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2026/09/27)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5, ‘하나님의 크신 사랑’, 찬95,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여섯 번째, 19절로 24절, AC 글 번호로는 405번에서 433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창4:19-24)
제목은
황폐의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새 교회
이며, 다음은 ‘3분 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그동안 함께해오신 분들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시간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큰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따라 그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창1에서는 천지창조를 거듭남의 과정으로, 창2에서는 에덴동산을 주님의 사랑과 생명 안에 살아가는 천적 상태로, 창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기 감각과 proprium을 따르면서 그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으로 읽었습니다.
창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읽고 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지난주에는 주님께서 ‘가인의 표’로 보존하신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뒤,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 에덴 동쪽 놋 땅에 거하고, 에녹을 낳아 성읍을 세우는 것을 읽었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하나의 가르침이 되고, 그 가르침이 하나의 교리적 세계를 이루며, 거기에서 다시 여러 분리가 이어지는 과정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가인의 계보가 마침내 라멕에게 이르는 장면입니다. 가인에게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도 아직 보존되었지만, 라멕에 이르면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은 ‘황폐’에 이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말씀은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시작을 보여 줍니다. 라멕의 두 아내 아다와 씰라는 새 교회의 출현을 나타내고, 그들에게서 태어나는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을 통하여 사랑의 거룩한 것과 선, 신앙의 영적인 진리와 선, 그리고 자연적인 선과 진리가 다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은 한 가지를 마음에 두고 읽겠습니다. ‘인간의 황폐가 주님의 역사의 끝은 아닙니다. 한 교회의 신앙이 소멸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도 주님께서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시고,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며 그 신앙이 다시 삶으로 이어지는 질서를 세우십니다.’ 오늘은 라멕의 황폐보다 더 깊은 주님의 섭리, 그리고 그 황폐 가운데서 다시 시작되는 새 교회의 질서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405-433 요약입니다.
AC.405-433은 지난번 AC.397-404에서 가인으로부터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하나의 교리적 계보를 이루어 내려온 바로 다음부터 시작합니다. 지난 범위에서 가인은 여호와의 얼굴 앞을 떠나 놋 땅에 거했고, 에녹을 낳고 성읍을 세웠으며, 그로부터 여러 후속적인 분리들이 하나의 계보를 이루었습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 분리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번 범위의 첫 인물인 ‘라멕’에 이르면 그 계열은 마침내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황폐’에 이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말씀은 바로 그 황폐의 자리에서 새로운 교회의 출현을 동시에 보여 줍니다.
AC.405-407에서 ‘라멕’은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된 황폐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가인에게서 시작된 분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가인에게서는 체어리티를 죽인 뒤에도 신앙 자체는 장래의 쓰임을 위하여 보존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이 계속 체어리티와 분리된 채 자기 계보를 만들어 가면 결국 신앙 자체도 생명을 잃게 됩니다. 라멕이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의 소멸을,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것은 체어리티의 소멸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가인에게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일어났다면, 라멕에게서는 그 분리가 끝까지 진행되어 ‘신앙과 체어리티 모두의 소멸’에 이른 것입니다.
AC.407은 이러한 황폐가 가인의 계열에만 있었던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교회의 역사에서 반복되는 질서라고 설명합니다. 교회는 처음에는 참된 신앙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신앙에서 떠나고, 마침내 신앙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 이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파뿐 아니라 고대교회와 유대교회, 초기 기독교회에서도 이러한 황폐가 나타났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교회가 황폐하더라도 언제나 어떤 ‘핵심’이 남는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경우에도 남은 부분이 있었으며, 그것이 홍수 이후까지 이어져 ‘노아’로 불리는 새로운 교회의 출발점이 됩니다. 황폐가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AC.405에 이미 등장했던 라멕의 두 아내 ‘아다’와 ‘씰라’의 의미가 중요해집니다. 라멕은 황폐를 의미하지만 그의 두 아내는 오히려 ‘새 교회의 출현’을 의미합니다. 아다는 새 교회의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이고, 씰라는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이전 교회의 신앙이 완전히 황폐해졌다고 선언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는 모습을 함께 보여 줍니다. 인간의 실패가 극점에 이른 바로 그곳에서 주님의 섭리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AC.408-411은 왜 새로운 교회가 이전 교회의 황폐 이후에 출현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이전 교회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이 모독적인 것들과 뒤섞여 있는 동안에는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 상태가 끝에 이르면 새로운 ‘아침’이 밝아 오고 새 교회가 일어납니다. 중요한 것은 황폐 자체가 새 교회를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황폐한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어떤 핵심을 보존하시고, 이전 질서가 끝에 이른 뒤 새로운 시작의 길을 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서들에서도 ‘황폐’, ‘황량’, ‘완결’, ‘끊어 버림’ 등의 표현 뒤에 새로운 교회의 출현이 이어지는 질서가 반복됩니다.
또한 새 교회는 진리를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가 아니라, 아직 진리를 알지 못했던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식의 많고 적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진리를 안다는 사실과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자기 사랑과 거짓에 맞추어 굳혀 버리면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집니다. 반면 아직 알지 못했던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따라서 새 교회의 출현은 기존의 종교적 지식이나 외적인 계승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내적인 상태와 관계됩니다.
AC.412 이후에는 아다와 씰라에게서 태어나는 자녀들을 통해 새 교회 안에 어떤 것들이 형성되는지가 펼쳐집니다. 여기서 창세기의 이야기는 갑자기 목축과 음악과 금속 기술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인간 문명의 기술사가 아니라 새 교회의 천적·영적·자연적 요소들이 어떻게 구별되어 나타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아다에게서는 야발과 유발이 나오고, 씰라에게서는 두발가인과 나아마가 나옵니다. 이들은 각각 새 교회 안의 서로 다른 선과 진리, 그리고 그것들에 관한 교리를 나타냅니다.
먼저 야발은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라고 불립니다. AC.415-417에서 이것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을 의미합니다. 장막은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사랑의 거룩한 것을 나타내며, 가축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을 나타냅니다. 이미 아벨도 양을 치는 자였지만 야발은 가인으로부터 일곱 번째 계열에 나타납니다. 따라서 문자적으로 최초의 목축인을 찾는 것이 본문의 목적이 아니라, 새 교회에서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이 다시 나타나는 영적 상태를 보여 주는 것이 중심입니다.
야발 다음에 나오는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입니다. AC.418-420에서 악기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 곧 진리와 선에 관계됩니다. 특히 수금은 영적 진리를, 퉁소는 영적 선을 나타냅니다. 말씀에서 수금과 비파, 노래와 찬송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들은 단순히 예배 음악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랑의 천적인 것에서 흘러나오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야발의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보여 준다면, 유발의 ‘악기’는 그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신앙의 진리와 선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야발과 유발의 순서도 중요합니다. 먼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선들이 있고, 거기서 신앙의 진리와 선들이 나옵니다. 이것은 가인의 질서와 정반대입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고 신앙이 사랑을 지배하려 했지만, 새 교회에서는 다시 사랑과 선이 중심이 되고 거기에서 진리와 신앙이 흘러나오는 질서가 나타납니다. 지난 범위에서 무너졌던 ‘사랑에서 신앙으로’의 질서가 새 교회에서 다시 회복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AC.421-426에서는 씰라에게서 태어난 두발가인을 통해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이 설명됩니다. 두발가인은 ‘놋과 쇠로 여러 기구를 만드는 자’인데, 속뜻에서 그는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놋’은 자연적 선을, ‘쇠’는 자연적 진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에 반대되는 악한 영역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의 외적인 삶에까지 내려와 생각과 말과 행동 가운데 표현되는 차원입니다. 새 교회는 천적이고 영적인 것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삶까지 질서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AC.424-426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말씀에 나오는 세공업자와 금속들을 폭넓게 다룹니다. 금은 천적 선을, 은은 영적 진리를, 놋은 자연적 선을, 쇠는 자연적 진리를 나타냅니다. 특히 쇠는 진리가 지닌 힘과 연결됩니다. 에스겔의 쇠벽, 다니엘의 모든 것을 부수는 쇠, 계시록의 ‘쇠 지팡이’가 인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쇠 지팡이는 단순한 강압적인 통치의 상징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의 힘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진리의 힘은 인간이 자기 주장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서 오는 진리 자체에 있습니다.
여기서 야발·유발·두발가인을 하나로 놓고 보면 새 교회의 구조가 매우 아름답게 드러납니다. 야발에게서는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선들이 나타나고, 유발에게서는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영적인 진리와 선들이 나타나며, 두발가인에게서는 그것들이 자연적인 선과 진리의 차원까지 내려옵니다. 곧 ‘천적 → 영적 → 자연적’ 질서입니다. 사랑이 중심에 있고, 그 사랑에서 진리가 나오며, 그 진리가 다시 자연적인 삶 속에서 선과 진리로 표현됩니다. 이것이 가인에게서 뒤집혔던 질서를 새 교회가 다시 회복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AC.427부터 말씀은 다시 라멕의 노래로 돌아갑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는 말은 고백을 의미하고,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나타내며, ‘상처’와 ‘상함’은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나타냅니다. 라멕의 황폐는 단순히 교리가 조금 잘못되었다거나 신앙생활이 약해졌다는 정도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의 생명이 소멸된 교회의 마지막 상태입니다.
특히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의미한다는 설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참된 체어리티에는 순진무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는 단순히 외적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이웃의 선을 구하는 내적인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라멕이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단순한 도덕적 실패보다 깊은 것을 나타냅니다.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 자체가 소멸된 것입니다.
AC.431-432에서는 가인의 ‘일곱 배’와 라멕의 ‘일흔일곱 배’가 서로 비교됩니다. 가인의 경우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도 장래의 쓰임을 위해 보존되어야 했으므로, 그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것이 신성모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라멕은 그 보존된 신앙 자체를 소멸시켰을 뿐 아니라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습니다. 그래서 라멕의 상태는 훨씬 더 큰 신성모독으로 표현됩니다. ‘일흔일곱 배의 보복’은 주님께서 인간처럼 분노하여 일흔일곱 배로 복수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함으로써 초래되는 정죄를 의미합니다.
마지막 AC.433은 왜 하필 ‘일흔일곱’이라는 수를 사용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일곱’은 일곱째 날과 연결되어 천적 인간과 천적 교회와 천적 천국을 의미하며,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에 말씀에서 거룩한 것 또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같은 숫자가 언제나 똑같은 결과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숫자가 무엇에 적용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마18:22에서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고 하신 말씀에서는 끝없는 용서를 나타내지만, 라멕의 ‘일흔일곱 배’에서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한 데 따른 정죄를 나타냅니다.
이렇게 보면 AC.405-433은 처음과 끝에 라멕을 두고 그 가운데에 새 교회의 출현을 넣은 매우 인상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의 라멕은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황폐’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바로 그 황폐 가운데 아다와 씰라가 등장하고, 그들에게서 야발·유발·두발가인이 태어나면서 새 교회의 천적·영적·자연적 질서가 펼쳐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라멕의 노래로 돌아와 이전 교회가 왜 황폐에 이르렀는지를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관점에서 확인합니다. 이전 교회의 죽음과 새로운 교회의 탄생이 하나의 본문 안에 나란히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 범위의 ‘가인의 표’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가인의 신앙을 보존하신 목적은 분리된 신앙 자체를 영원히 유지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 신앙을 통하여 언젠가 다시 체어리티가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라멕의 계열에서는 그 가능성마저 소멸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황폐한 것을 억지로 되살리는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그 새 교회에서는 다시 사랑의 거룩한 것과 선이 먼저 있고, 거기에서 영적인 진리와 선이 나오며, 그것이 자연적인 선과 진리의 삶으로까지 내려오는 질서가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번 본문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새 교회’가 단순히 새로운 조직이나 새로운 교파를 뜻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아다와 씰라,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이 보여 주는 것은 사람 안에서도 이루어져야 할 하나의 질서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이 중심이 되고, 그 사랑에서 신앙의 진리와 선이 나오며, 그것이 우리의 자연적인 생각과 말과 행동까지 질서 있게 해야 합니다. 내적인 사랑과 외적인 삶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질서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본문은 AC를 공부하는 우리에게도 매우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많은 진리를 배우고, 말씀의 상응을 공부하고, AC의 수많은 아르카나를 알아 갑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우리 안에서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의 질서를 이루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알수록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에게 더 체어리티를 행하며, 그것이 우리의 실제 말과 행동에까지 내려온다면 그 진리는 살아 있는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많이 알면서도 사랑과 체어리티가 소멸한다면, 지식의 양과 관계없이 라멕의 황폐가 우리 안에서도 시작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번 본문은 황폐보다 더 깊은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라멕에게서 한 교회의 신앙이 끝났지만 주님의 교회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황폐 가운데서도 어떤 핵심이 보존되었고, 아다와 씰라를 통하여 새로운 교회의 시작이 나타났습니다. 인간이 실패한다고 해서 주님의 목적이 실패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고, 새로운 빛을 주시며, 사랑과 신앙과 삶이 다시 올바른 질서를 이루도록 새로운 시작을 마련하십니다.
결국 AC.405-433 전체의 흐름은 ‘가인의 계보가 라멕에 이름 → 신앙의 완전한 황폐 → 그 가운데 보존된 핵심 →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새 교회의 출현 → 야발의 사랑의 거룩한 것과 선 → 유발의 신앙의 영적인 진리와 선 → 두발가인의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 → 천적·영적·자연적 질서의 회복 → 다시 라멕의 고백 →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 확인 → 일흔일곱 배로 표현된 지극히 거룩한 것의 침해와 정죄’로 읽을 수 있습니다. 지난 범위 AC.397-404가 ‘보존된 신앙을 인간이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보여 주었다면, 이번 AC.405-433은 그 분리된 신앙의 계열이 결국 어디에 이르는지, 그리고 그 황폐 가운데서 주님께서 어떻게 다시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이번 범위의 마지막 메시지는 황폐가 아닙니다. 라멕의 실패가 아무리 깊어도 주님의 섭리는 그보다 깊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신앙만 보존되는 것도, 교리만 정교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에서 진리가 나오고, 진리가 다시 사랑을 섬기며, 그 사랑과 진리가 우리의 자연적인 삶에까지 내려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 → 신앙 → 삶’, ‘천적 → 영적 → 자연적’이라는 이 질서가 다시 세워지는 것, 바로 그것이 라멕의 황폐 한가운데서 아다와 씰라와 그 자녀들을 통하여 보여 주시는 새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405, 창4:19, ‘라멕에게서 신앙이 소멸하고 새 교회가 일어나다 - 아다와 씰라의 속뜻’ (AC.405-41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창4:19) AC.405가인으로부터 순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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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6, 창4:19, ‘라멕은 왜 신앙의 황폐를 의미하는가? -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6‘라멕’(Lamech)이 황폐(vastation), 곧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뒤에 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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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7, 창4:19, ‘교회가 황폐해져도 남아 있는 핵심 - 노아로 이어지는 교회의 보존’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7교회 전체의 상태는 이와 같습니다. 교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참된 신앙에서 떠나 마침내 신앙이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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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8, 창4:19, ‘교회가 황폐해진 뒤에야 새 아침이 밝는 이유 - 거룩한 것의 모독과 새로운 시작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8 교회가 더 이상 아무런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을 만큼 황폐해졌을 때, 그때 비로소, 그 이전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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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9, 창4:19, ‘아다와 씰라는 왜 라멕의 아내인가? - 속 교회와 겉 교회는 하나입니다’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9‘가인’(Cain)이라 불린 이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이단은 시간이 흐르면서 황폐해졌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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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0, 창4:19, ‘교회의 황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 알면서 거부하는 상태와 아직 알지 못하는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10황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거나, 보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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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1, 창4:19, ‘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왜 황폐의 마지막 때가 오는가? - 예언서에 나타난 황폐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11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황폐의 마지막 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주님께서 예언서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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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2, 창4:20,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 야발 -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로부터 나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And Adah bare Jabal; he was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창4:20) AC.412‘아다’(Adah)는 앞에서와 같이 신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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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3, 창4:20, ‘아다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인 이유 - 야발이 뜻하는 사랑과 선’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3‘아다’(Adah)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그의 맏아들 야발이 ‘장막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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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4, 창4:20, ‘장막에 거주한다는 것은 왜 사랑의 거룩한 것을 뜻하는가? - 말씀의 장막과 성막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4‘장막에 거주한다’(dwell in tents)는 것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에서 ‘장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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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5, 창4:20, ‘가축의 조상은 왜 사랑의 거룩한 것에서 나오는 선을 뜻하는가?’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5‘가축의 조상’(father of cattle)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에서 나오는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이 장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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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6, 창4:20, ‘야발이 최초의 목축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6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이 의미된다는 사실은, 야발이 ‘장막과 가축의 우리에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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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7, 창4:21, ‘유발과 수금과 퉁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AC.417-420)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And his brother’s name was Jubal; he was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창4:21) AC.417‘그의 아우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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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8, 창4:21, ‘수금과 퉁소는 왜 신앙의 영적인 것들을 의미하는가?’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18앞 절은 사랑에 속하는 천적인 것들을 다루었지만, 이 절은 신앙에 속하는 영적인 것들을 다루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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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9, 창4:21, ‘수금은 신앙의 진리를, 퉁소는 신앙의 선을 의미하는 이유’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19천적인 것들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인 것처럼, 영적인 것들은 신앙의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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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0, 창4:21, ‘말씀에 여러 악기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20말씀에는 여러 가지 악기가 언급되며, 각 악기에는 저마다 고유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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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1, 창4:22, ‘두발가인과 나아마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AC.421-426)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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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2, 창4:22, ‘레아와 라헬은 왜 외적 교회와 내적 교회를 나타내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2이 새 교회가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지는 유대교회를 통해 알 수 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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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3, 창4:22, ‘두발가인은 왜 ‘아버지’가 아니라 ‘스승’이라고 불리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3두발가인은 야발과 유발의 경우처럼 ‘아버지’(father)가 아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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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4, 창4:22, ‘세공업자는 왜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을 뜻하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4말씀에서 ‘세공업자’(artificer)는 지혜롭고 총명하며 지식을 갖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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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5, 창4:22, ‘놋은 왜 자연적 선을 의미하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5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놋’(brass)이 자연적 선을 뜻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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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6, 창4:22, ‘쇠는 왜 자연적 진리를 의미하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6‘쇠’(iron)가 자연적 진리를 뜻한다는 사실은 에스겔이 두로에 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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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7, 창4:23, ‘라멕은 왜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고 고백하는가?’ (AC.427-431)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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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8, 창4:23, ‘라멕의 말은 왜 황폐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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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9, 창4:23, 왜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뜻하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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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0, 창4:23, ‘어린아이는 왜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의미하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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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1, 창4:23, ‘상처와 타박상은 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뜻하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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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2, 창4:24, ‘라멕의 일흔일곱 배 보복은 무엇을 뜻하는가?’ (AC.432-433)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창4:24) AC.432 이 말씀은 그들이 ‘가인’(Cain)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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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3, 창4:24, ‘일흔일곱 배의 보복은 왜 가장 거룩한 것의 침해를 뜻하는가?’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창4:24) AC.433가인이 ‘일곱 배로 보복을 받을 것’(avenged sevenfold)이라는 말이 ‘가인’(Cain)이 나타내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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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필수 리딩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AC.405, 창4:19, ‘라멕에게서 신앙이 소멸하고 새 교회가 일어나다 - 아다와 씰라의 속뜻’ (AC.405-41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창4:19) AC.405가인으로부터 순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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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6, 창4:20, ‘야발이 최초의 목축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6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이 의미된다는 사실은, 야발이 ‘장막과 가축의 우리에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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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1, 창4:22, ‘두발가인과 나아마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AC.421-426)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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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6, 창4:22, ‘쇠는 왜 자연적 진리를 의미하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6‘쇠’(iron)가 자연적 진리를 뜻한다는 사실은 에스겔이 두로에 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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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3, 창4:24, ‘일흔일곱 배의 보복은 왜 가장 거룩한 것의 침해를 뜻하는가?’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창4:24) AC.433가인이 ‘일곱 배로 보복을 받을 것’(avenged sevenfold)이라는 말이 ‘가인’(Cain)이 나타내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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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9-27(D1)
주일예배(2026/09/20, 창4:16-18, AC.397-404), ‘보존된 신앙은 어디로 가는가, 가인의 성읍 에녹’
※ 오늘(2026/09/20)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4, ‘주 우리 하나님’, 찬94,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다섯 번째, 16절로 18절, AC 글 번호로는 397번에서 404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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