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08.심화

 

5. ‘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25:22)

 

 

25:22 AC.308에 인용된 이유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장소가 바로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였다는 사실을 통하여, 그룹들이 단순한 장식이나 수호 천사가 아니라, 거룩한 것을 보호하시면서 동시에 사람과 교통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표상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AC.308은 그룹들의 본질적인 의미를 ‘주님께서 사람이 거룩한 것에 무질서하게 접근, 그것을 profane 하지 못하도록 지키시는 신적 섭리’로 설명하는데, 이 구절은 그 섭리가 단순히 막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질서 안에서는 오히려 사람과 주님을 연결하는 통로가 된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주님께서 ‘증거궤 안에서’ 말씀하시겠다고 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또한 ‘그룹들에게’ 말씀하시겠다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속죄소 위, 곧 두 그룹 사이에서’ 모세를 만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룹들이 주님의 임재를 대신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임재가 나타나는 거룩한 영역을 보호하는 표상임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계시는 그룹들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룹들이 지키고 있는 거룩한 중심에서 나옵니다.

 

여기서 속죄소(the mercy seat)는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속죄소는 말씀의 속뜻으로는 주님의 신적 자비와 신적 인성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속죄소 위에서 말씀하신다는 것은, 모든 신적 계시와 모든 진리는 심판이나 정죄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로부터 나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자비의 자리를 그룹들이 둘러싸고 있다는 것은, 그 자비가 profanation 되지 않도록 주님의 섭리가 항상 함께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두 그룹 사이에서’ 말씀하시겠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만일 그룹들이 사람을 무조건 내쫓거나 접근을 영원히 차단하는 존재라면, 주님의 음성도 그들 밖에서 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입니다. 주님의 음성은 바로 그룹들이 지키는 그 중심에서 들립니다. 이는 그룹들의 기능이 사람을 주님에게서 떼어 놓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올바른 질서 안에서만 주님께 가까이 나아오도록 보호하는 데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점에서 창3:24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에덴동산의 그룹들은 생명나무의 길을 지켰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길을 막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AC.308은 그 의미를 다르게 설명합니다. 그룹들은 생명나무를 없애거나 접근을 영원히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proprium과 감각적 추론으로 생명의 거룩한 것을 profane 하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입니다. 출25:22는 바로 그 보호의 적극적인 목적을 보여줍니다. 그룹들이 지키는 곳이야말로 주님께서 사람과 만나시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주님의 섭리가 언제나 ‘보호를 위한 제한’이라는 원리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사람은 흔히 제한을 자유의 박탈로 생각하지만, 말씀에서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거룩한 것을 보호하시고, 사람이 그것을 받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을 때, 그 거룩한 것 안으로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그룹은 길을 닫는 존재가 아니라, 길을 보존하여 지키는 존재입니다. 출25:22에서 주님의 음성이 그룹들 사이에서 들렸다는 것은, 보호와 계시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적 섭리 안에서 함께 작용함을 보여줍니다.

 

이 구절은 유대교회의 상태와도 연결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궤와 속죄소, 그리고 그룹들을 볼 수 있었지만, 누구나 마음대로 그곳에 접근할 수는 없었습니다. 대제사장도 정해진 질서와 의식을 따라야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사람을 멀리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보존하시기 위한 질서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그 질서 안에서 주어졌으며, 그 질서를 벗어난 접근은 거룩한 것을 profane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25:22는 또한 왕상6과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솔로몬 성전에서는 광야 시대의 언약궤와 속죄소, 그리고 그 위의 작은 금 그룹들이 그대로 보존되었고, 그 위를 다시 거대한 감람나무 그룹들이 내소 전체를 덮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임재는 여전히 속죄소와 그룹들 사이에서 상징되었지만, 이제는 내소 전체가 거대한 그룹들의 보호 아래 놓였습니다. 이는 주님의 계시와 임재가 여전히 같은 중심에서 나오지만, 그 거룩함을 보호하시는 섭리가 더욱 풍성하고 완전하게 표현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라는 말씀은 AC.308의 핵심을 가장 잘 설명하는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거룩한 것 밖에 영원히 머물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을 만나기 위해 거룩한 곳을 마련하시고, 그 거룩함이 훼손되지 않도록 그룹들로 지키게 하십니다. 만일 거룩한 것이 보호되지 않는다면, 사람은 그것을 받아 생명을 얻는 대신 오히려 profane, 더 큰 영적 파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룹들의 보호는 계시를 막는 장벽이 아니라, 참된 계시가 계속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거룩함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입니다.

 

25:22 AC.308에 인용된 이유는, 그룹들이 단순히 거룩한 것을 지키는 상징이라는 사실을 넘어서, 바로 그들이 지키는 중심에서 주님께서 사람을 만나시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의 섭리가 사람을 거룩한 것에서 영원히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profanation으로부터 보호함으로써 사람이 장차 안전하게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진리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자비의 섭리임을 가장 아름답게 증언하는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AC.308, 심화 4, ‘출25의 그룹과 왕상6의 그룹’

AC.308.심화 4. ‘출25의 그룹과 왕상6의 그룹’ 솔로몬이 내소 가운데에 그룹을 두었으니 그룹들의 날개가 퍼져 있는데 이쪽 그룹의 날개는 이쪽 벽에 닿았고 저쪽 그룹의 날개는 저쪽 벽에 닿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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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5의 그룹과 왕상6의 그룹

 

솔로몬이 내소 가운데에 그룹을 두었으니 그룹들의 날개가 퍼져 있는데 이쪽 그룹의 날개는 이쪽 벽에 닿았고 저쪽 그룹의 날개는 저쪽 벽에 닿았으며 두 날개는 성전의 중앙에서 서로 닿았더라 (왕상6:27)

 

위 구절 표현 말인데요, 저런 상태에서 어떻게 출25:20처럼 두 그룹이 서로 마주 보고 속죄소를 향할 수 있나요?

 

 

이 구절을 처음 읽으면 누구나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왕상6:27은 거대한 두 그룹의 날개가 한쪽은 양쪽 벽에 닿고, 다른 한쪽은 성전 중앙에서 서로 맞닿았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출25:20에서는 그룹들의 얼굴이 서로를 향하고 동시에 속죄소를 향하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왕상6의 거대한 그룹들도 같은 자세였다면, 과연 저런 날개의 배치 속에서 서로 마주 보고 속죄소를 바라볼 수 있었을까요?

 

이 의문은 왕상6과 출25가 같은 그룹을 설명한다고 생각할 때 생깁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두 본문은 서로 다른 그룹을 말하고 있습니다. 출25의 그룹들은 모세 시대에 언약궤와 함께 제작된 작은 금 그룹들입니다. 이들은 속죄소 양쪽 끝에 붙어 있었으며, 얼굴은 서로를 향하고 시선은 아래의 속죄소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 자세는 출25:20이 직접 설명하고 있습니다.

 

반면 왕상6의 그룹들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면서 새로 만든 거대한 감람나무 그룹들입니다. 높이가 각각 십 규빗에 이르렀으며, 날개를 펼치면 내소의 벽에서 벽까지 닿을 만큼 컸습니다. 이들은 언약궤 위에 놓인 것이 아니라 내소 안에 독립적으로 세워진 거대한 형상이었습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출25의 작은 그룹들과는 용도와 위치가 서로 달랐습니다.

 

이 사실은 왕상8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 제사장들은 광야 시대부터 내려오던 바로 그 언약궤를 내소로 옮겼습니다. 왕상8:6-7은 언약궤가 ‘그룹들의 날개 아래’ 놓였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룹들은 왕상6에서 새로 만든 거대한 그룹들입니다. 즉 언약궤는 거대한 그룹들의 날개 아래 놓였지만, 언약궤 자체에는 이미 모세 시대부터 있던 속죄소와 작은 금 그룹들이 그대로 붙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솔로몬 성전의 내소에는 실제로 두 종류의 그룹이 함께 존재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는 언약궤의 일부인 작은 금 그룹들입니다. 이들은 여전히 얼굴은 서로를, 그리고 시선은 속죄소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솔로몬이 새로 세운 거대한 감람나무 그룹들입니다. 이들은 내소 전체를 덮는 상징적인 보호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왕상6의 거대한 그룹들은 어느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왕상6은 날개의 위치만 설명할 뿐, 얼굴의 방향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같은 장면을 기록한 대하3:13은 중요한 정보를 하나 더 제공합니다. 거기에는 ‘그룹들의 얼굴이 외소를 향하였더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거대한 그룹들은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기보다 성소, 곧 외소를 향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본문에 가장 충실합니다.

 

이렇게 보면 출25와 왕상6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습니다. 출25의 작은 그룹들은 언약궤 위에서 서로 얼굴을 향하고, 속죄소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왕상6의 거대한 그룹들은 내소 안에 서서 펼친 날개로 언약궤 전체를 감싸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속죄소 위의 작은 그룹들과 내소를 덮는 큰 그룹들이 서로 다른 위치에서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점은 AC.308의 인용 의도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룹들의 자세나 조형적 차이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룹이라는 표상이 어디에 놓여 있든 동일하게 ‘거룩한 것을 보호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뜻한다는 사실을 밝히려 합니다. 속죄소 위 작은 그룹은 가장 내적 거룩함을 직접 보호하는 섭리를 나타내고, 솔로몬 성전 거대한 그룹은 그 거룩함뿐 아니라 내소 전체를 감싸 보호하는 섭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출25와 왕상6은 서로 충돌하는 본문이 아니라, 동일한 영적 진리가 더욱 풍성하고 확대된 모습으로 표현된 본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08, 심화 5, ‘출25:22’

AC.308.심화 5. ‘출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출25:22) 출25:22가 AC.308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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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8, 심화 3, ‘왕상6:23-29, 32’

AC.308.심화 3. ‘왕상6:23-29, 32’ 23내소 안에 감람나무로 두 그룹을 만들었는데 그 높이가 각각 십 규빗이라 24한 그룹의 이쪽 날개도 다섯 규빗이요 저쪽 날개도 다섯 규빗이니 이쪽 날개 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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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왕상6:23-29, 32

 

23내소 안에 감람나무로 두 그룹을 만들었는데 그 높이가 각각 십 규빗이라 24한 그룹의 이쪽 날개도 다섯 규빗이요 저쪽 날개도 다섯 규빗이니 이쪽 날개 끝으로부터 저쪽 날개 끝까지 십 규빗이며 25다른 그룹도 십 규빗이니 그 두 그룹은 같은 크기와 같은 모양이요 26이 그룹의 높이가 십 규빗이요 저 그룹도 같았더라 27솔로몬이 내소 가운데에 그룹을 두었으니 그룹들의 날개가 퍼져 있는데 이쪽 그룹의 날개는 이쪽 벽에 닿았고 저쪽 그룹의 날개는 저쪽 벽에 닿았으며 두 날개는 성전의 중앙에서 서로 닿았더라 28그가 금으로 그룹을 입혔더라 29내 외소 사방 벽에는 모두 그룹들과 종려와 핀 꽃 형상을 아로새겼고, 32감람나무로 만든 그 두 문짝에 그룹과 종려와 핀 꽃을 아로새기고 금으로 입히되 곧 그룹들과 종려에 금으로 입혔더라 (왕상6:23-29, 32)

 

 

왕상6:23-29, 32 AC.308에 인용된 이유는, 성전의 가장 안쪽인 내소 뿐 아니라 내소와 외소의 벽과 문에까지 새겨진 ‘그룹들’이, 주님의 가장 깊은 거룩한 것에서부터 교회의 외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보호하고 질서 있게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출25의 그룹들이 증거궤와 속죄소 위에서 가장 내적 거룩함을 지키고, 출26의 그룹들이 성막의 휘장과 경계를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왕상6의 그룹들은 그 보호가 성전 전체의 구조 안에 확장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먼저 두 그룹은 ‘내소 안’에 놓였습니다. 내소는 성전의 가장 안쪽 방인 지성소이며, 말씀의 속뜻으로는 주님의 신적 선과 가장 내적인 천적 천국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내소 가운데 놓인 두 그룹은 사람이 자신의 proprium과 감각 및 기억 지식으로 가장 내적인 신적, 천적인 것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보호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나타냅니다. 창3:24에서 그룹들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생명나무가 주님과 주님께 속한 천적 생명을 뜻하듯, 성전의 내소도 주님의 가장 깊은 임재와 천적인 것들을 뜻하므로, 그곳에 그룹들이 놓인 것은 AC.308의 설명을 직접적으로 뒷받침합니다.

 

두 그룹이 ‘감람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감람나무는 천적 사랑의 선, 곧 주님을 사랑하는 데서 나오는 가장 내적 선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그룹들이 감람나무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거룩한 것을 지키시는 주님의 섭리가 두려움이나 정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적 사랑의 선에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이 신앙의 아르카나 안으로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는 것은 그를 배척하거나 지식을 독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거룩한 것을 profane, 스스로를 파멸시키지 않도록 사랑으로 보호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룹의 보호는 본질적으로 사랑의 보호입니다.

 

각 그룹의 높이가 십 규빗이고, 날개 끝에서 끝까지도 십 규빗이었다는 점은 그 보호의 충만함과 완전함을 나타냅니다. 말씀에서 ‘(10)은 리메인스와 충만한 상태를 뜻하며, 여기서는 주님의 섭리가 부분적이거나 우연하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 전체를 완전하게 보존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두 그룹의 크기와 모양이 같았다는 것도 같은 의미를 강화합니다. 주님의 섭리는 서로 모순되거나 불균형하게 작용하지 않고, 신적 질서 안에서 완전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작용합니다.

 

그룹들의 날개가 내소 전체를 가득 채웠다는 사실은 특별히 주목할 만합니다. 한쪽 그룹의 바깥 날개는 한쪽 벽에 닿고, 다른 그룹의 바깥 날개는 반대편 벽에 닿았으며, 안쪽 날개들은 성전 중앙에서 서로 맞닿았습니다. 따라서 내소 안에는 그룹들의 날개가 미치지 않는 공간이 없었습니다. 이는 주님의 섭리가 가장 내적 거룩함의 어느 한 부분만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체를 감싸고 있음을 뜻합니다. 사람의 눈에는 주님의 섭리가 보이지 않거나 어떤 곳에서는 작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주님의 보호는 가장 내적인 것에서부터 가장 바깥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빈틈없이 미치고 있습니다.

 

날개’는 말씀에서 능력과 보호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날개가 벽에서 벽까지 펼쳐졌다는 것은 주님의 신적 능력이 거룩한 것을 온전히 보호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 보호는 거룩한 것을 사람에게서 빼앗는 폐쇄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신의 proprium으로부터 거룩한 것 안으로 들어가 그것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이용하지 못하도록 막는 보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겸손히 받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필요한 만큼 열리지만, 자기 지성과 감각적 추론으로 침입하려는 사람에게는 닫히는 것입니다.

 

두 그룹의 날개가 성전 중앙에서 서로 맞닿았다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룹들은 서로 분리되어 각자 한쪽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중앙에서 연결되어 하나의 완전한 보호 질서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주님의 섭리가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서로 무관하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과 마지막, 가장 안쪽과 가장 바깥쪽, 선과 진리가 하나의 목적 아래 결합되어 작용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목적은 사람이 거룩한 것을 profane 하지 않도록 보호하면서, 동시에 그가 받을 수 있는 만큼 주님과 천국에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룹들이 금으로 입혀졌다는 사실은 이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말씀에서 ‘’은 천적 사랑의 선을 뜻합니다. 그룹의 재료인 감람나무도 천적 사랑의 선을 표상하고, 그 위에 입힌 금도 같은 천적 선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그룹들의 안과 밖이 모두 사랑의 선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이 됩니다. 이는 사람의 접근을 제한하고 거룩한 것을 감추시는 주님의 섭리가 겉으로는 엄격한 금지처럼 보여도, 그 안과 밖의 본질은 모두 신적 사랑임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제한은 사랑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취하는 보호의 형식입니다.

 

왕상6:29에서는 내소와 외소의 사방 벽에 그룹들과 종려, 그리고 핀 꽃 형상이 아로새겨졌다고 합니다. 이 구절은 그룹들의 의미를 지성소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내소’는 교회와 사람의 더 내적인 것들을, ‘외소’는 그보다 외적인 것들을 표상합니다. 내소와 외소의 모든 벽에 그룹들이 새겨졌다는 것은 주님의 섭리가 가장 내적인 천적 상태뿐 아니라 영적 상태와 자연적 상태에도 두루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어느 단계에 있든 주님의 섭리 밖에 있지 않습니다. 가장 깊은 진리를 받는 사람도 보호받고, 아직 외적 진리와 예배 안에 있는 사람도 그가 profanation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받습니다.

 

벽에 새겨진 ‘종려’와 ‘핀 꽃’도 그룹들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종려는 선에서 나오는 영적 진리와 그 승리를, 핀 꽃은 진리와 지식이 처음 생겨나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그룹들과 종려, 그리고 핀 꽃이 함께 새겨진 것은, 주님의 섭리가 단순히 거룩한 것의 접근을 막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자라고 열매 맺도록 보호한다는 뜻입니다. 그룹은 생명을 차단하는 표상이 아니라, 참된 생명이 올바른 질서 안에서 자라도록 지키는 표상입니다.

 

그룹들이 내소와 외소 사방 벽에 새겨졌다는 것은 주님의 섭리가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에 함께한다는 점도 보여줍니다. 사람 안에서 진리가 꽃처럼 처음 피어날 때에도 주님의 섭리가 보호하며, 그 진리가 선과 결합, 종려가 표상하는 승리와 열매에 이를 때에도 주님의 섭리가 보호합니다.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것보다 더 깊은 진리가 너무 일찍 열리지 않도록 하시고, 이미 받은 진리를 악한 삶으로 더럽히지 않도록 내적으로 경고하시며, 때로는 그 진리에 대한 기억이나 이해를 흐리게 하심으로써 더 깊은 profanation을 막기도 하십니다.

 

32절에서는 내소로 들어가는 감람나무 문짝에도 그룹과 종려, 핀 꽃이 아로새겨지고 금으로 입혀졌다고 합니다. ‘’은 안과 밖을 연결하는 매개이며, 무엇이 안으로 들어가고 나오는지를 결정하는 접근 수단을 뜻합니다. 따라서 내소의 문에 그룹들이 새겨졌다는 것은, 가장 내적인 거룩함에 이르는 접근 자체가 주님의 섭리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단지 지식을 많이 쌓거나 논리적으로 추론한다고 해서 내소가 표상하는 천적 아르카나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열어 주시고, 사람의 사랑과 삶이 준비되었을 때에만 그 문을 통하여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문짝도 감람나무로 만들어지고 금으로 입혀졌습니다. 이는 가장 내적인 거룩함에 이르는 길이 오직 사랑의 선을 통해서만 열린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기 지성으로 내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통하여 들어갑니다. 신앙의 아르카나는 호기심이나 지적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선한 삶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룹들이 문에 새겨졌다는 것은, 자기 사랑과 감각적 추론으로 들어가려는 길은 막히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선을 통해 들어가는 길은 보호되고 열려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 구절은 AC.308에서 언급한 유대인들의 상태와도 직접 연결됩니다. 유대인들은 외적으로는 이 성전과 그룹들, 그리고 금과 감람나무, 종려와 꽃을 보았지만, 그것들이 주님의 오심과 천국, 그리고 속 사람과 말씀의 속뜻을 표상한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이 내적 의미가 감추어진 것은 주님의 거룩한 것을 그들에게 주지 않으려는 처분이 아니라, 그들이 그것을 알고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안에서 거부, profane 하지 않도록 보호하신 섭리였습니다. 그들은 성전의 표상 안에는 있었지만, 그 표상의 속뜻은 마치 내소의 문과 그룹들 뒤에 있는 것처럼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25의 그룹들과 비교하면 의미의 발전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출25에서는 작은 증거궤 위의 그룹들이 속죄소를 덮고 있었지만, 왕상6에서는 거대한 그룹들의 날개가 성전 내소 전체를 덮고 있습니다. 이는 같은 주님의 섭리가 성막에서 성전으로, 한 기물의 보호에서 성전 전체의 보호로 확대되어 표상된 것입니다. 그러나 본질은 동일합니다. 증거궤와 내소가 모두 주님과 주님께 속한 가장 거룩한 천적인 것들을 뜻하므로, 그 위와 그 안을 채우고 있는 그룹들은 사람이 자신의 proprium으로 그 거룩한 것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뜻합니다.

 

3:24와의 연결도 분명합니다. 에덴동산의 그룹들은 생명나무의 길을 지켰고, 솔로몬 성전의 그룹들은 내소와 그 문과 벽을 가득 채우며 지켰습니다. 생명나무와 내소는 모두 주님과 천적 생명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창3의 그룹들과 왕상6의 그룹들은 동일한 속뜻을 가집니다. 주님께서는 생명의 길을 폐지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profane, 영원히 파멸하지 않도록 지키셨습니다. 성전의 그룹들도 내소를 없애거나 비워 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보존하면서 그 접근을 질서 있게 제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왕상6:23-29, 32 AC.308에 인용된 이유는, 그룹들이 주님의 가장 내적 거룩함을 보호할 뿐 아니라 성전의 내소와 외소, 벽과 문, 곧 교회와 사람의 모든 내적, 외적 단계에 걸쳐 주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감람나무와 금은 그 보호의 본질이 천적 사랑의 선임을 나타내고, 내소 전체를 채운 날개는 그 보호가 완전함을 나타내며, 벽과 문에 새겨진 그룹들은 거룩한 것에 이르는 모든 과정과 접근이 주님의 질서 아래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 인용의 중심 메시지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성전의 그룹들은 사람이 신앙의 아르카나 안으로 자신의 proprium과 감각, 기억 지식을 가지고 광적으로 들어가 그것들을 profane 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표상합니다. 그러나 그 섭리는 사람을 거룩한 것에서 영원히 배제하는 냉혹한 장벽이 아니라, 사랑의 선에서 나와 거룩한 것을 온전히 보존하고, 사람이 합당한 상태가 되었을 때, 주님으로부터 그것을 받을 수 있도록 지키시는 자비로운 보호입니다.

 

 

 

AC.308, 심화 4, ‘출25의 그룹과 왕상6의 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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