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ing soul.(창2:7)
AC.94
‘지면의흙으로사람을지으셨다’(formman,dustfromtheground)는것은그의겉사람을형성하셨다는뜻입니다.그겉사람은이전에는사람이아니었습니다.5절에서‘땅을갈사람이없었다’(nomantotilltheground)고했기때문입니다.‘그의코에생명의숨을불어넣으셨다’(breatheintohisnostrilsthebreathoflives)는것은그에게신앙과사랑의생명을주셨다는뜻이며,‘사람이생령이되었다’(manbecamealivingsoul)는것은그의겉사람도살아있게되었다는것을의미합니다. To“formman,dustfromtheground”is to form his external man,which before was not man;for it is said(verse 5)that there was“nomantotilltheground.” To“breatheintohisnostrilsthebreathoflives”is to give him the life of faith and love;and by“manbecamealivingsoul”is signified that his external man also was made alive.
해설
AC.94는 창2:7의 세 표현을 차례로 해석하면서 천적 인간의 형성이 어디에 이르는지를 보여 줍니다. 첫째는 ‘지면의흙으로사람을지으셨다’, 둘째는 ‘그의코에생명의숨을불어넣으셨다’, 셋째는 ‘사람이생령이되었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들을 각각 겉 사람의 형성,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받음, 그리고 마침내 겉 사람까지 살아 있게 됨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단순히 육체를 만들고 거기에 생물학적 생명을 불어넣는 장면의 속뜻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인간의 겉 사람에까지 이르는 천적 인간의 형성을 묘사합니다.
먼저 ‘지면의흙으로사람을지으셨다’는 것은 겉 사람을 형성하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지면’은 앞의 AC.90과 직접 연결됩니다. 사람이 영적 인간으로 있는 동안에는 그의 겉 사람이 ‘땅’이라 불리지만, 천적 인간이 되면 ‘지면’ 또는 ‘들’이라 불린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지면의 흙으로 사람이 형성된다는 것은 이미 천적 인간의 문맥 안에서 겉 사람이 새롭게 형성되는 것을 뜻합니다. 바로 앞 AC.89에서도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 곧 ‘하늘’로부터 시작된다고 했으므로, 이것은 겉 사람이 자기 힘으로 새로 만들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질서에 따라 겉 사람이 형성되는 과정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겉 사람이 ‘이전에는사람이아니었다’고 상당히 강하게 말합니다. 그 근거가 창2:5의 ‘땅을갈사람이없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전에 육체를 가진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다루는 속뜻에서 아직 겉 사람이 천적 질서 안에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참된 의미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이라는 말은 단순한 생물학적 인간을 넘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올바른 질서 안에 있는 인간이라는 깊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도록 형성되어 갈 때 비로소 그것도 ‘사람’이 됩니다.
다음으로 ‘그의코에생명의숨을불어넣으셨다’는 것은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앞의 AC.76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AC.76에서도 천적 인간의 생명이 ‘생명의숨을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된다고 했는데, AC.94는 이제 그 생명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신앙과사랑의생명’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생명의숨’은 단순히 호흡이나 육체적 생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속뜻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과 사랑의 생명입니다. 앞서 AC.83에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되면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된다고 했던 흐름도 여기와 연결됩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이생령이되었다’는 것은 ‘그의겉사람도살아있게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도’가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에서 시작되지만 그 생명이 속 사람에만 머물러서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AC.91에서는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며,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온이 마치 비와 안개처럼 겉 사람을 적신다고 했습니다. AC.92에서는 그것을 ‘내적인평화로부터나오는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94에서는 그 생명이 겉 사람에까지 이르러 겉 사람 ‘또한’ 살아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생명이 겉 사람에까지 내려와 전체 인간을 살아 있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살아있음’도 자연적 생존과 구별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은 육체적으로 살아 있고 이성적으로 사고하며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의미에서는 아직 참된 생명을 받지 못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참된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며, AC.94에서는 그것을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라고 합니다. 이 생명이 겉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까지 흘러들 때 겉 사람도 살아 있게 됩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삶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삶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생명을 받아 그 생명을 표현하고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AC.94는 AC.89이후의 흐름을 매우 선명하게 완성합니다.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에서 시작되고(AC.89), 겉 사람은 ‘지면’과 ‘들’이 되어 속 사람의 질서 아래 놓이며(AC.90),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고(AC.91),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을 받아 선과 진리를 산출합니다(AC.92-93). 그리고 이제 ‘생명의숨’, 곧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 겉 사람에까지 이르러 그 겉 사람도 살아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면의흙으로사람을지으시고그의코에생명의숨을불어넣으시니사람이생령이되었다’는 말씀은 속뜻에서 주님께서 천적 인간의 겉 사람까지 형성하시고 살리시는 거듭남의 완성을 묘사합니다. (AC.94)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창2:5, 6)
AC.93
이처럼평화의평온을선물로받고,비로새롭게되며,악하고거짓된것의종살이에서벗어난천적인간의상태는에스겔에서주님에의해다음과같이묘사됩니다. The state of the celestial man,thus gifted with the tranquility of peace—refreshed by the rain—and delivered from the slavery of what is evil and false, is thus described by the Lord in Ezekiel:
그리고이것이말씀에서‘일곱째날’(seventh)과같은것을의미하는‘셋째날’(thirdday)에이루어진다는것은호세아에서다음과같이선언됩니다. And that this is effected on the“thirdday,”which in the Word signifies the same as the“seventh,”is thus declared in Hosea:
그리고이상태가‘들의성장’(growthofthefield)에비유된다는것은고대교회에관하여말하는에스겔에서다음과같이선언됩니다. And that this state is compared to the“growthofthefield”is declared by Ezekiel,when speaking of the ancient church:
AC.93은 AC.90-92에서 설명한 천적 인간의 ‘평화의평온’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확증합니다. AC.90에서는 비와 안개가 싸움이 그친 뒤의 평화의 평온이라고 했고, AC.91에서는 그 평온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적시고 이슬로 촉촉하게 하는 것과 같다고 했으며, AC.92에서는 그것이 단순히 싸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내적인평화로부터나오는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93에서는 그러한 상태가 에스겔과 호세아와 이사야에서 어떻게 묘사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여러 성경 인용은 서로 떨어진 증거 구절들의 나열이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하나의 천적 상태를 서로 다른 이미지로 보여 주는 말씀들입니다.
가장 긴 겔34의 인용은 그 전체 흐름을 압축하여 보여 줍니다. 먼저 ‘평화의언약’이 세워지고 ‘악한짐승’이 땅에서 그치며, 사람이 광야와 수풀에서도 평안히 거합니다. 이어 ‘복된비’가 내리고 들의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냅니다. 마침내 멍에가 꺾이고 종으로 삼던 자들의 손에서 건짐을 받습니다. 이것은 AC.93이 처음에 요약한 ‘평화의평온을선물로받고,비로새롭게되며,악하고거짓된것의종살이에서벗어난천적인간’의 상태와 대응합니다. 여기서 평화는 단순한 감정적 안정이 아니라 악과 거짓의 지배에서 벗어나 주님의 질서 안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상태이며, 그 평화 가운데 비가 내리고 열매와 소산이 생깁니다.
이것은 앞의 AC.91-92와 특히 잘 연결됩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지 않을 때에는 탐욕과 거짓으로 인한 싸움과 불안이 있지만, 천적 인간이 되면 그 싸움이 그치고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으로 평온과 생명이 흘러듭니다. 겔34의 ‘악한짐승이그침’과 ‘멍에가꺾임’은 그러한 악과 거짓의 지배가 끝나는 상태와 연결되고, ‘복된비’와 ‘들의나무가열매를맺음’은 평화로부터 생명이 흘러들어 겉 사람 안에서 선하고 참된 것들이 산출되는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AC.90의 ‘비’, AC.91의 ‘들의관목과초목’, AC.92의 ‘신앙의진리들과사랑의선들’이 겔34의 예언적 이미지 안에서 하나의 장면처럼 펼쳐집니다.
호6:2-3의 인용은 여기에 ‘셋째날’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셋째날’이 말씀에서 ‘일곱째날’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호세아에서는 이틀 후에 살리고 셋째 날에 일으켜 주님 앞에서 살게 하며, 이어 여호와께서 ‘비와같이,땅을적시는늦은비와같이’ 임하신다고 합니다. 창2의 일곱째 날도 싸움이 끝난 뒤의 안식과 생명의 상태이고, 호세아의 셋째 날도 다시 살아 주님 앞에서 사는 상태이므로 두 숫자는 여기서 완전히 같은 숫자적 값을 가진다는 뜻이 아니라, 완성과 새로운 생명이라는 같은 영적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특히 호세아에서도 새벽과 비가 함께 등장한다는 점은 앞의 AC.86에서 천적 인간을 ‘아침’이라고 한 것과 AC.90-92에서 비를 평화의 평온으로 설명한 흐름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이어 겔16의 ‘들의성장’은 같은 상태를 성장의 이미지로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이 고대교회에 관하여 말한다고 하면서, 평화 가운데 새 생명을 받은 상태가 들에서 자라나는 것에 비유된다고 봅니다. 이것은 앞에서 ‘들의관목’과 ‘들의초목’이 천적 인간의 겉 사람에서 산출되는 것들을 뜻한다고 한 설명과 이어집니다. 평화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지가 아니라 생명을 낳고 성장시키는 상태입니다. 싸움이 그친 뒤 속 사람으로부터 생명이 흘러들면서 겉 사람 안에 있는 것들이 새 질서 가운데 자라고 열매를 맺습니다.
마지막 사60:21의 ‘여호와께서심으신가지요여호와하나님의손으로하신일’은 AC.88과 다시 연결됩니다. 거기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될 때 그가 ‘하나님의일’이라 불리는 것은 주님 홀로 그를 위하여 싸우시고 그를 창조하고, 형성하고, 만드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AC.93에서도 천적 인간의 평화와 성장과 결실의 마지막 근원은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는 ‘주님께서심으신것’이며 ‘여호와하나님의손으로하신일’입니다. 비를 내리시는 분도 주님이고, 생명을 주시는 분도 주님이며, 자라게 하시는 분도 주님입니다. 따라서 AC.90-93의 식물과 비의 이미지는 결국 AC.88의 ‘새로운창조,곧거듭남은주님홀로하시는일’이라는 원리 안에서 하나로 모입니다.
결국 AC.93은 천적 인간의 상태를 ‘평화-해방-비-생명-성장-결실’이라는 하나의 흐름으로 보여 줍니다. 악과 거짓의 종살이가 끝나고 평화의 언약 아래 들어오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비가 겉 사람을 적시고 그 안에서 선과 진리가 자라며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의 안식은 정적인 휴식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방해받지 않고 흘러들어 결실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주체는 끝까지 주님이십니다. 천적 인간은 자신을 스스로 심고 자라게 한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께서심으신가지’이며 ‘여호와하나님의손으로하신일’입니다. (AC.93)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창2:5, 6)
AC.92
싸움이그칠때,곧탐욕과거짓으로인한불안이그칠때겉사람에게임하는평화의평온이어떤것인지는평화의상태를아는사람들만이알수있습니다.이상태는너무나기쁨에넘쳐서모든기쁨에대한관념을뛰어넘습니다.그것은단지싸움이그치는것만이아니라내적인평화로부터나오는생명이며,말로표현할수없는방식으로겉사람에게영향을미칩니다.그때평화의기쁨으로부터생명을얻는신앙의진리들과사랑의선들이태어납니다. The nature of the tranquility of peace of the external man,on the cessation of combat,or of the unrest caused by cupidities and falsities,can be known only to those who are acquainted with a state of peace. This state is so delightful that it surpasses every idea of delight:it is not only a cessation of combat,but is life proceeding from interior peace,and affecting the external man in such a manner as cannot be described;the truths of faith,and the goods of love,which derive their life from the delight of peace,are then born.
해설
AC.92는 앞의 AC.90-91에서 말한 ‘평화의평온’이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를 설명합니다. AC.91에서는 영적 인간일 때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지만,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므로 싸움이 그치고 평온이 뒤따른다고 했습니다. AC.92는 이제 그 평온이 단순히 갈등이나 시험이 사라진 소극적인 정적이 아니라고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내적인평화로부터나오는생명’이라고 부릅니다.
먼저 싸움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탐욕과거짓으로인한불안’이라고 합니다.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겉 사람 안의 탐욕과 거짓에 부딪힐 때 인간 안에 싸움이 생깁니다. 따라서 싸움이 그친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이 더 이상 고민하거나 갈등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탐욕과 거짓이 지배력을 잃고 겉 사람이 속 사람의 질서에 순종하게 됨으로써, 이전에 인간을 흔들던 영적 불안이 그치는 것입니다. AC.91의 ‘겉사람이속사람에게순종하고섬긴다’는 설명이 AC.92에서는 ‘탐욕과거짓으로인한불안이그친다’는 말로 더욱 구체화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평화의 상태가 얼마나 기쁜지는 실제로 그것을 아는 사람만이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기쁨은 ‘모든기쁨에대한관념을뛰어넘는다’고까지 표현합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즐거움의 양을 극대화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즐거움은 흔히 사람이 원하는 것을 얻는 데서 생기지만, 여기서 말하는 기쁨은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질서가 회복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평화가 인간의 외적인 삶에까지 흘러드는 데서 생깁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외부 환경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져서 생기는 기쁨보다 훨씬 내적인 것입니다.
이 점에서 ‘그것은단지싸움이그치는것만이아니라’라는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평화를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라고 정의할 수 없듯이, 천적 인간의 평온도 시험과 갈등이 없어진 빈 공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싸움이 있던 자리를 ‘내적인평화로부터나오는생명’이 채웁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겉 사람에게까지 흘러들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AC.91에서 비와 안개가 마치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적시고 이슬로 촉촉하게 하는 수증기와 같다고 한 까닭도 여기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내려오는 것은 단순한 고요함이 아니라 생명이며, 그 생명이 겉 사람을 적시고 살리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마지막 문장에 나타납니다. ‘신앙의진리들과사랑의선들’이 그때 태어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순서입니다.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이 인간의 자기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기쁨으로부터생명을얻어’ 태어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앞 AC.88에서 새로운 창조, 곧 거듭남은 주님 홀로 하시는 일이라고 했던 것과도 정확히 이어집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인 평화가 겉 사람에게 생명을 흘려보내고, 그 생명으로부터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이 살아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신앙의 진리는 단순히 머릿속에 저장된 교리적 지식이 아니며, 사랑의 선 역시 외적으로 수행한 선행의 목록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둘 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살아 있는 진리와 선입니다.
이것은 AC.91의 ‘이성에속한것들과기억지식에속한것들’과도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평화에서 나오는 평온이 천적 영적 기원을 가진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을 산출한다고 했고, 여기서는 같은 평화의 기쁨으로부터 생명을 얻는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태어난다고 합니다. 따라서 천적 상태에서는 이성, 기억지식, 신앙의 진리, 사랑의 선이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새로운 질서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알고 있느냐만이 아니라 그것이 어디에서 생명을 받느냐입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처럼 소유하려 할 때와 주님으로부터 오는 평화와 생명을 받아 그 안에서 사용될 때, 같은 진리와 지식도 전혀 다른 상태에 놓입니다.
결국 AC.92가 말하는 ‘평화의평온’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생명을 낳는 상태입니다. 싸움이 그쳤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없어졌다는 뜻에 그치지 않고, 그 자리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인 평화의 생명이 흘러들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 생명은 속 사람 안에만 머물지 않고 겉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며, 거기서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을 살아 있게 합니다. 그러므로 AC.90의 ‘비’, AC.91의 ‘안개와평온’, AC.92의 ‘내적인평화로부터나오는생명’은 하나의 흐름입니다. 주님의 안식은 정지나 무활동이 아니라, 싸움이 그친 인간 안에서 주님의 생명이 더욱 평화롭게 흘러들어 선과 진리를 낳는 상태입니다. (AC.92)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창2:5, 6)
AC.91
그러나이러한것들이무엇을함축하는지는사람이영적인간에서천적인간이되어갈때그의상태가어떠한지를알지못하면도저히지각할수없습니다.그것들은깊이감추어져있기때문입니다.사람이영적인간일때에는겉사람이아직속사람에게순종하고섬기려하지않으며,그러므로싸움이있습니다.그러나그가천적인간이되면겉사람이속사람에게순종하고섬기기시작하며,그러므로싸움이그치고평온이뒤따릅니다.(AC.87참조)이평온은‘비’(rain)와‘안개’(mist)로의미됩니다.그것은마치속사람으로부터겉사람을적시고이슬로촉촉하게하는수증기와같습니다.그리고‘평화에서나오는이평온’이‘들의관목’(shrubofthefield)과‘들의초목’(herbofthefield)이라불리는것들을산출합니다.이것들은구체적으로천적영적기원에서나오는이성에속한것들과기억지식에속한것들입니다. But what these things involve cannot possibly be perceived unless it is known what man’s state is while from being spiritual he is becoming celestial,for they are deeply hidden.While he is spiritual,the external man is not yet willing to yield obedience to and serve the internal,and therefore there is a combat;but when he becomes celestial,then the external man begins to obey and serve the internal,and therefore the combat ceases,and tranquility ensues(see n.87).This tranquility is signified by“rain”and“mist,”for it is like a vapor with which the external man is watered and bedewed from the internal;and it is this tranquility,the offspring of peace,which produces what are called the“shrubofthefield,”and the“herbofthefield,”which,specifically,are things of the rational mind and of the memory[rationalia et scientifica]from a celestial spiritual origin.
해설
AC.91은 AC.90에서 제시한 상응을 인간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풀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이 내용이 ‘깊이감추어져’ 있어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어 갈 때의 상태를 알지 못하면 도저히 지각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비’, ‘안개’, ‘들의관목’, ‘들의초목’을 각각 하나의 뜻에 대응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표현의 배후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과정이 있습니다.
사람이 아직 영적 인간일 때에는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기꺼이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습니다.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무엇을 요구하는지는 알면서도, 겉 사람 안에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온 욕구와 습관과 생각들이 있어서 그것에 저항합니다. 그래서 싸움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아무 관계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질서가 아직 겉 사람 안에서 자발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영적 인간에게 싸움이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면 관계가 달라집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섬기기시작’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겉 사람이 사라지거나 인간의 자연적인 기능이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것들이 속 사람의 질서 아래 놓여 그 질서를 기꺼이 섬기게 됩니다. AC.89에서 천적 인간의 형성이 속 사람, 곧 ‘하늘’에서 시작된다고 했고, AC.90에서는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이 ‘지면’과 ‘들’이라 불린다고 했습니다. AC.91은 그 이유를 더욱 안쪽에서 보여 줍니다. 겉 사람이 이제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므로 싸움이 그치고 평온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AC.87과 직접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될 때 악한 영들이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오므로 싸움이 그친다고 했습니다. AC.91은 같은 변화를 이번에는 인간 내부의 질서에서 설명합니다. AC.87이 싸움의 영적 환경을 보여 준다면, AC.91은 그에 상응하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싸움의 종식은 단순히 더 이상 어려운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서로 저항하던 것이 질서 안으로 들어오는 상태입니다.
바로 이때 오는 것이 ‘평온’이며, 그것이 ‘비’와 ‘안개’로 의미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매우 아름다운 자연적 이미지로 설명합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마치 수증기가 올라와 겉 사람을 적시고 이슬로 촉촉하게 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겉 사람은 억압되거나 메말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속 사람으로부터 적셔집니다. 거듭남의 완성은 자연적인 것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속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 두어 생명 있게 하는 과정이라는 점이 이 이미지에 잘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평온을 단순한 평온이라고 하지 않고 ‘평화에서나오는평온’이라고 합니다. 평화가 근원이고 평온은 그 평화에서 나오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평온이 ‘들의관목’과 ‘들의초목’을 산출합니다. AC.90에서는 이것들이 일반적으로 겉 사람이 산출하는 모든 것을 뜻한다고 했는데, AC.91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체적으로 ‘이성에속한것들과기억지식에속한것들’을 뜻한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이 된다고 해서 이성과 기억지식이 불필요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새로운 기원과 질서 안에 놓입니다.
이 마지막 점은 특히 중요합니다. 앞의 AC.80에서는 천적 인간이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려 하거나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으로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것만 떼어 읽으면 스베덴보리가 이성이나 기억지식을 부정하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91에서는 천적 상태에서도 ‘rationaliaetscientifica’, 곧 이성에 속한 것들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이 분명히 존재하며 산출된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의 존재가 아니라 ‘기원과질서’입니다. 자기 자신과 세상에서 출발하여 신적인 것을 지배하려 할 때가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천적 영적 기원 아래 놓일 때 이성과 기억지식도 올바른 쓰임을 갖게 됩니다.
따라서 AC.91은 거듭남을 ‘내적인것은선하고외적인것은나쁘므로외적인것을버리는과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합니다. 겉 사람은 속 사람을 섬겨야 하지만 없어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과 기억지식 역시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그 근원과 질서가 바뀌어야 합니다. 영적 인간의 상태에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싸움이 있지만, 천적 인간의 상태에서는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기꺼이 순종하면서 평화에서 나오는 평온이 그 겉 사람을 적시고, 거기서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이 새로운 질서 가운데 산출됩니다. 이것이 ‘비’, ‘안개’, ‘들의관목’, ‘들의초목’이라는 창2의 자연적 이미지 속에 감추어진 천적 인간의 형성 과정입니다. (AC.91)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And there was no shrub of the field as yet in the earth, and there was no herb of the field as yet growing, because Jehovah God had not caused it to rain upon the earth. And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And he made a mist to ascend from the earth, and watered all the faces of the ground.(창2:5, 6)
AC.90
‘들의관목’(shrubofthefield)과‘들의초목’(herbofthefield)은일반적으로그의겉사람이산출하는모든것을의미합니다.겉사람은그가영적인간으로있는동안에는‘땅’(earth)이라불리지만,천적인간이되면‘지면’(ground),그리고또한‘들’(field)이라불립니다.곧이어‘안개’(mist)라고불리는‘비’(Rain)는싸움이그칠때의평화의평온입니다. By the“shrubofthefield”and the“herbofthefield”are meant in general all that his external man produces. The external man is called“earth”while he remains spiritual,but“ground”and also“field”when he becomes celestial. “Rain,”which is soon after called“mist,”is the tranquility of peace when combat ceases.
해설
AC.90은 바로 앞 AC.89에서 제시한 어휘 변화 가운데 하나를 곧바로 설명합니다. 창2에서는 앞의 창조 기사와 달리 ‘땅’뿐 아니라 ‘지면’과 ‘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단순한 문체상의 변화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들의관목’과 ‘들의초목’은 일반적으로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이 산출하는 모든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나오는 식물의 표현들은 자연계의 식물 자체보다 천적 인간의 겉 사람 안에서 나타나는 것들을 묘사하는 말씀으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같은 겉 사람을 가리키면서도 인간의 상태에 따라 말씀에서 사용되는 표현이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영적 인간으로 있는 동안 그의 겉 사람은 ‘땅(earth)’이라 불리지만, 천적 인간이 되면 ‘지면(ground)’, 그리고 ‘들(field)’이라 불립니다. AC.89에서 스베덴보리는 창2에 들어오면서 이전에는 없던 ‘지면’과 ‘들’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천적 인간이 다루어지고 있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로 제시했습니다. AC.90은 이제 그 이유를 직접 밝힙니다. 겉 사람 자체가 없어지거나 전혀 다른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겉 사람이 천적 질서 안에 들어감에 따라 그것을 나타내는 말씀의 표현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 점은 AC.89의 ‘천적인간의형성은속사람,곧하늘로부터시작된다’는 설명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갖게 되면 그 질서가 겉 사람에까지 미치고, 겉 사람은 그에 따라 산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들의관목’과 ‘들의초목’이 ‘그의겉사람이산출하는모든것’을 의미한다는 말은 겉 사람이 독립적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앞 AC.88에서 새로운 창조, 곧 거듭남은 주님 홀로 하시는 일이라고 했고, AC.89에서는 천적 인간의 형성이 속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90의 겉 사람의 산출 역시 그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땅’, ‘지면’, ‘들’을 하나의 고정된 상응 사전처럼 다루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90이 직접 말하는 범위는 현재의 문맥에서 영적 인간의 겉 사람이 ‘땅’이라 불리고,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은 ‘지면’과 ‘들’이라 불린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연물의 명칭 자체보다 인간의 내적 상태가 달라지면서 동일한 겉 사람도 말씀 안에서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앞 AC.88에서 ‘창조하다’, ‘형성하다’, ‘만들다’라는 비슷해 보이는 표현에도 서로 구별되는 관념이 있다고 한 것과 함께,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세밀한 어휘 차이를 얼마나 중요하게 읽는지를 보여 줍니다.
마지막 문장은 다시 안식의 주제로 돌아갑니다. 스베덴보리는 ‘비’를 곧이어 나올 ‘안개’와 연결하면서 그것을 ‘싸움이그칠때의평화의평온’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AC.84-87의 흐름과 직접 이어집니다. 여섯 날 동안에는 싸움과 수고가 있었고,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 또는 안식일이 될 때 싸움이 그칩니다. AC.87에서는 악한 영들이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오면서 싸움이 그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90은 그 뒤에 오는 상태를 단순히 ‘싸움이없음’이라는 소극적인 상태로만 말하지 않고 ‘평화의평온’이라는 적극적인 상태로 표현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단순히 외부의 갈등이 없거나 마음이 잠시 편안한 심리 상태와 같지 않습니다. 문맥상 이것은 거듭남의 싸움이 그치고 주님의 질서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흘러들어 가는 천적 상태의 평온입니다. 바로 앞 AC.85에서 천적 인간은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행동하며, 그 결과 내적인 평화와 행복을 누린다고 했습니다. AC.90의 ‘평화의평온’도 그 흐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와 ‘안개’는 그러한 안식의 상태와 관련하여 앞으로 더 구체적으로 설명될 것입니다.
결국 AC.90은 짧은 번호 안에서 창2의 새로운 어휘와 천적 인간의 상태를 연결합니다. 영적 인간의 겉 사람을 나타내던 ‘땅’은 천적 인간의 문맥에서 ‘지면’과 ‘들’로 표현되고, 그 겉 사람에서 산출되는 것들은 ‘들의관목’과 ‘들의초목’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싸움 이후의 ‘평화의평온’이라는 상태 안에서 다루어집니다. AC.89가 천적 인간의 형성이 속 사람에서 시작된다는 큰 방향을 제시했다면, AC.90은 그 속 사람의 질서 아래 놓인 겉 사람이 어떤 새로운 상태에 들어가는지를 보여 주기 시작하는 번호입니다. (AC.90)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창2:4)
AC.89
‘하늘과땅의내력’(nativitiesoftheheavensandoftheearth)은천적인간의형성을뜻합니다.여기서그의형성이다루어지고있다는것은뒤따르는모든세부사항으로부터매우분명합니다.아직초목이자라지않았다는것,땅을갈사람이없었다는것,여호와하나님께서사람을지으셨다는것,그리고그후에들의모든짐승과하늘의모든새를만드셨다는것등이그러합니다.이들의형성은이미앞장에서다루어졌음에도여기서다시언급됩니다.이모든것으로부터여기서는다른사람이다루어지고있음이분명합니다. 그러나이것은이제처음으로주님께서‘여호와하나님’(JehovahGod)이라불리신다는사실에서더욱분명합니다.앞에서영적인간을다루는구절들에서는단지‘하나님’(God)이라고만불리셨습니다.더나아가이제는‘땅’(ground)과‘들’(field)이언급되는반면,앞에서는오직‘땅’(earth)만언급되었습니다. 또이구절에서는먼저‘하늘’(heaven)이‘땅’(earth)보다앞에언급되고,그후에는‘땅’(earth)이‘하늘’(heaven)보다앞에언급됩니다.그이유는‘땅’(earth)은겉사람을,‘하늘’(heaven)은속사람을의미하기때문입니다.영적인간에게서는개혁이‘땅’(earth),곧겉사람으로부터시작되는반면,여기서다루는천적인간에게서는속사람,곧‘하늘’(heaven)로부터시작됩니다.The“nativitiesoftheheavensandoftheearth”are the formations of the celestial man.That his formation is here treated of is very evident from all the particulars which follow,as that no herb was as yet growing;that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as well as that Jehovah God formed man,and afterwards,that he made every beast and bird of the heavens,notwithstanding that the formation of these had been treated of in the foregoing chapter;from all which it is manifest that another man is here treated of.This however is still more evident from the fact that now for the first time the Lord is called“JehovahGod,”whereas in the preceding passages,which treat of the spiritual man,he is called simply“God”;and,further,that now“ground”and“field”are mentioned,while in the preceding passages only“earth”is mentioned.In this verse also“heaven”is first mentioned before“earth,”and afterwards“earth”before“heaven”;the reason of which is that“earth”signifies the external man,and“heaven”the internal,and in the spiritual man reformation begins from“earth,”that is,from the external man,while in the celestial man,who is here treated of,it begins from the internal man,or from“heaven.”
해설
AC.89는 창2:4부터 시작되는 이야기가 창1의 창조 기사를 단순히 다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먼저 밝힙니다. ‘하늘과땅의내력’은 속뜻에서 천적 인간의 형성을 뜻합니다. 이것은 뒤이어 나오는 내용만 보아도 알 수 있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창1에서는 이미 식물이 나고 사람과 동물이 창조되었는데, 창2에서는 다시 아직 초목이 자라지 않았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다고 하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다시 들의 짐승과 하늘의 새를 만드셨다고 합니다. 문자적으로만 보면 이미 끝난 창조가 다시 시작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같은 사건을 중복해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다른사람’, 곧 앞에서 다룬 영적 인간과 구별되는 천적 인간의 형성을 다루기 때문에 이러한 서술이 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른사람’이라는 표현은 특히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두 번째 인간이나 별개의 역사적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창1의 여섯 날을 거치며 형성된 영적 인간과, 이제 창2에서 더 깊이 다루어질 천적 인간의 상태가 서로 다르다는 뜻입니다. AC.83에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면서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한다고 했고, AC.84-88에서는 그 천적 인간을 일곱째 날, 안식일, 하나님의 일로 설명했습니다. AC.89부터는 바로 그 천적 인간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더욱 세밀하게 보여 주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창1과 창2의 차이는 단순한 두 창조 이야기의 차이가 아니라 속뜻에서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이라는 서로 다른 상태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사실을 보여 주는 중요한 표지로 하나님의 이름이 달라지는 것을 지적합니다. 앞에서 영적 인간이 다루어질 때에는 단지 ‘하나님’이라 하였는데, 이제 처음으로 ‘여호와하나님’이라 합니다. AC.89자체는 여기서 왜 천적 인간과 관련하여 ‘여호와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사용되는지까지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이 번호에서 그 의미를 미리 완성하여 설명하기보다는, 스베덴보리가 하나님의 이름의 변화 자체를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넘어왔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본문상의 표지로 읽고 있다는 점을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하나님’과 ‘여호와하나님’의 차이가 직접 설명될 때 다시 살펴볼 중요한 주제입니다.
또 하나의 변화는 ‘땅’과 ‘들’이라는 표현입니다. 앞에서는 ‘땅’이 언급되었지만 이제는 ‘땅’과 ‘들’이 함께 등장합니다. 이것 역시 스베덴보리에게는 우연한 어휘 변화가 아닙니다. 다만 AC.89의 목적은 아직 ‘들’의 상응을 자세히 해설하는 데 있지 않고, 창2:4이하의 어휘가 앞의 창조 서술과 달라졌다는 사실을 통해 지금부터 다른 상태의 인간이 다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들’의 구체적인 의미 역시 뒤의 본문에서 직접 설명될 때 충분히 다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AC.89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마지막에 나오는 ‘하늘’과 ‘땅’의 어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땅’은 겉 사람을, ‘하늘’은 속 사람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그런데 창2:4에서는 처음에 ‘하늘과땅’이라 했다가 이어서 ‘땅과하늘’이라고 순서를 바꿉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어순까지 의미 있는 것으로 읽습니다. 영적 인간의 개혁은 ‘땅’, 곧 겉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반면, 천적 인간의 형성은 ‘하늘’, 곧 속 사람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AC.82에서 ‘하늘은속사람,땅은겉사람’을 뜻한다고 밝힌 설명이 여기서 한 단계 더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인간의개혁은겉사람으로부터시작되고천적인간은속사람으로부터시작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것을 단순히 영적 인간은 외적인 사람이고 천적 인간은 내적인 사람이라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 영적 인간에게도 분명히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차이는 주님께서 사람을 이끄시는 질서와 사람이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있습니다. 영적 인간은 먼저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따라 살면서 겉 사람의 삶이 질서 안으로 들어가고, 그 과정을 통해 내적인 것이 열려 가는 방식이 두드러집니다. 반면 천적 인간의 상태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 안에 있는 사랑과 선이 주도권을 가지며, 거기에서 겉 사람의 모든 것이 질서 지어집니다. 앞서 AC.83에서 신앙보다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한다고 한 것과도 같은 방향입니다.
이 때문에 AC.89는 창2의 독법을 결정하는 중요한 안내판과 같습니다. 앞으로 나오는 초목, 비, 땅을 가는 사람, 흙으로 지어진 사람, 생명의 숨, 에덴동산, 각종 나무, 강과 들과 짐승을 창1에서 이미 나온 것들의 단순 반복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그것들은 천적 인간이 어떻게 형성되고 그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떤 질서 가운데 놓이는지를 보여 주는 새로운 문맥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특히 창1에서는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을 향해 진행되는 영적 인간의 개혁이 두드러졌다면, 이제 창2에서는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향하여 질서가 내려오는 천적 인간의 형성이 중심이 됩니다.
동시에 여기서 ‘속사람에서시작된다’는 표현을 인간이 자기 내면 깊은 곳을 스스로 탐색하여 천적 상태에 도달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바로 앞 AC.88은 새로운 창조, 곧 거듭남이 주님 홀로 하시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형성이 속 사람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내면에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속 사람으로부터 역사하시고 그곳에서부터 겉 사람을 질서 있게 만드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AC.88의 ‘주님께서창조하고,형성하고,만드신다’는 선언과 AC.89의 ‘천적인간의형성은속사람에서시작된다’는 설명은 이렇게 서로 이어집니다.
결국 AC.89의 핵심은 창2:4이하를 읽는 관점의 전환입니다. 반복되는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천적 인간의 형성에 관한 이야기이며, ‘여호와하나님’이라는 이름, ‘땅’과 ‘들’이라는 어휘, ‘하늘과땅’의 순서까지 모두 그 전환을 알리는 표지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차이는 영적 인간의 개혁이 겉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데 비해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창2의 이후 구절들은 바로 이 질서 안에서 읽어야 하며, AC.89는 그 전체 해석의 방향을 미리 세워 주는 번호입니다. (AC.89)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2, 3)
AC.88
영적인간이천적인간이될때그는‘하나님의일’(workofGod)이라불립니다.주님홀로그를위하여싸우셨고,그를창조하고,형성하고,만드셨기때문입니다.그러므로여기서‘하나님이일곱째날에그의일을마치셨다’(Godfinishedhisworkontheseventhday)고하며,또두번이나‘그모든일을마치고쉬셨다’(herestedfromallhiswork)고합니다.선지서들에서도사람은거듭‘여호와의손과손가락으로하신일’(workofthehandsandofthefingersofJehovah)이라불립니다.거듭난사람에관하여말하는이사야의다음말씀과같습니다. When the spiritual man becomes celestial,he is called the“workofGod,”because the Lord alone has fought for him,and has created,formed,and made him;and therefore it is here said,“Godfinishedhisworkontheseventhday”;and twice,that“herestedfromallhiswork.”By the prophets man is repeatedly called the“workofthehandsandofthefingersofJehovah”;as in Isaiah,speaking of the regenerate man:
이로부터새로운창조,곧거듭남은주님홀로하시는일이라는것이분명합니다.‘창조하다’(create),‘형성하다’(form),‘만들다’(make)라는표현들은위의구절,곧‘하늘을창조하시고,땅을형성하시며,그것을만드신다’(creatingtheheavens,formingtheearth,andmakingit)는말씀에서뿐아니라같은선지서의다른곳에서도서로뚜렷이구별되어사용됩니다.다음말씀과같습니다. Hence it is evident that the new creation, or regeneration, is the work of the Lord alone. The expressions to “create,” to “form,” and to “make,” are employed quite distinctively, both in the above passage—“creatingtheheavens,formingtheearth,andmakingit”—andin other places in the same prophet, as:
또한앞장과이창세기2장에서도그러합니다.지금다루고있는말씀,곧‘하나님이만드시면서창조하신그의모든일을마치고쉬셨다’(herestedfromallhisworkwhichGodinmakingcreated)는구절에서도그러합니다.속뜻에서는이러한용법이언제나서로구별되는관념을전달합니다.주님께서‘창조자’(creator),‘형성자’(former),또는‘만드신이’(maker)라고불리실때에도마찬가지입니다. and also in both the preceding and this chapter of Genesis;as in the passage before us:“herestedfromallhisworkwhichGodinmakingcreated.” In the internal sense this usage always conveys a distinct idea;and the case is the same where the Lord is called“creator,”“former,”or“maker.”
해설
AC.88은 앞의 여러 번호에서 계속되어 온 ‘주님의일’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분명하게 결론짓습니다.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될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의일’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주님 홀로 그를 위하여 싸우셨고, 그를 창조하고, 형성하고,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87과 직접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싸움을 수행한 것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여 주님 홀로 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AC.88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싸움뿐 아니라 사람을 ‘창조하고,형성하고,만드는’ 전체 과정 역시 주님의 일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거듭난 인간은 자기 자신이 완성한 작품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신 ‘일’입니다.
그래서 창2에서 ‘하나님이그의일을마치셨다’, ‘그모든일을마치고쉬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창조 이야기의 속뜻에서 하나님의 ‘일’은 단순히 자연계의 우주와 생물을 제작하는 행위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인간을 죽은 상태에서 영적 인간으로, 그리고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새로운 창조가 주님의 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매우 명시적으로 ‘새로운창조,곧거듭남’이라고 부르며, 이 새로운 창조가 ‘주님홀로하시는일’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창1-2를 거듭남의 이야기로 읽는 것은 우리가 창세기 본문 위에 나중의 교리를 임의로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AC.88에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직접 밝히고 있는 속뜻입니다.
여기서 ‘주님홀로’라는 표현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제거하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거듭남 가운데 실제로 진리를 배우고, 악을 거절하고, 시험 가운데 싸우며, 선택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에서 생명과 능력을 주시고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며 인간을 새롭게 만드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주님의 역사를 받아들이고 자유롭게 응답하지만 자기 자신을 거듭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일’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영적 공로를 근본적으로 배제합니다. 사람이 오랜 시험을 견디고 악을 피하며 선한 삶을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내가나를이렇게만들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거듭난 인간 자신이 바로 주님께서 만드신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실을 선지서의 표현으로 확증합니다. 사람은 ‘여호와의손과손가락으로하신일’이라고 반복하여 불린다고 하면서 사45를 인용합니다. 그곳에서는 땅을 만들고 사람을 창조하며 하늘을 펴신 분이 여호와이심이 선언되는데,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거듭난 사람에 관한 것으로 읽습니다. 이것은 AC.82의 ‘하늘=속사람,땅=겉사람’이라는 설명과도 연결됩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고 형성하고 만드는 말씀은 속뜻에서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새롭게 이루어지는 거듭남과 관계됩니다. 창조의 언어가 곧 거듭남의 언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AC.88에는 또 하나 매우 중요한 주제가 있습니다. 바로 ‘창조하다’, ‘형성하다’, ‘만들다’라는 세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세 말이 아무 차이 없이 반복되는 동의어가 아니라 ‘서로뚜렷이구별되어’ 사용되며, 속뜻에서는 각각 구별되는 관념을 전달한다고 말합니다. 이 점은 앞의 AC.84에서 이미 예고되었습니다. 거기서 ‘이와같이사람이창조되고,형성되고,만들어졌다’고 했지만 각각의 차이를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AC.88에서는 적어도 세 표현이 의도적으로 구별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다만 AC.88자체는 ‘창조하다’가 정확히 무엇이고, ‘형성하다’와 ‘만들다’가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까지 풀어 주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창조=속사람,형성=이성,만듦=겉사람’ 또는 ‘창조=신앙,형성=체어리티,만듦=행위’와 같은 식으로 우리가 임의의 세 단계 체계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43:7에서도 ‘내가내영광을위하여창조한자’, ‘내가형성한자’, ‘내가만든자’라는 세 표현이 연이어 나타나는 것을 근거로 들며, 창1과 창2에서도 같은 구별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말씀에서 비슷한 단어가 반복된다고 해서 모두 단순한 동의어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각각의 정확한 차이는 AC전체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설명하는 내용을 더 확인하여 판단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원리는 말씀의 영감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이해와도 관계됩니다. 말씀의 표현은 우연히 선택된 것이 아니며, 속뜻에서는 단어의 선택과 반복에도 질서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원리를 우리가 모든 성경의 유사어에 임의로 적용하여 서로 다른 상응을 만들어 내서는 안 됩니다. AC.88의 경우에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창조하다’, ‘형성하다’, ‘만들다’가 뚜렷이 구별되어 사용된다고 명시하기 때문에 특별히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 표현보다 더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그 모든 동사의 주어가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창조하시는 분도 주님이고, 형성하시는 분도 주님이며, 만드시는 분도 주님입니다. 세 동사의 차이를 아무리 정교하게 분석하더라도 이 중심을 놓치면 AC.88의 논지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 번호의 결론은 ‘새로운창조,곧거듭남은주님홀로하시는일’이라는 한 문장으로 모입니다. 창1에서 빛이 생기고, 물과 땅이 나뉘고, 식물이 자라고, 광명체가 나타나고, 생물이 생기며, 마침내 사람이 창조되는 모든 과정은 속뜻에서 주님께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거듭남의 질서를 묘사합니다. 그리고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것도 인간이 자기 힘으로 한 단계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AC.87에서 주님 홀로 그를 위하여 싸우셨고, AC.88에서 주님께서 그를 창조하고, 형성하고,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 자체가 ‘하나님의일’입니다.
이 관점에서 ‘주님의일’과 ‘주님의안식’도 하나로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쉬신다는 것은 창조주께서 피곤해지셨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수행하신 새로운 창조의 일이 그 사람 안에서 안식의 상태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거듭남이 주님의 일이라면 사람이 자기 안에서 발견하는 선을 자기 소유나 공로로 돌릴 이유가 없으며, 동시에 변화가 더디다고 해서 모든 것을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는 절망에 빠질 이유도 없습니다. 인간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피하며 자유롭게 응답하지만, 그를 새롭게 창조하고, 형성하고, 만드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것이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그가 ‘하나님의일’이라 불리는 이유이며, AC.88이 말하는 새로운 창조, 곧 거듭남의 핵심입니다. (AC.88)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2, 3)
AC.87
천적인간이‘안식일’(sabbath)또는‘안식’(rest)인또하나의이유는,그가천적인간이될때싸움이그치기때문입니다.악한영들은물러가고선한영들이가까이오며,천적천사들도가까이옵니다.이들이함께있을때에는악한영들이도저히머물수없으므로멀리달아납니다.그리고싸움을수행한것은사람자신이아니라사람을위하여주님홀로하신것이므로,주님께서‘쉬셨다’(rested)고합니다. Another reason why the celestial man is the“sabbath,”or“rest,”is that combat ceases when he becomes celestial. The evil spirits retire,and good ones approach,as well as celestial angels;and when these are present,evil spirits cannot possibly remain,but flee far away. And since it was not the man himself who carried on the combat,but the Lord alone for the man,it is said that the Lord“rested.”
해설
AC.87은 왜 천적 인간이 ‘안식일’이며 ‘안식’인지를 또 하나의 각도에서 설명합니다. 앞의 AC.84에서는 모든 싸움이 그치기 때문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했고, AC.85에서는 안식이 주님의 뜻이 사람의 뜻이 되는 상태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AC.87에서는 그 싸움이 실제로 어떻게 그치는지, 그리고 누가 그 싸움을 수행해 왔는지를 밝힙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될 때 싸움이 그친다고 합니다. 이 말은 AC.81과 다시 연결됩니다. 거기서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고, 천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지 않으며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때 그것들을 멸시한다고 했습니다. AC.87은 그 차이의 배후에 있는 영계의 질서를 설명합니다.
천적 상태에 이르면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이 가까이 오며, 천적 천사들도 가까이 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있을 때에는 악한 영들이 도저히 머물 수 없으므로 멀리 달아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싸움이 그친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이 더 강한 의지력을 가지게 되어 악을 억누른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을 둘러싼 영적 환경과 결합의 질서 자체가 달라졌다는 설명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영적 상태를 영들과 천사들의 가까움과 멀어짐으로 설명한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인간의 선과 악은 완전히 고립된 내면 현상으로만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영계와의 결합 속에서 살며, 그의 지배적인 사랑과 상태에 따라 어떤 영적 사회와 연결되는지가 달라집니다. AC.87은 바로 그 질서를 짧게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의 핵심은 단순히 ‘악한영은떠나고선한영과천사가가까이온다’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마지막 문장이 더 중요합니다. ‘싸움을수행한것은사람자신이아니라사람을위하여주님홀로하신것이다.’ 이 문장이 있어야 ‘주님께서쉬셨다’는 말의 의미가 완성됩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매우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인간은 싸움 가운데 실제로 고통을 느끼고 선택하며 악을 거절합니다. 그러나 그 싸움을 가능하게 하고 악에 맞서 선과 진리를 보존하며 승리를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여섯 날의 모든 싸움이 끝났을 때 ‘사람이쉬었다’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쉬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역사 사이를 균형 있게 이해하게 합니다. ‘주님홀로싸우셨다’고 해서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반대로 인간이 실제로 싸움을 경험한다고 해서 그 힘과 승리의 근원이 인간 자신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악과 거짓을 거절해야 하지만, 그 싸움의 능력과 선한 결과는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따라서 AC.87은 거듭남을 자기 수련이나 도덕적 자기극복으로 보는 관점을 분명히 교정합니다. 천적 인간은 자기 힘으로 수많은 악한 영들을 쫓아낸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그 사람 안의 질서를 바꾸시고, 악한 영들이 머물 수 없는 상태로 이끄신 결과 싸움이 그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악한영들이도저히머물수없다’는 표현도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을 천적 인간에게 더 이상 어떤 유혹이나 공격도 절대로 접근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확대하면 AC.81과 긴장이 생깁니다. AC.81은 천적 인간도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 공격이 이전처럼 지속적인 내적 싸움의 상태를 만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악한 영들이 가까이 머물며 사람을 계속 붙드는 상태는 끝나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의 가까움이 지배적인 질서가 됩니다. 그래서 악한 영들의 접근은 일시적 공격일 수는 있어도 그 사람 안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싸움을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AC.85에서 말한 ‘주님의뜻이그의뜻이된다’는 설명과도 잘 연결됩니다. 사람이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삶의 중심으로 삼을수록 악한 영들이 그와 결합할 조건이 많지만, 주님의 선을 사랑하고 그 뜻을 자신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천적 상태에서는 그 결합의 질서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싸움이 자연스럽게 그치게 됩니다.
AC.87의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안식을 단순한 심리적 평온이 아니라 영적 질서의 결과로 설명한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편안해서 안식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싸움을 끝내시고 악한 영들이 물러가며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오는 질서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안식입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평화는 자기최면이나 감정 조절로 만들어 낸 평온과 다릅니다. 그 평화는 주님께서 이루신 거듭남의 결과이며, 영적 결합의 질서가 바뀐 데서 오는 안식입니다.
이번 번호에서 ‘천적천사들’이 따로 언급되는 것도 눈에 띕니다. 선한 영들뿐 아니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온다고 했습니다. 이는 천적 인간의 상태가 단지 악이 약해진 상태가 아니라 더 높은 천적 질서와의 결합이 이루어진 상태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AC.87자체는 천적 천사들의 성격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므로 여기서 더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AC.84-87을 함께 보면 안식의 의미가 점점 풍성해집니다. AC.84에서는 싸움이 그쳐 주님께서 쉬신다고 했고, AC.85에서는 그 안식이 주님의 뜻이 사람의 뜻이 되는 평화의 상태라고 했습니다. AC.86에서는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를 안식일의 저녁이라고 했고, 이제 AC.87에서는 그 싸움이 그치는 영적 배경과 주체를 설명합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은 창세기의 창조 기사 전체를 거듭남으로 읽는 데 중요한 열쇠입니다. ‘주님께서쉬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육체적으로 피곤하여 일을 멈추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을 위하여 수행하시던 거듭남의 싸움이 그 사람 안에서 안식의 상태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싸움의 주체가 애초부터 주님이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싸움이 인간 자신의 일이었다면 그 싸움이 끝났을 때 ‘인간이쉬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홀로 싸우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 일이 끝났을 때 주님께서 ‘쉬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공로를 배제하는 매우 중요한 설명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많은 싸움을 겪고 악을 이겼다고 해도, 그 승리를 자기 능력이나 자기 의의 근거로 삼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싸움의 힘과 승리의 근원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악을 악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거절하는 실제 선택을 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강제로 그를 거듭나게 하시는 방식은 아닙니다. AC.87은 자유를 없애는 말이 아니라 승리의 근원을 밝히는 말입니다.
따라서 ‘주님홀로싸우신다’는 표현은 ‘나는아무것도하지않아도된다’는 수동주의와도 다릅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실제로 싸워야 하지만, 그 힘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그 후자의 진실, 곧 실제 근원은 주님이라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이 점에서 AC.87은 proprium의 문제와도 조심스럽게 연결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싸움과 승리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 하면 거듭남마저 자기 공로가 됩니다. 그러나 싸움은 주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하시는 것이며, 인간은 그 주님의 역사에 응답하는 존재입니다. 이 질서가 유지될 때 안식도 자기 성취의 결과가 아니라 주님의 선물이 됩니다.
AC.87은 짧지만 ‘싸움과안식’, ‘인간의자유와주님의역사’, ‘영들과천사들의결합’, ‘거듭남의주체’가 한 문단 안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번호를 단순히 ‘악한영들이떠난다’는 흥미로운 영계 묘사로만 읽으면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결국 천적 인간이 안식일인 이유는 그가 더 이상 자기 힘으로 싸울 필요가 없을 만큼 강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수행하시던 싸움이 그 사람 안에서 안식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오며, 그 질서 안에서 싸움은 그칩니다.
그러므로 AC.87의 마지막 ‘주님께서쉬셨다’는 말은 거듭남 전체를 주님의 일로 돌리는 고백입니다. 사람은 싸움을 경험하지만 싸우시는 분은 주님이시고, 사람은 승리를 경험하지만 승리를 이루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의 일이 천적 상태에 이르면 싸움이 그치고 안식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천적 인간이 ‘안식일’이며 ‘안식’인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AC.87)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2, 3)
AC.86
‘여섯째날’(sixthday)이된영적인간이천적인간이되기시작할때,곧여기서처음다루고있는이상태가‘안식일의저녁’(eveofthesabbath)입니다.이것은유대교회에서저녁부터안식일을거룩하게지키는것으로표상되었습니다.천적인간은‘아침’(morning)이며,이에대해서는곧이어말할것입니다. When the spiritual man,who has become the“sixthday,”is beginning to be celestial,which state is here first treated of,it is the“eveofthesabbath,”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the keeping holy of the sabbath from the evening. The celestial man is the“morning”to be spoken of presently.
이날은준비일이요안식일이거의되었더라(눅23:54)
해설
AC.86은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넘어가는 경계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섯째날’이 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시작할때’, 그 상태를 ‘안식일의저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천적 인간 자체는 ‘아침’이라고 예고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핵심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 사이에 단절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넘어가는 전환이 있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앞 AC.83에서도 이 전환은 이미 나타났습니다. 사람이 여섯째 날에 이르면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며, 그때 신앙이 아니라 사랑, 곧 영적인 것이 아니라 천적인 것이 ‘주된것이되기시작한다’고 했습니다. AC.86의 표현도 똑같이 ‘천적인간이되기시작할때’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의저녁’은 바로 이 변화가 시작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저녁’을 곧바로 어둠이나 타락이나 악의 상태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창1해설에서 저녁과 아침이 여러 상태의 변화를 나타냈더라도, AC.86은 이번 저녁의 의미를 직접 규정합니다. 그것은 이미 ‘여섯째날’이 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으로 변하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번 문맥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전환의 저녁입니다.
이것은 상응을 기계적인 사전처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좋은 예이기도 합니다. 어떤 표현이 다른 문맥에서 특정한 의미를 지닌다고 해서 언제나 똑같은 뜻을 그대로 대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은 문맥과 상태의 연속성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AC.86에서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안식일의저녁’이 어떤 상태인지 명확히 밝혀 줍니다.
이 ‘저녁’은 아직 완전한 ‘아침’은 아닙니다. 영적 인간은 이미 여섯째 날에 도달했고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었지만, 사랑이 주된 것이 되는 천적 질서가 이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녁은 이전 상태의 끝과 다음 상태의 시작이 맞닿는 경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를 시간적으로 정확한 중간 단계처럼 지나치게 도식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몇 시간이나 몇 단계 동안 ‘저녁상태’에 있다가 어느 순간 ‘아침상태’로 넘어간다는 심리적 시간표를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녁과 아침이라는 말씀의 표현을 통해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변화하는 질서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가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안식일을거룩하게지키는것’으로 표상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대인의 하루 계산법 자체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유대교회의 안식일 준수라는 외적 제도가 더 깊은 영적 실재를 표상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저녁은 천적 안식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AC.85에서 말한 유대교회의 표상적 성격과 그대로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유대교회에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표상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제정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여섯 날의 수고와 일곱째 날의 안식이 싸움과 평화를 표상했듯, 저녁부터 시작되는 안식일도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외적인 안식일 규례에도 하나의 영적 질서가 담겨 있습니다. 안식이 갑자기 아무런 준비 없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싸움과 수고를 지나 안식으로 들어가는 변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섯째 날의 영적 상태가 천적 상태로 깊어지기 시작할 때 이미 안식일의 ‘저녁’이 시작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AC.86은 AC.84-85의 안식 개념을 조금 더 세밀하게 해 줍니다. AC.84에서는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모든 싸움이 그친 상태라고 했고, AC.85에서는 그 안식이 주님의 뜻이 사람 자신의 뜻이 된 상태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AC.86은 그런 상태가 한순간에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되기시작하는’ 전환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실제 성격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진리가 가르치기 때문에 선을 행하고, 양심 때문에 악과 싸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거듭남을 이루어 가시는 동안, 이전에는 의무로 행하던 선을 점차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는 것을 기꺼이 행하게 됩니다.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되는 변화는 이런 식으로 깊어집니다.
그 변화의 시작을 AC.86의 표현을 빌리면 ‘안식일의저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천적 인간의 충만한 ‘아침’은 아니지만, 이미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싸움에서 안식으로, 신앙이 앞서는 질서에서 사랑이 주된 질서로, 양심의 결박에서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의 자유로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적용은 어디까지나 AC.81-86의 흐름을 종합하여 이해한 것입니다. AC.86자체는 매우 간결하게 ‘영적인간이천적인간이되기시작하는상태=안식일의저녁’, ‘천적인간=아침’이라는 두 관계만을 직접 말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에 지나치게 많은 별도의 상응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저녁’을 속 사람과 겉 사람의 특정 관계, 신앙의 특정 단계, proprium의 특정 상태 등으로 더 세분하여 확정할 근거는 이번 문장에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주는 설명만 붙드는 편이 안전합니다. 저녁은 천적으로 되기 시작하는 상태이고, 아침은 천적 인간입니다.
마지막 문장 ‘천적인간은아침이며,이에대해서는곧이어말할것입니다’는 다음 해설을 위한 예고입니다. 그러므로 AC.86자체에서 ‘아침’의 모든 의미를 미리 풀 필요도 없습니다. 이어지는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설명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개요와 상세 해설의 질서를 지키는 방법입니다.
AC.86의 짧은 문장 안에는 앞 번호들의 흐름이 매우 압축되어 있습니다. 여섯째 날은 영적 인간이고, 그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가 안식일의 저녁이며, 완성된 천적 인간은 아침입니다. 여섯째 날에서 일곱째 날로의 변화가 곧 저녁에서 아침으로의 변화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녁에서아침으로’라는 말씀이 단순한 자연적 시간의 반복을 넘어 인간의 영적 상태의 변화를 담을 수 있음을 다시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문맥마다 본문이 주는 설명을 따라야 합니다. 이번에는 특별히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의 전환입니다.
결국 AC.86의 ‘안식일의저녁’은 아직 싸움 속에 머무르는 여섯째 날과 이미 완성된 천적 안식의 아침 사이에 놓인 살아 있는 전환입니다.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하면서 영적인 것이 천적인 것으로 깊어지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가 완성될 때 천적 인간은 ‘아침’이 됩니다. (AC.86)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2, 3)
AC.85
천적인간이‘일곱째날’(seventhday)이며,따라서일곱째날이거룩하게구별되어안식일이라불렸다는것은지금까지밝혀지지않았던아르카나입니다.이는천적인간의본성을아는사람이아무도없었고,영적인간의본성을아는사람도거의없었기때문입니다.이러한무지로인해사람들은영적인간과천적인간사이에큰차이가있음에도불구하고,둘을같은것으로여겨왔습니다.그차이는AC.81에서볼수있습니다.일곱째날에관하여,그리고천적인간이‘일곱째날’(seventhday)또는‘안식일’(sabbath)이라는것에관하여말하자면,이는주님자신이안식일이시라는사실로부터분명합니다.그러므로주님께서는말씀하십니다. That the celestial man is the“seventhday,”and that the seventh day was therefore hallowed,and called the sabbath,are arcana which have not hitherto been discovered.For none have been acquainted with the nature of the celestial man,and few with that of the spiritual man,whom in consequence of this ignorance they have made to be the same as the celestial man,notwithstanding the great difference that exists between them,as may be seen in n.81.As regards the seventh day,and as regards the celestial man being the“seventhday”or“sabbath,”thi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Lord himself is the sabbath;and therefore he says:
이말씀은주님께서사람그자체이시며안식일그자체이심을함축합니다.하늘과땅에있는주님의나라는주님으로말미암아안식일,곧영원한평화와안식이라불립니다.which words imply that the Lord is man himself,and the sabbath itself.His kingdom in the heavens and on the earth is called,from him,a sabbath,or eternal peace and rest.
[2] 여기서다루고있는태고교회는그뒤를이은모든교회보다더욱주님의안식일이었습니다.이후의모든주님의가장내적인교회도역시안식일이며,거듭난사람도천적인간이될때안식일입니다.그가주님의형상이기때문입니다.그에앞서여섯날의싸움또는수고가있습니다.이러한것들은유대교회에서수고하는날들과안식일인일곱째날로표상되었습니다.그교회에서는주님과주님의나라를표상하지않는것은아무것도제정되지않았기때문입니다.같은것이법궤가나아갈때와쉴때에도표상되었습니다.광야에서법궤가나아간것은싸움과시험을표상하였고,법궤가쉰것은평화의상태를표상하였습니다.그러므로법궤가떠날때모세가말했습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which is here treated of,was the sabbath of the Lord above all that succeeded it.Every subsequent inmost church of the Lord is also a sabbath;and so is every regenerate person when he becomes celestial,because he is a likeness of the Lord.The six days of combat or labor precede.These things were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the days of labor,and by the seventh day,which was the sabbath;for in that church there was nothing instituted which was not representative of the Lord and of his kingdom.The like was also represented by the ark when it went forward,and when it rested,for by its journeyings in the wilderness were represented combats and temptations,and by its rest a state of peace;and therefore,when it set forward,Moses said:
천적인간의본성은이와같아서그는자기자신의뜻에따라행동하지않고주님의선하신뜻에따라행동하며,그주님의뜻이그의‘뜻’(desire)이됩니다.이리하여그는내적인평화와행복을누리는데,이것이여기서는‘땅의높은곳에올림을받는것’(beingupliftedovertheloftythingsoftheearth)으로표현되며,동시에외적인평온과기쁨을누리는데,이것은‘야곱의기업으로양육되는것’(beingfedwiththeheritageofJacob)으로의미됩니다. Such is the quality of the celestial man that he acts not according to his own desire,but according to the good pleasure of the Lord,which is his“desire.”Thus he enjoys internal peace and happiness—here expressed by “beingupliftedovertheloftythingsoftheearth”—and at the same time external tranquility and delight,which is signified by “beingfedwiththeheritageofJacob.”
해설
AC.85는 앞의 AC.84에서 제시된 ‘천적인간은일곱째날’이라는 아르카나를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이유부터 말합니다.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없었고 영적 인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에도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같은 것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AC.81을 가리킵니다.
이 연결은 중요합니다. AC.81에서 영적 인간은 신앙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인정하고 양심의 결박 가운데 싸우는 사람이며,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고 악과 거짓을 멸시하는 사람으로 구별되었습니다. AC.83에서는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면서 사랑이 주된 것이 되는 것이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했고, AC.84에서는 천적 인간이 바로 일곱째 날이며 모든 싸움이 그치기 때문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했습니다. AC.85는 이 모든 설명을 ‘안식일’이라는 하나의 표상 안에 모읍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천적 인간을 안식일이라고 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지 않습니다. ‘주님자신이안식일이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이번 번호의 중심입니다. 천적 인간이 안식일인 것은 그 사람에게서 독립적으로 어떤 높은 영적 상태가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안식의 근원이신 주님의 형상이 그 사람 안에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를 확증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막2:28의 ‘인자는안식일에도주인이니라’를 인용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는 ‘주님께서사람그자체이시며안식일그자체이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사람그자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참된 인간성의 원형과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이 ‘사람’이며 ‘안식일’인 것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말미암습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하늘과 땅에 있는 주님의 나라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안식일’, 곧 ‘영원한평화와안식’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여기서 안식의 의미가 단순히 노동을 멈추는 것에서 크게 확장됩니다. 안식은 주님의 나라의 상태이며, 그 본질은 평화입니다. 따라서 일곱째 날의 안식은 단순한 휴식의 표상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가 이루어진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다음에는 이 안식의 원리가 교회와 개인에게 차례로 적용됩니다. 먼저 여기서 다루는 태고교회가 그 뒤를 이은 모든 교회보다 더욱 ‘주님의안식일’이었다고 합니다. 태고교회는 천적 교회였으며, 사랑과 퍼셉션의 질서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주님의 안식을 표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의미는 태고교회라는 과거의 한 교회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후의모든주님의가장내적인교회도역시안식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모든거듭난사람도천적인간이될때안식일’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주님의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AC.82의 원리가 다시 나타납니다. AC.82에서는 교회에 관하여 말한 것은 그 교회의 각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으며, 그 자신이 교회가 아니면 교회의 일부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AC.85에서도 동일하게 안식일이라는 표상이 주님에게서 주님의 나라로, 교회로, 그리고 한 사람에게로 이어집니다. 한 사람 안에서 주님의 천적 질서가 이루어질 때 그 사람도 안식일이 됩니다.
물론 이것은 사람이 곧 주님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그가주님의형상이기때문’이라고 분명히 제한합니다. 주님은 안식일 그 자체이시고, 거듭난 천적 인간은 주님의 형상으로서 안식일입니다. 원형과 형상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식에 앞서는 것이 ‘여섯날의싸움또는수고’입니다. 이것은 AC.84에서 말한 여섯 날 동안의 ‘주님의일’과 연결됩니다. 거듭남에는 싸움이 있습니다. 악과 거짓이 사람을 붙들고 있는 상태에서 주님께서 사람을 선과 진리의 질서로 이끄시는 과정은 싸움과 시험을 동반합니다. 그러나 그 싸움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싸움은 안식을 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영적 질서가 유대교회의 수고하는 여섯 날과 일곱째 날 안식일로 표상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매우 넓은 원리로 밝힙니다. ‘그교회에서는주님과주님의나라를표상하지않는것은아무것도제정되지않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교회의 안식일 제도는 외적인 생활 규정에 그치지 않고 주님과 주님의 나라,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 가운데 이루어지는 안식을 표상했습니다.
이어지는 법궤의 예도 같은 구조를 보여 줍니다. 법궤가 광야에서 나아가는 것은 싸움과 시험을 표상하고, 법궤가 쉬는 것은 평화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래서 법궤가 떠날 때 모세는 ‘여호와여일어나사주의대적들을흩으시고’라고 말하고, 법궤가 쉴 때에는 ‘여호와여이스라엘종족들에게로돌아오소서’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아감’과 ‘쉼’의 대비입니다. 나아감에는 대적과 싸움이 있고, 쉼에는 주님의 임재와 평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여섯 날과 일곱째 날의 관계를 또 다른 성경의 표상으로 보여 줍니다. 광야의 여정이 싸움과 시험이라면 법궤의 쉼은 그 싸움 뒤에 오는 평화입니다.
민10:33에서 법궤가 ‘그들의쉴곳을찾기위하여’ 앞서 갔다는 표현도 이 때문에 인용됩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은 사람을 끝없는 싸움 속에 붙들어 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안식으로 이끌기 위한 것입니다. 거듭남의 싸움은 목적지가 아니라 과정이며, 그 목적은 주님 안에서의 평화입니다.
그러나 AC.85의 가장 깊은 설명은 [3]에서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58:13-14를 인용하여 천적 인간의 안식이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를 설명합니다. 이사야는 안식일에 ‘네길로행하지아니하며네오락을구하지아니하며’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는 상태를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천적 인간의 내적 상태로 읽습니다.
그는 천적 인간의 본성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은 ‘자기자신의뜻에따라행동하지않고주님의선하신뜻에따라행동하며,그주님의뜻이그의뜻이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번 AC.85에서 안식의 가장 중요한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안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 행동의 근원이 달라졌습니다. 자기 자신의 욕망과 자기중심적 뜻에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행동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주님의 뜻이 외부에서 강제로 부과되는 명령으로 남지 않고 ‘그의뜻’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81의 천적 인간의 자유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거기서 천적 인간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결박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며, 그의 보이지 않는 결박은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선을 행하도록 외부에서 억지로 붙들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과 그의 자유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적 상태에서는 주님의 뜻이 자신의 뜻이 되기 때문에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가장 깊은 기쁨이 됩니다. 이것이 강제와 안식의 차이입니다. 외부에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시키면 그것은 안식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선을 사랑하여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자신도 원하게 되면, 순종과 자유가 하나가 됩니다.
여기서 ‘자기자신의뜻에따라행동하지않는다’는 말을 인간의 의지 자체가 제거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천적 인간이 의지가 없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의지가 주님의 선과 결합되어 새롭게 질서를 얻습니다. 본문도 주님의 뜻이 ‘그의뜻’이 된다고 말합니다. 자기중심적인 뜻에서 주님과 결합된 뜻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 점은 AC.79-80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AC.79에서 천적 인간은 동산의 모든 것을 누리되 그것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다고 했고, AC.80에서는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려 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해 그것을 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85에서는 행동과 의지에서도 같은 질서가 나타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뜻을 근원으로 삼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뜻을 자신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AC.79의 ‘소유’, AC.80의 ‘앎’, AC.85의 ‘뜻과행동’은 서로 연결됩니다.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삼지 않으며, 자기 뜻을 궁극적인 삶의 기준으로 삼지도 않습니다. 그의 생명은 점점 더 주님으로부터 받는 질서 안에 놓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때 인간에게 평화와 행복이 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58의 ‘땅의높은곳에올림을받는것’을 내적인 평화와 행복으로, ‘야곱의기업으로양육되는것’을 외적인 평온과 기쁨으로 풀이합니다. 즉 주님의 뜻이 자신의 뜻이 되는 천적 상태에는 내적 평화와 외적 평온이 함께 따릅니다.
이것은 평화를 단순히 외부 환경에 아무 문제가 없는 상태로 이해하지 않게 합니다. 천적 인간의 평화는 먼저 내적인 것입니다. 자기 뜻과 주님의 뜻이 서로 충돌하고, 악과 선이 계속 주도권을 놓고 싸우는 상태가 그쳤기 때문에 평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적 질서가 외적인 삶에도 평온과 기쁨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천적 인간에게 자연계의 고난이나 불편, 질병이나 손실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AC.85가 말하는 안식과 평화는 우선 영적 상태에 관한 것입니다. 외적 형편이 언제나 평탄하기 때문에 평화로운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적 생명이 주님의 질서 안에 놓여 있기 때문에 평화로운 것입니다.
AC.85를 이렇게 읽으면 안식일의 속뜻도 상당히 달라집니다. 안식일은 단지 ‘일하지않는날’이 아니라 주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여섯 날 동안에는 싸움과 수고가 있지만 일곱째 날에는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안에서 주님의 뜻이 사람의 뜻이 됩니다. 그래서 싸움이 안식으로 바뀝니다.
이것은 안식일의 외적 준수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유대교회의 안식일 자체가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표상하도록 제정되었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외적 표상이 가리키는 내적 실재입니다. 외적인 안식일은 인간이 주님 안에서 누리는 내적 안식을 가리킵니다.
또한 이번 번호는 ‘주님자신이안식일이시다’는 데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의 안식은 인간 안에서 독립적으로 발생하는 어떤 심리적 평온이 아닙니다. 주님이 안식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주님의 나라가 안식이며, 주님의 형상이 된 천적 인간도 안식일이 됩니다.
따라서 안식의 중심은 결국 주님입니다. 주님 없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과 AC.85의 안식은 같지 않습니다. 천적 인간의 평화는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모든 욕망을 충족시켜 얻는 평온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뜻이 물러가고 주님의 선하신 뜻이 자신의 뜻이 됨으로써 오는 평화입니다.
이 점에서 AC.85는 안식과 자유의 관계를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일반적으로는 자기 뜻을 포기하면 자유를 잃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천적 질서에서는 정반대입니다. 자기중심적인 뜻과 악의 지배 아래 있을 때 인간은 실제로 종이지만, 주님의 선을 사랑하여 그 뜻을 자신의 뜻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자유와 평화를 누립니다.
AC.81에서 시작된 ‘죽은사람,영적인간,천적인간’의 차이가 여기까지 오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죽은 사람은 외적인 결박에 의해 억제되고, 영적 인간은 양심의 결박 가운데 싸우며,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여 자유롭게 행합니다. AC.85는 그 천적 자유의 내면을 ‘주님의선하신뜻이그의뜻이되는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번호의 안식은 단순히 싸움이 없다는 소극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주님의 뜻을 사랑하고 그것을 자신의 뜻으로 기쁘게 행하는 적극적인 생명의 상태입니다. 싸움이 사라진 자리를 공백이 채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평화와 행복이 채웁니다.
결국 AC.85의 흐름은 하나입니다. 주님 자신이 안식일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나라는 영원한 평화와 안식입니다. 주님의 천적 교회도 안식일이며, 거듭난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될 때 그도 주님의 형상으로서 안식일이 됩니다. 그 안식에 앞서 여섯 날의 싸움과 시험이 있지만, 마침내 주님의 뜻이 자신의 뜻이 될 때 내적인 평화와 행복, 외적인 평온과 기쁨을 누립니다.
따라서 ‘천적인간은일곱째날’이라는 말의 가장 깊은 의미는 달력의 일곱째 날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거듭남의 일을 이루셔서, 사람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의 뜻을 중심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뜻을 자신의 뜻으로 기쁘게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바로 그 상태가 안식이며, 그 사람에게 이루어진 주님의 안식일입니다. (AC.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