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00.심화

 

6. ‘27년간이나 영계 체험을 했으면서도

 

영계 체험을 27년 동안이나 하면서 이 엄청난 저작들을 남길 정도면, 우리는 보통 생각하기를, 지상에서 궁금했던 모든 것, 곧 지구의 생성과 지난 45억 년의 과정, 그리고 성경 고대사 등을 그냥 다 알게 되겠지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아니거나 알았어도 주님의 허락이 없었거나인 것 같네요.

 

 

네, 목사님. 저도 스베덴보리를 오래 읽다 보면 바로 그 지점이 오히려 인상적으로 느껴집니다.

 

보통 사람들은 스베덴보리가 27년 동안 영계와 교통했다는 말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그러면 우주의 모든 비밀을 다 알았겠구나’, ‘지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았겠구나’, ‘공룡은 왜 멸종했는지 알았겠구나’, ‘인류의 정확한 연대도 알았겠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 저작들을 읽어보면 의외로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놀라울 정도로 절제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보지 않은 것은 보았다고 하지 않고, 들은 적 없는 것은 들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영계에 관한 이야기조차도 자신이 직접 경험한 범위 안에서만 말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입니다.

 

예를 들어, 그는 천국 공동체의 구조, 천사들의 삶, 사후 첫 상태, 중간 영계, 지옥의 본질, 거듭남의 과정, 말씀의 내적 의미 등에 대해서는 엄청난 분량으로 기록합니다. 그런데 현대인이 궁금해하는 많은 주제들, 곧 지구의 정확한 연대, 우주의 시작 방식, 선사시대의 세부 역사, 외계 문명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영계가 ‘모든 정보를 얻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계는 본질적으로 ‘상태의 세계’입니다. 그곳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fact)의 양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천사들도 모든 것을 아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HH를 보면 천사들은 자신들이 무한히 모른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주님의 섭리 때문일 수 있습니다. 설령 스베덴보리가 어떤 것을 보았더라도, 그것이 인류의 구원이나 거듭남과 직접 관련이 없다면 기록하도록 허락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여러 곳에서 ‘알도록 허락되었다’, ‘말하도록 허락되었다’, ‘드러내도록 허락되었다’는 표현을 반복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본 것이라도 모두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인상을 줍니다.

 

생각해 보면 성경도 비슷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책인데, 정작 우리가 궁금해하는 과학적 세부 사항은 거의 말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만 해도 우주의 생성 원리를 설명하는 과학 교과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과 하나님, 그리고 구원에 관한 책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도 비슷합니다. 그가 받은 계시는 인간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오히려 스베덴보리 저작의 신뢰성을 높여 주는 면도 있습니다. 만일 그가 ‘나는 영계에서 지구의 모든 역사와 우주의 모든 비밀을 보았다’고 말했다면, 오히려 더 의심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평생 남긴 방대한 저작 속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주제를 제한합니다. 거의 언제나 주님, 천국, 인간의 영혼, 거듭남, 말씀의 내적 의미로 다시 돌아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알았어도 주님의 허락이 없었거나’라는 표현이 저는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의 글을 읽다 보면 ‘모른다’기보다 ‘말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추측의 영역일 뿐, 그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침묵합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27년 동안 영계를 드나들고도 우리에게 남긴 것은 지구 45억 년의 역사 연표가 아니라, ‘사람은 왜 죽지 않는가’, ‘천국은 어떤 곳인가’, ‘주님은 어떻게 인간을 인도하시는가’, ‘말씀은 무엇을 말하는가’ 같은 질문들입니다.

 

어쩌면 이것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알고 싶어 하지만, 주님께서는 먼저 ‘너는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를 알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영계 체험은 우주의 비밀을 푸는 방향보다 인간 영혼의 비밀을 푸는 방향으로 집중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AC를 비롯한 방대한 저작들인 것이지요.

 

 

 

AC.200, 창3:2-3, 창2 ‘사랑’에서 창3 ‘신앙’으로 중심 이동을 허락하신 이유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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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0, 심화 5, ‘홍수가 실제로 있었는가?’

AC.200.심화 5. ‘홍수가 실제로 있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의 입장과 현대의 일반적 해석을 구분해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은 ‘홍수’의 가장 중요한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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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홍수가 실제로 있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의 입장과 현대의 일반적 해석을 구분해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은 홍수’의 가장 중요한 의미를 영적 의미에 둡니다. 그에게 홍수는 무엇보다도 태고교회 말기의 광적인 욕망들과 확신들(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의 범람을 뜻합니다. AC 전반을 읽어보면, 그는 노아 홍수 이야기를 단순한 자연재해의 기록으로 해설하지 않고, 교회의 상태와 인간 내면의 변화를 묘사하는 말씀으로 해설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실제 홍수는 없었다’고 말하는가? 그렇게 단정하기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여러 곳에서 고대인들 사이에 실제 홍수 전승이 있었음을 인정하는 듯한 표현들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가 관심을 두는 것은 지구 전체가 몇 미터 물에 잠겼는가’가 아니라, 그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이런 쪽에 있습니다. ‘설령 실제 물의 재앙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왜 주님은 그것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셨는가?’ 그리고 그 답은 교회의 멸망과 보존’에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 독자들 사이에서도 약간 견해가 갈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큰 지역적 홍수가 있었고, 그것이 말씀에서 영적 의미를 담는 그릇으로 사용되었다고 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역사적 사건 여부와 상관없이 말씀의 본질은 영적 의미에 있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AC의 흐름만 놓고 보면, 스베덴보리는 실제 물 이야기’를 증명하거나 반박하는 데 거의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그가 수백 개의 글에 걸쳐 설명하는 것은 물의 높이나 방주의 크기가 아니라, 태고교회의 붕괴와 노아 교회의 보존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 가장 안전한 표현은 이럴 것 같습니다.

 

홍수에 어떤 역사적 배경이 있었을 가능성은 배제되지 않지만,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치려는 핵심은 물의 재앙 자체가 아니라 교회의 영적 상태와 주님의 구원 섭리이다.’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AC를 따라오신 경험으로 보셔도,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11장을 읽을 때, 독자의 시선을 역사적 사건보다 영적 실재 쪽으로 계속 돌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중요한 질문은 홍수가 실제로 있었는가?’보다 홍수는 내 안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입니다.

 

다만 실제로도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에 예/아니오로 답해야 한다면, 스베덴보리는 실제 홍수의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말씀의 본질적 의미는 거기에 있지 않다’는 쪽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AC.200의 문맥에서는 분명히 물의 재앙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종말과 그 이후 인류 구조의 변화’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AC.200, 심화 6, ‘27년간이나 영계 체험을 했으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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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0, 심화 4, ‘홍수’(the fl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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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홍수(the flood)

 

홍수 the flood (AC.200)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 홍수(the flood)는 단순히 지구 전체를 덮은 물의 재앙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 문자에는 물로 세상이 덮이는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태고교회 말기의 영적 상태, 곧 인간이 진리와 선을 완전히 뒤섞어 버린 결과 일어난 영적 파멸을 의미합니다.

 

특히 AC에서는 홍수를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  광적인 욕망들과 확신들’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욕망(cupidities)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악한 욕구들이고, 확신(persuasions)은 그것들을 정당화하는 거짓된 신념들입니다. 태고교회 말기 사람들은 단순히 악을 행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악을 진리라고 확신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 결과 인간의 내면은 마치 범람하는 물에 잠기듯 거짓과 악으로 뒤덮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영적 의미의 홍수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홍수를 물보다도 범람’이라는 상태로 이해한다는 점입니다. 물은 성경에서 종종 진리를 의미하지만, 반대로 거짓도 물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홍수의 물은 영혼 안으로 밀려들어 오는 거짓된 생각들과 왜곡된 확신들을 상징합니다. 그것들이 너무 많아져 더 이상 선과 진리가 숨 쉴 공간이 없게 된 상태가 바로 홍수입니다.

 

AC.200의 문맥에서는 특별히 홍수가 인간 구조의 전환점으로 등장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직접 지각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높은 지각이 자기 own과 결합되면서 엄청난 영적 위험이 발생했습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인류 전체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도록 새로운 인간 구조를 마련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홍수 이후의 인간입니다. 이제 사람은 직접 지각하는 대신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고, 양심을 통해 인도받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홍수는 단순한 심판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시대의 종말인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시작입니다. 태고교회의 종말이면서 고대교회의 출발입니다. 천적 인간의 시대가 끝나고, 영적 인간의 시대가 시작되는 경계선입니다.

 

또한 홍수는 역사 속 한 번의 사건만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는 개인의 삶에서도 홍수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사랑과 거짓된 확신에 사로잡혀 더 이상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될 때, 그의 내면에도 일종의 홍수가 발생합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그 안에 남겨 두신 리메인스를 통해 새로운 삶이 시작될 때, 그것은 노아가 방주를 통해 보존되는 것과 비슷한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AC.200 홍수’를 읽을 때는 단순히 노아 시대의 대홍수’라고 생각하기보다, ‘태고교회 말기의 영적 붕괴’, ‘악한 욕망과 거짓된 확신의 범람’, 그리고 인류를 보존하기 위한 주님의 구조적 개입’이라는 세 가지 의미를 함께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에게 홍수는 물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영적 재난의 이야기이며, 동시에 그 재난 속에서도 인류를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AC.200에서 홍수는 단순한 과거 사건이 아니라, 인류 역사 전체를 바꾸어 놓은 영적 전환점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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