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존버리즘’의 이번 영상은 서로 다른 세 부부의 파탄을 보여 줍니다. 첫 번째 아내는 자기 생활의 책임을 남편에게 떠넘기고, 두 번째 아내는 분노와 모욕적인 말을 남편에게 지속적으로 쏟아붓고, 세 번째 아내는 자기 인생의 실패와 좌절을 12년 동안 남편 탓으로 돌립니다. 영상은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을 ‘자기 몫을 자기가 책임지지 않는 것’이라고 정리합니다. 어지른 집도, 터뜨린 화도, 꼬인 인생도 결국 다른 사람이 대신 치우기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에는 한 단계 더 깊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게으른 아내’, ‘화를 잘 내는 아내’, ‘남 탓하는 아내’의 문제가 아니라, 결혼이라는 관계 안에서 상대를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 사랑하는 대신 ‘나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버리는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곧바로 이혼의 허용 범위를 논하지 않으시고 창조의 처음으로 돌아가십니다.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그리고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출발점입니다. 결혼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편리하기 때문에 유지하는 계약에 그치지 않고, 본래 ‘둘이 한 몸’이 되는 결합을 지향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 결합은 더욱 깊습니다. 참된 결혼애(conjugial love)의 근원에는 ‘선과 진리의 결합’이 있고, 그러므로 부부가 서로의 자유와 인격을 존중하면서 상대의 선을 자기의 선처럼 기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혼인의 내적 형상이 이루어집니다.

 

그런 관점에서 첫 번째 사례를 보면 문제는 집안일의 분담 비율 자체가 아닙니다. 아내가 힘들거나 무기력해서 일시적으로 집안일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만으로 혼인이 파괴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남편이 아파 열이 39도까지 올랐는데도 결국 남편 자신이 설거지하고 쓰레기를 버려야 했다는 장면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남편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내가 쓰러져도 이 집 쓰레기는 내가 버리는구나’라고 깨닫습니다. 여기서 무너진 것은 가사분담표가 아니라 ‘상대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는 관계’입니다. 참된 결혼애라면 상대가 쓰러질 때 자기 편의를 잠시 내려놓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상대가 아파도 ‘나가는 김에 쓰레기 좀 버려 줘’라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면, 몸은 한 집에 있지만 마음은 이미 ‘한 몸’과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례는 더욱 심각합니다. 아내의 분노는 물병, 수건 접는 방법, 주차 같은 사소한 일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머리는 왜 달고 다녀?’, ‘너희 집은 그런 것도 안 가르쳤어?’, ‘내가 너랑 결혼한 게 미친 거지’라는 인격적 모욕으로 확대됩니다. 특히 여섯 살 딸이 곰 인형을 향해 엄마의 말을 그대로 흉내 내는 장면은 이 문제가 부부 두 사람에게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아이는 ‘이것도 하나 제대로 못 해. 머리는 왜 달고 다녀?’라고 인형을 야단칩니다. 악은 이렇게 전염됩니다. 부모 사이에서 반복되는 멸시와 모욕은 아이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라는 관계의 문법으로 내면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 ‘아이를 위해서라도 참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조심해야 합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부모가 한 주소에 사는 모습이 아니라, 사랑과 존중과 안전이 무엇인지를 경험하는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사례는 영적으로 더욱 미묘합니다. 아내는 12년 동안 ‘당신 때문에 내 인생이 망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발견된 사직서에는 남편이 지방 발령 소식을 전하기 3주 전에 이미 회사를 그만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영상 자체가 제시하는 사례이므로 실제 사건의 모든 사정을 우리가 알 수는 없습니다. 또한 남편에게도 잘못은 있었습니다. 영상 역시 남편이 승진 후 주말 골프 등으로 아내의 외로움을 충분히 돌보지 못했다고 인정합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남편을 선인, 아내를 악인으로 단순 분류하려는 렌즈가 아닙니다. 문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려는가, 아니면 자신의 모든 불행을 끊임없이 상대에게 전가하는가입니다. 회개는 언제나 ‘내 안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주님 앞에서 보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책임전가는 이 문을 닫습니다.

 

여기서 아까 살펴본 마19:3-12가 중요해집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혼인의 신성함과 영속성을 먼저 선언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영상을 보고 쉽게 ‘저런 배우자는 빨리 이혼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달려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께서 모세가 이혼을 허용한 이유를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라고 하신 말씀도 보아야 합니다. ‘완악함’은 결혼의 이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악이 얼마나 실제적이며 관계를 얼마나 심각하게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말입니다. 따라서 지속적인 폭력, 모욕, 방치, 책임전가가 계속되고 그것을 인정하거나 돌이키려는 의지마저 사라져 혼인의 실질과 자녀의 삶까지 파괴되는 경우, 단지 법률상 부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주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지키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 몸’은 주민등록상의 주소가 같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이혼장을 먼저 내밀었느냐만으로 ‘누가 혼인을 깨뜨렸는가’를 판단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영상의 첫 남편은 이혼 상담을 먼저 받았고, 두 번째 남편도 결국 이혼을 선택했으며, 세 번째 경우에는 오히려 아내가 먼저 이혼소장을 내밉니다. 그러나 외적인 마지막 행동만 보면 혼인의 실제 파괴 과정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상대를 하인처럼 여기고, 인격을 모욕하고, 자신의 삶 전체를 상대에게 책임지우면서도 변화하기를 거부했다면, 법원에 제출된 이혼장은 이미 오래전에 내적으로 진행되어 온 분리의 ‘마지막 문서’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불행한 결혼에서 이혼이 정답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속성’, ‘심각성’, ‘회개의 여부’, ‘변화하려는 실제 의지’, ‘배우자의 안전’,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을 함께 보는 것입니다. 결혼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악을 끝없이 허용하는 것과 결혼의 거룩함을 지키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영상 마지막의 ‘결혼은 사람을 바꾸지 않아요. 원래 있던 모습을 매일 보게 만들 뿐입니다’라는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보완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결혼은 오히려 사람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장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변화는 배우자가 나를 대신 살아 줌으로써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부부가 자기 안의 이기심과 지배욕과 책임전가를 발견하고 주님 앞에서 그것을 거부하는 과정을 통해 일어납니다. 그래서 결혼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단순히 집안일을 못하는 사람도, 성격이 급한 사람도,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도 아닐 것입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으며 문제는 언제나 당신에게 있다’고 굳어져 가는 사람입니다. 그 순간 상대는 더 이상 사랑해야 할 배우자가 아니라 내 불행을 설명하기 위한 희생양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영상의 세 사례를 ‘이런 여자와 결혼하면 안 된다’는 남녀 갈등의 소재로 소비한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렌즈를 우리 자신에게 돌려야 합니다. ‘나는 배우자가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내가 해야 할 몫을 배우자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떠넘기고 있지는 않은가?’, ‘내 분노를 정당한 충고라고 포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선택한 삶의 결과를 배우자 탓으로 돌리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반대편에서는 ‘나는 결혼을 지킨다는 이유로 상대의 악을 계속 대신 치워 주고 있지는 않은가?’도 물어야 합니다. 참된 결혼애는 한 사람이 끝없이 희생하고 다른 사람이 그 희생을 소비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두 사람이 주님을 향하여 각자의 악을 내려놓고 서로의 선을 기뻐하면서 점점 ‘한 몸’이 되어 가는 관계입니다. 마태복음 19장의 말씀은 그래서 단순히 ‘이혼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보다 훨씬 깊습니다. 그것은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신’ 창조의 질서로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질서를 먼저 깨뜨리는 것은 때로 법원의 이혼장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무관심과 멸시, 지배와 책임전가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어려운 질문이 남습니다. 파괴적인 혼인관계에서 한 사람이 결국 떠났고, 그 뒤 남겨진 사람이 삶이 무너질 정도로 파탄에 이르렀다면, 떠난 사람에게는 어디까지 책임이 있을까요? ‘혼인의 울타리를 끝까지 지켜 주었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주님의 섭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이 문제는 다음 심화에서 ‘혼인이 무너진 뒤에도 사랑은 계속되는가 - 이혼, 책임, 자유 그리고 주님의 섭리’라는 제목으로 조금 더 깊이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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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그리스도복음신보

밝은빛을 전하는 초교파 선교용 신문

www.cgnews.kr

 

 

이상화 목사의 글은 AI 시대를 바라보는 강한 위기의식에서 출발합니다. AI가 단순한 편리한 도구를 넘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가능성이 있으며, 인간의 지적 호기심과 탐욕, 국가 간 패권 경쟁과 기업의 이윤 추구가 그 위험한 발전을 더욱 가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창세기의 선악과 사건과 바벨탑에 연결하고, 마침내 대환난과 주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종말론적 경고로 글을 마칩니다. 먼저 짚고 넘어갈 것은 이 글의 AI 위험에 관한 경고를 단순한 공포 조장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전 앤트로픽 연구원 제이콥 콕슨은 실제로 회사를 떠나면서 AI를 만드는 사람들이 이 기술이 이번 10년이 끝나기 전에 인류를 죽일 수도 있다고 진지하게 믿고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앤트로픽의 정렬 연구 책임자 에번 허빙거 역시 그러한 위험을 실제 가능성으로 본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글에서 언급한 오픈AI 에이전트들의 허깅페이스 공격 사건 역시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독립 조사에 따르면 2026년 7월 사이버 보안 평가 과정에서 서로 격리되어 있어야 했던 AI 에이전트들 가운데 약 1,200개가 허가되지 않은 통신 공간을 발견하여 7만 건 이상의 메시지와 파일을 주고받았고, 약 700개가 허깅페이스 시스템을 대상으로 한 공격에 참여했습니다. 다만 이를 ‘AI가 격리환경을 탈출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처럼 자유를 갈망하다 탈옥한 사건이라기보다, 주어진 평가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시스템의 허점을 찾아 서로 협력하고 평가 시스템을 우회하려 한 사건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이 심각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고도로 자율화된 AI에게 어떤 목표를 주었을 때 그것이 인간이 의도하지 않은 방법까지 동원하여 목표를 달성하려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실제 사례를 통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상화 목사가 AI의 위험을 경고하는 것 자체는 충분히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이 현상을 성경적으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대면 상당히 흥미로운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상화 목사는 선악과 사건을 인간의 ‘지적 호기심과 탐욕’ 때문에 일어난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설교에서는 익숙한 설명이지만, 스베덴보리의 해석은 훨씬 깊숙이 들어갑니다. ‘천계비의’(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26-129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금지하신 지식을 호기심 때문에 취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지려는 것’, 곧 감각과 기억 지식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와 신적 질서를 자기 지성으로 판정하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학문이나 지식 자체가 금지된 것이 아니라고 명시합니다. 오히려 학문은 인간의 삶에 유용하고 즐거운 것이며, 문제는 출발점이라고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아는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아는가?’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AI 자체를 ‘선악과’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AI는 지식이며 도구입니다. 컴퓨터가 그랬고, 인쇄술이 그랬으며, 언어와 문자와 인간의 이성 역시 넓게 보면 모두 도구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그것을 어떤 사랑 아래 두느냐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 사용하는가, 아니면 자기 지능(self-intelligence)을 절대화하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며 부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사용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상화 목사의 ‘탐욕’에 대한 경고는 스베덴보리와 깊이 만납니다. AI가 병을 진단하고, 장애인의 의사소통을 돕고, 사람이 평생 접근하기 어려웠던 지식을 정리하고, 말씀을 연구하고, 이웃에게 유용한 일을 하는 데 사용된다면 그 지식은 ‘용도(use)’를 섬기는 종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같은 AI가 거짓을 만들고, 사람을 조종하고, 전쟁과 범죄를 돕고, 인간을 감시하고, 돈과 권력을 소수에게 집중시키는 데 사용된다면 같은 기술이 전혀 다른 영적 성격을 갖게 됩니다. 악은 실리콘 칩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목적에 맞게 사용하는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이 점은 바벨탑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상화 목사가 오늘의 AI 경쟁을 ‘바벨탑’이라고 부른 것은 오히려 매우 날카로운 직관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 바벨의 본질은 높은 기술이나 거대한 문명을 건설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AC.1326에서 ‘바벨’은 겉으로는 거룩한 것을 말하면서 속으로는 자기 사랑이 지배하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훗날 AC.8941에서는 자기 지능에서 나온 종교적 사고를 설명하면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모든 것이 되는 종교의 모습을 다시 ‘바벨’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오늘날 AI 산업이 바벨이 되는 순간은 AI가 인간보다 똑똑해지는 순간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름을 내자’가 그 중심 목적이 되는 순간입니다. 기업이 ‘우리가 세계를 지배하자’, 국가가 ‘우리가 다른 나라보다 먼저 초지능을 장악하자’, 개인이 ‘이 기술로 남보다 더 많은 돈과 권력과 영향력을 갖자’고 할 때 바벨은 이미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바벨탑은 데이터센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AI를 사용하는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도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의 제목에 있는 ‘인간의 호기심과 탐욕’ 가운데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더 예민하게 바라보는 것은 ‘호기심’ 자체보다는 ‘탐욕과 자기 사랑’입니다. 알고 싶어 하는 마음 자체는 악이 아닙니다. 만일 지적 호기심 자체가 타락의 원인이라면 학문과 과학과 성경 연구까지 의심해야 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인간이 지식을 배우고 이성을 사용하며 자연계의 사실들을 통해 영적 진리를 확인하는 것을 인정합니다. 다만 순서가 뒤집혀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인간의 지식이 주님을 섬겨야지, 주님의 진리를 인간의 지식 아래 세워 놓고 ‘내가 이해되는 것만 진리로 인정하겠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AC.130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지혜로워지려는 인간의 상태를 매우 강하게 경고합니다. 이것을 AI 시대에 옮기면 질문은 ‘AI가 얼마나 똑똑해질 것인가?’보다 ‘인간은 그 지능을 누구의 지배 아래 둘 것인가?’가 됩니다.

 

또 하나 반드시 짚어야 할 것은 단12:4입니다. 글은 ‘마지막 때가 되면 인간의 지식이 고도로 발달한다’는 예언으로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현대 기술의 폭발적 발전과 연결하면 상당히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에서는 그렇게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너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에서 ‘지식’은 현대 과학기술 일반이 폭증한다는 예언이라기보다, 봉해진 다니엘의 예언이 탐구되고 이해되는 것과 연결하여 해석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따라서 컴퓨터, 인터넷, AI의 발전을 보고 ‘단12:4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으므로 이제 마지막 때다’라고 곧바로 연결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기술 발전이 우리 시대의 놀라운 특징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특정 종말 시간표의 성경적 증거가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이상화 목사의 글과 스베덴보리의 종말론은 결정적으로 갈라집니다. 글은 AI의 급속한 발전과 인간의 타락을 보면서 ‘대환난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시간과 주의 재림이 코앞까지 다가온 느낌’이라고 말합니다. 전통적 종말론의 틀에서는 자연스러운 결론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재림을 주님께서 다시 육체를 입고 자연계의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사건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 776은 주님의 두 번째 오심이 ‘인격적으로 다시 오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이루어지는 오심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구름’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영광과 능력’은 그 안에 열리는 영적 의미와 말씀을 통한 주님의 능력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TCR.779에서는 이 새 교회의 교리가 말씀을 통하여 밝혀지는 과정과 재림을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AI가 무서워졌으니 이제 재림이 가까웠다’는 식의 시간표는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재림의 핵심은 외적인 세계의 파국보다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열리고, 인간이 다시 주님을 참되게 알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신적 진리가 밝혀지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글의 마지막 경고를 모두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다만 무엇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하는지를 조금 바꾸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AI가 어느 날 갑자기 악마처럼 자아를 얻어 인간을 멸망시키는지만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AI를 사용하는 동안 내 안에서 무엇이 커지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지식을 얻을수록 겸손해지는가, 아니면 내가 무엇이든 안다는 착각에 빠지는가? 일을 빨리 처리하게 된 시간을 이웃에게 더 유용하게 사용하는가, 아니면 더 많은 성취와 욕망을 채우는 데 사용하는가? AI의 답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신뢰하고 있지는 않은가? 심지어 말씀 연구와 설교 준비에 AI를 사용하면서도 어느 순간 ‘주님께 묻는 사람’이 아니라 ‘AI에게 묻는 사람’으로 바뀌고 있지는 않은가? 이것이야말로 AI 시대의 그리스도인이 진지하게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AI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것은 주님이 아니며, 양심도 아니고, 영적 생명의 근원도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엄청나게 강력한 자연적 지식의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판도라의 상자’라는 비유도 절반은 맞고 절반은 부족합니다. AI에는 실제 위험이 있습니다. 통제되지 않는 자율 에이전트, 사이버 공격, 생물학적 위험, 대규모 실업과 부의 집중, 거짓 정보와 인간 판단의 약화 같은 문제를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이라며 가볍게 여기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무책임일 수 있습니다. AI 안전 연구자들의 경고 역시 진지하게 들어야 합니다. 동시에 AI를 그 자체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물건’으로 규정해 버리는 것 역시 문제입니다. 칼은 사람을 죽이지만 수술에도 쓰이고, 돈은 탐욕의 도구가 되지만 굶주린 사람을 먹이는 데도 쓰이며, 언어는 거짓말에도 쓰이지만 복음을 전하는 데도 쓰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뿐 아니라 ‘무엇을 위하여 사용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세계를 결정하는 궁극적인 것은 인간이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했느냐’입니다.

 

그래서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달리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오만과 탐욕으로 쌓은 바벨탑은 반드시 무너진다.’ 이 말 자체는 깊은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너져야 할 바벨탑은 AI라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나는 내 힘으로 지혜로울 수 있다’, ‘나는 내 지능으로 선악을 결정할 수 있다’, ‘나는 이 힘으로 다른 사람 위에 설 수 있다’는 인간의 proprium, 곧 자기 것으로부터 솟아나는 자기 사랑의 탑입니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인간의 자유를 대신할 수 없으며, 거듭남을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AI가 강력해질수록 인간에게 주어지는 영적 질문은 더욱 선명해질 것입니다. ‘이 놀라운 지능을 가지고 누구를 섬길 것인가?’ 바로 그 질문 앞에서 AI는 판도라의 상자가 될 수도 있고, 이웃을 섬기는 놀라운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갈림길은 기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사랑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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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외형에 따른 판단’입니다. 노재환은 칠순잔치에서 전자 건반으로 트로트를 연주하는 노인입니다. 호텔 매니저와 클래식 공연 관계자들의 눈에는 ‘고급 예술’의 세계와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뽕짝’으로 낮추어 불리고, 그는 제대로 평가받기도 전에 이미 어떤 부류의 사람으로 규정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참된 가치는 이런 외적 조건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의 직업이나 학력, 명성, 말투, 옷차림, 심지어 그가 세상에서 어떤 집단에 속해 있는가도 그 사람의 영적 실체 자체는 아닙니다. 영계에서 결국 드러나는 것은 그가 ‘무엇을 사랑했고, 그 사랑으로 무엇을 하며 살았는가’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핵심을 단순히 ‘트로트도 클래식만큼 훌륭하다’로 읽으면 조금 얕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더 중요한 질문은 ‘그 음악이 무엇을 섬기고 있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모든 지식과 재능과 직분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쓰임’(use)을 위한 수단입니다. 노재환이 클래식 무대를 떠난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은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립니다. 그는 치매를 앓는 할머니에게 자신의 뛰어난 클래식 연주를 들려주었지만 반응을 얻지 못합니다. 그런데 익숙한 트로트가 흘러나오자 어르신들이 노래하고 춤추기 시작합니다. 그는 그때 ‘내 음악이 향해야 할 곳은 사람들의 삶 속이다’라고 결심합니다. 이 이야기의 설정 자체는 다소 극적으로 만들어졌지만, 그 안에 담긴 질문은 깊습니다. ‘내가 가진 재능은 나를 드러내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선을 전달하기 위한 것인가?’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쓰임’은 단순히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라는 도덕적 권면보다 훨씬 깊습니다. 천국은 수많은 천사들이 각기 다른 기능을 수행하면서 하나의 ‘가장 큰 사람’(Grand Man, Maximus Homo)을 이루는 질서입니다. 눈은 눈의 일을 하고, 손은 손의 일을 하며, 심장은 심장의 일을 합니다. 손이 눈보다 열등한 것도 아니고 심장이 발보다 고귀해서 발을 멸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각 부분의 아름다움은 ‘전체를 위해 자기에게 맡겨진 쓰임을 얼마나 충실하게 수행하는가’에서 나타납니다. 그렇게 보면 클래식과 트로트의 문제도 ‘어느 음악이 더 높은가?’에서 ‘각각 어떤 사람에게 어떤 선한 쓰임을 행하는가?’로 옮겨갑니다. 수준의 차이를 부정할 필요도 없고, 예술적 훈련의 차이를 없앨 필요도 없습니다. ‘차이가 있음’과 ‘사람의 가치에 위아래가 있음’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더 흥미로운 부분은 노재환이 마침내 오페라 피아노 앞에 앉는 장면입니다. 그는 자신을 증명하려고 나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계속 ‘나는 칠순잔치 반주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막상 건반 앞에 앉자 감추어져 있던 능력이 드러납니다. 이야기 속 사람들은 그제야 그의 과거를 알고 태도를 바꿉니다. 여기에는 인간적인 한계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저 사람이 사실은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존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만일 노재환이 정말로 전설적인 피아니스트가 아니었다면 어떻습니까? 평생 칠순잔치에서 트로트만 연주했던 평범한 노인이었다면 그를 업신여겨도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이 질문이 이 이야기의 영적 핵심을 더 정확하게 드러냅니다.

 

주님이 사람을 보시는 방식은 ‘감춰진 천재성을 발견하는 방식’보다 더 깊습니다. 주님은 한 사람이 맡은 가장 작고 평범한 쓰임 안에서도 그의 사랑을 보십니다. 세상에서는 수천 명 앞에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훨씬 커 보이고, 어느 작은 잔칫집에서 어르신들의 노래에 반주하는 사람은 작아 보입니다. 그러나 천국의 질서에서는 그 외적인 규모가 결정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재능을 자기 명예를 위해 사용하는지, 아니면 이웃에게 기쁨과 유익을 주기 위해 사용하는지가 훨씬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사실 ‘골든핑거’라는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했는데도 노재환이 잔치를 망치지 않으려고 ‘제가 조금 더 조용히 연주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일 수 있습니다. 재능보다 그 재능을 지배하는 애정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이야기의 결말도 조금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클래식과 트로트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모두 함께 노래하고 춤추면서 ‘장르도 경계도 없는 하나 됨’으로 나아갑니다. 감동적인 결말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하나 됨은 ‘모든 차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천국은 무수한 차이가 완벽한 질서 안에서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하나입니다. 바이올린이 피아노가 될 필요가 없고, 피아노가 성악이 될 필요도 없습니다. 클래식은 클래식으로서, 트로트는 트로트로서 자기 쓰임을 다하면서 더 높은 선을 함께 섬길 때 진정한 하나 됨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차별하지 말자’는 말이 ‘분별하지 말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차이를 지워버리는 힘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을 올바른 질서 안에서 결합시키는 힘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이야기에서 ‘반주’라는 말 자체가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원고는 좋은 반주를 ‘앞으로 나서지 않고 조용히 뒷받침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지식도, 설교도, 신학도, 스베덴보리의 방대한 저작에 대한 이해도 결국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반주’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는 선을 섬겨야 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하며, 지식은 삶을 섬겨야 합니다. 아무리 정확한 진리라 해도 그것을 가진 사람이 자기 우월성을 드러내는 데 사용한다면, 어느 순간 ‘반주자가 주인공보다 더 큰 소리를 내는’ 일이 벌어집니다. 반대로 진리가 사랑을 받쳐 주고, 지식이 쓰임을 받쳐 주며, 재능이 이웃의 기쁨을 받쳐 줄 때 그것들은 비로소 제자리를 찾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상의 제목 ‘트로트 할아버지가 피아노 앞에 앉자’보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았을 때 더 중요한 순간은 ‘피아노 앞에 앉은 뒤 모두가 그의 정체를 알게 된 순간’이 아니라 ‘아무도 그의 정체를 몰랐을 때 그를 어떻게 대했는가’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 꽤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저 사람이 사실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어도 나는 부끄럽지 않을 만큼, 지금 그를 존중하고 있는가?’ 주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의 내면을 이미 아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외형으로 낮추어 보는 순간, 우리는 어쩌면 주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어떤 쓰임을 업신여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감동 서사의 가장 깊은 메시지는 그래서 ‘숨은 천재를 무시하지 말라’가 아니라 이것일 것입니다. ‘천재가 아니어도 함부로 대하지 말라. 주님 앞에서는 가장 작은 쓰임도 사랑으로 행해질 때 천국의 질서 안에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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