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C.레2 심화

2. ‘왜 누룩과 꿀은 금하고 소금은 반드시 넣으라 하셨을까?’

 

레위기 2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규정 가운데 하나는 누룩과 꿀은 제단에서 불사르지 못하게 하면서 소금은 모든 소제에 반드시 넣도록 한 것입니다. 특히 꿀까지 금지했다는 것이 뜻밖입니다. 성경에서 꿀은 흔히 좋은 것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규정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137(출29:40)은 레2:11-13의 규정을 직접 다루면서 누룩은 ‘악에서 나오는 거짓’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악이 먼저 있고 그 악을 정당화하기 위해 거짓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제에 누룩을 넣지 않는 것은 주님께 드리는 예배 안에 악에서 나온 거짓이 섞여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꿀은 조금 다릅니다. 꿀은 그 자체로 언제나 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꿀이 자연적 인간의 즐거움, 외적인 즐거움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세상 사랑과 자기 사랑의 즐거움에 오염되어 거룩한 것과 섞이는 경우입니다. AC.5650(창43:11)은 바로 레2:11을 인용하면서 꿀이 세상에서 감각을 통해 오는 외적 즐거움과 관계하기 때문에 소제에서 금지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섬세한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에는 기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선에는 깊은 기쁨이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무엇 때문에 기쁜가?’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서 기쁜 것인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서 기쁜 것인지, 종교적인 일을 통해 명예나 영향력을 얻어서 기쁜 것인지, 아니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이웃에게 실제 선이 이루어져서 기쁜 것인지가 다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은 예배와 선행이라도 그 안에 ‘꿀’이 섞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칭찬을 기대하고 행하는 선, 자기 의를 즐기는 봉사, 인정받지 못하면 금세 낙심하거나 분노하는 헌신이라면 외적인 즐거움이 예배의 동기 속에 깊이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레2는 그런 것을 제단의 불에 올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누룩과 꿀을 빼라고만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AC.9207(출22:22)은 레2:13을 직접 인용하면서 소금이 ‘진리가 선을 갈망하고 선이 진리를 갈망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언약의 소금’이라고 부릅니다. 언약은 결합이고, 소금은 그 결합을 향한 갈망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용서해야 한다’는 진리를 참으로 받아들였다면 그 진리는 실제 용서의 선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받아들였다면 그것은 실제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반대로 참된 선은 진리를 원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무엇이 상대방에게 실제로 유익한지 알지 못한다면 선한 의도만으로 잘못된 일을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선은 진리를 통해 형태와 방향을 얻습니다.

 

그래서 소금은 단순히 ‘변하지 않게 보존한다’는 정도를 넘어섭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 소금의 핵심은 ‘결합을 향한 갈망’입니다. 진리와 선이 서로를 바라보며 하나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예물에 있어야 합니다.

 

레2의 이 세 가지를 나란히 놓으면 놀라운 영적 원리가 보입니다. ‘누룩은 빼라. 꿀도 제단의 불에 올리지 말라. 그러나 소금은 절대로 빼지 말라.’ 악에서 나오는 거짓은 버리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물든 외적 즐거움도 예배의 동기로 삼지 말되, 선과 진리가 결합하려는 갈망만은 절대로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와 신앙생활을 돌아보며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내 신앙에는 어떤 누룩이 들어 있는가?’, ‘내가 주님을 섬기면서 은밀히 맛보고 싶은 꿀은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는 소금이 있는가? 내가 아는 진리가 실제 선한 삶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가?’

 

주님께서 찾으시는 소제는 겉으로 화려한 소제가 아닙니다. 거짓이 섞이지 않고, 자기 사랑의 즐거움이 지배하지 않으며, 선과 진리가 서로 결합하기를 갈망하는 소제입니다. 그래서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는 짧은 말씀은 우리의 모든 예배와 삶을 관통하는 명령이 됩니다. (SWC.레2 심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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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2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여자가 남자의 갈빗대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며, 여기에는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깨닫지 못했던 더 깊은 아르카나가 함축되어 있음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woman)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는 것은 속임을 당한 것이 여자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을 속이는 것은 오직 그의 proprium, 곧 같은 말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뿐이기 때문입니다. It requires but little attention in anyone to discern that woman was not formed out of the rib of a man, and that deeper arcana are here implied than any person has heretofore been aware of. And that by the “woman” is signified man’s own may be known from the fact that it was the woman who was deceived; for nothing ever deceives man but his own, or what is the same,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3:1-6)

 

해설

AC.152는 먼저 창2:21-22의 갈빗대와 여자 이야기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매우 직접적인 입장을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여자가 실제로 남자의 갈빗대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별할 수 있으며, 이 말씀 안에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AC.152에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말하는 범위에서는 이 장면을 먼저 신체적으로 여성이 만들어진 과정을 기록한 사건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사람들의 내적 상태에 관한 말씀으로 읽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되어 온 해석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AC.147에서는 갈빗대가 생명력이 거의 없는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고, AC.148-149에서는 뼈와 살의 의미를 통해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AC.151에서는 갈빗대가 ‘생명을 얻지 못한 인간의 proprium’을, 여자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고 직접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AC.152의 첫 문장은 갑자기 등장하는 주장이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진 속뜻의 설명을 전제로 한 결론입니다. 문자에 나타난 갈빗대와 여자의 장면 안에 인간의 proprium이 어떻게 다루어지고 생명을 얻는가 하는 더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여자’(woman)가 왜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하는지를 창3의 이야기와 연결합니다. 그 근거는 ‘속임을 당한 것이 여자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2의 여자와 창3의 여자를 하나의 연속된 내적 의미 안에서 읽고 있다는 뜻입니다. 창2에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어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이 ‘여자’로 표현되었고, 이후 창3에서는 바로 그 여자가 속임을 당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연결을 통해 여자가 proprium을 의미한다는 해석을 확증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은 매우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속이는 것은 오직 그의 proprium, 곧 같은 말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문장만 떼어 놓으면 ‘proprium은 곧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며 언제나 악하다’고 읽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의 AC.141에서는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도 주님께서 proprium을 주시며, 그들의 proprium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고 그것이 ‘가장 참된 천적인 것 자체’라고 했습니다. AC.151에서도 여자는 단순히 proprium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152의 마지막 문장을 앞의 설명들과 분리하여 proprium 전체에 대한 보편적인 정의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여기서는 ‘속임을 당하는’ 상태에 놓인 인간의 proprium이 문제입니다. 인간이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여기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으려 할 때, proprium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 아래 놓일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proprium이 인간을 속입니다. 이것은 AC.146에서 ‘자기 자신의 것을 원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것들이 아무리 분명하게 표상되고 보여도 그것들을 업신여기기 시작한다’고 한 설명과도 이어집니다. 문제의 핵심은 인간에게 proprium이 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것이 어디에서 생명을 받고 무엇의 지배를 받는가에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152는 창2와 창3 사이에 중요한 다리를 놓습니다. 창2에서는 인간이 주님의 직접적인 인도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하면서 proprium으로 기울어지는 과정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proprium을 그대로 죽어 있는 상태에 두지 않으시고 생명을 주어 인간에게 허락하십니다. 그런데 이 proprium이 이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쪽으로 기울게 되면, 창3에서 여자가 뱀에게 속임을 당하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창3의 타락 이야기는 창2와 단절된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창2 후반부에서 시작된 proprium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여자 = proprium’이라는 표현 역시 모든 성경 구절에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151-152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그렇게 설명하는 것은 현재 창2-3의 이 특정한 문맥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상응의 의미는 다루는 주제와 문맥에 따라 살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여자’가 등장할 때마다 무조건 proprium으로 바꾸어 읽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현재 이 여자를 왜 proprium으로 해석하는지를 그 이야기의 연속성과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결국 AC.152는 매우 짧은 번호이지만 창2 후반부의 해석을 창3으로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갈빗대와 여자는 인간 남녀의 기원에 관한 문자적 설명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proprium에 관한 깊은 아르카나를 담고 있으며, 특히 여자가 속임을 당한다는 다음 장의 이야기를 통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동시에 앞 번호들을 함께 읽으면 proprium 자체를 악이라고 단순화해서는 안 되고,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기울어 인간을 속이는 proprium을 구별해야 한다는 사실도 놓치지 않게 됩니다. (AC.152)

 

 

 

AC.153, 창2:22, ‘짓다 -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3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built into a woman)고 하지만, 앞에서 거듭남을 다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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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1, 창2:22, ‘여자 -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 (AC.151-155)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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