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35 심화

1.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은 처음부터 병행한 두 계열인가?’

 

창세기 4장과 5장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두 계열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옵니다. 창4에서는 가인에게서 에녹,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나오고, 창5에서는 아담에게서 셋을 거쳐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등으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계보가 나옵니다. 그래서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이 아담과 하와에게서 갈라져 처음부터 나란히 진행된 두 혈통이며, 하나는 점점 악해지고 다른 하나는 태고교회의 선한 흐름을 이어 갔다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AC.434-437을 함께 읽으면 스베덴보리의 속뜻으로는 이보다 훨씬 복잡한 교회적 흐름이 드러납니다.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AC.435입니다. 창4:25에는 아담과 그의 아내가 셋을 낳는 이야기가 나오고, 창5:1-4에는 다시 아담과 그의 아내와 셋의 출생이 나옵니다. 문자적으로는 같은 사람과 같은 사건이 반복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두 기록의 속뜻이 서로 다르다고 명시합니다. 창4:25의 ‘사람과 그의 아내’는 앞에서 아다와 씰라로 나타낸 ‘새 교회’를 뜻하지만, 창5:1-4에서는 ‘태고교회의 첫 후손’이 뜻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자적으로 동일한 아담, 하와, 셋을 속뜻에서도 반드시 하나의 동일한 교회나 동일한 상태로 대응시켜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창1과 창2의 관계를 들어 설명합니다. 두 장에는 사람의 창조와 피조물들이 반복해서 등장하지만, 창1에서는 영적 인간의 창조가, 창2에서는 천적 인간의 창조가 다루어진다고 합니다. 동일한 사람이나 사물이 반복될 때에는 ‘언제나 의미의 차이’가 있으며, 그 차이는 속뜻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4와 창5의 족보 역시 문자적 혈통의 관계를 그대로 속뜻의 교회 역사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더 결정적인 설명은 AC.436에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4에서 지금까지 전개된 내용을 직접 하나의 ‘연속적인 순서’로 정리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고, 아벨은 체어리티이며,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무도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표를 주심으로써 신앙을 보존하셨습니다. 그 목적은 그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가인의 표에서 바로 셋으로 건너뛰지 않습니다. 야발은 주님께서 신앙을 통해 주신 ‘사랑의 거룩한 것과 거기서 나오는 선’을, 유발은 ‘신앙의 영적인 것’을, 두발가인은 이들로부터 나온 ‘자연적 선과 진리’를 나타냅니다. 이어 창4의 마지막 두 절에서 ‘사람과 그의 아내’는 앞에서 아다와 씰라라고 불린 새 교회를, 셋은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통로가 되는 신앙을, 다음 절의 에노스는 그 신앙을 통해 실제로 심어진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마지막 두 절을 앞에서 전개된 ‘이 모든 것의 결론, 따라서 그 요약’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이 설명을 따르면 속뜻으로는 가인 계열과 셋 계열 사이에 문자적 족보에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강한 연속성이 있습니다. ‘가인 계열은 악한 계열이고 셋 계열은 선한 계열이며, 두 계열이 처음부터 서로 별개로 병행했다’고만 설명하면 AC.436의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가인에게서 보존된 신앙, 그 신앙을 통하여 주어진 여러 선과 진리, 아다와 씰라로 나타난 새 교회, 그리고 마침내 셋으로 나타난 새로운 신앙이 하나의 교회적 흐름 안에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다시 단순한 시간표로 만들어 ‘가인 계열이 완전히 끝난 다음 셋 계열이 시작되었다’고 단정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434-437은 각 교회가 정확히 어느 시기에 시작되고 끝났는지에 관한 역사적 연대표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AC.435는 같은 아담과 아내와 셋의 기록조차 창4와 창5에서 서로 다른 교회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문자적 족보의 시간 순서와 속뜻의 교회적 순서를 단순히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은 ‘태고교회’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도 빛을 줍니다. 태고교회라고 하면 창2에서 묘사된 천적 인간의 아름다운 상태만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면 가인과 라멕으로 이어지는 창4의 어두운 내용이 어떻게 태고교회와 관련된 역사 안에 그렇게 큰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창3 이후의 내용은 이미 처음의 천적 상태가 변하고 쇠퇴하며 여러 교회적 상태로 분화되는 과정을 다룹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와 그 후손’이라는 큰 흐름 안에 본래의 천적 상태와 크게 달라진 후대의 상태들이 나타난다고 해서 그 자체가 모순은 아닙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AC.434-437이 말하는 범위를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이 글들만으로 태고교회 전체의 역사적 연대나 각 교회의 존속 기간, 서로 겹쳐 존재했는지 여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창4의 모든 인물을 실제 역사적 집단의 정확한 연속 단계로 환산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분명히 밝히는 것은 ‘누가 언제 누구와 동시에 살았는가’보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어떻게 분리되고 소멸되었으며, 주님께서 남은 신앙을 어떻게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가 심어질 수 있는 새 교회를 마련하셨는가 하는 영적 연속성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4의 어두운 부분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읽힙니다.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이야기는 태고교회라는 밝은 역사에 우연히 끼어든 암흑기가 아닙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마침내 황폐에 이르는 과정과, 그럼에도 주님께서 신앙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 않으시고 보존하여 다시 교회를 일으키시는 과정이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가인의 표’는 그 전환에서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신 목적 자체가 장차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시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셋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등장합니다. AC.437에 따르면 셋은 ‘다른 씨’, 곧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다른 신앙’입니다. 가인 역시 신앙을 나타냈지만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었고, 셋은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입니다. 이어 에노스는 그 신앙을 통해 심어진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창4의 끝은 ‘악한 가인 계열 이야기를 끝내고 이제 선한 셋 계열로 넘어간다’는 단순한 계보 전환이라기보다, 분리되고 황폐해진 신앙과 체어리티가 주님의 섭리 가운데 새로운 질서로 다시 이어지는 결론으로 읽는 것이 AC.434-437의 설명에 더 가깝습니다.

 

결국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은 처음부터 병행한 두 계열인가?’라는 질문에는 문자적 족보와 속뜻의 교회적 의미를 구별하여 답해야 합니다. 문자적으로는 두 계보가 구별되어 기록되어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속뜻으로는 그것을 곧바로 서로 독립된 두 교회의 병행으로 옮겨 놓을 수 없습니다. 특히 창4에서는 가인으로 나타난 분리된 신앙의 보존에서 시작하여 셋으로 나타난 새로운 신앙, 그리고 에노스로 나타날 체어리티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연속적인 교회적 흐름이 제시됩니다. 그 흐름의 중심에는 인간의 두 혈통이 아니라, 인간이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무너뜨린 뒤에도 남은 것을 보존하시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시는 주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AC.435 심화 1)

 

 

 

AC.435, 창4:25, ‘같은 사람과 아내가 다시 나오는데 왜 다른 교회를 의미하는가?’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5여기서 ‘사람’(man)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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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7

여기서 ‘셋’(Seth)이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뜻한다는 것은 그의 이름으로 설명됩니다. 그의 이름이 그렇게 붙여진 것은 하나님께서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기’(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씨를 주셨다’(appointed another seed)는 것은 주님께서 다른 신앙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다른 씨’(another seed)는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씨’(seed)가 신앙을 뜻한다는 것은 앞의 AC.255에서 볼 수 있습니다. That “Seth” here signifies a new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is explained by his name, which it is said was given him because God “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 That God “appointed another seed” means that the Lord gave another faith; for “another seed” is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That “seed” signifies faith may be seen above (n. 255).

 

해설

AC.437은 창4:25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하면서 ‘셋’과 ‘다른 씨’가 왜 새로운 신앙을 뜻하는지를 밝힙니다. 앞의 AC.434에서는 셋이 ‘체어리티를 얻을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이라고 했고, AC.436에서는 그것을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통로가 되는 신앙’이라고 좀 더 분명하게 설명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 해석의 근거를 창4:25 자체의 ‘다른 씨’라는 표현과 셋의 이름에서 찾습니다.

 

먼저 중요한 것은 ‘다른’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단순히 다시 ‘씨’를 주셨다고 하지 않고 ‘다른 씨’(another seed)를 주셨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께서 다른 신앙을 주셨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여기서 ‘다른 신앙’은 신앙과 전혀 다른 어떤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가인으로 나타났던 신앙과는 성격이 달라진 신앙을 뜻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냈지만, 셋은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과 셋은 모두 신앙과 관계되지만,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맺는 관계가 서로 다릅니다.

 

이 차이는 AC.436에서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가인이 나타내는 분리된 신앙은 아벨이 나타내는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신앙 자체를 완전히 없어지게 하지 않으시고 ‘가인의 표’를 통해 보존하셨습니다. 그 목적은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AC.437의 ‘다른 씨’는 그 긴 과정의 결과를 나타냅니다. 가인과 같은 분리된 신앙이 그대로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로 이어질 수 있는 ‘다른 신앙’이 주님에 의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씨’가 신앙을 뜻할까요? 바로 이 점 때문에 AC.437은 AC.255를 참조합니다. AC.255는 창3:15의 ‘여자의 씨’(seed of the woman)를 설명하면서, ‘여자’(woman)는 교회를 뜻하고 그 교회의 ‘씨’는 신앙이라고 밝힙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주님을 믿는 신앙으로부터 교회가 교회라 불리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437에서 ‘다른 씨’가 ‘다른 신앙’을 뜻한다는 해석은 이번 글에서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앞에서 이미 세워진 ‘씨 = 신앙’이라는 상응에 근거합니다.

 

AC.255에 인용된 여러 성경 구절도 이 의미를 뒷받침합니다. 말2:14-15에서는 ‘하나님의 씨’(seed of God), 사44:3에서는 ‘네 씨’(thy seed), 계12:17에서는 여자의 ‘남은 자손’(remnant of her seed), 시89편에서는 다윗의 ‘씨’(seed)가 언급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가운데 특히 ‘여자’가 교회를 나타내고 그 교회의 ‘씨’가 신앙을 나타낸다는 관계를 밝힙니다. 그러므로 창4:25의 ‘다른 씨’ 역시 단순히 아벨 대신 태어난 또 하나의 육적인 후손이라는 의미를 넘어, 새 교회에 주어진 새로운 신앙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창4:25은 ‘아벨 대신에’ 다른 씨가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아벨은 앞에서 체어리티를 나타냈으므로, 여기에는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아벨이 체어리티라면 아벨을 대신하여 주어진 셋도 체어리티를 뜻해야 할 것 같은데, 스베덴보리는 셋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AC.434-437을 함께 읽으면 그 이유가 드러납니다. 셋은 아벨이 나타냈던 체어리티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체어리티가 다시 주어질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입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의 에노스가 ‘신앙을 통해 심어진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아벨 대신’이라는 말은 상응하는 의미가 단순히 ‘체어리티에서 체어리티로’ 일대일 교체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소멸된 체어리티가 다시 세워지기 위한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4:25의 구조가 상당히 정교합니다. 아벨이 나타내는 체어리티는 가인에 의해 소멸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마저 함께 소멸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보존하셨습니다. 그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사랑의 거룩한 것과 선, 신앙의 영적인 것, 자연적 선과 진리가 차례로 주어졌고, 마침내 셋이라는 ‘다른 씨’, 곧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다음 절의 에노스에서 그 신앙을 통해 심어진 체어리티가 나타납니다. 창4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처음의 가인과 아벨 문제를 다시 풀어 가는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주목해야 할 것은 주어가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씨를 주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다른 신앙을 주셨다는 뜻이라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스스로 자신을 고쳐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남아 있는 신앙을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새 교회를 준비하시며, 마침내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셋이 나타내는 새로운 시작의 중심에는 인간의 자기 회복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하심이 있습니다.

 

결국 AC.437에서 ‘셋’은 단순히 가인을 대신하는 또 하나의 인물도, 아벨을 대신하는 또 하나의 아들도 아닙니다. 그는 ‘다른 씨’, 곧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나타냅니다. 가인으로 나타난 신앙은 사랑에서 분리되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지만, 셋으로 나타난 신앙은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는 통로가 됩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신앙을 주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로써 창4:25은 가인과 아벨에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어떻게 주님의 섭리 가운데 새로운 질서를 향해 나아가는지를 보여 주는 글로 마무리됩니다. (AC.437 해설)

 

 

 

AC.436, 창4:25, ‘가인에서 셋과 에노스까지, 신앙과 체어리티는 어떻게 다시 이어지는가?’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6그 여자의 ‘아들’(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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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6

그 여자의 ‘아들’(son), 곧 그가 셋이라 이름한 아들이 체어리티에 이를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을 뜻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으로부터 분명하며, 또한 가인에 관해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그에게 표를 주셨다’(mark was set upon him, lest anyone should slay him)고 기록된 사실에서도 분명합니다. 이 주제가 연속적으로 전개되는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가인’(Cain)으로, 체어리티는 ‘아벨’(Abel)로 나타냈으며, 분리된 상태의 그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으로 나타냈습니다. 체어리티가 그 신앙을 통해 주님에 의해 심어질 수 있도록 신앙을 보존하신 것은 아무도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신 것으로 나타냈습니다. That by her “son,” whom she named Seth, is signified a new faith, by which charity may be attained,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previously stated, as well as from its being related of Cain that a “mark was set upon him, lest anyone should slay him.” For the subject as it stands in a series is as follows: Faith separated from love was signified by “Cain”; charity, by “Abel”; and that faith in its separated state extinguished charity was signified by Cain slaying Abel. The preservation of faith in order that charity might be thereby implanted by the Lord was signified by Jehovah’s setting a mark on Cain lest anyone should slay him.

 

그 후 사랑의 거룩한 것과 거기서 나오는 선이 주님에 의해 신앙을 통해 주어진 것은 아다가 낳은 야발로 나타냈고, 신앙의 영적인 것이 주어진 것은 그의 아우 유발로 나타냈으며, 이들로부터 자연적 선과 진리가 나온 것은 씰라가 낳은 두발가인으로 나타냈습니다. 창세기 4장의 마지막 두 절에는 이 모든 것의 결론, 따라서 그 요약이 들어 있습니다. 곧 ‘사람과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는 앞에서 아다와 씰라라고 불렸던 그 새 교회를 뜻하고, ‘셋’(Seth)은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통로가 되는 신앙을 뜻하며, 이제 이어지는 절의 ‘에노스’(Enosh)는 신앙을 통해 심어진 체어리티를 뜻합니다. That afterwards the holy of love and the good thence derived were given by the Lord through faith was signified by Jabal whom Adah bare; and that the spiritual of faith was given, was signified by his brother Jubal; and that from these there came natural good and truth was signified by Tubal-Cain whom Zillah bare. In these two concluding verses of Genesis 4 we have the conclusion, and thus the summary, of all these matters, to this effect, that by the “man and his wife” is signified that new church which before was called Adah and Zillah, and that by “Seth” is signified the faith through which charity is implanted; and in the verse which now follows, by “Enosh” is signified the charity that is implanted through faith.

 

해설

AC.436은 창4의 가인 이후 이야기를 거의 한눈에 펼쳐 보이는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지금까지 가인, 아벨, 가인의 표, 야발, 유발, 두발가인, 그리고 마지막의 셋이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 개별적으로 설명해 왔다면, 여기서는 그 모든 내용을 하나의 연속된 과정으로 묶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 주제가 연속적으로 전개되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고 하며 그 흐름을 다시 정리합니다. 따라서 창4의 인물들을 서로 독립된 상징들로만 읽어서는 안 되고,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와 소멸, 보존, 그리고 다시 결합을 향한 과정으로 읽어야 합니다.

 

출발점은 가인과 아벨입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AC.436은 가인의 의미를 더욱 정확하게 표현합니다. 단순히 ‘신앙’이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반전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가인을 곧바로 없애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도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표를 주셨습니다. 앞에서 이 ‘가인의 표’를 신앙의 보존으로 설명했지만, AC.436은 이제 그 보존의 목적을 아주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것은 단순히 분리된 신앙 자체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체어리티가 그 신앙을 통해 주님에 의해 심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보존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보존하신 것은 그 신앙을 최종 상태로 인정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장차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실 수 있는 수단을 남겨 두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가인의 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가인의 표는 악한 상태를 승인하거나 분리된 신앙을 이상적인 신앙으로 인정한다는 표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아직 남아 있는 신앙을 파괴되지 않게 보존하시고, 바로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십니다. 인간 편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되고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지만, 주님의 섭리는 그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여 새로운 교회의 출발점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이후 야발, 유발, 두발가인의 의미도 이러한 큰 흐름 안에서 다시 정리됩니다. 야발은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주신 ‘사랑의 거룩한 것과 거기서 나오는 선’을, 유발은 ‘신앙의 영적인 것’을, 두발가인은 이들로부터 나온 ‘자연적 선과 진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인물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목축, 음악, 금속 기술의 기원을 말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으로는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주님께서 교회 안에 다시 사랑과 선, 신앙의 영적인 것, 그리고 자연적 선과 진리를 마련해 가시는 과정이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434-435에서 제기된 창4의 가인 계열과 창5의 셋 계열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도 중요한 빛을 비춥니다. 문자적으로만 보면 가인에게서 시작된 후손들의 계보와 셋에게서 시작되는 계보를 두 개의 나란한 혈통으로 읽기 쉽습니다. 그러나 AC.436은 속뜻으로는 창4의 가인 이후 이야기가 셋과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된 교회적 과정임을 분명히 합니다. 가인이 나타내는 분리된 신앙이 보존되고, 그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사랑과 선 및 영적인 것이 주어지며, 마침내 셋이 나타내는 새로운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지는 흐름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창4의 마지막 두 절이 ‘이 모든 것의 결론, 따라서 그 요약’이라고 직접 말합니다. 이것은 창4:25-26을 앞의 가인 계열과 전혀 관계없는 새로운 족보의 시작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단서입니다. 창4 전체에서 전개되어 온 신앙과 체어리티의 이야기가 마지막 두 절에서 결론을 맺는 것입니다. ‘사람과 그의 아내’는 앞에서 아다와 씰라라고 불렸던 새 교회이고, 그들에게서 난 셋은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통로가 되는 신앙입니다. 따라서 셋은 앞의 이야기를 지워 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인물이 아니라, 앞에서 보존되고 준비되어 온 것이 새로운 질서 안에서 결실을 향해 나아가는 지점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AC.436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직 읽지 않은 창4:26의 에노스까지 미리 밝혀 줍니다. 셋이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통로가 되는 신앙’이라면, 에노스는 ‘신앙을 통해 심어진 체어리티’입니다. 이 둘의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셋 자체가 체어리티인 것이 아닙니다. 셋은 체어리티가 주님에 의해 심어질 수 있게 하는 신앙이고, 에노스에 이르러 그 체어리티가 실제로 심어진 상태가 나타납니다. 따라서 가인에서 셋과 에노스에 이르는 전체 흐름을 보면, 분리된 신앙에서 시작하여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그럼에도 신앙이 보존되며, 그 신앙을 통해 주님께서 다시 사랑과 선을 주시고, 마침내 새로운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지는 하나의 긴 과정이 드러납니다.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주도권은 계속 주님께 있습니다. 체어리티를 다시 만들어 내는 것은 보존된 신앙 자체가 아닙니다. AC.436은 체어리티가 ‘주님에 의해’ 신앙을 통해 심어진다고 거듭 말합니다. 신앙은 통로이며, 심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가인의 표에서부터 셋과 에노스에 이르는 과정의 중심에는 인간이 무너뜨린 것 가운데서도 남은 것을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다시 사랑과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주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436은 창4의 어두운 역사를 단순한 쇠퇴의 기록으로 끝내지 않고, 그 쇠퇴 속에서도 새 교회를 준비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보여 주는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AC.436 해설)

 

 

 

AC.437, 창4:25, ‘다른 씨는 왜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의미하는가?’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7여기서 ‘셋’(Seth)이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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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5, 창4:25, ‘같은 사람과 아내가 다시 나오는데 왜 다른 교회를 의미하는가?’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5여기서 ‘사람’(man)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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