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20에서 스베덴보리는 수금과 노래가 신앙에 속하는 것들과 그 지식들에 관련된다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사23:16을 인용합니다. ‘수금을가지고성읍에두루다니며아름답게연주하고많은노래를불러서네가다시기억되게하라’는 말씀입니다. 앞서 인용된 시편들이 주님을 찬양하는 장면을 담고 있는 것과 달리, 이 구절은 이사야 23장의 두로에 관한 예언 안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 문자적 문맥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사야 23장은 두로에 대한 경고와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사23:15-16에서는 두로가 잊히는 기간에 관해 말한 뒤, 잊힌 음녀가 수금을 가지고 성읍을 돌아다니며 노래하여 다시 기억되게 하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음녀가 노래를 통해 다시 사람들의 기억에 남으려는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 수금과 노래가 등장한다고 해서, 그 장면 전체를 곧바로 거룩한 찬양이나 선한 예배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왜 이 구절을 인용했을까요? AC.420에서 그가 직접 밝힌 인용 목적은 ‘신앙에속하는것들과그지식들’에 관한 표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두로에 관한 예언 전체를 해설하지도 않고, 잊힌 음녀가 의미하는 바를 상세히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수금과 노래가 신앙의 지식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말씀의 한 사례로 이 구절을 제시합니다. 따라서 이 인용을 이해할 때에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설명한 범위와 우리가 더 알고 싶은 내용을 구별해야 합니다.
앞의 AC.419에서 수금은 영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밝혔습니다. AC.420에서도 수금과 비파 같은 악기들이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에 관련된다고 설명합니다. 사23:16의 수금 역시 이러한 논의 안에서 인용됩니다. 그러나 수금이 진리와 관련된다고 해서 그것을 사용하는 인물이 반드시 참된 진리 안에 있다거나, 그가 부르는 노래가 반드시 선한 찬양이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어떤 표현이 진리에 관한 지식과 관련된다는 사실과, 그 지식이 어떤 상태에서 사용되는가는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기존 심화에서는 이 구절을 ‘잃어버린진리의지식들이다시회복되고기억되는과정’으로 설명했습니다. 이는 별도로 검토해 볼 수 있는 해석이지만, AC.420자체는 그와 같은 회복의 과정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특히 잊힌 음녀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예언의 문맥을 고려하면, ‘다시기억되게하라’는 말을 곧바로 영적인 회복으로 확정하는 데에는 추가적인 근거가 필요합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수금과 노래가 신앙의 지식과 관련된다는 인용 목적을 분명히 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구절은 말씀의 속뜻을 살필 때 문자적 문맥을 보존하는 일이 왜 중요한지도 보여 줍니다. 같은 악기라도 찬양 시편에 등장할 수 있고, 두로에 관한 경고의 말씀에 등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금은진리’라는 대응 관계를 알고 있다고 해서 그 구절 전체의 뜻까지 자동으로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표현의 속뜻을 살피는 일과 그 표현이 놓인 문맥을 이해하는 일은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밝힌 내용은 그중 수금과 노래가 신앙의 지식에 관련된다는 점입니다.
결국 사23:16은 AC.420의 다른 찬양 구절들과 달리, 경고와 예언의 문맥 안에서도 수금과 노래가 신앙의 지식에 관련된 표현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수금과 노래의 속뜻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지, 잊힌 음녀의 모든 행동을 선한 예배로 바꾸어 읽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힌 의미를 분명히 붙들면서, 두로와 음녀와 성읍의 더 자세한 속뜻은 해당 예언을 다루는 충분한 근거가 있을 때 살펴보아야 합니다. (AC.420심화3)
시150:3-5에는 나팔, 비파, 수금, 소고, 현악기, 퉁소, 제금 등 여러 악기가 연이어 등장합니다. 문자적으로는 다양한 악기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권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420에서 이 말씀을 인용한 뒤, 이 악기들이 찬양의 대상이 된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악기에 고유한 의미가 없다면 이렇게 많은 종류의 악기가 언급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입니다. 이번 심화의 출발점은 바로 이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표상적 예배에 사용된 악기들이 서로 다른 것을 나타냈다고 설명했습니다. 수금과 비파, 노래와 그와 비슷한 악기들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찬양하는 데 사용되었고, 나팔과 같은 관악기들은 신앙의 거룩한 것들, 곧 천적인 것들을 찬양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시150편의 악기들을 모두 단순히 ‘찬양의기쁨’이라는 하나의 뜻으로만 묶으면,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악기들 사이의 구별을 놓치게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개별 의미도 있습니다. 앞의 AC.419는 수금이 영적 진리를, 퉁소가 영적 선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AC.420은 시149:3을 설명하면서 소고는 선을, 수금은 진리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시150편에 등장하는 수금과 소고, 퉁소를 읽을 때에는 이러한 설명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악기가 언급되는 모든 구절에서 세부 의미가 언제나 완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된다고 단정하기보다는, 각 구절의 문맥과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제금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시150편에는 큰 소리 나는 제금과 즐거운 외침의 제금이 함께 등장합니다. 그러나 AC.420은 두 제금의 개별적인 속뜻을 밝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각 악기에 고유한 의미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의미들은 적절한 곳에서 설명하겠다고 예고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번호만을 근거로 제금이 특정한 종류의 선이나 진리를 의미한다고 확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뜻이 있다는 사실과 그 뜻을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은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여러 악기가 함께 등장한다는 사실을 곧바로 천국의 완전한 합주에 관한 상세한 묘사로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AC.420의 마지막 문단은 천사들과 영들이 소리를 선과 진리의 차이에 따라 구별하고, 서로 일치하는 소리만 받아들인다고 말합니다. 이 설명은 악기의 소리와 영적인 것들 사이에 관계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시150편의 각 악기가 천국의 어떤 공동체나 어떤 상태에 해당하는지까지 이 번호가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본문이 밝히는 범위 안에서 악기들의 다양성과 고유한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예배에서 사용하는 악기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으로도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420은 오늘날 어떤 악기를 사용해야 한다거나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예배 규칙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것은 말씀에 기록된 악기들의 표상적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근거로 특정 악기의 영적 우열을 정하거나, 악기의 종류만으로 예배의 진정성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외적 악기의 소리와 그것이 말씀 안에서 나타내는 영적인 의미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시150:3-5에 많은 악기가 등장하는 이유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각각의 악기가 신앙의 선과 진리에 관한 고유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이 번호는 그 모든 의미를 완전히 밝히지는 않지만, 말씀의 악기들을 의미 없는 반복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원칙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이미 밝혀진 수금과 소고와 퉁소의 의미를 붙들면서, 아직 설명되지 않은 악기들의 속뜻은 관련된 말씀과 저작의 근거를 확인할 때까지 열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AC.420심화2)
시147:7은 ‘감사함으로여호와께응답하며수금으로우리하나님께찬송할지어다’라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같은 주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나란히 놓인 구절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AC.420에서 이 두 표현을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감사’는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관련되므로 ‘여호와’가 언급되고, ‘수금으로찬송함’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되므로 ‘하나님’이 언급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짧은 구절에서도 그는 사용된 표현의 차이에 주목합니다.
먼저 ‘감사’(confession)는 이번 번호에서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관련됩니다. 여기서 천적인 것들은 앞서 설명한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단순히 정해진 말을 입 밖으로 내는 행위로만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의 감사가 신앙의 천적인 것에 관련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읽을 때에는 감사의 말 자체만이 아니라, 그 감사가 관련되는 사랑과 선의 측면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반면 ‘수금으로찬송함’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됩니다. AC.419에서 수금은 영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시147:7의 수금 찬양은 앞서 밝힌 악기의 속뜻과 이어집니다. 이 구절에는 감사와 수금 찬양이 함께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둘을 같은 의미의 반복으로 보지 않습니다. 각각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에 관련되는 표현으로 구별합니다.
이 구별과 함께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이름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감사와 관련하여 ‘여호와’가, 수금 찬양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언급된다고 직접 말합니다. 다만 이것을 근거로 말씀의 모든 ‘여호와’와 ‘하나님’을 문맥과 관계없이 하나의 공식에 대입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는 시147:7의 두 표현이 왜 구별되어 사용되었는지에 관한 설명을 먼저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의 AC.418에서 스베덴보리는 마음의 애정이 천적이고 그 결과로 나오는 노래가 영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시147:7에 관한 설명도 그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감사가 신앙의 천적인 것과 관련되고, 수금 찬양이 신앙의 영적인 것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두 설명을 합쳐 감사는 언제나 내면에만 있고 찬양은 언제나 외면에만 있다는 식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직접 제시된 것은 두 표현이 각각 어떤 것과 관련되는가 하는 구별입니다.
이 구절은 예배의 언어를 읽는 우리의 태도에도 도움을 줍니다. 감사와 찬송을 단순히 비슷한 종교적 표현으로 지나칠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표현 하나하나가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일상적인 감사와 찬송을 엄격하게 분리하여 어느 한쪽만 천적이고 다른 쪽만 영적이라고 판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구절의 속뜻을 통해 사랑과 신앙에 속하는 것들이 말씀 안에서 구별되어 표현될 수 있음을 이해하면 됩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시147:7을 인용한 이유는 감사와 수금 찬양이 각각 신앙의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에 관련되며, 그에 따라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같은 주님을 향한 한 구절의 예배 안에서도 서로 다른 의미가 표현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사랑과 신앙의 구별을 살피면서도, 그 둘이 함께 주님께 향하는 예배의 문맥 안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됩니다. (AC.420심화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20
말씀에는여러가지악기가언급되며,각악기에는저마다고유한의미가있습니다.이에대해서는주님의신적자비로적절한곳에서설명하겠습니다.그러나여기서는시편이말한것만을인용하겠습니다. In the Word mention is made of various instruments, each having its own signification, as will be shown, of the Lord’s Divine mercy, in its proper place; here however we shall adduce only what is said in David:
여기서‘장막’(tent)은천적인것을표현하고,‘즐거운외침’(shouting),‘노래함’(singing),‘찬송함’(singingpraises)은거기서나오는영적인것을표현합니다.또다른곳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where by “tent” is expressed what is celestial, and by “shouting,” “singing,” and “singingpraises,” what is spiritual thence derived. Again:
이말씀은신앙의진리들을나타내며,이러한것들이바로그진리들에관하여말해진것입니다. denoting the truths of faith, concerning which these things are said.
[2]영적인것들,곧신앙의진리들과선들은수금과비파,노래와그와비슷한악기들로찬양되었습니다.그러나신앙의거룩한것들,곧천적인것들은나팔과같은관악기들로찬양되었습니다.이때문에성전에서는그렇게많은악기가,또그렇게자주사용되었습니다.이는이주제나저주제를각각특정한악기로찬양하기위한것이었습니다.그결과악기들은그것들로찬양되는대상들을가리키는것으로받아들여지고이해되게되었습니다. Spiritual things, or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were celebrated with the harp and psaltery, with singing and analogous instruments, but the holy or celestial things of faith were celebrated with wind instruments, such as trumpets and the like; and this was why so many instruments were used about the temple and so often, in order that this or that subject might be celebrated with certain instruments; and in consequence of this the instruments came to be taken and understood for the subjects that were celebrated with them.
‘감사’(confession)는신앙의천적인것들과관련되므로‘여호와’(Jehovah)가언급됩니다.반면‘수금으로찬송함’(singpraisesupontheharp)은신앙의영적인것들과관련되므로‘하나님’(God)이언급됩니다.또다른곳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confession” has respect to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and therefore mention is made of “Jehovah”; and to “singpraisesupontheharp” has reference to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wherefore “God” is spoken of. Again:
이악기들은찬양의대상이된신앙의선들과진리들을나타냅니다.각각의악기에고유한의미가없다면,이렇게많은종류의악기가여기에언급되었을것이라고생각해서는안됩니다.또다른곳에서는선과진리의지식들에관하여다음과같이말합니다. These instruments denote the goods and the truths of faith which were the subjects of praise; for let no one believe that so many different instruments would have been here mentioned unless each had a distinct signification. Again, referring to the knowledges of good and truth:
한가지언급할만한사실이있습니다.천사들과영들은소리들이선과진리에관련하여어떻게다른지에따라그소리들을구별합니다.노래와악기에서나는소리뿐아니라목소리도그렇게구별합니다.그리고서로일치하는소리만받아들입니다.이는소리들,따라서악기들의소리가선과진리의성질및본질과조화를이루게하기위한것입니다. It is worthy of mention that angels and spirits distinguish sounds according to their differences with respect to good and truth, not only those produced in singing and by instruments, but also those of voices; and they admit none but such as are in accord, so that there may be a concord of the sounds, and consequently of the instruments, with the nature and essence of the good and the true.
해설
AC.420은 앞의 AC.418-419에서 설명한 악기의 속뜻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확인합니다. AC.419에서 스베덴보리는 수금이 영적 진리를, 퉁소가 영적 선을 의미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그 설명을 한 악기에만 한정하지 않고, 말씀에 등장하는 여러 악기가 저마다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악기의 뜻을 여기서 밝히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악기와 노래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어떻게 나타내는지 보여 주는 것이 이번 번호의 중심입니다.
먼저 시27:6에서 ‘장막’은 천적인 것을, ‘즐거운외침’과 ‘노래함’과 ‘찬송함’은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을 표현합니다. 앞서 야발의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관련되고, 유발의 악기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된다고 설명한 내용이 이 시편 안에서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과 노래가 단순히 예배 장소와 예배 행위를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천적인 것과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의 관계를 표현한다고 봅니다. 이어 인용한 시33:1-4에서는 수금과 열 줄 비파, 새 노래가 등장한 뒤 ‘여호와의말씀은정직하며그가행하시는모든일은진실하시도다’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이 신앙의 진리들에 관한 말씀이라고 밝힙니다. 악기와 노래가 언급되는 문맥 자체가 말씀의 정직함과 주님이 행하시는 일의 진실함에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표상적 예배에서 악기들이 구별되어 사용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은 수금과 비파, 노래와 그와 비슷한 악기들로 찬양되었고, 신앙의 거룩한 것들, 곧 천적인 것들은 나팔과 같은 관악기들로 찬양되었습니다. 성전에서 많은 악기가 사용된 것은 단순히 음악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찬양하는 대상에 따라 특정한 악기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그 결과 악기 자체가 그것으로 찬양되는 영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이는 모든 악기가 같은 뜻을 지닌다는 말이 아니라, 서로 다른 악기들이 서로 다른 것을 표상한다는 뜻입니다.
시71:22-23은 이러한 설명을 다시 확인합니다. 비파와 수금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말씀 안에 ‘주의진리’가 직접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시147:7에서는 한층 세밀한 구별이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감사’가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관련되므로 ‘여호와’가 언급되고, ‘수금으로찬송함’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되므로 ‘하나님’이 언급된다고 설명합니다. 같은 구절 안에서도 감사와 수금 찬양,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시149:3에서는 ‘소고’가 선을, ‘수금’이 진리를 의미한다고 직접 밝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악기들의 소리를 감상하여 의미를 추측하는 일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해당 말씀에서 구별하여 밝힌 선과 진리의 의미를 살피는 일입니다.
시150:3-5에는 나팔, 비파, 수금, 소고, 현악기, 퉁소, 제금 등 여러 악기가 연이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각각에 고유한 의미가 없다면 이렇게 많은 종류의 악기가 말씀에 언급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이 모든 악기의 개별 의미를 하나씩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앞에서 밝혀진 의미들을 바탕으로 이 시편이 신앙의 여러 선과 진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이해하되, 아직 설명되지 않은 악기의 뜻까지 임의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시43:3-4는 ‘주의빛과주의진리’로 시작하여 거룩한 산과 처소, 하나님의 제단과 수금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선과 진리의 지식들에 관한 구절로 인용합니다. 여기서는 수금이 등장하는 찬양이 주님의 빛과 진리에 의한 인도라는 문맥 안에 놓여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사23:16은 앞의 찬양 시편들과 성격이 다릅니다. 이사야 23장은 두로에 관한 예언이며, 인용된 구절은 잊힌 음녀에게 수금을 가지고 성읍을 돌아다니며 노래하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도 신앙에 속하는 것들과 그 지식들에 관한 말씀으로 인용합니다. 따라서 수금과 노래가 등장한다고 해서 그 장면을 곧바로 선한 예배나 진리의 회복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이 여기서 사용된 이유는 수금과 노래가 신앙의 지식과 관련된 표현이라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해당 예언 전체의 속뜻을 설명하려면 두로와 음녀에 관한 문맥을 별도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인용에서는 진리와 선의 구별이 더욱 직접적으로 나타납니다. 계5:8에서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가진 ‘거문고’는 신앙의 진리들을, ‘향이가득한금대접’은 신앙의 선들을 의미한다고 스베덴보리는 밝힙니다. 같은 예배 장면 안에 진리와 선이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어 시42:5와 시69:31을 통해 다윗이 악기 연주를 ‘찬송’과 ‘감사’라고 부르는 용례를 제시합니다. 계14:2-3에서는 하늘의 거문고 소리와 새 노래를, 계15:2에서는 유리 바닷가에 선 이들이 가진 하나님의 거문고를 인용합니다. 이 구절들은 앞서 설명한 현악기와 신앙의 진리 사이의 관계를 뒷받침합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새 노래나 유리 바다의 세부적인 속뜻까지 풀어 주지는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천사들과 영들이 소리를 선과 진리의 차이에 따라 구별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노래와 악기 소리뿐 아니라 목소리도 구별하며, 서로 일치하는 소리만 받아들입니다. 소리와 악기가 선과 진리의 성질 및 본질에 조화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설명은 앞서 제시한 악기의 상응이 단순한 문학적 비유가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이해한 영계의 질서와도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이 번호는 어떤 음높이나 악기 소리가 어떤 선과 진리에 해당하는지 구체적인 목록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상의 음악을 듣고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정하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결국 AC.420은 말씀의 악기들이 단순한 음악 도구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각각 신앙의 선과 진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여러 구절로 설명합니다. 시편의 장막과 노래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관계를, 소고와 수금은 선과 진리의 구별을,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은 신앙의 진리와 선이 함께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의 천사와 영들에 관한 설명은 소리의 조화가 선과 진리의 성질과 관련된다는 점을 밝힙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찬양의 외적 소리만이 아니라, 그 찬양이 표현하는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를 함께 살펴보게 됩니다. (AC.420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