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11 심화

1.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무엇이며, 왜 거기서 지혜와 지성이 나오는가?’

 

AC.111에서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에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 무엇인지,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지혜와 지성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까지 말합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도 이 표현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믿은 뒤, 그 믿음에 따라 사랑하고 살아가는 순서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오히려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거기서 다시 지혜와 지성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사랑에서 신앙과 지혜와 지성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요?

 

먼저 이것은 창2에서 지금까지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며,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했습니다(AC.99). 또 생명나무를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이라고 했으며(AC.102), 그 생명나무는 궁극적으로 ‘주님의 자비’를 뜻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랑과 신앙, 따라서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AC.105). 그러므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라는 표현은 AC.111에서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 창2의 천적 인간을 설명해 온 중심 질서입니다.

 

여기서 ‘사랑이 먼저’라는 것은 사람이 먼저 어떤 감정적인 사랑을 만들어 낸 다음 거기서 교리나 신앙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사랑 자체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가 받아들여지며, 그 사랑에서 신앙이 나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에게 신앙은 사랑과 분리된 채 머리 안에 먼저 자리 잡고 있다가 나중에 사랑과 결합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처음부터 사랑의 생명 안에서 나오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라고 거듭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놓치면 AC.111에서 왜 기억지식을 지성과 지혜와 신앙이라고 부르는 겉 사람을 문제 삼는지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사실을 알고 교리를 정확히 기억하며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여기서 말하는 지혜와 지성은 아닙니다. 기억지식은 필요하고 유용하지만, 그것 자체가 영적인 생명의 근원은 아닙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천적 인간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도 주님의 유입을 받습니다(AC.99). 그러므로 문제는 기억지식의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방향입니다. 기억지식에서 출발하여 신앙과 사랑을 만들어 내는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생명이 신앙과 지혜와 지성 안으로 흘러드는가 하는 차이입니다.

 

AC.112는 이 질서를 더욱 간결하게 정리합니다. ‘사랑에서 나오지 않는 지혜는 없으며,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지혜는 없다.’ 그리고 ‘신앙에서 나오지 않는 지성도 없으며,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지성도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지혜와 지성의 차이를 지나치게 공식화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스베덴보리가 그것들을 단순한 지적 능력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혜에는 사랑의 생명이 있고, 지성에는 신앙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신앙의 근원이 주님이시므로 참된 지혜와 지성의 근원 역시 주님이십니다.

 

이렇게 보면 AC.110에서 비손을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이라고 한 말도 조금 더 선명해집니다. 에덴은 사랑이고, 에덴에서 강이 흘러나오며, 그 강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입니다(AC.107). 그 강이 동산을 적셔 지성을 주고, 이제 첫째 강 비손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서로 무관한 상응들을 차례로 늘어놓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지혜가 나오고,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며, 그 신앙에 지성이 있는 하나의 생명의 흐름을 여러 이미지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AC.113-115에서 금과 보석을 설명하는 것도 같은 질서 안에 있습니다. 금은 지혜 또는 사랑의 선을 뜻하고, 보석들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에 속한 것들을 표상합니다. 특히 AC.115에서는 호마노를 둘러싼 금테에서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들어야 한다’는 것을 퍼셉션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랑과 신앙이 단순히 나란히 놓여 있다는 것보다 더 깊은 관계를 보여 줍니다.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들어 그것을 살아 있게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진리는 사랑과 분리되어 홀로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진리입니다.

 

여기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단순히 ‘사랑이 중요하고 신앙은 덜 중요하다’는 말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AC.111은 의지와 이해가 하나의 마음을 이루면서도 ‘참으로 가장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했고, 천국 전체도 무수히 많은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주님께서 가장 뚜렷하게 질서 지으신다고 했습니다. 사랑이 주된 것이라고 해서 신앙의 고유한 성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과 신앙이 각각의 고유한 자리를 가지면서도 올바른 질서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어디에서 생명을 얻는지를 밝혀 줍니다.

 

그러므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라는 표현의 가장 깊은 초점은 결국 인간이 아니라 주님께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안에서 사랑을 만들어 내고, 그 사랑으로 신앙을 만들고, 다시 그 신앙으로 지혜와 지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AC.112가 계속해서 ‘따라서 주님으로부터’라고 반복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이 오고, 그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며, 거기서 지혜와 지성이 생명을 얻습니다. 에덴에서 강이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는 창2의 모습은 바로 이 생명의 질서를 그리고 있습니다. 천적 인간의 지혜와 지성이 살아 있는 까닭은 그가 자기 안에 특별한 영적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110-115를 읽으며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비손이나 하윌라, 금과 호마노의 개별 상응을 외우는 일이 아닙니다. 그 모든 상응을 하나로 연결하는 생명의 방향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이 오고,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며, 그 사랑과 신앙에서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가 생명을 얻습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바로 이 질서의 중심에 있는 표현입니다. 이것을 이해할 때 비손은 더 이상 낯선 고대의 강 이름에 머물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생명이 신앙과 지성 안으로 흘러들어 사람을 살아 있게 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말씀이 됩니다. (AC.111 심화 1)

 

 

 

AC.111, 창2:11-12,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과 그 지혜와 지성을 오늘날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1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속뜻에 있는 그대로 설명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속뜻에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날에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지혜와 지성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들은 기억지식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그것을 지성과 지혜와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사랑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며, 많은 사람은 의지와 이해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 둘이 하나의 마음을 이룬다는 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각각은 서로 구별되며, 참으로 가장 뚜렷하게 구별됩니다. 그리고 보편적인 천국 전체는 무수히 많은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주님에 의해 가장 뚜렷하게 질서 지어집니다. It is however a very difficult matter to describe these things as they are in the internal sense, for at the present day no one knows what is meant by faith from love, and what by the wisdom and intelligence thence derived. For external men scarcely know of anything but memory-knowledge, which they call intelligence and wisdom, and faith. They do not even know what love is, and many do not know what the will and understanding are, and that they constitute one mind. And yet each of these things is distinct, yea, most distinct, and the universal heaven is ordinated by the Lord in the most distinct manner according to the differences of love and faith, which are innumerable.

 

해설

AC.111은 앞의 AC.110에서 제시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지혜와 지성을 설명하기가 왜 어려운지를 밝힙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이 개념들이 추상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오늘날 사람들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신앙에서 나오는 지혜와 지성이 무엇인지 자체를 거의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AC.110의 ‘사랑의 선’,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 ‘사랑의 진리’,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라는 구별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어느 정도 당연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바로 그 어려움을 인정하면서 설명을 이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특히 지적하는 것은 ‘겉 사람’이 지성과 지혜를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겉 사람은 기억지식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그것을 지성과 지혜와 신앙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스베덴보리가 기억지식 자체를 부정한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 기억지식은 주님의 유입을 받는 인간의 능력 가운데 하나로 계속 등장했습니다. 문제는 기억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을 곧 지성이나 지혜라고 여기고, 심지어 신앙까지도 알고 기억하고 있는 내용과 동일시하는 데 있습니다. AC.111은 지식의 양과 참된 지혜의 생명이 같은 것이 아님을 구별합니다.

 

그 차이를 이해하는 열쇠가 바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입니다. 앞에서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고 신앙이 그 사랑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지혜와 지성도 머릿속에 축적된 기억지식에서 독립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거기서 다시 지혜와 지성이 나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지혜와 지성을 이해하려면 사람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앎과 이해에 어떤 사랑이 생명을 주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AC.110에서 비손을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이라고 한 배경이기도 합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많은 사람이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의지와 이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의 마음을 이룬다는 것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하나를 이룬다’는 것과 ‘구별된다’는 것이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의지와 이해는 하나의 마음을 이루지만 서로 같은 것은 아니며, 오히려 ‘참으로 가장 뚜렷하게 구별’됩니다. 사랑과 신앙 역시 서로 결합하여 하나의 생명을 이루지만 그렇다고 둘의 차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AC.110에서 선과 진리,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세밀하게 구별한 것도 이러한 질서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별은 단순한 인간 심리의 분석에 그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 전체가 ‘무수히 많은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주님에 의해 가장 뚜렷하게 질서 지어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질서가 획일성을 뜻하지 않는다는 중요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이루시는 하나 됨은 서로 다른 것들의 차이를 없애 모두 똑같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차이들을 가장 뚜렷하게 구별하시면서도 그것들을 하나의 천국으로 질서 지으시는 것입니다. 구별과 하나 됨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가 주님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 안의 의지와 이해,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를 주님께서는 뒤섞어 차이를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고유한 질서 안에 두시면서 하나의 마음과 하나의 생명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래서 AC.111의 마지막 문장은 앞의 세밀한 구별들이 단순한 용어상의 복잡함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이처럼 세밀하게 구별하는 까닭은 주님께서 사람과 천국을 실제로 그렇게 질서 지으신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111을 읽으면서 아직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혜와 지성이 정확히 무엇인가’를 모두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이 번호는 왜 그것을 쉽게 이해할 수 없는지를 먼저 보여 줍니다. 기억지식을 지혜로 여기고, 알고 있는 것을 신앙으로 여기기 쉬운 우리의 익숙한 틀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제 보여 주려는 것은 지식에서 출발하여 사랑으로 올라가는 질서가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그 신앙에서 지혜와 지성이 생명을 얻는 질서입니다. AC.111은 바로 그 낯선 질서로 독자를 데려가기 위한 중요한 문턱입니다. (AC.111 해설)  

 

심화

1.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무엇이며, 왜 거기서 지혜와 지성이 나오는가?’

 

AC.111 심화 1,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무엇이며, 왜 거기서 지혜와 지성이 나오는가?’

AC.111 심화1.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무엇이며, 왜 거기서 지혜와 지성이 나오는가?’ AC.111에서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에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 무엇인지,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지혜

bygrace.kr

 

 

 

AC.112, 창2:11-12, ‘참된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는 모두 주님으로부터 옴’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2또한 사랑에서 나오지 않는 지혜는 없으며, 따라서

bygrace.kr

 

AC.110, 창2:11-12, ‘비손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을, 하윌라는 마음을 뜻함’ (AC.110-115)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The name of the first is Pishon; that is it which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Havilah,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