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32.심화

 

4. 프로프리움은 자아’?, ‘자기(9:23)?

 

그럼 이 proprium 자아는요? 가장 맞는 한역은 뭔가요? 9:23,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가 바로 이 proprium을 말하는 거죠?

 

 

핵심만 먼저 분명히 말씀드리면, ‘proprium 자아로 번역하는 것은 부분적으로만 맞고, 그대로 쓰기에는 위험합니다.’ 그리고 눅9:23의 ‘자기’가 가리키는 바는 ‘proprium과 매우 깊이 연결되지만, 단순히 자아 전체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왜 ‘자아’가 조심스러운가 하면, 오늘 우리가 쓰는 ‘자아’는 심리학적 의미가 강합니다. 곧 ‘나는 누구인가’, ‘자기 정체성’, ‘인격의 중심’ 같은 비교적 중립적이거나 때로는 긍정적인 개념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proprium은 그런 중립 개념이 아니라, ‘‘내가 근원이다’, ‘이건 내 것이다라고 여기는 귀속 의식과 그 방향성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자아’라고만 하면, proprium의 핵심인 ‘자기 귀속의 왜곡’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맞는 한역은 무엇인가를 물으신다면, 하나로 딱 떨어지는 단어는 사실 없습니다. 다만 의미를 가장 정확히 살리는 쪽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자기 것’ 또는 ‘자기 것으로 삼는 상태’. 둘째, 설명형으로는 ‘자기 중심성’ 혹은 ‘자기 귀속 의식’. 셋째, 문맥에 따라 ‘자기(proprium)라고 음역+의역을 병기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실제로 AC를 깊이 다루는 경우에는 이 방식이 가장 안전합니다.

 

이제 ‘자기를 부인하고’와의 관계를 보시면 훨씬 선명해집니다. 눅9:23의 ‘자기’는 단순히 ‘자기 존재’를 부정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존재를 부정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부인해야 할 ‘자기’는 바로 ‘내 것이라 붙잡고, 내가 중심이 되려는 그 부분’, 곧 proprium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너 자신을 없애라’가 아니라, ‘네 안에서 근원 노릇을 하려는 것을 내려놓아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구분이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적으로 보면, 인간에게는 ‘느껴지는 자기’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자유도, 사랑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자기’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인정하느냐’, 아니면 ‘진짜로 내 것이라고 붙잡느냐’입니다. 전자를 유지하면서 후자를 부인하는 것이 바로 눅9:23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정리하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자아’는 존재 구조를 가리키는 말이고, proprium은 그 자아가 ‘자기중심으로 굳어질 때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은 자아를 없애라는 말이 아니라, ‘proprium으로 굳어지려는 방향을 끊으라’는 요청입니다.

 

결국 번역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proprium을 단순히 ‘자아’로 두면 너무 중립적이고, ‘고유 본성’은 너무 흐립니다. 그래서 가장 안전한 길은 ‘‘자기 것(proprium) 혹은 자기중심(proprium)처럼 의미를 드러내는 번역을 유지하면서, 필요할 때 설명을 덧붙이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해야 눅9:23 같은 구절도 살아 있고, AC 전체의 흐름도 정확히 이어집니다. 목사님 방식인 ‘체어리티(charity)처럼 그냥 ‘프로프리움(proprium)으로 병기하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처음에 한번 그 의미를 잡아주신 후 말이지요.

 

 

 

AC.132, 창2:18-25 개요, ‘프로프리움’(proprium, own)(18절)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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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2, 심화 3, 프로프리움은 ‘고유 본성’(固有 本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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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프로프리움은 고유 본성’(固有 本性)?

 

 프로프리움을 누구는 고유 본성’(固有 本性)으로 번역하더군요. 그래도 될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고유 본성이라는 번역은 가능은 하지만, 핵심을 정확히 전달하기에는 상당히 위험한 번역’입니다. 상황에 따라 보조적으로 쓸 수는 있어도, proprium의 중심 뜻을 대표하는 번역으로 쓰기에는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고유 본성’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독자는 그것을 ‘타고난 성품’, ‘본래 가지고 있는 좋은 성질’ 쪽으로 이해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prium은 그런 중립적이거나 긍정적인 ‘성격’이 아니라, 훨씬 더 근본적인 것, 곧 ‘내가 근원이라고 느끼는 상태’, ‘모든 것을 나에게 귀속시키려는 중심 감각’을 말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본성’이라고 하면, 이 핵심이 거의 사라집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proprium은 단지 ‘성질’이 아니라 ‘작동하는 방향성’입니다. 그것은 ‘나에게서 나온 것처럼 느끼고, 그것을 나의 것으로 붙잡으려는 움직임’입니다. 그래서 AC 전체에서 proprium은 거의 언제나 ‘왜곡의 근원’, 혹은 ‘주님으로부터의 흐름을 가로막는 중심’으로 다뤄집니다. 그런데 ‘고유 본성’이라고 하면 이런 긴장과 위험성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다만 왜 그런 번역이 나오는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proprium이 단순한 ‘소유물’이 아니라, 사람 안에 깊이 자리 잡은 ‘자기만의 소유인 것 같은 느낌’, ‘자기에게 속한 특유한 것’이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유’라는 말이 그 일부를 잡아주기는 합니다. 그래서 문맥에 따라 ‘자기의 고유스러운 것’ 정도로 풀어 설명할 때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심 번역으로는, ‘자기 것’, ‘자기 것으로 삼는 상태’, 혹은 ‘자기중심(proprium) 쪽이 훨씬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이 표현들은 proprium의 핵심인 ‘귀속(내 것이라 여김)’과 ‘근원 의식’을 직접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charity)처럼 그냥 ‘프로프리움(proprium)으로 병기하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처음에 한번 그 의미를 잡아주신 후 말이지요.

 

정리하면, ‘고유 본성’은 일부 뉘앙스를 담을 수는 있지만, proprium의 핵심인 ‘자기에게 돌리는 상태’를 흐릴 위험이 크기 때문에, 주 번역으로 쓰기보다는 설명용으로 제한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맥락에서는 결국 이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누구의 것으로 여기느냐’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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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때그때 야단치고 바로잡아야?

 

오히려 그때그때 야단치고, 강압적으로 하면 사람은 고분고분, 빙 돌아갈 길을 질러갈 수 있을 텐데...?

 

 

겉으로 보면 그 방법이 더 빠르고 확실해 보입니다. 실제로 강하게 몰아붙이면, 사람은 일단 멈추고, 겉 행동은 곧바로 바뀌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변화는 ‘사람의 중심이 바뀐 결과가 아니라, 압력에 대한 반응’일 뿐입니다. 압력이 사라지면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가거나, 안쪽에서는 오히려 반발이 쌓입니다. 그래서 길을 ‘질러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내면의 질서가 세워지지 않은 채 외형만 정돈된 상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핵심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순종하는 행동’ 그 자체보다 ‘자유 속에서 선택된 사랑과 신앙’이라는 점입니다. 사랑은 강요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억지로 사랑하게 만들 수 없듯이, 선도 강압으로는 뿌리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인도는 언제나 ‘자유를 보존하는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이 자유가 유지되어야, 사람이 ‘정말로 자기 것처럼’ 선택하고, 그 선택이 그의 삶이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강압은 인간의 프로프리움을 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형태로 강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복종하지만, 속에서는 ‘억지로 한다’, ‘나는 원래 다르게 생각한다’는 감각이 남습니다. 이것은 진짜 변화가 아니라, ‘눌려 있는 자기중심’입니다. 반대로 주님의 방식은 느리고 답답해 보일 수 있지만, 사람 안에서 스스로 ‘, 이게 맞다’고 동의하는 지점이 생기도록 기다립니다. 이 동의가 생길 때, 비로소 변화는 되돌아가지 않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지름길처럼 보이는 강압은 사실은 우회로이고,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자유 속의 인도는 실제로는 ‘가장 곧은 길, 곧 지름길’입니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사람의 의지와 이해, 곧 마음 전체를 함께 바꾸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주님이 강압적으로 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진짜로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고 사랑하게 될 때에만, 그 삶은 그의 것이 되며, 그 상태만이 천국까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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