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n the air of the day; and the man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3:8)

 

AC.218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는 그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한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를 의미하는데, 이 내적 딕테이트는 그들이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지각(perception)의 남은 흔적이었습니다. ‘그날 바람이 불 때(the air or breath of the day)는 교회가 아직 얼마간의 잔여 지각을 보유하고 있던 시기를 의미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hide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는 그 내적 딕테이트를 두려워한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악을 의식하는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그들이 숨었던 동산 나무 사이에(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는 자연적 선(natural good)을 의미합니다. 가장 안쪽에 있는 것은 사이에(midst)라고 불립니다. ‘나무(tree)는 앞에서와 같이 지각(perception)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지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나무들이라고 하지 않고 마치 하나만 남아 있는 것처럼 단수로 나무라고 말한 것입니다. By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s signified an internal dictate which caused them to feel afraid, this dictate being the residue of the perception which they had possessed; by the “air” or “breath” of the “day” is denoted a period when the church still possessed some residue of perception; to “hide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s to fear the dictate, as is wont to be the case with those who are conscious of evil; by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in which they hid themselves, is signified natural good; that which is inmost is called the “midst”; the “tree” denotes perception as before; but because there was little perception remaining, the tree is spoken of in the singular number, as if there were only one remaining.

 

 

해설

 

이 본문은 창3:8의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는 말씀을 내적 의미로 해설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여기서는 타락 이후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지각의 마지막 흔적이 강조됩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스베덴보리가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로 해석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AC.211AC.212에서 설명된 ‘interior dictate’와 같은 개념입니다. 즉 밖에서 들려오는 물리적 음성이 아니라, 내면에서 ‘이것은 옳지 않다’, ‘이 길은 아니다’라고 알려주는 영적 자각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원래 지각(perception)을 통해 직접 주님의 뜻을 알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거의 사라지고 희미한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그들은 자신의 상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날 바람이 불 때’라는 표현도 흥미롭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저녁 무렵의 시원한 바람을 뜻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적 상태로 읽습니다. 하루의 한낮이 밝은 지각의 상태라면, 서늘한 저녁은 지각이 점차 사라져 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태고교회가 이미 쇠퇴기에 들어섰지만,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는 않은 상태를 나타냅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는 것은 단순히 두려워서 숨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그들은 내적 딕테이트를 두려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딕테이트가 자기들의 실제 상태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AC.213에서 말한 ‘벌거벗음을 알고 부끄러워한 상태’와도 연결됩니다. 사람이 악을 의식하게 되면 주님을 미워하지는 않을지라도, 주님의 빛을 피하고 싶어집니다. 빛이 자신의 상태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해설이 마지막 부분에 나옵니다. 그들은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자연적 선 안으로 물러난 상태로 봅니다. 이미 이노센스와 깊은 퍼셉션은 잃어버렸지만, 아직 자연적 선은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216에서 무화과잎으로 자신을 가린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들은 완전히 악에 빠진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남은 자연적 선 속으로 숨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나무’를 단수로 표현한 이유에 대한 설명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원래 동산에는 많은 나무가 있었고, 그것들은 다양한 퍼셉션과 선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퍼셉션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나무’가 단수로 언급되는 것을, 마치 수많은 퍼셉션 가운데 단 하나의 희미한 흔적만 남아 있는 상태로 해석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AC.194-218 전체의 흐름과도 잘 맞습니다. 뱀의 유혹 이후 사람들은 감각과 자기 지혜를 신뢰하기 시작했고, 이노센스를 잃었으며, 벌거벗음을 알게 되었고, 무화과잎으로 자신을 가렸습니다. 그런데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내적 딕테이트가 남아 있고, 아직 부끄러움을 느끼며, 아직 자연적 선 속으로 숨을 수 있습니다. AC.218은 바로 그 마지막 남은 영적 생명의 흔적을 보여 주는 본문입니다.

 

어쩌면 이 장면은 매우 인간적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잘못을 저지른 후에도 주님을 완전히 잊어버리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더 의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의식이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숨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숨고 싶어 하는 마음 자체가 아직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AC.218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내적 딕테이트의 잔재’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완전한 퍼셉션은 사라졌지만, 아직 완전히 버려지지는 않은 상태, 아직 회복의 가능성이 남아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AC.217, 창3:7, ‘포도나무’(vine)와 ‘무화과나무’(fig tree)의 의미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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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6/21)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5, ‘큰 영화로신 주’, 81, ‘주는 귀한 보배입니다.

 

오늘3 세 번째, 본문은 창3:6-7이고, AC 글 번호로는 207번에서 217입니다.  

 

먼저 본문,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3:6-7)

 

제목은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진 인간의 내면 상태

 

이며, 다음은 AC.207-217입니다. 그전에 먼저 오늘 범위에 대한 요약 설명입니다.

 

 

창세기 36절과 7절은 타락의 실제 과정과 그 결과를 보여 주는 핵심 구절입니다. 6절은 의지와 이해가 뱀의 설득을 받아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신뢰하게 되는 과정을, 7절은 그 결과로 순진무구함(innocence)이 사라지고 자기 의(selfhood)가 드러나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 두 절은 단순히 최초 인간 부부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태고교회가 천적 상태에서 벗어나 자아를 사랑하는 상태로 기울어 가는 영적 과정을 상징합니다.

 

창세기 36절은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로 시작됩니다. 이는 감각과 외적 사고가 뱀의 설득에 의해 영향을 받아 진리를 판단하는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먹음직도 하고는 선에 대한 욕망처럼 보이는 것을,보암직도 하고는 진리처럼 보이는 것을,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는 것은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지혜로워지고자 하는 욕망을 의미합니다. 이어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는 구절은 의지(여자)뿐 아니라 이해(남자)까지도 같은 설득에 동의하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즉 사람 전체가 자아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창세기 37절은 타락의 직접적인 결과를 보여 줍니다.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라는 말씀은 참된 영적 시력이 열렸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자연적 자각이 생겼음을 의미합니다. 이전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 안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벌거벗음을 느끼지 못했지만, 이제는 선과 진리를 상실한 상태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입니다.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결핍과 수치를 가리기 위해 외적인 진리와 도덕성으로 스스로를 꾸미려 했음을 뜻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외적 인간을 상징하므로, 이는 내적 생명을 잃은 사람이 외적 종교성이나 도덕성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요약하면, 6절은 하나님보다 자기 판단을 신뢰하게 된 과정, 7절은 그 결과 순진무구함이 사라지고, 자기 의와 외적 종교성으로 자신을 가리게 된 상태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절을 통해 모든 영적 타락의 본질은 금지된 열매 자체가 아니라 주님 대신 자신을 지혜의 근원으로 삼는 것이며, 그 결과 사람은 참된 생명을 잃고, 외적인 것들로 자신의 영적 빈곤을 가리려 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태고교회의 이야기인 동시에, 오늘날 모든 사람 안에서 반복될 수 있는 영적 과정에 대한 묘사이기도 합니다.

 

 

아래는 오늘 본문에 해당하는 전체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207, 창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AC.207-210)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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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8, 창3:6, ‘태고교회의 네 번째 후손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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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9, 창3:6, ‘창3의 표현들이 의지, 애정의 언어들인 이유’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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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0, 창3:6,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own’의 정의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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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1, 창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AC.211-21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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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 창3:7, ‘interior dictate’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이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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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3, 창3:7,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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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4, 창3:7, ‘벌거벗음’(naked)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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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5, 창3:7, ‘own’을 실제 영계 체험을 근거로 증언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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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6, 창3:7,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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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7, 창3:7, ‘포도나무’(vine)와 ‘무화과나무’(fig tree)의 의미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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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 링크들 중 오늘 예배 때 꼭 리딩했으면 하는 글들입니다.

 

 

AC.207, 창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AC.207-210)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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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0, 창3:6,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own’의 정의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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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1, 창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AC.211-21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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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 심화 5, ‘나의 눈을 밝히소서’

AC.212.심화 5. ‘나의 눈을 밝히소서’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시13:3) 저도 이런 기도를 늘 드려야겠어요... 이 구절은 AC.212를 읽고 나면 이전과는 전혀 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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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3, 심화 1, ‘순진무구’(innocence)

AC.213.심화 1. ‘순진무구’(innocence) ‘순진무구’(innocence)는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어의 ‘순진하다’는 말은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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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3, 심화 5, ‘계3:18’

AC.213.심화 5. ‘계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계3:18) I counsel thee to buy of me white raiment that thou mayest be clothed, and that the shame of thy nake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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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6, 창3:7,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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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7, 심화 1, ‘마21:19’

AC.217.심화 1. ‘마21:19’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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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오늘 창3:6, 7 본문, 선악과를 따먹는 장면에 대한, 그러나 그 드러내시는, 너무나 놀라운 속뜻 앞에 우리 내면이 어리둥절할 정도로 확 밝아지며, 감사, 감동하게 됩니다. 오, 주님, 저희로 이 생명의 말씀 안에서 영원히, 그리고 새로운 한 주도 살아가게 하여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6-21(D1)

 

2656, 3, 창3.3, 2026-06-21(D1)-주일예배(창3,6-7, AC.207-217),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진 인간의 내면 상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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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6/14, 창3:1-5, AC.194-206), ‘태고교회 후손들의 상태 변화, 그 중심의 이동’

※ 오늘(2026/06/14)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4, ‘참 놀랍도다 주 크신 이름’, 찬80, ‘천지에 있는 이름 중’입니다. 오늘은 창3 두 번째, 본문은 창3:1-5이고, AC 글 번호로는 194번에서 206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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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7.심화

 

4. ‘2:22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2:22) Be not afraid, ye beasts of my fields, for the tree shall bear its fruit, the fig tree and the vine shall yield their strength (Joel 2:22).

 

 

이 구절을 AC.217에서 인용한 이유는, ‘포도나무(vine)가 영적 선(spiritual good)을, ‘무화과나무(fig tree)가 자연적 선(natural good)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앞서 인용된 예레미야 8장이 선의 상실과 황폐를 말한다면, 요엘 2장은 그 반대로 선의 회복과 생명의 회복을 말하는 본문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이것은 가뭄과 황폐가 끝나고 자연이 다시 살아나는 장면처럼 보입니다. 들의 풀이 돋고, 나무가 열매를 맺고,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힘을 내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농업 회복의 예언으로 보지 않습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는 교회와 인간 안에 선과 진리가 다시 살아나는 상태를 묘사한다고 봅니다.

 

여기서 포도나무가 힘을 낸다는 것은 영적 선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주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가 힘을 낸다는 것은 자연적 선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일상생활 속의 정직, 양심, 이웃 사랑, 책임감 같은 선한 삶이 다시 열매 맺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특히 AC.216과 연결해 보면 더욱 의미가 깊습니다. 창3에서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것이 무화과 잎, 곧 자연적 선이었습니다. 그리고 AC.217에서는 무화과나무 자체가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요엘서의 ‘무화과나무가 힘을 낸다’는 말씀은 단순히 나무의 회복이 아니라 인간 안에 남아 있던 선한 요소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구절은 앞서 본 렘8:12-13과 아름다운 대조를 이룹니다. 거기서는 ‘포도도 없고 무화과도 없다’고 했습니다. 영적 선도 자연적 선도 모두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요엘서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힘을 낸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황폐(vastation) 이후의 회복(restoration)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사람 안에 선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맨 앞의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라는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 따르면 들짐승은 종종 인간 안의 선한 애정과 정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두려워하지 말라. 주님께서 다시 생명을 주실 것이다’라는 약속처럼 읽을 수 있습니다. 영혼이 메마르고 황폐한 시기를 지나더라도, 결국 주님께서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다시 힘 있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217에서 이 구절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의 상응을 보여 주는 마지막 예로 인용됩니다. 포도나무는 영적 선,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이며, 둘이 함께 힘을 낸다는 것은 인간의 내면과 외면, 신앙과 삶, 사랑과 행동이 함께 회복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레미야가 선의 상실을 노래했다면, 요엘은 선의 회복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 속에서 주님께서 교회와 인간 안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희망의 약속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AC.217, 창3:7, ‘포도나무’(vine)와 ‘무화과나무’(fig tree)의 의미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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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7, 심화 3, ‘호9:10’

AC.217.심화 3. ‘호9:10’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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