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6.심화

 

3. 주님의 부활로 본 창1

 

이것으로 창1 AC 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 관련, 모든 작업을 마칩니다. 끝으로, 1의 모든 내용을 주님의 부활과 연결해 주세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창세기 1장은 세상의 창조 이야기’이기 이전에 주님의 부활이 어떻게 인간 안에서 재현되는가’를 보여 주는 가장 깊은 지도로도 볼 수 있습니다. 곧, ‘부활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반복되는 창조와 거듭남의 완성’이며, 그렇다면 창1의 여섯 날과 일곱째 날은 바로 그 부활의 내적 과정을 단계적으로 보여 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부활을 어떻게 보느냐가 핵심입니다. 보통은 부활을 십자가 이후 사흘 만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으로만 이해합니다. 물론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AC의 시선에서는 그 사건이 단순히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루신 것을 사람 안에서 지금도 실제로 이루어 가시는 현재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창1은 곧 주님의 부활이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첫째 날은 빛이 있으라’입니다. 이것은 부활의 시작입니다. 완전히 어둠 속에 있던 상태에서 무엇이 참인지’에 대한 첫 빛이 들어옵니다. 이때는 아직 삶이 바뀐 것이 아니라, ‘보이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죽음의 상태에서 생명의 빛이 처음 비추는 순간입니다.

 

둘째 날은 궁창으로 위와 아래를 나눔’입니다. 이것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곧 겉과 속의 구분’입니다. 이전에는 모든 것이 뒤섞여 있었지만, 이제 하늘에 속한 것’과 세상에 속한 것’이 구분되기 시작합니다. 부활의 과정에서도 이 분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무엇이 위에서 오는 것이고, 무엇이 아래에서 올라오는 것인지 분별되기 시작합니다.

 

셋째 날은 땅이 드러나고, 풀과 씨 맺는 채소가 남’입니다. 이것은 삶의 자리 위에 진리가 자라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이제 단순한 깨달음을 넘어, 실제로 무엇인가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씨의 단계’, 곧 시작입니다. 부활의 과정에서도 이 시기는 생명이 싹트는 시기’입니다.

 

넷째 날은 해와 달과 별’입니다. 이것은 사랑(해)과 신앙(달), 그리고 다양한 진리(별)가 질서를 갖추는 상태’입니다. 이제 삶을 이끄는 중심이 생깁니다. 부활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질서 있는 생명’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다섯째 날은 물고기와 새’입니다. 이것은 생각과 인식이 살아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이전에는 배운 것이 머리에만 있었지만, 이제 그것이 실제로 살아 움직이며 다양한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부활의 생명이 사고와 인식 영역까지 퍼지는 단계입니다.

 

여섯째 날은 결정적입니다. ‘짐승과 사람’이 창조됩니다. 이것은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되고, 사람이 주님의 형상을 이루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신앙과 사랑이 결합합니다. 더 이상 따로 움직이지 않고 하나로 작동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 직전의 완성 상태’입니다. 그래서 심히 좋았더라’가 나옵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 ‘안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더 이상 싸움이 중심이 아니라, 생명이 중심이 됩니다. 주님이 쉬신다는 것은 주님의 일이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 ‘이제 그 생명이 사람 안에서 안정되게 작동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전체를 하나로 묶으면 이렇게 됩니다. ‘부활은 죽은 뒤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어둠에서 빛으로, 혼돈에서 질서로, 분열에서 결합으로, 그리고 싸움에서 안식으로 옮겨가는 창조의 완성이다.’

 

이걸 설교적으로 아주 간단히 풀면 이렇게 전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주님이 부활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더 깊이 보면, ‘주님은 지금도 우리 안에서 부활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빛을 받을 때, 분별이 생길 때, 삶이 자라날 때, 사랑과 신앙이 하나가 될 때 등, 이 모든 과정이 부활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더 이상 억지로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선 안에 머무는 상태가 올 때, 그때 우리는 부활의 안식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창1은 단순한 시작의 이야기가 아니라, ‘부활의 완성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은 지금도 계속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창세기 1장은 주님의 부활이 인간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 주는 지도이며, 여섯 날의 창조는 부활을 향한 과정이고, 일곱째 날의 안식이 바로 그 부활의 상태입니다.’

 

 

 

AC.66, 창1, '말씀의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

AC.66 말씀에는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이 땅의 것과 세상의 것을 말할 때,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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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6, 심화 2, ‘시7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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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C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 버전 작업을 여러 달에 걸쳐 마쳤습니다.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인데... 이걸 아는 지인들에게 카톡으로 공유하는 게 맞을까요? 일단 블로그에는 실시간으로 글 단위 공유는 꾸준히 해오고 있지만... 정성을 쏟는 거에 비해 조회수나 좋아요는 거의 제로에 수렴합니다. 거의 아무도 안 보는 일을 하느라 시간을 써오고 있는 것이죠. 카톡 일대일 공유 역시 상황은 비슷합니다. 100명에게 보내던 걸 추려 20명에게 창1해설 버전을 보냈었는데 그나마 회신이라도 온 건 대여섯... 그냥 예의상인 것 같았습니다.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 그에 대한 진정성 어린, 그리고 제가 원하는 회신은 없습니다. 100여 명의 지인분들은 저의 평생 신앙 지인들 중 알곡들로 추린, 그러니까 마음을 주고받았다 저는 생각한 사람들인데도 그렇습니다. 해설 버전조차도 많이 어려운 건지... 이번 심화 버전 앞에서 제가 공유를 망설이는 이유는, 혹시 이것이 좀 미안한 표현이지만, 마치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주는건 아닌지, 그래서 주님의 신적 진리를 모독하는 건 아닌지 하는 우려가 있어서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블로그에 글 하나 올려 자유롭게 원하는 사람은 받아 가게 하고, 저는 계속 창2, 3... 진도 나가는 게 맞겠죠? 언젠가는 주님이 이 결과물들을 사용하실 줄 믿으면서...

 

 

목사님, 결론부터 먼저 조심스럽게 말씀드리면, 지금의 고민은 ‘전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전하는 것이 주님의 질서에 맞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경험, 곧 100명 중 극소수의 반응, 그마저도 깊지 않은 회신은 사실 실패의 신호가 아니라, 오히려 매우 정상적이고 건강한 ‘영적 분별의 데이터’라고 보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에마누엘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보여주는 원리는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강요되지 않으며, 준비된 상태에서만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진리가 널리 퍼지지 않는 것은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수용하는 상태의 문제입니다.

 

지금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은 매우 진지한 것이고, 실제로 스베덴보리 역시 이 원리를 강하게 말합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 깊은 진리를 무리하게 노출시키는 것은, 그 사람에게도 해가 되고, 진리 자체도 가볍게 취급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구분하셔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강요’와 ‘개방’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데 반복적으로 밀어 넣는 것은 분명 질서에 어긋나지만, 조용히 문을 열어 두고 원하는 사람이 들어오게 하는 것은 질서에 합당한 방식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지금 가장 적합한 방식은 이미 거의 마음속에서 정리하신 그 방향, 곧 ‘블로그에 두고, 원하는 사람이 스스로 찾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소극적 선택이 아니라, 매우 적극적인 ‘영적 질서에 순종하는 방식’입니다. 씨를 길바닥에 뿌리느냐, 아니면 밭에 심느냐의 차이입니다. 지금까지의 카톡 일괄 공유는 사실상 ‘길바닥에 뿌리는 방식’에 가까웠다면, 블로그는 ‘밭을 만들어 두는 방식’입니다. 밭은 당장 열매가 없어 보여도, 때가 되면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이것입니다. 목사님께서 기대하시는 ‘진정성 있는 회신’이 오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읽지 않아서라기보다, 읽더라도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스베덴보리의 글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상태를 요구하는 진리’이기 때문에, 그것을 접한 사람은 두 가지 반응 중 하나를 보입니다. 깊이 들어오거나, 아니면 조용히 물러나거나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후자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나쁘거나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아직 그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응 없음’은 거절이 아니라 ‘유보’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여기서 아주 중요한 전환이 하나 필요합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전했는데 왜 반응이 없을까’라는 방향이었다면, 이제는 ‘주님이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이 글을 사용하실까’로 중심을 옮기셔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삶을 보면, 그는 당대에 거의 이해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의 반응을 기준으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록하는 것’ 자체를 사명으로 보았고, ‘전달의 시기와 방식’은 주님의 영역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이 점이 목사님의 지금 상황과 매우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실천적으로는 이렇게 정리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대량 카톡 공유는 중단하셔도 좋습니다. 이것은 지금 단계에서는 효율도 낮고, 오히려 진리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둘째, 대신 블로그를 ‘저장소가 아니라 살아 있는 밭’으로 계속 가꾸십시오. 글의 밀도는 이미 충분하니, 이제는 접근성을 조금씩 보완하시는 것도 좋습니다. 예를 들어 ‘아주 쉬운 요약 버전’이나 ‘입문자를 위한 길잡이 글’을 간간이 추가하는 것입니다. 셋째, 정말로 마음이 향하는 소수, 그러니까 한두 명, 많아야 서너 명에게만 ‘개별적으로, 조용히’ 나누십시오. 그것도 ‘읽어 달라’가 아니라 ‘혹시 필요하시면 참고하시라’는 식으로 문을 열어 두는 방식으로요.

 

마지막으로, 목사님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지금 하시는 일은 ‘사람을 모으는 일’이 아니라 ‘진리를 보존하고 기록하는 일’에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언제나 외로워 보이고, 열매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 식으로 말하면, 이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저장되는 리메인스(remains)’와 같은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정확한 때에, 정확한 사람에게 연결됩니다.

 

그러니 목사님, 지금처럼 창2, 창3...로 계속 나아가십시오. 그것이 가장 안전하고, 가장 깊고, 그리고 가장 ‘주님의 방식’에 가까운 길입니다. 그리고 블로그에 조용히 올려 두십시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지금은 ‘알려지는 시간’이 아니라 ‘쌓이는 시간’일 가능성이 큽니다.

 

 

 

SC.52, 스베덴보리와 부활절, 성탄절 같은 기독교 절기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는 사람들은 부활절, 성탄절 같은 기독교 절기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에게 있어 부활절과 성탄절은 ‘폐지해야 할 외적 전통’도 아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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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는 사람들은 부활절, 성탄절 같은 기독교 절기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에게 있어 부활절과 성탄절은 ‘폐지해야 할 외적 전통’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그 자체로 거룩한 절대 시간’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전체 사상을 관통하는 한 가지 원리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곧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을 담기 위해 존재한다’는 원리입니다. 그래서 절기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주님의 신적 사역의 상태들’을 사람들로 하여금 기억하고 묵상하게 하는 도구로서 의미를 갖습니다. 다시 말해, 성탄절은 단순히 예수님의 역사적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주님이 인간의 마음 안에 새롭게 태어나시는 상태’를, 부활절은 단순히 무덤에서 일어나신 사건이 아니라 ‘지옥과 싸워 이기시고 인간 안에 새로운 생명을 여시는 상태’를 상기시키는 표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보면, 그는 절기를 중심으로 신앙을 조직하지 않습니다. 그의 모든 초점은 ‘거듭남’, 곧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지속적인 영적 변화에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특정한 하루에 감정적으로 고양되는 것보다,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의 탄생과 고난과 부활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훨씬 더 본질적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있어 ‘참된 성탄’은 어떤 날짜가 아니라, 사람이 처음으로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순간이며, ‘참된 부활’은 사람이 자신의 악과 거짓과 싸워 그것을 이기고 새로운 삶으로 일어서는 모든 순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절기는 ‘일 년에 한 번’이 아니라 ‘영적으로는 수없이 반복되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스베덴보리가 절기를 무시하거나 거부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실제로 교회에 출석했고, 성찬에도 참여했으며, 당시 교회의 외적 질서를 존중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내적 태도’였습니다. 그는 외적 의식이 사람을 구원한다고 보지 않았지만,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주님께로 향하게 하는 데 쓰일 수 있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절기는 ‘지켜야만 하는 법’이 아니라, ‘올바르게 사용될 수 있는 수단’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향은 매우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는 사람이라면, 절기를 두 가지 층위에서 동시에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외적 층위’로서, 가족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기억하고 나누는 시간으로서의 절기입니다. 이것은 사랑과 질서의 차원에서 소중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적 층위’로서, 그 절기가 가리키는 영적 실재가 지금 내 삶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만일 이 두 번째가 없다면, 첫 번째는 공허한 형식이 되고 말고, 반대로 첫 번째를 완전히 버리면 사랑의 교통과 질서가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에게 부활절과 성탄절은 ‘지켜야 할 날’이라기보다 ‘깨어 있어야 할 의미’였습니다. 그는 날짜를 통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상태를 통해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도 방향을 제시합니다. 절기를 잊었다고 해서 영적으로 뒤처진 것이 아니며, 절기를 잘 챙겼다고 해서 자동으로 깊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내 안에서 주님의 탄생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리고 내 안에서 부활이 일어나고 있는가입니다.

 

목사님께서 AC를 붙들고 씨름하시는 그 시간 속에서, 만일 혼돈이 질서로 바뀌고, 어둠 속에 빛이 들어오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가장 실제적인 성탄이며, 가장 실제적인 부활입니다. 그 순간이 외적 절기와 내적 실재가 아름답게 하나로 만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SC.53, ‘창1 AC 심화 버전 공유를 어떻게 해야 할지...’

창1 AC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 버전 작업을 여러 달에 걸쳐 마쳤습니다.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인데... 이걸 아는 지인들에게 카톡으로 공유하는 게 맞을까요? 일단 블로그에는 실시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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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51, 스베덴보리가 사람을 만났던 기준

스베덴보리의 소명 이후 하루하루는, 아니 시간 시간은 그 쓰임새와 밀도가 상상을 초월했겠구나 싶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랬나요? 혹시 어떤 기준이 있었을까요? 결론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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