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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목사님 때문에 우리 가정이 망했어요’라는 충격적인 말로 시작하지만, 이야기의 실제 중심은 어느 가정의 실패 자체보다 ‘목회자의 사랑이 언제 참된 사랑이 되고, 언제 상대의 자유를 침해하는 과잉 개입이 되는가’에 있습니다. 이야기 속 목사는 처음에는 부부 싸움이 벌어진 밤에 급히 달려가고, 실직한 가정에 구제비를 지급하며, 부부와 자녀의 문제를 함께 고민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표면적으로는 헌신적이고 선해 보입니다. 실제로 어려움에 빠진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급한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며, 공동체의 재원으로 곤궁한 이웃을 돕는 것은 체어리티의 중요한 실천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목회자는 성도의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목사가 도왔다는 데 있지 않고, 도움의 방식이 점차 그 가정의 자유와 책임을 대신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인간이 인간답게 거듭나기 위해 반드시 보존되어야 하는 두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유이고, 다른 하나는 rational, 곧 진리를 이해하고 스스로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강제로 거듭나게 하지 않으시며, 사람의 자유와 rational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이끄십니다.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고, 진리를 살피고, 선택하고, 그 선택의 결과를 감당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선은 그 사람의 생명 안에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목사의 말을 잘 따르고 신앙적으로 순종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 판단이 자기 안에서 자유롭게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아직 그 사람 자신의 신앙이 아닙니다. 이야기 속 가정은 처음에는 목사에게 조언을 구했지만, 점차 ‘목사님이 허락하시면 하겠습니다’, ‘목사님이 기다리라고 하셨으니 기다리겠습니다’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목사는 그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안내자의 자리를 넘어, 사실상 그들의 판단과 선택을 대신하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인플럭스(influx)의 질서와도 관계됩니다.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사람에게 흘러듭니다. 그러나 그 흐름은 어느 인간 개인이 다른 사람의 내면을 장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목회자는 말씀을 가르치고, 선과 진리를 제시하고, 함께 기도하며, 가능한 길들을 살펴보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그 진리를 받아들이고 삶에 적용하는 것은 각 사람의 자유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목사가 자신의 판단을 ‘하나님의 뜻’처럼 전달하거나, 성도가 목사의 말을 자신의 양심보다 앞세우기 시작하면 영적 질서가 흐려질 수 있습니다. 목회자가 의도적으로 사람을 지배하지 않았더라도, 성도가 목회자에게 과도하게 의존하는 구조를 계속 허용한다면 결과적으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내면을 대신 관리하는 관계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이야기 속 목사가 처음 구제비를 지급한 행동에는 선한 동기가 있었습니다. 실직하여 생활비가 막힌 가정을 보고 일주일을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은 인간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회의 승인과 보고 절차를 생략했고, 두 번째 지원 역시 같은 방식으로 집행했습니다. 이 대목은 사랑과 질서의 관계를 잘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선은 진리와 결합되어야 참된 선이 됩니다. 선한 마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그 선이 지혜롭고 질서 있는 방법으로 실행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재정은 목회자의 개인 재산이 아니므로, 아무리 긴급하고 선한 목적이라 해도 공동체가 정한 절차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절차는 사랑을 방해하는 냉혹한 장벽이 아니라, 사랑이 특정인의 감정이나 편견에 휘둘리지 않도록 보호하는 진리의 형식이 될 수 있습니다.
물질적 도움 자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궁핍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것은 체어리티(charity)입니다. 그러나 모든 요청에 반복적으로 돈을 제공하는 것이 언제나 체어리티인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웃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잘해 주는 것’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상대 안에 있는 선을 사랑하고, 그 선이 자라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는 즉각적인 지원이 필요하지만, 다른 경우에는 일할 기회를 찾도록 돕고, 지출 구조를 점검하고, 부부가 함께 책임을 나누며, 필요한 전문 지원을 받도록 연결하는 것이 더 깊은 사랑일 수 있습니다. 상대가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돕지 않고, 계속 대신 책임져 주는 것은 잠시 고통을 줄일 수는 있어도, 장기적으로는 그의 자유와 책임감을 약화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이 과정을 ‘목사가 주님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표현합니다. 이 고백에는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목사는 성도를 사랑하고 도왔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그 가정의 경제적 문제, 부부 문제, 자녀 교육, 투자, 대출, 심지어 일상의 사소한 결정까지 대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성도들이 자신을 신뢰한다는 사실에서 보람을 느꼈고, 자신의 영향력을 목회적 열매로 받아들였습니다. 여기에는 누구에게나 숨어 있을 수 있는 proprium, 그러니까 주님을 대신하여 자기가 주인노릇하고자 하는 유혹이 있습니다. 사람을 돕는다는 명분 아래 ‘내가 없으면 저 사람은 바로 설 수 없다’고 느끼는 마음, 나의 조언을 따라야 안전하다고 믿는 마음, 상대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서 은밀한 만족을 얻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노골적인 지배욕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희생과 헌신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더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모든 적극적인 목회를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규정해서도 안 됩니다. 부모가 어린 자녀를 책임지고, 목회자가 위기에 빠진 성도를 보호하며, 폭력이나 자해 위험이 있는 상황에서 즉시 개입하는 것은 과잉 지배가 아니라 필요한 사랑일 수 있습니다. 이야기 초반의 부부 싸움 장면에서는 물건이 깨지고, 아이가 떨고 있으며, 이웃들까지 소란을 듣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단순한 의견 충돌이 아니라 가정폭력의 위험이 있는 상황일 수 있습니다. 이때 목회자가 두 사람을 진정시키는 것만으로 사건을 끝내서는 안 됩니다. 피해자의 안전을 확인하고, 폭력의 반복 여부를 살피며, 필요한 경우 경찰이나 상담기관, 가정폭력 전문기관과 연결해야 합니다. ‘부부가 함께 기도하면 된다’거나 ‘목사가 물러나야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말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현실적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새벽 두 시에 걸려 온 전화를 목사가 두려움 때문에 받지 않고, 다음 날 ‘깊이 잠들어 몰랐다’고 거짓말한 장면도 중요합니다. 이야기는 이것을 목사가 자신의 과잉 개입을 깨닫는 전환점처럼 묘사하지만, ‘전화를 받지 않는 것’ 자체가 건강한 경계 설정은 아닙니다. 참된 경계는 몰래 피하고 거짓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관계의 한계와 도움의 범위를 분명하고 정직하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응급 상황에서는 경찰이나 구급대에 먼저 연락하도록 안내하고, 부부 갈등은 정해진 상담 시간에 다루며, 재정 지원은 당회의 공식 절차를 거치고, 목회자가 혼자 감당할 수 없는 문제는 전문기관과 협력하도록 해야 합니다. 경계는 사랑의 철회가 아니라 사랑이 오래 지속되도록 보호하는 질서입니다.
목사가 마침내 그 가정을 찾아가 ‘더 이상 두 분의 결정에 개입하지 않겠다’, ‘물질적 도움도 줄이겠다’고 선언한 것은 필요한 변화였지만, 그 전달 방식에는 다소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미 목사의 반복적인 지원과 지시에 익숙해진 가정에 갑자기 ‘이제 스스로 결정하라’고 말하면, 그들은 실제로 버림받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목사가 잘못 형성한 의존 관계라면, 그 관계를 바로잡는 책임도 목사에게 어느 정도 있습니다. 따라서 즉시 손을 떼기보다는 단계적으로 결정권을 돌려주고, 구제비는 정식 절차로 전환하며, 직업 상담이나 재정 상담, 부부 상담과 연결하고, 일정 기간 정기적으로 상태를 확인하는 방식이 더 지혜로울 수 있습니다. ‘당신들이 하나님께 직접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 상대를 홀로 남겨 두는 종교적 명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이야기에서 목사는 이후 상담을 요청하는 성도들에게 ‘주님께 여쭤보셨나요’, ‘제가 답을 드리면 저에게 의지하게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방향은 목회자가 모든 결정을 독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건강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세심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기도한 뒤, 자기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곧바로 주님의 응답이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내적 음성이나 즉각적인 영감을 무분별하게 하나님의 직접 계시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경계합니다. 주님의 인도는 대개 말씀의 진리, 건전한 이성, 양심, 경험, 공동체의 조언, 현실적인 사실을 통하여 질서 있게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주님께 직접 물어보라’는 말은 ‘마음에 떠오르는 느낌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믿으라’는 뜻이 아니라, 말씀과 이성 앞에서 자신의 동기와 선택을 정직하게 살피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목회 상담의 역할은 정답을 대신 내려 주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자신의 상태를 분별하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목회자는 ‘그 일을 하라’거나 ‘하지 말라’고 단정하기보다, ‘이 선택을 원하는 가장 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결정이 배우자와 자녀에게 어떤 영향을 줍니까?’, ‘말씀의 선과 진리에 어긋나는 부분은 없습니까?’, ‘두려움이나 욕심 때문에 서두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감당할 수 있는 위험은 어느 정도입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성도의 자유를 빼앗지 않으면서도 rational이 깨어나도록 돕습니다. 선택은 성도가 하되, 그 선택이 무지나 충동에서 나오지 않도록 진리를 제공하는 것이 목회자의 역할입니다.
이야기 속 가정이 일 년 후 ‘목사님이 물러나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고, 남편은 취직하고 아내는 일하며 아이도 안정되었다는 결말은 이야기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완성합니다. 다만 이 결말은 실제 삶의 복잡성을 다소 단순화한 서사적 장치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목회자가 물러난다고 모든 가정이 스스로 기도하며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가정은 더 깊이 무너질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경제적·정신적·관계적 지원을 오랫동안 필요로 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도움을 끊으면 사람이 자립한다’는 공식으로 읽는 것은 위험합니다. 핵심은 도움을 끊는 것이 아니라, 도움의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도움의 목적은 상대를 돕는 사람에게 묶어 두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자신의 자유 안에서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 있도록 세우는 데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영적으로 의미 있는 부분은 목사가 자신의 외적 헌신보다 그 헌신 안에 들어 있던 사랑의 성질을 돌아본다는 점입니다. 그는 밤중에 달려갔고, 돈을 주었고, 상담했고, 기도했습니다. 외적으로 보면 모두 훌륭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안에 자기 공로감과 영향력에 대한 만족, 다른 사람의 삶을 책임질 수 있다는 과신이 섞여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행위의 영적 성질은 그 겉모양이 아니라 행위를 낳은 사랑과 목적에 의해 결정됩니다. 같은 구제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여 할 수 있고, 인정받고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할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인간적 행동에는 두 동기가 섞여 있습니다. 거듭남은 선한 일을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한 일 속에서 proprium의 동기를 점차 제거하고 주님으로부터 행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물러나야 주님께서 일하십니다’라는 이야기의 결론도 조심스럽게 다듬어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은 목회자가 움직일 때도 일하시고, 물러날 때도 일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움직이느냐 물러나느냐가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에서 행하느냐입니다. 어떤 순간에는 즉시 달려가야 하고, 어떤 순간에는 기다려야 하며, 어떤 순간에는 분명한 조언을 해야 하고, 어떤 순간에는 선택권을 상대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차이를 분별하게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사랑만 있고 지혜가 없으면 과잉 개입이 되고, 지혜를 내세우면서 사랑이 없으면 냉정한 방임이 됩니다. 천국적인 체어리티는 사랑과 지혜가 결합된 상태입니다.
이야기에 인용된 서신서들의 말씀은 이 이야기의 목회적 교훈을 설명하는 데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기준에서는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의 서신은 창세기와 출애굽기, 복음서와 계시록처럼 연속적인 속뜻, 곧 아르카나를 지닌 ‘말씀’의 범주에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해설에서는 서신서의 각 문장을 상응에 따라 깊은 속뜻으로 풀이하기보다, 초기, 초대 교회의 신앙과 생활을 가르치는 교훈적 문장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 역시 특정 성구의 아르카나를 밝히는 데 있지 않고, 목회적 관계 안에서 자유와 책임, 사랑과 질서가 어떻게 결합되어야 하는지를 살피는 데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목회자에게 ‘더 많이 희생하라’고만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무엇을 위해 희생하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성도를 주님께 가까이 가게 하기 위한 헌신인지, 자신을 필요로 하게 만드는 헌신인지, 성도의 자유와 rational을 세우는 도움인지, 성도를 수동적으로 만드는 도움인지 돌아보게 합니다. 동시에 성도에게도 목회자를 자신의 모든 결정을 대신하는 영적 대리인으로 삼지 말라고 권합니다. 목회자의 조언은 소중하지만, 목회자는 주님이 아니며 개인의 양심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성도는 말씀과 기도, 건전한 이성, 공동체의 지혜 안에서 자신의 선택을 책임 있게 감당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본 이 이야기의 최종적인 교훈은 ‘참된 목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을 대신해 주는 것’도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참된 목회는 사람이 주님께로 자유롭게 향하도록 돕고, 진리를 통해 스스로 생각하게 하며, 필요할 때 곁에 서되 그 사람의 삶을 점유하지 않는 일입니다. 목회자는 사람을 자신의 품 안에 붙들어 두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주님의 품을 발견하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참된 체어리티는 상대의 당장 편안한 상태만을 원하는 사랑이 아니라, 그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이고, 마침내 스스로 설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이야기는 ‘헌신의 포기’를 말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중심적 헌신에서 질서 있는 사랑으로 옮겨 가는 한 목회자의 거듭남을 보여 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SY.42, ‘목사님, 그동안 제가 낸 헌금 모두 돌려주십시오’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헌금을 돌려 달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한 장로와, 그 과정을 통해 관계를 회복해 가는 목회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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