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87을 읽으면 ‘악한영들은물러가고선한영들이가까이오며,천적천사들도가까이온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앞의 AC.50에서는 사람마다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 ‘두영’을 악한 영들로 이해했다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AC.87의선한영들은갑자기어디에서등장한것인가?’
이 질문을 풀기 위해서는 먼저 앞에서 가졌던 전제 하나를 바로잡는 것이 좋습니다. ‘영들’이라는 말 자체를 언제나 ‘악한영들’과 같은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87만 보아도 스베덴보리는 악한 영들과 선한 영들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따라서 어떤 번호에서 단순히 ‘영들’이라고 했을 때 그것을 자동으로 악한 영들이라고 확정하기보다, 그 번호의 문맥과 스베덴보리의 직접 설명을 따라 판단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AC.50의 ‘두영’에 대한 앞선 설명도 수정해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AC.50이 사람과 영계 및 천국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영들’과 ‘천사들’을 구별했다고 해서, 거기서 말한 ‘영들’이라는 명칭 자체가 곧 ‘악한영들’을 뜻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영’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선악을 확정하는 명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AC.87은 같은 ‘영들’가운데 ‘악한영들’과 ‘선한영들’을 명시적으로 구별하여 말합니다.
그렇다면 AC.87에서 왜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을 따로 말할까요? 여기서는 원문이 말하는 데까지 정확히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될 때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이 가까이 오며 천적 천사들도 가까이 옵니다. 그리고 이들이 함께 있을 때에는 악한 영들이 도저히 머물 수 없어 멀리 달아납니다. 따라서 이 번호에서 ‘선한영들’과 ‘천적천사들’은 같은 명칭으로 묶이지 않고 서로 구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AC.87한 번호만 가지고 이 두 부류의 존재론적 차이와 영계에서의 정확한 위치, 역할, 상태를 모두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영들은천사들보다아래단계의존재들이다’, ‘아직완전히확정되지않은상태의존재들이다’, ‘선한영들은인간을더나은상태로이끄는역할을한다’는 식으로 전체 구조를 먼저 완성하면 AC.87이 직접 말하지 않은 내용까지 섞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구별은 스베덴보리가 영들의 세계와 천국, 영들과 천사들의 상태를 직접 설명하는 곳에서 차례로 확인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AC.87에서 지금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충분합니다. ‘영들’이라는 말은 곧 ‘악한영들’이라는 고정된 뜻이 아니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악한 영들과 선한 영들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또한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도 서로 구별하여 말합니다. 그러므로 AC를 읽을 때 ‘영’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미리 정해 둔 하나의 뜻을 기계적으로 대입하기보다, 그 문맥에서 어떤 영들을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용어 문제를 넘어 앞으로 AC를 읽는 데 중요한 원칙이 됩니다. 우리가 상응을 고정된 사전처럼 사용하지 않기로 한 것과 마찬가지로, 영계의 존재들을 가리키는 명칭도 한 번 정한 설명을 모든 번호에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50은 AC.50의 문맥에서, AC.87은 AC.87의 문맥에서 먼저 읽어야 하며, 여러 번호가 충분히 쌓였을 때 스베덴보리 자신이 보여 주는 전체 구조를 따라 정리해야 합니다.
따라서 ‘선한영들은갑자기어디에서등장했는가?’라는 질문에 지금 가장 정확하게 답하면 이렇습니다. 선한 영들이 AC.87에서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앞서 ‘영들’을 너무 빨리 ‘악한영들’로만 한정해서 이해했던 것입니다. AC.87은 그 이해를 바로잡아 줍니다. 영들 가운데 악한 영들도 있고 선한 영들도 있으며, 이 번호에서는 천적 인간에게서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온다고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고 있습니다. 그보다 더 자세한 영들과 천사들의 질서는 앞으로 스베덴보리 자신이 그것을 열어 줄 때 따라가면 됩니다. (AC.87심화1)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18)
AC.404
이모든이름은‘가인’(Cain)이라불린최초의이단에서파생된이단들을의미합니다.그러나그것들에관하여는이름들외에는전해지는것이없으므로,그것들에관하여무엇인가말하는것은불필요합니다.그이름들의어원으로부터어느정도알수있는것이있을수있습니다.예를들어‘이랏’(Irad)은그가‘성읍에서내려온다’(descendsfromacity)는것을의미하며,따라서‘에녹’(Enoch)이라불린이단에서내려왔음을의미합니다.다른이름들도이와같습니다. All these names signify heresies derived from the first,which was called “Cain”;but as there is nothing extant respecting them,except the names,it is unnecessary to say anything about them. Something might be gathered from the derivations of the names;for example,“Irad” means that he “descendsfromacity,” thus from the heresy called “Enoch,” and so on.
해설
AC.404는 창4:18에 이어지는 가인의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간결하게 밝혀 줍니다. 가인에게서 에녹이 나왔고, 에녹에게서 이라드가 나왔으며, 그 뒤로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이 이어집니다. 문자적 의미에서는 한 가문의 족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이름이 ‘가인’이라 불린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여러 이단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제 가인의 계보는 단순히 여러 세대가 이어지는 혈통이 아니라, 최초의 영적 분리가 계속 다른 형태로 파생되어 가는 하나의 교리적 계보로 읽힙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399-400과 직접 연결됩니다. AC.399에서는 가인이라는 분열 또는 이단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분열을 산출했고 그것이 에녹이라 불렸다고 했습니다. AC.400에서는 그 원리를 더욱 일반화하여 ‘하나의이단이잉태되면거기에서수많은이단이태어납니다’라고 했습니다. AC.404는 바로 그 말이 실제 가인의 계보에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가인에서 시작된 최초의 분리가 에녹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여러 이름으로 계속 파생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최초의이단’이라는 표현은 가인의 본래 의미를 다시 기억하게 합니다. 가인은 단순히 어떤 잘못된 교리 하나를 표상한 것이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상태를 표상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고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지만,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에게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AC.398의 표현대로 하면 ‘의지대신이해가,사랑대신신앙이지배하게된’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최초의 분리에서 이후의 여러 이단이 파생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라드, 므후야엘, 므드사엘 등이 각각 정확히 어떤 교리를 주장했는지 알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스스로 멈춥니다. ‘그것들에관하여는이름들외에는전해지는것이없으므로,그것들에관하여무엇인가말하는것은불필요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AC를 읽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해석 태도를 보여 줍니다. 속뜻이 있다고 해서 본문이 제공하지 않는 세부 내용까지 자유롭게 만들어 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스베덴보리는 이름의 의미에서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예로 ‘이라드’를 듭니다. 이라드라는 이름은 ‘성읍에서내려온다’는 의미를 가지므로, 속뜻에서는 앞의 ‘성읍’, 곧 에녹이라 불린 이단에서 파생되어 내려온 것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AC.401에서 에녹은 시작되거나 형성되기 시작한 가르침과 연결되었고, AC.402에서 성읍은 교리적인 것 또는 이단적인 것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이라드가 ‘성읍에서내려온다’는 것은 앞서 형성된 에녹의 교리적·이단적 상태에서 또 다른 상태가 파생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의 계보에는 상당히 일관된 흐름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가인이라는 최초의 분리가 있습니다. 그 분리에서 에녹이라는 새로운 이단이 산출됩니다. 에녹은 가르침으로 시작되고 형성되는 상태와 관련되고, 그 이름을 따라 성읍이 세워지면서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가 하나의 형태를 갖춥니다. 그리고 이제 그 ‘성읍’에서 이라드가 내려옵니다. 하나의 분리된 신앙이 가르침이 되고, 그 가르침이 교리적인 전체를 이루며, 그 교리적 전체에서 다시 새로운 형태의 분리가 파생되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AC.404에서 말하는 ‘계보’는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앞의 상태가 뒤의 상태를 낳는 연속성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AC.400에서 이미 말한 ‘잉태와출생’의 원리와 같습니다. 하나의 교리적 전제가 받아들여지면 그 안에서 다음 결론이 나오고, 그 결론에서 다시 다른 결론이 나옵니다. 처음의 근본 원리가 계속 후속적인 형태들을 산출하면서 하나의 계보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의 절제입니다. 그는 ‘다른이름들도이와같다’고 말할 뿐, 각각의 이름에 대해 상세한 교리적 내용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이름의 어원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을 뒷받침할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상응을 다룰 때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상응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영적 의미를 붙이는 작업이 아니라, 말씀 자체와 AC의 설명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 점은 앞의 AC.403과도 잘 연결됩니다. 태고인들은 영적인 것들을 ‘표상적유형들’아래 ‘역사형식’으로 배열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계보에 등장하는 이름들도 영적인 상태들의 연속을 역사적 족보의 형태로 나타냅니다. 그러나 표상적 역사라고 해서 모든 이름의 세부 의미가 우리에게 자동으로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속뜻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우리가 그 속뜻의 모든 세부를 알고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AC.404는 한편으로는 매우 강하게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강하게 말하는 것은 ‘이모든이름은가인이라는최초의이단에서파생된이단들을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은 ‘각각이구체적으로무엇인지는이름외에는자료가없으므로자세히말하지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두 태도를 함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교리 이해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잘못된 근본 원리는 여러 후속적인 오류를 낳을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진리를 선한 삶에서 분리하며, 이해를 사랑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시키는 원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교리적 형태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역사 속의 모든 교리나 교파를 임의로 가인의 어느 후손과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AC.404자체가 그런 과도한 추정을 경계하게 합니다.
오히려 가인의 계보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면 더욱 유익합니다. 하나의 잘못된 원리를 받아들였을 때 그것이 어떤 후속적인 생각들을 낳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옳다는것이사랑하는것보다중요하다’는 원리가 마음에 자리 잡으면, 거기서 상대를 판단하는 생각이 나오고, 그 판단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생기며, 마침내 사랑하지 않는 행동까지도 옳다고 설명하는 하나의 내적 ‘성읍’이 세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의 분리가 그 자체에서 후손을 낳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거듭남의 역사에서는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잘못된 근본 원리가 발견되고 그것을 악으로 인정하여 피할 때, 주님께서는 진리를 다시 선과 결합시키십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섬기게 되고, 이해는 자기 지성에서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표현하는 수단이 됩니다. 가인의 계보를 읽는 목적은 단순히 옛 이단의 역사를 분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신앙과 사랑의 질서가 어떻게 유지되거나 무너지는지를 보는 데 있습니다.
결국 AC.404는 가인의 후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상세히 해독하려 하기보다 그 계보 전체의 성격을 먼저 붙들게 합니다. 그들은 모두 ‘가인’이라 불린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이단들을 나타냅니다. 이라드가 ‘성읍에서내려온다’는 이름으로 에녹의 이단에서 파생된 상태를 보여 주듯, 뒤의 이름들도 같은 계보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세부 내용이 주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멈추어야 합니다. 말씀의 속뜻을 깊이 읽는 것과 말씀보다 앞서 나가는 것은 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AC.404는 바로 그 두 가지를 함께 가르쳐 주는 번호입니다. (AC.404해설)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창4:17)
AC.403
이제우리는‘성읍’(city)이무엇을의미하는지를살펴보았습니다.그러나창세기의이부분전체가역사형식(historicalform)으로구성되어있기때문에,문자적의미(senseoftheletter)안에있는사람들에게는가인이성읍을세우고그것을에녹이라불렀던것처럼보일수밖에없습니다.비록문자적의미로부터그들은또한가인이아담의장자에불과했음에도이미그땅에많은사람이살고있었다고생각하지않을수없지만말입니다.역사적연속(historicalseries)에는이러한것이들어있습니다.그러나앞에서살펴본것처럼,태고인들(mostancientpeople)은모든것을‘표상적유형들’(representativetypes)아래‘역사형식’(formofahistory)으로배열하는데익숙했습니다.그리고이것은그들에게지극히즐거운일이었는데,그렇게함으로써모든것이살아있는것처럼보였기때문입니다. We have now seen what a “city” signifies.But as all this part of Genesis is put into a historical form,to those who are in the sense of the letter it must seem that a city was built by Cain,and was called Enoch,although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they must also suppose that the land was already populous,notwithstanding that Cain was only the firstborn of Adam;the historical series has this in it.But as we observed above,the most ancient people were accustomed to arrange all things in the form of a history,under representative types,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highest degree,for it made all things seem to be alive.
해설
AC.403은 창세기 4장을 읽는 데서만 중요한 번호가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반부 전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해석 원리입니다. 앞의 AC.402에서는 ‘성읍’이 실제 성읍 자체보다 교리적인 것 또는 이단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왜 창세기 본문은 마치 실제 인물들이 태어나고, 성읍을 세우고, 그 성읍에 이름을 붙인 것처럼 역사 이야기의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403은 바로 그 질문에 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창세기의이부분전체가역사형식으로구성되어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문자적 의미만을 따라 읽으면 가인이 실제로 성읍을 세우고 그 이름을 에녹이라 불렀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본문이 그렇게 보이도록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역사 형식을 문자 그대로만 밀어붙일 때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아담의 장자에 불과한데도 이미 성읍을 세울 만큼 많은 사람이 땅에 살고 있었다고 생각해야 하는 난점이 생긴다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단순히 ‘가인의아내는어디에서왔는가?’같은 역사적 난제를 해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이이야기는처음부터실제사건들의연대기적기록만을목적으로쓰인것인가?’하는 것입니다. 그의 답은 그렇지 않다는 쪽입니다. 창세기 초반의 이 부분은 영적인 실재를 역사적인 형식 아래 배열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역사적연속’(historicalseries)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가인이 태어나고, 아벨을 죽이고, 놋 땅에 거하고, 에녹을 낳고, 성읍을 쌓는 일련의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하나의 연속된 역사처럼 전개됩니다. 그러나 그 속뜻에서는 교회의 상태들이 서로 이어지고, 하나의 교리적 상태가 다음 상태를 산출하며, 사랑과 신앙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쇠퇴하는지가 하나의 영적 연속으로 펼쳐집니다. 문자적 역사 형식은 그 영적 연속을 담는 외적 그릇인 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태고인들의 사고방식에서 찾습니다. 태고인들은 ‘모든것을표상적유형들아래역사형식으로배열하는데익숙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표상적유형들’(representativetypes)이란 자연적인 인물, 장소, 사건, 사물 등을 통하여 영적이고 천적인 실재를 나타내는 형식을 말합니다. 곧 추상적인 교리나 영적 상태를 직접 개념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사람과 장소와 사건의 형태로 살아 있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적 성격과도 잘 연결됩니다. 태고인들은 영적인 것을 자연적인 것과 분리된 추상 개념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자연계의 모든 것 속에서 영적인 의미를 느끼고 보았으며, 자연적인 형상들을 통해 천적이고 영적인 실재를 지각하는 데 익숙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영적 진리를 이야기와 인물과 장소의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 단순한 문학적 장식이 아니라 매우 자연스러운 사고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방식이 그들에게 ‘지극히즐거운일’이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모든것이살아있는것처럼보였기때문’입니다. 이것은 AC.403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적 진리를 단지 추상적인 명제와 정의로만 전달하면 개념으로 머물 수 있지만, 그것을 사람과 사건과 장소의 형식으로 표현하면 진리가 움직이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가인과 아벨, 에덴과 놋, 에녹과 성읍은 단순한 추상어가 아니라 영적 상태들이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이야기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창세기 초반의 서술은 일종의 ‘살아있는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앙이체어리티에서분리되면교리적오류가파생된다’고 한 문장으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것을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고, 놋 땅에 거하고, 에녹을 낳고, 성읍을 쌓는 이야기로 펼쳐 보여 줍니다. 그러면 하나의 교리적 명제가 인간의 선택과 관계와 결과를 가진 살아 있는 서사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AC.403을 근거로 ‘창세기초반은역사적의미가전혀없고순전히만들어낸이야기다’라고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강조하는 것은 ‘역사형식’과 ‘표상적유형들’입니다. 그의 관심은 문자적 형식 뒤에 있는 속뜻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에서 우리가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스베덴보리는창세기이부분을단순한문자적연대기로만읽지않고,영적인실재를역사형식아래배열한말씀으로읽는다’는 정도입니다.
또한 ‘역사형식’이라고 해서 내용이 임의적이거나 무질서하게 꾸며졌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역사적연속’이라고 부른 것처럼, 사건들의 순서와 관계 자체가 영적 상태들의 질서와 진행을 담고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보다 먼저 나오고, 아벨을 죽인 뒤 놋 땅에 거하며, 그 뒤 에녹과 성읍이 나오는 순서는 임의적인 배열이 아닙니다. 각각이 앞의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이어지는 영적 연속을 표현합니다.
이 점은 AC.399-402의 흐름을 다시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이라는 분열에서 에녹이라는 새로운 분열이 산출되고, 그것이 가르침으로 형성되며, 다시 성읍이라는 교리적 전체가 만들어졌습니다. 만일 이것을 추상적인 교리 설명으로만 기록했다면 매우 건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것을 출생과 이름과 성읍 건설이라는 이야기로 표현했습니다.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영적 변화가 ‘살아있는것처럼’보이게 됩니다.
따라서 AC.403은 우리가 창세기 초반을 읽는 태도에도 중요한 기준을 줍니다. 문자적 이야기를 무시하고 곧바로 속뜻으로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이야기의 흐름을 충분히 따라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역사 형식 자체가 속뜻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먼저 나오고, 누가 누구를 낳고, 어디로 이동하며, 무엇을 세우고, 무엇이라 이름하는지가 모두 영적 연속을 담는 표상적 형식입니다.
동시에 문자적 이야기에서만 멈추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말씀의 깊이는 그 역사 형식 안에 교회의 상태, 인간의 거듭남, 사랑과 신앙의 관계, 선과 진리의 질서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자적 의미와 속뜻은 경쟁하는 두 층위라기보다, 외적 형식과 그 안에 담긴 내적 생명의 관계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AC.403의 마지막 표현, ‘모든것이살아있는것처럼보였다’는 말은 우리가 왜 말씀의 표상과 상응을 공부하는지까지 생각하게 합니다. 상응을 공부하는 목적은 단어마다 뜻을 붙여 놓는 일종의 암호 해독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 속 인물과 사건과 장소가 영적 실재와 연결되면서 다시 살아 움직이도록 보는 데 있습니다. ‘가인=신앙’, ‘아벨=체어리티’, ‘성읍=교리’라고 대응표만 외운다면 아직 태고인들이 느꼈던 그 생명성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그 관계들이 하나의 살아 있는 영적 서사로 움직이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AC.403은 창세기 초반의 속뜻을 읽는 하나의 중요한 안내문입니다. 태고인들은 영적 실재를 ‘표상적유형들’아래 ‘역사형식’으로 배열했고, 그 방식은 모든 것을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인물과 장소와 사건들은 단순한 이름과 지명이 아니라 교회의 상태와 인간 마음의 변화를 살아 있는 역사처럼 보여 주는 표상적 형식입니다.
결국 AC.403이 말하는 것은 ‘역사를버리고상징만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의 역사적 형식이 왜 그렇게 구성되었는지를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그 형식 안에서 영적 실재가 인물과 사건과 장소를 통하여 살아 움직입니다. 가인의 성읍도 바로 그렇게 읽어야 합니다. 단순히 고대의 한 사람이 세운 도시가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어떻게 가르침을 낳고 교리적 세계를 형성해 갔는지를 살아 있는 역사 형식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태고인들이 즐겨 사용했던 표상적 서술 방식이며,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반의 속뜻을 읽는 기본 관점입니다. (AC.403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