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85의 첫 문장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천적 인간이 ‘일곱째날’이고 그 때문에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구별되어 안식일이라 하였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아르카나라면, 왜 이것은 처음부터 좀 더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말씀에 이 정도의 설명이라도 함께 주어졌다면 안식일과 창조의 날들을 둘러싼 많은 혼란을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답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AC.85가 실제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아르카나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이유를 곧바로 설명합니다. ‘천적인간의본성을아는사람이아무도없었고,영적인간의본성을아는사람도거의없었기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지 때문에 사람들은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에도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같은 것으로 여겨 왔다고 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AC.85가 직접 주는 첫 번째 답은 분명합니다. ‘일곱째날’과 ‘안식일’의 속뜻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바로 그것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를 모르면 왜 영적 인간의 형성이 여섯째 날과 연결되고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 또는 안식일과 연결되는지도 알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앞의 AC.67에서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 안에는 ‘다른삶의본성이무엇인지알지못하면결코알수없는’ 아르카나들이 있다고 한 것과도 닮아 있습니다. 어떤 속뜻은 단어 하나의 암호를 알아내듯 풀리는 것이 아니라, 그 속뜻이 가리키는 영적 실재 자체를 알아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AC.85의 안식일도 그런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천적 인간이라는 영적 상태를 알지 못하면 일곱째 날이 왜 천적 인간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렇다면주님께서는왜천적인간의본성을처음부터모든사람에게명백하게설명하지않으셨는가?’라고 물으면, AC.85한 번호만으로는 충분한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AC.85는 ‘왜이아르카나가알려지지않았는가?’에 관하여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본성이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왜주님께서그것을더일찍명시적으로계시하지않으셨는가?’라는 더 큰 섭리의 문제까지 여기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인간의 자유와 수용 상태, 말씀의 문자와 속뜻의 관계, 속뜻의 보존, 신적 섭리와 계시의 때 같은 스베덴보리의 다른 가르침들을 곧바로 AC.85의 확정적인 해답으로 끌어오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한 주제들은 이 질문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지만, 각각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그 문제를 다루는 곳에서 확인하면서 연결해야 합니다.
또 하나 조심할 것은 ‘속뜻이처음부터명백하게쓰여있었다면교회사적혼란이없었을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인간적인 이유는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어떤 결과를 낳았을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명백한 설명이 언제나 명백한 수용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주님의 계시 방식에 대한 우리의 추측보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히는 설명을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렇다고 처음의 질문을 접어 둘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매우 중요한 질문으로 남겨 둘 가치가 있습니다. AC를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지금까지알려지지않았다’, ‘밝히는것이허락되었다’, ‘이것은아르카나이다’라고 말하는 곳들을 계속 만나게 됩니다. 그때마다 ‘왜이제야밝혀지는가?’라는 질문이 다시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 본문들이 충분히 쌓이면 한 번호에서의 추측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의 여러 설명을 서로 대조하면서 더 신중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AC.85에서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데까지 먼저 가는 것이 좋습니다.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안식일이라는 아르카나가 알려지지 않았던 직접적인 이유는 천적 인간의 본성이 알려져 있지 않았고 영적 인간의 본성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깊은 질문, 곧 ‘왜이러한영적실재가오랫동안알려지지않도록허용되었는가?’는 여기서 성급하게 닫지 않고, 앞으로 AC가 그 답을 열어 줄 때까지 가지고 가야 할 질문입니다. (AC.85심화1)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세 가지를 한 문장 안에서 연결합니다. 사랑과 신앙에 관한 이 아르카나가 특히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다는 것,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라는 것, 그리고 이때에는 사랑이 거의 없으며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 읽으면 ‘사랑이적은것과아르카나가가려지는것이무슨관계가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을 이해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AC.32가 말하는 ‘아르카나’의 내용을 먼저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감추어져 있었다는 아르카나는 추상적인 비밀 지식 전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에서 말한 사랑과 신앙의 질서입니다. 사랑과 신앙을 처음에는 함께 ‘큰광명체들’이라 하고, 사랑을 더 큰 광명체, 신앙을 더 작은 광명체라 하며, 사랑은 낮을, 신앙은 밤을 다스린다는 것이 그 아르카나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서를 이해하려면 신앙을 사랑과 독립된 별도의 종교적 능력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30부터 계속되는 논리는 신앙이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이 더 작은 광명체인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이 살아 있을 때 신앙도 살아 있으며,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본래의 생명을 잃습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사랑 자체가 거의 사라지면 ‘신앙은사랑에서생명을얻는다’는 진리도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신앙을 교리의 인정, 지적 동의, 종교적 주장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쉬워지고, 사랑은 신앙과 나란히 놓이는 하나의 덕목 정도로 밀려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랑이더큰광명체이고신앙이그사랑에서생명을얻는다’는 질서 자체가 보이지 않게 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아르카나가가려져있음’과 ‘사랑이거의없음’이 연결됩니다. 아르카나가 말씀 안에서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과 신앙의 참된 관계가 교회 안에서 더 이상 알려지거나 인정되지 않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던 것을 이제 주님의 신적 자비로 설명하도록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이거의없고,그결과신앙도거의없다’는 표현에서 순서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없어서사랑이없다’고 하지 않고, 사랑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30부터 이어진 광명체의 질서와 정확히 같습니다.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더 작은 광명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32에서 세 가지는 하나의 흐름입니다. 세대의 종말에는 사랑이 거의 없어졌고, 사랑이 거의 없으므로 살아 있는 신앙도 거의 없어졌으며, 그 결과 사랑과 신앙의 본래 질서 자체가 교회에서 가려졌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시대에 ‘해는사랑이고달은신앙이며,신앙은사랑에서생명을얻는다’는 아르카나를 다시 밝혀야 했다는 것이 AC.32의 논리입니다. (AC.32심화2)
AC.67은 창2의 본문 해설에 들어가기 전에 스베덴보리가 왜 ‘다른삶’, 곧 사후의 삶에 관한 자신의 경험을 먼저 밝히려 하는지를 설명하는 글입니다. 그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씀의 속뜻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말하면서, 그 속뜻 안에는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아르카나를 알기 위해 ‘다른삶의본성’을 알아야 한다고 한 이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바로 그 삶을 향하고 있고, 그 삶에 속한 것들을 묘사하며, 또한 그것들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직접 설명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이어지는 다른 삶에 관한 기록은 창2해설과 무관하게 삽입된 별도의 사후세계 이야기가 아니라,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기 위한 배경으로 제시됩니다.
또한 이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앞으로 밝힐 내용을 추론이나 사변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는 것이 허락되었고, 그 기간 동안 자신이 ‘듣고보았던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AC.67은 이후 이어질 영계에 관한 기록의 성격을 미리 밝혀 주는 서문이기도 합니다. 독자는 앞으로 나오는 내용을 스베덴보리가 철학적으로 구성한 사후세계 이론이 아니라, 그 자신이 주님의 허락 아래 듣고 보았다고 증언하는 내용으로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그 증언의 진위를 여기서 별도로 논증한다는 뜻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이 자신의 기록을 어떤 성격의 것으로 제시하는지를 정확히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AC.67은 아직 ‘다른삶의본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알지 못하면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을 알 수 없다고 말한 뒤, 이제 자신이 여러 해 동안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번호에서 영계의 구조나 사후 인간의 상태를 미리 완성해서 설명하기보다, 말씀의 속뜻과 다른 삶의 본성이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으로 이어지는 기록을 읽으면서 독자는 다른 삶의 본성이 무엇인지 차례로 알게 되고, 동시에 그것이 왜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지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AC.67해설)
AC.64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 안에 너무나 많은‘아르카나’(arcana)가 있어서 수많은 책으로도 그것들을 모두 펼쳐 내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그런데‘아르카나’는‘속뜻’과 같은 말일까요?또AC에서 자주 만나는‘퍼셉션’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먼저 단어 자체를 보면‘arcana’는 라틴어‘arcanum’의 복수형으로, ‘감추어진것들’, ‘비밀들’이라는 뜻을 가집니다.그래서ArcanaCoelestia라는 제목도 문자 그대로 생각하면‘천적인비밀들’, ‘천국의비밀들’정도의 뜻이 됩니다.다만 여기서‘비밀’이라고 할 때는 일부 사람만 알고 남에게 숨겨 두는 비밀 정보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AC.64의 문맥에서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깊은 내용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아르카나’와‘속뜻’은 정확히 같은 말일까요?완전히 같은 용어라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AC.64는 먼저‘이것이말씀의속뜻이며말씀의가장참된생명’이라고 말한 다음, ‘그아르카나는너무많아서수많은책으로도충분하지않다’고 합니다.따라서 적어도 이 문맥에서는‘속뜻’이 말씀의 내적 의미 자체를 가리킨다면, ‘아르카나’는 그 속뜻 안에서 밝혀지는 수많은 감추어진 내용들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너무 기계적으로‘속뜻=그릇,아르카나=내용’이라는 공식으로 고정할 필요는 없습니다.스베덴보리는 언제나 그런 철학적 구분표를 제시하면서 두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문맥에 따라 서로 매우 가까운 의미 영역에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중요한 것은‘아르카나’가 말씀 밖에 따로 감추어져 있는 비밀 지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AC.64에서 말하는 아르카나는 바로 말씀의 속뜻과 관련하여 밝혀지는 감추어진 것들입니다.
창세기1장이 좋은 예입니다.문자에서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여섯 날을 읽습니다.그런데AC.6부터AC.63까지 스베덴보리는 그 말씀 안에서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수많은 내용을 밝혔습니다.빛과 어둠,물과 궁창,식물과 씨,해와 달과 별,물고기와 새와 짐승,하나님의 형상과‘심히좋았더라’등이 거듭남과 어떻게 관계되는지를 설명했습니다.AC.64는 지금까지 제시한 이 모든 것조차 말씀 안의 아르카나 가운데‘극히일부’라고 말합니다.
이 점에서 아르카나는 단순한‘상징의뜻풀이’보다 넓습니다. ‘빛은이것을뜻한다’, ‘물은저것을뜻한다’는 대응 하나를 알아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그 의미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거듭남의 질서와 상태,주님의 역사를 밝혀 줍니다.따라서 아르카나를 재미있는 성경 암호나 숨은 정보처럼 접근하면AC가 말하려는 핵심을 놓치기 쉽습니다.
그러면‘퍼셉션’과는 어떻게 다를까요?퍼셉션은AC에서 별도로 설명되는 인간의 영적 상태와 인식에 관한 용어입니다.따라서 아르카나와 퍼셉션을‘하나는내용이고하나는그것을알아보는능력’이라고 간단히 짝지어 정의할 필요는 없습니다.서로 관련될 수는 있지만 동일한 범주의 두 용어가 아닙니다. ‘아르카나’가 무엇인가를 묻는 이번 심화에서는 퍼셉션의 전체 교리까지 가져오지 않고,그것이 아르카나의 다른 이름은 아니라는 정도로 구별하면 충분합니다.
무엇보다‘아르카나’라는 말을 들을 때AC자체가 성경보다 더 높은 비밀 지식을 담은 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스베덴보리가 밝힌다고 주장하는 아르카나는AC안에서 독립적으로 만들어진 비밀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아르카나입니다.AC.64의 순서도 먼저‘말씀의속뜻’을 말하고 그 안의 헤아릴 수 없는 아르카나를 말합니다.
따라서ArcanaCoelestia라는 책 제목도 결국 독자의 눈을 이 책 자체에 묶어 두기보다 말씀으로 돌려보냅니다. ‘천국의비밀’은 스베덴보리가 새로 창조한 비밀이 아니라,그의 주장에 따르면 주님께서 주신 말씀 안에 이미 있으나 문자적 의미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영적이고 천적인 내용들입니다.
한마디로 정리한다면,AC.64에서‘아르카나’는 말씀의 문자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 속뜻 안에 담겨 있는 수많은 감추어진 영적이고 천적인 내용들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창세기1장을 다 설명한 이 자리에서도 자신이 밝힌 것은 그 가운데‘극히일부’라고 말합니다.
이것이바로말씀의속뜻(theinternalsenseoftheWord)이며,말씀의가장참된생명입니다.이는문자적의미에서는전혀드러나지않습니다.그안에담긴아르카나는너무나많아서,그것들을모두풀어내려면수많은책으로도충분하지않을것입니다.여기에서는다만극히일부만제시되었는데,그것도이말씀이거듭남을다루고있으며,그거듭남이겉사람(theexternalman)에서속사람(theinternalman)으로나아간다는사실을확인해주는것들뿐입니다. 천사들은말씀을이렇게지각합니다.그들은문자속에있는것들,심지어단어하나의가까운의미조차도전혀알지못합니다.하물며말씀의역사서와예언서에매우자주등장하는나라,성읍,강,사람의이름들은더더욱알지못합니다.그들은오직그말들과이름들이의미하는것들만을관념으로가집니다. 그래서낙원에있는아담을통해그들은태고교회를지각하지만,그교회자체가아니라그교회의주님에대한신앙을지각합니다.노아를통해서는태고교회의후손들에게남아아브람시대까지계속된교회를지각합니다.아브라함을통해서는그개인을전혀지각하지않고,그가표상한구원하는신앙을지각합니다.이와같이천사들은말과이름에서완전히떠나영적이고천적인것들을지각합니다. This then is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its veriest life, which does not at all appear from the sense of the letter.But so many are its arcana that volumes would not suffice for the unfolding of them.A very few only are here set forth, and those such as may confirm the fact that regeneration is here treated of, and that this proceed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It is thus that the angels perceive the Word.They know nothing at all of what is in the letter, not even the proximate meaning of a single word; still less do they know the names of the countries, cities, rivers, and persons, that occur so frequently in the historical and prophetical parts of the Word.They have an idea only of the things signified by the words and the names.Thus by Adam in paradise they perceive the most ancient church, yet not that church, but the faith in the Lord of that church.By Noah they perceive the church that remained with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at continued to the time of Abram.By Abraham they by no means perceive that individual, but a saving faith, which he represented; and so on.Thus they perceiv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entirely apart from the words and names.
해설
AC.64는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에 대한 해설을 마친 자리에서, 스베덴보리가 지금까지 자신이 무엇을 설명해 왔는지를 한 걸음 물러서서 밝히는 글입니다. 그는 이것을 ‘말씀의속뜻’이라고 부르며, 그것이 말씀의 ‘가장참된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1장을 읽으면 문자적으로는 천지와 빛, 궁창과 물, 식물과 해와 달과 별, 물고기와 새와 짐승, 그리고 사람의 창조가 나옵니다. 그런데 AC.6부터 AC.63까지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 안에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속뜻이 들어 있다고 설명해 왔습니다. AC.64는 이제 바로 그것이 말씀의 속뜻이며, 그 속뜻은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문자적의미에서는전혀드러나지않는다’는 말을 ‘문자적의미는중요하지않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속뜻은 말씀을 버리고 그 밖에서 만들어 낸 별도의 영적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그 말씀 안에 있는 뜻입니다. 창1의 빛, 물, 식물, 해와 달과 별, 생물과 사람이라는 말씀의 표현들이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담긴 속뜻도 밝혀집니다. 따라서 AC를 읽으면서 문자와 속뜻을 서로 경쟁시키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문자는낮고속뜻은높으니이제문자는필요없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말씀의 문자 안에 우리가 처음에는 알지 못했던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이 AC.64의 출발점입니다. 특히 우리의 독법에서는 언제나 말씀 자체가 먼저이고 AC는 그 말씀 안에 담긴 속뜻을 밝혀 주는 해설이라는 순서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안의 아르카나가 너무 많아 수많은 책으로도 충분히 펼쳐 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창1을 설명하면서 자신이 제시한 것은 그 가운데 ‘극히일부’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의 설명이 창세기 1장의 모든 속뜻을 다 밝혔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 줍니다. 그가 특별히 골라 제시한 것은 ‘이말씀이거듭남을다루고있으며,그거듭남이겉사람에서속사람으로나아간다는사실’을 확인해 주는 아르카나들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을 ‘거듭남에관한여섯단계’라고 이해했다고 해서 그 말씀의 내적 내용 전체를 다 파악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64자신이 지금까지 제시한 것은 극히 일부라고 선을 긋고 있습니다.
여기서 ‘거듭남이겉사람에서속사람으로나아간다’는 표현도 그대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에 이른다는 질서도 여러 차례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AC.64의 이 문장은 지금 그것을 설명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창1의 여섯 날에 나타난 거듭남의 진행이 ‘fromtheexternalmantotheinternal’, 곧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이 두 표현을 성급히 하나가 틀리고 하나가 맞는 것처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에게서 생명이 유입되는 질서와, 사람이 거듭남을 경험하며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인도되는 진행을 구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이후 AC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더 자세히 설명할 때 점차 분명해질 것입니다.
AC.64의 두 번째 큰 주제는 천사들이 말씀을 어떻게 지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말씀의 문자에 있는 것들을 알지 못하며, 심지어 단어 하나의 가까운 의미조차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역사서와 예언서에 등장하는 나라와 성읍, 강과 사람의 이름도 알지 못하고, 오직 그 말들과 이름들이 의미하는 것들을 지각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천사들이 성경의 역사에 무지하다는 일반적인 지식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말씀을 읽을 때 천사들에게 그 말씀이 어떻게 지각되는지를 설명하는 문맥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 예가 아담과 노아와 아브라함입니다. 천사들은 낙원의 아담을 통해 태고교회를 지각하지만 거기에서도 태고교회라는 역사적 교회 자체에 머무르지 않고 그 교회의 ‘주님에대한신앙’을 지각합니다. 노아를 통해서는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 남아 아브람 시대까지 계속된 교회를 지각하고,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아브라함이라는 개인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표상한 ‘구원하는신앙’을 지각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통해 말씀의 고유명사들이 천사에게 단순한 역사적 이름으로 머무르지 않고 그 이름들이 의미하고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으로 지각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아담도노아도아브라함도실제인물이아니었다’는 결론을 끌어내서는 안 됩니다. AC.64의 관심은 그 인물들의 역사성 여부를 논증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천사들이 말씀을 지각할 때 ‘아브라함’이라는 개인에게 머무르지 않고 그가 표상하는 것을 지각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속뜻을 인정하는 것과 문자에 기록된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처음 AC를 읽는 독자에게는 이 구별이 특히 중요합니다.
또 ‘천사들은말과이름에서완전히떠나영적이고천적인것을지각한다’는 말을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사람 이름과 사건을 무시해야 한다는 지침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자연계에서 문자로 주어진 말씀을 읽습니다. 천사의 지각 방식과 인간의 말씀 읽기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AC.64가 보여 주는 놀라운 점은 우리가 자연계에서 같은 말씀을 읽는 동안 그 말씀에는 천사들이 지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뜻도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인간과 천국을 잇는 방식으로 주어져 있다는 더 큰 주제의 입구가 여기서 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AC.64는 ‘성경이야기를이제역사로읽지말고상징으로만읽으라’는 선언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훨씬 깊습니다. 말씀에는 인간이 문자만 보아서는 알 수 없는 속뜻이 있으며, 그 속뜻이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천사들은 바로 그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합니다. 인간에게는 아담, 노아, 아브라함이라는 이름과 이야기가 보이지만, 천사에게는 그 이름들이 의미하는 교회와 신앙에 관한 것이 지각됩니다. 자연계의 문자와 천국의 지각이 하나의 말씀 안에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속뜻’은 인간이 본문을 읽다가 자유롭게 떠올리는 영적 감상과도 구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을 읽으며 ‘나는아브라함처럼용감하게살아야겠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고, 그것이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AC가 말하는 속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AC.64에서 아브라함은 그가 표상하는 ‘구원하는신앙’과 연결됩니다. 속뜻은 독자의 주관적인 연상이나 감동이 아니라 말씀의 말과 이름들이 실제로 의미하고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에 관한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아르카나’라는 말도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 안에 우리가 문자만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수많은 아르카나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재미있는 비밀 지식을 많이 안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창1에서 밝혀진 거듭남의 질서처럼 말씀 안에 감추어져 있는 깊은 내용들을 가리킵니다. ‘아르카나’와 ‘속뜻’이 정확히 같은 말인지, 서로 어떻게 구별되는지는 현재 연결된 심화에서 따로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하나 처음 읽는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생길 질문은 ‘그렇다면AC가말하는‘말씀’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경 66권 전체와 정확히 같은 범위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중요한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theWord’라는 말을 상당히 엄밀한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문제를 잘못 설명하면 ‘어떤성경책에는주님의생명이있고다른성경책에는없다’는 식으로 지나치게 단순화할 위험이 있으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충분히 구별하여 살펴보겠습니다.
AC.64를 읽고 나면 지금까지의 창1해설도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첫째 날의 빛부터 여섯째 날의 사람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따라온 것은 단순히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에 임의로 붙인 영적 비유가 아니라, 그가 ‘말씀의속뜻’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를 설명하면서 천사들의 말씀 지각을 제시합니다. 천사들은 인간이 보는 문자와 이름에 머무르지 않고 그 말과 이름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설명의 출발점과 돌아갈 곳은 여전히 말씀입니다. AC를 많이 읽을수록 성경의 문자가 시시해지고 AC의 설명만 중요해지는 방향으로 간다면 오히려 순서가 뒤집힌 것입니다. AC.64가 말하는 아르카나는 말씀 밖에 있는 비밀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아르카나이고, 속뜻 역시 말씀의 속뜻입니다. 따라서 AC의 역할은 말씀을 대신하는 데 있지 않고, 우리가 읽고 있던 바로 그 말씀 안에 얼마나 깊은 생명이 들어 있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AC.64의 첫 문장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이것이바로말씀의속뜻이며,말씀의가장참된생명입니다.’ 창세기 1장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말씀 안에서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 신앙과 사랑에 관한 영적이고 천적인 세계가 열립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 자신이 보여 준 것조차 그 헤아릴 수 없는 아르카나 가운데 ‘극히일부’라고 말합니다. AC.64는 그래서 창1해설의 결론인 동시에, 앞으로 우리가 말씀과 AC를 어떤 관계로 읽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중요한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AC.28을 처음 읽으면 한 가지 흥미로운 의문이 생깁니다. 이제 겨우 창1을 설명하는 AC.28인데, 스베덴보리는 이사야, 학개, 스가랴, 시편 등 말씀의 여러 곳을 자유롭게 오가며 그 구절들을 겉뜻이 아니라 속뜻의 근거로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차례로 해설하면서 그때그때 처음 속뜻을 알아 간 것이 아니라는 말일까요? 혹시 글을 쓰는 동안 주님께서 필요한 성경 구절을 하나씩 생각나게 하시고 그 뜻까지 알려 주셨던 것일까요?
먼저 분명히 할 것은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의 글 번호 순서와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을 알게 된 순서를 동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AC.28이 창세기 주석의 스물여덟 번째 글이라는 사실은 독자인 우리가 설명을 스물여덟 번째 단계까지 읽었다는 뜻이지, 스베덴보리가 그때 비로소 스물여덟 번째 속뜻을 발견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는 그가 이미 열렸다고 말하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순서에 따라 체계적으로 펼쳐 보이는 저술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은 말씀의 내적 의미를 자신의 학문적 연구나 추론만으로 발견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곳곳에서 그는 이전에는 누구의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던 말씀의 아르카나가 ‘주님의신적자비로’열렸다고 말하며, 자신에게 보고 들을 수 있도록 허락된 것들을 기록한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그의 자기 이해를 존중해서 말한다면, 그는 자신이 독창적인 상징 해석법을 만들어 성경에 적용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열어 보여 주신 말씀의 내적 의미를 기록한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스베덴보리가글을쓰고있으면주님께서곁에서다음에인용할성경구절을하나씩불러주셨다’는 식으로 구체적인 장면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28은 자신의 집필 과정이 그런 방식이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계시와 조명 아래 기록했다는 것과, 매 문장과 인용 구절을 받아쓰기처럼 직접 전달받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주장입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그 과정을 세밀하게 재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AC.28에서 여러 예언서와 시편을 한꺼번에 인용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말씀의 속뜻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매우 중요한 이해가 있습니다. 속뜻은 창세기에만 따로 존재하는 암호 같은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서를 이룹니다. 같은 대상과 표현이 말씀 안에서 같은 영적 실재와 연결되는 상응의 질서가 있기 때문에, 창세기의 ‘물’을 설명하면서 이사야의 물, 스가랴의 물, 시편의 물을 함께 살펴볼 수 있는 것입니다.
AC.28이 바로 좋은 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물’이 여러 지식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한 뒤 사11:9, 사19:5-6, 학2:6-7, 슥14:7-8, 시69:33-34등을 차례로 인용합니다. 그리고 ‘땅’이 그릇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슥12:1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각의 구절을 독립적으로 길게 주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성경책에 등장하는 동일하거나 관련된 표현들이 하나의 영적 의미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AC를 읽는 독자에게도 중요한 독법을 알려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의 어떤 단어를 설명하면서 이사야, 예레미야, 시편, 복음서 등의 여러 구절을 인용할 때, 그것들을 단순한 ‘참고성구’정도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그 인용들을 통하여 말씀의 한 부분에서 발견되는 영적 의미가 다른 부분과도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AC를 계속 읽다 보면 하나의 표현에 대한 설명이 여러 성경책을 가로질러 점점 풍성해지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하나의 상응을 알면 말씀의 모든 구절을 기계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물은지식이다’라는 공식을 외운 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물에 무조건 같은 한 단어를 대입하면 속뜻이 자동으로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문맥과 연결되는 다른 표현들, 다루어지는 주제와 상태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상응은 사람이 임의로 만든 상징표가 아니라 말씀 전체 안에서 질서 있게 연결되는 영적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주석이아직AC.28인데어떻게다른성경의속뜻까지알고있었을까?’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겠습니다. AC의 글 번호는 스베덴보리가 속뜻을 발견해 간 시간 순서가 아닙니다. 그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주님의 신적 자비로 자신에게 열렸다고 증언하며,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에서는 그것을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순서를 따라 펼쳐 보입니다. 그리고 말씀 전체가 하나의 상응적 질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창세기의 한 표현을 설명하면서 다른 성경책의 관련 구절들을 함께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그순간주님께서정확히어떤방식으로그구절을생각나게하셨는가?’라는 질문에는 우리가 아는 것 이상으로 답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모든 내적 의미의 근원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 돌렸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실제 집필 순간마다 주님의 조명이 어떤 심리적·의식적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우리가 재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경계를 지키는 것이 오히려 스베덴보리 자신의 증언을 더 정확하게 존중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보면 AC.28의 수많은 성경 인용은 오히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읽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우리는 창세기 한 권의 숨은 뜻만 배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의 한 표현을 통하여 말씀의 여러 부분이 어떻게 하나의 내적 질서 안에서 서로 연결되는지를 조금씩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AC.28심화1)
마음이오직문자적의미에만붙들려있는동안에는,그안에이러한것들이들어있다는사실을그누구도볼수없습니다.예를들어창세기의첫장들에서문자적의미로발견할수있는것은세상의창조와,낙원이라불리는에덴동산과,처음창조된사람으로서의아담에관한것뿐입니다.누가그밖의것을생각하겠습니까?그러나이어지는페이지들에서이내용들이지금까지결코드러난적이없는아르카나(arcana)를품고있다는사실이충분히입증될것입니다.실제로창세기1장은그속뜻으로는일반적으로인간의새로운창조,곧그의거듭남을다루며,구체적으로는태고교회(theMostAncientChurch)를다룹니다.그리고그방식은가장작은표현하나까지도이러한것들을표상하고,의미하며,그안에품고있지않은것이하나도없을정도입니다. While the mind cleaves to the literal sense alone,no one can possibly see that such things are contained within it.Thus in these first chapters of Genesis,nothing is discoverable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other than that the creation of the world is treated of,and the garden of Eden which is called paradise,and Adam as the first created man.Who supposes anything else?But it will be sufficiently established in the following pages that these matters contain arcana which have never yet been revealed;and in fact that the first chapter of Genesis in the internal sense treats in general of the new creation of man,or of his regeneration,and specifically of the most ancient church;and this in such a manner that there is not the least expression which does not represent,signify,and enfold within it these things.
해설
AC.4는 앞선 AC.1-3에서 제시한 말씀에 관한 원리를 실제 성경 본문에 처음 적용합니다. AC.1에서는 구약의 겉 글자 안에 하늘의 깊은 아르카나가 있다고 했고, AC.2에서는 말씀의 가장 작은 세부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품고 있으며 그 모든 것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에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AC.3에서는 이러한 내적인 생명과 분리된 문자를 영혼 없는 몸에 비유했습니다. 이제 AC.4에서는 독자가 실제로 읽게 될 창세기의 첫 장들을 가리키며, 앞에서 말한 원리가 바로 이 본문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처음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문자적 의미에서 독자가 실제로 무엇을 볼 수 있는지를 인정합니다. 창세기의 첫 장들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세상의 창조와 에덴동산, 그리고 처음 창조된 사람으로서의 아담이 보입니다. 그래서 ‘누가그밖의것을생각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자적 의미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오직’문자적 의미에만 붙들려 있으면 그 안에 있는 다른 것들을 볼 수 없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AC.3에서 문자와 내적인 생명의 관계를 몸과 영혼에 비유했던 것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창세기 1장에 대한 AC의 첫 번째 결정적인 해석이 제시됩니다. 창세기 1장은 속뜻으로 ‘일반적으로는인간의새로운창조,곧그의거듭남’을 다루며, ‘구체적으로는태고교회’를 다룬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빛과 어둠, 물과 궁창, 땅과 바다, 식물과 광명체, 동물과 사람, 그리고 여섯 날의 질서가 하나씩 해설되면서 이것이 구체적으로 밝혀질 것입니다. 따라서 AC.4에서는 그 세부 내용을 미리 설명하기보다, 창조 이야기가 속뜻에서는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다룬다는 큰 방향을 정확히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일반적으로’와 ‘구체적으로’의 구별도 중요합니다. 창세기 1장의 속뜻은 한 인간이 어떻게 새롭게 창조되는가, 곧 어떻게 거듭나는가를 보여 주는 동시에, 구체적으로는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라고 부르는 교회의 상태를 다룹니다. 따라서 앞으로 창세기 1장을 읽을 때 개인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 가운데 하나만 선택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AC.4에서 두 방향을 함께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태고교회가 정확히 어떤 교회이며 그 상태가 어떠했는지는 이후 해당 번호들의 설명을 따라가면서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마지막 문장은 앞으로 AC전체의 해설 방식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창세기 1장은 대략적으로만 거듭남을 상징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가장작은표현하나까지도’이러한 것들을 ‘표상하고,의미하며,그안에품고’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AC.2에서 말씀의 모든 것이 가장 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품고 있다고 한 선언이 창세기 1장에 직접 적용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후 스베덴보리가 단어 하나와 표현 하나까지 세밀하게 해설하는 것은 부수적인 관심 때문이 아니라, 말씀의 개별적인 것들에도 속뜻이 있다는 그의 말씀 이해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마지막 표현 때문에 ‘표상’과 ‘상응’이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AC.4원문에는 실제로 ‘표상하고’(represent), ‘의미하며’(signify), ‘그안에품는다’(enfold)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앞으로 AC를 읽으면 자연적인 사람과 사물과 사건이 어떻게 영적인 것을 표상하고 의미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만나게 됩니다. 그 관계를 이해하는 데 ‘표상’과 ‘상응’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 됩니다. 다만 AC.4자체는 아직 그 두 개념의 전체 교리를 설명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여기서는 그 질문을 심화로 넘기고 본문에서는 창세기 1장의 가장 작은 표현까지도 거듭남과 태고교회에 관한 것을 품고 있다는 선언에 집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AC.4는 AC서문에서 하나의 중요한 경계선입니다. 앞의 세 번호가 ‘말씀에는속뜻과생명이있다’는 원리를 세웠다면, 이제 AC.4는 그 원리를 창세기 1장에 직접 적용하여 ‘이창조이야기는속뜻으로인간의새로운창조,곧거듭남과태고교회를다룬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선언하고 끝내지 않습니다. ‘이어지는페이지들에서충분히입증될것’이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펼쳐질 창세기 1장의 세밀한 해설 자체가 바로 그 입증 과정입니다. (AC.4해설)
10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11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12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13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출17:10-13) 10And Joshua did as Moses had said to him, in fighting against Amalek; and Moses, and Aaron, and Hur went up to the top of the hill. 11And it was, when Moses lifted up his hand, that Israel prevailed; and when he let down his hand, that Amalek prevailed. 12And Moses’ hands were heavy, and they took a stone, and put it under him, and he sat upon it; and Aaron and Hur held up his hands, one on one side, and the other on the other; and it was, his hands were steady until the setting of the sun. 13And Joshua weakened Amalek and his people with the edge of the sword. (Exdo. 17:10-13)
위 본문에 대한, 지난주와 같은 주석 번역본은 설명 포함 총 19 페이지나 되어 오늘은 따로 그중에서 하나의 대지만 뽑아 본문을 준비했습니다. 이 19 페이지 원본도 제 블로그 이번 주 설교 본문 하단에 이 설교와 함께 첨부합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내려받아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속뜻(internal sense, inner meaning)은 다음과 같습니다.
싸우는 진리(fighting truth, Joshua)가 신성하신 진리(Divine truth, Moses)의 가르침을 받아 그대로 행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는, 내면의 악에서 나오는 거짓들(the falsities from interior evil, Amalek)을, 연속적인 질서, 순서로 나타나는 신성하신 진리들(Moses, Aaron, and Hur)과 함께 대항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체어리티의 선(the good of charity)안에서 말입니다.(10절)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의 신앙이 주님을 향할 때는 싸우는 진리가 이기고, 주님으로부터 떠나 자신과 세상을 향할 때는 거짓이 이겼습니다.(11절)
주님을 향해 위를 바라보는 힘이 빠지자, 함께한 진리들이 질서, 순서대로 맨 끝단에 있는 신성하신 진리로 하여금 맨 첫 단에 있는 진리와 상응하게 함으로써, 모든 면에서, 모든 방향에서 싸우는 진리가 가지고 있는 힘, 곧 그때의 힘과 파워의 세기, 강함을 유지하게 하였고, 그 결과, 내면의 악에서 나오는 거짓과 싸우는 상태가 그쳤습니다.(12절)
싸우는 진리를 가지고, 내면의 악에서 비롯되는 거짓 안에 있는 자들의 힘을 줄어들게 한 것입니다.(13절)
속뜻이 이해가 되시나요? 제가 오래전, 그때 계시록이었나? 하여튼 어떤 분이 정돈한 이런 속뜻을 처음 접했을 때, 저는 얼마나 어리둥절, 당황, 당혹스러웠는지 모릅니다. 분명히 우리말 문장이긴 한데... 제겐 마치 무슨 암호문 같았기 때문이지요. 벌써 7년 전이군요. 말씀에 속뜻이라는 게 담겼다는 말을 생전 처음 듣던 때였으니 뭐... ㅎㅎㅎ
오늘 본문이 어떻게 해서 저런 속뜻을 갖게 되는지 그 자세한 설명, 주석이 필요하신 분은 오늘 블로그에 첨부하는 주석본 파일도 함께 내려받아 정독하시기 바랍니다. 위 속뜻 역시 얼른 와닿지는 않으시겠지만, 그래도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시며, 몇 번 정독하시다 보면 조금은 이해가 되시지 싶습니다.
저는 이 속뜻 가운데서 오늘은 특별히 다음 한 가지만 뽑아 비교적 짧게 나누고 싶습니다.
아말렉이라는, 급(級)이 다른 거짓을 상대할 때는 무엇보다도 주님의 진리에 기초해서 싸워야 한다.
그럼 시작합니다.
아말렉이라는, 급이 다른 거짓을 상대할 때는 무엇보다도 주님의 진리에 기초해서 싸워야 한다.
아말렉을 가리켜 ‘급이 다른 거짓’이라 했는데, 왜 이런 예사롭지 않은 표현을 쓰는지는 지난 2주에 걸쳐 다룬 다음 내용들을 보시면 됩니다.
아말렉의 속뜻은 ‘the falsity from interior evil’, 즉 ‘내면의 악으로 말미암는 거짓’입니다.
내면의 악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이는 사람 안에 봉인된, 사람 속에 있는 것으로, 사람의 의지 안에,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의 생각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사람의 겉으로는, 그러니까 사람의 행동이나 말, 표정 같은 걸로는 도무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악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자기들의 이런 걸 몰래 감출 수 있을까 늘 고민하고 연구하는데요,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을 짐짓 영예와 공정, 정직을 추구하는 사람들인 양, 짐짓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인 양 꾸미지만, 그러나 여전히 어떻게 하면 악을 행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타인을 이용해 먹을 수 있을까, 그래야 탄로가 나지 않을 텐데 하는 것밖에는 궁리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악에 색을 입혀 마치 악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는데요, 이들의 가장 큰 즐거움은 이런 걸 깊이 생각하는 것이며, 몰래 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걸 ‘내면의 악’(interior evil)이라 하며, 이런 악 가운데 있는 자들을 ‘악한 정령(精靈)들’(evil genii)이라 합니다. 사후 세상에서 이들은 ‘외면의 악’(exterior evil) 가운데 있는, ‘영들’(spirits)이라 하는 자들하고는 완전히 격리되어 있습니다.(AC.8593:1)
이 악에서 나오는 거짓에 대해 좀 더 설명을 드리면, 이 거짓은 악한 영들의 악에서 나오는 거짓하고는 다릅니다. 이 거짓은 그 자체가 악이기 때문인데, 이 악 가운데 있는 자들은 그 공격하는 대상이 신앙의 진리들이 아닌, 신앙의 선들입니다. 이들은 타락한 애정들(depraved affections)을 가지고 액션을 취하는데요, 그걸로 이들은 선한 생각들을 왜곡시키는데, 그 방법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들은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의 양심에 진짜 감쪽같이 어떤 액션을 취해 비뚤어진 양심이 되게 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일은 타락한 애정을 호흡함으로써 일어납니다. 이들 지옥의 정령급들은 사람을 공격할 때 절대 공개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가 아주 완강하게 저항할 것 같을 때도 말이지요. 대신 가만히 보다가 그가 낙심, 거의 포기할 것 같다 싶을 때, 그때 갑자기 공격, 그를 밀어 넘어뜨려 그로 하여금 완전히 끝장나게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넘어뜨린 아말렉인데요, 그 결과 이스라엘 자손은 여호와를 등지게 되고, 그 결과 가나안 땅 여러 족속을 두려워하게 됩니다.(AC.8593:2)
지옥에 있는 사람들을 부르는 두 호칭이 있는데, 하나는, ‘영’(spirit)이고, 다른 하나는 ‘정령’(genii)입니다. 전자를 보통 ‘악령’이라 하고, 후자를 보통 ‘악마’라고 합니다. 악령들은 ‘사탄’이라고 부르는 앞쪽 지옥에 살고, 악마들은 ‘마귀’라고 부르는 뒤쪽 지옥에 삽니다. 앞쪽 지옥에 사는 사람들이 뒤쪽 지옥에 사는 사람들보다 덜 악합니다. 참고로, ‘사탄’, ‘마귀’는 어떤 우두머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모여 사는 지옥 내 지역을 말합니다. 보통 등장하는 대적들, 가령 애굽의 바로나 가나안 일곱 족속은 앞쪽 지옥을, 이 아말렉은 뒤쪽 지옥을 말합니다. 악령들은 진리를 공격하지만, 악마들은 선을 공격합니다. 이들이 지금 보고 있는 아말렉입니다. 주님은 이 두 지옥을 분리하셨습니다. 악령들의 지옥을 악마들의 지옥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악마들이 악령들의 지옥에 흘러들면, 악령들의 지옥은 초토화되기 때문입니다. 무슨 주님이 지옥을 보호하신다 하는가 하실 수 있지만,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비록 어쩔 수 없이 지옥에 갔어도 주님은 그들 역시도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이상 6/22 설교 인용)
네, 우선은 이 정도면 왜 아말렉을 가리켜 ‘급이 다르다’ 하는지 아셨을 겁니다. 그러니까 아말렉류가 사는 마귀라는 지옥은 삼층천 천적 천국에 대응하고요, 평범한(?) 악령들이 사는 사탄이라는 지옥은 이층천 영적 천국과 대응하기 때문에, 이들을 가리켜 정말 아주 지독한 자들이라 하는 것이며, 그래서 사랑이신 주님도 적어도 겉 글자 상으로는 이들을 가리켜 ‘내가 아말렉을 없이 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14절),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16절) 하시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주 아말렉 마지막 시간 때 다루겠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현실에서 이런 자들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오늘 본문에서는 알려주고 계시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의 진리에 기초해서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진리는 곧 신성하신 진리, 신적 진리(Divine truth)를 말합니다.
유튜브와 구글, 스마트폰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전 세계 뉴스를 거의 실시간으로 접하며, 각종 AI의 등장으로 설교조차 본문과 주제만 주면, AI가 그럴듯하게 몇 초 만에 만들어내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삶의 전 분야 모든 지식이 터질 듯이 넘쳐나는 이 시대이지만, 그러나 아말렉과 하는 이런 류의 전쟁은 영적 전쟁입니다. 육은 육, 영은 영입니다. 아말렉 류를 세상 지식과 지성, 진리로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더욱 말씀으로 돌아가고,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몇몇 유튜버들은 주님이 주신 통찰력으로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거짓의 흐름 그 배후를 중국으로 보고 있습니다. 미국 역시 주님 주신 통찰력으로 그렇게 보고 있고, 미국이 가진 힘, 곧 주님이 주신 힘으로 중국을 상대, 마치 천국 천사들이 지옥 악령들과 악마들을 상대하듯 그렇게 중국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지금 저 악과 거짓의 나라들이 사용하는 주요 수단들 중 거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저비용 고효율 수단인 부정선거이며, 이를 통해 전 세계 만만한 국가들 거의 모두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오고 있습니다. 1, 2차 세계 대전 이후 지옥이 전략을 바꾼 것인데요, 벌써 수십 년도 더 된 얘깁니다만, 그러나 그동안 아무도 몰랐지요.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몇 년 전부터 선거 주무 부처인 중앙선관위가 발표하는 숫자들을 들여다본 몇몇 천재 재야 의인들로 인해,사전투표와 본투표 간 너무나 이상한 괴리 현상, 통계학상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현상과 패턴이 발견되었는데, 이분들은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끝까지 매진, 결국 그 전모, 곧 전국 선거구마다 자기네 후보가 얼마를 지고 있으면 얼마를 보탠다는 식의 비율로 숫자를 건드린 정황들이 모조리 드러났지요. 그리고 이 조작된 숫자를 맞추기 위해 가짜 투표지를 대량으로 투표함에 넣는 등 여러 무리한 시도들이 발각되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어느 방송이나 언론, 심지어 검찰도, 경찰도, 아니 우리 쪽인 줄 알았던 국회의원들조차 입을 꾹 다물고 모른체 하는 이상한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제보를 하고, 고소, 고발을 해도 말입니다. 중앙선관위를 보호하는 대법원, 그리고 이런 것이 공론화되어 여론 형성되는 걸 막기 위해 미리부터 각종 방송과 언론을 장악, 국민을 귀머거리 만들고 소경 되게 해 온, 뭔가 좀 더 그 뒤에 큰 손이 있음이 느껴지는 상황이 계속되고... 더더욱 부정선거로 입법부를 장악, 자유 민주주의의 맹점인 다수결 원칙을 악용, 멀쩡한 대통령과 그의 행정부의 손, 발을 예산을 동결해서 꽁꽁 묶어 끝내 계엄을 일으킬 수 밖에 없게 만들더니 계엄이 터지자 올커니 하면서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이를 역이용, 결국은 탄핵과 조기 대선, 그리고 역시 부정선거로 대통령의 자리를 탈취, 현재 나라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정말 과거엔 상상도 못했던 권모술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의 허락으로 여러 지옥들도 방문하며, 그곳 악령들과 악마들하고도 교류(?)를 가졌는데, 특히 그곳 악마들의 경우, 그 기상천외함이 얼마나 놀라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고, 주님도 그 내용들 기록하는 것을 절대 금하셨습니다. 그때가 대략 지금으로부터 250년 전이니... 그때는 경악할 악한 모략과 계략이 지금은 이렇게 드러날 정도로 세상이 악해졌나 봅니다.
이상이 오늘날 서서히, 아니 노골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현대의 아말렉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아말렉이 있고, 이렇게 거대한 아말렉이 있습니다. 이렇게 다르지만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 대응 방법은 단 하나, 오직 주님의 가르침, 그 신성하신 진리입니다. 저들의 모든 기상천외한 방법들은 모두 지옥에서, 그것도 정령급인 악마들의 지옥인 삼층 지옥, 마귀라는 데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살아있으나 이미 저들에게 잠식된, 그래서 언제든 죽으면 바로 저 가장 깊은 지옥으로 가게 될 사람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주님의 신성하신 진리(The Lord’s Divine truth)인가요? 주님으로부터 직접 나오시는 진리가 주님의 신성하신 진리입니다. 지난주 말씀드렸듯 이 진리는 여섯 단계로 되어 있는데, 그 가장 마지막 단계가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 곧 ‘말씀’(The Word)입니다. 현 성경을 이루는 66권 중 말씀은 34권으로 주님의 아르카나가 담긴 것만 말씀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아르카나가 담긴 이 34권의 성경 말씀을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그 관련 인용입니다.
참고로, 성경 66권 중 주님의 아르카나가 들어있는 것만 ‘말씀’(The Word)이며, 이는 구약은 창, 출, 레, 민, 신, 수, 삿, 삼상, 삼하, 왕상, 왕하, 시,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 합 29권, 신약은 마, 막, 눅, 요, 계 합 5권 해서 총 34권입니다. 그럼에도 나머지 신구약 32권을 성경에 포함하신 이유는 신앙생활에 유익한 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들 글은 그저 참고만 해야지 여기서 무슨 교리를 뽑아내고 하면 안 됩니다. 주님의 아르카나가 들어있지 않은, 인간의 글, 사람의 글이기 때문입니다.(6/22 설교 인용)
비록 아직은 말씀을 속뜻으로 읽는 것이 많이 낯설어도 몇 가지 원칙, 곧
첫째, 주님을 사랑하면서 말씀 읽기
둘째, 말씀 읽는 동안 주님이 내 영적 역량에 맞춰 서서히 내 영의 눈과 귀 열어주실 것을 믿고 온전히 맡기기. 마치 어린아이가 천진난만하게 부모의 인도를 따르듯
셋째, 매일 읽기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입니다. 주님 사랑이 내 삶과 일상 가운데 첫째가 되면, 이후 모든 게 거기에 맞춰 교통 정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도 중요한데, 모든 천국적인 것은 이노센스(innocence), 즉 천진난만, 순진무구, 어린아이 같음 안에 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 사람의 상태가 어린아이 상태가 아니면 어떠한 천국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17:20, 21)
말씀을 읽을 땐 나만 읽는 게 아닙니다. 내게 와있는 천사들도 내 육안을 통해 함께 읽습니다. 다만 나는 겉 글자를, 천사들은 속뜻, 곧 거기 담긴 아르카나를 읽습니다. 이때 내가 속뜻 알기를 간절히 원하면, 바로 이때가 천사들과 내가 하나 되는 때이며, 이때 천사들이 이해하는 바가 내 안에 흘러들어옵니다. 이것이 영안(靈眼)이 열리고, 영이(靈耳)가 들리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내가 원해야만’ 일어납니다. 그것이 천국이든 지옥이든, 그리고 우리 사는 이 자연계이든 말입니다.
중요한 게 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아론과 훌이 모세와 함께하듯, 우리가 주님의 신성하신 진리를 붙들 때, 그때 우리를 돕는 진리들도 함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 역시 주님의 신성하신 진리들이지만, 이들은 간접 진리입니다. 저에게는 이들이 곧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스베덴보리 역시 여느 성경의 저자들처럼 자기의 모든 경험을 주님의 명령으로 기록했지만 말입니다. 그의 저작들 중 특별히 ‘천국과 지옥’이 중요합니다. 제게는 이 책이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기 위한 일종의 주석처럼 여겨지는데요, 이 책을 정말 여러 번 읽었고, 그 번역본을 아예 통째로 타이핑, 수시 검색을 통해 아주 적절히 활용하고 있습니다. 아론과 훌이 좌우에서 모세를 보좌하듯 저에게는 이 책이 말씀의 속뜻을 든든히 보좌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그 일점일획까지도 천국과의 상응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천국에 대한, 그리고 지옥과 그 중간 상태에 대한 풍부한 지식은 아주 큰 도움이 됩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이들이 산꼭대기에 올랐듯 이 모든 것이 능력이 되려면, 일상이 체어리티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세 가지를 꼭 기억하셔서 부디 이 큰 싸움에서 이기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10325. The books of the Word are all those which have an internal sense; and those which have not an internal sense are not the Word. The books of the Word in the Old Testament are the five books of Moses, the book of Joshua, the book of Judges, the two books of Samuel, the two books of Kings, the Psalms of David, the Prophets Isaiah, Jeremiah, Lamentations, Ezekiel, Daniel, Hosea, Joel, Amos, Obadiah, Jonah, Micah, Nahum, Habakkuk, Zephaniah, Haggai, Zechariah, and Malachi; and in the New Testament the four Gospels, Matthew, Mark, Luke, and John; and Revelation.
그러므로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성경들, 곧 내적 존재인 천사들이 보았을 때, 아무 아르카나도 없는 성경들인 구약의 룻, 대상, 대하, 스, 느, 에, 욥, 잠, 전, 아 등 10권과, 신약의 행, 롬, 고전, 고후, 갈, 엡, 빌, 골, 살전, 살후, 딤전, 딤후, 딛, 몬, 히, 약, 벧전, 벧후, 요일, 요이, 요삼, 유 등 22권에서 어떤 교리를 뽑아내는 것은안전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지난 교회사의 오랜 정경화(正經化) 작업은 그만큼 인류가 주님의 신성이 깃든 말씀을 분별할 수 있는 퍼셉션(perception, 현재 천국 천사들과 주님간 커뮤니케이션 방법, 이것이 지상에도 있었던 시대를 태고교회라고 함. 아담으로 시작된 이 시대는 노아의 홍수로 마감됨)이 없어, 어떤 성경이 참된 말씀인지를 보는 영적 역량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글들이 현 성경 66권에 포함된 것은, 마치 태고교회 시절, 에녹이라는 교회가 자신들의 모호하고 흐릿해진 퍼셉션을 보완할, 그 시대에는 아직 있어서는 안 되는, ‘교리’라는 것들을 만들 때, 주님이 그것을 아예 시작도 못하도록 막지는 않으신 것과 유사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시대는, 비록 갈수록 사람들의 악과 거짓으로 퍼셉션이 희미해져 갔지만, 여전히 퍼셉션의 시대, 즉 주님이 직접 그들을 가르치는 시대, 사람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걸 주님으로 말미암은 퍼셉션으로 직접 아는 시대였지, 무슨 인간이 만든 교리, 세상으로 말미암은 걸로 공부하여 아는, 학습하여 아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만든 걸 후대가 사용하도록 따로 보관하셨습니다. 퍼셉션이 사라진 인류, 즉 홍수 후 인류는 주님의 퍼셉션으로 살았던 홍수 전 인류와 달리 주님을 교리로 배워 알아야 하는 신 인류였고, 그래서 이들 후대를 위해 폐기 대신 따로 보관하셨는데요, 이것이 창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에 담긴 아르카나입니다.
천사들은 내적(內的) 존재여서 오직 내적인 것만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는 자연적 존재여서 자연계에 있는 것들만 볼 수 있는 것과 같지요. 이는 주님이 정하신 많은 원칙들 중 하나인데요, 그럼에도 가끔 천사들을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육의 눈으로 본 게 아니고, 영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며, 그것은 오직 주님의 허락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이 자연계의 사물을 보는 것 역시 사람의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천사들이 읽을 수 있는 성경은 오직 속뜻이 있는 성경, 곧 ‘말씀’ 뿐이라는 걸 상기시켜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천사들이 우리를 통해 가령, 룻기나 역대서, 사도행전이나 로마서 같은, 그 안에 속뜻, 곧 내적 의미가 없는 글들, 아르카나가 담기지 않은 글들을 읽을 땐, 그때는 그들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출애굽기나 마태복음, 계시록 등 주님의 신성이 담긴 말씀들을 읽을 땐, 그때는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기 담긴 주님의 무궁하신신성을 접하며, 온몸으로 감동, 감격합니다. 이런 사실은 매우 놀랍지만, 그러나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