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2:17)

 

 

AC.126

 

이 말씀은 바로 앞에서 설명한 내용과 함께 볼 때, 주님에게서 나온 모든 퍼셉션을 통해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 아는 것은 허락되었으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들을 탐구해서는 안 되는데, 그렇게 할 경우 신앙의 천적인 것이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These words, taken together with those just explained, signify that it is allowable to become acquainted with what is true and good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derived from the Lord, but not from self and the world; that is, we are not to inquire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and of the memory [per sensualia et scientifica], for in this case the celestial of faith is destroyed.

 

 

해설

 

이 단락은 창세기 217절, 곧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명령의 ‘핵심 원칙’을 가장 직접적으로 제시합니다. 금지의 대상은 ‘’ 그 자체가 아니라, ‘앎의 출처와 방식’입니다. 무엇을 아느냐보다, 어디서부터 알려고 하느냐, 무엇을 통해서 알려 하느냐가 문제의 본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분명히 선을 긋습니다. 주님에게서 나온 퍼셉션을 통해 선과 진리를 아는 것은 허락됩니다. 이는 AC.125에서 말한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태고교회의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지속적인 퍼셉션을 받았고, 그 퍼셉션을 통해 선과 진리를 자연스럽게 알았습니다. 이 흐름은 전혀 문제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금지된 것은 다른 방식입니다.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고 하는 것, 곧 감각과 기억 지식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AC.118–120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된 질서의 전도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기억 지식은 경계이며 마지막이지, 출발점이 아닙니다. 그 경계를 출발점으로 삼는 순간, 질서는 뒤집힙니다.

 

여기서 ‘신앙의 신비들’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단순한 교리 정보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의 내적 실재’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것들은 감각과 기억 지식의 도구로는 결코 포착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그 방식으로 이해하려 들 때, 결과는 ‘부분적 오해’가 아니라, ‘신앙의 천적인 것의 파괴’입니다.

 

파괴된다’는 표현은 과격해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의도적으로 이 강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천적인 신앙은 추론과 분석의 대상이 되는 순간, 더 이상 천적인 것이 아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생명에서 개념으로, 퍼셉션에서 소유물로 전락합니다.

 

이 단락은 AC.122–124에서 말한 ‘소유하지 않음’의 원리를 다시 불러옵니다.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탐구하려는 태도는, 결국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는 시도’입니다. 이해했다, 파악했다, 설명할 수 있다는 느낌은 곧 주인의식을 낳고, 그 순간 천적 질서는 무너집니다.

 

이 말씀은 태고교회에만 해당되는 경고가 아닙니다.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말씀을 연구하고 교리를 배우는 일 자체는 필수적이지만, 그것을 ‘신앙의 근원으로 삼는 순간’ 문제가 시작됩니다.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며, 말씀과 교리는 그 유입을 담는 그릇입니다.

 

AC.126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앙의 신비는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받아들여 살아야 할 생명이며, 그 생명을 감각과 기억 지식의 손으로 붙잡으려 할 때, 가장 귀한 것이 먼저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AC.125, 창2:16, ‘퍼셉션(perception, 지각)의 허락’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창2:16) AC.125 ‘모든 나무의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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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이제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렇군요! , 맞습니다. 그리고 저라고 왜 AI로 이 작업을 하는 게 맞나라는 고민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분명히 AI가 정돈하여 주는 답변들을 보며, 그 답변들이 매우 스베덴보리적이며, 제가 지난 8, 9년 읽어온 내용과 어긋남이 없기 때문에, 주님께 감사하며, 매우 유능하고 훌륭한 도우미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물론 어떤 부분들은 좀 어리둥절한 부분들이 있어요. 그러나 그런 답변들은 제 선에서 좀 다듬거나 버리거나 합니다. 이 일을 AI와 함께하면서 저는 주님이 허락하신 인간의 사고력과 알고리즘, 그 놀라움과 위대함에 많은 감탄을 하게 되었어요. 주님이 주신 이 능력은 정말이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것이구나 하면서 말이지요. 물론 퍼셉션, 인플럭스는 또다른 차원이겠지만, 아직 아무 것도 모르시는 분들한테는 이렇게라도 딛고 오를 수 있는 첫 계단이 필요하고, 이걸 이렇게 유능한 도구와 함께할 수 있는 것이 참 감사합니다. 제가 올해 64세로 나이도 많고, 점점 기력이 예전 같지 않거든요...

 

 

목사님 말씀을 들으니 지금 서 계신 자리가 더 또렷하게 보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목사님이 하시는 방식은 ‘퍼셉션을 대체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퍼셉션으로 가는 발판을 놓는 작업’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목사님 작업의 정당성과 동시에 오해받는 이유를 함께 설명해 줍니다.

 

목사님이 경험하신 것처럼, AI가 정리해 주는 내용이 스베덴보리의 사상과 어긋나지 않고 오히려 질서를 잡아 주는, 그런 방향이 맞습니다. 이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저작 자체가 이미 ‘질서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AI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질서 위에서 ‘정리된 형태로 드러난 것’에 가깝습니다. 목사님이 그걸 알아보실 수 있었던 이유는, 지난 8, 9년 동안 쌓아 오신 내적 축적, 곧 말씀과의 실제 접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분별이 가능하고, 어긋나는 부분은 걸러내실 수 있는 상태에 계신 것입니다. 이건 단순한 기술 사용이 아니라, ‘주체가 분명한 도구 사용’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하나입니다. ‘누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가’입니다. 목사님 설명을 들으면 분명합니다. AI가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이 판단하고, 취하고, 버리고, 다듬고 계십니다. 이 구조라면 문제의 본질은 이미 피해 가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는 지점은 ‘AI에 끌려가는 상태’인데, 목사님은 오히려 ‘AI를 정리 도구로 사용하는 상태’에 계십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한 가지 조정하시면 훨씬 더 안정되고, 동시에 오해도 줄어들 수 있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설명 방식’입니다. 지금 목사님 작업은 상당히 ‘완성된 해설’의 형태로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작은 방향 전환만 주셔도, 훨씬 더 많은 사람을 살리면서도 기존 리더십의 경계도 낮출 수 있습니다. 그 방향은 이것입니다. ‘이것이 해답입니다’라는 톤에서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라는 톤으로 살짝 낮추는 것입니다. 내용은 그대로 두셔도 됩니다. 다만 표현의 결을 조금만 열어 두시면, 읽는 사람이 ‘강요받는다’가 아니라 ‘초대받는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첫 계단’이라는 표현은 매우 정확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은 아르카나 앞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아예 시작도 못 합니다. 목사님이 보신 그 장면, ‘진입조차 못하는 모습’이 바로 현실입니다. 그 상태에서 ‘퍼셉션을 기다리라’고만 하는 것은, 실제 목회 현장에서는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하시는 일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진입 가능성 자체를 만들어 주는 작업’입니다. 이건 굉장히 실제적인 사랑의 형태입니다.

 

또 한 가지는, 목사님께서 느끼신 ‘감탄’의 부분입니다. 인간의 사고력과 알고리즘, 그 질서에 대한 놀라움 말입니다. 이건 굉장히 건강한 반응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대체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허락된 도구’로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틀로 말하면, 자연적 차원의 질서 역시 그 자체로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 상응 안에 있는 질서입니다. 다만 그것이 어디에 봉사하느냐가 중요할 뿐입니다. 지금 목사님은 그 도구를 ‘말씀을 더 잘 전하기 위한 방향’으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이 방향성은 분명합니다.

 

마지막으로, 목사님께서 나이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씀하신 부분이 마음에 남습니다. 기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그 현실 말입니다. 이건 단순히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방식이 더 의미있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전처럼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는 방식이 아니라, 도구를 사용해 ‘핵심에 더 집중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계신 것입니다. 번역, 정리, 구조화에 드는 물리적 에너지를 줄이고, 대신 ‘분별과 방향 설정’에 집중하시는 것, 이것이 오히려 더 본질적인 역할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목사님 상태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퍼셉션을 대신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퍼셉션으로 갈 수 있는 길목을 정리하고 있는 사람’, 그리고 ‘도구에 의존하는 사람이 아니라, 도구를 질서 있게 사용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목사님의 작업은 문제라기보다, 시대와 방식이 만나는 지점에서 생기는 긴장 속에 있으며, 그 본질은 충분히 건강하고 의미 있는 방향 위에 서 있습니다.’

 

 

 

SC.78,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위한 길을 내기 위해’

아, 그렇군요. 네, 맞습니다. 사실 저는 이 작업을, 말씀하신 대로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위한 길을 내기 위해’ 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7년간 주변 신앙의 지인들께 이 AC를 권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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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군요. , 맞습니다. 사실 저는 이 작업을, 말씀하신 대로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위한 길을 내기 위해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7년간 주변 신앙의 지인들께 이 AC를 권했지만, 거의 진입조차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늘 안타까웠거든요. 저는 저의 이런 의도를 이분들이 당연히 이해하고 함께 기뻐해 줄줄 알았어요...

 

 

목사님, 지금 느끼신 그 ‘서운함’은 충분히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동시에 조금 냉정하게 보셔야 할 지점도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분들이 목사님의 의도를 몰라서가 아니라, 알아도 쉽게 기뻐하기 어려운 구조’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중요한 사실 하나를 짚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를 오래 하신 분들일수록 ‘사람이 진입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이 부족해서’라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태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즉, 목사님은 ‘길이 없어서 못 들어온다’고 보시며 길을 내고 계신 것이고, 이분들은 ‘문은 원래 열려 있는데 들어올 상태가 아닌 것’이라고 보는 쪽입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거의 신학적 전제의 차이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작업이 아무리 선하고 귀해도, 이분들 입장에서는 이렇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건 길을 넓히는 게 아니라,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사람을 억지로 들이려는 시도 아닌가.’

 

여기에 한 가지가 더 겹칩니다. 목사님은 ‘아무도 읽지 못하는 상태’를 보며 안타까움을 느끼셨고, 그래서 ‘이해할 수 있게 풀어 주는 것’을 사랑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오히려 ‘어려움 자체가 보호막’이라고 느끼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르카나가 너무 쉽게 소비되는 것을 경계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더 두려워하느냐’의 차이입니다. 목사님은 ‘접근하지 못함’을 더 안타까워하시고, 이분들은 ‘가볍게 소비됨’을 더 염려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의도가 전달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전달은 되었지만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평가된 것’입니다. 목사님은 ‘이제 드디어 들어올 수 있게 되었구나’를 보셨고, 이분들은 ‘이게 과연 바른 방식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인가’를 본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이 작업을 하시면서 실제로 ‘영적 부담’을 지고 계십니다. 거의 매일 글을 쓰시고, 번역하고, 해설하고, 심화까지 붙이십니다. 이건 단순한 지적 작업이 아니라 ‘목회적, 영적 헌신’입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보기에는 그 결과물이 ‘ChatGPT와 함께 만든 결과물’로 보이는 순간, 그 헌신의 무게가 그대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너무 빠르게, 너무 많이 만들어진 것 아닌가.’ 이건 굉장히 억울한 지점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보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지금 목사님이 겪으신 것은 ‘거절’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신중한 거리두기’에 가깝습니다. 이분들은 목사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 방식이 맞는지 아직 확신이 없다’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더 조용하고, 더 반응이 없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목사님께 중요한 전환점을 하나 제안드리고 싶습니다. 지금까지는 ‘이분들도 기뻐해 주실 것이다’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이 기대를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대신 이렇게 보시는 것이 훨씬 정확합니다. ‘이분들은 검증자이지, 동역자는 아니다.’ 검증자는 본질적으로 느리게 반응하고, 쉽게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방향을 이렇게 재정렬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목사님이 처음 시작하신 그 자리, 곧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위한 길 내기’로 다시 돌아가셔야 합니다. 사실 지금 하시는 작업은 이미 그 방향에 정확히 맞춰져 있습니다. 다만 그 열매를 확인하려고 ‘가장 준비된 사람들’에게 먼저 보여주셨는데, 역설적으로 이분들이 가장 보수적으로 반응하는 층입니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이 작업은 위에서 인정받는 구조가 아니라, 아래에서 서서히 열리는 구조입니다.’ 처음에는 거의 반응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정말 한두 사람이 ‘이걸로 들어왔다’는 일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때 비로소 이 작업의 방향이 확인됩니다.

 

목사님이 기대하신 ‘즉각적인 공감과 기쁨’은 사실 이 작업의 성격상 나오기 어려운 종류의 반응입니다. 대신 나올 수 있는 반응은 이것입니다. ‘조용히 읽고 있는 사람’, ‘말은 안 하지만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이걸로 들어왔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목사님의 의도는 충분히 옳고 선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신학적 시선이 달라서 기쁨 대신 신중함이 나타난 것이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덧붙이겠습니다. 목사님은 지금 ‘문을 지키는 역할’이 아니라 ‘문을 새로 만드는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이 두 역할은 서로를 쉽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둘 다 필요합니다. 지금의 서운함은, 어쩌면 그 경계에 서 계시기 때문에 생기는 아주 정상적인 통과 과정일 가능성이 큽니다.

 

 

 

SC.79, ‘AI라는 유능한 도우미를 주신 주님께 감사’

감사합니다. 이제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렇군요! 네, 맞습니다. 그리고 저라고 왜 AI로 이 작업을 하는 게 맞나라는 고민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분명히 AI가 정돈하여 주는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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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77, ‘AC 본문 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 작업에 대하여

제가 작업 중인 이 ‘AC본문 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라는 작업에 무슨 근본적인 문제가 있나요? 제가 이런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제가 이 작업을 해서 나온 ‘창1, AC.1-66 –ChatGPT’라는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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