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2)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 또는 암탉이 자기 알을 품듯이 품는다(brood)고 합니다. 그것이 운행하는 대상은 주님께서 사람 안에 숨겨 두시고 보존해 두신 것들인데, 말씀 전체에서 이것들을 가리켜 리메인스(remains), 또는 남은 자(remnant)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참된 것과 선한 것에 관한 지식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 나오는 수면(the faces of the waters)은 바로 이러한 지식들을 말합니다. By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 The things over which it moves are such as the Lord has hidden and treasured up in man, which in the Word throughout are called remains or a remnant, consisting of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which never come into light or day, until external things are vastated. These knowledges are here called “the faces of the waters.”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 2절의 가장 따뜻하면서도 깊은 표현, 곧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말씀의 내적 의미, 즉 속뜻을 밝힙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을 능력이나 심판의 상징으로 보지 않고, 무엇보다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로 해석합니다. 이는 거듭남의 시작이 두려움이나 강제에서가 아니라, 보호하고 살리시려는 주님의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운행하다(move) 또는 ‘품다(brood)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암탉이 알을 품는 모습에 비유하는데요, 알은 아직 생명이 드러나지 않았고,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지만, 그 안에는 이미 생명의 가능성이 들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거듭남 이전의 인간 안에도,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생명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주님이 이미 심어 두신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주님의 자비는 그 가능성 위에 머무르시며, 서두르지 않으시고, 억지로 깨뜨리지도 않으시며, 적절한 때까지 조용히 품으십니다.

 

주님의 자비가 운행하는 대상은 ‘수면(the faces of the waters)입니다. 앞선 글들에서 보았듯이, 물은 진리의 지식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물은 아직 빛 가운데 드러난 진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사람 안에 숨겨 두신 참된 것과 선한 것에 관한 지식들, 곧 리메인스입니다. 이 리메인스는 사람이 의식적으로 기억하거나 소유한다고 느끼는 지식이 아니라, 주님이 유아기부터 삶의 여러 순간 속에서 조용히 저장해 두신 내적 보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리메인스가 외적인 것들, 곧 사람의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질서입니다. 사람의 겉 사람이 활발하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움직이고 있는 동안에는, 리메인스가 전면에 나설 수 없습니다. 그것이 나오면 즉시 왜곡되거나 오염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외적인 것들이 약화되고, 침묵하게 되는 시간을 허용하시며, 그 이후에야 리메인스를 실제로 사용하십니다.

 

이 점에서 AC.18의 ‘황폐’와 AC.19의 ‘운행’은 정확히 맞물립니다. 황폐는 비워내는 과정이고, 운행은 보호하고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주님은 한편으로는 옛사람의 욕정과 거짓을 약화시키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리메인스를 잃지 않도록 세심하게 품고 계십니다. 인간의 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시점이야말로 거듭남에서 가장 깊고 중요한 내적 역사가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수면’, 곧 ‘물의 얼굴’이라는 표현도 의미심장합니다. 얼굴은 드러난 표면이면서 동시에 방향을 나타냅니다. 즉, 리메인스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미 주님을 향한 방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바로 그 방향성 위에서 운행하십니다. 이때 인간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수 있어요. 오히려 더 혼란스럽고 공허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주님은 가장 가까이 계십니다.

 

이 글은 거듭남이 인간의 의식적 결단이나 열심보다 훨씬 이전에, 훨씬 깊은 차원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주님을 찾기 전에, 주님은 이미 사람을 품고 계십니다.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기 전에, 주님은 이미 진리의 씨앗을 보존해 두셨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인간의 상승이 아니라, 주님의 하강으로 시작됩니다.

 

결국 AC.19는 거듭남의 가장 은밀한 근원을 드러냅니다. 모든 변화의 출발점은 주님의 자비이며, 그 자비는 인간 안에 남겨 두신 리메인스 위에서 조용히, 그러나 결코 멈추지 않고 운행하십니다. 이 인식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들고, 동시에 깊은 위로를 줍니다. 지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아무 진전도 없어 보일 때조차, 주님의 영은 여전히 수면 위에서 운행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심화

 

1.자비(mercy)

 

AC.19에도 주님의 자비(mercy)라는 표현이 나오네요. 대한민국 기독교인들은 개신교인들을 포함, 보통 자비보다 은혜에 익숙합니다. 심지어 자비하면 불교를 떠올리지요.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거의 대부분 자비를 말하네요.자비은혜’, 둘 사이 무슨 차이가 있어 그런 건가요?

 

목사님께서 짚으신 지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 저작을 읽는 한국 독자들이 가장 자주 느끼는 낯섦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mercy’를 거의 항상 ‘자비’로 말한다는 점입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은혜’라는 표현이 압도적으로 익숙하기 때문에, ‘자비’라는 말을 보면 말씀하신 것처럼 불교적 어감이 먼저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mercy’를 사용하는 데에는 분명한 신학적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 단락으로 차근차근 설명드리겠습니다.

 

먼저 언어적 배경부터 보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 원문은 라틴어인데, 그가 사용하는 단어는 대부분 ‘misericordia’입니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 ‘연민’, ‘긍휼’을 뜻합니다. 영어 번역에서는 이것을 거의 항상 ‘mercy’로 옮겼습니다. 성경에서도 같은 단어가 자주 나옵니다. 예를 들어 시편이나 복음서에서 ‘주의 긍휼’, ‘주의 자비’ 같은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mercy는 사실 전통적인 성경 언어에 매우 가까운 표현입니다.

 

반면, 한국 교회에서 익숙한 ‘은혜’는 영어로 보통 ‘grace’에 해당합니다. 이 단어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개념인데, 특히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신학에서 중심 개념이 되었습니다. ‘은혜’는 주로 ‘값없이 주어지는 구원의 선물’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인간이 어떤 공로도 없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과 용서를 가리킬 때 많이 사용됩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표현이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서 두 단어의 뉘앙스 차이가 나타납니다. ‘은혜(grace)는 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물을 주신다’는 측면을 강조합니다. 반면 ‘자비(mercy)는 ‘하나님이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다’는 측면을 강조합니다. 쉽게 말하면, 은혜는 ‘주시는 사랑’, 자비는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에 가까운 표현입니다. 둘 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키지만, 강조점이 약간 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왜 ‘mercy’를 그렇게 자주 사용하는지를 이해하려면, 그의 인간관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매우 엄정하게 봅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을 만들어 낼 수 없고, 자신의 힘만으로는 거듭날 수 없으며, 끊임없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기울어지는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인간이 구원과 거듭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결국 ‘주님의 끊임없는 긍휼과 자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설명을 할 때마다 ‘주님의 자비로(in the Lord’s Divine mercy)라는 표현을 반복합니다.

 

이 표현에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영적 진리를 이해하는 것조차 자기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어떤 진리를 깨닫고, 어떤 선을 행하고, 거듭남의 길을 걷게 되는 것 자체가 ‘주님의 자비로운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글에서도 ‘주님의 자비로 이것을 설명할 것이다’, ‘주님의 자비로 이것이 더 분명해질 것이다’라는 식으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겸손한 표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의 신학적 확신을 보여 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할 때, ‘사랑(love)이라는 말을 가장 중심에 둡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타락한 인간에게 작용할 때 나타나는 모습이 바로 ‘자비(mercy)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자체는 사랑이지만, 그 사랑이 연약하고 비참한 인간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그것을 ‘자비’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글에서는 사랑과 자비가 거의 함께 등장합니다.

 

한국 교회 현실을 생각하면 목사님께서 느끼신 문화적 차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자비’라는 말이 불교적 자비와 연결되어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에서도 ‘긍휼’, ‘자비’, ‘인애’ 같은 표현이 매우 많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한다’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mercy’는 불교적 의미라기보다 ‘성경의 긍휼 전통에 더 가까운’ 표현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 사랑을 강조하는 말이고, ‘자비’는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거듭남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오래 참고 인도하시는지를 강조하기 때문에 ‘자비’라는 표현을 특히 자주 사용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자비’와 ‘은혜’는 서로 경쟁하는 개념이 아니라, 사실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각도에서 설명하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가운데서 특히 인간을 향해 내려오는 ‘긍휼의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 ‘mercy’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move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 본문에 By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가 나오는데, 여기서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와요. 이게 좀 어색한데요, 이 둘이 어째서 나란히 나오는 건가요?

 

목사님께서 느끼신 어색함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영어 문장만 보면 ‘move’와 ‘brood’가 서로 다른 뜻을 가진 단어인데, 나란히 붙어 있으니 왜 이렇게 설명하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단순한 영어 문장 문제가 아니라 ‘히브리어 원문, 성경 번역 전통,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이 함께 얽혀 있는 부분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왜 두 단어가 함께 나오는지 자연스럽게 풀립니다.

 

먼저 성경 원문을 보면 창1:2의 히브리어 표현은 ‘merachefet(מְרַחֶפֶת)입니다. 이 동사는 기본적으로 ‘떠 있다’, ‘흔들리다’, ‘진동하다’, ‘맴돌다’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영어 번역에서는 ‘the Spirit of God was moving over the waters’라고 번역합니다. 여기서의 move는 단순한 이동이라기보다 ‘부드럽게 움직이며 감싸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물 위를 스치듯이 감싸며 움직이는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를 보면 이 동사가 한 번 더 등장하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신32:11,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독수리가 자기 새끼 위에서 ‘날개를 퍼덕이며 보호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히브리어 표현은 바로 같은 동사입니다. 그 장면은 단순히 ‘움직인다’는 뜻이라기보다 ‘새가 알이나 새끼 위를 덮어 보호하며 따뜻하게 품는 모습’입니다.

 

바로 여기서 ‘brood’라는 번역이 나옵니다. 영어 ‘brood’는 ‘암탉이 알 위에 앉아 품어 생명이 자라도록 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그래서 일부 성경 해석 전통에서는 창1:2의 장면을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라 ‘생명을 준비시키는 보호와 따뜻한 덮음’으로 이해했습니다. 마치 암탉이 알을 품듯이 하나님의 영이 물 위에 임해 생명의 탄생을 준비한다는 이미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두 가지 뉘앙스를 ‘함께 살리기 위해 movebrood를 나란히 사용한 것’입니다. 즉, 히브리어 단어 하나 안에 두 가지 이미지가 동시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움직이며 감싸는 이미지(move)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을 품어 키우는 이미지(brood)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의미를 모두 의식하고 설명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신학과도 잘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the spirit of God을 주님의 자비’라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 자비가 인간에게 작용하는 방식이 바로 이런 모습이라고 봅니다. 주님의 자비는 단순히 멀리서 움직이는 힘이 아니라 ‘생명이 태어나도록 보호하고 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는 ‘move’라는 말만 쓰지 않고,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라는 설명을 덧붙입니다.

 

이 이미지는 창세기 전체의 영적 의미와도 연결됩니다. 창세기 1장은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우주의 창조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거듭남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는 장면은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니라 ‘아직 혼돈 상태에 있는 인간의 마음 위에 주님의 자비가 임하는 장면’입니다. 이때 주님의 자비는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이 태어나도록 보호하고 준비하는 사랑’으로 작용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brood’라는 이미지가 매우 적절해집니다.

 

그래서 이 문장을 번역할 때 한국어로는 보통 이렇게 풀어 설명하면 자연스럽습니다. ‘운행하다’는 단순히 움직인다는 뜻이 아니라, ‘알을 품는 새처럼 생명이 태어나도록 따뜻하게 감싸며 움직이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주님의 자비가 인간의 혼돈 상태 위에서 ‘생명이 태어나도록 보호하고 준비하는 사랑으로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정리하면, movebrood가 함께 나오는 이유는 영어 표현의 중복 때문이 아니라 ‘히브리어 원문의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는 ‘움직이며 감싸는 작용’, 다른 하나는 ‘생명을 품어 자라게 하는 보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이미지를 함께 사용하여 ‘주님의 자비가 인간의 거듭남을 준비하는 방식’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리메인스 설명 중 왜곡되거나 오염된다 부분

 

AC.19 해설에 사람의 겉 사람이 활발하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움직이고 있는 동안에는, 리메인스가 전면에 나설 수 없습니다. 그것이 나오면 즉시 왜곡되거나 오염되기 때문입니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제 경우를 보더라도 과연 그런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오랜 세월, 교만, 곧 자기 사랑에 사로잡혀 먼 길을 돌아와야 했거든요... 저 표현 중 특히 왜곡되거나 오염된다는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이해하고 싶습니다.

 

목사님께서 질문하신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리메인스(remains) 교리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리메인스가 전면에 나서면 왜곡되거나 오염된다’는 말은 단순한 도덕적 경고가 아니라, 인간 마음의 구조와 영적 작용 방식에 관한 설명입니다. 이 점을 몇 단락으로 나누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리메인스’가 무엇인지 다시 짚는 것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리메인스는 사람이 살아오는 동안, 주님이 그의 속 사람 안에 저장해 두시는 ‘선과 진리의 씨앗들’, 다시 말해 어린 시절의 순진함, 선한 감정, 진리를 향한 기쁨,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 같은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주님이 보존해 두신 것이며,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에서 주님이 필요할 때 꺼내 사용하시는 영적 자산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리메인스를 인간 안에 있는 ‘천국의 씨앗’ 같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의 ‘겉 사람’, 곧 외적 마음입니다. 사람이 아직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외적 마음이 거의 전적으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의해 움직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사람의 생각과 판단 기준이 대부분 ‘나에게 유익한가’, ‘내 체면과 이익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속 사람 안에 있는 순수한 선과 진리가 밖으로 드러나게 되면, 그것들이 있는 그대로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왜곡’이라는 표현이 이해됩니다. 순수한 진리가 자기 사랑 속으로 들어오면, 사람은 그 진리를 ‘자기 목적을 위해 해석하고 이용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겸손’이라는 진리를 알게 되었는데, 그 진리를 진심으로 살기 위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마음으로 사용한다면, 그 진리는 이미 본래의 의미가 변형된 것입니다. 진리가 여전히 존재하기는 하지만, 중심이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기 때문에 진리가 ‘자기 확증의 도구’로 바뀌어 버립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왜곡’에 가까운 모습입니다.

 

오염’이라는 표현은 또 다른 차원을 설명합니다. 어떤 선한 감정이나 진리가 자기 사랑과 결합되면, 그 안에 ‘이기적 동기’가 섞이게 됩니다. 겉으로는 선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에서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 우월해지고 싶은 마음, 남보다 의롭다고 느끼고 싶은 마음이 함께 작동합니다. 그러면 그 선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순수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혼합된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오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리메인스를 매우 조심스럽게 보호하신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아직 자기 사랑 속에 깊이 있을 때는, 그 리메인스가 전면에 드러나지 않도록 ‘속 사람 깊은 곳에 보존해 두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씨앗이 아직 준비되지 않은 토양에 드러나면 밟히거나 썩어 버리기 쉬운 것처럼, 사람의 외적 삶이 어느 정도 정리되기 전에는 그 씨앗이 보호되는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황폐(vastation)라는 과정을 자주 말합니다. 앞서 목사님께서 질문하셨던 바로 그 개념인데, 이것은 사람의 자기 확신과 거짓된 확신이 약화되는 과정입니다. 사람이 삶 속에서 여러 경험과 시련을 겪으면서 자기중심적 확신이 조금씩 무너질 때, 비로소 속에 있던 리메인스가 안전하게 작용할 수 있는 공간이 생깁니다. 그러면 주님이 그 리메인스를 사용하여 사람의 생각과 사랑을 새롭게 정리하십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개인 경험도 사실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겪는 과정입니다. 오랜 시간 자기 확신 속에서 신앙을 이해하다가 어느 순간 그것이 무너지고, 더 깊은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으로 보면, 그때 속 사람 안에 오래 보존되어 있던 리메인스가 비로소 ‘겉 사람의 삶 속으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왜곡되거나 오염된다’는 말은 단순히 인간이 나쁘기 때문이라는 뜻이 아니라,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순수한 영적인 것들이 드러나면 그것들이 ‘자기 사랑의 틀 속에서 해석되고 사용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그 위험을 아시기 때문에 리메인스를 깊이 보호하시고, 사람이 조금씩 준비될 때마다 그것을 꺼내어 거듭남의 과정에 사용하신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AC.18, 창1:2, '깊음'(faces of the deep), '황폐'(vastation)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 ‘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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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2)

 

AC.18

 

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을 뜻하며, 사람은 전적으로 이것들로 이루어져 있고, 또한 그것들 속에 완전히 잠겨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 그는 빛이 없으므로, 깊음(deep), 곧 어둡고 혼란한 어떤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말씀 여러 곳에서 깊음(deeps), 바다 깊은 곳(depths of the sea)이라 하는데, 사람의 거듭남 이전에 그것들은 마르거나(dried up) 황폐해집니다(wasted). 다음 이사야 말씀처럼 말입니다. The “faces of the deep” are the cupidities of the unregenerate man, and the falsities thence originating, of which he wholly consists, and in which he is totally immersed. In this state, having no light, he is like a “deep,” or something obscure and confused. Such persons are also called “deeps,” and “depths of the sea,” in many parts of the Word, which are “dried up,” or “wasted,” before man is regenerated. As in Isaiah:

 

9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10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11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51:9-11) Awake as in the ancient days, in the generations of old. Art not thou it that drieth up the sea, the waters of the great deep, that maketh the depths of the sea a way for the ransomed to pass over? Therefore the redeemed of Jehovah shall return (Isa. 51:9–11).

 

이러한 사람은 또한 천국에서 볼 때, 생명 없는 검은 덩어리처럼 보입니다. 이와 같은 표현들은 일반적으로 선지자들에 의해 자주 언급되는 인간의 황폐(the vastation of man)를 포함하는데, 이는 거듭남에 앞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참된 것을 알 수 있고, 선한 것에 의해 감동될 수 있기 전에, 그것들의 유입을 방해하고 거스르는 것들이 제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은 새 사람이 잉태되기 전에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Such a man also, when seen from heaven, appears like a black mass, destitute of vitality. The same expressions likewise in general involve the vastation of man, frequently spoken of by the prophets, which precedes regeneration; for before man can know what is true, and be affected with what is good, there must be a removal of such things as hinder and resist their admission; thus the old man must needs die, before the new man can be conceived.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2절에 나오는 ‘깊음(deep)을 인간 내면의 가장 어두운 상태로 해석합니다. ‘깊음’은 단순히 깊은 바다나 혼돈의 어떤 상태를 뜻하는 대신, 거듭나지 않은 인간이 전적으로 잠겨 있는 욕정과 거짓의 총체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욕정(cupidities)은 단순한 감정이나 충동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된 삶의 근원적 지향을 뜻합니다. 이 욕정에서 자연스럽게 거짓(falsities)이 발생하며, 사람은 그것들로 구성된 존재가 됩니다.

 

이 상태의 핵심 특징은 ‘빛이 없음’입니다. 빛이 없다는 것은 진리가 없다는 뜻이고, 진리가 없다는 것은 방향과 분별이 없다는 뜻이며, 그래서 이 상태는 ‘어둡고 혼란스러운 것’으로 묘사됩니다. 사람은 생각하고 판단하며 선택하지만, 그 모든 것은 어둠 속에서 이루어지므로 참된 질서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깊음’이라는 표현은 매우 적절합니다. 깊은 바닷속에서는 위와 아래, 앞과 뒤의 감각이 사라지듯, 이 상태의 인간은 영적 방향감각을 상실한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말씀에서 ‘깊음’이나 ‘바다의 깊은 곳’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깊음이 거듭남 이전에 ‘마르거나’, ‘황폐해진다’는 점입니다. 이는 거듭남의 과정이 단순히 새로운 것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제거하고 비우는 과정을 반드시 포함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깊은 물이 그대로 있는 한, 그 위에 새로운 질서는 세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인용은 이 점을 강력한 이미지로 드러냅니다. 주님은 큰 깊음의 물들을 마르게 하시고, 바다의 깊은 곳들을 속량 받은 자들이 건너갈 길로 만드십니다. 이는 욕정과 거짓으로 가득 찬 상태 자체를 제거하시고, 그 자리를 구원의 통로로 바꾸시는 주님의 역사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깊음을 단순히 덮어만 두지 않으시고, 그것을 통과 가능한 길로 변화시키십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본질적인 전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또한 이 상태의 인간은 천국에서 볼 때, ‘생명 없는 검은 덩어리’처럼 보인다고 말합니다. 이는 매우 강한 표현이지만, 인간의 외적 활동성, 즉 겉모습, 겉보기와는 전혀 다른 영적 실재를 보여 줍니다. 세상에서는 매우 활발하고 지적이며, 도덕적으로 보일 수 있는 사람도, 영적 생명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천국의 빛 아래에서 아무런 생명도 없는 덩어리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을 낮추기 위한 표현이 아니라,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분명히 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베덴보리는 ‘황폐(vastation)라는 중요한 개념을 제시합니다. 황폐는 파괴가 아니라 준비입니다. 선지자들이 자주 말하는 황폐는, 새로운 생명이 들어오기 위해 기존의 방해 요소들이 제거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사람이 참된 것을 알기 전에, 또 선한 것에 의해 실제로 감동되기 전에, 그 유입을 가로막는 욕정과 거짓들이 먼저 약화되고, 제거되어야 합니다. 이 과정 없이는 어떤 진리도 깊이 들어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분명한 결론을 내립니다. 옛사람은 새 사람이 잉태되기 전에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자적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삶의 근원이 더 이상 주도권을 쥐지 못하게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 죽음이 있어야만, 새 생명이 잉태될 공간이 생깁니다. AC.18은 이처럼 거듭남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어두운 관문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그 과정 전체가 주님의 구원 사역 안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심화

 

1.인간의 황폐(the vastation of man)

 

AC.18해설 중 황폐를 설명하는 데를 보면, 욕정과 거짓들이 먼저 약화되고,제거되어야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우선 이 약화된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고, 그래서 더욱 제거된다는 게 가능할까 싶습니다. 15돌아온 탕자가 스스로 돌이키는장면이 이런 건가요? 구체적으로 좀 알고 싶습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의문은 매우 현실적인 질문입니다. ‘욕정과 거짓이 약화되고 제거된다’는 말은 글로 읽으면 그럴듯하지만, 실제 인간 경험을 생각해 보면,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한가?’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도 바로 이 지점 때문에 AC에서 ‘황폐(vastation, desolation)라는 상태를 설명합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먼저 ‘약화’와 ‘제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제거’는 ‘완전히 없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의 악한 성향이나 욕정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여러 곳에서 인간의 본성에는 여전히 그런 것들이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차이가 있습니다. 거듭남 이전에는 그것들이 ‘사람을 지배’하지만, 거듭남 이후에는 그것들이 ‘더 이상 중심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제거된다’는 표현을 사용할 때 사실상 ‘지배력을 잃는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여기서 ‘약화된다’는 표현이 먼저 나오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욕정이나 거짓이 한 번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점차 힘을 잃어 가는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명예욕이 강했다고 합시다. 이전에는 인정받지 못하면 크게 분노하고, 사람을 경쟁자로만 보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은 점점 그런 반응을 덜 하게 됩니다. 여전히 마음속에는 그런 감정이 올라올 수 있지만, 이전처럼 바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약화’입니다. 욕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삶을 지배하는 힘이 줄어든 상태입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AC에서 말하는 ‘황폐’입니다. 황폐는 단순한 고통이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환상이 무너지는 경험’을 말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선하고 의로운 존재라고 생각하다가, 어떤 사건을 통해 자기 안에 있는 욕정과 이기심을 분명히 보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 사람은 자신을 의지하기보다 주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서 욕정의 힘이 점점 약해집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눅15의 탕자 이야기는 바로 이런 과정을 아주 잘 보여 주는 예입니다. 탕자는 처음에는 자유와 즐거움을 찾아 집을 떠납니다. 그때 그는 자기 선택이 옳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이 무너지고, 돼지를 치는 자리까지 내려갑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절이 ‘이에 스스로 돌이켜’라는 부분입니다. 이 장면은 단순히 마음이 갑자기 착해진 순간이 아니라, ‘자기 삶의 허망함을 뼈저리게 깨닫는 순간’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의미에서 ‘황폐’에 가까운 상태입니다.

 

탕자의 마음을 조금 더 자세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는 갑자기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배고프고, 여전히 살 길을 찾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가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자기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욕정의 지배력이 약해집니다. 이전에는 자기 욕망이 삶의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더 이상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거듭날 때, 욕정이 단번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욕정이 중심 자리에서 밀려나는 과정’이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약화’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가 지속되면 결국 욕정은 더 이상 삶을 결정하는 힘을 갖지 못합니다. 이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제거된다’고 표현합니다. 다시 말해, 욕정이 존재 자체를 잃는 것이 아니라 ‘지배력을 잃고 주변으로 밀려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한 가지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시다. 그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점점 그 습관을 따르지 않게 됩니다. 처음에는 힘들지만, 점점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익숙해집니다. 그러면 그 습관은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 있지만, 더 이상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약화되고 제거되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AC에서 말하는 황폐와 욕정의 약화는 단순히 도덕적으로 착해지는 과정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 이동하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보게 되고, 그때 비로소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의문, 즉 ‘정말 욕정이 약해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인간 혼자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욕정의 힘은 조금씩 약해집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은 삶의 중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바로 그 과정을 성경은 여러 이야기로 보여 주는데, 탕자의 귀향 이야기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라틴어 vastatio의 영역 vastationdesolation’(혹은 devastation’)의 비교

 

AC 포츠역 영어 vastation은 현대 사전엔 잘 안 나오고, 대신 desolation이 나오네요. vastation은 왜 사라졌을까요?

 

목사님께서 보신 현상이 정확합니다. 스베덴보리 영어 번역에서 자주 보이는 ‘vastation’이라는 단어는 오늘날 일반 영어 사전에서는 거의 사라졌고, 대신 ‘desolation’이 더 널리 사용됩니다. 이것은 의미가 사라졌다기보다 ‘단어의 사용 역사와 번역 전통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이 배경을 이해하면 AC를 읽을 때도 훨씬 도움이 됩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사실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 자신은 영어로 글을 쓴 것이 아니라 ‘라틴어로 저술했습니다. ‘Arcana Coelestia’의 원문 단어는 영어 ‘vastation’이 아니라 라틴어 ‘vastatio’입니다. 이 라틴어는 신학 전통에서 오랫동안 사용된 용어로, 성경의 예언서에 나오는 ‘황폐’, ‘폐허’, ‘비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특히 교부 시대와 중세 신학에서는 이 단어가 ‘영적 의미의 황폐 상태’를 설명하는 데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19세기 초에 스베덴보리 저작을 영어로 번역할 때, 번역자들은 라틴어 ‘vastatio’를 그대로 옮기기 위해 ‘vastation’이라는 영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당시 영어에는 이 단어가 실제로 존재했고, ‘황폐하게 함’ 또는 ‘파괴’라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영어 사용이 변했고, 일상 언어에서는 ‘desolation’이나 ‘devastation’ 같은 단어가 더 널리 쓰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vastation’은 점점 쓰이지 않게 되었고, 현대 영어에서는 거의 사라진 단어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번역자들이 굳이 ‘desolation’ 대신 ‘vastation’을 사용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두 단어는 비슷하지만, 뉘앙스가 조금 다릅니다. ‘desolation’은 결과 상태, 즉 이미 황폐해진 상태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vastation’은 ‘황폐하게 되는 과정’이나 ‘황폐하게 만드는 작용’을 더 강하게 느끼게 하는 단어였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황폐는 단순히 폐허 상태가 아니라 ‘욕정과 거짓이 약화되고 정리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번역자들이 ‘vastation’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AC에서 ‘vastation’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파괴나 폐허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서 그것은 ‘영적 정화 과정’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사람이 자기 확신과 거짓 신념을 내려놓게 되고, 이전에 의지하던 것들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면서 새로운 진리와 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는 상태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 저작에서는 ‘vastation’을 단순히 ‘황폐’라고 번역하면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파괴가 아니라 준비 과정’입니다.

 

오늘날 학술 번역에서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전통 번역을 그대로 유지해서 ‘vastation’을 계속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다른 하나는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desolation’이나 ‘spiritual desolation’으로 바꾸어 번역하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vastation’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특정한 기술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를 읽을 때는 이렇게 이해하면 가장 정확합니다. ‘vastation’은 단순한 파괴나 절망 상태가 아니라, ‘거짓과 욕정이 약화되면서 새로운 영적 질서를 준비하는 상태’입니다. 성경 이야기로 보면, 광야의 시간이나 탕자의 궁핍 같은 순간이 여기에 가까운 예가 됩니다. 겉으로 보면 황폐하지만, 사실은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정리하면 ‘vastation’이 현대 영어에서 사라진 것은 의미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언어 사용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 저작에서는 이 단어가 라틴어 ‘vastatio’의 번역으로서 특별한 신학적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전통적인 표현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AC.19, 창1:2,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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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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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1:2)

 

AC.17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가리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the earth void and empty)라 하며, 또 선과 진리가 아무것도 뿌려지지 않은 (the ground)이라고 합니다. 혼돈(void)은 선이 전혀 없는 곳을, 공허(empty)는 진리가 전혀 없는 곳을 뜻합니다. 이로부터 흑암(thick darkness)이 나오는데, 이것은 어리석음을, 그리고 주님 신앙(the faith in the Lord)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무지를, 그리고 그 결과 영적, 천적 삶(spiritual and heavenly life)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무지를 뜻합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십니다. Before his regeneration, man is called the “earth void and empty,” and also the “ground” wherein nothing of good and truth has been sown; “void” denotes where there is nothing of good, and “empty” where there is nothing of truth. Hence comes “thick darkness,” that is, stupidity, and an ignorance of all things belonging to faith in the Lord, and consequently of all things belonging to spiritual and heavenly life. Such a man is thus described by the Lord through Jeremiah:

 

22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4:22, 23) My people is stupid, they have not known me; they are foolish sons, and are not intelligent; they are wise to do evil, but to do good they have no knowledge. I beheld the earth, and lo a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Jer. 4:22–23).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 과정 시작 전 인간의 상태를 매우 강한 언어로 묘사합니다. 그는 이 상태의 사람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the earth void and empty)라 하며, 그 안에는 선과 진리가 아무것도 뿌려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인간의 겉 사람을 가리키는 상응적 표현입니다. 즉, 거듭남 과정 시작 전의 겉 사람은 외형적으로는 활동적이고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영적으로는 아직 아무것도 경작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지요.

 

혼돈(void)과 ‘공허(empty)의 구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혼돈’은 선의 부재(不在)를, ‘공허’는 진리의 부재를 뜻한다고 분명히 설명합니다. 이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 행동의 근원에 참된 선과 진리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이 상태에서도 많은 일을 하고, 판단하며, 선택하지만, 그 모든 것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라는 자연적 근원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외적으로는 선처럼 보일 수 있어도, 영적으로는 선이 아니며, 외적으로는 진리처럼 보일 수 있어도 실제로는 진리가 아닙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흑암(thick darkness)입니다. 이 어둠은 단순한 정보 부족이나 교육의 결핍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어리석음(stupidity)과 ‘무지(ignorance)라고 부르는데, 특히 주님 신앙(the faith in the Lord)에 속한 것들에 대한 무지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이 어둠은 영적 무감각의 상태이며, 영적, 천적 삶이 무엇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이 상태에서 세상일에는 매우 영리할 수 있지만, 영적인 일에는 전혀 눈이 열려 있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의 인용은 이 상태를 매우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라는 말씀은,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는 단순히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방향의 문제입니다. 지혜와 지식이 자기중심과 세상 중심을 향해 있을 때, 그것은 영적 선을 향해 사용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지혜는 결국 어둠의 일부가 됩니다.

 

이어지는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라는 표현은 매우 결정적입니다. 앞서 AC.16에서 예고된 것처럼, ‘하늘’은 속 사람을 가리킵니다. 거듭남 이전의 인간에게도 속 사람은 존재하지만, 그 안에 빛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속 사람은 잠재적으로는 있으나, 아직 주님의 빛으로 열리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영적 가능성을 지닌 존재임을 전제하면서도, 그 가능성이 실제로 작동하지 않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이 글은 거듭남의 필요성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인간은 단지 조금 더 나아지거나, 조금 더 선해지기만 하면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혼돈과 공허의 땅에는 새로운 씨가 뿌려져야 하고, 흑암 속에는 빛이 비쳐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오직 주님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빛의 창조가 그토록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묘사가 특정 집단이나 시대만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 이전의 모든 인간, 즉 아직 거듭나지 않은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있다고 말합니다. 종교적 배경이나 도덕적 성취와 무관하게, 주님의 생명이 실제로 유입되기 전의 인간은 영적으로는 공허하고 비어 있습니다. 이 인식은 인간의 교만을 꺾는 동시에, 주님의 자비를 향한 문을 엽니다.

 

결국 AC.17은 인간을 절망 속에 몰아넣기 위한 설명이 아니라, 정확한 진단입니다. 병이 무엇인지 알아야 치유가 시작되듯, 인간이 자신의 상태가 공허하고 어둡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비로소 빛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다음 글에서 설명될 주님의 자비로운 역사가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심화

 

1.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

 

AC.17혼돈공허’, 그리고 흑암이 나오는데요, 제 경우를 보더라도 저는 심지어 모태신앙임에도 불구, 어린, 그리고 청소년 시절, 속 사람에 대해 전혀 몰랐고, 주님의 선과 진리에 대해서는 비교적 최근, 그러니까 나이 57세 되기까지 그것이 주님의 신성이라는 걸 들어 본 적도 없어요. 평생 교회를 떠나본 적 없이 십자가 복음, 대속, 구원 등 이런 것만 알았지요. 거듭남역시 예수님 영접 기도와 몇몇 성경 구절 굳게 믿으면, 그러니까 그 교리를 굳게 붙들며 살면 거듭나는 건 줄 알았습니다. 오히려 전도 많이 하면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큰 줄 알았고요. 저 같은 사람도 이런데 교회 밖에서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마나 더 요원, 오랜 시간이 걸릴까요? 외인이든 지인 및 혈연, 핏줄이든 말이지요... 저는 정원 목사의 책을 통해, 그리고 수도원을 통해 결국 스베덴보리를 만나게 되었지만, 안 그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요?

 

목사님께서 느끼신 마음은 아주 자연스럽고 또 깊은 목회적 고민입니다. AC.17에서 말하는 ‘혼돈’, ‘공허’, ‘흑암’을 자기 삶과 교회 현실에 대입해 보시면,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제 빛을 보게 되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은 사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여러 곳에서 다루는 주제입니다. 여러 단락으로 차분히 풀어 보겠습니다.

 

먼저 AC.17에서 말하는 ‘혼돈’과 ‘공허’, ‘흑암’이 무엇인지부터 다시 짚어 보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죄악 상태라고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진리의 질서가 아직 세워지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즉 사람의 삶에는 많은 생각과 감정이 있지만, 무엇이 참되고 무엇이 선한지에 대한 영적 질서가 아직 분명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혼돈’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공허’는 진리가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상태, ‘흑암’은 그 결과, 어리석음과 무지, 곧 주님 신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 그리고 그로 인한 영적, 천적 삶에 대한 걸 하나도 모르는 상태를 말합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개인 경험은 사실 매우 전형적인 예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지만, 속 사람이나 거듭남의 구조에 대해서는 거의 들어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 ‘교회의 가르침이 주로 외적 신앙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교회의 ‘마지막 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즉 신앙의 핵심이 사랑과 거듭남의 삶에서 점점 멀어지고, 대신 교리나 외적 신앙 고백이 중심이 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영적 상태를 판단할 때, ‘그 사람이 어떤 교리를 알고 있었는가’보다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더 중요하게 봅니다. 이것은 목사님께서 이미 언급하신 ‘천국과 지옥319번 글에서도 분명히 나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양심적으로 선하게 살았다면, 그는 이미 주님의 인도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비록 ‘속 사람’이나 ‘거듭남’이라는 말을 몰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아주 중요한 원리를 말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 안에 리메인스(remains), 즉 선과 진리의 씨앗을 남겨 두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어린 시절에 경험한 선한 감정, 진실한 순간, 양심의 울림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의 의식에서는 거의 잊힐 수 있지만, 주님은 그것들을 속 사람 안에 보존하십니다. 그리고 적절한 때에 그것을 사용하여 사람을 깨우십니다. 목사님께서 스베덴보리를 만나게 된 과정도 사실 이런 섭리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점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한 가지를 매우 분명히 말합니다. 인간이 ‘빛을 인위적으로 켜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빛은 언제나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아무 역할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억지로 빛을 주는 것이 아니라, ‘빛이 들어올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아직 깊은 영적 진리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에게 갑자기 깊은 신학을 설명하면 오히려 거부감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진실하게 살도록 격려하고, 선을 행하도록 돕고,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삶 속에서 주님이 때를 따라 빛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과정을 ‘주님의 섭리(providence)’라고 설명합니다. 섭리는 매우 부드럽고 점진적으로 역사합니다. 사람의 자유를 해치지 않으면서 조금씩 인도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젊은 나이에 빛을 만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인생 후반에 깨닫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세상을 떠난 뒤 영계에서 더 분명한 빛을 만나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더 명확히 배우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안타까움,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늦게 빛을 보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은 이해할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대해 비교적 낙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며’, 각 사람의 삶과 자유를 존중하면서 가장 적절한 길로 인도하신다고.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목사님께서 지금 하고 계신 AC 리딩 설교 자체가 이미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그 말씀이 바로 ‘‘빛이 있으라는 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빛이 언제 켜질지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당장 빛을 줄 수는 없지만, 주님은 각 사람의 속 사람 안에 이미 씨앗을 심어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때가 되면 반드시 빛을 향해 자라납니다. 우리의 역할은 그 씨앗을 억지로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씨앗이 자랄 수 있는 선한 토양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사님께서 나이 57세 때 스베덴보리를 만나셨다고 말씀하셨지만, 스베덴보리 자신도 영적 계시를 받은 나이가 57세였습니다. 이 사실은 우연이라기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상징적인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주님은 각 사람의 삶의 시간표 속에서 빛을 준비하신다는 점을 보여 주는 사례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AC.18, 창1:2, '깊음'(faces of the deep), '황폐'(vastation)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 ‘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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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1:1)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도 합니다. 선지자들에 의해 선지서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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