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47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48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49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50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51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52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53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눅22:47-53)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마치신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유다가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이끌고 나타났습니다. 주님을 잡으러 온 것입니다. 유다가 자기들끼리 정한 약속에 따라 주님께 입을 맞추러 다가옵니다. 그 장면을 본문 47,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47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48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말씀에서 유다라는 이름은 본래 사랑으로 행하는 선을 뜻합니다. 그러나 반대의 의미로는 자아 사랑에서 나오는 악을 뜻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유다는 특별히 자아 사랑에 깊이 빠져 있는 유대교회를 뜻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말씀에서 유다라는 이름은 좋은 의미로 쓰일 때도 있고, 나쁜 의미로 쓰일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윗과 솔로몬 같은 걸출한 왕들이 유다 지파에서 나왔습니다. 그런가 하면,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유다는 동생 요셉을 팔아넘기는 데 앞장섰고, 오늘 말씀에서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유다는 주님을 팔아넘기고 있습니다. 영적인 의미, 즉 그 속뜻으로 볼 때, 전자의 경우인 유다 지파로부터 왕들이 나온 것은 사랑의 선으로부터 진리가 나오는 걸 의미합니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 즉 유다가 주님을 팔아넘기는 건 자아 사랑에 빠진 교회들이 진리를 파괴하는 걸 의미합니다. 자아 사랑에 빠진 사람이 진리를 미워하고 나중에는 파괴하기까지 하는 이유는, 진리가 자아 사랑에서 나오는 욕망을 죄라고 하고, 그러므로 멀리하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불순한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진리를 왜곡, 조작합니다. 그것이 진리를 파괴하는 것이며, 또한 유다가 주님을 파는 것입니다.

 

유다가 입을 맞추려고 주님께 다가갔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십니다. 주님이 유다에게 하신 말씀은 자아 사랑에 빠진 유대교회가 겉으로는 진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진리를 죽이는 것을 뜻합니다.

 

갑자기 나타난 대제사장의 군사들을 보고 주님의 제자들이 두려워하며 검을 빼 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49절과 5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9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50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 다음은 이순철 목사님의 청주 새 교회 시절 에피소드입니다.

 

청주에 살 때 일입니다. 어느 교파 사람들이 전도를 목적으로 저를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얘기하는 걸 한참 듣고 있다가 궁금한 것을 몇 가지 물어봤습니다. 그러다가 논쟁이 좀 있었고, 정작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안 하고 돌아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그때 생각이 났습니다. 새 교회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른 교파 사람들의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런 상황을 즐기려 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주님의 제자들이 진리의 검을 휘두르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자 중 하나가 대제사장의 종의 귀, 오른쪽 귀를 잘랐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대제사장은 유대교회로 상징되는 타락한 교회의 성직자를 뜻하고, 그가 보낸 종은 그들이 만들어 낸 거짓 교리를 추종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오른쪽 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남아 있는 선한 의지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오른쪽은 선을 뜻하고, 귀는 의지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검을 빼 종의 오른쪽 귀를 자르는 건, 진리를 가지고 거짓 진리에 맞서 싸울 때, 상대의 선한 의지를 꺾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이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와 비진리의 논쟁에서 진리의 편이 완승했다고 해서 비진리 안에 있던 사람들이 바로 승복하는 건 아닙니다. 승복하지 않는다는 건 거짓인 줄 알면서 기존의 신앙을 고집한다는 뜻일까요? 대개는 그렇지만 때에 따라서는 크게 실망한 나머지 그동안의 신앙을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런 것이 상대의 선한 의지를 꺾는 것입니다. 잘못된 신앙을 버린다면 잘된 일이라 하겠지만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진리이든 비진리이든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신앙으로 구원받겠다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강압적으로 상대의 신앙에 상처를 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말고 참으라고 하시고 종의 잘린 귀를 만져 낫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비록 거짓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이라도 구원을 바라는 순수한 뜻이 있으면 그것을 꺾지 않고 지켜주십니다. 그런 의지가 있어야 언젠가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거짓 진리 안에 있는 사람 중 어떤 사람이 상대적으로 선한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악한 사람일까요? 그것에 대해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스베덴보리 저,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85, 라틴) 413번 글에 따르면,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 중에는 두 부류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거짓으로부터 악을 행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악으로부터 거짓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거짓으로부터 악을 행하는 사람은 거짓된 교리를 진리라고 믿고 그것에 따라 악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리석을 뿐이고 악한 사람은 아닙니다. 적어도 자기가 믿는 교리에 충성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의 신앙을 억지로 빼앗지 않으시고 지켜주십니다. 마치 아벨을 죽인 가인을 보호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반대로 악으로부터 거짓을 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악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대로 해석해 악이 죄가 아닌 것처럼 조작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회개하지 않으며, 그래서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귀를 만져 낫게 하신 것은 전자의 사람, 즉 거짓 교리를 진리로 믿고 충성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손으로 만지신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에 대해 ‘계시록 해설’ 79번 글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영적인 힘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바라는 것이고, 할 수만 있다면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영적으로 ‘손’이 뜻하는 것은 바로 이런 힘을 말한다. 그러므로 손으로 만지는 것은 그 힘이 통하고 전해지는 것을 뜻한다. (AE.79, 이순철 역) but spiritual power is to will the good of another, and to will to convey to another as far as possible what is with oneself. This power is what “hand” in the spiritual sense signifies, and its communication and transference are signified by “touching with the hand.” (AE.79, 계1:17 속뜻 주석)

 

주님께서 손으로 만지실 때,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와 그 능력이 상대에게 흘러 들어가 그의 영혼을 살린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한 때 주님을 심하게 대적했습니다. 사도행전 22장 20절에서 바울은 스데반이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럴 정도로 그는 주님을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바울에게도 회개와 갱생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만져 낫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잡으러 온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52절 말씀입니다.

 

52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대제사장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타락한 유대교회의 성직자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경비대장은 성직자의 말만 듣고 참된 진리를 적대하는 교회 안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경비대장에 비유하는 것은 영적으로 볼 때, 그들은 진리를 대적해 싸우는 악한 군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장로들은 누굴까요? 타락한 교회 안에 있는 지적인 사람들, 즉 교리에 밝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유대교회의 성직자와 신학자들과 평신도들이 모두 합세해서 주님을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뭉치를 가지고 왔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말씀에서 강도와 도둑은 신앙인들에게 거짓 진리를 주입하는 나쁜 성직자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교인들에게 있는 진리와 선을 빼앗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도둑들이 오히려 주님을 강도로 몰고 있습니다. 그들이 들고 있는 검과 몽둥이는 말씀을 조작해 만든 거짓 진리를 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둥이를 가지고 나왔느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53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주님께서 끝으로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하십니다. 어둠의 권세는 지옥으로부터 오는 악과 거짓의 권세입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 주님을 대적하게 만드는 사악한 권세이며, 진리의 영광을 가리는 어둠의 권세입니다. 주님은 이제 그 악과 거짓의 권세에 맞서 최후의 싸움을 하려고 하십니다. 지옥의 칠흑 같은 어둠이 주님에게 아직 남아 있는 불완전한 인성을 통해 들어와 주님을 공격해 올 때, 주님은 당신 안에 있는 아버지의 신성으로 그것을 물리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불완전한 인성을 벗고, 여호와가 주시는 신적 인성을 입고 부활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며, 마지막 시험 가운데로 기꺼이 들어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대교회의 마지막 때, 그들이 주님을 핍박한 것처럼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타락한 교회들이 참된 진리를 핍박합니다. 그들은 말씀을 조작해 만든 거짓 진리를 가지고 참된 진리를 이단이요, 불법자라 규정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의 제자들처럼 진리의 검을 빼 들고 그들의 귀를 잘라야 할까요? 주님은 그러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당신을 대적하는 자의 귀를 만져 낫게 하시고, 담담히 마지막 시험 가운데로 들어가셨습니다.

 

새 교회인들은 교파가 다르다고 다른 교파 사람들을 미워하면 안 됩니다. 진리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거나 말씀을 전할 때 논쟁하듯 몰아붙여서도 안 됩니다. 상대의 신앙을 존중하고 언제까지라도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어둠의 때를 견뎌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주님이 지옥의 어둠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이 시대의 어둠을 뚫고 눈부시게 떠오를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유다처럼 실족하지 않도록 서로 기도하고 격려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에게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7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시2:7-8)

 

아멘

 

 

2023-01-08(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0-1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0-13(D1)-주일예배(2565, 눅22,47-53),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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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10-13(D1)-주일예배(2565, 눅22,47-53, AE.79),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pdf
0.22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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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권사님께 드린 권면 (2024/10/11)

 

다음은 제게 ‘할 말은 태산이지만 지금은 침묵할께요...’ 하신 어느 권사님께 보낸 답신입니다.

 

곧 팔 학년 되실 그분의 어떤 정황을 좀 아는 저는 다음날 아래와 같은 카톡 답신을 보내드렸는데요, 자세한 건 프라이버시 있어 좀 가리고, 내용 또한 좀 다듬어 글 올립니다.

 

 

권사님, 오늘은 어제 한글날을 피해 세종시 모처에서 외식 후, 국립 세종수목원에 들러 저희 부부, 둘째와 함께 좋은 시간을 가진 하루였습니다. 세종 국립수목원은 대전 저희 집에서 차로 25분 거리입니다.

 

이곳은 두 번째 오는 데, 처음 방문 때 놓쳤던 여러 가지, 가령 수목원 전체 전기차 버스 투어라든지, 지중해 전시 온실 전망대를 새롭게 경험하면서, 그러나 이 모든 눈에 보이는 겉의 나라의 것들을 통해 이것들과 서로 상응(相應, correspondence)하고 있는 저 천국, 속의 나라의 어떠함들을 마음에 그리며 구경하는 중에 권사님 생각이 났지요...

 

권사님, 이제 얼마 안 남은 이 지상 생활 후, 우리는 그토록 바라던 천국으로 가게 되는데요, 그런데 천국은 눈에 보이는 이 겉 사람의 세상과 달리 속 사람으로 가게 되는 나라이며, 그러므로 당연히 천국은 이 겉의 나라가 아닌, 속의 나라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중에 아직 아무도 자기 영의 모습을 본 자가 없듯 자기 육의 모습인 지금 거울에 비친 자기 외모 밖에는 본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자기 속 사람의 모습을 본 사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어떤 섭리로 다른 사람들의 영을 잠깐 볼 수 있도록 허락받으신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 육신의 외모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답지만, 그 영은 가히 형용할 수 없이 끔찍한 괴물 형상인 여자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그 외모는 주름투성이인 노파이지만 그 영은 가히 이를 데 없이 젊고 아름다우신, 천사 같은 분들도 계시다고 합니다.

 

이는 사람이 겉 사람과 속 사람으로 되어 있다는 하나의 예이지만, 그러나 방금 말씀드린 대로, 천국은 속 사람으로 가는 나라임을 기억, 그러므로 권사님, 이제 그만 이 세상 일, 곧 겉의 나라의 일들로부터는 물러나시고, 저 천국, 곧 속의 나라에 대해서만 집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겉의 나라에 속한 모든 일은, 그 동기가 주님을 사랑해서 하는 게 아닌 한, 우리 속 사람을 아름답게 단장하는 일에 아무 상관이 없거나 쓰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여전히 겉의 일에 마음을 기울여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실 경우, 이번에는 그 빈틈으로 계속해서 지옥이 우리 삶에 흘러들어오며, 그 결과, 삶의 우환이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게 됩니다.

 

지옥, 곧 악한 영들은 우리의 속 사람, 곧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한, 우리 속 사람을 못 건드리지만, 그러나 우리의 겉 사람, 곧 유전 악 아래에 있어 지키기 쉽지 않은, 겉의 일들은 건드리며, 공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하신 대로 악에게 공격을 받으신 것처럼 말입니다.

 

생전에 주님도 육으로는 마리아로 유전한 유전 악 가운데, 즉 십자가 마지막 시험 전까지는 아직 불완전한 인성 가운데 계셨기 때문이지요. 악은 오직 감각을 비롯, 이 겉의 나라에 속한 것들만 건드릴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등장하는 을 비롯, ‘발꿈치 등은 이런 것들을 의미합니다.

 

겉의 일에서 물러나는 것은 주님 말씀하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8)

 

하신 말씀을 붙들고, 그 울타리 안에 머무르는 것이지만, 반대로 계속 겉의 일을 붙들고 씨름하는 것은 위 주님의 권면을 거스르는 것으로, 그 결과 주님도 더 이상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실 수 없어, 즉 더 이상 우리를 도우실 수 없어 우리는 지옥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사님, 이제 그만 이 세상 겉의 일에서 손을 떼고 물러날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계속된 주님 말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11:29-30)

 

하시는 이 말씀의 보호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면서 당하는, 혹은 자초하는 모든 시험은 사실은 우리를 대신하여 주님이 홀로 싸우시는 시험들이며, 그래서 우리 힘으로 싸우면 지지만, 주님이 대신 싸워주셔서 우리가 이기는 줄을 믿습니다. 아멘!

 

대전에서 변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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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39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40그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1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45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눅22:39-46)

 

 

오늘 본문 말씀에는 주님께서 마지막 시험인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극한의 시험을 앞둔 주님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하나님이신 주님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이신 예수의 두려움과 절망감이 어떤 것인지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앞으로 얼마나 지독하고 끔찍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지 내다보고 계셨고,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거기서 벗어나고 싶으셨습니다. 그토록 절망적인 상황에서 주님은 평소와 같이 날이 어두워지자 감람(橄欖, 올리브나무의 中譯인 橄欖을 우리말로 읽은 것. 실제로는 중국의 감람나무와 이스라엘의 올리브나무는 서로 다른 나무) 산으로 가십니다. 그것을 본문 39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9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주님은 아주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 수없이 많은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그 시험에 대해 마가복음 1장 1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광야에서 사십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막1:13)

 

사람들은 이 시험을 주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직전 잠시 겪으신 시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한 구절의 말씀 속에는 주님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겪으신 모든 시험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말씀에서 40일은 주님의 모든 시험을 뜻하고, 들짐승과 함께 계시는 것은, 주님이 당신의 불완전한 인간을 통해 스스로 끌어들인 지옥의 공격들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 말고 주님이 당신의 시험에 대해 따로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이런 사실로부터 우리는 주님이 모든 시험을 혼자 묵묵히 싸워 이기셨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로 가셨다고 합니다. 모든 시험을 홀로 견디신 주님이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는 제자들과 함께 가신 이유가 뭘까요? 주님은 이 시험을 통해 두 가지를 보여 주시려 한 것 같습니다. 하나는 인류의 보편적 구원과 개별적 구원에 대해서입니다, 보편적 구원이란 시험을 통해 주님 자신이 영화롭게 되시는 것, 즉 완전한 진리가 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개별적 구원은 시험을 통해 신앙인들의 내면에서 선 없는 불완전 진리가 선을 동반한 완전 진리로 변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모든 시험에서 이기는 길은 사랑으로 드리는 기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신 감람산, 즉 올리브 산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선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감람산으로 가셔서 주님이 도착하신 곳은 어딜까요? 본문에는 지명을 말하지 않지만, 다른 복음서에서는 그곳을 겟세마네라고 합니다. 겟세마네에서 주님의 모습을 40절과 41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0그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1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주님이 겟세마네를 마지막 기도의 장소로 택하신 까닭은, 겟세마네(가트 슈마님)는 올리브기름(슈마님)을 짜는 틀(가트)을 말하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올리브기름은 사랑과 인애, 곧 체어리티(charity)의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당신 안에 계신 아버지와 전 인류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마지막 시험을 감당하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곳에서 기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거리에 주님이 계신 것은,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부를 때 언제라도 오셔서 진리를 가지고 싸울 준비가 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돌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시험이 있을 때 주님은 진리로 오셔서 그들을 위해 싸우십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무조건 우리들의 시험에 개입하시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로운 의사를 존중하시기 때문이지요. 어떻게 하는 게 도움을 청하는 걸까요? 주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오셔서 모든 유혹에서 우리를 구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시험에서 이기지 못하거나, 또는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에 대해 ‘천국의 비밀’ 2535번 글은,

 

사람이 사랑과 믿음으로, 그리고 오직 천국과 영적인 것을 위해 기도한다면 그 기도에는 희망과 위로, 또는 어떤 내적 기쁨의 계시 같은 것이 나타난다. (이순철 역) If the man prays from love and faith, and for only heavenly and spiritual things, there then comes forth in the prayer something like a revelation (which is manifested in the affection of him that prays) as to hope, consolation, or a certain inward joy. (AC.2535)

 

라고 합니다. 이 글을 통해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하며, 그 결과로 오는 응답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기도의 응답이 없는 이유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나라를 바라보지 않고, 세상일에만 골몰하는 사람, 무슨 일이든 진리를 따르는 대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은 주님보다는 자기 자신과 세상을 더 사랑하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 경우는 기도 응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열심히 해도 시험에 잘 넘어지거나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자기의 삶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의 뜻과 진리에 따라 이루어질 때 기도 응답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문제들이 풀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위로와 희망,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내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이 기도 응답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 근처에서 무릎을 꿇고, 다음과 같이 기도하십니다.

 

42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말씀에서 잔과 포도주는 진리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거짓을 뜻하고, 또한 시험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시험은 결국 거짓이 진리를 공격하고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하신 것은 어떻게 해서든 시험을 피하고 싶은 주님의 인간적인 욕구를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에게 남아 있는 불완전한 인간이 하는 기도라는 말입니다. 만일 그 기도가 이루어졌다면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인류의 구원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반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로 말미암아 주님은 지옥과의 싸움에서 완전히 이기실 수 있었습니다. 그때 당신 안에 있는 불완전한 인간의 뜻이 완전히 꺾이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43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말씀에는 주님이 힘써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마치 핏방울처럼 땅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땀이 핏방울처럼 떨어지는 것은 주님이 지독한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싸우시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절망과 고통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위로와 희망의 소리도 들렸습니다.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15:1)

 

라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위로가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죽을 것 같은 시험을 떨치고 일어나실 수 있었습니다.

 

※ 위 창세기 말씀에서 아브람은 주님을 표상(表象)합니다.

 

45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에게로 가셨습니다. 45절에는 제자들이 슬픔으로 인하여 잠들었다고 했습니다. 시험이 깊을 때는 주님으로부터 버려진 것과 같은 느낌이 듭니다. 지옥이 너무 두렵고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기도할 의지도 사라집니다. 일종의 자포자기와 같은 상태가 됩니다. 그런 상태가 제자들이 슬픔에 지쳐 잠이 든 상태입니다. 그렇더라도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한심해하거나 나무라지 않으시고, 포기하지도 않으십니다. 가만히 다가와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라고 하십니다. 시험을 이기신 능력의 주님이 우리를 깨우시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을 향하던 마음을 돌려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것이 일어나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을까요? 그 이유는 주님의 영혼은 신성(神性, Divine)이셨지만, 어머니로부터 받은 인간, 인성(人性, human)은 순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시험을 통해 불완전한 인간을 신성하게 만드셔야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주님은 아버지이신 신성 앞에 자신을 모두 내려놓고 지극히 겸손하셨습니다. 그와 관련해 ‘참된 기독교’ 104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되어가는 것이 비움(Exinanition)의 상태라면 신성과 인성의 합일(union) 그 자체는 영화(Glorification)의 상태이다.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이 두 상태, 즉 비움의 상태와 영화의 상태로 계셨다. (이순철 역) The progress towards union was his state of exinanition [emptying himself], and the union itself is his state of glorification. when the Lord was in the world he was in two states, called the state of exinanition and the state of glorification. (TCR.104)

 

그러므로 주님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신 것은 주님의 겸손과 비움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거룩하신 주님도 비움과 겸손을 통해 지독한 시험들을 이겨내시고 아버지와 분리된 인간을 벗고 아버지와 하나 된 인간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주님과 이웃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처럼 우리도 승리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배운 또 하나의 교훈은 기도할 때는 사랑과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고, 이웃에게 베푸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은 각자 직업에 관한 일과 일상의 일들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진리가 아닌 것을 멀리하는 것은 사랑 중에서도 첫 번째 사랑입니다. 한 손으로 악을 행하면서 다른 손으로 이웃을 사랑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얼굴에 난 종기를 그대로 두고 분을 바르는 거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사랑과 믿음과 겸손의 기도를 드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사53:12)

 

아멘

 

2022-12-1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0-0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0-06(D1)-주일예배(2564, 눅22,39-46),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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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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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10-06(D1)-주일예배(2564, 눅22,39-46),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pdf
0.22MB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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