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2, 3)

 

AC.85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the seventh day)이며, 그러므로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구별되어 안식일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아르카나(arcana)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천적 인간이 어떤 상태인지를 알지 못하였고, 영적 인간이 어떤 상태인지조차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무지로 인해, 사람들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동일시하였으나, 그 둘 사이에는 사실 매우 큰 차이가 있으며, 이는 AC.81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일곱째 날에 관해서, 그리고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 또는 ‘안식일(sabbath)이라는 사실에 관해서는, 주님 자신이 안식일이시라(the Lord himself is the sabbath)는 점에서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That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and that the seventh day was therefore hallowed, and called the sabbath, are arcana which have not hitherto been discovered. For none have been acquainted with the nature of the celestial man, and few with that of the spiritual man, whom in consequence of this ignorance they have made to be the same as the celestial man, notwithstanding the great difference that exists between them, as may be seen in n. 81. As regards the seventh day, and as regards the celestial man being the “seventh day” or “sabbath,” thi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Lord himself is the sabbath; and therefore he says: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2:28) The son of man is Lord also of the sabbath (Mark 2:27),

 

이 말씀은 주님이 곧 사람 자신(man himself)이시며, 동시에 안식일 그 자체(the sabbath itself)이심을 뜻합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주님의 나라를 가리켜 안식일이라 하는데, 이 안식은 그분으로 말미암으며, 다른 말로는 영원한 평화와 쉼이라고 합니다. which words imply that the Lord is man himself, and the sabbath itself. His kingdom in the heavens and on the earth is called, from him, a sabbath, or eternal peace and rest.

 

[2] 여기서 다루고 있는 태고교회는, 그 이후에 있었던 모든 교회들 가운데서도 무엇보다 주님의 안식일이었습니다. 이후에 이어진 모든 주님의 가장 내적인 교회들 역시 안식일이며, 또한 거듭남을 거쳐 천적인 상태가 된 모든 개인 역시 안식일입니다. 이는 그가 주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에는 여섯 날의 싸움과 수고가 선행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유대교회에서 노동의 날들과 안식일로 대표, 즉 표상되었습니다. 그 교회에는 주님과 그의 나라를 표상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제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것이 광야에서 언약궤가 나아갈 때와 쉴 때로도 표상되었습니다. 언약궤가 광야에서 행진할 때는 싸움과 시험이, 쉴 때는 평화의 상태가 표상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궤가 나아갈 때에 모세는 말하기를,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is here treated of, was the sabbath of the Lord above all that succeeded it. Every subsequent inmost church of the Lord is also a sabbath; and so is every regenerate person when he becomes celestial, because he is a likeness of the Lord. The six days of combat or labor precede. These things were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the days of labor, and by the seventh day, which was the sabbath; for in that church there was nothing instituted which was not representative of the Lord and of his kingdom. The like was also represented by the ark when it went forward, and when it rested, for by its journeyings in the wilderness were represented combats and temptations, and by its rest a state of peace; and therefore, when it set forward, Moses said:

 

35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36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민10:35, 36) Rise up, Jehovah, and let thine enemies be scattered, and let them that hate thee flee before thy faces. And when it rested, he said, Return, Jehovah, unto the ten thousands of the thousands of Israel (Num. 10:35–36).

 

또한 언약궤에 관하여는, 그것이 여호와의 산에서 나아가 그들을 위하여 쉴 곳을 찾았다고 합니다. (10:33) It is there said of the ark that it went from the Mount of Jehovah “to search out a rest for them” (Num. 10:33).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 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10:33)

 

[3] 천적 인간의 안식은 이사야에서 안식일로 묘사됩니다. The rest of the celestial man is described by the sabbath in Isaiah:

 

13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58:13, 14) If thou bring back thy foot from the sabbath, so that thou doest not thy desire in the day of my holiness, and callest the things of the sabbath delights to the holy of Jehovah, honorable; and shalt honor it, not doing thine own ways, nor finding thine own desire, nor speaking a word; then shalt thou be delightful to Jehovah, and I will cause thee to be borne over the lofty things of the earth, and will feed thee with the heritage of Jacob (Isa. 58:13–14).

 

이와 같이 천적 인간의 성질은 자기 자신의 욕망을 따라 행하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기쁨을 따라 행하는 데 있으며, 그것이 곧 그의 ‘욕망(desire)입니다. 이로 인해 그는 내적인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데, 이것이 여기서는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being uplifted over the lofty things of the earth)로 표현되었고, 동시에 외적인 평온과 기쁨도 누리게 되는데,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being fed with the heritage of Jacob)라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Such is the quality of the celestial man that he acts not according to his own desire, but according to the good pleasure of the Lord, which is his “desire.” Thus he enjoys internal peace and happiness—here expressed by “being uplifted over the lofty things of the earth”—and at the same time external tranquility and delight, which is signified by “being fed with the heritage of Jacob.”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장의 안식 사상이 어디까지 확장되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밀도 높은 정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천적 인간 = 일곱째 날 = 안식일’이라는 등식을 단순한 해석 차원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류에게 드러나지 않았던 아르카나’라고 선언합니다. 다시 말해, 이 내용은 새로운 교리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말씀 속에 이미 들어 있었으나 아무도 보지 못했던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거의 구분하지 못해 왔고, 그 결과 신앙 중심의 상태를 곧 완성 상태로 오해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C.81에서 이미 보았듯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신앙이 중심인 상태와 사랑이 중심인 상태는,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내적 질서는 전혀 다릅니다. 이 차이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안식일의 본질 역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안식의 본질을 주님 자신에게서 찾습니다. 주님이 곧 안식일이시라는 말은, 안식이 어떤 규범이나 제도가 아니라 ‘인격적 실재’임을 뜻합니다. 주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시라는 말씀은, 주님이 인간의 참된 안식이시며, 동시에 참된 인간의 형상이시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이 곧 ‘사람 자신’이며 ‘안식일 그 자체’라고까지 말합니다. 안식은 주님과 분리된 어떤 상태가 아니라, 주님과의 일치 안에서만 가능한 상태입니다.

 

이로부터 중요한 확장이 일어납니다. 주님의 나라는 ‘안식일’이라 불리며, 이는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뜻합니다. 안식은 시간의 하루가 아니라, ‘존재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는 그 이후의 어떤 교회보다도 주님의 안식일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그들이 도덕적으로 더 완벽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중심이 사랑과 퍼셉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등장한 모든 가장 내적인 교회들, 그리고 거듭남을 거쳐 천적인 상태에 이른 각 개인 역시 이름하여 안식일이라 합니다. 이는 그가 주님의 형상, 곧 주님의 안식을 담는 그릇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안식은 갑자기 주어지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엿새 동안의 싸움과 수고가 선행한다고 말입니다. 이는 앞서 반복적으로 강조된 질서입니다. 영적인 단계의 싸움과 선택, 유혹과 투쟁 없이는 천적인 안식이 오지 않습니다. 안식은 싸움을 회피한 결과가 아니라, ‘싸움을 통과한 결과’입니다.

 

이 구조는 유대교회의 제도 안에 표상으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육일 간의 노동과 안식일의 구분은 단순한 사회 질서가 아니라, 인간 내적 상태의 상응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유대교회에 제정된 것 가운데 주님과 그의 나라를 표상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고 단언합니다. 즉, 안식일 계명은 외적 순종을 요구하기 위한 규정이 아니라, ‘인간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가리키는 표지’였습니다.

 

이 표상은 광야에서 언약궤의 움직임에서도 반복됩니다. 언약궤가 나아갈 때는 싸움과 시험이 표상되고, 쉴 때는 평화의 상태가 표상됩니다. 모세의 두 기도는 이 두 상태를 정확히 가릅니다. 나아갈 때에는 원수들이 흩어지기를 구하고, 쉴 때에는 여호와께서 백성 가운데로 돌아오시기를 구합니다. 싸움의 때와 안식의 때가 분명히 구분되어 있으며, 그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언약궤가 ‘쉴 곳을 찾으러’ 나아갔다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싸움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안식을 찾기 위한 여정’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간의 영적 여정 전체를 요약하는 말과도 같습니다. 유혹과 시험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며, 그 끝에는 반드시 쉼이 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이사야를 통해 천적 인간의 안식을 한층 더 내적으로 묘사합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행위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멈추는 것입니다. 자기 길, 자기 기쁨, 자기 말을 내려놓는 것이 안식의 본질입니다. 이는 금욕이나 억압이 아니라, ‘중심의 이동’입니다. 자기 자신이 중심에서 물러나고, 주님의 기쁨이 중심에 놓일 때, 비로소 안식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은 자기 욕망을 따라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무욕(無慾)의 사람이라는 건 아닙니다. 그의 욕망 자체가 주님의 선하신 기쁨과 일치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천적 자유입니다. 그는 억지로 자기 뜻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의 뜻이 이미 주님의 뜻 안에서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 그는 두 가지를 동시에 누립니다. 하나는 내적 평화와 행복이며, 다른 하나는 외적 평온과 기쁨입니다. 이사야에서 말하는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는 내적 상승을,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는 말은 외적 삶의 안정과 충만을 뜻합니다. 천적 안식은 내면과 외면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둘을 하나로 엮습니다.

 

AC.85는 이렇게 해서 안식일을 도덕규범이나 종교 의무에서 해방, ‘인간 완성의 상태’로 되돌려 놓습니다. 안식은 멈춤이 아니라, 가장 깊은 일치이며, 가장 충만한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 안식은 주님 자신으로부터 오며, 주님을 닮아갈수록 인간 안에서 실제가 됩니다.

 

 

 

AC.84, 창2:2-3,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AC.84-88)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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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2

 

저는 천국과 천국의 기쁨이 가장 위대해지는 데에 있다고 생각하던 영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국에서 가장 위대한 이는 가장 작은 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작은 자가 가장 큰 행복을 지니고 있으며, 그러므로 참으로 가장 위대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위대하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이 점 때문에 지상에서는 권세 있는 자들이 권세를 통해 그것을 구하고, 부유한 자들이 재물을 통해 그것을 구합니다. 또한 그들은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천국은 가장 작아지기를 원함으로써 가장 위대해지려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실제로는 여전히 가장 위대해지기를 바라고 추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천국은 마음으로부터 다른 이들에게 자기 자신보다 더 나은 것을 바라며, 다른 이들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섬기고자 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자기를 목적으로 함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I have conversed with spirits who supposed heaven and heavenly joy to consist in being the greatest. But they were told that in heaven he is greatest who is least, because he who would be the least has the greatest happiness, and consequently is the greatest, for what is it to be the greatest except to be the most happy? It is this that the powerful seek by power, and the rich by riches. They were told, further, that heaven does not consist in desiring to be the least in order to be the greatest, for in that case the person is really aspiring and wishing to be the greatest; but that heaven consists in this, that from the heart we wish better for others than for ourselves, and desire to be of service to others in order to promote their happiness, and this for no selfish end, but from love.

 

 

해설

 

이 글은 앞선 AC.450AC.451에서 다룬 ‘위대함’과 ‘권세’의 문제를 ‘가장 정제된 형태로 마무리하는 핵심 진술’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질서를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천국에서 가장 위대한 이는 가장 작은 자입니다.

 

이 말은 역설처럼 들리지만, 스베덴보리는 즉시 그 논리를 풀어 줍니다. 가장 작은 자가 가장 큰 행복을 지니고 있으며, 가장 큰 행복을 지닌 자가 곧 가장 위대한 자라는 것입니다. 즉, 위대함의 기준이 바뀝니다. 힘이나 영향력, 인지도나 성취가 아니라, ‘행복의 질과 깊이’가 기준이 됩니다.

 

여기서 그는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가장 위대하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곧바로 답합니다. ‘가장 행복한 것이다.’ 이 정의는 지상과 천국을 동시에 비춥니다. 지상에서 사람들이 권세를 추구하고 재물을 쌓는 이유도, 결국은 더 큰 만족과 안전, 곧 행복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간접적이며 언제나 불안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흔히 오해되는 또 하나의 함정을 짚습니다. ‘가장 작아지려는 욕망’조차도, 그 동기가 잘못되면 여전히 가장 위대해지려는 욕망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겸손을 전략으로 삼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천국의 길이 아닙니다. 이 말은 매우 날카롭습니다. 왜냐하면 겉으로는 낮아 보이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비교와 우위를 계산하는 신앙을 정확히 겨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본질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천국은 마음에서 우러나 다른 이들에게 자기 자신보다 더 나은 것을 바라며, 다른 이들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 섬기고자 하는 데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섬김은 어떤 보상이나 자기를 목적으로 함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이 지점에서 천국과 지옥의 방향은 완전히 갈라집니다. 지옥의 사랑은 자기 자신으로 향하고, 천국의 사랑은 타인으로 향합니다. 지옥의 질서는 비교와 경쟁 속에서 위로 올라가려 하고, 천국의 질서는 사랑 안에서 기꺼이 낮아집니다. 그러나 그 낮아짐은 손해가 아니라, ‘가장 깊은 행복의 자리’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본문은 매우 실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섬김을 말할 때, 그것이 정말 사랑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더 나은 자리, 더 좋은 평가, 더 큰 만족을 은근히 기대하는 방식인지를 점검하게 합니다. 천국의 질서는 외적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매우 정직합니다.

 

AC.452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은 낮아지는 기술이 아니라, 비교하지 않는 사랑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 안에서, 사람은 더 이상 위대해지려 애쓰지 않아도 이미 가장 깊은 행복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윤리적 훈계가 아니라, 천국의 ‘행복 구조에 대한 설명’입니다.

 

 

 

AC.451, 창5 앞, '사후 세계', 지상 권세가 안 통하는 나라

AC.451 육신의 삶에서 권세를 지니고 있었던 어떤 영이, 사후 세계에서도 여전히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다른 나라, 곧 영원한 나라에 와 있다는 말을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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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1

 

육신의 삶에서 권세를 지니고 있었던 어떤 영이, 사후 세계에서도 여전히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다른 나라, 곧 영원한 나라에 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가 세상에서 가졌던 권세는 이미 죽었으며, 지금 그가 있는 곳에서는 오직 그가 지닌 선과 진리,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주님의 자비에 따라서만 가치가 매겨진다는 말과, 또한 이 나라에서도 지상과 마찬가지로 각 사람은 자신의 재산과 군주의 호의에 따라 평가되지만, 이곳에서의 재산은 선과 진리이며, 군주의 호의는 주님의 자비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이 나라, 곧 남의 나라에 와서 다른 방식으로 권세를 행사하고자 한다면, 그는 이 나라에서 봤을 때는 반역자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부끄러워하였습니다. A certain spirit, who during his life in the body had possessed authority, retained in the other life the desire to exercise command. But he was told that he was now in another kingdom, which is eternal; that his rule on earth was dead; and that where he was now no one is held in estimation except in accordance with the good and truth, and the mercy of the Lord, in which he is; and further, that it is in that kingdom as it is on earth, where everyone is rated according to his wealth, and his favor with his sovereign; and that there good and truth are wealth, and favor with the sovereign is the Lord’s mercy; and that if he desired to exercise command in any other way, he was a rebel, seeing that he was now in the kingdom of another. On hearing this he was ashamed.

 

 

해설

 

이 글은 앞선 AC.450의 논지를 ‘개인의 사례로 압축해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중심에 놓인 주제는 ‘권세의 지속’이라는 인간의 매우 뿌리 깊은 착각입니다. 이 영은 세상에서 실제로 권위를 지녔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 이후에도, 그 권위가 어떤 형태로든 이어질 것이라고 은연중에 기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기대를 단호하면서도 질서 있게 해체합니다. 먼저 그에게 들려준 말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이제 다른 나라에 있다.’ 이 한 문장은 모든 것을 바꿉니다. 사후 세계는 지상의 연장이 아니라, 전혀 다른 질서가 지배하는 왕국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이 결정적입니다. 세상에서의 그의 통치는 이미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기억에서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효력이 완전히 끝났다’는 뜻입니다.

 

그다음 스베덴보리는 새로운 왕국의 평가 기준을 제시합니다. 이 나라에서는 지위나 명령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닌 선과 진리,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주님의 자비만이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즉, 존재의 가치가 외적 힘이 아니라 내적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지요.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가 이 영에게 지상의 비유를 그대로 사용해 설명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상에서도 사람은 재산과 군주의 호의에 따라 평가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다만 지상과 달리 이 나라에서의 재산은 금이나 땅이 아니라, 선과 진리이며, 군주의 호의는 주님의 자비라고 말합니다. 이 비유는 그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그러나 완전히 다른 가치 체계를 제시하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가장 강한 말은 ‘반역자’라는 표현입니다. 만일 그가 여전히 이전 방식으로 남의 나라인 이곳에서 권세를 행사하려 한다면, 그는 이제 다른 분의 나라에 있으면서 반역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는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질서의 문제’를 지적하는 말입니다. 왕이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옛 왕의 권한을 행사하려 한다면, 그것은 충성이 아니라 반역이 됩니다.

 

이 말을 들은 후의 반응은 단순합니다. 그는 부끄러워합니다. 이 부끄러움은 처벌의 결과가 아니라, 질서를 깨달았을 때 자연스럽게 따르는 감정입니다. 그는 자신이 아직도 옛 나라의 논리로 새 나라를 살려고 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본문은 권위와 직분, 영향력에 대한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지상의 모든 권세는 그때뿐이며, 역할이었을 뿐이고, 한시적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정당했더라도, 영원한 나라로는 가져갈 수 없습니다. 영원한 나라에서 유효한 것은 오직 ‘선과 진리, 그리고 주님의 자비 안에 있는 상태’뿐이기 때문입니다.

 

AC.451은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은 권세를 이어 가는 곳이 아니라, 질서를 받아들이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 질서를 받아들일 때, 사람은 지위를 잃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자기 자리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위협이 아니라 초대입니다. 이제 더 이상 지배하려 하지 말고, 주님의 나라의 질서 안에서 선과 진리로 부유해지라는 초대입니다.

 

 

 

AC.452, 창5 앞, '천국과 천국의 기쁨은 어디에 있는가?'

AC.452 저는 천국과 천국의 기쁨이 가장 위대해지는 데에 있다고 생각하던 영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국에서 가장 위대한 이는 가장 작은 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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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0, 창5 앞, '천국은 높은 데서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다'

AC.450 이 세상에 있을 때 말씀에 관하여 특별히 밝은 것처럼 보였던 어떤 이들은, 천국에 대해 매우 그릇된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이 높은 곳에 있으면 곧 천국에 있는 것이라고 여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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