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62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뜻밖에 느껴지는 문장이 있습니다. ‘온천국은하나의천적인간인데,이는오직주님만이천적인간이시기때문입니다.’지금까지 창1과 창2에서‘천적인간’이라는 표현은 거듭남의 가장 깊은 상태에 이른 사람이나 태고교회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여러 차례 사용되었습니다.그런데 여기서는 갑자기‘오직주님만이천적인간이시다’고 합니다.그렇다면 앞에서 천적 인간이라 했던 사람들은 무엇이며,왜 여기서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AC.162가 무엇을 설명하려는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스베덴보리는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이‘천적기원들’,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흘러나온다고 말합니다.이어 온 천국이 하나의 천적 인간이라고 하고,그 이유를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며 주님께서 천국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따라서 여기서 강조점은 누가 천적 상태에 이를 수 있는가보다‘천적인것의근원이어디에있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창2에서 계속 배워 온 질서와도 같습니다.지혜와 지성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고 주님에게서 옵니다.선과 진리도 인간이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AC.149에서는 더 나아가 오직 주님만이 본래적으로 자기 자신의 것,곧 주님의proprium을 가지고 계시며,주님의proprium은 생명이라고 했습니다.인간의proprium은 그 자체로 생명이 아니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이 천적인 것의 근원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인 생명을 받아 그 질서 안에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오직주님만이천적인간이시다’라는 말과 태고교회의 사람들이‘천적인간’이었다는 말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주님은 천적인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본래적으로 천적 인간이십니다.반면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만큼 천적 인간이 됩니다.AC.155에서 천사들이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한다고 한 것도 같은 질서를 보여 줍니다.천사가 천사인 까닭도,천적 인간이 천적 인간인 까닭도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AC.162가‘온천국은하나의천적인간’이라고 한 뒤 곧바로‘오직주님만이천적인간이시기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천국의 모든 천사를 하나의 거대한 사람으로 상상하라는 데 우선적인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이 문맥에서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천국의 천적인 성질 자체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입니다.본문도‘주님께서천국과천적인간의모든것안에서모든것이시므로,천국과천적인간은그분으로말미암아천적이라한다’고 설명합니다.천국은 스스로 천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말미암아 천적입니다.
이 점은 이어지는‘혼인의법’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지상의 혼인이 천적 혼인으로부터 파생되어야 한다고 할 때,그 천적 혼인의 가장 깊은 중심에도 한 분 주님이 계십니다.AC.162가 천적 혼인을‘한분주님과하나의천국,곧머리가주님이신하나의교회’라고 설명하는 이유입니다.혼인의 하나 됨도 인간 둘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독립적인 하나 됨이 아니라,그 본과 질서를 한 분 주님에게서 받습니다.
따라서‘오직주님만이천적인간이시다’라는 문장은 인간이나 천사의 천적 상태를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오히려 그들의 천적인 모든 것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밝히는 말입니다.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고 천국이 천적 천국이 되는 것은 주님과 별도로 천적인 무엇을 소유하기 때문이 아니라,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생명과 질서를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결국 이 짧은 문장은 지금까지 창2가 계속 가르쳐 온 한 가지 질서를 다시 가장 깊은 곳에서 확인합니다. ‘생명의근원은인간에게있지않고주님에게있다’는 것입니다.(AC.162심화1)
AC.161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말을 합니다. ‘속사람과겉사람이어떻게하나로서활동하는지,또는어떻게하나처럼보이는지는하나가다른하나안으로유입되는것을알지못하면알수없습니다.’여기서 처음으로‘유입’(influx)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는 직접적인 열쇠로 제시됩니다.지금까지 우리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구별된다는 것도 읽었고,동시에 천적·영적 생명이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된다는 것도 읽었습니다.그렇다면 서로 구별되는 것들이 어떻게 실제 인간의 삶에서는 하나의 생각과 느낌과 행동처럼 나타나는 것일까요?AC.161은 그 답을‘유입’에서 찾기 시작합니다.
이 질문은 사실AC.161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앞의 여러 번호를 읽으면서 계속 쌓여 왔습니다.AC.149에서는 인간의proprium은 그 자체로 죽어 있으며,오직 주님의proprium만이 생명이라고 했습니다.그리고 인간은‘생명의기관’이라고 했습니다.AC.150에서는 더 놀라운 말이 나옵니다.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오랫동안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알도록 허락받았으며,모든 생각의 관념이 흘러든다는 것을 퍼셉션했다고 합니다.여기까지만 읽으면 독자는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내가생각하고느끼고행동한다고경험하는것은무엇인가?모든생명이주님으로부터온다면나의삶은어디에있는가?’
AC.155는 이 질문에 천사들의 상태를 통해 중요한 실마리를 줍니다.천사들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그러나 그것을 특별히 의식하며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으로밖에는 알지 못합니다.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과 자기 자신의 생명처럼 살아간다는 경험이 서로 모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천사들은 자기 생명을 끊임없이 외부에서 조종당하는 무엇처럼 경험하지 않습니다.그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각하고 사랑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살아갑니다.그러나 그들의 가장 깊은 곳에는 그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보편적인 퍼셉션이 있습니다.
AC.159에서는 이 관계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구조 안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천적 인간은 무엇이 속 사람에게 속하고 무엇이 겉 사람에게 속하는지를 분명하게 퍼셉션했으며,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어떻게 다스려지는지도 퍼셉션했습니다.그러므로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구별되지만 서로 단절되어 있는 두 영역이 아닙니다.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을 다스리시는 질서 안에서 서로 관계를 맺습니다.바로 이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AC.161이‘유입’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AC.161은 여기서 유입에 관한 전체 교리를 설명하지 않습니다.오히려 아주 평범한‘행위’하나를 예로 듭니다.어떤 사람이 겉으로 선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의 행위입니다.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행위 안에 체어리티,곧 사랑과 신앙이 있어야 하며,다시 그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셔야 그 행위를‘체어리티의행위’또는‘신앙의열매’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외적인 행위만 떼어 놓고 보아서는 그 행위의 영적 성질을 충분히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서 활동하는지를 조금 이해할 수 있습니다.외적으로 나타나는 행위와 그 행위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은 서로 같은 것이 아닙니다.그리고 그 사랑과 신앙의 생명의 근원인 주님도 인간의 외적인 행위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이들은 구별됩니다.그러나 실제 삶에서는 서로 단절된 채 존재하지 않습니다.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타나 하나의 행위가 됩니다.그러므로 사람이 어떤 일을 할 때‘이부분은속사람이고이부분은겉사람이다’라고 나누어 경험하지 않습니다.하나의 삶,하나의 의지,하나의 행동처럼 경험합니다.이것이AC.161이 말하는‘하나로서활동하고하나처럼보이는’상태를 이해하는 출발점입니다.
이 때문에‘유입’을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적어도 지금까지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오히려AC.155의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살면서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살아갑니다.AC.161의 태고교회 후손들도 겉 사람 안에서,곧 자기들의proprium안에서 살기를 원했고,주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셨습니다.다만 주님께서는 그들을proprium에 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 안에 영적 천적인 것을 자비롭게 스며들게 하셨습니다.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과 인간이 자기 삶으로 받아 살아가는 것이 서로 경쟁하는 두 생명처럼 제시되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서‘주님에의해생명을얻은proprium’이라는 앞의 표현들이 다시 중요해집니다.인간의proprium자체가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생명을 얻습니다.그런데 그렇게 생명을 얻은proprium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AC.155에서는 그것을 주님의‘신부와아내’라고까지 했으며,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퍼셉션하고 지혜와 지성을 누린다고 했습니다.따라서 거듭남의 방향을‘나라는존재가점점없어지는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지금까지의 본문이 보여 주는 방향은 오히려 인간이 자기 생명의 참된 근원을 주님에게서 받아들이면서,그 생명을 자기 자신의 삶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입은‘주님께서안에서움직이시고인간은밖에서수동적으로따라움직인다’는 식의 단순한 그림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AC.161이 보여 주는 것은 훨씬 섬세합니다.속 사람과 겉 사람은 구별되지만 하나로서 활동합니다.천적·영적 생명과proprium도 서로 같은 것은 아니지만 인간 안에서는 하나처럼 나타납니다.인간은 자기 자신의 삶을 실제 자기 삶처럼 살아가지만,그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이 여러 사실을 함께 붙들게 하는 개념이 지금 이 지점에서 등장한‘유입’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행하는 선한 일도 새롭게 보게 합니다.겉으로 보기에 같은 행동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저절로 체어리티의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AC.161이 행위를 예로 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행위 안에 체어리티,곧 사랑과 신앙이 있고,그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실 때 비로소 그 외적인 행위는 안에 있는 것과 하나로서 활동합니다.결국 중요한 것은 외적인 행동을 버리고 내적인 것만 추구하는 것도 아니며,외적인 선행만으로 만족하는 것도 아닙니다.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밖의 삶과 행위 안으로 흘러들어 하나의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아직AC.161에서 유입에 관한 모든 것이 설명된 것은 아닙니다.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이제 그 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그러므로 여기서 유입의 전체 교리를 미리 완성하려 하기보다,지금까지 읽은 것만으로 한 가지를 분명히 붙들면 충분합니다. ‘나는내삶을내삶으로살아가지만,그생명의근원은나자신에게있지않다’는 것입니다.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 우리의 실제 삶과 행위 안에 나타날 때,서로 구별되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은 하나로서 활동하고 하나처럼 보입니다.이것이AC.161에서 처음 열어 보여 주는 유입의 의미입니다.(AC.161심화1)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유튜브 채널 ‘말씀의서사’의 이번 영상은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보기에 상당히 중요한 영상입니다. 주제가 바로 ‘삼위일체’이기 때문입니다. 자막 전체를 보면 이 영상은 전통적인 니케아-아타나시우스적 삼위일체론을 대중적으로 아주 쉽게 설명하려는 영상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중간중간 사용하는 비유와 표현 가운데는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 이해에 매우 가까이 접근하는 부분이 있는 반면, 결정적인 대목에서는 스베덴보리가 가장 강하게 문제 삼았던 ‘영원전부터서로구별되는세신적위격’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은 단순히 ‘맞다, 틀리다’로 판정하기보다, 전통적 삼위일체론이 무엇을 지키려 했으며 스베덴보리가 그것을 어떻게 다시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이해했는지를 보여 주기에 아주 좋은 자료입니다.
영상은 오랫동안 교회를 다닌 사람도 ‘삼위일체가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쉽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데서 출발하며, 이것을 신앙이 얕기 때문이 아니라 삼위일체가 그만큼 깊고 신비로운 진리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출발점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삼위일체가본래부터인간의이해를초월할만큼모순적인신비인가, 아니면교회가하나님을세영원한위격으로설명하면서이해하기어려워진것인가?’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후자에 훨씬 가깝습니다. 그는 삼위일체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기독교에는 반드시 삼위일체가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 삼위일체를 ‘세신적인격의연합’으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 자체, 신적 인간, 발출하는 신성의 삼위일체로 이해합니다. 영상과 스베덴보리 모두 ‘하나님은한분이며삼위일체가있다’고 말하지만, ‘그셋이어디에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서 길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영상은 신명기 6장 4절의 ‘하나’인 히브리어 ‘에하드’가 창세기 2장 24절의 ‘한몸’에도 쓰인다는 사실을 들어, 하나가 반드시 단순한 숫자적 하나만을 뜻하지 않고 ‘여럿이연합된하나’일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창세기 1장 1절의 ‘엘로힘’이 형태상 복수인데 동사는 단수라는 점도 삼위일체를 암시하는 하나의 힌트처럼 제시합니다. 다행히 영상도 이것들만으로 삼위일체가 ‘증명되는것은아니다’라고 선을 긋는데, 이 신중함은 좋습니다. 그러나 ‘에하드’가 집합적 하나를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곧 하나님이 복수 인격으로 구성된 존재라는 뜻은 아니며, ‘엘로힘’의 형태 역시 그것만으로 삼위일체의 증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하나 되심을 먼저 온전히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성은 세 존재가 하나의 목적과 사랑으로 연합하여 이루는 하나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영상이 창세기 1장 26절의 ‘우리의형상을따라우리의모양대로우리가사람을만들고’를 설명하면서 ‘혼자가아니었던겁니다’, ‘하나님안에는이미서로대화하고의논하시는우리가계셨던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은 더욱 조심해서 보아야 합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의 창조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을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의 형성을 다루는 말씀의 속뜻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창1:26의 ‘우리’를 곧바로 영원 전부터 서로 의논하던 세 신적 위격의 대화로 읽는 것은 AC의 해석과 상당히 멀어집니다. 더구나 ‘서로대화하고의논하시는우리’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성부가 성자에게 말하고 성자가 성부에게 응답하며 성령이 그 옆에 계시는 세 신적 주체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전통적 삼위일체 교리에서 가장 우려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은한분’이라고 고백하면서 생각 속에서는 세 분을 그리게 되는 것입니다.
영상이 가장 강력한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요단강에서 예수께서 세례받으시는 장면입니다. 물속에는 성자, 비둘기같이 내려오는 성령, 하늘에서는 성부의 음성이 있으므로 ‘성부, 성자, 성령세분이같은순간에각자의자리에서동시에나타났다’고 설명하며, 이것이 한 분이 세 역할을 하는 ‘1인3역’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삼위일체를 단순한 양태론, 곧 한 하나님이 때로는 아버지 역할을 하고 때로는 아들 역할을 하고 때로는 성령 역할을 한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상이 경계하는 단순한 ‘1인3역론’에 스베덴보리를 넣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세례 장면이 ‘영원히서로구별되는세신적인격’을 증명하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은 실제적인 구별이지만 세 하나님 사이의 구별이 아닙니다.
특히 주님의 성육신과 영화의 과정에서는 아직 완전히 하나가 된 상태를 시간 속에서 이루어 가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복음서에는 아들이 아버지께 기도하고,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고, 성령이 임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곧바로 ‘영원전부터존재하던세인격이잠시한장면에동시에등장했다’고 읽으면 성육신과 영화라는 거대한 과정이 사라져 버립니다. 성육신하신 주님은 단순히 이미 완성된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 인간의 옷을 입고 잠시 지상에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모친 마리아에게서 취한 인성을 통하여 시험을 겪으시고 악과 지옥을 이기시며 그 인성을 점차 신성과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 나타나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이해할 때에는 이 ‘영화’의 과정이 반드시 함께 고려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 영상에서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 있습니다. 9분대에 등장하는 ‘태양비유’입니다. 영상은 하나의 태양에서 ‘빛, 열, 생명을살리는에너지’가 나온다고 설명하면서 ‘우리에게다가오시는모습은셋이지만그본질은완전히하나’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뜻밖에도 스베덴보리의 신학을 설명하기에 훨씬 적합한 방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신적 지혜를 태양의 열과 빛에 상응시켜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의 태양에서 열과 빛이 나오듯 신성의 근원이 나뉘어 여러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성이 서로 구별되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발출합니다. 따라서 이 영상은 여기에서 조금만 방향을 달리했더라면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 이해에 상당히 가까이 갈 수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비유를 제시한 직후 다시 ‘성부가계획하고, 성자가실행하고, 성령이적용한다’는 세 주체의 분업 구조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복음주의 교회에서 삼위일체적 구원을 설명할 때 매우 익숙하고 교육적으로도 이해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자칫 ‘성부라는한분이계획하고, 성자라는다른분이지상으로내려와값을치르고, 성령이라는또다른분이그것을인간에게전달한다’는 구조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영상의 ‘예수님은그한번의죽음으로우리의값을단번에그리고영원히갚아주셨습니다’라는 문장은 전통적인 대속·형벌대속적 구원론과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십자가는 구속의 핵심적인 마지막 시험이며 영화의 완성이지만, 성부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형벌의 값을 성자가 대신 지불하여 성부의 태도를 바꾸었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육신 전에는 진노하시다가 성자의 희생 때문에 인간을 사랑하게 되신 분이 아닙니다. 바로 그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랑 때문에 친히 인간에게 오셔서 지옥을 정복하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심으로 인간에게 다시 구원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영상 후반에 제시하는 ‘삼위일체를일상에서누리는다섯가지실천법’에서도 이 차이는 매우 실제적으로 나타납니다. 영상은 ‘하나님아버지, 오늘하루를주관해주세요. 예수님, 십자가의사랑을기억합니다. 성령님, 오늘저를인도해주세요’라고 각각 부르도록 권하고, 찬송도 1절은 성부, 2절은 성자, 3절은 성령께 드리라고 하며, 하루의 감사 역시 세 분에게 역할별로 나누어 드리도록 권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문제 제기가 실제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이것을 오랫동안 반복하면 신자의 마음속에는 자연스럽게 세 개의 신적 중심이 형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한하나님’이라고 하지만 기도할 때는 세 분을 차례로 찾아가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새 교회 신학에서 중심은 ‘주예수그리스도’입니다. 성부는 주님 밖에 따로 계시는 또 다른 신적 인격이 아니라 주님의 내적 신성이며, 성자는 그 신성이 세상에서 취하셨다가 영화하신 신적 인간이며,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발출하여 인간에게 역사하시는 신적 진리와 신적 활동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성부를 건너뛰는 것도 아니고 성령을 제외하는 것도 아닙니다. 한 분 주님께 나아감으로써 신성 전체에 나아갑니다. 이 점에서는 오히려 영상 자체가 14분대에 말한 ‘여러분은기도할때마다삼위일체하나님전체와만나고있는겁니다’라는 표현이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라면 그것을 ‘세분이동시에기도를듣는다’고 설명하기보다 ‘한분주님안에신성의충만이있기때문’이라고 설명했을 것입니다.
영상의 신학적 결론은 마지막 부분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은사랑이시다. 그런데혼자서는사랑할수없다. 그러므로창조이전부터성부와성자와성령께서서로사랑하고계셨다.’ 그리고 그 사랑이 넘쳐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설명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대목이 스베덴보리와 전통적 삼위일체론의 차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은 하나님 안에 사랑을 주고받는 세 인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신성 자체가 사랑 그 자체이며 지혜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본질에는 자신 밖의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그 존재에게 자신의 것을 주며, 그 존재와 결합하기를 원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적 사랑은 창조를 향합니다. 인간과 천국을 창조하신 것도 사랑할 대상을 필요로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완전한 신적 사랑 자체가 자신의 선과 행복을 다른 존재에게 나누어 주려 하기 때문입니다. 영상의 논리를 끝까지 밀고 가면 ‘사랑이되기위해하나님안에최소한복수의인격이필요하다’는 결론이 되지만,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의 단일성은 결핍이나 고독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한한 사랑과 지혜와 생명의 완전한 하나 됨입니다.
그렇다고 이 영상을 ‘삼위일체를잘못가르치는영상’이라고 단순하게 평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전통적 기독교가 지키고자 했던 매우 중요한 진리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신적이라는 것, 성령은 단순한 비인격적 힘으로 축소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구원 전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영상은 진지하게 붙들고 있습니다. 또한 고난 속에서 외적 상황의 변화보다 먼저 마음이 변화되고 평안을 얻는다는 후반부의 메시지도 매우 귀합니다. 이것은 ‘문제해결’ 자체보다 인간의 내적 상태와 거듭남을 중요하게 보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충분히 귀하게 받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보면 이 영상에는 한 가지 일관된 긴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한분’이라고 계속 말하면서 실제 설명에서는 성부·성자·성령을 각각 생각하고, 말하고, 사랑하고, 계획하고, 행동하는 세 신적 주체로 그립니다. 그래서 ‘셋이완벽하게하나로움직인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독자의 내적 사고에는 결국 세 분이 남기 쉽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론은 이 문제에 대해 매우 급진적이면서도 단순한 답을 내놓습니다. ‘삼위일체를버리지말라. 그러나그삼위를세영원한인격에게나누지말라. 그삼위는한분주예수그리스도안에있다.’ 사람에게 영혼과 몸과 그에게서 나오는 활동이 있다고 해서 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듯, 주님 안에는 성부라 불리는 신성 자체, 성자라 불리는 신적 인간, 성령이라 불리는 발출하는 신성이 있습니다. 이 셋은 세 하나님이 서로 완벽하게 협력하여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삼위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핵심 질문도 ‘세분이어떻게하나가되는가?’에서 ‘한분하나님안에서성부와성자와성령의삼위가어떻게존재하는가?’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 제목 ‘그런데아직도어려운삼위일체’에 ‘스베덴보리의렌즈’가 답한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삼위일체가어려운까닭은반드시하나님자체가모순적인신비이기때문만은아닙니다. 우리는오랫동안한분이라고고백하면서세분을생각하도록배워왔기때문일수도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삼위일체를없애지않습니다. 오히려흩어져있던삼위를다시한분주님안에모읍니다. 그때성부께갈것인가, 성자께갈것인가, 성령께구할것인가하는신자의오래된혼란도새로운빛아래놓입니다. 주예수그리스도께나아가면됩니다. 그분안에신성의모든충만이있기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번 영상에서 가장 역설적인 부분입니다. 영상은 ‘삼위일체의안개를걷어주겠다’고 시작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그 안개가 완전히 걷히는 지점은 ‘세분이어떻게하나인가’를 더 정교하게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셋이한분주님안에서어떻게하나인가’를 보는 데 있습니다. 그 순간 삼위일체는 세 하나님을 억지로 하나라고 이해해야 하는 난제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랑 자체로 계시고, 인간에게 보이도록 오셨으며, 지금도 자신의 영으로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구원의 한 질서로 보이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