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37

 

이 장은 태고교회의 퇴보, 곧 그 교리가 왜곡된 것과, 그 결과 생겨난 이단들과 분파들을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 아래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참된 교회가 어떠했는지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 교리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또한 그 교회의 이단들과 분파들이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태고교회에 관해서는 위에서 충분히 설명했습니다. 곧 태고교회는 천적 인간이었으며,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속한 것 외에는 어떠한 신앙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 그들은 이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신앙, 곧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될까 조심, 신앙에 대한 언급조차 꺼렸다는 설명을 위에서 드렸습니다. (AC.200, 203) As this chapter treats of the degenera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or the falsification of its doctrine, and consequently of its heresies and sects, under the names of Cain and his descendants, it is to be observed that there is no possibility of understanding how doctrine was falsified, or what was the nature of the heresies and sects of that church, unless the nature of the true church be rightly understood. Enough has been said above concerning the most ancient church, showing that it was a celestial man, and that it acknowledged no other faith than that which was of love to the Lord and toward the neighbor. Through this love they had faith from the Lord, or a perception of all the things that belonged to faith, and for this reason they were unwilling to mention faith, lest it should be separated from love, as was shown above. (n. 200, 203)

 

[2] 천적 인간은 이와 같으며, 시편에서도 표상을 통하여 이와 같이 묘사합니다. 주님은 ‘왕’, 천적 인간은 ‘왕의 아들’로 말이지요. Such is the celestial man, and such he is described by representatives in David, where the Lord is spoken of as the king, and the celestial man as the king’s son:

 

1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3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5그들이 해가 있을 동안에도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도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7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시72:1, 3, 5, 7) Give the king thy judgments, and thy righteousness to the king’s son. The mountains shall bring peace to the people, and the hills in righteousness. They shall fear thee with the sun, and toward the faces of the moon, generation of generations. In his days shall the righteous flourish, and abundance of peace, until there be no moon. (Ps. 72:1, 3, 5, 7)

 

‘해’(sun)는 사랑을, ‘달’(moon)은 신앙을, ‘산들’(mountains)과 ‘작은 산들’(hills)은 태고교회를, ‘대대로’(generation of generations)는 홍수 이후의 교회들을 각각 표상합니다. ‘달이 다할 때까지’(until there be no moon)라고 한 것은 신앙이 사랑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30:26 말씀도 참조) By the “sun” is signified love; by the “moon,” faith; by “mountains” and “hills,” the most ancient church; by “generation of generations,” the churches after the flood; “until there be no moon” is said because faith shall be love. (See also what is said in Isaiah 30:2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사30:26)

 

[3] 태고교회와 그 교리는 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지금은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지만,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시며, 그때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이로부터 태고 시대에 사람들이 신앙을 따로 고백,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을 때, 교리가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교리를 왜곡한 사람들, 곧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거나 신앙만을 따로 고백한 사람들을 당시에 ‘가인’(Cain)이라 불렀으며, 이러한 일은 그때 엄청난 악으로 여겨졌습니다. Such was the most ancient church, and such was its doctrine. But the case is far different at this day, for now faith takes precedence over charity, but still through faith charity is given by the Lord, and then charity becomes the principal. It follows from this that in the most ancient time doctrine was falsified when they made confession of faith, and thus separated it from love. Those who falsified doctrine in this way, or separated faith from love, or made confession of faith alone, were then called “Cain”; and such a thing was then regarded as an enormity.

 

 

해설

 

AC.337은 창4의 ‘가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잠시 태고교회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칙부터 제시합니다. ‘무엇이 왜곡되었는지를 알려면, 먼저 왜곡되기 전의 본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로 상징되는 이단과 분파가 얼마나 심각한 변질이었는지를 이해하려면, 먼저 태고교회에서 신앙과 사랑이 본래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기준이 없으면 변질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는 우리가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먼저 교리를 배우고, 그것을 믿고, 그 믿음에 따라 사랑을 실천한다’는 순서가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먼저 주님을 사랑했고, 이웃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직접 지각하는 퍼셉션(perception)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과 나란히 존재하는 별개의 무엇이 아니었습니다. 사랑 안에 신앙이 있었고, 사랑에서 진리를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속한 것 외에는 어떠한 신앙도 인정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을 언급하는 것조차 원치 않았다’는 표현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신앙’이라는 단어를 금기시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신앙을 사랑과 별개의 것으로 따로 떼어 말하는 순간, 본래 하나였던 것이 둘로 나뉠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나는 이것을 믿는다’는 고백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생명의 상태였습니다. 사랑 안에 있으면 그 사랑으로부터 무엇이 참인지 알았으므로, 굳이 신앙을 독립된 무엇으로 내세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문제가 얼마나 근본적인 것이었는지도 드러납니다. 가인의 출발은 신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신앙을 따로 떼어 ‘신앙’이라고 고백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눈으로 보면 이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 문제인지 선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질서에서는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여 독립된 것으로 세우는 순간 이미 질서가 뒤집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교리적 차이가 아니라 ‘교리가 왜곡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시72의 인용은 이러한 천적 질서를 상응으로 보여 줍니다. ‘해’는 사랑을, ‘달’은 신앙을 의미합니다. 자연계에서 달빛이 본래 자기 빛이 아니라 햇빛을 받아 비추듯, 영적으로도 신앙은 사랑에서 오는 빛을 받아 존재합니다. 신앙이 스스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그 생명과 빛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와 달의 관계는 태고교회에서 사랑과 신앙이 어떠한 질서 가운데 있었는지를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산들’과 ‘작은 산들’이 태고교회를 의미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말씀에서 ‘산’은 높은 사랑, 특히 주님을 향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태고교회가 천적 교회였던 것은 바로 그 교회의 중심이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교회의 가장 높은 것은 교리적 지식이나 신앙고백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생명이었습니다. 그 사랑으로부터 모든 진리와 지혜가 흘러나왔습니다.

 

특히 ‘달이 다할 때까지’라는 표현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설명이 인상적입니다. 그는 ‘신앙이 사랑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신앙이 없어진다는 것은 진리가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더 이상 사랑과 구별되는 별도의 것으로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사랑과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단지 ‘믿어야 할 것’으로 알고 있는 단계에서 더 나아가, 그것을 사랑하고 기쁘게 살아갈 때, 진리는 그의 생명이 됩니다. 이때 신앙은 단순한 지식이나 고백을 넘어 사랑 안에 살아 있게 됩니다.

 

사30:26의 ‘달빛은 햇빛 같겠고’라는 말씀도 같은 원리를 보여 줍니다. 달이 상징하는 신앙의 빛이 해가 상징하는 사랑의 빛과 같아진다는 것은 신앙과 사랑이 다시 하나가 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랑이 신앙으로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사랑 안에서 그 완성을 얻는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의 목적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결국 사랑과 체어리티입니다.

 

그런데 [3]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전환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이 한 문장을 놓치면 AC.337을 잘못 적용하기 쉽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에서 신앙으로 나아갔지만, 타락 이후의 인간에게는 그 질서가 그대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섭니다. 사람은 먼저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님께서 사람 안에 체어리티를 심으십니다. 바로 앞 AC.335의 ‘셋’과 AC.336의 ‘에노스’에서 살펴본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선다’고 해서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앞선다’는 것은 거듭남의 과정에서 먼저 의식적으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목적과 가치의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그때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고 덧붙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로 인도하기 위해 먼저 주어지고, 체어리티가 형성되면 신앙은 그 안에서 자신의 참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따라서 시간적, 과정적으로는 신앙이 먼저일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체어리티가 중심입니다.

 

이것은 가인과 셋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도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가인은 ‘신앙이 먼저’라는 것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AC.335에서 셋 역시 새로운 ‘신앙’이라 부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그 분리된 신앙 자체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든 데 있습니다. 반면 셋이 상징하는 신앙은 체어리티로 나아가며, 주님께서는 그 신앙으로 체어리티를 심으십니다. 같은 ‘신앙’이라 해도 하나는 자신에게서 끝나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AC.337 마지막의 ‘그러한 일은 그때 엄청난 악으로 여겨졌다’는 말도 이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앙과 사랑을 서로 구별하여 말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신앙을 따로 고백했다’는 것이 왜 그토록 심각했는지 쉽게 와닿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신앙이 하나였던 천적 교회에서 그것을 처음 분리한 것은 단순한 용어상의 구별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 질서를 뒤집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창4는 바로 그 작은 분리가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으로 보여 줍니다.

 

 

심화

 

1. 왜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을 따로 고백하는 것’조차 엄청난 악이었을까?

 

이 질문은 AC.337을 읽으면서 반드시 한번 짚어볼 만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신앙고백’이 오히려 매우 중요한 일로 여겨집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를 분명하게 말하며, 올바른 교리를 지키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을 따로 고백하는 것’이 교리의 왜곡이었고, 심지어 ‘엄청난 악’으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신앙고백 역시 잘못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두 교회의 영적 상태와 거듭남의 질서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 사람에게 사랑과 신앙은 아직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비유하자면, 오늘날 우리가 ‘나는 내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과 ‘나는 내 아이가 소중하다고 믿는다’를 굳이 별개의 두 체계로 나누지 않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가치를 알고 있으며, 그 앎은 사랑과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어느 순간부터 ‘사랑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아이가 소중하다는 사실을 올바르게 믿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면, 무언가 근본적인 것이 뒤집힌 것입니다. 태고교회에서 신앙을 사랑과 분리한다는 것은 이보다 훨씬 깊은 차원에서 그러한 질서의 전도(顚倒, 뒤집힘)를 의미했습니다.

 

더구나 처음의 분리는 아주 작아 보였을 것입니다. ‘사랑을 버리자’고 선언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세웠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가인’이 시작됩니다.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도 신앙일 수 있다는 생각이 가능해지고, 그다음에는 신앙이 사랑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가능해지며, 결국 체어리티가 없어도 올바른 신앙만 있으면 된다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AC.324-334에서 보았듯 그 끝은 체어리티의 소멸과 교리의 왜곡, 그리고 마침내 신앙과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였습니다.

 

이 때문에 AC.337은 오늘날의 교회에도 매우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태고교회 사람이 아니므로 먼저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신앙고백이나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 자체가 가인적인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신앙과 교리가 어디로 가고 있느냐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회개하게 하고, 자기 사랑을 낮추며,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으로 이끌고 있다면 신앙은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이 정확하다는 사실 자체가 구원의 보증처럼 되고, 삶에서 체어리티가 사라져도 ‘나는 올바른 교리를 믿는다’는 사실로 자신을 정당화한다면 가인의 문제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AC.337에서 말하는 태고교회의 타락은 먼 옛날 어느 교회의 특이한 사건만은 아닙니다. ‘사랑 안에 있어야 할 진리를 사랑에서 떼어 내어 그 진리 자체를 높이는 것’은 어느 시대의 교회에서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교리가 사람을 주님과 이웃에게로 이끌기 위한 길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될 때, 신앙이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아니라 자신이 옳음을 증명하는 표지가 될 때, 우리는 가인의 문제를 우리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어제 함께 붙들었던 원리가 다시 매우 정확하게 들어맞습니다. ‘진리가 자기 입장을 섬기게 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시작도 어쩌면 바로 그 질서의 미세한 전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진리와 신앙이 사랑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떨어져 나와 스스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자신을 높이지 않습니다. 사람을 체어리티로 데려가고, 체어리티 안에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한 뒤, 마침내 자신도 그 사랑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AC.337의 핵심은 ‘신앙보다 사랑이 중요하다’는 단순한 비교에 있지 않습니다. 더 깊은 핵심은 ‘신앙은 사랑과 분리될 때, 그 본래의 생명을 잃는다’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왔고, 오늘날에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집니다. 출발 순서는 달라졌지만, 목적은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진리가 선과 결합하고,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마침내 사람이 알고 믿는 것이 그가 사랑하고 살아가는 것이 되도록 이끄십니다. 바로 그 결합이 교회를 교회답게 하고,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내적 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가인의 분리’에 대한 재미있는 비유

 

가인이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다는 말을 처음 접하면, 이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 문제였는지 쉽게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신앙을 중요하게 여기고,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분명히 하는 것이 왜 잘못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부부관계에 한번 비유해 보면 조금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부부가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들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어려울 때 서로 돕고, 함부로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기쁨을 자기 기쁨처럼 여깁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매일 ‘부부간 준수 사항 20가지’를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가 이미 서로를 향한 사랑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규칙이 없어서가 아니라, 규칙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이미 사랑 안에서 살아 있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랑과 신앙의 관계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했으며,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주님으로부터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별개로 신앙을 따로 떼어 내어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라고 명문화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신앙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이 사랑 안에서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될까 하여 신앙을 따로 언급하기조차 원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보다 ‘부부간 준수 사항 20가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제 서로의 마음보다 조항을 먼저 살피고, ‘나는 20개 가운데 19개를 지켰으니 좋은 남편이다’, ‘당신은 14번 조항을 어겼으니 잘못했다’며 서로를 판단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 없어도 이 규칙만 제대로 지키면 좋은 부부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규칙의 관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사랑에서 나온 원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것이 되고, 나중에는 오히려 그 원칙이 사랑보다 위에 서게 된 것입니다.

 

‘가인’의 시작도 이와 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신앙은 본래 사랑 안에 있었고, 사랑에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내어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고, 마침내 신앙 자체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세우면서 질서가 뒤집히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분리’처럼 보였지만, 그 분리가 계속되자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교리가 왜곡되더니, 결국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는 또 이런 반전도 있습니다. 사랑이 이미 많이 식어 버린 부부에게는 오히려 ‘서로 모욕하지 말자’,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들어 주자’, ‘어려울 때 서로 돕자’와 같은 원칙을 다시 배우고, 의식적으로 지키는 것이 관계 회복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오지 않더라도 옳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고, 그러한 삶을 계속하는 가운데 사랑이 다시 살아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고 말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신앙으로 나아갔지만, 그 상태를 잃은 인간에게는 먼저 신앙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따라 살아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신앙으로 사람 안에 체어리티를 심으십니다. 따라서 오늘날은 신앙을 분명히 배우고 고백하는 것 자체가 ‘가인’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로 나아가지 않고 그 자체로 완결된 그 무엇이 될 때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보면 가인과 셋의 차이도 더욱 선명해집니다. 가인이 사랑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을 앞세우는 신앙이라면, 셋은 다시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신앙입니다. 부부관계에 비유하면, 사랑보다 규칙을 앞세우고, ‘규칙만 지키면 된다’고 하는 것이 전자의 모습이라면, 이미 약해진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올바른 원칙을 배우고, 그것을 따라 살면서 다시 서로를 사랑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은 후자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규칙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규칙이 사랑에서 나와 사랑을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되어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을 사랑과 분리한 일이 ‘엄청난 악’으로 여겨졌다는 것은 신앙이나 교리를 명문화하는 행위 자체가 악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래 사랑 안에서 하나였던 신앙을 사랑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랑이 살아 있을 때에는 신앙이 그 사랑 안에서 생명을 얻고, 사랑이 무너진 뒤에는 주님께서 신앙으로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십니다. 어느 경우든 목적은 같습니다. 신앙은 홀로서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삶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분리’, 곧 ‘가인’이라는 ‘분리’를 이해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입니다.

 

 

3. ‘시72:1, 3, 5, 7’

 

1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3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5그들이 해가 있을 동안에도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도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7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시72:1, 3, 5, 7) Give the king thy judgments, and thy righteousness to the king’s son. The mountains shall bring peace to the people, and the hills in righteousness. They shall fear thee with the sun, and toward the faces of the moon, generation of generations. In his days shall the righteous flourish, and abundance of peace, until there be no moon. (Ps. 72:1, 3, 5, 7)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시72:1, 3, 5, 7을 인용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가인’으로 의미되는 신앙의 분리가 얼마나 심각한 일이었는지를 설명하기에 앞서, 그 분리가 일어나기 전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가 어떠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337 첫머리에서 참된 교회가 어떠했는지를 알지 못하면 그 교리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가인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시72를 통하여 천적 인간의 본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 시편에서 핵심은 ‘해’, ‘달’, ‘산들’, ‘작은 산들’, 그리고 ‘평강’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해’가 사랑을, ‘달’이 신앙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이 인용의 중심입니다. 해는 스스로 빛을 내지만, 달은 해의 빛을 받아 비춥니다. 마찬가지로 태고교회에서 신앙은 사랑과 독립되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생명과 빛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먼저 주님을 사랑했고,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따라서 신앙은 사랑과 나란히 놓인 또 하나의 독립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 안에 신앙이 있었던 것입니다. 시72의 해와 달은 바로 이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이 해가 있을 동안에도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도 대대로 그리하리로다’라는 말씀은 단순히 해와 달이 존재하는 오랜 세월을 뜻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속뜻으로 보면 사랑과 신앙이라는 교회의 두 핵심 요소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둘이 서로 독립된 두 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해’가 중심입니다. 곧 사랑이 중심이고, ‘달’인 신앙은 그 사랑으로부터 빛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이 나타나기 전 참된 교회의 질서입니다.

 

‘산들’과 ‘작은 산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들이 태고교회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말씀에서 높은 곳, 특히 산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의로 말미암아 그리하리로다’라는 말씀은 천적 교회의 중심이 사랑이었으며, 그 사랑에서 ‘평강’이 흘러나왔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평강은 단순히 갈등이 없는 편안한 상태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가 주님의 질서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내적 평화를 생각하게 합니다.

 

특히 ‘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라는 마지막 표현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달이 다할 때까지’라고 한 이유를 놀랍게도 ‘신앙이 사랑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없어져 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이 사랑과 완전히 결합되어 더 이상 사랑과 떨어진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나는 이것이 진리라고 믿는다’고 하던 것이 마침내 ‘나는 이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산다’는 생명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사랑 안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바로 사30:26의 ‘달빛은 햇빛 같겠고’라는 말씀까지 연결합니다. 달이 상징하는 신앙의 빛이 해가 상징하는 사랑의 빛과 같아진다는 것은, 신앙과 사랑의 결합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72와 사30은 같은 천적 질서를 서로 다른 모습으로 보여 줍니다. 신앙의 최종 목적은 사랑과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데 있지 않고, 사랑과 하나가 되어 삶 자체가 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왜 이 구절이 ‘가인’을 설명하는 AC.337에 필요한지가 선명해집니다. ‘가인’은 바로 이 질서를 깨뜨렸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해와 달, 곧 사랑과 신앙이 하나의 질서 안에 있었는데, 가인으로 불린 사람들은 ‘달’을 ‘해’에서 떼어 내듯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습니다. 더 나아가 분리된 신앙을 그 자체로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는 단순히 어떤 잘못된 교리 하나를 새로 주장한 데 있지 않았습니다. 태고교회를 교회답게 하던 가장 근본적인 질서, 곧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온다’는 질서를 뒤집은 데 있었습니다.

 

이것을 앞서 살펴본 부부의 비유와 연결하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배려하고 존중하던 부부가 어느 순간부터 사랑 자체보다 ‘부부간 준수 사항 20가지’를 따로 떼어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한 것과 비슷합니다. 준수 사항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본래 사랑 안에서 생명을 얻던 것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 것이 문제입니다. 시72는 바로 그 분리가 일어나기 전의 상태, 곧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 하나였던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표현이 ‘generation of generations’, 곧 ‘대대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홍수 이후의 교회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시72의 인용은 태고교회만 바라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가 사라진 이후에도 주님의 목적은 여전히 같습니다. 인간의 상태가 달라져 이제는 먼저 신앙을 배우고 그 신앙으로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질서가 필요해졌지만, 최종 목적은 여전히 신앙과 사랑의 결합입니다. 길은 달라졌지만, 주님께서 사람을 이끄시는 목적은 변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AC.337의 시72 인용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설명하기 전에, 시72의 해와 달, 산들과 평강을 통하여 태고교회에서 사랑과 신앙이 본래 하나였던 천적 질서를 먼저 보여 줍니다.’ 그래야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일이 왜 당시에는 그토록 엄청난 악으로 여겨졌는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인용의 중심은 ‘해와 달’입니다. ‘해’인 사랑이 먼저이고, ‘달’인 신앙은 그 사랑으로부터 빛을 받습니다. 그리고 완성에서는 달이 해와 하나가 되듯 신앙이 사랑과 하나가 됩니다. ‘가인’은 바로 이 둘을 갈라놓은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시72는 단순히 천적 인간을 아름답게 묘사하기 위해 덧붙인 인용이 아니라, ‘가인의 분리’가 무엇을 깨뜨렸는지를 보여 주는 기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사30:2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사30:26)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사30:26을 인용한 이유는 바로 앞에서 인용한 시72의 ‘해’와 ‘달’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시72에서 ‘해’는 사랑을, ‘달’은 신앙을 의미하며, 특히 ‘달이 다할 때까지’라는 말씀을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사랑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사30:26의 ‘달빛은 햇빛 같겠고’는 바로 이 상태, 곧 신앙이 사랑과 분리된 채 따로 존재하지 않고 사랑과 하나가 되는 천적 질서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여기서 ‘달빛은 햇빛 같겠고’라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빛의 밝기가 강해지는 현상으로만 읽어서는 AC.337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를 알기 어렵습니다. 속뜻으로 ‘달’은 신앙을, ‘해’는 사랑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달빛이 햇빛 같아진다’는 것은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마침내 사랑과 하나가 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바로 태고교회 천적 인간의 상태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랑은 사랑이고, 신앙은 신앙’이라는 식의 분리가 없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무엇이 참인지 알았고, 그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했습니다.

 

이 점은 AC.337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가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바로 이 하나였던 것을 갈라놓았습니다. 태고교회에서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사랑으로부터 떼어 내어 독립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사30:26의 ‘달빛은 햇빛 같겠고’가 보여 주는 것은 가인의 분리와 정확히 반대되는 상태입니다. 가인은 ‘달’을 ‘해’에서 떼어 놓았다면, 이사야의 말씀은 ‘달빛’이 다시 ‘햇빛’과 같아지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곧 신앙이 다시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특히 이 구절의 앞부분인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도 이 문맥에서 의미심장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AC.337에서 직접 이 부분을 세세하게 풀이하지는 않으므로 지나치게 확대해서는 안 되지만, 적어도 인용된 말씀 전체의 흐름은 ‘상처를 싸매심’, ‘고치심’, 그리고 ‘달빛이 햇빛 같아짐’을 하나의 회복의 그림으로 보여 줍니다. 분리되고 손상된 것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질서를 회복하는 모습입니다. AC.337의 주제인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생각하면 매우 잘 어울리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도 주목할 만합니다. 말씀에서 ‘일곱’은 거룩함과 완전함을 나타내는 수로 자주 사용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단순히 햇빛의 광도가 물리적으로 일곱 배 강해진다는 뜻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충만함과 그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완전한 질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이 더 밝아졌다’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서 사랑 자체의 충만함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부부간 준수 사항’의 비유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부부에게 여러 원칙과 약속은 사랑과 떨어져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존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배려하며, 사랑하기 때문에 약속을 지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준수 사항’이 사랑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원칙이 사랑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달빛이 햇빛 같아지는’ 상태를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됩니다. 신앙의 진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하나가 되어 그 사랑을 표현하는 살아 있는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오늘날 우리의 거듭남과 연결되는 중요한 점도 있습니다. 우리는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처럼 처음부터 사랑에서 진리를 퍼셉션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AC.337이 분명히 말하듯 오늘날에는 신앙이 먼저이고, 주님께서 그 신앙으로 체어리티를 심으십니다. 처음에는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므로 해야 한다’며 진리를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처음에는 의무로 행하던 것을 점차 사랑해서 행하게 됩니다. ‘해야 하니까 하던 것’이 ‘하고 싶어서 하는 것’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30:26의 ‘달빛은 햇빛 같겠고’라는 말씀이 개인의 거듭남에도 매우 아름답게 와닿습니다. 처음에는 신앙으로 알고 믿었던 진리가 점차 사랑의 것이 되고, 마침내 그 사람의 의지와 삶이 됩니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원수를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을 진리이기 때문에 힘들게 순종하지만, 거듭남이 깊어지면서 실제로 그 사람의 선을 바라게 된다면, 신앙으로 받아들였던 진리가 체어리티의 생명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달빛’이 점차 ‘햇빛’과 같아지는 모습이라고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30:26은 AC.337에서 단순한 보충 성구가 아닙니다. 시72에서 제시한 ‘해는 사랑, 달은 신앙’이라는 상응을 더욱 깊게 보여 주면서, 참된 신앙의 완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신앙의 완성은 신앙이 독립적으로 더욱 강해지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여 사람이 믿는 진리가 곧 그가 사랑하고 살아가는 진리가 되는 데 있습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가인’은 사랑과 신앙이 ‘갈라지는’ 방향을 보여 주고, 사30:26은 그 둘이 주님 안에서 다시 ‘하나가 되는’ 방향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의 분리를 설명하는 AC.337에서 이 말씀을 끌어온 것입니다. ‘달빛은 햇빛 같겠고’라는 짧은 한 구절 안에, 신앙이 사랑에서 생명을 얻고, 마침내 사랑과 하나가 되는 참된 교회의 질서가 압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AC.336, 창4:26, ‘에노스’(Enosh)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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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6.심화

 

1. 왜 체어리티가 심어지자 다시 사람[homo]이라 불리는가?

 

AC.336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표현은 아마 ‘another man [homo]’, 곧 ‘또 하나의 사람’일 것입니다. 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에노스는 새로운 교회였다’고 하지 않고, 굳이 ‘또 하나의 사람’이라고 했을까요?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사람’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면 선명해집니다. 인간은 몸의 형태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영적인 의미에서 참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참으로 사람답게 하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이며, 더 깊게는 그 둘의 결합입니다.

 

그래서 신앙만 있고, 체어리티가 없다면 교회의 외형은 남아 있을 수 있어도 그 안의 인간다운 생명은 점점 사라집니다. 가인이 바로 그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신앙은 있었지만, 체어리티와 분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리가 계속되면서 결국 신앙마저 소멸되었습니다. 반대로 셋으로 의미되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지자, 비로소 ‘또 하나의 사람’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결합되면서 교회 안에 참된 영적 생명이 회복되었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다’는 순서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체어리티의 삶을 완성된 형태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먼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며,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진리를 통하여 배워야 합니다. 처음에는 그것을 ‘옳기 때문에’ 행할 수도 있습니다. 아직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랑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지 않더라도 말씀에서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가운데 주님께서 점차 그 사람 안에 선을 사랑하는 애정을 심으십니다. 처음에는 신앙으로 행하던 것이 나중에는 체어리티에서 행하는 삶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셋과 에노스의 관계는 개인의 거듭남에도 매우 아름답게 적용됩니다. ‘’은 내가 아직 선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여 진리를 따라 살아보려는 상태와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삶을 계속하는 동안 어느 순간 선을 행하는 것이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 되고, 이웃의 행복을 실제로 바라게 되며, 주님의 뜻을 행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기 시작한다면,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안에도 ‘’에서 ‘에노스’로 이어지는 과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기계적인 단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신앙을 일정 기간 가진 뒤 그다음 체어리티가 생긴다’는 식의 시간표가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거듭남 과정에서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주님에 의해 결합됩니다.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신앙이 자기 자신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느냐, 아니면 체어리티가 심어지도록 자신을 내어주느냐입니다. 전자의 방향이 가인이라면 후자의 방향이 셋이며, 그 결과 나타나는 살아 있는 교회의 모습이 에노스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AC.335 AC.336은 하나의 아름다운 짝을 이룹니다. ‘’은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새로운 신앙이고, ‘에노스’는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낳기 위한 수단이 되고, 체어리티는 그 신앙을 살아 있는 신앙답게 합니다. 그리고 그 둘이 다시 결합될 때, 스베덴보리는 그 교회를 ‘또 하나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AC.336은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도 아주 짧게 보여 줍니다. 교회는 올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진리가 사람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고, 체어리티가 다시 삶으로 나타날 때,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가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교회는 주님 앞에서 다시 ‘사람’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가인에게서 무너졌던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가 셋과 에노스에게서 다시 연결되는 것, 이것이 창4 마지막 두 절이 보여 주는 회복의 아르카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36, 창4:26, ‘에노스’(Enosh)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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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4:26)

 

AC.336

 

신앙으로 심어진 체어리티를 에노스(Enosh), 즉 또 하나의 사람(man, homo)이라 하는데, 이것이 그 교회의 이름입니다. (26) The charity implanted by faith is called “Enosh,” or another “man” [homo], which is the name of that church. (verse 26)

 

 

해설

 

AC.336은 바로 앞 AC.335와 반드시 이어서 읽어야 하는 글입니다. AC.335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으로 상징되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졌다고 하였습니다. 그 새로운 신앙이 ‘’입니다. 그런데 AC.336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렇게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 자체를 ‘에노스’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흐름은 매우 분명합니다. ‘’은 새로운 신앙이고,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가 ‘에노스’입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된 상태가 하나의 교회를 이루었으며, 그 교회의 이름 역시 ‘에노스’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노스’를 단순히 셋의 아들 한 사람으로만 읽지 않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창4:25-26은 아담이 셋을 낳고 셋이 다시 에노스를 낳았다는 가족의 계보입니다. 그러나 속뜻으로는 교회의 내적 변화가 묘사되고 있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인 ‘가인’이 체어리티인 ‘아벨’을 소멸시킨 뒤, 주님께서 ‘’이라는 새로운 신앙을 일으키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가 심어졌습니다. 그 결과 생겨난 새로운 교회적 상태가 ‘에노스’입니다. 그러므로 ‘셋이 에노스를 낳았다’는 말은 속뜻으로 보면 새로운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형성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특히 원문의 ‘the charity implanted by faith’, 곧 ‘신앙으로 심어진 체어리티’라는 표현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신앙이 체어리티를 스스로 만들어 냈다는 뜻은 아닙니다. 체어리티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AC.335에서도 ‘a new faith was given by the Lord’, 곧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신앙은 체어리티의 근원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하나의 길이며 수단입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주님께서 그의 의지 안에 체어리티를 심으실 수 있도록 준비됩니다. 그러므로 셋과 에노스의 관계에서도 언제나 주님이 중심에 계십니다.

 

이 점은 가인과 셋의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가인 역시 신앙이었지만,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었습니다. 그 신앙은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앞세웠고,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반면 셋으로 상징되는 신앙은 자신에게 머물지 않고 체어리티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그 신앙의 열매로 ‘에노스’가 나타납니다. 다시 말하면 가인의 신앙은 아벨을 죽였지만, 셋의 신앙은 에노스를 낳습니다. 전자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질서이고, 후자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질서입니다. 창4의 두 계열이 얼마나 대조적으로 묘사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인상적인 구조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에노스를 단순히 ‘체어리티’라고만 하지 않고, ‘another man [homo]’, 곧 ‘또 하나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사람[homo]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창세기 초반에서 스베덴보리가 ‘사람’을 사용할 때에는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을 뜻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된 의미에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있는 존재를 뜻합니다. 교회 역시 그 안에 선과 진리가 살아 있을 때, ‘사람’으로 불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에노스를 ‘또 하나의 사람’이라고 한 것은,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짐으로써 교회가 다시 참된 인간적인 형상을 갖게 되었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사람’이라는 표현에는 앞의 태고교회와의 연속성과 차이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최초의 태고교회 역시 ‘사람’이라 불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적 인간으로서 사랑에서 직접 선과 진리를 지각하는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 에노스로 의미되는 교회는 이미 그런 최초의 상태와 같지 않습니다. 이제는 ‘’으로 의미되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집니다. 그러므로 동일하게 ‘사람’이라 불리지만, 그 사람이 되는 과정과 교회의 상태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굳이 ‘another man’, 곧 ‘또 하나의 사람’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또한 마지막의 ‘which is the name of that church’, 곧 ‘이것이 그 교회의 이름입니다’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초기의 이름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해 줍니다. ‘에노스’는 단순히 한 개인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교회적 상태의 이름입니다. 앞에서 ‘가인’, ‘아벨’, ‘에녹’, ‘라멕’, ‘아다와 씰라’, ‘야발’, ‘유발’, ‘두발가인’을 교회와 교리의 상태를 나타내는 이름으로 읽었던 것처럼, ‘’과 ‘에노스’ 역시 그러합니다. 특히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아예 ‘그 교회의 이름’이라고 명시하므로, 창세기 초기의 계보를 단순한 개인들의 족보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렇게 보면 창4:25-26은 단 두 절이지만, 창4 전체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창4에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인 ‘가인’으로부터 여러 교리의 변화가 전개되어 마침내 ‘라멕’에 이르는 한편, 주님께서 주신 새로운 신앙인 ‘’과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진 ‘에노스’로 이어지는 또 다른 교회의 흐름도 함께 나타납니다. 가인이 상징하는 분리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교리를 왜곡하며, 여러 이단으로 갈라져,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 자체마저 사라지고, 선과 진리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이와 나란히 주님께서는 ‘’으로 의미되는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셨으며, 그렇게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연결된 교회를 ‘에노스’라고 하셨습니다.

 

 

심화

 

1. 왜 체어리티가 심어지자 다시 사람[homo]이라 불리는가?

 

 

AC.336, 심화 1, 왜 체어리티가 심어지자 다시 ‘사람’[homo]이라 불리는가?

AC.336.심화 1. 왜 체어리티가 심어지자 다시 ‘사람’[homo]이라 불리는가? AC.336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표현은 아마 ‘another man [homo]’, 곧 ‘또 하나의 사람’일 것입니다. 왜 스베덴보리는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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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5, 창4:25, ‘셋’(Seth)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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