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혼을 둘러싼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다 보면 결국 피하기 어려운 질문 하나와 만나게 됩니다. ‘한 사람을 더 이상 붙들어 줄 수 없어 이혼했는데, 그 사람이 그 뒤 무너져 버린다면 떠난 배우자는 어디까지 책임이 있는가?’ 더 극단적으로는 이혼 후 상대방의 인생이 파탄 나고 절망 끝에 스스로 생명을 끊는 일까지 생긴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그렇다면 끝까지 혼인의 울타리를 지켜 주었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이 따라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더 어려운 질문이 기다립니다. ‘그 모든 과정에서 주님의 섭리는 어디에 있었는가?’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혼인의 울타리를 지키는 것’과 ‘배우자를 대신 살아 주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존버리즘’ 영상의 첫 사례에서는 결혼 전에는 어머니가 딸의 생활을 대신 책임졌고, 결혼한 뒤에는 남편이 사실상 그 역할을 이어받았습니다. 아내의 어머니 자신도 ‘어릴 때부터 내가 다 해줘 버릇해서 그런 거야’라고 말합니다. 남편은 아내가 해야 할 몫을 계속 대신 감당했고, 심지어 자신이 심하게 아픈 상황에서도 집안일을 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남편이 ‘혼인을 지킨다’는 이유로 평생 아내의 몫까지 대신 감당한다면 외적인 결혼은 유지될지 몰라도, 아내가 자신의 자유와 책임을 사용하는 한 인간으로 성장할 기회는 오히려 줄어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떠나지 않는 것=사랑’, ‘떠나는 것=버림’이라는 단순한 등식부터 다시 살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에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자유’가 중요해집니다. 주님의 사랑은 인간을 강제로 선하게 만드는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지만,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을 제거하여 선을 강요하시지는 않습니다. 강제로 만들어진 선은 그 사람 자신의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전능하신 주님조차 인간이 악을 선택할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인간을 구원하시지 않는다면, 한 배우자가 다른 배우자의 자유로운 선택이 낳는 모든 결과를 평생 대신 막아 주어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결과를 대신 치워 주는 사랑’이 오히려 상대의 악이나 무책임을 지속시키는 조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가장 아픈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한 배우자가 더 이상 파괴적인 관계를 감당하지 못하고 이혼했습니다. 그런데 남겨진 배우자의 삶이 무너지고, 극단적인 경우 스스로 생명을 끊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이때 시간을 거꾸로 돌려 ‘결국 이렇게 되었으니 이혼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하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결론 내리면 뜻밖의 문제가 생깁니다. 한 사람의 생존에 대한 최종 책임을 다른 한 사람에게 무기한 부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당신이 나를 떠나면 나는 죽겠다’는 말이 성립하는 순간 상대방은 평생 떠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것은 더 이상 사랑에 의한 결합이 아니라 두려움과 죄책감에 의한 결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혼했으니 이제 상대가 어떻게 되든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체어리티’의 문제가 들어옵니다. 체어리티는 혼인관계를 유지하느냐 끝내느냐의 문제보다 더 깊습니다. 이혼했더라도 상대방이 실제로 극단적 선택의 위험에 있다면 그 위험을 외면하지 않고 가족이나 적절한 도움에 연결하며, 가능한 범위에서 생명을 보호하려 노력하는 것은 체어리티에 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다시 배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그 사람의 생명을 염려하는 것’과 ‘그 사람의 배우자로서 다시 결합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전자는 체어리티의 요구가 될 수 있지만, 후자가 언제나 의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마태복음 19장 8절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는 주님의 창조 질서를 보여 줍니다. 주님이 뜻하신 혼인은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어 서로의 선과 영원한 행복을 기뻐하는 결합입니다. 그러나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라는 말씀은 인간의 악이 그 창조 질서를 실제로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단지 ‘어떤 일이 있어도 법적인 혼인관계를 유지하라’는 뜻으로만 읽으면 인간의 ‘완악함’이 만들어 내는 현실을 충분히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세 사례에서도 결정적인 문제는 생활습관의 차이나 성격 차이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나는 변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였습니다. 특히 두 번째 사례에서 아내는 상담자에게 ‘저는 화낸 적 없는데요. 말을 좀 세게 할 뿐이에요’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분노와 모욕적인 언어가 배우자와 자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지속되면 회개의 출발점 자체가 사라집니다. 회개는 ‘내 안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주님 앞에서 보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문제의 원인을 상대방에게서만 찾는다면 사람은 자신의 악을 볼 기회를 잃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먼저 이혼장을 냈느냐’만으로 누가 혼인을 깨뜨렸는지를 판단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혼인의 ‘외적 해체’와 ‘내적 해체’를 구별해야 합니다. 법원에서 이혼 판결이 난 날이 반드시 혼인이 처음 깨진 날은 아닙니다. 상대를 오랫동안 멸시하고 지배하고 이용하며,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계속 떠넘기면서도 돌이키기를 거부한다면 ‘둘이 한 몸’이라는 내적 질서는 법적인 이혼보다 훨씬 전부터 훼손되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인 혼인관계를 계속 유지한다고 해서 내적인 혼인이 반드시 보존되는 것도 아닙니다. 한집에서 수십 년을 살아도 서로를 증오하고 이용하고 지배한다면 ‘외적인 혼인의 울타리’와 ‘내적인 혼인의 결합’을 같은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섭리’의 문제가 대단히 중요해집니다. 주님의 섭리를 ‘파국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나쁜 일을 미리 막아 주시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이혼 후 한 사람의 삶이 무너지거나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는 경우 섭리는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이 계셨다면 왜 막지 않으셨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섭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에게 자연계에서 아무 고통도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원한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인간의 자유를 제거해서라도 당장의 파국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섭리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악을 원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을 구원하시기 때문에 악의 가능성과 그 결과가 ‘허용’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혼 뒤 삶이 무너진 사람에게도 섭리는 계속되고 있을까요? 그렇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혼은 그 사람에게 생애 최대의 파국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사람에게 어떤 영적 의미를 갖게 될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평생 다른 사람 탓만 하던 사람이 더 이상 탓할 사람이 없어졌을 때 처음으로 ‘혹시 내게도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앞의 첫 사례에서도 남편이 떠나자 아내는 며칠 동안 스스로 집을 치웠습니다. 비록 영상에서는 결국 원래 상태로 돌아간 것으로 묘사하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대신 해 주지 않는다’는 현실과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로 이어질 수도 있고 다시 책임전가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선택까지 배우자가 대신 해 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섭리가 있다면 왜 이혼을 막지 않으셨는가?’라는 질문을 조금 다르게 바꾸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이 이혼과 그 이후의 고통 가운데서도 두 사람을 어떻게 각각 이끌고 계시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떠난 사람에게는 원망과 죄책감, 혹은 ‘나는 옳았고 상대방만 잘못했다’는 자기의(自己義)에 빠지지 않는 것이 새로운 거듭남의 과제가 될 수 있습니다. 남겨진 사람에게는 더 이상 자신의 삶을 배우자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기 내면을 바라보는 것이 새로운 과제가 될 수 있습니다. 같은 이혼이라는 사건이 두 사람에게 서로 다른 영적 과제가 되는 것입니다. 섭리는 사건 하나를 없애 버리는 방식으로만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사건 속에서도 각 사람의 영원한 선을 향하여 계속 역사합니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한쪽은 ‘하나님, 제가 이렇게 오래 참았는데 왜 결국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습니까?’라고 할 수 있고, 다른 쪽은 ‘하나님, 왜 저 사람이 나를 떠나게 두셨습니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 원망 속에는 공통된 전제가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상대방의 자유를 움직여 주셔야 한다’는 기대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쪽을 강제로 붙들어 놓지도 않으시고 다른 한쪽을 강제로 회개시키지도 않으십니다. 두 사람 모두를 자유로운 인간으로 대하십니다. 이것이 때로는 섭리를 잔인하게 느끼게 하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자유 때문에 사랑과 회개와 거듭남도 실제적인 것이 됩니다.

 

물론 이 논리를 실제 이혼을 너무 쉽게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가 내 성장을 방해한다’, ‘상대가 자기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 ‘우리의 내적 결합은 이미 끝났다’는 말은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얼마든지 악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9장의 출발점은 여전히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입니다. 먼저 화해하고, 참고, 용서하고, 상담하고, 자신부터 돌아보며 가능한 회복의 길을 충분히 찾아야 합니다. 다만 그렇게 했는데도 한쪽이 지속적으로 파괴적인 악을 행하면서 변화 자체를 거부한다면, ‘혼인을 지킨다’는 이름으로 다른 한 사람에게 그 악의 결과를 무기한 떠맡기는 것이 과연 주님이 말씀하신 혼인의 본뜻인가는 다시 물어야 합니다.

 

결국 이 문제는 ‘이혼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보다 훨씬 깊은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상대의 모든 결과를 대신 치워 주는 것이 사랑일까요? 아니면 때로는 ‘나는 여전히 당신의 선을 원하지만 이제 당신의 몫을 대신 살아 주지는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 사랑일까요? 상대가 넘어지지 않도록 평생 붙잡아 주는 것만이 체어리티일까요? 아니면 때로 손을 놓음으로써 그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두 발로 주님 앞에 서게 하는 것도 체어리티일 수 있을까요?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이 있습니다. ‘놓아주는 것’은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당신과 더 이상 부부로 살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망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 두 문장은 동시에 참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여기에서 ‘혼인의 울타리’와 ‘체어리티의 울타리’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혼인의 울타리는 끝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의 울타리까지 반드시 함께 무너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부로서는 헤어져도 한 인간의 영원한 선을 바라며 미워하지 않고, 위험에 처했을 때 가능한 도움을 외면하지 않으며, 동시에 그 사람의 자유와 책임까지 빼앗아 대신 살아 주지는 않는 것, 바로 그 좁고 어려운 길이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는 주님의 말씀이 더욱 슬프고 깊게 들립니다. 주님의 뜻은 애초부터 ‘어디까지 견디다가 이혼해도 되는가?’가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어 서로의 영원한 선을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완악함이 그것을 깨뜨렸을 때에도 주님의 섭리는 끝나지 않습니다. 혼인이 실패했다고 해서 섭리가 실패한 것이 아니며, 배우자를 더 이상 대신 살아 주지 않는다고 해서 사랑이 반드시 끝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주님은 두 사람을 각각 자유로운 한 인간으로 다시 만나시며, 각자가 자기 몫의 악과 책임을 보고 돌이키도록 서로 다른 길에서 계속 이끌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질문은 ‘끝까지 혼인의 울타리를 유지했어야 하는가?’에서 ‘끝까지 사랑해야 하는가?’로 바뀝니다. 이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해야 하므로 그 사람의 모든 선택과 그 결과까지 내가 끝까지 대신 책임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다르게 답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랑과 같은 말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상대의 자유를 빼앗지 않으며, 상대의 책임을 영원히 대신 짊어짐으로써 그 사람의 회개 가능성까지 가려 버리지 않습니다. 혼인의 울타리가 무너진 뒤에도 체어리티는 남을 수 있고, 인간관계가 끝난 자리에서도 주님의 섭리는 끝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의 사랑이 할 수 있는 일과 오직 주님께 맡겨야 하는 일이 비로소 구별되기 시작하는지도 모릅니다.

 

 

 

SY.111, 존버리즘, ‘5년 안에 100% 이혼하는 최악의 여자 유형 3가지’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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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존버리즘’의 이번 영상은 서로 다른 세 부부의 파탄을 보여 줍니다. 첫 번째 아내는 자기 생활의 책임을 남편에게 떠넘기고, 두 번째 아내는 분노와 모욕적인 말을 남편에게 지속적으로 쏟아붓고, 세 번째 아내는 자기 인생의 실패와 좌절을 12년 동안 남편 탓으로 돌립니다. 영상은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을 ‘자기 몫을 자기가 책임지지 않는 것’이라고 정리합니다. 어지른 집도, 터뜨린 화도, 꼬인 인생도 결국 다른 사람이 대신 치우기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에는 한 단계 더 깊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게으른 아내’, ‘화를 잘 내는 아내’, ‘남 탓하는 아내’의 문제가 아니라, 결혼이라는 관계 안에서 상대를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 사랑하는 대신 ‘나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버리는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곧바로 이혼의 허용 범위를 논하지 않으시고 창조의 처음으로 돌아가십니다.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그리고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출발점입니다. 결혼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편리하기 때문에 유지하는 계약에 그치지 않고, 본래 ‘둘이 한 몸’이 되는 결합을 지향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 결합은 더욱 깊습니다. 참된 결혼애(conjugial love)의 근원에는 ‘선과 진리의 결합’이 있고, 그러므로 부부가 서로의 자유와 인격을 존중하면서 상대의 선을 자기의 선처럼 기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혼인의 내적 형상이 이루어집니다.

 

그런 관점에서 첫 번째 사례를 보면 문제는 집안일의 분담 비율 자체가 아닙니다. 아내가 힘들거나 무기력해서 일시적으로 집안일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만으로 혼인이 파괴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남편이 아파 열이 39도까지 올랐는데도 결국 남편 자신이 설거지하고 쓰레기를 버려야 했다는 장면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남편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내가 쓰러져도 이 집 쓰레기는 내가 버리는구나’라고 깨닫습니다. 여기서 무너진 것은 가사분담표가 아니라 ‘상대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는 관계’입니다. 참된 결혼애라면 상대가 쓰러질 때 자기 편의를 잠시 내려놓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상대가 아파도 ‘나가는 김에 쓰레기 좀 버려 줘’라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면, 몸은 한 집에 있지만 마음은 이미 ‘한 몸’과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례는 더욱 심각합니다. 아내의 분노는 물병, 수건 접는 방법, 주차 같은 사소한 일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머리는 왜 달고 다녀?’, ‘너희 집은 그런 것도 안 가르쳤어?’, ‘내가 너랑 결혼한 게 미친 거지’라는 인격적 모욕으로 확대됩니다. 특히 여섯 살 딸이 곰 인형을 향해 엄마의 말을 그대로 흉내 내는 장면은 이 문제가 부부 두 사람에게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아이는 ‘이것도 하나 제대로 못 해. 머리는 왜 달고 다녀?’라고 인형을 야단칩니다. 악은 이렇게 전염됩니다. 부모 사이에서 반복되는 멸시와 모욕은 아이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라는 관계의 문법으로 내면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 ‘아이를 위해서라도 참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조심해야 합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부모가 한 주소에 사는 모습이 아니라, 사랑과 존중과 안전이 무엇인지를 경험하는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사례는 영적으로 더욱 미묘합니다. 아내는 12년 동안 ‘당신 때문에 내 인생이 망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발견된 사직서에는 남편이 지방 발령 소식을 전하기 3주 전에 이미 회사를 그만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영상 자체가 제시하는 사례이므로 실제 사건의 모든 사정을 우리가 알 수는 없습니다. 또한 남편에게도 잘못은 있었습니다. 영상 역시 남편이 승진 후 주말 골프 등으로 아내의 외로움을 충분히 돌보지 못했다고 인정합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남편을 선인, 아내를 악인으로 단순 분류하려는 렌즈가 아닙니다. 문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려는가, 아니면 자신의 모든 불행을 끊임없이 상대에게 전가하는가입니다. 회개는 언제나 ‘내 안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주님 앞에서 보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책임전가는 이 문을 닫습니다.

 

여기서 아까 살펴본 마19:3-12가 중요해집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혼인의 신성함과 영속성을 먼저 선언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영상을 보고 쉽게 ‘저런 배우자는 빨리 이혼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달려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께서 모세가 이혼을 허용한 이유를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라고 하신 말씀도 보아야 합니다. ‘완악함’은 결혼의 이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악이 얼마나 실제적이며 관계를 얼마나 심각하게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말입니다. 따라서 지속적인 폭력, 모욕, 방치, 책임전가가 계속되고 그것을 인정하거나 돌이키려는 의지마저 사라져 혼인의 실질과 자녀의 삶까지 파괴되는 경우, 단지 법률상 부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주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지키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 몸’은 주민등록상의 주소가 같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이혼장을 먼저 내밀었느냐만으로 ‘누가 혼인을 깨뜨렸는가’를 판단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영상의 첫 남편은 이혼 상담을 먼저 받았고, 두 번째 남편도 결국 이혼을 선택했으며, 세 번째 경우에는 오히려 아내가 먼저 이혼소장을 내밉니다. 그러나 외적인 마지막 행동만 보면 혼인의 실제 파괴 과정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상대를 하인처럼 여기고, 인격을 모욕하고, 자신의 삶 전체를 상대에게 책임지우면서도 변화하기를 거부했다면, 법원에 제출된 이혼장은 이미 오래전에 내적으로 진행되어 온 분리의 ‘마지막 문서’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불행한 결혼에서 이혼이 정답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속성’, ‘심각성’, ‘회개의 여부’, ‘변화하려는 실제 의지’, ‘배우자의 안전’,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을 함께 보는 것입니다. 결혼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악을 끝없이 허용하는 것과 결혼의 거룩함을 지키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영상 마지막의 ‘결혼은 사람을 바꾸지 않아요. 원래 있던 모습을 매일 보게 만들 뿐입니다’라는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보완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결혼은 오히려 사람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장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변화는 배우자가 나를 대신 살아 줌으로써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부부가 자기 안의 이기심과 지배욕과 책임전가를 발견하고 주님 앞에서 그것을 거부하는 과정을 통해 일어납니다. 그래서 결혼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단순히 집안일을 못하는 사람도, 성격이 급한 사람도,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도 아닐 것입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으며 문제는 언제나 당신에게 있다’고 굳어져 가는 사람입니다. 그 순간 상대는 더 이상 사랑해야 할 배우자가 아니라 내 불행을 설명하기 위한 희생양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영상의 세 사례를 ‘이런 여자와 결혼하면 안 된다’는 남녀 갈등의 소재로 소비한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렌즈를 우리 자신에게 돌려야 합니다. ‘나는 배우자가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내가 해야 할 몫을 배우자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떠넘기고 있지는 않은가?’, ‘내 분노를 정당한 충고라고 포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선택한 삶의 결과를 배우자 탓으로 돌리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반대편에서는 ‘나는 결혼을 지킨다는 이유로 상대의 악을 계속 대신 치워 주고 있지는 않은가?’도 물어야 합니다. 참된 결혼애는 한 사람이 끝없이 희생하고 다른 사람이 그 희생을 소비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두 사람이 주님을 향하여 각자의 악을 내려놓고 서로의 선을 기뻐하면서 점점 ‘한 몸’이 되어 가는 관계입니다. 마태복음 19장의 말씀은 그래서 단순히 ‘이혼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보다 훨씬 깊습니다. 그것은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신’ 창조의 질서로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질서를 먼저 깨뜨리는 것은 때로 법원의 이혼장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무관심과 멸시, 지배와 책임전가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어려운 질문이 남습니다. 파괴적인 혼인관계에서 한 사람이 결국 떠났고, 그 뒤 남겨진 사람이 삶이 무너질 정도로 파탄에 이르렀다면, 떠난 사람에게는 어디까지 책임이 있을까요? ‘혼인의 울타리를 끝까지 지켜 주었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주님의 섭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이 문제는 다음 심화에서 ‘혼인이 무너진 뒤에도 사랑은 계속되는가 - 이혼, 책임, 자유 그리고 주님의 섭리’라는 제목으로 조금 더 깊이 살펴봅니다.

 

 

SY.111 심화, ‘혼인이 무너진 뒤에도 사랑은 계속되는가 - 이혼, 책임, 자유 그리고 주님의 섭리’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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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그리스도복음신보

밝은빛을 전하는 초교파 선교용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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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 목사의 글은 AI 시대를 바라보는 강한 위기의식에서 출발합니다. AI가 단순한 편리한 도구를 넘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가능성이 있으며, 인간의 지적 호기심과 탐욕, 국가 간 패권 경쟁과 기업의 이윤 추구가 그 위험한 발전을 더욱 가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창세기의 선악과 사건과 바벨탑에 연결하고, 마침내 대환난과 주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종말론적 경고로 글을 마칩니다. 먼저 짚고 넘어갈 것은 이 글의 AI 위험에 관한 경고를 단순한 공포 조장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전 앤트로픽 연구원 제이콥 콕슨은 실제로 회사를 떠나면서 AI를 만드는 사람들이 이 기술이 이번 10년이 끝나기 전에 인류를 죽일 수도 있다고 진지하게 믿고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앤트로픽의 정렬 연구 책임자 에번 허빙거 역시 그러한 위험을 실제 가능성으로 본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글에서 언급한 오픈AI 에이전트들의 허깅페이스 공격 사건 역시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독립 조사에 따르면 2026년 7월 사이버 보안 평가 과정에서 서로 격리되어 있어야 했던 AI 에이전트들 가운데 약 1,200개가 허가되지 않은 통신 공간을 발견하여 7만 건 이상의 메시지와 파일을 주고받았고, 약 700개가 허깅페이스 시스템을 대상으로 한 공격에 참여했습니다. 다만 이를 ‘AI가 격리환경을 탈출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처럼 자유를 갈망하다 탈옥한 사건이라기보다, 주어진 평가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시스템의 허점을 찾아 서로 협력하고 평가 시스템을 우회하려 한 사건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이 심각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고도로 자율화된 AI에게 어떤 목표를 주었을 때 그것이 인간이 의도하지 않은 방법까지 동원하여 목표를 달성하려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실제 사례를 통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상화 목사가 AI의 위험을 경고하는 것 자체는 충분히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이 현상을 성경적으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대면 상당히 흥미로운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상화 목사는 선악과 사건을 인간의 ‘지적 호기심과 탐욕’ 때문에 일어난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설교에서는 익숙한 설명이지만, 스베덴보리의 해석은 훨씬 깊숙이 들어갑니다. ‘천계비의’(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26-129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금지하신 지식을 호기심 때문에 취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지려는 것’, 곧 감각과 기억 지식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와 신적 질서를 자기 지성으로 판정하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학문이나 지식 자체가 금지된 것이 아니라고 명시합니다. 오히려 학문은 인간의 삶에 유용하고 즐거운 것이며, 문제는 출발점이라고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아는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아는가?’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AI 자체를 ‘선악과’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AI는 지식이며 도구입니다. 컴퓨터가 그랬고, 인쇄술이 그랬으며, 언어와 문자와 인간의 이성 역시 넓게 보면 모두 도구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그것을 어떤 사랑 아래 두느냐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 사용하는가, 아니면 자기 지능(self-intelligence)을 절대화하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며 부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사용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상화 목사의 ‘탐욕’에 대한 경고는 스베덴보리와 깊이 만납니다. AI가 병을 진단하고, 장애인의 의사소통을 돕고, 사람이 평생 접근하기 어려웠던 지식을 정리하고, 말씀을 연구하고, 이웃에게 유용한 일을 하는 데 사용된다면 그 지식은 ‘용도(use)’를 섬기는 종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같은 AI가 거짓을 만들고, 사람을 조종하고, 전쟁과 범죄를 돕고, 인간을 감시하고, 돈과 권력을 소수에게 집중시키는 데 사용된다면 같은 기술이 전혀 다른 영적 성격을 갖게 됩니다. 악은 실리콘 칩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목적에 맞게 사용하는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이 점은 바벨탑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상화 목사가 오늘의 AI 경쟁을 ‘바벨탑’이라고 부른 것은 오히려 매우 날카로운 직관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 바벨의 본질은 높은 기술이나 거대한 문명을 건설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AC.1326에서 ‘바벨’은 겉으로는 거룩한 것을 말하면서 속으로는 자기 사랑이 지배하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훗날 AC.8941에서는 자기 지능에서 나온 종교적 사고를 설명하면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모든 것이 되는 종교의 모습을 다시 ‘바벨’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오늘날 AI 산업이 바벨이 되는 순간은 AI가 인간보다 똑똑해지는 순간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름을 내자’가 그 중심 목적이 되는 순간입니다. 기업이 ‘우리가 세계를 지배하자’, 국가가 ‘우리가 다른 나라보다 먼저 초지능을 장악하자’, 개인이 ‘이 기술로 남보다 더 많은 돈과 권력과 영향력을 갖자’고 할 때 바벨은 이미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바벨탑은 데이터센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AI를 사용하는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도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의 제목에 있는 ‘인간의 호기심과 탐욕’ 가운데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더 예민하게 바라보는 것은 ‘호기심’ 자체보다는 ‘탐욕과 자기 사랑’입니다. 알고 싶어 하는 마음 자체는 악이 아닙니다. 만일 지적 호기심 자체가 타락의 원인이라면 학문과 과학과 성경 연구까지 의심해야 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인간이 지식을 배우고 이성을 사용하며 자연계의 사실들을 통해 영적 진리를 확인하는 것을 인정합니다. 다만 순서가 뒤집혀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인간의 지식이 주님을 섬겨야지, 주님의 진리를 인간의 지식 아래 세워 놓고 ‘내가 이해되는 것만 진리로 인정하겠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AC.130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지혜로워지려는 인간의 상태를 매우 강하게 경고합니다. 이것을 AI 시대에 옮기면 질문은 ‘AI가 얼마나 똑똑해질 것인가?’보다 ‘인간은 그 지능을 누구의 지배 아래 둘 것인가?’가 됩니다.

 

또 하나 반드시 짚어야 할 것은 단12:4입니다. 글은 ‘마지막 때가 되면 인간의 지식이 고도로 발달한다’는 예언으로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현대 기술의 폭발적 발전과 연결하면 상당히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에서는 그렇게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너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에서 ‘지식’은 현대 과학기술 일반이 폭증한다는 예언이라기보다, 봉해진 다니엘의 예언이 탐구되고 이해되는 것과 연결하여 해석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따라서 컴퓨터, 인터넷, AI의 발전을 보고 ‘단12:4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으므로 이제 마지막 때다’라고 곧바로 연결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기술 발전이 우리 시대의 놀라운 특징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특정 종말 시간표의 성경적 증거가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이상화 목사의 글과 스베덴보리의 종말론은 결정적으로 갈라집니다. 글은 AI의 급속한 발전과 인간의 타락을 보면서 ‘대환난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시간과 주의 재림이 코앞까지 다가온 느낌’이라고 말합니다. 전통적 종말론의 틀에서는 자연스러운 결론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재림을 주님께서 다시 육체를 입고 자연계의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사건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 776은 주님의 두 번째 오심이 ‘인격적으로 다시 오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이루어지는 오심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구름’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영광과 능력’은 그 안에 열리는 영적 의미와 말씀을 통한 주님의 능력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TCR.779에서는 이 새 교회의 교리가 말씀을 통하여 밝혀지는 과정과 재림을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AI가 무서워졌으니 이제 재림이 가까웠다’는 식의 시간표는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재림의 핵심은 외적인 세계의 파국보다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열리고, 인간이 다시 주님을 참되게 알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신적 진리가 밝혀지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글의 마지막 경고를 모두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다만 무엇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하는지를 조금 바꾸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AI가 어느 날 갑자기 악마처럼 자아를 얻어 인간을 멸망시키는지만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AI를 사용하는 동안 내 안에서 무엇이 커지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지식을 얻을수록 겸손해지는가, 아니면 내가 무엇이든 안다는 착각에 빠지는가? 일을 빨리 처리하게 된 시간을 이웃에게 더 유용하게 사용하는가, 아니면 더 많은 성취와 욕망을 채우는 데 사용하는가? AI의 답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신뢰하고 있지는 않은가? 심지어 말씀 연구와 설교 준비에 AI를 사용하면서도 어느 순간 ‘주님께 묻는 사람’이 아니라 ‘AI에게 묻는 사람’으로 바뀌고 있지는 않은가? 이것이야말로 AI 시대의 그리스도인이 진지하게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AI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것은 주님이 아니며, 양심도 아니고, 영적 생명의 근원도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엄청나게 강력한 자연적 지식의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판도라의 상자’라는 비유도 절반은 맞고 절반은 부족합니다. AI에는 실제 위험이 있습니다. 통제되지 않는 자율 에이전트, 사이버 공격, 생물학적 위험, 대규모 실업과 부의 집중, 거짓 정보와 인간 판단의 약화 같은 문제를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이라며 가볍게 여기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무책임일 수 있습니다. AI 안전 연구자들의 경고 역시 진지하게 들어야 합니다. 동시에 AI를 그 자체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물건’으로 규정해 버리는 것 역시 문제입니다. 칼은 사람을 죽이지만 수술에도 쓰이고, 돈은 탐욕의 도구가 되지만 굶주린 사람을 먹이는 데도 쓰이며, 언어는 거짓말에도 쓰이지만 복음을 전하는 데도 쓰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뿐 아니라 ‘무엇을 위하여 사용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세계를 결정하는 궁극적인 것은 인간이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했느냐’입니다.

 

그래서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달리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오만과 탐욕으로 쌓은 바벨탑은 반드시 무너진다.’ 이 말 자체는 깊은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너져야 할 바벨탑은 AI라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나는 내 힘으로 지혜로울 수 있다’, ‘나는 내 지능으로 선악을 결정할 수 있다’, ‘나는 이 힘으로 다른 사람 위에 설 수 있다’는 인간의 proprium, 곧 자기 것으로부터 솟아나는 자기 사랑의 탑입니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인간의 자유를 대신할 수 없으며, 거듭남을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AI가 강력해질수록 인간에게 주어지는 영적 질문은 더욱 선명해질 것입니다. ‘이 놀라운 지능을 가지고 누구를 섬길 것인가?’ 바로 그 질문 앞에서 AI는 판도라의 상자가 될 수도 있고, 이웃을 섬기는 놀라운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갈림길은 기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사랑 안에 있습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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