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93.심화

바울은 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을 이렇게 말했을까?

 

앞의 신성종 목사의 설교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살펴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이 죽은 뒤 다시 자연적 육체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함께 영계에서 영적 몸으로 깨어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바울은 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마치 죽은 육체가 장차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말했을까요?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는 질문에 씨앗을 예로 들고,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고 말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 문제를 다룰 때 가장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은 ‘그러면 바울이 틀렸다는 말인가?’라고 너무 빨리 결론짓는 것입니다. 반대로 ‘바울도 사실 스베덴보리와 완전히 똑같은 사후세계관을 가르쳤다’고 만드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을 쓴 역사적 상황과 목적을 먼저 살펴보고, 그가 무엇을 말하려 했으며 무엇까지 말하지 않았는지를 구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의 직접적인 문제는 바울 자신이 12절에서 밝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여기서 고린도교회 일부 사람들이 부인하고 있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 자체라기보다 ‘죽은 자의 부활’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 장에서 가장 먼저 지키려고 했던 것은 사후세계의 세밀한 구조나 부활의 물리적 메커니즘이 아니라 ‘죽음이 인간의 생명을 끝내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분에게 속한 사람들의 부활은 분리될 수 없다’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소망이었습니다.

 

이 점을 놓치면 고린도전서 15장을 마치 ‘마지막 날 무덤 속 시체가 어떤 과정을 거쳐 다시 만들어지는가’를 설명하는 장처럼 읽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바울은 그런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흩어진 뼈와 육체의 원소가 어떻게 다시 모이는지 말하지 않고 오히려 ‘씨앗’을 이야기합니다.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분명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함께 있습니다. 심어진 것과 나타나는 것이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심어진 바로 그 형체가 그대로 되돌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바울의 씨앗 비유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도토리를 땅에 심었는데 나중에 땅에서 거대한 참나무가 올라왔다고 합시다. 도토리와 참나무는 모양도, 크기도, 기능도 전혀 다릅니다. 그렇다고 참나무가 그 도토리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의 연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비유를 통해 부활을 단순한 ‘원상복구’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신다’고 합니다.

 

더욱 주목할 구절은 44절입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도 있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몸’과 ‘영혼’을 대조하지 않습니다. 헬라어로 양쪽 모두 ‘소마(sōma)’, 곧 ‘몸’입니다. ‘소마 프쉬키콘(sōma psychikon)’과 ‘소마 프뉴마티콘(sōma pneumatikon)’, 곧 한 종류의 몸과 다른 종류의 몸을 대조합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부활은 ‘몸을 버리고 몸 없는 영혼이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이 점에서는 신성종 목사의 지적도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그는 ‘신령한 몸’을 흐릿하고 비물질적이며 유령 같은 무엇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와도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후의 인간을 몸 없이 떠다니는 의식이나 그림자 같은 존재로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후에도 완전한 인간이며, 인간의 형상을 가진 영적 몸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걷고, 다른 사람들과 만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지점에서 전통적인 육체 부활론과 스베덴보리의 설명이 갈라집니다. ‘신령한 몸’이 있다는 것과 ‘무덤에 들어간 자연적 육체가 먼 훗날 다시 살아나 그 신령한 몸으로 변한다’는 것은 같은 명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전자를 강하게 말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후대 기독교가 그 말씀을 바탕으로 발전시킨 ‘마지막 날 시체의 재결합과 육체 부활’이라는 구체적인 그림까지 바울이 이 장에서 모두 설명했다고 보아야 하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특히 고린도전서 15장 50절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바울 자신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연적 상태의 ‘혈과 육’이 그대로 하나님 나라를 상속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5장의 중심을 단순히 ‘현재의 물질적 육체가 다시 돌아온다’는 명제로 축소하면 바울 자신의 언어가 가진 훨씬 풍부한 긴장을 놓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이 매우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스베덴보리도 ‘부활’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인간이 죽음 후에 부활한다고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다만 ‘무엇이 부활하는가?’와 ‘언제 부활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전통적인 육체 부활론과 다릅니다. 부활하는 것은 무덤 속에 남겨진 자연적 육체가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며, 그 부활은 수천 년 뒤 우주의 마지막 날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죽은 뒤 자연계에서 영계로 깨어날 때 일어납니다. 자연적 육체는 자연계에 남지만 사람 자신은 영적 몸으로 영계에서 계속 살아갑니다.

 

이렇게 보면 ‘몸은 소중하다’는 말과 ‘자연적 육체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말을 반드시 동일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연적 몸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체어리티와 쓰임을 행하도록 주어진 귀한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몸을 악한 것, 영혼을 가두어 놓은 감옥, 아무 가치 없는 껍데기로 여기는 것은 기독교적인 인간 이해와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몸이 귀하다는 사실이 곧 그 몸의 물질이 영원히 보존되거나 마지막 날 다시 조립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연적 몸은 자연계에 속하고, 영적 몸은 영계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신성종 목사의 설교에 등장하는 ‘화장하면 어머니의 몸은 나중에 어떻게 부활합니까?’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조금 다른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화장하든 매장하든 어머니 자신에게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어머니 자신이 그 자연적 육체 속에 남아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연적 몸은 자연계에 남겨지지만 그 사람 자신은 이미 영적 몸으로 영계에서 깨어납니다. 그러므로 화장이 부활을 방해할 수도 없고, 매장이 부활을 더 안전하게 보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이것을 ‘사람은 죽는 즉시 영계에서 영적 몸으로 깨어난다’고 스베덴보리처럼 명료하게 설명하지 않았을까요? 여기서는 바울 서신의 성격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독특한 이해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도들의 서신을 모세오경과 예언서, 복음서와 계시록처럼 연속적인 내적 의미, 곧 아르카나가 들어 있는 ‘말씀’과 동일한 범주에 두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사도서신을 무가치하거나 잘못된 글이라고 보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들은 초기 기독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에게 주님에 대한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을 가르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을 영계의 구조와 사후 인간의 상태를 완전히 계시받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으로 읽기보다는, 당시 교회가 처한 문제 속에서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가르치는 사도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의 가장 큰 관심은 ‘죽은 뒤 정확히 몇 단계의 상태를 거쳐 천국에 들어가는가?’가 아닙니다. 그의 관심은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으며 너희도 그분 안에서 살아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주 안에서 살아가는 너희의 삶은 헛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바울 자신의 다른 글들을 보면 사후 상태에 관한 표현이 언제나 하나의 완성된 조직신학 체계처럼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고린도후서에서는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을 말하고, 빌립보서에서는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말합니다. 이런 표현들은 죽은 사람이 아주 먼 미래의 부활 때까지 사실상 아무런 삶도 없이 기다린다는 그림과는 잘 맞지 않습니다. 반면 고린도전서 15장과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미래의 부활과 주님의 오심이라는 종말론적 언어를 강하게 사용합니다. 후대 기독교 신학은 이러한 여러 표현을 종합하여 ‘죽음 → 영혼의 중간 상태 → 마지막 날 → 육체 부활’이라는 체계를 세웠지만, 그 완성된 체계를 그대로 바울 자신의 명시적인 설명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사실 스베덴보리와 똑같은 사후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표현만 다르게 했다’고 주장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역사적 바울에게 스베덴보리의 계시를 거꾸로 투영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당시 유대교의 부활 신앙과 초기 기독교의 종말론적 언어 속에서 말하고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훨씬 후대에 사후 인간의 깨어남, 영적 몸, 중간영계, 천국과 지옥의 상태 등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둘 사이에는 실제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균형 있게 말한다면 이렇습니다. ‘바울은 부활이라는 진리를 강력하게 가르쳤지만, 사후세계의 메커니즘 전체를 밝힌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붙들고 있는 핵심은 인간이 죽음으로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 주님의 부활이 우리의 생명과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는 것, 부활한 인간에게는 ‘몸’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몸은 지금의 썩고 약하고 죽는 자연적 상태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부활’과 ‘영적 몸’이 실제로 무엇이며 인간에게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훨씬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고린도전서 15장의 씨앗 비유도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씨앗과 나무 사이에는 분명한 연속성이 있지만 동일한 외적 형체가 반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적 몸과 영적 몸 역시 동일한 물질의 재조립이라는 의미에서 하나가 아닙니다. 그러나 죽기 전의 사람과 죽은 뒤의 사람이 서로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사람’이라는 인격과 생명의 연속성은 그대로 이어집니다. 죽음은 한 인간을 없애고 나중에 복제품을 만드는 사건이 아니라 자연계에서의 삶이 영계에서의 삶으로 이어지는 경계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고린도전서 15장의 마지막 58절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바울은 부활에 관한 긴 논의를 ‘그러므로 죽은 뒤의 일을 많이 연구하라’로 끝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주의 일에 힘쓰라’고 끝냅니다. 사후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현재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와 쓰임의 가르침과도 깊이 만납니다. 사람이 영원으로 가지고 가는 것은 자연적 육체를 구성했던 물질이 아니라 그가 세상에서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의도했으며, 그 사랑을 어떻게 실제 삶의 쓰임으로 나타냈는가 하는 그의 내적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병든 사람을 돌본 손,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건넨 손, 교회와 가정과 사회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묵묵히 감당한 손으로 행한 사랑은 헛되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그 손 자체가 영원히 보존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손을 움직였던 사랑과 의도와 삶이 그 사람 자신 안에 영원히 남기 때문입니다.

 

결국 고린도전서 15장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다는 것은 바울을 틀렸다고 버리는 것도 아니고, 바울의 모든 표현을 억지로 스베덴보리와 일치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이 당시 고린도교회를 향해 증언한 부활의 핵심 진리를 먼저 존중하고, 그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사후세계의 실상을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통해 더 깊이 살펴보는 것입니다.

 

바울의 외침은 분명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매우 구체적인 설명을 더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계에서 영적 몸을 지닌 완전한 인간으로 깨어납니다.’ 그리고 두 가르침은 마침내 삶을 향한 한 질문 앞에서 만납니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답 역시 고린도전서 15장의 마지막에 이미 놓여 있습니다.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죽음 이후에도 생명이 계속되기 때문에 오늘의 사랑이 중요하고, 영원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체어리티와 쓰임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에 관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쩌면 ‘내 몸의 물질이 마지막 날 어떻게 다시 모일 것인가?’가 아니라 ‘영원으로 이어질 오늘의 삶을 나는 어떤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는가?’일 것입니다.

 

 

 

SY.93, 신성종 목사, ‘성경은 화장에 대해 정말로 말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오늘날 교회의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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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 강의에서 도올 김용옥이 처음 던지는 질문은 매우 근본적입니다. ‘예수는 정말 살았는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람인가?’입니다. 도올은 요세푸스의 역사 기록에는 세례 요한이 비교적 분명하게 등장하는 반면 예수에 대해서는 확실한 역사적 자료가 빈약하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복음서에서 만나는 예수와 역사학이 복원할 수 있는 ‘역사적 예수’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어 복음서는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기록한 전기가 아니라 ‘드라마적 구성’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먼저 한 가지는 구별해야 합니다. ‘예수에 관한 동시대의 외부 기록이 우리가 기대하는 것만큼 풍부하지 않다’는 것과 ‘예수에 관한 역사적 근거가 없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더구나 도올 자신도 결국 예수를 완전한 허구의 인물로 돌리지는 않습니다. 그는 예수를 ‘영원한 X’라고 부르면서도, 예수의 죽음 이후 그를 향한 강렬한 기억과 운동을 낳은 어떤 역사적 진원이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도올의 실제 관심은 ‘예수가 있었느냐 없었느냐’보다 ‘후대 교회가 고백하는 그리스도상에서 역사적 인간 예수를 얼마나 분리하여 찾아낼 수 있느냐’에 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와 도올의 방향이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도올은 후대의 ‘그리스도’를 걷어내면서 그 아래 묻혀 있는 ‘인간 예수’를 찾으려 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정반대의 질문을 합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라는 인간 안에서 여호와께서 어떻게 자신의 인성을 신성하게 하셨는가?’입니다. 도올에게는 ‘인간 예수 → 후대에 신화화된 그리스도’라는 방향이 강하다면, 스베덴보리에게는 ‘여호와 → 인성을 취하심 → 시험과 승리 → 인성의 영화 → 신적 인성’이라는 방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문제는 단순한 ‘위대한 종교인의 전기’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에게 훌륭한 가르침 몇 가지를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 영계에 극도로 팽창한 지옥의 세력을 제압하고 천국과 지옥의 질서를 회복하시며, 동시에 취하신 인성을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성육신 이해에서 결정적인 부분입니다. 따라서 복음서에서 기적, 시험, 십자가, 부활 등을 걷어내고 ‘예수의 순수한 말씀’만 남기면 더 본래적인 예수에게 가까워진다는 도올의 생각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주님의 생애에서 가장 깊은 차원을 제거하는 일이 됩니다.

 

그렇다고 도올의 문제 제기가 무가치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기서 기존 기독교가 들어야 할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실제로 알고 있는가, 아니면 예수에 관한 교리만 알고 있는가?’입니다. 도올이 바울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바울에게는 ‘예수라는 인간’이 거의 없다고 말하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바울에게 중심은 갈릴리를 걷고, 사람을 만나고, 병자를 불쌍히 여기고, 비유를 말씀하시고, 죄인들과 식사하신 예수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라는 신학적 의미라는 것입니다.

 

이 지적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도 그냥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교리적으로 ‘예수는 하나님이시다’를 아무리 정확하게 고백해도 그분이 실제로 어떻게 사랑하셨고, 어떻게 사람을 대하셨으며, 무엇을 선이라고 하셨는지를 삶에서 따르지 않는다면 그 고백은 살아 있는 신앙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도올이 ‘교리화된 그리스도’ 뒤에 가려진 예수의 실제 말씀과 삶을 다시 보자고 요구하는 것은 기존 기독교에 유익한 자극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올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바울이 ‘예수 운동’이 아니라 ‘그리스도 운동’을 했고, 그 운동을 통해 교회가 형성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초기 교회는 승천한 예수가 곧 다시 돌아와 세상을 심판할 것이라고 기다리는 ‘종말론적 회중’이었으며, 심지어 이를 현대의 극단적 휴거 집단과 비교합니다. 예수가 오지 않자 재림을 계속 연기하다가 결국 ‘여기서 살 궁리를 하자’는 방향으로 신학이 변했다고 풍자합니다.

 

여기에는 분명 짚어야 할 과장이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안에 강렬한 종말론적 기대가 있었다는 사실과 초기 교회 전체를 현대의 시한부 종말론 집단과 사실상 동일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더구나 ‘처음에는 어느 해에 재림한다고 구체적으로 정했다가 안 오니 계속 연기했다’는 식의 서술은 이 강의에서 도올이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역사적 설명과 강연자의 풍자적 재구성을 구별해야 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바로 이 지점에서 도올과 스베덴보리가 뜻밖에 가까워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재림을 주님께서 육체를 입고 구름을 타고 지구로 다시 내려오시는 사건으로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유는 도올과 전혀 다릅니다. 도올은 문자적 재림 기대가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의 종말론적 신앙 자체를 역사적으로 상대화하는 방향으로 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문자가 품고 있는 속뜻을 밝힘으로써 ‘구름을 타고 오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새롭게 풉니다. ‘구름’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그 가운데 나타나는 ‘영광’은 말씀의 내적, 신적 진리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은 실패하여 연기된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그 의미를 문자적으로 잘못 이해했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도올은 ‘안 왔다’고 말하고, 스베덴보리는 ‘사람들이 오심의 방식을 잘못 알았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강의의 중반 이후부터 도올의 주장은 더욱 대담해집니다.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이후 교회가 ‘바울의 철학만으로는 안 되겠다. 역사적 예수의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이른바 ‘마가 교단’에서 일종의 드라마 팀을 만들어 팔레스타인의 예수 전승을 수집하여 최초의 복음서 드라마인 마가복음을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 마가가 성공하자 마태가 나오고, 이어 누가가 나오고, 마지막으로 요한이 종합했다는 식입니다. 심지어 복음서가 처음에는 중동의 구전문화나 판소리처럼 ‘챈팅’(chanting), 곧 일정한 가락을 붙여 낭송하는 공연적 형태였을 것이라는 설명까지 합니다.

 

이 부분은 특별히 조심해서 들어야 합니다. 복음서가 구전 전승과 공동체적 전승 과정을 거쳤다는 문제, 마가복음이 공관복음 가운데 이른 시기에 작성되었다는 견해 등과 ‘마가 교단이 드라마 작가 그룹을 팔레스타인에 파견했다’는 이야기는 동일한 수준의 역사적 명제가 아닙니다. 후자는 이 강의만 놓고 보면 도올의 상당히 자유로운 역사적 상상과 재구성이 들어간 설명입니다. ‘재미있는 설명’과 ‘입증된 역사’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귀담아들을 통찰은 있습니다. 복음서가 현대적인 의미의 녹취록이나 CCTV 기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자료를 선택하고 배열하며, 각각의 공동체와 신학적 목적 속에서 예수의 생애를 증언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그러므로 드라마이며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신학적 목적을 가지고 기록했다’와 ‘역사적 사실을 창작했다’ 사이에는 상당히 큰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도올은 이 둘 사이를 때때로 너무 빨리 건너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강의의 중심인 ‘도마복음’이 등장합니다. 도올에게 도마복음은 거의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도마복음에는 예수의 말씀 114개가 어록 형태로 수록되어 있고, 정경 복음서와 달리 예수의 탄생과 활동을 연결하는 서사, 십자가, 무덤, 부활, 승천 등의 이야기가 없습니다. 도올은 바로 이 ‘비어 있음’을 대단히 중요하게 봅니다. 후대 기독교의 신화적 요소가 들어가기 이전의 ‘순결한 예수’가 여기에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마복음이 사복음서보다 늦다는 견해를 강하게 거부하고, 오히려 이것이 예수 전승의 원초적 형태를 보존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논리적으로도 한번 점검할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문서에 십자가와 부활 이야기가 ‘없다’는 것과 그 문서가 ‘십자가와 부활 전승보다 먼저 만들어졌다’는 것은 같은 명제가 아닙니다. 문서의 장르가 ‘어록집’이라면 애초에 서사적 사건을 기록하지 않는 것이 그 장르의 특징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도마복음에는 십자가와 부활 서사가 없다 →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은 후대 교회의 창작이다’라는 결론은 그 사이에 상당한 논증을 더 필요로 합니다. 강의에서는 이 간격이 너무 쉽게 넘어가집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아주 선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복음서의 ‘말씀’과 ‘사건’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만 진짜이고 사건은 후대에 덧붙은 신화라는 식으로 나눌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생애는 하나입니다. 주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것, 병자를 고치신 것,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 십자가를 지신 것,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에는 역사적 층위가 있으면서 동시에 주님의 내적 과정, 곧 지옥들과의 싸움과 인성의 영화라는 더 깊은 신적 실재가 있습니다.

 

그래서 도올이 복음서에서 ‘신화’를 제거하여 역사적 예수를 찾으려 한다면,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그가 ‘신화’라고 부르는 대목 안에서 가장 깊은 아르카나를 발견합니다.

 

특히 십자가가 그렇습니다. 전통 기독교의 형벌대속론과 스베덴보리의 십자가 이해는 같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성부가 인간의 죄에 대한 형벌을 성자에게 대신 가하여 진노를 만족시켰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주님이 지옥들과 싸우신 마지막 시험이며, 그 모든 시험을 이기심으로써 취하신 인성을 완전히 영화롭게 하신 과정의 절정입니다. 그러므로 도올이 기존 기독교의 ‘우리 죄를 대신하여 벌받은 예수’라는 도식을 문제 삼는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비판 가운데 들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은 후대 교회가 만들어 낸 신화적 예수상이다’로 넘어가면 스베덴보리와는 결정적으로 갈라집니다.

 

도마복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안에 아름답고 깊은 예수의 말씀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배척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문헌이 정경 밖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안의 모든 내용을 거짓이라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이 말이 사람을 주님께, 선과 진리에, 체어리티의 삶에 이르게 하는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과 ‘그러므로 도마복음이 사복음서보다 더 순결한 복음이다’라는 주장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더욱 근본적으로는,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은 단순히 예수의 육성 어록을 많이 보존했다고 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문자적 의미 안에 천적, 영적 의미가 질서 있게 들어 있고, 그 상응을 통하여 천국과 인간을 연결하는 신적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실제로 하셨을 가능성이 높은 말들을 가장 오래된 형태로 모았다’는 역사비평적 가치와 ‘이것이 신적 말씀인가?’라는 문제는 서로 다른 차원의 질문입니다.

 

이 점에서 도올의 접근에는 흥미로운 역설이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신화에서 해방’하여 원래 예수에게 돌려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는 그렇게 ‘신화적 요소’를 하나씩 제거하고 나면 마지막에는 오히려 주님께서 왜 세상에 오셨는지가 사라질 위험이 있습니다. 예수는 훌륭한 말씀을 남기고 진실하게 살다가 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위대한 스승으로 남습니다. 실제로 강의 후반에서 도올이 그리는 예수상은 상당히 그 방향으로 갑니다.

 

스베덴보리는 거기서 묻습니다. ‘그러면 왜 여호와께서 친히 오셔야 했는가?’

 

좋은 윤리적 가르침만 필요했다면 선지자를 보내는 것으로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새로운 철학만 필요했다면 또 하나의 현자를 보내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와 영계 전체의 질서가 무너지고 인간이 더 이상 자유롭게 선과 진리를 선택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옥의 세력이 팽창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직접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설명입니다. 이것을 제거하면 성육신의 우주적 의미가 사라집니다.

 

강의 마지막에 도올은 도마복음을 통한 기독교의 재건을 한국인의 주체성 문제와 연결합니다. 서양에서 수입된 기독교를 마치 강대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처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한국인의 상식과 미학적·신앙적 감각으로 기독교를 새롭게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보수적인 기독교 신앙으로는 21세기를 견딜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이 대목 역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반은 상당히 공감되고 반은 경계하게 됩니다. 신앙을 특정 문화의 옷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옳습니다. 서양 선교사들이 전해 준 신학적 체계 전체를 곧 주님의 진리 자체로 동일시할 수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부터 당시 기독교의 삼위일체론, 이신칭의, 형벌대속적 구원 이해 등을 매우 근본적으로 다시 검토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전통이 그렇게 가르쳤으니 그대로 믿어라’는 태도를 스베덴보리 역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양의 기독교’를 벗어난 자리에 ‘한국인의 감각’을 최종 기준으로 세운다면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서양도 기준이 아니고 한국도 기준이 아닙니다. 보수도 기준이 아니고 진보도 기준이 아닙니다. 도마복음도 기준이 아니고 스베덴보리라는 인간 개인도 기준이 아닙니다. 기준은 주님이며,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과 진리입니다.

 

이것이 어쩌면 이번 강의를 통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가장 깊이 배울 수 있는 지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올에게서 배울 것은 배우는 것입니다. 그는 기독교인에게 익숙한 전제를 낯설게 만들어 다시 질문하게 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습니다. ‘당신이 믿는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 자신과 예수에 관한 신학을 구별해 본 적이 있는가?’, ‘재림을 정말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복음서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왜 정경 밖의 초기 기독교 문헌은 아예 들여다보지도 않는가?’ 이런 질문들은 충분히 유익합니다.

 

그러나 도올에게서 멈추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가 ‘신화’라고 제거하는 것 가운데 실제로는 말씀의 가장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역사적 인간 예수’를 되찾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오히려 그 인간 안에 계셨던 ‘여호와’를 놓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하고 싶습니다.

 

‘도올은 교회가 만든 그리스도에게서 역사적 예수를 구해내려 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역사적 예수 안에서 인성을 입고 오신 여호와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작지 않습니다. 전자는 우리를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으로 데려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자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그분의 선과 진리로 거듭나는 사람’으로 데려갑니다. 예수의 말씀을 존경하는 것과 예수께서 ‘주님’이심을 아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번 도올 김용옥을 ‘틀린 사람’이라는 한마디로 정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질문 때문에 우리가 너무 익숙해서 더 이상 묻지 않던 것들을 다시 묻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충분히 따라간 뒤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대어 보면, 기존 기독교와 도올 가운데 어느 한쪽을 단순히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제3의 풍경이 열립니다. 전통 기독교가 십자가를 이해한 방식에도 다시 물음을 던지고, 도올이 십자가를 후대의 신화화 쪽으로 밀어내는 방식에도 다시 물음을 던집니다. 문자적 재림론에도 물음을 던지고, 재림 자체를 초기 교회의 실패한 기대처럼 취급하는 데에도 물음을 던집니다.

 

아마 이것이 앞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주님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배우고 싶다’는 마음과도 연결될 것입니다. 누구의 편에 서서 상대방의 오류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있는 곳에서는 진리를 기뻐하고, 거짓이 섞인 곳에서는 그것을 분별하되, 그 사람 전체를 그 오류 하나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도올의 날카로운 질문도 받고, 그의 지나친 역사적 재구성도 경계하고, 기존 기독교의 소중한 고백도 보존하면서 그 안에 굳어진 인간적 전통 역시 다시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결국 스베덴보리를 가지고 세상을 재단하는 작업조차 아닐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열어 보여 준 말씀과 영계의 질서를 도움 삼아, ‘이 모든 것 가운데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가는 작업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오래 붙들수록, 사람을 너무 빨리 ‘우리 편’과 ‘저쪽 편’, ‘옳은 사람’과 ‘틀린 사람’으로 나누고 싶어 하는 우리의 시선도 조금씩 달라질 수 있겠습니다.

 

 

 

SY.90, 도올 김용옥, ‘종교라는 게 도대체 뭐냐?’ (20251112)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도올은 강의 시작부터 종교가 무엇인지를 아주 단호하게 규정합니다. 하나님을 믿어서 죽은 뒤 천당에 가려는 신앙을 ‘도피세적’이라고 비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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