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영상은 처음 들으면 상당히 불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상티어’, ‘중티어’, ‘하티어’로 나누고, 남자의 키와 외모, 학력, 직업, 연봉, 자산, 부모의 경제력과 노후 준비를 하나하나 따진 뒤 어느 등급에 속하는지를 정합니다. 여자 역시 나이와 외모, 학력, 직업, 연봉, 자산, 부모의 재산과 노후 준비 등을 놓고 같은 방식으로 분류합니다. 심지어 어떤 조건이 조금만 달라져도 ‘상에서 중으로 내려간다’, ‘하에서 중으로 올라가기 어렵다’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선 한 인격으로 보는 데 익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거부감부터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상을 곧바로 ‘사람을 돈과 외모로 평가하는 세속적인 이야기’라고 밀어내기 전에 한 가지는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영상은 ‘사람의 참된 가치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신학 강의가 아니라, 결혼정보회사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실제 사람들이 어떤 조건으로 서로를 선택하고 거절하는지를 오랫동안 관찰한 사람이 그 현실을 설명하는 영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이 보여 주는 ‘결혼 시장의 민낯’에는 상당한 현실성이 있습니다. 실제 결혼은 사랑만으로 이루어지는 추상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두 사람이 만나 함께 살고, 집을 마련하고, 돈을 벌고, 자녀를 낳아 기르고, 양가 부모와 관계를 맺으며 수십 년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상대의 직업이나 경제력, 건강, 성격, 가정환경, 부모의 노후 문제 등을 살펴보는 것 자체를 탐욕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결혼을 앞둔 사람이 ‘이 사람과 실제 생활을 함께 감당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책임 있는 태도일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지상생활의 외적인 조건 자체는 무가치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외적인 것을 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보다 위에 올라가 사람 전체의 가치를 결정하기 시작하는 데 있습니다.

 

영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표현 가운데 하나가 ‘육각형’입니다. 남자 상티어의 사례로 제시된 사람은 35세, 178cm, 연세대 공대 졸업, 유명 IT 대기업 과장, 연봉 15천만 원, 순자산 10억 원, 서울 아파트 보유, 부모 역시 안정적인 직업에서 은퇴했고 노후 준비도 끝난 사람입니다. 진행자는 이런 사람을 어느 한 곳도 특별히 걸리는 것이 없는 ‘큰 육각형’이라고 부릅니다. 반면 외모와 키는 좋지만 연봉과 자산이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은 ‘작은 육각형’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가 드러납니다. 이 육각형에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나타내는 항목이 거의 없습니다. 정직한가, 따뜻한가, 책임감이 있는가, 배우자를 존중하는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가, 욕망을 절제할 수 있는가, 배우자가 병들거나 실패했을 때도 곁을 지킬 사람인가 하는 것은 육각형의 축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가져와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을 결정하는 가장 깊은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그가 사랑하는 것에 있으며, 결국 사람은 자신이 지배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내적 모습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지상에서는 대단히 성공하고 좋은 조건을 갖춘 사람이 영계에서는 전혀 다르게 드러날 수 있고, 반대로 세상에서는 별 볼 일 없어 보였던 사람이 놀랍도록 아름다운 내면을 지닌 사람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는 학벌도, 직함도, 통장 잔고도, 부동산도, 부모의 사회적 지위도 가져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 형성된 ‘사랑의 성품’은 그대로 가지고 갑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정말 중요한 ‘결혼 티어’는 무엇일까요? 질문 자체를 조금 바꾸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상티어인가?’가 아니라 ‘이 사람의 지배적 사랑은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상대를 자기 행복을 위한 도구로 여기는 사람인지, 아니면 상대의 행복을 자기 행복처럼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인지가 훨씬 중요합니다. 재산이 10억인지 1억인지보다 돈을 어떻게 벌었고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중요하며, 좋은 직장에 다니는가보다 맡은 일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외모가 아름다운가보다 그 아름다움을 자기 우월감과 타인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지, 아니면 감사하며 겸손하게 살아가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는 추상적인 종교 개념이 아니라 이렇게 일상생활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상에 등장하는 조건들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30세 남자가 모은 돈이 500만 원이고 부모의 노후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면 결혼을 생각하는 상대가 걱정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39세 여성이 월세로 살고 있고 부모의 노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 역시 실제 결혼생활에서 고려할 현실적인 요소입니다. 여기서 ‘사랑만 있으면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무책임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조건을 ‘현실적인 고려 사항’으로 보는 것과 그것을 ‘인간의 등급’으로 바꾸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는 점입니다. ‘이 사람과 결혼하면 경제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와 ‘그러므로 이 사람은 하티어 인간이다’ 사이에는 매우 큰 간격이 있습니다.

 

영상에서 남녀를 평가하는 방식이 서로 다른 것도 흥미롭습니다. 남성은 직업, 연봉, 자산, 학력, 키, 외모, 부모의 경제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반면, 여성에게는 특히 나이와 외모가 강력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33세에 대기업에 다니고 연봉 8천만 원, 순자산 3억 원에 본인 명의 오피스텔까지 있는 여성도 ‘중티어’로 분류되고, 39세 여성에게는 학력이나 연봉이 조금 더 좋아지는 정도로는 ‘하티어’를 벗어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요소로 ‘예쁨’을 반복해서 제시합니다. 이것은 이 영상이 만들어 낸 규칙이라기보다, 진행자의 주장대로라면 실제 결혼 시장에서 사람들이 보여 주는 선택을 압축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우리는 영상 자체보다 그 영상을 가능하게 만든 우리 사회의 욕망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매우 아이러니한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은 조건으로 평가받기를 싫어하면서 상대는 조건으로 평가합니다. 남자는 자신의 연봉과 자산만 보는 여성을 싫어하면서 젊고 예쁜 여성을 원할 수 있고, 여자는 자신의 나이와 외모만 보는 남성을 불쾌하게 여기면서 상대 남성에게 높은 연봉과 안정된 직업과 자산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나라는 사람 전체를 봐 달라’고 요구하면서 정작 자신은 상대를 몇 개의 조건으로 압축해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녀 어느 한쪽의 문제라기보다 인간의 proprium이 관계 안에서 나타나는 한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좋은 것을 받아야 한다’는 욕구가 먼저 서고, ‘나는 상대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 줄 것인가’라는 질문은 뒤로 밀리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결혼애에 관한 가르침은 여기에서 방향을 완전히 바꿉니다. 참된 결혼은 ‘내게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확보하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고, 두 사람이 서로의 선과 진리를 사랑하며 하나를 이루어 가는 데서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남자와 여자의 결합을 단순한 육체적 결합이나 생활 공동체로만 보지 않고, 더 깊은 차원에서는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의 결합과 연결해서 봅니다. 그래서 참된 결혼애에서는 한 사람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행복과 점점 분리되지 않게 됩니다. ‘당신 때문에 내가 행복하다’에서 더 나아가 ‘당신이 행복한 것이 나의 행복이다’라는 상태로 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적 연애 감정과는 상당히 다른 차원의 사랑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영상 속 ‘상티어’라는 개념도 뒤집힙니다. 세상에서 상티어인 사람이 반드시 천국적 의미에서도 상티어인 것은 아닙니다. 연봉 15천만 원에 자산 10억 원, 서울 아파트와 좋은 학벌을 갖추었더라도 배우자를 자기 성공의 장식품처럼 여기고, 상대가 늙거나 병들거나 사회적 지위를 잃었을 때 사랑이 식어 버린다면 그 결혼의 내적 토대는 매우 약합니다. 반대로 연봉 3천만 원대의 평범한 직장인이고 아직 큰 재산이 없더라도 정직하게 일하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며, 배우자를 존중하고, 어려울 때 함께 견디며, 자신의 욕망보다 가정의 선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내면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가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가난하다고 해서 자동으로 선한 것도 아니고 부유하다고 해서 악한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초점은 언제나 재산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사랑의 질서에 있습니다.

 

여성의 아름다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상에서는 ‘예쁘면 된다’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됩니다. 현실의 결혼 시장에서는 실제로 외모가 강력한 경쟁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자연적인 끌림이 있고 결혼에서 육체적 매력 역시 일정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천국의 아름다움은 훨씬 흥미롭습니다. 영계에서는 내적인 상태가 외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선한 애정과 지혜가 얼굴과 몸짓에까지 나타납니다. 지상에서는 화장과 성형과 옷과 젊음으로 외적 아름다움을 어느 정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마음의 상태를 영원히 감출 수 없습니다. 결국 ‘어떤 얼굴을 가지고 태어났는가’보다 ‘어떤 사랑을 가지고 살아왔는가’가 그 사람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영상에서 말하는 ‘39’라는 숫자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결혼 시장에서는 나이가 올라갈수록 특히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 출산 가능성이나 사람들이 선호하는 연령대와 연결된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가치까지 나이에 따라 내려가는 것은 아닙니다. 26세 여성은 존재론적으로 39세 여성보다 더 가치 있는 인간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연봉 15천만 원인 남성이 연봉 32백만 원인 남성보다 하나님 앞에서 더 높은 등급의 인간인 것도 아닙니다. 시장에서의 ‘희소가치’와 인간의 ‘본질적 가치’를 구별하지 않으면 우리는 어느 순간 시장의 언어로 사람의 영혼까지 가격표를 붙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문장은 오히려 ‘결혼 시장의 민낯을 봐야 한다’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맞는 말입니다. 현실을 모른 채 이상만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민낯’을 보았다면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합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사람을 분류하고 있는가, 왜 남자는 여자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고 여자는 남자의 경제력과 사회적 안정성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가, 그리고 그 욕망 가운데 어디까지가 창조 질서 안의 자연스러운 필요이고 어디부터가 자기중심적인 욕망으로 변질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바로 여기서 영적 분별이 시작됩니다.

 

특히 결혼을 준비하는 사람이 이 영상을 본다면 ‘나는 어느 티어인가?’보다 더 중요한 질문을 하나 해보았으면 합니다. ‘나는 어떤 배우자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보다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배우자가 되어 줄 준비가 되어 있는가?’입니다. 내가 상티어 상대를 원하는 것보다 내가 상대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입니다. 나는 돈을 얼마나 모았는가뿐 아니라 돈을 책임 있게 다룰 줄 아는가, 좋은 직장을 얻었는가뿐 아니라 맡은 일에 충실한가, 외모를 얼마나 관리했는가뿐 아니라 상대의 늙어가는 모습을 사랑할 수 있는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는가뿐 아니라 배우자의 부모를 존중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런 질문들은 결혼정보회사의 프로필 용지에는 들어가지 않을지 모르지만 실제 결혼생활에서는 오히려 훨씬 오래 남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결혼관은 아주 현실적인 힘을 갖습니다. 결혼은 결혼식 날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살아가면서 계속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5세에 ‘큰 육각형’이었던 사람도 50세에 직장을 잃을 수 있고, 건강을 잃을 수도 있으며, 사업에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26세의 아름다운 얼굴도 60세와 70세가 되면 변합니다. 부모의 재산도 사라질 수 있고 서울 아파트의 가격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만일 결혼을 붙들고 있는 것이 이런 조건뿐이라면 조건이 무너질 때 관계도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오랜 세월 형성된 선한 애정과 신뢰, 존중과 책임, 그리고 서로의 영적 선을 바라는 사랑이 있다면 외적인 조건이 변해도 결혼의 더 깊은 부분은 오히려 강해질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영상이 보여 주는 ‘··’는 틀렸다기보다 매우 제한된 지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혼정보회사가 실제 매칭을 위해 사용하는 지도에는 분명 유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간 전체를 설명하는 지도라고 생각하는 순간 문제가 생깁니다. 그 지도에는 사람의 영혼이 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연봉 15’, ‘순자산 10’, ‘강남 아파트’, ‘해외 명문대’, ‘167cm의 예쁜 외모’ 같은 항목은 적을 수 있지만, ‘이 사람은 배우자가 아플 때 밤새 곁을 지킬 사람인가’, ‘자신이 잘못했을 때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돈 앞에서 양심을 버리지 않는가’,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상대의 행복에서 자신의 기쁨을 찾을 수 있는가’ 같은 것은 숫자로 적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긴 결혼생활에서는 오히려 이런 것들이 결정적인 조건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영상을 보고 난 뒤 남는 결론은 ‘결혼정보회사의 티어 분류는 나쁘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 조건의 세계에서는 그런 분류가 생겨날 수밖에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되, 그것을 인간의 참된 가치와 혼동하지 말자’에 가깝습니다. 외적인 조건은 결혼을 시작하는 데 영향을 줄 수 있지만, 결혼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두 사람 안에 형성된 내적인 것입니다. 외모는 만남의 문을 열 수 있고, 경제력은 생활을 안정시킬 수 있으며, 좋은 가정환경은 결혼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두 영혼이 하나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상의 표현을 빌려 조금 다른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상티어일까?’ 아마 이 질문에 연봉과 학벌과 자산을 적는 칸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가 아니라, 가진 것을 가지고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가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는지가 아니라 그 얼굴 뒤에 어떤 애정이 자리 잡았는지, 얼마나 좋은 직장을 가졌는지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얼마나 정직하고 유용한 삶을 살았는지, 얼마나 좋은 배우자를 얻었는지가 아니라 자신이 배우자에게 얼마나 좋은 사람이 되어 주었는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결혼 시장에서 말하는 ‘큰 육각형’보다 더 귀한 육각형이 있다면 어쩌면 이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선함, 진실함, 책임, 절제, 배려, 그리고 상대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여기는 사랑.’ 이것들은 결혼정보회사의 프로필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결혼을 영원한 결합으로 자라게 하는 훨씬 본질적인 조건들입니다. 세상에서는 ‘누구와 결혼했는가’가 성공처럼 보일 때가 많지만, 천국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더 깊은 질문이 남습니다. ‘나는 결혼을 통해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이 영상의 ‘··하 티어’를 넘어 우리가 끝까지 붙들어야 할 질문일 것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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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이집트 사막의 어느 수도 공동체에 전해지는 두 수도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강문호 수도사 자신도 이 수도원을 직접 방문한 것은 아니라고 밝히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곳에서 태어나 수도원 밖 세상을 거의 경험하지 못한 두 수도사가 어느 날 화면을 통해 사람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싸움이라는 것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두 사람은 호기심이 생겨 ‘우리도 한번 싸워 보자’고 합니다.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지갑 하나를 가운데 놓고 한 사람이 ‘내 것이다’라고 하면 다른 사람이 ‘아니다, 내 것이다’라고 맞서면서 다투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자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한 수도사가 지갑을 집어 들고 ‘내 거다’라고 하자 다른 수도사가 ‘그래, 네 거다. 가져가라’고 해버린 것입니다. 싸움이 시작될 수가 없었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여기에서 요한일서 39절의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를 인용하고, 이 두 수도사가 싸울 수 없었던 까닭을 ‘그 속에 하나님의 씨가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소와 말이 저마다 타고난 방식으로 일어나고 병아리가 물을 마신 뒤 본능적으로 머리를 드는 모습을 예로 들면서, 하나님의 씨가 사람 안에 자리 잡으면 선하고 깨끗하게 사는 것이 점차 그 사람의 ‘본질’처럼 된다고 말합니다.

 

이 짧은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지점이 보입니다. 무엇보다 ‘싸움이 성립되지 않았다’는 대목입니다. 싸움에는 반드시 두 개의 ‘내 것’이 필요합니다. 한쪽이 ‘내 것이다’라고 할 때 다른 쪽에서도 ‘아니다, 내 것이다’라고 해야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두 번째 수도사가 ‘그래, 네가 가져라’ 하는 순간 싸움의 재료 자체가 사라집니다. 이 작은 이야기는 인간의 proprium이 어떻게 갈등을 만들어 내는지를 아주 단순하면서도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prium은 단순히 물건에 대한 소유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내 것’, ‘내 생각’, ‘내 판단’, ‘내 공로’, ‘내 지위’, ‘내 명예’, ‘내가 옳다’는 데 집착하는 인간의 자기중심성이 모두 여기에 연결됩니다. 실제로 우리의 싸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물질 때문인 경우보다 ‘내가 옳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누군가 내 의견을 무시했다고 느끼고, 내 체면을 손상했다고 생각하고, 내가 받아야 할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여기면서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납니다. 결국 겉으로는 여러 이유가 있어 보여도 그 깊은 곳에는 ‘’와 ‘내 것’이 자리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두 번째 수도사가 ‘그래, 네 거다’라고 말하는 순간입니다. 그는 논쟁에서 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논쟁 자체를 필요 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내 것’을 지키기 위해 상대방과 맞설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의 질서와도 매우 잘 연결됩니다. 천국에서는 각자가 자기 자신만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유익을 기뻐합니다. 자신이 가진 선과 진리를 자기 소유로 움켜쥐기보다 그것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알고 서로 나누기를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적 삶의 중심에는 ‘누가 더 많이 가졌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서로에게 쓰임이 될 것인가’가 놓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는 조금 더 깊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요한일서의 ‘하나님의 씨’를 사람이 죄를 지을 수 없게 만드는 일종의 새로운 본질처럼 설명합니다. 이 방향에는 귀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실제로 거듭남이 깊어지면 사람은 단지 ‘죄를 지으면 안 되니까 참는 상태’를 넘어 ‘그 악 자체를 싫어하는 상태’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계명이 ‘하지 말라’고 하기 때문에 악을 피하지만, 나중에는 그 악이 주님을 거스르고 이웃을 해친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에서 싫어하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행동 교정이 아니라 애정의 변화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 관한 가르침은 강문호 수도사의 ‘본질이 달라진다’는 표현을 더욱 깊게 열어 줍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죄를 모르는 존재로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도움을 받아 악과 싸우고 그것을 피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애정을 받습니다. 처음에는 ‘하면 안 되니까 하지 않는 것’이었던 일이 어느 순간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됩니다. 반대로 처음에는 억지로 행하던 선이 점차 좋아지고 기뻐집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놀라운 변화입니다. 선이 의무에서 기쁨으로 옮겨갑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에 나오는 ‘죄를 피하는 게 아니라 죄를 모르는’ 삶이라는 표현은 그 의도를 잘 살려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거듭난 사람이 죄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게 된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악을 너무 멀리하여 그것을 자기 삶의 선택지로 삼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면 좋겠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사들은 악이 무엇인지 모르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과 진리 안에 있기 때문에 악과 거짓을 더욱 분명하게 분별합니다. 다만 그것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차이입니다. ‘악을 모른다’기보다 ‘악을 원하지 않는다’가 더 정확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이번 영상의 ‘하나님의 씨’라는 표현을 스베덴보리의 ‘리메인스’와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요한일서의 ‘’를 곧바로 스베덴보리의 리메인스와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 안에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보존하시며, 훗날 그것을 통하여 인간을 거듭나게 하신다는 점에서는 아름다운 접점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받은 사랑, 말씀을 들으며 느꼈던 거룩한 정서, 양심을 따라 선을 행했을 때의 기쁨, 주님과 이웃을 향했던 순수한 마음 등은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의 내면에 보존하십니다. 그리고 거듭남의 과정에서 그것들을 불러내어 사용하십니다.

 

다만 ‘하나님의 씨가 있으면 범죄하지 못한다’는 말을 너무 단순하게 이해하면 자칫 신앙생활의 실제 모습을 놓칠 수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에게도 시험은 있고 proprium은 계속 고개를 듭니다. 천적 상태에 이르기 전까지 인간에게는 끊임없는 내적 싸움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이제 하나님의 사람이므로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악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이 자기 안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물러서는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선한지를 자랑하기보다 자기 안에는 선한 것이 없고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이 점은 이번 이야기의 핵심과도 맞닿습니다. ‘내 거야’라고 주장하지 않았던 수도사의 모습은 단지 물질에 욕심이 없는 모습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더 어려운 내려놓음은 ‘내가 선하다’는 생각까지 내려놓는 것입니다. 재산을 내려놓는 것은 눈에 보이지만 자기 공로를 내려놓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수도복을 입고 청빈하게 살면서도 ‘나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 ‘나는 더 거룩하다’, ‘나는 이것을 이루었다’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많은 재산과 책임을 가지고 세상 한가운데 살면서도 자신에게 있는 모든 선과 능력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며 이웃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외적 형식보다 그 형식 안에 있는 사랑의 질입니다.

 

그러므로 수도원이라는 환경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싸움을 보지 않았다고 해서 마음속의 싸움까지 자동으로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악은 단순히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중심으로 한 내면의 애정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참된 수도는 장소의 격리가 마음의 변화로 이어질 때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보다 자기 안의 ‘내 것’을 얼마나 내려놓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이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이 점에서 ‘싸움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두 수도사’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 영적 비유로서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싸움을 멈추는 가장 깊은 방법은 싸움의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싸움을 일으키는 자기중심적 애정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내 것이다’라고 할 때 언제나 ‘그래, 네가 가져라’라고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불의 앞에서는 진리를 말해야 하고, 약자를 보호해야 하며, 맡겨진 것을 책임 있게 지켜야 합니다. 체어리티는 무조건적인 양보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사랑 때문에 ‘아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을 자기 자존심과 승리를 위해 하느냐, 아니면 선과 진리와 이웃의 유익을 위해 하느냐입니다.

 

따라서 참된 평화는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평화는 주님과의 결합에서 오는 내적 질서입니다. 사람 안에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바른 질서 아래 둘 때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때 사람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강박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집니다. ‘내 말이 맞다는 것을 저 사람이 인정해야 한다’, ‘내가 한 일을 사람들이 알아줘야 한다’, ‘내가 받아야 할 몫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마음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놀랍게도 이전에는 싸움거리가 되었던 것들이 더 이상 싸움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앞선 ‘사과나무 이야기’가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 안다’는 자기 지혜를 내려놓고 주님의 섭리에 맡기는 이야기였다면, 이번 ‘수도사 싸움’은 ‘내 것’을 내려놓음으로써 싸움 자체가 사라지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영상 모두 깊은 곳에서는 proprium을 다룹니다. 하나는 ‘내가 안다’는 proprium이고, 다른 하나는 ‘내 것이다’라는 proprium입니다. 그리고 거듭남은 이 ‘내가 안다’와 ‘내 것이다’가 조금씩 ‘주님께서 아십니다’와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옵니다’로 바뀌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인용한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라는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의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선언으로 끝나기보다 훨씬 아름다운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여 삶으로 살아갈수록 선은 점차 외부의 명령이 아니라 내면의 사랑이 됩니다. 처음에는 싸우고 싶은데 참습니다. 그다음에는 싸워서 얻을 것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상대의 유익을 자기 유익처럼 기뻐할 수 있는 상태를 향해 갑니다. ‘죄를 참는 사람’에서 ‘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번 ‘수도사 싸움’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거듭남이란 죄를 짓고 싶은 자신을 억지로 눌러 놓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심으신 선과 진리가 삶의 사랑이 되어 마침내 이전에 좋아하던 악을 싫어하고 이전에 힘들어하던 선을 기뻐하게 되는 변화입니다.’

 

그리고 두 수도사가 싸움에 실패한 이유를 조금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이렇습니다. ‘싸울 줄 몰라서 싸우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싸움을 만들어 낼 내 것이 힘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싸움이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구해야 할 것도 어쩌면 ‘평생 아무와도 부딪치지 않게 해주십시오’가 아니라 ‘부딪치는 순간에도 제 안의 proprium이 주인이 되지 않게 하시고, 선과 진리와 체어리티가 저를 이끌게 해주십시오’일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 한복판에서도 가능한 수도이며, 주님께서 우리 안에 심으신 ‘’가 마침내 삶의 열매가 되어 가는 길일 것입니다.

 

 

 

SY.73, 강문호 수도사, ‘사과나무와 하나님의 섭리’ (20191222)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한 수도사와 사과나무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수도사는 사과를 먹고 싶어 작은 묘목 하나를 심고 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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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4:2)

 

AC.345

 

농사하는 자(tiller of the ground)가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는 것, 곧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아무리 깊이 있다 하더라도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내며,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는 사실은 뒤에 이어지는 내용에서 분명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고, 그가 자기 형제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곧 그는 아벨(Abel)이 상징하는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가리켜 땅을 경작하는 사람들(till the ground)이라고 했다는 것은 창3:19, 23에서 분명합니다. 거기에는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져 땅을 경작하게 되었다(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That a “tiller of the ground” is one who is devoid of charity, however much he may be in faith separated from love, which is no faith, is evident from what follows: that Jehovah had no respect to his offering, and that he slew his brother, that is, destroyed charity, signified by “Abel.” Those were said to “till the ground” who look to bodily and earthly things, as is evident from what is said in Gen. 3:19, 23, where we read that the man was “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3:19, 23)

 

 

해설

 

AC.345는 앞의 AC.341에서 제시했던 ‘양 치는 자’와 ‘농사하는 자’의 대비 가운데 이제 두 번째 표현, 곧 가인이 ‘농사하는 자’였다는 말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AC.343-344에서는 ‘양 치는 자’가 체어리티의 선으로 사람을 인도하는 사람이며, 신앙과 교리의 궁극적인 목적 역시 체어리티라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그 반대편에 있는 ‘농사하는 자’는 체어리티 없이 신앙에 속한 것만을 붙드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먼저 주의할 것은 ‘농사하는 자’ 또는 ‘땅을 경작하는 자’ 자체가 언제나 나쁜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말씀에서 ‘’은 문맥에 따라 좋은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실제로 바로 앞 AC.343에서 인용한 사30:23에서는 땅에 씨를 뿌리고, 그 땅에서 양식이 나는 모습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농사=’, ‘목축=’이라는 식으로 자연적 직업 자체에 고정된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는 가인이 나타내는 상태와 창3에서 에덴동산 밖으로 쫓겨난 사람이 ‘땅을 경작하는’ 상태가 서로 연결되면서 부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가인이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이후의 이야기 자체에서 확인합니다. 첫째, 여호와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십니다. 둘째, 가인이 자기 형제 아벨을 죽입니다. 특히 두 번째 사건이 결정적입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상징하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속뜻으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가인이 아무리 신앙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그에게 체어리티가 없다는 사실은 그가 자기 형제 아벨을 죽이는 데서 최종적으로 드러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4의 결론과 정확하게 이어집니다. AC.344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기억 지식(scientia)과 인식 지식(cognitio), 그리고 교리(doctrina)가 아무리 많아도 사람이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체어리티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것은 ‘텅 빈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했습니다. AC.345에서는 바로 그런 신앙의 모습을 ‘농사하는 자’ 가인을 통해 보여 줍니다. 신앙에 속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신앙의 목적지인 체어리티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however much he may be in faith separated from love’를 단순히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겉으로는 신앙이 상당히 많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말씀을 알고, 교리를 알고, 신앙을 고백하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열심히 논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런 신앙에 대해 다시 한번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여기서 AC.345가 창3:19, 23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유가 중요합니다. 창3에서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나와 ‘땅을 경작하게’ 됩니다. 에덴동산은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퍼셉션 가운데 살아가던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상태에서 물러난 뒤에는 이전처럼 사랑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퍼셉션하지 못하고, 더 낮고 외적인 차원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AC.345는 바로 그 상태와 가인의 ‘농사하는 자’를 연결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땅을 경작한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이 노동하게 되었다는 뜻보다 훨씬 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상태와 연결합니다. 시선이 주님과 천적인 것에서 육체와 세상적인 것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사람은 여전히 종교적인 것을 알고, 신앙에 속한 것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고 다루는 중심이 더 외적인 차원으로 내려갑니다.

 

이렇게 보면 창3과 창4 사이의 연결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창3에서는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나와 땅을 경작하게 되고, 창4에서는 가인이 바로 ‘농사하는 자’가 됩니다. 이것을 단순한 역사적 시간 순서로 읽을 필요는 없지만, 말씀의 내적 연결에서는 분명한 연속성이 있습니다. 창3이 보여 준 인간의 내적 하강이 창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계속 주의해 온 점을 다시 붙들어야 합니다. 창4의 가인 계열과 이후 셋 계열을 자연적인 족보의 시간 순서만으로 읽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창3의 ‘땅을 경작함’에서 창4의 가인이 역사적으로 곧바로 생겨났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보여 주는 것은 ‘영적 상태의 연결’입니다. 에덴으로 나타낸 천적 상태에서 멀어져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바라보는 상태와,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여 외적인 것으로 다루는 가인의 상태 사이에 내적인 친연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바라본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사람은 자연계에 사는 동안 먹고 일하고 재산을 관리하며 세상적인 지식도 배워야 합니다. 문제는 무엇을 ‘바라보는가’, 곧 무엇을 목적으로 삼는가입니다.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섬긴다면 질서 안에 있지만, 영적인 것까지 자연적이고 세상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가인의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과 교리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AC.344가 이미 보여 주었듯 그것들은 모두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체어리티를 향해야 합니다. 진리가 사람을 선으로 이끌고, 신앙이 사랑을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가인은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내어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수단이 목적이 되고, 결국 체어리티라는 본래 목적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마침내 ‘형제를 죽이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처음에는 단지 신앙과 사랑을 ‘구별’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 구별이 분리가 되고, 분리가 독립이 되며, 마침내 신앙이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래서 창4에서 아벨의 죽음은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AC.338부터 계속 설명해 온 ‘가인의 분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필연적인 귀결입니다.

 

AC.345는 따라서 ‘농사하는 자’라는 짧은 표현을 통해 매우 중요한 대비를 보여 줍니다. 아벨은 ‘양 치는 자’로서 체어리티의 선을 돌보고 행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로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붙들면서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한쪽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고, 다른 한쪽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떨어져 점점 외적인 것이 됩니다.

 

결국 AC.345의 핵심은 ‘신앙이 얼마나 많은가?’가 아니라 ‘그 신앙이 무엇을 바라보고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있습니다. 신앙이 사람을 체어리티의 선으로 이끌고 주님과 이웃을 향하게 한다면 그 신앙은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에 머물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밀어낸다면 아무리 신앙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어도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신앙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의 비극은 신앙을 버린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붙들면서도 그 신앙의 생명인 사랑과 체어리티를 잃어버린 데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농사하는 자’라는 표현을 통해 AC.345가 보여 주는 가인의 상태입니다.

 

 

 

AC.344, 창4:2, ‘신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 목적은 체어리티입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4 신앙, 곧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과 인식 지식(knowledge, cognitio),그리고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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