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2:18)

 

AC.139

 

고대에는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 아래에 있던 이들을 홀로 거한다(dwell alone)고 말하였는데, 이는 그러한 이들이 더 이상 악이나 악한 영들로부터 침해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유대 교회에서, 그들이 민족들을 몰아낸 뒤 홀로 거하였던 것으로 표상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말씀에서는 때때로 주님의 교회를 가리켜 홀로 있다(alone)고 말하는데, 예레미야에서는 In ancient times those were said to “dwell alone” who were under the Lord’s guidance as celestial men, because such were no longer infested by evils, or evil spirits. This was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also by their dwelling alone when they had driven out the nations. On this account it is sometimes said of the Lord’s church, in the Word, that she is “alone,” as in Jeremiah: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는 일어나 고요하고도 평안히 사는 백성 곧 성문이나 문빗장이 없이 홀로 사는 국민을 치라 (49:31) Arise, get you up to a quiet nation that dwelleth confidently, saith the Lord, which hath neither gates nor bar; they dwell alone (Jer. 49:31).

 

라고 하였고, 모세의 예언에서는 In the prophecy of Moses: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33:28) Israel hath dwelt confidently alone (Deut. 33:28).

 

라고 하였으며, 발람의 예언에서는 더욱 분명히 And still more clearly in the prophecy of Balaam: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23:9) Lo, the people dwelleth alone, and shall not be reckoned among the nations (Num. 23:9),

 

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민족들(nations)은 악(evils)을 뜻합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이 후손은 홀로 거하고자 하지 않았으니, 곧 천적 인간으로 있기를 원하지 않았고,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함을 받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유대 교회와 같이 민족들 가운데에 있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것을 원하였기 때문에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라고 말해지는데, 왜냐하면 원하는 자는 이미 악 안에 있으며, 그것이 그에게 허락되기 때문입니다. where “nations” signify evils.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disposed to dwell alone, that is, to be a celestial man, or to be led by the Lord as a celestial man, but, like the Jewish church, desired to be among the nations. And because they desired this, it is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for he who desires is already in evil, and it is granted him.

 

 

해설

 

이 단락은 창2:18의 ‘혼자 사는 것’이라는 표현을 ‘정반대의 의미’로 재정의해 줍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혼자 사는 것’을 결핍이나 고립으로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서 ‘혼자 사는 것’은 오히려 ‘가장 충만한 상태’를 뜻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직접적인 인도 아래에 있어, 더 이상 악이나 악한 영들의 간섭을 받지 않는 천적 인간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대에는 ‘홀로 거한다’는 말은 부정이 아니라 찬사였습니다. 유대 교회가 민족들을 몰아내고 홀로 거한 것은, 그 자체로는 그들이 천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천적 상태를 가리키는 외적 표상’이었습니다. 말씀에서 교회를 ‘홀로 있다’고 말할 때마다, 그것은 세상과 단절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악의 질서로부터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특히 발람의 예언에서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라는 말은 결정적입니다. 여기서 ‘여러 민족’은 단순한 이방인이 아니라, 악을 의미합니다. 즉, 홀로 거한다는 것은 악의 질서와 섞이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것이 본래 태고교회가 지녔던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방향을 틀어 말합니다. 태고교회의 이 후손은 더 이상 이렇게 홀로 거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만 인도받는 천적 상태에 머물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대 교회가 나중에 그러했듯이, ‘민족들 가운데에 있기를’, 곧 세상 질서와 자기중심적 삶의 방식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창2:18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는 선언은, 인간이 외로웠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그의 의지가 다른 방향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원리를 밝힙니다. 인간은 먼저 ‘원하고’, 그다음에 그 원하는 것이 허락됩니다. 다시 말해, 허락은 원인의 시작이 아니라, ‘이미 내면에서 선택된 방향의 결과’입니다.

 

이 단락의 마지막 문장은 특히 날카롭습니다. ‘원하는 자는 이미 악 안에 있으며, 그것이 그에게 허락된다’는 말은, 악이 외부에서 강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구에 응답하는 형태로 들어온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자유 없는 존재로 만들지 않으시기에, 인간이 주님 아닌 다른 인도를 원할 때, 그 선택의 결과를 경험하도록 허락하십니다.

 

AC.139는 이렇게 말합니다. ‘홀로 있음’은 본래 천국의 상태였으나, 인간이 그 상태를 원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 홀로 있음은 더 이상 유지되지 않았고, 그 결과가 이후의 모든 분리와 타락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AC.138, 창2:18, ‘proprium에 의한 내적 방향 변화의 시작’(AC.138-141)

창2:18-25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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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8.심화

 

3. ‘인간에게 proprium을 허락하시는 주님

 

주님은 참으로 놀라우신 분입니다. 천국과 지옥에서 천국 질서에 쉬 수긍하지 않는 자들에게 주님은 그들이 원하는 만큼 거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시는 모습을 종종 보았습니다. 가령, 온 천국에 주님 말고 다른 하나님이 있는지를 찾아보게 하신다든지, 비록 지옥에 합당한 자들일지라도 원하면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최선의 천국 변방에라도 발을 들여놓게 잠시 허락, 천국을 경험하게 하신다든지 말이지요. 주님은 이런 독립하고자 하는 천적 인간에게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음에도 이 proprium을 허락하시네요...

 

 

네, 바로 그 점에서 스베덴보리가 보여 주는 주님의 모습은 참으로 놀랍고도 두렵도록 깊습니다. 주님은 단순히 ‘질서를 유지하는 통치자’처럼 행동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인간과 천사들의 자유를 존중하십니다. 『천국과 지옥』을 읽다 보면 말씀하신 것처럼, 천국 질서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영들에게조차 주님은 억지로 굴복시키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들이 스스로 확인하고 경험하고 선택하도록 허락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관용이나 느슨함이 아닙니다. 그 배경에는 아주 깊은 원리가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과 천사를 단지 ‘올바르게 복종하는 존재’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유 안에서 사랑하는 존재’로 원하십니다. 그런데 사랑은 강제로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은 심지어 그 자유가 자신으로부터 멀어질 가능성까지도 감수하십니다. 이것이 proprium 허락의 가장 깊은 이유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조차 어떤 영들이 ‘정말 주님 외에 다른 중심은 없는가’, ‘정말 자기 자신으로 살 수는 없는가’를 확인하고 싶어할 때, 주님은 단칼에 꺾어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어느 정도는 실제로 경험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진짜 자유 안에서 확인되고 선택되지 않은 질서는, 그 존재 안에 완전히 뿌리내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놀라움의 핵심은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허락하시는가?’ 하는 점 말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적으로 보면, 바로 그 허락 안에 주님의 사랑의 본질이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을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인간이 단순히 ‘끌려가는 존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독립하려는 움직임조차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 자유 안에서, 끝없이 다시 자신 쪽으로 돌이키려 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이 드러납니다. proprium은 단순히 ‘실수로 허락된 위험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참된 사랑과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정말로 ‘내가 원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천국의 기쁨도 실제로 자기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이 자기처럼 느끼는 자리까지 허락하시되, 동시에 끊임없이 ‘생명의 근원은 나에게 있다’는 것을 부드럽게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에서 보이는 장면들은 단순한 흥미로운 영계 묘사가 아니라, 주님의 통치 방식 자체를 보여줍니다. 그분은 힘으로 굴복시키는 왕이 아니라, 자유 안에서 스스로 사랑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심지어 천적 인간 안에도 ‘독립하고 싶은 가능성’ 자체는 남겨 두십니다. 단, 천국에서는 그 가능성이 더 이상 자기중심으로 굳어지지 않고, 오히려 ‘그래도 생명은 주님께 있구나’라는 더 깊은 기쁨과 감사로 되돌아옵니다.

 

결국 목사님께서 느끼신 놀라움은 아주 중요한 통찰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주님은 단순히 질서를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유를 끝까지 존중하시면서도 결국 사랑 안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proprium의 허락은 바로 그 사랑의 방식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는 증거 가운데 하나입니다.

 

 

 

AC.138, 창2:18, ‘proprium에 의한 내적 방향 변화의 시작’(AC.138-141)

창2:18-25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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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8, 심화 2,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

AC.138.심화 2.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 역시 위 해설, ‘돕는 배필’을 설명하면서, ‘따라서 ‘돕는 배필’ 역시 외부에서 보충되는 타자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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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

 

역시 위 해설, 돕는 배필을 설명하면서, 따라서 돕는 배필 역시 외부에서 보충되는 타자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분명히 사람 자신의 proprium이라고 규정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느끼고 판단하며 선택하려는 구조,  proprium이 여기서 돕는 배필이라는 형식으로 등장합니다. 이는 주님을 대체, 대신하는 조력자가 아니라,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입니다.’라고 하는데요, 여기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이 뭔가요? 표현이 어려워 알 듯 모를 듯 합니다.

 

 

여기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자기성(proprium)이 단순히 방해물이나 악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돕는 배필’을 설명하면서, 인간 안에 있는 어떤 ‘자기처럼 느껴지는 요소’가 왜 필요한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이라는 표현이 나온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뜻입니다. 주님은 인간을 직접 움직이는 기계처럼 다루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반드시 ‘내가 생각한다’, ‘내가 선택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껴야 합니다. 그러니까 ‘생각도, 선택도, 그리고 사랑도 내가 능동적으로 한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바로 이 ‘내가 한다고 느끼는 자리’가 proprium, 곧 자기성입니다. 만약 이것이 전혀 없다면, 인간은 주님의 인도를 받아도 그것을 자기 삶처럼 느끼지 못합니다. 사랑도, 기쁨도, 책임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자기성은, 비록 위험성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인간이 주님의 인도를 ‘자기 삶처럼’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매개 역할을 합니다. 바로 이런 뜻에서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면 더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이 선한 일을 할 때, 실제 생명과 선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것을 전혀 자기 일처럼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사랑도 기쁨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반대로 그가 ‘내가 선택했고, 내가 사랑했다’고 느낀다면, 바로 그 자기감 속에서 그는 주님의 생명을 자기 삶처럼 경험합니다. 이 자기감이 없다면, 인간은 살아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proprium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근원이다’라고 굳어질 때의 타락한 자기중심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을 내 삶처럼 느끼며 살아가는 자리’입니다. AC.138에서 말하는 ‘돕는 배필’은 후자 쪽에 가깝습니다. 곧, 인간이 주님의 인도를 실제 자기 삶 속에서 체험하고 응답할 수 있게 해 주는 ‘자기처럼 느껴지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이 단순한 외부 보조자가 아니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것은 인간 밖에서 와서 부족함을 채워주는 타자(他者), 타인이 아니라, 인간 안에 형성된 ‘자유롭게 응답할 수 있는 자기감’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주님의 인도를 받지만, 그 인도가 자기 안에서 실제로 살아 움직이기 위해서는, ‘내가 원한다’, ‘내가 따른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끼는 어떤 자기성이 필요합니다. 이 자기성이 바로 ‘돕는 배필’의 깊은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표현을 너무 추상적으로 보지 마시고, 이렇게 이해하시면 훨씬 또렷합니다.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이란, 인간이 주님의 생명을 단순히 외부 힘으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 ‘내 선택’, ‘내 사랑’처럼 실제로 느끼며 응답할 수 있게 해 주는 자기감의 구조를 말합니다.

 

그리고 문제는 이 자기성이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끝까지 ‘주님에게서 받은 것’으로 남느냐, 아니면 ‘진짜 내 것’으로 굳어지느냐에 있습니다.

 

 

 

AC.138, 심화 3, ‘인간에게 proprium을 허락하시는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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