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BU.008 | 불교(Buddhism)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극단을 피하고 중도를 따르는 것이 바른 길이다’ - 불교의 중도와 선과 진리의 신적 질서

 

해설

사람은 흔히 두 가지 극단 사이에서 자신의 삶을 결정하려 합니다. 한쪽에서는 원하는 것을 마음껏 누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쪽에서는 욕망과 즐거움을 철저히 억제해야 거룩하거나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욕망을 무조건 따라가는 삶도, 인간의 자연적인 필요와 기쁨을 모두 부정하는 삶도 온전한 자유를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불교는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중도’(中道, majjhimā paṭipadā)라는 길을 제시합니다. 중도는 흔히 양쪽의 극단을 피하고 적당한 가운데를 선택하는 태도로 이해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는 단순한 절충이나 타협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을 ‘고’(苦, dukkha), 곧 고통과 근본적인 불만족에서 벗어나게 하는 바른 수행과 지혜의 길입니다. 역사적 석가모니의 수행을 전하는 불교 전통에서는 그가 왕자로서 풍요로운 삶을 경험한 뒤 출가하여 극심한 고행을 했으나, 어느 쪽에서도 궁극적인 해답을 얻지 못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경험을 배경으로 제시된 중도는 감각적인 쾌락에 빠지는 삶과 자신을 지나치게 괴롭히는 고행이라는 두 극단을 넘어서는 길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참된 행복을 얻으려면 욕망에 끌려가거나 육체를 학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바르게 이해하고 다스리는 길이 필요하다는 중요한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초기불교의 ‘상윳따 니까야’(相應部, Saṃyutta Nikāya) 56.11에 수록된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 Dhammacakkappavattana Sutta)은 이러한 중도를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경전은 감각적인 즐거움에 탐닉하는 길과 스스로에게 고통을 가하는 고행의 길을 모두 피해야 할 극단으로 제시하고, 부처가 깨달은 중도의 구체적인 내용이 ‘팔정도’(八正道, ariya aṭṭhaṅgika magga)라고 밝힙니다. 팔정도는 바른 견해인 정견, 바른 의도인 정사유, 바른 말인 정어, 바른 행동인 정업, 바른 생계인 정명, 바른 노력인 정정진, 바른 알아차림인 정념, 바른 집중인 정정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는 인간의 생각과 말, 행동과 생활, 마음의 훈련이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불교에서 중도의 목적은 그저 지나친 행동을 삼가고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갈애’(渴愛, taṇhā), 곧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목마름과 ‘집착’(執著, upādāna), 곧 그것을 자기 것으로 붙잡으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궁극적으로 ‘열반’(涅槃, nibbāna)에 이르는 데 있습니다. 열반은 갈애와 무명이 소멸하여 고통과 ‘윤회’(輪廻, saṃsāra)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중도는 적당히 즐기고 적당히 절제하라는 생활의 지혜를 넘어, 고통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수행의 질서입니다. 때로는 매우 엄격한 계율과 지속적인 수행이 요구되기도 하므로, 중도를 언제나 편안하고 쉬운 길이라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불교의 중도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초기불교의 ‘상윳따 니까야’ 12.15에 수록된 ‘가전연경’(迦旃延經, Kaccānagotta Sutta)은 세계를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견해와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라는 두 극단으로 이해하는 태도를 경계합니다. 부처는 이 양극단을 떠나 모든 현상이 일정한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연기는 존재가 아무런 근거 없이 생겨난다는 뜻도 아니고, 모든 것이 영원불변하는 독립적인 실체로 존재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러한 사상은 후대 대승불교의 ‘중관’(中觀, Madhyamaka) 사상에서 더욱 체계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인도의 불교 사상가 용수(龍樹, Nāgārjuna)는 ‘중론’(中論, Mūlamadhyamakakārikā) 24장 18게송에서 연기와 ‘공’(空, śūnyatā), 곧 모든 현상이 독립적이고 고정된 자성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중도와 연결합니다. 이는 현상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허무주의가 아니라, 존재를 독립적이고 영원한 실체로 붙잡는 견해를 비판하는 설명입니다. 물론 초기불교의 수행적 중도와 대승불교의 철학적 중도가 완전히 같은 개념은 아닙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인간이 어느 한쪽의 견해에 집착하여 그것을 절대화하는 태도를 경계한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중도를 이해할 때에는 쾌락과 고행 사이의 수행적 중도와 존재와 비존재에 관한 극단적인 견해를 넘어서는 철학적 중도를 함께 구별해야 합니다.

 

이러한 불교의 통찰은 기독교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으므로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누려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인간의 자연적인 삶 자체를 악하다고 규정하지도 않고, 인간의 욕망을 무조건 정당화하지도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상의 모든 필요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먼저 사랑하고 무엇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DLW, 1763) 1번에서 사랑이 인간의 생명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사랑하는 것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며, 사랑이 없다면 생각과 행동도 생명력을 잃습니다. 따라서 영적인 삶은 욕망과 사랑을 모두 제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랑의 대상과 질서가 바르게 세워지는 데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건강을 돌보며, 직업에 충실하고, 정당한 기쁨을 누리는 것은 그 자체로 악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러한 것들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보다 앞세우거나, 다른 사람을 해치면서까지 자기의 만족을 추구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불교의 중도는 지나친 욕망과 고행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유익한 비교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불교의 중도와 새 교회의 신적 질서를 단순히 같은 원리라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불교의 중도는 고통과 집착에서 벗어나는 수행과 지혜의 길인 반면, 새 교회의 교리는 인간의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오며 그분의 사랑과 지혜 안에서 삶의 질서가 바로잡힌다고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새 예루살렘을 위한 삶의 교리’(Doctrine of Life for the New Jerusalem, Life, 1763) 1번에서 밝힌 ‘모든 종교는 삶에 관계되며, 종교적인 삶은 선을 행하는 것이다’라는 원리는 이 문제를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게 합니다. 참된 신앙은 무엇이 옳은지를 생각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진리를 실제 생활에서 실천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선을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양쪽의 의견을 적당히 절충하거나 모든 갈등을 피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악이라면 분명하게 악을 멀리해야 하고, 어떤 일이 이웃에게 유익하다면 그 선을 실천해야 합니다. 같은 저작 Life.21–22는 인간이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할 때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행할 수 있음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악을 죄로 여긴다’는 것은 그것이 자기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사회적으로 비난받기 때문에 피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과 신적 질서에 반대되기 때문에 멀리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적 삶의 기준은 언제나 두 극단의 한가운데에 놓이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와 거짓 사이에서 적당한 중간을 선택할 수 없고, 선과 악을 조금씩 섞는다고 해서 참된 선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불교의 중도 역시 진리와 오류를 절반씩 섞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두 전통 모두 무분별한 절충을 경계할 수 있지만, 불교는 바른 견해와 수행을 통해 해탈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새 교회의 교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함으로써 거듭나는 길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더욱 깊이 살펴야 할 것은 인간이 무엇을 궁극적인 기준으로 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불교의 중관사상은 어떤 현상도 독립적이고 고정된 자성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의 통찰을 강조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창조된 모든 존재는 그분에게서 생명을 받아들이는 유한한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신적 사랑과 지혜’ 4번은 주님과 인간 사이의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는 생명 자체가 아니며, 자신이 가진 사랑과 지혜의 궁극적인 근원도 아닙니다. 이 점에서 불교가 독립적이고 고정된 실체에 대한 집착을 경계하는 것과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독립적인 생명 소유라는 착각을 경계하는 것 사이에는 비교할 만한 통찰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 설명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불교의 공은 연기에 따라 성립하는 현상들의 자성 없음을 설명하지만, 스베덴보리의 저작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을 전제하고 모든 피조물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들인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이 자기에게 독립적인 생명이 있다고 여기는 태도는 ‘프로프리움’(proprium), 곧 자기에게 고유하게 속한 것으로 여기는 자아적 성향과 연결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절대화하면서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빛에서 참된 겸손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이러한 점에서 중도를 둘러싼 두 전통의 비교는 단순한 생활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와 생명의 근원에 관한 근본적인 신학적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이 문제는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나타납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모든 요구를 들어주거나, 반대로 자녀를 바르게 키운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통제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는 진리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사람을 정죄하거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이유로 잘못된 행동을 아무런 분별 없이 용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필요한 것은 양쪽의 행동을 산술적으로 절반씩 섞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그 사람에게 참으로 유익하며, 어떤 행동이 선과 진리의 질서에 부합하는지를 분별하는 일입니다. 불교의 중도는 극단적인 집착에 사로잡혀 자신의 견해와 행동을 절대화하지 않도록 경계한다는 점에서 귀중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말씀에서 말하는 사랑은 진리 없는 무조건적인 허용이 아니며, 진리 역시 사랑 없는 정죄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 47번에서 사랑의 본질이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으로 결합하는 데 있음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상대방에게 참으로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살피지 않는 사랑은 자기만족에 머물 위험이 있고, 상대방의 삶을 세워 주려는 목적 없이 행사하는 진리의 판단 역시 자기 우월감의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 신앙생활에서는 단호하게 악을 거절하면서도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진리를 분명하게 말하면서도 상대방의 자유와 인격을 존중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중간 선택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가 함께 작용하는 삶입니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불교의 중도를 기독교의 사랑과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비유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두 가르침이 동일한 교리를 전한다는 결론으로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결국 ‘극단을 피하고 중도를 따르는 것이 바른 길이다’라는 명제는 불교의 중요한 가르침이지만, 그 의미를 단순한 절충이나 적당주의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초기불교의 중도는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는 삶과 자신을 괴롭히는 고행을 넘어 팔정도에 따라 ‘해탈’(解脫, vimutti)을 추구하는 길이며, 대승불교의 중관사상은 존재와 비존재에 관한 극단적인 견해를 넘어 연기와 공의 의미를 밝히는 길입니다. 그 안에는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견해를 절대화하지 않고, 현실을 바르게 이해하며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에서 중간을 선택하는 것이 곧 진리라는 결론은 옳지 않습니다. 말씀과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의 차이는 인간의 편의에 따라 절충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자신의 사랑과 삶의 질서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중도가 인간을 속박하는 극단적인 집착에서 벗어나도록 이끈다면, 말씀은 인간이 무엇을 가장 사랑해야 하며 어떤 생명의 질서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밝혀 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극단을 피한다는 이유로 진리를 희석해서도 안 되고, 진리를 지킨다는 이유로 사랑을 버려서도 안 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가 하나를 이룰 때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판단에서 벗어나 이웃에게 참으로 유익한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중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지혜를 존중하면서도, 말씀의 빛에서 분명하게 구별해야 할 참된 영적 질서입니다. (BU.008 해설)

 

요약

불교의 중도는 극단을 피하여 적당한 중간을 선택하라는 단순한 처세술이 아니라, 초기불교에서는 쾌락과 고행의 두 극단을 넘어 팔정도를 실천하는 길이며, 대승불교의 중관사상에서는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극단적인 견해를 넘어 연기와 공을 이해하는 길입니다. 여기에는 자기의 욕망과 견해를 절대화하지 않고 바른 삶과 지혜를 추구해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도를 모든 진리와 오류의 절충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참된 영적 삶은 선과 악을 적당히 혼합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불교의 중도에 담긴 집착 극복과 바른 삶의 통찰을 인정하되, 모든 선과 진리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이시며, 사랑과 진리가 결합된 삶이 거듭남의 중요한 질서임을 분명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BU.007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팔정도에 있다’

SL.BU.007 | 불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팔정도에 있다’ - 도성제의 바른 삶과 주님에게서 오는 거듭남 해설인간은 누구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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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IS.008 | 이슬람(Islam)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알라의 아름다운 이름들은 그분의 속성을 나타낸다’ - 신적 이름과 신적 본질

 

해설

이슬람은 하나님께 아름다운 이름들이 있으며, 그 이름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속성(屬性, attributes)을 나타낸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이름들을 ‘알아스마 알후스나’(al-asma al-husna), 곧 ‘가장 아름다운 이름들’이라고 부릅니다. 꾸란 7:180은 가장 아름다운 이름들이 하나님께 속하므로 그 이름들로 그분을 부르라고 가르치며, 17:110은 ‘알라’라고 부르든 ‘지극히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부르든 그분에게 아름다운 이름들이 속한다고 선언합니다. 꾸란 59:22–24에는 자비로우신 분, 거룩하신 분, 평화의 근원이신 분, 창조하시는 분, 형상을 주시는 분 등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슬람에서 이러한 이름들은 서로 다른 신적 존재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분 하나님을 인간이 이해하고 경외할 수 있도록 그분의 여러 완전성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이해되는 분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와 지혜와 거룩함 등 그분의 신적 본성을 통하여 알려지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 깊이 살펴보아야 할 질문은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과 하나님 자신을 아는 것이 같은가, 그리고 여러 신적 속성은 하나님의 본질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슬람 전통에서는 하나님의 99가지 아름다운 이름이 특별히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사히흐 알부하리’(Sahih al-Bukhari) 2736에는 하나님께 99개의 이름이 있으며 이를 알고 헤아리는 사람이 낙원에 들어간다는 전승이 나옵니다. 다만 꾸란이 99개의 이름을 하나의 목록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며, 그 이름들의 구체적인 목록과 범위를 설명하는 방식에도 전승과 학파에 따른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이 이름들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아랍어 명칭을 소리 내어 반복하는 행위만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이슬람의 영적 전통에서는 그 이름들의 뜻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신이 허용된 범위에서 자비와 정의와 관대함을 실천하는 삶도 중요하게 여깁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부르면서 이웃에게 잔인하게 행동하거나, 정의로우신 분이라고 고백하면서 불의를 행한다면, 그 이름을 안다는 고백과 실제 삶 사이에는 모순이 생깁니다. 따라서 아름다운 이름에 관한 이슬람의 신앙은 단순한 명칭의 수집이나 암송을 넘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고 그분의 가르침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이름에 관한 가르침과 중요한 접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2009항에서 말씀에 등장하는 ‘이름’(name)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존재의 성질(quality)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주님의 이름은 그분에게 속한 모든 신적 성질, 곧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포함합니다. 영계에서는 어떤 존재를 단순한 이름이나 외적 명칭보다 그 존재의 내적 성질에 따라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저작 2724항에서는 고대교회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을 단순히 특정한 명칭을 발음하는 행위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으며 그분을 예배하는 모든 것과 연결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예배의 내적 생명이 약해지고 외적 형식만 남자, 사람들은 이름 자체를 거룩하게 여기고 그 이름을 부르는 행위에 특별한 효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름만을 예배하는 것은 참된 예배가 아니며, 그 이름이 나타내는 사랑과 신앙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아름다운 이름들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살펴볼 때에도 중요한 것은 이름의 수나 발음 자체가 아니라, 그 이름들이 어떤 신적 성질을 나타내며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하나님의 속성과 본질(本質, essence)의 관계라는 문제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DLW, 1763) 28항에서 신적 본질 자체는 사랑과 지혜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36–38항에서는 하나님이 사랑 자체와 지혜 자체이시며, 사랑에서 선이 나오고 지혜에서 진리가 나온다고 가르칩니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 거룩함과 선하심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때때로 경쟁하는 속성들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신적 사랑과 지혜라는 하나의 본질에 속하며, 인간이 하나님의 역사와 관계를 이해하는 여러 측면에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할 때에는 신적 사랑이 인간을 구원하려는 성질을 생각하게 되고, 지혜로우신 분이라고 할 때에는 그 사랑이 신적 진리와 질서에 따라 역사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 이름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 안에 여러 독립된 본질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점은 이슬람의 유일신 신앙과도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지만, 그 이름들이 가리키는 신적 본질과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에서는 신학적 차이가 남습니다.

 

그러한 차이는 특히 하나님의 권능과 심판을 나타내는 이름들에서 드러납니다. 꾸란에는 자비와 용서의 이름뿐 아니라 절대적 권능과 주권, 심판과 위엄을 나타내는 이름들도 등장합니다. 이슬람은 이러한 이름들을 모두 하나님의 완전성에 속한 것으로 이해하며, 자비와 정의가 신적 본성에 함께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신적 권능은 신적 사랑과 지혜에서 분리되어 작용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므로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시거나 보복을 즐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벌하시는 것처럼 나타나는 표현도 주님의 실제 본성과 인간이 악을 사랑하여 경험하는 결과를 구별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해석할 때에도 인간적인 분노와 지배욕, 보복심을 무한하게 확대하여 하나님의 속성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러한 구별이 이슬람의 권능과 심판에 관한 모든 해석을 인간적인 보복의 관념으로 환원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슬람 안에서도 하나님의 속성을 피조물의 감정이나 행동과 동일시하지 않으려는 신학적 전통이 존재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이름을 사용하느냐보다 그 이름을 통하여 어떤 하나님을 이해하고 예배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은 마6:9에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 2724항에서 이 말씀의 이름이 단순한 발음이나 명칭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 사랑과 신앙의 모든 것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요17:26에서 주님이 아버지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알리셨다고 말씀하신 것도 단순히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호칭을 가르쳐 주셨다는 의미로 한정할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 계시의 충만함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납니다. 주님은 하나님에 관한 여러 진리를 전달하신 예언자에 머무르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인성을 입고 나타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의미에서 주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라는 이름을 알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신적 사랑과 지혜이신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이슬람의 아름다운 이름에 담긴 진리를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본성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가 결정적이라는 스베덴보리의 신학적 입장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지식과 참된 신앙의 삶은 구별되면서도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며 자비로우시고 정의로우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이웃을 미워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체계적인 지식이 충분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정직하게 살고 어려운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전자는 이름을 알면서도 그 이름의 내적 성질을 삶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이며, 후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선을 실천하려는 상태입니다. 물론 선한 행위의 궁극적인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묵상하는 일은 단순한 지식의 증가나 종교적 만족에 머무르지 않고, 주님의 선과 진리를 실제 삶에서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특히 이름을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영적 우월성으로 삼거나, 자신이 사용하는 신적 명칭만이 참된 신앙의 증거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이름의 본질을 놓칠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인간이 자랑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나타내는 신적 사랑과 진리를 알고 받아들이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결국 ‘알라의 아름다운 이름들은 그분의 속성을 나타낸다’는 이슬람의 고백에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이름으로 불리시더라도 한 분이시며, 그 이름들은 인간이 그분의 자비와 거룩함과 지혜를 이해하고 경외하도록 돕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름에서 본질로, 지식에서 사랑으로, 외적 예배에서 내적 생명으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며, 그 이름을 참되게 아는 것은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연결됩니다. 이러한 관점은 기독교인 자신에게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배하면서 실제로는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거스르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자비로우시다고 고백하면서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고, 하나님이 진리이시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리를 왜곡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이름을 얼마나 많이 아는가보다 그 이름이 나타내는 신적 성질을 얼마나 사랑하고 받아들이는가에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 모든 신적 사랑과 지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이 문항이 남기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그 이름이 나타내는 하나님을 얼마나 참되게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선과 진리를 내 삶에서 실천하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IS.008 해설)

 

요약

이슬람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들이 그분의 속성을 나타내며, 인간은 그 이름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경외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중요한 진리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분의 성질과 그분을 향한 사랑과 신앙의 모든 것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름을 암송하거나 속성에 관한 지식을 소유하는 것 자체가 참된 신앙의 완성은 아닙니다. 또한 신적 속성들은 서로 분리된 독립적인 본질이 아니라 신적 사랑과 지혜 안에서 하나를 이룹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본성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계시되며, 그분의 이름을 참되게 아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아름다운 이름에 관한 신앙 자체가 오류인 것은 아니지만, 그 이름들의 신적 본질을 이해하는 방식과 성육신하신 주님에 대한 인식에서는 중요한 교리적 차이가 존재합니다.

 

 

 

IS.007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기초다’

SL.IS.007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기초다’ - 두려움과 사랑의 영적 질서 해설이슬람에서 하나님을 경외(敬畏, reverence)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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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08 | 천주교(Roman Catholic)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대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은 채 죽으면 지옥에 간다’ - 지옥을 결정하는 것은 죄의 종류인가, 끝까지 붙든 삶의 사랑인가?

 

해설

‘대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은 채 죽으면 지옥에 간다.’ 이것은 천주교가 죄와 회개, 인간의 영원한 운명에 관하여 가르치는 중요한 교리입니다. 천주교는 인간의 죄를 그 중대성에 따라 ‘대죄’(大罪, mortal sin)와 ‘소죄’(小罪, venial sin)로 구별하며, 대죄의 상태에서 회개하지 않고 죽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친교를 영원히 상실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인간의 도덕적 선택이 단순히 현세의 삶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도 관계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어떤 죄가 대죄인지는 누가 결정하며, 그 죄를 지은 사람이 실제로 어떤 내적 상태에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람이 중대한 죄를 지었다는 사실과 그 죄를 자신의 삶의 사랑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동일한 것일까요? 또한 죽기 직전에 회개했다는 사실만으로 오랜 세월 형성된 악한 사랑이 즉시 변화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지옥을 주님께서 죄인을 던져 넣으시는 장소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악한 사랑에 따라 스스로 들어가는 영적 상태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천주교의 대죄와 회개에 관한 가르침은 이러한 이해와 어디에서 일치하고, 어디에서 달라질까요? 이번 명제는 지옥의 존재를 인정하는가 하는 문제를 넘어, 인간의 영원한 상태를 결정하는 것이 무엇이며 참된 회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묻는 중요한 신학적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1854–1855항은 대죄와 소죄를 구별하면서, 대죄는 하나님의 법을 중대하게 어겨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체어리티를 파괴하고 하나님에게서 돌아서게 하는 죄라고 설명합니다. 반면 소죄는 체어리티를 상하게 하고 약화시키지만 그것을 완전히 파괴하지는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어떤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만으로 반드시 대죄가 성립한다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교리서 1857항은 대죄가 성립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함께 충족되어야 한다고 명시합니다. 첫째, 그 행위가 중대한 사안이어야 합니다. 둘째, 당사자가 그 행위가 중대한 죄임을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셋째,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로 그 행위에 의도적으로 동의해야 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동일한 행동을 했더라도 그 사람의 인식과 자유, 의도에 따라 개인적인 책임의 정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교리서 1860항은 무의식적인 무지나 외부의 강압, 심리적·병리적 장애 등이 행위의 자발성과 책임을 감소시키거나 제거할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구별에는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인간의 영적 상태는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으로 완전하게 판단할 수 없으며, 그의 이해와 의지, 자유로운 선택을 함께 고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천주교는 대죄가 회개 없이 지속되면 인간을 지옥에 이르게 한다고 가르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861항은 대죄가 체어리티와 성화 은총을 상실하게 하며,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로 회복되지 않으면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1033항은 대죄의 상태에서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죽는 것을,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영원히 분리되는 상태라고 정의합니다. 1035항은 지옥의 영원성을 가르치면서 그 가장 큰 고통을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점은 1037항입니다. 천주교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도 지옥에 가도록 예정하지 않으시며, 지옥에 이르기 위해서는 인간이 의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돌아선 상태를 끝까지 고집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천주교의 지옥 교리를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사람에게 분노하시어 임의로 지옥행을 선고하시는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 역시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끝까지 지속되는 회개 거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러한 점에서는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전통 모두 지옥을 인간의 악한 삶과 무관한 임의적인 처벌로 이해하지 않으며, 인간이 자유 가운데 무엇을 사랑하고 선택하는가가 영원한 운명과 깊이 관련된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죄를 지은 사람의 상태를 판단할 때에는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어떤 행위가 객관적으로 중대한 악이라는 사실과 그 행위를 저지른 개인에게 대죄의 책임이 완전하게 성립한다는 사실을 구별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861항도 행위 자체의 중대성은 평가할 수 있지만, 그 사람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은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에 맡겨야 한다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중대한 죄를 지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대죄의 상태에 있으며, 지금 죽는다면 지옥에 갈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천주교의 공식 교리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구별은 실제 목회 현장에서도 중요합니다. 인간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볼 수 있지만, 그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어떤 내적 갈등과 압력 가운데 있었는지, 자신의 행동을 얼마나 자유롭게 선택했는지를 완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또한 겉으로는 회개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자신의 내면에서 어떤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지도 인간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심각성을 분명하게 가르치는 일과 특정한 사람의 최종적인 구원을 판단하는 일은 구별해야 합니다. 죄를 죄라고 말해야 하지만,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까지 결정하는 것은 주님의 몫입니다. 이러한 원칙은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인간의 내적인 사랑과 의지의 중요성을 이해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지옥의 본질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545–550항에서 주님께서는 아무도 지옥에 던져 넣지 않으시며, 악한 영이 자신의 악에 따라 스스로 지옥으로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HH.545에서 스베덴보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얼굴을 돌리시고 분노하여 지옥으로 내쫓으신다는 생각을 비판합니다. 주님은 선 자체이시며 사랑과 자비 자체이시므로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으시고, 누구도 자신에게서 내쫓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HH.547에서는 인간 안에 있는 악이 곧 그 사람 안의 지옥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연계에서 자신이 사랑하고 의지한 악을 사후에도 사랑하며, 그 악을 자신의 생명처럼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와 일치하는 영적 공동체를 찾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지옥은 주님의 자비가 부족하여 생기는 결과가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거부하고 자신의 악한 사랑을 선택한 결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지옥의 존재나 영원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지옥을 매우 실제적인 영계의 상태로 설명하지만, 그 근원을 주님의 분노가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인 악한 사랑에서 찾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가르침은 죄와 회개가 인간의 영원한 운명에 관계된다는 천주교의 핵심적인 경고와 연결되면서도, 지옥이 형성되는 영적 원리를 더욱 깊이 설명합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결정적인 개념은 ‘지배적인 사랑’(ruling love)입니다. 스베덴보리는 HH.477–480에서 인간의 사후 상태가 지상에서 형성한 사랑과 의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HH.480은 사람이 죽은 후에도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을 유지하며, 그 사랑이 영계에서 자신의 삶과 행동을 지배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말은 인간이 생전에 한 번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영원한 상태가 결정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악을 사랑하고 정당화하며, 그것을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삼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탐욕으로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지만 이후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피해를 바로잡으며 정직한 삶으로 돌아섰다면, 그의 상태를 그 한 번의 잘못만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겉으로는 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속으로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해치려는 마음을 즐기며 그것을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참된 상태가 단순한 행동의 목록이 아니라 그 행동을 낳는 사랑과 의지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어떤 죄가 중대한가를 분별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생애 전체를 통하여 형성된 사랑과 그 사랑에 따른 실제적인 삶을 함께 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천주교의 대죄와 소죄의 구별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는 모든 악이 영적으로 동일한 무게를 지닌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람을 죽이거나 속이고 착취하는 악,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는 악은 매우 중대한 영적 문제입니다. 또한 사람이 어떤 악을 진리와 양심을 거슬러 의도적으로 선택할수록 그 악은 자신의 의지와 더욱 깊이 결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죄의 중대성과 의도적인 선택을 구별하는 천주교의 가르침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인정할 수 있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죄와 구원에 관한 가르침을 천주교의 대죄와 소죄라는 법적·성사적 분류에 그대로 대응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의 관점에서 결정적인 것은 특정한 죄목이 어떤 등급에 속하는가보다, 그 악이 인간의 사랑과 의지 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악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으로 그 악을 피하며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면, 그는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거듭남의 과정에 들어갑니다. 반대로 자신의 악을 정당화하고 즐기면서 끝까지 그것을 버리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그 악을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으로 굳혀 갑니다. 따라서 지옥에 관한 참된 경고는 특정한 죄의 등급을 확인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인간이 지금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삶을 선택하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해야 합니다.

 

이제 회개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주교는 회개를 단순히 죄를 입술로 고백하는 행위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451항은 ‘통회’(痛悔, contrition)를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또한 1452항은 하나님을 모든 것보다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 ‘완전한 통회’(perfect contrition)가 대죄의 용서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다만 여기에는 가능한 한 빨리 고해성사를 받겠다는 결심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가 사망 직전에 고해성사를 받지 못하면 언제나 지옥에 간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들이는 진정한 회개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회개의 필요성을 매우 강하게 강조합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520–524항에서는 사람이 자신의 악을 회개를 통하여 제거하지 않는 한 그 악 안에 머물며, 악 안에 계속 머무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TCR.528–531에서는 실제적인 회개가 자기 성찰과 죄의 인정, 주님께 드리는 기도, 그리고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회개하지 않고 악 가운데 머무는 사람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가르침은 스베덴보리에게서도 분명하게 확인됩니다. 이번 명제를 단순히 천주교만의 잘못된 지옥 교리라고 규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망 직전의 회개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에서는 더욱 깊은 구별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오랜 세월 악을 사랑하며 살다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죄를 두려워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기도를 무조건 거짓되거나 무가치하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애 마지막 순간에도 주님의 자비를 구할 수 있으며,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을 아십니다. 그러나 죽음이 두려워 죄를 후회하는 감정과 실제로 그 악을 미워하고 버리려는 사랑의 변화는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거듭남은 인간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삶을 변화시키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순간에 죄를 고백했다는 외적인 사실만으로 오랜 세월 형성된 지배적인 사랑이 실제로 달라졌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그 사람이 사망 직전에 충분한 말이나 행동으로 자신의 변화를 보여 주지 못했다고 해서 아무런 참된 회개도 없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필요한 것은 회개의 진정성을 가볍게 판단하지 않는 신중함입니다. 천주교의 완전한 통회에 관한 가르침과 스베덴보리의 실제적인 거듭남에 관한 가르침은 모두 내적인 변화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그 변화가 죄의 용서와 영원한 상태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서 죽음 이후의 상태에 관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도 중요합니다. 그는 HH.491–520에서 인간이 죽은 후 ‘영들의 세계’(world of spirits)를 거쳐 자신의 내적인 상태가 드러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이 즉시 최종적인 천국이나 지옥의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며, 영들의 세계에서 겉으로 드러났던 모습과 내적인 사랑이 점차 구별됩니다. 특히 HH.499–511에서 그는 사람이 사후에 자신의 속 사람의 상태로 들어가면서 지상에서 형성된 실제적인 사랑과 의지가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것을 사후에 누구나 자유롭게 새로운 삶을 선택하여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에 인간의 내적인 사랑이 드러나고 그에 따른 상태가 전개된다고 설명하며, HH.480에서는 지배적인 사랑이 사후에도 지속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영들의 세계는 생전에 형성된 사랑과 무관하게 구원의 기회를 새롭게 얻는 장소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지상에서 실제로 어떤 사랑을 받아들이고 살아왔는지가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영원한 운명은 단순히 사망 순간의 외적인 종교적 상태나 마지막 고백의 유무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생애를 통하여 형성된 내적인 사랑과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이루신 거듭남의 상태가 중심이 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목회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어떤 사람이 중대한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그에게 이미 지옥행이 확정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인간이 어떤 악을 사랑하고 고집하더라도 결국 모두 천국에 들어간다고 안심시키는 것 역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무한한 사랑과 자비 자체이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여 그가 사랑하지도 않는 선을 억지로 사랑하게 만들지는 않으십니다. 따라서 지옥의 가능성은 실제적이며, 인간이 악을 죄로 여겨 피해야 할 이유도 매우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최종적인 상태를 알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겉으로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가 어떤 내적 갈등을 겪고 있는지, 주님께서 그를 어떻게 인도하고 계시는지 완전하게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지옥의 두려움을 이용하여 사람을 조종하기보다, 악이 인간의 영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진지하게 가르치고 주님의 자비 안에서 실제적인 회개로 나아가도록 도와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처벌을 피하기 위한 외적인 종교 행위에 머물지 않고, 죄를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는 내적인 변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죄의 심각성을 낮추지 않으면서도 사람의 최종적인 심판은 주님께 맡기는 것, 이것이 지옥과 회개를 가르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태도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명제의 참된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이 악을 사랑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면 그 악은 그의 삶을 지배하며, 사후에는 그 사랑에 상응하는 영적 상태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회개하지 않은 악이 인간을 지옥으로 이끈다는 천주교의 가르침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와 깊이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단순히 대죄에 해당하는 행동을 저질렀는가, 사망 전에 고해성사나 통회를 마쳤는가 하는 외적인 기준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 역시 대죄가 성립하려면 충분한 인식과 의도적인 동의가 필요하며, 개인의 최종 심판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영원한 상태를 그의 지배적인 사랑과 실제적인 삶의 성격에서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도 지옥으로 던지지 않으시며, 인간이 악을 사랑하는 만큼 스스로 지옥의 상태에 가까워집니다. 반대로 인간이 주님의 도움으로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갈 때, 그는 천국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지옥을 피하는 가장 중요한 길은 자신의 죄가 어떤 등급에 해당하는지를 계산하거나 마지막 순간의 회개만을 기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늘 자신의 사랑과 의지를 돌아보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하는 삶을 시작하는 데 있습니다. 참된 회개는 언젠가 죽기 직전에 해결해야 할 종교적 절차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 주님의 은총으로 살아가야 할 거듭남의 삶입니다. 결국 인간을 천국으로 이끄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며, 인간을 지옥에 묶어 두는 것은 그가 끝까지 붙들고 버리기를 거부한 악한 사랑입니다. (SL.RC.008 해설)

 

요약

‘대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은 채 죽으면 지옥에 간다’라는 명제는 그 핵심에서 반드시 오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악을 사랑하고 회개하지 않은 채 그 악 안에 머무른다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가르침은 스베덴보리의 TCR.520–524와 HH.545–550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됩니다. 천주교는 대죄가 성립하려면 중대한 사안과 충분한 인식, 의도적인 동의가 함께 필요하다고 가르치며, 죄의 상태에서 회개하지 않고 죽는 것을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른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로 이해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도 지옥에 가도록 예정하지 않으시며, 개인의 최종적인 심판은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에 맡겨야 한다고 명시합니다. 이러한 공식적인 가르침은 정확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영원한 상태를 설명하는 핵심은 대죄와 소죄라는 분류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지상에서 형성하고 사후에도 유지하는 지배적인 사랑입니다. HH.480은 인간의 지배적인 사랑이 사후에도 지속된다고 설명하며, HH.547은 악을 사랑하는 인간이 스스로 그 악에 상응하는 지옥의 상태로 들어간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TCR.528–531은 실제적인 회개가 자신의 죄를 성찰하고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회개하지 않은 악이 인간을 지옥으로 이끈다는 가르침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특정한 죄목의 분류나 사망 직전의 외적인 고백만으로 개인의 영원한 상태를 확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지옥을 주님께서 분노하여 인간에게 강제로 부과하시는 형벌로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다만 천주교의 공식 교리 역시 그러한 단순화를 경계하므로, 이러한 오류를 천주교 전체의 가르침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두 전통의 중요한 차이는 죄와 회개의 필요성보다 인간의 영원한 상태가 무엇에 의하여 형성되고 드러나는가를 설명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사후의 상태는 지상에서 형성된 내적인 사랑과 실제적인 거듭남에 따라 전개되며, 어떤 사람의 최종 상태를 인간이 임의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명제는 ‘악을 사랑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지옥의 상태에 이른다’는 의미에서는 참되지만, 이를 단순한 죄목의 분류와 마지막 종교적 절차에 의하여 운명이 결정된다는 이해로 축소한다면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판정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지옥의 두려움에만 머무르지 않고,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신뢰하며 지금부터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EO.007. ‘하나님의 본질은 알 수 없지만 그 에너지에는 참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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