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는사랑자체외에무슨다른신앙을알지못했습니다.천적천사들역시사랑에속한신앙외에무슨다른신앙을알지못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읽으면 두 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도 결국 쇠퇴하고 황폐해져 종말을 맞았는데 어떻게 태고교회 전체를 두고 ‘사랑자체외에다른신앙을알지못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또 바로 이어 천적 천사들을 언급한다고 해서 태고교회 사람들 모두가 천적 천사가 되었다는 뜻일까요?
먼저 첫 번째 질문에서는 스베덴보리가 한 ‘교회’를 그 교회의 고유한 영적 성격에 따라 말하는 경우와, 그 교회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쇠퇴해 가는 과정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태고교회는 AC전체에서 ‘천적교회’로 설명됩니다. 그 교회의 고유한 질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중심에 있고, 신앙이 그 사랑과 분리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태고교회는사랑자체외에다른신앙을알지못했다’는 말은 태고교회의 역사에 속한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언제나 동일한 사랑의 상태에 있었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태고교회 역시 쇠퇴했고, 마침내 그 본래의 천적 상태를 잃었습니다. 그러므로 AC.32의 표현은 그 교회를 특징짓는 고유한 영적 질서, 곧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있지 않았던 천적 교회의 성격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맞습니다.
여기서 ‘사랑자체외에다른신앙을알지못했다’는 표현도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진리가 필요 없었다거나 그들에게 신앙이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사랑과 신앙이 오늘날 흔히 생각하듯 서로 독립된 두 요소로 나뉘어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신앙에 속한 진리가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랑에서 분리된 별도의 신앙을 그들은 참된 신앙으로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2의 전체 논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사랑은 ‘더큰광명체’이고, 신앙은 ‘더작은광명체’입니다.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런데 세대의 종말에는 사랑이 거의 없어졌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어졌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처럼 사랑과 신앙이 분리된 상태와 대조되는 예로 태고교회를 제시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본래 질서가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로 이어서 ‘천적천사들’을 언급할까요? 스베덴보리의 문장을 자세히 보면 ‘태고교회사람들이모두천적천사가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태고교회에 관한 진술에 이어 ‘천적천사들역시사랑에속한신앙외에무슨다른신앙을알지못한다’고 말합니다. 즉 두 집단의 모든 개인을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에서 나타나는 같은 천적 질서를 나란히 보여 주는 것입니다.
태고교회가 ‘천적교회’라고 불리는 것과 천국에 ‘천적천사들’이 있다는 것은 서로 관련되지만, 그렇다고 태고교회의 모든 구성원의 사후 운명이 자동으로 천적 천국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한 교회의 영적 성격을 말하는 것과 그 교회에 속했던 모든 개인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정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특히 태고교회가 후대로 가면서 쇠퇴하고 황폐해졌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구별은 더욱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천적 천사들을 언급하는 이유는 오히려 ‘사랑과신앙의질서’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어서 ‘온천국은사랑의천국’이며, 천국에는 사랑의 생명 외에 다른 생명이 없고, 모든 천국의 행복이 거기에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천적 천사들은 그 사랑과 생명과 행복을 자기 자신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얻는다는 것을 ‘알고,고백하며,지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32의 관심은 태고교회 사람들의 사후 분류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중심은 사랑과 신앙의 올바른 질서입니다. 태고교회라는 지상의 천적 교회의 고유한 상태에서도, 천적 천사들의 천국적 상태에서도 신앙은 사랑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사랑에 속하며,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태고교회는사랑자체외에다른신앙을알지못했다’는 말을 태고교회의 쇠퇴와 모순되는 절대적인 역사 진술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태고교회를 그 고유한 천적 성격에 따라 말하고 있으며, 그 성격을 오늘날 천적 천사들의 상태와 나란히 놓아 사랑과 신앙의 본래 질서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구별을 줍니다. 어떤 교회를 말할 때 그 교회가 나타내는 고유한 영적 성격과, 그 교회에 속한 모든 개인의 실제 상태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가 천적 교회였다고 해서 그 역사의 모든 사람이 천적 인간으로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니며, 천적 천사가 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반대로 태고교회가 후에 쇠퇴했다는 이유로 그 교회의 본래 천적 성격까지 부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결국 AC.32에서 ‘태고교회’와 ‘천적천사들’이 나란히 등장하는 까닭은 둘을 동일한 집단으로 보기 때문이 아니라, 양쪽에서 같은 천적 질서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 질서는 바로 ‘사랑이먼저이고,신앙은사랑에속하며,그모든사랑과생명의근원은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AC.32가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을 함께 언급하는 핵심 이유입니다. (AC.32심화3)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세 가지를 한 문장 안에서 연결합니다. 사랑과 신앙에 관한 이 아르카나가 특히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다는 것,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라는 것, 그리고 이때에는 사랑이 거의 없으며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 읽으면 ‘사랑이적은것과아르카나가가려지는것이무슨관계가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을 이해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AC.32가 말하는 ‘아르카나’의 내용을 먼저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감추어져 있었다는 아르카나는 추상적인 비밀 지식 전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에서 말한 사랑과 신앙의 질서입니다. 사랑과 신앙을 처음에는 함께 ‘큰광명체들’이라 하고, 사랑을 더 큰 광명체, 신앙을 더 작은 광명체라 하며, 사랑은 낮을, 신앙은 밤을 다스린다는 것이 그 아르카나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서를 이해하려면 신앙을 사랑과 독립된 별도의 종교적 능력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30부터 계속되는 논리는 신앙이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이 더 작은 광명체인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이 살아 있을 때 신앙도 살아 있으며,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본래의 생명을 잃습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사랑 자체가 거의 사라지면 ‘신앙은사랑에서생명을얻는다’는 진리도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신앙을 교리의 인정, 지적 동의, 종교적 주장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쉬워지고, 사랑은 신앙과 나란히 놓이는 하나의 덕목 정도로 밀려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랑이더큰광명체이고신앙이그사랑에서생명을얻는다’는 질서 자체가 보이지 않게 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아르카나가가려져있음’과 ‘사랑이거의없음’이 연결됩니다. 아르카나가 말씀 안에서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과 신앙의 참된 관계가 교회 안에서 더 이상 알려지거나 인정되지 않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던 것을 이제 주님의 신적 자비로 설명하도록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이거의없고,그결과신앙도거의없다’는 표현에서 순서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없어서사랑이없다’고 하지 않고, 사랑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30부터 이어진 광명체의 질서와 정확히 같습니다.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더 작은 광명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32에서 세 가지는 하나의 흐름입니다. 세대의 종말에는 사랑이 거의 없어졌고, 사랑이 거의 없으므로 살아 있는 신앙도 거의 없어졌으며, 그 결과 사랑과 신앙의 본래 질서 자체가 교회에서 가려졌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시대에 ‘해는사랑이고달은신앙이며,신앙은사랑에서생명을얻는다’는 아르카나를 다시 밝혀야 했다는 것이 AC.32의 논리입니다. (AC.32심화2)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시대를 가리켜 ‘지금이세대의종말(theconsummationoftheage)’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AC가 쓰인 때로부터 이미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세계와 기독교회는 계속 존재하고 있으니, 이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이 질문은 ‘세대의종말’을 현대적인 시간 개념으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의 영적 상태로 읽을 것인가와 관계됩니다.
우선 AC.32자체가 ‘세대의종말’을 무엇과 연결하는지를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이때에는사랑이거의없고,그결과신앙도거의없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문맥에서 ‘종말’의 핵심은 몇 년 뒤 세상이 사라진다는 시간표가 아니라, 한 교회가 그 본래의 사랑과 신앙을 거의 잃어버린 영적 상태에 있습니다.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살아 있는 신앙도 거의 없는 상태를 스베덴보리는 ‘세대의종말’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세대’(age)를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한 인간 세대, 곧 20년이나 30년 정도의 기간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복음서의 ‘consummationoftheage’역시 한 사람의 세대가 끝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적·교회적 시대의 완결과 관계된 표현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18세기에 ‘세대의종말’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몇십년안에지상세계가끝난다’는 예언을 한 것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종말’이라는 말을 어떤 상태가 마지막 단계에 이른 것으로 이해하면 시간이 오래 흐른다는 사실 자체가 곧 모순이 되지는 않습니다. 한 교회가 그 본래의 사랑과 신앙을 잃었다고 해서 지상의 조직과 제도, 예배와 교리, 교회 건물과 이름이 그 즉시 모두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외적인 형태는 남아 있으면서도 그 교회의 내적 생명은 크게 쇠퇴한 상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AC.32의 관심은 바로 그 내적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2026년이라는 현재 시점에서 ‘왜아직종말이끝나지않았는가?’라고 묻기 전에,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종말’이라고 불렀는지를 먼저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AC.32에서 그는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의 물리적 소멸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질서가 소진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이 단락의 문맥에 가장 잘 맞습니다.
물론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에서는 최후의 심판과 새 교회에 관하여 훨씬 더 구체적인 설명을 합니다. 그러나 그 후 수백 년의 교회사를 정확히 어떤 단계의 ‘과도기’라고 이름 붙일 것인지, 또는 현재가 그 과정의 어느 지점인지를 AC.32만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자기 시대의 교회를 ‘사랑이거의없고그결과신앙도거의없는종말상태’로 보았다는 사실까지만 분명히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따라서 ‘세대의종말’이 수백 년 동안 계속된다고 생각하기보다, 먼저 ‘종말’이 달력상의 짧은 기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상태를 뜻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AC.32에서 그 상태를 판단하는 기준은 매우 분명합니다. 사랑이 살아 있는가, 그리고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신앙이 살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32심화1)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창1:14-17)
AC.32
사랑과신앙을처음에는함께‘큰광명체들’(greatluminaries)이라하고,그다음에는사랑을‘더큰광명체’(greaterluminary),신앙을‘더작은광명체’(lesserluminary)라합니다.또한사랑을가리켜서는‘낮을다스린다’(rulebyday)하고,신앙을가리켜서는‘밤을다스린다’(rulebynight)고합니다.이런내용이바로아르카나(arcana)인데,특히이마지막시대에숨겨져있는것을이제제가설명해도좋다는주님의신적자비(theLord’sDivinemercy)가있었습니다.이아르카나가특히이마지막시대에가려져있는이유는,지금이세대의종말(theconsummationoftheage)이기때문이며,이때에는사랑이거의없고,그결과신앙도거의없기때문입니다.이는주님께서복음서에서다음과같이친히예고하신바와같습니다.Love and faith are first called “greatluminaries,” and afterwards love is called a “greaterluminary,” and faith a “lesserluminary”;and it is said of love that it shall “rulebyday,” and of faith that it shall “rulebynight.”As these are arcana which are hidden,especially in this end of days,it is permitted of the Lord’s Divine mercy to explain them.The reason why these arcana are more especially concealed in this end of days is that now is the consummation of the age,when there is scarcely any love,and consequently scarcely any faith,as the Lord himself foretold in the evangelists in these words:
여기서‘해’(sun)는사랑,곧어두워지는사랑을,‘달’(moon)은신앙,곧빛을내지못하는신앙을,‘별들’(stars)은신앙에관한지식들(theknowledgesoffaith),곧하늘에서떨어지는것들을뜻하며,이것들이바로‘하늘의권능들’(virtuesandpowersoftheheavens)입니다. By the “sun” is here meant love,which is darkened;by the “moon” faith,which does not give light;and by the “stars,” the knowledges of faith,which fall from heaven,and which are the “virtuesandpowersoftheheavens.”
[2] 태고교회는사랑자체외에다른어떤신앙도알지못했습니다.천적천사들역시사랑에속한신앙외에는어떤신앙도알지못합니다.온천국은사랑의천국이며,천국에는사랑의생명외에다른생명이없습니다.모든천국의행복이여기에서나오는데,그크기는어떤말로도설명할수없고어떤인간의생각으로도결코상상할수없습니다.사랑의영향을받는이들은마음으로주님을사랑하지만,동시에모든사랑과,그결과모든생명,곧사랑에서만나오는모든생명과모든행복이오직주님에게서만온다는사실을알고,고백하며,지각합니다(perceive).그들은자신에게서나오는사랑이나생명이나행복은조금도없다는것을분명히압니다.모든사랑이주님에게서온다는사실은주님의변화산사건에서큰광명체,곧‘해’(sun)로도표현되었습니다.기록되기를, The most ancient church acknowledged no other faith than love itself.The celestial angels also do not know what faith is except that which is of love.The universal heaven is a heaven of love,for there is no other life in the heavens than the life of love.From this is derived all heavenly happiness,which is so great that nothing of it admits of description,nor can ever be conceived by any human idea.Those who are under the influence of love,love the Lord from the heart,but yet know,declare,and perceive,that all love,and consequently all life—which is of love alone—and thus all happiness, come solely from the Lord, and that they have not the least of love, of life, or of happiness, from themselves.That it is the Lord from whom all love comes was also represented by the great luminary or “sun” at histransfiguration, for it is written:
얼굴은가장안쪽의것들을뜻하고,옷은거기서나오는것들을뜻합니다.따라서주님의신성(theLord’sDivine)은‘해’(sun),곧사랑으로,그의인성(hishuman)은사랑에서나오는지혜,곧‘빛’(light)으로상징되었습니다. Inmost things are signified by the face,and the things that proceed from them by the raiment.Thus the Lord’s Divine was signified by the “sun,” or love;and his human by the “light,” or wisdom proceeding from love.
해설
AC.32는 넷째 날의 두 광명체를 한층 더 깊이 설명합니다. 앞의 AC.30-31에서 사랑과 신앙이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로 표현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스베덴보리는 왜 사랑이 ‘더큰광명체’이고 신앙이 ‘더작은광명체’인지, 그리고 왜 이 사실이 자신의 시대에는 특별히 가려진 아르카나였는지를 설명합니다. 핵심은 사랑과 신앙이 서로 독립된 두 요소가 아니라, 신앙이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하나의 질서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을 처음에는 함께 ‘큰광명체들’이라고 부르지만, 곧 사랑을 ‘더큰광명체’, 신앙을 ‘더작은광명체’라고 구별합니다. 사랑은 낮을 다스리고 신앙은 밤을 다스립니다. 여기서 크고 작다는 말은 단순히 하나는 중요하고 다른 하나는 덜 중요하다는 가치 평가가 아닙니다. 신앙의 생명이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에 사랑이 먼저이며 주된 것이라는 영적 질서를 나타냅니다. AC.30에서 이미 신앙의 마지막 단계가 ‘마음에속한신앙,곧사랑의신앙’이며,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는 신앙이라고 설명한 것과 같은 흐름입니다.
이 사랑과 신앙의 질서가 AC.32에서 ‘특히이마지막시대에숨겨져있던아르카나’라고 불립니다. 그 이유도 스베덴보리 자신이 바로 설명합니다. 지금이 ‘세대의종말’이며, 이때에는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순서는 ‘사랑이거의없고,그결과신앙도거의없다’입니다. 살아 있는 신앙은 사랑과 분리되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생명을 얻기 때문에, 사랑이 사라지면 참된 신앙도 함께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신앙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아는 것 자체가 그 시대에는 가려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확증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마24:29을 인용합니다. 여기서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의미를 직접 풀이합니다. ‘해’는 사랑이며 그 사랑이 어두워지고, ‘달’은 신앙이며 그 신앙이 빛을 내지 못하고, ‘별들’은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며 그것들이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가지고 별도의 복잡한 종말론적 도식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32에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해와 달과 별의 어두워짐이 사랑과 신앙과 신앙에 관한 지식이 무너지는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태고교회의 언급은 이 마지막 시대와 정반대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가 ‘사랑자체외에다른어떤신앙도알지못했다’고 말하며, 천적 천사들도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어떤 신앙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 역사에 속한 모든 사람이 끝까지 동일한 상태에 있었다거나, 태고교회의 모든 사람이 사후에 천적 천사가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태고교회의 본래적인 천적 성격과 천적 천사들의 질서가 나란히 제시되는 것입니다. 두 경우 모두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더 나아가 ‘온천국은사랑의천국’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사랑 자체를 독립적인 생명의 근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곧이어 그는 사랑의 영향을 받는 이들이 모든 사랑과 모든 생명과 모든 행복이 오직 주님에게서만 온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고, 지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국의 사랑이 참된 사랑인 이유는 천사들이 자기 자신을 사랑의 근원으로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랑과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앞의 AC.29-31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사람은 거듭남의 초기에는 자기가 선을 행하고 자기가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점차 그 안의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AC.32의 천적 상태에서는 이것이 더욱 분명합니다. 천적 천사들은 자기에게서 사랑이나 생명이나 행복이 조금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사랑하지 않거나 수동적인 존재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은 실제로 주님을 마음으로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 사랑의 생명과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지각합니다.
마지막 변화산 사건은 이 모든 설명의 절정을 이룹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사랑이주님에게서온다’는 사실이 주님의 변화산 사건에서 큰 광명체인 ‘해’로 표현되었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고 옷은 빛처럼 희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얼굴이 가장 안쪽의 것들을 뜻하고, 옷은 거기서 나오는 것들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신성은 ‘해’, 곧 사랑으로, 그의 인성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 곧 ‘빛’으로 상징되었습니다.
여기서도 AC.32가 실제로 말한 만큼만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변화산의 모든 세부를 새롭게 해석하거나 얼굴과 옷에 관한 전체 상응 체계를 이 자리에서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본문에서 필요한 핵심은 하나입니다. 사랑의 근원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으며, 그것이 변화산에서 ‘해’라는 형상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1의 더 큰 광명체가 사랑을 뜻한다는 것은 단순한 추상적 상징이 아니라 결국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AC.32의 중심은 ‘해=사랑,달=신앙’이라는 대응표 자체보다 더 깊습니다. 사랑과 신앙은 둘이지만 분리되어서는 안 되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조차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질서가 사라지면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으며 별들이 떨어지는 상태가 되고, 이 질서가 살아 있을 때에는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의 경우처럼 사랑 안에 신앙이 살아 있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었고, 주님의 신적 자비로 다시 설명하도록 허락되었다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광명체의 아르카나입니다. (AC.32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