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2026/06/14)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4, ‘참 놀랍도다 주 크신 이름’, 찬80, ‘천지에 있는 이름 중입니다.

 

오늘은 창3 두 번째, 본문은 창3:1-5이고, AC 글 번호로는 194번에서 206입니다.  

 

먼저 본문,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3:1-5)

 

제목은

 

태고교회 후손들의 상태 변화, 그 중심의 이동

 

이며, 다음은 AC.194-206입니다. 그전에 먼저 오늘 범위에 대한 요약 설명 후, 필요하면 몇몇 글 리딩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3:1-5와 이에 대한 AC.194-206은 인류 타락의 시작을 설명하는 본문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어떤 한 남자와 여자가 과일 하나를 따먹은 사건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것을 태고교회 후손들 안에서 일어난 영적 상태의 변화, 곧 인간이 주님을 신뢰하던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상태로 이동해 가는 과정을 보여 주는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AC.194에서 스베덴보리는 먼저 등장인물들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은 인간의 감각 파트(sensuous part)이며, ‘여자’는 인간의 own, 곧 자신의 proprium을 뜻합니다. ‘남자’는 이성 파트(rational part)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뱀이 처음부터 악마나 사탄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뱀은 본래 인간의 감각 파트입니다. 문제는 그 감각이 주님의 질서 아래 머물지 않고, 신앙의 재판관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더냐?’라는 뱀의 질문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계시를 자기 판단으로 검증하려는 태도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AC.195에서는 왜 감각 파트가 ‘’으로 불리는지 설명합니다. 고대인들은 감각적인 것들을 뱀으로 불렀는데, 이는 뱀이 땅에 가장 가까이 붙어사는 것처럼 감각도 인간 존재의 가장 바깥 단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감각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의 신비를 감각으로 판단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시편, 아모스, 예레미야, 욥기의 여러 구절을 인용하여, 감각에 근거한 거짓 추론이 어떻게 ‘뱀의 독’으로 묘사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뱀의 독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사람을 진리에서 멀어지게 하는 자기 확신의 힘을 뜻합니다.

 

AC.196에 이르면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시대를 향해 더 강한 경고를 합니다. 고대인들은 감각만을 신뢰했지만, 현대인들은 여기에 학문(scientia), 철학, 기억 지식까지 더해 자신들의 불신앙을 더욱 강하게 정당화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 사후 생명을 비웃는 사람, 모든 것을 물질과 자연으로 설명하려는 사람들을 예로 듭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학문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을 신앙의 재판관으로 삼는 태도를 비판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지식이 주님의 진리를 밝히는 도구가 되어야지, 그것을 심판하는 권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AC.197은 중요한 균형을 제공합니다. 뱀은 항상 악한 상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또한 광야의 놋뱀 역시 주님의 감각 파트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감각은 본래 나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아래 있을 때는 신중함과 분별력을 의미합니다. 창3의 뱀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감각이 종의 자리를 떠나 주인의 자리에 앉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AC.198-199에서는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는 내용이 해설됩니다. ‘동산 나무의 열매’는 태고교회로부터 전해진 신앙의 선과 진리, 곧 신앙의 지식들(cognitiones)을 뜻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동산 나무’가 아니라 ‘동산 나무의 열매’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태고교회는 진리를 직접 지각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나무’ 자체가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더 이상 직접 지각하지 못하고, 조상들로부터 전해진 진리의 열매를 배우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열매’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또한 ‘만지지도 말라’는 것은 신앙의 문제를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며, ‘죽을까 하노라’는 것은 그렇게 하면 신앙과 지혜가 소멸된다는 의미입니다.

 

AC.200-201은 홍수 이전과 이후 인간 구조의 차이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사람들은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 진리로부터 선을 배우는 구조로 바뀌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결국 ‘quod scirent’, 곧 ‘그저 알고 있는 것’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타락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홍수 이후 세상이 완전히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주님의 섭리적 조치였습니다. 태고교회의 높은 지각이 타락과 결합되면 회복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홍수 이후 인간은 비록 더 낮은 상태에 있게 되었어도 더 안전하게 보호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유대인을 보호하기 위해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13:13) 하신 것과 같습니다.

 

AC.202-203은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직접 지각하기 때문에 신앙에 대해 추론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옳다, 옳다’, ‘아니다, 아니다’면 충분합니다. 반면 영적 인간은 이해와 이성, 기억 지식을 사용하여 신앙을 확증합니다. 그러나 그들도 그것들로부터 신앙의 진위를 결론짓지는 않습니다. 확증은 이미 받아들인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이고, 결론은 자기 지성으로 신앙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영적 천사들의 길이고, 후자는 뱀의 길입니다.

 

마지막으로 AC.204-206은 타락의 내적 과정을 요약합니다. 뱀은 ‘너희 눈이 밝아질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감각과 자기 판단으로 신앙을 검증하면 진리를 더 잘 알게 될 것이라는 유혹입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정말 불법일까?’라는 작은 의심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점차 ‘내가 직접 판단하겠다’, ‘내가 스스로 인도하겠다’는 생각으로 발전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은 자신을 신뢰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사람들을 두고 ‘자신들이 신들처럼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양심이 무엇인지, 지각이 무엇인지,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열린 눈’이며,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어둠의 심연’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창3:1-5는 단순히 선악과를 먹은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주님을 신뢰하던 상태에서 자기 own을 신뢰하는 상태로 이동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감각의 제안, own의 동의, 이성의 승인이라는 흐름 속에서 인간은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참이다’에서 ‘내가 인정해야 참이다’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모든 영적 타락의 시작입니다. 동시에, 이 본문은 오늘날 우리 각 사람 안에서도 계속 반복되는 영적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상 요약 설명을 마치고, 아래는 해당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194, 창3: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AC.194-197)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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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5, 창3:1, ‘뱀’(serpent)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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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6, 창3:1, ‘뱀’의 시대적 확장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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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7, 창3:1,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진 ‘뱀’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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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8, 창3:2-3,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AC.198-203)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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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9, 창3:2-3, ‘나무’와 ‘열매’, 태고교회의 상태 변화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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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0, 창3:2-3, 창2 ‘사랑’에서 창3 ‘신앙’으로 중심 이동을 허락하신 이유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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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1, 창3:2-3, ‘홍수 이전 태고 사람들의 성향(genius) 이해의 어려움’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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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2, 창3:2-3, ‘신앙’ 관련, 천적 천사들의 경우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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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3, 창3:2-3, ‘신앙’ 관련, 영적 천사들의 경우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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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4, 창3:4-5,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AC.204-206)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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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5, 창3:4-5, 창3의 서술, ‘상태의 연속적 변화’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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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6, 창3:4-5, ‘너희 눈이 밝아져’가 실제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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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오늘 창3 본문에 대한, 그러나 그 드러내시는, 너무나 놀라운 속뜻 앞에 어리둥절, 감사, 감동하게 됩니다. 오, 주님, 저희로 이 생명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게 하여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6-14(D1)

 

 

축도

 

주 여호와 하나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그 거룩한 역사하심이, 오늘 ‘태고교회 후손들의 상태 변화, 그 중심의 이동(3:1-5)에 대한, 놀라운 아르카나의 말씀들 앞에 거듭 참된 ‘눈 밝아짐’으로 아멘 하며, 마음에 더욱 깊은 주님 사랑을 결심하는, 그리고 주님 주신 일부를 감사함으로 주님께 헌금하는 모든 손길 위에, 이제부터 영원토록 함께하시길 간절히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2655, 2, 창3.2, 2026-06-14(D1)-주일예배(창3,1-5, AC.194-206), ‘태고교회 후손들의 상태 변화, 그 중심의 이동’.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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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6/07, 창3:1-13, AC.190-193), ‘창3 전체 소개 및 창3:1-13 개요’

※ 오늘(2026/06/07, 성찬)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3, ‘영광스런 주를 보라’,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성찬), 찬79,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입니다. 오늘부터 창3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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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6.심화

 

2. ‘주님의 영원하신 사랑과 자비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인정하지 않는데, 이는 멸망하는 짐승들과 자신들을 같게 여기기 때문이며, 주님을 인정하지도 않고, 오직 자기 자신과 자연만을 숭배합니다. 그들 가운데 말에 신중하려는 자들은, 그 본질은 알지 못하지만, 어떤 최고 존재[ens]가 만물을 다스린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감각과 기억 지식의 것들로 여러 방식으로 스스로를 확증하는 원리들이며, 만일 감히 할 수만 있다면, 온 우주 앞에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지혜이며,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열린 눈(open eyes)이며, 이러한 신들(gods)입니다. 그들이 한낮보다 더 분명하다고 여기는 이러한 원리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계속 나아가며, 이런 방식으로 신앙의 신비들에 대해 추론하는데, 그 결과가 무엇이겠습니까? 어둠의 심연일 뿐입니다. 이들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세상을 미혹하는 뱀들(serpents)입니다. they do not acknowledge an eternal life; for they believe themselves to be like the brutes which perish; neither do they acknowledge the Lord, but worship only themselves and nature. Those among them who wish to be guarded in their expressions, say that a certain supreme existence [ens] of the nature of which they are ignorant rules all things. These are the principles in which they confirm themselves in many ways by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and if they dared, they would do the same before all the universe... Such is their wisdom, such “open eyes” have they, and such “gods” are they. Principles like these, which they think clearer than the day, they make their starting point, and so continue on, and in this way reason about the mysteries of faith; and what can be the result but an abyss of darkness? These above all others are the “serpents” who seduce the world. (AC.206)

 

주님은 그럼에도 불구, 저런 사람들에게도 끝까지 볕과 비를 내리시고, 지상의 삶은 물론, 사후 지옥으로 뛰어들 때까지 보살피시네요...

 

 

네, 목사님께서 짚으신 부분이야말로 AC.206을 읽으며, 가장 깊은 감동을 받게 되는 지점 가운데 하나인 것 같습니다.

 

사실 AC.206의 묘사는 상당히 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람들을 ‘세상을 미혹하는 뱀들’이라고까지 부릅니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고, 주님을 인정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과 자연을 숭배하고, 신앙의 신비들을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심판합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상태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들을 함께 읽어보면, 주님은 그런 사람들조차 단 한 순간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선한 사람들만의 주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햇빛이 의인과 악인 위에 함께 비치고, 비가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위에 함께 내리는 것처럼, 주님의 생명과 인플럭스는 천국에 갈 사람에게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지옥으로 가는 사람에게도 계속 흐릅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지옥에 있는 자들조차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지 않으면 단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차이는 생명이 어디서 오느냐가 아니라, 그 생명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있습니다. 천사는 그것을 사랑과 지혜로 받아들이고, 악한 영은 그것을 자기 사랑과 지배욕으로 왜곡하여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생명 자체는 여전히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목사님 말씀처럼, 주님은 저런 사람들에게도 끝까지 볕과 비를 내리십니다. 그들이 지상에 사는 동안에도 그렇고, 죽은 후 중간 영계에 있는 동안에도 그렇고, 심지어 그들이 최종적으로 지옥을 선택하는 순간에도 그렇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은 누구도 지옥으로 보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끝까지 천국으로 이끌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기 사랑이 너무 강하여 결국 주님의 질서보다 자신의 삶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저는 AC.182-189의 사후 첫 상태가 떠오릅니다. 목사님께서 여러 번 감탄하셨듯이, 주님은 사람이 죽은 직후 그가 누구였는지, 어떤 신앙을 가졌는지, 얼마나 완고했는지를 먼저 따지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천적 천사들에게 맡기시고, 사랑과 평안 가운데 보호하시며, 마치 어린아이가 잠에서 깨어나듯 조심스럽게 인도하십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AC.206의 저런 사람들조차 죽는 순간에는 주님의 품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에게도 동일한 사랑을 베푸십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가 진정 사랑하는 것이 드러나고, 결국 스스로 자신과 가장 비슷한 공동체를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지옥론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주님의 사랑이 천국 문턱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주님을 거부할 수 있지만, 주님은 인간을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등을 돌릴 수 있지만, 주님은 끝까지 등을 돌리지 않으십니다.

 

어쩌면 AC.206을 읽으며 우리가 정말 놀라워해야 할 것은 저 사람들의 어둠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에게조차 결코 끊어지지 않는 주님의 인내와 자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한 가지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은 주님께서는 언제나 인간보다 먼저 사랑하시고, 인간보다 오래 기다리시며, 인간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지옥으로 뛰어들 때까지 보살피신다’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를 매우 잘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마지막 순간에도 주님은 그 사람이 방향을 돌리기를 바라시며 손을 내밀고 계신다는 점까지 함께 기억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AC.206, 창3:4-5, ‘너희 눈이 밝아져’가 실제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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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6, 심화 1, ‘실제 경험 사례들인가?’

AC.206.심화 1. ‘실제 경험 사례들인가?’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들이거나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로 여겨지기를 원하지만, 만일 ‘자신의 own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무엇이냐’(whether they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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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6.심화

 

1. ‘실제 경험 사례들인가?’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들이거나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로 여겨지기를 원하지만, 만일 자신의 own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무엇이냐(whether they know what it is not to have anything of their own)고 묻는다면, 그것은 곧 아무런 존재도 가지지 않는 것이며, 자신의 own이 모두 제거된다면 자신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만일 주님으로부터 사는 것이 무엇이냐(what it is to live from the Lord)고 묻는다면, 그것을 공상으로 여길 것입니다. 만일 양심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서민들을 억제하는 데 쓰이는 상상의 산물일 뿐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지각(perception)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그것을 비웃으며, 광신적인 헛소리라 부를 것입니다. Although such persons desire to be regarded as gods, or as the wisest of men, if they were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it is not to have anything of their own, they would answer that it is to have no existence, and that if they were deprived of everything that is their own, they would be nothing. If they are asked what it is to live from the Lord, they think it a fantasy. If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conscience is, they would say it is a mere creature of the imagination, which may be of service in keeping the vulgar under restraint. If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perception is, they would merely laugh at it and call it enthusiastic rubbish. (AC.206)

 

위 내용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경험한 것들 같아요.

 

 

네, 저도 AC.206을 읽으면 그런 인상을 받습니다. 물론 학문적으로는 조심해서 말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특정 개인들과 나눈 실제 대화를 그대로 기록한 것인지, 아니면 그가 관찰한 인간 유형을 대표적으로 묘사한 것인지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작 전체를 읽어보면, 이 대목은 단순한 철학적 가정이라기보다 그가 오랫동안 직접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쓰고 있다는 느낌이 매우 강합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AC.206의 논리가 지나치게 생생하다는 점입니다. 그는 단순히 ‘그들은 영적인 것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씩 질문을 던집니다. ‘자신의 own이 없는 상태가 무엇인지 아는가?’, ‘주님으로부터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양심이 무엇인지 아는가?’, ‘지각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리고 각각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마치 실제 사람들과 수없이 대화해 본 사람이 하는 설명처럼 보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이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낯설지 않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own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은 공상이다’, ‘양심은 사회 질서를 위한 심리적 장치일 뿐이다’, ‘지각 같은 것은 광신이다’라는 생각은 18세기에도 있었겠지만, 어쩌면 21세기에는 더 흔해졌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206을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특정 시대의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own을 절대화하는 인간 정신의 한 유형을 묘사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또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은, 그가 비판하는 대상이 무식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는 ‘세상 학문에 뛰어난 사람들’, ‘가장 지혜롭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지식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태도를 비판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 자신이 당대 유럽 최고의 과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AC.206을 읽을 때마다 스베덴보리가 영계 체험 이전의 과학자 스베덴보리와, 영계 체험 이후의 계시자 스베덴보리, 두 삶을 모두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는 학문과 철학의 세계도 깊이 알고 있었고, 동시에 영계에서 천사들과 영들과의 교류도 경험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단순한 교리적 주장이라기보다, ‘나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보았고, 그들의 생각이 어디까지 가는지 보았다’는 증언처럼 읽히는 면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AC.206을 읽으며 곧바로 ‘세상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다 틀렸다’는 결론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학문 자체가 아니라, 학문을 최종 권위로 삼는 태도에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평생 쌓은 과학 지식을 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주님의 질서 안에서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결국 AC.206은 단순한 논쟁문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오랜 세월 관찰한 인간 정신의 한 극단을 보여 주는 글로 읽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말씀처럼, 그 생생함 때문에 독자는 종종 ‘이건 실제로 스베덴보리가 만나고 경험한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 느낌이 충분히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AC.206, 심화 2, ‘주님의 영원하신 사랑과 자비’

AC.206.심화 2. ‘주님의 영원하신 사랑과 자비’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인정하지 않는데, 이는 멸망하는 짐승들과 자신들을 같게 여기기 때문이며, 주님을 인정하지도 않고, 오직 자기 자신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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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6, 창3:4-5, ‘너희 눈이 밝아져’가 실제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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