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24, 25)
AC.46
‘짐승’(beasts)이 사람의 애정(affections)을 뜻한다는 사실, 곧 악한 사람에게서는 악한 애정을, 선한 사람에게서는 선한 애정을 뜻한다는 사실을 말씀의 많은 구절을 보면 분명한데요, 에스겔입니다. That “beasts” signify man’s affections—evil affections with the evil, and good affections with the good—is evident from numerous passages in the Word, as in Ezekiel:
9내가 돌이켜 너희와 함께하리니 사람이 너희를 갈고 심을 것이며,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겔36:9, 11, 거듭남에 대해 말하는) Behold, I am for you, and I will look back to you, that ye may be tilled and sown, and I will multiply upon you man and beast, and they shall be multiplied and bring forth fruit; and I will cause you to dwell as in your ancient times (Ezek. 36:9, 11, treating of regeneration).
요엘입니다. In Joel: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욜2:22) Be not afraid ye beasts of my field, for the dwelling places of the wilderness are become grassy (Joel 2:22).
시편에서도 In David also:
내가 이같이 우매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시73:22) So foolish was I, I was as a beast before thee (Ps. 73:22).
예레미야에서 거듭남을 다루며 In Jeremiah, treating of regeneration:
27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28깨어서 그들을 뿌리 뽑으며 무너뜨리며 전복하며 멸망시키며 괴롭게 하던 것과 같이 내가 깨어서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27, 28) Behold the days come, saith Jehovah, that I will sow the house of Israel and the house of Judah with the seed of man, and with the seed of beast, and I will watch over them to build and to plant (Jer. 31:27–28).
[2] ‘들짐승’(Wild animals)도 비슷한 의미인데요, 호세아입니다. “Wild animals” have a similar signification, as in Hosea: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호2:18) In that day will I make a covenant for them with the wild animal of the field, and with the fowl of the heavens, and with the creeping thing of the earth (Hos. 2:18).
욥기입니다. In Job:
22너는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 23들에 있는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니라 (욥5:22, 23) Thou shalt not be afraid of the wild animals of the earth, for thy covenant is with the stones of the field, and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shall be at peace with thee (Job 5:22–23).
에스겔입니다. In Ezekiel: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겔34:25) I will make with you a covenant of peace, and will cause the evil wild animal to cease out of the land, that they may dwell confidently in the wilderness (Ezek. 34:25).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사43:20)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shall honor me, because I have given waters in the wilderness (Isa. 43:20).
에스겔입니다. In Ezekiel:
공중의 모든 새가 그 큰 가지에 깃들이며 들의 모든 짐승이 그 가는 가지 밑에 새끼를 낳으며 모든 큰 나라가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였느니라 (겔31:6) All the fowls of the heavens made their nests in his boughs, and under his branches did all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bring forth their young, and under his shadow dwelt all great nations (Ezek. 31:6).
이는 앗수르에 대한 말입니다. 앗수르는 영적 인간을 뜻하며, 에덴동산에 비유됩니다. This is said of the Assyrian, by whom is signified the spiritual man, and who is compared to the garden of Eden.
시편입니다. In David:
2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그를 찬양할지어다, 7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9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수와 모든 백향목이며 10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시148:2, 7, 9-10) Glorify ye him, all his angels, glorify Jehovah from the earth, ye whales, fruit trees, wild animal, and every beast, creeping thing, and flying fowl (Ps. 148:2, 7, 9–10).
이렇게 여기서 전반적으로 ‘용들’(whales), ‘과수’(the fruit tree), ‘짐승’(wild animal), ‘가축’(the beast), ‘기는 것’(creeping thing), ‘나는 새’(fowl)가 함께 언급되는데, 이것들이 사람 안의 살아 있는 원리들을 뜻하지 않는다면,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부름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Here mention is made of the same things—as “whales,” the “fruit tree,” “wild animal,” the “beast,” “creeping thing,” and “fowl,” which, unless they had signified living principles in man, could never have been called upon to glorify Jehovah.
[3] 선지자들은 ‘가축’(beasts)과 ‘땅의 짐승’(wild animals of the earth), 또 ‘가축’(beasts)과 ‘들의 짐승’(wild animals of the field)을 조심스럽게 구별합니다. 그럼에도 사람 안의 선한 것들은 ‘가축’(beasts)이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주님과 가장 가까운 이들도 ‘생물’(animals)이라 하는데, 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에서 모두 그렇게 말합니다. The prophets carefully distinguish between “beasts” and “wild animals of the earth,” and “beasts” and “wild animals of the field.” Nevertheless goods in man are called “beasts,” just as those who are nearest the Lord in heaven are called “animals,” both in Ezekiel and in John: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주3)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계7:11) All the angels stood round about the throne, and the elders, and the four animals (Rev. 7:11),3
※ AE.462에 의하면, 여기 ‘모든 천사’(the angels)는 일층천, 즉 가장 낮은 천국 천사들을, ‘장로들’(the elders)은 이층천, 즉 중간 천국 천사들을, ‘네 생물’(the four animals)은 삼층천, 즉 가장 높은 천국 천사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계19:4) and fell before the throne on their faces, and worshiped the lamb (Rev. 19:4).
또한 복음이 전파되는 이들도 ‘만민’(creatures)이라 하는데, 이는 그들이 새롭게 창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Those also who have the gospel preached to them are called “creatures,” because they are to be created anew: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막16:15) Go ye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spel to every creature (Mark 16:15).
주3. 여기 이 단어는 ‘비스트’(beasts, 짐승, 야수)가 아닌, 흠정역(the authorized version)에서처럼 ‘애니멀’(animals, 짐승, 동물)로 정확하게 번역되었습니다. 헬라어의 ‘준’(ζοόν, z¯oon)과, 라틴과 영어의 ‘애니멀’은 서로 정확히 대응하며, ‘생물’(a living creature)이라는 의미에 맞기 때문입니다. 원전(the original) 해당 구절들에서 사용된 단어는 준이며, 만일 ‘비스트’ 사용을 의도했다면 썼을 법한 테르(θήρ, th¯er)나 테리온(θηρίον, th¯erion)이 아닙니다. This word is here correctly translated “animals” and not “beasts,” as in the authorized version, for z¯oon in Greek, and animal in Latin and English, precisely correspond to each other, and properly signify “a living creature.” Z¯oon is the word used in these passages in the original, and not th¯er or th¯erion, as would be the case if “beast” had been intended.
해설
이 글은 왜 말씀에서 ‘짐승’(개역개정에서는 자주 ‘가축’으로 번역)과 ‘들짐승’이 그렇게 자주, 그리고 다양한 맥락에서 등장하는지를 종합적으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결코 우연적이거나 장식적인 표현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애정 구조를 드러내는 필수적인 언어라고 말합니다. 사람 안에서 가장 강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애정이기 때문에, 애정은 언제나 ‘살아 있는 존재’로 표현됩니다.
이 글은 먼저 짐승이 선과 악 어느 쪽에도 사용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악한 사람에게서의 짐승은 악한 애정이며, 선한 사람에게서의 짐승은 선한 애정입니다. 그래서 짐승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짐승이 어떤 성질을 지니느냐가 핵심입니다. 거듭남을 다루는 본문들에서는 언제나 짐승이 긍정적인 의미로 등장하는데, 이는 애정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새롭게 정돈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예언서들에서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뿌린다’는 표현은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생각과 애정이 함께 새로워진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씨는 이해와 인식을, 짐승의 씨는 의지와 애정을 가리킵니다. 거듭남은 어느 한쪽만의 변화가 아니라, 두 영역이 동시에 새롭게 심어지는 과정입니다.
이 글은 또한 ‘짐승’과 ‘들짐승’을 세밀하게 구분합니다. 들짐승은 더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층위의 애정을 뜻하며, 짐승은 보다 질서 잡힌, 의지에 속한 애정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 둘은 모두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주님의 언약 안으로 들어와야 할 대상입니다. 그래서 ‘들짐승과 언약을 맺는다’는 표현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시편에서 고래(‘용’으로 번역됨)와 과실나무(‘과수’로 번역됨)와 짐승과 새들이 모두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불리는 장면은, 이 상징들이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 줍니다. 찬양은 의식적 행위이므로, 그것은 오직 살아 있는 원리에게만 요청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인간 안의 모든 생명 원리들이 주님을 향하도록 부름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글은 또한 천사들이 ‘짐승들’(‘생물’로 번역됨)로 불린다는 사실을 통해, 짐승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깊은 긍정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는 인간적 이성이나 지식이 아니라, 사랑과 애정의 충만함이 주님께 가장 가까운 상태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주님께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 ‘짐승’으로 불린다는 것은, 애정이야말로 생명의 핵심임을 분명히 합니다.
마지막으로 복음이 ‘모든 피조물’(‘만민’으로 번역됨)에게 전파된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단순히 교리를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어야 할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말씀 전체가 인간의 애정과 생명을 새롭게 빚어 가는 과정임을, ‘짐승’이라는 상징을 통해 아주 풍성하게 보여 줍니다.
심화
1. ‘겔36:9, 11’
AC.46 첫 인용 구절인 겔36:9,11, ‘9내가 돌이켜 너희와 함께하리니 사람이 너희를 갈고 심을 것이며,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Behold, I am for you, and I will look back to you, that ye may be tilled and sown, and I will multiply upon you man and beast, and they shall be multiplied and bring forth fruit; and I will cause you to dwell as in your ancient times’가 거듭남을 다루는 내용이라고 하는데 저한테는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잘 납득이 되지 않아서요...
이 구절은 겉으로 보면 ‘땅이 회복되고 사람이 많아진다’는 이야기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것이 어떻게 ‘거듭남’ 이야기인가가 바로 납득이 안 되는 지점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방식은, 이 모든 표현을 ‘사람의 내면 상태에 대한 상응’으로 읽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한 개인 안에서 일어나는 거듭남의 과정을 ‘농사와 번성의 이미지로 풀어낸 것’입니다.
먼저 가장 핵심이 되는 표현은 ‘땅’입니다. 말씀에서 ‘땅’은 단순한 토지가 아니라, ‘사람 자신, 특히 그의 마음과 삶의 자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로 돌이켜 너희와 함께하리니’라는 말은, 어떤 외적인 회복이 아니라, ‘주님이 그 사람의 내면 안으로 다시 작용하시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거듭남은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사람 쪽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시 그 사람 안에서 일하시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이제 ‘갈고 심는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데, ‘간다’(tilled)는 것은 단단해진 땅을 부드럽게 뒤집는 것이고, ‘심는다’(sown)는 것은 씨를 넣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풀면, 먼저 사람 안에 굳어 있던 자기 생각, 자기 확신, 자기 사랑이 ‘흔들리고 깨지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것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그 자리에 ‘진리가 들어오는 것’이 ‘심는 것’입니다. 즉, 거듭남은 단순히 좋은 것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기존의 상태가 흔들리고 열리는 과정’을 포함합니다.
그다음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겠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AC에서 반복되는 구조와 연결됩니다. ‘사람’(man)은 ‘이해, 곧 진리와 관련된 것’, ‘짐승’(beast)은 ‘의지, 곧 선과 사랑에 속한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히 인구 증가가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진리와 선이 함께 자라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번성하고 열매 맺는다’는 것은, 이 둘이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결합되어 실제 삶 속에서 열매로 나타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연결이 하나 더 있습니다.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라, 너희를 옛 때처럼 거주하게 하리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처음 창조 때의 질서, 곧 하나님과 바르게 연결된 상태로 돌아가되, 더 깊은 형태로 회복되는 것’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 식으로 말하면, 이것은 태고 상태로의 단순한 회귀가 아니라, ‘거듭남을 통해 새롭게 이루어지는 질서의 회복’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한 줄로 묶어 보면 이렇게 됩니다. 이 구절은 ‘주님이 사람 안에서 다시 일하시기 시작하여, 그의 굳은 상태를 깨고 진리를 심으며, 그 안에서 선과 진리가 함께 자라 열매 맺게 하여, 결국 하나님과 바르게 연결된 상태로 회복시키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거듭남은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갈아엎고, 그 안에 말씀을 심으셔서, 결국 우리 안에 새로운 삶이 자라나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겔36의 ‘갈고 심고 번성하게 한다’는 말씀은, 주님이 사람 안에서 일하시어 진리와 선을 자라게 하고, 열매 맺게 하시는 거듭남의 과정을 농사의 비유로 보여 준 것입니다.’
2. ‘욜2:22’
두 번째 인용 구절인 욜2:22,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Be not afraid ye beasts of my field, for the dwelling places of the wilderness are become grassy.’ 역시 설명, 곧 해설에서 ‘짐승은 보다 질서 잡힌, 의지에 속한 애정을 뜻한다’는 내용에 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 부분이 막히는 이유는 아주 분명합니다. ‘짐승=애정’이라는 연결 자체가 우리에게는 거의 직관적으로 납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반드시 한 단계 뒤로 물러나 ‘왜 짐승이 애정을 뜻하는가?’부터 풀어 주어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말씀에서 ‘짐승’(beasts)은 사람 안의 ‘살아 움직이는 힘’, 곧 의지와 애정(사랑의 움직임)을 상징합니다.’ 왜냐하면 짐승은 생각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욕구와 본능, 곧 ‘원하는 것’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을 잡아서, 짐승을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움직이게 하는 힘’, 즉 애정의 상응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걸 아주 쉽게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사람 안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생각하고 판단하는 부분(이해), 다른 하나는 좋아하고 원하며 움직이는 부분(의지)입니다. 생각은 머리에서 일어나지만, 실제로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원함’, 곧 애정’입니다. 그런데 이 ‘움직이는 힘’이라는 점에서 보면, 사람과 짐승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짐승을 통해 ‘의지와 애정의 세계’를 표현합니다.
이제 욜2:22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은 단순히 자연의 동물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애정들, 특히 자연적이고 일상적인 욕구와 감정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애정들이 왜 ‘두려워하느냐’ 하면, 이전 상태에서는 이 애정들이 ‘질서 없이 흩어져 있거나, 메마르고 불안정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곧, 제대로 살아갈 방향과 생명을 공급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어서 ‘들의 풀이 싹이 나고, 나무가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풀’은 ‘기초적인 진리와 선’, ‘나무’는 ‘더 성숙한 상태의 선과 진리’, ‘열매’는 ‘삶 속에서 나타나는 결과’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전체 흐름은 이렇습니다. ‘말씀의 진리와 선이 다시 살아나고, 그것이 자라기 시작하자, 그동안 불안정하던 애정들이 이제 안정되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해설에서 말한 ‘짐승은 보다 질서 잡힌, 의지에 속한 애정’이라는 표현이 풀립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질서 잡힌’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애정을 나쁘게 보지 않습니다. 문제는 애정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질서 밖에 있을 때’입니다. 그러나 진리와 선이 들어오면, 애정이 점점 ‘제자리를 찾고, 올바른 방향으로 정돈됩니다.’ 이 상태가 바로 ‘들짐승이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실제적으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사람에게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 즐거움을 추구하는 마음,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다 ‘짐승’ 같은 애정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이 욕구들이 사람을 끌고 다니며 불안과 두려움을 만듭니다. 그러나 말씀의 진리와 선이 들어오면, 이 욕구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방향이 바뀌고 자리가 잡힙니다.’ 인정 욕구는 남을 세워 주는 방향으로, 즐거움은 건강하고 선한 방식으로, 소유 욕구는 나눔과 책임의 방향으로 정돈됩니다. 그러면 이 애정들은 더 이상 사람을 괴롭히는 존재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게 하는 건강한 힘’이 됩니다. 이것이 ‘질서 잡힌 애정’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말씀의 진리와 선이 자라나면, 사람 안의 애정들도 제자리를 찾아 안정되고, 더 이상 두려움 속에 있지 않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욜2:22의 속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욕망을 없애시는 분이 아니라, 그것을 바르게 살게 하시는 분입니다.’
3. ‘시73:22’
괜찮으시면, 나머지 인용 구절들도 하나하나 이런 귀한 설명을 듣고 싶은데요, 다음은 세 번째 인용 구절입니다. ‘내가 이같이 우매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시73:22) So foolish was I, I was as a beast before thee (Ps. 73:22).’
이 구절은 앞의 욜2:22와 연결되면서도, 한 걸음 더 깊은 자리, 곧 ‘사람이 자기 상태를 자각하는 자리’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이것도 같은 ‘짐승’이지만, 의미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시73:22의 ‘짐승’은 ‘의지에 속한 애정’ 그 자체가 아니라, ‘진리 없이 애정만 남아 있는 상태’, 곧 이해가 비춰 주지 않는 채로 살아가는 상태를 뜻합니다.’
‘내가 우매무지하여 주 앞에 짐승이었습니다’라는 고백은, 단순히 ‘제가 못났습니다’라는 겸손 표현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매무지함’은 스베덴보리 식으로 보면 ‘진리를 보지 못하는 상태’, 곧 이해(understanding)가 어두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상태를 ‘짐승’이라고 표현합니다. 왜냐하면, ‘이해가 비워진 상태에서 남는 것은 의지, 곧 애정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핵심 연결이 나옵니다. 사람은 원래 ‘이해와 의지’, ‘진리와 선’이 함께 있어야 온전한데, 이 구절에서는 ‘이해가 빠져 버린 상태’가 묘사됩니다. 그러면 사람은 무엇으로 움직이느냐 하면, 생각이나 분별이 아니라, ‘그때그때 올라오는 욕구와 감정’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바로 이 상태가 ‘짐승 같은 상태’입니다. 즉, 짐승이 나쁜 존재라서가 아니라, ‘‘이해 없이 애정만으로 사는 상태’가 짐승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걸 좀 더 실제적으로 보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자기 감정, 자기 기분, 자기 욕구를 따라 행동합니다. 겉으로는 신앙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진리의 빛 없이 애정만으로 사는 상태’입니다. 바로 이 상태를 시편 기자는 깨닫고, ‘내가 짐승 같았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한 자책이 아니라, ‘하나의 전환점’입니다. 앞부분에서는 혼란과 비교 속에서 흔들리다가, 주님 앞에 서면서 비로소 자기 상태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드는 고백이 ‘내가 짐승 같았다’입니다. 즉, ‘이해 없이 살던 상태에서, 이제 진리의 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순간의 고백’입니다.
여기서 욜2:22와의 차이가 또렷해집니다. 욜(요엘)에서는 ‘짐승’이 ‘질서 안으로 들어온 애정’, 곧 회복되는 대상이었다면, 시73:22에서는 ‘짐승’이 ‘질서 밖에 있는 상태’, 곧 이해 없이 애정만 남아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같은 ‘짐승’이지만, 하나는 ‘회복될 대상’, 다른 하나는 ‘자각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나는 진리 없이 애정만으로 살던 상태였으며, 그래서 주님 앞에서 짐승과 같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 고백의 핵심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진리 없이 자기 감정과 욕구대로 살면, 겉으로는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짐승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깨닫는 순간, 비로소 변화가 시작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 구절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깨어남의 고백’이 됩니다.
‘시73:22의 ‘짐승’은 애정 자체가 아니라, 진리의 빛 없이 애정만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4. ‘렘31:27-28’
다음은 네 번째 인용 구절입니다. ‘27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28깨어서 그들을 뿌리 뽑으며 무너뜨리며 전복하며 멸망시키며 괴롭게 하던 것과 같이 내가 깨어서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27, 28) Behold the days come, saith Jehovah, that I will sow the house of Israel and the house of Judah with the seed of man, and with the seed of beast, and I will watch over them to build and to plant (Jer. 31:27–28).’
이 구절은 앞선 것들과 연결되면서도, 한층 더 ‘질서 있게 회복되는 전체 구조’를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함께 뿌린다는 것은, 주님이 사람 안에 진리(이해)와 선(의지), 곧 생각과 사랑을 동시에 새롭게 심으신다는 뜻’이며,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핵심입니다.
먼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이 둘은 단순한 민족 구분이 아니라, ‘사람 안의 두 측면’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주로 ‘진리, 곧 이해와 신앙의 영역’, ‘유다’는 ‘선, 곧 사랑과 의지의 영역’을 뜻합니다. 이미 여기서 ‘두 축’이 등장합니다.
그다음 ‘씨를 뿌린다’(sow)는 표현입니다. 씨는 언제나 ‘시작점, 가능성, 생명의 근원’을 뜻합니다. 그래서 ‘씨를 뿌린다’는 것은 어떤 것을 완성해 준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자라날 수 있는 근본을 넣어 주는 것’입니다. 즉, 주님이 사람 안에 ‘새로운 진리와 새로운 선의 씨앗을 심으신다’는 뜻입니다.
이제 핵심 표현,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입니다. 여기서 ‘사람’(man)은 앞서 계속 보셨듯이 ‘이해, 진리, 분별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반면 ‘짐승’(beast)은 ‘의지, 애정, 사랑의 움직임’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히 두 종류의 생물을 늘린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 안에 ‘생각의 씨’와 ‘사랑의 씨’를 함께 심으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가 나옵니다. 왜 굳이 두 가지를 함께 말할까요? 그것은 거듭남이 ‘한쪽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만 심어지면 사람은 알기만 하고 살지 못합니다. 반대로 선만 있으면 방향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항상 ‘‘사람의 씨(진리)’와 ‘짐승의 씨(선)’를 동시에 심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AC 전체를 관통하는 구조입니다.
이어지는 28절도 같은 흐름입니다. ‘뿌리 뽑고 무너뜨리고 전복하던 것처럼, 이제는 세우고 심는다.’ 이것은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이전의 잘못된 구조(거짓과 자기 사랑)를 허무시고, 그 자리에 새로운 구조(진리와 선)를 다시 세우시는 과정’입니다. 다시 말해, 거듭남은 단순한 개선이 아니라, ‘근본을 바꾸는 재창조’입니다.
이걸 일상적으로 설명드리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이전에는 자기 생각과 욕망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 사람 안에 먼저 ‘‘이것이 옳다’는 진리(사람의 씨)’를 심으십니다. 동시에 ‘‘이렇게 살고 싶다’는 선한 마음(짐승의 씨)’도 함께 주십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함께 자라면서, 그 사람의 삶이 점점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구절이 말하는 ‘심고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주님은 사람 안에 진리와 선, 곧 생각과 사랑의 씨를 함께 심으셔서,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우고 새롭게 자라게 하신다.’ 이것이 렘31:27-28의 속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먼저 그것을 알게 하시고, 동시에 그렇게 살고 싶어 하는 마음도 함께 주십니다.’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는 각각 진리와 선을 뜻하며, 주님이 이 둘을 함께 심으심으로써 거듭남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이 구절의 본질입니다.’
5. ‘호2:18’
다음 여섯 구절은 ‘들짐승’(wild animals) 구절이라는데 먼저 호세아입니다.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호2:18) In that day will I make a covenant for them with the wild animal of the field, and with the fowl of the heavens, and with the creeping thing of the earth (Hos. 2:18).’
이 구절은 ‘들짐승’이 단순히 부정적이거나 위험한 것만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에 들어와 함께 평화를 이루는 대상으로 변하는 애정들’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호2:18의 ‘들짐승’은 사람 안의 자연적이고 거칠 수 있는 애정들이며, ‘언약을 맺는다’는 것은 그것들이 주님의 통치 아래 들어와 질서와 평화를 이루게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먼저 ‘그날에 언약을 맺는다’는 표현입니다. 말씀에서 ‘언약’(covenant)은 단순한 약속이 아니라, ‘주님과 사람 사이에 질서와 결합이 이루어진 상태’를 뜻합니다. 즉, 서로 연결되고 조화되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자연계의 동물과 협약을 맺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 안의 여러 요소들이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질서를 이루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제 세 가지가 나옵니다. ‘들짐승’, ‘공중의 새’, ‘땅의 곤충’입니다. 이것들은 각각 사람 안의 서로 다른 층위를 가리킵니다. ‘공중의 새’는 앞에서 보셨듯이 ‘이성적, 지적인 것들’, 곧 생각과 이해에 속한 것들입니다. ‘땅의 곤충’은 ‘아주 낮은 감각적이고 육적인 수준’, 즉 거의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습관이나 본능에 가까운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것이 바로 ‘들짐승’입니다. 이것은 ‘일상적이고 자연적인 애정들’, 곧 기쁨, 욕구, 감정, 삶의 동력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들짐승’ 앞에 붙은 ‘들’(field)입니다. ‘들’은 말씀에서 ‘사람의 교회 상태, 곧 진리와 선이 자라는 자리’를 뜻합니다. 그래서 ‘들짐승’은 단순히 거친 욕망이 아니라, ‘이미 어느 정도 질서 안으로 들어온, 그러나 여전히 자연적 수준에 있는 애정들’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완전히 타락한 욕정이 아니라, ‘다스려질 수 있는 상태에 있는 애정들’입니다.
이제 ‘언약을 맺는다’는 것이 풀립니다. 이것은 이 모든 층위, 곧 생각(새), 애정(들짐승), 감각적 습관(곤충)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아래에서 하나의 질서를 이루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이어지는 표현입니다. ‘활과 칼을 꺾고 전쟁을 없애며 평안히 눕게 하리라.’ 이것은 외적인 전쟁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계속되던 갈등, 곧 생각과 욕망의 충돌, 선과 악의 싸움이 점점 가라앉고, 조화와 평안이 자리 잡는 상태’를 뜻합니다.
사람 안에는 늘 싸움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과 ‘그래도 하고 싶다’는 욕구가 부딪힙니다. 어떤 때는 감정이 앞서고, 어떤 때는 생각이 억누릅니다. 그런데 주님의 질서가 들어오면, 이 싸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각각이 제자리를 찾아 조화를 이루기 시작합니다.’ 욕구는 사라지지 않지만, 방향이 바뀌고, 생각은 억압이 아니라 인도가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점점 ‘편안해지고 안정되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평안히 눕게 하리라’입니다.
‘주님은 사람 안의 생각과 애정과 감각적 요소들까지 모두 질서 안에 두어, 서로 싸우지 않고 조화를 이루며 평안을 누리게 하신다.’ 이것이 호2:18의 속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의 욕망을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서로 싸우지 않고 함께 평안히 살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들짐승과의 언약’은 자연적 애정들이 주님의 통치 아래 들어와, 생각과 감각과 함께 조화를 이루는 거듭남의 평화 상태를 의미합니다.’
6. ‘욥5:22-23’
다음은 욥기입니다. ‘22너는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 23들에 있는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니라 (욥5:22, 23) Thou shalt not be afraid of the wild animals of the earth, for thy covenant is with the stones of the field, and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shall be at peace with thee (Job 5:22–23).’
이 구절도 앞의 호2:18과 같은 흐름이지만, 한 가지 더 나아가 ‘왜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욥5:22–23의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 안의 자연적 욕망과 감정들이 더 이상 그 사람을 위협하거나 끌고 가지 못하고, 오히려 질서 안에서 평화를 이루게 된 상태’를 뜻합니다.
먼저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표현부터 보겠습니다. 여기서 ‘들짐승’은 앞과 같이 ‘자연적 애정, 즉 욕구, 감정, 쾌락의 움직임’입니다. 이 애정들은 질서 밖에 있을 때는 사람을 흔들고 끌고 가기 때문에, 실제로 사람은 이것들을 두려워합니다. 예를 들어, 분노, 욕심, 인정 욕구 같은 것들이 올라올 때, 그것이 나를 어디로 끌고 갈지 몰라 불안해지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들짐승을 두려워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이유 때문입니다. ‘돌과 언약을 맺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언약’과 ‘화목’입니다.
먼저 ‘돌’(stones of the field)입니다. 말씀에서 ‘돌’은 ‘기초적인 진리, 변하지 않는 기준’을 뜻합니다. 즉, 사람이 삶 속에서 붙들고 있는 기본적인 옳고 그름의 기준입니다. 그래서 ‘돌과 언약을 맺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진리와 안정된 관계를 맺고, 그것을 삶의 기준으로 삼게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더 이상 흔들리는 기준이 아니라, ‘확고한 진리 위에 서게 되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가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바로 다음 표현이 나옵니다.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변화입니다. 이전에는 욕망과 감정이 사람을 흔들고 끌고 갔다면, 이제는 그것들이 ‘진리 아래에서 조화를 이루며 함께 살아가게 되는 상태’가 됩니다. 즉, 욕망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더 이상 ‘적이 아니라 동반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건 그러니까 이런 얘깁니다. 어떤 사람이 이전에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터뜨렸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도 두려워합니다. ‘내가 또 저러면 어떡하지?’ 그런데 그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그 위에 서기 시작하면, 분노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지만, 그것이 ‘방향을 바꾸고 조절되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그것이 파괴가 아니라, 필요할 때는 바른 판단과 결단의 힘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화목하게 사는 상태’입니다.
또 다른 예로, 욕심이나 인정 욕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전에는 그것이 사람을 끌고 다녔지만, 진리 안에 들어오면 그것이 ‘책임감, 성실함, 다른 사람을 세우는 에너지’로 바뀝니다. 그래서 더 이상 그것이 혹시 나를 무너뜨리지는 않을까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질서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힘’이 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의 흐름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진리와 언약을 맺는다 → 기준이 세워진다 → 욕망과 감정이 질서 안에 들어온다 → 더 이상 두렵지 않다 → 평화가 생긴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한 단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면, 우리 안의 욕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하게 됩니다.’
‘욥5:22–23의 ‘들짐승과 화목’은, 진리 위에 선 사람이 자신의 자연적 애정들과도 조화를 이루어 더 이상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듭남의 평화 상태를 의미합니다.’
7. ‘겔34:25’
다음은 에스겔입니다.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겔34:25) I will make with you a covenant of peace, and will cause the evil wild animal to cease out of the land, that they may dwell confidently in the wilderness (Ezek. 34:25).’
이 구절은 앞의 호세아와 욥기의 흐름을 이어받으면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어떤 애정은 질서 안으로 들어오고, 어떤 애정은 멈추게 된다’는 구분’을 분명히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겔34:25의 ‘악한 짐승이 그친다’는 것은, 사람 안의 자연적 애정 가운데서도 질서를 거부하고 해치는 것들은 제거되고, 나머지는 평화 가운데 살게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먼저 ‘화평의 언약’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평온함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면서, 사람 안의 모든 요소들이 제자리를 찾는 상태’입니다. 즉, 진리와 선이 중심에 서고, 그 아래에서 모든 것이 정돈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언약’이고, 그 결과가 ‘화평’입니다.
이제 핵심 표현인 ‘악한 짐승’입니다. 앞의 구절들에서는 ‘들짐승’이 질서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애정들이었다면, 여기서는 그중에서도 ‘질서를 거부하고, 사람을 파괴 쪽으로 끌고 가는 애정들’이 따로 구분됩니다. 예를 들면, 단순한 즐거움이나 인정 욕구가 아니라, ‘남을 해치려는 마음, 집요한 탐욕, 왜곡된 쾌락, 파괴적인 분노’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방향을 바꾸어 쓸 수 있는 수준을 넘어, ‘그대로 두면 전체를 무너뜨리는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악한 짐승’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그치게 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은 단순히 눌러 두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이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하게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 사람의 억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가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힘을 잃게 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즉, 빛이 들어오면 어둠이 밀려나듯이, ‘선과 진리가 중심에 서면 파괴적인 애정들은 설 자리를 잃는다’는 말입니다.
그다음 표현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여기서 ‘빈 들’과 ‘수풀’은 여전히 자연적이고 외적인 삶의 영역입니다. 즉, 특별한 신비적 상태가 아니라, ‘일상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평안히 거하고 쉰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제 그 사람이 ‘외적인 삶 속에서도 더 이상 내적 갈등에 시달리지 않고, 안정된 상태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건 그러니까 이런 얘깁니다. 어떤 사람이 이전에는 특정한 욕망이나 감정에 반복적으로 끌려다녔습니다. 스스로도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계속 넘어집니다. 그런데 주님의 진리와 선이 점점 자리 잡으면서, 어느 순간부터 그 욕망이 ‘예전처럼 힘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완전히 기억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그 사람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대신 다른 애정들, 그러니까 더 건강하고 선한 것들이 중심을 잡습니다. 그래서 삶이 훨씬 ‘안정되고 평안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이 구절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앞의 구절들과 비교하면 이렇게 정리됩니다. 호세아에서는 애정들이 ‘언약 안으로 들어오는 것’, 욥기에서는 그것들이 ‘두렵지 않게 되는 것’, 그리고 여기 에스겔에서는 그중에서도 ‘파괴적인 것들은 멈추고, 나머지는 평화롭게 자리 잡는 것’까지 나아갑니다. 점점 더 깊어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의 모든 것을 그대로 두지 않으십니다. 살릴 것은 살리시고, 무너뜨릴 것은 멈추게 하셔서, 결국 우리를 평안한 상태로 이끄십니다.’
‘겔34:25의 ‘악한 짐승이 그친다’는 것은, 주님의 질서가 들어오면서 파괴적인 애정은 힘을 잃고, 나머지 애정들은 평화롭게 자리 잡아 사람 안에 안정된 삶이 이루어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8. ‘사43:20’
다음은 이사야입니다.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사43:20)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shall honor me, because I have given waters in the wilderness (Isa. 43:20).’
이 구절은 앞의 흐름들 가운데서 특히 아름다운 장면을 보여 줍니다. 단순히 ‘질서가 잡힌다’는 수준을 넘어, ‘이전에는 거칠고 멀었던 애정들까지도 주님을 ‘존중하고 따르는 상태’로 변화되는 단계’를 말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사43:20의 ‘들짐승이 나를 존경한다’는 것은, 사람 안의 자연적이고 낮은 애정들까지도 진리와 생명을 공급받아, 이제는 주님을 거스르지 않고 오히려 그분의 질서에 기꺼이 따르는 상태’를 뜻합니다.
먼저 ‘들짐승, 승냥이, 타조’입니다. 여기서는 단순한 자연적 애정이 아니라, 그중에서도 비교적 ‘거칠고, 방향이 없고, 때로는 왜곡될 수 있는 애정들’까지 포함됩니다. 승냥이 같은 경우는 탐욕이나 집요한 욕구를, 타조 같은 것은 무지하거나 둔한 상태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사람 안에서 그다지 고상하지 않은, 오히려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층위까지 포함됩니다.
그런데 이들이 ‘나를 존경한다’고 합니다. 이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억눌려 조용해진 상태가 아니라, ‘방향이 바뀌어 자발적으로 질서에 따르는 상태’입니다. 즉, 이전에는 제멋대로 움직이던 애정들이 이제는 ‘주님 중심의 질서 안에서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이어집니다.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을 낸다.’ 여기서 ‘광야’와 ‘사막’은 ‘진리와 선이 없는 메마른 상태’, 곧 영적으로 비어 있고 생명력이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물’은 ‘진리’, ‘강’은 ‘흐르고 작용하는 진리의 풍성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주님이 그 메마른 상태 안에 ‘진리를 공급하시고, 그것이 흐르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제 전체가 연결됩니다. 이전에는 메마르고 방향 없던 상태, 곧 그래서 애정들이 제멋대로 움직이던 상태에 ‘진리의 물이 공급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애정들이 억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결국 ‘존경한다’, 즉 ‘주님을 중심으로 정렬된 상태’가 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얘깁니다. 어떤 사람이 이전에는 강한 욕구나 집착, 혹은 둔하고 무감각한 상태 속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통해 진리를 접하고, 그것이 점점 마음 안에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렇다고 이전에 문제였던 욕구들이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지만, ‘그것들이 점점 방향을 바꾸어 주님이 원하시는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집요한 욕구는 ‘끈기와 책임감’으로 바뀌고, 둔했던 상태는 ‘단순하고 안정된 태도’로 바뀝니다. 그래서 더 이상 그것들이 방해가 아니라, 오히려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됩니다. 이것이 ‘존경한다’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단순히 ‘두렵지 않다’, ‘화목하다’를 넘어서, ‘이제는 낮은 애정들까지도 주님을 향해 정렬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이 깊어졌을 때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의 거친 것들까지도 바꾸셔서, 결국 그것들이 하나님을 따르게 하십니다.’
‘사43:20의 ‘들짐승이 주님을 존경한다’는 것은, 진리의 생수가 공급되면서 사람 안의 낮고 거친 애정들까지도 주님의 질서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 거듭남의 성숙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9. ‘겔31:6’
다음은 에스겔입니다. ‘이는 앗수르에 대한 말입니다. 앗수르는 영적 인간을 뜻하며, 에덴동산에 비유됩니다.’라는 설명이 이어집니다. ‘공중의 모든 새가 그 큰 가지에 깃들이며 들의 모든 짐승이 그 가는 가지 밑에 새끼를 낳으며 모든 큰 나라가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였느니라 (겔31:6) All the fowls of the heavens made their nests in his boughs, and under his branches did all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bring forth their young, and under his shadow dwelt all great nations (Ezek. 31:6).’
이 구절은 앞선 ‘들짐승’ 구절들의 결론처럼 보이는 매우 풍성한 장면입니다. 단순히 애정이 정돈되는 정도를 넘어, ‘사람 안에 형성된 하나의 ‘질서 있는 세계’’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겔31:6은 영적 인간이 형성될 때, 그의 이해(진리)와 의지(선)가 자라 하나의 큰 구조를 이루고, 그 아래에서 생각(새)과 애정(짐승)과 삶의 모든 요소들이 질서 있게 자리 잡고 열매를 맺는 상태’를 뜻합니다.
먼저 배경이 되는 ‘앗수르’를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앗수르는 단순한 나라가 아니라, ‘이성적 인간, 특히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발달한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에덴동산’에 비유한다는 것은, 그 이해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생명과 연결된 살아 있는 지성’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즉, 단순히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가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큰 가지’와 ‘가는 가지’가 나옵니다. 나무 전체는 ‘그 사람의 내적 구조, 곧 형성된 영적 인간 전체’를 뜻하고, 가지들은 그 안에서 뻗어 나가는 ‘생각과 이해의 다양한 표현들’입니다. 큰 가지는 더 중심적이고 깊은 진리들이고, 가는 가지는 더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생각들입니다.
그 위에 ‘공중의 새가 깃든다’고 합니다. ‘새’는 ‘이성적, 지적인 것들’, 곧 생각과 통찰입니다. 이것이 가지 위에 깃든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이해 안에 ‘올바른 생각과 분별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 상태’를 뜻합니다. 생각이 떠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잡고 거처를 얻은 상태’입니다.
그다음 ‘들짐승이 그 가지 밑에 새끼를 낳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들짐승’은 앞서 계속 보셨듯이 ‘자연적 애정, 의지의 움직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새끼를 낳는다’, 즉 계속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 사람 안의 애정들이 이제 질서 안에서 ‘생산적이고 창조적으로 작용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더 이상 충돌하거나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힘’이 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큰 나라가 그 그늘 아래 거한다’고 합니다. ‘나라’(nations)는 ‘선과 관련된 것들, 혹은 다양한 삶의 상태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늘’은 ‘보호와 안식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그 사람 안에 형성된 이 질서가 단순히 한 부분이 아니라, ‘삶 전체를 덮고 보호하는 중심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의 전 삶이 이 질서 아래에서 안정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얘깁니다. 한 사람이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것이 사랑과 결합되면, 그 안에 하나의 ‘나무’ 같은 구조가 세워집니다. 그 안에서 생각들은 자리를 잡고, 애정들은 건강하게 열매를 맺고, 삶의 모든 부분이 그 아래에서 안정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인간’의 모습’입니다.
앞선 구절들과 비교하면 흐름이 더 또렷해집니다. 처음에는 애정들이 두려운 상태였고, 그다음에는 질서 안으로 들어왔고, 그다음에는 일부는 멈추고 일부는 살아났고, 이제 여기서는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유기적인 질서로 완성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일종의 ‘완성된 그림’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사람이 자라면, 그의 생각과 마음과 삶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나무처럼 연결되어,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자리를 잡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겔31:6은 영적 인간이 형성될 때, 그의 이해와 의지가 하나의 질서로 결합되어, 그 안에서 생각과 애정과 삶의 모든 요소가 조화를 이루며 풍성하게 열매 맺는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AC.45, 창1:24-25, ‘짐승’(beasts), ‘땅의 짐승’(wild animals of that earth)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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