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댁이, 처가가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 - 요한이서의 ‘인사도 하지 말라’는 말씀은 가족 절연을 명령하는가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 요한이서에 보면 인사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 실제로 요한이서 1장 10-11절은 상당히 강하게 들립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이 말씀만 떼어 놓으면 ‘잘못된 교리를 가진 사람과는 집안의 관계까지 끊어야 한다’는 결론이 가능해 보입니다. 특히 가족이나 시댁, 혹은 처가를 ‘이단’이라고 판단한 경우에는 이 말씀이 절연을 정당화하는 매우 강력한 근거처럼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서 전체의 문맥과 성경의 다른 말씀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함께 놓고 보면 그렇게 단순하게 적용하기 어렵습니다.

 

먼저 요한이서가 경계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보아야 합니다. 요한은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요이1:7)고 대상을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이어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9절), 그리고 바로 다음에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10절)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직접적인 상황은 단순히 ‘나와 교리가 다른 혈육, 혈연, 친척’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거짓 가르침을 가지고 신앙공동체 안으로 들어와 그것을 전파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11절의 이유도 중요합니다.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핵심은 사람과 인간적인 접촉을 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의 ‘악한 일’에 참여하고 그것을 지지하는 데 있습니다.

 

당시의 ‘집에 들인다’는 표현도 오늘날 누군가를 집에 잠깐 방문하게 하는 것과 완전히 동일하게 읽기는 어렵습니다. 초기 교회는 가정집을 중심으로 모였고 순회 교사와 전도자들이 신자들의 집에서 숙식을 제공받으며 가르쳤습니다. 그런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한 개인적 친절을 넘어 그의 사역을 후원하고 그에게 활동 기반을 제공하는 의미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요한의 명령에는 ‘거짓 교사를 교회의 교사로 받아들이고 그의 활동을 지원하지 말라’는 매우 실제적인 목적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바꾸면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의 사역을 교회가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고 후원하지 말라’에 훨씬 가깝습니다.

 

특히 ‘인사도 하지 말라’는 말씀을 ‘그러므로 그 사람과 인간관계를 완전히 끊어라’로 확대할 때는 성경 전체와 충돌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고 하셨습니다. 바울도 불신자와 모든 관계를 끊으라는 뜻으로 자신의 말을 오해하지 말라고 설명하면서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5:10). 더구나 부모와 가족을 공경하고 돌보아야 한다는 말씀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이서 한 구절을 근거로 ‘이단으로 판단되는 사람에게는 일반적인 인간적 사랑과 가족으로서의 모든 책임까지 중단해도 된다’는 보편적 원칙을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에서 ‘교제’와 ‘동조’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의 교리를 인정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으로 만나고 안부를 묻고 어려울 때 돕는다고 해서 그의 신학적 주장을 승인하는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그 사람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판단된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를 미워하거나 가족관계에서 제거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거짓에 참여하지 않는 것’과 ‘그 사람에게 체어리티(charity)를 행하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구별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체어리티는 상대방이 믿는 모든 것을 옳다고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상대방 안의 선을 사랑하고 그의 참된 유익,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유익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가르침에는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하면서도 그 사람에게 인간적인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교리가 틀렸으므로 그 사람에게는 사랑을 베풀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진리를 지키려다가 체어리티를 잃는 역설이 생길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단’이라는 판단 자체에도 주의가 필요합니다. 앞에서 사울과 스데반을 살펴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하나님 편에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스데반과 그리스도인들이 위험한 잘못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고,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길에서 주님께서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9:4)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이단 판정이 잘못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거짓 교리는 실제로 존재하며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진리를 가지고 있고 저 사람은 이단이다’라는 확신이 그 사람에게 무엇을 해도 된다는 허가증이 되는 순간, 사울의 이야기는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특히 가족관계에서는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저 사람의 신앙을 받아들일 수 없다’와 ‘그러므로 저 사람과 가족으로서의 관계도 끊어야 한다’ 사이에는 상당히 큰 거리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댁의 종교적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 집의 종교활동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고, 자녀에게 그 교리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경계를 세울 수도 있으며, 반복적인 개종 압박이나 모욕이 있다면 만남의 방식과 빈도를 조정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경계’입니다. 그러나 단지 ‘이단’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부모·자녀·형제의 인간적 관계 자체를 끊는 것을 요한이서 10절이 명령한다고 말한다면, 본문의 적용 범위를 상당히 넘어설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반대편의 극단도 피해야 합니다. ‘가족이니까 무조건 만나야 한다’는 것도 성경적 원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실제 폭력이나 학대, 지속적인 모욕, 강압적인 종교행위, 자녀에게 심각한 해를 끼치는 행동이 있다면 적절한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상당히 강한 관계 제한도 정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저들은 이단이니까 요한이서가 절연하라고 했다’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발생하는 악과 해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고 그 악에 참여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해야 합니다. ‘교리적 불일치’와 ‘실제적인 해악’을 구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이 문제에는 ‘프로프리움’(proprium)의 위험도 있습니다. 종교적인 프로프리움은 ‘내가 싫다’를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로, ‘나는 만나고 싶지 않다’를 ‘성경이 만나지 말라고 한다’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 신앙 때문에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정말 진리를 지키기 위해 이 관계를 제한하는가, 아니면 내 불편함과 분노와 상처를 하나님의 명령으로 정당화하고 있는가?’ 이것은 상대방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해야 할 분별입니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살펴본 사울의 이야기가 여기서 다시 의미를 갖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16:2). 종교적 확신은 때로 인간에게 가장 강력한 정당화 장치가 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는 말이 붙으면 평소에는 하지 못할 냉혹한 행동까지 의로운 행동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행동이 정말 주님의 뜻인지 판단할 때에는 ‘내가 성경 구절 하나를 가지고 있는가?’뿐 아니라 그 해석이 말씀 전체의 선과 진리, 특히 주님의 사랑과 체어리티의 질서에 합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요한이서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오히려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거짓까지 받아들이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사람은 사랑하되 거짓을 후원하지 말고, 관계는 유지하더라도 악한 일에는 참여하지 말며, 체어리티를 행하되 진리를 희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과 ‘진리’가 결합되어야 한다는 스베덴보리의 원리와도 잘 맞습니다. 사랑만을 내세워 모든 거짓을 용인하는 것도 잘못이고, 진리를 내세워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따라서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 요한이서에 인사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라는 말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겠습니다. ‘요한이서는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의 사역을 받아들이고 후원하여 그의 악한 일에 참여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말씀이지, 교리가 다르다고 판단되는 가족과 모든 인간적·가족적 관계를 끊으라는 일반적인 절연 명령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한 문장으로 더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요한은 거짓과의 연합을 끊으라고 했지, 체어리티까지 끊으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진리를 지킨다는 이유로 사랑을 버리지 말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거짓을 받아들이지도 않는 것, 바로 그 둘을 함께 지키는 것이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SL.12,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참여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던 사울’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참여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던 사울 - 열심보다 중요한 진리 사울(사도 바울의 회심 전 이름)은 하나님을 미워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참여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던 사울 - 열심보다 중요한 진리

 

사울(사도 바울의 회심 전 이름)은 하나님을 미워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일을 했습니다. 훗날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고백합니다(행26:9). 이것은 대단히 무서운 말씀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거역하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울에게는 ‘열심’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라고 표현합니다(빌3:6). 따라서 그의 문제는 신앙적 열심이 부족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열심이 너무 강했습니다. 문제는 그 열심이 참된 진리에 의해 인도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율법과 종교적 체계를 하나님과 동일시했고, 그것을 위협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제거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의 ‘하나님 사랑’에는 진리에 대한 중대한 오류가 섞여 있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앞서 이야기한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실 때가 있지?’라는 질문과 놀랍게 연결됩니다. 스데반이 죽임당하던 그 순간 사울에게 물었다고 상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누구 편이십니까?’ 사울은 아마 자신 있게 ‘우리 편’이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편이고 스데반은 위험한 이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늘이 열린 것을 본 사람은 사울이 아니라 스데반이었습니다. 스데반은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7:56)고 말합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편’이라고 확신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사울이 박해하는 사람과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메섹 길에서 이 사실이 완전히 뒤집힙니다. 사울에게 나타나신 주님께서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하십니다(행9:4). 사울의 입장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왜 박해하느냐’가 아니라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사울이 하나님을 위해 제거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안에서 오히려 주님께서 박해받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만큼 ‘종교적 확신’과 ‘실제 진리’가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지를 강렬하게 보여 주는 장면도 드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진실하게 믿는다’는 것과 ‘진리를 믿는다’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믿음에 진지했습니다. 그러나 진지함이 그 믿음의 내용을 자동으로 진리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거짓을 진심으로 믿을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그 거짓에 종교적 열심이 결합하면 매우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확신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행동을 의심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은 그때 이미 악한 사람이었고 지옥적인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단정해야 할까요? 바로 여기에서도 조심해야 합니다. 이후의 바울을 보면 그의 내면에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끝까지 자기 입장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뒤 자신의 세계 전체가 무너지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자기가 평생 옳다고 믿었던 것을 내려놓고 자신이 박해하던 주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거짓을 진리라고 잘못 믿었던 사람’과 ‘거짓임을 알면서도 자기 사랑 때문에 끝까지 붙드는 사람’은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이야기는 인간의 ‘합리성’(rationality), 곧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왜 중요한지도 보여 줍니다. 참된 신앙은 ‘나는 확신한다’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혹시 내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내 생각과 내 종교적 체계를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자신을 진리 앞에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사울의 회심은 단순히 무신론자가 하나님을 믿게 된 사건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을 열렬히 믿던 사람이 ‘자기가 믿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무너지고 참된 주님을 새롭게 알아가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울의 회심은 종교인에게 훨씬 더 무서운 회심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프로프리움’(proprium)의 문제도 깊이 숨어 있습니다. 종교적인 프로프리움은 세속적인 프로프리움보다 오히려 알아차리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내가 옳다’가 ‘하나님이 옳으시다’와 결합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내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이 곧 하나님께 반대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내 교리를 비판하는 사람이 진리를 공격하는 사람처럼 보이며, 심지어 상대방을 공격하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사울이 바로 그 지점까지 갔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요16:2)은 그래서 섬뜩할 정도로 정확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부정하면서만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하여’라는 이름으로도 악을 행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 언어가 붙었다고 해서 그 행위가 선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그것이 주님의 선과 진리에 합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울의 이야기가 두려운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울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어떻게 감히 내 사람들을 죽이느냐’며 즉시 심판하여 제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가 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사울은 눈이 멀었습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실제 일어난 사건이면서 동시에 너무나 강렬한 영적 그림입니다. ‘나는 누구보다 잘 본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비로소 ‘나는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자리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진짜 눈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거듭남(regeneration)의 중요한 한 모습일 것입니다. 거듭남은 언제나 ‘나쁜 사람이 착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나는 하나님을 잘 알고 있고, 나는 하나님 편이며,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던 사람이 주님 앞에서 ‘내가 틀릴 수도 있었습니다’라고 무너지는 과정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버리고 바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면서 붙들고 있던 거짓을 버림으로써 비로소 자신이 사랑한다고 말했던 하나님을 참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이야기를 오늘 우리에게 적용할 때 가장 위험한 방식은 ‘저런 사람이 바로 사울 같은 사람이다’라고 다른 사람을 지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사울의 자리에 설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의 칼날은 먼저 나를 향해야 합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내 생각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진리를 지키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지키는 것인가? 상대방의 오류를 분별하는 것과 상대방을 미워하는 것을 혼동하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의 이름으로 내 분노와 적개심을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사람을 바라볼 때도 상당히 중요한 원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설교나 신학에서 명백한 오류를 발견했다면 오류는 오류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곧바로 ‘그러므로 저 사람의 내면도 악하다’로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사울조차 스데반의 죽음에 찬성하고 교회를 박해하던 바로 그 시절, 훗날 바울이 될 가능성을 주님께서는 이미 보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당시의 사울을 보지만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내면 깊은 곳과 앞으로 자유롭게 진리를 받아들일 가능성까지 보십니다.

 

결국 사울의 이야기는 ‘열심이 있느냐?’보다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 열심은 진리에 의해 인도되고 있는가?’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질문도 던집니다.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주님께서 보여 주실 때 나는 바뀔 수 있는가?’ 어쩌면 사울과 완고한 종교인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는 처음부터 오류가 없었느냐가 아니라, 진리가 찾아왔을 때 자신의 오류를 내려놓을 수 있었느냐에 있을 것입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사울의 가장 무서운 오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믿으면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박해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회심이 주는 희망까지 함께 붙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잘못된 열심 속에 있던 사울조차 버리지 않으시고, 그가 자기 확신보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눈을 감기시고 다시 뜨게 하셨습니다.’

 

 

 

SL.13,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 요한이서에 보면 인사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 - 요한이서의 ‘인사도 하지 말라’는 말씀은 가족 절연을 명령하는가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 요한이서에 보면 인사도 하

bygrace.kr

 

SL.11,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실 때가 있지?’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실 때가 있지?’ - 주님은 내 편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시는 분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실 때가 있지?’ 신앙생활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실 때가 있지?’ - 주님은 내 편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시는 분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실 때가 있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상당히 절실하게 생기는 질문입니다. 열심히 기도했는데 일이 내가 바라던 방향과 정반대로 흘러갈 때,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도 상대방이 잘되고 내가 손해를 볼 때, 분명 좋은 뜻으로 시작했다고 생각했는데 길이 막힐 때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하나님은 왜 저 사람을 막아 주시지 않지? 왜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지? 하나님이라면 적어도 내 편은 되어 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에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주 쉽게 혼동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하나님이 언제나 내가 원하는 쪽을 지지하신다’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여호수아 5장에는 이 문제를 놀랍도록 선명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리고를 앞둔 여호수아가 칼을 든 존재를 만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고 묻습니다. 쉽게 말하면 ‘당신은 우리 편입니까, 저쪽 편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뜻밖에도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입니다(수5:13-14).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우리 편인가?’를 물었지만, 질문의 방향 자체가 바뀝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하나님이 내 편인가?’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질서 안에 서 있는가?’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그쪽에 합류하시는 분이 아니라, 선과 진리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특별히 우선 처리해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버지가 자녀를 정말 사랑한다면 자녀가 원하는 것을 무조건 들어주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린아이는 사탕을 더 달라고 하고 위험한 곳에도 가고 싶어 하지만, 부모는 때로 ‘안 된다’고 합니다. 아이의 눈에는 그 순간 부모가 자기 편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거절이 사랑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 역시 우리가 당장 원하는 행복보다 훨씬 더 깊은 것을 바라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의 섭리가 궁극적으로 향하는 것은 사람이 세상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얻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유 안에서 영원한 생명에 적합한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간절히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주님께서 내 편이 아니시다’고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실제로 나에게 선한 것인지 나는 완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이 일이 잘되어야 하나님의 영광이지’, ‘저 사람이 잘못했으니 하나님께서 반드시 저 사람을 꺾으셔야 해’, ‘나는 옳으니까 하나님께서 내 억울함을 풀어 주셔야 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진실한 정의감과 함께 자기 사랑, 인정받고 싶은 욕망, 상대방이 패배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섞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은 신앙의 언어까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때때로 내가 원하는 ‘승리’를 주시는 것보다 내 안에 숨어 있는 것을 보게 하시는 쪽을 택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일으켜 나를 훈련시키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에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악을 허용하시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인간의 자유 때문에 주님께서 허용하시는 고통과 악이 있으며, 주님께서 그 악 자체를 원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단 허용된 상황 속에서도 주님은 끊임없이 사람을 선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실패나 고난을 당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일부러 이것을 보내셨다’고 단정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방향으로 쉬지 않고 역사합니다.

 

여기서 ‘내 편’이라는 말의 의미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 ‘내 편’이라는 것이 ‘내가 옳든 그르든 나를 지지해 주는 것’을 뜻한다면, 주님은 결코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편이 아니십니다. 내가 거짓을 말하면 상대방이 아무리 나쁜 사람이어도 주님께서 내 거짓을 진리라고 해주시지 않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저 사람은 악인이니까 하나님도 내 미움을 인정하시겠지’라고 생각해도 주님께서는 미움을 선으로 바꾸어 주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편을 들어 진리를 바꾸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을 진리의 편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내 편’이라는 말을 ‘나의 영원한 선을 바라시고 끝까지 나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철저하게 우리 편이십니다. 내가 잘못된 길을 선택할 때조차 즉시 버리지 않으시고, 나의 자유와 ‘합리성’, 곧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보존하시면서 계속 돌아올 길을 마련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것보다 내가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바로 그것 때문에 주님이 내 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것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아이 둘이 싸우는데 한 아이가 부모에게 ‘엄마는 누구 편이야?’라고 묻는다면 좋은 부모는 무조건 자기 아이의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자기 아이가 잘못했다면 오히려 자기 아이를 바로잡습니다. 그렇다고 그 아이를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네 잘못까지 사랑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이것보다 훨씬 완전합니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지만 ‘내 악’을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나를 구원하기 원하시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붙들고 있는 악과 거짓에는 반대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주님이 ‘나를 반대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사실은 주님께서 ‘내 안의 나를 파괴하는 것’을 반대하고 계시는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의 의미도 바꾸어 놓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내 편으로 끌어오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세운 계획을 하나님께 설명하고 승인을 받아내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는 점점 내가 주님의 뜻과 질서에 맞추어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겟세마네에서 보여 주신 기도의 질서는 깊습니다.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고백은 자신의 뜻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뜻을 아버지의 뜻 아래 두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 제 편이 되어 주십시오’에서 조금씩 ‘주님, 제가 주님의 편에 서게 해주십시오’로 변화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에서 나눈 여러 질문과도 하나로 이어집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나는 전도를 많이 했으니 구원받을 거야’, ‘나는 주님께 헌신했으니 큰 상을 받을 거야’, ‘나는 죽으면 곧 주님 품에 안기겠지’라는 말들에는 공통적으로 ‘나’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위험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도, 전도도, 헌신도, 천국의 소망도 모두 귀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중심이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해주실 것인가?’에 머물면 신앙의 중심에 여전히 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거듭남’(regeneration)은 그 중심이 서서히 바뀌어 가는 과정입니다. ‘주님께서 내 뜻을 이루어 주시는가?’에서 ‘나는 주님의 뜻을 사랑하게 되었는가?’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실 때가 있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나를 사랑하시지만, 언제나 내 욕망의 편을 드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 안의 거짓과 악에는 반대하시며, 내가 선과 진리의 편에 서도록 이끄십니다.’

 

조금 더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은 내가 옳기 때문에 내 편이 되시는 분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가 옳은 것의 편에 서도록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질문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을 하나만 남긴다면 이것을 택하겠습니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점점 하나님의 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특권에서 거듭남으로, 보호받을 권리에서 아버지를 닮아 가는 삶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SL.12,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참여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던 사울’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참여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던 사울 - 열심보다 중요한 진리 사울(사도 바울의 회심 전 이름)은 하나님을 미워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bygrace.kr

 

SL.10, ‘나는 사후 눈 뜨면 주님 품에 안겨 있겠지?’

‘나는 사후 눈 뜨면 주님 품에 안겨 있겠지?’ - 죽음 직후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예수 믿으니까 죽은 뒤 눈을 뜨면 곧바로 주님 품에 안겨 있겠지.’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