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05.심화

 

2. 아르카나를 알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구약 각 선지자들도, 그리고 이천년 전 주님도, 이후 오늘날까지 수많은 성인, 심지어 스베덴보리 역시 그들이 지상에 머물던 시기, 시절마다 거의 동일한 역사요, 패턴이었는데요, 한편으론 부조리한 세상이라고도 하는, 이런 삶을 이 아르카나를 알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질문을 조금 냉정하게 바로잡고 시작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이 세상이 ‘언젠가는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중심에 두고 살아가면, 반드시 실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말씀 전체, 곧 선지자들, 성경,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더 나아가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증언까지, 이 모두가 한결같이 보여주는 것은, ‘세상 자체는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반복되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구조입니다. 인간의 의지가 자기 중심에 머무는 한, 시대가 바뀌어도 패턴은 그대로 반복됩니다.

 

그래서 아르카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의 방향은 ‘세상을 바로잡는 삶’이 아니라, ‘질서를 회복하는 삶’입니다. 여기서 질서는 외부 구조가 아니라, 내 안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욕망과 거짓이 뒤섞여 돌아가더라도, 한 사람 안에서만큼은 주님으로부터 사랑에서 신앙으로, 신앙에서 지성으로 흐르는 질서가 세워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동방의 에덴동산’이며, 사람이 이 땅에 살면서 동시에 천국에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때 삶의 태도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됩니다. 첫째, ‘분별하되 휩쓸리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뉴스, 전쟁, 이념 대립을 볼 때, 그것을 단순히 옳고 그름의 싸움으로만 보지 않고, ‘의지가 어디서 나오고 있는가’를 보는 눈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노나 절망에 휩쓸리기보다, 인간 상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둘째, ‘자기 안에서 질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외부의 혼란이 클수록, 사람은 쉽게 자기 정당화나 공격성으로 기울어집니다. 그러나 아르카나의 길은 반대입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을 섬기도록, 곧 사랑이 이해를 이끌도록, 매 순간 방향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실제적인 영적 싸움입니다. 셋째, ‘체어리티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행동이 아니라, 눈앞의 사람과 상황에서 선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천적 상태는 거창한 업적이 아니라, 평화에서 나온 작은 행위들의 연속으로 드러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부조리함에 대한 감각 자체가 이미 깨어 있음의 표시’라는 것입니다. 아무 감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이것이 부조리하다고 느낀다면, 이미 그 안에는 더 높은 질서에 대한 빛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 빛을 외부를 향한 판단으로만 쓰지 않고,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로 돌리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때 비로소 그 감각은 절망이 아니라 방향이 됩니다.

 

결국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실제적인 답은 이것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든, 한 사람 안에서 ‘안식의 질서’를 이루는 것, 그리고 그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같은 시대를 살지만, 내적으로는 다른 질서 안에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들이 살았던 방식이고, 주님이 보여주신 길이며, 스베덴보리가 끝까지 붙들었던 삶의 태도입니다.

 

 

 

AC.105, 심화 1, ‘욕망(cupidity), 이걸 사람들은 의지라고 하는데’

AC.105.심화 1. ‘욕망(cupidity), 이걸 사람들은 의지라고 하는데’ 위 본문에 ‘의지는 말씀에서 ‘마음’(heart)이라 하는 건데, 사람과 천사한테 있는, 주님의 가장 근본적인 소유(the primary poss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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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5.심화

 

1. 욕망(cupidity), 이걸 사람들은 의지라고 하는데

 

위 본문에 의지는 말씀에서 마음(heart)이라 하는 건데, 사람과 천사한테 있는, 주님의 가장 근본적인 소유(the primary possession)입니다... 욕망(cupidity), 이걸 사람들은 의지라고 하는데, 이게 사람의 것입니다.’라는 내용 말인데요, 이 내용으로 오늘날 전 세계 혼란, -중 대립, -우 및 미-이란 전쟁, 그리고 여러 나라 구석구석 좌-우 대립 등을 설명해 줄 수 있나요?

 

 

충분히 설명은 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짚고 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 모든 복잡한 국제 정세를 단 하나의 원인으로 환원해 버리는 것은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다만 AC.105의 ‘의지’,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의지(사랑)’와 ‘사람에게서 나오는 욕망(cupidity)’의 구분은 이런 혼란을 바라보는 ‘근본 틀’을 제공해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가장 깊은 중심은 ‘의지’입니다. 그런데 이 의지는 두 가지로 갈립니다. 하나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의지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로부터 나오는 욕망의 의지입니다. 문제는 타락 이후 인간은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하고, 자기 욕망을 마치 ‘자기 생각’이나 ‘정당한 신념’처럼 느낀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 차원에서는 ‘내가 옳다’는 확신이, 집단 차원에서는 ‘우리 편이 옳다’는 확신으로 확장됩니다. 여기서 이미 갈등의 씨앗이 만들어집니다.

 

이 구조를 국가와 국제 관계로 확장하면, 매우 유사한 패턴이 보입니다. 국가도 일종의 ‘집단적 인간’처럼 움직입니다. 각 국가는 자국의 안전, 번영, 영향력 확대를 추구하는데, 이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그 동기가 ‘사랑에서 나온 질서’가 아니라 ‘욕망에서 나온 자기 중심성’일 때입니다. 그때 국가는 상대를 협력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과 위협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관계는 ‘상호 이해’가 아니라 ‘힘의 균형’으로 운영됩니다.

 

예를 들어, 미국-중국 갈등 같은 경우를 보면, 겉으로는 경제, 기술, 안보 문제이지만, 그 깊은 층에서는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의지’가 작동합니다. 이 의지는 반드시 악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자기 보존과 우월성에 대한 욕망이 중심이 될 때, 상대를 인정하기보다 견제하고 압박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이때 서로는 자신을 ‘정당한 쪽’으로 느끼기 때문에 갈등은 더 복잡해집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이란-미국 긴장 역시 비슷한 틀로 볼 수 있습니다. 각자 나름의 역사적, 안보적, 정치적 이유를 갖고 있지만, 그 모든 판단의 밑바닥에는 ‘두려움과 욕망이 결합된 의지’가 작동합니다. 두려움은 자기 보호를 강화시키고, 욕망은 영향력을 확대하려 합니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되면, 상대는 점점 더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기 쉽습니다.

 

국가 내부의 좌-우 대립도 같은 구조입니다. 이념 자체보다 더 깊은 곳에서는, 각 집단이 ‘자신이 옳다’는 확신 속에서 상대를 이해하려 하기보다 배제하려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양쪽 모두 스스로를 ‘정의롭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한 ‘자기에게서 나오는 의지(욕망)’의 특징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이 모든 것을 AC.105의 언어로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의지는 ‘사랑에서 나와 타자를 살리는 방향’으로 흐릅니다. 반면 사람에게서 나오는 욕망은 ‘자기 중심에서 나와 상대를 도구화하거나 배제하는 방향’으로 흐릅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어느 쪽 의지가 중심에 서 있느냐에 따라 질서와 평화, 혹은 혼란과 갈등이 결정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은 단순히 ‘누가 옳으냐’를 판단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의지가 지금 작동하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개인에게도 그대로 돌아옵니다. 왜냐하면 집단의 상태는 결국 개인들의 상태가 모여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외부 세계의 갈등은, 인간 내면의 질서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확대해서 보여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결국 이 설명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오늘날의 세계적 혼란은 단지 정치적, 경제적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 의지의 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욕망이 중심에 있을 때는 필연적으로 충돌이 생기고, 사랑이 중심에 있을 때만 질서가 회복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사랑이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말합니다.

 

 

 

AC.105, 창2:9, ‘생명나무 : 인간 의지의 중심에 계신 주님의 자비’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5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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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9)

 

AC.105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입니다. ‘동산 가운데에(in the midst of the garden)는 속 사람의 의지 안입니다. 의지는 말씀에서 마음(heart)이라 하는 건데, 사람과 천사한테 있는, 주님의 가장 근본적인 소유(the primary possession)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스스로 선을 행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의지 곧 마음은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비록 사람에게 속한 것처럼 서술되지만 말입니다. 욕망(cupidity), 이걸 사람들은 의지라고 하는데, 이게 사람의 것입니다. 이렇게 의지가 동산 가운데(midst of the garden),  생명나무가 있는 곳이고, 사람한테는 의지는 전혀 없고, 대신 욕망만 있으므로,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주님의 자비입니다. 곧 모든 사랑과 신앙, 그리고 그 결과 모든 생명이 나오는 그분한테서 나오는 자비 말입니다. The “tree of lives” is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in the midst of the garden” is in the will of the internal man. The will, which in the Word is called the “heart,” is the primary possession of the Lord with man and angel. But as no one can do good of himself, the will or heart is not man’s, although it is predicated of man; cupidity, which he calls will, is man’s. Since then the will is the “midst of the garden,” where the tree of lives is placed, and man has no will, but mere cupidity, the “tree of lives” is the mercy of the Lord, from whom comes all love and faith, consequently all life.

 

해설

 

이 글은 에덴동산의 중심에 놓인 ‘생명나무’를,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자리’와 정확히 연결시키는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동산 한가운데’를 공간적 중심이 아니라, ‘의지의 중심’으로 읽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이어져 온 구조, 즉 동산은 지성, 나무는 퍼셉션이라는 구조를 한 단계 더 깊이 밀어 넣는 해석입니다.

 

먼저 ‘생명나무’가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의미한다는 점은 이미 AC.102에서 제시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위치입니다. 그것은 동산의 변두리에 있지 않고,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이는 사랑과 사랑의 신앙이 인간 내면에서 부수적인 요소가 아니라, ‘모든 생명의 중심 원리’임을 뜻합니다.

 

이 중심은 곧 속 사람의 의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의지를 ‘마음’이라고 부르며, 이것이 사람과 천사 안에서 주님께 속한 가장 근본적인 소유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전환점에 서게 됩니다. 의지는 인간의 자율적 중심이 아니라, ‘주님께서 거하시는 자리’입니다. 인간은 이 자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자리를 통해 생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스베덴보리는 결정적인 단서를 덧붙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의지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비록 일상 언어에서는 ‘내 의지’, ‘내 마음’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사람에게 속한 것은 참된 의지가 아니라 ‘욕망’입니다. 사람이 의지라고 부르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의 의지가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충동입니다.

 

이 대목은 인간 이해에 있어 매우 정직하고도 급진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도덕적 결단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근원을 분명히 합니다. 인간은 선을 선택할 수 있지만, 선을 ‘생산’할 수는 없습니다. 생산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은, 그 유입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자유뿐입니다.

 

이제 다시 ‘동산 한가운데’로 돌아옵니다. 그 자리는 의지의 자리이며, 그곳에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참된 의지가 없고 다만 욕망만 있다면, 그 나무는 사람의 소유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결론을 이렇게 내립니다. ‘생명나무’는 ‘주님의 자비’를 의미한다고 말입니다.

 

자비는 외부에서 덧붙여지는 감정이 아닙니다. 자비는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생명의 중심을 차지하시는 방식입니다. 사랑과 신앙, 곧 모든 생명은 인간의 노력이나 결단에서 나오지 않고, 주님의 자비에서 흘러옵니다. 생명나무가 동산 한가운데 있다는 것은, 인간 삶의 중심이 언제나 주님의 자비에 있어야 함을 뜻합니다.

 

이 글은 에덴동산 이야기를 도덕적 시험담에서 완전히 벗겨 냅니다. 문제는 인간이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중심에 두느냐’입니다. 중심에 주님의 자비가 있을 때, 사랑과 신앙은 살아 있고, 지성은 에덴의 동산이 됩니다. 중심이 인간 자신의 욕망으로 바뀌는 순간, 질서는 무너집니다.

 

AC.105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게 생명의 중심은 주어지는 것이지 소유되는 것이 아니며,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 곧 ‘생명나무’라고 말입니다.  

 

 

심화

 

1. ‘욕망(cupidity), 이걸 사람들은 의지라고 하는데’

 

위 본문에 ‘의지는 말씀에서 ‘마음’(heart)이라 하는 건데, 사람과 천사한테 있는, 주님의 가장 근본적인 소유(the primary possession)입니다... 욕망(cupidity), 이걸 사람들은 의지라고 하는데, 이게 사람의 것입니다.’라는 내용 말인데요, 이 내용으로 오늘날 전 세계 혼란, 미-중 대립, 러-우 및 미-이란 전쟁, 그리고 여러 나라 구석구석 좌-우 대립 등을 설명해 줄 수 있나요?

 

 

충분히 설명은 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짚고 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 모든 복잡한 국제 정세를 단 하나의 원인으로 환원해 버리는 것은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다만 AC.105의 ‘의지’,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의지(사랑)’와 ‘사람에게서 나오는 욕망(cupidity)’의 구분은 이런 혼란을 바라보는 ‘근본 틀’을 제공해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가장 깊은 중심은 ‘의지’입니다. 그런데 이 의지는 두 가지로 갈립니다. 하나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의지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로부터 나오는 욕망의 의지입니다. 문제는 타락 이후 인간은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하고, 자기 욕망을 마치 ‘자기 생각’이나 ‘정당한 신념’처럼 느낀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 차원에서는 ‘내가 옳다’는 확신이, 집단 차원에서는 ‘우리 편이 옳다’는 확신으로 확장됩니다. 여기서 이미 갈등의 씨앗이 만들어집니다.

 

이 구조를 국가와 국제 관계로 확장하면, 매우 유사한 패턴이 보입니다. 국가도 일종의 ‘집단적 인간’처럼 움직입니다. 각 국가는 자국의 안전, 번영, 영향력 확대를 추구하는데, 이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그 동기가 ‘사랑에서 나온 질서’가 아니라 ‘욕망에서 나온 자기 중심성’일 때입니다. 그때 국가는 상대를 협력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과 위협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관계는 ‘상호 이해’가 아니라 ‘힘의 균형’으로 운영됩니다.

 

예를 들어, 미국-중국 갈등 같은 경우를 보면, 겉으로는 경제, 기술, 안보 문제이지만, 그 깊은 층에서는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의지’가 작동합니다. 이 의지는 반드시 악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자기 보존과 우월성에 대한 욕망이 중심이 될 때, 상대를 인정하기보다 견제하고 압박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이때 서로는 자신을 ‘정당한 쪽’으로 느끼기 때문에 갈등은 더 복잡해집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이란-미국 긴장 역시 비슷한 틀로 볼 수 있습니다. 각자 나름의 역사적, 안보적, 정치적 이유를 갖고 있지만, 그 모든 판단의 밑바닥에는 ‘두려움과 욕망이 결합된 의지’가 작동합니다. 두려움은 자기 보호를 강화시키고, 욕망은 영향력을 확대하려 합니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되면, 상대는 점점 더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기 쉽습니다.

 

국가 내부의 좌-우 대립도 같은 구조입니다. 이념 자체보다 더 깊은 곳에서는, 각 집단이 ‘자신이 옳다’는 확신 속에서 상대를 이해하려 하기보다 배제하려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양쪽 모두 스스로를 ‘정의롭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한 ‘자기에게서 나오는 의지(욕망)’의 특징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이 모든 것을 AC.105의 언어로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의지는 ‘사랑에서 나와 타자를 살리는 방향’으로 흐릅니다. 반면 사람에게서 나오는 욕망은 ‘자기 중심에서 나와 상대를 도구화하거나 배제하는 방향’으로 흐릅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어느 쪽 의지가 중심에 서 있느냐에 따라 질서와 평화, 혹은 혼란과 갈등이 결정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은 단순히 ‘누가 옳으냐’를 판단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의지가 지금 작동하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개인에게도 그대로 돌아옵니다. 왜냐하면 집단의 상태는 결국 개인들의 상태가 모여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외부 세계의 갈등은, 인간 내면의 질서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확대해서 보여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결국 이 설명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오늘날의 세계적 혼란은 단지 정치적, 경제적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 의지의 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욕망이 중심에 있을 때는 필연적으로 충돌이 생기고, 사랑이 중심에 있을 때만 질서가 회복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사랑이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말합니다.

 

 

2. ‘아르카나를 알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구약 각 선지자들도, 그리고 이천년 전 주님도, 이후 오늘날까지 수많은 성인, 심지어 스베덴보리 역시 그들이 지상에 머물던 시기, 시절마다 거의 동일한 역사요, 패턴이었는데요, 한편으론 ‘부조리한 세상’이라고도 하는, 이런 삶을 이 아르카나를 알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질문을 조금 냉정하게 바로잡고 시작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이 세상이 ‘언젠가는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중심에 두고 살아가면, 반드시 실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말씀 전체, 곧 선지자들, 성경,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더 나아가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증언까지, 이 모두가 한결같이 보여주는 것은, ‘세상 자체는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반복되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구조입니다. 인간의 의지가 자기 중심에 머무는 한, 시대가 바뀌어도 패턴은 그대로 반복됩니다.

 

그래서 아르카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의 방향은 ‘세상을 바로잡는 삶’이 아니라, ‘질서를 회복하는 삶’입니다. 여기서 질서는 외부 구조가 아니라, 내 안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욕망과 거짓이 뒤섞여 돌아가더라도, 한 사람 안에서만큼은 주님으로부터 사랑에서 신앙으로, 신앙에서 지성으로 흐르는 질서가 세워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동방의 에덴동산’이며, 사람이 이 땅에 살면서 동시에 천국에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때 삶의 태도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됩니다. 첫째, ‘분별하되 휩쓸리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뉴스, 전쟁, 이념 대립을 볼 때, 그것을 단순히 옳고 그름의 싸움으로만 보지 않고, ‘의지가 어디서 나오고 있는가’를 보는 눈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노나 절망에 휩쓸리기보다, 인간 상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둘째, ‘자기 안에서 질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외부의 혼란이 클수록, 사람은 쉽게 자기 정당화나 공격성으로 기울어집니다. 그러나 아르카나의 길은 반대입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을 섬기도록, 곧 사랑이 이해를 이끌도록, 매 순간 방향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실제적인 영적 싸움입니다. 셋째, ‘체어리티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행동이 아니라, 눈앞의 사람과 상황에서 선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천적 상태는 거창한 업적이 아니라, 평화에서 나온 작은 행위들의 연속으로 드러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부조리함에 대한 감각 자체가 이미 깨어 있음의 표시’라는 것입니다. 아무 감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이것이 부조리하다고 느낀다면, 이미 그 안에는 더 높은 질서에 대한 빛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 빛을 외부를 향한 판단으로만 쓰지 않고,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로 돌리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때 비로소 그 감각은 절망이 아니라 방향이 됩니다.

 

결국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실제적인 답은 이것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든, 한 사람 안에서 ‘안식의 질서’를 이루는 것, 그리고 그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같은 시대를 살지만, 내적으로는 다른 질서 안에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들이 살았던 방식이고, 주님이 보여주신 길이며, 스베덴보리가 끝까지 붙들었던 삶의 태도입니다.

 

 

 

AC.104, 창2:9, '퍼셉션과 양심 : 잃어버린 생명의 감각'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4 오늘날에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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