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1 [3]에서 스베덴보리는 유대교회에 ‘저녁부터아침까지항상타는등불’을 두도록 명하신 규례를 언급합니다. 출27:20-21에는 순수한 감람유를 가져다가 등불을 켜고 회막 안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그것을 보살피도록 하는 명령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등불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유대교회의 사람들은 이러한 규례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실제로 지켰지만, 그 규례가 표상하는 천국의 내적 의미까지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이 자기가 하는 행위의 내적 의미를 알지 못하면서도 그 행위를 통하여 거룩한 것을 표상할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먼저 ‘표상’과 ‘그표상을행하는사람의내적상태’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거룩한 것을 표상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 자신도 그 거룩한 상태 안에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대교회의 제사, 절기, 성막과 성전, 제사장 직무와 의복 등은 주님과 천국과 교회에 속한 것들을 표상하도록 정해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표상의 거룩함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깊은 영적 이해를 가지고 있었느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제도와 말씀에 부여하신 표상적 질서에서 나왔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제사장이 등불의 내적 의미를 충분히 알지 못했다고 해서 등불의 표상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그 제물과 제단과 불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정하신 표상적 의미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표상의 의미는 사람의 주관적인 해석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표상이제대로기능하려면그것을행하는사람이반드시그의미를몰라야했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상응과 표상의 의미를 아는 것 자체가 표상을 파괴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더 오래된 교회들에서는 자연계의 사물들이 무엇을 상응하고 표상하는지에 관한 지식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므로 ‘무지해야표상이가능하다’는 것이 영적 원리는 아닙니다.
유대교회의 특별한 점은 다른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회의 많은 사람이 내적인 것보다 외적인 것에 강하게 기울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매우 구체적인 율법과 규례를 주셨고, 그 외적 예배가 천국의 것들을 표상하도록 질서 지으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내적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정해진 규례를 수행하는 동안 그 외적 행위는 주님께서 정하신 표상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의미를모르면서어떻게그렇게철저하게지킬수있었는가?’라는 질문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명령의 모든 깊은 의미를 알아야만 그것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여호와께서 명하신 율법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따라서 내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과 외적 명령을 준수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대인들의 무지를 그 자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그들은의미를몰랐기때문에오히려더좋은표상교회가될수있었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내적인 것을 알지 못하고 외적인 것에만 머무는 것은 그 자체로 더 높은 영적 상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러한 인간의 상태 속에서도 당신의 질서를 보존하시고, 외적인 예배를 통하여 천국의 것들이 표상되도록 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주님의 섭리를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상태가 이상적이어야만 주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처한 상태를 아시고, 그 상태에 맞추어 당신의 질서를 보존하십니다. 유대교회의 외적 예배 역시 그런 의미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내적 이해가 충분하지 않았음에도,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신 율법과 규례를 통하여 주님과 천국에 관한 표상들이 역사 속에 계속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AC.31에서 말하는 ‘항상타는등불’은 무엇을 표상했을까요?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만큼만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는 ‘광명체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하고 뜻했기 때문에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명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규례가 주님께서 속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 안에서도 그렇게 하시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상의 세부적인 의미는 ‘적절한곳에서’설명하겠다고 여기서 유보합니다. 그러므로 AC.31만을 가지고 ‘저녁은반드시이런상태이고,등불이밤새타는것은반드시이런교회사적보존을뜻한다’는 식으로 세부 상응을 미리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를 읽을 때에는 스베덴보리가 밝힌 만큼과 우리가 그 원리를 따라 추론한 것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심화의 질문으로 돌아가면 답은 이렇습니다. 유대교회의 사람들이 모든 규례의 내적 의미를 알아야만 그 규례가 표상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표상의 근거는 인간의 이해가 아니라 주님께서 정하신 영적 질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들이 의미를 몰랐다는 사실 자체가 표상을 가능하게 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내적인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외적 예배까지 사용하여 천국의 것들을 표상하고 보존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항상타는등불’은 유대인들이 그 의미를 얼마나 잘 이해했느냐보다, 그 규례를 통하여 주님께서 무엇을 표상하도록 하셨느냐에 초점을 맞추어 읽는 것이 좋습니다. AC.31에서는 그것이 바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신앙이며, 주님께서 그것들을 속 사람 안에서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고 다시 겉 사람의 삶에까지 나타나게 하시는 질서입니다. (AC.31심화3)
AC.31 [2]에서 스베덴보리는 사60:1-3, 20을 인용하면서 이 말씀이 ‘주님의강림과이방인들의밝아짐,따라서새교회와,특히어둠가운데있다가빛을받아거듭나는모든사람’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새교회’라는 표현을 보면 자연스럽게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에서 말하는 ‘새교회’(NewChurch), 곧 새 예루살렘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1의 이 한 문장만 놓고 그것을 곧바로 특정한 역사적 교회나 교단으로 한정하는 것은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 이유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같은 문장에서 범위를 함께 밝혀 주기 때문입니다. 그는 먼저 ‘주님의강림과이방인들의밝아짐’을 말하고, 그 결과로 ‘새교회’를 언급한 뒤, 곧바로 ‘특히어둠가운데있다가빛을받아거듭나는모든사람’을 덧붙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심은 어떤 조직의 명칭보다 ‘어둠가운데빛이임하고,주님으로말미암아새로운영적상태가시작되는것’에 있습니다.
사60의 본문 자체도 이 문맥과 잘 맞습니다. ‘일어나라빛을발하라이는네빛이이르렀고’, ‘어둠이땅을덮을것이며캄캄함이만민을가리려니와’, 그리고 ‘여호와가네영원한빛이된다’는 말씀은 어둠에서 빛으로의 전환을 묘사합니다. AC.31에서 이 구절이 중요한 이유는 해와 달의 ‘밝아짐’을 통해 사랑과 신앙이 주님에게서 다시 살아나는 상태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 ‘새교회’는 우선 주님의 오심과 빛의 유입으로 새롭게 세워지는 교회의 상태를 뜻한다고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동시에 스베덴보리는 그와 같은 질서가 한 개인의 거듭남에도 적용된다고 직접 말합니다. 어둠 가운데 있던 사람이 주님의 빛을 받아 사랑과 신앙이 살아나기 시작할 때, 그 사람 안에서도 일종의 새로운 교회의 상태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교회를 단순히 건물이나 조직의 이름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점과도 연결됩니다. 교회가 참으로 교회가 되려면 그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 곧 사랑과 신앙의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새교회’라는 말의 핵심도 외적 명칭의 새로움보다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빛과 생명이 들어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에서 말하는 ‘새예루살렘’과 전혀 관계없다고 미리 선을 그을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AC.31은 여기서 그 역사적·교회사적 동일성을 논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락을 읽을 때에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범위에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곧 사60은 주님의 강림으로 어둠 가운데 빛이 임하고, 그로 인해 새 교회가 일어나며, 개별적으로는 어둠 가운데 있던 사람이 빛을 받아 거듭나는 상태를 묘사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60의새교회가어느교회인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AC.31에서는 특정한 후대 교단명을 먼저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기보다, 주님의 강림과 빛의 유입으로 새롭게 세워지는 교회의 상태를 뜻하며, 그와 같은 새로움은 거듭나는 각 사람 안에서도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이 자리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고 있는 범위입니다. (AC.31심화2)
AC.31에서 스베덴보리는 바로와 애굽에 관하여 ‘단지감각과단지기억지식의원리’(theprincipleofmeresenseandofmereknowledge)를 뜻하며, 여기서는 그것들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었음을 말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표현을 읽을 때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은 감각이나 기억 지식 자체를 나쁜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감각을 통하여 자연세계를 접하고, 기억 지식을 통하여 배우고 생각합니다. 앞의 AC.24-29에서도 기억 지식은 거듭남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다루어졌습니다. 문제는 감각과 기억 지식이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만’을 최종 기준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눈으로확인되지않는것은믿을수없다’고 하면서 영적인 모든 것을 감각적 증거 아래에 두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 천국, 영혼, 주님의 섭리와 같은 것을 오직 눈에 보이는 결과가 있는지 없는지로만 판단하는 것입니다. 질문하고 검토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자연적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실재의 전부로 정하고, 그 범위를 넘어서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 태도입니다. 감각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섬기는 자리가 아니라 영적인 것의 재판관이 될 때 질서가 뒤집힙니다.
기억 지식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과 신학과 교리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지식 자체는 귀중하며, 주님께서 거듭남 가운데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내가알고있는것만참이다’, ‘내이성이납득하지못하면주님의말씀도받아들일수없다’는 식으로 기억 지식을 가장 높은 자리에 놓으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지식이 사랑과 신앙을 섬기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과 신앙의 가능 여부를 판정하는 지배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실제 삶에서는 이런 모습이 아주 미묘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교리에는 매우 정확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는 사랑과 자비가 사라질 수 있고, 말씀의 구절을 많이 알면서도 그 지식을 상대방을 판단하고 이기는 데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식이많아서사랑이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같은 지식이라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쓰이면 매우 유익합니다. 문제는 지식이 자기 지성에 대한 신뢰와 결합하여 사랑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갈 때입니다.
감각적인 사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조 세계를 자세히 관찰하고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것 자체는 신앙의 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통하여 주님의 지혜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사실만을 전부라고 여기고 영적인 원인이나 목적 자체를 배제할 때, 감각은 더 이상 섬기는 도구가 아니라 지배하는 원리가 됩니다. AC.31에서 경고하는 것은 바로 이런 질서의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감각과단지기억지식에의해사랑과신앙이소멸된다’는 말을 ‘과학이나지식이신앙을파괴한다’는 뜻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지식과 이해를 거듭남의 중요한 단계로 봅니다. 오히려 사람의 감각과 지식이 자기보다 높은 것, 곧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섬길 때에는 그것들이 거듭남에 매우 유용하게 사용됩니다.
AC.31의 표현은 결국 ‘무엇이무엇을다스리는가?’의 문제입니다. 사랑과 신앙이 중심이 되고 감각과 기억 지식이 그것들을 섬기면 질서가 바르게 서지만, 감각과 기억 지식만이 최종 기준이 되어 사랑과 신앙을 재단하기 시작하면 영적 빛은 점차 가려질 수 있습니다. 에스겔에서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는 모습은 바로 이런 상태를 나타냅니다. 자연적인 것 자체가 악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영적인 것 위에 올라가 지배할 때 사랑과 신앙의 빛이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AC.31심화1)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창1:14-17)
AC.31
‘큰광명체들’(greatluminaries)이사랑과신앙을뜻하고,또한‘해와달과별’(sun, moon, andstars)이라고도불린다는사실은선지자들의글에서분명합니다.에스겔에서처럼말입니다.That the “greatluminaries” signify love and faith,and are also called “sun,moon,andstars,” is evident from the prophets,as in Ezekiel:
이구절들은바로와애굽을다루는데,말씀에서바로와애굽은단지감각과단지기억지식의원리를뜻합니다.여기서는감각과단지기억지식에의해사랑과신앙이소멸되었음을말합니다.이사야에서도그렇습니다.In this passage Pharaoh and the Egyptians are treated of,by whom are meant,in the Word,the principle of mere sense and of mere knowledge [sensuale et scientificum];and here,that by things of sense and of mere knowledge,love and faith had been extinguished.So in Isaiah:
[2] 다시이사야에서는주님의강림과이방인들의밝아짐,따라서새교회와,특히어둠가운데있다가빛을받아거듭나는모든사람에대해말하면서,Again,in Isaiah,speaking of the advent of the Lord and the enlightening of the gentiles,consequently of a new church,and in particular of all who are in darkness,and receive light,and are being regenerated:
[3] 이모든구절에서‘광명체들’(luminaries)은사랑과신앙을뜻합니다.광명체들이주님을향한사랑과신앙을표상하고뜻했기때문에,유대교회에서는저녁부터아침까지항상타는등불을두도록명했습니다.그교회의모든규례는주님을표상하는것이었기때문입니다.이등불에관해서는다음과같이기록되어있습니다.In all these passages,“luminaries” signify love and faith.It was because “luminaries” represented and signified love and faith toward the Lord that it was ordained in the Jewish church that a perpetual luminary should be kept burning from evening till morning,for every ordinance in that church was representative of the Lord.Of this luminary it is written:
이모든것이주님께서속사람안에서사랑과신앙을불붙이시고빛나게하시며,속사람을통하여겉사람안에서도그렇게하신다는뜻임은,주님의신적자비로적절한곳에서밝힐것입니다.That these things signify love and faith,which the Lord kindles and causes to give light in the internal man,and through the internal man in the external,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shown in its proper place.
해설
AC.31은 앞의 AC.30에서 밝힌 ‘큰광명체들’, 곧 사랑과 신앙의 의미를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하여 확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는 구절들을 연이어 제시하고, 이어서 그것들이 밝아지는 말씀을 인용하며, 마지막에는 유대교회의 항상 타는 등불의 규례까지 연결합니다. 따라서 이 단락의 중심은 단순히 ‘해는사랑,달은신앙’이라는 하나의 대응표를 제시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랑과 신앙이 소멸될 때 말씀은 그것을 광명체의 어두워짐으로 표현하고, 사랑과 신앙이 다시 살아날 때에는 빛과 광명체의 밝아짐으로 표현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첫 번째 겔32:7-8은 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이 바로와 애굽을 다룬다고 하면서, 말씀에서 그것들이 ‘단지감각과단지기억지식의원리’를 뜻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감각이나 기억 지식 자체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인간의 자연적 삶과 배움에 필요한 것입니다. 문제는 감각으로 확인되는 것과 기억 속 지식만을 최종 원리로 삼아 영적인 것을 그 아래 두는 상태입니다. 그렇게 질서가 뒤집힐 때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것으로 묘사되며, 에스겔의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는 장면이 바로 그 상태를 표현합니다.
사13:9-10과 욜2:1-2,10도 같은 방향의 증거입니다. 두 본문 모두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들이 빛을 잃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AC.31은 이 자리에서 ‘여호와의날’이나 각 선지서의 모든 세부 표현을 해설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심판의 구체적인 교리나 별개의 상응을 덧붙이기보다, 사랑과 신앙의 빛이 사라지는 상태가 말씀에서 자연적 광명체의 어두워짐으로 반복하여 표현된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습니다. 창1의 넷째 날에서는 광명체가 나타나 빛을 비추지만, 이 선지서들에서는 그 반대 상태가 해와 달과 별의 어두워짐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AC.31은 어두워짐만 보여 주지 않습니다. 사60:1-3,20에 이르면 방향이 정반대로 바뀝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주님의강림과이방인들의밝아짐,따라서새교회와,특히어둠가운데있다가빛을받아거듭나는모든사람’에 관한 말씀이라고 직접 설명합니다. ‘일어나라빛을발하라이는네빛이이르렀고’, ‘다시는네해가지지아니하며네달이물러가지아니할것’이라는 표현은 앞의 어두워진 해와 달과 선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상태가 광명체의 어두워짐이라면, 주님으로부터 빛을 받아 새롭게 되는 상태는 해와 달이 지속해서 빛나는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새교회’를 곧바로 특정한 후대 교단명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1의 직접 문맥에서는 주님의 강림으로 어둠 속에 빛이 임하여 교회가 새롭게 되는 상태를 말하고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그것을 개별적인 거듭남에도 적용합니다. 따라서 교회의 새로움과 한 사람의 거듭남이 같은 빛의 질서 안에서 함께 언급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어둠 가운데 있는 곳에 빛을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시136:5-9와 시148:3-4의 인용은 이러한 광명체의 언어가 선지서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시편의 창조와 찬양의 언어 안에서도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시136은 창세기와 매우 유사하게 하늘과 땅과 물, 큰 광명체, 낮을 주관하는 해, 밤을 주관하는 달과 별을 차례로 말합니다. 시148은 해와 달과 밝은 별들에게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합니다. AC.31은 이 자리에서 해와 달과 별 각각의 세부 의미를 더 확장하기보다, 이러한 말씀 전체에서 ‘광명체들’이 사랑과 신앙을 뜻한다고 결론 내립니다.
그다음 유대교회의 ‘항상타는등불’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앞의 선지서와 시편에서 확인한 광명체의 의미가 예배의 표상 안에서도 나타났음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광명체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하고 뜻했기 때문에,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등불을 계속 켜 두도록 명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등불과 기름과 저녁과 아침의 모든 세부 상응을 지금 미리 풀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그 상세한 의미는 ‘적절한곳에서’밝히겠다고 유보합니다.
다만 AC.31은 그 등불의 가장 중심적인 의미만큼은 분명히 밝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속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불붙이시고 빛나게 하시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 안에서도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0의 마지막과도 정확히 이어집니다. 사랑과 신앙이 사람의 의지와 이해 안에서 나타나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이, 이제 ‘주님께서불붙이시고빛나게하신다’는 표현으로 다시 확인됩니다.
따라서 AC.31은 감각과 기억 지식을 없애야 한다고 말하지 않으며, 외적 지식보다 무조건 내적인 감정이 우월하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연적인 것과 기억 지식은 제자리에 있을 때 유용합니다. 다만 그것들이 가장 높은 원리가 되어 사랑과 신앙을 지배하려 할 때 질서가 뒤집힙니다. 그때 영적 광명체는 어두워집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사랑과 신앙을 다시 불붙이고 빛나게 하실 때, 어둠 가운데 있던 사람에게 빛이 임하고 해와 달이 다시 밝아지는 상태가 됩니다.
이렇게 보면 AC.31의 여러 인용은 흩어진 성경 증거들의 나열이 아닙니다. 겔32, 사13, 욜2는 사랑과 신앙의 소멸을 ‘어두워진광명체’로 보여 주고, 사60은 주님의 오심과 거듭남을 ‘다시밝아진광명체’로 보여 주며, 시편들은 동일한 광명체의 언어를 창조와 찬양 안에서 확인하고, 출27의 등불은 그 사랑과 신앙을 실제로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창1의 해와 달과 별은 단순히 하늘의 천체를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사람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의 빛이 어떻게 살아나고 또 어떻게 가려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의 언어가 됩니다. (AC.31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