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d said unto him, Where art thou? And he said, I heard thy voice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and I hid myself. (3:9-10)

 

AC.227

 

지각(perception),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 그리고 양심(conscience)의 기원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에 대해 전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얼마간 설명하고자 합니다. 사람은 주님에 의해 영들(spirits)과 천사들(angels)을 통하여 다스려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진리입니다. 악한 영들(evil spirits)이 사람을 지배하기 시작하면, 천사들은 악과 거짓을 물리치기 위해 애씁니다. 그러므로 그 결과로 하나의 싸움(combat)이 일어납니다. 사람이 지각(perception),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 그리고 양심(conscience)을 통하여 느끼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싸움입니다. 또한 시험(temptations)을 통해서도 같은 싸움을 경험합니다. 사람이 만일 영들과 천사들에 관한 이야기를 전혀 믿지 않을 만큼 육체적인 것(corporeal things)에 깊이 빠져 있지 않았다면, 그는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자신과 함께 영들과 천사들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적인 것에만 몰두한 사람들은 이러한 싸움을 수백 번 경험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단지 상상이나 정신 이상의 결과라고 말할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싸움을 수천 번, 수만 번 생생하게 느끼는 것이 허락되었으며, 그것도 여러 해 동안 거의 끊임없이 그러하였습니다. 또한 그 싸움을 일으킨 자들이 누구이며, 어떤 존재들이며, 어디에 있었는지, 언제 왔고 언제 떠났는지를 알 수 있었고, 그들과 직접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As it is desirable that the origin of perception, internal dictate, and conscience, should be known, and as at the present day it is altogether unknown, I may relate something on the subject. It is a great truth that man is governed by the Lord by means of spirits and angels. When evil spirits begin to rule, the angels labor to avert evils and falsities, and hence arises a combat. It is this combat of which the man is rendered sensible by perception, dictate, and conscience. By these, and also by temptations, a man might clearly see that spirits and angels are with him, were he not so deeply immersed in corporeal things as to believe nothing that is said about spirits and angels. Such persons, even if they were to feel these combats hundreds of times, would still say that they are imaginary, and the effect of a disordered mind. I have been permitted to feel such combats, and to have a vivid sense of them, thousands and thousands of times, and this almost constantly for several years, as well as to know who, what, and where they were that caused them, when they came, and when they departed; and I have conversed with them.

 

 

해설

 

AC.227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과 영계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글입니다. 지금까지 그는 퍼셉션(perception),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 양심(conscience)에 대해 설명해 왔는데, 이제는 그것들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밝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은 결코 혼자 생각하거나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언제나 영들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으며, 주님께서는 천사들과 영들을 통하여 사람을 다스리십니다. 물론 최종적으로 다스리시는 분은 주님 한 분이시며, 천사들과 영들은 그 섭리의 도구일 뿐입니다.

 

사람이 선을 향하려고 할 때에는 천사들이 함께하고, 악으로 기울려고 할 때에는 악한 영들이 영향을 미칩니다. 이 둘 사이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영적 전투(combat)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싸움, 이 전투는 대부분 육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경험됩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perception),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 양심(conscience)이 모두 이 영적 전투가 인간 의식 속에 나타나는 방식이라고 설명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퍼셉션으로, 거듭나는 사람에게는 내적 딕테이트로,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는 양심으로 경험되었습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근원은 같습니다. 모두 주님께서 천사들을 통해 사람을 선으로 이끄시는 역사입니다.

 

또한 시험(temptations)의 본질도 여기서 설명됩니다. 시험은 단순히 어려운 환경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영들의 영향과 천사들의 보호가 사람 안에서 충돌하는 영적 전투입니다. 그래서 시험을 겪는 사람은 마음속에서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의 심한 갈등을 경험하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현대인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평가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영들과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는 가장 큰 이유를 ‘육체적인 것(corporeal things)에 지나치게 몰두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이러한 내적 전투를 경험하면서도 그것을 단지 심리 현상이나 신경 작용으로만 설명하려 합니다.

 

물론 스베덴보리는 모든 심리 현상을 곧바로 영들의 직접적인 작용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핵심은 인간의 내면에는 자연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적 차원이 있으며, 주님께서는 그 차원을 통하여 끊임없이 인간을 선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특별한 사명을 언급합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거의 끊임없이 이러한 영적 전투를 직접 경험하였으며, 그 원인이 되는 영들과 천사들을 보고 그들과 대화하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특별함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후 저작들에서 영계의 구조와 인간의 영적 상태를 상세히 설명할 수 있는 근거를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결국 AC.227은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영적 갈등의 정체를 밝혀 줍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고자 할 때 느끼는 내적 격려, 악을 피하려 할 때 느끼는 갈등, 시험 가운데 경험하는 치열한 내적 전투는 단순한 심리 현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천사들을 통해 우리를 보호하시고, 악한 영들의 영향으로부터 지키시는 영적 역사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삶은 눈에 보이는 세계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와도 끊임없이 이어져 있으며, 그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의 사랑과 섭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AC.226, 창3:9-10,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AC.226-228)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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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d said unto him, Where art thou? And he said, I heard thy voice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and I hid myself. (3:9-10)

 

AC.226

 

부르시며(crying),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the voice in the garden),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being afraid because they were naked), 그리고 숨었나이다(hiding themselves)의 의미는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습니다. 말씀에서는 주님께서 이미 모든 걸 미리 알고 계심에도 불구, 사람에게 먼저 네가 어디 있느냐?’ 또는 네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시는 일이 흔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물으시는 이유는 사람이 스스로 인정하고 고백하게(acknowledge and confess) 하기 위함입니다. The meaning of “crying,” of the “voice in the garden,” of their “being afraid because they were naked,” and of “hiding themselves” has been previously explained. It is common in the Word for man to be first asked where he is and what he is doing, although the Lord previously knew all things; but the reason for asking is that man may acknowledge and confess.

 

 

해설

 

AC.226은 창세기 39절의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의 의미를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이 질문은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의문을 던져 왔습니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정말 아담의 위치를 모르셔서 물으셨을까요? 스베덴보리는 그렇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아담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도, 왜 숨었는지도, 그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두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이 질문은 정보를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물으셨을까요?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인정하고 고백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말씀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주님은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시기 때문에, 사람에게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보게 하시고, 입으로 시인하도록 이끄십니다.

 

영적 변화는 강제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너는 지금 이런 상태다’라고 선언하시는 것만으로는 사람의 내면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상태를 직접 깨닫고, 그것을 인정하며, 주님 앞에 고백할 때 비로소 회개의 문이 열립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러한 질문이 자주 등장합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원하느냐?’, ‘네 믿음이 어디 있느냐?’와 같은 질문들은 모두 주님께서 모르셔서 묻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신이 자기 내면을 직면, 직시하도록 하시는 질문들입니다.

 

이 점에서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지리적 위치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영적 상태를 묻는 질문입니다. ‘너는 지금 어떤 사랑 가운데 있느냐?’, ‘너는 지금 나와 얼마나 가까우냐, 혹은 얼마나 멀어졌느냐?’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질문은 계속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책망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고, 주님께 다시 나아오도록 초대하시는 사랑의 질문입니다.

 

결국 AC.226은 주님의 질문에는 언제나 자비가 담겨 있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사람을 정죄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 말할 기회를 주십니다. 회개는 강요되지 않으며, 언제나 자유로운 인정과 고백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네가 어디 있느냐?’는 심판의 선언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을 다시 찾으시는 목자의 첫 번째 부르심인 것입니다.

 

 

 

AC.227, 창3:9-10, 지각(perception),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 양심(conscience) 및 시험(temptations)의 기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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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5, 창3:8, ‘동산 나무 사이’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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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n the air of the day; and the man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3:8)

 

AC.225

 

동산 나무 사이(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가 자연적 선(natural good)을 의미하며, 그 안에 얼마간의 지각(perception)이 있는데, 그것이 나무(tree)라고 불린다는 사실 역시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천적 인간(celestial man)이 거하던 동산(garden)으로부터 이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선과 진리는 동산(garden)이라고 불리는데, 다만 그것을 경작하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good)은 그 가장 안쪽(inmost)이 천적(celestial)이지 않으면 참된 선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천적인 것(celestial)으로부터, 또는 그것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지각(perception)이 옵니다. 이 가장 깊은 것, 곧 안쪽(inmost)이 여기서는 사이(midst)라고 불립니다. 말씀의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That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signifies natural good, in which there is some perception which is called a “tree,” is also evident from the “garden” in which the celestial man dwelt; for everything good and true is called a “garden,” with a difference according to the man who cultivates it. Good is not good unless its inmost is celestial, from which, or through which, from the Lord, comes perception. This inmost is here called the “midst,” as also elsewhere in the Word.

 

 

해설

 

AC.225는 창세기 38절의 ‘동산 나무 사이’라는 표현을 더욱 깊이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특별히 ‘사이(midst, 가운데)라는 말에 주목합니다. 말씀에서 ‘가운데’는 단순한 공간적 중심이 아니라 가장 깊은 것(inmost), 가장 본질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앞 절들에서 스베덴보리는 아담의 후손들이 타락했지만 아직 자연적 선(natural good)과 얼마간의 지각(perception)을 남겨 두고 있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동산 나무 사이’는 바로 그 남아 있는 자연적 선과 지각의 중심부를 가리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선은 그 가장 안쪽이 천적(celestial)이지 않으면 참된 선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입니다. 외적으로는 선해 보여도 그 가장 깊은 곳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완전한 의미의 선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친절을 베푼다고 하더라도, 그 동기가 칭찬받기 위함인지, 이익을 얻기 위함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인지에 따라 그 선의 질이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가장 깊은 동기, 가장 안쪽의 사랑을 ‘가운데(midst)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동산(garden)은 단순히 진리와 선의 집합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심으신 선과 진리가 살아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동산의 중심에는 언제나 천적(celestial), 곧 주님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이 구절은 퍼셉션(perception)의 근원도 설명합니다. 지각은 단순한 지식이나 추론 능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 사랑을 통하여 생겨나는 직접적인 영적 인식입니다. 그래서 태고교회 사람들은 진리를 논리적으로 증명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선을 사랑함으로써 진리를 곧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결국 AC.225에서 말하는 ‘동산 나무 사이’는 타락 이후에도 아직 남아 있던 자연적 선의 중심, 그리고 그 안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천적 요소와 지각의 흔적을 의미합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이미 많은 것을 잃었지만, 아직 그 중심이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자신의 상태를 부끄러워할 수도 있었으며, 숨을 수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모든 영적 생명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선의 진정한 가치는 외적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장 깊은 중심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연결되어 있을 때, 비로소 그 선은 살아 있는 선이 되며, 그로부터 참된 지각(perception)도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AC.226, 창3:9-10,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AC.226-228)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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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4, 창3:8, ‘숨은지라’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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