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오히려 궁금한 것은 목사님께서 지금 바울 서신을 멀리하게 된 이유가 말씀이 아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수십 년 동안 너무 많이 들어서 더 이상 영혼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인지입니다.’ (SC.92)

 

... 생각해 보니, 제가 사도들의 편지들, 특히 바울 서신을 가까이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첫째, 스베덴보리의 참된 기독교에 나오는, 영계에서 만나본 바울의 모습 때문이고, 둘째, 그의 서신들이 나름 또 하나의 체계를 이뤘기 때문에, 거기에 발 담그는 순간, 모든 것이 헝클어지고, 뒤죽박죽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 말씀을 들으니, 이것은 단순히 ‘말씀이 아니기 때문에 바울 서신을 읽지 않는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목사님 안에서는 지난 8, 9년 동안 스베덴보리를 통해 새롭게 형성된 거대한 신학적 질서와, 그 이전 수십 년 동안 익숙했던 개신교적 신학 체계가 만나는 지점에서 생기는 매우 현실적인 고민으로 보입니다.

 

먼저 첫 번째 이유인 바울 개인에 관한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 여러 인물들을 만났고, 그에 대한 기록도 남겼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 가운데 바울에 대한 언급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본 바울의 상태와,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 역사 가운데 이루신 섭리는 반드시 동일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성경을 보아도 다윗의 개인적 약점과 시편의 영감은 같은 문제가 아니며, 베드로의 실수와 사도적 사명도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본 바울의 모습만으로 바울 서신 전체를 평가하기에는 조금 더 신중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두 번째 이유가 훨씬 더 핵심적으로 들립니다. 목사님은 ‘그의 서신들이 나름 또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발 담그는 순간 모든 것이 헝클어지고 뒤죽박죽된다’고 하셨는데, 저는 바로 이 부분이 현재 목사님의 실제 심정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님은 지금 단순히 책 몇 권을 읽고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AC 번역과 해설, 그리고 심화를 수년 동안 계속해 오시면서 인간, 천국, 지옥, 자유, 체어리티, 신앙, 거듭남, 상응에 관한 하나의 유기적 세계관을 이미 마음속에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바울 서신을 전통적인 개신교 방식으로 읽기 시작하면 곧바로 ‘오직 믿음’, ‘행위가 아닌 은혜’, ‘율법이 아닌 신앙’ 같은 익숙한 문장들이 따라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 본문 자체보다도 그 본문을 둘러싼 수백 년의 해석 전통이 함께 떠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목사님은 바울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을 통해 들어오는 특정한 신학 체계를 경계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바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바울을 해석하는 오래된 프레임이 문제인 것입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바울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러 저작에서 바울의 말을 인용합니다. 다만 그는 바울을 중심에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주님의 말씀, 곧 창세기와 예언서와 복음서와 계시록을 중심에 두고, 그 빛 아래에서 바울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구절을 읽어도 개신교 신학자와 스베덴보리가 보는 초점은 달라집니다. 개신교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에 주목할 때, 스베덴보리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신앙’에 주목합니다. 개신교가 ‘행위가 아니다’에 무게를 둘 때, 스베덴보리는 ‘새 사람을 입으라’, ‘선을 행하라’, ‘육체를 죽이라’ 같은 구절들을 함께 봅니다.

 

따라서 지금 목사님의 상태는 건강하지 못하다기보다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보입니다. 오랫동안 한 체계 안에 있다가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를 발견한 사람은 누구나 일정 기간 이전 체계로부터 거리를 두게 됩니다. 특히 목사님처럼 수십 년 동안 바울 중심의 설교와 신학을 접해 오신 분이라면 더욱 그럴 수 있습니다.

 

다만 장기적으로는 ‘바울을 닫아 두는 것’보다는 ‘말씀의 빛 아래에서 바울을 다시 읽는 것’이 더 안정적인 길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진리와 충돌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히신 내용이 참이라면, 바울 안에 있는 참된 진리 역시 결국 그와 조화를 이룰 것입니다. 충돌하는 것은 바울 자신이 아니라, 바울을 둘러싸고 형성된 특정한 신학 체계일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그래서 저는 스베덴보리가 목사님께 이렇게 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을 중심에 두십시오. 복음서와 창세기와 계시록을 가장 가까이하십시오. 그러나 바울을 두려워하지는 마십시오. 다만 바울을 주님보다 앞에 세우지만 마십시오.’ 지금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거리감은 바울에 대한 거부감이라기보다, 과거의 신학 체계가 다시 자신 안으로 들어와 질서를 흐릴 수 있다는 조심스러움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현재 목사님의 여정 안에서는, 그 조심스러움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또 존중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SC.91, ‘성령이 내주하시는데 어떻게 악한 영이?’

‘모든 사람에게는 천사 둘, 악한 영 둘이 와 있다’는 말에 ‘구원받아 성령이 내주하시는데 어떻게 악한 영이 같이 있을 수 있나?’ 하시는 경우 그 질문은 사실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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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The Word)에 대해 알고 나서는 이제는 바울 서신을 비롯, 그 안에 아르카나(arcana, inner sense)가 들어있지 않다는 신구약 성경들은 잘 읽지도, 그걸 가지고 주일설교 본문을 삼지도, 더 나아가 가급적 인용도 안 하고 있습니다. 저의 이런 태도가 건강한 건가요? 스베덴보리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목사님, 제 생각에는 이것은 ‘건강하다’ 혹은 ‘건강하지 않다’라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스베덴보리를 읽는 사람들이 거의 반드시 한 번은 통과하게 되는 단계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말씀(The Word)에 대한 가르침을 처음 깊이 접하면 충격이 있습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시편, 선지서, 복음서, 계시록 안에는 천국과 주님에 관한 연속적인 속뜻이 들어 있는데, 다른 성경책들에는 그런 의미의 아르카나가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굳이 바울 서신을 읽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생깁니다. 사실 목사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서양의 스베덴보리 독자들 가운데서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할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울 서신이 ‘말씀’이 아니라고는 했지만, ‘쓸모없다’거나 ‘권위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울을 사도 중 한 사람으로 존중했고, 바울의 글 안에도 교회를 위한 유익한 가르침이 많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그것이 창세기나 복음서처럼 천국과 지상을 연결하는 내적 구조를 가진 ‘말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스베덴보리에게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은 주님께서 직접 지으신 성전과 같고, 바울 서신은 그 성전을 설명하고 적용하는 훌륭한 신학서와 같습니다. 둘은 중요성이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신학서를 버리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목사님의 경우를 생각하면, 지금 약간 반대 방향의 위험도 있어 보입니다.

 

과거 개신교 안에서는 너무 많은 설교가 바울 중심이었습니다. 창세기보다 로마서를 더 읽고, 복음서보다 갈라디아서를 더 읽고, 주님의 말씀보다 교리 체계를 더 읽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를 만나면 자연스럽게 그 반작용으로 ‘이제는 복음서와 창세기만 보겠다’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 자신은 언제나 균형을 유지했습니다.

 

그는 모든 진리를 결국 주님께로부터 보았고, 모든 성경을 주님의 섭리 아래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단지 중심과 주변을 구분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말씀을 중심에 두어라. 그러나 다른 성경도 경시하지 말라.’

 

복음서를 태양으로 삼아라. 그러나 다른 책들을 어둠으로 취급하지 말라.’

 

내적 의미가 없는 책이라 하여 주님께서 그것을 헛되이 허락하신 것은 아니다.’

 

특히 주일설교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목사님께서 수년 동안 AC를 번역하고 해설하시면서 이미 체험하셨듯이, 창세기 한 절 속에는 바울 서신 한 장보다 훨씬 깊은 영적 세계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 중심 설교로 이동하신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어쩌면 스베덴보리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앞으로 ‘바울은 거의 인용하지 않는다’, ‘바울은 별로 읽지 않는다’, ‘바울은 중요하지 않다’는 방향으로 굳어지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편향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가 가장 경계한 것 중 하나가 ‘부분 진리를 전체 진리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히려 궁금한 것은 목사님께서 지금 바울 서신을 멀리하게 된 이유가 ‘말씀이 아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수십 년 동안 너무 많이 들어서 더 이상 영혼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인지입니다.

 

사실 후자의 비중도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목사님은 이미 수십 년 동안 바울 중심 설교를 들었고 하셨습니다. 반면 AC와 ‘말씀’의 속뜻은 이제야 발견한 거대한 대륙입니다. 그러니 영혼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끌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현재의 상태 자체는 건강하지 않다고 보기보다, 오히려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보입니다.

 

다만 장기적으로는 ‘말씀을 중심에 두되, 나머지 성경도 주님의 섭리 아래 있는 귀한 증언으로 존중하는 태도’가 가장 스베덴보리다운 균형일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스베덴보리가 목사님의 강단에 직접 올라온다면 아마 바울을 거의 설교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바울을 폄하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는 아마 창세기와 복음서와 계시록을 중심으로 설교하면서도, 필요한 순간에는 바울을 인용하여 ‘보십시오. 바울도 같은 진리를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라고 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아 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목사님이 ‘말씀’을 중심에 두게 된 것은 건강한 변화일 수 있습니다. 다만 ‘중심에 둔다’와 ‘나머지를 멀리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전자를 권했을 것이고, 후자에 대해서는 아마 조금 더 넓은 시야를 권했을 것 같습니다.

 

 

 

SC.93, ‘바울 서신을 가까이하지 않으려는 이유’

‘제가 오히려 궁금한 것은 목사님께서 지금 바울 서신을 멀리하게 된 이유가 ‘말씀이 아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수십 년 동안 너무 많이 들어서 더 이상 영혼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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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91, ‘성령이 내주하시는데 어떻게 악한 영이?’

‘모든 사람에게는 천사 둘, 악한 영 둘이 와 있다’는 말에 ‘구원받아 성령이 내주하시는데 어떻게 악한 영이 같이 있을 수 있나?’ 하시는 경우 그 질문은 사실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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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0.심화

 

2. ‘태고교회의 첫 번째, 두 번째 상태

 

여기서는 태고교회의 세 번째 상태가 다루어지는데, The third state of the most ancient church is treated of, (AC.190)

 

 

죄송하지만, 여기서 앞에서 다룬 태고교회의 첫 번째, 두 번째 상태에 대한 설명 좀 다시 부탁드립니다.

 

 

AC.190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태고교회의 세 번째 상태’를 이해하려면 먼저 첫 번째 상태와 두 번째 상태를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2장은 사실상 태고교회의 형성과 변화를 단계적으로 보여 주는 장이며, 창세기 3장은 그 마지막 단계와 전환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190 세 번째 상태’는 갑자기 등장한 개념이 아니라 창2 전체의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첫 번째 상태는 창2:7의 상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에 해당합니다. 이 상태의 핵심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는 생명이 없고,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아직 완전한 천적 인간은 아니지만, 자신의 proprium, 곧 자신의 own이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이 상태의 인간은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존재로 압니다.

 

두 번째 상태는 에덴동산의 상태입니다. 2:8 이하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제 인간은 천적 인간이 되었으며,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직접 지각합니다. 오늘날 우리처럼 진리를 배우고 연구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즉시 압니다. 스베덴보리가 반복하여 말하듯, 그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알았고, 사랑으로부터 신앙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태고교회의 황금기입니다. 에덴동산, 생명나무, 강들, 아름다운 나무들은 모두 이 풍성한 천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창2 후반부에 이르면 한 가지 경고가 주어집니다.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먹지 말라’, ‘만지지도 말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이것은 아직 타락이 시작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앞으로 다가올 위험이 이미 시야 안에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own을 사랑하기 시작할 가능성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창3:1에서 시작되는 것이 바로 세 번째 상태입니다. AC.190은 이것을 매우 간결하게 설명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own을 몹시 원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것을 사랑하게 되었다.’ 여기서 자신의 own은 재산이나 소유물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나온 생각, 판단, 의지, 지혜를 뜻합니다.

 

첫 번째 상태에서는 나는 주님으로부터 산다’였습니다. 두 번째 상태에서는 나는 주님 안에서 기쁘게 산다’였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상태에서는 그래도 내가 직접 확인해 보고 싶다’, ‘내가 스스로 판단해 보겠다’가 시작됩니다. 아직 선악과를 먹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타락은 현실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중심이 아주 미세하게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AC.191부터 뱀이 등장합니다. 뱀은 감각적인 부분을 뜻합니다. 이제 인간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대신, 감각과 이성으로 신앙을 검토하려고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결국 AC.204 이하에서 보듯, ‘하나님과 같이 되어 스스로를 인도할 수 있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의 세 상태를 가장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첫 번째 상태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상태입니다. 두 번째 상태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에덴의 상태입니다. 세 번째 상태는 자신의 own을 사랑하기 시작하며, 신앙을 자기 판단으로 검토하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AC.190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은, 스베덴보리가 이 세 번째 상태를 아직 악한 상태’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직 그들은 선악과를 먹지 않았습니다. 아직 눈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아직 숨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사랑의 중심이 주님에게서 자기 자신에게로 조금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창3은 죄를 지은 이야기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3은 먼저 사랑의 중심이 이동하기 시작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이것이 AC.190에서 말하는 태고교회의 세 번째 상태의 핵심입니다.

 

 

 

AC.190, 창3:1-13, ‘창3:1-13 본문, 개요’(AC.190-193)

창3:1-13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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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0, 심화 1, ‘자기 자신의 것’을 ‘자신의 own’으로

AC.190.심화 1. ‘자기 자신의 것’을 ‘자신의 own’으로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표현을 ‘자신의 own’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AC.190) 네, 그렇게 이해하셔도 됩니다. 오히려 AC를 처음 읽을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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