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hallowed it; because that in i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2:2, 3)

 

AC.84

천적 인간은 일곱째 (seventh day)입니다. 주님께서 여섯 동안 일하셨으므로 그것을 그분의 (his work)이라 하며, 그때 모든 싸움이 그치므로 주님께서 모든 일을 마치고 쉬신다(rest from all his work) 합니다. 때문에 일곱째 날은 거룩하게 구별되었고, 안식(rest) 뜻하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하여 안식일이라 불렸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창조되고, 형성되고,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말씀 자체로부터 매우 분명합니다.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which, as the Lord has worked during the six days, is called his work”; and as all combat then ceases, the Lord is said to rest from all his work.On this account the seventh day was sanctified, and called the sabbath, from a Hebrew word meaning rest.And thus was man created, formed, and made. These things are very evident from the words.

 

해설

AC.84는 창2일곱째 이 무엇인지를 직접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첫 문장에서 아주 간결하게 천적 인간은 일곱째 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일곱째 날은 단순히 창조가 끝난 뒤 이어지는 시간상의 하루가 아니라, 속뜻에서는 거듭남을 통하여 천적 인간이 된 사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83과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사람이 여섯째 날이 되었을 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그 하나 됨 가운데 신앙이 아니라 사랑, 곧 영적인 것이 아니라 천적인 것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AC.84는 그 결과로 이루어지는 천적 상태를 일곱째 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의 차이는 단순한 시간 순서가 아니라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상태 차이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섯 날 동안 이루어진 일을 사람의 일이라고 하지 않고 그분의 ’, 곧 주님의 일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1부터 이어져 온 거듭남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다시 확인해 줍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악과 싸우며 실제로 선택하고 행동하지만, 그 사람 안에서 거듭남을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여섯 날 동안의 모든 과정은 궁극적으로 그분의 이라고 불립니다.

 

이 점은 거듭남을 인간 자신의 영적 성취로 이해하지 않게 하는 데 중요합니다. 사람이 여섯 날을 자기 힘으로 통과하여 마침내 일곱째 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일하시며 그를 죽은 상태에서 영적 인간으로, 그리고 천적 인간의 상태로 이끄십니다. 인간은 그 과정에서 자유롭게 주님의 역사에 응답하고 악과 싸우지만,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이어지는 모든 싸움이 그친다는 말은 AC.81과 직접 연결됩니다. AC.81에서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지만 언제나 승리한다고 했고, 천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지 않으며’,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때 그것들을 멸시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84에서는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인 이유를 바로 이 싸움의 그침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안식은 단순히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정적인 휴식이 아닙니다. 그 앞에는 여섯 날 동안의 주님의 일이 있고, 그 과정에는 영적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적 상태에서는 그 싸움이 그칩니다.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되면서, 악과 거짓이 이전처럼 사람 안에서 서로 맞서는 싸움을 일으키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여기서도 모든 싸움이 그친다는 말을 천적 인간에게 악과 거짓이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81은 천적 인간도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가 있다고 명시했습니다. 다만 그는 그것들을 멸시합니다. 즉 악과 거짓이 접근할 수는 있지만 그것들이 사람의 내면에서 선과 진리와 대등하게 다투며 그를 흔드는 상태가 더 이상 지배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 때문에 주님께서 모든 일을 마치고 쉬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님의 안식을 인간처럼 일을 많이 하신 뒤 피곤하여 쉬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속뜻의 초점은 주님께서 피로를 회복하신다는 데 있지 않고, 사람 안에서 이루시던 거듭남의 싸움이 안식의 상태에 이르렀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쉬신다는 표현은 사실 인간에게 일어난 변화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악과 거짓의 지배 아래 있을 때에는 주님께서 그를 거듭나게 하시는 일이 계속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천적 상태에 이르러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싸움이 그치면, 그 상태가 주님의 안식으로 묘사됩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일이 그 사람 안에서 안식의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구별되고 안식일이라 불렸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안식일은 히브리어의 , 그침이라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AC.84에서 중요한 것은 히브리어 어원 자체보다 그것이 나타내는 영적 상태입니다. 안식일이 거룩한 것은 단순히 일하지 않는 날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이루신 거듭남의 일이 싸움을 지나 안식에 이른 천적 상태를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안식일의 거룩함도 외적인 휴식 규정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외적인 안식일은 그보다 더 깊은 내적 실재를 표상합니다. 인간 안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려는 질서가 물러가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이 주된 것이 될 때, 그 사람의 내면에 안식일이 의미하는 상태가 이루어집니다.

 

다만 여기서 싸움이 그쳤다는 것을 거듭난 사람이 현실에서 더 이상 어떤 갈등이나 어려움도 겪지 않는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84가 말하는 combat은 일반적인 인생의 고난이나 심리적 갈등 전체가 아니라 거듭남의 문맥에서 악과 거짓에 맞서는 영적 싸움입니다. 따라서 일곱째 날을 이제 삶에는 아무 문제도 없는 상태로 이해하면 본문의 뜻을 벗어나게 됩니다.

 

또한 천적 인간의 안식을 인간이 자기 노력으로 도달하여 확보하는 완전무결한 상태처럼 생각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이번 번호에서 여섯 날의 일이 명시적으로 그분의 이라고 불리기 때문입니다. 안식은 인간이 자기 수행으로 획득한 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신 거듭남의 질서에서 오는 상태입니다.

 

AC.84의 마지막 문장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창조되고, 형성되고, 만들어졌습니다.스베덴보리는 비슷해 보이는 세 동사를 나란히 사용합니다. 이번 번호 자체에서는 그 차이를 상세히 설명하지 않으므로 여기서 각각에 확정적인 상응을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표현은 창1과 창2에서 다루어진 창조가 단순히 최초 인간의 육체적 제작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보여 줍니다.

 

지금까지의 문맥에서 사람이 창조되고, 형성되고, 만들어진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과정과 연결됩니다. 1에서 죽어 있던 사람은 여섯 날을 거쳐 영적 인간으로 형성되었고, 2에서는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되면서 천적 인간의 상태로 들어갑니다. 따라서 인간의 참된 창조는 그의 내적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새롭게 형성되는 것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특히 이 문장은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읽고 있는지를 압축해서 보여 줍니다. 자연계의 하늘과 땅, 빛과 광명체, 식물과 동물, 사람의 창조를 말하는 문자적 서술 안에서 그는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속뜻을 읽습니다. 그리고 그 전체 과정의 끝에서 이와 같이 사람이 창조되고, 형성되고,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AC.83AC.84를 함께 보면 여섯째 날에서 일곱째 날로 넘어가는 구조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여섯째 날에는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합니다. 일곱째 날에는 그 천적 질서가 이루어져 싸움이 그칩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이 바로 일곱째 이며, 그 상태가 주님의 안식으로 표현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안식이 거듭남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이 지향하는 상태라는 점입니다. 여섯 날 동안의 싸움과 변화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영원히 싸움 속에서만 살도록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고 진리를 퍼셉션하여 선을 행하는 것이 자유와 기쁨이 되는 질서로 이끄십니다. AC.81에서 천적 인간의 결박이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한 것도 이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안식은 수동성이 아니라 질서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더 이상 악과 거짓의 강제와 저항 속에서 선을 행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사랑과 자유에서 나오므로 그 자체가 기쁨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천적 인간의 안식은 죽은 정지가 아니라 살아 있는 평화에 가깝습니다.

 

AC.84는 또한 주님의 주님의 안식이 모두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듭남과 관계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여섯 날 동안 주님께서 일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신다는 말씀을 인간 밖에서 벌어진 하나님의 행동만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어떻게 일하시고 그 일을 어떤 상태에 이르게 하시는가로 읽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82에서 제시된 원리와도 잘 맞습니다. 거기서 교회에 관하여 말한 것은 그 교회의 각 사람에게도 말할 수 있다고 했고, 하늘과 땅 역시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에게 적용되었습니다. 이제 안식일 역시 인간 밖의 제도만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는 천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말씀의 큰 표상들이 한 사람의 거듭남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AC.84천적 인간은 일곱째 이라는 문장은 단순한 상응 하나를 알려 주는 문장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창1에서 시작된 거듭남의 운동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고,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며,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마침내 싸움이 그쳐 주님의 안식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영적 인간의 싸움을 부정적으로 평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싸움은 안식에 이르는 과정이며, AC.81에서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언제나 승리한다고까지 표현되었습니다. 양심에 따라 악과 싸우는 영적 상태는 실패한 상태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이끄시는 거듭남의 실제적인 과정입니다. 일곱째 날의 안식은 그 여섯 날의 일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합니다.

 

결국 AC.84에서 안식일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상태의 문제로 깊어집니다. 천적 인간이 일곱째 이며, 여섯 날 동안의 일은 주님의 이고, 모든 싸움이 그치기 때문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구별되어 안식일이라 불립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스베덴보리는 이와 같이 사람이 창조되고, 형성되고, 만들어졌다는 말로 마무리합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께서 이루시는 새로운 창조입니다. 여섯 날의 일과 일곱째 날의 안식은 바로 그 창조의 질서를 묘사합니다. 천적 인간은 그 안식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며, 그래서 그 자신이 일곱째 입니다. (AC.84)

 

 

 

AC.85, 창2:2-3, '주님 자신이 안식일이시며, 천적 인간의 안식은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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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3, 창2:1,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될 때,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창2:1) AC.83‘하늘과 땅과 그 모든 만상’(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은 사람이 ‘여섯째 날’(sixth day)이 되었을 때 ‘다 이루어졌다’(finished)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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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1)

 

AC.83

하늘과 땅과 모든 만상(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 사람이 여섯째 (sixth day) 되었을 이루어졌다(finished) 합니다. 그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룰 때에는 신앙이 아니라 사랑이, 다시 말해 영적인 것이 아니라 천적인 것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천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The 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 are said to be finished, when man has become the sixth day, for then faith and love make a one. When they do this, love, and not faith, or in other words the celestial principle, and not the spiritual, begins to be the principal, and this is to be a celestial man.

 

해설

AC.83은 창1의 여섯째 날에서 창2의 천적 인간으로 넘어가는 전환을 매우 간결하게 설명합니다. AC.82에서는 하늘이 속 사람, ‘이 겉 사람이며, ‘ 모든 만상은 사랑과 신앙 및 그것들에 관한 지식들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83은 왜 이 모든 것이 사람이 여섯째 이 되었을 때 이루어졌다고 하는지를 밝힙니다. 그 이유는 그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먼저 중요한 것은 이루어졌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거듭남에 더 이상 아무런 변화도 남아 있지 않은 절대적인 완성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창1에서 다루어진 영적 인간의 형성이 하나의 완성된 상태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바로 이어지는 창2에서는 그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더 깊은 변화가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여섯째 날의 완성은 끝이라기보다 다음 상태로 넘어갈 수 있는 충만한 상태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상태의 핵심이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는 입니다. 1의 거듭남 과정에서 사람은 먼저 진리를 배우고 신앙을 통하여 선으로 인도됩니다. 처음에는 무엇이 참인지 배우고, 그것을 믿으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신앙으로 받아들인 진리는 점차 삶의 선과 결합합니다. 사람이 단지 이것이 옳기 때문에 해야 한다고 아는 데 머물지 않고 실제로 그것을 사랑하고 행하게 될 때, 신앙과 사랑은 더 이상 서로 떨어진 두 가지가 아니라 하나를 이루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AC.81에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비교한 내용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영적 인간은 영적·천적인 진리와 선을 사랑으로부터라기보다는 신앙의 원리로부터인정하고 행동한다고 했습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오는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그 사랑으로부터 행동합니다. AC.83은 바로 그 전환을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룬다는 말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의 변화는 신앙을 버리고 사랑만 남기는 과정이 아닙니다. 이 점을 특히 주의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과 사랑 가운데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하나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달라지는 것은 그 둘의 질서입니다. 이전에는 신앙이 앞에서 사람을 인도했다면, 이제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신앙은 그 사랑과 하나 되어 존재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신앙이 아니라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신앙이 아니라는 말을 신앙이 중요하지 않게 되거나 필요 없어졌다는 뜻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이미 첫 문장에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룬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그대로 있지만 이제 독립적으로 앞장서는 원리가 아니라 사랑 안에서 사랑과 하나 된 신앙이 됩니다.

 

이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천적인 것이 주된 것이 된다는 다음 표현으로 다시 설명됩니다. 여기서도 영적인 것이 제거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the spiritualthe celestial의 관계는 서로 하나가 다른 하나를 없애는 관계가 아니라 무엇이 주된 것이며 무엇이 그 주된 것에 종속되어 질서를 이루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랑이 주된 것이 될 때 그 사람은 천적 인간이 됩니다.

 

따라서 AC.83에서 천적 인간을 정의하는 핵심은 단순히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그 하나 됨 가운데 사랑이 주된 것이 된 사람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강하다고 해서 곧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하나를 이루고 그 가운데 사랑이 삶을 이끄는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주된 이라는 개념도 중요합니다. 인간 안에는 사랑, 신앙, 지식, 이성, 기억지식 등 여러 가지가 함께 존재합니다. 문제는 그 가운데 무엇이 중심에서 다른 것들을 질서 있게 이끄느냐입니다. AC.78에서도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한 모든 것이 지혜에서 나오고, 그 지혜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제 AC.83은 그 질서의 중심에서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고 밝힙니다.

 

이 점에서 AC.83은 앞의 AC.77에서 생명나무가 사랑을, 지식의 나무가 신앙을 의미한다고 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사랑과 신앙은 모두 천적 인간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천적 질서에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며 신앙은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문제를 이해할 때도 단순히 신앙이 나쁘다거나 지식이 나쁘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신앙과 지식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주된 것이 되려는 데 있습니다.

 

AC.83은 또한 왜 창2가 창1의 반복이 아닌지를 보여 줍니다. 1에서 사람은 여섯째 날에 이르러 영적 인간으로 형성됩니다. 사랑과 신앙도 이미 존재합니다. 그런데 창2에서는 그 둘의 내적 질서가 더욱 깊어져 사랑이 주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창2의 천적 인간은 창1의 영적 인간과 전혀 별개의 새로운 인간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거듭나게 하신 영적 인간이 더 깊은 천적 질서로 들어간 상태입니다.

 

여기서 되기 시작한다는 표현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고만 하지 않고 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사이의 전환적 성격을 잘 보여 줍니다. 여섯째 날에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면서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하고, 이어지는 일곱째 날에서 천적 인간의 상태가 본격적으로 펼쳐집니다.

 

따라서 거듭남을 너무 딱딱한 단계표로 나누는 것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느 순간까지는 완전히 영적 인간이었다가 다음 순간 갑자기 완전히 다른 천적 인간으로 바뀐다는 식보다는, 신앙과 사랑이 결합되고 그 질서가 변화하면서 사랑이 주된 것이 되어 가는 과정으로 읽는 것이 AC.83의 표현에 더 잘 맞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실제 신앙생활을 돌아보는 데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말씀이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에’, ‘이것이 주님의 뜻이기 때문에순종하는 일이 많습니다. 때로는 마음이 따라오지 않더라도 진리를 붙들고 행동합니다. 이것은 결코 낮게 평가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적 인간의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과정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거듭남을 계속 이루어 가시면, 이전에는 의무와 양심으로 행하던 선을 점차 사랑하게 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하는 으로 깊어지는 것입니다. 이때 진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가 사랑과 하나가 되어 삶 자체가 됩니다. AC.83이 말하는 신앙과 사랑의 하나 됨을 우리의 경험에 적용한다면 이런 방향에서 조심스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의무감으로 하는 신앙은 가치가 없고 자발적인 사랑만 참된 것이다라는 식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영적 인간의 신앙과 양심도 주님께서 거듭남 가운데 형성하시는 귀중한 것입니다. AC.81에서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으나 승리한다고 했습니다. 진리를 붙들고 양심에 따라 악과 싸우는 과정이 있기 때문에 더 깊은 사랑의 질서로 인도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의 차이를 우열만으로 보는 것보다 주도 원리의 차이로 보는 것이 이번 번호에서는 특히 중요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주도적인 위치에서 사람을 선으로 인도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신앙이 그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둘 다 주님의 거듭남의 질서 안에 있지만 그 내적 형태가 다릅니다.

 

AC.83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룬다는 말로 신앙과 삶의 관계도 생각하게 합니다. 신앙이 머리 안의 교리적 동의로만 남고 실제 사랑과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아직 하나를 이룬 상태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사랑이라고 주장하면서 진리를 떠나는 것도 AC.83의 하나 됨과 다릅니다. 여기서 하나가 되는 것은 바로 신앙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될 수 없다는 더 넓은 가르침과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다만 AC.83의 직접적인 문맥은 일반적인 신앙과 체어리티 교리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신앙과 사랑의 질서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그보다 더 넓은 교리 전체를 이번 번호에 모두 끌어올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룬다는 것을 두 개의 독립적인 실체가 나중에 기계적으로 합쳐진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참된 신앙은 본래 삶을 향하고, 참된 사랑은 진리와 함께합니다. 거듭남 가운데 주님께서는 사람이 받아들인 진리가 선의 삶과 결합되도록 이끄십니다. 그 결합이 깊어질수록 사람이 아는 것과 원하는 것, 믿는 것과 살아가는 것 사이의 분열도 줄어듭니다.

 

바로 이 점에서 여섯째 날의 이루어짐이 이해됩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형성되고 사랑과 신앙 및 그것들에 관한 지식들이 갖추어진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이 서로 하나를 이루게 됩니다. 인간 안의 영적 질서가 하나의 완성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완성은 곧 새로운 시작입니다.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하면서 천적 인간의 상태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안식과 일곱째 날은 바로 그 상태를 더 깊이 보여 줄 것입니다. 따라서 창2:1 이루어지니라는 말씀은 창1의 끝을 알리는 동시에 창2의 천적 상태로 들어가는 문턱에 서 있습니다.

 

AC.82AC.83을 함께 읽으면 창2:1의 속뜻이 상당히 분명해집니다. ‘하늘은 속 사람이고 은 겉 사람이며, ‘ 모든 만상은 사랑과 신앙 및 그것들에 관한 지식들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사람이 여섯째 날이 되어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 됨 가운데 이제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AC.83의 핵심은 단순히 사랑이 신앙보다 중요하다는 문장으로 축약하면 오히려 놓치는 것이 생깁니다. 더 정확한 표현은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하나 가운데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입니다. 신앙은 제거되지 않고 사랑 안에서 자신의 참된 자리를 얻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넘어가는 전환입니다.

 

결국 AC.83은 천적 인간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매우 명료하게 보여 줍니다. 신앙만으로 천적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니고, 신앙을 버리고 사랑만 남김으로 천적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거듭남 가운데 신앙과 사랑을 하나 되게 하시고, 그 가운데 사랑이 주된 것이 되게 하실 때 영적인 질서가 천적인 질서로 깊어집니다. 이것이 창2에서 말하는 천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AC.83)

 

 

 

AC.84, 창2:2-3,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모든 싸움이 그친 안식의 상태다’ (AC.84-88)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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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2, 창2:1, ‘하늘은 속 사람, 땅은 겉 사람 - 한 사람이 곧 교회여야 한다’ (AC.82-8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창2:1) AC.82이 말씀은 이제 사람이 ‘여섯째 날’(sixth day)이 될 만큼 영적으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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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1)

 

AC.82

말씀은 이제 사람이 여섯째 (sixth day) 만큼 영적으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늘(heaven) 그의 사람이고, (earth) 그의 사람이며, 그것들의 만상(the army of them) 사랑과 신앙 그것들에 관한 지식들인데, 이것들은 앞에서 광명체들과 별들로 의미되었습니다. 사람이 하늘(heaven)이라 불리고 사람이 (earth)이라 불린다는 것은 장에서 이미 인용한 말씀의 구절들로부터 분명하며, 여기에 이사야의 다음 말씀을 덧붙일 있습니다. By these words is meant that man is now rendered so far spiritual as to have become the sixth day”; heaven is his internal man, and earth his external; the army of them are love, faith, and the knowledges thereof, which were previously signified by the great luminaries and the stars. That the internal man is called heaven, and the external earth, is evident from the passages of the Word already cited in the preceding chapter, to which may be added the following from Isaiah:

 

12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 13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가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13:12, 13) I will make a man more rare than solid gold, even a man than the precious gold of Ophir; therefore I will smite the heavens with terror, and the earth shall be shaken out of its place (Isa. 13:1213).

 

13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 16내가 말을 입에 두고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백성이라 말하기 위함이니라 (51:13, 16) Thou forgettest Jehovah thy maker, that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nd layeth the foundations of the earth; but I will put my words in thy mouth, and I will hide thee in the shadow of my hand, that I may stretch out the heaven, and lay the foundation of the earth (Isa. 51:13, 16).

 

말씀들로부터 하늘(heaven) (earth) 모두 사람에 대하여 서술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비록 말씀들이 주로 태고교회를 가리키지만, 말씀의 내적인 것들은 교회에 관하여 말한 것은 무엇이든 교회의 사람에게도 말할 있는 그러한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신이 교회가 아니면 결코 교회의 일부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의 성전이 아닌 사람은 성전이 의미하는 , 교회와 천국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태고교회가 단수로 사람(man)이라 불립니다. From these words it is evident that both heaven and earth are predicated of man; for although they refer primarily to the most ancient church, yet the interiors of the Word are of such a nature that whatever is said of the church may also be said of every individual member of it, who, unless he were a church, could not possibly be a part of the church, just as he who is not a temple of the Lord cannot be what is signified by the temple, namely, the church and heaven. It is for this reason that the most ancient church is called man, in the singular number.

 

해설

AC.82부터 창2 본문의 상세 해설이 시작됩니다. 앞의 AC.73-81이 창2:1-17 전체의 개요였다면, 이제 스베덴보리는 창2:1천지와 만물이 이루어지니라를 구체적으로 풀이합니다. 첫 문장에서 그는 이 말씀이 사람이 이제 여섯째 이 될 만큼 영적으로 되었다는 뜻이라고 밝힙니다. 그리고 하늘은 그의 속 사람, ‘은 그의 겉 사람, ‘그것들의 만상은 사랑과 신앙 및 그것들에 관한 지식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여섯째 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1의 여섯 날은 자연계의 창조 순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속뜻에서는 인간의 거듭남을 묘사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여섯째 이 되었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여섯 번째 날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거듭남의 과정에서 영적 인간으로 형성된 상태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바로 앞 AC.81에서 스베덴보리가 창1죽은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을 다루었다고 한 것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따라서 AC.82는 창1과 창2 사이의 경계도 다시 확인해 줍니다. 1의 여섯째 날에 이르러 사람은 영적 인간이 되었습니다. 2에서는 그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일이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창2:1천지와 만물이 이루어지니라는 말씀은 속뜻에서 창1의 거듭남 과정이 여섯째 날의 상태에 이르렀음을 전제로 합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하늘을 사람 안에서 풀이합니다. ‘하늘은 속 사람이고 은 겉 사람입니다. 이것은 AC를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 상당히 낯선 해석일 수 있습니다. 성경의 하늘과 땅을 보통 인간 밖에 있는 우주와 자연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에서 하늘과 땅이 인간의 내적·외적 구조를 나타낼 수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 속 사람이 하늘이라고 해서 속 사람 자체가 천국이라는 단순한 공간적 등식을 세우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겉 사람이 이라고 해서 겉 사람은 낮고 악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거듭난 인간에게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모두 주님의 질서 안에 놓입니다. 중요한 것은 속 사람이 주님과 천국을 향하여 열리고, 겉 사람이 그 속 사람과 질서 있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의 만상은 사랑과 신앙 및 그것들에 관한 지식들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들이 앞에서 광명체들과 별들로 의미되었다고 덧붙입니다. 이것은 창1의 상세 해설을 다시 연결하는 표현입니다. 창조 이야기에서 하늘의 광명체와 별들이 단순한 천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는 사람 안에 형성되는 사랑과 신앙 및 그에 속한 것들을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2:1천지와 만물이 이루어지니라는 말씀은 속뜻에서 한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 및 그에 관한 지식들이 하나의 질서 안에 형성된 상태를 묘사합니다. 자연계 창조의 완성이 인간 안에서는 거듭남의 한 단계가 완성되는 것으로 읽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AC.82에서 더욱 중요한 부분은 그다음에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왜 하늘 = 사람’, ‘ = 사람이라고 읽을 수 있는지를 말씀 자체로 확증하기 위해 이사야의 두 본문을 인용합니다. 13:12-13과 사51:13, 16입니다. 이 인용의 목적은 단순히 하늘이라는 단어가 성경 다른 곳에도 나온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이 사람과 교회의 내적 상태를 가리키는 방식으로 말씀에서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13에서는 사람이 순금보다 희귀하게 되고 하늘이 진동하며 땅이 그 자리에서 흔들리는 것이 함께 말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말씀을 단순히 물리적 우주의 격변으로만 읽지 않고 인간과 교회의 내적·외적 상태의 변화와 연결합니다. 51에서도 여호와께서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신다는 말씀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두시는 것과 함께 나타납니다. 이것이 하늘을 사람에게 적용하여 읽을 수 있는 성경적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AC.82의 가장 중요한 해석 원리는 이 두 인용 뒤에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들이 주로 태고교회를 가리키지만, 말씀의 내적인 것들은 교회에 관하여 말한 것은 무엇이든 그 교회의 각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본성을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번 두 이사야 구절을 설명하기 위한 부연이 아니라 AC 전체의 성경 해석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즉 말씀에서 교회가 다루어질 때 그것은 거대한 종교 집단이나 역사적 제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이루는 한 사람 안에서도 같은 영적 질서가 존재해야 합니다. 교회 전체에 관하여 말하는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 타락과 회복의 문제는 한 사람의 내적 생명에도 적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매우 강하게 표현합니다. ‘ 자신이 교회가 아니면 결코 교회의 일부가 없기 때문입니다.이것은 교회론을 외적인 소속에서 내적인 상태로 옮겨 놓는 중요한 문장입니다. 어떤 사람이 외적으로 교회 명부에 속해 있다는 사실만으로 말씀에서 말하는 의미의 교회의 일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 자신 안에 교회를 이루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외적인 교회 공동체가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교회 공동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동체를 실제로 교회가 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더 깊이 보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들로 이루어지며, 각각의 사람 안에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의 질서가 없다면 외적인 조직만으로는 말씀에서 의미하는 교회의 본질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이어지는 성전의 비유가 이 원리를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주님의 성전이 아닌 사람은 성전이 의미하는 , 교회와 천국이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건물로서의 성전과 사람 안의 영적 실재가 연결됩니다. 성전이 말씀에서 교회와 천국을 의미한다면, 그 교회와 천국의 질서가 한 사람 안에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 안에 천국이 있다는 말을 막연하게 낭만적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AC.82의 문맥에서는 매우 구체적입니다. 사람의 속 사람은 하늘’, 겉 사람은 으로 묘사되고, 그 안에 사랑과 신앙 및 그것들에 관한 지식들이 질서를 이루어야 합니다. 즉 인간이 하나의 작은 교회이며 성전이라는 말은 그의 내적·외적 삶 전체가 주님의 질서 안에 놓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가 단수로 사람이라 불린다고 설명합니다. 태고교회라는 하나의 교회와 그 교회를 이루는 한 사람 사이에 상응하는 구조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전체에 있는 것이 각 사람 안에도 있으며, 각 사람이 교회의 질서를 자기 안에 받아들일 때 그들이 함께 교회를 이룹니다.

 

여기서 태고교회가 사람이라 불린다는 말을 태고교회 전체가 실제 한 개인이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라는 단수 표현은 그 교회의 내적 성격과 질서를 나타냅니다. 앞서 창1사람역시 거듭나는 인간과 교회의 상태를 묘사하는 방식으로 읽혀 왔습니다.

 

AC.82의 이 원리는 말씀의 속뜻이 왜 동시에 교회와 개인에게 적용될 수 있는지도 설명해 줍니다. 예를 들어 교회의 타락에 관한 말씀이 개인의 거듭남과 무관한 역사적 사건으로만 머물지 않고, 한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의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교회의 회복에 관한 말씀도 한 사람의 내적 회복과 연결됩니다. 말씀의 속뜻에서는 교회와 인간이 서로 분리된 두 주제가 아니라 상응하는 질서 안에 있습니다.

 

이것은 AC를 읽으면서 자주 만나게 될 교회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 고대교회, 유대교회, 기독교회 등을 다룰 때 우리는 역사적 집단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들의 영적 특성은 동시에 인간 안의 상태와도 연결됩니다. AC.82는 바로 그 적용이 가능한 이유를 직접 설명해 주는 번호입니다.

 

또한 이 원리는 거듭남이 개인적인 문제이면서 동시에 교회적인 문제라는 사실도 보여 줍니다. 교회의 갱신을 말하면서 구성원 각 사람의 거듭남을 제외할 수 없습니다. ‘ 자신이 교회가 아니면 교회의 일부가 없다는 문장은 교회의 참된 갱신이 결국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주님의 질서가 이루어지는 것과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완전히 거듭난 사람만 교회에 들어올 자격이 있다는 배타적인 의미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AC.82는 교회 회원의 자격 심사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에서 교회와 개인이 왜 서로 대응하여 서술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문장의 초점은 다른 사람을 교회인지 아닌지 판정하는 데 있지 않고, 교회라고 불리는 것이 먼저 나 자신 안에서 실제가 되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AC.82를 이렇게 읽으면 하늘의 의미도 더욱 깊어집니다. 하늘과 땅은 사람 밖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연결되고, 사랑과 신앙 및 그것들에 관한 지식들이 그 안에서 제자리를 찾을 때 인간 안에 하나의 하늘과 이 형성됩니다.

 

이 점은 창2의 천적 인간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AC.81까지는 죽은 사람,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의 차이를 설명했습니다. 이제 AC.82는 먼저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이 어떤 상태까지 형성되었는지를 다시 확인합니다. 그의 속 사람과 겉 사람, 사랑과 신앙 및 그에 관한 지식들이 형성되어 천지와 만상이 이루어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어지는 안식과 일곱째 날을 통하여 천적 인간의 상태가 본격적으로 설명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AC.82는 창2:1의 짧은 말씀을 해설하면서 동시에 세 가지 중요한 원리를 세웁니다. 여섯째 날은 거듭난 영적 인간의 상태이며, 하늘과 땅은 그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고, 교회에 관하여 말한 말씀은 그 교회를 이루는 각 사람에게도 적용됩니다. 이 세 번째 원리 때문에 이번 번호는 창2 한 절의 해설을 넘어 AC 전체를 읽는 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특히 자신이 교회가 아니면 교회의 일부가 없다는 문장을 기억해 둘 만합니다. 교회는 먼저 외부에 존재하는 조직이고 내가 거기에 가입함으로써 교회의 일부가 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말씀의 선과 진리,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이 내 안에서 실제 삶의 질서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함께 있을 때 외적인 교회도 그 내적 실재를 담는 교회가 됩니다.

 

결국 AC.82하늘과 은 먼 우주의 이야기에서 인간 자신의 내면으로 다가옵니다. 하늘은 속 사람이고 땅은 겉 사람이며, 그 만상은 사랑과 신앙 및 그것들에 관한 지식들입니다. 그리고 이 질서는 한 사람 안에서 실제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교회이기 위해서는 교회를 이루는 사람이 먼저 자기 안에서 교회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원리 때문에 말씀에서 교회에 관하여 말한 것은 동시에 그 교회의 각 사람에 관하여 말할 수 있으며, 태고교회도 단수로 사람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AC.82)

 

 

 

AC.83, 창2:1,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될 때,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창2:1) AC.83‘하늘과 땅과 그 모든 만상’(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은 사람이 ‘여섯째 날’(sixth day)이 되었을 때 ‘다 이루어졌다’(finished)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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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1, 창2:1-17 배경, '죽은 사람,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의 세 가지 차이'

AC.81이 장은 천적 인간을 다루며, 앞 장은 죽은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을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고, 영적 인간이나 죽은 사람이 무엇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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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1

장은 천적 인간을 다루며, 장은 죽은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을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고, 영적 인간이나 죽은 사람이 무엇인지조차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차이를 있도록 각각의 본성이 어떠한지를 간략히 말하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첫째, 죽은 사람은 몸과 세상에 속한 외에는 아무것도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그것을 숭배합니다. 영적 인간은 영적·천적인 진리와 선을 인정하지만, 사랑으로부터라기보다는 신앙의 원리로부터 그렇게 하며, 또한 그것을 바탕으로 행동합니다. 천적 인간은 영적·천적인 진리와 선을 믿고 퍼셉션하며, 사랑으로부터 오는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또한 사랑으로부터 행동합니다. This chapter treats of the celestial man, as the preceding one did of the spiritual, who was formed out of a dead man. But as it is unknown at this day what the celestial man is, and scarcely what the spiritual man is, or a dead man, it is permitted me briefly to state the nature of each, that the difference may be known. First, then, a dead man acknowledges nothing to be true and good but what belongs to the body and the world, and this he adores. A spiritual man acknowledges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 and good; but he does so from a principle of faith, which is likewise the ground of his actions, and not so much from love. A celestial man believes and perceives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 and good, acknowledging no other faith than that which is from love, from which also he acts.

 

[2] 둘째, 죽은 사람을 움직이는 목적은 오직 육체적·세상적 삶만을 향하며, 그는 영원한 삶이 무엇인지, 주님이 누구신지도 알지 못합니다. 안다 하더라도 믿지 않습니다. 영적 인간을 움직이는 목적은 영원한 삶을 향하며, 그로 말미암아 주님을 향합니다. 천적 인간을 움직이는 목적은 주님을 향하며, 그로 말미암아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삶을 향합니다. Second: The ends which influence a dead man regard only corporeal and worldly life, nor does he know what eternal life is, or what the Lord is; or should he know, he does not believe. The ends which influence a spiritual man regard eternal life, and thereby the Lord. The ends which influence a celestial man regard the Lord, and thereby his kingdom and eternal life.

 

[3] 셋째, 죽은 사람은 싸움 가운데 있을 거의 언제나 굴복하며, 싸움 가운데 있지 않을 때에는 악과 거짓이 그를 지배하므로 그는 종입니다. 그를 묶는 것은 외적인 결박들, 법에 대한 두려움, 생명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재산과 이익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것들 때문에 중요하게 여기는 평판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것들입니다.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지만 언제나 승리합니다. 그를 억제하는 결박들은 내적인 것이며, 양심의 결박이라 불립니다. 천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지 않으며,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그것들을 멸시하므로 정복자라 불립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결박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것처럼 보입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의 결박은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Third: A dead man when in combat almost always yields, and when not in combat, evils and falsities have dominion over him, and he is a slave. His bonds are external, such as the fear of the law, of the loss of life, of wealth, of gain, and of the reputation which he values for their sake. The spiritual man is in combat, but is always victorious; the bonds by which he is restrained are internal, and are called the bonds of conscience. The celestial man is not in combat, and when assaulted by evils and falsities, he despises them, and is therefore called a conqueror. He is apparently restrained by no bonds, but is free. His bonds, which are not apparent, are perceptions of good and truth.

 

해설

AC.81은 창1과 창2의 속뜻을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번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1죽은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을 다루었다면 창2천적 인간을 다룬다고 다시 확인합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영적 인간과 죽은 사람이 무엇인지조차 거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세 사람의 차이를 직접 설명합니다. 그 비교 기준은 세 가지입니다. 무엇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하는가, 무엇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가, 그리고 악과 거짓을 만났을 때 무엇에 의해 억제되고 어떻게 싸우는가입니다.

 

먼저 여기서 죽은 사람을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73에서도 이미 주의했던 것처럼, 이것은 창1의 거듭남 이전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는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고 생각하고 활동하지만, 속뜻에서는 아직 영적 생명에 들어오지 않은 상태이므로 죽은 사람이라고 불립니다. AC.81은 이제 그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첫 번째 차이는 사람이 무엇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하는가에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몸과 세상에 속한 것만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하며 그것을 숭배합니다. 여기서 숭배한다는 말은 반드시 종교 의식을 행한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그의 마음과 삶의 중심이 육체적·세상적인 것에 놓여 있고, 그것을 궁극적인 선과 진리처럼 여긴다는 뜻입니다.

 

영적 인간은 이와 다릅니다. 그는 영적·천적인 진리와 선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중요한 제한을 덧붙입니다. 그는 그것들을 사랑으로부터라기보다는 신앙의 원리로부터인정하고, 또한 그 신앙을 바탕으로 행동합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에게 사랑이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적 인간의 특징은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선으로 인도된다는 데 있습니다. 먼저 참된 것을 배우고 믿으며, 그것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양심을 통해 행동하는 질서가 두드러집니다.

 

천적 인간은 다시 다릅니다. 그는 영적·천적인 진리와 선을 믿고 퍼셉션합니다’. 그리고 사랑으로부터 오는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AC.77에서 나온 퍼셉션의 의미가 다시 중요해집니다.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외적인 교리나 논증을 통해서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그것을 내적으로 퍼셉션합니다.

 

특히 사랑으로부터 오는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천적 인간에게 신앙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독립적인 첫째 원리로 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출발점으로 두드러지고 그 신앙으로부터 행동하는 반면,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먼저이며 신앙은 그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래서 같은 선과 진리를 인정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내적 질서가 서로 다릅니다.

 

두 번째 차이는 목적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느냐보다 더 깊은 차원입니다. 죽은 사람을 움직이는 목적은 육체적·세상적 삶에 한정됩니다. 그는 영원한 삶과 주님을 모르거나, 설령 들어서 알고 있다 하더라도 믿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과 삶의 방향이 현세적인 것 안에 닫혀 있는 것입니다.

 

영적 인간의 목적은 영원한 삶을 향하고, ‘그로 말미암아 주님을 향합니다. 반면 천적 인간의 목적은 먼저 주님을 향하고, ‘그로 말미암아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을 향합니다. 이 순서의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영적 인간에게는 영원한 삶과 구원이 중요한 목적이 되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을 향하는 질서가 두드러집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에게는 주님 자신이 첫째 목적입니다.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삶조차 주님으로부터 이어집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이 영원한 삶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목적의 중심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내가 영원히 살기 위해 주님을 믿는다는 데 머물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삶을 향합니다. 자기 자신의 구원보다 주님이 먼저 놓이는 질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차이는 영적 싸움과 인간을 억제하는 결박에서 나타납니다. 죽은 사람은 싸움 가운데 있을 때 거의 언제나 굴복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싸움이 없을 때에는 악과 거짓이 그를 지배하므로 그는 종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싸움은 거듭남 과정에서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에 일어나는 영적 싸움의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죽은 사람을 붙들어 악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주로 외적인 결박입니다. 법이 두렵고, 생명이나 재산이나 이익을 잃는 것이 두렵고, 평판을 잃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행동을 억제합니다. 이것은 외적 질서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법과 사회적 질서는 인간 공동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만 그 사람이 악을 피하는 내적 이유가 아직 선과 진리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외적인 손실에 대한 두려움에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으며 언제나 승리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언제나를 거듭나는 사람이 현실에서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장은 죽은 사람과 영적 인간의 상태를 유형적으로 대조하는 문맥에 있습니다. 영적 인간은 실제 영적 싸움에 들어가며, 그를 악에서 붙드는 것은 외적인 두려움만이 아니라 양심의 결박이라는 내적인 것입니다.

 

양심은 영적 인간을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그는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신앙을 통해 받아들이고, 그것에 어긋나는 일을 할 때 내적으로 고통을 느낍니다. 그래서 아무도 보지 않고 법적인 처벌도 없더라도 이것은 주님 앞에서 해서는 된다는 내적 결박이 작용합니다. 외적인 결박에서 내적인 양심의 결박으로 옮겨진 것은 거듭남에서 매우 큰 변화입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에게서는 또 다른 상태가 나타납니다. 그는 싸움 가운데 있지 않다고 합니다. 악과 거짓이 공격해 올 때 그것들을 멸시하며, 그래서 정복자라고 불립니다. 이것을 천적 인간에게는 유혹이나 악의 접근 자체가 전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도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라고 합니다. 차이는 그것들이 내적인 싸움을 일으켜 그를 흔들 정도의 힘을 갖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영적 인간은 이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양심 가운데 싸우며 진리를 붙듭니다.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기 때문에 악과 거짓을 그것들과 대등한 선택지처럼 놓고 오래 씨름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악하고 거짓임을 퍼셉션하고 배척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를 단순히 싸워 이기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정복자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천적 인간의 자유에 관한 매우 중요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결박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것처럼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아무런 질서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결박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자유가 단순히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과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 줍니다. 죽은 사람은 외적으로는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악과 거짓의 종입니다. 영적 인간은 양심의 결박 가운데 악과 싸웁니다.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사랑하고 퍼셉션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이 그의 자유 자체가 됩니다. 외부에서 억지로 붙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 상태의 차이는 단순히 나쁜 사람, 좋은 사람, 아주 좋은 사람의 세 등급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명을 지배하는 중심과 질서가 서로 다릅니다. 죽은 사람은 몸과 세상을 중심으로 살며 외적 결박에 의해 억제됩니다. 영적 인간은 신앙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인정하고 양심에 의해 살아갑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며, 그것을 따르는 것이 그의 자유가 됩니다.

 

이 세 번째 비교는 창1에서 창2로 넘어가는 이유도 잘 보여 줍니다. 1의 여섯 날은 죽어 있던 사람이 거듭나 영적 인간이 되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창2에서는 그보다 더 깊은 천적 상태가 다루어집니다. 따라서 창1에서 거듭남이 끝났다고 해서 창2가 단순한 반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AC.81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 사이에 실제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보여 줌으로써 창2가 왜 별도로 필요한지를 설명합니다.

 

다만 이 세 상태를 오늘날 모든 사람에게 기계적인 세 단계표로 적용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창1과 창2의 속뜻, 그리고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성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지금 죽은 사람 단계인가, 영적 단계인가, 천적 단계인가?를 점수표처럼 판정하는 데 이 번호를 사용하는 것은 본문의 목적과 거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서 무엇이 삶의 중심이 되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지를 비추어 보는 기준으로 읽는 것이 유익합니다.

 

특히 외적 결박, 양심, 퍼셉션이라는 세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겉으로 똑같이 악을 행하지 않는 세 사람이 있어도 그 내적 이유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처벌과 손해가 두려워 악을 피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그것이 신앙의 진리에 어긋난다는 양심 때문에 피할 수 있으며, 또 다른 사람은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악 자체를 싫어할 수 있습니다. 외적 행동만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내적인 생명의 질서는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거듭남이 단순한 행동 교정이 아니라는 사실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법이 무서워 악을 억제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양심으로 악을 피하며, 더 깊게는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악을 원하지 않는 상태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인간이 자기 힘으로 올라가야 하는 영적 성취의 사다리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1부터 계속된 모든 거듭남의 주체는 주님입니다.

 

AC.81의 세 번째 비교는 AC.79-80과도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AC.79에서는 천적 인간이 동산의 모든 것을 누리면서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다고 했고, AC.80에서는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려 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퍼셉션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81에서는 바로 그 퍼셉션이 천적 인간의 보이지 않는 결박이라고 합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기 때문에 외적 강제에 의해 움직이지 않고 자유롭게 선을 행합니다.

 

이렇게 보면 천적 인간의 자유와 주님께 대한 의존은 서로 반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질서 안에 있을수록 인간은 악과 거짓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 가운데 있게 됩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살려고 하는 것이 자유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악과 거짓의 지배 아래 놓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사랑하는 상태에서는 선을 행하는 것이 강제가 아니라 자신의 기쁨과 자유가 됩니다.

 

AC.81은 또한 신앙에서 사랑으로라는 표현을 조심스럽게 이해하게 해 줍니다. 영적 인간은 신앙으로부터 행동하고,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오는 신앙으로 행동합니다. 그렇다고 영적 인간의 신앙이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거듭남의 실제적인 질서이며 주님께서 사람을 이끄시는 방식입니다. 다만 천적 상태에서는 신앙과 진리가 사랑 안에 더욱 깊이 결합되어,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는 상태가 됩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을 영적 인간보다 단순히 등급이 높은 사람이라고만 이해하는 것보다, 두 사람이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과 양심이 두드러지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과 퍼셉션이 두드러집니다. 이 차이가 창1과 창2의 차이를 이루는 중요한 배경입니다.

 

AC.81은 결국 세 가지 질문으로 세 상태를 구별합니다. ‘무엇을 선과 진리로 인정하는가?’, ‘무엇을 목적으로 살아가는가?’, ‘무엇에 의해 악에서 억제되는가?입니다. 죽은 사람은 몸과 세상을 중심으로 하며 육체적·세상적 삶을 목적으로 삼고 외적 두려움에 의해 억제됩니다. 영적 인간은 영적·천적인 선과 진리를 신앙으로 인정하고 영원한 삶을 목적으로 하며 양심의 결박 가운데 싸웁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믿고 퍼셉션하며 주님 자신을 목적으로 하고,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AC.81은 창2의 천적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일종의 기준표와 같은 번호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분류하기 위한 기준표라기보다, 거듭남이 인간의 중심을 얼마나 깊이 변화시키는지를 보여 주는 기준입니다. 몸과 세상이 중심이던 상태에서 신앙과 양심의 상태로, 그리고 마침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 자유 자체가 되는 상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2에서 다루는 천적 인간은 바로 이러한 사람입니다. (AC.81)

 

 

 

AC.80, 창2:1-17 개요, '주님으로부터 알고,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하지 말라' (16-17절)

AC.80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해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sens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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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0

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해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해서는 되며,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sensualia et scientifica) 통해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해서도 됩니다. 그렇게 하면 그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됩니다. (16-17) He is also permitted to acquire a knowledge of what is good and true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from the Lord, but he must not do so from himself and the world, nor search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 which would cause the death of his celestial nature (verses 1617).

 

16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16, 17)

 

해설

AC.80은 창2:16-17의 금령을 이해하는 핵심 원리를 개요 단계에서 제시합니다. 바로 앞 AC.79에서는 천적 인간이 에덴동산과 같은 존재이지만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며, 인간은 그 안의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80은 그 원리가 인간의 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아는 것이 금지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해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문제는 그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알려 하는 데 있습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2:16-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말씀을 지식이나 이성 자체에 대한 금지로 읽으면 스베덴보리의 뜻과 멀어집니다. 앞의 AC.75AC.78에서 이미 천적 인간에게 지식과 이성이 있으며, 이성과 기억지식도 올바른 질서 안에서는 그의 겉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지식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인간이 선과 진리를 어디로부터알고자 하느냐입니다.

 

천적 인간에게 허락된 길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해선과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AC.77에서 에덴동산의 보기에 좋은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80은 그 퍼셉션의 근원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그것은 인간 자신에게서 솟아나는 직감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퍼셉션입니다. 천적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며, 그것을 자신의 생명 안에서 누립니다.

 

반대로 금지되는 것은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선과 진리를 알려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자신세상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지혜의 근원으로 삼고, 외부 세계에서 감각으로 받아들인 것과 자기 기억에 축적된 지식을 최종적인 판단 기준으로 삼아 신적인 것들을 판단하려 할 때 본래의 천적 질서가 뒤집히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AC.80의 핵심은 이성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지식을 버리라는 것도 아니며, 세상에 관한 지식을 배우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AC.78에서 이성과 기억지식은 겉 사람에게 속하며 모두 지혜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속 사람 위에 서서 신적인 것들을 자기 기준으로 심판하려 하는 데 있습니다. 이성과 기억지식은 질서 안에서는 유용하지만,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판단하는 최고의 권위가 될 때 질서가 전도됩니다.

 

이 점에서 sensualia et scientifica’,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감각적인 것들은 인간이 육체의 감각을 통하여 접하는 가장 외적인 차원의 것들과 관련되고, ‘기억지식은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학습된 것들이 기억 속에 축적된 앎과 관련됩니다. 이것들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감각과 기억지식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가지고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하여 신적인 진리를 자기 힘으로 판정하려 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여기서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한다는 말도 오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신앙에 관하여 질문하거나 말씀의 깊은 뜻을 연구하는 것 자체를 금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 자신의 방대한 저술과 말씀 해설부터 성립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문제는 탐구 자체가 아니라 탐구의 질서입니다.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출발점이자 최종 기준으로 삼아 신적인 것들이 참인지 아닌지를 인간 자신이 판정하려는 태도가 문제입니다.

 

따라서 AC.80신앙은 무조건 믿어야 하며 이성적으로 질문해서는 된다는 반지성주의의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이성과 신앙의 대립이 아니라 질서의 문제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성과 기억지식이 그것을 이해하고 확인하며 자연적 삶에서 섬기는 것은 올바른 질서입니다. 반대로 감각과 기억지식을 최상위에 놓고 그것으로 신앙의 아르카나를 재단하면서, 감각적으로 입증되지 않거나 인간의 자연적 이성에 맞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천적 질서와 반대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79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지 말라는 말씀과도 직접 연결됩니다. 선과 진리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하는 것은 결국 지혜와 판단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는 것입니다. AC.79에서 동산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는 문제가 제시되었다면, AC.80에서는 그것이 인식의 차원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대신, ‘내가 스스로 알아내고 내가 판단한다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proprium과의 연결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자기에게서 생명과 선과 진리가 나오는 것처럼 여기려는 성향과 연결됩니다. 천적 인간의 질서에서는 선과 진리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하지만, 그 질서에서 벗어나면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려 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AC.80의 금령은 단순히 특정한 지식을 얻지 말라는 금지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선과 진리의 근원과 심판자로 세우지 말라는 보호의 명령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의 천적 본성의 죽음을 초래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닙니다. 2:17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의 속뜻에서 천적 인간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퍼셉션하며 살아가는 천적 상태가 소멸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을 읽으면서 아담과 하와가 그날 육체적으로 죽지 않았다는 문제에 곧바로 매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AC.80이 제시하는 속뜻에서는 죽음의 초점이 육체적 사망 시점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는 천적 질서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들을 알려 할 때, 그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73에서 사용된 죽어 있던 사람이라는 표현과도 구별하여 읽어야 합니다. AC.73에서는 창1의 거듭남 이전 상태에서 죽어 있던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고 다시 천적 인간이 되는 흐름을 말했습니다. AC.80에서는 이미 천적 인간이 된 사람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되는 위험을 말합니다. 두 경우 모두 단순한 육체적 죽음을 뜻하지 않지만, 문맥과 기능은 서로 다릅니다.

 

또한 AC.80은 인간이 세상을 무시해야 한다는 가르침도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해서는 된다는 말을 자연계의 경험이나 학문을 불신하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자연적 사실을 알아내는 일에서는 감각과 관찰과 이성과 기억지식이 당연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가지고 신앙의 아르카나와 신적인 선과 진리의 근원까지 인간 자신이 결정하려 하는 데 있습니다.

 

이 구별은 오늘날에도 중요합니다. 자연과학의 문제를 신앙만으로 대신 판단하는 것도 질서의 혼동일 수 있고, 반대로 자연과학이 다루는 방법만을 가지고 신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존재 여부를 최종 판정하려 하는 것도 서로 다른 차원을 혼동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80 자체가 현대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논하는 번호는 아니므로 이 문제를 지나치게 확대하기보다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이 신앙의 아르카나를 판단하는 최종적인 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본문의 원리에 머무는 것이 좋겠습니다.

 

AC.80에서 특히 아름다운 것은 이 금령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한 명령이라기보다 천적 생명을 보호하는 질서로 읽힌다는 점입니다. 주님께서는 천적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해 그것들을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금지되는 것은 생명의 근원에서 떠나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삼는 것입니다. 금령은 앎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참된 앎의 질서를 보존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2:16-17의 허용과 금지는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라는 허용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금지는 모두 같은 질서를 말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풍성하게 받아 누리는 것은 허락되어 있지만, 그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아내어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AC.79AC.80을 함께 읽으면 에덴의 질서가 매우 선명해집니다. AC.79에서는 누리되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AC.80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알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는 소유의 질서이고 다른 하나는 앎의 질서처럼 보이지만, 사실 둘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모든 선과 진리와 생명과 지혜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앞으로 창3의 타락 이야기를 읽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타락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과일 하나를 먹은 사건으로만 이해되지 않습니다. 더 깊은 차원에서는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퍼셉션하던 질서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과 감각과 기억지식을 통해 신적인 것들을 알려 하고 판단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과정이 다루어집니다. AC.80은 그 문제를 창2의 개요에서 미리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AC.80의 핵심은 알지 말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어디로부터 아는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해 선과 진리를 아는 것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을 알려 하는 것은 겉으로는 모두 안다는 행위처럼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전혀 다른 질서입니다. 전자는 천적 생명의 질서이고 후자는 그 천적 본성을 죽음으로 이끄는 질서입니다.

 

AC.80은 그래서 창2:16-17의 금령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기준을 세웁니다. 인간에게 금지된 것은 지식도, 이성도, 질문도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세우고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가지고 신앙의 아르카나를 자기 힘으로 판단하려 하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의 참된 질서는 주님으로부터 퍼셉션하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누리며, 그 모든 것의 근원을 주님께 돌리는 데 있습니다. 그 질서를 떠나는 것이 바로 그의 천적 본성의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AC.80)

 

 

 

AC.81, 창2:1-17 배경, '죽은 사람,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의 세 가지 차이'

AC.81이 장은 천적 인간을 다루며, 앞 장은 죽은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을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고, 영적 인간이나 죽은 사람이 무엇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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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9,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에덴동산이지만,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다' (15절)

AC.79천적 인간은 이와 같은 동산입니다. 그러나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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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9

천적 인간은 이와 같은 동산입니다. 그러나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사람은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15) The celestial man is such a garden. But as the garden is the Lords, it is permitted this man to enjoy all these things, and yet not to possess them as his own (verse 15).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5)

 

해설

AC.79는 앞의 에덴동산에 관한 개요를 매우 중요한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AC.77에서는 천적 인간의 지성이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되고, 그 안의 나무들은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며,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AC.78에서는 동산의 강이 지혜이고, 거기서 갈라지는 네 강이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을 나타내며, 이 모든 것이 지혜에서, 그리고 그 지혜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9는 이 모든 것을 한데 모아 천적 인간은 이와 같은 동산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은 천적 인간과 무관한 외부의 어떤 아름다운 장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속뜻에서 천적 인간 자신이 그러한 동산입니다. 그의 지성,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사랑과 신앙, 지혜, 그리고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모두 주님이 정하신 질서 안에 있을 때 그 인간이 바로 에덴동산으로 묘사될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AC.79의 핵심은 그다음 문장에 있습니다. ‘ 동산은 주님의 것입니다.천적 인간이 동산이라고 했지만 그 동산의 소유자는 천적 인간이 아닙니다. 그의 안에 있는 사랑도, 신앙도, 퍼셉션도, 지혜도, 선과 진리도 궁극적으로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모두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은 자신 안에 있는 천국적인 것들을 누릴 수 있지만 그것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누린다는 것과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한다는 것이 분명하게 구별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선과 진리, 사랑과 지혜를 주시고 그것들을 실제 자신의 삶 안에서 누리도록 하십니다. 인간은 사랑하고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들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자유롭게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의 근원까지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그것들을 받는 자이지 그 생명과 선과 지혜의 원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구별은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시라고 해서 인간이 아무것도 생각하거나 행하지 않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인간이 실제로 사랑하고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한다고 해서 그 안의 참된 선과 진리가 인간 자신에게서 발생하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자기 것으로 느끼면서 자유롭게 살아가되, 그것의 근원은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질서 안에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AC.79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말에 담긴 중요한 질서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을 누리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를 갖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사랑하거나 선을 행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충분히 받아 누리되 이것은 나에게서 나온 나의 것이다라고 주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79는 앞으로 본격적으로 등장할 proprium의 문제와 깊이 연결됩니다. ‘proprium은 문자 그대로 인간 자신의 것, 곧 인간이 자기에게 속한다고 여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타락한 인간의 proprium은 자기에게 생명과 선과 지혜가 있는 것처럼 여기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려는 방향과 연결됩니다. AC.79는 아직 그 전체 교리를 펼치지는 않지만, 에덴의 질서를 설명하면서 이미 그 문제의 핵심을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이 에덴동산인 까닭은 그가 자기 안의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있는 선과 진리와 지혜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 동산은 그의 안에 있으면서도 그의 소유가 아니라 주님의 동산입니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에서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받을수록 더욱 살아 있는 인간이 되지만, 동시에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을 더욱 인정하게 됩니다.

 

여기서 주님의 이라는 말을 단순한 소유권의 비유로만 읽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지성과 사랑을 외적으로 소유하고 계신다는 뜻이라기보다, 인간 안의 모든 참된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앞 AC.76에서 천적 인간의 생명이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되었던 것과도 연결됩니다.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면, 그 생명으로 살아 움직이는 선과 진리와 지혜 역시 인간 자신의 독립적인 소유물이 될 수 없습니다.

 

AC.78의 마지막 문장과도 매우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거기서는 네 강으로 묘사된 모든 것이 지혜에서 나오고, 그 지혜는 다시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AC.79에서 동산은 주님의 이라고 하는 것은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원리가 아닙니다. 이미 모든 것의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설명한 뒤, 그 질서를 인간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적 인간의 퍼셉션과도 연결됩니다.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자기 이성으로 만들어 내어 자기 것으로 확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그것을 퍼셉션하는 사람입니다. AC.77의 나무들이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했던 것도 이런 질서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퍼셉션의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있다면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받는 퍼셉션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이것은 모두 주님의 것이니 나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 책임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AC.79의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그것들을 누리는 을 허락하셨다는 표현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실제 자신의 삶 안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 사용합니다. 사랑하고, 배우고, 분별하고, 선을 행하며, 쓰임을 살아갑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자기 삶 안에서 실제로 살아 내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몫입니다.

 

따라서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은 책임이나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공로와 근원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선을 행하지만 그 선의 근원이 주님임을 인정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이후 여러 저작에서 거듭남과 자유를 설명할 때 반복해서 나타나는 중요한 질서와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AC.79라는 개요에서 그 후대의 교리 전체를 미리 끌어올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창2:15의 속뜻을 읽기 위한 기본 원리를 붙드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은 에덴동산과 같은 존재이지만 그 동산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는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누리도록 허락받았지만 그것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알면 창2:15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는 말씀도 단순한 농사 명령을 넘어서는 의미를 갖기 시작합니다. 다만 경작하며 지키다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해당 절의 상세 해설에서 살피는 것이 좋겠습니다. AC.79에서는 우선 동산이 주님의 것이며 인간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다는 기본 질서를 세우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특히 동산을 경작한다는 말을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과 지혜를 생산한다는 뜻으로 읽으면 AC.79의 핵심과 정반대가 됩니다. 동산 자체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맡겨진 활동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입니다. 인간은 근원이 아니라 받는 자이며, 동시에 받은 것을 살아 내는 자입니다.

 

이 원리는 앞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명령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해집니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를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고 자기의 감각과 이성을 근원으로 삼으려 할 때, 에덴의 질서는 흔들리게 됩니다. AC.79는 아직 그 타락을 다루지 않지만, 타락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기준을 미리 세워 놓습니다. ‘동산은 주님의 것이다.이 질서를 인정하는 것이 에덴의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에덴의 행복은 단순히 모든 것을 많이 소유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누리면서도 그것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과 지혜를 누리고,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유입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보여 줍니다. 주님으로부터 모든 선과 진리를 받는다고 해서 인간의 삶이 덜 인간적인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그것을 자기 삶 안에서 자유롭게 누릴 때 인간은 참으로 살아 있게 됩니다. 반대로 인간이 그 생명의 근원을 자기에게 돌릴수록 본래의 질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AC.73부터의 개요를 함께 놓으면 이 흐름은 더욱 분명합니다.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되고, 그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그의 지식과 이성, 생명, 지성, 퍼셉션, 사랑과 신앙, 지혜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가 차례로 묘사되었습니다. 이제 AC.79는 그 모든 것을 인간이 어떤 태도로 받아야 하는지를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누릴 수 있지만 그의 독립적인 소유물이 아닙니다. 동산은 주님의 것입니다.

 

이 한 문장은 앞으로 에덴의 상실을 이해하는 데도 결정적인 기준이 됩니다. 에덴을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장소에서 추방되는 것보다 훨씬 깊은 문제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며 살아가는 천적 질서에서 벗어나는 것과 관련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창2 후반과 창3에서 차례로 밝혀질 것이므로 지금은 미리 상세하게 전개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AC.79에서 우선 붙들 것은 매우 명료합니다. 천적 인간은 에덴동산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가 에덴인 까닭은 그 안의 모든 것이 그의 독립적인 소유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질서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 퍼셉션과 지혜를 자유롭게 누립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AC.79는 에덴동산의 가장 깊은 질서 가운데 하나를 보여 줍니다. ‘누리되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 .인간은 주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을 자신의 삶 안에서 충분히 받아 누리면서도 그 근원을 주님께 돌립니다. 이것이 천적 인간이 주님의 동산으로 살아가는 질서이며, 이후 말씀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로 기울기 시작할 때 무엇이 무너지게 되는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AC.79)

 

 

 

AC.80, 창2:1-17 개요, '주님으로부터 알고,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하지 말라' (16-17절)

AC.80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해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sens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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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8, 창2:1-17 개요, '에덴의 강과 네 갈래 - 지혜에서 나오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모든 것' (10-14절

AC.78동산의 강은 지혜를 의미합니다. 거기에서 네 강이 갈라져 나왔는데, 첫째는 선과 진리이고, 둘째는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것, 곧 사랑과 신앙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앎(cognitio)입니다.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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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8

동산의 강은 지혜를 의미합니다. 거기에서 강이 갈라져 나왔는데, 첫째는 선과 진리이고, 둘째는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 사랑과 신앙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cognitio)입니다. 이것들은 사람에게 속합니다. 셋째는 이성이고, 넷째는 기억지식(scientia)인데, 이것들은 사람에게 속합니다. 모든 것은 지혜에서 나오며, 지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옵니다. (10-14) Wisdom is meant by the river in the garden. From thence were four rivers, the first of which is good and truth; the second is the knowledge [cognitio] of all things of good and truth, or of love and faith. These are of the internal man. The third is reason, and the fourth is memory-knowledge [scientia], which are of the external man. All are from wisdom, and this is from love and faith in the Lord (verses 1014).

 

10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근원이 되었으니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땅을 둘렀으며 12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땅을 둘렀고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10-14)

 

해설

AC.78은 창2:10-14에 나오는 에덴동산의 강과 네 갈래 강의 속뜻을 개요로 보여 줍니다. AC.77에서 천적 인간의 지성이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되고, 그 동산의 나무들이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며,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8에서는 그 동산에서 흘러나오는 강이 지혜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의 강에서 네 강이 갈라져 나오는 모습으로 천적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어떻게 질서를 이루는지가 묘사됩니다.

 

먼저 동산의 강은 지혜를 의미한다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바로 앞 AC.77에서 에덴동산은 천적 인간의 지성으로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그 동산을 적시며 흘러나오는 강은 지혜입니다. 여기서도 강이라는 자연물의 성질을 보고 우리가 임의로 물이 흐르므로 지혜도 흐른다는 식의 상응을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AC.78은 직접 = 지혜라고 밝히고 있으므로 우선 그 대응 관계를 정확하게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강은 하나로 끝나지 않습니다. 2:10에서는 에덴에서 강이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AC.78은 이 네 강을 차례대로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한 것들로 설명합니다. 첫째와 둘째는 속 사람에게 속하고, 셋째와 넷째는 겉 사람에게 속합니다. 따라서 네 강은 단순히 고대 세계의 네 지리적 수계를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속뜻에서는 천적 인간 안에 있는 내적·외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첫째 강은 선과 진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아직 창2:11의 비손이라는 이름과 그 주변의 금, 베델리엄, 호마노가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개요이므로 첫째 강이 선과 진리를 나타낸다는 큰 대응 관계만 제시합니다. 이 선과 진리가 속 사람에게 속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 강은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 사랑과 신앙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cognitio)입니다. 여기서 원문의 cognitio를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Pottsknowledge라고 옮겼지만 스베덴보리는 뒤의 넷째 강에 사용하는 scientia와 다른 라틴어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한국어에서도 둘을 모두 지식이라고 해 버리면 스베덴보리가 개요에서 세운 구별이 흐려집니다.

 

이번 번역에서는 그래서 cognitio으로 옮겼습니다. 이것은 선과 진리, 다시 말해 사랑과 신앙에 관한 것들을 아는 것과 관련됩니다. 다만 이 한 문장만으로 cognitio의 전체적인 전문용어 체계를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으로 AC에서 이 단어가 반복해서 사용되는 문맥을 보면서 그 의미 범위를 더 정확하게 잡아야 합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둘째 강의 cognitio와 넷째 강의 scientia가 같은 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첫째와 둘째를 묶어 이것들은 사람에게 속한다고 합니다. 즉 선과 진리, 그리고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앎이 속 사람과 관련됩니다. 여기서도 사람이라는 말을 단순히 인간의 깊은 심리나 무의식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은 인간의 영적 구조와 거듭남을 이해하는 중요한 틀입니다. 속 사람은 주님과 천국을 향하여 열릴 수 있는 인간의 내적인 부분이며, 겉 사람은 자연계와 감각적인 삶을 향하여 있는 부분입니다.

 

그렇다고 속 사람은 선하고 겉 사람은 나쁘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AC.78의 네 강 자체가 그런 오해를 막아 줍니다. 셋째와 넷째 강, 곧 겉 사람에 속한 이성과 기억지식 역시 하나의 지혜에서 나옵니다. 문제는 겉 사람 자체가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질서입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조화를 이루고 그 안에 있는 선과 진리를 자연적 삶에서 섬길 때, 이성과 기억지식도 온전한 쓰임을 갖습니다.

 

셋째 강은 이성입니다. 이것은 겉 사람에게 속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성을 속 사람에 속한 선과 진리보다 열등하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평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성은 인간이 자연적 차원에서 생각하고 분별하며 이해하는 데 중요한 능력입니다. 다만 천적 인간의 질서에서는 이성이 스스로 최고의 권위를 주장하지 않고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과 질서 있게 연결됩니다.

 

넷째 강은 기억지식(scientia)입니다. ‘scientia역시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을 때 매우 주의해야 하는 용어입니다. 이것을 현대적인 과학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여기서는 인간이 감각과 경험, 학습 등을 통하여 기억 안에 받아들인 지식과 관련됩니다. 그래서 기억지식이라고 옮기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자연적·외적 차원의 앎이라는 성격을 비교적 잘 살릴 수 있습니다.

 

AC.75에서 이미 천적 인간의 scientificum et rationale’, 곧 지식과 이성이 언급되었습니다. AC.78에서는 이제 이성과 기억지식이 겉 사람에게 속한다고 명시함으로써 그 위치가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따라서 AC.75에서 우리가 지식과 이성을 너무 빨리 천적 인간의 내적인 인식 구조라고 규정하지 않았던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AC.78에 이르러 스베덴보리 자신이 그것들을 겉 사람과 연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네 강 모두가 어디에서 나오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모든 것은 지혜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첫째의 선과 진리, 둘째의 사랑과 신앙에 관한 앎, 셋째의 이성, 넷째의 기억지식이 서로 완전히 독립된 네 능력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지혜에서 나와 속 사람과 겉 사람에 각각 질서 있게 자리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 단계 더 근원으로 올라갑니다. ‘ 지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옵니다.AC.78 전체를 이해하는 결정적인 마지막 문장입니다. 네 강의 근원은 지혜이고, 그 지혜의 근원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입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지혜는 인간 자신의 뛰어난 지능이나 많은 지식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그 지혜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한 모든 것이 질서 있게 흘러나옵니다.

 

이 순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기억지식을 많이 쌓아서 이성이 생기고, 이성을 충분히 발전시키면 선과 진리에 이르며, 결국 사랑과 신앙에 도달한다는 식의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구조가 아닙니다. AC.78이 제시하는 천적 질서는 반대 방향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그 지혜로부터 속 사람의 선과 진리와 그것들에 관한 앎이 나오며, 또한 겉 사람의 이성과 기억지식도 질서를 얻습니다.

 

그렇다고 자연적 지식과 이성을 무가치하게 여겨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번호에서 이성과 기억지식도 에덴의 하나의 강에서 갈라져 나온 네 강 가운데 포함됩니다. 그것들이 올바른 근원과 질서 안에 있을 때에는 천적 인간의 삶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문제는 이성과 기억지식이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여기고 속 사람으로부터 분리될 때입니다.

 

이 점은 앞으로 창2와 창3에서 매우 중요하게 됩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고자 하고, 자기의 감각과 기억지식과 이성을 최종적인 판단자로 삼으려 할 때 질서가 뒤집히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C.78은 아직 그 타락을 다루는 번호가 아닙니다. 여기서는 타락 이전의 올바른 천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이 근원에 있고, 거기서 지혜가 나오며, 그 지혜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모든 것이 질서 있게 나옵니다.

 

이것을 바로 앞 AC.77과 함께 읽으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AC.77에서는 생명나무가 사랑이고 지식의 나무가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78에서는 지혜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랑과 신앙은 에덴동산 안에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서로 무관한 원리가 아닙니다. 천적 인간의 지혜 전체가 그것들로부터 나옵니다.

 

다만 여기서도 사랑과 신앙을 완전히 동등한 두 출발점이라고 단순화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사랑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신앙이 그 사랑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뒤의 상세 해설과 AC 전체를 통해 더 정교하게 드러납니다. AC.78의 표현은 우선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지혜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 문장을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네 강을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조로 읽는 것은 에덴동산의 지리적 묘사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열어 줍니다. 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라는 네 강을 고대 지도에서 찾아내는 것만으로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속뜻에 이를 수 없습니다. 말씀은 이 강들을 통해 천적 인간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어떻게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에까지 질서 있게 펼쳐지는지를 묘사합니다.

 

그렇다고 각각의 강 이름과 지역을 이번 개요에서 미리 상세히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첫째 강이 왜 선과 진리인지, 둘째 강이 왜 선과 진리에 관한 앎인지, 셋째와 넷째가 왜 이성과 기억지식인지에 대한 세부적인 근거는 창2:10-14의 상세 해설에서 다루어질 것입니다. AC.78에서는 네 강 전체의 구조를 먼저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구조를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첫째와 둘째는 속 사람에게 속하고, 셋째와 넷째는 겉 사람에게 속합니다. 그러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두 개의 서로 끊어진 세계가 아닙니다. 모두 하나의 지혜에서 나오며, 그 지혜는 다시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 안에서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하나의 근원 아래 질서를 이룹니다.

 

이 점에서 AC.78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개요 번호입니다. 거듭남의 목적은 겉 사람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과 기억지식을 버리고 순수하게 내적인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올바른 질서로 연결되어, 겉 사람에 속한 이성과 기억지식까지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억지식과 이성을 많이 사용하는 것 자체가 영적이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어디에서 출발하며 무엇을 섬기느냐입니다. 자기 지성과 기억지식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최종 기준이 되면 질서가 거꾸로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의 질서 아래 놓일 때 이성과 기억지식은 인간의 자연적 삶에서 매우 중요한 쓰임을 담당합니다.

 

다만 이것을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서 공부보다 사랑이 중요하다’, ‘이성보다 신앙이 중요하다는 식으로 단순한 양자택일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78이 보여 주는 것은 어느 하나를 버리는 구조가 아니라 모두가 올바른 근원과 질서 안에 놓이는 구조입니다.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그 지혜가 속 사람뿐 아니라 겉 사람의 이성과 기억지식까지 질서 있게 합니다.

 

AC.73부터의 개요를 함께 놓으면 이제 천적 인간의 모습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는 일곱째 날이며, 그의 지식과 이성이 묘사되고, 그의 생명은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되며, 그의 지성은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그 동산 안에는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 있고, 생명나무와 지식의 나무는 사랑과 신앙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 동산에서 흘러나오는 강은 지혜이며, 그 지혜로부터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한 모든 것이 나옵니다.

 

그 모든 흐름의 가장 깊은 근원에 있는 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입니다. 이것이 AC.78의 마지막 문장이면서 동시에 전체 번호를 묶는 핵심입니다. 천적 인간의 선과 진리, 그것들에 관한 앎, 이성과 기억지식은 서로 흩어진 능력들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는 하나의 지혜 안에서 질서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AC.78에서 에덴의 강과 네 강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고대 지리의 수계를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이 보여 주는 영적 질서를 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지혜가 나오고, 그 지혜에서 속 사람의 선과 진리와 그에 관한 앎이 나오며, 겉 사람의 이성과 기억지식도 나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 전체가 하나의 지혜 아래 질서를 이루는 것, 이것이 에덴의 강과 네 갈래 강을 통해 묘사되는 천적 인간의 내적 질서입니다. (AC.78)

 

 

 

AC.79,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에덴동산이지만,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다' (15절)

AC.79천적 인간은 이와 같은 동산입니다. 그러나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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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7, 창2:1-17 개요, '에덴동산과 두 나무 - 천적 인간의 지성과 퍼셉션, 사랑과 신앙' (8-9절)

AC.77그다음 그의 지성은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그 안에서 보기에 좋은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며,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생명나무는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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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7

그다음 그의 지성은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안에서 보기에 좋은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며,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the tree of knowledge [scientiae]) 신앙을 의미합니다. (8-9) Afterwards his intelligence is described by the garden in Eden, in the east; in which the trees pleasant to the sight are perceptions of truth, and the trees good for food are perceptions of good. Love is meant by the tree of lives, faith by the tree of knowledge [scientiae] (verses 89).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여호와 하나님이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8, 9)

 

해설

AC.77은 창2:1-17 개요 가운데 천적 인간의 내적 상태를 한층 더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번호입니다. AC.75에서는 그의 지식과 이성이 초목과 채소로 묘사되었고, AC.76에서는 그의 생명이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제 AC.77에서는 그의 지성이 무엇으로 묘사되는지를 밝힙니다. 그것이 바로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입니다. 그리고 그 동산 안의 여러 나무는 천적 인간의 퍼셉션을,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먼저 에덴동산이 천적 인간의 지성이라는 점을 정확하게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에덴동산을 최초의 두 사람이 살았던 아름다운 낙원으로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창2의 속뜻에서 에덴동산을 천적 인간의 내적 상태와 연결합니다. AC.77에서는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그의 지성이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에덴은 단순한 아름다운 장소가 아니라 천적 인간 안에 있는 지성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열립니다.

 

그렇다고 에덴’, ‘동산’, ‘동쪽각각의 상응을 지금 모두 풀어낼 필요는 없습니다. AC.77은 개요이기 때문입니다. 왜 에덴이 지성과 관계되는지, 왜 그 동산이 동쪽에 있다고 하는지, 동쪽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뒤의 창2:8 상세 해설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집니다. 지금은 스베덴보리가 먼저 제시하는 큰 대응 관계, 천적 인간의 지성=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을 기억하면 충분합니다.

 

이어서 동산 안의 나무들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보기에 좋은 나무들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하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선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퍼셉션은 창2의 천적 인간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천적 인간은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단지 외부에서 배운 규칙이나 논증을 통해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인 퍼셉션을 통해 그것을 지각합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의 나무들은 단순히 천적 인간이 알고 있는 여러 지식의 목록이 아니라 그의 지성 안에 있는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을 묘사합니다.

 

여기서도 스베덴보리가 보기에 좋은 먹기에 좋은 을 구별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자는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고 후자는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그러나 본다 = 진리’, ‘먹는다 = 이라는 상응의 세부적인 근거를 AC.77에서 우리가 임의로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뒤의 상세 해설에서 스베덴보리가 그 의미를 어떻게 풀어 가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은 이 두 종류의 나무가 천적 인간의 지성 안에 있는 진리와 선에 대한 퍼셉션을 각각 나타낸다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특히 여기서 퍼셉션을 일반적인 직감이나 느낌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왠지 이것이 맞는 같다고 느끼는 심리적 직관을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적 인간의 퍼셉션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퍼셉션은 태고교회와 천적 인간의 매우 독특한 내적 상태와 관련된 개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능력이며, 단순한 개인적 감정이나 주관적 확신과는 구별됩니다.

 

이 점은 앞으로 에덴 이야기를 읽는 데 중요합니다. 에덴동산을 천적 인간의 지성이라고 할 때, 그 지성은 단순히 논리적 추론 능력이 뛰어난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 동산의 나무들이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을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의 지성은 사랑과 퍼셉션의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동산 가운데 특별한 두 나무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생명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지식의 나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아주 간결하게 사랑은 생명나무로, 신앙은 지식의 나무로 의미된다고 합니다. 이 대응은 창2와 창3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먼저 생명나무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사랑을 단순한 인간적 감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문맥은 천적 인간의 상태이며, 천적 인간에게 중심이 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입니다. 따라서 생명나무가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은 천적 인간의 참된 생명이 사랑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바로 앞 AC.76에서 그의 생명이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되었다는 점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다른 하나인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이 점은 특히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은 우리가 고정해 온 용어대로 faith입니다. 따라서 이 나무를 단순히 지식’, ‘학문’, ‘이성또는 인간의 지적 능력자체라고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77은 분명히 그것이 신앙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곧바로 생명나무는 좋은 나무이고 지식의 나무는 나쁜 나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신앙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창4에서도 계속 살펴보았듯 문제는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첫째가 되려고 할 때 발생합니다. 2에서도 이 질서의 문제가 매우 중요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사랑이 중심이며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이 점에서 AC.77의 두 나무는 앞으로 벌어질 이야기를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을 제공합니다. 생명나무가 사랑이고 지식의 나무가 신앙이라면, 핵심 문제는 단순히 어떤 나무의 열매를 먹었는가?라는 외적인 사건에만 있지 않습니다. 사랑과 신앙이 인간 안에서 어떤 질서에 놓여 있는가라는 훨씬 깊은 문제가 말씀의 속뜻에 들어 있습니다. 다만 이 문제는 창2:16-17과 창3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펼쳐지므로 AC.77에서 미리 모든 결론을 끌어오지는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특히 tree of knowledge [scientiae]라는 표현도 주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Pottsknowledge라고 번역하면서 라틴어 scientiae를 함께 표시합니다. 이 단어를 현대적인 의미의 과학이나 학문적 지식으로 읽으면 본문의 뜻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용어 체계에서 scientia와 관련된 표현은 기억에 받아들인 앎이나 지식과 연결되며, 여기서는 그 나무가 신앙을 의미한다고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힙니다. 따라서 지식의 나무라는 명칭만 보고 지식 자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AC.75AC.77을 비교하면 이 점이 더욱 분명합니다. AC.75에서는 천적 인간에게도 지식과 이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지식 자체를 악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지식과 이성과 신앙이 사랑이라는 중심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가입니다. 천적 질서에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며, 진리와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선과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질서가 두드러집니다. 반면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의 선이 중심이며, 그 사랑으로부터 진리와 신앙을 퍼셉션합니다. 따라서 생명나무가 사랑이고 지식의 나무가 신앙이라는 AC.77의 짧은 설명은 천적 인간 안에서 사랑과 신앙의 올바른 질서를 보여 주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두 나무를 서로 적대적인 두 원리로 만들지는 말아야 합니다. 사랑과 신앙은 본래 서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질서에서는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분리되고, 인간이 신앙에 속한 것을 자기 자신에게서 알고 판단하려 할 때입니다. 바로 이 문제가 뒤의 에덴 이야기와 창3에서 점차 드러나게 됩니다.

 

또한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이라는 표현과 생명나무의 사랑을 연결하여 동쪽은 주님이므로 에덴동산은 주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지성이다라고 지금 곧바로 완성된 상응 체계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그 방향이 뒤의 상세 해설과 연결될 수 있더라도, AC.77은 아직 각 요소의 세부 의미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번 개요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한 대응 관계를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AC.77은 앞의 개요들과 함께 읽을 때 더욱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AC.73에서는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이 창2의 주제라고 했습니다. AC.74에서는 그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라고 했고, AC.75에서는 그의 지식과 이성을, AC.76에서는 그의 생명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AC.77에서는 그의 지성과 그 지성 안의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그리고 사랑과 신앙을 보여 줍니다. 개요가 천적 인간의 내적 상태를 점점 더 구체적으로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특히 기억할 것은 에덴동산 = 천적 인간의 지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에덴은 단순히 잃어버린 옛 낙원의 지리적 장소를 찾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속뜻에서는 주님에 의해 거듭난 천적 인간의 내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 동산 안에 있는 아름다운 나무들은 그의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며, 그 중심에는 사랑과 신앙이라는 두 중요한 것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모든 것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AC.76에서 천적 인간의 생명이 주님께서 불어넣으시는 생명의 숨으로 묘사되었다면, AC.77의 에덴동산 역시 그 생명을 받은 인간 안에 형성된 지성의 상태입니다. 인간이 자기 지혜로 에덴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사랑과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질서 안에서 그의 내면이 에덴동산으로 묘사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77의 핵심은 여러 상응을 따로 외우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하나의 질서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있고, 그의 지성은 에덴동산으로 묘사되며, 그 안에는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 있고, 사랑과 신앙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앞으로 창2와 창3에서 인간의 내적 질서가 어떻게 유지되고 또 어떻게 무너지게 되는지를 이해하는 기초가 됩니다.

 

AC.77은 따라서 에덴동산 이야기를 읽는 매우 중요한 열쇠입니다.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은 천적 인간의 지성을, 보기에 좋은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을,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을 나타냅니다.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이 대응 관계를 정확하게 붙들고 있으면 이후 에덴의 이야기는 단순한 고대의 정원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 퍼셉션과 인간의 지혜에 관한 깊은 말씀으로 열리기 시작합니다. (AC.77)

 

 

 

AC.78, 창2:1-17 개요, '에덴의 강과 네 갈래 - 지혜에서 나오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모든 것' (10-14절

AC.78동산의 강은 지혜를 의미합니다. 거기에서 네 강이 갈라져 나왔는데, 첫째는 선과 진리이고, 둘째는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것, 곧 사랑과 신앙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앎(cognitio)입니다.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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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6,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의 생명 -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7절)

AC.76‘그의 생명은 그에게 생명의 숨(the breath of lives)을 불어넣으신 것으로 묘사됩니다. (7절) His life is described by the breathing into him of the breath of lives (verse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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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6

그의 생명은 그에게 생명의 (the breath of lives) 불어넣으신 것으로 묘사됩니다. (7) His life is described by the breathing into him of the breath of lives (verse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7)

 

해설

AC.76 2:1-17 개요의 흐름을 한층 깊은 곳으로 이끕니다. AC.73에서는 영적으로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이 2에서 다루어진다고 했고, AC.74에서는 천적 인간이 일곱째 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했습니다. AC.75에서는 그의 지식과 이성이 안개로 적셔지는 땅의 초목과 채소로 묘사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6에서는 그 천적 인간의 생명자체가 무엇으로 묘사되는지를 밝힙니다. 그것은 창2:7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의 을 불어넣으시는 것입니다.

 

이 한 문장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그의 생명이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는 바로 앞에서 계속 다루고 있는 천적 인간입니다. 따라서 AC.76은 일반적인 생물학적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2:7의 문자적 의미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사람이 생령이 되는 장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말씀의 속뜻에서 천적 인간의 생명이 묘사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을 단순히 최초 인간의 육체에 호흡이 시작된 사건으로만 읽어서는 AC.76이 가리키는 속뜻에 이르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지금 관심을 두는 것은 인간의 몸이 어떻게 생물학적으로 살아나게 되었는가?가 아니라 천적 인간의 참된 생명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오는가?입니다. 그 생명이 말씀에서는 주님께서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생명의 주체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생명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불어넣으심이라는 말씀 자체가 생명이 인간 자신에게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생명 그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 원리는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 전체에서 매우 중요하며, 천적 인간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오히려 천적 인간은 자기에게 있는 사랑과 지혜와 생명이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가장 내적으로 인정하는 인간입니다.

 

다만 AC.76의 한 문장만으로 이 불어넣으심의 모든 상응을 미리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명의 이라고 하는지, 그리고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는 창2:7의 상세 해설에서 스베덴보리가 구체적으로 밝힐 것입니다. 지금은 개요이므로 천적 인간의 생명은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된다는 큰 대응 관계를 정확히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점은 바로 앞 AC.75와 비교하면 더욱 선명합니다. AC.75에서는 천적 인간의 지식과 이성을 말했습니다. 지식과 이성은 인간의 중요한 능력이지만 그것 자체가 인간의 생명은 아닙니다. 이제 AC.76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생명으로 들어갑니다. 인간에게 지식이 있고 이성이 있으며 지성이 있다고 해서 그것들이 스스로 살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생명을 받아야 비로소 살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천적 인간을 단순히 매우 지혜로운 사람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천적 인간의 핵심은 지식의 양이나 추론 능력의 탁월함에 있지 않습니다. AC.75가 그의 지식과 이성을 말한 뒤 곧바로 AC.76이 그의 생명을 말한다는 순서도 의미 있게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과 정교한 이성을 갖추고 있어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순서를 근거로 지식과 이성은 낮고 생명은 높다는 식의 위계적 상응을 우리가 임의로 만들어 낼 필요도 없습니다. 개요에서 스베덴보리가 서로 다른 요소들을 차례로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따라가면 충분합니다. AC.75에서는 지식과 이성, AC.76에서는 생명, 이어지는 AC.77에서는 지성을 말합니다. 각각의 의미와 관계는 뒤의 상세 해설에서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생명의 이라는 표현을 오늘날 흔히 말하는 하나님의 영을 인간에게 불어넣으셨다는 식으로 곧바로 동일시하는 것도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성경의 ’, ‘호흡’, ‘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는 경우가 있지만, AC.76 자체는 아직 그 교리적 관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생명의 =성령이라고 단순 등식으로 확정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해당 절을 상세히 해설할 때 무엇이라고 하는지를 기다리는 것이 정확합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Potts 영어가 the breath of lives라고 복수형을 그대로 살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2:7의 히브리어 역시 문자적으로는 생명들의 에 해당하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것만 보고 곧바로 여러 종류의 생명이나 몇 단계의 생명을 뜻한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AC.76은 그 복수형 자체의 속뜻을 아직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종 번역에서는 개역개정의 익숙한 표현과 한국어의 자연스러움을 고려하여 생명의 으로 두고, 상세 해설에서 필요할 때 원문의 복수형을 다시 살피는 것이 좋겠습니다.

 

AC.76은 또한 창1의 거듭남 전체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1의 여섯 날 동안 사람에게 빛이 생기고, 선과 진리가 구별되고, 신앙에 속한 것들이 생겨나며, 살아 있는 것들이 나타나고, 마침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는 과정이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거듭남의 근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입니다. 2:7에서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은 천적 인간 역시 자기 힘으로 천적 생명을 획득한 존재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사는 존재임을 다시 보여 줍니다.

 

이것은 proprium의 문제와도 앞으로 깊이 연결됩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자기에게 있는 생명과 선과 지혜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여기려는 방향으로 기울기 쉽습니다. 그러나 참된 질서에서는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 주님입니다.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할 때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AC.76 자체가 아직 proprium을 직접 언급하지 않으므로, 여기서 그 문제를 길게 전개하기보다 앞으로 창2의 본문이 그것을 어떻게 열어 가는지 따라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따라서 AC.76의 핵심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깊습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지식과 이성이 있지만 그의 참된 생명은 그것들 자체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의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말씀은 그 사실을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이라는 형상으로 묘사합니다.

 

AC.73부터 지금까지의 개요를 함께 놓으면 흐름이 더욱 또렷해집니다. AC.73에서는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의 전환을 말했습니다. AC.74에서는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했습니다. AC.75에서는 그의 지식과 이성이 초목과 채소로 묘사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76에서는 그의 생명이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된다고 합니다. 개요가 한 문장씩 천적 인간의 상태를 열어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번호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생명의 숨이 정확히 어떤 물질인가?가 아닙니다. ‘천적 인간의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입니다. 답은 인간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입니다. 인간은 생명의 원천이 아니라 생명을 받는 존재이며, 천적 인간은 이 질서를 가장 내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2:7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은 바로 그 천적 생명을 묘사하는 말씀입니다. (AC.76)

 

 

 

AC.77, 창2:1-17 개요, '에덴동산과 두 나무 - 천적 인간의 지성과 퍼셉션, 사랑과 신앙' (8-9절)

AC.77그다음 그의 지성은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그 안에서 보기에 좋은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며,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생명나무는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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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5,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의 지식과 이성은 초목과 채소로 묘사된다’(5-6절)

AC.75그의 지식과 이성(knowledge and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은 안개로 적셔지는 땅에서 난 초목과 채소로 묘사됩니다. (5-6절) His knowledge and his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 are described by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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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5

그의 지식과 이성(knowledge and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안개로 적셔지는 땅에서 초목과 채소로 묘사됩니다. (5-6) His knowledge and his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 are described by the shrub and the herb out of the ground watered by the mist (verses 56).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지면을 적셨더라 (5, 6)

 

해설

AC.75는 창2:1-17 개요의 세 번째 항목입니다. AC.73에서는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된 뒤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이 창2에서 다루어진다고 했고, AC.74에서는 그 천적 인간이 일곱째 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5에서는 천적 인간 안에 있는 지식과 이성이 말씀에서 무엇으로 묘사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것은 안개로 적셔지는 땅에서 초목과 채소입니다.

 

먼저 중요한 것은 천적 인간에게도 지식과 이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천적 인간이 사랑과 퍼셉션에 의해 인도된다고 해서 지식이나 이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그것들이 천적 인간 안에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다만 앞으로 살펴보게 되듯 그것들이 천적 인간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기능은 영적 인간의 경우와 같지 않습니다.

 

원문은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라고 합니다. 여기서 scientificum은 영어 번역에서 knowledge로 옮겨졌지만, 현대 한국어에서 지식이라고 할 때 떠올리는 학문적 지식에만 한정해서 이해하면 좁아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용례에서 이 말은 인간이 감각과 경험, 교육 등을 통하여 겉 사람의 기억 안에 받아들인 여러 앎과 관련됩니다. 이러한 것들은 이성이 사고하고 판단하는 데 사용되는 재료가 되기도 합니다.

 

rationale는 이성과 관련됩니다. 그러나 현재 해설처럼 scientificum 경험과 학습으로 쌓인 지식이고 rationale 지식이 질서 잡혀 이해로 올라간 상태라고 너무 간단하게 두 층으로 고정하는 것은 조금 조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후 AC에서 지식, 이성,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훨씬 정교하게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AC.75에서는 우선 천적 인간에게도 지식과 이성이 있으며, 2:5-6의 자연적 이미지들이 그것들을 묘사한다는 사실까지만 정확히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 지식과 이성을 묘사하는 것이 초목과 채소라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나무는 높이 자라지만 초목과 채소는 가까이 자라므로 지식과 이성이 중심이 아니라 섬기는 자리에 있다는 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갑니다. AC.75는 식물의 높낮이를 근거로 그런 해석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상응을 설명할 때에는 자연물의 외형에서 우리가 그럴듯한 의미를 만들어 내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그 상응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원칙은 우리의 AC 작업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초목은 낮으니까 겸손’, ‘나무는 높으니까 높은 지혜’, ‘안개는 부드러우니까 은밀한 은혜와 같이 자연적 이미지에서 곧바로 영적 의미를 추론하면 아름다운 묵상은 만들어질 수 있지만, 그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과 동일하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상응은 단순한 시적 연상이나 비유가 아니라 말씀의 내적 질서와 관련되므로, 가능한 한 해당 AC의 직접적인 설명을 따라야 합니다.

 

안개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안개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직접적인 계시나 교훈이 아니라 내적으로 스며드는 생명의 영향을 뜻한다고 설명하고, 다시 비와 안개를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주입되는 방식안에서 밖으로 부드럽게 흘러가는 방식으로 대비했습니다. 그러나 AC.75 자체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글이 말하는 것은 지식과 이성이 안개로 적셔지는 땅에서 초목과 채소로 묘사된다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안개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창2:6을 직접 해설하는 곳에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따라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개요의 역할은 앞으로 펼쳐질 세부 상응을 미리 모두 해석하는 데 있지 않고, 독자가 본문 전체의 구조를 먼저 볼 수 있도록 큰 대응 관계를 알려 주는 데 있습니다. AC.75에서는 지식과 이성초목과 채소라는 자연적 이미지로 묘사된다는 큰 틀을 기억하면 충분합니다.

 

그렇다고 현재 해설이 강조한 천적 인간에게 지식과 이성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라는 점까지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AC.75 자체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천적 인간의 scientificum et rationale을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적 인간의 특징이 사랑과 퍼셉션이라고 해서 그가 이성을 사용하지 않거나 자연적 지식을 가지지 않는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천적 인간은 지식과 이성을 가장 바른 자리에 사람이다’, ‘지식은 사랑을 섬기고 이성은 선을 밝힌다’, ‘그의 지식은 날카롭기보다 온화하고 그의 이성은 논쟁적이기보다 투명하다는 기존 표현은 이번에는 빼는 것이 좋겠습니다. 앞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전체적인 천적 인간 이해와 어느 정도 연결할 수 있지만, 뒤의 온화하다’, ‘투명하다는 표현은 우리의 문학적 묘사입니다. 최종본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는 것과 우리의 묵상을 분명히 구별하는 편이 좋습니다.

 

AC.73부터의 흐름을 다시 보면 AC.75의 위치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AC.73은 창2 전체의 주체가 어떤 인간인지를 먼저 밝혔습니다. 그는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된 사람입니다. AC.74는 그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일곱째 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AC.75는 이제 그 사람 안의 특정한 능력, 곧 지식과 이성을 가리킵니다. 개요가 점차 천적 인간의 상태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75천적 인간의 인식 구조라고 부르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는 가능하지만, 그 구조 전체가 이 한 문장에 다 들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뒤 AC.76에서는 그의 생명이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신 것으로 묘사되고, AC.77에서는 그의 지성이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지식과 이성, 생명, 지성이 각각 구별되어 차례로 등장한다는 점을 주의해서 보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지식과 이성과 뒤에 나올 지성을 너무 빨리 하나의 인식 능력으로 묶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개요에서 서로 다른 표현을 사용했다면 일단 그 구별을 존중해야 합니다. 각각이 천적 인간 안에서 무엇을 뜻하고 서로 어떻게 관계되는지는 뒤의 상세 해설을 따라가면서 확인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2:5-6의 문자적 본문도 이 관점에서 다시 보입니다.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지면을 적셨더라는 문장은 자연적 창조의 장면만을 읽을 때에는 식물이 생겨나기 전 땅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AC.75는 속뜻에서 이 표현들이 천적 인간의 지식과 이성과 관계된다고 미리 알려 줍니다. 문자적 자연물의 묘사가 인간 내면의 상태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AC.75 단계에서는 아직 초목과 채소가 없다고 하는가?’, ‘ 비가 아직 내리지 않았는가?’, ‘ 땅을 사람이 없다고 하는가?’, ‘ 안개가 땅에서 올라오는가?를 모두 답하려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바로 그런 질문들이 뒤의 상세 해설을 필요로 하는 이유입니다. 개요와 상세 해설의 역할을 구별하면 같은 내용을 여러 번 반복하는 것도 줄일 수 있습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가 먼저이고 천적 인간에게는 선이 먼저라는 원리를 사용했습니다. 이 큰 구별 자체는 매우 중요하며 앞으로 계속 필요합니다. 그러나 AC.75에서 그래서 천적 인간은 지식을 쌓거나 이성을 단련한다는 감각이 거의 없다고까지 나아가는 것은 근거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천적 인간이 외적인 교육이나 지식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오해될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창2의 천적 인간은 태고교회의 상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의 퍼셉션이라는 독특한 특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앞으로 관련 AC가 직접 설명할 때 충분히 다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은 천적 인간에게도 지식과 이성이 존재하지만 그것들의 질서와 역할은 그의 천적 상태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안식의 상태에 들어간 사람은 이상 지식과 이성을 통해 하나님께 도달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주님 안에 있다는 기존 표현도 수정하겠습니다. ‘이미 주님 안에 있다는 말은 신학적으로 여러 의미로 읽힐 수 있고, AC.75의 표현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거듭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든 생명과 선과 진리를 계속 주님으로부터 받아야 한다는 기본 질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천적 상태를 이제 이상 배울 필요도, 생각할 필요도, 분별할 필요도 없는 상태처럼 그리는 것도 피해야 합니다. AC.75가 천적 인간의 지식과 이성을 명시적으로 언급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런 단순화를 막아 줍니다. 천적 인간에게 지식과 이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그의 천적 생명의 질서 안에 존재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하나의 중요한 독법을 가르쳐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천적 인간을 이성을 초월했으므로 이성이 필요 없는 사람으로 낭만화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 중심이라고 해서 진리와 지식이 무가치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선과 진리는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인간의 여러 능력은 주님이 정하신 질서 안에서 각각의 쓰임을 갖습니다.

 

다만 이것을 곧바로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하여 우리의 지식과 이성은 나무처럼 자신을 드러내는가, 아니면 초목과 채소처럼 삶을 섬기는가?라고 묻는 것은 이번 최종본에서는 빼겠습니다. 질문 자체는 좋은 묵상이지만 나무=자기과시, 초목과 채소=겸손한 섬김이라는 상응을 먼저 만들어 낸 뒤 그 위에 적용을 세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AC 해설에서는 먼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상응을 정확히 세우고, 그 위에서 적용을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AC.75의 역할은 훨씬 간결하고 분명합니다. 2의 천적 인간에게도 지식과 이성이 있으며, 말씀은 그것들을 안개로 적셔지는 땅에서 초목과 채소라는 자연적 형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한 형상으로 묘사되는지는 뒤에서 더 자세히 밝혀질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기억할 것은 세 가지 정도면 충분합니다. 첫째, AC.73부터는 사후세계가 아니라 다시 거듭남의 문맥입니다. 둘째, 2의 주체는 천적 인간입니다. 셋째, 그 천적 인간의 지식과 이성이 창2:5-6의 초목과 채소로 묘사됩니다. 이 큰 구조를 먼저 붙들고 뒤의 상세 해설로 들어가면 각각의 상응을 억지로 앞당겨 해석하지 않고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차례대로 따라갈 수 있습니다.

 

AC.73에서는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AC.74에서는 천적 인간은 일곱째 ’, 그리고 AC.75에서는 그의 지식과 이성은 초목과 채소로 묘사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개요는 한 문장씩 천적 인간의 내적 상태를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다음 AC.76에서는 한층 더 근본적인 문제, 곧 그 천적 인간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가 생명의 을 통해 묘사됩니다.

 

그러므로 AC.75는 천적 인간을 지식이나 이성이 없는 신비적인 존재로 그리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에게도 지식과 이성이 있음을 분명히 하면서, 그것들이 말씀 안에서 어떤 자연적 형상으로 표현되는지를 알려 주는 개요입니다. 지금은 그 대응 관계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초목과 채소와 땅과 안개의 세부적인 의미는 해당 절의 상세 해설이 열어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가장 좋은 읽기입니다.

 

 

 

AC.76,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의 생명 -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7절)

AC.76‘그의 생명은 그에게 생명의 숨(the breath of lives)을 불어넣으신 것으로 묘사됩니다. (7절) His life is described by the breathing into him of the breath of lives (verse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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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4,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2-3절)

AC.74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 (2-3절)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on which the Lord rests (verses 2–3).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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