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10강 1부
‘좁은 길’에서 계시록 13, 14장까지 : 종말의 시간표보다 먼저 보아야 할 것
10강의 시작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7장 13~14절의 ‘좁은 문’과 ‘협착한 길’을 먼저 꺼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좁은 길을 ‘힘들고 어려워도 올라가야 하는 길’, 곧 신앙인이 실제 삶에서 감당해야 할 연단의 길로 풀어냅니다. 이어 자신의 부부관계를 예로 들면서, 기도가 막힐 때 ‘아내를 사랑하라. 사랑하지 못하면 어떻게 남을 사랑하겠느냐’는 깨달음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은 이후 적그리스도, 짐승, 666, 대환난이라는 거대한 종말론적 주제로 넘어가기 전에 놓인 작은 서론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오히려 10강 전체를 읽는 데 가장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의 핵심은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을 정확히 알아맞히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받아 자신의 삶에서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함으로써 거듭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좁은 길’은 특별한 고행을 많이 하는 길이라기보다 자기의 proprium, 곧 자기중심적 의지와 욕망을 따라 살지 않고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진리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을 사랑하겠느냐’고 자신의 삶으로 말씀을 끌어내린 부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거대한 종말의 비밀을 안다고 하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아직 그 진리가 그 사람의 생명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강사가 ‘이 세상에도 공짜가 없는데 하늘에 공짜가 있겠어요?’라고 하면서 ‘상급의 진리’를 강조하는 부분은 조금 섬세하게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도 천국의 상급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말씀에 ‘상급’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도 그대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천국의 상급은 사람이 고생한 만큼 외부에서 지급되는 보수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선을 사랑하고 행하는 사람에게는 그 선 자체가 기쁨이 되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 자체가 행복이 됩니다. 이것이 천국에서 완전하게 열릴 때 그것이 그의 ‘상급’이 됩니다. 따라서 ‘내가 이렇게 고생했으므로 더 높은 상급을 받아야 한다’는 자기 공로가 개입하기 시작하면 오히려 천국적 질서와 멀어집니다. 강사가 바로 뒤에서 ‘자기 의지로 하지 않도록’ 기도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 오히려 중요한 균형점이 됩니다.
찬양과 기도 후 강사는 앞서 공부한 계시록 13장을 정리합니다. 그의 해석 체계에서는 후 3년 반에 적그리스도가 세계를 지배하고 성도들을 핍박합니다.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짐승은 적그리스도이며, 그는 사탄과 합일된 인물이고, 마흔두 달 동안 권세를 받아 활동합니다. 두 뿔 짐승은 거짓 선지자로서 적그리스도를 보좌하며 이적을 통해 사람들을 미혹하고, 짐승에게 경배하도록 만들며, 666의 표를 받도록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미래주의적 계시록 해석의 틀 안에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상당히 큰 차이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계시록을 미래의 어느 7년 동안 지상에서 일어날 정치·군사적 사건들의 암호문으로 읽지 않습니다. ‘묵시록 해설’과 ‘계시록 밝히기’에서 계시록은 무엇보다 교회의 영적 상태와 그 교회의 종말, 최후의 심판, 그리고 주님께서 세우시는 새 교회에 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짐승도 미래 어느 독재자 한 사람의 외모나 정치적 조직을 미리 묘사한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선과 분리된 신앙, 곧 삶을 떠난 교리적 신앙이 형성되고 그것이 말씀을 이용하여 자신을 정당화하는 영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이것은 계시록을 읽는 좌표 자체가 달라지는 문제입니다.
특히 강사는 적그리스도를 ‘사탄이 내주 합일된 사람’으로 이해하고, 후 3년 반 동안 실제 세계를 지배할 특정 인물로 설명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적그리스도’는 일차적으로 어떤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거스르는 것’, 곧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거나 주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거짓을 참으로 만드는 원리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를 찾기 위해 세계 정치 지도자들의 얼굴을 살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내 안에서 무엇이 주님의 진리를 거짓되게 만들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계시록의 무대가 먼 미래의 국제정치에서 갑자기 오늘 우리의 내면으로 들어옵니다.
두 뿔 짐승에 대한 강사의 설명에서도 중요한 영적 통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강사는 거짓 선지자가 ‘큰 이적’을 행하여 사람들을 미혹한다고 강조합니다. 여기에는 충분히 귀 기울일 만한 경고가 있습니다. 기적이나 은사, 특별한 영적 체험 자체가 진리의 보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기적이 사람을 강제하여 믿게 만들 경우 자유와 이성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참된 신앙을 훼손할 수 있다고 봅니다. 신앙은 놀라운 현상을 보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무엇인지 깨닫고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 삶으로 옮길 때 사람의 것이 됩니다.
흥미롭게도 강사 자신도 이 대목에서 한국교회의 은사 중심 신앙을 돌아봅니다. 한때 은사가 충만했지만 문제가 생겼고, 그 반작용으로 이제는 ‘말씀’과 지식만 많아졌는데 실제 신앙은 오히려 약해질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목회자의 설교를 들으며 맞는지 틀리는지만 검사하면서 실제 신앙생활은 하지 않는 모습을 비판하고, ‘아느냐 모르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운 접점을 가집니다.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경계하는 것이 바로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를 ‘사는 것’을 혼동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관한 수많은 지식이 기억 속에 들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천국적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삶이 되어야 합니다.
강사가 ‘성경 책 갖고 싸우면 안 된다. 신학 갖고 싸우면 안 되고 내 이름이 거기에 기록돼 있느냐, 주님이 나를 모른다고 하지 않을까, 이게 너무 중요하다’고 말하는 부분도 같은 맥락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표현과 신학적 설명에는 스베덴보리와 차이가 있지만, 그가 겨냥하는 문제는 분명합니다. 신학 지식 자체를 구원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조금 바꾸어 말한다면, 문제는 ‘생명책이라는 어떤 천상의 명부에 내 이름이 문자적으로 적혀 있는가’라기보다 ‘주님의 질서가 내 삶에 새겨져 있는가’입니다. 말씀의 진리를 알고 그것을 의지하고 행하는 것이 사람 안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후에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많이 알았는가보다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여 실제로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입니다.
이어 강사는 계시록 14장으로 넘어가 144,000과 시온산, 새 노래, 세 천사의 경고, 바벨론의 멸망, 짐승의 표, 성도들의 인내를 설명합니다. 여기에서도 그의 미래주의적 시간표가 계속 작동합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하나님만을 경배하라’, ‘죄악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인내하라’는 권면은 종말론 체계를 넘어서는 본질적인 메시지입니다. 특히 강사는 이를 ‘광야 연단 과정’과 연결하면서 ‘오늘 넘어지면 또 일어나고’, 어려움 속에서도 계속 신앙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벨론’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의 해석이 훨씬 깊숙이 들어갑니다. 바벨론은 단순히 미래에 등장할 악한 세계체제나 도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사람을 지배하려는 사랑, 곧 종교를 통해 권력과 자기 우월성을 추구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바벨론이 무너진다’는 것은 먼 미래 어느 도시의 붕괴만을 기다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도 신앙과 말씀과 직분을 이용하여 남보다 높아지고 싶어 하는 욕망이 무너져야 합니다. 목회자에게는 특히 두려운 말씀입니다. ‘주님의 것’을 가지고 ‘나의 것’을 세우려는 순간, 사람 안에 작은 바벨론이 세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짐승의 표’ 역시 같은 원리로 볼 수 있습니다. 강사는 후 3년 반 동안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 실제로 받게 될 표와 연결하지만, 스베덴보리의 상응적 해석에서 ‘이마’와 ‘손’은 훨씬 내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이마는 사랑과 의지를, 손은 능력과 행위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짐승의 표를 이마와 손에 받는다는 것은 악한 원리를 마음으로 사랑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뜻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이름이 이마에 있다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진리가 의지와 삶에 새겨져 있음을 뜻합니다. 이렇게 보면 666의 문제도 어떤 바코드나 칩, 특정 기술을 찾아내는 문제보다 훨씬 깊어집니다. ‘나는 무엇을 사랑하고 있으며, 그 사랑이 내 행동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가?’가 계시록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10강 초반의 ‘좁은 길’이 다시 살아납니다. 짐승과 적그리스도와 666을 아무리 정확하게 설명해도,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신의 욕망과 교만을 회개하지 않는다면 계시록을 아직 바깥에서만 읽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종말의 연대와 국제정세를 정확히 알지 못하더라도 매일 자신의 악을 주님 앞에서 살피고, 진리를 따라 살며, 이웃을 사랑하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주님을 향한다면 그는 계시록이 말하는 영적 싸움 한가운데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다만 강사가 개인의 작은 실수나 불편한 사건을 곧바로 하나님의 ‘징계’와 연결하는 부분은 조심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잘못하면 ‘5분도 안 돼서 바로 징계가 온다’고 느끼며, 작은 행동에서도 하나님께서 즉각 깨닫게 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그 안에 담긴 ‘작은 악까지도 가볍게 여기지 않겠다’는 태도는 귀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에서는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개별적인 손해, 사고, 실패를 곧바로 ‘하나님께서 이 죄 때문에 이것을 보내셨다’고 단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신적 섭리는 무한히 많은 원인과 결과를 동시에 품으며 인간의 영원한 구원을 향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이나 불행을 직접 보내 벌하신다기보다,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허용된 일들까지 영적 선을 위해 굽혀 사용하신다고 보는 편이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10강 1부에서 가장 귀하게 붙들 수 있는 것은 의외로 적그리스도의 정체나 666의 방식이 아닙니다. ‘자기를 죽여야 한다’, ‘끝까지 인내해야 한다’, ‘작은 죄까지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권면입니다. 강사의 종말론적 지도와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석은 상당히 다르지만, 삶으로 내려오는 바로 이 지점에서는 중요한 만남이 일어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만남을 한 걸음 더 안쪽으로 이끕니다. 계시록의 전쟁은 먼저 내 안에서 벌어지고, 적그리스도의 문제는 먼저 내 안에서 진리가 어떻게 왜곡되는가의 문제이며, 바벨론은 먼저 내 안의 지배욕이고, 짐승의 표는 먼저 내가 사랑하고 행함으로 내 것이 된 악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계시록이 묻는 마지막 질문은 ‘후 3년 반이 언제 시작되는가?’보다 더 깊습니다. ‘오늘 내 의지와 행위에는 누구의 이름이 새겨지고 있는가?’입니다. 10강 1부의 ‘좁은 길’은 바로 그 질문 앞에서 비로소 계시록 전체와 연결됩니다. 좁은 길은 종말을 피해 가는 비상통로가 아니라, 오늘 여기서 주님의 진리를 알고 그 진리에 따라 악을 멀리하며 선을 행하는 거듭남의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끝까지 걷게 하시는 분은 인간 자신의 의지와 공로가 아니라 오직 주님이십니다.
10강 2부
‘처음 익은 열매’와 순교자, 그리고 천국을 ‘반열’로 나누어 보는 문제
10강 2부에서 강사는 계시록 14장의 144,000과 ‘처음 익은 열매’를 중심으로 자신의 종말론적 구원 체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펼쳐 갑니다. 여기서 강사의 관심은 단순히 ‘누가 구원받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구원받는 성도들 가운데서도 서로 다른 영적 성숙과 상급이 있으며, 그에 따라 천국에서 차지하는 위치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144,000을 ‘처음 익은 열매’, 교회 시대의 순교자들을 ‘두 번째 익은 열매’, 대환난을 통과하거나 영계에서 준비되어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세 번째 익은 열매’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구약 이스라엘의 제사장, 레위인, 일반 백성이라는 세 구분을 이러한 천국 질서의 모형으로 연결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을 때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강사가 말하는 구체적인 ‘세 종류의 익은 열매’ 체계에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그 배후에 있는 한 가지 중요한 직관, 곧 ‘천국은 모두가 똑같은 상태로 들어가 똑같은 자리에 머무는 획일적인 세계가 아니다’라는 생각 자체는 스베덴보리와 상당한 접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본 천국 역시 놀라울 정도로 질서 있고 다양합니다. 천국에는 무수한 공동체가 있고, 각 공동체는 서로 다른 선과 진리의 상태를 이루며, 크게는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 자연적 천국이라는 세 천국으로 구별됩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차등과 질서가 있다는 강사의 기본 직관까지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 차이를 무엇을 기준으로 나누느냐에 있습니다.
강사는 144,000을 교회 시대에 완성된 특별한 ‘이긴 자들’로 봅니다. 이들은 대환난을 면제받고 예수님의 공중강림 때 휴거되며, 천국에서도 가장 큰 상급을 받는 특별한 성도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다른 대목에서는 이들을 ‘천국의 수도’와 연결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계시록의 144,000은 문자 그대로 144,000명의 특별 선발대가 아닙니다. ‘12’와 ‘12×12’, 그리고 거기에 충만함을 뜻하는 수가 결합된 144,000은 주님의 교회를 이루는 모든 선과 진리의 충만한 상태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144,000은 천국의 VIP 명단과 같은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인정하고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완전한 집합을 표상하는 수입니다.
이 차이는 작지 않습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계시록의 숫자와 사건들이 미래의 실제 역사 속에서 상당 부분 문자적으로 성취됩니다. 그래서 144,000도 실제 특정 인원과 특별한 반열을 가리키는 방향으로 갑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계시록이 ‘상응’으로 기록된 예언서라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따라서 숫자도 그 숫자가 가리키는 영적 질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열둘’은 신앙과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천’은 충만함과 완전함을 표상합니다. 그래서 144,000은 ‘딱 그 숫자만큼만’이라는 제한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새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의 충만함을 나타냅니다.
그렇다고 강사가 강조하는 ‘이긴 자’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도 계시록의 ‘이기는 자’는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무엇을 이기는가가 달라집니다. 이긴 자는 미래의 적그리스도 정권과 싸워 살아남은 특별한 종말 성도만이 아니라, 자신의 악과 거짓을 대적하여 주님께서 거듭나게 하시는 과정에 응답한 사람입니다. 가장 무서운 적그리스도는 밖에 있는 어떤 정치지도자 이전에 내 안에서 주님의 진리를 거부하고 왜곡하는 악과 거짓이며, 가장 치열한 전쟁은 국제전쟁 이전에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시험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이김’은 곧 거듭남의 전투입니다.
강사가 144,000에 이어 ‘두 번째 익은 열매’로 순교자들을 말하는 부분에서도 같은 구별이 필요합니다. 강사는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교회 시대 동안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죽은 순교자들이 아직 완전한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기다리다가, 순교자의 수가 채워진 뒤 특별한 반열로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대환난을 살아서 통과한 사람들과 영계에서 준비된 사람들을 ‘세 번째 익은 열매’로 봅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핵심은 그가 ‘순교했는가’, ‘대환난을 통과했는가’, ‘어느 시대에 죽었는가’가 아닙니다. 사람은 사후 영계에 들어가 겉으로 꾸며 왔던 것들이 벗겨지고 자신의 지배적 사랑, 곧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왔는지가 드러납니다. 선과 진리를 사랑한 사람은 그 사랑과 상응하는 천국 공동체로 인도되고, 악과 거짓을 사랑한 사람은 그와 상응하는 곳으로 스스로 향합니다. 천국의 차이는 역사적 순교 여부보다는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어떤 종류와 정도의 선을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였는가에 따라 생깁니다.
이 점에서 ‘순교’도 조금 다르게 보아야 합니다. 순교 자체가 사람을 더 높은 천국으로 올려 보내는 공로는 아닙니다. 사람이 어떤 외적인 방식으로 죽었느냐보다 그 죽음에 이르기까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위해 살았느냐가 더 본질적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했기 때문에 진리를 버리지 않고 죽음까지 감당했다면 그 순교는 그의 내적 사랑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열매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순교라는 외적 사건 자체가 사람의 내면을 자동으로 천적으로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외적 업적에 대한 포상이 아니라 사람의 내적 생명과 상응하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강사가 계속 강조하는 ‘상급’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강사의 표현을 따라가다 보면 144,000은 가장 큰 상급, 순교자는 그다음 반열, 다른 구원받은 성도는 또 다른 반열이라는 식의 일종의 천국적 위계도가 그려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높고 낮음은 세상의 서열과 전혀 다릅니다. 더 높은 천국에 있는 천사는 ‘내가 저 사람보다 높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더 사랑할수록 자신에게 있는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더 분명하게 압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가장 높은 자는 오히려 가장 낮아지며 섬기려는 자입니다. 천국의 위대함은 권세의 크기가 아니라 사랑의 깊이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익은 열매’를 가장 큰 상급을 차지하는 엘리트 성도의 개념으로 읽기보다는 ‘첫 열매’라는 표상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첫 열매는 전체 추수를 대표하여 주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계시록 14장의 사람들도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로 묘사됩니다. 여기서 중심은 그들의 특권이 아니라 어린양을 ‘따름’입니다. 즉 자기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르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말한다면 proprium을 중심으로 사는 데서 벗어나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에 의해 사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강사가 10강 전체에서 반복하는 ‘자기를 죽여야 한다’, ‘광야를 통과해야 한다’, ‘연단을 받아야 한다’는 메시지와 뜻밖의 접점을 만듭니다. 강사는 대환난을 성도들을 연단하고 정결하게 하는 ‘광야’로 이해합니다. 다른 부분에서는 계시록 12장의 여자가 광야에서 1,260일 동안 양육되는 것을 특별한 피난처가 아니라 ‘영적으로 정결케 되는 기간’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 부분은 매우 주목할 만합니다. 계시록을 전체적으로는 미래의 역사적 사건으로 읽으면서도 ‘광야’에 대해서는 이미 상당히 내적인 의미를 발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이 통찰을 더 깊이 밀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광야는 특정 시대에만 성도들이 들어가는 지리적 장소가 아니라, 거듭나는 모든 사람이 통과하는 시험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사람 안에 있던 이전의 확신과 자기 의존이 흔들리고, 진리가 메마른 것처럼 느껴지며, 악과 거짓이 공격하는 가운데 주님만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는 상태가 ‘광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 역시 그러한 시험과 거듭남의 전 과정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대환난을 통과해야 정결해진다’는 것을 특정 미래 세대의 이야기로 한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각자가 지금 자기 안의 광야를 통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휴거’ 역시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읽게 됩니다. 강사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휴거되고 미련한 다섯 처녀는 환난에 들어간다는 식으로 연결하면서, 모든 신자가 아니라 준비된 일부 성도만 환난 전에 휴거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신학에는 이런 의미의 ‘공중 휴거’ 교리가 없습니다. 주님의 재림 역시 육체를 입으신 주님께서 다시 자연계의 구름을 타고 내려오시는 사건이라기보다, 말씀의 속뜻이 열리고 주님의 신적 진리가 새롭게 드러남으로써 이루어지는 영적 재림입니다. 따라서 ‘준비된 사람은 지상에서 사라지고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환난에 남는다’는 구도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강사가 붙들고 있는 영적 핵심 하나는 남습니다. 바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 처녀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미래의 비행처럼 하늘로 올라갈 준비가 아니라 ‘등’과 ‘기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등은 신앙의 진리를, 기름은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등은 있는데 기름이 없다는 것은 ‘진리는 알고 있지만 사랑의 선이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것은 오히려 매우 두려운 말씀입니다. 성경을 알고, 교리를 알고, 설교를 하고, 종말론의 시간표를 알고 있어도 그것이 사랑과 체어리티의 생명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를 가르는 것은 ‘환난 전 휴거에 성공했느냐’가 아니라 진리와 선이 결합되어 있느냐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앎과 삶, 이해와 의지가 결합되어 있는지가 관건입니다. 여기서 10강 1부에서 강사가 했던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기를 죽여야 한다’는 말이 다시 중요해집니다. 강사 자신의 여러 권면 가운데에는 그의 종말론 체계보다 오히려 훨씬 깊은 영적 직관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강사가 ‘천국이 채워진다’는 표현을 반복한다는 점입니다. 먼저 144,000이 채워지고, 다음으로 순교자의 수가 채워지고, 마지막으로 다른 구원받은 사람들이 들어가 천국이 완성된다는 구조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천국은 인류와 무관하게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는 정적인 공간이 아닙니다. 천국은 천사들로 이루어져 있고, 천사들은 본래 인간으로 지상에서 살았던 이들이므로 인류의 구원과 천국의 형성은 깊이 연결됩니다. 이 점에서는 강사의 ‘천국이 사람들로 채워진다’는 직관에 일정한 접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숫자가 차야 하나님께서 다음 단계의 종말 사건을 시작하시는 일종의 정원제 구조가 아닙니다. 천국 전체가 한 사람의 형상, 곧 ‘가장 큰 사람’(Grand Man, Maximus Homo)을 이루며, 무수한 천국 공동체가 각기 서로 다른 기능을 담당합니다. 한 사람의 몸에서 눈과 귀와 심장과 폐가 서로 다르지만 모두 한 생명을 이루듯, 천국의 다양성 역시 우열을 위한 계급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조화와 질서를 위한 다양성입니다.
이 관점은 ‘세 종류의 익은 열매’라는 강사의 설명을 대할 때 특히 중요합니다. 천국에 다양한 상태와 등급이 있다는 점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144,000 → 순교자 → 나머지 성도’라는 세 역사적 집단으로 고정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천국 이해와 다릅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지상에서 받아들인 사랑과 신앙의 질에 따라 자기에게 가장 맞는 공동체로 인도됩니다. 그곳에서는 누구도 다른 천국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선의 상태가 바로 자기에게 가장 충만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강의에서 ‘상급’을 들을 때도 경쟁적 상급 개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천국에서 더 큰 상급이란 더 큰 왕좌나 더 높은 신분을 갖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더 많이 섬기고, 더 많이 섬길수록 더 큰 기쁨을 누립니다. 천국에서는 사랑하는 것과 행복한 것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강사가 말하는 ‘영적으로 더 깊이 준비된 사람에게 더 큰 상급이 있다’는 말을 완전히 버릴 필요는 없지만, 그 ‘더 큼’의 의미를 천국적으로 바꾸어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10강 2부의 여러 이야기 가운데 특히 붙들 만한 것은 ‘믿음과 함께 행함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연단이죠’라는 강사의 말입니다. 이 짧은 말은 오히려 복잡한 종말 시간표보다 스베덴보리의 중심 가르침에 훨씬 가깝습니다. 신앙이 삶과 분리되면 그것은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며, 사람이 알고 있는 말씀은 결국 의지와 행위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바로 이 과정이 거듭남입니다.
따라서 10강 2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으면 묘한 역전이 일어납니다. 강사가 가장 많은 설명을 들이는 ‘144,000의 특별 반열’, ‘순교자의 두 번째 열매’, ‘대환난을 통과하는 세 번째 열매’, ‘부분 휴거’ 등의 종말론적 도식은 상당 부분 내려놓게 됩니다. 반대로 그 설명 사이사이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연단’, ‘정결’, ‘자기를 죽임’, ‘끝까지 인내함’, ‘믿음과 행함’, ‘주님을 따름’이 앞으로 나오게 됩니다.
결국 계시록 14장의 ‘처음 익은 열매’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도 ‘나는 144,000에 들어갈 수 있는가?’가 아닙니다. ‘나는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시든 따라갈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따름은 미래의 대환난 때 갑자기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내 뜻과 주님의 뜻이 충돌할 때 어느 쪽을 선택하는가, 오늘 내 이익과 이웃의 선이 충돌할 때 무엇을 사랑하는가, 오늘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 삶으로 옮기는가에서 이미 시작됩니다. 바로 그 일상의 선택 속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말씀은 먼 종말의 암호에서 벗어나 지금 우리의 거듭남을 비추는 살아 있는 말씀이 됩니다.
10강 3부
일곱 대접의 시작 : ‘재앙이 내려온다’보다 ‘감추어진 상태가 드러난다’
10강 3부에서 강의는 마침내 계시록 16장으로 넘어갑니다. 계시록 15장에서 순교자들이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곁에서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고, 하늘의 ‘증거 장막의 성전’에서 일곱 재앙을 가진 천사들이 나온 데 이어, 이제 실제로 일곱 금 대접이 땅에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강사는 16장부터 18장까지를 하나의 거대한 심판 구간으로 정리합니다. 16장은 일곱 대접을 통한 전 세계적 심판, 17장은 ‘큰 음녀’로 표상되는 종교적 세력의 멸망, 18장은 ‘큰 성 바벨론’으로 표상되는 정치적 세력의 멸망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강사의 종말 시간표에서 이제부터는 더 이상 대환난을 ‘준비’하는 단계가 아니라 본격적인 마지막 심판의 단계입니다.
강사는 동시에 이 마지막 재앙에도 두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짐승과 그에게 속한 자들에게는 심판이지만, 아직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살아남아 있는 성도들에게는 ‘마지막 연단’입니다. 그는 ‘순교하지 못하고 살아남은 성도들이 일곱 대접 환난을 통하여 마지막 연단을 받는다’고 명시합니다. 이 점은 지금까지 ‘핵심진리’가 대환난을 이해해 온 관점과 일관됩니다. 대환난은 단지 악한 세상을 파괴하는 기간이 아니라 성도를 정결하게 하여 ‘익은 열매’로 만드는 광야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바로 이 지점에서 중요한 접점과 중요한 차이가 동시에 나타납니다. 접점은 ‘심판이 단순한 파괴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마지막 심판은 무엇인가를 마구 부수는 사건이 아니라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드러내고 분리하여 천국의 질서를 회복하고 새 교회가 세워질 수 있게 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차이는 이 사건을 미래의 특정한 몇 달 동안 자연계 전체를 뒤덮을 물리적 재앙으로 읽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계시록 16장의 대접들은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이미 내적으로 존재하고 있던 악과 거짓이 신적 진리의 유입에 의해 완전히 드러나는 영적 심판을 묘사합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려면 ‘대접을 쏟는다’는 형상을 먼저 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접은 무엇인가를 담고 있던 그릇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쏟으면 안에 있던 것이 밖으로 나타납니다. 이 형상은 스베덴보리의 마지막 심판 이해와 매우 잘 맞습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없던 악을 새로 만들어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람과 교회 안에 품어지고 형성되어 있던 상태가 신적 진리의 빛 아래에서 더 이상 감추어지지 못하고 드러나는 것입니다. 심판은 ‘악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강의는 계시록 16장 1절의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를 읽은 후, 2절의 첫째 대접으로 들어갑니다. 첫째 천사가 대접을 땅에 쏟자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생깁니다. 강사는 이것을 실제 피부병이나 악성 종기와 같은 온역성 재앙으로 이해하며, 바로 이때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 곧 자기 표현으로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이 외적으로도 확연하게 구별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첫째 대접부터 넷째 대접까지는 땅, 바다, 물의 근원, 하늘을 차례로 치면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헌데’라는 표현을 피부질환 자체에서 인간의 영적 상태로 옮겨갑니다. 말씀에서 상처, 종기, 궤양과 같은 것은 좋은 생명이 훼손되어 악과 거짓이 밖으로 드러난 상태를 표상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몸에서는 내부의 질서가 외부의 건강으로 나타나지만, 내적 질서가 무너지면 그것이 몸의 상처나 병변처럼 밖으로 나타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적으로 사랑하던 악과 그것을 정당화하던 거짓이 마지막에는 더 이상 경건한 외관 뒤에 숨어 있지 못합니다. ‘헌데가 난다’는 것은 바로 그 내적 부패가 외적으로 드러나는 매우 강렬한 표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첫째 대접은 하나님께서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에게 특수한 피부병을 골라 보내신다는 의미가 중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짐승으로 표상된 거짓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의 사랑과 삶으로 만든 사람들의 내적 상태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이마’가 지배적 사랑을, ‘손’이 행위를 나타낸다고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짐승의 표를 받았다는 것은 이미 거짓을 의지로 받아들이고 삶으로 확증한 상태입니다. 이제 대접이 쏟아지면서 그 상태가 ‘헌데’처럼 밖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땅’도 단순히 지구의 토양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땅’, 특히 예언서와 계시록의 ‘땅’은 교회를 표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첫째 대접이 땅에 쏟아진다는 것은 교회의 외적인 영역과 그 교회를 이루는 사람들의 상태가 신적 진리에 의해 드러나는 것과 관련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 모두 동일한 기독교인처럼 보였지만 무엇을 실제로 사랑했는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강사가 말하는 ‘그때 가면 천국에 갈 사람과 지옥에 갈 사람이 확실하게 보인다’는 직관에는 일정한 접점이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피부에 어떤 표시가 나타나 외관만 보고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판별할 수 있게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심판에서는 사람의 겉과 속이 하나가 되고, 내적으로 사랑한 것이 더 이상 감추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구별’입니다.
사후세계에서도 스베덴보리는 이 과정을 아주 중요하게 설명합니다. 지상에서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직분과 언어와 사회적 예절과 종교적 외관으로 상당 부분 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후 중간영계에서 겉 사람이 점차 벗겨지고 내적 사람이 드러나면서, 사람이 정말 무엇을 사랑했는지가 밖으로 나타납니다. 선을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선의 얼굴과 행동을 갖게 되고, 악을 사랑했던 사람은 자기 악과 상응하는 모습을 취합니다. 마지막 심판 역시 본질적으로 이런 ‘드러남’과 ‘분리’입니다.
따라서 첫째 대접의 ‘헌데’는 우리에게도 상당히 현재적인 말씀이 됩니다. 사람은 자기 안의 악이 아직 밖으로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것이 없는 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명예를 매우 사랑하면서도 인정받는 환경에서는 온화하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분노와 질투가 갑자기 터져 나옵니다. 그 상황이 분노를 새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안에 있던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것이 작은 규모에서 일어나는 ‘대접’과 같은 경험이라고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시험의 중요한 기능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 때 내면의 상태를 볼 수 있도록 허용하십니다. 어떤 상황에서 내가 예상하지 못한 교만, 질투, 분노, 지배욕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놀랄 수 있습니다. ‘나는 왜 갑자기 이런 사람이 되었나?’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이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일 수 있습니다. 빛이 들어왔기 때문에 보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심판은 거듭나는 사람에게 반드시 나쁜 소식만은 아닙니다. 악을 보아야 회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추어진 악은 제거될 수 없습니다. 내가 그것을 악이라고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 행하지 않으려고 할 때 주님께서 그 악을 조금씩 분리하십니다. 그러므로 한 개인의 거듭남에서는 ‘내 안의 헌데가 보였다’는 것이 오히려 치료의 시작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짐승의 표를 자기 생명으로 확정한 상태에서는 악이 드러나도 회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계시록 16장의 대접 재앙에서 반복되는 무서운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고통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훼방하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강사도 뒤의 대접들을 설명하면서 악성 종기와 고통으로 ‘혀를 깨물’ 정도가 되어도 하나님을 향해 악독을 품고 회개하지 않는 상태를 강조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고난이 사람을 자동으로 회개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미 굳어진 지배적 사랑은 고난을 만날 때 자기 본성을 더욱 강하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자기애가 지배적인 사람은 뜻대로 되지 않을수록 더 분노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시험 가운데 자신의 약함을 보고 더 주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같은 사건이 서로 다른 사랑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환난을 많이 받으면 거룩해진다’고 단순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환난의 양이 아니라 환난 속에서 사람의 자유가 어디를 향하느냐입니다. 강사가 대환난을 ‘마지막 연단’이라고 말하는 것은 귀하게 받을 수 있지만, 그 연단이 자동적인 영적 세척 과정은 아닙니다. 시험 가운데 악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의지하여 반대되는 선을 선택할 때 거듭남이 일어납니다.
강사는 일곱 대접이 시작되기 직전 세계가 사실상 혼란스러운 무정부 상태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 역시 그의 미래주의적 종말 시간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앞선 전쟁과 재앙으로 사회 질서가 붕괴한 가운데 적그리스도의 세계체제마저 흔들리고, 그때 대접 재앙이 본격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런 ‘질서 붕괴’를 교회의 영적 질서가 무너진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무엇이 진리인지 거짓인지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고, 인간의 자기 지성이 말씀보다 높은 권위를 차지하면 교회에도 일종의 영적 무정부 상태가 생깁니다.
교회는 제도와 건물이 그대로 있어도 내적으로는 질서를 잃을 수 있습니다. 설교도 있고 예배도 있고 신학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중심을 잃으면 각 사람이 자기 교리와 자기 주장과 자기 이익을 중심으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의미의 무질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은 그 혼합을 끝내고 다시 선과 진리를 분명하게 구별하는 과정입니다.
강사는 첫째 대접을 설명하면서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는 마태복음 24장의 말씀도 연결합니다. 그 예로 일제 말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투옥된 성도들이 해방으로 살아남았던 이야기를 들며, 죽음 직전에 하나님께서 기간을 ‘감하시는’ 섭리가 있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후 3년 반에도 순교자의 수가 채워진 뒤 살아남아야 할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보존하여 천년왕국의 백성이 되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도 강사의 중심적인 신앙은 분명합니다. 악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그것이 무한정 지속될 수 없으며, 주님의 섭리 아래에는 경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중심은 스베덴보리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지옥은 결코 주님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위해 악을 허용하시지만, 그 악이 영원한 구원의 가능성을 완전히 파괴하도록 허용하지 않으시며 끊임없이 제한하고 굽히십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 놓은 자연적 날짜를 몇 일 줄이신다’는 의미보다 훨씬 넓은 신적 섭리의 질서에서 봅니다. 지옥으로부터 유입되는 악은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정도까지만 허용됩니다. 시험이 인간의 자유 자체를 파괴해 버린다면 그 시험은 구원에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시험의 시작과 진행과 끝까지도 사람의 영원한 선을 바라보며 제한하십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시험을 이해할 때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가 시험 가운데 ‘이것이 끝나지 않을 것 같다’고 느낄 수 있지만, 영적 시험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험을 허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의 세력에서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허용하십니다. 필요한 만큼만 허용하시고, 그 사람에게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보호하시며, 그 시험을 통해 더 깊은 선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한 가지 조심해야 합니다. 특정한 역사 사건을 곧바로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을 살리려고 정확히 이렇게 계획하셨다’고 단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섭리의 전체 인과관계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건 이후에 감사와 섭리의 손길을 고백할 수는 있지만, 모든 세부 사건의 직접적인 신적 목적을 인간이 확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가 ‘보이지 않게’ 움직이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인간이 섭리를 사전에 계산하고 확정하려 들면 오히려 자유를 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의가 첫째 대접부터 넷째 대접까지를 거의 동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보는 것도 ‘핵심진리’의 독특한 시간표에 속합니다. 본문 자체에는 반드시 그것들이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고 명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강사가 나팔 재앙과 대접 재앙의 구조를 비교하여 세운 해석입니다. 이 점은 ‘본문’과 ‘해석’을 구별하여 읽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대접들의 연속을 자연적 시간 간격보다 영적 상태들의 연속으로 봅니다.
그 연속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땅, 바다, 강과 물 근원, 해, 짐승의 보좌, 유브라데, 그리고 공기까지 차례로 대접이 쏟아집니다. 이것은 교회와 인간의 영적 생명을 이루는 여러 차원이 차례로 드러나는 장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땅’은 교회의 일반적 상태, ‘바다’는 보다 외적인 자연적 지식과 진리의 영역, ‘강과 물 근원’은 진리가 흘러나오는 교리와 이해의 원천, ‘해’는 사랑의 차원과 관계합니다. 결국 마지막 심판에서 일부 영역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랑과 신앙, 이해와 삶 전체가 빛 아래 놓이는 것입니다.
특히 뒤에서 해에 대접이 쏟아지는 장면은 흥미롭습니다. 말씀에서 해는 가장 깊은 의미에서 주님의 신적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 사랑을 거부하고 반대되는 자기애 안에 있을 때 같은 신적 사랑의 열이 고통스럽게 경험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사람을 불태우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애가 주님의 사랑과 충돌하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앞에서 살펴본 ‘하나님의 진노’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그래서 계시록 16장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을 때 ‘하나님은 왜 이렇게 무서운 재앙을 내리시는가?’라는 질문은 조금 달라집니다. ‘신적 선과 진리가 완전히 드러날 때 악과 거짓은 왜 그것을 고통스럽게 경험하는가?’가 됩니다. 주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바뀌는 것은 인간의 상태입니다.
빛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빛이 더 밝아지는 것은 기쁨입니다. 어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같은 빛은 고통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은 주님의 사랑이 자비에서 분노로 변하는 순간이 아니라, 변함없는 사랑과 진리가 더 이상 가려지지 않고 나타나는 순간입니다. 그때 각 사람과 교회의 상태가 무엇인지 완전히 드러납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첫째 대접의 ‘헌데’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만들어 붙이신 상처가 아니라 이미 안에 있던 부패가 밖으로 드러난 형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듭나는 사람에게 이것은 두려움만 줄 필요가 없습니다. 내 안에서 전에 보지 못했던 악을 보는 것은 아프지만, 그것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그 영역까지 빛을 비추고 계시다는 표시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때 중요한 것은 계시록 16장의 악한 자들처럼 드러난 악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는’ 상태로 굳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내 성질이 드러났을 때 환경을 탓하고, 내 질투가 드러났을 때 상대를 탓하고, 내 지배욕이 드러났을 때 ‘나는 책임자니까 어쩔 수 없다’며 정당화하면 헌데를 보면서도 치료를 거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주님, 이것이 제 안에 있었군요. 이것은 악입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이 치유의 출발점입니다.
이 점에서 10강 3부의 일곱 대접은 의외로 매우 개인적인 말씀이 됩니다. 미래의 온역과 세계 붕괴를 상상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오늘 내 안에 쏟아질 때 무엇이 드러나는가’를 묻게 합니다. 그 빛 앞에서 변명할 것인가, 아니면 회개할 것인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강사가 10강 첫머리에서 말한 ‘좁은 길’과 다시 연결됩니다. 좁은 길은 자신에게 헌데가 없다고 주장하는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 안의 것을 정직하게 보고, 아프더라도 악을 악이라고 인정하며, 다시 일어나 주님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강사가 ‘오늘 넘어지면 또 일어나고’라고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점에서는 귀한 권면입니다.
10강 3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6장의 첫째 대접과 악하고 독한 헌데는 미래 후 3년 반에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에게 실제 피부질환이 내려와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이 외적으로 구별되는 사건으로만 읽기보다,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체어리티와 분리된 거짓 신앙과 악한 사랑이 신적 진리의 유입 앞에서 더 이상 숨지 못하고 외적으로 드러나며, 선과 악의 분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마지막 심판의 아르카나로 읽을 때 더욱 깊은 의미가 열립니다.’
그리고 이 3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접’보다 어쩌면 ‘드러남’일 것입니다. 심판은 주님께서 우리를 해치기 위해 무엇인가를 새로 부어 넣으시는 일이 아니라,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말씀의 빛 앞에서 보게 하시는 일입니다. 악한 자에게 그 드러남은 진노처럼 느껴지지만, 거듭나는 사람에게는 회개의 기회가 됩니다. 같은 빛입니다. 같은 주님입니다. 다른 것은 그 빛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의 마지막 심판을 읽을수록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대접의 재앙 자체라기보다, 내 악이 드러나도 그것을 끝까지 정당화하여 ‘회개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10강 4부
둘째, 셋째, 넷째 대접 : 바다가 피가 되고, 물의 근원이 피가 되며, 해가 사람을 태우는 까닭
10강 4부에서는 계시록 16장의 일곱 대접 가운데 둘째·셋째·넷째 대접으로 진행됩니다. 첫째 대접이 ‘땅’에 쏟아져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에게 악하고 독한 헌데가 생겼다면, 이제 심판의 범위는 ‘바다’, ‘강과 물 근원’, 그리고 ‘해’로 확대됩니다. 강사의 종말론적 틀에서는 이것들이 후 3년 반 마지막에 자연계에서 실제로 일어날 전 지구적 재앙입니다. 지금까지 나팔 재앙에서는 땅과 바다와 강 등이 부분적으로 타격을 입었다면, 대접 재앙은 마지막 심판이므로 그 강도와 범위가 훨씬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이 일곱 대접을 순교자의 수가 다 찬 뒤 그 ‘피값’을 갚는 마지막 재앙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16장부터 18장까지를 전 세계적·종교적·정치적 심판의 완결 과정으로 읽고 있습니다.
계시록 16장 3절의 둘째 대접은 바다에 쏟아집니다. 그러자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고 합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이것을 실제 자연계의 바다에 임하는 재앙으로 읽습니다. 바다가 피처럼 변하고 해양 생태계가 파괴되는 엄청난 환경재앙입니다. 앞선 나팔 재앙에서도 자연환경에 대한 심판이 있었지만 그것은 부분적인 것이었고, 이제 마지막 대접에서는 사실상 전면적인 심판으로 확대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바다’는 훨씬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말씀에서 바다는 흔히 교회의 가장 외적인 영역, 특히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일반적인 진리와 지식들의 집합을 표상합니다. 강과 샘처럼 특정한 방향으로 흐르는 물이 아니라 수많은 물이 모여 있는 거대한 바다라는 형상 자체가 이를 보여 줍니다. 사람이 말씀을 읽고 배우면서 기억 속에 축적한 수많은 지식과 교리적 사실들이 아직 깊은 생명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일종의 ‘바다’와 같습니다.
이 바다가 ‘죽은 자의 피같이 된다’는 것은 매우 강렬한 표상입니다. ‘피’는 좋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적 진리, 특히 말씀의 진리를 나타냅니다. 성찬의 포도주가 주님의 피를 표상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진리가 왜곡되고 거짓으로 변하면 ‘피’는 정반대의 의미를 취합니다. 진리를 훼손하고 말씀을 악한 사랑에 맞추어 왜곡한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다가 피가 되었다는 것은 교회의 외적인 지식과 교리가 더 이상 생명을 전달하지 못하고 거짓과 왜곡으로 가득해진 상태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계시록이 단순히 ‘바다가 더러워졌다’고 하지 않고 ‘죽은 자의 피같이 되었다’고 하는 점이 중요합니다. 생명을 전달해야 할 것이 오히려 죽음의 상태가 된 것입니다. 말씀과 교리는 본래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여 영적 생명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애와 세상 사랑, 권력욕과 자기 의를 확증하는 데 사용되면 같은 성경 지식이 오히려 영적 생명을 질식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두려운 경고입니다. 진리를 모르는 것만 위험한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자기 악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훨씬 깊은 왜곡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성경을 많이 인용하면서도 체어리티를 파괴할 수 있고, 신학적으로 매우 정교하면서도 자기 교리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멸시할 수 있습니다. 그때 ‘바다’에는 여전히 많은 물이 있습니다. 지식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물이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는 표현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적 의미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할 때 살아 있습니다. 반대로 진리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그것은 지식으로 남을 수는 있어도 영적으로는 생명을 잃습니다. 따라서 바다의 생물들이 죽는 것은 교회의 외적 지식과 교리 안에서 살아 있던 영적 생명이 사라지는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지금 우리가 AC 창세기 4장에서 살펴보고 있는 ‘가인’의 문제가 다시 떠오릅니다. 가인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표상합니다. 진리는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겉으로는 여전히 ‘신앙’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도 그 안의 생명은 사라집니다. 계시록 16장의 ‘죽은 바다’는 바로 이 문제가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얼마나 철저하게 진행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형상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어 셋째 천사가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습니다. 그러자 그것들도 피가 됩니다. 바다가 일반적인 진리와 지식의 집합이라면 ‘강’과 ‘물 근원’은 조금 더 구체적입니다. 강은 어떤 근원에서 시작하여 일정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강과 샘, 물 근원은 진리가 흘러나오는 원천과 그 진리의 이해를 표상합니다. 그렇다면 물 근원 자체가 피가 되었다는 것은 단지 몇몇 교리가 잘못되었다는 수준을 넘어 ‘진리를 받아들이고 가르치는 원천 자체가 왜곡된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 차이는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 한 구절을 잘못 이해하는 것과, 성경 전체를 바라보는 원리가 잘못되는 것은 다릅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그 원리에서 흘러나오는 많은 해석이 연쇄적으로 왜곡될 수 있습니다. 물 근원이 오염되면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강 전체가 영향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그렇게 끊임없이 ‘선과 진리의 결합’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을 해석하는 가장 깊은 열쇠는 단순히 언어학적 지식이나 신학 체계가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선입니다. 선이 없는 상태에서 진리를 다루면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결론을 위해 말씀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물 근원’이 오염됩니다.
셋째 대접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이어지는 천사의 선언입니다.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그리고 제단에서도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라는 응답이 나옵니다.
강사는 이 부분을 순교자들의 피값과 직접 연결합니다. 앞서 계시록 6장의 순교자들이 제단 아래에서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라고 호소했고, 하나님께서는 동무 종들과 형제들의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고 하셨는데, 이제 그 수가 다 찼으므로 일곱 대접을 통해 그 피값에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강의에서도 제단이 말하는 장면을 계시록 6장의 제단 아래에서 호소하던 순교자들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이 연결은 본문의 문자적 흐름에서는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피값을 갚는다’를 인간적 보복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천국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죽인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며 만족하지 않습니다. 천국의 사랑에는 복수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피를 흘렸다’는 것은 가장 깊게는 진리를 파괴하고 선을 해친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피를 마시게 한다’는 심판은 그들이 선택하고 사랑한 거짓과 악의 결과를 스스로 받아들이게 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심판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그가 원하지 않는 지옥을 강제로 떠안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이 지상에서 어떤 사랑을 자기 생명으로 만들면 사후에는 그 사랑과 상응하는 상태로 갑니다. 악을 사랑하고 거짓을 즐겼다면 결국 그 악과 거짓이 자기의 세계가 됩니다. ‘피를 마신다’는 말씀은 이런 영적 귀결을 아주 강렬한 언어로 보여 줍니다. 자신이 남에게 준 것을 하나님께서 복수하여 되돌려 주신다는 의미라기보다, 사람이 선택한 악이 결국 자기 생명이 되어 그 결과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이 의롭다’는 선언도 ‘하나님께서 죄인을 충분히 고통스럽게 벌하셨으니 공정하다’는 의미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신적 심판이 의로운 것은 모든 사람이 자기가 실제로 사랑한 것에 따라 정확하게 분리되기 때문입니다. 겉모습이나 명성, 교단, 직분, 말로 한 신앙고백이 아니라 실제 내적 상태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그 누구도 자기에게 맞지 않는 천국이나 지옥에 강제로 배치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단’에서 나오는 음성과도 어울립니다. 제단은 가장 깊게는 주님께 대한 사랑과 예배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제단이 ‘주의 심판이 참되고 의롭다’고 말한다는 것은 심판의 근원에도 신적 사랑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앞서 일곱 대접 자체가 ‘금 대접’이었다는 사실과 같은 맥락입니다. 심판의 겉모습은 무섭지만 그 가장 깊은 근원에는 신적 사랑과 질서가 있습니다.
이어 넷째 천사가 대접을 ‘해’에 쏟습니다. 그러자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웁니다. 사람들이 크게 태움을 입고도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더라’고 합니다. 강사는 여기서 실제 자연계의 태양과 연결하여 극심한 열 재앙을 말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9절의 ‘회개하지 아니하더라’에 주목합니다. 강사는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면 절대로 회개할 수 없다’며, 우리가 지금 회개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큰 은혜라고 강조합니다.
이 대목은 10강 4부에서 매우 귀하게 받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강사의 대접 재앙에 대한 자연적 해석과 별개로, ‘회개할 수 있음 자체가 은혜’라는 통찰은 깊습니다. 사람은 자기 악을 쉽게 인정하지 않습니다. proprium의 본성은 자기를 변호하고 악의 원인을 다른 사람과 환경에 돌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 안의 악을 보고 ‘이것은 악이며 주님께 대한 죄입니다’라고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진리의 빛이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만 ‘성령께서 회개하게 하신다’는 말을 인간의 자유가 사라지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끊임없이 선과 진리를 사람에게 유입하시지만, 사람은 그것을 마치 자기 힘으로 받아들이고 선택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응답해야 합니다.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보게 하시고 힘을 주시지만, 사람은 실제로 자기 악을 살피고 인정하고 저항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대신 회개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거듭남은 주님과 인간의 이러한 결합된 과정입니다.
넷째 대접의 ‘해’는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해는 가장 높은 의미에서 주님의 신적 사랑을 표상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 천국의 해가 실제로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사랑의 현현이라고 설명합니다. 천적 천사들에게 주님은 해로 보이며, 그 해에서 나오는 열은 신적 사랑에 상응하고 빛은 신적 지혜와 진리에 상응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바로 그 ‘해’가 사람을 태웁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주님의 사랑이 갑자기 사랑을 멈추고 파괴적인 불로 변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변한 것은 해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태입니다.
같은 신적 사랑이 선한 사람에게는 천국의 기쁨이지만 악한 사랑에 굳어진 사람에게는 견딜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자기애를 최고의 사랑으로 삼은 사람에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질서는 자기 존재 전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적 사랑의 열이 그에게는 ‘태우는 불’처럼 경험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이해하는 핵심 원리와 같습니다. 주님 안에는 인간적인 분노나 복수심이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영원히 동일합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이 그 사랑에 반대되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의 작용을 진노와 형벌처럼 경험합니다. 태양이 진흙을 진흙으로 만들고 밀랍을 밀랍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성질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물론 자연적 비유에는 한계가 있지만, 핵심은 ‘주님이 변하시는 것이 아니라 수용자의 상태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계시록 16장의 처음 네 대접에는 매우 정교한 진행이 보입니다. 첫째는 ‘땅’입니다. 교회의 외적 기반과 삶의 상태가 드러납니다. 둘째는 ‘바다’입니다. 자연적 인간 안에 축적된 진리와 지식의 전체가 드러납니다. 셋째는 ‘강과 물 근원’입니다. 진리가 흘러나오는 이해와 교리의 원천이 드러납니다. 넷째는 ‘해’입니다. 가장 깊은 사랑의 상태까지 드러납니다. 결국 심판은 사람의 겉에서 시작하여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개인의 거듭남에도 매우 의미 있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는 외적인 행동의 악을 봅니다. ‘이 행동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조금 더 깊어지면 그 행동을 만들어 내는 잘못된 생각과 신앙을 봅니다. 더 깊어지면 그 생각들이 어디에서 흘러나오는지, 곧 내 판단의 원천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깊은 곳에서 ‘내가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화를 냈다고 합시다. 처음에는 ‘화를 낸 행동’을 회개합니다. 이것이 ‘땅’의 차원과 비슷합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저 사람이 나를 무시했다’는 자기중심적인 판단을 발견합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나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사고의 근원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는 주님의 뜻보다 내 명예를 더 사랑하고 있었구나’라는 지배적 사랑의 문제를 보게 됩니다. 거듭남은 이렇게 점점 ‘해’까지 들어갑니다.
그래서 넷째 대접 뒤에 ‘회개하지 아니하더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가장 깊은 사랑이 드러났을 때에도 사람이 그것을 놓지 않으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동 하나를 고치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 생각 하나를 수정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내려놓는 것은 어렵습니다. 바로 거기서 진정한 영적 싸움이 시작됩니다.
사람은 심지어 고통을 당하면서도 자기 사랑을 붙들 수 있습니다. 계시록 16장의 사람들은 해의 열에 크게 태움을 입으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훼방합니다. 고난 자체가 사람을 거듭나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보여 줍니다. 고난은 내적 상태를 드러낼 수 있지만, 드러난 것을 주님의 도움으로 거절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을 필요로 합니다.
강사가 이 대목에서 ‘우리가 회개하는 것은 큰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 것은 그래서 더욱 귀하게 들립니다. 회개할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마음이 완전히 굳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듣다가 마음이 찔리고, ‘이것은 내 잘못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주님 앞에서 돌이키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을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적 진리가 아직 우리 안에 들어올 길이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다만 회개는 감정의 강도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많이 울었다고 반드시 깊이 회개한 것도 아니고, 눈물이 없다고 회개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회개는 자기를 살펴 악을 발견하고, 그것을 주님께 대한 죄로 인정하여 고백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실제로 그 악을 행하지 않으려고 싸우는 것입니다. 결국 회개의 진실성은 이후의 삶에서 확인됩니다.
이 점은 ‘핵심진리’가 강조해 온 ‘연단’과도 좋은 접점을 만듭니다. 연단은 많은 고통을 겪었다는 이력이 아닙니다. 내 안의 것이 드러날 때 그것을 주님의 말씀 앞에서 다루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대접 재앙을 거듭남에 적용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얼마나 큰 고난을 보내셨는가’보다 ‘그 상황을 통해 내 안의 무엇이 드러났고, 나는 그것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또한 둘째·셋째 대접에서 물이 피로 변하는 장면은 말씀을 다루는 우리 자신에게도 특별한 경고가 됩니다. 말씀은 생명의 물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이미 세워 놓은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씀을 가져다 붙이면 물이 피로 변할 수 있습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정죄하기 위해 성경을 사용하고, 자기 교단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말씀을 사용하며, 자기 권위를 세우기 위해 신적 진리를 이용한다면 생명의 물이 다른 용도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사용하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가지고 다른 설교자와 교회를 재단하는 데만 사용한다면, 아무리 정확한 AC와 ‘계시록 밝히기’의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생명의 물로 기능하고 있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그 렌즈를 통해 다른 사람의 말 가운데 있는 선과 진리는 더 잘 발견하고, 잘못된 부분은 그 사람을 정죄하지 않으면서 분별하며,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먼저 비추게 된다면 진리는 본래의 쓰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이번 강사의 태도에서도 좋은 것을 먼저 살릴 필요가 있습니다. 일곱 대접을 자연계의 미래 재앙으로 해석하는 부분에서는 스베덴보리와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회개할 수 있는 것이 은혜다’, ‘작은 죄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성도가 끝까지 연단 가운데 주님을 붙들어야 한다’는 중심에는 귀한 신앙적 감각이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통째로 버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 안에서 더 깊은 질서로 옮겨 놓는 것입니다.
10강 4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둘째·셋째·넷째 대접에서 바다가 피가 되고 강과 물 근원이 피가 되며 해가 사람을 태우는 장면은 미래의 자연계에서 바다와 담수와 태양에 연속적으로 물리적 재앙이 일어나는 사건으로만 읽기보다,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말씀의 진리와 교리의 원천이 악한 사랑에 의해 왜곡되어 영적 생명을 잃고, 마침내 사람의 가장 깊은 지배적 사랑까지 신적 사랑과 진리 앞에서 완전히 드러나는 마지막 심판의 아르카나로 읽을 때 더욱 깊은 의미가 열립니다.’
그리고 10강 4부에서 가장 오래 남겨 둘 말씀은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더라.’ 계시록이 두려운 이유는 바다가 피가 되어서만도 아니고 해가 뜨거워져서만도 아닙니다. 그 모든 일을 겪고도 사람이 ‘회개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악이 드러나는 것은 아직 끝이 아닙니다. 악이 드러났는데도 그것을 악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상태, 더 나아가 자기 악의 결과를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상태가 진정 두려운 것입니다.
반대로 아직 회개할 수 있다면 희망이 있습니다. 내 안의 ‘바다’가 오염되어 있음을 보고, ‘물 근원’에 잘못된 것이 있음을 발견하고, 마침내 내 ‘해’, 곧 가장 깊은 사랑 가운데 자기애가 자리 잡고 있음을 보게 되더라도, 그것을 주님 앞에서 인정할 수 있다면 거듭남은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말씀 앞에서 우리가 구할 것은 ‘주님, 저에게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게 해 주십시오’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 제 안에 있는 것을 보게 하시고, 보았을 때 변명하지 않고 회개하게 하시며, 그 악을 주님의 힘으로 떠날 수 있게 하옵소서’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말한 것처럼, 참으로 ‘회개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10강 5부
다섯째, 여섯째 대접과 아마겟돈 : 짐승의 보좌가 어두워지고, 마지막 거짓들이 전쟁을 준비하다
10강 5부에서는 계시록 16장의 흐름이 한층 더 깊어집니다. 앞의 네 대접이 ‘땅’, ‘바다’, ‘강과 물 근원’, ‘해’에 차례로 쏟아지면서 교회와 인간의 외적인 것에서 점점 내적인 사랑의 상태까지 드러냈다면, 이제 다섯째 대접은 마침내 ‘짐승의 보좌’ 자체를 겨냥합니다. 강사는 이것을 미래 후 3년 반에 실제 예루살렘 성전에 자리 잡은 적그리스도의 보좌에 하나님의 심판이 직접 떨어지는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그 결과 적그리스도의 나라가 암흑에 빠지고, 첫째 대접 때부터 악성 종기로 고통받던 사람들이 혀를 깨물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하나님을 훼방하고 여전히 회개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강사의 종말 시간표 안에서는 이 장면이 매우 극적입니다. 지금까지 세계를 장악한 듯했던 적그리스도의 체제가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적그리스도를 구세주처럼 믿고 짐승의 표까지 받았는데, 막상 그의 나라는 대접 재앙 앞에서 아무 힘도 쓰지 못합니다. 그러자 강사는 그 내부에서도 책임 전가와 불신이 생기고,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 세력이 서로를 탓하면서 분열하기 시작한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여섯째 대접에서 이 갈등이 세계적 전쟁, 곧 아마겟돈으로 폭발한다는 구조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가장 먼저 주목할 말은 ‘짐승의 보좌’입니다. 보좌는 누군가가 앉아 다스리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영적으로는 무엇이 교회와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가를 나타냅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스베덴보리에게 계시록의 짐승은 미래 한 정치인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특히 체어리티와 삶에서 분리된 신앙, 그리고 그 교리를 자연적 인간의 추론으로 확증하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렇다면 ‘짐승의 보좌’란 바로 그 거짓된 원리가 교회 안에서 하나의 지배적 권위를 차지한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거짓 하나가 있다는 것과 그 거짓이 ‘보좌’에 앉는 것은 다릅니다. 사람에게 잘못된 생각 하나가 있어도 그것이 다른 진리에 의해 교정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거짓이 신앙 체계 전체를 지배하는 원리가 되면, 그 사람은 모든 말씀을 그 거짓을 중심으로 읽기 시작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인간이 어떤 교리를 만들고, 그 뒤에 성경 전체를 그 교리에 맞추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말씀보다 인간의 체계가 ‘보좌’에 앉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섯째 대접이 ‘짐승’ 자체보다 ‘짐승의 보좌’에 쏟아진다는 것은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마지막 심판에서는 단편적인 오류들만 고쳐지는 것이 아니라 거짓을 지배하게 만든 중심 원리 자체가 신적 진리 앞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뿌리가 심판받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밝히기’에서 이 대목이 신앙만의 교리를 지탱하는 지배적 구조와 연결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집니다’. 말씀에서 ‘어둠’은 진리가 없는 상태, 또는 거짓으로 인해 진리를 볼 수 없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것도 단순히 자연계의 태양빛이 갑자기 사라지는 장면만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거짓이 신적 진리 앞에서 폭로되었는데, 그 거짓을 버리지 않으면 사람에게 남는 것은 빛이 아니라 어둠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거짓된 교리가 세력을 얻고 있을 때에는 오히려 매우 밝게 느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설명이 명료하고, 모든 성경 구절이 한 체계 안에서 정리되는 것처럼 보이며, ‘우리는 답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을 줍니다. 그런데 그 중심 원리가 잘못되어 있다면 그 명료함 전체가 일종의 거짓된 빛일 수 있습니다. 신적 진리가 그 체계를 비추면 갑자기 그동안 분명해 보였던 것들이 모순으로 드러납니다. 그때가 ‘짐승의 나라가 어두워지는’ 상태와 비슷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자기 확신이 강할 때에는 모든 일이 자기 시각에서 잘 설명됩니다. ‘내가 화내는 것은 저 사람이 잘못했기 때문이고, 내가 저 사람을 멀리하는 것은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이며, 내가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서다’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빛이 조금 더 깊이 들어오면 그 뒤에 자기애와 명예욕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때 이전의 설명 체계가 무너집니다. 작은 ‘보좌의 심판’입니다.
강사는 다섯째 대접에서 사람들이 심한 고통을 받으면서도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강조합니다. 그는 ‘진정한 회개는 성령님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며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이 충격과 원망과 불평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돌아오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앞 4부에서도 보았지만, 이 반복은 계시록 16장에서 상당히 중요합니다. 재앙 그 자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재앙을 겪고도 회개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지배적 사랑의 고착과 연결해서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오랫동안 어떤 악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그 악을 거짓으로 정당화하면서 생명으로 만들어 가면 나중에는 진리를 보아도 그것을 싫어하게 될 수 있습니다. 진리가 이해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진리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지성의 문제가 사랑의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단순히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내가 사랑하던 것을 내려놓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명예를 사랑했다면 명예욕을, 지배를 사랑했다면 지배욕을, 자기 의를 사랑했다면 ‘내가 옳다’는 기쁨을 포기해야 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회개는 어렵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지 않는 거짓은 쉽게 고칠 수 있지만, 사랑과 결합한 거짓은 잘 놓지 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섯째 대접의 ‘혀를 깨문다’는 표현도 흥미롭습니다. 말씀에서 혀는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사람이 고통 속에서 혀를 깨물면서도 하나님을 훼방한다는 것은 자기의 거짓된 사고가 무너지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신적 진리를 대적하는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인간은 자기 확신이 무너질 때 상당한 고통을 느낍니다. 오랫동안 자기 정체성과 결합해 온 신앙 체계나 가치관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진리를 공격하는 편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섯째 대접 뒤 강사의 설명에서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 세력이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갈라진다는 점도 영적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악과 거짓은 겉으로는 강하게 연합하는 것처럼 보여도 진정한 결합을 이룰 수 없습니다. 천국적 결합은 서로의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루어지지만, 지옥적 연합은 각자가 자기 유익을 얻기 위해 잠시 손잡은 것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공동의 적이나 공동의 이익이 사라지면 서로를 공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옥의 영들이 서로를 사랑해서 하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같은 악한 목적 때문에 잠시 결합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의 가장 깊은 사랑은 자기 자신이므로 결국 서로를 지배하려 합니다. 한 지옥적 영이 다른 영에게 복종하는 것도 그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힘에 눌려서입니다. 그래서 지옥적 질서는 본질적으로 분열을 품고 있습니다.
이 원리는 인간의 마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탐욕과 명예욕은 어느 동안 서로 협력할 수 있습니다. 돈을 벌어 명예를 얻고, 명예를 이용해 더 많은 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둘이 충돌하면 사람 안에서 갈등이 생깁니다. 자기애에 기초한 여러 욕망들은 근본적으로 하나의 천국적 질서를 이루지 못합니다. 결국 각각 ‘내가 왕이 되겠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적 붕괴 뒤 여섯째 대접이 ‘큰 강 유브라데’에 쏟아집니다. 강사는 유브라데 강물이 실제로 말라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군대가 아마겟돈 전쟁에 참여할 길이 열리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어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을 실제 악령들의 활동으로 보며, 이 악령들이 이적을 행하여 세계의 왕들을 마지막 전쟁으로 모은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섯째 대접에서 매우 중요한 방향 전환이 다시 일어납니다. 유브라데는 단순한 중동의 강을 넘어 말씀에서 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사이의 경계, 특히 이성적 사고가 있는 영역과 관련됩니다. ‘물이 마른다’는 것은 그 영역에 있던 진리가 사라지거나, 반대로 거짓된 추론이 더 이상 자기 모습을 감추지 못하도록 길이 열리는 상태와 관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방에서 오는 왕들’은 자연적 아시아의 군주들이라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 특히 ‘동방’이 주님과 사랑을 나타내는 상응 속에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이 대목은 강사의 자연적 전쟁 독법과 스베덴보리의 영적 독법이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강사의 질문은 ‘유브라데가 마르면 어느 국가의 군대가 어느 길로 이동할 것인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질문은 ‘교회의 마지막 싸움에서 어떤 진리와 어떤 거짓이 맞붙는가?’입니다.
계시록에서 그 싸움을 준비하는 세력이 ‘용의 입, 짐승의 입,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옵니다. 여기서 반복되는 말이 ‘입’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전쟁의 무기가 먼저 탱크나 미사일이 아니라 ‘입’에서 나옵니다. 곧 교리와 주장, 추론입니다. 계시록의 마지막 전쟁이 본질적으로 진리와 거짓의 전쟁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중요한 표상입니다.
강사는 이 세 더러운 영을 ‘온갖 악담과 시끄러운 비방과 욕을 잘하는 악령’이라고 설명하면서,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주장을 가지고 활동하는 영들이라고 봅니다. 여기에는 영적 전쟁이 말과 사상과 미혹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중요한 감각이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 ‘개구리’는 더욱 구체적으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자연적 추론과 말재주로 거짓을 확증하는 상태와 관련됩니다.
개구리는 물과 땅 사이를 오갑니다. 영적 상응에서도 이런 낮고 습한 생물은 감각적·자연적인 추론과 연결되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특히 계시록의 ‘개구리 같은 영’은 말씀의 더 높은 영적 진리를 보지 못하고 외적 문자와 인간적 논리를 가지고 거짓을 계속 주장하는 추론을 생각하게 합니다. 논리는 많고 말은 많지만 그 안에 천국의 빛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현실적인 영적 위험입니다. 거짓은 대개 ‘나는 거짓이다’라는 모습으로 오지 않습니다. 논리를 가지고 옵니다. 성경 구절을 가지고 옵니다. 역사적 사례를 가지고 옵니다. 사람의 자연적 이성에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개구리 같은 영’의 문제는 무지보다 거짓된 확증에 있습니다. 이미 결론을 정해 놓고 가능한 모든 논리를 동원하여 그 결론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겟돈’은 군사전쟁의 지명만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아마겟돈은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진리와 거짓이 결정적으로 충돌하는 영적 전쟁을 나타냅니다. 특히 주님이 누구이신가, 그리고 구원이 단순한 신앙의 고백으로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 속에서 이루어지는가 하는 문제와 깊이 연결됩니다. 계시록 전체에서 계속해 온 싸움이 마지막으로 집중되는 곳입니다.
강사의 해석에서도 아마겟돈은 단순한 국가 간 전쟁을 넘어 ‘하나님의 큰 날의 전쟁’입니다. 그는 세 더러운 영이 온 천하 임금들을 모아 이 마지막 전쟁을 준비한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그의 렌즈에서는 이 영적 미혹이 결국 자연계의 군사동맹과 전쟁으로 나타나지만, 스베덴보리에게는 교회 안의 거짓과 진리의 최종 충돌 자체가 본질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거대한 전쟁 준비 장면 한가운데에 계시록 16장 15절이 갑자기 삽입됩니다.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강사도 이 구절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는 주님의 지상 재림이 언제인지 모르므로 깨어 있어야 하며, 특히 마지막 연단을 통과하는 성도들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자기 옷’, 곧 자신의 행실을 더럽히지 않아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대목은 이번 10강 5부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강사의 권면이 매우 가까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말씀에서 ‘옷’은 진리를 표상합니다. 왜냐하면 옷이 몸을 입히듯 진리는 선을 입히고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사랑과 의지가 몸과 같다면, 그것이 밖으로 나타나는 사고와 삶의 형식이 옷과 같습니다. 따라서 ‘옷을 지킨다’는 것은 단지 외적 도덕생활을 깨끗이 유지하는 것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를 거짓으로 더럽히지 않고 그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을 뜻합니다.
강사는 이를 ‘자기 행실’과 연결합니다. 이 직관은 상당히 좋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행실 자체보다 그 행실을 입히고 있는 내적 사랑까지 함께 봅니다. 같은 선행을 해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할 수 있고, 이웃의 선을 진심으로 원해서 할 수도 있습니다. 천국에서 중요한 것은 외적 행위와 그 행위의 내적 의도가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벌거벗음’ 역시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좋은 의미의 벌거벗음은 순진함을 나타낼 때도 있지만, 여기서는 진리가 없어 자기 악이 그대로 드러난 부끄러운 상태를 나타냅니다. 겉으로 신앙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마지막 심판에서 그 옷이 실제 생명과 결합되어 있지 않았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둑같이 오신다’는 말씀의 초점도 날짜를 알아맞히지 못한다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진리가 우리의 상태를 드러낼 때 그것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예상치 못한 심판처럼 느껴진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날마다 자기 삶을 말씀의 빛 아래 살피는 사람에게는 그 빛이 완전히 낯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재림 이해와도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두 번째 오심은 자연계 하늘에서 육체로 다시 내려오시는 사건보다 말씀의 신적 진리가 새롭게 열리고 주님의 참된 신성이 드러나는 영적 오심입니다. 따라서 ‘깨어 있으라’는 것은 구름을 쳐다보며 날짜를 기다리는 것보다 진리가 올 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랑과 삶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강사는 ‘재림 신앙이 너무 중요하다’며 신학적 견해가 조금 달라도 주님은 반드시 오시며 행한 대로 갚으신다고 강조합니다. 이어 믿음과 행실을 함께 중요하게 말합니다. 종말론의 외적 형태에서는 스베덴보리와 크게 다르지만, ‘깨어 있음이 실제 행실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이 부분은 귀하게 남길 수 있습니다.
더구나 ‘도적같이 오리니’라는 말씀이 세 더러운 영들이 세상의 왕들을 전쟁에 모으는 한가운데 삽입되어 있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합니다. 계시록은 독자에게 ‘그들이 어느 나라 군대를 어디에 모으는지 계산하라’고만 하지 않습니다. 갑자기 시선을 독자 자신에게 돌립니다. ‘너는 깨어 있는가? 네 옷은 어떠한가?’라고 묻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계시록을 읽는 중요한 방식입니다. 아마겟돈을 밖에서 연구하다가도 반드시 안으로 돌아옵니다.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밖에 있다고 안심하지 못하게 합니다. 내 안에도 거짓을 합리화하는 ‘개구리 같은 추론’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악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성경 구절과 논리를 동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아마겟돈은 이미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진리는 ‘용서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proprium은 ‘저 사람은 너무 악하니까 용서하면 안 된다’, ‘용서하는 것은 불의를 묵인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공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수많은 논리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물론 실제 정의의 문제와 용서는 구별해야 하지만, 그 논리의 깊은 목적이 내 복수심을 지키는 데 있다면 그것은 ‘개구리 같은 추론’이 될 수 있습니다. 진리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실제로는 악한 사랑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또 진리는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고 합니다. proprium은 ‘그래도 내가 이만큼 공부했고, 내가 수고했고, 내가 남들보다 더 깊이 이해했다’고 말합니다. 이 역시 매우 그럴듯합니다. 사실 수고한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사용하여 자기 공로를 지키려 한다면 거짓의 추론이 섞입니다. 그래서 영적 전쟁은 단순히 참 문장과 거짓 문장을 구별하는 싸움이 아니라 그 문장을 움직이는 사랑까지 분별하는 싸움입니다.
이 점에서 ‘아마겟돈’은 우리에게 매우 가까워집니다. 거대한 마지막 전쟁의 본질이 진리와 거짓의 충돌이라면, 한 사람이 회개를 앞두고 자기 악을 정당화하는 모든 논리와 싸우는 것도 작은 아마겟돈입니다. 주님의 진리와 proprium의 거짓 사이에 전선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인간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내가 스스로 진리를 판별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모든 참된 빛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고 이성을 사용하고 분별해야 하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주님, 제 자기애가 이 진리를 왜곡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자기 지성이 자기 자신을 심판관으로 세우는 순간 짐승의 보좌가 다시 세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섯째 대접의 핵심은 ‘적그리스도 왕국에 정전이 일어난다’는 것보다 거짓된 신앙의 지배 원리가 신적 진리 앞에서 빛을 잃는 데 있습니다. 여섯째 대접의 핵심은 ‘유브라데 강이 물리적으로 마른다’는 것보다 마지막 영적 싸움을 가리고 있던 것들이 제거되어 진리와 거짓이 완전히 맞부딪히는 데 있습니다. 세 개구리의 핵심은 기괴한 악령들의 외모보다 악한 사랑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쏟아지는 거짓된 추론입니다. 그리고 아마겟돈의 핵심은 어느 평원에서 벌어질 세계대전 이전에 주님에 관한 진리와 삶의 선을 거부하는 거짓이 마지막으로 결집하여 싸우는 교회의 영적 전쟁입니다.
그러면서도 강사의 해설에서 꼭 살려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아마겟돈 이야기를 하던 바로 한가운데서 ‘자기 옷을 지키라’는 말씀을 붙들고 신앙과 행실을 강조합니다. 이 부분은 계시록 자체의 초점과도 잘 맞습니다. 세계가 어떤 모양으로 끝날지 아는 것보다 그때 내가 어떤 상태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때’만이 아니라 지금의 상태가 중요합니다. 마지막 순간의 옷은 오늘 하루하루 입고 살아 온 옷이기 때문입니다.
10강 5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6장의 다섯째·여섯째 대접과 아마겟돈은 미래 적그리스도의 세계정부가 암흑에 빠진 뒤 유브라데가 말라 각국 군대가 중동으로 집결하여 최후의 세계전쟁을 벌이는 사건으로만 읽기보다,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의 지배적 원리가 신적 진리 앞에서 완전히 어두워지고, 그 체계를 지탱하던 자연적 추론과 거짓들이 마지막으로 결집하여 주님에 관한 진리와 선한 삶을 대적하는 교회의 최종 영적 전쟁을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을 때 그 아르카나가 더욱 깊게 열립니다.’
그리고 이 5부에서 가장 오래 남겨 두고 싶은 말씀은 아마 아마겟돈이라는 이름보다 그 한가운데 삽입된 이것일 것입니다.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세상의 왕들이 모이고 악령들이 이적을 행하고 마지막 전쟁이 준비되는 그 엄청난 장면 한복판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전쟁 지도를 연구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네 옷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강사도 이 말씀을 ‘자기 행실을 지켜야 한다’는 권면으로 받아들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그것은 ‘네가 받은 진리를 사랑과 결합하여 살고, 자기애의 거짓으로 그 진리를 더럽히지 말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바로 그것이 아마겟돈을 준비하는 가장 실제적인 준비이며, 동시에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거듭남의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10강 6부
일곱째 대접과 ‘되었다’ : 큰 지진, 바벨론의 붕괴, 그리고 심판의 완결
10강 6부에서는 계시록 16장의 마지막, 곧 일곱째 대접으로 들어갑니다. 여섯째 대접에서 유브라데가 마르고,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 세 더러운 영이 세상의 왕들을 아마겟돈으로 모았다면, 이제 일곱째 천사가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습니다. 그러자 성전의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되었다’고 선언하고, 번개와 음성과 우레와 전무후무한 큰 지진이 일어납니다. 강사는 이 장면을 실제 자연계에 일어날 마지막 전 지구적 재앙으로 이해합니다. 그는 이 지진을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지각변동으로 보고, 그 결과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이 무너지며, 섬과 산들이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거대한 우박까지 쏟아짐으로써 일곱 대접 재앙이 완전히 끝난다고 설명합니다.
강사의 시간표에서 이 장면은 매우 결정적입니다. 일곱째 대접이 끝나면 후 3년 반의 마지막 재앙도 사실상 완결되고, 이어 계시록 17장에서는 큰 음녀의 종교적 심판, 18장에서는 큰 성 바벨론의 정치적 심판을 자세히 보여 준다고 정리합니다. 강사 자신도 계시록 16장을 ‘전 세계가 멸망하는 일곱 대접’, 17장을 ‘큰 음녀의 종교적 멸망’, 18장을 ‘큰 성 바벨론의 정치적 멸망’으로 구분합니다. 그러므로 16장의 일곱째 대접은 단지 일곱 재앙 가운데 마지막 하나가 아니라, 지금까지 축적되어 온 종말의 악과 거짓이 완전히 무너지는 총결산의 장면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말은 ‘되었다’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마지막 자연재해까지 모두 끝났다’는 종료 방송처럼만 들을 말이 아닙니다. 어떤 영적 상태가 완전히 충만해져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게 되었다는 선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 전체에서 우리는 계속 ‘익음’, ‘수가 참’, ‘일곱’, ‘마지막’이라는 표현들을 보았습니다. 선도 익고 악도 익으며, 상태가 완성되면 분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되었다’는 말은 주님의 인내가 감정적으로 한계에 도달했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상태가 심판을 통해 완전히 드러나고 분리될 때가 찼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더 깊습니다.
이것은 앞서 강사가 계속 강조해 온 ‘익은 열매’와도 연결됩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성도들이 첫째, 둘째, 셋째 익은 열매로 완성되고, 악한 자들의 포도송이도 심판받을 만큼 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익음’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반복해서 사랑하고 선택하느냐가 점차 지배적 사랑이 되고, 마침내 그것이 그 사람의 생명의 질이 됩니다. 마지막 심판은 바로 그 생명의 질이 완전히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되었다’는 것은 사람과 교회 안의 숨은 것이 더 이상 숨을 수 없게 되었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일곱째 대접이 ‘공기 가운데’ 쏟아진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앞의 대접들은 땅, 바다, 강과 샘, 해, 짐승의 보좌, 유브라데에 쏟아졌습니다. 이제 마지막 대접은 공기입니다.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생명 활동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런 마지막 범위를 교회 전체를 둘러싼 가장 일반적인 사고와 영적 분위기, 곧 모든 것을 관통하는 상태와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심판이 어느 한 교리나 한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교회 전체의 영적 분위기까지 완전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습니다. 어떤 잘못 하나를 고치는 것과 그 사람의 ‘분위기’ 전체가 바뀌는 것은 다릅니다. 거듭남이 깊어지면 단지 몇 가지 행동만 수정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 무엇을 기뻐하고 싫어하는지까지 달라집니다. 이것은 공기처럼 전체를 둘러싼 상태입니다. 일곱째 대접이 공기에 쏟아진다는 표상은 마지막 심판이 그렇게 전면적임을 보여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어 ‘번개와 음성과 우레’가 나옵니다. 말씀에서 번개와 우레는 신적 진리가 강력하게 나타나는 것과 자주 연결됩니다. 신적 진리가 사람의 더 낮은 차원까지 내려올 때 그것이 마치 번쩍이는 빛과 강한 소리처럼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계시록에서 반복되는 표상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단순한 기상현상만 보기보다, 주님의 신적 진리가 더 이상 가려지지 않고 마지막으로 강력하게 드러나는 상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뒤에 ‘큰 지진’이 옵니다. 강사는 이것을 실제 전무후무한 자연 지진으로 해석합니다. 그는 ‘지금 우리가 염려하는 지진은 지진도 아니다’라고 할 정도로 이 재앙의 물리적 규모를 크게 봅니다. 문자적 차원에서는 충분히 그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지진’은 교회의 상태가 크게 흔들리고 뒤집히는 것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표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땅’이 교회를 나타내므로 땅이 흔들린다는 것은 교회의 기존 질서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교회 건물이 무너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의 교리적 기반과 신앙의 구조가 무너질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절대적으로 여겼던 것이 더 이상 설 수 없게 되고, 사람들에게 확실해 보였던 교리적 체계가 신적 진리 앞에서 흔들리며, 그동안 선과 진리처럼 보였던 것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이런 것이 영적 지진입니다.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이런 ‘지진’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자기 정체성을 떠받쳐 온 신앙적 확신 하나가 잘못되었음을 깨닫는 순간, 사람의 내적 세계 전체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믿고 있었던 것인가?’ 하는 혼란이 옵니다. 하지만 그 흔들림이 반드시 파괴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기초가 무너져야 더 참된 기초 위에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지진은 심판이면서 동시에 새 질서의 준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마지막 심판은 옛것을 단순히 없애기 위한 사건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교회를 준비하기 위한 분리입니다. 옛 교회의 거짓과 악이 흔들려 무너져야 새 예루살렘의 질서가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계시록의 심판 장면을 마지막 파괴로만 읽으면 이야기의 절반만 보는 셈입니다.
계시록 16장 19절에서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졌다’고 합니다. 강사는 여기서 큰 성을 후 3년 반 적그리스도 체제의 중심과 연결하고, 만국의 성들은 666의 짐승들이 지배하던 여러 세력의 중심이라고 풀이합니다. 그는 실제 대지진으로 그들이 자랑하던 도시와 권력과 모든 것이 무너진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성’이 교리와 교회의 구조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성은 많은 사람이 함께 살며 질서를 이루는 곳입니다. 영적으로는 진리나 거짓이 체계화되어 하나의 교리적 도시를 이루는 것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큰 성이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이 무너진다는 것은 거짓된 교리 체계와 그것을 바탕으로 세워진 여러 영적 구조들이 마지막 심판에서 더 이상 하나를 유지하지 못하고 붕괴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갈라진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거짓에 기초한 연합은 처음에는 단단해 보이지만 본질적인 결합이 아닙니다. 앞서 다섯째 대접에서도 보았듯 악과 거짓은 서로를 사랑해서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유익 때문에 잠시 손잡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내부적으로 갈라집니다. 천국적 결합은 선과 진리가 하나의 주님을 중심으로 결합하지만, 지옥적 결합은 각자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결국 분열을 품고 있습니다.
사람 안의 악한 욕망들도 그렇습니다. 돈을 사랑하고 명예를 사랑하며 지배를 사랑하는 것이 한동안 서로 협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서로 충돌하면 사람의 내면은 찢어집니다. 하나의 악한 사랑이 다른 악한 사랑을 끝까지 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각각 자기 중심을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악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분열’의 씨앗을 품습니다.
이어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강사는 바벨론을 장차 심판받을 실제 정치·종교적 세계 체제와 연결하며, 이어 17장과 18장에서 그 정체와 멸망을 따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바벨론은 훨씬 명확한 영적 원리를 가집니다. 주님의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사람을 지배하려는 사랑, 곧 종교적 권위와 신앙을 자기 권력과 자기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왜곡 가운데서도 매우 깊은 왜곡입니다. 돈을 위해 사람을 지배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의 양심을 지배하는 것이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내 말을 따르는 것이 곧 하나님을 따르는 것’으로 만들고, 교회와 직분과 영적 권위를 자기 지배욕의 도구로 사용한다면 바벨론의 원리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오래 잊고 계시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에서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상태가 심판을 위해 완전히 드러나는 것을 인간적 표현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적 지배욕이 그동안 종교적 경건의 외관 속에 감추어져 있었지만, 이제 그 실체가 완전히 드러난 것입니다.
이것은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에게 특히 엄중한 말씀입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사람이 다른 사람을 더 자유롭게 주님께 인도해야지, 자기에게 종속시키려 해서는 안 됩니다. 천국의 질서는 자유입니다. 주님조차 사람을 강제로 사랑하게 하지 않으시는데,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양심을 자기 손에 쥐려 한다면 천국의 질서와 정반대로 갑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심판을 다른 교단이나 특정 종교집단의 문제로만 읽으면 말씀의 칼날을 피하게 됩니다. ‘내 안에도 바벨론이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내가 진리를 말할 때 상대가 주님께 가까워지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내 말을 인정하기를 원하는가. 내가 사역을 할 때 사람을 자유롭게 하려 하는가, 아니면 내 영향력 안에 두려 하는가. 내가 옳다는 사실보다 이웃의 영적 선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가. 이런 질문들이 바벨론을 우리 안에서 드러냅니다.
이어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데없더라’고 합니다. 강사는 이를 실제 지각변동으로 섬과 산들이 사라지는 것으로 읽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는 ‘섬’과 ‘산’ 역시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섬은 더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어느 정도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는 외적 상태와 연결될 수 있고, 산은 좋은 의미에서는 사랑의 높음, 반대 의미에서는 자기애와 교만의 높음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문맥상 마지막 심판에서 산들이 사라지는 것은 인간이 자기 높음을 세워 온 모든 것이 신적 진리 앞에서 무너지는 상태로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산’은 자기 높임과 연결하여 생각하면 매우 직접적입니다. 인간은 자기 지식, 직분, 영적 체험, 업적을 산처럼 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빛 앞에서는 자기에게서 나온 높음이 아무것도 아님이 드러납니다. 천국의 참된 높음은 자신을 높이는 데 있지 않고 주님을 높이고 이웃을 섬기는 데 있습니다.
강의는 이어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을 실제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는 이를 거의 폭탄과 같은 거대한 우박으로 설명하면서, 이런 재앙 앞에서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훼방한다고 말합니다. 자동자막에는 무게 환산이 다소 혼란스럽게 나타나므로 그 세부 수치까지 해설의 근거로 삼지는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강사가 이것을 마지막 자연재해의 절정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우박은 거짓된 진리, 곧 겉모습은 진리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생명이 없는 거짓과 관련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물은 본래 진리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 물이 얼어 차갑고 딱딱한 우박이 되면 생명을 적시는 물의 기능을 잃습니다. 이것은 진리가 사랑에서 분리되어 차갑고 공격적인 교리적 거짓으로 변하는 모습과 잘 어울립니다.
사람은 성경구절을 가지고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때릴 수도 있습니다.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면 생명의 물이지만, 사랑이 빠지고 자기 의와 정죄와 결합하면 그 진리가 우박처럼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같은 말씀인데 사용하는 사랑이 다르면 전혀 다른 결과가 생깁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적용하는 우리에게도 특별히 주의할 점입니다. 상응과 속뜻이라는 귀한 진리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두드리는 ‘우박’을 만들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당신은 틀렸다’, ‘당신의 신앙은 문자적 수준이다’라는 식으로 진리를 사용하면, 내용은 맞을 수 있어도 사랑의 물이 얼어붙은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진리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주어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그래서 이번 해설의 기본 태도도 중요합니다. 강사의 자연적 종말론과 스베덴보리의 영적 해석이 크게 다르더라도, 그것을 ‘누가 옳고 누가 어리석은가’를 가르는 자료로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강사가 붙들고 있는 ‘끝까지 회개하라’,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하나님만 경배하라’, ‘연단 가운데 믿음을 지키라’는 영적 중심은 충분히 귀하게 받고, 그 종말 시간표와 상징 해석은 스베덴보리의 상응으로 더 깊게 조명하면 됩니다.
일곱째 대접 뒤 사람들이 여전히 하나님을 훼방한다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계시록 16장에서 ‘회개하지 않았다’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이것이 모든 재앙 장면보다 더 두려운 부분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고통받는다고 자동으로 주님께 돌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기애가 굳어져 있으면 자기 욕망이 좌절될수록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고난 자체를 영적 성장의 증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많이 고생했다고 더 거룩한 것도 아니고, 큰 시험을 받았다고 자동으로 더 높은 천국적 상태에 이른 것도 아닙니다. 핵심은 그 가운데 무엇을 보았고 어떻게 자유롭게 응답했는가입니다. 악을 보고 주님 앞에 인정했는가, 아니면 더 정당화했는가입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처음 10강을 시작하며 ‘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고 잘못을 고백해야 한다’고 말했던 부분과 일곱째 대접은 뜻밖에 연결됩니다. 심판의 본질도 결국 드러남입니다. 숨겨져 있던 것이 드러나고, 그 앞에서 사람이 선택합니다. 변명할 것인가, 회개할 것인가입니다.
‘되었다’라는 선언도 그래서 우리 개인에게는 아주 작은 형태로 반복될 수 있습니다. 어떤 악에 대해 주님께서 충분히 보여 주셨고, 내가 그것이 악임을 분명히 알게 된 순간에는 더 이상 ‘몰랐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때 하나의 상태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 진리에 따라 선택해야 합니다. 진리를 받아들여 옛 상태가 끝나게 하든지, 진리를 거절하여 악을 더욱 굳히든지 하는 갈림길이 옵니다.
거듭남에서 이런 작은 종말은 여러 번 옵니다. 옛 자기 의의 세계가 끝나고, 오래 붙들던 원망의 세계가 끝나고, 자기 공로를 붙드는 한 영역이 끝납니다. 그때 사람 안에서 작은 지진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진 뒤에 새 질서가 들어옵니다. 이것이 ‘종말’과 ‘새 창조’가 늘 붙어 있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을 두려운 세계 파괴의 이야기로만 읽는 것과, 주님께서 악과 거짓을 끝내시고 새 질서를 여시는 이야기로 읽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심판은 반드시 새 교회를 향합니다. 바벨론이 무너진 뒤에는 새 예루살렘이 옵니다.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체계가 무너진 뒤에는 어린양의 혼인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질서가 나타납니다. ‘되었다’는 말은 옛것의 끝인 동시에 새것을 위한 문입니다.
10강 6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6장의 일곱째 대접과 ‘되었다’는 선언, 전무후무한 지진과 바벨론의 붕괴, 섬과 산의 소멸과 큰 우박은 미래 후 3년 반의 끝에 지구 전체를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마지막 자연재해로만 읽기보다,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악과 거짓의 모든 구조와 인간의 자기 높임이 신적 진리 앞에서 완전히 드러나 무너지고, 더 이상 선과 악이 섞여 있을 수 없는 최종 분리가 이루어지는 마지막 심판의 완결을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을 때 그 아르카나가 더욱 깊게 열립니다.’
그리고 이 6부에서 오래 남겨 둘 말은 ‘지진’도 ‘우박’도 아닌 ‘되었다’일 것입니다. 그 말은 파괴의 환호가 아닙니다. 악이 영원히 선을 억압하지 못한다는 선언입니다. 거짓이 영원히 진리의 옷을 입고 숨어 있을 수 없다는 선언이며, 바벨론적 지배욕과 짐승적 자기 지성이 언젠가는 반드시 자기 실체를 드러낸다는 선언입니다. 한 개인에게는 더 희망적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의 악을 끝없이 방치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자유롭게 응답하는 만큼 그것을 드러내고 분리하시며, 마침내 어떤 옛 상태를 ‘끝났다’고 하실 수 있도록 거듭나게 하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계시록은 바로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강사의 흐름에서도 이제 17장으로 넘어가 ‘큰 음녀’의 정체와 심판을 본격적으로 다룹니다. 강사는 17장을 ‘큰 음녀가 누구인가’, ‘열 뿔 짐승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 둘이 결국 어떻게 서로 충돌하여 큰 음녀가 심판받는가’를 밝히는 장으로 소개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지점부터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사람과 세상을 지배하려는 사랑’, 곧 바벨론의 본질이 훨씬 직접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따라서 다음 7부에서는 계시록 17장의 ‘큰 음녀’가 단순히 미래의 어느 종교조직인가를 묻는 데서 멈추지 않고, 왜 말씀에서 ‘음행’이 선과 진리의 왜곡을 의미하며, 종교적 지배욕이 왜 그토록 깊은 영적 악으로 묘사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10강 7부
계시록 17장의 큰 음녀 :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지배하려는 사랑
10강 7부에서는 계시록 16장의 일곱 대접을 마치고 계시록 17장으로 들어갑니다. 강사는 17장의 내용을 크게 ‘큰 음녀의 정체’, ‘열 뿔 짐승의 정체’, 그리고 ‘큰 음녀가 어떻게 심판받는가’라는 세 갈래로 정리합니다. 일곱 대접을 가진 천사 가운데 하나가 요한에게 와서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보여 주겠다고 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강사는 이 큰 음녀를 후 3년 반 동안 적그리스도 체제에서 활동할 ‘두 뿔 짐승’, 곧 거짓 선지자와 연결하고, 그가 세상 사람들을 미혹하여 적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숭배하게 만드는 중심적인 종교 지도자가 될 것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먼저 강사의 해석을 그 자체로 충분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에게 계시록 17장은 막연한 악의 상징이 아닙니다. 앞서 계시록 13장에서 등장한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 666의 체제가 후 3년 반 동안 실제 역사 속에서 어떻게 종교적·정치적 조직을 이루는지를 더 자세히 풀어 주는 장입니다. 그래서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다’는 말씀도 그 미래 체제 안에서 권세를 받은 지도자들이 큰 음녀와 결탁하여 적그리스도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강사는 이 ‘음행’을 육체적인 음행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영적 음행’으로 이해합니다. 이 점은 중요합니다. 계시록의 상징을 모두 자연적 의미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음행’에 대해서는 이미 영적 의미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들어가면 바로 이 ‘음행’이라는 말이 더욱 깊어집니다. 말씀에서 결혼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을 표상합니다. 주님과 교회의 결합, 그리고 사람 안에서 의지의 선과 이해의 진리가 하나가 되는 것이 천국적 결혼의 원형입니다. 그렇다면 ‘음행’은 그 결합이 깨지는 것입니다. 진리가 선과 분리되고, 더 나아가 진리가 악한 사랑과 결합하여 왜곡되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큰 음녀를 이해하려면 먼저 성적인 부도덕의 이미지를 떠올리기보다 ‘신성한 진리가 무엇과 결합하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큰 음녀를 ‘많은 사람을 적그리스도 우상에게 끌어가는 존재’라고 해석하는 데에는 중요한 영적 직관이 들어 있습니다. 문제의 핵심이 단순히 잘못된 교리 몇 가지가 아니라, 사람의 사랑과 예배의 방향을 주님에게서 다른 대상으로 돌리는 데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 그것은 미래의 한 거짓 선지자에게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인간 자신과 세상을 높이고 지배하려는 모든 종교적 상태가 ‘바벨론’의 원리를 이룹니다.
계시록 17장의 큰 음녀를 스베덴보리가 해설할 때 가장 중요한 중심은 바로 ‘지배욕’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정치적 권력욕보다 더 깊은 지배욕입니다. 종교와 말씀과 교회의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의 영혼과 양심까지 지배하려는 사랑입니다. 돈을 가지고 사람을 지배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영적으로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적어도 세속적 권력으로 보이지만, 후자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옷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큰 음녀가 ‘많은 물 위에 앉아 있다’는 모습도 의미심장합니다. 계시록 17장 후반에서는 그 물들이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라고 직접 설명됩니다. 즉 이 여자의 영향력이 광범위하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여기서 단순한 인구 규모보다 ‘거룩한 것을 이용하는 지배욕이 얼마나 넓게 인간의 마음과 종교적 질서를 장악할 수 있는가’를 보게 됩니다. 한 사람의 지배욕이 한 공동체에만 머무르지 않고 교리와 제도와 권위를 통하여 확장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앞서 말씀해 주신 이 강사의 배경을 함께 기억하면 해설의 결도 조금 달라집니다. 이 강사는 단순히 종말론 자료를 연구하여 강의하는 분이라기보다 공용복 선생 생전부터 함께했고, 실제 시흥영성수련원 성결수도회의 수도적 전통 안에 있는 분입니다. 따라서 이분이 ‘미혹’, ‘연단’, ‘자기를 죽임’, ‘끝까지 이김’을 말할 때 그것을 단지 미래 사건에 대한 지식으로만 들을 필요는 없겠습니다. 이 강의의 종말론적 도식과 별개로, 그 배후에는 자기 의지와 정욕을 다루고 실제 삶을 정결하게 해야 한다는 수도적 관심이 계속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강사의 종말론적 해석과 그 배후의 수도적 영성을 구별하면서 함께 보는 것이 공정하겠습니다.
계시록 17장 3절에서 요한은 ‘성령으로’ 광야로 이끌려 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큰 음녀가 붉은 빛 짐승을 타고 있는 것을 봅니다. 흥미롭게도 이 사경회의 다른 강의에서도 ‘광야’를 단순한 지리적 피난처가 아니라 성도가 ‘연단받고 정결케 되는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실제 강의 자료에는 계시록 12장의 광야 1,260일을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양육하는 기간’, 곧 영적으로 정결케 되는 과정이라고 해설하고, 계시록 17장의 광야에서는 큰 음녀와 짐승이라는 ‘싸움의 대상’을 만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상당히 흥미로운 접점을 이룹니다. 광야는 말씀에서 시험의 상태를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에서 이전에 의지하던 것들이 사라지고,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이 드러나며, 주님만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는 상태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이 대표적인 표상입니다. 따라서 ‘광야에 갔더니 음녀와 짐승이 있었다’는 것은 매우 깊은 영적 그림이 됩니다. 시험에 들어가면 전에 보이지 않던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평상시에는 내가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시당하는 순간 분노가 올라옵니다. 내가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상대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지배하고 싶은 마음이 나타납니다. 내가 진리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내 신학을 비판하자 그 사람 자체를 미워하게 됩니다. 광야가 악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이미 안에 있던 것이 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은 자기 인식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큰 음녀를 먼 미래의 한 인물로만 밀어 놓으면 계시록 17장의 칼날이 우리 자신에게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 안에도 큰 음녀의 원리가 있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의 진리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진리를 ‘소유함으로써’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서는 것을 사랑하는가. 내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려 하는가, 아니면 내 해석과 내 권위 아래 두려 하는가. 이 두 가지는 겉으로 매우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내적으로는 전혀 다릅니다.
목회자에게는 더욱 예민한 문제입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성도를 인도하는 일 자체는 거룩한 쓰임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proprium이 그 거룩한 것을 자기 것으로 삼을 위험도 있습니다. ‘내 성도’, ‘내 교회’, ‘내 사역’, ‘내 제자’, ‘내가 가르친 진리’라는 소유의식이 깊어지면서 사람들의 양심까지 통제하려 한다면, 주님의 것을 이용하여 자기 왕국을 세우는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벨론적 원리의 씨앗입니다.
반대로 참된 천국적 목회는 사람이 목회자에게 종속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더 자유롭게 속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강제로 선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보존하시면서 진리를 제시하시고 사람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목회 역시 그 신적 방식을 닮아야 합니다. 진리를 가르치되 양심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인도하되 사람을 자기에게 묶어 두지 않는 것입니다.
큰 음녀가 ‘붉은 빛 짐승을 타고 있다’는 것도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강사는 이 붉은 짐승을 앞서 계시록 12장의 붉은 용과 계시록 13장의 일곱 머리 열 뿔 짐승의 연장선에서 이해합니다. 그에게 붉은 색은 전쟁을 나타내며, 큰 음녀가 적그리스도적 권세와 결합하여 세상을 미혹하는 장면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여자가 짐승을 탄다’는 그림 자체가 중요합니다. 여자가 어떤 종교적·교회적 상태를 나타낸다면, 짐승은 그것을 떠받치는 자연적·외적 권세와 추론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거룩한 종교적 외관이 세속적 권력과 자기 지성 위에 올라타 있는 것입니다.
이 결합은 역사적으로도 반복되어 왔지만, 여기서는 특정 시대나 특정 교파를 지목하는 데 머물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종교가 세속 권력과 결합하면 언제든 위험해진다는 일반론보다 더 깊이 들어가, ‘신앙의 진리를 이용하여 지배하려는 사랑’과 ‘그것을 실행할 수 있게 하는 자연적 힘’의 결합을 보는 것입니다. 큰 음녀에게 욕망이 있고 짐승에게 힘이 있습니다. 둘이 결합하면 거대한 종교적 지배체제가 형성됩니다.
계시록 17장 4절의 여자는 자주색과 붉은색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몄으며 손에는 금잔을 들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화려하고 거룩하며 부유합니다. 여기에는 계시록의 매우 날카로운 역설이 있습니다. 악이 언제나 흉측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입고 나타날 수 있습니다. 진리의 언어, 예배의 형식, 성직의 권위, 말씀의 지식까지도 자기애가 입을 수 있는 옷이 됩니다.
특히 ‘금잔’은 놀라운 이미지입니다. 금은 좋은 의미에서 천적 선, 곧 사랑의 선을 나타내며, 잔은 진리와 그 내용을 담는 것을 표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의 금잔 안에는 ‘가증한 물건과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합니다. 겉 그릇은 금입니다. 문제는 그 안에 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종교적 타락의 무서움입니다. 겉모양은 가장 거룩한데 그 안의 사랑은 자기 지배와 자기 영광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예배와 교리의 진실성을 판단할 때 외형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얼마나 웅장한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따르는가, 얼마나 정통적인 용어를 사용하는가, 얼마나 많은 기적이나 영적 체험이 있는가가 최종 기준이 아닙니다. 그 안에 어떤 사랑이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있는가, 아니면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있는가입니다.
이 점은 강사가 10강 앞부분에서 했던 말과도 다시 만납니다. 강사는 ‘아느냐 모르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라고 했고, 성경과 신학을 가지고 서로 싸우면서 실제 신앙은 없는 모습을 비판했습니다. 또 ‘성경은 밀어붙이는 게 아니에요. 자기를 죽여야 돼’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이 말은 큰 음녀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의외로 좋은 열쇠가 됩니다. 진리를 ‘가지고 있음’이 곧 거룩함이 아닙니다. 그 진리가 나의 proprium을 낮추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큰 음녀의 이마에는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강사는 이를 큰 음녀가 후 3년 반 동안 666의 거짓된 지도자들을 세우고 우상숭배를 확산시키는 중심 존재라는 의미로 풀이합니다. 강의에서는 ‘어미’라는 표현을 그 음녀가 다른 ‘음녀들’을 만들어 내는 근원이라는 뜻으로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어미’는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어머니는 무엇인가를 낳습니다. 따라서 ‘큰 바벨론’이라는 지배적 사랑에서 수많은 거짓과 악이 태어난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의 잘못된 사랑이 수많은 잘못된 교리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다른 사람보다 높아져야 한다’는 지배욕이 먼저 있으면, 그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특별한 권위를 주셨다’, ‘나를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만 진리가 있다’는 여러 거짓이 뒤따라 나올 수 있습니다. 사랑이 어머니가 되고 거짓들이 그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사람은 단순히 ‘생각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더 깊게는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배적 사랑은 자기에게 맞는 생각과 논리를 끊임없이 생산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개혁은 잘못된 생각 몇 개만 수정한다고 끝나지 않습니다. 그 생각을 낳고 있는 사랑이 무엇인지 보아야 합니다.
계시록 17장 6절에서 요한은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 것’을 봅니다. 강사는 이것을 후 3년 반 동안 큰 음녀가 적그리스도의 종교적 체제를 이끌면서 성도들을 박해하고 순교시키는 모습으로 이해합니다. 강의 자료에서도 이 구절을 직접 읽으며 여자가 성도들과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했다고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피’가 다시 진리와 연결됩니다. 좋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적 진리이고, 반대 의미에서는 진리를 훼손하고 파괴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성도들의 피에 취했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 박해만이 아니라 참된 선과 진리를 억압하고 파괴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특히 종교적 권력이 자기 지배에 방해되는 진리를 제거할 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여기에는 매우 미묘한 위험이 있습니다. 거짓이 진리를 미워하는 이유는 진리가 논리적으로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진리가 자기가 사랑하는 악을 폭로하기 때문입니다. 지배욕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람의 양심은 주님께 속한다’는 진리는 불편합니다. 자기 공로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진리는 불편합니다. 자기 교리의 우월성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리는 선과 결합해야 살아 있다’는 말씀은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악한 사랑은 결국 자기에게 불편한 진리를 억압하려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계시록 17장의 큰 음녀를 설명하면서 특정 교회나 특정 종교 지도자를 쉽게 ‘바벨론’이라고 지목하는 순간, 오히려 우리 자신이 진리를 가지고 다른 사람 위에 서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바벨론을 비판하면서 바벨론적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먼저 자기 자신을 향해야 합니다. ‘저 사람이 큰 음녀인가?’보다 ‘내 안에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인정받고 지배하려는 사랑이 있는가?’를 묻는 것이 먼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설이 특정 역사적 종교체제에 강하게 적용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속뜻의 궁극적인 쓰임은 사람을 정죄할 지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악과 거짓의 본질을 분별하여 그것에서 떠나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알려 주신 성결수도회와 은총수도회의 존재를 생각하면, 이 대목에서 이 사경회의 수도적 전통이 가진 한 가지 장점도 보입니다. 수도생활의 본래 목적은 다른 사람 위에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의지와 자기 사랑을 낮추고 주님 앞에서 자신을 다루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수도자라는 신분 자체가 사람을 자동으로 바벨론의 유혹에서 보호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수도원에도 인간의 proprium은 그대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자기를 죽이고, 연단받고, 정결케 되어야 한다’는 이분들의 반복적인 강조는 적어도 바벨론의 반대 방향을 바라보려는 수도적 열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 배경을 알고 나니 강사가 계속 ‘연단’을 강조하는 이유도 조금 더 입체적으로 보입니다. 이분에게 대환난은 미래의 사건인 동시에, 성도가 정결해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광야’라는 수도적 언어입니다. 실제 다른 강의에서도 대사경회에 참석하여 구원 섭리와 연단의 진리를 깨닫고, 각자 처소로 돌아가 ‘영적인 싸움을 해서 이기라’고 권면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계시록 독법에는 미래주의적 종말론과 수도적 자기정화가 서로 겹쳐 있습니다. 바로 이 두 층을 함께 보아야 이 강의를 지나치게 단순화하지 않게 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자기를 죽인다’는 표현도 정교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없애려 하시는 것은 인간의 개성이나 자유 자체가 아닙니다. 제거되어야 하는 것은 proprium에서 나온 악과 거짓의 지배입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무색무취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에게서 받은 고유한 선과 쓰임이 더욱 온전히 살아납니다. 천국은 개성이 사라진 사람들의 집단이 아니라 각자 고유한 선과 쓰임을 가진 천사들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세계입니다.
따라서 수도적 자기부인의 가장 건강한 방향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 사라져야 한다’가 아니라 ‘내게 있는 선과 진리의 근원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다’라는 인식입니다. 이것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오히려 자유로워집니다. 다른 사람을 지배할 필요도, 인정받을 필요도, 자기 신앙의 우월성을 증명할 필요도 줄어듭니다. 그리고 바로 그 상태가 큰 바벨론의 정반대입니다.
10강 7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7장의 큰 음녀는 미래 후 3년 반에 적그리스도를 숭배하게 하는 한 거짓 선지자와 그의 세계적 종교조직으로만 읽기보다, 주님의 말씀과 교회의 거룩한 것들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영혼과 양심을 지배하고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사랑, 그리고 그 사랑에서 태어나는 수많은 거짓과 진리의 왜곡을 표상하는 바벨론의 영적 원리로 읽을 때 그 아르카나가 더욱 깊게 열립니다.’
그리고 이번 7부에서 가장 마음에 남겨 둘 장면은 ‘금잔’일 것 같습니다. 금잔 자체는 아름답습니다. 문제는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입니다. 교회도, 신학도, 설교도, 수도생활도, 심지어 ‘스베덴보리의 렌즈’도 하나의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안에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담기면 사람을 살리는 쓰임이 됩니다. 그러나 같은 거룩한 그릇 안에 자기 우월감과 지배욕과 정죄가 들어가면 겉모양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바벨론의 금잔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계시록 17장은 ‘저 큰 음녀가 누구인가?’를 알아맞히는 장이기 전에 ‘내가 들고 있는 잔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를 묻는 장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공용복 선생의 시대부터 이어져 온 이 수도적 전통이 반복해서 말해 온 ‘자기를 죽이고 정결케 하라’는 권면 역시,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과시키면 결국 같은 깊은 자리로 향합니다. 주님의 것을 나의 것으로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proprium을 내려놓고, 선과 진리가 다시 그 참된 주인이신 주님께 속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큰 바벨론의 붕괴는 먼 미래 어느 종교제국의 몰락 이전에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10강 8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과 열 뿔 : 악의 연합은 왜 끝내 스스로 무너지는가
10강 8부에서는 계시록 17장의 큰 음녀에서 시선이 그 음녀가 타고 있는 짐승과 열 뿔로 옮겨갑니다. 요한이 큰 음녀를 보고 크게 놀라자 천사는 ‘왜 놀랍게 여기느냐’고 하면서 여자와 그가 탄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풀어 줍니다. 특히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라는 난해한 표현, 일곱 머리와 일곱 왕, 그리고 아직 나라를 얻지 못했으나 짐승과 더불어 잠시 권세를 받는 열 뿔의 의미가 이어집니다. 강사는 이것을 후 3년 반 적그리스도 세계체제의 구체적인 정치적 구성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이 대목은 계시록을 문자적 미래 예언으로 읽을 때 매우 복잡해지기 쉬운 부분입니다.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고 장차 나올’ 존재가 누구인가, 일곱 왕은 과거의 어느 제국들인가, 열 왕은 미래의 어느 국가들인가를 역사적 지도와 맞추기 시작하면 수많은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강사는 자신의 ‘핵심진리’ 체계 안에서 이것들을 적그리스도의 마지막 세계통치와 연결하여 하나의 시간표로 정리합니다. 이 해석을 먼저 그 자체로 존중해서 따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질문 자체가 달라집니다. ‘일곱 왕은 어느 나라의 왕들인가?’보다 ‘왜 말씀은 악과 거짓의 상태를 짐승과 머리와 뿔과 왕이라는 형상으로 보여 주는가?’를 묻게 됩니다.
말씀에서 ‘머리’는 무엇인가를 지배하고 통솔하는 것과 관계합니다. 몸 전체가 머리의 명령을 따라 움직이듯 영적으로도 사람을 지배하는 원리와 사랑이 ‘머리’에 해당합니다. ‘뿔’은 힘과 능력을 표상합니다. 짐승의 힘이 뿔에서 나타나는 자연적 형상에서 비롯된 상응입니다. 그리고 ‘왕’은 좋은 의미에서는 진리를,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을 나타냅니다. 왕이 나라를 다스리듯 진리 또는 거짓이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짐승은 단순히 기괴한 미래 생물이나 국제정치조직의 암호가 아니라, 거짓된 종교 원리가 여러 형태의 지배적 거짓과 힘을 갖추어 교회를 장악한 상태를 보여 주는 영적 그림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계시록의 ‘짐승’이라는 표현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짐승 자체가 언제나 악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에서는 좋은 짐승들도 선한 애정들을 표상합니다. 그러나 여기의 짐승은 용과 연결되고 큰 음녀를 태우며 주님을 대적합니다. 따라서 자연적 인간의 능력과 추론이 악한 사랑과 거짓에 복종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인간에게 이성과 지식과 조직력과 권력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무엇을 섬기느냐입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를 섬기면 쓰임이 되지만, 자기애와 지배욕을 섬기면 짐승의 힘이 됩니다.
이것은 큰 음녀와 짐승의 관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큰 음녀에게는 종교적 지배욕이 있고, 짐승에게는 그것을 실행할 외적 힘이 있습니다. 하나는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지배하려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사랑을 떠받치는 자연적 권력과 추론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둘이 매우 잘 결합된 것처럼 보입니다. 종교적 권위는 정치적·사회적 힘을 이용하고, 세속적 권력은 종교적 권위를 이용합니다. 그러나 계시록 17장의 놀라운 반전은 이 둘이 끝까지 함께 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나중에 열 뿔과 짐승이 오히려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며 그 살을 먹고 불로 사릅니다. 강사도 이 부분을 적그리스도 체제 내부의 갈등과 최종적인 종교세력의 제거로 설명합니다. 지금까지 서로 필요해서 결합했던 세력들이 마지막에는 서로를 공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앞서 다섯째 대접에서 강사가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 진영 내부에 책임 전가와 갈등이 일어날 것이라고 설명한 흐름과도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장면이 악의 본질을 매우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악과 악은 참으로 결합할 수 없습니다. 선과 진리는 주님 안에서 서로 결합하지만, 악들은 궁극적으로 각각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권력을 사랑한다고 해서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공동의 목적이 있을 동안에는 협력할 수 있지만, 결국 둘 다 자기가 더 높아지기를 원하기 때문에 충돌합니다. 지옥의 연합도 이와 같습니다. 겉으로 보면 지옥에도 조직과 질서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천국의 결합과 전혀 다릅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서로의 선을 기뻐하고 공동의 쓰임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를 이룹니다. 반대로 지옥의 영들은 자기 유익을 위해 결합합니다. 힘이 센 자가 약한 자를 억누르고, 약한 자는 기회가 생기면 그 지배에서 벗어나거나 오히려 상대를 지배하려 합니다. 그러므로 지옥의 결합 안에는 언제나 해체의 씨앗이 들어 있습니다. 이 원리를 알면 ‘열 뿔이 음녀를 미워한다’는 장면이 단순한 미래 정치적 배신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거짓 종교와 세속적 자기애가 한동안 서로를 이용하지만 결국 자기애라는 동일한 뿌리 때문에 서로를 파괴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성은 다른 자기중심성과 영원히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습니다. 둘 다 중심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 한 사람 안에서도 그대로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돈도 많이 가지고 싶고 명예도 얻고 싶고 편안하게도 살고 싶을 수 있습니다. 한동안 이 세 욕망은 서로 협력합니다. 돈을 벌어 명예를 얻고, 명예를 이용하여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돈을 포기해야 하거나, 돈을 벌기 위해 평안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서로 충돌합니다. proprium에서 나온 사랑들은 하나의 참된 질서를 이루지 못합니다. 반대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들은 서로 싸우지 않습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진리 사랑과 쓰임의 사랑은 서로를 강화합니다. 하나가 깊어지면 다른 것도 깊어집니다. 이것이 천국적 질서입니다. 따라서 사람 안에서 여러 욕망이 끊임없이 서로 싸우고 있다면 단순히 ‘나는 성격이 복잡하다’고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중심에 어떤 사랑들이 자리 잡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계시록 17장 8절의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이라는 표현은 더욱 난해합니다. 강사의 미래주의적 해석에서는 적그리스도적 세력의 역사적 출현과 소멸, 그리고 마지막 재등장과 연결하여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있음’과 ‘없음’을 단순한 자연적 존재 여부보다 영적 상태로 읽습니다. 악과 거짓은 때로 교회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이다가 조건이 갖추어지면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니라 잠복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이 현상은 매우 익숙합니다. 어떤 악을 오래 경험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완전히 제거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제 화를 내지 않는다’, ‘나는 명예욕에서 자유로워졌다’, ‘나는 저 사람을 용서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특정한 시험이 오자 옛 감정이 다시 살아납니다.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다시 올라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거듭남은 인간이 한 번의 회개로 모든 악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과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안의 악을 차례로 드러내시고, 사람이 자유롭게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저항하도록 하시며, 그렇게 여러 시험을 거치면서 악의 지배력을 점차 약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이전에 다룬 줄 알았던 악이 다시 나타나는 것은 반드시 거듭남이 실패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깊은 층이 드러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중요한 구별이 있습니다. 악이 ‘나타나는 것’과 그것을 다시 ‘받아들이는 것’은 다릅니다. 악한 생각이나 욕망이 올라오는 것 자체가 곧 그 사람이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을 자기 것으로 인정하고 사랑하여 의지적으로 행할 때 비로소 자기 생명과 결합됩니다. 그래서 영적 싸움에서는 ‘왜 이런 생각이 또 올라오지?’라고 지나치게 두려워하기보다 ‘나는 이것에 동의할 것인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점은 이 사경회가 반복하여 강조하는 ‘영적 싸움’과도 만납니다. 강사들은 연단 가운데 끝까지 이기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싸워야 한다고 계속 권면합니다. 공용복 선생 생전부터 이어져 온 수도적 전통을 배경으로 보면 이 표현들은 단순한 종말론적 구호라기보다 실제 자기부인과 내적 싸움을 중요하게 여겨 온 영성의 언어로 들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바로 이 지점을 더욱 세밀하게 해석합니다. 싸움의 궁극적 상대는 밖에 있는 어떤 사람보다 내 안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를 거스르는 악과 거짓입니다. 이어 일곱 머리에 대한 설명에서 ‘일곱 산’과 ‘일곱 왕’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런 구절은 역사적 동일시를 시도하기 매우 쉬운 부분입니다. 실제로 계시록 해석사에서는 로마의 일곱 언덕이나 특정한 일곱 제국, 일곱 황제 등과 연결하는 다양한 해석들이 제시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일곱’이라는 수가 먼저 중요합니다. 일곱은 말씀에서 거룩함과 완전한 상태, 그리고 문맥에 따라 어떤 상태의 전체와 완결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일곱 머리와 일곱 왕은 반드시 일곱 명의 자연적 통치자를 하나씩 찾아 대응시켜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해당 악과 거짓의 지배적 상태 전체를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상응의 원리에 더 가깝습니다.
이것은 계시록의 숫자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7, 12, 144, 144,000, 1,260, 42개월 같은 숫자를 자연적 산술로만 읽으면 계시록은 거대한 종말 시간표가 됩니다. 그러나 숫자의 상응을 보면 그 숫자가 어떤 영적 상태의 질과 충만함을 나타내는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계시록의 초점이 ‘언제?’에서 ‘어떤 상태인가?’로 이동합니다. 열 뿔 역시 같은 원리입니다. ‘열’은 많은 것 또는 충만한 것을 나타내며, ‘뿔’은 힘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열 뿔은 거짓된 체제가 가진 모든 힘과 능력을 표상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반드시 미래의 열 개 국가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열 뿔들이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준다’고 합니다. 이것은 악과 거짓이 마지막 순간에 얼마나 강하게 결집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거짓들이 서로 조금씩 달라도 주님의 선과 진리를 대적한다는 공통 목적 아래에서는 하나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영적 전쟁은 매우 강력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어린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이것이 계시록 17장의 중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짐승과 열 뿔과 음녀의 복잡한 구조를 연구하다가도 결국 시선은 어린양에게 돌아와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이 더욱 결정적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승리는 인간이 거짓을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논박하여 얻는 승리가 아닙니다. 주님의 신적 진리와 신적 선이 악과 거짓의 실체를 드러내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승리입니다. 어린양은 주님의 신적 인성, 특히 구원을 위해 오셔서 지옥을 정복하시고 인성을 신성하게 하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모든 영적 전쟁의 실제 승리자는 주님이십니다.
사람이 시험 가운데 ‘내가 이 악을 이겨야 한다’고만 생각하면 결국 자기 힘에 의지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매우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은 인간은 악과 싸울 때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싸워야 하지만, 동시에 실제 힘은 전적으로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하는 것도 아니고, ‘내 의지력으로 이기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이 사경회가 강조하는 ‘연단’과 ‘싸워서 이김’ 역시 이 균형 속에서 보면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수도생활이 자기 의지를 강하게 만들어 영적 강자가 되는 훈련이라면 결국 또 다른 proprium을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힘의 한계를 보고 주님의 힘으로 악을 거절하는 법을 배우는 훈련이라면 그것은 거듭남과 깊이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도적 자기부인의 목표는 ‘강한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할 수 있는 나’로 변화되는 데 있어야 합니다.
‘어린양과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이 독립적으로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린양과 함께’ 있기 때문에 이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적 힘의 비밀입니다. 천사는 자기 힘이 강해서 지옥의 영보다 강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 안에 있기 때문에 강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신앙생활의 목표도 ‘내 영적 능력을 키우는 것’에서 ‘주님과의 결합이 깊어지는 것’으로 이동합니다. 기도도, 말씀 공부도, 수도적 훈련도, 연단도 모두 그 결합을 위한 수단입니다.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면 다시 자기 공로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계시록 17장 후반에서 가장 놀라운 장면은 하나님께서 열 뿔의 마음에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주셔서 결국 음녀를 멸망시키게 하신다고 기록한 부분입니다. 문자만 보면 하나님께서 악한 세력에게 악한 일을 하도록 시키시는 것처럼 읽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 이해에서는 매우 조심해서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악을 의지하거나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악한 자들이 자기 자유에서 선택한 악을 허용하시되, 그 악조차 궁극적으로 더 큰 악을 제한하고 선한 질서를 회복하는 데 굽혀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허용의 섭리’입니다. 주님은 악을 만드시지 않지만 악을 허용하시며, 허용하신 악의 결과까지 영원한 선을 위해 다스리십니다. 따라서 짐승과 열 뿔이 음녀를 파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증오를 주입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그들 안에 있던 악한 사랑들의 내적 모순이 드러나 서로를 파괴하도록 허용하시고 그 결과를 심판의 질서에 사용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악으로 직접 처벌하시는 분처럼 보일 때가 있지만, 실제로는 악 자체 안에 자기 파괴의 결과가 들어 있습니다. 거짓은 결국 거짓과 충돌하고, 지배욕은 다른 지배욕과 충돌하며, 자기애는 다른 자기애를 견디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결과를 허용하시면서 악이 무한히 확장되지 못하도록 경계를 두십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멸망은 외부에서 갑자기 내려오는 하나님의 폭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벨론적 사랑 자체가 자기 안에 붕괴의 씨앗을 품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사랑은 결국 자기를 지지하던 사람들까지 도구로 취급하게 되고, 그 사람들 역시 자기 유익을 위해 결합했으므로 조건이 바뀌면 등을 돌립니다. 사랑 없는 결합의 필연적 결말입니다.
여기서 앞서 말씀해 주신 시흥영성수련원의 구조도 하나의 좋은 대비를 생각하게 합니다. 남자 성결수도회와 여자 은총수도회가 각각 다른 건물에서 생활하면서도 한 수련원 안에서 같은 영적 지향을 공유한다는 것은, 적어도 구조적으로는 ‘모두를 하나의 동일한 형태로 만들기’보다 서로 다른 자리와 쓰임이 하나의 목적을 향하는 공동체를 생각하게 합니다. 물론 실제 공동체의 내적 상태를 외부에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천국의 질서 역시 획일성이 아니라 서로 다른 공동체들이 각자의 쓰임을 이루면서 하나의 주님 아래 결합하는 질서라는 점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모두가 같은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 공동체와 천사는 서로 다른 선과 쓰임을 가집니다. 그런데 그 다양성이 분열을 만들지 않는 이유는 중심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계시록 17장의 짐승과 음녀와 열 뿔은 겉으로는 하나의 거대한 세계체제를 이루지만 결국 분열됩니다. 중심이 주님이 아니라 각자의 자기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공동체를 분별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얼마나 강하게 하나가 되어 있는가?’만으로는 천국적 공동체인지 알 수 없습니다. 악한 집단도 매우 강하게 결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무엇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있는가?’입니다. 한 지도자의 인격인가, 공동의 적인가, 조직의 성공인가, 아니면 주님과 이웃의 선인가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 ‘하나 됨’을 강조할 때에도 모든 사람이 지도자의 생각과 똑같아지는 것을 하나 됨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천국적 하나 됨은 다양성을 없애는 통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선과 쓰임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벨론적 지배와 천국적 질서를 가르는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10강 8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7장의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과 일곱 머리, 열 뿔과 열 왕은 미래 세계정부를 구성할 특정 제국과 국가들의 명단으로만 읽기보다,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악한 사랑을 떠받치는 모든 거짓된 지배 원리와 자연적 힘이 결집하여 주님과 그분의 진리를 대적하지만, 자기애에 기초한 악의 결합은 참된 결합이 아니므로 마침내 서로를 미워하고 파괴하며, 어린양이신 주님의 신적 선과 진리 앞에서 완전히 무너지는 마지막 영적 전쟁의 아르카나로 읽을 때 더욱 깊은 의미가 열립니다.’
그리고 이번 8부에서 가장 깊이 붙들 만한 말씀은 ‘어린양은 이기실 터이요’일 것입니다. 계시록을 읽다 보면 짐승과 용과 음녀와 열 뿔이 너무 크게 보입니다. 악의 조직은 거대하고, 거짓은 정교하며, 그들의 힘은 압도적으로 보입니다. 우리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된 자기애와 습관을 만나면 ‘이것을 어떻게 내가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계시록은 ‘네가 더 강해져서 짐승을 이겨라’고 하지 않습니다. 어린양이 이기십니다. 그리고 어린양과 함께 있는 자들이 함께 이깁니다. 이것은 수도적 연단의 의미도 바꾸어 놓습니다. 연단은 인간을 초인적으로 강하게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는 이길 수 없음을 깊이 알고 주님의 힘에 자신을 맡기는 법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자기를 죽인다’는 말의 가장 깊은 뜻도 결국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자기 존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구원자이며 내가 내 힘으로 선해질 수 있다’는 proprium의 환상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사람 안에서도 열 뿔과 짐승과 음녀의 거짓 연합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지배욕과 자기 의와 자기 공로와 거짓된 추론이 서로의 힘을 잃고, 그 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질서를 이루기 시작합니다. 계시록 17장의 거대한 전쟁은 결국 바로 그 일을 보여 줍니다. 큰 바벨론의 몰락은 단지 미래 어느 제국이 무너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의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내가 중심이던 세계’가 무너지고 ‘주님이 중심이신 질서’가 세워지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10강 9부
계시록 18장의 큰 성 바벨론 : ‘무너졌도다’와 세상 부귀의 영적 실체
10강 9부에서는 계시록 17장의 ‘큰 음녀’에서 계시록 18장의 ‘큰 성 바벨론’으로 무대가 옮겨갑니다. 강사는 이 전환을 분명하게 구분합니다. 17장이 큰 음녀와 그를 둘러싼 종교적 세력의 정체와 심판을 보여 주었다면, 18장은 그 큰 음녀가 활동하던 ‘큰 성’, 곧 그 체제 전체가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 주는 장으로 설명합니다. 강사는 특히 바벨론의 멸망을 종교적인 면에만 한정하지 않고 정치·경제·문화적 영역까지 포함하는 실제적인 세계체제의 붕괴로 읽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이 무너질 때 왕들, 상고들, 해상에서 경제적 이익을 얻던 사람들이 각각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차례로 살펴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으로 들어가기 직전 강사가 한 말이 눈에 띕니다. 그는 성령 충만을 말하면서 ‘순종하고, 담대하고, 사랑하고, 전도하고, 희생하고, 믿음으로 그렇게 하면’이라고 말하고, ‘이런 사랑 실천이 있기를’ 권면한 뒤 비로소 ‘이제 망하는 걸 보러 갑시다’라며 계시록 18장으로 넘어갑니다. 얼핏 보면 단순한 강의 진행상의 연결이지만, 이 강사가 실제 성결수도회의 수도사이며 공용복 선생 생전부터 함께했던 분이라는 배경까지 생각하면 그냥 지나칠 대목은 아닌 듯합니다. 이분에게 계시록 공부의 목적은 미래의 종말 사건을 알아맞히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순종하고 사랑하고 희생하며 실제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종말론적 도식에서는 스베덴보리와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진리를 알았으면 삶으로 살아야 한다’는 이 중심은 분명 귀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계시록 18장 1절에서 요한은 ‘큰 권세를 가진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집니다. 이어 천사가 힘센 음성으로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라고 외칩니다. 강사는 이것을 바벨론 성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선언으로 받아들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순서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먼저 ‘빛’이 오고, 그다음 ‘무너짐’이 옵니다. 이것이 신적 심판의 본질과 깊이 관계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무엇인가를 파괴하신 뒤 그 이유를 설명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적 진리의 빛이 임하면 그 빛 속에서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의 실체가 드러나고 거짓에 의해서만 유지되던 것은 더 이상 설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근본적인 힘은 파괴력이 아니라 ‘빛’입니다.
우리는 심판을 생각할 때 흔히 불, 지진, 전쟁, 재앙부터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마지막 심판은 본질적으로 ‘드러남’과 ‘분리’입니다. 사람의 외적 모습과 내적 상태가 더 이상 서로 다르게 유지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경건하면서 속으로는 지배욕을 사랑하고, 입으로는 주님을 말하면서 마음으로는 자기 자신을 섬기는 상태가 신적 진리의 빛 앞에서 드러납니다. 따라서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졌다’는 말씀과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는 서로 떨어진 두 사건이 아닙니다. 환하여졌기 때문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거짓은 어둠 속에서는 유지될 수 있지만 완전한 빛 속에서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그대로 일어납니다. 어떤 악한 습관이 있을 때 우리는 처음에는 그것을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여러 이유를 들어 정당화합니다. 그런데 말씀의 진리가 들어와 ‘이것은 네 안의 자기애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비추기 시작하면 이전처럼 편안하게 그 악을 행하기 어려워집니다. 아직 악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지만 이미 ‘땅이 환하여진’ 것입니다. 그 빛을 받아들이며 싸우면 마침내 그 악의 작은 바벨론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심판의 말씀은 거듭나는 사람에게 두려움만을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희망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내 힘으로는 발견하지 못하는 것을 주님의 빛이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무너졌도다’는 말도 악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승리의 함성으로만 읽기보다, 우리를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악과 거짓의 지배가 영원하지 않다는 선언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이 무너지는 이유를 보아야 합니다. 천사는 큰 성 바벨론이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강사는 이 부분을 ‘영적으로 음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그 안에 ‘정과 욕심’이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강사의 수도적 영성과도 잘 연결됩니다. 바벨론의 문제를 외부의 정치제도만이 아니라 인간 안의 정욕과 연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더욱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귀신의 처소’라는 것은 어떤 장소에 악령들이 물리적으로 모여 산다는 뜻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악한 사랑과 거짓이 서로 결합하여 하나의 삶의 질서를 이룬 상태를 나타냅니다. 천국이 선과 진리가 결합한 질서라면, 바벨론은 자기애와 거짓이 결합하여 만들어 낸 거짓된 질서입니다. 앞 7부와 8부에서 살펴보았듯 바벨론의 핵심은 단순한 세속적 부패가 아닙니다.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지배하려는 사랑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교회의 권위, 신앙과 예배를 자기 자신을 높이고 사람의 영혼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발전하면 겉은 매우 종교적이어도 안에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가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계시록 18장의 바벨론이 그토록 부유하고 화려하게 묘사되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 세마포와 자주색 옷감, 향품과 포도주와 기름 등 수많은 상품들이 등장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세계경제의 중심지가 무너지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강사도 이 장을 큰 음녀의 본부가 정치·문화·경제적으로 무너지는 실제 사건으로 이해하며, 특히 상고들과 여러 경제 종사자들이 바벨론으로부터 이익을 얻고 있었다는 데 주목합니다. 강사는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다’는 말씀을 바벨론 체제를 통해 경제적 부를 축적한 사람들과 연결합니다. 큰 음녀가 온 세상에 사치스러운 것들을 공급했고, 그것을 통해 상인들이 많은 돈을 벌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설에서 ‘상고’, 곧 상인과 상품은 단순히 경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사고파는 것은 영적 지식과 진리를 획득하고 전달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좋은 의미에서는 진리를 배우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지만, 반대 의미에서는 거룩한 것들을 자기 유익과 명예를 얻는 수단으로 만드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바벨론의 경제가 갑자기 영적으로 매우 가까워집니다. 진리도 ‘상품’처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명예를 얻을 수 있고, 신학을 가지고 권위를 얻을 수 있으며, 영적 체험을 가지고 사람들의 존경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겸손을 가지고도 ‘나는 겸손한 사람’이라는 명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의 ‘사치’를 단순히 비싼 물건을 소유하는 것으로만 보면 너무 좁습니다. 영적 사치는 주님의 것을 자기 영광을 위해 장식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진리들을 자기 왕국을 꾸미는 보석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도 매우 예민한 경고가 됩니다. AC와 ‘천국과 지옥’, ‘계시록 밝히기’를 많이 읽었다는 사실 자체가 영적 성장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지식을 가지고 ‘나는 남들이 모르는 속뜻을 안다’는 우월감을 키운다면, 천국의 보석을 자기 바벨론을 장식하는 데 사용하는 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공부할수록 자기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이 진리가 나를 더 겸손하게 하는가? 이웃을 더 이해하고 사랑하게 하는가? 주님에게서 모든 선과 진리가 온다는 것을 더 깊이 인정하게 하는가?’ 그렇지 않고 사람을 분류하고 정죄하며 내가 더 높다는 감각만 커진다면, 지식은 늘어도 거듭남은 그만큼 진행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말한 ‘순종하고, 담대하고, 사랑하고, 전도하고, 희생하고’라는 표현을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적어도 이 강사는 계시록 지식을 지식으로만 끝내지 않고 삶의 실천으로 가져가려 합니다. 특히 이분이 실제 성결수도회의 수도사이고 공용복 선생 생전부터 함께했던 분이라는 배경을 알고 들으면, ‘정결’, ‘연단’, ‘희생’, ‘사랑 실천’이라는 말에 어느 정도 삶의 무게가 실려 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겠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강사의 모든 종말론 해석이 옳다는 뜻은 아닙니다. 해석의 정확성과 삶의 진정성은 서로 구별해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전자를 다룬다는 이유로 후자를 보지 못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이 이 사경회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해설할 때 계속 지켜야 할 균형입니다.
계시록 18장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바벨론이 혼자 부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다’고 합니다. 강사는 이것을 큰 음녀를 중심으로 왕들과 거짓된 종교 지도자들과 상고들이 하나의 거대한 체제를 이루어 서로 이익을 얻은 것으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이 악의 확산 원리를 보여 줍니다. 하나의 지배적 악은 혼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맞는 수많은 거짓을 불러들이고, 그 거짓들은 다시 다른 악들을 정당화합니다. 그렇게 하나의 ‘도시’가 만들어집니다. 예를 들어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지배적 사랑이 되면 사람은 그것을 위해 여러 행동을 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자기 장점을 과장하고, 자기 실패를 감추며, 경쟁자를 낮추고, 칭찬하는 사람을 가까이하고, 비판하는 사람을 멀리합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욕망이었는데 어느새 그 욕망을 중심으로 생각과 행동의 전체 체계가 형성됩니다. 이것이 한 개인 안의 작은 ‘성’입니다. 바벨론도 그렇습니다. ‘지배하고 싶다’는 사랑 하나가 수많은 교리와 제도와 권위와 관계를 자기 주위에 조직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에서는 악 하나만 떼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악을 중심으로 세워진 전체 질서가 무너져야 합니다.
여기서 계시록 18장의 유명한 부르심이 이어집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 이것은 바벨론 심판의 한가운데서 들리는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심판의 목적이 단순한 파괴라면 굳이 ‘나오라’고 부르실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안에 아직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부르십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신적 자비의 원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종교적 조직이나 교리체계 안에 사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을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의 내적 사랑과 실제 삶을 보십니다. 잘못된 교리 안에서도 양심에 따라 선하게 살며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려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가장 정확한 교리 안에서도 자기애와 지배욕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말씀을 ‘저 교단에서 탈퇴하라’는 식으로만 적용하는 것은 너무 외적입니다. 더 깊게는 ‘네 안에서 주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삼아 지배하려는 사랑에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은 고통스러운 곳으로만 묘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매우 부유하고 화려합니다. 사람들이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거기서 얻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악 역시 그렇습니다. 아무런 즐거움이 없다면 사람은 악을 붙들지 않습니다. 지배욕에는 지배하는 즐거움이 있고, 자기 의에는 옳다고 인정받는 즐거움이 있으며, 탐욕에는 소유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바로 이 즐거움 때문에 악에서 ‘나오는 것’이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사랑하는 것의 즐거움이 그의 생명과 매우 깊이 결합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단순히 ‘이 행동은 나쁘니까 하지 말아야지’ 하는 수준을 넘어갑니다. 주님께서 점차 악한 즐거움 대신 선한 즐거움을 주셔야 합니다. 지배하는 즐거움 대신 섬기는 즐거움, 인정받는 즐거움 대신 이웃이 잘되는 것을 기뻐하는 즐거움, 자기 공로의 즐거움 대신 모든 선을 주님께 돌리는 기쁨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바벨론을 떠나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는 말씀은 매우 따뜻한 말씀으로도 들립니다. ‘너는 바벨론 사람이니 멸망하라’가 아니라 ‘내 백성아’라고 부르십니다. 아직 바벨론 안에 있는데도 ‘내 백성’이라고 하십니다. 사람 안에 아직 주님에게서 온 리메인스가 있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매우 희망적입니다. 사람 안에 악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 전체가 악은 아닙니다. 거듭나는 동안에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복잡하게 섞여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가운데 주님에게서 온 것을 보존하시고 악과 거짓을 점차 분리하십니다. 그래서 ‘나오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가 다른 교회와 다른 신앙인을 바라보는 태도에도 영향을 줍니다. ‘저 사람은 바벨론 안에 있다’고 판정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무엇을 보존하고 계시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사람을 정죄하기 위한 확대경이 아니라, 먼저 악과 거짓의 원리를 분별하기 위한 렌즈여야 합니다. 이 점은 이번 시흥영성수련원 사경회를 해설하는 데에도 중요합니다. 강사들의 계시록 해석 가운데 스베덴보리의 상응적 해석과 크게 다른 부분이 상당히 있습니다. 적그리스도를 미래의 특정 인물로 보고, 666을 구체적인 종말 체제와 연결하며, 대환난과 휴거와 천년왕국을 시간표로 배열하는 방식은 스베덴보리와 분명 다릅니다. 그러나 그것만 보고 이분들의 영성을 한꺼번에 판단하면 안 됩니다.
특히 강사들 가운데 상당수가 실제 수도생활을 하는 분들이고, 이번 10강 강사 역시 공용복 선생 생전부터 함께했던 성결수도회의 수도사라는 배경은 이런 구별을 더욱 필요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 강사의 종말론적 ‘지도’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차이를 분명히 살펴보되, 그 지도 아래 흐르는 ‘정결하게 살라’, ‘자기를 부인하라’, ‘사랑을 실천하라’, ‘희생하라’, ‘끝까지 주님을 붙들라’는 수도적 열망은 따로 귀하게 살펴야 하겠습니다. 두 층을 섞지 않는 것이 오히려 공정한 해설입니다. 더구나 계시록 18장 자체가 우리에게 바로 그런 분별을 요구합니다. 겉모양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사랑을 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의 문제는 건물이 크다는 것도 아니고 재산이 많다는 것도 아니며 조직이 강하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들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는가가 문제입니다.
재산이 있어도 이웃을 섬기는 쓰임에 사용하면 선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권위가 있어도 사람을 자유롭게 주님께 인도하는 데 사용하면 선한 쓰임이 됩니다. 신학 지식이 많아도 사람을 살리고 진리를 밝히는 데 사용하면 귀한 것입니다. 반대로 가난과 금욕조차 자기 의를 높이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적 형태만으로 바벨론과 새 예루살렘을 가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수도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수도복을 입고 검소하게 살아도 그 검소함으로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거룩하다고 생각한다면 proprium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 가운데 재산과 책임을 가지고 살아도 그것을 주님께 받은 쓰임으로 여기며 이웃을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것은 외적 생활양식 자체가 아니라 그 생활을 움직이는 지배적 사랑입니다.
그래서 강사가 바벨론의 사치와 부를 설명하면서 세상의 부와 경제적 풍요를 경계하는 방향으로 이야기하는 부분도 그 취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한 걸음 더 조심해야 합니다. 부 자체가 바벨론은 아닙니다. 부를 사랑하여 그것을 자기 생명의 목적으로 삼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 위에 서려는 사랑이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가난 자체가 천국적인 것도 아닙니다. 가난하면서도 탐욕과 시기와 지배욕으로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소유량보다 쓰임과 사랑입니다.
이것은 계시록 18장의 상인들이 왜 그렇게 슬퍼하는지를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바벨론 자체를 사랑해서 우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상품을 사 줄 사람이 없어졌기 때문에 웁니다. 관계의 중심이 사랑이 아니라 자기 이익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벨론적 관계의 특징입니다. 상대방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사랑합니다. 그 사람이 내게 명예를 주고 돈을 주고 인정과 영향력을 주는 동안에는 가까이하지만, 더 이상 그것을 줄 수 없게 되면 관계도 끝납니다. 천국적 사랑은 정반대입니다. 이웃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보다 그 사람 안의 선을 사랑합니다. 그 사람이 더 선해지고 주님께 가까워지는 것을 기뻐합니다. 이것이 체어리티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 18장은 경제체제의 멸망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나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사람 자체의 선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그 사람을 통해 내가 얻는 것을 사랑하는가입니다.
10강 9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8장의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은 미래 후 3년 반의 끝에 적그리스도와 큰 음녀를 중심으로 형성된 세계적 종교·정치·경제체제가 물리적으로 파괴되는 사건으로만 읽기보다, 주님의 말씀과 교회의 거룩한 것, 진리와 지식과 권위를 자기 지배와 명예와 이익을 위해 이용해 온 자기애의 거대한 질서가 신적 진리의 빛 앞에서 그 실체를 드러내고 무너지는 마지막 심판의 아르카나로 읽을 때 더욱 깊은 의미가 열립니다.’
그리고 이번 9부에서 가장 오래 붙들어 둘 말씀은 ‘무너졌도다’보다 오히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일 것입니다. 바벨론이 아직 서 있을 때 주님은 자기 백성을 부르십니다. 심판이 시작되기 전에 부르십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직 바벨론 안에 있는 사람들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이 말씀에는 심판보다 먼저 오는 신적 자비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완전히 깨끗해진 뒤에야 우리를 당신의 백성이라고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우리 안에 자기애도 있고 세상 사랑도 있으며, 인정받고 싶고 지배하고 싶은 마음도 남아 있는 그 자리에서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고 부르십니다. 그 음성을 듣고 한 걸음씩 나오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렇게 보면 바벨론의 멸망은 남의 멸망을 바라보며 기뻐할 장면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서 오래도록 주님의 자리를 차지해 온 proprium의 질서가 무너지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그 무너짐 뒤에야 새 예루살렘이 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계시록의 심판을 읽을 때 결국 시선이 향해야 하는 곳은 ‘누가 바벨론인가?’가 아니라 ‘내 안의 바벨론에서 오늘 무엇을 떠나야 하는가?’라는 질문일 것입니다.
10강 10부
바벨론의 최종 멸망과 하늘의 기쁨 : 심판의 끝은 파괴가 아니라 어린양의 혼인입니다
10강의 마지막 10부에서는 계시록 18장의 후반부를 지나 계시록 19장의 문턱까지 나아가면서,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이 완전히 확정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앞의 9부에서 강사는 바벨론을 중심으로 형성된 종교적·정치적·경제적 세계체제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무너지고, 그 체제와 결탁하여 부와 권세를 얻던 왕들과 상인들이 그것을 바라보며 애통하는 모습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그 멸망이 얼마나 철저한지를 보여 주는 여러 표상이 이어지고, 놀랍게도 땅에서의 애통과 정반대로 하늘에서는 기쁨과 찬양이 터져 나옵니다. 이 대조가 계시록 18장 후반의 중심을 이룹니다. 강사의 종말론적 틀에서 보면 이것은 후 3년 반 마지막 때의 실제적 사건입니다. 큰 음녀와 적그리스도의 체제를 중심으로 세계의 종교와 정치와 경제가 하나의 거대한 구조를 이루었다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으로 순식간에 붕괴합니다. 따라서 그 체제를 통해 부와 권세를 얻던 사람들에게 바벨론의 멸망은 자기 세계 전체의 붕괴입니다. 반대로 하나님 편에 서서 박해받던 성도들에게는 악한 체제의 끝이며 해방의 순간입니다. 그래서 같은 사건을 놓고 땅에서는 울고 하늘에서는 기뻐하는 정반대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바로 이 대조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떤 것이 무너질 때 내가 슬퍼하는가 기뻐하는가는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있었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을 사랑한 사람은 바벨론이 무너질 때 웁니다. 어린양을 사랑한 사람은 바벨론이 무너질 때 기뻐합니다. 결국 마지막 심판은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었는가보다 무엇을 사랑하고 있었는가를 드러냅니다. 계시록 18장에서 왕들과 상인들이 우는 이유를 자세히 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죄악을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이 누리던 영화와 거래와 이익이 사라졌기 때문에 웁니다. ‘이제 네 상품을 사는 자가 없도다’라는 말씀이 그 본질을 드러냅니다. 바벨론과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이익의 관계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매우 예리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나에게 주는 즐거움과 이익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사람이 나를 인정해 주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고, 교회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교회에서 내가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으며, 진리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진리를 아는 것이 나를 남보다 특별하게 느끼게 하기 때문에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익이 사라지는 순간 진짜 사랑이 드러납니다. 인정해 주던 사람이 나를 비판할 때에도 그 사람의 선을 원하는가, 직분이 없어져도 교회를 사랑하는가, 내가 옳다고 인정받지 못해도 진리를 사랑하는가를 보면 내가 실제로 무엇을 사랑했는지가 보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멸망은 거대한 종말 사건인 동시에 인간의 지배적 사랑을 드러내는 심판입니다. 바벨론이 무너졌을 때 상인들이 ‘내가 잃은 것이 무엇인가’를 바라본다면, 천국은 ‘악과 거짓의 지배가 끝났다’는 것을 봅니다. 동일한 사건을 전혀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의 차이를 결국 사랑의 차이로 설명합니다. 천국의 사람은 주님과 이웃의 선을 기뻐하고, 지옥의 사람은 자기 자신과 세상의 이익을 기뻐합니다. 따라서 마지막 심판은 외부에서 임의적으로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유롭게 형성해 온 사랑에 따라 스스로 자기에게 맞는 곳으로 가게 되는 분리입니다. 계시록 18장의 상품 목록 끝에 매우 충격적인 표현이 하나 나옵니다. ‘사람의 영혼들’입니다. 금과 은, 보석과 진주, 좋은 옷감과 향품, 포도주와 기름, 가축과 수레가 나열되다가 마지막에는 인간의 몸과 영혼까지 상품처럼 등장합니다. 바벨론의 본질을 이보다 더 날카롭게 보여 주는 표현도 드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이 바벨론적 지배욕의 최종 모습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명예와 부를 얻지만, 결국 사람 자체를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사람의 자유와 양심까지 소유하려 합니다. ‘이 사람은 주님의 사람’이 아니라 ‘내 사람’, ‘우리 편’, ‘우리 조직의 사람’이 됩니다. 목회와 종교의 영역에서는 특히 두려운 경고입니다. 성도는 목회자의 소유가 아닙니다. 제자도 지도자의 소유가 아닙니다. 사람의 영혼은 오직 주님께 속합니다. 목회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말씀을 가르치고 선한 길을 보여 주며 그 사람이 자유롭게 주님을 따르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양심을 자기에게 묶으려는 순간 목회적 돌봄은 지배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특정 종교지도자에게만 적용할 말씀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배우자가 배우자에게, 교사가 학생에게, 신앙의 선배가 후배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내 생각대로 해야 한다’는 말 안에는 사랑과 지배가 섞일 수 있습니다. 참된 사랑은 상대를 자기 모습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주님께서 주신 고유한 쓰임을 이루도록 돕습니다.
이런 점에서 앞서 말씀해 주신 시흥영성수련원의 수도적 배경을 알고 이 강의를 듣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 이 강사 역시 성결수도회의 수도사이며 공용복 선생 생전부터 함께했던 분이므로, 그가 반복하여 ‘자기를 죽이라’, ‘정결케 되라’, ‘연단을 통과하라’,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하는 것을 단순한 종말론 강사의 도덕적 권면으로만 볼 필요는 없겠습니다. 실제 수도적 훈련을 통해 자기 의지와 정욕을 다루려 해 온 전통의 언어가 그 안에 배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겠습니다. 물론 이것과 계시록의 구체적 해석이 옳으냐 하는 문제는 별개입니다. 이 둘을 구별하여 보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유지해 온 해설의 중요한 원칙입니다. 계시록 18장 후반에서는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지며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바벨론의 멸망이 일시적 후퇴가 아니라 최종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강력한 표상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맷돌은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맷돌은 곡식을 갈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식으로 만드는 도구입니다. 따라서 말씀의 진리들을 이해하고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자연적 차원의 사고와 관련됩니다. 좋은 의미에서는 말씀의 진리를 실제 생활에 적용하도록 풀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거짓된 상태에서는 그 진리를 왜곡하고 자기 목적에 맞게 바꾸는 자연적 추론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런 ‘큰 맷돌’이 바다에 던져진다는 것은 바벨론을 떠받치던 거짓된 추론과 교리적 체계가 완전히 심판받는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더 이상 거룩한 말씀을 갈아 자기 욕망을 위한 양식으로 만들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매우 엄중합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해서 말씀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자기 교리를 증명하기 위한 재료로만 사용하거나, 이미 정해 놓은 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구절들을 선택하면 말씀을 ‘갈아’ 자기 양식을 만드는 셈이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가지고 모든 사람과 모든 설교를 재단하는 도구로 사용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그 렌즈를 먼저 자기 자신에게 대야 합니다. ‘나는 이 진리를 가지고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더 겸손해졌는가? 다른 사람의 선을 더 잘 볼 수 있게 되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매우 높은 진리를 알고도 그 진리를 proprium의 맷돌에 갈아 자기 우월감의 양식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어 바벨론에서는 다시 음악이 들리지 않고, 기술자도 보이지 않으며, 맷돌 소리도 들리지 않고, 등불도 비치지 않으며, 신랑과 신부의 음성도 다시 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한 도시의 생활이 완전히 정지된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영적으로 보면 더욱 깊습니다. ‘등불’은 진리를 비추는 빛과 관계하고, ‘신랑과 신부’는 선과 진리의 결합, 더 높게는 주님과 교회의 결합을 나타냅니다. 바벨론적 사랑이 완전히 지배하는 곳에서는 결국 참된 선과 진리의 결혼이 사라집니다. 겉으로는 종교가 있고 예배가 있고 말씀과 찬양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중심이 자기 지배와 자기 영광이라면 내적인 신랑과 신부의 음성은 사라진 것입니다. 이 점은 상당히 두렵습니다. 교회가 외적으로 매우 활발하면서도 내적으로는 황폐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많고 프로그램이 많으며 사람이 많고 재정이 풍부한 것이 그 자체로 주님의 임재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작고 눈에 띄지 않는 공동체라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진리에 따라 살고 있다면 그 안에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생명은 규모가 아니라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신앙이 삶과 결합하고, 진리가 체어리티와 결합하며, 사람이 말씀을 알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교회는 살아 있습니다.
계시록 18장 마지막은 바벨론 안에서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발견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바벨론의 죄가 단순한 사치나 경제적 탐욕보다 훨씬 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진리를 억압하고 선을 파괴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피’는 좋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적 진리를 나타냅니다. 반대 의미에서는 그 진리를 폭행하고 왜곡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에서 성도들의 피가 발견된다는 것은 자기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에게 불편한 진리를 제거해 온 상태를 나타냅니다. 자기애는 진리를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단, 자기를 높여 주는 진리일 때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네가 틀렸다’, ‘회개하라’, ‘네 공로를 버려라’,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고 말하기 시작하면 태도가 달라집니다. 그 진리를 죽이려 합니다. 무시하거나 왜곡하거나 다른 의미로 돌립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을 분별하는 중요한 기준 가운데 하나는 ‘나에게 불편한 진리를 어떻게 대하는가’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확인해 주는 말씀만 사랑하는가, 아니면 내 악을 드러내는 말씀도 주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가입니다.
이것은 수도적 연단의 본질과도 만납니다. 연단은 내가 이미 선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 아니라 내가 몰랐던 악이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그 악이 보이지 않으면 주님께서 그것에서 나를 자유롭게 하실 수도 없습니다. 광야에서 숨겨져 있던 것이 드러나고, 그것을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거듭남이 진행됩니다. 이렇게 계시록 18장의 바벨론이 완전히 무너지자 계시록 19장은 전혀 다른 소리로 시작합니다. 하늘에서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이 들립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이 전환은 계시록 전체에서 매우 아름다운 순간 가운데 하나입니다. 땅에서는 바벨론을 잃은 사람들이 울고 있는데 하늘에서는 ‘할렐루야’가 울려 퍼집니다. 땅에서는 ‘한 시간에 망하였다’며 탄식하지만,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이 참되고 의롭다고 찬양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천국이 다른 사람의 고통과 멸망을 보고 즐거워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누구의 멸망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기뻐하는 것은 악과 거짓의 지배가 끝나고, 억압받던 선과 진리가 자유로워지며, 천국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인이 ‘악인이 심판받았다’며 사람의 멸망을 기뻐한다면 그것은 천국적 기쁨이 아닐 수 있습니다. 천국적 기쁨은 사람이 망해서 기쁜 것이 아니라 악이 더 이상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악에서 구원하시려 합니다. 사람이 끝까지 악을 자기 생명으로 선택할 때에도 주님께서는 가능한 한 그 악을 제한하시고 그 사람에게 가능한 질서를 허락하십니다. 따라서 계시록의 심판을 읽으면서 다른 교회, 다른 종교, 다른 사람의 멸망을 기대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오히려 자기 안의 상태를 살펴야 합니다. ‘나는 진리가 승리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내가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기를 원하는가?’ 둘은 매우 다릅니다.
이 점에서 이번 사경회 전체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해설하는 태도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강사들의 종말론과 계시록 해석에서 스베덴보리와 다른 부분을 발견하는 목적은 ‘이분들이 틀렸고 우리는 더 높은 진리를 안다’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분들이 붙들고 있는 선한 것과 참된 것을 귀하게 받으면서, 상응과 속뜻을 통해 그 의미를 한층 더 깊게 보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특히 이번 강사의 경우 실제 성결수도회의 수도사이고 공용복 선생 생전부터 함께했던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의 강의에서 반복되는 ‘자기를 죽임’, ‘연단’, ‘정결’, ‘희생’, ‘사랑의 실천’을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종말론의 외적 구조에서는 큰 차이가 있어도 실제 삶을 정결하게 하려는 방향에는 분명 우리가 귀 기울일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가장 건강하게 작동할 수 있습니다. 렌즈는 대상을 깎아내리는 도구가 아니라 더 깊이 보는 도구입니다. 외적 교리의 차이를 분명히 하되 그 안에 있는 선한 애정을 발견하고, 반대로 매우 옳은 교리를 가지고 있어도 그 안에 자기애가 들어갈 수 있음을 함께 경계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19장에서 하늘의 찬양은 마침내 ‘어린양의 혼인’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바벨론의 멸망 자체가 계시록의 목적지가 아닙니다. 바벨론이 무너져야 어린양의 혼인이 나타납니다. 거짓과 악의 제거는 목적이 아니라 선과 진리의 결합을 위한 준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어린양의 혼인’은 주님과 교회의 결합이며, 한 사람 안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결합하는 거듭남의 상태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단순히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랑하여 행하기 시작할 때 진리와 선의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계시록 전체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열쇠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목적은 멸망이 아니라 결혼입니다. 바벨론을 무너뜨리는 목적은 폐허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짐승을 심판하는 목적은 사람을 두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과의 결합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라는 선언과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다’는 선언은 하나의 과정입니다. 자기애의 왕국이 무너지면 주님의 왕국이 들어옵니다. proprium이 중심에서 내려오면 주님께서 중심이 되십니다. 진리가 자기 우월감을 위한 지식에서 벗어나 삶의 선과 결합하면 혼인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이 사경회의 ‘연단’이라는 주제를 한 단계 더 깊게 이해하게 합니다. 연단의 목적은 고난 자체가 아닙니다. 많이 고생하는 것이 거룩함의 척도가 아닙니다. 연단의 목적은 주님과의 결합을 방해하는 악과 거짓이 드러나고 제거되어 선과 진리가 결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도적 자기부인도 고행 자체가 목적일 수 없습니다. 금식, 절제, 기도, 침묵, 순종 같은 훈련은 그 자체로 천국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다루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라도록 돕는 쓰임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도생활조차 자기 의의 새로운 바벨론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 훈련을 통해 자기 의지가 꺾이고, 다른 사람을 더 이해하게 되고, 인정받지 않아도 평안하며, 섬기는 것을 기뻐하고, 모든 선을 주님께 돌리게 된다면 외적 수도훈련이 내적 거듭남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공용복 선생으로부터 이어진 이 수도적 전통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교리는 서로 다른 신학적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실제 삶의 어떤 지점에서는 만날 수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연단을 통해 자기를 죽이고 정결케 된다’고 말하고, 다른 쪽에서는 ‘시험을 통해 proprium의 악과 거짓이 드러나고 주님께서 그것을 제거하시며 새 의지와 새 이해를 형성하신다’고 설명합니다. 둘을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실제 신앙생활에서 가리키는 방향 가운데 상당한 접점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한 가지를 더 분명하게 합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기 자신을 죽이거나 거듭나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듯 싸워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이기는 모든 힘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내가 이렇게 수련해서 여기까지 왔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여기까지 이끄셨다’는 고백이 깊어져야 합니다. 그 고백이 깊어질수록 바벨론은 무너집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의 가장 깊은 본질은 결국 ‘내가 중심이 되겠다’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10강 10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8장 후반의 큰 성 바벨론의 최종 멸망과 계시록 19장의 하늘의 할렐루야는 미래 적그리스도 체제의 정치·경제·종교적 중심지가 물리적으로 완전히 파괴되는 사건으로만 읽기보다, 주님의 거룩한 것과 진리와 사람의 영혼까지 자기 지배와 명예와 이익을 위한 상품으로 삼았던 자기애의 전체 질서가 신적 진리 앞에서 완전히 제거되고, 그 결과 주님과 교회, 그리고 사람 안의 선과 진리가 다시 결합하는 ‘어린양의 혼인’이 준비되는 마지막 심판의 아르카나로 읽을 때 그 깊은 뜻이 더욱 환하게 열립니다.’
그리고 10강 전체를 마치면서 가장 오래 남겨 둘 것은 짐승도, 666도, 대환난도, 아마겟돈도, 바벨론의 멸망도 아닌 것 같습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어린양’입니다. 계시록의 모든 심판은 어린양을 향해 갑니다. 일곱 인도, 일곱 나팔도, 일곱 대접도, 용과 짐승의 싸움도, 큰 음녀와 바벨론의 멸망도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마지막에는 어린양의 혼인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과 결합하시고, 선과 진리가 결합하며, 사랑과 신앙이 다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긴 10강에서 강사가 반복한 ‘연단받아야 한다’, ‘정결케 되어야 한다’, ‘자기를 죽여야 한다’,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권면도 가장 좋은 자리로 돌아옵니다. 연단은 어린양과 결합하기 위한 연단이고, 정결은 어린양과 결합하기 위한 정결이며, 자기부인은 어린양께서 내 삶의 중심이 되시기 위한 자기부인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 한마디를 더합니다. 그 모든 과정의 주체는 궁극적으로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응답하고 협력하지만 생명을 주시는 분도, 진리를 밝히시는 분도, 시험 가운데 싸울 힘을 주시는 분도, 마침내 선과 진리를 결합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마지막을 향할수록 질문은 ‘적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서 ‘내 안에서 누가 왕인가?’로, ‘바벨론은 어느 도시인가?’에서 ‘내 안에서 무엇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로, ‘아마겟돈은 언제 일어나는가?’에서 ‘오늘 내 안에서 진리와 거짓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하고 있는가?’로 옮겨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질문은 하나로 모입니다. ‘나는 어린양과 함께 있는가?’ 그것이 이 긴 10강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통과하고 난 뒤 남겨 둘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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