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76

그의 생명은 그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됩니다. (7) His life is described by the breathing into him of the breath of lives (verse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7)

 

해설

AC.76은 창2:7의 개요입니다. AC.73에서 스베덴보리는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된 다음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가 되는 것을 창2에서 다룬다고 했고, AC.74에서는 그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했습니다. AC.75에서는 그의 기억지식과 이성이 안개에 의해 적셔지는 땅의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6에서는 그 사람의 생명이 무엇으로 묘사되는지를 밝힙니다. 그것은 창2:7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입니다.

 

여기서 그의 생명에서 는 앞에서 계속 다루고 있는 천적 인간입니다. 따라서 AC.76은 일반적인 생물학적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번호가 아닙니다. 2:7의 문자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사람이 생령이 되는 장면이 나오지만, 스베덴보리는 지금 창2:1-17의 속뜻을 개괄하면서 그 말씀으로 천적 인간의 생명이 묘사된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 한 문장에서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의 속뜻 전체를 미리 풀어서는 안 됩니다. ‘이 무엇을 뜻하는지, 에 불어넣는다고 하는지, ‘생명의 은 무엇이며 생령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는 창2:7의 상세한 해설을 따라가며 확인해야 합니다. AC.76은 아직 그러한 세부 의미를 설명하지 않고, 천적 인간의 생명이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된다는 큰 연결만 제시합니다.

 

또한 생명의 을 곧바로 성령과 동일시하는 것도 이 단계에서는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에서 숨과 호흡과 영이 서로 관련되는 경우가 있지만, AC.76은 그러한 관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Potts 영어의 the breath of lives에서 lives가 복수형이라는 사실만 가지고 여러 종류나 단계의 생명을 뜻한다고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원문의 세부 표현은 기억해 둘 수 있지만, 그 의미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기다려야 합니다.

 

바로 앞의 AC.75와 비교하면 개요의 진행도 보입니다. AC.75에서는 천적 인간의 기억지식과 이성을 말했고, AC.76에서는 그의 생명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순서만으로 기억지식과 이성은 낮은 것이고 생명은 높은 것이라는 위계를 만들거나, 기억지식과 이성에는 생명이 없고 별도로 생명이 주어져야 한다는 체계를 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창2:1-17의 여러 절이 천적 인간의 무엇을 묘사하는지를 한 항목씩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행 해설에서는 불어넣으심이라는 표현을 근거로 생명이 인간 자신에게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주어진다고 설명하고, 천적 인간은 자기에게 있는 사랑과 지혜와 생명이 자기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가장 내적으로 인정하는 인간이라고까지 나아갑니다. 이러한 주제는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매우 중요해집니다. 그러나 AC.76 자체가 여기서 그 교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개요에서는 말씀에서 천적 인간의 생명이 무엇으로 묘사되는지를 정확히 확인하고 멈추는 편이 좋습니다.

 

같은 이유로 proprium의 문제도 아직 끌어오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천적 인간의 생명과 proprium이 이후 깊이 연결되더라도 AC.76에는 proprium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지금 단계에서 후대의 설명을 앞당기면 오히려 독자가 창2의 실제 전개를 따라가면서 그 관계를 발견할 기회를 잃게 됩니다.

 

따라서 AC.76의 역할은 매우 단순합니다. 2:7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는 것은 속뜻에서 지금 다루고 있는 천적 인간의 생명을 묘사합니다. 그 생명이 정확히 무엇인지, ‘생명의 의 각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직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AC.76은 그것을 미리 완성하는 번호가 아니라, 뒤에서 자세히 풀어 갈 창2:7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먼저 보여 주는 개요입니다. (AC.76 해설)

 

 

 

AC.77, 창2:1-17 개요, ‘에덴동산의 지성, 퍼셉션, 사랑과 신앙’ (8-9절)

AC.77그다음 그의 지성은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그 안에서 보기에 좋은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생명나무는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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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5, 창2:1-17 개요, ‘안개로 적셔지는 땅의 관목과 초목, 기억지식과 이성’ (5-6절)

AC.75그의 기억지식과 이성은 안개에 의해 적셔지는 땅에서 난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됩니다. (5-6절) His knowledge and his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 are described by the shrub and the herb out of the 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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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5

그의 기억지식과 이성은 안개에 의해 적셔지는 땅에서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됩니다. (5-6) His knowledge and his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 are described by the shrub and the herb out of the ground watered by the mist (verses 56).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지면을 적셨더라 (5, 6)

 

해설

AC.75는 창2:5-6의 개요입니다. AC.73에서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된 다음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가 된다고 했고, AC.74에서는 그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5에서는 그 사람의 기억지식과 이성이 무엇으로 묘사되는지를 간략하게 밝힙니다. 그것은 안개에 의해 적셔지는 땅에서 관목과 초목입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천적 인간에게도 기억지식과 이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천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사람이 기억지식이나 이성을 잃거나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AC.75는 오히려 그의 기억지식과 이성을 분명히 언급합니다. 다만 이 번호에서는 그것들이 천적 인간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능하는지까지 설명하지 않고, 2:5-6의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된다고만 개괄합니다.

 

scientificum을 단순히 일반적인 지식으로 옮기기보다 기억지식으로 옮기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이 말은 사람이 배우고 경험하여 기억에 받아들인 지식의 층위와 관련됩니다. ‘rationale이성입니다. 따라서 AC.75는 천적 인간에게 기억지식과 이성이 없어진다고 하지 않고, 그것들이 창2:5-6의 특정한 자연적 표상들을 통해 묘사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관목은 기억지식이고 초목은 이성이라고 하나씩 고정하여 대응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AC.75의 문장은 두 가지를 함께 묶어 말합니다. ‘그의 기억지식과 이성은 안개에 의해 적셔지는 땅에서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됩니다.따라서 이 개요 단계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제시한 묶음 그대로 받아들이고, 관목과 초목 각각의 의미와 관계는 실제 본문 해설에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기다리는 편이 안전합니다.

 

현행 해설에서는 관목과 초목이 나무보다 낮게 자라므로 천적 인간에게 기억지식과 이성이 주인이 아니라 섬기는 이며, 삶을 지탱하고 섬기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합니다. 자연 이미지로서는 아름다운 설명이지만 AC.75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특히 자연물의 외형적 특징을 보고 그 상응을 추론하여 확정하는 방식은 조심해야 합니다. 상응은 단순히 나무는 높고 관목은 낮으므로 높은 것은 중심이고 낮은 것은 섬김과 같은 방식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안개에 대해서도 같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현행 해설은 안개가 비처럼 위에서 내리지 않고 땅에서 올라온다는 점을 근거로, 이것을 주님으로부터 오는 직접적인 계시나 교훈이 아니라 내적으로 스며드는 생명의 영향이라고 해석하고, 천적 인간에게는 생명이 안에서 밖으로 부드럽게 흘러간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AC.75 자체는 아직 안개의 속뜻을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기억지식과 이성이 안개에 의해 적셔지는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된다는 연결만 제시됩니다.

 

따라서 이 번호에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인식 방법을 완성된 체계로 대비시키는 것도 조금 기다리는 편이 좋습니다. 현행 해설은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가 먼저이고 기억지식과 이성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지만, 천적 인간에게는 선이 먼저이므로 기억지식과 이성이 그 선을 표현하는 도구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앞으로 매우 중요한 주제가 되지만, AC.75 한 문장이 그것을 모두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요에서는 앞으로 설명될 요소들을 먼저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렇다고 AC.75가 아무 내용도 주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사실 하나를 미리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의 상태를 설명하면서도 스베덴보리는 기억지식과 이성을 제거하지 않습니다. 2가 사랑이나 천적 상태를 다룬다고 해서 기억지식과 이성이 무가치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이 어떤 질서 안에 놓이며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앞으로의 설명을 통해 밝혀져야 하지만, 적어도 천적 인간에게도 기억지식과 이성이 있다는 사실은 이 개요에서 이미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75에서는 서둘러 천적 인간의 인식 구조를 완성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먼저 제시한 그림을 그대로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천적 인간에게 기억지식과 이성이 있으며, 그것들은 창2:5-6에서 안개에 의해 적셔지는 땅의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됩니다. 왜 관목과 초목인지, 안개가 무엇을 뜻하는지, 기억지식과 이성이 천적 인간 안에서 어떠한 질서에 놓이는지는 실제 본문 해설이 시작될 때 하나씩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AC.75 해설)

 

 

 

AC.76, 창2:1-17 개요, ‘그의 생명은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된다’ (7절)

AC.76그의 생명은 그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됩니다. (7절) His life is described by the breathing into him of the breath of lives (verse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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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4,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2-3절)

AC.74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 (2-3절)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on which the Lord rests (verses 2–3).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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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4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 (2-3)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on which the Lord rests (verses 23).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 3)

 

해설

AC.74는 바로 앞의 AC.73을 이어받습니다. AC.73에서 스베덴보리는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된 다음,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가 되며 창2에서는 바로 이것을 다룬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4에서는 그 천적 인간을 창2:2-3일곱째 과 연결하여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천적 인간은 일곱째 이라는 말은 천적 인간이 문자 그대로 어떤 하루라는 뜻이 아닙니다. 1에서 여섯 날은 사람이 거듭나는 연속적인 상태들을 나타냈으며, 이제 그 과정에 이어지는 일곱째 날은 천적 인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창2:2-3에서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신다는 말씀도 속뜻에서는 인간의 거듭남과 연결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천적 인간이 쉰다고 하지 않고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한다는 점입니다. 현행 해설은 이것을 주님의 신적 작용이 방해받지 않고 그대로 흘러가는 상태’, ‘주님이 사람 안에서 편히 거하실 있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방향은 앞으로의 설명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겠지만, AC.74 자체는 아직 그 의미를 풀어 주지 않습니다. 이 번호에서는 우선 천적 인간과 일곱째 날, 그리고 주님의 안식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일곱째 날을 곧바로 이상 무엇을 이루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는 상태라고 정의하거나, 천적 인간에게는 삶이 이상 투쟁이 아니라 흐름이 된다고 설명하는 것도 여기서는 조금 이릅니다. 1에서 여섯째 날까지 거듭남의 과정과 싸움이 있었고, 일곱째 날이 그 뒤에 온다는 큰 흐름은 분명하지만, 왜 이 상태를 특별히 주님의 안식이라 하는지는 뒤의 설명을 따라가며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AC.74를 사후의 천국 상태와 바로 연결할 필요도 없습니다. 현행 해설은 여기서 천국을 안식의 상태로 설명하고, 천적 인간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며 사랑에서 나오는 활동이 수고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확장합니다. 그러나 AC.74의 문맥은 AC.73과 마찬가지로 사후 소생을 설명하는 부분이 아니라 창2:1-17의 속뜻을 개괄하는 부분입니다. 지금은 거듭나는 사람이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나아가는 흐름 안에서 일곱째 날을 이해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1과 창2의 연결도 여기에서 다시 분명해집니다. 1에서 여섯 날에 걸쳐 진행된 거듭남이 창2에서 전혀 다른 이야기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2:2-3의 일곱째 날은 앞의 여섯 날에 이어집니다. AC.73에서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나아간다고 한 뒤 AC.74에서 그 천적 인간을 일곱째 날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연속성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AC.74는 천적 인간의 모든 특징을 설명하는 번호가 아닙니다. 이 번호가 하는 일은 훨씬 단순합니다. 2:2-3의 일곱째 날이 속뜻에서 천적 인간을 가리키며, 바로 그 상태에서 주님께서 쉬신다는 사실을 개괄적으로 알려 주는 것입니다. 왜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인지, 주님께서 그 안에서 쉬신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뒤의 본문 해설에서 차츰 밝혀질 것입니다.

 

AC.73AC.74를 함께 읽으면 창2의 출발점이 선명해집니다.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고,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되며, 그 천적 인간이 일곱째 입니다. 그리고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 이것이 지금 스베덴보리가 독자에게 먼저 제시하는 창2:1-3의 큰 그림입니다. (AC.74 해설)

 

 

 

AC.75, 창2:1-17 개요, ‘안개로 적셔지는 땅의 관목과 초목, 기억지식과 이성’ (5-6절)

AC.75그의 기억지식과 이성은 안개에 의해 적셔지는 땅에서 난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됩니다. (5-6절) His knowledge and his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 are described by the shrub and the herb out of the 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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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3, 창2:1-17 개요, ‘죽어 있던 상태에서 영적으로, 영적 상태에서 천적으로’ (1절)

창2:1-17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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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7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hallowed it, because that in i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And there was no shrub of the field as yet in the earth, and there was no herb of the field as yet growing, because Jehovah God had not caused it to rain upon the earth. And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And he made a mist to ascend from the earth, and watered all the faces of the ground. 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ing soul.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o behold, and good for food; the tree of lives also,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10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And a river went out of Eden to water the garden, and from thence it was parted, and was into four heads.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The name of the first is Pishon; that is it which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Havilah, where there is gold.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And the gold of that land is good; there is bdellium and the onyx stone.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And the name of the second river is Gihon; the same is it that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Cush.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And the name of the third river is Hiddekel; that is it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yria; and the fourth river is Euphrates.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And Jehovah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2:1-17)

 

AC.73

사람은 죽어 있던 상태에서 영적 인간이 다음,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가 됩니다. 지금 여기에서는 바로 이것을 다룹니다. (1) When from being dead a man has become spiritual, then from spiritual he becomes celestial, as is now treated of (verse 1).

 

천지와 만물이 이루어지니라 (1)

 

해설

AC.73부터 창2:1-17의 개요가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창2:1이 무엇을 다루는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사람은 죽어 있던 상태에서 영적 인간이 다음,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가 됩니다.이 짧은 문장은 창1과 창2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죽어 있던 상태는 육체적으로 죽은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바로 앞의 AC.67-72에서 사후의 삶과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지는 일을 말했기 때문에 그렇게 오해하기 쉽지만, AC.73에서는 다시 창세기 본문의 거듭남에 관한 설명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1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나기 전의 사람을 죽은 사람이라 했고, 창조의 여섯 날을 거치면서 사람이 점차 영적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창2에서는 그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을 다룹니다.

 

따라서 AC.73은 사후에 사람이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계속 상승한다는 설명이 아닙니다. 현행 해설은 사후 역시 성장과 변화의 과정이며 땅에서 영적 삶을 얼마나 성실히 살았는가에 따라 천적 상태로 들어가는 깊이와 속도도 달라진다고 설명하지만, AC.73은 그런 주장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창1에서 시작된 인간의 거듭남이 창2에서 어떻게 더 깊은 상태로 나아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영적에서 천적으로 간다는 표현도 이 번호에서는 우선 그 순서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이 정확히 어떻게 다른지, 왜 영적 상태 다음에 천적 상태가 오는지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앞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여기서 영적 인간은 이해와 진리를 중심으로 살고 천적 인간은 의지와 사랑을 중심으로 산다는 전체 구도를 미리 충분히 전개할 필요는 없습니다. AC.73은 우선 독자에게 창2가 다룰 새로운 상태를 알려 주는 개요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창1과 창2 사이의 큰 전환은 분명합니다. 1의 여섯 날을 거치며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었고, 이제 그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일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창2는 창1과 무관한 두 번째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속뜻에서는 앞에서 진행되던 거듭남의 연속선 위에 놓여 있습니다. 1에서 이루어진 상태가 끝이 아니라, 그 위에서 더 깊은 변화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마지막에 지금 여기에서는 바로 이것을 다룹니다라고 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는 창2:1천지와 만물이 이루어지니라를 문자적인 창조의 완성만으로 읽지 않고, 속뜻에서 인간에게 일어나는 상태의 변화와 연결합니다. 다만 AC.73은 아직 천지와 만물각각의 의미나 이루어지다의 세부적인 속뜻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창2:1이 전체적으로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나아가는 일을 다룬다고 개괄할 뿐이며, 구체적인 설명은 뒤의 번호들을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이 한 문장으로 창2를 읽는 기본 방향이 정해집니다. 1에서 다룬 것은 죽어 있던 사람이 거듭남을 통하여 영적 인간이 되는 과정이었고, 2에서는 그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과정이 이어집니다. 따라서 AC.73은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단절점이라기보다, 1에서 시작된 거듭남이 한층 더 깊은 상태로 이어지는 전환점입니다. 이 구별을 붙들고 읽으면 앞으로 등장하는 일곱째 ’, ‘안식’, ‘에덴동산’, ‘생명나무등의 설명이 어떤 큰 흐름 안에 놓여 있는지를 차츰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AC.73 해설)

 

 

 

AC.74,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2-3절)

AC.74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 (2-3절)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on which the Lord rests (verses 2–3).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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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2, 창2 앞,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는가’

AC.72그러므로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말하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ell how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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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2

그러므로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말하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ell how man is raised from the dead and enters into the life of eternity.

 

해설

AC.72AC.67부터 이어진 짧은 서론을 마무리하면서, 이 장의 끝에서 다룰 내용을 한 문장으로 예고합니다. 바로 앞의 AC.71에서 스베덴보리는 다른 삶에 관한 내용들이 말씀 본문의 해설 사이에 끼어들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되므로, 그것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AC.72의 첫말 그러므로는 바로 그 설명을 받습니다. 이제 그는 그 원칙에 따라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말하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라는 표현은 중요하지만, 이 한 문장만 가지고 그 과정의 성격을 미리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행 해설에서는 죽음을 아래로 떨어지는 사건과 대조하고, 사람이 능동적으로 다른 안으로 옮겨지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원문은 단지 사람이 어떻게 raised from the dead되는지를 말하겠다고 할 뿐입니다. 특히 일으켜 세워져는 수동형이므로 인간이 능동적으로 다른 삶으로 옮겨진다는 설명은 오히려 원문의 표현과 맞지 않습니다. 그 소생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이 장 끝에 이어질 기록에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설명하도록 두는 것이 좋습니다.

 

영원한 안으로 들어간다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현행 해설은 여기서 영원은 끝없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 있는 상태이며, 사람이 자기 삶의 참된 자리로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AC.72는 아직 그런 정의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앞의 AC.70에서 스베덴보리는 이미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했고, ‘죽음은 삶의 연속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72에서는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 전환 과정이 뒤에서 설명될 것이라는 정도로 읽는 것이 충분합니다.

 

또한 장의 끝에서라는 위치 자체에 별도의 영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습니다. 현행 해설은 장의 끝을 독자가 말씀의 속뜻을 삶의 실제로 연결하는 자리라고 설명하지만, AC.71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힌 이유는 다른 삶에 관한 내용들이 말씀 본문 사이에 끼어들어 흩어지고 연결되지 않게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AC.72 장의 끝에서역시 우선 그 편집상의 설명과 연결해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AC.72에서 다시 한번 허락되었습니다라는 표현이 사용된다는 점도 눈에 띕니다. AC.67부터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을 알게 된 것과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게 된 것, 자신이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일정한 순서로 배치하는 것을 계속 주님의 신적 자비와 허락의 언어로 표현해 왔습니다. AC.72에서도 자신이 이제 사후의 소생 과정을 설명하겠다는 일을 같은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바로 앞의 AC.71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 허락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주어졌는지는 여기서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AC.72의 역할은 새로운 교리를 자세히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 번호는 하나의 예고입니다. AC.67-71에서 다른 삶에 관하여 왜 말하는지, 자신이 그것을 어떻게 경험했다고 하는지, 인간과 영계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지, 그리고 그 기록을 AC 안에 어떻게 배치할지를 설명한 뒤, 이제 실제로 다룰 첫 주제를 알려 줍니다. 그것은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안으로 들어가는가입니다.

 

이 한 문장을 지나면 곧바로 창2 본문의 속뜻에 관한 해설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약속한 내용은 이 장의 끝에 가서 실제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독자는 지금 소생의 과정을 미리 채워 넣을 필요가 없습니다. AC.72는 그 문을 열어 놓고, 자세한 설명은 약속한 자리에 남겨 둡니다. (AC.72 해설)

 

 

 

AC.73, 창2:1-17 개요, ‘죽어 있던 상태에서 영적으로, 영적 상태에서 천적으로’ (1절)

창2:1-17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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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1, 창2 앞, ‘다른 삶에 관한 내용들을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다’

AC.71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을 말씀 본문에 들어 있는 것들 사이에 끼워 넣는다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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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1

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을 말씀 본문에 들어 있는 것들 사이에 끼워 넣는다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이와 별도로 부수적으로 삽입되는 것들도 있습니다. But as these matters would be scattered and disconnected if inserted among those contained in the text of the Word, it is permitted, of the Lords Divine mercy, to append them in some order, at the beginning and end of each chapter; besides those which are introduced incidentally.

 

해설

AC.71AC.67부터 시작된 다른 삶에 관한 기록을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안에서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를 설명하는 짧은 안내문입니다. AC.7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때의 상태를 말하기 시작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들을 말씀 본문의 해설 사이에 계속 끼워 넣으면 서로 흩어지고 연결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어떤 순서대로라고 한 점입니다. 다른 삶에 관한 기록들은 그때그때 생각나는 경험을 무작위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될 수 있도록 일정한 순서 안에서 제시됩니다. 따라서 독자는 앞으로 창세기 본문의 속뜻에 관한 해설과 함께, 각 장의 처음과 끝에서 다른 삶과 영계에 관한 별도의 연속된 설명을 만나게 됩니다.

 

다만 이것을 현행 해설처럼 장의 처음은 독자의 인식을 열어 주는 자리이고, 장의 끝은 인식을 가라앉히고 확장하는 자리라고까지 설명할 근거는 AC.71에 없습니다. 또한 본문 해설의 중심부에는 철저히 말씀의 문자와 내적 의미만이 놓인다고 절대화하기도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바로 이어서 부수적으로 삽입되는 것들도 있다고 덧붙이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인 배치 원칙은 각 장의 처음과 끝이지만, 필요에 따라 다른 곳에 부수적으로 들어가는 내용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경험보다 말씀을 우위에 놓기 위해 이러한 구성을 선택했다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물론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전체가 말씀의 속뜻을 밝히는 저작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AC.71에서 그가 직접 밝힌 배치 이유는 이러한 내용들이 말씀 본문의 내용들 사이에 삽입될 경우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직접 설명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여기서 다시 등장하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허락되었습니다라는 표현도 눈에 띕니다. AC.67에서도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씀의 속뜻을 아는 것이 자신에게 허락되었다고 했고, 자신이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도 허락의 언어로 표현했습니다. AC.70에서도 여러 해 동안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1에서는 내용뿐 아니라 그것을 어떤 순서로 덧붙일 것인가에 대해서도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 허락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전달되었는지는 이 번호에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점은 별도로 물어볼 만한 중요한 질문입니다.

 

따라서 AC.71의 역할은 크지만 그 내용은 단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다른 삶에 관한 많은 내용을 기록할 것이며, 그것들이 서로 흩어지지 않고 연결되도록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서대로 배치합니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부수적으로 삽입되는 내용들도 있습니다. 이 짧은 설명을 기억하면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으면서 왜 창세기 본문의 속뜻을 따라가다가 장의 경계에서 영계와 사후의 삶에 관한 긴 기록들이 등장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 무관한 자료가 우연히 한 책 안에 섞인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처음부터 밝힌 구성 방식에 따른 것입니다. (AC.71 해설)

 

심화

1. 허락되었습니다 -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허락을 받았는가?

 

AC.71 심화 1, ‘허락되었습니다’ -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허락을 받았는가?

AC.71 심화1. ‘허락되었습니다’ -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허락을 받았는가? AC.71에서 스베덴보리는 다른 삶에 관한 내용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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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2, 창2 앞,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는가’

AC.72그러므로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말하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ell how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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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 창2 앞, ‘죽음은 삶의 연속이다’

AC.70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때 그 상태가 어떠한지를 말하고자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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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

여러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상태가 어떠한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음을 제가 있도록, 저는 육체 안에 사는 동안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과 말하고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것도 단지 하루나 동안만이 아니라 여러 동안, 거의 동안이나 세상에서처럼 그들과 말하고 교제했습니다. 그들은 육체 안에 자신들이 그랬듯이, 그리고 지금도 매우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죽은 뒤에는 살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그러한 불신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을 몹시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사실 육체의 죽음 이후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사람은 다른 안에 있게 됩니다.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As it is permitted me to disclose what for several years I have heard and seen, it shall here be told, first, how the case is with man 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or how he enters from the life of the body into the life of eternity. In order that I might know that men live after death, it has been given me to speak and be in company with many who were known to me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 and this not merely for a day or a week, but for months, and almost a year, speaking and associating with them just as in this world. They wondered exceedingly that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they were, and that very many others are, in such incredulity as to believe that they will not live after death; when in fact scarcely a day intervenes after the death of the body before they are in the other life; for death is a continuation of life.

 

해설

AC.70부터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예고한 다른 에 관한 실제 내용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AC.67에서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 삶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삶의 본성을 알아야 한다고 했고, AC.68에서는 자신이 보고 듣고 느꼈다고 증언했으며, AC.69에서는 사람이 몸을 입은 영이기 때문에 육체 안에 있으면서도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0에서는 그 다른 삶에 들어가는 첫 순간, 곧 사람이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때의 상태를 다루겠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처음 등장하는 중요한 표현이 소생될 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육체의 죽음 이후의 일을 소멸한 사람이 다시 존재하게 되는 것으로 설명하지 않고,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소생은 죽음으로 존재가 끊어졌다가 다시 만들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AC.70의 마지막 문장이 그 의미를 가장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다는 것을 자신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도 말합니다. 그는 육체 안에서 알고 지냈던 많은 사람들과 그들이 죽은 뒤에도 말하고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더욱이 그 경험은 하루나 한 주 정도에 그치지 않고 여러 달 동안, 어떤 경우에는 거의 일 년 동안 이어졌으며, 그는 그들과 이 세상에서처럼 말하고 교제했다고 합니다. AC.68에서 보았고, 들었으며, 느꼈다고 한 증언이 여기서부터 구체적인 내용으로 펼쳐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가 사후에 만난 사람들이 보인 반응도 주목할 만합니다. 그들은 육체 안에서 살 때 자신들도 죽은 뒤에 계속 살아갈 것을 믿지 않았으며, 지금도 매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몹시 이상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죽기 전에는 사후의 삶을 믿지 못했던 사람이 죽은 뒤에는 오히려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직접 경험하고, 과거의 자기 불신을 이상하게 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그들의 불신을 책망하거나 그 원인을 자세히 분석하지 않고, 그들이 보인 놀라움 자체를 전합니다.

 

이어지는 육체의 죽음 이후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사람은 다른 안에 있게 된다는 문장은 특히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 문장이 직접 말하는 것은 육체의 죽음과 다른 삶 사이에 긴 단절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거의 하루를 곧바로 영계의 하루라는 시간 단위로 해석하거나, 반대로 실제 시간이 전혀 아니라 하나의 상태만을 뜻한다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제부터 사람이 어떻게 소생되어 다른 삶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차례로 설명하려 하고 있으므로, 그 구체적인 과정은 이어지는 기록을 따라가며 확인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같은 이유로 AC.70에서 곧바로 연옥이나 영들의 세계에 관한 완성된 교리를 끌어올 필요도 없습니다. 현재 해설에는 어떤 중간 지대나 공백이 없다’, ‘연옥이나 무의식 상태를 전제하지 않는다는 설명이 있지만, AC.70 자체가 여기서 연옥을 논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번호의 직접적인 강조점은 훨씬 단순하고 강합니다. 육체가 죽은 뒤 인간의 삶은 중단되지 않으며,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는 다른 삶 안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70의 마지막 문장은 이 번호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죽음은 삶의 연속이라는 말은 죽음이 아무 변화도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간다는 분명한 변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 가운데서도 살아 있는 인간 자체가 소멸했다가 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이 번호의 중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제 그 연속성 안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다음 번호들에서 더 자세히 말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AC.70 해설)

 

심화

1.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 영계에도 시간이 있는가?

 

AC.70 심화 1,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 영계에도 시간이 있는가?

AC.70 심화1.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 영계에도 시간이 있는가? AC.70에서 스베덴보리는 육체의 죽음 이후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사람이 다른 삶 안에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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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1, 창2 앞, ‘다른 삶에 관한 내용들을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다’

AC.71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을 말씀 본문에 들어 있는 것들 사이에 끼워 넣는다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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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9, 창2 앞, ‘인간은 본래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69사람은 주님에 의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사람은 몸을 입은 영이므로 그들과 하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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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9 심화

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AC.69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에 너무 깊이 잠김으로 영들과 천사들과 말하던 길이 닫혔지만, ‘사람이 잠겨 있는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기만 하면  길은 다시 열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육체적인 것들을 물러가게 하면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일까요?

 

먼저 AC.69가 실제로 말하는 범위를 정확히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들과 말할 수 있는 상태에 들어가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금식이나 명상이나 특별한 기도법을 제시하지도 않고, 감각을 억제하거나 세상생활에서 물러나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인간이 본래 육체 안에서도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으며, 태곳적에는 실제로 그러했지만, 사람들이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에 너무 깊이 잠기면서 그 길이 닫혔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간다는 표현을 곧바로 어떤 수행 방법으로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몸 자체를 나쁜 것으로 여기거나 일상생활을 버리는 것이 그 길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AC.69에서 문제는 인간에게 육체가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에 너무 깊이 잠겨 그 밖의 것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게 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의 중심은 육체를 제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인간의 관심과 삶을 완전히 사로잡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사후의 일을 말하는 것일까요? AC.67부터의 흐름을 보면 다른 ’, 곧 육체의 삶 이후의 영적 삶이 중요한 배경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AC.69의 첫 문장은 명백히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인간이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마지막 문장을 오직 죽은 뒤에만 일어나는 일로 제한할 수도 없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육체 안에서 살아 있는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다고 바로 앞의 AC.67에서 말했습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러므로 우리도 스베덴보리와 같은 상태를 추구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AC.69에는 그런 권고가 없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어떤 일이 인간에게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과, 모든 사람이 그것을 의도적으로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현재 이 번호에서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영적 세계와 전적으로 무관한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에 대한 깊은 잠김이 그 길을 닫았다는 것까지입니다.

 

그러므로 AC.69을 읽고 우리가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어떻게 하면 나도 영들을   있을까?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나는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만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질문이 본문에 더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몸을 입은 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현재의 삶도 영적 생명과 무관한 시간이 될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세상에 속한 것만을 실재의 전부로 여기지 않는 것이 AC.69이 독자에게 먼저 열어 주는 시야입니다.

 

앞으로 AC가 진행되면 인간과 영계의 관계, 스베덴보리에게 특별히 허락된 상태, 그리고 사후에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에 관하여 더 구체적인 설명들이 이어집니다. 따라서 AC.69에서 그 모든 문제를 미리 해결하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한 가지를 분명히 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간다는 말을 영적 체험을 얻기 위한 기술이나 수행의 지침으로 읽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지금 설명하는 것은 인간이 본래 어떤 존재로 창조되었으며, 왜 태곳적에 열려 있던 길이 닫히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AC.69 심화 1)

 

 

 

AC.69, 창2 앞, ‘인간은 본래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69사람은 주님에 의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사람은 몸을 입은 영이므로 그들과 하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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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9

사람은 주님에 의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사람은 몸을 입은 영이므로 그들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에 너무 깊이 잠기게 되어, 밖의 것에는 거의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게 되었고, 그리하여 길이 닫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이 잠겨 있는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기만 하면 길은 다시 열리며, 그는 영들 가운데 있게 되고 그들과 공동의 안에 있게 됩니다. Man was so created by the Lord as to be able while living in the body to speak with spirits and angels, as in fact was done in the most ancient times; for, being a spirit clothed with a body, he is one with them. But because in process of time men so immersed themselves in corporeal and worldly things as to care almost nothing for aught besides, the way was closed. Yet as soon as the corporeal things recede in which man is immersed, the way is again opened, and he is among spirits, and in a common life with them.

 

해설

AC.69는 앞의 두 번호에서 제기된 문제를 인간의 창조 질서와 연결합니다. AC.67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 삶을 향하고 있다고 했고, AC.68에서는 자신이 영들과 천사들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사람들이 상상이라고 여길 것을 알면서도 보았고, 들었으며, 느꼈기때문에 물러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제 AC.69에서는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말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의 대답은 사람이 주님에 의해 처음부터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로 제시되는 문장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몸을 입은 이므로 영들과 하나라고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육체만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육체 안에서 살아가는 현재의 인간에게도 영적 차원이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육체를 입지 않은 영들과 전적으로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AC.69가 말하는 영들과의 관계는 인간에게 전혀 낯선 능력이 외부에서 추가되는 것으로 설명되지 않고, 인간이 어떤 존재로 창조되었는가에서 출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실제로 태곳적에는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현재 메인 해설처럼 태고교회 사람들이 자연계와 영계를 동시에 인식했으며 영적 교통이 일상적 삶이었다고 여기서부터 자세히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AC.69가 직접 말하는 것은 태곳적 사람들이 육체 안에서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었다는 데까지입니다. 그들의 내적 상태와 퍼셉션,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는 이후의 설명을 따라가면서 점차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렇다면 왜 지금은 이러한 일이 일반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요? AC.69는 그 원인을 인간이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에 너무 깊이 잠기게 에서 찾습니다. 여기서 육체와 세상 자체를 악하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이 문제 삼는 것은 사람이 그것들에 너무 깊이 잠겨 그 밖의 것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게 된 상태입니다. 인간의 관심이 감각으로 접하는 것과 세상에 속한 것에 압도되면서, 영들과 천사들과 말하던 길이 닫혔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길이 닫혔다는 표현 역시 조심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메인 해설은 길은 파괴된 것이 아니라 닫혔으므로 인간의 본성 안에 영적 교통의 가능성이 차단된 상태로 남아 있다고 설명합니다.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지만, AC.69가 직접 설명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간 표현입니다. 이 번호에서 분명한 것은 육체적인 것들에 잠김으로 길이 닫혔고, 그것들이 물러가면 다시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상의 인간론적 구조는 뒤의 설명과 함께 확인하는 편이 좋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면서도 오해하기 쉽습니다. ‘사람이 잠겨 있는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기만 하면 길은 다시 열린다고 합니다. 이것을 읽고 그렇다면 나도 육체적인 것들을 물러가게 하면 영들과 말할 있는가?라고 묻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AC.69 자체는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나 수행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육체적 감각을 억제하라거나 세상생활을 떠나라거나 영들과의 접촉을 의도적으로 추구하라는 권고도 없습니다. 이 번호는 그 길이 어떤 조건에서 닫혔고 어떤 조건에서 다시 열리는지를 설명할 뿐입니다.

 

따라서 현재 메인 해설의 마지막 부분처럼 AC.69만으로 스베덴보리가 육체적 일상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영계를 지속적으로 지각했고, 두 가지 활동을 동시에 수행했다고 구체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조금 이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의 특별한 상태가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앞으로 그의 증언을 더 읽으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붙들어야 할 핵심은 더 근본적입니다. 인간은 단순히 육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몸을 입은 이며, 그래서 영적 세계와 전적으로 무관한 존재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AC.67-69를 함께 읽으면 흐름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AC.67은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 삶을 향하고 있다고 밝히고, AC.68은 스베덴보리가 그것을 직접 경험했다고 증언하며, AC.69는 그러한 경험의 가능성을 인간이 몸을 입은 이라는 사실과 연결합니다. 동시에 인간이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에 깊이 잠김으로 그 길이 닫혔다고 설명합니다. 이로써 앞으로 이어질 영계에 관한 증언은 인간과 전혀 관계없는 낯선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육체의 삶 이후에도 어떻게 계속 살아가는가라는 문제와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AC.69 해설)

 

심화

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AC.69 심화 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AC.69 심화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AC.69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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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 창2 앞, ‘죽음은 삶의 연속이다’

AC.70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때 그 상태가 어떠한지를 말하고자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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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 창2 앞, ‘나는 보았고, 들었고, 느꼈다’

AC.68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천사들과 말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상상이라고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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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천사들과 말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모든 것이 상상이라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제가 신뢰를 얻기 위해 이런 것들을 이야기한다고 것이며, 다른 사람들은 밖의 여러 반대를 제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저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보았고, 들었으며, 느꼈기 때문입니다. I am well aware that many will say that no one can possibly speak with spirits and angels so long as he lives in the body; and many will say that it is all fancy, others that I relate such things in order to gain credence, and others will make other objections. But by all this I am not deterred, for I have seen, I have heard, I have felt.

 

해설

AC.68AC.67에서 시작된 스베덴보리의 영계에 관한 증언을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딛게 합니다. AC.67에서 그는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으며 그동안 듣고 본 것을 이제 밝히겠다고 했습니다. AC.68에서는 곧바로 그러한 주장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자신도 잘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으면서 영들과 천사들과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사람들, 모든 것이 상상이라고 할 사람들, 사람들의 신뢰를 얻으려고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할 사람들이 있을 것임을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러한 반대에 대해 논증으로 답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영들과 천사들과 대화하는 것이 철학적으로 어떻게 가능한지를 증명하려 하지도 않고, 자신의 말을 믿어야 할 이유들을 길게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그의 대답은 매우 짧습니다. ‘저는 보았고, 들었으며, 느꼈기 때문입니다.AC.68에서 스베덴보리가 내세우는 것은 이론적 가능성이 아니라 자신에게 실제로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경험의 증언입니다.

 

그렇다고 보았다’, ‘들었다’, ‘느꼈다라는 세 동사에 각각 별도의 영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보았다는 형상과 구조와 질서를 인식했다는 뜻이고, ‘들었다는 의미와 소통이 있었다는 뜻이며, ‘느꼈다는 실재로서 경험했다는 선언이라고 세분합니다. 그러나 AC.68 자체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세 표현을 함께 사용함으로써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경험을 단순한 생각이나 추측이 아니라 직접적인 경험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정도로 읽는 것이 더 충실합니다.

 

또한 이 세 가지 경험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증언이 상상이나 자기 암시일 수 없다고 논증해서도 안 됩니다. 현재 해설에는 상상이라면 질서 있게 보고 들을 수 없고, 자기 암시라면 일관된 구조와 반복 가능한 경험으로 남기 어려우며, 조작이라면 수십 년 동안 내부 정합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AC.68에서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논증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그러한 반론을 하나씩 논파하려 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경험했다고 증언하는 데 머뭅니다. 그 절제된 태도 자체를 그대로 보존하는 편이 이 단락의 힘을 더 잘 살립니다.

 

AC.68은 독자에게 스베덴보리의 증언을 무조건 믿으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보고 듣고 느꼈다고 말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번호에서 중요한 것은 독자에게 믿을 것인가, 거짓말이라고 것인가를 당장 선택하게 만드는 데 있다기보다, 앞으로 이어질 기록의 성격을 분명히 밝히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영계에 관하여 앞으로 기록할 내용들을 추측이나 철학적 사색이 아니라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하도록 허락된 것에 관한 증언으로 제시하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67AC.68은 매우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AC.67에서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다른 삶을 향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 삶의 본성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68에서는 그러한 말을 사람들이 믿기 어려워할 것이라는 사실까지 인정하면서도 그 증언을 거두지 않습니다. 독자는 바로 이 전제를 알고 이후의 기록을 읽게 됩니다.

 

그러므로 AC.68의 마지막 세 동사는 짧지만 중요합니다. ‘저는 보았고, 들었으며, 느꼈기 때문입니다.스베덴보리는 이 문장으로 모든 반론이 해결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반론을 예상하면서도 자신이 경험했다고 하는 것을 부정하거나 침묵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밝힙니다. 앞으로 그의 영계에 관한 기록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는 독자의 몫이지만,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이 그것을 어떤 성격의 기록으로 제시하고 있는지는 이 짧은 번호에서 분명해집니다. (AC.68 해설)

 

 

 

AC.69, 창2 앞, ‘인간은 본래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69사람은 주님에 의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사람은 몸을 입은 영이므로 그들과 하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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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7, 창2 앞, ‘왜 말씀의 속뜻을 알려면 다른 삶의 본성을 알아야 하는가’ (AC.6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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