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의 제목만 보면 조금 불편할 수 있습니다. ‘모은 돈 없는 30대 여자들의 충격적인 특징들’이라는 표현은 자칫 특정 성별과 세대를 하나의 유형으로 묶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상 속 ‘윤서 씨’를 남자로 바꾸어도 이야기의 본질은 거의 달라지지 않습니다. 월급이 들어오자마자 카드값이 빠져나가고, 할부와 리볼빙이 이어지고, 주변 사람들의 소비 수준에 맞추며, 여행과 공연에는 ‘경험이니까’라는 이유를 붙이고, 목돈이 생기면 ‘이 정도 보상은 괜찮다’며 써버리는 모습은 남녀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욕구와 자기관리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 영상의 제목은 사실 이렇게 바꾸어도 좋을 것입니다. ‘왜 나는 열심히 사는데 남는 것이 없을까?’

 

영상의 첫 장면은 상징적입니다. 월급 290만 원이 들어오지만 몇 시간 뒤 카드값 190만 원이 빠져나갑니다. 결혼자금 통장에는 남자친구가 100만 원을 넣지만 윤서 씨가 넣은 돈은 없습니다. 문제는 윤서 씨가 명품에 중독되었거나 거대한 빚을 숨긴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택시 1만 4천 원, 라떼 5천5백 원, 점심 1만 3천 원, 동료들에게 산 커피, 배달음식, 니트 한 벌처럼 각각의 소비에는 모두 설명 가능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돈을 많이 썼다고 생각하지 않은 하루의 지출이 15만 원이 됩니다. 여기에 노트북, 에어컨, 항공권, 코트, 필라테스 할부가 겹치면서 ‘이번 달에는 아무것도 사지 않아도’ 이미 42만 원이 나갑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흥미롭게 작동합니다. 악은 언제나 거대한 모습으로만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 삶을 지배하는 많은 것은 ‘이 정도는 괜찮아’라는 작은 허용들의 축적입니다. 5천 원짜리 커피 한 잔이 악이라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여행이나 좋은 식사나 공연을 즐기는 것도 그 자체로 악이 아닙니다. 문제는 내 삶의 전체 질서를 보지 않은 채 순간순간의 욕구마다 ‘이것쯤은 괜찮다’고 허락하는 습관입니다. 하나하나는 합리적으로 보여도 그것들이 모여 내 삶 전체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영상 속 윤서 씨에게는 그래서 ‘큰 사치’가 없습니다. 대신 모든 소비에 ‘이유’가 있습니다. 택시는 지각하지 않기 위해, 커피는 직장생활을 위해, 비싼 집들이 선물은 초라해 보이지 않기 위해, 브라이덜 샤워는 친구를 축하하기 위해, 콘서트와 여행은 물건이 아니라 ‘경험’이기 때문에, 비싼 월세는 안전하고 출퇴근하기 편하기 때문에, 필라테스는 건강을 위해, 성과급 소비는 ‘1년 동안 고생한 나에게 주는 보상’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모든 욕구에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proprium을 생각하게 됩니다. proprium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대로 ‘나는 이것을 원한다’고 드러내기보다 종종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냅니다. ‘이건 사치가 아니라 경험이야’,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어’, ‘열심히 일했으니 이 정도는 나에게 해줘야지’, ‘다들 하는데 나만 빠질 수 없잖아.’ 각각의 문장은 어느 정도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질문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인가?’만이 아니라 ‘나는 왜 그 사실을 지금 붙들고 있는가?’입니다. 진실은 때때로 욕구를 섬기는 변호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영상에서 두 번째 특징으로 지적하는 ‘내 월급이 아니라 주변 사람을 보고 소비 수준을 정한다’는 문제도 그래서 중요합니다. 윤서 씨는 같은 직장 동기의 집들이에 23만 원짜리 선물을 가져갑니다. 다른 사람들은 3만~5만 원 정도의 선물을 가져왔는데도 ‘싸 보이는 것을 들고 가기 싫어서’였습니다. 친구들의 모임에서도 빠지면 눈에 띌까 봐 돈을 냅니다. 결국 소비의 기준이 ‘나에게 정말 필요한가?’에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로 이동합니다.

 

이것은 돈보다 더 깊은 영적 문제를 보여줍니다. 사람은 자신의 행복을 다른 사람의 시선에 맡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가진 것의 가치는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유용한가가 아니라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더 비싼 식사, 더 멋진 여행이 필요한 이유도 그것 자체의 유용보다 ‘나는 이 정도 수준의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때 돈은 생활의 도구가 아니라 자아를 표현하고 방어하는 수단이 됩니다.

 

반대로 같은 직장에 같은 시기에 들어가 비슷한 월급을 받은 동기는 해외여행을 포기하고 본가에서 출퇴근하며 차도 사지 않았습니다. 윤서 씨는 그런 동기를 ‘좀 재미없게 산다’고 생각했지만 몇 년 뒤 그 동기에게는 전세보증금이 생겼습니다. 영상은 이를 매우 인상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날 그 방에서 가장 비싼 선물을 들고 온 사람이 모아둔 돈은 가장 적은 사람이었다.’ 지금 보이는 풍요와 실제로 축적된 삶의 기반이 서로 반대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절제’의 의미를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절제는 좋은 것을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누릴 수 있는 좋은 것을 더 큰 선을 위해 스스로 제한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여행이 나빠서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집을 마련한다는 더 큰 목적 때문에 이번 여행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커피가 나빠서 마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세운 목적을 위해 오늘의 욕구를 뒤로 미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제에는 반드시 ‘미래’가 들어 있습니다. 지금의 나뿐 아니라 미래의 나까지 사랑할 수 있어야 절제가 가능합니다.

 

이 영상에서 ‘경험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는 대목은 특히 오늘날의 소비문화를 정확하게 건드립니다. 윤서 씨는 오사카 콘서트에 120만 원을 쓰면서 ‘물건이 아니라 경험이고 평생 기억에 남을 밤’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상에 따르면 그는 직장생활 8년 동안 해마다 여러 차례 해외여행을 했고 여행비로만 2천만 원 이상을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 휴대전화에는 8년치 여행 사진이 쌓였지만 통장에는 200만 원 정도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여행하지 말라’는 결론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천국의 삶은 금욕 자체를 선으로 삼지 않습니다. 문제는 질서입니다. 유용을 위한 휴식, 가족과의 여행, 아름다운 것을 경험하는 기쁨은 충분히 좋은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은 남으니까 괜찮다’는 말 역시 무제한적인 소비를 정당화하는 교리가 될 수 있습니다. 경험도 소비입니다. 기억은 남지만 지불한 돈 역시 사라집니다. 따라서 ‘좋은 경험인가?’와 함께 ‘지금 내 형편에 맞는 경험인가?’도 물어야 합니다.

 

더 심각한 장면은 어머니가 8년 동안 매달 5만 원씩 넣어준 청약통장을 깨는 부분입니다. 어머니는 ‘이건 절대 깨지 마. 나중에 너 집 구할 때 쓰는 거야’라며 딸의 미래를 위해 돈을 모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윤서 씨는 설 연휴 여행 잔금을 내기 위해 그 통장을 해지합니다. 그러면서 ‘어차피 결혼하면 남자친구 쪽에서 집은 해결되잖아’라고 생각합니다. 이 순간 문제는 더 이상 단순한 소비습관이 아닙니다. 자기 미래를 준비해야 할 책임을 다른 사람의 축적 위에 올려놓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남자친구의 말이 영상 전체를 관통합니다. ‘나는 네가 돈을 못 모으는 것보다 달라질 생각이 없다는 게 무서워.’ 그리고 이어서 ‘나는 그 돈을 9년 동안 모았어. 차도 안 바꾸고 여행도 1년에 한 번만 가면서. 그게 너랑 같이 쓰기 싫다는 게 아니야. 같이 모을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다는 거야.’ 이것은 결혼에 관한 상당히 중요한 통찰입니다.

 

결혼은 ‘내 것과 네 것을 합치는 것’이기 전에 ‘내 삶의 방향과 네 삶의 방향을 합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에게 8천만 원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 200만 원밖에 없다는 사실만으로 결혼의 적합성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삶에는 질병, 가족부양, 학업, 실직, 사업 실패 등 수많은 사정이 있습니다. 많은 돈을 모았다고 반드시 성실한 것도 아니며 모은 돈이 적다고 반드시 무책임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돈을 대하는 ‘방향’이 완전히 다르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한 사람은 오늘의 만족을 줄여 미래를 준비하고, 다른 사람은 미래의 자원을 끌어와 오늘을 즐깁니다. 한 사람은 ‘먼저 모으고 남은 돈을 쓰자’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먼저 쓰고 남으면 모으자’고 생각합니다. 이런 두 사람이 결혼하면 단순히 통장만 합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상의 표현대로 ‘두 사람이 돈을 쓰는 방식도 한 통장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결혼 전에 서로의 연봉만 확인할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한 ‘사랑의 방향’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에서 스베덴보리가 바라보는 참된 결혼의 핵심에는 두 마음의 결합이 있습니다. 결혼은 몸과 재산과 주거의 결합만이 아니라 삶의 목적과 의지의 결합을 향해 갑니다. 그렇다면 돈은 결혼의 본질은 아니지만 두 사람의 내면을 드러내는 매우 현실적인 창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에 기꺼이 돈을 쓰는지, 무엇을 위해 기꺼이 참는지, 무엇을 위해 저축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가 어느 정도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영상 속에서 가장 흥미로운 숫자는 어쩌면 8천만 원과 200만 원이 아닙니다. 남자친구는 9년 동안 매주 일요일 밤 10분씩 자신이 쓴 돈을 기록했습니다. 반면 윤서 씨는 자신의 월 지출이 월세를 제외하고 약 150만 원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 최근 3개월 평균 카드 사용액은 238만 원이었습니다. 배달은 한 달 23번, 택시는 19번이었습니다. 남자친구가 특별한 투자 천재여서 돈을 모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돈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도 의미심장합니다. 거듭남 역시 먼저 ‘보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지 않는 사람은 그것을 고칠 수도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많이 쓰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 기록을 보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화를 잘 안 내’, ‘나는 남을 판단하지 않아’, ‘나는 돈에 욕심이 없어’, ‘나는 가족을 위해 살고 있어’라는 자기평가와 실제 하루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다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진리는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자신이 아니라 실제 자신을 보게 합니다.

 

그래서 가계부와 영적 자기성찰 사이에는 뜻밖의 닮은 점이 있습니다. 둘 다 ‘기록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것입니다. 돈도 작은 지출들이 모여 큰 흐름이 되고, 영적 삶도 작은 허용들이 쌓여 습관이 됩니다. 5천 원짜리 커피 한 잔이 가계를 무너뜨리지 않듯 한 번의 짜증이 사람을 악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반복되는 작은 선택은 어느 순간 삶의 방향이 됩니다.

 

그리고 영상 속 윤서 씨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영상은 일곱 번째 특징을 ‘돈이 없는 이유를 문제로 보지 않는다’고 정리합니다. 그는 돈이 없다는 사실 자체보다 ‘결혼하면 합치면 된다’, ‘집은 남자친구 돈으로 해결하면 된다’, ‘혼수는 엄마가 해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자신의 삶에서 생긴 문제를 자신의 변화가 아니라 외부의 자원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이것은 돈을 넘어서는 인간의 오래된 성향입니다. ‘환경이 좋아지면 나는 괜찮아질 거야’, ‘좋은 배우자를 만나면 행복해질 거야’, ‘돈이 많아지면 절약할 거야’, ‘시간이 생기면 말씀을 읽을 거야’, ‘상대가 먼저 달라지면 나도 달라질 거야.’ 그러나 거듭남은 언제나 ‘지금 여기의 나’에게서 시작됩니다. 주님은 내가 다른 환경에 들어간 뒤의 나를 먼저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작은 것들을 통해 나를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 영상의 핵심은 ‘30대 여자는 얼마를 모아야 하는가?’가 아닙니다. 더구나 ‘모은 돈이 적은 사람은 결혼상대로 부적합하다’는 결론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지금까지 어떤 방향으로 살아왔으며, 그 방향에 문제가 있음을 보았을 때 바꿀 의지가 있는가?’입니다. 남자친구 역시 액수가 아니라 바로 그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달라질 생각이 없어 보여서’였습니다.

 

이것은 주님 앞에서 우리의 영적 삶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미 완성된 사람이어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고쳐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진리의 빛 가운데 보았을 때 계속 변명하며 붙드는가, 아니면 ‘주님, 이것이 제 안에 있었군요’ 하며 돌이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완성된 상태보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의 장면이 의미심장합니다. 어머니는 딸이 결혼할 때 집을 구하는 데 쓰라고 8년 동안 청약통장을 부어주었지만 딸은 그 돈을 여행과 카드값에 사용했습니다. 딸은 ‘결혼하면 남자친구의 통장이 집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상은 이를 ‘엄마는 딸이 결혼하면 그 통장이 집이 될 거라고 믿고 있었고, 딸은 결혼하면 남자친구의 통장이 집이 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둘 중 어느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정리합니다.

 

참 인상적인 문장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사라진 것은 통장만이 아닙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오늘 무엇인가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능력이 약해져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8년 동안 매달 5만 원씩 미래를 선택했지만 딸은 그 미래를 현재의 여행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차이는 액수의 차이가 아니라 시간에 대한 태도의 차이입니다.

 

거듭남 역시 그렇습니다. 오늘의 proprium은 언제나 ‘지금’을 원합니다. 지금 인정받고 싶고, 지금 화를 내고 싶고, 지금 즐기고 싶고, 지금 내 뜻대로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더 먼 것을 보게 하십니다. 지금 한 번 참는 것, 지금 한 번 정직해지는 것, 지금 한 번 욕구를 내려놓는 것이 즉시 큰 기쁨을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작은 선택들이 모여 영원한 성품을 형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축’은 그 자체가 영적인 선은 아니지만 ‘절제’와 ‘질서’와 ‘미래를 위한 현재의 포기’를 연습하는 매우 현실적인 장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돈을 많이 모았다는 사실 자체가 영적 성숙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탐욕 때문에 돈을 모을 수도 있고, 이웃을 외면하면서 자기 재산만 쌓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모았는가’보다 ‘무엇을 사랑하기 때문에 모으고, 무엇을 사랑하기 때문에 쓰는가’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을 보고 통장 잔액보다 먼저 물어볼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무엇에는 너무 쉽게 “이 정도는 괜찮아”라고 말하는가?’, ‘내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소비하는가?’, ‘내가 오늘 누리는 것 때문에 미래의 누군가가 대가를 치르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문제를 발견했을 때 나는 변명하는 사람인가, 방향을 바꾸는 사람인가?’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마지막에 비추어야 할 곳은 윤서 씨의 통장이 아니라 결국 우리 자신의 내면입니다. ‘왜 이것밖에 없지?’라는 질문을 돈에만 던질 필요는 없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는데 내 안에 체어리티는 얼마나 쌓였는가, 수없이 말씀을 읽었는데 내 성품에는 무엇이 남았는가, 많은 은혜와 진리를 받았는데 그것들은 실제 삶에서 어떤 선으로 축적되었는가를 돌아볼 수도 있습니다.

 

돈은 쓰면 사라지지만 선은 행할수록 사람 안에 남습니다. 오늘의 작은 선택이 쌓여 통장의 잔액이 되듯, 매일의 작은 의지와 행동이 쌓여 결국 그 사람의 삶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이 던지는 가장 깊은 질문은 ‘서른세 살에 얼마를 모았는가?’가 아닐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쌓으며 살아왔는가?’ 그리고 ‘지금의 방향으로 계속 간다면 내 안에는 과연 무엇이 남게 될 것인가?’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

AC.469-474 심화

2,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은 어떻게 다른가?’

 

창1:26에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되어 있고, 창5:1에는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드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형상’과 ‘모양’을 비슷한 의미의 반복으로 읽기 쉽지만, AC.472-473에서 스베덴보리는 두 표현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은 영적 인간을, ‘하나님의 모양’(likeness of God)은 천적 인간을 의미하며, ‘형상은 모양을 위한 준비 단계’라고 설명합니다.

 

이 구별은 AC.472의 ‘창조하다’(create)와 ‘만들다’(make)의 구별과 연결됩니다. 사람이 새롭게 ‘창조된다’는 것은 거듭나서 영적 인간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영적 인간이 된 사람이 더욱 온전하게 ‘만들어진다’는 것은 천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두 설명을 함께 놓으면 ‘창조-영적 인간-형상’과 ‘만듦-천적 인간-모양’이라는 거듭남의 질서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거듭남의 시작과 진행 가운데 주님의 질서가 사람 안에 나타나기 시작한 상태이고, 하나님의 모양은 그 질서가 사랑과 삶에 더욱 온전히 자리 잡은 상태입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선과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것이 진리임을 인정하며, 그 진리에 따라 자신의 삶을 바로잡아 갑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는 아직 싸움이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과 주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하고, 진리이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며 순종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미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주님의 것이 그의 생각과 삶 안에서 비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질서가 더욱 깊어집니다. 그는 단지 진리가 명령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데 머물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고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보고 행합니다. 그래서 AC.473은 천적 인간이 주님의 ‘모양’인 이유를 ‘전적으로 주님의 다스림을 받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를 외적으로 억압하고 통제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의지와 사랑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기쁘게 받아들이므로,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점점 그의 자유와 기쁨이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모양’이 ‘실제적인 닮음’(real replica)이라는 표현도 사람이 신적인 존재가 되거나 주님과 동일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언제나 피조물이고 생명 자체는 오직 주님께 있습니다. 다만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려는 것을 내려놓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 살아갈수록, 그의 생각과 의지와 행위 안에서 주님의 사랑과 질서가 더욱 실제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적 인간은 영적 인간보다 더욱 실제적인 ‘모양’이 됩니다.

 

그러므로 ‘형상에서 모양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외형이 점점 하나님처럼 변한다는 뜻이 아니라, 거듭남의 중심이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진리를 알고 믿고 순종하는 데서 시작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진리를 사람의 사랑과 의지에까지 심으십니다. 마침내 사람은 ‘진리이기 때문에 억지로 행하는 상태’에서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쁘게 행하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신앙이 사랑으로 들어가고, 진리가 선과 결합하며, 외적인 순종이 내적인 기쁨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태고교회를 ‘천적 교회’라고 부르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고유한 상태는 단순히 많은 진리를 알고 있었던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을 중심으로 살았으며, 그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는 퍼셉션을 누렸습니다. 그러므로 창5:1에서 태고교회를 다시 소개하면서 단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드셨다’고 하는 것은, 이 교회의 고유한 천적 상태를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차이는 거듭남이 어디를 향하여 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진리를 주셔서 먼저 당신의 ‘형상’을 이루시고, 거기에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 진리를 사랑과 결합시키고 우리의 의지와 삶 속에까지 심으셔서, 우리가 점점 당신의 ‘모양’을 닮아 가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목적은 단지 올바른 진리를 많이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가 사랑이 되고 그 사랑이 삶이 되어 주님의 선이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는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AC.469-474 심화 2)

 

 

 

AC.474, 창5:1,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나아간 태고교회’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4그러므로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태고교회의 출생 또는 번성(birth or propagation)이므

bygrace.kr

 

AC.469-474 심화 1, ‘태고교회는 왜 집안과 일가와 민족으로 구별되어 있었는가?’

AC.469-474 심화1, ‘태고교회는 왜 집안과 일가와 민족으로 구별되어 있었는가?’ AC.470-471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 시대의 사람들이 ‘집안’(house), ‘일가’(family), ‘민족’(nation)으로 구별되어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469-474 심화

1, ‘태고교회는 왜 집안과 일가와 민족으로 구별되어 있었는가?’

 

AC.470-471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 시대의 사람들이 ‘집안’(house), ‘일가’(family), ‘민족’(nation)으로 구별되어 살았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이 세 표현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가족 개념과 조금 다릅니다. 하나의 ‘집안’은 남편과 아내와 그 자녀들, 그리고 그 집안에 속하여 섬기는 몇몇 사람들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 집안이 서로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한 집에 함께 살지는 않으면서 하나의 ‘일가’를 이루었고, 다시 여러 일가가 하나의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이 구조는 ‘집안-일가-민족’으로 점차 확대되는 공동체의 질서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이 구조를 설명하는 이유는 단순히 태고 시대의 사회생활을 알려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AC.471은 그들이 이렇게 구별되어 살았던 이유가 ‘교회가 온전하게 보존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밝힙니다. 각 집안과 일가가 자기 부모에게 의존함으로써 부모로부터 이어진 사랑과 참된 예배 안에 머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혈연을 따라 집안과 일가가 구별되어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사랑과 신앙과 예배의 고유한 성격을 보존하는 교회적 질서와도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이 각 집안의 ‘고유한 성향’(genius)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녀뿐 아니라 먼 후손들에게까지 부모로부터 어떤 특정한 성향이 이어졌으며, 그 특징이 얼굴과 여러 고유한 특성에서도 드러날 정도였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집안과 일가가 서로 무분별하게 뒤섞이지 않고 각각의 고유성을 유지하는 것은 단순한 혈통의 보존을 넘어,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공유하던 사랑과 신앙과 예배의 성격을 보존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구별’과 ‘분열’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 집안과 일가는 서로 달랐지만, 그 다름 자체가 교회의 분열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질서가 천국의 모습을 살아 있게 나타내는 것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천국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동체가 있으며, 각 공동체는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다른 공동체와 구별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공동체가 주님을 중심으로 하나의 천국을 이룹니다. 태고교회의 여러 집안과 일가와 민족 역시 서로 고유한 성격을 가지면서 하나의 교회를 이루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의 나라를 살아 있게 표상’하였습니다.

 

이것은 태고교회를 하나의 획일적인 집단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단서를 줍니다. 태고교회라는 큰 틀 안에는 여러 집안과 일가와 민족이 있었고, 각각의 공동체에는 서로 구별되는 고유한 성향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어느 한 공동체에서 교리나 예배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해서 태고교회에 속한 모든 공동체가 동시에 똑같은 변화를 겪었다고 전제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집단이 기존의 사랑과 신앙의 질서에서 벗어나더라도 다른 집안과 일가들은 자신들에게 전해진 교회적 성격을 계속 보존할 수 있는 구조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은 우리가 창4와 창5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창4에서는 ‘가인’과 그 후손들의 이름 아래 태고교회 안에서 일어난 교리적 변화와 분파들의 전개가 묘사되고, 창5에서는 태고교회 자체와 그 후대의 여러 교회가 이어지는 과정이 묘사됩니다. 그렇다면 가인으로 표상되는 어떤 교회 계열이 태고교회의 원래 질서에서 분리되거나 변질되었다고 해서, 태고교회에 속한 다른 모든 집안과 일가와 민족까지 함께 사라졌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70-471이 보여 주는 공동체 구조는 같은 넓은 태고교회 시대 안에서 서로 다른 교회 상태와 계열이 존재할 수 있었음을 이해하게 하는 중요한 배경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은 남겨 두어야 합니다. AC.470-471만으로 창4의 가인 계열과 창5의 계열이 정확히 같은 시기에 나란히 진행되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두 번호가 직접 밝히는 것은 태고 시대의 교회가 여러 집안과 일가와 민족으로 구별되어 있었으며, 그 구별이 교회를 보존하고 천국의 여러 공동체를 표상하는 질서였다는 사실입니다. 창4와 창5의 구체적인 관계는 관련 AC의 설명을 더 종합하여 판단해야 합니다. 다만 ‘한 계열이 등장하면 이전의 모든 공동체가 사라지고 다음 하나의 교회로 통째로 교체된다’는 단선적인 그림만으로 태고교회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결국 태고교회의 하나 됨은 모든 집안과 일가가 똑같아지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각 공동체가 주님께 받은 고유한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보존하면서도 모두가 주님을 중심으로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데 있었습니다. 천국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동체가 서로 다르면서도 주님 안에서 하나의 천국을 이루듯, 태고교회의 집안과 일가와 민족도 서로 구별되면서 하나의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태고교회의 공동체 질서는 바로 이러한 ‘다양성 안의 하나 됨’이라는 천국의 질서를 지상에서 살아 있게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AC.469-474 심화 1)

 

 

 

AC.469-474 심화 2,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은 어떻게 다른가?’

AC.469-474 심화2,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은 어떻게 다른가?’ 창1:26에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되어 있고, 창5:1에는 하나님이 사람을 ‘하

bygrace.kr

 

AC.469, 창5:1, '계보의 책, 영적으로 창조되어 천적으로 된 태고교회'(AC.469-474)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This is the book of the births of man.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 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 (창5:1) AC.469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