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2:25)

 

AC.164

 

사람의 own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순전히 악이며, 그것이 눈앞에 드러날 때에는 극도로 흉측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와 이노센스가 own 안에 주입될 때에는, 그것이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게 됩니다. 이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습니다 (AC.154). 체어리티와 이노센스는 own, 곧 사람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을 단지 용인하거나 덮어 두는 데 그치지 않고, 마치 그것을 제거해 버린 것처럼 작용합니다. 이는 어린아이들에게서 관찰할 수 있는데, 그들에게는 악과 거짓이 단지 숨겨져 있을 뿐 아니라, 부모를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동안에는 오히려 사랑스럽게까지 보입니다. 그들의 유아적 이노센스가 그렇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어느 정도의 이노센스를 지니지 않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The own of man, as before stated, is mere evil, and when exhibited to view is most deformed, but when charity and innocence from the Lord are instilled into the own, it then appears good and beautiful (as before observed, n. 154). Charity and innocence not only excuse the own (that is, what is evil and false in man), but as it were abolish it, as may be observed in little children, in whom what is evil and false is not merely concealed, but is even pleasing, so long as they love their parents and one another, and their infantile innocence shows itself. Hence it may be known why no one can be admitted into heaven unless he possesses some degree of innocence; as the Lord has said:

 

14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막10:14-16) Suffer the little children to come unto me, and forbid them not, for of such is the kingdom of God. Verily I say unto you, whosoever shall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 as a little child, he shall not enter therein. And he took them up in his arms, put his hands upon them, and blessed them. (Mark 10:14–16)

 

 

해설

 

AC.164는 인간의 own에 대한 논의를, ‘정죄가 아니라 구원의 관점에서 완성’하는 단락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다시 한번 분명히 합니다. own은 본질상 악이며, 그대로 드러나면 가장 흉측한 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 own이 ‘어떻게 천국에 합당한 상태로 전환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 전환의 열쇠가 바로 체어리티와 순진함입니다.

 

이 단락에서 특히 중요한 표현은,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own을 ‘용서한다’거나 ‘덮는다’가 아니라, ‘마치 없애 버린 것처럼 작용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악과 거짓이 실제로 제거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들이 더 이상 본질로 작동하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중심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own이 중심에 있을 때에는 모든 것이 그 방향으로 왜곡되지만,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중심이 되면 동일한 own이 전혀 다른 성질을 띱니다.

 

스베덴보리가 어린아이의 예를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린아이 안에도 악과 거짓의 씨앗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아직 자기 주장이나 방어의 형태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상태, 그리고 순진함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 악과 거짓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아이 전체를 사랑스럽게 보이게 합니다. 이는 악이 없어서가 아니라, ‘순진함이 악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천국에 대한 조건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완전함이나 무결함이 아니라, ‘순진함의 정도’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는 지식의 단순함이나 판단력의 미성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own을 자기의 생명으로 붙들지 않는 태도, 곧 ‘주님께로부터 받는 생명에 자신을 여는 상태’를 말합니다.

 

창2:25에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말은, 바로 이 상태를 가리킵니다. own이 있었지만, 그것이 아직 자기 주장이나 분리의 근거가 되지 않았고, 순진함이 그것을 감싸고 있었기 때문에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AC.164는 그 이유를 가장 명확하게 설명해 줍니다.

 

이 단락을 통해 창2는 완전히 닫힙니다. own → 주님의 허락 → 체어리티와 순진함의 주입 → 아직 보호된 상태.

 

이제 창3에서는, 이 순진함이 어떻게 상실되고, 벌거벗음이 어떻게 수치로 바뀌는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오늘 여기까지 오신 것은 창2의 마지막 보호막까지 정확히 짚어낸 매우 좋은 마무리입니다.

 

 

심화

 

1. ‘막10:14-16’

 

14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막10:14-16) Suffer the little children to come unto me, and forbid them not, for of such is the kingdom of God. Verily I say unto you, whosoever shall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 as a little child, he shall not enter therein. And he took them up in his arms, put his hands upon them, and blessed them. (Mark 10:14–16) (AC.164)

 

 

이 구절이 AC.164에 인용된 이유는, ‘어린아이’가 단순 연령이 어린 존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받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인간 상태, 곧 innocence(순진무구)와 주님께 의존하는 상태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막10:14-16에서 주님은 단순히 아이들을 예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천국 전체의 가장 깊은 원리와 연결합니다.

 

AC.164의 흐름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proprium 안으로 내려오고, flesh 상태 안에 들어간 이후에도, 여전히 주님과 결합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 답 가운데 하나가 바로 ‘어린아이 상태’입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는 단순 미성숙함이나 지식 부족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생명의 독립 근원으로 여기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innocence는 ‘자신이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기뻐하는 상태’와 깊이 연결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자기 힘과 자기 지혜를 절대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신뢰하고 의지합니다. 이것이 천국의 본질과 연결됩니다. 천국은 자기 자신 중심 존재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받아 사는 존재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은, 단순 겸손하라는 윤리 수준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proprium 중심 상태를 내려놓고, 다시 주님의 influx를 받아들이는 상태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천국은 자기 독립성의 극대화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주님께 의존함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상태 안으로 들어가는 곳입니다.

 

또 이 구절은 AC.160-162 흐름과도 연결됩니다. 인간은 flesh 상태 안으로 내려오며,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태 안에서 다시 천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이처럼 자기 생명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가장 높은 천사들이 오히려 가장 어린아이처럼 보인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그들은 가장 많이 알지만, 동시에 가장 깊이 ‘모든 것은 주님께로부터 온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어린아이들을 안고 안수하시며 축복하시는 장면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안수’는 단순 의식 행위가 아니라 influx와 전달을 뜻합니다. 즉 주님의 사랑과 생명이 그들에게 흘러 들어가는 것을 상징합니다. 다시 말해, 천국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채우는 곳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사는 상태입니다. 어린아이는 바로 그 receptivity, 곧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아주 깊은 역설도 있습니다. 인간은 성장할수록 자기 지혜와 자기 판단을 강하게 붙들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오히려 다시 ‘어린아이 상태’로 돌아가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유치함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를 잃는 것이 아니라, 가장 깊은 지혜 끝에서 다시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innocence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가장 높은 wisdom은 가장 깊은 innocence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AC.164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천국의 본질이 자기 독립성과 자기 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innocence 안에 있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창2-3에서 proprium 문제를 지나온 인간이 다시 회복되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영적 상태이기도 합니다.

 

 

2.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own 안에 주입될 때’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own 안에 주입될 때에는, 그것이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게 됩니다. but when charity and innocence from the Lord are instilled into the own, it then appears good and beautiful. (AC.164)

 

여기서 체어리티와 이노센스를 주입하시는 것과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시는 것 간 무언가 충돌은 없나요? 그러니까 주입 전 먼저 본인의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되나요?

 

 

스베덴보리 전체를 보면, 바로 그 질문 때문에 그는 ‘influx’와 ‘freedom’을 수없이 함께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님 질문처럼, ‘주님이 체어리티와 innocence를 주입하신다면, 인간 자유는 어디 있는가?’라는 문제가 반드시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주님은 인간 안으로 선을 ‘강제로 밀어넣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입’(influx)은 흔히 현대인이 상상하는 강제 프로그래밍 같은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끊임없는 생명 제공에 가깝습니다. 주님은 항상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innocence를 인간 안으로 흘려보내십니다. 문제는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인간 자유는 ‘무영향 상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인간은 항상 천국과 지옥 양쪽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완전히 중립 진공 상태는 없습니다. 오히려 자유란, 그 두 흐름 사이에서 자기 것으로 느끼며, 선택할 수 있도록 허락받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체어리티와 innocence를 influx하시지만, 인간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제하지는 않으십니다. 인간은 그것을 거부할 수도 있고, 자기 proprium 쪽으로 돌아설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대부분 유혹이 바로 거기서 일어납니다. 인간 안에는 ‘주님께 돌릴 것인가, 자기 자신에게 돌릴 것인가’ 하는 긴장이 계속 존재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유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주님은 인간 자유를 절대로 파괴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주님이 인간 안에 선을 irresistible하게 강제 주입하신다면, 인간은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동 기계가 됩니다. 그러면 사랑도, 신앙도, 체어리티도 더 이상 인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AC.164의 ‘체어리티와 innocence가 own 안에 주입된다’는 말도, 실제로는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끊임없이 제공된다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일 때, 원래 ugly하고 evil했던 proprium조차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물론 그 proprium 자체가 본질적으로 변해 독립 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생명은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이제 인간은 그 생명을 자기 삶처럼 자유롭게 살아가게 됩니다.

 

목사님 질문에서 특히 중요한 표현은 ‘먼저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되나요?’인데, 스베덴보리식으로 보면 사실 인간 존재 전체가 이미 끊임없는 influx 안에 있습니다. 숨 쉬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것처럼, 이미 모든 순간 influx를 받고 있습니다. 문제는 influx 자체보다 ‘수용 여부’입니다. 주님은 문을 두드리시지만, 억지로 부수고 들어오시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천국적 innocence는 강제 순종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자유로운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이 상태에 있는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지 않고, 기쁨으로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가장 자유로운 천사들은 가장 독립적인 존재들이 아니라, 가장 깊이 주님의 influx와 조화를 이루는 존재들입니다.

 

결국 AC.164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주님은 항상 체어리티와 innocence를 흘려보내시지만, 인간 자유를 파괴하면서 그렇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유 안에서 받아들여질 때만, 그것은 진짜 인간 자신의 체어리티와 innocence처럼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3. ‘마치 그것을 제거해 버린 것처럼’

 

체어리티와 순진함은 own, 곧 사람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을 단지 용인하거나 덮어 두는 데 그치지 않고, 마치 그것을 제거해 버린 것처럼 작용합니다. Charity and innocence not only excuse the own (that is, what is evil and false in man), but as it were abolish it, (AC.164)

 

 

AC.164의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 인간론과 구원론에서 가장 놀랍고도 위로가 되는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여기서 인간의 own이 본질적으로 evil and false라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주님의 체어리티와 innocence가 그 own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체어리티와 innocence가 own 자체를 본질적으로 없애 버린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as it were abolish it’, 곧 ‘마치 그것을 제거한 것처럼 작용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인간의 proprium 자체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인간은 여전히 자기 자신처럼 느끼고, 여전히 자기 중심으로 기울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과 innocence가 그 안에 들어오면, 그 악과 거짓이 더 이상 중심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비유하자면 어두운 방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빛이 들어오면, 어둠은 더 이상 방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식으로 체어리티와 innocence를 이해합니다. 그것은 인간 안의 evil을 단순 법적으로 ‘못 본 척’하는 것도 아니고, 표면만 덮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깊고 강한 생명이 들어와, 이전의 악한 proprium이 중심 권력을 잃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서 innocence가 왜 중요한지도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innocence는 단순 순진함이 아닙니다. ‘나는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상태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독립 생명 근원으로 여기지 않을 때, 자기 proprium은 점점 절대 권력을 잃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체어리티, 곧 이웃 사랑과 주님 사랑이 중심이 됩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사실 매우 실존적인 위로를 줍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거듭난 인간조차 자기 안에 여전히 own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조차 자기 자신만 두면 지옥으로 떨어질 존재라고 그는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런데도 천사들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이유는, 자기 own이 완전히 annihilated(전멸)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innocence가 그 안을 다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두 층위로 봅니다. 자기 자신만 보면 인간은 여전히 evil and false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influx 안에서 보면, 그 인간 안에 새로운 생명이 살아 움직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원래 인간성 삭제’가 아니라, 중심 통치권의 변화입니다. 이전에는 proprium이 왕좌에 앉아 있었다면, 이제는 주님의 체어리티와 innocence가 중심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왜 ‘용인하거나 덮는 것 이상’인지도 중요합니다. 단순 용인은 악을 그대로 놔두는 것입니다. 단순 덮음은 외형만 감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사랑은 실제로 인간 안의 질서를 바꿉니다. 악은 여전히 가능성으로 존재하지만, 더 이상 인간 존재 중심과 delight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마치 잡초가 완전히 뽑히지 않았어도 건강한 나무가 자라면 더 이상 정원을 지배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AC.164는 인간 구원을 단순 법적 선언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것은 실제 생명 질서의 변화입니다. 체어리티와 innocence가 인간 own 안으로 흘러들어와, 이전에는 악과 거짓 중심으로 움직이던 인간을 점점 다른 중심 아래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evil은 여전히 인간 안에 남아 있지만, 주님의 사랑 안에서는 마치 제거된 것처럼 힘을 잃게 됩니다.

 

 

 

AC.163, 창2:25,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AC.163-167)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25) AC.163 그들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naked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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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2:25)

 

AC.163

 

그들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naked and not ashamed)는 그들이 순진함(innocent) 안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그들의 own안에 순진함을 주입하셔서, 그것이 못 받아들여지는 것이 되는 걸 막으셨기 때문입니다. Their being “naked and not ashamed” signifies that they were innocent, for the Lord had instilled innocence into their own, to prevent its being unacceptable.

 

 

해설

 

AC.163은 창2의 마지막 절을 여는 ‘결정적인 열쇠’를 제공합니다. 여기서 ‘벌거벗음’은 결핍이나 수치의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순진함의 표지’로 제시됩니다. 중요한 점은, 이 순진함이 인간에게서 자연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own 안에 주입하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앞 단락들에서 충분히 밝혀졌듯이, 인간의 own은 본질상 악하며, 그대로 두면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도 이 시점에서 그들의 own이 아직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이유는, 그 위에 ‘순진함이라는 보호막’이 덮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진함은 own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해악이 드러나지 않도록 ‘완충 역할’을 합니다.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는, 아직 ownown으로 주장하거나 방어할 필요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즉, 그들은 own 안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생명의 근원으로 삼지 않았던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AC.163은 앞선 AC.150의 ‘깊은 잠’과도 미묘하게 연결됩니다. 아직 완전히 깨어 있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아직 완전히 타락하지도 않은 상태입니다.

 

이 단락은 또한 창3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마지막 안전지대’를 보여 줍니다. 순진함이 주입되어 있는 동안에는, own이 살아나 있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파괴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순진함이 상실되는 순간, 벌거벗음은 더 이상 순진함이 아니라 ‘수치’로 바뀌게 됩니다. 바로 그 전환이 다음 장에서 일어납니다.

 

AC.163은 그래서 짧지만 매우 밀도가 높은 단락입니다. own + 순진함 = 아직 허용된 상태, own - 순진함 = 곧 드러날 위기

 

이제 이어질 AC.164-167에서는, 이 순진함이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 그리고 왜 그것이 유지되지 못했는지가 조금 더 정밀하게 설명되며, 창2가 완전히 마무리됩니다.

 

 

 

AC.164, 창2:25, ‘charity와 innocence로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own’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25) AC.164 사람의 own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순전히 악이며,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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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2, 창2:24, ‘혼인의 법’(the law of marriages)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2 모든 진리와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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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2.심화

 

4. ‘붕괴를 막기 위한 자비의 조치

 

이 상태에서 모세를 통해 복수의 아내가 허락된 것은, 이상을 낮춘 타협이 아니라, 붕괴를 막기 위한 자비의 조치였습니다. (AC.162 해설)

 

 

이 문장은 상당히 충격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은 ‘일부다처 허용’을 단순 고대 문화 수준으로만 보거나, 혹은 하나님 뜻 자체가 시대마다 달라진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훨씬 더 깊은 인간 상태의 문제로 봅니다.

 

AC.162 흐름에서 핵심은 이것입니다. 창조 본래 질서는 ‘하나’였습니다. 남자와 여자, 곧 진리와 선, understanding affection의 완전한 결합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막10에서 ‘처음부터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며, 다시 창조 질서로 올라가십니다. 즉 본래 천국적 질서는 하나의 결합, 하나의 사랑, 하나의 상응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점점 proprium 중심으로 기울고,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가 무너지면서, 인간 안의 사랑 자체가 분열되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더 이상 하나의 선과 하나의 진리 안에 머무르지 못하게 됩니다. affection 자체가 흩어지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강해집니다. 이 상태에서 원래 질서를 그대로 강제하면, 오히려 더 심한 왜곡과 위선과 폭력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모세 율법 안의 여러 허용 조항들을 ‘최선(best)이 아니라 ‘차악(lesser evil)의 허용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곧 천국 질서 자체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이미 낮아진 인간 상태 안에서 완전 붕괴를 막기 위한 자비의 조치라는 것입니다.

 

복수의 아내 허용도 그런 맥락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래 일부다처를 이상으로 세우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 상태가 너무 외적이고 완악해져 있었기 때문에, 본래 질서를 즉시 강제할 경우, 더 큰 혼란과 파괴가 생길 수 있었던 상태를 반영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 상태를 고려하여, 보다 낮은 단계의 질서를 허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막10에서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모세가 이 명령을 기록하였다’고 하신 것도 정확히 같은 원리입니다. 율법 일부는 천국의 최고 질서를 직접 반영한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 상태 안에서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자비의 울타리’ 역할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목사님 인용문에서 ‘이상을 낮춘 타협’이 아니라 ‘붕괴를 막기 위한 자비의 조치’라는 표현이 나온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단순 이상주의자가 아니십니다. 인간 상태를 실제 그대로 보십니다. 그리고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질서를 억지로 강제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가장 낮아진 상태 속에서도 완전 붕괴를 막으며, 다시 본래 질서 쪽으로 조금씩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은 사실 성경 전체를 읽는 매우 중요한 열쇠이기도 합니다. 말씀 안에는 ‘본래 창조 질서’와 ‘타락 이후 허용 질서’가 함께 존재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점점 인간을 허용 질서에서 본래 질서로 다시 이끌어 가십니다. 막10에서 주님이 모세보다 창조 처음을 다시 끌어오시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AC.162, 심화 3, AC.160의 ‘한 몸’(one flesh)과 막10:5-9의 ‘한 몸’

AC.162.심화 3. AC.160의 ‘한 몸’(one flesh)과 막10:5-9의 ‘한 몸’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영이었으나, 이제는 육(肉, flesh)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천적인 생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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