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9, 20)

 

AC.145

 

말씀에서도 또한 이름(name)은 어떤 것의 본질(essence)을 뜻하고,보고 이름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는 그 성질(quality) 아는 것을 뜻합니다. 이사야 다음 말씀처럼 말입니다. In the Word also by “name” is signified the essence of a thing, and by “seeing and calling by name” is signified to know the quality. As in Isaiah:

 

3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4내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자 이스라엘 곧 너를 위하여 네 이름을 불러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45:3, 4) I will give thee the treasures of darkness, and hidden riches of secret places, that thou mayest know that I, Jehovah, who call thee by thy name, am the God of Israel. For Jacob my servants sake, and Israel my chosen, I have even called thee by thy name, I have surnamed thee, and thou hast not known me (Isa. 45:3–4).

 

여기서 이름을 부르다(call by name)칭호를 주다(surname)는 그 성질을 미리 아는 걸 뜻합니다. 계속해서 In this passage, to “call by name” and to “surname” signifies to foreknow the quality. Again: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62:2) Thou shalt be called by a new name, which the mouth of Jehovah shall declare, (Isa. 62:2)

 

라고 하는데, 이는 앞뒤 문맥에서 보듯이 다른 성품(character)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signifying to become of another character, as appears from the preceding and subsequent verses. Again: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43:1) Fear not, O Israel, for I have redeemed thee, I have called thee by thy name; thou art mine, (Isa. 43:1)

 

라고 하시는 것도 그들의 성질(quality)을 아셨음을 뜻합니다. 같은 예언자에게서 계속해서 denoting that he knew their quality. Again in the same prophet: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40:26) Lift up your eyes on high, and behold who hath created these things, that bringeth out their army by number. He will call them all by name, (Isa. 40:26)

 

라고 하는데, 이는 그 모든 걸 아신다는 뜻입니다. 계시록에서는 meaning that he knew them all. In the Revelation:

 

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3:4, 5) Thou hast a few names even in Sardis who have not defiled their garments: he that overcometh, the same shall be clothed in white raiment, and I will not blot out his name out of the book of life, but I will confess his name before my Father, and before his angels (Rev. 3:45).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13:8) Whose names are not written in the lamb’s book of life (Rev. 13:8). 

 

라고 합니다. 이 모든 곳에서 이름들(names)은 결코 이름 자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성질(qualities)을 뜻하며, 천국에서는 누구의 이름도 알지 못하고, 오직 그의 성질(quality) 만이 알려질 뿐입니다. By “names” in these passages are by no means meant names, but qualities; nor is the name of anyone ever known in heaven, but his quality.



해설

 

이 단락은 AC.144에서 제시된 원리를 말씀 전체로 확장하여, ‘이름’이라는 개념이 성경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결정적으로 정리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이름을 언어적 표지로 이해하는 현대적 관점을 단호히 배제하고, 이름을 ‘존재의 질(quality)을 가리키는 표상’으로 고정합니다. 이름은 부르는 소리가 아니라, 그 존재가 어떤 성향과 상태에 있는지를 드러내는 총체적 표현입니다.

 

이사야서의 여러 인용은 이 원리를 다양한 각도에서 확인해 줍니다. ‘이름을 부른다’, ‘별명을 준다’는 표현은 선택이나 호명의 문제가 아니라, ‘성질을 미리 알고, 섭리 안에 두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새 이름’은 새로운 호칭이 아니라, ‘새로운 성품과 상태’를 의미합니다. 구속과 선택의 언어가 이름의 언어로 표현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40의 ‘별들을 이름으로 부르신다’는 표현은 특히 중요합니다. 이는 개체 식별이 아니라, ‘각각의 질(quality)과 기능을 완전히 아신다’는 뜻입니다. 창조주가 이름을 부르신다는 말은, 그 존재가 질서 안에서 어떤 역할과 상태에 있는지를 완전히 인식하고 계신다는 선언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표현도 같은 맥락입니다.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라 ‘삶의 질(quality)’입니다.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말과 흰옷을 입는다는 말이 곧바로 이어지는 이유는, 이름이 도덕적, 영적 상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지워진다는 말 역시 기억의 삭제가 아니라, ‘그 질(quality)이 생명의 질서에 속하지 않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 단락의 결론은 매우 단호합니다. 하늘에서는 누구의 이름도 알지 못하고, 오직 그의 성질만이 알려진다는 말입니다. 이는 천국이 익명적 사회라는 뜻이 아니라, ‘관계와 인식의 기준이 전적으로 질(quality)에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하늘에서는 부르는 이름보다, 다가올 때 느껴지는 애정과 상태가 그 존재를 규정합니다.

 

AC.145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표지가 아니라 본질이며,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존재의 질(quality)을 알아보고 그에 따라 관계 맺는 것을 뜻하고, 하늘의 언어는 언제나 ‘누구인가’가 아니라 ‘어떤가’를 묻는 언어라고 말입니다.

 

 

심화

 

1. ‘사45:3-4’

 

3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4내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자 이스라엘 곧 너를 위하여 네 이름을 불러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45:3, 4) I will give thee the treasures of darkness, and hidden riches of secret places, that thou mayest know that I, Jehovah, who call thee by thy name, am the God of Israel. For Jacob my servants sake, and Israel my chosen, I have even called thee by thy name, I have surnamed thee, and thou hast not known me (Isa. 45:3–4).

 

 

이 구절이 AC.145에 인용된 이유는, ‘이름으로 부른다’(call by name)는 표현이 단순히 어떤 호칭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의 본질과 상태 전체를 알고, 인정하고, 목적 가운데 두는 것을 뜻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144에서 이미 스베덴보리는 ‘이름’이 본질(essence)을, ‘이름으로 부름’이 성질(quality)을 아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했는데, AC.145에서는 이사야 말씀을 통해 그 원리를 말씀 자체로 확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주님께서 고레스를 향해 ‘네 이름을 불렀다’고 하시면서도 동시에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신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이름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상대가 주님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 존재의 상태와 역할과 용도를 완전히 알고 계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즉, 고레스는 자기 스스로는 여호와를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주님은 그를 알고 계셨고, 섭리 안에서 그를 특정 목적을 위해 사용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네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단순 호명 행위가 아니라,

‘나는 네 본성과 상태와 역할을 알고 있으며, 너를 섭리 가운데 두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이 AC.145의 핵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이름(name)이 단순 언어적 표지가 아니라, 존재 전체의 상태와 의미를 담는 것임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름으로 부르신다는 것은, 단순히 ‘고레스야!’ 하고 소리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의 quality와 use를 완전히 아시고 인정하신다는 뜻입니다.

 

또 여기 ‘칭호를 주었다’(I have surnamed thee)는 표현도 같은 흐름입니다. 성경에서 이름과 칭호는 존재의 상태와 역할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새로운 이름이나 칭호를 받는다는 것은, 새로운 상태나 사명을 부여받는 것과 연결됩니다.

 

이 구절이 AC.145에 인용된 이유를 더 깊이 보면, 결국 이것은 ‘이름’에 대한 고대적, 영적 이해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입니다. 현대인은 이름을 외적 식별표로 여기지만, 말씀에서는 이름이 존재의 essence와 quality를 담습니다. 그러므로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은 그 존재를 표면적으로 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존재의 본성과 상태를 알고, 섭리 가운데 목적 있게 두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AC.145에서 이사야 45장은 매우 적절한 예가 됩니다. 고레스는 주님을 알지 못했지만, 주님은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곧, 인간이 주님을 모르고 있어도, 주님은 인간의 상태와 역할을 완전히 아시며 섭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말씀에서 ‘이름’은 단순 호칭이 아니라 영적 본질을 담는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2. ‘사62:2’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62:2) Thou shalt be called by a new name, which the mouth of Jehovah shall declare, (Isa. 62:2)

 

 

이 구절이 AC.145에 인용된 이유는, 말씀에서 ‘새 이름’(new name)을 받는다는 것이 단순한 개명(改名)이 아니라, 존재의 상태와 본질이 새롭게 되는 것을 뜻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144-145의 전체 흐름은 계속해서 ‘이름’이 단순 호칭이 아니라 essence와 quality를 담는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데, 사62:2는 그 점을 아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대표 구절입니다.

 

여기서 이사야서는 시온과 예루살렘의 회복, 곧 교회의 새로운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다른 명칭을 붙인다는 뜻이 아니라, 그 존재의 영적 상태 자체가 새로워진다는 뜻입니다.

 

만약 이름이 단순 표지라면, 새 이름을 받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에서는 이름이 그 존재의 본성과 상태를 담기 때문에, ‘새 이름’은 곧 ‘새 상태’, ‘새 본성’, ‘새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서 반복되는 원리입니다. 예를 들어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사래가 사라로,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것은 단순 호칭 변경이 아니라, 그들의 영적 상태와 사명이 변화되었음을 뜻합니다.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의 ‘새 이름’도 새 존재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AC.145에서 사62:2가 인용되는 이유는, 고대인들과 말씀의 언어에서 이름(name)이 곧 존재의 essence와 quality를 담는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새 이름’이란, 그 존재 안에 새로운 영적 상태와 생명이 형성되었다는 뜻입니다.

 

특히 여기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이름이 인간의 임의적 선택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온다는 뜻입니다. 곧, 새로운 상태와 본질은 인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로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AC의 흐름 안에서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이름을 부른다’, ‘이름을 안다’, ‘이름을 준다’는 표현들이 모두 단순 언어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상태와 본질을 인식하고 규정하는 영적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 이름’은 단순히 새 호칭이 아니라, 새 quality와 새 essence의 표지입니다.

 

정리하면, 사62:2가 AC.145에 인용된 이유는, 말씀에서 이름(name)은 존재의 본질과 상태를 뜻하며, 따라서 ‘새 이름’이란 곧 인간이나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영적 상태와 생명을 부여받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3. ‘사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43:1) Fear not, O Israel, for I have redeemed thee, I have called thee by thy name; thou art mine, (Isa. 43:1)

 

 

이 구절이 AC.145에 인용된 이유는, ‘이름으로 부른다’(call by name)는 표현이 단순히 어떤 사람을 식별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존재를 깊이 알고, 인정하고,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그 의미를 가장 따뜻하고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대표적인 예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사야서 43:1에서 주님은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핵심은 마지막 말입니다. ‘너는 내 것이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앞의 ‘이름으로 불렀다’는 표현이 바로 이 선언과 연결됩니다. 곧,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은 단순 호명 행위가 아니라, 그 존재를 자기와 관계된 존재로 알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AC.145의 흐름 안에서는, ‘이름’이 곧 존재의 essence와 quality를 담는다는 점이 다시 확인됩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름으로 부르신다는 것은, 단순히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아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상태와 본성과 가능성과 역할 전체를 아시며, 그들을 섭리 안에 두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또 여기 ‘구속하였다’와 ‘이름으로 불렀다’가 함께 나오는 것도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구속은 단순 법적 선언이 아니라, 다시 자기에게로 돌려놓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은 단순 식별이 아니라, ‘나는 너를 안다’, ‘나는 너를 잊지 않았다’, ‘너는 나와 관계된 존재다’라는 의미를 담습니다.

 

이 점에서 AC.145는 이름(name)에 대한 아주 깊은 성경적 이해를 보여 줍니다. 이름은 단순한 외적 호칭이 아니라, 존재의 영적 실체를 담습니다. 따라서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은 그 존재의 내적 상태를 알고 인정하는 행위가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너는 내 것이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적으로 보면 아주 중요한 영적 의미를 가집니다. 이것은 소유욕 같은 뜻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 관계를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속할 때 proprium 안에 갇히지만, 주님께 속할 때 비로소 참 생명 안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내 것이라’는 말은 억압적 선언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과 보호와 사랑의 관계 선언입니다.

 

이 구절이 AC.145에 인용된 이유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말씀에서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은 단순히 이름을 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존재의 본질과 상태를 깊이 알고,

그를 사랑과 섭리 안에서 자기와 관계된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4. ‘사40: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40:26) Lift up your eyes on high, and behold who hath created these things, that bringeth out their army by number. He will call them all by name, (Isa. 40:26)

 

 

이 구절이 AC.145에 인용된 이유는, 주님께서 ‘모든 이름을 부르신다’는 표현이 단순히 우주의 존재들을 목록처럼 알고 계신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상태와 질서와 본질을 완전히 알고 다스리신다는 뜻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서 40:26은 문자적으로는 하늘의 별들과 만상을 말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도 상응적으로 읽습니다. 말씀에서 ‘하늘의 군대’(army of heaven), 별들, 빛들은 단순 천체가 아니라 진리들과 지식들, 그리고 천사적 질서들을 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 모든 상태와 질서를 완전히 알고 계시며, 하나하나를 제 자리에 두신다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표현은 ‘수효대로’와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입니다. 이것은 단순 계산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수(number)는 질서와 상태를 뜻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만상을 수효대로 이끌어 내신다는 것은, 모든 것을 완전한 질서와 조화 안에 두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이름을 부르신다는 것은, 그 질서 안의 각각의 본성과 quality를 완전히 아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AC.145의 흐름 속에서는 이 구절이 아주 적절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스베덴보리는 계속해서, 말씀에서 ‘이름’은 단순 호칭이 아니라 존재의 essence와 quality를 담는다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이름을 부르신다는 것은, 단순히 명칭을 기억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각 존재를 그 본질과 상태 안에서 완전히 아신다는 뜻이 됩니다.

 

또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섭리 개념도 들어 있습니다. ‘하나도 빠짐이 없다’는 것은, 주님의 시야 밖에 있는 존재가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단지 전체만 아시는 분이 아니라, 가장 작은 개별까지도 그 이름, 곧 본질과 상태를 아십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 하면, 주님은 보편(universal) 안에서만이 아니라 가장 개별적인 것(particulars and singulars)까지 아십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AC.145에서, ‘이름을 부른다’는 말이 단순 언어 행위가 아니라, 존재를 그 본질과 질서 안에서 완전히 알고 섭리하는 것을 뜻한다는 증거로 인용된 것입니다.

 

정리하면, 사40:26이 AC.145에 인용된 이유는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모든 이름을 부르신다’는 것은,

모든 존재의 essence와 quality와 상태를 완전히 알고 계시며,

그 모든 것을 질서 가운데 보존하고 다스리신다는 뜻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5. ‘계3:4-5’

 

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3:4, 5) Thou hast a few names even in Sardis who have not defiled their garments: he that overcometh, the same shall be clothed in white raiment, and I will not blot out his name out of the book of life, but I will confess his name before my Father, and before his angels (Rev. 3:4–5).

 

 

이 구절이 AC.145에 인용된 이유는, ‘이름’(name)이 단순한 개인 식별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영적 상태와 본질 전체를 뜻한다는 점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기서는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 ‘그 이름을 지우지 않는다’, ‘그 이름을 시인한다’는 표현들이 모두 나오는데, 이것들은 전부 이름이 곧 존재의 영적 quality와 essence를 뜻한다는 전제 위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먼저 요한계시록 3:4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다’는 표현부터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옷’은 진리와 신앙의 외적 상태를 뜻합니다. 따라서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은, 삶과 신앙의 상태가 거짓과 악으로 심하게 왜곡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가리켜 ‘몇 명의 이름들’(a few names)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이미 ‘이름’이 단순 호칭이 아니라, 어떤 영적 상태를 가진 사람들을 뜻하는 표현으로 쓰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겠다’는 말씀은 더욱 중요합니다. 만약 이름이 단순 문자 기록이라면, 이것은 단순 명단 관리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서 ‘생명책’은 주님 앞에 있는 인간의 내적 상태와 생명의 기록입니다. 따라서 이름이 거기에 기록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영적 상태와 본질이 천국 질서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이름이 지워진다는 것은, 단순히 등록 말소가 아니라, 그 상태가 더 이상 천국 질서와 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또 ‘그 이름을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겠다’는 표현도 같은 맥락입니다. 주님께서 이름을 시인하신다는 것은, 그 존재의 상태를 인정하시고, 그것이 주님의 질서와 일치함을 드러내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도 이름은 단순 호칭이 아니라, 존재 전체의 영적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AC.145의 흐름 안에서 이 구절은 매우 결정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계속해서, 말씀에서 ‘이름’은 essence와 quality를 담는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3:4–5는 이름이 단순 명칭이 아니라는 점을 거의 노골적으로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고, 지워지고, 시인되는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름이 곧 그 존재의 영적 상태를 대표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아주 위로가 되는 의미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름을 아신다는 것은, 단순히 ‘누구인지 안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인간 안에 남아 있는 작은 선과 진리의 상태까지도 다 아시고 기억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데 교회 전체는 문제가 많았지만, 그 안에도 ‘옷을 더럽히지 않은 몇 이름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놓치지 않으십니다.

 

정리하면, 계3:4–5가 AC.145에 인용된 이유는, 말씀에서 이름(name)은 단순 호칭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상태와 본질을 뜻하며, 따라서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고 주님께 시인된다는 것은, 그 존재 전체가 천국 질서 안에서 인정되고 기억된다는 뜻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6. ‘계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13:8) Whose names are not written in the lamb’s book of life (Rev. 13:8).

 

 

이 구절이 AC.145에 인용된 이유는, 앞의 요한계시록 3:4–5와 마찬가지로, ‘이름’(name)이 단순한 문자상의 명단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상태와 본질을 뜻한다는 점을 다시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여기서는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표현을 통해, 이름이 곧 천국적 생명과의 결합 여부를 나타낸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만약 이름이 단순 호칭이라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말은 단순 등록 여부 정도의 뜻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서 ‘생명책’은 주님 앞에 있는 인간의 생명 상태 전체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그 사람 안에 어떤 사랑과 신앙과 삶의 질서가 형성되어 있는지가 기록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단순히 주님이 그 사람을 모르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상태가 천국적 생명과 결합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곧, 그 존재의 essence와 quality가 어린 양, 즉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질서와 일치하지 않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린 양의 생명책’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어린 양(Lamb)은 주님의 신적 인성, 특히 순결한 사랑과 구속의 측면을 뜻합니다. 따라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종교 명부에 오른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생명 안에 그 존재의 상태가 결합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짐승에게 경배한다’고 하는 것도 같은 구조입니다. 말씀에서 짐승(beast)은 문맥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지만, 여기서는 자기 사랑과 왜곡된 신앙 체계에 속한 상태를 뜻합니다. 따라서 생명책에 이름이 없다는 것은, 결국 그 존재가 주님의 질서보다 자기 중심 질서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AC.145의 문맥 안에서는, 이 구절이 이름(name)의 영적 의미를 매우 강하게 드러내는 예가 됩니다. 이름은 단순 호칭이 아니라 존재의 영적 상태 전체를 뜻하기 때문에,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다는 것은 그 존재가 천국 질서 안에 있다는 뜻이고, 기록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상태가 그 질서와 결합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단순 예정론처럼 읽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어떤 자들이 미리 버림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현재 그들의 사랑과 신앙의 상태가 어떤 방향에 놓여 있는가를 뜻합니다. 생명책은 단순 외적 명단이 아니라, 존재의 실제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계13:8이 AC.145에 인용된 이유는, 말씀에서 이름(name)은 인간의 essence와 quality를 뜻하며, 따라서 이름이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 존재가 주님의 생명 질서 안에 결합되어 있음을,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상태가 그 질서와 일치하지 않음을 뜻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7.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라’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라 ‘삶의 질(quality)’입니다.

 

위 문장은 위 해설에 나오는 문장인데, 여기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라’는, 이게 무슨 말인가요?

 

 

여기서 ‘소리’는 문자 그대로의 이름 발음, 곧 외적인 호칭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라 삶의 질(quality)이다’라는 말은,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은 단순히 “김○○”, “이○○” 같은 언어적 이름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실제 삶의 상태와 사랑의 방향이라는 뜻입니다.

 

이 표현은 AC.145 전체의 핵심을 아주 압축적으로 요약한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계속해서, 말씀에서 ‘이름’(name)은 단순한 발음이나 문자 조합이 아니라, 존재의 essence와 quality를 뜻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다’는 것도, 문자 몇 자가 천국 장부에 적힌다는 뜻이 아니라, 그 존재의 영적 상태가 주님 앞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천국에서 주님이 인간을 아신다는 것은,

그 사람 주민등록 이름을 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어떤 진리 안에서 살며,

삶 전체가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를 아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이름의 발음 자체는 본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지상에서는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수천 명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각 존재의 quality가 전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천국에서는 각 천사가 자기 사랑과 신앙의 상태에 따라 일종의 ‘영적 이름’을 가집니다. 즉, 존재 상태 자체가 그 이름입니다.

 

그래서 ‘소리’는 외적 표지이고,

‘quality’는 실제 존재 상태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된다는 것은,

‘어떤 이름 발음이 적혀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존재의 사랑과 신앙과 삶의 방향 전체가

천국 질서 안에 새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실 오늘날에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 이름을 들을 때, 단순 발음만 떠오르지 않고,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의 분위기와 기억 전체가 함께 떠오르지요.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훨씬 더 깊고 영적인 차원으로 가져갑니다. 천국에서는 이름이 곧 상태(state)와 quality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라 삶의 질이다’라는 문장은,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은 단순 호적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실제로 형성된 사랑과 진리의 상태라는 뜻입니다.

 

 

 

AC.144, 창2:19-20, 고대인들에게 있어 '이름을 짓는다'는 것의 의미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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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자녀의 이름에 포함시키는 것들

 

그들이 아들과 딸들에게 이름을 지을 때, 의미되는 것들에 따라 이름을 붙였기 때문인데, 모든 이름에는 그 자녀의 기원(origin)과 본성(nature)을 알 수 있게 하는 어떤 고유한 것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 저작의 뒤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 야곱의 열두 아들을 다루게 될 때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름들 속에 그렇게 부르게 된 것들의 근원과 성질이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름으로 부르기(calling by name)라는 말은 이것 말고 다른 어떤 것으로도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윗글에서 한 가지... 아직 신생아에 불과한 이 아이가 나중에 어떤 quality의 인간이 될 줄 알고 저런 모든 걸 다 담은 이름을 지을 수 있나요?

 

 

바로 그 지점 때문에 현대인은 AC.144를 읽을 때 가장 낯설어합니다. 우리는 이름을 거의 부모 취향’이나 발음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어떻게 갓난아이 이름에 그 사람의 origin nature, 심지어 이후 상태까지 담을 수 있느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단순한 작명 기술이 아니라, 고대 특히 태고, 고대교회의 상응적 사고방식’입니다.

 

핵심은, 고대인들이 미래를 점쟁이처럼 다 예측했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과 사건을 섭리와 상태의 흐름 속에서 보았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성경에 기록된 이름들은 단순 역사 기록용 이름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영적 상태를 표상하도록 섭리 가운데 주어진 이름들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성경의 이름들을 거의 언제나 상징적, 표상적 이름으로 읽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서 아담’은 단순 개인 이름이라기보다 인간(humanity)의 상태를, ‘가인’은 신앙의 분리된 상태를, ‘노아’는 새로운 교회 상태를 나타냅니다. 또 야곱의 열두 아들의 이름들도 단순 가족 족보가 아니라, 교회와 인간 안의 다양한 영적 상태들을 순서대로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이름은 단순 호적 이름이 아니라, ‘그 존재가 섭리 안에서 어떤 상태를 표상하는가’를 드러내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AC.144의 문맥에서 이름 속에 origin nature가 들어 있다’는 것은, 부모가 인간적으로 아이의 미래를 완벽히 예언했다는 뜻이라기보다, 말씀 안에서는 이름 자체가 그 존재의 영적 의미와 역할을 표상하도록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물론 실제 역사 속에서도 고대인들은 이름을 매우 의미 중심으로 지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상황에서 태어났는지, 부모가 어떤 체험을 했는지, 어떤 소망과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단순 기호가 아니라, 그 존재에 대한 해석과 기대를 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성경 안에서는 이것이 단순 문화 차원을 넘어, 섭리적 상응 구조 속에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면,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nature는 완전히 무(無)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어떤 사랑의 방향성과 성향 속에 태어나고, 섭리는 그것까지도 포함해 역사합니다. 그래서 이름은 단순히 나중 결과를 예언한다’기보다, ‘그 존재 안에 있는 방향성과 역할’을 표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현대인은 이름을 사람에게 붙이는 임의적 표지’로 보지만, 고대교회적 사고에서는 이름이 그 존재의 영적 상태와 역할을 드러내는 표현’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AC.144 고대인들이 초능력으로 미래를 다 알았다’는 말이 아니라, 이름 자체를 존재의 본질과 상태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는 상응적 세계관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성경 안에서는, 주님의 섭리 가운데 이름들이 그런 의미를 담도록 기록되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AC.144, 창2:19-20, 고대인들에게 있어 '이름을 짓는다'는 것의 의미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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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4, 심화 3, ‘이름’(name),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

AC.144.심화 3. ‘이름’(name),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 고대인들이 ‘이름’(name)으로는 어떤 것의 본질(essence)을 이해하였고,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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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름(name),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

 

고대인들이 이름(name)으로는 어떤 것의 본질(essence)을 이해하였고,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로는 그 성질 아는 걸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윗글은 뭐가 다른 거죠? 전자는 이해를 했고’, 후자는 이해하는 행위를 이해했다는 건가요? 이게 뭐죠?

 

 

네, 목사님께서 정확히 걸리신 부분입니다. 여기 문장은 얼핏 보면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름 자체와 이름을 부르는 행위’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반부와 후반부의 초점이 다릅니다.

 

먼저, ‘고대인들이 이름(name)으로는 어떤 것의 본질(essence)을 이해하였다’는 말은, ‘이름’이라는 것 자체를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설명합니다. 즉, 고대인들에게 이름은 단순 호칭이 아니라, 그 존재의 essence, 곧 가장 중심적 실체와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름 자체가 곧 존재의 핵심 의미를 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반면,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로는 그 성질(quality)을 아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말은, ‘이름을 부르는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여기서는 이름이라는 정적인 개념보다, ‘어떤 존재를 보고, 그 이름을 부른다’는 동작 전체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호칭을 발음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존재의 상태와 성질을 분별하고 인식하는 것을 뜻합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이름 자체는 그 존재의 본질(essence)을 담고 있고, ‘이름을 부른다’는 행위는 그 존재의 성질(quality)을 알아보고 분별하는 작용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더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자체는 어떤 영적 본질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이스라엘’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서 그런 성질과 상태를 알아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전자는 존재론적 의미에 더 가깝고, 후자는 인식 작용에 더 가깝습니다.

 

목사님 표현대로 아주 단순화하면, 전자는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말하고, 후자는 이름을 부르는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말한다고 보셔도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왜 essence quality가 갈라지는지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essence는 존재의 중심 핵심이고, quality는 그것이 실제 상태로 드러난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름 자체는 essence를 담지만, ‘보고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essence가 어떤 quality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인식하는 행위가 됩니다.

 

결국 AC.144의 구조는 이렇게 됩니다.

 

고대인들에게 이름(name)은 존재의 essence를 담는 것이었고, 그 이름을 보고 부르는 행위는 그 존재의 quality를 분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단순 반복이 아니라, ‘이름의 의미’와 이름 짓기의 행위’를 구분해서 설명하는 문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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