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과 아벨, 가인의 제사, 아벨의 제사 (2025/11/5)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4:1-9)

 

 

태고교회는 사랑으로 주님을 신앙하는 교회(church had faith in the Lord through love)였으나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는 사람들(some who separated faith from love)이 일어났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가인’(Cain)이라 하고,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charity, 자선, 기부, 이웃사랑)를 ‘아벨’(Abel)이라 하였습니다. (1, 2) (AC.325)  

 

사랑으로 주님을 신앙한다’는 것은 그의 신앙생활 전반에 주님을 사랑함이 가득함을 말합니다. 그가 하는 말, 표정, 태도 등 전반에 주님 사랑으로 말미암은 따뜻함과 애정이 느껴지는 신앙으로, 그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의 동기가 오직 주님을 사랑함에 있는, 그런 신앙을 말합니다.

 

반면,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다’는 것은 신앙 따로, 사랑 따로, 그러니까 말로는 주님 신앙을 말하면서도 태도나 표정, 느껴지는 아우라 등은 전혀 주님 사랑이 아닌, 그런 차갑고 낯선, 이상한 신앙을 말합니다. 말로는 원수를 사랑하라를 가르치면서 정작 자기는 원수를 미워하는 신앙인들이 여기에 해당되겠습니다.

 

 

각각의 예배에 대한 설명입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으로 드리는 예배를 ‘가인의 제사’(offering of Cain)라 하고, 체어리티로 드리는 예배를 ‘아벨의 제사’(offering of Abel)라 합니다. (3, 4) 체어리티로 드리는 예배는 열납(悅納, acceptable)될 수 있었으나 분리된 신앙으로 드리는 예배는 열납될 수 없었습니다. (4, 5) (AC.326)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은 악한 상태가 되었는데, 이걸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Cain’s anger being kindled, and his countenance falling)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5, 6) (AC.327)

 

 

그리고 신앙의 질(, quality)은 체어리티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신앙이 주(主)가 되려 하거나 체어리티보다 높아지려고만 하지 않으면 이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하고 싶어 한다는 것 (7절) (AC.327)

 

 

신앙을 분리,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우선하는 사람들한테서는 체어리티가 사라지게 되는데, 이것을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Cain slaying his brother Abel)로 표현하였습니다. (8, 9) (AC.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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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인, 기독교인이 스베덴보리를 하게 되면 (2025/11/4)

 

 

피난 간 부산 보수동 시절, 같은 동네 어느 권사님의 백일기도 정성에 마음이 움직여 그분 다니시던 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이라는 걸 처음 시작하신, 그것도 가문 전체에서 처음으로! 부모님을 따라 이번에는 원래 사시던 서울로 제 나이 네 살 때 귀경, 서울 옥수동이라는 데에 터를 잡아 살면서 서울 약수교회라는 데에서 저의 어린 시절은 시작되었습니다. 약수교회는 근처 신일교회에서 나온 교회입니다. 장로교 통합측입니다. 한국 장로교회는 예장통합, 예장합동, 예장고신, 예장합신 및 기장 등 대표 교단과 함께 군소 수백 개 교단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잠시 중학교를 다니던 저는 경남 김해로 이사, 부산까지 통학하면서 고1까지, 그리고 다시 이번에는 경기도 수원으로 가게 되는데, 거기서 수원중앙침례교회라는 데를 다니게 되면서 저의 침례교회와의 연결고리가 시작됩니다. 이는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가 크리스찬스쿨로서 거기 교목이 바로 이동원 목사님이셨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김장환 목사님과 수원중앙침례교회로 연결된 것입니다. 김장환 목사님은 이동원 목사님 미국 유학 뒷바라지를 하신 분이시며, 또 제가 셋째 형님 따라 거기 5천 명 성가대도 섰던, 빌리 그래함 초청, 여의도 집회 때 통역으로 섬기신 분이셔서 나름 검증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여기 ‘검증’이라 한 이유는, 그때만 해도 한국 개신교단에서 침례교회는 이단 아닌가 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지요. 그 고등학교에서 중간에 이동원 목사님이 서울침례교회로 가시게 되어 저 역시 자연스럽게 서울침례교회로, 그리고 그곳 대학부에서 제 아내를 만나게 되며, 이곳에서 삼성 입사 및 결혼도, 그리고 두 아들도 얻게 됩니다.

 

그러다 미국에서 돌아오신 이동원 목사님을 돕기 위해 기업을 나와 교회 직원으로 들어가 정보시스템 분야에 현 지구촌교회의 첫 토대 놓는 일에 한 장의 벽돌로 쓰임을 받게 되지요. 이후 대전 내려와 지내던 중 2005년 어느 날, 살던 아파트 앞, 다니던 교회에서 한밤중 장모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다가 신학으로의 부름을 받고, 준비, 이듬해 대전침신신대원에 입학, 늦은 나이에 신학을 하게 됩니다.

 

3년 신대원을 마치고 대전 모 교회에 청빙 받아 마을 사역자 및 교회 내 정보시스템 총괄로 섬기다가 지난 2013년 허리 디스크 악화로 사임, 재활 중 그해 9월, 집에서 ‘한결같은 교회’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시작, 처음엔 남들처럼 일반 목회로 부르심 받은 줄 알고 그쪽으로 여러 해 두리번거렸으나 둘째를 통해 주님은 전혀 새로운 길, 곧 수도원으로 부르시고,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새로운 길로 인도하심을 알고, 순종, 처음엔 수도 목회를 준비하다가 지금은 스베덴보리 저작 번역 및 준비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수도원 공부를 하며, 많은 수도원, 성인전 통해 수많은 국내외 성인을 접하면서, 그동안 개신교, 특히 침례교회 안에서만 숨 쉬던 저는 개신교를 포함하는 전체 기독교, 그리고 기독교를 포함하는 인류 전체를 보는 시선, 시야,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옮겨가는 것과 같다 할까요? 그러나 이 변화는 결국 만나게 될 어떤 인물을 위한 중간 과정이었을 뿐인데요, 그가 바로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입니다. 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저는 비로소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또렷이 알아가게 되었어요. 주님은 스베덴보리를 통해 많은 것을 계시하셨는데, 그 계시의 전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 곧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에 관한 걸 알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신성의 나라인 천국, 곧 사람들로 하여금 생전에 천국에 합당한 상태가 되는 일에 힘쓰도록 말입니다.

 

내 나이 만 64세... 지난 세월이 몇 글자로 이리 쉽게 요약, 정리가 되지만, 사실 이 글 사이사이 다 적지 못할 많은 내적, 외적 갈등과 고민, 어려움들, 그러니까 혈육을 비롯, 모든 신앙의 지인들로부터 버림받음, 무시, 모욕, 무례, 함부로 취급받음 등이 있었는데, 다 지난 일들이며, 한발 물러난 지금은 뭐랄까... 마치 껍질을 찢고 나와 아름다운 나비가 되는 과정이었다랄까요? 모든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 지난날 제 삶은 전적으로 주님의 섭리와 경륜임을 인정합니다.

 

모태신앙인의 삶, 곧 개신교인의 삶도 살아보고, 스베덴보리 역시 만 8년째인 현재 두 신앙 세계를 굳이 대비, 비교하자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제 경우는, 전자의 삶이 이 세상 정오의 빛 같은 삶이라면, 후자의 삶은 그 일곱 배의 빛 가운데 사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이 한 문장으로도 충분하지만 덧붙이자면, 전자는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를 믿는다면 후자는 주님을 사랑하다 보니 덤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며, 전자는 영성, 영성 하지만 결국 겉 사람의 삶을 좀 거룩하게 사는 걸 가르친다면, 후자는 신성 그 자체에만, 그러니까 무슨 일체의 세속적인 걸 섞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신성만 가르치는, 그래서 순도 100%의 속 사람 되는 걸 가르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아래는 스베덴보리 관련, 제 블로그 글들입니다. 참고하세요.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

다음은 제가 번역하는 책들의 저자에 대한 간단한 소개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1688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출생, 웁살라대학에서 언어학, 수학, 광물학, 천문학, 생리학, 신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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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저서들(Writings)

다음은 스베덴보리의 저서목록(Writings)입니다. 인류사에 존재했던 사람 중 가장 지능이 높은 사람으로 기네스 북에는 밀턴, 괴테 그리고 스베덴보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생전에 가장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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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주신 남편 본연의 역할을 가볍게 여기면 (2025/11/3)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3:17)  

 

다음은 이 합리적 능력이라는 래셔널의 퀄러티(The quality of the rational)에 관한 설명입니다. 여기 보면, 이 합리적 능력은 자아, 즉 본성에 동의, 저주를 자초하더니 결국 지옥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남아 있는 이성(理性, reason)은 없고, 대신 이성 노릇을 하는 추론 능력(推論, ratiocination)만 남게 된 것이지요. (17) (AC.237)

 

오늘날에도 아내라는 본성(own)에 사로잡혀 그만 주님 주신 본연의 역할인 합리(rational)라는 능력을 포기하는 남편들이 있는데요, 그럴 경우, 이들이 비록 선한 마음으로 그리했을지라도 주님의 질서는 엄정하여 결국 그 값을 치루게 됩니다. 좀 헷갈리고 잘 모르겠을 땐 주님 말씀을 의지하여 결정해야 합니다. 그저 당장 급한 불을 끄고자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서둘러 좋게 좋게 결정하면 좀 심하게 말씀드리면 지옥문이 열리기 때문인데요, 우리는 잘 모르겠을 땐 베드로처럼 해야 합니다.

 

4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5:4-11)

 

이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이라는 표현은 또한 다음 주님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18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려진 자요 20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3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13:18-23)

 

혹시 이제라도 돌이켜 수습할 마음이 있으시면 자신의 경솔함을 주님 앞에 시인하시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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