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08-410을 읽으면 매우 자연스럽게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거룩한 것들을 알면서 그것들을 인정하고 믿은 뒤 모독적인 것들과 뒤섞는 상태를 매우 위험하게 설명하는 한편, 그것들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 사람은 그런 방식으로 모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진리를 배우지 않는 것이 안전한 것 아닐까요? 주님과 말씀에 관하여 적게 알수록 모독할 위험도 줄어든다면, 무지가 오히려 유리한 상태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AC.408의 요점은 ‘무지가좋은상태’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핵심은 ‘모독’이 단순한 무지나 불신앙과 같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거룩한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면 그것을 자기 안에서 거룩한 것으로 받아들였다가 다시 악과 거짓에 결합시키는 방식의 모독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반면 사람이 진리를 알고 인정하며 그것을 신앙의 거룩한 것으로 받아들인 뒤, 그것을 의도적으로 그 반대되는 악과 거짓에 결합시키면 서로 함께 있을 수 없는 것들이 그의 내면에서 뒤섞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위험하다고 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모르는사람’과 ‘알면서거부하는사람’ 사이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AC.410은 황폐에도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알면서도알려하지않고,보면서도보려하지않는’ 상태이며, 다른 하나는 무지 때문에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상태입니다. 후자의 사람에게 진리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 사람의 완성된 영적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직 진리를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이미 알고 보면서도 그것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상태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새로운 교회가 때때로 이전 교회의 중심이 아니라 ‘이방인’이라고 불리던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난다고 설명합니까? AC.408-410의 문맥에서는 이미 계시된 거룩한 것들을 알고도 계속 거부하고 뒤섞어 온 곳보다, 아직 그것들을 알지 못했던 곳에서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떤 민족이나 종교 집단 자체가 다른 집단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것은 교회의 ‘상태’입니다. 어느 곳이든 진리를 알고도 완강하게 거부하는 상태가 될 수 있고, 어느 곳이든 아직 알지 못했지만 받아들일 준비가 된 상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가르침을 ‘복음을듣지않는것이더안전하다’거나 ‘진리를배우지않는것이영적으로유리하다’는 결론으로 가져가서는 안 됩니다. 진리는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고 거듭나게 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문제는 진리를 ‘아는것’이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인 뒤 그것을 어떻게 대하는가입니다. 진리를 알게 된다는 것은 위험 자체가 아니라 큰 선물이며, 동시에 그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이라는 부르심입니다. 위험은 빛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받아들여 빛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의도적으로 어둠과 결합시키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408의 ‘새로운아침’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무지를 보존하기 위해 새 교회를 일으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새로운 빛을 주시기 위해 일으키십니다. 이전 상태에서는 거룩한 것과 모독적인 것이 뒤섞여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그 상태가 끝에 이르면 아직 그렇게 뒤섞이지 않은 곳에서 다시 진리가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지는 목적이 아니라 새로운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출발 상태일 뿐입니다. 목적은 결국 진리를 알고, 인정하고, 믿으며, 그것을 체어리티의 삶과 결합하는 데 있습니다.
목회적으로도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우리는 ‘모르면책임이적으니차라리모르는것이낫다’고 가르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빛을 주실 때 그 빛을 감사히 받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복입니다. 동시에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을 정죄해서도 안 됩니다. 그가 아직 알지 못한다는 사실과 진리를 알고도 거부한다는 것은 같은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AC.408-410은 주님께서 인간의 상태를 얼마나 세밀하게 구별하시며, 황폐 가운데서도 다시 진리를 받을 수 있는 곳을 마련하여 새로운 아침을 여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AC.408심화1)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8
교회가더이상아무런신앙도남아있지않을만큼황폐해졌을때,그때비로소,그이전이아니라,교회는새롭게시작됩니다.곧새로운빛이비치기시작하는데,이것을말씀에서는‘아침’(morning)이라고부릅니다.교회가황폐해지기전에는새로운빛,곧‘아침’(morning)이밝아오지않는이유는신앙과체어리티에속한것들이모독적인것들과뒤섞여있기때문입니다.이러한상태가지속되는동안에는빛이나체어리티에속한어떤것도그안에스며들게할수없습니다.‘가라지’(tares)가모든‘좋은씨’(goodseed)를파괴하기때문입니다.그러나신앙이더이상남아있지않으면신앙을더이상모독할수도없습니다.사람들이자기들에게전해지는것을더이상믿지않기때문입니다.앞에서살펴본것처럼,인정하고믿지는않으면서단지알고있기만하는사람들은모독할수없습니다.오늘날의유대인들이그러합니다.그들은기독교인들가운데살기때문에기독교인들이주님을자신들이기다려왔고지금도계속기다리는메시아로인정한다는사실을알고있을것입니다.그러나그들은이것을인정하거나믿지않으므로모독할수없습니다.주님에관하여들은무슬림들(Mohammedans)과이방인들(gentiles)의경우도마찬가지입니다.유대교회가아무것도인정하거나믿지않게될때까지주님께서세상에오시지않은것도바로이러한이유때문입니다. When a church has been so vastated that there is no longer any faith, then and not before, it begins anew, that is, new light shines forth, which in the Word is called the “morning.” The reason why the new light or “morning” does not shine forth until the church is vastated, is that the things of faith and of charity have been commingled with things profane; and so long as they remain in this state it is impossible for anything of light or charity to be insinuated, since the “tares” destroy all the “goodseed.” But when there is no faith, faith can no longer be profaned, because men no longer believe what is declared unto them; and those who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but only know, cannot profane, as was observed above. This is the case with the Jews at the present day, who in consequence of living among Christians must be aware that the Lord is acknowledged by Christians to be the messiah whom they themselves have expected, and still continue to expect, but yet they cannot profane this because they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it. And it is the same with the Mohammedans and gentiles who have heard about the Lord. It was for this reason that the Lord did not come into the world until the Jewish church acknowledged and believed nothing.
해설
AC.408은 교회의 황폐와 새로운 시작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앞의 AC.407에서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시간이 흐르면서 참된 신앙에서 떠나 마침내 신앙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 이르지만, 그 가운데서도 교회의 어떤 핵심은 보존된다고 했습니다. 태고교회의 남은 부분이 홍수를 지나서도 계속되었으며, 그 남은 부분을 ‘노아’라고 부른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이제 AC.408은 왜 이전 교회가 황폐해진 뒤에야 새로운 교회가 시작되는지를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더 이상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을 만큼 황폐해졌을 때 비로소 새롭게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빛이 비치기 시작하는 이 상태를 말씀의 ‘아침’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아침은 단순히 어둠이 끝난 다음의 시간대를 뜻하지 않습니다. 이전 교회의 황폐 이후에 새로운 신앙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아침은 교회의 영적 상태가 새로워지는 일과 관련됩니다.
그렇다면 왜 이전 교회가 완전히 황폐해지기 전에는 새로운 아침이 밝아 올 수 없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이 모독적인 것들과 뒤섞여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단순히 거짓된 생각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것을 인정하고 믿으면서도 그것을 모독적인 것과 결합시키는 상태가 문제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는 동안에는 새로운 빛이나 체어리티를 그 안에 스며들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가라지’가 모든 ‘좋은씨’를 파괴한다고 말합니다. 가라지와 좋은 씨는 서로 다른 성격의 것들이 한곳에 뒤섞여 있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번 문맥에서 좋은 씨는 새롭게 받아들여질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관련되며, 가라지는 그것들을 파괴하는 모독적인 것들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이 비유의 핵심은 교회 안에 거룩한 것과 모독적인 것이 뒤섞인 상태에서는 새로운 영적 생명이 제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완전히 사라지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때에는 그것을 더 이상 모독할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전해지는 것을 더 이상 인정하거나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별은 ‘아는것’과 ‘인정하고믿는것’의 차이입니다. 어떤 사람이 거룩한 진리에 관하여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진리를 자기 신앙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지 알고 있을 뿐 인정하거나 믿지 않는 경우에는 이번 문맥에서 말하는 모독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번호에서 말하는 모독은 단순한 무지나 불신앙과 구별됩니다. 거룩한 것에 관한 정보를 접했다는 사실만으로 모독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논지는 거룩한 것을 실제로 인정하고 믿는 상태와 그것을 모독적인 것에 결합시키는 상태 사이의 관계에 있습니다. 교회가 황폐해져 더 이상 신앙을 인정하지 않게 되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거룩한 것을 모독하는 상태도 지속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구별을 설명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시대에 기독교인들 가운데 살던 유대인들을 예로 듭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자신들은 그것을 인정하거나 믿지 않으므로 그 신앙을 모독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에 관하여 들은 무슬림들과 이방인들도 같은 원리의 예로 제시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려는 것은 특정 집단에 대한 도덕적 평가가 아니라, 어떤 진리를 외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을 자신의 신앙으로 인정하는 것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이 대목의 ‘오늘날’은 AC가 집필되던 스베덴보리의 시대를 가리킵니다. 또한 그가 유대인과 무슬림과 이방인을 예로 든 것은 그의 신학적 관점에서 모독의 조건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 오늘날 해당 종교에 속한 모든 사람의 실제 신앙 상태에 대한 일반적인 사실 판단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사람마다 무엇을 알고, 무엇을 인정하며, 실제로 무엇을 믿는지는 외적인 종교적 소속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유대교회가 아무것도 인정하거나 믿지 않게 될 때까지 세상에 오시지 않은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강림 시기를 교회의 황폐와 모독의 문제에 연결하는 그의 신학적 해석입니다. 이전 교회가 거룩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모독적인 것과 뒤섞는 상태에 있는 동안에는 새로운 빛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므로, 그 상태가 끝난 뒤에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을 당시 모든 유대인이 아무런 종교적 믿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역사적 진술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주님에 관한 참된 신앙이라는 자신의 신학적 기준으로 유대교회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AC.407과 AC.408을 함께 읽으면 교회의 황폐와 보존, 그리고 새로운 시작의 관계가 드러납니다. 이전 교회는 참된 신앙에서 떠나 황폐해집니다. 그러나 교회의 모든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가운데 어떤 핵심이 남아 보존됩니다. 그리고 이전 교회의 황폐가 끝에 이르러 새로운 신앙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열릴 때, 새로운 빛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아침’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황폐를 그 자체로 좋은 일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하는 것은 교회의 비극적인 상태입니다. 다만 주님께서는 그러한 상태에서도 교회의 남은 부분을 보존하시며, 거룩한 것과 모독적인 것이 뒤섞인 상태가 더 이상 지속되지 않을 때 새로운 시작의 길을 여십니다. 따라서 새로운 아침은 인간이 신앙을 잃었기 때문에 자동으로 찾아오는 결과가 아니라, 황폐 가운데에서도 교회의 핵심을 보존하시고 새로운 빛을 주시는 주님의 섭리와 관련됩니다.
이것은 개인의 거듭남을 생각할 때에도 조심스럽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에게 신앙이 없다고 느끼거나 영적으로 메마른 시기를 겪는다고 해서 반드시 이번 번호에서 말하는 교회의 황폐에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더 깊이 무너져야만 주님께서 새롭게 하신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AC.408은 우선 교회 전체의 상태와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설명하는 번호입니다. 개인에게 적용할 때에는 거룩한 것을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악과 결합시키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러한 결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원리를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결국 AC.408의 중심은 ‘황폐가끝나야아침이시작된다’는 말에만 있지 않습니다. 왜 그런 질서가 필요한지를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인정하면서 모독적인 것과 뒤섞는 상태에서는 새로운 신앙과 체어리티가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신앙이 완전히 사라져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모독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새로운 시작의 길이 열립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빛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아침’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새로운 시작입니다. (AC.408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