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영상은 강문호 수도사가 ‘수도학교’를 왜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 출발의 계기와 초기 과정을 직접 설명하는 기록입니다. 앞선 영상들이 수도원과 수도사들의 일화, 아토스 체험, 수도 영성의 가치 등을 소개했다면, 이번 영상은 그 관심이 어떻게 한국 개신교 안에서 하나의 구체적인 교육 과정으로 발전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을 때에는 수도학교라는 제도 자체를 옳다 그르다 판단하기보다, 그 출발점에 있었던 ‘거룩한 삶을 배우고 전하고 싶다’는 열망과 그것이 실제로 어떤 방향을 향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수도학교의 직접적인 계기로 제시하는 것은 세겜의 야곱의 우물에 세워진 수도원에서 만난 한 수도사입니다. 영상의 자동자막은 지명과 상황을 상당히 흐트러뜨리고 있어 세부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 확정하기 어렵지만, 메시지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사라진 지역에서 홀로 수도원을 지키던 노수도사가 ‘내가 떠나면 이곳에서 예수님이 없어진다’는 취지로 말하고, 이어 강문호 수도사에게 ‘수도사를 양성해서 파송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 말을 자신의 표현대로 ‘5만 볼트의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받아들였고, 여기에서 수도학교에 대한 구상이 시작되었다고 회고합니다.

 

이 대목에는 아름다운 것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자기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반드시 많은 일을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때로는 ‘떠나지 않는 것’ 자체가 증언이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교회의 생명은 외적 규모나 사람의 수에 있지 않습니다. 한 사람 안에라도 주님을 향한 사랑과 선, 그리고 그 선을 밝혀 주는 진리가 살아 있다면 그곳에 교회의 본질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떠나면 이곳에서 예수님이 없어진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그 지역에 그 수도사 한 사람만이 주님을 대표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누군가는 끝까지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신앙적 고백으로 읽으면 상당히 울림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갑니다. 주님은 특정 수도원이나 수도사에게만 계시는 분이 아니며, 어떤 지역에서 마지막 기독교인이 떠났다고 해서 그곳에서 주님까지 떠나시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의 섭리는 인간이 볼 수 있는 교회의 경계보다 훨씬 넓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양심과 선을 향한 애정이 남아 있고, 자신이 아는 진리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려는 삶이 있다면 주님은 그 사람에게도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일화의 가장 깊은 의미는 ‘그 수도사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곳에 계셨다’기보다, ‘그 수도사는 자신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끝까지 살고자 했다’는 데서 찾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강문호 수도사가 곧바로 ‘수도사 파송’이라는 생각으로 나아간 것도 흥미롭습니다. 그는 일반적인 선교사 파송에는 교통비와 생활비, 활동비 등 많은 지원이 필요하지만 이미 형성된 수도원에 수도사를 보내면 훨씬 적은 비용으로 가능하다는 현실적인 장점을 이야기합니다. 이 발상에는 실제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선교의 효율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파송하는가?’입니다. 수도복을 입은 사람을 보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 안에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살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수도사라는 외적 신분을 얻는 것과 그 사람의 속 사람이 실제로 거듭나는 것은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은 어쩌면 ‘수도학교를 만들자’가 아니라 그보다 앞에 있는 ‘거룩한 영을 전하고 싶다’는 열망일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거룩’을 무엇으로 정의하느냐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룩은 세상에서 물러나는 것 자체도 아니고, 금욕의 강도가 높아지는 것도 아니며, 수도원이라는 특별한 공간에 거하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거룩은 사람의 의지와 이해가 주님께로 향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랑이 조금씩 물러가며, 주님에게서 받은 선과 진리가 실제 이웃 사랑의 삶으로 나타나는 데 있습니다. 수도생활은 그것을 돕는 하나의 외적 형식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거룩은 아닙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처음 열두 명을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열두 사도를 훈련하여 보내셨다는 데서 착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틀 만에 열두 명이 모이고, 계속 지원자가 생겨 스물넷, 마침내 서른여섯 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 과정을 하나님의 인도로 받아들입니다. 이 부분도 조심스럽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일이 예상보다 빠르게 이루어지고 사람이 많이 모였다는 사실은 감사할 일이지만, 그것 자체가 곧 하나님의 뜻을 확증하는 표지는 아닙니다. 반대로 사람이 적게 모였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는 외적 성공보다 그 일을 움직이는 ‘목적’과 그 목적에서 나오는 ‘수단’, 그리고 마침내 맺히는 ‘쓰임(use)’이 훨씬 중요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분별 기준입니다. ‘사람이 몇 명 모였는가?’보다 ‘그 사람들이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수도사가 몇 명 배출되었는가?’보다 ‘그들의 proprium이 얼마나 다루어지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몇 기까지 이어졌는가?’보다 ‘그 과정을 통하여 주님과 이웃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수도학교에만 적용되는 기준이 아닙니다. 신학교도, 교회도, 선교단체도, 수도원도,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공부하는 모임도 똑같습니다. 지식과 제도가 커졌는데 자기 사랑도 함께 커진다면 외적 성장은 내적 성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수도사도 없고, 교수도 없고, 교재도 없고, 공부할 교실도 없었다’며 ‘맨땅에 헤딩’하듯 시작했다고 회고하는 부분은 그 자체로 존중할 만합니다. 아무 기반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교육 과정을 만들고 교재와 커리큘럼을 마련한다는 것은 상당한 수고를 요구합니다. 고대·중세·현대 수도원, 수도원의 역사와 영성, 아토스와 산티아고 순례길 등을 공부하도록 구성한 것도 개신교 목회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기독교 수도 전통을 다시 들여다보게 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하나의 중심축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수도원의 역사와 위대한 수도사들의 이야기를 많이 알수록 자칫 ‘비범한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얼마나 금식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했는지,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는지, 얼마나 혹독하게 자신을 절제했는지가 수도 영성의 중심이 되기 시작하면 복음의 중심이 조금씩 이동할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계속해서 우리를 되돌려 놓는 곳은 ‘사람의 위대함’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신 주님’입니다. 수도사의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 아름다움의 근원은 수도사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강문호 수도사가 영상 말미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며, 젖지 않고 마르는 빨래가 어디 있느냐’는 취지로 초기의 어려움을 표현하는 대목은 오히려 수도학교의 본질을 생각하게 합니다. 참된 영적 훈련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흔들릴 때 무엇을 붙드는 사람인가를 드러냅니다. 시행착오가 없다는 것이 반드시 영적 성숙의 증거도 아닙니다. 자신의 오류를 보고 인정하며 돌이키는 과정까지도 주님은 거듭남의 재료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것을 이루었다’는 결론이 아니라 ‘이 모든 과정에서 주님께서 우리 안의 무엇을 보여 주시고 고치셨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점에서 이 영상은 이후 수도학교가 어떤 모습으로 발전했는지를 미리 가져와 판단하지 않고, ‘출발 당시의 영상’ 자체로 읽는 것이 가장 공정하겠습니다. 이 영상 속 강문호 수도사에게서는 분명한 열망이 보입니다. 자신이 해외 수도원들을 다니며 받은 충격과 감동을 한국 개신교 안에 소개하고 싶었고, 그것을 일회성 세미나로 끝내지 않고 사람을 훈련하는 과정으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 열망 자체를 가볍게 볼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 출발점에 조용히 하나의 문장을 덧붙인다면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수도사를 만드는 것보다 먼저, 주님께서 사람의 속을 새롭게 하시도록 하라.’ 수도복도, 수도학교도, 커리큘럼도, 금욕도, 공동생활도 모두 외적 그릇입니다. 좋은 그릇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그릇 안에 담겨야 하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이며, 그것이 일상의 체어리티로 흘러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가장 정교한 수도 제도도 외적 형식에 머물 수 있고, 이것이 있다면 수도원 밖에서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고 가정을 돌보며 살아가는 사람도 주님 앞에서 깊은 거듭남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에서 시작된 ‘수도학교’의 꿈을 가장 아름답게 완성하는 길은 수도사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곳을 거쳐 간 사람들이 자기 공로를 낮추고, 자신의 악과 거짓을 살피며, 주님께 모든 선의 근원을 돌리고, 이웃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사용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수도학교의 진정한 열매는 졸업생 명단이나 수도원 숫자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거룩한 영을 전하는 학교’라는 강문호 수도사의 처음 소망도 가장 깊은 의미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SY.92, 강문호 수도사, ‘게라시모스 수도원’ (20200114)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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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84, 강문호 수도사, 수도원 7년, ‘청빈·거룩·오직 예수’를 다시 생각하다 (20260826)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앞서 살펴본 개별 수도사 이야기들과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은퇴 후 약 7년 동안 수도원에서 무엇을 해왔는지 돌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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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영상은 앞서 살펴본 개별 수도사 이야기들과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은퇴 후 약 7년 동안 수도원에서 무엇을 해왔는지 돌아보고, 수도학교와 잇사갈 성경대학, 봉쇄학당, 수도 영성가 연구, 방문객 교육과 부흥회 사역 등을 소개한 뒤, 자신이 생각하는 수도원 운동의 방향을 ‘청빈, 거룩, 오직 예수’라는 세 가지 말로 압축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편은 하나의 수도 일화라기보다 강문호 수도사가 생각하는 ‘개신교 수도원 운동의 자기소개와 비전’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도 개별 사실 하나하나를 따지는 것보다 이 세 축이 과연 사람을 어디로 이끌려 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하겠습니다.

 

영상은 은퇴를 앞두고 ‘후반전이 더 아름답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는 고백에서 시작합니다. 이 출발점에는 귀한 것이 있습니다. 은퇴를 인생의 퇴장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남은 생애를 어떻게 주님께 드릴 것인가를 묻는 태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인간의 영적 성장은 특정 나이에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평생 계속되며, 이 세상에서 시작된 변화는 영원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노년은 단순히 지난 업적을 정리하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proprium, 곧 자기 자신에게 속한 것을 더욱 내려놓고 주님께로 향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후반전이 더 아름다워야 한다’는 강문호 수도사의 소망은 충분히 공감할 만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아름다운 후반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나 더 던집니다. 많은 일을 이루는 것이 아름다운 후반전일까요, 아니면 사람이 점점 더 주님 앞에서 작아지는 것이 아름다운 후반전일까요? 물론 둘은 서로 배척되지 않습니다. 수도원을 세울 수도 있고, 학교를 만들 수도 있고, 수백 권의 자료를 집필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모든 외적 성취가 무엇을 향하고 있느냐입니다. 거듭남의 관점에서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얼마나 많은 일을 이루었는가?’보다 ‘그 일을 하는 동안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얼마나 주님의 질서 아래 놓였는가?’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수도원을 알기 위해 이스라엘의 수많은 수도원을 방문하고 여러 나라의 수도원을 답사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도원에 대한 자신의 선입견이 깨졌다고 고백합니다. 이 대목 역시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이 속한 개신교 전통 밖으로 나가 오래된 기독교 수도 전통을 직접 보고 배우려 했다는 것은 적어도 ‘우리에게 없는 것이 다른 전통에는 있을 수 있다’는 열린 태도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개신교가 종교개혁 이후 수도원 제도와 상당히 멀어진 것을 생각하면, 오래된 기독교 전통 안에서 기도와 절제, 침묵, 공동생활, 노동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려는 시도 자체는 귀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서도 외적 수도생활과 내적 거듭남을 구별합니다. 수도원을 많이 방문했다고 수도의 본질을 아는 것은 아니며, 수도복을 입었다고 수도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봉쇄된 공간에 오래 머물렀다고 내면의 자기 사랑까지 봉쇄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과의 접촉을 줄이면 이전에는 외부 활동에 가려져 있던 proprium이 더 선명하게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수도의 시험은 ‘얼마나 세상을 떠났는가?’가 아니라 ‘세상을 떠난 그 자리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얼마나 떠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영상에 나오는 새벽 4시의 기도실 이야기도 같은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연 속 작은 기도실에 들어가 예수의 형상 아래 머리를 대고 ‘오늘 안수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한다는 모습에는 주님께 의탁하려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어떤 형상 자체에 능력이 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마음을 주님께 향하게 하는 외적 도움으로 사용된다면 그 자체를 굳이 문제 삼을 이유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상이 아니라 그 순간 마음이 향하는 대상입니다. 더 나아가 아침에 주님의 인도를 구했다면 하루 동안 실제로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님의 계명 아래 두려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기도실에서의 ‘주님, 저를 지켜 주세요’가 생활 속에서는 ‘주님, 제 뜻보다 주님의 뜻을 따르게 해 주세요’가 되어야 합니다.

 

이어지는 수도학교 이야기는 강문호 수도사의 사역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개신교 안에 수도사를 양성하는 학교를 만들고, 그 가운데 일부가 실제 수도사의 길을 택하고, 다시 일부가 수도원을 세우는 흐름을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도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무조건 긍정하거나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수도제도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지만,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 기도와 자기 성찰, 절제와 쓰임을 훈련하는 환경이 될 수는 있습니다. 반대로 수도제도 자체가 영적 우월감이나 특별한 신분의식으로 변한다면 오히려 거듭남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제도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제도 안에서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따라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선을 행할 때 거룩함이 형성됩니다.

 

성경 연구에 대한 열정도 이번 영상의 큰 축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한번 성경만 깊이 파보자’, ‘오직 예수 공부만 해 보자’며 여러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여 수백 권의 소책자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경이 놀라울 정도로 깊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고백합니다.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깊게 만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은 인간이 그 문자만 읽어서는 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품고 있으며, 그 안에는 천국과 연결되는 내적 의미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다’는 발견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크게 공감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을 깊이 안다는 것은 희귀한 자료를 많이 알고, 고대 문헌을 많이 읽고, 사람들이 처음 듣는 정보를 많이 찾아낸다는 것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깊이는 궁극적으로 ‘얼마나 놀라운 정보를 발견했는가?’에 있지 않고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을 더 알고, 자기 안의 악을 발견하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삶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을 그토록 방대하게 펼쳐 보인 목적도 지적 경탄을 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이 주님과 천국과 인간의 거듭남을 어떻게 품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경악할 만큼 새로운 성경 지식’은 종착지가 아니라 출발점이어야 합니다. 그 지식이 사람의 생명을 바꾸지 못한다면 아직 말씀은 머리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영상 후반부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강문호 수도사가 마지막 때를 대비하는 수도원 영성을 ‘청빈, 거룩, 오직 예수’라는 세 가지로 정리하는 대목입니다. ‘돈 대신 청빈, 음란 대신 거룩, 배교 대신 오직 예수’라는 구도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강렬하고 기억하기 쉬운 표어입니다. 그리고 각각에는 분명 기독교적 가치가 있습니다. 재물의 지배에서 자유로워지고, 성적 욕망의 무질서를 다스리며, 주님에게서 떠나지 않으려는 삶은 모두 중요한 영적 과제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세 가지를 조금 다르게 깊이 들어갑니다. 먼저 ‘청빈’의 반대는 단순히 돈이 아닙니다. 돈 자체는 악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재물을 사랑하고 그것을 자기 자신을 높이는 수단으로 삼는 사랑입니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도 그것을 주님의 질서에 따라 선한 쓰임에 사용할 수 있으며, 아무 재산이 없어도 돈을 몹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적 청빈보다 더 깊은 것은 ‘소유에 대한 내적 자유’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내 힘과 내 영광의 증거로 붙들지 않고, 주님에게서 맡겨진 것으로 보며 쓰임에 따라 사용하는 것입니다.

 

‘음란 대신 거룩’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적 절제는 중요하지만, 거룩은 단순한 금욕보다 훨씬 큽니다. 외적 행동을 억제했다고 내적 욕망까지 정돈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결혼애의 질서는 오히려 매우 중요하며, 성 자체를 부정하거나 육체를 악한 것으로 보는 것이 거룩은 아닙니다. 거룩은 사랑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도자의 독신도 그 자체가 더 높은 거룩함을 보증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욕망을 중심에 놓지 않고 사랑을 주님의 질서 아래 두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배교 대신 오직 예수’는 세 표어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구호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를 반복한다고 주님 중심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그분의 이름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는 말씀처럼, 주님을 향한 사랑은 결국 삶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의 가장 깊은 형태는 ‘내가 아니라 주님’입니다. 내 지식이 아니라 주님, 내 업적이 아니라 주님, 내 사역의 성공이 아니라 주님, 내가 세운 제도와 내가 만든 책과 내가 이룬 결과가 아니라 그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신 주님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번 영상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영상에는 ‘내가 방문했다’, ‘내가 수도원을 세웠다’, ‘내가 자료를 만들었다’, ‘내가 학교를 세웠다’는 식의 개인적 경험과 성취가 자연스럽게 많이 등장합니다. 이것 자체를 곧바로 자기 자랑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사역을 소개하는 영상이라면 당연히 자신이 한 일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보다 한 단계 안쪽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 모든 일을 누가 이루셨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사람이 선한 일을 많이 할수록 더욱 깊어져야 할 고백은 ‘내가 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이끄셨으며, 나는 쓰임을 위해 사용된 도구일 뿐이다’라는 고백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 처음의 ‘후반전이 아름답게 해 달라’는 기도와 마지막의 ‘오직 예수’는 사실 하나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후반전은 앞선 전반전보다 더 많은 업적을 쌓는 후반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참으로 아름다운 후반전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기 이야기는 조금씩 작아지고 주님 이야기가 점점 커지는 후반전일 수 있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내가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가?’가 중요했다면, 영적 노년에는 ‘주님께서 나를 통해 무엇을 이루셨으며, 나는 얼마나 그분 앞에서 비워지고 있는가?’가 더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수도원의 존재 이유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수도원은 세상에서 도망치는 장소도 아니고, 특별히 거룩한 사람들이 모여 자신들의 거룩함을 증명하는 장소도 아닐 것입니다. 수도원이 참으로 교회를 섬기려 한다면, 그곳은 사람이 조용히 자기 proprium을 직면하고, 주님 앞에서 그것을 내려놓으며, 다시 세상 속 이웃을 더 잘 사랑하고 섬기도록 준비되는 장소여야 합니다. 외적 침묵이 내적 침묵으로, 외적 청빈이 내적 자유로, 외적 독신과 절제가 사랑의 질서로, 성경 연구가 삶의 거듭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 제시된 ‘청빈, 거룩, 오직 예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다듬어 다시 말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소유하지 않는 것’보다 ‘소유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 ‘욕망을 억누르는 것’보다 ‘사랑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 그리고 ‘오직 예수라고 말하는 것’보다 ‘자기 대신 주님이 중심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이루어진다면 수도원은 교회와 경쟁하는 또 하나의 제도가 아니라 교회를 섬기는 귀한 영적 훈련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번 영상에서 가장 오래 붙들 만한 말은 처음에 나왔던 ‘후반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인생의 후반전은 단순한 제2의 성공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점점 더 ‘나’에게서 ‘주님’으로 중심이 옮겨가는 시간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는가보다 주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가 크게 보이고, 내가 얼마나 알려졌는가보다 내가 얼마나 주님의 선한 쓰임에 사용되었는지가 중요해지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가장 아름다운 수도의 열매는 수도원 숫자도, 제자의 숫자도, 책의 숫자도 아닐 것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한 사람의 말과 표정과 삶에서 ‘그 사람’보다 ‘주님’이 더 잘 보이게 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오직 예수’라는 고백이 마침내 한 인간 안에서 이루어 낸 가장 아름다운 후반전일 것입니다.

 

 

 

SY.87, 강문호 수도사, ‘수도학교 이야기’ (20200112)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강문호 수도사가 ‘수도학교’를 왜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 출발의 계기와 초기 과정을 직접 설명하는 기록입니다. 앞선 영상들이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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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83, 강문호 수도사, ‘아토스 이비론 수도원, 주는 것과 받는 것을 잊지 말라’ (20200106)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소개하는 곳은 아토스의 이비론 수도원입니다. 아토스에 얽힌 전승과 이비론 수도원의 오래된 역사, 그리고 무엇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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