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창4:23)
AC.427
‘라멕’(Lamech)은앞에서와같이황폐를뜻합니다.그가‘자기아내들인아다와씰라에게말하기를,너희귀로내말을들으라’(saiduntohiswivesAdahandZillah, Withyourearsperceivemyspeech)고한것은고백을뜻합니다.이러한고백은교회가있는곳에서만이루어질수있는데,앞에서말했듯이그의‘아내들’(wives)은교회를나타냅니다. ‘내가한사람을죽여내게상처를입혔다’(Ihaveslainamantomywounding)는그가신앙을소멸시켰음을뜻합니다.‘사람’(man)은신앙을나타내기때문입니다.‘어린아이를죽여내게해를입혔다’(alittleonetomyhurt)는그가체어리티를소멸시켰음을뜻합니다. ‘상처’(wound)와‘타박상’(bruise)은더이상온전함이남아있지않음을뜻합니다.‘상처’는신앙이황폐해졌음을,‘해’(hurt)는체어리티가황폐해졌음을나타냅니다. By “Lamech” is signified vastation, as before; that he “saiduntohiswivesAdahandZillah,Withyourearsperceivemyspeech” signifies confession, which can only be made where there is a church, which, as has been said, is signified by his “wives.” “Ihaveslainamantomywounding” signifies that he had extinguished faith, for by a “man” is signified faith; “alittleonetomyhurt” signifies that he had extinguished charity. By a “wound” and a “bruise” is signified that there was no more soundness; by a “wound,” that faith was desolated; by a “hurt,” that charity was devastated.
해설
AC.427은 창4:23에 나오는 라멕의 말을 풀이합니다. 앞의 AC.421-426에서는 라멕의 아내들과 자녀들을 통해 새 교회의 내적·외적 요소, 그리고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다시 라멕 자신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이 앞에서와 같이 ‘황폐’를 나타낸다고 밝히며, 그의 말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에 관한 고백이라고 설명합니다.
라멕은 먼저 자기 아내들인 아다와 씰라에게 말을 듣도록 요청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을 ‘고백’으로 풀이합니다. 그가 아내들에게 말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아내들이 교회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고백이 교회가 있는 곳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고백은 단순히 어떤 사건을 이야기하는 행위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된 상태를 드러내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어 라멕은 자신이 ‘한사람’을 죽였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사람’이 신앙을 나타내므로, 사람을 죽였다는 말은 신앙을 소멸시켰다는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창4:23의 살인에 관한 표현을 문자적 사건의 차원에서만 읽지 않고, 교회 안에서 신앙이 소멸된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읽는 것입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라멕이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신앙을 소멸시켰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과정은 앞뒤의 황폐에 관한 설명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음을 뜻합니다. 여기서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다른 표현으로 구별됩니다.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의 말에 등장하는 두 죽음을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에 연결함으로써, 이 고백이 교회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 모두에 관한 것임을 밝힙니다.
이 구별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와도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창4장의 앞부분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 그리고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를 다루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라멕의 고백을 통해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된 상태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연결을 근거로 가인과 라멕의 상태가 모든 면에서 동일하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AC.427이 직접 밝히는 것은 라멕이 황폐를 나타내며, 그의 말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을 뜻한다는 사실입니다.
라멕은 이 두 죽음을 말하면서 자신에게 ‘상처’와 ‘해’가 생겼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상처’와 ‘타박상’이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음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상처는 신앙의 황폐를, 해는 체어리티의 황폐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들은 라멕이 입은 육체적 부상의 정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어 교회 안에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황폐’라는 말도 단순히 신앙생활이 잠시 약해지거나 체어리티를 충분히 실천하지 못한 상태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고 말하며,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읽고 자신의 일시적인 연약함을 곧바로 라멕의 황폐와 동일한 상태로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 번호는 라멕이 표상하는 교회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국 AC.427에서 라멕의 말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된 상태에 관한 고백입니다. 아다와 씰라는 교회를 나타내며, 그들에게 말을 듣도록 요청하는 것은 고백을 뜻합니다. ‘사람’을 죽였다는 말은 신앙의 소멸을,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체어리티의 소멸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상처와 해는 그 결과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교회의 황폐가 단순히 외적인 형식의 변화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의 생명에 관한 문제임을 살펴보게 됩니다. (AC.427해설)
AC.426에서 스베덴보리는 쇠가 자연적 진리를 뜻한다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진리에는 아무도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쇠가 ‘산산이부순다’, ‘짓부순다’는 표현과 함께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는 쇠의 강함을 설명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계시록의 ‘쇠지팡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지 살펴봅니다. 그 결론은 분명합니다. ‘쇠지팡이’는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입니다.
먼저 계2:26-27에서는 이기는 자에게 민족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고 말씀합니다. 이어 그가 쇠 지팡이로 민족들을 목양하며, 토기장이의 그릇처럼 그들을 깨뜨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쇠 지팡이는 강한 권세와 심판의 도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쇠가 진리를 나타내며, 진리에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쇠 지팡이의 속뜻을 이해하려면 먼저 쇠가 나타내는 진리의 의미를 살펴야 합니다.
계12:5에서도 쇠 지팡이가 등장합니다. 여자가 낳은 남자아이는 장차 쇠 지팡이로 모든 민족을 목양할 자라고 말합니다. 계2장에서는 이기는 자에게 쇠 지팡이가 주어지고, 계12장에서는 남자아이가 쇠 지팡이로 목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구절을 나란히 인용하여 쇠 지팡이가 진리의 힘과 관련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여자가 누구를 뜻하는지, 남자아이가 무엇을 나타내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의미를 확정하려면 계시록의 해당 구절에 관한 별도의 해설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쇠 지팡이가 단순히 강한 권세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의 진리라는 사실은 어디에서 분명해집니까? 스베덴보리는 계19:11, 13, 15를 인용하여 이를 설명합니다. 이 말씀에서 백마를 타신 분은 ‘충신과진실’이라 불리며, 공의로 심판하고 싸우십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말씀’이라고 명시됩니다. 그분의 입에서는 예리한 검이 나오고, 그분은 쇠 지팡이로 민족들을 목양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문맥을 통해 쇠 지팡이가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임을 밝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말씀’이라는 이름과 ‘쇠지팡이’가 같은 분에 관한 묘사 안에 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쇠 지팡이의 의미를 금속의 단단함만으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쇠가 진리를 나타낸다는 앞선 설명과, 쇠 지팡이로 목양하시는 분의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함께 살핍니다. 그러므로 쇠 지팡이는 단순한 물리적 무기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를 나타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가 인용한 영어 본문은 ‘다스린다’는 표현을 ‘목양한다’(pasture)고 옮깁니다. 이는 쇠 지팡이의 의미를 생각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입니다. 말씀의 진리가 지닌 힘은 단순히 무언가를 부수는 힘으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계시록의 본문은 쇠 지팡이로 민족들을 목양한다고도 말합니다. 다만 AC.426은 그 목양이 구체적으로 어떤 영적 과정을 뜻하는지까지 자세히 풀이하지 않으므로, 여기서는 주님의 말씀의 진리가 다스림과 목양의 이미지로 표현된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진리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에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 힘을 인간의 주장이나 논쟁의 승리와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계19장에서 쇠 지팡이로 목양하시는 분의 이름은 ‘하나님의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리를 말한다고 주장한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의 말에 그러한 힘이 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자신이 붙들고 있는 것이 실제로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인지 살펴야 합니다.
결국 계시록의 쇠 지팡이는 AC.426의 논지를 완성합니다. 쇠는 자연적 진리를 뜻하고, 진리에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계19장은 그 쇠 지팡이가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진리의 힘을 인간 자신의 강함에서 찾기보다,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에서 찾아야 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AC.426심화1)
이말씀과같은장의앞뒤에나오는내용에서천적·영적부요함을뜻한다는사실이매우분명하게드러납니다.또한각각의표현은물론언급된이름들까지도저마다고유한의미를지닙니다.주님의말씀은단순히문자적인말이아니라영적인말씀이기때문입니다. From these words, as well as from what is said both previously and subsequently in the same chapter, it is very evident that celestial and spiritual riches are signified; and that every particular expression, and even the names mentioned, have some specific signification, for the Word of the Lord is spiritual, and not verbal.
여기서‘쇠’(iron)와‘놋’(brass)은자연적진리와선을뜻합니다.그것들이‘북방’(north)에서왔다고한것은감각적이고자연적인것을나타냅니다.자연적인것은영적·천적인것에비하면짙은어둠이빛에비하는것과같기때문입니다.곧‘북방’이‘남방’(south)에비하는것과같습니다.또는그늘이빛에비하는것과도같은데,여기서는‘어머니’(mother)인‘씰라’(Zillah)도이러한그늘을나타냅니다.‘재산’(substance)과‘보물’(treasures)이천적·영적부요함을뜻한다는사실도매우분명합니다. where “iron” and “brass” signify natural truth and good; that it came from the “north” signifies what is sensuous and natural; for what is natural, relatively to what is spiritual and celestial, is like thick darkness (that is, the “north”)relatively to light or the “south”; or like shade, which is also signified here by “Zillah,” who is the “mother.” That the “substance” and “treasures” are celestial and spiritual riches is also very evident.
여기서도‘쇠’가진리를뜻한다는사실이분명하게드러납니다.진리에는아무도저항할수없는힘이있으므로,힘은진리에속한다고말합니다.이러한이유로진리,곧신앙의진리를뜻하는쇠에관해‘산산이부순다’(breaksinpieces),‘짓부순다’(crushes)고말합니다.다니엘서에서도그러하며(단2:34, 40),계시록에서도다음과같이말합니다. where also it is evident that “iron” signifies truth. Strength is attributed to truth, because it cannot be resisted, and for this reason it is said of iron—by which is signified truth, or the truth of faith—that it “breaksinpieces” and “crushes”; asin Daniel (2:34, 40), and in John:
AC.426은 앞의 AC.425에서 밝힌 금속의 속뜻 가운데 특별히 ‘쇠’에 집중합니다. 앞 번호에서 놋이 자연적 선을 뜻한다는 사실을 여러 말씀으로 확인했다면, 이번 번호에서는 쇠가 자연적 진리를 뜻한다는 사실을 살펴봅니다. 스베덴보리는 에스겔과 예레미야, 다니엘과 계시록을 차례로 인용하면서 쇠가 나타내는 진리의 성격을 설명합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자연적 진리와 영적·천적 부요함의 관계,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차이, 그리고 진리가 지닌 힘입니다.
먼저 겔27:12, 19는 두로의 무역에 관한 말씀입니다. 다시스는 은과 쇠와 주석과 납을 가져오고, 단과 야완과 므우살은 빛나는 쇠와 향료를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뿐 아니라 같은 장의 앞뒤 내용을 함께 살펴보면, 이 모든 것이 천적·영적 부요함에 관한 말씀임을 알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앞의 AC.425에서도 두로는 영적·천적 부요함을 지닌 사람들을 나타냈습니다. 따라서 두로의 무역품 가운데 등장하는 쇠 역시 단순한 금속을 넘어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주석과 납, 향료, 각각의 지명에 대한 구체적인 속뜻까지 밝히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각각의 표현뿐 아니라 이름들까지도 저마다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고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말씀은영적이며,단순히문자적인말이아니기때문’입니다. 이는 말씀의 문자적 기록이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두로의 무역에 관한 기록은 문자적으로도 읽을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안에 천적·영적 부요함에 관한 속뜻이 담겨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을 때 특정한 단어나 이름 하나만 떼어 내어 의미를 정하기보다, 앞뒤 문맥과 함께 살피는 일이 중요합니다.
렘15:12-13에서는 쇠와 놋이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쇠가 자연적 진리를, 놋이 자연적 선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북방의쇠’라는 표현에 주목하여, 북방이 감각적이고 자연적인 것을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자연적인 것은 영적·천적인 것에 비하면 짙은 어둠이 빛에 비하는 것과 같으며, 북방이 남방에 비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둠은 자연적 진리가 곧 거짓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과 영적·천적인 것의 관계를 밝음의 차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설명은 창4장의 씰라와도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머니’인 씰라가 그늘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앞의 AC.421에서 씰라는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씰라의 의미를 북방과 그늘의 이미지에 연결하여, 자연적인 것이 영적·천적인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외적인 차원에 있음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씰라가 그늘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근거로 씰라 자체가 악이나 거짓을 뜻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어지는 ‘재산’과 ‘보물’은 천적·영적 부요함을 뜻합니다. 예레미야의 문자적 말씀에서는 죄로 인해 재산과 보물이 노략물로 넘어간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에서 재산과 보물이 단순한 물질적 소유가 아니라 천적·영적 부요함을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그 부요함이 어떤 과정을 거쳐 상실되는지까지 상세히 풀이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쇠와 놋, 북방, 재산과 보물의 의미를 함께 살피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겔4:3에서는 에스겔이 쇠판을 가져다가 자신과 성읍 사이에 쇠벽으로 세우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에서도 쇠가 진리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진리에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으므로 힘은 진리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이 설명은 이번 번호의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앞에서는 쇠가 어떤 차원의 진리를 나타내는지 살펴보았다면, 이제는 왜 쇠가 진리를 나타내는지, 특히 진리의 힘이 말씀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단2:34, 40을 언급합니다. 다니엘의 신상 환상에서 쇠는 부수고 깨뜨리는 힘을 지닌 것으로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표현을 진리의 힘과 연결합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는 다니엘의 네 나라가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 손대지 않은 돌과 쇠와 진흙이 섞인 발이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인용의 직접적인 목적은 다니엘의 환상 전체를 풀이하는 데 있지 않고, 쇠에 ‘부수고깨뜨리는’ 힘이 부여되는 이유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계2:26-27과 계12:5에서는 ‘쇠지팡이’가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들을 진리가 지닌 힘을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인용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가 인용한 영어 본문이 ‘다스린다’는 표현을 ‘목양한다’(pasture)고 옮긴다는 사실입니다. 쇠 지팡이는 문자적으로 강한 통치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키지만, 스베덴보리가 이 번호에서 밝히는 속뜻은 진리의 힘에 관한 것입니다. 다만 ‘토기장이의그릇’이나 계12장의 ‘남자아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이번 번호에서 따로 풀이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계19:11, 13, 15는 앞의 철장 구절들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백마를 타신 분은 ‘충신과진실’이라 불리고,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말씀’이라고 명시됩니다. 그분의 입에서는 예리한 검이 나오며, 그분은 쇠 지팡이로 민족들을 목양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통해 ‘쇠지팡이’가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라는 사실이 설명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마지막 인용은 단순히 쇠가 강하다는 사실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이 주님의 말씀의 진리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결국 AC.426의 핵심은 쇠가 자연적 진리를 뜻하며, 진리에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두로의 무역은 자연적 진리가 천적·영적 부요함에 관한 말씀 안에 등장한다는 점을 보여 주고, 북방의 쇠는 자연적인 것과 영적·천적인 것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쇠벽과 다니엘의 쇠는 진리의 힘을 드러내며, 계시록의 쇠 지팡이는 그 힘이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와 연결되어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두발가인이 다루는 쇠가 단순한 금속이 아니라, 자연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진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AC.426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