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1.심화

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된다는 것은?

 AC.31 본문, 여기서는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었음을 말합니다.’(and here, that by things of sense and of mere knowledge, love and faith had been extinguished.), , 인간이 감각과 지식만을 의지할 때, 사랑과 신앙은 자연스럽게 소멸된다는 해설도 있지만... 좀 더 와닿는 사례로 설명해 주세요.

 

AC.31에서 스베덴보리는 겔32:7-8을 인용하면서 바로와 애굽이 여기서는 ‘감각적인 것과 단지 지식적인 것의 원리’를 뜻하며, 그것들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상태가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잘못 읽으면 ‘감각도 나쁘고 지식도 나쁘다’는 뜻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의 AC.27-28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나기 위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기억 속에 먼저 모여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AC.31의 문제는 감각이나 지식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사람이 감각적인 것과 자연적인 지식을 가장 높은 판단 기준으로 삼아, 그것을 넘어서는 영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경험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 실재한다고 여기고, 자신의 자연적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은 참일 수 없다고 판단한다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본래 감각과 지식은 더 높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섬기는 수단이 될 수 있는데, 이제 오히려 그것들이 영적인 것을 판단하는 최종 재판관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내가 수도 없고 측정할 수도 없으니 영혼이나 천국은 있을 없다’고 단정한다고 해 보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질문을 제기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정말 천국이 있는가?’, ‘영혼은 무엇인가?’라고 묻고 탐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신앙을 파괴하는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처음부터 ‘감각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워 놓고 모든 영적 실재를 그 기준으로 재단하는 데 있습니다. 이때 감각은 진리를 탐구하는 도구가 아니라 영적인 것을 배척하는 기준이 됩니다.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역사와 언어를 연구하고, 자연과학을 배우고,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는 것 자체는 사랑과 신앙을 소멸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지식들은 바르게 사용될 때 진리를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이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 ‘내가 이해할 없는 것은 참일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그러면 지식이 진리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지성을 확증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신학 지식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씀과 교리를 매우 많이 알고 있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는 성경 구절도 잘 찾고 교리도 정교하게 설명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지식을 통하여 주님과 이웃을 더욱 사랑하기보다, 자기 판단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다른 사람을 낮추는 데 사용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문제는 ‘지식이 많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지식이 자기 지성의 우월함을 확증하는 수단이 되면서 사랑과 신앙보다 위에 놓였다는 데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세상에서 돈, 건강, 성공, 평판과 같은 눈에 보이는 결과를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들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잘되는 것이 주님의 복이고, 실패하는 것은 주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 증거’라고 판단하기 시작한다면 자연적 결과를 영적 상태의 최종 기준으로 삼게 됩니다. 기도했는데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러므로 기도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결론짓는 것도 같은 문제를 보여 줄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결과가 보이지 않는 섭리를 판단하는 절대 기준이 된 것입니다.

 

AC.31이 인용하는 겔32의 이미지는 이러한 상태를 ‘하늘의 광명체들이 어두워지는 ’으로 표현합니다. 해와 달과 별은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을 나타내는데, 감각적인 것과 단지 지식적인 것이 지배하게 되면 이 광명체들의 빛이 가려집니다. 이는 감각과 지식이 본래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낮은 것이 높은 것을 섬겨야 하는 질서가 뒤집혔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27-28AC.31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지식들이 모여 거듭남을 위한 땅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그 지식들이 목적 자체가 되거나 사람이 그것만을 의지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지식은 거듭남을 위한 귀중한 수단이지만 그 자체가 사랑과 신앙의 생명은 아닙니다. 그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된다’는 말을 ‘많이 공부하면 신앙이 약해진다’는 경고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자연적인 것을 영적인 것보다 위에 놓지 말라’는 질서의 문제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감각과 지식이 자기 자리에 있을 때 그것들은 거듭남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기 시작하면, 사랑과 신앙의 광명체는 사람 안에서 점점 어두워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질문은 ‘나는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도 아니고 ‘나는 감각과 이성을 사용하는가?’도 아닙니다. ‘내가 가진 감각과 지식은 무엇을 섬기고 있는가?’입니다.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삶에 적용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지, 아니면 자기 지성과 자연적인 판단을 최종 기준으로 세우는 데 사용되는지가 중요합니다. 바로 이 차이가 AC.31에서 밝게 빛나는 광명체와 어두워지는 광명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AC.31, 심화 2, 사60에 나오는 ‘새 교회’

AC.31.심화 2. 사60에 나오는 ‘새 교회’ 위 AC.31 [2]에서 사60:1-3, 20을 인용하며 ‘새 교회’를 언급하는데요, 이 ‘새 교회’는 어떤 새 교회인가요? 지금은 현 기독교 이후에 오는 교회를 ‘새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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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창1:14-17, ‘해와 달과 별 : 사랑과 신앙의 밝아짐과 어두워짐’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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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심화

1. 의지와 이해 안에 나타나지만 그 근원은 주님께 있다는 것

 AC.30 분문 [3], 그러나 그것들은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입니다.’(but they appear in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only as does the light of the sun in its recipient objects.), 이게 무슨 뜻인가요?

 

AC.30 [3]의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 인간론의 핵심 원리 하나를 아주 압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문장을 그대로 보면 ‘선과 진리는 의지와 이해 안에서 나타나지만, 그것은 태양빛이 어떤 대상에 비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in its recipient objects’, 곧 ‘빛을 받아들이는 대상’이라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선과 진리의 ‘근원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그릇’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자연적인 비유부터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쉬워집니다. 태양 빛이 창문, 물, 나뭇잎, 돌 등에 비치면 각각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물 위에서는 반짝이고, 잎에서는 녹색으로 보이고, 거울에서는 강하게 반사됩니다. 그래서 마치 그 빛이 그 물건들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빛의 근원은 그 물건들이 아니라 ‘태양’입니다. 물건들은 단지 빛을 ‘받아들이고 드러내는 매개체’일 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 마음에서 선과 진리가 나타나는 방식도 바로 이와 같다고 설명합니다.

 

이 비유를 인간의 의지와 이해에 적용해 보면 이런 뜻이 됩니다. 사람이 어떤 선한 생각을 하거나 진리를 이해할 때, 그것은 마치 그 생각과 선이 ‘자기 안에서 생겨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실제로 선과 진리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선과 신적 진리’입니다. 인간의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그릇이고, 의지는 선을 받아들이는 그릇입니다. 그래서 선과 진리는 의지와 이해 안에서 나타나지만, 그것은 마치 태양 빛이 물체 안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확신해 버리면, 인간은 쉽게 ‘자기 의로움’이나 ‘자기 지혜’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선과 진리를 행하고 이해할 때 그것이 자기 안에서 나타나기는 하지만, 실제 근원은 ‘주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앞서 나누었던 ‘inanimate’와 ‘animate’의 구분과도 연결됩니다. 사람이 선을 행하더라도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는 동안에는 아직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설명이 바로 여기에서 나옵니다.

 

실제 예를 하나 들어 보면 이해가 더 분명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어려운 상황에서 누군가를 도와주려고 결심합니다. 그때 그는 ‘내가 이렇게 선한 결정을 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 결정은 그의 의지와 이해 안에서 일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 선한 마음과 판단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그 사람의 마음을 통해 나타난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 빛을 받아들이는 ‘대상’이고, 그 빛 자체는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AC.30 [3]의 문장은 결국 인간과 주님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인간의 의지와 이해는 선과 진리의 ‘근원이 아니라 수용 기관’입니다. 선과 진리는 그 안에서 나타나지만, 그것은 마치 태양 빛이 사물 안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방식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선과 진리를 실제로 행하고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그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중요한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AC.30, 창1:14-17, ‘사랑과 신앙의 광명체 : 생명 얻은 신앙이 다스리는 넷째 날’(AC.30-37)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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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4

사랑과 신앙은 분리될 없는데, 이는 둘이 하나요, 동일한 것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광명체들(luminaries) 언급하실 , 그것들을 하나로 간주,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으라(Let there be [sit]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라고 라틴어 단수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주님의 허락으로 다음과 같은 가지 놀라운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천적 사랑 안에 있는 천사들은, 주님한테서 오는 사랑으로 인해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 있는데,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가운데 있는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랑 없이 신앙의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은,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 속에 있어, 하늘의 문턱에도 가까이 가지 못하고 다시 물러납니다. 이들 가운데는 주님의 계명대로 살지 않으면서도, 자기는 주님을 믿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두고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시기를, Love and faith admit of no separation, because they constitute one and the same thing; and therefore when mention is first made of “luminaries” they are regarded as one, and it is said, “Let there be [sit]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Concerning this circumstance it is permitted me to relate the following wonderful particulars. The celestial angels, by virtue of the celestial love in which they are from the Lord, are from that love in all the knowledges of faith, and are in such a life and light of intelligence that scarcely anything of it can be described. But, on the other hand, spirits who are in the knowledge of the doctrinals of faith, without love, are in such a coldness of life and obscurity of light that they cannot even approach the first threshold of the court of the heavens, but flee back again. Some of them, while not living according to his precepts, say that they have believed in the Lord, and it was of such that the Lord said in Matthew: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7:21, 22, 끝까지) Not everyone that saith unto me, Lord, Lord, shall enter into the kingdom of the heavens, but he that doeth my will: many will say to me in that day, Lord, Lord, have we not prophesied through thy name (Matt. 7:21–22, to the end).

 

[2]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신앙 안에도 있으며, 그렇게 해서 천적 생명 안에 있지만, 자기는 신앙이 있다 말하면서도 사랑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의 생명은 겨울철 햇빛과 같아 아무것도 자라지 않고 모든 것이 얼어붙어 죽은 것과 같습니다. 반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봄철 햇볕과 같아, 태양의 열로 인해 모든 것이 자라고 번성합니다.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도 정확히 이와 같은데, 이런 것들은 보통 말씀에서 세상과 위에 있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또한 신앙이 전혀 없는 상태와 사랑 없는 신앙은, 주님께서 세대의 종말을 예고하시면서 겨울(winter) 비유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Hence it is evident that those who are in love are also in faith, and thereby in heavenly life, but not those who say they are in faith, and are not in the life of love. The life of faith without love is like the light of the sun without heat, as in the time of winter, when nothing grows, but all things are torpid and dead; whereas faith proceeding from love is like the light of the sun in the time of spring, when all things grow and flourish in consequence of the sun’s fructifying heat. It is precisely similar in regard to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 which are usually represented in the Word by such as exist in the world and on the face of the earth. No faith and faith without love are also compared by the Lord to “winter,” where he foretell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in Mark:

 

18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19이는 그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13:18, 19) Pray ye that your flight be not in the winter, for those shall be days of affliction (Mark 13:18–19).

 

여기서 (flight) 마지막 때를 뜻하며, 또한 사람이 죽을 때를 뜻합니다. ‘겨울 사랑이 없는 삶이고, ‘환난의 (day of affliction) 저세상에서의 비참한 상태를 말합니다. Flight” means the last time, and also that of every man when he dies. “Winter” is a life destitute of love; the “day of affliction” is its miserable state in the other life.

 

 

해설

AC.34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한층 더 분명하게 밝힙니다. ‘사랑과 신앙은 분리될 없는데, 이는 둘이 하나요, 동일한 것을 이루기 때문입니다.이것이 AC.34 전체의 중심입니다. 사랑과 신앙은 단순히 서로 잘 협력해야 하는 두 가지 종교적 요소가 아니라, 본래 하나를 이루도록 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1:14의 표현 자체에서 이 질서를 봅니다. 처음 광명체들이 언급될 때 복수의 광명체들을 가리키면서도 라틴어에서는 있으라에 단수형 sit가 사용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이것을 사랑과 신앙이 하나를 이룬다는 사실과 연결합니다. 앞의 AC.30-33에서 큰 광명체는 사랑이고 작은 광명체는 신앙이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고 설명했는데, 이제 AC.34에서는 그 둘이 본래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고 더욱 분명히 말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에게 허락된 영계의 경험을 소개합니다. 천적 사랑 안에 있는 천사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그 사랑으로 인해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 있으며, 그들의 생명과 지성의 빛은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랑과 신앙의 결합입니다. 천적 사랑과 신앙에 속한 지식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하나의 천국적 생명을 이루고 있습니다.

 

반대편에는 사랑 없이 신앙의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신앙에 관한 지식 자체가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리적 지식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가운데 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하늘 뜰의 첫 문턱에도 가까이 가지 못하고 다시 물러난다고 합니다. 이것은 AC.34에서 매우 중요한 대조입니다. 문제는 신앙에 관한 지식의 유무만이 아니라, 그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어 생명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어떤 이들은 주님의 계명대로 살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은 주님을 믿었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는 마7:21 이하를 인용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 삶에서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이 인용을 통해 AC.34가 말하는 사랑이 단순한 감정이 아님도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대조하는 것은 사랑의 사랑 없이 신앙이 있다고 말하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사랑과 신앙의 결합은 단순히 마음속에서 따뜻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서 교리를 믿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실제 삶과 결합되어 주님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데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이 차이를 자연의 매우 선명한 비유로 설명합니다. 사랑 없는 신앙의 생명은 겨울철의 햇빛과 같습니다. 빛은 있지만 열이 없으므로 아무것도 자라지 않고 모든 것이 굳어 죽은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봄철의 햇빛과 같습니다. 태양의 열로 인해 모든 것이 자라고 번성합니다.

 

이 비유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두 경우 모두 이 있다는 점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에도 신앙에 관한 교리적 지식과 생각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빛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낳는 사랑과 결합되어 있지 않으므로 겨울의 햇빛처럼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반대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봄의 햇빛처럼 생명을 일으키고 자라게 합니다.

 

따라서 AC.34의 핵심을 단순히 사랑이 신앙보다 중요하다고 요약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사랑과 신앙은 본래 하나이며,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참된 생명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버리고 사랑만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신앙이 참된 신앙이라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자연의 모습들이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말씀에서 표현하는 데 사용된다고 설명합니다. 자연계의 겨울과 봄, 빛과 열, 성장과 죽음 같은 모습들이 말씀 안에서 영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세대의 종말을 말씀하시면서도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막13:18도망함(flight)마지막 를 뜻하는 것으로 풀이하고, 동시에 각 사람이 죽을 때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겨울은 사랑이 없는 삶, ‘환난의 은 저세상에서의 그 비참한 상태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AC.34의 앞부분에서 설명한 사랑 없는 신앙을 매우 엄중한 모습으로 다시 보여 줍니다.

 

이 대목에서는 도망함을 현대 기독교 종말론에서 말하는 휴거와 곧바로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AC.34에서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이 지상에서 사라지는가 하는 종말 시간표에 있지 않고, 사람이 마지막 때 또는 죽음을 맞을 때 어떤 영적 상태에 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그 상태가 겨울’, 곧 사랑 없는 삶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사후 상태에 관한 매우 중요한 원리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자연계에서 얼마나 많은 신앙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가, 얼마나 자주 주님의 이름을 불렀는가 하는 것만으로 천국의 생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AC.34가 제시하는 대조는 분명합니다. 사랑 없는 교리적 지식은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 가운데 있지만,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에는 천국적 생명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지식이나 교리를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AC.34 자체가 천적 천사들이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지식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생명과 결합되어 있는가입니다. 사랑과 신앙이 하나를 이룰 때 신앙에 관한 지식도 살아 있는 질서 안에 있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AC.34는 앞의 AC.30-33을 더욱 선명하게 완성해 갑니다. AC.30에서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고, AC.32에서는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이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알지 못한다고 했으며, AC.33에서는 사랑이 생명과 기쁨의 성질을 결정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4에서는 그 모든 내용을 사랑과 신앙은 분리될 없으며 하나를 이룬다는 말로 집약합니다.

 

결국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겨울의 빛이 아니라 봄의 빛입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과 고백이 있으면서 사랑의 삶과 분리되어 있다면 그것은 생명을 자라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신앙이 생명을 얻을 때, 사랑과 신앙은 본래의 질서대로 하나를 이루게 됩니다. 이것이 AC.34에서 두 광명체를 통해 밝혀지는 핵심입니다.

 

 

심화

1. 천적 천사들의 생명과 지성의  어떤 상태일까?

 

AC.34, 심화 1,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상태’

AC.34.심화 1.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상태’ 위 AC.34 본문,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그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and are in such a life and light of intelli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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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도망함(flight) 마지막 때와  사람이 죽을  뜻하는가?

 

AC.34, 심화 3, ‘일’(flight)

AC.34.심화 3. ‘일’(flight) 위 AC.34 본문 중 인용 구절,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막13:18)에 나오는 ‘일’(flight)을 기독교, 개신교에서는 ‘휴거’라 하여 매우 특별하게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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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 창1:14-17,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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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 창1:14-17, 생명과 기쁨, 행복의 근원은 ‘사랑’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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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2

사랑과 신앙을 처음에는 함께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이라 하고, 그다음에는 사랑을 광명체(greater luminary), 신앙을 작은 광명체(lesser luminary) 합니다. 또한 사랑을 가리켜서는 낮을 다스린다(rule by day) 하고, 신앙을 가리켜는 밤을 다스린다(rule by night) 합니다. 이런 내용이 바로 아르카나(arcana)인데, 특히 마지막 시대에 숨겨져 있는 것을 이제 제가 설명해도 좋다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 있었습니다. 아르카나가 특히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는 이유는, 지금이 세대의 종말(the consummation of the age)이기 때문이며, 이때에는 사랑이 거의 없고, 결과 신앙도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친히 예고하신 바와 같습니다. Love and faith are first called “great luminaries,” and afterwards love is called a “greater luminary,” and faith a “lesser luminary”; and it is said of love that it shall “rule by day,” and of faith that it shall “rule by night.” As these are arcana which are hidden, especially in this end of days, it is permitted of the Lord’s Divine mercy to explain them. The reason why these arcana are more especially concealed in this end of days is that now i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when there is scarcely any love, and consequently scarcely any faith, as the Lord himself foretold in the evangelists in these words: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24:29) The sun shall be darkened, and the moon shall not give her light, and the stars shall fall from heaven, and the powers of the heavens shall be shaken (Matt. 24:29).

 

여기서 (sun) 사랑, 어두워지는 사랑을, ‘(moon) 신앙, 특히 빛을 내지 못하는 신앙을, ‘별들(stars) 신앙 관련 지식(the knowledges of faith),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러니까 하늘의 권능들(virtues and powers of the heavens) 의미합니다. By the “sun” is here meant love, which is darkened; by the “moon” faith, which does not give light; and by the “stars,” the knowledges of faith, which fall from heaven, and which are the “virtues and powers of the heavens.

 

[2]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습니다.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합니다. 천국은 사랑의 천국이며, 천국(heavens)에는 사랑의 생명 외에 다른 생명은 없습니다. 모든 천국 행복이 여기서 나오는데, 그레이트(great)함은 어떤 말로도 설명할 없고, 어떤 인간의 생각으로도 결코 상상할 없습니다. 사랑의 영향을 받는 이들은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모든 사랑과, 결과 모든 생명, 사랑에서만 나오는 모든 생명과 모든 행복이 오직 주님에게서만 온다는 사실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합니다(perceive). 그들은 자신에게서 나오는 사랑이나 생명이나 행복은 조금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압니다. 모든 사랑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은, 주님의 변화산 사건에서 광명체, (sun)로도 표현되었습니다. 기록되기를, The most ancient church acknowledged no other faith than love itself. The celestial angels also do not know what faith is except that which is of love. The universal heaven is a heaven of love, for there is no other life in the heavens than the life of love. From this is derived all heavenly happiness, which is so great that nothing of it admits of description, nor can ever be conceived by any human idea. Those who are under the influence of love, love the Lord from the heart, but yet know, declare, and perceive, that all love, and consequently all life—which is of love alone—and thus all happiness, come solely from the Lord, and that they have not the least of love, of life, or of happiness, from themselves. That it is the Lord from whom all love comes was also represented by the great luminary or “sun” at his transfiguration, for it is written: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얼굴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17:2) His face did shine as the sun, and his raiment was white as the light (Matt. 17:2).

 

얼굴은 가장 안쪽의 것들을 뜻하고, 옷은 거기서 나오는 것들을 뜻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신성(the Lord’s Divine) (sun), 사랑으로, 그의 인성(his human)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 (light)으로 상징되었습니다. Inmost things are signified by the face, and the things that proceed from them by the raiment. Thus the Lord’s Divine was signified by the “sun,” or love; and his human by the “light,” or wisdom proceeding from love.

 

 

해설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조 넷째 날의 ‘ 광명체’가 왜 처음에는 함께 ‘ 광명체들’이라 불리다가, 이어서는 하나는 ‘ 광명체’, 다른 하나는 ‘ 작은 광명체’라고 불리는지를 설명합니다. 그 속뜻에서 사랑과 신앙은 모두 사람을 밝히는 광명체이지만, 둘의 관계에는 분명한 질서가 있습니다. 사랑이 ‘ 광명체’이고 신앙이 ‘ 작은 광명체’입니다. 또한 사랑은 ‘낮을 다스리고’, 신앙은 ‘밤을 다스립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랑이 신앙보다 더 중요하다는 가치 비교가 아닙니다. AC.30에서 이미 밝혔듯이 생명 있는 신앙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신앙은 서로 경쟁하는 두 원리가 아니라 하나의 질서 안에 있습니다.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이 때문에 둘 다 광명체이지만 사랑은 더 큰 광명체로, 신앙은 더 작은 광명체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아르카나’라고 부르면서, 특히 당시의 ‘마지막 시대’에는 이 사실이 감추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세대의 종말’에 이르러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순서입니다. 그는 ‘신앙이 없어져서 사랑도 없어졌다’고 하지 않고, ‘사랑이 거의 없고, 결과 신앙도 거의 없다’고 합니다. 이것만으로도 AC.32가 말하려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마24:29을 인용합니다.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진다’는 말씀에서, ‘’는 사랑을, ‘’은 신앙을, ‘별들’은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속뜻에서는 사랑이 어두워지고, 신앙이 빛을 잃으며, 신앙에 관한 지식들까지 그 본래의 자리를 잃는 교회의 영적 상태가 묘사됩니다.

 

이 관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랑이 사라지면 신앙만 따로 온전히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생명이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교리와 신앙고백과 성경 지식이 남아 있을 수 있어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분리되면 그것은 본래의 생명을 잃어 갑니다. 그래서 해가 어두워질 때 달도 빛을 내지 못하고 별들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을 예로 듭니다.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다’고 하며,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의 신앙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진리가 없었다거나 신앙에 속한 것을 몰랐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과 신앙이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과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 있는 신앙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 천국은 사랑의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천국에는 사랑의 생명 외에 다른 생명이 없으며, 모든 천국의 행복도 여기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천국의 행복은 단순히 좋은 환경이나 즐거운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천적 상태에 있는 이들은 자신들의 사랑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면서도, 모든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모든 생명과 행복이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합니다’. 이것은 AC.29-30에서 계속 이어져 온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셋째 날의 사람은 아직 자신이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은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실을 주님의 변화산 사건과 연결합니다. 마17:2에서 주님의 얼굴은 해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그는 ‘얼굴’이 가장 안쪽의 것들을, ‘’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들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신성은 ‘’, 곧 사랑으로 표현되고, 그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는 ‘’으로 표현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도 같은 질서가 나타납니다. 사랑이 근원이고, 지혜와 빛은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AC.32에서 해가 사랑이고 달이 신앙이라는 것은 단순한 상응표 하나를 배우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 상응 안에는 거듭남과 천국의 근본 질서가 들어 있습니다. 사랑과 신앙은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되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사랑이 사라지면 신앙도 빛을 잃고, 신앙에 관한 지식들 역시 본래의 영적 기능을 잃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근원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천적 천사들이 사랑과 생명과 행복을 자기에게서 조금도 얻지 않는다고 지각하듯, 사람의 참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역시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이 깊어진다는 것은 단순히 더 많은 진리를 알게 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과 신앙의 올바른 질서가 사람 안에서 회복되고 그 모든 생명의 근원이 주님임을 점점 더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AC.32에서 ‘ 광명체’와 ‘ 작은 광명체’가 보여 주는 아르카나입니다. 사랑은 해처럼 중심에 있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 질서가 사라진 시대에 바로 그 질서를 다시 밝혀 주는 것이, 스베덴보리가 이 글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심화

 

1. 세대의 종말  수백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AC.32, 심화 1, ‘세대의 종말’은 왜 수백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AC.32.심화1. ‘세대의 종말’은 왜 수백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위 AC.32 본문,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기 때문이며’(now i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말인데요, 이 글, 곧 ‘Arcana Coe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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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AC.32, 심화 2, 왜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AC.32.심화2. 왜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위 AC.32 본문, ‘이 아르카나가 특히 이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는 이유는,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기 때문이며, 이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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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기서 말하는 태고교회, 천적 천사들의 의미

 

 

AC.32, 심화 3, 여기서 말하는 ‘태고교회, 천적 천사들’의 의미

AC.32.심화 3. 여기서 말하는 ‘태고교회, 천적 천사들’의 의미 위 AC.32 본문,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습니다.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 무슨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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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 창1:14-17, 생명과 기쁨, 행복의 근원은 ‘사랑’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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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창1:14-17, ‘큰 광명체들’의 속뜻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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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1

 

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의 의미가 사랑과 신앙이며, 또한 ,,(sun, moon, and stars)이라 한다는 사실은 선지자들의 글을 보면 분명합니다. 에스겔에서처럼 말입니다. That the “great luminaries” signify love and faith, and are also called “sun, moon, and stars,” is evident from the prophets, as in Ezekiel:

 

7내가 너를 불 끄듯 할 때에 하늘을 가리어 별을 어둡게 하며 해를 구름으로 가리며 달이 빛을 내지 못하게 할 것임이여 8하늘의 모든 밝은 빛을 내가 네 위에서 어둡게 하여 어둠을 네 땅에 베풀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2:7, 8) When I shall extinguish thee, I will cover the heavens and make the stars thereof black; I will cover the sun with a cloud, and the moon shall not give her light; all the luminaries of the light of heaven will I make black over thee, and I will set darkness upon thy land (Ezek. 32:7–8).

 

이 구절들은 바로와 애굽을 다루는데, 말씀에서 바로와 애굽은 감각적인 것과 단지 지식적인 것의 원리를 뜻합니다. 여기서는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었음을 말합니다. 이사야에서도 그렇습니다. In this passage Pharaoh and the Egyptians are treated of, by whom are meant, in the Word, the principle of mere sense and of mere knowledge [sensuale et scientificum]; and here, that by things of sense and of mere knowledge, love and faith had been extinguished. So in Isaiah:

 

9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0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추지 아니할 것이로다 (13:9, 10) The day of Jehovah cometh to set the land in desolation, for the stars of heaven and the constellations thereof shall not give their light; the sun is darkened in his going forth, and the moon shall not cause her light to shine (Isa. 13:9–10).

 

요엘에서도입니다. Again, in Joel:

 

1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10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2:1-2, 10) The day of Jehovah cometh, a day of darkness and of thick darkness; the earth trembleth before him, the heavens are in commotion; the sun and the moon are blackened, and the stars withdraw their brightness (Joel 2:1–2, 10).

 

[2] 다시 이사야에서는 주님의 강림과 이방인들의 밝아짐, 곧 새 교회와, 특히 어둠 가운데 있다가 빛을 받아 거듭나는 모든 사람에 대해 말하면서, Again, in Isaiah, speaking of the advent of the Lord and the enlightening of the gentiles, consequently of a new church, and in particular of all who are in darkness, and receive light, and are being regenerated:

 

1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20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 (60:1-3, 20) Arise, shine, for thy light is come; behold darkness covers the earth, and thick darkness the peoples, and Jehovah shall arise upon thee, and the gentiles shall come to thy light, and kings to the brightness of thy rising; Jehovah shall be to thee a light of eternity, thy sun shall no more go down, neither shall thy moon withdraw itself, for Jehovah shall be to thee a light of eternity (Isa. 60:1–3, 20).

 

시편도 이렇게 말합니다. So in David:

 

5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6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7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8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9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6:5-9) Jehovah in intelligence maketh the heavens; he stretcheth out the earth above the waters; he maketh great luminaries, the sun to rule by day, the moon and stars to rule by night (Ps. 136:5–9).

 

3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 4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148:3, 4) Glorify ye Jehovah, sun and moon, glorify him, all ye stars of light, glorify him, ye heavens of heavens, and ye waters that are above the heavens (Ps. 148:3–4).

 

[3] 이 모든 구절에서 광명체들(luminaries)은 사랑과 신앙을 뜻합니다. 광명체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나타내고 뜻했기 때문에, 유대교회에서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했습니다. 그 교회의 모든 규례는 주님을 대표, 즉 표상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이 등불에 관한 기록입니다. In all these passages, “luminaries” signify love and faith. It was because “luminaries” represented and signified love and faith toward the Lord that it was ordained in the Jewish church that a perpetual luminary should be kept burning from evening till morning, for every ordinance in that church was representative of the Lord. Of this luminary it is written:

 

20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21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 (27:20, 21) Command the sons of Israel that they take oil for the luminary, to cause the lamp to ascend continually: in the tabernacle of the congregation without the veil, which is before the testimony, shall Aaron and his sons order it from evening even until morning, before Jehovah (Exod. 27:20–21).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속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불붙이시고 빛나게 하시며,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에서도 그렇게 하신다는 뜻임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적절한 곳에서 밝힐 것입니다. That these things signify love and faith, which the Lord kindles and causes to give light in the internal man, and through the internal man in the external,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shown in its proper place.

 

 

해설

AC.31에서 스베덴보리는 앞의 AC.30에서 밝힌 광명체들의 의미를 말씀 전체의 여러 구절을 통하여 확인합니다. 1의 해와 달과 별은 단순히 자연계의 천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속뜻에서는 사랑과 신앙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선지서에서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거나 빛을 잃는 장면은 자연계의 천체에 일어날 사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나 교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이 쇠하거나 소멸되는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겔32:7-8을 인용합니다. 이 말씀은 바로와 애굽을 다루는데, 그는 말씀에서 바로와 애굽이 여기서는 감각적인 것과 단지 지식적인 것의 원리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상태가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감각이나 지식 자체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도 단지 감각적인 ’, ‘단지 지식적인 에 초점이 있습니다. 사람이 감각과 기억 지식에만 머물러 그것을 영적인 것보다 앞세울 때, 사랑과 신앙의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3:9-10과 욜2:1-2,10에서도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는 모습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여기서 인용하는 이유는 같은 상응이 말씀의 여러 곳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해와 달과 별이 문자적으로는 천체이지만, 속뜻에서는 사랑과 신앙에 관계된 것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것들의 빛이 사라지는 모습으로 사랑과 신앙이 쇠하고 어두워지는 상태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AC.31은 어두워짐만 말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사60:1-3,20에서는 반대의 상태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이 주님의 강림과 이방인들의 밝아짐, 따라서 새 교회에 관한 것이며, 특별히 어둠 가운데 있다가 빛을 받아 거듭나는 모든 사람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앞에서는 해와 달과 별의 빛이 사라졌지만 여기서는 빛이 임하고, 여호와께서 영원한 빛이 되시며, 해가 다시 지지 않고 달도 물러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랑과 신앙의 빛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이 이 말씀을 통하여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것은 AC.30과도 직접 연결됩니다. 앞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이 사람의 의지와 이해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것들을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해와 달의 빛은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영적 빛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랑하고 믿고 진리를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과 신앙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창조 넷째 날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놓이는 것도 이러한 사랑과 신앙이 속 사람 안에 자리 잡는 거듭남의 상태와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시136:5-9와 시148:3-4도 인용합니다. 136에서는 큰 빛들과 해와 달과 별이 창조되고 낮과 밤을 주관하는 모습이 나오며, 148에서는 해와 달과 밝은 별들이 여호와를 찬양합니다. 이러한 여러 인용을 통하여 스베덴보리가 보여 주려는 핵심은 말씀에서 광명체들이 사랑과 신앙을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창1의 넷째 날도 자연계의 천체에 관한 문자적 서술 안에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담고 있습니다.

 

AC.31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 의미가 유대교회의 예배 규례와도 연결됩니다. 27:20-21에서는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사용하여 회막 안의 등불을 저녁부터 아침까지 계속 밝히도록 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광명체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하고 뜻했기 때문에 이러한 규례가 주어졌다고 설명합니다. 유대교회의 규례들이 주님을 표상하는 것이었으므로, 성막의 등불 역시 단순히 공간을 밝히기 위한 조명 이상의 대표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의미를 마지막 문장에서 매우 중요하게 정리합니다. 그 등불에 관한 규례는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불붙이시고 빛나게 하시며, 사람을 통해 사람 안에서도 그렇게 하시는 을 뜻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그 자세한 의미를 여기서 모두 설명하지 않고 적절한 곳에서밝히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AC.31에서는 등불의 세부적인 상응을 앞당겨 확정하기보다, 사랑과 신앙의 근원이 주님이며 그것들이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나타난다는 큰 원리를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렇게 보면 AC.31의 여러 성경 인용은 각각 별개의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모아 놓은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 이사야, 요엘, 시편, 출애굽기를 가로질러 하나의 일관된 원리를 보여 줍니다.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면 광명체들이 어두워지는 것으로 표현되고, 사랑과 신앙이 주님에게서 새롭게 받아들여지면 빛이 임하는 것으로 표현되며, 예배의 표상 안에서는 계속 밝혀지는 등불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AC.31의 중심은 해와 달과 별의 상응을 아는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더 깊은 중심은 우리의 사랑과 신앙에 생명을 주고 빛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가에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이 스스로 빛의 근원이 아니듯, 사람 안의 참된 사랑과 신앙도 사람 자신의 proprium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속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며, 그것이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의 삶에도 나타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창조 넷째 날의 광명체들을 통하여 AC.31이 보여 주는 거듭남의 중요한 질서입니다.

 

 

심화

 

1.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실제 사례

 

 

AC.31, 심화 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실제 사례’

AC.31.심화 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실제 사례’ 위 AC.31 본문, ‘여기서는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었음을 말합니다.’(and here, that by 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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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에 나오는 새 교회

 

 

AC.31, 심화 2, 사60에 나오는 ‘새 교회’

AC.31.심화 2. 사60에 나오는 ‘새 교회’ 위 AC.31 [2]에서 사60:1-3, 20을 인용하며 ‘새 교회’를 언급하는데요, 이 ‘새 교회’는 어떤 새 교회인가요? 지금은 현 기독교 이후에 오는 교회를 ‘새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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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유대교회의 항상 타는 등불의 규례

 

 

AC.31, 심화 3, ‘유대교회의 항상 타는 등불의 규례’

AC.31.심화 3. ‘유대교회의 항상 타는 등불의 규례’ 위 AC.31 [3]의 ‘유대교회에서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했다’는 부분 말인데요, 그들은 정말 ‘영원히’ 이 규례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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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창1:14-17, ‘큰 광명체’는 사랑, ‘작은 광명체’는 신앙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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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 창1:14-17,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AC.30-37)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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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And God said, Let there be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distinguish between the day and the night; and let them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And let them be for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And God made two great luminaries, the greater luminary to rule by day, and the lesser luminary to rule by night; and the stars. And God set them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1:14-17)

 

AC.30

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먼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새로 창조되고 있는 사람들 안에서 신앙이 어떻게 자라 가는지를 알지 않으면 분명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과 생명은 오직 주님이시며,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는 주님 친히 요한복음에서 밝히신 바입니다. What is meant by “great luminaries” cannot be clearly understood unless it is first known what is the essence of faith, and also what is its progress with those who are being created anew. The very essence and life of faith is the Lord alone, for he who does not believe in the Lord cannot have life, as he himself has declared in John: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3:36) He that believeth on the son hath eternal life, but he that believeth not on the son shall not see life, but the wrath of God shall abide upon him (John 3:36).

 

[2] 새로 창조되고 있는 사람들 안에서 신앙이 자라 가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에게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은 선과 진리 안에만 있고, 악과 거짓 안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에 그들은 신앙을 통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데, 먼저는 기억에 속한 신앙, 곧 단지 지식에 불과한 신앙인 기억 지식의 신앙을 받습니다. 다음에는 이해에 속한 신앙, 곧 이성적 신앙을 받고, 마지막으로는 마음에 속한 신앙, 곧 사랑의 신앙이며 구원의 신앙을 받습니다. 앞의 두 종류의 신앙은 3절로 13절에서 생명 없는 것들로 표현되며,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는 신앙은 20절로 25절에서 생명 있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이 때문에 여기서는 이제 처음으로 사랑과 거기서 나온 신앙을 다루는데, 이것들이 바로 광명체들(luminaries)입니다. 사랑은 낮을 다스리는 큰 광명체(the greater luminary which rules by day)이고,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밤을 다스리는 작은 광명체(the lesser luminary which rules by night)입니다. 이 두 광명체는 하나가 되어야 하므로, 광명체들이 있어(Let there be luminaries, [sit luminaria])라는 라틴어 단수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라틴어 복수 표현인 [sint luminaria]가 아니고 말입니다. The progression of faith with those who are being created anew is as follows. At first they have no life, for it is only in the good and the true that there is life, and none in the evil and the false; afterwards they receive life from the Lord by faith, first by faith of the memory, which is a faith of mere knowledge [fides scientifica]; next by faith in the understanding, which is an intellectual faith; lastly by faith in the heart, which is the faith of love, or saving faith. The first two kinds of faith are represented from verse 3 to verse 13, by things inanimate, but faith vivified by love is represented from verse 20 to verse 25, by animate things. For this reason love, and faith thence derived, are now here first treated of, and are called “luminaries”; love being “the greater luminary which rules by day”; faith derived from love “the lesser luminary which rules by night”; and as these two luminaries ought to make a one, it is said of them, in the singular number, “Let there be luminaries” [sit luminaria], and not in the plural [sint luminaria].

 

[3] 속 사람 안에서의 사랑과 신앙은 겉 사람의 육체적 차원에서의 열과 빛과 같으므로, 전자는 후자로 표현됩니다. 이런 이유로 광명체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set in the expanse of heaven)라고 하는데, 이는 속 사람 안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큰 광명체는 의지 안에, 작은 광명체는 이해 안에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입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해를 진리 또는 신앙으로 비추는 것은 오직 주님의 자비뿐입니다. Love and faith in the internal man are like heat and light in the external corporeal man, for which reason the former are represented by the latter. It is on this account that luminaries are said to be “set in the expanse of heaven,” or in the internal man; a great luminary in its will, and a lesser one in its understanding; but they appear in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only as does the light of the sun in its recipient objects. It is the Lord’s mercy alone that affects the will with love, and the understanding with truth or faith.

 

 

해설

AC.30의 중심은 창조 넷째 날에 나타나는 광명체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해와 달의 상응부터 설명하지 않고 먼저 신앙의 본질과 생명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그 답은 매우 분명합니다. 신앙의 본질과 생명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신앙이 생명을 가지는 것은 사람이 어떤 교리를 알고 있거나 그것을 지적으로 인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신앙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3:36을 인용하여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음을 먼저 밝힙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새로 창조되는 사람, 곧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신앙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세 단계로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기억에 속한 신앙’, 곧 단지 지식으로 알고 있는 신앙입니다. 말씀과 교리를 배우고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진리인지를 기억 속에 가지고 있지만, 아직 그것이 사람의 내적 생명이 된 것은 아닙니다. 다음에는 이해에 속한 신앙’, 곧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인정하는 신앙이 옵니다. 사람은 이제 배운 진리가 왜 참인지 어느 정도 이해하고 그것에 지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아직 신앙의 완성은 아닙니다.

 

마지막에는 마음에 속한 신앙이 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랑의 신앙또는 구원의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앙이 단순히 더 많은 지식을 얻거나 더 정교한 이해에 도달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과 결합함으로써 생명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의 두 종류의 신앙은 창1:3-13생명 없는 것들로 표현되고,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은 신앙은 창1:20-25생명 있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셋째 날까지 나타난 빛과 궁창과 땅과 식물은 반드시 필요한 준비이지만, 아직 사랑으로 생명을 얻은 신앙 자체는 아닙니다.

 

이 점은 바로 앞의 AC.29와도 매우 중요하게 연결됩니다. 셋째 날에는 이미 땅에서 풀이 돋고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까지 나타났습니다. 실제로 선하고 참된 것이 사람의 삶에서 어느 정도 열매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스베덴보리는 그 단계가 아직 생명 없는 것들에 속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넷째 날에 이르러 결정적인 변화가 시작됩니다. 사랑과 신앙이 광명체들로 나타나고,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점점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넷째 날의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는 단순히 자연계의 해와 달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낮을 다스리는 광명체는 사랑을, ‘밤을 다스리는 작은 광명체는 사랑에서 나온 신앙을 뜻합니다. 여기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신앙이 먼저 있고 거기에 나중에 사랑이 덧붙는 것이 아니라, 생명 있는 신앙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사랑이 큰 광명체이고 신앙이 작은 광명체인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신앙은 서로 분리된 두 생명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둘이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라틴어 표현까지 주목합니다. 본문에서 광명체들을 말하면서도 동사가 복수형 sint가 아니라 단수형 sit으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랑과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과 연결합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면 그 신앙에는 본래 있어야 할 생명이 없으며, 사랑 역시 그 사랑에서 나오는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속 사람 안의 사랑과 신앙을 겉 사람의 육체적 차원에서 경험하는 열과 빛에 비유합니다. 그래서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놓였다고 하는 것은 그것들이 속 사람 안에 놓였음을 뜻합니다. 큰 광명체인 사랑은 의지 안에, 작은 광명체인 신앙은 이해 안에 있습니다. 여기서 의지와 이해는 단순한 인간의 심리 기능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중요한 두 능력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욱 중요한 구별이 하나 나옵니다. 사랑과 신앙이 사람의 의지와 이해 안에 있으므로 얼핏 보면 그것들이 사람 자신의 것처럼 보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내가 이해하며, 내가 믿는 것처럼 경험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나타날 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태양의 빛이 어떤 대상을 비추면 그 대상 자체가 빛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빛의 근원은 그 대상에 있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해를 진리 또는 신앙으로 비추는 근원은 오직 주님의 자비입니다.

 

이것은 셋째 날과 넷째 날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특히 중요합니다. 셋째 날의 사람도 이미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직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 넷째 날에는 사람이 점차 그 선과 진리의 생명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선을 행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니고, 자신의 의지와 이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사람은 여전히 자유롭게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합니다. 다만 그 선과 진리의 생명과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주님께 돌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0에서 말하는 넷째 날은 단순히 신앙이 강해지는단계가 아닙니다. 신앙의 성질 자체가 달라지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기억에만 있던 신앙, 이해에 머물던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여 마음의 신앙이 되고, 비로소 구원의 신앙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랑과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로 표현됩니다.

 

결국 넷째 날의 핵심은 내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도 아니고 내가 얼마나 논리적으로 믿고 있는가도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신앙의 생명은 궁극적으로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것을 깨닫고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앞선 날들 동안 준비되어 온 사람의 내면에 비로소 광명체들이 놓이고, 그 빛 아래에서 다음 단계의 살아 있는 것들이 나타날 준비가 이루어집니다.

 

 

심화

1. 의지와 이해 안에 나타나지만 그 근원은 주님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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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심화 1.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 위 AC.30 분문 [3], ‘그러나 그것들은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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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창1:14-17, ‘큰 광명체들’의 속뜻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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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창1:11-13,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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