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75.심화

 

1. ‘성인전과 향기

 

제가 전에 수도원 공부를 할 때, 그 커리큘럼의 일부로 성인전을 많이 접할 수 있었는데, 거기엔 매우 자주 성인들의 임종 시, 또는 사후 무덤 주위에 향기 얘기가 많았어요. 성 분도 요셉 라브르라든지 리드비나 성녀라든지... 혹시 그런 사례들과 이 AC.175가 서로 연결될 수 있을까요?

 

 

네, 충분히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스베덴보리가 직접 ‘가톨릭 성인들의 향기 현상’ 자체를 논한 것은 아니지만, AC.175를 비롯한 그의 전체 상응(correspondence) 사상을 보면, 그런 현상을 단순 미신으로만 보지 않을 여지는 분명 있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에게 ‘향기(odor, fragrance)는 매우 중요한 영적 상응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영계에서는 각 영과 천사의 내적 상태가 일종의 atmosphere처럼 퍼져 나갑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때때로 향기로도 지각됩니다. 그는 천국적 사랑과 innocence와 체어리티 상태에서는 매우 부드럽고 아름다운 향기가 느껴질 수 있고, 반대로 지옥적 상태에서는 악취와 부패 냄새 같은 것이 corresponding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 상징이 아니라, 영적 상태 자체가 감각적 형태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175에서 천적 천사들과 연결된 상태 속에 어떤 sweetness peace atmosphere가 묘사되는 흐름은, 성인전들에 자주 나오는 ‘거룩한 향기’ 이야기와 상당히 흥미로운 평행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특히 수도원 전통에서는 어떤 성인들이 임종 때, 혹은 사후에 inexplicable fragrance를 남겼다는 기록이 반복해서 등장하지요. 성 요셉 라브르나 리드비나 같은 사례들도 그렇고, 동방교회나 가톨릭 전통 전체에 이런 기록이 적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적으로 해석해 보면, 만약 어떤 인간 안에 체어리티와 innocence와 주님 사랑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면, 그 영적 상태가 어떤 corresponding atmosphere로 외적으로도 표현될 가능성 자체는 충분히 있습니다. 특히 그는 천사들의 presence가 때때로 향기처럼 지각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heavenly affection fragrance와 자주 연결됩니다. 성경에서도 ‘향기로운 제물’, ‘그리스도의 향기’ 같은 표현이 반복되지요.

 

다만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라면 probably 그 향기 현상 자체를 saintliness의 절대 증거처럼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언제나 phenomenon 자체보다 affection life를 더 중요하게 봅니다. 즉 향기가 났느냐 안 났느냐보다, 실제로 그 사람이 어떤 love 안에서 살았는가가 본질입니다. 영적 현상은 때때로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본질 자체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목사님 연결은 굉장히 흥미롭고 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수도원 전통의 성인전들과 스베덴보리 사이에는 의외로 접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humility, innocence, 자기 부정, 주님 의존, heavenly peace 같은 themes는 상당히 닿아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 상태가 외적으로 atmosphere처럼 드러난다는 생각도 양쪽 모두에 존재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수도원 전통은 그것을 경건 체험 언어로 기록했고,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correspondence spiritual influx 언어로 설명하려 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표현 체계는 다르지만, 인간 안의 깊은 영적 상태가 외적 감각 세계에도 어떤 흔적을 남길 수 있다는 intuition은 서로 완전히 동떨어져 있지는 않습니다.

 

 

 

AC.175, 창2 뒤, ‘시체 같은 냄새가 향기로운 것으로 지각’

사람의 사후, 죽음에서 깨어나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The Resuscitation Of Man From Death, And His Entrance Into Eternal Life AC.175 향기로운 냄새가 지각되었는데, 그것은 마치 방부 처리된 시신의 냄새와 같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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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사후, 죽음에서 깨어나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The Resuscitation Of Man From Death, And His Entrance Into Eternal Life

 

AC.175

 

향기로운 냄새가 지각되었는데, 그것은 마치 방부 처리된 시신의 냄새와 같았습니다. 이는 천적 천사들이 함께 있을 때에는 시체 같은 냄새가 향기로운 것으로 지각되기 때문이며, 이러한 냄새가 지각되면 악한 영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됩니다. An aromatic odor was perceived, like that of an embalmed corpse, for when the celestial angels are present, the cadaverous odor is perceived as if it were aromatic, which when perceived by evil spirits prevents their approach.

 

 

해설

 

이 단락은 소생 과정에서 일어나는 ‘영적 감각의 전환’과 동시에, ‘보호의 질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매우 인상적인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냄새’라는 감각을 통해, 생명 상태의 변화가 단지 의식이나 생각의 차원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적 감각 전반에 걸쳐 일어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시체 같은 냄새’가 ‘향기로운 냄새’로 지각된다는 점입니다. 이는 냄새 그 자체가 바뀌었다기보다, ‘지각의 주체와 그 주위에 임재한 존재의 질서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천적 천사들이 임재할 때, 죽음과 관련된 것조차도 더 이상 부패나 혐오의 상징이 아니라, 질서 속에 보존된 상태로 지각됩니다. 즉, 죽음은 이 질서 안에서 이미 부패가 아니라 ‘통과’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냄새는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사랑과 상태의 상응입니다. 향기는 선과 평화, 천적 임재를 상징하며, 악취는 자기 사랑과 악한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시체 냄새’가 ‘향기’로 느껴집니다. 이는 죽음이 악이나 공포의 상태가 아니라, 천적 임재 안에서 질서 있게 거두어지는 과정임을 강하게 암시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향기로운 냄새가 ‘악한 영들을 막는 역할’을 한다는 설명입니다. 이는 방어가 싸움이나 대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태 자체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천적 천사들의 임재로 형성된 이 상태는, 악한 영들이 접근할 수 없는 분위기, 곧 영적 환경을 만듭니다. 악은 빛이나 진리와 싸우기보다는, 그러한 상태 자체를 견디지 못하고 물러납니다.

 

이 장면은 죽음 직후의 인간이 얼마나 세심하게 보호받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인간이 가장 연약한 상태에 놓일 때, 주님께서는 천적 천사들의 임재와 그에 상응하는 영적 환경을 통해, 악한 영향이 전혀 미치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이 보호는 외적 강제나 장벽이 아니라, 사랑과 질서에서 흘러나오는 향기와 같은 것입니다.

 

AC.175는 그래서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죽음은 악한 영들이 달려드는 혼란의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천적 임재로 인해 악이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상태로 열립니다. 향기로운 냄새로 표현된 이 장면은, 소생이 얼마나 평온하고, 질서 있으며, 자비로운 과정인지를 감각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심화

 

1. ‘성인전과 향기

 

 

AC.175, 심화 1, ‘성인전과 향기’

AC.175.심화 1. ‘성인전과 향기’ 제가 전에 수도원 공부를 할 때, 그 커리큘럼의 일부로 성인전을 많이 접할 수 있었는데, 거기엔 매우 자주 성인들의 임종 시, 또는 사후 무덤 주위에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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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4, 창2 뒤, ‘입 region’, ‘입 province’, ‘cogitative speech’

사람의 사후, 죽음에서 깨어나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The Resuscitation Of Man From Death, And His Entrance Into Eternal Life AC.174 그들의 얼굴이 인식된 뒤에, 그들은 입 region 부근에 어떤 변화를 일으켰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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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5/24)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1, ‘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 예수’, 77,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오늘은 2 일곱 번째, 마지막 시간으로, 본문은 23절로 25절, AC 글 번호로는 156번에서 167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23-25)

 

이 본문을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여자, 아내, 둘이 한 몸을 이루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다

 

라는 키워드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 본문 및 해설, 그리고 심화 리딩 주일설교 시작합니다.

 

 

 

AC.156, 창2:23,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AC.156-159)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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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7, 창2:23,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 own 관련 여러 구절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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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8, 창2:23, ‘man [vir]’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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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9, 창2:23, ‘속 사람, 겉 사람을 구별 못하게 된, 천적 인간의 후손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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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0, 창2:24,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AC.160-162)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0 ‘부모를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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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1, 창2:24,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를 푸는 열쇠, influx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1 이 태고교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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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2, 창2:24, ‘혼인의 법’(the law of marriages)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2 모든 진리와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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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3, 창2:25,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AC.163-167)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25) AC.163 그들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naked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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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4, 창2:25, ‘charity와 innocence로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own’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25) AC.164 사람의 own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순전히 악이며,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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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5, 창2:25, innocence를 의미하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25) AC.165 그들이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벌거벗음’(nakedness of wh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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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6, 창2:25, ‘여기에서 제시된 것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25) AC.166 이 장의 말씀 안에는 이러한 것들이 담겨 있으나,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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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7, 창2:25, ‘영적 해상도에 따른 말씀 이해’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25) AC.167 각 절마다 얼마나 많은 아르카나가 담겨 있는지를 누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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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그러니까 창2 마감은 여기까지이며, 아래는 창1, 창3의 흐름 속에서 살펴본 창2 AC 전체 요약 및 해설입니다. 오늘 리딩은 이것으로 대신하며, 글의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동물에게도 own이 있는가?

2. 동물과 생명

3. 동물과 인간의 차이

4. 2 AC 전체 요약 및 해설

 

 

1. 동물에게도 own이 있는가?

 

스베덴보리 관점으로 보면, 네, 어떤 의미에서는 동물에게도 일종의 ‘own’ 비슷한 것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proprium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여기 distinction(뚜렷한 차이, 대조)이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의 own(proprium)은 단순 본능이나 개별 성향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느끼는 상태, 곧 자아의식과 자유, 자기 사랑까지 포함하는 구조입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주체도 나’, ‘원하는 주체도 나’, ‘결정하는 주체도 나’라는 자기감(自己感)을 갖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proprium 때문에 인간은 주님을 거부할 수도 있고, 반대로 자유롭게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즉 인간의 own은 도덕적, 영적 책임과 연결됩니다.

 

반면 동물은 스베덴보리에게서는, 그러니까 스베덴보리가 볼 때에는 ‘생명 자체’를 가진 존재라기보다, ‘생명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cf. 2)에 가깝습니다. 그는 동물들이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instinct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인간처럼 자유로운 understandingwill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시 말해, 동물은 자기 자신을 독립 존재처럼 깊이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어진 affectioninstinct 안에서 움직입니다.

 

그래서 동물에게도 일종의 자기 보존 instinct, 습성, 기질은 있지만, 인간처럼 ‘나는 나 자신으로 산다’는 proprium은 없습니다. 동물은 자기 사랑 때문에 의식적으로 진리를 왜곡하거나, 위선적이거나, 자기 의를 세우거나, 주님을 거부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베덴보리는 evil 자체를 인간과 영들에게만 연결합니다. 동물은 악하지 않습니다. 단지 자기 종(species)에 맞는 natural affection 안에서 살아갈 뿐입니다.

 

이 차이를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자기 것처럼 움직이는 존재’이고, 인간은 ‘자기 자신을 독립 중심처럼 느끼는 존재(cf. 3)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차이 때문에 인간에게는 거듭남도 가능하고 타락도 가능하며, 천국과 지옥도 가능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동물들을 꽤 긍정적으로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동물은 인간처럼 자기 proprium으로 진리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자 자기 질서 안에서 놀라운 순종성과 질서를 드러냅니다. 그는 종종 동물 instinct 안에서도 주님의 질서를 봅니다. 벌, 새, 양, 말 같은 존재들의 instinct를 단순 기계 반응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정적 차이는 이것입니다. 동물은 영원한 spiritual individuality로 계속 살아가는 존재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인간만이 주님과 자유로운 reciprocal conjunction을 이룰 수 있는 존재로 설명됩니다. 왜냐하면 인간만이 self-conscious(자의식이 강한) proprium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동물에게도 자기 보존성과 개별 instinct라는 의미의 ‘자기성’(自己性)은 있지만, 인간의 proprium처럼 자유, 도덕, 영적 책임, 거듭남, 자기 사랑까지 포함하는 깊은 own은 아닙니다. 인간의 own은 천국도 지옥도 가능하게 하는 존재 구조이고, 동물의 instinct는 주어진 질서 안에서 움직이는 자연적 생명 흐름에 더 가깝다고 스베덴보리는 보는 것입니다.

 

 

2. 동물과 생명

 

아래는 위 1번 글의 ‘생명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라는 표현에 대한 설명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생명의 흐름에 따라 움직인다’는 표현은, 동물이 자기 안에 독립 생명 원천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자연적 생명 질서 안에서 instinct(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현대인이 들으면 약간 차갑거나 기계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데,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그 안에서 놀라운 신적 질서를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철새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가 계절 따라 수천 km를 이동하고, 거의 정확히 같은 장소를 찾아갑니다. 벌은 복잡한 육각 벌집을 만들고, 거미는 누가 설계도를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정교한 거미줄을 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것을 단순 ‘동물 개인의 독립 지혜’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자연계 안으로 흘러드는 질서와 생명의 표현으로 본 것입니다.

 

즉, 동물은 자기 스스로 깊이 숙고해서 ‘나는 이렇게 살아야겠다’ 결정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species(種) 안에 주어진 affectioninstinct 흐름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생명의 흐름에 따라 움직인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차이가 인간과 비교할 때 드러납니다. 인간은 instinct를 거스를 수 있습니다. 배워야 하고, 선택해야 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선택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사랑 때문에 진리를 왜곡할 수도 있고, 양심을 거스를 수도 있습니다. 반면 동물은 보통 자기 종에 맞는 질서 안에서 움직입니다. 늑대는 늑대답게, 새는 새답게 삽니다. 인간처럼 위선적이거나, 자기 영광 때문에 진리를 조작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동물은 어떤 면에서는 인간보다 ‘질서에 더 순종적’입니다. 물론 그것은 천사적 자유 때문이 아니라, 자연적 influx 안에서 instinct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동물은 주어진 affection 구조 안에서 relatively straight하게 움직입니다.

 

이를 아주 쉽게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운전대를 직접 잡은 존재 같습니다. 그래서 잘 갈 수도 있지만, 길을 잃고 절벽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반면 동물은 훨씬 강하게 자연 질서의 레일 위에서 움직입니다. 그래서 자기 species 본성을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 기계론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동물 instinct 안에 주님의 지혜 흔적이 있다고 감탄했습니다. 인간이 복잡한 계산 끝에 겨우 흉내 내는 것을, 동물은 instinct 안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해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것을 ‘생명의 흐름’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흐름에 따라 움직인다’는 말은, 동물이 단순 로봇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동물은 자기 독립 ego 중심으로 살기보다, 자연계 안으로 흘러드는 질서와 affection 안에서 움직이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동물은 인간처럼 spiritual evil의 주체가 되지는 않는다고 스베덴보리는 보는 것입니다.

 

 

3. 동물과 인간의 차이

 

아래는 위 1번 글의 ‘동물은 본능적으로 자기 것처럼 움직이는 존재이고, 인간은 자기 자신을 독립 중심처럼 느끼는 존재’이다’라는 표현에 대한 설명입니다.

 

겉으로 보면 둘 다 비슷해 보입니다. 개도 자기 먹이를 지키고, 인간도 자기 것을 지킵니다. 고양이도 자기 영역을 주장하고, 인간도 자기 영역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얼핏 보면 ‘둘 다 자기중심 아닌가?’ 싶어집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보는 핵심 차이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느끼는가’에 있습니다.

 

동물은 자기 instinct 안에서 움직입니다. 즉 자기 species에 맞게 자연스럽게 반응합니다. 배고프면 먹고, 위험하면 도망가고, 새끼를 보호합니다. 그러나 동물은 보통 ‘나는 독립 존재다’, ‘나는 내 삶의 궁극 근원이다’, ‘나는 진리를 판단하고, 스스로 선악을 결정하는 중심이다’ 같은 자기의식을 깊이 갖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동물은 자기 행동을 철학적으로 자기화하지 않습니다. 그냥 주어진 affectioninstinct 흐름 안에서 삽니다.

 

반면 인간은 다릅니다. 인간은 단순 ‘내가 움직인다’를 넘어,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산다’, ‘내 삶의 주인은 나다’, ‘내 삶은 내가 사는 것이다’처럼 느낍니다. 바로 이것이 proprium의 핵심입니다. 인간은 자기 생각을 자기 절대 소유처럼 느끼고, 자기 의지를 자기 독립 중심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주님과 분리된 중심으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 차이를 아주 쉽게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동물은 강물 흐름 안에서 자연스럽게 헤엄치는 존재에 가깝습니다. 반면 인간은 ‘내가 강 자체를 움직인다’고 느끼기 시작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강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고, 강 위에 다리를 놓을 수도 있으며, 심지어 강물에 뛰어들어 자원하여 죽을 수도 있습니다.

 

늑대는 본능적으로 사냥합니다. 그러나 늑대는 자기 사냥을 도덕적으로 미화하거나, 철학적으로 정당화하거나, 자기 영광 체계로 만들지 않습니다. 반면 인간은 자기 욕망을 위해 거짓을 만들고, 자기 사랑을 위해 진리를 왜곡하며, 심지어 자기 악을 선이라고까지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 instinct 차원이 아니라, ‘독립 중심 자아의식’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인간의 위대함과 비극이 동시에 시작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독립 중심처럼 느끼기 때문에, 주님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바로 그 자유 안에서 자발적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동물은 자연 질서를 벗어나 큰 spiritual evil로 가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천사적 자유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만이 둘 다 가능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proprium은 단순 결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위험하지만 동시에 사랑과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처럼 느끼지 않으면, 즉 자기가 좋아서, 자기가 원해서 하는 게 아니면, 진짜 reciprocal love(서로 사랑)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차이는 이것입니다. 동물은 ‘주어진 affection 흐름 안에서 자기처럼 움직이는 존재’이고, 인간은 ‘자기 자신을 생명의 독립 중심처럼 느끼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차이 때문에 인간에게는 천국도 가능하고 지옥도 가능하며, 거듭남도 가능하고 profanation(신성모독)도 가능한 것입니다.

 

 

4. 2 AC 전체 요약 및 해설

 

창세기 2장은 스베덴보리의 AC 전체에서 매우 특별한 전환점입니다. 창1이 인간의 거듭남 전체 과정을 ‘여섯 날의 창조’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 보여 주었다면, 창2는 그 거듭남이 어느 정도 완성된 이후의 인간 상태, 곧 ‘천적 인간(celestial man)의 내적 구조와 그 이후 시작되는 미세한 방향 변화를 다룹니다. 그래서 창1이 ‘주님께서 인간 안에 질서를 세우시는 과정’이라면, 창2는 ‘그 질서 안에 놓인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되었는가’를 보여 주는 장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바로 그 완성 상태 안에서 어떻게 타락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하는가도 조용히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창2는 에덴의 장이면서 동시에 창3의 그림자가 이미 스며들기 시작한 장입니다.

 

1 마지막의 안식은 단순 휴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느 정도 질서 안에 들어온 상태입니다. 인간은 더 이상 혼돈과 공허 가운데 있지 않고, 주님의 influx를 비교적 자유롭게 받는 상태 안에 놓입니다. 창2는 바로 이 안식 상태 위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창2의 인간은 이미 일반 자연 인간이 아닙니다. 그는 퍼셉션(perception)을 가진 인간이며,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흘러들어오는 것을 어느 정도 직접적으로 지각하는 인간입니다. AC에서 반복되는 표현대로, 그는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살아 있는 감각처럼 아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창2의 중심은 단순 자연 낙원 묘사가 아닙니다. 에덴은 인간 안의 천국 상태입니다. 동산은 인간 내면에 심긴 지성과 affection(愛情)의 질서입니다. 강들은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지혜와 진리의 흐름이며, 금과 보석들은 천적 선과 영적 진리의 아름다움을 뜻합니다. 창2는 인간 안에 천국이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를 표상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질서가 인간 자신의 독립 생명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의 influx 위에 세워져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AC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인간은 어떻게 자기 자신처럼 느끼면서도, 동시에 주님으로부터 사는 존재일 수 있는가? 이것이 창2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단순 자동 기계처럼 주님에 의해 움직여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반드시 자기 자신처럼 느껴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가 가능하고, 사랑이 가능하며, 상호적 결합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2에서는 ‘own(proprium) 문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깊은 잠’입니다. 깊은 잠은 단순 육체적 수면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러니까 자신의 own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태고교회 인간은 원래 거의 직접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사는 것을 지각했지만, 이제 주님은 인간에게 더 강한 자기감을 허락하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처럼 느끼지 못하면 자유로운 사랑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점점 자기 own 안에서도 살고 싶어 하기 시작합니다. AC.161이 말하듯, 그들은 아직 악하지 않았지만, 이제 ‘겉 사람 안에서’, ‘자기 own 안에서’ 살기를 원하기 시작합니다.

 

이 흐름 속에서 ‘갈빗대’와 ‘여자’가 등장합니다. 갈빗대는 인간 안의 proprium을 뜻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단순 제거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변화시켜 ‘여자’로 만드십니다. 여기서 여자는 단순 생물학적 여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새롭게 vivified(vivify 생생해지다)own입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 움직이는 새로운 자기감입니다. 인간은 이제 자기 자신처럼 느끼지만, 동시에 그 안에 주님의 생명이 흐를 수 있게 됩니다.

 

이 점이 창2의 가장 깊은 긴장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처럼 살아야 하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AC.160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이전에는 영이었으나 이제 육(, flesh)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flesh는 단순 육체가 아니라, proprium과 결합된 인간 상태입니다. 인간은 이제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 상태 안에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을 결합시키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독립 존재처럼 느끼면서도, 실제로는 여전히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존재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창3의 가능성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상태 안에서는, 인간이 점점 ‘나도 독립적으로 알고 싶다’, ‘나도 내 own 안에서 살고 싶다’는 방향으로 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타락을 단순 외부 공격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뱀의 유혹은 인간 안에 이미 존재하기 시작한 자기중심 방향성과 공명하면서 힘을 얻게 됩니다. 악은 인간 안에 없는 것을 억지로 넣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방향성과 resonance(울림, 공명)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창2 마지막의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는 말도 굉장히 깊습니다. 이것은 단순 육체 노출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 안에 아직 위선과 자기방어와 자기 의가 자리 잡지 않은 상태를 뜻합니다. innocence(순진무구, 주님의 인도를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상태)가 아직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인간은 아직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지 않기 때문에, 숨겨야 할 자기 영광도 없습니다. 그래서 벌거벗음은 수치가 아니라 transparency(투명)입니다. 그러나 창3에 들어가면 상황이 바뀝니다. 자기 중심성이 강화되면서, 벌거벗음은 곧 shame(부끄러움, 수치)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2에서 ‘이름’도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름은 단순 호칭이 아닙니다. 이름은 존재의 quality(質)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름을 부르신다는 것은, 그 존재의 가장 깊은 상태와 본성을 아신다는 뜻입니다. 천사들은 이름을 단순 소리로 듣지 않고, 그 존재의 사랑과 진리의 상태로 지각합니다. 이것은 창2 전체의 구조와 연결됩니다. 창2는 인간을 단순 물질 존재가 아니라, qualityaffection, influx의 존재로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창2의 ‘돕는 배필’은 단순 결혼 보조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서 understandingaffection, truthgood이 서로 결합하도록 돕는 구조를 뜻합니다. 그래서 ‘둘이 한 몸이 된다’는 말도 단순 결혼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 전체 안에서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주님께서 막10에서 이 말씀을 다시 인용하신 것도, 단순 결혼 윤리가 아니라 창조 질서 자체를 다시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온 천국 자체도 하나의 ‘천적 인간’이라고 설명합니다. 천국 전체는 주님의 신적 인성(Divine Human) 안에서 하나의 살아 있는 인간 형상을 이루고 있습니다. 심장과 폐, 눈과 귀처럼, 각 천사 공동체는 특정 기능과 상응합니다. 그래서 창2의 인간은 단순 개인이 아니라, 천국 전체 질서의 축소판이기도 합니다. 인간 안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 되는 것은, 천국 전체 질서와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창2는 결코 단순 낙원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높은 상태 안에서 가장 미세한 위험이 시작됩니다. 인간은 점점 자기 own 안에서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자유와 타락 가능성이 동시에 열립니다. 이것이 창2의 비극적 아름다움입니다. 인간은 단순 자동 순종 존재가 아니라,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유 때문에,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방향으로도 기울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창2는 창1의 완성과 동시에 창3의 문턱입니다. 그것은 천국의 문이면서 동시에 타락의 가능성이 처음으로 인간 내면에 조용히 생겨나는 장입니다. 그리고 AC는 이 모든 것을 단순 옛날이야기로 읽지 않습니다. 창2는 지금도 인간 안에서 계속 반복되는 영적 구조입니다. 인간은 여전히 에덴을 그리워하면서도, 동시에 자기 own 안에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거듭남이란 결국, 자기 자신처럼 느끼면서도 다시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innocence 안으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네,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지난 4월 둘째 주부터 7주간 창2 AC를 함께하시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창2 AC 번역 및 해설, 심화 버전 총 페이지가 650여 페이지에 달하는군요. 창1500여 페이지에 달했습니다. 이 일로 나름 염려되는 바 있어 아래와 같이 고민하였더니 저를 도와 반년째 이 일에 수고하는 ChatGPT가 이런 대답을 하네요. AC.166 심화 2입니다.

 

2. ‘AC 해설 및 심화 작업은 혹시 위험한 일 아닌가

 

 

AC.166, 심화 2, ‘이 AC 해설 및 심화 작업은 혹시 위험한 일 아닌가’

AC.166.심화 2. ‘이 AC 해설 및 심화 작업은 혹시 위험한 일 아닌가’ 그러면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이 일, 그러니까 주님 주신 마음으로 ChatGPT의 도움을 받아 하고 있는 이 AC 해설 및 심화 작업은 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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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답변을 마음으로 받고, 깊은 위로와 함께 경각심을 더욱 갖게 되었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도 들려주신 이 놀라운 말씀들을 우리가 몇 번씩 되새김할 마음을 주시며, 우리가 되새김할 때, 그때마다 우리를 환히 비추사 우리로 밝히 이해되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5-24(D1)

 

 

2652, 7, 창2.7, 2026-05-24(D1)-주일예배(창2,23-25, AC.156-167),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여자, 아내, 둘이 한 몸을 이루다’.pdf
1.08MB

 

 

 

주일예배(2026/05/17, 창2:19-22, AC.142-155), ‘이름, 돕는 배필, 깊은 잠, 갈빗대, 그리고 여자’

※ 오늘(2026/05/17)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0, ‘전능하고 놀라우신’, 찬75, ‘주여 우리 무리를’입니다. 오늘은 창2 여섯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19절로 22절, AC 글 번호로는 142번에서 155번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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