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C.레1 심화

1. ‘왜 하나님께서는 동물의 희생제사를 명하셨을까?’

 

레위기 1장을 처음 읽는 현대 독자에게 가장 먼저 생기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왜 하나님께서는 굳이 동물을 죽여 제물로 드리게 하셨을까?’입니다. 소와 양과 염소의 목을 따고,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몸을 각 뜨고, 그것을 불에 태우는 장면은 오늘날 우리의 감각으로는 상당히 낯설고 심지어 잔혹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정말 이런 동물의 죽음과 피와 불을 원하셨던 것일까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제사 자체가 예배의 본질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22(창8:20)는 번제와 희생제사가 내적 예배를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소와 양과 염소와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가 각각 서로 다른 천적인 것들을 표상했으며, 크게 보아 짐승들은 체어리티의 선을, 새들은 신앙의 진리를 표상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신 것은 짐승 자체가 아니라 그 짐승들이 표상하고 있는 인간 안의 선과 진리, 사랑과 체어리티와 신앙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성경 자체에서도 반복해서 드러납니다.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말합니다(삼상15:22). 미가 역시 수많은 번제물보다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을 말씀합니다(미6:6-8). 호세아에서는 더욱 직접적으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하십니다(호6:6). 스베덴보리가 AC.922(창8:20)에서 바로 이러한 말씀들을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외적 제사는 내적 예배를 담고 있을 때만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외적인 제사 형식이 필요했을까요? 고대의 표상교회에서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자연계의 사물과 행위들을 통해 표상되었습니다. 제단과 불과 피와 물, 그리고 서로 다른 종류의 동물들은 각각 천국의 실재를 표상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의 세세한 규례도 임의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희생제사와 번제의 각 과정 안에 ‘천국의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설명합니다(AC.10057, 출29:18). 최고 의미에서는 그것들이 주님의 영화에 관한 것이며, 상대적 의미에서는 인간의 거듭남과 정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레위기의 제사는 ‘죄를 지었으니 하나님께서 화가 나셨고, 그 화를 풀기 위해 동물을 죽여 피를 보여 드려야 한다’는 구조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피는 신적 진리를 표상하고(AC.10046, 출29:16), 물로 씻는 것은 진리에 의한 정결과 관계하며, 제단의 불은 사랑을 표상합니다. 짐승의 종류들 역시 인간 안의 서로 다른 선과 진리의 애정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제사 전체는 악과 거짓으로부터 인간이 정결하게 되고, 선과 진리가 그 안에 심어지고, 마침내 그것들이 결합하여 하나의 새로운 삶을 이루는 과정을 가시적인 의식으로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가장 분명하게 정리하는 것이 AC.10143(출29:42)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희생제사와 번제가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 선과 진리의 심음, 그리고 그 둘의 결합을 의미하며, 이 전체가 거듭남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단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궁극적으로 짐승에게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에게 관한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무엇을 정결하게 하시고, 무엇을 새롭게 하시며, 어떻게 인간을 당신과 결합시키시는지를 보여 주는 표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동물의 죽음 자체가 아닙니다. 그 외적 의식이 표상하고 있던 내적 실재였습니다. 인간이 악을 버리고,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며, 체어리티의 선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참된 제사였습니다. 외적 제사가 그 내적 실재와 분리되는 순간 제사는 껍데기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그토록 강하게 제사를 책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면서도 악을 행한다면 제사의 표상과 실제 삶이 완전히 분리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소와 양과 비둘기를 제단에서 불사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레위기의 제사가 우리와 무관해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는 그 외적 표상이 가리키던 실재를 우리의 삶에서 살아야 합니다.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며, 이웃을 사랑하고, 우리의 자연적인 삶까지 주님의 질서 안으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짐승의 번제는 사라졌지만 그것이 표상하던 ‘살아 있는 예배’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1장을 읽으며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제사를 명하셨을까?’라고 묻는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피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을 통하여 표상되는 인간의 거듭남이었습니다. 제단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궁극적으로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할 일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참된 제사는 짐승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악을 버리는 것이며, 참된 번제는 인간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가 주님의 사랑 안에서 새롭게 되어 삶 전체가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SWC.레1 심화 1)

 

 

 

SW.3 심화 2, ‘번제는 정말 예수님의 대속 죽음을 의미하는가?’

SW.3 심화2. ‘번제는 정말 예수님의 대속 죽음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인이 레위기 1장의 번제를 읽으면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올립니다. 흠 없는 제물이 사람을 대신하여

bygrace.kr

 

SW.레1, ‘전부를 불살라 - 번제에 감추어진 거듭남의 아르카나’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1 심화

3. ‘내적 의미를 몰라도 어떻게 거룩한 표상을 지킬 수 있었을까?’

 

AC.31 [3]에서 스베덴보리는 유대교회에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명하신 규례를 언급합니다. 출27:20-21에는 순수한 감람유를 가져다가 등불을 켜고 회막 안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그것을 보살피도록 하는 명령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등불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유대교회의 사람들은 이러한 규례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실제로 지켰지만, 그 규례가 표상하는 천국의 내적 의미까지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이 자기가 하는 행위의 내적 의미를 알지 못하면서도 그 행위를 통하여 거룩한 것을 표상할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먼저 ‘표상’과 ‘그 표상을 행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거룩한 것을 표상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 자신도 그 거룩한 상태 안에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대교회의 제사, 절기, 성막과 성전, 제사장 직무와 의복 등은 주님과 천국과 교회에 속한 것들을 표상하도록 정해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표상의 거룩함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깊은 영적 이해를 가지고 있었느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제도와 말씀에 부여하신 표상적 질서에서 나왔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제사장이 등불의 내적 의미를 충분히 알지 못했다고 해서 등불의 표상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그 제물과 제단과 불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정하신 표상적 의미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표상의 의미는 사람의 주관적인 해석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표상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반드시 그 의미를 몰라야 했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상응과 표상의 의미를 아는 것 자체가 표상을 파괴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더 오래된 교회들에서는 자연계의 사물들이 무엇을 상응하고 표상하는지에 관한 지식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므로 ‘무지해야 표상이 가능하다’는 것이 영적 원리는 아닙니다.

 

유대교회의 특별한 점은 다른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회의 많은 사람이 내적인 것보다 외적인 것에 강하게 기울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매우 구체적인 율법과 규례를 주셨고, 그 외적 예배가 천국의 것들을 표상하도록 질서 지으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내적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정해진 규례를 수행하는 동안 그 외적 행위는 주님께서 정하신 표상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의미를 모르면서 어떻게 그렇게 철저하게 지킬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명령의 모든 깊은 의미를 알아야만 그것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여호와께서 명하신 율법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따라서 내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과 외적 명령을 준수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대인들의 무지를 그 자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그들은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오히려 더 좋은 표상 교회가 될 수 있었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내적인 것을 알지 못하고 외적인 것에만 머무는 것은 그 자체로 더 높은 영적 상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러한 인간의 상태 속에서도 당신의 질서를 보존하시고, 외적인 예배를 통하여 천국의 것들이 표상되도록 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주님의 섭리를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상태가 이상적이어야만 주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처한 상태를 아시고, 그 상태에 맞추어 당신의 질서를 보존하십니다. 유대교회의 외적 예배 역시 그런 의미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내적 이해가 충분하지 않았음에도,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신 율법과 규례를 통하여 주님과 천국에 관한 표상들이 역사 속에 계속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AC.31에서 말하는 ‘항상 타는 등불’은 무엇을 표상했을까요?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만큼만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는 ‘광명체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하고 뜻했기 때문에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명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규례가 주님께서 속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 안에서도 그렇게 하시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상의 세부적인 의미는 ‘적절한 곳에서’ 설명하겠다고 여기서 유보합니다. 그러므로 AC.31만을 가지고 ‘저녁은 반드시 이런 상태이고, 등불이 밤새 타는 것은 반드시 이런 교회사적 보존을 뜻한다’는 식으로 세부 상응을 미리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를 읽을 때에는 스베덴보리가 밝힌 만큼과 우리가 그 원리를 따라 추론한 것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심화의 질문으로 돌아가면 답은 이렇습니다. 유대교회의 사람들이 모든 규례의 내적 의미를 알아야만 그 규례가 표상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표상의 근거는 인간의 이해가 아니라 주님께서 정하신 영적 질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들이 의미를 몰랐다는 사실 자체가 표상을 가능하게 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내적인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외적 예배까지 사용하여 천국의 것들을 표상하고 보존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타는 등불’은 유대인들이 그 의미를 얼마나 잘 이해했느냐보다, 그 규례를 통하여 주님께서 무엇을 표상하도록 하셨느냐에 초점을 맞추어 읽는 것이 좋습니다. AC.31에서는 그것이 바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신앙이며, 주님께서 그것들을 속 사람 안에서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고 다시 겉 사람의 삶에까지 나타나게 하시는 질서입니다. (AC.31 심화 3)

 

 

 

AC.31, 창1:14-17, ‘해와 달과 별 : 사랑과 신앙의 밝아짐과 어두워짐’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bygrace.kr

 

AC.31 심화 2, 사60의 ‘새 교회’는 어느 교회를 말하는가?

AC.31 심화2. 사60의 ‘새 교회’는 어느 교회를 말하는가? AC.31 [2]에서 스베덴보리는 사60:1-3, 20을 인용하면서 이 말씀이 ‘주님의 강림과 이방인들의 밝아짐, 따라서 새 교회와, 특히 어둠 가운데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