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인데...’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인데....’ 개신교 안에서는 상당히 민감하게 들리는 말입니다. 설교자가 ‘선을 행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악을 버리고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라고 반복해서 강조하면 누군가는 금방 걱정합니다. ‘저러다가 행위구원으로 가는 것 아닌가?’ 특히 종교개혁 이후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중요하게 여겨 온 개신교 전통에서는 인간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처럼 말하는 것에 강한 경계심이 있습니다. 그 경계심에는 분명 지켜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선행을 쌓아서 하나님께 구원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나는 평생 착하게 살았습니다’, ‘헌금도 많이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도왔습니다’, ‘교회 봉사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나를 천국에 보내셔야 합니다’라고 말한다면 선행을 일종의 구원 대금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바울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라고 한 말씀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자랑과 공로를 철저히 무너뜨립니다(엡2:8-9).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선행으로 구원을 살 수 없다’는 것과 ‘그러므로 선행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전자는 인간의 공로를 부정하는 것이지만, 후자는 자칫 주님께서 끊임없이 명하신 선한 삶 자체를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위구원을 피하려다가 어느 순간 ‘행위’를 피하게 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읽어 보면 선한 삶에 대한 요구는 결코 주변적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마5:16). 또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고 하셨으며(마7:16),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뒤에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하셨습니다(눅10:37). 주님께서는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행위구원이라고 걱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은 더욱 직접적입니다. 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시게 하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헐벗은 사람을 입히며, 병든 사람과 갇힌 사람을 돌본 일이 마지막 심판의 장면에 등장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마25:40). 만일 선행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행위구원이라면 이 말씀부터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야고보는 더 대담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라고 말하고(약2:17),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라고까지 말합니다(약2:24). 이 구절 때문에 종교개혁 이후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성경 자체는 ‘행위’를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행위가 있느냐 없느냐만이 아니라 그 행위가 어디에서 나오며,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매우 유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한 행위를 구원의 대가로 보지 않습니다.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은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서 독립적으로 발생한 순수한 선이 있어서 그것을 주님께 가져가고 ‘제가 이것을 했으니 상을 주십시오’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행하는 참된 선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 실제 삶에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선을 행했는가’보다 ‘그 선을 누구의 것으로 여기고 있는가’입니다. 선을 행한 뒤 ‘내가 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선하다. 나는 이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더 높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프로프리움’(proprium)이 그 선을 자기 것으로 붙잡기 시작합니다. 겉으로는 선행이지만 그 안에 자기 의와 명예욕, 그리고 공로 의식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경계하는 공로적 선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해결책을 ‘그러니 선을 강조하지 말자’로 잡으면 이상해집니다. 자기 자랑이 생길 위험이 있으니 이웃을 돕지 말자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해결책은 선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선의 근원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사람은 선을 실제로 행해야 합니다. 악을 죄로 알고 피해야 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 하며, 자신의 직분과 책임 안에서 유용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선의 능력과 근원은 주님에게서 온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매우 중요한 원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가 하는 것처럼(as if from self) 선을 행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대신 정직해 주시기를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하고, 내가 용서해야 하며, 내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행한 뒤에는 그 선의 근원과 능력이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유롭게 내가 행하지만, 선 자체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을 동시에 보존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꼭두각시처럼 선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며, 그것을 자유롭게 선택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거듭남(regeneration)은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은 적극적으로 악과 싸우고 선을 행합니다. 다만 그 싸움에서 이길 힘과 선을 행할 능력이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배워 갑니다.

 

여기에서 ‘행위구원’이라는 말을 좀 더 정확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을 행해야 한다’고 말한다고 해서 곧 행위구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행을 쌓아 그 공로로 구원을 얻는다’라고 말할 때 행위구원 문제가 생깁니다. 이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선행은 필요 없다’와 ‘선행에는 공로가 없다’도 전혀 다른 말입니다.

 

이 차이를 놓치면 이상한 역설이 생깁니다.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라고 아주 정확하게 고백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거짓과 탐욕과 미움과 음란을 계속 붙들어도, 선한 삶을 강조하는 사람보다 자신이 더 복음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라는 설교를 듣고 ‘저건 복음이 아니라 율법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수없이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라고도 하셨습니다(요13:17).

 

사실 신앙이 살아 있는지를 확인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곳이 삶입니다. 사과나무가 살아 있는지는 ‘나는 사과나무입니다’라는 팻말로 확인하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열매를 봅니다. 그렇다고 열매를 가지에 접착제로 붙인다고 나무가 살아나는 것도 아닙니다. 뿌리와 줄기에 생명이 있어야 열매가 나옵니다. 믿음과 선행도 이와 비슷합니다. 외적 선행을 많이 붙인다고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실제로 사람 안에 있다면 그 생명은 결국 어떤 형태로든 삶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선행은 구원의 ‘가격’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열매는 단순히 나무가 살아 있다는 증거만이 아닙니다. 나무가 존재하는 목적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것은 그 사람이 자기 혼자 천국에 들어가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며 선하고 유용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이것이 ‘체어리티’(charity)입니다. 체어리티는 단순히 돈을 기부하거나 불쌍한 사람을 돕는 좁은 의미의 자선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이웃과 공동체를 향하여 실제적인 선과 유용한 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바르게 돌보는 것, 직장에서 정직하게 책임을 다하는 것, 환자를 성실하게 치료하는 것, 학생을 진실하게 가르치는 것,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 때로는 상대에게 해로운 일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까지도 체어리티의 삶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믿음과 체어리티’는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보게 하고, 체어리티는 그것을 사랑하게 하며, 행위는 그 사랑을 실제 세계에서 구현합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하고, 선이 유용한 일(use, 쓰임새)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여기에서 종교개혁이 경계했던 공로주의와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선한 삶 사이의 차이도 분명해집니다. ‘내가 선을 행했으니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셔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내 행위에는 공로가 없으니 어떻게 살아도 구원과는 상관없다’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첫 번째는 인간의 선행을 주님보다 높이고, 두 번째는 주님께서 인간을 실제로 거듭나게 하시는 일을 약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장면은 이 점을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섬김에 관한 교리를 설명하시는 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직접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그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라고 하셨습니다(요13:14). 참된 진리는 결국 행위로 내려옵니다. 사랑은 행동할 때 비로소 자연계 안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이야’라는 생각의 가장 큰 위험은 선과 행위를 신앙에서 밀어내 버릴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신앙은 머리에서 동의하는 교리가 되고, 구원은 그 교리를 믿었다는 신분이 되며, 실제 삶은 ‘가능하면 잘 살면 좋은 것’ 정도로 낮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사람의 생각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의지와 사랑, 그리고 삶을 변화시키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물론 여기에서도 완벽주의로 가서는 안 됩니다. 선행을 강조한다는 것이 ‘완벽하게 선하게 살아야 구원받는다’라는 뜻은 아닙니다. 거듭나는 사람도 넘어지고 실패합니다. 중요한 것은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악이라고 인정하고, 그것을 정당화하지 않으며, 다시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선을 향하여 일어서는 것입니다. 선한 삶은 구원을 얻기 위한 시험 점수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주 중요한 역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참된 선을 행할수록 사람은 오히려 ‘내가 선하다’는 생각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자기 안의 선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점점 더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저 사람을 도왔다’고 생각하지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주님께서 내게 사랑할 마음과 도울 기회, 그리고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선행이 많아질수록 공로 의식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감사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적 선과 공로적 선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행위구원’을 가장 정확하게 경계하는 방법은 선행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을 힘껏 행하면서도 그 선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야 은혜입니다’가 아니라 ‘나는 주님께서 명하신 선을 힘껏 행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선의 능력과 공로를 내 것으로 주장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은혜’와 ‘행위’도 더 이상 경쟁하지 않습니다. 은혜는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게 하는 모든 생명과 능력이 먼저 주님에게서 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은혜를 자유롭게 받아 실제 삶에서 사용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것, 그것이 체어리티이며 유용한 삶입니다.

 

따라서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이야’라는 말에는 중요한 경계심이 있지만, 그것을 지나치게 확대하면 오히려 성경이 강조하는 삶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경계해야 할 것은 선행이 아니라 ‘공로 의식’입니다. 버려야 할 것은 행위가 아니라 ‘내 행위가 나를 구원한다’는 생각입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선행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은 반드시 우리를 선을 사랑하고 행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조금 더 날카롭게 말하면 이것이겠습니다.

 

‘행위구원의 반대말은 ‘행위 없음’이 아니라 ‘공로 없음’입니다.’

 

그리고 이번 글의 핵심을 가장 ‘스베덴보리의 렌즈’답게 표현한다면 이것이겠습니다.

 

‘선을 행하되 그것을 내 공로로 여기지 않는 것, 마치 내가 하는 것처럼 힘껏 행하되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은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은혜와 삶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SL.21,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부차적인 거고’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부차적인 거고’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부차적인 거고.’ 개신교 신앙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매우 자연스럽게 들리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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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부차적인 거고’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부차적인 거고.’ 개신교 신앙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매우 자연스럽게 들리는 말입니다. 바울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라고 말하고(롬3:28), 에베소서에는 더욱 분명하게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엡2:8-9).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 선행을 쌓아 하나님께 구원의 대가를 지불한다는 생각은 분명 복음과 맞지 않습니다. 구원의 근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주님입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대가가 아니다’라는 말과 ‘그러므로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는 구원에서 부차적이다’라는 말은 같은 것일까요? 바로 여기에서 매우 큰 비약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인간의 공로를 부정한 것을 인간의 삶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로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믿음’은 구원을 얻는 결정적인 조건이 되고, 실제 삶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가능하면 잘 살아야 하는 일종의 후속 과정처럼 밀려납니다.

 

그런데 에베소서의 말씀도 9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로 다음 절은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말합니다(엡2:10). 선한 행위 때문에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하시는 주님의 역사는 사람을 선한 삶으로 이끕니다. 다시 말해 선한 행위는 구원을 사는 가격이 아니지만, 구원이 사람 안에서 실제로 역사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삶의 열매입니다.

 

야고보서는 더욱 직접적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라고 하고(약2:17),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까지 말합니다(약2:26). 야고보가 바울과 반대되는 또 다른 구원론을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인간이 자기 행위를 공로로 삼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하는 것을 거부하고, 야고보는 삶과 분리된 지적 신앙을 살아 있는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합니다. 서로 다른 오류를 겨냥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행위’라는 말을 조금 조심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행위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헌금, 봉사, 구제, 전도, 새벽기도 같은 종교적 활동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면 ‘행위 구원’이라는 경계심이 곧바로 생깁니다. 그러나 성경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 근본적인 문제는 ‘내가 선행 몇 개를 했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사랑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입니다. 삶과 행위는 그 사람 안에 무엇이 사랑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를 밖으로 나타냅니다.

 

주님께서는 나무와 열매의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고 하셨고,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라고 하셨습니다(마7:16-17). 열매가 나무를 좋은 나무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좋은 나무라면 그 생명이 결국 열매로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선한 행위를 많이 쌓아서 그 양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실제로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언젠가는 삶의 열매로 나타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믿음과 체어리티(charity)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사람이 무엇이 선인지 볼 수 있도록 빛을 주고, 선은 그 진리를 실제 삶으로 옮깁니다. 믿음이 ‘무엇이 참인지 아는 것’에만 머물고 그 진리가 의지와 삶으로 내려가지 않는다면 아직 완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믿음은 체어리티를 향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과 체어리티는 서로 경쟁하는 두 가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한 영적 생명의 두 측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믿음은 선을 보는 눈이고, 체어리티는 그 선을 행하려는 마음이며, 행위는 그 마음이 실제 삶에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만 있고 걸어가지 않는다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눈 없이 무작정 걸어가는 것도 위험합니다. 진리 없는 선은 무엇이 참된 선인지 분별하기 어렵고, 선 없는 진리는 머릿속 지식으로 굳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의 결합은 거듭남(regeneration)의 핵심 질서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보면 삶이 결코 부차적인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마지막 심판을 묘사하는 마태복음 25장에서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신앙고백의 문장을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헐벗은 자, 병든 자, 갇힌 자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하십니다(마25:40). 그렇다고 이 말씀이 ‘선행 점수가 높은 사람이 천국에 간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행위들을 통하여 그 사람 안에 어떤 사랑이 있었는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주님께서는 교회들의 교리만을 평가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실제 상태와 삶을 보십니다. 이것은 행위가 믿음과 경쟁하는 별도의 구원 수단이기 때문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사랑과 믿음이 보이는 삶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행위는 내면과 무관하게 천국 입장권을 사는 공적이 아니라 내면의 사랑이 몸을 입은 모습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냐 행위냐’라는 질문 자체가 어느 정도 잘못 설정된 질문일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심장이 중요합니까, 혈액순환이 중요합니까’라고 묻는 것과 비슷합니다. 둘을 분리하면 생명이 유지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은 삶으로 향하고, 참된 선행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로부터 나옵니다. 성경이 경계하는 것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행위를 자기 공로로 소유하는 태도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인간은 선을 행하고 나면 ‘내가 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나는 이만큼 봉사했다’, ‘나는 이만큼 헌금했다’, ‘나는 평생 교회를 섬겼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착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주님 앞에 자신의 공로처럼 내놓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행위 구원의 깊은 위험입니다. 그러나 해결책은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선을 힘껏 행하되 그 선의 근원과 능력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원리가 여기에서 빛을 발합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선을 선택하고 행해야 하지만, 실제 선의 근원은 주님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rationality)을 없애지 않으면서 동시에 인간의 공로를 제거합니다. 나는 악을 죄로 알고 피해야 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해야 하며, 내가 해야 할 일을 실제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 선은 내 소유이며 이것 때문에 나는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의 반대말이 ‘행위로 구원받는다’일 필요는 없습니다. 더 깊은 대안은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살아 있는 믿음은 주님을 신뢰하면서 주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실제 삶으로 받아들입니다. 악을 죄로 알고 피하고, 용서해야 할 사람을 용서하려 애쓰고, 정직해야 할 때 정직을 선택하며, 자신의 책임을 감당하고, 이웃에게 필요한 선을 행합니다. 이 모든 것은 천국을 사기 위한 대가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서 열매 맺어 가는 과정입니다.

 

여기에서 ‘체어리티’가 중요합니다. 체어리티는 단순한 구제나 자선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이웃과 공동체를 향하여 실제적인 선과 유용한 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맡은 일을 정직하게 하는 것, 가족에게 책임을 다하는 것,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 때로는 상대에게 해로운 요구를 거절하는 것까지도 참된 선을 목적으로 한다면 체어리티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신앙은 바로 이런 삶 속에서 몸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일까요? 정반대입니다. 믿음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진리를 모르면 무엇이 선인지 제대로 분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목적은 단지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믿게 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진리는 우리의 삶을 밝혀 악을 보게 하고, 선을 알게 하며, 주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믿음은 삶을 위한 진리입니다.

 

이 때문에 ‘삶과 행위는 부차적’이라는 말은 생각보다 위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신앙고백은 구원의 본질이고 삶은 그다음 문제라고 생각하면, 신앙과 삶 사이에 커다란 틈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물론 성질도 못 고쳤고, 사람을 미워하고, 돈 앞에서 거짓말도 하지만 그것은 성화의 문제이지 구원과는 별개다.’ 이런 식의 사고가 가능해집니다. 그러면 믿음은 거듭남을 촉진하는 진리가 아니라 거듭나지 않아도 안심할 수 있게 해 주는 방패가 됩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한번 구원받으면 끝’이라는 생각과도 연결됩니다. 믿음을 삶에서 떼어 놓는 순간 구원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과거 어느 시점에 무엇을 믿었다고 고백했는가’의 문제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은 사람의 명칭만 바꾸는 일이 아니라 사람 자체를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지배되던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 변화는 완벽함을 뜻하지 않습니다. 거듭나는 사람도 넘어지고, 화를 내고, 잘못 판단하고, 죄를 짓습니다. 중요한 것은 ‘완벽하게 살았느냐’가 아니라 악을 발견했을 때 그것을 정당화하는가, 아니면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가 다시 싸우는가입니다. 한 번의 실패가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을 계속 사랑하고 정당화하면서 ‘그래도 나는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괜찮다’고 한다면 믿음이 오히려 프로프리움을 보호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과 행위를 이렇게 이해하면 바울과 야고보 사이의 긴장도 상당 부분 풀립니다. ‘내 선행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셔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바울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반대로 ‘나는 믿으니까 어떻게 살아도 구원에는 상관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야고보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하나는 인간의 공로를 무너뜨리고, 다른 하나는 삶 없는 신앙을 무너뜨립니다.

 

결국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믿음인가 행위인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믿고, 그 진리가 사랑이 되어, 사랑이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체어리티와 결합하고, 체어리티는 행위와 유용한 일(use, 쓰임새) 속에서 실제가 됩니다. 이것이 선과 진리의 결합이며 거듭남의 삶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부차적인 거고’라는 말에는 매우 중요한 진리와 매우 위험한 비약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인간의 행위가 구원의 공로가 아니다’라는 앞부분은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러므로 삶은 구원 문제에서 부차적이다’라고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삶은 믿음의 경쟁자가 아니라 믿음이 살아 있는지를 드러내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선한 행위를 대가로 구원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구원받지만, 주님에게서 받은 참된 믿음은 반드시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삶 속에서 선한 열매를 맺으려 합니다.’

 

그리고 이번 글의 핵심을 더 짧게 압축한다면 이것이겠습니다.

 

‘행위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은 우리의 삶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가장 ‘스베덴보리의 렌즈’다운 표현은 이것일 것입니다.

 

‘믿음과 삶 가운데 어느 것이 구원에 더 중요한지를 묻기보다, 삶으로 내려오지 않는 믿음을 과연 살아 있는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SL.22,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인데...’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인데...’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인데....’ 개신교 안에서는 상당히 민감하게 들리는 말입니다. 설교자가 ‘선을 행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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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20, ‘정통 교리를 믿으면 구원 받지만, 이단 교리를 믿으면 지옥 가’

‘정통 교리를 믿으면 구원 받지만, 이단 교리를 믿으면 지옥 가’ ‘정통 교리를 믿으면 구원받지만, 이단 교리를 믿으면 지옥 가.’ 개신교 안에서는 상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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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교리를 믿으면 구원 받지만, 이단 교리를 믿으면 지옥 가’

 

‘정통 교리를 믿으면 구원받지만, 이단 교리를 믿으면 지옥 가.’ 개신교 안에서는 상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생각입니다. 실제로 교리는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느냐에 따라 신앙의 방향이 달라지고, 인간과 죄와 구원과 이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삶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리는 아무래도 상관없고, 착하게만 살면 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거짓은 사람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으며, 진리는 사람이 선을 보고 그 선을 따라 살아가도록 밝혀 주는 빛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참된 교리는 구원에 중요하다’는 말과 ‘정통 교리를 가지고 있으면 구원받고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으면 지옥에 간다’는 말은 같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자는 진리의 중요성에 관한 말이지만, 후자는 자칫 구원을 일종의 ‘교리 시험’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죽은 뒤 주님 앞에서 신론, 기독론, 삼위일체론, 속죄론, 종말론에 관한 정답을 맞히면 천국에 들어가고, 몇 문제를 틀리면 지옥에 가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오히려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여기 등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주여 주여’라고 부르고,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으며,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까지 행했다고 말합니다. 적어도 외적으로는 상당히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의 종교적 자기 인식보다 그들의 삶을 문제 삼으십니다.

 

이 점에서 사울은 매우 충격적인 사례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스데반의 죽음에 찬성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 일에 찬성했습니다. 훗날 바울 자신도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고백합니다(행26:9). 그의 문제는 종교적 열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진리라고 확신한 것이 실제 진리와 어긋나 있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울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부르셨습니다(행9:4). 사울은 자신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너는 잘못된 교리를 믿었으므로 끝났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먼저 그의 눈을 멀게 하심으로써 자신이 보고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 실제로는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고, 이후 다시 보게 하셨습니다.

 

이 장면은 ‘정통과 이단’의 문제를 생각할 때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거짓을 진리라고 잘못 믿는 것과, 그것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자기 욕망을 지키기 위해 붙드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태어난 가정과 사회와 종교적 환경에서 많은 것을 물려받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어떤 교리를 진리라고 배웠다면 그것을 의심하지 않고 평생 믿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단지 그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명제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왜 그것을 믿었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빛 안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십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거짓을 가지고 있는 것’과 ‘거짓을 사랑하는 것’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잘못된 것을 진리라고 믿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더 밝은 진리가 주어졌을 때 ‘내가 잘못 알고 있었구나’ 하며 기꺼이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매우 정확한 교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지위와 명예, 욕망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왜곡할 수 있습니다. 전자의 머릿속에는 거짓이 있지만 마음은 진리를 향해 열려 있을 수 있고, 후자의 머릿속에는 정통 교리가 있지만 마음은 진리를 이용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왜냐하면 사후세계에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던 단순한 지식보다 그 지식을 무엇을 위해 사랑했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진리 자체와 선한 삶을 위해 사랑했던 사람은 잘못 알고 있던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는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더 밝은 진리가 주어지면 기뻐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자기 우월감과 지배욕, 그리고 명예를 위해 사용했던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정통 교리조차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애초에 그가 사랑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소유한 ‘나’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이 종교 안으로 들어옵니다. 세속적인 프로프리움은 ‘내가 잘났다’고 말하지만, 종교적인 프로프리움은 훨씬 미묘합니다. ‘내가 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옳으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이 이해한 것을 하나님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내 교리에 반대한다’가 어느 순간 ‘하나님께 반대한다’가 되고, ‘내가 저 사람을 이단이라고 판단한다’가 ‘하나님께서 저 사람을 버리셨다’로 바뀝니다. 인간의 판단과 주님의 판단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16:2).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사람을 죽이면서도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적 확신의 강도가 그 확신의 진실성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믿는다’와 ‘나는 진리를 믿는다’는 같은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단’이라는 구분 자체가 필요 없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리는 분별해야 합니다. 주님이 누구신지,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선과 악이 무엇인지에 관한 거짓된 가르침은 실제로 사람을 해칠 수 있습니다. 사람의 탐욕과 음란, 지배욕을 정당화하는 교리라면 더욱 경계해야 합니다. 진리와 거짓의 차이를 없애 버리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 역시 모든 가르침이 똑같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엇이 진리인지 더 깊이 분별하려는 작업입니다.

 

다만 ‘교리를 분별하는 것’과 ‘그 교리를 믿는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판결하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가르침은 성경과 맞지 않는다’, ‘이 부분은 거짓이라고 판단한다’, ‘이 가르침을 따라가면 이런 위험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곧바로 ‘그러므로 저 사람은 지옥 간다’고 넘어가면 우리는 교리의 분별에서 인간의 영원한 내면에 대한 심판으로 영역을 넘어간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를 대하는 태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전통적 개신교의 기준으로 스베덴보리를 ‘이단’이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들이 스베덴보리를 이단이라고 하니 오히려 그들이 진짜 이단이다’라고 되받아친다면 똑같은 구조 안에 들어가 버립니다. 중요한 것은 이름표를 뒤집어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살피고, 그것이 성경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검토하며, 그 가르침이 사람을 주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는지, 악을 죄로 알고 피하게 하는지, 이웃을 사랑하고 체어리티(charity)를 행하게 하는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정통’이라는 말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통 교리를 소유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진리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빛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 빛 가운데 걷는 것은 다릅니다. 손에 등불을 들고 있으면서 정반대 방향으로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더 큰 책임이 따릅니다. 무엇이 선인지 알면서 행하지 않고, 무엇이 악인지 알면서 의도적으로 행한다면 그 지식 자체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정통 교리를 가진 사람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나는 정통이므로 안전하다’는 생각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으므로 안전하다’, ‘한번 구원받았으므로 안전하다’, ‘나는 교회 안에 있으므로 안전하다’와 놀랍도록 비슷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어느 순간 자기 성찰을 멈추게 하는 신분증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이단이고 나는 정통이다’라는 구분이 ‘그러므로 저 사람보다 나는 주님께 가깝다’는 결론으로 넘어가는 순간, 진리는 자신을 비추는 빛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재단하는 도구가 됩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훨씬 깊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배울 기회를 가졌는지, 무엇을 진리라고 진실하게 믿었는지, 더 밝은 진리를 만났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려 했는지, 아니면 자기 사랑 때문에 거부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 삶에서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보십니다. 인간은 교리의 문장을 볼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 교리를 품고 있는 사람의 사랑을 보십니다.

 

그렇다고 사랑만 있으면 진리는 필요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선은 진리를 필요로 하고 진리는 선을 향해야 합니다. 사랑만 강조하면서 무엇이 선인지 분별하지 않으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악을 허용할 수도 있고, 진리만 강조하면서 사랑을 잃으면 진리를 가지고 사람을 정죄하고 상처 입힐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말하는 선과 진리의 결합은 바로 이 지점에서 중요합니다. 참된 신앙은 ‘정확하게 아는 것’과 ‘선하게 사는 것’을 서로 떼어 놓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정통 교리를 믿으면 구원받지만, 이단 교리를 믿으면 지옥 가’라는 말에는 중요한 진리와 위험한 비약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진리는 분명 구원에 중요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소유한 것이 곧 구원을 소유한 것은 아닙니다. 거짓 역시 위험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교리를 물려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인간이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진리와 선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궁극적으로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형성되어 가느냐입니다.

 

그래서 질문은 ‘나는 정통인가, 저 사람은 이단인가?’에서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진리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사랑하는가?’입니다. 이 둘은 겉으로 매우 비슷해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이 밝혀져도 진리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옳다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가 자기 생각을 무너뜨리면 진리와 싸우기 시작합니다. 사울이 다메섹 길에서 맞닥뜨린 것이 바로 이 경계였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진짜 이단’의 문제도 여기에서 다시 보아야 합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어떤 교단의 이단 목록에 내 이름이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보여 주시는데도 내 욕망과 체면, 지위를 지키기 위해 그것을 거부하고, 내가 원하는 악을 선이라 부르며, 거짓을 진리라고 고집하는 상태입니다. 교리적 오류보다 더 깊은 곳에는 사랑의 왜곡이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질문에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정통 교리는 구원의 귀중한 빛이지만 구원 그 자체는 아닙니다. 잘못된 교리는 사람을 어둡게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잘못 배웠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을 지옥에 있다고 판결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선과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었는지를 보십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정통 교리를 소유하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여 그 진리가 우리의 사랑과 삶을 변화시키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번 글의 핵심을 가장 날카롭게 압축한다면 이것이겠습니다.

 

‘주님 앞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 나는 정통인가가 아니라 나는 진리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사랑하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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