 신관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주님은 악이나 비극을 직접 보내어 사람을 성화시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의 섭리는 끊임없이 선을 향하지만, 자연계와 인간 자유 안에서 허용되는 고난과 상실까지 사용하여 사람을 영원한 선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재산을 잃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을 ‘하나님께서 당신을 더 높은 단계로 올리기 위해 거두어 가셨다’고 쉽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당사자에게는 영적으로도 목회적으로도 너무 무거운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욥기의 핵심을 자기부인의 관점에서 받는다면, 외적인 것을 잃었다는 사실 자체보다 모든 외적 기반이 흔들릴 때에도 하나님을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만 사랑했는지, 아니면 하나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지가 드러나는 시험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라는 고백의 깊이는 하나님께서 실제로 모든 비극을 직접 일으키신다는 교리적 진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의 근거를 외적 소유에서 하나님께로 옮기는 신뢰에 있습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더욱 깊이 가져가면, 결국 인간은 ‘내 생명도 내 것이 아니다’라는 데까지 가게 됩니다. 생명 자체가 순간마다 주님에게서 유입되기 때문입니다.

 

진주와 보화가 ‘하나님의 생명’을 나타낸다는 강사의 강조도 이 지점에서 새롭게 받을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을 자기 소유물로 만들어 갖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생명의 원천이 될 수 없고 오직 생명을 받아들이는 그릇입니다. 천사조차 자기에게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생명이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유입된다는 것을 압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다’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더욱 충만하게 받아들이는 상태’라고 이해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사람이 자기 proprium을 붙들수록 그 유입을 왜곡하고, 자기 것을 내려놓을수록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더욱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진주를 ‘소유’하는 길은 내 소유를 버리는 길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얻는 진주마저 ‘이제 이것은 내 것이다’라고 붙들 수 없습니다. 모든 선과 진리는 여전히 주님의 것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느끼며 자유롭게 살아야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천국적 자유의 아름다운 역설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천사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자유롭게 행하지만 그것을 자기 공로로 돌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자유롭습니다.

 

이것을 앞의 누룩 비유와 연결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것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비워 내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운 자리에 주님의 생명이 들어와야 합니다. 자기애를 버렸는데 사랑이 들어오지 않으면 단순한 자기 억압이 될 수 있고, 세상 욕망을 절제했는데 쓰임의 기쁨이 생기지 않으면 메마른 금욕이 될 수 있습니다. 참된 자기부인은 ‘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나’의 중심을 바꾸는 것입니다. proprium이 중심이던 인간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중심이 되는 인간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주 비유의 중심은 ‘얼마나 많이 버렸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얻기 위해 버리는가?’입니다. 밭을 산 사람은 슬퍼하며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기뻐하여’ 돌아가 자기 소유를 다 팔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천국적 자기부인은 궁극적으로 기쁨을 향합니다. 처음에는 악을 버리는 일이 고통스럽습니다. 자기애가 그것을 자기 생명을 잃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면 내가 지는 것 같고, 명예욕을 내려놓으면 내가 작아지는 것 같으며, 자기 뜻을 포기하면 자유를 잃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은 반대로 알게 됩니다. 자기애를 붙드는 것이 속박이었고, 그것을 버리는 것이 자유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진주를 발견한 사람이 모든 것을 팔면서도 기뻐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더 귀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전에 귀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상대적으로 가벼워진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부인의 동기를 분별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두려워서 버리는 것과 더 큰 사랑 때문에 버리는 것은 다릅니다. ‘이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벌받는다’는 두려움만으로 이루어지는 금욕은 오래가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서 오는 선의 기쁨을 맛보면서 이전의 자기중심적 욕망이 더 이상 가치 있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의 질서가 실제로 변화하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어린아이가 성장하면서 예전에 소중히 여기던 장난감을 자연스럽게 내려놓듯, 영적 인간도 더 높은 선을 맛보면서 낮은 사랑을 점차 놓게 됩니다. 이것이 강사가 말하는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표현을 거듭남의 언어로 더욱 깊이 이해하는 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 세 비유를 함께 놓으면 강사의 체계가 왜 이들을 모두 ‘교회 시대 이긴 자’와 연결하는지도 이해됩니다. 겨자씨는 ‘성장’, 누룩은 ‘전 존재의 변화’, 진주와 보화는 ‘자기 소유를 버리고 하나님의 생명을 얻음’을 보여 줍니다. 강사는 이 세 가지를 광야 연단을 통과한 한 사람의 서로 다른 모습으로 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 세 비유를 반드시 14만 4천이라는 특정 집단과 연결할 필요는 없지만, 거듭남의 서로 다른 면을 보여 주는 연속적인 그림으로 읽는 것은 상당히 풍성합니다. 진리가 씨로 심어지고 자라 나무가 되며, 그 생명이 인간 전체에 누룩처럼 퍼지고, 마침내 사람은 주님과의 결합을 방해하는 proprium을 내려놓으면서 천국적 생명을 더욱 충만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나는 이제 나무가 되었다’, ‘나는 전부 부풀었다’, ‘나는 진주를 소유했다’고 자기 상태를 판정하기 시작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영적 성장의 가장 큰 역설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주님에게 가까워질수록 자기 선을 덜 봅니다.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지 더 잘 알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아직 자기 의가 강할수록 자신의 영적 성취를 쉽게 측정하고 등급화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시대 이긴 자’라는 강사의 표현을 받아들일 때 가장 중요한 안전장치는 ‘이긴 자 자신은 누구의 힘으로 이겼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자기 힘과 자기 연단과 자기 성취로 이겼다고 생각한다면 가장 깊은 싸움이 아직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수도적 연단의 목표도 매우 분명해집니다. 수도생활의 목표는 고난을 많이 견딜 수 있는 강한 인간을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많이 버린 사람, 더 오래 금식한 사람, 더 많이 기도한 사람, 더 어려운 환경을 견딘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도 궁극적 목적이 아닙니다. 그 모든 훈련이 의미를 가지려면 그 결과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지배가 약해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강해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더 오래 참게 되고, 자기 잘못을 더 빨리 인정하게 되며, 자신의 공로를 덜 주장하고, 맡겨진 쓰임을 더 기쁘게 행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외적인 광야는 통과했어도 내적인 광야는 아직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특히 시흥영성수련원처럼 오랫동안 실제 수도공동체와 연단의 전통을 이어 온 곳을 바라볼 때 소중한 분별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외부 사람이 그들의 내적 상태를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수도적 전통 그 자체가 향해야 할 방향은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세상 사랑의 지배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소유를 줄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소유욕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자기를 낮추는 외적 모습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proprium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 그리고 그 빈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쓰임의 기쁨이 자리 잡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수도적 자기부인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는 상당히 깊은 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강사가 이 세 비유를 계시록의 14만 4천과 연결하는 부분에서는 앞서 9부에서 살펴본 구별을 그대로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겨자씨·누룩·진주·보화가 모두 14만 4천이라는 ‘교회 시대 이긴 자’의 성장·행실·생명적 측면을 설명합니다. 실제 강의 서두에서도 겨자씨 비유는 14만 4천의 성장적 측면, 누룩 비유는 행실적 측면, 진주·보화 비유는 생명적 측면이라고 명시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144,000은 자연적 인원수로 제한된 영적 엘리트 집단이라기보다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의 모든 것과 그 충만한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 비유가 가리키는 거듭남의 충만함을 특정한 144,000명에게만 해당되는 특별 코스로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각자의 자유와 받아들임에 따라 가능한 가장 충만한 천국적 상태로 이끌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목회적으로도 중요합니다. ‘나는 14만 4천 안에 들었는가?’, ‘나는 어느 연단 단계인가?’, ‘나는 생명과를 먹는 단계인가?’라는 질문에 신앙의 중심이 쏠리면 사람은 자꾸 자기 영적 위치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나 거듭남의 중심 질문은 ‘나는 지금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어떤 악을 거절해야 하는가?’, ‘오늘 내가 행해야 할 선과 쓰임은 무엇인가?’, ‘내가 알고 있는 진리를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전자는 자기 상태를 측정하게 하지만 후자는 주님을 바라보고 실제 삶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1강 10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라는 성장, 누룩이 가루 전체를 부풀게 하는 인격과 행실의 변화, 값진 진주와 보화를 얻기 위하여 자기 소유를 모두 파는 자기부인을 모두 광야 연단을 통과한 ‘교회 시대 이긴 자’, 곧 14만 4천의 서로 다른 모습으로 읽는 강사의 해석은 신앙이 지식이나 체험에 머물지 않고 인간 전체의 변화와 철저한 자기부인에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강력한 요청을 담고 있으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를 진리가 이해에서 의지로 내려가 인간의 모든 생활을 새롭게 하고, 시험 가운데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거절하며, 마침내 인간이 자기 지혜와 자기 공로와 자기 뜻이라는 proprium의 소유권을 내려놓음으로써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더욱 자유롭고 충만하게 받아들이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10부에서 가장 깊이 붙들 만한 것은 어쩌면 ‘자기 소유를 다 팔았다’는 말보다 그 앞에 있는 ‘기뻐하여’라는 한마디일 것입니다. 자기부인을 고통과 희생만으로 이해하면 신앙은 점점 무거워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밭의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귀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내려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자기부인의 비밀입니다. 세상을 미워해서 주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너무 귀하여 세상이 제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재물을 악하게 여겨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재물보다 더 귀한 선을 발견하고, 명예를 무조건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인정과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의 생명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거듭남은 ‘나는 무엇을 얼마나 버렸는가?’를 세는 과정이 아니라 ‘무엇이 내게 가장 귀한 것이 되어 가고 있는가?’를 묻는 과정입니다. 주님이 정말 가장 귀해지면 많은 것은 억지로 떼어 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제자리로 내려갑니다. 재산은 쓰임의 도구가 되고, 지식은 이웃을 섬기는 수단이 되며, 직분은 명예가 아니라 책임이 되고, 신앙 체험은 자랑거리가 아니라 주님께 감사할 이유가 됩니다. 심지어 자기의 영적 성장마저 자기 소유로 붙들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누룩도 ‘전부’ 부풀기 시작합니다. 주님이 주일의 한 시간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돈을 사용하는 방식에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도, 화가 날 때의 선택에도, 아무도 보지 않을 때의 행동에도,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도 들어오십니다. 신앙이 삶의 한 부분이 아니라 삶 전체의 질서가 되어 갑니다. 이것이 누룩의 변화이고, 겨자씨의 성장이며, 진주를 얻기 위해 자기 소유를 파는 자기부인이 서로 만나는 지점입니다.

 

결국 ‘이긴 자’의 가장 깊은 표지는 ‘내가 이겼다’는 의식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기셨다’는 고백일 것입니다. 내 힘으로 광야를 통과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붙드셨고, 내 힘으로 악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싸우실 수 있도록 내가 악을 거절했으며, 내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나를 살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버림조차 자랑이 될 수 없고 연단조차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남는 것은 감사와 쓰임입니다.

 

그렇게 보면 겨자씨와 누룩과 진주와 보화가 하나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모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진리 하나가 심어집니다. 그 진리가 시험을 지나며 자라 나무가 됩니다. 그 생명이 사람의 전 존재에 누룩처럼 스며듭니다. 그러면서 이전에 ‘내 것’이라고 움켜쥐던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발견하는 것은 ‘내가 모든 것을 버려서 하나님을 얻었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나를 찾아오시고 씨를 심으시고 자라게 하시고 변화시키신 분이 주님이셨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바로 이것이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말씀의 가장 깊은 자리일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내가 했다’는 소유권마저 주님께 돌려드리는 것, 그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누리면서도 그것이 영원히 주님의 것임을 기쁘게 인정하는 것, 그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1강 10부의 가장 깊은 결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강 11부

부자 청년과 ‘모든 소유를 팔라’ : 영생, 생명, 온전, 보화, 그리고 주님과의 결합

1강 11부에서는 앞서 진주와 보화 비유에서 다루었던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주제가 마태복음 19장의 부자 청년 이야기와 연결되면서 더욱 구체적으로 전개됩니다. 강사는 부자 청년이 주님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자 주님께서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대답하신 점에 주목합니다. 이어 청년이 어려서부터 계명들을 지켰다고 하자 주님께서는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강사는 여기에서 ‘영생’, ‘생명’, ‘온전’, ‘보화’를 서로 연결되는 표현으로 보고, 진주와 보화 비유에서 말한 ‘하나님의 생명’을 얻으려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이 ‘소유’에는 물질적 재산뿐 아니라 인간 안의 ‘죄성과 정욕’까지 포함되며, 그것을 벗어 가는 과정이 곧 ‘광야 연단 과정’이라고 풀이합니다. 강사의 종합은 매우 선명합니다. 계명을 지키는 길, 모든 소유를 파는 길, 좁은 문과 협착한 길을 통과하는 길, 광야 연단을 받는 길은 결국 한 방향, 곧 하나님의 생명을 얻고 ‘온전’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이 사경회의 영적 성장론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합니다. 강사가 말하는 ‘구원’과 ‘완성’ 사이의 관계가 매우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계명을 알고 있으며 어려서부터 그것을 지켜 왔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그에게 아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음을 드러내십니다. 강사는 이것을 단순히 도덕적으로 착하게 사는 수준과 하나님의 생명을 온전히 소유하는 수준 사이의 차이로 읽습니다. 외적인 계명 준수에서 더 깊은 자기 포기와 주님을 따르는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강의의 문제의식은 매우 귀합니다. 신앙은 단지 ‘나는 이 계명을 지켰다’고 점검하는 외적 도덕성으로 끝나지 않으며, 인간의 가장 깊은 사랑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가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부자 청년 이야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매우 깊어집니다. 계명 준수는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에서 악을 죄로 알고 피하는 삶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그러나 계명을 외적으로 지켰다는 사실만으로 인간의 내적 사랑까지 자동적으로 변화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살인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다른 사람을 미워할 수 있고, 도둑질하지 않았지만 탐욕을 사랑할 수 있으며, 간음하지 않았지만 음란한 욕망을 자기 생명의 즐거움으로 품을 수도 있습니다. 또 부모를 공경하고 종교생활을 성실하게 했어도 자기 재산과 명예와 자기 의를 주님보다 더 깊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단순히 ‘계명을 더 열심히 지켜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의 마음이 실제로 무엇에 붙들려 있는지를 드러내십니다.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다’는 사실은 그의 가장 깊은 사랑의 질서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강사도 바로 이 점을 붙들어, 청년이 소유가 많았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소유’의 속뜻이 중요해집니다. 강사는 소유를 물질적 재산에만 한정하지 않고 ‘죄성과 정욕’까지 포함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방향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더욱 깊게 확장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버리기 어려운 소유는 반드시 돈이나 집이나 토지가 아닐 수 있습니다. ‘내 생각’, ‘내 판단’, ‘내 공로’, ‘내 신앙’, ‘내가 옳다는 확신’,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와 같은 것들이 훨씬 더 깊은 소유일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proprium의 영역입니다. 인간은 자기에게서 나오는 생각과 선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기를 좋아합니다. 특히 종교적인 사람은 자연적인 재물을 상당히 절제하고도 ‘나는 남들보다 더 거룩하다’, ‘나는 이만큼 연단받았다’, ‘나는 더 깊은 진리를 안다’는 영적 소유를 붙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소유를 팔라’는 말씀을 단순히 물질적 무소유의 명령으로만 읽으면 가장 깊은 소유를 그대로 둔 채 외적인 것만 내려놓을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자기부인은 인간의 개성과 인격을 파괴하거나 모든 자연적 소유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자기에게서 나온 자기 것’으로 붙드는 질서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재산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주님께서 맡기신 쓰임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고, 지식과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자기 영광이 아니라 이웃의 선을 위해 사용할 수 있으며, 목회적 권위를 가지고 있어도 사람을 자기에게 묶지 않고 주님께 이끌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 재산도 없고 매우 검소하게 살면서도 자기 뜻과 자기 의와 자기 영적 우월감을 강하게 소유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말씀의 가장 깊은 층에서는 ‘이것은 내 것이다’라고 붙드는 proprium의 소유권이 무너져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것을 내려놓을수록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더욱 자유롭게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영생’, ‘생명’, ‘온전’, ‘보화’를 서로 연결하여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하나의 중심으로 모으는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네 표현이 완전히 동일한 동의어라기보다 서로 깊이 연결된 영적 질서의 서로 다른 면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밀하겠습니다. ‘생명’의 원천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생명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형체입니다. ‘영생’은 그 주님의 생명을 천국적 사랑과 진리의 질서 안에서 영원히 받아들이며 사는 상태입니다. ‘온전’은 인간이 무한하신 주님처럼 절대적으로 완전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질서 안에서 선과 진리가 조화를 이루고 사랑과 삶이 하나가 되어 가는 상태입니다. ‘보화’는 그보다 귀한 것이 없을 만큼 주님과 그분의 나라가 인간의 가장 높은 가치가 된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네 표현은 모두 주님과의 결합을 향하지만 각각 생명의 근원, 영원한 상태, 질서의 충만함, 가치의 중심이라는 서로 다른 뉘앙스를 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온전하고자 할진대’라는 주님의 말씀은 조심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완덕’, ‘이긴 자’, ‘익은 열매’와 연결되면서 상당히 완성된 영적 단계의 언어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서 인간이 지상에서 어느 순간 절대적 무결점 상태에 도달하여 더 이상 거듭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유한한 피조물은 무한하신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영원히 더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천사들도 영원히 완전해져 갑니다. 그러므로 ‘온전’은 ‘나는 이제 완성되었다’고 자기 상태에 졸업장을 붙이는 의미라기보다, 그 단계에서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선과 진리의 질서가 사람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상태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깊은 영적 상태에 들어갈수록 사람은 자신을 완전하다고 느끼기보다 주님만이 완전하시며 자기 안의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압니다.

 

여기서 부자 청년의 이야기와 진주 비유 사이에는 매우 아름다운 공통점이 있습니다. 진주를 발견한 사람은 자기 소유를 다 팔고 기뻐하며 진주를 얻지만, 부자 청년은 자기 소유를 팔라는 말씀 앞에서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둘 다 ‘모든 소유’의 문제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는 더 귀한 것을 발견한 기쁨이 자기 소유에 대한 애착보다 컸고, 다른 사람에게는 자기 소유에 대한 애착이 주님을 따르는 기쁨보다 컸습니다. 바로 이 차이가 영적 가치관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단지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경제적 교훈으로만 읽기보다 ‘내가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읽으면 훨씬 깊어집니다. 사람은 실제로 가장 사랑하는 것을 위해 다른 것을 희생합니다. 돈을 가장 사랑하면 시간을 희생하고, 명예를 가장 사랑하면 관계를 희생할 수 있으며, 주님과 그분의 나라를 가장 사랑하게 되면 자기애와 거짓을 내려놓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강사가 ‘광야 연단 과정 자체가 계명을 지키는 과정’이며, 부자 청년이 가진 물질적 소유뿐 아니라 ‘정욕과 죄성’까지 모두 팔아야 비로소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부분은 귀한 강조와 동시에 신중한 보완을 함께 필요로 합니다. 귀한 점은 계명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지켜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내적 욕망과 싸우는 과정이 없이는 참된 영적 성장이 어렵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죄성을 다 팔아 없애야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다’는 표현이 인간 자신의 수고로 죄의 뿌리를 완전히 제거한 뒤에야 주님께서 생명을 주신다는 식으로 들리면 문제가 생깁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악의 뿌리를 뽑아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악에서 물러나게 하시고 그 악이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사람의 역할은 악이 올라올 때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사랑하고 합리화하지 않고, 주님의 계명에 반하는 죄로 인정하여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거절하는 것입니다. 실제 힘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모든 소유를 판다’는 것도 한 번의 영웅적 결단으로 끝나는 사건이라기보다 거듭남 전체를 통하여 반복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명예욕 하나가 드러나면 그것을 내려놓고, 내일 자기 의가 드러나면 그것을 내려놓으며, 어느 날에는 돈에 대한 애착이, 또 어느 날에는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드러납니다. 인간은 자기 안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를 처음부터 모두 알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시험과 삶의 여러 상태를 통하여 하나씩 드러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는 인간이 자기 소유의 목록을 하나씩 발견하는 장소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것에는 자유롭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니었구나’, ‘나는 저 사람을 용서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인정받고 싶었구나’ 하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거절할 때 ‘판매’가 이루어집니다. 물론 그 대가로 주님의 생명을 인간이 구매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은혜는 사고파는 상품이 아닙니다. 오히려 붙들고 있던 자기 것을 놓음으로써 이미 끊임없이 주어지고 있던 주님의 생명을 더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진주 비유의 ‘산다’는 표현도 더욱 섬세하게 이해하도록 합니다. 자연적 상거래에서는 값을 지불하면 물건의 소유권이 내게 넘어옵니다. 그러나 천국적 진리는 그렇게 소유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 소유를 버린 대가로 ‘하나님의 생명’을 자기 재산처럼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선과 진리와 생명은 영원히 주님의 것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 자기 것처럼 느끼고 자유롭게 살아가지만, 동시에 그것이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주의 참된 소유는 역설적으로 ‘내 것이 아니다’라는 인식과 함께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천국적 자유입니다. 자기 것으로 움켜쥐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충만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강사는 이어 요한복음 17장의 주님의 기도, 곧 제자들이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는 말씀도 이 ‘생명’과 결합의 문제 안에서 연결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앞서 바로잡았던 ‘신인합일’이라는 표현이 다시 중요한 자리를 갖습니다. 주님과 인간이 ‘하나가 된다’는 말씀은 인간이 신적 본질로 변하여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언어로는 ‘결합’입니다. 주님은 생명의 근원이시고 인간은 생명의 수용체이며, 주님은 선과 진리 자체이시고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피조물입니다. 두 존재의 구별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주님의 뜻을 자기 뜻보다 사랑하고, 주님의 진리를 자기 생각보다 높이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삶으로 행할수록 사랑과 목적과 삶의 질서에서 주님과 더욱 깊이 결합됩니다.

 

이것은 결혼의 상응을 생각하면 조금 이해하기 쉽습니다. 참된 부부는 서로 다른 두 사람으로 남으면서도 사랑과 목적이 깊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흡수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구별되면서도 사랑으로 결합합니다. 물론 주님과 인간의 관계는 피조물 사이의 결혼보다 무한히 높은 것이지만, ‘구별을 보존한 채 이루어지는 결합’이라는 점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인합일’을 사용할 때에도 ‘합일’이라는 말 때문에 인간과 하나님이 존재론적으로 융합된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주님과의 결합이라는 의미를 함께 밝혀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결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람이 단지 주님에 관한 진리를 많이 안다고 주님과 결합되는 것은 아닙니다. 알고 있는 진리를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부자 청년의 이야기에서 ‘계명을 지키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붙드는 것은 좋은 출발입니다. 다만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형식적인 규칙 준수만이 아니라, 계명의 내적 목적을 사랑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살인하지 않는 것을 넘어 미움을 거절하고, 도둑질하지 않는 것을 넘어 이웃의 선을 원하며, 간음하지 않는 것을 넘어 결혼 사랑의 거룩함을 사랑하고, 거짓 증언하지 않는 것을 넘어 진실 자체를 사랑해야 합니다. 외적 계명이 내적 사랑으로 들어갈 때 주님과의 결합이 깊어집니다.

 

이렇게 보면 부자 청년의 가장 큰 문제는 재산의 양 자체가 아닙니다. 그의 마음이 재산과 결합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정확히 그 결합을 드러내셨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방식의 명령이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재물이 가장 큰 소유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명예가,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학문과 지식이, 종교인에게는 자기 교리와 자기 경건이 가장 큰 소유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이 가장 깊이 붙들고 있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시험은 모든 사람에게 외적으로 동일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부자 청년에게 모든 재산을 팔라고 하셨으므로 모든 성도는 문자적으로 모든 재산을 팔아야 한다’는 식으로 적용하면 안 됩니다. 말씀의 깊은 목적은 가장 사랑하는 것이 주님보다 위에 있는지를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수도적 무소유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재산을 실제로 줄이거나 공동생활 가운데 개인 소유를 제한하는 것은 인간의 애착을 드러내고 절제하는 데 유익한 훈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훈련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사람이 소유를 버린 뒤에도 ‘내가 버린 것’을 소유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 사람과 다르다’, ‘나는 재산을 버렸다’, ‘나는 수도적 삶을 산다’는 의식이 새로운 보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proprium은 놀라울 만큼 종교적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마지막까지 팔아야 할 것은 ‘내가 팔았다’는 공로의식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소유를 다 팔아야 한다. 하나라도 안 팔면 진주를 살 수 없다’고 강하게 강조한 표현은 내적으로 읽을 때 오히려 더욱 엄중해집니다. 외적 재산 몇 가지를 내려놓는 수준이 아니라 주님과의 결합을 방해하는 모든 자기 소유권을 내려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비워 무(無)가 되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와 이성, 고유한 개성과 쓰임을 없애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proprium의 지배가 약해질수록 주님께서 주신 참된 개성이 더 자유롭게 살아납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서로 똑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상에서보다 훨씬 분명한 고유성을 가지면서도 그 고유성이 자기 사랑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의 쓰임을 섬깁니다.

 

따라서 자기부인의 최종 목적은 ‘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거짓된 나의 중심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가 생명의 원천이다’, ‘내 선은 내 것이다’, ‘내 판단이 최종 기준이다’,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거짓된 중심이 내려옵니다. 그 자리에 주님이 중심이 되십니다. 그렇게 될 때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오히려 참된 자신을 얻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피조물로서의 참된 질서 안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좁은 문’과 ‘협착한 길’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강사는 부자 청년과 진주 비유를 연결하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협착한 길을 다 통과해야 비로소 보화와 생명을 얻는다’고 설명합니다. 좁은 길이 좁은 이유는 주님께서 일부러 인간을 고생시키기 위해 길을 좁게 만드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은 자기 욕망을 제한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자기를 부인하라’, ‘악을 죄로 알고 피하라’, ‘네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진리는 proprium에게 매우 좁게 느껴집니다. 자기 욕망에는 넓은 길이 편합니다. 원하는 대로 화내고, 원하는 대로 소유하고, 원하는 대로 인정받고, 자기에게 유리하게 진리를 해석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넓음은 실제 자유가 아니라 욕망의 지배입니다.

 

반대로 처음에는 좁아 보이는 주님의 길이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참된 자유의 길이 됩니다. 처음에는 용서하는 것이 억울하지만 나중에는 미움을 품고 사는 것이 더 큰 속박임을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정직 때문에 손해 보는 것이 답답하지만 나중에는 거짓말을 유지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훨씬 고통스러운 속박임을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자기 뜻을 내려놓는 것이 죽음처럼 느껴지지만 나중에는 자기 뜻에 갇혀 사는 것이 얼마나 좁은 삶이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좁은 길의 끝에는 더 큰 생명과 자유가 있습니다.

 

1강 11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부자 청년의 ‘영생’, 주님의 ‘생명’, ‘온전하고자 할진대’, ‘하늘의 보화’, 그리고 진주 비유의 ‘자기 소유를 다 팔아 얻는 값진 진주’를 모두 하나님의 생명과 광야 연단의 완성으로 연결하는 강사의 해석은 신앙이 외적인 계명 준수에 머물지 않고 인간이 가장 깊이 붙들고 있는 소유와 욕망까지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한다는 강력한 자기부인의 요청을 담고 있으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모든 소유’를 단순한 재산이나 외적인 생활조건보다 더 깊이 인간이 자기 생각과 자기 뜻과 자기 선과 자기 공로를 자기 것으로 붙드는 proprium으로 읽고, 그것을 시험 가운데 죄로 인정하고 주님의 힘으로 거절함으로써 이미 끊임없이 유입되고 있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더욱 자유롭게 받아들이며, 그렇게 주님과 존재론적으로 융합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의지와 삶의 질서에서 점점 더 깊이 결합되는 거듭남의 아르카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11부에서 특별히 붙들 만한 것은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주님을 싫어해서 돌아간 것이 아닙니다. 영생을 원했고 계명도 지켰으며 주님께 직접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가장 깊은 사랑을 건드리는 순간 멈추었습니다. 이 장면은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에게도 매우 정직한 거울이 됩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주님께서 손대지 않기를 바라는 영역 하나를 남겨 둘 수 있습니다. ‘이것만은 건드리지 마십시오. 이것만은 제 것입니다.’ 재물일 수도 있고, 인간관계일 수도 있고, 자기 계획일 수도 있고, 자존심일 수도 있으며, 오랫동안 붙들어 온 신학적 확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주 비유와 부자 청년의 차이는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느냐보다 ‘더 귀한 것을 보았는가?’에 있습니다.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기뻐하여’ 팔았고, 부자 청년은 ‘근심하여’ 돌아갔습니다. 주님이 정말 더 귀하게 보이기 시작하면 자기부인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억지로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더 귀한 것을 위해 자발적으로 놓게 됩니다. 이것이 참된 영적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세상을 미워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세상이 제자리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모든 소유를 판다’는 말씀의 마지막 단계는 재산도, 정욕도, 자기 의도만이 아닐 수 있습니다. 가장 마지막에는 ‘내가 이 모든 것을 버려서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마저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 생각까지 내 소유로 붙들면 자기부인이 다시 자기 공로가 됩니다. 그래서 참된 이긴 자는 마지막에 ‘나는 모든 것을 팔았습니다’라고 자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제 손에서 하나씩 놓게 하셨고, 제가 놓았다고 생각한 힘마저 주님에게서 왔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신인합일’이라는 이 사경회의 언어도 가장 안전한 의미를 얻습니다. 인간이 신적인 존재로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 것’이 점점 내려가고 주님의 생명이 더욱 자유롭게 그 안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나의 의지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을 기뻐하는 새 의지로 거듭나고, 나의 이해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로 밝아지며, 나의 개성은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고유한 쓰임을 더욱 온전히 드러내게 됩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라는 고백은 인간의 인격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생명의 중심이 자기에게서 주님께로 옮겨 간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결국 부자 청년의 이야기는 ‘재산을 버렸는가, 안 버렸는가’를 묻는 이야기보다 훨씬 깊습니다. ‘내가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는 누구도 쉽게 ‘나는 다 팔았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거듭남은 평생의 과정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를 보여 주시면 하나를 내려놓고, 또 더 깊은 하나를 보여 주시면 다시 내려놓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점점 가난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부유해집니다. 자기 것으로 가득했던 자리가 주님의 선과 진리로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역설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진주와 보화는 인간이 소유한 물건이 아니라 주님 자신과 그분에게서 오는 생명이 우리에게 얼마나 귀한가를 보여 주는 말씀이 됩니다.



1강 12부

가라지 비유 : ‘악한 자의 아들들’, 불법, 그리고 선과 악이 함께 자라도록 허용되는 이유

1강 12부에서는 마태복음 13장의 다섯 번째 비유인 ‘가라지 비유’로 들어갑니다. 강사는 앞의 씨 뿌리는 비유가 서론적인 말씀이고, 겨자씨·누룩·진주와 보화 비유가 ‘교회 시대 이긴 자들’을 성장·행실·생명의 여러 측면에서 설명했다면, 이제 가라지 비유는 그 정반대편을 보여 준다고 정리합니다. 곧 앞의 비유들이 ‘빛으로 익은 가장 훌륭한 열매’를 보여 주었다면, 가라지는 ‘어둠으로 익어 가장 악한 마귀의 종이 된 사람들’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13장 24절부터 30절의 좋은 씨와 가라지를 함께 자라게 두었다가 추수 때에 분리하는 말씀을 읽고, 이어 주님께서 친히 해설하신 36절 이하를 토대로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 ‘추수 때는 세상 끝’, ‘추수꾼은 천사들’이라고 정리합니다. 이 부분에서 강사의 관심은 단순히 ‘나쁜 사람도 세상에 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교회와 세상 안에 선과 악이 함께 존재하고 자라다가 마지막에는 그 실제 정체가 드러나 분리된다는 종말론적 질서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가라지 비유는 대단히 깊은 말씀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종들에게 가라지를 곧바로 뽑지 못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종들은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묻지만 주인은 ‘가만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합니다. 강사도 실제 농사의 예를 들어 벼와 피가 어린 시절에는 구별하기 쉽지 않지만 자라고 열매가 맺힐 무렵에는 확연히 달라진다고 설명합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반면 피는 뻣뻣하게 서 있고, 추수 때가 되면 열매의 차이도 드러나므로 그때 비로소 골라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에는 매우 의미 있는 통찰이 있습니다. 사람의 영적 상태도 처음부터 외관만으로 쉽게 단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열매를 맺는지가 드러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 이해와도 매우 깊이 맞닿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 안의 악을 강제로 즉시 뽑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한다면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이 손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 안에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한동안 함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가 있습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우면서도 여전히 자기애를 사랑할 수 있고, 선을 행하면서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섞여 있을 수 있으며, 교회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밑에 자기 집단의 명예나 자기 지위에 대한 욕망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인간 자신이 자유 가운데 볼 수 있도록 허용하시고, 진리의 빛을 통하여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점차 분별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가만두라’는 말씀은 악을 괜찮다고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면서 악의 본질이 충분히 드러나도록 허용하시는 섭리의 깊은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이 점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문제에서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현재 상태를 보고 쉽게 ‘알곡’이나 ‘가라지’라고 판정하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특히 종교적 확신이 강할수록 ‘저 사람은 바른 진리를 가졌고, 저 사람은 틀렸다’, ‘저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고, 저 사람은 버림받은 사람이다’라고 빠르게 나누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비유에는 놀랍게도 인간 종들이 성급하게 뽑는 일을 금하시는 장면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최종 심판권이 없다는 매우 중요한 경고로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외적 행위와 말은 볼 수 있지만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 내적 동기, 그리고 주님께서 그 안에 보존하고 계신 리메인스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악한 행위는 분명 악하다고 말해야 하지만, 그 행위를 한 사람의 영원한 상태까지 우리가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강사는 가라지를 단순히 연약한 신자나 아직 성숙하지 못한 신자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강한 표현으로 ‘악한 자의 아들들’, ‘마귀의 종’, ‘가장 어둠으로 익은 영혼들’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뒤로 가면서 이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들’, 다른 성도를 넘어지게 하고 미혹하는 자들, 배교자들, 거짓 선지자들과 연결합니다. 특히 마태복음 13장 41~42절의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를 읽으며 가라지의 첫 특징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정리합니다. 이 부분에서 강사의 강조는 분명합니다. 가라지는 단순히 영적 수준이 낮은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알고도 그것을 거슬러 악을 행하며, 다른 사람까지 잘못된 길로 이끄는 상태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불법’이라는 말을 더욱 내적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불법은 단지 국가 법률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법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모든 계명은 그 사랑을 보호하기 위한 질서입니다. 따라서 겉으로 종교적으로 매우 바르고 성경을 많이 알아도 자기애와 지배욕을 위해 말씀을 사용한다면 영적으로는 불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교리적 표현은 다소 부족하더라도 주님을 향하여 진실하고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 하며 자기가 아는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 안에는 선의 질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가라지’를 특정 교파나 특정 집단의 이름과 너무 쉽게 동일시하지 않도록 해 줍니다. 가라지의 가장 깊은 정체는 교단명이 아니라 사랑의 질에 있기 때문입니다.

 

강사의 설명에서는 가라지가 계시록의 ‘666’과도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앞서 강의 서두에서도 14만 4천은 가장 밝은 빛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여 익은 성도들이고, 666은 가장 깊은 어둠 가운데 하나님을 대적하며 마귀의 종으로 살아간 타락한 영혼들의 상징으로 대비됩니다. 그래서 겨자씨·누룩·진주와 보화가 14만 4천의 여러 면을 보여 준다면 가라지 비유는 666의 정체를 보여 준다는 것이 강사의 해석입니다. 이 구조는 강의 전체 안에서는 일관되어 있습니다. ‘빛으로 완전히 익은 사람’과 ‘어둠으로 완전히 익은 사람’을 양극에 놓고 마지막 추수에서 그 둘이 분리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666 역시 특정 수의 사람이나 특정 인물의 암호로 한정하기보다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수로 읽습니다. 계시록의 숫자는 일반적으로 영적 질과 상태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666을 ‘누가 바로 그 사람인가?’라고 외부에서 찾기보다, 신적 진리를 알면서도 그것을 자기애와 세상 사랑 아래 종속시켜 왜곡하는 인간의 상태를 볼 수 있습니다. 이 관점은 오히려 가라지 비유를 더 가까이 가져옵니다. 가라지는 언제나 ‘저 밖의 악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진리를 내가 어떤 사랑에 종속시키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리를 통해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가, 아니면 진리를 이용해 내 옳음을 증명하고 사람을 지배하며 자기 명예를 높이는가에 따라 같은 진리도 전혀 다른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가라지는 처음부터 겉모습이 완전히 다른 식물이 아니라 알곡과 매우 비슷하게 자란다는 강사의 농사 비유가 의미심장합니다. 영적으로도 가장 위험한 거짓은 처음부터 ‘나는 악이다’라는 얼굴로 오는 거짓이 아닙니다. 선처럼 보이고 진리처럼 보일 때 더욱 위험합니다. 자기 의는 ‘진리를 지키는 열심’처럼 보일 수 있고, 지배욕은 ‘영적 권위’처럼 보일 수 있으며, 사람을 멸시하는 마음은 ‘거룩한 분노’로 포장될 수 있습니다. 자기 교회의 성공을 사랑하면서 그것을 ‘주님의 나라 확장’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자기 주장을 관철하려는 욕망을 ‘말씀에 대한 충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초기에는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열매가 맺히면 차이가 드러납니다. 한쪽에서는 체어리티와 겸손과 쓰임이 나오고, 다른 쪽에서는 멸시와 지배와 분열과 자기 높임이 나옵니다.

 

바로 이 ‘열매’가 강사의 설명에서도 중요합니다. 벼와 피를 어릴 때는 구별하기 어렵지만 추수 때에는 벼가 익어 고개를 숙이고 피는 뻣뻣이 서 있으므로 확실히 구별된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을 곧바로 ‘겸손해 보이는 사람은 알곡, 당당해 보이는 사람은 가라지’라는 외적 성격 판별법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상징적으로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참된 선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자기에게서 선이 나온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반대로 자기애가 깊어질수록 자기 힘, 자기 지식, 자기 의, 자기 공로를 높이 세우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열매가 익을수록 겸손이 깊어지는 것은 매우 천국적인 특징입니다.

 

이것은 앞서 14만 4천과 ‘이긴 자’를 설명할 때 계속 보완했던 부분과도 연결됩니다. 만일 ‘나는 이긴 자다’, ‘나는 높은 영적 단계에 있다’, ‘나는 밝은 빛 가운데 있고 저들은 어둠에 있다’는 의식이 사람 안에서 자기 우월감으로 굳어진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는 기준을 다시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 보아야 합니다. 참된 빛은 자기를 높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빛이 강해질수록 사람은 오히려 자기 안의 proprium을 더 잘 보고, 자신에게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오직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더 깊이 인정합니다. 따라서 ‘가장 밝은 빛’과 ‘가장 깊은 겸손’은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또 하나 중요하게 볼 것은 가라지를 누가 심었느냐는 문제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고 하십니다. 강사는 이것을 마귀가 악의 씨를 심는 것으로 읽습니다. 이 기본 방향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들어오는 악과 거짓의 유입은 지옥에서 오고, 선과 진리의 유입은 주님에게서 천국을 통해 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인간이 단순한 수동적 희생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악한 생각이나 욕망이 들어오는 것 자체가 곧 그 사람의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여 동의하고 자기 것으로 삼을 수도 있고, 말씀의 진리에 어긋난다고 인정하여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마귀가 가라지를 심었다’는 말을 듣고 ‘내 안의 악은 전부 마귀가 넣은 것이니 나는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악한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고 ‘나는 이미 가라지가 되었다’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영적 책임은 유입 자체보다 수용과 동의에 관계합니다. 분노가 올라오는 것과 분노를 사랑하여 복수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다릅니다. 음란한 생각이 지나가는 것과 그것을 붙들어 즐기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은 다릅니다. 거짓된 생각이 떠오르는 것과 그것을 자기 유익 때문에 진리로 확정하는 것도 다릅니다. 거듭남의 싸움은 바로 이 수용의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잘 때’ 원수가 가라지를 심었다는 표현도 영적으로 매우 인상적입니다. 잠은 무의식 상태를 뜻하기도 하지만, 말씀의 상응에서는 영적 경계가 느슨해지고 진리에 대한 주의가 약해진 상태를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이 자기 상태를 살피지 않고 ‘나는 이제 괜찮다’고 안심할 때, 또는 진리를 단지 습관적으로 알고 실제 삶에는 적용하지 않을 때 거짓과 악이 아주 자연스럽게 들어와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반복해서 ‘깨어 있으라’고 하신 말씀과 연결됩니다. 깨어 있음은 종말 날짜를 계산하며 긴장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자기 안의 사랑과 생각의 움직임을 말씀 앞에서 살피는 상태입니다.

 

강사가 가라지를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자들’과 연결하는 부분도 매우 중요합니다. 악은 개인에게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종교 지도자나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거짓을 가르치면 다른 사람의 영적 삶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가르침의 책임은 매우 큽니다. 진리는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주님께 이끌어야 하는데, 그것을 이용해 사람을 자기에게 묶거나 공포로 통제하거나 자기 권위를 절대화한다면 진리의 외형으로 거짓의 쓰임을 행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외적 직분만으로 그 가르침의 영적 질이 보증되지는 않습니다. 그 가르침이 어떤 사랑에서 나오며 어떤 열매를 맺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시흥영성수련원의 강사들을 포함하여 어느 신앙 공동체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일 것입니다. 강의 내용의 일부가 스베덴보리의 해석과 다르다고 해서 그 강사의 내적 상태를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오랜 수도생활과 많은 성경 지식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의 모든 해석이 자동적으로 신적 진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과 가르침을 구별해서 보아야 합니다. 가르침은 말씀의 빛 아래 검토할 수 있지만 사람의 영원한 내면은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가라지를 지금 뽑지 말라’는 비유에서 매우 중요한 태도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허용의 섭리’가 다시 깊게 들어옵니다. 왜 주님께서는 악한 가르침과 거짓된 종교가 존재하도록 허용하시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왜 처음부터 모두 제거하지 않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답의 중심은 자유입니다. 진리가 진리로 받아들여지려면 사람에게 진리를 거절할 가능성도 있어야 합니다. 선을 자유롭게 사랑하려면 악을 선택할 가능성도 허용되어야 합니다. 강제로 선밖에 선택할 수 없는 존재는 선을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인 인간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악을 원하지 않으시지만 인간의 자유 때문에 그것을 일정한 범위 안에서 허용하시며, 허용된 악조차 궁극적으로 선을 위해 굽혀 사용하십니다. 거짓을 만나면서 진리가 더 분명해질 수도 있고, 시험을 통해 자기 안의 숨은 악이 드러나 거절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악도 결국 좋은 것이니 내버려 두자’는 말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에서 가라지는 결국 거두어집니다. 악은 영원히 선과 하나를 이룰 수 없습니다. 다만 분리의 때와 방식이 주님의 지혜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맡겨진 범위에서는 악을 죄로 알고 피하고, 거짓을 분별하며,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를 제어해야 합니다. 교회도 거짓 가르침과 학대와 부정을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을 최종적으로 ‘가라지’라고 판결하여 정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행위와 교리는 분별하되 사람의 영원한 상태에 대한 심판은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1강 12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앞의 겨자씨·누룩·진주와 보화 비유가 빛으로 익어 ‘교회 시대 이긴 자’, 곧 14만 4천이 된 성도들을 보여 준다면 가라지 비유는 그 반대로 어둠 가운데 익어 불법을 행하고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며 마귀의 종이 된 666적 영혼의 정체를 보여 준다고 보는 강사의 해석은 선과 악이 인간의 자유로운 삶 속에서 점차 그 열매를 드러내다가 마지막 추수에서 분리된다는 강한 도덕적·종말론적 경고를 담고 있으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를 특정 사람이나 집단을 미리 ‘가라지’로 판정하는 도식으로 사용하기보다, 선과 악·진리와 거짓이 인간과 교회 안에서 한동안 함께 존재하도록 허용되는 것은 자유와 거듭남을 위한 신적 섭리 때문이며, 시험과 삶을 통하여 각 사랑의 실제 열매가 드러나고, 마지막에는 신적 진리의 빛 앞에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속한 것과 자기애와 거짓에 속한 것이 스스로 분리되는 심판의 아르카나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12부에서는 무엇보다 ‘가만두라’는 주님의 말씀을 깊이 붙들 만합니다. 이것은 무관심의 말씀이 아닙니다. 악을 보고도 방관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인간의 성급한 심판보다 주님의 섭리가 훨씬 깊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늘 보이는 한 장면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시작과 끝, 감추어진 동기와 자유, 리메인스와 앞으로 가능한 모든 상태를 함께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사람은 틀렸다. 뽑아 버리자’고 할 때 주님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곡식의 뿌리까지 보고 계실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자기 자신에게도 위로가 됩니다. 내 안에 가라지 같은 생각과 욕망이 발견된다고 해서 곧 ‘나는 가라지다’라고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발견한 뒤 무엇을 하느냐입니다. 자기 것으로 사랑하고 변호하면 그것은 점점 뿌리를 깊게 내리지만, ‘이것은 주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라고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 거절한다면 그것이 드러난 것 자체가 오히려 거듭남의 기회가 됩니다. 밭에 가라지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된 것은 농사가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 이제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가 보이기 시작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열매를 분별할 수는 있지만 영혼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거짓은 거짓이라고 말해야 하고 불법은 불법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저 사람은 가라지다’라고 최종 판정을 내리는 순간 우리는 주님께 속한 추수꾼의 자리를 인간이 차지하려 할 수 있습니다. 비유에서 최종적인 분리는 종들이 아니라 ‘추수 때’에 천사들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일은 먼저 자기 밭을 돌보고, 주님께서 주신 씨가 좋은 열매를 맺도록 하며, 다른 사람에게도 가능한 한 진리와 선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읽으면 가라지 비유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위한 무서운 종말 비유가 아니라 오히려 겸손을 배우게 하는 말씀으로 바뀝니다. 알곡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강사의 농사 비유처럼, 참으로 주님의 선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기가 알곡이라고 큰소리치기보다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며 더욱 낮아집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서 아직 발견되는 가라지를 보며 다른 사람의 연약함도 오래 참을 수 있게 됩니다. 어쩌면 바로 그 겸손과 체어리티가 ‘나는 알곡이다’라는 자기 확신보다 훨씬 더 분명한 알곡의 열매일 것입니다.



1강 13부

‘주여 주여’와 불법 : 가라지는 왜 교회 밖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자라는가

1강 13부에서는 가라지의 정체를 한층 더 깊이 파고듭니다. 12부에서 강사는 주님께서 가라지를 ‘악한 자의 아들들’이라 하셨고, 특히 그들을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설명하신 데 주목했습니다. 이제 강사는 그 가운데 ‘불법을 행하는 자’라는 표현을 붙들고 마태복음 7장 21절부터 23절로 이동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그리고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말씀입니다. 강사가 이 본문을 가라지 비유와 연결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가라지는 반드시 교회 밖에서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여 주여’라고 부르고 심지어 종교적 능력과 활동까지 보이면서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앞서 가라지를 다른 성도들을 미혹하여 넘어지게 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며 명예욕·교만·정욕에 지배되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설명한 뒤 곧바로 마태복음 7장의 이 말씀을 연결합니다.

 

이 연결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역시 종교의 외적 형태와 사람의 실제 내적 생명을 엄격하게 구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님을 입으로 고백하고, 성경을 알고, 예배하고, 기도하며,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친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내적 생명이 천국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며, 그 사랑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입니다. 신앙은 입술의 고백이나 지적 동의만으로 살아 있는 신앙이 되지 않습니다. 신앙의 진리가 의지 안에서 체어리티와 결합하고 실제 생활로 나타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주여 주여’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함’ 사이의 구별은 바로 신앙과 삶,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의 결합 문제로 들어갑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마태복음 7장의 사람들이 주님을 전혀 모르는 세속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고 말합니다. 외적으로만 보면 상당히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의 종교적 활동 목록을 인정의 근거로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십니다. 바로 이 대목 때문에 가라지 비유는 ‘교회 사람 대 세상 사람’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있을 수 있으며, 더 깊이 들어가면 한 사람의 종교생활 안에도 주님에게서 온 것과 proprium에서 나온 것이 오랫동안 뒤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엄중한 말씀입니다. 사람은 종교적 활동을 하면서도 그 활동의 중심에 자기애를 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하면서 사람의 구원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정을 사랑할 수도 있고, 봉사하면서 쓰임 자체보다 칭찬받는 것을 더 기뻐할 수도 있으며, 진리를 가르치면서 진리 자체보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더 큰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악을 책망하면서도 상대방의 회복보다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데 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외적 행위만 보면 모두 종교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움직이는 지배적 사랑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 행위의 영적 질은 전혀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때문에 행위만 떼어 놓고 선악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행위의 생명은 그 안에 있는 의도와 사랑입니다. 같은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더라도 한 사람은 이웃의 필요 때문에 줄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사람들에게 선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줄 수 있습니다. 외적 행위는 같아도 내적 생명은 다릅니다. 물론 우리는 다른 사람의 내적 동기를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만이 완전하게 아십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말씀의 빛 아래 끊임없이 살펴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했는가?’뿐 아니라 ‘나는 왜 이것을 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가라지 비유가 더욱 무서워지는 동시에 더욱 유익해집니다. 가라지는 처음부터 알곡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강사가 벼와 피의 예를 들어 설명했듯이 초기에는 매우 비슷해서 쉽게 구별되지 않다가 열매가 익을 때 차이가 분명해집니다. 영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애는 처음부터 ‘나는 자기애다’라고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진리를 지키기 위하여’라는 매우 종교적인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열매가 나타나면 그 사랑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참으로 주님에게서 온 열심이라면 체어리티와 겸손과 인내와 쓰임을 낳지만, 자기애에서 나온 열심이라면 결국 경쟁과 지배와 멸시와 분열을 낳습니다.

 

그래서 ‘불법’의 가장 깊은 의미를 단순한 규칙 위반으로만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주님의 법 전체의 중심은 사랑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두 계명에 율법과 선지자가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가장 깊은 불법은 사랑의 질서를 뒤집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하고, 이웃의 선보다 자기 유익을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을 종교적 언어로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외적인 무법보다 훨씬 알아보기 어려운 불법입니다.

 

이렇게 보면 ‘주여 주여’라는 고백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함’의 차이는 말과 행동의 단순한 대비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진리를 알고 인정하는 이해의 차원과 관계하고, 아버지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그 진리가 의지와 사랑 안으로 들어가 실제 생명이 되는 차원과 관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신앙의 진리가 체어리티의 선과 결합해야 합니다. 진리가 선과 분리되어 머리에만 있을 때 사람은 많은 것을 알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진리가 그의 생명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반대로 진리가 선과 결합하면 사람은 알고 있는 것을 행하게 되고, 점차 그 행함 자체를 사랑하게 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 강의가 계속 강조해 온 ‘행실’과 ‘연단’의 중요성을 긍정적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단순히 교리를 알고 구원을 고백하는 데서 멈추지 말고 실제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야 한다는 강조입니다. 씨가 좋은 밭에 떨어졌다면 열매를 맺어야 하고, 누룩이 들어갔다면 가루 전체가 부풀어야 하며, 진주를 발견했다면 자기 소유를 내려놓는 실제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라지 비유와 마태복음 7장의 연결은 앞의 여러 비유를 거꾸로 비추어 줍니다.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무엇이 자라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주의가 하나 필요합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를 발견하겠다고 다른 사람의 삶을 끊임없이 검사하기 시작하면 가라지 비유의 방향이 뒤집힐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먼저 자기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어야 합니다. ‘저 목사는 불법을 행하는 자인가?’, ‘저 교단은 가라지인가?’, ‘저 사람은 666에 속했는가?’를 찾기 시작하면 말씀의 빛이 밖으로만 향합니다. 그러나 ‘내가 주여 주여 하면서 실제로는 주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는 부분은 없는가?’, ‘내 종교적 열심 안에 자기애와 명예욕이 숨어 있지는 않은가?’, ‘내가 진리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진리를 가진 나를 사랑하는가?’라고 물으면 비로소 말씀이 내 속 사람을 비추기 시작합니다.

 

이 차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최후의 심판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내리는 판결이 아니라 신적 진리가 각 사람의 내적 상태를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영계에서는 지상에서 사용하던 외적인 가면을 영원히 유지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실제로 사랑하는 것이 점차 밖으로 드러나고, 그 사랑과 같은 공동체로 스스로 향하게 됩니다. 천국과 지옥은 단순히 외부에서 선고받아 보내지는 장소라기보다 각 사람이 지상에서 자기 생명으로 만든 지배적 사랑이 드러나 그 사랑과 상응하는 공동체와 결합하는 상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추수’는 주님께서 임의로 사람을 알곡과 가라지로 나누시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 안에서 이미 형성된 사랑의 질이 신적 진리의 빛 가운데 완전히 드러나는 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불에 던진다’는 말씀도 하나님께서 분노하여 사람을 문자적인 불 속에 집어넣으시는 장면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불’은 사랑을 나타내며, 좋은 의미에서는 주님 사랑과 천국적 사랑을, 반대 의미에서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욕망을 나타냅니다. 지옥의 불은 하나님께서 밖에서 가하시는 물리적 형벌의 불이라기보다 악한 영들이 자기 생명으로 삼은 악한 사랑의 타오르는 욕망입니다. 지배하고 싶고, 복수하고 싶고,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고 싶은 사랑이 그들의 생명 자체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라지가 불에 던져진다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는 사람이 평생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사랑한 악한 사랑이 마침내 그의 영원한 상태로 드러나는 엄중한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이해하는 방식에도 중요한 차이를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너는 마음에 들지 않으니 지옥으로 가라’고 임의적으로 판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고 끊임없이 선과 진리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끝까지 자기애와 악을 자기 생명으로 선택한다면 주님께서는 그 선택 자체를 강제로 없애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심판에는 언제나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함께 있습니다. 주님은 지옥을 원하지 않으시지만 인간이 선택한 사랑의 영원한 결과를 허용하십니다.

 

여기서 강사의 ‘적그리스도·거짓 선지자·666은 악으로 익은 가라지들’이라는 해석도 다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강사는 계시록 13장의 적그리스도를 ‘인류 역사상 최고의 적그리스도’로 보고, 거짓 선지자와 666을 그와 연결하여 ‘악으로 익은 가라지’라고 정리합니다. 이것은 강사의 미래주의적 종말론 체계에서는 매우 중요한 연결입니다. 앞의 14만 4천이 빛으로 가장 잘 익은 알곡이라면, 666은 어둠으로 가장 깊이 익은 가라지라는 대칭 구조입니다. 강의 처음부터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을 바로 이 14만 4천과 666을 해석하는 중요한 열쇠로 제시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대칭 구조의 영적 통찰은 살리면서도 그것을 미래의 특정 두 집단에 고정하지 않습니다. ‘14만 4천’과 ‘666’은 자연적인 인원수나 특정 정치적 집단의 명단이라기보다 서로 대립하는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하나는 선과 진리가 주님 아래 질서를 이루는 교회의 충만한 상태를, 다른 하나는 신적 진리가 자연적 인간과 자기애에 의해 왜곡되고 훼손된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계시록의 전쟁은 먼 미래에만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지금 한 사람의 내면에서도 일어나는 싸움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가 내 삶을 다스릴 것인가, 아니면 내 욕망이 진리를 자기 편으로 끌어다 사용할 것인가 하는 싸움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적그리스도’라는 말도 가장 깊은 의미를 얻습니다. 단순히 미래 어느 한 악한 세계 통치자만 찾으면 나는 그 문제에서 빠져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 내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주님의 진리를 알면서 자기 욕망 때문에 거절할 때, 체어리티보다 자기 의를 높일 때, 주님의 이름을 사용하면서 사람을 자기에게 종속시키려 할 때 그리스도께 반대되는 원리가 내 안에서도 작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곧 ‘내 안에 적그리스도가 있다’는 식으로 과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핵심은 계시록의 악을 언제나 외부 인물에게만 투사하지 말고 그것이 표상하는 악과 거짓의 원리를 자기 거듭남의 문제로도 읽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마태복음 7장의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는 고백은 영적 은사와 체험을 바라보는 데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놀라운 체험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내적 상태를 보증하지 않습니다. 예언이나 치유나 방언이나 환상이나 특별한 영적 경험 자체가 곧 거듭남의 척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이 참된 것인지 여부와 별개로,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결정하는 것은 그가 어떤 사랑을 자기 생명으로 만들었느냐입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가, 자기애와 세상 사랑인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영계 체험이 방대한데도 그의 저작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돌아가는 중심이 ‘어떤 놀라운 영적 현상을 경험하라’가 아니라 악을 죄로 알고 피하고 선을 행하라는 데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영계를 보고 천사와 대화했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을 천국적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영적 지식을 많이 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진리를 많이 알수록 그것을 살지 않을 때 책임이 더 무거워질 수 있습니다. 진리가 이해 안에 많아졌지만 의지가 변화하지 않으면 그 지식은 자기 의와 교만을 강화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사경회가 영적 성장과 연단을 강조하는 데서 가장 귀하게 살릴 부분은 ‘체험보다 삶’, ‘고백보다 행함’, ‘지식보다 실제 변화’라는 방향입니다. 다만 그 행함마저 자기 공로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의 중요한 보완입니다. ‘나는 좁은 길을 걸었다’, ‘나는 연단을 통과했다’, ‘나는 계명을 지켰다’, ‘나는 이긴 자가 되었다’가 새로운 ‘주여 주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선한 일을 행해야 하지만 그 선의 근원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마치 자기 힘으로 행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하되 실제 선을 행할 수 있는 힘과 의지와 생명은 모두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가라지의 가장 미묘한 형태는 어쩌면 ‘종교적 proprium’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적 proprium은 돈과 권력과 쾌락을 자랑하지만 종교적 proprium은 진리와 경건과 희생과 연단을 자랑합니다. 전자는 알아보기 쉽지만 후자는 훨씬 어렵습니다. 심지어 ‘나는 겸손하다’는 생각으로 교만할 수도 있고, ‘나는 자기부인하는 사람이다’라는 자기 정체성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외적인 악만이 아니라 선한 것처럼 보이는 자기 동기까지 주님 앞에 비추어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 동기를 의심하며 불안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은 자기 내면을 끝없이 분석하여 완벽한 동기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분명히 보여 주시는 악을 죄로 인정하고 실제로 거절하며, 맡겨진 쓰임을 성실히 행하는 것입니다. 동기에 불순물이 섞여 있음을 발견하면 그것도 주님께 맡기고 다시 선을 선택하면 됩니다. 거듭남은 한 번에 순수해지는 과정이 아니라 선과 진리가 점차 지배권을 얻어 가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보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말씀은 단순히 마지막 심판 날 어떤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무서운 선고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안에서 무엇이 주님과 결합될 수 없으며 무엇이 떠나가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미움은 주님과 결합될 수 없고, 거짓은 주님과 결합될 수 없으며, 지배욕과 자기 공로와 악의 즐거움도 주님과 결합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 가운데 ‘떠나가라’는 말씀을 먼저 들어야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내 안의 악과 거짓입니다. 사람을 쫓아내기 전에 악을 쫓아내야 하고, 다른 사람을 가라지로 판정하기 전에 내 안에서 주님의 생명과 결합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주님께서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고 하신 말씀과도 균형을 이룹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오래 참고 성급한 최종 심판을 삼가야 하지만, 자기 안에서 분명히 죄임을 알게 된 악에 대해서는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과 ‘악’을 구별해야 합니다. 사람은 사랑하고 악은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정죄하지 않으면서도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고, 사람의 구원을 바라면서도 그 사람의 해로운 행위를 막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체어리티와 진리가 함께 가는 방식입니다.

 

1강 13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가라지를 ‘불법을 행하는 자들’로 설명한 주님의 말씀을 마태복음 7장의 ‘주여 주여’ 하는 자들과 연결하고, 나아가 적그리스도·거짓 선지자·666을 악으로 완전히 익은 가라지의 모습으로 이해하는 강사의 해석은 단순한 종교적 고백이나 능력이나 직분이 사람의 참된 영적 상태를 보증하지 않으며 결국 삶의 열매가 드러나야 한다는 엄중한 경고를 담고 있고,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를 미래의 특정 악인들을 찾아내는 도식으로만 읽기보다 신앙의 진리가 체어리티의 선과 결합하지 않은 채 자기애와 명예욕과 지배욕을 섬기게 될 때 종교 자체가 가라지의 외형을 취할 수 있다는 경고로 받아들이며, 마지막 심판은 주님께서 임의로 사람을 정죄하시는 사건이 아니라 각 사람이 자유 가운데 자기 생명으로 만든 지배적 사랑이 신적 진리의 빛 가운데 완전히 드러나 선은 선과, 악은 악과 결합하는 영적 분리의 아르카나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번 13부에서 특히 마음에 남는 것은 ‘주여 주여’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불신앙인의 말이 아닙니다. 주님을 알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의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교회 밖보다 먼저 교회 안을 향하며, 더 먼저는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자신의 내면을 향합니다. ‘나는 주님의 이름을 얼마나 많이 부르는가?’보다 ‘주님의 뜻이 내 삶의 어느 부분까지 들어와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기도할 때의 나와 가족을 대할 때의 내가 얼마나 같은가, 예배할 때의 나와 돈을 사용할 때의 내가 얼마나 같은가, 말씀을 설명할 때의 나와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을 대할 때의 내가 얼마나 같은가를 묻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 사경회가 그토록 강조하는 ‘익는다’는 표현을 더욱 깊게 만들어 줍니다. 무엇이 익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종교생활을 오래 했다는 것 자체가 익음은 아닙니다. 말씀 지식이 많아졌다는 것도 그 자체로 익음은 아닙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자기 의가 익을 수도 있고 체어리티가 익을 수도 있습니다. 연단을 많이 받은 뒤 사람이 더 딱딱해질 수도 있고 더 부드러워질 수도 있습니다. 진리를 많이 배운 뒤 다른 사람을 더 쉽게 정죄할 수도 있고 더 오래 품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 열매가 무엇이 자라고 있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알곡과 가라지의 가장 안전한 분별은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분류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일 것입니다. ‘나는 무엇으로 익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주님을 알아 갈수록 더 겸손해지고 있는가, 진리를 알아 갈수록 사람을 더 사랑하게 되는가, 연단을 통과할수록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더 이해하게 되는가, 자기부인을 배울수록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게 되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겨자씨가 자라고 누룩이 퍼지며 진주의 가치가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반대로 종교생활이 깊어질수록 자기 우월감과 정죄와 지배욕이 함께 커지고 있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 주님의 말씀 앞에 다시 서야 합니다.

 

결국 ‘주여 주여’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로 옮겨 가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입술에서 삶으로, 이해에서 의지로, 신앙에서 체어리티로, 자기 공로에서 주님의 은혜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 인간이 가장 마지막까지 내려놓아야 할 것은 어쩌면 ‘나는 이제 알곡이다’라는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알곡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강사의 비유처럼, 주님의 생명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기 선을 자랑하기보다 ‘내 안에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에게서 온 것입니다’라고 인정하게 됩니다. 그 겸손 속에서 ‘주여 주여’라는 입술의 고백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함’이라는 삶이 마침내 하나가 됩니다. 바로 그것이 가라지 비유가 우리를 다른 사람의 심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거듭남으로 돌려세우는 가장 깊은 지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강 14부

그물 비유와 ‘세상 끝’ : 교회라는 그물은 왜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를 함께 품는가

1강 14부에서는 마태복음 13장의 마지막 비유인 ‘그물 비유’가 등장합니다. 강사는 이 비유를 앞의 모든 비유를 종합하고 정리하는 ‘결론’으로 봅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강사는 이것을 ‘추수의 원리’, 특히 지금까지 설명해 온 ‘천국 건설 사업의 결론적 진리’이자 종말론적 진리로 규정합니다. 마지막 때를 ‘추수 때’라고 해석해 왔듯이, 그물 비유 역시 알곡과 가라지를 분리하는 추수와 동일한 원리를 물고기의 형상으로 다시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강사의 해석은 매우 명료합니다. ‘바다’는 세상이고, ‘물고기’는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바다에 던져진 ‘그물’은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하여 교회가 시작되었고, 교회는 세상이라는 바다 속에 그물을 던져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물 속에는 좋은 물고기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가 함께 들어옵니다. 그리고 강사의 종말론적 시간표에서는 교회 시대가 끝나고 주님께서 지상 재림하실 때 그물이 완전히 걷어지며, 그 안에 들어 있던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가 분리됩니다. 강사는 이것을 알곡은 곡간에 모으고 쭉정이는 불사르는 추수의 원리와 동일한 구조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먼저 매우 중요한 점 하나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강사는 ‘교회 안에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와 ‘구원받은 상태’ 자체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그물 안에는 각종 물고기가 있습니다. 즉 교회라는 외적 울타리 안에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천국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가라지 비유와 마태복음 7장의 ‘주여 주여’ 하는 자들에 대한 설명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교회 안에도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있고, 그물 안에도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가 함께 있습니다. 외적인 교회 소속보다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떤 생명의 사람이 되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교회는 두 차원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외적인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내적인 교회입니다. 사람이 세례를 받고, 교회에 출석하고, 교리를 알고, 예배에 참여한다는 것은 외적인 교회의 형식 안에 들어와 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인 교회는 주님을 인정하고 말씀에서 진리를 받아 그 진리를 선한 삶으로 살아갈 때 그 사람 안에 세워집니다. 따라서 외적으로 같은 교회 안에 있어도 내적으로는 매우 다른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물’이라는 형상은 매우 적절합니다. 그물은 물고기를 잡는 순간부터 종류를 완벽하게 구별하지 않습니다. 일단 함께 모읍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이미 완성된 천사들만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아직 거듭남의 초기 단계에 있는 사람도 있고, 깊이 성장한 사람도 있으며, 말씀을 진실하게 받아들이려는 사람도 있고, 종교를 자기 목적에 이용하려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모두 하나의 그물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연계에서 곧바로 완전한 천국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교회를 바라보는 데 상당히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교회 안에 불완전한 사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교회가 왜 이 모양인가?’ 하며 곧바로 교회 자체를 부정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교회 안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안전하다’고 안심해서도 안 됩니다. 그물의 목적은 단지 물고기를 잡아 두는 데 있지 않고 마지막에는 종류가 드러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구원의 울타리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진리를 배우고 자유롭게 그 진리에 응답하며 자기의 실제 영적 상태를 형성하는 장소입니다.

 

여기서 강사의 설명과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에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생깁니다. 강사는 그물을 오순절부터 지상 재림까지 존재하는 ‘교회 시대’의 교회로 이해하고, 그 끝에서 자연적 역사 속의 마지막 분리가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세상 끝’은 지구의 물리적 소멸이나 교회 조직의 단순한 종료가 아니라, 한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가 더 이상 살아 있는 결합을 이루지 못하여 그 교회가 영적으로 끝에 이른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은 자연계에서 모든 사람을 한 장소에 모아 판결하는 사건이 아니라 영계에서 각 사람과 각 영적 사회의 실제 상태가 신적 진리의 빛 가운데 드러나 분리되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그물이 ‘가득하다’는 표현도 단순히 교회의 사람 수가 어느 정원까지 차면 끝난다는 뜻으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영적으로는 교회의 상태가 충만해지고, 그 안에 있던 선과 악의 실제 성격이 더 이상 감추어질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드러나는 상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 ‘충만함’과 ‘완성’은 어떤 상태가 그 끝까지 진행되었음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도 충분히 성숙하고 악도 충분히 성숙하여 더 이상 하나의 외적 형태 아래 섞여 있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바로 그때 분리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앞서 가라지 비유에서 보았던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와 정확히 맞닿습니다. 처음에는 구별하기 어렵지만 마지막에는 열매가 드러납니다. 그물 비유에서도 물속에 있을 동안에는 모든 물고기가 한 그물 안에 함께 있지만, 물가로 끌어올린 뒤에는 좋은 것과 못된 것이 구별됩니다. 이 두 비유가 서로 다른 형상으로 동일한 영적 원리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기 때문에 사람의 내적 상태가 충분히 형성되기 전에 억지로 최종 분리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이 ‘기다림’은 신적 무관심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악을 방치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유 가운데 자기 사랑의 방향을 형성할 수 있도록 허용하시는 섭리입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워도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자유가 있고, 선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주님과 이웃을 위해 행할 수도 있고 자기 명예를 위해 행할 수도 있습니다. 이 자유로운 선택들이 반복되면서 사람의 지배적 사랑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사랑이 감추어지지 않고 드러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를 이해하는 기준도 중요해집니다. 좋은 물고기는 교리 시험에 더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을 뜻하지 않고, 못된 물고기는 특정 교파에 속한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가장 깊은 기준은 사람의 지배적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의 선을 기뻐하는 사랑이 중심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과 세상을 모든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중심인가입니다. 진리 역시 그 사랑을 섬깁니다. 선한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진리를 자기 삶을 고치고 이웃에게 쓰임이 되기 위해 사용하지만, 자기애 안에 있는 사람은 진리를 자기 우월성과 지배를 위해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그물 비유는 교리와 삶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교회라는 그물 안에는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찬송을 부르며 비슷한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동일한 종교적 외형 아래에서 무엇을 사랑하는지는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예배를 통해 주님께 가까이 가기를 원하고, 다른 사람은 예배를 통해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할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은 목회를 이웃을 위한 쓰임으로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목회 직분의 권위와 존경을 더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같은 그물 안에 있지만 내적으로는 다른 방향으로 자라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교회 안에서 ‘누가 좋은 물고기이고 누가 나쁜 물고기인가’를 판정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 비유에서도 최종적인 분리를 행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천사들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천사들도 자기 판단으로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에 따라 봉사하는 것입니다. 심판의 주체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미리 판결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가르치고, 악을 악이라고 분명히 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회개하고 선을 선택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목회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는 문을 열어 사람을 받아들이는 그물이어야 하지만 동시에 악을 선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사랑하되 악은 분명히 거절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그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도 잘못이고, 어떤 악을 범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영혼 전체를 ‘못된 물고기’로 확정해 버리는 것도 잘못입니다. 행위와 교리는 분별할 수 있지만 사람의 가장 깊은 내적 상태와 영원한 가능성은 주님만이 아십니다.

 

이것은 12부에서 살펴본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한다’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분별해야 하지만 성급하게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 없는 사랑은 모든 것을 용납하는 감상주의로 흐를 수 있고, 사랑 없는 진리는 사람을 잘라내는 냉혹한 심판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천국적 질서는 체어리티와 진리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악은 악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사람의 구원을 원하고, 거짓은 거짓이라고 밝히면서도 그 사람을 멸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강사는 이 그물 비유를 ‘천국 건설 사업의 결론적 진리’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강사의 전체 체계에서는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마음밭이 드러나고, 겨자씨에서 성장하며, 누룩에서 행실 전체가 변화되고, 진주와 보화에서 자기 소유를 버리고 하나님의 생명을 얻으며, 가라지 비유에서 악의 정체가 드러난 뒤, 마지막 그물 비유에서 모든 상태가 종합적으로 추수된다는 구조입니다. 강사의 관점에서는 마태복음 13장이 사실상 구원론·성화론·종말론 전체를 한눈에 보여 주는 하나의 축소판인 셈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 일곱 비유 전체를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라는 관점에서 연결해 보면 상당히 풍성한 그림이 나옵니다. 먼저 씨가 뿌려집니다. 신적 진리가 사람에게 옵니다. 그 진리를 어떤 상태로 받아들이는지가 드러납니다. 받아들여진 진리는 겨자씨처럼 성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누룩처럼 삶 전체에 스며들어야 합니다. 사람이 더 귀한 천국적 선을 발견하면 proprium의 소유를 점차 내려놓게 됩니다. 동시에 가라지 같은 자기애와 거짓의 상태가 드러나며 영적 싸움이 일어납니다. 마침내 사람의 지배적 사랑이 무엇인지 분명해집니다. 이것을 개인의 차원에서 하나의 ‘추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구별이 있습니다. 거듭나는 사람에게서 악한 성향이 완전히 소멸하여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악으로부터 떼어 놓으시고 그것이 지배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사람은 여전히 자신의 proprium에서 올라오는 악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영원히 주님의 보호와 생명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물고기가 된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악과 완전히 무관한 완전한 존재가 되었다’고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천국의 사람은 자기에게서 선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이 점은 그물 비유에서 ‘좋은 것’이라는 말을 읽을 때 특히 중요합니다. 선은 인간에게서 자생하지 않습니다.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선을 생산하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그 선에 따라 살기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천국의 사람은 자기 선을 자기 공로로 여기지 않습니다.

 

반대로 ‘못된 것’이라는 표현도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태어날 때부터 나쁘게 만드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인간을 천국을 위해 창조하시고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유를 가지고 있으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지속적으로 거절하고 자기애와 악을 자기 생명으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선택된 사랑이 점점 지배적 사랑으로 굳어지면 사후에는 그 사랑과 같은 공동체를 기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분리는 주님께서 임의로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만들어 놓고 나누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 가운데 받아들인 생명의 질이 완전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낸다’는 말씀도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영계에서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오랫동안 숨길 수 없습니다. 자연계에서는 체면과 사회적 규범과 이해관계 때문에 실제 사랑과 다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후에는 겉 사람의 외적 형식이 점차 벗겨지고 속 사람의 실제 사랑이 나타납니다. 자기가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게 되고, 같은 종류의 즐거움을 가진 공동체를 찾아갑니다. 그래서 심판은 외부에서 낯선 판결이 내려오는 것이라기보다 그 사람이 이미 자기 생명으로 만든 상태가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세상 끝’의 의미에도 중요한 빛을 줍니다. 자연적 의미에서 ‘세상 끝’이라고 하면 지구의 마지막 날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에서 ‘세상’ 또는 ‘시대’의 끝은 한 교회의 완성된 마지막 상태를 뜻합니다.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의 결합이 무너지고 외적 종교 형식만 남았을 때 그 교회는 끝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 끝은 모든 것이 끝난다는 뜻이 아니라 새 교회가 시작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었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심판 후에 새 질서를 세우십니다.

 

이렇게 보면 그물의 걷힘은 파괴보다 분별과 새 질서의 시작입니다. 좋은 물고기가 분리되는 것은 그들을 위한 새로운 질서가 열리는 것이고, 악이 분리되는 것은 더 이상 선을 억압하고 혼란시키지 못하도록 경계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심판은 천국의 관점에서 단지 공포스러운 종말이 아니라 해방이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선과 악이 뒤섞여 있어 선한 사람들이 억압받던 상태가 끝나고, 각자가 자기의 실제 사랑에 맞는 질서 안으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경험됩니다. 어느 악이 오랫동안 선한 의도를 방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주님을 섬기고 싶어 하면서도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 때문에 흔들릴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둘이 섞여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한다’와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가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시험을 통하여 둘의 차이가 점점 드러납니다. 어느 순간 사람은 선택해야 합니다. 인정받지 못해도 선을 계속 행할 것인가, 아니면 인정이 없으면 선을 포기할 것인가. 이런 시험을 통해 무엇이 진짜 사랑인지 분리됩니다. 작은 의미에서 하나의 그물이 걷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말론을 개인의 거듭남과 연결한다고 해서 계시록과 마지막 심판을 단순한 심리학으로 축소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같은 신적 질서가 여러 층위에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개인 안에서 일어나는 선과 악의 분별, 교회 전체에서 이루어지는 진리와 거짓의 분리, 영계에서 이루어지는 마지막 심판은 서로 다른 규모이지만 하나의 신적 질서를 반영합니다. 주님의 질서는 선과 악이 영원히 혼합된 상태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자유를 위해 한동안 허용하시지만 끝에는 각각 그 본질대로 질서를 세우십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이 그물 비유가 요한계시록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최종 정리라는 점도 중요합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을 통하여 ‘14만 4천’과 ‘666’이라는 계시록의 두 중요한 숫자의 정체를 준비시키고, 마지막 그물 비유를 통해 ‘추수 때 곧 세상 끝’을 정리한 뒤 계시록 해설로 나아갑니다. 강사 자신도 14만 4천을 가장 잘 익은 알곡, 666을 가장 악하게 익은 쭉정이로 대비하면서 계시록 전체를 ‘추수 때에 대한 이야기’라고 이해합니다.

 

이 구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받을 때에는 강사의 핵심 문제의식은 살리되 숫자와 집단의 문자적 고정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14만 4천을 정확한 영적 엘리트 숫자로, 666을 특정 집단이나 개인들의 명단처럼 읽기 시작하면 계시록의 보편적 영적 의미가 좁아질 수 있습니다. 14만 4천은 선과 진리의 충만한 교회 상태를, 666은 진리가 자연적 인간과 자기애에 의해 왜곡된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읽을 때 그 말씀은 어느 한 시대의 특정 사람들에게만 해당되지 않고 모든 시대의 교회와 인간에게 살아 있는 말씀으로 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물 비유가 주는 가장 중요한 균형일 수 있습니다. 그물은 넓습니다. ‘각종 물고기’를 모읍니다. 교회의 사명은 처음부터 사람을 세밀히 골라내어 ‘너는 올 자격이 있고 너는 없다’고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주님의 진리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고, 사람은 자유롭게 응답할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교회는 그물을 던지는 일을 맡았지 최종 심판의 자리를 맡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선교와 목회에 상당히 중요한 원리입니다. 교회는 완성된 사람만 받아들이는 ‘천국 우등생 모임’이 아니라 죄인들이 말씀을 듣고 회개하며 거듭날 수 있도록 열려 있는 장소여야 합니다. 지금 돌밭인 사람이 나중에 좋은 밭이 될 수 있고, 지금 많은 가시를 가진 사람도 주님의 섭리 가운데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물은 넓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물 안에 들어온 것으로 모든 과정이 끝난 것도 아닙니다. 말씀을 받아 실제 생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이 사경회의 ‘익은 열매’라는 강조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교회 안에 들어오는 것이 시작이라면 익는 것은 과정이고 추수는 그 상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의 질문은 ‘나는 교회 안에 있는가?’에서 멈추지 않고 ‘나는 어떤 물고기가 되어 가고 있는가?’, 더 정확히는 ‘어떤 사랑이 내 생명의 중심으로 익어 가고 있는가?’가 되어야 합니다. 종교생활의 기간이나 직분보다 사랑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이 점에서 그물 비유는 아주 조용하지만 날카로운 자기 점검을 요구합니다. 나는 교회라는 그물 안에서 무엇을 얻고 있는가? 진리를 받아 더 겸손해지고 있는가, 아니면 더 쉽게 사람을 판단하게 되는가?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다른 사람에게 쓰임이 되는가, 아니면 자기 신앙 경력을 특권처럼 생각하는가? 연단을 받을수록 부드러워지는가, 아니면 강퍅해지는가? 하나님을 알아 갈수록 ‘주님께서 하셨다’는 고백이 깊어지는가, 아니면 ‘나는 이만큼 했다’는 자기 공로가 커지는가? 바로 이러한 열매가 그물 안에서 어떤 생명이 자라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1강 14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바다를 세상, 물고기를 세상 사람들, 그물을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시작된 교회, 그물이 가득하여 끌어올려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를 나누는 장면을 마지막 때의 추수와 지상 재림 이후의 심판으로 읽는 강사의 해석은 교회라는 외적 울타리 안에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 사람의 영적 상태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는 실제 열매와 생명이 드러나야 한다는 엄중한 결론을 제시하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물 비유를 한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외적으로 함께 섞여 있던 선과 악, 참된 신앙과 거짓된 신앙이 신적 진리의 빛 가운데 그 실제 사랑에 따라 분리되는 마지막 심판의 아르카나로 읽고, 개인에게서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서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과 proprium의 자기애가 점차 구별되어 마침내 어느 사랑이 지배적 생명이 되었는지가 드러나는 거듭남의 완성이라는 차원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강의 이 마지막 비유에서 가장 깊이 붙들 만한 것은 ‘각종 물고기’라는 표현일 것입니다. 그물은 처음부터 좋은 물고기만 골라 잡지 않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구원 의지가 얼마나 넓은지를 보여 주는 아름다운 그림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완성된 사람만 부르지 않으십니다. 아직 혼란스러운 사람도, 많은 악한 습관을 가진 사람도, 진리를 거의 모르는 사람도 부르십니다. 교회의 문은 거듭난 사람에게만 열리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야 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천국적으로 될수록 사람을 받아들이는 문은 넓고, 악과 거짓을 분별하는 진리는 분명하며, 사람에 대한 최종 심판은 주님께 맡기는 태도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사랑 때문에 진리를 흐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사람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물의 교회가 추수 때까지 감당해야 할 매우 어려운 균형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물 자체도 목적이 아닙니다. 교회 조직도, 수도공동체도, 신학 체계도, 사경회도 모두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사람을 주님께 이끌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돕는 ‘그물’입니다. 만일 사람이 그물 자체를 사랑하여 주님보다 자기 교회와 자기 체계와 자기 공동체를 더 사랑하게 된다면 수단이 목적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좋은 그물은 물고기를 자기에게 묶어 두기 위한 그물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으로 이끄는 그물이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1강 전체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겠습니다. ‘밝은 진리’, ‘모형적 진리’, ‘신인합일’, ‘광야 연단’, ‘익은 열매’, ‘이긴 자’, ‘14만 4천’, ‘666’, 그리고 마지막 ‘그물’까지 매우 독특하고 강한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체계가 가진 장점은 분명합니다. 신앙을 지식으로 끝내지 않고 실제 성화와 삶의 변화로 밀어붙이는 힘이 있습니다.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체계가 지나치게 자연적 시간표와 영적 등급, 특정 숫자와 집단에 고정될 때 말씀의 더 깊고 보편적인 속뜻을 열어 줍니다.

 

결국 모든 비유의 마지막 질문은 하나로 모입니다. ‘나는 어느 체계를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씨는 열매가 되어야 하고, 겨자씨는 나무가 되어야 하며, 누룩은 전체에 스며들어야 하고, 진주를 발견하면 proprium의 소유를 내려놓아야 하며, 가라지 같은 악은 주님의 빛 앞에서 드러나야 하고, 마지막에는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의 차이가 생명으로 나타납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실제 삶이 되는가를 묻습니다.

 

그래서 1강의 마지막에서 가장 안전하게 남길 수 있는 기도는 아마 ‘주님, 저를 좋은 물고기라고 여기게 해 주십시오’가 아니라 ‘주님, 제 안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에 속하지 않은 것을 보여 주시고, 그것을 죄로 알고 거절하게 하시며, 제가 어떤 영적 반열에 들었는지를 계산하기보다 오늘 맡겨진 사람에게 선한 쓰임이 되게 해 주십시오’일 것입니다. 그때 그물 비유는 다른 사람을 골라내는 종말의 비유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주님의 생명을 받아 어떤 사람으로 익어 가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으로 살아납니다.

 

 

 

SY.48,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2강 (7/27),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2강 1부‘모형적 진리’와 구원의 여정 - 출애굽은 지나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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