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C.레6 심화

4. ‘왜 제사장은 제물을 먹어야 했을까? - 거룩한 것을 자기 삶으로 삼는다는 것’

 

레6에는 현대 독자에게 조금 낯선 장면이 반복됩니다. 하나님께 드린 소제와 속죄제의 일부를 제사장이 먹습니다.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는데 왜 그 제물을 다시 사람이 먹는 것일까요? 단순히 제사장들의 생활을 위한 식량 공급 규정만으로 보면 이 반복되는 ‘먹음’의 영적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부분을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2177(창18:6)은 레6:13-17을 직접 인용하면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소제의 나머지를 먹는 것은 인간의 ‘상호성’과 ‘자기 것으로 삼음’을 표상하며, 그 결과 사랑과 체어리티를 통한 결합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AC.2187(창18:8)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먹는 것’ 자체가 교통과 결합과 자기 것으로 삼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레6:16, 18, 26을 직접 열거합니다. 거룩한 제물을 먹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영적 선을 받아들여 그것이 인간 안의 실제 생명이 되는 것을 표상한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것으로 삼음’은 선의 근원이 인간 자신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여 마치 자기 의지에서 행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이 밖에 놓인 교리로만 남아 있지 않고 내가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고 ‘좋은 말씀이구나’라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먹은 것이 아닙니다. 용서하라는 말씀을 읽었다면 실제 용서하려고 싸우고, 정직하라는 말씀을 읽었다면 손해가 와도 정직을 선택하며,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읽었다면 실제 이웃의 필요를 돌아볼 때 비로소 그 진리가 삶의 일부가 됩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거룩한 것을 아무 곳에서나 먹지 않고 ‘거룩한 곳’, 곧 회막 뜰에서 먹습니다. 주님의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 일은 proprium이 그것을 차지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임재와 질서 안에서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을 행하지만 그 선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중요한 목표입니다. 주님의 진리가 계속 내 밖에 있는 명령으로만 남아 있으면 우리는 억지로 순종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우리 안에 받아들여지면 어느 순간 그 일을 사랑해서 행하기 시작합니다. 밖에 있던 말씀이 안으로 들어와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6에서 제사장이 제물을 먹는 장면은 제사의 부수적인 뒤처리가 아닙니다. 제단에서 주님께 드려진 것이 다시 인간에게 돌아와 인간의 생명이 되는 순간입니다. 거듭남은 악을 버리는 것으로만 완성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그것을 먹고, 자기 삶으로 삼고, 마침내 사랑과 체어리티로 살아가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SWC.레6 심화 4)

 

 

 

SW.레6.심화5, ‘왜 토기는 깨뜨리고 유기는 닦아 물로 씻어야 했을까?’

SW.레6.심화5. ‘왜 토기는 깨뜨리고 유기는 닦아 물로 씻어야 했을까?’ 레6:28은 문자로만 읽으면 위생 규정처럼 보입니다. 속죄제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깨뜨리고, 유기에 삶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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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6.심화3, ‘왜 번제의 재까지 거룩하게 다루어야 했을까?’

SW.레6.심화3. ‘왜 번제의 재까지 거룩하게 다루어야 했을까?’ 번제가 모두 타고 나면 남는 것은 재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제사는 끝났고 재는 치워야 할 폐기물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레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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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6, ‘제단의 불은 꺼지지 않게 하고 - 회복에서 영원한 사랑의 불로 이어지는 거듭남의 질서’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범죄하되 곧 이웃이 맡긴 물건이나 전당물을 속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착취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3남의 잃은 물건을 줍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하는 등 사람이 이 모든 일 중의 하나라도 행하여 범죄하면 4이는 죄를 범하였고 죄가 있는 자니 그 훔친 것이나 착취한 것이나 맡은 것이나 잃은 물건을 주운 것이나 5그 거짓 맹세한 모든 물건을 돌려보내되 곧 그 본래 물건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돌려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 6그는 또 그 속건제물을 여호와께 가져갈지니 곧 네가 지정한 가치대로 양 떼 중 흠 없는 숫양을 속건제물을 위하여 제사장에게로 끌고 갈 것이요 7제사장은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는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받으리라 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9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라 번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번제물은 아침까지 제단 위에 있는 석쇠 위에 두고 제단의 불이 그 위에서 꺼지지 않게 할 것이요 10제사장은 세마포 긴 옷을 입고 세마포 속바지로 하체를 가리고 제단 위에서 불태운 번제의 재를 가져다가 제단 곁에 두고 11그 옷을 벗고 다른 옷을 입고 그 재를 진영 바깥 정결한 곳으로 가져갈 것이요 12제단 위의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서 태우고 번제물을 그 위에 벌여 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서 불사를지며 13불은 끊임이 없이 제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 14소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제단 앞 여호와 앞에 드리되 15그 소제의 고운 가루 한 움큼과 기름과 소제물 위의 유향을 다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16그 나머지는 아론과 그의 자손이 먹되 누룩을 넣지 말고 거룩한 곳 회막 뜰에서 먹을지니라 17그것에 누룩을 넣어 굽지 말라 이는 나의 화제물 중에서 내가 그들에게 주어 그들의 소득이 되게 하는 것이라 속죄제와 속건제 같이 지극히 거룩한즉 18아론 자손의 남자는 모두 이를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서 대대로 그들의 영원한 소득이 됨이라 이를 만지는 자마다 거룩하리라 19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0아론과 그의 자손이 기름 부음을 받는 날에 여호와께 드릴 예물은 이러하니라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항상 드리는 소제물로 삼아 그 절반은 아침에, 절반은 저녁에 드리되 21그것을 기름으로 반죽하여 철판에 굽고 기름에 적셔 썰어서 소제로 여호와께 드려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라 22이 소제는 아론의 자손 중 기름 부음을 받고 그를 이어 제사장 된 자가 드릴 것이요 영원한 규례로 여호와께 온전히 불사를 것이니 23제사장의 모든 소제물은 온전히 불사르고 먹지 말지니라 2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5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속죄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속죄제 제물은 지극히 거룩하니 여호와 앞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그 속죄제 제물을 잡을 것이요 26죄를 위하여 제사 드리는 제사장이 그것을 먹되 곧 회막 뜰 거룩한 곳에서 먹을 것이며 27그 고기에 접촉하는 모든 자는 거룩할 것이며 그 피가 어떤 옷에든지 묻었으면 묻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빨 것이요 28그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깨뜨릴 것이요 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닦고 물에 씻을 것이며 29제사장인 남자는 모두 그것을 먹을지니 그것은 지극히 거룩하니라 30그러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 성소에서 속죄하게 한 속죄제 제물의 고기는 먹지 못할지니 불사를지니라 (레6)

 

 

해설

레위기 6장은 앞의 장들과 조금 다른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레4에서는 죄를 ‘깨닫는 것’, 레5에서는 그것을 ‘자복하는 것’과 ‘보상하는 것’이 강조되었다면, 레6:1-7에서는 그 보상이 아주 구체적인 이웃 관계 안으로 들어옵니다. 맡긴 물건을 속이고, 전당물을 부인하고, 도둑질하고, 착취하고, 남이 잃은 물건을 주워 놓고도 모른다고 하며, 거기에 거짓 맹세까지 하는 경우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경이 이런 행동을 단순히 ‘이웃에게 신실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범죄’한 것이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이웃에게 행한 부정직이 곧 주님께 대한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체어리티와 예배를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제사의 법 한가운데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속건제의 순서도 중요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먼저 훔치거나 착취하거나 맡아 두었던 물건을 ‘돌려보내되 곧 그 본래 물건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숫양을 속건제물로 여호와께 가져갑니다. 레5에서 이미 보았듯이 속건제는 단순히 마음속에서 미안해하는 것으로 끝나는 회개가 아닙니다. 잘못으로 실제 손상이 생겼다면 가능한 범위에서 그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가져가는 종교적 행위가 이웃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웃에게 바로잡을 것을 바로잡는 것과 주님 앞에서 속죄하는 것이 하나의 회개 안에 함께 들어 있습니다. 레6은 그래서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바로잡으려 한다면 이웃과의 관계에서 내가 저지른 실제 불의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까지가 레5 후반의 속건제를 완성하는 부분이라면 8절부터는 시선이 크게 바뀝니다. 이제 ‘누가 어떤 제물을 가져오는가’보다 제사장이 그 제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가 중심이 됩니다. 번제, 소제, 속죄제의 규례가 다시 나오지만 레1, 2, 4의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앞에서는 제물을 가져오는 사람의 입장에서 제사를 보았다면 여기서는 제단과 제사장의 입장에서 그 제사가 어떻게 계속되고, 어떻게 거룩하게 다루어지며,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레6은 레1-5에서 배운 제사의 의미를 한 단계 더 안쪽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심에 9절로 13절의 ‘불’이 있습니다. ‘제단의 불이 그 위에서 꺼지지 않게 할 것이요’, ‘제단 위의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그리고 다시 ‘불은 끊임이 없이 제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이 부분에는 매우 분명한 스베덴보리의 직접 해설이 있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2177(창18:6)은 레6:13-17을 직접 인용하면서 제단에서 계속 타고 있어야 했던 불은 ‘주님의 사랑, 곧 영원하고 영속적인 주님의 자비’를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AC.6832(출3:2)도 레6:12-13을 직접 인용하면서 제단 위의 영속적인 불이 신적 사랑 자체를 표상했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이 불은 먼저 ‘우리의 열심이 꺼지지 않아야 한다’는 명령이 아닙니다. 인간의 사랑보다 먼저 꺼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향한 주님의 사랑과 자비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에는 아침과 저녁이 있고 뜨거울 때와 차가울 때가 있습니다. 어떤 날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하지만 어떤 날은 말씀을 읽는 것조차 힘들 수 있습니다. 만일 거듭남이 인간의 종교적 열심이라는 불에 달려 있다면 그 불은 오래전에 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단의 불은 인간이 처음 만들어 내는 불이 아닙니다. 주님의 신적 사랑이 먼저 끊임없이 흐르고 있으며 인간은 매일 아침 그 불 위에 나무를 놓고 번제를 벌여 놓습니다. 그러므로 ‘아침마다’라는 말씀과 ‘꺼지지 않는 불’이 함께 있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끊이지 않지만 인간은 날마다 새롭게 그 사랑에 응답해야 합니다. 거듭남은 한 번 뜨거워진 신앙으로 평생을 버티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흐르는 주님의 사랑을 매일 새롭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10절과 11절에서는 번제가 다 타고 남은 ‘재’가 등장합니다. 제사장은 세마포 옷을 입고 재를 제단 곁에 두었다가, 다시 옷을 갈아입고 그 재를 ‘진영 바깥 정결한 곳’으로 가져갑니다. 여기에서도 세부를 함부로 상응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만, 세마포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AC.9959(출28:42)는 세마포가 외적 또는 자연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바로 레6:10-11의 제사장이 재를 치울 때 세마포 옷과 속바지를 입었던 규정을 직접 인용합니다. 따라서 제사의 마지막 남은 것까지 진리의 질서 아래 처리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재가 ‘진영 밖’으로 나가지만 아무 데나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정결한 곳’으로 옮겨진다는 사실입니다. 제사가 끝났다고 해서 그 결과가 부정한 폐기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재 자체의 세부 의미에 대해서는 이번에 확보한 직접 원전보다 더 나아가 단정하지 않겠습니다.

 

14절로 18절의 소제 규례는 레2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의 일부를 제단에서 불사르고 나머지를 아론과 그의 자손이 거룩한 곳에서 먹습니다. 그런데 AC.2177은 이 본문을 직접 해설하면서 고운 가루는 체어리티의 영적인 것을, 기름은 체어리티의 천적인 것을, 유향은 그렇게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한 움큼을 취하는 것은 온 힘과 온 영혼으로 사랑하는 것을, 누룩 없이 먹는 것은 순수하고 불결함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고 풀이합니다. 그리고 특히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남은 것을 먹는 것은 인간 편에서의 ‘상호성’과 ‘자기 것으로 삼음’을 표상하며, 그 결과 사랑과 체어리티를 통한 결합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제물은 제단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께 드려진 선이 다시 인간에게 주어지고 인간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레6에서 ‘먹는다’는 행동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AC.2187(창18:8)에서 거룩한 제물을 먹는 것은 ‘교통, 결합, 자기 것으로 삼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레6:16, 18, 26을 직접 열거합니다. 제사장이 거룩한 것을 먹는 것은 단순히 제사장의 식량을 마련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표상적으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인간 안에 받아들여져 실제 생명의 일부가 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진리를 듣기만 하는 것과 그 진리가 내가 살아가는 선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말씀을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먹어’ 자기 삶으로 만드는 것도 다릅니다. 거듭남은 결국 주님의 선과 진리가 내 생각과 의지와 행동 안으로 들어와 나의 삶이 되는 과정입니다.

 

19절로 23절에는 또 하나 특이한 소제가 나옵니다. 아론과 그의 자손이 기름 부음을 받는 날에는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아침과 저녁으로 나누어 드리되, 이 제물은 제사장이 먹지 않고 ‘온전히 불사르라’고 합니다. AC.9993은 아론이 기름 부음을 받는 날 드리는 레6의 소제를 직접 언급하면서 누룩 없는 떡과 기름이 결합된 여러 형태가 천적 선의 서로 다른 층위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는 모든 세부를 억지로 풀기보다 중요한 차이를 붙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일반 소제에서는 일부가 제사장에게 돌아가지만 제사장 자신을 위한 이 소제는 온전히 여호와께 돌려집니다. 주님께 봉사하는 직분 자체도 자기 소유가 될 수 없으며, 그것의 근원과 목적 전체가 주님께 있음을 보여 주는 매우 인상적인 규례입니다.

 

24절로 30절에서는 속죄제 규례가 다시 등장합니다. 여기서 반복되는 표현은 ‘지극히 거룩하다’입니다. 죄를 다루는 제물인데 왜 오히려 ‘지극히 거룩하다’고 부를까요? 스베덴보리는 정결이 단지 인간이 자기 악을 들여다보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실제로 건져 내시는 신적 역사라고 봅니다. AC.10132는 정결과 거듭남이 이노센스의 상태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속죄제와 속건제가 레6:17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지극히 거룩하다’고 불렸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속죄제의 거룩함은 죄 자체가 거룩하다는 뜻이 아니라 죄를 제거하고 인간을 다시 주님의 질서 안으로 돌려놓으시는 주님의 정결케 하시는 역사가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27절과 28절은 더욱 놀랍습니다. 속죄제의 고기에 접촉하는 것은 거룩하게 되고, 피가 옷에 묻으면 거룩한 곳에서 빨아야 하며,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깨뜨리고 유기에 삶았으면 닦고 물로 씻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직접적인 원전이 있습니다. AC.10130(출29:37)은 레6:18, 27을 직접 인용하면서 ‘접촉’은 교통과 전달과 받아들임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AC.10105(출29:31)는 레6:28을 직접 인용하면서 토기는 ‘선과 결합하지 않는 거짓’을, 유기는 ‘선이 들어 있는 교리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풀이합니다. 속죄제의 고기를 삶는 것은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되기 위한 준비를 의미하므로, 선과 결합할 수 없는 거짓은 ‘깨뜨려야’ 하지만 선을 담고 있는 교리적인 것은 버리지 않고 ‘닦고 물로 씻어’ 정결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레6의 가장 사소해 보이는 그릇 하나에도 거듭남의 놀라운 아르카나가 들어 있습니다.

 

마지막 30절에서는 속죄제 가운데서도 차이가 나타납니다. 어떤 속죄제는 제사장이 먹지만, 그 피를 회막 안 성소로 가지고 들어가 속죄한 제물은 먹지 않고 불살라야 합니다. 본문 자체가 이 둘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이것을 현재 확보한 원전 이상으로 세밀하게 상응시키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레6 전체에서 한 가지 원리는 분명합니다. 제사의 모든 것이 똑같은 방식으로 처리되지 않습니다. 무엇은 제단에서 불살라지고, 무엇은 제사장이 먹으며, 무엇은 씻고, 무엇은 깨뜨리고, 무엇은 성소로 들어가고, 무엇은 다시 불살라집니다. 거듭남 역시 모든 것을 무조건 버리는 과정이 아닙니다. 악과 결합된 거짓은 깨뜨려야 하지만 선을 섬길 수 있는 진리는 정결하게 하여 보존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받아들여 자기 삶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레6은 놀랍도록 역동적인 장입니다. 처음에는 훔친 것을 ‘돌려보내라’고 하고, 마지막에는 속죄제의 그릇 하나까지 어떻게 정결하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그 모든 과정의 한가운데에는 ‘불은 끊임이 없이 제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을 깨닫고, 자복하고, 돌려주고, 악과 거짓을 씻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삶으로 만들 수 있는 근원은 결국 우리의 의지력이 아닙니다. 꺼지지 않는 것은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자비입니다. 그 영원한 불이 제단 위에 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오늘도 다시 정결하게 되고, 다시 선을 받아들이며, 다시 이웃에게 바로 행하는 삶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레6이 보여 주는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SWC.레6 해설)

 

심화

1. ‘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전에 이웃에게 먼저 돌려주어야 했을까?’

 

SW.레6.심화1, ‘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전에 이웃에게 먼저 돌려주어야 했을까?’

SW.레6.심화1. ‘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전에 이웃에게 먼저 돌려주어야 했을까?’ 레6:1-7에서 가장 눈여겨볼 것은 범죄의 대상입니다. 맡긴 물건을 속이고, 도둑질하고, 착취하고, 잃어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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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 제단의 불은 밤새도록, 끊임없이 꺼지지 않아야 했을까?’

 

SW.레6.심화2, ‘왜 제단의 불은 밤새도록, 끊임없이 꺼지지 않아야 했을까?’

SW.레6.심화2. ‘왜 제단의 불은 밤새도록, 끊임없이 꺼지지 않아야 했을까?’ 레6에서 가장 강렬하게 반복되는 명령은 ‘불을 끄지 말라’는 것입니다. 번제물은 밤새도록 제단 위에 있고, 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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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왜 번제의 재까지 거룩하게 다루어야 했을까?’

 

SW.레6.심화3, ‘왜 번제의 재까지 거룩하게 다루어야 했을까?’

SW.레6.심화3. ‘왜 번제의 재까지 거룩하게 다루어야 했을까?’ 번제가 모두 타고 나면 남는 것은 재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제사는 끝났고 재는 치워야 할 폐기물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레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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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왜 제사장은 제물을 먹어야 했을까? - 거룩한 것을 자기 삶으로 삼는다는 것’

 

SW.레6.심화4, ‘왜 제사장은 제물을 먹어야 했을까? - 거룩한 것을 자기 삶으로 삼는다는 것’

SW.레6.심화4. ‘왜 제사장은 제물을 먹어야 했을까? - 거룩한 것을 자기 삶으로 삼는다는 것’ 레6에는 현대 독자에게 조금 낯선 장면이 반복됩니다. 하나님께 드린 소제와 속죄제의 일부를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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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왜 토기는 깨뜨리고 유기는 닦아 물로 씻어야 했을까?’

 

SW.레6.심화5, ‘왜 토기는 깨뜨리고 유기는 닦아 물로 씻어야 했을까?’

SW.레6.심화5. ‘왜 토기는 깨뜨리고 유기는 닦아 물로 씻어야 했을까?’ 레6:28은 문자로만 읽으면 위생 규정처럼 보입니다. 속죄제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깨뜨리고, 유기에 삶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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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7, 레5,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 - 죄를 인정하는 데서 보상에 이르는 거듭남의 길’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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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2 심화

3. ‘왜 소제의 일부만 불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었을까?’

 

레위기 1장의 번제와 레위기 2장의 소제 사이에는 눈에 띄는 차이가 있습니다. 번제에서는 제물 전체를 제단 위에서 불살랐습니다. 그래서 레1에는 반복해서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레2에서는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 가운데 일부만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자손들에게 돌립니다. 왜 하나님께 드린 예물을 사람이 다시 먹는 것일까요?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2177(창18:6)은 이 부분을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남은 소제를 먹는 것이 ‘인간 편에서의 상호성’과 ‘자기 것으로 받아들임’을 표상하며, 그로 말미암아 사랑과 체어리티를 통한 결합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자기 것으로 받아들임’은 인간이 선과 진리의 주인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인간의 바깥에 놓아두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원하고, 행함으로써 마치 자신의 것처럼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래야 실제 결합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 식탁 위에 놓여 있어도 바라보기만 해서는 몸의 생명이 되지 않습니다. 먹고 소화하여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의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책 안에 있는 진리, 설교에서 들은 진리, 머릿속으로 이해한 교리는 아직 완전히 우리의 삶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받아 실제로 살아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아는 것과 나를 힘들게 한 사람에게 실제로 악으로 갚지 않는 것은 다릅니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진리를 아는 것과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직하게 말하는 것은 다릅니다. 체어리티가 중요하다는 교리를 이해하는 것과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실제 선을 행하는 것도 다릅니다. 진리가 의지와 행동으로 내려와 삶이 될 때 비로소 영적으로 ‘먹은 것’이 됩니다.

 

그런데 소제의 일부는 먼저 제단 위에서 불살라집니다. 이것도 중요합니다. 인간이 진리와 선을 자기 삶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그 모든 것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질서가 먼저 서 있습니다. 내가 선을 행했다고 해서 그 선의 근원이 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그 진리를 내가 만들어 낸 것도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 자신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제에는 매우 아름다운 왕복 운동이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가 옵니다.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실제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삶의 선을 다시 주님께 돌립니다. 주님께서 주시고, 인간은 받아 응답하며, 그 응답을 통해 다시 주님과 결합합니다.

 

AC.2177이 이것을 ‘상호성’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과 인간의 결합은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물론 모든 선의 능력은 주님에게서 오지만, 인간에게는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일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고 인간이 그 사랑에 응답하며, 주님께서 진리를 주시고 인간이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찬과도 매우 깊은 연결을 생각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소제와 전제가 교회와 천국에 속한 것들을 표상하며, 성찬의 떡과 포도주 역시 같은 방식으로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AC.10137, 출29:40). 성찬에서도 떡을 바라보기만 하지 않고 ‘먹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자신의 영적 생명으로 삼는다는 표상입니다.

 

그래서 레2에서 제사장이 남은 소제를 먹는 장면은 사소한 제사 규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의 진리가 어떻게 인간의 삶이 되는가를 보여 줍니다. 진리는 읽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이해하는 데서도 끝나서는 안 됩니다. 먹어야 합니다. 곧 받아들여 의지하고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레1의 번제가 ‘나의 전부가 주님께 속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면, 레2의 소제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내가 실제 삶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 드리는 것과 주님에게서 받아 먹는 것이 서로 반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의 순환입니다. 주님에게서 받고, 그것을 살아 내고, 다시 주님께 돌리는 것, 바로 그 안에서 주님과 인간의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소제의 남은 것을 먹는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실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말씀을 읽고 있는가?’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말씀을 먹고 있는가?’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오늘 나의 말과 선택과 관계와 행동이 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삶이 될 때,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는 비로소 우리 안에 살아 있게 됩니다. (SWC.레2 심화 3)

 

 

 

SW.4, 레2, ‘고운 가루에 기름을 붓고 - 선과 진리가 하나 되어 삶의 예물이 되기까지’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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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4 심화 2, ‘왜 누룩과 꿀은 금하고 소금은 반드시 넣으라 하셨을까?’

SW.4 심화2. ‘왜 누룩과 꿀은 금하고 소금은 반드시 넣으라 하셨을까?’ 레위기 2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규정 가운데 하나는 누룩과 꿀은 제단에서 불사르지 못하게 하면서 소금은 모든 소제에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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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2 심화

2. ‘왜 누룩과 꿀은 금하고 소금은 반드시 넣으라 하셨을까?’

 

레위기 2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규정 가운데 하나는 누룩과 꿀은 제단에서 불사르지 못하게 하면서 소금은 모든 소제에 반드시 넣도록 한 것입니다. 특히 꿀까지 금지했다는 것이 뜻밖입니다. 성경에서 꿀은 흔히 좋은 것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규정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137(출29:40)은 레2:11-13의 규정을 직접 다루면서 누룩은 ‘악에서 나오는 거짓’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악이 먼저 있고 그 악을 정당화하기 위해 거짓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제에 누룩을 넣지 않는 것은 주님께 드리는 예배 안에 악에서 나온 거짓이 섞여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꿀은 조금 다릅니다. 꿀은 그 자체로 언제나 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꿀이 자연적 인간의 즐거움, 외적인 즐거움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세상 사랑과 자기 사랑의 즐거움에 오염되어 거룩한 것과 섞이는 경우입니다. AC.5650(창43:11)은 바로 레2:11을 인용하면서 꿀이 세상에서 감각을 통해 오는 외적 즐거움과 관계하기 때문에 소제에서 금지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섬세한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에는 기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선에는 깊은 기쁨이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무엇 때문에 기쁜가?’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서 기쁜 것인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서 기쁜 것인지, 종교적인 일을 통해 명예나 영향력을 얻어서 기쁜 것인지, 아니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이웃에게 실제 선이 이루어져서 기쁜 것인지가 다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은 예배와 선행이라도 그 안에 ‘꿀’이 섞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칭찬을 기대하고 행하는 선, 자기 의를 즐기는 봉사, 인정받지 못하면 금세 낙심하거나 분노하는 헌신이라면 외적인 즐거움이 예배의 동기 속에 깊이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레2는 그런 것을 제단의 불에 올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누룩과 꿀을 빼라고만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AC.9207(출22:22)은 레2:13을 직접 인용하면서 소금이 ‘진리가 선을 갈망하고 선이 진리를 갈망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언약의 소금’이라고 부릅니다. 언약은 결합이고, 소금은 그 결합을 향한 갈망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용서해야 한다’는 진리를 참으로 받아들였다면 그 진리는 실제 용서의 선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받아들였다면 그것은 실제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반대로 참된 선은 진리를 원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무엇이 상대방에게 실제로 유익한지 알지 못한다면 선한 의도만으로 잘못된 일을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선은 진리를 통해 형태와 방향을 얻습니다.

 

그래서 소금은 단순히 ‘변하지 않게 보존한다’는 정도를 넘어섭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 소금의 핵심은 ‘결합을 향한 갈망’입니다. 진리와 선이 서로를 바라보며 하나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예물에 있어야 합니다.

 

레2의 이 세 가지를 나란히 놓으면 놀라운 영적 원리가 보입니다. ‘누룩은 빼라. 꿀도 제단의 불에 올리지 말라. 그러나 소금은 절대로 빼지 말라.’ 악에서 나오는 거짓은 버리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물든 외적 즐거움도 예배의 동기로 삼지 말되, 선과 진리가 결합하려는 갈망만은 절대로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와 신앙생활을 돌아보며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내 신앙에는 어떤 누룩이 들어 있는가?’, ‘내가 주님을 섬기면서 은밀히 맛보고 싶은 꿀은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는 소금이 있는가? 내가 아는 진리가 실제 선한 삶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가?’

 

주님께서 찾으시는 소제는 겉으로 화려한 소제가 아닙니다. 거짓이 섞이지 않고, 자기 사랑의 즐거움이 지배하지 않으며, 선과 진리가 서로 결합하기를 갈망하는 소제입니다. 그래서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는 짧은 말씀은 우리의 모든 예배와 삶을 관통하는 명령이 됩니다. (SWC.레2 심화 2)

 

 

 

SW.4 심화 3, ‘왜 소제의 일부만 불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었을까?’

SW.4 심화3. ‘왜 소제의 일부만 불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었을까?’ 레위기 1장의 번제와 레위기 2장의 소제 사이에는 눈에 띄는 차이가 있습니다. 번제에서는 제물 전체를 제단 위에서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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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4 심화 1, ‘왜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함께 놓았을까?’

SW.4 심화1. ‘왜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함께 놓았을까?’ 레위기 2장의 소제를 가장 짧게 표현한다면 ‘고운 가루 + 기름 + 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 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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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2 심화

1. ‘왜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함께 놓았을까?’

 

레위기 2장의 소제를 가장 짧게 표현한다면 ‘고운 가루 + 기름 + 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 세 가지를 함께 드리도록 하셨을까요? 단순히 향기롭고 좋은 제물을 만들기 위한 조리법이었을까요? 스베덴보리는 이 세 가지의 결합 속에서 소제의 핵심적인 영적 질서를 봅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324(계5:8)은 놀랍게도 레2:1-2를 직접 인용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고운 가루가 진정한 진리를 의미하고, 기름은 천적 사랑의 선, 유향은 영적 사랑의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소제의 세 재료는 단순한 음식 재료가 아니라 ‘진리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함께 있는 예배를 보여 줍니다.

 

고운 가루부터 살펴보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995(출29:2)는 고운 가루를 ‘선에서 나오는 진리’라고 설명합니다. 이 표현이 중요합니다. 진리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신적 선에서 신적 진리가 나오며, 인간 안에서도 참된 진리는 결국 선을 섬기고 선으로 인도합니다. 따라서 고운 가루는 단순히 많이 배운 교리 지식이 아닙니다. 삶을 선하게 만드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고운 가루만 드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위에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기름은 사랑의 선을 표상합니다. 진리에 사랑이 스며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확한 진리라도 사랑과 분리되면 사람을 살리는 진리가 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위한 진리,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진리, 지적 우월감을 위한 진리는 고운 가루만 있고 기름이 없는 상태와 비슷합니다. 주님의 진리는 사랑 안에서 사용될 때 그 본래의 목적을 이룹니다.

 

그리고 거기에 유향이 더해집니다. 유향은 영적 사랑의 선과 관계합니다. 특별히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이웃 사랑과 체어리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제 안에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질서가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사랑의 선이 오고, 그 선에서 진리가 나오며, 그 사랑과 진리가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앙을 점검하는 매우 좋은 기준이 됩니다. ‘나는 진리를 알고 있는가?’만 물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에는 기름이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향이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더 온유하고 정직하며 이웃의 유익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제는 신앙과 사랑과 체어리티를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신앙의 진리가 사랑에서 분리되면 메마른 지식이 되기 쉽고, 사랑이라고 하면서 진리가 없으면 무엇이 참으로 선한 것인지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주님 사랑을 말하면서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없다면 그 사랑 역시 삶에서 완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이 한 소제 안에 함께 놓이는 것은 그래서 매우 아름다운 상응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진리를 ‘아는 사람’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진리가 사랑과 결합되고, 그 사랑이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로 흘러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때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은 하나의 소제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과 사랑과 삶도 하나가 됩니다. (SWC.레2 심화 1)

 

 

 

SW.4 심화 2, ‘왜 누룩과 꿀은 금하고 소금은 반드시 넣으라 하셨을까?’

SW.4 심화2. ‘왜 누룩과 꿀은 금하고 소금은 반드시 넣으라 하셨을까?’ 레위기 2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규정 가운데 하나는 누룩과 꿀은 제단에서 불사르지 못하게 하면서 소금은 모든 소제에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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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4, 레2, ‘고운 가루에 기름을 붓고 - 선과 진리가 하나 되어 삶의 예물이 되기까지’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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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2, ‘고운 가루에 기름을 붓고 - 선과 진리가 하나 되어 삶의 예물이 되기까지’

 

1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2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가루 한 움큼과 기름과 그 모든 유향을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3그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4네가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이나 기름을 바른 무교전병을 드릴 것이요 5철판에 부친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지 말고 기름을 섞어 6조각으로 나누고 그 위에 기름을 부을지니 이는 소제니라 7네가 냄비의 것으로 소제를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와 기름을 섞어 만들지니라 8너는 이것들로 만든 소제물을 여호와께로 가져다가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으로 가져가서 9그 소제물 중에서 기념할 것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10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돌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11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12처음 익은 것으로는 그것을 여호와께 드릴지나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는 제단에 올리지 말지며 13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14너는 첫 이삭의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거든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네 소제를 삼되 15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위에 유향을 더할지니 이는 소제니라 16제사장은 찧은 곡식과 기름을 모든 유향과 함께 기념물로 불사를지니 이는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니라 (레2)

 

해설

레위기 1장이 피 흘리는 동물의 번제였다면 레위기 2장은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피도 없고 짐승의 죽음도 없습니다. 대신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이 등장하고, 화덕과 철판과 냄비에서 음식을 만들어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러나 두 장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레1의 번제가 사랑의 선으로부터 드리는 예배를 보여 주었다면, 레2의 소제는 그 사랑이 진리와 결합하여 인간의 삶 안에서 어떻게 구체적인 예배가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소제는 먹을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단순한 곡물 제사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결합하여 주님께 드려지는 삶의 예배를 표상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원전 가운데 하나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2177(창18:6)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소제가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고 유향을 더하여 드리는 제사였다고 설명하면서, 이러한 것들이 모두 사랑과 체어리티에 속한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표상했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그는 레위기 2장 전체가 소제를 어떻게 준비하는지를 다루는 장이라고 직접 언급합니다. 따라서 레2를 읽을 때 우리는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을 각각 따로 떨어진 상징으로 보는 데서 멈추지 말고, 그것들이 어떻게 하나의 소제가 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 재료는 ‘고운 가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고운 가루가 ‘선에서 나오는 진리’를 의미한다고 분명히 설명합니다(AC.9995, 출29:2). 그냥 진리가 아니라 ‘선에서 나오는 진리’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천국의 모든 진리와 선은 주님의 신적 선에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에서 비롯되며, 진리는 선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소제의 고운 가루는 머릿속에 저장된 교리 지식이나 성경 지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그 선을 표현하고 섬기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 고운 가루 위에 반드시 ‘기름’을 붓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기름은 사랑의 선, 특별히 주님을 향한 사랑의 선을 표상합니다. 그래서 고운 가루와 기름이 함께 있다는 것은 진리와 선이 결합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AC.10136(출29:40)은 고운 가루와 기름이 결합된 것을 ‘천적 선으로부터 나오는 영적 선’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진리가 사랑에서 나와 사랑을 섬길 때 그것은 더 이상 머릿속 지식에 머물지 않고 삶을 움직이는 진리가 됩니다.

 

여기에 다시 ‘유향’이 놓입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324(계5:8)은 레2:1-2를 직접 인용하면서 소제의 고운 가루는 진정한 진리를, 기름은 천적 사랑의 선을, 유향은 영적 사랑의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유향은 이웃을 향한 사랑, 곧 체어리티와 관계합니다. 그러므로 레2 첫 두 절에는 매우 아름다운 질서가 들어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의 선이 있고, 그 선에서 나오는 진리가 있으며, 그 사랑이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로 흘러갑니다. 소제는 이 세 가지가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예배가 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매우 실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진리를 많이 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소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운 가루에는 기름이 부어져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사랑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유향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웃에게 무정하다면 아직 소제의 질서가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은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로 흘러가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생활에서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그 사랑으로 이웃을 어떻게 대하는가’가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제사장은 그 가운데 ‘고운 가루 한 움큼과 기름과 그 모든 유향’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사릅니다. 여기서 ‘한 움큼’도 의미 없는 양의 규정이 아닙니다. AC.2177은 손이나 손바닥이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에 ‘한 움큼’은 힘을 의미하며, 소제에서 한 움큼을 취하는 것은 온 힘 또는 온 영혼으로 사랑하는 것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제단의 불은 사랑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소제의 일부를 한 움큼 취하여 불사르는 것은 인간이 가진 선과 진리가 사랑 안에서 주님께 돌려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것을 본문은 ‘기념물’이라고 부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잊으셨다가 그 연기를 맡고 기억하신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제 전체 가운데 주님께 드려지는 부분이 제단의 불 위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됩니다. 레1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불은 사랑을, 향기로운 냄새는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가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소제 역시 결국 사랑으로 돌아갑니다. 진리는 사랑에서 나오고, 사랑과 결합하며,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나고, 다시 사랑의 불 안에서 주님께 드려집니다.

 

그런데 소제 전체를 불사르지는 않습니다.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릴지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레1의 번제와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번제는 전부를 불살랐지만 소제는 일부만 제단 위에 드리고 나머지는 제사장들이 먹습니다. AC.2177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남은 소제를 먹는 것이 인간 편에서의 응답과 자기 것으로 받아들임, 그리고 그로 말미암는 사랑과 체어리티를 통한 결합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는 인간 바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받아들여 자신의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의미에서 ‘먹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제에는 ‘주님께 드림’과 ‘인간이 받아 삶으로 삼음’이라는 두 방향이 함께 있습니다.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기 삶에서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면서 ‘이 선은 내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주님께 돌립니다. 주님에게서 받고, 삶으로 받아들이며, 다시 주님께 돌리는 이 순환이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4절부터는 소제를 만드는 방법이 다양해집니다. 화덕에 굽기도 하고, 철판에 부치기도 하며, 냄비에서 만들기도 합니다. 어떤 것은 기름을 섞고 어떤 것은 기름을 바르며, 어떤 것은 조각으로 나눈 뒤 다시 기름을 붓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서로 다른 소제의 조리법까지도 각각 천국의 아르카나를 담고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실제로 AC.10137(출29:40)은 화덕, 철판, 냄비에서 만들어지는 여러 소제를 직접 언급하며, 소제의 모든 세부 규정 안에 신적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현재 확보된 직접 원전만으로 화덕·철판·냄비 각각을 레2의 문맥에서 세밀하게 구별하여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태와 준비 방식은 달라도 ‘고운 가루와 기름’이라는 중심 구조가 반복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사람마다 거듭남의 삶이 똑같은 외적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도 생각하게 합니다. 각 사람의 환경과 쓰임, 성품과 삶의 형편은 다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다양성 안에서 변하지 않는 중심은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어떤 모습의 소제든 고운 가루와 기름이 있어야 하듯, 참된 영적 삶에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그 선을 표현하는 진리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11절에서는 매우 강한 금지 명령이 등장합니다.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누룩뿐 아니라 꿀까지 금지한다는 것이 뜻밖입니다. 누룩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어도 꿀은 좋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거의 직접 해설합니다. AC.10137은 소제에 누룩과 꿀을 넣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면서, 누룩은 ‘악에서 나오는 거짓’을, 꿀은 세상 사랑의 즐거움이 많이 섞여 있는 외적 즐거움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것들이 천국의 선과 진리에 섞이면 그것들을 변질시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꿀 자체가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꿀이 자연적 선의 즐거움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문제는 그 즐거움이 거룩한 예배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섬기는 이유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인지, 아니면 인정받는 즐거움과 성공의 만족, 자기 의가 주는 기쁨, 세상적인 보상을 얻기 위한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외적으로는 똑같은 선행과 예배처럼 보여도 그 안에 무엇이 섞여 있는가에 따라 그 질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룩과 꿀은 금하면서 모든 소제에는 반드시 ‘소금’을 치라고 합니다. 더구나 그것을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레2의 가장 아름다운 상응 가운데 하나입니다. AC.9207(출22:22)은 레2:13을 직접 인용하면서 모든 예물에 소금을 넣는 것은 모든 예배 안에 ‘진리가 선을 갈망하고 선이 진리를 갈망하는 것’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언약은 결합을 의미하고, 소금은 그 결합을 향한 갈망을 의미하기 때문에 ‘언약의 소금’이라고 불렸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레2 전체의 중심을 다시 밝혀 줍니다. 고운 가루와 기름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하기를 원하고, 선은 진리를 통하여 자신을 표현하기를 원합니다. 참된 진리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참된 선은 진리를 통해 무엇이 실제로 선한지를 분별하고 행하기를 원합니다. 이 둘이 서로를 향하는 갈망이 ‘소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고 하십니다. 예배의 모든 것 안에 선과 진리가 서로 결합하려는 갈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4절부터는 ‘첫 이삭의 소제’가 등장합니다. 첫 이삭을 볶고 찧어서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유향을 더하여 드립니다. 말씀에서 처음 익은 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선과 진리의 근원을 어디에 두는가와 깊이 관계합니다. AC.9300(출23:19)은 첫 열매를 여호와의 집으로 가져오는 것이 교회의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만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주님께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첫 이삭을 드리는 행위에는 ‘이것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 것입니다’라는 인정이 들어 있습니다.

 

이 점에서 소제는 인간의 공로와 정반대에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깨달았을 때 ‘내가 알았다’고 생각하기 쉽고, 선한 일을 했을 때 ‘내가 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첫 열매를 주님께 드린다는 것은 그 진리도, 그 선을 행할 능력도, 그 선을 사랑하게 된 마음도 근원적으로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 자유롭게 자신의 삶으로 살아가지만, 그 생명의 근원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이제 레위기 2장 전체를 다시 보면 하나의 매우 아름다운 흐름이 나타납니다. 고운 가루가 있습니다. 선에서 나오는 진리입니다. 그 위에 기름이 부어집니다. 사랑의 선입니다. 유향이 놓입니다. 그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영적 선, 곧 체어리티입니다. 한 움큼이 사랑의 불 위에 올라가고, 남은 것은 제사장이 먹어 인간의 삶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악에서 나오는 거짓인 누룩은 제거되고, 세상 사랑에 물든 외적 즐거움인 꿀도 제단의 불에 섞이지 않습니다. 대신 모든 것에 소금이 들어갑니다. 진리와 선이 서로 결합하기를 갈망하는 ‘언약의 소금’입니다. 그리고 첫 이삭을 드리면서 이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레1과 레2는 아름답게 이어집니다. 레1이 ‘나의 전부가 사랑으로부터 주님께 드려지는가?’를 묻는다면, 레2는 한 걸음 더 구체적으로 ‘내가 알고 있는 진리는 사랑의 기름과 섞여 있는가?’, ‘주님을 향한 사랑은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의 유향으로 나타나는가?’, ‘내 예배에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누룩과 꿀이 섞여 있지 않은가?’, ‘내 안의 진리는 선과 결합하기를 갈망하는가?’, ‘그리고 내가 가진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는가?’라고 묻습니다.

 

소제는 피 없는 제사이지만 결코 가벼운 제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매일의 삶에 매우 가까운 제사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진리, 품는 사랑, 이웃에게 행하는 선, 일상의 수고와 쓰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누구의 것으로 인정하는가가 소제 안에 들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고운 가루만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 위에 기름이 부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선과 진리가 우리 안에서 실제 삶이 되어 다시 주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때 우리의 일상은 하나의 소제가 되고, 삶은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됩니다. (SWC.레2 해설)

 

심화

1. ‘왜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함께 놓았을까?’

 

SW.4 심화 1, ‘왜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함께 놓았을까?’

SW.4 심화1. ‘왜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함께 놓았을까?’ 레위기 2장의 소제를 가장 짧게 표현한다면 ‘고운 가루 + 기름 + 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 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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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 누룩과 꿀은 금하고 소금은 반드시 넣으라 하셨을까?’

 

SW.4 심화 2, ‘왜 누룩과 꿀은 금하고 소금은 반드시 넣으라 하셨을까?’

SW.4 심화2. ‘왜 누룩과 꿀은 금하고 소금은 반드시 넣으라 하셨을까?’ 레위기 2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규정 가운데 하나는 누룩과 꿀은 제단에서 불사르지 못하게 하면서 소금은 모든 소제에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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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왜 소제의 일부만 불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었을까?’

 

SW.4 심화 3, ‘왜 소제의 일부만 불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었을까?’

SW.4 심화3. ‘왜 소제의 일부만 불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었을까?’ 레위기 1장의 번제와 레위기 2장의 소제 사이에는 눈에 띄는 차이가 있습니다. 번제에서는 제물 전체를 제단 위에서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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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5, 레3,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 화목제에 감추어진 선과 진리의 결합’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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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3, 레1, ‘전부를 불살라 - 번제에 감추어진 거듭남의 아르카나’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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