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EO.003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성부는 신성의 유일한 근원이시다’ - 성부의 군주성과 신적 일치의 문제
해설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에서 특별히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성부는 신성의 유일한 근원이시다’라는 고백입니다. 처음 이 말을 들으면 성부 하나님이 성자와 성령보다 더 높으신 분이며, 성자와 성령은 성부에게서 신성을 받아 존재하는 종속적인 신적 존재들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는 이러한 이해를 분명하게 거부합니다. 정교회가 말하는 ‘성부의 군주성’(monarchy of the Father)은 성부가 다른 두 위격보다 더 강하거나 더 높은 신성을 소유한다는 뜻이 아니라, 성부가 성자의 영원한 출생과 성령의 영원한 발출의 유일한 인격적 근원이시라는 뜻입니다.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고 성령은 성부에게서 영원히 발출하시지만, 세 위격은 동일한 신적 본질을 완전하게 공유하십니다. 따라서 성자와 성령은 피조물이 아니며, 성부보다 늦게 존재하기 시작하신 분들도 아닙니다. 정교회는 오히려 성부의 군주성을 통해 하나님의 일치를 설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성부가 신적 존재의 유일한 근원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일치는 성부라는 한 위격으로부터 설명되어야 합니까, 아니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하나를 이루는가 하는 문제에서 출발해야 합니까? 이 질문은 동방정교회와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 신학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동방정교회의 성부의 군주성은 초기 교부들의 삼위일체 논의, 특히 4세기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대 바실리오스(Basil the Great),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Gregory of Nazianzus), 니사의 그레고리오스(Gregory of Nyssa)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완전하게 인정하면서도, 세 위격의 구별과 하나님의 일치를 함께 설명하려 했습니다. 이때 성부는 성자와 성령의 ‘원인’(aitia) 또는 ‘근원’(arche)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인이라는 말은 자연계에서 어떤 물건을 만들어 내거나 시간적으로 먼저 존재한 존재가 뒤의 존재를 발생시키는 인과관계와 다릅니다. 성부는 성자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낳으시며, 성령을 만들어 내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영원한 발출 근원이십니다. 따라서 성자와 성령은 성부에게서 비롯되지만 성부와 동일하게 영원하시고, 동일하게 신성이시며, 동일하게 예배와 영광을 받으십니다. 미국 정교회(OCA)의 교리 해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까닭을 한 분 성부에게서 설명하면서,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분리되지 않고 동일한 신적 생명 안에 계신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성부가 세 위격 가운데 가장 높은 신이라는 뜻이 아니라, 세 위격의 영원한 관계를 성부의 근원성으로 설명하는 정교회 특유의 신학적 구조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용어상의 문제를 정확히 구별해야 합니다. ‘성부는 신성의 유일한 근원이시다’라는 표현은 동방정교회의 핵심 사상을 전달하지만, 자칫 신적 본질 자체가 성부보다 나중에 생겨났거나, 성부가 어떤 신성을 먼저 소유한 다음 그것을 성자와 성령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오해를 낳을 수 있습니다. 정교회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세 개의 신적 본질을 각각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하고 나뉠 수 없는 하나의 신적 본질을 완전하게 공유하십니다. 성부의 근원성이란 이 공통된 신적 본질보다 앞서 존재하는 별도의 원인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성자와 성령이 각각 성부와 맺는 영원한 위격적 관계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성부는 성자의 아버지이시고 성령의 발출 근원이시지만, 그 때문에 성자와 성령보다 더 신적이신 것은 아닙니다. 성자의 출생과 성령의 발출은 그 방식에서 구별되지만, 두 위격의 신성에는 어떠한 등급 차이도 없습니다. 또한 정교회는 성부의 군주성을 강조하면서도 세 위격이 하나의 신적 의지와 하나의 신적 역사하심을 공유한다고 가르칩니다. 성부께서 홀로 결정하시고 성자와 성령이 그 결정에 복종하는 세 신적 주체의 협력 구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교회의 가르침을 공정하게 이해하려면 ‘성부가 유일한 근원’이라는 말과 ‘세 위격이 동일한 신성’이라는 말을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동방정교회가 이러한 가르침의 근거로 중요하게 여기는 말씀 가운데 하나는 요15:26입니다. 예수께서는 진리의 성령이 아버지에게서 나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정교회는 여기서 성령의 영원한 발출이 성부에게서 이루어진다는 가르침을 확인합니다. 또한 요5:26에서는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고 말씀하시며, 요1:18에서는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아버지를 나타내셨다고 증언합니다. 정교회는 이러한 말씀들을 성자와 성령의 영원한 위격적 관계와 연결하여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동시에 요10:30에서 예수께서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라고 말씀하신 사실을 기록하며, 요14:9-11에서는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고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계신다고 가르치신 사실을 전합니다. 따라서 성경에는 성부가 근원이시라는 이해를 뒷받침하는 표현과 성부와 성자의 완전한 일치를 증언하는 표현이 함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말씀들이 성부와 성자의 영원한 두 위격적 관계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성육신하신 한 분 주님 안에서 근원적인 신성과 그 신성이 취하신 인성의 관계를 나타내는지를 분별하는 일입니다. 성경의 본문 자체와 그 본문을 해석하는 신학적 체계를 구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점에서 동방정교회와 스베덴보리는 동일한 성경을 읽으면서도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163-169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적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그것을 세 영원한 신적 위격의 관계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 안의 세 가지 본질적인 요소로 이해합니다. 그는 이를 인간의 영혼과 몸과 활동에 비유합니다. 인간에게 영혼과 몸과 활동이 있다고 해서 세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 하나님 안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있다고 해서 세 신적 인격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부는 한 분 주님 안의 근원적인 신성이시며, 성자는 그 신성이 성육신을 통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이시고,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하심입니다. 특히 TCR.167에서 스베덴보리는 성부의 신성이 주님의 영혼에 해당하고, 성자의 신적 인성이 그 영혼과 하나를 이루는 몸에 해당하며, 성령은 영혼과 몸이 하나 되어 나타내는 활동에 해당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비유의 목적은 하나님의 신비를 인간의 구조로 축소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이 본질과 인격 모두에서 한 분이심을 이해하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성부는 신적 근원이시지만, 그 성부는 성자와 구별되어 영원히 존재하는 별도의 신적 인격이 아닙니다. 성부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근원적인 신성이시며, 성자는 그 신성이 자신을 나타내신 신적 인성이십니다. 바로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동방정교회의 성부의 군주성과 근본적으로 달라집니다.
이 차이를 이해할 때 특별히 중요한 것은 성육신과 영화의 관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의 교리’(Doctrine of the Lord, 1763) DL.29-36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을 취하여 세상에 오셨으며, 지상 생애 동안 자신의 인성을 점차 영화롭게 하심으로써 신성과 인성을 완전하게 하나로 만드셨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영화’(glorification)는 단순히 예수께서 부활 후 영광스러운 지위에 오르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유한한 인간적 상태를 시험과 승리를 통해 벗으시고, 자신의 근원적인 신성으로부터 신적 인성을 이루신 과정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본래부터 따로 존재하던 두 신적 인격이 영원히 관계를 맺는 구조가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서 근원적인 신성과 그 신성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인성의 관계로 이해됩니다. 요14:10에서 주님께서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신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영혼이 몸 밖에 따로 있는 또 다른 사람이 아니듯, 성부는 성자 밖에 계신 또 다른 신적 인격이 아니라 주님 안에 계신 신성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부와 성자의 구별을 단순한 명칭의 차이로 없애 버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성과 인성의 실제적인 구별과 그 결합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그 결과가 한 분 신적 인격 안의 완전한 일치라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스베덴보리의 신론에서는 성부의 근원성을 성자와의 영원한 위격적 관계보다 주님 자신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정교회가 강조하는 성부의 군주성 안에는 어떤 진리가 담겨 있습니까? 우선 하나님 안에 둘 이상의 독립적인 신적 근원이 존재할 수 없다는 통찰입니다. 정교회는 성부를 유일한 근원으로 고백함으로써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 하나님이라는 이해를 거부합니다. 또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경쟁이나 권력의 서열이 아니라 하나의 신적 생명과 사랑과 의지 안의 완전한 일치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여러 신적 권력으로 나누어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이러한 일치의 중요성을 강하게 강조합니다. 다만 그는 하나님의 유일한 근원을 성부라는 한 위격에 두면서도 성자와 성령을 별개의 영원한 위격으로 인정하는 구조가 신적 인격의 완전한 단일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고 봅니다. 동방정교회가 ‘한 근원으로부터 세 위격이 완전한 일치를 이룬다’고 설명한다면, 스베덴보리는 ‘한 분 하나님 안에 근원적인 신성과 신적 인성과 신적 역사하심이 완전한 일치를 이룬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두 견해를 단순히 같은 진리를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정교회에서 영원한 세 위격의 실재는 포기할 수 없는 신앙의 내용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의 인격적 단일성은 바로 그러한 세 위격의 영원한 구별을 거부하는 핵심적인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성부께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실제 신앙의 문제에서도 드러납니다. 동방정교회의 예배는 성부께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나아가는 구조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것은 성자와 성령이 성부보다 열등하므로 인간이 그분들을 거쳐 더 높은 하나님께 도달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동등하게 예배하며, 성자를 통하고 성령 안에서 성부께 나아간다는 표현을 세 위격의 구별과 하나의 신적 역사하심을 드러내는 전례적 언어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정교회 신자의 기도를 마치 두 신적 중개자를 통하여 멀리 계신 성부의 허락을 얻으려는 행위처럼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인간 사이에 서 계신 또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성부의 신성이 그분 안에 완전하게 계시기 때문입니다. 요14:6에서 주님께서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한 신적 인격을 거쳐 다른 신적 인격에게 접근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신적 인성을 통하여 그분 안에 계신 근원적인 신성에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성부를 제외하고 성자만을 향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적 삼위일체가 완전하게 하나를 이루시는 주님 자신께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성부를 근원적인 신성이라고 부르고 성자를 신적 인성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신성만이 참된 하나님이고 인성은 그보다 낮은 어떤 피조물적 부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영화된 인성은 더 이상 마리아에게서 받은 유한한 인간적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성과 완전하게 결합하여 신적 인성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신성에 관해서만 하나님이신 것이 아니라 인성에 관해서도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이해는 하나님을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진 보이지 않는 절대자로만 생각하지 않도록 합니다. 보이지 않는 신성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셨으므로, 우리는 주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성부는 근원적인 신성이시다’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에도 성부가 성자보다 더 완전한 하나님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성과 신적 인성의 결합을 영혼과 몸의 일치에 비유하지만, 그 비유는 신적 인성이 신성보다 열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몸은 유한하고 피조된 것이지만, 주님의 영화된 인성은 신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 이해를 정확하게 설명하려면 ‘성부는 신성, 성자는 인성’이라는 간단한 공식에 머물지 않고, 성자는 신성과 완전히 하나가 된 ‘신적 인성’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이 문제는 우리의 실제 신앙생활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을 멀리 계신 두려운 권위자로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분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자비로운 중보자로 여긴다면, 그의 신앙 안에는 서로 다른 두 신적 성품에 대한 관념이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을 동방정교회의 성부의 군주성에서 직접 도출해서는 안 됩니다. 정교회 역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동일한 신적 사랑과 선과 지혜를 공유하신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단일성이 우리의 실제 생각과 기도 속에서 어떻게 보존되고 있는지는 어느 교회에 속한 신자든 살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이 점에서 한 분 주님께 우리의 이해와 사랑을 집중하도록 안내합니다. 주님께서 사랑이시고 지혜이시며, 그분 안에 근원적인 신성이 완전하게 계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 안에 서로 대립하는 사랑과 의지가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의 이름을 부르거나 하나님의 신비에 관한 올바른 개념을 소유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자신의 의지와 이해 안에 받아들이고, 이웃을 사랑하며,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치를 고백하면서 자신의 삶에서는 사랑과 진리를 분리한다면, 그 신앙고백은 아직 자신의 내면에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입니다.
성부의 군주성이라는 어려운 교리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진리는,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이해가 인간을 겸손하게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정교회의 교부들이 성부의 근원성과 세 위격의 일치를 설명하려 했던 것은 하나님을 인간의 철학적 개념 속에 완전히 가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경이 증언하는 신적 신비를 훼손하지 않으려는 노력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인간이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알아볼 수 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으며, 그 계시의 중심이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두 전통의 차이를 분별할 때 우리는 교리적 정확성만으로 상대방의 신앙 전체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정교회의 삼위일체 신앙 안에서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한다면, 그의 내면에 있는 사랑과 선을 교리적 차이만으로 부정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의 신론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교리적 우월성을 주장하거나 다른 신앙인을 멸시하는 근거가 된다면,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와 반대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교리는 인간을 주님께 인도하고, 주님을 향한 사랑이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도록 도와야 합니다. 신학적 분별은 중요하지만, 그 분별의 최종 목적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 그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이제 처음의 고백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성부는 신성의 유일한 근원이십니까? 동방정교회는 성부를 성자와 성령의 영원한 위격적 근원으로 고백하며,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유일성과 세 위격의 완전한 신적 일치를 설명합니다. 이 가르침에는 하나님 안에 독립적인 여러 근원이 존재할 수 없으며, 신적 생명과 사랑과 의지는 하나라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성부의 근원성을 세 영원한 위격 가운데 한 위격의 고유한 특성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에서뿐 아니라 인격에서도 한 분이시며, 성부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근원적인 신성이시고, 성자는 그 신성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이시며,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하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부의 신성을 참되게 알고자 한다면, 그 신성이 자신을 완전하게 나타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신 요14:9의 선언은 바로 이러한 이해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서로 다른 세 신적 인격을 마음속에 조합하여 하나로 생각해야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사랑과 지혜와 생명을 나타내신 한 분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부의 군주성을 설명하는 신학적 공식을 완성하는 데 있지 않고, 주님 안에 계신 근원적인 신성을 깨닫고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실제 삶에서 그분과 결합하는 데 있습니다. (EO.003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는 성부를 성자의 영원한 출생과 성령의 영원한 발출의 유일한 위격적 근원으로 고백하며, 이를 ‘성부의 군주성’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성부가 성자와 성령보다 더 높은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라, 세 위격이 동일한 신적 본질과 의지와 역사하심을 공유하면서도 성부에게서 영원한 관계의 근원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하나님의 유일성과 신적 일치를 보존하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성부의 근원성을 세 영원한 신적 위격 가운데 한 위격의 특성으로 이해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근원적인 신성으로 이해합니다. 성자는 그 신성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이시며,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하심입니다. 따라서 동방정교회와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유일성을 함께 강조하면서도, 신적 근원과 삼위일체의 구조를 설명하는 방식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성부의 신성을 성자와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전하게 나타나신 한 분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께 직접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앙은 교리적 지식에 머무르지 않고,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여 이웃을 위한 선한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EO.002. ‘하나님은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SL.EO.002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 삼위일체의 일치와 구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해설기독교 신앙에서
bygrace.kr
'즐겨찾기 > SL.EO 100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 EO.002. ‘하나님은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0) | 2026.11.06 |
|---|---|
| EO.001.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신다’ (0) | 2026.11.0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