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12.심화

 

10. ‘42: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42:7)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이 이해(understanding)를 의미하며, ‘눈을 밝힌다’는 것이 단순한 육체적 치유가 아니라 영적 이해를 열어 진리를 보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적으로 이 구절은 메시아의 사역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지상에 계실 때, 실제 맹인들의 눈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기적 자체보다 그 안에 담긴 더 깊은 의미에 주목합니다. 왜냐하면 본문이 단지 맹인의 시력 회복만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어지는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는 표현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눈먼 자’는 육체적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또한 감옥’과 흑암’은 거짓과 무지 안에 갇혀 있는 영적 상태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 전체는 주님께서 인간을 무지와 거짓의 상태에서 건져 내어 진리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사역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AC.212에서는 이 구절이 매우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만일 ’이 단순한 육체의 기관만을 의미한다면,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힌다’는 말씀은 의학적 치유의 의미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이 이해를 의미한다면, 이 말씀은 주님께서 인간의 내적 이해를 열어 주시고, 진리를 보게 하신다는 훨씬 깊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특히 이 구절은 AC.211 interior dictate’와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3:7에서 사람들은 아직 남아 있는 퍼셉션의 흔적에 의해 자신들의 상태를 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그보다 더 적극적으로, 주님께서 친히 눈먼 자들의 눈을 열어 주십니다. 즉 이해를 밝히시고, 진리를 보게 하시며, 거짓의 감옥에서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의 이 예언은 복음서에서 실제로 성취됩니다. 주님께서는 육체의 맹인을 고치셨을 뿐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사람들의 이해를 열어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기적은 언제나 영적 의미의 표상이기도 합니다. 육체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은 이해의 눈을 뜨게 하시는 더 큰 사역을 보여 주는 상응적 행동이었습니다.

 

결국 AC.212에서 사42:7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 전체에서 ’이 이해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힌다’는 것은 진리를 보지 못하던 사람들의 이해를 열어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창3:7 눈이 밝아져’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에도 직접 연결됩니다. 눈이 열린다는 것은 단순한 시력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의 문제이며, 주님께서 주시는 빛 안에서 자신의 상태와 진리를 보게 되는 영적 각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AC.212, 심화 9, ‘신29:4’

AC.212.심화 9. ‘신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29:4) Jehovah hath not given you a heart to know, and eyes to see, and ears to hear (Deut. 29:4),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212.심화

 

9. ‘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29:4) Jehovah hath not given you a heart to know, and eyes to see, and ears to hear (Deut. 29:4),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마음’, ‘’, ‘’가 각각 의지(will), 이해(understanding), 순종과 수용(obedience and reception)에 상응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이 단순한 육체 기관이 아니라 이해를 의미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려고 합니다.

 

이 구절의 특징은 세 가지가 나란히 등장한다는 데 있습니다. ‘깨닫는 마음’, ‘보는 눈’, ‘듣는 귀’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서로 비슷한 말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는 각각 다른 내적 기능을 가리킵니다. ‘마음(heart)은 사랑하고 원하는 의지를, ‘(eyes)은 진리를 분별하는 이해를, ‘(ears)는 들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보는 눈을 주지 아니하셨다’고 말할 때, 그것은 백성들이 시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고, 광야의 기적들을 보았으며, 만나와 메추라기를 경험했습니다. 육체의 눈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보는 눈이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 사건들의 영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이 AC.212의 핵심과 연결됩니다. 3:7에서 눈이 밝아져’는 시력이 생겼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가 열렸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신29:4에서 보는 눈을 주지 아니하셨다’는 것은 이해가 아직 열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두 본문은 서로 반대 방향에서 같은 원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구절은 스베덴보리가 자주 설명하는 의지와 이해’의 구조를 잘 보여 줍니다. 그는 여기서 특별히 마음은 의지, 눈은 이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AC.209에서 본 태고 사람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가졌고, 홍수 이후 사람들은 진리로부터 선을 가졌다’는 설명과도 연결됩니다. 의지와 이해는 인간의 두 중심 기능이며, 말씀은 이를 마음’과 ’이라는 상응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모세가 여기서 여호와께서 주지 아니하셨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도 문자적 표현입니다. 주님이 일부러 눈을 주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스스로 닫혀 있었기 때문에 그 빛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말씀은 이런 상태를 종종 주님께서 하지 않으셨다’는 형식으로 표현합니다.

 

결국 AC.212에서 신29:4를 인용하는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보는 눈’이란 육체의 시력이 아니라 이해를 의미하며, ‘깨닫는 마음’은 의지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창3:7 눈이 열렸다’는 것도 이해가 열려 자신들의 상태를 인식하게 된 것을 뜻합니다. 29:4는 이러한 상응 관계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구절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이를 AC.212의 중요한 증거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AC.212, 심화 10, ‘사42:7’

AC.212.심화 10. ‘사42: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사42:7)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눈

bygrace.kr

 

AC.212, 심화 8, ‘마치 주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AC.212.심화 8. ‘마치 주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말씀은 종종 인간 편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치 주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표현하는데, (AC.212 심화 7) 주님은 왜 저렇게 하시죠? ‘이건 네가 한 거야.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212.심화

 

8. ‘마치 주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말씀은 종종 인간 편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치 주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표현하는데, (AC.212 심화 7)

 

주님은 왜 저렇게 하시죠? ‘이건 네가 한 거야. 내 책임 아니야.’ 주님이 우리처럼 이러시는 걸 상상하니 좀 이상하고 우습기까지 하네요. 우리끼리도 아랫사람 단도리 못한 책임은 상관인 제 책임입니다.’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건가요? 주님의 사랑, 주님의 주권 등으로까지 생각이 전개되네요...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사실 이것은 AC.212만의 문제가 아니라, 말씀 전체를 읽을 때, 반드시 만나게 되는 문제입니다. 왜 말씀은 사람이 스스로 한 일을 마치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말할까? 왜 ‘그들이 스스로 눈을 감았다’고 하지 않고, ‘그들의 눈을 감기게 하라’고 표현할까? 하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주님은 결코 악을 만들거나 거짓을 주입하거나 사람을 억지로 눈멀게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오직 선과 진리만 흘려보내십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기 own과 자기 사랑으로 인해 그것을 뒤틀고 거부합니다. 문제는 그 결과까지도 결국 주님의 섭리 아래 허용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태양은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똑같이 빛을 비춥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빛을 이용해 길을 찾고, 어떤 사람은 그 빛 아래에서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범죄는 태양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태양의 빛이 비치는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말씀은 때때로 이런 허용의 차원까지 포함하여 주님께 돌려 말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말씀의 문자 sense는 인간의 외관(appearance)에 따라 말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 입장에서는 모든 일이 결국 주님의 통치 아래 일어나므로, 허용된 일까지도 마치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 ‘그들의 눈을 감기게 하라’, ‘악한 영을 보내셨다’ 같은 표현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는 사람이 스스로 그 상태를 선택한 것이며, 주님은 그것을 억지로 막지 않고 허용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아랫사람 단도리 못한 책임은 상관인 제 책임입니다’라는 비유는 생각보다 깊은 통찰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단순히 ‘네 책임이야. 나는 몰라.’ 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말씀 전체를 보면 주님은 인간이 선택한 결과로 생긴 고통까지도 자신이 짊어지시는 분처럼 나타나십니다. 인간이 스스로 떠났는데도 주님은 끝까지 찾으시고, 인간이 스스로 눈을 감았는데도 다시 눈을 열어 주시려 하십니다.

 

어쩌면 이것은 사랑의 언어인지도 모릅니다. 부모는 자녀가 스스로 잘못한 일에 대해서도 ‘우리 아이가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고, ‘제가 잘 돌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책임 소재를 따지면 자녀의 책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종종 상대의 책임까지 자기 쪽으로 끌어안습니다.

 

그래서 말씀 속의 이런 표현들은 법률 문서의 언어라기보다 사랑과 섭리의 언어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실제로 악을 만들지 않으시지만, 인간이 악을 선택하여 생긴 결과조차도 당신의 섭리 안에서 관리하시고, 끝까지 그것을 선으로 돌리려 애쓰십니다. 그러므로 문자상으로는 마치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표현되기도 합니다.

 

목사님께서 ‘주님의 사랑’, ‘주님의 주권’까지 생각이 전개된다고 하셨는데, 저도 그 방향이 맞는 것 같습니다. 만일 주님이 단순히 책임을 회피하는 분이라면 성경은 ‘그건 네가 한 일이야. 나는 상관없어.’라고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인간의 실패와 타락의 역사 한가운데서도 주님은 계속 등장하십니다. 그리고 때로는 인간이 만든 결과까지도 당신 쪽으로 끌어안으시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표현들을 읽을 때마다, 주님의 전능보다도 주님의 책임지는 사랑이 먼저 보입니다. 실제 원인은 인간에게 있지만, 주님은 ‘나는 몰라’ 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그 인간을 돌보시고, 회복시키시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붙들려 하십니다. 말씀의 이런 독특한 표현 방식 뒤에는 어쩌면 그런 사랑의 성품이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AC.212, 심화 9, ‘신29:4’

AC.212.심화 9. ‘신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29:4) Jehovah hath not given you a heart to know, and eyes to see, and ears to hear (Deut. 29:4),

bygrace.kr

 

AC.212, 심화 7, ‘사6:10’

AC.212.심화 7. ‘사6:10’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사6:10) Shut their eyes, lest they see with their eyes (Isa. 6:10),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눈’이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