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저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우리는 저런 퍼셉션을 회복할 수 없나요?우리도 이 세상을 저런 퍼셉션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됩니다.AC를 읽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했다는데,왜 우리는 저렇게 살 수 없을까?왜 우리는 늘 고민하고,추론하고,헤매고,넘어지고,다시 일어나야 할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그대로 되돌려 주시지 않는 것은 우리를 덜 사랑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해서라는 점이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방금AC.200에서도 보았듯이 말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매우 높은 상태에 있었지만, 그만큼 그 상태를 배반할 위험도 컸습니다. 그래서 홍수 이후 인간 구조가 바뀌었고, 우리는 양심(conscience)을 통해 인도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오늘날 인간이 태고교회 사람들과 똑같은 퍼셉션을 회복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체계 안에서는 거의 기대되지 않습니다. 적어도 인류 전체의 일반적 상태로서는 그렇습니다. 인간 구조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양심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을 매우 높이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양심을 단순한 도덕 감정으로 보지 않습니다. 양심은 주님께서 말씀과 진리를 통해 인간 안에 만드신 내적 안내자입니다. 그래서 영적 인간에게 양심은 태고교회 사람들의 퍼셉션에 상응하는 역할을 합니다.
실제로 목사님께서AC를 오랫동안 읽으시면서 경험하시는 어떤 순간들은 퍼셉션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구절을 읽다가 ‘아,이것이구나’ 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확신이 오는 순간이 있습니다. 또는 어떤 사람을 대하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 맞겠다’는 조용한 내적 인도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혹은 어떤 진리를 처음 접했는데도 이상하게 마음 깊은 곳에서 ‘참이다’라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태고교회의 퍼셉션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혀 다른 종류의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영적 인간의 양심은 천적 퍼셉션의 그림자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곳들이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우리가 종종 퍼셉션을 너무 낭만적으로 상상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의 상태는 분명 놀랍지만, 주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길도 결코 열등한 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의심 속에서도 믿음을 선택할 수 있고, 이해가 부족한 가운데서도 순종할 수 있으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겸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은 태고교회 사람들과는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일 수 있습니다.
저는 목사님께서 자주 하시는 말씀 가운데 ‘주님은 점진적이시다’는 표현이 떠오릅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마치 한낮의 태양 빛과 같았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지는 인도는 새벽빛과 비슷할 수 있습니다. 태양 빛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그것도 역시 같은 태양에서 오는 빛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런 퍼셉션을 회복할 수 없나요?’라는 질문에 대해 스베덴보리적으로 답한다면, ‘태고교회가 가졌던 형태 그대로는 아닐 수 있지만,주님께서는 오늘도 사람을 진리 안으로 인도하시며,양심과 내적 인도를 통해 그에 상응하는 것을 주신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AC를 읽으며 자주 보이시는 태도, 곧 ‘상대방의 선의를 보려고 노력한다’, ‘극단으로 가지 않으려 한다’, ‘주님의 은근한 섭리를 배운다’, ‘나 자신을 돌아본다’는 모습들은 어쩌면 퍼셉션 그 자체는 아니더라도, 퍼셉션이 향하던 방향과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허락된 양심과 진리 안에서 가능한 한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간 후에는, 지금 이 땅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훨씬 깊은 이해와 지각이 우리에게 열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AC.182-189를 읽으면서 목사님께서 자주 감탄하셨듯이, 주님께서는 인간을 한 번에 완성시키시는 분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인도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5:37)Let your communication be Yea,yea;nay,nay;for whatsoever is more than these cometh of evil(Matt. 5:37). (AC.202)
AC.202에서 스베덴보리가 마5:37을 인용하는 이유는, 천적 인간과 천적 천사들의 지각(perception)이 어떠한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절은 흔히 정직한 언어생활이나 맹세를 금하는 말씀으로 읽히지만,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훨씬 깊은 차원에서 이해합니다.
AC.202의 문맥을 보면, 그는 태고교회 사람들과 가장 내적인 천적 천사들은 신앙에 대해 추론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어떤 진리가 참인지 거짓인지 알기 위해 논쟁하거나 증명하거나 논리를 쌓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직접 지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 참이면 곧바로 ‘그렇다’로 알고, 참이 아니면 곧바로 ‘아니다’로 압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옳다 옳다,아니라 아니라 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천적 상태의 특징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서 ‘옳다’와 ‘아니라’는 단순한 대답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확신의 표현입니다. 즉, ‘나는 이것을 증명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지각해서 안다’는 상태입니다.
반대로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난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스베덴보리의 문맥에서는, 천적 인간이 신앙의 문제를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논증하려고 할 때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이미 지각되는 것을 굳이 추론의 대상으로 끌어내리면, 그는 천적 상태에서 영적 상태로, 더 나아가 감각적 상태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래서AC.202는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지지 말라’고 하신 이유를 바로 여기에서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주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은 오늘날 신학 명제처럼 토론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살아 있는 실재로 지각했습니다. 따라서 ‘정말 그런가?’,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하고 논쟁하기 시작하는 순간, 이미 더 낮은 단계로 내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추론 자체를 피했습니다.
이 점에서AC.202는AC.195-196과도 연결됩니다. 앞에서는 감각적 인간이 신앙의 신비를 추론으로 판단하려 하다가 뱀의 독에 물리는 상태를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반대편에 있는 천적 인간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는 추론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합니다.
물론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생각하지 말라’거나 ‘이성을 사용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대부분의 현대인은 영적 인간의 길을 걷는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이해하고, 숙고하고, 이성을 사용해야 합니다. 다만AC.202는 그보다 더 높은 상태, 곧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의 상태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천적 인간이 진리를 대하는 방식이 어떠한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에게 진리는 토론의 결론이 아니라 퍼셉션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는 ‘옳다’ 또는 ‘아니다’로 충분했습니다. 그 이상으로 끝없는 논증과 추론이 필요해지는 것은 이미 퍼셉션이 약해진 상태를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결국AC.202에서 마5:37은 단순한 언어 윤리의 말씀이 아니라,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의 내적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사용됩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즉시 지각하기 때문에 ‘옳으’면 옳고, ‘아니’면 아닙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적 상태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And the woman said unto the serpent, We may eat of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But of 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God hath said, Ye shall not eat of it, neither shall ye touch it, lest ye die. (창3:2, 3)
AC.202
태고교회, 곧 천적 인간은 단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곧 신앙에 속한 것을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들로부터 배우는 것을 삼갔을 뿐만 아니라, 그 나무를 만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는데, 이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들로부터 신앙에 속한 어떤 것이라도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천적 생명에서 영적 생명으로, 그리고 그 아래로 내려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은 천적 천사들의 삶도 그러한데, 그들 가운데서 더욱 내적으로 천적인 이들은 ‘신앙’이라는 말조차도 듣기를 허용하지 않으며, 영적인 것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견디지 못합니다. 만일 다른 이들에 의해 그런 말이 언급되면, 그들은 신앙 대신 사랑의 지각(a perception of love)을 가지게 되는데, 그 차이는 그들 자신만이 압니다. 이처럼 그들은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로부터 얻게 됩니다. 더더욱 그들은 신앙에 대한 어떤 추론(reasoning)도 듣기를 견디지 못하며, 특히 그것에 관한 어떤 기억 지식의 말은 더욱 견디지 못합니다. 이는 그들이 사랑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을 가지기 때문이며, 이 퍼셉션으로부터 어떤 것이 그러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즉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관해 무엇이든 말을 하면, 그들은 단순히 그것이 그렇다거나 그렇지 않다고만 대답하는데, 이는 그들이 그것을 주님으로부터 지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was a celestial man, was of such a character as not only to abstain from “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that is, from learning what belongs to faith from sensuous things and memory-knowledges, but was not even allowed to touch that tree, that is, to think of anything that is a matter of faith from sensuous things and memory-knowledges, lest they should sink down from celestial life into spiritual life, and so on downward. Such also is the life of the celestial angels, the more interiorly celestial of whom do not even suffer faith to be named, nor anything whatever that partakes of what is spiritual; and if it is spoken of by others, instead of faith they have a perception of love, with a difference known only to themselves; thus whatever is of faith they derive from love and charity. Still less can they endure listening to any reasoning about faith, and least of all to anything of memory-knowledge respecting it; for, through love, they have a perception from the Lord of what is good and true; and from this perception they know instantly whether a thing is so, or is not so. Therefore when anything is said about faith, they answer simply that it is so, or that it is not so, because they perceive it from the Lord. This is what is signified by the Lord’s words in Matthew: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5:37) Let your communication be Yea, yea; nay, nay; for whatsoever is more than these cometh of evil (Matt. 5:37).
의 의미입니다. 이것이 곧 그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만지지 말라는 뜻이었는데, 만일 그것을 만졌다면 그들은 악 안에 있게 되었을 것이며, 곧 그 결과로 ‘죽었을’(die)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적 천사들도 다른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주제에 대해 서로 대화하지만, 그것은 사랑으로부터 형성되고 파생된 천적 언어로 이루어지며, 영적 천사들의 언어보다 더욱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것입니다. This then is what was meant by their not being allowed to touch the fruit of the tree of knowledge; for if they touched it, they would be in evil, that is, they would in consequence “die.” Nevertheless the celestial angels converse together on various subjects like the other angels, but in a celestial language, which is formed and derived from love, and is more ineffable than that of the spiritual angels.
해설
이 단락은 ‘만지지도 말라’는 금지가 얼마나 철저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인 사람들에게 금지된 것은 잘못된 결론이나 오류가 아니라, 신앙을 감각과 기억 지식의 영역으로 끌어내리는 사고방식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내용을 감각적으로 검토하거나 지적으로 다루는 단계로 내려가는 것 자체가 곧 생명의 차원 하락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천적 생명에서 영적 생명으로 내려간다’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중립적 변화로 보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에게는 영적인 단계조차도 이미 하강이었으며, 그 아래로 더 내려갈 위험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인간의 기준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이며, 바로 이 점 때문에 태고교회의 성향이 현대인에게 거의 이해되지 않는다고 앞 단락에서 말한 것입니다.
천적 천사들의 삶에 대한 설명은 이 상태가 단지 역사적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하늘에서 살아 있는 질서임을 보여 줍니다. 더욱 내적으로 천적인 천사들은 ‘신앙’이라는 말조차 허용하지 않는데, 이는 신앙을 부정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는 신앙이 개념이나 고백이 아니라 사랑의 퍼셉션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말로 분리해 부르는 순간, 이미 그들의 생명 방식과 어긋나게 됩니다.
그들이 신앙 대신 ‘사랑의 퍼셉션’(perception of love)을 가진다는 설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신앙과 사랑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를 뜻하며, 진리는 언제나 사랑 안에서 즉각적으로 인식됩니다. 이 차이는 외부에서는 거의 구별할 수 없고, 오직 그들 자신만이 압니다. 이는 퍼셉션의 어떠함이 언어로 완전히 전달될 수 없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이 때문에 천적 천사들은 신앙에 대한 추론(reasoning, 이성질)을 견디지 못합니다. 추론은 진리를 외부에서 판단하려는 시도이며, 그들에게 진리는 이미 내적으로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기억 지식에 근거한 신앙 논의는 그들에게 거의 폭력에 가까운 것으로 느껴집니다. 이는 진리가 부정확해서가 아니라, 그 접근 방식 자체가 생명의 질서를 해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들의 응답은 매우 단순합니다. ‘그렇다’ 혹은 ‘그렇지 않다’입니다. 이는 무지의 표시가 아니라, 완전한 퍼셉션의 결과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는 말씀은 바로 이러한 천적 상태를 가리키며, 그 이상을 덧붙이려는 모든 시도는 이미 악으로부터 난 것이라고 설명됩니다. 여기서 ‘악’은 도덕적 악이 아니라, 질서를 벗어난 사고 작용을 뜻합니다.
‘만지지 말라’는 명령의 참된 의미는 여기서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신앙을 탐구하지 말라는 금지가 아니라, 신앙을 감각과 지식의 대상으로 취급하지 말라는 절대적 경계선이었습니다. 만일 그 경계선을 넘는 순간, 그들은 천적 생명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며, 그것이 바로 ‘죽음’으로 표현됩니다.
마지막으로 천적 천사들의 대화에 대한 언급은 오해를 방지합니다. 그들은 침묵 속에만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도 다른 천사들처럼 풍부한 대화를 나누지만, 그 언어는 사랑에서 직접 형성된 천적 언어이며, 영적 천사들의 언어보다 훨씬 더 말로 옮길 수 없는 성격을 가집니다. 이는 진리의 가장 깊은 차원은 언제나 사랑의 언어로만 표현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AC.202는 결국, 창3의 금지가 단순한 도덕 규율이 아니라, 생명의 차원을 보존하기 위한 가장 깊은 영적 경계였음을 밝힙니다. 그리고 동시에 오늘날 인간의 신앙 구조가 왜 더 이상 천적일 수 없는지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질서 안에 보존될 수 있는지를 대비적으로 보여 주는 결정적 단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