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20.심화

 

1. ‘40:3, 6

 

3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6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40:3, 6)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the voice said, Cry (Isa. 40:3, 6).

 

 

이 구절을 AC.220에서 인용한 이유는, 말씀에서 ‘소리(voice)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주님의 오심을 알리는 계시와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220에서 스베덴보리는 창3:8의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설명하면서, 그 음성이 타락 이후에도 남아 있던 지각(perception)의 희미한 흔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사야 40장을 인용하여, 말씀 전체에서 ‘소리’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세례 요한의 사역을 예언하는 말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신약은 이 구절을 세례 요한에게 적용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더 깊은 의미를 봅니다.

 

그에 따르면 ‘광야(wilderness)는 단순한 사막이 아니라 신앙이 없는 교회, 또는 진리와 선이 희박해진 영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고, 교회가 황폐해진 상태입니다. 창3의 후손들이 점차 지각, 곧 퍼셉션을 잃어 가던 상태와도 통하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광야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주님의 음성은 모든 것이 풍성하고 밝을 때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적 황폐 속에서 더욱 절실하게 들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음성을 ‘주님의 오심에 대한 선포’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외치라’는 명령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설교 행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는 주님의 진리가 인간의 내면에 자신을 드러내고 알리는 작용을 의미합니다. 즉 사람이 주님을 찾기 전에, 먼저 주님께서 사람에게 다가오시고, 자신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특히 AC.220의 마지막 문장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광야의 외치는 소리’를 ‘거듭난 사람들에게 있는 내적 딕테이트’와 연결합니다. 즉 이사야의 예언은 단지 세례 요한에 관한 역사적 예언이 아니라, 모든 거듭남의 과정에서 반복되는 영적 경험을 묘사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다 보면, 어느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내적 촉구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이 길은 아니다’, ‘돌아가야 한다’, ‘주님께 더 가까이 가야 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런 내면의 부르심을 바로 이런 ‘음성’, ‘소리’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AC.220에서 이사야 40장을 인용한 이유는, 창3:8의 ‘여호와의 소리’가 단순한 청각적 소리가 아니라 주님의 오심을 알리는 내적 부르심이며, 신앙이 메마른 광야 같은 상태 속에서도 여전히 인간 안에 울려 퍼지는 계시와 양심의 음성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어쩌면 목사님께서 자주 말씀하시는 퍼셉션(perception)에 비추어 보면, 이 구절은 더욱 특별하게 읽힙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밝은 대낮처럼 주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는 그 빛이 희미해졌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는 퍼셉션의 밝은 빛 대신, 광야에서 들려오는 한 음성처럼 사람을 부르십니다. AC.220은 바로 그 음성의 정체를 설명하는 본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라, 인간 영혼 깊은 곳에서 주님께서 계속 말씀하고 계시는 사랑의 부르심인 것입니다.

 

 

 

AC.220, 창3:8, ‘거니시는 소리’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n the air of the day; and the man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3:8)

 

AC.220

 

거니시는 소리(the voice going to itself)란 지각(perception)이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다만 마치 홀로 존재하며,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남아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다음 절에서 여호와께서 아담을 부르시며(Jehovah called to the man)라고 하는 것으로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에도 이와 같이 말합니다. By the “voice going to itself,” is meant that there was but little perception remaining, and that alone as it were by itself and unheard, as is manifest also from the following verse where it is said, “Jehovah called to the man.” So in Isaiah:

 

3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6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40:3, 6)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the voice said, Cry (Isa. 40:3, 6).

 

여기서 광야(wilderness)는 신앙이 없는 교회(a church where there is no faith)를 의미합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the voice of one crying)는 주님의 오심(the Lord’s advent)에 대한 선포를 의미하며, 일반적으로는 주님의 오심에 대한 모든 알림(announcement)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거듭난 사람들(the regenerate)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에게는 내적 딕테이트(an internal dictate)가 있기 때문입니다. The “wilderness” is a church where there is no faith; the “voice of one crying” is the annunciation of the Lord’s advent, and in general every announcement of his coming, as with the regenerate, with whom there is an internal dictate.

 

 

해설

 

AC.220은 창세기 38절의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라는 말씀을 더욱 깊이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앞의 AC.219에서 스베덴보리는 ‘여호와의 소리’를 양심, 내적 깨달음, 내적 책망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거니시는(going to itself)이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그에 따르면 이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타락한 후에도 완전히 모든 영적 지각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음을 의미합니다. 다만 그 지각이 거의 사라져 버렸고, 마치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처럼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홀로 존재하는 것처럼’,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남아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음성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을 듣지 못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여전히 말씀하시지만, 사람은 더 이상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마치 먼 곳에서 누군가 부르고 있는데도 자기 생각과 욕망에 사로잡혀 그 소리를 거의 듣지 못하는 상태와 같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다음 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셨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숨었지만, 주님은 찾으십니다. 인간은 듣지 않지만, 주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타락 이후에도 계속되는 주님의 자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이사야 40장을 인용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는 신약에서는 흔히 세례 요한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되지만, 스베덴보리는 더 넓은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에게 광야는 단순한 사막이 아니라 신앙이 사라진 교회를 의미합니다. 진리가 메말라 있고 영적 생명이 희박해진 상태입니다.

 

그런 광야에서 들리는 ‘외치는 소리’는 주님의 오심을 알리는 음성입니다. 즉 사람 안에 남아 있는 마지막 양심의 소리, 마지막 진리의 부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이 쇠퇴하고 교회가 황폐해져도 주님은 여전히 부르고 계십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난 사람(the regenerate)에게는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perception)과는 다르지만, 양심(conscience)을 통해 주님께서 계속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양심을 자신의 생각이나 도덕 교육의 결과 정도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양심은 주님께서 사람 안에 심어 두신 영적 통로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선을 행하려 할 때 느끼는 내적 권고, 악을 피하려 할 때 느끼는 내적 경고는 단순한 심리 현상이 아니라 주님의 음성이 희미하게 울리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AC.220은 매우 따뜻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주님의 음성을 거의 잃어버렸을 때조차 그 음성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비록 ‘거니시는 소리’처럼 희미해졌지만 여전히 남아 있었고, 주님은 계속 사람을 부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주님은 양심과 내적 깨달음을 통해 같은 방식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다가 아니라, 우리가 그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심화

 

1. ‘40:3, 6

 

 

AC.220, 심화 1, ‘사40:3, 6’

AC.220.심화 1. ‘사40:3, 6’ 3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6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

bygrace.kr

 

 

 

 

AC.219, 창3:8,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219.심화

 

6. ‘30:30-31

 

30여호와께서 그의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시며 혁혁한 진노로 그의 팔의 치심을 보이시되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시리니 31여호와의 목소리에 앗수르가 낙담할 것이며 주께서는 막대기로 치실 것이라 (30:30, 31) Jehovah shall cause the excellency of his voice to be heard, for through the voice of Jehovah shall Asshur be beaten down (Isa. 30:30–31).

 

 

이 구절을 AC.219에서 인용한 이유는, ‘여호와의 목소리(voice of Jehovah)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신적 진리의 계시와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를 의미하며, 그 진리가 인간 own에서 나온 거짓된 추론을 무너뜨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219의 전체 목적은 창3:8의 ‘동산에서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음성을 단순한 청각적 소리로 보지 않고, 양심과 퍼셉션 속에 울리는 주님의 내적 부르심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그는 여러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말씀 전체에서 ‘여호와의 음성’이 언제나 계시와 진리의 작용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30장의 경우, 특히 ‘앗수르(Asshur)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에서 앗수르는 흔히 이성적 능력, 추론 능력, 지성(intellectual reasoning)을 의미합니다. 원래 이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own 안에 머물면서 이성을 주님 위에 두게 되면, 앗수르는 진리를 섬기는 도구가 아니라 진리를 재판하는 주인이 됩니다.

 

바로 AC.194-206에서 본 뱀의 길이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믿는다’가 아니라, ‘내 감각과 내 이성이 납득해야 믿겠다’는 태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려는 상태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목소리에 앗수르가 낙담할 것이며’라는 말은, 신적 진리가 인간 own의 교만한 추론을 무너뜨린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진리 앞에서는 인간의 가장 정교한 논리도 한계를 드러내게 됩니다. 마치 AC.215에서 말한 것처럼, 자기 지혜를 절대화한 사람은 결국 거짓의 심연으로 빠지게 되지만, 여호와의 음성은 그 거짓을 드러내고 깨뜨립니다.

 

또한 본문에 나오는 ‘화염’, ‘폭풍’, ‘폭우’, ‘우박’ 역시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런 표현들은 진리가 인간 안의 거짓과 악을 심판하고 정화하는 다양한 작용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음성은 부드러운 위로의 음성일 뿐 아니라, 때로는 인간의 자기 확신과 교만을 무너뜨리는 음성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창3의 아담과 하와가 들은 음성과도 연결됩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음성이 자기들의 상태를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언제나 숨겨진 것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자기 own 안에 있는 사람은 그 빛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AC.219에서 사30:30-31을 인용한 이유는, ‘여호와의 음성’이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역사하는 신적 진리이며, 특히 인간 own의 추론과 자기 지혜를 꺾고 진리 앞에 복종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어쩌면 AC.215의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와 이 구절은 서로 짝을 이루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전자는 자기 지혜를 의지하는 인간의 상태를 보여 주고, 후자는 그런 인간적 지혜를 무너뜨리는 여호와의 음성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창3의 이야기 전체는 바로 그 두 길, 곧 자신의 음성을 따르는 길과 주님의 음성을 따르는 길 사이의 갈림길을 그리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219, 창3:8,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bygrace.kr

 

AC.219, 심화 5,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AC.219.심화 5.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영어 성경과 달리 한글 성경에서는 ‘낙태’로 번역한 이유는? 좋은 질문입니다. 사실 여기에는 번역상의 문제라기보다 원문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