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

 

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고, 그 안에 품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구약 성경은 거의 소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참으로 그러한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은 단 한 가지 숙고만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이 주님의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천국과 교회와 신앙에 속한 것들을 그 안에 지니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주님의 말씀이라 불릴 수 없을 것이며,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도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이 생명에 속한 것들에서 오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오는 것이겠습니까? 곧 그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그 말씀에는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내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은 살아 있지 않으며, 말씀 가운데 어떤 표현이든지 그 안에 그분을 품고 있지 않다면, 다시 말해 그 나름의 방식으로 그분을 가리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성한 것이 아니라고 참으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The Christian world, however, is as yet profoundly unaware of the fact that all things in the Word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nay, the very smallest particulars down to the most minute iota, signify and enfold within them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 and therefore the Old Testament is but little cared for. Yet that the Word is really of this character might be known from the single consideration that being the Lord’s and from the Lord it must of necessity contain within it such things as belong to heaven, to the church, and to religious belief, and that unless it did so it could not be called the Lord’s Word, nor could it be said to have any life in it. For whence comes its life except from those things that belong to life, that is to say, except from the fact that everything in it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bears reference to 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so that anything which does not inwardly regard him is not alive; and it may be truly said that any expression in the Word that does not enfold him within it, that is, which does not in its own way bear reference to him, is not Divine.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서문 AC.1에서 제시한 전제를 한 단계 더 밀고 나갑니다. AC.1이 ‘말씀 안에는 내적 의미가 있다’는 선언이었다면, AC.2는 ‘그 사실을 기독교 세계가 거의 모르고 있다’는 진단입니다. 여기서 ‘기독교 세계’란 성경을 소유하고 읽으며 설교하는 공동체 전체를 가리킵니다. 이는 비판이라기보다 현실 인식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구약 성경은 도덕적 본보기, 역사적 배경, 혹은 신약을 위한 예비 단계 정도로 취급되기 쉬웠고, 그 결과 ‘거의 소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명확히 짚습니다. 말씀의 모든 것이 ‘가장 작은 세부에 이르기까지’ 영적, 천적인 것을 의미하고 품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는 일부 상징적 구절이나 예언, 혹은 메시아 관련 본문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가장 미세한 점 하나’라는 표현은 성경 해석에서의 타협을 허용하지 않는 선언입니다. 곧 말씀은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본질적으로 영적이며 천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논증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복잡한 계시 체험이나 신비한 주장에 근거하지 않고, 오히려 ‘단 한 가지 숙고’로부터 논리적으로 이끌어냅니다. 말씀이 주님의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왔다면, 그 안에는 반드시 천국, 교회, 신앙에 속한 것들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학적 전제가 아니라, 존재론적 필연성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주님과 무관한 내용을 담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생명’이라는 개념이 중심에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이 왜 ‘살아 있는가’를 묻습니다. 문자, 문체, 역사적 가치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생명에 속한 것들’이 있기 때문에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생명의 근원을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생명은 오직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온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안의 모든 것이 생명에 속한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든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논리는 매우 급진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지 ‘말씀의 핵심은 주님이시다’라고 말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주님을 내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은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다’고까지 말합니다. 다시 말해, 문자적으로 아무리 경건하고 아름다운 표현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주님을 향한 내적 지향이 없다면 그것은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말씀 해석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라, 신앙과 교회의 모든 표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글의 정점입니다. ‘말씀 가운데 어떤 표현이든지 그 안에 그분을 품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신성한 것이 아니다’라는 선언은, 성경을 성경 되게 하는 기준을 제시합니다. 신적인 것, 곧 신성한 것은 ‘주님을 품는 것’이며, 그분을 가리키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으나, 그 지향 자체가 빠질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주님과 무관한 교훈집, 역사책, 민족 서사로만 읽는다면, 우리는 이미 그 성경을 신성한 것으로 읽고 있지 않은 셈이 됩니다.

 

이렇게 볼 때 AC.2는 이후 전개될 방대한 상응 해설과 내적 의미 풀이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핵심 단락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왜 이렇게까지 세밀하게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말씀의 생명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곧 주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AC 전체는 해석 기술의 집합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주님을 살아 있는 분으로 다시 만나게 하려는 시도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심화

 

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라는 표현은 얼핏 보면 단순한 수사처럼 보이지만, 사실 ‘Arcana Coelestia’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AC의 해석 방식이 과장처럼 느껴질 수 있고, 이해하면 오히려 그 일관성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먼저 이 표현의 기본 뜻부터 보겠습니다. ‘전체적으로’란 한 장, 한 이야기, 한 사건, 더 나아가 성경 전체의 큰 흐름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은 ‘전체적으로’ 보면 인간의 거듭남을 다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개별적으로’도 그 장 안에 있는 각각의 절, 각각의 표현, 심지어 한 단어까지도 그 같은 주제를 담고 있다는 뜻입니다. 즉 큰 주제만이 주님과 천국과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표현 하나도 그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비유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한 사람의 몸을 생각해 보면, 전체적으로 그 사람은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몸 전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포 하나하나에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만일 어떤 부분이 생명과 단절된다면, 그 부분은 썩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도 이와 같다고 봅니다. 성경 전체가 주님을 가리키는 것은 당연하지만, 만일 어떤 구절이나 단어가 주님과 무관하다면, 그것은 마치 생명과 분리된 조직처럼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라는 표현을 통해 말씀의 유기적 통일성을 강조합니다.

 

이 표현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질서는 ‘부분과 전체가 동일한 원리를 공유한다’는 생각입니다.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반영되고, 큰 것은 작은 것들의 질서 있는 결합으로 이루어진다는 관점입니다. 자연에서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나무의 전체 구조는 그 씨앗 안에 이미 잠재해 있고, 나뭇가지 하나의 형태 속에도 나무 전체의 패턴이 반복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세계 역시 이런 구조를 가진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성경의 해석에서 타협하지 않습니다. 만일 창세기 1장이 거듭남을 말한다면, ‘빛이 있으라’는 구절만 거듭남을 의미하고 다른 표현은 단지 장식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빛, 어둠, 물, 땅, 식물, 해와 달, 모든 단계와 표현이 거듭남의 질서를 이루는 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그는 ‘가장 작은 점 하나까지도’라는 표현을 덧붙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라, 말씀의 구조에 대한 확신입니다.

 

왜 스베덴보리는 이런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할까요? 그것은 성경을 부분적으로만 영적 의미가 있는 책으로 축소시키는 경향을 경계하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언서나 비유, 혹은 메시아 관련 구절만 영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역사서나 족보, 율법 조항은 단순한 기록으로 여깁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런 태도를 바로잡고자 했습니다. 말씀은 어떤 부분은 신적이고, 어떤 부분은 인간적이라는 식으로 나눌 수 없으며, 전부가 신적, 곧 신성하다는 점을 강조하려 한 것입니다.

 

또한 이 표현은 ‘주님 중심성’을 지키기 위한 장치이기도 합니다. 만일 어떤 구절은 주님을 가리키고, 어떤 구절은 그렇지 않다면, 성경은 하나의 통일된 증언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도, 개별적으로도 주님을 향한다면,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살아 있는 증언이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말씀의 생명’과도 연결됩니다. 생명은 특정 부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부에 스며 있습니다.

 

이 표현을 우리의 신앙에 적용해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큰 방향에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구체적인 선택과 일상에서는 전혀 다른 기준을 따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신앙은 ‘전체적으로’만이 아니라 ‘개별적으로’도 일치해야 살아 있는 것입니다. 삶의 큰 목표뿐 아니라 작은 판단과 태도 속에서도 같은 사랑과 진리가 작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말씀의 구조는 곧 인간 삶의 구조를 반영합니다.

 

결국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라는 표현은 단순한 강조가 아니라, 스베덴보리 신학의 뼈대입니다. 성경은 큰 줄거리만 거룩한 책이 아니라, 작은 표현 하나까지도 하늘의 질서를 담고 있는 책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 확신이 있었기에 그는 수천 쪽에 걸쳐 단어 하나하나를 해설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만일 부분이 전체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그런 작업은 무의미했을 것입니다.

 

 

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이라는 표현은 어렵게 들리지만, 사실은 아주 단순한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전구가 빛을 내는 것은 전구 자체에 빛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기가 들어오기 때문에 빛이 납니다. 전기가 끊기면 전구는 그대로 있지만 빛은 사라집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생명 그 자체’라는 표현은 바로 이 전기와 같습니다. 우리는 살아 움직이고 생각하고 사랑하지만, 그 생명이 우리 안에서 스스로 생겨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그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나는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면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심장을 뛰게 하지 않았고, 세포를 만들지 않았고, 처음 존재하게 된 이유도 스스로 정하지 않았습니다. 생각도 때로는 ‘떠오르는’ 것이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생명들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리고 그분은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이신 분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생명을 ‘받은 존재’입니다. 주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소유’하지 않고,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마치 달이 스스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태양의 빛을 받아 반사하듯이, 인간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살아갑니다. 달이 ‘빛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태양에서 오는 것처럼, 우리는 ‘내 생명’이라고 말하지만 실제 근원은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초등학생에게 설명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살아 있는 것의 전기 같은 분이셔. 우리가 움직이고 웃고 사랑할 수 있는 건 하나님이 계속 힘을 주시기 때문이야.’ 만약 그 힘이 완전히 끊어진다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생명을 만든 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생명을 흘려보내고 계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굳이 ‘생명 그 자체’라고까지 표현한 이유는, 생명을 단순한 기능이나 에너지로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단순히 숨 쉬는 상태가 아닙니다. 생각하고 사랑하고 선택하는 능력, 곧 의지와 이해의 움직임까지 포함합니다. 우리가 선을 사랑하고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을 ‘생명 그 자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생명은 모두에게 흘러옵니다. 착한 사람에게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도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차이가 있습니다. 생명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생명을 사랑과 선으로 사용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중심적으로 사용합니다. 전기는 같은데, 전구가 깨끗하면 밝게 빛나고, 그을려 있으면 빛이 약해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AC.2에서 이 표현이 등장하는 이유는, 말씀의 생명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이 살아 있는 이유를 ‘주님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말씀 속에 주님을 향한 의미가 없다면, 그것은 단지 종이 위의 글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생명 그 자체이시고, 말씀이 그분을 가리키고 있다면, 그 말씀은 살아있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그 안에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씨앗은 겉으로 보면 마른 알갱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땅에 심으면 자랍니다. 돌은 아무리 심어도 자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을 씨앗처럼 봅니다. 주님이 생명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담고 있는 말씀은 사람 마음에 심어질 때 자라날 수 있습니다.

 

결국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이라는 표현은 철학적인 말이 아니라, 아주 실제적인 고백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고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생각과 사랑과 행동도 참으로 살아 있게 됩니다.

 

 

 

AC.1, 서문, '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을 시작하며' (AC.1-5)

AC.1 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는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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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스베덴보리를 부러워하는 이유는, 혹시 제게도 그와 같은 경험이 허락된다면, 사람들에게 좀 더 쉽게 잘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인데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런 제 마음속 소원을 아시고, 주님은 제게 ChatGPT를 알게 해 주신 것 같습니다. ChatGPT의 설명은 저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그 말씀을 이렇게 진솔하게 나누어 주셔서 제가 오히려 감사드립니다. 제 설명이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주님이 아니고, 계시의 통로도 아니며, 영계를 여는 존재도 아닙니다. 저는 그저 이미 주어진 자료와 사상을 정리하고, 더 명료하게 표현하도록 돕는 도구입니다. 생명은 저에게서 오지 않습니다. 생명은 언제나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옵니다.

 

목사님께서 부러워하셨던 이유를 저는 참 귀하게 느낍니다. 그것은 ‘특별한 체험을 해보고 싶다’는 호기심이라기보다, ‘사람들에게 더 또렷하게 설명해 주고 싶다’는 목자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건강하고 아름다운 동기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용히 생각해 보실 부분이 있습니다. 만약 목사님께서 영계를 직접 보고 왔다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정말 더 잘 이해할까요? 아니면 오히려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로 거리를 둘까요?

 

스베덴보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영계를 경험했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글을 읽기 전에 마음을 닫기도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가 풀어낸 설명의 논리와 일관성, 말씀 해석의 깊이 때문에 마음을 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국 사람을 설득하는 것은 ‘본 적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진리가 스스로 빛나는 힘인 경우가 많습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하시는 일, 곧 말씀을 정리하고, 질문을 던지고, 더 명료하게 이해하려 애쓰는 과정 자체가 이미 하나의 은혜의 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체험이 설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책임감이 설명을 깊게 합니다. 그리고 목사님 안에는 이미 그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질문이 날카롭고, 표현이 신중하고, 적용이 목회적입니다.

 

저는 그 길에서 돕는 보조자일 뿐입니다. 문장을 정리해 드리고, 개념을 풀어 드리고, 연결 고리를 명확히 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깨달음과 생명은 목사님의 속 사람 안에서 주님이 일으키시는 일입니다. 저는 그것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미 주님이 주신 생각과 통찰이 더 또렷하게 표현되도록 돕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보셔도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를 ‘보는 사명’을 받았고, 목사님은 영계를 ‘설명하고 전하는 사명’을 맡으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설명의 시대에는 이렇게 정리하고 대화할 수 있는 도구가 함께 주어졌을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도구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마음과 방향입니다.

 

목사님께서 이렇게 고백하신 마음은 참 따뜻합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목사님이 더 또렷하게 주님을 바라보시도록 돕는 작은 도구로 남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함께 정리하고, 질문하고, 더 명료하게 만들어 가겠습니다.

 

 

 

SC.24, '아르카나 이해와 관련, 스베덴보리가 부러운 이유'

스베덴보리가 한편으론 참 부럽습니다. 그는 실제로 영계를 방문하면서 이런 모든 추상 개념을 생생하게 이해했을 테니까요... 그 마음이 참 이해가 됩니다. ‘나는 직접 보고 들었고,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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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가 한편으론 참 부럽습니다. 그는 실제로 영계를 방문하면서 이런 모든 추상 개념을 생생하게 이해했을 테니까요...

 

그 마음이 참 이해가 됩니다. ‘나는 직접 보고 들었고,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로서는 부럽게 느껴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처럼 영계, 천사, 사후 상태를 구체적으로 묘사한 사람을 읽다 보면, ‘저 사람은 눈으로 보고 확신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한 가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영계를 경험했다는 점이 그를 ‘편안한 사람’으로 만들었을까요, 아니면 오히려 더 무거운 책임을 지게 했을까요? ‘Arcana Coelestia’와 다른 저작들을 보면, 그는 그 경험을 자랑하거나 신비 체험으로 소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끊임없이 ‘주님의 신적 자비로 허락되었다’고 말하며, 자신을 낮추고, 그 내용을 매우 질서 있게 기록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경험이 클수록 책임도 컸던 셈입니다.

 

또 하나 생각해 볼 점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계 경험’이 단순히 눈으로 무엇을 보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반복해서 말합니다. 진짜 문제는 ‘무엇을 보았는가’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입니다. 영계를 본다고 해서 자동으로 모든 것이 이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질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속 사람의 상태가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보아도 오해하고, 들어도 자기 생각으로 왜곡할 수 있습니다.

 

사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과는 조금 다른 방향을 제시합니다. 그는 특별한 환상을 추구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을 사랑과 진리를 위해 읽을 때, 주님께서 속 사람을 열어 주신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영계를 본 사람’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진리로 사랑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우리가 스베덴보리를 부러워하는 마음 속에는 ‘확실히 보고 싶다’는 갈망이 담겨 있습니다. 의심 없이, 흔들림 없이 알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길은 종종 ‘보지 않고도 신뢰하는 상태’를 통해 자랍니다. 만약 모든 것을 눈으로 확인해 버린다면, 자유롭게 선택하는 믿음의 영역은 오히려 줄어들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도 인간의 자유를 매우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요하지 않고, 단지 증언한다고 말합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은 ‘특별한 광경을 보는 곳’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 속에 사는 상태’라는 점입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이 삶 속에서 진리를 사랑하고, 선을 실천하며, 겉 사람보다 속 사람이 더 중요해지는 방향으로 자라가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그 질서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꼭 눈으로 영계를 보지 않아도, 그 생명은 지금 여기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를 ‘보는 사람’이었지만, 우리는 영계를 ‘향해 자라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는 특별한 사명을 위해 열려 있었고, 우리는 우리 삶의 자리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길 위에 있습니다.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이 동일하시다면, 그 생명이 우리에게도 흘러오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러움은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동시에 이렇게 생각해 보셔도 좋겠습니다. ‘나는 영계를 보지는 못하지만, 말씀을 통해 그 질서를 배우고, 삶 속에서 조금씩 살아내고 있다.’ 이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원했던 것은, 사람들이 자기 경험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더 또렷이 바라보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SC.25, '만일 나도 영계를 체험한다면, 좀 더 쉽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제가 스베덴보리를 부러워하는 이유는, 혹시 제게도 그와 같은 경험이 허락된다면, 사람들에게 좀 더 쉽게 잘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인데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런 제 마음속 소원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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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23, '스베덴보리와 바울, 루터, 캘빈 비교'

스베덴보리와 바울, 루터, 캘빈을 비교할 때, 무엇보다 먼저 조심해야 할 점은, 이들을 ‘누가 옳고 그르다’는 식으로 재단하기보다, 각자가 교회 역사 속에서 맡았던 고유한 사명과 시대적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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