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보다 더 나쁜 상태가 되었는데,But it is still worse at the present day, (AC.196)
본문의‘오늘날’(the present day)과 이 글을 쓰고 있는2026년은 제법 간격이 큰데 그래도 괜찮을까요?
네, 괜찮습니다. 오히려AC를 읽을 때는 그런 시간적 간격을 의식적으로 넘어서 읽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문자적으로 보면AC.196의 ‘오늘날’은 스베덴보리가 글을 쓰던18세기 중엽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는1740-1750년대 유럽의 지적 분위기, 특히 계몽주의와 합리주의, 자연과학의 급격한 발전, 그리고 신앙을 이성으로 재판하려는 경향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은 분명 스베덴보리의 동시대를 가리킵니다.
그러나AC를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종종 특정 시대를 말하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영적 상태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AC.196도 그런 경우입니다. 그가 말하려는 핵심은 ‘18세기 사람들이 나쁘다’가 아닙니다. 핵심은 ‘계시보다 감각을 더 신뢰하는 상태가 점점 심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AC.196을 읽으면 오히려2026년이 스베덴보리 시대보다 더 잘 들어맞는 부분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보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는 것은 믿지 않으며’, ‘기억 지식과 철학으로 자기 불신앙을 더욱 강화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과학, 데이터, 통계, 실험, 측정, 알고리즘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측정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과학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도 과학자였습니다. 문제는AC.196이 말하듯, 과학과 지식이 진리를 섬기는 종이 아니라 진리를 심판하는 주인이 될 때입니다. 그 점에서는 오히려 현대가 스베덴보리 시대보다 더AC.196에 가까운 측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번역이나 해설에서 ‘오늘날’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고민하신다면, 문자적으로는 ‘스베덴보리 당시’를 가리키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계시보다 감각과 기억 지식을 우위에 두는 모든 시대’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합니다.
사실 이것은 성경의 ‘말세’와도 비슷합니다. 문자적으로는 특정 시기를 가리킬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에게는 하나의 교회 상태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AC.196의 ‘오늘날’도 단순한 연대기적 표현이라기보다 하나의 영적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2026년에AC.196을 읽으며 ‘이 말이 지금도 해당되는가?’라고 묻는다면, 제 생각에는 ‘해당될 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더 선명하게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AC.196을 읽으며 놀라운 점은, 약270년 전에 쓰인 글인데도 현대인이 영혼, 천국, 양심, 영적 세계를 대하는 태도를 너무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AC.196의 ‘오늘날’은 역사적으로는18세기를 가리키지만, 영적으로는 지금도 계속 반복되는 인간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which Jehovah God had made; and he said unto the woman, 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 of the garden? (창3:1)
AC.196
고대에는 계시된 것들보다 감각적인 것들에 대해 더 큰 신뢰를 두는 자들을 ‘뱀’(serpents)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보다 더 나쁜 상태가 되었는데, 이제는 보거나 느낄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 믿지 않을 뿐 아니라, 고대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지식들[scientifica]로 그러한 불신을 스스로 확증함으로써, 자기 안에 훨씬 더 큰 정도의 시력 상실을 일으키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감각의 것, 기억 지식의 것, 그리고 철학으로부터 하늘의 일들에 대해 결론을 내리는 자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눈멀게 하여, 이후에는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되는지를 알 수 있도록, 그리고 그들이 말씀에서 자주 언급되는 ‘귀머거리 뱀’(deaf serpents)일 뿐 아니라 훨씬 더 해로운 ‘날아다니는 뱀’(flying serpents)이기도 함을 알 수 있도록, 우리는 그들이 영에 대해 무엇을 믿는지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In ancient times those were called “serpents” who had more confidence in sensuous things than in revealed ones. But it is still worse at the present day, for now there are persons who not only disbelieve everything they cannot see and feel, but who also confirm themselves in such incredulity by knowledges [scientifica] unknown to the ancients, and thus occasion in themselves a far greater degree of blindness. In order that it may be known how those blind themselves, so as afterwards to see and hear nothing, who form their conclusions concerning heavenly matters from the things of sense, of memory-knowledge, and of philosophy, and who are not only “deaf serpents,” but also the “flying serpents” frequently spoken of in the Word, which are much more pernicious, we will take as an example what they believe about the spirit.
[2]감각적인 사람, 곧 오직 감각의 증거만을 믿는 자는, 영을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영의 존재를 부인하며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니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보고 만질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다’(It is nothing because I do not feel it: that which I see and touch I know exists)라고 합니다. 기억 지식의 사람[scientificus], 곧 기억 지식들로부터 결론을 내리는 자는 말하기를, ‘영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어쩌면 기체나 열기 같은 것이거나, 혹은 자기 학문 속의 어떤 다른 실체일 뿐이며, 곧 허공으로 사라질 것 아닌가? 동물들도 몸과 감각과 이성, 그리고 그 유사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들은 죽는다고 하면서, 어찌 사람의 영만은 산다고 말하는가?’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The sensuous man, or he who only believes on the evidence of his senses, denies the existence of the spirit because he cannot see it, saying, “It is nothing because I do not feel it: that which I see and touch I know exists.” The man of memory-knowledge [scientificus], or he who forms his conclusions from memory-knowledges says, What is the spirit, except perhaps vapor or heat, or some other entity of his science, that presently vanishes into thin air? Have not the animals also a body, senses, and something analogous to reason, and yet it is asserted that these will die, while the spirit of man will live. Thus they deny the existence of the spirit.
[3]철학자들 또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예리하다고 자처하지만, 사실상 그들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영에 대해 말합니다. 그들은 영에 대해 논쟁하며, 물질적이거나 유기적이거나 연장된 것에서 무엇이든 취하는 표현은 하나도 영에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영을 자기 관념에서 지나치게 추상화하여, 마침내 그것을 상실해 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다소 건전한 이들은 영을 ‘사고’(thought)라고 말하지만, 사고에 대해 추론하면서 거기서 모든 실체성을 분리해 버리기 때문에, 결국에는 육체가 죽을 때 사고도 함께 사라져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처럼 감각의 것, 기억 지식의 것, 철학으로부터 추론하는 모든 자들은 영의 존재를 부인하며, 그 결과 영과 영적인 것들에 관해 언급되는 어떤 것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단순한 사람들(the simple in heart)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영의 존재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자기들은 영이 존재한다는 걸 안다고 말하는데, 이는 주님께서 죽은 후에도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렇게 하여 자기 이성을 소멸시키는 대신, 주님의 말씀으로 그것을 살아 있게 합니다. Philosophers also, who would be more acute than the rest of mankind, speak of the spirit in terms which they themselves do not understand, for they dispute about them, contending that not a single expression is applicable to the spirit which derives anything from what is material, organic, or extended; thus they so abstract it from their ideas that it vanishes from them, and becomes nothing. The more sane however assert that the spirit is thought; but in their reasonings about thought, in consequence of separating from it all substantiality, they at last conclude that it must vanish away when the body expires. Thus all who reason from the things of sense, of memory-knowledge, and of philosophy, deny the existence of the spirit, and therefore believe nothing of what is said about the spirit and spiritual things. Not so the simple in heart: if these are questioned about the existence of spirit, they say they know it exists, because the Lord has said that they will live after death; thus instead of extinguishing their rational, they vivify it by the Word of the Lord.
해설
이 단락은 ‘뱀’이라는 상징을 시대적 변화 속에서 더욱 날카롭게 확장합니다. 고대에는 계시보다 감각을 더 신뢰하는 상태만으로도 ‘뱀’이라 불렸는데,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의 상태를 그보다 훨씬 심각한 것으로 진단합니다. 이제 인간은 단순히 감각에 의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지식과 학문을 동원하여 자신의 불신을 논리적으로 정당화하고 확증합니다. 그 결과 생기는 시력 상실은 고대보다 훨씬 깊고 완고한 상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지식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지식이 감각적 불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사용될 때 발생합니다. 고대인들에게는 없었던 ‘scientifica’, 곧 체계화된 자연 지식과 학문은 본래 질서 안에서는 유익하지만, 계시를 배제하는 도구가 될 때 오히려 인간을 더 깊은 영적 어둠으로 끌어들입니다. 이 상태가 바로 ‘날아다니는 뱀’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단순히 땅에 붙어있는 감각적 사고보다 훨씬 빠르고 널리 해를 끼치는 사고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예로 ‘영에 대한 믿음’을 선택합니다. 감각적인 사람은 영을 보거나 만질 수 없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합니다. 여기서 감각은 판단의 최종 기준이 되며, 존재의 조건은 물리적 접촉 가능성으로 축소됩니다. 이는 영적 실재를 논박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고려 대상에서 제거하는 태도입니다.
기억 지식의 사람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영을 자기 학문 체계 안의 개념으로 환원합니다. 영은 기체, 열기, 혹은 어떤 일시적 현상으로 설명되며,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도 지워지며, 영의 영속성은 부정됩니다. 이는 감각적 불신이 지식의 언어를 빌려 체계화된 모습입니다.
철학자들의 경우는 더욱 미묘합니다. 이들은 영을 지나치게 순수한 개념으로 만들기 위해, 물질성, 조직성, 실체성을 모두 제거합니다. 그 결과 영은 사고라는 이름으로 남지만, 그 사고조차 실체가 없으므로 육체와 함께 소멸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영은 논리적으로 ‘없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보기에 이는 지성의 승리가 아니라, 지성이 자기 대상을 스스로 말살한 결과입니다.
이 모든 경우의 공통점은, 감각, 지식, 철학이 각각 다른 옷을 입고 있으나, 동일한 방향으로 작동한다는 점입니다. 즉,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판단을 최종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이들은 영과 영적인 것들에 관해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됩니다.
이에 대비되어 제시되는 것이 ‘마음이 단순한 사람들’(the simple in heart)입니다. 이들은 철학적 정의나 과학적 증명을 제시하지 않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영이 존재함을 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단순함은 무지가 아니라, 질서의 보존입니다. 이들은 이성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 이성을 살아 있게 합니다.
AC.196은 결국, 타락의 마지막 단계를 지적합니다. 그것은 무지나 단순한 의심이 아니라, 지식과 이성을 사용하여 계시를 무력화시키는 상태입니다. 동시에 이 단락은 참된 이성이 어디에서 살아나는지를 분명히 밝힙니다. 이성은 감각과 철학으로 강화될 때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 안에 머물 때 비로소 살아 움직입니다.
16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17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욥20:16, 17)He shall suck the poison of asps;the viper’s tongue shall slay him.he shall not see the brooks,the flowing rivers of honey and butter(Job 20:16–17).
AC.195에서 스베덴보리가 욥20:16-17을 인용하는 이유는,감각적 추론이 인간에게서 무엇을 빼앗아 가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앞에서 인용한 시편과 아모스,예레미야의 구절들이 주로‘뱀의 독’자체와 그 위험성을 설명했다면,욥기의 이 구절은 그 독의 결과로 사람이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먼저‘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는 말씀은,사람이 스스로 독을 받아들인다는 점을 암시합니다.뱀이 억지로 독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스스로 그것을 마시는 것입니다.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감각과 기억 지식에 근거한 추론을 사람이 스스로 사랑하고 선택하는 상태를 뜻합니다.그는 그것을 지혜라고 생각하고,분별력이라고 생각하며,진리를 탐구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그러나 실제로는 영적 생명을 약화시키는 독을 마시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다음 구절입니다. ‘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AC.195에서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꿀과 젖의 강’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다시 말해,천국의 삶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지혜의 풍성함을 뜻합니다.
왜 하필‘꿀’과‘젖’일까요?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에 따르면,꿀은 자연적 차원에서 느껴지는 선의 달콤함을,젖은 보다 내적인 진리와 선의 양육을 의미합니다.그래서‘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성경 전체에서 천국적 상태와 교회의 풍성함을 상징합니다.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꿀과 젖이 흐르는 강’을 본다는 것은 영적 생명의 아름다움과 주님의 사랑에서 오는 기쁨을 지각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감각적 추론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주목할 점은‘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보지 못한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강은 여전히 흐르고 있습니다.꿀과 젖도 여전히 있습니다.천국의 실재도 존재합니다.주님의 사랑도 끊어진 적이 없습니다.그러나 뱀의 독에 중독된 사람은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어버립니다.
이 점이AC.195전체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감각적 인간은 자신이 더 많이 본다고 생각합니다.그는 증거를 요구하고,분석하고,검증하고,논증합니다.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가장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그는 자연은 보지만 천국은 보지 못합니다.물질은 보지만 영은 보지 못합니다.현상은 보지만 원인은 보지 못합니다.그래서AC.196으로 이어지면 결국 영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상태에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목사님께서 앞서 말씀하신‘이성질’이라는 표현을 다시 빌리자면,욥기20장의 이 말씀은‘이성질의 가장 비극적인 결과는 틀린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더 높은 차원의 실재를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본문처럼 보입니다.뱀의 독은 사람을 즉시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오히려 그에게‘나는 잘 보고 있다’는 확신을 줍니다.그러나 그 결과 그는 정작‘꿀과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AC.195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독사의 독’은 감각과 기억 지식에 근거한 잘못된 추론을 뜻하고, ‘꿀과 젖이 흐르는 강’은 영적,천적 진리의 풍성함을 뜻합니다.그리고 그 둘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사람이 뱀의 독을 사랑할수록,그는 천국의 강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통해 강조하려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