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창1:8)
AC.26
‘저녁’(evening), ‘아침’(morning), 그리고 ‘날’(day)의 의미는 위의 5절에서 이미 설명했습니다. The meaning of “evening,” of “morning,” and of “day,” was shown above at verse 5.
해설
이 짧은 문장은 단순한 주석처럼 보이지만, 창세기 1장 전체 해석을 지탱하는 ‘핵심 해석 원리의 재확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지 않고, 오히려 독자가 다시 한번 5절로 돌아가 그 의미를 굳게 붙들도록 합니다. 이는 ‘저녁’, ‘아침’, ‘날’이 더 이상 문자적 시간 개념이 아니라, ‘거듭남의 상태 변화’를 가리킨다는 사실이 이후 모든 단락의 전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미 5절에서 밝혔듯이, ‘저녁’은 선과 진리가 없는 상태, 혹은 약화된 상태를 뜻하고, ‘아침’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과 생명이 유입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날’은 이 두 상태를 함께 포함하는 하나의 완결된 과정, 곧 하나의 영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AC.26은 이 정의가 일회성 설명이 아니라, 이후 모든 ‘날’ 해석에 반복 적용되는 기준임을 분명히 합니다.
특히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굳이 여기서 다시 설명하지 않고 ‘이미 위에서 보였다’고만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창세기 해설이 ‘앞에서 세운 원리를 계속 누적, 확장해 가는 구조’임을 보여 줍니다. 만일 독자가 ‘저녁’과 ‘아침’을 다시 시간으로 되돌려 이해한다면, 둘째 날 이후의 모든 해석은 무너집니다. 그래서 AC.26은 짧지만, 해석 전체를 고정하는 쐐기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또한 이 문장은 거듭남의 과정이 반복 구조임을 조용히 상기시킵니다. 이후에 등장하는 모든 ‘저녁과 아침’은 각각 다른 내용을 담지만, 동일한 질서를 따릅니다. 즉, 혼란과 약화의 상태를 거치지 않고는 새로운 빛의 상태가 오지 않으며, 모든 영적 성장은 이 리듬 안에서 진행됩니다.
결국 AC.26은 독자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미 배운 것을 잊지 말라. 창세기의 언어는 시간의 기록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반복되는 생명의 질서이다.’ 이 인식을 붙드는 한, 이후의 창조 기사들은 더 이상 멀어진 고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영적 상태를 설명하는 살아 있는 말씀으로 열리게 됩니다.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1:6, 7)
AC.25
‘하늘을 폈으며 땅을 펼쳤고’(spread out the earth and stretch out the heavens)라는 표현은, 사람의 거듭남을 다룰 때 선지자들이 아주 흔히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이사야에 보면, To “spread out the earth and stretch out the heavens,” is a common form of speaking with the prophets, when treating of the regeneration of man. As in Isaiah: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사44:24) Thus saith Jehovah thy redeemer, and he that formed thee from the womb; I am Jehovah that maketh all things, that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lone, that spreadeth abroad the earth by myself (Isa. 44:24).
또한 주님의 강림을 분명히 말하고 있는 곳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And again, where the advent of the Lord is openly spoken of: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사42:3) A bruised reed shall he not break, and the smoking flax shall he not quench; he shall bring forth judgment unto truth (Isa. 42:3);
이는 오류를 바로잡거나 욕정을 소멸시키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굽히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that is, he does not break fallacies, nor quench cupidities, but bends them to what is true and good; and therefore it follows: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사42:5) Jehovah God createth the heavens, and stretcheth them out; he spreadeth out the earth, and the productions thereof; he giveth breath unto the people upon it, and spirit to them that walk therein (Isa. 42:5).
이와 같은 뜻을 지닌 다른 구절들은 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Not to mention other passages to the same purport.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하늘을 펴고 땅을 펼친다’는 성경의 전형적인 표현이 실제로는 우주 창조의 묘사가 아니라, ‘인간 거듭남의 과정’을 말하는 언어임을 분명히 합니다. 선지자들은 반복해서 하늘과 땅을 언급하지만, 그 목적은 자연 세계의 구조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재질서화, 곧 거듭남의 과정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하늘과 땅은 앞서 보았듯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을 가리키며, ‘펼친다’는 말은 그 구조가 열리고 정돈된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44장의 인용은 이 점을 매우 직접적으로 보여 줍니다. 주님은 모태에서부터 사람을 지으신 분이며, 만물을 지은 분으로 소개됩니다. 여기서 하늘을 펼치고 땅을 편다는 표현은, 주님만이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올바른 질서로 세우실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는 거듭남이 인간의 자율적 노력이나 도덕적 훈련의 결과가 아니라, ‘주님의 단독 사역’임을 분명히 하는 고백입니다.
이사야 42장으로 넘어가면, 이 언어가 더욱 섬세한 의미를 띱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은, 주님이 인간 안에 있는 오류와 욕정을 즉각적으로 제거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오류를 바로잡거나 욕정을 소멸시키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굽히신다’고 풀이합니다. 이는 AC.24에서 보았던 원리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본성과 그 착각을 재료로 삼아, 그것들을 점진적으로 선과 진리의 방향으로 이끄십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시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는 단순히 위와 아래를 나누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질서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속 사람은 하늘로서 열리고, 겉 사람은 땅으로서 제자리를 찾으며, 그 사이에서 생명과 호흡이 주어집니다. 이때 주님은 그 위에 사는 백성에게 ‘호흡’을, 그 가운데 행하는 자들에게 ‘영’을 주신다고 합니다. 이는 생명의 유입이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다시 삶의 행위로 흘러간다는 질서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모든 과정이 ‘파괴가 아니라 보존과 굽힘’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십니다. 이는 인간 안에 남아 있는 미약한 선의 가능성과 희미한 진리의 불꽃을 끝까지 존중하신다는 뜻입니다. 거듭남은 급진적 단절이 아니라, 생명이 꺼지지 않도록 보호하면서 방향을 바꾸는 섬세한 작업입니다.
이 글은 선지서의 언어가 왜 그렇게 반복적으로 하늘과 땅을 말하는지를 이해하게 해 줍니다. 그것은 우주론적 집착이 아니라, 인간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거듭남의 보편적 구조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하늘이 펼쳐지고 땅이 펴지는 일은, 오늘도 인간 안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여전히 하늘을 펼치시고, 땅을 펴시며, 사람에게 호흡과 영을 주십니다.
결국 AC.25는 거듭남의 방식이 ‘온유하고 질서 있으며 점진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주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부수지 않으시고, 그 연약함 속에서 생명을 살려 내십니다. 하늘과 땅이 그렇게 펼쳐질 때, 인간은 비로소 숨을 쉬고, 걸을 수 있게 됩니다. 이는 창조의 언어로 말한 구원의 실제 모습입니다.
그 당시에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퍼셉션의 대상이 되었던 것들로부터 교리를 구성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러한 교리가 규범, 곧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기 위한 규범으로 쓰이게 하려고 그런 건데, 이 일을 한 사람들을 가리켜 ‘에녹’(Enoch)이라 하며, 이것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and Enoch walked with God)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성한 교리를 또한 그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이는 ‘에녹’이라는 이름의 뜻이 ‘가르치다’(instruct)라는 데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또한 이는 ‘동행하다’(walk)라는 표현의 의미와, 그가 ‘여호와가 아닌 하나님과 동행하였다’(walked with God, not with Jehovah)라고 하는 사실에서도 분명해집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walk with God)은 신앙의 교리에 따라 가르치고, 또 살아가는 것을 뜻하지만, ‘여호와와 동행하는 것’(walk with Jehovah)은 사랑의 삶(life)을 사는 것, 곧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무엇을 하든 그 동기가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것이지요. ‘동행하다’(walk)라는 말은 살아가는 걸 의미하는 상용 표현으로, ‘율법 안에서 살아가다’(walk in the law), ‘규례 안에서 살아가다’(walk in the statutes), ‘진리 안에서 살아가다’(walk in the truth)와 같은 표현이 그러합니다. ‘동행하다’(walk)라는 표현은 본래 길과 관련된 말로서, 진리와 관련되며, 따라서 신앙이나 신앙의 교리와 관련됩니다. 성경에서 ‘동행하다’(walking)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다음의 말씀들에서 어느 정도 분명해집니다. There were some at that time who framed doctrines from the things that had been matters of perception in the most ancient and succeeding churches, in order that such doctrine might serve as a rule whereby to know what was good and true: such persons were called “Enoch.” This is what is signified by the words,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so did they call that doctrine; which is likewise signified by the name “Enoch,” which means to “instruct.”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expression to “walk,” and from the fact that he is said to have “walked with God,” not “with Jehovah”; to “walk with God” is to teach and live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faith, but to “walk with Jehovah” is to live the life of love. To “walk” is a customary form of speaking that signifies to live, as to “walk in the law,” to “walk in the statutes,” to “walk in the truth.” To “walk” has reference properly to a way, which has relation to truth, consequently to faith, or the doctrine of faith. What is signified in the Word by “walking,” may in some measure appear from the following passages.
[2] 미가에서는 In Micah: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He hath showed thee, O man, what is good, and what doth Jehovah require of thee, but to do judgment and the love of mercy, and to humble thyself by walking with thy God? (Micah 6:8)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walk with God)은 여기서 말씀하신 것들을 따라 사는 걸 뜻합니다. 다만 여기서는 ‘하나님과’(with God)라고 되어 있고, 에녹에 대해서는 또한 ‘하나님으로부터’(from with God)라는 의미를 지닌 다른 말이 쓰여, 그 표현이 다소 중의적으로 사용됩니다. 시편에서는 where to “walk with God” signifies to live according to the things here indicated; here, however, it is said “with God,” while of Enoch another word is used which signifies also “from with God,” so that the expression is ambiguous. In David: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시56:13) Thou hast delivered my feet from impulsion, that I may walk before God in the light of the living, (Ps. 56:13)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하나님 앞에 다니는 것’(walk before God)은 신앙의 진리 안에서 동행하는 것을 뜻하며, 이것이 곧 ‘생명의 빛’(light of the living)입니다. 이와 같이 이사야에서는 where to “walk before God” is to walk in the truth of faith, which is the “light of the living.” In like manner in Isaiah: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사9:2) The people that walk in darkness see a great light. (Isa. 9:1)
라고 말합니다. 또 주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So the Lord says by Moses: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26:12) I will walk in the midst, and will be your God, and ye shall be my people, (Lev. 26:12)
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율법의 교리에 따라 사는 것을 뜻합니다. signifying that they should live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the law.
[3]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별 아래에서 펼쳐지게 하리니(렘8:2) They shall spread them before the sun, and the moon, and to the armies of the heavens, whom they have loved, and whom they have served, and after whom they have walked, and whom they have sought, (Jer. 8:2)
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는 사랑의 것들과 신앙의 것들이 분명히 구별됩니다. 사랑의 것들은 ‘사랑하며’(loving)와 ‘섬기며’(serving)로 표현되고, 신앙의 것들은 ‘뒤따르며’(walking)와 ‘구하며’(seeking)로 표현됩니다. 모든 예언서에서는 모든 표현이 정확하게 사용되며, 어느 한 용어도 다른 용어를 대신하여 쓰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에서 ‘여호와와 동행하다’(walk with Jehovah) 또는 ‘여호와 앞에서 행하다’(before Jehovah)라는 것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where a manifest distinction is made between the things of love, and those of faith; the things of love being expressed by “loving” and “serving”; and those of faith by “walking” and “seeking.” In all the prophetical writings every expression is used with accuracy, nor is one term ever used in the place of another. But to “walk with Jehovah,” or “before Jehovah,” signifies, in the Word, to live the life of love.
해설
이 글은 ‘에녹’의 교회가 왜 태고교회 흐름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에녹의 교회는 퍼셉션 그 자체로 살아가던 교회가 아니라, ‘퍼셉션의 내용으로부터 교리를 구성하여 보존하려 했던 교회’였습니다. 퍼셉션이 점차 약화되면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즉각적으로 알 수 없게 되자, 그것을 대신할 규범이 필요해졌고, 그 결과 교리가 형성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리를 단순한 인간적 산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는 주님의 섭리 안에서 허락된 보존의 방식이었습니다. 에녹이라 불린 사람들은, 이전 교회들에서 살아 있던 퍼셉션의 내용을 붙잡아,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녹’(Enoch)이라는 이름 자체가 ‘가르치다’(instruct)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분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와 ‘여호와와 동행하다’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신앙의 교리에 따라 살고 가르치는 것을 뜻합니다. 반면 여호와와 동행하는 것은 사랑의 삶, 곧 쓰임새의 삶을 직접 사는 것을 뜻합니다. 이 구분은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이는 교회의 중심이 퍼셉션과 사랑의 삶에서 교리와 신앙의 삶으로 이동했음을 보여 주는 결정적 표시입니다.
‘동행하다’(walk)라는 표현 자체도 이 변화를 잘 드러냅니다. 동행은 길과 관련된 말이며, 길은 진리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동행하다’는 주로 신앙과 교리, 진리의 길을 따라 사는 것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예언서의 구절들을 통해, 이 표현이 얼마나 일관되고 정확하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랑과 관련된 표현과, 신앙과 관련된 표현이 결코 뒤섞여 쓰이지 않는다는 점이 특히 강조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오늘날 교회의 현실을 깊이 비추는 거울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감정적 친밀감이나 개인적 체험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에녹의 교회가 보여 주는 동행은, ‘교리를 통해 신앙의 방향을 유지하는 삶’입니다. 이는 살아 있는 퍼셉션이 약해진 시대에, 신앙을 지키는 매우 현실적인 방식입니다.
동시에 이 글은 교리의 한계도 암시합니다. 교리는 생명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생명이 사라지는 것을 막는 그릇이 될 수는 있습니다. 에녹의 교회는 바로 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퍼셉션이 직접 작동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었지만, 그 진리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교리라는 형태로 다음 시대에 전해지도록 준비한 것입니다.
결국 AC.519는 에녹의 교회를 ‘보존의 교회’, ‘가르침의 교회’로 규정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신앙의 교리를 따라 살고 그것을 가르친다는 뜻이며, 이는 퍼셉션이 약화된 시대 속에서도 주님께서 교회의 생명을 이어 가시는 섭리의 한 방식이었습니다. 이 글은 교회 역사뿐 아니라, 오늘 우리의 신앙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성찰하게 만드는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