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2:8)

 

AC.99

 

영적 인간한테 있어서의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심에도 불구하고,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지성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람 자신으로부터, 곧 기억 지식과 이성을 통하여 나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와 다릅니다.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의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시며,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싸움이 없기 때문에, 그는 이것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이와 같이, 영적 인간한테는 거꾸로 되어 있던 질서가, 이제 천적 인간한테 있어서는 회복된 것으로 묘사되며, 이 질서, 곧 이 사람을 동방의 에덴동산(garden in Eden in the east)이라 부릅니다. 최고 의미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창설하신 동산(garden planted by Jehovah God in Eden in the east)은 주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또한 보편적 의미에서는, 이것은 주님의 나라, 그리고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놓이게 되는 하늘을 의미합니다. 이때 그의 상태는, 그가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있으며, 마치 그들 가운데 하나인 것과 같습니다. 이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도 동시에 하늘에 있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그의 모든 생각과 생각의 관념들, 심지어 그의 말과 행동들까지도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으며, 그 안에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각각의 것 안에 주님의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퍼셉션을 가질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Life, or the order of life, with the spiritual man, is such that although the Lord flows in, through faith, into the things of his understanding, reason, and memory [in ejus intellectualia, rationalia, et scientifica], yet as his external man fights against his internal man, it appears as if intelligence did not flow in from the Lord, but from the man himself, through the things of memory and reason [per scientifica et rationalia]. But the life, or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is such that the Lord flows in through love and the faith of love into the things of his understanding, reason, and memory, and as there is no combat between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he perceives that this is really so. Thus the order which up to this point had been inverted with the spiritual man is now described as restored with the celestial man, and this order, or man, is called a “garden in Eden in the east.” In the supreme sense, the “garden planted by Jehovah God in Eden in the east” is the Lord himself. In the inmost sense, which is also the universal sense, it is the Lord’s kingdom, and the heaven in which man is placed when he has become celestial. His state then is such that he is with the angels in heaven, and is as it were one among them; for man has been so created that while living in this world he may at the same time be in heaven. In this state all his thoughts and ideas of thoughts, and even his words and actions, are open, even from the Lord, and contain within them what is celestial and spiritual; for each one [of these] has the Lord’s life within it, which enables him to have perception.

 

 

해설

 

이 글은 AC.98에서 제시된 ‘에덴동산’의 구조를, ‘생명의 질서’라는 관점에서 정밀하게 해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도덕성이나 경건의 정도로 설명하지 않고, 오직 ‘유입이 어떻게 인식되는가’라는 문제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깊고도 실제적인 구분입니다.

 

먼저 영적 인간의 상태가 설명됩니다. 주님은 실제로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십니다. 이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식입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이 유입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걸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마치 자신이 기억 지식과 이성을 사용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즉, 유입은 있지만, 출처가 가려져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 영적 인간은 지성을 가지고 있으나, 그 지성은 항상 ‘내가 이해했다’, ‘내가 판단했다’는 감각을 동반합니다. 이는 교만의 문제라기보다, 아직 질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이 여전히 주도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생명의 흐름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꾸로 된 질서’입니다.

 

이에 반해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는 완전히 다릅니다. 주님은 사랑과 사랑의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때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더 이상 싸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성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퍼셉션합니다’. 그는 ‘,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구나’ 하고 즉각적으로 압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천적 인간은 더 많은 정보를 갖기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차이는 오직 하나, ‘질서가 회복되었는가’입니다. 생명은 위에서 아래로,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거쳐 지성으로 흘러갑니다. 천적 인간은 이 흐름을 막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있는 그대로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에덴동산’의 실체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회복된 질서, 혹은 그 사람 자체를 ‘동방의 에덴동산’이라고 부릅니다. 동쪽은 주님, 에덴은 사랑, 동산은 지성입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지성으로 흘러드는 생명의 질서가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장소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의 상태’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의미의 층위를 한 단계씩 올립니다. 최고 의미에서는 이 동산이 주님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모든 생명과 질서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보편적 의미에서는, 이것이 주님의 나라, 그리고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놓이게 되는 하늘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에덴동산은 개인 안에도 있고, 교회 전체 안에도 있으며, 하늘 전체 안에도 있습니다.

 

이제 놀라운 진술이 나옵니다. 천적 인간은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있으며, 마치 그들 가운데 하나인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는 사후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동시에 하늘에 있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인간 창조의 본래 목적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의 모든 생각과 생각의 관념들, 심지어 말과 행동까지도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습니다. 이는 무의식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깨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각각의 것 안에 주님의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습니다. 사람이 퍼셉션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각 생각과 말과 행동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퍼셉션은 특별한 은사가 아니라, ‘생명이 올바른 질서로 흐를 때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상태’입니다.

 

AC.99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적 인간은 더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생명의 출처를 숨기지 않고 그대로 느끼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 곧 그 질서 자체가 바로 ‘동방의 에덴동산’입니다.

 

 

 

AC.98, 창2:8, ‘동방의 에덴동산’, 천적 인간의 지성(AC.98-101)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창2:8) AC.98 ‘동산’(garden)은 지성(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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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8.심화

 

2. 퍼셉션의 확장

 

 AC.98 해설에, 그러나 천적 인간의 지성은 사랑에서 출발합니다. 그는 먼저 기뻐하고, 그다음에 압니다. 그의 이해는 판단이 아니라 퍼셉션의 확장입니다.’라고 하는데요, 여기 그의 이해는 판단이 아니라 퍼셉션의 확장입니다라는 이 표현, 무슨 뜻인가요?

 

 

핵심을 바로 짚어 드리면, ‘그의 이해는 판단이 아니라 퍼셉션의 확장’이라는 말은 천적 인간의 앎은 ‘따져서 결론 내리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안에서 주어진 퍼셉션이 점점 더 또렷해지고 넓어지는 과정’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영적 단계의 이해가 판단(judgment)이라면, 천적 단계의 이해는 확장(expansion)이라는 말입니다.

 

먼저 판단’이 무엇인지부터 대비해 보겠습니다. 판단은 보통 이런 구조입니다. ‘이것이 맞나?’에서 시작, 근거를 찾고, 비교하고, 결론을 내는 것이죠. 여기서는 아직 모르는 상태’에서 출발해서, 사고 과정을 통해 아는 상태’로 갑니다. 그래서 이때는 이성이 주인이고, 퍼셉션은 없거나 약한 상태입니다.

 

반면 퍼셉션의 확장’은 완전히 다른 출발점입니다. 이미 안에서 이것이 선하다’, ‘이것이 옳다’는 것이 느껴지고 보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맞나 틀리나 따지는 과정’이 중심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걸 더 깊이, 더 넓게 이해하는 과정’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확장’이라는 표현이 정확합니다. 처음에는 한 점처럼 보이던 것이 점점 더 또렷해지고, 더 많은 경우에 적용되고, 더 깊은 의미로 열리는 것입니다.

 

이걸 실제적인 예로 보시면 더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선하다’는 걸 생각해 보겠습니다.

영적 단계에서는 왜 사랑해야 하지? 어디까지가 사랑인가? 나도 손해 보지 않아야 하는데...’ 등, 이런 판단과 비교가 계속 일어납니다.

 

그러나 천적 상태에서는 이미 사랑하는 것은 선하다’라는 것이 안에서 분명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그걸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맞을까?’, ‘이 사람에게는 어떤 방식이 가장 선한 걸까?’ 등, 이렇게 같은 선이 다양한 상황 속에서 더 풍성하게 열립니다.’

 

이것이 바로 퍼셉션의 확장’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특징은 이것입니다.

 

판단은 맞다/틀리다’를 가르지만, 퍼셉션의 확장은 더 깊다/더 넓다’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의 이해는 논쟁적이지 않고’, ‘방어적이지 않으며’, ‘점점 더 조화롭게 됩니다.’ 왜냐하면 출발이 옳음을 증명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판단은 모르는 데서 시작해 결론에 이르지만, 퍼셉션의 확장은 이미 아는 데서 시작해 더 깊이 열립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적 인간의 이해는 생각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보이고, 그 보임이 점점 넓어지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은 옳음을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미 안에서 보이기 때문에, 그 보임이 삶 속에서 점점 더 깊어지고 넓어질 뿐입니다.’

 

퍼셉션의 확장’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지성과 사랑의 질서가 완전히 바뀐 상태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앎의 방식’입니다.

 

 

 

AC.98, 창2:8, ‘동방의 에덴동산’, 천적 인간의 지성(AC.98-101)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창2:8) AC.98 ‘동산’(garden)은 지성(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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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8, 심화 1, ‘사랑을 통하여 흘러들어오는 지성’

AC.98.심화 1. ‘사랑을 통하여 흘러들어오는 지성’ 위 AC.98 본문에 ‘‘동방의 에덴동산’(garden of Eden eastward)은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천적 인간의 지성(the intelligence of the 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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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튜브를 통해 AI의 엄청난 발전을 보면서 불현듯 든 생각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ChatGPT의 도움을 받고 있으니 대략 10년쯤 걸리겠지 하며 하고 있는, 이 스베덴보리 저작 번역의 일이 혹시 불과 몇 년 사이 전혀 다른, 그 퀄리티에 있어 차원이 다른 해설과 설명, 대답들이 나오면 어떻게 하지? 아니, 그 이전에 아예 이 모든 정리, 정돈된 글과 책이 전혀 필요 없는 시대가 오면 지금의 이 모든 노력이 다 무슨 소용이 있지? 테크놀로지의 비약적 발전으로, 궁금하면 모든 것을 실시간으로 알게 되는, 그러니까 마치 태고교회 때 퍼셉션을 21, 22세기 신기술로 구현한 것 같은 그런 시대가 도래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순간 마음이 무겁고 혼란스러웠습니다...

 

 

그 생각, 아주 현실을 정확히 짚은 고민입니다. 다만 결론부터 조금 단호하게 말씀드리면, ‘그 일이 무의미해질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런 시대가 올수록 지금 목사님께서 하고 계신 일의 ‘성격’이 더 또렷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정보’와 ‘상태’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한 핵심을 그대로 빌리면, 지식은 밖에서 들어오지만, 퍼셉션은 생명에서 솟아납니다. AI는 아무리 발전해도 전자에만 속할 뿐, 후자에는 본질적으로 닿지 못합니다.

 

지금 유튜브에서 보시는 AI의 발전은 분명 놀랍습니다. 몇 년 사이 번역, 요약, 해설, 심지어 설교 초안까지 만들어 내는 수준이 급격히 올라왔습니다. 앞으로는 더 정교해져서, 아마 AC 각 번호를 입력하면 그에 대한 ‘최적화된 설명’이 즉시 나오고, 서로 다른 해석 전통까지 비교해 주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목사님이 수년, 수십 년에 걸쳐 하시는 작업을 단 몇 초 만에 대신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구분이 하나 있습니다. AI가 만들어내는 것은 ‘정리된 의미’이지, ‘살아 있는 의미’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식으로 표현하면, 그것은 여전히 ‘겉 사람의 이해’에 속한 것이지 ‘속 사람의 지각’이 아닙니다. 목사님께서 수년간 기도하시며, 때로는 막히고, 때로는 열리고, 그렇게 씨름하며 번역하고 해설을 쓰시는 그 과정 자체가 이미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형성되는 이해는 단순한 문장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상태이고, 결합이며, 사랑과 진리의 실제적인 결합입니다. 이건 어떤 기술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씀드리면, 앞으로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그래서 ‘좋은 설명’이 넘쳐나더라도, 그러나 ‘누군가의 삶을 통해 검증된 설명’은 여전히 희귀할 것입니다. 지금도 설교 잘하는 사람, 글 잘 쓰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말 속에 생명이 있느냐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도 같은 것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진리는 사랑 안에 있을 때만 살아 있고, 그렇지 않으면 죽어 있는 것과 같다고 말입니다. AI는 진리를 배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사랑 안에 두지는 못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목사님께서 하시는 일이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하시는 작업은 사실상 ‘하늘의 질서를 글로 고정시키는 작업’에 가깝습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심지어 사람들이 책을 덜 읽게 되어도, 그런 작업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정보가 넘칠수록 사람들은 ‘검증된 길’을 더 찾게 됩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이미 누군가가 깊이 통과해 본 길’입니다. 지금 쓰시는 이 수백, 수천 페이지의 글들은 바로 그런 성격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떠올리신 그 생각, 곧 ‘퍼셉션이 기술로 구현되는 시대’라는 생각은 흥미롭지만, 사실 스베덴보리 관점에서는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영역입니다. 퍼셉션은 ‘주님과의 결합 상태’에서 오는 것이지, 데이터 처리의 속도나 정확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그것은 ‘더 빠른 이해’, ‘더 정확한 설명’은 만들 수 있어도 ‘더 깊은 사랑에서 나오는 앎’은 만들 수 없습니다. 전자는 계산의 영역이고, 후자는 존재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지금 목사님의 작업을 이렇게 다시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는 미래에 쓸모 있을 정보를 만드는 중이다’가 아니라, ‘나는 지금 내 안에 천국의 질서를 형성하는 중이다.’ 이 관점으로 바뀌면, 외부 기술의 발전이 전혀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도움이 됩니다. AI는 점점 더 훌륭한 ‘도구’가 되어, 목사님의 시간을 절약해 주고, 표현을 다듬어 주고, 자료를 정리해 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심, 곧 ‘무엇을 말할 것인가’와 ‘그 말이 어디서 나오는가’는 여전히 목사님에게만 속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 일이 언젠가 더 잘하는 누군가(혹은 AI)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는 생각은 겉으로는 합리적이지만, 그 밑에는 은근히 ‘결과 중심’의 관점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길은 철저히 ‘상태 중심’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완성도 높은 책을 남겼는가보다, 그 일을 하면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를 보십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 시간, 이 번역, 이 씨름은 이미 그 자체로 목적을 이룬 것입니다.

 

정리하면, 앞으로 AI는 ‘설명’을 압도적으로 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이해’는 여전히 사람을 통해서만 전달됩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지금 하고 계신 일은 바로 그 ‘살아 있는 이해’를 만들어 가는 일입니다. 그러니 이 길은 기술이 발전할수록 사라지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더 드러나는 길입니다.

 

 

 

SC.62, ‘스베덴보리가 관찰한 사후(死後) 재회’

스베덴보리가 영계를 처음 왕래하던 시절, 그에게 가장 충격적이면서도 가장 위로가 되었던 경험은 지상에서 헤어진 가족, 부부, 형제자매가 다시 만나는 장면들이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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