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나님의 자녀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 신뢰와 영적 방임의 차이

 

‘나는 하나님의 자녀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얼핏 들으면 매우 믿음 좋은 말처럼 들립니다. 실제로 이 말 안에는 귀한 진리도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미래가 궁극적으로 주님 손에 있으며,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통제하려 하지 않고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것은 신앙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말은 전혀 다른 두 방향으로 갈라질 수 있습니다. 하나는 참된 신뢰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책임을 주님께 떠넘기는 ‘영적 방임’입니다.

 

 

주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는 사람이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 능력과 선의 근원은 주님에게서 오지만, 사람에게는 마치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 그러니까 ‘무엇이 옳은지를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인 합리성과 ‘그렇게 이해한 것을 스스로 선택하여 행할 수 있는 능력’인 자유가 주어져 있습니다. 바로 그 자유 안에서 악을 거절하고 선을 선택할 때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하신다’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같은 말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는데 ‘나는 하나님의 자녀니까 하나님께서 알아서 먹여 주시겠지’ 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지 않는다면 그것을 곧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건강에 문제가 있는데 필요한 치료와 생활관리는 하지 않으면서 ‘주님께 맡겼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자녀의 문제를 발견하고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키우시겠지’ 하며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섭리를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유용한 일’(use), 곧 자신의 ‘쓰임새’를 방기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책임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책임 있는 선택과 행동을 섭리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영적 문제에서는 이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나는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까 결국 천국에는 가겠지’라는 생각이 악을 살펴보고 회개하며 거듭나는 삶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일종의 영적 안전보장처럼 생각한다면 앞서 살펴본 ‘영접 기도만 하면 구원받는가?’라는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입으로 주님을 영접했다고 고백하거나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그 고백이 실제 삶에서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마7: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regeneration)은 그래서 매우 역동적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강제로 천국 사람으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사람에게 진리를 보여 주시고 선을 행할 능력을 주시며 끊임없이 이끄시지만, 사람은 자신의 자유 안에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거짓말하려는 마음을 발견했다면 ‘주님께서 언젠가 고쳐 주시겠지’라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죄임을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실제로 거짓말하지 않으려고 싸워야 합니다. 미움과 탐욕, 음란과 교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싸움에서 사람이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최선을 다할 때, 실제로 악을 이길 힘을 공급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여기서 ‘프로프리움’(proprium)에 관한 절묘한 역설이 생깁니다. 사람은 자기 힘만 믿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자기에게 아무 역할도 없는 것처럼 행동해서도 안 됩니다. ‘내가 했다’고 생각하면 자기 의에 빠지고, ‘주님이 하시니까 나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영적 나태에 빠집니다. 바른 질서는 ‘나는 최선을 다해 행하되, 선을 행할 수 있었던 모든 능력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말하는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하되 그것이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하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신다’는 말은 언제 참된 신앙고백이 될까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뒤 결과를 주님께 맡길 때입니다. 진실하게 판단하고, 필요한 행동을 하고, 책임을 다하고, 기도하며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는 내가 통제할 수 없을 때 ‘이제는 주님께 맡깁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체념이 아니라 섭리에 대한 신뢰입니다. 내가 해야 할 것과 주님께 맡겨야 할 것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라는 말도 내면에서는 정반대일 수 있습니다. ‘나는 하기 싫으니 하나님이 하시겠지’라면 책임 회피가 될 수 있지만, ‘나는 주님 앞에서 오늘 해야 할 일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나 결과까지 내가 붙잡으려 하지 않고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겠습니다’라면 매우 건강한 신앙이 됩니다. 외적으로는 비슷한 말인데 그 안의 사랑과 의지가 다른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 자체도 특권보다 관계와 닮음의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하나님이 무슨 일이든 내 뜻대로 처리해 주신다’는 의미라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기보다 보호막처럼 이용하는 셈이 됩니다. 참된 자녀 됨은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 가는 데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유용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니까 아무렇게나 살아도 하나님이 책임지시겠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고 싶다’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섭리에 관한 매우 중요한 균형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하고,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 맡긴다’고만 말해도 아직 조금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는 ‘내가 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것조차 사실 주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가능한 것이지만, 주님은 내가 그것을 내 힘으로 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행하기를 원하신다’고 말해야 더욱 정확합니다.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섭리는 경쟁관계가 아닙니다. 인간이 자유롭게 선을 선택하는 바로 그 안에서 주님의 섭리가 역사합니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라는 말은 절반은 매우 아름답고 절반은 매우 위험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주님의 섭리를 신뢰한다’는 부분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러므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가 붙는 순간 신뢰가 방임으로 변합니다. 참된 신앙은 ‘주님께 맡긴다’는 말로 책임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오늘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힘을 받아 내가 해야 할 일을 다한 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결과를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스베덴보리답게 압축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해야 하지만, 모든 선한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바로 이 두 문장 사이에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라는 말이 참된 신뢰가 될 것인지, 영적 방임이 될 것인지를 가르는 경계가 있습니다.

 

 

 

SY.119, ‘한번 혈연이면 영원히 혈연인가’

한번 혈연이면 영원히 혈연인가 - 천국에서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한번 부모와 자녀가 되었으면 영원히 부모와 자녀인가? 형제자매는 영원히 형제자매인가?’ 이 질문은 사후세계와 천국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한번 혈연이면 영원히 혈연인가 - 천국에서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한번 부모와 자녀가 되었으면 영원히 부모와 자녀인가? 형제자매는 영원히 형제자매인가?’ 이 질문은 사후세계와 천국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우리는 가족을 너무나 중요한 관계로 경험하기 때문에 천국에서도 지금의 가족관계가 그대로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대답은 ‘혈연이라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지만, 혈연관계가 영원한 관계를 결정하지는 않는다’에 가깝습니다.

 

자연계에서 혈연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라는 관계는 우연히 붙은 이름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서로 사랑하고 돌보며 책임을 배우도록 주어진 질서입니다. 특히 부모가 어린 자녀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사랑에는 주님의 섭리가 깊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혈연을 하찮게 여긴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계에서 가족에게 맡겨진 책임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은 체어리티(charity)의 중요한 형태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영계에 들어가면 관계를 결정하는 원리가 달라집니다. 자연계에서는 ‘누구에게서 태어났는가?’가 가족을 결정하지만, 영계에서는 ‘무엇을 사랑하는가?’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결정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 공동체는 혈통이나 국적, 혹은 지상 소속에 따라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비슷한 사랑과 선을 가진 사람들이 주님의 질서에 따라 결합하여 이루어집니다. 결국 자연적 친족관계보다 ‘영적 친화성’이 더 근본적 관계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밖에서 찾나이다’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고 물으신 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2:47-50). 이것은 육신의 가족을 무시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혈연보다 더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같은 선과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영적 친족관계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부자지간이었다고 해서 영원히 ‘아버지는 위, 아들은 아래’라는 관계가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계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낳고 양육했지만, 아들도 성인이 되고 두 사람 모두 영계에 들어가면 각각 독립된 영적 인간입니다. 그때는 ‘누가 누구의 아버지였는가?’보다 각 사람이 어떤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을 형성했는지가 더 중요해집니다. 두 사람이 서로 비슷한 천국적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매우 가까이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 사랑이 크게 다르다면 혈연이라는 이유만으로 영원히 같은 공동체에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형제자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형제이지만, 영계에서는 두 사람의 내적 사랑이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선택하고 다른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자신의 지배적 사랑으로 만들었다면, 자연적 혈연이 그 영적 차이를 없앨 수 없습니다. 천국에 있는 사람이 ‘내 동생이 지옥에 있으니 나도 그곳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고 할 수도 없고, 반대로 혈연 때문에 지옥의 사람이 천국 공동체에 머무를 수도 없습니다. 각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삶과 상응하는 곳으로 갑니다.

 

그러면 천국에 간 사람이 지옥에 간 가족 때문에 영원히 슬퍼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가 곧 따라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별도의 주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천국의 행복이 기억상실에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지상에서의 혈연적 애착 때문에 천국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것도 아닙니다. 사후에는 사람과 관계를 바라보는 기준 자체가 자연적 혈연에서 영적 선과 주님의 질서로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천국에 간 부모는 지옥에 간 자녀 때문에 슬퍼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으로 따로 다루면 상당히 깊은 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후에 가족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에서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잃어버리는 존재가 아닙니다. 지상에서 알던 사람들을 만나고 알아보는 과정이 있으며, 가족이나 친지들도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재회’와 ‘영원한 결합’이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만나서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는 것과 영원히 같은 공동체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각 사람의 내면이 드러나고, 서로의 사랑이 조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가까워지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서로 다른 곳으로 향합니다.

 

이 원리를 생각하면 주님께서 자연계의 가족을 왜 그렇게 중요하게 주셨는지도 새롭게 보입니다. 가족은 영원히 유지해야 할 하나의 혈연집단이라기보다, 우리가 사랑과 책임, 희생과 용서와 돌봄을 배우도록 주어진 매우 중요한 ‘거듭남’(regeneration)의 자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소유하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한 독립된 영혼이 주님을 향하여 성장하도록 돌봅니다. 자녀 역시 부모에게 영원히 종속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연계의 가족관계는 영적인 사랑을 배우는 매우 중요한 학교인 셈입니다.

 

그래서 ‘한번 혈연이면 영원히 혈연인가?’라는 질문에는 두 층위로 답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내 아버지였고, 내 어머니였고, 내 아들이었고, 내 딸이었다는 지상의 역사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혈연관계가 영원히 우리의 관계를 결정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영원한 세계에서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것은 피가 아니라 사랑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함께 사랑하는 내적 조화입니다.

 

어쩌면 이것을 가장 간결하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자연계에서는 혈연이 우리를 가족으로 만나게 하지만, 영계에서는 사랑이 우리를 영원히 함께 있게 합니다.’

 

그리고 이 원리는 가족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귀하게 만듭니다. 지금 부모와 자녀이고 부부이며 형제자매라는 이유만으로 영원한 결합이 자동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함께 주님을 향해 살아가는 가운데 자연적 가족관계가 ‘영적인 관계’로 깊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경우는 지상에서 가족이었던 사람들이 단지 혈연 때문에 다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비슷한 천국적 사랑을 이루었기 때문에 영계에서도 서로 가까운 사람들이 되는 경우일 것입니다.

 

 

 

SY.120, ‘나는 하나님의 자녀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나는 하나님의 자녀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 신뢰와 영적 방임의 차이 ‘나는 하나님의 자녀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얼핏 들으면 매우 믿음 좋은 말처럼 들립니다. 실제

bygrace.kr

 

SY.118, ‘부자는 지옥에 가는가?’

부자는 지옥에 가는가 - 재산이 아니라 사랑의 문제 ‘부자는 지옥에 가는가?’라는 질문은 복음서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주님께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고 말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부자는 지옥에 가는가 - 재산이 아니라 사랑의 문제

 

‘부자는 지옥에 가는가?’라는 질문은 복음서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주님께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고 말씀하셨고, 이어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3-24)고까지 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도 부자는 죽은 뒤 음부에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만 놓고 보면 마치 부유함 자체가 구원을 가로막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와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남기신 그의 저작들을 함께 보면 결론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자이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도 아니고, 가난하기 때문에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 자체가 재산의 많고 적음을 구원의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많은 가축과 은금을 소유한 부자였고, 욥 역시 큰 재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마태복음이 명시적으로 ‘부자’라고 부르는 사람이면서 주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부유함 자체를 악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가?’입니다. 재산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고 그것을 자기 존재의 안전과 가치, 그리고 행복의 근원으로 삼는다면 부는 영적인 위험이 됩니다. 그러나 재산을 자신과 가족을 돌보고 이웃과 사회에 유익을 끼치며 맡겨진 일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재산 자체가 천국을 가로막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 구별은 더욱 분명합니다. 사람이 사후에 가져가는 것은 집도, 토지도, 그리고 통장도 아닙니다.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동안 자신 안에 형성한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을 가지고 갑니다. 따라서 똑같이 많은 재산을 가진 두 사람도 내적으로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돈을 통해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자신의 쾌락과 명예를 높이는 것을 사랑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자신의 재산과 능력을 맡겨진 것으로 여기며 정직하게 사업하고 가족을 책임지며 많은 사람에게 ‘유용한 일’(use, 쓰임, 쓰임새)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둘 다 ‘부자’이지만 그 재산을 움직이는 내적인 사랑은 정반대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그토록 강하게 말씀하셨을까요? 마태복음 19장의 문맥을 보면 바로 앞에 부자 청년이 있습니다. 그는 계명을 지켰다고 말했지만 주님께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시자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떠났습니다(마19:21-22). 그 순간 그의 재산이 단순히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 ‘붙들고 있는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주님과 재물 가운데 어느 하나를 놓아야 하는 순간이 오자 재물을 놓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핵심은 재산의 액수보다 ‘마음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있습니다.

 

‘낙타와 바늘귀’도 같은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흔히 ‘바늘귀’가 예루살렘의 작은 성문이어서 낙타가 짐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으면 통과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 전해지지만, 이를 뒷받침할 확실한 역사적 근거는 없습니다. 본문의 자연스러운 뜻은 실제 낙타와 바늘구멍을 극단적으로 대비하여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놀라자 주님께서는 곧바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19:25-26)고 말씀하십니다. 이 마지막 말씀이 앞의 말씀을 푸는 열쇠입니다. 주님께서는 ‘부자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선언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벗어나 천국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주님께서는 사람의 사랑 자체를 변화시키실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으로 들어가면 ‘부자’의 의미는 물질적 재산을 넘어 더욱 넓어집니다. 말씀에서 ‘부’, ‘재물’, ‘보물’은 좋은 의미에서는 선과 진리의 지식, 곧 영적 부요함을 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 의미에서는 자신이 가진 지식과 능력, 자기 의와 자기 지혜를 자기 것으로 여기며 의지하는 상태를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프로프리움’(proprium)의 문제가 나타납니다. ‘내가 가지고 있다’, ‘내가 알고 있다’, ‘내가 이루었다’, ‘나는 옳다’는 것이 주님을 대신하여 마음의 중심을 차지하기 시작하면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도 영적 의미에서는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가 좋은 예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3:17). 여기서 문제는 단순히 라오디게아 사람들이 돈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는 영적 자기충족이 문제입니다.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야 하는 존재가 자신에게 이미 모든 것이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부유하지만 속으로는 가난할 수 있고, 반대로 겉으로는 가난하지만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적으로 부유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 역시 ‘부자 = 지옥, 가난한 사람 = 천국’이라는 경제적 구원론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부자의 문제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자기 문 앞에 누워 있는 나사로를 외면하면서 자신의 풍요를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의 재산이 체어리티(charity)로 흘러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많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보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웃을 보지 못하는 상태’가 문제입니다. 부가 자기 사랑 안에 갇히면 그것은 사람을 주님과 이웃에게서 멀어지게 하지만, 부가 이웃의 유익과 ‘유용한 일’을 위해 사용되면 같은 재산도 전혀 다른 기능을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부자’를 한 가지 의미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자적으로는 실제 재산이 많은 사람을 가리킬 수 있고, 좋은 의미에서는 선과 진리라는 영적 재산을 풍성하게 가진 사람을 뜻할 수 있으며, 반대 의미에서는 자신이 가진 재산과 지식, 능력을 자기 것으로 여기며 주님보다도 더 그것을 의지하는 사람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부자’가 등장할 때마다 먼저 그 문맥에서 어떤 종류의 ‘부’를 말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결국 주님께서 문제 삼으시는 것은 ‘소유’ 자체라기보다 ‘소유에 대한 사랑’입니다. 부유한 사람에게는 부를 주님보다 사랑하게 될 특별한 시험이 있고, 가난한 사람에게도 부를 탐내고 부자를 시기하며 재물을 삶의 궁극적인 행복으로 여기게 될 시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하다는 사실도 영적인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통장에 돈이 없으면서 마음 전체로 돈을 사랑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많은 재산을 소유하면서도 마음은 그것에 매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지옥에 가는가?’라는 질문에는 분명하게 ‘아닙니다’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죽은 뒤 그의 재산 목록을 조사하여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재산을 소유하고 사용하는 동안 그 사람 안에 ‘어떤 사랑이 형성되었는가’를 보십니다. 재산은 죽을 때 모두 남겨 두고 가지만, 그것을 사용하면서 형성된 사랑은 가지고 갑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부자는 돈이 많아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돈이 주님을 대신하여 마음의 주인이 될 때 영적인 위험에 빠집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죽을 때 우리가 가지고 가는 것은 재산이 아니라, 그 재산을 사랑하고 사용하면서 형성된 우리의 사랑입니다.’

 

 

 

SY.119, ‘한번 혈연이면 영원히 혈연인가’

한번 혈연이면 영원히 혈연인가 - 천국에서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한번 부모와 자녀가 되었으면 영원히 부모와 자녀인가? 형제자매는 영원히 형제자매인가?’ 이 질문은 사후세계와 천국

bygrace.kr

 

SY.117, ‘좌파도 구원 받을 수 있는가’

좌파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 - 주님은 정치적 좌표로 사람을 심판하시는가 ‘좌파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다소 도발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들이대면 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