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혀 주신 말씀의 상응과 속뜻,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의 질서에 비추어, 주님의 말씀 안에 이미 담겨 있는 선과 진리를 더욱 분명히 살피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작업의 시작과 중심과 마지막에 계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SW.2 돌아온 탕자와 큰아들(15:11-32)

 

11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눅15:11-32)

 

 

 

누가복음 15장의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기독교인에게 너무나 익숙한 말씀입니다. 흔히 이 비유를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 회개하여 돌아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받아 주신다’는 이야기로 읽습니다. 물론 그것이 이 비유의 가장 분명한 문자적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혀 주신 말씀의 상응과 거듭남의 질서에서 이 비유를 다시 살펴보면, 이 이야기는 단순히 집을 나갔다 돌아온 한 청년의 이야기를 넘어 한 인간이 주님에게서 받은 영적 재산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떠났다가 그것을 모두 잃은 뒤, 마침내 자기 자신에게서 돌아서 주님께 돌아와 다시 진리와 선으로 옷 입혀지는 거듭남의 이야기로 펼쳐집니다.

 

무엇보다 이번 비유에는 매우 든든한 직접 근거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9391(24:5)에서 바로 이 돌아온 탕자를 직접 언급합니다. 그는 ‘탕자’가 ‘천국의 부요함,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탕진한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가 아버지께 돌아와 자신은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고백한 것은 ‘마음의 회개와 자기를 낮춤’을 의미하며, 아버지가 입혀 준 ‘제일 좋은 ’은 일반적인 진리들을, ‘살진 송아지’는 그 진리들에 상응하는 일반적인 선들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비유를 거듭남의 과정으로 읽는 것은 비유의 세부에 임의의 상응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 비유를 직접 그렇게 열어 준 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AC는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틴 Arcana Coelestia, 영어 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 1749-1756, , 속뜻 주석, 10,837 )를 뜻하며, 숫자는 글 번호입니다. 괄호 안의 성경 장절은 해당 글이 다루는 말씀의 본문입니다.

 

비유는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있는데’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요구합니다. 여기서 벌써 인간의 깊은 문제가 드러납니다. 아들이 가진 것은 본래 아버지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그것을 ‘내게 돌아올 분깃’으로 받아 들고 아버지를 떠납니다. 영적으로 보면 인간에게 있는 생명, 이해, 자유, 진리를 아는 능력, 선을 행할 능력은 모두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proprium은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느끼고 마침내 ‘ ’이라고 주장합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모든 것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게 하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유가 있어야 사랑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을 행할 때 그것이 마치 내 선택과 내 행동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면 선을 자유롭게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 것처럼’ 사용하는 것과 ‘내게서 나온 ’이라고 믿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둘째 아들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아버지와 분리하여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 합니다.

 

13절은 ‘ 며칠이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모아 가지고 나라에 ’라고 합니다. ‘ 나라’는 문자적으로는 아버지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이지만, 영적으로 읽으면 주님에게서 멀어진 인간의 상태를 매우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주님은 공간적으로 우리에게서 멀어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이 사랑과 삶에서 주님에게서 멀어집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와 선을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할수록 사람은 마음의 상태에서 ‘ 나라’로 갑니다.

 

그곳에서 둘째 아들은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낭비’합니다. 여기에서 AC.9391의 직접 설명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탕자가 탕진한 것을 ‘천국의 부요함’, 곧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라고 밝힙니다. 사람은 말씀을 통해 많은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선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용서가 무엇인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위해 사용하거나 삶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면 영적으로 그것을 탕진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진리의 목적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천국의 재산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 없앤 ’ 흉년이 옵니다. 이 순서가 의미심장합니다. 재산을 다 없앤 뒤 흉년이 왔습니다. 외부에서 갑자기 불행이 닥쳐서 탕자가 타락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가진 것을 다 탕진한 상태에서 흉년이 닥치자 그의 내적 빈곤이 밖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영적 의미에서 흉년은 선과 진리가 결핍된 상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를 계속 삶에서 밀어내면 어느 순간 ‘먹을 ’이 없어집니다. 말씀을 알고 있는데도 마음은 굶주리고, 많은 것을 경험했는데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릅니다. 이것이 영적 궁핍입니다.

 

그 결과 둘째 아들은 그 나라 사람에게 붙어 살며 돼지를 치게 됩니다. 유대인의 청중에게 ‘돼지를 친다’는 것은 단순히 가난한 직업을 얻었다는 것보다 훨씬 강렬한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레위기의 정결 규례에서 돼지는 부정한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집에서 아들로 살던 사람이 이제 먼 나라에서 돼지를 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주님에게서 멀어져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욕망의 지배 아래 내려간 인간의 상태를 아주 강하게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더욱 처참한 것은 16절입니다.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천국의 양식이 아니라 돼지가 먹는 음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무엇인가로 채워져야 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로 채워지지 않으면 결국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오는 것들로 자신을 채우려 합니다. 인정, 소유, 쾌락, 우월감, 원망, 자기 합리화 같은 것들이 잠시 마음을 채우는 듯하지만 영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먹으려 하지만 배부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17절에서 이 비유 전체의 방향이 바뀝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개역개정의 이 표현은 참 좋습니다. 외적 환경이 먼저 바뀐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사람을 보내 데려온 것도 아닙니다. 아들의 내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보기 시작합니다. ‘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거듭남에서도 이 순간은 결정적입니다. 사람은 먼저 자기 상태를 보아야 합니다. 자신이 주님에게서 멀어져 있다는 사실, 자기 지혜와 자기 사랑으로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성찰의 시작이며 회개의 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아직 아버지 집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이미 좋은 사람이 된 뒤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보는 순간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는 말합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것은 단순한 후회와 회개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 후회는 돼지우리에서 ‘내가 이렇게 되었지?’ 하고 슬퍼하는 데서 끝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일어나 아버지께 가는 ’입니다. 방향이 바뀝니다. 스베덴보리가 AC.9391에서 탕자의 귀환을 ‘마음의 회개와 자기를 낮춤’으로 설명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악에서 돌아서 주님께 향하는 실제적인 방향 전환입니다.

 

18절과 19절의 고백도 중요합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여기에는 변명도 자기 합리화도 없습니다. ‘환경이 나빴습니다’, ‘친구들을 잘못 만났습니다’, ‘아버지가 처음부터 재산을 주지 말았어야 했습니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악을 자기 것으로 인정합니다. 이것이 참된 회개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악을 죄로 여겨 피하려면 먼저 그것이 ‘나의 ’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결심한 뒤 아버지를 찾아 헤매는 장면이 길게 나오지 않습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들은 아직 멀리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미 그를 봅니다.

 

이 장면은 이 비유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들이 먼저 돌아서기는 했지만, 그가 아버지께 도착해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충분히 회개했음을 증명한 뒤 아버지가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먼저 보고, 측은히 여기고, 달려갑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완전히 깨끗해진 뒤에야 가까이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유 가운데 방향을 돌려 주님께 향하기 시작할 때, 이미 주님의 자비는 그 사람을 향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여기에는 심문이 없습니다. ‘재산을 얼마나 남겼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느냐?’며 조서를 작성하지도 않습니다. 먼저 안습니다. 이것은 죄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들은 이미 자기 죄를 보고 돌아섰습니다. 회개가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자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는 언제나 있었지만, 이제 아들이 그것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변화가 하나 있습니다. 아들은 돌아오기 전에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고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아버지 앞에 도착해서는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까지만 말합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는 말은 본문에서 사라집니다. 그 말을 꺼낼 틈도 없이 아버지가 종들에게 명령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아들은 ‘품꾼’의 자리라도 달라고 생각하지만 아버지는 그를 품꾼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시작하는 일은 ‘아들의 회복’입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깁니다.

 

바로 이 대목을 스베덴보리가 직접 풉니다. AC.9391에서 ‘제일 좋은 ’은 ‘일반적인 진리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9, AE) AE.279(5:1)에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제일 좋은 ’은 일반적이고 주된 진리들을, ‘손의 가락지’는 속 또는 영적 사람 안에서 진리와 선의 결합을, ‘발의 ’은 겉 또는 자연적 사람 안에서 그와 같은 결합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둘, 곧 가락지와 신이 함께 ‘거듭남’을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이렇게 보면 아버지가 아들을 받아들이는 장면은 단순한 환영식이 아닙니다. 거듭남의 회복 장면입니다. 먼저 옷을 입힙니다. 말씀에서 옷은 진리와 관련됩니다. 벌거벗고 궁핍해진 사람에게 다시 진리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진리는 머리에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락지가 ‘’에 끼워집니다. 손은 행위와 능력의 영역과 연결됩니다. 진리와 선이 속 사람 안에서 결합하고 그것이 삶의 행위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에 신을 신깁니다. 발은 자연적 삶의 가장 바깥 영역과 관계됩니다. 즉 거듭남은 마음속에서만 일어나는 신비한 변화가 아니라 일상생활의 가장 바깥 부분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에 돌아왔다고 해서 이야기가 ‘용서받았다’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다시 입히고, 연결하고, 걷게 합니다. 주님의 용서는 단순히 과거의 죄를 장부에서 지우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을 다시 질서 안으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진리로 옷 입히고,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고, 자연적 삶까지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고 합니다. 이것 역시 스베덴보리가 직접 해설합니다. AC.9391에서는 살진 송아지가 앞의 진리들에 상응하는 ‘일반적인 선들’을 의미한다고 하며, AE.279에서는 더 분명하게 ‘사랑과 체어리티의 ’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제일 좋은 옷과 살진 송아지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옷은 진리이고 송아지는 선입니다. 돌아온 아들에게 진리만 다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가 향해야 할 선, 곧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이 회복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먹고 즐기자’는 말씀도 단순한 잔치 장면이 아닙니다. AE.279는 이것을 ‘결합과 천국의 기쁨’으로 설명합니다. 말씀에서 함께 먹는다는 것은 단순한 음식 섭취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선을 함께 받아들이고 나누는 결합을 나타냅니다. 아들은 먼 나라에서 쥐엄 열매조차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집에서는 살진 송아지를 함께 먹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대비입니까? 주님에게서 떠난 proprium의 삶이 주는 음식과 주님과의 결합 안에서 받는 천국의 음식이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그러므로 24절의 ‘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는 말씀이 비유의 중심에 놓입니다. 아들은 육체적으로 죽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아버지에게서 떠난 상태가 ‘죽음’이었고, 돌아와 다시 결합된 상태가 ‘’입니다. 영적 죽음과 영적 생명의 차이입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얼마나 활발히 활동하고 성공하고 즐기고 있느냐가 생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있느냐가 영적 생명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비유가 끝났다면 우리는 훨씬 편안했을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와 아버지가 서로 끌어안고 잔치를 벌이는 아름다운 장면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야기를 계속하십니다. ‘맏아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맏아들이야말로 이 비유를 단순한 ‘탕자의 회개 이야기’에서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바꾸어 놓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맏아들은 먼 나라에 가지 않았습니다. 재산을 창녀들과 함께 탕진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 집에 계속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말합니다. ‘내가 여러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외적으로 보면 모범적인 아들입니다. 그런데 동생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자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합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아버지 안에 있는 ’과 ‘아버지의 마음 안에 있는 ’은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맏아들은 몸으로는 아버지 곁에 있었지만 아버지가 왜 기뻐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는 동생을 ‘ 동생’이라고 부르지 않고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관계가 끊어져 있습니다. 그의 관심은 동생이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보다 ‘나는 이렇게 충성했는데 사람에게 잘해 주느냐’는 비교와 공로에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문맥을 생각하면 이것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이 장은 세리와 죄인들이 주님께 가까이 나아오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수군거리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그리고 잃은 아들의 비유를 연이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둘째 아들만큼이나 맏아들도 이 비유의 중요한 대상입니다. ‘죄인과 함께 먹는 주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맏아들에게서 드러납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매우 엄중한 질문이 됩니다. 사람은 외적으로 종교적 질서를 잘 지키면서도 그 중심에 자기 공로가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내가 여러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이라는 말 안에는 순종의 기록이 가득하지만, 동시에 ‘그러므로 나는 받을 자격이 있다’는 자기 의가 숨어 있습니다. 선을 행하면서 그 선을 주님에게서 온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 공로로 붙잡으면, 다른 사람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자비를 기뻐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맏아들은 동생의 회복을 보면서 기뻐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의 문제입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다른 사람이 주님께 돌아오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러나 자기 공로를 중심에 놓는 신앙은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자비를 불공평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오래 섬겼는데 사람은 저렇게 살다가 돌아와서 저런 환대를 받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버지는 둘째에게 했던 것과 비슷하게 맏아들에게도 ‘나옵니다.’ 둘째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버지가 달려 나갔고, 맏아들이 화가 나서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도 ‘아버지가 나와서 권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아버지는 먼 나라에 간 아들에게만 자비로운 분이 아닙니다. 자기 의와 분노 때문에 잔치에 들어오지 못하는 맏아들에게도 나아가십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사실 ‘잃어버린 아들’은 한 명만이 아닐 수 있습니다. 둘째는 아버지 집 밖의 먼 나라에서 잃어버렸고, 맏아들은 아버지 집 가까이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한 사람은 허랑방탕 속에서 주님에게서 멀어지고, 다른 사람은 자기 의와 공로의식 속에서 주님의 마음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맏아들도 정죄하지 않습니다. ‘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것이 것이로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맏아들이 ‘ 아들’이라고 부른 사람을 다시 ‘ 동생’이라고 불러 줍니다. 끊어진 관계를 다시 이어 주는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체어리티의 본질을 다시 보게 됩니다. 주님께 돌아온 사람을 보면서 ‘ 사람이 과거에 무엇을 했는가’를 끝없이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함께 기뻐하는 것이 천국의 기쁨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비유는 맏아들이 결국 잔치에 들어갔는지를 말하지 않고 끝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열린 결말입니다. 둘째 아들의 선택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의 선택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는 밖으로 나와 권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가 자기 공로와 분노를 내려놓고 아버지와 함께 동생의 회복을 기뻐하며 잔치에 들어갈 것인가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읽으며 우리는 둘째 아들에게만 자신을 대입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안에는 둘째도 있고 맏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내 것이라 여기며 먼 나라로 가려는 proprium도 있고,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proprium도 있습니다. 하나는 노골적으로 아버지를 떠나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 곁에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떠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중심을 ‘탕자’에게만 두면 오히려 가장 중요한 분을 놓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둘째가 재산을 요구할 때도 아버지가 있습니다. 둘째가 먼 나라에 있을 때도 아버지의 집은 그대로 있습니다. 둘째가 스스로 돌이킬 때 기억해 낸 것도 아버지의 집입니다. 아직 거리가 먼데 먼저 발견한 것도 아버지이고, 달려간 것도 아버지이며, 목을 안고 입을 맞춘 것도 아버지입니다.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긴 것도 아버지이며,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시작한 것도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맏아들이 분노하여 밖에 서 있을 때 다시 밖으로 나가 권하는 분도 아버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가는가’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그보다 더 근원적으로 ‘주님께서 잃어버린 인간을 어떻게 대하시는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빼앗아 억지로 집에 붙잡아 두지 않으십니다. 둘째가 떠나는 것도 허용하십니다. 그러나 떠났다고 사랑을 거두시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선택의 결과를 통해 자기 상태를 보고, 자유 가운데 돌이켜 주님께 향할 때 주님께서는 그를 품꾼으로 강등시키지 않으십니다. 다시 진리로 옷 입히고,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며, 자연적 삶까지 새롭게 하시고,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 안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이것이 AC.9391AE.279가 옷과 가락지와 신과 살진 송아지를 통해 우리에게 열어 보여 주는 거듭남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전에 우리가 나누었던 질문, 곧 ‘아버지는 둘째 모르게 사람을 보내 그가 사는 형편을 은밀히 살필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다시 떠올릴 수 있습니다. 문자적 이야기 안에서는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오히려 더 깊은 답이 보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먼 나라에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상태를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여 억지로 데려오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자유 가운데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고 할 수 있도록 섭리하시면서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방향을 돌리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됩니다. 사실 아버지는 처음부터 우리를 잊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비유를 우리 자신의 거듭남에 놓고 읽으면 질문은 아주 구체적으로 바뀝니다. ‘나는 지금 아버지에게서 받은 무엇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가? 나는 어떤 선과 진리를 목적을 위해 탕진하고 있는가? 마음의 나라는 어디인가? 나는 무엇으로 영혼의 배를 채우려 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돼지우리에서 처지를 한탄하고만 있는가, 아니면 실제로 일어나 아버지께 가고 있는가? 그리고 혹시 나는 이미 아버지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자비 때문에 화가 맏아들은 아닌가?

 

그런데 이 모든 질문 끝에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은 결국 우리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이신 주님입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이 한 장면 안에 이 비유의 복음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먼 나라에서 돌아오지만, 구원은 인간이 먼 길을 완주하여 마침내 주님께 도달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이 자유 가운데 주님께로 방향을 돌릴 때, 주님께서 그를 향하여 오십니다. 그리고 그를 단지 과거의 상태로 돌려놓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다시 옷 입히고,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고, 삶의 가장 바깥까지 새롭게 하여 천국의 기쁨 안으로 들이십니다.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죽어 있던 것이 살아나는 것이며, 잃었던 것이 주님에게 다시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기뻐하시는 분은 무엇보다 주님이십니다.

 

 

 

SW.1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13:1-23)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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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혀 주신 말씀의 상응과 속뜻,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의 질서에 비추어, 주님의 말씀 안에 이미 담겨 있는 선과 진리를 더욱 분명히 살피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작업의 시작과 중심과 마지막에 계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SW.1 ‘ 뿌리는 자의 비유’(13:1-23)

 

1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3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0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2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4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6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18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20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3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13:1-23)

 

 

마태복음 13장의 뿌리는 자의 비유는 주님의 비유 가운데서도 특별합니다. 주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18절로 23절에서 그 의미까지 친히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비유를 읽는다는 것은 주님의 해설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하나 더 얹거나, 주님께서 설명하신 것보다 더 깊은 의미를 스베덴보리에게서 찾아내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친히 밝혀 주신 이 해설을 출발점으로 삼아,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혀 주신 말씀의 상응과 인간의 거듭남의 질서에 비추어, 주님의 이 말씀이 우리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빛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시며, 말씀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말씀 안에 주님께서 두신 질서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 안내자입니다.

 

이 비유의 문자적 문맥부터 살펴보면 구조가 매우 분명합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립니다. 그런데 씨가 떨어지는 곳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먹어 버리고, 어떤 씨는 돌밭에 떨어져 금방 싹이 나지만 뿌리가 없어 해가 뜨자 말라 버립니다. 어떤 씨는 가시떨기 가운데 떨어져 자라기는 하지만 가시가 기운을 막아 결실하지 못합니다. 마지막 씨는 좋은 땅에 떨어져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의미를 직접 설명하십니다. 씨는 천국 말씀이며,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와 좋은 땅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서로 다른 상태입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그것을 천국 말씀이라고 하셨으므로 씨의 의미는 이미 주님께서 밝혀 주셨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은 이것을 말씀 전체의 상응 안에서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AC.2851(22:17)에서는 가 체어리티와 신앙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AC.3373(26:3)에서는 주님에게서만 천국의 ’, 곧 모든 선과 진리가 나온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씨는 단순한 종교적 정보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과 진리이며, 특별히 사람 안에 심겨 그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 있는 말씀의 진리입니다. 씨 한 알 안에 장차 자라날 나무와 열매의 가능성이 들어 있듯, 주님의 진리 안에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고 마침내 선과 체어리티라는 열매를 맺게 할 천국의 생명력이 들어 있습니다.

 

AC는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틴 Arcana Coelestia, 영어 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 1749-1756, , 속뜻 주석, 10,837 )를 뜻하며, 숫자는 글 번호입니다. 괄호 안의 성경 장절은 해당 글이 다루는 말씀의 본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중심은 씨의 차이가 아닙니다. 같은 씨가 뿌려집니다. 씨 뿌리는 자도 같습니다. 차이는 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6148(47:26)에서 (ground)을 진리를 받아들이는 리셉터클, 곧 받아들이는 그릇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더 깊이 보면 그 받아들이는 능력 자체도 인간에게서 독립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의 인플럭스 때문에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좋은 땅인 사람이 자기 힘으로 좋은 땅이 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씨도 주시고, 그 씨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도 주십니다. 다만 인간에게는 그 씨를 자유롭게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 있는 리셉션의 상태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길가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는다고 하십니다. 길가는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 굳어진 곳입니다. 씨가 땅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표면에 그대로 놓여 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심지어 말씀에 관한 많은 지식을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말씀은 지금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안에서 무엇을 고치라고 하시는가?라는 자리까지 들어오지 못한다면 씨는 아직 마음의 표면에 놓여 있는 셈입니다.

 

길가의 씨를 새들이 먹어 버렸다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말씀에서 새는 문맥에 따라 생각과 지적인 것들을 의미하며, 반대 의미에서는 진리를 파괴하는 거짓된 사고와 추론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자마자 자기 생각으로 재단하고, 자기 욕망에 맞게 해석하며, 자신에게 불편한 진리를 합리화해 버리는 상태를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씨는 분명 마음에 떨어졌지만 그 진리가 내 삶을 판단하기 전에 오히려 내가 그 진리를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말씀을 내가 듣는 것이 아니라 내 proprium이 말씀을 심문하기 시작하면 씨는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두 번째는 돌밭입니다. 이 사람은 길가보다 훨씬 더 나아간 것처럼 보입니다.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받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감동하고,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여 기뻐하며, 어떤 때는 자신의 삶이 완전히 달라질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결정적인 문제를 속에 뿌리가 없다고 하십니다. 여기에는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구별이 있습니다. 진리를 아는 ’, 진리에 감동받는 ’, 진리를 행하는 은 서로 같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반복해서 밝히신 거듭남의 질서에서 진리는 이해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의지로 내려가 삶이 되어야 합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 374에서는 이것을 씨와 나무와 열매의 관계로 아주 아름답게 설명합니다. 씨 안에는 열매를 향한 목적이 들어 있고, 씨가 땅에서 올라와 가지와 잎을 이루는 것은 이해에 해당하며, 마침내 열매를 맺는 것은 선한 일을 행하는 것에 해당합니다. 즉 씨의 목적은 싹 자체가 아니라 열매입니다. 진리의 목적 역시 내가 진리를 알게 되었다는 데 있지 않고 그 진리가 내 의지를 변화시키고 삶에서 선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돌밭의 결정적인 시험은 환난이나 박해입니다. 이것을 외적인 종교박해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말씀의 진리가 내가 지금까지 사랑해 온 악과 충돌할 때 내적 싸움이 시작됩니다. ‘용서하라는 말씀을 들을 때는 아름답지만 실제로 나에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해야 할 때는 다릅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도 들을 때는 거룩하지만 실제 내 자존심과 명예와 이익을 내려놓아야 할 때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됩니다. 바로 그때 진리에 뿌리가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진리가 나를 위로할 때만 사랑하고, 진리가 나를 고치려 할 때 거부한다면 아직 뿌리가 깊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새 예루살렘과 그 천국 교리(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1758)에서 시험(temptation)을 거듭남의 중요한 과정으로 다루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거듭남은 진리를 많이 배우는 평탄한 지적 과정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와 선이 기존의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면서 새로운 사람이 형성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돌밭에서 중요한 것은 처음 싹이 얼마나 빨리 나왔느냐가 아닙니다. 뿌리가 어디까지 내려갔느냐입니다.

 

세 번째는 가시떨기입니다. 이 부분은 특별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AC.9144(22:6)에서 스베덴보리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직접 인용하면서 가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시를 욕망에서 나오는 거짓들과 연결하며, 특히 세상에 대한 염려와 세상적 욕망을 지지하는 거짓들이 사람의 내면을 닫아 버릴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바로 막4의 씨 뿌리는 자 비유,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시가 단순히 돈이나 재산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세상에서 직업을 가지고 일하며 재산을 관리하고 가족을 돌보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은 악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올바른 질서 안에서 쓰임(use)을 이루는 중요한 삶의 영역입니다. 문제는 세상의 것이 천국의 것을 섬기느냐, 천국의 것이 세상의 것을 섬기게 되었느냐입니다. AC.9144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적인 사랑이 될 때 그것들이 선과 진리를 소멸시키는 불처럼 작용한다고 설명합니다.

 

가시떨기의 무서운 점은 씨가 아예 없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씨도 자라고 가시도 자랍니다. 말씀도 있고 세상 사랑도 있습니다. 신앙도 있고 인정욕구도 있습니다. 예배도 드리고 자기중심적 욕망도 키웁니다. 성경도 읽고 재물과 체면과 성공도 마음의 중심에 놓습니다. 둘이 한동안 함께 자랍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쪽이 더 강한지가 드러납니다. 가시는 씨를 뽑아 버리지 않습니다. ‘기운을 막습니다.결국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신앙과 체어리티에 관한 가르침과 정확히 만납니다. 진리는 그 자체를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신앙 역시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습니다. TCR.373-376에서는 체어리티와 신앙이 가능한 곳에서는 반드시 행위 안에서 함께 존재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머리에는 진리가 가득하지만 삶에서 선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아직 씨가 그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네 번째 좋은 에서 비로소 이 비유 전체의 목적이 나타납니다. 주님께서는 좋은 땅에 뿌려진 사람을 말씀을 듣고 깨닫는 라고 하시며 곧바로 결실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깨달음결실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는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참된 이해는 삶과 분리된 지적 이해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진리를 알고, 그것을 인정하고, 그 진리에 따라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선을 행할 때 진리가 사람의 것이 되어 갑니다.

 

스베덴보리가 생명의 교리(Doctrine of Life, 1763, Life) 2에서 바로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인용하는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그는 주님의 여러 말씀을 모아 듣는 행하는 의 관계를 보여 주면서,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말씀을 듣고 주의를 기울여 마침내 열매를 맺는 사람이라고 인용합니다. 따라서 좋은 땅의 핵심은 지식의 양이 아닙니다. ‘리셉션’, 곧 받아들임입니다. 그리고 그 받아들임이 실제 삶으로 내려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열매는 무엇일까요? TCR.373은 사람의 내면이 그 사람의 행위 안에 나타난다고 설명하며, 체어리티와 신앙은 선한 행위 안에서 함께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같은 책 421에서는 영적 씨를 말씀에서 나오는 교회의 진리라고 부르며, 그것이 어떤 열매를 맺는지는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내적 동기에 따라 달라진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열매는 단순히 교회 봉사를 많이 한다거나 종교적 업적을 많이 남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가 사람 안에서 선이 되고, 그 선이 체어리티와 쓰임의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전체에는 진리에서 선으로라는 거듭남의 운동이 흐르고 있습니다. 씨는 진리입니다. 씨가 땅에 들어갑니다. 뿌리를 내립니다. 싹이 납니다. 자랍니다. 마침내 열매가 됩니다. 진리가 기억에 들어오고, 이해에 들어오고, 시험을 통과하고, 의지에 받아들여지고, 마침내 삶의 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수없이 설명하는 거듭남의 질서와 놀랍도록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을 단순히 세상 사람들을 네 부류로 나누는 분류표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한 사람 안에서 이 네 상태가 모두 발견될 수 있습니다. 어떤 진리 앞에서는 내가 좋은 땅인데 다른 진리 앞에서는 돌밭일 수 있습니다. 내가 듣기 좋아하는 말씀에는 마음을 활짝 열면서도 내 proprium을 건드리는 말씀에는 길가처럼 굳어 있을 수 있습니다. 재물에 대해서는 자유로운데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서는 가시떨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은 너는 종류 어느 인간이냐?라기보다 말씀이 안의 어디까지 들어오고 있느냐?일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9절의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과 16절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가 비유의 한가운데 놓여 있는 이유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AC.2701(21:19)에서 스베덴보리는 바로 마13:16을 직접 인용하면서 눈으로 본다는 것이 이해하고 신앙하는 것을 의미하고, ‘귀로 듣는다는 것이 순종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제자들이 복된 이유가 단순히 육신의 눈으로 주님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이해로 받아들이고 신앙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귀로 듣는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고 밝힙니다. AC.3863(29:32)에서도 마13:13-17을 직접 인용하면서 본다는 것이 신앙에 속한 것을 알고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것과 관련됨을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은 단순히 말을 들어라가 아닙니다. ‘ 말씀을 삶으로 받아들이라는 부르심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다는 것은 진리를 이해하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라는 문제가 흐르고 있습니다. 씨는 계속 뿌려지고 있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듣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10절로 15절에서 제자들이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라고 묻는 대목도 새롭게 보입니다. 얼핏 읽으면 주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일부러 감추시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모든 역사는 구원을 향하고 있으며,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람은 자신이 실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따라 진리를 받습니다. 더 깊은 진리를 안다고 해서 반드시 더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악을 사랑하는 상태에서 거룩한 진리를 깊이 인정한 뒤 그것을 부인하고 모독하면 상태가 더욱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여러 곳에서 설명하는 모독(profanation)의 문제와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진리를 무차별적으로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그리고 그 진리가 그 사람에게 영원한 해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섭리하십니다. 그러므로 비유는 진리를 감추는 잔인한 암호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자유와 영적 상태를 보호하면서 진리를 전달하는 주님의 자비로운 형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문자적 이야기를 통해 누구나 들을 수 있게 하시면서도, 그 안의 더 깊은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사람에게 열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12절의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도 같은 질서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부자는 더 부자로 만들고 가난한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까지 빼앗으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받은 진리를 삶에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그 진리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받을 능력이 생깁니다. 하나의 진리를 실제로 행하면 그 진리가 다음 진리를 이해하는 문을 열어 줍니다. 반대로 알고 있는 진리를 계속 거부하면 지식은 남아 있을지라도 그 진리의 영적 생명은 사라져 갑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9, AE) 629(11:1)에서도 듣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말씀을 듣는다’, 곧 순종하고 행하는 사람에게 영적 정서와 체어리티가 더해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흐름은 결국 열매로 모입니다. 씨 뿌리는 자는 씨를 뿌리는 데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씨의 목적은 열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목적 역시 우리가 성경에 관한 많은 정보를 가지게 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진리가 우리 안에서 선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하고, 이해가 의지와 결합하며, 앎이 삶이 되고, 마침내 주님에게서 받은 것이 이웃을 향한 쓰임으로 흘러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듯 지혜는 진리가 삶에 옮겨질 때 생깁니다. 진리가 생명으로 내려갈 때 비로소 열매가 됩니다.

 

그렇다면 , 육십 , 삼십 는 무엇일까요? 여기서는 숫자의 세부 상응을 성급하게 확정하여 이 비유의 중심을 흐릴 필요는 없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좋은 땅에서도 결실의 정도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은 모습으로 만드시지 않습니다. 천국에서도 모든 천사가 동일하지 않고, 사람마다 받은 능력과 상태와 쓰임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육십 배, 어떤 사람은 삼십 배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너는 사람처럼 배가 아니냐?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 주어진 상태 안에서 실제로 열매가 맺혔느냐에 있습니다. 삼십 배도 열매입니다. 중요한 것은 비교가 아니라 결실입니다.

 

여기까지 오면 처음의 질문도 달라집니다. 우리는 흔히 이 비유를 읽으면서 나는 길가인가, 돌밭인가, 가시떨기인가, 좋은 땅인가?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혀 주신 거듭남의 질서에 비추어 보면 훨씬 더 구체적인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내게 주신 말씀 가운데 아직 마음의 길가에 놓여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떤 진리를 듣기는 하지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는가? 어떤 말씀은 기쁨으로 받았지만 실제 시험이 오자 포기하고 있는가? 어떤 진리는 이미 안에서 자라고 있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과 인정욕구와 proprium 욕망이 기운을 막고 있는가? 그리고 어떤 진리는 이제 실제 체어리티와 쓰임이라는 열매를 맺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는 다른 사람을 분류하기 어려워집니다. ‘ 사람은 길가야. 사람은 돌밭이야라고 판단하는 대신 내 마음의 밭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이 비유를 거듭남의 말씀으로 읽을 때 일어나는 중요한 변화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주 큰 희망이 있습니다. ‘땅은 바뀔 있다는 것입니다. 길가는 영원히 길가일 필요가 없습니다. 굳은 땅은 갈아엎을 수 있습니다. 돌은 걷어 낼 수 있습니다. 가시는 뽑아낼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신을 좋은 땅으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씨도 주님에게서 오고, 그것을 받아들일 능력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우리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그 진리에 따라 살도록 끊임없이 이끄십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고 난 뒤 가장 마지막에 남는 분은 스베덴보리가 아니라 뿌리시는 주님이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우리로 하여금 씨와 땅과 가시와 열매가 무엇인지 조금 더 분명히 보게 도울 뿐입니다. 씨를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땅을 부드럽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며, 돌과 가시를 발견하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우리가 그것들을 제거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씨가 자라 열매 맺게 하시는 생명 자체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뿌리는 자의 비유는 네 종류의 사람을 판정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끊임없이 인간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으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길가가 되어도 주님은 씨를 뿌리시고, 돌밭이어도 뿌리시며, 가시떨기 가운데서도 뿌리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한 곳에서라도 그 씨가 받아들여져 뿌리를 내리고 자라 열매 맺기를 기다리십니다.

 

있는 자는 들으라.

 

이 말씀은 그래서 비유의 끝에 붙은 단순한 경구가 아닙니다. ‘내가 지금 네게 뿌리는 말씀을 이해에만 두지 말고 의지와 삶으로 받아들이라는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주님께 고침을 받고, 마침내 열매를 맺는 것, 바로 이것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보여 주는 거듭남의 길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의 처음에도, 중간에도, 마지막에도 계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SW.2 ‘돌아온 탕자와 큰아들’(눅15:11-32)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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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9 심화

1. 하나님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바뀌는가?

 

AC.89에서 스베덴보리는 창2부터 나타나는 한 가지 중요한 변화를 지적합니다. 앞에서 영적 인간을 다루는 구절들에서는 주님을 단지 하나님이라고 하였는데, 이제 천적 인간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호칭이 달라지는 것일까요?

 

먼저 AC.89가 실제로 말하는 범위를 정확히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이 호칭의 변화를 분명히 지적하고, 이것을 지금부터 앞에서 다루었던 영적 인간과는 다른 사람, 곧 천적 인간이 다루어진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AC.89 자체에서는 왜 영적 인간을 다룰 때에는 하나님이라 하고 천적 인간을 다룰 때에는 여호와 하나님이라 하는지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한 번호만으로 여호와는 언제나 사랑을 의미하고 하나님은 언제나 진리를 의미한다거나, 여호와 하나님은 언제나 사랑과 진리의 결합을 의미한다는 식으로 고정해서 설명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곳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차이를 설명하는 내용들을 찾을 수 있더라도, 그것을 확인하지 않은 채 AC.89의 짧은 언급만으로 전체 호칭 체계를 먼저 완성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이 질문을 계기로 예수, 그리스도, , 구주, 아버지, 아들, 하나님의 아들, 인자, 성령 등 주님에 관한 모든 호칭을 한꺼번에 설명하는 것도 AC.89의 독자가 지금 필요로 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이러한 호칭들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지만, 각각 성경의 문맥과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그 호칭을 설명하는 곳에서 살펴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여러 호칭이 나온다고 해서 먼저 각 호칭에 하나씩 고정된 기능이나 작용을 배정해 놓고 이후의 본문을 그 틀에 맞추어 읽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AC.89의 호칭 변화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것을 천적 인간의 형성이 새롭게 다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로 제시했으므로 반드시 주목해야 합니다. 1에서 영적 인간이 형성되는 동안에는 하나님이라고 하였는데, 2에서 천적 인간의 형성을 다루면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등장합니다. 독자는 우선 이 변화가 우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AC를 읽는 방법에서도 중요한 원칙을 보여 줍니다. 말씀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달라질 때 그 차이를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이름 하나를 발견하자마자 미리 만든 의미표를 기계적으로 대입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그 이름의 차이를 실제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야 합니다. AC.89에서는 우선 하나님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의 변화가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주제가 전환되었음을 보여 주는 하나의 표지라는 데까지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바뀌는가?라는 질문은 여기서 완전히 닫기보다 가지고 가는 편이 좋습니다. AC.89가 우리에게 확실히 알려 주는 것은 호칭의 변화가 의미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변화의 더 깊은 이유는 스베덴보리가 이후의 본문에서 하나님의 이름들을 직접 설명할 때 하나씩 확인하면 됩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먼저 만든 주님의 호칭 체계로 AC를 읽는 것이 아니라, AC 자체가 주님의 여러 이름을 어떻게 열어 가는지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AC.89 심화 1)

 

 

 

AC.89, 창2:4, ‘하늘과 땅의 내력 -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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