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32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 가장 낯설게 다가올 수 있는 말은 ‘신성모독’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성모독을 하나님을 욕하거나 거룩한 것을 조롱하는 말과 행동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키는 일을 신성모독이라고 부릅니다. 더 나아가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키는 일을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신성모독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 것일까요?
먼저 이번 번호의 대상은 교회 안에 있던 신앙과 체어리티입니다. 앞의 AC.429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신앙을,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라멕이 이 둘을 죽였다는 말은 그들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신성모독은 단순히 입으로 거룩한 것을 비난하는 행위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있던 거룩한 것들이 소멸되는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려면 ‘신앙을소멸시켰다’는 말과 ‘신앙이약해졌다’는 말을 구별해야 합니다.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질문하거나, 의심과 혼란을 겪거나, 자신의 신앙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일이 곧 이번 번호의 신성모독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이 나타내는 황폐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사람을죽였다’고 한 표현이 신앙의 소멸을 뜻한다고 밝힌 것도 같은 문맥입니다. 그러므로 독자가 자신의 일시적인 연약함을 곧바로 신성모독으로 판단하는 것은 이번 번호의 설명을 넘어섭니다.
그렇다면 체어리티의 소멸은 왜 ‘훨씬더큰’ 신성모독일까요? AC.432는 그 이유를 길게 논증하지 않지만, ‘신앙을통해태어나야할체어리티’라는 표현으로 중요한 관계를 보여 줍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무관하게 놓여 있는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소멸된 데 이어,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신앙의 소멸이 그 신앙과 연결된 사랑의 소멸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를 단순히 착한 일을 많이 하는 것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AC.430에서 스베덴보리는 참된 체어리티가 참된 순진무구와 분리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라멕이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에는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그것을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앞에서 밝혀 온 체어리티의 의미를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신성모독’이라는 말이 등장한다고 해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영적 상태를 쉽게 판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교리에 동의하지 않거나 사랑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가 라멕처럼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AC.432는 말씀의 속뜻에서 라멕이 나타내는 상태를 설명하는 번호입니다. 특정한 사람의 내면과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정하는 기준으로 이 한 번호를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결국 AC.432에서 신성모독은 교회 안에 있던 신앙과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가 소멸된 상태와 관련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을 소멸시키는 일을 신성모독이라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키는 일을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말씀은 신앙을 단지 보존해야 할 지식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그 신앙과 연결된 체어리티까지 함께 살펴보게 합니다. (AC.432심화1)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창4:24)
AC.432
이말씀은그들이‘가인’(Cain)이나타내는신앙을소멸시켰다는뜻입니다.그신앙에폭력을가하는것은신성모독이었습니다.동시에그들은신앙을통해태어나야할체어리티까지소멸시켰는데,이는훨씬더큰신성모독이었습니다.이로인해정죄가있었으며,이것이곧‘일흔일곱배의보복’(seventyandsevenfoldavengement)입니다. These words signify that they had extinguished the faith meant by “Cain,” to do violence to which was sacrilege, and at the same time had extinguished the charity which should be born through faith, a far greater sacrilege, and that for this there was condemnation, that is, a “seventyandsevenfoldavengement.”
해설
AC.432는 창4:24의 ‘가인을위하여는벌이칠배일진대라멕을위하여는벌이칠십칠배이리로다’라는 말씀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앞의 AC.427-431에서 스베덴보리는 라멕이 죽였다고 말한 ‘사람’이 신앙을,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상처’와 ‘타박상’은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이 설명들을 하나로 모아, 라멕의 말에 담긴 신성모독과 정죄의 의미를 밝힙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가인은 단순히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신앙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다는 것은 교회 안에 있던 신앙이 파괴되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신앙이 단지 인간이 만들어 낸 의견이 아니라 교회의 거룩한 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라멕의 상태는 신앙의 소멸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신앙을통해태어나야할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다고 말합니다. 앞의 AC.429에서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고 한 이유가 여기서 다시 중요해집니다. 라멕이 ‘사람’과 ‘어린아이’를 함께 죽였다는 것은 신앙뿐 아니라 그 신앙에서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후자를 ‘훨씬더큰신성모독’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독자가 주의할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단순히 지식과 행동의 두 항목으로 나누지 않는 것입니다. AC.432에서 문제 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신앙에 관한 내용을 조금 잘못 이해했거나 이웃을 충분히 돕지 못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 안의 거룩한 것인 신앙이 소멸되고,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된 상태를 말합니다. 앞의 번호들에서 ‘더이상성한곳이없다’고 설명한 황폐가 이번 번호에서는 신성모독과 정죄라는 표현으로 이어집니다.
‘훨씬더큰신성모독’이라는 말도 이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을 소멸시키는 일 자체가 신성모독이지만, 체어리티까지 소멸시키는 것은 그보다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신앙과 무관한 별개의 덕목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보여 줍니다. 신앙이 보존되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할 때,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를 함께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번 번호의 한 문장만으로 모든 종류의 죄와 신성모독에 대한 일반적인 서열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소멸로 인해 ‘정죄’가 있었으며, 그것이 ‘일흔일곱배의보복’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일흔일곱 배를 가인의 일곱 배보다 정확히 열한 배 무거운 형벌로 계산해서는 안 됩니다. AC.432가 직접 밝히는 것은 이 표현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데 따른 정죄를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보복’이라는 말만으로 주님께서 인간처럼 분노하여 복수하신다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이번 번호는 그 표현의 속뜻을 정죄라고 밝히지만, 정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관한 모든 설명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결국 AC.432는 라멕의 고백에 담긴 황폐의 의미를 한층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그들은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고,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각각 신성모독과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설명하며, 그 결과인 정죄를 ‘일흔일곱배의보복’이라고 풀이합니다. 따라서 라멕의 말은 단순히 더 큰 보복을 요구하는 선언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된 교회의 상태를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AC.432해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428
이절과다음절의내용에서‘라멕’(Lamech)이황폐를뜻한다는사실이매우분명하게드러납니다.그가‘한사람을죽였다’(slainaman)고하고,‘어린아이’(littlechild)를죽였다고하며,가인은일곱배로보복을받겠지만라멕은‘일흔일곱배로’(seventyandsevenfold)보복을받을것이라고말하기때문입니다. From the contents of this and the following verse, it is very evident that by “Lamech” is signified vastation; for he says that he had “slainaman,” and a “littlechild,” and that Cain should be avenged sevenfold, and Lamech “seventyandsevenfold.”
해설
AC.428은 앞의 AC.427에서 풀이한 라멕의 고백을 다음 절까지 연결하여, 라멕이 왜 ‘황폐’를 나타내는지 확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새로운 상응을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라멕이 직접 한 말들을 근거로, 그가 나타내는 상태가 황폐라는 사실이 매우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핵심은 창4:23의 ‘죽였다’는 표현과 창4:24의 ‘일흔일곱배’라는 표현을 함께 읽는 데 있습니다.
앞의 AC.427에서 ‘한사람을죽였다’는 말은 신앙을 소멸시켰다는 뜻이었고,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번 번호는 이 두 표현을 다시 언급합니다. 라멕의 황폐는 단순히 신앙이 약해진 상태나 체어리티가 잠시 부족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앞 번호에서 설명했듯이,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와 관련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음 절의 ‘가인은일곱배,라멕은일흔일곱배’라는 말까지 함께 제시합니다. 창4:24는 가인에게 적용된 ‘일곱배’와 라멕에게 적용된 ‘일흔일곱배’를 대비합니다. 이 대비가 라멕의 황폐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는 것이 이번 번호의 설명입니다. 다만 AC.428자체는 일곱과 일흔일곱의 속뜻을 아직 풀이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일흔일곱 배를 황폐의 정도를 나타내는 단순한 수치로 계산하거나, 가인보다 라멕이 정확히 열한 배 더 악하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보복’이라는 표현을 곧바로 주님께서 분노하여 가인이나 라멕에게 복수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보복의 성격을 설명하기보다, 라멕의 말에 등장하는 두 죽음과 두 수치의 대비를 통해 황폐의 의미를 확인합니다. 보복과 숫자의 속뜻은 다음 절에 관한 설명을 살피면서 판단해야 합니다.
이처럼 AC.428은 짧지만 앞뒤 번호를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AC.427은 라멕이 죽였다고 말한 ‘사람’과 ‘어린아이’의 의미를 밝히고, AC.428은 그 말과 다음 절의 보복에 관한 선언을 함께 제시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는 라멕의 황폐에 관한 설명을 마무리하는 동시에, 창4:24의 ‘일곱배’와 ‘일흔일곱배’에 관한 해설로 독자를 이끕니다.
결국 라멕이 황폐를 나타낸다는 사실은 그가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고 고백하는 말에서 드러나며, 다음 절에서 가인과 라멕의 보복을 대비하는 표현을 통해 더욱 분명해집니다. AC.428은 이 두 절을 하나의 문맥으로 읽게 하면서, 라멕의 상태를 이해하려면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뿐 아니라 이어지는 ‘일흔일곱배’의 의미도 살펴야 함을 보여 줍니다. (AC.428해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창4:23)
AC.427
‘라멕’(Lamech)은앞에서와같이황폐를뜻합니다.그가‘자기아내들인아다와씰라에게말하기를,너희귀로내말을들으라’(saiduntohiswivesAdahandZillah, Withyourearsperceivemyspeech)고한것은고백을뜻합니다.이러한고백은교회가있는곳에서만이루어질수있는데,앞에서말했듯이그의‘아내들’(wives)은교회를나타냅니다. ‘내가한사람을죽여내게상처를입혔다’(Ihaveslainamantomywounding)는그가신앙을소멸시켰음을뜻합니다.‘사람’(man)은신앙을나타내기때문입니다.‘어린아이를죽여내게해를입혔다’(alittleonetomyhurt)는그가체어리티를소멸시켰음을뜻합니다. ‘상처’(wound)와‘타박상’(bruise)은더이상온전함이남아있지않음을뜻합니다.‘상처’는신앙이황폐해졌음을,‘해’(hurt)는체어리티가황폐해졌음을나타냅니다. By “Lamech” is signified vastation, as before; that he “saiduntohiswivesAdahandZillah,Withyourearsperceivemyspeech” signifies confession, which can only be made where there is a church, which, as has been said, is signified by his “wives.” “Ihaveslainamantomywounding” signifies that he had extinguished faith, for by a “man” is signified faith; “alittleonetomyhurt” signifies that he had extinguished charity. By a “wound” and a “bruise” is signified that there was no more soundness; by a “wound,” that faith was desolated; by a “hurt,” that charity was devastated.
해설
AC.427은 창4:23에 나오는 라멕의 말을 풀이합니다. 앞의 AC.421-426에서는 라멕의 아내들과 자녀들을 통해 새 교회의 내적·외적 요소, 그리고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다시 라멕 자신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이 앞에서와 같이 ‘황폐’를 나타낸다고 밝히며, 그의 말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에 관한 고백이라고 설명합니다.
라멕은 먼저 자기 아내들인 아다와 씰라에게 말을 듣도록 요청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을 ‘고백’으로 풀이합니다. 그가 아내들에게 말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아내들이 교회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고백이 교회가 있는 곳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고백은 단순히 어떤 사건을 이야기하는 행위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된 상태를 드러내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어 라멕은 자신이 ‘한사람’을 죽였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사람’이 신앙을 나타내므로, 사람을 죽였다는 말은 신앙을 소멸시켰다는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창4:23의 살인에 관한 표현을 문자적 사건의 차원에서만 읽지 않고, 교회 안에서 신앙이 소멸된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읽는 것입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라멕이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신앙을 소멸시켰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과정은 앞뒤의 황폐에 관한 설명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음을 뜻합니다. 여기서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다른 표현으로 구별됩니다.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의 말에 등장하는 두 죽음을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에 연결함으로써, 이 고백이 교회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 모두에 관한 것임을 밝힙니다.
이 구별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와도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창4장의 앞부분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 그리고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를 다루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라멕의 고백을 통해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된 상태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연결을 근거로 가인과 라멕의 상태가 모든 면에서 동일하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AC.427이 직접 밝히는 것은 라멕이 황폐를 나타내며, 그의 말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을 뜻한다는 사실입니다.
라멕은 이 두 죽음을 말하면서 자신에게 ‘상처’와 ‘해’가 생겼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상처’와 ‘타박상’이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음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상처는 신앙의 황폐를, 해는 체어리티의 황폐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들은 라멕이 입은 육체적 부상의 정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어 교회 안에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황폐’라는 말도 단순히 신앙생활이 잠시 약해지거나 체어리티를 충분히 실천하지 못한 상태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고 말하며,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읽고 자신의 일시적인 연약함을 곧바로 라멕의 황폐와 동일한 상태로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 번호는 라멕이 표상하는 교회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국 AC.427에서 라멕의 말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된 상태에 관한 고백입니다. 아다와 씰라는 교회를 나타내며, 그들에게 말을 듣도록 요청하는 것은 고백을 뜻합니다. ‘사람’을 죽였다는 말은 신앙의 소멸을,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체어리티의 소멸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상처와 해는 그 결과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교회의 황폐가 단순히 외적인 형식의 변화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의 생명에 관한 문제임을 살펴보게 됩니다. (AC.427해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unto Cain,Where is Abel thy brother?And he said,I know not,am I my brother’s keeper? (창4:9)
AC.370
‘여호와께서가인에게말씀하셨다’(JehovahsaiduntoCain)는것은체어리티,곧‘아우아벨’(brotherAbel)에관하여그들에게어떤딕테이트를주는,내면에서오는어떤퍼셉션(acertainperceptivityfromwithin)을의미합니다.가인의대답인‘내가알지못하나이다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Iknownot,amImybrother’skeeper?)는신앙이체어리티를아무것도아닌것으로여겼으며,체어리티에종속되기를원하지않았고,그결과신앙이체어리티에속한모든것을완전히거부했음을의미합니다.그들의교리는이와같이되었습니다. “JehovahsaiduntoCain”signifies a certain perceptivity from within that gave them a dictate concerning charity or the“brotherAbel.” Cain’s reply, “Iknownot,amImybrother’skeeper?”signifies that faith considered charity as nothing, and was unwilling to be subservient to it, consequently that faith altogether rejected everything of charity.Such did their doctrine become.
해설
AC.370은 창4:9의 ‘여호와께서가인에게이르시되네아우아벨이어디있느냐’와 가인의 대답 ‘내가알지못하나이다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를 설명합니다. 앞의 창4:6-8에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체어리티와의 올바른 질서를 거부하다가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아벨이 죽은 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네아우아벨이어디있느냐’고 물으십니다. 문자적으로는 살인한 가인에게 아벨의 행방을 묻는 장면이지만, 속뜻에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에게 다시 ‘체어리티는어디에있는가?’라고 묻는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AC.370은 앞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한 단계 더 깊은 교리적 상태로 끌고 갑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여호와께서가인에게말씀하셨다’에 대한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체어리티,곧아우아벨에관하여그들에게어떤딕테이트를주는,내면에서오는어떤퍼셉션’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AC.359-360과 함께 읽으면 특히 흥미롭습니다. 거기서는 ‘여호와께서가인에게말씀하셨다’를 ‘consciencedictated’, 곧 ‘양심이말해주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acertainperceptivityfromwithin’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 가인 계열의 내적 경고를 설명하면서 ‘양심’과 ‘퍼셉션’에 관련된 표현을 모두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두 용어의 교리적 구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 특징적인 것은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지각하는 퍼셉션이고, 홍수 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에게 특징적인 것은 배운 진리와 선으로부터 형성되는 양심입니다. 그러므로 AC.370의 표현은 가인 계열에게 후대 고대교회의 양심이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는 증거로 읽기보다, 태고교회의 질서가 크게 훼손된 상태에서도 체어리티에 관하여 내면에서 무엇인가를 알리고 지시하는 퍼셉션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벨은 이미 죽었습니다. 속뜻으로는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호와께서가인에게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체어리티를 거부했다고 해서 주님께서 즉시 그를 완전히 버리시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내면에서는 여전히 ‘아벨이어디있느냐’, 곧 ‘체어리티는어디에있느냐’는 딕테이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르셔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알 수 있도록 내면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도 주님께서 ‘네가분하여함은어찌됨이며안색이변함은어찌됨이냐’고 말씀하셨듯이, 체어리티를 실제로 소멸시킨 뒤에도 주님의 말씀은 계속됩니다. 인간의 상태가 변한다고 해서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먼저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인의 대답은 이제 그들의 상태가 얼마나 깊이 굳어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내가알지못하나이다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 스베덴보리는 이 짧은 대답을 세 단계로 풉니다. 첫째, 신앙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아닌것으로여겼습니다.’ 둘째, 신앙은 체어리티에 ‘종속되기를원하지않았습니다.’ 셋째, 그 결과 신앙은 ‘체어리티에속한모든것을완전히거부했습니다.’ 앞의 번호들에서 진행되어 온 가인의 타락이 여기에서 하나의 완성된 교리적 태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구별하는 데서 시작했지만, 신앙을 사랑에서 독립된 것으로 여기면서 둘의 분리가 생겼고, 그 결과 체어리티 없는 행위와 예배가 나타났습니다. 이어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주도권을 가지려 했고, 마침내 아벨을 죽였습니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왜아벨을지켜야하는가?’라고 말합니다. 체어리티 자체를 신앙과 무관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체어리티에종속되기를원하지않았다’는 표현은 특별히 주의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신앙을 억압하거나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열등하여 없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될 때 각각의 기능이 온전해진다는 뜻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무엇이 선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밝혀 주지만, 그 진리를 사랑하고 실제로 행하게 하는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체어리티 아래 있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며 그것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앞의 AC.361-365에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했듯이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하며, 체어리티는 신앙을 통하여 자신이 어떻게 선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아갑니다.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하지만 그 생명의 근원과 주도권은 사랑과 체어리티에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라는 말은 단순한 책임 회피보다 훨씬 깊은 뜻을 갖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아우’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 서로 완전히 무관한 두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의 문자 자체가 보존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둘은 ‘형제’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이제 ‘내가그를지켜야하는가?’라고 묻습니다. 속뜻으로 읽으면 ‘신앙이왜체어리티를돌보아야하는가?신앙이체어리티와무슨상관이있는가?’라는 말이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앙은 자기 존재의 목적을 잃어버립니다. 신앙의 모든 진리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인도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선을 실제 삶으로 행하게 하기 위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선언한다면 자신에게 생명을 주는 목적과 결합을 거부하는 셈입니다.
마지막의 ‘그들의교리는이와같이되었습니다’라는 한 문장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가인이라는 한 개인이 순간적으로 거짓말하고 책임을 회피했다는 심리적 설명에 머물지 않습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의 ‘교리’가 이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지만, 그것이 반복되고 확증되면서 하나의 교리가 되었습니다. 신앙을 그 자체로 구원의 본질적인 것으로 높이고,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낮추며, 마침내 체어리티에 속한 것을 신앙에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체계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을죽였다’는 것은 단지 사람들이 이웃 사랑을 잘 실천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라는 사실 자체를 교리적으로 거부하기에 이른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교리가 왜 중요한지도 역으로 보여 줍니다. 교리는 단순히 머릿속에 저장된 신학적 문장이 아닙니다. 무엇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느냐에 따라 사람의 사랑과 삶의 방향도 영향을 받습니다. 체어리티를 신앙의 생명으로 인정하는 교리는 사람이 ‘내가믿는진리가어떻게이웃의선으로나타나야하는가?’를 묻게 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신앙과 무관한 것으로 만드는 교리는 결국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라는 태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오늘날 특정 교파나 특정 신학적 표어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다루는 것은 신앙이 실제로 사랑과 삶에서 분리되어 체어리티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드는 내적 원리입니다. 사람의 실제 영적 상태는 그가 사용하는 교리적 명칭만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사랑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AC.370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함께 놓으면 더욱 깊은 대비가 나타납니다. 한쪽에서는 내면으로부터 ‘아벨이어디있느냐’는 퍼셉션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그들이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라고 대답하는 교리를 만들어 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내적 딕테이트와 인간이 스스로 확증한 교리가 서로 맞서는 것입니다. 내면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임을 알리고 있는데, 인간은 신앙이 체어리티 아래 있기를 거부하는 교리를 세웁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는 단순히 진리를 몰랐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체어리티에 관한 어떤 내적 퍼셉션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거부하고 반대되는 것을 교리로 굳혔다는 데 있습니다.
결국 AC.370은 창4:9의 질문을 우리에게도 돌려놓습니다. ‘네아우아벨이어디있느냐?’ 이것은 단지 가인에게 죽은 동생의 행방을 묻는 질문이 아니라,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람에게 ‘그신앙안에서체어리티는어디에있는가?’라고 묻는 질문이 됩니다. 우리가 알고 고백하는 진리가 실제로 이웃의 참된 선을 구하게 하는지, 우리의 신앙이 사랑과 자비와 쓰임의 삶으로 이어지는지, 아니면 신앙의 정확성을 주장하면서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참된 신앙은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홀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비로소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