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일이 생겼어? 그럼 하나님께 복 받은 거고, 나쁜 일이 생겼어? 그럼 뭔가 잘못한 거지’

 

‘좋은 일이 생겼어? 하나님께 복 받은 거야. 그런데 자꾸 나쁜 일이 생겨? 뭔가 잘못한 게 있는지 돌아봐야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매우 자연스럽게 듣는 말입니다. 취업이 되고, 사업이 잘되고, 건강이 회복되고, 자녀가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면 ‘하나님께 복 받았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병이 생기고, 사업이 어려워지고, 사고를 당하고,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면 ‘혹시 하나님 앞에 뭔가 잘못한 것이 있는 것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도 순종과 복, 불순종과 화를 연결하는 말씀들이 있기 때문에 이런 생각에는 분명 성경적인 뿌리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너무 단순한 공식으로 만들어 ‘좋은 일 = 하나님의 복, 나쁜 일 = 내가 잘못한 결과’라고 모든 삶에 적용할 때 생깁니다.

 

성경은 실제로 죄와 그 결과를 연결합니다. 사람이 악을 선택하면 그 악 자체가 삶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거짓말을 반복하면 신뢰를 잃고, 탐욕에 사로잡히면 관계가 깨지며, 무절제하게 살면 삶의 여러 영역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닥쳤을 때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혹시 내가 고쳐야 할 것이 있는가?’, ‘내가 잘못 선택한 것은 없는가?’라고 주님 앞에서 자신을 살펴보는 것은 오히려 거듭남에 필요한 태도입니다. 문제는 ‘어려움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 ‘그러므로 네가 뭔가 잘못했다’고 결론 내리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가장 강력하게 다루는 성경이 욥기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바로 이 공식을 가지고 욥을 바라보았습니다. 욥에게 엄청난 재난이 닥쳤으니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재산을 잃고, 자녀들을 잃고, 건강까지 무너졌으니 욥이 하나님 앞에서 뭔가 큰 잘못을 했음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라고 말합니다(욥4:7). 얼핏 들으면 상당히 경건하고 논리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욥기의 서두에서 독자는 이미 욥의 고난을 그런 식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끝없이 욥의 숨은 죄를 찾아내려 했던 이유는 ‘나쁜 일이 일어났다면 반드시 그 사람에게 나쁜 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공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이 사고방식을 직접 바로잡으셨습니다. 요9에서 제자들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고 묻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9:2). 제자들의 머릿속에는 고난이 있다면 반드시 그 고난에 상응하는 죄인을 찾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답하십니다(요9:3). 주님은 고난을 보고 곧바로 죄의 크기를 역산하는 인간의 습관을 깨뜨리십니다.

 

눅13에서는 더 충격적인 사례가 나옵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죽었습니다. 당시 사람들도 아마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었기에 저런 일을 당했을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는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고 하십니다(눅13:4-5). 비극을 당한 사람의 죄가 다른 사람보다 더 컸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고, 질병, 재난, 실패를 보고 그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는 것은 주님의 가르침과 맞지 않습니다.

 

반대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께 특별히 인정받고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5:45). 자연계에서는 선한 사람에게도 비가 내리고 악한 사람에게도 비가 내립니다. 선한 사람도 성공할 수 있고 악한 사람도 성공할 수 있으며, 선한 사람도 병들 수 있고 악한 사람도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습니다. 자연계의 형편만 보고 한 사람의 영적 상태를 읽어 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시73의 시인은 바로 이 문제 때문에 흔들렸습니다. 그는 악인의 형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라고 탄식합니다(시73:4-5). 만일 ‘잘되는 사람 =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이라는 공식이 옳다면 시인이 본 악인들은 하나님께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결국 외적인 형통과 인간의 궁극적인 영적 상태가 같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복’은 무엇일까요? 물론 자연적인 복도 있습니다. 건강과 일용할 양식, 좋은 관계와 안전, 필요한 물질은 모두 감사할 수 있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굳이 ‘이것은 복이 아니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건강이 회복되면 감사하고,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면 감사하며, 자녀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함께 기뻐하면 됩니다. 문제는 자연적인 좋은 일을 ‘복의 전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복 있는 사람’을 말씀하시는 장면을 보면 복의 의미가 크게 달라집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십니다(마5:3-10).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가난하고 애통하고 박해받는 상태를 ‘복 받았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향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은 외적인 환경이 얼마나 편안한가보다 인간이 주님과 천국을 향하여 어떤 내적 상태에 있는가와 더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구별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자연계에서 우리가 좋은 것이라고 느끼는 것과 영원한 관점에서 실제로 선한 것이 언제나 같지는 않습니다. 돈이 많이 생기는 것이 자연적으로는 좋은 일이지만, 그 돈 때문에 탐욕과 교만이 더욱 강해진다면 그 사람의 영적 삶에는 오히려 위험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경제적인 어려움 자체는 분명 고통스럽고 그것을 선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교만을 보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며 주님을 더 깊이 의지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그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가난이나 실패를 보내셨다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허용된 모든 상황 속에서도 인간을 선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주님께서 허용하시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모든 질병과 사고, 실패와 재난을 ‘하나님께서 뜻하셨다’고 말하면 하나님을 악과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에서 주님의 목적은 언제나 선이며 인간의 영원한 구원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고, 자연계에는 자연적인 질서와 인과관계가 있으며, 사람들의 잘못된 선택과 악으로 인해 수많은 고통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악으로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허용하시면서도 가능한 한 선한 결과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나쁜 일이 생겼으니 내가 뭔가 잘못했나?’라는 질문도 조금 바꾸어야 합니다. 자기성찰은 필요합니다. 병에 걸렸다고 해서 ‘내가 무슨 죄를 지었지?’라고 자책할 필요는 없지만, 삶의 습관 가운데 고쳐야 할 것이 있는지는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업이 실패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벌 받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판단과 욕심, 준비 부족을 돌아볼 수는 있습니다. 관계가 깨졌다고 무조건 ‘하나님께서 심판하셨다’고 할 필요는 없지만, 내가 상대에게 잘못한 것이 없는지는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사건을 미신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거듭남을 위해 자신을 성찰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특히 다른 사람에게 이 공식을 적용할 때는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병든 사람에게 ‘뭔가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있지 않느냐’고 말하거나, 자녀에게 어려움이 생긴 부모에게 ‘기도가 부족해서 그런 것 아니냐’고 말하거나, 사업이 실패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치신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은 욥의 친구들과 같은 자리에 설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고통이 왜 허용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원인을 함부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아파하고, 필요한 도움을 주며, 그 사람이 고통 속에서도 주님을 향할 수 있도록 곁에 있는 ‘체어리티’(charity)입니다.

 

반대로 좋은 일을 경험한 사람도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니까 사업이 잘된다’, ‘내가 믿음이 좋으니까 자녀가 잘된다’, ‘기도를 많이 해서 건강하다’는 생각은 자기도 모르게 ‘프로프리움’(proprium)을 키울 수 있습니다. 더 위험한 것은 거기에서 ‘그러므로 잘 안 되는 사람은 나보다 뭔가 문제가 있다’는 판단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성공을 영적 우월함의 증거로 삼는 순간, 감사가 교만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받은 자연적인 좋은 것에 대한 가장 건강한 반응은 ‘내가 하나님께 인정받았다는 증거’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면서 선한 쓰임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돈이 생겼다면 그것을 어떻게 선하게 사용할 것인지, 건강하다면 그 건강으로 누구에게 유용한 사람이 될 것인지, 지위와 능력을 얻었다면 그것을 자기 영광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복이 영적인 복과 연결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진정한 복은 단순히 좋은 사건이 많이 생기는 상태가 아닙니다. 가장 깊은 복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우리의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이 천국을 향하여 변화되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형편이 좋을 때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형편이 어려울 때도 악을 악으로 알고 피하며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 이것이 거듭남(regeneration)의 관점에서 훨씬 깊은 복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일이 생기면 감사하면 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 일이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의롭거나 더 사랑받는다는 증거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나쁜 일이 생기면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벌하시는구나’, ‘내 믿음에 문제가 있구나’라고 자동으로 결론 내리지도 말아야 합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의 고난을 보고 그의 죄와 믿음을 추측해서는 안 됩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좋은 일은 감사할 선물이 될 수 있고 나쁜 일은 자신을 돌아볼 계기가 될 수 있지만, 사건의 좋고 나쁨 자체가 그 사람의 영적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판정표는 아닙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더 깊이 압축하면 이것이겠습니다.

 

‘주님의 복은 내 삶에 좋은 일만 일어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 안에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천국의 사랑을 가진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일이 생겼어? 하나님께 복 받은 거야. 나쁜 일이 생겼어? 뭔가 잘못한 거지’라는 말은 절반의 진리를 담고 있지만 그대로 공식으로 만들면 위험합니다. 좋은 것은 주님께 감사하고, 어려움 앞에서는 자신을 겸손히 살피되, 형통한 사람을 의인으로 높이지도 말고 고난받는 사람을 죄인으로 판단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을 너무 빨리 설명했습니다. 주님은 고난당하는 사람의 사정을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깊이 아십니다. 그러므로 고통 앞에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에도 ‘나는 복 받은 사람인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물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이것을 나는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

 

어쩌면 그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 좋은 일이 생겼다는 사실 자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영적 문제가 될 것입니다.

 

 

 

SL.26, ‘일이 계속 막히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는 건가?’

‘일이 계속 막히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는 건가?’ ‘이상하다. 기도하면서 시작한 일인데 왜 이렇게 계속 막히지?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인가?’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일이 계속 막히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는 건가?’

 

‘이상하다. 기도하면서 시작한 일인데 왜 이렇게 계속 막히지?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인가?’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한두 번이 아니라 계속 일이 어긋납니다. 사람도 안 만나지고, 돈도 마련되지 않고, 계획했던 일정도 틀어지고,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연달아 생깁니다. 처음에는 ‘조금만 더 해 보자’고 생각하지만 막힘이 반복되면 마음속에 신앙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이 길을 막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가려는 길을 막으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울 일행은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려 했지만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고, 비두니아로 가려고 애썼지만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고 했습니다(행16:6-7). 그 뒤 바울은 밤에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 마게도냐로 향합니다. 여기서는 분명 어떤 길이 막힌 것이 방향을 바꾸라는 주님의 인도하심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일이 계속 막힐 때 ‘혹시 내가 방향을 다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묻는 것은 건강한 신앙적 태도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막혔다’는 사실에서 곧바로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다’는 결론으로 뛰어갈 때입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의 뜻을 따라가는 길에도 놀라울 만큼 많은 장애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세우는 일은 분명 선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을까요? 산발랏과 도비야의 조롱과 방해가 있었고, 대적들은 성벽 공사를 중단시키려 했으며, 내부에서도 어려움이 일어났습니다. 느헤미야와 백성들은 한 손으로 일을 하고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아야 할 정도였습니다(느4:17). 만일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렇게 계속 막힐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면 성벽 재건은 중단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는 더욱 극적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지만 그의 사역에는 끊임없이 막힘이 있었습니다. 박해를 받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배가 파선하고, 복음을 전하려는 곳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그 장애물들은 ‘이 일을 하지 말라’는 신호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바로 그 어려움들을 통과하면서 자신의 부르심을 수행했습니다. 행16에서도 흥미로운 대조가 나타납니다. 어떤 길은 성령께서 막으셨지만, 마게도냐로 간 뒤 빌립보에서 감옥에 갇힌 것은 ‘마게도냐로 가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막힘’처럼 보여도 그 의미는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모든 장애물이 같은 종류의 장애물이 아닙니다. 어떤 막힘은 방향을 바꾸라는 섭리적 인도일 수 있고, 어떤 막힘은 선한 일을 이루기 위해 견디고 통과해야 하는 어려움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막힘은 내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길 수도 있고, 판단을 잘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다른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이나 자연계의 여러 조건 때문에 생길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모두 ‘일이 안 풀린다’는 모습이지만 그 내적 의미까지 같은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를 생각하면 이 구별은 더욱 중요해집니다. 주님의 섭리는 우리가 매 순간 외적인 사건을 암호처럼 해독하여 ‘하라’, ‘하지 말라’를 알아맞히게 하는 체계가 아닙니다. 주님의 섭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고,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선과 진리를 선택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일어난 모든 사건에 즉시 하나님의 특별한 메시지를 붙이는 것과 다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업을 시작하려는데 자금 조달이 계속 실패한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것이 ‘하지 말라’는 주님의 뜻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다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업계획 자체가 현실성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직 준비가 덜 되었거나 시기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매우 선하고 필요한 일을 시작했는데도 주변 사람들의 반대와 예상하지 못한 문제 때문에 계속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모든 장애물을 ‘하나님이 막으신다’고 해석하여 포기한다면, 오히려 끝까지 해야 할 선한 일을 중단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그것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환경의 신호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생각해야 합니다. 정보를 살펴보고, 경험 있는 사람의 조언을 듣고, 자신의 능력과 형편을 점검하고, 예상되는 결과를 검토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일이 선과 진리에 합당한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것 역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이 힘든 분별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세 번 막혔으니 하나님 뜻이 아니야’, ‘기도했는데 계속 문제가 생기니 그만두라는 뜻이야’라고 결론 내리면 오히려 편합니다. 내가 판단하고 책임져야 할 부담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에 넘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자신의 판단과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빛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성실하게 판단하고 선택하면서 결과를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반대편의 위험도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기 싫어서 모든 막힘을 무조건 ‘시험’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충분한 이유를 들어 만류하고, 객관적으로도 문제가 반복해서 드러나며, 자신의 능력과 조건을 보아도 계속하는 것이 지혜롭지 않은데 ‘하나님께서 내 믿음을 시험하시는 것이다. 끝까지 밀어붙이면 문이 열릴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신앙적 분별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때로는 멈추는 것이 믿음일 수 있고, 방향을 바꾸는 것이 순종일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을 살펴야 합니다. 인간의 자기중심성은 ‘포기하고 싶을 때’에도, ‘포기하고 싶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기 싫은 일에는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것 같다’고 말하고, 꼭 하고 싶은 일에는 ‘사탄의 방해가 심한 것을 보니 반드시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같은 장애물을 자기 욕망에 따라 정반대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복되는 막힘 앞에서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몇 번 막혔는가?’가 아닙니다. ‘내가 하려는 일이 그 자체로 선하고 참된가?’입니다. 성경의 분명한 선과 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일이 잘 풀리든 막히든 하지 않아야 합니다. 반대로 분명히 선한 일이라면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즉시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그 다음에는 ‘나는 왜 이 일을 하려 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정말 이웃에게 필요한 선을 이루려는 것인지, 아니면 성공과 인정, 자기만족을 원하는 것인지 자신의 동기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을 더 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막힘은 나에게 무엇을 다시 보게 하는가?’입니다. 당장 ‘하라, 하지 말라’는 답을 얻으려 하기보다, 그 장애를 통하여 계획의 허점이 드러났는지, 내 욕심이 드러났는지, 준비 부족이 드러났는지, 아니면 정말로 포기하지 말고 인내해야 할 선이 더욱 분명해졌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막힘은 단순한 신호가 아니라 분별을 깊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것은 거듭남(regeneration)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외적인 사건을 보고 정답을 맞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사랑하여 자유롭게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결정마다 하늘에서 ‘YES’나 ‘NO’가 떨어진다면 우리는 순종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어도 내적으로 분별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는 어렵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로봇처럼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이끄십니다.

 

그렇다면 일이 계속 막힐 때 실제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멈추어 살펴보는 것은 좋습니다. 기도하고, 말씀의 선과 진리에 비추어 보고, 자신의 동기를 살피고, 현실적인 조건을 다시 검토해야 합니다. 필요하면 믿을 만하고 지혜로운 사람의 조언도 들어야 합니다. 그런 뒤 ‘계속해야 할 선인가, 방법을 바꾸어야 하는가, 때를 기다려야 하는가, 아니면 정말 내려놓아야 하는가’를 판단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막힘 자체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등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판단한 뒤에는 어느 정도 책임 있게 걸어가야 합니다. 모든 장애가 나타날 때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하나님 뜻인가 아닌가’를 묻기 시작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선하고 옳다고 충분히 판단했다면 어려움이 있어도 견딜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충분히 살펴본 결과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붙잡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면 미련 없이 내려놓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둘 다 믿음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이 문제에서도 가장 깊은 기준을 보여 줍니다. 겟세마네에서 골고다까지 모든 상황은 막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배신, 체포, 거짓 증언, 조롱, 채찍질, 십자가가 이어졌습니다. 외적인 상황만 읽었다면 ‘이 길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고 결론 내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길에서 주님의 사랑과 구원의 역사가 가장 깊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장애 자체는 주님의 뜻에서 벗어났다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모든 고난을 ‘하나님께서 일부러 보내신 것’이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인간의 악과 잘못된 선택, 다른 사람의 자유, 자연계의 질서 속에서 수많은 고통과 장애가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악 자체를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허용된 상황 속에서도 인간을 선으로 이끄시며, 우리가 자유롭게 주님을 향하여 돌아설 수 있도록 섭리하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신 것’과 ‘주님께서 허용하시면서 선으로 이끄시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결국 ‘일이 계속 막히는데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단순히 ‘그렇다’거나 ‘아니다’라고 답할 수 없습니다. 반복되는 막힘은 분명 멈추어 살펴보라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정말 방향을 바꾸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막힘 그 자체가 곧 하나님의 금지 명령은 아닙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반복되는 막힘은 하나님의 뜻을 다시 분별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곧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더 깊이 압축하면 이것이겠습니다.

 

‘주님의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모든 장애물을 하나님의 암호로 해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장애물 앞에서도 자유와 합리성을 사용하여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분별하고 그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이 계속 막힐 때 이렇게 물어보는 편이 더 좋습니다.

 

‘하나님, 왜 자꾸 막으십니까?’라고 단정하기 전에, ‘주님, 이 상황에서 제가 보아야 할 선과 진리는 무엇입니까? 계속해야 한다면 견딜 지혜와 힘을 주시고, 멈추어야 한다면 제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게 하시며,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면 그것을 알아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막힘이 곧 하나님의 ‘NO’는 아닙니다. 때로는 ‘기다려라’일 수 있고, ‘방법을 바꾸어라’일 수도 있으며, ‘끝까지 가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그 의미를 당장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모든 사건의 숨은 뜻을 알아맞히는 능력이 아닙니다. 알 수 없는 것까지 억지로 해석하지 않으면서도, 지금 내가 알 수 있는 선과 진리를 붙들고 주님을 신뢰하며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것입니다.

 

 

 

SL.27, ‘좋은 일이 생겼어? 그럼 하나님께 복 받은 거고, 나쁜 일이 생겼어? 그럼 뭔가 잘못한 거

‘좋은 일이 생겼어? 그럼 하나님께 복 받은 거고, 나쁜 일이 생겼어? 그럼 뭔가 잘못한 거지’ ‘좋은 일이 생겼어? 하나님께 복 받은 거야. 그런데 자꾸 나쁜 일이 생겨? 뭔가 잘못한 게 있는지

bygrace.kr

 

SL.25, ‘하나님의 뜻이라면 반드시 일이 잘 풀릴 거야’

‘하나님의 뜻이라면 반드시 일이 잘 풀릴 거야’ ‘하나님의 뜻이라면 반드시 일이 잘 풀릴 거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매우 자연스럽게 듣게 되는 말입니다. 어떤 일을 앞두고 기도했는데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하나님의 뜻이라면 반드시 일이 잘 풀릴 거야’

 

‘하나님의 뜻이라면 반드시 일이 잘 풀릴 거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매우 자연스럽게 듣게 되는 말입니다. 어떤 일을 앞두고 기도했는데 예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면 ‘역시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반대로 계속 문제가 생기고 계획이 어그러지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고 형통하게 하시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이삭의 아내를 구하러 가면서 ‘여호와께서 나의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라고 고백했고(창24:27), 요셉에 대해서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기록합니다(창39:2). 그러므로 어떤 일이 순조롭게 열릴 때 그것을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감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하나의 공식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 일이 잘 풀림’, 그리고 그 반대편에 ‘하나님의 뜻이 아님 = 일이 막힘’이라는 공식을 놓는 것입니다. 이 공식이 성립한다면 우리는 일이 얼마나 잘 풀리는지만 보아도 하나님의 뜻을 상당히 정확하게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조금만 깊이 읽어 보면 이 공식은 곧 무너집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요셉입니다. 성경은 분명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함께하셨던 요셉의 삶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일이 잘 풀리는 삶’과 상당히 달랐습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구덩이에 던져졌으며, 노예로 팔렸고, 보디발의 집에서 충성스럽게 일했지만, 거짓 고발을 받아 감옥에 갔습니다. 심지어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의 부탁을 잊어버렸습니다. 만일 요셉이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이라면 일이 잘 풀려야 한다’는 기준으로 자신의 삶을 해석했다면, 여러 차례 ‘나는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나 보다’라고 결론 내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바로 그 막혀 있는 시간 속에서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말합니다(창39:21).

 

바울의 삶은 더욱 분명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는 길은 언제나 순조롭게 열렸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배가 파선하고, 사람들에게 쫓겨났습니다. 행16에서는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 매를 맞고 깊은 감옥에 갇힙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한밤중에 기도하고 찬송했고, 옥문이 열렸으며, 간수와 그의 집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행16:22-34).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막힘’이 서로 반대편에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었기 때문에 감옥에 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던 바로 그 길에서 감옥에 갔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일이 아주 잘 풀린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하려 했을 때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었습니다. 삯을 내니 배에도 탈 수 있었습니다(욘1:3). 상황만 놓고 보면 놀라울 만큼 길이 잘 열렸습니다. ‘기도했더니 마침 배가 있더라. 역시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셨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배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피해 달아나는 배였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사실을 보여 줍니다. ‘문이 열렸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증명하지 않으며, ‘문이 닫혔다’는 사실 자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열린 문으로 잘못 들어갈 수도 있고, 닫힌 문 앞에서 기다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닫힌 문 자체가 주님의 인도하심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단지 우리가 통과해야 할 어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황의 순조로움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판별하려 하면 우리는 매우 쉽게 자기 욕망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실제로 주님께서 길을 막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행16에서 바울 일행은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려 했지만,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으셨고,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으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행16:6-7). 이후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통하여 방향이 바뀝니다. 그러므로 일이 막히는 것을 전혀 무시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환경의 열림과 닫힘은 우리가 분별할 때 참고해야 할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 하나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판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들어가면 이 문제는 더욱 깊어집니다. 주님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자연계에서 원하는 일을 모두 성공시키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고 거듭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대개 ‘이 일이 성공할 것인가’, ‘이 관계가 이루어질 것인가’, ‘사업이 잘될 것인가’,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를 보지만, 주님께서는 그 일을 통하여 우리가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는지를 보십니다.

 

그래서 자연적 성공과 영적 선이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사업이 크게 성공했는데 그 성공 때문에 돈과 명예에 대한 사랑이 더욱 강해질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사업이 실패했는데 그 실패를 통하여 자신의 교만을 보고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게 될 수도 있습니다.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 결혼이 자동으로 주님의 뜻이라는 뜻도 아니며, 좋은 일을 하려고 하는데 어려움이 생긴다고 해서 그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자연계에서의 ‘잘됨’과 영적 의미에서의 ‘선’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이 ‘프로프리움’(proprium)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일이 잘 풀리면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석하기 쉽습니다. ‘내가 기도했는데 계약이 성사되었다’, ‘내가 원하던 사람이 나타났다’, ‘돈이 마련되었다’, ‘문이 열렸다.’ 물론 실제로 주님의 섭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했던 일이 이루어졌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주님의 뜻이었다고 단정하면, 어느 순간 ‘내가 원하는 것’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동일시하게 됩니다.

 

반대로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서 막으신다’고 너무 쉽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주님의 제지인지, 다른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 때문인지, 자연계의 조건 때문인지, 나 자신의 준비 부족 때문인지, 아니면 선한 일을 이루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어려움인지는 즉시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장애물에 하나님의 특별한 메시지를 붙이는 것도 신적 섭리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이 문제는 더욱 선명해집니다. 겟세마네에서 시작하여 체포, 심문, 조롱, 채찍질,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외적으로만 보면 모든 일이 ‘잘못 풀리고’ 있었습니다. 제자는 배신했고, 다른 제자들은 도망갔으며, 종교 지도자들은 주님을 거부했고, 빌라도는 십자가형을 허락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일이 잘 풀릴 것이다’라는 기준만 적용한다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에서 가장 멀리 벗어난 사건처럼 보여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바로 그 십자가에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형통 = 하나님의 뜻’이라는 공식은 유지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분별해야 할까요? 가장 먼저 보아야 할 것은 ‘일이 잘 풀리는가’가 아니라 ‘이것이 선하고 참된가’입니다.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과 충돌한다면 아무리 문이 활짝 열려도 주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거짓말을 하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해서 그것이 주님의 축복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이용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해서 주님께서 길을 열어 주신 것도 아닙니다. 상황보다 먼저 선과 진리를 보아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자신의 동기를 살펴야 합니다. ‘나는 왜 이것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주님의 영광이라는 말을 붙이고 있지만, 실제로는 인정받고 싶은 것인지,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말하지만, 사실은 성공하고 싶은 것인지,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고 하면서 이미 내가 원하는 답을 정해 놓고 주님께 확인만 요구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은 외부에서 표적을 찾는 일만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을 살피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실제 상황도 신중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없애고, 매 순간 초자연적인 신호로 지시하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정보를 살피고, 조언을 듣고, 결과를 예상하고, 책임 있게 선택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말씀의 선과 진리에 비추어 보고, 그 뒤에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결과는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이 잘 풀릴 때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 풀렸으니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일이 막힐 때도 멈추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혔으니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다’고 즉시 결론 내리지 않습니다. 형통과 장애 모두 분별의 자료는 될 수 있지만 최종 기준은 아닙니다.

 

오히려 때로는 하나님의 뜻 안에 있기 때문에 견뎌야 하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선을 선택했기 때문에 손해를 볼 수 있고, 진실을 말했기 때문에 관계가 어려워질 수도 있으며, 옳은 일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더 힘든 길을 걸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일이 안 풀리니 내가 잘못 가고 있나’라고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선을 너무 빨리 포기하게 됩니다.

 

반대로 일이 놀라울 만큼 잘 풀릴 때야말로 더 깊이 자신을 살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 성공을 나는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 ‘이 일이 나를 주님과 이웃에게 더 가까이 가게 하는가, 아니면 나 자신에게 더 집착하게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형통 자체가 영적 성공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는 것은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맞히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상황에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살피고, 그것을 자유롭게 선택하며, 그 결과 속에서도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거듭남(regeneration)은 모든 일이 내 뜻대로 풀리는 삶이 아니라, 일이 풀리든 막히든 점점 주님의 선과 진리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라면 반드시 일이 잘 풀릴 거야’라는 말에는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필요한 길을 열어 주신다는 귀한 신뢰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의 공식으로 만들면 위험합니다. 주님의 뜻 안에서도 일이 막힐 수 있고, 주님의 뜻을 거슬러 가면서도 일이 놀라울 만큼 잘 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일이 잘 풀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하나의 참고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증명하는 기준은 아닙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더 깊이 압축하면 이것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는 것은 ‘이 일이 잘될 것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이 상황에서 무엇이 선하고 참되며, 나는 그것을 선택함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 가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일이 가장 잘 풀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주님의 사랑은 가장 깊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형통’을 주님의 뜻과 동일시해서도, ‘막힘’을 주님의 부재와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의 섭리는 때로 열린 문을 통하여 우리를 이끄시고, 때로 닫힌 문 앞에서 우리를 멈추게 하시며, 때로는 아주 어렵고 좁은 길을 끝까지 걸어가게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길이 얼마나 편한가가 아니라, 그 길에서 내가 누구를 따르고 있는가입니다.

 

 

 

SL.26, ‘일이 계속 막히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는 건가?’

‘일이 계속 막히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는 건가?’ ‘이상하다. 기도하면서 시작한 일인데 왜 이렇게 계속 막히지?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인가?’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

bygrace.kr

 

SL.24, ‘기도응답이 안 일어나는 건 네 믿음이 부족해서야’

‘기도응답이 안 일어나는 건 네 믿음이 부족해서야’ ‘기도응답이 안 일어나는 건 네 믿음이 부족해서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의외로 자주 듣게 되는 말입니다. 병이 낫지 않거나, 자녀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