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40.심화

 

1. ‘16: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6:11)

 

 

AC.340에서 스베덴보리가 창16:11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를 인용한 직접적인 이유는 이스마엘 자체를 해설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여기서는 가인’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고대인들이 이름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예로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AC.340의 중심에는 하와가 한 말,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와 가인’이라는 이름의 관계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은 본래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의 신앙의 교리’로 정리하기 시작하면서, 마치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얻은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새롭게 구별하여 세운 신앙의 교리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독자에게는 이것이 다소 낯설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한 문장인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가 가인’이라는 이름과 연결되고, 더 나아가 하나의 신앙의 교리를 나타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성경 안에서 이름과 그것이 나타내는 상태가 연결되는 여러 사례를 제시합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16:11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고 하면서 곧바로 그 이유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라고 설명합니다.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뜻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이 이름은 단순히 아이를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한 호칭이 아니라, 그때 일어난 일과 그 상태를 이름 안에 담고 있습니다. 하갈의 고통을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사실을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AC.340에서 중요한 것은 이스마엘은 무엇을 상응하는가?’가 아닙니다. 여기서는 이름을 붙이는 방식’이 중요합니다.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다’라는 어떤 상태와 사건이 있고, 그것을 한 이름 안에 담아 이스마엘’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르우벤, 시므온, 유다의 사례도 모두 같은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예를 연이어 제시함으로써 가인’이라는 이름 역시 아무 의미 없이 붙인 고유명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을 가인에게 적용하면 구조가 선명해집니다. ‘이스마엘’에는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의미가 담겨 있고, ‘르우벤’에는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다’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유다’에는 이번에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가인’에는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로 표현된 상태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AC.340은 그 상태가 무엇인지를 밝혀 줍니다. 바로 신앙에 속한 것들을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상태에서 그것들을 따로 꺼내어 하나의 신앙의 교리로 정리하고, 그것을 마치 새롭게 얻은 무엇처럼 여긴 상태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창16:11을 인용한 데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AC.339에서 설명한 태고인들은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어떤 것들을 의미하게 했다’는 원칙을 실제 성경 구절을 통해 보여 주는 것입니다. AC.339에서 원리를 설명했다면, AC.340에서는 성경을 보라. 실제로 이름이 이런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았는가?’ 하며 구체적인 사례들을 제시하는 셈입니다.

 

특히 이것은 창4를 평범한 가족 족보처럼 읽지 않는 데 중요합니다. ‘가인’이라는 이름을 단순히 한 개인의 이름으로만 읽으면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하와의 말은 출산에 대한 감사 정도로 보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고대의 이름이 그 이름으로 나타내는 어떤 성질과 상태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가인’이라는 이름 자체가 태고교회 안에서 새롭게 나타난 교리의 성격을 표현한다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다만 이스마엘과 가인 사이에는 구별할 점도 있습니다. 16:11은 실제 역사적 시대에 속하는 기록이므로 하갈과 이스마엘의 역사적 사건이 있으면서 동시에 그 안에 속뜻이 있습니다. 반면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창4는 앞서 AC.339에서 확인했듯 태고교회의 영적인 일들을 이름과 출생과 계보의 형식으로 표현한 기록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이스마엘과 가인을 똑같은 종류의 역사적 인물로 놓고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 안에 그 이름으로 나타내는 어떤 상태와 의미를 담는다’는 고대의 명명 방식이 말씀 안에서도 확인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 이스마엘을 예로 든 것입니다.

 

결국 창16:11 AC.340에서 인용한 이유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이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다’라는 의미를 담아 붙인 이름인 것처럼, ‘가인’이라는 이름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로 표현된 어떤 영적 상태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란 이전에는 마음에 새겨져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의 교리로 만들고, 그것을 마치 새롭게 얻은 독립된 무엇처럼 여기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이 인용은 이스마엘을 설명하기 위한 곁가지가 아니라, ‘가인’이라는 이름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열쇠입니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나타내는 상태를 담는 그릇이며, ‘가인’이라는 이름 안에는 태고교회에서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구별되어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결정적인 변화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AC.340, 창4:1,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4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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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4:1)

 

AC.34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라는 말은 가인(Cain)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하고 인정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이 장의 처음에서 말한 것으로 분명합니다. 이전에 그들은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마치 알지 못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앙에 관한 구별된 교리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이전에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것들을 가져다가 교리로 정리하였고, 그것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하여 이전에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이제는 단지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었습니다. 고대에는 새로운 것이 생길 때마다 그것에 이름을 붙였으며, 이런 식으로 그 이름 안에 담긴 것들을 나타냈습니다.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Jehovah hath heard her affliction)라는 말로 설명되고(16:11), That the words “I have gotten a man, Jehovah” signify that with such as are called “Cain” faith is recognized and acknowledged as a thing by itself,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at the beginning of this chapter. Previously, they had been as it were ignorant of what faith is, because they had a perception of all the things of faith. But when they began to make a distinct doctrine of faith, they took the things they had a perception of and reduced them into doctrine, calling it “I have gotten a man, Jehovah,” as if they had found out something new; and thus what was before inscribed on the heart became a mere matter of knowing. In ancient times they gave every new thing a name, and in this way set forth the things involved in the names. Thus the signification of the name Ishmael is explained by the saying, “Jehovah hath heard her affliction;” (Gen. 16: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6:11)

 

르우벤은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므로(Jehovah hath looked upon my affliction)라는 말로(29:32), that of Reuben, by the expression, “Jehovah hath looked upon my affliction;” (Gen. 29:32)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29:32)

 

시므온은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Jehovah hath heard that I was less dear)라는 말로(29:33), the name Simeon, by the saying, “Jehovah hath heard that I was less dear;” (Gen. 29:33)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29:33)

 

유다는 이번에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This time will I praise Jehovah)라는 말로 설명됩니다(29:35). and that of Judah by, “This time will I praise Jehovah;” (Gen. 29:35)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29:35)

 

또한 모세는 자신이 세운 제단에 여호와 닛시’, 여호와는 나의 깃발(Jehovah my banner)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17:15). and an altar built by Moses was called, “Jehovah my banner.” (Exod. 17: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7:15)

 

이와 같은 방식으로 여기서는 신앙의 교리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In like manner the doctrine of faith is here denominated “I have gotten a man, Jehovah,” or “Cain.”

 

 

해설

 

AC.340은 바로 앞 AC.338에서 나온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이라는 표현을 한층 더 깊이 설명합니다. 특히 이 글을 읽으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거짓된 신앙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들이 교리로 정리한 내용은 원래 태고교회 안에 이미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이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알았는가’보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그리고 ‘그 신앙이 사랑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역설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들은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마치 알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신앙이 없었다거나 신앙에 무지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이 그들의 사랑과 생명 안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들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따로 떼어 ‘이것이 신앙이다’라고 정의하거나 하나의 교리 체계로 만들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부모를 깊이 사랑하며 평생 살아왔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는 먼저 ‘부모 사랑의 원칙’을 배우고 그것을 실천하여 부모를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부모를 존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돌보며, 사랑하기 때문에 어려울 때 돕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부모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항목별로 설명해 보라’고 하면 오히려 잠시 생각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부모 사랑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그것을 지식으로 정리하기 전에 이미 삶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이 신앙을 ‘마치 알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이전에는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하나씩 꺼내어 구별하고 정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신앙에 관한 구별된 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표현합니다. 전에는 사랑 안에서 하나로 살아 있던 것들을 이제는 대상으로 삼아 ‘이것은 신앙에 속한 것이다’, ‘저것도 신앙에 속한 것이다’라고 구별하여 하나의 교리로 정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 교리를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를 곧 악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핵심은 그 과정에서 신앙과 사랑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변화를 매우 인상적으로 표현합니다. ‘이전에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이제는 단지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었다.’ AC.340 전체를 이해하는 데 이보다 중요한 문장은 많지 않습니다.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는 것은 단순히 기억 속에 많은 진리를 저장하고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진리가 그들의 사랑과 삶 안에 있었고, 그래서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내적으로 퍼셉션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진리를 사랑에서 구별하여 교리로 정리하고 하나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이전에는 ‘살아서 알던 것’이 점차 ‘배워서 아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진리의 내용 자체가 갑자기 거짓이 된 것은 아닙니다. 진리가 사람 안에 존재하는 방식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AC.338에서 살펴본 ‘가인의 분리’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처음에는 사랑 안에 신앙이 있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믿었고, 사랑 안에서 무엇이 참인지를 퍼셉션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신앙에 속한 것들을 사랑에서 구별하여 하나의 교리로 정리하면서,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마치 전에는 없었던 무엇인가를 새롭게 발견한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마치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새롭게 발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미 그들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것을 이제 밖으로 꺼내어 이름을 붙이고 교리로 정리한 것입니다. 바로 이 새로운 신앙의 교리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곧 ‘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이라는 이름에는 단순히 ‘신앙’이라는 뜻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변화까지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는 매우 미묘한 역설이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엇인가를 잃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을 이제 지식으로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진리를 살아서 알았는데 이제는 진리를 대상으로 삼아 알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사랑 안에서 무엇이 참인지 퍼셉션했는데, 이제는 교리를 통하여 무엇이 참인지 배우게 되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신앙에 관한 지식과 체계가 생겨났으니 무엇인가 발전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태고교회 특유의 퍼셉션이 사라져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AC.340을 근거로 ‘교리나 지식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고 이미 설명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으로부터 신앙을 가졌지만, 오늘날의 인간은 먼저 신앙의 진리를 배우고, 그 신앙으로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질서를 따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이해하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분별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질서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에서 신앙으로’ 나아가는 질서가 있었습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퍼셉션했고, 그 진리가 곧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인으로 나타나는 변화에서는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하나의 독립된 교리로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반면 오늘날 우리는 먼저 신앙의 진리를 배우되, 그것이 체어리티로 이어지고 마침내 삶에 새겨져야 합니다. 표현을 조금 달리하면, 태고교회에서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단지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는’ 방향으로 변화가 일어났다면, 오늘날 우리의 거듭남은 ‘지식으로 배운 진리가 다시 마음과 삶에 새겨지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AC.340 후반에서 스베덴보리가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 유다, 그리고 ‘여호와 닛시’를 차례로 예로 드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고대인들에게 이름은 단순히 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한 호칭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름에는 그 사람이나 대상과 관련된 어떤 성질과 상태가 담겨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사실이 이스마엘이라는 이름과 연결되고,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다’는 사실이 르우벤과 연결되며, ‘이번에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말이 유다라는 이름과 연결됩니다. 같은 방식으로 ‘가인’이라는 이름에도 그 이름으로 나타낸 신앙의 교리가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도 단순히 한 여인이 아이를 낳고 기뻐하며 한 말로 읽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앞서 AC.339에서 살펴본 것처럼, 창4의 잉태와 출생과 이름과 계보는 태고교회 안에서 교리에 속한 것들이 어떻게 생겨나고 서로에게서 파생되었는지를 나타냅니다. 여기서는 이전까지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하나의 독립된 교리로 정리하여 ‘우리가 이것을 얻었다’고 여긴 상태를 ‘가인’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 대목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 역시 말씀을 공부하고 교리를 배우면서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정리하고 체계적으로 이해하면서 큰 기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한 가지를 함께 물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알게 된 이 진리가 내 마음과 삶에도 새겨지고 있는가?’입니다. 지식이 늘어나는 것과 생명이 깊어지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히 AC를 읽는 우리에게는 이 질문이 더욱 실제적일 수 있습니다. ‘상응’, ‘퍼셉션’, ‘리메인스’, ‘인플럭스’, ‘속 사람과 겉 사람’,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 같은 개념을 점점 정확하게 이해하고 서로 연결할 수 있게 되어도, 그것 자체가 곧 거듭남은 아닙니다. 그 진리로 자기 안의 악을 보고,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하며,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더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갈 때, 머리로 배운 진리가 점차 마음과 삶에 새겨지기 시작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AC.340은 ‘진리를 얼마나 많이 발견했는가?’만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진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묻습니다. 마음에 새겨져 생명으로 살아 있는가, 아니면 기억 속에 저장된 지식으로만 남아 있는가? 교리가 사랑을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교리가 사랑에서 떨어져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이 되어 있는가? 가인의 시작은 처음부터 명백한 거짓을 믿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본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참된 것을 사랑에서 구별하여 별도로 소유하기 시작한 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AC.340의 핵심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진리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이미 마음에 새겨져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사랑에서 구별하여 하나의 교리로 정리하고, 그것을 마치 새롭게 얻은 독립된 무엇처럼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미세한 변화 속에 이후 가인의 계열에서 점점 더 분명하게 나타날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이미 씨앗처럼 들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340은 단순히 ‘가인’이라는 이름의 뜻을 설명하는 글을 넘어섭니다. 우리가 진리를 대하는 방식 자체를 돌아보게 합니다. 진리는 많이 알고 소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이 되기 위한 것이며, 교리는 사랑을 대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거듭남의 길은 머리로 배운 진리가 주님의 역사하심으로 점차 마음과 삶에 새겨져, 마침내 우리가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과 살아가는 것이 다시 하나가 되어 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화

 

1. ‘16:11

 

 

AC.340, 심화 1, ‘창16:11’

AC.340.심화 1. ‘창16: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창16:11) AC.340에서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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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9, 창4:1, ‘창4의 계보를 읽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39 앞의 세 장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가 태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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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어떤 수도사의 일화를 중심으로 하기보다, 강문호 목사님이 왜 수도원을 공부하게 되었고, 그 가운데 특히 아토스산 수도 공동체에서 무엇을 인상 깊게 보았는지를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강 목사님은 은퇴를 앞두고 기도하던 중 수도원의 영성을 세상에 전해야 한다는 사명을 받았다고 이해했고, 그 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여러 나라의 수도원을 직접 찾아다니며 수도 전통을 공부했다고 말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강한 인상을 받은 곳이 그리스의 아토스산(Mount Athos)이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토스산은 그리스 영토 안에 있으면서 특별한 자치권을 가진 정교회 수도 공동체이며, 현재 20개의 주요 수도원이 있습니다. 수도 전통은 적어도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여성의 출입을 제한하는 ‘아바톤(avaton) 전통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위키백과)

 

강 목사님은 아토스산을 ‘수도사들의 나라’처럼 묘사합니다. 표현 자체는 다소 과장될 수 있지만, 그곳이 일반적인 수도원 하나와 다른 독특한 공동체라는 점은 맞습니다. 아토스산은 하나의 반도 전체에 여러 수도원과 스케테, 은수처가 분포하며, 행정적으로도 자치적인 수도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약 20개의 수도원이 존재하고, 천 명이 넘는 수도사들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UNESCO도 아토스산을 오랜 정교회 수도 전통의 중심지로 소개합니다.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영상에서 강 목사님이 특히 놀라워하는 것은 ‘여성이 들어오지 않는 남성 수도 공동체가 천 년 넘게 유지되어 왔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아토스산에는 여성의 출입을 금지하는 전통이 있으며, 이는 중세부터 제도화되어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위키백과)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서 즉시 한 가지 구별이 필요합니다. 여성과의 접촉을 차단하는 외적 환경은 수도자의 정결을 돕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정결을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음란과 욕망은 외부의 대상이 있기 때문에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의 애정과 사랑의 질서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이 전혀 없는 장소에서도 사람은 음란한 상상과 자기 사랑을 품을 수 있고, 반대로 남녀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 안에서도 주님으로부터 순결한 결혼애와 절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상에서 어떤 수도사가 ‘하와 한 명만 들어와도 이곳은 무너진다’는 취지로 말했다는 이야기는 수도 전통 안에서는 이해될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상당히 조심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성을 남성 수도자의 영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외적 위험 요소처럼 보는 순간, 인간 안의 욕망에 대한 책임이 외부 대상에게 옮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음란의 근원은 ‘여자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 안의 사랑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순결은 여성을 보지 않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욕망의 대상으로 소유하려는 사랑이 변화되어 상대를 하나의 인격과 영적 존재로 존중하게 되는 데서 형성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특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는 남녀의 차이를 창조질서 안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참된 결혼애를 천국의 가장 깊은 사랑 가운데 하나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성 자체를 영적 위험으로 이해하는 수도적 감수성과 스베덴보리의 결혼 이해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수도자의 독신은 개인의 소명과 훈련이 될 수 있지만, 남녀의 결합 자체가 더 낮은 영적 삶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결혼애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표상하며, 천국의 질서와 깊은 상응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상에는 아토스산 수도사들이 죽으면 일정 기간 매장한 뒤 뼈를 다시 꺼내 납골당에 보존하는 관습도 소개됩니다. 이러한 관습은 실제 아토스산의 수도 전통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육체의 덧없음을 기억하고 죽은 수도사들을 공동체 안에서 계속 기억하기 위한 방식입니다. (인스타그램)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해골과 뼈는 인간의 참된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는 영으로 계속 살아가며, 자연적 육체만 세상에 남습니다. 그러므로 수도자의 뼈를 바라볼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도 언젠가 뼈가 된다’가 아니라 ‘내가 이 육체를 벗은 뒤에도 그대로 가지고 갈 사랑은 지금 무엇인가’일 것입니다.

 

강 목사님은 아토스산 수도자들의 모습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사는 모습’으로 이해하며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에는 상당히 귀한 면이 있습니다. 세상의 성공과 재물과 명예에서 거리를 두고 하나님께 집중하려는 삶은 우리 자신의 욕망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무엇을 더 소유하고, 더 경험하고, 더 유명해질 것인가가 삶의 중심이 되기 쉽기 때문에, 그것과 정반대 방향으로 살아가는 수도자의 모습은 사람에게 강한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과연 무엇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본다’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시간이 많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은 결국 이웃을 향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루 종일 기도하면서도 옆 사람을 업신여기고, 자신의 영적 수준을 자랑하며,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정죄한다면 그 기도는 아직 사랑과 결합되지 않은 것입니다. 반대로 생활 속에서 맡은 일을 정직하게 수행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며, 자신의 악을 피하는 사람은 외적으로 수도원에 살지 않아도 실제로 주님을 바라보며 살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아토스산의 수도 전통을 바라볼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외적 극단성을 영적 깊이와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천 년 동안 여성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 수도사들이 평생 독신으로 산다는 사실, 죽은 뒤 뼈를 다시 거두어 납골당에 둔다는 사실, 세상과 단절된 산속에서 기도한다는 사실은 모두 강렬한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의 영적 수준을 판단하는 기준은 이런 외적인 희생의 크기가 아닙니다. 그 안에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실제로 얼마나 약해졌으며,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얼마나 자라났는가가 기준입니다.

 

사람은 세상을 떠나면서도 세상 사랑을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수도원 안에서 재산을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명예를 사랑할 수 있고,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은수자가 되면서도 ‘나는 특별한 수도자’라는 자기 의식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proprium의 매우 미세한 모습입니다. 반대로 큰 도시에서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며 살아도 자신의 재물을 주님께서 맡기신 것으로 여기고, 정직하게 사용하며, 이웃을 위해 유용하게 쓴다면 그 사람의 자연적 삶 안에는 천국적인 질서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는 강 목사님 자신이 ‘한국 사람으로서 이곳을 밟은 최초의 사람’이라는 말을 수도원마다 들었다고 소개합니다. 이 부분은 영상 자체에서 단순한 여행 경험이나 놀라움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러한 종류의 경험에서도 아주 조용한 경계를 하나 세웁니다. 영적인 길에서 ‘내가 최초다’, ‘내가 특별한 곳에 갔다’, ‘나는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했다’는 사실은 영성의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특별한 경험을 많이 할수록 그것을 자기 특별함의 근거로 삼지 않도록 더 깊은 겸손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특별한 경험을 허락하셨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떤 선한 쓰임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보는 편이 영적 질서에 맞습니다.

 

영상에서 언급되는 ‘성 뽀르피리오스’는 아마 현대 정교회에서 널리 존경받는 성 포르피리오스(St. Porphyrios)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강 목사님은 그의 수도생활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아토스산에 대한 갈망이 커졌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서도 중요한 것은 어떤 수도자의 비범한 체험이나 영적 능력 자체보다, 그 삶을 통해 주님과 이웃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수도자의 신비한 체험을 동경하기 시작하면 신앙은 쉽게 특별한 현상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를 실제로 보고 천사와 영들과 대화한 사람이었지만, 흥미롭게도 자신의 독자들에게 그런 체험을 추구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에게 가장 안전한 길은 말씀을 읽고, 계명을 따라 악을 피하며, 자신의 직업과 관계 속에서 선한 쓰임을 행하는 것이라고 반복합니다. 영적 세계를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자연계에서 어떤 사랑으로 살아가는가입니다. 이런 점에서 수도사들의 신비 체험 역시 ‘어떻게 그런 체험을 할 수 있을까?’보다 ‘그 체험 때문에 그 사람은 더 겸손하고 더 선한 사람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강 목사님은 영상 마지막에서 아토스산과 같은 수도 영성이 한국 교회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소개하고 싶어 이 유튜브 채널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취지는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는 종교개혁 이후의 전통에 익숙한 반면, 그보다 훨씬 오래된 동방교회의 수도 전통이나 초기 기독교의 금욕적 영성은 상대적으로 낯설기 때문입니다. 다른 기독교 전통을 접하는 것은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다른 전통이 오래되었다거나 낯설고 신비롭다는 이유로 자동적으로 더 깊은 영성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모든 전통은 결국 말씀과 주님의 질서라는 기준 아래에서 분별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수도원 영성이 한국 교회에 던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질문은 ‘우리도 수도원에 들어가야 하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세상 사랑에 얼마나 붙들려 있는가?’일 것입니다. 수도자들이 재산과 명예와 결혼을 포기한 모습을 보며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나는 내가 가진 재산과 지위와 관계를 어떤 사랑으로 사용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수도자의 외적 포기는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형식이 아니지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내려놓는 내적 포기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됩니다.

 

그리고 아토스산의 가장 깊은 영성을 스베덴보리식으로 다시 표현한다면,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며 사는 것’보다 ‘자기에게 있는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그것을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의 삶이어야 합니다. 주님께 가까워질수록 사람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더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 영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토스산의 천 년 수도 전통과 철저한 금욕은 현대의 신앙인에게 강한 질문을 던지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참된 수도의 깊이는 얼마나 세상과 단절했는가가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강 목사님이 감탄했던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이라는 말을 조금 더 깊게 다듬는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으로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사람은 세상을 보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속 모든 사람과 모든 쓰임을 주님의 질서 안에서 바라보기 시작하는 사람입니다.’

 

 

 

SY.65, 강문호 목사, ‘이영길 수도사’ (20191210)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이영길 수도사’라는 한 인물을 통해 수도의 완성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강문호 목사님은 전남 화순의 깊은 산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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