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8.심화

 

3. ‘51:9-11

 

9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10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11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51:9-11) Awake as in the ancient days, in the generations of old. Art not thou it that drieth up the sea, the waters of the great deep, that maketh the depths of the sea a way for the ransomed to pass over? Therefore the redeemed of Jehovah shall return (Isa. 51:9–11).

 

 

이 이사야 51장 구절이 AC.18에 인용된 이유는, 창세기 1 2절의 깊음(deep),  깊음 위의 흑암’이 단순한 바다나 물리적 심연이 아니라, 거듭나기 이전 인간 안에 있는 욕망과 거짓의 혼돈 상태’를 뜻한다는 사실을 성경 자체로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특별히 바다’, ‘깊은 물’, ‘’, 그리고 구속받은 자들이 건너가는 길’이라는 이미지들을 통해, 창조와 구원이 동일한 영적 구조 안에 있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먼저 이 본문은 단순히 출애굽 사건을 회상하는 시가 아닙니다. 문자적으로는 홍해를 가르시고, 백성을 건너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속뜻에서 이것을 거듭남 이전의 혼돈 상태로부터 인간을 건져 내시는 주님의 역사’로 읽습니다. 그래서 바다’와 깊은 물’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깊은 혼란과 시험의 상태를 뜻합니다.

 

특히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dragon)이나 바다 괴물’은 흔히 자기 사랑과 거짓, 그리고 그것에서 나오는 교만한 추론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 안에서 주님의 질서를 거스르는 가장 깊고 원초적인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것은 AC.18에서 말한 깊음’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창세기 1 2절의 깊음’은 아직 질서 잡히지 않은 인간의 욕망과 거짓의 심연이며, 이사야는 그것을 바다의 깊은 물’과 ’이라는 상징으로 다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바다를 말리시고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셨다’는 표현도 결정적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적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 안의 혼돈과 시험 가운데 ’을 내신다는 뜻입니다. 즉, 거듭남은 혼돈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깊음 한가운데서 주님께서 길을 여심으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AC.18에서 스베덴보리는 깊음’이 단지 부정적 상태만이 아니라, 동시에 주님의 영이 움직이시기 시작하는 자리라는 점을 말하려 했습니다.

 

이어지는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 시온으로 돌아온다’는 말은, 거듭남의 결과를 뜻합니다. ‘시온’은 주님과의 사랑의 상태, 곧 회복된 교회와 회복된 인간 내면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깊은 물을 건넌다는 것은 단순히 위험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혼돈 상태에서 질서와 평안의 상태로 이동하는 영적 여정을 뜻합니다.

 

결국 이 본문이 AC.18에 인용된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깊음’을 설명하면서, 그것이 단순한 우주론적 바다가 아니라 인간 안의 영적 혼돈 상태이며, 주님은 바로 그 깊음 속에서 길을 내시고 사람을 구속하여 새 창조로 이끄신다는 사실을 이사야 51장을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와 출애굽과 거듭남은 모두 같은 구조를 갖습니다.  혼돈의 깊음  주님의 역사  길의 열림  구속받은 자의 귀환’이라는 구조입니다.

 

 

 

AC.18, 창1:2, '깊음의 황폐 : 욕정과 거짓이 말라야 새 생명이 열린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 ‘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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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 심화 2, 라틴어 ‘vastatio’의 영역 ‘vastation’과 ‘desolation’(혹은 ‘devastation’)의 비교

AC.18.심화 2. 라틴어 ‘vastatio’의 영역 ‘vastation’과 ‘desolation’(혹은 ‘devastation’)의 비교 AC 포츠역 영어 ‘vastation’은 현대 사전엔 잘 안 나오고, 대신 ‘desolation’이 나오네요. ‘vas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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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심화

 

2. ‘4:22-23

 

22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4:22, 23) My people is stupid, they have not known me; they are foolish sons, and are not intelligent; they are wise to do evil, but to do good they have no knowledge. I beheld the earth, and lo a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Jer. 4:22–23).

 

 

AC.17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예레미야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창세기 1 2절의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는 상태가 단순한 물질 우주의 초기 상태가 아니라, ‘거듭나기 이전 인간의 영적 상태’를 뜻한다는 점을 성경 자체로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예레미야 4장의 이 구절은 창세기 1장의 언어가 실제로는 인간 내면의 황폐 상태를 묘사하는 상응의 언어임을 보여 주는 결정적 병행 본문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예레미야 본문을 보면 먼저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단순한 지식 부족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인식과 신앙의 상실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이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다’입니다. 이것은 이해력은 남아 있지만, 그 이해력이 선을 향하지 않고 악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지혜가 거꾸로 된 상태입니다.

 

그다음에 바로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었다’는 표현이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은 실제 지구가 아니고, ‘하늘’도 실제 우주 하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 안의 상태를 말합니다. ‘’은 겉 사람, 혹은 교회의 수용 상태를 뜻하고, ‘하늘’은 속 사람, 곧 진리와 선이 있어야 할 내적 영역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하늘에 빛이 없다’고 합니다. 즉, 진리가 사라졌고, 주님의 빛이 비치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혼돈하고 공허하다’는 표현은 바로 창세기 1 2절의 표현과 동일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통해 창세기의 창조 언어가 이미 선지서에서 영적 황폐 상태’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의 혼돈과 공허’는 물질 우주의 미완성 상태가 아니라, 아직 주님의 질서와 빛이 들어오기 전 인간 내면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특히 중요한 점은, 예레미야 본문에서는 그 상태가 죄와 무지와 신앙 상실’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빛 없음’은 물리적 어둠이 아니라 영적 어둠이며, ‘혼돈과 공허’는 주님에게서 분리된 인간의 내적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AC.17에서 이 구절은,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가 사실은 거듭남 이전 인간 상태’에서 주님의 빛이 들어오는 과정’을 묘사하는 것임을 입증하는 증거 본문으로 인용된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는 예레미야 4장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보라, 창세기의 언어는 이미 선지자들 안에서 인간의 영적 상태를 설명하는 언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창조 역시 인간 내면의 새 창조, 곧 거듭남을 말하는 것이다.’

 

 

 

AC.17, 창1:2, '혼돈과 공허, 흑암의 상태 : 거듭남 이전 인간의 실상'(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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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 심화 1,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

AC.17.심화 1.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 AC.17에 ‘혼돈’과 ‘공허’, 그리고 ‘흑암’이 나오는데요, 제 경우를 보더라도 저는 심지어 모태신앙임에도 불구, 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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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AC.67-181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hwpx 소개

 

 

2, AC.67-181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hwpx’는 단순히 창세기 2장에 대한 주석이나 해설서가 아닙니다. 이 책은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구조, 곧 인간이 어떻게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며, 어떻게 ‘천적 상태’에서 ‘자기 자신 중심의 상태’, 곧 ‘자신의 own(proprium) 상태’로 기울어지는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전환점에 대한 기록입니다. 창세기 1장이 인간 거듭남의 전체적인 큰 흐름과 질서를 보여주는 장이라면, 창세기 2장은 그 거듭남이 실제로 어떤 내적 상태 안에서 이루어지는지를 훨씬 더 친밀하고 섬세하게 보여주는 장입니다. 그리고 AC.67-181은 바로 그 섬세한 내적 세계를 스베덴보리 특유의 깊이로 해설하는 부분입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독자는 곧 깨닫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은 단순히 교리를 외우거나 종교적 소속을 갖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의 관심은 언제나 인간의 ‘상태(state)에 있습니다. 인간이 어떤 상태 안에 있으며, 무엇을 사랑하고, 어디로부터 생각하며, 무엇 안에서 평안을 느끼는가가 핵심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한 성경 지식 전달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에서 독자를 자기 자신 안으로 데려갑니다. 우리는 창세기 2장을 읽으며 단순히 에덴동산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인간 영혼 안에 존재하는 가장 깊은 구조를 들여다보게 됩니다.

 

특별히 이 책은 ‘태고교회’에 대한 이해를 매우 중요하게 다룹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 사람들은 오늘날 인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influx를 거의 직접적으로 느끼며 살았고, 선과 진리가 자기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perception으로 알았습니다. 오늘날 인간처럼 끊임없이 논증하고 의심하며 자기 판단으로 신앙을 유지하려 한 것이 아니라,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 품 안에서 자연스럽게 쉬듯 주님의 생명 안에 거하는 상태였습니다. 이 책은 바로 그 ‘천적 인간’의 상태가 무엇인지를 반복적으로 보여줍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가장 낯설면서도 동시에 가장 깊은 울림을 주는 부분도 여기에 있습니다. 현대인은 거의 모두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각하는 삶’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고, 계산하고, 자기 의견을 세우며, 자기 확신을 강화하는 것을 성숙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인간의 가장 깊은 평안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질서 안에 머무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은 단순한 낙원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본래 어떤 상태로 창조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영적 기억과도 같습니다.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단순한 육체적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인간 안에는 주님을 향해 열릴 수 있는 속 사람이 있고, 세상과 연결되는 겉 사람이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지만, 인간이 자기 own으로 기울어질수록 이 질서는 점점 무너지게 됩니다. 따라서 창세기 2장의 에덴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아직 분열되지 않은 상태, 다시 말해 인간 전체가 주님의 질서 안에 놓여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특히 AC.67-181에서는 ‘에덴동산’, ‘강들’, ‘나무들’, ‘선악과’, ‘경작하며 지키게 함’, ‘생명나무’ 같은 표현들이 단순한 역사적 묘사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상태를 나타내는 상응임이 자세히 설명됩니다. 이 책은 독자에게 성경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읽도록 초대합니다. 문자 자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흐르는 영적 의미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자는 어느 순간 창세기 2장을 읽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자기 자신의 영적 상태를 읽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예를 들어, ‘동산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는 말씀은 단순한 농업 명령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안에 주어진 선과 진리를 보살피고 보호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영적 삶을 매우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설명합니다. 사랑과 신앙은 방치하면 살아남지 못합니다. 잡초가 자라듯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침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경작함’은 선을 돌보는 것이고, ‘지킴’은 거짓과 악으로부터 마음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런 설명은 성경을 단순한 종교 문헌이 아니라 인간 영혼의 지도처럼 느끼게 합니다.

 

또 하나 매우 중요한 주제는 ‘선악과’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흔히 선악과를 단순한 순종 시험 정도로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훨씬 더 깊게 봅니다. 선악과는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는 상태’를 떠나, 자기 자신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려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자기 own으로부터 살고자 하는 움직임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도덕적 불순종을 넘어 인간 존재 방향 자체의 변화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의 타락은 갑자기 시작되는 사건이 아니라, 이미 창세기 2장에서부터 조용히 가능성으로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은 그 미세한 긴장과 전환의 분위기를 매우 깊이 있게 드러냅니다.

 

또한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스베덴보리의 ‘언어 이해’가 얼마나 독특한지도 경험하게 됩니다. 그는 천사들의 언어가 단순한 단어 교환이 아니라 상태와 affection의 전달이라고 설명합니다. 특히 천적 천사들의 경우에는 논증과 설득의 언어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상태가 상태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어떤 영혼이 그들과 처음 접촉할 때, 먼저 경험하는 것은 설명보다도 atmosphere입니다. 곧 평안, 부드러움, 자기방어의 사라짐 같은 것입니다. 이 책에서 설명되는 ‘무게 없음의 분위기’ 역시 바로 그런 천적 상태의 한 단면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붙들고 유지하려는 긴장에서 잠시 놓일 때 느끼는 영적 가벼움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극도의 피로와 불안 속에 살아갑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고, 비교해야 하며,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있습니다. 그런 시대 속에서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매우 특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참 평안이 자기 자신을 강화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주님의 질서 안에 머무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옛 시대의 천사적 인간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오늘날 인간이 잃어버린 영적 감각을 다시 일깨우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스베덴보리의 설명이 단순히 추상적 철학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의 설명은 놀라울 정도로 실제적입니다. 인간이 왜 불안해지는지, 왜 교리 논쟁에 빠지는지, 왜 자기 확신에 집착하는지, 왜 평안을 잃는지, 왜 신앙이 메말라지는지를 아주 깊은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문제의 중심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삶’이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단순한 성경 해설서가 아니라, 인간 영혼의 병리와 회복 과정을 동시에 보여주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독자에게 ‘거듭남’을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보게 합니다. 거듭남은 단순한 종교적 결단이나 감정적 체험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 전체가 주님의 질서 안으로 다시 재배열되는 과정입니다. 속 사람이 열리고, 겉 사람이 정돈되며, 사랑과 진리가 질서 있게 연결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2장은 바로 그 ‘본래적 질서’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본래 어떤 존재였으며, 또한 어떤 존재로 다시 부르심 받고 있는지를 묵상하는 일입니다.

 

2, AC.67-181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hwpx’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매우 특별한 작업입니다. 이 책은 창세기 2장을 단순한 고대 이야기에서 꺼내 오늘의 인간 영혼 앞에 다시 세워 놓습니다. 그리고 독자에게 조용히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로부터 살고 있는가? 자기 자신으로부터인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인가?’ 바로 이 질문이야말로 창세기 2장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질문이며, 동시에 오늘날 우리 모두 앞에 놓인 가장 본질적인 질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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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 AC.1-66 - ChatGPT.hwpx 소개

창1, AC.1-66 - ChatGPT.hwpx 소개 이 ‘창1, AC.1-66 - ChatGPT.hwpx’는 단순한 번역 문서가 아닙니다. 이 원고는 스베덴보리의 대표 저작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 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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