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10강 1부

‘좁은 길’에서 계시록 13, 14장까지 : 종말의 시간표보다 먼저 보아야 할 것

10강의 시작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7장 13~14절의 ‘좁은 문’과 ‘협착한 길’을 먼저 꺼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좁은 길을 ‘힘들고 어려워도 올라가야 하는 길’, 곧 신앙인이 실제 삶에서 감당해야 할 연단의 길로 풀어냅니다. 이어 자신의 부부관계를 예로 들면서, 기도가 막힐 때 ‘아내를 사랑하라. 사랑하지 못하면 어떻게 남을 사랑하겠느냐’는 깨달음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은 이후 적그리스도, 짐승, 666, 대환난이라는 거대한 종말론적 주제로 넘어가기 전에 놓인 작은 서론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오히려 10강 전체를 읽는 데 가장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의 핵심은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을 정확히 알아맞히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받아 자신의 삶에서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함으로써 거듭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좁은 길’은 특별한 고행을 많이 하는 길이라기보다 자기의 proprium, 곧 자기중심적 의지와 욕망을 따라 살지 않고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진리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을 사랑하겠느냐’고 자신의 삶으로 말씀을 끌어내린 부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거대한 종말의 비밀을 안다고 하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아직 그 진리가 그 사람의 생명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강사가 ‘이 세상에도 공짜가 없는데 하늘에 공짜가 있겠어요?’라고 하면서 ‘상급의 진리’를 강조하는 부분은 조금 섬세하게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도 천국의 상급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말씀에 ‘상급’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도 그대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천국의 상급은 사람이 고생한 만큼 외부에서 지급되는 보수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선을 사랑하고 행하는 사람에게는 그 선 자체가 기쁨이 되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 자체가 행복이 됩니다. 이것이 천국에서 완전하게 열릴 때 그것이 그의 ‘상급’이 됩니다. 따라서 ‘내가 이렇게 고생했으므로 더 높은 상급을 받아야 한다’는 자기 공로가 개입하기 시작하면 오히려 천국적 질서와 멀어집니다. 강사가 바로 뒤에서 ‘자기 의지로 하지 않도록’ 기도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 오히려 중요한 균형점이 됩니다.

 

찬양과 기도 후 강사는 앞서 공부한 계시록 13장을 정리합니다. 그의 해석 체계에서는 후 3년 반에 적그리스도가 세계를 지배하고 성도들을 핍박합니다.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짐승은 적그리스도이며, 그는 사탄과 합일된 인물이고, 마흔두 달 동안 권세를 받아 활동합니다. 두 뿔 짐승은 거짓 선지자로서 적그리스도를 보좌하며 이적을 통해 사람들을 미혹하고, 짐승에게 경배하도록 만들며, 666의 표를 받도록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미래주의적 계시록 해석의 틀 안에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상당히 큰 차이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계시록을 미래의 어느 7년 동안 지상에서 일어날 정치·군사적 사건들의 암호문으로 읽지 않습니다. ‘묵시록 해설’과 ‘계시록 밝히기’에서 계시록은 무엇보다 교회의 영적 상태와 그 교회의 종말, 최후의 심판, 그리고 주님께서 세우시는 새 교회에 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짐승도 미래 어느 독재자 한 사람의 외모나 정치적 조직을 미리 묘사한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선과 분리된 신앙, 곧 삶을 떠난 교리적 신앙이 형성되고 그것이 말씀을 이용하여 자신을 정당화하는 영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이것은 계시록을 읽는 좌표 자체가 달라지는 문제입니다.

 

특히 강사는 적그리스도를 ‘사탄이 내주 합일된 사람’으로 이해하고, 후 3년 반 동안 실제 세계를 지배할 특정 인물로 설명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적그리스도’는 일차적으로 어떤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거스르는 것’, 곧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거나 주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거짓을 참으로 만드는 원리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를 찾기 위해 세계 정치 지도자들의 얼굴을 살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내 안에서 무엇이 주님의 진리를 거짓되게 만들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계시록의 무대가 먼 미래의 국제정치에서 갑자기 오늘 우리의 내면으로 들어옵니다.

 

두 뿔 짐승에 대한 강사의 설명에서도 중요한 영적 통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강사는 거짓 선지자가 ‘큰 이적’을 행하여 사람들을 미혹한다고 강조합니다. 여기에는 충분히 귀 기울일 만한 경고가 있습니다. 기적이나 은사, 특별한 영적 체험 자체가 진리의 보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기적이 사람을 강제하여 믿게 만들 경우 자유와 이성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참된 신앙을 훼손할 수 있다고 봅니다. 신앙은 놀라운 현상을 보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무엇인지 깨닫고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 삶으로 옮길 때 사람의 것이 됩니다.

 

흥미롭게도 강사 자신도 이 대목에서 한국교회의 은사 중심 신앙을 돌아봅니다. 한때 은사가 충만했지만 문제가 생겼고, 그 반작용으로 이제는 ‘말씀’과 지식만 많아졌는데 실제 신앙은 오히려 약해질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목회자의 설교를 들으며 맞는지 틀리는지만 검사하면서 실제 신앙생활은 하지 않는 모습을 비판하고, ‘아느냐 모르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운 접점을 가집니다.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경계하는 것이 바로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를 ‘사는 것’을 혼동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관한 수많은 지식이 기억 속에 들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천국적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삶이 되어야 합니다.

 

강사가 ‘성경 책 갖고 싸우면 안 된다. 신학 갖고 싸우면 안 되고 내 이름이 거기에 기록돼 있느냐, 주님이 나를 모른다고 하지 않을까, 이게 너무 중요하다’고 말하는 부분도 같은 맥락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표현과 신학적 설명에는 스베덴보리와 차이가 있지만, 그가 겨냥하는 문제는 분명합니다. 신학 지식 자체를 구원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조금 바꾸어 말한다면, 문제는 ‘생명책이라는 어떤 천상의 명부에 내 이름이 문자적으로 적혀 있는가’라기보다 ‘주님의 질서가 내 삶에 새겨져 있는가’입니다. 말씀의 진리를 알고 그것을 의지하고 행하는 것이 사람 안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후에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많이 알았는가보다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여 실제로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입니다.

 

이어 강사는 계시록 14장으로 넘어가 144,000과 시온산, 새 노래, 세 천사의 경고, 바벨론의 멸망, 짐승의 표, 성도들의 인내를 설명합니다. 여기에서도 그의 미래주의적 시간표가 계속 작동합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하나님만을 경배하라’, ‘죄악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인내하라’는 권면은 종말론 체계를 넘어서는 본질적인 메시지입니다. 특히 강사는 이를 ‘광야 연단 과정’과 연결하면서 ‘오늘 넘어지면 또 일어나고’, 어려움 속에서도 계속 신앙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벨론’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의 해석이 훨씬 깊숙이 들어갑니다. 바벨론은 단순히 미래에 등장할 악한 세계체제나 도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사람을 지배하려는 사랑, 곧 종교를 통해 권력과 자기 우월성을 추구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바벨론이 무너진다’는 것은 먼 미래 어느 도시의 붕괴만을 기다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도 신앙과 말씀과 직분을 이용하여 남보다 높아지고 싶어 하는 욕망이 무너져야 합니다. 목회자에게는 특히 두려운 말씀입니다. ‘주님의 것’을 가지고 ‘나의 것’을 세우려는 순간, 사람 안에 작은 바벨론이 세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짐승의 표’ 역시 같은 원리로 볼 수 있습니다. 강사는 후 3년 반 동안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 실제로 받게 될 표와 연결하지만, 스베덴보리의 상응적 해석에서 ‘이마’와 ‘손’은 훨씬 내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이마는 사랑과 의지를, 손은 능력과 행위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짐승의 표를 이마와 손에 받는다는 것은 악한 원리를 마음으로 사랑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뜻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이름이 이마에 있다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진리가 의지와 삶에 새겨져 있음을 뜻합니다. 이렇게 보면 666의 문제도 어떤 바코드나 칩, 특정 기술을 찾아내는 문제보다 훨씬 깊어집니다. ‘나는 무엇을 사랑하고 있으며, 그 사랑이 내 행동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가?’가 계시록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10강 초반의 ‘좁은 길’이 다시 살아납니다. 짐승과 적그리스도와 666을 아무리 정확하게 설명해도,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신의 욕망과 교만을 회개하지 않는다면 계시록을 아직 바깥에서만 읽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종말의 연대와 국제정세를 정확히 알지 못하더라도 매일 자신의 악을 주님 앞에서 살피고, 진리를 따라 살며, 이웃을 사랑하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주님을 향한다면 그는 계시록이 말하는 영적 싸움 한가운데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다만 강사가 개인의 작은 실수나 불편한 사건을 곧바로 하나님의 ‘징계’와 연결하는 부분은 조심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잘못하면 ‘5분도 안 돼서 바로 징계가 온다’고 느끼며, 작은 행동에서도 하나님께서 즉각 깨닫게 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그 안에 담긴 ‘작은 악까지도 가볍게 여기지 않겠다’는 태도는 귀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에서는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개별적인 손해, 사고, 실패를 곧바로 ‘하나님께서 이 죄 때문에 이것을 보내셨다’고 단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신적 섭리는 무한히 많은 원인과 결과를 동시에 품으며 인간의 영원한 구원을 향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이나 불행을 직접 보내 벌하신다기보다,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허용된 일들까지 영적 선을 위해 굽혀 사용하신다고 보는 편이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10강 1부에서 가장 귀하게 붙들 수 있는 것은 의외로 적그리스도의 정체나 666의 방식이 아닙니다. ‘자기를 죽여야 한다’, ‘끝까지 인내해야 한다’, ‘작은 죄까지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권면입니다. 강사의 종말론적 지도와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석은 상당히 다르지만, 삶으로 내려오는 바로 이 지점에서는 중요한 만남이 일어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만남을 한 걸음 더 안쪽으로 이끕니다. 계시록의 전쟁은 먼저 내 안에서 벌어지고, 적그리스도의 문제는 먼저 내 안에서 진리가 어떻게 왜곡되는가의 문제이며, 바벨론은 먼저 내 안의 지배욕이고, 짐승의 표는 먼저 내가 사랑하고 행함으로 내 것이 된 악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계시록이 묻는 마지막 질문은 ‘후 3년 반이 언제 시작되는가?’보다 더 깊습니다. ‘오늘 내 의지와 행위에는 누구의 이름이 새겨지고 있는가?’입니다. 10강 1부의 ‘좁은 길’은 바로 그 질문 앞에서 비로소 계시록 전체와 연결됩니다. 좁은 길은 종말을 피해 가는 비상통로가 아니라, 오늘 여기서 주님의 진리를 알고 그 진리에 따라 악을 멀리하며 선을 행하는 거듭남의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끝까지 걷게 하시는 분은 인간 자신의 의지와 공로가 아니라 오직 주님이십니다.



10강 2부

‘처음 익은 열매’와 순교자, 그리고 천국을 ‘반열’로 나누어 보는 문제

10강 2부에서 강사는 계시록 14장의 144,000과 ‘처음 익은 열매’를 중심으로 자신의 종말론적 구원 체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펼쳐 갑니다. 여기서 강사의 관심은 단순히 ‘누가 구원받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구원받는 성도들 가운데서도 서로 다른 영적 성숙과 상급이 있으며, 그에 따라 천국에서 차지하는 위치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144,000을 ‘처음 익은 열매’, 교회 시대의 순교자들을 ‘두 번째 익은 열매’, 대환난을 통과하거나 영계에서 준비되어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세 번째 익은 열매’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구약 이스라엘의 제사장, 레위인, 일반 백성이라는 세 구분을 이러한 천국 질서의 모형으로 연결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을 때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강사가 말하는 구체적인 ‘세 종류의 익은 열매’ 체계에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그 배후에 있는 한 가지 중요한 직관, 곧 ‘천국은 모두가 똑같은 상태로 들어가 똑같은 자리에 머무는 획일적인 세계가 아니다’라는 생각 자체는 스베덴보리와 상당한 접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본 천국 역시 놀라울 정도로 질서 있고 다양합니다. 천국에는 무수한 공동체가 있고, 각 공동체는 서로 다른 선과 진리의 상태를 이루며, 크게는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 자연적 천국이라는 세 천국으로 구별됩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차등과 질서가 있다는 강사의 기본 직관까지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 차이를 무엇을 기준으로 나누느냐에 있습니다.

 

강사는 144,000을 교회 시대에 완성된 특별한 ‘이긴 자들’로 봅니다. 이들은 대환난을 면제받고 예수님의 공중강림 때 휴거되며, 천국에서도 가장 큰 상급을 받는 특별한 성도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다른 대목에서는 이들을 ‘천국의 수도’와 연결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계시록의 144,000은 문자 그대로 144,000명의 특별 선발대가 아닙니다. ‘12’와 ‘12×12’, 그리고 거기에 충만함을 뜻하는 수가 결합된 144,000은 주님의 교회를 이루는 모든 선과 진리의 충만한 상태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144,000은 천국의 VIP 명단과 같은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인정하고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완전한 집합을 표상하는 수입니다.

 

이 차이는 작지 않습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계시록의 숫자와 사건들이 미래의 실제 역사 속에서 상당 부분 문자적으로 성취됩니다. 그래서 144,000도 실제 특정 인원과 특별한 반열을 가리키는 방향으로 갑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계시록이 ‘상응’으로 기록된 예언서라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따라서 숫자도 그 숫자가 가리키는 영적 질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열둘’은 신앙과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천’은 충만함과 완전함을 표상합니다. 그래서 144,000은 ‘딱 그 숫자만큼만’이라는 제한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새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의 충만함을 나타냅니다.

 

그렇다고 강사가 강조하는 ‘이긴 자’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도 계시록의 ‘이기는 자’는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무엇을 이기는가가 달라집니다. 이긴 자는 미래의 적그리스도 정권과 싸워 살아남은 특별한 종말 성도만이 아니라, 자신의 악과 거짓을 대적하여 주님께서 거듭나게 하시는 과정에 응답한 사람입니다. 가장 무서운 적그리스도는 밖에 있는 어떤 정치지도자 이전에 내 안에서 주님의 진리를 거부하고 왜곡하는 악과 거짓이며, 가장 치열한 전쟁은 국제전쟁 이전에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시험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이김’은 곧 거듭남의 전투입니다.

 

강사가 144,000에 이어 ‘두 번째 익은 열매’로 순교자들을 말하는 부분에서도 같은 구별이 필요합니다. 강사는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교회 시대 동안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죽은 순교자들이 아직 완전한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기다리다가, 순교자의 수가 채워진 뒤 특별한 반열로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대환난을 살아서 통과한 사람들과 영계에서 준비된 사람들을 ‘세 번째 익은 열매’로 봅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핵심은 그가 ‘순교했는가’, ‘대환난을 통과했는가’, ‘어느 시대에 죽었는가’가 아닙니다. 사람은 사후 영계에 들어가 겉으로 꾸며 왔던 것들이 벗겨지고 자신의 지배적 사랑, 곧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왔는지가 드러납니다. 선과 진리를 사랑한 사람은 그 사랑과 상응하는 천국 공동체로 인도되고, 악과 거짓을 사랑한 사람은 그와 상응하는 곳으로 스스로 향합니다. 천국의 차이는 역사적 순교 여부보다는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어떤 종류와 정도의 선을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였는가에 따라 생깁니다.

 

이 점에서 ‘순교’도 조금 다르게 보아야 합니다. 순교 자체가 사람을 더 높은 천국으로 올려 보내는 공로는 아닙니다. 사람이 어떤 외적인 방식으로 죽었느냐보다 그 죽음에 이르기까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위해 살았느냐가 더 본질적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했기 때문에 진리를 버리지 않고 죽음까지 감당했다면 그 순교는 그의 내적 사랑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열매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순교라는 외적 사건 자체가 사람의 내면을 자동으로 천적으로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외적 업적에 대한 포상이 아니라 사람의 내적 생명과 상응하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강사가 계속 강조하는 ‘상급’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강사의 표현을 따라가다 보면 144,000은 가장 큰 상급, 순교자는 그다음 반열, 다른 구원받은 성도는 또 다른 반열이라는 식의 일종의 천국적 위계도가 그려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높고 낮음은 세상의 서열과 전혀 다릅니다. 더 높은 천국에 있는 천사는 ‘내가 저 사람보다 높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더 사랑할수록 자신에게 있는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더 분명하게 압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가장 높은 자는 오히려 가장 낮아지며 섬기려는 자입니다. 천국의 위대함은 권세의 크기가 아니라 사랑의 깊이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익은 열매’를 가장 큰 상급을 차지하는 엘리트 성도의 개념으로 읽기보다는 ‘첫 열매’라는 표상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첫 열매는 전체 추수를 대표하여 주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계시록 14장의 사람들도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로 묘사됩니다. 여기서 중심은 그들의 특권이 아니라 어린양을 ‘따름’입니다. 즉 자기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르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말한다면 proprium을 중심으로 사는 데서 벗어나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에 의해 사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강사가 10강 전체에서 반복하는 ‘자기를 죽여야 한다’, ‘광야를 통과해야 한다’, ‘연단을 받아야 한다’는 메시지와 뜻밖의 접점을 만듭니다. 강사는 대환난을 성도들을 연단하고 정결하게 하는 ‘광야’로 이해합니다. 다른 부분에서는 계시록 12장의 여자가 광야에서 1,260일 동안 양육되는 것을 특별한 피난처가 아니라 ‘영적으로 정결케 되는 기간’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 부분은 매우 주목할 만합니다. 계시록을 전체적으로는 미래의 역사적 사건으로 읽으면서도 ‘광야’에 대해서는 이미 상당히 내적인 의미를 발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이 통찰을 더 깊이 밀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광야는 특정 시대에만 성도들이 들어가는 지리적 장소가 아니라, 거듭나는 모든 사람이 통과하는 시험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사람 안에 있던 이전의 확신과 자기 의존이 흔들리고, 진리가 메마른 것처럼 느껴지며, 악과 거짓이 공격하는 가운데 주님만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는 상태가 ‘광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 역시 그러한 시험과 거듭남의 전 과정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대환난을 통과해야 정결해진다’는 것을 특정 미래 세대의 이야기로 한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각자가 지금 자기 안의 광야를 통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휴거’ 역시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읽게 됩니다. 강사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휴거되고 미련한 다섯 처녀는 환난에 들어간다는 식으로 연결하면서, 모든 신자가 아니라 준비된 일부 성도만 환난 전에 휴거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신학에는 이런 의미의 ‘공중 휴거’ 교리가 없습니다. 주님의 재림 역시 육체를 입으신 주님께서 다시 자연계의 구름을 타고 내려오시는 사건이라기보다, 말씀의 속뜻이 열리고 주님의 신적 진리가 새롭게 드러남으로써 이루어지는 영적 재림입니다. 따라서 ‘준비된 사람은 지상에서 사라지고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환난에 남는다’는 구도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강사가 붙들고 있는 영적 핵심 하나는 남습니다. 바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 처녀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미래의 비행처럼 하늘로 올라갈 준비가 아니라 ‘등’과 ‘기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등은 신앙의 진리를, 기름은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등은 있는데 기름이 없다는 것은 ‘진리는 알고 있지만 사랑의 선이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것은 오히려 매우 두려운 말씀입니다. 성경을 알고, 교리를 알고, 설교를 하고, 종말론의 시간표를 알고 있어도 그것이 사랑과 체어리티의 생명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를 가르는 것은 ‘환난 전 휴거에 성공했느냐’가 아니라 진리와 선이 결합되어 있느냐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앎과 삶, 이해와 의지가 결합되어 있는지가 관건입니다. 여기서 10강 1부에서 강사가 했던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기를 죽여야 한다’는 말이 다시 중요해집니다. 강사 자신의 여러 권면 가운데에는 그의 종말론 체계보다 오히려 훨씬 깊은 영적 직관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강사가 ‘천국이 채워진다’는 표현을 반복한다는 점입니다. 먼저 144,000이 채워지고, 다음으로 순교자의 수가 채워지고, 마지막으로 다른 구원받은 사람들이 들어가 천국이 완성된다는 구조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천국은 인류와 무관하게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는 정적인 공간이 아닙니다. 천국은 천사들로 이루어져 있고, 천사들은 본래 인간으로 지상에서 살았던 이들이므로 인류의 구원과 천국의 형성은 깊이 연결됩니다. 이 점에서는 강사의 ‘천국이 사람들로 채워진다’는 직관에 일정한 접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숫자가 차야 하나님께서 다음 단계의 종말 사건을 시작하시는 일종의 정원제 구조가 아닙니다. 천국 전체가 한 사람의 형상, 곧 ‘가장 큰 사람’(Grand Man, Maximus Homo)을 이루며, 무수한 천국 공동체가 각기 서로 다른 기능을 담당합니다. 한 사람의 몸에서 눈과 귀와 심장과 폐가 서로 다르지만 모두 한 생명을 이루듯, 천국의 다양성 역시 우열을 위한 계급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조화와 질서를 위한 다양성입니다.

 

이 관점은 ‘세 종류의 익은 열매’라는 강사의 설명을 대할 때 특히 중요합니다. 천국에 다양한 상태와 등급이 있다는 점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144,000 → 순교자 → 나머지 성도’라는 세 역사적 집단으로 고정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천국 이해와 다릅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지상에서 받아들인 사랑과 신앙의 질에 따라 자기에게 가장 맞는 공동체로 인도됩니다. 그곳에서는 누구도 다른 천국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선의 상태가 바로 자기에게 가장 충만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강의에서 ‘상급’을 들을 때도 경쟁적 상급 개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천국에서 더 큰 상급이란 더 큰 왕좌나 더 높은 신분을 갖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더 많이 섬기고, 더 많이 섬길수록 더 큰 기쁨을 누립니다. 천국에서는 사랑하는 것과 행복한 것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강사가 말하는 ‘영적으로 더 깊이 준비된 사람에게 더 큰 상급이 있다’는 말을 완전히 버릴 필요는 없지만, 그 ‘더 큼’의 의미를 천국적으로 바꾸어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10강 2부의 여러 이야기 가운데 특히 붙들 만한 것은 ‘믿음과 함께 행함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연단이죠’라는 강사의 말입니다. 이 짧은 말은 오히려 복잡한 종말 시간표보다 스베덴보리의 중심 가르침에 훨씬 가깝습니다. 신앙이 삶과 분리되면 그것은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며, 사람이 알고 있는 말씀은 결국 의지와 행위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바로 이 과정이 거듭남입니다.

 

따라서 10강 2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으면 묘한 역전이 일어납니다. 강사가 가장 많은 설명을 들이는 ‘144,000의 특별 반열’, ‘순교자의 두 번째 열매’, ‘대환난을 통과하는 세 번째 열매’, ‘부분 휴거’ 등의 종말론적 도식은 상당 부분 내려놓게 됩니다. 반대로 그 설명 사이사이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연단’, ‘정결’, ‘자기를 죽임’, ‘끝까지 인내함’, ‘믿음과 행함’, ‘주님을 따름’이 앞으로 나오게 됩니다.

 

결국 계시록 14장의 ‘처음 익은 열매’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도 ‘나는 144,000에 들어갈 수 있는가?’가 아닙니다. ‘나는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시든 따라갈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따름은 미래의 대환난 때 갑자기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내 뜻과 주님의 뜻이 충돌할 때 어느 쪽을 선택하는가, 오늘 내 이익과 이웃의 선이 충돌할 때 무엇을 사랑하는가, 오늘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 삶으로 옮기는가에서 이미 시작됩니다. 바로 그 일상의 선택 속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말씀은 먼 종말의 암호에서 벗어나 지금 우리의 거듭남을 비추는 살아 있는 말씀이 됩니다.



10강 3부

일곱 대접의 시작 : ‘재앙이 내려온다’보다 ‘감추어진 상태가 드러난다’

10강 3부에서 강의는 마침내 계시록 16장으로 넘어갑니다. 계시록 15장에서 순교자들이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곁에서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고, 하늘의 ‘증거 장막의 성전’에서 일곱 재앙을 가진 천사들이 나온 데 이어, 이제 실제로 일곱 금 대접이 땅에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강사는 16장부터 18장까지를 하나의 거대한 심판 구간으로 정리합니다. 16장은 일곱 대접을 통한 전 세계적 심판, 17장은 ‘큰 음녀’로 표상되는 종교적 세력의 멸망, 18장은 ‘큰 성 바벨론’으로 표상되는 정치적 세력의 멸망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강사의 종말 시간표에서 이제부터는 더 이상 대환난을 ‘준비’하는 단계가 아니라 본격적인 마지막 심판의 단계입니다.

 

강사는 동시에 이 마지막 재앙에도 두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짐승과 그에게 속한 자들에게는 심판이지만, 아직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살아남아 있는 성도들에게는 ‘마지막 연단’입니다. 그는 ‘순교하지 못하고 살아남은 성도들이 일곱 대접 환난을 통하여 마지막 연단을 받는다’고 명시합니다. 이 점은 지금까지 ‘핵심진리’가 대환난을 이해해 온 관점과 일관됩니다. 대환난은 단지 악한 세상을 파괴하는 기간이 아니라 성도를 정결하게 하여 ‘익은 열매’로 만드는 광야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바로 이 지점에서 중요한 접점과 중요한 차이가 동시에 나타납니다. 접점은 ‘심판이 단순한 파괴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마지막 심판은 무엇인가를 마구 부수는 사건이 아니라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드러내고 분리하여 천국의 질서를 회복하고 새 교회가 세워질 수 있게 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차이는 이 사건을 미래의 특정한 몇 달 동안 자연계 전체를 뒤덮을 물리적 재앙으로 읽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계시록 16장의 대접들은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이미 내적으로 존재하고 있던 악과 거짓이 신적 진리의 유입에 의해 완전히 드러나는 영적 심판을 묘사합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려면 ‘대접을 쏟는다’는 형상을 먼저 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접은 무엇인가를 담고 있던 그릇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쏟으면 안에 있던 것이 밖으로 나타납니다. 이 형상은 스베덴보리의 마지막 심판 이해와 매우 잘 맞습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없던 악을 새로 만들어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람과 교회 안에 품어지고 형성되어 있던 상태가 신적 진리의 빛 아래에서 더 이상 감추어지지 못하고 드러나는 것입니다. 심판은 ‘악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강의는 계시록 16장 1절의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를 읽은 후, 2절의 첫째 대접으로 들어갑니다. 첫째 천사가 대접을 땅에 쏟자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생깁니다. 강사는 이것을 실제 피부병이나 악성 종기와 같은 온역성 재앙으로 이해하며, 바로 이때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 곧 자기 표현으로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이 외적으로도 확연하게 구별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첫째 대접부터 넷째 대접까지는 땅, 바다, 물의 근원, 하늘을 차례로 치면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헌데’라는 표현을 피부질환 자체에서 인간의 영적 상태로 옮겨갑니다. 말씀에서 상처, 종기, 궤양과 같은 것은 좋은 생명이 훼손되어 악과 거짓이 밖으로 드러난 상태를 표상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몸에서는 내부의 질서가 외부의 건강으로 나타나지만, 내적 질서가 무너지면 그것이 몸의 상처나 병변처럼 밖으로 나타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적으로 사랑하던 악과 그것을 정당화하던 거짓이 마지막에는 더 이상 경건한 외관 뒤에 숨어 있지 못합니다. ‘헌데가 난다’는 것은 바로 그 내적 부패가 외적으로 드러나는 매우 강렬한 표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첫째 대접은 하나님께서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에게 특수한 피부병을 골라 보내신다는 의미가 중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짐승으로 표상된 거짓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의 사랑과 삶으로 만든 사람들의 내적 상태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이마’가 지배적 사랑을, ‘손’이 행위를 나타낸다고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짐승의 표를 받았다는 것은 이미 거짓을 의지로 받아들이고 삶으로 확증한 상태입니다. 이제 대접이 쏟아지면서 그 상태가 ‘헌데’처럼 밖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땅’도 단순히 지구의 토양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땅’, 특히 예언서와 계시록의 ‘땅’은 교회를 표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첫째 대접이 땅에 쏟아진다는 것은 교회의 외적인 영역과 그 교회를 이루는 사람들의 상태가 신적 진리에 의해 드러나는 것과 관련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 모두 동일한 기독교인처럼 보였지만 무엇을 실제로 사랑했는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강사가 말하는 ‘그때 가면 천국에 갈 사람과 지옥에 갈 사람이 확실하게 보인다’는 직관에는 일정한 접점이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피부에 어떤 표시가 나타나 외관만 보고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판별할 수 있게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심판에서는 사람의 겉과 속이 하나가 되고, 내적으로 사랑한 것이 더 이상 감추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구별’입니다.

 

사후세계에서도 스베덴보리는 이 과정을 아주 중요하게 설명합니다. 지상에서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직분과 언어와 사회적 예절과 종교적 외관으로 상당 부분 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후 중간영계에서 겉 사람이 점차 벗겨지고 내적 사람이 드러나면서, 사람이 정말 무엇을 사랑했는지가 밖으로 나타납니다. 선을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선의 얼굴과 행동을 갖게 되고, 악을 사랑했던 사람은 자기 악과 상응하는 모습을 취합니다. 마지막 심판 역시 본질적으로 이런 ‘드러남’과 ‘분리’입니다.

 

따라서 첫째 대접의 ‘헌데’는 우리에게도 상당히 현재적인 말씀이 됩니다. 사람은 자기 안의 악이 아직 밖으로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것이 없는 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명예를 매우 사랑하면서도 인정받는 환경에서는 온화하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분노와 질투가 갑자기 터져 나옵니다. 그 상황이 분노를 새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안에 있던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것이 작은 규모에서 일어나는 ‘대접’과 같은 경험이라고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시험의 중요한 기능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 때 내면의 상태를 볼 수 있도록 허용하십니다. 어떤 상황에서 내가 예상하지 못한 교만, 질투, 분노, 지배욕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놀랄 수 있습니다. ‘나는 왜 갑자기 이런 사람이 되었나?’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이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일 수 있습니다. 빛이 들어왔기 때문에 보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심판은 거듭나는 사람에게 반드시 나쁜 소식만은 아닙니다. 악을 보아야 회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추어진 악은 제거될 수 없습니다. 내가 그것을 악이라고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 행하지 않으려고 할 때 주님께서 그 악을 조금씩 분리하십니다. 그러므로 한 개인의 거듭남에서는 ‘내 안의 헌데가 보였다’는 것이 오히려 치료의 시작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짐승의 표를 자기 생명으로 확정한 상태에서는 악이 드러나도 회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계시록 16장의 대접 재앙에서 반복되는 무서운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고통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훼방하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강사도 뒤의 대접들을 설명하면서 악성 종기와 고통으로 ‘혀를 깨물’ 정도가 되어도 하나님을 향해 악독을 품고 회개하지 않는 상태를 강조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고난이 사람을 자동으로 회개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미 굳어진 지배적 사랑은 고난을 만날 때 자기 본성을 더욱 강하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자기애가 지배적인 사람은 뜻대로 되지 않을수록 더 분노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시험 가운데 자신의 약함을 보고 더 주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같은 사건이 서로 다른 사랑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환난을 많이 받으면 거룩해진다’고 단순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환난의 양이 아니라 환난 속에서 사람의 자유가 어디를 향하느냐입니다. 강사가 대환난을 ‘마지막 연단’이라고 말하는 것은 귀하게 받을 수 있지만, 그 연단이 자동적인 영적 세척 과정은 아닙니다. 시험 가운데 악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의지하여 반대되는 선을 선택할 때 거듭남이 일어납니다.

 

강사는 일곱 대접이 시작되기 직전 세계가 사실상 혼란스러운 무정부 상태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 역시 그의 미래주의적 종말 시간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앞선 전쟁과 재앙으로 사회 질서가 붕괴한 가운데 적그리스도의 세계체제마저 흔들리고, 그때 대접 재앙이 본격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런 ‘질서 붕괴’를 교회의 영적 질서가 무너진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무엇이 진리인지 거짓인지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고, 인간의 자기 지성이 말씀보다 높은 권위를 차지하면 교회에도 일종의 영적 무정부 상태가 생깁니다.

 

교회는 제도와 건물이 그대로 있어도 내적으로는 질서를 잃을 수 있습니다. 설교도 있고 예배도 있고 신학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중심을 잃으면 각 사람이 자기 교리와 자기 주장과 자기 이익을 중심으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의미의 무질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은 그 혼합을 끝내고 다시 선과 진리를 분명하게 구별하는 과정입니다.

 

강사는 첫째 대접을 설명하면서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는 마태복음 24장의 말씀도 연결합니다. 그 예로 일제 말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투옥된 성도들이 해방으로 살아남았던 이야기를 들며, 죽음 직전에 하나님께서 기간을 ‘감하시는’ 섭리가 있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후 3년 반에도 순교자의 수가 채워진 뒤 살아남아야 할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보존하여 천년왕국의 백성이 되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도 강사의 중심적인 신앙은 분명합니다. 악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그것이 무한정 지속될 수 없으며, 주님의 섭리 아래에는 경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중심은 스베덴보리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지옥은 결코 주님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위해 악을 허용하시지만, 그 악이 영원한 구원의 가능성을 완전히 파괴하도록 허용하지 않으시며 끊임없이 제한하고 굽히십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 놓은 자연적 날짜를 몇 일 줄이신다’는 의미보다 훨씬 넓은 신적 섭리의 질서에서 봅니다. 지옥으로부터 유입되는 악은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정도까지만 허용됩니다. 시험이 인간의 자유 자체를 파괴해 버린다면 그 시험은 구원에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시험의 시작과 진행과 끝까지도 사람의 영원한 선을 바라보며 제한하십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시험을 이해할 때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가 시험 가운데 ‘이것이 끝나지 않을 것 같다’고 느낄 수 있지만, 영적 시험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험을 허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의 세력에서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허용하십니다. 필요한 만큼만 허용하시고, 그 사람에게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보호하시며, 그 시험을 통해 더 깊은 선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한 가지 조심해야 합니다. 특정한 역사 사건을 곧바로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을 살리려고 정확히 이렇게 계획하셨다’고 단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섭리의 전체 인과관계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건 이후에 감사와 섭리의 손길을 고백할 수는 있지만, 모든 세부 사건의 직접적인 신적 목적을 인간이 확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가 ‘보이지 않게’ 움직이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인간이 섭리를 사전에 계산하고 확정하려 들면 오히려 자유를 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의가 첫째 대접부터 넷째 대접까지를 거의 동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보는 것도 ‘핵심진리’의 독특한 시간표에 속합니다. 본문 자체에는 반드시 그것들이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고 명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강사가 나팔 재앙과 대접 재앙의 구조를 비교하여 세운 해석입니다. 이 점은 ‘본문’과 ‘해석’을 구별하여 읽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대접들의 연속을 자연적 시간 간격보다 영적 상태들의 연속으로 봅니다.

 

그 연속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땅, 바다, 강과 물 근원, 해, 짐승의 보좌, 유브라데, 그리고 공기까지 차례로 대접이 쏟아집니다. 이것은 교회와 인간의 영적 생명을 이루는 여러 차원이 차례로 드러나는 장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땅’은 교회의 일반적 상태, ‘바다’는 보다 외적인 자연적 지식과 진리의 영역, ‘강과 물 근원’은 진리가 흘러나오는 교리와 이해의 원천, ‘해’는 사랑의 차원과 관계합니다. 결국 마지막 심판에서 일부 영역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랑과 신앙, 이해와 삶 전체가 빛 아래 놓이는 것입니다.

 

특히 뒤에서 해에 대접이 쏟아지는 장면은 흥미롭습니다. 말씀에서 해는 가장 깊은 의미에서 주님의 신적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 사랑을 거부하고 반대되는 자기애 안에 있을 때 같은 신적 사랑의 열이 고통스럽게 경험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사람을 불태우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애가 주님의 사랑과 충돌하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앞에서 살펴본 ‘하나님의 진노’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그래서 계시록 16장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을 때 ‘하나님은 왜 이렇게 무서운 재앙을 내리시는가?’라는 질문은 조금 달라집니다. ‘신적 선과 진리가 완전히 드러날 때 악과 거짓은 왜 그것을 고통스럽게 경험하는가?’가 됩니다. 주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바뀌는 것은 인간의 상태입니다.

 

빛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빛이 더 밝아지는 것은 기쁨입니다. 어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같은 빛은 고통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은 주님의 사랑이 자비에서 분노로 변하는 순간이 아니라, 변함없는 사랑과 진리가 더 이상 가려지지 않고 나타나는 순간입니다. 그때 각 사람과 교회의 상태가 무엇인지 완전히 드러납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첫째 대접의 ‘헌데’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만들어 붙이신 상처가 아니라 이미 안에 있던 부패가 밖으로 드러난 형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듭나는 사람에게 이것은 두려움만 줄 필요가 없습니다. 내 안에서 전에 보지 못했던 악을 보는 것은 아프지만, 그것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그 영역까지 빛을 비추고 계시다는 표시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때 중요한 것은 계시록 16장의 악한 자들처럼 드러난 악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는’ 상태로 굳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내 성질이 드러났을 때 환경을 탓하고, 내 질투가 드러났을 때 상대를 탓하고, 내 지배욕이 드러났을 때 ‘나는 책임자니까 어쩔 수 없다’며 정당화하면 헌데를 보면서도 치료를 거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주님, 이것이 제 안에 있었군요. 이것은 악입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이 치유의 출발점입니다.

 

이 점에서 10강 3부의 일곱 대접은 의외로 매우 개인적인 말씀이 됩니다. 미래의 온역과 세계 붕괴를 상상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오늘 내 안에 쏟아질 때 무엇이 드러나는가’를 묻게 합니다. 그 빛 앞에서 변명할 것인가, 아니면 회개할 것인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강사가 10강 첫머리에서 말한 ‘좁은 길’과 다시 연결됩니다. 좁은 길은 자신에게 헌데가 없다고 주장하는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 안의 것을 정직하게 보고, 아프더라도 악을 악이라고 인정하며, 다시 일어나 주님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강사가 ‘오늘 넘어지면 또 일어나고’라고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점에서는 귀한 권면입니다.

 

10강 3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6장의 첫째 대접과 악하고 독한 헌데는 미래 후 3년 반에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에게 실제 피부질환이 내려와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이 외적으로 구별되는 사건으로만 읽기보다,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체어리티와 분리된 거짓 신앙과 악한 사랑이 신적 진리의 유입 앞에서 더 이상 숨지 못하고 외적으로 드러나며, 선과 악의 분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마지막 심판의 아르카나로 읽을 때 더욱 깊은 의미가 열립니다.’

 

그리고 이 3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접’보다 어쩌면 ‘드러남’일 것입니다. 심판은 주님께서 우리를 해치기 위해 무엇인가를 새로 부어 넣으시는 일이 아니라,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말씀의 빛 앞에서 보게 하시는 일입니다. 악한 자에게 그 드러남은 진노처럼 느껴지지만, 거듭나는 사람에게는 회개의 기회가 됩니다. 같은 빛입니다. 같은 주님입니다. 다른 것은 그 빛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의 마지막 심판을 읽을수록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대접의 재앙 자체라기보다, 내 악이 드러나도 그것을 끝까지 정당화하여 ‘회개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10강 4부

둘째, 셋째, 넷째 대접 : 바다가 피가 되고, 물의 근원이 피가 되며, 해가 사람을 태우는 까닭

10강 4부에서는 계시록 16장의 일곱 대접 가운데 둘째·셋째·넷째 대접으로 진행됩니다. 첫째 대접이 ‘땅’에 쏟아져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에게 악하고 독한 헌데가 생겼다면, 이제 심판의 범위는 ‘바다’, ‘강과 물 근원’, 그리고 ‘해’로 확대됩니다. 강사의 종말론적 틀에서는 이것들이 후 3년 반 마지막에 자연계에서 실제로 일어날 전 지구적 재앙입니다. 지금까지 나팔 재앙에서는 땅과 바다와 강 등이 부분적으로 타격을 입었다면, 대접 재앙은 마지막 심판이므로 그 강도와 범위가 훨씬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이 일곱 대접을 순교자의 수가 다 찬 뒤 그 ‘피값’을 갚는 마지막 재앙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16장부터 18장까지를 전 세계적·종교적·정치적 심판의 완결 과정으로 읽고 있습니다.

 

계시록 16장 3절의 둘째 대접은 바다에 쏟아집니다. 그러자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고 합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이것을 실제 자연계의 바다에 임하는 재앙으로 읽습니다. 바다가 피처럼 변하고 해양 생태계가 파괴되는 엄청난 환경재앙입니다. 앞선 나팔 재앙에서도 자연환경에 대한 심판이 있었지만 그것은 부분적인 것이었고, 이제 마지막 대접에서는 사실상 전면적인 심판으로 확대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바다’는 훨씬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말씀에서 바다는 흔히 교회의 가장 외적인 영역, 특히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일반적인 진리와 지식들의 집합을 표상합니다. 강과 샘처럼 특정한 방향으로 흐르는 물이 아니라 수많은 물이 모여 있는 거대한 바다라는 형상 자체가 이를 보여 줍니다. 사람이 말씀을 읽고 배우면서 기억 속에 축적한 수많은 지식과 교리적 사실들이 아직 깊은 생명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일종의 ‘바다’와 같습니다.

 

이 바다가 ‘죽은 자의 피같이 된다’는 것은 매우 강렬한 표상입니다. ‘피’는 좋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적 진리, 특히 말씀의 진리를 나타냅니다. 성찬의 포도주가 주님의 피를 표상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진리가 왜곡되고 거짓으로 변하면 ‘피’는 정반대의 의미를 취합니다. 진리를 훼손하고 말씀을 악한 사랑에 맞추어 왜곡한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다가 피가 되었다는 것은 교회의 외적인 지식과 교리가 더 이상 생명을 전달하지 못하고 거짓과 왜곡으로 가득해진 상태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계시록이 단순히 ‘바다가 더러워졌다’고 하지 않고 ‘죽은 자의 피같이 되었다’고 하는 점이 중요합니다. 생명을 전달해야 할 것이 오히려 죽음의 상태가 된 것입니다. 말씀과 교리는 본래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여 영적 생명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애와 세상 사랑, 권력욕과 자기 의를 확증하는 데 사용되면 같은 성경 지식이 오히려 영적 생명을 질식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두려운 경고입니다. 진리를 모르는 것만 위험한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자기 악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훨씬 깊은 왜곡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성경을 많이 인용하면서도 체어리티를 파괴할 수 있고, 신학적으로 매우 정교하면서도 자기 교리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멸시할 수 있습니다. 그때 ‘바다’에는 여전히 많은 물이 있습니다. 지식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물이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는 표현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적 의미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할 때 살아 있습니다. 반대로 진리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그것은 지식으로 남을 수는 있어도 영적으로는 생명을 잃습니다. 따라서 바다의 생물들이 죽는 것은 교회의 외적 지식과 교리 안에서 살아 있던 영적 생명이 사라지는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지금 우리가 AC 창세기 4장에서 살펴보고 있는 ‘가인’의 문제가 다시 떠오릅니다. 가인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표상합니다. 진리는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겉으로는 여전히 ‘신앙’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도 그 안의 생명은 사라집니다. 계시록 16장의 ‘죽은 바다’는 바로 이 문제가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얼마나 철저하게 진행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형상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어 셋째 천사가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습니다. 그러자 그것들도 피가 됩니다. 바다가 일반적인 진리와 지식의 집합이라면 ‘강’과 ‘물 근원’은 조금 더 구체적입니다. 강은 어떤 근원에서 시작하여 일정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강과 샘, 물 근원은 진리가 흘러나오는 원천과 그 진리의 이해를 표상합니다. 그렇다면 물 근원 자체가 피가 되었다는 것은 단지 몇몇 교리가 잘못되었다는 수준을 넘어 ‘진리를 받아들이고 가르치는 원천 자체가 왜곡된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 차이는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 한 구절을 잘못 이해하는 것과, 성경 전체를 바라보는 원리가 잘못되는 것은 다릅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그 원리에서 흘러나오는 많은 해석이 연쇄적으로 왜곡될 수 있습니다. 물 근원이 오염되면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강 전체가 영향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그렇게 끊임없이 ‘선과 진리의 결합’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을 해석하는 가장 깊은 열쇠는 단순히 언어학적 지식이나 신학 체계가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선입니다. 선이 없는 상태에서 진리를 다루면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결론을 위해 말씀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물 근원’이 오염됩니다.

 

셋째 대접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이어지는 천사의 선언입니다.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그리고 제단에서도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라는 응답이 나옵니다.

 

강사는 이 부분을 순교자들의 피값과 직접 연결합니다. 앞서 계시록 6장의 순교자들이 제단 아래에서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라고 호소했고, 하나님께서는 동무 종들과 형제들의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고 하셨는데, 이제 그 수가 다 찼으므로 일곱 대접을 통해 그 피값에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강의에서도 제단이 말하는 장면을 계시록 6장의 제단 아래에서 호소하던 순교자들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이 연결은 본문의 문자적 흐름에서는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피값을 갚는다’를 인간적 보복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천국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죽인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며 만족하지 않습니다. 천국의 사랑에는 복수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피를 흘렸다’는 것은 가장 깊게는 진리를 파괴하고 선을 해친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피를 마시게 한다’는 심판은 그들이 선택하고 사랑한 거짓과 악의 결과를 스스로 받아들이게 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심판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그가 원하지 않는 지옥을 강제로 떠안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이 지상에서 어떤 사랑을 자기 생명으로 만들면 사후에는 그 사랑과 상응하는 상태로 갑니다. 악을 사랑하고 거짓을 즐겼다면 결국 그 악과 거짓이 자기의 세계가 됩니다. ‘피를 마신다’는 말씀은 이런 영적 귀결을 아주 강렬한 언어로 보여 줍니다. 자신이 남에게 준 것을 하나님께서 복수하여 되돌려 주신다는 의미라기보다, 사람이 선택한 악이 결국 자기 생명이 되어 그 결과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이 의롭다’는 선언도 ‘하나님께서 죄인을 충분히 고통스럽게 벌하셨으니 공정하다’는 의미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신적 심판이 의로운 것은 모든 사람이 자기가 실제로 사랑한 것에 따라 정확하게 분리되기 때문입니다. 겉모습이나 명성, 교단, 직분, 말로 한 신앙고백이 아니라 실제 내적 상태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그 누구도 자기에게 맞지 않는 천국이나 지옥에 강제로 배치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단’에서 나오는 음성과도 어울립니다. 제단은 가장 깊게는 주님께 대한 사랑과 예배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제단이 ‘주의 심판이 참되고 의롭다’고 말한다는 것은 심판의 근원에도 신적 사랑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앞서 일곱 대접 자체가 ‘금 대접’이었다는 사실과 같은 맥락입니다. 심판의 겉모습은 무섭지만 그 가장 깊은 근원에는 신적 사랑과 질서가 있습니다.

 

이어 넷째 천사가 대접을 ‘해’에 쏟습니다. 그러자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웁니다. 사람들이 크게 태움을 입고도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더라’고 합니다. 강사는 여기서 실제 자연계의 태양과 연결하여 극심한 열 재앙을 말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9절의 ‘회개하지 아니하더라’에 주목합니다. 강사는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면 절대로 회개할 수 없다’며, 우리가 지금 회개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큰 은혜라고 강조합니다.

 

이 대목은 10강 4부에서 매우 귀하게 받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강사의 대접 재앙에 대한 자연적 해석과 별개로, ‘회개할 수 있음 자체가 은혜’라는 통찰은 깊습니다. 사람은 자기 악을 쉽게 인정하지 않습니다. proprium의 본성은 자기를 변호하고 악의 원인을 다른 사람과 환경에 돌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 안의 악을 보고 ‘이것은 악이며 주님께 대한 죄입니다’라고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진리의 빛이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만 ‘성령께서 회개하게 하신다’는 말을 인간의 자유가 사라지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끊임없이 선과 진리를 사람에게 유입하시지만, 사람은 그것을 마치 자기 힘으로 받아들이고 선택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응답해야 합니다.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보게 하시고 힘을 주시지만, 사람은 실제로 자기 악을 살피고 인정하고 저항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대신 회개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거듭남은 주님과 인간의 이러한 결합된 과정입니다.

 

넷째 대접의 ‘해’는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해는 가장 높은 의미에서 주님의 신적 사랑을 표상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 천국의 해가 실제로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사랑의 현현이라고 설명합니다. 천적 천사들에게 주님은 해로 보이며, 그 해에서 나오는 열은 신적 사랑에 상응하고 빛은 신적 지혜와 진리에 상응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바로 그 ‘해’가 사람을 태웁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주님의 사랑이 갑자기 사랑을 멈추고 파괴적인 불로 변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변한 것은 해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태입니다.

 

같은 신적 사랑이 선한 사람에게는 천국의 기쁨이지만 악한 사랑에 굳어진 사람에게는 견딜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자기애를 최고의 사랑으로 삼은 사람에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질서는 자기 존재 전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적 사랑의 열이 그에게는 ‘태우는 불’처럼 경험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이해하는 핵심 원리와 같습니다. 주님 안에는 인간적인 분노나 복수심이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영원히 동일합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이 그 사랑에 반대되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의 작용을 진노와 형벌처럼 경험합니다. 태양이 진흙을 진흙으로 만들고 밀랍을 밀랍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성질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물론 자연적 비유에는 한계가 있지만, 핵심은 ‘주님이 변하시는 것이 아니라 수용자의 상태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계시록 16장의 처음 네 대접에는 매우 정교한 진행이 보입니다. 첫째는 ‘땅’입니다. 교회의 외적 기반과 삶의 상태가 드러납니다. 둘째는 ‘바다’입니다. 자연적 인간 안에 축적된 진리와 지식의 전체가 드러납니다. 셋째는 ‘강과 물 근원’입니다. 진리가 흘러나오는 이해와 교리의 원천이 드러납니다. 넷째는 ‘해’입니다. 가장 깊은 사랑의 상태까지 드러납니다. 결국 심판은 사람의 겉에서 시작하여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개인의 거듭남에도 매우 의미 있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는 외적인 행동의 악을 봅니다. ‘이 행동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조금 더 깊어지면 그 행동을 만들어 내는 잘못된 생각과 신앙을 봅니다. 더 깊어지면 그 생각들이 어디에서 흘러나오는지, 곧 내 판단의 원천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깊은 곳에서 ‘내가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화를 냈다고 합시다. 처음에는 ‘화를 낸 행동’을 회개합니다. 이것이 ‘땅’의 차원과 비슷합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저 사람이 나를 무시했다’는 자기중심적인 판단을 발견합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나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사고의 근원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는 주님의 뜻보다 내 명예를 더 사랑하고 있었구나’라는 지배적 사랑의 문제를 보게 됩니다. 거듭남은 이렇게 점점 ‘해’까지 들어갑니다.

 

그래서 넷째 대접 뒤에 ‘회개하지 아니하더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가장 깊은 사랑이 드러났을 때에도 사람이 그것을 놓지 않으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동 하나를 고치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 생각 하나를 수정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내려놓는 것은 어렵습니다. 바로 거기서 진정한 영적 싸움이 시작됩니다.

 

사람은 심지어 고통을 당하면서도 자기 사랑을 붙들 수 있습니다. 계시록 16장의 사람들은 해의 열에 크게 태움을 입으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훼방합니다. 고난 자체가 사람을 거듭나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보여 줍니다. 고난은 내적 상태를 드러낼 수 있지만, 드러난 것을 주님의 도움으로 거절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을 필요로 합니다.

 

강사가 이 대목에서 ‘우리가 회개하는 것은 큰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 것은 그래서 더욱 귀하게 들립니다. 회개할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마음이 완전히 굳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듣다가 마음이 찔리고, ‘이것은 내 잘못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주님 앞에서 돌이키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을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적 진리가 아직 우리 안에 들어올 길이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다만 회개는 감정의 강도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많이 울었다고 반드시 깊이 회개한 것도 아니고, 눈물이 없다고 회개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회개는 자기를 살펴 악을 발견하고, 그것을 주님께 대한 죄로 인정하여 고백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실제로 그 악을 행하지 않으려고 싸우는 것입니다. 결국 회개의 진실성은 이후의 삶에서 확인됩니다.

 

이 점은 ‘핵심진리’가 강조해 온 ‘연단’과도 좋은 접점을 만듭니다. 연단은 많은 고통을 겪었다는 이력이 아닙니다. 내 안의 것이 드러날 때 그것을 주님의 말씀 앞에서 다루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대접 재앙을 거듭남에 적용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얼마나 큰 고난을 보내셨는가’보다 ‘그 상황을 통해 내 안의 무엇이 드러났고, 나는 그것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또한 둘째·셋째 대접에서 물이 피로 변하는 장면은 말씀을 다루는 우리 자신에게도 특별한 경고가 됩니다. 말씀은 생명의 물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이미 세워 놓은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씀을 가져다 붙이면 물이 피로 변할 수 있습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정죄하기 위해 성경을 사용하고, 자기 교단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말씀을 사용하며, 자기 권위를 세우기 위해 신적 진리를 이용한다면 생명의 물이 다른 용도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사용하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가지고 다른 설교자와 교회를 재단하는 데만 사용한다면, 아무리 정확한 AC와 ‘계시록 밝히기’의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생명의 물로 기능하고 있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그 렌즈를 통해 다른 사람의 말 가운데 있는 선과 진리는 더 잘 발견하고, 잘못된 부분은 그 사람을 정죄하지 않으면서 분별하며,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먼저 비추게 된다면 진리는 본래의 쓰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이번 강사의 태도에서도 좋은 것을 먼저 살릴 필요가 있습니다. 일곱 대접을 자연계의 미래 재앙으로 해석하는 부분에서는 스베덴보리와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회개할 수 있는 것이 은혜다’, ‘작은 죄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성도가 끝까지 연단 가운데 주님을 붙들어야 한다’는 중심에는 귀한 신앙적 감각이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통째로 버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 안에서 더 깊은 질서로 옮겨 놓는 것입니다.

 

10강 4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둘째·셋째·넷째 대접에서 바다가 피가 되고 강과 물 근원이 피가 되며 해가 사람을 태우는 장면은 미래의 자연계에서 바다와 담수와 태양에 연속적으로 물리적 재앙이 일어나는 사건으로만 읽기보다,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말씀의 진리와 교리의 원천이 악한 사랑에 의해 왜곡되어 영적 생명을 잃고, 마침내 사람의 가장 깊은 지배적 사랑까지 신적 사랑과 진리 앞에서 완전히 드러나는 마지막 심판의 아르카나로 읽을 때 더욱 깊은 의미가 열립니다.’

 

그리고 10강 4부에서 가장 오래 남겨 둘 말씀은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더라.’ 계시록이 두려운 이유는 바다가 피가 되어서만도 아니고 해가 뜨거워져서만도 아닙니다. 그 모든 일을 겪고도 사람이 ‘회개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악이 드러나는 것은 아직 끝이 아닙니다. 악이 드러났는데도 그것을 악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상태, 더 나아가 자기 악의 결과를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상태가 진정 두려운 것입니다.

 

반대로 아직 회개할 수 있다면 희망이 있습니다. 내 안의 ‘바다’가 오염되어 있음을 보고, ‘물 근원’에 잘못된 것이 있음을 발견하고, 마침내 내 ‘해’, 곧 가장 깊은 사랑 가운데 자기애가 자리 잡고 있음을 보게 되더라도, 그것을 주님 앞에서 인정할 수 있다면 거듭남은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말씀 앞에서 우리가 구할 것은 ‘주님, 저에게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게 해 주십시오’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 제 안에 있는 것을 보게 하시고, 보았을 때 변명하지 않고 회개하게 하시며, 그 악을 주님의 힘으로 떠날 수 있게 하옵소서’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말한 것처럼, 참으로 ‘회개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10강 5부

다섯째, 여섯째 대접과 아마겟돈 : 짐승의 보좌가 어두워지고, 마지막 거짓들이 전쟁을 준비하다

10강 5부에서는 계시록 16장의 흐름이 한층 더 깊어집니다. 앞의 네 대접이 ‘땅’, ‘바다’, ‘강과 물 근원’, ‘해’에 차례로 쏟아지면서 교회와 인간의 외적인 것에서 점점 내적인 사랑의 상태까지 드러냈다면, 이제 다섯째 대접은 마침내 ‘짐승의 보좌’ 자체를 겨냥합니다. 강사는 이것을 미래 후 3년 반에 실제 예루살렘 성전에 자리 잡은 적그리스도의 보좌에 하나님의 심판이 직접 떨어지는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그 결과 적그리스도의 나라가 암흑에 빠지고, 첫째 대접 때부터 악성 종기로 고통받던 사람들이 혀를 깨물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하나님을 훼방하고 여전히 회개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강사의 종말 시간표 안에서는 이 장면이 매우 극적입니다. 지금까지 세계를 장악한 듯했던 적그리스도의 체제가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적그리스도를 구세주처럼 믿고 짐승의 표까지 받았는데, 막상 그의 나라는 대접 재앙 앞에서 아무 힘도 쓰지 못합니다. 그러자 강사는 그 내부에서도 책임 전가와 불신이 생기고,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 세력이 서로를 탓하면서 분열하기 시작한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여섯째 대접에서 이 갈등이 세계적 전쟁, 곧 아마겟돈으로 폭발한다는 구조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가장 먼저 주목할 말은 ‘짐승의 보좌’입니다. 보좌는 누군가가 앉아 다스리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영적으로는 무엇이 교회와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가를 나타냅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스베덴보리에게 계시록의 짐승은 미래 한 정치인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특히 체어리티와 삶에서 분리된 신앙, 그리고 그 교리를 자연적 인간의 추론으로 확증하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렇다면 ‘짐승의 보좌’란 바로 그 거짓된 원리가 교회 안에서 하나의 지배적 권위를 차지한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거짓 하나가 있다는 것과 그 거짓이 ‘보좌’에 앉는 것은 다릅니다. 사람에게 잘못된 생각 하나가 있어도 그것이 다른 진리에 의해 교정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거짓이 신앙 체계 전체를 지배하는 원리가 되면, 그 사람은 모든 말씀을 그 거짓을 중심으로 읽기 시작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인간이 어떤 교리를 만들고, 그 뒤에 성경 전체를 그 교리에 맞추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말씀보다 인간의 체계가 ‘보좌’에 앉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섯째 대접이 ‘짐승’ 자체보다 ‘짐승의 보좌’에 쏟아진다는 것은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마지막 심판에서는 단편적인 오류들만 고쳐지는 것이 아니라 거짓을 지배하게 만든 중심 원리 자체가 신적 진리 앞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뿌리가 심판받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밝히기’에서 이 대목이 신앙만의 교리를 지탱하는 지배적 구조와 연결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집니다’. 말씀에서 ‘어둠’은 진리가 없는 상태, 또는 거짓으로 인해 진리를 볼 수 없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것도 단순히 자연계의 태양빛이 갑자기 사라지는 장면만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거짓이 신적 진리 앞에서 폭로되었는데, 그 거짓을 버리지 않으면 사람에게 남는 것은 빛이 아니라 어둠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거짓된 교리가 세력을 얻고 있을 때에는 오히려 매우 밝게 느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설명이 명료하고, 모든 성경 구절이 한 체계 안에서 정리되는 것처럼 보이며, ‘우리는 답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을 줍니다. 그런데 그 중심 원리가 잘못되어 있다면 그 명료함 전체가 일종의 거짓된 빛일 수 있습니다. 신적 진리가 그 체계를 비추면 갑자기 그동안 분명해 보였던 것들이 모순으로 드러납니다. 그때가 ‘짐승의 나라가 어두워지는’ 상태와 비슷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자기 확신이 강할 때에는 모든 일이 자기 시각에서 잘 설명됩니다. ‘내가 화내는 것은 저 사람이 잘못했기 때문이고, 내가 저 사람을 멀리하는 것은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이며, 내가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서다’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빛이 조금 더 깊이 들어오면 그 뒤에 자기애와 명예욕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때 이전의 설명 체계가 무너집니다. 작은 ‘보좌의 심판’입니다.

 

강사는 다섯째 대접에서 사람들이 심한 고통을 받으면서도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강조합니다. 그는 ‘진정한 회개는 성령님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며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이 충격과 원망과 불평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돌아오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앞 4부에서도 보았지만, 이 반복은 계시록 16장에서 상당히 중요합니다. 재앙 그 자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재앙을 겪고도 회개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지배적 사랑의 고착과 연결해서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오랫동안 어떤 악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그 악을 거짓으로 정당화하면서 생명으로 만들어 가면 나중에는 진리를 보아도 그것을 싫어하게 될 수 있습니다. 진리가 이해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진리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지성의 문제가 사랑의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단순히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내가 사랑하던 것을 내려놓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명예를 사랑했다면 명예욕을, 지배를 사랑했다면 지배욕을, 자기 의를 사랑했다면 ‘내가 옳다’는 기쁨을 포기해야 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회개는 어렵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지 않는 거짓은 쉽게 고칠 수 있지만, 사랑과 결합한 거짓은 잘 놓지 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섯째 대접의 ‘혀를 깨문다’는 표현도 흥미롭습니다. 말씀에서 혀는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사람이 고통 속에서 혀를 깨물면서도 하나님을 훼방한다는 것은 자기의 거짓된 사고가 무너지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신적 진리를 대적하는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인간은 자기 확신이 무너질 때 상당한 고통을 느낍니다. 오랫동안 자기 정체성과 결합해 온 신앙 체계나 가치관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진리를 공격하는 편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섯째 대접 뒤 강사의 설명에서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 세력이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갈라진다는 점도 영적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악과 거짓은 겉으로는 강하게 연합하는 것처럼 보여도 진정한 결합을 이룰 수 없습니다. 천국적 결합은 서로의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루어지지만, 지옥적 연합은 각자가 자기 유익을 얻기 위해 잠시 손잡은 것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공동의 적이나 공동의 이익이 사라지면 서로를 공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옥의 영들이 서로를 사랑해서 하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같은 악한 목적 때문에 잠시 결합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의 가장 깊은 사랑은 자기 자신이므로 결국 서로를 지배하려 합니다. 한 지옥적 영이 다른 영에게 복종하는 것도 그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힘에 눌려서입니다. 그래서 지옥적 질서는 본질적으로 분열을 품고 있습니다.

 

이 원리는 인간의 마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탐욕과 명예욕은 어느 동안 서로 협력할 수 있습니다. 돈을 벌어 명예를 얻고, 명예를 이용해 더 많은 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둘이 충돌하면 사람 안에서 갈등이 생깁니다. 자기애에 기초한 여러 욕망들은 근본적으로 하나의 천국적 질서를 이루지 못합니다. 결국 각각 ‘내가 왕이 되겠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적 붕괴 뒤 여섯째 대접이 ‘큰 강 유브라데’에 쏟아집니다. 강사는 유브라데 강물이 실제로 말라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군대가 아마겟돈 전쟁에 참여할 길이 열리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어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을 실제 악령들의 활동으로 보며, 이 악령들이 이적을 행하여 세계의 왕들을 마지막 전쟁으로 모은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섯째 대접에서 매우 중요한 방향 전환이 다시 일어납니다. 유브라데는 단순한 중동의 강을 넘어 말씀에서 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사이의 경계, 특히 이성적 사고가 있는 영역과 관련됩니다. ‘물이 마른다’는 것은 그 영역에 있던 진리가 사라지거나, 반대로 거짓된 추론이 더 이상 자기 모습을 감추지 못하도록 길이 열리는 상태와 관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방에서 오는 왕들’은 자연적 아시아의 군주들이라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 특히 ‘동방’이 주님과 사랑을 나타내는 상응 속에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이 대목은 강사의 자연적 전쟁 독법과 스베덴보리의 영적 독법이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강사의 질문은 ‘유브라데가 마르면 어느 국가의 군대가 어느 길로 이동할 것인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질문은 ‘교회의 마지막 싸움에서 어떤 진리와 어떤 거짓이 맞붙는가?’입니다.

 

계시록에서 그 싸움을 준비하는 세력이 ‘용의 입, 짐승의 입,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옵니다. 여기서 반복되는 말이 ‘입’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전쟁의 무기가 먼저 탱크나 미사일이 아니라 ‘입’에서 나옵니다. 곧 교리와 주장, 추론입니다. 계시록의 마지막 전쟁이 본질적으로 진리와 거짓의 전쟁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중요한 표상입니다.

 

강사는 이 세 더러운 영을 ‘온갖 악담과 시끄러운 비방과 욕을 잘하는 악령’이라고 설명하면서,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주장을 가지고 활동하는 영들이라고 봅니다. 여기에는 영적 전쟁이 말과 사상과 미혹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중요한 감각이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 ‘개구리’는 더욱 구체적으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자연적 추론과 말재주로 거짓을 확증하는 상태와 관련됩니다.

 

개구리는 물과 땅 사이를 오갑니다. 영적 상응에서도 이런 낮고 습한 생물은 감각적·자연적인 추론과 연결되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특히 계시록의 ‘개구리 같은 영’은 말씀의 더 높은 영적 진리를 보지 못하고 외적 문자와 인간적 논리를 가지고 거짓을 계속 주장하는 추론을 생각하게 합니다. 논리는 많고 말은 많지만 그 안에 천국의 빛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현실적인 영적 위험입니다. 거짓은 대개 ‘나는 거짓이다’라는 모습으로 오지 않습니다. 논리를 가지고 옵니다. 성경 구절을 가지고 옵니다. 역사적 사례를 가지고 옵니다. 사람의 자연적 이성에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개구리 같은 영’의 문제는 무지보다 거짓된 확증에 있습니다. 이미 결론을 정해 놓고 가능한 모든 논리를 동원하여 그 결론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겟돈’은 군사전쟁의 지명만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아마겟돈은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진리와 거짓이 결정적으로 충돌하는 영적 전쟁을 나타냅니다. 특히 주님이 누구이신가, 그리고 구원이 단순한 신앙의 고백으로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 속에서 이루어지는가 하는 문제와 깊이 연결됩니다. 계시록 전체에서 계속해 온 싸움이 마지막으로 집중되는 곳입니다.

 

강사의 해석에서도 아마겟돈은 단순한 국가 간 전쟁을 넘어 ‘하나님의 큰 날의 전쟁’입니다. 그는 세 더러운 영이 온 천하 임금들을 모아 이 마지막 전쟁을 준비한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그의 렌즈에서는 이 영적 미혹이 결국 자연계의 군사동맹과 전쟁으로 나타나지만, 스베덴보리에게는 교회 안의 거짓과 진리의 최종 충돌 자체가 본질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거대한 전쟁 준비 장면 한가운데에 계시록 16장 15절이 갑자기 삽입됩니다.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강사도 이 구절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는 주님의 지상 재림이 언제인지 모르므로 깨어 있어야 하며, 특히 마지막 연단을 통과하는 성도들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자기 옷’, 곧 자신의 행실을 더럽히지 않아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대목은 이번 10강 5부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강사의 권면이 매우 가까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말씀에서 ‘옷’은 진리를 표상합니다. 왜냐하면 옷이 몸을 입히듯 진리는 선을 입히고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사랑과 의지가 몸과 같다면, 그것이 밖으로 나타나는 사고와 삶의 형식이 옷과 같습니다. 따라서 ‘옷을 지킨다’는 것은 단지 외적 도덕생활을 깨끗이 유지하는 것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를 거짓으로 더럽히지 않고 그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을 뜻합니다.

 

강사는 이를 ‘자기 행실’과 연결합니다. 이 직관은 상당히 좋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행실 자체보다 그 행실을 입히고 있는 내적 사랑까지 함께 봅니다. 같은 선행을 해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할 수 있고, 이웃의 선을 진심으로 원해서 할 수도 있습니다. 천국에서 중요한 것은 외적 행위와 그 행위의 내적 의도가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벌거벗음’ 역시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좋은 의미의 벌거벗음은 순진함을 나타낼 때도 있지만, 여기서는 진리가 없어 자기 악이 그대로 드러난 부끄러운 상태를 나타냅니다. 겉으로 신앙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마지막 심판에서 그 옷이 실제 생명과 결합되어 있지 않았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둑같이 오신다’는 말씀의 초점도 날짜를 알아맞히지 못한다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진리가 우리의 상태를 드러낼 때 그것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예상치 못한 심판처럼 느껴진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날마다 자기 삶을 말씀의 빛 아래 살피는 사람에게는 그 빛이 완전히 낯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재림 이해와도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두 번째 오심은 자연계 하늘에서 육체로 다시 내려오시는 사건보다 말씀의 신적 진리가 새롭게 열리고 주님의 참된 신성이 드러나는 영적 오심입니다. 따라서 ‘깨어 있으라’는 것은 구름을 쳐다보며 날짜를 기다리는 것보다 진리가 올 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랑과 삶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강사는 ‘재림 신앙이 너무 중요하다’며 신학적 견해가 조금 달라도 주님은 반드시 오시며 행한 대로 갚으신다고 강조합니다. 이어 믿음과 행실을 함께 중요하게 말합니다. 종말론의 외적 형태에서는 스베덴보리와 크게 다르지만, ‘깨어 있음이 실제 행실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이 부분은 귀하게 남길 수 있습니다.

 

더구나 ‘도적같이 오리니’라는 말씀이 세 더러운 영들이 세상의 왕들을 전쟁에 모으는 한가운데 삽입되어 있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합니다. 계시록은 독자에게 ‘그들이 어느 나라 군대를 어디에 모으는지 계산하라’고만 하지 않습니다. 갑자기 시선을 독자 자신에게 돌립니다. ‘너는 깨어 있는가? 네 옷은 어떠한가?’라고 묻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계시록을 읽는 중요한 방식입니다. 아마겟돈을 밖에서 연구하다가도 반드시 안으로 돌아옵니다.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밖에 있다고 안심하지 못하게 합니다. 내 안에도 거짓을 합리화하는 ‘개구리 같은 추론’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악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성경 구절과 논리를 동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아마겟돈은 이미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진리는 ‘용서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proprium은 ‘저 사람은 너무 악하니까 용서하면 안 된다’, ‘용서하는 것은 불의를 묵인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공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수많은 논리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물론 실제 정의의 문제와 용서는 구별해야 하지만, 그 논리의 깊은 목적이 내 복수심을 지키는 데 있다면 그것은 ‘개구리 같은 추론’이 될 수 있습니다. 진리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실제로는 악한 사랑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또 진리는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고 합니다. proprium은 ‘그래도 내가 이만큼 공부했고, 내가 수고했고, 내가 남들보다 더 깊이 이해했다’고 말합니다. 이 역시 매우 그럴듯합니다. 사실 수고한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사용하여 자기 공로를 지키려 한다면 거짓의 추론이 섞입니다. 그래서 영적 전쟁은 단순히 참 문장과 거짓 문장을 구별하는 싸움이 아니라 그 문장을 움직이는 사랑까지 분별하는 싸움입니다.

 

이 점에서 ‘아마겟돈’은 우리에게 매우 가까워집니다. 거대한 마지막 전쟁의 본질이 진리와 거짓의 충돌이라면, 한 사람이 회개를 앞두고 자기 악을 정당화하는 모든 논리와 싸우는 것도 작은 아마겟돈입니다. 주님의 진리와 proprium의 거짓 사이에 전선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인간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내가 스스로 진리를 판별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모든 참된 빛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고 이성을 사용하고 분별해야 하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주님, 제 자기애가 이 진리를 왜곡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자기 지성이 자기 자신을 심판관으로 세우는 순간 짐승의 보좌가 다시 세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섯째 대접의 핵심은 ‘적그리스도 왕국에 정전이 일어난다’는 것보다 거짓된 신앙의 지배 원리가 신적 진리 앞에서 빛을 잃는 데 있습니다. 여섯째 대접의 핵심은 ‘유브라데 강이 물리적으로 마른다’는 것보다 마지막 영적 싸움을 가리고 있던 것들이 제거되어 진리와 거짓이 완전히 맞부딪히는 데 있습니다. 세 개구리의 핵심은 기괴한 악령들의 외모보다 악한 사랑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쏟아지는 거짓된 추론입니다. 그리고 아마겟돈의 핵심은 어느 평원에서 벌어질 세계대전 이전에 주님에 관한 진리와 삶의 선을 거부하는 거짓이 마지막으로 결집하여 싸우는 교회의 영적 전쟁입니다.

 

그러면서도 강사의 해설에서 꼭 살려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아마겟돈 이야기를 하던 바로 한가운데서 ‘자기 옷을 지키라’는 말씀을 붙들고 신앙과 행실을 강조합니다. 이 부분은 계시록 자체의 초점과도 잘 맞습니다. 세계가 어떤 모양으로 끝날지 아는 것보다 그때 내가 어떤 상태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때’만이 아니라 지금의 상태가 중요합니다. 마지막 순간의 옷은 오늘 하루하루 입고 살아 온 옷이기 때문입니다.

 

10강 5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6장의 다섯째·여섯째 대접과 아마겟돈은 미래 적그리스도의 세계정부가 암흑에 빠진 뒤 유브라데가 말라 각국 군대가 중동으로 집결하여 최후의 세계전쟁을 벌이는 사건으로만 읽기보다,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의 지배적 원리가 신적 진리 앞에서 완전히 어두워지고, 그 체계를 지탱하던 자연적 추론과 거짓들이 마지막으로 결집하여 주님에 관한 진리와 선한 삶을 대적하는 교회의 최종 영적 전쟁을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을 때 그 아르카나가 더욱 깊게 열립니다.’

 

그리고 이 5부에서 가장 오래 남겨 두고 싶은 말씀은 아마 아마겟돈이라는 이름보다 그 한가운데 삽입된 이것일 것입니다.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세상의 왕들이 모이고 악령들이 이적을 행하고 마지막 전쟁이 준비되는 그 엄청난 장면 한복판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전쟁 지도를 연구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네 옷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강사도 이 말씀을 ‘자기 행실을 지켜야 한다’는 권면으로 받아들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그것은 ‘네가 받은 진리를 사랑과 결합하여 살고, 자기애의 거짓으로 그 진리를 더럽히지 말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바로 그것이 아마겟돈을 준비하는 가장 실제적인 준비이며, 동시에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거듭남의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10강 6부

일곱째 대접과 ‘되었다’ : 큰 지진, 바벨론의 붕괴, 그리고 심판의 완결

10강 6부에서는 계시록 16장의 마지막, 곧 일곱째 대접으로 들어갑니다. 여섯째 대접에서 유브라데가 마르고,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 세 더러운 영이 세상의 왕들을 아마겟돈으로 모았다면, 이제 일곱째 천사가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습니다. 그러자 성전의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되었다’고 선언하고, 번개와 음성과 우레와 전무후무한 큰 지진이 일어납니다. 강사는 이 장면을 실제 자연계에 일어날 마지막 전 지구적 재앙으로 이해합니다. 그는 이 지진을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지각변동으로 보고, 그 결과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이 무너지며, 섬과 산들이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거대한 우박까지 쏟아짐으로써 일곱 대접 재앙이 완전히 끝난다고 설명합니다.

 

강사의 시간표에서 이 장면은 매우 결정적입니다. 일곱째 대접이 끝나면 후 3년 반의 마지막 재앙도 사실상 완결되고, 이어 계시록 17장에서는 큰 음녀의 종교적 심판, 18장에서는 큰 성 바벨론의 정치적 심판을 자세히 보여 준다고 정리합니다. 강사 자신도 계시록 16장을 ‘전 세계가 멸망하는 일곱 대접’, 17장을 ‘큰 음녀의 종교적 멸망’, 18장을 ‘큰 성 바벨론의 정치적 멸망’으로 구분합니다. 그러므로 16장의 일곱째 대접은 단지 일곱 재앙 가운데 마지막 하나가 아니라, 지금까지 축적되어 온 종말의 악과 거짓이 완전히 무너지는 총결산의 장면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말은 ‘되었다’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마지막 자연재해까지 모두 끝났다’는 종료 방송처럼만 들을 말이 아닙니다. 어떤 영적 상태가 완전히 충만해져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게 되었다는 선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 전체에서 우리는 계속 ‘익음’, ‘수가 참’, ‘일곱’, ‘마지막’이라는 표현들을 보았습니다. 선도 익고 악도 익으며, 상태가 완성되면 분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되었다’는 말은 주님의 인내가 감정적으로 한계에 도달했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상태가 심판을 통해 완전히 드러나고 분리될 때가 찼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더 깊습니다.

 

이것은 앞서 강사가 계속 강조해 온 ‘익은 열매’와도 연결됩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성도들이 첫째, 둘째, 셋째 익은 열매로 완성되고, 악한 자들의 포도송이도 심판받을 만큼 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익음’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반복해서 사랑하고 선택하느냐가 점차 지배적 사랑이 되고, 마침내 그것이 그 사람의 생명의 질이 됩니다. 마지막 심판은 바로 그 생명의 질이 완전히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되었다’는 것은 사람과 교회 안의 숨은 것이 더 이상 숨을 수 없게 되었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일곱째 대접이 ‘공기 가운데’ 쏟아진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앞의 대접들은 땅, 바다, 강과 샘, 해, 짐승의 보좌, 유브라데에 쏟아졌습니다. 이제 마지막 대접은 공기입니다.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생명 활동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런 마지막 범위를 교회 전체를 둘러싼 가장 일반적인 사고와 영적 분위기, 곧 모든 것을 관통하는 상태와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심판이 어느 한 교리나 한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교회 전체의 영적 분위기까지 완전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습니다. 어떤 잘못 하나를 고치는 것과 그 사람의 ‘분위기’ 전체가 바뀌는 것은 다릅니다. 거듭남이 깊어지면 단지 몇 가지 행동만 수정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 무엇을 기뻐하고 싫어하는지까지 달라집니다. 이것은 공기처럼 전체를 둘러싼 상태입니다. 일곱째 대접이 공기에 쏟아진다는 표상은 마지막 심판이 그렇게 전면적임을 보여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어 ‘번개와 음성과 우레’가 나옵니다. 말씀에서 번개와 우레는 신적 진리가 강력하게 나타나는 것과 자주 연결됩니다. 신적 진리가 사람의 더 낮은 차원까지 내려올 때 그것이 마치 번쩍이는 빛과 강한 소리처럼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계시록에서 반복되는 표상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단순한 기상현상만 보기보다, 주님의 신적 진리가 더 이상 가려지지 않고 마지막으로 강력하게 드러나는 상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뒤에 ‘큰 지진’이 옵니다. 강사는 이것을 실제 전무후무한 자연 지진으로 해석합니다. 그는 ‘지금 우리가 염려하는 지진은 지진도 아니다’라고 할 정도로 이 재앙의 물리적 규모를 크게 봅니다. 문자적 차원에서는 충분히 그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지진’은 교회의 상태가 크게 흔들리고 뒤집히는 것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표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땅’이 교회를 나타내므로 땅이 흔들린다는 것은 교회의 기존 질서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교회 건물이 무너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의 교리적 기반과 신앙의 구조가 무너질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절대적으로 여겼던 것이 더 이상 설 수 없게 되고, 사람들에게 확실해 보였던 교리적 체계가 신적 진리 앞에서 흔들리며, 그동안 선과 진리처럼 보였던 것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이런 것이 영적 지진입니다.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이런 ‘지진’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자기 정체성을 떠받쳐 온 신앙적 확신 하나가 잘못되었음을 깨닫는 순간, 사람의 내적 세계 전체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믿고 있었던 것인가?’ 하는 혼란이 옵니다. 하지만 그 흔들림이 반드시 파괴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기초가 무너져야 더 참된 기초 위에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지진은 심판이면서 동시에 새 질서의 준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마지막 심판은 옛것을 단순히 없애기 위한 사건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교회를 준비하기 위한 분리입니다. 옛 교회의 거짓과 악이 흔들려 무너져야 새 예루살렘의 질서가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계시록의 심판 장면을 마지막 파괴로만 읽으면 이야기의 절반만 보는 셈입니다.

 

계시록 16장 19절에서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졌다’고 합니다. 강사는 여기서 큰 성을 후 3년 반 적그리스도 체제의 중심과 연결하고, 만국의 성들은 666의 짐승들이 지배하던 여러 세력의 중심이라고 풀이합니다. 그는 실제 대지진으로 그들이 자랑하던 도시와 권력과 모든 것이 무너진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성’이 교리와 교회의 구조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성은 많은 사람이 함께 살며 질서를 이루는 곳입니다. 영적으로는 진리나 거짓이 체계화되어 하나의 교리적 도시를 이루는 것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큰 성이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이 무너진다는 것은 거짓된 교리 체계와 그것을 바탕으로 세워진 여러 영적 구조들이 마지막 심판에서 더 이상 하나를 유지하지 못하고 붕괴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갈라진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거짓에 기초한 연합은 처음에는 단단해 보이지만 본질적인 결합이 아닙니다. 앞서 다섯째 대접에서도 보았듯 악과 거짓은 서로를 사랑해서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유익 때문에 잠시 손잡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내부적으로 갈라집니다. 천국적 결합은 선과 진리가 하나의 주님을 중심으로 결합하지만, 지옥적 결합은 각자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결국 분열을 품고 있습니다.

 

사람 안의 악한 욕망들도 그렇습니다. 돈을 사랑하고 명예를 사랑하며 지배를 사랑하는 것이 한동안 서로 협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서로 충돌하면 사람의 내면은 찢어집니다. 하나의 악한 사랑이 다른 악한 사랑을 끝까지 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각각 자기 중심을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악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분열’의 씨앗을 품습니다.

 

이어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강사는 바벨론을 장차 심판받을 실제 정치·종교적 세계 체제와 연결하며, 이어 17장과 18장에서 그 정체와 멸망을 따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바벨론은 훨씬 명확한 영적 원리를 가집니다. 주님의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사람을 지배하려는 사랑, 곧 종교적 권위와 신앙을 자기 권력과 자기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왜곡 가운데서도 매우 깊은 왜곡입니다. 돈을 위해 사람을 지배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의 양심을 지배하는 것이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내 말을 따르는 것이 곧 하나님을 따르는 것’으로 만들고, 교회와 직분과 영적 권위를 자기 지배욕의 도구로 사용한다면 바벨론의 원리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오래 잊고 계시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에서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상태가 심판을 위해 완전히 드러나는 것을 인간적 표현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적 지배욕이 그동안 종교적 경건의 외관 속에 감추어져 있었지만, 이제 그 실체가 완전히 드러난 것입니다.

 

이것은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에게 특히 엄중한 말씀입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사람이 다른 사람을 더 자유롭게 주님께 인도해야지, 자기에게 종속시키려 해서는 안 됩니다. 천국의 질서는 자유입니다. 주님조차 사람을 강제로 사랑하게 하지 않으시는데,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양심을 자기 손에 쥐려 한다면 천국의 질서와 정반대로 갑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심판을 다른 교단이나 특정 종교집단의 문제로만 읽으면 말씀의 칼날을 피하게 됩니다. ‘내 안에도 바벨론이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내가 진리를 말할 때 상대가 주님께 가까워지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내 말을 인정하기를 원하는가. 내가 사역을 할 때 사람을 자유롭게 하려 하는가, 아니면 내 영향력 안에 두려 하는가. 내가 옳다는 사실보다 이웃의 영적 선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가. 이런 질문들이 바벨론을 우리 안에서 드러냅니다.

 

이어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데없더라’고 합니다. 강사는 이를 실제 지각변동으로 섬과 산들이 사라지는 것으로 읽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는 ‘섬’과 ‘산’ 역시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섬은 더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어느 정도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는 외적 상태와 연결될 수 있고, 산은 좋은 의미에서는 사랑의 높음, 반대 의미에서는 자기애와 교만의 높음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문맥상 마지막 심판에서 산들이 사라지는 것은 인간이 자기 높음을 세워 온 모든 것이 신적 진리 앞에서 무너지는 상태로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산’은 자기 높임과 연결하여 생각하면 매우 직접적입니다. 인간은 자기 지식, 직분, 영적 체험, 업적을 산처럼 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빛 앞에서는 자기에게서 나온 높음이 아무것도 아님이 드러납니다. 천국의 참된 높음은 자신을 높이는 데 있지 않고 주님을 높이고 이웃을 섬기는 데 있습니다.

 

강의는 이어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을 실제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는 이를 거의 폭탄과 같은 거대한 우박으로 설명하면서, 이런 재앙 앞에서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훼방한다고 말합니다. 자동자막에는 무게 환산이 다소 혼란스럽게 나타나므로 그 세부 수치까지 해설의 근거로 삼지는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강사가 이것을 마지막 자연재해의 절정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우박은 거짓된 진리, 곧 겉모습은 진리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생명이 없는 거짓과 관련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물은 본래 진리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 물이 얼어 차갑고 딱딱한 우박이 되면 생명을 적시는 물의 기능을 잃습니다. 이것은 진리가 사랑에서 분리되어 차갑고 공격적인 교리적 거짓으로 변하는 모습과 잘 어울립니다.

 

사람은 성경구절을 가지고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때릴 수도 있습니다.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면 생명의 물이지만, 사랑이 빠지고 자기 의와 정죄와 결합하면 그 진리가 우박처럼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같은 말씀인데 사용하는 사랑이 다르면 전혀 다른 결과가 생깁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적용하는 우리에게도 특별히 주의할 점입니다. 상응과 속뜻이라는 귀한 진리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두드리는 ‘우박’을 만들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당신은 틀렸다’, ‘당신의 신앙은 문자적 수준이다’라는 식으로 진리를 사용하면, 내용은 맞을 수 있어도 사랑의 물이 얼어붙은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진리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주어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그래서 이번 해설의 기본 태도도 중요합니다. 강사의 자연적 종말론과 스베덴보리의 영적 해석이 크게 다르더라도, 그것을 ‘누가 옳고 누가 어리석은가’를 가르는 자료로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강사가 붙들고 있는 ‘끝까지 회개하라’,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하나님만 경배하라’, ‘연단 가운데 믿음을 지키라’는 영적 중심은 충분히 귀하게 받고, 그 종말 시간표와 상징 해석은 스베덴보리의 상응으로 더 깊게 조명하면 됩니다.

 

일곱째 대접 뒤 사람들이 여전히 하나님을 훼방한다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계시록 16장에서 ‘회개하지 않았다’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이것이 모든 재앙 장면보다 더 두려운 부분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고통받는다고 자동으로 주님께 돌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기애가 굳어져 있으면 자기 욕망이 좌절될수록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고난 자체를 영적 성장의 증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많이 고생했다고 더 거룩한 것도 아니고, 큰 시험을 받았다고 자동으로 더 높은 천국적 상태에 이른 것도 아닙니다. 핵심은 그 가운데 무엇을 보았고 어떻게 자유롭게 응답했는가입니다. 악을 보고 주님 앞에 인정했는가, 아니면 더 정당화했는가입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처음 10강을 시작하며 ‘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고 잘못을 고백해야 한다’고 말했던 부분과 일곱째 대접은 뜻밖에 연결됩니다. 심판의 본질도 결국 드러남입니다. 숨겨져 있던 것이 드러나고, 그 앞에서 사람이 선택합니다. 변명할 것인가, 회개할 것인가입니다.

 

‘되었다’라는 선언도 그래서 우리 개인에게는 아주 작은 형태로 반복될 수 있습니다. 어떤 악에 대해 주님께서 충분히 보여 주셨고, 내가 그것이 악임을 분명히 알게 된 순간에는 더 이상 ‘몰랐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때 하나의 상태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 진리에 따라 선택해야 합니다. 진리를 받아들여 옛 상태가 끝나게 하든지, 진리를 거절하여 악을 더욱 굳히든지 하는 갈림길이 옵니다.

 

거듭남에서 이런 작은 종말은 여러 번 옵니다. 옛 자기 의의 세계가 끝나고, 오래 붙들던 원망의 세계가 끝나고, 자기 공로를 붙드는 한 영역이 끝납니다. 그때 사람 안에서 작은 지진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진 뒤에 새 질서가 들어옵니다. 이것이 ‘종말’과 ‘새 창조’가 늘 붙어 있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을 두려운 세계 파괴의 이야기로만 읽는 것과, 주님께서 악과 거짓을 끝내시고 새 질서를 여시는 이야기로 읽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심판은 반드시 새 교회를 향합니다. 바벨론이 무너진 뒤에는 새 예루살렘이 옵니다.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체계가 무너진 뒤에는 어린양의 혼인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질서가 나타납니다. ‘되었다’는 말은 옛것의 끝인 동시에 새것을 위한 문입니다.

 

10강 6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6장의 일곱째 대접과 ‘되었다’는 선언, 전무후무한 지진과 바벨론의 붕괴, 섬과 산의 소멸과 큰 우박은 미래 후 3년 반의 끝에 지구 전체를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마지막 자연재해로만 읽기보다,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악과 거짓의 모든 구조와 인간의 자기 높임이 신적 진리 앞에서 완전히 드러나 무너지고, 더 이상 선과 악이 섞여 있을 수 없는 최종 분리가 이루어지는 마지막 심판의 완결을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을 때 그 아르카나가 더욱 깊게 열립니다.’

 

그리고 이 6부에서 오래 남겨 둘 말은 ‘지진’도 ‘우박’도 아닌 ‘되었다’일 것입니다. 그 말은 파괴의 환호가 아닙니다. 악이 영원히 선을 억압하지 못한다는 선언입니다. 거짓이 영원히 진리의 옷을 입고 숨어 있을 수 없다는 선언이며, 바벨론적 지배욕과 짐승적 자기 지성이 언젠가는 반드시 자기 실체를 드러낸다는 선언입니다. 한 개인에게는 더 희망적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의 악을 끝없이 방치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자유롭게 응답하는 만큼 그것을 드러내고 분리하시며, 마침내 어떤 옛 상태를 ‘끝났다’고 하실 수 있도록 거듭나게 하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계시록은 바로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강사의 흐름에서도 이제 17장으로 넘어가 ‘큰 음녀’의 정체와 심판을 본격적으로 다룹니다. 강사는 17장을 ‘큰 음녀가 누구인가’, ‘열 뿔 짐승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 둘이 결국 어떻게 서로 충돌하여 큰 음녀가 심판받는가’를 밝히는 장으로 소개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지점부터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사람과 세상을 지배하려는 사랑’, 곧 바벨론의 본질이 훨씬 직접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따라서 다음 7부에서는 계시록 17장의 ‘큰 음녀’가 단순히 미래의 어느 종교조직인가를 묻는 데서 멈추지 않고, 왜 말씀에서 ‘음행’이 선과 진리의 왜곡을 의미하며, 종교적 지배욕이 왜 그토록 깊은 영적 악으로 묘사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10강 7부

계시록 17장의 큰 음녀 :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지배하려는 사랑

10강 7부에서는 계시록 16장의 일곱 대접을 마치고 계시록 17장으로 들어갑니다. 강사는 17장의 내용을 크게 ‘큰 음녀의 정체’, ‘열 뿔 짐승의 정체’, 그리고 ‘큰 음녀가 어떻게 심판받는가’라는 세 갈래로 정리합니다. 일곱 대접을 가진 천사 가운데 하나가 요한에게 와서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보여 주겠다고 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강사는 이 큰 음녀를 후 3년 반 동안 적그리스도 체제에서 활동할 ‘두 뿔 짐승’, 곧 거짓 선지자와 연결하고, 그가 세상 사람들을 미혹하여 적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숭배하게 만드는 중심적인 종교 지도자가 될 것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먼저 강사의 해석을 그 자체로 충분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에게 계시록 17장은 막연한 악의 상징이 아닙니다. 앞서 계시록 13장에서 등장한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 666의 체제가 후 3년 반 동안 실제 역사 속에서 어떻게 종교적·정치적 조직을 이루는지를 더 자세히 풀어 주는 장입니다. 그래서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다’는 말씀도 그 미래 체제 안에서 권세를 받은 지도자들이 큰 음녀와 결탁하여 적그리스도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강사는 이 ‘음행’을 육체적인 음행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영적 음행’으로 이해합니다. 이 점은 중요합니다. 계시록의 상징을 모두 자연적 의미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음행’에 대해서는 이미 영적 의미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들어가면 바로 이 ‘음행’이라는 말이 더욱 깊어집니다. 말씀에서 결혼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을 표상합니다. 주님과 교회의 결합, 그리고 사람 안에서 의지의 선과 이해의 진리가 하나가 되는 것이 천국적 결혼의 원형입니다. 그렇다면 ‘음행’은 그 결합이 깨지는 것입니다. 진리가 선과 분리되고, 더 나아가 진리가 악한 사랑과 결합하여 왜곡되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큰 음녀를 이해하려면 먼저 성적인 부도덕의 이미지를 떠올리기보다 ‘신성한 진리가 무엇과 결합하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큰 음녀를 ‘많은 사람을 적그리스도 우상에게 끌어가는 존재’라고 해석하는 데에는 중요한 영적 직관이 들어 있습니다. 문제의 핵심이 단순히 잘못된 교리 몇 가지가 아니라, 사람의 사랑과 예배의 방향을 주님에게서 다른 대상으로 돌리는 데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 그것은 미래의 한 거짓 선지자에게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인간 자신과 세상을 높이고 지배하려는 모든 종교적 상태가 ‘바벨론’의 원리를 이룹니다.

 

계시록 17장의 큰 음녀를 스베덴보리가 해설할 때 가장 중요한 중심은 바로 ‘지배욕’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정치적 권력욕보다 더 깊은 지배욕입니다. 종교와 말씀과 교회의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의 영혼과 양심까지 지배하려는 사랑입니다. 돈을 가지고 사람을 지배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영적으로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적어도 세속적 권력으로 보이지만, 후자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옷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큰 음녀가 ‘많은 물 위에 앉아 있다’는 모습도 의미심장합니다. 계시록 17장 후반에서는 그 물들이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라고 직접 설명됩니다. 즉 이 여자의 영향력이 광범위하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여기서 단순한 인구 규모보다 ‘거룩한 것을 이용하는 지배욕이 얼마나 넓게 인간의 마음과 종교적 질서를 장악할 수 있는가’를 보게 됩니다. 한 사람의 지배욕이 한 공동체에만 머무르지 않고 교리와 제도와 권위를 통하여 확장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앞서 말씀해 주신 이 강사의 배경을 함께 기억하면 해설의 결도 조금 달라집니다. 이 강사는 단순히 종말론 자료를 연구하여 강의하는 분이라기보다 공용복 선생 생전부터 함께했고, 실제 시흥영성수련원 성결수도회의 수도적 전통 안에 있는 분입니다. 따라서 이분이 ‘미혹’, ‘연단’, ‘자기를 죽임’, ‘끝까지 이김’을 말할 때 그것을 단지 미래 사건에 대한 지식으로만 들을 필요는 없겠습니다. 이 강의의 종말론적 도식과 별개로, 그 배후에는 자기 의지와 정욕을 다루고 실제 삶을 정결하게 해야 한다는 수도적 관심이 계속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강사의 종말론적 해석과 그 배후의 수도적 영성을 구별하면서 함께 보는 것이 공정하겠습니다.

 

계시록 17장 3절에서 요한은 ‘성령으로’ 광야로 이끌려 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큰 음녀가 붉은 빛 짐승을 타고 있는 것을 봅니다. 흥미롭게도 이 사경회의 다른 강의에서도 ‘광야’를 단순한 지리적 피난처가 아니라 성도가 ‘연단받고 정결케 되는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실제 강의 자료에는 계시록 12장의 광야 1,260일을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양육하는 기간’, 곧 영적으로 정결케 되는 과정이라고 해설하고, 계시록 17장의 광야에서는 큰 음녀와 짐승이라는 ‘싸움의 대상’을 만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상당히 흥미로운 접점을 이룹니다. 광야는 말씀에서 시험의 상태를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에서 이전에 의지하던 것들이 사라지고,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이 드러나며, 주님만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는 상태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이 대표적인 표상입니다. 따라서 ‘광야에 갔더니 음녀와 짐승이 있었다’는 것은 매우 깊은 영적 그림이 됩니다. 시험에 들어가면 전에 보이지 않던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평상시에는 내가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시당하는 순간 분노가 올라옵니다. 내가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상대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지배하고 싶은 마음이 나타납니다. 내가 진리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내 신학을 비판하자 그 사람 자체를 미워하게 됩니다. 광야가 악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이미 안에 있던 것이 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은 자기 인식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큰 음녀를 먼 미래의 한 인물로만 밀어 놓으면 계시록 17장의 칼날이 우리 자신에게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 안에도 큰 음녀의 원리가 있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의 진리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진리를 ‘소유함으로써’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서는 것을 사랑하는가. 내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려 하는가, 아니면 내 해석과 내 권위 아래 두려 하는가. 이 두 가지는 겉으로 매우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내적으로는 전혀 다릅니다.

 

목회자에게는 더욱 예민한 문제입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성도를 인도하는 일 자체는 거룩한 쓰임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proprium이 그 거룩한 것을 자기 것으로 삼을 위험도 있습니다. ‘내 성도’, ‘내 교회’, ‘내 사역’, ‘내 제자’, ‘내가 가르친 진리’라는 소유의식이 깊어지면서 사람들의 양심까지 통제하려 한다면, 주님의 것을 이용하여 자기 왕국을 세우는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벨론적 원리의 씨앗입니다.

 

반대로 참된 천국적 목회는 사람이 목회자에게 종속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더 자유롭게 속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강제로 선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보존하시면서 진리를 제시하시고 사람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목회 역시 그 신적 방식을 닮아야 합니다. 진리를 가르치되 양심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인도하되 사람을 자기에게 묶어 두지 않는 것입니다.

 

큰 음녀가 ‘붉은 빛 짐승을 타고 있다’는 것도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강사는 이 붉은 짐승을 앞서 계시록 12장의 붉은 용과 계시록 13장의 일곱 머리 열 뿔 짐승의 연장선에서 이해합니다. 그에게 붉은 색은 전쟁을 나타내며, 큰 음녀가 적그리스도적 권세와 결합하여 세상을 미혹하는 장면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여자가 짐승을 탄다’는 그림 자체가 중요합니다. 여자가 어떤 종교적·교회적 상태를 나타낸다면, 짐승은 그것을 떠받치는 자연적·외적 권세와 추론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거룩한 종교적 외관이 세속적 권력과 자기 지성 위에 올라타 있는 것입니다.

 

이 결합은 역사적으로도 반복되어 왔지만, 여기서는 특정 시대나 특정 교파를 지목하는 데 머물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종교가 세속 권력과 결합하면 언제든 위험해진다는 일반론보다 더 깊이 들어가, ‘신앙의 진리를 이용하여 지배하려는 사랑’과 ‘그것을 실행할 수 있게 하는 자연적 힘’의 결합을 보는 것입니다. 큰 음녀에게 욕망이 있고 짐승에게 힘이 있습니다. 둘이 결합하면 거대한 종교적 지배체제가 형성됩니다.

 

계시록 17장 4절의 여자는 자주색과 붉은색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몄으며 손에는 금잔을 들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화려하고 거룩하며 부유합니다. 여기에는 계시록의 매우 날카로운 역설이 있습니다. 악이 언제나 흉측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입고 나타날 수 있습니다. 진리의 언어, 예배의 형식, 성직의 권위, 말씀의 지식까지도 자기애가 입을 수 있는 옷이 됩니다.

 

특히 ‘금잔’은 놀라운 이미지입니다. 금은 좋은 의미에서 천적 선, 곧 사랑의 선을 나타내며, 잔은 진리와 그 내용을 담는 것을 표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의 금잔 안에는 ‘가증한 물건과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합니다. 겉 그릇은 금입니다. 문제는 그 안에 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종교적 타락의 무서움입니다. 겉모양은 가장 거룩한데 그 안의 사랑은 자기 지배와 자기 영광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예배와 교리의 진실성을 판단할 때 외형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얼마나 웅장한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따르는가, 얼마나 정통적인 용어를 사용하는가, 얼마나 많은 기적이나 영적 체험이 있는가가 최종 기준이 아닙니다. 그 안에 어떤 사랑이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있는가, 아니면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있는가입니다.

 

이 점은 강사가 10강 앞부분에서 했던 말과도 다시 만납니다. 강사는 ‘아느냐 모르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라고 했고, 성경과 신학을 가지고 서로 싸우면서 실제 신앙은 없는 모습을 비판했습니다. 또 ‘성경은 밀어붙이는 게 아니에요. 자기를 죽여야 돼’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이 말은 큰 음녀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의외로 좋은 열쇠가 됩니다. 진리를 ‘가지고 있음’이 곧 거룩함이 아닙니다. 그 진리가 나의 proprium을 낮추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큰 음녀의 이마에는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강사는 이를 큰 음녀가 후 3년 반 동안 666의 거짓된 지도자들을 세우고 우상숭배를 확산시키는 중심 존재라는 의미로 풀이합니다. 강의에서는 ‘어미’라는 표현을 그 음녀가 다른 ‘음녀들’을 만들어 내는 근원이라는 뜻으로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어미’는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어머니는 무엇인가를 낳습니다. 따라서 ‘큰 바벨론’이라는 지배적 사랑에서 수많은 거짓과 악이 태어난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의 잘못된 사랑이 수많은 잘못된 교리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다른 사람보다 높아져야 한다’는 지배욕이 먼저 있으면, 그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특별한 권위를 주셨다’, ‘나를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만 진리가 있다’는 여러 거짓이 뒤따라 나올 수 있습니다. 사랑이 어머니가 되고 거짓들이 그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사람은 단순히 ‘생각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더 깊게는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배적 사랑은 자기에게 맞는 생각과 논리를 끊임없이 생산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개혁은 잘못된 생각 몇 개만 수정한다고 끝나지 않습니다. 그 생각을 낳고 있는 사랑이 무엇인지 보아야 합니다.

 

계시록 17장 6절에서 요한은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 것’을 봅니다. 강사는 이것을 후 3년 반 동안 큰 음녀가 적그리스도의 종교적 체제를 이끌면서 성도들을 박해하고 순교시키는 모습으로 이해합니다. 강의 자료에서도 이 구절을 직접 읽으며 여자가 성도들과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했다고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피’가 다시 진리와 연결됩니다. 좋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적 진리이고, 반대 의미에서는 진리를 훼손하고 파괴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성도들의 피에 취했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 박해만이 아니라 참된 선과 진리를 억압하고 파괴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특히 종교적 권력이 자기 지배에 방해되는 진리를 제거할 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여기에는 매우 미묘한 위험이 있습니다. 거짓이 진리를 미워하는 이유는 진리가 논리적으로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진리가 자기가 사랑하는 악을 폭로하기 때문입니다. 지배욕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람의 양심은 주님께 속한다’는 진리는 불편합니다. 자기 공로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진리는 불편합니다. 자기 교리의 우월성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리는 선과 결합해야 살아 있다’는 말씀은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악한 사랑은 결국 자기에게 불편한 진리를 억압하려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계시록 17장의 큰 음녀를 설명하면서 특정 교회나 특정 종교 지도자를 쉽게 ‘바벨론’이라고 지목하는 순간, 오히려 우리 자신이 진리를 가지고 다른 사람 위에 서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바벨론을 비판하면서 바벨론적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먼저 자기 자신을 향해야 합니다. ‘저 사람이 큰 음녀인가?’보다 ‘내 안에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인정받고 지배하려는 사랑이 있는가?’를 묻는 것이 먼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설이 특정 역사적 종교체제에 강하게 적용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속뜻의 궁극적인 쓰임은 사람을 정죄할 지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악과 거짓의 본질을 분별하여 그것에서 떠나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알려 주신 성결수도회와 은총수도회의 존재를 생각하면, 이 대목에서 이 사경회의 수도적 전통이 가진 한 가지 장점도 보입니다. 수도생활의 본래 목적은 다른 사람 위에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의지와 자기 사랑을 낮추고 주님 앞에서 자신을 다루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수도자라는 신분 자체가 사람을 자동으로 바벨론의 유혹에서 보호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수도원에도 인간의 proprium은 그대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자기를 죽이고, 연단받고, 정결케 되어야 한다’는 이분들의 반복적인 강조는 적어도 바벨론의 반대 방향을 바라보려는 수도적 열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 배경을 알고 나니 강사가 계속 ‘연단’을 강조하는 이유도 조금 더 입체적으로 보입니다. 이분에게 대환난은 미래의 사건인 동시에, 성도가 정결해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광야’라는 수도적 언어입니다. 실제 다른 강의에서도 대사경회에 참석하여 구원 섭리와 연단의 진리를 깨닫고, 각자 처소로 돌아가 ‘영적인 싸움을 해서 이기라’고 권면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계시록 독법에는 미래주의적 종말론과 수도적 자기정화가 서로 겹쳐 있습니다. 바로 이 두 층을 함께 보아야 이 강의를 지나치게 단순화하지 않게 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자기를 죽인다’는 표현도 정교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없애려 하시는 것은 인간의 개성이나 자유 자체가 아닙니다. 제거되어야 하는 것은 proprium에서 나온 악과 거짓의 지배입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무색무취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에게서 받은 고유한 선과 쓰임이 더욱 온전히 살아납니다. 천국은 개성이 사라진 사람들의 집단이 아니라 각자 고유한 선과 쓰임을 가진 천사들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세계입니다.

 

따라서 수도적 자기부인의 가장 건강한 방향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 사라져야 한다’가 아니라 ‘내게 있는 선과 진리의 근원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다’라는 인식입니다. 이것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오히려 자유로워집니다. 다른 사람을 지배할 필요도, 인정받을 필요도, 자기 신앙의 우월성을 증명할 필요도 줄어듭니다. 그리고 바로 그 상태가 큰 바벨론의 정반대입니다.

 

10강 7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7장의 큰 음녀는 미래 후 3년 반에 적그리스도를 숭배하게 하는 한 거짓 선지자와 그의 세계적 종교조직으로만 읽기보다, 주님의 말씀과 교회의 거룩한 것들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영혼과 양심을 지배하고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사랑, 그리고 그 사랑에서 태어나는 수많은 거짓과 진리의 왜곡을 표상하는 바벨론의 영적 원리로 읽을 때 그 아르카나가 더욱 깊게 열립니다.’

 

그리고 이번 7부에서 가장 마음에 남겨 둘 장면은 ‘금잔’일 것 같습니다. 금잔 자체는 아름답습니다. 문제는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입니다. 교회도, 신학도, 설교도, 수도생활도, 심지어 ‘스베덴보리의 렌즈’도 하나의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안에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담기면 사람을 살리는 쓰임이 됩니다. 그러나 같은 거룩한 그릇 안에 자기 우월감과 지배욕과 정죄가 들어가면 겉모양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바벨론의 금잔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계시록 17장은 ‘저 큰 음녀가 누구인가?’를 알아맞히는 장이기 전에 ‘내가 들고 있는 잔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를 묻는 장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공용복 선생의 시대부터 이어져 온 이 수도적 전통이 반복해서 말해 온 ‘자기를 죽이고 정결케 하라’는 권면 역시,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과시키면 결국 같은 깊은 자리로 향합니다. 주님의 것을 나의 것으로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proprium을 내려놓고, 선과 진리가 다시 그 참된 주인이신 주님께 속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큰 바벨론의 붕괴는 먼 미래 어느 종교제국의 몰락 이전에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10강 8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과 열 뿔 : 악의 연합은 왜 끝내 스스로 무너지는가

10강 8부에서는 계시록 17장의 큰 음녀에서 시선이 그 음녀가 타고 있는 짐승과 열 뿔로 옮겨갑니다. 요한이 큰 음녀를 보고 크게 놀라자 천사는 ‘왜 놀랍게 여기느냐’고 하면서 여자와 그가 탄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풀어 줍니다. 특히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라는 난해한 표현, 일곱 머리와 일곱 왕, 그리고 아직 나라를 얻지 못했으나 짐승과 더불어 잠시 권세를 받는 열 뿔의 의미가 이어집니다. 강사는 이것을 후 3년 반 적그리스도 세계체제의 구체적인 정치적 구성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이 대목은 계시록을 문자적 미래 예언으로 읽을 때 매우 복잡해지기 쉬운 부분입니다.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고 장차 나올’ 존재가 누구인가, 일곱 왕은 과거의 어느 제국들인가, 열 왕은 미래의 어느 국가들인가를 역사적 지도와 맞추기 시작하면 수많은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강사는 자신의 ‘핵심진리’ 체계 안에서 이것들을 적그리스도의 마지막 세계통치와 연결하여 하나의 시간표로 정리합니다. 이 해석을 먼저 그 자체로 존중해서 따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질문 자체가 달라집니다. ‘일곱 왕은 어느 나라의 왕들인가?’보다 ‘왜 말씀은 악과 거짓의 상태를 짐승과 머리와 뿔과 왕이라는 형상으로 보여 주는가?’를 묻게 됩니다.

 

말씀에서 ‘머리’는 무엇인가를 지배하고 통솔하는 것과 관계합니다. 몸 전체가 머리의 명령을 따라 움직이듯 영적으로도 사람을 지배하는 원리와 사랑이 ‘머리’에 해당합니다. ‘뿔’은 힘과 능력을 표상합니다. 짐승의 힘이 뿔에서 나타나는 자연적 형상에서 비롯된 상응입니다. 그리고 ‘왕’은 좋은 의미에서는 진리를,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을 나타냅니다. 왕이 나라를 다스리듯 진리 또는 거짓이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짐승은 단순히 기괴한 미래 생물이나 국제정치조직의 암호가 아니라, 거짓된 종교 원리가 여러 형태의 지배적 거짓과 힘을 갖추어 교회를 장악한 상태를 보여 주는 영적 그림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계시록의 ‘짐승’이라는 표현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짐승 자체가 언제나 악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에서는 좋은 짐승들도 선한 애정들을 표상합니다. 그러나 여기의 짐승은 용과 연결되고 큰 음녀를 태우며 주님을 대적합니다. 따라서 자연적 인간의 능력과 추론이 악한 사랑과 거짓에 복종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인간에게 이성과 지식과 조직력과 권력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무엇을 섬기느냐입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를 섬기면 쓰임이 되지만, 자기애와 지배욕을 섬기면 짐승의 힘이 됩니다.

 

이것은 큰 음녀와 짐승의 관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큰 음녀에게는 종교적 지배욕이 있고, 짐승에게는 그것을 실행할 외적 힘이 있습니다. 하나는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지배하려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사랑을 떠받치는 자연적 권력과 추론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둘이 매우 잘 결합된 것처럼 보입니다. 종교적 권위는 정치적·사회적 힘을 이용하고, 세속적 권력은 종교적 권위를 이용합니다. 그러나 계시록 17장의 놀라운 반전은 이 둘이 끝까지 함께 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나중에 열 뿔과 짐승이 오히려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며 그 살을 먹고 불로 사릅니다. 강사도 이 부분을 적그리스도 체제 내부의 갈등과 최종적인 종교세력의 제거로 설명합니다. 지금까지 서로 필요해서 결합했던 세력들이 마지막에는 서로를 공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앞서 다섯째 대접에서 강사가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 진영 내부에 책임 전가와 갈등이 일어날 것이라고 설명한 흐름과도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장면이 악의 본질을 매우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악과 악은 참으로 결합할 수 없습니다. 선과 진리는 주님 안에서 서로 결합하지만, 악들은 궁극적으로 각각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권력을 사랑한다고 해서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공동의 목적이 있을 동안에는 협력할 수 있지만, 결국 둘 다 자기가 더 높아지기를 원하기 때문에 충돌합니다. 지옥의 연합도 이와 같습니다. 겉으로 보면 지옥에도 조직과 질서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천국의 결합과 전혀 다릅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서로의 선을 기뻐하고 공동의 쓰임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를 이룹니다. 반대로 지옥의 영들은 자기 유익을 위해 결합합니다. 힘이 센 자가 약한 자를 억누르고, 약한 자는 기회가 생기면 그 지배에서 벗어나거나 오히려 상대를 지배하려 합니다. 그러므로 지옥의 결합 안에는 언제나 해체의 씨앗이 들어 있습니다. 이 원리를 알면 ‘열 뿔이 음녀를 미워한다’는 장면이 단순한 미래 정치적 배신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거짓 종교와 세속적 자기애가 한동안 서로를 이용하지만 결국 자기애라는 동일한 뿌리 때문에 서로를 파괴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성은 다른 자기중심성과 영원히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습니다. 둘 다 중심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 한 사람 안에서도 그대로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돈도 많이 가지고 싶고 명예도 얻고 싶고 편안하게도 살고 싶을 수 있습니다. 한동안 이 세 욕망은 서로 협력합니다. 돈을 벌어 명예를 얻고, 명예를 이용하여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돈을 포기해야 하거나, 돈을 벌기 위해 평안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서로 충돌합니다. proprium에서 나온 사랑들은 하나의 참된 질서를 이루지 못합니다. 반대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들은 서로 싸우지 않습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진리 사랑과 쓰임의 사랑은 서로를 강화합니다. 하나가 깊어지면 다른 것도 깊어집니다. 이것이 천국적 질서입니다. 따라서 사람 안에서 여러 욕망이 끊임없이 서로 싸우고 있다면 단순히 ‘나는 성격이 복잡하다’고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중심에 어떤 사랑들이 자리 잡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계시록 17장 8절의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이라는 표현은 더욱 난해합니다. 강사의 미래주의적 해석에서는 적그리스도적 세력의 역사적 출현과 소멸, 그리고 마지막 재등장과 연결하여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있음’과 ‘없음’을 단순한 자연적 존재 여부보다 영적 상태로 읽습니다. 악과 거짓은 때로 교회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이다가 조건이 갖추어지면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니라 잠복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이 현상은 매우 익숙합니다. 어떤 악을 오래 경험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완전히 제거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제 화를 내지 않는다’, ‘나는 명예욕에서 자유로워졌다’, ‘나는 저 사람을 용서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특정한 시험이 오자 옛 감정이 다시 살아납니다.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다시 올라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거듭남은 인간이 한 번의 회개로 모든 악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과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안의 악을 차례로 드러내시고, 사람이 자유롭게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저항하도록 하시며, 그렇게 여러 시험을 거치면서 악의 지배력을 점차 약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이전에 다룬 줄 알았던 악이 다시 나타나는 것은 반드시 거듭남이 실패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깊은 층이 드러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중요한 구별이 있습니다. 악이 ‘나타나는 것’과 그것을 다시 ‘받아들이는 것’은 다릅니다. 악한 생각이나 욕망이 올라오는 것 자체가 곧 그 사람이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을 자기 것으로 인정하고 사랑하여 의지적으로 행할 때 비로소 자기 생명과 결합됩니다. 그래서 영적 싸움에서는 ‘왜 이런 생각이 또 올라오지?’라고 지나치게 두려워하기보다 ‘나는 이것에 동의할 것인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점은 이 사경회가 반복하여 강조하는 ‘영적 싸움’과도 만납니다. 강사들은 연단 가운데 끝까지 이기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싸워야 한다고 계속 권면합니다. 공용복 선생 생전부터 이어져 온 수도적 전통을 배경으로 보면 이 표현들은 단순한 종말론적 구호라기보다 실제 자기부인과 내적 싸움을 중요하게 여겨 온 영성의 언어로 들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바로 이 지점을 더욱 세밀하게 해석합니다. 싸움의 궁극적 상대는 밖에 있는 어떤 사람보다 내 안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를 거스르는 악과 거짓입니다. 이어 일곱 머리에 대한 설명에서 ‘일곱 산’과 ‘일곱 왕’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런 구절은 역사적 동일시를 시도하기 매우 쉬운 부분입니다. 실제로 계시록 해석사에서는 로마의 일곱 언덕이나 특정한 일곱 제국, 일곱 황제 등과 연결하는 다양한 해석들이 제시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일곱’이라는 수가 먼저 중요합니다. 일곱은 말씀에서 거룩함과 완전한 상태, 그리고 문맥에 따라 어떤 상태의 전체와 완결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일곱 머리와 일곱 왕은 반드시 일곱 명의 자연적 통치자를 하나씩 찾아 대응시켜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해당 악과 거짓의 지배적 상태 전체를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상응의 원리에 더 가깝습니다.

 

이것은 계시록의 숫자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7, 12, 144, 144,000, 1,260, 42개월 같은 숫자를 자연적 산술로만 읽으면 계시록은 거대한 종말 시간표가 됩니다. 그러나 숫자의 상응을 보면 그 숫자가 어떤 영적 상태의 질과 충만함을 나타내는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계시록의 초점이 ‘언제?’에서 ‘어떤 상태인가?’로 이동합니다. 열 뿔 역시 같은 원리입니다. ‘열’은 많은 것 또는 충만한 것을 나타내며, ‘뿔’은 힘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열 뿔은 거짓된 체제가 가진 모든 힘과 능력을 표상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반드시 미래의 열 개 국가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열 뿔들이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준다’고 합니다. 이것은 악과 거짓이 마지막 순간에 얼마나 강하게 결집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거짓들이 서로 조금씩 달라도 주님의 선과 진리를 대적한다는 공통 목적 아래에서는 하나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영적 전쟁은 매우 강력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어린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이것이 계시록 17장의 중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짐승과 열 뿔과 음녀의 복잡한 구조를 연구하다가도 결국 시선은 어린양에게 돌아와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이 더욱 결정적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승리는 인간이 거짓을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논박하여 얻는 승리가 아닙니다. 주님의 신적 진리와 신적 선이 악과 거짓의 실체를 드러내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승리입니다. 어린양은 주님의 신적 인성, 특히 구원을 위해 오셔서 지옥을 정복하시고 인성을 신성하게 하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모든 영적 전쟁의 실제 승리자는 주님이십니다.

 

사람이 시험 가운데 ‘내가 이 악을 이겨야 한다’고만 생각하면 결국 자기 힘에 의지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매우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은 인간은 악과 싸울 때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싸워야 하지만, 동시에 실제 힘은 전적으로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하는 것도 아니고, ‘내 의지력으로 이기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이 사경회가 강조하는 ‘연단’과 ‘싸워서 이김’ 역시 이 균형 속에서 보면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수도생활이 자기 의지를 강하게 만들어 영적 강자가 되는 훈련이라면 결국 또 다른 proprium을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힘의 한계를 보고 주님의 힘으로 악을 거절하는 법을 배우는 훈련이라면 그것은 거듭남과 깊이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도적 자기부인의 목표는 ‘강한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할 수 있는 나’로 변화되는 데 있어야 합니다.

 

‘어린양과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이 독립적으로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린양과 함께’ 있기 때문에 이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적 힘의 비밀입니다. 천사는 자기 힘이 강해서 지옥의 영보다 강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 안에 있기 때문에 강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신앙생활의 목표도 ‘내 영적 능력을 키우는 것’에서 ‘주님과의 결합이 깊어지는 것’으로 이동합니다. 기도도, 말씀 공부도, 수도적 훈련도, 연단도 모두 그 결합을 위한 수단입니다.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면 다시 자기 공로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계시록 17장 후반에서 가장 놀라운 장면은 하나님께서 열 뿔의 마음에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주셔서 결국 음녀를 멸망시키게 하신다고 기록한 부분입니다. 문자만 보면 하나님께서 악한 세력에게 악한 일을 하도록 시키시는 것처럼 읽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 이해에서는 매우 조심해서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악을 의지하거나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악한 자들이 자기 자유에서 선택한 악을 허용하시되, 그 악조차 궁극적으로 더 큰 악을 제한하고 선한 질서를 회복하는 데 굽혀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허용의 섭리’입니다. 주님은 악을 만드시지 않지만 악을 허용하시며, 허용하신 악의 결과까지 영원한 선을 위해 다스리십니다. 따라서 짐승과 열 뿔이 음녀를 파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증오를 주입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그들 안에 있던 악한 사랑들의 내적 모순이 드러나 서로를 파괴하도록 허용하시고 그 결과를 심판의 질서에 사용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악으로 직접 처벌하시는 분처럼 보일 때가 있지만, 실제로는 악 자체 안에 자기 파괴의 결과가 들어 있습니다. 거짓은 결국 거짓과 충돌하고, 지배욕은 다른 지배욕과 충돌하며, 자기애는 다른 자기애를 견디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결과를 허용하시면서 악이 무한히 확장되지 못하도록 경계를 두십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멸망은 외부에서 갑자기 내려오는 하나님의 폭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벨론적 사랑 자체가 자기 안에 붕괴의 씨앗을 품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사랑은 결국 자기를 지지하던 사람들까지 도구로 취급하게 되고, 그 사람들 역시 자기 유익을 위해 결합했으므로 조건이 바뀌면 등을 돌립니다. 사랑 없는 결합의 필연적 결말입니다.

 

여기서 앞서 말씀해 주신 시흥영성수련원의 구조도 하나의 좋은 대비를 생각하게 합니다. 남자 성결수도회와 여자 은총수도회가 각각 다른 건물에서 생활하면서도 한 수련원 안에서 같은 영적 지향을 공유한다는 것은, 적어도 구조적으로는 ‘모두를 하나의 동일한 형태로 만들기’보다 서로 다른 자리와 쓰임이 하나의 목적을 향하는 공동체를 생각하게 합니다. 물론 실제 공동체의 내적 상태를 외부에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천국의 질서 역시 획일성이 아니라 서로 다른 공동체들이 각자의 쓰임을 이루면서 하나의 주님 아래 결합하는 질서라는 점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모두가 같은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 공동체와 천사는 서로 다른 선과 쓰임을 가집니다. 그런데 그 다양성이 분열을 만들지 않는 이유는 중심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계시록 17장의 짐승과 음녀와 열 뿔은 겉으로는 하나의 거대한 세계체제를 이루지만 결국 분열됩니다. 중심이 주님이 아니라 각자의 자기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공동체를 분별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얼마나 강하게 하나가 되어 있는가?’만으로는 천국적 공동체인지 알 수 없습니다. 악한 집단도 매우 강하게 결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무엇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있는가?’입니다. 한 지도자의 인격인가, 공동의 적인가, 조직의 성공인가, 아니면 주님과 이웃의 선인가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 ‘하나 됨’을 강조할 때에도 모든 사람이 지도자의 생각과 똑같아지는 것을 하나 됨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천국적 하나 됨은 다양성을 없애는 통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선과 쓰임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벨론적 지배와 천국적 질서를 가르는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10강 8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7장의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과 일곱 머리, 열 뿔과 열 왕은 미래 세계정부를 구성할 특정 제국과 국가들의 명단으로만 읽기보다,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악한 사랑을 떠받치는 모든 거짓된 지배 원리와 자연적 힘이 결집하여 주님과 그분의 진리를 대적하지만, 자기애에 기초한 악의 결합은 참된 결합이 아니므로 마침내 서로를 미워하고 파괴하며, 어린양이신 주님의 신적 선과 진리 앞에서 완전히 무너지는 마지막 영적 전쟁의 아르카나로 읽을 때 더욱 깊은 의미가 열립니다.’

 

그리고 이번 8부에서 가장 깊이 붙들 만한 말씀은 ‘어린양은 이기실 터이요’일 것입니다. 계시록을 읽다 보면 짐승과 용과 음녀와 열 뿔이 너무 크게 보입니다. 악의 조직은 거대하고, 거짓은 정교하며, 그들의 힘은 압도적으로 보입니다. 우리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된 자기애와 습관을 만나면 ‘이것을 어떻게 내가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계시록은 ‘네가 더 강해져서 짐승을 이겨라’고 하지 않습니다. 어린양이 이기십니다. 그리고 어린양과 함께 있는 자들이 함께 이깁니다. 이것은 수도적 연단의 의미도 바꾸어 놓습니다. 연단은 인간을 초인적으로 강하게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는 이길 수 없음을 깊이 알고 주님의 힘에 자신을 맡기는 법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자기를 죽인다’는 말의 가장 깊은 뜻도 결국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자기 존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구원자이며 내가 내 힘으로 선해질 수 있다’는 proprium의 환상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사람 안에서도 열 뿔과 짐승과 음녀의 거짓 연합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지배욕과 자기 의와 자기 공로와 거짓된 추론이 서로의 힘을 잃고, 그 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질서를 이루기 시작합니다. 계시록 17장의 거대한 전쟁은 결국 바로 그 일을 보여 줍니다. 큰 바벨론의 몰락은 단지 미래 어느 제국이 무너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의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내가 중심이던 세계’가 무너지고 ‘주님이 중심이신 질서’가 세워지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10강 9부

계시록 18장의 큰 성 바벨론 : ‘무너졌도다’와 세상 부귀의 영적 실체

10강 9부에서는 계시록 17장의 ‘큰 음녀’에서 계시록 18장의 ‘큰 성 바벨론’으로 무대가 옮겨갑니다. 강사는 이 전환을 분명하게 구분합니다. 17장이 큰 음녀와 그를 둘러싼 종교적 세력의 정체와 심판을 보여 주었다면, 18장은 그 큰 음녀가 활동하던 ‘큰 성’, 곧 그 체제 전체가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 주는 장으로 설명합니다. 강사는 특히 바벨론의 멸망을 종교적인 면에만 한정하지 않고 정치·경제·문화적 영역까지 포함하는 실제적인 세계체제의 붕괴로 읽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이 무너질 때 왕들, 상고들, 해상에서 경제적 이익을 얻던 사람들이 각각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차례로 살펴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으로 들어가기 직전 강사가 한 말이 눈에 띕니다. 그는 성령 충만을 말하면서 ‘순종하고, 담대하고, 사랑하고, 전도하고, 희생하고, 믿음으로 그렇게 하면’이라고 말하고, ‘이런 사랑 실천이 있기를’ 권면한 뒤 비로소 ‘이제 망하는 걸 보러 갑시다’라며 계시록 18장으로 넘어갑니다. 얼핏 보면 단순한 강의 진행상의 연결이지만, 이 강사가 실제 성결수도회의 수도사이며 공용복 선생 생전부터 함께했던 분이라는 배경까지 생각하면 그냥 지나칠 대목은 아닌 듯합니다. 이분에게 계시록 공부의 목적은 미래의 종말 사건을 알아맞히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순종하고 사랑하고 희생하며 실제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종말론적 도식에서는 스베덴보리와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진리를 알았으면 삶으로 살아야 한다’는 이 중심은 분명 귀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계시록 18장 1절에서 요한은 ‘큰 권세를 가진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집니다. 이어 천사가 힘센 음성으로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라고 외칩니다. 강사는 이것을 바벨론 성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선언으로 받아들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순서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먼저 ‘빛’이 오고, 그다음 ‘무너짐’이 옵니다. 이것이 신적 심판의 본질과 깊이 관계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무엇인가를 파괴하신 뒤 그 이유를 설명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적 진리의 빛이 임하면 그 빛 속에서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의 실체가 드러나고 거짓에 의해서만 유지되던 것은 더 이상 설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근본적인 힘은 파괴력이 아니라 ‘빛’입니다.

 

우리는 심판을 생각할 때 흔히 불, 지진, 전쟁, 재앙부터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마지막 심판은 본질적으로 ‘드러남’과 ‘분리’입니다. 사람의 외적 모습과 내적 상태가 더 이상 서로 다르게 유지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경건하면서 속으로는 지배욕을 사랑하고, 입으로는 주님을 말하면서 마음으로는 자기 자신을 섬기는 상태가 신적 진리의 빛 앞에서 드러납니다. 따라서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졌다’는 말씀과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는 서로 떨어진 두 사건이 아닙니다. 환하여졌기 때문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거짓은 어둠 속에서는 유지될 수 있지만 완전한 빛 속에서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그대로 일어납니다. 어떤 악한 습관이 있을 때 우리는 처음에는 그것을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여러 이유를 들어 정당화합니다. 그런데 말씀의 진리가 들어와 ‘이것은 네 안의 자기애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비추기 시작하면 이전처럼 편안하게 그 악을 행하기 어려워집니다. 아직 악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지만 이미 ‘땅이 환하여진’ 것입니다. 그 빛을 받아들이며 싸우면 마침내 그 악의 작은 바벨론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심판의 말씀은 거듭나는 사람에게 두려움만을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희망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내 힘으로는 발견하지 못하는 것을 주님의 빛이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무너졌도다’는 말도 악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승리의 함성으로만 읽기보다, 우리를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악과 거짓의 지배가 영원하지 않다는 선언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이 무너지는 이유를 보아야 합니다. 천사는 큰 성 바벨론이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강사는 이 부분을 ‘영적으로 음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그 안에 ‘정과 욕심’이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강사의 수도적 영성과도 잘 연결됩니다. 바벨론의 문제를 외부의 정치제도만이 아니라 인간 안의 정욕과 연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더욱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귀신의 처소’라는 것은 어떤 장소에 악령들이 물리적으로 모여 산다는 뜻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악한 사랑과 거짓이 서로 결합하여 하나의 삶의 질서를 이룬 상태를 나타냅니다. 천국이 선과 진리가 결합한 질서라면, 바벨론은 자기애와 거짓이 결합하여 만들어 낸 거짓된 질서입니다. 앞 7부와 8부에서 살펴보았듯 바벨론의 핵심은 단순한 세속적 부패가 아닙니다.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지배하려는 사랑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교회의 권위, 신앙과 예배를 자기 자신을 높이고 사람의 영혼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발전하면 겉은 매우 종교적이어도 안에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가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계시록 18장의 바벨론이 그토록 부유하고 화려하게 묘사되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 세마포와 자주색 옷감, 향품과 포도주와 기름 등 수많은 상품들이 등장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세계경제의 중심지가 무너지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강사도 이 장을 큰 음녀의 본부가 정치·문화·경제적으로 무너지는 실제 사건으로 이해하며, 특히 상고들과 여러 경제 종사자들이 바벨론으로부터 이익을 얻고 있었다는 데 주목합니다. 강사는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다’는 말씀을 바벨론 체제를 통해 경제적 부를 축적한 사람들과 연결합니다. 큰 음녀가 온 세상에 사치스러운 것들을 공급했고, 그것을 통해 상인들이 많은 돈을 벌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설에서 ‘상고’, 곧 상인과 상품은 단순히 경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사고파는 것은 영적 지식과 진리를 획득하고 전달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좋은 의미에서는 진리를 배우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지만, 반대 의미에서는 거룩한 것들을 자기 유익과 명예를 얻는 수단으로 만드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바벨론의 경제가 갑자기 영적으로 매우 가까워집니다. 진리도 ‘상품’처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명예를 얻을 수 있고, 신학을 가지고 권위를 얻을 수 있으며, 영적 체험을 가지고 사람들의 존경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겸손을 가지고도 ‘나는 겸손한 사람’이라는 명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의 ‘사치’를 단순히 비싼 물건을 소유하는 것으로만 보면 너무 좁습니다. 영적 사치는 주님의 것을 자기 영광을 위해 장식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진리들을 자기 왕국을 꾸미는 보석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도 매우 예민한 경고가 됩니다. AC와 ‘천국과 지옥’, ‘계시록 밝히기’를 많이 읽었다는 사실 자체가 영적 성장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지식을 가지고 ‘나는 남들이 모르는 속뜻을 안다’는 우월감을 키운다면, 천국의 보석을 자기 바벨론을 장식하는 데 사용하는 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공부할수록 자기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이 진리가 나를 더 겸손하게 하는가? 이웃을 더 이해하고 사랑하게 하는가? 주님에게서 모든 선과 진리가 온다는 것을 더 깊이 인정하게 하는가?’ 그렇지 않고 사람을 분류하고 정죄하며 내가 더 높다는 감각만 커진다면, 지식은 늘어도 거듭남은 그만큼 진행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말한 ‘순종하고, 담대하고, 사랑하고, 전도하고, 희생하고’라는 표현을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적어도 이 강사는 계시록 지식을 지식으로만 끝내지 않고 삶의 실천으로 가져가려 합니다. 특히 이분이 실제 성결수도회의 수도사이고 공용복 선생 생전부터 함께했던 분이라는 배경을 알고 들으면, ‘정결’, ‘연단’, ‘희생’, ‘사랑 실천’이라는 말에 어느 정도 삶의 무게가 실려 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겠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강사의 모든 종말론 해석이 옳다는 뜻은 아닙니다. 해석의 정확성과 삶의 진정성은 서로 구별해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전자를 다룬다는 이유로 후자를 보지 못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이 이 사경회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해설할 때 계속 지켜야 할 균형입니다.

 

계시록 18장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바벨론이 혼자 부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다’고 합니다. 강사는 이것을 큰 음녀를 중심으로 왕들과 거짓된 종교 지도자들과 상고들이 하나의 거대한 체제를 이루어 서로 이익을 얻은 것으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이 악의 확산 원리를 보여 줍니다. 하나의 지배적 악은 혼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맞는 수많은 거짓을 불러들이고, 그 거짓들은 다시 다른 악들을 정당화합니다. 그렇게 하나의 ‘도시’가 만들어집니다. 예를 들어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지배적 사랑이 되면 사람은 그것을 위해 여러 행동을 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자기 장점을 과장하고, 자기 실패를 감추며, 경쟁자를 낮추고, 칭찬하는 사람을 가까이하고, 비판하는 사람을 멀리합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욕망이었는데 어느새 그 욕망을 중심으로 생각과 행동의 전체 체계가 형성됩니다. 이것이 한 개인 안의 작은 ‘성’입니다. 바벨론도 그렇습니다. ‘지배하고 싶다’는 사랑 하나가 수많은 교리와 제도와 권위와 관계를 자기 주위에 조직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에서는 악 하나만 떼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악을 중심으로 세워진 전체 질서가 무너져야 합니다.

 

여기서 계시록 18장의 유명한 부르심이 이어집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 이것은 바벨론 심판의 한가운데서 들리는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심판의 목적이 단순한 파괴라면 굳이 ‘나오라’고 부르실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안에 아직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부르십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신적 자비의 원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종교적 조직이나 교리체계 안에 사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을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의 내적 사랑과 실제 삶을 보십니다. 잘못된 교리 안에서도 양심에 따라 선하게 살며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려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가장 정확한 교리 안에서도 자기애와 지배욕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말씀을 ‘저 교단에서 탈퇴하라’는 식으로만 적용하는 것은 너무 외적입니다. 더 깊게는 ‘네 안에서 주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삼아 지배하려는 사랑에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은 고통스러운 곳으로만 묘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매우 부유하고 화려합니다. 사람들이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거기서 얻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악 역시 그렇습니다. 아무런 즐거움이 없다면 사람은 악을 붙들지 않습니다. 지배욕에는 지배하는 즐거움이 있고, 자기 의에는 옳다고 인정받는 즐거움이 있으며, 탐욕에는 소유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바로 이 즐거움 때문에 악에서 ‘나오는 것’이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사랑하는 것의 즐거움이 그의 생명과 매우 깊이 결합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단순히 ‘이 행동은 나쁘니까 하지 말아야지’ 하는 수준을 넘어갑니다. 주님께서 점차 악한 즐거움 대신 선한 즐거움을 주셔야 합니다. 지배하는 즐거움 대신 섬기는 즐거움, 인정받는 즐거움 대신 이웃이 잘되는 것을 기뻐하는 즐거움, 자기 공로의 즐거움 대신 모든 선을 주님께 돌리는 기쁨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바벨론을 떠나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는 말씀은 매우 따뜻한 말씀으로도 들립니다. ‘너는 바벨론 사람이니 멸망하라’가 아니라 ‘내 백성아’라고 부르십니다. 아직 바벨론 안에 있는데도 ‘내 백성’이라고 하십니다. 사람 안에 아직 주님에게서 온 리메인스가 있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매우 희망적입니다. 사람 안에 악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 전체가 악은 아닙니다. 거듭나는 동안에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복잡하게 섞여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가운데 주님에게서 온 것을 보존하시고 악과 거짓을 점차 분리하십니다. 그래서 ‘나오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가 다른 교회와 다른 신앙인을 바라보는 태도에도 영향을 줍니다. ‘저 사람은 바벨론 안에 있다’고 판정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무엇을 보존하고 계시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사람을 정죄하기 위한 확대경이 아니라, 먼저 악과 거짓의 원리를 분별하기 위한 렌즈여야 합니다. 이 점은 이번 시흥영성수련원 사경회를 해설하는 데에도 중요합니다. 강사들의 계시록 해석 가운데 스베덴보리의 상응적 해석과 크게 다른 부분이 상당히 있습니다. 적그리스도를 미래의 특정 인물로 보고, 666을 구체적인 종말 체제와 연결하며, 대환난과 휴거와 천년왕국을 시간표로 배열하는 방식은 스베덴보리와 분명 다릅니다. 그러나 그것만 보고 이분들의 영성을 한꺼번에 판단하면 안 됩니다.

 

특히 강사들 가운데 상당수가 실제 수도생활을 하는 분들이고, 이번 10강 강사 역시 공용복 선생 생전부터 함께했던 성결수도회의 수도사라는 배경은 이런 구별을 더욱 필요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 강사의 종말론적 ‘지도’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차이를 분명히 살펴보되, 그 지도 아래 흐르는 ‘정결하게 살라’, ‘자기를 부인하라’, ‘사랑을 실천하라’, ‘희생하라’, ‘끝까지 주님을 붙들라’는 수도적 열망은 따로 귀하게 살펴야 하겠습니다. 두 층을 섞지 않는 것이 오히려 공정한 해설입니다. 더구나 계시록 18장 자체가 우리에게 바로 그런 분별을 요구합니다. 겉모양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사랑을 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의 문제는 건물이 크다는 것도 아니고 재산이 많다는 것도 아니며 조직이 강하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들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는가가 문제입니다.

 

재산이 있어도 이웃을 섬기는 쓰임에 사용하면 선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권위가 있어도 사람을 자유롭게 주님께 인도하는 데 사용하면 선한 쓰임이 됩니다. 신학 지식이 많아도 사람을 살리고 진리를 밝히는 데 사용하면 귀한 것입니다. 반대로 가난과 금욕조차 자기 의를 높이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적 형태만으로 바벨론과 새 예루살렘을 가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수도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수도복을 입고 검소하게 살아도 그 검소함으로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거룩하다고 생각한다면 proprium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 가운데 재산과 책임을 가지고 살아도 그것을 주님께 받은 쓰임으로 여기며 이웃을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것은 외적 생활양식 자체가 아니라 그 생활을 움직이는 지배적 사랑입니다.

 

그래서 강사가 바벨론의 사치와 부를 설명하면서 세상의 부와 경제적 풍요를 경계하는 방향으로 이야기하는 부분도 그 취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한 걸음 더 조심해야 합니다. 부 자체가 바벨론은 아닙니다. 부를 사랑하여 그것을 자기 생명의 목적으로 삼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 위에 서려는 사랑이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가난 자체가 천국적인 것도 아닙니다. 가난하면서도 탐욕과 시기와 지배욕으로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소유량보다 쓰임과 사랑입니다.

 

이것은 계시록 18장의 상인들이 왜 그렇게 슬퍼하는지를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바벨론 자체를 사랑해서 우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상품을 사 줄 사람이 없어졌기 때문에 웁니다. 관계의 중심이 사랑이 아니라 자기 이익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벨론적 관계의 특징입니다. 상대방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사랑합니다. 그 사람이 내게 명예를 주고 돈을 주고 인정과 영향력을 주는 동안에는 가까이하지만, 더 이상 그것을 줄 수 없게 되면 관계도 끝납니다. 천국적 사랑은 정반대입니다. 이웃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보다 그 사람 안의 선을 사랑합니다. 그 사람이 더 선해지고 주님께 가까워지는 것을 기뻐합니다. 이것이 체어리티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 18장은 경제체제의 멸망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나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사람 자체의 선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그 사람을 통해 내가 얻는 것을 사랑하는가입니다.

 

10강 9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8장의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은 미래 후 3년 반의 끝에 적그리스도와 큰 음녀를 중심으로 형성된 세계적 종교·정치·경제체제가 물리적으로 파괴되는 사건으로만 읽기보다, 주님의 말씀과 교회의 거룩한 것, 진리와 지식과 권위를 자기 지배와 명예와 이익을 위해 이용해 온 자기애의 거대한 질서가 신적 진리의 빛 앞에서 그 실체를 드러내고 무너지는 마지막 심판의 아르카나로 읽을 때 더욱 깊은 의미가 열립니다.’

 

그리고 이번 9부에서 가장 오래 붙들어 둘 말씀은 ‘무너졌도다’보다 오히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일 것입니다. 바벨론이 아직 서 있을 때 주님은 자기 백성을 부르십니다. 심판이 시작되기 전에 부르십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직 바벨론 안에 있는 사람들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이 말씀에는 심판보다 먼저 오는 신적 자비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완전히 깨끗해진 뒤에야 우리를 당신의 백성이라고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우리 안에 자기애도 있고 세상 사랑도 있으며, 인정받고 싶고 지배하고 싶은 마음도 남아 있는 그 자리에서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고 부르십니다. 그 음성을 듣고 한 걸음씩 나오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렇게 보면 바벨론의 멸망은 남의 멸망을 바라보며 기뻐할 장면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서 오래도록 주님의 자리를 차지해 온 proprium의 질서가 무너지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그 무너짐 뒤에야 새 예루살렘이 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계시록의 심판을 읽을 때 결국 시선이 향해야 하는 곳은 ‘누가 바벨론인가?’가 아니라 ‘내 안의 바벨론에서 오늘 무엇을 떠나야 하는가?’라는 질문일 것입니다.



10강 10부

바벨론의 최종 멸망과 하늘의 기쁨 : 심판의 끝은 파괴가 아니라 어린양의 혼인입니다

10강의 마지막 10부에서는 계시록 18장의 후반부를 지나 계시록 19장의 문턱까지 나아가면서,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이 완전히 확정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앞의 9부에서 강사는 바벨론을 중심으로 형성된 종교적·정치적·경제적 세계체제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무너지고, 그 체제와 결탁하여 부와 권세를 얻던 왕들과 상인들이 그것을 바라보며 애통하는 모습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그 멸망이 얼마나 철저한지를 보여 주는 여러 표상이 이어지고, 놀랍게도 땅에서의 애통과 정반대로 하늘에서는 기쁨과 찬양이 터져 나옵니다. 이 대조가 계시록 18장 후반의 중심을 이룹니다. 강사의 종말론적 틀에서 보면 이것은 후 3년 반 마지막 때의 실제적 사건입니다. 큰 음녀와 적그리스도의 체제를 중심으로 세계의 종교와 정치와 경제가 하나의 거대한 구조를 이루었다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으로 순식간에 붕괴합니다. 따라서 그 체제를 통해 부와 권세를 얻던 사람들에게 바벨론의 멸망은 자기 세계 전체의 붕괴입니다. 반대로 하나님 편에 서서 박해받던 성도들에게는 악한 체제의 끝이며 해방의 순간입니다. 그래서 같은 사건을 놓고 땅에서는 울고 하늘에서는 기뻐하는 정반대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바로 이 대조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떤 것이 무너질 때 내가 슬퍼하는가 기뻐하는가는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있었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을 사랑한 사람은 바벨론이 무너질 때 웁니다. 어린양을 사랑한 사람은 바벨론이 무너질 때 기뻐합니다. 결국 마지막 심판은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었는가보다 무엇을 사랑하고 있었는가를 드러냅니다. 계시록 18장에서 왕들과 상인들이 우는 이유를 자세히 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죄악을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이 누리던 영화와 거래와 이익이 사라졌기 때문에 웁니다. ‘이제 네 상품을 사는 자가 없도다’라는 말씀이 그 본질을 드러냅니다. 바벨론과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이익의 관계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매우 예리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나에게 주는 즐거움과 이익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사람이 나를 인정해 주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고, 교회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교회에서 내가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으며, 진리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진리를 아는 것이 나를 남보다 특별하게 느끼게 하기 때문에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익이 사라지는 순간 진짜 사랑이 드러납니다. 인정해 주던 사람이 나를 비판할 때에도 그 사람의 선을 원하는가, 직분이 없어져도 교회를 사랑하는가, 내가 옳다고 인정받지 못해도 진리를 사랑하는가를 보면 내가 실제로 무엇을 사랑했는지가 보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멸망은 거대한 종말 사건인 동시에 인간의 지배적 사랑을 드러내는 심판입니다. 바벨론이 무너졌을 때 상인들이 ‘내가 잃은 것이 무엇인가’를 바라본다면, 천국은 ‘악과 거짓의 지배가 끝났다’는 것을 봅니다. 동일한 사건을 전혀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의 차이를 결국 사랑의 차이로 설명합니다. 천국의 사람은 주님과 이웃의 선을 기뻐하고, 지옥의 사람은 자기 자신과 세상의 이익을 기뻐합니다. 따라서 마지막 심판은 외부에서 임의적으로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유롭게 형성해 온 사랑에 따라 스스로 자기에게 맞는 곳으로 가게 되는 분리입니다. 계시록 18장의 상품 목록 끝에 매우 충격적인 표현이 하나 나옵니다. ‘사람의 영혼들’입니다. 금과 은, 보석과 진주, 좋은 옷감과 향품, 포도주와 기름, 가축과 수레가 나열되다가 마지막에는 인간의 몸과 영혼까지 상품처럼 등장합니다. 바벨론의 본질을 이보다 더 날카롭게 보여 주는 표현도 드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이 바벨론적 지배욕의 최종 모습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명예와 부를 얻지만, 결국 사람 자체를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사람의 자유와 양심까지 소유하려 합니다. ‘이 사람은 주님의 사람’이 아니라 ‘내 사람’, ‘우리 편’, ‘우리 조직의 사람’이 됩니다. 목회와 종교의 영역에서는 특히 두려운 경고입니다. 성도는 목회자의 소유가 아닙니다. 제자도 지도자의 소유가 아닙니다. 사람의 영혼은 오직 주님께 속합니다. 목회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말씀을 가르치고 선한 길을 보여 주며 그 사람이 자유롭게 주님을 따르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양심을 자기에게 묶으려는 순간 목회적 돌봄은 지배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특정 종교지도자에게만 적용할 말씀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배우자가 배우자에게, 교사가 학생에게, 신앙의 선배가 후배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내 생각대로 해야 한다’는 말 안에는 사랑과 지배가 섞일 수 있습니다. 참된 사랑은 상대를 자기 모습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주님께서 주신 고유한 쓰임을 이루도록 돕습니다.

 

이런 점에서 앞서 말씀해 주신 시흥영성수련원의 수도적 배경을 알고 이 강의를 듣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 이 강사 역시 성결수도회의 수도사이며 공용복 선생 생전부터 함께했던 분이므로, 그가 반복하여 ‘자기를 죽이라’, ‘정결케 되라’, ‘연단을 통과하라’,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하는 것을 단순한 종말론 강사의 도덕적 권면으로만 볼 필요는 없겠습니다. 실제 수도적 훈련을 통해 자기 의지와 정욕을 다루려 해 온 전통의 언어가 그 안에 배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겠습니다. 물론 이것과 계시록의 구체적 해석이 옳으냐 하는 문제는 별개입니다. 이 둘을 구별하여 보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유지해 온 해설의 중요한 원칙입니다. 계시록 18장 후반에서는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지며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바벨론의 멸망이 일시적 후퇴가 아니라 최종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강력한 표상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맷돌은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맷돌은 곡식을 갈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식으로 만드는 도구입니다. 따라서 말씀의 진리들을 이해하고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자연적 차원의 사고와 관련됩니다. 좋은 의미에서는 말씀의 진리를 실제 생활에 적용하도록 풀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거짓된 상태에서는 그 진리를 왜곡하고 자기 목적에 맞게 바꾸는 자연적 추론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런 ‘큰 맷돌’이 바다에 던져진다는 것은 바벨론을 떠받치던 거짓된 추론과 교리적 체계가 완전히 심판받는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더 이상 거룩한 말씀을 갈아 자기 욕망을 위한 양식으로 만들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매우 엄중합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해서 말씀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자기 교리를 증명하기 위한 재료로만 사용하거나, 이미 정해 놓은 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구절들을 선택하면 말씀을 ‘갈아’ 자기 양식을 만드는 셈이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가지고 모든 사람과 모든 설교를 재단하는 도구로 사용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그 렌즈를 먼저 자기 자신에게 대야 합니다. ‘나는 이 진리를 가지고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더 겸손해졌는가? 다른 사람의 선을 더 잘 볼 수 있게 되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매우 높은 진리를 알고도 그 진리를 proprium의 맷돌에 갈아 자기 우월감의 양식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어 바벨론에서는 다시 음악이 들리지 않고, 기술자도 보이지 않으며, 맷돌 소리도 들리지 않고, 등불도 비치지 않으며, 신랑과 신부의 음성도 다시 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한 도시의 생활이 완전히 정지된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영적으로 보면 더욱 깊습니다. ‘등불’은 진리를 비추는 빛과 관계하고, ‘신랑과 신부’는 선과 진리의 결합, 더 높게는 주님과 교회의 결합을 나타냅니다. 바벨론적 사랑이 완전히 지배하는 곳에서는 결국 참된 선과 진리의 결혼이 사라집니다. 겉으로는 종교가 있고 예배가 있고 말씀과 찬양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중심이 자기 지배와 자기 영광이라면 내적인 신랑과 신부의 음성은 사라진 것입니다. 이 점은 상당히 두렵습니다. 교회가 외적으로 매우 활발하면서도 내적으로는 황폐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많고 프로그램이 많으며 사람이 많고 재정이 풍부한 것이 그 자체로 주님의 임재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작고 눈에 띄지 않는 공동체라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진리에 따라 살고 있다면 그 안에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생명은 규모가 아니라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신앙이 삶과 결합하고, 진리가 체어리티와 결합하며, 사람이 말씀을 알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교회는 살아 있습니다.

 

계시록 18장 마지막은 바벨론 안에서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발견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바벨론의 죄가 단순한 사치나 경제적 탐욕보다 훨씬 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진리를 억압하고 선을 파괴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피’는 좋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적 진리를 나타냅니다. 반대 의미에서는 그 진리를 폭행하고 왜곡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에서 성도들의 피가 발견된다는 것은 자기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에게 불편한 진리를 제거해 온 상태를 나타냅니다. 자기애는 진리를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단, 자기를 높여 주는 진리일 때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네가 틀렸다’, ‘회개하라’, ‘네 공로를 버려라’,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고 말하기 시작하면 태도가 달라집니다. 그 진리를 죽이려 합니다. 무시하거나 왜곡하거나 다른 의미로 돌립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을 분별하는 중요한 기준 가운데 하나는 ‘나에게 불편한 진리를 어떻게 대하는가’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확인해 주는 말씀만 사랑하는가, 아니면 내 악을 드러내는 말씀도 주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가입니다.

 

이것은 수도적 연단의 본질과도 만납니다. 연단은 내가 이미 선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 아니라 내가 몰랐던 악이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그 악이 보이지 않으면 주님께서 그것에서 나를 자유롭게 하실 수도 없습니다. 광야에서 숨겨져 있던 것이 드러나고, 그것을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거듭남이 진행됩니다. 이렇게 계시록 18장의 바벨론이 완전히 무너지자 계시록 19장은 전혀 다른 소리로 시작합니다. 하늘에서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이 들립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이 전환은 계시록 전체에서 매우 아름다운 순간 가운데 하나입니다. 땅에서는 바벨론을 잃은 사람들이 울고 있는데 하늘에서는 ‘할렐루야’가 울려 퍼집니다. 땅에서는 ‘한 시간에 망하였다’며 탄식하지만,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이 참되고 의롭다고 찬양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천국이 다른 사람의 고통과 멸망을 보고 즐거워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누구의 멸망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기뻐하는 것은 악과 거짓의 지배가 끝나고, 억압받던 선과 진리가 자유로워지며, 천국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인이 ‘악인이 심판받았다’며 사람의 멸망을 기뻐한다면 그것은 천국적 기쁨이 아닐 수 있습니다. 천국적 기쁨은 사람이 망해서 기쁜 것이 아니라 악이 더 이상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악에서 구원하시려 합니다. 사람이 끝까지 악을 자기 생명으로 선택할 때에도 주님께서는 가능한 한 그 악을 제한하시고 그 사람에게 가능한 질서를 허락하십니다. 따라서 계시록의 심판을 읽으면서 다른 교회, 다른 종교, 다른 사람의 멸망을 기대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오히려 자기 안의 상태를 살펴야 합니다. ‘나는 진리가 승리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내가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기를 원하는가?’ 둘은 매우 다릅니다.

 

이 점에서 이번 사경회 전체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해설하는 태도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강사들의 종말론과 계시록 해석에서 스베덴보리와 다른 부분을 발견하는 목적은 ‘이분들이 틀렸고 우리는 더 높은 진리를 안다’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분들이 붙들고 있는 선한 것과 참된 것을 귀하게 받으면서, 상응과 속뜻을 통해 그 의미를 한층 더 깊게 보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특히 이번 강사의 경우 실제 성결수도회의 수도사이고 공용복 선생 생전부터 함께했던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의 강의에서 반복되는 ‘자기를 죽임’, ‘연단’, ‘정결’, ‘희생’, ‘사랑의 실천’을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종말론의 외적 구조에서는 큰 차이가 있어도 실제 삶을 정결하게 하려는 방향에는 분명 우리가 귀 기울일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가장 건강하게 작동할 수 있습니다. 렌즈는 대상을 깎아내리는 도구가 아니라 더 깊이 보는 도구입니다. 외적 교리의 차이를 분명히 하되 그 안에 있는 선한 애정을 발견하고, 반대로 매우 옳은 교리를 가지고 있어도 그 안에 자기애가 들어갈 수 있음을 함께 경계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19장에서 하늘의 찬양은 마침내 ‘어린양의 혼인’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바벨론의 멸망 자체가 계시록의 목적지가 아닙니다. 바벨론이 무너져야 어린양의 혼인이 나타납니다. 거짓과 악의 제거는 목적이 아니라 선과 진리의 결합을 위한 준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어린양의 혼인’은 주님과 교회의 결합이며, 한 사람 안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결합하는 거듭남의 상태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단순히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랑하여 행하기 시작할 때 진리와 선의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계시록 전체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열쇠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목적은 멸망이 아니라 결혼입니다. 바벨론을 무너뜨리는 목적은 폐허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짐승을 심판하는 목적은 사람을 두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과의 결합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라는 선언과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다’는 선언은 하나의 과정입니다. 자기애의 왕국이 무너지면 주님의 왕국이 들어옵니다. proprium이 중심에서 내려오면 주님께서 중심이 되십니다. 진리가 자기 우월감을 위한 지식에서 벗어나 삶의 선과 결합하면 혼인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이 사경회의 ‘연단’이라는 주제를 한 단계 더 깊게 이해하게 합니다. 연단의 목적은 고난 자체가 아닙니다. 많이 고생하는 것이 거룩함의 척도가 아닙니다. 연단의 목적은 주님과의 결합을 방해하는 악과 거짓이 드러나고 제거되어 선과 진리가 결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도적 자기부인도 고행 자체가 목적일 수 없습니다. 금식, 절제, 기도, 침묵, 순종 같은 훈련은 그 자체로 천국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다루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라도록 돕는 쓰임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도생활조차 자기 의의 새로운 바벨론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 훈련을 통해 자기 의지가 꺾이고, 다른 사람을 더 이해하게 되고, 인정받지 않아도 평안하며, 섬기는 것을 기뻐하고, 모든 선을 주님께 돌리게 된다면 외적 수도훈련이 내적 거듭남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공용복 선생으로부터 이어진 이 수도적 전통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교리는 서로 다른 신학적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실제 삶의 어떤 지점에서는 만날 수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연단을 통해 자기를 죽이고 정결케 된다’고 말하고, 다른 쪽에서는 ‘시험을 통해 proprium의 악과 거짓이 드러나고 주님께서 그것을 제거하시며 새 의지와 새 이해를 형성하신다’고 설명합니다. 둘을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실제 신앙생활에서 가리키는 방향 가운데 상당한 접점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한 가지를 더 분명하게 합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기 자신을 죽이거나 거듭나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듯 싸워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이기는 모든 힘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내가 이렇게 수련해서 여기까지 왔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여기까지 이끄셨다’는 고백이 깊어져야 합니다. 그 고백이 깊어질수록 바벨론은 무너집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의 가장 깊은 본질은 결국 ‘내가 중심이 되겠다’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10강 10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8장 후반의 큰 성 바벨론의 최종 멸망과 계시록 19장의 하늘의 할렐루야는 미래 적그리스도 체제의 정치·경제·종교적 중심지가 물리적으로 완전히 파괴되는 사건으로만 읽기보다, 주님의 거룩한 것과 진리와 사람의 영혼까지 자기 지배와 명예와 이익을 위한 상품으로 삼았던 자기애의 전체 질서가 신적 진리 앞에서 완전히 제거되고, 그 결과 주님과 교회, 그리고 사람 안의 선과 진리가 다시 결합하는 ‘어린양의 혼인’이 준비되는 마지막 심판의 아르카나로 읽을 때 그 깊은 뜻이 더욱 환하게 열립니다.’

 

그리고 10강 전체를 마치면서 가장 오래 남겨 둘 것은 짐승도, 666도, 대환난도, 아마겟돈도, 바벨론의 멸망도 아닌 것 같습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어린양’입니다. 계시록의 모든 심판은 어린양을 향해 갑니다. 일곱 인도, 일곱 나팔도, 일곱 대접도, 용과 짐승의 싸움도, 큰 음녀와 바벨론의 멸망도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마지막에는 어린양의 혼인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과 결합하시고, 선과 진리가 결합하며, 사랑과 신앙이 다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긴 10강에서 강사가 반복한 ‘연단받아야 한다’, ‘정결케 되어야 한다’, ‘자기를 죽여야 한다’,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권면도 가장 좋은 자리로 돌아옵니다. 연단은 어린양과 결합하기 위한 연단이고, 정결은 어린양과 결합하기 위한 정결이며, 자기부인은 어린양께서 내 삶의 중심이 되시기 위한 자기부인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 한마디를 더합니다. 그 모든 과정의 주체는 궁극적으로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응답하고 협력하지만 생명을 주시는 분도, 진리를 밝히시는 분도, 시험 가운데 싸울 힘을 주시는 분도, 마침내 선과 진리를 결합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마지막을 향할수록 질문은 ‘적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서 ‘내 안에서 누가 왕인가?’로, ‘바벨론은 어느 도시인가?’에서 ‘내 안에서 무엇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로, ‘아마겟돈은 언제 일어나는가?’에서 ‘오늘 내 안에서 진리와 거짓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하고 있는가?’로 옮겨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질문은 하나로 모입니다. ‘나는 어린양과 함께 있는가?’ 그것이 이 긴 10강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통과하고 난 뒤 남겨 둘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하겠습니다.

 

 

 

SY.34,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1강 (7/27),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1강 1부 다시 읽는 ‘핵심진리’ - 한 사람의 병상에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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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62,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9강 (7/31),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9강 1부‘후 3년 반’과 적그리스도9강은 찬송과 기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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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9강 1부

‘후 3년 반’과 적그리스도

9강은 찬송과 기도 후 약 20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강사는 지난 시간까지 계시록 12장을 공부했음을 상기시키고, 이번 시간에는 계시록 13장부터 15장까지를 다루겠다고 밝힙니다. 강의의 큰 틀은 분명합니다. 계시록을 1장부터 22장까지 시간 순서에 따라 진행되는 종말의 역사로 읽고, 특히 계시록 13장부터 ‘후 3년 반’이 시작된다고 봅니다. 이어 13장은 적그리스도의 정부 조직과 활동, 14장은 두 번째 익은 열매인 순교자의 추수, 15장은 순교자의 수가 찬 뒤 마지막 일곱 대접 재앙이 준비되는 장면으로 배열합니다.

 

먼저 이 강의에서 눈여겨볼 것은 종말론의 세부 시간표보다 그 밑에 놓여 있는 신앙적 문제의식입니다. 강사는 ‘왜 주님께서 재림하시는가’, ‘왜 하나님께서 대환난을 허락하시는가’를 먼저 묻습니다. 그리고 재림의 목적을 ‘익은 열매를 추수하시기 위해서’, ‘죄악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천년왕국을 건설하시기 위해서’라는 세 가지로 정리합니다. 특히 대환난의 목적을 단순히 세상을 파괴하는 데 두지 않고 ‘익은 열매를 추수하는 것’에 둔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에는 상당히 귀한 영적 직관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의 심판은 파괴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언제나 구원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선과 악을 분리하고, 주님께로 향할 수 있는 것을 구원하여 새로운 질서를 이루시는 신적 섭리의 한 과정입니다.

 

다만 여기서부터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 사이에 매우 중요한 갈림길이 나타납니다. 강의에서는 이 모든 것을 장차 자연계의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날 사건들의 시간표로 읽습니다. ‘전 3년 반’ 동안 적그리스도가 등장할 정치적·사회적 환경이 마련되고, ‘후 3년 반’에는 적그리스도가 세계를 통치하며 성도들을 핍박하고, 그 가운데 순교자가 나오며, 마지막에는 일곱 대접 재앙이 실제 세계에 쏟아진다는 구조입니다. 강사는 전 3년 반의 나팔 재앙과 전쟁으로 세계가 거의 초토화되고,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재생 로마제국의 통치자가 구세주처럼 등장하여 사람들이 그를 메시아로 받아들이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요한계시록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열립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Revealed) 전체를 관통하는 원리에 따르면 요한이 본 것은 장차 지상에 일어날 정치·군사적 사건을 암호처럼 미리 기록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회의 영적 상태와 그 종말, 마지막 심판, 그리고 주님께서 세우시는 새 교회에 관한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짐승’, ‘용’, ‘거짓 선지자’, ‘바벨론’, ‘아마겟돈’ 등은 각각 특정 미래 정치인이나 국가, 군사동맹을 직접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가 훼손되고 신앙이 왜곡되어 가는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차이는 앞으로 9강을 읽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강사가 강조하는 ‘마지막 때 깨어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까지 함께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것을 더욱 개인적이고 절박한 문제로 가져옵니다. 마지막 때는 단지 어느 미래 세대가 경험할 ‘7년 대환난’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 교회가 진리를 잃어버리고 선을 잃어버릴 때 그 교회에는 종말이 옵니다. 동시에 한 사람 안에서도 신앙의 진리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마음의 왕좌를 차지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의 작은 세계 안에서도 일종의 ‘교회의 종말’이 진행됩니다. 따라서 계시록은 ‘미래에 적그리스도가 언제 등장할 것인가’를 묻기 전에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이 주님 대신 왕 노릇하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강의에서 사용하는 ‘익은 열매’라는 표현도 이 관점에서 매우 풍성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강사는 교회 시대 끝에 휴거되는 ‘처음 익은 열매’, 후 3년 반 동안 순교하는 ‘두 번째 익은 열매’,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살아서 대환난을 통과하는 ‘세 번째 익은 열매’를 구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의 계층적 분류보다는 ‘열매’ 자체의 상응이 더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열매는 인간 안에서 실제 삶으로 나타난 선, 곧 진리가 삶이 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나무가 교리와 신앙의 구조를 나타낸다면 그 나무가 존재하는 목적은 결국 열매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은 진리를 알고 있어도 그것이 의지와 삶 속에서 선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아직 열매가 맺힌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반복하여 ‘익은 열매’를 강조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교리와 만날 수 있는 좋은 접점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언제 추수되는가’와 ‘누가 몇 번째 열매인가’를 외적인 종말 시간표로 계산하기보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실제 삶의 선으로 얼마나 익어가고 있는가’를 살피는 쪽으로 중심을 옮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추수’는 공포스러운 종말 사건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한 사람의 평생 동안 그 사람 안에 심으신 진리와 선을 자라게 하시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에 합당한 것으로 거두시는 구원의 이미지가 됩니다.

 

이 대목에서 강사의 기도 역시 주목할 만합니다. 본 강의에 앞선 기도에서 ‘묵은 것들을 벗어버리고’, ‘하늘의 신령한 것을 소망하며’, ‘영적으로 더욱 깨어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마지막 날 말씀을 통하여 ‘새롭게 결단’하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사실 이 표현들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상당히 가까운 지점에 있습니다. 거듭남이란 지식을 많이 축적하는 일이 아니라 옛 사람의 악과 거짓이 점차 물러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 자리 잡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강의를 읽을 때 교리적 차이를 찾는 데만 집중하기보다, 강의가 실제로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깨어 있음’, ‘정결’, ‘새로운 삶’을 함께 보아야 공정한 해설이 됩니다.

 

이어 강사는 계시록 13장을 ‘적그리스도의 정부의 조직과 활동’으로 규정합니다. 후 3년 반은 ‘짐승 통치 시대’이며, 적그리스도가 정치적 통치자이면서 동시에 신으로 숭배받는 ‘제정일치’의 세계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를 설명하면서 북한의 김일성 체제를 하나의 비유로 사용합니다. 한 인물이 정치적 최고 통치자이면서 동시에 절대적 숭배의 대상이 되는 구조가 장차 적그리스도의 세계 통치와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다시 외적 인물에서 내적 원리로 시선을 돌립니다. 계시록의 ‘짐승’은 단순히 미래에 나타날 한 독재자가 아닙니다. 짐승은 인간의 자연적 차원이 영적인 것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진리를 판단하고 지배하려는 상태와 연결됩니다. 특히 계시록의 짐승들을 해석할 때 스베덴보리는 신앙을 체어리티와 분리하고, 말씀의 진리를 자기 교리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는 교회의 왜곡을 깊이 다룹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천국의 비밀’에서 가인과 아벨을 통해 계속 만나고 있는 바로 그 문제와도 통합니다. ‘가인’이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나타내듯, 계시록에서도 진리가 선과 분리되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는 진리가 아니라 오히려 지배의 수단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적그리스도’를 반드시 한 사람으로만 찾으려 하면 계시록의 경고가 오히려 우리 자신에게서 멀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적그리스도인가’, ‘어느 나라가 열 뿔인가’, ‘재생 로마제국은 언제 등장하는가’를 계속 바라보는 동안, 정작 내 안에서 주님을 대신하여 왕 노릇하려는 proprium을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훨씬 무서운 ‘적그리스도적’ 상태는 입으로는 주님을 고백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자기 사랑과 자기 지성을 최고 권위로 삼는 상태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말하면서도 주님이 가르치신 사랑과 체어리티를 삶에서 밀어낸다면, 외적으로는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면서도 그 신앙의 내부에서는 주님을 밀어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강사가 말하는 ‘적그리스도가 온 세상을 지배하는 후 3년 반’이라는 그림도 우리에게 전혀 무의미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가리키는 초점을 외적 미래에서 영적 현실로 옮겨 볼 수 있습니다. 거짓이 진리처럼 받아들여지고, 자기 사랑이 사랑처럼 포장되며, 지배욕이 신앙적 열심처럼 나타나고, 사람의 지성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높은 자리에 앉는다면 이미 ‘짐승의 통치’가 인간의 마음 안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계시록이 우리에게 경계하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먼 미래의 어느 독재자보다 훨씬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9강 초반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으면서 가장 소중하게 붙들 수 있는 것은 강사가 반복하는 ‘추수’와 ‘깨어 있음’입니다. 반면 신중하게 분별해야 할 것은 그 추수를 ‘전 3년 반-후 3년 반-적그리스도 세계정부-휴거-순교자 수의 충족-일곱 대접-천년왕국’이라는 하나의 고정된 자연계 시간표로 환원하는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계시록은 훨씬 깊은 곳을 향합니다. 그것은 세계 정치의 미래 지도를 보여 주기 전에 인간과 교회의 영적 지도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단순한 해석 방법의 차이가 아닙니다. 계시록을 읽는 사람의 시선 자체를 바꿉니다. 외적 종말론은 ‘앞으로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묻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설은 거기에 앞서 ‘교회 안의 신앙과 사랑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리고 마침내 ‘내 안의 신앙과 사랑에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그렇게 읽을 때 계시록 13장의 짐승은 먼 미래의 괴물이 아니라 오늘도 인간의 마음 문 앞에 서 있는 하나의 영적 가능성이 됩니다. 그리고 그 짐승을 이기는 길 역시 종말의 날짜를 정확히 아는 데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알고 그 진리를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살아 ‘익은 열매’가 되어 가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9강 첫머리에서 ‘핵심진리’가 강조하는 ‘익은 열매’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신학이 만날 수 있는 가장 깊은 지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9강 2부

두 짐승, 거짓 선지자와 ‘짐승의 우상’

9강 2부에서 강의는 계시록 13장의 핵심부로 깊이 들어갑니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열 뿔과 일곱 머리를 가진 짐승’과 땅에서 올라오는 ‘두 뿔 가진 짐승’을 구별하고, 전자를 적그리스도, 후자를 적그리스도를 보좌하는 거짓 선지자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이 둘의 배후에는 계시록 12장의 붉은 용, 곧 루시퍼가 있으며, 결국 후 3년 반의 세계는 악령 세계의 힘이 인간과 정치·종교 조직을 통하여 지상에 구현되는 시대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강사는 두 뿔 가진 짐승을 ‘거짓 선지자’, 더 나아가 계시록 17장의 ‘큰 음녀’와도 연결하면서, 이 세 표현이 사실상 동일한 적그리스도적 종교 세력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여기서 먼저 눈여겨볼 것은 이 강의가 악의 본질을 단순히 인간의 정치적 악행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강사는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의 배후에 영적 악의 세계가 있다고 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전혀 낯선 발상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자연계에서 나타나는 악의 근원을 자연계 자체에서 찾지 않습니다. 인간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으며,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유입되고, 악과 거짓은 지옥으로부터 유입됩니다. 그러므로 지상의 거짓과 악 뒤에 영계의 실제적인 영향이 있다는 강사의 기본적인 영적 감각에는 스베덴보리와 만날 수 있는 지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영적 영향’이 인간에게 작용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데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강의에서는 적그리스도를 ‘악령 세계의 최고 통치자 루시퍼가 내주·합일된 자’로 설명하고, 붉은 용과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모습이 모두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 근거 가운데 하나로 제시합니다. 열 뿔은 열 왕, 곧 열 나라가 결합한 연방국을 뜻하며, 그 연방국에서 적그리스도가 등장할 것으로 풀이합니다. 이것은 계시록의 상징들을 장래 자연계의 특정 인물과 국가연합에 대응시키는 전형적인 미래주의적 종말론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용’과 ‘짐승’은 먼저 특정 악령이나 미래의 정치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형성된 거짓의 체계를 가리킵니다. 특히 ‘계시록 해설’에서 계시록 12장의 용과 13장의 짐승들은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 곧 체어리티와 선한 삶으로부터 신앙을 분리한 교리와 깊이 연결되어 해석됩니다. 이것은 지금 ‘천국의 비밀’에서 우리가 창세기 4장의 ‘가인’을 통하여 보고 있는 문제와 놀라울 만큼 맞닿아 있습니다. 가인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표상합니다. 마찬가지로 계시록의 용과 짐승도 단순히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악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 안에서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 진리를 선한 삶과 분리하는 훨씬 미묘한 영적 타락을 드러냅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계시록을 읽는 방향을 완전히 바꿉니다. 강의의 해석을 따르면 독자는 ‘열 나라가 어디인가’, ‘재생 로마제국은 언제 나타나는가’, ‘적그리스도는 누구인가’를 찾게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따르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내가 알고 있는 신앙의 진리가 실제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이어지고 있는가’, ‘나는 진리를 주님께 순종하기 위해 사용하는가, 아니면 내 생각을 옳다고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는가’를 묻게 됩니다. 계시록의 무서운 짐승이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심지어 신앙인 자신의 내면에도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강사는 두 뿔 가진 짐승을 집중적으로 설명합니다. 이 짐승은 처음 짐승에게서 권세를 받아 이적을 행하고 사람들을 미혹하며, 마침내 사람들이 처음 짐승을 경배하도록 만든다고 합니다. 강의에서는 이것을 적그리스도의 정치적 권력과 결합한 종교 권력으로 이해합니다. 두 번째 짐승이 자신의 독자적인 힘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첫 번째 짐승에게서 권세를 받아 활동한다는 점을 특히 강조합니다.

 

바로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으면 매우 깊어집니다. 거짓은 홀로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거짓은 언제나 그것을 사랑하는 어떤 악과 결합합니다. 반대로 진리 역시 살아 있으려면 선과 결합해야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구조입니다. 선과 진리는 결혼을 이루며, 악과 거짓 역시 서로 결합합니다. 악이 의지의 영역이라면 거짓은 그 악을 정당화하는 사고의 영역이 됩니다. 사람이 먼저 어떤 악을 사랑하게 되면 지성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악이 옳다고 설명할 이유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렇게 해서 악은 거짓을 낳고, 다시 그 거짓은 악을 강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시록 13장의 ‘첫째 짐승’과 ‘둘째 짐승’을 단순히 미래의 두 인물로만 읽지 않고 악과 거짓이 서로를 강화하는 영적 구조로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권력과 지배를 사랑하면서도 그것을 노골적인 악이라고 인정한다면 아직 돌이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더 위험한 것은 그 지배욕을 ‘하나님의 뜻’, ‘진리 수호’, ‘교회를 위한 일’, ‘의를 위한 싸움’이라고 정당화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그 순간 악은 종교적 언어를 얻습니다. 그렇게 거짓이 악에게 ‘경배’를 돌리게 합니다. 계시록의 두 번째 짐승이 첫 번째 짐승을 경배하게 한다는 장면은 이러한 인간 내면의 구조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강의에서 ‘이적’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적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영적 능력을 가지고 놀라운 이적을 행하며 세상을 미혹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부분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특별히 유익합니다. 그는 기적 자체를 진리의 최종적인 증거로 삼는 데 매우 신중합니다. 외적인 기적은 사람의 외적 사고를 강제로 압도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이 자유 가운데 진리를 보고 받아들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강제된 신앙은 인간의 내면에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참된 신앙은 ‘놀라운 일을 보았기 때문에 믿는 것’에서 머물지 않고, 진리가 진리임을 보고 자유롭게 받아들이며 그것을 삶으로 살아가는 데 이르러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대목에서 강사가 ‘이적에 미혹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하는 정신은 충분히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그 경계의 범위를 종말 때 나타날 초자연적 거짓 선지자에게만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의 신앙생활에서도 ‘무슨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가’보다 ‘그것이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인도하는가’를 묻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병이 나았는가, 환상을 보았는가, 예언이 맞았는가,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는가보다 그 결과 사람이 더욱 겸손해지고, 악을 멀리하며,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살아가게 되었는지가 훨씬 근본적인 분별 기준이 됩니다.

 

이어 강의는 계시록 13장의 매우 인상적인 장면, 곧 ‘짐승의 우상’으로 넘어갑니다. 강사는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전쟁에서 치명상을 입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미래의 적그리스도로 보고, 거짓 선지자가 그 적그리스도의 우상을 만들도록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다니엘서와 마태복음 24장의 ‘멸망의 가증한 것’을 바로 이 적그리스도의 우상으로 연결합니다. 후 3년 반에는 이 우상이 교회와 가정과 거리 곳곳에 세워지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경배하도록 강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강의 앞부분에서도 ‘멸망의 가증한 것’이 예루살렘 성전에 세워지는 때를 후 3년 반의 시작으로 규정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우상’이 훨씬 근원적인 문제가 됩니다. 우상숭배의 본질은 돌이나 금속으로 만든 형상 앞에 절하는 행위 자체에만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주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신뢰하고, 더 의지하며, 궁극적으로 자기 삶의 중심에 놓는 것은 무엇이든 영적으로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인간의 proprium, 곧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을 최고로 여기고 자신의 지성과 능력을 주님의 것보다 높이는 상태는 우상숭배의 깊은 뿌리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짐승의 우상’을 먼 미래 어느 날 세계 곳곳에 설치될 적그리스도의 동상으로만 읽으면 오히려 이 말씀의 칼날이 무뎌질 수 있습니다. 인간은 실제 동상 앞에 한 번도 절하지 않으면서 평생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판단, 자신의 명예, 자신의 신학, 자신의 교단, 자신의 경험, 심지어 자신의 영적 체험까지 주님과 말씀보다 높은 자리에 올려놓는다면 외적으로는 우상을 섬기지 않으면서 내적으로는 이미 ‘형상’을 만들어 놓은 셈입니다.

 

특히 종교 안에서 이것은 더욱 섬세하게 나타납니다. 사람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보다 ‘내가 주님의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다’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말씀 자체보다 자기 해석을 보호하게 됩니다. 누군가 그 해석에 질문을 던지면 마치 주님을 공격한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바로 여기서 진리와 진리에 관한 인간의 이해를 구별해야 합니다. 진리는 주님의 것이지만, 내가 진리를 이해한 방식에는 언제나 인간적인 것이 섞일 수 있습니다. 이 구별을 잃으면 신학 자체가 우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사용하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를 읽는 목적은 ‘스베덴보리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열어 보여 준 말씀의 속뜻을 통하여 더욱 주님을 바라보고 더욱 선한 삶으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만일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가지고 다른 신앙인을 재단하고 우월감을 느끼며 ‘나는 아르카나를 알고 저 사람은 모른다’는 식의 자기확신에 빠진다면, 가장 깊은 진리를 가지고도 proprium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주님께로 데려가는 길이어야지, 사람 자신을 높이는 왕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강의에서는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우상이 말하게 되고,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사람은 죽임을 당한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옛 ‘신주단지’를 예로 들면서 사람이 어떤 물건을 계속 숭배하면 실제로 악령이 거기에 관계할 수 있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와 그대로 동일시해서는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계의 물체 자체에 악령이 붙어서 그 물체가 독자적인 영적 능력을 갖게 된다는 식의 설명은 중심적인 영계 원리가 아닙니다. 핵심은 언제나 인간의 애정과 사고, 그리고 그것과 상응하는 영적 결합입니다. 영들은 물건 자체보다 인간의 사랑과 사고의 상태와 관계합니다.

 

그러나 강사가 이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려는 경고 자체, 곧 ‘사람이 무엇을 숭배하느냐에 따라 영적으로 어떤 세계와 연결되는가’라는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따라 천국 또는 지옥과 연결됩니다. 선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면 그와 상응하는 천국 사회와 연결되고, 악을 사랑하고 그것을 거짓으로 정당화하면 그와 상응하는 지옥 사회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어떤 물건에 귀신이 ‘붙었느냐’보다 인간의 마음이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숭배하느냐에 있습니다.

 

여기서 9강 2부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 드러납니다. 강의는 ‘마지막 때 적그리스도를 경배할 것인가, 주님을 경배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질문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훨씬 가까이 가져옵니다. ‘나는 오늘 누구를 경배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경배는 예배당에서 무릎을 꿇는 행위에만 있지 않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 그것을 위해 기꺼이 다른 것을 희생하는 것, 그것을 잃으면 내 존재 전체가 무너질 것 같은 바로 그것이 내가 실제로 무엇을 경배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렇게 보면 계시록 13장은 어느 미래 세대만을 위한 공포스러운 예언이 아닙니다. ‘용 → 첫째 짐승 → 둘째 짐승 → 짐승의 우상 → 경배’라는 흐름은 악이 인간의 내면을 점령해 가는 과정으로도 읽힙니다. 먼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고, 그 사랑에 맞는 거짓된 사고가 형성되며, 그 사고가 다시 악을 정당화하고, 마침내 그 악과 거짓이 하나의 굳어진 삶의 형태가 됩니다. 그때 사람은 그것을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옳다’고 믿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악이 가장 강력해진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이 강의에서 말하는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라’는 권면은 충분히 귀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분별의 시선을 미래 세계정부와 특정 정치인에게만 고정시키지 않고 우리 자신의 의지와 이해로 돌려놓습니다. 적그리스도적 원리는 단지 ‘그리스도를 반대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데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사용하면서도 주님의 본질인 신적 사랑과 신적 진리를 삶에서 밀어내는 데서도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9강 2부의 핵심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강의는 미래의 ‘적그리스도 정부’와 ‘거짓 선지자’와 ‘짐승의 우상’을 보여 주면서 성도들에게 마지막 때 미혹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경고를 받아들이되 그보다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짐승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내 안에서 무엇이 짐승의 역할을 하고 있는가?’로, ‘우상은 어디에 세워질 것인가?’에서 ‘내 마음의 지성소에는 지금 누가 앉아 있는가?’로, ‘거짓 선지자의 이적에 속지 말라’에서 ‘진리처럼 보이는 거짓을 나는 무엇으로 분별할 것인가?’로 옮겨갑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열매’입니다. 어떤 가르침이 아무리 놀랍고 정교하고 신비해 보여도 그것이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고, 자기 사랑을 낮추며, 악을 죄로 알고 멀리하게 하고, 진리를 실제 삶으로 살아가게 한다면 좋은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성경 구절을 많이 사용하고 놀라운 영적 현상을 동반하더라도 사람을 두려움과 자기확신과 타인에 대한 정죄와 지배욕으로 몰고 간다면 그 열매를 세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결국 계시록 13장의 싸움은 ‘누가 미래의 적그리스도인가’를 맞히는 지식의 싸움 이전에, 우리 안에서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주님의 것과 proprium의 것을 분별하는 영적 싸움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9강이 강조하는 ‘마지막 때의 깨어 있음’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일생에 걸친 거듭남의 싸움과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9강 3부

짐승의 표와 666 : 문제는 ‘어떤 기술인가’보다 ‘무엇이 사람의 사랑과 삶을 지배하는가’입니다

9강 3부에서는 계시록 13장의 마지막 부분, 곧 ‘짐승의 표’와 666으로 들어갑니다. 앞에서 강사는 바다에서 올라온 첫째 짐승을 적그리스도, 땅에서 올라온 둘째 짐승을 거짓 선지자로 해석했고, 이제 그 두 세력의 결합이 실제 세계의 통제 체제로 나타나는 것이 ‘짐승의 표’라고 설명합니다. 계시록 13장 16~18절의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그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고’,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라’는 말씀을 후 3년 반에 실제로 시행될 경제적·사회적 통제 장치로 읽는 것입니다. 강의 전체에서 이 부분은 단순한 성경 해석을 넘어 ‘그때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매우 실제적인 신앙의 결단을 요구하는 대목입니다.

 

강사의 설명에서 짐승의 표는 단순한 상징이 아닙니다. 실제로 돈의 기능을 대신하며, 그것이 없으면 물건을 사고팔 수 없고 정상적인 사회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집니다. 앞선 강의에서도 강사는 ‘짐승의 표가 돈의 기능을 한다’고 하면서, 전 3년 반의 환난으로 세상이 피폐해진 상황에서 먹을 것이 부족하고, 그 가운데 표를 받지 않는 사람은 극심한 생존의 압박을 받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짐승의 표는 강사에게 단순한 종말론적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마지막 시대 성도의 사랑과 충성을 시험하는 결정적인 시험입니다.

 

이 때문에 강사는 평상시에 세상 소유와 혈육에 대한 집착을 끊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손주가 ‘할머니, 배고파요’라고 울며 호소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매우 구체적인 상황까지 제시합니다. 표를 받으면 먹을 것을 살 수 있지만 받지 않으면 사랑하는 가족이 굶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혈육을 ‘육적인 애정’으로 사랑하지 말고 ‘주님 안에서 영적인 사랑’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 대목은 상당히 조심스럽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조부모가 손주를 사랑하는 자연적 애정 자체가 끊어야 할 악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자연적 가족애는 제거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영적 사랑의 질서 아래 놓여야 할 것입니다. 가족을 사랑하되 ‘내 것’이기 때문에만 사랑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 사람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과 선을 위해 사랑하는 방향으로 정화되어야 합니다. 자연적 애정이 천국적 사랑의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강사가 말하는 ‘혈육의 정을 끊어라’는 표현의 핵심도 문자 그대로 가족에 대한 애정을 메마르게 만들라는 뜻보다는, 가족 때문에 주님과 진리를 저버릴 정도의 소유적 애착을 내려놓으라는 뜻으로 받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질서에서도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문제는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질서로 사랑하느냐’입니다. 주님보다 자녀를 사랑하고, 진리보다 가족의 이해관계를 사랑한다면 사랑의 질서가 뒤집힌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가족을 사랑한다면 오히려 자연적 애정은 더욱 순수하고 깊어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강의가 짐승의 표를 통하여 제기하는 질문은 상당히 날카롭습니다. ‘생존과 신앙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입니다. 이 질문 자체는 종말 시간표에 동의하는가와 별개로 귀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결국 어떤 순간에는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가’의 문제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평상시에는 주님도 사랑하고 돈도 사랑하고 가족도 사랑하고 명예도 사랑하면서 그것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랑이 충돌하는 순간 어느 것이 지배적 사랑인지 드러납니다.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짐승의 표를 훨씬 더 가까운 문제로 가져옵니다. 강사의 독법에서는 언젠가 후 3년 반에 표를 ‘받을 것인가, 받지 않을 것인가’가 결정적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으로 보면 사람은 이미 매일 자신의 ‘이마’와 ‘손’에 무엇인가를 새기며 살아갑니다. 계시록에서 이마는 단순한 신체 부위가 아니라 사람의 내적 사랑과 의지를 나타내고, 손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능력과 행위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짐승의 표를 이마와 손에 받는다는 말씀은 어떤 악과 거짓을 의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제 삶으로 행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점은 계시록 자체의 구조에서도 매우 아름답게 확인됩니다. 계시록 13장에서는 짐승의 표가 이마와 손에 나타나지만, 바로 다음 14장에서는 시온 산에 선 14만 4천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장면은 서로를 비추는 대조입니다. 한쪽에는 짐승의 이름이 있고 다른 쪽에는 주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결국 ‘피부에 어떤 표식을 받느냐’ 이전에 ‘내 생명에 누구의 질이 새겨지고 있느냐’입니다.

 

‘이름’은 말씀의 속뜻에서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존재의 질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이 이마에 기록된다는 것은 ‘예수’라는 글자가 영적 이마에 적힌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이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이 되어 간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짐승의 이름이 이마에 기록된다는 것은 자기애와 세상 사랑,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거짓이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보면 ‘표를 받는다’는 것은 단 한 번의 사건이라기보다 일생에 걸친 형성의 과정이 됩니다. 사람은 반복해서 사랑하는 것을 점점 더 사랑하게 되고, 반복해서 행하는 것이 점점 자기 생명의 일부가 됩니다. 처음에는 작은 선택이었던 것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성향이 되고, 마침내 지배적 사랑이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사후 인간의 상태를 설명할 때 그토록 ‘지배적 사랑’을 중요하게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사후에 지상에서 형성된 자기 사랑의 질을 가지고 영계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짐승의 표는 미래의 어느 기술보다 훨씬 엄중해집니다. 어떤 기술은 외부에서 거부할 수 있지만, 이미 자기 생명이 되어 버린 사랑은 그렇게 간단히 떼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평생 돈을 가장 사랑한 사람이 죽기 직전에 ‘이제 돈을 사랑하지 않겠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의 지배적 사랑이 곧바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 자기 명예와 지배를 즐긴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몇 마디 고백한다고 해서 그 사랑의 질 전체가 자동으로 뒤집히는 것도 아닙니다. 거듭남이 이 세상에서 실제 삶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그때 가서 결단하려 하지 말고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준비의 이유를 달리 설명할 수 있습니다. 미래 어느 날 표를 거부할 정신력을 미리 훈련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오늘의 선택 하나하나가 이미 우리의 영원한 사랑의 성품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의에서는 이 문제를 더욱 현실감 있게 하기 위해 어느 책에 기록된 환상 이야기도 소개합니다. 강사가 언급하는 책의 자동자막상 저자명과 제목은 다소 불분명하지만, 1996년 미국 집회에서 대환난 때의 ‘표’에 관한 환상을 보았다는 내용입니다. 그 환상에서는 어떤 목회자가 ‘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표를 받으려 하고, 이를 반대하는 아내와 갈등하며, 다른 한 청년은 표를 받지 않아 직장생활을 할 수 없게 되어 고향으로 내려가고, 이전에 함께 신앙생활하던 사람들이 찾아와 그에게 표를 받으라고 회유하는 장면 등이 소개됩니다.

 

이 이야기가 실제 미래를 보여 준 계시인지 여부는 현재 제공된 강의 자료만으로 확인할 수 없으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그러한 개인적 환상을 계시록 해석의 근거로 삼는 데는 신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던지는 신앙적 질문 자체는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교회를 지키기 위해 표를 받는다’는 설정은 아주 역설적입니다. 교회를 지킨다는 명분 때문에 주님을 배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적 명분이 언제나 그 행동의 영적 질을 보증하지 않는다는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을 더욱 깊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라는 말 아래에서도 자기애와 지배욕이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악을 노골적인 악의 모습으로 유지하기보다 선한 이유로 포장하기를 좋아합니다. 자기 명예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부르고, 자기 집단의 확장을 ‘복음의 승리’라고 부르며,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영적 권위’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행위의 외적 명칭보다 그 안에 있는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이어 666이 등장합니다. 강의의 전체 틀에서 666은 적그리스도와 그의 세계통치 체계를 가리키는 결정적 표지입니다. 앞선 전체 강의에서도 강사는 ‘적그리스도, 두 뿔 짐승, 666, 발락, 발람, 음녀’가 서로 ‘짝꿍’이라고 표현하면서 구약의 모형들과 계시록의 종말 사건들을 서로 대응시키는 방식으로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핵심진리’가 계시록을 해석하는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구약의 사건들을 장차 종말에 일어날 실제 사건의 모형으로 보고 서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666’은 어떤 미래 인물의 이름을 숫자로 환산하여 찾아내는 암호가 아닙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계시록 13장 18절의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세다’는 것은 말씀의 상응에서 단순히 산술 계산을 한다는 의미를 넘어 어떤 것의 질을 살피고 알아보는 것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짐승의 수를 세라’는 것은 계산기를 들고 어느 정치인의 이름을 숫자로 바꾸라는 요청이라기보다, 짐승으로 표상된 교리와 신앙 상태의 질을 영적 지혜로 분별하라는 말씀으로 읽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밝힘’에서는 이 666을 특히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의 진리가 완전히 왜곡된 상태와 연결합니다. 이것은 계시록 12장과 13장 전체에 대한 그의 해석과 이어집니다. 용과 그에 뒤따르는 짐승들은 교회 안에서 신앙을 삶과 분리하고, 체어리티와 선한 행위를 구원에서 떼어 낸 교리의 여러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666은 ‘악마의 신비한 번호’라기보다 진리가 선에서 분리되고 인간적 추론에 의해 끝까지 확증되어 버린 상태를 보여 주는 수입니다.

 

여기서 ‘6’이라는 수의 의미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사람은 여섯 날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 안식에 들어갑니다. 우리가 AC 창세기 1장을 읽으면서 보았듯 여섯 날은 거듭남의 싸움과 과정이고, 일곱째 날은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일하시며 이루시는 천적 인간의 상태, 곧 안식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6은 그 자체로 ‘악마의 숫자’가 아니라 아직 완성에 이르지 못한 상태와 관련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666은 신앙의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참된 완성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인간적인 것 안에서 끝까지 확증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세상에는 666이라는 숫자 자체를 두려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동차 번호, 전화번호, 영수증 금액, 상품 코드에 666이 들어가면 불길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말씀의 수를 이렇게 물질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상응의 본질과 거리가 멉니다. 666이라는 숫자가 종이에 인쇄되어 있다고 해서 거기에 악한 영적 힘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서 수는 영적인 질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666이라는 세 자리 숫자’가 아니라 그것이 나타내는 영적 상태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창세기 4장의 ‘가인’이 다시 떠오릅니다. 가인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냅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함께 있을 때는 살아 있지만, 신앙이 ‘나는 혼자서도 구원할 수 있다’며 사랑에서 독립하기 시작하면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이 일어납니다. 계시록의 666도 전혀 다른 책에 나타난 별개의 주제가 아니라, 말씀 전체를 관통하는 바로 그 영적 문제의 마지막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진리가 선을 떠나 자기 홀로 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666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훨씬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단지 미래의 어떤 전자 장치나 표식을 거부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를 삶에서 분리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말하면서도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상태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자기 지성을 진리의 최종 심판자로 세우지 않고, 받은 진리를 실제 선한 삶으로 내려보내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스베덴보리를 읽는 사람에게도 매우 엄중한 자기점검이 필요합니다. ‘신앙만’을 비판하고 체어리티를 강조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666의 영적 원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많이 읽고 AC의 단락 번호를 기억하며 상응과 아르카나를 잘 설명하면서도 그것이 자기 지성의 우월감을 강화하는 데 사용된다면, 형태만 달라졌을 뿐 ‘진리가 사랑에서 분리되는’ 구조는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지식조차 proprium의 손에 들어가면 자기 높임의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다른 사람을 향한 망원경이기 전에 자신을 향한 거울이어야 합니다. ‘저 교리는 666이다’, ‘저 사람은 짐승에게 속했다’고 판정하는 데 사용되는 순간 렌즈의 방향이 위험해집니다. 오히려 ‘내가 알고 있는 이 진리가 오늘 내 사랑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가’, ‘나는 이 진리를 가지고 누구에게 선을 행하고 있는가’, ‘진리를 더 알수록 나는 더 겸손해지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강사의 ‘짐승의 표’ 가르침에서도 바로 이 실천적 중심은 귀하게 살릴 수 있습니다. 강사는 미래 대환난을 대비하여 지금부터 세상 소유와 가족과 자기 생명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언젠가 모든 것을 버릴 준비’라기보다 ‘오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올바른 질서로 사용하는 삶’으로 바꾸어 읽을 수 있습니다. 소유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문제는 소유가 나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가족 사랑도 악이 아닙니다. 문제는 가족을 주님보다 위에 놓는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보존하려는 것도 악이 아닙니다. 문제는 자연적 생명을 지키기 위해 영적 생명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짐승의 표와 주님의 이름 사이의 싸움은 이미 오늘 벌어지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작은 이익을 얻기 위해 거짓말할 것인가, 손해를 감수하고 정직할 것인가. 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상하게 할 것인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것인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진리를 사용할 것인가, 이웃을 살리는 데 진리를 사용할 것인가. 이런 작은 선택 하나하나가 ‘이마’와 ‘손’, 곧 사랑과 행위를 형성합니다.

 

사람이 한 번 선을 선택했다고 곧 천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한 번 악을 선택했다고 곧 지옥적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반복되는 자유로운 선택을 통하여 무엇이 지배적 사랑이 되어 가느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과정에서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선과 진리를 끊임없이 공급하십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강제로 찍히는 ‘표’의 반대입니다. 주님은 사람에게 당신의 이름을 억지로 새기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자유 가운데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랑하여 행할 때, 주님께서 그 사람의 생명 안에 당신의 질을 조금씩 형성하십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계시록 13장의 마지막 말씀이 ‘지혜가 여기 있으니’라고 시작하는 이유도 의미심장합니다. 공포가 여기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지혜’가 여기 있다고 합니다. 666은 두려움에 떨며 미래 기술을 추적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영적으로 분별하라는 말씀입니다.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는가, 무엇이 proprium에서 나오는가, 무엇이 진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사랑을 정당화하고 있는가를 분별하는 지혜입니다.

 

따라서 9강 3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3장의 짐승의 표와 666은 미래 후 3년 반에 적그리스도의 세계정부가 시행할 경제적 통제 표식으로만 읽기보다,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과 자기 지성이 사람의 지배적 사랑인 ‘이마’와 실제 삶인 ‘손’을 점유하여 마침내 그 사람의 영적 성품이 되어 가는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을 때 그 속뜻이 더욱 깊게 열립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던지는 ‘그때 표를 받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거기에 한 질문을 더합니다. ‘그런데 오늘 나는 무엇을 받고 있습니까?’입니다. 내 이마에는 무엇이 조금씩 새겨지고 있으며, 내 손은 무엇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가. 돈인가, 명예인가, 자기 지성인가, 자기 교리인가, 아니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가. 미래의 666을 아무리 정확히 알아도 오늘 자기애의 표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산다면 계시록을 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미래의 종말 시간표를 정확히 알지 못하더라도 오늘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알고 있는 진리를 체어리티로 살아가고,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며 살아간다면 그의 이마에는 이미 전혀 다른 ‘이름’이 조금씩 새겨지고 있을 것입니다. 바로 다음 계시록 14장이 보여 주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입니다. 이것이 666에 대한 말씀의 가장 아름다운 대답일 것입니다.



9강 4부

계시록 14장의 14만 4천과 ‘새 노래’ : 어린양을 따라가는 사람은 누구인가

9강 4부에서는 계시록 13장의 짐승과 짐승의 표, 666에 관한 긴 설명을 지나 계시록 14장으로 넘어갑니다. 여기서 장면은 놀랄 만큼 급격하게 바뀝니다. 13장 마지막에서는 짐승이 사람들의 ‘이마’와 ‘오른손’에 자기 표를 받게 하고, 그 표가 없으면 매매조차 할 수 없게 합니다. 그런데 14장이 열리자 요한은 전혀 다른 광경을 봅니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짐승의 표가 있던 바로 그 ‘이마’에 이번에는 어린양과 아버지의 이름이 있습니다. 이 대조는 계시록 13장과 14장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열쇠입니다.

 

강사의 전체 종말론에서 14만 4천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앞서 계속 설명했듯 강사는 종말의 추수를 몇 단계로 나누어 이해합니다. 교회 시대 끝에 먼저 추수되는 ‘처음 익은 열매’가 있고, 후 3년 반의 대환난 가운데 순교하여 추수되는 사람들이 있으며, 또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끝까지 견디며 살아남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여러 무리는 단순히 동일한 구원받은 사람들을 다른 표현으로 반복한 것이 아니라, 종말의 서로 다른 시점에서 추수되는 서로 다른 무리로 배열됩니다. 이 구조는 9강 첫머리에서 강사가 재림의 첫 번째 목적을 ‘익은 열매를 추수하기 위해서’라고 정리한 것과 연결됩니다.

 

이러한 해석에서 귀하게 받을 수 있는 것은 ‘열매’에 대한 강조입니다. 신앙은 결국 익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씨를 심어 놓은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잎이 무성한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실제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강사가 반복하여 정결, 연단, 행실, 세상 소유에서의 자유, 주님께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것도 결국 ‘익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14만 4천을 이해하는 방식에서는 큰 차이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수는 자연적 산술을 넘어 영적 질을 나타냅니다. 특히 ‘12’는 교회에 속한 선과 진리의 모든 것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수입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주님의 열두 사도, 새 예루살렘의 열두 문과 열두 기초석 등이 모두 같은 계열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144,000’ 역시 특정한 144,000명의 사람을 선발하여 다른 구원받은 사람보다 높은 위치에 세운다는 의미보다, 주님의 교회에 속한 선과 진리의 모든 것이 충만하게 갖추어진 사람들을 나타내는 상징적 수로 보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해석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어디에 있는가’보다 ‘어떤 사람들인가’입니다. 계시록은 그들의 숫자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이마에 어린양과 아버지의 이름이 있고, 그들이 새 노래를 부르며,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 따라가고, 입에 거짓이 없다고 말합니다. 결국 14만 4천이라는 수가 나타내는 영적 질을 본문 자체가 계속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마’가 다시 등장합니다. 바로 앞에서 살펴보았듯 짐승의 표도 이마에 받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이마에 기록됩니다. 따라서 이 둘을 따로 떼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계시록은 의도적으로 두 종류의 사람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한쪽은 짐승의 이름을 지니고 있고 다른 쪽은 주님의 이름을 지니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마는 지배적 사랑, 곧 사람이 가장 깊이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름’은 단순한 명칭이 아니라 그 존재의 질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이름이 이마에 있다는 것은 ‘예수’라는 글자가 영적 이마에 새겨져 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가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과 생명의 질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입으로 주님의 이름을 수없이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록이 말하는 ‘이름’은 입술의 발음보다 깊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사람에게 있다는 것은 주님에게 속한 것이 그 사람의 생명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비로우시므로 그 사람도 자비를 사랑하고, 주님께서 진리이시므로 그 사람도 진실을 사랑하며,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므로 그 사람도 이웃의 영원한 선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3장의 짐승의 표와 14장의 주님의 이름은 결국 ‘두 종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하나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생명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생명입니다. 계시록의 마지막 싸움을 가장 깊은 곳까지 따라가면 결국 ‘어느 정치세력을 지지하느냐’보다 ‘어떤 사랑이 내 생명을 지배하느냐’의 문제에 도달합니다.

 

이어 14만 4천은 ‘새 노래’를 부릅니다. 계시록은 그 노래를 아무나 배울 수 없으며 오직 14만 4천만 배울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마치 천국에 특별한 노래가 있고 선택받은 사람들만 그 악보를 배울 수 있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에서 ‘노래’는 진리에서 오는 기쁨과 고백, 특히 주님의 구원으로 말미암은 영적 기쁨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왜 아무나 그 노래를 배울 수 없을까요? 비밀정보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노래가 나타내는 사랑의 상태에 들어가지 않으면 그 진리를 실제로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것은 지식만으로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삶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용서하라’는 말씀은 누구나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을 실제로 용서하기 위해 주님 앞에서 오랫동안 씨름해 본 사람에게 ‘용서’라는 단어는 전혀 다른 깊이를 갖습니다.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교리도 책으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공로를 내려놓는 시험을 지나면서 ‘정말 내게서 선한 것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구나’를 경험한 사람에게 그 말씀은 더 이상 교리 문장이 아닙니다. 그의 생명이 부르는 ‘노래’가 됩니다.

 

그래서 천국의 ‘새 노래’는 머리로 외우는 노래라기보다 거듭난 생명이 부르는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것과 그 진리가 내 생명이 된 것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의지와 이해’,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의 결합을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해 안에만 있는 진리는 아직 사람의 완전한 소유가 아닙니다. 의지가 그것을 사랑하고 삶으로 행할 때 비로소 진리는 생명 안으로 들어갑니다.

 

계시록은 이어 14만 4천을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고 묘사합니다. 이 표현 역시 자연적 성생활이나 독신 여부로만 읽으면 상당한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말씀의 상응에서 결혼은 선과 진리의 결합과 깊이 관련되고, 반대로 음행과 간음은 선과 진리가 왜곡되고 거짓과 결합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들의 ‘순결’은 단순한 육체적 독신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를 거짓과 섞어 훼손하지 않은 영적 순결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짐승의 문제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신앙의 진리는 본래 체어리티와 결혼해야 합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할 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런데 진리를 자기애와 결합시키면 그 진리는 왜곡됩니다. 말씀을 이용하여 사람을 지배하고, 교리를 이용하여 자기 우월감을 높이며, 성경 지식을 이용하여 이웃을 정죄한다면 진리가 자기애와 ‘불법적인 결합’을 한 셈입니다. 영적 음행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14만 4천의 ‘순결’은 진리를 많이 가진 데 있지 않습니다. 진리를 올바른 사랑과 결합시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섬깁니다. 그래서 그들의 다음 특징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아마 14만 4천을 설명하는 여러 표현 가운데 이것이 가장 본질적일 것입니다. 이들의 위대함은 어떤 특별한 종말 정보를 알고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어린양을 따라간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도 자기가 원하는 곳까지만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갑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매우 정확한 그림입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주님께서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건강하게 해 주시고, 형편을 풀어 주시고, 자녀를 잘되게 해 주시고, 사역을 형통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질문이 바뀝니다. ‘주님, 제가 원하는 곳으로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제가 따라가겠습니다’로 바뀌어 갑니다.

 

이 변화가 쉽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에는 proprium이 싫어하는 길도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해야 할 때가 있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으며, 내가 옳다는 것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손해를 감수하면서 진실해야 할 때도 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쓰임을 묵묵히 감당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어린양을 따라간다는 것은 이런 작은 선택들을 포함합니다.

 

여기에서 강사가 앞서 강조한 ‘세상 소유를 내려놓는 훈련’과도 접점이 생깁니다. 강사의 종말론에서는 미래 대환난 때 모든 것을 버리고 짐승의 표를 거부하기 위해 지금부터 훈련해야 한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목적을 조금 달리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어디로 인도하시든 따라갈 수 있도록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지배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소유를 버리는 것 자체가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가난 자체가 천국적 상태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소유가 나를 지배하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주님의 쓰임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가진 것이 거의 없으면서도 작은 소유 하나에 온 마음이 묶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소유의 양보다 사랑의 질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족을 사랑하는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가족은 주님께서 맡기신 가장 가까운 이웃입니다. 그러나 가족을 ‘내 것’으로만 사랑하여 그들의 자연적 행복을 영적 선보다 앞세우면 사랑의 질서가 흐트러질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가족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영원한 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말하는 ‘육적 혈육의 정을 끊어야 한다’는 표현은 가족애 자체를 끊으라는 말보다는 가족 사랑을 주님 아래 올바르게 질서 잡으라는 방향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계시록은 14만 4천을 ‘사람 가운데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다시 ‘처음 익은 열매’가 등장합니다. 강사의 ‘핵심진리’에서 이 표현은 종말의 특정한 추수 집단을 구분하는 매우 중요한 용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열매’의 영적 질에 조금 더 집중합니다.

 

말씀에서 열매는 선한 삶을 나타냅니다. 나무의 목적은 열매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진리를 배우는 목적도 결국 선한 삶입니다. 진리는 사람을 선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교리적 언어가 아무리 훌륭해도 결국 무엇을 사랑하고 어떻게 사는가에서 그 진리의 질이 드러납니다.

 

이 점에서 ‘핵심진리’가 ‘익은 열매’를 계속 강조하는 것은 상당히 귀합니다. 비록 그 열매를 종말의 여러 추수 집단으로 나누는 방식에서는 스베덴보리와 차이가 있지만, 신앙이 반드시 삶으로 익어야 한다는 중심적 문제의식은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지식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말씀은 강의로 끝나서는 안 되며, 진리는 결국 사람의 사랑과 행위 안에서 열매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14만 4천에 관한 마지막 설명이 이를 다시 확인합니다.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여기서 ‘흠이 없다’는 말을 자연적 의미의 완전무결함으로 이해하면 아무도 해당될 수 없습니다. 거듭난 사람도 지상에서는 여전히 연약함이 있고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내적 방향입니다. 그는 거짓을 사랑하지 않으며 악을 정당화하려 하지 않습니다. 넘어지더라도 악을 선이라고 부르지 않고, 자기 잘못을 주님 앞에서 인정하며 다시 돌이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악을 가지고 있는 것과 악을 사랑하는 것은 다릅니다. 거듭나는 사람에게도 악한 충동은 계속 올라올 수 있습니다. 지옥은 끊임없이 그것을 자극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이것은 주님의 뜻에 반하는 악이다’라고 인정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주님의 도움으로 물리친다면, 그 악이 그의 지배적 사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흠이 없는 자’란 자기 자신에게 아무 악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악을 더 분명히 발견하면서 그것을 주님 앞에서 감추지 않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자기 악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완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도 변명하지 않는 사람이 정결해져 갑니다.

 

이 점에서 14만 4천의 ‘입에 거짓이 없다’는 표현은 자기기만의 문제까지 깊이 들어갑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하는 것을 알아차리기 더 어렵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것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인정받고 싶어서 할 수 있고, ‘진리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싸울 수도 있습니다. proprium은 종교적 언어를 입는 데 매우 능숙합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남의 거짓보다 자기 안의 거짓을 먼저 보기 시작합니다. ‘저 사람은 틀렸다’보다 ‘내가 이것을 왜 이렇게 말하고 싶어 하는가’를 살핍니다. ‘저 사람의 교리가 잘못되었다’는 판단 이전에 ‘나는 이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말하는가, 아니면 이 진리를 가지고 내가 높아지고 싶은가’를 묻게 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 작업에도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이 렌즈의 목적은 다른 설교자와 교단과 신앙 전통의 오류를 찾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 안에 있는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가 어디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만나며 어디에서 다른지를 조심스럽게 살피고, 마지막에는 그 모든 것을 우리 자신의 거듭남으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정확한 아르카나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또 하나의 ‘나는 안다’는 proprium의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계시록 13장과 14장의 대비는 대단히 아름답습니다. 13장에는 강제와 공포가 있습니다. 짐승은 경배를 강요하고, 표를 받게 하며, 받지 않으면 매매하지 못하게 하고 죽이려 합니다. 그러나 14장의 어린양은 사람들을 강제로 끌고 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한쪽은 강제이고 다른 한쪽은 자유로운 따름입니다.

 

이 차이는 천국과 지옥의 본질적 차이와도 연결됩니다. 지옥적 사랑은 지배하려 합니다. 다른 사람을 자기 뜻 아래 굴복시키는 데서 즐거움을 얻습니다. 반면 천국적 사랑은 다른 사람의 자유 안에서 그의 선을 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강제로 천국으로 끌고 가지 않으십니다. 진리를 보여 주시고 선으로 이끄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끝까지 보존하십니다. 사랑은 자유 없이는 사랑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짐승의 표와 어린양의 이름 사이에는 단순한 두 표식 이상의 대조가 있습니다. 짐승은 인간을 자기 소유로 만들려 하고, 어린양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십니다. 짐승은 사람의 의지와 행위를 강제로 점유하려 하지만, 주님은 사람이 자유 가운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이끄십니다. 그리고 사람이 자유롭게 받아들인 선과 진리만이 그의 영원한 생명의 일부가 됩니다.

 

그렇다면 ‘어린양을 따라간다’는 것은 수동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종교 지도자를 따라가는 것과도 정반대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인간의 이성과 자유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이성과 자유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악에 사로잡혀 있을 때 사람은 자유롭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자기 욕망의 종입니다. 주님께서 그 욕망에서 사람을 해방하실수록 그는 비로소 선을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9강 4부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깊습니다. ‘내 이마에는 지금 누구의 이름이 기록되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이것은 죽은 뒤 갑자기 결정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선택하는가를 통하여 조금씩 형성됩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정직을 선택하면 주님의 이름이 조금 더 깊이 새겨집니다. 나를 상하게 한 사람을 용서하려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면 그 이름이 조금 더 깊어집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보다 상대의 선을 먼저 생각하면 또 조금 깊어집니다. 반대로 자기 이익을 위해 진리를 굽히고, 자기 명예를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며, 교리를 가지고 이웃을 멸시하는 선택을 반복한다면 다른 이름이 생명 안에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표’와 ‘이름’은 먼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거듭남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강사가 반복하는 ‘지금 준비해야 한다’는 권면과도 뜻밖에 깊이 만납니다. 강사는 미래 대환난에서 짐승의 표를 거부하기 위해 지금 준비하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세계에서 주님과 함께 살 수 있는 사랑을 지금 형성해야 하기 때문에 지금 거듭나야 합니다.’

 

그 준비는 공포에서 시작할 필요가 없습니다. ‘666을 받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두려움보다 ‘어린양을 더 사랑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하는 것이 천국적입니다. 거듭남의 중심은 지옥을 무서워하여 도망치는 데 있지 않고, 주님의 선이 아름답다는 것을 조금씩 보고 그것을 사랑하게 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9강 4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4장의 14만 4천은 미래 종말의 어느 시점에 다른 성도들보다 먼저 선발되는 특정한 수의 영적 엘리트라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충만하게 결합되어 그분의 이름이 지배적 사랑에 새겨지고, 진리를 거짓과 섞지 않으며,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시든 자유롭게 따라가는 새 교회의 모든 사람을 표상한다고 볼 때 그 속뜻이 더욱 깊게 열립니다.’

 

그리고 아마 이 대목에서 가장 오래 남겨 둘 말씀은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가 아니라 이것일 것입니다.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AC를 수천 단락 읽고, 상응을 이해하고, 천국과 영계의 구조를 알고, 계시록의 아르카나를 이해하는 것도 귀하지만, 그 모든 지식이 결국 우리를 이 한 상태로 데려가지 못한다면 아직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도하실 때 내 뜻보다 주님의 뜻을 사랑하고, 내 명예보다 이웃의 선을 선택하며, 내 지식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귀히 여기는 것, 그렇게 하루하루 어린양을 따라가는 것, 바로 그것이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이 기록되는’ 삶일 것입니다.



9강 5부

순교자의 추수와 유리 바다 : 심판은 ‘복수’인가, 악과 선의 최종 분리인가

9강 5부에서는 계시록 14장에서 시작된 ‘추수’의 주제가 계시록 15장으로 이어지면서, 강사가 지금까지 세워 온 종말론의 큰 구조가 한 단계 마무리됩니다. 강사의 설명에 따르면 후 3년 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순교자의 수가 모두 차게 되고, 그렇게 ‘두 번째 익은 열매’로 추수된 순교자들이 계시록 15장에서 천상의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순교자의 수가 다 찬 뒤에는 계시록 6장에서 약속된 ‘피값’을 갚으시는 일곱 대접 재앙이 시작됩니다.

 

이 대목은 9강 전체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강사는 계시록의 사건들을 시간 순서에 따라 매우 정교하게 배열하고 있습니다. 먼저 교회 시대에 충분히 정결해진 이기는 자들이 있고, 이어 대환난에 들어가 후 3년 반 동안 순교함으로 추수되는 성도들이 있으며, 그 순교자의 수가 모두 찬 뒤에는 더 이상 심판을 미루지 않고 일곱 대접 재앙이 쏟아집니다. 따라서 강사의 관점에서 계시록 15장은 단순한 천국 찬양 장면이 아니라 ‘구원받아야 할 순교자들의 추수가 완료되었고 이제 마지막 심판만 남았다’는 전환점입니다. 실제로 강사는 계시록 6장의 순교자들에게 ‘그 수가 찰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신 말씀과 계시록 15장을 직접 연결합니다.

 

먼저 이 구조에서 귀하게 받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악을 무제한 허용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입니다. 지상에서 의인이 고난받고 악인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니며, 마침내 신적 질서에 따른 분리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의 신적 섭리는 악을 선이라고 인정하거나 방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허용하시되 그 허용 안에서도 끊임없이 선을 향하여 이끄시며, 마지막에는 선과 악이 완전히 분리되게 하십니다.

 

그러나 ‘순교자의 피값을 갚는다’는 것을 이해하는 방식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차이가 생깁니다. 강사의 설명에서는 순교자들을 죽인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 일곱 대접 재앙으로 나타납니다. 계시록의 문자 그대로 읽으면 충분히 그렇게 느껴집니다. 순교자들이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라고 외치고, 마침내 그 수가 차자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진노’는 인간의 분노와 같은 감정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자비 자체이시기 때문에 어느 순간 자비를 거두고 악인을 향해 복수심을 품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말씀에서 ‘여호와의 진노’, ‘분노’, ‘복수’, ‘형벌’이라고 표현되는 것은 인간이 악 가운데 있으면서 주님의 신적 선과 진리를 반대할 때 그 신적 질서를 자기에게 고통스러운 것으로 경험하는 것을 인간의 외관에 따라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햇빛 자체에는 분노가 없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눈은 햇빛을 기뻐하고 병든 눈은 같은 빛을 고통스럽게 느낍니다. 문제는 태양이 어느 눈에는 사랑을 보내고 다른 눈에는 분노를 보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받아들이는 상태가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주님의 신적 사랑과 진리는 언제나 동일하지만, 천국적 사랑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기쁨과 생명이 되고, 악을 자기 생명으로 만든 사람에게는 그것이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따라서 ‘피값을 갚는다’는 표현도 주님께서 순교자들의 원한을 대신 풀어 주시는 식으로 이해하기보다, 지금까지 악이 선을 억압하도록 허용되었던 상태가 끝나고 마침내 신적 질서에 따라 선과 악이 분리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악은 더 이상 선을 공격할 수 없게 되고, 선은 악의 억압에서 해방됩니다. 이것이 영적으로는 가장 완전한 ‘신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순교 자체를 조금 더 깊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의에서 순교자는 후 3년 반 동안 적그리스도에게 죽임을 당하는 실제 성도들입니다. 그들이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고 주님을 선택했기 때문에 ‘두 번째 익은 열매’로 추수됩니다. 이것은 강사의 종말론 안에서는 매우 구체적인 미래 사건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실제 순교의 숭고함을 조금도 낮출 필요가 없습니다. 신앙 때문에 생명을 잃으면서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은 사람의 충성은 귀한 것입니다. 다만 영적 의미에서 ‘순교’는 육체적 죽음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순교자 또는 ‘증인’의 개념은 진리를 증언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붙들기 위해 자기 proprium의 욕망을 포기하고, 자기 명예와 이익을 내려놓으며, 악을 죄로 알고 거절할 때에도 일종의 내적 죽음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보면 순교의 가장 깊은 원형은 ‘내가 죽고 주님이 사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바울적 표현 하나에 환원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교리에서 실제로 죽어야 하는 것은 인간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것으로 여기는 악한 proprium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의 개성과 자유와 고유성을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지옥으로부터 유입되는 악을 자기 것이라고 붙잡고 살아가는 상태에서 그를 해방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악을 하나씩 죄로 알고 피할 때마다 작은 의미의 ‘순교’가 일어납니다. 자존심을 죽여야 사과할 수 있고, 탐욕을 죽여야 정직할 수 있으며, 복수심을 죽여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죽인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욕망을 억압하여 감정을 마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주님의 뜻에 반하는 악입니다’라고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그 악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 악의 지배력을 조금씩 제거하십니다.

 

그러므로 강사의 ‘대환난에서 순교할 준비를 하라’는 메시지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과하면서 ‘오늘 proprium에게 죽는 연습을 하라’는 말씀으로 더욱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미래 어느 날 목숨을 버릴 수 있는가를 상상하기 전에, 오늘 작은 자존심 하나를 주님 앞에서 내려놓을 수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큰 순교를 꿈꾸면서 작은 자기부인을 거절한다면 무엇인가 순서가 바뀐 셈입니다.

 

계시록 15장에서는 이렇게 추수된 사람들이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 곁에 서 있습니다. 그들은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며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강사는 이 ‘유리 바다’를 매우 구체적인 천국의 장소와 연결합니다. 새 예루살렘성이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다’는 계시록 21장의 묘사를 근거로, 유리 바다를 삼층천의 새 예루살렘과 관계된 실제 천상 공간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순교자들은 삼층천 자체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그 ‘유리 바닷가’, 곧 그 가장자리에 해당하는 위치에 서 있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여기에는 ‘핵심진리’의 천국 이해가 잘 드러납니다. 천국을 매우 실제적인 공간적 세계로 이해하고, 그 안에도 위치와 등급이 있으며, 이기는 자와 순교자 등이 서로 다른 천국적 위치와 상급을 받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강의에서 반복해서 나타난 특징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이 막연한 관념이나 심리상태에 불과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실제 세계이며 천사들은 실제 인간의 형상으로 살고, 공동체와 집과 길과 풍경이 있습니다. 이 점에서는 오히려 전통적인 추상적 천국관보다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가 가까워 보이는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천국의 공간을 이해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계의 공간은 자연계의 고정된 물리적 거리와 같은 것이 아니라 내적 상태의 상응에 따라 나타나는 ‘외관적 공간’입니다. 서로 사랑과 진리의 상태가 가까운 영들은 서로 가까이 나타나고, 상태가 다른 영들은 멀리 나타납니다. 위와 아래, 중심과 주변도 모두 영적 상태의 차이를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유리 바닷가’를 삼층천 성벽 바깥의 어떤 물리적 해변 같은 곳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그 위치가 나타내는 영적 상태가 무엇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여기서 ‘유리’가 중요합니다. 유리는 빛을 통과시킵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유리와 투명함은 진리가 빛 가운데 분명히 드러나는 상태와 관련됩니다. ‘바다’는 말씀의 상응에서 자연적 차원에 모여 있는 일반적 진리들과 관련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계시록의 ‘유리 바다’ 역시 천국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이들이 가진 일반적 진리의 상태, 그리고 그것이 신적 빛을 받아 투명하게 된 상태를 생각하게 합니다.

 

따라서 ‘유리 바닷가에 서 있다’는 것을 ‘삼층천에는 못 들어가고 바로 그 아래 등급에 배치되었다’는 공간적 서열로만 이해하면 말씀의 영적 풍성함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어떤 진리의 상태 안에 있으며 그 진리를 통해 주님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 유리 바다에 ‘불이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불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사랑을 나타냅니다. 좋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적 사랑과 그로부터 오는 천국적 사랑입니다. 따라서 ‘유리’가 진리의 투명함을 나타낸다면 ‘불이 섞인 유리 바다’는 사랑과 결합한 진리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단순히 차갑고 투명한 지식의 바다가 아니라 사랑의 불이 그 안에 들어 있는 진리입니다.

 

바로 이것이 계시록 13장의 짐승과 대조됩니다. 짐승의 문제는 진리가 선에서 분리되는 데 있었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지성이 사랑에서 분리되며, 진리가 자기 지성을 확증하는 수단으로 변합니다. 그러나 이제 짐승을 이긴 사람들이 서 있는 곳에는 ‘불이 섞인 유리 바다’가 있습니다. 진리와 사랑이 다시 함께 있습니다. 이 장면을 이렇게 읽으면 계시록의 내적 흐름이 놀라울 만큼 일관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부릅니다. 강의에서도 계시록 15장 3~4절을 직접 읽으며 이 찬양을 중요하게 다룹니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라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가 하나로 불린다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특별히 의미심장합니다. 모세는 말씀의 역사적 차원, 곧 율법과 신적 진리를 표상하며, 어린양은 주님 자신, 특별히 주님의 신적 인성과 구원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구약과 신약이라는 두 성경 부분이 서로 다른 두 하나님이나 두 구원 질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이신 주님의 신적 진리와 구원을 증언한다는 깊은 통일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더 나아가 ‘모세’와 ‘어린양’은 진리와 선의 관계로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이 무엇이 진리인지를 가르친다면 어린양은 그 진리를 사랑으로 완성하시는 주님을 보여 줍니다. 진리가 사랑과 결합할 때 비로소 ‘노래’가 됩니다. 진리가 지식으로만 남아 있을 때는 논쟁의 자료가 될 수 있지만, 사랑과 결합하면 감사와 찬양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AC를 읽는 일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AC의 목적은 상응을 많이 알고 아르카나를 많이 축적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창세기의 속뜻이 열릴수록 결국 우리 안에서 주님의 구원 질서가 더 분명히 보이고, 그분이 어떻게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지를 보며, 그 결과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진리가 마지막에 ‘노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이들이 부르는 노래의 내용이 흥미롭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순교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짐승을 이겼다’, ‘우리가 목숨을 버렸다’, ‘우리가 다른 성도보다 높은 상급을 받았다’고 노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께서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다’,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다’, ‘오직 주만 거룩하시다’고 노래합니다. 중심이 완전히 주님께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천국적 상태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천국의 사람들은 자기가 얼마나 훌륭하게 싸웠는지를 영원히 회상하며 자기 공로를 즐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안에 있는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왔다는 것을 점점 더 분명히 압니다. 그래서 천국이 깊어질수록 자기 공로 의식은 줄어들고 주님께 대한 감사가 커집니다.

 

이 점에서 ‘상급’이라는 말도 조심스럽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의에서는 이기는 자, 순교자 등에게 각각 다른 천국의 위치와 상급이 주어지는 구조가 비교적 선명합니다. 스베덴보리도 천국의 모든 사람이 똑같은 상태라고 하지 않습니다. 세 천국이 있고 무수한 공동체가 있으며, 사람마다 사랑과 지혜와 쓰임의 정도가 다릅니다. 그러나 천국의 ‘상급’은 지상에서 공로에 따라 높은 직급과 좋은 자리를 배정받는 것과는 다릅니다.

 

천국의 상급은 선을 행하는 기쁨 자체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행할수록 행복합니다. 더 큰 사랑을 가진 천사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면 그것은 더 많은 사람을 지배할 권한을 얻었다는 뜻이 아니라 더 깊고 넓은 쓰임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천국에서 높아진다는 것은 더 많이 섬길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교자의 피값도 천국적 의미에서는 ‘나를 죽인 자가 고통받는 것을 보는 즐거움’일 수 없습니다. 만일 천국의 순교자가 자기 박해자가 불타는 모습을 보고 만족한다면 아직 복수심이라는 지옥적 애정이 남아 있는 셈입니다. 천국의 사람은 원수의 멸망 자체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악이 더 이상 선을 해치지 못하고 신적 질서가 회복되는 것을 기뻐합니다. 이것이 ‘신원’과 인간적 복수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계시록 15장 후반에는 마침내 성전이 열리고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지고 나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가득 담긴 일곱 금 대접이 그들에게 주어지며, 성전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은 연기가 가득하여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 아무도 성전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강사의 시간표에서는 이제 후 3년 반 마지막에 일어날 최종 재앙이 시작될 준비가 모두 끝난 것입니다. 순교자의 수가 찼고, 그들은 천국에 들어갔으며, 이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피값을 갚으시는 일곱 대접 재앙만 남았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일곱’은 다시 충만과 완성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일곱 대접은 하나님께서 일곱 번 화를 내신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악과 거짓이 완전히 드러나고 심판되는 전체 과정을 나타냅니다. ‘대접’ 역시 그 안에 담긴 것이 밖으로 쏟아져 드러난다는 의미에서 내면에 축적되어 있던 악과 거짓의 상태가 외적으로 완전히 드러나는 것과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심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 없는 악을 새로 만들어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그 사람과 교회 안에 형성되어 있던 것이 드러나게 하십니다. 지상에서는 외적 경건과 명예와 사회적 지위와 종교적 언어로 내면을 감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판에서는 겉과 속이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했는지가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가 마지막 심판을 이해하는 방식도 이와 같습니다. 심판은 모든 사람이 법정 앞에 줄을 서고 주님께서 각 사람의 범죄 목록을 읽어 판결을 내리시는 사건이 아닙니다. 영계에서 외적인 것이 벗겨지고 내적인 것이 드러나면서 각 사람이 자기의 지배적 사랑에 맞는 곳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선을 사랑하는 사람은 천국을 향하고 악을 사랑하는 사람은 지옥을 향합니다. 심판은 본질적으로 ‘드러남’과 ‘분리’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계시록의 무서운 대접 재앙들도 전혀 다른 빛을 띱니다. 주님께서 참다못해 세상을 공격하시는 장면이라기보다 악과 거짓이 더 이상 선과 진리의 외관 뒤에 숨어 있을 수 없게 되는 과정입니다. 감추어진 것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렇게 해서 선과 악이 완전히 구별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한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작은 규모로 반복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자기애와 욕망을 때때로 드러내십니다. 우리는 그런 때 ‘내가 왜 이런 사람이 되었지?’라고 놀라지만 사실 그 악이 그 순간 새로 생긴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미 안에 있었으나 주님의 섭리 가운데 이제 그것을 보고 싸울 수 있는 때가 되어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자비입니다. 감추어진 악은 제거될 수 없습니다. 먼저 보여야 합니다. 사람이 ‘내 안에 이런 것이 있었구나’를 보고 그것이 악임을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할 때 비로소 주님께서 그것을 제거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심판과 구원은 완전히 반대되는 일이 아닙니다. 거듭나는 사람에게 ‘심판’은 악을 드러내어 그것에서 구원하시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 지점에서 강사가 앞선 강의에서 ‘대환난은 성도를 연단받게 하고 정결케 하는 과정’이라고 말한 것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는 계시록 12장의 광야에서 1,260일 동안 ‘양육한다’는 것을 영적으로 ‘정결케 한다’는 뜻으로 설명하고, 대환난을 성도가 연단받고 정결해지는 과정이라고 명시합니다. 이것은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가 의외로 가까이 접근하는 대목입니다.

 

차이는 그 연단을 어디에 배치하느냐입니다. 강사는 그것을 종말의 전·후 3년 반이라는 특정한 역사적 기간 안에 배치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한 사람의 일생에 걸친 거듭남의 질서, 그리고 교회 전체의 영적 상태에 적용합니다. 그러나 ‘시험을 통하여 악이 드러나고, 그 악과 싸우면서 사람이 정결해진다’는 기본 구조에는 분명한 접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으면서 모든 것을 틀렸다고 지워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강사가 이미 붙들고 있는 ‘연단’, ‘정결’, ‘익은 열매’, ‘이기는 자’, ‘주님을 끝까지 따름’이라는 귀한 주제들을 받아 그 의미를 외적 종말 시간표에서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내적 질서로 더 깊이 가져가면 됩니다.

 

9강 5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5장의 유리 바닷가에 선 순교자들과 일곱 대접 재앙은 후 3년 반에 정해진 수만큼 순교한 성도들이 천국의 특정 위치로 옮겨지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피값을 세상에 보복하시는 사건으로만 읽기보다, 시험을 통하여 진리가 사랑과 결합한 사람들이 자기 공로가 아닌 오직 주님의 구원을 찬양하게 되고, 마침내 악과 거짓의 내적 상태가 완전히 드러나 선과 악이 신적 질서에 따라 최종적으로 분리되는 마지막 심판의 영적 질서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을 때 더욱 깊은 의미가 열립니다.’

 

그리고 9강 5부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어쩌면 일곱 대접이 아니라 그 직전에 부르는 노래일 것입니다. 그토록 무서운 짐승을 이기고, 우상을 거부하고, 자기 생명까지 내어놓았다는 사람들이 천국에 도착하여 정작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겼습니다’가 아니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크고 놀랍습니다’라고 노래합니다. 거듭남의 마지막도 아마 이와 같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악과 싸운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더 깊이 여실수록 마침내 알게 됩니다. 싸울 힘도 주님에게서 왔고, 진리를 볼 빛도 주님에게서 왔으며, 선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조차 주님에게서 왔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익은 열매’가 된 사람의 마지막 고백은 자기 승리의 간증이 아니라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라는 찬양이 될 것입니다.



9강 6부

세 번째 익은 열매와 일곱 대접 : 마지막 연단은 무엇을 완성하는가

9강 6부에서 강사는 계시록 15장 마지막 부분을 붙들고, 아직 살아서 대환난을 통과하고 있는 성도들의 마지막 상태를 설명합니다. 순교자들은 이미 ‘두 번째 익은 열매’로 추수되어 천국의 유리 바닷가에 서 있지만,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은 성도들은 아직 추수가 끝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계시록 15장 8절의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는 말씀을, 이 살아남은 성도들이 일곱 대접 재앙을 통하여 마지막 연단을 다 마쳐야 비로소 ‘세 번째 익은 열매’로 완성된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강사는 실제로 ‘일곱 대접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없고, 살아남은 성도들은 이 재앙을 통하여 나머지 연단을 마친 후 세 번째 익은 열매로 추수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해석은 지금까지 ‘핵심진리’가 세워 온 전체 성장론과 매우 잘 맞습니다. 처음 익은 열매는 교회 시대에 이미 연단과 정결을 충분히 통과하여 대환난을 면제받는 이긴 자들이고, 두 번째 익은 열매는 후 3년 반의 핍박 가운데 순교함으로 완성되는 사람들이며, 세 번째 익은 열매는 순교하지 않고 살아남으면서 일곱 대접까지 끝까지 통과하여 마지막 연단을 마치는 사람들입니다. 강의 후반에서도 ‘세 번째 익은 열매는 대환난을 살아서 통과하며 연단을 받아 만들어져야 하고, 그래야 장차 천년 그리스도 왕국에 육체를 가진 백성으로 들어갈 사람들이 있게 된다’고 다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강사의 종말론에서 일곱 대접은 단순한 악인에 대한 형벌만이 아니라, 살아남은 성도에게는 구원의 마지막 연단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점이 이번 6부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대목입니다. 강사의 종말론은 매우 문자적이고 미래적인데도, 재앙을 단순한 ‘처벌’로만 읽지 않고 성도의 정결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광야를 ‘정결케 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고, 대환난을 ‘성도를 연단받게 하고 정결케 하는 과정’이라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상당히 의미 있는 접점입니다. 거듭남에서 시험과 연단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연단이 반드시 미래의 특정한 7년 대환난과 일곱 대접이라는 역사적 재앙 안에서만 이루어지는가 하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거듭남은 기본적으로 이 자연계의 삶 전체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람은 매일 자유 가운데 악과 진리, 자기애와 체어리티 사이에서 선택하며, 그 선택들이 반복되면서 지배적 사랑이 형성됩니다. 시험은 그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평상시에는 감추어져 있던 악과 거짓이 시험 가운데 드러나고, 사람은 주님의 도움으로 그것을 죄로 인정하여 거절하며, 그 반대의 선과 진리가 더 깊게 결합합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말하는 ‘마지막 연단’의 원리를 특정 미래의 재앙에만 묶어 두지 않고, 한 사람의 평생 거듭남 안에서 읽으면 훨씬 보편적이고 현재적인 의미가 열립니다.

 

여기서 ‘일곱 대접’의 ‘일곱’이 중요합니다. 강사의 해석에서는 실제 일곱 차례의 마지막 재앙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일곱’은 말씀에서 완전함과 충만함, 전체를 나타내는 수입니다. 따라서 일곱 대접은 하나님께서 정확히 일곱 번 화를 내신다는 뜻보다,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악과 거짓의 모든 것이 완전히 드러나고 그 상태가 끝에 이르는 전체적인 심판의 과정을 나타냅니다. 대접이라는 그릇도 안에 담긴 것을 밖으로 쏟아내는 형상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안에 감추어져 있던 악과 거짓이 더 이상 숨겨지지 않고 밖으로 완전히 드러나는 상태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것이 심판의 본질과도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 없던 악을 새로 만들어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미 그 사람 안에 형성되어 있던 것이 드러나게 하십니다. 지상에서는 사람의 외적 예절, 종교적 언어, 명예, 직분, 사회적 역할 때문에 내면이 어느 정도 가려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계에서는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이 점차 하나가 되어 갑니다. 사람은 실제로 무엇을 사랑했는지, 무엇을 즐거워했는지,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접이 쏟아진다’는 것은 심판이 밖에서 덧붙여지는 사건이라기보다 안에 있던 것이 밖으로 나타나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강사가 ‘일곱 대접이 끝나야 세 번째 익은 열매가 완성된다’고 한 말도 다른 차원에서 깊어집니다. 거듭남의 완성은 사람이 고통을 충분히 많이 받아야 자격을 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안에 숨어 있던 악과 거짓이 충분히 드러나고, 그것을 자유 가운데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며, 반대되는 선과 진리가 그 사람의 생명에 형성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연단’의 핵심은 고통의 양이 아니라 사랑의 변화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고난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고난을 겪어도 어떤 사람은 더 겸손해지고 주님을 의지하게 되지만, 어떤 사람은 더 완고해지고 원망과 자기연민에 빠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고난은 자동적인 성화 장치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태에서 사람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서는 시험이 사람이 자유 가운데 주님께로 돌아설 수 있도록 허용되는 영적 싸움이지, 하나님께서 고통의 점수를 채우게 하시는 과정이 아닙니다.

 

강사는 15장 8절의 ‘아무도 능히 성전에 들어갈 수 없더라’를 살아남은 성도들이 아직 천국에 들어갈 준비가 끝나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성전’은 단순히 천국 안의 어떤 건물이나 특정한 천국 구역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가장 깊게는 주님의 신적 인성, 그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천국과 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성전에 들어간다’는 것은 공간적으로 어느 문을 통과한다는 뜻보다 주님과의 결합, 곧 선과 진리의 천국적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 아무도 성전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도 영적으로는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악과 거짓이 완전히 드러나고 분리되기 전에는 새 교회의 충만한 질서가 아직 확립될 수 없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옛것이 완전히 드러나야 새것이 분명히 세워집니다. 이것은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비슷합니다. 어떤 악이 계속 감추어져 있고 그 악을 정당화하는 거짓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주님의 선과 진리가 그 영역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다스릴 수 없습니다. 악이 드러나고 분리될수록 ‘성전’, 곧 주님의 질서가 그 사람 안에서 더욱 열립니다.

 

이것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다’는 강사의 표현을 조금 다듬어 생각하게 합니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합격점수를 넘긴 사람에게 입장권을 발급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은 자신이 형성한 사랑의 상태와 일치하는 곳으로 갑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그의 생명이 되었다면 천국은 그에게 자연스럽고 기쁜 환경입니다. 반대로 자기애와 지배욕을 사랑한다면 천국의 질서는 오히려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갈 준비’라는 말의 가장 깊은 뜻은 천국의 사랑을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강사의 ‘익은 열매’라는 표현은 다시 상당히 귀하게 살아납니다. 열매는 어떤 시험을 통과했다는 증명서가 아닙니다. 그 나무 안에 있던 생명이 실제로 밖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를 배워 기억에 저장하는 단계는 아직 열매가 아닙니다. 진리를 이해하는 것도 그 자체로는 열매의 완성이 아닙니다. 그 진리가 의지 안에 받아들여져 선을 사랑하게 하고, 그 사랑이 실제 삶의 행위로 나타날 때 열매가 맺힙니다.

 

따라서 ‘세 번째 익은 열매’라는 강사의 말을 ‘최하위의 구원 등급’처럼 읽는 것은 좋지 않겠습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세 부류가 시간적으로 구별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질문이 돌아옵니다. ‘내 안의 진리는 지금 얼마나 선으로 익어가고 있는가?’입니다. 누가 첫째 열매인지, 둘째인지, 셋째인지보다 내가 지금 실제로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강의의 시간표에서 이 살아남은 성도들은 일곱 대접 재앙을 다 통과한 뒤 장차 주님의 지상 재림과 심판을 맞고, 이후 천년 그리스도 왕국에 육체를 가진 백성으로 들어갈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강사는 ‘왕은 오셨는데 백성이 없으면 안 되니 살아서 대환난을 통과한 세 번째 열매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매우 직관적인 설명도 합니다. 이것은 ‘핵심진리’의 문자적 천년왕국론을 잘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계시록의 ‘천 년’과 ‘왕국’은 이렇게 자연계에 세워질 정확히 1,000년짜리 정치적 왕국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나라는 본질적으로 영적 왕국이며, 주님께서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 안에서 선과 진리로 다스리시는 상태입니다. 계시록 20장의 ‘천 년’ 역시 일정한 영적 상태의 충만함과 관련하여 해석됩니다. 그러므로 일곱 대접 이후 살아남은 특정 육체적 집단이 지상 천년왕국의 백성이 된다는 구조는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설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하지만 ‘주님의 나라에는 백성이 있어야 한다’는 강사의 직관을 영적으로 바꾸어 읽으면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의 나라는 추상적 교리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실제 사람 안에 세워져야 합니다. 진리가 실제 인간의 사랑과 삶 속에서 받아들여지고, 그 사람이 주님의 선을 행하는 천국적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왕국은 언제나 ‘사람 안에’ 세워집니다. 주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과 진리가 실제 인간 생명 안에서 통치하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세 번째 익은 열매’의 본질도 다시 달라집니다. 그들은 단지 대재앙 속에서 목숨을 부지한 생존자가 아니라, 시험을 통하여 자기의 사랑이 정결해져 주님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사람을 나타내는 그림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살아남는 것 자체가 구원의 목적이 아닙니다. 어떤 상태로 살아남았는가가 중요합니다. 자기애를 더욱 굳게 붙든 채 살아남았다면 영적으로는 아무런 추수가 아닐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으로 많은 것을 잃었어도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하고 이웃에게 더 선한 사람이 되었다면 그 시험은 실제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강사의 설명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일곱 대접을 ‘순교자의 피값’과 동시에 ‘살아남은 성도의 마지막 연단’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같은 사건이 악한 자에게는 심판이고 선한 자에게는 연단이라는 것입니다. 이 직관은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와 어느 정도 만날 수 있습니다. 동일한 신적 진리가 사람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경험되기 때문입니다. 선한 사람에게는 그 진리가 정결케 하는 빛이 되고, 악한 사람에게는 자기 악을 드러내는 심판의 빛이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순교자의 피값을 갚기 위해 재앙을 일으키고, 그 재앙을 동시에 성도 훈련의 도구로 사용하신다고 생각하면 주님 안에 형벌과 교육이라는 두 의지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의지는 언제나 하나입니다. 곧 구원과 선입니다. 악한 자가 그 신적 질서를 심판으로 경험하는 것은 주님이 악을 의도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신적 선과 반대되는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자가 그것을 정결의 빛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은 주님의 성품이 사랑에서 분노로 바뀌는 순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변하지 않는 신적 사랑과 진리가 완전히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 빛 앞에서 각자의 상태가 분명해집니다. 천국적 사랑은 그 빛을 기뻐하고, 지옥적 사랑은 그 빛을 피하려 합니다. 이 점을 붙들면 계시록의 격렬한 재앙들을 읽으면서도 주님의 본질적인 사랑과 자비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번 대목은 ‘연단’이라는 말 자체도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강사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속에도 하나님이 자아를 깨뜨리시는 연단의 섭리가 있다고 강하게 말합니다. 다른 강의 부분에서도 ‘하나님이 제일 관심이 많으신 게 연단’이라며, 자기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아를 깨뜨리는 섭리로 받아들인다고 고백합니다. 이 태도에는 분명 귀한 면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을 무조건 남 탓으로 돌리지 않고, 그 가운데 자기의 proprium을 보고 주님께 배우려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모든 고통을 ‘하나님이 나를 깨뜨리려고 직접 보내신 것’이라고 단정하는 데에는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고, 질병, 타인의 악행, 인간 사회의 불의까지 모두 주님이 적극적으로 보내신 연단이라고 하면 악의 근원을 하나님께 돌릴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에서는 주님은 악을 결코 의도하지 않으십니다. 악을 허용하시지만, 그 허용된 악 속에서 가능한 한 선을 끌어내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것을 보내셨다’보다 ‘이 일이 허용된 가운데 주님께서 이것을 어떻게 선으로 돌리고 계시는가’를 묻는 편이 더 안전합니다.

 

이 구별은 목회적으로도 중요합니다. 고난받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아를 깨뜨리려고 이 일을 보내셨습니다’라고 너무 쉽게 말하면 그 사람에게 불필요한 죄책감이나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줄 수 있습니다. 반면 ‘이 고통 자체가 선은 아니지만, 주님께서는 이것마저 당신의 영원한 선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주님의 자비와 섭리를 함께 보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강사의 ‘연단’ 강조는 버리기보다 정화해서 받는 것이 좋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나님이 직접 보내신다’에서 ‘어떤 일이 허용되더라도 주님은 그것을 우리의 거듭남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다’로, ‘고통받아야 정결해진다’에서 ‘시험 가운데 악을 죄로 알고 주님을 의지하여 선을 선택할 때 정결해진다’로 옮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강사가 귀하게 붙들고 있는 자기부인과 거듭남의 긴장이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와 더 조화롭게 만납니다.

 

또 ‘아무도 성전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조급함을 경계하게 합니다. 사람은 자기 안의 악 하나를 발견하면 당장 완전히 없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질서 있게 거듭나게 하십니다. 한 상태가 충분히 드러나고, 사람이 그것을 자유롭게 보고 인정하며, 반대되는 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될 때 다음 단계가 열립니다. 우리가 원하는 속도보다 느리게 느껴질 수 있지만 주님의 순서는 완전합니다. 아직 ‘일곱 대접’이 끝나지 않은 영역이 있다면 그 영역에서 더 깊은 것을 보여 주시고 다루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낙심하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위로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 아직 악한 생각이 올라오고, 오래된 습관이 다시 고개를 들며, 자기애가 예상보다 깊다는 사실을 발견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이 나타난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사랑하고 정당화하느냐입니다. 악이 보인다는 것은 오히려 주님의 빛이 그 영역에 닿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숨겨진 것은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연단’이라는 말을 한 개인에게 적용할 때, 우리는 완전무결한 상태에 도달해야만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천국에서도 영원히 완전해져 갑니다. 주님만이 무한히 완전하십니다. 거듭남의 핵심은 더 이상 아무 결점도 없는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배적 사랑의 방향이 주님을 향하고, 악을 악으로 인정하며, 주님에게서 선을 받아 살아가는 상태가 확립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강사의 ‘천국 갈 자격이 다 된다’는 표현도 조금 다듬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자격’보다 ‘상태’가 더 정확합니다. 주님께서 요구 조건을 만족한 사람에게 허가증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사랑이 천국의 사랑과 상응하도록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외부 입장 심사를 통과하는 것보다 자기 생명이 천국의 질서와 맞아 가는 일입니다.

 

이렇게 보면 9강 6부가 말하는 세 번째 익은 열매는 영적 엘리트의 세 번째 등급이라기보다 하나의 중요한 거듭남 원리를 비춰 줍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중간에서 버리지 않으십니다. 아직 익지 않은 열매를 억지로 따지도 않으시고, 끝없이 미성숙한 상태로 두지도 않으십니다. 사람의 자유를 보존하면서 필요한 진리를 보여 주시고, 시험을 허용하시며, 그 시험 가운데 선을 선택하도록 힘을 주시고, 마침내 그 사람 안에서 주님의 생명이 실제 열매로 나타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익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누구는 큰 외적 고난을 통하여 깊이 주님을 의지하게 될 수 있고, 누구는 평범한 가정과 직장생활 속에서 아주 오랫동안 자기 성질과 교만과 욕심을 다루면서 깊이 거듭날 수 있습니다. 외적 사건의 크기가 영적 깊이를 자동으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그 사건 속에서 사람의 사랑이 어떻게 변화했는가입니다.

 

따라서 9강 6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5장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 아무도 성전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과 강사가 말하는 세 번째 익은 열매는 미래 대환난에서 살아남은 성도들이 일곱 대접이라는 마지막 고난을 통과해야 천국 입장 자격을 얻는다는 뜻으로만 읽기보다, 교회와 인간 안에 남아 있는 악과 거짓이 끝까지 드러나고 분리되며,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여 주님의 천국적 질서가 생명 안에 확립되는 거듭남과 마지막 심판의 충만한 과정을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을 때 더욱 깊은 의미가 열립니다.’

 

그리고 저는 이번 부분에서 강사의 ‘연단’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남겨 두면 좋겠습니다. 연단은 주님께서 사람을 괴롭혀 강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허용된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드러내시고, 그 가운데 악을 죄로 보고 주님의 선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이끄시는 섭리의 과정입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일곱 대접’의 엄중한 그림도 단지 파괴의 공포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끝에는 ‘익은 열매’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없애고자 하시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속박하는 악이며, 살리고자 하시는 것은 그 사람 안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생명입니다. 이것이 심판 속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주님의 구원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9강 7부

포도송이 추수와 일곱 대접 : 악이 ‘익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9강 7부에서는 계시록 14장의 마지막 부분, 곧 ‘포도송이 추수’가 중심에 놓입니다. 강사는 앞에서 곡식 추수를 후 3년 반 동안 순교하는 성도들의 추수로 해석한 뒤, 곧이어 등장하는 포도송이 추수를 그 성도들을 박해하고 죽인 적그리스도의 무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풀이합니다. 그래서 순교자의 수가 다 차면 하나님께서 일곱 대접 재앙을 땅에 쏟으시고, 마지막에는 아마겟돈 심판과 주님의 지상 재림을 통해 죄악 세상을 완전히 심판하신다는 구조를 세웁니다. 강의에서 강사는 ‘포도가 익었다’는 말씀을 적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무리의 죄악이 심판받을 만큼 완전히 성숙한 상태로 보고, 일곱 대접과 아마겟돈을 그 최종 심판의 집행으로 연결합니다.

 

이 대목에서 먼저 귀하게 볼 것은 강사가 ‘심판에도 때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이 조금 나타났다고 즉시 멸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태가 충분히 ‘익을 때’까지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익음’이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선도 익고 악도 익습니다. 선은 반복하여 받아들인 진리가 사랑과 삶 안에서 결합될 때 익어 가고, 악은 반복하여 선택하고 정당화한 욕망이 지배적 사랑이 되어 갈 때 익어 갑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은 어느 날 하나님께서 갑자기 화가 나셔서 시작하시는 사건이 아니라, 선과 악의 상태가 서로 완전히 구별될 만큼 성숙한 뒤 이루어지는 분리입니다.

 

이 점은 마태복음 13장의 알곡과 가라지 비유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주인은 가라지를 발견하자마자 뽑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게 두라’고 합니다. 아직 어릴 때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충분히 구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급하게 악을 제거하려 하면 그 악과 얽혀 있는 선까지 손상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자유와 선을 최대한 보호하면서 악과 거짓이 스스로 자기 본질을 드러내게 하십니다. 그래서 ‘익었다’는 것은 단지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랑의 질이 충분히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강사의 설명에서는 이 ‘익음’이 종말의 적그리스도 진영에 적용됩니다. 그들이 성도들을 박해하고 순교시키며 악이 절정에 이르면, 더 이상 심판을 미룰 이유가 없고 일곱 대접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원리를 특정 미래 정치세력에게만 한정하지 않고 교회와 한 개인의 내적 상태에까지 가져옵니다. 어떤 사람도 하루아침에 ‘완성된 악인’이 되지 않습니다. 작은 자기애를 정당화하고, 반복해서 이웃의 선보다 자기 유익을 선택하며, 진리를 자기 욕망을 변호하는 도구로 사용할 때 악은 점차 사람의 생명 안에서 익어 갑니다.

 

이것이 무서운 이유는 악이 자라면서 점점 악처럼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처음 거짓말할 때에는 양심의 불편이 크지만 반복하면 익숙해집니다. 처음 사람을 지배할 때에는 마음 한편에서 잘못되었다고 느끼지만, 나중에는 ‘질서를 세우는 일’, ‘책임 있는 지도력’이라고 합리화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자기 영광을 원하는 것을 알아차리지만, 나중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악은 거짓과 결합하면서 ‘익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악과 거짓은 서로 결혼합니다. 선과 진리가 천국적 결혼을 이루듯 악과 거짓도 지옥적 결합을 이룹니다. 악한 사랑은 자기에게 맞는 거짓을 끌어들이고, 그 거짓은 다시 악한 사랑을 정당화하고 강화합니다. 그러므로 포도가 익는다는 것은 단지 죄악의 양이 많아졌다는 것이 아니라 악한 사랑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거짓이 하나의 굳어진 생명 체계를 이루었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계시록의 ‘포도’라는 표상이 흥미롭습니다. 좋은 의미에서 포도와 포도주는 체어리티와 신앙의 진리, 또는 영적 선과 관련된 아름다운 상응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표상은 반대 의미도 가질 수 있습니다. 선과 진리가 왜곡되면 그와 반대되는 악과 거짓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계시록 14장의 ‘땅의 포도가 익었다’는 것은 단지 농작물이 수확기에 이르렀다는 그림이 아니라, 교회의 선과 진리를 거슬러 형성된 악과 거짓의 상태가 완전히 드러난 것을 보여 줍니다.

 

강사는 이 포도송이를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는 것을 적그리스도 무리에 대한 직접적인 형벌과 연결합니다. ‘일곱 대접 재앙으로 초토화시키고, 마지막으로 아마겟돈에서 지상 재림하신 주님께서 완전히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하나님의 ‘진노’를 다시 매우 조심스럽게 읽습니다. 주님의 본질 안에는 사람과 같은 복수심이나 분노가 없습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 자비 자체이십니다. 그렇다면 왜 말씀에는 그렇게 자주 ‘진노’, ‘보복’, ‘멸망’이라는 표현이 나올까요?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말씀의 문자적 외관 가운데 하나로 봅니다. 악한 사람이 신적 선과 진리를 거스르며 살아갈 때, 주님의 질서가 자기 욕망을 제한하고 폭로하는 것을 ‘분노’와 ‘형벌’처럼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 원인은 주님 안의 증오가 아니라 악한 상태와 신적 질서 사이의 충돌입니다. 같은 태양빛도 맑은 눈에는 기쁨이지만 병든 눈에는 고통이 됩니다. 빛이 분노한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상태가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진노의 포도주 틀’은 주님께서 악인을 고문하시는 장소라기보다, 악과 거짓의 실체가 신적 진리의 빛 앞에서 완전히 드러나고 그 결과 서로 분리되는 상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악은 더 이상 선의 외관을 입고 섞여 있을 수 없습니다. 자기 본질대로 나타나고, 자신과 같은 지옥적 상태로 향하게 됩니다. 이것이 마지막 심판의 본질적 질서입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말하는 ‘순교자의 피값’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의 구조에서는 순교자의 수가 다 차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인 세상에 일곱 대접으로 피값을 갚아 주십니다. 그러나 천국의 사랑은 ‘나를 죽인 사람도 고통받아야 한다’는 복수심을 품을 수 없습니다. 천국에 있는 사람은 원수의 고통 자체를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악이 더 이상 선을 파괴하지 못하는 질서, 진리가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신원’은 복수보다 해방과 질서 회복의 의미로 읽는 것이 더 천국적입니다.

 

악의 세력을 제거하는 것과 악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미워하시되 사람 자체를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사람이 끝까지 악을 사랑하여 주님의 선을 거절할 때에도 주님께서는 그 사람에게서 생명을 거두거나 복수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유롭게 선택한 사랑의 상태 안에 머무르도록 허용하십니다. 지옥 역시 주님께서 사람을 던져 넣는 형벌 감옥이라기보다 자기가 사랑하는 악을 계속 선택한 영들이 그와 같은 상태의 공동체로 모이는 곳입니다.

 

이렇게 보면 포도송이 추수는 다른 사람의 멸망을 구경하게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 안에서 무엇이 익고 있는지를 묻게 하는 말씀입니다. 내 안에는 선한 포도와 악한 포도가 모두 자랄 가능성이 있습니다. 같은 말씀을 들어도 그것을 자기 공로와 자기 의를 키우는 데 사용할 수 있고, 반대로 겸손과 체어리티를 키우는 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진리를 많이 안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열매가 익는지는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어떤 사랑과 결합하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현재 진행 중인 ‘스베덴보리의 렌즈’ 작업에도 매우 직접적인 경고입니다. 강사의 문자적 종말론과 스베덴보리의 속뜻을 비교하면서 우리가 더 정확한 해석을 가지고 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다른 사람을 얕보는 데 쓰인다면 진리가 자기애와 결합한 것입니다. 반대로 그 진리를 통해 다른 신앙 전통 안에 있는 진리와 선을 더 잘 알아보고,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며, 자기 안의 proprium을 더 깊이 살피게 된다면 진리가 체어리티와 결합해 가는 것입니다. 어떤 포도가 익고 있는지는 바로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강의는 포도송이 심판을 일곱 대접과 아마겟돈에 연결합니다. 15장은 그 일곱 대접의 준비이고 16장에서 본격적으로 대접이 쏟아진다는 것이 강사의 시간표입니다. 따라서 14장 후반의 포도 추수는 16장 이후의 심판을 미리 보여 주는 장면이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독법에서는 이런 반복을 단순한 예고편과 본편의 관계로만 보지 않습니다. 계시록의 여러 장면은 교회의 마지막 상태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보여 주며, 이전 장면에서 드러난 영적 상태가 다음 장면에서 더 구체적으로 펼쳐집니다.

 

‘대접’도 이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대접은 무엇인가를 담고 있다가 쏟아내는 그릇입니다. 사람이 오랫동안 내면에 품고 있던 사랑과 사고는 언젠가 외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교회 역시 내적으로 쌓여 온 교리적 왜곡과 악한 사랑이 마지막에는 외적으로 완전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심판은 갑자기 밖에서 덮쳐오는 낯선 재앙보다 ‘안에 있던 것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면을 가집니다.

 

사람에게도 그렇습니다. 평상시에는 자기 성질을 잘 통제하고 점잖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압박과 시험이 오면 안에 있던 것이 밖으로 쏟아져 나옵니다. 우리는 그때 ‘이런 상황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 상황이 안에 있던 것을 드러낸 경우가 많습니다. 시험은 사람 안에 없는 악을 새로 만들어 내기보다 이미 숨어 있던 것을 표면으로 끌어올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접 재앙’은 개인의 거듭남에 매우 실제적으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의 숨은 자기애와 거짓을 보게 허용하실 때 처음에는 그것이 재앙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하는 충격이 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악은 회개할 수 없습니다. 악이 드러나야 그것을 악이라고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나는 사람에게 ‘심판’은 구원의 반대가 아니라 구원을 위해 필요한 드러남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강사가 계속 강조해 온 ‘연단’이라는 주제가 다시 돌아옵니다. 대환난은 선한 사람을 정결하게 하고 악한 사람을 더욱 악하게 하여 결국 둘이 분리되는 과정이라고 강사는 설명합니다. 다른 강의 부분에서도 다니엘 12장을 인용하며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되지만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한다’고 말하고, 계시록의 광야를 정결의 과정으로 풀이합니다. 이런 ‘분리’에 대한 감각은 스베덴보리와 꽤 중요한 접점을 이룹니다.

 

다만 ‘대환난이 사람을 천사 또는 마귀로 만든다’는 식으로 이해하기보다, 환난과 시험이 이미 형성되고 있는 사랑의 방향을 드러내고 강화하는 과정이라고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통해 자동으로 선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 속에서 주님께 의지하여 악을 거절하면 선이 강화되고, 반대로 악을 정당화하고 자기애를 더욱 붙들면 악이 강화됩니다. 결정적인 것은 고통의 크기가 아니라 자유로운 선택의 방향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무조건 영적으로 좋다고 미화해서는 안 됩니다. 큰 병에 걸렸다고 더 거룩해지는 것도 아니고, 가난을 경험했다고 자동으로 천국적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 속에서 원망과 자기연민이 더 깊어질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고난 가운데 주님께 무엇을 배우고, 어떤 악을 보며, 무엇을 선택하는가입니다.

 

이 원리는 포도송이의 ‘익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사람은 사건에 의해 선하거나 악하게 만들어지는 것보다, 사건에 대해 반복해서 어떤 자유로운 반응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점차 자기 사랑의 질을 형성합니다. 같은 모욕을 받고 어떤 사람은 복수심을 키우며, 다른 사람은 주님의 도움을 구해 용서를 배울 수 있습니다. 같은 성공을 경험하고 한 사람은 자기 공로를 높이며, 다른 사람은 받은 것을 쓰임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열매는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 안에서 형성된 사랑입니다.

 

이렇게 보면 마지막 심판의 ‘추수’도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임의로 ‘천국행’, ‘지옥행’으로 분류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평생 형성된 지배적 사랑이 드러나고 그 사랑이 자기와 상응하는 세계를 선택합니다. 이것이 심판이면서 동시에 자유의 완성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후에 인간의 외적 상태가 벗겨지고 내적 상태가 드러나는 과정을 중요하게 설명합니다. 지상에서는 선한 사람처럼 보였으나 내적으로는 자기 유익만 사랑했던 사람의 외관은 점차 벗겨집니다. 반대로 교리적으로 부족하고 외적으로 서툴렀지만 진심으로 선을 사랑했던 사람의 내적 선도 드러납니다. 마지막에는 겉과 속이 하나가 됩니다. 바로 그때 영적 ‘포도’가 완전히 익은 것입니다.

 

이 점은 사람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크게 조심하게 합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대개 아직 익는 중인 외적 모습입니다. 누가 최종적으로 알곡인지 가라지인지, 어떤 포도가 선한지 악한지를 인간이 쉽게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추수’를 천사들에게 맡기신다는 말씀도 중요합니다. 최종 심판은 인간의 몫이 아닙니다. 우리는 교리와 행위의 선악을 분별할 수 있지만 사람의 영원한 내적 상태를 판결해서는 안 됩니다.

 

‘핵심진리’의 종말론은 매우 선명하게 두 진영을 그립니다.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과 주님께 충성하는 자들입니다. 이 선명함에는 신앙적 긴장을 주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명함이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을 너무 쉽게 ‘저쪽’으로 분류하는 데 사용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심판을 먼저 자기 안으로 돌립니다. ‘나는 어느 편인가?’보다 ‘내 안에서 지금 어느 사랑이 힘을 얻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그리고 계시록의 마지막 심판은 한 사람 안에서도 계속 작은 형태로 일어납니다. 오늘 내 안의 거짓 하나가 드러나고 그것을 버리면 작은 심판이 일어난 것입니다. 자기 의 하나가 말씀의 빛 앞에서 무너지고 그 자리에 겸손이 생기면 옛 세계 하나가 끝나고 새 세계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 작은 심판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은 마지막 심판을 공포로만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이미 주님의 빛이 자기 안의 악을 분리하는 것이 구원임을 조금씩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사가 일곱 대접과 아마겟돈을 ‘죄악 세상을 완전히 심판하시는 것’으로 보는 데에는 결국 ‘악은 영원히 계속되지 않는다’는 강한 소망이 있습니다. 이 소망 자체는 귀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것을 파괴의 이미지보다 질서 회복의 이미지로 더 깊게 읽습니다. 마지막 심판의 목적은 세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천국과 지옥을 분리하고, 새 하늘을 형성하며, 그로부터 새 교회가 지상에 세워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끝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의 심판 뒤에는 반드시 ‘새 예루살렘’이 옵니다. 주님께서 악을 드러내고 분리하시는 목적은 빈 공간을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새로운 선과 진리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거듭남도 똑같습니다. 탐욕을 제거하는 목적은 사람이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무감각한 존재가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이웃의 유익을 원하는 천국적 사랑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복수심을 제거하는 목적은 감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자비와 정의로운 사랑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포도주 틀’은 파괴의 마지막 장면이면서 동시에 새 포도주를 준비하는 그림처럼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계시록 본문의 직접적인 반대 의미를 임의로 바꾸자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주님의 모든 심판의 궁극적 목적은 언제나 선한 것을 보존하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시는 데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번 7부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강사가 ‘순교자의 수가 다 차는 데 대략 1년 내외가 되지 않을까’라고 추정하는 부분입니다. 강사 스스로도 이를 단정이 아니라 ‘예상을 해 보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대목에서는 강사의 설명과 계시록 본문 자체를 구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계시록에는 그 기간이 ‘약 1년’이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강사의 종말 시간표 안에서 이루어진 추정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더더욱 수와 기간을 자연적 연대 계산보다 영적 상태의 충만함으로 읽으므로, 이런 추정은 아르카나 해석의 근거가 되기 어렵습니다.

 

이 구별을 정중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강사가 진지하게 말씀을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의 모든 세부 시간표가 말씀 자체의 확정적 의미라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핵심진리’가 귀하게 유지되어 오려면 그 안에서도 ‘본문’, ‘해석’, ‘추정’을 구별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적용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적용과 설명을 스베덴보리의 실제 진술인 것처럼 섞지 않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또 하나, 강사는 계시록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완벽하게 진행되는 체계’로 보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13장부터 15장까지가 후 3년 반의 한 구간이며, 15장이 끝나면 16장의 일곱 대접으로 넘어간다고 명확하게 봅니다. 이러한 구조적 독법은 독자에게 큰 명료함을 줍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 계시록의 순서는 자연적 시간의 연표이기보다 영적 상태들의 연속이라는 점을 계속 기억해야 합니다.

 

계시록의 순서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배열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먼저 몇 년, 다음 몇 개월’의 순서보다 ‘어떤 교리적 상태가 먼저 형성되고, 그것이 어떤 거짓을 낳으며, 마지막에 어떻게 심판되고 새 교회가 세워지는가’라는 영적 순서가 중심입니다. 시간표가 상태의 질서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렇게 읽으면 이번 포도송이 추수는 우리에게 아주 직접적으로 옵니다. ‘세상 악이 언제 완전히 익을까?’만을 기다리는 대신 ‘내 안에서 무엇이 지금 익어 가고 있는가’를 살피게 합니다. 어떤 분노를 계속 품고 있는가, 어떤 자기 의를 반복적으로 정당화하는가, 어떤 선을 꾸준히 실천하고 있는가, 어떤 진리를 실제로 사랑하게 되어 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 생명 안에서 아무것도 중립적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반복하는 것은 강화됩니다. 반복해서 감사하면 감사가 성향이 되고, 반복해서 원망하면 원망이 성향이 됩니다. 반복해서 이웃의 선을 생각하면 체어리티가 생명의 기쁨이 되고, 반복해서 자기 유익만 계산하면 자기애가 지배적 사랑이 됩니다. 이것이 영적 ‘숙성’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큰 사건 몇 번보다 작은 선택들의 지속적 방향과 깊이 관련됩니다. 마지막 순간에 갑자기 좋은 포도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선택 가운데 익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모든 과정에서 끊임없이 선과 진리를 공급하시며 사람의 자유를 보존하십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선택하는 것처럼 선택하지만,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모든 힘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따라서 ‘악도 익는다’는 말씀은 무섭지만 동시에 ‘선도 익는다’는 소망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작은 선 하나가 아직 겨우 싹처럼 보여도 주님께서는 그것을 자라게 하실 수 있습니다. 진리를 하나 알고 그것대로 작은 행동 하나를 할 때, 그 안에 미래의 열매가 들어 있습니다.

 

9강 7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4장의 포도송이 추수와 이어지는 일곱 대접 및 아마겟돈 심판은 미래 적그리스도의 무리를 향한 하나님의 보복적 파괴로만 읽기보다, 교회와 인간 안에서 악한 사랑과 거짓이 완전히 결합하여 자기 본질을 드러낸 마지막 상태에서 주님의 신적 진리가 그것을 선과 완전히 분리하고, 그 분리를 통해 새로운 천국적 질서를 준비하시는 마지막 심판의 아르카나로 읽을 때 더 깊은 의미가 열립니다.’

 

그리고 이번 부분에서 가장 오래 붙들 수 있는 단어는 아마 ‘익었다’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말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반복하여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선택하며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지를 보십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을 준비하는 가장 실제적인 길은 먼 미래의 포도주 틀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 안에서 어떤 포도가 익고 있는지를 말씀의 빛 앞에서 살피는 것입니다. 그때 심판에 관한 말씀은 다른 사람의 멸망을 바라보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내 안의 악이 더 익기 전에 회개하고 주님께서 심으신 선과 진리를 열매 맺게 하라는 자비의 부르심이 됩니다.



9강 8부

불이 섞인 유리 바다와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 : 심판의 끝에서 무엇이 남는가

9강 8부에서는 계시록 14장의 두 추수, 곧 성도의 추수와 악한 자의 포도송이 추수를 지나 계시록 15장으로 들어갑니다. 강사는 14장에서 순교자의 수가 모두 찼다고 보고, 이제 15장은 그 순교자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마지막 일곱 대접 재앙을 준비하는 장이라고 설명합니다. 실제 강의에서 그는 계시록 15장 1절의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를 읽은 뒤, 순교자의 수가 찼으므로 이제 일곱 재앙을 준비하고 있으며 실제 대접이 쏟아지는 것은 16장이라고 분명하게 정리합니다. 그러므로 ‘핵심진리’의 시간표에서는 계시록 15장이 ‘후 3년 반의 순교자 추수 완료 → 마지막 심판 준비 → 계시록 16장의 일곱 대접’으로 넘어가는 결정적 문턱입니다.

 

강사는 이어 계시록 15장 2절의 ‘불이 섞인 유리 바다’를 매우 구체적인 천국의 모습으로 해석합니다.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긴 사람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 있는데, 강사는 이 유리 바다를 삼층천과 연결합니다. 새 예루살렘성이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다는 계시록 21장의 표현을 근거로 삼층천 전체를 유리 바다와 같은 곳으로 보고, 순교자들은 그 ‘바닷가’, 곧 삼층천 안이 아니라 그 가장자리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더 나아가 ‘불이 섞인’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불이 삼층천을 통하여 땅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상징한다고 풀이합니다. 이 부분에는 ‘핵심진리’의 천국 이해가 아주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천국을 실제적 장소로 보며, 그 안에도 위계적 위치가 있고, 성도들의 영적 성숙 정도에 따라 서로 다른 곳에 배치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 귀하게 받아들일 것은 천국의 ‘실재성’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을 막연한 정신상태나 상징에 불과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실제 인간의 형상을 가지고 살며, 공동체가 있고, 거처와 길과 풍경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천국은 실제 세계다’라는 강사의 감각과 분명 만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는 그 공간이 자연계의 공간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계의 공간은 상태에 따라 나타나는 공간입니다. 서로 사랑과 진리의 상태가 가까운 영들은 가까이 나타나고, 상태가 다른 영들은 멀리 나타납니다. ‘위’, ‘아래’, ‘중심’, ‘주변’ 역시 내적 상태의 차이가 공간처럼 표현된 것입니다.

 

따라서 ‘유리 바닷가’를 삼층천의 실제 경계선이나 천국의 해변처럼 이해하기보다, 그곳에 서 있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가 무엇인지를 보는 편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 더 가깝습니다. ‘유리’는 투명합니다. 빛을 가리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투명함과 수정 같은 맑음은 신적 진리가 방해받지 않고 드러나는 상태와 연결됩니다. ‘바다’는 일반적으로 보다 외적이고 자연적인 진리, 또는 기억 속에 모여 있는 진리들의 전체와 관련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리 바다’는 진리가 주님의 빛을 받아 투명하게 된 상태, 곧 자연적 차원에 있는 진리조차 더 이상 인간의 proprium으로 흐려지지 않고 주님의 빛을 통과시키는 상태를 보여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불’이 섞여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강사는 이 불을 심판의 불로 봅니다. 문자적 심판의 문맥에서는 충분히 이해되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불’의 가장 깊은 의미는 사랑입니다. 좋은 의미의 불은 주님의 신적 사랑과 천국적 사랑을 나타내고, 반대 의미에서는 자기애와 탐욕의 불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불이 섞인 유리 바다’를 주님 쪽에서 읽으면, 진리인 ‘유리’ 안에 사랑의 ‘불’이 함께 있는 매우 아름다운 모습이 됩니다. 차가운 진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결합한 진리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계시록 12장과 13장에서 다루었던 용과 짐승, 그리고 666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해석과 정확히 대조됩니다. 짐승의 핵심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였습니다. 진리가 선에서 떨어져 나와 자기 혼자 서는 것입니다.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지 않고 인간의 자기 지성과 proprium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짐승을 이긴 사람들이 마침내 서 있는 곳은 ‘불이 섞인 유리 바다’입니다. 다시 사랑과 진리가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이 장면을 이렇게 읽으면 계시록의 영적 서사가 아주 아름답게 이어집니다. ‘진리와 사랑의 분리’가 짐승이라면 ‘사랑과 결합한 투명한 진리’가 승리자의 상태입니다.

 

특히 본문은 이들이 단순히 환난에서 살아남은 자들이라고 하지 않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미래 어느 기술적 표식을 거부한 사람들에게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짐승이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과 그것을 인간 지성으로 확증한 상태를 나타낸다면, 짐승을 이긴다는 것은 그 분리를 이겼다는 뜻이 됩니다. 곧 진리를 다시 선과 결합시키고, 신앙을 다시 체어리티와 결합시키며, 자기 지성을 주님의 말씀 아래 놓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짐승을 이긴다’는 것은 매우 실제적인 거듭남입니다. 어떤 사람이 교리적으로 ‘신앙과 체어리티는 하나다’라는 문장을 정확하게 설명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짐승을 이긴 것은 아닙니다. 진리를 실제 체어리티의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내 자존심을 강화하는 대신 사람을 사랑하게 하고, 내 지식을 드러내는 대신 이웃의 선을 위해 쓰이게 하며, 내 판단을 확증하는 대신 내 proprium을 비추어 회개하게 한다면 그때 비로소 진리와 사랑의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사용하는 우리에게도 피할 수 없는 자기점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을 아는 것이 우리를 짐승에게서 자동으로 자유롭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속뜻을 많이 알수록 위험이 하나 더 생길 수도 있습니다. ‘나는 더 깊은 것을 안다’는 자기 지성의 만족입니다. 만일 아르카나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낮춰 보고, 전통적 기독교인을 ‘문자에만 머문 사람’으로 멸시하며, 진리를 자기 우월성을 확인하는 도구로 사용한다면 내용은 스베덴보리적이어도 구조는 다시 ‘진리가 사랑에서 분리된’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리 바다는 ‘진리가 얼마나 투명한가’뿐 아니라 그 안에 ‘불’, 곧 사랑이 함께 있는가를 묻습니다.

 

계시록 15장의 승리자들은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입니다. 강사는 이 찬양을 읽으며 순교자들이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설명합니다. 실제 본문에서 이들은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장면은 이번 강의 전체에서 매우 아름다운 지점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순교와 희생을 자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우리가 얼마나 잘 싸웠는가’를 노래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짐승의 표를 거절했고 얼마나 큰 고통을 견뎠는가’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이 크고 놀랍다’,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다’, ‘오직 주만 거룩하시다’고 노래합니다. 천국적 상태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기 승리를 덜 보고 주님의 역사를 더 봅니다. 처음에는 ‘내가 악과 싸우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눈을 여실수록 싸울 힘도 주님에게서 왔고, 진리를 알아볼 빛도 주님에게서 왔으며, 악을 싫어하게 된 것까지 주님의 은혜였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천국론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천사들은 자기 선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선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은 천국적 상태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순간순간 유입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바로 그 인정 안에서 가장 큰 자유와 행복을 느낍니다. 따라서 천국에서 가장 성숙한 사람의 고백은 ‘내가 완성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하셨다’가 됩니다.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가 함께 언급되는 것도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모세는 구약의 율법과 말씀을 대표하고, 어린양은 주님 자신과 그분의 신적 인성을 가리킵니다. 문자적으로는 출애굽의 구원 노래와 주님의 구원이 서로 연결되는 장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더 깊이, 구약과 신약의 말씀이 결국 한 분 주님과 하나의 구원 질서를 증언한다는 통일성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와 어린양이 두 구원 체계의 대표가 아니라 하나의 신적 말씀과 하나의 주님의 두 측면처럼 함께 노래됩니다.

 

이것은 말씀 전체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구약의 여호와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서로 다른 신적 인격의 역사처럼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 전체의 중심은 한 분 주님이십니다. 구약에서 여호와로 계시되신 바로 그분이 신적 인성을 입고 세상에 오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가 하나로 불리는 것은 말씀 전체의 내적 중심이 한 분 주님이라는 사실과도 깊이 어울립니다.

 

또한 모세와 어린양을 ‘진리와 선’의 질서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무엇이 진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어린양은 그 진리를 실제 구원의 사랑으로 완성하시는 주님을 나타냅니다. 진리만 있으면 명령이 될 수 있지만, 사랑과 결합하면 노래가 됩니다. 이것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사람이 처음에는 ‘하지 말라’, ‘하라’는 계명으로 진리를 배웁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 그 진리를 지키는 것이 점차 의무를 넘어 기쁨이 됩니다. 그때 율법은 노래가 됩니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계명을 억지로라도 지킬 수 있습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해야 하니까 지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주님께서 정직의 선을 사람 안에 형성하시면 그는 단지 ‘거짓말하면 죄니까’가 아니라 진실 자체를 사랑하게 됩니다. 진실하게 사는 것이 자유롭고 기쁩니다. 그때 ‘모세의 계명’이 ‘어린양의 노래’가 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선의 기쁨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들이 ‘거문고’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비슷한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말씀에서 악기와 노래는 애정과 진리가 조화를 이루어 주님을 찬양하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단순히 정확한 음을 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애정이 진리의 형식 안에서 표현되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진리와 사랑의 불협화음이 없습니다. 진리가 사랑을 섬기고 사랑은 진리를 통해 자신을 표현합니다. 바로 이 조화가 영적으로 음악이 됩니다.

 

따라서 계시록 15장의 유리 바다는 단순히 순교자들이 배정받은 ‘천국의 등급 위치’를 보여 주는 장면보다 훨씬 풍성하게 읽힐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 안에 있지만 그 진리는 ‘불’, 곧 사랑과 결합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합은 ‘노래’가 됩니다. 13장의 짐승이 보여 준 ‘사랑 없는 신앙’의 정반대 상태입니다.

 

여기서 ‘핵심진리’가 이들을 삼층천 바깥의 유리 바닷가에 있다고 설명하는 천국의 서열 문제를 조금 더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14만 4천을 가장 높은 삼층천의 시온산에, 순교자들은 그보다 아래인 유리 바닷가에, 또 다른 구원받은 사람들은 다른 천국적 위치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천국을 설명해 왔습니다. 이 체계는 성도의 연단과 상급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도 구원만 받으면 모두 같다’는 평면적 구원론을 경계하는 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의 모든 사람이 같은 상태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천적 천국, 영적 천국, 자연적 천국이 있고 그 안에 무수한 공동체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사랑과 지혜의 정도도 다르고 쓰임도 다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상태의 차이가 있다는 강사의 기본 감각 자체는 틀린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을 ‘1등 성도는 삼층천 중심, 2등 성도는 바닷가, 3등 성도는 그 아래’ 같은 영적 등급표로 이해하는 데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천국에서 상태의 높음은 특권의 높음이 아닙니다. 천적 천사가 영적 천사보다 ‘더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각 천사는 자기가 받은 사랑과 쓰임에 맞는 공동체에서 완전한 기쁨을 누립니다. 눈이 손보다 우월하다고 자랑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가장 큰 사람을 이루는 모든 기관과 지체가 서로 다르지만 서로를 위해 쓰임을 행합니다. 천국의 다양성은 경쟁적인 서열이 아니라 조화로운 질서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높다’는 것은 지배권을 더 많이 가진다는 뜻보다 더 깊이 사랑하고 더 넓게 섬길 수 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주님께 가장 가까운 사람일수록 오히려 자기 높음을 가장 적게 느낄 것입니다. 자기에게 있는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왔다는 것을 가장 깊이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더 높은 천국에 가야 한다’는 욕망이 자기 영적 성취욕과 결합하면 다시 proprium이 끼어들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핵심진리’가 추구하는 높은 성화의 열망은 살리면서 그 동기를 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14만 4천에 들어가야 한다’, ‘가장 높은 천국에 가야 한다’가 아니라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하고 내게 맡겨진 쓰임을 더 순수하게 감당하고 싶다’가 되어야 합니다. 천국의 높이는 장소 확보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질 문제입니다.

 

계시록 15장 4절에서 이들이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라고 찬양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심판의 결과는 단순한 악인의 파괴가 아닙니다. 주님의 의가 드러나고 경배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악과 거짓이 선과 진리를 억압하던 상태가 끝나면 주님을 자유롭게 인정하고 예배할 수 있는 질서가 열립니다. 이것이 심판의 목적입니다.

 

여기서 ‘만국’ 역시 자연계의 모든 국가 정부가 어느 날 동일한 정치적 종교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에 머물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나라와 민족은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여러 종류의 사람과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국이 주께 경배한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다양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하나의 주님 아래에서 조화를 이루는 천국과 새 교회의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것은 획일성과 다릅니다. 천국은 모두가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행동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무한하신 주님의 선과 진리는 한 사람이나 한 공동체가 모두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천국에는 무수한 공동체가 있고 각각 다른 선과 쓰임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 다양성의 중심이 모두 한 분 주님이기 때문에 하나를 이룹니다. ‘만국이 와서 경배한다’는 말씀 안에는 이런 다양성 속의 일치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새 교회’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새 교회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표현과 동일한 인간 교리 체계를 강제로 받아들이는 종교제국이 아닙니다. 중심은 한 분 주님이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체어리티와 신앙이 결합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중심 안에서는 다양한 상태와 쓰임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강사의 종말론에서는 이제 이 아름다운 찬양 뒤 곧바로 일곱 대접이 준비됩니다. 순교자들의 수가 다 찼고 그들이 유리 바닷가에 안전하게 서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이제 피값을 갚아 주실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구조에서 우리는 다시 ‘복수’와 ‘질서 회복’을 구별해야 합니다. 천국의 순교자들이 ‘이제 저들을 멸망시켜 주십시오’라는 인간적 복수심으로 찬양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악이 더 이상 선을 해치지 못하게 되고 주님의 의로운 질서가 회복되는 것을 기뻐한다고 보는 편이 천국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라는 15장 1절도 주님의 감정이 마지막으로 폭발한 뒤 진정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의 악과 거짓이 완전히 드러나고 그 상태에 대한 심판이 충만하게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사랑이십니다. 변화하는 것은 인간과 교회의 상태입니다.

 

이 사실을 붙들면 계시록의 무서운 장면들 사이에서도 주님의 얼굴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재앙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하나님이 더 무서워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얼마나 깊이 선과 진리를 거부했는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심판의 끝에도 주님은 여전히 구원하시는 어린양이십니다.

 

그리고 9강 8부에서 가장 귀하게 남길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강사의 천국 지리나 대접 시간표보다 이 찬양일 것입니다.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참된 거듭남은 결국 이 고백으로 갑니다. 처음에는 ‘나는 왜 이런 일을 겪습니까?’라고 묻고, ‘왜 주님께서는 이 시험을 허락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를 조금씩 배우면서 언젠가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주의 길은 의롭고 참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상태로 자랍니다.

 

그 고백은 체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악을 원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모든 악은 인간과 지옥에서 나오지만, 주님께서는 그 어떤 악도 당신의 선한 목적을 궁극적으로 무너뜨리지 못하게 하시며, 허용된 모든 것을 영원한 구원을 향해 굽히신다는 신뢰입니다. 바로 이것이 신적 섭리를 믿는 신앙의 깊은 평화입니다.

 

따라서 9강 8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5장의 불이 섞인 유리 바다와 모세의 노래·어린양의 노래는 순교자들이 삼층천 경계의 특정 상급 위치에 배치되어 그 아래 세상에 쏟아질 하나님의 진노를 바라보는 장면으로만 읽기보다, 짐승으로 표상된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을 이긴 사람들이 사랑의 불과 결합하여 투명해진 진리 안에 서고, 자기 승리나 공로가 아니라 모든 구원의 근원이신 한 분 주님을 찬양하는 천국적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을 때 더욱 깊은 의미가 열립니다.’

 

그리고 이 장면은 앞서 666을 다루었던 모든 논의를 아름답게 마무리해 줍니다. 짐승을 이긴 자의 최종 모습은 ‘나는 666의 정체를 정확히 알았다’가 아닙니다.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입니다. 진리에 관한 모든 지식이 끝내 이 고백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가지 않는다면 아직 유리 바다의 투명함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진리를 알수록 자기 것은 작아지고 주님은 커지며, 진리를 배울수록 사랑이 깊어지고, 자신의 승리보다 주님의 은혜를 더 보게 된다면, 바로 그곳에서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가 이미 조금씩 시작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9강 9부

‘증거 장막의 성전’과 일곱 금 대접 : 심판의 가장 깊은 곳에도 언약이 있습니다

9강 9부에서는 계시록 15장의 마지막 장면으로 들어갑니다. 앞에서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긴 사람들이 ‘불이 섞인 유리 바다’에 서서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았다면, 이제 요한의 시선은 다시 천국의 ‘성전’으로 옮겨집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네 생물 중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라는 장면입니다. 강사의 종말론에서는 이로써 계시록 16장에서 실제로 쏟아질 일곱 대접 재앙의 모든 준비가 끝납니다. 순교자의 수가 다 찼고, 순교자들은 유리 바닷가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으며, 이제 네 생물 가운데 하나가 일곱 금 대접을 일곱 천사에게 넘겨주면 천사들이 그것을 땅에 쏟아 마지막 심판을 집행하게 된다는 구조입니다. 강사는 계시록 8장 이후 나팔을 담당한 천사들과 계시록 16장의 대접을 담당할 천사들을 구별하면서, 네 생물과 천사들이 각각 맡은 역할도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으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대접’보다 ‘성전’입니다. 더욱 정확하게는 ‘증거 장막의 성전’입니다. 계시록 15장은 마지막 재앙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재앙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먼저 보여 줍니다. 아무 근거 없이 하늘 어딘가에서 심판이 갑자기 쏟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이 열리고 그 성전에서 천사들이 나옵니다. 이것은 심판조차 주님의 거룩한 질서, 신적 선과 진리의 질서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심판의 근원은 분노가 아니라 거룩함이며, 복수가 아니라 신적 질서입니다.

 

강사도 ‘증거 장막’이라는 표현을 구약 광야의 장막과 연결합니다. 장막은 이스라엘이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광야에서 사용한 성소였고, 그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다른 강의 부분에서도 강사는 계시록의 ‘장막 성전’을 아직 천국의 완성이 이루어지기 전, 대환난 가운데 성도들이 연단받고 있는 상태와 연결합니다. 장막이 광야의 성전이었다는 사실과 대환난을 ‘광야 연단’으로 보는 자신의 체계를 연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핵심진리’ 특유의 모형론이 잘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성막과 성전은 대단히 중요한 표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광야 장막=미완성 천국’, ‘솔로몬 성전=완성된 천국’이라는 시간적 모형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가장 깊게는 성막과 성전이 주님의 신적 인성을 표상하며, 거기서 파생하여 천국과 교회, 그리고 거듭난 인간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천국과 교회와 거듭난 인간은 모두 주님께서 거하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전이 열린다는 것은 단순히 천국의 어느 건물 문이 열리는 장면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가 더 깊이 드러나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특히 이곳이 ‘증거 장막’이라고 불린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증거’하는 장막입니까? 구약 장막의 가장 깊은 곳에는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는 십계명의 두 돌판이 있었습니다. 말씀에서 ‘증거’는 신적 진리, 특히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주님의 계명과 깊이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렸다’는 것은 심판의 기준이 인간적 감정이나 임의적인 결정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임을 보여 줍니다. 사람을 심판하는 것은 어느 교단 소속인지, 어느 종말론을 믿었는지, 어느 종교적 지위를 가졌는지가 아니라 그가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였고 그 진리에 따라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계시록의 마지막 심판을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심판을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화가 났는가’라는 식으로 보면 무서운 군주의 판결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증거 장막’에서 나오는 심판이라고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주님의 계명, 곧 사랑과 체어리티의 신적 질서가 빛처럼 나타나고, 그 빛 앞에서 각 사람의 실제 상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심판자는 물론 주님이시지만, 주님께서는 변덕스럽게 판결하시는 분이 아니라 신적 진리 자체이시므로 사람의 상태가 그 진리와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 드러납니다.

 

이 점에서 ‘언약궤’의 의미도 깊어집니다. 언약은 본질적으로 결합입니다. 주님과 인간의 결합입니다. 십계명이 언약궤 안에 놓여 있다는 것은 주님과의 결합이 계명과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속적으로 거절하고, 신앙이 있다고 하면서 체어리티의 삶을 무관한 것으로 만든다면 ‘언약’의 질서가 깨집니다. 그래서 계시록의 마지막 심판도 결국 ‘신앙과 삶이 결합되어 있었는가’라는 문제로 돌아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계시록 13장의 짐승과 666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짐승의 핵심적인 문제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데 있었습니다. 반면 계시록 15장의 증거 장막 안에는 ‘언약’이 있습니다. 분리된 신앙의 끝에서 말씀은 다시 결합을 보여 줍니다. 주님과 인간,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 계명과 삶이 서로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15장의 성전은 13장의 짐승에 대한 깊은 대답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일곱 천사’가 성전에서 나옵니다. 강사는 이 천사들을 실제 영계의 일꾼으로 이해합니다. 계시록 8장 이후 일곱 나팔을 불던 천사들과 계시록 16장에서 일곱 대접을 쏟을 천사들이 서로 다른 천사들이며, 네 생물 가운데 하나가 일곱 대접을 천사들에게 전달하고 천사들이 그것을 실제로 집행한다는 식으로 역할을 구별합니다. 이것은 영계에 실제 천사들이 있고 주님의 명령 아래 각각 쓰임을 담당한다는 강사의 세계관을 잘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사들이 실제 존재하고, 천국의 모든 것은 쓰임의 질서 안에 있으며, 천사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쓰임을 수행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천사들이 실제 영계에서 활동한다’는 강사의 감각 자체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록의 천사를 볼 때 스베덴보리는 그 천사가 표상하는 영적 기능과 신적 진리의 상태를 함께 봅니다. 특히 말씀에서 천사는 종종 개인 한 천사를 넘어 주님에게서 나오는 어떤 신적 진리나 천국 전체의 어떤 기능을 대표합니다.

 

따라서 ‘일곱 천사’의 ‘일곱’이 다시 중요합니다. 일곱은 신적 질서의 충만함, 전체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지고 나온다는 것은 자연계에 일곱 차례 재난을 가할 정확히 일곱 명의 천사라는 의미에만 머물지 않고, 교회의 마지막 상태를 완전히 드러내고 심판하는 신적 진리의 전체적인 작용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천사들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심판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이 천사들이 하나님의 복수와 파괴를 수행하는 존재라면 왜 그들의 옷은 ‘맑고 빛난’ 세마포입니까? 말씀에서 옷은 진리를 나타내며, 세마포의 맑음과 빛남은 순수한 진리를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 일곱 대접의 심판을 수행하는 것조차 순수한 신적 진리의 작용입니다. 악의 파괴 자체를 즐기는 폭력적 힘이 아닙니다.

 

또 ‘가슴에 금띠’를 띠고 있습니다. ‘금’은 말씀에서 천적 선, 사랑의 선과 깊이 연결됩니다. 그리고 가슴은 사랑과 애정을 나타내는 부위입니다. 따라서 이 천사들은 진리의 세마포를 입었을 뿐 아니라 사랑의 금으로 띠를 두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균형입니다. 심판은 진리만의 차가운 판결이 아니며 사랑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신적 진리가 악을 드러내고 분리하지만 그 모든 작용의 가장 깊은 근원에는 신적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심판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시각입니다. 사람은 흔히 사랑과 심판을 서로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마치 서로 다른 두 얼굴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신적 사랑과 신적 지혜는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사랑 때문에 진리가 있고, 진리는 사랑이 이루려는 선을 질서 있게 실현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심판은 사랑의 반대가 아니라 사랑이 악으로부터 선을 보호하는 질서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위험한 것을 막는 것처럼, 주님의 사랑도 악을 영원히 선과 섞어 두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비유조차 주님에게 인간적 분노를 돌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의 ‘막으심’은 복수심에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영원한 선을 위한 신적 질서에서 나옵니다. 일곱 천사의 맑은 세마포와 금띠는 바로 이 사실을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진리와 사랑이 함께 심판합니다.

 

이어 네 생물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천사들에게 줍니다. 강사는 네 생물 중 누구인지는 본문만으로 알 수 없다고 하면서도, 네 생물과 일곱 천사의 역할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대접 자체가 ‘금 대접’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금입니다. 만일 그 안의 ‘진노’를 인간적 분노와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면, 왜 그것을 담은 그릇이 천국적 사랑을 표상하는 금으로 되어 있는지를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이 오히려 주님의 진노에 대한 문자적 오해를 바로잡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그 대접은 ‘금’입니다. 모든 심판의 가장 깊은 기원은 신적 사랑입니다. 주님의 ‘진노’는 주님 안에 분노가 생겼다는 뜻이 아니라, 신적 사랑과 진리가 악에게 닿을 때 악의 상태에서 그것이 진노처럼 보이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대접이 금이라는 사실은 그 심판의 내적 본질이 여전히 사랑임을 보여 줍니다.

 

여기에서 ‘가득히 담았다’는 말도 중요합니다. 어떤 상태가 충만해졌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순교자의 수가 찼다’, ‘포도가 익었다’, ‘일곱 재앙’이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보았습니다. 계시록의 마지막에는 계속 ‘충만함’의 언어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성급하게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교회와 인간의 상태가 충분히 드러나 선과 악을 완전히 분리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심판은 ‘주님의 참으심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인간적 감정의 폭발이 아닙니다. 영적 상태가 더 이상 섞여 있을 수 없는 단계까지 도달한 것입니다. 선한 것은 선한 것으로, 악한 것은 악한 것으로 자기 질을 완전히 드러냅니다. 그때 분리가 이루어집니다.

 

강사는 순교자의 수가 차면 피값을 갚기 위한 일곱 대접 재앙이 시작된다고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이때 우리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피값’을 인간적 복수의 언어로 읽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천국의 순교자들이 자신을 죽인 사람들의 고통을 보고 만족한다는 것은 천국적 사랑과 맞지 않습니다. 그들의 기쁨은 악이 더 이상 선을 공격하지 못하고 주님의 질서가 회복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목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우리가 큰 악을 당했을 때 정의를 원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악이 멈추고 진실이 드러나며 다시는 다른 사람이 같은 피해를 입지 않기를 원하는 것은 선한 의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가 고통받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복수심과 악이 중단되기를 원하는 정의의 사랑은 다릅니다. 천국은 후자를 지향합니다.

 

따라서 ‘신원해 주소서’라는 기도도 ‘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해 주십시오’가 아니라 ‘악이 더 이상 힘을 갖지 못하게 하시고 진리와 선의 질서를 회복해 주십시오’라는 방향으로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과 인간의 복수를 구별하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강의에서는 일곱 대접과 관련하여 성도들의 기도도 언급합니다. 그는 기도의 큰 목적을 ‘죄악된 세상의 죄와 불행을 제거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 세상에 의와 행복이 충만하게 해 주십시오’라는 두 방향으로 정리합니다. 표현은 강사의 종말 체계 안에 있지만, 이 두 방향은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악의 제거와 선의 충만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서도 이 두 질서는 항상 함께 갑니다. 악을 피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는 순서가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선을 행하려고 애쓰는 것만으로 거듭남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먼저 악을 주님께 대한 죄로 알고 피해야 합니다. 악이 계속 지배하는 상태에서는 진정한 선이 자유롭게 흘러나오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악을 피하는 것도 목적 그 자체는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 자리에 선을 넣으시기 위해 악을 제거하십니다. 방을 비우는 목적은 영원히 빈 방으로 두려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으로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죄와 불행을 제거해 달라’와 ‘의와 행복으로 채워 달라’는 두 기도는 한 사람의 거듭남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주님, 제 교만을 제거해 주십시오’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겸손과 이웃을 존중하는 사랑을 형성해 달라고 해야 합니다. 탐욕을 제거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자리에 관대함과 쓰임을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와야 합니다. 거짓을 끊는 데서 끝나지 않고 진리를 사랑하는 기쁨이 자라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계시록 15장의 일곱 대접은 단지 세상을 초토화하는 종말 재앙으로만 보이지 않습니다. 한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는 오래 축적된 거짓과 악이 완전히 드러나고 제거되는 심판이며, 개인의 거듭남에서는 말씀의 신적 진리가 우리 안의 숨은 악과 거짓을 밝히 드러내어 그것을 분리하는 과정과도 상응적으로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개인적 적용과 계시록의 교회적 속뜻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밝힘’에서 본문의 직접적인 영적 의미는 무엇보다 교회의 상태와 마지막 심판을 다룹니다. 다만 교회가 인간들로 이루어지고 말씀의 모든 영적 질서가 한 인간의 거듭남에도 상응하기 때문에, 그 교회적 아르카나를 개인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구별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계시록의 속뜻을 심리적 자기계발로 축소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거대한 교회 역사 이야기로만 만들어 나 자신과 무관하게 해서도 안 됩니다.

 

이어 계시록 15장 8절은 아주 강렬한 장면으로 끝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강사의 체계에서는 이것을 살아남은 성도들의 연단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일곱 대접이 끝날 때까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의미와 연결합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에서 이들이 모든 재앙을 통과하여 세 번째 익은 열매로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연기’도 상응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연기는 불에서 나옵니다. 좋은 의미에서 불이 주님의 신적 사랑을 나타낸다면, 연기는 그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가 인간의 낮은 이해에 나타날 때의 외관과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성전에 연기가 가득했다는 것은 신적 현존이 너무 강하여 낮은 상태에서는 그것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보여 주는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이나 성전에 임할 때 구름이 가득하여 제사장들이 들어가거나 섬길 수 없었던 장면과도 연결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문밖에 세워두고 화를 풀고 계신다는 그림이 아닙니다. 신적 현존이 충만하여 인간의 유한한 것이 그 자체로는 가까이 갈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람은 주님께서 질서 있게 적응시켜 주시는 만큼만 신적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계시의 원리와도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무한한 신적 진리를 인간에게 한꺼번에 쏟아붓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수준에 맞추어 말씀의 문자로 입히시고, 그 안에 점층적인 내적 의미를 두셨습니다. 천국의 천사들조차 각 천국의 상태에 따라 주님의 진리를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신적 진리는 무한하고 피조물의 수용은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성전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단순히 출입금지의 형벌이 아니라, 어떤 영적 상태가 완결되기 전에는 다음 상태로 들어갈 수 없다는 질서를 보여 주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거듭남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아직 이전의 악과 거짓이 다루어지고 있는 영역에서 사람이 자기 뜻대로 다음 단계로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질서 있게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영적 조급함을 경계하게 합니다. 사람은 어떤 깊은 진리를 배우고 나면 ‘이제 나는 다 알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이해한 속도와 그 진리가 의지와 삶에 자리 잡는 속도는 다를 수 있습니다. 머리는 한 시간에 배울 수 있어도 생명은 수년을 통해 배우기도 합니다. ‘성전의 문’은 지식을 많이 쌓았다고 자동으로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되는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핵심진리’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연단’의 긍정적인 핵심과 다시 만나는 곳입니다. 강사는 진리를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연단을 통하여 그것이 실제 생명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종말의 시간표와 천국의 등급에 관한 해석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다르지만, ‘진리가 생명이 되어야 한다’는 이 중심에는 깊이 공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연단을 ‘더 많은 고통을 받아야 더 높은 사람이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고통의 양이 아니라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어떤 사람은 극심한 외적 고난을 겪어도 내적으로 완고해질 수 있고, 어떤 사람은 평범한 일상에서 매일 자기애를 내려놓고 이웃을 사랑하는 작은 선택을 통해 매우 깊이 거듭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마다 필요한 질서를 가장 정확히 아십니다.

 

그래서 계시록 15장의 ‘성전에 연기가 가득했다’는 장면을 개인에게 적용하면 이런 겸손도 배울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일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적 섭리가 너무 깊어 내 자연적 이해가 따라갈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억지로 모든 것을 설명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진리에 충실하면서 주님의 질서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말론 자체를 대하는 태도에도 중요합니다. 계시록에 기록되지 않은 것까지 빈틈없이 채워 완벽한 미래 시간표를 만들고 싶어 하는 욕구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록 10장에서는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을 기록하지 말라고 했고, 이제 15장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가득 채워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말씀 자체가 인간의 이해에는 경계가 있음을 반복해서 가르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계시록을 읽는다고 해서 우리가 모든 비밀을 자기 손안에 넣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계시는 말씀의 속뜻을 놀랍도록 열어 주지만, 무한하신 주님의 지혜 자체를 인간이 다 소유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르카나가 열릴수록 말씀 안에는 끝없는 깊이가 있음을 더 알게 됩니다. 참된 빛은 사람을 거만하게 하기보다 겸손하게 합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계시록의 여러 천사와 네 생물의 역할을 매우 구체적으로 구분하려는 태도도 존중하면서 한계를 함께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이 명시하는 것은 명시하는 만큼 정확하게 받고, 본문이 말하지 않는 것은 지나치게 확정하지 않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실제로 강사도 네 생물 중 어느 생물이 일곱 금 대접을 전달했는지는 ‘모른다’고 말합니다. 이런 ‘모른다’는 한마디가 오히려 성경 해석에서는 귀할 때가 있습니다.

 

9강 9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5장의 증거 장막의 성전과 일곱 금 대접은 미래 후 3년 반의 마지막에 순교자의 피값을 갚기 위하여 천사들이 자연계에 일곱 파괴적 재앙을 집행하도록 준비되는 장면으로만 읽기보다, 주님의 신적 사랑과 진리의 거룩한 질서가 교회 안의 악과 거짓을 완전히 드러내고 분리하며, 그 모든 심판의 중심에 주님과 인간을 결합시키는 ‘언약’이 있음을 보여 주는 마지막 심판의 아르카나로 읽을 때 더욱 깊은 의미가 열립니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저는 ‘금 대접’이라는 표현을 오래 남겨 두고 싶습니다. 대접 안에는 ‘진노’가 있다고 하는데 대접은 금입니다. 그것은 심판의 가장 바깥 모습만 보면 진노처럼 보일지라도, 그 가장 깊은 곳에는 여전히 주님의 신적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주님께서 악을 드러내시는 것도 사랑 때문이고, 악을 선과 분리하시는 것도 사랑 때문이며, 우리 안의 proprium을 말씀의 빛으로 심판하시는 것도 우리를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속박에서 구원하여 당신과 결합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의 심판을 끝까지 따라가도 마지막에 만나야 하는 주님의 얼굴은 처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어린양이시며, 여전히 구원하시는 한 분 주님이십니다.



9강 10부

13,14,15장 전체 : 짐승의 통치에서 ‘익은 열매’까지, 종말론의 중심은 결국 무엇인가

9강의 마지막 10부에서는 새로운 본문을 더 진행하기보다, 이번 강의가 실제로 다룬 계시록 13장·14장·15장의 긴 흐름을 한데 모아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강사 자신도 강의 말미에 13장을 예상보다 길게 다루는 바람에 14장과 15장을 상당히 빠르게 지나왔다고 말하면서, 이 세 장을 가리켜 계시록에서 ‘하이라이트 같은 곳’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도 분명하게 밝힙니다. 강사가 이해하는 대환난의 가장 중요한 목적, 곧 ‘익은 열매를 추수하는 목적’이 바로 이 부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9강을 마무리할 때에는 적그리스도, 두 짐승, 666, 순교자, 유리 바다, 일곱 대접이라는 각각의 항목을 따로 남겨 두기보다, 이 모든 것이 강사의 ‘익은 열매’라는 하나의 큰 주제 안에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강사의 구조를 먼저 그대로 따라가 보면 매우 일관되어 있습니다. 계시록 13장에서 후 3년 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적그리스도가 정치와 종교를 함께 장악한 세계적 통치 체제를 이룹니다.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사람들을 미혹하고, 짐승의 우상을 세우며, 이마와 오른손에 표를 받게 하고, 그 표가 없으면 매매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극심한 압박을 통하여 성도들의 신앙이 시험되고, 어떤 이들은 순교하여 ‘두 번째 익은 열매’가 되며, 어떤 이들은 끝까지 표를 받지 않고 살아남아 뒤이어 일곱 대접을 통과하면서 ‘세 번째 익은 열매’로 완성됩니다. 교회 시대에 이미 정결하게 되어 휴거된 14만 4천은 ‘처음 익은 열매’이고, 후 3년 반의 순교자는 두 번째, 살아서 끝까지 환난을 통과하는 성도는 세 번째 열매라는 것이 강사의 큰 도식입니다. 실제 강의 초반부터 강사는 대환난의 중심 목적을 바로 이 세 종류의 ‘익은 열매 추수’에 두고 있습니다.

 

이 구조가 주는 영적 긴장은 분명합니다. ‘믿는다고 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익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신앙을 어떤 법적 신분이나 교리적 동의만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정욕과 자기애가 다루어지고, 마음과 행실이 정결해지고, 세상 소유에 대한 집착이 벗겨지고, 시험과 연단 가운데 끝까지 주님을 택하는 상태를 중요하게 봅니다. ‘핵심진리’ 전체에서 반복되는 이 문제의식은 9강에서도 아주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강의를 읽을 때 가장 먼저 살려야 할 것도 바로 이 ‘생명으로 익어야 한다’는 요청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진리의 목적은 결국 선입니다. 신앙의 목적은 체어리티이며, 말씀을 아는 목적은 그 진리를 삶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의 목적이 열매에 있듯, 사람이 진리를 배우는 목적도 결국 ‘선의 열매’를 맺는 데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강사가 ‘익은 열매’를 종말론의 중심에 놓는 감각에는 상당히 귀한 것이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누가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열매인가’라는 계층적·시간적 구분보다 ‘진리가 어떻게 실제 선으로 익어 가는가’라는 거듭남의 질에 더 깊이 들어갑니다.

 

바로 여기서 두 체계의 가장 큰 차이가 드러납니다. 강사의 계시록은 매우 시간적입니다. ‘전 3년 반’, ‘후 3년 반’, ‘적그리스도 등장’, ‘순교자의 수 충족’, ‘일곱 대접’, ‘아마겟돈’, ‘천년왕국’이 차례로 진행됩니다. 강사 자신도 계시록이 1장부터 22장까지 기본적으로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체계적으로 진행된다고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계시록의 순서는 물론 매우 중요하지만, 그 핵심은 자연계의 연대기가 아니라 ‘교회의 영적 상태가 어떻게 진행되는가’라는 상태의 연속입니다. 진리가 처음에는 살아 있다가 점차 훼손되고,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인간의 자기 지성이 그 분리를 확증하고, 악과 거짓이 교회의 외관 속에 숨어 있다가 마침내 완전히 드러나고, 마지막 심판을 통해 분리된 뒤 새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계시록 13장의 ‘짐승 통치 시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미래의 한 세계독재자에게만 시선을 두기보다 ‘교회 안에서 무엇이 주님의 자리를 대신하여 지배하게 되었는가’를 보게 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에게 용과 짐승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과, 그 분리된 신앙을 인간의 자연적 추론으로 확증하는 교리적 상태와 깊이 관련됩니다. 여기서 ‘짐승’은 정치적인 괴물 이전에 영적으로 짐승화된 인간 지성을 보여 줍니다. 지성이 사랑과 선을 섬기지 않고 자기 자신을 최고 판단자로 세우는 상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적그리스도를 어느 미래 인물 한 사람에게만 집중시키면 계시록의 경고가 오히려 우리에게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이 적그리스도인가?’를 묻는 동안, 내 안에서 주님보다 자기 판단을 더 신뢰하고 있지는 않은지, 진리를 사랑의 삶과 분리하고 있지는 않은지, 교리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며 자기 우월성을 세우고 있지는 않은지를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의 짐승은 먼 미래의 정치 무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를 자기 사랑의 도구로 바꾸는 모든 곳에서 영적 원리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AC 창세기 4장에서 읽고 있는 ‘가인’과 놀라울 만큼 깊이 이어집니다. 가인은 신앙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표상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입니다. 신앙은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이 자기 스스로 독립하려 할 때 결국 아벨을 죽입니다. 계시록 13장의 짐승과 666 역시 스베덴보리에게는 이 오래된 문제가 교회의 마지막에서 거대한 체계로 완성된 모습과 연결됩니다. 창세기 초두에서 시작된 ‘신앙과 사랑의 분리’가 계시록에서는 교회 전체를 흔드는 짐승적 교리로 나타나는 셈입니다.

 

그래서 9강에서 길게 다룬 666도 다시 그 중심에서 보아야 합니다. 강사에게 666은 후 3년 반에 적그리스도 체제가 사람들을 통제하는 실제적 표와 연결됩니다. 그것을 받지 않으면 경제활동을 할 수 없고, 결국 생존 자체가 위협받습니다. 그래서 강사는 가족과 재산과 생명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도록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고 매우 강하게 권면합니다. 이 신앙적 긴장은 충분히 귀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날 어떤 표를 받을 것인가?’보다 먼저 ‘오늘 내 이마와 손에는 무엇이 새겨지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이마는 지배적 사랑을, 손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행위와 능력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짐승의 표가 이마와 손에 있다는 것은 거짓과 악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실제 삶으로 행하는 상태입니다. 반대로 계시록 14장의 14만 4천의 이마에는 어린양과 아버지의 이름이 있습니다. 짐승의 표와 주님의 이름이 정확히 대조됩니다. 결국 계시록의 싸움은 외부 표식 두 개의 싸움 이전에 ‘어느 사랑이 나의 의지와 삶을 지배하는가’의 싸움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강사의 ‘지금부터 준비하라’는 권면은 오히려 훨씬 더 현재적이 됩니다. 미래의 엄청난 대환난에서 갑자기 주님을 선택할 힘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작은 선택들이 지배적 사랑을 형성합니다. 작은 이익을 위해 진리를 굽힐 것인가,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할 것인가. 자존심을 지킬 것인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것인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말씀을 사용할 것인가, 상대의 선을 위해 진리를 사용할 것인가. 이런 일상의 선택들이 영적으로는 이미 ‘이마’와 ‘손’을 형성해 갑니다.

 

계시록 14장으로 넘어오면 이 대조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13장에서 짐승이 모든 것을 장악한 것처럼 보이지만 14장은 ‘보라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로 시작합니다. 악이 마지막 말을 하지 않습니다. 666 뒤에 어린양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양 곁에는 이마에 주님의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강사의 체계에서는 ‘처음 익은 열매’로 이미 특별한 삼층천에 들어간 성도들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질이 생명에 형성된 새 교회의 사람들을 표상합니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숫자가 아닐 것입니다. 계시록은 그들을 가리켜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라고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익은 열매’의 가장 본질적인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학을 많이 아는 사람보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자기 뜻과 주님의 뜻이 충돌할 때 주님의 뜻을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명예보다 진리를, 자기 유익보다 이웃의 선을, 자기 공로보다 주님의 은혜를 더 귀하게 여기게 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새 노래’가 있습니다. 새 노래는 지식의 비밀 암호가 아닙니다. 삶으로 배운 진리의 기쁨입니다. 주님이 선하시다는 것을 교리로만 아는 것과, 수많은 시험 속에서 실제로 주님의 섭리를 경험하며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다’고 고백하는 것은 다릅니다. 후자는 생명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이 점에서 계시록 15장의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는 9강 전체를 마무리하는 매우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강사의 체계에서 순교자들은 후 3년 반의 엄청난 고난을 이기고 유리 바닷가에 도착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천국에 도착해서 부르는 노래의 중심은 자기 희생이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잘 싸웠다’가 아니라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입니다.

 

이것은 참된 거듭남의 결과를 정확히 보여 줍니다. 시작할 때에는 사람이 ‘내가 싸워야 한다’, ‘내가 악을 이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승리의 모든 능력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보게 됩니다. 선을 행한 것도, 진리를 이해한 것도, 악을 죄로 보고 싫어하게 된 것도 궁극적으로 모두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참된 승리자의 노래에는 자기 공로가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핵심진리’가 말하는 높은 성화의 열망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사이에 중요한 만남과 동시에 중요한 차이가 생깁니다. ‘핵심진리’는 ‘이기는 자’, ‘처음 익은 열매’, ‘두 번째 익은 열매’, ‘세 번째 익은 열매’를 나누며 사람에게 더욱 높은 성숙을 사모하게 합니다. 이 열망 자체는 귀합니다. 영적 삶을 대충 살지 말고 끝까지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는 긴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나는 어느 등급인가’, ‘나는 14만 4천에 들어가는가’, ‘나는 삼층천 중심부에 들어가는가’라는 자기 위치의 관심으로 바뀌면 proprium이 영적 성취욕의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천국에는 분명 상태의 높낮이가 있습니다. 세 천국이 있고 무수한 공동체가 있으며, 각 천사마다 사랑과 지혜의 질이 다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경쟁적 계급이 아닙니다. 천적 천사가 영적 천사를 내려다보며 ‘나는 더 높은 등급이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 깊이 아는 만큼 오히려 더 겸손합니다. 천국에서 높은 것은 더 많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사랑하고 더 넓게 쓰임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높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는 강사의 권면을 ‘더 높은 자리를 얻어야 한다’에서 ‘더 깊이 주님의 선을 받아 이웃의 쓰임이 되어야 한다’로 옮기면 훨씬 천국적이 됩니다. 첫째냐 둘째냐 셋째냐보다 ‘내게 맡겨진 진리가 실제 사랑과 쓰임으로 익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15장의 ‘불이 섞인 유리 바다’도 다시 매우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강사는 이를 삼층천과 연결하고, ‘불’은 아래 세상으로 내려가는 심판의 불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는 유리가 진리의 투명함을, 불이 사랑을 나타내므로 ‘불이 섞인 유리 바다’는 사랑과 결합한 진리라는 아름다운 상태를 보여 줄 수 있습니다. 바로 짐승이 나타내는 ‘사랑과 분리된 신앙’의 정반대입니다.

 

9강은 결국 13장에서 ‘분리된 것’을 보여 주고, 15장에서 ‘다시 결합된 것’을 보여 준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13장의 짐승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갈라지고, 인간의 지성이 자기 힘으로 진리를 확증합니다. 그러나 15장의 승리자들에게는 ‘불’과 ‘유리’, 곧 사랑과 진리가 함께 있습니다. 그 결과가 찬양입니다. 진리가 사랑과 분리되면 논쟁과 지배가 되고, 사랑과 결합하면 노래가 됩니다.

 

또 15장의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린 뒤 맑고 빛난 세마포를 입고 금띠를 띤 일곱 천사가 나오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 중요합니다. 심판조차 진리와 사랑에서 나옵니다. 세마포는 순수한 진리를, 금은 사랑의 선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담은 대접조차 ‘금 대접’입니다. 계시록을 표면적으로만 보면 분노와 파괴의 장면인데, 그 그릇 자체는 사랑을 나타내는 금입니다. 이것은 심판의 가장 깊은 근원이 복수가 아니라 신적 사랑과 질서임을 생각하게 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마지막 심판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계시다가 마침내 화를 폭발시키시는 사건이 아닙니다. 교회의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충분히 ‘익어’ 더 이상 함께 있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신적 진리가 모든 상태를 드러내어 분리하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에게는 해방이고, 악한 상태에는 심판입니다. 동일한 주님의 빛이 하나에게는 기쁨이고 다른 하나에게는 견딜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강사의 9강에서도 ‘익는다’는 표현이 계속 반복됩니다. 처음 익은 열매, 두 번째 익은 열매, 세 번째 익은 열매뿐 아니라 악의 포도송이도 익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통찰입니다. 선만 성숙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도 반복해서 선택하고 정당화하면 성숙합니다.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천국적 인간이나 지옥적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수많은 선택을 통하여 자기 지배적 사랑을 형성해 갑니다.

 

이것이 마지막 심판을 오늘의 문제로 가져옵니다. 내 안에서 무엇이 익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감사가 익고 있는가, 원망이 익고 있는가. 체어리티가 익고 있는가, 자기 의가 익고 있는가. 진리를 알수록 겸손이 자라고 있는가, 아니면 ‘나는 안다’는 자기 지혜가 강해지고 있는가. 이 질문은 미래의 적그리스도 이름을 알아내는 것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우리의 영원과 관계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렌즈’라는 작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이 점이 더욱 중요합니다. 다른 설교와 교리를 스베덴보리의 저작과 비교하면서 우리는 상당히 정교한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차이를 본다는 사실 자체가 영적 선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더 깊은 아르카나를 안다’는 마음이 자라면 진리는 다시 자기애와 결합합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통해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진리의 씨앗도 더 잘 발견하고, 잘못된 부분을 보면서도 사람 자체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자기 안의 악을 더 먼저 살피게 된다면 그 진리는 체어리티와 결합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의 중요한 자기검증 기준이 될 수 있겠습니다. 이 렌즈를 오래 사용할수록 독자가 더 겸손해지는가, 주님이 더 크게 보이는가,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는가, 악은 더 분명히 악으로 보되 사람에 대한 정죄는 줄어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해석이 정확해도 어딘가에서 ‘유리’는 있으나 ‘불’이 빠진 상태일 수 있습니다.

 

강사의 9강 역시 같은 기준으로 볼 때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종말 시간표와 적그리스도 해석에서는 스베덴보리와 매우 크게 갈라지지만, 강의 전체를 움직이는 열망 자체는 ‘성도들이 세상에 취하지 말고, 정결하게 되어, 주님을 끝까지 따르며, 익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강사는 13·14·15장을 마치면서 바로 이 세 장을 ‘대환란을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목적, 곧 익은 열매를 추수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을 이루는 때’라고 다시 정리합니다. 이 중심을 놓치지 않는 것이 공정한 해설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중심을 부정하기보다 한 층 안으로 옮깁니다. 미래 대환난에서만 익는 것이 아니라 지금 거듭남 안에서 익습니다. 적그리스도를 이기는 것은 미래 독재자의 표를 거부하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자기애와 거짓된 신앙의 지배를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는 것입니다. 순교는 미래에 목숨을 잃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proprium의 욕망을 진리 앞에서 내려놓는 데서 시작됩니다. 짐승의 표를 피하는 것은 어느 외부 기술을 피하는 것만이 아니라 악과 거짓이 내 사랑과 행동에 새겨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일곱 대접의 심판은 먼 미래의 파괴만이 아니라 말씀의 빛이 내 안의 감추어진 악을 드러내어 분리하는 작은 심판들에서도 경험됩니다.

 

그리고 이런 심판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계시록은 점점 덜 무서운 책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심판이 자기를 없애려는 주님의 분노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 자기를 파괴하는 악을 제거하시려는 주님의 자비임을 조금씩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없애고 싶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속박하는 것을 없애고 싶어 하십니다. 지배욕은 없어져야 하지만 사람은 살아야 합니다. 거짓은 벗겨져야 하지만 사람은 진리 안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proprium의 악은 죽어야 하지만 주님께서 주신 참된 개성과 인간성은 오히려 더 완전하게 살아나야 합니다.

 

이것이 강사의 ‘연단’ 언어를 스베덴보리적으로 정화하여 받을 수 있는 지점입니다. 강사는 환난을 통해 자아가 깨지고 정결하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다만 모든 고통을 하나님께서 직접 보내신 연단이라고 보기보다, 주님께서는 악을 결코 의도하지 않으시며 허용된 모든 상황을 거듭남의 선을 위해 굽히시는 분으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고통 자체가 성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 가운데 사람이 주님의 힘으로 악을 거절하고 선을 선택할 때 거듭남이 이루어집니다.

 

9강에서 강사는 살아남은 성도들이 일곱 대접 동안에는 아직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며, 그 마지막 연단을 마친 뒤 세 번째 익은 열매가 되어 ‘구원이 완성되고 천국에 갈 수 있는 성도들’이 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특별히 다듬어야 할 표현은 ‘천국 갈 자격’입니다. 천국은 시험 점수를 다 채운 사람에게 주어지는 자격증의 나라가 아닙니다. 사람의 지배적 사랑이 천국의 사랑과 상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의 사랑을 생명으로 가진 사람에게 천국은 집처럼 느껴지고, 지옥적 사랑을 생명으로 삼은 사람에게는 오히려 천국이 견딜 수 없는 곳이 됩니다. 문제는 자격보다 상태입니다.

 

또 ‘완성’도 절대적 완전무결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사들조차 영원히 지혜와 사랑에서 자라갑니다. 주님만이 무한히 완전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천국에 합당해진다는 것은 더 이상 어떤 결점도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지배적 사랑이 주님을 향하고 악을 죄로 인정하여 거절하는 영적 방향이 확립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차이는 목회적으로도 중요합니다. ‘충분히 정결하지 못하면 아직 천국 갈 자격이 없다’는 언어는 진지한 신앙인에게 끊임없는 자기검열과 두려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반면 ‘주님께서는 당신 안에서 지배적 사랑의 방향을 새롭게 하시며, 아직 많은 연약함이 있어도 악을 악으로 인정하고 주님께로 돌아서는 사람을 계속 거듭나게 하신다’고 이해하면 거룩함에 대한 긴장을 잃지 않으면서도 구원의 중심이 인간의 자기완성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에 있음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강의가 끝나는 지점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강사는 13장을 길게 설명하여 14장과 15장을 급히 진행했음을 인정한 뒤, 이 세 장이 계시록에서 매우 중요한 ‘하이라이트’라고 다시 말하고 찬송과 기도로 강의를 마칩니다. 따라서 9강은 계시록 16장의 일곱 대접을 실제로 펼치기 전에 멈춥니다. 15장에서는 대접이 ‘준비’되었고, 16장에서 비로소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9강을 10부로 마치는 지점으로도 자연스럽습니다. 다음 강의는 이제 준비된 심판이 실제로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다루게 될 것입니다.

 

9강 전체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3·14·15장은 미래 후 3년 반에 적그리스도의 세계정부가 등장하고 666의 표를 강요하며, 그 박해 속에서 세 종류의 익은 열매가 차례로 추수되고 마지막 일곱 대접 심판이 준비되는 종말 시간표로만 읽기보다,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과 자기 지성이 지배력을 얻고 그것이 완전히 드러난 뒤, 주님의 신적 진리가 선과 악을 분리하고, 사랑과 진리가 다시 결합된 사람들로 새 교회를 준비하시는 영적 심판과 거듭남의 질서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을 때 그 아르카나가 더욱 깊게 열립니다.’

 

그리고 9강 전체를 지나면서 저는 ‘666’보다 ‘익은 열매’라는 말을 더 오래 남겨 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강사의 종말론이 가장 궁극적으로 묻는 것도 사실 ‘적그리스도의 정체를 알아맞혔는가?’가 아니라 ‘당신은 익었는가?’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도 바로 그 질문을 받아들이되 조금 바꾸어 묻습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진리는 지금 어떤 사랑과 결합하고 있습니까? 그 진리는 당신을 더 겸손하게 하고, 더 체어리티 있게 하며, 더 주님을 의지하게 하고 있습니까?’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면 열매가 됩니다. 진리가 proprium과 결합하면 자기 의가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하면 살아 있는 신앙이 되지만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가인’이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지식이 쓰임과 결합하면 천국의 지혜가 되지만 자기 우월감과 결합하면 짐승의 지성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문제는 ‘얼마나 많이 아는가’보다 ‘그 진리가 무엇과 결합되어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참으로 익을수록 사람의 마지막 노래는 자신의 성취가 아니라 계시록 15장의 노래를 닮아 갈 것입니다. ‘내가 이겼습니다’가 아니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며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십니다.’ 바로 그 고백이 9강 전체에서 말하는 ‘이기는 자’와 ‘익은 열매’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가장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자리라고 하겠습니다. 짐승에서 시작했지만 마지막에 남는 것은 짐승이 아닙니다. 666을 지나왔지만 마지막에 남는 숫자도 아닙니다.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그 고백이 남습니다. 그리고 진리가 마침내 이 고백과 체어리티의 삶이 될 때, 말씀은 단지 이해된 것이 아니라 비로소 ‘익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SY.63,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10강 (7/31),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10강 1부‘좁은 길’에서 계시록 13, 14장까지 : 종말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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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61,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8강 (7/30),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8강 1부‘일곱 인’과 네 말, 그리고 종말을 읽는 두 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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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8강 1부

‘일곱 인’과 네 말, 그리고 종말을 읽는 두 개의 렌즈

이번 8강은 계시록 6장으로 들어가면서 강사의 종말론 체계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대목입니다. 강사는 앞서 계시록 4장을 천상의 ‘총사령부’, 5장을 어린양이신 ‘총사령관’의 등장으로 정리한 뒤, 6장을 ‘무엇으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인가를 보여 주는 심판의 재료’로 규정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일곱 인 자체를 7년 대환난의 시작으로 보지 않고, 대환난 직전의 ‘준비 과정’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첫째부터 넷째 인의 네 말은 앞으로 사용될 심판의 수단을 미리 보여 주는 견본이며, 실제 환난은 계시록 8장의 일곱째 인과 일곱 나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것이 강사의 큰 시간표입니다.

 

이러한 설명에는 이 강의 전체를 관통하는 장점이 하나 있습니다. 계시록의 장면들을 무질서한 환상들의 연속으로 읽지 않고 하나의 질서와 구조 안에서 이해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계시록 4장, 5장, 6장, 7장, 8장을 서로 연결하고, 다시 스가랴 6장의 네 병거와 계시록 6장의 네 말을 연결하며, 계시록 7장의 ‘네 바람’까지 하나의 구조 안에 넣습니다. 그래서 듣는 사람은 매우 복잡한 계시록의 환상들을 비교적 선명한 그림으로 기억할 수 있습니다. 강사가 계시록 6장을 ‘대환난의 모델하우스’라고 비유하면서 네 말을 앞으로 나타날 심판의 견본이라고 설명하는 것도 이러한 교육적 특징을 잘 보여 줍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부터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적용하면 두 해석 사이에 상당히 큰 차이가 나타납니다. 강사의 해석은 기본적으로 ‘시간적·역사적·미래적’입니다. 즉 계시록의 말, 전쟁, 기근, 천재지변, 나팔, 대접 등을 장차 자연계에서 실제로 일어날 세계적 사건들의 예고로 읽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계시록은 무엇보다 교회의 영적 상태와 그 상태에 대한 마지막 심판, 그리고 그 후 주님께서 세우시는 새 교회를 다루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같은 ‘심판’을 말하더라도 초점이 자연계의 파괴 자체에 있지 않고, 교회 안에 감추어져 있던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의 상태가 드러나고 분리되는 데 있습니다. 이 차이를 먼저 붙들어야 이번 강의를 공정하게 들으면서도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설과 혼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첫째 인에서 등장하는 ‘흰말’은 그 차이를 아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강사는 계시록 19장의 백마와 연결하여 흰말을 ‘공의의 심판’을 나타내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그리고 흰말 탄 자를 사탄으로 해석하는 일부 종말론을 비판하면서, 계시록 19장에서 백마를 타신 분이 주님이므로 계시록 6장의 백마 역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연결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강의 자체의 체계 안에서는 상당히 일관된 해석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에게 ‘말’은 매우 중요한 상응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말’은 말씀에 대한 이해, 곧 진리에 관한 지성을 표상하며, ‘흰색’은 진리의 빛과 순수성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계시록 6장의 흰말을 자연계에 임할 ‘공의의 심판 바람’으로 읽기보다, 말씀의 진리에 관한 교회의 최초 상태와 연결하여 읽습니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스베덴보리가 아예 계시록 19장의 ‘백마’를 제목으로 삼은 작은 저작 ‘백마’(The White Horse)를 남겼다는 사실입니다. 그에게 백마는 계시록을 이해하는 데 주변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말씀의 속뜻에 대한 이해’를 집약적으로 보여 주는 표상입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계시록 6장과 19장의 백마를 서로 연결한 것 자체는 흥미롭게도 스베덴보리와 접점이 있습니다. 다만 그 연결을 통해 도달하는 결론이 다릅니다. 강사는 ‘공의로운 미래 심판’으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신적 진리에 대한 이해’로 향합니다.

 

둘째 인의 붉은 말에서도 같은 차이가 반복됩니다. 강사는 붉은색에서 피를 연상하고,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한다’는 말씀을 실제 전쟁으로 읽습니다. 더 나아가 이를 전 3년 반의 세계적 전쟁과 후 3년 반의 아마겟돈 전쟁에 연결합니다. 따라서 붉은 말은 장차 일어날 대규모 전쟁의 심판 수단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화평이 없어지고 서로 죽이는 것’이 먼저 영적 차원에서 읽힙니다. 여기서 죽이는 것은 단순히 육체의 생명을 빼앗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 안의 신앙과 체어리티를 파괴하고, 진리를 거짓으로 소멸시키는 것도 말씀의 속뜻에서는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흰말에서 나타났던 말씀에 대한 참된 이해가 훼손되기 시작하면, 다음 단계에서는 진리와 선 사이의 평화가 깨어집니다. 이것이 붉은 말이 나타내는 교회의 상태입니다. 자연계의 전쟁보다 더 깊은 곳에서 벌어지는 ‘영적 전쟁’인 셈입니다.

 

셋째 인의 검은 말에 대해서 강사는 ‘검정색 → 기근 → 흉년’이라는 연결을 사용합니다.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라는 극심한 물가 상승을 실제 식량난과 연결하고, 이것을 대환난기의 자연환경과 경제적 재앙으로 읽습니다. 이 역시 문자적 의미를 따라가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해석입니다. 계시록의 이미지 자체가 실제 굶주림과 경제적 궁핍을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에서 ‘기근’은 더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스베덴보리가 구약의 수많은 기근 이야기를 해설하면서 반복해서 보여 주듯, 영적 의미에서 기근은 단순히 빵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선과 진리에 대한 지식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상태의 결핍’을 뜻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계시록의 네 말을 하나의 영적 연속선 위에 놓으면 매우 의미 있는 그림이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흰말’, 곧 말씀의 진리를 이해하는 상태가 있습니다. 그 상태가 훼손되면서 ‘붉은 말’, 곧 선과 진리의 평화가 무너집니다. 그 결과 ‘검은 말’, 곧 진리와 선이 희귀해지고 영적 기근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에는 결국 ‘죽음’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단순히 네 종류의 재앙을 병렬적으로 나열하는 것보다 훨씬 내적인 연속성을 갖습니다.

 

이렇게 보면 강사가 스가랴 6장의 네 병거와 계시록 6장의 네 말을 연결한 시도 역시 주목할 만합니다. 강사는 스가랴의 말들을 ‘하늘의 네 바람’이라고 한 말씀을 근거로 계시록 7장의 네 바람까지 연결하고, 이것을 장차 세상에 풀려날 네 종류의 환난으로 설명합니다. 즉 백마는 공의, 홍마는 전쟁, 흑마는 흉년, 청황마는 사망의 심판을 각각 나타낸다고 정리합니다. 이처럼 성경의 서로 떨어진 본문을 ‘말’과 ‘바람’이라는 공통 표상을 통해 연결하려는 태도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독법과 뜻밖의 접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의 한 부분을 다른 부분으로 밝히고 동일한 표상과 상응이 말씀 전체에서 어떻게 반복되는지를 매우 중요하게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결정적인 갈림길이 있습니다. 강사는 동일한 상징이 문맥에 따라 전혀 다른 실제 대상을 가리킬 수 있다고 보면서, 그것을 주로 미래의 역사적 사건과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 전체에 존재하는 ‘상응의 질서’를 훨씬 더 일관되게 적용합니다. 물론 하나의 표상이 문맥에 따라 긍정적 의미와 부정적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세부 의미가 달라질 수 있지만, 그것은 임의적인 변화가 아니라 그 표상이 가진 영적 본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말’이 어떤 곳에서는 전쟁, 어떤 곳에서는 자연재앙, 어떤 곳에서는 천체적 현상이라는 식으로 자유롭게 대상화되기보다, 기본적으로 ‘지성’, 특히 말씀과 진리에 대한 이해라는 중심적 상응을 유지하면서 문맥에 따라 그 상태가 달라집니다.

 

이번 1부에서 특히 신중하게 볼 부분은 ‘7년 대환난’이라는 전체 시간표입니다. 강사는 일곱 인 → 일곱 나팔 → 일곱 대접을 시간적으로 배열하고, 이를 ‘대환난 직전 → 7년 대환난 → 후 3년 반의 심판 완결’이라는 구조 안에 넣습니다. 나아가 전 3년 반과 후 3년 반, 세계적 전쟁, 아마겟돈 등을 구체적인 미래 사건으로 연결합니다. 이것은 현대 복음주의 종말론의 특정한 미래주의적 틀과 상당한 친연성을 가진 독법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이해에서는 이러한 방식의 종말 시간표 자체가 중심이 아닙니다. ‘마지막 심판’은 지구라는 행성이 불타 없어지는 사건도 아니고 인류 역사가 물리적으로 끝나는 사건도 아닙니다. 그것은 영계에서 교회의 한 시대가 완결될 때 일어나는 영적 심판입니다. 따라서 계시록에 등장하는 전쟁과 기근과 죽음과 지진과 별의 추락을 자연계의 미래 뉴스처럼 일대일 대응시키기 시작하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계시록의 아르카나에서 점점 멀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의 장면은 속뜻을 담는 그릇이지, 반드시 그 모습 그대로 자연계에서 재현되어야 하는 미래 사건의 도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번 강사의 종말론적 긴장을 전부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긴장을 더 깊은 곳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강사는 ‘대환난이 다가오고 있으니 준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준비를 달력과 국제정세의 관찰보다 인간의 내적 상태에서 찾게 합니다. 내 안에서 흰말은 살아 있는가, 곧 말씀의 진리를 주님으로부터 이해하려는 마음이 살아 있는가. 붉은 말의 상태처럼 선과 진리 사이의 평화가 무너지고 있지는 않은가. 검은 말의 상태처럼 말씀은 많이 알고 있으나 실제로 영혼을 먹이는 선과 진리는 희귀해지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결국 청황마가 나타내는 영적 죽음의 상태로 가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번 강의의 첫 찬송이 오히려 뜻깊게 돌아옵니다. 강의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는 고백으로 시작했습니다. 강사는 ‘오직 예수님이면 충분합니다’라고 기도한 뒤 계시록 강해에 들어갑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사실 이 고백이 이번 1부의 복잡한 종말 시간표보다 더 중심에 놓일 수 있습니다. 계시록의 중심은 재앙이 아니라 어린양이기 때문입니다. 인을 떼시는 분도 어린양이고, 말씀을 여시는 분도 어린양이며, 마지막에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을 제대로 읽는 목적은 ‘언제 무슨 재앙이 일어날 것인가’를 정확하게 알아맞히는 데 있기보다,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더 분명히 보고 그분의 신적 진리와 신적 선이 우리의 삶 안에서 다스리게 하는 데 있습니다.

 

결국 8강 1부는 ‘심판’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계시록 전체를 하나의 질서 있는 구조로 읽으려 한다는 점에서 귀 기울일 가치가 있습니다. 또한 스가랴와 계시록을 연결하고, 말·바람·인·나팔 등의 표상들을 서로 비교하는 태도에는 말씀의 내적 연결을 찾으려는 좋은 감각도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한 겹 더 씌우면, 그 표상들을 곧바로 미래의 자연재해와 세계전쟁에 대응시키기보다 먼저 ‘교회와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상태의 변화’로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계시록 6장은 먼 미래에 일어날 공포의 예고편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훼손되며 마침내 소멸하는지를 보여 주는 엄숙한 영적 진단이 됩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앞으로 계시록 6장이 진행될수록 더욱 중요해질 것입니다. 강사의 렌즈에서는 네 말이 ‘앞으로 세상에 닥칠 네 심판의 바람’이라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것들이 ‘교회 안에서 말씀을 받아들이는 상태가 단계적으로 쇠퇴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같은 계시록을 읽으면서도 하나는 주로 ‘밖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바라보고, 다른 하나는 ‘교회와 내 안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을 바라봅니다. 이 두 방향을 구별하면서 강의를 따라가면, 강사의 진지한 경고를 존중하면서도 계시록의 아르카나를 놓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8강 2부

‘제단 아래 순교자들’과 천국을 채우는 질서

8강 2부에서 강의의 무게중심은 앞서 살펴본 네 말의 심판에서 다섯째 인, 곧 ‘제단 아래 있는 순교자들의 영혼’으로 이동합니다. 여기서부터 강사의 독특한 구원론과 영계 이해가 상당히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특히 ‘이미 죽은 순교자들이 왜 아직 제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는가’, ‘흰 두루마기를 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순교자의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는 말씀은 무엇을 뜻하는가’를 하나의 천국 질서 안에서 설명하려 합니다. 강사는 계시록 전체를 ‘천국의 가장 거룩한 곳부터 차례로 채워 가시는 과정’으로 이해하면서, 먼저 14만 4천의 ‘처음 익은 열매’, 다음으로 순교자들, 그리고 대환난을 통과한 성도들이 차례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구조를 제시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앞의 네 말 해석보다 오히려 더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강사의 설명 가운데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이 다가오는 부분과,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부분이 동시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람이 죽은 직후 곧바로 최종적인 천국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죽은 사람에게도 일정한 영적 과정과 심판이 있다는 생각,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단순히 ‘예수를 믿었다’는 외적 고백 하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적 상태와 정결함에 관계된다는 생각은 일반적인 개신교 설교에서 흔히 듣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이 점만 놓고 보면 강사의 시선은 뜻밖에도 스베덴보리의 영계론과 상당히 가까운 곳까지 옵니다.

 

강사는 다섯째 인의 순교자들을 오순절 이후 교회 시대에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순교한 사람들로 이해합니다. 이들은 이미 죽었지만 아직 천국의 최종적인 자리에 들어간 것은 아니며, 제단 아래에서 자기들의 피를 신원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순교자의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는 말씀을 후 3년 반 동안 순교하게 될 사람들까지 그 수가 완성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그동안 이들에게 흰 두루마기가 주어지고 ‘잠시 쉬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강사가 죽음과 천국 입성을 동일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분들이 지금 돌아가셨어요? … 그러니까 이분들이 심판대를 거쳐서 천국에 들어가셔야 되거든요’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AC와 ‘천국과 지옥’을 읽으며 계속 확인해 온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람이 육체의 죽음과 동시에 곧바로 천국이나 지옥의 최종 상태에 들어간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먼저 영계에서 깨어나며, 중간영계에서 자신의 내적 상태가 점차 드러나는 과정을 거친 후 자기의 지배적 사랑과 완전히 일치하는 공동체로 가게 됩니다.

 

따라서 ‘죽은 뒤에도 어떤 과정이 있다’는 강사의 직관 자체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잘못된 것으로 밀어낼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한국 개신교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죽으면 즉시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도식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강사는 그 중간 과정을 계시록의 종말 시간표와 결합하여 ‘순교자의 숫자가 찰 때까지 기다리는 장소와 기간’으로 이해하는 반면,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각 영이 자신의 실제 내적 상태를 드러내고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이 하나가 되어 가는 영적 과정으로 설명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더 중요한 차이는 ‘순교’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있습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순교자가 천국의 특별한 반열을 구성합니다. 교회 시대에 죽은 순교자들이 있고, 앞으로 대환난 중에 순교할 사람들이 있으며, 그 숫자가 완성되어야 하나의 천국 질서가 완성됩니다. 실제로 강사는 ‘처음 익은 열매 14만 4천’을 먼저 추수하고, 두 번째 익은 열매로 순교자들을 추수하며, 이어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환난을 통과한 성도들이 있다고 설명하면서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몇 부류로 나눕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러한 ‘반열’의 구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천국의 질서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천국에는 무수한 공동체가 있고,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의 구별도 있으며, 각 사람은 자기 사랑과 지혜의 상태에 정확히 맞는 공동체로 인도됩니다. 그러므로 ‘천국에는 질서와 차이가 있다’는 강사의 기본 감각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질서는 ‘14만 4천 → 순교자 → 환난 통과자’라는 역사적·종말론적 자격 순서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 곧 그가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그 사랑에 따라 어떻게 살았는가에 의해 정해집니다.

 

이것은 ‘순교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외적으로 순교했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의 내적 상태를 자동으로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순교는 분명히 가장 숭고한 신앙의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과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생명까지 내어놓았다면 그 외적 행위는 그 사람의 내적 사랑과 완전히 하나가 된 행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했는가’입니다. 명예를 위해서인지, 자기 종교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서인지, 사람들에게 성인으로 기억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정말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했는지가 영계에서는 드러납니다. 천국은 행위의 외형이 아니라 그 행위 안에 들어 있던 사랑에 따라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를 적용하면 계시록 6장의 ‘제단 아래 순교자들’도 훨씬 깊어집니다. ‘제단’은 단순히 영계 어느 곳에 실제로 설치되어 있는 거대한 제단을 의미하는 것으로만 볼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에서 제단은 예배, 특히 주님께 자신을 드리는 사랑의 예배와 관련됩니다. 그리고 ‘피’ 역시 단순한 육체의 피를 넘어 신적 진리와 관계된 깊은 상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라는 표현은 역사적으로 실제 순교한 사람들을 포함하면서도, 속뜻에서는 진리를 위해 자기의 proprium을 버리고 주님께 자신을 드린 사람들의 상태까지 훨씬 넓게 열어 줍니다.

 

특히 ‘흰 두루마기’가 중요합니다. 강사는 이것을 ‘너희는 이미 깨끗해졌다’는 표시로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상응으로 한 걸음만 더 들어가면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말씀에서 ‘옷’은 사람의 내적인 것을 둘러싸고 표현하는 진리를 의미하며, ‘흰색’은 그 진리의 순수함과 빛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흰 두루마기를 받는다는 것은 천국에서 사용할 물리적인 흰 예복 한 벌을 지급받는다는 차원보다, 그들이 신적 진리 안에 있으며 그 진리가 그들의 삶을 감싸고 있다는 영적 상태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계시록의 옷은 그 사람의 영적 상태가 외적으로 나타난 모습입니다.

 

그리고 ‘잠시 쉬라’는 말씀 역시 단순히 대환난이 끝날 때까지 대기하라는 시간표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 ‘쉼’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상태가 아닙니다. 말씀에서 참된 안식은 싸움이 끝나고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주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는 상태와 관계됩니다. 우리가 창세기 2장의 ‘일곱째 날’을 읽으면서 보았듯, 안식은 거듭남의 완성 상태와 깊이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잠시 쉬라’는 말씀을 단지 ‘후 3년 반의 순교자가 다 찰 때까지 대기하라’는 연대기적 의미로만 제한하면 이 표현이 가진 깊은 영적 차원이 좁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2부에서 무엇보다 눈여겨볼 것은 강사가 ‘천국이 채워진다’는 개념을 매우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천국의 가장 거룩한 곳부터 채워가시는 모습’이라고 하면서 처음 익은 열매, 순교자, 환난 통과자 순으로 천국이 완성되어 간다고 설명합니다. 이 표현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오히려 매우 중요한 주제로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단순히 구원받은 개인들이 모여 사는 장소가 아닙니다. 천국 전체는 주님 앞에서 하나의 ‘가장 큰 사람’, 곧 막시무스 호모(Maximus Homo)를 이룹니다. 각각의 천국 공동체와 각각의 천사는 그 거대한 천국적 인간 안에서 서로 다른 기능과 쓰임을 담당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에는 실제로 ‘채워짐’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단순히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따로 구원하여 천국이라는 장소에 넣는 것이 아니라, 인류로부터 천국 전체를 끊임없이 형성하시는 섭리입니다.

 

이렇게 보면 강사가 느끼고 있는 직관의 깊은 곳에는 상당히 중요한 진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을 질서 있게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채움이 특정 시대의 14만 4천 명을 먼저 채우고, 다음 방을 순교자로 채우고, 그다음 방을 환난 통과자로 채우는 식의 공간적·시간적 배열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의 결합, 그리고 그 사람이 감당할 영원한 쓰임에 따라 천국의 무수한 공동체들을 완성해 가십니다. 강사가 보고 있는 ‘질서 있는 천국’이라는 그림은 살리되, 그 질서를 문자적 숫자와 종말 시간표에서 ‘사랑과 쓰임의 질서’로 옮겨 놓으면 스베덴보리의 천국론에 훨씬 가까워집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순교자의 수가 차기까지’라는 표현입니다. 강사는 이것을 실제 순교해야 할 사람들의 예정된 숫자가 있다는 의미로 읽습니다. 그러나 말씀에서 ‘수’는 단순한 산술적 숫자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설에서 수는 흔히 어떤 영적 상태의 질과 충만함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수가 차다’는 것은 주님께서 미리 정해 두신 순교자의 인원수가 정확히 몇 명에 도달한다는 뜻이라기보다, 그 말씀으로 표상되는 교회의 영적 상태가 충만해지고 완결되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이 원리는 14만 4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강사는 14만 4천을 교회 시대의 ‘이긴 자들’, 곧 특별히 정결하게 되어 휴거되는 성도들의 실제적인 반열로 이해합니다. 다른 강의 부분에서도 ‘교회 시대 동안에 하나님께서 인 맞은 종 14만 4천을 만들어 내신다’고 분명히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144,000을 그렇게 제한된 실제 인원수로 읽지 않습니다. 12와 12, 그리고 천이라는 수가 결합된 이 숫자는 주님의 새 교회를 이루는 모든 사람, 곧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충만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14만 4천 명만 특별한 최상위 반열에 들어간다’는 식의 계층적 구원론으로 읽으면 계시록의 수가 가진 상응적 의미가 사라집니다.

 

그럼에도 이번 강의에서 계속 존중할 만한 것은 강사가 ‘정결’을 매우 중요하게 본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하지 않습니다. 성도가 실제로 정결하게 되어야 하고, 연단을 받아야 하며, 주님 앞에서 변화되어야 한다는 긴장이 강의 전체에 흐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교리와 만나는 매우 중요한 접점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입술의 신앙이나 교리적 정통성만으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주님의 계명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사람의 의지와 이해가 실제로 새로워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다만 두 체계가 다시 갈라지는 곳은 ‘그 정결이 언제 이루어지는가’입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충분히 정결해지지 못한 신자가 앞으로 올 대환난에 들어가 그곳에서 남은 연단을 받는 구조가 나타납니다. 실제 다른 대목에서 강사는 정결하게 된 성도는 환난을 면하고 휴거되지만, 아직 정결하지 못한 성도는 ‘나머지 연단을 받으러 대환난에 들어가야’ 하며, 대환난은 불신자에게는 심판이지만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연단의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부분을 매우 신중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사람의 거듭남은 기본적으로 자연계의 삶에서 이루어집니다. 바로 여기서 사람은 자유 가운데 악을 거절하고 선을 선택하며,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삶으로 옮깁니다. 죽은 뒤 중간영계에서 일어나는 것은 지상에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지 못했던 사람에게 새로운 구원의 기회를 주는 ‘제2의 연단 과정’이라기보다, 지상에서 실제로 형성된 그 사람의 내적 사랑이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선한 사람에게 남아 있던 외적인 거짓과 오류가 벗겨질 수 있고 교육도 이루어지지만, 지배적 사랑 자체가 죽음 이후 완전히 반대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강조하는 ‘지금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는 권면은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강하게 살릴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이유는 ‘그래야 7년 대환난을 피하여 휴거되기 때문’이라기보다 훨씬 근본적입니다. 지금 이 자연계의 삶이 우리의 영원한 사랑이 형성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일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선택하며 어떤 악을 죄로 여기고 물리치는지가 영원한 우리의 모습을 만들어 갑니다. 미래의 환난을 피하기 위해 오늘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삶 그 자체가 천국의 삶이기 때문에’ 오늘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8강 2부에서 강사가 그리고 있는 그림과 스베덴보리의 그림은 뜻밖에 가까운 곳에서 출발했다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두 그림 모두 천국에는 질서가 있다고 말합니다. 두 그림 모두 죽음 이후에도 영적 세계와 심판이 있다고 말합니다. 두 그림 모두 사람의 정결과 실제적인 변화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두 그림 모두 주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질서 있게 이루신다고 봅니다. 그러나 강사는 그것을 ‘14만 4천 → 순교자 → 환난 통과자’, ‘교회 시대 → 휴거 → 7년 대환난 → 심판 → 천국’이라는 시간적·집단적 구조로 설명하고,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각 사람의 지배적 사랑 → 선과 진리의 결합 → 중간영계에서의 내적 상태의 드러남 → 그 상태에 상응하는 천국 공동체로의 인도’라는 영적 질서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이번 2부에서 가장 귀하게 붙들 수 있는 말은 어쩌면 ‘순교자의 숫자’도 ‘14만 4천’도 아닙니다. ‘정결’입니다. 다만 그 정결을 미래 대환난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격으로 이해하는 데 머물지 않고, 주님께서 우리의 proprium을 낮추시고 악한 사랑을 제거하시며 선과 진리를 실제 삶 안에서 결합하시는 ‘거듭남’으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흰 두루마기’ 역시 미래 어느 날 특별한 성도들에게 지급되는 천상의 예복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부터 주님의 진리로 입혀지고 그 진리대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마침내 영계에서 드러나는 영적 옷으로 읽힙니다.

 

그리고 그렇게 읽을 때 ‘제단 아래 순교자들’의 모습은 우리와 멀리 떨어진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모든 참된 거듭남에는 일종의 ‘순교’가 있기 때문입니다. 죽어야 하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먼저 우리의 proprium이며, 제단 위에 놓여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우리의 낡은 의지입니다. 이것이 죽을수록 주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의지가 살아나고, 거짓이 벗겨질수록 흰옷과 같은 진리가 우리를 입힙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시록의 심판은 먼 미래에 갑자기 시작되는 사건만이 아니라, 오늘 말씀 앞에 선 한 사람의 내면에서도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8강 3부

황충 재앙과 여섯째 나팔 : 무저갱, 악령의 공격, 그리고 ‘큰 전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8강 3부에서는 다섯째 나팔의 황충 재앙이 마무리되고, 이어 여섯째 나팔과 ‘큰 전쟁’으로 넘어갑니다. 강사는 계시록 9장 11절의 ‘아바돈’과 ‘아볼루온’을 황충들을 지휘하는 무저갱의 사자, 곧 사탄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다섯째 나팔의 황충 재앙을 ‘첫째 화’, 여섯째 나팔을 ‘둘째 화’, 일곱째 나팔을 ‘셋째 화’로 정리하면서, 여섯째 나팔에서 대환난 전 3년 반 후반기에 일어날 세계적인 전쟁이 시작된다고 설명합니다. 계시록 9장은 그 전쟁을 개략적으로 말하고, 에스겔 38장이 그 전쟁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충해 준다는 것이 강사의 핵심 논리입니다.

 

먼저 황충 재앙의 마지막 부분을 보겠습니다. 강사는 계시록 9장의 황충을 실제 자연계의 곤충이 아니라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악령들’로 봅니다. 이 점은 오히려 상당히 중요한 출발입니다. 그는 황충의 전갈 같은 꼬리, 철 흉갑, 사자의 이, 여자의 머리털, 병거 소리 같은 날갯소리 등을 영계의 악령들이 가진 무섭고 사나운 모습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읽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임금인 아바돈과 아볼루온을 무저갱을 연 사탄으로 연결합니다. 여기서는 앞선 네 말보다 강사의 해석이 오히려 자연적 문자에서 한 걸음 벗어나 ‘영계의 실재’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흥미롭게 만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계시록 9장의 황충을 자연계에 나타날 거대한 곤충 떼로 읽지 않습니다. 계시록의 환상은 영계에서 나타난 표상적 형상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것들은 실제로 지옥적 상태와 거짓에서 나오는 영적 영향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황충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영적 악의 세력과 관계된다’는 강사의 기본 직관은 매우 귀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악령’이 무엇을 표상하는지에 들어가면 두 해석은 다시 달라집니다. 강사는 황충을 대환난 때 실제로 무저갱에서 풀려나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악령 군대로 봅니다. 특히 하나님의 인을 맞지 않은 사람들을 다섯 달 동안 괴롭히며, 성도들에게는 연단이 되고 불신자들에게는 징벌이 된다고 설명합니다. 교회 시대의 ‘이긴 자’, 곧 14만 4천은 이미 휴거되었기 때문에 이 황충 재앙을 받지 않는다고 봅니다.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설에서는 계시록 9장의 황충이 훨씬 구체적인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것은 특히 신앙을 체어리티와 분리하면서도, 그 신앙을 그럴듯한 추론과 감각적 확신으로 방어하는 사람들의 거짓된 사고와 관련됩니다. 다시 말해 ‘황충’은 단순히 외부에서 날아와 사람을 괴롭히는 악령 무리가 아니라, 인간과 교회 안에서 진리를 왜곡하고 선에서 분리된 신앙을 정당화하는 거짓된 추론이 영계에서 어떤 형상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계시록의 괴물 같은 형상은 그 거짓의 내적 질이 외적으로 드러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강사의 렌즈에서는 ‘무저갱의 황충이 언제 풀려나는가?’가 중심 질문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내 신앙 안에서 어떤 거짓된 추론이 무저갱에서 올라온 황충처럼 진리와 체어리티를 공격하고 있는가?’가 중심 질문이 됩니다. 다시 말해 종말론적 공포의 대상을 바깥에서 찾기보다, 교회 안에서 신앙이 사랑과 삶으로부터 분리될 때 어떤 영적 괴물이 만들어지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강사가 황충의 ‘꼬리’를 매우 강조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그는 전갈이 꼬리로 쏘듯 황충도 꼬리로 사람을 괴롭게 한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꼬리는 일반적으로 가장 낮고 마지막에 있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앞선 모든 것이 종결되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특히 거짓 교리가 실제 삶의 가장 낮은 자연적 차원에서 굳어지고, 그 거짓을 이용해 다른 사람을 해치는 상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머리에서 시작된 거짓이 꼬리에서 실제 해악으로 끝나는 셈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의 ‘꼬리’는 단순히 무서운 괴물의 신체 부위가 아니라, 거짓이 삶의 마지막 결과로 나타나는 상태를 상응적으로 보여 줄 수 있습니다.

 

또 황충에게 ‘사람을 죽이지는 못하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라’고 한 말씀도 강사는 문자적으로 다섯 달 동안의 실제 고통 기간으로 읽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을 정도의 극심한 괴로움을 당한다고 설명하면서, 이것을 미래 대환난의 실제적인 한 기간으로 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시간 수치는 자연적 달력의 기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다섯’이라는 수 역시 일정한 영적 상태의 질과 제한된 정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섯 달’을 미래의 정확한 150일로 고정하는 것보다, 이 거짓과 악의 영향이 제한된 범위 안에서 허용된다는 의미로 보는 편이 상응적 해석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악령들에게 허락하신 권세’라는 강사의 표현도 주목할 만합니다. 강사는 황충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한 범위 안에서만 사람을 괴롭게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와 접점이 있습니다. 지옥은 독립적인 두 번째 신적 세력이 아닙니다. 악령들은 자기 욕망대로 활동하려 하지만, 주님의 섭리 아래에서 그 영향은 항상 제한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하나님께서 악령을 보내 사람을 고문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은 악 자체를 원하지 않으시며, 악한 영들의 활동을 허용하시되 그 허용된 악까지 선을 위해 굽히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황충을 풀어 성도를 연단하신다’는 표현은 조금 조심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시험과 연단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맞지만, 주님이 악을 만들어 보내 인간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 안에 이미 존재하는 악과 거짓, 그리고 그것과 연결된 지옥적 영향이 시험 가운데 드러날 때 주님께서는 그것을 이용하여 사람이 자유 가운데 악을 거절하고 선을 선택하도록 하십니다. 주님의 목적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악의 분리와 선의 결합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강사가 연단을 강조하는 부분에는 분명 귀한 것이 있습니다. 그는 어려움과 고난이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고, 사람이 자기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한다고 설명합니다. ‘연단이 은혜이고 축복’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고난은 많을수록 좋다’거나 ‘하나님께서 고난을 적극적으로 보내셔야만 사람이 거룩해진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서는 시험이 필요하지만, 시험의 목적은 고통을 늘리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의 자유 안에서 악과 거짓을 분리하고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는 데 있습니다.

 

황충 재앙의 마지막에는 ‘아바돈’과 ‘아볼루온’이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강사는 아바돈을 ‘파괴자’, 아볼루온을 사탄과 연결하면서 무저갱의 임금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이름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파괴’의 성격입니다. 지옥적 거짓은 무엇을 파괴합니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가장 먼저 선과 진리의 결합을 파괴합니다.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사랑과 삶에서 떼어 놓고, 자기 이해와 자기 확신을 진리보다 높이며, 결국 신앙을 자기 의의 도구로 만드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태가 교회의 생명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황충 재앙을 읽을 때 ‘미래에 무서운 악령이 출현한다’는 데만 집중하면 계시록이 지금 교회에 주는 경고를 놓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신앙만을 붙들고 체어리티를 잃을 때, 말씀의 진리를 자기 논리로 왜곡하여 악한 삶을 정당화할 때, 바로 그때 황충 같은 거짓이 이미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것입니다. 이 독법은 훨씬 현재적이고, 그래서 오히려 더 엄중합니다.

 

이제 강의는 다섯째 나팔의 ‘첫째 화’가 끝나고 여섯째 나팔의 ‘둘째 화’로 넘어갑니다. 강사는 여섯째 나팔을 ‘큰 전쟁’으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계시록 9장은 그 전쟁을 간단히만 언급하기 때문에 에스겔 38장으로 가서 그 구체적인 세력과 진행을 보충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이 전쟁은 대환난 전 3년 반 후반기에 일어나며,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동유럽과 중동 아랍 세력이 이스라엘을 침공하는 전쟁입니다. 그는 계시록 9장과 에스겔 38장의 전쟁을 시기, 등장 세력, 내용이라는 세 기준으로 비교하여 ‘같은 전쟁’이라고 결론짓습니다.

 

이 부분은 ‘핵심진리’의 미래주의적 종말론이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로스, 메섹, 두발을 러시아와 연결하고, 바사·구스·붓·고멜 등을 현대의 중동 및 동유럽 국가 세력과 연결하며, 그것을 세계대전 규모의 미래 전쟁으로 읽습니다. 이런 방식은 현대의 국제정세를 에스겔과 계시록의 예언에 직접 대입하는 전형적인 종말론적 독법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매우 큰 방향 전환이 필요합니다. 에스겔과 계시록의 ‘곡과 마곡’, ‘로스와 메섹과 두발’ 등의 이름은 단순히 미래의 특정 현대 국가를 암호화한 명칭으로 보지 않습니다. 말씀의 국가와 민족은 영적 의미에서 교회의 선과 진리, 또는 그것을 공격하는 악과 거짓의 여러 상태를 표상합니다. 곡과 마곡은 특히 외적인 예배와 신앙만 붙들면서 내적인 체어리티와 사랑을 결여한 상태, 또는 교회의 마지막 때에 진리의 내적 생명을 공격하는 외적 종교성을 나타내는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에스겔 38장의 전쟁을 ‘러시아와 중동 국가들이 실제 이스라엘을 침공할 미래 전쟁’으로 고정하면, 그 본문이 담고 있는 교회와 인간 내부의 영적 전쟁이 매우 좁아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 ‘어떤 국가가 이스라엘을 공격할 것인가?’가 아니라 ‘교회의 내적 선과 진리를 외적인 신앙과 거짓 추론이 어떻게 공격하는가?’입니다. 그리고 이 전쟁은 멀리 있는 국가들의 군사 충돌 이전에 한 사람의 마음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역시 자연적 민족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이스라엘은 교회와 영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은 교회 안의 신앙과 체어리티, 곧 선과 진리에 대한 공격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적 이스라엘의 역사적 의미를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의 신적 의미가 한 민족의 현대 정치사를 훨씬 넘어선다는 뜻입니다.

 

강사가 계시록 9장과 에스겔 38장을 연결하려는 시도 자체는 흥미롭습니다. 하나의 말씀을 다른 말씀으로 밝히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같은 전쟁’을 찾는 기준이 ‘현대 국가와 미래 전쟁’으로 향하느냐, ‘같은 영적 상태와 상응’으로 향하느냐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도 말씀 안의 서로 다른 책들이 같은 내적 질서를 반복해서 보여 준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연결을 지정학적 대응보다 영적 상응에서 찾습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면 계시록 9장의 ‘이억의 마병대’ 같은 표현도 다르게 보입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2억 명의 실제 군대가 어느 날 지상에 출현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어느 국가가 2억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흘러갑니다. 그러나 상응적 독법에서는 ‘수’ 자체가 영적 상태의 양과 충만함을 나타내며, ‘말’과 ‘마병’은 진리에 대한 이해 또는 그 왜곡된 추론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엄청난 숫자의 마병은 어떤 특정 국가의 병력 규모보다 거짓된 추론과 영적 공격이 교회 안에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졌는지를 보여 주는 형상으로 읽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이 대목에서 8강 1부의 네 말과 다시 연결됩니다. 앞에서 말은 말씀에 대한 이해와 지성을 나타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9장에서 무수한 마병이 나타나는 것도 같은 계시록 안의 상응을 유지하여 읽는 것이 좋습니다. 진리를 이해하는 말이 처음에는 흰말로 나타났다가, 거짓과 악이 교회를 지배하면서 이제 왜곡된 이해와 추론의 거대한 군대로 변한 것입니다. 이것이 계시록의 내적 연속을 따라가는 방식입니다.

 

강사는 종말의 전쟁을 매우 구체적인 시간표로 설명하면서 ‘전 3년 반 후반기’, ‘여섯째 나팔’, ‘러시아와 중동 세력’, ‘이스라엘 침공’ 등을 연결합니다. 이 구조는 듣는 사람에게 매우 선명하고 기억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선명하다는 것과 반드시 말씀의 속뜻이라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종말론 도표는 복잡한 본문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그 도표가 본문 자체의 아르카나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시대의 정치 상황을 성경 예언과 직접 연결하는 방식에는 항상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국가의 국경과 이름과 동맹은 역사 속에서 계속 변합니다. 한 시대의 독자는 한 국가를 ‘곡과 마곡’으로 보고 확신할 수 있지만, 수십 년 뒤 국제질서가 바뀌면 또 다른 국가가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은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습니다. 자기애와 거짓이 선과 진리를 공격하는 영적 질서는 1세기에도, 중세에도, 오늘에도 동일합니다. 이것이 말씀의 영원성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종말의 전쟁을 부정하기보다 그 전쟁의 중심을 영적인 곳으로 옮깁니다. 실제 세계의 전쟁은 인류의 악한 사랑이 자연계에서 나타난 끔찍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록이 궁극적으로 계시하는 것은 그 전쟁의 더 깊은 원인, 곧 천국과 지옥,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의 영적 대립입니다. 자연계의 전쟁은 영적 전쟁의 그림자일 수 있지만, 말씀의 본체는 그 그림자보다 깊은 곳에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여섯째 나팔’이 오늘 우리에게도 직접 다가옵니다. 내 안의 진리에 대해 거대한 거짓의 군대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악을 정당화하기 위해 수십 개의 논리가 동원됩니다. ‘이번만은 괜찮다’, ‘다들 그렇게 한다’, ‘내 상황은 특별하다’, ‘하나님도 이해하실 것이다’라는 수많은 추론이 진리 하나를 포위합니다. 바로 이런 상태가 영적으로는 거대한 마병대가 공격하는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영적 전쟁은 매우 실제적이지만 그 전장은 인간의 의지와 이해 안에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인간은 자기 지성만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거짓의 힘은 단순한 정보 부족이 아니라 악한 사랑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어떤 거짓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대부분 그 거짓을 통해 보호하고 싶은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돈을 사랑하면 돈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생기고, 지배를 사랑하면 권위를 정당화하는 교리가 생기며, 자기 의를 사랑하면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신학이 생깁니다. 따라서 영적 전쟁의 승리는 논리 싸움만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이 바뀌는 거듭남을 요구합니다.

 

이 지점에서 강사의 ‘연단’ 강조와 스베덴보리의 ‘시험’이 다시 만납니다. 강사는 미래 환난을 성도들이 남은 연단을 받는 시간으로 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미래의 특정 7년에 묶지는 않지만, 사람에게 시험이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는 분명히 말합니다. 시험 가운데서 악한 사랑과 거짓 추론이 실제로 드러나고, 사람이 주님의 도움으로 그것에 저항할 때 선과 진리가 더욱 깊게 결합합니다. 이 싸움이 없다면 진리는 아직 삶의 것이 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더 많은 고통을 받아야 더 높은 성도가 된다’는 사고를 피하는 것입니다. 시험의 가치가 고통의 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악을 죄로 인정하며 선과 진리를 선택하는 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극심한 외적 박해 속에서 시험을 겪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아주 평범한 일상에서 자기 욕심과 교만을 내려놓는 작은 선택들을 통해 깊이 거듭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마다 필요한 만큼만 허용하십니다.

 

따라서 황충 재앙과 여섯째 나팔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공포가 아닙니다. 분별입니다. ‘이 황충은 어느 악령인가?’에서 더 나아가 ‘어떤 거짓된 신앙과 추론이 내 안의 체어리티를 공격하고 있는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가 이스라엘을 침공할 것인가?’보다 ‘내 안에서 외적인 종교성과 자기 의가 주님의 선과 진리를 공격하고 있지는 않은가?’를 묻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강사의 해석에서 가장 귀하게 살려야 할 것은 ‘깨어 있으라’는 긴장입니다. 그는 계시록을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준비를 위한 말씀으로 읽습니다. 이 의도는 중요합니다. 다만 그 깨어 있음의 초점을 국제정세와 미래의 전쟁 징후에만 두지 않고, 자기 내면의 악과 거짓, 그리고 교회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되는 상태에 두면 계시록은 훨씬 더 직접적인 말씀이 됩니다.

 

8강 3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황충과 여섯째 나팔의 거대한 전쟁은 단순히 미래 자연계에서 출현할 악령과 군대의 사건표가 아니라, 교회와 인간 안에서 사랑과 분리된 신앙, 거짓된 추론과 악한 욕망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공격하는 영적 전쟁이 영계의 표상으로 드러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의 목적은 ‘누가 언제 공격해 올 것인가’를 알아맞히게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깊은 목적은 ‘그 공격이 내 안에서 시작될 때 내가 무엇으로 서 있을 것인가’를 준비시키는 데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알고, 그 진리를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살며, 거짓이 아무리 그럴듯한 논리로 몰려와도 ‘이것은 주님의 질서와 맞지 않는다’고 분별하여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시록의 전쟁 준비는 무기와 식량을 준비하는 것보다 먼저 마음과 생명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다음 8강 4부에서는 강의가 본격적으로 계시록 9장의 여섯째 나팔과 에스겔 38장의 ‘곡과 마곡’ 전쟁을 하나로 묶으면서, 러시아·동유럽·중동 세력과 이스라엘의 미래 전쟁이라는 구체적인 종말론으로 들어갑니다. 이 부분에서는 ‘곡과 마곡’, ‘이스라엘’, ‘전쟁’, ‘북방’, 그리고 에스겔의 여러 민족 이름들이 스베덴보리에게 무엇을 표상하는지를 보다 충분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8강 4부

여섯째 나팔과 에스겔 38장의 ‘곡’ : 현대 국가들의 전쟁인가, 교회의 내적 선과 진리를 공격하는 마지막 영적 전쟁인가

8강 4부에서는 앞에서 예고한 ‘둘째 화’, 곧 여섯째 나팔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펼쳐집니다. 강사는 계시록 9장 13절 이하의 큰 유브라데 강, 결박된 네 천사, 수많은 마병대를 하나의 대규모 미래 전쟁으로 읽고, 계시록 9장만으로는 그 전쟁에 참여하는 국가와 진행 과정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으므로 에스겔 38장이 그 내용을 보충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계시록 9장과 에스겔 38장에 나타나는 두 전쟁은 같은 전쟁’이라고 명시하고, 그 근거를 ‘전쟁의 시기, 등장 세력, 전쟁의 내용’이라는 세 가지 기준으로 정리합니다. 계시록 9장의 여섯째 나팔은 대환난 전 3년 반의 후반부에 일어나며, 에스겔 38장 역시 이스라엘이 회복되어 평안을 누리는 같은 시기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보고, 등장 세력 또한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동유럽과 중동 아랍 세력’으로 동일하므로 결국 하나의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강사는 계시록 9장의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중동 지역에서 일어날 미래 세계전쟁과 연결합니다. 유브라데를 실제 중동의 강으로 보고, 바로 그 지역을 중심으로 예정된 큰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어 에스겔 38장으로 넘어가서는 ‘로스와 메섹과 두발의 왕 곡’을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북방 세력과 연결하고, 바사·구스·붓·고멜·도갈마 등을 중동과 주변의 여러 국가 세력으로 읽습니다. 강사의 전체 그림에서는 이들 비기독교 세력이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결국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들을 심판하시는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 됩니다. 강사 자신도 이 전쟁을 큰 틀에서 ‘기독교 국가와 비기독교 국가가 싸우는 전쟁’이라고 설명합니다.

 

먼저 이 해석을 너무 빨리 재단하지 않고 그 안에 있는 강사의 문제의식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계시록과 에스겔을 서로 떨어진 예언으로 읽지 않습니다. 동일한 주님께서 주신 말씀이므로 서로 밝혀 주어야 한다고 보고, 한 본문에서 부족한 세부가 다른 본문에서 보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 전체를 하나의 연결된 계시로 보려는 태도입니다. 이것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의 한 부분은 다른 부분과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같은 영적 실재가 서로 다른 역사적 인물과 장소와 사건을 통하여 반복하여 표상된다고 봅니다. 차이는 ‘그 연결의 원리를 어디에서 찾는가’입니다.

 

강사는 주로 역사적·지리적 대응에서 연결을 찾습니다. ‘북방’이면 오늘날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어느 국가인가, ‘로스·메섹·두발’은 현대 지도에서 어느 민족이나 국가인가, ‘바사·구스·붓·고멜’은 오늘날 어느 나라들인가를 찾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현대 국가들을 계시록의 미래 전쟁 시간표 안에 배치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같은 이름들을 먼저 ‘상응’으로 읽습니다. 말씀 안에서 ‘나라’, ‘민족’, ‘왕’, ‘땅’, ‘산’, ‘북방’, ‘전쟁’은 자연계의 정치적 실재를 담는 동시에 교회와 인간 안의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의 영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두 독법은 결정적으로 갈라집니다.

 

에스겔의 ‘곡’부터 살펴보면 이 차이가 분명해집니다. 강사의 해석에서 곡은 러시아와 그 주변 국가들을 통치하는 미래의 실제 정치적 지도자 또는 세력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넣어 이스라엘을 치러 내려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곡’과 ‘마곡’은 본질적으로 어느 특정 현대 국가의 암호명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여러 해설에서 곡과 마곡은 내적 예배는 잃고 외적인 예배와 종교적 형식에만 머무는 상태, 또는 체어리티의 내적 생명 없이 외적 경건과 교리만을 붙드는 상태와 깊이 관련됩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바깥 껍질은 남아 있지만 그 안의 사랑과 생명은 사라진 상태입니다.

 

이것은 계시록 20장의 ‘곡과 마곡’과도 연결됩니다. 계시록 마지막 가까이에서 다시 곡과 마곡이 등장하는 까닭은 어느 특정 나라가 두 번 등장하기 때문이라기보다,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외적인 종교성이 내적인 사랑과 진리를 공격하는 동일한 영적 원리가 반복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스겔 38장과 계시록 사이의 진정한 연결을 스베덴보리식으로 찾는다면 ‘두 본문 모두 러시아를 예언한다’가 아니라 ‘두 본문 모두 내적 생명이 없는 외적 종교가 참된 교회의 선과 진리를 공격하는 마지막 상태를 보여 준다’는 방향이 됩니다.

 

이때 ‘이스라엘’의 의미도 자연스럽게 달라집니다. 강사는 현대 국가 이스라엘을 예언의 중심에 놓고, 그 민족의 고토 귀환과 미래의 회복을 종말의 시간표와 연결합니다. 다른 강의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이 고토로 돌아오는 것을 종말의 중요한 징조로 보고, 마지막 때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성경의 ‘이스라엘’을 그렇게 자연적 혈통의 민족에게만 고정하지 않습니다. 속뜻에서 이스라엘은 영적 교회, 곧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교회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이것은 자연적 유대 민족이나 오늘날 이스라엘 국가의 역사적 존재를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문제는 말씀의 신적 예언을 특정 현대 국가의 정치사와 일대일로 동일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은 어느 한 시대의 국제정세보다 훨씬 깊고 영원합니다. 에스겔 38장이 단지 20세기나 21세기의 어느 전쟁 하나를 예고한 것이라면 그 사건이 지나간 뒤에는 말씀의 직접적인 효력이 크게 줄어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시대의 교회 안에서 반복될 수 있는 영적 공격을 다룬다면, 그 말씀은 2천 년 전에도, 오늘에도, 앞으로도 살아 있습니다.

 

‘북방’도 같은 원리로 볼 수 있습니다. 강사는 북방을 실제 지리적 북쪽으로 읽어 러시아와 주변 세력을 연결합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에서 방향은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일반적으로 동쪽은 주님과 사랑, 남쪽은 진리의 빛과 지혜, 서쪽은 그보다 더 외적인 상태, 북쪽은 진리에 대한 빛이 상대적으로 희미한 상태와 관련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극한 북방에서 내려온다’는 표현은 단지 지구본에서 북쪽 국가가 남쪽으로 진군한다는 의미를 넘어, 진리의 빛이 희박하고 외적인 지식이나 거짓 추론이 지배하는 상태가 교회의 더 내적인 선과 진리를 공격하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곡의 연합군’이라는 이미지가 훨씬 깊어집니다. 한 가지 거짓만이 진리를 공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안에서도 어떤 악한 사랑 하나를 지키기 위해 여러 거짓과 합리화가 연합합니다. 자기 지배욕을 놓지 않으려면 ‘나는 책임자이므로 그래야 한다’, ‘저 사람들을 위해서도 강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도 권위를 세우셨다’ 같은 수많은 논리가 동원될 수 있습니다. 자기 의를 사랑하면 성경 구절과 교리와 신앙 체험까지 동원하여 자기를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곡’ 아래 여러 민족이 모여 이스라엘을 치는 모습이 영적으로는 이처럼 하나의 악한 사랑 아래 여러 거짓된 추론이 연합하여 선과 진리를 공격하는 모습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전쟁’ 자체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전쟁’을 자주 영적 싸움, 곧 진리와 거짓, 선과 악 사이의 싸움으로 해설합니다. 자연계의 전쟁 역시 인간의 악한 사랑이 외부 세계에서 폭발한 결과일 수 있지만, 말씀에서 전쟁의 아르카나는 군사적 충돌 그 자체보다 훨씬 깊습니다. 사람의 거듭남 가운데도 끊임없는 전쟁이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가 자기에게 익숙한 욕망과 충돌하고, 체어리티가 자기애와 충돌하며, 겸손이 proprium의 자기 의와 충돌합니다. 이런 영적 시험이 말씀에서 ‘싸움’과 ‘전쟁’으로 표상됩니다.

 

강사가 여섯째 나팔을 ‘큰 전쟁’으로 보는 직관 자체를 이런 방향에서 살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의 마지막에는 매우 큰 영적 싸움이 있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되고, 말씀의 내적 의미가 사라지며, 외적인 경건과 교리적 자기 확신은 남아 있지만 실제 삶의 선이 약해질 때, 교회 안에서는 진리와 거짓의 거대한 충돌이 일어납니다. 겉으로는 모두 하나님과 성경을 말하지만, 그 안에서 무엇이 정말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나오는가가 시험받습니다. 이것은 물리적 세계대전 못지않게 실재적인 영적 전쟁입니다.

 

계시록 9장의 ‘이억의 마병대’도 이 차이를 잘 보여 줍니다. 문자적 종말론에서는 이 숫자를 실제 병력 규모와 연결하려는 유혹이 큽니다. 그러나 말씀의 수에는 영적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이억’ 역시 인구 통계의 숫자로만 볼 필요가 없습니다. 더구나 ‘말’이 진리에 대한 이해와 지성을 표상한다면 ‘마병’은 그러한 이해와 추론을 사용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어마어마한 수의 마병은 엄청난 규모로 확산된 거짓된 추론과 교리적 공격의 상태를 보여 주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한 번 거짓된 원리가 교회의 중심 교리가 되면 그 원리에서 끝없는 파생 논리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 거짓의 군대가 선과 진리를 포위하는 것입니다.

 

‘유브라데’ 역시 단순히 중동에서 실제 전쟁이 시작될 지점을 표시하기 위한 지도 좌표로만 읽기 어렵습니다. 성경에서 유브라데는 가나안의 경계와 관련하여 자주 등장하며, 상응적으로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사이의 경계, 또는 인간의 이성적·자연적 차원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브라데에 결박된 것들이 풀린다’는 형상은 교회의 외적·자연적 차원에 묶여 있던 거짓과 악의 세력이 제한에서 풀려나 크게 활동하기 시작하는 마지막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자연지리보다 영적 지리가 핵심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결박된 네 천사’라는 표현도 흥미로워집니다. 강사는 이들을 실제로 심판을 수행할 영적 존재들로 보며, 정해진 시간까지 결박되어 있다가 풀려 전쟁을 일으키는 존재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계시록에서 ‘천사’는 반드시 개인적인 한 천사만을 뜻하지 않고, 천국의 어떤 기능이나 상태, 때로는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작용을 표상할 수 있습니다. 반대 의미에서는 악한 세력이나 상태가 천사의 형상 아래 표현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넷’이라는 수는 무엇인가의 전체적 범위나 모든 방향과 관련될 수 있으므로, 이 장면을 ‘네 명의 초자연적 존재가 중동에서 물리적으로 풀려나는 사건’으로만 한정하기보다 교회의 외적 질서를 덮고 있던 악과 거짓이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상태로 보는 편이 계시록의 상응적 문법과 더 잘 맞습니다.

 

강의에서는 이 전쟁이 ‘전 3년 반 후반기’에 정확히 들어간다고 봅니다. 여섯째 나팔의 전쟁이 끝나면서 전 3년 반도 끝나고, 이어 일곱째 나팔과 함께 후 3년 반, 곧 적그리스도의 본격적인 통치가 시작된다는 시간표입니다. 이 체계가 잘 정돈되어 있기 때문에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계시록이 놀라울 만큼 명료해질 수 있습니다. 무엇이 언제 일어나며, 어느 장이 어느 기간에 해당하는지가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잘 정돈되어 있다’와 ‘말씀의 아르카나가 밝혀졌다’를 구별해야 합니다. 인간이 만든 종말 시간표는 본문을 이해하기 쉽게 만들 수 있지만, 그 명료함 자체가 신적 내적 의미의 증거는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의 환상들을 지나치게 촘촘한 시간표로 맞추다 보면, 본문이 그 도표에 맞도록 다른 성경 구절들을 계속 끌어와야 하고, 어느 순간 말씀 자체보다 도표가 해석을 지배할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특별히 조심하는 지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계시록의 순서는 분명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로 영적 상태의 연속입니다. 첫째 상태에서 둘째 상태로, 선과 진리가 점차 훼손되고, 거짓이 강화되며, 결국 마지막 심판에 이르고 새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전 3년 반의 몇 개월째에 어느 국가가 공격한다’는 방식의 연대기보다 ‘교회의 어떤 상태 다음에 어떤 상태가 오는가’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계시록은 역사의 시계라기보다 교회의 영적 생명을 진단하는 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 38장에서 곡의 군대가 ‘평안히 거하는 이스라엘’을 공격한다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강사는 이것을 미래에 회복된 자연적 이스라엘이 일정한 평화를 누리는 때라고 봅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사람이 주님에게서 받은 선과 진리 안에 어느 정도 정착했을 때 오히려 더 깊은 시험이 일어나는 모습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거듭남이 진전되었다고 시험이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더 깊은 proprium이 드러나고, 외적 종교성과 자기 의가 새롭게 형성된 내적 선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 거듭남에서도 매우 중요한 경험입니다. 신앙생활 초기에 눈에 띄는 외적 악을 어느 정도 정리한 뒤 사람은 자신이 꽤 안정되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훨씬 섬세한 악이 드러납니다. 선을 행하면서 자기 공로를 사랑하고, 진리를 알면서 자기 지혜를 사랑하며, 사역을 하면서 영향력과 인정을 사랑하는 것 같은 것들입니다. 외적 악보다 훨씬 종교적인 모습을 하고 있어서 더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바로 이런 ‘내적 교회를 공격하는 외적인 종교성’이 곡의 공격이라는 상응과 상당히 깊이 만납니다.

 

그래서 ‘곡’은 어쩌면 멀리 러시아 지도에서 찾기보다 교회 안에서 더 먼저 찾아야 할 이름인지도 모릅니다. 말씀과 예배와 교리와 종교적 열심은 많은데 체어리티가 약해질 때, 외적 경건을 통해 자기 의를 키울 때, ‘정통’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멸시할 때, 교회는 스스로 곡의 상태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는 언제나 말씀을 먼저 우리 자신에게 돌려줍니다. ‘저 나라가 곡이다’가 아니라 ‘내 신앙 안에 곡이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이것은 교리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진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진리가 반드시 선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교리 지식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에스겔의 ‘곡’이 표상하는 문제는 외적 지식과 예배가 내적 사랑으로부터 분리되는 데 있습니다. 같은 성경 지식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사용되면 천국적이지만, 자기 우월성을 세우는 데 사용되면 지옥적 방향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외적 진리의 형식은 같아 보여도 그것을 움직이는 지배적 사랑이 다릅니다.

 

강사는 에스겔 38장 18절 이하에서 곡이 이스라엘을 침공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일어나고, 큰 지진과 여러 재앙을 통해 곡의 세력이 멸망한다고 봅니다. 이 부분도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심판의 내적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 안에 인간과 같은 분노의 감정이 생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은 본질적으로 사랑과 자비이십니다. 그런데 그 신적 사랑과 진리가 악한 상태에 부딪힐 때 악한 자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진노와 심판으로 경험됩니다. 태양의 같은 빛과 열이 건강한 생명에는 생명이 되지만 부패한 것에는 부패를 드러내듯, 주님의 선과 진리는 선한 상태에는 천국의 기쁨이 되고 악한 상태에는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곡을 멸망시키신다’는 것도 주님이 분노하여 어느 민족을 미워하고 파괴하신다는 차원보다, 신적 진리가 나타남으로써 거짓과 악이 자기 실체를 드러내고 더 이상 선과 함께 있을 수 없게 되는 분리를 뜻합니다. 이것이 마지막 심판의 본질입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만드시는 분이 아니라, 악이 더 이상 선의 외관 속에 숨어 있지 못하게 하십니다.

 

‘큰 지진’ 역시 계시록과 예언서에서 매우 중요한 표상입니다. 자연적인 지진은 땅의 기반이 흔들리는 사건입니다. 영적으로 ‘땅’이 교회를 나타낸다면 지진은 교회의 기존 질서와 신앙 체계가 크게 흔들리고 뒤집히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과 새 교회의 출현 주변에 지진의 이미지가 반복됩니다. 반드시 어느 날짜에 실제 지각이 움직여야만 성취되는 예언으로 볼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의 근본적인 질서가 뒤흔들리는 것이 훨씬 깊은 지진입니다.

 

여기서 강사의 해석과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의외로 다시 만날 수 있는 지점이 있습니다. 강사도 이 전쟁의 최종 목적을 단지 국가들 사이의 군사적 승패로 끝내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을 드러내시고, 인간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방향으로 해석합니다. 곡의 세력이 아무리 강해도 하나님의 뜻을 넘어갈 수 없으며, 모든 역사와 생사화복은 하나님께 속한다는 확신이 강의 전체에 흐릅니다. 이것은 귀한 신앙적 중심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주권을 훨씬 내적으로 봅니다. 주님께서는 국제정세를 움직여 자신의 힘을 과시하시는 군주이기 이전에, 인간의 자유를 조금도 침해하지 않으면서 악과 거짓을 제한하시고 모든 것을 최종적으로 선을 향해 이끄시는 신적 섭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승리는 어느 국가가 무너지는 데서 가장 깊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악의 사랑이 힘을 잃고 선과 진리가 자유롭게 결합되는 데서 드러납니다.

 

이런 관점에서 강사가 ‘하나님께서 곡에게 전쟁할 마음을 주셨다’고 설명하는 부분은 특별히 조심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문자에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처럼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문자에서 많은 것이 인간의 외관에 따라 하나님께 돌려져 표현된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욕망을 사람의 마음에 넣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은 자기의 악에서 전쟁과 파괴를 원하며, 주님께서는 그것을 허용하시되 그 허용을 통해 결국 더 큰 악을 제한하고 선을 이루십니다. ‘의지하신 것’과 ‘허용하신 것’을 구별해야 하나님의 신적 사랑이 보존됩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에게 악한 생각을 넣으시고, 그 생각대로 행동하자 다시 그를 심판하시는 모순된 그림이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에서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지 않습니다. 악은 지옥과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며, 주님께서는 오직 선만을 원하시고 악은 자유와 영원한 구원을 위해 필요한 만큼 허용하실 뿐입니다.

 

따라서 이번 8강 4부를 읽으며 강사의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살리되, 그것을 ‘하나님께서 악까지 직접 일으키신다’는 뜻으로 확대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주님의 주권은 악을 창조하는 능력이 아니라, 인간과 지옥이 일으킨 악조차 궁극적으로는 선을 해치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굽히시는 무한한 섭리에서 더욱 놀랍게 드러납니다.

 

결국 이번 강의의 가장 큰 갈림길은 이것입니다. ‘에스겔 38장이 어느 현대 국가를 가리키는가?’ 강사는 러시아와 동유럽, 중동의 여러 세력을 구체적으로 지목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런 동일시를 말씀의 중심으로 삼지 않습니다. 오늘 러시아를 곡이라고 확정해 놓으면 국제질서가 바뀔 때 해석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곡은 내적 체어리티와 분리된 외적 종교성이 참된 교회의 선과 진리를 공격하는 상태’라고 읽으면 그 의미는 시대가 달라져도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신적 보편성과도 더 잘 어울립니다.

 

더욱이 이 독법은 독자를 구경꾼으로 남겨 두지 않습니다. ‘러시아가 이스라엘을 공격할까?’라고 뉴스만 관찰하는 사람은 계시록의 바깥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진리를 알면서 사랑 없이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 신앙의 외형이 실제 체어리티보다 앞서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옳다는 생각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거짓된 추론을 동원하고 있지는 않은가?’라고 묻는 순간 곡의 전쟁은 내 영혼의 문제가 됩니다. 말씀이 바로 오늘 나를 심판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스겔 38장과 계시록 9장은 실제로 매우 깊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연결은 ‘같은 제3차 세계대전을 두 곳에서 예언했다’는 방식보다, ‘교회의 마지막에 외적 종교성과 거짓된 추론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지만 결국 신적 진리 앞에서 드러나고 분리되는 동일한 영적 전쟁을 서로 다른 표상으로 보여 준다’는 방향에서 훨씬 깊어집니다.

 

그리고 이 전쟁의 승자는 어느 자연 국가도 아닙니다. 주님이십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영적 싸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거짓 하나를 자기 지성으로 논박해 이겼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거짓을 볼 수 있게 하는 빛도 주님에게서 오고, 악한 사랑에 저항할 힘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싸워야 하지만 승리를 자기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시험의 질서입니다.

 

따라서 8강 4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9장의 여섯째 나팔과 에스겔 38장의 곡의 전쟁은 특정 현대 국가들의 미래 군사전쟁을 암호화한 예언으로만 읽기보다,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내적 사랑과 체어리티를 잃은 외적 종교성과 거짓된 추론이 참된 선과 진리를 공격하고, 마침내 주님의 신적 진리 앞에서 드러나 분리되는 거대한 영적 전쟁을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을 때 그 아르카나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그러면서도 강사가 계속 강조하는 ‘깨어 있음’은 그대로 살릴 수 있습니다. 다만 깨어 있음의 첫 대상이 세계지도나 전쟁 뉴스가 아니라 자신의 영적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밖의 곡을 찾기 전에 내 안의 곡을 살피고, 어느 나라가 이스라엘을 공격할지 계산하기 전에 내 안의 외적 신앙이 주님께서 심으신 선과 진리를 공격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종말론은 공포와 호기심의 학문이 아니라 회개와 거듭남의 말씀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 강의에 더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사가 그토록 진지하게 붙들고 있는 ‘마지막 전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전쟁을 훨씬 더 가까운 곳, 곧 교회와 인간의 마음 안으로 데려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계시록의 마지막 전쟁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먼 미래의 사건만이 아닙니다. 오늘 진리를 사랑과 분리하려는 내 안의 모든 움직임 앞에서 이미 싸움은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분은 ‘어느 국가가 우리 편인가’가 아니라 오직 어린양이신 주님 한 분입니다.



8강 5부

계시록 10장의 ‘작은 책’과 일곱째 나팔 : 계시를 먹는다는 것, 그리고 ‘지체하지 아니하리니’의 의미

8강 5부에서 강의는 계시록 9장의 여섯째 나팔과 에스겔 38장의 전쟁을 지나 계시록 10장으로 넘어갑니다. 강사는 계시록 10장에 ‘일곱 우레와 작은 책’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9장에서 묘사된 여섯째 나팔의 거대한 전쟁이 어떻게 마무리되며 그 이후 어떤 종말론적 전환이 일어나는지를 설명하는 장으로 봅니다. 특히 그는 여섯째 나팔의 전쟁을 ‘전 3년 반 후반기의 제3차 세계대전’으로 규정하고, 계시록 10장이 그 전쟁 뒤 적그리스도의 등장을 준비하는 전환점이라고 설명합니다. 강사의 전체 시간표에서 보면 계시록 10장은 단순한 삽입장이 아니라, 여섯째 나팔에서 일곱째 나팔로 넘어가는 ‘문턱’입니다.

 

강사는 계시록 10장 5절과 6절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씀을 매우 중요하게 붙듭니다. 바다와 땅을 밟고 선 천사가 오른손을 들고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면서 ‘지체하지 아니하리니’라고 선언하는 장면을, 이제 곧 일곱째 나팔이 불리고 후 3년 반이 시작되며 적그리스도가 등장하게 된다는 신호로 해석합니다. 그는 이 천사를 미가엘 천사장으로 보고, ‘가까운 시일 내에 일곱째 나팔이 지체하지 않고 불릴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해석은 지금까지 강사가 세워 온 ‘전 3년 반-여섯째 나팔-세계대전-일곱째 나팔-후 3년 반-적그리스도’라는 도식 안에서는 매우 일관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계시록 10장에 들어가면 이 장의 중심은 다르게 보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계시록의 ‘힘센 천사’는 단순히 특정 천사장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와 그 진리가 계시되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계시록에서 천사는 자주 어떤 한 개인 영을 넘어 주님의 신적 작용, 천국의 어떤 기능, 또는 신적 진리의 나타남을 대표합니다. 따라서 ‘이 천사가 미가엘인가, 가브리엘인가’를 먼저 확정하는 것보다 그 천사가 어떻게 묘사되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계시록 10장의 힘센 천사는 구름을 입고,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으며, 얼굴은 해 같고, 발은 불기둥 같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천사의 모습이라기보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와 사랑의 위엄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입니다. ‘구름’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 ‘해’는 주님의 신적 사랑, ‘불’은 사랑의 선을 나타내는 상응과 깊이 연결됩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종말 시간표를 알려 주는 천사 한 명의 등장 이전에, 주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신적 진리를 강력하게 드러내시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천사의 한 발은 바다를, 다른 한 발은 땅을 밟고 있습니다. 강사의 설명에서는 이것이 천사의 권세와 세계적 범위를 보여 주는 장면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는 ‘바다’와 ‘땅’이 중요한 영적 영역을 나타냅니다. 일반적으로 ‘땅’은 교회 자체와 그 내적인 상태, ‘바다’는 보다 외적인 자연적 지식과 교회 밖 또는 교회의 외곽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발은 바다에, 한 발은 땅에 둔다는 것은 주님의 신적 진리가 교회의 내적 영역과 외적 영역 모두에 미치는 전면적인 권세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계시록 10장은 마치 주님께서 ‘이 말씀은 교회의 어느 한 부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내적인 진리를 많이 아는 사람에게도, 아직 외적인 지식과 문자에 머물러 있는 사람에게도, 주님의 진리는 모두 미칩니다. 말씀의 속뜻은 문자와 떨어져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 안에 들어 있고, 그 문자를 통해 외적 사람과 내적 사람이 연결됩니다. ‘바다와 땅을 밟고 선다’는 형상은 이런 전체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또 강사는 이 힘센 천사가 ‘일곱 우레’를 발하게 하는 장면을 계시록의 종말 전환과 연결합니다. 그러나 일곱 우레가 무엇을 말했는지는 요한에게 기록하지 말라고 명령됩니다. 이 점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계시록은 모든 비밀을 다 풀어놓는 책처럼 보이지만, 정작 어떤 것은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인간이 원한다고 해서 전부 한꺼번에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계시는 인간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정보 공개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의 상태와 교회의 필요에 맞추어 주시는 신적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일곱’은 충만함과 전체를 나타내므로, ‘일곱 우레’는 신적 진리가 힘 있게 발해지는 충만한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우레’ 역시 말씀에서 신적 진리가 외적 차원에까지 내려와 강력하게 들리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것을 기록하지 못합니다. 왜일까요? 모든 신적 진리가 인간의 자연적 이해에 즉시 내려올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만큼, 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계시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계시의 질서와도 잘 맞습니다.

 

강사의 종말론에서는 계시록이 ‘마지막 때의 비밀’을 매우 체계적으로 알려 주는 책으로 강조됩니다. 그러나 일곱 우레를 기록하지 말라는 장면은 인간에게 중요한 경계를 일깨웁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이 종말의 모든 세부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오히려 위험할 수 있습니다. 계시록 자체가 ‘기록된 것’과 ‘기록되지 않은 것’을 구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계시록을 연구할수록 ‘내가 종말 시간표를 완벽히 안다’는 확신보다 주님 앞의 겸손이 깊어지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이 점에서 이번 강의에도 귀한 긴장이 있습니다. 강사는 계시록을 최대한 체계적으로 연결하고, 여섯째 나팔과 에스겔 38장과 계시록 10장과 일곱째 나팔을 하나의 시간표로 정리하려 합니다. 이 노력은 복잡한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체계가 너무 완벽해 보일수록 오히려 질문 하나를 남겨 두어야 합니다. ‘이 체계는 정말 말씀 자체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여러 본문을 하나의 종말 도표 안에 맞추면서 만들어진 것인가?’입니다. 말씀의 아르카나는 인간이 만든 체계보다 언제나 더 깊습니다.

 

강의는 이어 ‘작은 책’으로 들어갑니다. 계시록 10장의 천사는 손에 펼쳐진 작은 책을 들고 있고, 요한에게 그것을 받아먹으라고 합니다. 요한이 먹었을 때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배에서는 쓰게 됩니다. 강사는 이 작은 책을 요한이 받아 앞으로 온 세계에 전해야 할 계시의 내용으로 보고, 마지막 11절의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를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온 세계에 전파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이 부분은 강사의 설명 안에서도 매우 중요한 영적 통찰을 품고 있습니다. 계시는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먹는다’는 것은 매우 깊은 상응입니다. 음식이 몸 안으로 들어가 우리 몸의 일부가 되듯, 말씀의 진리를 먹는다는 것은 그 진리를 단순히 읽고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진리가 기억에만 있으면 아직 밖에 있는 책입니다. 그것이 이해 안으로 들어오고, 의지와 결합하며, 삶에서 선이 될 때 비로소 ‘먹은 말씀’이 됩니다.

 

이 점은 지금까지 ‘핵심진리’ 강의에서 반복해 온 ‘생명화’라는 주제와 놀랍도록 잘 만납니다. 강사는 계속해서 진리는 머리로 아는 데서 끝나면 안 되고 실제 행실과 생명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계시록 10장의 ‘작은 책을 먹으라’는 말씀은 이 전체 강조를 매우 아름답게 뒷받침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계시록의 종말 시간표를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계시의 진리를 실제로 먹는 것입니다.

 

왜 입에는 달고 배에서는 씁니까? 강사는 계시 내용을 전하는 사명을 중심으로 설명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진리가 처음에는 이해성에 들어올 때 기쁨을 주지만 그것이 의지와 삶으로 내려가면 자기 proprium과 충돌하면서 시험과 쓰라림이 생기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진리는 들을 때는 아름답습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라’는 말씀도 깊은 진리로 감동을 줍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나를 모욕한 사람을 용서하라는 요구가 되고, 내가 사랑하는 자기 의와 명예를 내려놓으라는 말씀이 되는 순간 배에서는 쓰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말씀을 ‘먹는’ 과정입니다. 입에서만 달고 끝나면 아직 진리가 완전히 생명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배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성경적 지식이 내 감정과 욕망과 습관과 생활을 건드려야 합니다. 그때 진리는 쓰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쓰라림 속에서 거듭남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강사가 말하는 ‘연단’과도 깊이 만납니다. 다만 연단의 본질을 미래 7년 대환난 같은 특정 역사 기간에만 두지 않고, 말씀의 진리가 우리의 낡은 proprium과 충돌하는 모든 순간으로 넓혀 볼 수 있습니다. 작은 책이 입에는 달고 배에서는 쓰다는 것은 한 사람의 평생 거듭남을 압축해서 보여 주는 매우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진리는 먼저 매력적이고 기쁩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실제로 살려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죽어야 하므로 고통이 따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나면 진리는 다시 선의 기쁨이 됩니다.

 

‘작은 책’이 펼쳐져 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앞의 계시록 5장에서는 일곱 인으로 봉해진 책이 등장했습니다. 거기서는 어린양 외에는 아무도 책을 펴거나 볼 수 없었습니다. 이제 계시록 10장에서는 책이 ‘펴져’ 있습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말씀의 신적 진리가 주님에 의해 열리고 인간에게 주어지는 상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말씀의 속뜻이 열리는 것은 주님의 재림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닫혀 있던 책이 열리고, 그 책을 사람이 받아먹는 것입니다.

 

이 점은 목사님과 지금 진행하시는 AC 리딩에도 꽤 직접적인 울림이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이 ‘열렸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열린 말씀을 읽고 감탄하는 데서 끝나면 아직 작은 책을 손에 들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고와 사랑과 삶을 바꿀 때 비로소 먹은 것입니다. 아르카나를 많이 아는 것과 그 아르카나가 생명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진리는 선을 위해 존재한다고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강사는 작은 책을 먹은 요한에게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고 한 말씀을, 요한이 이 계시를 기록하고 온 세계의 성도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사명으로 풀이합니다. 이 해석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한 단계 더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진리를 전하려면 먼저 먹어야 합니다. 내가 살지 않은 진리를 말할 수는 있지만, 그 말에는 생명의 힘이 약합니다. 입에서만 달았던 말씀을 바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면 지식 전달에 머물 수 있습니다. 배에서 쓰라림을 겪고 삶으로 소화된 진리는 전혀 다른 무게를 가집니다.

 

따라서 ‘다시 예언하라’는 명령 앞에는 반드시 ‘먹으라’가 먼저 옵니다. 이것은 모든 설교자와 교사에게 매우 엄중한 질서입니다. 먼저 말씀을 자기 안에서 받아들이고, 그 말씀이 자기 악과 거짓을 심판하게 하고, 그 진리를 실제로 살아본 뒤에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완전해야만 설교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말씀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만 적용하는 태도는 계시록 10장의 질서와 맞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 해설 작업에도 중요한 원칙 하나가 생깁니다. 다른 설교자나 교리를 분석하면서 ‘저 해석은 문자적이고, 스베덴보리의 속뜻은 더 깊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발견한 진리가 우리 자신의 체어리티와 겸손을 더 깊게 만드는지 반드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속뜻’을 안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proprium의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작은 책은 남을 판단하는 자가 아니라 먼저 먹는 자에게 주어졌습니다.

 

강사는 계시록 10장의 결론에서 이 장이 계시록 9장의 전쟁 뒤 ‘이스라엘을 도와주던 재생 로마제국의 통치자가 적그리스도로 뒤집어지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 준다고 정리합니다. 즉 계시록 10장의 작은 책과 천사의 선언을 최종적으로는 적그리스도 출현을 위한 종말 시간표의 전환점에 배치합니다. 이것은 강사의 체계에서는 중요한 결론이지만,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설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적그리스도’는 반드시 미래에 나타날 한 정치적 세계 통치자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거나, 주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신앙을 체어리티와 분리하며, 거짓을 진리의 자리에 세우는 모든 교리와 상태가 적그리스도적입니다. 따라서 ‘적그리스도가 언제 등장하는가?’보다 ‘교회 안에서 무엇이 그리스도, 곧 주님의 신적 진리를 거스르고 있는가?’가 더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이것은 666 해석과도 이어집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후 3년 반에 등장하는 적그리스도가 666의 핵심 인물이 되고, 두 짐승과 큰 음녀, 발람과 발락 같은 인물들을 하나의 종말적 악의 연합으로 연결합니다. 실제 강의 후반에서는 ‘적그리스도, 두 짐승, 666, 발락, 발람, 음녀들이 다 짝’이라는 식으로 모형 관계를 정리합니다. 이런 종합은 매우 인상적이고 기억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인물과 사건을 서로 ‘짝맞추기’보다 그들이 표상하는 악과 거짓의 질을 먼저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발람은 어떤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가, 큰 음녀는 무엇을 나타내는가, 짐승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666은 어떤 교리적 왜곡을 나타내는가를 각각 상응적으로 살피고, 그 내적 상태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말씀의 여러 본문이 자연스럽게 하나의 아르카나를 이룹니다. 단지 ‘이 사람=저 사람’, ‘이 사건=저 사건’이라고 대응시키는 모형론과는 다른 방식입니다.

 

강의는 또한 민수기의 여러 사건을 계시록과 짝지어 읽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사용합니다. 발락과 발람은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 온역은 대접 재앙, 여호수아의 안수는 재림을 준비하는 주님, 미디안 전쟁은 주님과 14만 4천이 함께 내려오는 아마겟돈 심판의 모형이라는 식입니다. 강사는 이를 ‘모형적 진리’라고 부르며 계시록 해석의 하나의 중요한 틀로 사용합니다.

 

이 부분은 공용복 선생의 ‘핵심진리’ 전체를 이해하는 데도 상당히 중요해 보입니다. 역사적 사건들을 단지 역사로 읽지 않고 더 큰 종말적 실재의 ‘모형’으로 읽으려 한다는 점에서는 말씀 안에 더 깊은 차원이 있다는 강한 감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목사님께서 오래전부터 ‘혹시 공용복 선생이 스베덴보리를 어느 정도 읽었던 것이 아닐까’ 하고 느끼셨던 이유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우리가 앞서 확인한 것처럼, 공용복 선생이 ‘천국과 지옥’을 직접 언급했다는 사실과 별개로, 이 모형론 전체를 곧 스베덴보리의 상응론과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두 방식의 가장 큰 차이는 ‘연속성’에 있습니다. 모형론에서는 한 역사 사건이 미래의 다른 사건을 예고하는 그림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발람은 적그리스도의 모형, 미디안 전쟁은 아마겟돈의 모형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상응과 속뜻에서는 말씀의 역사 전체가 한 절 한 절, 단어와 배열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으로 주님과 인간의 거듭남, 교회와 천국의 상태를 담고 있습니다. 즉 일부 장면만 미래 사건과 대응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 하나의 내적 연속이 있습니다. 이 차이는 앞으로도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를 비교할 때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될 것입니다.

 

계시록 10장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강사는 이것을 종말 시간표의 다음 단계가 곧 시작된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 표현은 단순한 시간적 긴박감 이상입니다. 주님의 신적 질서가 완결될 때 더 이상 지연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교회의 상태가 완전히 성숙하고 선과 악의 분리가 준비되면 심판은 반드시 일어납니다. 여기서 ‘지체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달력에 몇 년 남았다는 예언보다 신적 질서의 확실성을 나타냅니다.

 

이것을 한 사람의 거듭남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충분한 자유와 시간과 기회를 주십니다. 악과 선이 섞여 있는 동안 성급하게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반복적으로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선택하여 그것이 지배적 사랑으로 굳어지면 그 상태는 점점 분명해집니다. ‘지체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그 신적 질서가 무한히 유예되지 않는다는 엄숙함도 품고 있습니다. 지금의 선택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강사가 강조하는 ‘마지막 때의 긴박성’도 이런 방식으로 충분히 살릴 수 있습니다. 날짜를 계산하지 않아도 영적으로는 언제나 긴박합니다. 인간의 자연적 생명은 유한하고, 오늘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내일의 우리를 형성합니다. 회개를 끝없이 미룰 수는 없습니다. 이 점에서 계시록 10장의 선언은 종말론적 호기심보다 훨씬 직접적인 회개의 말씀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8강 5부에서 가장 아름다운 중심은 오히려 ‘작은 책’입니다. 강사의 해석에서는 이것이 종말의 비밀을 전달할 계시의 책이고,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계시가 인간 안에 실제 생명이 되어야 한다는 아르카나가 더욱 깊게 열립니다. 말씀을 ‘안다’에서 ‘먹는다’로, ‘설명한다’에서 ‘산다’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입에서는 달고 배에서는 쓰다는 이 한 장면은 ‘스베덴보리의 렌즈’ 작업 전체에 하나의 경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속뜻을 발견하는 것은 달콤합니다. 서로 흩어져 있던 성경의 의미가 연결되고, 전에 이해되지 않던 구절이 열리며, 천국과 영계와 거듭남의 질서가 하나로 보일 때 큰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자기 사랑을 내려놓으라’, ‘자기 지혜를 내려놓으라’, ‘알고 있는 진리만큼 살아라’고 요구하기 시작하면 쓰라립니다. 바로 그때 작은 책이 배에 도달한 것입니다.

 

8강 5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0장은 미래의 적그리스도가 등장할 시점을 알려 주는 종말 시간표의 연결장으로만 읽기보다, 주님께서 교회 전체에 신적 진리를 열어 주시고, 사람이 그 말씀을 단순히 보거나 아는 데서 멈추지 않고 ‘먹어’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인 뒤 다시 세상에 증거해야 하는 계시와 거듭남의 질서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는 마지막 명령도 훨씬 무게 있게 들립니다. 먼저 먹고, 그다음 말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주님의 진리가 나를 심판하게 하고, 그다음 다른 사람에게 전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입의 단맛과 배의 쓰라림을 모두 통과하고, 그다음 진리를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설교자에게도, 교사에게도, 말씀을 번역하고 해설하는 사람에게도 매우 엄중하면서도 아름다운 순서입니다.

 

그리고 강의는 여기서 계시록 10장을 마무리한 뒤, 일곱째 나팔과 후 3년 반, 두 짐승과 666, 적그리스도의 본격적인 활동 쪽으로 넘어갑니다. 강사의 전체 시간표에서는 이제 가장 어두운 구간에 들어가는 셈입니다. 다음 부분에서는 바로 이 ‘짐승’과 ‘666’을 특정 미래 인물과 정치 체제의 표지로 읽는 방식과, 스베덴보리가 그것을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 및 인간 지성의 왜곡이라는 영적 상태로 읽는 방식 사이의 차이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8강 6부

두 증인과 일곱째 나팔 : ‘후 3년 반’의 시간표인가,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가 마지막으로 증거되는 상태인가

8강 6부에서 강의는 계시록 11장으로 들어가면서, 지금까지 진행해 온 종말론 시간표를 다시 한 번 정리합니다. 강사는 다섯째 나팔의 황충 재앙을 ‘첫째 화’, 여섯째 나팔의 대전쟁을 ‘둘째 화’, 그리고 일곱째 나팔과 함께 시작되는 후 3년 반, 곧 적그리스도의 통치 시대를 ‘셋째 화’로 봅니다. 실제로 강의에서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라는 말씀을 읽은 뒤, ‘셋째 화는 일곱째 나팔이 불릴 때 적그리스도 짐승이 출현하고 후 3년 반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정리합니다. 이것은 8강 전체에서 강사가 세워 온 시간적 틀을 거의 완성하는 대목입니다.

 

강사의 구조에서는 일곱째 나팔 하나가 짧은 단일 사건이 아니라 사실상 대환난 후 3년 반 전체를 포괄합니다. 앞서 그는 ‘일곱째 나팔은 이제 대환난 후 3년 반이 시작될 때 불려지는 것’이며, ‘후 3년 반 전체가 일곱째 나팔에 해당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일곱째 나팔은 단순히 일곱 개 가운데 마지막 음 하나가 아니라, 적그리스도가 온 세계를 지배하고, 짐승의 표와 박해가 일어나며, 마지막 심판으로 이어지는 종말의 최종 구간 전체를 여는 신호입니다. 이 틀을 먼저 이해해야 계시록 11장 이후에 나오는 두 증인, 여자와 용, 두 짐승, 666 등을 강사가 왜 모두 후 3년 반 안에 배치하는지가 보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먼저 ‘시간’의 의미를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의 해석은 1,260일, 마흔두 달, 전 3년 반, 후 3년 반을 자연계의 실제 달력 기간으로 배열합니다. 실제 다른 강의에서도 그는 ‘요한계시록에서는 전 3년 반은 1,260일, 후 3년 반은 마흔두 달로 구분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날짜와 기간은 단순한 연대 계산을 위한 숫자가 아니라 영적 상태의 질과 지속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1,260일과 마흔두 달을 계산하여 세계사의 남은 기간을 알아내기보다, 그 수가 어떤 교회의 상태가 충만해지고 끝에 이르는 과정을 표상하는지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계시록 11장의 중심에는 ‘두 증인’이 있습니다. 강사는 이 두 증인을 후 3년 반의 특정한 종말 사역과 연결합니다. 그들은 정해진 기간 동안 예언하고, 짐승에게 죽임을 당하며, 다시 살아나 하늘로 올라가는 존재들입니다. 강사의 전체 체계에서 이들은 적그리스도 통치 시대에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는 실제 인물들로 이해되는 방향이 강합니다. 그리고 그 죽음과 부활, 승천은 후 3년 반 종말 사건 가운데 하나로 배치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두 증인’을 우선 두 명의 미래 예언자라는 자연적 인물 차원에서 보지 않습니다. 계시록의 ‘둘’은 결합을 나타내며, 특히 교회를 이루는 두 본질적인 것, 곧 선과 진리, 또는 체어리티와 신앙을 생각하게 합니다. 증인은 무엇을 증거합니까? 주님과 주님의 진리를 증거합니다. 따라서 ‘두 증인’은 한 교회 안에서 주님을 증거하는 선과 진리, 또는 사랑과 신앙의 결합을 표상하는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계시록 전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7강과 8강에서 계속 보았듯, 스베덴보리에게 666과 짐승의 핵심도 단순한 정치적 독재자가 아니라 신앙을 사랑과 삶으로부터 떼어 놓는 상태와 깊이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편의 ‘두 증인’은 그 분리된 것을 다시 하나로 붙드는 증거, 곧 선과 진리가 함께 주님을 증거하는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둘 가운데 하나만 남으면 참된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진리 없는 선은 방향을 잃고, 선 없는 진리는 생명을 잃습니다.

 

강사의 강점은 여기서도 ‘증거’를 단순한 지식에 머물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두 증인은 안전한 자리에서 교리를 설명하는 존재들이 아니라 실제 죽음의 위협 속에서 증거합니다. 강의 전체에서 반복되는 ‘이기는 자’, ‘순교’, ‘연단’, ‘정결’이라는 주제가 다시 등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강사의 중심 관심은 ‘마지막 때에도 끝까지 진리를 지켜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 요청은 충분히 귀하게 살릴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것을 특정 미래 세대에게만 해당하는 순교 명령으로 제한하지 않고, 모든 시대의 신앙인 안에서 선과 진리를 끝까지 지키는 영적 싸움으로 넓힙니다.

 

‘증인’이라는 말 자체도 흥미롭습니다. 증인은 자신이 보거나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단순히 입으로 말하는 것보다 삶 전체가 증거가 됩니다. 사람이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실제 삶은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 지배된다면 말과 생명이 서로 다른 증언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반대로 말은 많지 않아도 정직과 체어리티와 겸손과 쓰임으로 사는 사람은 그의 삶 자체가 주님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두 증인’은 교회의 교리와 생명이 서로 일치하는 상태를 보여 주는 매우 아름다운 표상이 될 수 있습니다.

 

계시록 11장에서 두 증인은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합니다. 강사의 종말론에서는 이것이 마지막 때의 고난과 애통 가운데 이루어지는 증언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옷은 진리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화려한 흰옷이 아니라 굵은 베옷이라는 것은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진리가 기쁨과 영광 가운데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애통 가운데 증거되는 상태를 생각하게 합니다. 진리가 교회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오히려 거부되고 멸시되는 것입니다.

 

두 증인이 결국 ‘짐승’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것도 같은 방향에서 볼 수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미래의 어떤 적그리스도 세력이 두 예언자를 죽이는 사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의 증거가 짐승으로 표상되는 거짓 교리에 의해 소멸되는 것을 뜻할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고, 인간의 자기 지성이 주님의 말씀보다 높아질 때, 참된 선과 진리의 증거는 교회 안에서 ‘죽은 것’처럼 됩니다.

 

이때 ‘죽인다’는 말도 자연적 육체의 죽음보다 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살인’과 ‘죽음’은 영적 생명을 파괴하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진리를 거짓이라고 만들어 버리거나 선을 악이라고 왜곡하여 사람이 더 이상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도 영적 죽임입니다. 그러므로 두 증인이 죽는다는 것은 ‘두 사람이 실제로 총이나 칼로 죽는다’는 사건 이상으로,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가 더 이상 살아 있는 권위를 갖지 못하는 마지막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두 증인은 다시 살아납니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강사의 해석에서는 실제 죽은 두 증인이 다시 살아나 승천하는 기적적 종말 사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교회의 소망이 열립니다. 진리가 완전히 소멸된 것처럼 보여도 주님께서는 그것을 다시 일으키십니다. 옛 교회 안에서 죽은 선과 진리는 새 교회에서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마지막 심판은 파괴로 끝나지 않고 새 교회의 시작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전체 교회론과도 잘 맞습니다. 한 교회가 선과 진리를 거의 완전히 잃고 끝에 이르면 주님께서는 그 교회를 억지로 영원히 유지시키지 않으십니다. 마지막 심판을 통해 거짓과 악을 드러내고 분리한 뒤 새로운 교회를 세우십니다. 따라서 두 증인의 죽음과 부활은 ‘진리가 역사에서 잠시 패배했다가 미래 기적으로 복권된다’는 것보다, 옛 교회에서 죽은 선과 진리가 주님에 의해 새 교회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질서를 보여 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강의에서는 두 증인 사건 뒤 큰 지진과 함께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장면을 지나, ‘둘째 화가 지나갔고 셋째 화가 속히 온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일곱째 나팔이 불리면 후 3년 반의 적그리스도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는 것으로 봅니다. 이 전환은 강사의 시간표에서는 매우 분명합니다. 여섯째 나팔의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이제 역사의 마지막 악이 집중적으로 드러나는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교회의 마지막에는 악과 거짓이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상태가 있다는 점 자체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반드시 한 정치 지도자가 전 세계를 42개월간 통치하는 역사적 체제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한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거짓 교리가 얼마나 지배적인 힘을 가지게 되는지, 사람들이 겉으로는 기독교 신앙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신앙과 삶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상태가 어떻게 교회 전체를 지배하게 되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강사의 ‘적그리스도’ 이해가 본격적으로 나타납니다. 강사는 요한일서에 이미 ‘많은 적그리스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계시록 13장의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짐승은 인류 역사 마지막에 등장할 ‘최고의 적그리스도’이며, 악령 세계의 최고 통치자인 루시퍼와 ‘내주합일’된 자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강사의 영계론과 종말론이 결합되는 매우 독특한 대목입니다. 최고로 거룩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하게 내주한다면, 반대편에서는 최고로 악한 사람에게 사탄의 영이 완전히 내주한다는 양극 구조입니다.

 

이 구조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상당히 조심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스베덴보리는 ‘루시퍼’라는 하나의 초월적 악령 군주가 모든 지옥을 통치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마귀’와 ‘사탄’은 흔히 지옥 전체 또는 악과 거짓의 집합적 세력을 나타내며, 모든 지옥 위에 군림하는 하나의 개인적 사탄 왕이 있다는 구조와는 다릅니다. 따라서 미래의 한 정치적 인간 안에 ‘루시퍼가 완전히 내주합일한다’는 방식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구조와 맞지 않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과 인간의 결합과 악령과 인간의 결합이 대칭적이지 않다는 점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생명의 근원이시며 모든 선과 진리는 실제로 주님에게서 유입됩니다. 반면 악령은 자기 생명을 인간에게 창조적으로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 역시 생명 자체는 주님에게서 받으면서 그것을 악으로 왜곡하여 사용하는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하고, 적그리스도에게는 루시퍼의 생명이 똑같은 방식으로 내주합일한다’는 식의 완전한 대칭은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는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강사가 말하고자 하는 실질적 의미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오랫동안 어떤 사랑을 선택하고 반복하면 점차 그 사랑과 완전히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선을 사랑하고 살아온 사람은 천국적 공동체와 깊이 결합하고, 악을 사랑하고 살아온 사람은 지옥적 공동체와 깊이 결합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사람의 삶 전체가 지옥적 욕망을 표현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루시퍼라는 한 인격이 그 사람 속으로 들어와 한 몸이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이 지옥의 같은 사랑과 완전히 결합된 상태로 보는 것이 스베덴보리에게 더 가깝습니다.

 

‘적그리스도’라는 말 자체도 이 점에서 다시 보아야 합니다. 강사는 마지막 한 사람에게 초점을 모읍니다. 그러나 요한일서에서 ‘이미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다’는 말씀은 오히려 적그리스도의 본질이 한 사람에게만 제한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말씀의 진리를 왜곡하며, 특히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시키는 모든 상태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를 미래에 나타날 한 독재자에게만 집중시키면 오늘 교회 안의 적그리스도적 상태를 놓칠 위험이 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실제적인 경고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고백하면서도 사랑 없는 신앙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예수를 구주라 말하면서 주님의 계명대로 사는 것을 구원과 무관한 것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교리적 정통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자기애와 지배욕을 정당화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외형적으로는 ‘기독교’의 옷을 입고 있어 더욱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계시록의 짐승은 단순히 교회 밖의 명백한 무신론적 세력보다, 종교의 모양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속에서 진리를 왜곡하는 상태를 더 깊이 경계하게 할 수 있습니다.

 

강사는 일곱째 나팔 뒤 적그리스도의 온 세계 통치를 매우 실제적으로 그립니다. 그 시대에는 적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으면 재산을 잃고 가족까지 잃을 수 있으며, 그래서 지금부터 ‘육적인 소유를 순간순간 잘 비우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그는 자녀도 ‘내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잠시 맡기신 것이고 재물도 ‘내 물질’이 아니라 맡겨진 것이라는 청지기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대목은 그 종말 시간표에 동의하는가와 별개로 상당히 귀하게 살릴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proprium을 내려놓는 문제와 직접 만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자녀’, ‘내 돈’, ‘내 명예’, ‘내 몸’, ‘내 사역’이라는 소유의식은 매우 강한 proprium의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가족과 재산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가정과 직업과 소유는 모두 선한 쓰임의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주님보다 더 높이 두고 자기 자신의 것으로 절대화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의 ‘미리 버리는 훈련을 하라’는 표현을 ‘미래 대환난 때 빼앗겨도 버틸 수 있도록 연습하라’는 차원에만 두지 않고, 지금부터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왔으며 나는 그것을 쓰임을 위해 맡아 관리한다는 천국적 질서를 배우는 것으로 이해하면 매우 깊어집니다. 재산을 실제로 모두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이라는 잘못된 소유 의식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되 내 욕망을 실현할 소유물로 사랑하지 않고, 주님께서 맡기신 한 인격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7강의 값진 진주 비유에서 살펴본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문제와도 정확히 이어집니다. 강사는 미래 대환난의 박탈을 예상하여 자기 소유를 미리 내려놓으라고 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대환난이 오지 않아도 이 훈련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가 궁극적으로 내려놓아야 하는 것은 물건 그 자체보다 ‘모든 것이 내게서 나오며 내 것이고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proprium이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11장의 일곱째 나팔 장면에는 또 하나 매우 중요한 선언이 있습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라는 선포입니다. 강사는 이를 후 3년 반 환난 가운데 성도들에게 주시는 은혜와 소망의 말씀으로 봅니다. 실제 강의에서도 11장 15절부터 19절을 ‘후 3년 반 환난 전에, 대환난에 있는 성도들에게 은혜와 소망을 주는 내용’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계시록의 목적이 재앙과 짐승을 크게 보이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주님의 나라가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선언이 더욱 중심으로 이동합니다. ‘세상 나라가 주님의 나라가 되었다’는 것은 장차 어떤 정치적 세계정부가 예수님의 지상 왕국으로 교체된다는 의미보다 더 깊습니다. 인간과 교회 안에서 자기애와 거짓이 다스리던 상태가 끝나고 주님의 선과 진리가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왕권은 강제로 사람을 복종시키는 정치적 권력이 아니라 신적 사랑과 지혜의 통치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왕 노릇하신다는 것은 한 사람 안에서도 실제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돈이 왕이었습니다. 명예가 왕이었습니다. 자기 판단이 왕이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무엇이 내게 유리한가?’보다 ‘무엇이 주님 보시기에 선한가?’를 먼저 묻기 시작합니다. 그때 그 사람 안에서 세상 나라가 조금씩 주님의 나라가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일곱째 나팔은 세계정치의 미래만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왕권 교체를 선언하는 말씀으로도 살아납니다.

 

강사는 일곱째 나팔을 ‘셋째 화’라고 부르지만, 그 장면 속에서 오히려 하늘은 감사와 경배로 가득합니다. 스물네 장로가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며 언약궤가 보입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밖에서는 심판이지만 안에서는 주님의 질서가 회복되고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의 양면성입니다. 악과 거짓에게는 ‘화’이지만 선과 진리에게는 해방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마지막 심판 이해와 잘 맞습니다. 심판은 선한 사람들에게 공포의 날이 아니라 오히려 오랫동안 거짓과 악의 압박 아래 있던 사람들이 해방되는 날입니다. 옛 교회의 거짓이 제거되고 새 교회가 세워질 수 있도록 영적 환경이 정돈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셋째 화’와 ‘주님의 왕국’이 같은 장면에서 함께 나타나는 것은 모순이 아닙니다. 동일한 신적 진리가 악에는 심판으로, 선에는 구원으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고 언약궤가 보인다’는 장면 역시 이 관점에서 아름답습니다. 성전은 가장 깊게는 주님의 신적 인성을, 그리고 천국과 교회를 표상합니다. 언약궤는 그 안에 있는 주님과 인간의 결합, 특히 십계명에 담긴 신적 진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결합을 생각하게 합니다. 교회의 마지막에 성전이 열린다는 것은 주님에 관한 참된 이해와 말씀의 내적인 것이 다시 열리는 상태를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재림과도 연결됩니다. 옛 교회에서 말씀의 속뜻이 닫히고 외적 문자와 교리만 남았던 상태가 마지막에 이르면 주님께서 다시 성전을 여십니다. 문자 안에 감추어져 있던 언약궤, 곧 신적 진리가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바로 이런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열리는 것이 주님의 두 번째 오심과 깊이 연결됩니다.

 

따라서 8강 6부의 일곱째 나팔은 ‘적그리스도의 후 3년 반 통치를 시작시키는 신호’만으로 보기에 너무 풍성합니다. 그 안에는 교회의 마지막, 선과 진리의 증거와 죽음, 그것의 부활, 심판과 분리, 그리고 주님의 왕권과 말씀의 내적 성전이 다시 열리는 거대한 영적 질서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번 강의에서 강사가 말하는 ‘대환난은 성도를 정결케 하는 광야’라는 관점도 이 흐름과 연결됩니다. 다른 강의 대목에서 그는 계시록 12장 6절의 여자가 1,260일 동안 광야에서 양육받는 것을 특정 피난처가 아니라 ‘영적으로 정결케 하는 기간’으로 풀이합니다. ‘페트라 같은 특별한 피신처가 아니라 양육하는 기간이며, 광야는 정결케 하는 과정’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 대목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강사의 종말론은 대단히 문자적이지만, ‘광야’에서는 오히려 지리적 장소보다 영적 연단의 상태를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와 꽤 깊은 접점이 있습니다. 말씀에서 ‘광야’는 진리가 부족하고 시험이 있는 상태를 나타내면서, 동시에 사람이 자기 proprium에서 벗어나 주님만을 의지하도록 준비되는 중요한 거듭남의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곧장 들어가지 않고 광야를 통과해야 했던 것처럼, 사람도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천국적 질서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시험을 겪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미래의 정확한 1,260일에 한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거듭나는 사람에게 광야 상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전에 누리던 영적 기쁨이 사라지고, 진리가 멀게 느껴지며,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이 드러나고, 주님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광야에서 만나가 내리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듯, 사람은 자기 힘이 아닌 주님의 선과 진리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강사가 ‘대환난을 대비하여 미리 육적인 소유를 비워야 한다’고 권면하는 것을 조금 더 보편적인 거듭남의 언어로 바꾸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언젠가 찾아올 광야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주님의 섭리 안에서 끊임없이 proprium을 내려놓는 광야의 훈련이기 때문에 오늘 모든 것을 주님의 것으로 알고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특정 종말 시간표에 동의하지 않는 독자도 강사의 영적 권면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한 적그리스도와 짐승의 시대를 지나치게 바깥에서만 찾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강사는 ‘마지막 때에 진리로 밝고 정확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우리도 끌려갈 수 있다’고 강하게 경고합니다. 이 경고 자체는 귀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어느 이단 지도자에게 끌려갈까’를 넘어 ‘내 proprium과 내가 사랑하는 거짓에 끌려갈 수 있다’는 데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지 않는 거짓에는 잘 속지 않습니다. 어떤 거짓이 힘을 가지는 것은 그것이 내 욕망을 만족시키기 때문입니다. 돈을 사랑하면 번영을 보장하는 거짓에 끌리고,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으면 ‘너는 선택받은 엘리트’라는 교리에 끌리며, 남을 지배하고 싶으면 절대 복종을 정당화하는 신학에 끌립니다. 그래서 거짓과 싸우려면 지적 분별만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살펴야 합니다. 거짓의 뿌리는 흔히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666과 짐승 문제를 읽을 때도 핵심이 됩니다. 사람은 ‘짐승의 표가 어떤 기술일까?’를 연구하면서도 이미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표를 마음에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반대로 미래의 어떤 외적 표식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어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며 악을 죄로 알고 피하는 사람은 주님의 질서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계시록의 가장 깊은 관심은 손이나 이마에 붙는 물리적 장치보다 인간의 의지와 생각이 누구에게 속했는가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마’는 지배적 사랑을, ‘손’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능력과 행위를 나타내는 상응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짐승의 표를 이마와 손에 받는다는 것은 거짓된 교리와 악한 사랑을 마음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실제 행위로 살아가는 상태가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이름이 이마에 기록된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이 지배적 사랑이 되고, 그 사랑에서 선한 행위가 나오는 상태입니다. 문제는 결국 누구의 사랑과 진리가 내 의지와 삶을 지배하는가입니다.

 

8강 6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1장의 두 증인과 일곱째 나팔은 미래 후 3년 반에 일어날 두 예언자의 순교와 적그리스도 통치의 시간표로만 읽기보다,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의 참된 증거가 거짓에 의해 죽은 것처럼 되었다가 주님에 의해 다시 살아나며, 옛 교회의 지배가 끝나고 주님의 선과 진리가 새 교회 안에서 왕권을 회복하는 영적 과정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장에서 가장 희망적인 문장은 짐승이나 ‘화’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결국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라는 선언입니다. 종말의 중심은 적그리스도의 승리가 아니라 주님의 승리입니다. 용과 짐승이 아무리 크게 보이더라도 계시록 전체의 주인공은 어린양이십니다. 계시록을 읽은 뒤 적그리스도가 더 크게 보인다면 아직 계시록의 중심에 이르지 못한 것이고, 끝으로 갈수록 주님이 더 크게 보인다면 비로소 이 말씀의 방향을 따라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의 ‘마지막 때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요청도 이렇게 바꾸어 들을 수 있습니다. ‘미래 적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아맞히기 위해 깨어 있으라’가 아니라 ‘오늘 내 안에서 선과 진리를 갈라놓고,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떼어 놓으며, proprium을 왕으로 세우려는 모든 움직임 앞에서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야말로 계시록이 말하는 가장 현재적인 ‘이기는 자’의 길일 것입니다.



8강 7부

해를 입은 여자와 큰 붉은 용 : ‘이스라엘의 환난’인가, 새 교회의 탄생을 둘러싼 영적 전쟁인가

8강 7부에서는 계시록 12장이 본격적으로 중심에 놓입니다. 강사는 계시록 12장 1절의 ‘해를 입은 한 여자’, 발 아래의 달, 머리 위의 열두 별의 면류관, 그리고 이어지는 해산의 고통을 매우 중요하게 취급합니다. 실제로 강의 후반에는 ‘계시록 12장 1절을 잘 이해해야 그 뒤의 내용이 정리된다’고 거듭 강조하며, 12장을 마친 뒤에도 다시 1절로 돌아가 ‘해를 입은 여자’부터 재정리합니다. 이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계시록 12장은 여자와 아이, 용, 미가엘과 천사들, 광야, 뱀이 토해 내는 물, 그리고 여자의 남은 자손까지 하나의 거대한 영적 드라마가 펼쳐지는 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장에서 ‘핵심진리’의 종말론적 독법과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밝힘’이 가장 선명하게 서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강사의 전체 구조에서 ‘여자’는 특히 마지막 때의 이스라엘과 연결됩니다. 앞선 설명에서 전 3년 반은 이스라엘이 연단받는 기간이며, 이 시기 두 증인의 사역을 통하여 완악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받아들이게 된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 로마서 11장의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과 다니엘 12장의 연단과 정결을 연결합니다. 그리고 계시록 12장 6절의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여 1,260일 동안 양육받는 것을, 단순한 물리적 피난처라기보다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양육되고 정결하게 되는 기간으로 풀이합니다. 이 대목은 흥미롭습니다. 강사의 계시록 해석이 전체적으로 상당히 문자적이고 미래적인데도, 여기서 ‘광야’를 페트라 같은 특정 피난처로 보지 않고 ‘영적으로 정결케 되는 과정’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강사 자신도 ‘예비하신 곳’은 어떤 특별한 장소라기보다 ‘양육하는 기간’이며, 광야는 정결의 과정이라고 명시합니다.

 

바로 이 ‘여자’에서 스베덴보리의 해석은 매우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에서 ‘여자’는 일반적으로 교회를 표상합니다. 좋은 의미에서는 주님께 속한 교회, 반대 의미에서는 타락한 교회를 나타냅니다. 계시록 12장의 여자는 ‘해를 입고’ 있으므로 무엇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 있는 새 교회를 표상합니다. ‘해’는 주님의 신적 사랑을, ‘달’은 그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신앙 또는 보다 외적인 진리를, ‘열두 별’은 교회의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지식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단순히 미래 어느 시기의 자연적 이스라엘 민족을 그려 놓은 그림이라기보다, 주님의 사랑과 진리 안에서 새롭게 일어나는 교회 전체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특히 ‘해를 입었다’는 표현은 아름답습니다. 여자가 자기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해를 ‘입고’ 있습니다. 교회도 자기에게서 사랑과 진리를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교회의 모든 생명과 빛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여자가 해를 입었다는 것은 새 교회가 주님의 신적 사랑으로 둘러싸이고 그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자기 교리나 자기 조직이나 자기 전통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유입됨을 인정해야 한다는 매우 깊은 말씀입니다.

 

‘발 아래의 달’ 역시 흥미롭습니다. 이것을 단순히 천체적 장식으로 볼 필요가 없습니다. 해가 사랑의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낸다면 달은 해의 빛을 반사하듯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과 진리의 보다 외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발 아래’ 있다는 것은 그러한 외적 신앙과 문자적 진리가 교회의 더 내적인 사랑을 섬기는 질서 안에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진리는 사랑을 섬겨야 합니다. 진리가 사랑 위에 올라가 주인이 되면 교회의 질서가 뒤집힙니다. 이것은 우리가 AC 창세기 4장에서 보고 있는 ‘가인’, 곧 사랑과 분리된 신앙의 문제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신앙은 살아 있으려면 사랑 아래, 곧 사랑에서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머리의 ‘열두 별의 면류관’도 같은 질서를 보여 줍니다. ‘열둘’은 말씀에서 교회에 속한 선과 진리의 모든 것을 나타냅니다.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 새 예루살렘의 열두 문과 열두 기초석이 같은 영적 문법 안에 있습니다. 별은 진리에 관한 지식과 인식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열두 별의 면류관은 새 교회가 주님의 선과 진리에 관한 충만한 지식으로 장식되어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열둘’을 자연적 숫자만으로 읽지 않고 교회의 충만함으로 읽는 스베덴보리의 일관된 수의 상응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여자는 아름답고 평안하게만 서 있지 않습니다.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습니다.’ 새 교회는 아무 저항 없이 탄생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새롭게 주어지고 교회가 새로 일어날 때 반드시 거짓과 악의 저항이 일어납니다. ‘해산’은 말씀에서 새로운 선과 진리의 탄생과 관련됩니다. 한 사람의 거듭남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영적 의지가 생겨나는 데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낡은 proprium과 새 생명이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시록 12장의 해산은 단지 한 여인이 미래에 특정한 아이를 낳는 사건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새 교회를 일으키실 때 영계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영적 싸움을 보여 주는 표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강사의 해석에서는 이 여자가 낳는 ‘남자 아이’와 이스라엘의 구원, 그리고 마지막 때의 종말적 사역이 하나의 시간표 안에서 연결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이 ‘남자 아이’는 특정한 한 인간 지도자를 뜻하지 않습니다. 계시록 12장의 핵심 아르카나에서 이 아이는 새 교회의 교리, 특히 주님에 관한 참된 교리와 신앙의 진리를 표상합니다. 왜 ‘남자’인가 하면 말씀에서 남성은 일반적으로 진리와 이해성의 측면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자’라고 한 것은 이 진리가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 있는 강력한 신적 진리로 거짓을 심판하고 질서 있게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강사의 ‘철장 권세’ 이해와도 차이가 생깁니다. 강사는 ‘이기는 자들’, 곧 처음 익은 열매들이 장차 천년왕국의 분봉왕처럼 만국을 다스리며, 아마겟돈 심판 때 주님과 함께 철장 권세를 행사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해석에서는 철장이 특별한 성도들에게 주어진 매우 강한 통치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철장’은 사람을 강압적으로 다스리는 천국의 권력이라기보다 말씀의 문자에 있는 신적 진리의 힘을 나타냅니다. ‘철’은 자연적 차원의 진리, 특히 문자적 진리의 강함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철장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새 교회의 참된 교리가 말씀의 문자에서 오는 강력한 진리로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 무너뜨리는 것을 뜻합니다.

 

이 차이는 중요합니다. 천국에서 높은 성도가 낮은 사람을 강한 권력으로 지배한다는 그림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의 질서와 맞지 않습니다. 천국의 통치는 사랑과 지혜, 그리고 쓰임의 질서입니다. 가장 높은 천사일수록 지배하려는 욕망이 없으며 오히려 섬기는 기쁨이 큽니다. 따라서 ‘철장 권세’를 영적 엘리트에게 주어지는 강제 통치권으로 읽기보다 신적 진리가 거짓을 이기는 권능으로 읽는 편이 훨씬 천국적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를 삼키려고 기다리는 ‘큰 붉은 용’이 등장합니다. 계시록 12장은 이 용을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설명합니다. 강사는 이를 실제 사탄과 그의 악령 세계의 활동으로 이해하며, 이어지는 미가엘과 용의 싸움도 실제 영계에서 미가엘 천사장과 사탄의 세력이 벌이는 전쟁으로 설명합니다. 강의에서도 12장 7절부터 12절을 명시적으로 ‘미가엘과 용의 싸움’이라고 정리하고, ‘하늘에서 전쟁이 붙는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 전쟁이 영적 전쟁이라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용’을 단순히 한 개인적 사탄의 모습으로만 보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계시록의 ‘용’은 기독교 세계 안에서 형성된 거짓 교리의 한 큰 체계, 특히 하나님을 세 인격으로 나누어 생각하고 신앙을 체어리티와 삶에서 분리하여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해석입니다. 계시록 12장의 전쟁이 단지 천사와 악마 사이의 초자연적 전쟁이 아니라, 새 교회가 주님에 관한 참된 이해와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을 세우려 할 때 기존의 거짓 교리가 그것을 공격하는 영적 전쟁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왜 ‘옛 뱀’이라는 말이 사용되는지도 깊어집니다. 창세기 3장의 뱀은 감각적인 것과 자기 지성에 의지하여 주님의 질서를 의심하고 왜곡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옛 뱀’이 등장한다는 것은 창세기에서 시작된 동일한 영적 문제가 교회의 마지막까지 이어진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감각적 추론과 proprium이 신적 진리 위에 서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와 계시록은 아주 먼 두 책처럼 보이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하나의 영적 드라마로 이어집니다.

 

강사의 ‘사탄’ 이해와도 여기서 구별이 필요합니다. 강의에서는 마귀와 사탄, 나아가 루시퍼를 악령 세계의 최고 통치자 같은 한 개인적 존재로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마귀’와 ‘사탄’은 흔히 지옥 전체 또는 서로 다른 종류의 지옥적 악과 거짓을 집합적으로 가리킵니다. 모든 지옥 위에 한 명의 ‘루시퍼 왕’이 군림하는 구조가 아닙니다. 각각의 지옥 공동체는 같은 지배적 사랑을 가진 영들의 집단이고, 그 전체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악한 인간과 같은 질서를 이룹니다. 따라서 미가엘과 용의 전쟁 역시 ‘두 초월적 군주의 군대가 우주에서 맞붙는 전쟁’으로만 이해하기보다 천국의 신적 진리와 지옥의 거짓된 교리 사이의 싸움으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미가엘’은 무엇일까요? 미가엘은 물론 실제 천사적 존재와 공동체와 관련될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설에서는 이름 하나가 단순한 개인 이름 이상의 표상적 의미를 갖습니다. 미가엘은 주님의 신적 인성을 인정하고 주님을 한 분 하나님으로 예배하는 사람들과 천사들의 진리를 나타내는 방향으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미가엘과 용의 싸움’은 한편에서는 주님을 신적 인성 안에서 한 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진리와, 다른 한편에서는 하나님을 분리하고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떼어 놓는 거짓 사이의 싸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계시록 12장은 스베덴보리의 전체 신학과 놀랄 만큼 중심적으로 연결됩니다. ‘여자’는 새 교회입니다. ‘해’는 주님의 신적 사랑입니다. ‘남자 아이’는 그 새 교회의 참된 교리입니다. ‘용’은 그 교리를 공격하는 거짓된 기독교 교리입니다. ‘미가엘’은 주님과 주님의 신적 인성을 인정하는 진리를 옹호하는 천국적 세력입니다. 그리고 이 싸움의 결과 용은 하늘에서 쫓겨납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탄이 어느 날 공간적으로 천국에서 지상으로 추락하는 사건이라기보다, 마지막 심판을 통해 거짓된 종교적 세력이 영계의 중간 영역에서 더 이상 천국의 외관을 유지하지 못하고 자기와 맞는 지옥으로 분리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의 1757년 마지막 심판 이해와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 이전 중간영계에는 겉으로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고 외적 경건을 보였기 때문에 일종의 ‘가상 천국’ 같은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지만, 내적으로는 악과 거짓을 사랑하던 수많은 영들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심판에서 그 외관이 벗겨지고 내적 상태가 드러나면서 그들은 더 이상 높은 곳에 머물 수 없게 되었고, 자신과 같은 지옥적 공동체로 분리되었습니다. 계시록에서 ‘하늘에서 용과 그의 천사들의 있을 곳을 다시 얻지 못하였다’는 표현은 이런 영적 심판의 질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강사의 설명에서도 용이 땅으로 내어쫓긴 뒤 성도들을 더욱 극렬하게 박해한다는 긴장이 강조됩니다. 후 3년 반에는 적그리스도가 42개월 동안 권세를 받아 예루살렘을 짓밟고 성도들을 미혹하고 박해하며, 짐승의 표와 우상숭배가 본격화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체계에서는 용의 추락이 미래 대환난 후반부의 정치적·종교적 박해를 촉발하는 사건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장면을 교회의 새 진리가 나타날 때 거짓이 더욱 격렬하게 저항하는 상태로 봅니다. 거짓은 진리가 나타나지 않을 때는 조용히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본질을 폭로하는 진리가 나타나면 강하게 저항합니다.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그렇습니다. 어떤 악이 있다는 사실을 모를 때는 별 갈등이 없습니다. 말씀의 진리가 그것을 분명히 비추어 ‘이것은 죄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악을 사랑하는 proprium이 강하게 반발합니다. 그때 실제 영적 시험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용의 분노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습니다. 용이 단지 미래 어느 날 나타날 초자연적 괴물이라면 우리는 그 장면의 구경꾼입니다. 그러나 용이 자기 지성과 자기 의를 진리 위에 두려는 상태,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고집하는 상태라면 그 용은 우리 각 사람 안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새 진리를 받아들이려 할 때 ‘내가 지금까지 믿어 온 것이 틀렸다는 말인가?’, ‘내가 쌓아 온 신앙 체계가 무너지는 것 아닌가?’ 하는 강한 방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때가 용과 새 교회의 싸움이 한 사람 안에서 반복되는 순간일 수 있습니다.

 

계시록 12장의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는 대목은 이런 관점에서 매우 아름답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강사도 광야를 단순한 지리적 피난처로만 보지 않고 정결과 양육의 기간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 상당히 깊이 만납니다. 광야는 진리가 풍성하지 않고 시험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사람을 보호하고 양육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반석의 물을 마셨듯, 새 교회도 처음에는 외적으로 약하고 공격받는 것처럼 보여도 주님으로부터 필요한 선과 진리를 공급받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새 교회가 처음부터 세상의 중심적인 거대한 조직으로 출발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새 교회는 처음에는 소수에게서, 심지어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서 조용히 시작될 수 있습니다. ‘광야’라는 말은 외적인 힘과 인정이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직접 보호하시고 양육하시는 상태를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교회의 힘은 숫자나 제도에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1,260일’도 강사는 전 3년 반이라는 실제 종말 기간과 연결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이런 수는 일정한 영적 상태의 충만함을 나타내므로 자연적 달력으로만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특히 계시록에서 ‘마흔두 달’, ‘1,260일’,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같은 표현들이 반복되는 것은 어떤 교회 상태가 완전한 한 주기에 이르지만 아직 완전성 자체는 아닌 제한된 상태를 나타내는 방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확히 몇 년 몇 월인가’보다 그 기간 동안 무엇이 영적으로 이루어지는가입니다.

 

그리고 강사는 ‘대환난은 성도를 연단받게 하고 정결케 하는 과정’이라는 점을 매우 강조합니다. 광야에 가면 용과 짐승과 음녀 같은 악의 세력이 활동하고, 바로 그것들이 성도의 싸움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강사의 해석에서 상당히 귀한 부분입니다. 다만 ‘왜 하나님께서 마귀를 붙여 놓으셨는가? 우리를 성숙시키고 정결하게 하시려고’라는 식의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에서는 조금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악을 만들어 인간에게 붙이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의 proprium과 지옥으로부터 일어나는 악을 자유 때문에 허용하시며, 그 허용된 악까지 거듭남을 위해 선으로 굽히시는 것입니다. 시험을 허용하시는 것과 악을 직접 보내시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계시록 12장 11절의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은 이 모든 장면의 중심을 보여 줍니다. 승리는 인간의 강함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어린양의 피’와 ‘증언하는 말씀’으로 이깁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피’는 주님의 신적 진리, 특히 주님에게서 나오는 구원의 진리와 깊이 관련됩니다. 따라서 용을 이기는 힘은 인간 자신의 종교적 열심이나 영적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도 반드시 육체적 순교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자기 proprium의 생명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가 옳아야 한다’, ‘내가 인정받아야 한다’,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자기 생명을 붙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값진 진주 비유에서 살펴본 자기 소유를 다 파는 것과 연결됩니다. 참된 영적 승리는 자기 자신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생명과 선이 나온다는 착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미가엘과 용의 싸움’은 놀랍도록 현재적인 말씀이 됩니다. 말씀을 읽을 때마다 우리 안에서도 작은 전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진리는 ‘용서하라’고 하고 proprium은 ‘저 사람은 용서할 자격이 없다’고 합니다. 진리는 ‘네 공로를 주장하지 말라’고 하고 proprium은 ‘내가 얼마나 수고했는데’라고 합니다. 진리는 ‘주님에게서 모든 선이 온다’고 하고 proprium은 ‘그래도 내가 선택하고 내가 해냈다’고 말합니다. 이런 수많은 순간 속에서 미가엘과 용의 싸움이 작은 형태로 반복됩니다.

 

그래서 계시록 12장을 읽으며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용은 저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지옥은 실제이며 악령도 실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전쟁을 단순한 심리 현상으로 축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령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그들과 호응하는 proprium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애가 전혀 없다면 자기애의 지옥은 우리를 붙잡을 수 없습니다. 거짓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거짓의 유입도 뿌리를 내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외부의 마귀를 알아내는 것만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 마귀와 호응하는 사랑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강사는 계시록 12장을 마친 뒤 13장부터 ‘후 3년 반 직전 또는 후 3년 반의 모습’이 본격화된다고 정리하며, 13장에 등장하는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을 적그리스도와 연결합니다. 여기서부터 8강의 다음 큰 주제인 ‘두 짐승과 666’으로 넘어갑니다. 강사의 해석에서는 첫째 짐승이 기독교 세계를 배경으로 등장하는 미래의 적그리스도이며, 일곱 머리와 열 뿔은 유럽의 정치적 연합과 연결됩니다. 실제 강의에서 적그리스도는 공산국가나 아랍 국가가 아니라 ‘기독교 국가’에서 등장하며, 열 나라로 갈라진 유럽이 통합되는 배경에서 활동한다고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8강 7부는 13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매우 중요한 경계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사의 렌즈에서는 계시록 12장이 ‘이스라엘의 연단과 사탄의 하강, 후 3년 반의 적그리스도 시대를 준비하는 영계 전쟁’을 보여 준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주님의 사랑으로 둘러싸인 새 교회와 그 교리의 탄생, 그것을 소멸하려는 용으로 표상된 거짓된 기독교 교리와의 싸움, 마지막 심판을 통한 용의 축출, 그리고 광야에서 보호받으며 자라나는 새 교회’를 보여 주는 장입니다.

 

두 해석 모두 ‘싸움’을 봅니다. 두 해석 모두 교회가 아무 저항 없이 완성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두 해석 모두 영계의 실재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두 해석 모두 끝내 주님의 편이 승리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싸움의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가 다릅니다. 하나는 미래 대환난의 이스라엘과 적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고, 다른 하나는 교회의 선과 진리, 특히 주님에 관한 참된 교리와 체어리티를 공격하는 거짓의 영적 상태를 중심으로 합니다.

 

여기에서 강사의 ‘광야에서 양육되고 정결해진다’는 강조는 특별히 오래 남길 만합니다. 문자적 종말 시간표는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다르지만, 사람은 시험을 통해 자기의 실상을 보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법을 배운다는 그 중심은 거듭남의 질서와 깊이 만납니다. 광야의 목적은 사람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양육하는 것입니다. 계시록도 ‘여자를 죽이기 위해 광야로 보냈다’고 하지 않고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시험을 바라보는 매우 중요한 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광야에서도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서 이 상태에서 내 안의 무엇을 보여 주시고, 무엇을 내려놓게 하시며, 어떤 선과 진리를 새롭게 형성하고 계시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고통을 하나님께서 직접 보내신 훈련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어떤 고통도 주님의 섭리 밖으로 벗어나지는 않으며, 주님께서는 허용된 것을 거듭남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해를 입은 여자’의 그림을 마지막으로 다시 바라보면, 계시록 12장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흔히 이 장에서는 무서운 붉은 용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나 말씀은 용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먼저 해를 입은 여자를 보여 줍니다. 악보다 먼저 주님의 사랑이 있고, 용보다 먼저 교회가 있으며, 전쟁보다 먼저 새 생명의 탄생이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지옥의 공격은 주님의 새 일을 좌절시키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공격 속에서도 아이는 하나님과 그 보좌 앞으로 들려 올라가고, 여자는 광야에서 보호받으며, 용은 결국 하늘에서 쫓겨납니다.

 

따라서 계시록 12장의 중심은 ‘용이 얼마나 무서운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새 교회를 어떻게 보호하시는가’입니다. 악의 힘을 크게 보는 책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를 크게 보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강사의 종말론을 따라갈 때에도 잊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적그리스도와 짐승과 666에 대한 설명이 앞으로 훨씬 강렬해지겠지만, 그 모든 것보다 먼저 계시록의 중심에는 해와 같은 주님의 사랑과 어린양의 승리가 있습니다.

 

8강 7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2장의 해를 입은 여자와 남자 아이, 큰 붉은 용과 미가엘의 전쟁은 미래 어느 시기의 이스라엘과 사탄 사이에서만 벌어질 종말 사건이라기보다, 주님의 사랑과 진리로 세워지는 새 교회와 그 교리를 소멸하려는 거짓된 신앙 사이의 영적 전쟁, 그리고 마지막 심판을 통하여 그 거짓이 분리되고 새 교회가 주님의 보호 아래 양육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장을 한 인간의 거듭남으로 가져오면 더욱 가까워집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새로운 선과 진리를 낳으려 하실 때, 오래된 proprium과 거짓은 그것을 삼키려 합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내가 더 강한 용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양의 피와 증언하는 말씀’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진리가 내 안에서 싸우게 하고, 나는 그 진리 편에 서서 악을 죄로 알고 거절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용은 조금씩 그 자리를 잃고, 새 교회는 멀리 어느 미래에만이 아니라 한 사람의 마음 안에서도 태어나기 시작합니다.



8강 8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666 : 미래의 한 적그리스도인가,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 만들어 내는 ‘인간적 지성’인가

계시록 12장에서 ‘해를 입은 여자’와 큰 붉은 용의 싸움을 살펴본 강의는 이제 13장으로 넘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적그리스도’와 ‘666’의 정체를 다룹니다. 강사는 12장을 마무리한 뒤 ‘13장부터 이제 후 3년 반 직전의 모습’으로 들어간다고 정리하고, 13장 1절의 ‘바다에서 올라오는 한 짐승’을 미래의 적그리스도로 규정합니다. 이어 적그리스도는 공산국가나 아랍 국가에서 등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독교 국가’에서 등장하며, 열 나라로 갈라져 있던 유럽이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되는 정치적 배경 위에서 출현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짐승의 열 뿔은 그 정치적 세력을, 일곱 머리와 열 면류관은 그의 세계적 권세를 나타내는 방향으로 읽습니다. 이 대목은 지금까지 강사가 구축해 온 종말 시간표가 계시록 13장에서 구체적인 정치적 인물과 체제로 응축되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강사의 설명을 먼저 그 자체로 이해하면 구조는 상당히 선명합니다. ‘바다’는 세상이며, 그 세상에서 한 짐승이 올라옵니다. 그런데 계시록 13장 18절에는 이것이 ‘사람의 수’라고 되어 있으므로, 강사는 이 짐승을 결국 ‘사람인데 짐승 같은 사람’, 곧 적그리스도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적그리스도가 열 나라의 정치적 권력을 등에 업고 등장하여 후 3년 반 동안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강사의 관점에서 666은 막연한 악의 상징이 아니라 마지막 시대에 등장할 특정 인물과 그의 체제를 알아보게 하는 매우 중요한 종말론적 표지입니다.

 

이러한 해석이 왜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강한 흡인력을 가지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계시록의 극적인 환상들이 미래 세계정세와 직접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짐승이 누구인가’, ‘열 뿔은 어느 나라들인가’, ‘666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가’를 찾기 시작하면 계시록이 마치 미래 세계사의 암호문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강사의 해설도 이런 방향에서 매우 체계적입니다. 계시록 12장의 용, 13장의 짐승, 뒤의 거짓 선지자와 음녀, 그리고 적그리스도를 하나의 악의 체계 안에 배치하여 듣는 이가 전체 그림을 쉽게 기억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계시록 13장에 들어가면, 여기에서 매우 큰 방향 전환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우선 미래 어느 한 정치 지도자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짐승’은 인간의 자연적·감각적 차원, 특히 신앙의 문제를 자연적 추론과 인간적 지성으로 다루면서 말씀의 신적 진리를 왜곡하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더욱 구체적으로는 계시록 12장의 ‘용’이 나타내는 교리, 곧 신앙을 체어리티와 분리하는 교리가 자연적 사람 안에서 확증되고 체계화된 모습을 이 첫째 짐승이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 용이 교리적 원리라면 짐승은 그 원리가 인간의 자연적 사고와 추론 속에서 무장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AC 창세기 4장에서 살펴보고 있는 ‘가인’의 문제와도 놀라울 만큼 깊게 연결됩니다. ‘가인’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표상합니다. 신앙은 본래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하지만, 그것이 독립하여 ‘나는 사랑 없이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면 신앙은 자기 본질을 잃습니다. 계시록의 용과 짐승, 그리고 666 역시 스베덴보리에게는 바로 이 문제와 깊이 연결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떨어져 나와 인간의 지성과 논리로 자기 독립성을 방어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적그리스도’를 찾는 방향도 달라집니다. 강사의 렌즈에서는 ‘그 사람이 미래 어느 나라에서 나오는가?’가 중요한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상태가 교회 안에서 어떻게 형성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고백하면서도 주님의 계명에 따라 사는 것을 구원과 분리하고,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떼어 놓으며, 말씀보다 인간의 교리적 추론을 높인다면 그 상태는 이미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방향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는 반드시 교회 밖에서 노골적으로 예수를 부정하는 사람의 모습으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그 안의 생명인 사랑과 선을 제거할 때 훨씬 알아보기 어려운 적그리스도적 상태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적그리스도는 오히려 기독교 국가에서 등장한다’고 한 것은 뜻밖에도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 볼 만합니다. 강사는 이것을 미래 정치 지도자의 출신 배경으로 말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훨씬 더 내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계시록의 가장 심각한 거짓은 기독교 밖의 무지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말씀과 주님을 알고 있는 교회 안에서 그 진리를 왜곡할 때 생깁니다. 빛을 전혀 받지 못한 사람보다 빛을 받은 뒤 그것을 자기 욕망에 맞게 뒤집는 상태가 영적으로 더 심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짐승이 기독교 세계 안에서 나타난다’는 강사의 직관은 정치지리적 적용을 벗겨 내면 상당히 의미 있는 경고가 됩니다.

 

‘바다’의 의미에서도 두 독법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강사는 계시록 17장의 ‘많은 물’을 세상 사람들과 연결하여 바다를 ‘세상’이라고 풀이합니다. 이것은 문자적 상징 해석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바다는 특히 교회의 보다 외적이고 자연적인 상태, 자연적 지식과 기억지식이 있는 영역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바다에서 짐승이 올라온다’는 것은 거짓 교리가 단순히 지옥에서 완성된 형태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연적 사고와 감각적 추론에서 힘을 얻어 올라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악을 사랑하면 그 악을 정당화할 논리가 반드시 생깁니다. 자기 공로를 사랑하면 ‘나는 이만큼 했으니 인정받아야 한다’는 논리가 나오고, 지배를 사랑하면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는 진리를 왜곡하여 자기 지배욕을 신성화할 수 있습니다. 교리적 우월감을 사랑하면 ‘우리가 진리를 가졌으므로 다른 사람을 멸시해도 된다’는 식의 태도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악한 사랑이 자연적 지성과 결합하여 자기를 방어하기 시작할 때 ‘바다에서 짐승이 올라오는 것’과 같은 영적 형상이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짐승의 ‘일곱 머리’와 ‘열 뿔’도 특정 국가 숫자를 찾는 문제로만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에서 ‘머리’는 지혜나 지성, 또는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된 지성을 나타낼 수 있고, ‘뿔’은 능력을 나타냅니다. ‘일곱’과 ‘열’도 완전함이나 전체, 많은 것과 관련된 수의 의미를 가집니다. 따라서 일곱 머리와 열 뿔은 거짓된 교리가 인간의 지성과 능력을 총동원하여 강력하게 확증된 상태를 보여 주는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의 잘못된 교리도 수많은 논리와 성경구절과 전통적 권위를 붙여 매우 거대한 체계로 만들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참람된 이름’이 중요합니다. 강사는 이를 적그리스도의 하나님 대적과 연결합니다. 그 자체로 충분히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하나님의 것’을 인간의 것으로 돌리는 것이 가장 깊은 참람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선이 주님에게서 오는데 ‘내 선’이라고 하고, 진리가 주님에게서 오는데 ‘내 지혜’라고 하며, 말씀의 권위를 자기 교리 체계의 권위로 바꾸는 것입니다. proprium이 신적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 인간은 말로 하나님을 높이면서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높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666으로 가는 중요한 길입니다. 강사의 해석에서는 666이 결국 미래 적그리스도라는 ‘한 사람’을 식별하는 수입니다. 계시록 13장 18절의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는 말씀을 ‘사람인데 짐승 같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읽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에게 바로 이 ‘사람의 수’라는 표현이 오히려 결정적입니다. ‘사람’은 말씀에서 지혜와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를 나타낼 수 있는데, 여기서는 그것이 왜곡된 상태, 곧 신앙의 진리를 인간적 지성으로 측정하고 판단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666을 단순한 개인의 이름을 숫자로 환산한 암호로 보지 않습니다. 특히 ‘6’이 세 번 반복되는 구조는 신앙의 진리가 선에서 분리되어 불완전하게 된 상태가 충만해진 것을 나타내는 방향으로 읽습니다. ‘6’은 ‘7’에 앞서는 수입니다. 7이 거룩함과 완성, 선과 진리의 충만한 결합을 나타낸다면, 6은 그 완성에 이르지 못한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666으로 충만하게 확증될 때, 신앙은 겉으로 대단히 완성된 신학 체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체어리티와 결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명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666은 나쁜 숫자’라는 식으로 단순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계시록의 수는 마술적 숫자가 아닙니다. 어떤 물건에 666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지옥적인 것도 아니고, 신용카드나 바코드나 컴퓨터 시스템에 우연히 666이 들어갔다고 영적으로 오염되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의 수는 영적인 질을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666의 위험은 외부의 세 자리 숫자보다 ‘신앙을 사랑과 삶에서 분리하는 교리와 상태’에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666은 훨씬 가까워지고 오히려 훨씬 엄중해집니다. 미래의 누군가를 기다리면 나는 그 짐승과 무관한 사람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체어리티와 분리하려는 상태는 지금 내 안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교리는 정확히 알아야 하지만 실제 삶은 그다음 문제다’, ‘예수를 믿었으니 어떻게 살든 구원과는 별개다’, ‘나는 진리를 알고 있으므로 사랑이 좀 부족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오는 순간 666의 영적 원리가 이미 가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스베덴보리를 읽는 사람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신앙만’을 비판하면서 정작 스베덴보리의 교리 지식을 자기 우월감의 근거로 삼는다면 구조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AC 번호를 많이 알고, 상응을 많이 설명하고, ‘계시록 밝힘’의 해석을 정확하게 말하면서도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기독교인을 멸시한다면, 진리는 다시 체어리티에서 분리됩니다. 교리 내용은 달라졌어도 ‘가인’의 원리는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 자체를 적용할 때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강사의 ‘핵심진리’에도 바로 이 대목에서 귀하게 살릴 요소가 있습니다. 공용복 선생의 가르침과 이 강의는 계속해서 ‘행실’, ‘연단’, ‘정결’, ‘자기 소유를 내려놓음’, ‘이기는 자’를 강조해 왔습니다. 즉 신앙을 단순한 교리적 동의로 끝내지 않고 실제 삶의 변화와 연결하려는 긴장이 매우 강합니다. 이 점에서는 오히려 666을 ‘사랑과 분리된 신앙’이라고 보는 스베덴보리와 대화할 수 있는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강사의 종말 시간표에는 동의하지 않더라도, ‘입술로만 믿고 삶이 변하지 않는 신앙은 충분하지 않다’는 중심적 문제의식은 귀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계시록 13장에는 첫째 짐승뿐 아니라 땅에서 올라오는 둘째 짐승도 등장합니다. 첫째 짐승이 정치적 적그리스도라면 강사의 체계에서 둘째 짐승은 그를 돕는 종교적 세력, 곧 거짓 선지자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뒤로 갈수록 적그리스도, 거짓 선지자, 666, 큰 음녀 등이 하나의 종말적 악의 연합으로 연결됩니다. 앞선 강의에서도 강사는 ‘적그리스도, 두 짐승, 666, 발락, 발람, 음녀들이 다 짝’이라는 식으로 여러 성경의 인물과 이미지를 하나의 모형 구조 안에 배치했습니다. 이 방식은 ‘핵심진리’ 특유의 종합적 모형론을 잘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둘째 짐승 역시 특정 미래 종교지도자 한 사람이라기보다 첫째 짐승의 거짓된 원리를 성경과 교리의 외관으로 정당화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특히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어린양처럼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겉모습은 어린양과 비슷합니다. 기독교적이고 경건해 보입니다. 그러나 말하는 것은 용의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거짓 종교의 가장 위험한 모습입니다. 노골적인 악보다 선의 모습으로 위장한 거짓이 훨씬 분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처럼 보이나 용처럼 말한다’는 한 표현 안에 계시록 13장의 영적 위험이 거의 압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예수, 은혜, 복음, 성경, 구원이라는 언어를 그대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 교리의 실제 결과가 체어리티를 제거하고 삶의 변화를 불필요하게 만들며 인간의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그대로 보존한다면, 외형은 어린양인데 말은 용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리를 판단할 때 단지 ‘예수라는 말을 많이 하는가’를 넘어 그 교리가 사람을 주님과 이웃 사랑으로 이끄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가 왜 ‘신앙만으로’ 교리를 그토록 심각하게 다루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신앙’이 나쁘기 때문이 아닙니다. 신앙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진리가 없으면 사람은 무엇이 선인지 알 수 없습니다. 문제는 ‘만으로’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홀로 구원한다고 주장할 때, 신앙은 자기 생명의 근원인 사랑을 밀어내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창세기 4장의 아르카나와 연결됩니다. 진리가 사랑을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666을 피한다’는 말도 새로운 의미를 갖습니다. 미래의 특정 표식을 기술적으로 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내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을 배우면 그 진리를 실제 삶으로 내려보내야 하고, 진리를 말할수록 더 겸손해야 하며, 교리를 알수록 다른 사람의 선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바로 그 진리가 proprium과 결합하여 짐승의 힘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계시록 13장의 ‘표’를 이 관점에서 보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짐승의 표를 ‘오른손이나 이마’에 받는다고 합니다. 이마는 앞서 14만 4천의 ‘하나님의 이름이 이마에 기록된다’는 말씀에서도 보았듯 지배적 사랑과 의지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손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능력과 행위와 관련됩니다. 따라서 짐승의 표를 이마와 손에 받는다는 것은 거짓된 원리를 마음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실제 행동으로 살아가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인을 이마에 받는다는 것은 주님 사랑이 지배적 사랑이 되고, 그 사랑으로부터 선한 행위가 나오는 상태입니다. 결국 계시록에는 두 종류의 ‘표’가 있는 셈입니다. 하나는 주님의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짐승의 이름입니다. 문제는 피부에 어떤 글자가 찍히는가보다 내 의지와 삶이 무엇에 의해 형성되고 있는가입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짐승의 표가 후 3년 반에 등장할 실제 제도와 연결되며, 그것을 받지 않으면 매매할 수 없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게 됩니다. 이런 문자적 긴장 때문에 강사는 지금부터 세상 소유를 내려놓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 권면의 중심은 앞 6부에서도 보았듯 충분히 귀하게 살릴 수 있습니다. 다만 이유를 조금 더 깊게 할 수 있습니다. 미래의 특정 경제 통제를 견디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돈과 소유가 우리의 지배적 사랑이 되면 이미 세상 사랑의 ‘표’가 우리 의지와 행위에 찍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돈을 잃는 것이 두려워 진리를 버린다면, 문제는 아직 666이라는 기술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도 이미 드러났습니다. 명예를 지키기 위해 거짓말하고, 직위를 유지하기 위해 양심을 거스르고, 사람의 인정 때문에 주님의 진리를 숨긴다면 ‘매매’의 원리는 영적으로 이미 작동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팔고 자기 유익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의 표를 미래로만 밀어낼수록 오히려 오늘의 영적 선택을 놓칠 수 있습니다.

 

‘매매’도 말씀에서 흥미로운 상응을 갖습니다. 진리를 얻고 나누는 일과 관련하여 ‘사고판다’는 표현이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매매하지 못한다’는 것을 자연경제의 봉쇄만이 아니라 진리를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특정 거짓 교리의 인정 아래 통제되는 상태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거짓 체계가 교회를 지배하면 그 체계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진리를 말할 자격을 박탈당하고, 그 안에 속한 사람만 신학적 권위를 인정받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도 교회 안에서 여러 형태로 반복되어 온 문제입니다.

 

이렇게 보면 짐승의 권세는 정치적 독재보다 더 미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사고 자체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이 틀 밖에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교리를 의심하면 구원받지 못한다’, ‘우리 체계와 다른 진리는 들을 가치가 없다’고 하는 순간 인간의 영적 자유가 억압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진리를 강제로 받아들이게 하지 않으시는데, 종교가 강제로 사고를 통제한다면 오히려 짐승적 질서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짐승’이라는 표현의 본질도 보입니다. 인간이 참으로 인간다운 것은 이성 그 자체 때문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지혜가 결합될 때 인간은 천국적 인간이 됩니다. 그러나 지성이 사랑에서 분리되고 감각과 욕망을 섬기기 시작하면 인간의 이성은 짐승적 차원으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계시록은 ‘사람의 수’이면서 동시에 ‘짐승의 수’라고 말합니다. 인간적 지성이 신적 진리에서 독립하여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삼을 때 인간은 겉으로는 매우 지성적이면서 영적으로는 짐승의 상태가 될 수 있다는 엄중한 그림입니다.

 

여기에는 현대를 향한 매우 깊은 경고도 있습니다. 과학과 철학과 기술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이성은 주님께서 주신 귀한 능력입니다. 문제는 이성이 자기보다 높은 신적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참이다’라고 선언할 때입니다. 감각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고, 사랑과 선보다 효율과 힘을 절대화하며, 인간의 욕망을 가장 높은 가치로 만드는 순간 이성은 더 이상 천국을 섬기지 않고 짐승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666의 가장 깊은 반대는 어떤 다른 숫자가 아니라 ‘주님의 이름’입니다. 자기 지혜를 신뢰하는 대신 주님의 지혜를 받고, 자기 사랑을 중심으로 사는 대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지 않고 실제 삶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계시록은 공포스러운 숫자를 연구하라고 주어진 책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묻는 말씀입니다.

 

이 지점에서 강사의 ‘마지막 때에 진리를 분명히 알아야 미혹되지 않는다’는 권면도 충분히 살릴 수 있습니다. 다만 ‘진리를 안다’는 것을 종말 시간표의 정확한 지식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계시록 13장에서 미혹을 이기는 가장 깊은 진리는 ‘적그리스도가 어느 나라에서 나오는가’를 맞히는 지식보다 주님이 누구이신지,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 신앙과 체어리티가 왜 분리될 수 없는지를 생명으로 아는 것입니다.

 

진리를 생명으로 아는 사람은 거짓이 아무리 그럴듯한 기독교 언어로 나타나도 어느 정도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거짓이 사랑과 겸손과 자유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종말론 지식을 매우 많이 가지고 있어도 자기애와 공포와 집단적 우월감이 강하다면 다른 형태의 미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진리는 머리뿐 아니라 사랑을 밝히는 빛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번 ‘스베덴보리의 렌즈’ 작업에서도 중요한 균형을 요구합니다. 강사의 666 해석을 읽으며 ‘아, 이것은 문자적이구나. 스베덴보리는 더 깊게 안다’고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 순간 스베덴보리의 지식이 새로운 자기 지혜가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666의 해설을 읽을수록 ‘나는 신앙을 실제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살고 있는가? 내가 아는 진리가 사람을 사랑하게 하는가? 아니면 내가 남보다 옳다는 느낌을 강화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666의 말씀을 정말 ‘먹은’ 것이 됩니다.

 

8강 8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3장의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과 666은 미래 유럽에서 등장할 한 정치적 적그리스도와 그의 개인 식별번호를 예언한 말씀으로만 읽기보다, 교회 안에서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고 그 분리된 신앙이 인간의 자연적 지성과 추론에 의해 강력하게 확증되어 마침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대적하는 완성된 거짓의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을 때 그 아르카나가 더욱 깊게 열립니다.’

 

그리고 이 해석의 유익은 분명합니다. 666을 미래로 밀어내지 못하게 합니다. ‘나는 그 시대에 살지 않을지도 모르니 상관없다’고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오늘 진리를 사랑에서 분리할 때, 오늘 자기 지성을 주님의 말씀보다 높일 때, 오늘 교리를 가지고 이웃을 멸시할 때, 오늘 외적 신앙으로 내 악한 사랑을 덮을 때, 바로 그 자리에서 짐승의 원리가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오늘 작은 체어리티 하나를 선택하고, 알고 있는 진리 하나를 실제로 살며, 악 하나를 주님께 죄라고 인정하여 피하고, 자기 공로 하나를 내려놓을 때 우리는 다른 표를 받아 갑니다.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주님의 이름이 조금씩 이마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계시록의 마지막 전쟁은 결국 ‘어떤 숫자를 몸에 받을 것인가’보다 ‘어떤 사랑을 생명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관한 싸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8강 9부

땅에서 올라온 둘째 짐승과 짐승의 표 : 미혹의 절정과 ‘이마와 손’에 새겨지는 것

8강 9부에서는 계시록 13장의 후반부로 들어가면서 첫째 짐승에 이어 ‘땅에서 올라오는 다른 짐승’이 등장합니다. 앞에서 강사는 바다에서 올라온 첫째 짐승을 후 3년 반 동안 세계를 지배할 적그리스도로 이해했습니다. 이제 둘째 짐승은 그 적그리스도의 권세를 뒷받침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첫째 짐승을 경배하게 하는 종교적 존재로 등장합니다. 이 둘째 짐승은 ‘어린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는’ 자이며, 큰 이적을 행하고 사람들을 미혹하며, 마침내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게 하고 짐승의 표를 받게 합니다. 따라서 강사의 종말론적 구조에서는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미혹이 결합하여 후 3년 반의 세계적 통제 체제를 완성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강사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미혹’입니다. 마지막 시대의 악은 처음부터 악의 얼굴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계시록 자체가 둘째 짐승을 ‘어린양같이’ 보인다고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그리스도와 비슷하고 종교적이며 신령한 능력까지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용처럼’ 말합니다. 따라서 강사의 관심은 단순히 미래 정치체제를 알아맞히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마지막 때에 나타날 초자연적 현상과 이적에 압도되어 그것을 하나님의 역사라고 오인하지 않도록 ‘진리로 분별해야 한다’는 경고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다만 둘째 짐승을 미래의 한 거짓 선지자라는 개인에게 집중하기보다, 거짓된 교리가 종교적 외관과 말씀의 외관을 이용하여 자신을 정당화하는 상태로 들어가 봅니다. 첫째 짐승이 신앙을 체어리티와 분리한 교리를 자연적 이성과 추론으로 확증하는 상태라면, 둘째 짐승은 그러한 거짓을 마치 하나님의 진리인 것처럼 말씀으로 입증하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계시록은 이 짐승을 단순히 무섭게 생긴 괴물로 그리지 않고 ‘어린양같이’ 보인다고 합니다.

 

이 표현은 계시록 13장의 핵심을 찌릅니다. 거짓이 ‘나는 거짓이다’라고 말하며 오면 분별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거짓이 성경을 들고, 주님을 말하고, 복음을 말하고, 은혜와 구원을 말하면서 들어오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외관만 보면 어린양입니다. 문제는 ‘용처럼 말한다’는 데 있습니다. 겉으로 사용하는 종교적 언어가 아니라 그 가르침이 실제로 어디로 사람을 이끄는가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특히 ‘신앙만으로’라는 교리와 관련하여 매우 예민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의 공로’, ‘은혜’, ‘믿음’, ‘구원’이라는 말 하나하나는 모두 기독교의 귀한 언어입니다. 그러나 그 언어들을 사용하여 ‘그러므로 사람이 어떻게 사는가는 구원과 본질적인 관계가 없다’, ‘체어리티와 선한 삶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라는 결론으로 간다면, 외관은 어린양과 같으나 그 결과는 주님의 계명과 삶을 신앙에서 분리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리가 사용하는 단어만 보지 말고 그 교리가 만들어 내는 영적 생명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바울이나 개신교 전체를 간단히 ‘둘째 짐승’이라고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나 교단에 표찰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드러나는 영적 원리를 살피는 것입니다. 어느 교단 안에서든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며 악을 죄로 알고 피하는 사람에게는 살아 있는 신앙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를 읽는 사람도 교리를 지식으로만 붙들고 체어리티가 없다면 같은 분리의 원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계시록의 짐승은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기 전에 우리 자신의 신앙 상태를 비추는 거울이어야 합니다.

 

둘째 짐승은 큰 이적을 행합니다.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합니다. 강사의 종말론에서는 이것을 후 3년 반에 실제로 일어날 초자연적 이적으로 이해하며, 그러므로 이적을 보고 참과 거짓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이 경고 자체는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에서도 이적의 존재 자체가 그 가르침의 진실성을 자동으로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온다’는 것은 더 내적으로 읽힙니다. 좋은 의미의 불은 주님의 신적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가 불을 내려오게 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신적 사랑과 천국적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짓된 외관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자기애와 지배욕에서 나온 열정인데도 그것을 ‘성령의 불’, ‘하나님의 열심’이라고 포장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외적 종교적 열광과 내적 사랑을 구별해야 한다는 매우 섬세한 경고가 됩니다.

 

사람이 격렬하게 기도한다고 해서 반드시 사랑이 깊은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열정적으로 가르친다고 해서 반드시 체어리티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놀라운 영적 경험을 했다고 해서 그 경험의 근원이 자동으로 천국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현상의 분별에서 중요한 것은 그 현상이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겸손과 자유, 선한 쓰임으로 이끄는가 하는 것입니다. 열매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이번 ‘핵심진리’ 강의를 읽을 때도 적용해야 할 원칙입니다. 공용복 선생이나 강사들의 영적 체험 여부를 가지고 그 가르침의 진위를 결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천국을 보았는가, 영계를 체험했는가, 특별한 계시를 받았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 가르침의 내용이 무엇이며 그것이 주님의 말씀과 어떻게 관계하는가입니다. 공용복 선생 자신과 관련하여 목사님께서 오래 기억하고 계셨던 ‘선생님은 천국을 실제로 가보셨지요?’라는 질문 앞에서 그가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는 일화도, 바로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조심스럽게 남겨 두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 침묵을 ‘갔다 왔다는 인정’으로도, ‘아니라는 부정’으로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실제로 무엇을 가르쳤는가입니다.

 

계시록 13장의 둘째 짐승은 첫째 짐승의 ‘우상’을 만들게 합니다. 여기서 ‘우상’은 매우 깊은 주제입니다. 자연적으로 우상은 사람이 만들어 놓고 신이라고 섬기는 형상입니다. 영적으로는 인간이 자기 지성과 자기 교리를 절대화하여 신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도 우상숭배가 될 수 있습니다. 본래 교리는 말씀을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교리 체계가 말씀 자체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모든 성경을 그 체계에 맞추어 읽기 시작하면 인간이 만든 ‘형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계시록에는 바로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말하게 한다’는 기묘한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거짓 교리가 처음에는 인간이 만들어 낸 죽은 체계에 불과하지만, 계속해서 말씀의 구절들을 끌어와 확증하면 마침내 살아 있는 진리처럼 말하기 시작하는 상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먼저 만들어 놓은 교리가 성경을 대신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한 교파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역시 조심해야 합니다. 심지어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했다’는 문장이 말씀보다 앞서기 시작하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은 말씀의 내적 의미를 열어 주는 귀한 도구이지만, 목적은 언제나 주님과 말씀을 더 깊이 보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주님을 가리는 렌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렌즈는 대상을 더 분명히 보기 위한 것이지 렌즈 자체를 바라보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어 둘째 짐승은 모든 사람에게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합니다. 강사의 설명에서는 이 ‘짐승의 표’가 후 3년 반의 실제적인 세계 통제 수단이 됩니다. 그 표가 없으면 매매할 수 없으며, 따라서 적그리스도에게 굴복하지 않는 성도들은 경제활동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극단적 상황을 맞습니다. 그래서 강사는 앞서부터 반복하여 ‘지금부터 소유를 내려놓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미래에 집과 돈과 직장과 심지어 가족을 잃을 수 있기 때문에 지금부터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청지기 의식을 길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권면은 종말 시간표와 분리해도 상당히 귀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표’ 자체의 의미를 더 깊이 살펴봅니다. 왜 하필 ‘이마’와 ‘손’일까요? 말씀에서 신체 부위도 상응합니다. 이마는 사람의 가장 내적인 사랑, 특히 지배적 사랑을 나타냅니다. 얼굴은 내적 상태가 밖으로 드러나는 곳이고, 그 가운데 이마는 의지와 사랑의 방향을 표상합니다. 손은 능력과 행위를 나타냅니다. 사람이 사랑하는 것은 결국 손으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짐승의 표를 ‘이마’에 받는다는 것은 그 거짓과 악을 사랑과 의지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손’에 받는다는 것은 그것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계시록의 표는 단순한 외적 표지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과 삶 전체를 말합니다. 무엇을 사랑하는가, 그리고 그 사랑에 따라 무엇을 행하는가입니다.

 

이것은 계시록의 다른 ‘표’와 정확히 대조됩니다. 계시록 7장에서는 하나님의 종들이 이마에 인을 받고, 14장에서는 어린양과 함께 있는 사람들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계시록은 처음부터 끝까지 두 종류의 표를 대조합니다. 짐승의 이름과 주님의 이름입니다. 결국 인간의 이마에는 무엇인가가 기록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지배적으로 사랑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영적 얼굴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에서는 이것이 더욱 실제적입니다. 지상에서는 사람의 내면을 어느 정도 감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후에는 외적 얼굴이 점차 내적 사랑과 일치하게 됩니다. 사람이 평생 무엇을 사랑했는지가 그의 영적 형상에 드러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마에 기록된다’는 것은 임의로 붙였다 떼는 스티커 같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반복적으로 사랑하고 선택한 것이 마침내 그의 생명의 형상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짐승의 표는 어느 날 갑자기 강제로 찍히는 것만을 두려워할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은 매일 조금씩 자기 이마와 손에 무엇인가를 새기며 살아갑니다. 돈을 최고의 선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에 따라 반복적으로 행동하면 세상 사랑이 생명에 새겨집니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기쁨을 사랑하고 계속 그렇게 행동하면 지배욕이 새겨집니다. 반대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기뻐하며 반복해서 살아가면 천국적 사랑이 생명에 새겨집니다.

 

여기에서 ‘매매하지 못하게 한다’는 말씀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강사는 이를 실제 경제적 통제로 읽습니다. 미래 적그리스도의 세계에서 표가 없으면 물건을 사고팔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사고판다’는 것은 말씀에서 진리를 습득하고 전달하는 것과 관련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사고 팔지 말라’는 성경적 표현도 그런 영적 배경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짐승의 표가 없는 사람은 매매하지 못한다는 것은 거짓된 교리 체계가 지배하는 교회에서 그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진리를 가르치거나 배우는 자격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사에서 낯선 일이 아닙니다. 어떤 교리 체계가 절대적 권위를 가지면 그 체계 밖에서 성경을 읽는 사람은 이단으로 취급될 수 있습니다. 질문 자체가 금지되고, 기존 교리와 다른 해석을 말하는 순간 공동체에서 배제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진리는 자유롭게 교류되지 못합니다. ‘표를 가진 사람’만 매매할 수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교리적 경계나 이단 분별 자체를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는 반드시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인간이 만든 교리 체계를 절대화하여 말씀 자체가 새롭게 들려올 가능성까지 차단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이성을 폐기하지 않으시며 강제로 신앙을 주입하지도 않으십니다. 참된 신앙에는 자유가 필요합니다. 진리는 자유 속에서 받아들여져야 사람의 생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사의 ‘표를 받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경고는 매우 강합니다. 문자적으로 계시록 14장도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표를 받는 것에 대해 엄중한 심판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이유가 외적 표식 자체에 어떤 마술적 저주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이 이마와 손, 곧 사랑과 행위로 악과 거짓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외부에서 임의로 부과되는 형벌이라기보다 사람이 스스로 형성한 사랑의 상태가 사후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 이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보시고 ‘너는 666을 받았으니 지옥으로 보내겠다’고 외적으로 판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평생 사랑하고 선택한 것이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이 되고, 사후에는 그 사랑과 같은 공동체를 자유롭게 찾아갑니다. 선을 사랑한 사람은 천국적 공동체에서 숨을 쉬듯 편안함을 느끼고, 악을 사랑한 사람은 지옥적 공동체에서 자기 생명의 즐거움을 느낍니다. ‘표’는 바로 그 사람이 누구에게 속했는지를 나타내는 영적 성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666이 다시 등장합니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강사의 종말론에서는 이것이 미래 적그리스도를 식별할 수 있는 매우 구체적인 표지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세어 보라’는 말도 단순한 숫자 계산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세다’는 것은 어떤 것의 질을 살피고 알아보는 것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는 것은 이름을 숫자로 환산하여 특정 정치인의 이름을 찾아내라는 암호풀이보다, 그 짐승이 나타내는 영적 상태의 질이 무엇인지 지혜롭게 분별하라는 요청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수’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인간은 본래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 지혜로워질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성을 주님에게서 분리하여 자기 지성으로 만들면 바로 그 ‘사람의 것’이 짐승적인 것이 됩니다. 그래서 666은 인간 지성 자체를 정죄하는 숫자가 아니라, 신적 진리에서 분리된 인간적 지성이 신앙의 일을 판단하고 확증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지점에서 ‘가인’이 다시 떠오릅니다. 가인도 처음에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얻은 사람’이라고 불릴 만큼 기대 속에서 등장합니다. 신앙은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는 순간 문제가 시작됩니다. 가인은 결국 아벨을 죽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지성도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섬길 때는 귀한 도구이지만,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면 진리를 죽일 수 있습니다. 창세기 4장의 가인과 계시록 13장의 짐승 사이에는 이런 깊은 영적 평행이 있습니다.

 

그래서 666의 반대편에는 단순히 ‘777’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666 대신 777을 선택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계시록이 보여 주는 실제 반대편은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입니다. 하나는 자기 지성과 자기 사랑을 중심으로 형성된 생명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 형성된 생명입니다.

 

이 차이는 ‘누구를 예배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예배는 주일에 누구에게 찬송하는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가장 사랑하고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모든 판단의 최종 기준으로 삼는 것이 실질적으로 그의 예배 대상이 됩니다. 입으로 주님을 부르면서 돈이 모든 결정의 최종 기준이라면 실질적 삶에서는 돈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자기 명예를 위해 사람을 이용한다면 자기 자신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짐승에게 ‘경배한다’는 것도 반드시 미래 어느 동상 앞에 절하는 장면에만 국한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짓을 진리로 인정하고 그 거짓에 따라 사는 것이 영적 의미의 경배가 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참이라고 인정하고, 무엇을 선이라고 사랑하며, 무엇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지가 곧 예배입니다.

 

강사의 종말론이 가진 장점 가운데 하나는 이런 말씀을 매우 ‘실제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강사는 계시록을 막연한 상징으로 흐리지 않습니다. ‘정말 그런 때가 온다면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재산과 직장과 생명을 잃더라도 주님을 선택할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이것은 듣는 사람에게 상당한 긴장을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긴장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로 가져옵니다. ‘언젠가 적그리스도가 나타났을 때 나는 주님을 선택할 것인가?’라고 묻기 전에 ‘오늘 작은 이익과 진리가 충돌할 때 나는 무엇을 선택하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거대한 대환난의 선택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의 지배적 사랑은 수많은 작은 선택을 통해 형성됩니다.

 

만원의 이익 때문에 작은 거짓말을 할 것인가, 자존심 때문에 사과하지 않을 것인가,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공정하게 대할 것인가, 아무도 보지 않을 때도 정직할 것인가, 내 교리와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선을 인정할 것인가. 이런 선택들이 영적 이마와 손에 조금씩 무엇인가를 기록합니다.

 

이렇게 보면 ‘짐승의 표’는 공포의 교리라기보다 거듭남의 엄숙한 말씀으로 바뀝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느 날 마지막 순간에 갑자기 영적 성품을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날마다 진리를 보여 주시고 자유롭게 선택할 기회를 주십니다. 악을 죄로 알고 피할 때마다 주님께서는 그 자리에 선을 형성하시고, 거짓을 물리칠 때마다 진리를 더욱 깊게 심으십니다.

 

여기에서 리메인스의 원리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주님께서 우리 안에 저장하신 선과 진리의 상태들은 훗날 시험 가운데 우리를 붙드는 중요한 기반이 됩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짐승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심어 두신 선과 진리를 사용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단순히 ‘내가 결심해서 강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 안에 보존하신 것을 통해 나를 이끌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강사의 ‘마지막 때에 미혹되지 않으려면 진리를 알아야 한다’는 권면도 여기서 더욱 깊어집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적그리스도의 특징을 암기하고 종말의 순서를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진리는 사람의 사랑을 변화시킵니다. 진리를 알수록 겸손해지고, 주님을 더 의지하며, 이웃을 더 사랑하고, 악을 더 분명하게 죄로 알아 피하게 된다면 그 진리는 살아 있습니다.

 

반대로 진리를 많이 알수록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우리만 안다’는 우월감이 강해지고, 두려움과 적대감이 커진다면 무엇인가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리는 주님에게서 오므로 본질적으로 선과 결합하기를 원합니다. 선과 결합되지 않은 진리는 아직 인간의 기억과 지성 안에 머물 뿐 생명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 점에서 이번 ‘핵심진리’를 읽는 우리의 자세도 중요합니다. 강사의 종말 시간표와 스베덴보리의 해석이 상당히 다르다고 해서 어느 한쪽을 조롱하거나 재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강사가 붙들고 있는 중심적 열망, 곧 ‘주님께 끝까지 충성하고 미혹되지 않으며 실제 삶에서 정결하게 살아야 한다’는 요청은 충분히 귀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종말론적 도식을 말씀의 상응과 내적 의미를 통해 더 깊은 거듭남의 질서로 옮겨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해야 할 일이지, 사람을 판정하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특히 공용복 선생의 ‘핵심진리’가 단순히 미래 사건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기는 데 머물지 않고 ‘정결’, ‘연단’, ‘행실’, ‘자기 소유를 내려놓음’을 계속 강조한다는 점은 기억할 만합니다. 종말론의 외적 구조는 스베덴보리와 크게 다르지만, 진리가 실제 삶이 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는 만날 수 있는 지점이 있습니다. 바로 그 접점을 살리면서 차이는 차이대로 분명히 하는 것이 가장 공정한 해설일 것입니다.

 

8강 9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3장의 둘째 짐승과 짐승의 표는 미래 후 3년 반에 한 거짓 선지자가 초자연적 이적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적그리스도의 경제통제 표식을 받게 하는 사건으로만 읽기보다, 체어리티와 분리된 거짓 신앙이 어린양과 같은 기독교적 외관과 말씀의 권위를 이용하여 자신을 진리처럼 보이게 하고, 마침내 사람의 지배적 사랑인 ‘이마’와 실제 삶인 ‘손’을 점유하는 영적 과정을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을 때 더욱 깊은 의미가 열립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질문은 결국 ‘666이 무엇으로 만들어질 것인가?’보다 ‘오늘 내 이마와 손에는 무엇이 새겨지고 있는가?’입니다. 내 마음이 무엇을 가장 사랑하고 있는가, 그리고 내 손은 그 사랑을 따라 무엇을 하고 있는가입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점점 지배적 사랑이 되고 그것이 실제 쓰임과 체어리티로 나타난다면, 요한계시록의 종말은 단지 두려운 미래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이미 시작된 새 창조의 이야기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8강 10부

14만 4천과 어린양, 세 천사의 복음과 마지막 추수 : 계시록의 결론은 ‘공포’가 아니라 ‘사랑의 완성’입니다

8강 10부에서는 계시록 13장의 두 짐승과 666이라는 어두운 장면을 지나 계시록 14장으로 넘어가면서 분위기가 크게 전환됩니다. 13장 마지막에서는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면 매매조차 할 수 없는 것처럼 악의 세력이 세상을 완전히 장악한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14장이 열리자 요한의 시선은 즉시 어린양에게로 옮겨갑니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이것은 계시록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순서입니다. 말씀은 짐승에게 마지막 말을 주지 않습니다. 666 다음에 어린양이 나타나고, 짐승의 표 다음에 주님의 이름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계시록의 중심을 짐승과 적그리스도와 666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 모든 어둠을 통과하여 결국 보여 주려는 것은 어린양의 승리입니다.

 

강사의 종말론적 구조에서 14만 4천은 매우 특별한 무리입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구원받는 모든 성도와 동일한 무리가 아니라, 마지막 시대에 특별히 준비되고 정결하게 된 ‘처음 익은 열매’, 곧 이기는 자들의 무리로 이해됩니다. 강사는 앞선 강의들에서도 이들을 대환난을 통과하여 특별한 위치에 이르는 성도들과 연결했고, 장차 주님과 함께 철장 권세를 행사하며 천년왕국에서 특별한 통치적 역할을 담당하는 자들로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14만 4천’은 강사의 전체 구원론 안에서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모든 구원받은 사람이 동일한 영적 성숙과 상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연단과 정결을 통해 특별히 준비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사람마다 영적 상태와 천국의 쓰임이 같지 않다는 점은 충분히 인정됩니다. 천국에는 무수한 공동체가 있고 각 사람은 자신의 지배적 사랑과 선의 질에 따라 자기에게 맞는 공동체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이것을 몇몇 영적 엘리트가 다른 사람들 위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계급구조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천국의 높음은 지배의 높음이 아니라 사랑과 쓰임의 깊이입니다. 가장 높은 천사일수록 ‘내가 높은 자다’라는 의식으로 다른 천사를 지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받은 선을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데서 가장 큰 기쁨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14만 4천을 ‘특권적 통치계급’으로 보기보다 그 숫자가 나타내는 영적 질을 먼저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144,000은 ‘12×12×1,000’이라는 구조를 갖습니다. 말씀에서 ‘열둘’은 교회에 속한 선과 진리의 모든 것을 나타내며,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 새 예루살렘의 열두 문과 열두 기초석도 같은 상응의 질서에 있습니다. 그것이 다시 열둘과 결합하고 천이라는 충만함의 수로 확대됩니다. 따라서 14만 4천은 자연적 산술로 정확히 144,000명만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충만한 상태를 나타내는 수로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이들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바로 앞 장에서 짐승의 표가 이마와 손에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계시록 13장과 14장은 의도적으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습니다. 한쪽에는 짐승의 이름이 있고 다른 쪽에는 어린양과 아버지의 이름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마는 사람의 지배적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이 이마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천국 입장권 같은 표식을 붙였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으로 형성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름’ 역시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말씀에서 이름은 그 존재의 질, 곧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이름이 사람에게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주님의 성품을 자기 힘으로 소유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 그것이 그의 생명 안에 형성되었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자비로우시므로 그 사람도 자비를 배우고, 주님께서 용서하시므로 그 사람도 용서하며,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므로 그 사람도 이웃의 선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름이 이마에 기록된다는 것은 이렇게 주님의 질이 인간의 사랑 안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13장의 ‘짐승의 표’와 14장의 ‘어린양의 이름’ 사이의 대조가 매우 분명해집니다. 문제는 미래 어느 날 우리의 피부에 무엇이 새겨지는가가 아니라 평생 무엇이 우리의 지배적 사랑이 되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중심이 되어 모든 진리를 자기 유익에 맞게 사용하는가, 아니면 주님과 이웃 사랑이 중심이 되어 진리를 선한 쓰임을 위해 사용하는가입니다. 계시록의 마지막 싸움은 결국 두 사랑 사이의 싸움입니다.

 

14만 4천은 ‘새 노래’를 부릅니다. 그런데 그 노래는 아무나 배울 수 없고 오직 그들만 배울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어떤 비밀 지식이나 천국의 특수한 암호처럼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에서 노래는 기쁨 가운데 이루어지는 진리의 고백과 관련됩니다. 특히 ‘새 노래’는 새로운 교회에서 주님을 새롭게 인정하고 예배하는 기쁨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무나 배울 수 없다는 것은 지적인 암기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진리와 같은 사랑의 상태에 있지 않으면 그 진리의 내적 기쁨을 실제로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누구나 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을 해친 사람을 주님 안에서 용서해 본 사람에게 이 말씀은 전혀 다른 ‘노래’가 됩니다.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교리도 머리로는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공로를 내려놓는 시험을 통과하면서 실제로 주님만을 의지하게 된 사람에게 그 말씀은 생명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국의 새 노래는 지식이 아니라 삶으로 배우는 노래입니다.

 

이어 14만 4천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고 묘사됩니다. 이것을 자연적 성관계나 독신의 문제로 문자적으로만 읽으면 계시록의 의미가 크게 좁아집니다. 말씀에서 음행과 간음은 영적으로 선과 진리를 왜곡하고 거짓과 결합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순결하다’는 것은 결혼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를 거짓과 섞지 않고 보존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영적 순결의 본질은 진리가 선과 올바르게 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은 14만 4천의 본질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 주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들의 특징은 미래 사건을 누구보다 정확히 예측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어린양을 따라간다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진리로 인도하실 때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따르며, 선으로 인도하실 때 자기 욕망을 내려놓고 따르는 것입니다. 결국 계시록에서 ‘이기는 자’의 본질은 특별한 종말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따라 삶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이들은 ‘사람 가운데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강사는 이 ‘처음 익은 열매’를 특별한 이기는 자들과 연결합니다. 이 해석에는 귀하게 살릴 부분이 있습니다. 영적 생명에도 성숙이 있고,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를 열매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처음 익은 열매’를 다른 구원받은 사람보다 높은 특권계층이라는 방향으로 가져가기보다, 주님께서 새 교회 안에서 처음 형성하시는 선과 진리의 상태로 보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질서에 더 가깝습니다.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것은 자연적 인간이 절대 한 번도 실수하지 않는 완전무결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라기보다, 그의 내적 의도가 주님께 향하고 진리와 선을 의도적으로 왜곡하지 않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천국의 완전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흠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악을 인정하고 주님께서 그것을 제거하시도록 끊임없이 돌아서는 데 있습니다.

 

이제 계시록 14장에는 세 천사가 차례로 등장합니다. 첫째 천사는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으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강사의 종말론에서는 이것이 마지막 심판을 앞둔 최후의 복음 선포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짐승의 권세가 극에 달한 바로 그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 장면은 매우 중요합니다. ‘영원한 복음’의 중심은 특정한 종말 시간표가 아닙니다. ‘창조주를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경배는 앞서 보았듯 단순한 종교의식보다 깊습니다. 무엇을 가장 사랑하고 삶의 최종 기준으로 삼는가입니다. 짐승은 인간의 자기 지성과 자기 사랑을 경배하게 하지만 천사는 모든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두 예배의 근본적 차이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것도 공포에 떨라는 뜻으로만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에서 거룩한 두려움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거스르는 것을 두려워하는 상태로 깊어질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벌이 무서워 부모에게 순종하는 단계에서 부모를 사랑하기 때문에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은 단계로 자라는 것과 비슷합니다.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형벌의 공포는 점차 사랑에서 오는 거룩한 경외로 바뀝니다.

 

둘째 천사는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라고 외칩니다. 강사의 전체 종말론에서 바벨론과 큰 음녀는 마지막 시대의 타락한 종교 체계와 연결됩니다. 앞으로 계시록 17장과 18장에서 더욱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겠지만, 여기서 이미 그 심판이 선언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바벨론은 매우 분명한 영적 원리를 가집니다.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사람을 지배하려는 사랑, 곧 종교를 자기 권력과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매우 무서운 악입니다. 세상 권력을 원하는 사람이 정치권력을 추구하는 것은 적어도 그 성격이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과 말씀과 교회의 권위를 이용하여 사람의 양심까지 지배하려 한다면 훨씬 깊은 차원의 왜곡이 일어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높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중심에는 ‘내가 사람 위에 서고 싶다’는 지배욕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은 특정 교단 하나를 손쉽게 가리키는 표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적으로 어떤 교회 안에서 그런 구조가 강하게 나타났는지를 논할 수는 있지만, 영적 의미의 바벨론은 어느 종교 공동체에서든 발생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가 성도들의 양심을 자기에게 종속시키고, 교회 지도자가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나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구조를 만들며, 종교적 권위를 자기 명예와 지배를 위해 사용한다면 바벨론의 원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 안에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전하면서 은밀히 ‘저 사람이 내 말을 인정했으면 좋겠다’는 욕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상대가 주님께 가까워지는 것보다 ‘내가 옳다는 것을 인정받는 것’을 더 원한다면 아주 작은 형태로나마 바벨론의 씨앗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모든 심판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셋째 천사는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나 손에 표를 받는 사람들에게 엄중한 심판을 선언합니다. 강사의 해석에서는 후 3년 반 동안 실제 짐승의 표를 받는 사람들의 최종 운명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13장의 경고를 더욱 강화합니다. 경제적 생존 때문에 표를 받는 선택이 일시적으로는 편안해 보여도 영원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말씀을 외적 표식 때문에 하나님께서 분노하여 형벌을 가하시는 장면으로 보기보다, 악과 거짓을 의지와 행위로 자기 생명에 받아들인 결과가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사후의 상태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지옥의 고통은 주님께서 분노하여 만들어 내시는 고문이 아니라 악한 사랑 자체가 천국의 질서와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불과 유황’ 같은 계시록의 강렬한 표현도 같은 방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불은 좋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사랑이지만 반대 의미에서는 자기애와 악한 욕망의 불을 나타냅니다. 유황도 악에서 나오는 거짓과 그 욕망의 파괴적 성질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옥의 불은 하나님께서 밖에서 붙이는 물리적 불이라기보다 악한 사랑 자체가 가진 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애와 지배욕과 복수심이 사람을 안에서 태우는 것입니다.

 

이어 매우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신앙을 지키는 자니라.’ 이 한 구절은 지금까지의 666 논의를 정리하는 데 대단히 중요합니다. 짐승의 반대편에 서 있는 성도는 단지 ‘표를 받지 않은 사람’이라고 정의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신앙’을 함께 지키는 사람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결합을 특별히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계명’과 ‘신앙’입니다. 삶과 신앙입니다. 선과 진리입니다. 체어리티와 신앙입니다. 어느 하나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상태가 짐승의 핵심이라는 해석과 정확히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참된 성도의 인내는 ‘나는 믿는다’는 고백만이 아니라 주님의 계명을 실제로 지키면서 그 신앙을 생명으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강사의 ‘핵심진리’가 계속 행실과 정결과 이기는 삶을 강조해 온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종말론적 도식은 스베덴보리와 크게 다르지만, 적어도 ‘입술의 신앙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문제의식에서는 상당한 접점이 나타납니다. 바로 이런 대목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다른 가르침을 볼 때 소중합니다. 무엇이 다른지만 찾는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 안에 이미 존재하는 진리의 씨앗과 접점을 함께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어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는 선언이 나옵니다. 문자적으로는 대환난 가운데 순교하는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죽는다’는 것은 자기 proprium을 내려놓는 거듭남의 과정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지배가 죽고 주님의 사랑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자기 자신에게 죽는 사람은 참으로 복이 있습니다.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는 말씀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사후에 사람을 따라가는 것은 그가 입으로 고백했던 교리 목록만이 아닙니다. 그의 ‘행한 일’이 따라갑니다. 물론 스베덴보리에게 행위는 외적 행동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행위 안에 있었던 의지와 사랑 전체가 포함됩니다. 사람이 어떤 사랑에서 행동했는지가 그 사람의 생명의 질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선행으로 천국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받은 선이 실제 행위 속에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그것이 실제로 그 사람의 것이 됩니다. 이것은 야고보서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말씀과도 자연스럽게 만납니다.

 

계시록 14장의 후반부에는 이제 ‘추수’가 등장합니다.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땅의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라는 선언과 함께 추수가 시작됩니다. 강사의 시간표에서는 이것이 마지막 심판과 성도들의 구원, 그리고 이어질 아마겟돈의 최종 심판과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추수는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선과 악이 완전히 성숙하여 분리될 수 있게 된 때를 나타냅니다. 주님께서 성급하게 심판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곡식이 익어야 합니다. 사람의 내적 사랑이 아직 형성되는 과정에 있을 때에는 선과 악이 섞여 있어 그 최종 질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에게 충분한 자유와 기회를 주면서 그가 무엇을 정말 사랑하는지를 스스로 형성하도록 허용합니다.

 

따라서 마지막 심판은 주님의 인내가 갑자기 끝나 분노가 폭발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상태가 성숙하여 분리가 가능해진 때 이루어지는 신적 질서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13장의 가라지와 곡식 비유와도 잘 연결됩니다. 종들이 가라지를 즉시 뽑으려 하자 주인은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게 두라’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선이라고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선을 해치지 않으면서 완전한 분리가 이루어질 때까지 섭리하십니다.

 

이 원리는 한 사람의 거듭남에서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자기 안의 악을 발견하면 당장 완전히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대개 긴 과정입니다. 주님께서는 한꺼번에 모든 악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보여 주시고, 자유 안에서 그것을 죄로 인정하여 피하게 하시며, 그 자리에 반대되는 선을 조금씩 형성하십니다. 이것도 작은 의미에서 ‘추수’를 향해 가는 과정입니다.

 

마지막에는 포도송이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매우 무서운 그림이지만 이것 역시 단순한 물리적 학살의 예고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포도는 좋은 의미에서는 체어리티와 그로부터 나오는 신앙의 열매를 나타낼 수 있지만, 반대 의미에서는 악한 사랑에서 나오는 거짓의 열매를 나타냅니다. 그것이 완전히 익었다는 것은 악과 거짓도 자기 상태의 끝까지 발전했다는 뜻입니다. 이제 선과 악을 더 이상 섞어 둘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추수와 포도주 틀은 모두 ‘분리’의 말씀입니다. 심판의 본질은 분리입니다. 선을 사랑하는 사람은 선과 함께하고 악을 사랑하는 사람은 악과 함께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임의로 두 집단으로 나누시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자유롭게 형성한 지배적 사랑이 그를 자기와 같은 공동체로 이끕니다.

 

이렇게 보면 8강 전체에서 강사가 강조해 온 ‘이기는 자’의 의미도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이긴다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서 지옥과 연결되는 사랑을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고 천국적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가장 큰 승리는 남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proprium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처음 익은 열매’라는 표현에도 새로운 빛을 줍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열매는 종말론 지식의 축적이 아닙니다. 사랑의 열매입니다. 진리가 사람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고, 체어리티가 실제 쓰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말씀을 백 번 읽어도 그것이 삶에 내려오지 않으면 아직 열매가 아닙니다. 작은 진리 하나라도 실제로 살아 이웃에게 선이 되면 열매가 맺힌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 14장은 13장의 666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짐승은 이마에 자기 이름을 새기려 하지만 어린양도 자기 사람들의 이마에 이름을 가지고 계십니다. 짐승은 사람들에게 자기에게 경배하라고 하지만 천사는 ‘창조주를 경배하라’고 외칩니다. 바벨론은 자기 욕망의 포도주로 사람들을 취하게 하지만 14만 4천은 어린양을 따라갑니다. 짐승은 강제하지만 어린양은 인도하십니다. 짐승은 사람의 자유를 빼앗지만 주님은 자유 가운데 사랑으로 따르게 하십니다.

 

이 대조가 계시록의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666을 지나치게 크게 만들면 오히려 계시록의 시선을 놓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짐승을 보여 준 뒤 곧바로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라고 합니다. 시선을 옮기라는 것입니다. 짐승을 충분히 보았으면 이제 어린양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종말론을 공부하는 태도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종말 공부가 깊어질수록 두려움과 음모와 적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주님은 점점 배경으로 밀려난다면 방향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계시록을 제대로 읽을수록 어린양이 더 크게 보여야 합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짐승의 승리가 아니라 주님의 나라입니다.

 

강사의 강의 역시 이 점에서는 귀한 긴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적그리스도와 대환난을 매우 실제적으로 강조하면서도 결국 성도에게 요구하는 것은 ‘끝까지 주님을 따르라’, ‘세상 소유에 매이지 말라’, ‘정결하게 살라’, ‘미혹되지 말라’, ‘이기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실천적 중심을 살리고, 그 바깥을 둘러싼 종말 시간표는 스베덴보리의 상응과 속뜻을 통해 다시 조명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8강 10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4장의 14만 4천과 세 천사와 마지막 추수는 미래 대환난에서 특별히 선발된 영적 엘리트와 세계 종말의 시간표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짐승으로 표상되는 자기애와 거짓 신앙의 지배에 맞서 주님의 이름이 사람의 지배적 사랑에 새겨지고, 신앙과 계명이 삶에서 하나가 되며, 마침내 각 사람이 자유롭게 형성한 사랑의 질에 따라 선과 악이 완전히 분리되는 새 교회와 마지막 심판의 영적 질서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결국 8강 전체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적그리스도는 누구인가?’도, ‘666은 무엇인가?’도, ‘대환난은 언제 시작되는가?’도 아닐 것입니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 누구를 따라가고 있는가?’입니다. 계시록 14장은 14만 4천을 가리켜 아주 단순하게 말합니다.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종말론 전체를 통과하고도 이 한 문장이 남는다면, 어쩌면 우리는 계시록의 중심에 상당히 가까이 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SY.62,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9강 (7/31),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9강 1부‘후 3년 반’과 적그리스도9강은 찬송과 기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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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60,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7강 (7/29),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7강 1부씨 뿌리는 비유와 네 가지 마음밭이번 강의에서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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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6강 1부

마태복음 13장, 씨 뿌리는 비유와 ‘마음밭’

이번 6강은 지금까지 배운 ‘기본 진리’ 일곱 과목을 정리하면서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을 통해 전체 체계를 하나로 묶고, 이어질 요한계시록 공부로 넘어가기 위한 일종의 종합 강의입니다. 강사는 이 과정의 핵심을 ‘영적인 목표’, ‘신앙의 방향’, 그리고 ‘영적 가치관’의 정립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알고 있느냐보다 결국 ‘무엇을 추구하며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고, 영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영적인 것을 추구한다는 설명입니다. 이 출발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의 영적 정체성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머릿속에 축적된 교리의 양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실제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목적으로 삼느냐가 그의 내적 생명을 이루며, 결국 사후에도 그 지배적 사랑이 그 사람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강의가 시작부터 ‘영적 가치관’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출발입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의 일곱 비유를 하나의 체계로 읽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서론으로, 겨자씨ㆍ누룩ㆍ진주와 보화ㆍ가라지 비유 등을 본론으로, ‘그물 비유’를 결론으로 배치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과 ‘666’을 해석하는 틀과 연결합니다. 특히 겨자씨ㆍ누룩ㆍ진주와 보화의 비유를 ‘14만 4천’의 성장ㆍ행실ㆍ생명과 연결하고, 가라지를 ‘666’ 또는 적그리스도적 영혼과 연결합니다. 여기까지 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이 서로 연결되어 인간의 영적 성장과 교회의 상태를 보여 준다는 큰 방향에는 상당히 공감할 수 있지만, 그것을 곧바로 요한계시록의 특정 숫자들과 일대일로 연결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과는 방법론적으로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성경의 숫자는 단순한 암호나 특정 집단의 인원수가 아니라 ‘상태’와 ‘질’을 나타냅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은 문자 그대로 144,000명의 특별한 성도 집단을 가리킨다기보다 주님의 교회를 이루는 모든 사람 가운데 선과 진리가 온전히 결합된 상태를 표상합니다. ‘12’가 신앙과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나타내고, 그것이 확장되어 ‘144’, 다시 ‘천’과 결합한 ‘144,000’은 충만함과 완전성을 표현합니다. 따라서 ‘14만 4천’을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산 성화된 성도들’이라고 이해하려는 강사의 영적 방향은 흥미롭게도 스베덴보리와 어느 정도 가까워지지만, 그것을 별도의 특수한 최상위 성도 계층처럼 굳혀 버리면 차이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숫자에 들어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자기 안에서 결합되어 가는 것입니다.

 

더욱 주목할 부분은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강사는 씨를 ‘하나님의 말씀, 복음의 진리’, 밭을 ‘사람의 마음’으로 풀이합니다. 길가ㆍ돌밭ㆍ가시밭ㆍ좋은 밭은 각각 말씀을 받아들이는 서로 다른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초점은 결국 ‘좋은 밭’에 있으며, 좋은 밭이어야 씨가 뿌리를 내리고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다만 여기서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씨’는 단순히 설교를 통해 전달되는 성경 지식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에 심기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생명을 얻으려면 반드시 ‘선’ 안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진리를 듣고 기억하고 이해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하여 실제 삶에서 행할 때 비로소 씨가 열매가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밭’은 단순히 설교를 잘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 정도가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받아들여 그것이 의지 안으로 들어가 삶이 되도록 허용하는 내적 상태입니다. 강사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가 결실한다고 설명하면서 좋은 밭을 영적 성장의 출발점으로 봅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 옮기면, 말씀의 진리가 기억에 들어오고, 이해에 들어오고, 마침내 의지에 받아들여져 행위가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안다’에서 ‘원한다’로, 다시 ‘행한다’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단계까지 내려가야 씨가 열매가 됩니다.

 

여기서 강사의 설명 가운데 특히 눈여겨볼 부분이 있습니다. 강사는 사람이 자기 마음이 길가인지 돌밭인지 가시밭인지 좋은 밭인지 스스로 정확히 알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시험해 보는 과정’을 통하여 그것을 드러내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시험’(temptation)에 관한 가르침과 매우 가까운 부분입니다. 사람은 평안할 때에는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 잘 모릅니다.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하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며, 이웃을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이해관계가 침해되고, 명예가 손상되고, 소유가 위협받고, 원하는 것이 좌절되는 순간 내면에 숨어 있던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영적 시험은 바로 이런 감추어진 악과 거짓이 밖으로 드러나고, 사람이 그것과 싸우면서 주님을 의지하도록 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이 사람이 어느 등급인가’를 판정하기 위한 검사가 아니라, 사람 자신에게 자기 상태를 드러내고 동시에 그 악으로부터 실제로 벗어나게 하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이 점에서 네 가지 밭을 네 종류의 사람으로만 고정하는 것보다 한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거듭남의 과정으로도 읽어 보는 것이 좋습니다. 내 안에도 ‘길가’가 있고 ‘돌밭’이 있으며 ‘가시떨기’가 있고 ‘좋은 땅’이 있습니다. 어떤 진리에 대해서는 마음이 굳어 있어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떤 진리는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실제 희생이 요구되면 포기합니다. 또 어떤 진리는 받아들였지만 세상 염려와 욕망이 자라 그것을 질식시킵니다. 그러나 어떤 진리는 깊이 받아들여져 삶을 바꾸고 열매를 맺습니다. 거듭남이 진행된다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 안의 ‘길가’를 갈아엎으시고, ‘돌’을 제거하시며, ‘가시’를 뽑으셔서 점점 더 많은 영역을 ‘좋은 땅’으로 만들어 가시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씨 뿌리는 비유는 사람들을 네 부류로 분류하는 말씀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서 주님의 말씀이 어디까지 들어와 있는가’를 묻게 하는 말씀이 됩니다.

 

강사는 이어서 좋은 밭을 가진 성도들은 세상에서 빛과 향기를 나타내고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으며,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산 사람들을 ‘교회 시대 이긴 자들’, 성화된 성도들, 순교자들과 연결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적당히 천국만 가면 되지’라는 태도를 버리고 더 높은 영적인 것을 추구하라고 권면합니다. 이 열망 자체는 귀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의 삶을 수동적인 구원 상태로 보지 않습니다. 사람은 끝없이 주님께 가까워지고, 선과 진리를 더욱 풍성하게 받아들이며, 이웃을 더욱 온전히 사랑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천국 자체가 영원한 완성의 정지가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는 완전해짐의 과정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매우 섬세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더 높은 영적 단계’, ‘더 밝은 빛’, ‘더 큰 상급’을 추구하는 것이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의 영적 위대함을 추구하는 것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의에서는 이를 ‘생명책이라는 저금 통장’에 비유하여, 더 겸손하고 더 충성하고 더 인내하고 더 온전한 사랑을 실천하면 마치 더 많은 금액이 저축되는 것처럼 상급이 커진다고 설명합니다. 교육적 비유로서는 이해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부분을 조금 다르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의 상급은 선행에 대한 외적 보수라기보다 ‘선 자체 안에 있는 기쁨’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서 기쁨을 얻고,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섬김 자체에서 행복을 얻습니다. 이것이 천국적 상급입니다.

 

그래서 ‘100만 원짜리 인내’, ‘10만 원짜리 선행’처럼 생각하기 시작하면 아주 미묘하게 proprium이 개입할 위험이 있습니다. ‘나는 이만큼 참았다’, ‘나는 저 사람보다 더 희생했다’, ‘나는 더 높은 영적 수준을 추구한다’는 자기의식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천국적 선은 오히려 자기가 행한 선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선을 행할 수 있었던 것조차 주님에게서 왔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높은 천사는 자신이 다른 천사보다 높다고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가장 깊이 아는 존재입니다. 영적 성장의 역설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높아질수록 자기는 낮아지고, 주님만 높아집니다.

 

강사가 ‘넓고 편하고 내가 좋은 것, 내 입맛에 맞는 것만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좀 손해 보고, 불편하게 살고, 희생하는 좁은 길’을 강조하는 부분 역시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좁은 길의 본질은 고생 자체가 아닙니다. 일부러 가난하거나 불편하게 사는 것이 영성을 높이는 것도 아니며, 자연적 즐거움을 버리는 것 자체가 거룩함도 아닙니다. 핵심은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주님과 이웃 사랑보다 위에 서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재물을 가지고도 재물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있고,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도 그것을 이웃에게 유용한 일을 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금욕적으로 살면서도 자기의 거룩함을 사랑한다면 proprium은 더욱 강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무엇을 소유했느냐’보다 ‘무엇이 나를 지배하느냐’입니다.

 

이렇게 보면 6강 초반부의 핵심인 ‘영적 가치관’이라는 말이 한층 깊어집니다. 영적인 사람은 단순히 세상을 싫어하고 천국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점차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던 삶에서 벗어나 주님과 이웃을 중심으로 판단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밭’이 된다는 것도 어느 날 특별한 영적 계급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내 의지와 삶 속에서 자유롭게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자기애의 딱딱한 길을 갈아엎고, 거짓의 돌을 걷어 내며, 세상 염려와 욕망이라는 가시를 제거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6강 1부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았을 때 상당히 좋은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어느 밭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다만 그 질문을 ‘나는 네 부류 가운데 어느 등급의 사람인가?’로 묻기보다 ‘오늘 주님의 말씀이 내 안의 어디에서 막히고 있는가?’로 바꾸면 훨씬 깊어집니다. 말씀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고도 원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 원한다고 하면서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 주님보다 자기 명예ㆍ소유ㆍ편안함을 더 사랑하여 말씀이 질식되고 있는 영역은 어디인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바로 그곳이 아직 갈아엎어져야 할 우리의 ‘마음밭’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씨 뿌리는 비유가 매우 아름답게 바뀝니다. 중심은 밭의 우열이 아니라 ‘씨를 뿌리시는 주님’입니다. 주님은 길가에도 씨를 뿌리시고, 돌밭에도 뿌리시며, 가시떨기에도 뿌리십니다. 인간의 현재 상태가 완전하지 않다고 해서 말씀 주시기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끊임없이 진리를 주시고, 섭리 가운데 우리의 굳은 땅을 부드럽게 하시며, 돌을 드러내고, 가시를 보여 주시면서 마침내 열매 맺는 땅으로 이끄십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궁극적인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주님이 심으시는 씨를 받아들이고, 자기 안에서 드러나는 악을 죄로 인정하여 피하며, 주님께서 선을 행하실 수 있도록 협력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관점에서 보면 강사가 강조하는 ‘좋은 밭이 되어 열매를 맺으라’는 권면은 단순한 성화의 독려를 넘어,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거듭남이라는 더 깊은 지평으로 열립니다.

 

 

6강 2부

길가와 돌밭, 그리고 ‘시험’을 통한 마음밭의 드러남

6강 1부에서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 전체를 개관한 뒤, 이제 네 종류의 밭을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네 밭을 단순히 네 종류의 사람을 분류하기 위한 도표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성장 과정’과 연결한다는 점입니다. 강사는 앞서 배운 성장론을 다시 불러오면서 사람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과정 자체가 ‘내 마음밭이 과연 어디에 해당하는가’를 시험받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바로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매우 주의 깊게 볼 만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역시 사람이 평상시 자기 자신에 관하여 생각하는 모습과 시험 가운데 실제로 드러나는 내적 상태가 서로 다를 수 있음을 거듭 말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길가’입니다. 강사는 길가가 사람들에게 계속 밟혀 딱딱해진 땅이라는 아주 자연스러운 이미지에서 출발합니다. 씨가 떨어져도 흙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표면에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새가 와서 먹어 버립니다. 이를 사람의 마음에 적용하면 복음을 들어도 받아들이지 않는 강퍅한 마음, 세상일과 돈 버는 일 등에 온통 마음이 쏠려 영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비유의 문자적 의미에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조금 더 깊은 층위를 갖습니다. 말씀은 귀를 통하여 기억에 들어오는 것만으로 아직 사람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기억에서 이해로, 이해에서 의지로, 의지에서 삶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길가는 바로 그 첫 단계에서 진리가 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딱딱하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마음이 딱딱하다는 것은 단순히 성격이 고집스럽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삶이 오랫동안 반복되어 하나의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이 마침내 마음의 길처럼 굳어진 상태입니다. 사람들은 길을 반복해서 밟고 다닙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같은 욕망, 같은 생각, 같은 행동을 계속 반복하면 그것이 점차 자신의 생명 형태가 됩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행동이었던 것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마침내 그 사람의 사랑과 성품으로 굳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에는 진리가 ‘떨어질’ 수는 있어도 쉽게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설교를 들을 수 있고 성경을 읽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삶을 바꾸는 진리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길가의 문제는 단순히 ‘불신자라서 복음을 거절한다’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닌 사람에게도 길가는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수없이 들어 이미 익숙해졌지만, 바로 그 익숙함 때문에 더 이상 말씀이 자기 자신을 향한 말씀으로 들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안다’는 생각 자체가 길가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진리를 많이 아는 것과 진리 가운데 사는 것은 전혀 동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를 많이 알면서도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그 진리를 자기의 지성과 명예를 높이는 데 사용할 위험마저 있습니다. 그러므로 씨가 마음에 떨어졌다는 것과 씨가 뿌리를 내렸다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비유에서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는 장면도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새는 문맥에 따라 생각, 이성적인 것, 지적인 것 등을 표상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씨를 빼앗는 새이므로 진리를 소멸시키는 거짓한 사고와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마음 깊은 곳으로 내려가지 않고 단지 표면에 머물러 있으면, 기존의 거짓한 사고와 세상적인 추론이 그것을 금세 빼앗아 갑니다. ‘그렇게 살면 손해 보는데’, ‘세상은 원래 이렇게 사는 거야’, ‘모두 그렇게 하는데 나만 왜 그래야 하지?’ 하는 생각들이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은 들었지만 기존의 삶을 지배하던 사고방식이 말씀을 삼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씨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씨가 뿌리를 내릴 수 없는 마음의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길가가 영원히 길가일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비유를 읽을 때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입니다. 주님의 섭리와 거듭남은 굳은 마음을 그대로 판정하고 버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삶에서 여러 사건과 시험을 허용하시면서 굳어진 것을 깨뜨리십니다. 자신감이 무너지고, 자기 지혜의 한계를 발견하며, 세상적인 것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공허를 경험하는 가운데 사람은 이전에는 들어오지 않던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변화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시험은 ‘너는 길가다’라고 판결하는 시험이라기보다 길가를 밭으로 바꾸시는 주님의 섭리 가운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돌밭’입니다. 길가와 돌밭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길가에서는 씨가 아예 뿌리를 내리지 못하지만, 돌밭에서는 씨가 싹을 틔웁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이 사람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습니다. 문제는 ‘그 속에 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반응이 좋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면 곧 넘어집니다. 따라서 돌밭의 핵심은 진리를 거절하는 데 있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아직 사람의 깊은 의지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를 사랑하는 것’의 차이를 생각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새로운 진리를 들으면 대단히 기뻐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몰랐던 성경의 의미가 열리고, 영계와 천국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되며, 자신의 신앙 세계가 갑자기 넓어지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자신의 기존 욕망과 충돌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진리를 정말 사랑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이 진리를 받아들이려면 내가 이것을 포기해야 하는구나’, ‘이 말씀대로 살려면 내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하는구나’, ‘저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구나’, ‘이익이 되더라도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구나’ 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바로 그때 뿌리의 깊이가 드러납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시험’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길가와 돌밭과 좋은 밭이 겉으로 비슷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모두 교회에 앉아 있고, 모두 ‘아멘’하며, 모두 말씀을 듣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자기애와 충돌하는 순간 차이가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시험은 바로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싸움이며, 선과 진리를 사랑하려는 새 의지와 자기애ㆍ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옛 욕망 사이의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이 없으면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사랑하는지 깊이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여기서 강사의 ‘하나님께서 시험하여 어느 밭인지 확인하신다’는 표현은 조금 다듬어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밭을 모르셔서 시험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의 내적 상태를 이미 아십니다. 시험을 통하여 그것을 알아야 하는 쪽은 오히려 인간 자신입니다. 더욱이 시험의 목적은 단순한 ‘확인’에 머물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시험은 실제적인 거듭남의 수단입니다. 시험을 통하여 악한 영들이 자극하는 자기애와 거짓이 드러나고, 사람이 주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그것에 저항할 때 선과 진리가 더욱 깊이 결합합니다. 시험 전과 시험 후의 사람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통과한 영적 시험은 진리를 단순한 지식에서 생명의 진리로 내려보냅니다.

 

그래서 돌밭의 ‘돌’을 특별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돌은 언제나 악한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좋은 의미에서는 진리, 특히 낮은 차원에서 굳건하게 받쳐 주는 진리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흙 아래 숨어 있어 뿌리가 깊어지는 것을 방해하는 돌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맥에서는 마음속에 굳어진 거짓이나 자기 확신, 혹은 진리가 의지 안으로 내려가는 것을 가로막는 내적인 장애로 볼 수 있습니다. 겉에는 흙이 있으므로 씨가 싹을 틔웁니다. 신앙도 있고 감동도 있으며 열심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내려가면 ‘나는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단단한 자기 자신이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proprium의 문제가 나타납니다. 사람은 진리를 좋아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더 좋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고 싶어 하면서도 자기 뜻이 꺾이는 것은 싫어할 수 있습니다. 천국을 원하면서도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그대로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고 싶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진리가 proprium의 표면을 장식하는 과정이 아니라, 진리가 그 안으로 내려가 그 질서를 바꾸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돌밭은 매우 종교적인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좋아하고 영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며 깊은 진리를 배우는 것을 즐기지만, 그 진리가 자기 삶을 건드리는 순간 멈추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 작업 자체에도 매우 중요한 경계가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는 너무나 깊고 아름답기 때문에 그것을 발견하고 이해하는 것 자체에서 큰 지적ㆍ영적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를 읽으며 ‘이런 깊은 뜻이 있었구나’ 하고 감탄하는 것과, 그 진리가 실제 자기 생명 속에 뿌리를 내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속뜻을 아무리 정확하게 이해해도 자기 삶에서는 여전히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고 있다면, 진리는 아직 충분히 뿌리내린 것이 아닙니다. 천국의 구조를 아무리 자세히 알아도 이웃을 대하는 태도가 변하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아직 기억과 이해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돌밭에서 좋은 밭으로 가는 길은 ‘더 많은 진리를 아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미 받은 진리를 삶으로 옮기는 데서 시작됩니다. 작은 진리 하나라도 실제로 행할 때 뿌리가 내려갑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용서하려고 애쓰고, 정직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손해를 감수하고 정직을 선택하며, 자기 공로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선을 행한 뒤 그것을 자기 것으로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작은 순종들이 반복되면서 진리가 점차 의지 안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시험은 거듭남에서 제거되어야 할 불필요한 고통이 아니라 때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햇볕이 없었다면 돌밭의 씨도 한동안 잘 자라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햇볕이 뜨거워지자 뿌리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역설이 있습니다. 식물을 말라 죽게 한 바로 그 태양이 좋은 밭의 식물에게는 성장에 없어서는 안 될 빛과 열을 제공합니다. 문제는 태양이 아니라 뿌리입니다. 같은 시험이 어떤 사람에게는 신앙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보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오히려 신앙을 깊게 만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주님께서 시험을 통하여 사람을 파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시험 가운데서 끊임없이 사람을 보호하시며,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악과 거짓이 드러나도록 허용하시고, 그 가운데서 선과 진리를 선택할 자유를 보존하십니다. 실제 싸움은 인간에게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악을 이길 수 있는 모든 힘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의 몫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악에 저항하면서도, 승리의 능력은 자기에게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에서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역사가 함께 움직이는 신비로운 지점입니다.

 

따라서 6강이 말하는 ‘좋은 밭이 되어야 한다’는 권면을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조금 바꾸어 말하면 이렇습니다. ‘좋은 밭인 사람으로 판정받으라’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 마음을 좋은 밭으로 만드시도록 허용하라’입니다. 길가가 발견되면 절망할 것이 아니라 갈아엎어져야 할 곳을 발견한 것이고, 돌이 발견되면 신앙이 가짜였다고 단정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제거하시려는 내적 장애가 드러난 것입니다. 앞으로 나올 가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거듭남이란 처음부터 좋은 밭이었던 사람들이 천국에 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길가와 돌밭과 가시밭 같은 인간의 proprium을 끊임없이 다루시면서 마침내 말씀의 씨가 선 안에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도록 하시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씨 뿌리는 비유의 중심은 점점 ‘나는 어느 밭인가?’에서 ‘주님께서 지금 내 밭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로 이동합니다. 이것은 작은 차이 같지만 매우 중요합니다. 전자는 자칫 사람을 분류하고 영적 등급을 매기는 방향으로 갈 수 있지만, 후자는 거듭남과 주님의 섭리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관점이 이번 강의가 강조하는 ‘영적 성장’을 훨씬 깊고도 복음적으로 이해하게 해 준다고 봅니다. 씨는 주님의 진리이며, 그것을 살게 하는 생명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그 생명이 자기 안으로 더 깊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길과 돌과 가시를 주님 앞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여 피하며,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걸음씩 진리가 의지와 삶 안으로 내려갈 때 ‘말씀을 듣는 사람’은 서서히 ‘말씀이 열매 맺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6강 3부

가시밭에서 좋은 밭으로, 그리고 겨자씨가 ‘나무’가 된다는 것

6강 2부에서 길가와 돌밭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강의는 가시밭과 좋은 밭으로 나아갑니다. 주님께서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에 대하여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라고 직접 설명하십니다. 반면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이며, 마침내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합니다. 강사는 이 차이를 단순히 말씀을 ‘듣느냐 듣지 않느냐’의 차이로 보지 않습니다. 가시밭도 말씀을 듣습니다. 돌밭은 심지어 기쁨으로 받습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그 말씀이 사람의 실제 생명 안에서 ‘열매’가 되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6강의 씨 뿌리는 비유 해설은 앞서 여러 강에서 반복되었던 ‘말씀을 실제로 살아야 한다’는 ‘핵심진리’의 중심 주제로 다시 돌아옵니다.

 

가시밭은 특히 흥미롭습니다. 길가처럼 씨가 아예 들어가지 않은 것도 아니고, 돌밭처럼 싹이 났다가 곧 말라 버린 것도 아닙니다. 씨가 자랍니다. 문제는 씨와 함께 ‘다른 것’도 자란다는 데 있습니다. 가시가 함께 자라 말씀의 기운을 막습니다. 바로 이것이 가시밭의 영적 위험을 더욱 미묘하게 만듭니다.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말씀도 듣고, 기도도 하고, 교회생활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세상 염려와 재물의 매력, 지위와 인정, 편안함과 자기 유익이 동시에 자라고 있습니다. 마침내 그것들이 말씀보다 더 강한 애정이 되면 말씀은 사라지지 않았는데도 ‘결실하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것은 인간의 지배적 사랑과 직결됩니다. 문제는 재물 그 자체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를 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직업을 가지고 세상일을 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재물을 관리하는 것은 자연계에서 필요한 쓰임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사랑의 질서에서 어디에 놓여 있느냐입니다. 재물이 쓰임을 위한 수단이면 질서 안에 있지만, 재물이 삶의 목적이 되어 주님과 이웃보다 더 사랑받기 시작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세상의 염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책임을 다하기 위해 미래를 생각하는 것과, 세상적인 안전을 자기 생명의 궁극적 근거로 삼아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러므로 가시는 반드시 노골적인 악의 모습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 영적 생명을 질식시킬 수도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선하지만 가족을 주님보다 높이면 질서가 바뀝니다. 직업에 충실한 것은 선하지만 성공과 명예가 생명의 목적이 되면 가시가 됩니다. 교회 봉사 역시 선하지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그 봉사의 속을 차지하면 역시 가시가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영적 지식도 그렇습니다. 진리를 아는 것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깊은 것을 안다’는 자기 우월감의 재료가 된다면, 진리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proprium이 가시처럼 자라난 것입니다.

 

이 대목은 우리가 ‘가시’를 너무 쉽게 세상 사람들에게만 적용하지 않도록 합니다. ‘저 사람은 돈을 사랑하니까 가시밭이다’라고 판단하기 전에, ‘내 신앙생활 안에서 말씀과 함께 자라고 있는 가시는 무엇인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사람의 인정을 원하는 마음, 진리를 전한다고 하면서 자기 의견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 선을 행하면서 그 선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얼마든지 가시가 될 수 있습니다. 가시는 씨를 뽑아 버리지 않습니다. 씨 옆에서 함께 자랍니다. 바로 이 때문에 더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강사는 가시밭의 문제를 앞서 설명한 ‘연단’의 구조와 연결하고, 가시밭에 머물지 않는 사람은 다시 다음 연단의 과정으로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실제 원고에서도 가시밭이 아닌 사람들은 ‘무리바 생수’를 마신 뒤 두 번째 연단으로 들어간다고 연결합니다. 여기서 ‘핵심진리’ 특유의 단계적 성장론이 다시 나타납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 이 단계들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고정된 시간표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조심스러움이 필요하지만,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더 깊은 애정이 시험받는다’는 방향은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눈에 보이는 행동이 다루어지고, 그다음에는 행동을 일으키는 욕망이, 더 깊어지면 그 욕망을 낳는 자기 사랑 자체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네 번째 ‘좋은 밭’에 이르면 강사의 강조점은 아주 분명해집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합니다. 강사는 주님의 설명을 따라 좋은 밭의 사람을 ‘말씀을 듣고 깨달아 그 말씀을 실천하고, 말씀대로 행하고 살아감으로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동일한 정도의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어서 백 배를 맺는 사람도 있고, 육십 배, 삼십 배를 맺는 사람도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 ‘듣고 깨닫는다’와 ‘결실한다’ 사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깨달음 자체가 결실은 아닙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진리가 기억에 들어오는 단계가 있고, 이해성에서 깨닫는 단계가 있으며, 그것을 의지가 받아들여 사랑하는 단계가 있고, 마지막으로 행동과 쓰임으로 나타나는 단계가 있습니다. 좋은 밭은 이 전체 과정이 이어지는 상태입니다. 말씀을 들었고, 이해했고, ‘참 좋은 말씀이다’라고 감동한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진리가 삶으로 내려갑니다.

 

바로 이 점에서 ‘열매’의 상응은 매우 분명합니다. 열매는 선한 삶, 곧 행위 가운데 나타난 선과 관계됩니다. 나무의 최종 목적이 잎이나 꽃에 머물지 않고 열매에 이르는 것처럼, 진리의 목적도 지식 자체에 머물지 않고 선에 이르는 것입니다. 말씀을 배우는 것은 잎이 돋는 것과 같고,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꽃이 피는 것과도 같지만, 그것이 이웃을 향한 실제 선과 쓰임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열매가 맺힙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선행과 쓰임은 신앙에 덧붙이는 부속물이 아니라 신앙이 생명을 얻어 밖으로 나타나는 완성입니다.

 

다만 여기서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를 단순한 ‘영적 성적표’처럼 읽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강의에서는 좋은 밭 안에서도 열매의 풍성함에 차이가 있다는 데 주목하며, 더 온전한 성품과 더 충성스러운 헌신을 향해 계속 성장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특히 ‘예수님 같은 겸손’, ‘예수님 같은 온유’, 세상 욕심에서 벗어난 삶과 충성스러운 헌신이라는 두 방향을 함께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더욱 온전해지도록 계속 성장하는 과정을 좋은 밭의 삶으로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귀합니다. 좋은 밭도 ‘완성되어 더 이상 자랄 필요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계속 성장하고 열매 맺는 사람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천국적 완전함은 획일적이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고유한 성향과 쓰임이 다르고, 받아들이는 선과 진리의 정도도 다릅니다. 천국의 공동체들이 모두 같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가 천국에서 경쟁이나 우열의식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한 천사가 다른 천사를 보며 ‘나는 백 배이고 너는 삼십 배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천사는 자기에게 주어진 쓰임을 기쁨으로 행하며, 다른 이의 선을 자기 선처럼 기뻐합니다. 따라서 백 배와 육십 배와 삼십 배를 읽을 때 중요한 것은 ‘내가 몇 배짜리인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얼마나 충실하게 생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입니다.

 

이것은 앞서 강의에서 등장했던 ‘더 높은 상급을 추구하라’는 표현에도 필요한 보완입니다. 영적 성장을 사모하는 것은 귀하지만, ‘나는 더 높은 천국에 가야 한다’, ‘나는 다른 성도보다 백 배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식으로 proprium이 개입하면 영적 성장을 추구한다는 바로 그 열망이 자기애의 새로운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천국의 높은 상태는 ‘내가 높아지는 것’을 사랑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 형성됩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가장 높은 천국적 사랑은 자기의 높음을 전혀 목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강사가 ‘풍성한 열매를 맺으면 농부가 기뻐하듯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신다’고 말하는 부분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아름답게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을 등급별로 세워 경쟁시키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 안에 심으신 진리가 그 사람의 삶에서 사랑과 선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가 성장하는 것을 기뻐하듯, 농부가 씨가 열매를 맺는 것을 기뻐하듯, 주님께서는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을 자유롭게 받아들여 참된 인간으로 되어 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씨 뿌리는 비유가 끝나면서 강의는 두 번째 비유인 ‘겨자씨 비유’로 넘어갑니다. 강사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하나님의 초점이 ‘좋은 밭’에 있다고 정리한 뒤, 겨자씨ㆍ누룩ㆍ진주와 보화의 비유를 바로 이 ‘아주 좋은 밭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삶’을 다시 종합적으로 보여 주는 비유들로 배치합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을 강사 나름의 하나의 성장 체계로 연결하는 매우 독특한 해석입니다. 그리고 겨자씨 비유에서는 그 좋은 밭의 사람이 성장하여 다른 사람을 ‘양육하는’ 단계로 나아간다고 봅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강사는 여기서 특히 ‘나무’와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드는 것’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겨자씨 비유를 ‘천국 백성을 양육하는 목양적인 사명, 목양적 사업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진리’라고 해석합니다. 즉 작은 씨가 성장하여 큰 나무가 되고, 그 나무에 새들이 깃드는 것처럼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은 마침내 다른 사람을 품고 양육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강의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지금까지의 영적 성장이 주로 ‘내가 어떻게 좋은 밭이 되는가’, ‘내가 어떻게 연단을 통과하는가’, ‘내가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라는 자기 자신의 거듭남에 초점이 있었다면, 겨자씨에서는 그 성장의 결과가 ‘다른 생명을 품는 것’으로 바뀝니다. 내가 자라는 목적이 나의 영적 완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그늘을 제공하고, 다른 사람을 품고, 다른 사람의 영적 생명을 돕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 방향은 매우 귀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쓰임’이라는 말로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 모든 존재의 기쁨은 쓰임에 있습니다. 천사는 자기 완성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몰두하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지혜를 다른 이의 선을 위하여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목적도 ‘나 혼자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거듭날수록 자기에게서 시선이 벗어나 주님과 이웃을 향하게 됩니다. 받은 진리와 선이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쓰임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겨자씨가 나무가 된다’는 강사의 해석은 적어도 영적 적용의 차원에서 매우 아름다운 방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작은 신앙의 시작이 자라 마침내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생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을 곧바로 ‘목회자가 된다’거나 ‘많은 제자를 거느리는 지도자가 된다’는 뜻으로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쓰임은 목회직보다 훨씬 넓습니다. 한 어머니가 자녀에게 선과 진리를 심어 주는 것도 쓰임이고, 한 직장인이 정직하게 자기 일을 하여 공동체에 유익을 주는 것도 쓰임이며, 아픈 사람을 돌보고 외로운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도 쓰임입니다. 천국의 나무는 반드시 강단 위에서만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스베덴보리의 속뜻에서 ‘나무’는 일반적으로 퍼셉션이나 인식, 지적·영적 생명과 관련되며, ‘가지’와 ‘새’ 역시 그 문맥에 따라 진리의 인식과 사고의 여러 측면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13장의 겨자씨를 곧바로 ‘성화된 지도자가 다른 성도들을 목양한다’는 하나의 대응표로 고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강사의 설명은 ‘핵심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영적 적용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과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 구별은 앞으로 더욱 중요해집니다. 강사는 겨자씨 비유를 설명하면서 아브라함과 모세, 바울 등 여러 인물을 ‘나무’와 ‘그 가지에 깃드는 새’의 구조에 넣어 해석합니다. 바울의 경우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것을 ‘출애굽’으로, 이후 다소에서 보낸 기간을 ‘광야 연단’으로, 그 뒤 바나바에게 불려 안디옥과 선교 현장으로 나간 것을 연단을 마친 뒤 다른 사람들을 양육하는 단계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성경 인물들의 생애를 출애굽-광야-가나안이라는 하나의 영적 성장 패턴으로 읽으려는 ‘핵심진리’ 특유의 해석법입니다.

 

여기서는 장점과 한계를 함께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장점은 성경의 역사를 죽은 과거의 사건으로 두지 않고 ‘나에게도 출애굽이 있고 광야가 있으며 쓰임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있다’고 현재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다소 생활을 정확히 ‘11년 광야 연단’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이스라엘의 광야와 같은 영적 단계라고 단정하는 것은 성경 본문 자체가 직접 말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런 부분은 ‘핵심진리’의 영적 독법으로 존중하여 듣되, 그것을 성경의 아르카나 자체와 동일시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특히 바울 서신과 바울의 생애를 다룰 때에는 우리가 이미 정한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사도들의 서신은 복음서나 창세기ㆍ출애굽기ㆍ요한계시록처럼 문장과 단어 하나하나에 연속적인 속뜻, 곧 아르카나가 들어 있는 ‘말씀’과 같은 차원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생애에서 영적 교훈을 얻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의 생애 사건 하나하나를 출애굽기의 상응처럼 취급하여 숨은 영적 단계표를 복원하는 데에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강사가 겨자씨 비유에서 붙드는 ‘성장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살리는 데 있다’는 중심은 충분히 살릴 만합니다. 이것은 5강에서 보았던 ‘익은 열매’의 개념도 보완해 줍니다. 익은 열매가 된다는 것이 ‘나는 이제 성화되었다’는 자기완성의 선언이라면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익은 열매가 된다는 것이 ‘이제 주님께서 나를 다른 사람의 선을 위한 쓰임으로 더 자유롭게 사용하실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라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성숙은 자기에게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공용복 선생의 삶과 그 제자들의 관계를 생각할 때도 특별히 의미 있게 다가오는 대목입니다. 한 사람에게 심긴 작은 씨가 그 사람의 생애를 통하여 자라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에게서 말씀을 배우고 함께 살았던 사람들의 생명 안에서 계속 열매를 맺는다면, ‘나무가 되고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든다’는 그림이 왜 이 전승 안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마태복음 13장의 겨자씨 비유에 대한 유일한 속뜻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영적 성숙이 자기에게서 끝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살리고 품는 쓰임으로 확장된다는 점에서는 매우 인상적인 적용입니다.

 

결국 6강 3부에서 길가ㆍ돌밭ㆍ가시밭ㆍ좋은 밭의 흐름은 겨자씨 앞에서 새로운 방향을 얻습니다. 좋은 밭이 되는 것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열매를 맺는 것도 자기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와 선이 사람 안에서 자라면 그 사람은 마침내 다른 생명을 위한 ‘쓰임’이 됩니다. 씨가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것을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좋은 밭은 말씀을 많이 아는 마음이 아니라 진리가 선이 되어 삶의 열매를 맺는 마음이며, 그 열매가 더욱 성숙하면 받은 선과 진리는 자기완성에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의 영적 유익을 위한 쓰임으로 흘러갑니다.’ 이때 비로소 거듭남의 방향이 ‘나의 구원’에서 ‘주님의 나라를 이루는 쓰임’으로 넓어집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다음 ‘누룩 비유’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겨자씨가 영적 생명의 ‘성장과 확장’을 보여 준다면, 강사는 누룩 비유를 그 사람의 내면과 행실 전체가 변화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그림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6강 4부에서는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이 ‘핵심진리’에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먼저 충분히 따라가고, 이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에서 의지와 이해성, 그리고 선과 진리가 인간의 자연적 삶 전체로 내려가는 과정과 비교하여 살펴보겠습니다.

 

 

6강 4부

누룩과 진주, 보화 : ‘행실의 정결’에서 ‘생명의 소유’로

겨자씨 비유를 마친 강사는 이제 누룩 비유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이 전환에서 자신의 해석 구조를 다시 한번 분명히 합니다.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진주·보화 비유는 모두 ‘교회 시대 이긴 자들’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겨자씨가 장성한 겨자나무가 되어 다른 성도들을 양육하는 ‘성장과 쓰임’의 측면을 보여 준다면, 누룩은 그 사람의 ‘행실적인 측면’을 보여 주고, 진주와 보화는 마침내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는 측면을 보여 준다고 합니다. 실제로 강사는 강의 마지막 정리에서도 이 세 비유를 ‘장성한 겨자나무’, ‘행실이 정결해진 누룩’, ‘값진 진주를 소유한 성도’라는 세 그림으로 다시 하나로 묶습니다.

 

누룩 비유의 본문은 마태복음 13장 33절의 짧은 한 절입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강사는 이 장면을 아주 생활적인 그림으로 설명합니다. 밀가루에 누룩을 넣고 따뜻한 곳에 두면 시간이 지나면서 반죽 전체가 부풀어 오릅니다. 예전에는 이불을 덮어 놓고 밤새 발효시키기도 했다는 익숙한 경험까지 끌어옵니다. 중요한 것은 누룩이 밀가루의 한 부분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전부’를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핵심진리’가 이 장면에서 붙드는 것은 바로 ‘전부’입니다. 신앙은 인간의 일부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의 행실과 성품 전체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사는 누룩 비유를 ‘인격적인 면에서의 행실적인 성장’을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 결론짓습니다. 겨자씨가 작은 생명이 자라 큰 나무가 되는 성장의 그림이었다면, 누룩은 안에 들어온 어떤 생명이 밖에서 잘 보이지 않는 가운데 점차 전체를 변화시키는 그림입니다.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상당히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거듭남은 인간의 종교적인 한 부분만 변화시키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일의 몇 시간, 기도할 때의 마음, 성경을 읽을 때의 생각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아들인 선과 진리가 점차 그 사람의 생각과 의지, 말과 행동, 인간관계와 직업생활, 재물 사용과 일상의 선택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속 사람에서 받아들인 것이 겉 사람 전체에 질서를 이루어야 합니다.

 

여기서 ‘가루 서 말’이라는 표현은 그냥 지나가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셋’은 대체로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어진 것, 곧 완전하고 충만한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서 말’이라는 표현도 단순한 밀가루의 양을 넘어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완전한 과정이라는 방향으로 생각할 여지가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는 특정 AC 번호의 세부 상응을 억지로 끌어다 붙이기보다, 본문의 ‘전부 부풀게 한’이라는 주님의 말씀 자체와 함께 읽는 편이 안전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사람 안의 한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의 삶 전체로 스며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6강이 계속 강조해 온 ‘말씀의 실천’과도 연결됩니다. 말씀을 많이 알면서도 돈을 다루는 방식은 이전과 같고, 가족을 대하는 태도도 이전과 같으며, 자존심이 건드려졌을 때의 반응도 이전과 같다면 아직 누룩이 ‘전부’를 부풀게 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거듭남이 진행되면 이전에는 종교와 관계없다고 생각했던 영역까지 주님의 질서가 들어옵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왜 이 물건을 사고 싶은지, 왜 이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지, 왜 이 비판을 견디지 못하는지까지 진리의 빛 아래 놓이기 시작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강사가 누룩을 ‘행실’과 연결한 것은 중요한 통찰입니다. 신앙의 진위가 결국 생활에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행실의 정결’을 조금 더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겉 행동이 정돈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같은 선행이라도 그 행위가 어디에서 나오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칭찬받기 위해 친절할 수도 있고, 자기 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금욕할 수도 있으며, 천국에서 더 높은 상급을 받으려는 자기 유익 때문에 희생할 수도 있습니다. 외적 행동은 선해 보여도 그 안의 사랑이 자기에게 향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외적 행위의 교정에서 시작하여 그 행위를 낳는 의지의 변화로 깊어집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는 진리 때문에 자기를 억제합니다. 이것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나중에는 그 악 자체를 싫어하고 선을 사랑하도록 의지를 새롭게 하십니다. 처음에는 거짓말하면 안 되기 때문에 진실을 말하지만, 점차 진실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진실을 말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 때문에 보복하지 않지만, 점차 그 사람의 실제 선을 바라는 마음이 생깁니다. 바로 이때 누룩이 단순히 외관을 부풀리는 것이 아니라 반죽 전체에 스며든 것과 같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흥미로운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누룩’은 흔히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경계하라고 하셨고, 다른 문맥에서는 누룩이 악과 거짓이 퍼지는 모습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13장의 누룩도 악을 의미한다고 해야 할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상응은 단어 하나에 기계적으로 하나의 뜻만 붙이는 암호표가 아닙니다. 문맥에 따라 정반대의 의미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주님께서 친히 ‘천국은 … 누룩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시므로, 누룩의 침투하고 변화시키는 성질이 천국의 확장과 변화라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것은 상응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새는 언제나 이것’, ‘돌은 언제나 저것’, ‘누룩은 언제나 악’이라는 식으로 단어를 기계적으로 대입하면 말씀의 속뜻을 오히려 훼손할 수 있습니다. 같은 ‘사자’도 문맥에 따라 주님의 신적 능력을 표상할 수도 있고, 파괴적인 악의 세력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단어가 말씀 전체의 내적 연결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단순한 상징 풀이와 다릅니다.

 

그리고 누룩 비유를 ‘행실의 변화’로 읽으면서도 하나 더 보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누룩이 스스로 반죽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반죽 안에 들어가 그것을 변화시킵니다. 거듭남에서도 인간의 모든 자연적 기능이 폐기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격, 재능, 기억, 직업 능력, 인간관계, 자연적 애정 자체를 모두 버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새로운 사랑 아래서 질서를 찾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을 위해 사용하던 지성을 이제 쓰임을 위해 사용하고, 자기 명예를 위해 사용하던 재능을 이웃을 위해 사용하며, 소유를 자기만을 위해 쌓던 사람이 그것을 선한 쓰임에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의 자연적 삶이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새 중심 아래 재배열됩니다.

 

이 점은 ‘핵심진리’에서 자주 나타나는 ‘육적인 것을 버린다’는 강한 표현을 읽을 때에도 중요합니다. 자연적인 것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자연계를 창조하셨고 인간에게 자연적 몸과 감각과 애정을 주셨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영적인 것 위에 올라가 지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자연적인 것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 아래 두어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올바른 질서는 바로 이것입니다.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가 자연적 삶 전체를 질서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부 부풀게 한 누룩’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으면, 단순히 ‘모든 행동이 완벽해진 사람’이라는 정적인 그림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의 삶 전체에 점차 침투하여 속과 겉이 하나의 질서 안에 놓여 가는 거듭남의 과정’이라는 훨씬 역동적인 그림이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강사가 누룩을 넣은 뒤 한나절 또는 밤새 기다리는 생활 경험을 언급한 것도 흥미롭습니다. 거듭남 역시 순간적인 선언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생애 전체에 걸쳐 진행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핵심진리’의 ‘성화’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사이의 중요한 차이가 다시 나타납니다. 강의에서는 일정한 연단을 지나 행실이 정결해지고 ‘이긴 자’가 되는 상태를 비교적 분명한 단계로 제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계속되며, 천국에서도 영원히 완전해져 갑니다. 그러므로 어느 순간 ‘내 전체가 이제 다 부풀었다’, 곧 ‘나는 완전히 성화되었다’고 자기 상태를 확정하는 것에는 조심스러움이 필요합니다. 오히려 주님께 가까워질수록 자기 안에 남아 있는 proprium을 더 섬세하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강사가 강조하는 ‘행실의 정결’을 약화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 깊게 만들면 됩니다. 정결은 단순히 죄목 몇 가지를 행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행동을 일으키는 사랑 자체가 점차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하지 않는다’에서 ‘나는 이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로, 다시 ‘나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사랑한다’로 이동합니다. 이것이 누룩이 전체에 퍼지는 것과 같은 변화입니다.

 

이제 강의는 누룩 비유를 마치면서 진주와 보화 비유로 넘어갑니다. 원고에서도 강사는 누룩을 ‘인격적인 면에서의 행실적인 성장’이라고 정리한 직후, 마태복음 13장 44절부터 46절의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를 읽습니다. 그리고 두 비유가 사실상 같은 의미라고 봅니다. 한 사람은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고 기뻐하여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고, 좋은 진주를 구하던 장사는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한 뒤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것을 삽니다.

 

강사가 여기서 가장 강하게 붙드는 표현은 ‘자기 소유를 다 팔아’입니다. 그는 묻습니다. ‘진주 값은 얼마입니까?’ 그리고 ‘자기 소유를 몽땅 파는 값이 진주 값’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핵심진리’의 연단론과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값진 진주, 곧 하나님의 생명을 온전히 소유하기 위해서는 자기에게 속한 것을 내려놓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실제 강의의 다른 부분에서는 이 원리를 욥의 세 번째 연단과 연결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 육적인 소유를 내려놓게 된다고까지 설명합니다.

 

이 대목은 매우 깊으면서도 동시에 매우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우선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모든 신앙인이 재산과 가족과 직업을 실제로 잃어야 한다는 공식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외적 형태의 삶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도 재산이 있었고 욥도 회복 후 다시 큰 재산을 가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외적 소유의 유무보다 그 소유가 내 사랑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매우 중요한 빛을 비춥니다. ‘자기 소유’라는 말을 더 깊이 들어가면 proprium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내려놓아야 할 것은 단지 집과 돈과 재산이 아니라 ‘이것은 내 것이다’, ‘내 생명은 나에게서 나온다’, ‘내 지혜는 내 것이다’, ‘내 선은 내가 행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proprium입니다. 이것이 훨씬 깊은 자기 소유입니다.

 

따라서 ‘모든 소유를 팔아 값진 진주를 산다’는 말씀을 거듭남의 관점에서 읽으면, ‘내가 가진 물건을 모두 없애야 주님을 얻는다’는 뜻보다 ‘자기에게서 생명과 선과 진리가 나온다는 모든 자기 소유의식을 내려놓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가장 귀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방향이 더욱 깊습니다. 물론 실제 삶에서는 재물이나 명예, 관계나 지위를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목적이 아니라 proprium의 지배가 드러나는 구체적인 자리들입니다.

 

이 차이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람이 전 재산을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가도 proprium은 그대로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나는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라는 더 강한 자기 의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영광이 아니라 가족과 사회와 교회의 선한 쓰임을 위해 관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통장의 액수만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주와 보화 비유는 5강에서 계속 다루었던 ‘자기부인’을 훨씬 깊은 곳으로 데려갑니다. 자기부인은 단지 불편한 것을 참고 좋은 것을 포기하는 금욕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선의 근원으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지혜보다 주님의 진리를 귀하게 여기고, 자기 뜻보다 주님의 질서를 귀하게 여기며, 자기 영광보다 이웃의 선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은 무엇인가를 잃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값진 진주’를 얻습니다.

 

여기에서 ‘기뻐하여’라는 말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억지로 모든 소유를 팝니다가 아니라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 소유를 다 팝니다. 이것은 천국의 질서를 아주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주님을 위해 자기 것을 내려놓는 것이 영원히 고통스러운 희생으로만 남는 것이 아닙니다. 더 큰 선의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에 작은 것을 자유롭게 내려놓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손에 쥔 돌멩이를 억지로 빼앗기는 것과, 훨씬 귀한 것을 발견하여 스스로 돌멩이를 놓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거듭남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악을 포기하는 것이 손해처럼 느껴집니다. 복수하지 않는 것이 억울하고, 자기 뜻을 내려놓는 것이 고통스럽고, 정직 때문에 손해를 보는 것이 힘듭니다. 그러나 선을 사랑하게 될수록 질서가 바뀝니다. 예전에는 포기라고 느꼈던 것이 나중에는 자유가 됩니다. 미움을 내려놓는 것이 손실이 아니라 해방이 되고, 자기 공로를 버리는 것이 낮아짐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의 평안이 됩니다. 값진 진주의 가치를 실제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핵심진리’가 진주와 보화를 ‘하나님의 생명’과 연결하려는 의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강사는 겨자씨의 ‘성장’, 누룩의 ‘행실’, 진주와 보화의 ‘생명’을 서로 보완하는 세 측면으로 봅니다. 마지막 정리에서도 ‘겨자나무가 된 성도’, ‘행실이 정결해진 누룩 같은 성도’, ‘값진 진주를 소유한 성도’는 결국 같은 상태를 다른 각도에서 말한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가지 결정적인 보완을 붙이고 싶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다’고 할 때 그 생명이 인간의 독립적 소유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은 언제나 주님에게서 유입됩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받는 그릇입니다. 따라서 값진 진주를 ‘소유한다’는 것도 ‘이제 신적 생명이 내 것이 되었다’는 의미보다, 자기 생명이라고 붙들던 proprium을 내려놓고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상태로 이해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러면 놀라운 역설이 생깁니다. ‘자기 소유를 다 팔았을 때’ 비로소 참으로 풍성해집니다. 자기에게서 선이 나온다는 생각을 버렸을 때 주님의 선을 받을 수 있고, 자기 지혜를 절대화하지 않을 때 주님의 진리를 받을 수 있으며, 자기 생명을 붙들지 않을 때 주님의 생명이 더 자유롭게 흘러들어옵니다. 잃어서 비는 것이 아니라 비움으로써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자기 것처럼 받아 자유롭게 행하게 됩니다. 천사도 사랑하고 생각하고 선택할 때 그것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느낍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사랑과 지혜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압니다. 이것이 천국적 proprium, 곧 주님으로부터 받은 새로운 ‘자기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신비입니다. 인간 자신의 proprium은 악하지만, 주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새로운 의지와 생명은 사람이 자기 것처럼 누리면서도 그 근원을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룩과 진주·보화 비유를 함께 놓으면 6강의 흐름이 상당히 선명해집니다. 누룩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의 삶 전체에 스며들어 겉 사람까지 변화시키는 과정을 보여 주고, 진주와 보화는 그 변화의 중심에서 무엇이 가장 귀한 것이 되었는지를 묻습니다. 전자는 ‘내 삶 전체가 무엇에 의해 변화되고 있는가?’를 묻고, 후자는 ‘나는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두 질문은 사실 하나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가장 사랑하느냐가 결국 그의 삶 전체를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값진 진주로 발견한 사람에게는 삶의 다른 것들이 새로운 질서 안에 들어갑니다. 재물도, 명예도, 가족도, 직업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높은 사랑 아래서 제자리를 찾습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이 가장 값진 진주인 사람은 종교와 말씀까지 자기 영광을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무엇을 얼마나 많이 버렸는가?’가 아닙니다. ‘내가 모든 것을 판단할 때 최종적으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이것이 지배적 사랑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지배적 사랑이 바뀌면 누룩이 반죽 전체를 변화시키듯 삶의 나머지 모든 영역도 차츰 새로운 질서를 갖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겨자씨·누룩·진주와 보화라는 세 비유를 하나로 묶으려는 강사의 시도에는 흥미로운 영적 통찰이 있습니다. ‘성장하여 쓰임이 되고, 삶 전체가 변화되며, 마침내 가장 귀한 생명을 얻는다’는 흐름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것을 ‘특별한 이긴 자 집단의 영적 등급’보다 모든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이루시는 선과 진리의 성장, 삶 전체의 질서화, 그리고 지배적 사랑의 변화로 넓혀 읽습니다. 그렇게 할 때 이 세 비유는 특정한 영적 엘리트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마음 안에서 지금 진행되어야 할 천국의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고 이제 6강의 분위기는 크게 바뀝니다. 겨자씨·누룩·진주와 보화를 ‘교회 시대 이긴 자들’의 밝은 측면으로 묶은 뒤, 강사는 그 반대편에 ‘가라지’를 놓습니다. 실제 강의의 전체 도식에서 앞의 비유들이 ‘14만 4천’과 연결된다면 가라지는 ‘666’, 곧 적그리스도적 상태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마지막 6강 5부에서는 ‘가라지 비유’와 ‘그물 비유’를 중심으로, ‘알곡과 가라지’,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 ‘추수와 세상 끝’, 그리고 강사가 이것을 ‘14만 4천 대 666’이라는 종말론적 구도로 연결하는 방식을 충분히 살펴본 뒤, 스베덴보리의 마지막 심판과 요한계시록 해석에서는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전혀 다른 깊이로 열리는지를 함께 보겠습니다.

 

 

6강 5부

가라지와 그물, ‘세상 끝’과 마지막 심판, 그리고 6강 전체의 결론

6강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분위기가 크게 달라집니다. 앞의 겨자씨, 누룩,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가 ‘좋은 밭’에서 자라난 생명의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이제 가라지 비유와 그물 비유에서는 선과 악의 분리, 곧 심판의 문제가 전면에 등장합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을 하나의 큰 구조로 묶으면서, 씨 뿌리는 비유를 일종의 서론으로, 겨자씨·누룩·진주와 보화를 영적으로 성장한 ‘이긴 자’의 모습으로, 가라지를 그 반대편에 있는 적그리스도적 상태로, 마지막 그물 비유를 이 모든 것의 최종적인 분리와 결론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6강 전체가 결국 ‘말씀의 씨를 받은 사람이 어떤 생명으로 형성되며, 마지막에는 무엇으로 드러나는가’라는 하나의 질문을 향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라지 비유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알곡과 가라지가 ‘같은 밭’에서 함께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주인은 좋은 씨를 뿌렸지만 사람들이 잘 때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립니다. 싹이 나고 결실할 때 비로소 가라지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종들이 즉시 가라지를 뽑으려 하지만 주인은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선과 악의 분리가 인간의 성급한 판단에 맡겨져 있지 않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외적인 모습을 보고 누가 알곡이고 누가 가라지인지 쉽게 판단하려 하지만, 주님께서는 마지막까지 기다리십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이 말씀은 더욱 깊어집니다. 사람의 내적 상태는 외적인 신앙고백이나 종교생활만으로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예배하고, 기도하고, 봉사하며, 심지어 똑같은 진리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다른 사람은 자기 명예와 이익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겉 사람에서는 비슷해 보여도 속 사람의 지배적 사랑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종적인 분리는 인간의 외적 판정이 아니라 내적 사랑이 완전히 드러나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이 점에서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는 말씀은 단순한 종말론적 시간표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면서 선과 악이 충분히 자기 모습을 드러내도록 허용합니다. 사람이 아직 변화될 수 있는 동안에는 악한 상태가 보인다고 해서 곧바로 그의 영원한 상태가 확정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회개하고 방향을 바꿀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현재 모습을 보고 ‘저 사람은 가라지다’라고 확정하는 것은 이 비유의 정신과 오히려 어긋날 수 있습니다. 가라지 비유는 다른 사람을 판별하기 위한 도구라기보다 먼저 자기 안에서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를 살피게 하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더 깊게 들어가면 한 사람 안에서도 알곡과 가라지가 한동안 함께 존재합니다. 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선한 애정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과 자기 자신을 높이고 싶은 마음,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싶은 마음과 자기 유익을 먼저 챙기려는 마음이 함께 나타납니다. 진리를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그 진리를 자기 의를 세우는 데 사용하려는 proprium이 끼어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어느 날 ‘나는 알곡이고 저 사람은 가라지’라고 사람들을 둘로 나누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 안의 선과 악을 점점 구별하시고 악을 분리하시며 선을 주님의 질서 안에서 굳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덧뿌렸다’는 말씀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이시며, 모든 악과 거짓은 지옥에서 유입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에게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유입되는 악과 거짓을 사람이 자기 자유 가운데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의지의 것으로 만들 때 그것이 그의 생명에 속하게 됩니다. 반대로 유입되는 악을 죄로 알고 거부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할 때 그것은 자기 생명으로 굳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악한 생각이 떠올랐다는 사실 자체와 그 악을 사랑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것은 영적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사람에게 순간적으로 악한 생각이나 감정이 일어났다고 해서 곧 ‘나는 악한 사람이다’라고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에 동의하는가, 그것을 즐거워하는가, 아니면 주님 앞에서 악이라고 인정하고 물리치는가입니다. 거듭남의 싸움은 악의 유입 자체를 완전히 없애는 일이 아니라 그것이 의지 안으로 들어와 지배적 사랑이 되지 못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강사는 이 가라지 비유를 자신의 종말론적 체계 안에서 ‘666’과 연결합니다. 앞의 겨자씨·누룩·진주와 보화를 ‘14만 4천’과 연결하여 성화되고 이긴 성도들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가라지는 그 반대편의 적그리스도적 생명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구조는 ‘핵심진리’의 전체적인 영적·종말론적 도식을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됩니다. 선한 씨가 자라 완성되는 방향과 악한 씨가 자라 완성되는 방향을 서로 대비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상당히 중요한 보정이 필요합니다. 요한계시록의 ‘666’은 어떤 특정한 악인 집단이나 미래의 한 적그리스도 세력을 표시하는 암호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요한계시록 해설에서 ‘짐승의 수’는 신앙을 체어리티와 분리하여 구원의 전부로 만드는 교리와 그 상태의 질을 나타내는 매우 깊은 상응적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666인 사람들’이라는 식으로 사람 자체에 표지를 붙이는 것보다, ‘내 신앙 안에서도 진리와 신앙을 사랑과 삶으로부터 분리하는 666적 상태가 생길 수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 훨씬 스베덴보리적인 접근입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AC 창세기 4장에서 읽고 있는 ‘가인’과도 놀랍게 연결됩니다. 가인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표상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으면 살아 있지만, 신앙이 자기 독립적인 것이 되어 사랑을 밀어내면 결국 아벨을 죽이는 가인이 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스베덴보리가 비판하는 ‘신앙만’의 교리도 본질적으로 같은 영적 문제를 다른 시대와 형식에서 보여 줍니다. 따라서 ‘666’을 밖에 있는 무서운 적그리스도를 찾아내는 표지로만 읽기보다, 진리가 사랑과 분리될 때 교회 안에서조차 어떻게 생명을 잃는지를 보여 주는 경고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보면 ‘알곡과 가라지’ 역시 교파나 집단을 나누는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알곡이고 저 교회는 가라지다’, ‘우리 교리는 14만 4천이고 저들의 교리는 666이다’라는 식으로 사용되는 순간, 이 비유는 자기성찰의 말씀에서 타인을 정죄하는 도구로 바뀝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묻고 계시는 것은 ‘네가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네 안에서 실제로 무엇이 자라고 있느냐?’입니다.

 

이제 가라지 비유의 마지막에는 ‘추수’가 등장합니다. 주님께서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세상 끝’을 문자적으로 우주와 지구가 소멸하는 날이라고 읽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한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세상 끝’ 또는 ‘시대의 완성’은 자연계 자체의 파괴가 아니라 하나의 교회가 선과 진리를 완전히 잃어 더 이상 교회로 기능할 수 없게 된 마지막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때 영계에서 심판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교회가 시작됩니다.

 

따라서 마지막 심판 역시 자연계의 모든 사람이 무덤에서 육체로 부활하여 한 장소에 모여 재판받는 사건이 아닙니다. 인간은 죽은 뒤 이미 영계에서 살아가며, 마지막 심판은 그 영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외적으로는 천국을 가장하고 선한 신앙인처럼 살았지만 내적으로는 악과 거짓을 사랑하던 상태들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면서 외관이 벗겨지고, 각자가 실제로 사랑하는 것에 따라 분리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라지 비유와 매우 잘 맞습니다. 추수 전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랍니다. 외관상으로는 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가 완전히 드러나면 더 이상 감출 수 없습니다. 사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지상에서 가지고 있던 외적 습관과 종교적 외관이 어느 정도 남아 있지만, 중간영계에서 외적인 것이 점차 벗겨지면서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사람은 결국 자기 지배적 사랑과 같은 곳으로 갑니다. 누가 억지로 천국이나 지옥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이 그와 같은 공동체를 찾아갑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본질은 주님께서 분노하여 사람을 벌하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진리가 사람의 실제 상태를 드러내고, 각자가 자유롭게 형성한 사랑에 따라 질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천국의 사랑은 오히려 견딜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보다 이웃의 행복을 더 기뻐하는 천국 공동체 안에서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은 단순한 ‘보상과 형벌의 장소’ 이전에 서로 완전히 다른 사랑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제 마태복음 13장의 마지막 비유인 ‘그물 비유’가 나옵니다.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그리고 주님께서는 다시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라고 설명하십니다. 가라지 비유와 거의 같은 결론입니다. 처음에는 함께 모이지만 마지막에는 분리가 일어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바다’는 자연적 차원에 모여 있는 지식과 일반적인 진리의 영역과 연결될 수 있으며, 물고기는 그 가운데 살아 움직이는 자연적 지식과 인식들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다는 말씀도 이와 관련하여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나 이번 강의에서 더 중요한 것은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가 처음부터 별도의 그물에 잡힌 것이 아니라 ‘한 그물’ 안에 함께 들어왔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외적 소속만으로 사람의 영원한 상태가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보여 줍니다. 같은 교회에 속하고, 같은 세례를 받고, 같은 성찬에 참여하며, 같은 교리를 고백한다고 해서 내적 생명이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외적 질서는 필요하지만 그것이 곧 천국은 아닙니다. 천국은 사람 안에 주님의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형성되는 내적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물’에 들어왔다는 것과 ‘좋은 물고기’가 되었다는 것은 다릅니다. 교회에 들어온 것과 거듭난 것도 동일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알고 교리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 진리가 곧 생명이 된 것도 아닙니다. 다시 6강의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씨가 뿌려졌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떤 밭에 떨어졌으며, 뿌리를 내렸고, 가시를 이겨 내고, 마침내 열매가 되었는지가 중요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마태복음 13장의 여러 비유를 하나의 흐름으로 읽으려 한 강사의 의도가 가장 잘 드러납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어떤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가’를 묻고, 겨자씨에서 ‘그 생명이 얼마나 성장하는가’를 묻고, 누룩에서 ‘그 생명이 삶 전체를 얼마나 변화시키는가’를 묻고, 진주와 보화에서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가’를 묻고, 가라지와 그물에서 ‘마침내 어떤 생명으로 드러나는가’를 묻습니다. 이 연결 자체는 매우 인상적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모든 것을 ‘14만 4천에 들어갈 것인가, 666에 들어갈 것인가’라는 두 집단의 분류보다 훨씬 내적인 문제로 가져옵니다. 그것은 ‘오늘 내 안에서 어떤 사랑이 형성되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천국적 사랑인가, 자기 자신과 세상을 모든 것 위에 두는 지옥적 사랑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별은 겉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섬세합니다. 설교자가 될 수도 있고, 선교사가 될 수도 있고, 수도자가 될 수도 있으며, 스베덴보리를 깊이 연구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활동의 가장 깊은 목적이 자기 명예와 우월감이라면 외적 종교성만으로는 천국적 생명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이름 없이 평범한 일을 하면서도 주님을 신뢰하고 이웃에게 정직하며 맡겨진 쓰임을 사랑하는 사람이 훨씬 천국적인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쓰임’을 그렇게 중요하게 보는 이유입니다. 천국적 생명은 특별한 종교적 지위를 갖는 데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받은 선과 진리를 자기 자리에서 실제 쓰임으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좋은 밭의 열매도 결국 쓰임이고, 겨자나무의 가지도 다른 생명을 위한 쓰임이며, 누룩이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목적도 선한 쓰임이고, 값진 진주를 얻은 사람의 새 생명 역시 체어리티의 쓰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추수’도 두려움의 이미지에서 조금 달라집니다. 물론 악을 사랑하여 그것을 자기 생명으로 만든 사람에게 분리는 엄중합니다. 그러나 거듭나는 사람에게 주님의 분리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내 안에서 선과 악이 뒤섞여 있는 상태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악을 분리하시고 선을 자유롭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듭남 자체가 작은 심판들의 연속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진리가 비추어질 때마다 ‘이 생각은 주님에게서 오는 질서와 맞는가’, ‘이 욕망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분별하고 악을 거부하며 선을 선택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의 원리가 오늘의 회개 안에서도 작동합니다. 회개는 자기 자신을 정죄하며 괴롭히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빛 가운데 선과 악을 구별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내 proprium에서 나온 것이구나’, ‘이것은 이웃을 해치는 사랑이구나’ 하고 보고, 주님께 그것을 물리쳐 달라고 구하면서 실제 행동에서는 그 악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작은 분리들이 쌓이면서 사람의 영적 생명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6강 전체를 처음부터 다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강사가 강조했던 것은 ‘영적 가치관’이었습니다.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며 어떤 방향으로 살아갈 것인가였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는 그 가치관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밭’으로 나타났습니다. 길가는 말씀이 들어오지 못하는 상태였고, 돌밭은 말씀을 기쁨으로 받지만 뿌리가 깊지 않은 상태였으며, 가시밭은 말씀과 함께 세상 사랑이 자라 말씀을 질식시키는 상태였습니다. 좋은 밭에서는 말씀이 실제 열매가 되었습니다.

 

그다음 겨자씨에서는 그 생명이 성장하여 다른 사람을 위한 ‘쓰임’으로 확장되었습니다. 누룩에서는 주님의 진리와 선이 삶의 일부에 머물지 않고 생각과 의지, 말과 행동 전체로 스며들어 사람을 변화시키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진주와 보화에서는 이 모든 변화의 중심에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가’라는 지배적 사랑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라지와 그물에서는 결국 그 지배적 사랑이 완전히 드러나 선과 악의 분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보면 6강의 처음과 마지막이 정확히 만납니다. 처음에는 ‘영적 가치관’이라고 했고, 마지막에는 ‘심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사실 두 가지가 하나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기고 사랑하며 살았는지가 결국 나의 영원한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전혀 낯선 기준이 마지막 순간 갑자기 적용되는 사건이 아니라, 평생 자유롭게 형성해 온 사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을 준비한다는 것도 죽기 직전에 어떤 자격을 얻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의 작은 선택에서 천국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손해가 생겨도 정직을 선택하고, 미워할 이유가 충분해 보여도 보복을 거부하며, 선을 행한 뒤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자기 판단보다 진리를 높이며, 받은 능력을 이웃의 쓰임을 위해 사용하는 가운데 천국적 사랑이 조금씩 사람의 생명이 됩니다.

 

반대로 지옥 역시 죽은 뒤 갑자기 주어지는 낯선 상태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모든 것 위에 놓고, 다른 사람을 자기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며, 거짓임을 알면서도 이익 때문에 붙들고, 악임을 알면서도 사랑하기 때문에 선택하는 일이 반복될수록 그 사랑이 점차 생명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회개를 그렇게 중요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직 자연계에 있는 동안 사람은 방향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핵심진리’가 계속 강조하는 ‘영적 성장’, ‘연단’, ‘이긴 자’, ‘익은 열매’라는 언어에는 귀한 긴장감이 있습니다. 신앙을 단순히 ‘예수를 믿었으니 이제 구원받았다’는 과거의 한 사건으로 끝내지 않고, ‘그 믿음이 지금 당신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라고 묻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도 바로 그 질문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입니다.

 

다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몇 단계의 연단을 통과했는가’, ‘14만 4천에 속할 정도로 성화되었는가’, ‘다른 성도보다 높은 영적 등급에 도달했는가’로 가져갈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 단순하고 더 깊게 물을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사랑하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삶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보면 됩니다. 사랑은 반드시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진리를 사랑하게 되고, 진리를 사랑하면 그것을 행하려 하며, 이웃을 사랑하면 그의 선을 원하게 되고, 선을 사랑하면 쓰임을 기뻐하게 됩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면 진리조차 자기편을 만드는 도구로 사용하게 됩니다. 결국 나무는 열매로 드러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6강의 씨 뿌리는 비유와 마지막 그물 비유 사이에는 매우 아름다운 연결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씨였습니다. 너무 작아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씨가 자라고 마침내 열매가 나타났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열매와 생명의 질이 드러나 분리가 이루어집니다. 영적 생명도 그렇습니다. 아주 작은 선택 하나가 반복되면서 애정이 되고, 애정이 습관이 되며, 습관이 마침내 사랑의 형태를 이루어 사람의 생명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날 ‘666의 사람’만이 아닙니다. 오늘 내 안에서 사랑과 분리된 신앙이 자라고 있지는 않은지, 진리를 알면서도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영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영적 우월성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14만 4천에 들어가야 한다’는 욕망보다 오늘 받은 작은 진리를 삶으로 옮기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저는 6강의 가장 좋은 부분과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만난다고 봅니다. ‘좋은 밭이 되라.’ 그러나 그것은 영적 엘리트가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의 씨가 네 안에서 실제 생명이 되게 하라’는 뜻입니다. ‘겨자나무가 되라.’ 그러나 많은 사람 위에 서는 지도자가 되라는 뜻이 아니라 받은 선과 진리가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쓰임이 되게 하라는 뜻입니다. ‘누룩처럼 전부 변화되라.’ 그러나 외적으로 흠 없는 종교인이 되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가 삶의 가장 자연적인 영역까지 스며들게 하라는 뜻입니다. ‘값진 진주를 얻으라.’ 그러나 영적 보물을 자기 소유로 확보하라는 뜻이 아니라 자기 proprium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더 귀하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가라지를 경계하라.’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가라지라는 이름표를 붙이라는 뜻이 아니라 내 안에서 진리와 사랑을 분리시키는 악과 거짓을 살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물이 가득 찰 때를 기억하라.’ 그러나 공포 속에서 종말의 날짜를 계산하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형성되고 있는 지배적 사랑이 결국 나의 영원한 방향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해서 6강의 다섯 부분은 하나로 모입니다. ‘말씀은 씨로 들어오고, 선 안에서 뿌리를 내리며, 시험 가운데 깊어지고, 삶 전체로 퍼져 열매가 되고, 마침내 그 열매가 그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드러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6강의 가장 중심적인 흐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결론은 다시 AC의 아주 오래된 주제로 돌아갑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진리를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진리가 선과 결합된 사람입니다.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사랑 안에서 살아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가인’을 없애고 ‘아벨’만 남긴다는 의미가 아니라,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독립적인 주인이 되는 질서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신앙은 사랑에서 나오고 사랑으로 돌아가며, 결국 선한 삶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따라서 6강 전체를 한 문장으로 마무리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천국은 미래 어느 날 들어갈 장소이기 전에, 주님께서 말씀의 씨를 통하여 인간의 마음에 심으시고, 거듭남 가운데 선과 진리를 결합하시며, 마침내 사랑과 쓰임이라는 열매로 나타나게 하시는 생명의 질서입니다.’

 

그렇게 보면 마태복음 13장의 마지막 질문은 ‘나는 14만 4천인가, 666인가?’가 아닙니다. 훨씬 조용하고, 훨씬 깊으며, 그래서 더욱 피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내 마음에 씨를 뿌리고 계시는데, 나는 그 말씀을 어떻게 받고 있으며, 그 말씀은 지금 내 삶에서 어떤 열매가 되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이 질문을 남기는 것으로 6강 5부, 그리고 6강 전체를 마무리하면 좋겠습니다.

 

 

 

SY.60,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7강 (7/30),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7강 1부씨 뿌리는 비유와 네 가지 마음밭이번 강의에서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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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58,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5강 (7/29),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5강 1부‘말씀을 아는 것’에서 ‘말씀으로 사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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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3강 1부

요한계시록 6장의 ‘네 말’과 심판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번 3강은 찬송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로 문을 엽니다. 강사는 ‘오직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이어지는 기도에서도 ‘진리의 영으로 저희들을 충만케 하여 주옵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이것은 뒤이어 전개되는 복잡한 종말론적 도식보다 먼저 붙들어야 할 이 강의의 영적 중심입니다. 강사가 무엇보다 주님을 삶의 가장 귀한 분으로 모시고자 하며, 말씀을 통해 자신과 청중이 변화되기를 원한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 출발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의 중심은 어떤 종말 시간표를 정확하게 아는 데 있지 않고, 주님을 인정하고 사랑하며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사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후의 해석에서 상당한 차이가 발견되더라도, 이 강의의 첫 고백 자체는 소중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앞서 살펴본 요한계시록 4장을 ‘총사령부’, 5장을 어린양이신 ‘총사령관’이 등장하는 장으로 정리한 뒤, 6장을 ‘무엇으로 심판하실 것인가’, 곧 ‘심판의 재료’를 보여 주는 장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일곱 인을 떼는 과정 자체를 7년 대환란으로 보지 않고, 대환란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봅니다. 첫째부터 넷째 인에서는 백마·홍마·흑마·청황마라는 네 가지 심판의 재료가 제시되고, 다섯째 인에서는 순교자의 수가 채워지며, 여섯째 인에서는 천재지변 가운데 고통받는 인류가 나타나고, 일곱째 인이 떼어질 때 비로소 일곱 나팔과 함께 본격적인 7년 대환란이 시작된다는 구조입니다. 강사는 이를 스가랴 6장의 네 종류의 말과 요한계시록 7장의 ‘사방의 바람’까지 서로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여기까지는 강사 자신의 계시록 독법입니다. 이 해석 안에는 주목할 만한 장점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한 절씩 고립시켜 읽지 않고, 4장부터 8장까지의 구조와 스가랴의 환상을 함께 놓고 성경 전체의 연결을 찾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말’, ‘바람’, ‘인’, ‘나팔’과 같은 이미지가 서로 무관한 장식물이 아니라 어떤 영적 의미를 전달한다고 보는 태도는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와도 일정 부분 접점을 가집니다. 성경의 환상적 이미지에는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를 찾으려면 다른 말씀과의 관계를 살펴야 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가까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부터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강사의 해석과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들어갑니다. 차이는 ‘상징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양쪽 모두 상징을 인정합니다. 진짜 차이는 ‘그 상징이 무엇과 상응하는가’에 있습니다. 강사는 백마·홍마·흑마·청황마를 앞으로 자연계에서 일어날 공의의 심판·전쟁·기근·사망이라는 사건들과 연결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의 말들을 인간의 영적 상태, 더 정확히는 교회 안에서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라는 문제와 연결합니다. 여기서부터 같은 요한계시록 6장을 바라보면서도 두 해석은 전혀 다른 풍경을 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은 말씀에 대한 이해, 곧 진리를 이해하는 지적 능력과 상응합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6장에 갑자기 만들어진 해석 원리가 아닙니다. 성경 전체에서 말이 지닌 상응을 따라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 19장의 백마도 같은 원리로 풉니다.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라는 환상은 단순히 미래 어느 날 주님께서 실제 흰색 말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광경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의 속뜻을 열어 주시고 말씀에 대한 참된 이해를 회복시키시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백마’는 말씀에 대한 참된 이해이며, 그 위에 타신 분은 말씀 자체이신 주님입니다.

 

이 점에서 흥미롭게도 강사와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 6장의 백마 탄 자를 ‘사탄’으로 보지 않는다는 데서는 만납니다. 강사는 백마 탄 자를 공의로 심판하시는 예수님과 연결하면서, 이를 사탄으로 해석하는 일부 종말론적 해석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백마를 악한 존재의 상징으로 보지 않습니다. 다만 그 이유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흰색은 진리를 나타내고, 말은 말씀의 이해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첫째 인을 뗄 때 나타나는 백마는 ‘전쟁을 시작하는 어떤 존재’라기보다 교회 가운데 존재하는 말씀에 대한 참된 이해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6장의 네 말은 각각 따로 떨어진 네 사건이라기보다 하나의 연속적인 영적 쇠퇴를 보여 줍니다. 이것이 이번 3강 1부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스베덴보리의 렌즈’입니다. 처음에는 말씀을 바르게 이해합니다. 이것이 백마입니다. 그러나 그다음에는 선과 사랑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붉은 말입니다. 이어서 진리에 대한 이해가 빈곤해지고 왜곡됩니다. 이것이 검은 말입니다. 마침내 선도 진리도 사라져 영적 생명 자체가 죽은 상태에 이릅니다. 이것이 청황색 말입니다. 그러므로 백마 → 홍마 → 흑마 → 청황마의 진행은 외부 세계에서 ‘공의 → 전쟁 → 기근 → 죽음’이 차례로 일어나는 시간표라기보다, 교회가 말씀의 참된 이해로부터 점차 사랑과 진리를 잃어 마침내 영적으로 황폐해지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둘째 인의 ‘붉은 말’도 훨씬 내면적인 의미를 갖게 됩니다. 본문은 붉은 말을 탄 자가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한다고 말합니다. 강사는 이를 실제 전쟁으로 읽고, 나아가 미래의 세계적 전쟁 및 아마겟돈과 연결합니다. 물론 전쟁은 인류의 악이 자연계에 나타나는 참혹한 결과이므로 영적 의미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전쟁’은 더 근본적으로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의 영적 싸움을 나타냅니다. 특히 ‘땅에서 화평을 제한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사랑과 체어리티가 사라지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사랑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같은 성경을 가지고도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진리는 상대를 살리는 빛이 아니라 상대를 정죄하는 칼이 됩니다.

 

여기에는 매우 실제적인 영적 통찰이 있습니다. 교회가 말씀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말한다고 해서 반드시 ‘백마의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에 대한 지식이 사랑과 결합되어 있을 때 비로소 그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사랑이 떠나면 신앙의 언어는 그대로 남아 있어도 그 안에서 ‘화평’이 사라집니다.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입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면 진리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확증과 정죄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붉은 말은 단지 먼 미래의 세계대전을 예언하는 그림이 아니라, 오늘 우리 자신의 신앙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영적 사건입니다.

 

셋째 인을 떼었을 때 나타나는 ‘검은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사는 검은색을 기근과 연결하고,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라는 말씀을 실제적인 흉년과 식량 부족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으로 보면 여기서 기근은 단순히 먹을 양식이 부족한 상태가 아니라 선과 진리의 결핍입니다. 성경에서 ‘먹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생명으로 만드는 것이며, ‘양식’은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선과 진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영적인 기근은 성경책이 없어지는 상태가 아닙니다. 성경은 여전히 있고 설교도 계속되고 신학도 풍성한데, 그 말씀을 통해 실제로 사랑과 선을 공급받지 못하는 상태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의 교회를 돌아볼 때 매우 엄중한 의미를 가집니다. 성경책이 넘쳐나고 설교와 강의가 인터넷에 가득하다고 해서 반드시 영적 풍년인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말씀을 통해 자신의 악을 보고 회개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에 따라 실제 삶을 고쳐 가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정보는 풍성하면서도 영적으로는 기근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성경 지식은 많지 않더라도 알고 있는 진리 하나를 붙들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 안에는 주님께서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실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리는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보다 ‘그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삶이 되었는가’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계시록 6장을 ‘심판의 재료를 보여 주는 장’이라고 표현한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달리 받아들이면 뜻밖에도 깊은 의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다만 ‘재료’가 자연계의 전쟁·기근·천재지변이라기보다, 심판 때 드러나는 인간과 교회의 내적 상태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외부에서 갑자기 어떤 재앙을 던져 사람을 파괴하시는 행위가 아니라, 그동안 사람 안에 형성되어 온 것이 빛 가운데 드러나는 것입니다. 무엇을 사랑했는지, 무엇을 진리로 받아들였는지, 알고 있는 진리를 어떻게 살았는지가 드러나는 것이 심판입니다.

 

이 관점에서는 ‘인을 떼신다’는 표현도 중요해집니다. 봉인된 것은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인이 떼어지면 감추어져 있던 것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어린양께서 인을 떼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을 파괴하기 위한 재앙을 하나씩 방출하신다는 뜻이라기보다, 말씀과 교회의 내적 상태를 밝히 드러내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빛 앞에서는 감추어진 것이 드러납니다. 겉으로는 신앙이 좋아 보였지만 실제로 무엇을 사랑했는지, 진리를 말했지만 그 진리를 자기 유익을 위해 사용했는지, 혹은 부족한 지식 가운데서도 선을 사랑하며 살았는지가 드러납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심판은 ‘폭로’이면서 동시에 ‘분별’입니다.

 

이 지점은 시흥영성수련원 사경회가 오랫동안 강조해 온 ‘말씀대로 실제로 살아야 한다’는 수도적 영성과도 깊은 접점이 있습니다. 말씀을 많이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받은 말씀을 삶에서 순종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강조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과 상당히 가까이 다가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말씀을 삶으로 옮기는 과정 자체가 인간 안의 영적 질서를 변화시키는 ‘거듭남’이라고 설명합니다. 진리를 알고, 그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기를 반복할 때 주님께서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점차 질서 안에 놓으십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6장을 읽으면서 우리가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제3차 세계대전은 언제 일어나는가?’, ‘7년 대환란은 언제 시작되는가?’, ‘첫째 인은 이미 떼어졌는가?’가 아닐 수 있습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지금 내 안의 말은 무슨 색인가?’입니다. 나는 말씀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 진리를 사랑과 결합시키고 있는가, 아니면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과의 화평을 잃어버리고 있는가, 혹은 진리를 많이 말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영적인 기근 가운데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환상을 자기 밖의 미래 사건으로만 돌려놓으면 우리는 구경꾼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환상을 자신의 영적 상태를 비추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요한계시록은 갑자기 현재의 말씀이 됩니다.

 

또 하나 조심스럽게 짚어야 할 부분은 강사가 말하는 ‘7년 대환란은 모든 인류의 죄를 없이 하시는 7년간의 번제 기간’이라는 설명입니다. 이 표현은 강사의 종말론 체계 안에서는 의미가 있겠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죄는 외부의 환난을 겪는다고 자동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지만, 고난 자체가 악을 제거하지는 않습니다. 같은 고난을 겪고도 어떤 사람은 더욱 선해지고 어떤 사람은 더욱 완고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난 속에서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서며, 그 악을 실제 삶에서 피하려 하는 자유로운 선택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인간의 악을 강제로 뽑아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보존하시면서, 진리를 보여 주시고 악을 보게 하시며, 사람이 자유롭게 그 악을 거부하도록 끊임없이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목적을 파괴 그 자체로 이해하기보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도록 하는 신적 질서의 회복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깊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지옥에 보내기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끝까지 천국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끝내 사랑하는 악을 놓지 않으면, 사후에는 그 사랑과 상응하는 공동체를 스스로 찾아가게 됩니다. 천국과 지옥은 결국 사람이 평생 무엇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았는지가 완전히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강의 중에는 또 ‘성도들의 기도의 분량이 다 차야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행하신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강사는 요한계시록 8장의 향과 성도들의 기도를 근거로 이것을 심판이 시작되는 조건과 연결합니다. 이 부분도 문자적으로 ‘기도가 일정량 누적되면 하나님께서 재앙을 시작하신다’고 이해하기보다는, 기도가 나타내는 영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향은 예배와 기도, 특별히 주님께 올라가는 영적 애정과 상응합니다. 따라서 향연이 올라간다는 것은 단순한 기도 횟수의 축적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에서 선과 진리를 향한 애정이 주님께 향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렇게 읽으면 요한계시록의 장면은 훨씬 내면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결국 3강 1부에서 강사는 요한계시록 6장의 네 말을 앞으로 임할 심판의 네 가지 ‘바람’, 곧 공의·전쟁·기근·사망의 심판으로 읽으며 이를 7년 대환란 직전의 준비 과정에 배치합니다. 이에 비해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같은 네 말을 교회와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상태의 변화로 읽습니다. 백마는 말씀에 대한 참된 이해, 붉은 말은 선과 사랑의 상실, 검은 말은 진리의 황폐, 청황색 말은 마침내 선과 진리가 모두 사라진 영적 죽음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두 해석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나 이 차이를 ‘어느 쪽이 맞고 어느 쪽이 틀렸다’는 식으로만 다루기보다, 강사가 외적 역사 속에서 발견하려 한 심판의 질서를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내면과 교회의 영적 역사 속으로 더 깊이 가져간다고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차이가 이번 사경회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이유를 가장 잘 보여 줍니다. 강사는 우리에게 ‘다가올 환난에 준비되어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질문을 없애지 않고 오히려 더 가까이 가져옵니다. ‘그 환난이 오기 전에 준비되어 있는가?’를 넘어 ‘오늘 주님께서 네 안의 인을 떼어 네 내면을 보여 주신다면 무엇이 드러나겠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말씀을 알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그 말씀을 사랑하고 있는가, 사랑한다고 말하는가만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내고 있는가, 신앙을 고백하는가만이 아니라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가를 묻습니다.

 

그렇게 보면 요한계시록의 심판은 먼 미래의 공포스러운 사건만이 아닙니다. 말씀의 빛이 오늘 나에게 임하여 내 속의 거짓과 악을 드러내고, 그것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매일의 작은 심판이 먼저 있습니다. 이 심판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마지막 심판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밝히시는 것은 멸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며, 드러내시는 것은 정죄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자유롭게 악에서 돌아서도록 하시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3강 첫머리에서 함께 부른 찬송의 고백이 오히려 이 모든 복잡한 종말론을 꿰뚫는 가장 단순하고 깊은 결론이 됩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사람이 실제로 이 고백대로 살아간다면, 요한계시록이 궁극적으로 준비시키려는 사람도 바로 그런 사람일 것입니다.



3강 2부

씨 뿌리는 비유와 네 가지 마음밭

이번 3강 2부에서는 강사가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를 중심으로 지금까지 배운 ‘핵심진리’를 종합하기 시작합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의 일곱 비유를 서로 떨어진 이야기들이 아니라 하나의 체계로 읽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서론, 겨자씨·누룩·진주와 보화·가라지 비유를 본론, 그물 비유를 결론처럼 배열하고, 이것이 앞으로 공부할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과 666을 이해하는 준비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이 사경회의 독특한 종말론적 체계가 이미 상당히 들어와 있습니다. 특히 ‘14만 4천’을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성장한 성도들로, ‘666’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장 어두운 영혼들과 연결하려는 방향이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이 가운데 먼저 귀하게 받아들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강사가 성경 공부의 목적을 단순한 지식 습득에 두지 않고 ‘영적인 목표’, ‘신앙의 방향’, ‘영적 가치관’을 분명히 하는 데 둔다는 점입니다. 강사는 ‘무엇을 추구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세상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고 영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영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와 상당히 깊은 곳에서 만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을 결정하는 가장 깊은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느냐입니다. 사람은 결국 자신의 지배적 사랑, 곧 생명의 중심을 이루는 사랑에 따라 형성되며, 사후에도 바로 그 사랑이 그 사람의 영적 방향을 결정합니다.

 

다만 마태복음 13장을 곧바로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 대 666’을 해석하기 위한 일종의 암호표로 사용하는 부분에서는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와 요한계시록 사이에 깊은 내적 연결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연결은 ‘겨자씨 비유 = 14만 4천의 성장’, ‘누룩 비유 = 14만 4천의 행실’, ‘가라지 = 666’과 같이 인물 집단을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방식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은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영적 상태, 그리고 가장 깊게는 주님과 그분의 나라를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따라서 어떤 비유를 특정 종말 집단의 정체를 밝히는 열쇠로 제한하면, 오히려 그 비유가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보편적인 영적 의미가 좁아질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부분의 핵심인 ‘씨 뿌리는 비유’로 들어오면 오히려 강사의 설명과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가 상당히 가까워집니다. 강사는 씨를 ‘하나님의 말씀, 복음의 진리’, 씨가 떨어지는 밭을 ‘사람의 마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길가·돌밭·가시밭·좋은 밭이라는 네 상태를 사람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서로 다른 마음 상태로 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설명하신 비유의 문자적 의미에 충실한 해석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씨’라는 표현 자체가 매우 깊습니다. 씨에는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은 씨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땅에 받아들여져야 하고, 뿌리를 내려야 하며, 자라고 마침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말씀의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듣는 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기억하는 것도 시작입니다. 이해하는 것도 아직 완성이 아닙니다.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삶이 되고, 그 진리로부터 선이 행해질 때 비로소 ‘열매’가 맺힙니다. 그러므로 씨 뿌리는 비유는 사실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이라고 부르는 과정 전체를 놀랍도록 간결하게 보여 주는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밭’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 조금 더 세밀하게 말하면,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되는 인간의 내면입니다. 같은 씨가 뿌려집니다. 씨 자체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다릅니다. 어떤 씨는 새가 먹고, 어떤 씨는 잠깐 자랐다가 말라 버리고, 어떤 씨는 가시에 눌리며, 어떤 씨는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합니다. 차이는 씨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그릇’에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는 동일하지만,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강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말을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밭이 어디에 해당하는지 스스로 정확하게 알지 못하며, 하나님께서 ‘시험해 보는 과정’을 통해 그것을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험을 영적 성장 과정과 연결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상당히 깊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시험하신다’는 표현의 의미를 조금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넘어뜨리기 위해 시험을 보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영적 시험, 곧 temptation은 지옥으로부터 오는 악과 거짓의 공격을 주님께서 허용하시는 가운데, 인간 안에 이미 존재하던 것이 드러나고 주님께서 그것을 이기도록 인도하시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평안할 때에는 자신이 어떤 밭인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나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나는 세상보다 천국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존심이 심하게 상했을 때, 손해를 보게 되었을 때,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돈과 명예와 안락함 가운데 하나를 포기해야 할 때 비로소 마음밭의 상태가 드러납니다. 바로 이 점에서 강사가 말하는 ‘시험을 통해 자신의 밭이 드러난다’는 설명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네 가지 밭을 반드시 세상 사람들을 네 부류로 영원히 고정하여 나누는 분류표로만 볼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은 넷 중 하나에 해당한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어느 시점에서 사람의 주된 상태를 그렇게 구별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네 밭을 한 사람의 거듭남 과정 안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아직 길가 같은 부분도 있고, 돌밭 같은 부분도 있으며, 가시떨기가 우거진 부분도 있습니다. 동시에 주님께서 오래 갈아엎고 준비하셔서 좋은 땅이 된 부분도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씨 뿌리는 비유가 타인을 분류하는 말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비추는 말씀이 됩니다. ‘저 사람은 길가다’, ‘저 사람은 돌밭이다’, ‘나는 좋은 밭이다’라고 판정하는 순간 이 비유의 칼날이 밖으로 향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주님의 말씀이 아직 들어가지 못하고 튕겨 나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어떤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였다가 어려움이 오자 버렸는가?’, ‘내가 알고 있는 말씀 가운데 세상 염려와 자기애 때문에 열매 맺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이 비유는 거듭남의 말씀이 됩니다.

 

먼저 ‘길가’는 말씀이 내면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강사는 길가가 사람들이 계속 밟고 다녀 딱딱해진 땅인 것처럼,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강퍅한 마음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중요한 것은 진리가 내면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귀로 들을 수 있습니다. 설교를 듣고 성경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기억의 표면을 스쳐 지나가고 자신의 삶과 무관한 정보로 머문다면, 씨는 아직 ‘땅속’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는 표현도 의미심장합니다. 성경에서 새는 문맥에 따라 생각과 지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좋은 의미의 새도 있지만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된 사고, 곧 진리를 빼앗아 가는 잘못된 추론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말씀을 들은 직후 자신의 기존 욕망에 맞추어 ‘그 말씀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요즘 세상에 그렇게 살면 손해만 보지’, ‘그건 나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야’라고 합리화하기 시작하면, 막 뿌려진 진리가 내면에 들어가기 전에 거짓된 추론에 의해 사라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새가 씨를 먹는’ 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다음의 ‘돌밭’은 더욱 미묘합니다. 이 사람은 말씀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즉시 기쁨으로’ 받습니다. 문제는 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상당히 자주 볼 수 있는 상태입니다. 설교를 듣고 감동하고, 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어떤 진리를 발견하고 크게 기뻐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자신의 사랑과 의지를 바꾸는 데까지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말씀 때문에 손해를 보거나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견디지 못합니다. 진리가 감정에는 닿았지만 생명에는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뿌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식물의 뿌리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뿌리가 식물 전체를 지탱합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종교 활동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혼자 있을 때 무엇을 사랑하는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어떤 선택을 하는가,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진리를 따르는가 하는 내면의 상태입니다. 거기에 진리가 뿌리를 내릴 때 신앙은 외부 환경에 따라 쉽게 말라 버리지 않습니다.

 

강사가 좋은 밭을 설명하면서 ‘더 겸손하고, 더 충성하고, 더 인내하고, 더 온전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부분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또한 ‘적당히 천국만 가면 되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해야 한다고 권합니다. 세상의 쾌락이나 성공을 최고의 가치로 삼지 말고 ‘좁은 길’을 선택해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표현의 체계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이 실천적 강조는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상당히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다만 강사가 이것을 ‘생명책이라는 저금통장’에 선행과 인내가 상급으로 적립되는 것처럼 설명하는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조금 달리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의 상태는 선행을 많이 해서 점수를 많이 쌓은 결과라기보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형성하신 사랑과 지혜의 상태입니다. 선한 행위는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행위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천국의 공로를 적립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행위 속에서 사람의 사랑이 실제 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같은 선행이라도 자기 명예를 위해 한 것과 이웃의 유익을 사랑해서 한 것은 외적으로는 같아 보여도 내적으로 전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행위’ 또는 ‘일’을 그토록 중요하게 다루면서도 공로 사상을 경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얼마나 많이 했는가’만 계산하지 않습니다. 무엇으로부터 했는가가 중요합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했는가, 아니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의 선을 원하여 했는가입니다. 결국 행위는 사랑의 외적 형상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는지는 실제 행위 가운데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말하는 ‘밝은 빛’도 이렇게 이해하면 한층 깊어집니다.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은 단순히 신앙적 업적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가 그의 이해를 밝히고, 그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실제 생활로 흘러나오는 사람입니다. 빛은 진리이고, 그 빛을 따뜻하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빛만 있고 따뜻함이 없다면 겨울 햇빛과 같을 수 있습니다. 진리는 많이 알지만 체어리티가 없다면 영적 생명을 자라게 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사랑한다고 하면서 진리를 원하지 않는다면 방향을 잃기 쉽습니다. 거듭남은 이 둘, 곧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이 결합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씨 뿌리는 비유에서 ‘열매’가 최종적으로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좋은 땅을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하시면서 그 결과를 ‘결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씨가 목적이 아니며 싹도 목적이 아니고 줄기와 잎도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열매가 목적입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을 듣는 것, 공부하는 것, 이해하는 것, 교리를 정리하는 것 모두 중요하지만 그것 자체가 최종 목적은 아닙니다. 그것을 통하여 사람이 선하게 되고, 주님의 사랑이 그의 삶을 통하여 이웃에게 흘러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 점에서 이번 강의가 계속 강조하는 ‘영적 성장’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매우 아름답게 다시 읽을 수 있습니다. 영적 성장은 특별한 체험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며, 비밀스러운 종말론적 지식을 많이 아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중심성이 조금씩 물러가고 주님의 뜻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던 사람을 용서하게 되고, 자기 자존심 때문에 참지 못하던 것을 진리를 위해 참게 되고,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보다 그 사람에게 실제로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는 변화입니다. 이런 변화가 바로 씨가 자라고 열매를 맺는 모습입니다.

 

따라서 이번 3강 2부에서 특별히 소중한 것은 ‘14만 4천이 누구인가’를 설명하려는 종말론적 도식 자체라기보다, 그 도식 아래에서 강사가 계속 붙들고 있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강사는 가장 밝은 빛을 따라 살고, 좁은 길을 선택하며, 세상적 가치보다 영적 가치를 추구하고, 인내와 겸손과 사랑 가운데 성장해야 한다고 권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바로 이 대목을 더 깊이 붙듭니다. 그리고 ‘특별한 종말의 성도 집단에 들어가기 위해 그렇게 살아야 한다’기보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원하시는 거듭남의 삶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면 ‘좋은 밭’도 특별한 소수에게 처음부터 주어진 우월한 마음이 아닙니다. 밭은 갈아야 합니다. 돌을 골라내야 하고 가시를 뽑아야 하며 굳은 땅을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심장을 새롭게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로운 협력을 통하여 그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악을 죄로 알고 피하려고 힘쓰며,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로 행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때 실제로 악을 제거하고 선을 심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읽으면서 ‘나는 네 밭 가운데 어디인가?’라고 묻는 것도 필요하지만, 거기에서 멈출 필요는 없습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오늘 주님께서 내 밭의 어느 부분을 갈고 계시는가?’일 것입니다. 아직 딱딱한 길가가 있다면 부드럽게 하시고, 돌이 있다면 드러내어 치우게 하시며, 가시가 있다면 뽑게 하시고, 이미 좋은 땅이 된 곳에는 더 많은 씨를 심으십니다. 거듭남은 단번에 ‘좋은 밭 사람’이라는 판정을 받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평생에 걸쳐 인간의 내면을 천국에 적합한 땅으로 만들어 가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번 3강 2부의 중심은 의외로 단순해집니다. ‘나는 14만 4천에 속하는가?’보다 먼저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열매를 맺고 있는가?’입니다. ‘마지막 때 시간표를 얼마나 정확하게 아는가?’보다 먼저 ‘오늘 내게 주어진 진리를 얼마나 삶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강사가 서두에서 말한 ‘영적인 목표와 방향’, ‘영적 가치관’이라는 표현과도 자연스럽게 만납니다.

 

결국 좋은 밭의 가장 깊은 특징은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씨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씨의 생명은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열매를 가능하게 하는 생명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이 할 일은 그 생명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진리를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함으로써 주님께서 일하실 길을 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밭을 내어 드릴 때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라는 차이는 있어도 주님께서는 각 사람 안에서 그가 받을 수 있는 만큼의 천국을 이루어 가십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는 종말을 계산하기 위한 비유를 넘어, 지금 이 순간 우리 각 사람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거듭남의 비유’가 됩니다.



3강 3부

돌밭과 가시떨기에서 좋은 땅으로 : 말씀의 뿌리, 시험, 세상 염려와 참된 결실

3강 3부에서는 앞서 살펴본 씨 뿌리는 비유가 한층 더 실제적인 신앙생활의 문제로 들어갑니다. 2부에서 길가와 돌밭, 가시떨기와 좋은 땅이라는 네 가지 마음밭의 큰 구조를 살펴보았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왜 어떤 사람에게서는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가’, ‘왜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인 사람도 시험이 오면 넘어지는가’, ‘왜 신앙생활을 오래 했는데도 열매가 막힐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강사가 이 비유를 단순히 불신자와 신자를 나누는 비유로만 다루지 않고 영적 성장과 시험, 그리고 실제 삶의 열매라는 방향으로 가져가는 것은 이 사경회의 전체적인 영성과도 잘 어울립니다. 이곳에서 반복되는 ‘연단’, ‘인내’, ‘순종’, ‘좁은 길’, ‘사랑의 실천’이라는 언어가 씨 뿌리는 비유와 만나기 때문입니다.

 

돌밭의 특징은 씨를 받지 않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을 ‘즉시 기쁨으로’ 받습니다. 이것이 길가와 돌밭의 중요한 차이입니다. 길가에서는 씨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지만, 돌밭에서는 싹까지 납니다. 외적으로 보면 상당히 좋은 신앙의 시작처럼 보입니다. 말씀을 듣고 감동하고, 기도하기 시작하며, 새로운 결심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집회나 수련회에서 큰 은혜를 경험하고 자신의 삶이 완전히 달라진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상태에 대해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처음의 기쁨이 거짓이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기쁨이 아직 충분히 깊은 곳까지 내려가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 ‘뿌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의 진리가 기억에 들어가는 것과 이해에 들어가는 것, 그리고 마침내 의지와 사랑에 들어가는 것은 서로 다른 단계입니다. 어떤 진리를 듣고 ‘맞다’고 인정하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 그 진리를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 때문에 자기 욕망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전혀 다른 문제가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을 대할 때 악으로 악을 갚지 않는 것은 다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에 아멘 하는 것과 자신의 이익과 주님의 뜻이 충돌할 때 후자를 선택하는 것도 다릅니다. 진리가 여기까지 내려오면 비로소 뿌리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시험은 말씀을 파괴하는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말씀이 어디까지 뿌리내렸는지를 드러내는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평안할 때에는 자기 신앙의 실제 깊이를 알기 어렵습니다. 누구나 사랑을 말할 수 있고, 겸손을 말할 수 있으며, 주님을 의지한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욕을 받았을 때에도 상대를 악으로 대하지 않을 수 있는지, 자신의 옳음이 인정받지 못할 때에도 평안을 지킬 수 있는지, 예상하지 못한 손해가 생겼을 때에도 주님의 섭리를 신뢰할 수 있는지를 통해 그 진리가 단순히 기억과 이해에 있는지 아니면 의지 안으로 내려가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경회가 강조하는 ‘연단’은 씨 뿌리는 비유의 ‘뿌리’와 깊이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시험에 대해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을 더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넘어뜨리려고 악을 보내 시험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 시험은 지옥으로부터 오는 악과 거짓의 공격이며, 주님께서는 그것을 일정한 범위 안에서 허용하시고 그 가운데 사람을 지키시며 선한 결과를 이루십니다. 인간에게는 시험이 마치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그 시험 가운데 싸울 힘과 진리, 보호와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연단을 귀하게 여긴다고 해서 고통 자체를 거룩하게 여기거나 일부러 고통을 찾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고난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주님을 의지하고 악과 거짓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선과 진리를 붙들 때 고난이 거듭남의 쓰임으로 바뀝니다.

 

이 구별은 수도적 영성을 이해할 때에도 중요합니다. 금식과 절제, 침묵과 순종, 불편을 감수하는 훈련 자체가 사람을 천국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외적 훈련이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다루고, 자기 뜻보다 주님의 뜻을 구하며, 이웃을 더 사랑하도록 돕는다면 귀한 쓰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만큼 견뎠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희생했다’, ‘나는 더 깊은 영적 훈련을 받았다’는 자기 공로로 바뀌면 바로 그 수도적 훈련이 새로운 proprium의 토양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연단의 결과를 판별하는 가장 좋은 기준은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가’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주님을 의지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는가’입니다. 이 점에서 공용복 선생으로부터 이어진 이 사경회의 수도적 강조를 존중하면서도, 그 연단의 내적 목적을 거듭남의 관점에서 더욱 분명하게 할 수 있습니다.

 

돌밭 다음에는 가시떨기가 등장합니다. 여기서는 씨가 싹만 내는 정도가 아니라 어느 정도 자랍니다. 그러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 상태는 어쩌면 돌밭보다 더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돌밭에서는 환난이나 박해가 왔을 때 곧 넘어지므로 문제가 비교적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가시떨기에서는 신앙생활 자체가 계속될 수 있습니다. 예배도 드리고, 말씀도 읽으며, 교회생활도 합니다. 씨가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다른 것들이 함께 자라서 말씀의 생명을 압박한다는 데 있습니다.

 

‘세상의 염려’라는 말도 세상일을 걱정하는 모든 것을 악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자녀를 돌보고, 직업을 성실하게 수행하며, 노후를 준비하는 것은 자연계에서 필요한 일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적 삶은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영적 삶을 섬겨야 할 질서입니다. 문제는 질서가 뒤집힐 때입니다. 자연적인 것이 목적이 되고 영적인 것이 수단이 되는 순간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유가 사업이 잘되기 위해서이고, 기도하는 이유가 건강과 성공을 얻기 위해서이며, 교회생활의 목적이 사회적 관계와 자기 평판을 위한 것이라면 외적으로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도 실제 중심에는 세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재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돈은 자연계에서 수많은 쓰임을 가능하게 하는 유용한 수단입니다. 가족을 돌보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선한 사업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재물의 유혹’, 곧 재물이 주는 안전감과 우월감과 자유를 주님보다 더 사랑하게 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재물을 소유하는 것과 재물이 사람을 소유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재산이 많으면서도 그것을 주님께 받은 쓰임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고, 반대로 가진 것이 많지 않으면서도 온 마음이 돈을 향할 수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것은 통장 잔액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입니다.

 

가시떨기의 또 다른 특징은 ‘말씀을 막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매우 실제적인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세상 사랑과 자기애가 반드시 말씀을 공개적으로 부정해야만 진리를 파괴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을 인정하면서 그 말씀을 끊임없이 뒤로 밀어낼 수 있습니다. ‘맞는 말씀이지. 하지만 지금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조금 더 여유가 생기면 그렇게 살겠다’, ‘지금 이 문제만 해결되면 그때 주님께 더 충실하겠다’고 하면서 진리에 따른 삶을 계속 연기할 수 있습니다. 씨는 살아 있지만 가시가 더 빨리 자랍니다. 그렇게 몇 년, 몇십 년이 지나면 신앙의 언어는 남아 있어도 열매가 매우 적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가시떨기를 단순히 ‘세상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판정하기보다 우리 각자의 삶 속에 들어와 보게 합니다. 목회자에게도 가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 성장과 사역의 성취가 어느 순간 주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도 가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 아는 기쁨보다 ‘내가 더 깊은 것을 안다’는 만족이 커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도 당연히 가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르카나를 발견하는 기쁨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이어지지 않고, 다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고 자신이 더 높은 진리를 가졌다고 느끼는 데 머문다면 귀한 진리의 씨 주변에 아주 미세한 가시가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다른 사람을 확대해서 보는 렌즈이기 전에 자기 자신을 비추는 렌즈여야 합니다. 이것은 이번 시흥영성수련원 사경회를 해설하는 작업에서도 계속 지켜야 할 원칙입니다. 강사의 종말론적 도식과 스베덴보리의 해석이 다른 곳을 발견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우리의 영적 우월성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은 진리를 접했다면 그만큼 더 겸손하고, 더 온유하며, 더 체어리티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높은 진리가 높은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진리는 지식으로만 남을 수 있습니다.

 

이제 좋은 땅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좋은 땅은 처음부터 아무 돌도 없고 아무 가시도 없는 완벽한 인간을 의미한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자연계에서도 좋은 밭은 농부가 손을 대지 않아도 저절로 만들어지는 땅이 아닙니다. 굳은 땅을 갈고, 돌을 골라내고, 잡초를 뽑으며, 물을 대고, 씨를 심고, 오랜 시간을 기다립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매우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인간의 마음도 주님께서 그렇게 경작하십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악을 드러내시고, 말씀의 진리를 통해 그것이 악임을 알게 하시며, 실제 생활에서 그것을 피할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악을 거절할 때 조금씩 돌이 치워지고 가시가 뽑힙니다.

 

여기서 인간의 자유로운 협력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니까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내가 노력해서 나를 좋은 밭으로 만들었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을 설명할 때 반복하는 중요한 원리는 사람이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해야 하지만, 실제 능력과 선은 모두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자유가 없으면 사랑이 형성될 수 없고, 주님의 힘이 없으면 인간은 어떤 악도 실제로 이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좋은 땅에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이 있다는 것도 경쟁적 상급표처럼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천국에는 모두가 똑같은 정도의 선과 지혜를 가져야 한다는 획일성이 없습니다. 사람마다 주님께 받을 수 있는 그릇과 쓰임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삼십 배, 어떤 사람은 육십 배, 어떤 사람은 백 배를 맺지만 중요한 것은 각자가 주님께 받은 것에 따라 충실하게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천국의 완전함은 모든 천사가 똑같아지는 데 있지 않고, 서로 다른 수많은 선과 쓰임이 주님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강사가 ‘더 밝은 빛’, ‘더 큰 상급’을 향해 나아가라고 권면하는 부분을 이해할 때에도 유익합니다. 그 권면을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영적 경쟁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나는 삼십 배가 아니라 백 배짜리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욕망 속에 자기 우월감이 들어오면 좋은 밭을 만들려다가 오히려 새로운 가시를 심을 수 있습니다. 참된 천국적 열망은 ‘내가 더 높은 사람이 되겠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하나도 헛되게 하지 않고 가능한 한 온전히 받아 이웃을 섬기는 데 사용하고 싶다’는 열망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지옥적 사랑도 높은 곳을 원합니다.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보다 위에 있기 위해서’ 높은 곳을 원합니다. 천국적 사랑도 더 큰 것을 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이 사랑하고 더 유용하게 섬기기 위해서’ 원합니다. 겉으로는 둘 다 열심이고 희생적일 수 있지만 내적 동기는 정반대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행위만이 아니라 그 행위 안에 있는 사랑을 보십니다.

 

강의에서 강조하는 ‘좁은 길’ 역시 이런 관점에서 이해하면 좋습니다. 좁은 길은 일부러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길이 아닙니다. 자연적 인간에게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거스르는 길이 좁게 느껴집니다. 복수하고 싶은데 용서하는 길, 인정받고 싶은데 드러나지 않는 자리에서 섬기는 길, 자기 이익을 챙길 수 있는데 정직을 선택하는 길, 자기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데 관계의 선을 위해 말을 절제하는 길이 좁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길을 오래 걸으면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좁았던 길이 점점 자유의 길이 됩니다. 악의 욕망에 끌려 다니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에서 일어나는 ‘즐거움의 변화’입니다. 처음에는 선을 행하는 것이 의무이고 자기부인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새 의지를 형성해 가시면 선을 행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 됩니다. 용서하는 것이 억지가 아니라 평안이 되고, 섬기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 기쁨이 되며,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 억압이 아니라 자유가 됩니다. 그때 좋은 땅은 단순히 ‘말씀을 잘 지키는 사람’의 상태를 넘어, 말씀대로 사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의 상태가 됩니다.

 

이 점에서 이 사경회의 수도적 전통이 강조해 온 ‘연단’도 그 최종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연단의 목적은 평생 이를 악물고 자신을 억누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자기 욕망을 거슬러 싸워야 하지만, 주님께서 거듭나게 하실수록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의지가 형성됩니다. 결국 천국에서는 아무도 억지로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합니다. 그러므로 수도적 훈련의 가장 아름다운 결실은 ‘나는 이렇게 많이 참았다’가 아니라 ‘이제는 예전과 달리 이것이 기쁘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씨 뿌리는 비유는 ‘리메인스’와도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사람이 경험한 순수한 사랑, 선한 정서, 말씀을 통해 받은 진리, 부모나 교사에게서 배운 선한 것들을 내면에 보존하십니다. 사람이 그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여도 주님께서는 보존하십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러한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사람을 악과 거짓에서 끌어내실 때 매우 중요한 토대가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현재 마음밭이 매우 굳어 보인다고 해서 우리는 그 사람을 쉽게 단정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 안에 무엇을 보존하고 계시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를 크게 바꿉니다. ‘저 사람은 길가니까 안 된다’, ‘저 사람은 돌밭이라 오래 못 간다’, ‘저 사람은 가시밭이다’라고 판정하기보다 주님께서 그 사람의 밭을 어떻게 경작하고 계시는지를 알 수 없음을 인정하게 합니다. 오늘은 돌밭처럼 보여도 내일 큰 시험을 통해 돌이 드러나 제거될 수 있고, 오랫동안 가시에 눌려 있던 씨가 어느 순간 주님의 섭리 가운데 다시 살아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섭리를 생각하면 씨 뿌리는 비유는 사람을 네 종류로 나누는 비유라기보다, 주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얼마나 오래 참고 경작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비유로도 읽힙니다.

 

그렇게 보면 이번 3강 3부에서 강사가 강조하는 영적 성장과 연단, 좁은 길과 결실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하여 더욱 깊은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됩니다. 말씀의 씨가 들어오고, 시험을 통해 돌이 드러나며, 세상 염려와 자기애라는 가시가 드러나고, 사람이 주님의 힘을 의지하여 그것들을 피할 때 밭이 조금씩 좋은 땅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그 좋은 땅에서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실제 삶의 열매가 됩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씨 뿌리는 비유 앞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지금 좋은 밭인가 아닌가?’라는 자기 판정만은 아닐 것입니다. 더 살아 있는 질문은 ‘주님께서 오늘 내 안에서 어떤 돌을 보여 주고 계시는가? 어떤 가시를 뽑으라고 하시는가? 이미 알고 있는 어떤 진리를 이제 실제 삶으로 옮기라고 하시는가?’일 것입니다. 바로 그 질문에 하루하루 응답하는 것이 밭을 내어 드리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강사의 권면과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상당히 가까운 자리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더 겸손하고, 더 충성하고, 더 인내하고, 더 사랑하라’는 권면을 자기 공로를 쌓기 위한 명령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께서 내 안에 심으신 씨가 충분히 열매 맺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라는 초청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삼십 배든 육십 배든 백 배든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닙니다. 그 열매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좋은 밭은 ‘나는 좋은 밭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님께 자기 밭을 내어 드리는 사람일 것입니다. 돌이 드러나면 인정하고, 가시가 보이면 뽑으려 하며, 말씀이 자기 욕망과 충돌할 때 말씀 편을 선택하고, 그렇게 하면서도 ‘내가 해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하셨다’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 안에서 말씀은 더 이상 머리에만 있는 씨가 아니라 의지에 뿌리를 내리고 삶으로 열매 맺는 생명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이 사경회가 강조해 온 ‘연단을 통과한 신앙’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볼 때 발견할 수 있는 가장 깊고 아름다운 의미 가운데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3강 4부

겨자씨와 누룩,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 : 영적 성장의 본질

3강 4부에서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시작된 ‘영적 성장’이라는 주제가 겨자씨와 누룩,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의 비유를 통하여 더욱 깊어집니다. 앞에서 네 가지 마음밭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질문은 ‘좋은 밭에 떨어진 씨는 어떻게 자라는가’, 그리고 ‘그 성장이 사람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로 옮겨갑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의 여러 비유를 서로 연결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성장하고, 무엇을 가장 귀한 가치로 발견하며, 결국 어떤 삶을 선택하게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이 사경회가 계속 강조해 온 ‘영적 목표’, ‘연단’, ‘좁은 길’, ‘온전한 사랑’이라는 주제가 여기에서 보다 적극적인 성장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겨자씨 비유입니다. 겨자씨는 시작할 때에는 매우 작지만 자라면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게 됩니다. 강사는 이것을 성도의 영적 성장과 연결합니다. 처음 신앙을 받아들였을 때에는 작고 연약하지만 말씀을 받고 순종하며 시험과 연단을 통과하면서 점차 성장하여 마침내 다른 사람에게까지 유익을 주는 신앙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향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거듭남 역시 처음부터 완성된 천국적 인간이 되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께서 작은 시작으로부터 사람 안에 새로운 생명을 형성하시고 그것을 점차 자라게 하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작다’는 것은 단순히 신앙 지식이 적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거듭남의 시작은 인간에게 매우 미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행동을 어느 날 ‘이것이 정말 주님 앞에서 옳은가?’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작은 양심의 움직임, 미워하던 사람에게 악으로 갚지 않으려는 작은 결심,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기보다 인정하려는 작은 움직임도 겨자씨와 같을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대단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 것이고 사람이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인다면 그 안에는 천국 전체를 향하여 자랄 수 있는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영적 성장을 평가하는 기준도 바꾸어 놓습니다. 사람은 흔히 눈에 띄는 변화와 특별한 체험을 영적 성장으로 생각합니다. 기도를 오래 하고, 성경을 많이 알고, 큰 사역을 하며,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성장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선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 근본적인 성장은 사람의 ‘사랑의 질서’가 바뀌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하던 사람이 조금씩 이웃의 선을 생각하게 되고, 자기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사람이 주님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아주 작은 변화처럼 보여도 영계에서는 이것이 훨씬 큰 변화일 수 있습니다.

 

겨자씨가 ‘나무’가 된다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말씀에서 나무는 사람의 지각과 지식, 그리고 그로부터 형성되는 영적 생명과 관련됩니다. 씨였던 진리가 사람 안에서 자라 하나의 질서를 이루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각각 떨어져 있던 진리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연결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악을 죄로 알고 피하라’, ‘용서하라’, ‘정직하라’는 말씀들이 따로따로 존재하다가 어느 순간 하나의 생명 체계를 이루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왜 이것을 해야 하지?’를 일일이 계산하지 않고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행하기 시작합니다. 씨가 나무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든다’는 말씀도 아름답습니다. 앞서 길가의 씨를 먹어 버린 새는 반대 의미에서 거짓된 사고와 추론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좋은 의미입니다. 말씀에서 새는 사고와 이해에 속한 것들을 나타낼 수 있으므로, 나무의 가지에 새들이 깃든다는 것은 사람 안에 선한 생명이 형성되면서 수많은 진리와 생각들이 그 생명 안에서 제자리를 찾는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참된 영적 성장은 생각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각과 지식과 이성이 선한 사랑을 섬기도록 질서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도적 영성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점입니다. 자기부인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자기 개성을 없애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신 이해와 재능과 개성을 자기애를 위해 사용하지 않고 선한 쓰임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개성이 제거된 사람들의 세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각 사람이 지상에서보다 훨씬 더 분명한 고유성을 가지면서도 그 고유성이 공동의 선을 섬깁니다. 따라서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된다는 것은 ‘작은 나’가 ‘대단한 나’로 커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생명이 충분히 성장하여 다른 생명들을 품을 수 있는 쓰임이 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다음으로 강사가 다루는 누룩의 비유는 영적 성장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 줍니다.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누룩을 넣어 ‘전부 부풀게’ 합니다. 겨자씨가 눈에 보이는 외적 성장의 이미지라면 누룩은 안에서부터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누룩은 반죽 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게 작용하지만 마침내 반죽 전체를 변화시킵니다. 강사는 이것을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제로 행함으로써 사람 전체가 변화되는 과정과 연결합니다. 이 부분 역시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좋은 이미지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거듭남은 사람의 종교적 영역 하나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에 예배드리는 부분, 성경 읽는 부분, 기도하는 부분만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그의 생각과 감정, 인간관계, 직업생활, 돈을 사용하는 태도,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방식까지 변화되어야 합니다. 누룩이 반죽 전체로 퍼지듯 진리가 사람의 삶 전체에 스며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교회에서는 매우 경건하지만 가정과 직장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면 아직 누룩이 반죽 전체에 퍼졌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변화의 주체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뜯어고쳐 천국적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은 그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진리에 반대되는 악을 발견할 때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피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때 실제로 사람 안의 질서를 변화시키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기 변화에 대해 자랑하기보다 더욱 주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내가 이만큼 수련해서 이렇게 되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데려오셨다’는 고백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 사경회의 수도적 전통과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에 매우 중요한 접점과 동시에 경계선이 생깁니다. 오랫동안 자기부인과 절제, 순종과 인내를 강조해 온 전통은 사람의 삶 전체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매우 귀한 통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훈련이 ‘내가 나를 거룩하게 만들었다’는 자기 공로로 돌아가는 순간 방향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참된 수도적 훈련이라면 시간이 갈수록 자신이 강한 사람이라는 의식보다 주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인식이 깊어져야 할 것입니다. 연단이 깊어질수록 proprium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약해져야 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눈보다 이해하고 품는 사랑이 깊어져야 합니다.

 

이어서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이 두 비유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모든 것을 상대화시킬 만큼 귀한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기뻐하며 돌아가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고, 좋은 진주를 구하던 상인은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자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것을 삽니다. 강사는 이것을 영적 가치관의 문제와 연결합니다. 무엇이 정말 귀한 것인지 발견한 사람은 이전에 귀하게 여기던 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사경회가 반복해서 강조해 온 ‘세상적인 가치와 영적인 가치’라는 구분이 다시 나타납니다. 사람이 세상의 성공과 재물과 명예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면 그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힘을 사용합니다. 반대로 천국과 영원한 생명, 주님과의 관계를 가장 귀한 것으로 발견하면 삶의 우선순위가 달라집니다. 강사가 좁은 길과 희생, 자기부인을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가치의 전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보화’와 ‘진주’를 더욱 깊이 말씀의 선과 진리와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진주’는 진리를 나타내는 아름다운 표상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가치는 단순히 희귀한 지식을 알게 되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진리는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고 그의 삶을 선하게 만들기 때문에 귀합니다. 따라서 가장 귀한 진리를 발견했다는 것은 ‘남들이 모르는 비밀을 알았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전 생애를 새롭게 질서 지을 만큼 주님의 진리를 실제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사용하는 우리 자신에게도 특별히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알게 되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세계가 열리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인물과 장소와 숫자가 인간의 거듭남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정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해야 할 일은 그것을 가지고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소유를 다 파는’ 것입니다. 곧 기존의 자기중심적 가치와 생각을 내려놓고 발견한 진리에 따라 삶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아르카나를 많이 아는 것보다 그 아르카나 때문에 한 가지 악이라도 실제로 피하게 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표현도 문자적으로 모든 재산을 처분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뜻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에서 소유는 사람이 자기 것이라고 붙들고 있는 생각과 사랑까지 포함하는 깊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버리기 어려운 소유는 때로 돈이 아니라 ‘내가 옳다’는 생각입니다. 자기 명예, 자기 공로, 자기 판단, 자기 방식, 심지어 자기가 오랫동안 붙들어 온 종교적 확신도 주님의 진리 앞에서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proprium의 문제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가 proprium을 그토록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선과 지혜를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느끼고 싶어 합니다. ‘내 생각’, ‘내 선’, ‘내 신앙’, ‘내 의’, ‘내 공로’를 붙들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천국의 가장 깊은 질서는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팔아 값진 진주를 산다’는 말씀은 가장 깊게는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는 질서를 내려놓고 주님의 선과 진리를 생명의 중심으로 받아들이는 변화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때 ‘기뻐하여 돌아가’ 자기 소유를 판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천국적 자기부인은 이를 악물고 모든 것을 빼앗기는 상태가 아닙니다. 더 귀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이전의 것을 기꺼이 내려놓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손에 쥔 돌멩이를 억지로 빼앗기면 울지만, 더 아름다운 것을 보여 주면 스스로 돌을 놓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방식도 이와 비슷합니다. 단순히 ‘세상을 사랑하지 마라’, ‘자기를 부인하라’고 강제로 빼앗으시는 것이 아니라 천국적 사랑의 더 큰 기쁨을 조금씩 맛보게 하십니다. 그러면 이전에 그렇게 중요했던 것들이 점차 덜 중요해집니다.

 

이것은 앞서 3부에서 살펴본 ‘즐거움의 변화’와도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악을 포기하는 것이 손해처럼 느껴집니다. 복수하지 않는 것이 억울하고, 인정받으려는 욕망을 내려놓는 것이 손해 같으며, 자기 뜻을 포기하는 것이 죽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선한 사랑을 형성해 가시면 그보다 더 깊은 평안과 기쁨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부인은 단순한 상실이 아니라 더 귀한 것을 얻기 위한 자유로운 내려놓음이 됩니다.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기뻐하여’ 모든 것을 판다는 말씀은 바로 이 천국적 자유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수도적 자기부인의 건강한 기준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자기부인이 사람을 점점 어둡고 경직되고 타인에게 엄격하게 만든다면 그 열매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대로 자기부인을 통하여 더 자유로워지고,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다른 사람에게 너그러워지고, 자기 명예가 손상되어도 이전보다 평안하며, 주님과 이웃의 선을 더 기뻐하게 된다면 그 훈련은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빈 껍데기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옥적 즐거움을 비우고 천국적 즐거움으로 채우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겨자씨, 누룩, 보화, 진주를 하나의 흐름으로 놓으면 이번 3강 4부의 구조가 매우 아름답게 보입니다. 겨자씨는 ‘생명의 시작과 성장’을 보여 줍니다. 누룩은 ‘그 생명이 사람 전체로 퍼지는 변화’를 보여 줍니다.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는 ‘그 변화가 가능해지는 가치의 전환’을 보여 줍니다. 결국 사람이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느냐에 따라 무엇을 선택할지가 결정되고, 반복된 선택이 그의 사랑을 형성하며, 그 사랑이 그의 영적 생명을 결정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사후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계에서 자유롭게 선택하고 살아온 사랑이 사후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지금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지가 중요합니다. 입으로는 ‘주님이 가장 귀합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실제 선택에서는 계속 자기 명예와 이익을 먼저 선택한다면 아직 보화를 충분히 발견하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완전하지 않고 자주 넘어지더라도 선택의 방향이 점차 주님과 이웃의 선을 향한다면 주님께서 그 사람의 사랑을 변화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영적 목표’를 반복하여 강조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목표가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목표를 ‘가장 높은 등급의 성도가 되는 것’이나 ‘특별한 14만 4천에 들어가는 것’으로 제한하지 않습니다. 가장 높은 목표는 주님과 결합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가 자기 생명이 되며, 그 생명으로 이웃에게 쓰임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의 위대함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데 있지 않고 더 큰 사랑으로 더 많은 쓰임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백 배의 결실’도, ‘가장 밝은 빛’도, ‘값진 진주’도 모두 다른 사람보다 높은 영적 지위를 얻는 언어로 이해하기보다 주님에게서 더 많은 선과 진리를 받아 더 온전히 살아내는 상태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이렇게 하면 강사가 강조하는 ‘최선을 다해 영적으로 성장하라’는 권면의 힘을 잃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자기 공로나 영적 경쟁으로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목표는 ‘내가 얼마나 높은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게 주신 생명이 얼마나 자유롭게 흘러가고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 사경회 전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하나의 접점이 있습니다. 공용복 선생으로부터 이어져 온 이 수도적 전통이 ‘세상보다 영적인 것을 택하라’, ‘자기를 부인하라’, ‘좁은 길을 가라’, ‘연단을 통과하라’고 반복해 왔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언어를 거듭남이라는 더 내적인 구조 안에 놓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을 버린다는 것은 자연계를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을 영적인 것 아래 두는 것이고, 자기를 죽인다는 것은 인간의 인격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proprium의 지배를 내려놓는 것이며, 좁은 길을 간다는 것은 고통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거슬러 주님의 선과 진리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수도원에 들어가느냐 세상 가운데 사느냐가 가장 중요한 구분도 아닙니다. 사람은 수도원 안에서도 자기애와 명예욕을 키울 수 있고, 세상 한가운데서 직업과 가정을 돌보면서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외적 장소보다 내적 질서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정한 ‘세상 포기’는 세상의 쓰임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자기 목적을 위해 사랑하는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오히려 천국적 인간일수록 자연계의 맡겨진 책임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그것을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쓰임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3강 4부를 읽으면서 ‘나는 겨자씨가 얼마나 크게 자랐는가?’라고만 묻기보다 ‘내 사랑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를 물어야겠습니다. ‘내 안에 누룩이 얼마나 퍼졌는가?’, 곧 신앙이 예배 시간뿐 아니라 가정과 인간관계와 돈과 말과 생각에까지 들어가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무엇을 보화와 진주로 여기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위해 기꺼이 다른 것을 포기하는지를 보면 그가 실제로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결국 겨자씨의 비밀은 크기에 있지 않고 그 안의 생명에 있습니다. 누룩의 비밀은 양에 있지 않고 안에서부터 전체를 변화시키는 힘에 있습니다. 보화와 진주의 비밀은 값비싸다는 데만 있지 않고 그것을 발견한 사람의 가치체계 전체를 바꾸어 놓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비유의 중심에는 주님께서 계십니다. 씨의 생명도 주님에게서 오고, 누룩처럼 사람 안에서 역사하는 진리의 힘도 주님에게서 오며, 우리가 발견해야 할 궁극적인 보화도 주님과 그분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영적 성장이란 결국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되었는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작은 겨자씨 하나처럼 시작된 주님의 진리가 내 안에서 자라고, 누룩처럼 삶 전체로 퍼지고, 마침내 주님과 그분의 나라가 다른 모든 것보다 귀한 보화가 되어 삶의 우선순위 전체가 달라지는 이야기입니다. 그때 사람은 억지로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여’ 내려놓습니다. 더 귀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변화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거듭남이며, 이번 3강 4부에서 강사가 말하는 ‘영적 성장’을 가장 깊은 자리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3강 5부

‘이긴 자’, 인 맞은 종, 14만 4천과 생명수 : 가장 밝은 빛과 주님과의 결합

3강 5부에 이르면 강의의 무게중심이 마태복음 13장의 여러 비유를 설명하는 데서, 그 비유들을 통해 지금까지 말해 온 ‘영적 성장의 최종 목표가 무엇인가’를 밝히는 쪽으로 옮겨갑니다. 강사는 앞선 강의에서 다룬 ‘영적 성장론’과 성화된 신앙인들의 생애를 다시 불러오면서,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의 일곱 교회에 반복되는 ‘이기는 자’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특히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권면이 일곱 번 반복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것은 교회 시대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매우 중요한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긴 자’를 연단을 통과하여 정결해진 성도,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살아간 성도, 더 나아가 요한계시록의 ‘인 맞은 종’과 14만 4천에 연결합니다.

 

여기서 먼저 이 강의의 중심 의도를 충분히 살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가 14만 4천이라는 숫자 자체에 호기심을 집중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14만 4천에 들어가는가?’라는 질문 아래 실제로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입니다. 말씀을 인내로 지키고, 시험과 연단 가운데 악과 싸우며, 자기중심적인 삶을 버리고, 주님을 사랑하고, 마침내 ‘이긴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성화된 신앙인들의 삶을 ‘이렇게 살아라’고 보여 주는 모델로 제시하고, 영적 성장의 길에는 출애굽에서 완덕에 이르는 과정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부분을 해설할 때 14만 4천의 숫자 해석만 놓고 스베덴보리와 비교한다면 오히려 강사가 전달하려는 실천적 중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기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다만 누구를 이기는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가장 깊은 의미에서 이겨야 할 대상은 밖에 있는 세상이나 다른 종교인이나 다른 교리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를 거스르는 악과 거짓입니다. 그리고 그 악과 거짓의 뿌리에는 proprium, 곧 모든 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며 자기를 중심에 놓으려는 인간의 고유한 자기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에서 ‘이기는 자’라는 말은 영적 경쟁에서 다른 성도보다 높은 등급에 올라간 사람이라기보다, 주님의 능력으로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대적하여 그것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가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욱 깊습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아주 현실적인 예를 듭니다. 자신이 ‘이긴 자’인지 알려면 극단적으로 말해 누군가에게 모욕을 당해 보면 알 수 있다는 취지의 설명입니다. 평소에는 자신이 상당히 성화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 생기면 즉시 내면의 상태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표현은 다소 익살스럽고 강하지만, 그 안에 담긴 영적 통찰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사람의 영적 상태는 평안할 때의 자기평가보다 자기 사랑이 공격받을 때 무엇이 올라오는지를 통해 더 잘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앞서 씨 뿌리는 비유에서 살펴본 ‘시험’의 의미와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말씀을 듣고 ‘나는 용서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 모욕을 당했을 때 용서하는 것은 다릅니다. ‘나는 겸손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자신의 의견이 무시되었을 때 평정을 유지하는 것도 다릅니다. ‘나는 주님만 의지한다’고 고백하는 것과 모든 자연적 안전망이 흔들릴 때에도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것은 다릅니다. 시험은 사람에게 없던 악을 새로 만들어 넣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안에 있던 사랑의 상태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이러한 드러남이 필요합니다.

 

다만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참았다’는 외적 행동만으로 이김을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겉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반드시 악을 이긴 것은 아닙니다. 속에서는 증오와 복수심을 품으면서 체면 때문에 참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처음에는 분노가 올라왔지만 그것이 죄임을 알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상대에게 악을 행하지 않으려 싸울 수도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 아직 분노를 느꼈다고 해서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로 그곳에서 영적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악한 충동이 한 번도 올라오지 않는 상태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올라오는 악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의 진리에 따라 거절하는 데서 진행됩니다.

 

따라서 ‘이긴 자’는 한 번도 넘어져 본 적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넘어질 때마다 자기 악을 보고 주님께 돌아가 다시 싸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싸움이 거듭될수록 처음에는 억지로 참던 사람이 점차 참는 것을 덜 힘들어하고, 마침내 상대의 선을 실제로 원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단순한 자기통제와 거듭남의 차이입니다. 자기통제는 겉 행동을 억제할 수 있지만 거듭남은 사랑 자체의 방향을 변화시킵니다.

 

강사는 이어서 이러한 ‘이긴 자’를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 곧 ‘인 맞은 종’과 연결합니다. 특히 자신이 강조하는 ‘생명수의 부어짐’ 또는 생명수의 강력한 영적 체험을 인 맞은 종의 중요한 표지로 제시하며, 그러한 경험을 하는 사람은 극소수라고 설명합니다. 다른 대목에서는 허드슨 테일러가 주님과의 깊은 일치와 내면에서 강물처럼 흐르는 생명을 경험했다고 고백한 내용을 소개한 뒤, 이를 ‘생명수 유입’을 경험한 인 맞은 종의 사례로 해석합니다.

 

바로 이 부분은 이번 재해설에서 상당히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가 말하는 ‘생명수’는 주님과의 깊은 결합에서 오는 영적 생명과 충만을 표현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 자체에는 매우 귀한 것이 있습니다. 신앙이 단순한 교리적 동의에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서 실제 자기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상태를 갈망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안다’에서 ‘주님으로 산다’로 나아가려는 갈망입니다. 수도적 영성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도 외적 금욕 자체가 아니라 이런 주님과의 깊은 결합이라면, 그 방향은 충분히 존중할 수 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생명수’가 매우 중요한 상응이라는 점입니다. 물은 일반적으로 진리를 나타내며, 특히 ‘생명수’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 그리고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서 오는 영적 생명을 나타냅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서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생명은 인간 자신에게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옵니다. 그러므로 ‘생명수가 흐른다’는 이미지는 상응의 관점에서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생명수의 유입은 반드시 어떤 특별한 감각적·신비적 체험을 경험해야만 확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내면에서 강물이 흐르는 것 같은 압도적인 체험을 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그의 영적 등급이나 천국의 위치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영적 체험은 실제일 수도 있고, 사람에게 큰 전환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욱 안전하고 본질적인 기준은 그 체험 이후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었는가’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영적 세계와 인간의 내면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강렬한 감정, 환상, 음성, 황홀감, 몸의 특별한 감각이 반드시 그 자체로 천국적 상태를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그런 체험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주님에게서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평생 조용히 자기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고, 맡겨진 일을 정직하게 행하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선을 선택해 온 사람이 오히려 매우 깊은 천국적 생명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 맞은 종’을 특정한 신비 체험을 가진 극소수와 동일시하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계시록의 ‘인’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어떤 외적인 표식이나 일회적 영적 체험이라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의 생명 안에 받아들여져 확고하게 자리 잡은 상태와 관련됩니다. ‘이마’ 역시 중요합니다. 얼굴은 인간의 내적 애정을 나타내고, 특히 이마는 사랑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보이지 않는 표식이 영적 신체에 찍혀 있다는 것보다, 주님에 대한 사랑과 그분의 진리가 그 사람의 가장 깊은 생명의 성격이 되었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더 내적입니다.

 

‘이름’도 말씀에서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이름은 그 존재의 질과 성품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과 어린양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있다’는 것은 주님의 신적 성품, 곧 그분의 사랑과 진리가 그들의 사랑 안에 새겨져 있다는 뜻이 됩니다. 강사는 필라델피아 교회의 이긴 자와 14만 4천을 연결하면서 이마에 하나님과 어린양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아름다운 이미지를 외적 신분 표시에서 내적 생명의 형성으로 가져갑니다.

 

그러면 ‘14만 4천’이라는 숫자도 자연스럽게 다시 보입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14만 4천이 교회 시대 가운데 가장 밝은 빛으로 살고 연단을 완성하여 큰 환난을 면제받으며 휴거되는 특별한 성도들의 집단입니다. 강사는 이들을 천국에서 가장 큰 상급을 받는 사람들로 설명하고, 시온산 및 새 예루살렘과 연결합니다. 이 체계 안에서 14만 4천은 사실상 영적 성장의 최고 단계에 도달한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숫자를 전혀 다르게 읽습니다.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은 자연적 산술로 정확히 144,000명의 특별한 사람을 세는 숫자가 아닙니다. 12는 신앙과 사랑에 속한 모든 것, 곧 교회의 모든 것을 나타내며, 12에 12를 곱한 144는 그 충만함을 나타냅니다. 여기에 천이 결합되면서 그 의미가 더욱 충만하게 표현됩니다. 따라서 14만 4천은 특정한 소수 엘리트 성도들의 정원이라기보다, 주님의 새 교회에 속하여 선과 진리를 받아들인 모든 사람의 완전한 총체를 표상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숫자 해석의 차이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14만 4천을 ‘가장 높은 극소수의 영적 엘리트’로 이해하면 신앙생활이 자칫 등급 경쟁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일반 구원만 받아서는 안 된다. 14만 4천에 들어가야 한다’는 열망은 처음에는 거룩한 열심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미세하게 자기 우월감과 결합할 위험이 있습니다. ‘나는 다른 성도보다 더 연단받았다’, ‘나는 특별한 체험을 했다’, ‘나는 더 밝은 빛 가운데 있다’는 생각이 들어오는 순간, 영적 성장을 추구하면서 오히려 proprium이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강사가 말하는 ‘더 높은 것을 사모하라’는 권면 자체를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방향을 바꾸면 됩니다. ‘다른 사람보다 높은 천국에 가기 위해 더 거룩해져야 한다’가 아니라 ‘주님을 더 사랑하고, 더 많은 진리를 받아들이며, 더 온전히 이웃에게 쓰임 있기 위해 거듭나기를 원한다’가 되는 것입니다. 전자는 자기의 높음을 바라보고, 후자는 주님의 선이 더 많이 흘러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천국에서 ‘큰 자’의 의미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의 높음은 지배의 높음이 아니라 사랑과 쓰임의 깊이입니다. 더 높은 천사는 더 많은 사람을 자기 아래 두는 천사가 아니라, 더 큰 사랑과 지혜로 더 넓은 쓰임을 행하는 천사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선과 지혜가 자기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더욱 분명히 압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높아질수록 오히려 겸손해집니다.

 

이 원리를 적용하면 강사가 반복해서 말하는 ‘가장 밝은 빛’도 더욱 아름답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은 ‘나는 남들보다 밝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빛이 밝아질수록 자기 안에 있는 어둠을 더 잘 보는 사람입니다. 자연계에서도 밝은 햇빛이 들어오면 어두울 때 보이지 않던 먼지가 보이듯, 주님의 진리가 밝게 비칠수록 사람은 자기 안의 미세한 자기애와 거짓을 더 분명히 발견합니다. 그래서 참된 영적 성장은 자기 확신을 크게 만들기보다 회개를 깊게 합니다.

 

강사는 일곱 교회 가운데 특별히 필라델피아 교회를 높이 평가하면서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라는 말씀을 큰 환난의 면제와 연결합니다. 그리고 필라델피아의 이긴 자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받는 것을 14만 4천과 연결합니다. 이 해석의 역사적·종말론적 도식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다르지만,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는 부분은 매우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기억한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진리를 삶에 보존하는 것입니다. 특히 시험 가운데 진리를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사랑하기 어려운 순간에 사랑의 편을 선택하고, 정직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거짓말하면 유리한 순간에 정직을 선택하며,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복수하고 싶은 순간에 용서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때 진리는 단순히 기억 속에 저장된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행위 안에 ‘새겨진’ 말씀이 됩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참된 ‘인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강사가 ‘나는 세 번까지 참는데 네 번째에는 못 참는다. 이제 네 번째까지 참아 가야 한다’는 식으로 인내를 설명하는 것도 재미있으면서 실제적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참는 횟수를 하나씩 늘려 천국 점수를 올리는 과정은 아닙니다. 더 깊은 목표는 ‘참아야 하는 나’에서 ‘사랑하기 때문에 참을 수 있는 나’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를 악물고 참습니다. 다음에는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참습니다. 더 깊어지면 상대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예전 같으면 상처받았을 일에도 자기 자존심이 덜 반응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사랑 자체를 변화시키고 계시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긴 자’의 가장 깊은 표지는 초자연적 능력이나 특별한 체험보다 사랑의 변화입니다. 이전에는 자기에게 잘해 주는 사람만 사랑했는데 이제는 불편한 사람의 선도 생각할 수 있게 되고, 이전에는 인정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했는데 이제는 이름 없이 섬기는 것을 기뻐하며, 이전에는 자기 옳음을 증명해야 했는데 이제는 상대의 구원과 공동의 선을 위해 자기 말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겉으로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계에서는 이런 변화가 가장 실제적인 변화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이번 3강 재작업에서 특별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후의 가르침’ 문제로 들어갈 준비가 이루어집니다. 지상에서 모든 사람이 동일한 정도의 교리적 지식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깊은 신학을 공부하고, 어떤 사람은 매우 단순한 신앙만 알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종교적 환경 자체가 달라 기독교의 교리를 제대로 접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천국은 이 지상에서 정확한 교리 지식을 얼마나 많이 습득했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는 그렇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사후 중간영계에서 선한 영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가르침을 받는다는 사실은 바로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은 지상에서 몰랐던 ‘구원 공식’을 죽은 뒤에 처음 듣고 그것에 지적으로 동의함으로써 구원을 얻는 과정이 아닙니다. 사후에 사람의 지배적 사랑이 근본적으로 뒤집히는 것도 아닙니다. 자연계는 의지와 사랑의 기본 방향이 형성되는 곳입니다. 사후의 가르침은 이미 선을 사랑하는 사람 안에 있는 선과 그에 맞는 진리를 결합하여, 그가 천국의 질서에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과정입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지상에서 단순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정직하고 자비롭게 살았지만 복잡한 교리를 배우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에게 선한 사랑이 형성되어 있다면, 사후에는 그 선과 조화되는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은 진리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지상에서 성경과 신학을 많이 알았지만 실제 사랑이 자기애와 지배욕에 있었다면, 사후에 더 많은 진리를 설명해 준다고 해서 그것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자기 사랑에 맞지 않으면 거절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의 가르침은 ‘몰랐던 정답을 외우게 하는 보충수업’이 아닙니다. 이미 사람 안에 형성된 선한 사랑이 그 사랑에 합당한 진리를 만나 완전해지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선과 진리의 결합을 그렇게 중요하게 말하는 이유입니다. 선만으로는 방향을 분명히 알기 어렵고, 진리만으로는 생명이 없습니다. 선은 진리를 원하고 진리는 선을 향합니다. 천국은 바로 그 둘이 결합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관점은 오히려 이번 사경회가 그토록 강조해 온 ‘삶’의 중요성을 더욱 깊게 만들어 줍니다. 사후에도 가르침이 있다고 해서 ‘그럼 이 땅에서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죽은 다음 배우면 되겠네’가 되지 않습니다. 정반대입니다. 사후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바탕 자체가 지상에서 형성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어떤 것을 반복하여 선택하고 사랑했는지가 사후에 어떤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자연계의 삶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점에서 강사의 ‘연단을 통하여 이긴 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조와 스베덴보리의 사후 교육은 서로 뜻밖에 깊은 접점을 가집니다. 강사는 지상에서 연단을 통과하여 정결해지고 좋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지상에서 사람의 사랑과 의지가 형성되는 것을 결정적으로 중요하게 봅니다. 다만 ‘완성’을 이해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지상에서 모든 교리적 이해와 영적 성장을 완전히 끝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을 향하고 선을 사랑하는 기본적인 생명의 방향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후에도 천사들은 영원히 지혜와 사랑 가운데 성장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졸업장을 받은 완성품들이 들어가는 정지된 박물관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주님에게서 더 많은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며 성장하는 살아 있는 나라입니다. 천사도 영원히 더 지혜로워질 수 있고 더 깊은 사랑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기쁨은 ‘내가 얼마나 높은 천사가 되었는가’에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더 많이 받아 더 온전히 쓰임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14만 4천을 바라보는 시선도 바꾸어 놓습니다. ‘나는 그 특별한 수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라는 불안이나 영적 경쟁보다 ‘나는 지금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얼마나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그리고 ‘생명수 체험을 했는가?’보다 ‘생명수가 내 삶에서 실제 열매가 되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생명수가 정말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왔다면 그 물은 사람을 살립니다. 그의 말이 부드러워지고, 판단이 자비로워지고, 자기 고집이 약해지고, 진리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함께 깊어져야 합니다.

 

이 기준은 신비 체험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호해 줍니다. 어떤 사람이 실제로 깊은 기도 가운데 주님의 임재와 생명을 강력하게 경험했다면 그것은 귀한 은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을 자기 영적 신분을 증명하는 훈장으로 삼지 않고, 그 경험으로 인해 더 겸손하고 더 사랑하며 더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비로소 그 체험은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체험은 씨가 될 수 있지만 열매는 삶에서 확인됩니다.

 

또한 이것은 시흥영성수련원과 같은 수도적 공동체의 역할을 생각하는 데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강사는 혼자서 영적 싸움을 잘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사경회에 다시 모여 ‘충전’하고, 각자의 처소로 돌아가 다시 싸워 이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상당히 실제적입니다. 사람은 혼자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해서 언제나 그것을 살아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공동 예배와 말씀, 서로의 간증과 권면, 함께하는 기도는 사람이 다시 방향을 주님께 돌리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천국은 철저히 공동체적입니다. 천사는 혼자 완전해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각 천사는 자신과 상응하는 공동체 안에서 다른 천사들과 연결되고, 공동의 쓰임 안에서 더 큰 한 사람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영적 성숙을 ‘나 혼자 높은 단계에 도달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이미 천국의 질서와 어긋납니다. 참된 성숙은 사람을 고립시키지 않고 더 깊은 관계와 쓰임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다만 공동체 역시 사람을 대신하여 거듭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사경회에서 큰 은혜를 받고 ‘충전’되어 돌아가도 실제 생활에서 자신의 악을 만나고 그것을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는 일은 각 사람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강사가 ‘각자 처소에 가서 열심히 영적인 싸움을 해서 이기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집회가 목적이 아니라 삶이 목적입니다. 수도원이 목적이 아니라 거듭남이 목적입니다. 말씀 공부가 목적이 아니라 그 말씀이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3강 5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종합하면, 강사가 말하는 ‘이긴 자’, ‘인 맞은 종’, ‘14만 4천’, ‘생명수’, ‘가장 밝은 빛’이라는 여러 표현은 모두 한 중심으로 모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 안에 들어와 그의 사랑과 생각과 삶을 점차 변화시키고, 마침내 그 사람의 생명의 성격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 ‘인’은 외적인 신분표가 아니라 생명에 새겨진 주님의 질서가 되고, ‘생명수’는 특별한 체험만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삶으로 흘러드는 것이 되며, ‘이긴 자’는 다른 성도보다 우월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의 지배를 주님의 힘으로 거절해 온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이기는가’입니다. 인간의 의지력이 최종적으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의 중심에는 언제나 어린양이 계십니다. 사람이 싸우기는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 싸워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이기게 하는 힘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참된 이김의 마지막 고백은 ‘내가 이겼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기게 하셨다’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가장 밝은 빛’을 추구한다는 말도 전혀 다른 울림을 갖습니다. 높은 자리를 탐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주님의 빛을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것이며, 그 빛으로 남을 비추기 전에 먼저 자기 안의 어둠을 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인 맞은 종’이 되고 싶다는 갈망도 특별한 신분을 얻으려는 갈망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 곧 그분의 사랑과 진리가 자기 생명에 깊이 새겨지기를 원하는 갈망이 됩니다. ‘생명수’를 원한다는 것도 특별한 신비 체험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자기 안으로 흘러와 말과 행동과 관계와 쓰임 전체를 살려 내기를 원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3강 5부의 가장 깊은 질문은 ‘나는 14만 4천에 속하는가?’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의 이름이 지금 내 이마, 곧 내 사랑에 새겨지고 있는가?’입니다. ‘나는 특별한 생명수 체험을 했는가?’보다 ‘주님의 생명이 오늘 나를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고 있는가?’입니다. ‘나는 이긴 자인가?’보다 ‘오늘 드러난 이 악 하나를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고 있는가?’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강사가 그토록 강조하는 ‘이긴 자가 되라’는 권면의 힘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훨씬 더 가까워집니다. 종말의 어느 날 특별한 성도가 되기 위한 명령이 아니라 오늘 하루 내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싸움에서 주님 편에 서라는 말씀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작은 승리들이 거듭될 때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시고, 생명수를 흐르게 하시며, 마침내 그 사람을 천국의 선과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준비시키십니다. 사후의 가르침조차 그때 전혀 낯선 무엇을 억지로 집어넣는 일이 아니라, 지상에서 주님께 향하기 시작한 그 사랑을 더욱 밝은 진리로 완성해 가는 일이 됩니다. 이것이 이번 3강 5부에서 ‘이긴 자’와 ‘인 맞은 종’을 바라볼 때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열어 주는 가장 깊은 지평이라고 하겠습니다.



3강 6부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세 차례의 영적 싸움과 ‘이기는 자’ : 거듭남의 전 과정

3강 6부에서는 지금까지 다루어 온 ‘영적 성장’이 출애굽의 여정과 본격적으로 결합됩니다. 강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겪은 싸움을 크게 세 단계로 나누고, 이것을 성도의 영적 성장 단계와 연결합니다. 첫 번째는 바로의 군대에 쫓기는 단계, 두 번째는 아말렉과 직접 싸우는 단계, 세 번째는 아모리 왕들과 바산 왕 옥을 비롯한 강한 세력들과 싸우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이를 요한일서의 ‘아이들’, ‘청년들’, ‘아비들’의 단계와 연결하면서, 처음에는 악의 세력 앞에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던 사람이 점차 싸울 수 있게 되고, 마침내 강한 적과도 싸워 이긴 뒤 가나안에 들어가는 과정을 ‘이기는 자’가 되어 가는 영적 성장으로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이번 3강 전체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가장 흥미롭게 만나는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강사가 제시하는 ‘바로의 추격 = 아이 단계, 아말렉 = 청년 단계, 아모리·바산과의 전쟁 = 아비 단계’라는 일대일 도식 자체가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과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출애굽의 역사를 단순한 고대 이스라엘의 민족 이동사가 아니라 한 사람의 영적 성장과 싸움의 과정으로 읽으려 한다는 방향에서는 놀랄 만큼 가까워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출애굽기는 그 깊은 속뜻에서 인간이 주님에 의해 악과 거짓의 속박에서 해방되고, 수많은 시험을 통과하여 마침내 선과 진리가 결합된 거듭난 상태로 인도되는 과정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강사의 해석을 먼저 충분히 따라가면서 그 아래에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겹쳐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강사가 말하는 첫 번째 상태는 바로의 군대에 쫓기는 이스라엘입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은 싸우지 못합니다. 애굽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군사적 훈련도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있고 뒤에서는 바로의 군대가 추격합니다. 백성은 두려워하며 모세를 원망합니다. 강사는 이것을 아직 영적으로 어린 성도가 악의 세력 앞에서 제대로 싸울 힘이 없는 상태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장면이 거듭남 초기의 인간을 매우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사람은 진리를 처음 받아들이고 ‘이제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곧바로 이전의 악한 습관과 사랑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를 받아들인 뒤에야 이전에는 잘 보이지 않던 악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기도 합니다. 애굽에서 나오기 전에는 바로의 지배가 일상이었지만, 나오기 시작하자 바로가 추격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거듭남을 시작했기 때문에 싸움이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싸움이 생겼다는 것이 반드시 뒤로 물러났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전에는 악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싸울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 이제 서로 반대되는 두 질서가 만나면서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갖기 시작한 뒤 자신의 악이 더 많이 보이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전에는 화를 내면서도 그것이 크게 문제라고 느끼지 않았는데, 말씀을 받아들인 뒤에는 작은 분노까지 마음에 걸립니다. 예전에는 자기 명예를 위해 행동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여겼는데, 이제는 그 동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악이 갑자기 더 많아졌기 때문이라기보다 빛이 들어왔기 때문에 어둠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 점을 모르면 거듭남의 초기 단계에서 ‘나는 왜 신앙생활을 할수록 더 형편없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느껴질까?’ 하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말씀은 그래서 의미심장합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거듭남의 초기에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악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먼저 배우게 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시는 분임을 경험해야 합니다. 이것은 수동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이어서 백성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길을 여시고 인간은 그 길을 걸어갑니다. 구원은 주님께서 이루시지만 인간에게는 주님께서 열어 주신 길로 자유롭게 걸어가는 응답이 요구됩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아말렉이 공격해 왔을 때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일방적으로 도망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가 사람들을 선택하여 직접 싸웁니다. 모세는 산 위에서 손을 들고 있고, 여호수아와 백성은 아래에서 전쟁합니다. 강사는 이것을 영적으로 어느 정도 성장하여 이제 악과 직접 싸울 수 있게 된 ‘청년’의 단계로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악 앞에서 두려워 도망치던 사람이 이제는 훈련을 받아 싸워 이기기도 하고 때로는 지기도 하면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매우 중요한 거듭남의 원리를 발견합니다. 사람은 주님께서 모든 것을 하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론에서 반복되는 핵심 원리입니다. 사람이 ‘주님이 다 하시니까 나는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하면 자유와 이성이 사용되지 않으며, 악을 자신의 선택으로 거절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내 의지력으로 이 악을 이기겠다’고 하면 proprium에 의존하게 됩니다. 올바른 질서는 ‘나는 최선을 다해 싸우지만 실제 힘은 주님에게서 온다’입니다.

 

아말렉과의 싸움은 이 두 요소를 아주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아래에서는 여호수아가 실제로 칼을 들고 싸웁니다. 그러나 위에서는 모세의 손이 들려 있어야 합니다. 손이 내려가면 아말렉이 이기고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깁니다. 문자 그대로만 보면 기이한 전쟁 장면이지만, 상응으로 읽으면 인간의 실제 노력과 주님에게서 오는 능력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은 아래에서 싸워야 하지만 승리의 능력은 위에서 옵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악습을 끊는 문제를 매우 실제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이 눈에 들어옵니다. 어떤 악습은 성령의 도움으로 비교적 쉽게 끊어지지만, 어떤 악습은 우리의 의지를 들여 계속 싸우면서 끊게 하시는 훈련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과하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라는 말씀을 들고, 주일 설교를 들은 뒤 제목조차 잊어버리는 데서 끝나지 말고 한 주간 그 말씀을 계속 되새기고 묵상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 대목은 매우 귀하게 받아들일 만합니다. 특히 ‘악습에 따라 싸움의 양상이 다르다’는 관찰은 실제 거듭남에서도 맞닿는 부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악을 한꺼번에 인간에게 보여 주시지 않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차례로 드러내십니다. 어떤 외적 악은 비교적 빨리 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악 아래 숨어 있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뿌리는 훨씬 오래 걸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거짓말이라는 외적 행동을 끊는 것보다 ‘나는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깊은 명예욕을 다루는 것이 훨씬 어려울 수 있습니다. 분노를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보다 ‘내가 무시당해서는 안 된다’는 자기 사랑을 다루는 것이 더 깊은 싸움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싸움이 반드시 쉬워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깊은 악이 드러나면서 전쟁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이것이 강사가 말하는 세 번째 단계와도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 같은 강력한 적들과 싸웁니다. 강사는 이것을 영적으로 성숙한 ‘아비’의 단계, 곧 더욱 깊은 연단과 싸움을 통과하는 단계로 설명합니다. 초기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악과 싸웠다면, 성장할수록 인간의 더 깊은 사랑과 동기 속에 숨어 있는 악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 초신자보다 자기 자신을 더 부족하게 느끼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이상합니다. 더 오래 신앙생활을 했으니 자신이 더 거룩하다고 느껴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로 깊은 영적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서는 반대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빛이 더 깊이 들어갈수록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자기애와 자기 의, 자기 공로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성장은 ‘나는 이제 꽤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는 자기 확신을 키우기보다 주님의 자비가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를 더 깊이 알게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아이들’, ‘청년들’, ‘아비들’이라는 강사의 구분도 영적 우열의 계급표처럼 이해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천국의 성장은 누가 더 높은 계급인가를 겨루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서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더 깊은 것을 열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어린 단계에는 어린 단계에서 필요한 보호와 은혜가 있고, 청년 단계에는 싸움과 힘이 있으며, 아비의 단계에는 더 깊은 지혜와 사랑이 있습니다. 어느 단계에서도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가나안’의 의미가 중요해집니다. 강사는 세 차례의 싸움을 통과하고 가나안에 들어간 성도를 ‘이기는 자’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가나안은 매우 중요한 표상입니다.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나라와 교회, 인간 안에서는 천국적·영적 생명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간다는 것은 지리적으로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인간의 생명의 중심이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합니다.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모든 싸움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도 이스라엘은 요단을 건넌 뒤에 오히려 가나안 족속들과 계속 싸워야 했습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어느 순간 완덕에 도달하면 더 이상 악과 싸울 필요가 없는 상태’로 이해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사람은 지상에 사는 동안 계속해서 거듭납니다. 더 나아가 사후 천국에서도 영원히 사랑과 지혜 가운데 완전해져 갑니다. 유한한 피조물이 무한하신 주님의 선과 지혜를 끝까지 받아들이는 과정에는 종착점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기는 자’도 완성된 무결점 인간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힘으로 악과 거짓의 지배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긴 악보다 내일 더 깊은 악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악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나타날 때 누구의 편에 서는가입니다. 악을 자기 것으로 사랑하고 변호하는가, 아니면 그것이 주님의 질서에 반대됨을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 거절하는가입니다.

 

여기서 강사가 ‘말씀을 가까이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도 더욱 깊어집니다. 영적 싸움에서는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 인간 스스로 결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proprium은 놀라울 만큼 자기 자신을 합리화합니다. 내가 미워하는 것은 ‘정의감’이라고 부르고, 내 고집은 ‘신념’이라고 부르며, 명예욕은 ‘사명감’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말씀은 단순히 싸울 때 힘을 주는 격려문이 아니라 무엇이 실제 선이고 진리인지를 밝혀 주는 빛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는 말씀에서 ‘발’이라는 표현도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발은 인간의 가장 바깥 자연적 삶, 곧 실제 행위의 차원과 관계합니다. 말씀이 ‘발의 등’이라는 것은 진리가 단지 높은 신학적 사색을 밝히는 빛이 아니라 오늘 내가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빛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이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이 관계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이 욕망을 따라가야 하는지 거절해야 하는지와 같은 실제 삶의 자리에서 말씀이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강사가 주일에 들은 말씀을 한 주간 계속 되새기라고 권하는 것은 매우 실제적인 영적 훈련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말씀을 단순히 반복해서 기억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진리를 기억에 보존하는 이유는 그것을 실제 상황에서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다가 어느 순간 ‘아, 바로 이 상황에서 내가 이 말씀대로 해야 하는구나’ 하는 때가 옵니다. 그때 진리가 기억에서 삶으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사람이 그 진리를 따라 실제로 행동할 때 진리는 선과 결합합니다.

 

이것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입니다. 말씀을 알고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이웃을 향한 선한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다고 선행만 있으면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선은 진리를 통해 방향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진리를 주시고, 그 진리를 따라 선을 행하게 하시며, 마침내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이 결합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거듭납니다.

 

이렇게 보면 출애굽 여정 전체는 단순한 ‘연단 코스’보다 훨씬 풍성한 의미를 갖습니다. 애굽은 속박입니다. 홍해는 이전 상태와의 결정적 분리입니다. 광야는 진리를 배우고 시험을 통하여 그것을 삶으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만나와 물은 그 과정에서 주님께서 공급하시는 선과 진리입니다. 아말렉과 여러 적들은 거듭남을 방해하는 악과 거짓입니다. 요단은 새로운 상태로 들어가는 경계이고, 가나안은 주님의 나라가 사람 안에 형성되는 상태입니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주체는 인간의 의지력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하심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서 계속 반복되는 ‘여호와께서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이 자기 지혜로 길을 찾아 가나안에 도착한 것이 아닙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앞서 갔습니다. 만나도 그들이 만든 것이 아니고 반석의 물도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싸움에서는 그들이 칼을 들었지만 승리는 여호와께로부터 왔습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전 과정이 주님의 역사임을 보여 주는 아름다운 표상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역할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실제로 애굽에서 나와야 했고, 홍해 앞에서 앞으로 걸어가야 했으며, 만나를 거두어야 했고, 아말렉과 싸워야 했으며, 요단을 건너야 했습니다. 이것이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하는 인간의 자유입니다. 주님은 인간을 돌처럼 끌고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자유롭게 진리를 선택하고 선을 행하게 하시며, 그 자유 안에서 주님과 결합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강사가 말하는 ‘악습을 끊는 훈련’도 매우 균형 있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아직 마음으로는 이것을 좋아하니까 억지로 끊는 것은 위선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악을 좋아하는 욕망이 남아 있더라도 그것이 죄임을 알고 행하지 않으려고 싸우는 것은 거듭남의 중요한 시작입니다. 처음에는 의지와 행동 사이에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싸움을 통하여 새로운 의지를 형성해 가시면 언젠가는 이전에 좋아했던 악 자체를 싫어하게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으로 악을 끊었다고 해서 거듭남이 끝난 것도 아닙니다. 술이나 도박이나 음란 같은 눈에 띄는 악습을 끊는 것은 매우 귀하지만, 그 아래에 있는 지배욕과 자기애, 교만, 타인에 대한 멸시가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외적인 애굽에서 끌어내신 뒤 광야를 지나 더 깊은 적들과 만나게 하십니다. 이 과정이 때로 길고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영적 성장에는 ‘세월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강의 첫머리에서도 복음의 씨가 싹이 되고 이삭이 되고 마침내 익은 열매가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합니다. 거듭남은 조급하게 완성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해치지 않으시면서 수많은 상태와 경험을 통하여 사랑의 질서를 바꾸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 변화도 없는 것 같은 기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땅 위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겨울 동안에도 뿌리에서는 일이 일어나듯, 주님의 섭리는 사람이 의식하지 못하는 깊은 곳에서도 계속됩니다.

 

이 점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중요합니다. ‘왜 저 사람은 아직 저 모양인가’라고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영적 여정의 어느 지점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바로의 군대 앞에서 떨고 있는 단계인지, 아말렉과 싸우다가 넘어지는 단계인지, 아니면 겉으로는 평범해 보여도 매우 깊은 내적 싸움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더구나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 보존해 두신 리메인스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성장론은 다른 사람의 등급을 매기는 도구가 아니라 서로를 오래 참고 돕게 하는 지혜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이번 사경회의 수도적 전통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연단’, ‘좁은 길’, ‘자기부인’, ‘싸워 이김’을 강조해 온 것은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여정을 실제 신앙생활에 적용하려는 강한 실천적 영성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강사 자신도 성결수도회 수도사로서 공용복 선생 시절부터 이 전통 안에 함께해 온 분이라는 배경을 알고 들으면, ‘광야’와 ‘연단’이라는 말이 단순한 강단의 수사가 아니라 오랫동안 삶으로 붙들어 온 언어일 수 있음을 존중하게 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수도적 연단을 한 가지 방향으로 더 깊게 가져갑니다. 연단의 목적은 ‘강한 영적 전사’를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기 의지가 강해져 웬만한 고난은 다 버티는 사람이 되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더 깊이 알고 주님의 힘에 의지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이 악을 이겨야 한다’고 싸웠다면, 깊어질수록 ‘주님께서 아니시면 나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때 더 힘 있게 싸울 수 있습니다.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를 한 사람의 거듭남으로 읽으면 이것이 선명해집니다. 처음에는 바로가 너무 커 보이고 이스라엘은 너무 약해 보입니다. 그러나 여정이 계속될수록 사람이 강해진다기보다 ‘여호와께서 싸우신다’는 사실을 점점 배우게 됩니다. 아말렉과 싸우면서도 모세의 손이 들려 있어야 하고, 여리고 앞에서는 인간의 군사 전략보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자기 능력을 더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더 신뢰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계시록의 ‘이기는 자’와 다시 만납니다. 이기는 자는 자신의 영적 근육이 가장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어린양과 함께 있기 때문에 이기는 사람입니다. 계시록 전체가 결국 보여 주는 승리는 인간의 승리가 아니라 주님의 승리입니다. 사람은 그 승리에 참여합니다. 주님 편에 서서 싸우고, 진리를 선택하고, 악을 거절하면서 주님께서 이루신 승리를 자기 생명 안에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3강 6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애굽에서 나와 바로의 추격을 받고, 광야에서 아말렉과 싸우며, 더 강한 적들과의 전쟁을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의 여정은 단지 성도가 몇 단계의 연단 코스를 통과하여 영적 강자가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한 인간을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속박에서 끌어내어 진리를 가르치시고, 시험 가운데 그 진리를 삶으로 만들게 하시며, 사람이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악과 거짓을 거절하게 하시는 가운데 실제 모든 승리는 주님께로부터 받게 하시고, 마침내 선과 진리가 결합된 천국적 질서를 그 사람 안에 이루어 가시는 거듭남의 아르카나입니다.’

 

그리고 이 해설의 끝에서 가장 오래 남았으면 하는 것은 강사의 매우 소박한 권면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훈련을 해야 된다.’ 이 말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 가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생명줄입니다. 광야에서는 길을 잃기 쉽고, 자기 생각이 주님의 뜻처럼 느껴질 때도 있으며, 악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그때 우리의 ‘발에 등’이 됩니다. 아주 먼 미래를 한꺼번에 비추는 탐조등이라기보다, 오늘 내딛어야 할 한 걸음을 보여 주는 등입니다. 오늘 이 사람에게 화를 낼 것인가 참을 것인가, 이 일을 정직하게 처리할 것인가 편법을 택할 것인가, 내 자존심을 지킬 것인가 관계의 선을 지킬 것인가, 받은 상처를 붙들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를 비춥니다. 그리고 그 한 걸음을 주님의 힘으로 옮길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애굽에서 멀어지고 가나안을 향해 갑니다.

 

결국 ‘이기는 자’가 되는 길은 어떤 거대한 마지막 시험에서 한 번 영웅적으로 승리하는 데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주어진 작은 진리 하나를 실제로 살아내고, 내일 또 하나의 악이 드러나면 그것을 주님 앞에 인정하며,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고, 그러면서 점점 자기 힘보다 주님의 힘을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길을 오래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사람은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가나안을 향해 걸어온 줄 알았는데, 사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자기 손을 꼭 붙잡고 이끌고 계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강의 첫머리에서 함께 부른 ‘예수님 내 손을 꼭 잡아 주소서’라는 찬송이 그래서 3강 6부 전체의 영적 내용을 뜻밖에 정확하게 압축하고 있습니다.



3강 7부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시온산, 14만 4천 : 천국의 장소와 상태, 그리고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

3강 7부에서는 앞에서 계속 다루어 온 ‘이기는 자’의 문제가 계시록 3장 12절의 약속 가운데 특히 ‘새 예루살렘의 이름’으로 집중됩니다. 강사는 생활 속의 작은 일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강조한 뒤, ‘작은 것이 쌓이고 쌓여 이것이 열매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고 나서 ‘두 번째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넘어가, 이기는 자에게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록해 주신다는 약속을 풀이하기 시작합니다. 이 흐름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강사에게 ‘새 예루살렘’은 단순한 종말론적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이 땅에서 실제로 연단을 통과하고 이긴 사람이 마침내 들어가게 되는 최고의 천국적 목적지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앞부분에서 강사가 ‘이김’을 거창한 순교나 위대한 업적보다 일상생활의 작은 사랑과 연결한 것은 이번 3강 가운데서도 특히 귀하게 받아들일 만한 대목입니다. 보기 싫은 사람을 만났을 때 얼굴을 돌리지 않고 먼저 다가가 반갑게 인사하는 것, 가족 가운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을 때 오히려 정성스럽게 대하는 것, 배우자가 맞는 말을 기분 나쁘게 했을 때 자기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 같은 매우 구체적인 예를 듭니다. 강사는 이것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바로 이런 작은 승리들이 쌓여 ‘익은 열매’가 된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을 만큼 중요합니다. 거듭남은 대부분 거대한 사건보다 아주 작은 선택들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평생 한두 번 경험할 극적인 사건보다 매일 수십 번 만나는 작은 선택들이 그의 사랑을 형성합니다. 말을 한마디 더 할 것인가 참을 것인가, 상대의 허물을 들추어낼 것인가 덮어 줄 것인가, 나에게 돌아올 이익을 먼저 생각할 것인가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먼저 생각할 것인가, 인정받지 못했을 때 마음속으로 상대를 깎아내릴 것인가 자기애의 움직임을 보고 거절할 것인가 하는 선택들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작은 선택이 단순한 ‘착한 행동 점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람 안에는 어떤 자극을 받으면 자동적으로 반응하려는 오래된 proprium의 경향이 있습니다. 무시당하면 화를 내고 싶고, 손해를 보면 보복하고 싶으며, 자존심이 상하면 상대를 낮추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그 순간 말씀의 진리가 떠오르고, 사람이 ‘이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자기 욕망을 거절한다면 아주 작은 사건 속에서 실제 영적 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밖에서 보면 인사 한 번 하고 지나간 일에 불과할 수 있지만, 영적으로는 자기애가 한 걸음 물러나고 주님의 질서가 한 걸음 들어온 사건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큰 것보다 생활 속의 작은 것으로 승부를 보자’고 말한 것은 상당히 깊은 영적 통찰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영적 성격은 추상적인 신앙 고백이 아니라 반복되는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의지 안에 형성됩니다. 진리를 한 번 아는 것과 그 진리를 반복하여 행하는 것은 다릅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기억에 있고, 다음에는 이해에 있으며, 실제로 행하기 시작하면 의지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 기쁨이 되면 진리와 선이 결합합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이런 흐름 뒤에서 강사는 계시록 3장 12절의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리라’를 다룹니다. 강사는 이 가운데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특별히 천국의 특정한 장소와 연결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가나안 전체가 천국을 표상한다면 예루살렘은 그 가운데 왕이 거하는 도성, 곧 수도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 역시 천국 전체가 아니라 ‘천국의 수도’이며, 이기는 자들이 특별히 그곳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여기서 상당히 구체적인 공간적 천국관을 제시합니다. 계시록 21장의 새 예루살렘의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다는 말씀을 정육면체의 실제 공간적 구조로 이해하고, 그것을 천국 안의 특별한 중심 도성으로 봅니다. 이어서 구약의 모리아산, 시온산, 예루살렘을 동일한 장소가 시대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린 것으로 설명하면서, 이것을 천국에도 적용합니다. 지상의 모형에서 모리아산이 시온산이 되고 예루살렘이 되었듯, 현재 천국의 수도가 ‘시온산’이며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되면 그것이 ‘새 예루살렘’이라 불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강사의 해석 사이에 상당히 큰 차이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차이는 어느 쪽을 공격하거나 재단하는 방식보다 ‘말씀의 표상을 어디까지 자연적 공간으로 읽고, 어디서부터 영적 상태로 읽을 것인가’라는 차이로 설명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강사는 가나안과 예루살렘의 지리적 구조를 천국의 실제 지리적 구조에 비교적 직접적으로 대응시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가나안과 예루살렘, 시온을 모두 상응에 따라 영적인 상태와 교회,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님의 나라와 관련하여 읽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새 예루살렘’은 특히 중요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천국 안에 있는 거대한 정육면체 형태의 수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교회’를 표상합니다. 계시록 21장에서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도 어떤 물질적 도시가 우주 공간을 통과하여 지상으로 내려온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를 이루는 모든 선과 진리가 인간에게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천국을 통하여 내려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이라는 이름 자체의 상응에서부터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 예루살렘은 교회를 나타내며, 특히 교회의 교리와 진리의 측면을 나타냅니다. 그곳에 성전이 있고 예배가 이루어지며, 율법과 가르침이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은 주님께서 새롭게 세우시는 교회, 곧 주님과 그분의 말씀에 관한 참된 이해와 그 이해에 따른 생명이 새롭게 형성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은 먼저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야 할 도시라기보다 ‘어떤 상태인가?’를 물어야 할 영적 실재입니다.

 

이 차이는 계시록 전체를 읽는 방법과 직결됩니다. 계시록의 성, 문, 성벽, 보석, 금, 강, 생명나무, 숫자와 치수를 자연계의 건축물과 동일한 방식으로 읽으면 계시록은 미래 천국의 지리와 건축을 묘사하는 책이 됩니다. 그러나 상응으로 읽으면 그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과 진리, 그것을 받아들이는 교회와 인간의 상태를 보여 주는 하나의 거대한 영적 그림이 됩니다. 성벽에도 의미가 있고, 열두 문에도 의미가 있으며, 열두 기초석과 각종 보석에도 의미가 있고, 성의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다는 것에도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다’는 것은 정육면체의 천국 건축물을 정확하게 측량하도록 주어진 정보라기보다, 새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의 완전하고 조화로운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보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 더 가깝습니다. 계시록의 숫자는 자연적 산술을 위한 숫자가 아니라 영적 질과 상태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을 몇 리, 몇 킬로미터 크기의 실제 도성으로 계산하기 시작하면 문자적 형상은 선명해질 수 있지만, 그 안에 감추어진 아르카나는 오히려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시온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강사는 시온산을 현재 천국의 수도 이름으로 이해하고, 장차 그것이 새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으로 바뀐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시온은 예루살렘과 아주 가까우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영적 의미를 가집니다. 일반적으로 ‘시온’은 교회와 천국 가운데에서도 사랑의 선, 특히 주님을 향한 천적 사랑과 관련되고, ‘예루살렘’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진리와 교리에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시온과 예루살렘은 단순히 같은 장소의 옛 이름과 새 이름이라기보다 선과 진리,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가르침이라는 서로 구별되면서 결합되는 영적 실재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에서 매우 아름다운 부분입니다. 성경에서 ‘시온과 예루살렘’이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단순한 시적 반복만은 아닙니다. 시온은 선과 사랑에 속한 것을, 예루살렘은 진리와 신앙에 속한 것을 나타내며, 둘이 함께 언급될 때에는 교회의 선과 진리가 결합된 전체 상태가 표현될 수 있습니다. 결국 천국의 본질도 장소보다 이 결합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고 그 선에 합당한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상태가 천국입니다.

 

따라서 ‘시온산에 선 14만 4천’이라는 장면도 훨씬 깊어집니다. 강사는 계시록 14장의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서 있는 14만 4천을 ‘교회 시대 이긴 자들’, 곧 ‘인 맞은 종들’로 이해합니다. 그들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계시록 3장 12절에서도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이름과 주님의 새 이름을 기록하겠다고 했으므로 양쪽을 동일한 집단으로 연결합니다. 이 논리 안에서 강사는 결국 ‘이긴 자 = 인 맞은 종 = 14만 4천 = 시온산에 서는 사람 =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사람’이라는 하나의 체계를 세웁니다.

 

이 체계는 강사의 ‘핵심진리’ 전체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을 해설하면서 단순히 ‘스베덴보리와 다르다’고 지나가면 강의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강사가 왜 그토록 ‘연단’, ‘이김’, ‘완덕’, ‘익은 열매’를 강조하는지 여기에서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단순히 훌륭한 신앙인이 되기 위한 덕목이 아니라, 그의 종말론적 체계 안에서는 실제로 14만 4천의 ‘이긴 자’가 되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위한 과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중요한 보완을 제공합니다. 계시록의 14만 4천은 정확히 그 숫자만큼의 특별한 사람을 선발한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에서 ‘12’는 신앙과 사랑에 속한 모든 것, 따라서 교회에 속한 모든 것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수입니다. 열두 지파, 열두 사도, 새 예루살렘의 열두 문과 열두 기초석이 모두 이 구조 안에 있습니다. 144는 12 곱하기 12이고, 144,000은 그 의미가 충만하게 확대된 것입니다. 따라서 14만 4천은 ‘구원받은 최고 등급의 정확히 144,000명’이라기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새 교회를 이루는 사람들의 충만한 전체를 표상한다고 보는 것이 상응에 더 가깝습니다.

 

강사는 실제로 ‘14만 4천이면 너무 적지 않느냐’는 질문을 예상하면서 ‘적지 않다’고 말하고, 그 숫자를 실제 예정된 수로 이해합니다. 또한 아직 구원이 완성되지 않고 광야 과정에 있는 사람들과, 가나안에 들어간 14만 4천의 ‘인 맞은 종’을 구별합니다. 이 부분은 강사의 체계에서는 자연스럽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상당히 조심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적 성장을 자연적 숫자의 정원과 결합하는 순간 ‘나는 그 수 안에 들어가는가?’라는 경쟁적·선발적 신앙이 생길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계시록의 초점은 천국의 정원 제한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사람을 일정 숫자까지만 받아들이고 문을 닫는 사랑이 아닙니다. 천국은 모든 사람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몇 명을 받아 주시는가가 아니라 사람이 어떤 사랑을 자기 생명으로 만들었는가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기뻐하는 사람은 천국의 분위기를 기뻐하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합니다. 따라서 천국의 가장 깊은 분별은 ‘명단에 들어갔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랑이 그 사람의 생명이 되었는가?’입니다.

 

이 점에서 계시록 3장 12절의 ‘이름을 기록한다’는 말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름’은 단순한 명칭이나 신분증이 아닙니다. 말씀에서 어떤 존재의 ‘이름’은 그 존재의 질, 곧 그 성품과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이 사람에게 기록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문자적 이름 몇 글자가 영적 이마에 쓰인다는 의미를 넘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그 사람의 생명 안에 받아들여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리라’는 말씀 역시 ‘새 예루살렘에 입장할 자격증을 붙여 주겠다’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새 예루살렘이 주님의 새 교회와 그 교회의 진리와 선을 나타낸다면, 그 이름이 사람에게 기록된다는 것은 그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의 질이 그 사람 안에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 자신이 ‘새 예루살렘적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전환입니다. 질문이 ‘나는 죽어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을까?’에서 ‘새 예루살렘이 지금 내 안에 내려오고 있는가?’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21장은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합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위로부터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와 그의 생각과 사랑과 행위를 새롭게 질서 지을 때, 작은 의미에서 새 예루살렘이 그 사람 안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다’는 것과 ‘새 예루살렘이 사람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서로 떨어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이 지상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이면 사후에는 그 내적 상태와 상응하는 천국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천국에서 장소는 상태와 상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영계에서는 비슷한 사랑과 진리의 상태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 가까이 있고, 다른 상태의 사람들은 멀리 있는 것처럼 나타납니다. 영계의 공간은 자연계의 물리적 공간과 동일하지 않고 내적 상태를 표현하는 공간입니다.

 

이 원리를 알면 강사가 말하는 ‘천국의 수도’라는 표현도 완전히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자연계의 서울이나 워싱턴처럼 중앙정부가 위치한 물리적 수도로 상상하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가장 중심적인 선과 진리가 가장 충만하게 나타나는 영적 질서라는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는 실제 공동체들이 있고 장소처럼 경험되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배치는 거리와 좌표보다 사랑과 지혜의 상태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중심’이라는 말 역시 영적으로는 주님과의 결합 상태를 중심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서 있다’는 표현이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중요한 것은 ‘시온산의 주소가 어디인가?’가 아니라 ‘어린양과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천국 되게 하는 것은 황금길도, 보석 성벽도, 거대한 도성도 아닙니다. 주님의 임재입니다. 그리고 그 임재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이 천국입니다. 따라서 14만 4천이 시온산에 서 있다는 말씀의 중심은 특별한 엘리트들이 최고급 천국의 수도에 입성했다는 데 있기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인 교회의 충만한 전체가 어린양과 결합해 있다는 데 있습니다.

 

또 그들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이마는 얼굴 가운데에서도 특히 사랑과 의지의 상태와 관련됩니다. 얼굴이 인간의 내적 애정을 나타낸다면 이마는 그 중심적인 사랑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이마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지적 기억 속에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사랑과 그분에게서 오는 선이 그들의 지배적 사랑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3강 7부 앞부분의 ‘작은 승리’와 뒷부분의 ‘이마에 기록된 이름’이 사실 하나의 이야기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처음에는 전혀 다른 주제처럼 보입니다. 한쪽에서는 보기 싫은 사람에게 먼저 인사하라고 하고, 배우자가 기분 나쁘게 맞는 말을 했을 때 참으라고 합니다. 다른 쪽에서는 시온산과 새 예루살렘과 14만 4천이라는 거대한 계시록의 환상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둘 사이에 놀라운 연결이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의 이름은 바로 그런 작은 선택들을 통해 사람 안에 기록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영적 이마에 도장이 ‘꽝’ 찍혀 천국의 특별 시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미워하고 싶은 순간에 사랑을 선택하고, 자기 유익을 구하고 싶은 순간에 이웃의 선을 생각하고,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순간에 진리를 선택하고, 자기 공로를 주장하고 싶은 순간에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는 선택들이 쌓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선과 진리가 조금씩 인간의 의지 안에 새겨집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작은 게 쌓이고 쌓이고 쌓여 가지고 익은 열매가 된다’고 말한 것은 오히려 ‘이름이 기록된다’는 계시록의 상응을 설명하는 데 매우 좋은 실천적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이름은 단순히 적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집니다. 주님의 이름을 입술로 부르는 것과 주님의 성품이 사람의 생명에 새겨지는 것은 다릅니다. 주님의 이름을 생명에 기록한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와 정직과 겸손과 쓰임의 질서가 사람의 실제 선택 속에서 자기 것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도 ‘자기 것이 된다’는 표현은 조심해야 합니다. 선 자체가 인간의 소유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선은 영원히 주님의 것입니다. 천사들도 자기 안의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사가 천사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자기 안의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온다는 것을 기쁘게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선이 ‘생명이 된다’는 것은 그것을 자기 공로로 소유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그것에 따라 사는 것을 사랑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점에서 강사의 ‘이기는 자’ 개념도 한층 부드럽고 깊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기는 자는 영적 전쟁에서 높은 점수를 얻어 14만 4천의 제한된 정원 안에 선발되는 사람이기 전에, 날마다 자기 안의 proprium과 싸우면서 주님께서 이기시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가장 큰 승리는 ‘내가 이겼다’는 의식마저 내려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 승리자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시흥영성수련원의 수도적 영성이 강조해 온 ‘자기부인’과도 아주 깊은 자리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자기부인의 최종 목적은 고통을 많이 견디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특별한 영적 등급을 획득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려는 질서를 내려놓고 주님께서 중심이 되시는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광야 연단’도 자기 의지를 강철처럼 단련하는 과정이라기보다 자기 의지를 주님의 질서 아래 놓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 됩니다. 이 사경회의 오랜 수도적 전통을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가장 깊이 보태 줄 수 있는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강사는 이어 ‘광야 연단 과정 속에서 자기 옷, 자기 행실을 깨끗하게 빨아서 정결해진 행실이 되었기 때문에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권세를 받는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도 매우 귀한 핵심이 있습니다. 계시록의 ‘옷’이 인간의 삶과 관계된다는 통찰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의복은 인간의 내적인 것을 감싸고 표현하는 진리, 그리고 그 진리에 따른 외적 삶과 관계합니다. 그러므로 옷을 깨끗하게 한다는 이미지를 실제 삶의 정결과 연결하는 방향은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그 옷을 사람이 자기 힘으로 깨끗하게 만들어 입장 자격을 획득한다고 이해하면 자기 공로의 위험이 생깁니다. 계시록의 다른 곳에서는 사람들이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고 합니다. 중심은 언제나 어린양입니다. 인간은 회개하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악을 제거하시고 선을 주시는 실제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은 ‘나는 광야에서 충분히 연단받아 이 자격을 얻었다’고 말하기보다 ‘주님께서 나를 수없이 넘어지는 가운데 붙들어 여기까지 인도하셨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은 ‘익은 열매’의 의미도 바꾸어 놓습니다. 익은 열매는 완벽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실제 행위 안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열매는 나무가 자기 자신에게 먹이려고 맺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존재에게 양식이 됩니다. 따라서 영적 열매의 가장 분명한 표지는 다른 사람에게 쓰임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연단을 받았는가보다 그 연단을 통해 내가 얼마나 더 온유하고 자비롭고 정직하고 유용한 사람이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천국의 ‘높은 곳’을 생각할 때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새 예루살렘이 천국의 수도이고 14만 4천의 이긴 자들이 그곳에 들어가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높음은 지위의 높음보다 사랑과 쓰임의 깊이입니다. 가장 높은 천사는 가장 많은 권력을 가진 천사가 아니라 가장 깊이 주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 때문에 가장 넓은 쓰임을 기쁨으로 행하는 천사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가장 낮게 여깁니다. 자기 안의 모든 선이 주님의 것임을 가장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기록된다’는 약속은 어떤 의미에서는 ‘천국 시민권’보다 훨씬 더 큰 약속입니다. 단순히 좋은 장소에 보내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와 상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사람을 외적으로 집어넣는다고 천국이 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 안에 천국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선과 진리의 결합이 그 사람의 생명이 되어야 그 사람은 천국의 분위기 속에서 숨 쉬듯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가장 깊은 준비는 새 예루살렘이 먼저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주님의 진리가 내 이해를 새롭게 하고, 그 진리에서 오는 선이 내 의지를 새롭게 하며, 그 선과 진리가 결합하여 내 실제 삶을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그때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은 먼 미래의 사건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거듭나는 인간 안에서 작은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3강 7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기는 자에게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록하신다는 말씀은 연단을 완성한 정확히 14만 4천 명의 특별한 성도가 천국의 물리적 수도에 입성할 자격을 얻는다는 뜻으로만 읽기보다, 주님께서 사람 안의 자기애와 거짓을 이기시고 그 사람이 자유롭게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새 교회의 질서가 그의 사랑과 삶에 새겨지며, 마침내 그 내적 상태와 상응하는 천국의 공동체 안에서 어린양과 결합하게 된다는 아르카나로 읽을 때 더욱 깊어집니다.’

 

그리고 이번 7부에서는 뜻밖에도 강사가 앞에서 한 아주 소박한 말이 가장 오래 남습니다. ‘작은 게 쌓이고 쌓이고 쌓여 가지고 익은 열매가 된다.’ 이것은 거대한 새 예루살렘 환상을 우리의 오늘 하루와 연결해 줍니다. 새 예루살렘은 계시록 마지막 장면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기 싫은 사람에게 먼저 웃으며 인사하는 그 순간, 배우자의 옳은 말을 자존심 때문에 거부하지 않는 그 순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정직을 선택하는 그 순간, 내 유익보다 다른 사람의 선을 먼저 생각하는 그 순간, 그리고 그 모든 일을 한 뒤 ‘내가 잘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도우셨다’고 마음을 돌리는 그 순간, 새 예루살렘의 한 조각이 우리 안으로 내려옵니다.

 

그렇게 작은 선택이 쌓이고, 진리가 선과 결합하며, 선이 점차 사랑이 되어 갈 때 주님의 ‘이름’은 더 이상 성경책의 글자에만 있지 않고 사람의 생명에 기록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이기는 자에게 내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리라’는 약속의 가장 아름다운 성취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새 예루살렘으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를 새 예루살렘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3강 8부

천년왕국, 첫째 부활과 ‘왕 노릇’ : 주님의 나라와 부활의 참된 의미

3강 8부에서는 앞서 다룬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14만 4천에 관한 설명에서 자연스럽게 계시록 20장의 ‘천년왕국’으로 넘어갑니다. 강사는 광야의 연단 가운데 ‘자기 옷’, 곧 자기 행실을 깨끗하게 하여 익은 열매가 된 이기는 자에게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권세가 주어진다고 정리한 뒤, 계시록 20장 1절 이하의 천년왕국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종말론적 체계에서는 예수님께서 지상 재림하시고 아마겟돈 심판을 행하신 뒤 이 땅에 실제적인 ‘천년 그리스도 왕국’, 곧 메시아 왕국을 세우십니다. 따라서 이번 8부는 앞서의 개인적 영적 성장론이 본격적인 미래 종말론의 시간표와 결합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눈여겨볼 것은 강사가 ‘천년왕국’을 말하면서 지상의 천국을 주장하는 여러 이단적 재림주 운동과 자기 해석을 분명하게 구별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강사는 ‘이단들이 쓰는 단골 메뉴’ 가운데 하나가 영계의 천국은 말하지 않고 ‘내가 재림 메시아로 왔으니 이 땅에 지상천국을 이루겠다’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의 주님의 승천과 재림 말씀을 근거로 그러한 자칭 재림주들을 배격합니다. 이 부분은 중요합니다. 강사의 천년왕국론을 단순히 ‘지상천국론’이라는 한 단어로 묶어 버리면 강의 자체가 의도적으로 구별하고 있는 지점을 놓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여기서 한 걸음 더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참된 재림은 무엇인가?’, 그리고 ‘주님의 나라는 어디에 어떻게 임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재림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 주님께서 자연계의 구름을 타고 지상에 다시 나타나시는 사건이고, 그 뒤 실제적인 메시아 왕국이 이 땅에 천 년 동안 세워집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재림은 주님께서 다시 육체를 입고 자연계에 오시는 두 번째 성육신이나 자연적 구름을 타고 물리적으로 내려오시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의 속뜻이 열리고 그 안에 계신 주님께서 신적 진리로 새롭게 나타나시는 영적 강림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큽니다. 그러나 이것을 곧바로 ‘어느 해석은 틀리고 어느 해석은 맞다’는 식으로 처리하기보다, 두 해석이 계시록의 언어를 바라보는 층위가 다르다고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강사는 계시록의 사건들을 미래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날 일들의 모형과 예언으로 읽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사건들의 자연적 형상 안에서 교회와 인간의 내적 상태, 그리고 주님의 신적 질서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봅니다. 앞서 새 예루살렘을 실제 천국의 수도로 보는 것과 주님의 새 교회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차이도 바로 여기에서 생겼습니다.

 

계시록 20장의 ‘천 년’도 같은 원리로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말씀의 숫자는 대부분 자연적 산술을 목적으로 주어진 숫자가 아닙니다. 특히 ‘천’은 정확히 1,000년이라는 시간 단위를 가리키기보다 많음, 충만함, 완전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천년왕국’을 달력으로 정확히 1,000년 동안 존속하는 미래의 지상 정치체제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숫자 ‘천’이 나타내는 영적 상태의 충만함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계시록을 읽는 방향을 크게 바꾸어 놓습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질문은 ‘천년왕국은 언제 시작되는가?’, ‘휴거 전인가 후인가?’, ‘누가 그 왕국에 들어가는가?’, ‘그곳에서 누가 왕 노릇하는가?’가 됩니다. 그러나 속뜻으로 들어가면 질문은 ‘주님의 통치가 인간 안에 이루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악과 거짓의 세력이 결박된다는 것은 어떤 상태인가?’, ‘첫째 부활은 무엇인가?’,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로 바뀝니다. 계시록의 관심이 미래 연표에서 현재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강사가 지금까지 반복해서 강조한 ‘연단’과 ‘이김’을 생각하면 오히려 이 내적 독법이 강의의 실천적 중심을 더 깊게 살려 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나라가 먼 미래에만 세워지는 것이라면 지금의 영적 싸움은 그 미래 왕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기 위한 준비가 되기 쉽지만, 주님의 나라가 지금 인간 안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영적 싸움 자체가 이미 그 나라가 임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자기애의 요구를 거절하고 주님의 진리에 순종할 때, 바로 그만큼 내 안에서 자기의 왕국이 물러나고 주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천국은 먼저 장소이기 전에 상태입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의 사랑과 생각을 다스리는 상태가 천국이며,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악과 거짓이 지배하는 상태가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왕이 되신다’는 것은 단지 먼 미래에 예루살렘에 왕좌를 설치하신다는 의미에 앞서, 인간 안에서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지배적인 원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왕 노릇한다’는 계시록의 표현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자연적인 왕 노릇은 다른 사람 위에 서서 명령하고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의 ‘왕 노릇’은 그런 지배와 정반대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천국의 권세는 다른 사람을 자기 뜻 아래 굴복시키는 권세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로 악과 거짓을 다스리고, 그 진리를 통해 선한 쓰임을 행하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리라’는 말씀을 어떤 특별한 성도들이 미래 천년왕국에서 정치적 통치권을 받아 다른 사람들을 다스린다는 그림으로만 읽으면 천국적 ‘왕권’의 본질을 놓칠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한다는 것은 먼저 자기 밖의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무질서를 주님의 진리 아래 두는 것입니다. 분노가 올라와도 분노가 왕이 되지 못하게 하고, 명예욕이 올라와도 명예욕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하며, 탐욕이 올라와도 그것이 삶의 방향을 정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다스리고 사랑이 목적이 되는 질서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강사가 강조해 온 ‘이기는 자’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진정한 왕은 다른 사람을 이긴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이 자기를 지배하지 못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실제 승리자는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신적 진리로 악과 거짓을 굴복시키십니다. 인간은 주님의 편에 서서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싸웁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사람이 가장 깊이 아는 것은 ‘이 권세는 내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계시록의 ‘보좌’도 단순한 왕실 의자로만 볼 수 없습니다. 보좌는 심판과 통치, 그리고 그 통치를 이루는 신적 진리와 관련됩니다. 사람이 보좌에 앉는다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다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할 권력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 악과 거짓을 분별하는 상태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천국마저 지상의 권력구조처럼 상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천국은 지상 왕국을 크게 확대해 놓은 곳이 아닙니다. 천국에는 질서와 등급과 통치가 있지만, 그 모든 질서는 사랑과 쓰임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높은 천사는 낮은 천사를 지배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높은 사랑과 지혜를 가진 만큼 더 넓은 쓰임을 행합니다. 천국의 통치는 자기 확대가 아니라 쓰임의 확대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가장 높은 자들은 자신을 가장 낮게 여깁니다.

 

이 점은 시흥영성수련원의 수도적 영성이 강조해 온 ‘자기부인’과도 아주 중요한 접점을 가집니다. 자기부인이 깊어질수록 ‘내가 남보다 높은 영적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욕망까지 내려놓아야 합니다. 만일 연단과 금욕과 순종을 오래 한 결과 ‘나는 일반 성도와 다르다’, ‘나는 이긴 자다’, ‘나는 더 높은 천국에 갈 사람이다’라는 의식이 강해진다면, 외적인 proprium은 억제했을지 몰라도 더 미세한 영적 proprium이 자라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깊은 연단을 거친 사람이 갈수록 부드러워지고,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이해하며, 자기 선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게 된다면 그 연단은 천국적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강사가 이번 사경회 전체에서 반복하는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개회기도에서도 ‘자기와의 싸움’, 환경과의 싸움 가운데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고, 순간순간 회개하며 감사함으로 봉사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드려집니다. 이 기도에는 이 사경회의 영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있습니다. 종말론적 시간표가 아무리 상세하더라도 이 공동체가 실제로 요구하는 삶은 결국 자기와 싸우고, 회개하고, 성령의 도움을 구하며, 봉사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 실천적 중심을 놓치지 않는 것이 공정한 해설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계시록 20장의 ‘첫째 부활’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문자적 미래주의에서는 첫째 부활을 미래 어느 시점에 죽었던 특정 성도들이 육체적으로 먼저 부활하는 사건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강사의 천년왕국 체계에서도 부활은 종말의 시간표 속에 배치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부활 자체를 먼저 전혀 다른 차원에서 봅니다. 인간은 자연적 육체가 죽은 뒤 오랜 세월 무덤에서 무의식적으로 기다렸다가 먼 미래에 다시 살아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연적 몸이 죽으면 영은 영계에서 깨어나 계속 살아갑니다.

 

따라서 ‘첫째 부활’ 역시 무덤 속 육체가 먼저 일어나는 장면만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깊게는 사람이 자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명에서 영적 생명으로 일어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를 형성하시고, 사람이 악과 거짓의 지배에서 벗어나 선과 진리를 사랑하기 시작할 때 그는 이미 어떤 의미에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영적 죽음과 영적 생명은 자연적 심장이 뛰느냐 멈추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지배하는 상태가 영적 죽음이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생명이 되는 상태가 영적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 자체가 하나의 부활입니다. 사람이 회개할 때마다 죽은 부분에서 일어납니다. 미움에서 사랑으로 옮겨 갈 때 일어나고, 거짓에서 진리로 옮겨 갈 때 일어나며, 자기 공로에서 주님의 은혜로 옮겨 갈 때 일어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계시록의 부활은 먼 미래의 기적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안에서 시작되어야 할 영적 현실입니다.

 

이것은 강사가 앞서 ‘구원이 완성되었다’, ‘광야 과정을 통과했다’,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표현한 것과도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어느 순간 인간이 완덕의 선을 넘어 더 이상 거듭날 필요가 없는 완성품이 된다고 보기보다, 주님께로 향하는 지배적 사랑이 형성되고 그 사랑이 계속해서 더 깊어지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천사들조차 영원히 사랑과 지혜에서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구원의 완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상당히 중요합니다. 만일 ‘나는 구원이 완성되었다’는 확신이 ‘이제 나는 익은 열매이며 저 사람은 아직 광야에 있다’는 판단으로 이어지면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내적 상태를 볼 수 없습니다. 더구나 자기 자신의 가장 깊은 동기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주님만이 그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성장할수록 자기 위치를 확정하는 것보다 오늘 주어진 악을 죄로 알고 피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강사가 ‘14만 4천도 많은 숫자’라고 하면서 그 수를 실제로 예정된 수로 이해하는 부분도 앞서 살펴본 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상응적으로 다시 읽게 됩니다. 천년이 정확한 1,000년을 반드시 뜻하지 않는 것처럼 14만 4천도 정확한 인원수를 반드시 뜻하지 않습니다. 계시록의 숫자는 영적 상태의 질과 충만함을 표현합니다. 이 원칙을 일관되게 적용하면 계시록은 ‘몇 명’, ‘몇 년’, ‘몇 달’, ‘몇 나라’의 계산에서 벗어나 훨씬 더 깊은 영적 구조를 드러냅니다.

 

그렇다고 계시록에서 역사적 사건의 차원을 완전히 지워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계시록이 교회의 역사적 상태와 마지막 심판, 새 교회의 도래를 다룬다고 봅니다. 다만 그 사건들은 자연계의 국제정치 시간표로만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영계에서 이루어지는 심판과 교회의 영적 상태 변화라는 차원에서 이해됩니다. 이 점은 강사의 미래주의적 계시록 해석과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의 가장 큰 차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마지막 심판’은 자연계의 지구가 불타 없어지고 모든 죽은 육체가 무덤에서 일어나 한 장소에 모이는 사건이 아닙니다. 심판은 영계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람은 죽은 즉시 영으로 살아 있으며, 자신의 지배적 사랑이 드러남에 따라 결국 자신과 상응하는 천국이나 지옥으로 갑니다. 그리고 보편적인 마지막 심판은 영계에 오랫동안 형성되어 있던 거짓된 영적 사회들이 분리되고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는 사건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천년왕국을 지상의 국제정치적 왕국으로 세밀하게 구성해야 할 필요도 줄어듭니다. 주님의 나라는 본질적으로 영적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의 나라가 인간 안에 임하면 자연계에도 결과가 나타납니다. 더 정직한 사회, 더 자비로운 관계, 더 정의로운 제도, 더 선한 쓰임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천국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외적 제도를 아무리 완벽하게 만들어도 인간의 사랑이 자기중심적이면 그 제도는 결국 변질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지상천국’에 대한 강사의 경계와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뜻밖에 만납니다. 강사는 자칭 재림주가 나타나 ‘내가 이 땅에 지상천국을 만들겠다’고 하는 것을 이단의 전형적 주장으로 경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외적 사회체제를 바꾸는 것만으로 천국을 만들 수 없다고 봅니다. 천국은 인간의 내면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자기애와 지배욕이 그대로인데 완벽한 제도만 만들면 그 제도는 결국 그 사랑을 표현하는 도구가 됩니다.

 

따라서 주님의 나라는 먼저 ‘누가 통치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내 삶에서 돈이 왕인가, 명예가 왕인가, 내 의견이 왕인가, 아니면 주님의 선과 진리가 왕인가입니다. 이 질문 앞에서는 천년왕국이 더 이상 먼 미래의 종말론적 호기심으로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내 안에서 어느 나라가 세워지고 있는가의 문제가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강사가 개회 설교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를 중심으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그리고 빛의 열매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강조한 것도 다시 주목할 만합니다. 이것은 사실 천년왕국의 가장 깊은 의미와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왕이신 나라는 사람들이 종말론적 지식을 많이 가진 나라가 아니라 주님의 빛이 그들의 삶에서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는 열매로 나타나는 나라입니다.

 

강사는 또한 성령께서는 ‘진리를 통해서 역사하신다’고 강조하고, 흐리고 세상적이며 기복적이고 정욕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순수하고 누룩이 섞이지 않는 밝은 진리’를 통해 영성이 살아나고 삶이 밝아지며 회개가 일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 역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상당히 가까운 지점입니다. 진리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사람 안의 악과 거짓을 드러내고 선한 삶으로 인도하는 빛이어야 합니다. 진리를 많이 알았는데 삶이 더 교만해지고 다른 사람을 더 쉽게 정죄하게 된다면 그 진리는 아직 생명과 결합되지 못한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밝은 진리’를 무엇으로 판별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단순히 더 세밀하고 비밀스러운 종말 시간표를 알고 있다는 것이 반드시 더 밝은 진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리의 밝음은 그 진리가 주님과 그분의 사랑을 얼마나 분명히 드러내고, 인간을 악에서 떠나 선한 삶으로 인도하는가와 관계합니다. 높은 진리는 높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는 오히려 자기 지성의 우월감을 키우는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번 사경회 전체를 해설하면서 계속 붙들어야 할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이 사경회에는 강한 종말론적 확신과 독특한 계시록 해석이 있습니다. 동시에 자기부인, 회개, 사랑, 봉사, 연단, 성결이라는 매우 실제적인 영적 요청도 있습니다. 이 둘 가운데 후자를 가볍게 여기면서 전자의 교리적 차이만 비판하면 이 사경회의 실제 영성을 제대로 읽지 못합니다. 반대로 실천적 열심이 귀하다고 해서 모든 종말론적 도식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할 일은 좋은 것은 충분히 알아보고, 문자적 해석이 속뜻을 가릴 수 있는 곳에서는 조용히 더 깊은 층을 열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3강 8부의 ‘천년왕국’은 폐기해야 할 주제가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이 들어가야 할 주제입니다. ‘천 년이 정말 1,000년인가?’만 묻는 데서 멈추지 않고 ‘주님의 통치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누가 그때 왕 노릇하는가?’에서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이 왕 노릇하고 있는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첫째 부활은 언제 일어나는가?’에서 ‘나는 지금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년왕국은 갑자기 오늘의 문제가 됩니다. 화를 내고 싶은 순간에 주님의 진리가 내 분노를 다스리면 그 작은 영역에서 주님께서 왕이 되십니다. 돈 때문에 진리를 타협하고 싶은 순간에 정직을 선택하면 그 자리에서 주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내 의견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상대의 선을 먼저 생각하면 자기 왕국이 조금 무너지고 주님의 왕국이 조금 더 세워집니다. 남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악을 거절할 때 첫째 부활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강사가 말한 ‘작은 것이 쌓이고 쌓여 익은 열매가 된다’는 설명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천년왕국과 새 예루살렘이라는 거대한 계시록의 환상이 결국 한 사람의 작은 일상과 만나는 것입니다. 미래에 주님께서 왕이 되실 것을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먼저 오늘 자기 안에서 주님께 왕좌를 내어 드려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먼저 말씀의 신적 진리가 자기 생각과 사랑 안으로 오시도록 받아들여야 합니다.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새 예루살렘의 선과 진리가 자기 삶 안으로 내려오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천년왕국의 문자적 그림을 내적 의미로 옮기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이것은 종말의 긴장감을 약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종말을 훨씬 더 가까이 가져오기 위해서입니다. 자연적 미래주의에서는 종말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날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종말’은 낡은 자기중심적 질서가 끝나고 주님의 새로운 질서가 시작될 때마다 우리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교회 전체에도 그러하고 개인에게도 그러합니다.

 

3강 8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20장의 천년왕국과 첫째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한다는 말씀은 예수께서 미래 어느 시점에 자연계로 다시 내려오셔서 정확히 천 년 동안 지상 정치왕국을 세우시고 특별히 선발된 성도들에게 통치권을 나누어 주신다는 시간표로만 읽기보다, 마지막 심판을 통하여 악과 거짓의 거짓된 지배가 무너지고 주님의 신적 선과 진리에서 오는 새로운 교회의 질서가 세워지며, 개인 안에서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지배에서 일어나 주님의 선과 진리가 다스리는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가는 거듭남의 아르카나로 읽을 때 그 속뜻이 더욱 깊이 열립니다.’

 

그리고 이번 8부에서 특히 귀하게 남길 것은 ‘왕 노릇’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높은 영적 단계에 올라가 다른 사람을 다스리기 위해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의 지옥적 사랑들이 더 이상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거듭납니다. 그러고 나면 놀랍게도 사람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도 점차 잃어버립니다. 천국적 사랑은 지배하려 하지 않고 섬기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깊이 거듭난 사람은 ‘나는 왕이 되었다’고 느끼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만이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자기 지혜도, 자기 의도, 자기 공로도 왕좌에서 내려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앉습니다. 그때 비로소 사람은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합니다. 자기가 왕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참된 왕이신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결국 천년왕국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언제입니까?’보다 ‘누가 지금 나를 다스리고 있습니까?’일 수 있습니다. 그 답이 조금씩 ‘나’에서 ‘주님’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 그것이 바로 강사가 말하는 광야의 연단과 이김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더욱 깊이 읽었을 때 보이는 거듭남의 길이며, 계시록의 천년왕국이 우리의 오늘과 만나는 자리라고 하겠습니다.



3강 9부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그리고 천년왕국의 ‘세 부류’ : 부활, 천국의 다양성, 그리고 쓰임의 질서

3강 9부에서는 앞서 살펴본 천년왕국의 논의가 한층 더 구체화됩니다. 강사는 고린도전서 15장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리고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라는 말씀을 근거로 부활의 순서를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이시며, 그 다음에는 주님의 강림 때 그분에게 ‘붙은 자들’이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사는 자신이 앞서 세운 ‘공중 강림’과 ‘지상 재림’의 구분을 적용하여, 공중 강림 때 휴거되는 성도들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고, 이들이 천년왕국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왕 노릇한다고 설명합니다. 나머지는 둘째 부활에 속한다고 구별합니다.

 

이어서 강사는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성도들을 ‘세 부류’로 나눕니다. 이 구분은 그의 ‘핵심진리’ 체계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사람들 가운데 왕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고, 그 왕들을 보필하는 사람이 있으며, 일반 백성으로서 땅을 분배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형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에 들어갈 때의 구조에서 찾습니다. 곧 ‘제사장’, ‘레위인’, ‘땅을 분배받는 일반 백성’이라는 세 부류가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세 종류의 성도들을 미리 보여 주는 모형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이번 3강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매우 흥미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천국에 서로 다른 상태와 쓰임이 있다’는 강사의 기본 직관은 스베덴보리의 천국 이해와 상당히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왕-왕을 보필하는 자-일반 백성’이라는 지상 왕국의 신분구조로 이해하는 데서는 상당한 차이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고 질서정연하지만, 그 다양성은 특권과 신분의 서열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종류, 그리고 그 사랑에서 나오는 ‘쓰임’의 차이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먼저 강사의 논리를 조금 더 충분히 따라가 보겠습니다. 강사는 계시록 14장의 시온산에 있는 14만 4천을 ‘처음 익은 열매’라고 부르는 데 주목합니다. 만일 익은 열매가 한 종류뿐이라면 굳이 ‘처음’이라는 말을 붙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 익은 열매’가 있다면 두 번째와 세 번째 익은 열매도 있다는 논리입니다. 그리고 그 수가 세 종류인 이유를 구약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에서 찾습니다. 제사장, 레위인, 땅을 분배받은 일반 백성이라는 세 종류가 있었으므로 천국에도 세 종류의 익은 열매가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두 번째 익은 열매를 순교자들과 연결합니다.

 

이러한 해석법의 장점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구약과 신약, 특히 출애굽-광야-가나안의 구조와 계시록을 하나의 구속사적 그림으로 연결하려고 합니다. 구약의 사건을 단순한 과거 역사로 끝내지 않고 신약의 영적 실재를 미리 보여 주는 모형으로 읽으려는 것입니다. 이 방향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와 성막, 제사장, 레위인, 가나안, 예루살렘 등을 모두 더 깊은 영적 실재를 표상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다만 ‘표상한다’는 것이 곧 자연적 구조가 미래에 그대로 재현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이 중요한 차이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에 제사장과 레위인과 일반 백성이 있었으므로 천년왕국에도 정확히 그에 상응하는 세 계급의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고 읽는 것은 ‘모형’을 자연적 차원에서 반복시키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표상의 핵심은 자연적 형상 안에 감추어진 영적 실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질문은 ‘천국에서 누가 제사장 계급이고 누가 레위인 계급인가?’보다 ‘제사장과 레위인과 이스라엘 백성이 각각 어떤 영적 선과 진리, 그리고 쓰임을 표상하는가?’가 됩니다.

 

특히 말씀에서 ‘제사장’과 ‘왕’은 매우 중요한 두 축을 이룹니다. 제사장적인 것은 선과 사랑에 관계하고, 왕적인 것은 진리와 신앙에 관계합니다. 주님께서 왕이시며 동시에 제사장이신 것도 그분 안에 신적 선과 신적 진리가 완전히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표현 역시 천국에서 다른 사람 위에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특별 계급을 뜻하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보여 주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왕 노릇’이라는 표현을 다시 정확하게 붙들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8부에서도 살펴보았듯, 천국적 왕권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권력이 아닙니다.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이 더 이상 자기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주님의 진리가 다스리는 상태입니다. 자연적 왕은 백성을 지배하지만 영적 의미의 왕은 진리로 거짓을 다스립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한다’는 것은 천국에서 많은 부하를 거느린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 안에서 악과 거짓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만일 천국을 지상의 왕국처럼 상상하면 신앙생활의 동기 속에 아주 미세한 야망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일반 백성보다 높은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나는 첫째 부활에 들어야 한다’, ‘나는 14만 4천 안에 들어야 한다’, ‘나는 새 예루살렘의 더 높은 자리에 가야 한다’는 식입니다. 처음에는 거룩한 열심처럼 보이지만 그 밑바닥에 자기 높임이 숨어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질서는 정반대입니다. 천국에서 높아진다는 것은 더 많은 사람 위에 올라간다는 뜻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섬길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랑이 깊을수록 쓰임이 넓어지고, 지혜가 클수록 다른 사람의 선을 더 섬세하게 도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의 높은 천사일수록 자신을 높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안의 모든 선과 지혜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 분명하게 압니다.

 

이 점에서 강사의 ‘세 부류’라는 직관을 완전히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계급’에서 ‘쓰임’으로 옮겨 읽으면 매우 풍성해집니다. 천국에는 실제로 무수히 많은 서로 다른 공동체와 쓰임이 있습니다. 모든 천사가 똑같은 일을 하지 않습니다. 가르치는 천사도 있고, 어린아이를 돌보는 천사도 있으며, 새로 영계에 온 사람을 돕는 천사도 있고, 다른 공동체와 연결되는 쓰임을 맡는 천사도 있습니다. 천국 전체가 한 사람과 같은 ‘가장 큰 사람’, 곧 막시무스 호모(Maximus Homo)를 이루기 때문에 각각의 공동체는 서로 다른 기관과 기능에 상응합니다.

 

사람의 몸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심장과 폐와 눈과 손과 발은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심장이 손보다 ‘높은 계급’이고 발이 눈보다 ‘낮은 계급’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몸의 질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각각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전체 생명을 위해 서로 필요합니다. 손이 눈이 되려고 하지 않고 눈이 심장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쓰임을 완전하게 수행할 때 전체 몸이 건강합니다. 천국의 질서도 이와 같습니다.

 

따라서 제사장, 레위인, 일반 백성이라는 구약의 세 구분 역시 ‘누가 더 높은가?’보다 ‘각각 어떤 쓰임을 맡았는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사장은 성소의 예배와 관련된 쓰임을 맡았고, 레위인은 성막과 제사장의 봉사를 돕는 여러 쓰임을 맡았으며, 각 지파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서 자기 기업을 받아 생활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이스라엘을 이루었습니다. 누구 하나만으로 이스라엘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강사의 모형론이 훨씬 천국적으로 열립니다. ‘천국에는 세 계급이 있다’가 아니라 ‘주님의 나라에는 서로 다른 선과 진리와 쓰임들이 질서 있게 결합되어 있다’가 됩니다. 그리고 이 원리는 바로 시흥영성수련원과 같은 실제 신앙 공동체를 생각할 때도 의미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말씀을 가르치고, 누군가는 기도하고, 누군가는 식사를 준비하고, 누군가는 청소하고, 누군가는 방문자를 맞으며,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공동체를 유지합니다. 천국적 관점에서는 어느 쓰임이 더 화려한가보다 그 쓰임이 주님과 이웃을 위한 사랑에서 이루어지는가가 중요합니다.

 

이 점은 수도생활에도 특히 중요합니다. 수도적 공동체에서는 오랜 연단을 받은 사람, 가르치는 사람, 지도하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권위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공동체에는 질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천국적 권위는 언제나 쓰임을 위한 권위여야 합니다. ‘내가 오래 연단받았으므로 너보다 높다’가 아니라 ‘내가 더 많이 받았으므로 더 많이 섬겨야 한다’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외적 질서가 내적 천국의 질서와 상응하게 됩니다.

 

이제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의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강사는 첫째 부활을 휴거 성도들, 특히 천년왕국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왕 노릇할 어린양의 신부들과 연결하고, 그 밖의 부활을 둘째 부활로 구별합니다. 이것은 강사의 종말 시간표 안에서는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부활 자체에 대한 전제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사람은 죽은 뒤 육체와 함께 무덤에서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마지막 날에 다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 육체가 죽으면 영은 영계에서 깨어나 계속 살아갑니다. 그 사람은 여전히 자신이 자기 자신임을 알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말하고, 다른 영들을 만나며 살아갑니다. 오히려 자연계에서보다 훨씬 더 온전한 인간적 감각과 사고를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죽었던 자연적 육체가 먼 미래에 다시 살아나는 것에 중심이 있지 않고, 사람이 자연계의 몸을 벗고 영적 생명으로 일어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계시록 20장의 ‘첫째 부활’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해석은 특히 중요합니다. ‘첫째 부활’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먼저 무덤에서 일어나는 한 집단의 육체 부활이라기보다, 주님께로부터 영적 생명을 받아 천국의 생명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부활의 핵심은 몸의 재조립보다 생명의 방향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는 표현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사람이 자연적으로 살아 있다고 해서 반드시 영적으로 살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만을 생명으로 삼고 있다면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웃을 사랑하며 악을 죄로 알고 피하는 사람이 되어 갈 때 그는 영적으로 살아납니다.

 

따라서 거듭남 자체가 이미 ‘부활’의 시작입니다. 이것은 부활을 사후의 일에서 현재의 삶으로 끌어옵니다. ‘나는 첫째 부활에 참여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나는 지금 죽은 상태에서 살아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뀝니다. 미움에서 사랑으로, 거짓에서 진리로, 자기중심성에서 쓰임으로, 자기 공로에서 주님의 은혜로 옮겨 가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그리고 이 변화는 한 번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강사가 계속 강조하듯 광야 여정이 있습니다.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고, 어떤 시험을 통과한 뒤 더 깊은 시험을 만나며, 한때 이긴 줄 알았던 악이 다시 나타나기도 합니다. 강의에서도 성도들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인내해야 하며, 오늘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신앙의 여정을 계속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권면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직선적인 상승이 아닙니다. 때로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가 뒤로 물러나는 것처럼 보이고, 밝은 상태 뒤에 어두운 상태가 오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의 교대를 매우 중요하게 다룹니다. 사람이 언제나 동일한 영적 고양 상태에 있다면 자신의 자유 안에서 선을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때로 주님의 임재가 선명하게 느껴지고, 때로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 상태를 지나면서 사람의 자유가 보존되고 그의 사랑이 실제로 무엇을 선택하는지가 드러납니다.

 

강사가 ‘열 개 중 하나도 응답이 없으면 주님이 싫어질 때도 있다’고 상당히 솔직하게 말하는 것도 이런 인간의 실제 상태를 보여 줍니다. 신앙은 언제나 감정적으로 뜨겁고 확신에 가득 찬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기도 응답도 없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를 붙들고, 선이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과정에서 신앙은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첫째 부활’은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지는 영적 특권이라기보다 사람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지배적이 되어 가는 과정과 연결됩니다. 예전에는 자기 뜻이 거절되면 곧바로 화를 냈지만 이제는 잠시 멈출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지만 이제는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지만 이제는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변화 하나하나가 영적 생명이 죽은 proprium을 밀어내며 일어나는 작은 부활입니다.

 

강사는 또한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세 번째 부류 가운데 ‘살아서 육체를 가지고 들어가는 성도들’을 말하고, 이들을 통해 천년왕국의 백성이 다시 생육하고 번성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는 강사의 천년왕국이 얼마나 구체적인 자연계의 왕국으로 이해되고 있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부활체를 입은 사람들과 자연적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 한 왕국 안에 함께 존재하고, 자연적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 자녀를 낳아 인구가 증가한다는 그림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부분 역시 자연적 미래 사건으로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영계에서는 자연계와 같은 방식의 생물학적 출산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결혼은 존재하지만 자연계처럼 육체적 자녀를 출산하는 결혼이 아닙니다. 천국에서 결혼의 결실은 선과 진리의 새로운 출생, 곧 사랑과 지혜와 쓰임의 증가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말씀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열쇠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자녀가 많아지는 것을 뜻하지만 속뜻에서는 선과 진리의 증가를 나타냅니다. ‘생육’은 선의 증가와, ‘번성’은 진리의 증가와 관련하여 사용됩니다. 태고교회와 고대교회의 사람들에게 자녀와 후손의 언어가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가 태어나고 증가하는 것을 표상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에서 생육하고 번성한다’는 것을 영적으로 읽으면 매우 아름다워집니다. 주님의 나라가 사람 안에 세워질수록 사랑에서 더 많은 선이 태어나고, 그 선을 섬기는 더 많은 진리가 생겨납니다. 한 가지 참된 사랑에서 수많은 선한 행동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시작하면 그 사랑에서 인내도 나오고, 용서도 나오고, 배려도 나오고, 정직도 나오며, 필요한 때에는 바르게 권면하는 지혜도 나옵니다. 하나의 선한 사랑이 수많은 ‘자손’을 낳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사가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근거로 ‘대환난을 눈앞에 둔 사람들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에 몰두할 때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적용하는 부분은 강사의 강한 임박한 종말의식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이 부분은 강의의 종말론적 체계 안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지만, 보편적인 신앙생활의 원리로 곧바로 확대하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바울의 특정 권면을 모든 시대의 결혼과 가정생활에 대한 일반적 축소 명령으로 읽으면 성경 전체가 말하는 결혼과 가정의 선한 쓰임을 충분히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결혼 자체를 매우 높은 영적 표상으로 봅니다. 참된 결혼 사랑은 선과 진리의 결합에 상응하고, 더 깊게는 주님과 교회의 결합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자연계의 부부 사랑과 가정은 단지 종말이 가까우므로 가능한 한 줄여야 할 자연적 부담이 아니라, 올바른 질서 안에서는 거듭남의 중요한 장이 될 수 있습니다. 배우자를 통해 자기애가 드러나고, 용서와 인내와 책임과 섬김을 배우며, 자녀를 통해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다른 생명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법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번 강의 전체에서 강사가 가장 실제적인 연단의 예로 자주 드는 것도 부부와 가족관계입니다. 보기 싫은 사람에게 먼저 인사하고, 배우자가 맞는 말을 했을 때 자기 자존심을 내려놓고, 가까운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이김’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가정은 종말을 기다리느라 영적 삶에서 밀어내야 할 영역이라기보다 바로 그 ‘이김’이 가장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광야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 ‘둘째 부활’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특별한 성도들과 나머지 둘째 부활 사이에 시간적·신분적 구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계시록의 ‘첫째’와 ‘둘째’를 단순한 시간표의 두 시점으로만 읽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계시록은 영적 상태의 질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둘째 사망’이라는 표현과 함께 읽으면 이것이 더 분명해집니다. 자연적 죽음은 모든 사람이 겪습니다. 그러나 둘째 사망은 자연적 몸의 죽음이 아니라 악과 거짓을 자기 생명으로 선택함으로써 천국의 생명과 완전히 반대되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첫째 부활의 복됨도 자연적 몸이 남보다 먼저 일어나는 특권보다, 주님의 생명을 받아 둘째 사망이 그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첫째 부활과 둘째 사망은 서로 대조되는 영적 언어가 됩니다. 한쪽에서는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살아나고, 다른 쪽에서는 자기애와 거짓이 그의 지배적 생명이 됩니다. 사람은 지상에서 날마다 이 두 방향 가운데 하나를 향해 자기 생명의 성격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은 전혀 낯선 판결이 갑자기 외부에서 내려오는 사건이 아닙니다. 사람이 평생 자유롭게 사랑해 온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을 임의로 천국에 넣고 다른 사람을 지옥에 던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 자신이 자유롭게 형성한 지배적 사랑이 그 사람의 영원한 방향을 결정합니다. 다만 그 자유와 생명과 선을 선택할 모든 능력 자체는 끊임없이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원리는 강사가 말하는 ‘세 부류의 익은 열매’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열매의 차이는 천국의 계급장을 의미하기보다 사람이 받아들인 선의 서로 다른 질을 생각하게 합니다. 천국의 모든 사람이 똑같은 정도와 형태의 사랑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이 중심인 천적 선에 속하고, 어떤 사람은 이웃 사랑이 중심인 영적 선에 속하며, 또 어떤 사람은 보다 외적인 순종과 쓰임 가운데 선을 받아들입니다. 천국에는 이러한 무수한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천국의 세 천국, 곧 천적 천국, 영적 천국, 자연적 천국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강사의 ‘제사장-레위인-일반 백성’과 기계적으로 일대일 대응시키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두 체계의 출발점과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만 ‘천국은 단조로운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깊이의 사랑과 진리를 가진 무수한 공동체들이 완전한 질서를 이루는 곳’이라는 점에서는 중요한 접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경쟁을 만들지 않습니다. 자연계에서는 높은 자리를 보면 올라가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각 사람이 자기 사랑과 쓰임에 가장 알맞은 공동체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영적 천사가 천적 천사의 상태를 억지로 차지하려 하지 않고, 어느 공동체도 다른 공동체의 쓰임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주어진 쓰임을 행하는 기쁨 자체가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상급’을 이해할 때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좁은 길을 가는 어려움과 함께 ‘상급의 진리’를 강조하는 흐름이 나타납니다. 상급을 말하는 것 자체는 성경적입니다. 문제는 상급을 세상의 보상체계처럼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나는 더 많이 희생했으므로 더 높은 자리와 더 많은 권세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상급에 자기 공로가 섞입니다.

 

천국의 참된 상급은 선 자체를 행하는 기쁨입니다. 이웃을 사랑한 사람이 천국에서 받는 상급은 ‘사랑했으니 이제 특별한 지위를 받는다’가 아니라, 더 완전하게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사랑한 사람의 상급은 더 깊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며, 쓰임을 사랑한 사람의 상급은 더 넓고 깊은 쓰임을 기쁨으로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상급은 천국적 사랑의 능력이 더욱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왕 같은 제사장’의 가장 큰 상급도 왕좌가 아닙니다. 더 깊이 사랑하고 더 지혜롭게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상의 왕과 천국의 왕을 가르는 결정적 차이입니다. 지상의 왕은 많은 사람에게 섬김을 받지만 천국적 왕은 더 많은 사람을 섬깁니다. 주님께서 바로 그 원형이십니다. 만왕의 왕이신 분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여기서 3강 전체의 ‘연단’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왜 광야에서 연단받는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입니다. 왜 자기부인을 하는가? 영적 강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proprium이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지배하려는 힘을 잃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말씀을 배우는가? 남보다 더 많이 알아 우월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분별하여 실제로 선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의 중 ‘성경은 밀어붙이는 게 아니에요. 자기를 죽여야 돼’라고 말하는 부분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설교가 맞는지 틀리는지만 검사하는 신앙을 경계하면서, 중요한 것은 지식의 축적 자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충분히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자기를 죽인다’는 표현은 다시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의 인격과 개성, 자유와 이성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고유한 개성은 천국에서도 영원히 보존됩니다. 죽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으로 삼고,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며, 자기 지혜를 진리의 최종 기준으로 삼으려는 proprium의 지배입니다. 이것이 내려갈수록 오히려 주님께서 주신 참된 인간성이 살아납니다.

 

강사가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 있느냐가 중요하다’, ‘성경 책 가지고 싸우고 신학 가지고 싸우는 것보다 주님이 나를 모른다고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물론 진리와 교리는 중요합니다. 잘못된 진리는 삶의 방향도 잘못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목적이 사랑과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사람의 외적 기억에 머물 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생명책도 실제 천국 어딘가에 놓인 거대한 명부에 사람 이름이 적혀 있는 것으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책’은 사람의 내적 상태가 기록된 것을 나타냅니다. 인간이 사랑하고 의도하고 생각하고 행한 모든 것은 그의 영에 새겨집니다. 그래서 사후에는 숨길 수 없습니다. 자기 생명 자체가 책이 됩니다. 어떤 외부의 심판자가 증거자료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무엇을 사랑했는지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어떤 명단에 등록되었다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그 사람의 성품에 새겨졌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7부에서 살펴본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록한다’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질을 나타냅니다. 결국 문제는 ‘내 이름이 어느 명단에 있는가?’만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내 삶에 얼마나 기록되고 있는가?’입니다.

 

그렇다면 첫째 부활도, 생명책도, 왕 같은 제사장도, 세 부류의 익은 열매도 하나의 중심으로 모입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종말론의 모든 그림이 결국 인간의 생명으로 돌아옵니다.

 

이 점에서 이번 3강의 강사가 천년왕국과 14만 4천,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을 매우 구체적인 미래 시간표로 설명하면서도 계속해서 ‘오늘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라’, ‘작은 죄까지 철저하게 회개하라’, ‘자기를 죽여야 한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라’고 삶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교리적 구조에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상당한 거리가 있지만, 실제 목회적 권면에서는 다시 거듭남의 핵심에 가까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강의를 해설할 때 어느 한쪽만 보면 안 됩니다. 천년왕국의 자연적 시간표만 보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와의 차이가 매우 크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표를 통해 강사가 성도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보면 ‘끝까지 악과 싸우라’, ‘자기를 부인하라’, ‘작은 죄도 회개하라’, ‘주님을 사랑하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라’는 실천적 중심이 보입니다. 이 중심은 충분히 존중하면서, 그 실천을 떠받치는 계시록의 문자적 도식은 상응의 빛 아래에서 한층 깊게 읽어 볼 수 있습니다.

 

3강 9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왕 같은 제사장과 그를 보필하는 자와 일반 백성, 그리고 세 종류의 익은 열매라는 강사의 천년왕국 구조는 미래 지상왕국의 신분과 부활 순서를 문자적으로 확정하는 도식으로만 읽기보다, 주님께서 서로 다른 사랑과 진리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각각의 쓰임에 맞게 거듭나게 하시고, 그들이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의 지배에서 일어나 주님의 선과 진리 안에서 생명을 얻으며, 서로 다른 쓰임을 통해 하나의 천국을 이루게 하시는 영적 질서의 표상으로 읽을 때 더욱 깊어집니다.’

 

그리고 이번 9부에서 가장 오래 붙들 만한 것은 어쩌면 ‘세 부류’가 아니라 ‘한 나라’라는 사실일 것입니다. 제사장도 있고 레위인도 있고 땅을 분배받은 백성도 있지만 모두 하나의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몸에는 눈도 있고 손도 있고 발도 있지만 모두 하나의 몸입니다. 천국에도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과 자연적 천국이 있고 그 안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동체가 있지만 모두 하나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목표는 ‘나는 어느 등급까지 올라갈 것인가?’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선과 진리를 가지고 나는 어떤 쓰임을 할 것인가?’입니다. 천국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쓰임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쓰임 안에서 자기 자신을 잊을수록 더욱 천국적이 됩니다.

 

강사가 말한 ‘왕 같은 제사장’도 이렇게 읽으면 전혀 다른 빛을 띱니다. 왕관을 쓰고 다른 사람 위에 앉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로 먼저 자기 안의 악을 다스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왕관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영광의 왕관이 아니라 주님께 돌려 드릴 왕관입니다.

 

결국 첫째 부활의 가장 깊은 표지는 ‘남보다 먼저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무엇으로 살아났는가?’일 것입니다. 자기애로 살아 있는 사람인가,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나는 사람인가. 다른 사람 위에 서고 싶은 사람인가, 다른 사람에게 쓰임이 되고 싶은 사람인가. 자기 공로를 쌓는 사람인가,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점 더 깊이 인정하는 사람인가.

 

그렇게 보면 천년왕국의 ‘세 부류’는 경쟁의 세 등급이 아니라 천국의 놀라운 다양성을 생각하게 하는 하나의 출발점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각 사람의 고유한 성품과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서로 다른 선과 진리와 쓰임 안에서 완성해 가십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다름을 하나로 만드는 것은 동일한 계급도, 동일한 지식도, 동일한 수도적 훈련도 아닙니다. 오직 한 분 주님에게서 흘러오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왕’은 섬기고, ‘제사장’은 자기 공로를 내려놓으며, ‘백성’은 자기 쓰임을 기뻐합니다. 바로 그때 서로 다른 모든 사람이 한 천국을 이루게 됩니다.



3강 10부

‘세 종류의 익은 열매’에서 두아디라 교회의 약속까지 : 추수,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별

3강 10부에서는 지금까지 길게 이어져 온 ‘이기는 자’, ‘광야 연단’, ‘14만 4천’, ‘순교자’, ‘천년왕국’의 논의가 ‘세 종류의 익은 열매’라는 구조로 최종 정리되고, 이어서 계시록 2장의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약속으로 넘어갑니다. 강사는 계시록 14장의 14만 4천을 ‘처음 익은 열매’, 교회 시대와 대환난 가운데 순교하는 이들을 ‘두 번째 익은 열매’, 대환난을 살아서 통과하여 지상 재림하신 주님께 추수되는 성도들을 ‘세 번째 익은 열매’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이 세 부류를 구약의 가나안에 들어간 제사장, 레위인, 땅을 분배받은 일반 백성이라는 세 부류와 연결합니다. 그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목적이 익은 열매를 추수하는 데 있다. 따라서 우리도 처음이나 두 번째나 세 번째나 익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3강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강사가 지금까지 왜 그토록 ‘익어야 한다’, ‘연단받아야 한다’, ‘이겨야 한다’, ‘광야를 통과해야 한다’고 강조했는지가 여기에서 하나로 모이기 때문입니다. 강사의 종말론적 체계에서 신앙생활은 단순히 죽어서 천국에 가는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어느 정도까지 익었느냐에 따라 마지막 때의 추수와 천년왕국에서의 위치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익은 열매’는 이 강의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먼저 이 핵심을 충분히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신앙의 목적은 단순히 교리를 알고 입으로 믿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진리가 삶 속에서 선으로 열매 맺어야 합니다. 씨가 뿌려졌다고 농사가 끝나는 것이 아니며, 싹이 났다고 추수하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의 진리가 기억에 들어오고, 이해되고, 사람이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시험 가운데 그것을 따라 살며, 마침내 선한 삶이 그의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말하는 ‘익음’은 거듭남과 매우 가까운 실천적 직관을 담고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익은 열매’를 세 종류의 종말론적 신분집단으로 고정하기보다,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가 실제 생명으로 결합되는 것으로 읽습니다. 말씀에서 ‘열매’는 매우 자주 선한 행위와 쓰임, 더 깊게는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표상합니다. 나무가 그 본질을 열매로 드러내듯 인간의 내적 사랑도 결국 삶의 행위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신 말씀은 사람의 신앙이 무엇인지는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떤 생명을 사는지를 통해 드러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익었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아직 설익은 열매와 익은 열매의 차이는 단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영적으로는 진리가 얼마나 의지와 결합했느냐의 차이입니다. 처음에는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압니다. 다음에는 그것이 옳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마음은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말씀 때문에 억지로라도 선하게 행동하려고 합니다. 이것도 매우 귀한 시작입니다. 그런데 오랜 거듭남을 거치면서 어느 순간 상대를 불쌍히 여기고 그의 선을 진심으로 바라게 됩니다. 진리가 사랑과 결합한 것입니다. 열매가 익어 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 ‘익음’은 완벽함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번 강의의 ‘완덕’, ‘익은 열매’, ‘이기는 자’를 이해할 때 꼭 붙들어야 할 구별입니다. 익었다는 것은 더 이상 결점이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명을 지배하는 방향이 주님께로 향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전히 약함이 있고 실수도 할 수 있지만, 악을 악이라고 인정하고 그것을 변호하지 않으며 주님의 도움으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선을 억지로만 행하는 데서 조금씩 선 자체를 사랑하는 방향으로 옮겨 갑니다. 강사는 첫 번째 익은 열매인 14만 4천이 추수된 뒤 두 번째 익은 열매인 순교자들이 추수되고, 마지막으로 대환난을 살아서 통과한 세 번째 성도들이 추수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순교자들에 대해서는 오순절 이후 교회 시대 동안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순교했으나 14만 4천의 처음 익은 열매 반열에는 들어가지 못한 이들이며, 그들의 수가 채워질 때까지 기다린다고 풀이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천국의 가장 거룩한 곳부터 채워 가시는 모습’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에는 강사의 천국관이 매우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천국이 일정한 공간적 구조와 등급을 가지고 있고, 그 높은 곳부터 자격을 갖춘 성도들이 차례로 채워진다는 그림입니다. 앞에서 보았던 ‘새 예루살렘은 천국의 수도’, ‘14만 4천은 그곳에 들어가는 이긴 자들’,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설명도 모두 이 구조와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천국에는 분명히 높고 낮음이 있으며 세 천국과 무수한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말하는 것 역시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지상의 신분계급처럼 외적으로 부여되는 차이가 아닙니다. 각 사람이 받아들인 사랑과 지혜의 질에 따른 내적 차이입니다. 더 깊은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랑과 상응하는 천국에 있고, 보다 외적인 선 가운데 있는 사람은 그 선과 상응하는 천국에 있습니다. 어느 누가 행정적으로 사람을 등급별로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내적 상태 자체가 그에게 맞는 공동체를 찾게 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거룩한 곳부터 채워진다’는 표현도 ‘먼저 선발된 엘리트들이 최고층 천국의 정원을 채운다’는 방식보다, 주님께서 각 사람을 그의 사랑과 선의 질에 따라 가장 적합한 천국의 쓰임과 공동체로 인도하신다는 방향으로 읽으면 훨씬 부드러워집니다. 천국의 차이는 경쟁의 결과가 아니라 상응의 결과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천국적 삶에서는 ‘저 사람보다 더 높은 곳에 가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천국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높은 곳을 원하는 사랑은 이미 자기 우월과 지배의 요소를 포함합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자기보다 높은 천국에 있는 천사를 시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에게 주어진 선과 쓰임 안에서 완전한 기쁨을 누립니다. 이 원리를 ‘익은 열매’에 적용하면 경쟁의 문제가 사라집니다. 사과가 포도가 되려고 애쓸 필요가 없고 포도가 무화과가 되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 주신 선이 충분히 열매 맺는 것입니다. 천국은 똑같은 열매만 가득한 창고가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선들이 하나의 주님 아래 조화를 이루는 나라입니다.

 

특히 ‘순교자’를 두 번째 익은 열매라는 고정된 신분으로 이해하는 문제도 여기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순교는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숭고한 신앙의 증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기 생명까지 내어놓으면서 주님을 부인하지 않은 사람들의 충성은 가볍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죽음의 방식 자체가 자동적으로 영적 등급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 상태를 결정하는 것은 그 행위가 어떤 사랑에서 나왔느냐입니다. 겉으로 같은 순교처럼 보여도 사람의 내면은 다를 수 있습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놓는 것과, 자기 종교집단의 명예나 자기 의를 증명하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것은 내적으로 같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외적 사건보다 그 안의 사랑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순교의 영적 가치는 죽음 자체에 있다기보다 그 죽음 안에 있는 사랑과 충성에 있습니다.

 

더 나아가 ‘순교’에는 일상적인 영적 의미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가 문자적으로 목숨을 잃는 순교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모든 거듭나는 사람은 자기 proprium의 어떤 것을 날마다 죽이는 경험을 합니다.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도 작은 죽음이고, 자기 주장을 포기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작은 죽음이며, 미움을 품고 싶은 욕망을 거절하는 것도 자기중심적 생명에 대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반드시 문자적 순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악을 죄로 알고 거절하는 삶 전체가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이 의미에서 수도적 전통이 강조해 온 ‘자기부인’은 거듭남과 매우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 사랑을 방해하는 자기중심적 의지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강사는 세 번째 익은 열매를 ‘7년 대환난을 인내하고 말씀을 지키며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우상에게 절하지 않은 채 살아남아 육체로 환난을 통과한 성도들’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첫째, 둘째, 셋째 익은 열매가 차례로 추수되어 천국이 채워진다고 정리합니다. 이 부분에서도 강사의 핵심은 결국 ‘끝까지 지키는 신앙’입니다. 이 실천적 중심은 충분히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끝까지’라는 말은 거듭남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어느 한때 뜨거운 신앙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평생 형성하는 지배적 사랑이 중요합니다. 한때 선한 감정을 느꼈다는 것, 한때 큰 은혜를 체험했다는 것, 한때 열심히 봉사했다는 것이 곧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형성하시는 선이 그의 실제 생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딘다’는 것도 인간의 이를 악문 의지력만을 의미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나는 반드시 끝까지 버티겠다’고 하면 그 힘 자체가 proprium이 될 수 있습니다. 강의의 시작 기도에서 ‘헌신과 수고를 통한 주님의 나라에 봉사할 때 하늘로부터 주시는 새 힘으로 하게 하시고 자기 의지로 하지 않도록 붙잡아 달라’고 기도한 것은 그래서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매우 중요하게 붙들 수 있는 표현입니다. ‘자기 의지로 하지 않도록.’ 수도적 연단에서 이 한 문장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금식도 자기 의지로 할 수 있고, 철야기도도 자기 의지로 할 수 있으며, 오랜 수도생활도 자기 의지로 견딜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부인조차 ‘나는 이만큼 나를 부인했다’는 새로운 자기 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외적인 연단보다 더 깊은 연단은 ‘내가 하고 있다’는 의식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선을 행할 때 마치 자기 힘으로 행하는 것처럼 해야 하지만, 실제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가르칩니다.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문제가 생깁니다. ‘주님이 하시니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거듭남에 필요한 자유로운 협력이 사라지고, ‘내가 해냈다’고 하면 자기 공로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악과 싸우면서도 승리 후에는 ‘주님께서 하셨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익은 열매’의 매우 중요한 표지일 수 있습니다. 덜 익었을 때에는 자기 선을 자랑하기 쉽습니다. ‘나는 이것을 끊었다’, ‘나는 이 시험을 이겼다’, ‘나는 이만큼 기도한다’, ‘나는 이런 깊은 진리를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자기 안에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더 분명히 압니다. 열매가 익을수록 가지가 오히려 아래로 숙여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익은 열매’와 겸손은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익은 사람은 자기가 익었다고 쉽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안의 악을 더 섬세하게 보며 주님의 자비를 더 필요로 합니다. 다른 사람의 미숙함을 보아도 쉽게 정죄하지 않습니다. 자신도 얼마나 오랜 시간 주님께 붙들려 여기까지 왔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이번 사경회의 수도적 전통을 바라볼 때에도 매우 중요한 분별 기준이 됩니다. 연단의 결과가 사람을 강퍅하게 하고 다른 신앙인들을 쉽게 ‘덜 익은 사람’, ‘광야에 있는 사람’, ‘낮은 반열’로 분류하게 한다면 그 연단에는 다시 살펴볼 부분이 있습니다. 반대로 연단을 오래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약함에 더 인내하고, 더 부드러워지고, 더 적게 자기 공로를 말하며, 더 많이 섬긴다면 그 열매에는 천국적인 것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공동체가 오랫동안 강조해 온 ‘연단’과 ‘자기부인’을 가장 선한 방향으로 이해하려면 결국 이 열매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강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전환을 합니다. ‘요렇게 해서 이제 살펴봤습니다’라고 지금까지의 세 종류의 익은 열매에 관한 설명을 마치고, 두아디라 교회의 이기는 자에게 주신 약속으로 넘어갑니다. 두 가지 축복, 곧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별’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계시록 2장 26절 이하의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전환은 3강 전체의 주제인 ‘이기는 자’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앞에서는 ‘누가 익은 열매인가?’를 설명했다면 이제는 ‘이긴 자에게 무엇을 주시는가?’를 다루는 것입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이 권세가 천년왕국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실제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 역시 먼저 내적으로 읽습니다. 말씀에서 ‘나라들’, 곧 ‘만국’은 좋은 의미에서는 선들, 반대 의미에서는 악들과 관계합니다. ‘다스린다’는 것은 영적 의미에서 진리로 악과 거짓을 질서 아래 두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기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진다는 것은 다른 민족과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권력을 받는다는 의미에 앞서, 주님의 진리로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다스릴 능력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앞서 ‘왕 노릇’의 의미와 같습니다. 천국적 권세의 첫 대상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 안에 들어오는 지옥의 영향, 곧 악과 거짓입니다. 다른 사람을 완벽하게 통제하면서 자기 분노 하나 다스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천국적 왕권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에게 명령할 수 있으면서 명예욕의 명령에는 꼼짝없이 복종한다면 그는 실제로 왕이 아니라 자기 욕망의 종입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아무 직위도 없는 사람이 자기 안의 탐욕과 미움과 복수심을 주님의 진리로 거절할 수 있다면 영적으로는 왕의 권세를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능력 자체는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계시록은 이 권세를 이기는 자가 ‘얻어낸다’고 하기보다 주님께서 ‘주신다’고 합니다. 이어 ‘철장으로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는 강한 표현이 나옵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미래의 성도들이 철장으로 이방 나라들을 강압적으로 통치하는 장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응으로 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열립니다. ‘철’은 자연적 차원에 있는 진리, 곧 삶과 행위에 적용되는 강한 진리를 나타낼 수 있고, ‘막대기’ 또는 ‘지팡이’는 권능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철장’은 자연적 삶의 차원에서 악과 거짓을 제어하는 진리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질그릇’ 역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릇은 무엇인가를 담는 것이며, 질그릇은 흙으로 만들어진 가장 외적이고 자연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질그릇을 깨뜨린다는 것은 사람을 폭력적으로 파괴한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 외적이고 거짓된 형식들이 무너지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자기 합리화, 잘못된 신앙의 형식, 악을 감싸고 있던 거짓된 논리들이 주님의 진리 앞에서 깨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개인의 거듭남에 적용하면 아주 실제적입니다. 사람은 자기 악을 보호하기 위해 수많은 ‘질그릇’을 만듭니다. ‘다들 그렇게 산다’, ‘나는 원래 성격이 그렇다’, ‘저 사람이 먼저 잘못했다’, ‘이 정도는 죄가 아니다’, ‘목회를 위해서 어쩔 수 없다’, ‘좋은 목적이니까 괜찮다’와 같은 합리화들입니다. 악한 사랑이 그 안에 담겨 있는 동안 사람은 그 그릇을 소중히 지킵니다.

 

그런데 말씀의 진리가 강하게 들어오면 그 그릇이 깨집니다. ‘아, 이것은 상황 때문이 아니라 내 자존심 때문이었구나.’ ‘나는 정의를 위해 화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무시당한 것이 싫었던 것이구나.’ ‘사명을 위한 열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구나.’ 이런 깨달음이 일어날 때 질그릇 하나가 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장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무서운 통치의 그림이 아니라 오히려 거듭남의 매우 정밀한 그림이 될 수 있습니다. 진리는 때때로 우리를 위로하지만 때로는 아주 단단하게 우리의 거짓을 깨뜨립니다. 말씀은 언제나 부드러운 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거짓을 깨뜨려야 할 때에는 철장처럼 단호하게 작용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사람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얽매고 있는 거짓을 파괴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목회와 가르침에서도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철장’을 문자적으로 모방하여 지도자가 사람들에게 강압적 권위를 행사하면 위험합니다. ‘나는 진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너희를 다스릴 권세가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종교적 지배욕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주님의 진리는 사람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거짓을 드러내지만 사람이 자유롭게 그것을 인정하고 버리도록 이끄십니다. 그래서 참된 영적 권위는 사람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는 힘이 아니라 그 사람이 주님께 자유롭게 순종하도록 돕는 힘입니다. 좋은 목회자는 성도를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좋은 영적 스승은 제자가 평생 자기에게 의존하도록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말씀 앞에 서서 주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이 점에서 수도적 전통의 ‘순종’ 역시 세심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외적 순종은 훈련의 유익한 수단이 될 수 있지만 최종 목적은 인간 지도자의 뜻에 완전히 종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인 순종은 주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인간의 권위는 그 순종을 돕는 한에서만 영적 권위입니다. 이것이 지켜지면 수도적 순종은 proprium을 내려놓는 귀한 훈련이 될 수 있지만, 이것이 뒤집히면 사람을 지배하는 종교적 권력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아디라 교회의 두 번째 약속이 ‘새벽별’입니다. 이 표현은 이번 3강 전체의 마지막 부분을 아주 아름답게 밝힐 수 있는 상징입니다. 계시록 22장에서 주님께서는 친히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새벽별은 주님 자신과 관련됩니다.

 

새벽별은 밤이 완전히 끝난 뒤 뜨는 별이 아닙니다. 아직 어둠이 남아 있을 때 나타나 곧 아침이 올 것을 알립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상응입니다. 시험 가운데 있는 사람은 아직 완전한 낮에 있지 않습니다. 악과 거짓의 어둠이 있고, 주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지며, 무엇이 어떻게 될지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둠 가운데 작은 빛이 나타납니다. 진리가 마음에 들어오고 희망이 생기며 주님의 임재가 다시 느껴집니다. 이것이 새벽별의 상태를 생각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별’은 천사적인 의미에서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 그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영적 빛과 관련됩니다. 별이 밤하늘을 비추듯 진리의 지식은 아직 완전한 영적 낮에 이르지 못한 사람에게 방향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새벽별’은 단순한 지식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밤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에도 이런 새벽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어떤 악과 싸웠는데 전혀 변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 같고, 같은 시험이 반복되며, 자신이 정말 변하고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전 같으면 크게 화냈을 상황에서 마음이 조금 덜 흔들립니다. 예전에는 미워했던 사람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예전에는 억지로 했던 선을 조금 기쁘게 행합니다. 아직 대낮은 아니지만 새벽별이 뜬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기는 자에게 새벽별을 주겠다’고 하신 약속을 매우 개인적으로 읽을 수 있는 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기는 사람에게 단지 외적 상급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진리와 사랑, 궁극적으로는 주님 자신의 임재를 주십니다. 상급의 본질이 주님입니다.

 

이것은 ‘상급’에 대한 이번 사경회의 강조를 매우 아름답게 보완할 수 있습니다. 강사는 좁은 길을 걸으면 상급이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합니다. 그 말 자체는 충분히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천국적 상급의 가장 깊은 형태는 더 높은 지위나 더 큰 통치권이 아니라 주님과의 더 깊은 결합입니다.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은 ‘왕좌’가 아니라 ‘새벽별’, 곧 주님 자신입니다. 이렇게 보면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별’이라는 두 약속의 순서도 의미심장합니다. 먼저 악과 거짓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지고, 그 다음 새벽별이 주어집니다. 거듭남에서도 사람이 주님의 힘으로 악과 거짓을 거절할수록 내면이 깨끗해지고, 깨끗해진 만큼 주님의 빛을 더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악을 버리는 것과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의 과정의 두 면입니다.

 

단순히 악을 끊는 것이 거듭남의 목적은 아닙니다. 빈집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들어오시도록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미움을 버리는 목적은 단지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입니다. 거짓을 버리는 목적은 단지 오류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기애의 지배를 내려놓는 목적은 자아가 텅 빈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그 자리를 채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수도적 자기부인 역시 ‘없애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자기 욕망을 끊고, 자기 뜻을 내려놓고, 세상 즐거움을 절제하는 것 자체가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그 빈자리에 무엇이 들어오는가가 중요합니다. 더 많은 주님 사랑, 더 깊은 이웃 사랑, 더 넓은 쓰임이 들어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부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업적이 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3강 처음부터 이어져 온 ‘광야’의 의미도 완성됩니다. 광야는 사람이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닙니다.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지나가는 곳입니다. 연단도 목적지가 아닙니다. 사랑이 목적지입니다. 자기부인도 목적지가 아닙니다. 주님과의 결합이 목적입니다. 싸움도 목적지가 아닙니다. 평화가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 평화는 싸움을 전혀 경험하지 않은 사람의 평화와 다릅니다. 악을 모르기 때문에 평안한 것이 아니라, 악과 싸우면서 주님만이 승리자이심을 배운 뒤 주님께 자신을 맡기는 평화입니다. 이것이 거듭남 이후의 안식이며, 창세기의 일곱째 날과도 연결되는 천국적 평화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3강을 통해 계속 말해 온 ‘익은 열매’는 매우 좋은 표현입니다. 다만 ‘어느 반열에 들어갈 만큼 익었는가?’보다 ‘무엇으로 익어 가고 있는가?’를 물으면 더욱 깊어집니다. 지식으로 익는가, 자기 확신으로 익는가, 종말론적 정보로 익는가가 아니라 사랑과 쓰임으로 익고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무의 크기를 보시기보다 열매를 보십니다. 얼마나 오래 교회에 다녔는지, 얼마나 많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특별한 체험을 했는지, 얼마나 혹독한 연단을 받았는지 그 자체가 마지막 기준은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을 통해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더 정직해졌는가, 더 온유해졌는가, 더 쉽게 용서하게 되었는가, 다른 사람의 선을 더 기뻐하게 되었는가,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되었는가입니다. 이것이 ‘익음’입니다.

 

그래서 3강 10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처음 익은 열매 14만 4천, 순교자인 두 번째 익은 열매, 대환난을 살아서 통과하는 세 번째 익은 열매라는 구분과 이기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별을 주신다는 말씀은 미래 천년왕국에 들어갈 성도들을 세 신분으로 나누고 그 가운데 높은 반열에 특별한 통치권을 부여하는 종말론적 구조로만 읽기보다, 주님께서 각 사람을 그의 고유한 선과 쓰임에 따라 거듭나게 하시고, 말씀의 진리로 그 사람 안의 악과 거짓의 지배를 깨뜨리시며, 마침내 그 모든 싸움과 자기부인의 목적이 다른 사람 위에 높아지는 데 있지 않고 새벽별이신 주님 자신과 더욱 깊이 결합되는 데 있음을 보여 주는 거듭남의 아르카나로 읽을 때 더욱 깊어집니다.’

 

그리고 이번 10부에서, 더 나아가 이번 3강 전체에서 가장 귀하게 남길 수 있는 것은 강사의 ‘익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는 절박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절박함 자체를 버릴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절박함의 방향을 조금 바꾸어 줍니다. ‘나는 첫째인가, 둘째인가, 셋째인가?’를 묻기보다 ‘오늘 내 안에서 주님의 진리가 선한 열매가 되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그 질문은 훨씬 조용하지만 훨씬 피하기 어렵습니다. 종말 시간표는 공부할 수 있지만, 보기 싫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14만 4천의 정체를 논할 수 있지만, 내 자존심 하나 내려놓는 것은 어렵습니다. 천년왕국의 세 부류를 설명할 수 있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정직하기는 어렵습니다.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을 구별할 수 있지만, 오늘 내 안의 죽은 사랑 하나가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래서 ‘익은 열매’의 최종적인 표지는 지식의 많음보다 사랑의 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익을수록 사람은 이상하게도 자기를 덜 높입니다. 가지가 열매 때문에 아래로 숙여지듯, 주님의 선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이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도 안전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다스리고 싶은 욕망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때 ‘새벽별’도 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 빛으로 빛나고 싶은 욕망이 사라지고 오직 주님의 빛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3강이 처음부터 말해 온 ‘이기는 자’란 가장 강한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끝까지 버틴 사람도 아니며, 남보다 높은 영적 반열을 차지한 사람도 아닙니다. 날마다 자기 안의 악과 거짓 앞에서 주님의 진리를 선택하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며, 선을 행하되 그것을 자기 공로로 여기지 않고, 마침내 자기 삶의 중심에서 proprium이 내려오고 주님께서 왕이 되시도록 허용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단지 ‘무엇’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주십니다. ‘내가 또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 이 약속을 그렇게 읽으면 3강 전체를 관통했던 연단과 자기부인과 이김과 익은 열매와 상급이 마지막에 한곳으로 모입니다. 광야의 끝에 있는 것은 높은 지위가 아니라 주님이며, 이김의 상급도 주님이고, 천국의 기쁨도 주님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마침내 알게 되는 가장 깊은 사실은 이것일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붙들고 여기까지 온 줄 알았는데, 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께서 나를 붙들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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