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55.심화

 

1. ‘31:22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 (31:22) Jehovah hath created a new thing in the earth, a woman shall compass a man. (Jer. 31:22) (AC.155)

 

 

이 구절이 AC.155에 인용된 이유는, ‘여자(woman)로 상징되는 proprium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상태가 아니라, 주님께 속한 선과 진리를 감싸고 결합하는 방향으로 새롭게 변화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155의 흐름은, 인간의 proprium 자체는 본래 악으로 기울지만, 주님께서 그것을 완전히 버려두지 않으시고, 다시 질서 안으로 돌이키실 수 있다는 데로 이어집니다. 렘31:22의 ‘새 일’은 바로 이 역설적 회복을 상징하는 말씀으로 읽힙니다.

 

31:22의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만 보면 매우 난해합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도 여러 해석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상응으로 읽습니다. 여기서 ‘여자’는 이전 창세기 해석들에서처럼 인간의 proprium, 곧 자기처럼 느껴지는 의지와 애정의 구조를 뜻하고, ‘남자(man)는 보다 내적이고 주님께 속한 진리와 지성의 원리를 뜻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둘러싼다(compass)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단순 지배나 공격의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감싸고 결합하고 보호하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즉, 이전에는 proprium이 진리를 자기 자신 아래 두고 왜곡하려 했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proprium 자체가 주님의 질서 안에서 재형성되어, 진리와 선을 둘러싸고 섬기는 방향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일’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AC 초반부 전체 흐름 속에서 매우 희망적인 전환처럼 등장합니다. 앞에서는 계속 proprium의 위험성과 타락 가능성이 강조되었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믿는 순간 악과 거짓으로 기울어졌고, 여자라는 proprium은 뱀의 유혹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바로 그 proprium이 완전히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재형성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립니다.

 

즉, 주님은 인간을 proprium 없는 존재로 되돌리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 안의 자기감과 자유 구조 자체를 새롭게 하십니다. 이전에는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돌던 proprium이, 이제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감싸며 움직이는 상태로 변화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에게서 ‘천사적 proprium’ 혹은 ‘주님께 열린 proprium’의 방향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새 일’이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이것은 단순 외적 개혁이 아니라, 인간 존재 구조 안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창조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원래 타락의 통로였던 proprium이, 이제는 사랑과 진리를 담는 그릇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155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인간의 proprium이 단순히 제거될 대상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에서 새롭게 재형성될 수 있으며, 그 결과 원래는 타락의 통로였던 ‘여자’가 이제는 진리와 선을 감싸고 섬기는 구조로 변화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AC.155, 창2:22, ‘말씀 자체의 가장 깊은 핵심을 직접적으로 열어 보이는 단락’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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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2:22)

 

AC.155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a rib was built into a woman)라는 말 속에는, 문자로부터는 누구도 결코 다 헤아릴 수 없는 더 깊은 것들이 가장 안쪽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 가장 안쪽 내용이 언제나 주님 자신과 그의 나라를 바라보고 있으며, 말씀의 모든 생명은 바로 거기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이 본문에서도, 그 가장 안쪽에서는 천적 혼인(heavenly marriage)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천적 혼인은 이러한 성질을 지니는데, 곧 그것은 own 안에 존재하며,own이 주님에 의해 살아나게 될 때, 주님의 신부와 아내(bride and wife)라 불리게 됩니다. 이렇게 살아난 사람의 own은 사랑의 모든 선과 신앙의 모든 진리에 대한 퍼셉션을 지니며, 그 결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과 결합된 모든 지혜와 지성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 살아난 이 own,주님의 신부와 아내라 불리는 것의 성질은 간결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 정도만 말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천사들은 자신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지각하고 있으나, 그 일에 대해 깊이 숙고하지 않을 때에는 자신들이 자기로부터 사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이러한 성질의 보편적 애정이 있어서,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서 아주 조금만 벗어나도 곧바로 변화를 지각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보편적 퍼셉션 안에 머무는 동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을 누립니다. 이와 같은 own도 예레미야서에서 뜻해지는데, The words “a rib was built into a woman” have more things inmostly concealed in them than it is possible for anyone ever to discover from the letter; for the Word of the Lord is such that its inmost contents regard the Lord himself and his kingdom, and from this comes all the life of the Word. And so in the passage before us, it is the heavenly marriage that is regarded in its inmost contents. The heavenly marriage is of such a nature that it exists in the own, which, when vivified by the Lord, is called the “bride and wife” of the Lord. Man’s own thus vivified has a perception of all the good of love and truth of faith, and consequently possesses all wisdom and intelligence conjoined with inexpressible happiness. But the nature of this vivified own, which is called the “bride and wife” of the Lord, cannot be concisely explained. Suffice it therefore to observe that the angels perceive that they live from the Lord, although when not reflecting on the subject they know no other than that they live from themselves; but there is a general affection of such a nature that at the least departure from the good of love and truth of faith they perceive a change, and consequently they are in the enjoyment of their peace and happiness, which is inexpressible, while they are in their general perception that they live from the Lord. It is this own also that is meant in Jeremiah, where it is said: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 (렘31:22) Jehovah hath created a new thing in the earth, a woman shall compass a man. (Jer. 31:22)

 

이 말씀 역시 천적 혼인을 뜻하며, 여기서 여자(woman)는 주님에 의해 살아난 own을 의미합니다. 이 여자에 대해 두르다(to compass)라는 표현이 사용된 이유는,own이 갈빗대가 살이 되어 심장을 두르는 것처럼, 사랑의 중심을 둘러싸는 성질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It is the heavenly marriage that is signified in this passage also, where by a “woman” is meant the own vivified by the Lord, of which woman the expression “to compass” is predicated, because this own is such that it encompasses, as a rib made flesh encompasses the heart.



해설

 

AC.155는 창세기 2장 전체, 더 나아가 ‘말씀 자체의 가장 깊은 핵심을 직접적으로 열어 보이는 단락’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더 이상 인간의 상태만을 말하지 않고, 그 모든 구조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밝힙니다. 그것이 바로 ‘천적 혼인’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원리를 다시 한번 선언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 가장 안쪽이 언제나 ‘주님 자신과 그의 나라’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창2의 이 본문도 인간의 기원이나 결혼제도의 설명이 아니라, 주님과 인간, 더 정확히는 주님과 ‘주님에 의해 살아난 인간의 own’ 사이의 관계를 다룹니다.

 

여기서 천적 혼인은 인간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own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점이 결정적입니다. 앞 단락들에서 반복해서 강조되었듯이, 인간의 own은 본질상 죽어 있으나, 주님에 의해 살아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살아난 own이 ‘주님의 신부와 아내’가 됩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인간의 own을 제거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당신과의 결합의 자리로 삼으십니다.

 

이렇게 살아난 own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 대한 퍼셉션을 지니게 되며, 그 결과 모든 지혜와 지성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 지혜와 지성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행복과 결합된 상태’입니다. 이는 앞서 AC.92, AC.154에서 말한 ‘평화의 고요’와 같은 계열의 상태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천사들조차도 자신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사실을 항상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는 설명입니다. 그들은 일상적 상태에서는 마치 자기로부터 사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보편적 애정’이 있어서, 사랑과 진리에서 아주 조금만 벗어나도 즉각적인 변화를 지각합니다. 이 민감한 퍼셉션이 그들을 다시 질서로 이끌며, 그 안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이 유지됩니다.

 

이 설명은 인간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참된 상태란, 끊임없이 ‘나는 주님으로부터 산다’를 의식적으로 되뇌는 상태가 아니라, ‘벗어날 때 곧바로 알 수 있는 상태’, 곧 중심이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살아난 own의 표지입니다.

 

마지막으로 렘31:22의 말씀, ‘여자가 남자를 두르리라’는 구절이 인용됩니다. 이는 매우 상징적인 표현으로, 살아난 own이 사랑의 중심을 둘러싸 보호하고 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갈빗대가 살이 되어 심장을 두르는 것처럼, 주님에 의해 살아난 own은 더 이상 분열과 반항의 근원이 아니라, ‘결합과 보호의 자리’가 됩니다.

 

 

심화

 

1. ‘31:22

 

 

AC.155, 심화 1, ‘렘31:22’

AC.155.심화 1. ‘렘31:22’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 (렘31:22) Jehovah hath created a new thing in the earth, a woman sh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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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4, 창2:22, own에 대한 ‘가장 급진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단락’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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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4.심화

 

1. ‘사람의 own은 악 그 자체

 

사람의 own은 곧 악 그 자체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사람은 악과 거짓 외의 다른 것이 아닙니다. for the own of man is evil itself, and consequently man is nothing but evil and falsity. (AC.154)

 

주님은 왜 이런 걸 사람의 own으로 주셨나요? 그리고 위 결과적으로라는 말은 왜 나왔나요? 모든 사람이 같은 출발선,  여자라는 새로운 own에서 삶을 시작하는 게 아니었나요? 왜 누구는 흉측하고, 누구는 소년, 소녀’, 그리고 벌거벗은 어린아이처럼 보이나요?

 

 

AC.154 AC 초반부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문장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사람의 own은 악 그 자체이다’, ‘사람은 악과 거짓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같은 표현은 처음 읽으면 거의 절망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own’은 단순 개성이나 자기감 전체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자기 자신 안에서 생명을 가지려는 상태’를 뜻한다는 점을 먼저 붙들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첫 질문, “주님은 왜 이런 걸 사람의 own으로 주셨는가?”에 대해 말하면, 스베덴보리는 사실 주님께서 ‘악 자체’를 인간에게 창조해 넣으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은 자유로운 자기감(as if from himself)입니다. 인간은 반드시 자기 삶처럼 느껴야 사랑도 자유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자기감을 점점 자기 독립 생명으로 굳히기 시작하면서, proprium은 주님께 열린 구조에서 자기 자신에게 닫힌 구조로 변질됩니다. 바로 그 닫힌 상태가 ‘악한 proprium’입니다.

 

즉, 원래 허락된 것은 살아 있는 자유의 가능성이었는데, 인간이 그것을 자기중심으로 돌려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proprium을 설명할 때 자꾸 방향성을 강조합니다. 주님께 열려 있는 proprium과 자기 자신에게 닫힌 proprium은 같은 단어를 쓰지만 전혀 다른 상태입니다. 천사에게도 proprium은 있지만, 그것은 주님의 생명이 흐르는 proprium입니다. 반면 지옥적 인간의 proprium은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짚으신 ‘결과적으로(consequently)라는 단어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냥 “사람은 악이다”라고 툭 던지지 않습니다. 그는 논리 흐름을 만들고 있습니다. 즉, 인간이 자기 자신 안에 생명의 근원을 둔다면, 결과적으로(consequently) 인간은 악과 거짓 안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안에는 본래 독립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오직 주님께 있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자신만을 중심 삼는 순간 그는 점점 주님으로부터 분리되고, 그 결과 악과 거짓 안으로 기울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기 ‘결과적으로’는 단순 접속사가 아니라, 인간 존재 구조에 대한 결론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 “왜 모두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지 않는가?” 하는 부분은 아주 깊은 문제입니다. 겉으로 보면 모두 ‘여자’라는 vivified proprium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데, 왜 어떤 영들은 흉측하고, 어떤 영들은 소년, 소녀처럼 보이며, 어떤 천사들은 벌거벗은 어린아이처럼 보이느냐는 것이지요.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인간은 모두 같은 ‘가능성 구조’ 안에서 시작하지만,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방향으로 proprium을 사용했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상태로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에서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말하는 것처럼, 영계에서 외모는 단순 외형이 아니라 내면 사랑의 형태입니다. 자기 사랑과 지배욕 안에 굳어진 영은 점점 왜곡되고 흉측해집니다. 반면 주님께 열린 사랑 안에 있는 천사들은 순수와 생명이 살아 있기 때문에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여기 어린아이는 미성숙이 아니라, innocence, 곧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동일한 최종 상태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에게 자유와 자기감의 구조는 허락되지만, 그 자유를 어디로 돌리느냐에 따라 인간 존재 자체가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점점 자기 자신 안으로 굳어지고, 어떤 사람은 점점 주님께 열립니다. 그리고 그 방향성이 결국 영적 형상 전체를 만들어 냅니다.

 

즉, 같은 출발 구조는 주어졌지만, 같은 방향성과 같은 사랑은 자동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바로 그 자유 안에서 자기 영원을 형성해 가는 존재입니다.

 

 

 

AC.154, 창2:22, own에 대한 ‘가장 급진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단락’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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