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3)

 

AC.348

 

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는 신앙이 없는 행위이며, 자체로 죽은 행위입니다. 그것들은 오직 사람에게만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 관하여 예레미야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That by thefruit of the groundare meant the works of faith without charity, appears also from what follows; for the works of faith devoid of charity are works of no faith, being in themselves dead, for they are solely of the external man. Of such it is written in Jeremiah:

 

1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2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4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렘12:1-2, 4) Wherefore doth the way of the wicked prosper? Thou hast planted them, they also have taken root; they have gone on, they also bear fruit; thou art near in their mouth, and far from their reins; how long shall the land mourn, and the herb of every field wither? (Jer. 12:12, 4)

 

입에는 가까우나 마음에는 멀다’(Near in the mouth, but far from the reins) 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을 뜻하며, 그들에 관하여땅이 슬퍼한다’(the land mourns) 말합니다. 같은 선지서에서는 그러한 행위를행위의 열매’(fruit of works)라고 부릅니다. “Near in the mouth, but far from the reinsdenotes those who are of faith separated from charity, concerning whom it is said thatthe land mourns.” In the same prophet such works are called thefruit of works”:

 

9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렘17:9, 10) The heart is deceitful [supplantativum] above all things, and it is desperate, who can know it? I Jehovah search the heart, I try the reins, even to give to every man according to his ways, and according to the fruit of his works. (Jer. 17:910)

 

미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In Micah:

 

그 땅은 그 주민의 행위의 열매로 말미암아 황폐하리로다 (미7:13) The land shall be desolate because of them that dwell therein, for the fruit of their works. (Micah 7:13)

 

그러한열매(fruit) 열매가 아니며, 그러한행위(work)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열매와 뿌리가 모두 멸망하는 것을 아모스에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That suchfruitis no fruit, or that theworkis dead, and that both fruit and root perish, is thus declared in Amos:

 

내가 아모리 사람을 그들 앞에서 멸하였나니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으나 내가 그 위의 열매와 그 아래의 뿌리를 진멸하였느니라 (암2:9) I destroyed the Amorite before them,whose height was like the height of the cedars, and he was strong as the oaks; yet I destroyed his fruit from above, and his roots from beneath. (Amos 2:9)

 

다윗의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d in David:

 

왕이 그들의 후손을 땅에서 멸함이여 그들의 자손을 사람 중에서 끊으리로다 (시21:10) Their fruit shalt thou destroy from the earth, and their seed from the sons of man. (Ps. 21:10)

 

그러나 체어리티의 행위는 살아 있으며, 그것들에 관하여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는다’(take root downward, and bear fruit upward)고 선언합니다.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But the works of charity are living, and of them it is declared that theytake root downward, and bear fruit upward;” as in Isaiah: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사37:31) The remnant that is escaped of the house of Judah shall again take root downward, and bear fruit upward. (Isa. 37:31)

 

위로 열매를 맺는다’(bear fruit upward)는 것은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열매를 같은 선지서에서는 ‘아름답고 영화로운 열매’(fruit of excellence)라고 부릅니다. Tobear fruit upwardis to act from charity. Such fruit is called thefruit of excellence,” in the same prophet:

 

그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사4:2) In that day shall the shoot of Jehovah be beautiful and glorious, and the fruit of the earth excellent and comely for them that are escaped of Israel. (Isa. 4:2)

 

그것은 또한 ‘구원의 열매’(fruit of salvation)이며, 같은 선지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부릅니다. It is also thefruit of salvation,” and is so called by the same prophet:

 

하늘이여 위로부터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 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사45:8) Drop down, ye heavens, from above, and let the skies pour down righteousness; let the earth open, and let them bring forth the fruit of salvation, and let righteousness spring up together; I Jehovah will create it. (Isa. 45:8)

 

 

해설

 

AC.348은 앞의 AC.346에서 간략하게 밝힌 ‘땅의 소산’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AC.346에서는 가인이 드린 ‘땅의 소산’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48은 왜 그런 행위가 참된 열매가 될 수 없는지를 여러 말씀을 통해 보여 줍니다.

 

첫 문장이 이 글 전체의 핵심입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는 신앙이 없는 행위이며, 자체로 죽은 행위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선행을 많이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 행위는 어디에서 나오는가?’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도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AC.346에서 이미 보았듯이 가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땅을 경작했고, 소산을 거두었으며, 그것을 여호와께 제물로 드렸습니다. 따라서 외적으로 보면 ‘행위’도 있고 ‘예배’도 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죽은 행위’라고 합니다. 그 행위가 ‘오직 사람에게만 속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 사람’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외적인 행위 자체가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체어리티는 결국 자연계에서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나야 합니다. 문제는 그 외적인 행위가 속 사람의 선과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행위라면 외적인 행위도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의, 명예, 인정, 보상, 종교적 우월성 같은 목적에서 행한다면 겉으로 아무리 선해 보여도 그 행위에는 천국의 생명이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가장 먼저 렘12:1-2, 4을 인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습니다.’ 외적으로는 아주 성공적입니다. 종교적인 삶도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말이 이어집니다.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이것은 가인의 예배를 매우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말하고, 외적으로는 제물을 드리며, 종교적인 행위도 합니다. 그러나 그 내면의 사랑은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고 해석합니다. 신앙의 말은 입에 있지만 그 신앙의 생명이 되어야 할 체어리티는 마음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땅이 슬퍼한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은 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될 때, 피해를 입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종교생활만이 아닙니다. 교회 자체가 황폐해집니다. 교리는 남아 있고, 예배도 남아 있으며, 종교적 활동도 활발할 수 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과 선이 사라지면 교회의 내적 생명은 메말라 갑니다.

 

이어지는 렘17:9-10은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갑니다. 주님께서는 단지 외적으로 나타난 행위만 보지 않으시고,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십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행위의 영적 성질을 결정하는 것이 외적인 모양만이 아니라 그 행위가 나온 내적 사랑과 의도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원문의 ‘폐부’(reins)는 고대 성경의 상징적 표현입니다. 자연적인 장기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깊은 내면과 애정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만이 아니라 왜 그렇게 했는지, 그 행위의 내적 근원이 무엇인지를 보신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갚으신다는 말씀에서 ‘행위의 열매’가 중요해집니다. 행위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내적인 사랑은 외적인 삶을 통해 자신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행위와 내면을 서로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7:13의 ‘ 주민의 행위의 열매로 말미암아 황폐하리로다’ 역시 같은 원리를 보여 줍니다. 열매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열매가 선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악한 사랑도 자기에게 맞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열매’라는 말이 나올 때 무조건 선행을 뜻한다고 정해 놓아서는 안 됩니다. 어떤 뿌리에서 나온 열매인지 문맥을 보아야 합니다.

 

이 점에서 암2:9의 인용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아모리 사람은 ‘백향목 높이’ 같고 ‘상수리나무’처럼 강합니다. 외적으로는 거대하고 견고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위의 열매’뿐 아니라 ‘아래의 뿌리’까지 멸하십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열매와 뿌리를 함께 언급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열매는 행위이고, 뿌리는 그 행위를 낳는 내적 근원입니다. 뿌리가 악하면 그 열매 역시 영적으로 살아 있는 열매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AC.348은 여기서 놀라운 대조를 보여 줍니다. 지금까지는 ‘죽은 열매’를 설명했지만 사37:31부터는 ‘살아 있는 열매’로 전환합니다.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스베덴보리는 ‘위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아주 간결하게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이라고 풀이합니다. 이 한 문장이 AC.348 전체를 압축합니다. 참된 열매는 단순히 외적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것입니다.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는다’는 표현에는 영적 삶의 질서가 아름답게 담겨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먼저 뿌리가 내려야 보이는 곳에서 열매가 맺힙니다. 마찬가지로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사랑과 선을 심으시고, 그것이 내적 생명이 될 때, 그 생명이 자연적인 삶으로 내려와 말과 행동과 쓰임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행위는 겉에서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밖으로 흘러나옵니다.

 

이것은 앞의 가인과 정확히 대조됩니다. 가인에게도 ‘땅의 소산’이라는 열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것이므로 ‘죽은 열매’였습니다. 반면 사37:31의 열매는 체어리티라는 살아 있는 뿌리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차이는 ‘행위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 행위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가’에 있습니다.

 

4:2에서는 이러한 열매를 ‘아름답고 영화로운’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사45:8에서는 그 열매가 ‘구원의 열매’로까지 나아갑니다. 하늘에서 의가 내려오고, 땅이 열려 구원이 싹트며, 공의가 함께 자랍니다. 여기서는 위에서 내려오는 것과 아래에서 열매 맺는 것이 하나의 질서를 이룹니다.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고, 인간은 그것을 받아 자신의 삶에서 열매 맺습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로부터 행한다’는 것을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한 마음을 만들어 선행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사45:8의 마지막 말이 그 점을 분명히 합니다. ‘ 여호와가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살아 있는 열매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의 속 사람 안에 선을 심으시고, 인간이 자유롭게 그 선을 받아 살아갈 때, 그것이 겉 사람을 통해 행위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보면 AC.348에서 ‘뿌리’와 ‘열매’의 관계는 곧 ‘ 사람’과 ‘ 사람’의 관계와 연결됩니다. 체어리티 없는 행위는 겉 사람에만 머물기 때문에 죽어 있습니다. 반면 살아 있는 행위는 속 사람 안에 있는 체어리티에서 시작하여 겉 사람의 실제 삶으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참된 거듭남은 속 사람만 변화시키거나 겉 행동만 고치는 일이 아니라, 속의 선이 겉의 삶으로 흘러나와 둘이 하나가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AC.348은 결국 우리가 선행을 바라보는 기준을 바꾸어 놓습니다. ‘무엇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보다 먼저 ‘어디에서 그것을 행했는가?’를 묻게 합니다. 예배, 봉사, 헌금, 구제, 전도, 설교, 성경공부 같은 종교적 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모든 것은 귀한 열매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살아 있는 열매가 되려면 체어리티라는 뿌리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48의 중심은 ‘행위가 중요하다’거나 ‘신앙보다 행위가 중요하다’는 단순한 주장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과 체어리티와 행위는 하나의 생명 질서 안에 있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신앙의 진리는 사람을 체어리티로 이끌고, 체어리티는 실제 행위로 열매 맺습니다. 이 연결이 끊어지면 행위가 있어도 죽은 행위가 될 수 있지만, 이 질서가 살아 있으면 사람의 일상적인 작은 쓰임까지도 ‘위로 열매를 맺는’ 살아 있는 행위가 됩니다.

 

그래서 가인의 ‘땅의 소산’과 사37:31의 ‘위로 맺는 열매’는 겉으로는 모두 ‘열매’이지만 영적으로는 정반대입니다. 하나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나온 죽은 열매이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나온 살아 있는 열매입니다. 결국 열매의 생명을 결정하는 것은 그 열매의 외형이 아니라 그 뿌리입니다.

 

### 인용 심화 판단

 

AC.348은 인용 구절이 많지만, 이번에는 별도의 인용 장절 심화를 거의 만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러 구절을 인용한 목적이 하나의 논증 안에서 매우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렘12:1-2, 4과 렘17:9-10, 미7:13, 암2:9, 시21:10은 모두 ‘체어리티 없는 행위와 열매는 죽어 있다’는 앞부분을 뒷받침하고, 사37:31, 사4:2, 사45:8은 ‘체어리티에서 나온 행위는 살아 있는 열매다’라는 뒷부분을 보여 줍니다.

 

다만 이 가운데 하나를 꼭 심화한다면 사37:31의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를 추천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위로 열매를 맺는 것은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이라고 풀이하기 때문에, AC.348의 핵심을 한 구절로 압축해서 보여 줍니다. 그렇더라도 이번 해설에서 이미 충분히 다루었으므로 시간과 작업량을 생각하면 별도 심화 없이 넘어가도 전혀 아쉽지 않습니다.

 

### 블로그 제목

 

열매의 생명은 뿌리에서 결정됩니다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살아 있는 행위’ (AC.348)

 

본문 표현에 좀 더 밀착한다면 ‘가인의땅의 소산’ — 체어리티 없는 죽은 행위와 살아 있는 열매’ (AC.348)도 좋습니다. 저는 두 번째 제목을 조금 더 추천합니다. 앞의 AC.346-347과 연결해서 읽을 때 무엇을 설명하는 글인지 바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 추천 태그 10

 

스베덴보리, 천국의 비밀, Arcana Coelestia, AC348, 창세기 4장, 가인의 제물, 땅의 소산, 신앙과 체어리티, 선행과 체어리티, 말씀의 속뜻

 

이제 사총사 덕분에 마지막 한 줄만 그대로 복사해서 태그 입력창에 넣으면 ‘촤라락!’이겠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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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3)

 

AC.347

 

세월이 지난 후에’(end of days, ‘날들의 끝에’)가 ‘시간이 흐른 ’를 뜻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니다. 처음에는, 그리고 그 교리 안에 단순함이 있었을 때에는, 여기서 ‘가인’(Cain)이라 불리는 교리가 후에 그렇게 된 것만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자손을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a man Jehovah, ‘여호와인 사람’)라고 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합니다. 따라서 처음에는 신앙이 ‘날들의 끝에’, 곧 시간이 흐른 뒤에 이르렀을 때만큼 사랑에서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참된 신앙의 모든 교리에서 흔히 일어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That by theend of daysis signified in process of time, is evident to all. At first, and while there was simplicity in it, the doctrine here calledCaindoes not appear to have been so unacceptable as it became afterwards, a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y called their offspring aman Jehovah.” Thus at first faith was not so far separated from love as at theend of days,” or in process of time; as is wont to be the case with every doctrine of true faith.

 

 

해설

 

AC.347은 바로 앞 AC.346의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표현을 설명하면서, 가인으로 표상된 교리가 처음부터 완전히 타락한 형태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처음에는, 그리고 교리 안에 단순함이 있었을 때에는’ 가인의 교리가 후대에 이르러 나타난 것만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가인의 발생과 타락을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점진적인 과정으로 보게 합니다.

 

여기서 ‘단순함’(simplicity)은 단순히 지식이 부족하거나 생각이 단순했다는 뜻으로 읽기보다, 아직 교리가 자기주장을 강화하여 사랑과 맞서지 않았던 초기 상태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앞의 AC.338에서 보았듯이 가인의 시작은 신앙 자체를 버리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 자체로 하나의 ’으로 구별하여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신앙과 사랑 사이의 거리가 아직 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구별’과 ‘분리’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신앙을 사랑과 구별하여 하나의 교리로 정리하는 것 자체가 곧바로 악은 아닙니다.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 구별이 분리가 되고, 분리가 마침내 우열 관계로 변하는 데 있습니다. 신앙이 ‘나는 사랑 없이도 참된 신앙이다’라고 주장하기 시작하고, 더 나아가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앞세우게 되면 가인의 성격이 본격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AC.346에서는 이를 단순히 ‘시간이 흐른 ’라고 밝혔지만, AC.347은 그 시간 동안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 사이의 분리가 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거리가 점점 벌어졌습니다. 결국 ‘세월이 지난 후에’ 이르러서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인 ‘땅의 소산’을 여호와께 드리는 상태, 곧 사랑과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예배하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그 초기 상태가 아직 완전히 타락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드는 것이 ‘그들이 자기들의 자손을 향해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표현은 앞의 창4:1, 곧 하와가 가인을 낳으며 한 말과 연결됩니다. AC.338에서 스베덴보리는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씀을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이라는 첫 자손이 생겨난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즉 가인의 초기 단계에는 여전히 그 신앙이 주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인식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이라는 이름만 보고 처음부터 모든 것이 거짓이고 악이었다고 생각하면 AC.347의 중요한 뉘앙스를 놓치게 됩니다. 처음에는 참된 것에서 출발했습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신앙이 있었고, 그 신앙은 아직 사랑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신앙을 사랑과 별개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해졌고, 마침내 신앙 자체를 구원의 본질로 높이면서 체어리티를 밀어내게 된 것입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참된 신앙의 모든 교리에서 흔히 일어나는 ’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AC.347은 태고교회의 가인이라는 특정 교리만 설명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참된 진리에서 시작한 교리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교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자기애와 지성적 자부심에 의해 본래의 생명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일반적인 교회사의 원리를 보여 줍니다.

 

예를 들어 어떤 교리가 처음에는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도록 돕기 위해 명료하게 정리될 수 있습니다. 그 단계에서는 교리가 사랑을 섬깁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그 교리를 ‘우리가 옳다는 증거’로 사용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관심이 ‘ 진리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서 ‘누가 교리를 정확하게 믿는가?’로 이동합니다. 더 진행되면 교리를 정확하게 고백하는 것을 사랑과 삶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마침내 교리의 차이 때문에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기까지 합니다. 처음의 참된 교리는 그대로인 것처럼 보여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내적 상태는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347은 앞서 살펴본 ‘가인의 분리는 어디서 시작되었는가?’라는 문제를 한층 더 세밀하게 만듭니다. 가인의 길은 처음부터 ‘체어리티를 없애자’라고 선언하면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주 작은 이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바라보고, 그것을 점점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며, 시간이 흐르면서 그 독립성을 강화한 것입니다. 결국 처음에는 미세했던 틈이 나중에는 신앙과 사랑의 완전한 분리로 발전합니다.

 

이것은 개인의 영적 삶에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처음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알아갈 때에는 그 진리가 주님께 가까이 가고 삶을 고치기 위한 것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이것을 안다’는 데 만족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가진 진리로 다른 사람을 재고, 판단하기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진리 자체는 변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목적이 달라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가인의 문제는 과거 어느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신앙인 안에서 끊임없이 경계해야 할 가능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리를 보존한다는 것은 단지 처음의 정확한 문장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교리가 처음 지향했던 목적, 곧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고,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이끄는 목적도 함께 보존해야 합니다. 교리의 문장은 그대로인데 사랑이 빠져버린다면 외형은 보존되었어도 그 생명은 이미 달라진 것입니다.

 

결국 AC.347이 보여 주는 것은 ‘참된 것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이 끝까지 참된 상태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엄중한 사실입니다. 신앙은 계속 사랑을 바라보고, 사랑을 섬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에는 거의 보이지 않던 작은 분리가 ‘시간이 흐른 ’ 점점 커져 마침내 신앙과 체어리티를 서로 갈라놓게 됩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는 바로 그 점진적인 변화를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AC.348, 창4:3, 가인의 ‘땅의 소산’ - 체어리티 없는 죽은 행위와 살아 있는 열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8 ‘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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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6, 창4:3,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는 나올 수 있습니다’(AC.346-349)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창4:3) AC.346 ‘날들의 끝에’(end of days)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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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3)

 

AC.346

 

날들의 끝에’(end of days)는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하고, ‘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하며,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an offering to Jehovah)은 거기에서 나온 예배를 뜻합니다. By theend of daysis meant in process of time; by thefruit of the ground,” the works of faith without charity; and byan offering to Jehovah,” worship thence derived.

 

 

해설

 

AC.346부터 창4:3의 속뜻으로 들어갑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라는 짧은 한 절 안에서 스베덴보리는 세 표현을 차례로 풉니다. ‘날들의 끝에’는 시간이 흐른 뒤를, ‘땅의 소산’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그리고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은 그런 신앙에서 나온 예배를 나타냅니다.

 

먼저 ‘날들의 끝에’가 ‘시간이 흐른 ’를 뜻한다는 것은 단순히 며칠이나 몇 년이 지났다는 자연적인 시간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앞의 AC.338-345에서 가인의 상태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으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신앙과 체어리티 사이에 분리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날들의 끝에’라는 표현은 그러한 상태가 어느 정도 진행되어 그 성질이 실제 행위와 예배로 나타날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 줍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가인의 분리는 어느 순간 갑자기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사랑과 구별하여 바라보는 미세한 변화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분리가 하나의 확고한 원리가 되고, 마침내 그 원리에 맞는 행위와 예배까지 생겨납니다. 따라서 ‘날들의 끝에’는 단순한 시간 경과라기보다 한 영적 상태가 자라 그 결과를 나타내기 시작하는 과정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다음 ‘땅의 소산’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합니다. 여기서 다시 주의해야 할 것은 ‘땅의 소산’ 자체가 언제나 나쁜 것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로 AC.343의 사30:23에서는 ‘땅의 소산의 양식’이 체어리티를 나타냈습니다. 따라서 상응의 의미는 언제나 그 표현이 놓인 문맥과 상태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는 ‘가인’이 땅의 소산을 가져옵니다. 가인은 이미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내고, AC.345에서는 ‘농사하는 ’가 체어리티 없이 신앙만을 붙드는 사람을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경작한 땅에서 나온 ‘소산’ 역시 그와 같은 신앙으로부터 나온 행위를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 행위 자체가 외적으로는 선해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 체어리티의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구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행위가 있으니 체어리티도 있다’고 자동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종교적인 일을 하고, 봉사하고, 헌금하며, 예배에 성실히 참석한다고 해도 그 행위의 내적 성질은 그 행위가 어떤 사랑과 목적에서 나오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자기 의를 세우거나 사람들에게 인정받거나 자신의 신앙적 우월성을 확인하기 위한 행위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여 행하는 선은 외형이 비슷해도 내적으로는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AC.346의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라는 표현을 잘 붙들 필요가 있습니다. 가인에게도 ‘행위’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땅을 경작했고 소산을 얻었으며, 그 소산을 가지고 여호와께 제물까지 드렸습니다. 겉모습만 보면 상당히 종교적입니다. 문제는 그 행위를 낳은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4와 매우 긴밀하게 이어집니다. AC.344는 신앙의 기억 지식과 인식 지식과 교리가 사람을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들고, 마침내 체어리티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면 ‘ 아무것도 아닌 ’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AC.346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단지 지식과 교리만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도 나름의 ‘행위’를 낳고 심지어 ‘예배’까지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은 ‘거기에서 나온 예배’를 뜻합니다. 여기서 ‘거기에서’란 바로 앞의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에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즉 가인의 예배는 그의 내적 신앙 상태와 별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어떤 사랑과 신앙 안에 있느냐에 따라 그에게서 나오는 예배의 성질도 달라집니다.

 

이것은 창4:3-5에서 왜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에 대한 주님의 반응이 달랐는지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겉으로만 보면 두 사람 모두 자기에게 있는 것을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단순히 ‘식물 제사는 나쁘고 동물 제사는 좋다’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핵심은 제물의 자연적인 종류가 아니라 그 제물을 낳은 내적 상태입니다.

 

가인의 제물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나온 예배를 나타냅니다. 반면 뒤에서 보게 될 아벨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나온 예배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제물이라는 외적인 형식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주님께 올라오는 사랑과 선입니다. 동일한 기도, 동일한 찬송, 동일한 헌금, 동일한 봉사라도 그 안의 목적과 사랑에 따라 영적인 성질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AC.338부터 이어져 온 흐름이 매우 선명하게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으로 바라봅니다. 시간이 흐릅니다. 그 신앙에서 특정한 행위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행위에서 예배가 나옵니다. 즉 ‘내적인 분리행위예배’라는 흐름입니다. 처음의 아주 미세한 교리적 분리가 마침내 삶과 예배의 성질까지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46은 예배에 대해서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 예배는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가?’도 물어야 합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서 나오는가, 아니면 자기 의와 자기 확신과 자신의 신앙적 정당성을 확인하는 데서 나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회와 교회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외적으로 매우 활발하고 정교한 종교생활을 하면서도 체어리티가 중심에서 사라질 수 있습니다. 예배와 성경공부와 봉사와 선교와 헌신이 풍성해 보이는데, 그 결과 사람들이 점점 더 자기 의에 강해지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며 서로 갈라진다면 그 행위와 예배가 어떤 사랑에서 나오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반대로 참된 예배는 사람이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자기 악을 버리며, 이웃의 선을 바라고 실제로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가인의 제물은 ‘예배하지 않는 사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배하는데도 체어리티와 분리될 있다’는 훨씬 더 섬세하고 무거운 문제를 보여 줍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도 교리는 남을 수 있고, 행위도 남을 수 있으며, 심지어 예배도 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신앙을 신앙답게 하고 예배를 예배답게 하는 생명, 곧 체어리티가 빠질 수 있습니다.

 

결국 AC.346의 핵심은 ‘예배는 예배를 낳은 내적 사랑의 성질을 따른다’는 데 있습니다. 가인의 ‘땅의 소산’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나온 행위를, 그것을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은 그러한 상태에서 나온 예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를 이루는 것은 외적인 제물의 크기나 종교적 형식의 정교함이 아니라, 그 안에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살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345, 창4:2,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농사하는 자’ 가인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5 ‘농사하는 자’(tiller of the ground)가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는 것, 곧 사랑에서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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