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4:26)

 

AC.336

 

신앙으로 심어진 체어리티를 에노스(Enosh), 즉 또 하나의 사람(man, homo)이라 하는데, 이것이 그 교회의 이름입니다. (26) The charity implanted by faith is called “Enosh,” or another “man” [homo], which is the name of that church. (verse 26)

 

 

해설

 

AC.336은 바로 앞 AC.335와 반드시 이어서 읽어야 하는 글입니다. AC.335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으로 상징되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졌다고 하였습니다. 그 새로운 신앙이 ‘셋’입니다. 그런데 AC.336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렇게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 자체를 ‘에노스’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흐름은 매우 분명합니다. ‘셋’은 새로운 신앙이고,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가 ‘에노스’입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된 상태가 하나의 교회를 이루었으며, 그 교회의 이름 역시 ‘에노스’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노스’를 단순히 셋의 아들 한 사람으로만 읽지 않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창4:25-26은 아담이 셋을 낳고 셋이 다시 에노스를 낳았다는 가족의 계보입니다. 그러나 속뜻으로는 교회의 내적 변화가 묘사되고 있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인 ‘가인’이 체어리티인 ‘아벨’을 소멸시킨 뒤, 주님께서 ‘셋’이라는 새로운 신앙을 일으키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가 심어졌습니다. 그 결과 생겨난 새로운 교회적 상태가 ‘에노스’입니다. 그러므로 ‘셋이 에노스를 낳았다’는 말은 속뜻으로 보면 새로운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형성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특히 원문의 ‘the charity implanted by faith’, 곧 ‘신앙으로 심어진 체어리티’라는 표현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신앙이 체어리티를 스스로 만들어 냈다는 뜻은 아닙니다. 체어리티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AC.335에서도 ‘a new faith was given by the Lord’, 곧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신앙은 체어리티의 근원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하나의 길이며 수단입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주님께서 그의 의지 안에 체어리티를 심으실 수 있도록 준비됩니다. 그러므로 셋과 에노스의 관계에서도 언제나 주님이 중심에 계십니다.

 

이 점은 가인과 셋의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가인 역시 신앙이었지만,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었습니다. 그 신앙은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앞세웠고,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반면 셋으로 상징되는 신앙은 자신에게 머물지 않고 체어리티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그 신앙의 열매로 ‘에노스’가 나타납니다. 다시 말하면 가인의 신앙은 아벨을 죽였지만, 셋의 신앙은 에노스를 낳습니다. 전자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질서이고, 후자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질서입니다. 창4의 두 계열이 얼마나 대조적으로 묘사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인상적인 구조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에노스를 단순히 ‘체어리티’라고만 하지 않고, ‘another man [homo]’, 곧 ‘또 하나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사람’[homo]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창세기 초반에서 스베덴보리가 ‘사람’을 사용할 때에는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을 뜻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된 의미에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있는 존재를 뜻합니다. 교회 역시 그 안에 선과 진리가 살아 있을 때, ‘사람’으로 불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에노스를 ‘또 하나의 사람’이라고 한 것은,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짐으로써 교회가 다시 참된 인간적인 형상을 갖게 되었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사람’이라는 표현에는 앞의 태고교회와의 연속성과 차이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최초의 태고교회 역시 ‘사람’이라 불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적 인간으로서 사랑에서 직접 선과 진리를 지각하는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 에노스로 의미되는 교회는 이미 그런 최초의 상태와 같지 않습니다. 이제는 ‘셋’으로 의미되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집니다. 그러므로 동일하게 ‘사람’이라 불리지만, 그 사람이 되는 과정과 교회의 상태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굳이 ‘another man’, 곧 ‘또 하나의 사람’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또한 마지막의 ‘which is the name of that church’, 곧 ‘이것이 그 교회의 이름입니다’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초기의 이름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해 줍니다. ‘에노스’는 단순히 한 개인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교회적 상태의 이름입니다. 앞에서 ‘가인’, ‘아벨’, ‘에녹’, ‘라멕’, ‘아다와 씰라’, ‘야발’, ‘유발’, ‘두발가인’을 교회와 교리의 상태를 나타내는 이름으로 읽었던 것처럼, ‘셋’과 ‘에노스’ 역시 그러합니다. 특히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아예 ‘그 교회의 이름’이라고 명시하므로, 창세기 초기의 계보를 단순한 개인들의 족보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렇게 보면 창4:25-26은 단 두 절이지만, 창4 전체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창4에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인 ‘가인’으로부터 여러 교리의 변화가 전개되어 마침내 ‘라멕’에 이르는 한편, 주님께서 주신 새로운 신앙인 ‘셋’과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진 ‘에노스’로 이어지는 또 다른 교회의 흐름도 함께 나타납니다. 가인이 상징하는 분리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교리를 왜곡하며, 여러 이단으로 갈라져,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 자체마저 사라지고, 선과 진리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이와 나란히 주님께서는 ‘셋’으로 의미되는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셨으며, 그렇게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연결된 교회를 ‘에노스’라고 하셨습니다.

 

 

심화

 

1. 왜 체어리티가 심어지자 다시 ‘사람’[homo]이라 불리는가?

 

AC.336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표현은 아마 ‘another man [homo]’, 곧 ‘또 하나의 사람’일 것입니다. 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에노스는 새로운 교회였다’고 하지 않고, 굳이 ‘또 하나의 사람’이라고 했을까요?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사람’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면 선명해집니다. 인간은 몸의 형태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영적인 의미에서 참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참으로 사람답게 하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이며, 더 깊게는 그 둘의 결합입니다.

 

그래서 신앙만 있고, 체어리티가 없다면 교회의 외형은 남아 있을 수 있어도 그 안의 인간다운 생명은 점점 사라집니다. 가인이 바로 그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신앙은 있었지만, 체어리티와 분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리가 계속되면서 결국 신앙마저 소멸되었습니다. 반대로 셋으로 의미되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지자, 비로소 ‘또 하나의 사람’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결합되면서 교회 안에 참된 영적 생명이 회복되었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다’는 순서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체어리티의 삶을 완성된 형태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먼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며,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진리를 통하여 배워야 합니다. 처음에는 그것을 ‘옳기 때문에’ 행할 수도 있습니다. 아직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랑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지 않더라도 말씀에서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가운데 주님께서 점차 그 사람 안에 선을 사랑하는 애정을 심으십니다. 처음에는 신앙으로 행하던 것이 나중에는 체어리티에서 행하는 삶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셋과 에노스의 관계는 개인의 거듭남에도 매우 아름답게 적용됩니다. ‘셋’은 내가 아직 선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여 진리를 따라 살아보려는 상태와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삶을 계속하는 동안 어느 순간 선을 행하는 것이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 되고, 이웃의 행복을 실제로 바라게 되며, 주님의 뜻을 행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기 시작한다면,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안에도 ‘셋’에서 ‘에노스’로 이어지는 과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기계적인 단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신앙을 일정 기간 가진 뒤 그다음 체어리티가 생긴다’는 식의 시간표가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거듭남 과정에서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주님에 의해 결합됩니다.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신앙이 자기 자신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느냐, 아니면 체어리티가 심어지도록 자신을 내어주느냐입니다. 전자의 방향이 가인이라면 후자의 방향이 셋이며, 그 결과 나타나는 살아 있는 교회의 모습이 에노스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AC.335와 AC.336은 하나의 아름다운 짝을 이룹니다. ‘셋’은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새로운 신앙이고, ‘에노스’는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낳기 위한 수단이 되고, 체어리티는 그 신앙을 살아 있는 신앙답게 합니다. 그리고 그 둘이 다시 결합될 때, 스베덴보리는 그 교회를 ‘또 하나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AC.336은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도 아주 짧게 보여 줍니다. 교회는 올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진리가 사람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고, 체어리티가 다시 삶으로 나타날 때,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가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교회는 주님 앞에서 다시 ‘사람’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가인에게서 무너졌던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가 셋과 에노스에게서 다시 연결되는 것, 이것이 창4 마지막 두 절이 보여 주는 회복의 아르카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35, 창4:25, ‘셋’(Seth)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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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5.심화

 

1. ‘가인도 신앙이고, 도 신앙이라면, 무엇이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가?

 

AC.335는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가인도 ‘신앙’을 의미하고, 셋도 ‘신앙’을 의미한다면, ‘신앙’이라는 이름 자체만으로는 그 신앙이 참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인은 분명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자신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높였다는 데 있었습니다. 반면 셋의 신앙은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통로가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 것은 단순히 교리를 많이 알고, 그것을 정확하게 고백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이 사람을 체어리티로 이끌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AC.328에서 이미 제시된 원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려진다’고 하였습니다. 신앙이 어떤 것인지는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교리를 알고 있는지, 얼마나 확신 있게 고백하는지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 신앙이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지, 악을 악으로 알고 피하게 하는지, 자기 자신보다 주님의 뜻을 앞세우게 하는지, 삶을 선으로 이끄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의 질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과 셋은 겉으로는 모두 ‘신앙’이지만 내적 방향은 정반대입니다. 가인의 신앙은 ‘신앙을 위하여 체어리티를 희생시키는 신앙’이고, 셋의 신앙은 ‘체어리티가 심어지도록 자신을 내어주는 신앙’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전자에서는 신앙이 목적이 되고 체어리티가 종속되지만, 후자에서는 신앙이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수단이 됩니다. 신앙이 자신을 높이면 가인이 되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면 셋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4의 이야기는 단순히 ‘가인은 나쁜 사람이고, 셋은 좋은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훨씬 더 깊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내가 가진 신앙은 가인인가, 셋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나는 말씀과 교리를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신앙의 증거로 여기고 있는가, 아니면 그 말씀과 교리가 나의 사랑과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가? 신앙이 나를 다른 사람보다 옳은 사람으로 느끼게 하는가, 아니면 더욱 겸손하게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이끄는가? 바로 이런 질문 앞에서 가인과 셋은 과거의 두 인물이 아니라 오늘 우리 안에서도 갈라지는 두 종류의 신앙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조금 전 AC.334에서 우리가 오래 붙들었던 문장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어느 쪽이든 진리가 자기 입장을 섬기게 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신앙은 결국 진리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자기 위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셋의 신앙은 진리가 사람을 체어리티로 이끌도록 자신을 내어줍니다. 진리를 이용하여 자신을 세우는 신앙과, 진리 앞에서 자신을 내려놓고 사랑의 삶으로 나아가는 신앙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335는 가인 계열의 어두운 이야기를 지나온 뒤 처음으로 매우 분명한 회복의 빛을 보여 줍니다. 아벨은 죽었지만, 체어리티를 향한 주님의 뜻은 죽지 않았습니다. 가인의 신앙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지만, 주님께서는 다시 새로운 신앙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셨습니다. 인간은 주님께서 주신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 무너진 자리에서도 인간의 현재 상태에 맞는 새로운 길을 마련하여 다시 선과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은 바로 그 회복의 길을 의미하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35, 창4:25, ‘셋’(Seth)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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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n,and called his name Seth; for God hath appointed me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for Cain slew him. (4:25)

 

AC.335

 

이 주제의 요약이 제시됩니다. ‘가인(Cain)이 상징하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후,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습니다. 이 신앙을 (Seth)이라 합니다. (25) A summary of the subject is given: that after faith, signified by “Cain,” had extinguished charity, a new faith was given by the Lord, whereby charity was implanted. This faith is called “Seth.” (verse 25)

 

 

해설

 

AC.335는 창4 전체의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앞의 AC.324-334가 주로 ‘가인’으로 시작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어떻게 변질되어 갔는지를 보여 주었다면, 이제 AC.335부터는 그 종말 가운데서 주님께서 어떻게 새로운 길을 마련하셨는지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글을 ‘이 주제의 요약이 제시된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가인으로 의미되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지만, 그것으로 교회의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가 심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신앙이 바로 ‘’입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새로운 신앙’입니다. 가인도 신앙이고, 셋도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핵심은 신앙 자체에 있지 않고,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에 있습니다. ‘가인’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자신을 앞세운 신앙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중요한 것으로 높였고, 그 결과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으며, 결국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 자체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반면 ‘’으로 의미되는 새로운 신앙은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할 수 있는 신앙이며, 더 정확하게는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질 수 있는 신앙’입니다. 따라서 가인과 셋의 차이는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신앙이 무엇을 향하고 있으며, 어떤 질서 안에 놓여 있느냐에 있습니다.

 

원문의 ‘whereby charity was implanted’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셋으로 상징되는 신앙의 목적이 신앙 그 자체에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신앙은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가게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께서 사람 안에 체어리티를 심으실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종착지가 아니라 체어리티를 향해 나아가는 길입니다. 가인의 오류는 바로 이 질서를 뒤집어 신앙 자체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고, 체어리티를 그 아래에 두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태고교회 최초의 천적 인간에게는 본래 이러한 순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데서 출발하여 선을 행하였고, 그 선 안에서 진리를 지각했습니다. 곧 사랑에서 신앙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태고교회가 타락하면서 이 천적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따라서 AC.335의 ‘새로운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다’는 것은 최초의 태고교회 상태로 단순히 되돌아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이전의 퍼셉션을 잃은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그들의 달라진 상태에 맞는 새로운 회복의 길을 마련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AC.335는 우리가 앞서 ‘가인의 표’를 다루면서 제기했던 질문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왜 주님께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가인의 신앙을 완전히 없애지 않으시고, ‘’를 주어 보존하셨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AC.330에서 그 이유는 ‘후에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되었습니다. 그런데 AC.335에서 바로 그 일이 나타납니다. 가인적 신앙 자체가 회복되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주님께서 신앙이라는 길을 보존하셨기 때문에, 이제 ‘’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AC.330의 ‘가인의 표’와 AC.335의 ‘’은 서로 멀리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섭리 안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라멕을 다루면서 가졌던 의문에도 답을 줍니다. 라멕에게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면, 가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을 보존하셨던 주님의 계획이 실패한 것 아닌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AC.335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특정한 교리적 계열에서는 신앙이 완전히 소멸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 전체를 향한 주님의 섭리 안에서는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에 이를 수 있는 길 자체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길이 새로운 형태로 나타난 것이 ‘’으로 상징되는 신앙입니다. 한 계열은 종말에 이를 수 있지만, 주님의 구원 질서는 종말에 이르지 않습니다.

 

또한 여기서 창4의 ‘’을 시간순으로만 읽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겉으로 보면 가인이 태어나고, 가인의 여러 후손이 이어진 뒤, 라멕과 그 자녀들의 이야기가 나온 다음, 마지막에 아담과 하와가 다시 셋을 낳는 것처럼 서술됩니다. 그렇게만 읽으면 가인 계열의 여러 세대가 모두 지나간 뒤에야 셋이 태어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뜻으로는 서로 다른 교회와 교리의 상태가 묘사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AC.335의 셋은 단순히 ‘가인 계열이 끝난 뒤 역사적으로 등장한 한 사람’이라는 시간순의 의미보다, 가인으로 상징되는 분리된 신앙과 구별되는 새로운 신앙의 계열이 주님에 의해 세워졌다는 데 중심이 있습니다.

 

특히 창4:25에서 하와가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고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가인이 아벨을 죽였으므로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벨 대신에 다른 씨’로 주어진 셋은 단순히 죽은 아들의 빈자리를 채우는 또 하나의 아들이 아닙니다. 속뜻으로 보면 체어리티가 소멸된 이후, 주님께서 다시 체어리티가 심어질 수 있도록 마련하신 새로운 신앙입니다. 그래서 ‘’이라는 이름 자체가 교회의 회복과 연결됩니다.

 

여기에는 매우 아름다운 섭리의 질서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을 때, 억지로 과거로 돌려놓지 않으십니다. 최초의 태고교회처럼 사랑에서 직접 진리를 지각하는 상태가 이미 상실되었다면, 그 상태를 강제로 복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마련하십니다. 이제 사람은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인간의 상태는 낮아졌지만, 주님의 구원의 역사는 그 낮아진 상태에 맞추어 계속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에게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주님의 적응과 섭리의 원리입니다.

 

그렇다고 ‘’이 곧 홍수 이후 ‘노아’로 시작되는 영적 교회와 동일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셋은 여전히 태고교회 시대 안에 있으며, 태고교회의 남은 계열 가운데 새로운 신앙을 의미합니다. 이후 창5에서 셋으로부터 이어지는 계보 역시 태고교회의 여러 교회적 상태를 나타내다가 결국 홍수라는 종말에 이릅니다. 그 후에야 ‘노아’로 의미되는 고대교회가 일어나며, 그때에는 퍼셉션 대신 양심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거듭남의 질서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따라서 ‘셋의 새로운 신앙’과 ‘노아의 새로운 교회’를 구별하면서 읽어야 창4와 창5, 그리고 창6 이후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심화

 

1. ‘가인도 신앙이고, 도 신앙이라면, 무엇이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가?

 

 

AC.335, 심화 1, ‘가인’도 신앙이고, ‘셋’도 신앙이라면, 무엇이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가?

AC.335.심화 1. ‘가인’도 신앙이고, ‘셋’도 신앙이라면, 무엇이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가? AC.335는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가인도 ‘신앙’을 의미하고, 셋도 ‘신앙’을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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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6, 창4:26, ‘에노스’(Enosh)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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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 창4:23-24, ‘아다와 씰라’라는 새 교회가 일어났을 때의 상황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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