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3:24)

 

AC.307

 

여기서는 홍수로 멸망한 여섯째와 일곱째 후손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에덴동산에서 쫓겨난(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자들, 그러니까 진리를 이해하는 모든 능력이 박탈되었고, 그 결과 그들은 말하자면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으며, 자신들의 광적 욕망(insane cupidities)persuasions에 남겨진 사람들이었습니다. It here treats of the sixth and seventh posterities, which perished by the flood, and were altogether “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that is, from all understanding of truth, and became as it were not men, being left to their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

 

 

해설

 

이 글은 앞의 AC.306을 이어받아, 창3 마지막 장면의 속뜻이 태고교회 말기에 이르러 홍수로 멸망하게 되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설명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여섯째와 일곱째 후손’은 단순히 족보의 세대 수를 세려는 표현이 아니라, 태고교회가 마지막에 이르러 극도로 타락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서 창45는 단순한 역사적 연대기로 이해하기보다, 태고교회 안에서 나타난 서로 다른 영적 계열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창4는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서 점차 타락해 가는 하나의 계열, 곧 가인 계열을, 창5는 주님께서 보존하신 또 다른 계열, 그러니까 셋 계열로 말이지요. 따라서 두 계열은 반드시 시간적으로 앞뒤를 이루는 사건이라기보다, 같은 시대 안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 영적 흐름으로 이해하는 것이 AC 전체의 해석과 더 잘 조화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여섯째와 일곱째 후손’도 어느 한 족보만을 가리키기보다, 결국 홍수로 멸망하게 된 태고교회의 마지막 사람들을 대표, 즉 표상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어느 계열이든 결국 끝에 가서는 홍수를 만나게 되니까요.

 

본문은 이어서 그들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어떤 장소에서 추방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를 이해하는 모든 능력을 박탈당했다는 말입니다. 에덴동산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지혜의 생명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그곳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더 이상 천적인 빛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뜻합니다.

 

또한 그들이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는 말씀도 육체적인 인간성을 잃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사람’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사랑과 거짓에 완전히 사로잡혀 선과 진리의 생명을 잃게 되면, 비록 겉모습은 여전히 사람일지라도 영적인 의미에서는 참된 사람이 아니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광적 욕망과 persuasion에 그대로 남겨졌다(being left to their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고 합니다. 여기서 ‘광적 욕망’은 자기 사랑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악한 탐닉을 말하며, persuasion은 거짓을 너무도 강하게 확신한 나머지 어떤 진리도 받아들일 수 없게 된 영적 고착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겉으로는 신앙의 거룩한 것에 관심을 보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을 위하여 이용하기 때문에 결국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러한 상태에 ‘내맡겨졌다’, ‘남겨졌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들을 버리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상태를 허용하심으로써, 더 깊은 거룩한 것들을 모독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막으시는 자비로운 섭리를 뜻합니다. 앞글에서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AC.307은 태고교회의 마지막 상태를 매우 간결하게 요약합니다. 그들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잃었고, 참된 사람됨을 상실했으며,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 광적 욕망과 persuasion 속에 스스로를 가두었습니다. 그 결과 홍수로 상징되는 영적 종말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의 목적은 단순히 과거의 심판을 기록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을 떠난 인간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왜 주님께서 사람의 상태에 따라 진리를 허락하시기도 하고 감추시기도 하시며, 거룩한 것들이 모독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보호하시는지, 그리고 그렇게 하심으로써 가능한 한 비록 지옥 상태에 이르더라도 좀 덜 고통스러운 상태에 이르도록 끝까지 살피시는지를 밝히려는 데 있습니다.

 

 

심화

 

1. ‘being left to their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

 

그러나 그들이 이러한 상태에 내맡겨졌다’,남겨졌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들을 버리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상태를 허용하심으로써, 더 깊은 거룩한 것들을 모독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막으시는 자비로운 섭리를 뜻합니다. 앞글에서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AC.307 해설)

 

위 해설 중 이 부분 말인데요, 이미 돌이킬 수는 없고, 그럼 할 수 없이 같은 지옥을 가더라도 덜 심한 지옥을 가도록  하셨다는 말로 이해해도 되나요?

 

 

네, 스베덴보리의 전체 신학에서는 그렇게 이해해도 큰 무리는 없습니다. 다만 표현을 조금 더 정확하게 다듬으면 좋겠습니다.

 

같은 지옥을 가더라도 덜 심한 지옥을 가도록’이라는 말은 핵심 취지는 맞지만, 자칫 ‘주님께서 어느 지옥으로 보낼지를 결정하신다’는 뉘앙스를 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옥의 위치나 정도를 주님께서 임의로 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형성한 사랑의 상태가 그에 상응하는 공동체를 찾아간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AC.306, 307의 의미를 스베덴보리식으로 풀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이 이미 자기 사랑과 persuasion 속에 깊이 빠졌더라도, 아직 천국의 가장 깊은 거룩한 것들을 충분히 알지 못한 상태라면, 그 악은 그 정도에서 머뭅니다. 그러나 만일 그런 사람이 천적 진리까지 깊이 알고, 그것을 인정하였다가 다시 의도적으로 부인하고 거스른다면, 그는 profanation에 빠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악보다 훨씬 더 무서운 상태로 봅니다.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한 사람 안에서 뒤섞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더 깊은 진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으십니다. 이것은 벌을 주기 위한 제한이 아니라, ‘더 악한 상태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보호’입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표현으로 옮기면,

 

같은 지옥을 가더라도 조금이라도 덜 악한 지옥에 머물도록 하시는 주님의 자비

 

라는 뜻에 상당히 가깝습니다.

 

저는 오히려 이렇게 표현하면 더 스베덴보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상태에 이른 사람까지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그가 끝내 지옥을 선택하게 될지라도, 더 깊은 거룩한 것들을 모독하여 훨씬 더 비참한 상태에 이르지 않도록 막으십니다. 그러므로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은 천국의 문을 닫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이 만든 악보다 더 깊은 악 속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지키시는 마지막 자비의 표상입니다.’

 

이 표현이 AC.306AC.307의 핵심을 가장 잘 담는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것은 스베덴보리 신학의 매우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님의 섭리는 구원받을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받지 않는 사람에게도 미칩니다.’ 지옥에 가는 사람에게조차도 가능한 한 악을 제한하시고, 가능한 한 고통을 줄이시며, 가능한 한 덜 악한 상태에 머물도록 질서를 세우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저작에서 주님께서 지옥까지도 질서 가운데 다스리신다고 설명하는데, 바로 그 원리가 여기 AC.306, 307에도 이미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AC.306, 창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AC.306-313)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And he cast out the man; and he made to dwell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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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6.심화

 

1. ‘cherubim

 

Cherubim’은 히브리어 케루빔(כְּרוּבִים, kerubim)의 음역으로, ‘Cherub’(그룹)의 복수형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보통 그룹들 또는 그룹 천사들’로 번역하지만,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는 단순히 천사의 한 종류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보호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상징하는 표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그룹은 여러 곳에 등장합니다. 3에서는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기 위해 에덴동산 동쪽에 세워졌고(3:24), 25에서는 언약궤의 속죄소 위에 두 그룹이 마주 보고 날개를 펼치고 있으며(25:18-22), 1 10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모시는 존재로 나타나고, 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에서 끊임없이 주님을 찬양하는 네 생물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처럼 성경마다 모습은 조금씩 다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모든 표상이 하나의 공통된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거룩한 것에 대한 접근을 주님의 질서에 따라 허락하거나 제한하시는 섭리’입니다.

 

AC.306에서도 바로 이 의미가 사용됩니다. ‘그룹들을 에덴동산 동쪽에 두셨다’는 것은 무서운 천사들이 칼을 들고 사람을 위협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직 자기 사랑 가운데 있는 사람이 천국의 가장 깊은 진리와 사랑에 함부로 들어가 그것을 모독하지 않도록 보호하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룹이 사람을 막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영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천국의 가장 깊은 진리를 충분히 알고도 그것을 거절하거나 왜곡한다면, 그는 단순한 무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모독(profanation)에 빠지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이 사람의 영혼에 가장 치명적인 상태임을 아시기 때문에, 그룹을 통하여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룹은 심판의 상징’이라기보다 보호의 상징’입니다. 그들이 지키는 것은 천국의 문이 아니라, 사람의 영혼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상태에 맞을 때까지 더 깊은 진리를 감추시기도 하고, 준비가 되었을 때에는 다시 그 길을 열어 주십니다. 이것이 그룹이 상징하는 주님의 섭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이 의미를 반복하여 설명합니다. 특히 AC.306을 비롯하여 AC.308, AC.9277, AC.9509-9511 등에서는 그룹의 본질적인 의미를 일관되게 주님의 섭리, 곧 거룩한 것들이 모독되지 않도록 지키시는 보호’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창3의 그룹은 죄인을 쫓아내는 무서운 수문장이 아니라, 언젠가 사람이 다시 생명나무에 이를 수 있도록 그 길을 거룩하게 보존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표상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해석입니다.

 

 

 

AC.306, 창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AC.306-313)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And he cast out the man; and he made to dwell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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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And he cast out the man; and he made to dwell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cherubim, and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3:24)

 

AC.306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cast out the man)는 그에게서 선한 의지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the will of good and understanding of truth)을 완전히 빼앗으셔서, 그것들로부터 분리되게 하셨고, 그 결과 그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을 두어(make cherubim from the east to dwell)는 그런 사람이 더 이상 신앙의 어떤 비밀스런 것들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으셨다는 말입니다. ‘에덴동산 동쪽(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은 천적인 것을 말하는데, 지성(intelligence)이 여기서 비롯되며, ‘그룹(cherubim)은 그러한 사람이 신앙에 속한 것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그러니까 보호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말합니다. ‘두루 도는 불 칼(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은 자기 사랑(self-love)과 거기서 나오는 광적 욕망(insane desires) 및 그에 따른 persuasions을 의미합니다. 이런 것들이 그가 정말 원하는 것들이며, 그 결과 그는 육적이고 세상적인 것들한테로 끌려갑니다. 이것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keeping the way of the tree of lives)의 의미, 즉 거룩한 것들을 profanation으로부터 막기 위한 것입니다. To “cast out the man” is to entirely deprive him of all the will of good and understanding of truth, insomuch that he is separated from them, and is no longer man. To “make cherubim from the east to dwell” is to provide against his entering into any secret thing of faith; for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is the celestial, from which is intelligence; and by “cherubim” is signified the providence of the Lord in preventing such a man from entering into the things of faith. By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is signified self-love with its insane desires and consequent persuasions, which are such that he indeed wishes to enter, but is carried away to corporeal and earthly things, and this for the purpose of “keeping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that is, of preventing the profanation of holy things.

 

 

해설

 

이 글은 창3의 마지막 절을 전체적으로 요약하면서, 왜 주님께서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시고,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는지를 다시 한번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얼핏 보면 이는 심판과 추방의 장면처럼 보이지만, 말씀의 속뜻으로는 철저히 보호와 섭리의 장면입니다.

 

먼저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는 단순히 장소를 옮기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타락한 사람이 더 이상 선한 의지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 안에 머물지 못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원래 선과 진리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참된 의미에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사랑과 자기 지혜를 선택한 결과, 그들은 그 생명으로부터 스스로 분리되었고, 결국 참된 사람됨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목적은 사람을 버리시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큰 영적 파멸을 막으시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룹’을 두셨습니다. 성경에서 그룹은 언제나 거룩한 것을 지키시는 주님의 섭리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천국의 깊은 진리와 사랑 안으로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 주시는 사랑의 보호입니다.

 

에덴동산 동쪽’ 역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동쪽은 언제나 주님과 천적 사랑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에덴동산 동쪽은 천국의 가장 안쪽 생명,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지혜의 근원을 의미합니다. 그룹이 바로 그곳을 지키고 있다는 것은, 천국의 가장 거룩한 생명이 아무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에서만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두루 도는 불 칼’도 심판의 무기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자기 사랑과 거기에서 생겨나는 광적 욕망, 그리고 persuasions의 상태로 설명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겉으로는 신앙을 알고 싶어 하고, 천국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마음은 여전히 육체와 세상에 묶여 있기 때문에,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다시 자기 자신과 세상적인 것들을 향해 끌려갑니다. 두루 도는 불 칼은 바로 이러한 상태 자체를 상징합니다.

 

글의 마지막은 이 모든 섭리의 목적을 한마디로 밝힙니다. 그것은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 거룩한 것들이 모독되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만일 사람이 아직 자기 사랑 가운데 있으면서도 천국의 가장 깊은 진리를 충분히 알고, 그다음 그것을 의도적으로 거부한다면, 그는 단순한 무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모독, 즉 profanation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비 가운데 사람의 상태에 맞추어 진리를 허락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감추시기도 하십니다.

 

3의 마지막 장면은 인간을 쫓아내시는 하나님의 분노가 아니라, 끝까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생명나무의 길을 막으신 것은 생명을 빼앗기 위함이 아니라, 언젠가 사람이 다시 그 생명에 이를 수 있도록 그 길을 거룩하게 보존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그룹과 두루 도는 불 칼이 서 있는 이유이며, 창3을 관통하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의 절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심화

 

1. ‘cherubim

 

 

AC.306, 심화 1, ‘cherubim’

AC.306.심화 1. ‘cherubim’ ‘Cherubim’은 히브리어 ‘케루빔’(כְּרוּבִים, kerubim)의 음역으로, ‘Cherub’(그룹)의 복수형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보통 ‘그룹들’ 또는 ‘그룹 천사들’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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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7, 창3:24, ‘여섯째와 일곱째 후손’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7 여기서는 홍수로 멸망한 여섯째와 일곱째 후손에 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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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5, 창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Therefore Jehovah God sent him forth from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 (창3:23) AC.305 ‘에덴동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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