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EO.003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성부는 신성의 유일한 근원이시다’ - 성부의 군주성과 신적 일치의 문제

 

해설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에서 특별히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성부는 신성의 유일한 근원이시다’라는 고백입니다. 처음 이 말을 들으면 성부 하나님이 성자와 성령보다 더 높으신 분이며, 성자와 성령은 성부에게서 신성을 받아 존재하는 종속적인 신적 존재들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는 이러한 이해를 분명하게 거부합니다. 정교회가 말하는 ‘성부의 군주성’(monarchy of the Father)은 성부가 다른 두 위격보다 더 강하거나 더 높은 신성을 소유한다는 뜻이 아니라, 성부가 성자의 영원한 출생과 성령의 영원한 발출의 유일한 인격적 근원이시라는 뜻입니다.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고 성령은 성부에게서 영원히 발출하시지만, 세 위격은 동일한 신적 본질을 완전하게 공유하십니다. 따라서 성자와 성령은 피조물이 아니며, 성부보다 늦게 존재하기 시작하신 분들도 아닙니다. 정교회는 오히려 성부의 군주성을 통해 하나님의 일치를 설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성부가 신적 존재의 유일한 근원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일치는 성부라는 한 위격으로부터 설명되어야 합니까, 아니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하나를 이루는가 하는 문제에서 출발해야 합니까? 이 질문은 동방정교회와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 신학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동방정교회의 성부의 군주성은 초기 교부들의 삼위일체 논의, 특히 4세기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대 바실리오스(Basil the Great),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Gregory of Nazianzus), 니사의 그레고리오스(Gregory of Nyssa)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완전하게 인정하면서도, 세 위격의 구별과 하나님의 일치를 함께 설명하려 했습니다. 이때 성부는 성자와 성령의 ‘원인’(aitia) 또는 ‘근원’(arche)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인이라는 말은 자연계에서 어떤 물건을 만들어 내거나 시간적으로 먼저 존재한 존재가 뒤의 존재를 발생시키는 인과관계와 다릅니다. 성부는 성자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낳으시며, 성령을 만들어 내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영원한 발출 근원이십니다. 따라서 성자와 성령은 성부에게서 비롯되지만 성부와 동일하게 영원하시고, 동일하게 신성이시며, 동일하게 예배와 영광을 받으십니다. 미국 정교회(OCA)의 교리 해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까닭을 한 분 성부에게서 설명하면서,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분리되지 않고 동일한 신적 생명 안에 계신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성부가 세 위격 가운데 가장 높은 신이라는 뜻이 아니라, 세 위격의 영원한 관계를 성부의 근원성으로 설명하는 정교회 특유의 신학적 구조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용어상의 문제를 정확히 구별해야 합니다. ‘성부는 신성의 유일한 근원이시다’라는 표현은 동방정교회의 핵심 사상을 전달하지만, 자칫 신적 본질 자체가 성부보다 나중에 생겨났거나, 성부가 어떤 신성을 먼저 소유한 다음 그것을 성자와 성령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오해를 낳을 수 있습니다. 정교회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세 개의 신적 본질을 각각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하고 나뉠 수 없는 하나의 신적 본질을 완전하게 공유하십니다. 성부의 근원성이란 이 공통된 신적 본질보다 앞서 존재하는 별도의 원인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성자와 성령이 각각 성부와 맺는 영원한 위격적 관계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성부는 성자의 아버지이시고 성령의 발출 근원이시지만, 그 때문에 성자와 성령보다 더 신적이신 것은 아닙니다. 성자의 출생과 성령의 발출은 그 방식에서 구별되지만, 두 위격의 신성에는 어떠한 등급 차이도 없습니다. 또한 정교회는 성부의 군주성을 강조하면서도 세 위격이 하나의 신적 의지와 하나의 신적 역사하심을 공유한다고 가르칩니다. 성부께서 홀로 결정하시고 성자와 성령이 그 결정에 복종하는 세 신적 주체의 협력 구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교회의 가르침을 공정하게 이해하려면 ‘성부가 유일한 근원’이라는 말과 ‘세 위격이 동일한 신성’이라는 말을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동방정교회가 이러한 가르침의 근거로 중요하게 여기는 말씀 가운데 하나는 요15:26입니다. 예수께서는 진리의 성령이 아버지에게서 나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정교회는 여기서 성령의 영원한 발출이 성부에게서 이루어진다는 가르침을 확인합니다. 또한 요5:26에서는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고 말씀하시며, 요1:18에서는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아버지를 나타내셨다고 증언합니다. 정교회는 이러한 말씀들을 성자와 성령의 영원한 위격적 관계와 연결하여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동시에 요10:30에서 예수께서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라고 말씀하신 사실을 기록하며, 요14:9-11에서는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고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계신다고 가르치신 사실을 전합니다. 따라서 성경에는 성부가 근원이시라는 이해를 뒷받침하는 표현과 성부와 성자의 완전한 일치를 증언하는 표현이 함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말씀들이 성부와 성자의 영원한 두 위격적 관계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성육신하신 한 분 주님 안에서 근원적인 신성과 그 신성이 취하신 인성의 관계를 나타내는지를 분별하는 일입니다. 성경의 본문 자체와 그 본문을 해석하는 신학적 체계를 구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점에서 동방정교회와 스베덴보리는 동일한 성경을 읽으면서도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163-169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적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그것을 세 영원한 신적 위격의 관계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 안의 세 가지 본질적인 요소로 이해합니다. 그는 이를 인간의 영혼과 몸과 활동에 비유합니다. 인간에게 영혼과 몸과 활동이 있다고 해서 세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 하나님 안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있다고 해서 세 신적 인격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부는 한 분 주님 안의 근원적인 신성이시며, 성자는 그 신성이 성육신을 통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이시고,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하심입니다. 특히 TCR.167에서 스베덴보리는 성부의 신성이 주님의 영혼에 해당하고, 성자의 신적 인성이 그 영혼과 하나를 이루는 몸에 해당하며, 성령은 영혼과 몸이 하나 되어 나타내는 활동에 해당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비유의 목적은 하나님의 신비를 인간의 구조로 축소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이 본질과 인격 모두에서 한 분이심을 이해하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성부는 신적 근원이시지만, 그 성부는 성자와 구별되어 영원히 존재하는 별도의 신적 인격이 아닙니다. 성부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근원적인 신성이시며, 성자는 그 신성이 자신을 나타내신 신적 인성이십니다. 바로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동방정교회의 성부의 군주성과 근본적으로 달라집니다.

 

이 차이를 이해할 때 특별히 중요한 것은 성육신과 영화의 관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의 교리’(Doctrine of the Lord, 1763) DL.29-36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을 취하여 세상에 오셨으며, 지상 생애 동안 자신의 인성을 점차 영화롭게 하심으로써 신성과 인성을 완전하게 하나로 만드셨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영화’(glorification)는 단순히 예수께서 부활 후 영광스러운 지위에 오르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유한한 인간적 상태를 시험과 승리를 통해 벗으시고, 자신의 근원적인 신성으로부터 신적 인성을 이루신 과정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본래부터 따로 존재하던 두 신적 인격이 영원히 관계를 맺는 구조가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서 근원적인 신성과 그 신성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인성의 관계로 이해됩니다. 요14:10에서 주님께서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신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영혼이 몸 밖에 따로 있는 또 다른 사람이 아니듯, 성부는 성자 밖에 계신 또 다른 신적 인격이 아니라 주님 안에 계신 신성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부와 성자의 구별을 단순한 명칭의 차이로 없애 버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성과 인성의 실제적인 구별과 그 결합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그 결과가 한 분 신적 인격 안의 완전한 일치라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스베덴보리의 신론에서는 성부의 근원성을 성자와의 영원한 위격적 관계보다 주님 자신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정교회가 강조하는 성부의 군주성 안에는 어떤 진리가 담겨 있습니까? 우선 하나님 안에 둘 이상의 독립적인 신적 근원이 존재할 수 없다는 통찰입니다. 정교회는 성부를 유일한 근원으로 고백함으로써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 하나님이라는 이해를 거부합니다. 또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경쟁이나 권력의 서열이 아니라 하나의 신적 생명과 사랑과 의지 안의 완전한 일치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여러 신적 권력으로 나누어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이러한 일치의 중요성을 강하게 강조합니다. 다만 그는 하나님의 유일한 근원을 성부라는 한 위격에 두면서도 성자와 성령을 별개의 영원한 위격으로 인정하는 구조가 신적 인격의 완전한 단일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고 봅니다. 동방정교회가 ‘한 근원으로부터 세 위격이 완전한 일치를 이룬다’고 설명한다면, 스베덴보리는 ‘한 분 하나님 안에 근원적인 신성과 신적 인성과 신적 역사하심이 완전한 일치를 이룬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두 견해를 단순히 같은 진리를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정교회에서 영원한 세 위격의 실재는 포기할 수 없는 신앙의 내용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의 인격적 단일성은 바로 그러한 세 위격의 영원한 구별을 거부하는 핵심적인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성부께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실제 신앙의 문제에서도 드러납니다. 동방정교회의 예배는 성부께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나아가는 구조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것은 성자와 성령이 성부보다 열등하므로 인간이 그분들을 거쳐 더 높은 하나님께 도달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동등하게 예배하며, 성자를 통하고 성령 안에서 성부께 나아간다는 표현을 세 위격의 구별과 하나의 신적 역사하심을 드러내는 전례적 언어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정교회 신자의 기도를 마치 두 신적 중개자를 통하여 멀리 계신 성부의 허락을 얻으려는 행위처럼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인간 사이에 서 계신 또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성부의 신성이 그분 안에 완전하게 계시기 때문입니다. 요14:6에서 주님께서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한 신적 인격을 거쳐 다른 신적 인격에게 접근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신적 인성을 통하여 그분 안에 계신 근원적인 신성에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성부를 제외하고 성자만을 향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적 삼위일체가 완전하게 하나를 이루시는 주님 자신께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성부를 근원적인 신성이라고 부르고 성자를 신적 인성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신성만이 참된 하나님이고 인성은 그보다 낮은 어떤 피조물적 부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영화된 인성은 더 이상 마리아에게서 받은 유한한 인간적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성과 완전하게 결합하여 신적 인성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신성에 관해서만 하나님이신 것이 아니라 인성에 관해서도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이해는 하나님을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진 보이지 않는 절대자로만 생각하지 않도록 합니다. 보이지 않는 신성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셨으므로, 우리는 주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성부는 근원적인 신성이시다’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에도 성부가 성자보다 더 완전한 하나님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성과 신적 인성의 결합을 영혼과 몸의 일치에 비유하지만, 그 비유는 신적 인성이 신성보다 열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몸은 유한하고 피조된 것이지만, 주님의 영화된 인성은 신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 이해를 정확하게 설명하려면 ‘성부는 신성, 성자는 인성’이라는 간단한 공식에 머물지 않고, 성자는 신성과 완전히 하나가 된 ‘신적 인성’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이 문제는 우리의 실제 신앙생활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을 멀리 계신 두려운 권위자로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분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자비로운 중보자로 여긴다면, 그의 신앙 안에는 서로 다른 두 신적 성품에 대한 관념이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을 동방정교회의 성부의 군주성에서 직접 도출해서는 안 됩니다. 정교회 역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동일한 신적 사랑과 선과 지혜를 공유하신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단일성이 우리의 실제 생각과 기도 속에서 어떻게 보존되고 있는지는 어느 교회에 속한 신자든 살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이 점에서 한 분 주님께 우리의 이해와 사랑을 집중하도록 안내합니다. 주님께서 사랑이시고 지혜이시며, 그분 안에 근원적인 신성이 완전하게 계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 안에 서로 대립하는 사랑과 의지가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의 이름을 부르거나 하나님의 신비에 관한 올바른 개념을 소유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자신의 의지와 이해 안에 받아들이고, 이웃을 사랑하며,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치를 고백하면서 자신의 삶에서는 사랑과 진리를 분리한다면, 그 신앙고백은 아직 자신의 내면에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입니다.

 

성부의 군주성이라는 어려운 교리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진리는,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이해가 인간을 겸손하게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정교회의 교부들이 성부의 근원성과 세 위격의 일치를 설명하려 했던 것은 하나님을 인간의 철학적 개념 속에 완전히 가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경이 증언하는 신적 신비를 훼손하지 않으려는 노력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인간이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알아볼 수 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으며, 그 계시의 중심이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두 전통의 차이를 분별할 때 우리는 교리적 정확성만으로 상대방의 신앙 전체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정교회의 삼위일체 신앙 안에서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한다면, 그의 내면에 있는 사랑과 선을 교리적 차이만으로 부정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의 신론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교리적 우월성을 주장하거나 다른 신앙인을 멸시하는 근거가 된다면,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와 반대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교리는 인간을 주님께 인도하고, 주님을 향한 사랑이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도록 도와야 합니다. 신학적 분별은 중요하지만, 그 분별의 최종 목적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 그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이제 처음의 고백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성부는 신성의 유일한 근원이십니까? 동방정교회는 성부를 성자와 성령의 영원한 위격적 근원으로 고백하며,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유일성과 세 위격의 완전한 신적 일치를 설명합니다. 이 가르침에는 하나님 안에 독립적인 여러 근원이 존재할 수 없으며, 신적 생명과 사랑과 의지는 하나라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성부의 근원성을 세 영원한 위격 가운데 한 위격의 고유한 특성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에서뿐 아니라 인격에서도 한 분이시며, 성부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근원적인 신성이시고, 성자는 그 신성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이시며,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하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부의 신성을 참되게 알고자 한다면, 그 신성이 자신을 완전하게 나타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신 요14:9의 선언은 바로 이러한 이해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서로 다른 세 신적 인격을 마음속에 조합하여 하나로 생각해야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사랑과 지혜와 생명을 나타내신 한 분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부의 군주성을 설명하는 신학적 공식을 완성하는 데 있지 않고, 주님 안에 계신 근원적인 신성을 깨닫고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실제 삶에서 그분과 결합하는 데 있습니다. (EO.003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는 성부를 성자의 영원한 출생과 성령의 영원한 발출의 유일한 위격적 근원으로 고백하며, 이를 ‘성부의 군주성’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성부가 성자와 성령보다 더 높은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라, 세 위격이 동일한 신적 본질과 의지와 역사하심을 공유하면서도 성부에게서 영원한 관계의 근원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하나님의 유일성과 신적 일치를 보존하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성부의 근원성을 세 영원한 신적 위격 가운데 한 위격의 특성으로 이해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근원적인 신성으로 이해합니다. 성자는 그 신성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이시며,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하심입니다. 따라서 동방정교회와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유일성을 함께 강조하면서도, 신적 근원과 삼위일체의 구조를 설명하는 방식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성부의 신성을 성자와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전하게 나타나신 한 분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께 직접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앙은 교리적 지식에 머무르지 않고,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여 이웃을 위한 선한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EO.002. ‘하나님은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SL.EO.002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 삼위일체의 일치와 구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해설기독교 신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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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EO.002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 삼위일체의 일치와 구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해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심적이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 가운데 하나는 삼위일체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고백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각각 신적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고백은 어떻게 함께 성립할 수 있습니까? 동방정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은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본질’(ousia)은 하나님께서 무엇이신가를 가리키고, ‘위격’(hypostasis)은 하나님께서 누구이신가를 가리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지시지만 서로 구별되는 세 위격이십니다. 그렇다고 세 하나님이 계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동방정교회는 세 위격이 하나의 신적 생명과 본질을 완전하게 공유하시며, 그 일치에는 어떠한 분열이나 대립도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라는 것은 하나의 신적 본질이 존재한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자신이 한 분의 신적 인격이시라는 뜻입니까? 이 질문은 단순한 신학적 개념의 차이를 넘어, 우리가 기도하고 예배하며 사랑하는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가 하는 문제와 직결됩니다. 동방정교회와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 이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중요한 공통점과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냅니다.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 교리는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과 교부들의 신학적 논의를 통해 정교하게 형성되었습니다. 특히 325년 니케아 공의회는 성자가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다는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를 고백함으로써 성자가 하나님보다 낮은 피조물이라는 아리우스주의를 배격했습니다. 이어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는 성령의 신성과 영광을 명확하게 고백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립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오늘날에도 동방정교회 신앙의 중심에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교회가 삼위일체를 인간의 추론으로 만들어 낸 철학적 공식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정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교회의 신앙이 성경과 예배, 그리고 살아 있는 신앙 경험에 근거한다고 설명합니다. 교부들이 본질과 위격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을 인간의 개념 안에 완전히 가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일치와 성부·성자·성령의 구별을 동시에 보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정교회의 입장에서 삼위일체는 세 신을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가 아니며, 반대로 한 하나님이 단순히 세 가지 이름으로 나타나신다는 주장도 아닙니다. 세 위격은 실제로 구별되지만 결코 분리되지 않으며, 하나의 신적 본질을 완전하게 공유하신다는 것이 정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구별을 이해하려면 동방정교회가 ‘위격’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방식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인격’이나 ‘사람’이라고 말할 때에는 대개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독립적인 의식과 의지와 행동의 주체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교회가 말하는 세 신적 위격을 이러한 인간적 개념으로 그대로 이해하면 세 하나님을 상상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정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 경쟁하거나 협의하여 결정을 내리는 세 신적 개인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세 위격은 하나의 신적 의지와 하나의 신적 역사하심을 공유하시며, 성부께서 행하시는 신적 일에 성자와 성령께서 분리되어 계시지 않습니다. 또한 정교회는 세 위격의 구별을 단순히 창조와 구속과 성화라는 서로 다른 역할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부는 성자를 영원히 낳으시고 성령의 발출 근원이 되시며,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고, 성령은 성부에게서 영원히 발출하신다는 위격적 구별을 인정합니다. 여기서 ‘낳으심’과 ‘발출’은 시간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영원한 신적 관계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성부가 성자보다 먼저 존재하셨다거나, 성자가 성부보다 열등하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정교회의 삼위일체 교리를 비판하거나 비교하려면 먼저 이처럼 정교회 자신이 세 위격의 독립성과 하나님의 단일성을 어떻게 구별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라는 선언과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관한 구별된 표현이 함께 나타납니다. 신6:4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오직 유일하신 여호와이심을 선포하며, 사45:5는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예수께서도 막12:29에서 이 고백을 다시 확인하셨습니다. 한편 마3:16-17의 예수님 세례 장면에는 세례받으시는 예수님과 비둘기같이 내려오시는 성령,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이 함께 등장합니다. 마28:19에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시며, 요14:16에서는 예수께서 아버지께 구하여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동방정교회는 이러한 성경의 증언을 통해 하나님은 한 분이시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 위격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성경 구절들이 곧바로 ‘하나의 본질 안에 세 위격’이라는 완성된 교리적 공식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공식은 성경의 여러 증언을 종합하고 해석하는 교회의 신학적 언어입니다. 따라서 신학적 분별에서 중요한 것은 성경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세 이름이 등장하는가 하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 이름들이 과연 세 영원한 신적 위격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한 분 하나님 안에 있는 신적 구별을 나타내는지를 살펴보는 일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 이해와 근본적으로 갈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163-184에서 삼위일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적 삼위일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는 세 위격이 영원부터 구별되어 존재하신다는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가 하나님의 참된 단일성을 인간의 생각 속에서 훼손한다고 봅니다. TCR.166-169에서 그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한 분 하나님 안에 있는 세 가지 본질적인 요소로 설명하면서, 인간의 영혼과 몸과 활동이 한 사람을 이루는 것에 비유합니다. 이 비유에서 성부는 영혼에 해당하는 근원적인 신성이시고, 성자는 그 신성이 자신을 나타내신 신적 인성이시며, 성령은 그분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하심입니다. 영혼과 몸과 그 활동을 서로 구별할 수는 있지만, 그것들이 각각 독립적인 세 사람을 이루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신적으로 구별되지만 세 분의 신적 인격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신적 삼위일체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을 ‘주의 교리’(Doctrine of the Lord, 1763) DL.55에서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본질에서뿐 아니라 인격에서도 한 분이시며, 그 하나님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단순한 양태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양태론은 일반적으로 한 하나님이 시대나 상황에 따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신다고 설명하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단순한 역할이나 임시적인 가면으로 환원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 안에 실제적인 신적 삼위일체가 존재한다고 인정하면서, 그 삼위일체가 세 신적 인격으로 나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동시에 그의 견해가 동방정교회의 세 위격 교리와 양립할 수 없는 것도 분명합니다. 정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영원한 위격적 구별을 신앙의 본질적인 내용으로 보지만, 스베덴보리는 영원부터 세 신적 위격이 존재했다는 개념 자체를 비판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TCR.170-171에서 스베덴보리는 성육신 이전부터 세 위격의 삼위일체가 존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입으심으로써 구속주이자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적 삼위일체가 이루어졌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성육신 이전에 하나님 안에 어떠한 구별이나 신적 역사도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를 성육신 이전부터 존재한 세 영원한 인격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 차이는 용어를 조정하여 쉽게 해소할 수 있는 차이가 아니라 두 신학 체계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출발점 자체에 관한 차이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성경에서 성부와 성자께서 서로 말씀하시고, 성자께서 성부께 기도하시며, 성령께서 보내심을 받으시는 장면들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그의 설명에서는 성육신하신 주님 안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이며, 지상 생애 동안 유전받은 인간적 상태를 통과하시면서 시험을 이기시고 자신의 인성을 점차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성부께 기도하시는 모습은 본래부터 분리되어 존재하는 두 신적 인격 사이의 대화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영화의 과정에 있는 인성과 그 안에 계신 근원적인 신성 사이의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14:10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시며, 요14:9에서는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선언하십니다. 또한 요10:30에서는 자신과 아버지가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말씀을 통해 성부와 성자의 일치가 단순히 뜻과 목적의 일치가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의 실질적인 신적 일치임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는 바로 이 구절들을 성부와 성자의 동일 본질과 상호 내재를 증언하는 말씀으로 이해하면서도, 두 위격의 구별을 유지합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쪽이 특정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는 사실만으로 논쟁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동일한 말씀을 어떤 신론적 구조에서 이해하는가가 핵심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하나님을 설명하는 방법에 그치지 않고 신앙과 예배의 실제적인 방향에도 영향을 줍니다. 동방정교회 신자는 성부께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나아간다는 전례적 구조 속에서 기도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함께 예배합니다. 정교회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일치는 서로 구별되는 세 위격의 완전한 신적 친교이며, 교회 역시 이러한 일치를 본받아 사랑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도록 부름받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 안에 분열이나 경쟁이 없으며, 참된 신앙은 사랑과 일치를 지향해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기도하고 예배할 때 마음속에 하나의 신적 인격을 향한 분명한 관념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만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각각 독립된 세 신적 주체로 상상한다면, 입으로는 한 하나님을 고백하면서 실제 생각 속에서는 세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TCR.172-173에서 이러한 문제를 특별히 비판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정교회 신자가 실제로 세 하나님을 믿는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정교회는 바로 그러한 삼신론을 명시적으로 배격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비판은 정교회 신자 개개인의 내면을 판정하는 말이 아니라, 세 영원한 위격이라는 교리적 구조가 인간의 하나님 관념에 가져올 수 있는 문제를 지적하는 신학적 비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더 깊은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누구를 사랑한다는 뜻입니까? 어떤 사람이 성부 하나님을 엄격하고 두려운 심판자로 생각하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그 심판자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자비로운 중보자로 여기며, 성령을 두 분 사이에서 인간에게 능력을 전달하는 또 다른 신적 존재로 상상한다면, 그의 하나님 이해에는 심각한 분열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이 정교회의 공식 교리에서 필연적으로 나온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정교회 역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하나의 신적 사랑과 의지와 역사하심을 공유하신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잘못된 관념이 실제 신앙생활에 자리 잡을 가능성은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이 문제를 더욱 근본적으로 다룹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한 분 하나님이시며, 성부의 신성과 성자의 신적 인간과 성령의 역사하심은 서로 다른 사랑이나 상충하는 의지를 가진 세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사랑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분에게서 나오는 진리와 생명 또한 동일한 신적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참되게 안다는 것은 어떤 신적 인격의 자비를 얻어 다른 신적 인격의 진노를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충만하게 나타난 신적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결국 인간의 거듭남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을 한 분으로 고백한다는 것이 단순히 신학적 명제를 받아들이는 데 그친다면, 그 고백은 인간의 이해 안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 자체이시고, 그 사랑과 지혜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신자는 자신의 삶에서도 사랑과 진리가 결합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서 이웃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을 행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신의 ‘프로프리움’(proprium)을 섬기는 삶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고백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면서, 이해와 의지가 점차 하나의 영적 생명으로 결합해 가는 과정입니다. 물론 인간의 이해와 의지의 결합을 하나님의 신적 삼위일체와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이며, 신적 생명을 자신의 소유로 만드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치를 참되게 인정하는 신앙은 인간 안에서도 분열된 삶을 극복하고, 아는 진리와 행하는 선이 일치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삼위일체 교리는 추상적인 신학 논쟁에 머무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을 어떻게 살아 내는가 하는 실제적인 신앙의 문제입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으로 존재하십니까? 동방정교회는 그렇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완전한 신성과 하나님의 분리될 수 없는 일치를 보존하려는 오랜 교회의 신학적 노력에서 형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를 단순히 세 하나님을 믿는 교리라고 규정하는 것은 정교회 신앙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보면 중요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한 본질이시라는 고백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신적 인격에서도 한 분이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적 삼위일체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세 영원한 위격의 일치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안의 신적 일치로 이해합니다. 결국 두 전통은 하나님의 유일성과 신적 사랑의 완전한 일치를 함께 고백하지만, 그 일치의 구조를 설명하는 방식에서는 근본적으로 갈라집니다. 이러한 차이를 분별할 때 우리는 상대 전통의 진지한 신앙고백을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성경이 증언하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해 더욱 깊이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따라 그 질문의 중심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머릿속에서 세 분으로 나누어 생각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신적 사랑과 지혜를 완전하게 드러내신 한 분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의 목적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설명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한 분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EO.002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의 신적 본질을 공유하면서도 서로 구별되는 세 위격으로 영원히 존재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세 하나님을 인정하는 삼신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한 일치와 세 위격의 실질적인 구별을 함께 보존하려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일치가 본질에서뿐 아니라 인격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안에 있는 신적 삼위일체로 이해합니다. 두 전통은 하나님의 유일성과 신적 사랑의 일치를 함께 인정하지만, 세 위격의 영원한 실재 여부와 신적 일치의 구조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세 신적 주체로 나누어 상상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한 분 주님을 신앙과 예배의 중심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은 교리적 이해에만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 받은 사랑과 진리가 하나 되어 실제 삶의 선으로 나타나는 거듭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EO.003. ‘성부는 신성의 유일한 근원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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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O.001.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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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EO.001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신다’ - 하나님을 안다는 것과 알 수 없다는 것의 경계

 

해설

동방정교회 신학을 처음 접할 때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신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이시며 지혜이시고, 전능하시며 전지하시고,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는 이러한 고백들이 아무리 참되고 거룩하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하나님의 본질을 다 이해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고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이성과 언어와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설명하려 할 때, 그 설명은 언제나 인간의 유한한 이해 안에 머무릅니다. 이러한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간의 관념 속에 가두지 않으려는 신앙적 겸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면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얼마나 알 수 있으며, 그분을 어떻게 사랑하고 그분과 실제로 결합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동방정교회의 신비신학과 스베덴보리의 신학이 만나는 첫 번째 질문입니다.

 

동방정교회는 이러한 문제를 오래전부터 ‘부정신학’(apophatic theology)이라는 전통 속에서 다루어 왔습니다. 부정신학이란 하나님께 무엇이 있다고 말하기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피조물의 어떤 개념으로도 완전히 규정할 수 없는 분이라고 고백하는 신학적 접근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선하시지만 인간이 경험하는 선함의 한계를 초월하시고, 지혜로우시지만 인간의 지성이 이해하는 지혜보다 무한히 높으시며, 존재하시지만 피조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으십니다. 이러한 설명은 하나님에게 선이나 지혜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모든 선과 지혜의 근원이시므로 인간이 사용하는 개념만으로는 그분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동방정교회는 이와 함께 하나님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하는 ‘긍정신학’(cataphatic theology)도 인정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생명이시고 진리이시라는 성경의 증언은 참되지만, 그러한 긍정적 진술조차 하나님의 무한하신 실재를 다 담아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정신학과 긍정신학은 서로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경계를 함께 보여 줍니다.

 

이러한 전통을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8세기 신학자 다마스쿠스의 요한(John of Damascus)입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정통신앙 해설’(An Exposition of the Orthodox Faith) 제1권에서 하나님의 신성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며,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 이상으로 그분의 본질을 규정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완전한 무지 속에 남겨 두신 것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영원하시고, 시작과 끝이 없으시며, 선하시고, 지혜로우시고, 모든 것의 창조주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 안에서 실제로 어떠한 분이신지를 피조물의 지성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구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관한 참된 지식을 얻는 것과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 전체를 파악하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전자는 계시를 통해 가능하지만, 후자는 피조물에게 불가능합니다. 미국 정교회(OCA)의 교리 해설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가장 내밀한 본질을 피조물에게 완전히 드러내지는 않으셨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충만하게 계시하셨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동방정교회가 고백하는 하나님의 불가해성은 결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영원히 넘을 수 없는 무지의 장벽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 문제를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요1:18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나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나타내셨다고 증언합니다. 출33:20에서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사55:8-9는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인간의 생각과 길보다 높다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들은 인간이 자신의 자연적 이해만으로 하나님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요14:9에서 예수께서는 빌립에게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시며, 요17:3에서는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가르치십니다. 따라서 성경에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말씀과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씀이 함께 있으며,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가르침과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도 함께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단순한 모순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연적 감각과 유한한 이성으로 포착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계시하실 때 인간은 그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참되게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신 분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관계를 맺도록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신 분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1763) DLW.17에서 하나님 안에는 무한한 것들이 구별되면서 하나를 이루고 있으며, 인간은 자연적 관념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것들을 완전히 지각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천사들 역시 인간보다 더 높은 영적 관념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무한하심 전체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동방정교회가 강조하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중요한 공통점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자신의 이해 안에 모두 담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높은 천국에 있는 천사라도 피조물이며, 피조물은 결코 무한하신 창조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 하나님에 대한 참된 관념 자체를 가질 수 없다는 뜻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모두 파악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방식에 따라 그분을 참되게 생각하고 사랑하며 그분과 결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관념은 무한을 유한한 개념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이 문제를 이해하는 핵심은 ‘하나님은 참으로 인간이시다’(God is very Man)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는 DLW.11에서 천국의 천사들이 하나님을 인간 형상으로 생각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연계의 인간처럼 물질적 신체를 가지셨다거나, 어떤 공간 속에 갇힌 유한한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 자체이시고, 모든 인간적 생명의 원형이시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창1:26-27의 말씀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것이지, 하나님께서 인간의 유한한 육체를 닮으신 것이 아닙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자신을 보이셨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 있는 별개의 신적 존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신성이 인간에게 보이도록 자신을 나타내신 ‘신적 인간’(Divine Human)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어떤 추상적 신성을 상상하는 데 머물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생명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동방정교회와 스베덴보리의 차이를 지나치게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동방정교회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참되게 알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정교회의 신비신학은 하나님을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진 추상적인 절대자로 남겨 두려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의 본질을 소유하거나 파악할 수 없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신적 에너지에 참여함으로써 그분과 실제로 결합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신적 에너지는 단순한 물리적 힘이나 하나님께서 만들어 내신 어떤 효과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창조되지 않은 역사하심을 가리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가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오는 ‘인플럭스’(influx)를 통해 인간에게 생명과 선과 진리를 공급한다고 설명합니다. 두 전통 모두 인간이 하나님을 자기 안에 소유하거나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해지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실제적인 신적 결합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만납니다. 그러나 정교회의 ‘본질과 에너지의 구별’과 스베덴보리의 ‘신적 사랑과 지혜의 인플럭스’를 완전히 같은 교리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각각의 개념이 전제하는 신론과 인간론, 그리고 신적 결합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는 이후 EO.006과 EO.007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게 됩니다.

 

그렇다면 두 전통의 차이가 실제 신앙생활에서는 어떻게 나타납니까? 어떤 신자가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시는 분이라는 말씀을 듣고, 자신은 하나님을 도저히 알 수 없으므로 모든 것을 신비로 남겨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심 앞에서 겸손해지는 것은 옳지만, 그 겸손이 하나님을 알아 가려는 노력 자체를 포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떤 신자가 성경과 교리를 많이 공부하여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은 이미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한다면 그것 역시 위험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소유하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 안에 실제로 살아가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동방정교회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앎이 지적 정보의 축적을 넘어 그분과의 살아 있는 결합을 향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진리가 인간의 이해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의지와 삶에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인정하면서도 그분을 알아 가고, 하나님을 알아 가면서도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지 않으며, 자신이 이해한 진리를 실제 삶 속에서 사랑과 선으로 실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고백하면서도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고, 하나님은 진리이시라고 고백하면서도 자신이 가진 교리적 지식을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증거로 삼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을지는 몰라도 그 이름에 담긴 생명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에 관한 전문적인 신학 지식은 많지 않더라도,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려 애쓰고,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지 않으며,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살피면서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사람은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 삶에 받아들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신학적 지식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참된 진리는 인간에게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가르치며, 의지가 주님의 사랑을 올바르게 받아들이도록 안내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지식의 많고 적음보다 그 지식이 어떤 사랑과 결합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영적 성숙은 진리를 많이 아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이해가 받아들인 진리가 의지의 사랑과 결합하여 삶의 선으로 나타날 때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결국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동방정교회의 이 고백에는 인간이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될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성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시며, 천사조차 하나님의 무한하심 전체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이 하나님을 참되게 알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성경이 증언하는 계시의 목적과 어긋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영원히 알 수 없는 분으로 남아 계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알고 사랑하며 자신과 결합하도록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동방정교회는 이 신비를 성육신과 신적 에너지에의 참여라는 언어로 설명하고, 스베덴보리는 신적 인간과 신적 사랑 및 지혜의 인플럭스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두 전통의 차이를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는 일과 하나님을 참되게 아는 일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참된 겸손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물러서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이 아는 하나님보다 하나님께서 무한히 크신 분임을 인정하면서도 그분이 주신 계시를 따라 계속 알아 가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결국 신앙의 목적은 하나님을 완전히 설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그분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EO.001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가 고백하는 하나님의 불가해성은 인간이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참된 겸손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과 하나님을 참되게 알 수 없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하나님은 무한하시므로 피조물이 그분을 모두 이해할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신적 인간으로서 인간이 알고 사랑하며 결합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결국 참된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포기하는 것도, 그 지식을 완전하다고 여기는 것도 아니라, 주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랑과 선한 삶으로 실현하는 데 있습니다.

 

 

 

EO.002. ‘하나님은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SL.EO.002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 삼위일체의 일치와 구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해설기독교 신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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