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03.심화

 

9. ‘내 이야기

 

아... 그러셨군요. 그래서 질문이 그렇게 절실하고 구체적이었던 것이군요. 목사님께서 자신의 지난 삶을 ‘오만하고 교만하며, 부끄럽고 비겁했다’ 고백하시는 그 마음 자체가, 이미 예전의 그 삶을 사랑하고 붙들고 있는 사람의 마음은 아닙니다. 사람은 아직 악을 사랑하면서 그 악을 진심으로 수치스러워하지 못합니다. 과거를 미화하지 않고 아파하며, 주님의 자비 없이는 자신에게 아무 소망도 없음을 인정하는 것은 회개의 중요한 열매입니다.

 

물론 제가 목사님의 영원한 상태를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나 적어도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따라 말하면, 주님은 목사님의 인생을 ‘90은 실패, 10은 회심’이라는 비율로 보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 오랜 세월 속에서 무엇을 허용하시고, 무엇을 억제하시고, 어떤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며, 마침내 어떻게 목사님을 돌이키셨는지를 모두 함께 보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마지막 10에 불과해도, 주님의 섭리 안에서는 그 10을 위해 평생을 이끌어 오신 것일 수 있습니다.

 

참된 회심은 과거가 없었던 일이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과거를 이전보다 더 분명히 보고, 더 이상 그것을 자기 의로 변호하지 않으며, 주님 앞에서 떠나기를 원하는 상태입니다. 과거의 기억이 계속 아프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정죄의 증거는 아닙니다. 때로는 그 아픔이 사람을 겸손하게 지키고, 다시 proprium을 의지하지 않게 하며, 타인의 연약함을 더 불쌍히 여기게 하는 도구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악 자체를 선으로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 악에서 돌이킨 사람의 통회와 경험을 선한 쓰임으로 이끄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회심 이후 단지 마음속으로 후회만 하신 것이 아니라, 여러 해 동안 말씀을 붙들고 번역하고 해설하며, 예배와 설교를 통해 주님을 섬기는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이것이 공로가 되어 구원을 산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다만 참된 회심은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삶의 방향을 바꾸는데, 목사님의 현재 삶에는 그 방향 전환의 흔적이 분명히 있습니다. 과거의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의 자비를 더 의지하게 된 것도 그 흔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님께서 지금 붙드실 말씀은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잘못 살았으니 늦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마침내 돌이키셨다’는 사실입니다. 늦게 돌아온 사람도 실제로 돌아왔다면 돌아온 사람입니다. 저녁 무렵 포도원에 들어온 품꾼도 주인의 선함 안에 있었고, 탕자도 먼 나라에서 허비한 세월보다 아버지께 돌아온 현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것을 값싼 위로나 자동적인 구원 선언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지만, 반대로 주님의 자비를 인간의 시간 계산보다 작게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목사님께서 과거를 생각하며 느끼는 부끄러움은 이제 ‘나는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이다’라는 절망으로 향할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오늘도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겸손으로 향해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자신을 끝없이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미워하고 주님을 따라 실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목사님이 과거의 무덤 앞에 평생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무덤에서 나와 남은 날들을 주님으로부터 받은 새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90 : 10’이라는 숫자보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씀이 더 먼저 떠오릅니다. 목사님의 소망은 회심의 분량이나 남은 세월의 길이에 있지 않고, 돌이키게 하신 주님의 자비와 그 자비 안에서 오늘도 계속 돌이키는 데 있습니다. 과거가 크더라도 주님은 더 크십니다. 그리고 진실로 주님께 돌아온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구원을 스스로 확정하는 오만도, 스스로 불가능하다고 판결하는 절망도 아니라, 날마다 겸손히 ‘주님, 저는 주님의 자비만 의지합니다’라고 고백하며 걷는 것입니다.

 

 

 

AC.303, 심화 8, ‘90 : 10’

AC.303.심화 8. ‘90 : 10’ ‘삶’은 돌아보면 참 오만, 교만하고, 부끄럽고 비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와 자비로 돌이켜 ‘회개’했습니다. 이 회개는 참된 회개, 곧 ‘회심’이었습니다.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03.심화

 

8. ‘90 : 10

 

은 돌아보면 참 오만, 교만하고, 부끄럽고 비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와 자비로 돌이켜 회개했습니다. 이 회개는 참된 회개,  회심이었습니다. 전체 비율로는,  : 회심 = 90 : 10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 부끄러운 삶으로 보낸 시간이 압도적인데, 전체 삶으로 평가된다면... 과연 구원 받을 수 있나요?

 

 

이 질문은 사실 스베덴보리의 구원론에서 가장 위로가 되는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이 질문 때문에 ‘삶을 시간의 길이로 재지 않는다’ 여러 곳에서 강조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삶의 대부분은 오만했고 교만했으며, 부끄럽고 비겁했다. 비로소 말년에 주님의 은혜로 돌이켜 참된 회개와 회심을 경험했지만, 전체를 따지면 죄 가운데 보낸 시간이 훨씬 길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결국 내 삶 전체를 보시고 심판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자세히 읽어보면, 주님께서는 사람의 삶을 단순히 시간의 길이나 선악의 횟수로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란 단순히 평생 동안 행한 행동들의 합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이 결국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었는가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심판의 기준은 ‘얼마나 오랫동안 악 가운데 있었는가’가 아니라, ‘죽음을 맞이할 때 그의 의지와 사랑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행위의 통계가 아니라 사랑의 상태에 따라 결정됩니다.

 

참된 회개와 회심이란 단순히 죄를 후회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의 중심 사랑이 바뀌는 사건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을 위해 살던 사람이 이제는 주님을 향하기 시작하고, 자신의 proprium을 신뢰하던 사람이 주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비록 인생의 마지막 부분에서 일어났더라도, 사람 전체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전환점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 안에는 어린 시절부터 주님께서 보존하신 리메인스(remains)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 리메인스는 평생 동안 사람 안에 조용히 간직되어 있다가, 참된 회개가 일어날 때 비로소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말년의 회심은 갑자기 새로운 무엇이 생긴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오래전부터 보존해 오신 선과 진리가 마침내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과거보다 현재의 상태를 더 중요하게 봅니다. 물론 과거의 악은 흔적을 남깁니다. 그러나 사람이 진실로 거듭나기 시작하면, 그 과거는 더 이상 그의 중심이 아닙니다. 악은 기억으로 남아 있을 수 있지만, 더 이상 그의 삶을 지배하는 사랑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과거의 죄를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더 이상 사람의 중심이 아니게 되도록 새 사랑을 심어 주십니다.

 

이 점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탕자의 비유는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아버지는 탕자가 집을 떠나 허랑방탕하게 보낸 세월을 일일이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보셨습니다. 돌아온 아들은 과거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과거를 통하여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심입니다. 주님께서는 시간의 길이를 재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어느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지를 보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 : 회심 = 90 : 10’이라는 계산은 인간적인 계산일 수는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심판론은 그와 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주님께서는 90의 악과 10의 선을 저울에 올려 어느 쪽이 무거운지를 계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 사람은 지금 누구를 사랑하는가? 지금 무엇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고 있는가?’를 보십니다. 참된 회심은 과거의 시간을 지우는 마술이 아니라, 사람의 중심 사랑을 바꾸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신의 사랑과 삶에 따라 심판받는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누구든지 진실로 거듭난다면 주님께서는 그 새로운 삶을 그의 참된 삶으로 인정하신다고 일관되게 가르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는 오히려 눅15의 아버지의 말씀이 스베덴보리의 구원론을 가장 잘 요약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아버지는 ‘너는 평생 대부분을 잘못 살았으니 그 비율대로 대우하겠다’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현재의 상태를 선언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람의 영원한 운명은 과거의 시간 비율보다, 주님의 은혜 안에서 새롭게 된 현재의 생명과 그 생명이 영원히 지속될 방향에 따라 결정된다고 가르칩니다.

 

 

 

AC.303, 심화 9, ‘내 이야기’

AC.303.심화 9. ‘내 이야기’ 아... 그러셨군요. 그래서 질문이 그렇게 절실하고 구체적이었던 것이군요. 목사님께서 자신의 지난 삶을 ‘오만하고 교만하며, 부끄럽고 비겁했다’ 고백하시는 그

bygrace.kr

 

AC.303, 심화 7,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AC.303.심화 7.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위 AC.303 해설 중 ‘그는 개인은 언제나 자신의 사랑과 삶에 따라 심판받는다고 일관되게 가르칩니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럼, 주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03.심화

 

7.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AC.303 해설 중 그는 개인은 언제나 자신의 사랑과 삶에 따라 심판받는다고 일관되게 가르칩니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럼, 주님 십자가 상에서 강도 하나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신 부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강도의 삶을 살다 죽음을 앞둔 상황인데요...

 

 

목사님, 이 질문 역시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여러 곳에서 직접 다루며, 그의 사후관과 심판론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핵심은 주님께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셨다는 것이, ‘오늘 네가 최종 심판을 받고 천국 시민이 된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은 죽는 순간 곧바로 천국이나 지옥의 최종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중간 영계(World of Spirits)에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자신의 속 사람이 점차 드러나고, 천사들과 영들의 인도를 받으며, 자신의 참된 사랑과 삶이 나타난 뒤, 비로소 천국이나 지옥으로 들어갑니다. AC.182 이하에서 이미 보셨듯이, 처음 며칠 동안은 천적 천사들과 함께 있으며, 이어 영적 천사들의 인도를 받고, 그 후 자신의 내적 상태가 점차 드러나는 과정이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위 강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주님께서는 그 강도의 마지막 한마디만 보신 것이 아니라 그의 전 생애와 내면 전체를 보셨다고 이해합니다.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갑자기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을 앞둔 순간에는 평생 형성해 온 가장 깊은 사랑과 의도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강도의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라는 고백은 단순한 공포 속의 외침이 아니라, 그의 가장 깊은 내면이 주님을 향해 열려 있었음을 보여주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은 언제나 ‘’에 따라 심판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은 단순히 겉으로 행한 행동의 총합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평생 형성된 사랑과 의지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강도가 마지막 순간에 주님을 인정했다는 사실은, 그 한마디 때문에 천국에 들어갔다기보다, 그 고백을 통해 그의 참된 내면이 드러났다고 이해하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사상과 더 잘 어울립니다.

 

또한 주님의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도 스베덴보리의 사후관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낙원’은 곧 주님과 함께 있는 영적 세계를 의미하며, 반드시 최종적인 천국의 처소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죽는 그날 곧바로 주님의 보호 아래 영계로 들어가게 되었고,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악한 삶으로 돌아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그가 주님의 구원 안으로 들어갔음을 선언하는 말씀이지, 사후의 모든 과정이 생략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AC.182 이하의 사후 세계 설명과도 잘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의인이라 할지라도 죽은 직후에는 일정한 과정을 거친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강도 역시 예외가 아니라, 주님의 특별한 보호 아래 그 과정을 지나 천국으로 인도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그의 사상 전체와 조화를 이룹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약속은 과정의 부정이 아니라 결과의 확실성을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 장면은 ‘죽기 직전 한 번 믿으면 평생의 삶과 상관없이 천국에 간다’는 교리를 세우기 위한 본문이라기보다,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을 완전히 아시는 주님의 신적 통찰과 자비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사람은 마지막 한마디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한마디를 통해 평생 형성된 가장 깊은 사랑과 신앙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바로 그 내면의 삶을 보시며 심판하십니다. 이 점에서 강도의 이야기는 스베덴보리가 일관되게 가르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과 삶에 따라 심판받는다’는 원리와 모순되기보다, 오히려 그 원리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03, 심화 8, ‘90 : 10’

AC.303.심화 8. ‘90 : 10’ ‘삶’은 돌아보면 참 오만, 교만하고, 부끄럽고 비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와 자비로 돌이켜 ‘회개’했습니다. 이 회개는 참된 회개, 곧 ‘회심’이었습니다.

bygrace.kr

 

AC.303, 심화 6, ‘스베덴보리의 시대’

AC.303.심화 6. ‘스베덴보리의 시대’ 그런데, 그렇다고 스베덴보리의 시대가 ‘내적 의미를 수용할 수 있는 영적 상태였다’ 하기엔 좀 무리가 있지 싶은데요? 교회사적으로나 세계사적으로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