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nd the fruit tree bearing fruit after its kind, whose seed is in itself,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And the earth brought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fter its kind, and 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was in itself,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third day. (1:11-13)

 

AC.29

 

(earth), 곧 사람이 이렇게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씨앗을 받을 준비가 되고, 선과 진리에 속한 어떤 싹을 낼 수 있는 상태가 되면, 주님은 먼저 아주 연약한 것을 돋아나게 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tender herb)입니다. 다음으로는 더 괜찮은 것이 나오는데, 이것은 그 안에 씨를 지니고 있어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라고 하지요. 마지막으로는 선한 것이 나와 열매를 맺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이며, 이 모든 것은 각기 종류대로입니다. 거듭나는 중인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가 행하는 선과 자기가 말하는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선과 모든 진리는 주님에게서만 오지요. 그러므로 그것들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직 참된 신앙의 생명을 갖고 있지 않은 상태인데,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나중에 그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며, 다만 신앙의 생명을 받아들일 준비 상태에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는 여기서 생명 없는(inanimate) 것들로 표현되고, 그다음에 오는 신앙의 생명 상태는 생명 있는(animate) 것들로 표현됩니다. When the “earth,” or man, has been thus prepared to receive celestial seeds from the Lord, and to produce something of what is good and true, then the Lord first causes some tender thing to spring forth, which is called the “tender herb”; then something more useful, which again bears seed in itself, and is called the “herb yielding seed”; and at length something good which becomes fruitful, and is called 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 each according to its own kind. The man who is being regenerated is at first of such a quality that he supposes the good which he does, and the truth which he speaks, to be from himself, when in reality all good and all truth are from the Lord, so that whosoever supposes them to be from himself has not as yet the life of true faith, which nevertheless he may afterwards receive; for he cannot as yet believe that they are from the Lord, because he is only in a state of preparation for the reception of the life of faith. This state is here represented by things inanimate, and the succeeding one of the life of faith, by animate things.

 

[2] 씨를 뿌리는 이는 주님이시며, 씨는 주님의 말씀이고, 땅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주님 자신 친히 밝혀 주셨습니다. (13:19-24, 37-39; 4:14-21; 8:11-16) The Lord is he who sows, the “seed” is his Word, and the “earth” is man, as he himself has deigned to declare (Matt. 13:19–24, 37–39; Mark 4:14–21; Luke 8:11–16).

 

19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려진 자요 20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3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24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37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39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13:19-24, 37-39)

 

14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15말씀이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16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8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19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20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4:14-20)

 

11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15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8:11-15)

 

같은 뜻으로 주님은 이렇게도 설명하십니다. To the same purport he gives this description:

 

26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4:26-28) So is the kingdom of God, as a man when he casteth seed into the earth, and sleepeth and riseth night and day, and the seed groweth and riseth up, he knoweth not how; for the earth bringeth forth fruit of herself, first the blade, then the ear, after that the full corn in the ear (Mark 4:26–28)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는 가장 보편적 의미로는 전체 천국을 뜻하고, 덜 보편적으로는 주님의 참된 교회를, 가장 개별적 의미로는 참된 신앙에 속한 사람, 곧 신앙의 삶으로 거듭난 각 사람을 뜻합니다. 이런 이유로 이러한 사람을 천국(heaven)이라 하는데, 이는 천국이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이며, 또 그를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라고도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주님은 누가복음에서 친히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By the “kingdom of God,” in the universal sense, is meant the universal heaven; in a sense less universal, the true church of the Lord; and in a particular sense, everyone who is of true faith, or who is regenerate by a life of faith. Wherefore such a person is also called “heaven,” because heaven is in him; and likewise the “kingdom of God,” because the kingdom of God is in him, as the Lord himself teaches in Luke: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17:20, 21) Being demanded of the Pharisees when the kingdom of God should come, he answered them, and said, The kingdom of God cometh not with observation; neither shall they say, Lo here! or, Lo there! for behold,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Luke 17:20–21).

 

이것이 사람 거듭남의 세 번째 연속 단계로서, 곧 회개(repentance)의 상태이며, 이 역시 그늘에서 빛으로, 곧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13절에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This is the third successive stage of the regeneration of man, being his state of repentance, and in like manner proceeding from shade to light, or from evening to morning; wherefore it is said (verse 13),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third day.”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에서 처음으로 ‘생명처럼 보이는 것’이 등장하는 장면을 인간 거듭남의 실제 단계와 연결합니다. 앞선 단계들에서 사람은 빛을 인식하고,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구별되며, 지식이 기억 속에 모이는 준비를 거쳤습니다. 이제 그 준비 위에서 비로소 무엇인가가 ‘자라기’ 시작합니다. 이 성장은 단번에 열매로 나타나지 않고, 연한 풀에서 시작해 씨 맺는 채소를 거쳐 열매 맺는 나무에 이르는 점진적 과정으로 묘사됩니다.

 

연한 풀은 거듭남 초기에 나타나는 매우 미약한 선의 움직임을 뜻합니다. 이는 아직 삶을 이끌 만큼 강하지도, 분명하지도 않지만, 분명히 이전에는 없던 변화입니다. 그다음 단계인 씨 맺는 채소는, 선이 어느 정도 유용성을 갖기 시작하고, 그 안에 다시 진리를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상태를 가리킵니다. 마지막으로 열매 맺는 나무는, 선이 안정되어 실제 삶 속에서 반복적으로 선한 행위를 낳는 상태입니다. 이 모든 과정은 ‘각기 자기 종류대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거듭남이 사람마다 동일한 외형을 갖지 않음을 뜻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 단계 전체에서 사람이 여전히 착각 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행하는 선과 자기가 말하는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생각을 즉시 잘못이라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반드시 거쳐야 할 상태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아직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 신앙의 생명을 받기 위한 준비 단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단계는 ‘생명이 없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풀과 채소와 나무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서는 아직 참된 의미에서의 신앙의 생명, 곧 주님에게서 직접 나오는 생명이 완전히 작동하는 단계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단계는 헛된 것이 아니라, 다음 단계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토양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느끼는 그 선과 진리를 통해서도, 실제로는 그를 더 깊은 신앙의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원리를 주님의 비유로 확증합니다. 씨를 뿌리는 이는 주님이시고, 씨는 주님의 말씀이며, 땅은 사람입니다. 씨가 자라나는 과정에서 사람은 ‘어떻게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변화는 일어나지만, 그 메커니즘은 인간의 통제와 인식 바깥에서 작동합니다. 사람은 다만 땅으로서, 수용체로서 그 과정을 통과할 뿐입니다.

 

마가복음의 비유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성장의 순서입니다. 먼저 풀잎, 다음에 이삭, 그다음에 충만한 알곡이 나옵니다. 이는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에서 풀, 채소, 나무의 순서를 설명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즉,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이미 복음서에서 거듭남의 비유로 다시 해석되고 있습니다.

 

이 글의 후반부에서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의미를 세 층위로 설명합니다. 천국 전체, 참된 교회, 그리고 각 개인입니다. 특히 마지막 의미가 중요합니다. 참된 신앙의 삶으로 거듭난 사람 자신이 ‘천국’이며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외적 제도나 미래 사건으로만 이해하는 관점을 근본적으로 뒤집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관찰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세워지는 질서입니다.

 

그래서 이 단계는 회개(repentance)의 상태라고 불립니다. 회개는 단순히 잘못을 뉘우치는 행위가 아니라, 선과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서 주님으로 옮겨 가는 방향 전환입니다. 이 방향 전환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분명히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단계 역시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며, 셋째 날로 불립니다.

 

AC.29는 거듭남이 얼마나 인내를 요구하는 과정인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열매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아주 연한 풀 하나가 돋아나는 것을 귀히 여기십니다. 이 점에서 이 단락은 신학적으로 깊을 뿐 아니라, 목회적으로도 매우 큰 위로를 줍니다.  

 

 

심화

 

1.tender herb’,herb yielding seed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에 대한 실제 예

 

AC.29tender herb’,herb yielding seed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에 대한 실제 예를 들어주세요. 거듭남 가운데 있는 한 개인에 있어 어떤 게 tender herb이고, 어떤 게 herb yielding seed인지, 그리고 어떤 모습이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인지 말이지요.

 

AC.29에서 나오는 ‘tender herb’, ‘herb yielding seed’,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는 식물 비유이지만, 실제로는 ‘거듭남 과정에서 선과 진리가 자라는 단계’를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식물들을 인간 영혼 안에서 자라는 영적 상태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실제 한 사람의 신앙 경험 속에서 보면 훨씬 이해가 쉬워집니다.

 

먼저 ‘tender herb’입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막 돋아난 연한 싹 같은 상태’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사람이 아직 진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선한 감정이나 진리를 향한 마음이 처음으로 생깁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어느 날 설교를 듣다가 ‘그래,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는 마음이 처음으로 생깁니다. 또는 ‘내 삶이 조금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아직 그 사람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깊이 알지 못합니다. 그저 마음이 조금 움직였을 뿐입니다. 이런 상태가 바로 ‘tender herb’입니다. 어린아이의 순진함이나, 신앙 초기에 생기는 막연한 선한 마음도 여기에 속합니다. 아직 약하고 쉽게 흔들리지만 ‘생명의 시작’이 이미 있는 상태입니다.

 

그다음이 ‘herb yielding seed’입니다. 여기서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진리가 조금씩 이해되고 그것이 다시 다른 진리를 낳을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예를 들어 아까의 사람을 생각해 보면, 처음에는 막연히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배우면서 ‘왜 미워하면 안 되는지’, ‘주님이 왜 사랑을 말씀하셨는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또 다른 생각을 낳습니다. ‘그러면 나는 직장에서 이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내 가족에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식으로 진리가 계속 확장됩니다. 이것이 바로 ‘seed’를 가진 상태입니다. 즉 ‘한 진리가 다른 진리를 낳는 상태’입니다. 목회적으로 보면 성도들이 말씀을 듣고 삶 속에서 적용하기 시작하는 단계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마지막이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진리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삶의 성품이 됩니다’. 이제 그 사람은 ‘사람을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리를 생각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행동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자신을 공격해도 이전처럼 바로 분노가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이해하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이 그 사람에게서 ‘열매처럼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여기서 ‘fruit’는 실제 선한 행동과 삶의 열매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seed is in itself’라는 표현은 그 선이 다시 다른 선을 낳을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그 사람의 삶 자체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새로운 선을 낳는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의 태도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변화되거나, 그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신앙의 본보기가 되는 경우입니다.

 

어떤 성도가 처음 교회에 나와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지고 ‘사람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tender herb’입니다. 그다음 그는 말씀을 배우면서 왜 사랑과 봉사가 중요한지 이해하게 되고, 구체적으로 교회 봉사나 이웃 돕기에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herb yielding seed’입니다. 시간이 더 지나면서 그는 봉사를 의무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기쁨으로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줍니다. 이것이 ‘tree bearing fruit’의 상태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 세 단계가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성장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작은 싹처럼 시작하고, 그다음에는 진리가 확장되며, 마지막에는 삶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가 식물 비유를 사용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식물처럼 영적 생명도 ‘점진적으로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29의 세 표현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tender herb’는 선과 진리를 향한 ‘첫 마음의 싹’, ‘herb yielding seed’는 이해된 진리가 계속 ‘새 진리를 낳는 상태’,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는 그 진리가 삶 속에서 ‘선한 열매가 되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이 바로 이런 식으로 사람 안에서 자라난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2.각기 종류대로

 

각기 종류대로라는 표현이 계속 나오는데요, 그냥 다양한 종류의 채소, 나무라는 단순한 의미만은 아니겠지요?

 

각기 종류대로’라는 표현은 창세기 1장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문자적으로만 보면 단순히 식물이 여러 종류로 나뉘어 있다는 뜻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훨씬 깊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종류(kind, genus, species)라는 말은 단순한 생물학적 분류가 아니라 ‘선과 진리의 질서와 구별’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이 창조하시는 것은 무질서한 혼합이 아니라, 각각 고유한 성질을 가진 선과 진리들이 ‘자기 질서 속에서 자라도록 하는 것’입니다.

 

먼저 자연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연 세계에서도 모든 생명은 ‘종류대로’ 번식합니다. 밀은 밀을 낳고, 포도는 포도를 낳습니다. 이것은 자연의 질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자연의 질서가 사실은 더 깊은 영적 질서를 반영한다고 말합니다. 즉 인간의 영적 삶에서도 ‘각 선과 진리는 그 고유한 성질에 따라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친구 사이의 우정, 이웃을 돕는 자비,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 등이 모두 다릅니다. 이 사랑들은 서로 관련되어 있지만 동일하지 않습니다. 각각 고유한 성질과 역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 의미에서 ‘각기 종류대로’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도 이 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선을 배우고 진리를 받아들일 때, 그것들이 무질서하게 섞이면 건강한 영적 생명이 자라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지만,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선한 감정은 있지만 진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를 ‘혼합’ 또는 ‘혼동’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때는 선과 진리가 ‘자기 종류와 질서에 맞게 자라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 계속 ‘각기 종류대로’라는 표현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실제 신앙생활에서도 이 원리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진리를 배우는 기쁨이 먼저 자랍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이웃을 돕는 사랑이 먼저 자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는 경건한 예배의 마음이 강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서로 다른 ‘종류’의 선과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온 것이라면 각각의 자리에서 조화를 이루며 성장합니다. 이것이 ‘각기 종류대로 열매 맺는다’는 의미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의미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섞이지 않는다는 원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선과 진리는 서로 결합하지만, 선과 악은 결합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영계에서는 모든 것이 결국 자기 ‘종류’에 따라 나뉘게 됩니다. 선한 사랑은 선한 사랑과 함께 있고, 이기적인 사랑은 그와 같은 것들과 함께 모입니다. 이 점에서도 ‘각기 종류대로’라는 표현은 단순한 식물 분류가 아니라 ‘영계의 근본 질서’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때 모든 사람을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혜가,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가, 어떤 사람에게는 봉사의 마음이 더 두드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주님에게서 온 선과 진리라는 공통된 뿌리 안에서 자랍니다. 이것이 바로 ‘각기 종류대로’라는 표현이 가리키는 깊은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단순히 ‘여러 종류의 채소와 나무가 있다’는 자연 묘사가 아니라, ‘주님이 인간의 영적 삶을 질서 있게 자라게 하시는 방식’을 보여 주는 말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반복되는 이 표현은 결국 한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주님이 창조하시는 모든 생명은 무질서하게 섞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고유한 성질과 자리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3.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단계에서도 생명 없는(inanimate) 상태?

 

위 심화 1의 세 번째 단계인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 단계,진리가 삶의 성품이 되며, 선한 행동이 열매처럼 자연스럽게 나오는 단계에서도 여전히 생명 없는(inanimate) 상태일 수가 있나요?

 

이 질문은 사실 창세기 1장 해석에서 매우 미묘하지만 핵심적인 지점을 건드립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 단계에서도 여전히 어느 정도 inanimate’, 곧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는 아닐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해석 구조를 보면 이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먼저 ‘inanimate’라는 표현의 의미를 정확히 짚을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animate’와 ‘inanimate’는 단순히 활동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다고 느끼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어떤 선한 일을 하고 진리를 말하며 실제 삶에서 선한 열매를 맺고 있어도, 그 사람이 그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여긴다면’,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라고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선이 아무리 아름다워 보일지라도, 그것이 여전히 ‘나의 선’이라는 의식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 상태는 완전히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자기 생명처럼 보이는 상태’, 곧 어느 의미에서는 ‘inanimate’에 가까운 상태입니다.

 

이 점에서 창세기 1장의 식물 단계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식물들을 설명할 때 ‘‘living soul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herb’, ‘tree’, ‘fruit’ 같은 식물적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의도적인 것입니다. 식물은 생명이 있지만 ‘자기 스스로 움직이거나 의식적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영적 의미에서, 사람이 선과 진리를 가지고 있고 실제로 선한 삶을 살고 있어도 아직 그 선이 ‘자유로운 사랑에서 살아 움직이는 상태까지는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이 단계는 선이 존재하지만, 아직 완전히 ‘animate’ 상태는 아닌 단계로 이해됩니다.

 

어떤 성도가 오랜 신앙생활을 통해 매우 성실하고 선한 삶을 살고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정직하며 교회에서도 헌신적으로 봉사합니다. 그의 삶에는 분명히 ‘fruit’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이런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그래도 꽤 선하게 살아왔다’, ‘내가 이렇게 봉사해 왔다.’ 이것은 교만한 마음이라기보다 자연스러운 자기의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 상태에서도 여전히 선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는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다음 단계로 이어지는 이유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식물 다음에 등장하는 것이 ‘‘living soul’, 즉 살아 있는 생명’입니다. 이것은 동물 단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동물은 ‘사랑과 애정(affection)을 상징합니다. 즉 사람이 선과 진리를 단순히 알고 실천하는 수준을 넘어, 그것을 ‘사랑 자체로 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진짜 ‘animate’ 상태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때 사람은 선을 행하면서도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걸 더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tree bearing fruit’ 단계는 매우 중요한 단계이지만 아직 최종 단계는 아닙니다. 이 단계에서는 진리가 실제 삶의 열매로 나타나지만, 사람은 여전히 어느 정도는 ‘자기 자신이 그 선을 행한다고 느끼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다음 단계로 들어가면 사람은 점점 더 분명히 깨닫습니다. ‘내가 하는 선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통해 하시는 선이구나.’ 그때 선은 더 이상 식물처럼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 움직이는 생명’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구조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먼저 진리가 싹트는 단계가 있고, 그다음 진리가 열매를 맺는 삶의 단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이 완전히 살아 있는 생명이 되기 위해서는 그 선이 ‘사랑에서 나오고, 또한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하는 상태’로 들어가야 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식물의 상징이 끝나고 ‘living soul’이 등장합니다.

 

사람은 선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이 아직 ‘내가 하는 선’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열매가 맺힌 단계이지만 아직 완전히 살아 있는 단계는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점점 더 빛 속으로 들어가면, 그 선이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알게 되고 그때 선은 진짜 생명처럼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창세기 1장의 식물에서 동물로 넘어가는 변화가 바로 이 차이를 보여 준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4.갑작스런 repentance의 등장

 

AC.29 두 번째 단락에,This is the third successive stage of the regeneration of man, being his state of repentance,’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부분이 좀 어리둥절합니다. 갑자기 repentance가 나오기 때문인데... 이게 어떻게 연결이 되는 건가요?

 

AC.29의 문맥을 처음 읽으면 앞에서는 식물 이야기—‘tender herb’, ‘herb yielding seed’, ‘tree bearing fruit’—를 하다가 갑자기 ‘repentance의 상태’라는 말이 등장하기 때문에 논리 점프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1장 해석 구조를 보면 이것은 갑작스러운 전환이 아니라 ‘앞 단계에서 준비된 상태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이 연결을 이해하려면 창세기 1장에서 말하는 거듭남의 초기 단계들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첫 부분을 인간 거듭남의 초기 과정으로 설명하면서 대략 이런 흐름을 말합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완전히 혼돈과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다음 진리의 빛이 조금씩 들어옵니다. 그리고 진리와 거짓이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이런 과정을 지나면 사람 안에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 곧 식물로 상징되는 단계가 나타납니다. 바로 여기서 ‘herb’와 ‘tree’가 등장합니다. 즉 사람 안에 처음으로 선과 진리의 싹이 나타나는 단계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repentance의 상태’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처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고 선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할 때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상태를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 자신의 생각과 삶이 괜찮다고 여겼던 것들이 진리의 빛 속에서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순간에 사람은 처음으로 ‘자기 삶을 돌아보고 바꾸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repentance입니다.

 

여기서 repentance라는 말을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의미—큰 죄를 뉘우치며 눈물로 회개하는 사건—으로 이해하면 연결이 어려워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repentance는 훨씬 더 기본적인 의미입니다. 그것은 ‘자기 삶을 돌아본 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보고, 그것을 바꾸려는 의지’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이 자신의 삶을 그 진리에 맞추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AC.29의 식물 비유와 repentance는 실제로 매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tender herb’는 사람이 처음으로 진리를 듣고 마음이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herb yielding seed’는 그 진리가 생각 속에서 자라 다른 진리를 낳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tree bearing fruit’는 그 진리가 실제 삶 속에서 행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진리에 따라 삶을 바꾸기 시작하는 바로 그 과정이 ‘repentance’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식물 단계 전체를 ‘repentance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씀을 듣다가 ‘나는 지금까지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듭니다. 이것이 tender herb입니다. 그다음 그는 말씀을 더 배우면서 자신의 행동들을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내가 왜 이렇게 말했을까?’, ‘이 행동은 옳았을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이것이 herb yielding seed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실제 행동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쉽게 화를 냈다면 이제는 참아 보려고 노력합니다. 이전에는 남을 비판했다면 이제는 말을 조심합니다. 이것이 tree bearing fruit입니다. 바로 이 전체 과정이 repentance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AC.29에서 repentance가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식물의 성장 비유가 바로 repentance의 실제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기 시작할 때, 그 순간이 바로 회개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회개를 거듭남의 매우 초기 단계로 보고 있습니다. 아직 완전히 거듭난 상태는 아니지만,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삶을 진리의 빛 속에서 고치기 시작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그것을 ‘repentance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회개는 어떤 특별한 감정 사건이 아니라, 진리를 알게 된 사람이 ‘자기 삶을 그 진리에 맞추어 바꾸기 시작하는 과정’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식물이 처음 자라는 장면이 바로 그 회개의 시작을 상징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AC.28, 창1: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창1:10)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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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10)

 

AC.28

 

말씀에서 (waters)로는 여러 지식(knowledges, cognitiones et scientifica), 바다(seas)로는 그 많은 물, 곧 지식의 집합을 의미할 때가 참 많은데요, 이사야에 보면, It is a very common thing in the Word for “waters” to signify knowledges [cognitiones et scientifica], and consequently for “seas” to signify a collection of knowledges. As in Isaiah: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11:9) The earth shall be full of the knowledge[scientia] of Jehovah, as the waters cover the sea (Isa. 11:9).

 

이사야 또 다른 데 지식의 결핍이 다루어지는 곳을 보면, And in the same prophet, where a lack of knowledges [cognitionum et scientificorum] is treated of:

 

5바닷물이 없어지겠고 강이 잦아서 마르겠고 6강들에서는 악취가 나겠고 애굽의 강물은 줄어들고 마르므로 갈대와 부들이 시들겠으며 (19:5, 6) The waters shall fail from the sea, and the river shall be dried up and become utterly dry, and the streams shall recede (Isa. 19:5–6).

 

학개에서 새 교회에 대해 말하면서, In Haggai, speaking of a new church:

 

6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7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2:6, 7) 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and the sea and the dry [land]; and I will shake all nations; and the desire of all nations shall come; and I will fill this house with glory (Hag. 2:6–7).

 

또 거듭나는 중인 사람에 대해 스가랴서에서는 And concerning man in the process of regeneration, in Zechariah:

 

7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8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14:7, 8) There shall be one day, it is known to Jehovah; not day, nor night; but it shall come to pass that at evening time it shall be light; and it shall be in that day that living waters shall go out from Jerusalem, part of them toward the eastern sea, and part of them toward the hinder sea (Zech. 14:7–8).

 

시편에도 보면, 황폐해졌다가 거듭나 주님을 경배하게 될 사람을 묘사하면서, David also, describing a vastated man who is to be regenerated and who will worship the Lord:

 

33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 34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 (69:33, 34) Jehovah despiseth not his prisoners; let the heavens and the earth praise him, the seas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therein (Ps. 69:33–34).

 

(earth)이 그릇(recipient)을 의미한다는 것이 스가랴를 보면 분명한데, That the “earth” signifies a recipient, appears from Zechariah: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경고의 말씀이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가 이르시되 (12:1) Jehovah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nd layeth the foundation of the earth, and formeth the spirit of man in the midst of him (Zech. 12:1).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waters)과 ‘바다(seas)가 말씀 전체에서 일관되게 지식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여러 선지서의 예문을 통해 확증합니다. 이는 창세기 1장의 상응 해석이 자의적이거나 국지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보편적 언어 사용임을 보여 주는 작업입니다. 즉, 물을 지식으로 읽는 것은 특정 본문에 대한 독특한 해석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제공하는 해석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이사야 11장의 말씀은 긍정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다(The earth shall be full of the knowledge [scientia] of Jehovah)는 표현은, 단순히 정보가 많아진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인식이 인간과 교회 전체를 채운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 충만함이 ‘물이 바다를 덮음’에 비유된 것은, 지식이 부분적으로 흩어져 있는 상태가 아니라, 질서 있게 모여 전체를 이루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바다는 기억과 삶 속에 축적된 지식의 총체이며, 물이 바다를 덮는다는 것은 그 총체가 살아 있는 의미로 충만해졌음을 뜻합니다.

 

반대로 이사야 19장의 말씀은 지식의 결핍, 곧 황폐한 상태를 묘사합니다. 바다에서 물이 끊어지고, 강과 시내가 마른다는 표현은, 지식이 사라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의미 있는 지식의 흐름이 끊어진 상태’를 뜻합니다. 정보는 남아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연결하고 살리는 생명의 흐름이 멈추면, 말씀은 이를 ‘마름’으로 표현합니다. 이는 AC.18에서 말한 황폐의 개념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학개의 인용은 이 상응이 개인을 넘어 교회 전체에 적용됨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새 교회를 세우실 때 하늘과 땅과 바다와 마른 땅을 함께 진동시키십니다. 이는 교회의 속 사람과 겉 사람, 그리고 그 안에 축적된 지식과 아직 열매 맺지 못한 영역까지 모두 재정렬하신다는 뜻입니다. 새 교회는 단순히 새로운 교리의 추가가 아니라, 지식의 질서와 수용 구조 전체가 새롭게 되는 사건입니다.

 

스가랴의 ‘생수(living waters)는 이 글의 핵심 이미지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물은 더 이상 정적인 지식이 아니라, 생명을 지닌 지식입니다. 이 물들이 예루살렘에서 흘러나와 동쪽 바다와 서쪽 바다로 나뉘어 흐른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지식이 인간의 모든 기억 영역으로 퍼져 나가 삶의 전 영역을 적신다는 뜻입니다. ‘동해’는 사랑의 근원을, ‘서해(toward the hinder sea)는 상대적으로 어두운 영역을 가리키므로, 살아 있는 지식은 밝은 영역뿐 아니라 아직 미처 조명되지 않은 영역까지도 도달한다는 말입니다.

 

시편의 인용은 황폐했던 사람의 거듭난 이후의 상태를 찬양의 언어로 묘사합니다. 하늘과 땅,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이 주님을 찬양한다는 말은, 속 사람과 겉 사람, 그리고 기억 속에 저장된 모든 지식이 주님을 향한 질서 안에 들어왔음을 뜻합니다. 여기서 바다는 더 이상 혼란의 장소가 아니라, 찬양에 참여하는 영역이 됩니다. 이는 기억과 지식이 주님께 복종할 때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마지막으로 스가랴 12장의 말씀은 ‘(earth)의 의미를 분명히 합니다. 땅은 스스로 무엇을 만들어 내는 주체가 아니라, 주님이 영을 형성하시는 그릇, 곧 수용체입니다. 하늘이 펼쳐지고 땅의 기초가 놓일 때, 그 한가운데서 사람의 영이 형성됩니다. 이는 지식과 기억, 겉 사람의 구조가 갖추어질 때, 비로소 주님의 생명이 그 안에 질서 있게 자리 잡는다는 뜻입니다.

 

결국 AC.28은 ‘바다’이라는 연쇄가 거듭남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종합적으로 보여 줍니다. 물은 지식이며, 바다는 그 지식이 모여 저장된 총체이고, 땅은 그것을 받아 생명으로 전환하는 수용 구조입니다. 이 질서가 살아 있을 때, 지식은 더 이상 머리에 머무르지 않고 삶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생수’(生), 곧 물이 ‘살아 있다’고 말하며, 지식이 생명으로 변하는 지점을 정확히 짚어 줍니다.  

 

 

심화

 

1.스베덴보리가 AC 초기부터 여러 인용 구절의 속뜻을 알 수 있었던 이유

 

AC.28을 보면,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 그러니까 이사야, 학개, 스가랴, 시편 등에서 여러 구절들을 인용하는데, 그것도 겉뜻이 아닌 속뜻으로 인용합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요? 실제로 주석한 성경은 창세기와 출애굽기 및 계시록 뿐인데 말입니다. 창세기도 28번 글이면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한 거고 말이지요.곁에서 주님이 구절들을 생각나게 하시면서 계속 풀어 주고 계셨던 건가요?

 

실제로 ‘Arcana Coelestia’를 읽다 보면 창세기 초반인데도 이미 이사야, 예레미야, 시편, 복음서 등 여러 곳의 말씀을 자유롭게 인용하면서 그것들의 속뜻을 설명합니다. 그래서 많은 독자들이 ‘이 많은 연결을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알았을까?’라는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스베덴보리의 계시 이해와 집필 방식, 그리고 말씀의 구조에 대한 그의 인식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먼저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성경의 속뜻을 ‘연구’만으로 발견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여러 곳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는 인간의 학문적 연구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열려야만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설명을 ‘주님의 자비로 보여진 것’ 또는 ‘주님의 자비로 알게 된 것’이라는 표현으로 자주 소개합니다. 즉 그는 자신이 해석 체계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영계의 경험과 주님의 조명을 통해 알게 된 것을 기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받아쓰기(dictation) 방식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글을 쓸 때, 주님이 곁에서 문장을 그대로 불러 주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조명(illumination)과 ‘내적 지각(perception)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즉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그 안에 담긴 영적 의미가 마음에 분명하게 보이도록 밝혀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실제로 성경을 읽으면서 설명을 써 내려갔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두 번째 요소가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이 ‘전체적으로 하나의 일관된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말씀은 전부 상응(correspondence)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한 번 그 상응의 질서를 알게 되면 다른 구절들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예를 들어, ‘’는 사랑을, ‘’은 신앙을, ‘’은 신앙의 지식들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사야든 시편이든 복음서든 어디에서 같은 상징이 나와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다른 예언서 구절들이 인용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서 ‘’이 등장하면, 예언서에서 ‘’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도 함께 연결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주석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상응 구조를 보여 주는 방식’입니다. 다시 말해 스베덴보리는 한 구절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영적 언어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생각해야 할 점은, 스베덴보리가 이미 매우 깊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계시 이전에도 성경을 오랫동안 연구했습니다. 그의 일기와 기록을 보면, 성경을 매우 정밀하게 읽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구절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그는 그 구절들의 ‘내적 의미를 보는 눈이 열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님이 곁에서 구절을 떠올리게 해 주셨느냐’라는 부분은 어느 정도 맞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비슷한 경험을 여러 번 기록합니다. 어떤 구절을 읽다가 다른 구절이 연결되어 떠오르고, 그것이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게 되는 경험입니다. 그는 이것을 자신의 능력이라기보다 ‘주님의 인도와 조명’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AC.28 같은 곳에서 여러 예언서를 자유롭게 인용하는 것은, 창세기 주석이 아직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말씀 전체가 하나의 영적 언어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예언서의 상징도 설명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이 인용들은 단순한 참고 구절이 아니라 ‘상응의 보편성을 보여 주는 증거’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을 연구하여 상징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 공통으로 흐르는 영적 언어를 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창세기를 설명할 때도 자연스럽게 이사야나 시편의 구절들이 연결됩니다. 이는 성경 전체가 하나의 동일한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를 읽다 보면 창세기 주석이면서 동시에 ‘성경 전체의 영적 사전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창세기의 한 단어를 설명하는 순간, 같은 상징이 사용된 다른 말씀들도 함께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AC.29, 창1:11-13,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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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 창1:9,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창1:9) AC.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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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1:9)

 

AC.27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둘 다 존재한다는 사실과, 여러 진리와 선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으로 흘러 들어온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러니까 겉보기에는 그렇지 않아 보여도 말입니다. 그때 거듭나는 중인 사람 안에 있는 그러한 여러 진리와 선, 곧 참과 선에 관한 여러 지식은 그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기억 지식(scientifica) 가운데로 분류됩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의 기억 속에 스며든 건, 그것이 자연적이든, 영적이든, 또는 천적이든 간에 모두 기억 지식으로 그곳에 머물며, 나중에 필요에 따라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지식들이 바로 한곳으로 모인 물(waters gathered together into one place)이며, 이렇게 모인 것들을 바다(seas)라고 합니다. 이때 겉 사람 자체를 가리켜서는 마른 땅(dry [land])이라 하고, 곧이어 (earth)이라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다음 내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When it is known that there is both an internal and an external man, and that truths and goods flow in from, or through, the internal man to the external, from the Lord, although it does not so appear, then those truths and goods, or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the good in the regenerating man, are stored up in his memory, and are classed among its knowledges [scientifica]; for whatsoever is insinuated into the memory of the external man, whether it be natural, or spiritual, or celestial, abides there as memory-knowledge, and is brought forth thence by the Lord. These knowledges are the “waters gathered together into one place,” and are called “seas,” but the external man himself is called the “dry [land],” and presently “earth,” as in what follows.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셋째 날, 곧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는’ 장면이 인간 거듭남에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풀어 주는 핵심 연결 고리입니다. 앞선 글들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이 세워졌다면, 이제 그 둘 사이의 ‘유입과 저장의 질서’가 설명됩니다. 거듭남은 단지 내면에서 무언가가 일어나는 사건만이 아니라, 기억과 삶의 차원에서도 실제로 무언가가 일어나는, 축적되는 과정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중요한 전제를 다시 확인합니다. 진리(truths)와 선(goods)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으로 흘러 들어옵니다. 그러나 이 유입은 대부분의 사람들한테 있어서는 이런 순서로 인식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이해하고, 자기가 느끼고, 자기가 선택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그러나 실제로는 그 모든 것이 속 사람을 통해 조용히 유입된 결과입니다. 이것이 영적 실상입니다. 이 ‘보이지 않는 유입’을 알게 되는 것, 이런 영적 실상에 대해 눈이 떠지는 것, 이것이 거듭남의 중요한 인식 단계입니다.

 

이렇게 유입된 진리와 선이 어디로 가는가 하면, 겉 사람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저장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매우 분명히 말합니다. 자연적인 지식이든, 영적인 지식이든, 아니면 천적인 지식이든, 한 번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온 것은 모두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으로서 그곳에 머뭅니다. 즉, 기억은 단순한 정보 창고가 아니라, 주님이 언제든지 꺼내어 사용하실 수 있는 ‘영적 저장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기억 지식이 인간의 소유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기억 속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주님은 적절한 때에, 적절한 질서로, 필요한 지식을 기억에서 꺼내어 삶과 사고에 연결시키십니다. 이는 거듭남이 인간의 계획이나 통제가 아니라, ‘주님의 섭리에 의해 조율되는 과정’임을 다시 한번 보여 줍니다.

 

이제 창세기의 표현이 상응으로 해석됩니다. 기억 속에 저장된 이 모든 지식이 ‘한곳으로 모인 물’입니다. 물은 진리의 지식을 뜻하고, 그것들이 한곳으로 모인다는 것은 이렇게 모인 지식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지 않고, 기억이라는 한 영역 안에 정돈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가리켜 ‘바다’라고 합니다. 바다는 넓고 깊으며, 겉으로 보기에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풍부한 내용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겉 사람 자체는 ‘마른 땅’으로 불립니다. 이는 겉 사람이 그 자체로는 생명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마른 땅은 씨앗을 받아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겉 사람은 속 사람을 통해 유입된 진리와 선이 있어야만 의미 있는 활동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때 비로소 겉 사람은 단순한 ‘마른 땅’을 넘어 ‘(earth)이라 불리게 됩니다. 이는 다음 단계에서 생명 있는 것이 나타날 준비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글은 거듭남의 중요한 균형을 가르쳐 줍니다. 한편으로는,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들이 인간의 기억과 삶의 영역에 실제로 저장되고 사용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거듭남은 인간을 수동적인 그릇으로 만들지 않고, 기억과 사고와 행위를 지닌 ‘살아 있는 협력자로 세웁니다’.

 

또한 이 설명은 왜 말씀과 교훈, 설교와 배움이 거듭남에서 중요한지를 잘 보여 줍니다. 지금 당장 이해되지 않거나 감동 없는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기억 속에 저장되면, 언젠가 주님에 의해 기억-지식이라는 바다에서 불려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관점에서 보면, 헛된 배움은 없습니다. 모든 참된 것과 선한 것은, 때를 기다리며 바닷속에 모여 있습니다.

 

결국 AC.27은 셋째 날의 준비 단계입니다. 물들이 모이고 땅이 드러난 뒤에야, 비로소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가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진리와 선에 관한 수많은 지식이 기억 속에 질서 있게 모이고, 겉 사람이 그 자리를 갖춘 뒤에야 삶의 실제 변화가 시작됩니다. 이 질서는 느리지만 확실하며, 언제나 주님의 손안에서 진행됩니다.  

 

 

심화

 

1.나중에 필요에 따라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AC.27 본문에 나오는 위 표현은 스베덴보리 사상을 처음 접하는 분들이 거의 반드시 멈칫하는 부분입니다. ‘지식이 필요할 때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진다’라는 말은 자칫 들으면 ‘그럼 나는 아무 역할이 없다는 말인가?’라는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생각은 인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주님의 협력 구조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균형을 이해하면 오히려 인간의 역할이 더 분명해집니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기본 전제부터 정리해야 합니다. 그는 인간의 삶을 두 층으로 봅니다. 하나는 ‘생명의 근원’, 다른 하나는 ‘생명의 수용과 사용’입니다. 생명의 근원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생명을 받아서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자유로운 수용자’입니다. 전기는 발전소가 만들지만, 실제로 방을 밝히는 건 전등인 것과 같습니다.

 

기억도 이와 비슷한 구조로 설명됩니다. 사람이 공부하고, 경험하고, 생각하면서 기억을 쌓는 일은 분명히 인간의 활동입니다. 책을 읽고, 듣고, 배우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실제로 하는 일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이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기억 속에 있는 것들을 언제 어떻게 떠올리게 할지, 어떤 진리를 어떤 순간에 살아 움직이게 할지는 더 깊은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 말씀을 오래전에 읽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몇 년 뒤 어떤 어려운 상황을 겪으면서 순간 그 말씀이 갑자기 마음에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그 사람의 판단과 행동을 바꾸어 놓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험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경우를 두고 ‘주님이 기억 속에서 필요한 것을 불러내신다’고 설명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 어떤 목사님은 이런 경험을 하실 것입니다. 여러 책을 읽고 자료를 공부했는데, 막상 설교를 준비하는 순간 이전에 읽었던 내용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떠오릅니다. 어떤 때는 생각지도 않았던 구절이 딱 맞게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도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섭리 속에서 기억이 질서 있게 사용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균형은 이것입니다. 인간은 ‘지식을 배우고 쌓는 책임을 가지고 있고’, 주님은 ‘그 지식이 언제 어떻게 살아 움직일지 섭리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창고를 채우고, 주님은 그 창고를 질서 있게 사용하십니다. 둘 중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함께 작용합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처음 읽는 분들도 반감을 덜 느낍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노력과 책임이 분명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기억도 없습니다. 읽지 않으면 떠오를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억을 쌓는 일은 인간의 몫’입니다. 그러나 그 기억이 진리와 선을 위해 가장 적절한 순간에 사용되도록 이끄시는 것은 ‘주님의 섭리’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바로 이 균형을 강조합니다. 그는 인간이 마치 모든 것을 스스로 하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실제 삶에서는 그렇게 느끼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깊이 생각해 보면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마치 자기가 하는 것처럼(as of oneself)의 삶입니다.

 

사람은 공부하고, 경험하고, 생각하면서 기억을 쌓습니다. 그러나 그 기억이 언제 어떻게 살아 움직여 진리가 되고 지혜가 되는지는 더 깊은 섭리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열심히 배우고 기억을 쌓는 책임이 있고’, 주님은 ‘그 기억을 통해 사람을 이끄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분명해집니다. 인간은 배우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자유로운 협력자’이고,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생명과 질서 속에서 이끄시는 근원’입니다. 바로 이 두 요소의 균형이 스베덴보리 인간 이해의 핵심입니다.  

 

 

2.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혹시 위 심화 1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를 좀 자세히 알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각 사람에게 와있다는 천사나 선한 영들을 통해선가요, 아니면 퍼셉션 같은 영적 지각으로인가요?

 

AC.27에서 말하는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는 표현은 리메인스(remains)가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여기서 ‘거기’라는 것은 사람의 속 사람 안에 보존되어 있는 리메인스의 저장소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의 어린 시절부터 주님은 여러 선한 감정과 진리의 씨앗들을 그 속 사람 안에 저장해 두시는데, 이것들이 바로 리메인스입니다. 평소에는 그것들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마치 조용히 보관되어 있는 것처럼 있지만, 사람이 어떤 상황에 놓이거나 어떤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주님이 그것들을 ‘‘불러내어사용하신다’고 말합니다. 이때 ‘불러낸다’는 말은 기억 속에서 어떤 지식을 꺼내듯이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과 의지 안에 그 선과 진리의 감정을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작용’을 뜻합니다.

 

이 과정은 대체로 사람에게는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주님의 역사라는 사실을 거의 의식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어려운 상황에서 갑자기 ‘그래도 선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마음이 일어나거나, 어떤 진리를 들었을 때 이상하게 마음이 깊이 공감하며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순간들은 종종 사람이 자신의 양심이나 성격에서 나온 것처럼 느끼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런 작용 가운데 상당 부분이 ‘리메인스가 다시 활성화되는 순간’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오래전에 주님이 사람 안에 심어 두셨던 선과 진리의 씨앗이 그 순간 다시 살아나 사람의 생각과 의지를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질문하신 것처럼, 이 일이 ‘천사나 선한 영들을 통해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퍼셉션 같은 직접적인 영적 지각으로 이루어지는가’ 하는 문제는 스베덴보리의 인간 구조 이해와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결코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영적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에게는 항상 두 천사와 두 영이 함께 있으며, 이를 통해 인간은 영계와 연결된 상태에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인간에게 어떤 선과 진리를 작용시키실 때, 그 작용은 대부분 ‘천사들의 매개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천사들은 인간의 속 사람과 연결되어 있고, 그 속 사람 안에 있는 리메인스와 조화를 이루는 선과 진리를 사람에게 흘려보냅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가 불러내어지는 작용은 대체로 ‘주님 천사들 인간의 속 사람 인간의 생각과 의지’라는 질서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것을 직접적으로 ‘천사가 이렇게 했다’고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사람 자신의 생각과 감정처럼 느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주님의 섭리라고 설명합니다. 만약 사람이 그 선과 진리가 외부에서 강제로 들어온다는 사실을 명확히 느낀다면, 인간의 자유가 손상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그 작용이 ‘마치 사람 자신의 생각과 감정처럼 느껴지도록’ 하신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리메인스가 작용하는 순간에도 그것을 대개 ‘내 마음이 그렇게 움직였다’고 느끼게 됩니다.

 

퍼셉션(perception)은 이와 조금 다른 차원의 경험입니다. 퍼셉션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있었던 것으로 설명되는데, 그들은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거의 직접적으로 ‘느끼는’ 상태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직접적인 퍼셉션이 거의 없고, 대신 ‘양심(conscience)을 통해 주님의 작용이 전달됩니다. 그러므로 현대 인간에게서 리메인스가 불러내어질 때, 그것은 대개 퍼셉션의 형태가 아니라 ‘양심의 움직임이나 내적 깨달음’으로 나타납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 할 때, 마음속에서 ‘이건 옳지 않다’거나 ‘이렇게 하는 것이 선하다’는 조용한 감각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는데, 스베덴보리는 이런 양심의 작용 속에도 리메인스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AC.27에서 말하는 ‘주님이 거기에서 불러내신다’는 말은 한 가지 단일한 메커니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속 사람 안에 저장된 리메인스를 ‘천사들의 매개를 통해 다시 활성화하여 사람의 생각과 의지 안에 작용하게 하시는 주님의 섭리적 역사’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대개 자신의 양심이나 깨달음처럼 느껴지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바로 주님이 인간을 거듭남의 길로 이끄시기 위해 리메인스를 사용하시는 방식입니다.

 

 

 

AC.28, 창1: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창1:10)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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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 창1:8,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창1:8) AC.26 ‘저녁’(evening), ‘아침’(m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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