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강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상당히 강한 긴장 속에서 진행됩니다. 정동수 목사는 이동원 목사의 지구촌교회 창립기념 설교를 계기로, 떼제 공동체와 관상기도, 가톨릭과 개신교의 일치, 에큐메니즘, 유진 피터슨과 레노바레 운동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 비판합니다. 그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단순히 ‘기도 방법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에게 이것은 결국 ‘다른 복음’의 문제이며, 교회가 성경에서 떠나 종교통합과 신비주의로 이동하는 ‘배도’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의 ‘다른 복음’, 고린도후서 11장의 ‘다른 예수, 다른 , 다른 복음’, 요한이서의 ‘그리스도의 교리’를 가져와 자신의 비판을 뒷받침합니다.

 

이처럼 정동수 목사의 문제의식 자체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사랑’, ‘화해’, ‘포용’, ‘넓은 마음’이라는 아름다운 말 아래서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를 더 이상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 문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모든 종교적 차이를 지워 버리고 ‘무엇을 믿든 착하게만 살면 된다’는 식의 무차별주의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에게 선과 진리는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선만 있고 진리가 없어도 안 되고, 진리만 있고 선이 없어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번 강의가 제기하는 ‘넓은 마음이라는 이름으로 진리의 경계까지 없애도 되는가?’라는 질문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반드시 진지하게 받아야 할 질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정동수 목사와 스베덴보리의 길은 크게 갈라집니다. 정동수 목사는 ‘진리의 경계’를 거의 교리적 소속과 정통성의 경계로 설정합니다.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와 개신교가 함께 예배하는 것을 종교통합으로 보고, 그것을 사실상 ‘다른 복음’과 연결합니다. 더 나아가 강의 마지막에는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의 교리를 그대로 믿으면 구원이 없다고 단정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진리의 경계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경계는 사람이 어느 교단 명부에 속해 있는가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번 강의를 읽는 데 가장 중요한 차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세계에 관한 방대한 기록에서 사람을 ‘가톨릭’, ‘개신교’, ‘유대교’, ‘이방인’이라는 지상의 명칭만으로 나누어 구원을 판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각 종교 안에는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있으며, 특히 종교를 이용하여 사람의 양심을 지배하거나 자신에게 신적 권위를 돌리는 것은 매우 심각하게 비판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어떤 교회적 환경에서 태어났고 어떤 교리를 배웠다는 사실과,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어떻게 살았는가는 구별합니다. 그의 저서,‘천국과 지옥’에서 반복되는 중요한 원리도 결국 사람이 사후에 자기의 지배적 사랑에 따라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단순히 지상에서 가입했던 교파의 연장선이 아닙니다.

 

따라서 정동수 목사의 ‘가톨릭 신자는 교리를 그대로 믿으면 구원이 없다’는 식의 결론은 스베덴보리의 구원 이해와 상당히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라면 먼저 그 사람이 알고 있는 진리가 무엇인지, 그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았는지,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보아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는 사람을 선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교리는 구원의 목적이 아니라 삶을 인도하는 수단입니다. 교리적으로 많은 것을 정확히 알고 있으면서 자기애와 세상 사랑 속에서 사는 사람보다, 제한된 진리밖에 모르면서도 자신이 아는 진리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이 주님께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이 점을 먼저 세워 놓고 이동원 목사의 ‘하나님의 넓은 마음’이라는 표현을 보아야 합니다. 이 표현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상당히 아름다운 진실이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인간이 만든 교파의 울타리보다 훨씬 큽니다. 주님은 개신교라는 명칭 아래 있는 사람만 돌보시는 분이 아니며,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 합니다. 심지어 참된 종교에 관하여 거의 아무것도 알 기회가 없었던 사람에게도 그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선과 진리를 공급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의 교파적 마음보다 넓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스베덴보리에게 낯선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한 문장이 뒤따라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이 넓다는 것과 주님께서 진리와 거짓을 구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사랑은 진리를 폐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적 사랑은 신적 지혜와 영원히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리를 동일하게 참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넓은 마음’은 아닙니다. 가톨릭과 개신교와 동방정교회 사이에 실제 교리적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정직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교황권, 성인에 대한 기도, 성찬 이해, 칭의, 교회론 등에 실제 차이가 있는데 ‘우리는 똑같으니 아무 차이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화해라기보다 진리 문제의 회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떼제 공동체에서 서로 다른 전통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기도한다는 사실 자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이 문제에서도 양극단을 피해야 합니다. ‘함께 기도했으니 모든 교리가 참이라고 인정한 것이다’라고 단정할 수도 없고, 반대로 ‘함께 기도했으니 아무 문제도 없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임이 실제로 무엇을 고백하고 무엇을 지향하며, 참여자가 그 가운데서 무엇을 받아들이느냐입니다. 정동수 목사는 떼제를 ‘가짜들끼리 같이 모이는’ 곳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이렇게 집단적으로 판정하는 데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외적 형식만 보고 그곳에 모인 수많은 사람의 영적 상태를 우리가 알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강의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예레미야 24장의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입니다. 정동수 목사는 이동원 목사가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넓은 마음’을 끌어낸 것을 ‘설교 왜곡’이라고 비판합니다.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바벨론으로 보내신 목적이 ‘넓은 마음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자가 먼저 하고 싶은 말을 정해 놓은 다음 성경 본문을 그것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설교 왜곡’이라고 정의합니다. 이 지적은 상당히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 역시 본문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여기서 우리 자신에게도 똑같은 경고를 적용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라고 해서 어느 본문에든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집어넣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문자의 뜻을 정직하게 읽어야 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역사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본문의 직접적인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 뒤에야 말씀의 속뜻을 살펴야 합니다. 속뜻은 문자적 의미를 무시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자 안에 주님께서 넣어 두신 더 깊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24장에서 좋은 무화과는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들을, 나쁜 무화과는 남아 있거나 심판 아래 놓인 이들을 가리킵니다. 놀라운 것은 인간의 눈에는 정반대로 보였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포로가 된 사람들이 실패자이고 예루살렘에 남은 사람들이 살아남은 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포로로 끌려간 이들을 오히려 ‘좋은 무화과’라고 하십니다.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징계를 통하여 보존하시고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만으로도 매우 깊은 영적 원리가 보입니다. 인간이 불행이라고 판단하는 사건이 반드시 영적 파멸은 아니며, 인간이 안전이라고 생각하는 상태가 반드시 영적 안전도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서 ‘무화과’라는 표상은 스베덴보리의 성경 해석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말씀에서 무화과는 대체로 자연적 선, 곧 사람의 외적·자연적 삶에서 나타나는 선과 관련됩니다. 포도나무가 보다 영적인 선과 연결되고 올리브가 보다 천적인 선과 연결되는 것과 비교하면, 무화과는 인간의 자연적인 차원에서 나타나는 선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의 대비는 단순히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라는 도덕적 구분보다 더 깊게, 사람의 자연적 삶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선하게 형성되었는가 아니면 부패했는가 하는 문제까지 열어 줍니다.

 

그렇게 보면 바벨론 포로라는 사건도 색다르게 보입니다. 포로 생활 자체가 선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유다의 오랜 우상숭배와 불순종으로 인한 심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심판 가운데서도 리메인스를 보존하십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가운데 다시 교회를 일으킬 수 있는 남은 것을 지키십니다. ‘좋은 무화과’는 바로 그런 보존과 회복의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악을 선이라고 부르지 않으면서도 그 악의 결과 가운데서 선을 끌어내십니다.

 

이 점에서는 이동원 목사가 고난을 통하여 더 넓은 시야를 배우는다는 방향으로 적용한 것이 본문의 문자에 직접 쓰여 있지는 않더라도, ‘고난을 통한 변화’라는 적용 자체를 곧바로 성경 왜곡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조금 더 살펴볼 여지가 있습니다. 설교에는 본문 해석과 오늘의 적용이라는 두 단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적용은 본문의 문장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적용이 본문의 중심 흐름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가, 아니면 본문을 발판으로 전혀 다른 주장을 하는가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이동원 목사의 실제 설교 전체 문맥을 놓고 따져야 공정합니다. 이번 원고가 제시한 비판자의 설명만으로 그의 설교 전체를 최종 판정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오히려 정동수 목사 자신에게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본문에 없는 것을 가져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설교 왜곡’이라고 매우 좋은 원칙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후 예레미야에서 ‘하늘의 여왕’을 가져와 현대 가톨릭의 마리아 칭호와 직접 연결하고, 따라서 예레미야를 설교한다면 가톨릭의 마리아 숭배와 종교통합을 버리라고 설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동일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당시 말한 ‘하늘의 여왕’과 후대 가톨릭에서 마리아에게 사용된 ‘하늘의 여왕’이라는 칭호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두 대상을 곧바로 동일시할 수 있는가? 이것 역시 본문 밖의 역사적·신학적 연결을 사용한 ‘적용’입니다.

 

이것은 정동수 목사의 결론이 반드시 틀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해석의 일관성입니다. 이동원 목사가 본문에서 현대 교회의 화해를 적용하는 것은 ‘본문에 없는 것을 넣은 ’이라 비판하면서, 자신은 같은 예레미야에서 현대 가톨릭의 마리아론을 끌어오는 것이 자동적으로 허용된다면 해석 기준이 비대칭적이 됩니다. 설교자를 분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해석 원칙을 자기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하는지 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매우 유익한 제3의 길을 제공합니다. 역사적 문맥은 역사적 문맥대로 존중하면서, 그 안에 있는 영적 의미는 인간의 자의적인 연상으로 찾지 않고 말씀 전체의 상응을 통해 살펴보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하늘의 여왕’을 단순히 2천여 년 뒤 특정 교단의 명칭으로 바로 점프시키는 것보다, 우상숭배가 인간 내면에서 무엇인지 먼저 묻는 것입니다. 사람이 주님에게 속해야 할 사랑과 경배를 자기 자신이나 세상의 어떤 대상에게 돌릴 때 무엇이 일어나는가? 이것이 모든 시대의 사람에게 적용되는 속뜻의 질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강의에서 계속 등장하는 ‘배도’ 역시 단순히 교단 이동이나 에큐메니즘 참여보다 훨씬 깊은 문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가장 심각한 배도는 입으로 주님을 고백하면서 삶에서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교리가 아무리 정통이어도 체어리티가 죽어 있으면 신앙도 살아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천국의 비밀’에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 반복해서 나타나는 원리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하기 시작하면 결국 아벨, 곧 체어리티를 죽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복음’을 경계하는 사람은 동시에 ‘나는 올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확신 때문에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있지는 않은가?’도 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이번 강의의 언어를 돌아보게 합니다. ‘가짜 목사’, ‘쓰레기’, ‘마귀가 만든 ’, ‘가짜들끼리 모인다’, ‘침례교의 침자도 모르는 사람’ 같은 표현이 반복됩니다. 교리적 오류를 강하게 비판하는 것과 사람을 멸시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진리를 위한 열심도 그 안의 정서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선에서 나오는 열심은 진리를 보호하면서도 사람의 구원을 원합니다. 자기애에서 나오는 열심은 진리를 방패 삼아 상대를 공격하고 이기는 데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둘 다 매우 강한 말을 할 수 있지만 속의 불은 서로 다릅니다.

 

그렇다고 ‘사랑해야 하므로 오류를 지적하지 말자’는 뜻도 아닙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체어리티는 무조건 상대의 말을 인정하는 온순함이 아닙니다. 악을 악이라고 하고 거짓을 거짓이라고 하는 것도 이웃 사랑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어떤 가르침이 사람을 영적으로 해친다면 그것을 밝히는 것이 오히려 체어리티일 수 있습니다. 다만 목적이 중요합니다. ‘ 사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거짓에서 벗어나 선과 진리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서’여야 합니다. 이것이 논쟁에서 가장 어려운 지점입니다.

 

이제 관상기도 문제를 보겠습니다. 강사는 관상기도, 침묵기도, 향심기도, 호흡기도 등을 거의 하나의 범주로 묶고, 불교·힌두교의 명상 및 만트라와 연결합니다. 반복적인 말을 계속하면 이성적 사고가 정지되고 의식을 잃게 되며, 수동적인 상태가 되어 외부 영적 존재에게 열리고 결국 ‘마귀가 들어온다’고 설명합니다. 촛불을 바라보거나 호흡을 조절하는 것 역시 같은 위험의 통로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는 매우 세심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영계와 실제로 연결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혼자 생각하고 느끼는 독립된 섬이 아니라 영들과 천사들을 통해 영계와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 영향’이라는 개념 자체를 스베덴보리에게 낯선 것으로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부분만 보면 강사의 경계심이 스베덴보리와 접점을 갖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평상시에도 영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정 기도법을 사용해야 비로소 영이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섭리 아래 인간이 자유와 이성 안에서 보존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촛불을 켰다는 사실, 몇 분 침묵했다는 사실, 짧은 기도문을 반복했다는 사실만으로 ‘마귀가 들어오는 통로가 열렸다’고 단정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와도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정말 중요한 경계선은 ‘자유와 이성을 훼손하는가’입니다. 사람을 무비판적 수동성으로 몰아가고, 자신의 이성을 내려놓게 하고, 어떤 내적 음성이나 느낌을 곧바로 하나님의 직접 계시라고 믿게 만드는 수행이라면 분명 위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파괴하여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선택하여 그것을 삶으로 행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이 점에서는 강사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데 중요한 진실이 있습니다.

 

하지만 ‘침묵’ 자체는 악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고 잠시 침묵하면서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 역시 그 자체로 비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그 침묵 속에서 무엇을 하는가입니다. 자기 생각을 완전히 제거하여 무의식 상태로 들어가려 하는 것과, 방금 읽은 말씀을 주님 앞에서 조용히 되새기며 자신을 살피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외형은 둘 다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일 수 있지만 내적 활동은 정반대일 수 있습니다.

 

반복기도도 같은 구별이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헛된 반복’을 경계하신 것은 분명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반복이 곧 ‘헛된 반복’은 아닙니다. 같은 시편을 반복해서 읽는 것,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진심으로 여러 번 기도하는 것, 찬송의 후렴을 반복하는 것을 그 자체만으로 힌두교 만트라와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핵심은 말의 횟수보다 그 말 안에 있는 의도와 의식입니다. 의미를 제거하고 의식을 변형시키기 위한 기계적 반복과, 마음을 주님께 돌리며 의미를 더욱 깊이 새기는 반복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의도’와 ‘목적’에 관한 가르침으로 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같은 외적 행위라도 목적이 다르면 영적으로 전혀 다른 행위가 됩니다. 한 사람은 침묵 속에서 자기 안의 신성을 발견하려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침묵 속에서 주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낮출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반복을 통해 의식을 지우려 하고, 다른 사람은 같은 말씀을 반복하며 그 의미를 마음에 새길 수 있습니다. 외적 형식만으로 내적 상태를 판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떼제 찬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악의 구조가 단순하고 짧은 문장을 반복한다고 해서 그 구조 자체가 곧 악령을 불러들이는 장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음악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영적으로 선한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 찬양이 사람의 애정을 어디로 이끄는가? 주님을 향한 겸손과 사랑으로 이끄는가, 아니면 자기 감정의 황홀경 자체를 사랑하게 하는가? 그리고 정서가 이후의 삶에서 체어리티로 이어지는가?

 

이 기준은 통성기도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조용한 기도만 위험하고 큰소리 기도는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큰소리로 열정적으로 기도하면서도 자기 감정에 도취될 수 있고, 조용히 침묵하면서도 깊은 회개 가운데 주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외적인 기도 형식보다 그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이 본질입니다.

 

강의에서 ‘설교 없는 예배’에 대한 비판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로마서 10장의 ‘신앙은 들음에서 난다’를 근거로 말씀 선포가 반드시 있어야 하며, 성경을 읽고 5~10분 침묵하는 것을 ‘설교’라고 부르는 것은 성경적 설교관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문제에서도 말씀을 가르치는 직무의 중요성은 충분히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워야 하고,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감정적 체험만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말씀 자체는 인간 설교자의 설명보다 더 근원적인 거룩함을 지닙니다. 설교자는 말씀의 주인이 아니라 봉사자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봉독한 뒤 잠시 조용히 그 말씀을 생각하는 시간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말씀 선포를 폐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설교가 있느냐 없느냐보다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도록 인도받고 있는가’입니다. 훌륭한 설교도 사람을 자기 숭배로 이끌 수 있고, 짧은 말씀 봉독 하나가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대목은 역설적으로 이번 강의 자체에도 적용됩니다. 강사는 성도들에게 ‘유명한 목사가 말한다고 무조건 아멘하지 말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원칙은 이동원 목사에게만 적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강의를 하는 강사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해야 합니다. ‘이동원 목사가 유명하다고 믿지 말라’가 옳다면 ‘이동원 목사를 비판하는 유명한 목사가 말한다고 그대로 믿지도 말라’ 역시 옳습니다. 모든 주장을 말씀과 사실과 이성 앞에서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이번 강의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분별의 원칙입니다. ‘누가 말했는가?’보다 ‘무엇을 말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말했는가?’보다 ‘ 말이 참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생각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말씀 전체를 어떻게 연결하고 주님과 천국과 인간의 거듭남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유진 피터슨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이러한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강사는 유진 피터슨을 ‘신비주의자’, ‘이단’이라고 규정하고 ‘메시지’를 ‘쓰레기’라고까지 표현합니다. 여기서는 한 사람의 저작과 신학 전체를 특정 연관관계 몇 가지로 한꺼번에 판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저자의 특정 주장에 문제가 있다면 그 주장을 구체적으로 살피면 됩니다. 리처드 포스터나 댈러스 윌라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 사람과 관계가 있으므로 사람도 잘못되었다’는 연쇄적인 방식보다 각각의 가르침을 실제 내용에 따라 검토하는 편이 더 공정합니다.

 

특히 ‘누구 이름이 나오면 가지 말라’는 방식의 분별은 성도들에게 단기적으로는 편리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분별력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이름 목록만 외우면 되기 때문입니다. 참된 분별은 ‘ 사람은 금지된 사람인가?’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 가르침은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존중하는가, 주님께로 향하게 하는가, 말씀의 진리와 조화를 이루는가, 체어리티의 삶으로 열매 맺게 하는가’를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번 강의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인 가톨릭과 구원의 문제로 돌아가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로마 가톨릭의 교황권과 성인 숭배, 인간에게 신적 권위를 돌리는 문제를 결코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밝히기’에서 바벨론에 관한 해설을 읽어 보면 그 비판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종교를 이용하여 사람의 영혼과 천국에 대한 권세를 자기에게 돌리는 사랑을 심각한 악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는 포용적이니까 가톨릭 교리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보았다’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큰 오해입니다.

 

그러나 그 비판은 ‘가톨릭 신자는 모두 지옥 간다’는 결론과 전혀 같지 않습니다. 교리 체계의 오류를 비판하는 것과 그 안에 태어나 살아온 개개인의 영원한 운명을 판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놀라울 정도로 섬세한 부분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알지 못했던 진리에 대해 같은 방식으로 책임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각 사람이 받은 빛과 기회 안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십니다.

 

이것은 동방정교회뿐 아니라 불교, 이슬람교 등 기독교 밖의 사람들을 바라볼 때도 적용됩니다. ‘천국과 지옥’에서 스베덴보리는 교회 밖의 민족들, 곧 이방인들의 구원 가능성을 분명히 다룹니다. 그들이 기독교인이 아니었다는 이유만으로 정죄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종교 안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선한 삶을 살며 양심에 따라 행동했다면 사후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번 강의 마지막의 ‘구원은 기독교 안에만 있다’는 문장은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중요한 수정이 필요합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도 단호합니다. 그러나 ‘오직 주님을 통해 구원받는다’와 ‘지상에서 특정한 기독교 교리 체계에 소속된 사람만 구원받는다’는 같은 문장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 기회를 얻지 못했더라도 그가 받아들인 선과 진리의 근원은 궁극적으로 주님입니다. 그리고 사후에 그 근원이 누구인지를 배우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구원론은 놀랍도록 넓으면서 동시에 철저하게 주님 중심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넓은 마음’이라는 이번 논쟁의 표현이 다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은 정말 넓습니다. 그러나 ‘아무거나 괜찮다’는 의미에서 넓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선과 진리 안으로 인도하시려 하기 때문에 넓습니다. 불교인도, 무슬림도, 가톨릭 신자도, 개신교 신자도 사랑하시지만 그들 안에 있는 모든 거짓을 사랑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사랑하시되 거짓에서는 건져 내시고, 선을 보존하시며, 더 온전한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에큐메니즘과 잘못된 종교통합도 구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교리 차이는 아무 의미가 없으니 모두 똑같다’고 하는 것은 진리를 희생한 통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다른 교리를 가지고 있지만 상대를 악마화하지 않고, 함께 대화하면서 무엇이 참인지 찾고, 가능한 선에서는 협력하며, 최종적인 심판은 주님께 맡긴다’는 태도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는 후자와 훨씬 가깝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번 강의의 장점과 한계를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장점은 매우 분명합니다. 교회의 화해와 포용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진리의 문제를 덮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 설교자가 본문을 자기 주장에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 유명한 목사의 말도 성도가 분별해야 한다는 경고, 감정적·신비적 체험이 말씀의 진리를 대신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는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고가 지나치게 확대되면서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침묵을 곧 관상기도로, 관상기도를 곧 동양 종교의 명상으로, 반복 찬양을 곧 만트라로, 만트라적 반복을 곧 의식 상실로, 의식의 이완을 곧 마귀의 침입으로 연결하는 일련의 논증에는 단계마다 별도의 검증이 필요합니다. 또한 떼제에 참여한 사람들을 ‘가짜’로 묶고,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의 사람들에게 구원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분별’에서 ‘심판’으로 넘어갈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보여 주는 영적 세계는 오히려 우리에게 더 큰 경외심과 신중함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겉모습은 볼 수 있지만 그 사람의 내적 사랑 전체를 볼 수 없습니다. 누가 천국에 속했고 누가 지옥에 속했는지는 주님께서 아십니다. 우리는 교리를 살필 수 있고 행동의 선악을 판단할 수 있으며 위험한 가르침을 경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 자체를 최종적으로 판결하는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사용하는 우리 자신에게도 매우 중요한 경고입니다. 스베덴보리를 읽다 보면 기존 기독교의 여러 교리가 얼마나 다르게 보이는지 경험하게 됩니다. 삼위일체, 믿음만의 구원, 속죄, 부활, 천국과 지옥, 최후의 심판, 말씀의 속뜻 등 거의 모든 핵심 주제가 새롭게 보입니다. 바로 그때 가장 조심해야 할 유혹이 ‘나는 이제 알았고 저들은 모른다’는 우월감입니다. 그것이 들어오는 순간 진리를 많이 아는 것이 오히려 proprium의 먹이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보여 주시는 목적은 다른 사람을 정죄할 자격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먼저 우리 자신을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은 ‘ 사람이 틀렸는가?’가 아니라 ‘ 말씀이 안에서 무엇을 드러내는가?’입니다. 예레미야 24장의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도 결국 내 안의 문제입니다. 내 자연적 삶 안에서 주님께 순종하는 선은 무엇이며, 이미 부패하여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내가 붙들고 있는 예루살렘은 정말 주님의 도성인가, 아니면 내가 안전하다고 착각하는 proprium의 성인가? 때로는 내가 실패라고 생각하는 ‘바벨론 포로’ 같은 경험을 통해 주님께서 오히려 내 안의 리메인스를 보존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읽기 시작하면 ‘좋은 무화과 광주의 소망’이라는 본문은 특정 목사의 에큐메니즘을 공격하기 위한 무기가 되기 전에 우리 자신의 거듭남을 비추는 말씀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을 열어 보이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말씀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판정하는 책이기 전에 나를 심판하고 고치고 거듭나게 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결국 이번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보며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넓은 마음이냐, 진리 수호냐’라는 양자택일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는 사랑과 진리가 결코 싸우지 않습니다. 신적 사랑은 신적 지혜와 하나이며, 선은 진리와 결혼해야 합니다. 진리를 버린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니고, 사랑을 잃은 진리는 살아 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리적 차이를 분명하게 말하면서도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잘못된 영성을 경계하면서도 침묵과 묵상 자체를 악마화하지 않아야 합니다. 가톨릭의 교리적 문제를 비판하면서도 가톨릭 신자의 영혼을 우리가 대신 심판하지 않아야 합니다. 에큐메니즘의 위험을 살피면서도 다른 전통의 그리스도인을 만나는 것 자체를 배도로 규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목사의 설교를 분별하라고 가르치면서 그 목사를 비판하는 또 다른 유명한 목사의 말 역시 똑같은 기준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넓은 마음’이라는 말을 가장 안전하게 이해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그 넓음은 진리를 희석시키는 넓음이 아니라, 진리를 가지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사랑의 넓음입니다. 주님은 거짓을 참이라고 부르실 만큼 넓으신 분이 아니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까지 버리지 않고 참으로 이끄실 만큼 넓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분별도 바로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붙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리에는 경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비에는 우리가 함부로 그을 있는 경계가 없습니다.’ 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잃으면 한쪽에서는 무차별적인 종교혼합으로 흐르고, 다른 한쪽에서는 교리적 정죄와 영적 우월감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한 시간의 강의를 다 듣고 난 뒤 우리에게 남아야 할 질문은 ‘이동원 목사는 배도한 목사인가?’ 하나만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어야 합니다. ‘나는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거짓을 경계하는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오류를 찾고 있는가?’ 그리고 또 하나, ‘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진리의 차이를 흐리고 있는가, 아니면 진리를 사랑하면서도 진리가 궁극적으로 사람을 살리기 위한 주님의 것임을 기억하고 있는가?

 

이 두 질문 사이에서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이 하나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넓지만 흐리지 않고, 분명하지만 정죄하지 않는’ 분별에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이번 논쟁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보면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붙들고 싶은 지점입니다.

 

 

 

SY.71, 정동수 목사, ‘클로드, 챗GPT, 제미나이로 성경 공부 바르게 하기, 잘못된 목사, 교리, 설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특강은 인공지능 시대에 성경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정동수 목사의 출발점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과거에는 성경을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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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설교는 마태복음 21장의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사건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 성전의 외형적 종교성과 어린아이 같은 신앙, 하나님과의 친밀함, 그리고 기도에 대한 신뢰로 나아갑니다. 설교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문장은 사실 매우 단순합니다. ‘하나님 자신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사랑하지 말라.’ 박요한 목사는 어린아이에게 ‘엄마가 전부’인 것처럼 신앙인에게도 하나님이 전부가 되어야 한다고 반복합니다. 이 중심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상당히 깊은 지점을 건드립니다. 다만 설교 후반부의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면 반드시 받는다’는 적용으로 갈수록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중요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먼저 박요한 목사가 무화과나무 사건을 문자 그대로만 읽지 않고 ‘표면성 이면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말한 대목은 매우 주목할 만합니다. 박요한 목사는 예수께서 배가 고프셔서 열매를 찾으셨는데 열매가 없자 화가 나서 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으로만 읽으면 이해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그래서 무성한 잎은 있으나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당시 예루살렘 종교의 상태와 연결합니다. 성전과 제사와 제사장과 종교적 형식은 화려하지만 정작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라는 ‘열매’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는 방식과 상당히 가까이 다가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 속의 나무와 잎과 열매는 단순한 자연물이 아닙니다. 특히 ‘열매’는 사람이 알고 믿는 것을 실제 선한 삶으로 가져가는 것, 곧 선과 체어리티의 실제적인 산출과 깊이 연결됩니다.

 

따라서 이 설교의 ‘잎은 무성한데 열매가 없다’는 진단은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잎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교리도 필요하고, 말씀에 관한 지식도 필요하며, 예배의 형식도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열매를 위한 ’이 아니라 그 자체로 종교의 목적이 될 때입니다. 사람이 말씀을 많이 알고, 신앙에 관한 말을 많이 하고, 예배와 기도와 찬양에 열심이어도 그것이 삶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살며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영적으로는 잎만 무성한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무화과나무 사건을 오늘의 교회에 적용한다면 ‘예배를 화려하게 하지 말자’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와 찬양과 설교와 기도가 실제 삶에서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입니다.

 

이 지점에서 박요한 목사가 대형 연합집회, 수많은 직함, 화려한 찬양대와 찬양 형식을 비판하는 문제도 조금 조심스럽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박요한 목사가 무엇을 염려하는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의 명예와 직함과 외형이 앞서는 종교는 분명 위험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화려함’ 자체와 ‘’을 동일시하기 어렵습니다. 소박한 예배라고 해서 자동으로 내적 예배가 되는 것도 아니고, 장엄하고 아름다운 예배라고 해서 자동으로 외적 예배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핵심은 그 외적 형식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입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찬양대를 없애야 한국 교회가 산다’는 식의 결론보다는 ‘찬양대가 있든 없든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내적 예배를 담고 있는가’를 묻는 편이 더 본질적입니다.

 

설교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 가운데 하나는 어린아이에 관한 해설입니다. 박요한 목사는 어린아이도 장난감과 좋은 것을 좋아하지만 엄마가 보이지 않는 순간 그것들을 내려놓고 엄마를 찾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영적 통찰이 있습니다. 문제는 세상의 좋은 것을 누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재산과 직업과 가정과 건강과 성취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주님과 그것들 가운데 어느 것이 목적이고 어느 것이 수단인가’입니다. 어린아이 비유를 이 관점에서 읽으면, 장난감을 가지고 즐겁게 노는 것은 괜찮지만 ‘엄마보다 장난감이 중요해지는 순간’ 질서가 뒤집힙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은 주님에게서 받아 선하게 사용하는 동안에는 축복이지만, 그것이 주님을 대신하여 삶의 궁극적 목적이 되면 우상이 됩니다.

 

이것은 설교 중 출애굽기 33장의 모세와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은 주시겠지만 친히 함께 올라가지는 않겠다고 하시자 모세가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라고 대답합니다. 박요한 목사는 이것을 ‘가나안보다 하나님을 원하는 신앙’으로 읽습니다. 바로 이 대목이 이번 설교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영적 중심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가나안’보다 ‘하나님 자신’을 원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조금 더 깊이 표현한다면, 천국조차 주님과 분리된 독립적인 보상이 아닙니다. 천국의 본질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 그 안에서 사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없이 천국만 얻겠다’는 것은 영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말입니다.

 

어린아이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이해를 더하면 이 설교는 더욱 깊어집니다. 어린아이가 천국적인 것은 단순히 지적으로 미숙하기 때문도 아니고, 부모에게 무엇이든 달라고 조르기 때문도 아닙니다. 어린아이에게 나타나는 순진무구함의 핵심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지 않는 상태’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개념인 proprium과 정반대 방향입니다. ‘내가 안다’, ‘내가 있다’, ‘ 힘으로 산다’는 자기중심적 독립성이 아니라 자신에게 생명과 선이 공급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어린아이 같은 신앙’은 지성을 포기하는 신앙도,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신앙도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자신에게서 선할 없으며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깊은 인정에 가깝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박요한 목사가 ‘어린아이는 어머니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받는다’고 한 것은 매우 좋은 비유입니다. 다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에게서 ‘모든 것을 공급받는다’는 말의 가장 깊은 뜻은 반드시 돈과 성공과 건강과 소원의 성취를 공급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가장 근원적으로는 생명, 선을 사랑할 능력, 진리를 볼 빛, 악과 싸울 힘, 그리고 거듭남에 필요한 모든 것을 순간순간 주님에게서 받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연적인 생명뿐 아니라 영적인 생명에서도 스스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마음으로 인정하는 것이 어린아이의 상태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설교 후반부의 기도론은 이 렌즈에서 한 번 더 정교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박요한 목사는 자신의 경제적 어려움과 오랜 기도 끝에 유튜브가 크게 성장한 경험을 들려주면서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 ‘무엇이든지 믿고 구한 것은 받는다’고 강조합니다. 개인적으로 체험한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하는 고백 자체는 소중합니다. 어려운 시절에도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증언 역시 귀합니다. 그러나 한 개인에게 경제적인 회복과 성공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마태복음 2122절의 보편적 해석 원리로 확장하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믿음으로 오래 기도했는데도 병이 낫지 않은 사람, 사업이 회복되지 않은 사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은 ‘내가 어린아이처럼 믿지 못했기 때문인가?’라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응답은 우리의 욕망을 무제한으로 실현해 주시는 데 있지 않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는 신적 섭리 안에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무엇이든 요구한다고 해서 사랑하는 엄마가 문자 그대로 무엇이든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이가 엄마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엄마는 아이가 원하는 것과 아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구별합니다. 그러므로 박요한 목사가 사용한 ‘엄마만 믿어’라는 표현은 역설적으로 기도 응답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됩니다. 어린아이의 믿음은 ‘엄마에게 조르면 내가 원하는 것은 반드시 얻는다’가 아니라 ‘엄마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엄마에게 나를 맡길 있다’에 더 가깝습니다.

 

이렇게 보면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받으리라’는 말씀도 ‘ 욕망을 강한 확신으로 밀어붙이면 현실이 된다’는 공식이 아닙니다.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의 기도 자체가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주님, 이것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만 점차 ‘주님, 이것이 제게 정말 선한 것이라면 허락하시고 그렇지 않다면 뜻을 고쳐 주십시오’라는 기도로 변합니다. 결국 가장 깊은 기도는 주님의 뜻과 사람의 뜻이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응답의 절정은 ‘ 뜻대로 이루어졌다’가 아니라 ‘ 뜻이 주님의 뜻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에서 ‘성령 충만’을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고 사모하는 상태로 설명한 부분 역시 매우 좋습니다. 방언이나 봉사나 종교적 활동 하나를 성령 충만의 결정적 표지로 삼지 않고 ‘하나님 분이면 만족합니다’라는 방향으로 가져간 것은 이번 설교의 중요한 장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붙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감정적인 친밀감에서 끝나지 않고 결국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기를 기뻐하는 ’으로 나타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계명을 사랑하고, 그 계명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즐거워함’과 ‘이웃에게 선을 행함’은 서로 경쟁하는 두 영성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이 안과 밖으로 나타나는 두 모습입니다.

 

반면 설교 중 몇몇 단정적인 표현은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구별해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교 전체를 ‘예수님이 씨를 말려 버린 이단 종교’라고 규정하는 표현이나, 특정 음악가·연예인들의 약물 문제를 감정적 공연 방식과 직접적인 인과관계로 연결하는 설명, 점이나 타로를 본 사람의 영 안으로 곧바로 악령이 들어와 영혼을 갉아먹는다고 설명하는 방식 등은 설교의 중심 메시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주장들이 아닙니다. 특히 무화과나무의 심판을 역사적 유대인 전체에 대한 주님의 저주로 확대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특정 민족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표상했던 ‘교회의 영적 상태’를 읽는 것입니다. 그렇게 읽어야 그 말씀이 오늘 우리 자신에게도 살아 있는 심판과 경고가 됩니다. ‘ 유대인들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였다’고 끝내면 말씀은 남을 판단하는 도구가 되지만, ‘혹시 지금 안에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있지 않은가?’라고 읽으면 말씀이 거듭남의 말씀이 됩니다.

 

설교 첫머리에서 언급한 엘리사와 아이들 사건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박요한 목사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자적 사건 앞에서 ‘성격이 불같은 사람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구나’라고 나름의 답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이런 본문일수록 문자적 사건에 나타난 인물의 성격을 중심으로 교훈을 끌어내기보다 말씀의 표상과 상응을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박요한 목사 자신이 무화과나무에서는 ‘표면성 이면의 영적인 의미’를 찾으면서 엘리사 사건에서는 문자적 인물의 성격으로 해석한 것은 방법론적으로 조금 일관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두 사건을 함께 놓으면 ‘문자만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일수록 속뜻이 필요한가’를 보여 주는 좋은 사례가 됩니다.

 

결국 이번 설교의 가장 귀한 부분은 ‘기도하면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깊은 중심은 박요한 목사 자신이 앞부분에서 이미 말했습니다. ‘가나안도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면 필요 없습니다.’ 이것을 끝까지 밀고 가면 설교 전체가 하나로 연결됩니다. 무화과나무의 문제도 ‘하나님 없는 종교’이고, 성전의 문제도 ‘하나님 없는 종교적 외형’이며, 어린아이의 아름다움도 ‘엄마 없는 좋은 것을 원하지 않는 ’이고, 모세의 위대함도 ‘하나님 없는 가나안을 거절한 ’입니다. 그렇다면 기도의 절정 역시 ‘하나님 없는 응답’을 원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번 설교를 한 문장으로 다시 읽는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신앙이란 주님께 무엇이든 요구하면 무엇이든 얻어내는 신앙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모든 생명과 선이 온다는 것을 인정하며, 주님 자신을 모든 선물보다 사랑하고, 사랑을 삶의 열매로 맺어 가는 신앙입니다.’ 그렇게 읽을 때 무화과나무의 ‘열매’, 어린아이의 ‘엄마’, 모세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그리고 예수께서 가르치신 ‘믿고 구하는 기도’가 한 줄로 이어집니다. 잎만 무성한 종교에서 열매 맺는 신앙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사랑하는 데서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는 데로, 자기 능력을 의지하는 어른의 proprium에서 모든 선을 주님에게서 받는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번 설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가장 밝게 비추어 줄 수 있는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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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영상은 앞서 살펴본 개별 수도사 이야기들과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은퇴 후 약 7년 동안 수도원에서 무엇을 해왔는지 돌아보고, 수도학교와 잇사갈 성경대학, 봉쇄학당, 수도 영성가 연구, 방문객 교육과 부흥회 사역 등을 소개한 뒤, 자신이 생각하는 수도원 운동의 방향을 ‘청빈, 거룩, 오직 예수’라는 세 가지 말로 압축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편은 하나의 수도 일화라기보다 강문호 수도사가 생각하는 ‘개신교 수도원 운동의 자기소개와 비전’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도 개별 사실 하나하나를 따지는 것보다 이 세 축이 과연 사람을 어디로 이끌려 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하겠습니다.

 

영상은 은퇴를 앞두고 ‘후반전이 아름답게 달라’고 기도했다는 고백에서 시작합니다. 이 출발점에는 귀한 것이 있습니다. 은퇴를 인생의 퇴장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남은 생애를 어떻게 주님께 드릴 것인가를 묻는 태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인간의 영적 성장은 특정 나이에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평생 계속되며, 이 세상에서 시작된 변화는 영원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노년은 단순히 지난 업적을 정리하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proprium, 곧 자기 자신에게 속한 것을 더욱 내려놓고 주님께로 향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후반전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강문호 수도사의 소망은 충분히 공감할 만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아름다운 후반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나 더 던집니다. 많은 일을 이루는 것이 아름다운 후반전일까요, 아니면 사람이 점점 더 주님 앞에서 작아지는 것이 아름다운 후반전일까요? 물론 둘은 서로 배척되지 않습니다. 수도원을 세울 수도 있고, 학교를 만들 수도 있고, 수백 권의 자료를 집필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모든 외적 성취가 무엇을 향하고 있느냐입니다. 거듭남의 관점에서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얼마나 많은 일을 이루었는가?’보다 ‘ 일을 하는 동안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얼마나 주님의 질서 아래 놓였는가?’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수도원을 알기 위해 이스라엘의 수많은 수도원을 방문하고 여러 나라의 수도원을 답사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도원에 대한 자신의 선입견이 깨졌다고 고백합니다. 이 대목 역시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이 속한 개신교 전통 밖으로 나가 오래된 기독교 수도 전통을 직접 보고 배우려 했다는 것은 적어도 ‘우리에게 없는 것이 다른 전통에는 있을 있다’는 열린 태도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개신교가 종교개혁 이후 수도원 제도와 상당히 멀어진 것을 생각하면, 오래된 기독교 전통 안에서 기도와 절제, 침묵, 공동생활, 노동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려는 시도 자체는 귀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서도 외적 수도생활과 내적 거듭남을 구별합니다. 수도원을 많이 방문했다고 수도의 본질을 아는 것은 아니며, 수도복을 입었다고 수도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봉쇄된 공간에 오래 머물렀다고 내면의 자기 사랑까지 봉쇄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과의 접촉을 줄이면 이전에는 외부 활동에 가려져 있던 proprium이 더 선명하게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수도의 시험은 ‘얼마나 세상을 떠났는가?’가 아니라 ‘세상을 떠난 자리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얼마나 떠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영상에 나오는 새벽 4시의 기도실 이야기도 같은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연 속 작은 기도실에 들어가 예수의 형상 아래 머리를 대고 ‘오늘 안수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한다는 모습에는 주님께 의탁하려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어떤 형상 자체에 능력이 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마음을 주님께 향하게 하는 외적 도움으로 사용된다면 그 자체를 굳이 문제 삼을 이유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상이 아니라 그 순간 마음이 향하는 대상입니다. 더 나아가 아침에 주님의 인도를 구했다면 하루 동안 실제로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님의 계명 아래 두려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기도실에서의 ‘주님, 저를 지켜 주세요’가 생활 속에서는 ‘주님, 뜻보다 주님의 뜻을 따르게 주세요’가 되어야 합니다.

 

이어지는 수도학교 이야기는 강문호 수도사의 사역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개신교 안에 수도사를 양성하는 학교를 만들고, 그 가운데 일부가 실제 수도사의 길을 택하고, 다시 일부가 수도원을 세우는 흐름을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도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무조건 긍정하거나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수도제도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지만,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 기도와 자기 성찰, 절제와 쓰임을 훈련하는 환경이 될 수는 있습니다. 반대로 수도제도 자체가 영적 우월감이나 특별한 신분의식으로 변한다면 오히려 거듭남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제도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제도 안에서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따라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선을 행할 때 거룩함이 형성됩니다.

 

성경 연구에 대한 열정도 이번 영상의 큰 축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한번 성경만 깊이 파보자’, ‘오직 예수 공부만 보자’며 여러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여 수백 권의 소책자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경이 놀라울 정도로 깊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고백합니다.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깊게 만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은 인간이 그 문자만 읽어서는 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품고 있으며, 그 안에는 천국과 연결되는 내적 의미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다’는 발견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크게 공감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을 깊이 안다는 것은 희귀한 자료를 많이 알고, 고대 문헌을 많이 읽고, 사람들이 처음 듣는 정보를 많이 찾아낸다는 것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깊이는 궁극적으로 ‘얼마나 놀라운 정보를 발견했는가?’에 있지 않고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을 더 알고, 자기 안의 악을 발견하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삶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을 그토록 방대하게 펼쳐 보인 목적도 지적 경탄을 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이 주님과 천국과 인간의 거듭남을 어떻게 품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경악할 만큼 새로운 성경 지식’은 종착지가 아니라 출발점이어야 합니다. 그 지식이 사람의 생명을 바꾸지 못한다면 아직 말씀은 머리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영상 후반부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강문호 수도사가 마지막 때를 대비하는 수도원 영성을 ‘청빈, 거룩, 오직 예수’라는 세 가지로 정리하는 대목입니다. ‘ 대신 청빈, 음란 대신 거룩, 배교 대신 오직 예수’라는 구도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강렬하고 기억하기 쉬운 표어입니다. 그리고 각각에는 분명 기독교적 가치가 있습니다. 재물의 지배에서 자유로워지고, 성적 욕망의 무질서를 다스리며, 주님에게서 떠나지 않으려는 삶은 모두 중요한 영적 과제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세 가지를 조금 다르게 깊이 들어갑니다. 먼저 ‘청빈’의 반대는 단순히 돈이 아닙니다. 돈 자체는 악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재물을 사랑하고 그것을 자기 자신을 높이는 수단으로 삼는 사랑입니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도 그것을 주님의 질서에 따라 선한 쓰임에 사용할 수 있으며, 아무 재산이 없어도 돈을 몹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적 청빈보다 더 깊은 것은 ‘소유에 대한 내적 자유’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내 힘과 내 영광의 증거로 붙들지 않고, 주님에게서 맡겨진 것으로 보며 쓰임에 따라 사용하는 것입니다.

 

음란 대신 거룩’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적 절제는 중요하지만, 거룩은 단순한 금욕보다 훨씬 큽니다. 외적 행동을 억제했다고 내적 욕망까지 정돈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결혼애의 질서는 오히려 매우 중요하며, 성 자체를 부정하거나 육체를 악한 것으로 보는 것이 거룩은 아닙니다. 거룩은 사랑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도자의 독신도 그 자체가 더 높은 거룩함을 보증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욕망을 중심에 놓지 않고 사랑을 주님의 질서 아래 두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배교 대신 오직 예수’는 세 표어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구호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를 반복한다고 주님 중심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그분의 이름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는 말씀처럼, 주님을 향한 사랑은 결국 삶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의 가장 깊은 형태는 ‘내가 아니라 주님’입니다. 내 지식이 아니라 주님, 내 업적이 아니라 주님, 내 사역의 성공이 아니라 주님, 내가 세운 제도와 내가 만든 책과 내가 이룬 결과가 아니라 그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신 주님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번 영상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영상에는 ‘내가 방문했다’, ‘내가 수도원을 세웠다’, ‘내가 자료를 만들었다’, ‘내가 학교를 세웠다’는 식의 개인적 경험과 성취가 자연스럽게 많이 등장합니다. 이것 자체를 곧바로 자기 자랑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사역을 소개하는 영상이라면 당연히 자신이 한 일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보다 한 단계 안쪽을 바라보게 합니다. ‘ 모든 일을 누가 이루셨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사람이 선한 일을 많이 할수록 더욱 깊어져야 할 고백은 ‘내가 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이끄셨으며, 나는 쓰임을 위해 사용된 도구일 뿐이다’라는 고백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 처음의 ‘후반전이 아름답게 달라’는 기도와 마지막의 ‘오직 예수’는 사실 하나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후반전은 앞선 전반전보다 더 많은 업적을 쌓는 후반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참으로 아름다운 후반전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기 이야기는 조금씩 작아지고 주님 이야기가 점점 커지는 후반전일 수 있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내가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가?’가 중요했다면, 영적 노년에는 ‘주님께서 나를 통해 무엇을 이루셨으며, 나는 얼마나 그분 앞에서 비워지고 있는가?’가 더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수도원의 존재 이유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수도원은 세상에서 도망치는 장소도 아니고, 특별히 거룩한 사람들이 모여 자신들의 거룩함을 증명하는 장소도 아닐 것입니다. 수도원이 참으로 교회를 섬기려 한다면, 그곳은 사람이 조용히 자기 proprium을 직면하고, 주님 앞에서 그것을 내려놓으며, 다시 세상 속 이웃을 더 잘 사랑하고 섬기도록 준비되는 장소여야 합니다. 외적 침묵이 내적 침묵으로, 외적 청빈이 내적 자유로, 외적 독신과 절제가 사랑의 질서로, 성경 연구가 삶의 거듭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 제시된 ‘청빈, 거룩, 오직 예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다듬어 다시 말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소유하지 않는 ’보다 ‘소유에 사로잡히지 않는 ’, ‘욕망을 억누르는 ’보다 ‘사랑의 질서가 회복되는 ’, 그리고 ‘오직 예수라고 말하는 ’보다 ‘자기 대신 주님이 중심이 되게 하는 ’입니다. 이 세 가지가 이루어진다면 수도원은 교회와 경쟁하는 또 하나의 제도가 아니라 교회를 섬기는 귀한 영적 훈련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번 영상에서 가장 오래 붙들 만한 말은 처음에 나왔던 ‘후반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인생의 후반전은 단순한 제2의 성공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점점 더 ‘’에게서 ‘주님’으로 중심이 옮겨가는 시간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는가보다 주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가 크게 보이고, 내가 얼마나 알려졌는가보다 내가 얼마나 주님의 선한 쓰임에 사용되었는지가 중요해지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가장 아름다운 수도의 열매는 수도원 숫자도, 제자의 숫자도, 책의 숫자도 아닐 것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한 사람의 말과 표정과 삶에서 ‘ 사람’보다 ‘주님’이 더 잘 보이게 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오직 예수’라는 고백이 마침내 한 인간 안에서 이루어 낸 가장 아름다운 후반전일 것입니다.

 

 

 

SY.83, 강문호 수도사, ‘아토스 이비론 수도원, 주는 것과 받는 것을 잊지 말라’ (20200106)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소개하는 곳은 아토스의 이비론 수도원입니다. 아토스에 얽힌 전승과 이비론 수도원의 오래된 역사, 그리고 무엇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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