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3

 

이 장의 끝에서는,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의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하겠습니다. At the end of the chapter, several examples will be given of those who during their abode in this world had thought otherwise.

 

 

해설

 

AC.323은 한 문장으로 된 매우 짧은 글이지만, AC.320-322에서 다룬 내용을 다음에 이어질 실제 영계 경험과 연결해 주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여기서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이란, 사람이 죽은 뒤에도 지금과 같은 인간으로 살아가며,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는 모든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완전한 감각과 사고 능력을 지닌다는 사실을 지상 생애 동안 믿지 않았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AC.320에서는 사람이 저세상에 들어간 직후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삶의 연속성이 완전하다는 것을, AC.321에서는 영의 감각과 사고와 말하는 능력이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AC.322에서는 그것을 시각, 청각, 후각, 촉각, 애정, 사고와 언어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AC.323은 이제 이러한 설명을 교리적 진술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실제 사례를 통하여 확인하겠다고 예고하는 글입니다.

 

특히 ‘during their abode in this world’를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이라고 옮긴 데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abode’에는 단순히 이 세상에서 ‘살았다’는 것보다 잠시 ‘머물렀다’는 뉘앙스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인간관에서 지상의 육체적 삶은 인간 존재의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삶의 첫 단계입니다. 사람은 잠시 자연계에 머물면서 자신의 사랑과 삶의 방향을 형성하고, 육체를 벗은 뒤에는 그 생명이 영계에서 계속됩니다. 따라서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나 단절이 아니라, 자연계에서 영계로 삶의 장이 옮겨지는 사건입니다. AC.320에서 사람이 사후에도 자신을 여전히 같은 사람으로 느끼는 이유도 바로 이 생명의 연속성 때문입니다.

 

또한 여기서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주장을 단순한 추론이나 신학적 사변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AC.322에서 그는 ‘저는 수천 번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그 반대임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AC.323에서는 지상에 있을 때, 영의 실재와 사후의 감각적 삶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실제로 사후에 어떤 경험을 하게 되었는지를 제시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믿지 않았으니 벌을 받았다’는 식의 이야기를 예고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관념에 갇혀 있던 사람이 육체를 벗은 뒤 자신이 여전히 보고 듣고 생각하며 살아 있음을 직접 경험하면서 기존의 관념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323AC.320-322 전체의 중요한 결론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지상에서 영을 육체보다 덜 실제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영을 연기나 기운처럼 막연한 것으로 상상하거나, 사후의 삶을 의식만 희미하게 남아 있는 상태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전하는 영계는 정반대입니다. 육체가 더 실제적이고 영이 덜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영이 본래적인 인간이며, 육체는 그 영이 자연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잠시 사용하는 가장 바깥 형체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벗는 것은 인간적인 감각과 사고를 잃는 일이 아니라, 그것들을 제한하던 자연적 조건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바로 앞 AC.322와 연결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육체의 눈과 귀가 실제로 보고 듣는 주체가 아니라 영이 그것들을 통하여 보고 들었던 것이라면, 육체를 벗었다고 해서 시각이나 청각 자체가 사라질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자연적 기관의 제한이 사라지면서 영적 감각은 더욱 분명하고 완전하게 활동합니다. 그래서 사후에 자신이 여전히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지상에서 ‘육체가 감각의 주체’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는 자신의 옛 관념을 바로잡는 직접적인 경험이 됩니다.

 

따라서 AC.323의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이라는 짧은 표현에는 상당히 넓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후세계를 부정했던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은 존재하더라도 육체가 없으면 인간다운 감각과 사고를 할 수 없다고 여겼던 사람들까지 포함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제 그들이 저세상에서 자기 자신의 생생한 존재를 통하여 무엇을 깨닫게 되는지를 실제 사례로 보여 주려 합니다. AC.323은 짧지만, AC.320-322의 ‘사후에도 나는 여전히 나이며, 오히려 더 분명하게 보고 듣고 생각하고 살아간다’는 메시지를 실제 영계 경험으로 넘겨주는 하나의 문턱과 같은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22, 창4 앞, ‘시각, 청각, 후각, 촉각, 욕망과 애정, 사고와 말의 능력의 확장’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2 영들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그릇된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수천 번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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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8/09)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8,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 88, ‘내 진정 사모하는입니다.

 

오늘 일종의 쉬어가는 주로 AC 글 번호로는 314번에서 323번입니다. AC 3 뒤와 창4 , 그러니까 사후 사람이 영생에 들어가는 것’, 그리고 사후 사람이 영혼, 즉 영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내용을 함께 다루겠습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오늘은 창세기 본문이 필요 없는 AC 리딩 시간이지만, 3과 창4의 연결 시간이기도 하므로 창3:24와 창4:1을 묶어 봉독하겠습니다.

 

2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3:24; 4:1)

 

제목은

 

사람이 영생에 들어간다는 것과 영으로 산다는 것

 

이며, 다음은 오늘 범위인 AC.314-323 요약입니다.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AC.314-319)

 

AC.314-319는 사람이 죽은 뒤 어떻게 천사들의 인도를 받고, 자신의 내적 사랑과 삶의 질에 따라 점차 천국 또는 지옥을 향해 나아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후 처음 의식을 회복한 사람에게는 빛의 사용이 허락되고, 영적 천사들은 그가 원하는 것을 가능한 한 친절하게 도우며,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저세상의 일을 알려 줍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섭리의 중요한 원리가 드러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진리를 한꺼번에 강요하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상태와 수용 능력, 그리고 자유를 존중하시며,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씩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러한 가르침과 인도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내적 성향 때문에 천사들의 가르침을 원하지 않게 되고, 결국 스스로 천사들에게서 멀어지려 합니다. 중요한 것은 천사들이 그 사람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의 사랑과 성향에 따라 그들에게서 떠난다는 점입니다. 천사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친절히 돕고 가르치며, 가능한 한 천국으로 인도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천국의 사랑은 결코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이 끝까지 존중됩니다.

 

이후 사람은 다시 선한 영들의 공동체로 인도되어 도움을 받지만, 세상에서 형성된 그의 삶이 그들과 함께 머물 수 없는 성격이라면 그곳에서도 스스로 떠나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여러 차례 반복되며, 마침내 그는 자신의 세상에서의 삶과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마치 자기 자신의 삶을 다시 발견한 것처럼 느끼며, 결국 자신이 평생 사랑해 온 것이 무엇이었는지가 온전히 드러납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은 외부에서 강제로 배정되는 장소라기보다, 사람이 자신의 가장 깊은 사랑을 따라 스스로 찾아가는 영적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또한 사후의 인도 과정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속도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더 천천히, 어떤 사람은 더 빨리 천국으로 나아가며, 심지어 죽은 직후 거의 곧바로 천국으로 올려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주님의 사랑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각 사람이 지상에서 얼마나 천국의 사랑과 질서에 맞는 삶을 이미 형성하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AC.318의 첫 번째 사례는 이를 잘 보여 줍니다. 한 사람은 처음에는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여전히 세상에 있다고 생각했으며, 집과 재산을 모두 잃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걱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천적 천사들의 큰 친절을 받은 뒤, 그의 마음에서 나온 생각은 ‘이 큰 사랑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였습니다. 바로 이 반응을 통하여 그가 지상에서도 이미 신앙의 체어리티 가운데 살았던 사람임이 드러났고, 그는 곧바로 천국으로 올려졌습니다. 사후에 새로운 성품이 생긴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형성된 사랑이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입니다.

 

AC.319에서는 또 다른 사람이 천사들에 의해 곧바로 천국으로 옮겨져 주님께 받아들여지고 천국의 영광을 보게 된 사례를 덧붙입니다. 이를 통해 스베덴보리는 사후의 길에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일반적인 질서가 있지만, 그 질서가 기계적으로 동일한 기간과 단계로 진행되는 것은 아님을 보여 줍니다. 이미 세상에서 천국의 삶을 자신의 내적 삶으로 형성한 사람에게는 긴 준비가 거의 필요하지 않을 수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는 보다 긴 정리와 준비의 과정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사람을 인도하고 받아들이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며, 천사들은 그 섭리를 수행하는 사랑의 봉사자들입니다.

 

따라서 AC.314-319의 핵심은 사후의 심판이 외부에서 내려지는 일방적인 판결이 아니라, 사람의 내적 사랑이 드러나고, 그 사랑과 맞는 공동체를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능한 한 사람을 천국으로 이끄시지만, 결코 그의 자유를 빼앗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자신이 세상에서 형성한 사랑을 따라 결국 자신의 영원한 삶의 자리를 찾아가며, 이미 천국의 사랑 가운데 살아온 사람에게 죽음은 천국의 삶이 중단 없이 계속되는 하나의 전환일 뿐입니다.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AC.320-323)

 

AC.320-323은 사람이 죽은 뒤에도 여전히 이전과 같은 사람으로 살아가며, 오히려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완전한 감각과 사고 능력을 지니게 된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사람이 저세상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여전히 이 세상에 있으며, 심지어 아직도 육체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죽음이 의식의 단절이 아니라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죽는 순간에도 기억과 생각, 욕망과 애정, 성격과 사랑을 그대로 지닌 채 영계로 들어가므로, 자신이 여전히 같은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AC.321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영의 감각과 사고와 말하는 능력이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육체를 벗으면 인간성이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분명하고 실제적으로 드러납니다. 다만 영들은 이러한 변화를 처음부터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며, 주님께서 성찰의 빛을 허락하실 때, 비로소 자신의 현재 상태와 지상에서의 상태를 비교하여 그 차이를 깨닫게 됩니다.

 

AC.322는 이를 시각, 청각, 후각, 촉각, 애정, 사고와 언어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영들은 지상의 한낮의 빛과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밝은 빛 가운데 보고, 육체의 청각으로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하게 들으며, 후각과 촉각 역시 훨씬 더 완전하게 사용합니다. 특히 모든 감각은 어떤 의미에서 촉각과 관련되며, 지옥의 고통과 괴로움 역시 영적 감각이 더욱 직접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경험됩니다. 따라서 영계는 감각이 사라진 추상적 세계가 아니라, 지상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실제적인 세계입니다.

 

또한 영들은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맑고 분명하게 생각하며, 그들의 하나의 관념 안에는 지상에서의 수많은 관념에 해당하는 풍부한 내용이 담길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말 역시 생각과 애정에 훨씬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지상의 언어보다 훨씬 더 예리하고 명료하게 의미를 전달합니다. 이는 감각과 사고의 실제 주체가 육체가 아니라 영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눈과 귀, 뇌와 혀는 영이 자연계에서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며, 육체를 벗은 뒤에는 그 영적 능력이 자연적 기관의 제약 없이 더욱 자유롭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뛰어난 능력이 그 자체로 선함이나 지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악한 영들도 뛰어난 감각과 사고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자기 사랑과 거짓을 위해 사용하며, 선한 영들과 천사들은 같은 능력을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를 위해 사용합니다. 따라서 사후에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얼마나 잘 보고 듣고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그 모든 능력이 어떤 사랑을 섬기고 있느냐입니다. 생명의 질은 감각과 사고 능력 자체보다 그것들이 무엇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추구하는지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러한 관점은 육체적 장애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빛을 줍니다. 육체의 눈이나 귀가 제한되어 있다고 해서 영 자체가 손상된 것은 아닙니다. 감각의 근원은 영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연계에서 특정 감각 기관에 제약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도 영으로서는 온전한 인간 구조를 지니며, 사후에는 육체의 제한에서 벗어나 그동안 영 안에 있었던 감각과 생각과 교통의 능력을 더욱 자유롭게 나타내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육체적 장애가 사람의 proprium이나 자기 사랑을 자동으로 제거하는 것도 아닙니다. 장애가 있든 없든 모든 사람은 동일하게 주님의 거듭남이 필요합니다.

 

마지막 AC.323은 이러한 설명을 실제 사례로 이어 주는 짧은 전환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의 끝, 그러니까 창4 끝에서, 지상에 있을 때 영과 사후의 삶을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의 사례를 제시하겠다고 예고합니다. 즉 영은 희미하고 비현실적이며 육체가 없으면 감각이나 사고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사후 자신의 실제 경험을 통하여 그러한 관념이 틀렸음을 어떻게 깨닫게 되는지를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결국 AC.320-323의 중심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사람의 참된 인간성은 육체에 있지 않고 영에 있으며, 죽음은 그 인간성을 약화시키는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육체의 제약을 벗겨 그 본래 상태를 더 분명히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사람은 죽은 뒤에도 여전히 같은 사람으로 보고, 듣고, 생각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오히려 그 모든 능력은 더욱 완전해집니다. 따라서 죽음은 생명의 소멸이 아니라, 영이 자신의 본래 세계에서 더 충만하고 실제적인 삶을 시작하는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314, 창3 뒤,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AC.314-319)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Man’s Entrance Into Eternal Life AC.314 되살아난(resuscitated) 사람, 곧 영혼이 주위를 둘러볼 수 있도록 빛의 사용이 허락되면, 앞에서 말한 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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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5, 창3 뒤, ‘사람의 사후 운명은 자신의 내적 사랑과 자유로운 선택으로 결정’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5 그러나 되살아난 사람, 곧 영혼이 가르침 받기를 원하지 않는 성향이라면, 그는 천사들의 무리로부터 떠나기를 원하게 됩니다. 천사들은 이를 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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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6, 창3 뒤, ‘사람이 사후 자신의 영원한 거처에 이르게 되는 과정’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6 영혼이 이처럼 그 천사들에게서 스스로 멀어지면, 그는 선한 영들에게 받아들여지며,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도 온갖 친절한 도움을 받습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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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7, 창3 뒤, ‘저마다 다 다른 속도로 진행되는 사후의 여정’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7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천국을 향하여 더 천천히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은 더 빨리 나아갑니다. 나는 죽은 직후 곧바로 천국으로 올려진 사람들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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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8, 창3 뒤, ‘사후 거의 곧바로 천국에 올라간 처음 사례’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8 어떤 영 하나가 내게 와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는 얼마 전에 막 세상을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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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9, 창3 뒤, ‘두 번째 사례’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9 나는 또 다른 한 사람도 보았는데, 그는 천사들에 의해 곧바로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는 주님께 받아들여졌고, 천국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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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0, 창4 앞,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AC.320-323)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AC.320 영혼(soul)으로서의 삶, 곧 죽은 뒤 처음 영계에 들어가는 신참, 신생 영들(novitiate spirits)의 삶에 관한 일반적인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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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1, 창4 앞, ‘사후 두 번째 상태, 삶의 질이 더 완전해짐’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1 두 번째 일반적인 사실은, 영은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감각 기능을 훨씬 더 뛰어나게 사용하며,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 또한 훨씬 더 탁월하다는 것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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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2, 창4 앞, ‘시각, 청각, 후각, 촉각, 욕망과 애정, 사고와 말의 능력의 확장’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2 영들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그릇된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수천 번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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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3, 창4 앞, ‘창4 앞(AC.320-322)의 구체적 사례를 뒤(AC.443-448)에서 제시하겠다고’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3 이 장의 끝에서는,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의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하겠습니다. At the end of the chapter, several examples will be g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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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필수 리딩 목록은 리딩 순서대로 다음과 같습니다.

 

 

AC.314, 심화 1,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말하기’

AC.314.심화 1.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말하기’ 그들은 언제나 그 사람의 상태와 자유를 존중, 그가 진심으로 필요로 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을 제공합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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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6, 심화 1, ‘주님이 신생 영에게 일련의 코스를 밟게 하시는 이유’

AC.316.심화 1. ‘주님이 신생 영에게 일련의 코스를 밟게 하시는 이유’ 사람의 자유와 선택을 존중하시는 주님은 왜 사후 처음 눈 뜨는 영에게 이후 진행될 전체 코스를 설명, 너는 이 코스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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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2, 심화 1, ‘공주농아교회를 생각하며’

AC.322.심화 1. ‘공주농아교회를 생각하며’ 이 글을 읽으면서 반대로 농아(聾啞)인들, 그러니까 못 듣고, 말 못 하는 분들 생각과, 그분들을 대상으로 목회하시는, 저의 친구 목사님 생각이 났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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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주부터 창4 시작합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8-09(D1)

 

2663, 10, 창3.10, 2026-08-09(D1)-주일예배(창3 뒤, 창4 앞, AC.314-323), ‘사람이 영생에 들어간다는 것과 영으로 산다는 것’.pdf
0.81MB

 

 

 

주일예배(2026/08/02, 창3:23-24, AC.305-313, 성찬), ‘그룹들, 두루 도는 불 칼,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 오늘(2026/08/02)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41, ‘내 영혼아 주 찬양하여라’,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성찬), 찬87,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입니다. 오늘은 창3 아홉 번째, 본문은 창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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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첫 강의를 듣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것이 일반적인 의미의 ‘강의’라기보다 새로운 공동체를 출범시키면서 그 정체성을 설명하는 일종의 오리엔테이션이라는 점입니다. 강사는 한국 개신교 안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수도 전통을 다시 세워 보고 싶다는 상당히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도사학교를 단순한 신학교나 성경공부 모임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부하고 시험을 치고 책을 읽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보다 훨씬 깊은 곳에는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놓여 있습니다. 이 선명한 문제의식, 곧 ‘한국 개신교에 수도(修道)가 필요하다. 그리고 수도는 지식을 더 쌓는 일이 아니라 사람 자체가 달라지는 일이어야 한다.’ 이것이 첫 강의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이 강의를 상당히 호의적으로 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역시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지식의 축적에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사람에게 알려지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지만, 아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이해한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고, 의지에서 행위로 나오며, 마침내 삶의 습관과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무엇을 알고 있는가’보다 훨씬 근본적인 질문은 ‘무엇을 사랑하는가’, 그리고 ‘그 사랑에 따라 어떻게 사는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수도사학교가 처음부터 ‘또 하나의 신학 공부’를 지향하지 않고, ‘사람의 변화’를 지향했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장점입니다.

 

강의에서 반복적으로 느껴지는 또 하나의 문제의식은 한국 개신교의 ‘목회자 중심적 성공 모델’에 대한 불만입니다. 교회를 크게 하고, 사람을 모으고, 조직을 확장하고, 목회자로서 사회적 위치를 얻는 것과 복음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반드시 같은 일이 아니라는 문제의식입니다. ‘,,’ 같은 표현을 비롯, 강사는 교회가 물질과 성공을 좇으면서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가능성을 상당히 강하게 경계합니다. 이것은 표현의 강약을 떠나서 매우 성경적인 문제제기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깊어집니다. 교회의 타락은 먼저 제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가 뒤집히면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진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높이고 세상을 소유하기 위해 종교와 진리를 사용하기 시작할 때, 겉으로는 여전히 교회이고, 설교와 예배와 성경이 존재하더라도 속에서는 이미 질서가 전도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수도를 요청하는 이유를 단순히 ‘가톨릭에는 수도원이 있으니 개신교에도 수도원이 하나쯤 있어야 한다’는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더 깊은 동기는 ‘목회 성공이라는 궤도 밖에서 하나님 앞에 한 사람으로 서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귀한 문제의식입니다. 목사라는 직함도, 교회의 크기도, 설교 능력도, 학위도 잠시 내려놓고, ‘나는 실제로 어떤 사람인가’를 하나님 앞에서 묻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도 매우 가까운 곳에서 만납니다. 영계에서는 직함이나 사회적 외관이 그 사람의 본질을 결정하지 않고,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왔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수도사학교의 방향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강의에서는 상당한 정도로 훈련과 절제와 고행이 강조됩니다. 수도원 생활의 엄격함, 추위와 배고픔, 단순한 음식, 침묵, 걷기, 불편한 잠자리, 금식과 같은 경험들이 소개되고, 실제 교육과정에서도 독서와 글쓰기뿐 아니라 몸으로 견디고 경험하는 훈련이 중요하게 취급됩니다. 강사가 경험한 여러 수도원과 수도자들의 이야기도 이런 맥락에서 등장합니다. 심지어 수십 년 동안 한 장소에서 수도생활을 한 사람들, 죽을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깊은 경외도 느껴집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몸을 가진 존재이고, 삶의 습관을 바꾸려면 일정한 규율도 필요합니다. 자기 욕망을 무조건 따라가지 않는 훈련 역시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도 거듭남에는 반드시 시험이 따르며, 사람은 자기 안의 악한 욕망과 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절제와 훈련 자체를 부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현대 그리스도교가 지나치게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된다’는 방향으로 흐르면서 삶의 훈련을 잃어버렸다면, 수도 전통이 그것을 일깨워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구별이 하나 생깁니다. ‘고생하는 것’과 ‘거듭나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배가 고프다고 proprium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추운 곳에서 잔다고 자기 사랑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침묵한다고 내면의 교만이 저절로 죽는 것도 아니고, 세상과 떨어져 산다고 세상 사랑이 자동으로 정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은 수도생활 자체를 자기 공로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들과 다르다. 나는 세상을 버렸다. 나는 금식한다. 나는 고행한다. 나는 수도자다’라는 새로운 형태의 proprium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세속적 자아를 버리고 종교적 자아를 얻은 것뿐이지, 진정한 자기 부인이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바로 여기서 이 강의를 읽는 중요한 열쇠가 생깁니다. 수도사학교가 추구하는 외적 훈련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어야 합니다. 침묵도 수단이고, 금식도 수단이며, 독서도 수단이고, 공동생활도 수단입니다. 심지어 수도원도 수단입니다.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사람이 자기 안의 악을 주님 앞에서 보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여 물리치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자신의 의지와 삶 안에 자리 잡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수도원이 도움이 된다면 수도원은 귀한 장소가 됩니다. 그러나 수도원 자체가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첫 학기 과정에서 독서와 글쓰기를 상당히 강조했다는 것도 새롭게 보입니다. 강의 후반부에서 강사는 A4 용지를 기준으로 요약하고, 인상 깊은 내용을 정리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과 연결하여 쓰게 하는 식의 과제를 설명합니다. 한 달에 일정량의 글을 제출하게 하고, 많은 책을 읽게 하는 상당히 강도 높은 과정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책을 많이 읽으라는 뜻보다 ‘읽은 것이 자기 삶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쓰라’는 중요한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바로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진리는 기억에만 머물러서는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억에 들어온 진리가 이해의 대상이 되고, 자신의 상태를 비추는 빛이 되며, 의지와 행위에 연결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다만 여기에도 한 단계가 더 필요합니다. ‘내 삶과 연결한다’는 것이 단순한 자기성찰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진리는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분석하기 위한 심리학적 도구가 아니라, 무엇이 주님의 질서이고, 무엇이 그 질서에 반하는지를 분별하게 하는 빛입니다. 그러므로 독서 후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무엇을 느꼈는가’만이 아니라 ‘이 진리가 내 안에서 어떤 악과 거짓을 드러내는가’, ‘나는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주님께서는 나를 어떤 선으로 이끄시는가’가 되어야 합니다. 이 단계까지 들어가면 수도사학교의 독서와 글쓰기 훈련은 단순한 인문학적 독서가 아니라 거듭남을 위한 자기성찰로 훨씬 깊어질 수 있습니다.

 

공동체 역시 그렇습니다. 혼자 있을 때에는 자신의 성품을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일하고, 불편을 견디며 다른 사람에게 맞추어야 할 때, 비로소 자기 안에 숨어 있던 성냄, 경쟁심, 인정 욕구, 지배욕, 질투, 조급함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수도 공동체의 진정한 가치는 세상에서 도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할 수 없게 만드는 데 있을 수 있습니다. 혼자 산속에 앉아 있을 때는 자신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여러 사람과 부딪히며 살아 보면 자신이 얼마나 자기 뜻대로 되어야 편안한 사람인지 금방 드러납니다. 이 점에서 공동생활은 매우 강력한 영적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도 한 가지 더 나아갑니다. 공동체 안에서 드러난 악을 단순히 억누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규칙 때문에 화를 참는 것과 화를 내고 싶어 하는 자기 안의 악을 죄로 인정하여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은 다릅니다. 전자는 행동 교정일 수 있지만 후자는 거듭남입니다. 수도학교의 엄격한 규칙이 사람을 단정하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규칙 자체가 사람의 속 사람을 새롭게 할 수는 없습니다. 속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외적 규율은 그 역사를 위한 질서를 제공할 뿐입니다.

 

이 점에서 첫 강의에서 느껴지는 ‘강한 사람을 만들겠다’는 분위기도 조심스럽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고, 많은 책을 읽고, 어려운 훈련을 통과하며,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사람을 만들겠다는 열정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강사는 과정 중 많은 사람이 떨어져 나갈 수 있다는 것도 예상하고 있으며, 끝까지 남는 소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천국적인 사람은 반드시 의지가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자기 힘을 강하게 만든 사람’이 아니라 ‘자기 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약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힘으로 악을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고, 싸우는 힘 자체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어쩌면 실패했을 때가 아니라 성공했을 때일지도 모릅니다. 금식에 성공하고, 침묵에 성공하고, 독서량을 채우고, 남들이 포기한 훈련을 끝까지 견디고, 마침내 ‘수도사’라는 이름까지 얻었을 때, proprium은 그것을 자신의 의로 취하기 쉽습니다. ‘나는 해냈다’가 되는 순간입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은 갈수록 ‘주님께서 하셨다’는 인식이 깊어지는 과정입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듯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승리는 자신의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수도의 외적 엄격함보다 훨씬 어려운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첫 강의 중 역사 부분은 조금 다르게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니므롯, 세미라미스, 담무스, 태양신 숭배, 바벨론 종교가 이후의 여러 종교와 기독교에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상당히 큰 역사적 틀로 제시됩니다. 여기서 강사가 말하고자 하는 영적 메시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순수한 하나님 신앙이 인간의 욕망과 권력, 우상숭배와 결합하면서 변질되고, 교회 역시 언제든 그 길을 갈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이 경고 자체는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그러나 세미라미스와 담무스를 중심으로 고대 바벨론 종교에서 후대의 가톨릭 및 기독교 관습을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역사 서술은 이 자료만으로 사실이라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이 부분의 역사적 사실성은 별도의 검증 대상으로 남겨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바벨론’을 어떻게 보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바벨론의 핵심은 단순히 어떤 고대 종교의 계보가 아닙니다. 영적으로 ‘바벨론’은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사람을 지배하려는 사랑, 곧 종교적인 것을 자기 권력과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상태와 깊이 연결됩니다. 이렇게 보면 바벨론은 밖에만 있지 않습니다. 가톨릭 안에서만 찾을 수도 없고, 특정 교단에만 돌릴 수도 없습니다. 개신교 목사에게도 바벨론이 있을 수 있고, 수도자에게도 있을 수 있으며, 심지어 ‘나는 타락한 교회를 떠나 순수한 수도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자신을 높이려는 순간, 바벨론의 원리는 그 사람 안에서 다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첫 강의의 역사적 도식을 오히려 훨씬 더 날카로운 영적 질문으로 바꾸어 줍니다. ‘어느 교회가 바벨론인가?’가 아니라 ‘내 안의 바벨론은 무엇인가?’입니다. ‘어느 종교가 타락했는가?’가 아니라 ‘나는 주님의 것을 이용하여 나 자신을 높이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 강의에 더해 줄 수 있는 중요한 깊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강사가 수도 전통을 개신교가 다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는 방식입니다. 수도원이 가톨릭보다 먼저 존재했던 기독교적 유산이며, 그러므로 개신교가 수도 전통 자체를 가톨릭적인 것으로 치부하여 버릴 필요가 없다는 문제의식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여기에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실제로 기도, 침묵, 절제, 독신 또는 단순한 생활, 공동체 생활, 노동과 묵상 등 수도적 요소들은 기독교 역사 안에서 오랫동안 존재해 왔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어느 교파가 수도원의 소유권을 갖느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형식 안에 어떤 영이 들어 있느냐입니다.

 

그러므로 수도복을 입는 것도 같은 원리로 볼 수 있습니다. 강의 후반에는 과정을 마친 사람과 수도복, 수도사로서의 정체성 등에 관한 이야기도 등장합니다. 수도복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겸손과 헌신을 기억하게 하는 표지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특별한 사람이라는 의식을 강화하는 표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옷이 아니라 애정입니다. 같은 수도복을 입은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나는 주님의 종이다’라는 마음으로 입을 수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나는 보통 신자와 다른 특별한 영적 사람이다’라는 마음으로 입을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동일하지만 영적으로는 전혀 다른 상태입니다.

 

여기서 수도사학교의 이름 자체도 흥미로워집니다. 나중에 ‘수도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명칭 변경 이상의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수도사’를 만드는 학교보다 ‘수도’를 배우는 학교라는 표현이 오히려 본질에 가까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수도는 특정 신분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명칭 변경의 실제 이유를 단정하는 말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바라본 의미입니다. 진정한 수도는 ‘나는 수도사다’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하는 데 있지 않고, 날마다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주님 앞에 내어놓으며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첫 강의에서 가장 귀하게 보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사는 완성된 체계를 가르치는 사람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국 개신교 안에서 거의 해 보지 않은 일을 ‘우리끼리 시작한다’, ‘전통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도 ‘아무의 전통을 우리가 만들어 가야 되지’라는 취지의 말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는 개척자의 서툶과 동시에 진정성이 있습니다. 이미 정답을 가지고 학생들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경험하고 배우면서 길을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첫 학기 일정표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완성된 수도원 규칙서라기보다 ‘한국 개신교 안에서 수도적 삶을 어떻게 실제로 가르쳐 볼 것인가’를 처음 실험해 본 흔적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이것을 전부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부분을 살릴 수 있습니다. 침묵은 자기 말이 얼마나 많은지를 발견하게 할 수 있고, 금식은 욕망의 힘을 보게 할 수 있으며, 공동생활은 proprium을 드러내고, 독서는 이해를 열며, 글쓰기는 자신의 상태를 성찰하게 하고, 노동은 관념적인 신앙을 실제 삶으로 끌어내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을 어디로 향하게 하느냐입니다. 이 훈련들이 ‘훌륭한 수도자’를 만드는 방향으로 향하면 자기완성의 종교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거듭나게 하시도록 내 안의 악과 거짓을 발견하고 물리치는 삶’으로 향한다면 매우 유익한 외적 질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가 수도 전통에 던지는 가장 큰 질문이 나옵니다. ‘왜 세상을 떠나야 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천국 이해에서는 세상에서 맡은 직업과 책임을 성실히 수행하고, 이웃에게 유용한 일을 하면서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삶이 매우 중요합니다. 거듭남의 현장은 반드시 수도원이 아닙니다. 가정도 수도원이 될 수 있고, 직장도 수도원이 될 수 있으며, 목회 현장도 수도원이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책임을 감당하며 돈을 사용하고 갈등을 해결하고 용서하고 봉사하는 그 복잡한 일상 속에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실제 모습이 끊임없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수도원은 거듭남을 위한 특별한 ‘훈련장’이 될 수는 있어도, 거듭남의 최종 목적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 수도사학교가 품었던 이상과 스베덴보리 사이에는 생각보다 상당히 넓은 접점이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을 만드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사람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 지식을 삶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것, 자기 욕망을 그대로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 물질과 성공에 사로잡힌 종교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 실제 훈련과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 등은 서로 깊이 만납니다. 차이는 ‘그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설명하는 데서 생깁니다.

 

수도사학교에서는 그것을 상당 부분 ‘훈련을 통한 사람 만들기’로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한층 안쪽으로 들어갑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거듭나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우고, 자신을 살피고, 악을 죄로 인정하고, 그것과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듯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악을 제거하시고, 새로운 의지를 심으시며,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수도의 가장 깊은 자리는 산속 수도원의 독방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입니다. 거기에서 ‘내가 원하는 것’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만납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첫 강의를 한 문장으로 이렇게 읽어도 좋겠습니다. ‘이 강의는 세상을 버리는 수도자를 만들려는 시도라기보다, 세상에 삼켜지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만들고 싶었던 한 개신교 목회자의 몸부림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보탭니다. ‘그러나 사람이 정말 버려야 할 것은 세상 그 자체가 아니라, 세상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사랑하는 proprium이며, 사람이 정말 들어가야 할 수도원은 외딴 장소 이전에 주님 앞에 열리는 자신의 내면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첫 강의를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역사 설명에는 검토해야 할 부분이 있고, 금욕과 외적 훈련에는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으며, 수도자라는 특별한 신분을 강조할 경우 생길 수 있는 위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 흐르는 질문은 매우 진지합니다. ‘목회자가 되고도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성경을 많이 알고도 자기 욕망대로 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교회가 커지고도 하나님에게서 멀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수도사학교는 그 답을 ‘수도’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질문에 아주 깊은 곳에서 답합니다. 다시 시작해야 할 곳은 ‘’입니다. 진리가 기억에서 이해로, 이해에서 의지로, 의지에서 행위로 내려와 마침내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은 자신의 proprium이 얼마나 완강한지를 발견하고, 수많은 시험을 통과합니다. 외적으로는 평범한 가정생활을 하고, 직업을 가지고 살아도 그 사람 안에서는 치열한 수도생활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평생 수도원에 살아도 자기 사랑을 붙들고 있다면 내적인 수도는 시작되지도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첫 강의와 첫 학기 일정표를 함께 놓고 보면, 어쩌면 이 학교가 처음부터 찾고 있었던 가장 깊은 것은 ‘수도사’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이 되는 것’,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실제로 살아가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 갈망은 귀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갈망을 더 안쪽으로 인도합니다. 수도복에서 삶으로, 고행에서 회개로, 자기훈련에서 주님의 역사하심으로, 세상으로부터의 분리에서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분리로, 그리고 ‘특별한 수도자’가 되는 데서 ‘주님으로부터 새롭게 된 사람’이 되는 데로 말입니다. 저는 이 첫 강의의 가장 아름다운 가능성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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