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소개하는 곳은 아토스의 이비론 수도원입니다. 아토스에 얽힌 전승과 이비론 수도원의 오래된 역사,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에서 경험한 ‘손님 대접의 영성’을 소개하면서, ‘주는 것을 잊지 말고,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도 잊지 말라’는 메시지로 나아갑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번 영상은 앞선 몇 편과 조금 다른 의미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수도자의 극단적인 금욕이나 기이한 일화보다 ‘타인을 향하여 열리는 ’이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아토스를 바라보는 시선부터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에는 ‘마리아의 정원’, 여성 출입 금지의 기원, 황후의 방문 등에 관한 여러 전승이 등장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그 자체로 동방정교회의 오랜 수도 전통과 신심을 이해하는 데 흥미로운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전승의 신성함이나 기적성 자체가 영적 진리를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장소가 천 년 이상 보존되었고, 수많은 성물과 고문서를 간직하고 있으며, 수많은 수도자가 그곳에서 기도했다는 사실은 존중할 만하지만, 그것이 곧 그 장소 자체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룩함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며, 사람이나 장소, 그리고 물건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으로 나타내는 만큼만 거룩함에 참여합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정원’이라는 전승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그곳에서 사람들이 어떤 사랑으로 살아가는가?’입니다.

 

이 점에서 영상 후반부의 ‘손님 대접’ 이야기가 오히려 이번 영상의 영적 중심에 가깝습니다. 가뭄과 흉년 때문에 수도원 자신들의 먹을 것조차 부족해지자 수도사들은 방문객에게 무료로 음식을 제공하던 관행을 중단하기로 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결정입니다. 그런데 한 가난한 방문객이 찾아와 ‘ 가지를 잊지 말라. 주는 것과 받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주면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것을 믿으라’는 취지의 말을 남깁니다. 이후 수도원은 다시 창고를 열어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에게 음식을 나누었고, 그것이 이비론 수도원의 중요한 전통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의 신학과 매우 아름답게 만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삶은 근본적으로 ‘받아서 주는 ’입니다. 모든 선과 진리, 모든 사랑과 생명은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옵니다. 인간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움켜쥐기 위해 받는 존재가 아니라, 받아서 다시 이웃에게 흘려보내도록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영상의 ‘주는 것과 받는 것을 잊지 말라’는 말은 단순한 자선의 격언보다 훨씬 깊게 읽을 수 있습니다. ‘받음’과 ‘’은 서로 반대되는 두 행동이 아니라 하나의 영적 순환입니다. 주님에게서 받고, 이웃에게 흘려보내며, 그렇게 흘려보내는 가운데 다시 주님에게서 받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주의점도 있습니다. 이것을 ‘내가 남에게 하나를 주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열을 주신다’는 식의 보상 원리로 이해하면 금세 본래 의미에서 벗어납니다. 주는 행위가 더 큰 물질적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되는 순간, 겉으로는 체어리티처럼 보여도 그 안에는 자기 사랑이 숨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었으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갚으실 것이다’가 아니라 ‘내가 가진 것부터가 주님에게서 것이므로 필요한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것이 마땅하다’가 더 깊은 질서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주시는 것도 반드시 돈이나 재산의 증가를 뜻하지 않습니다. 선을 사랑하는 마음, 이웃을 볼 수 있는 눈, 더 깊은 평안과 지혜,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훨씬 귀한 선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손님이 오지 않는 집에는 천사도 오지 않는다’는 수도원의 말도 문자 그대로 어떤 신비한 법칙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가리키는 정신은 아름답습니다. 낯선 사람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식탁을 열고, 자기에게 속한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행위는 인간을 자기 자신에게서 밖으로 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말하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모든 것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운동이라면, 체어리티는 받은 선을 이웃에게 유용하게 흘려보내는 운동입니다. 그래서 환대는 단순한 예절이 아니라 잘 행해질 때 ‘use’, 곧 쓰임의 한 형태가 됩니다.

 

영상에서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하다 천사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연결하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읽으면 좋습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자기 장막 앞을 지나가는 이들을 보고 먼저 달려나가 맞이하고, 물과 음식과 쉼을 제공합니다. 속뜻에서 더 깊은 의미들이 있겠지만, 겉으로도 이 장면에는 매우 아름다운 질서가 있습니다. ‘먼저 대접하고, 나중에 그들이 누구였는지를 알게 됩니다.’ 상대가 천사인 줄 알았기 때문에 대접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환대했습니다. 바로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체어리티는 ‘가치 있는 사람인지 확인한 사랑하는 ’이 아니라, 선과 진리에 따라 필요한 쓰임을 행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수도원이라는 장소를 넘어 우리 일상으로 곧바로 이어집니다. 수도원에 들어가지 않아도 식탁 하나를 여는 것이 수도가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는 것도 수도가 될 수 있고, 어려운 사람에게 시간과 물질을 내어주는 것도 수도가 될 수 있으며, 자기 능력과 지식을 필요한 사람에게 사용하는 것도 수도가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수도생활을 바라볼 때, 특히 중요하게 보는 지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얼마나 세상에서 멀리 떨어졌는가?’보다 ‘얼마나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주님의 선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는가?’가 더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번 영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천 년 된 박물관도, 아토스의 신비로운 전승도, 여성의 출입이 제한된 독특한 수도 전통도 아닙니다. 오히려 굶주림이 닥쳤을 때 닫으려 했던 ‘창고를 다시 여는 장면’입니다. 수도원의 거룩함이 박물관 속 오래된 성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에게 내어주는 한 조각의 빵에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적 성물은 과거의 거룩한 삶을 기억하게 할 수 있지만, 체어리티는 지금 여기에서 주님의 사랑을 살아 있게 합니다.

 

다만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스베덴보리는 ‘주는 ’ 자체도 분별 없이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는 단순히 누구에게나 무엇이든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실제로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지혜롭게 살피는 사랑입니다. 악을 돕는 것은 체어리티가 아니며, 상대의 잘못을 강화하는 도움 역시 참된 선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환대와 나눔에는 사랑과 함께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단순한 자선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 사이의 중요한 차이입니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아토스의 웅장한 역사와 희귀한 보물들을 한참 이야기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끝까지 따라가 보면 결국 가장 빛나는 보물은 다른 데 있는 듯합니다. 그것은 ‘주는 것과 받는 것을 잊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조금 더 깊게 바꾸어 읽어볼 수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받았음을 잊지 말고, 받은 것을 이웃에게 흘려보내기를 잊지 말라.’ 그렇게 읽는 순간 이비론 수도원의 오래된 환대 이야기는 특정 수도원의 미담을 넘어 그리스도인의 일상 전체를 비추는 말이 됩니다.

 

결국 참된 수도는 세상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느냐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외적 고요가 내적 고요를 도울 수 있고, 외적 청빈이 자기 사랑을 돌아보게 할 수도 있으며, 수도원의 규율과 전통이 영적 훈련에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목적은 아닙니다. 목적은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자기 것으로 가두지 않고, 삶의 쓰임으로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 우리가 가져갈 가장 아름다운 문장은 어쩌면 이것일 것입니다. ‘받은 것은 것이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이 나를 지나 다른 사람에게까지 흘러가도록 받은 것입니다.’ 그 흐름이 막히지 않는 곳,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바로 그곳에서 천국의 질서가 시작됩니다.

 

 

 

SY.81, 강문호 수도사, ‘아토스의 티혼 수도사, 금욕과 거듭남’ (20200105)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아토스산 수도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 깊은 인상을 받았던 한 러시아 수도사의 삶을 소개합니다. 자동자막에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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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2.심화

 

1. ‘왜 장자가 아닌 레위가 모든 장자를 대신했는가 - 사랑과 신앙의 내적 질서

 

2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모든 것은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것이니라 하시니라, 12너는 태에서 처음  모든 것과 네게 있는 가축의 태에서 처음  것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15그때에 바로가 완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모든 것은 사람의 장자로부터 가축의 처음  것까지  죽이셨으므로 태에서 처음  모든 수컷은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려서  아들 중에 모든 처음  자를  대속하리니 (13:2, 12, 15)

 

40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태어난 남자를 일 개월 이상으로 다 계수하여 그 명수를 기록하라 41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중 모든 처음 태어난 것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내게 돌리라 42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계수하니 43일 개월 이상으로 계수된 처음 태어난 남자의 총계는 이만 이천이백칠십삼 명이었더라 4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5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에 레위인을 취하고 또 그들의 가축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취하라 레위인은 내 것이라 나는 여호와니라 (3:40-45)

 

14너는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구별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내게 속할 것이라 15네가 그들을 정결하게 하여 요제로 드린 후에 그들이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할 것이니라 16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게 온전히 드린 바 된 자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초태생 곧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내가 그들을 취하였나니 17이스라엘 자손 중에 처음 태어난 것은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내게 속하였음은 내가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치던 날에 그들을 내게 구별하였음이라 18이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레위인을 취하였느니라 19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그들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 그들로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게 하며 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가까이 할 때에 그들 중에 재앙이 없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20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께서 레위인에 대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다 따라 레위인에게 행하였으되 곧 이스라엘 자손이 그와 같이 그들에게 행하였더라 (8:14-20)

 

 

13과 민3, 민8을 함께 읽으면 처음에는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출13에서 여호와께서는 ‘태에서 처음  모든 것은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것이니라’고 명하십니다. 사람의 장자도, 짐승의 처음 난 것도 모두 여호와의 것입니다. 그런데 민수기에 이르면 뜻밖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모든 장자를 직접 여호와께 구별하는 대신 레위 지파 전체를 취하여 그 장자들을 대신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  모든 처음 태어난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민3:41), ‘이스라엘 자손  모든 처음 태어난  대신 내가 그들을 취하였나니’(민8:16)라고 하십니다. 왜 하필 레위일까요? 더구나 야곱의 실제 장자는 르우벤이며, 출생 순서로 보아도 레위는 르우벤과 시므온 다음의 셋째 아들입니다. AC.352는 이 문제를 말씀의 속뜻에서 풀면서 사랑과 신앙의 내적 질서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먼저 ‘처음  ’이 왜 거룩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출13:2에서 주님께서는 ‘처음  모든 것은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처음’ 못지않게 ‘ ’입니다. 처음 난 것이 거룩한 까닭은 자연적 출생 순서 자체에 신성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모든 선과 진리의 처음이시며 근원이신 주님을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352는 처음 난 것들이 모두 거룩했던 이유를 ‘오직 홀로 장자’이신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예배에서 처음 난 것은 궁극적으로 주님을 표상합니다.

 

그런데 AC.352는 곧이어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이 장자’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거기서 비롯된’이라는 말입니다. 신앙이 홀로 장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이 장자입니다. 그 이유는 이어지는 문장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다.’ 따라서 처음 난 것을 주님께 돌리는 행위에는 ‘ 안에 있는 참된 사랑과 선의 근원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다’라는 내적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처음 난 것이 ‘ ’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라는 출13의 반복은 바로 이 질서를 표상합니다.

 

13:15의 유월절 사건도 같은 배경을 보여 줍니다. 애굽의 처음 난 것은 죽었지만 이스라엘의 장자는 보존되었고, 그 결과 이스라엘의 모든 처음 난 것은 여호와께 속한 것으로 구별되었습니다. 따라서 장자의 거룩함에는 단지 ‘ 번째’라는 의미뿐 아니라 ‘주님께서 살리셨으므로 주님의 ’이라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생명을 보존하신 분이 주님이시므로 그 생명의 처음을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속뜻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 인간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의 참된 생명 역시 인간 자신에게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원리가 드러납니다.

 

그런데 민3과 민8에 이르면 모든 장자를 대신하여 레위인을 취하십니다. 민3:41은 ‘이스라엘 자손  모든 처음 태어난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라’고 하고, 민8:18은 더욱 직접적으로 ‘이스라엘 자손  모든 처음 태어난  대신 레위인을 취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자연적 질서만 보면 이상합니다. 장자를 대신할 사람을 고른다면 실제 장자인 르우벤과 연결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C.352는 여기에서 자연적 출생 순서와 영적 질서가 반드시 같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속뜻에서 레위는 ‘사랑’을 상징합니다. 반면 레위보다 먼저 태어난 르우벤과 시므온은 신앙에 속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놀라운 역전이 일어납니다. 자연적 순서에서는 르우벤과 시므온이 레위보다 먼저지만, 내적 질서에서는 레위가 나타내는 사랑이 신앙보다 먼저입니다. 그래서 실제 출생 순서로 셋째인 레위가 영적 의미에서는 모든 장자를 대신하게 됩니다. 말씀의 속뜻에서는 육체의 출생 순서보다 사랑과 신앙 사이의 내적 질서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AC.352가 이 구절들을 인용하는 핵심 이유입니다. ‘사랑이 신앙보다 내적으로 먼저다.’ 여기서 ‘먼저’라는 말은 단순한 시간 순서를 뜻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신앙의 생명이며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이 아무리 먼저 의식에 나타나고, 진리를 먼저 배우며, 그것을 지성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그 신앙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신앙은 생명을 잃습니다. 반대로 사랑 안에 있을 때 신앙은 사랑이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밝히는 진리가 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을 통해 살펴본 문제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AC.338에서 ‘가인’은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 곧 신앙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처음  ’이라고 불리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실제로 AC.352 마지막에서도 ‘교회의 처음  것은 신앙’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매우 섬세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처음  것이 신앙이다’라는 것과 ‘신앙이 사랑보다 내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인식되는 교회의 첫 출발이 신앙일 수 있습니다. 특히 태고교회 이후의 인간은 말씀을 통하여 먼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인 뒤,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그 신앙으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길을 걷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은 교회의 ‘처음  ’입니다. 그러나 그 신앙에 생명을 주는 근원은 여전히 사랑이며, 사랑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따라서 외적·시간적 순서에서는 신앙이 먼저 나타날 수 있어도 내적·생명적 질서에서는 사랑이 먼저입니다.

 

바로 이 점을 레위가 모든 장자를 대신하는 표상이 놀랍도록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르우벤과 시므온은 자연적 출생 순서에서는 레위보다 앞섭니다. 그러나 사랑을 나타내는 레위가 모든 장자를 대신하여 주님께 속하게 됩니다. 이는 신앙에 속한 것들이 아무리 먼저 나타난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의 내적 중심에는 사랑이 있어야 함을 보여 줍니다. 신앙의 진리들은 사랑을 섬기기 위해 존재하며, 궁극적으로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더구나 레위인은 단순히 장자를 대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성막 봉사의 직무를 받습니다. 민8:15은 정결하게 된 레위인들이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할 ’이라고 하고, 민8:19은 그들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게’ 했다고 말합니다. 이것 역시 의미심장합니다. 사랑은 관념으로 머무르지 않고 ‘봉사’, 곧 쓰임으로 나아갑니다. 체어리티가 실제 삶에서 이웃의 선을 위한 행위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질서입니다.

 

따라서 레위가 장자를 대신한다는 말씀은 ‘사랑이 중요하고 신앙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이 신앙답게 되기 위해서는 사랑이라는 생명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가인의 길로 나아가지만, 사랑에서 생명을 받는 신앙은 주님의 질서 안에 있습니다. 신앙과 사랑은 서로 제거해야 할 경쟁자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을 이루어야 할 것들입니다. 다만 그 안에는 분명한 질서가 있습니다. 신앙이 사랑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신앙에 생명을 주고, 신앙은 그 사랑이 바르게 행할 수 있도록 진리로 섬깁니다.

 

이렇게 보면 ‘장자’라는 표현에 두 층위가 있다는 AC.352 마지막 문장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배에서 처음  것들은 주님을 상징하고, 교회의 처음  것은 신앙을 상징한다.’ 예배에서 처음 난 것을 여호와께 드리는 것은 모든 거룩함과 사랑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반면 교회의 발생이라는 측면에서 처음 난 것은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 신앙조차 독립적인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두 의미는 충돌하지 않고 하나의 질서를 이룹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질서가 아벨의 제물 안에 들어 있습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그가 드린 것은 ‘ 떼의 처음  ’입니다. 체어리티가 주님께 드리는 처음 난 것은 ‘ 안에 있는 사랑과 선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아벨의 제물에는 자기 공로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인정이 있고,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있습니다.

 

결국 ‘ 장자가 아닌 레위가 모든 장자를 대신했는가?’라는 질문의 답은 자연적 족보가 아니라 말씀의 내적 질서에서 찾아야 합니다. 자연적 출생에서는 르우벤과 시므온이 레위보다 먼저지만, 영적 생명의 질서에서는 사랑이 신앙보다 내적으로 먼저입니다. 신앙은 진리를 보고 고백하지만, 그 신앙에 생명을 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 자체의 근원은 인간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그래서 모든 처음 난 것은 주님의 것이며, 사랑을 상징하는 레위가 모든 장자를 대신하여 주님께 속하게 됩니다.

 

이것은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읽는 데도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존재했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신앙이 자신에게 생명을 주는 사랑으로부터 독립하려 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반대로 주님의 질서는 신앙을 다시 사랑 안에 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352에서 장자와 레위의 표상을 통하여 보여 주시는 질서는 결국 하나입니다.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며, 신앙은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얻는다.’ 자연적 순서에서는 신앙이 먼저 보일 수 있지만, 내적 질서에서는 언제나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먼저입니다. 이것이 장자가 아닌 레위가 모든 장자를 대신하게 된 말씀 안에 담긴 깊은 속뜻입니다.

 

 

 

AC.352, 창4:4, ‘왜 장자가 거룩했는가 -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2 ‘양의 첫 새끼’(firstlings of the flock, ‘양 떼의 처음 난 것’)는 오직 주님께만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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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4:4)

 

AC.352

 

양의 새끼(firstlings of the flock, ‘ 떼의 처음 ’) 오직 주님께만 속한 것을 상징한다는 것은 표상교회에서 처음 , 장자에 관한 규례에서 분명합니다. 처음 것은 모두 거룩했는데, 이는 그것들이 오직 홀로장자(firstborn)이신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이장자(firstborn)입니다.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만이장자(firstborn)이십니다. 이것은 고대교회들에서 사람과 짐승의 처음 것을 여호와께 거룩한 것으로 드림으로써 표상되었습니다. (13:2, 12, 15) That the “firstlings of the flock” signify that which is of the Lord alone is evident from the firstlings or firstborn in the representative church, which were all holy, because they had relation to the Lord, who alone is the “firstborn.”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are the “firstborn.” All love is of the Lord, and not one whit of it is of man, therefore the Lord alone is the “firstborn.” This was represented in the ancient churches by the firstborn of man and of beast being sacred to Jehovah; (Exod. 13:2, 12, 15)

 

2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모든 것은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것이니라 하시니라, 12너는 태에서 처음 모든 것과 네게 있는 가축의 태에서 처음 것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15그때에 바로가 완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모든 것은 사람의 장자로부터 가축의 처음 것까지 죽이셨으므로 태에서 처음 모든 수컷은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려서 아들 중에 모든 처음 자를 대속하리니 (13:2, 12, 15)

 

또한 속뜻으로 사랑을 상징하는 레위 지파가, 비록 속뜻으로 신앙을 상징하는 르우벤과 시므온보다 나중에 태어났지만, 모든 장자를 대신하여 받아들여지고 제사장직을 맡게 것으로도 표상되었습니다. (3:40-45; 8:14-20) and by the tribe of Levi, which in the internal sense signifies love—though Levi was born after Reuben and Simeon who in the internal sense signify faith—being accepted instead of all the firstborn, and constituting the priesthood. (Num. 3:40–45; 8:14–20)

 

40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태어난 남자를 일 개월 이상으로 다 계수하여 그 명수를 기록하라 41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중 모든 처음 태어난 것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내게 돌리라 42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계수하니 43일 개월 이상으로 계수된 처음 태어난 남자의 총계는 이만 이천이백칠십삼 명이었더라 4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5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에 레위인을 취하고 또 그들의 가축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취하라 레위인은 내 것이라 나는 여호와니라 (3:40-45)

 

14너는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구별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내게 속할 것이라 15네가 그들을 정결하게 하여 요제로 드린 후에 그들이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할 것이니라 16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게 온전히 드린 바 된 자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초태생 곧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내가 그들을 취하였나니 17이스라엘 자손 중에 처음 태어난 것은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내게 속하였음은 내가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치던 날에 그들을 내게 구별하였음이라 18이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레위인을 취하였느니라 19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그들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 그들로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게 하며 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가까이 할 때에 그들 중에 재앙이 없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20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께서 레위인에 대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다 따라 레위인에게 행하였으되 곧 이스라엘 자손이 그와 같이 그들에게 행하였더라 (8:14-20)

 

주님께서 그분의 인성에 관하여 모든 것의 장자이심을 다윗의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Of the Lord as the firstborn of all, with respect to his human essence, it is thus written in David:

 

26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27내가 또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 (시89:26-27) He shall call me, my Father, my God, and the rock of my salvation. I will also make him my firstborn, high above the kings of the earth. (Ps. 89:26–27)

 

또 요한의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d in John: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1:5) Jesus Christ the firstborn of the dead, and the prince of the kings of the earth. (Rev. 1:5)

 

예배에서 처음 난 것들은 주님을 상징하고, 교회의 처음 난 것은 신앙을 상징한다는 것을 유의해야 합니다. Observe that the firstborn of worship signify the Lord, and the firstborn of the church, faith.

 

 

해설

 

AC.352는 앞의 AC.350에서 ‘ 떼의 처음 ’이 왜 ‘오직 주님께만 속한 거룩한 ’을 상징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글은 단순히 성경에서 ‘장자’가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랑과 신앙의 관계, 그리고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참된 사랑의 근원이 누구인가를 매우 깊이 다룹니다.

 

가장 먼저 주목할 문장은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이장자’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사랑과 신앙’이라고만 하지 않고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과 아벨을 통해 계속 살펴본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를 다시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이 사랑과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먼저 있었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사랑에서 태어난 것이었습니다.

 

바로 다음 문장은 이 글의 핵심이라 할 만큼 중요합니다.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 떼의 처음 ’을 오직 주님께 속한 것이라고 말하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참된 사랑은 인간이 자기 안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사랑이나 체어리티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실제로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며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생명과 최초 근원은 인간의 proprium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인간이 받아들여 마치 자기 것으로 느끼면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 사랑이 깊어질수록 ‘내가 이렇게 사랑했다’는 자기 의보다는 ‘주님께서 사랑할 있게 하셨다’는 인정이 깊어집니다.

 

이 때문에 ‘처음 ’이 거룩했습니다. 처음 난 동물이나 사람 자체에 어떤 신비한 거룩함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들이 모든 선과 사랑의 처음이신 주님을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출13:2, 12, 15에서 처음 난 것을 여호와께 구별하여 드리게 하신 규례도 바로 이 내적 실재를 표상했습니다. 인간에게 처음이며 가장 귀한 것은 본래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이 그 표상 안에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AC.352에서 특별히 흥미로운 부분은 레위 지파에 관한 설명입니다. 자연적인 출생 순서로 보면 레위는 장자가 아닙니다. 르우벤이 첫째이고 시므온이 둘째이며 레위가 셋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속뜻에서 ‘레위’가 사랑을, 르우벤과 시므온이 신앙에 속한 것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실제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를 대신하여 레위 지파가 여호와께 구별되었고 제사장직을 담당했습니다.

 

여기서 자연적인 출생 순서와 영적인 질서가 서로 달라집니다. 자연적인 계보에서는 르우벤과 시므온이 레위보다 앞서지만, 내적 질서에서는 사랑이 신앙의 근원이므로 사랑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장자를 대신하여 ‘사랑’을 상징하는 레위가 선택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의 문제를 통해 보아 온 ‘무엇이 먼저인가?’라는 질문과도 직접 연결됩니다.

 

가인의 오류는 신앙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본래 사랑에서 나온 신앙을 사랑과 분리하여 독립시키고, 마침내 사랑보다 앞세운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AC.352의 레위에 관한 설명은 그 질서를 다시 바로잡습니다. 영적인 질서에서는 사랑이 근원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참된 신앙으로 존재하려면 계속 사랑을 바라보고 사랑을 섬겨야 합니다.

 

여기서 ‘장자’라는 상응에는 흥미로운 이중성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예배에서 처음 것들은 주님을 상징하고, 교회의 처음 것은 신앙을 상징한다’고 특별히 주의를 줍니다. 따라서 ‘장자’라는 말을 어디에서나 기계적으로 하나의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의 표상으로서 처음 난 것을 주님께 드릴 때 그것은 주님을 가리키지만, 교회 안에서 생겨나는 첫 번째 것을 말할 때에는 신앙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AC.338에서 가인을 태고교회의 ‘ 번째 자손’, 곧 신앙이라고 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교회의 삶에서 나타나고 인식되는 첫 자손은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 신앙의 생명과 근원은 사랑이며, 그 사랑 자체는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처음 ’이라고 해서 신앙이 사랑보다 우월하거나 독립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신앙은 자신을 낳은 사랑과 자신에게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향해야 합니다.

 

89:26-27과 계1:5의 인용은 이 모든 표상이 궁극적으로 누구를 향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은 ‘장자’이십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그분의 인성에 관하여’ 주님이 모든 것의 장자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구약의 처음 난 것에 관한 여러 표상은 궁극적으로 주님을 향하며, 주님 안에서 그 의미가 완성됩니다.

 

이 점에서 아벨이 ‘ 떼의 처음 ’을 드렸다는 말씀의 의미도 더욱 깊어집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체어리티가 드리는 것은 ‘처음 ’, 곧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참된 체어리티는 자기 안에 있는 사랑과 선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며 주님께 돌려드립니다.

 

이것은 참된 예배의 내적 자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고, 봉사하고, 말씀을 전하고, 어떤 선한 쓰임을 행했을 때 그것을 자기 공로로 붙들면 그 순간 선의 질서가 뒤집힐 수 있습니다. 반대로 ‘ 선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왔습니다’라고 인정하면, 인간은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자유롭게 행하면서도 그 근원을 주님께 돌립니다. 이것이 아벨이 ‘ 떼의 처음 ’을 드리는 모습 속에 들어 있는 중요한 속뜻입니다.

 

따라서 AC.352는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유입의 원리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인간은 생명과 사랑의 독립적인 근원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일 것인지, proprium의 사랑을 따를 것인지 인간은 자유 안에서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거듭남은 점점 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 삶의 생명으로 삼는 과정입니다.

 

결국 AC.352가 말하는 ‘ 떼의 처음 ’의 핵심은 단순히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교훈이 아닙니다. 더 깊은 속뜻은 ‘우리 안의 모든 참된 사랑과 선의 처음과 근원은 주님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고, 참된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오며, 체어리티의 행위 역시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래서 아벨의 제물이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이유도 더욱 선명해집니다. 아벨의 예배에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질서’가 들어 있습니다. 가인의 길은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독립시키는 길이었다면, 아벨의 길은 사랑과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리고 그 사랑에서 신앙과 행위와 예배가 나오게 하는 길입니다. 결국 AC.352는 우리에게 ‘ 안에 있는 선의 근원을 누구에게 돌리고 있는가?’라는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심화

 

1. ‘왜 장자가 아닌 레위가 모든 장자를 대신했는가 - 사랑과 신앙의 내적 질서

 

 

AC.352, 심화 1, ‘왜 장자가 아닌 레위가 모든 장자를 대신했는가 - 사랑과 신앙의 내적 질서’

AC.352.심화 1. ‘왜 장자가 아닌 레위가 모든 장자를 대신했는가 - 사랑과 신앙의 내적 질서’ 2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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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1, 창4:4, ‘체어리티란? -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기는 사랑’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1 ‘아벨’(Abel)이 체어리티를 상징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체어리티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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