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므온이 주의 그리스도를 보다

 

 

21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 21절은 누가복음 전체 강해 원본에서 누락되어 있습니다.

 

22모세의 법대로 정결 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25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눅2:22-27)

 

 

그렇게 무덥던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10월이 왔습니다. 오늘은 누가복음 2장 22절에서 27절까지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아기 예수의 부모가 관례에 따라서 첫아기를 주께 드리기 위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내용입니다.

 

22모세의 법대로 정결 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정결 예식의 날이란 레위기 12장 6절과 7절에 나오는 규례와 관련이 있습니다. 즉 아기를 출산한 여인에 대한 규례인데요,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6아들이나 딸이나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면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 년 된 어린 양을 가져가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회막 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7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그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는 아들이나 딸을 생산한 여인에게 대한 규례니라 (레12:6-7)

 

이 말씀에서 아기를 낳는 것은 선과 진리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선과 진리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있는 선한 애정 안으로 진리로 오실 때, 속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하나가 되는데, 그때 그것은 다시 겉 사람 안에 새로운 선과 진리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겉 사람 안에 태어나는 새로운 선과 진리란, 악한 습관을 끊는 것이고, 이웃을 위하여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로 태어나는 아기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처음에는 그렇게 순수하지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겉으로 보면 경건하고 사랑이 넘치는 것 같은 행위 안에도 사실은 자아에 속한 것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자기 힘으로 선을 행한다 생각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순수한 선과 진리가 아닙니다. 따라서 자아에 속한 이런 불순한 것들이 사라지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 시간이 바로 출산한 여인이 견뎌야 하는 정결의 기한입니다. 말씀에는 그 기간을 아들을 낳을 경우, 7일로 정하고 있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니까 말씀에서 7일이란 물리적인 7일이 아니고요, 불결한 것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의 시간입니다. 그 시간, 그 기간이 지나야 비로소 삶의 행위 가운데 있는 불순한 것들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정결의 기한이 찬 다음에 당신께 속죄제를 드리라 하셨습니다. 속죄제란 순수한 선과 진리로 주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동안 자아에 속한 불순한 것으로 주님을 예배한 것에 대한 반성을 담아 순수한 진리와 선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주님께 드리는 속죄제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내아이를 8일째 되는 날 할례를 시켰다는 것과 아들을 낳은 여인이 7일의 정결 기한 후에 속죄제를 드리는 것은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23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여기 ‘주의 율법’이란 출애굽기 22장 29절에 나오는 말씀, 즉

 

너는 네가 추수한 것과 네가 짜낸 즙을 바치기를 더디하지 말지며 네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 (출22:29)

 

라는 말씀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왜 장자를 거룩하다 하시고, 또 당신의 것이라 하셨을까요? ‘장자’(長子), 즉 ‘첫 태에 처음 난 남자’, ‘처음 난 아들’은 사랑이 있는 신앙, 또는 체어리티(charity)를 바탕으로 한 진리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는 사랑 또는 체어리티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나 체어리티에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나옵니다.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악이며,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러한 악들은 주님의 신성한 빛이 흘러들어올 때, 그냥 흩어져 버리고 맙니다. 마치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사라지는 것처럼 그렇게 흩어집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은 빛이지, 어둠이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하는 것은 사랑과 체어리티로부터 태어납니다. 그래서 태는 사랑이요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태어난 진리와 신앙, 그것이 장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오시기 전에 우리에게 있던 신앙, 또는 진리는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사랑이 없는 신앙이고 진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새로 생긴 신앙은 사랑이 있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장자라고 하고, 주님의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신앙인들이 이제 새로 생긴 신앙, 즉 사랑이 있는 신앙을 가지고 주님을 예배하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드리는 곳이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왜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를 드릴까요? ‘예루살렘’은 천적 영적 교회(celestial spiritual church)를 나타냅니다. 천적 영적 교회란 사랑이 있는 진리 위에 세워진 교회란 뜻입니다. 사랑과 신앙으로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사랑과 진리 위에 세워진 교회에서 예배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24절에서는 속죄제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4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일반적으로 ‘’는 진리나 신앙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여기서 ‘비둘기’는 선과 진리를 모두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비둘기 한 쌍으로 드리는 예배는 진리와 선 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을 한데 묶어 드리는 예배입니다. 주님께서 왜 그런 규례를 정해주셨는지는 할례 시킨 아이와 정결의 기한이 지난 여인의 영적 의미를 통해 알 수 있는데요, 그것은 영적으로 할례를 받고, 정결의 기한이 지나야 비로소 순수한 선과 진리로 주님을 예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그들은 비둘기 한 쌍을 가지고 속죄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예배는 이제 진리만 가지고 드리는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끔찍이도 준수하는 율법에 사실은 이런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의 외적인 것에만 치중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규례를 아주 세세한 것까지 잘 지킨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내적 의미 없는 외적 행위만으로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몰랐습니다.

 

※ 가령 이런 것이죠. 누가복음 18장 세리의 기도 본문입니다.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18:9-14)

 

그래서 바울은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8)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개신교 교리를 만든 사람들은 바울이 말한 율법의 행위를 체어리티의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해를 한 것이죠. 그래서 믿음만의 교리가 생겨난 것이며, 그 결과 구원은 체어리티의 삶이 아니라 오직 믿음만으로 이루어진다 믿게 된 것입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루터를 만나 이 주제를 가지고 나눈 대화입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796번 글입니다.

 

루터(Luther)

 

그는 영계에 처음 들어오면서부터 자기의 독단 교리(dogmas)의 극렬한 창조자였고, 변론자였다. 그리고 그 입장에서 그와 의견을 같이하는 자들이 오는 수에 따라 그 열정이 더해갔다. 그는 세상에 있을 때, 아이슬레벤(Eisleben)에 가지고 있었던 것과 같은 집 한 채가 주어졌고, 거기서 추종자들이 와서 그의 의견과 일치하는 정도에 따라, 자기 자리에 가깝게 또는 멀리 자리를 잡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는 줄곧 이야기를 계속했으나, 간혹 그는 자기의 설교자로서의 인기에 의해서 청중들에게 마법을 거는 기술을 습득했다. 이 술법은 고대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아주 강력해서 영계에서는 모든 반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 그것은 자아애(the love of self)로부터 발생하고, 발언자로 하여금 그의 반대자의 의견뿐 아니라, 그 인격까지 공격하도록 강요된다. 그러므로 이 술법을 쓰는 것이 금지되었으므로, 그의 청중들의 이성에 호소하는 그의 예전 방법으로 바꾸었다.

 

이것이 1757년에 영계에서 행해진 최후 심판의 때까지, 루터가 살아온 생활 상태였다. 그 이듬해에 그는 처음 집에서 다른 집으로 옮겨졌으며, 따라서 동시에 그의 심정 상태도 변해졌다. 그리고 내가 자연계에 있으면서 영계 안에 있는 자들과 대화를 한다는 것을 듣고, 여러 번 추종자(從者)들을 거느리고 나를 만나러 왔다. 몇몇의 질문들을 하고 내 대답들을 듣고는, 그가 지금 옛 교회의 종말과 다니엘서와 복음서들 안에서 하신 주님의 말씀에 의하여 예언된 새 교회의 시작이라는 것을 지각했다. 그는 또한 이 새 교회가 계시록에 새 예루살렘에 의하여 표상되었음과, 또 천국 한 가운데를 나는 천사가 지상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 전파한 영원한 복음으로 표상되었음도 지각했다(계14:6). 처음에는 그는 격분해서 폭언을 퍼부었다. 그러나 곧 새 하늘이 마태복음의 주님의 말씀(마28:18)에 의하여 주님만을 하늘과 땅의 하나님으로 시인하는 자들로써 형성되고 있음을 보았다. 그때 그는 욕설을 중지하고 나 있는 곳을 찾았으며, 나와 전보다 친숙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의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독단교리(his chief dogma of justification by faith alone)가 말씀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총명에서 창안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됐을 때, 주님, 인애, 참 믿음, 자유의지, 그리고 구속에 관해서 말씀에 의하여 교육받기를 원했다.

 

마침내 새 교회가 기초를 놓아야 할 진리들에 찬성하며, 점진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이때에 날마다 나와 함께 있었으며, 그가 새 교회의 진리들을 받아들임에 따라, 가끔 자기의 옛 견해가 말씀에 직접 반대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스스로 자신이 했던 일들에 대해서 자신을 비웃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내가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독단교리들, 즉 영적인 것들에 있어서의 자유의지의 부정, 체어리티의 영적 본질의 부정 등을 설교했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시오. 왜냐하면 내 목적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고는 그 목적이 관철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히려 내가 오류를 범했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한 미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미치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이상하며, 그들이 이 독단교리들 안에 내포된 명확한 성경 말씀과의 모순들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 이상할 따름이요.’ 여기서 그는 자기 옆에 서 있는 약간의 유명한 교리학자들을 향해서 경멸의 눈길을 던졌다.

 

나는 검문하는 천사들(the examining angels)에게 루터가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신득의 교리로 자신들의 믿음을 굳힌 많은 다른 자들보다, 훨씬 전에 회심하였다고 알려주었다. 왜냐하면 그는 젊어서 기독교 개혁이 시작되기 전에, 체어리티의 중요성에 관한 교리에 정통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글로나 설교로 체어리티를 훌륭하게 가르칠 수 있었던 이유다. 즉 믿음만이라는 교리가 그의 겉 사람에게는 심겼으나, 그의 내적, 영적 속 사람(영혼) 속에는 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어서부터 믿음만에 의한 이신득의에 찬동하는 교리로 체어리티의 영적 특성에 반대하고, 스스로 그 교리에 굳어진 자들의 경우는 다르다. 나는 삭소니(Saxony) 후작과 대화한 적이 있는데, 그는 루터와 세상에서 사귄 사람이었다. 그는 루터가 특히 체어리티를 믿음으로부터 분리한 것을 비난했다고 내게 일러주었다. 왜냐하면 루터는 체어리티를 믿음과 분리시켰고, 체어리티가 아니라 믿음이 구원하는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둘을 결합해서 구원의 방편이라고 제시한다. 바울은 체어리티를 믿음 위에 놓고 말하기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13:13)고 했다. 그러나 루터는 로마 가톨릭 신도들 때문에 다르게 할 수 없었고, 일반적인 대답을 했다고 부언했다. 이 후작은 축복받은 자들 가운데 있다. //

 

그러나 바울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내적 의미와 동떨어진 율법의 모든 외적 행위,

 

※ 그러니까 위 성전에서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했던, 이런 율법 준수의 동기가 주님 사랑이 아닌, 자기 사랑, 자기 자랑이었던,

 

그런 영혼 없는 율법 행위를 부정했을 뿐, 체어리티의 삶을 부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다른 곳에서 말한 걸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 5장 6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할례는 모세 율법에서 가르치는 아주 중요한 행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적 행위를 모르는 상태, 즉 이 할례를 명하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할례받는 것은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무엇이 중요하다고 합니까? 믿음만 중요하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주장하는 믿음은 그냥 말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에 근거한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말을 ‘오직 믿음’ 교리의 근거로 삼는 것은 그의 의도를 철저히 왜곡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알게 되면, 주님이 주시는 규례의 의미를 알게 되고, 그리고 그것을 삶 가운데 어떻게 담아내야 하는지를 저절로 알게 되며, 그렇게 되면 주님을 사랑하되 속에서 우러나는 마음으로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25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예루살렘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인들의 내면에 세워진 천적 영적 교회입니다. 즉 사랑과 신앙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예루살렘을 천적 영적 교회라고 말씀드린 까닭은, 사람의 내면으로 주님이 오시게 되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체어리티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교회는 신앙만 있는 교회가 아니고요, 사랑과 신앙에 기초한 교회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제사를 드리는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 있다는 시므온은 누구를 말할까요? 전 시간에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야곱의 아들 요셉과 같은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사람의 이름을 특정인과 연관 짓지 않고, 이름 자체가 가지는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시므온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의 시므온은 야곱의 아내 레아가 낳은 둘째 아들 시므온과 같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면 ‘시므온’의 영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 의미는 레아가 시므온을 낳았을 때 말한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데요, 창세기 29장 33절 말씀입니다. 레아가 말하기를,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창29:33)

 

이 말씀에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은 신앙은 있는데 그에 따라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신앙에 따라 살지 못할 때,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죠. 그런 상태가 바로 시므온이 태어나기 전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을 들으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실천하지 못하는 신앙을 붙들고 힘겨워하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신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시므온은 새로운 신앙을 뜻합니다. 새로운 신앙이란 전처럼 이성에 속한 신앙이 아니고요, 의지에 속한 신앙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머릿속에만 있던 신앙을 의지 가운데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머리 신앙이 가슴 신앙이 된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신앙에 따라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전에는 그렇지 못했죠. 이성에 속한 신앙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머리로는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데... 생각하면서도 정작 행동하질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의지 가운데 신앙을 심어주실 때, 우리는 그 새로운 신앙에 따라 능동적으로 진리를 행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시므온이란 의미는 의지에 속한 신앙입니다.

 

그런데 시므온이라는 새로운 신앙을 얻기까지는 많은 시련이 있습니다. 시험에서 이기지 못할 때도 있었고, 그래서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두려움에 떨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어야 지혜롭고 강단 있게 주님의 뜻을 받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했습니다. 그런 고민을 오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 말은 시므온에 대해 하는 말입니다. 즉 영적 교회의 사람들이 기다리던 주님의 위로가 곧 시므온이라는 새로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며 주님이 이스라엘에 주시는 위로는 어떤 것입니까? 새로운 신앙을 통해 지혜 안에 있는 것이고, 사랑의 기쁨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까지 우리가 기다렸던 이스라엘의 위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부터 시므온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26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주님이 우리 속에 오시면 그때부터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합니다. 성령은 주님의 신적 인성으로부터 나오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시므온에게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지시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안의 시므온이라는 신앙이 성령으로부터 계시를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이 그냥 그리스도라 하지 않고, ‘주의 그리스도’라고 말한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주의 그리스도’는 그냥 진리로 오신 주님이 아니고요, 부활하셔서 당신 안에 여호와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 되신 신적 인성(Divine Human)이신 주님이십니다. 왜냐하면 ‘’라는 말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는 주님이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신약에서부터 주라는 말을 썼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에서 주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약의 그리스도는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에 대해 주라고 부르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불렀다면 주님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실 수도 없었을 것이고, 병자를 고치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 스스로 ‘내가 여호와다!’ 하시자마자 바로 유대인들에게 돌을 맞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주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주 그리스도라는 말은 당신 안의 신적 진리와, 여호와이신 신적 선이 하나가 되신 주님, 즉 신적 진리로부터 신적 선이 되신 주님을 나타내고요, 그러므로 주님의 신적 인성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또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이라고 했는데, 이 ‘본다’는 말은 주님을 받아들이고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주님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시므온에게 하신 말씀, 즉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의 의미는 ‘너의 영이 죽지 않고 결국 주님의 신적 인성을 믿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입니다. 생각해 보면, 신앙인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으로만 믿지, 그분 안에 여호와의 신성이 계심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또 이 진리를 아는 많은 분들 가운데도 그것을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영으로는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이 여호와이심을 영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신앙과 삶을 하나로 만들지 못하는 것은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그분 안에 신적 선으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분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주님이세요. 그리고 체어리티 역시 주님이세요. 그러므로 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내면에 주님을 온전히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신 주님과 사랑이신 주님을 분리시키는 것이죠. 그래서 그것은 주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고요, 영적으로는 주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의 영으로 주님의 인성 안에 신성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 신앙으로 우리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 성령이 시므온에게 ‘네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지시하시는 것은 ‘네가 주님의 신적 인성을 반드시 영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며, 그러므로 죽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신앙인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27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이 말씀은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를 통해 아기 예수를 만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신앙, 즉 의지에 속한 신앙 가운데 있는 신앙인들이 신적 인성이신 주님을 그의 영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예수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신적 선이신 주님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율법의 관례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일들이 신적 질서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마음의 할례를 받는 일이나, 내면의 교회 안에 불순한 것들이 제거되는 일이나, 그의 신앙이 이성에 속한 신앙에서 의지에 속한 신앙으로 바뀌는 일이나, 그리고 새로운 신앙을 통해 신적 인성이신 주님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이나,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신적 질서에 따라 잘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내면에 주님이 오신 사람들의 거듭남의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이가 할례를 받는 것과 아기 어머니가 정결의 기한을 채우는 것은 모두 주님이 오신 다음에 삶의 행위 가운데 있는 불순한 것들이 제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새로 생기는 신앙, 즉 의지에 속한 신앙을 본문에서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이 머리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체어리티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서 그것이 의지에 심어질 때 비로소 체어리티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본래 시므온은 레아의 첫 번째 아들 르우벤 다음에 태어난 두 번째 아들입니다. 첫째 아들 르우벤은 영적 의미로 이성에 속한 신앙을 뜻합니다. 즉 머리에 들어있는 신앙이라는 것이죠. 처음에 신앙은 그렇게 사람의 이성 가운데 씨가 떨어지듯 떨어집니다. 그런 다음 우리가 신앙에 따라 살기를 간절히 원할 때, 주님께서는 이성 가운데 있는 신앙을 의지라는 밭으로 마치 모종 옮기듯 옮겨주십니다. 그것이 레아가 낳은 두 번째 아들 시므온입니다. 시므온이 그런 뜻을 가졌기 때문에, 오늘 아기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이름도 시므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이 시므온의 상태일 때, 우리는 비로소 영으로 주님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체어리티의 삶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때 레아는 세 번째 아들 레위를 낳죠. 레위는 체어리티의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을 알면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시험 가운데서 불안을 느낍니다. 자신의 영이 살아 있음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말씀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데도 시험이 많고, 일이 잘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시험이 깊어지면, 자신이 영적으로 죽은 자 같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말씀하세요.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주님의 예언입니다. 주님의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 없습니다. 주께서 ‘네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믿으시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신적 인성이신 주님을 우리들의 영으로 믿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주님의 그러한 가호가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시89:26)

 

아멘

 

 

 

원본

2016-10-02(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10(D6)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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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유에 누이신 주님을 목격한 사람들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15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18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19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20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눅2:8-20)

 

 

베들레헴은 새로운 상태에서의 천적인 것에 속한 영적인 것을 뜻한다. 이 상태는 선과 진리에 대한 새로운 애정이 있는 상태이다. 왜냐하면 천적인 것에 속한 영적인 것은 선에서 비롯한 진리이고, 그러므로 선에서 비롯한 진리에 대한 애정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6247, 이순철 역) ...from the signification of “Bethlehem,” as being 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 in a new state (see n. 4594), thus a state of new affection of truth and good; for 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 is the truth of good, thus the affection of truth from good. (AC.6247, Clowes 역)

 

※ 윗글은 아래 창세기 48장 7절 말씀에 대한 주석 일부입니다.

 

내게 대하여는 내가 이전에 밧단에서 올 때에 라헬이 나를 따르는 도중 가나안 땅에서 죽었는데 그곳은 에브랏까지 길이 아직도 먼 곳이라 내가 거기서 그를 에브랏 길에 장사하였느니라 (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라) (창48:7)

 

 

※ 오늘 본문은 지난주 본문과 앞부분이 좀 겹칩니다. 원래대로라면 15절부터 새로운 본문이어야 하는데, 아마 21절까지 말이지요, 이상하게 이 부분에 대한 설교 원본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여러 성탄절 본문 중 여기에 근접한 것으로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새 교회의 모든 성도님과 함께 주님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구약의 예언서에는 주님의 탄생을 예언하는 말씀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서 7장 14절에는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7:14)

 

했고, 또 미가서 5장 2절에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5:2)

 

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나 미가 선지자나 주님 오시기 전, 약 700년 전의 사람들인 걸 감안하면, 메시아에 대한 믿음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탄생하시던 날, 주님께 경배를 드린 사람은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과 멀리 시리아에서 온 동방박사들뿐이었습니다. 세상에 오신 주님을 인정하는 사람이 그렇게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목자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본문 8절,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밤에 목자들이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는데 갑자기 천사들이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밤은 주님이 오실 당시 유대교회의 영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교회 안에 진리도 없고, 사랑도 없는 상태입니다. 유대교회가 그렇게 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생각을 섞어 인간의 학문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진리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런 진리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중에도 주님이 주신 사랑과 인애(仁愛, charity)를 지키고 실천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요, 본문에 자기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 태고교회부터 시작, 고대교회와 유대교회, 그리고 현 기독교회 역시 각 교회 시대의 종말마다 소위 ‘남은 자’(remnant), ‘리메인스’(remains)라 하는, 주님이 그때그때 새 교회를 일으키시기 위해 사용하신 소수의 신앙인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선 그중 일부가 바로 이 ‘목자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치 태고교회와 고대교회를 잇는 ‘노아’라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노아’는 어느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닌, 그 시대 특정 신앙이나 교리, 교회를 일컫는 이름입니다. 창세기 아브라함의 등장 전까지는 그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모두 이런 의미를 가집니다.

 

’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비롯한 선을 뜻하고, ‘목자’는 그 선을 지키기 위해 힘쓰는 사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들 앞에 주님의 천사들이 나타나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는데요, 그러자 목자들이 크게 무서워합니다.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말씀에서는 주님이 선지자나 사도들에게 나타나실 때 그들의 모습을, 떨거나 죽은 사람처럼 되거나, 또는 온몸의 기운이 빠진 걸로 기술하는데요, 가령, 다니엘 같은 경우입니다. 다니엘서 10장 4절로 12절입니다.

 

4첫째 달 이십사일에 내가 힛데겔이라 하는 큰 강가에 있었는데 5그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 6또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7이 환상을 나 다니엘이 홀로 보았고 나와 함께 한 사람들은 이 환상은 보지 못하였어도 그들이 크게 떨며 도망하여 숨었느니라 8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환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9내가 그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의 음성을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느니라 10한 손이 있어 나를 어루만지기로 내가 떨었더니 그가 내 무릎과 손바닥이 땅에 닿게 일으키고 11내게 이르되 큰 은총을 받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내가 네게 보내심을 받았느니라 하더라 그가 내게 이 말을 한 후에 내가 떨며 일어서니 12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게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응답받았으므로 내가 네 말로 말미암아 왔느니라 (단10:4-12)

 

주님이 나타나실 때,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고, 온몸에 기운이 빠져 죽은 자처럼 되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주님의 위엄 앞에서 그들의 자아가 완전히 굴복하는 모습입니다. 죽은 자처럼 된다는 것은 마치 자아가 없는 것처럼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영적으로 보면 지극히 경건한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주님께서 오셔서 그를 새롭게 만드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성(聖) 문서에서는, 주님을 만날 때의 떨림을 거룩한 떨림, 또는 거룩한 전율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떠는 사람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하시는 것은 그 순간 주님께서 그를 영적으로 새롭게 만드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 위 ‘(聖) 문서’라는 용어는 스베덴보리가 영계 체험 이후부터 기록한, 그러니까 주님이 그의 손을 빌려 기록하신 저작들(Writings)을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가 천국에서 듣고 본 모든 경험과 남기는 이 모든 기록은 오직 주님의 허락으로 하는 것이며, 특히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은 오직 주님이 친히 하시는 말씀을 자기는 성경 한 권만 가지고 받아 적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오늘날의 프린터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그가 남긴 기록들에 대하여 ‘’(聖)이라는 글자를 붙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절대로 안 되죠. 감히 말입니다! 이 형용은 오직 주님 한 분께만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영적으로 새롭게 된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전한 기쁜 소식은 무엇이었을까요? 다윗의 동네에 구주, 곧 그리스도 주님이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입으로는 삼위일체를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아버지 하나님 따로, 아들 하나님 따로, 성령 하나님 따로, 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문자적으로만 보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따로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셋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여러 성품을 나타냅니다. 즉 사람 안에 영이 있고 몸이 있으며, 영으로부터 몸을 통해 나오는 능력이나 에너지, 기운이 있는 것처럼, 주님도 그렇게 영과 몸과 영으로부터 몸을 통해 발산되는 에너지와 기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삼위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세 가지 본질인 것입니다. 목자들처럼 마음속에 사랑과 체어리티가 있는 사람은 그러한 진리를 누구보다 잘 이해합니다. 사랑과 체어리티는 진리를 끌어당겨 자신과 하나로 만들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마음속에 체어리티가 없으면 진리를 배척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이유 없이 미워하고 해치려 했던 것도 그들의 내면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속에 사랑이 있는 사람은 진실을 진실이라고 하고, 거짓은 거짓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사람은 거짓을 진실이라 하고, 진실을 거짓이라 폄하하고 비난합니다. 인력으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질서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제일 먼저 주님의 탄생을 알린 것은 그래서입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그러니까 베들레헴에 가면 강보에 싸여 말구유에 누워있는 아기가 있을 것인데, 그 아기가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이유는 여관에 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여관’(inn)은 진리를 가르치는 곳인 교회를 뜻하고, ‘’은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여관에 방이 없다는 것은 교회에 참된 교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교리 안에서 진리로 존재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참된 교리가 없다는 것은 유대교회 안에 주님이 계실 곳이 어디에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불가피하게 외양간 말구유에서 태어나셔야 했습니다. 말씀에서 ‘’(horse)은 진리에 대한 이해력을 뜻합니다. 그리고 ‘구유’(manger)는 말이 먹이를 먹는 곳이므로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말구유에 누워계시는 주님은 신앙인들의 지성을 먹이는, 교리라는 진리로서의 주님을 뜻합니다. 그러면 주님을 감싸고 있는 강보는 무슨 뜻일까요? ‘강보’는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나오는 첫 번째 진리를 뜻합니다. 그것은 태양의 뜨거운 불에서 나오는 첫 번째 빛과 같이 순수하고 밝은 진리입니다. 태양에서 처음 나오는 빛은 우주공간과 대기권을 차례로 지나 사람들에게 도달합니다. 그러니 그 빛과 열기가 얼마나 희석되겠습니까? 주님의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신성에서 나오는 처음 진리는 인간이 받아들일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그 진리는 각자의 영적 상태에 맞도록 주님에 의해 그 빛과 열기가 조절된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원형은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바로 나온 진리, 즉 순진무구한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 진리가 바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 곧 주님이십니다.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지극히 높은 곳’은 하늘에서는 천국이요, 사람 안에서는 속 사람입니다. 또 ‘’은 지상에서는 교회이며, 사람 안에서는 겉 사람을 뜻합니다. 따라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는 하늘과 땅에서 주님을 여호와로 인정하는 사람, 모든 선하고 진실한 것이 오직 주님에게서만 나온다고 믿는 사람들이 드리는 감사와 영광의 고백입니다. 그러면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는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아기로 오신 주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시인하는 사람,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의 것이라는 걸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지옥의 악과 거짓으로부터 지켜주십니다.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평화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찬송한 것입니다.

 

15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자 목자들이 서로 말하되 베들레헴으로 가자고 합니다. 구유에 계신 주님을 직접 뵙기 위해서입니다. 목자들이 천사로부터 진리를 깨우치는 것처럼, 우리도 천사를 통해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이것이 천사를 통해 얻은 생각인지 인간의 생각인지 분명치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 우리는 말씀의 속뜻 진리를 통해 그것을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목자들이 구유에 계신 주님을 뵙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간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베들레헴’은 자연적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진리인 합리적 진리와, 말씀의 문자적 뜻인 자연적 진리를 서로 연결시켜 주는 중간자적 진리, 즉 선에 속한 진리(truth of good)나 선이 있는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세상에 오실 때는 선한 진리, 선을 동반한 진리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선의 진리, 선에 속한 진리, 선을 동반한 진리라고 하는 이유는, 이 진리는 주님이 인간의 겉 사람 안에 심어놓으신, 체어리티라고 하는 선 안에서 자라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성 문서에서는 그것을 선이 있는 진리 또는 신앙의 진리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은 자연적 진리 상태에 계속 머물러만 있을 뿐, 선의 진리, 즉 선에 속한, 선을 동반한, 참 신앙의 진리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16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18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19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드디어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가서 구유에 계신 주님을 뵙습니다. 그리고 천사들로부터 들은 진리가 사실임을 확인하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들은 바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듣는 자들이 다 목자들이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겼다고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목자들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으로 진리를 행하면서 전할 때, 그들의 진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듣는 자가 목자들이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겼다는 것은 그들이 전하는 진리가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뜻입니다.

 

20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목자들이 봤다는 것은 진리를 깨닫는 것을 뜻하고, 들었다는 것은 진리에 순종해 행동으로 옮겼다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이 이렇게 한편으로는 새로운 진리를 깨우치고, 한편으로는 그것을 실천할 때, 자기도 모르게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자신의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세상에 오실 때, 제일 먼저 당신의 탄생을 알린 사람들은 지위가 높거나 재물이 많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들에서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양은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체어리티를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자들은 주님이 주신 사랑과 체어리티를 지키고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오십니다. 주님은 사랑 없는 믿음 안에 계시지 않고, 사랑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목자들에게 오신 것처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말씀의 속뜻이라는 순수한 진리로 오셨습니다. 말씀의 속뜻 진리 안에는 문자적인 의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선한 것이 들어있습니다. 그 선으로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양들을 지킬 수 있으며, 또한 매일 같이 새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목자들이 천사들로부터 들은 바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한 것처럼 우리도 체어리티의 삶을 통해 이웃에게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진리는 말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결합한 선한 삶으로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새 교회에 맡기신 사명은 이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자신을 돌아보면 주님 앞에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또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빛이 없던 각자의 등불들이 살아나고, 그로 인해 세상을 덮은 재앙의 어둠이 걷힐 것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새 교회의 모든 성도가 주님 앞에 그런 충직한 목자들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탄의 기쁨과 평화가 성도님들과 가정에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출12:42)

 

아멘

 

원본

2020-12-2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08(D4)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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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목자들에게 전하신 이유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눅2:8-14)

 

 

지난 시간에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을 당시에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역사적 사건만이 아니고요, 우리 신앙인들이 거듭나는 동안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는 것도 말씀드렸습니다. 내적 의미로 볼 때, 주님의 탄생은 신앙인들의 신앙 가운데로 주님이 가장 순수한 진리로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믿는다, 신앙한다고 해서 모두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 안에 이웃에 대한 사랑, 곧 체어리티(charity)의 삶이 있어야, 그래야 진짜 신앙입니다. 그래서 사랑 없는 신앙은 껍질만 있고 과육은 없는 열매와 같으며, 그러므로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 없는 신앙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진리를 믿는다고 하면서 행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또 진리를 행하더라도 진리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사로운 목적, 개인의 사사로움을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이 이런 신앙 가운데 있습니다. 왜 우리는 아직도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자기를 내려놓는 일이 힘들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 안에 아직 주님이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떤 사람에게 언제 오실까요? 8절입니다.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킬 때라고 합니다. 말씀에서 ‘지역’은 본래, 그러니까 그 속뜻은 이웃을 뜻합니다. 얼핏 전혀 다른 뜻이지요. 아마 사람이 어떤 지역에 사는 모습이 그 지역 이웃들과 함께 사는 모습처럼 보이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지역은 교회를 뜻합니다. 지역이 이웃을 뜻하면서, 또한 교회를 뜻하는 이유는, 우리가 가장 사랑해야 할 이웃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목자는 누구일까요? ‘목자’는 사람들을 진리로 가르치고, 선한 삶으로 이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의미에서 목자는 성직자를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성직자나 목회자가 아니고요, 신앙인 중에 마음속에 양을 키우는 사람들입니다. ‘’은 무슨 뜻입니까? 순진함, 또는 순수한 선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양은 진리 배우기를 좋아하고, 그 진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순진한 애정을 말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하는 ‘그 지역에 목자들’이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진리를 사랑하는 순수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수시로 변하는 영적 상황 속에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과 끊임없이 싸웁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로 표현했습니다.

 

※ 여기서 잠깐, 본문 중 ‘밖에서’라는 표현 관련, 매우 흥미로운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절기 이야기’ 15장, ‘예수님은 언제 태어나셨을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는 과연 크리스마스를 유추해 낼 수 있는 근거가 있을까? 다행히 직접적인 언급은 아니지만 크리스마스를 유추해 낼 수 있는 가장 설득력 있는 말씀이 누가복음에 나온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눅2:8)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가 탄생했을 때 이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사람은 밤에도 성실하게 양들을 돌보던 목자들이었다. 예수님 탄생 당시에 목자들은 농사를 지으며 정착생활을 하는 농경 문화의 주류 사회에 들지 못하고, 그때까지도 양과 염소에게 먹일 풀밭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으로서 최하류 계층이었다.

 

예수님 탄생 당시 유대 땅은 헤롯 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마2:1)

 

우리에게 헤롯은 악한 왕의 대명사로 통하지만, 역사적으로 그의 통치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를 잇는 유대 땅의 지정학적 이점을 잘 살려 상업이 발달하고 인구가 증가했다.

 

집 지을 땅과 농사지을 농경지가 점점 부족해지자 목자들은 황량한 광야로 밀려나야 했다. 비록 돌과 바위가 많은 광야라지만 비가 오는 6개월의 우기 동안에는 작은 풀들이 돋아나 그런대로 양과 염소에게 풀을 뜯길 수 있었다. 하지만 비가 오지 않는 나머지 6개월간의 건기는 어떻게 버틸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가축들과 함께 광야로 쫓겨난 목자들에게도 죽으란 법은 없었다. 건기가 시작되는 유월절부터 7주 동안만 잘 버티면, 이후 목자들이 가축들과 함께 농경지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보리 추수기인 유월절과 그로부터 7주 후인 칠칠절은 밀 추수기였다. 밀 추수가 끝난 칠칠절 이후부터 다음 해 농경 사이클이 시작되어 쟁기질을 해야 하는 초막절 전후까지는 농경지가 목자들에게 오픈되었던 것이다.

 

목자들은 칠칠절 이후 가축들을 데리고 농경지에 들어갔고, 그곳에는 밀 추수가 끝난 후 남아 있는 밀 밑동이 있었다. 이것을 가축들에게 먹이며, 목자들은 밀밭 사이에서 난 뽕나무를 배양해 주어 밀밭 주인에게 상응하는 보답을 했다. 성서 시대 목자들의 라이프 사이클을 이해할 때 자신을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 소개한 아모스 선지자의 알쏭달쏭한 직업이 이해된다.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암7:14)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당시에 목자들이 밖에서 양들을 지키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눅2:8)

 

아기 예수 탄생과 관련된 크리스마스 시즌의 비밀은 바로 ‘밖에서’란 단어에 있다. 과연 ‘밖에서’라는 말은 뭘까? 집 바깥을 말하는 걸까? 양들을 집 안에서 칠 수 없으므로, 단순히 바깥(outside)을 의미한다고 볼 수 없다.

 

우리말 성경에 ‘밖에서’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아그라울레오’(ἀγραυλέω)인데, 이는 단순한 바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농경지의 들판’(agricultural field)을 의미한다. 즉 아기 예수가 탄생할 때 목자들은 황량한 광야가 아니라 농경지에서 가축을 돌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당시 목자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감안하면, 크리스마스 시즌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난다. 목자들이 가축을 데리고 농경지로 들어갈 수 있는 기간, 측 칠칠절(6월경) 이후부터 초막절(10월경) 사이의 기간이 되는 것이다.

 

(중략)

 

레위기 23장에 나오는 ‘절기’들이 단지 유대인들의 명절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제정하신 ‘여호와의 절기’이고, 그 안에 하나님의 인류 구속의 계획들이 암호화되어 있다면, 예수님의 탄생일인 크리스마스는 분명 레위기 23장에 나오는 7개의 절기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칠칠절 이후부터 초막절 사이에 들어가는 절기는 단지 두 개뿐이다. 바로 신년(나팔절)과 대 속죄일이다. 그러면 두 절기 가운데 크리스마스와 가장 부합하는 절기는 무엇일까? 바로 신년일 것이다. 신년은 영광의 나팔을 불며 새로운 해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다. 나팔을 불며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년! 이 신년이야말로 영원 전에 계신 하나님이 이 땅에 아기의 몸으로 탄생함으로써 인류 구속의 역사를 위한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영광의 나팔을 불기에 가장 합당한 날이 아니겠는가! 바로 그날 하늘의 천군 천사들이 영광의 팡파르를 울리며 하나님을 찬송한 것이다. //

 

하루 중에도 낮이 있고, 밤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우리의 영적 상태도 수시로 변합니다. 늘 같지가 않은 것이죠. 낮은 어떤 때입니까? ‘’은 진리의 빛 안에 있는 때입니다. 진리의 빛 안에 있기 때문에, 말씀을 읽으면 이해가 잘 됩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가 이해한 진리로 늘 자신을 비춰볼 수 있습니다. 그때가 낮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은 빛이 없는 때입니다. 그래서 그때는 말씀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안 되고, 또 진리가 없기 때문에 자신을 비춰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가 밤입니다. 그래서 밤을 다른 말로는 시험의 기간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시험 가운데서도 주님이 주신 선과 진리를 잃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 자신과 싸우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들이 밤에 자기 양을 지키기 위해 깨어 있는 목자들입니다. 이런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고 있는데 갑자기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9절입니다.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말씀에서 ‘주의 사자’(the angel of the Lord), 곧 천사는 진리를 뜻합니다. 천사가 왜 진리를 뜻할까요?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을 뿐 아니라 그것을 삶으로 온전히 표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는 자기 생각을 말하지 않고 오직 주님이 주시는 말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에서 천사는 진리를 뜻하며, 가장 높은 의미로는 진리 자체이신 주님을 뜻합니다.

 

※ 아래는 위 ‘그들, 즉 천사들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문장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5장, ‘천국과 지옥은 인류로 말미암는다’(Heaven and Hell Are from the Human Race, 311-317) 311번 글입니다.

 

기독교계에서는 천국과 지옥이 인류로 구성되어 있음을 전혀 모르고 있다. 처음부터 천사는 천사로 창조되어 천국을 이루고 있었다고, 마귀 또는 사탄도 빛의 천사였다가 반역하여 그 일당과 함께 내쫓겨 지옥을 형성했다고들 믿기 때문이다. 기독교계에서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에 천사들은 무척 놀라고, 천국이야말로 교회 교리의 근본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천국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데 더욱 경악한다. 그러나 또한 그런 무지가 만연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주님의 뜻에 따라 천국과 지옥에 대한 많은 사실이 기독교 사회의 사람들에게 밝혀지게 되었고, 기독교가 종말을 맞아 어둠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데, 이 계시로 인해 그 어둠이 가능한 한 많이 걷히게 되었다고 천사들은 진심으로 기뻐한다. In the Christian world it is wholly unknown that heaven and hell are from the human race, for it is believed that in the beginning angels were created and heaven was thus formed; also that the devil or satan was an angel of light, but having rebelled he was cast down with his crew, and thus hell was formed. The angels never cease to wonder at such a belief in the Christian world, and still more that nothing is really known about heaven, when in fact that is the primary principle of all doctrine in the church. But since such ignorance prevails they rejoice in heart that it has pleased the Lord to reveal to mankind at this time many things about heaven and about hell, thereby dispelling as far as possible the darkness that has been daily increasing because the church has come to its end.

 

[2] 그래서 천사들은 내가 그들의 다음 말을 증언해 주기를 원했다. ‘천국 전체에 처음부터 천사로 창조된 천사는 단 한 명도 없다. 지옥에도 빛의 천사로 창조되었다가 쫓겨난 악마는 없다. 천국이나 지옥이나 전부 인류가 가서 이룬다. 천국은 세상에서 천국의 사랑과 신앙으로 산 사람들로, 지옥은 지옥적 사랑과 신조로 산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또 마귀나 사탄은 지옥을 통칭하는 말이다. 마귀는 악마들이 모여 사는 뒤쪽 지옥을, 사탄은 악령들이 모여 사는 앞쪽 지옥을 말한다. 각 지옥의 속성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룰 것이다. They wish for this reason that I should declare from their lips that in the entire heaven there is not a single angel who was created such from the beginning, nor in hell any devil who was created an angel of light and cast down; but that all, both in heaven and in hell, are from the human race; in heaven those who lived in the world in heavenly love and belief, in hell those who lived in infernal love and belief, also that it is hell taken as a whole that is called the devil and satan—the name devil being given to the hell that is behind, where those are that are called evil genii, and the name satan being given to the hell that is in front, where those are that are called evil spirits. The character of these hells will be described in the following pages.

 

[3] 천사들은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 사회가 천국과 지옥의 구성에 대해 잘못 믿는 것은, 해당 구절들을 오로지 글자 그대로 이해했을 뿐, 말씀에서 이끌어 낸 참된 교리로 깨우침이나 설명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씀의 문자 상의 의미는 참된 교리로 설명되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을 오도하고, 이것이 무지한 견해와 이설과 오류를 낳는 것이다.’ The angels said that the Christian world had gathered such a belief about those in heaven and those in hell from some passages in the Word understood according to the mere sense of the letter not illustrated and explained by genuine doctrine from the Word; yet the sense of the letter of the Word until illuminated by genuine doctrine, draws the mind in different directions, and this begets ignorance, heresies, and errors. (HH.311) //

 

※ 그리고 하나 더, 여기 목자들이 천사들을 본 걸로 나오는데, 과연 자연계, 물질계의 존재가 영계의 존재를 육안(肉眼)으로 볼 수 있는지, 이런 궁금점에 관한 아랫글을 참고하세요.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은 육신의 눈으로는 천사를 볼 수 없고, 사람 안에 있는 영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영은 영계에 있고, 육신은 물질계에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자기와 동질의 것 밖에는 볼 수 없다. 게다가 잘 알려진 대로, 눈이라는 신체 기관은 조야(粗野)해서 확대경 없이는 물질계의 미세한 것들도 볼 수 없다. 하물며 물질의 영역을 초월한 영계를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육안에서 떠나 그 영안이 열리면 영계를 볼 수 있다. 주님이 영계를 보여주시고자 하면 언제든지 즉시 보게 된다. 그러나 그때 사람은 자기 육안(肉眼)으로 보고 있다고 여긴다. 아브라함, 롯, 마노아(삿13, 삼손의 아비) 등 선지자들이 천사를 봤을 때도 그랬고,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봤을 때나 내가 천사들을 본 것도 마찬가지다. 선지자들이 이런 식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보는 사람들’(seers)이라 하고, ‘그들의 눈이 열렸다’(to have their eyes opened)고 했으며(삼상9:9, 민24:3), 또 이렇게 영계를 보게 하시는 것을 ‘그 눈을 여신다’(opening their eyes)라고 표현한 것이다. 엘리사의 사환에 대한 기록이 그 예이다. But it must be remembered that a man cannot see angels with his bodily eyes, but only with the eyes of the spirit within him, because his spirit is in the spiritual world, and all things of the body are in the natural world. Like sees like from being like. Moreover, as the bodily organ of sight, which is the eye, is too gross, as everyone knows, to see even the smaller things of nature except through magnifying glasses, still less can it see what is above the sphere of nature, as all things in the spiritual world are. Nevertheless these things can be seen by man when he has been withdrawn from the sight of the body, and the sight of his spirit has been opened; and this can be effected instantly whenever it is the pleasure of the Lord that man should see these things; and in that case man does not know but what he is seeing them with his bodily eyes. Thus were angels seen by Abraham, Lot, Manoah, and the prophets; and thus, too, the Lord was seen by the disciples after the resurrection; and in the same way angels have been seen by me. Because the prophets saw in this way they were called “seers,” and were said “to have their eyes opened” (1 Sam. 9:9; Num. 24:3); and enabling them to see thus was called “opening their eyes,” as with Elisha’s servant, of whom we read: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왕하6:17) Elisha prayed and said, Jehovah, I pray Thee open his eyes that he may see; and Jehovah opened the eyes of the young man and he saw, and behold the mountain was full of horses and chariots of fire round about Elisha (2 Kings 6:17). (HH.76, 김은경 역) //

 

또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라고 했는데 그것은 주님의 임재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임재하실 때,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진리가 마치 밝은 영광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사가 빛과 함께 목자들에게 나타난 것은 그 속뜻으로는, 진리이신 주님이 선한 신앙인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자들이 크게 무서워했습니다. 말씀에는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두려워 떠는 모습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이 그랬고요, 사가랴도, 마리아도 주님을 만날 때, 그러니까 주님이 보내신 천사 가브리엘을 만날 때에 그랬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신성이 사람의 내면으로 흘러 들어올 때에는 누구나 마음이 크게 동요되고요, 심지어 전율 같은 것을 느낀다고 합니다.

 

※ 저는 아직 이 정도의 체험은 아니지만, 나름 충격적인 영적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정원 목사의 저서, ‘대적기도’를 읽고, 잠자리에 누워 ‘귀신아!’ 따라 해 보다가 내 안에 숨어든 악령을 어렴풋이 보게 된 체험이었습니다. 지난 2013년 12월 15일 주일 밤에 있었던 일인데, 다음은 그날의 일지에 적힌 내용입니다.

 

자정 즈음, 다시 치통 시작, 잠결에 ‘귀신아!’ 하였더니 갑자기 온몸에 전율이 오래도록 지속, 정원 목사님이 대적기도 책에서 기술한 그대로의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 내 안에 뭔가가 숨어 있다가 들켜 어쩔 줄 몰라 하는 듯한 느낌 받음,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하는데 혀가 꼬여서 발음이 잘 안됨, 아내, 내가 잠꼬대를 하는 줄 알고 대적기도 중인 나를 계속 흔들어 댐... 전율이 잦아들 즈음, 치통도 사라짐, 책의 내용 그대로여서 너무 신기, 아내에게 자초지종 설명

 

제 안에서 몰래 활동하던 악한 영이 그만 갑자기 들키는 바람에 저쪽 주방 정수기 쪽으로 황급히 숨는 무슨 다급함이었지요. 형체는 그냥 검은 그림자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비춰보면 좀 창피한(?) 체험이긴 한데, 이 일로 수년 후,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에서 아랫글을 읽었을 때, 덕분에 별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각 사람에게는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이 와있다. 선한 영들을 통해서는 사람은 천국과 결합되고, 악한 영들을 통해서는 지옥과 결합된다. 이 영들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놓여 있는 중간 영계에 있다. 이곳에 대해서는 앞으로 특별히 다룰 것이다. 이 영들이 사람에게 오면 사람의 기억 전체 안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생각 전체에 들어간다. 이때 악한 영은 사람의 악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선한 영은 선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들어간다. 이 영들은 자기들이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이 사람과 같이 있을 때, 그 사람의 모든 기억과 생각이 자기 것인 줄 안다. 또 그들에게는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태양계 내의 것은 아무 것도 그들 시각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영들이 자기가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각별히 배려하신다. 만일 그들이 알아차리면 사람에게 말을 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악한 영의 경우, 사람을 파괴하려 들기 때문이다. 악한 영들은 지옥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바로 사람의 영혼을, 즉 그의 신앙과 사랑을 파괴하고, 사람의 몸까지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들이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없다. 이 경우, 그들은 자기의 말과 생각이 사람에게서 온 것임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말도 사람에게서 온 것인데도 그들은 자기가 하는 생각과 말이 자기 것인 줄 믿는다. 그리고 누구나 자기 것은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들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도록 그들이 모르는 제재를 받는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경험의 결과로 사람과 영들과의 이러한 결합에 대해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내가 이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HH.292, 김은경 역) With every individual there are good spirits and evil spirits. Through good spirits man has conjunction with heaven, and through evil spirits with hell. These spirits are in the world of spirits, which lies midway between heaven and hell. This world will be described particularly hereafter. When these spirits come to a man they enter into his entire memory, and thus into his entire thought, evil spirits into the evil things of his memory and thought, and good spirits into the good things of his memory and thought. These spirits have no knowledge whatever that they are with man; but when they are with him they believe that all things of his memory and thought are their own; neither do they see the man, because nothing that is in our solar world falls into their sight. The Lord exercises the greatest care that spirits may not know that they are with man; for if they knew it they would talk with him, and in that case evil spirits would destroy him; for evil spirits, being joined with hell, desire nothing so much as to destroy man, not alone his soul, that is, his faith and love, but also his body. It is otherwise when spirits do not talk with man, in which case they are not aware that what they are thinking and also what they are saying among themselves is from man; for although it is from man that they talk with one another, they believe that what they are thinking and saying is their own, and everyone esteems and loves what is his own. In this way spirits are constrained to love and esteem man, although they do not know it. That such is the conjunction of spirits with man has become so well known to me from a continual experience of many years that nothing is better known to me. (HH.292) //

 

말씀에서는 그 전율을 두려움이라고 표현합니다. 왜 그런 식으로 표현할까요? 그것에 대해서 ‘계시록 해설’ 677번 글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임재 시에 느끼는 공포는 지옥에서 오는 악과 거짓 때문에 내면의 영적 사람이 느끼는 두려움이다. 즉 악과 거짓들로 인해 그가 사랑하는 선과 진리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순철 역) Again, “terror” signifies in the spiritual sense terror on account of evils and falsities that are from hell, for these terrify the spiritual man, because they are the opposites of the goods and truths, which the spiritual man loves and the loss of which he fears. (AE.677)

 

※ 위 내용은 아래 계시록 말씀에 대한 주석이며, 영역은 Ager 역입니다.

 

그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 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계11:13) //

 

그냥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두려워 떠는 것이 아니고요, 우리 내면의 속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떠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의 실체는 우리 속에 있는 악과 거짓들이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를 행여 더럽힐까? 하는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이 모두 아시는 것처럼 사람의 내면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속 사람이 겉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겉 사람이 얼마나 세상의 유혹에 잘 넘어갈 수 있는지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장 순수한 진리로 오실 때 행여 주님을 더럽히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을 자기도 모르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10절에서 천사가 말했습니다.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천사가 목자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사실은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이제 내가 너희를 지켜줄 터이니 더 이상 겁내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죽었던 생명의 소생을 의미합니다. 영적 의미로 생명의 소생은 어떤 것입니까? 그동안 세상 유혹에 자주 넘어지던 사람이 이제는 주님을 의지해서 다시는 넘어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셨다고 해서 한순간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계시록 속뜻’ 56번 글에는 주님이 우리에게 오실 때 일어나는 변화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거룩한 공포가 사람을 덮을 때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생명의 소생을 알리신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사람의 자아의 생명의 자리로 들어올 때, 거룩한 공포를 느끼는데, 그것은 가끔 마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거룩한 전율이나 소름과 합쳐진다. 사람의 자아의 생명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지만,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는데, 그러나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렇게 하는 것처럼 한다. 사람이 후자의 생명 안에 있을 때 그는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주님이 전부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계시록 속뜻 56, 이순철 역) And as a holy fear seized him, the Lord said, on his being resuscitated, “Fear not.” Holy fear, which sometimes is joined with a sacred tremor of the interiors of the mind, and sometimes with horripilation, supervenes, when life enters from the Lord in place of one’s own life. One’s own life is to look from one’s self to the Lord, but life from the Lord is to look from the Lord to the Lord and yet as if from himself. When man is in this latter life, he sees that he himself is not anything, but the Lord only. (AR.56)

 

※ 위 스베덴보리 저, ‘계시록 속뜻’(Apocalypse Revealed) 56번 글은 아래 계시록 1장 17절 말씀,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계1:17)

 

에 대한 주석이며, 영역은 Whitehead 역입니다. 참고하세요. //

 

주님이 오실 때 비로소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는 것과 주님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서로 어떻게 다를까요? 자기 자신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자기 사랑으로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그렇지요. 신앙생활 하는 것도 자기를 위해서 하고, 교회에 오는 것도 자기를 위해서 옵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시면 주님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때는 자기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주님을 향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어떤 시련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사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래서 주님은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천사는 또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말했습니다. 말씀에서 ‘좋은 소식’이란 주님이 오셔서 당신을 믿는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진리를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천사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은 진리가 자기 스스로를 증거하는 모습입니다. 진리는 자기 스스로를 증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저는 직업상 진리를 전하는 일을 하고는 있지만, 가끔 말로 진리를 증거하는 것에 대해 회의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잘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이 말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급적이면 진리가 스스로 증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진리가 스스로 증거하게 할 수 있을까요? 진리를 말함과 함께 그에 따라 살면 됩니다. 그때 각자의 삶을 통해 진리가 스스로를 증거합니다. 그리고 그때 진리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말이 아니라 진리에 따라 사는 모습을 볼 때 감동합니다. 왜 그럴까요? 진리의 능력이 전해지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주님은 진리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에 전혀 다릅니다. 주님의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라고 하셨는데요,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가 스스로 증거하는 모습입니다. 이제 ‘천사가 좋은 소식을 전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짐작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오실 때, 비로소 주님의 임재와 구원의 확신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계신 주님께서 스스로 증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어떻습니까? 주님이 오신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인정했지만 확신하지는 못했습니다. 주님이 과연 우리에게 오실까? 주님이 완고한 나의 성품을 바꾸어 주실까?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실 때 그러한 확신이 생깁니다. 안 되는 것이 되기 시작하니까요.

 

11절과 12절에서는 천사가 전하는 좋은 소식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기술합니다.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말씀에서 ‘다윗’은 주님을 나타냅니다. 주님이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베들레헴’의 속뜻은 무엇일까요? 베들레헴은 새로운 진리, 즉 선을 동반한 진리가 태어나는 곳입니다. 이전에 가지고 있던 진리가 선 없는 진리였다면 베들레헴에 태어나는 진리는 선을 동반한 진리라는 것이죠. 그 새로운 진리가 강보에 쌓여 누워계신 주님이세요. 지난 시간에도 설명드린 것처럼, ‘강보’는 순진무구의 진리를 나타냅니다. 즉 선과 하나가 된 진리 그 자체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베들레헴, 즉 다윗의 동네는 그 속뜻으로는 세상의 어떤 지역이 아니라 거듭나는 사람들의 내면에 있는 어떤 곳입니다. 베들레헴이 사람의 내면 어디쯤에 있는지는 천국의 비밀 4592번 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거기서는 베냐민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는데, 베냐민이 태어난 곳 베들레헴이 영적 사람과 천적 사람의 중간쯤에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내면에는 보통 자연적 사람이라고 하는 겉 사람이 있고요, 영적 사람이라고 불리는 속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쪽 더 깊은 곳에 천적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난다는 것은 이 세 가지 내면의 의식, 천적 의식과 영적 의식, 그리고 자연적 의식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왜 그것이 거듭나는 것이냐 하면, 그래야 주님의 생명인 선과 진리가 사람의 내면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가장 바깥쪽인 삶으로, 일상생활로 흘러나오고, 거기서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천적 사람과 영적 사람, 자연적 사람이 서로 소통하여 하나 되어야 합니다. 결론을 말하면, 베들레헴은 영적 사람과 천적 사람의 중간에 있으며, 그곳에 주님께서 선을 동반한 진리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으로 오셔야 영적 사람과 천적 사람 사이에 비로소 소통이 이루어지기 때문이지요. 그 전 상태는 어떻습니까? 영적 사람과 자연적 사람 간 연결만 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천적, 영적, 자연적 사람이 모두 통하기 시작하는데요, 이것이 바로 주님이 오셨을 때에 일어나는 변화들입니다.

 

※ 위 4592번 글은 아래 창세기 말씀에 대한 주석이며, 관련 영역은 Clowes 역입니다.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창35:18)

 

All men whatever are born natural, with the power of becoming either celestial or spiritual; but the Lord alone was born spiritual celestial, and for this reason he was born at Bethlehem, where is the boundary of the land of Benjamin, for by “Bethlehem” is signified 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 and by Benjamin is represented 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 The reason why the Lord alone was born spiritual celestial is that the Divine was in him. (AC.4592)

 

그러면 그 변화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사람마다 고질병처럼 해결되지 않는 영적 문제들이 있는데 그것이 해결됩니다. 그리고 전에는 그냥 지적 기쁨을 위해서 진리를 추구했다면, 이제는 지혜를 얻기 위해 진리를 추구합니다. 삶의 목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의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나타나는 그러한 변화를 느낄 때, 주님이 우리 내면에 오신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다윗의 동네에 강보에 쌓인 아기를 보았을 때 그것이 주님이 오신 표적이니라 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믿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을 믿기 때문에 당하는 시련이 너무 많습니다. 시험 가운데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거나, 또 진리를 알게 된 것을 후회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이해하니, 그러한 모든 시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너무나 고마운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한 과정이 없다면 우리는 주님을 진실한 마음으로 찬송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 찬송 받기를 원하지 않으세요. 인간을 위해 찬송 받길 원하십니다. 주님을 찬송한다는 것은, 우리 자아에서 나온 것은 모두 악이며, 오직 주님만 선하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찬송을 주님께 드리기 위해서는 시험에 맞서 싸우다 넘어지고, 또 일어나 싸우는 그런 혹독한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냥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의 목자들은 그러한 시험들을 꿋꿋하게 버틴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가장 순수한 진리로 오십니다. 그때 우리 내면에 하늘이 열리고, 하늘과 땅이 비로소 하나 됩니다. 그리고 진정한 평화가 찾아옵니다. 평화가 무엇입니까? 시험에서 이길 때 자연히 찾아오는 상태, 그것이 평화입니다. 그래서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 모든 분께 주님의 그런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2:14)

 

아멘

 

 

원본

2016-09-04(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0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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