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RC.034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는 지상 생애를 마친 뒤 몸과 영혼이 함께 하늘에 올림받았다’ - 성모 승천은 특별한 육체적 영화인가, 주님의 유일한 부활과 구별해야 할 교리인가?

 

‘마리아는 지상 생애를 마친 뒤 몸과 영혼이 함께 하늘에 올림받았다.’ 이것은 천주교의 대표적인 마리아 교리 가운데 하나인 ‘성모 승천’(聖母昇天, Assumption of Mary)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천주교는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친 뒤 영혼만 천국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몸과 영혼이 함께 천상의 영광에 들어갔다고 믿습니다. 여기에는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로서 특별한 은총을 받았으며,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리에 다른 신자들보다 앞서 참여했다는 신앙적 이해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교리를 접하면 몇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인간은 죽은 후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데, 마리아만 몸과 영혼이 함께 하늘에 올림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몸은 지상에서 사용하던 자연적인 육체일까요, 아니면 영광스럽게 변화된 몸일까요? 마리아의 특별한 승천은 성경 어디에 기록되어 있을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죽은 후에도 완전한 인간의 형상을 지닌 영적 몸으로 살아간다고 가르치는데, 이러한 사후세계의 이해와 천주교의 성모 승천 교리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이 질문은 마리아의 특별한 지위에 관한 문제를 넘어 인간의 죽음과 부활, 자연계와 영계의 관계, 그리고 주님께서 이루신 인성의 영화(榮化, glorification)가 무엇인지를 묻는 중요한 신학적 문제입니다.

 

성모 승천은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가 교황령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Munificentissimus Deus)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확정한 교리입니다. 그 정의문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하느님의 어머니이자 평생 동정녀이신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친 뒤 몸과 영혼이 함께 천상의 영광에 들어갔다고 선언합니다. 이 가르침은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966항에도 나타납니다. 교리서는 마리아의 승천을 그리스도의 부활에 특별하게 참여한 사건이며,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장차 이루어질 몸의 부활을 미리 보여 주는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승천과 마리아의 승천은 구별해야 합니다. 영어에서 주님의 승천은 ‘어센션’(Ascension), 마리아의 승천은 ‘어섬션’(Assumption)이라고 부릅니다. 전자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신의 신적 능력으로 하늘에 오르셨다는 의미이고, 후자는 마리아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으로 천상의 영광에 올림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천주교가 마리아에게 예수님과 동일한 신적 권능을 부여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성모 승천을 자연적인 육체가 아무런 변화 없이 물질적인 공간을 이동한 사건으로 단순화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몸이 영화되어 천상의 영광에 참여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검토해야 할 핵심은 바로 이러한 특별한 육체적 영화가 실제로 계시된 진리인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정확하게 구별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천주교가 1950년에 확정한 교리의 정의문은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쳤다고 선언하지만, 그가 반드시 죽은 뒤 부활했는지, 아니면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늘에 올림받았는지를 신앙의 교리로 확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지상 생애를 마친 뒤’라는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톨릭과 동방교회의 오랜 전통에서는 마리아가 실제로 죽음을 경험했다고 이해하는 견해가 널리 이어져 왔습니다. 동방교회는 이를 ‘성모 안식’(Dormition of the Theotokos)이라고 부르며, 마리아가 죽음의 잠을 거쳐 천상의 영광에 들어갔다고 이해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역시 1997년 7월 2일의 교리교육에서 마리아가 죽은 뒤 그 몸이 영화되었다는 전통적인 이해를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1950년의 교리 정의문이 마리아의 죽음 여부를 신앙의 진리로 결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따라서 천주교가 마리아는 죽지 않았다고 가르친다거나, 반대로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세부 과정까지 공식적으로 확정했다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교리가 실제로 확정한 내용과 그 주변에서 발전한 신학적 설명 및 전승을 구별해야 합니다.

 

성모 승천은 앞서 살펴본 ‘무염시태’(無染始胎, Immaculate Conception) 및 마리아의 평생 동정과 연결됩니다. 천주교는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특별히 준비되었으며, 원죄에서 보존되는 은총을 받았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러한 특별한 은총이 지상 생애의 마지막에도 이어졌다고 이해합니다. 비오 12세는 마리아의 몸이 무덤의 부패에 맡겨지지 않고 천상의 영광에 들어간 것을 그의 특별한 신학적 지위와 연결하여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교리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의 몸이 반드시 다른 모든 인간보다 먼저 영화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논리적으로 자동으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성모 승천은 무염시태와 연결되어 있지만, 그 자체로 별도의 계시적 근거를 요구하는 교리입니다. 천주교는 그 근거를 성경의 직접적인 사건 기록에서만 찾지 않고 교회의 전통과 전례, 성경의 여러 예표와 상징을 종합하여 설명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문제를 검토할 때에는 그러한 신학적 연결이 실제로 말씀의 속뜻과 주님의 부활에 관한 가르침에 부합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로서 특별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사실과, 그 몸이 다른 인간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방식으로 영화되었다는 주장은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과 지상 생애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사실을 기록하지만, 그가 언제 어디에서 지상 생애를 마쳤으며 몸이 어떤 방식으로 천상의 영광에 들어갔는지는 직접적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행1:14에는 마리아가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는 모습이 나타나지만, 그 이후의 죽음이나 승천에 관한 사건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천주교는 계12:1에 나타나는 해를 입은 여자, 창3:15의 여자와 뱀 사이의 적대 관계, 그리고 구약의 언약궤에 관한 말씀들을 성모 승천과 연결하여 해석합니다. 이러한 본문들은 마리아의 역할과 구원의 역사를 신학적으로 연결하여 생각하게 하지만, 마리아의 육체가 실제로 하늘에 올림받았다는 사건을 직접 서술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계12:1의 여인을 마리아 개인과만 동일시하는 것은 본문의 상징적 성격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계시록 해설’(Apocalypse Revealed, AR, 1766) 533항에서 해를 입은 여인이 새 하늘에 있는 주님의 새 교회와 땅 위에 세워질 새 교회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여인은 우선 교회와 그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상입니다. 이를 마리아의 육체적 승천을 직접 증명하는 본문으로 사용하는 것은 말씀의 속뜻과 후대의 교리적 적용을 혼동할 위험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데려가신 사람들에 관한 기록도 있습니다. 창5:24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다고 기록하며, 왕하2:11은 엘리야가 회오리바람 가운데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이 곧 마리아에게도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초기 인물들의 이야기 안에 교회의 영적 상태와 변화에 관한 깊은 속뜻이 담겨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에녹의 이야기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하여 마리아의 승천과 직접 연결하는 데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사람을 데려가실 수 있는가 하는 가능성의 문제와, 마리아에게 실제로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계시되었는가 하는 증거의 문제를 구별하는 일입니다. 성경에 어떤 종류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기록되지 않은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마리아의 성모 승천 역시 이러한 구별 아래에서 검토해야 합니다.

 

이제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론을 살펴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445–452항에서 인간이 죽는 순간의 상태와 영계에서 깨어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인간이 죽는 것은 그 존재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계에서 사용하던 육체와 분리되어 영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물질적인 육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 안에 있으며, 육체는 영이 자연계에서 활동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따라서 육체의 기능이 멈추더라도 인간의 생명은 계속됩니다. 또한 HH.453–469에서는 사람이 죽은 후에도 완전한 인간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며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능력을 계속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후의 인간이 단순히 형체 없는 의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실제로 몸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몸은 자연계의 물질로 이루어진 육체가 아니라 영계에 속하는 ‘영적 몸’(靈的身體, spiritual body)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성모 승천 교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마리아가 죽은 후에도 완전한 인간의 형상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의미라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것은 마리아만의 특별한 특권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죽은 후에도 영적 몸을 지닌 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주교의 성모 승천은 단순히 마리아가 영계에서 인간의 형상을 지닌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천주교는 마리아가 장차 모든 의인에게 이루어질 몸의 부활과 영화에 특별한 방식으로 미리 참여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두 전통의 차이는 사후에도 인간이 몸을 지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몸이 무엇이며 자연적인 육체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의 문제에서 드러납니다.

 

이 구별은 스베덴보리의 ‘최후의 심판’(Last Judgment, LJ, 1758) 36항에서 더욱 명확해집니다. 그는 자연계의 인간은 자연적인 몸을 입고 있지만 영계의 인간은 영적인 몸을 입고 있으며, 두 몸은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한다고 설명합니다. 자연적인 눈은 자연적인 것을 보고, 영적인 눈은 영적인 것을 봅니다. 따라서 영계에 들어간 인간이 완전한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지상에서 입었던 자연적인 육체가 그대로 영계로 옮겨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연적인 몸을 벗고 영적인 몸으로 살아가며, 그 안에서 자신의 사랑과 신앙에 따라 영원한 삶을 계속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물질적인 육체가 다시 살아나야 비로소 인간이 완전해진다는 생각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론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천주교와 스베덴보리의 차이는 더욱 선명해집니다. 천주교는 마지막 날에 모든 인간에게 이루어질 몸의 부활을 믿으며, 마리아는 그 영광에 특별히 앞서 참여했다고 설명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죽은 후 이미 영적 몸을 지닌 완전한 인간으로 살아간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마리아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하여 자연적인 육체의 특별한 영화까지 필요로 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여기서 더욱 결정적인 본문은 HH.316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부활하실 때 영으로만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몸까지 부활하셨다고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지상 생애 동안 자신의 인성 전체를 영화하여 신적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영혼은 처음부터 아버지이신 여호와의 신성 자체였으며, 그분의 인성은 그 신성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일반 인간과 달리 몸까지 영화하여 부활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일반 인간은 영으로 부활하지만 주님은 몸까지 부활하셨다고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여기서 주님의 몸의 부활을 자연적인 물질의 몸이 아무런 변화 없이 보존된 사건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인성을 온전히 신적으로 영화하셨으며, 그 영화된 인성은 자연적인 물질의 한계에 속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부활은 일반 인간의 사후 각성과 동일한 사건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신적 능력으로 이루신 유일한 영화의 완성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마리아가 자신의 몸까지 특별히 영화되어 하늘에 올림받았다는 천주교의 교리는 중요한 신학적 긴장을 일으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만이 몸까지 영화하여 부활하셨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두 전통의 용어를 무조건 같은 의미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가 말하는 마리아의 몸의 영화는 피조물에게 베푸신 은총이며,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의 인성의 영화는 신성 자체가 인성을 신적으로 만드신 사건입니다. 두 설명은 동일한 종류의 영화가 아니므로, 단순히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만으로 모순이라고 단정하기보다 두 전통이 몸의 부활과 영화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함께 검토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사후에 어떤 존재로 이해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827항에서 마리아와 관련된 특별한 영적 경험을 기록합니다. 그는 흰옷을 입은 마리아를 보았으며, 마리아가 자신은 주님의 어머니였지만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인간적인 것을 벗으시고 인성을 신적으로 만드셨으므로 이제는 그분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예배한다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이 기록에서 마리아는 주님과 동일한 신적 권위를 지닌 존재가 아니라 주님을 예배하는 영계의 한 인간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여기서 자료의 성격을 분명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TCR.827은 성경에 기록된 사건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경험으로 보고한 내용입니다. 또한 이 본문은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칠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의 자연적인 육체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마리아와 영계에서 만났다는 기록만으로 성모 승천의 역사적 사실이 반박되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 기록은 스베덴보리가 마리아를 주님을 예배하는 영계의 인간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직접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는 모든 인간이 사후에도 영적 몸을 지닌 존재로 살아간다는 그의 사후세계론과 일치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천국의 영광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성모 승천을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특별히 참여한 사건으로 이해하며, 장차 모든 신자에게 이루어질 몸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보여 준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천국의 영광은 자연적인 육체가 얼마나 특별한 방식으로 보존되거나 변화되었는가에 따라 결정되지 않습니다. 천국의 상태는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얼마나 받아들이고 그 사랑과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천국의 모든 천사는 영적 몸을 지니고 있으며, 각 사람은 자신의 내적인 사랑과 신앙에 따라 서로 다른 천국의 상태에 있게 됩니다. 따라서 자연적인 육체가 특별한 방식으로 영화되었다는 사실이 천국에서의 더 높은 영적 상태를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마리아의 실제적인 천국의 상태를 인간이 임의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내면과 영원한 상태에 대한 최종적인 앎은 오직 주님께 속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리아에게 어떤 특별한 영광이 주어졌는가보다, 천국의 모든 생명과 영광이 오직 주님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입니다. 천국은 특별한 몇 사람의 신체적인 특권에 의하여 성립하는 세계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영적인 삶의 세계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모 승천 교리에서 인정해야 할 진리와 다시 검토해야 할 주장을 구별해야 합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된 복된 여인이었다는 사실은 성경에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또한 주님께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며 죽음 이후에도 인간이 계속 살아간다는 사실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론에서도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친 후에도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 안에서 살아간다는 이해 자체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다른 모든 인간과 달리 자신의 자연적인 육체와 연결된 특별한 육체적 영화를 미리 누렸다는 주장은 별도의 계시적 근거를 요구합니다. 성경은 그러한 사건을 직접 기록하지 않으며, 스베덴보리의 저작 역시 그것을 신적으로 확정된 진리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이 죽은 후 자연적인 몸을 벗고 영적인 몸으로 살아간다고 설명하며, 주님께서 자신의 몸까지 영화하여 부활하신 사건을 일반 인간의 부활과 구별합니다. 따라서 성모 승천을 반드시 믿어야 할 신앙의 교리로 확정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론에서 직접적인 뒷받침을 얻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는 마리아의 사후에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우리가 역사적으로 증명하거나 반증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더욱 중요하게 붙들어야 할 것은 주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베푸시며, 그들을 자신의 사랑과 진리 안에서 천국의 삶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마리아가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하늘에 들어갔는가보다, 죽음을 이기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여 모든 구원의 근원이 되신 주님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일이 더욱 중요합니다. 결국 인간의 영원한 생명과 천국의 영광은 마리아의 특별한 승천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여 모든 인간에게 천국의 길을 열어 주신 주님 한 분에게서 비롯됩니다. (SL.RC.034 해설)

 

 

‘마리아는 지상 생애를 마친 뒤 몸과 영혼이 함께 하늘에 올림받았다’라는 명제에는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된 복된 여인이며, 인간의 영원한 생명이 오직 주님의 은총과 구속에서 비롯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천주교는 성모 승천을 마리아가 자신의 능력으로 하늘에 올랐다는 뜻으로 가르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부활에 특별히 참여하여 몸과 영혼이 천상의 영광에 들어갔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마리아가 죽음을 경험했는지의 여부는 1950년의 교리 정의문에서 확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자신의 몸까지 특별히 영화되어 하늘에 올림받았다는 주장은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을 넘어서는 교리적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HH.445–469와 LJ.36에서 인간이 죽은 후 자연적인 몸을 벗고 영적인 몸으로 살아간다고 설명하며, HH.316에서는 주님만이 자신의 몸까지 영화하여 부활하셨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영계에서 완전한 인간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살아간다는 사실과, 다른 모든 인간과 구별되는 특별한 육체적 영화를 미리 누렸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전자는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론과 일치하지만, 후자는 그의 가르침에서 직접적인 근거를 찾기 어렵습니다. 특히 천주교의 육체 부활론과 스베덴보리의 영적 몸에 관한 가르침은 인간의 사후 상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다만 이러한 신학적 차이가 마리아의 지상 육체에 실제로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역사적으로 증명하거나 반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마리아가 천국에서 살아간다는 믿음이나 그의 특별한 소명을 존중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경의 직접적인 증언과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론에서 확증되지 않는 특별한 육체적 승천을 모든 신자가 반드시 믿어야 할 신적 진리로 확정하는 데 있습니다. 천국의 생명은 자연적인 육체의 특별한 보존에 달려 있지 않으며,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영적 상태와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이 교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마리아의 특별한 육체적 지위를 높이는 데 있지 않고, 죽음을 이기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여 모든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신 주님의 유일한 신성과 구속의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있어야 합니다.

 

 

 

RC.033.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기 전과 낳을 때와 낳은 후에도 평생 동정녀였다’

SL.RC.033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기 전과 낳을 때와 낳은 후에도 평생 동정녀였다’ - 주님의 동정녀 탄생과 마리아의 평생 동정은 같은 신앙의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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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33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기 전과 낳을 때와 낳은 후에도 평생 동정녀였다’ - 주님의 동정녀 탄생과 마리아의 평생 동정은 같은 신앙의 진리인가?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기 전과 낳을 때와 낳은 후에도 평생 동정녀였다.’ 이것은 천주교가 가르치는 ‘마리아의 평생 동정’(終身童貞, Perpetual Virginity of Mary)에 관한 교리입니다. 천주교는 마리아가 남자와 관계없이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사실을 믿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출산하는 순간에도 그의 동정성이 보존되었으며, 출산 이후에도 요셉과 부부관계를 맺지 않고 평생 동정녀로 살았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영원한 동정녀’라는 뜻의 그리스어 ‘아이파르테노스’(Aeiparthenos)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성육신이 전적으로 하느님의 역사였으며, 마리아의 몸과 삶이 그 특별한 소명을 위하여 온전히 봉헌되었다는 신앙적 이해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성경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할 때 동정녀였다고 분명히 증언하지만, 출산하는 순간의 신체적 상태와 그 이후의 결혼생활에 대해서도 같은 정도로 분명하게 가르칠까요?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형제들과 자매들은 누구였을까요? 무엇보다 마리아의 평생 동정이 주님의 신성과 구속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진리일까요? 이러한 질문은 단순히 마리아와 요셉의 사생활에 관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성경이 직접 증언하는 사실과 교회가 후대에 확정한 교리를 어떻게 구별할 것인지, 그리고 동정과 결혼을 어떤 영적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하는지를 묻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이번 명제를 검토하려면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성경의 증언과 스베덴보리의 성육신론 및 상응의 가르침을 차례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은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496–507항에 나타납니다. 496항은 예수님께서 인간 남성의 개입 없이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셨다고 설명합니다. 499항은 마리아의 동정성이 예수님을 출산하는 순간에도 보존되었다고 가르치며, 500항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형제자매들이 마리아가 낳은 다른 자녀들이 아니라 친족들이었다고 해석합니다. 501항은 예수님이 마리아의 유일한 아들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평생 동정은 세 가지 주장으로 구별됩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하기 전까지의 동정(virginitas ante partum)이고, 둘째는 예수님을 출산하는 과정에서도 보존된 동정(virginitas in partu)이며, 셋째는 예수님을 낳은 이후에도 지속된 동정(virginitas post partum)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의 교리 안에 포함되어 있지만, 성경적 근거와 신학적 의미가 동일하지 않습니다. 특히 첫째는 주님의 신적 기원과 직접 연결되는 반면, 둘째와 셋째는 마리아의 출산 과정과 이후 삶에 관한 추가적인 주장입니다. 천주교는 세 가지 모두를 신앙의 진리로 고백하지만, 이를 검토하는 우리는 각각의 근거와 의미를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천주교가 평생 동정을 단순한 신체적 순결 문제가 아니라, 마리아의 믿음과 주님께 대한 전적 헌신의 표지로 이해한다는 점도 인정해야 합니다. 실제로 교리서 506항은 마리아의 동정성을 의심으로 더럽혀지지 않은 믿음과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바친 상태의 표지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교리를 단순히 신체적인 동정 여부에 집착하는 가르침으로만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출산 전 동정에 관해서는 성경의 증언이 매우 분명합니다. 마1:18은 마리아와 요셉이 함께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기록합니다. 마1:20에서 천사는 요셉에게 마리아에게 잉태된 자가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눅1:34에서 마리아는 자신이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을 수 있느냐고 묻고, 눅1:35에서 천사는 성령이 그에게 임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그를 덮을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씀들은 예수님의 잉태가 일반적인 인간의 출생과 근본적으로 달랐음을 증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에 관한 교리’(Doctrine of the Lord, DL, 1763) DL.48과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92에서 이러한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의 특별한 질서를 설명합니다. 주님의 영혼은 처음부터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온 신성 자체였으며, 마리아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위한 자연적 인성을 제공한 어머니였습니다. 주님은 인간 아버지에게서 생명을 받으신 분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신적 생명을 받으시고, 마리아에게서는 자연적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동정녀 탄생은 단순히 놀라운 기적이나 마리아의 순결을 보여 주기 위한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의 신적 기원과 직접 연결되는 성육신의 본질적 진리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사실을 부정하면 주님의 출생을 일반 인간의 출생과 구별하는 중요한 근거를 잃게 됩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기 전까지 동정녀였다는 사실은 성경과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직접적으로 뒷받침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출산하는 순간에도 마리아의 신체적 동정성이 온전히 보존되었다는 두 번째 주장은 별도로 살펴야 합니다. 천주교는 주님의 탄생이 마리아의 동정성을 손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거룩하게 했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출생이 일반적 출산과 달랐다는 특별한 신학적 이해입니다. 그렇다고 천주교가 주님께서 실제 인간의 몸을 취하지 않으셨다거나 출생 자체가 단순한 환상이었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천주교는 주님께서 참된 인간으로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출생이 마리아의 동정성을 훼손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실제로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증언할 뿐, 출산 순간의 구체적인 신체적 과정이나 마리아의 신체 상태가 어떻게 유지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눅2:7은 마리아가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다고 기록하지만, 그 출산이 일반적인 신체적 출산과 어떤 점에서 달랐는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주님의 동정녀 잉태와 신적 기원을 중요하게 설명하지만, 확인되는 주요 직접 본문만으로는 마리아가 출산하는 순간에 어떤 신체적 상태를 유지했는지에 관한 별도의 교리를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출산 중 동정이 반드시 거짓이었다고 단정할 근거도 충분하지 않지만, 이를 주님의 성육신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신적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할 직접적인 근거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실제로 가르치는 내용과 교회가 신학적으로 확정한 내용을 구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 번째 주장인 출산 후의 평생 동정은 성경 해석에서 더욱 직접적인 논쟁을 일으킵니다. 마13:55-56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그분의 형제들인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의 이름을 언급하고 자매들도 있다고 말합니다. 막6:3에도 같은 취지의 기록이 나타나며, 막3:31-35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을 찾아온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1:19에서 바울은 야고보를 ‘주의 형제’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표현을 일반적인 가족관계의 문맥에서 읽으면 예수님께 실제 형제자매들이 있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이들이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다른 자녀들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성경의 친족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엄밀한 가족관계의 용어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으며, 가까운 친족을 형제라고 부르는 관습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리서 500항은 야고보와 요셉이 다른 마리아의 아들들이라고 설명하면서, 복음서의 형제자매 언급이 마리아의 다른 출산을 증명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역사적으로는 그들이 요셉의 이전 결혼에서 태어난 자녀들이었다는 해석도 존재했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형제들’이라는 표현은 마리아에게 다른 자녀들이 있었다는 해석의 중요한 근거가 되지만, 그 표현만으로 논쟁이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동시에 이들이 모두 친족이었다는 천주교의 해석 역시 성경이 직접 명시한 관계를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닙니다. 결국 복음서의 가족관계 표현을 해석할 때에는 그 문맥과 언어적 관습을 함께 고려해야 하며, 어느 한쪽의 결론을 처음부터 확정된 사실로 놓고 본문을 읽어서는 안 됩니다.

 

마1:25 역시 중요한 논쟁의 대상입니다. 이 말씀은 요셉이 마리아가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낳기까지’라는 표현을 근거로 예수님을 낳은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부부관계를 맺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특정 시점까지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이후에는 반대의 일이 일어났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마1:25는 예수님의 출생 이전에 요셉과 마리아가 부부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지만, 출산 이후의 결혼생활을 확정하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닙니다. 눅2:7의 ‘첫아들’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첫아들이라는 말이 반드시 둘째나 셋째 아들의 존재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유대 율법에서 처음 태어난 아들은 후속 자녀의 유무와 관계없이 특별한 지위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표현들은 마리아가 이후 다른 자녀들을 낳았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하지만, 그 가능성을 곧바로 역사적으로 확정해 주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평생 다른 자녀를 낳지 않았다는 주장도 이 본문들만으로 직접 증명할 수 없습니다. 교회 역사에서는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지지하는 전통이 일찍부터 발전했으며, 2세기의 ‘야고보 원복음서’(Protoevangelium of James) 같은 외경 문헌에서도 마리아의 특별한 동정에 관한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헌은 정경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지니지 않습니다. 4세기에는 헬비디우스가 예수님의 형제들에 관한 본문을 근거로 마리아의 출산 후 결혼생활을 주장했고, 히에로니무스는 이에 반대하여 평생 동정을 옹호했습니다. 이 논쟁은 후대 교회에서 동정과 결혼의 영적 가치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되었습니다. 따라서 평생 동정은 천주교만의 독특한 교리가 아니라 오래된 기독교 전통에 속하지만, 오랜 전통 자체가 성경의 직접적인 증언과 동일한 권위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주님의 동정녀 탄생을 분명하게 가르친다는 사실과, 마리아의 출산 중 및 출산 후 동정까지 직접 확정한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주님에 관한 교리’ DP.48과 TCR.92는 주님의 신적 기원과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인성을 설명하는 직접적인 근거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들에서 마리아가 이후에도 평생 동정녀로 살았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마리아의 동정성이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되었는가보다, 주님께서 인간 아버지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신적 생명을 받으셨으며, 마리아에게서는 자연적 인성을 취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인성을 시험과 싸움을 통하여 영화하셨습니다. 따라서 성육신의 본질적인 진리는 주님의 신적 기원과 인성의 영화(榮化, glorification)에 있으며, 마리아의 출산 이후 생활에 관한 추가적인 가정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평생 동정의 세 측면을 동일한 수준의 신적 진리로 확정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직접적 가르침에서 도출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이것은 마리아가 실제로 평생 동정녀였을 가능성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역사적 사실의 가능성과 신앙적으로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교리의 확실성은 서로 구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더 깊이 살펴볼 문제는 성경에서 ‘동정녀’(童貞女, virgin)가 지니는 영적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3081에서 창24:16에 등장하는 리브가가 동정녀이며, 남자가 그를 알지 못했다는 말씀을 해설합니다. 그는 동정녀가 주님의 나라와 교회를 나타내며, 그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결합과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남자가 알지 못했다’는 표현은 거짓에 의하여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동정녀는 단순히 육체적 성경험이 없는 상태를 넘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교회의 순수한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설명은 마리아의 동정녀 탄생을 이해할 때도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주님께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다는 역사적인 사실은 신적 생명의 근원이 인간 남성에게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동시에 동정녀의 상응은 인간이 주님의 생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해석의 범위를 정확하게 지켜야 합니다. AC.3081은 리브가에 관한 말씀의 속뜻을 해설하는 본문이지 마리아의 평생 동정 여부를 직접 판정하는 본문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를 마리아 교리에 적용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 원리에 근거한 신학적 적용이지, 그가 마리아의 출산 후 동정을 직접 인정하거나 부정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이처럼 문자적인 역사적 사실과 말씀의 속뜻을 구별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반드시 지켜야 할 해석의 원칙입니다.

 

이러한 영적 의미를 이해하면 육체적인 동정과 영적인 순결을 반드시 동일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하지 않고 평생 동정생활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마음이 자동으로 거짓과 악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결혼하여 배우자와 사랑을 나누고 자녀를 낳았다고 해서 영적 순결을 잃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결혼애’(Conjugial Love, CL, 1768) CL.154에서 결혼을 부정한 상태로 여기는 사람들은 참된 순결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CL.155에서는 평생 독신을 서약했다는 사실 자체가 참된 순결을 보증하지 않으며, 참된 결혼생활에 대한 사랑이 그 사람 안에 남아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CL.156에서는 결혼생활이 독신생활보다 선호되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참된 결혼애가 영적 선과 진리의 결합에 상응하며, 주님에게서 오는 거룩한 사랑이라는 그의 결혼관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결혼은 인간의 영적 삶을 더럽히는 낮은 상태가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에서 사랑과 지혜가 결합하는 중요한 삶의 형태입니다. 물론 독신이나 동정의 삶도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선한 쓰임 가운데 살아간다면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동정생활 자체가 결혼생활보다 본질적으로 더 거룩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마리아의 평생 동정 교리는 중요한 질문을 받게 됩니다. 만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후, 요셉과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맺었다면 그의 거룩함이 훼손되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결혼관에 비추어 보면 그렇다고 말할 근거는 없습니다. 주님의 질서 안에 있는 참된 결혼애는 거룩한 사랑이며, 정상적인 부부관계 자체는 죄나 영적인 오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도 천주교의 공식적인 입장을 정확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결혼 자체를 부정하거나 부부관계를 본질적으로 부정하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혼인을 ‘성사’(聖事, sacrament)로 인정하며, 배우자 사이의 사랑과 자녀의 출산을 하느님께서 주신 선한 질서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평생 동정 교리를 결혼에 대한 멸시로 규정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동정을 일반적인 결혼생활에 대한 부정으로 설명하기보다, 주님의 성육신이라는 유일한 사건에 온전히 봉헌된 특별한 소명으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의도에는 인정해야 할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특별한 소명을 설명하기 위하여 출산 중의 신체적 상태와 출산 이후의 모든 부부관계까지 신앙의 필수적인 진리로 확정해야 하는지는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참된 거룩함은 외적 신체 상태나 결혼 여부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께서 막3:31-35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러한 영적 관계의 중요성을 보여 줍니다. 이 말씀은 자연적 가족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참된 관계가 혈연이나 외적 조건보다 깊은 영적 차원에 있음을 가르칩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존중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그의 신체적 상태에 관한 추정을 신앙의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한 믿음을 본받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교리가 오늘 우리의 신앙에 던지는 질문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동정녀 탄생은 스베덴보리의 주님론에서 성육신의 중요한 진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 아버지에게서 태어나신 분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신적 생명을 받으시고, 마리아에게서 자연적 인성을 취하신 분입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그분께서는 일반 인간과 달리 자신의 신적 능력으로 모든 시험을 이기시고, 인성을 영화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마리아가 어떤 신체적 상태를 유지했으며, 요셉과 어떠한 결혼생활을 했는지는 주님의 신적 기원과 인성 영화의 진리를 이해하는 데 같은 방식으로 요구되지 않습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증언하는 것은 주님께서 동정녀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사실이며, 마리아의 출산 순간과 이후 생활에 관한 세부 사항은 그만큼 직접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중심은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무조건 입증하거나 반박하는 데 있지 않고, 동정녀에게서 인간으로 오신 주님이 누구이신가를 올바르게 아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각 사람 안에 이루고자 하시는 영적 출생 역시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인간이 거짓과 악에서 돌아서고 순수한 진리에 대한 애정으로 말씀을 받아들일 때, 그 사람 안에 천국의 생명을 이루십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선과 진리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순결은 단순한 육체적 상태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거짓과 악으로 더럽히지 않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려는 마음의 순결입니다. (SL.RC.033 해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기 전과 낳을 때와 낳은 후에도 평생 동정녀였다’라는 명제에는 구별하여 판단해야 할 세 가지 주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인간 아버지의 개입 없이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셨다는 출산 전 동정은 성경이 분명하게 증언하며, 스베덴보리의 성육신론에서도 중요한 신적 진리입니다. 둘째, 마리아가 예수님을 출산하는 순간에도 신체적인 동정성을 보존했다는 출산 중 동정은 천주교의 공식 교리이지만, 성경은 그 구체적인 출산 과정을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셋째,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후에도 요셉과 부부관계를 맺지 않고 평생 동정녀로 살았다는 출산 후 동정 역시 오랜 교회 전통에 근거하지만, 성경만으로 그 역사적 사실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복음서의 형제자매 언급은 마리아에게 다른 자녀들이 있었다는 해석의 중요한 근거가 되지만, 친족관계에 관한 다른 해석도 존재하므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가르침 역시 이 문제를 명확히 해결한다고 주장할 근거는 부족합니다. 따라서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마리아가 실제로 평생 동정녀였을 가능성을 인정하거나 그의 특별한 소명을 존중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증언하는 동정녀 잉태와, 출산 중 및 출산 후 동정에 관한 후대의 교리적 확정을 동일한 수준의 직접적 신적 증언으로 취급하는 데 있습니다. 또한 육체적 동정 자체를 결혼생활보다 자동으로 더 높은 거룩함의 조건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동정녀의 속뜻은 거짓에 의하여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한 상태와 선과 진리의 결합에 관계되며, 참된 거룩함은 외적 신체 상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내적 삶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교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마리아의 출산 전후 생활을 신앙의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인간으로 오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여 인류를 구원하신 주님의 유일한 신성과 구속의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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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32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는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원죄 없이 보존되었다’ - 무염시태는 주님의 성육신과 구속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진리인가?

 

‘마리아는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원죄 없이 보존되었다.’ 이것은 천주교의 대표적 마리아 교리 가운데 하나인 ‘무염시태’(無染始胎, Immaculate Conception)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라틴어로는 ‘콘켑티오 임마쿨라타’(conceptio immaculata)라고 하며, 오늘날 한국 천주교에서는 주로 ‘원죄 없으신 잉태’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천주교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할 때 비로소 특별히 거룩해졌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 자신이 어머니 안에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원죄에서 보존되었으며, 평생 어떠한 개인적인 죄도 짓지 않았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마리아가 특별히 준비되었다는 신앙적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을 접하면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모든 인간이 죄의 영향을 받는 존재라면 어떻게 마리아 한 사람만은 처음부터 원죄 없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주님께서 죄 없으신 거룩한 분으로 태어나시기 위해서는 그분의 어머니 역시 원죄가 없어야 했던 것일까요? 무엇보다 마리아가 특별한 은총으로 원죄에서 보존되었다는 사실은 성경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질문은 마리아 개인의 거룩함을 넘어, 주님의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에서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결합하였으며, 인간에게 전해지는 악의 성향과 주님께서 이루신 인성의 영화(榮化, glorification)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묻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무염시태를 검토하려면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어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유전악과 주님의 구속 및 영화의 질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무염시태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Virgin Birth)에 관한 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무염시태의 대상은 예수님이 아니라 마리아 자신입니다. 이 교리는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가 교황령 ‘형언할 수 없으신 하느님’(Ineffabilis Deus)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확정했습니다. 그 내용은 마리아가 자신의 잉태 첫 순간부터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권으로, 그리고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힘입어 ‘원죄’(原罪, original sin)의 모든 더러움에서 보존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주교가 마리아를 구원이 필요 없는 독립적인 존재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천주교에 따르면 마리아도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하여 구원받았지만, 다른 인간들과 달리 죄에 빠진 다음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도록 보존되는 특별한 방식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흔히 ‘예방적 구속’(preservative redemption)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무염시태를 ‘마리아는 구원이 필요 없는 완전한 인간이었다’라는 주장으로 이해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특별한 거룩함마저 그리스도의 구속과 하느님의 은총에서 비롯된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490–493항에 체계적으로 나타납니다. 491항은 마리아가 자신의 잉태 첫 순간부터 원죄에서 보존되었다고 설명하고, 492항은 그 특별한 거룩함이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되었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493항은 마리아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평생 모든 개인적인 죄에서 자유로웠다고 밝힙니다. 여기에는 구별해야 할 두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하나는 마리아가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원죄의 상태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상 생애 동안 실제적인 죄도 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천주교는 이 둘을 연결하면서 마리아가 구원자의 어머니로서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님의 성육신에 합당하도록 준비되었다’라는 신학적 설명과 ‘주님께서 성육신하시려면 반드시 죄 없는 어머니가 필요했다’라는 논리적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무염시태를 하느님께서 자유롭게 베푸신 특별한 은총으로 설명하지, 하느님께서 원죄 없는 어머니가 없으면 성육신하실 수 없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검토해야 할 것은 마리아의 이러한 특별한 보존이 실제로 계시된 진리인지, 그리고 그것이 주님의 성육신과 구속을 이해하는 데 어떤 신학적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점입니다.

 

무염시태가 역사적으로 형성된 과정도 중요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마리아를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된 복된 여인으로 이해하였으며, 하와의 불순종과 마리아의 순종을 대비하는 신학적 해석도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원죄에서 보존되었다는 교리가 처음부터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정립되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중세 서방교회에서는 마리아의 거룩함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원죄에서 정화되었는가를 놓고 신학적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특히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필요로 한다는 가르침과 마리아의 특별한 무죄성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러한 논쟁 가운데 둔스 스코투스는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하여 미리 죄에서 보존되었다는 신학적 설명을 발전시켰으며, 이는 이후 무염시태 교리를 정식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천주교는 이러한 과정을 새로운 교리를 임의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교회에 맡겨진 신앙의 유산을 점차 명확하게 이해한 과정으로 봅니다. 그러나 교리의 역사적 발전과 그 교리가 신적 계시에 근거한 진리인지는 구별하여 검토해야 합니다. 어떤 교리가 오랜 논쟁을 거쳐 공식적으로 확정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곧바로 성경의 속뜻에 포함된 신적 진리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천주교가 무염시태의 근거로 중요하게 제시하는 성경 말씀 가운데 하나는 눅1:28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은혜를 받은 자라고 인사하며, 주께서 그와 함께하신다고 전합니다. 가톨릭 신학은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케카리토메네’(kecharitōmenē)를 중요하게 해석합니다. 이 표현은 은총을 받은 상태를 나타내며, 천주교는 마리아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특별히 충만하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 자체가 마리아가 자신의 잉태 첫 순간부터 원죄 없이 보존되었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선언하지는 않습니다.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는 사실과 그 은총이 정확히 언제부터 어떤 방식으로 역사했는가는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근거는 창3:15입니다. 천주교는 뱀과 여자, 그리고 그 후손 사이의 적대 관계를 그리스도와 마리아에 연결하여 이해하며, 마리아를 ‘새 하와’(New Eve)로 해석하는 전통을 발전시켰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마리아의 순종을 구원의 역사와 연결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본문 자체가 마리아에게 유전적 악의 성향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까지 직접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창3의 인물과 사건들은 태고교회의 영적 상태와 인간 안에서 일어난 변화를 담고 있으므로, 그 의미를 후대의 특정 교리에 단순히 대응시켜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성경이 명시하는 내용과 후대의 신학적 해석을 통하여 도출한 결론을 구별해야 합니다. 물론 성경에 직접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교리가 곧바로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모든 신자가 반드시 믿어야 할 신적 진리로 확정하려면 그에 합당한 근거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천주교의 무염시태론과 중요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에서 인간에게 전해지는 악을 설명하면서, 그것이 단순히 최초의 인간 아담이 지은 한 번의 죄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의 ‘유전악’(遺傳惡, hereditary evil)은 부모와 조부모, 여러 세대의 조상들이 실제적인 삶에서 형성한 악한 성향이 후손에게 전해지는 것과 관계됩니다. 이러한 성향은 인간이 성장하여 자신의 이해와 의지를 사용하면서 실제적인 악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특히 AC.4563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부모에게서 유전악을 물려받지만, 그 유전적 성향 자체 때문에 실제적 죄를 범한 사람으로 책망받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 안에서 악을 선택하고 행할 때, 그 실제적 악에 대하여 책임을 집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유전악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는 악을 향한 성향과 관계되며, 이미 개인적으로 범한 죄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구별은 마리아의 무염시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유전악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주장과 그 사람이 실제로 죄를 지었다는 주장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천주교의 원죄를 스베덴보리의 유전악과 정확히 구별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404–405항은 원죄를 아담의 죄에 대한 후손 개개인의 직접적인 개인적 책임이나 단순한 법적 죄책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원죄는 인류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 본성에 전해진 ‘원초적 거룩함과 의로움의 결핍’이며, 인간이 스스로 저지른 행위가 아니라 물려받은 상태입니다. 교리서는 인간 본성이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지만 상처를 입었으며, 무지와 고통과 죽음의 영향을 받고 죄로 기우는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 죄로 기우는 성향을 ‘사욕편정’(邪慾偏情, concupiscence)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세례로 원죄가 제거된 사람에게도 이러한 성향이 남아 있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가톨릭의 원죄와 스베덴보리의 유전악은 서로 관련된 문제를 다루지만, 동일한 개념은 아닙니다. 가톨릭의 무염시태가 마리아를 원죄에서 보존되었다고 선언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마리아에게 어떤 의미의 유전적 성향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자동으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유전악을 취하셨다고 가르친다는 사실만으로 가톨릭의 원죄 개념에 따른 무염시태가 곧바로 논리적으로 반박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차이를 분명히 해야 두 전통의 실제적인 신학적 쟁점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무염시태를 검토할 때, 가장 결정적인 본문은 AC.1573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항목에서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겉 사람 안에 어머니에게서 비롯된 유전악이 있었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그는 주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아버지에게서 오는 유전악은 전혀 없었지만, 인간 어머니인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외적 인성에는 유전적 악이 있었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AC.1573은 이러한 모성적 유전성이 주님께서 실제로 시험을 받으실 수 있었던 이유와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유전악을 취하셨다는 사실과 실제로 죄를 지으셨다는 주장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실제적인 악을 행하셨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유전적 악을 통하여 시험을 받으셨지만, 자신의 신적 능력으로 모든 시험을 이기셨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의 영혼은 처음부터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온 신성 자체였으며, 그분에게는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악이 전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자연적 인성은 영화되어야 할 대상이었고, 주님께서는 시험과 싸움을 통하여 그 인성을 점차 신적으로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거룩함은 마리아가 특별히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조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주님 안에 계신 신성 자체에서 비롯됩니다.

 

이러한 구별은 AC.4564에서 더욱 명확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일반 인간이 거듭날 때, 유전악과 실제적인 악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그 악은 주님의 섭리에 의하여 분리되고 주변으로 물러나며, 인간은 주님께서 그를 악으로부터 붙드시고 선 안에 머물게 하시는 만큼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인간도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선을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천국의 천사들조차 자신들에게서 비롯되는 것은 악과 거짓이며, 그들 안에 있는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일반 인간과 전혀 다른 일을 이루셨습니다. AC.4564는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유전악을 완전히 제거하시고, 자신의 인성을 신적으로 만드셨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일반 인간의 ‘거듭남’(regeneration)과 주님의 영화 사이의 결정적 차이입니다. 인간은 주님의 능력으로 악에서 분리되고 선 안에 보존되지만, 주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유전적 악을 완전히 제거하셨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주님론에서 성육신과 구속의 핵심은 마리아의 무죄한 출생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으로 취하신 인성을 시험과 싸움을 통하여 온전히 신적으로 만드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 문제는 주님의 시험과 구속의 관계를 살펴볼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히4:15는 주님께서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는 없으시다고 가르칩니다. 주님께서 시험받으셨다는 사실과 죄 없으셨다는 사실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실제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그 시험에 굴복하여 죄를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시험을 단순히 인간에게 도덕적인 모범을 보여 주시기 위한 사건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지옥의 세력과 싸우시고, 그들을 이기심으로써 구속의 역사를 이루셨으며, 동시에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셨다고 가르칩니다.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자연적 인성은 이러한 시험이 실제로 일어나는 자리였으며, 주님께서는 자신의 신적 능력으로 그 모든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인성이 마리아에게서 유전적 악의 성향을 취하셨다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주님의 거룩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왜 실제적인 시험을 받으셨으며 어떻게 구속과 영화를 이루셨는지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주님의 성육신을 이해하기 위하여 마리아의 무염시태를 필수적인 조건으로 설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성육신론에서 도출되는 판단이지, AC.1573 자체가 마리아의 무염시태라는 후대의 가톨릭 교리를 명시적으로 논박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원문이 직접 가르치는 내용과 그 가르침에 근거한 신학적 판단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염시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리아가 실제로 많은 죄를 범한 사람이라고 판단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유전악을 취하셨다고 가르친다는 사실은 그의 저작을 통하여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마리아가 지상 생애 동안 어떤 구체적인 죄를 범했는지까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역시 마리아의 일생과 그의 모든 내적 상태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무염시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리아를 특별히 죄 많은 사람으로 묘사해서는 안 됩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되었고, 천사의 말씀에 순종했으며, 자신의 하나님이자 구주를 찬양한 복된 여인입니다. 눅1:38에서 그는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고 부르며,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눅1:46-47에서는 자신의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하나님 자신의 구주를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자신의 거룩함을 자랑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은총과 구원을 기뻐하는 인간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천주교는 이러한 고백이 무염시태와 모순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마리아도 그리스도의 공로로 미리 구속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마리아에게 특별한 무죄의 출생 상태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그가 주님의 은총을 받고 거룩한 쓰임을 감당한 복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별은 인간의 거룩함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거룩함을 어떤 사람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특별한 성질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모든 참된 선과 거룩함의 근원은 오직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에게서 선을 만들어 내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만큼 거룩한 삶에 참여하는 존재입니다. 이는 마리아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근본적인 원리입니다. 어떤 사람이 매우 높은 천국의 상태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그가 선 자체의 근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피조물입니다. 물론 천주교 역시 마리아의 거룩함을 하느님에게서 독립된 속성으로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모든 은총과 거룩함이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두 전통의 차이는 거룩함의 궁극적인 근원이 누구인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원죄에서 보존되었다는 특별한 상태를 신적으로 계시된 진리로 인정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은 이러한 특별한 무죄 상태를 가르치지 않으며, 오히려 마리아에게서 유전적 인간성을 취하신 주님의 시험과 영화에 신학적 무게중심을 둡니다. 또한 그가 설명하는 거듭남의 질서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가보다, 주님께서 그 인간 안에 있는 악을 어떻게 다루시고 새로운 생명을 이루시는가에 더욱 집중하게 합니다.

 

이제 우리는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특별히 선택된 복된 여인이었다는 사실은 성경에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자신의 하나님이자 구주를 찬양했다는 사실도 귀중한 진리입니다. 또한 천주교가 마리아의 특별한 거룩함을 그의 독립적인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과 은총에 근거한다고 가르치는 점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자신의 잉태 첫 순간부터 원죄에서 완전히 보존되었으며, 평생 모든 실제적인 죄에서도 자유로웠다는 주장은 성경의 직접적인 진술을 넘어서는 교리적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도 이 교리를 신적으로 확정된 진리로 받아들여야 할 근거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유전악을 취하셨고, 그 유전적인 것을 시험과 싸움을 통하여 완전히 제거하시고, 인성을 영화하셨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은 마리아가 태어날 때부터 얼마나 특별한 상태에 있었는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모든 시험을 이기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심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에 집중해야 합니다. 마리아는 그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된 복된 인간이지만, 성육신의 능력과 구속의 완성은 오직 주님께 속합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가 보여 준 믿음의 가장 귀중한 모습을 생각해야 합니다. 눅1:38에서 마리아는 자신의 특별한 신분이나 거룩함을 선언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의 중심에는 마리아 자신이 아니라 그에게 말씀하시고 역사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우리는 특별한 사람의 출생과 거룩함을 바라보는 데 머무르기보다, 주님께서 지금 우리 안에서 이루고 계시는 거듭남의 역사에 주목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유전악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주님께서 베푸시는 선과 진리의 생명으로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리아에게서 자연적 인성을 취하셨지만, 그 인성의 유전적 한계에 머물러 계시지 않고, 자신의 신적 능력으로 그것을 영화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모든 인간에게 당신의 사랑과 진리를 주시며, 그들이 천국의 생명으로 거듭나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가장 위대한 신비는 마리아의 특별한 출생 상태가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모든 시험을 이기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심으로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인간의 구원과 거룩함의 유일한 근원은 마리아가 아니라, 마리아가 자신의 하나님이자 구주로 찬양했던 바로 그 주님 한 분이십니다. (SL.RC.032 해설)

 

 

‘마리아는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원죄 없이 보존되었다’라는 명제에는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특별히 선택되었으며, 모든 참된 거룩함과 구원이 하느님의 은총에서 비롯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천주교는 무염시태를 마리아가 구속이 필요 없는 독립적인 존재였다는 뜻으로 가르치지 않으며, 오히려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하여 특별한 방식으로 구속받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잉태 첫 순간부터 원죄에서 완전히 보존되었고 평생 개인적인 죄도 범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을 넘어서는 교리적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1573에서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유전악을 취하셨다고 직접 가르치며, AC.4564에서는 주님께서 그 유전적인 악을 완전히 제거하고 자신의 인성을 신적으로 만드셨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가톨릭의 원죄와 스베덴보리의 유전악은 동일한 개념이 아니므로, 두 교리의 차이를 단순한 직접적 모순으로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 분명한 것은 주님의 성육신과 영화가 마리아의 무염시태를 필수적인 전제로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마리아를 복된 여인으로 존중하거나 그의 특별한 소명을 인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경의 직접적인 증언과 스베덴보리의 주님론에서 확증되지 않는 특별한 무죄의 출생 상태를 모든 신자가 반드시 믿어야 할 신적 진리로 확정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의 거룩함은 마리아에게서 비롯되지 않았으며, 처음부터 주님 안에 계신 신성 자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주님은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인성을 자신의 능력으로 영화하셨고, 모든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구원의 근원 역시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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