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사30:26을 인용한 직접적인 이유는 바로 앞 시72의‘해’와‘달’에 대한 설명을 보강하기 위해서입니다.시72에서‘해’는 사랑을, ‘달’은 신앙을 의미하며, ‘달이다할때까지’라고 한 것은‘신앙이사랑이될것이기때문’이라고 했습니다.이어 사30:26의‘달빛은햇빛같겠고’라는 말씀을 참조하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사야 인용의 중심도 사랑과 신앙의 관계에 있습니다. ‘달’이 의미하는 신앙과‘해’가 의미하는 사랑이 서로 분리된 채 남는 것이 아니라,신앙이 사랑 안에서 자신의 생명과 완성을 얻는 천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이것을 신앙이 없어져 버린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달빛은햇빛같겠고’라는 말씀은 진리가 사라지고 사랑만 남는다는 뜻이 아니라,신앙의 진리가 사랑과 완전히 결합되어 그 사랑의 생명이 된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서 바로 이러한 질서가 있었습니다.그들은 먼저 주님을 사랑했고 이웃을 사랑했으며,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신앙이 사랑과 떨어져 독립적으로 서 있지 않았습니다.
이 점에서 사30:26의 말씀은 가인의 분리와 반대되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가인으로 의미된 사람들은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냈습니다.반면 이사야의‘달빛은햇빛같겠고’라는 이미지는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생명 안에 있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다만‘가인은달을해에서떼어냈다’는 표현은 설명을 위한 비유이지AC.337의 문자 그대로의 정의는 아닙니다.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는 것은 가인으로 의미된 사람들이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여 따로 고백했다는 것입니다.해와 달의 표상은 그 분리가 무엇을 깨뜨렸는지를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사30:26의 앞부분에는‘여호와께서자기백성의상처를싸매시며그들의맞은자리를고치시는날’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이 문맥에서 분리되고 손상된 것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회복되는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그러나AC.337에서는 이‘상처’와‘맞은자리’의 세부 상응을 직접 설명하지 않으므로 여기서 지나치게 구체적인 의미를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햇빛은일곱배가되어일곱날의빛과같으리라’는 부분도AC.337에서는 직접 해설하지 않습니다.말씀에서‘일곱’이 거룩함이나 충만함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는 일반적인 상응을 참고할 수는 있지만,AC.337의 인용 목적을 설명하는 데 반드시 세부 해석까지 끌어올 필요는 없습니다.
이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붙드는 것은 단순합니다.시72의‘달이다할때까지’라는 말씀은 신앙이 사랑이 될 것을 의미하며,사30:26의‘달빛은햇빛같겠고’도 그 동일한 천적 질서를 보여 주는 참조 구절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부의 비유로 생각하면 조금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서로 깊이 사랑하는 부부에게 존중과 신실함과 배려라는 원칙은 사랑과 떨어진 외적 조항으로만 남지 않습니다.사랑하기 때문에 그 원칙을 기쁘게 살아갑니다.원칙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살아 있게 됩니다.
신앙의 진리도 이와 비슷합니다.신앙이 사랑이 된다는 것은 진리의 구별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진리가 더 이상 외부에서 강요되는 명제처럼만 존재하지 않고 사랑과 삶 안에서 살아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AC.337 [3]은 오늘날 인간의 과정이 태고교회와 다르다는 것도 함께 알려 줍니다.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그러므로 오늘의 사람에게‘달빛이햇빛같아진다’는 원리를 적용할 때도 처음부터 태고교회의 퍼셉션 상태를 그대로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후대 인간에게서는 먼저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 진리는 끝까지 체어리티와 떨어진 지식으로 남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주님께서 그 진리를 통하여 인간 안에 선과 체어리티를 이루실 때 신앙은 자신의 참된 목적을 향해 갑니다.
따라서 사30:26이AC.337에서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원리는 신앙과 사랑의 최종적인 결합입니다.태고교회에서는 그 결합이 사랑으로부터 오는 퍼셉션 안에 있었고,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형성되는 길이 나타납니다.그러나 주님의 목적은 어느 경우에도 신앙과 사랑이 영원히 분리되어 있는 데 있지 않습니다.
‘달빛은햇빛같겠고’라는 말씀은 그래서AC.337전체를 아름답게 압축해 줍니다.신앙의 완성은 자신을 사랑과 분리하여 독립시키는 데 있지 않고,사랑 안에서 살아 있는 진리가 되는 데 있습니다.가인은 그 결합을 깨뜨린 상태이고,주님의 질서는 다시 선과 진리,사랑과 신앙이 하나의 생명을 이루도록 이끄시는 질서입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시72:1, 3, 5, 7을 인용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가인으로 의미되는 신앙의 분리를 설명하기에 앞서,그 분리가 일어나기 전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가 어떠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그는 참된 교회가 어떠했는지를 알지 못하면 그 교리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먼저 시72를 통하여 천적 인간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이 시편에서 그는 주님을‘왕’으로,천적 인간을‘왕의아들’로 보고, ‘해’, ‘달’, ‘산들’, ‘작은산들’, ‘대대로’라는 표현의 속뜻을 설명합니다.
‘해’는 사랑을 의미합니다.태고교회는 천적 교회였고 그 중심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그들에게 신앙은 사랑에서 떨어져 독립된 것이 아니었습니다.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달’은 신앙을 의미합니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해와 달이 각각 별개의 두 종교 원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이 사랑과 결합된 질서 안에 있었다는 점입니다.사랑이 중심이고 신앙은 그 사랑 안에 살아 있었습니다.
자연계에서 달이 해의 빛을 받아 비춘다는 사실을 하나의 보조적인 비유로 생각하면 이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그러나AC.337의 직접적인 논점은 물리적인 천문 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해=사랑’, ‘달=신앙’이라는 상응을 통하여 사랑과 신앙의 천적 질서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산들’과‘작은산들’은 태고교회를 의미합니다.이것 역시 그 교회의 중심이 높은 사랑,곧 주님을 향한 사랑에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시72의 장면 전체는 태고교회를 단순히 올바른 교리를 많이 가진 교회로 묘사하지 않고,사랑을 중심으로 선과 진리가 살아 있는 교회로 보여 줍니다.
특히‘그의날에의인이흥왕하여평강의풍성함이달이다할때까지이르리로다’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스베덴보리는‘달이다할때까지’라고 한 이유를‘신앙이사랑이될것이기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신앙과 진리가 없어져 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신앙이 더 이상 사랑과 떨어진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지 않고 사랑 안에서 생명이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진리를 단지 참이라고 인정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사랑하고 살아가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평강’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단어의 상응을 따로 해설하지는 않으므로 세부 의미를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다만 시편 전체의 흐름에서 사랑과 신앙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상태와 잘 어울리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대대로’입니다.스베덴보리는 이것을‘홍수이후의교회들’이라고 직접 설명합니다.따라서 시72의 표상은 태고교회만 보여 주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태고교회 이후에도 교회가 계속 이어질 것을 함께 보여 줍니다.
그러나 홍수 이후 교회들의 질서는 태고교회와 동일하지 않습니다.AC.337 [3]에서 스베덴보리는‘오늘날에는사정이전혀다르다’고 하며,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고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있었고,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지는 방식이 나타납니다.길은 다르지만 주님의 목적은 여전히 선과 진리,사랑과 신앙의 결합입니다.신앙이 사랑에서 영원히 분리되어 독립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이제 왜 이 시편이 가인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지가 분명해집니다.태고교회에서는 사랑과 신앙이 하나의 천적 질서 안에 있었습니다.그런데 가인으로 의미된 사람들은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내어 따로 고백했습니다.따라서 가인은 단순히 새로운 교리 하나를 만들어 낸 이름이 아니라,태고교회를 교회답게 하던 근본 질서를 깨뜨린 상태를 나타냅니다.
시72는 바로 그‘깨뜨리기전의상태’를 보여 주는 기준점입니다.해는 사랑을,달은 신앙을 나타내고,그 둘은 태고교회 안에서 분리된 경쟁 관계가 아니었습니다.따라서 가인의 분리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려면 먼저 해와 달이 하나의 질서 안에 있었던 상태를 알아야 합니다.
‘달이다할때까지’라는 말도 이 점을 가장 깊게 보여 줍니다.신앙의 완성은 사랑과 떨어져 더욱 독립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오히려 사랑 안에 완전히 살아 들어가는 데 있습니다.신앙이 사랑이 된다는 것은 진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AC.337의 시72인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이렇습니다.스베덴보리는 가인이 무엇을 깨뜨렸는지를 설명하기 전에,해와 달과 산들을 통하여 태고교회에서 사랑과 신앙이 본래 어떠한 천적 질서 안에 있었는지를 먼저 보여 줍니다.그 기준이 있어야 가인의 분리가 왜 당시에는 그렇게 엄청난 악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인이 신앙을 사랑에서‘분리’했다는 말을 처음 들으면 이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 문제였는지 쉽게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신앙을 중요하게 여기고,무엇을 믿는지 분명히 하는 것이 왜 잘못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이것을 부부관계에 비유하면AC.337의 차이를 조금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부부가 있다고 해보겠습니다.이들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어려울 때 서로 돕고,함부로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으며,상대방의 기쁨을 자기 기쁨처럼 여깁니다.그렇다고 매일‘부부간준수사항20가지’를 펼쳐 놓고 하나씩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가 이미 서로를 향한 사랑 안에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규칙이나 원칙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오히려 그 원칙들이 사랑 안에 살아 있습니다.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존중하고,사랑하기 때문에 신실하며,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해가 되는 일을 피합니다.규칙의 내용이 사랑 밖에서 억지로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랑과 신앙의 관계도 이와 어느 정도 비슷했습니다.그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신앙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신앙에 속한 것이 사랑 안에 살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사랑과 별개로 신앙을 따로 떼어 내어‘우리가반드시믿어야할것은이것이다’라고 독립된 체계로 세울 필요가 없었습니다.신앙을 따로 언급하는 것조차 꺼렸다는 스베덴보리의 말은 바로 이 하나 된 질서를 배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보다‘부부간준수사항20가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이제 서로의 마음과 유익보다 조항을 먼저 살피고, ‘나는20개가운데19개를지켰으니좋은남편이다’, ‘당신은14번을어겼으니나쁜아내다’라고 서로를 평가합니다.
더 나아가‘서로사랑하는마음이없어도이규칙만정확히지키면좋은부부다’라고 생각한다면 본래 관계가 완전히 뒤집힙니다.사랑에서 나온 원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하고,마침내 사랑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한 것입니다.
가인의 시작도 이와 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었습니다.신앙은 본래 사랑 안에 있었고 그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얻었습니다.그런데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주된 것으로 높이면서 질서가 뒤집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창4의 흐름은 이 작은 분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되고,분리된 신앙의 예배가 생기며,체어리티가 소멸되고,교리가 왜곡되며,마지막에는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됩니다.처음에는‘규칙을조금더중요하게여긴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관계의 생명 자체가 사라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는 중요한 반전이 있습니다.서로를 향한 사랑이 이미 많이 식어 버린 부부에게는 오히려‘서로모욕하지말자’, ‘상대방의말을끝까지듣자’, ‘어려울때서로돕자’같은 원칙을 다시 배우고 의식적으로 지키는 것이 회복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지 않더라도 그것이 옳기 때문에 행동할 수 있습니다.그렇게 잘못된 행동을 멈추고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행동하는 가운데 관계가 다시 회복될 여지가 생길 수 있습니다.물론 인간의 사랑 자체를 단순한 규칙 준수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이 비유의 요점은 상태가 달라지면 원칙과 사랑의 관계도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AC.337의‘그러나오늘날에는사정이전혀다릅니다’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그러나 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따라서 오늘날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을 명확하게 고백하는 것 자체는 가인의 분리가 아닙니다.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다시 선과 체어리티로 인도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문제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독립된 목적이 되는 데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부부간준수사항’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듯,교리와 신앙고백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닙니다.사랑이 살아 있을 때 원칙은 그 사랑을 표현하고 지키는 형식이 될 수 있으며,사랑이 약해진 상태에서는 올바른 원칙이 다시 관계의 질서를 배우는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준수 사항이 사랑을 대신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문제가 생깁니다.마찬가지로 신앙과 교리가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이것만정확히믿으면된다’는 것으로 바뀌면 진리가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 부부의 비유가 보여 주는 핵심은‘규칙이냐사랑이냐’의 양자택일이 아닙니다.올바른 질서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이 사랑 안에 살아 있었고,후대 인간에게서는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이끄십니다.어느 경우에도 최종 목적은 규칙이나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홀로 서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가인의 분리는 바로 이 결합을 깨뜨린 것입니다.그래서 문제는 신앙을 가진 데 있지 않고,신앙을 그 생명인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낸 데 있습니다.이 비유를 이렇게 이해하면 왜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에서 그 분리를‘엄청난악’이라고 했는지를 조금 더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AC.337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오늘날 교회에서는 신앙고백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무엇을 믿는지 분명하게 고백하고 올바른 교리를 배우는 것은 오히려 신앙생활의 중요한 일부입니다.그런데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을 따로 고백하는 것이 교리의 왜곡이었고,심지어‘엄청난악’으로 여겨졌다고 합니다.그렇다면 오늘날의 신앙고백 역시 잘못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AC.337자체가 그 답을 줍니다.태고교회와 오늘날 인간의 영적 상태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태고교회는 천적 인간이었고,사랑으로부터 주님께 받은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반면 스베덴보리는‘오늘날에는사정이전혀다르다’고 하며,지금은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고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신다고 말합니다.
태고교회 사람에게 사랑과 신앙은 아직 분리된 두 체계가 아니었습니다.그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으로 지각했습니다.따라서 사랑 안에 신앙이 있었고,신앙에 속한 모든 것이 그 사랑으로부터 살아 있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어떤 부모가 자기 아이를 깊이 사랑할 때‘나는내아이를사랑한다’는 것과‘나는내아이가소중하다고믿는다’를 두 개의 별도 체계로 만들 필요가 없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사랑하기 때문에 그 가치를 알고 있으며,그 앎이 사랑과 함께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아이를사랑하는지는중요하지않다.그아이가소중하다는사실을정확하게믿기만하면된다’고 한다면 질서가 달라집니다.원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앎을 사랑에서 떼어 내어 독립시킨 것입니다.태고교회에서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다는 것은 이보다 훨씬 깊은 영적 차원에서 그러한 전도를 의미했습니다.
가인의 시작도‘사랑을버리자’는 노골적인 선언이 아니었습니다.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세우는 데서 시작했습니다.그러나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도 온전한 신앙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다음에는 신앙이 사랑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고,마침내 체어리티가 없어도 신앙만 있으면 된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창4에서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가인 계열의 진행은 바로 이러한 분리의 결과를 보여 줍니다.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였지만,결국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교리가 왜곡되며,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고 신앙과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에게 신앙을 따로 배우고 고백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가인의 분리가 아닙니다.AC.337은 이 점을 분명하게 구별합니다.오늘날에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따라서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이해하며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분명히 하는 것은 후대 인간에게 필요한 과정입니다.
여기서‘신앙이앞선다’는 것은‘신앙이더중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고 말합니다.신앙의 진리는 인간을 체어리티로 이끌기 위해 주어지고,주님께서 그 진리를 통하여 인간 안에 선을 형성하실 때 신앙은 자신의 참된 목적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신앙고백이 가인적으로 되는 지점은 신앙을 말한다는 사실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그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할 때입니다.교리를 정확히 안다는 사실이 삶에서의 선을 대신하고,올바른 신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악을 피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할 필요를 약화시킨다면 가인의 원리가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정확한 교리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악을 더 분명하게 보게 하고,주님을 의지하게 하며,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쓰임을 행하게 한다면 그 신앙은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신앙은 체어리티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따라서‘태고교회에서는신앙고백이악이었다’는 말을 오늘날 모든 신앙고백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스베덴보리가‘그때’라고 한 것을 중요하게 보아야 합니다.사랑과 신앙이 퍼셉션 안에서 하나였던 천적 교회에서는 그것을 처음 분리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인 질서를 깨뜨리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시대와 상태에 따라 주님의 거듭남의 질서가 어떻게 달리 적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태고교회의 천적 인간과 후대의 영적 인간을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그러나 둘 모두를 관통하는 목적은 같습니다.진리와 선이 결합되고 신앙과 체어리티가 살아 있는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AC.337이 오늘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신앙을고백하고있는가?’가 아닙니다.그것보다 더 깊은 질문은‘내가고백하는신앙은어디로나를이끌고있는가?’입니다.그 신앙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신앙은 살아 있습니다.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된 채 자기 자신만을 높인다면 태고교회의 가인에게서 나타난 영적 위험이 오늘 우리 안에서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이장은태고교회의퇴보,곧그교리의왜곡과,그결과생겨난이단들과분파들을가인과그의후손들의이름아래다루고있으므로,여기서한가지주의해야할것이있습니다.참된교회가어떠했는지를올바르게이해하지않고서는그교리가어떻게왜곡되었는지,또한그교회의이단들과분파들이어떤성격의것이었는지를이해할수없다는것입니다.태고교회에관해서는위에서충분히설명했습니다.곧태고교회는천적인간이었으며,주님을향한사랑과이웃을향한사랑에속한신앙외에는어떠한신앙도인정하지않았다는것,그들은이사랑을통하여주님으로부터신앙,곧신앙에속한모든것에대한퍼셉션을가지고있었다는것,그리고이러한이유로신앙이사랑에서분리될까하여신앙을언급하는것조차원하지않았다는것을위에서설명했습니다.(AC.200,203)As this chapter treats of the degenera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or the falsification of its doctrine, and consequently of its heresies and sects, under the names of Cain and his descendants, it is to be observed that there is no possibility of understanding how doctrine was falsified, or what was the nature of the heresies and sects of that church, unless the nature of the true church be rightly understood.Enough has been said above concerning the most ancient church, showing that it was a celestial man, and that it acknowledged no other faith than that which was of love to the Lord and toward the neighbor.Through this love they had faith from the Lord, or a perception of all the things that belonged to faith, and for this reason they were unwilling to mention faith, lest it should be separated from love, as was shown above. (n. 200, 203)
[2] 천적인간은이와같으며,시편에서도표상을통하여이와같이묘사됩니다.거기서는주님을‘왕’으로,천적인간을‘왕의아들’로말합니다. Such is the celestial man, and such he is described by representatives in David, where the Lord is spoken of as the king, and the celestial man as the king’s son:
[3] 태고교회와그교리는이와같았습니다.그러나오늘날에는사정이전혀다릅니다.지금은신앙이체어리티에앞서지만,그럼에도주님께서는신앙을통하여체어리티를주시며,그때체어리티가가장중요한것이됩니다.이로부터태고시대에사람들이신앙을따로고백하여그것을사랑에서분리했을때교리가왜곡되었다는사실을알수있습니다.이와같이교리를왜곡한사람들,곧신앙을사랑에서분리하거나신앙만을따로고백한사람들을당시에‘가인’(Cain)이라불렀으며,이러한일은그때엄청난악으로여겨졌습니다. Such was the most ancient church, and such was its doctrine.But the case is far different at this day, for now faith takes precedence over charity, but still through faith charity is given by the Lord, and then charity becomes the principal.It follows from this that in the most ancient time doctrine was falsified when they made confession of faith, and thus separated it from love.Those who falsified doctrine in this way, or separated faith from love, or made confession of faith alone, were then called “Cain”; and such a thing was then regarded as an enormity.
해설
AC.337은 창4의 가인과 그 후손들을 더 자세히 해설하기 전에 잠시 멈추어, 태고교회의 본래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다시 확인하는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칙을 먼저 제시합니다. ‘무엇이왜곡되었는지를알려면먼저왜곡되기전의참된모습이무엇이었는지를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로 의미되는 이단들과 분파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알려면, 먼저 태고교회에서 사랑과 신앙이 본래 어떤 관계 안에 있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는 천적 인간이었습니다. 이들에게 교회의 중심은 신앙을 별도로 고백하고 교리를 체계화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먼저였고, 그 사랑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퍼셉션으로 지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과 나란히 서 있는 독립된 무엇이 아니라 사랑 안에 살아 있는 진리였습니다.
이 때문에 AC.337의 ‘그들은신앙을언급하는것조차원하지않았다’는 표현도 문자적인 금기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이 ‘신앙’이라는 낱말 자체를 싫어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 안에 하나로 있던 것을 따로 떼어 ‘신앙’이라고 세우는 순간 그것이 사랑에서 분리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독립된 종교적 영역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주님께 받은 퍼셉션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바로 이 기준에서 볼 때 가인의 문제가 얼마나 근본적이었는지가 드러납니다. 가인은 신앙을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독립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상태에서는 ‘신앙을따로말하고고백하는것이왜그렇게심각한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신앙이 본래 하나로 있었던 천적 인간에게서 그 둘을 분리하는 것은 단순한 표현상의 구별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 질서를 뒤집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참된 태고교회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기준이 ‘사랑과신앙의하나됨’이라면 가인의 죄는 단순히 하나의 교리적 오류를 주장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랑으로부터 오는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내어 별개의 것으로 세웠다는 데 있습니다. 그 첫 분리가 뒤의 모든 변질의 출발점이 됩니다.
시72의 인용은 이 천적 질서를 표상으로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해’를 사랑으로, ‘달’을 신앙으로 설명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연계의 달이 자기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해의 빛을 받아 비춘다는 점을 기계적인 상응으로 확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AC.337이 직접 밝히는 핵심은 사랑이 중심이고 신앙이 그 사랑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생명과 빛을 받았습니다.
‘산들’과 ‘작은산들’은 태고교회를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산과 높은 곳이 사랑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으며, 여기에서도 태고교회의 천적 성격을 보여 줍니다. 그들에게 가장 높은 것은 신앙고백 자체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으로부터 이웃 사랑과 신앙에 속한 퍼셉션이 나왔습니다.
특히 ‘달이다할때까지’라는 표현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신앙이사랑이될것이기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진리나 신앙이 없어져 버린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이 사랑과 분리된 별개의 것으로 남지 않고 사랑 안에서 완전히 살아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진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생명이 됩니다.
사30:26의 ‘달빛은햇빛같겠고’라는 말씀도 같은 설명을 보강합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의 모든 세부 상응을 해설하는 것은 아닙니다. 직접적인 연결점은 달과 해, 곧 신앙과 사랑입니다. 신앙의 빛이 사랑의 빛과 하나 되는 천적 질서를 보여 주기 위해 이 말씀을 함께 인용합니다.
그런데 AC.337 [3]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그러나오늘날에는사정이전혀다릅니다.’ 이 문장을 놓치면 태고교회의 질서를 오늘의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시대를 포함한 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이체어리티에앞선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시며, 그 체어리티가 형성되면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여기에서 ‘신앙이체어리티에앞선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더 높거나 본질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어서 체어리티가 ‘가장중요한것’이 된다고 말합니다.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진리와 신앙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먼저 의식적으로 주어질 수 있지만, 그 신앙의 목적은 주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형성하시는 데 있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며,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여기서 바로 앞 AC.335의 셋과 AC.336의 에노스를 조심해서 구별해야 합니다. 셋은 ‘새로운신앙’, 에노스는 ‘그신앙을통하여심어진체어리티’라고 했지만, 셋과 에노스 자체는 여전히 태고교회 문맥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AC.337 [3]의 ‘오늘날에는신앙이체어리티에앞선다’는 후대 영적 인간의 질서를 셋과 에노스에게 그대로 소급해서는 안 됩니다. AC.335-336은 태고교회 안에서 가인의 분리 이후 새로운 신앙과 체어리티가 형성된 것을 말하고, AC.337 [3]은 그것과 별도로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와 스베덴보리 시대의 후대 질서를 대비합니다.
이 구별을 해 두면 가인의 의미도 더욱 정확해집니다. 가인은 단순히 ‘신앙이먼저오는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는 것은 정상적인 거듭남의 질서가 될 수 있습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먼저 나타났다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그 자체로 독립시키고 높인 데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신앙고백을 하거나 교리를 배우는 것 자체를 가인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후대 인간에게는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서 끝날 때입니다. 신앙고백의 정확성이 삶에서의 선과 체어리티를 대신하게 되면 가인의 영적 원리가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7의 마지막 ‘이러한일은그때엄청난악으로여겨졌다’는 말에서 ‘그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과 사랑이 하나였던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서 신앙을 별도로 떼어 고백하는 것은 그 질서 자체의 붕괴를 뜻했습니다. 그러나 후대의 인간이 신앙을 명확히 배우고 고백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같은 악이 아닙니다. 인간의 영적 상태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교리를 읽을 때 매우 중요한 원칙을 보여 줍니다. 어떤 질서를 무조건 모든 시대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천적 인간의 질서와 영적 인간의 질서를 구별해야 하고, 태고교회와 홍수 이후 교회의 상태도 구별해야 합니다. 사랑이 먼저였다는 태고교회의 질서를 오늘 사람에게 ‘먼저사랑이생긴다음에야진리를배워야한다’는 시간적 공식으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오늘날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선다는 말도 ‘그러므로신앙이체어리티보다중요하다’는 교리적 우선권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듯,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시며 그때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과정상의 선행과 본질상의 주도권은 서로 다릅니다.
AC.337은 이처럼 가인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기준점을 세워 줍니다. 참된 태고교회의 질서는 사랑 안에 신앙이 있었고,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으로 지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인은 바로 그 질서를 깨뜨린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이후 가인의 후손들과 여러 이단적 상태를 읽을 때에도 ‘무엇을믿었는가?’만이 아니라 ‘그신앙이사랑과어떤관계에놓였는가?’를 계속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원리는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태고교회 사람처럼 퍼셉션으로 직접 진리를 아는 상태에 있지 않으며, 먼저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신앙의 목적은 여전히 같습니다. 주님께서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 안에 체어리티를 이루시고, 마침내 진리가 삶과 사랑 안에서 살아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37은 ‘신앙보다사랑이중요하다’는 단순한 구호보다 훨씬 정교한 질서를 가르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있었고, 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신앙과 사랑의 최종적인 분리가 주님의 질서는 아닙니다. 신앙은 사랑과 결합될 때 살아 있고,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그 목적을 이룹니다.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art thou wroth, and why are thy faces fallen?(창4:5-6)
AC.327
분리된신앙에속한사람들의상태가악해진것은,가인이‘몹시분하여안색이변한것’(angerbeingkindled,andhiscountenancefalling)으로묘사됩니다.(5-6절)That the state of those who were of separated faith became evil, is described by Cain’s “angerbeingkindled,andhiscountenancefalling.” (verses 5–6)
해설
AC.327은 AC.325-326에서 시작된 흐름이 이제 사람의 상태 자체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 줍니다. AC.325에서는 본래 사랑과 하나였던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었고, AC.326에서는 그 분리가 예배에까지 나타났습니다. 가인도 제물을 드렸지만 그것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비롯된 예배였습니다. 이제 AC.327에서는 그 결과 ‘분리된신앙에속한사람들의상태가악해졌다’고 합니다.
여기서 ‘상태가악해졌다’(became evil)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완전히 악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가인은 본래 교회 안에 있던 신앙에서 출발합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자신의 생명인 사랑에서 분리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의 분리였지만,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났고, 이제는 그 분리를 붙들고 있는 사람들의 상태 자체가 악해지는 단계로 진행됩니다.
이것은 창4의 타락이 한순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처음부터 ‘아벨을죽이자’는 상태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본래 함께 있어야 할 사랑과 신앙이 서로 떨어져 나가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분리가 계속되자 예배의 질이 달라졌고, 이제는 그 결과 애정과 내적 상태 자체가 악한 방향으로 변해 갑니다. 이후에는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곧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가인이 ‘몹시분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악화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문자 그대로의 이야기에서는 자신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데 대한 가인의 분노이지만, 속뜻에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진 것이 이 분노를 통하여 묘사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개인의 성격이나 순간적인 감정 분석이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어떤 방향으로 변해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신앙도사랑과구별되는중요한것이아닌가?’라는 데서 출발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신앙은 중요하며 진리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구별이 분리가 되고, 분리된 신앙이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세우기 시작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체어리티는 더 이상 신앙과 함께 있어야 할 형제가 아니라 신앙의 독립적인 지위를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의 분노는 앞으로 일어날 아벨의 죽음과 연결됩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단지 체어리티 없이 존재하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밀어내며 결국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4의 살인은 속뜻에서 이러한 영적 과정의 마지막 결과를 보여 줍니다.
‘안색이변하였다’는 표현도 가인의 상태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더욱 강하게 묘사합니다. 다만 AC.327에서는 아직 이 표현의 세부적인 상응을 풀어 주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분함’과 ‘안색의변화’가 함께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졌음을 나타낸다는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설명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고 신앙 자체를 악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AC.325부터 계속 지켜야 할 중요한 구별입니다. 문제는 신앙이 아니라 ‘분리된신앙’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체어리티의 선과 결합될 때 사람에게 생명을 주며,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진리가 선에서 분리되고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떨어져 나가면, 본래 선을 섬겨야 할 진리가 그 목적을 잃게 됩니다.
또한 창4:6에서는 이러한 상태에 있는 가인에게 여호와께서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네가분하여함은어찌됨이며안색이변함은어찌됨이냐.’ AC.327은 이 질문의 속뜻을 아직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문자 자체에서도 주님께서 가인의 악해진 상태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설명에서는 이 부르심과 경고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AC.325-327을 함께 놓으면 창4의 흐름이 매우 선명해집니다. 먼저 사랑과 신앙의 분리가 일어납니다. 다음으로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제 그 결과 사람의 상태 자체가 악해집니다. 결국 아벨의 죽음은 갑자기 등장하는 비극이 아니라 앞에서부터 진행되어 온 분리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AC.327은 우리에게 ‘나는화를내는가?’라는 심리적인 질문보다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붙들고있는진리와신앙은사랑과체어리티안에서살아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진리가 선과 함께 있고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 있을 때 그것은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분리되어 신앙이 스스로 서려고 할 때, 처음에는 작은 질서의 변화처럼 보였던 것이 결국 사람의 내적 상태 전체를 바꾸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창4:3-5)
AC.326
각각의예배가묘사됩니다.사랑에서분리된신앙의예배는‘가인의제물’(offeringofCain)로,체어리티의예배는‘아벨의제물’(offeringofAbel)로묘사됩니다.(3-4절)체어리티에서비롯된예배는받아들여졌으나,분리된신앙에서비롯된예배는받아들여지지않았습니다.(4-5절)The worship of each is described, that of faith separated from love, by the“offeringofCain”; and that of charity, by the“offeringofAbel.”(verses 3–4)That worship from charity was acceptable, but not worship from separated faith. (verses 4–5)
해설
AC.326은 앞의 AC.325에서 제시된 ‘가인’과 ‘아벨’의 의미를 이제 예배의 문제로 발전시킵니다. AC.325에서 가인은 ‘사랑에서분리된신앙의교리’를, 아벨은 ‘이웃을향한사랑인체어리티’를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은 단지 두 가지 교리적 상태로 머물지 않고 각각 그 상태에 맞는 예배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창4:3-4에서 가인도 제물을 드리고 아벨도 제물을 드립니다. 겉으로 보면 둘 다 여호와께 예배드리며 둘 다 제물을 가지고 나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AC.326은 그 차이가 제물의 외적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예배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체어리티에서비롯된예배’(worship from charity)입니다. 참된 예배는 단순히 예배의 형식이 바르고 교리가 정확하며 기도와 찬송과 헌물이 갖추어졌기 때문에 참된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예배의 내적 생명이 중요합니다. AC.326에 따르면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예배는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외적인 예배 안에 생명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가인의제물’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입니다. 이것은 가인이 주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거나 예배 자체를 거부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가인도 제물을 드립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도 얼마든지 종교적인 모습을 가질 수 있고 예배를 드리며 교리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있다면 그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 역시 그 분리를 그대로 품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아벨과그의제물은받으셨으나가인과그의제물은받지아니하신지라’는 말씀을 단순히 하나님께서 두 사람이 가져온 물건을 비교하여 하나는 좋아하시고 다른 하나는 싫어하셨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속뜻에 이르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땅의소산’과 ‘양의첫새끼’라는 물질적 차이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각각 어떤 내적 예배를 표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벨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나온 예배를, 가인의 제물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예배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받으셨다’와 ‘받지않으셨다’는 표현도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호의를 보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임의로 등을 돌리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변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인간 편의 상태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질서 안에 있지만,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는 그 결합의 질서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따라서 차이는 주님의 사랑이 달라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에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제물’은 오늘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게 하는 매우 엄중한 표상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며 예물을 드리면서도, 그 신앙을 실제 이웃 사랑과 삶에서 분리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믿고 어떤 진리를 알고 있는가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는알고있는진리에따라살아가는가’, ‘나의신앙은이웃을향한선과쓰임으로나타나는가’와 완전히 분리된다면, 신앙과 체어리티 사이에서 가인의 원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AC.326을 ‘교리와신앙은중요하지않고사랑만있으면된다’는 뜻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에서분리된신앙’입니다. 참된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사람이 무엇이 선인지 알도록 인도하고, 그 진리는 삶 안에서 선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 안에서도 신앙과 체어리티는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또한 AC.326은 ‘아벨의제물’을 단순히 체어리티라고 하지 않고 ‘체어리티에서비롯된예배’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배와 삶을 분리할 수 없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참된 예배의 내적 생명은 예배 시간에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평소에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살고, 악을 죄로 여기며 피하고, 이웃의 참된 선을 구하려 할 때 그 삶의 체어리티가 기도와 찬송과 말씀을 듣는 외적 예배 안에도 들어갑니다. 예배의 내적 질은 삶의 방향과 떨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AC.326은 창4의 비극이 깊어지는 두 번째 단계를 보여 줍니다. AC.325에서는 사랑과 신앙 사이에 분리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AC.326에서는 그 내적 분리가 예배에 나타납니다. 겉으로는 가인도 아벨도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지만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나온 예배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예배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나는예배를드리고있는가?’가 아닙니다. 더 깊은 질문은 ‘나의예배는어디에서나오고있는가?’입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Jehovah.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창4:1-2)
개요
AC.325
태고교회는사랑을통하여주님을신앙하였습니다.그러나사랑에서신앙을분리한사람들이생겨났습니다.사랑에서분리된신앙의교리를‘가인’(Cain)이라하였고,이웃을향한사랑인체어리티를‘아벨’(Abel)이라하였습니다.(1-2절)The most ancient church had faith in the Lord through love; but there arose some who separated faith from love.The doctrine of faith separated from love was called“Cain”; and charity, which is love toward the neighbor, was called“Abel.”(verses 1–2)
해설
AC.325는 창4의 속뜻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열쇠를 제시합니다. 창4의 가인과 아벨을 단지 인류 최초의 두 형제에 관한 이야기로 읽는 데 머물지 않고,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이 어떻게 분리되기 시작했는지를 보여 주는 표상으로 읽게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아벨’은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앞으로 전개되는 두 형제의 관계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보여 주는 교회의 영적 역사이기도 합니다.
첫 문장인 ‘태고교회는사랑을통하여주님을신앙하였습니다’는 특히 중요합니다. 여기서 ‘사랑을통하여’(through love)라는 말은 단순히 ‘주님을사랑하면서믿었다’는 정도보다 깊은 뜻을 가집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 사랑은 신앙에 나중에 덧붙여지는 하나의 덕목이 아니라 신앙이 나오는 근원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 안에서 무엇이 참된지를 퍼셉션으로 지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신앙은 서로 독립된 두 가지라기보다 하나의 생명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를 이루고 있었으며, 선을 사랑하는 의지에서 그 선에 속한 진리에 대한 지각이 나왔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신앙은 어떤 교리 내용을 먼저 배우고 논증하여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하고, 그 진리를 살아가는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AC.325의 ‘사랑을통하여주님을신앙하였다’는 짧은 표현은 바로 이러한 천적 질서를 압축하여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장에서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랑에서신앙을분리한사람들이생겨났습니다.’ 여기서 창4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처음부터 신앙 자체가 거짓이거나 악했던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신앙이 자기 생명의 근원인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것으로 서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가지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나무의 줄기와 뿌리에서 끊어질 때 생명을 잃는 것처럼, 신앙과 진리도 사랑과 선 안에 있을 때 살아 있지만 그것에서 분리되면 본래의 생명을 잃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상태가 ‘가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가인을 단순히 ‘신앙’이라고 하지 않고 ‘사랑에서분리된신앙의교리’라고 규정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가인을 처음부터 단순히 악이나 거짓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본래 교회 안에 있던 신앙이 사랑에서 구별되기 시작하고, 그 구별이 점차 분리로 굳어져 독립적인 교리가 되어 가는 상태가 가인으로 표상됩니다. 이후 창4에서는 이 분리가 더욱 진행되면서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앞세우고,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는 과정을 보게 됩니다.
반면 ‘아벨’은 체어리티, 곧 이웃을 향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는 단순히 친절한 감정이나 몇 가지 구제 행위를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으로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행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은 본래 경쟁 관계가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를 없애야 하는 두 원리가 아니라 함께 있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이후 스베덴보리가 아벨을 가인의 ‘형제’라고 거듭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AC.325는 앞의 AC.324에서 말한 ‘교회에서분리되어나온교리들’이 어떻게 생겨나기 시작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교회의 쇠퇴는 언제나 처음부터 노골적인 거짓이 밖에서 들어오는 방식으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참된 것 하나가 전체적인 질서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세울 때에도 시작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참된 것이지만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되면 질서가 무너집니다. 진리는 선을 섬겨야 하지만, 선과 삶에서 분리된 진리가 자기 지성과 자기 의를 세우는 수단으로 변하면 가인의 원리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다만 이 태고교회의 질서를 오늘날 인간의 거듭남에 그대로 시간적인 순서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는사랑을통하여주님을신앙하였다’고 해서 오늘날의 영적 인간도 먼저 완성된 사랑을 가진 뒤에야 진리를 배우고 신앙을 갖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하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시고 선과 진리를 결합하시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질서는 같습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을 단순히 ‘악과선’으로 대응시키는 것은 아직 너무 이릅니다. 창4의 첫 비극은 아벨이 들에서 죽을 때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먼저 본래 하나의 생명을 이루던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의 살인은 그 내적인 분리가 끝까지 진행된 결과입니다. 그래서 AC.325는 창4전체를 읽는 데 하나의 중요한 질문을 우리에게 줍니다. ‘내가가진신앙은사랑과체어리티안에서살아있는가,아니면그것들과분리되어스스로서려하고있는가?’ 창4는 이제 그 작은 분리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하여 보여 주기 시작합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처음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왜이책은처음부터계속선과진리이야기인가?’선과 진리,사랑과 신앙,의지와 이해,그리고 이제AC.44에서는 듣는 것과 행하는 것까지 비슷한 구도가 계속 나타납니다.창세기에는 빛과 어둠,물과 땅,풀과 나무,해와 달,물고기와 새,짐승이 나오는데,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다시 인간 안의 선과 진리 이야기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질문은AC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입니다.그리고 사실 이 질문을 잘 이해하면 앞으로AC를 읽기가 훨씬 쉬워집니다.스베덴보리가 선과 진리를 수많은 교리 가운데 특별히 좋아하는 두 주제로 골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인간의 영적 생명과 거듭남을 설명할 때 이 둘의 관계가 매우 근본적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인간을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사람에게는 무엇인가를 알고 생각하고 이해하는 면이 있고,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원하며 행하는 면이 있습니다.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크게 이해와 의지로 구별합니다.진리는 이해와 특별히 관계되고 선은 의지와 특별히 관계됩니다.그러나 이것을‘진리=이해,선=의지’라는 기계적인 공식으로만 외우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중요한 것은 사람이 참된 것을 알고 이해하는 것과,그것을 좋아하고 원하여 실제로 행하는 것이 하나의 삶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AC.44가 바로 그 문제를 매우 실제적인 언어로 보여 줍니다.말씀을‘듣는것’은 이해의 역할이고,그것을‘행하는것’은 의지의 역할입니다.사람은 들으면서 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무엇이 참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원하지 않을 수 있고,신앙을 말하면서도 그 신앙에 따라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의 문제는 추상적인 철학이 아니라‘내가아는진리가내가사랑하고행하는선과하나가되어있는가?’라는 삶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왜 창세기1장을 설명하면서 이 문제가 계속 나타날까요?지금 스베덴보리가 창조 이야기를 한 사람의 거듭남에 관한 속뜻으로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거듭남은 한순간에 완성되지 않습니다.처음에는 진리가 비치고,서로 다른 것들이 구별되고,지식이 생기고,그 지식들이 살아나며,마침내 이해에 속한 것뿐 아니라 의지에 속한 것들도 새롭게 되어 갑니다.그러므로 창조의 날들이 진행될수록 선과 진리의 관계도 같은 모습으로 단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점차 다른 단계에서 나타납니다.
이 점에서‘사랑과신앙’, ‘의지와이해’, ‘선과진리’, ‘행함과들음’을 완전히 같은 말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각각은 서로 다른 것을 가리키며 사용되는 문맥도 다릅니다.그러나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신앙은 진리와 관계되고 사랑은 선과 관계되며,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능과 관계되고 의지는 선을 받아들이고 행하는 것과 관계됩니다.그래서AC를 읽다 보면 서로 다른 용어들이 계속 선과 진리의 관계를 중심으로 연결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천국을 설명할 때도 선과 진리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생명은 단순히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 상태도 아니고,막연히 좋은 감정을 많이 가지고 있는 상태도 아닙니다.천사들의 생명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들이 결합된 삶과 관계됩니다.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거듭남도 결국 천국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며,선과 진리의 결합은 그 설명에서 계속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말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인간의 거듭남과 천국,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님을 다룬다고 봅니다.따라서 말씀 속의 수많은 자연물과 사건이 속뜻에서 선과 진리,그리고 그것들의 여러 상태와 관계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그렇다고 성경의 모든 단어를‘이것은선,저것은진리’라는 두 칸짜리 표에 넣어 해석한다는 뜻은 아닙니다.상응은 훨씬 다양하고 문맥에 따라 세밀하게 달라집니다.다만 그 다양한 상응들이 결국 사람의 사랑과 신앙,의지와 이해,선과 진리의 상태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선과진리는둘중어느것이더중요한가?’라는 경쟁 구도로 읽지 않는 것입니다.진리를 많이 아는 것만으로 거듭나는 것도 아니지만, ‘마음만착하면진리는별로중요하지않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사람은 무엇이 선인지 알기 위해 진리가 필요하고,알게 된 진리는 실제 선한 삶을 향해야 합니다.AC.44에서 신앙의 지식이 먼저 사람 안에 심겨야 한다고 한 뒤 곧바로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의 결합을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AC에서 선과 진리가 계속 등장하는 것을‘또같은이야기’라고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오히려‘이번에는선과진리의관계가거듭남의어느단계에서,어떤모습으로나타나는가?’라고 물으며 읽으면 좋습니다.창조 첫째 날의 빛에서 말하는 진리와 여섯째 날의 이해와 의지의 관계는 똑같은 상태가 아닙니다.거듭남이 진행됨에 따라 같은 근본 문제가 점점 더 깊은 차원에서 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선과 진리를 계속 말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사람의 영적 생명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그것들이 서로 결합하여 하나의 삶을 이루는 것과 깊이 관계되기 때문입니다.그래서AC를 읽을 때 선과 진리가 또 나왔다고 생각하기보다, ‘이번에는이둘이어떻게만나고있으며,아직무엇이분리되어있고,거듭남이그것을어떻게하나로만들어가는가?’라고 살펴보면 글의 흐름이 훨씬 선명해집니다.
그러면‘처음부터끝까지선,진리이야기만한다’는 첫인상도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같은 두 단어를 되풀이하는 책이라기보다,인간의 내면이 주님에 의해 어떻게 새롭게 창조되어 가는지를 선과 진리의 관계를 통해 아주 오랫동안,여러 각도와 여러 단계에서 추적하는 책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창1:14-19의 넷째 날에 해당하는AC.30-38을 여기까지 읽고 나면 여러 내용이 한꺼번에 등장해서 조금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해와 달과 별,사랑과 신앙,의지와 이해,순종,교대와 다양함,낮과 밤,빛과 어둠이 연이어 나오기 때문입니다.그래서 넷째 날이 끝나는 이 지점에서 전체 흐름을 한 번 묶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넷째 날은‘빛이처음생기는날’이라고 이해하면 정확하지 않습니다.빛은 이미 첫째 날에 등장했습니다.넷째 날에 새롭게 등장하는 것은‘광명체들’입니다.AC.3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사랑과 신앙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말할 수 있을 뿐 아니라,이제 사랑과 신앙이 사람 안에서 빛을 비추고 삶을 이끌게 되는 상태를 설명합니다.그래서 큰 광명체는 사랑,작은 광명체는 신앙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앙이 사랑과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AC.31-34를 지나면서 이 점이 점점 분명해집니다.사람은 처음에는 말씀과 교리를 배우고 신앙에 속한 것들을 알게 됩니다.그러나 참된 영적 생명에서는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홀로 서는 것이 아닙니다.스베덴보리가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를 말하면서 사랑을 더 큰 것으로 두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신앙의 생명은 사랑에서 옵니다.
이것은‘사랑만있으면진리나신앙은필요없다’는 뜻도 아닙니다.사랑과 신앙은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다만 그 질서에서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받습니다.넷째 날의 해와 달은 바로 이 관계를 보여 줍니다.그러므로 신앙을 많이 알고 말하는 것만으로 영적 생명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그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어 삶 안에서 살아 있어야 합니다.
별들도 등장합니다.별은 신앙에 속한 여러 지식과 진리들을 나타냅니다.해와 달과 별을 함께 보면 넷째 날의 모습이 조금 더 선명해집니다.사람 안에 단지 하나의 막연한‘종교적느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사랑과 신앙과 그것에 속한 여러 진리가 서로 관계를 이루면서 영적 삶을 비추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AC.33에서는 이 빛의 근원이 더욱 깊이 설명됩니다.사람의 생각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랑과 관계되어 있습니다.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달라집니다.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단순한 감정 하나가 아니라 인간 생명의 중심과 관계된 것입니다.넷째 날에 큰 광명체인 사랑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도 이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4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 다시 강조됩니다.사랑 없는 신앙,곧 삶과 분리된 신앙은 참된 의미의 살아 있는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여기서 넷째 날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분명해집니다.거듭남은 사람이 진리를 머릿속에 많이 저장하는 과정만이 아니라,그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여 살아 있는 신앙이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AC.35에서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인간의 두 능력인‘의지’와‘이해’가 등장합니다.사람은 의지하고 이해하는 존재이며,이 두 능력은 본래 하나의 생명을 이루도록 되어 있습니다.그러나 타락한 인간에게서는 의지와 이해의 관계가 크게 손상되었습니다.주님의 자비로 사람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이 보존되기 때문에,사람은 자신의 악한 의지가 원하는 것과 다른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이를 통해 거듭남의 길이 열립니다.
이 대목은 넷째 날의 사랑과 신앙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사랑과 신앙이 하나가 된다는 말을 단순히‘내가원하는것을옳다고믿으면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타락한 인간의 의지는 처음부터 선하지 않습니다.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진리를 통해 사람을 가르치시고,사람은 그 진리를 받아들이며 점차 의지와 삶이 새로워져야 합니다.참된 결합은 악한 의지와 거짓된 생각의 일치가 아니라,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하나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AC.36은 그래서 신앙을‘순종’과 연결합니다.스베덴보리는 신앙이 단순히 무엇을 알고 인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특별히 순종이라고 말합니다.그리고 그 순종의 중심에‘주님사랑’과‘이웃사랑’을 둡니다.여기서도 신앙과 삶이 분리되지 않습니다.무엇을 신앙한다고 말하는가만이 아니라,그 신앙이 어떤 사랑과 삶으로 나타나는가가 중요합니다.
AC.37에서는 창1:14의‘징조와계절과날과해’로부터 영적·천적 상태의‘교대와다양함’이라는 중요한 원리를 설명합니다.자연계에 아침과 낮과 저녁과 밤이 있고,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있듯이 영적 생명에도 서로 다른 상태들이 있습니다.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삶이 획일적이 되어 생명이 없게 되고,선과 진리도 분별되거나 구별되거나 퍼셉션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것을‘영적으로성장하려면반드시침체와혼란과악을경험해야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AC.37이 말하는 것은‘영적인것들과천적인것들의교대와다양함’입니다.따라서 모든 영적 후퇴나 악한 상태를 주님께서 성장시키기 위해 주신 필수적인 계절이라고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중요한 것은 영적 생명이 변화 없는 정지 상태가 아니라 교대와 다양함을 가진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지막AC.38에서는 넷째 날을 마무리하면서 네 가지 대응을 매우 간결하게 제시합니다. ‘낮’은 선, ‘밤’은 악, ‘빛’은 진리, ‘어둠’은 거짓입니다.그래서 선한 것들은‘낮의일’,악한 것들은‘밤의일’이라고 합니다.스베덴보리는 요3:19, 21을 인용하여 빛과 어둠이 인간이 받아들이는 진리와 거짓,그리고 그의 삶과 관계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AC.37의‘밤’과AC.38의‘밤’을 기계적으로 똑같이 읽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AC.37에서는 하루의 변화 전체가 상태의 교대와 다양함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지만,AC.38에서는 낮과 밤의 대조를 통해 선과 악을 나타냅니다.말씀의 상응은 단어 하나에 언제나 하나의 뜻만 붙여 놓은 고정된 암호표가 아니라,문맥 안에서 그 의미를 살펴야 합니다.
이렇게AC.30-38을 한 흐름으로 놓고 보면 넷째 날의 중심이 보입니다.앞선 과정에서 사람이 선과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였다면,이제 사랑과 신앙이 사람 안에서 광명체처럼 세워지고 영적 삶을 비추며 다스리기 시작합니다.그리고 사랑과 신앙은 서로 분리된 두 생명이 아니라 하나를 이루어야 하며,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받고 순종과 삶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넷째 날을 단순히‘해와달과별의창조’라고만 읽으면 그 속뜻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이 날은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이 점차 살아 있는 빛으로 자리 잡고,선과 악,진리와 거짓이 더욱 분명히 구별되며,영적 생명이 그 빛 아래서 질서를 이루어 가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