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PR.002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교리화된 오류 100선

 

‘영접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 주님께 나아가는 길을 하나의 기도문에 가두다

 

개신교 신앙생활에서 ‘영접기도’만큼 익숙하면서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은 기도는 흔치 않습니다. 전도자가 복음을 설명한 뒤 상대방에게 예수님을 영접하겠느냐고 묻고, 상대방이 동의하면 정해진 기도문을 한 문장씩 따라 하도록 인도합니다. ‘주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제 마음에 들어오셔서 저의 구주와 주님이 되어 주십시오.’ 기도가 끝나면 전도자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축하하며, 때로는 그날의 날짜를 기록해 두라고 권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수많은 사람이 처음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을 향해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 자체로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본래 주님께 나아가도록 돕기 위해 마련된 기도가 어느새 구원에 반드시 필요한 절차처럼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과연 주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특정한 기도문을 반드시 말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을까요?

 

먼저 역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에서 널리 사용하는 영접기도, 곧 ‘죄인의 기도’(Sinner's Prayer)는 초대교회부터 동일한 형식으로 전해 내려온 기도가 아닙니다. 회개와 신앙고백의 전통은 초기 기독교부터 존재했지만, 전도집회에서 결신을 요청하고 일정한 기도문을 따라 하도록 하는 방식은 근대 부흥운동과 복음전도 문화 속에서 발전했습니다. 특히 19세기 이후의 부흥집회와 20세기 대중전도 활동을 거치면서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모든 개신교 교단이 영접기도를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개신교 신학자와 목회자도 기도문을 따라 하는 행위 자체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검토하려는 것은 개신교 전체의 공식 교리라기보다, 특정한 전도 방식이 오랫동안 반복되면서 신자들의 의식 속에 사실상 구원의 필수 절차처럼 자리 잡은 현상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이 문제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사도행전 2장 37, 38절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묻자,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권합니다. 사도행전 16장 30, 31절에서 빌립보 간수가 바울과 실라에게 구원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자, 그들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대답합니다. 로마서 10장 9, 10절 역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어디에도 모든 사람이 동일한 문장으로 영접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규정은 없습니다. 성경은 회개와 믿음, 주님을 향한 고백과 삶의 변화를 가르치지만, 구원을 특정한 기도문을 암송하거나 따라 말하는 행위에 결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영접기도를 드리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사람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성경이 명시하지 않은 조건을 인간이 덧붙이는 일이 됩니다.

 

여기서 특별히 살펴볼 본문은 누가복음 23장 39–43절에 등장하는 십자가 위의 강도입니다. 그는 전도자의 안내를 받아 영접기도를 드리지 않았고, 교회의 정식 절차를 거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예수님께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낙원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 본문은 구원을 받기 위해 정해진 기도문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반대편 극단으로 넘어가, 죽기 직전 몇 마디 고백만 하면 그 사람의 실제 내적 상태와 관계없이 구원이 자동으로 확정된다고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강도의 내면을 아셨지만,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강도의 짧은 고백 안에 어떤 참된 회개와 신뢰가 있었는지 그 깊이를 완전히 판단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의 핵심은 마지막 순간에 사용할 수 있는 간단한 구원 공식을 발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종교적 절차에 갇히지 않으시며, 그 사람의 실제 내면을 아시고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는 이 문제를 더 깊은 차원에서 조명합니다. 그는 구원하는 신앙이 주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라고 설명하며(TCR.337), 사람이 주님께 나아가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갈 때 신앙이 형성된다고 가르칩니다(TCR.343–348). 여기에는 중요한 순서가 있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은 시작이며,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는 것은 그 시작을 밝히는 과정이고,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것은 배운 진리가 인간의 생명과 결합되는 과정입니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를 나머지와 완전히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영접기도는 주님께 나아가는 마음을 표현하는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문을 따라 말한 사실 자체가 참된 믿음을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입술로 주님을 부르면서도 실제 의지로는 여전히 악을 사랑할 수 있으며, 반대로 아직 기독교 언어와 기도 형식을 배우지 못했더라도 자신이 아는 진리에 충실하고 악을 죄로 여기며 선을 행하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외적 신앙 형식 자체보다 그 형식을 통해 실제로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스베덴보리의 회개론에서 더욱 뚜렷해집니다. 그는 TCR.510–511에서 회개를 인간 안에 교회가 성립하는 첫 번째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TCR.516–519에서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참된 회개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TCR.528–531에서는 실제적인 회개란 자신을 살피고,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인정하며, 주님께 기도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단순한 죄책감이나 종교적 감정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며,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그 악으로부터 돌아서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기도는 결코 불필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일은 회개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참된 의미는 정해진 문장을 정확히 말하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의 의지와 삶을 실제로 주님께 돌이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입술의 고백과 생명의 회개를 구별하는 기준입니다.

 

그렇다면 영접기도를 한 번도 드리지 않은 사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조차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의 구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의 구원론이 전통적인 배타적 구원 이해와 구별되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318–328에서 교회 밖에서 태어난 사람도 자신의 종교에 따라 선하게 살고, 자신이 아는 범위 안에서 신성, 그러니까 신적인 것을 인정하며, 양심에 따라 살아간다면 천국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가 동일한 진리를 가르친다거나, 주님을 믿는 신앙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모든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며, 주님을 명시적으로 알지 못한 사람도 구원받는다면 그 역시 주님에 의해 구원받습니다. 다만 지상에서 특정 종교에 속했는지, 특정 기도문을 사용했는지가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자동으로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신성한 사랑과 섭리는 인간이 태어난 시대와 지역, 종교적 환경이라는 외적 조건보다 훨씬 깊은 차원에서 역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접기도가 무의식 속에서 교리화될 때 발생하는 또 하나의 문제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교회가 정해 놓은 절차를 통과해야만 작동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아직 영접기도를 하지 않았으니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믿거나, 다른 사람이 ‘저 사람은 영접기도를 하지 않았으니 구원받지 못했다’고 단정한다면, 이미 구원을 주님의 신성한 사랑과 지혜보다 인간의 종교적 형식에 더 강하게 연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이 마련한 형식에 의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선과 진리의 생명을 끊임없이 공급하시며, 각 사람이 자신의 자유 안에서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인도하십니다. 사람이 진리를 모르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와, 진리를 알고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이유는 서로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차이를 모두 아십니다. 따라서 누군가의 구원을 판단할 때 단지 영접기도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보시는 인간 내면의 깊이를 외적인 한 가지 사실로 축소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영접기도를 없애야 한다거나 전도 현장에서 더 이상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진지하게 주님께 나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의 용서와 인도를 구하도록 돕는 것은 얼마든지 유익합니다. 처음 신앙을 시작하는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라 도움을 요청한다면, 목회자가 함께 기도문을 만들어 주거나 한 문장씩 인도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기도 자체가 아니라 기도에 부여하는 의미입니다. 기도가 끝난 뒤 ‘이제 영접기도를 했으니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하는 것과, ‘이제 주님께 마음을 열었으니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면서 주님과 더욱 깊이 결합해 갑시다’라고 권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전자는 기도라는 사건을 구원의 완성처럼 받아들이게 만들 위험이 있지만, 후자는 기도를 거듭남의 출발점으로 이해하게 합니다. 전도와 목회의 목적은 사람에게 어떤 종교적 절차를 완료했다는 안도감을 주는 데 있지 않고,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결국 ‘영접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우리가 바로잡아야 할 것은 기도의 중요성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이해입니다. 주님께 나아가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구원을 간구하는 일은 분명히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 소중한 행위가 하나의 필수적인 종교 형식으로 절대화될 때, 우리는 그 형식이 본래 가리키던 실체를 놓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의 입술에서 특정한 기도문이 한 번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과 삶이 실제로 그분을 향해 열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모든 사람을 당신께로 부르시며, 각 사람이 자신의 형편과 이해의 수준 안에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거듭남의 길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나는 영접기도를 했는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나는 지금도 주님께 나아가고 있는가? 내 입술의 기도가 내 의지의 변화로 이어지고 있는가? 내가 고백한 주님께서 실제로 내 삶의 주님이 되어 가고 계시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구원의 본질은 인간이 어떤 기도문을 완성했다는 사실에 있지 않고, 오직 주님께서 인간 안에 새로운 생명을 이루어 가시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영접기도는 주님께 나아가고 믿음을 고백하는 유익한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구원에 반드시 필요한 성경적 절차는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며, 그 구원은 믿음과 회개, 체어리티와 거듭남을 통해 인간의 실제 생명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기도문을 사용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SL.PR.001,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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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01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오류 100선

 

‘천주교회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다’

 

천주교회의 자기 이해를 살펴볼 때 가장 먼저 만나는 명제는 ‘천주교회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다’라는 주장입니다. 천주교는 자신을 수많은 기독교 교파 가운데 하나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신 교회가 역사 속에서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왔으며, 그 교회의 온전한 실재가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과 일치하는 가톨릭교회 안에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여기에는 단순한 교단적 자부심 이상의 신학적 주장이 담겨 있습니다. 곧 교회는 인간들이 신앙의 필요에 따라 만든 공동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구원의 공동체이며, 그 공동체에는 사도적 계승과 성사, 교도권과 교회적 일치가 본질적인 요소로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천주교회와의 완전한 일치는 단순히 어느 교단에 가입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온전한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과연 주님께서 보시는 참된 교회도 우리가 역사적 계보와 제도적 연속성으로 확인하는 바로 그 교회일까요? 주님께서 어떤 공동체를 당신의 교회로 인정하시는 기준은 교황과의 일치, 사도적 계승, 성사의 유효성에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 공동체 안에 실제로 살아 있는 사랑과 신앙에 있는 것일까요?

 

먼저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제8항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유일한 교회가 가톨릭교회 안에 온전히 존속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것은 천주교 밖에는 아무런 진리나 은총도 없으며,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전부 거짓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천주교회는 자신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지 않은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안에도 성화와 진리의 요소들이 존재한다고 인정합니다. 또한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제846, 847, 848항은 교회의 구원적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자기 잘못 없이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고 양심에 따라 선을 행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회만이 참된 교회다’라는 명제를 ‘천주교 신자가 아니면 모두 지옥에 간다’라는 식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천주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온전히 존속하는 유일한 공동체라는 자기 이해를 공식적으로 유지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바로 이 ‘온전한 교회’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검토해야 합니다.

 

성경은 교회를 이해하는 데 전혀 다른 출발점을 제시합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주교는 이 말씀을 베드로의 특별한 사도적 직무와 그 후계자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살펴보면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신다는 사실, 그리고 교회가 주님께 속한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 교회의 영적 생명이 특정한 역사적 조직의 독점적 소유가 된다는 결론까지 본문 자체에서 곧바로 도출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자신을 포도나무로, 제자들을 가지로 말씀하시면서 당신 안에 거하고 당신의 생명을 받는 자가 열매를 맺는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서 교회의 생명은 어느 가지가 먼저 생겼는지, 어느 가지가 다른 가지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지에 있지 않습니다. 모든 가지가 동일한 포도나무로부터 생명을 받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3장 35절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알아보게 하는 표지가 그들 사이의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교회의 참됨을 판단할 때 역사적 연속성이나 제도적 권위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주님과의 살아 있는 결합과 그 결합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의 열매를 살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제318항에서 328항에 걸쳐 이 문제를 더욱 넓은 시야에서 설명합니다. 특히 HH.328은 주님의 교회가 온 지구에 퍼져 있으며, 각자의 종교 안에서 체어리티(charity)의 선을 따라 살아온 사람들이 그 교회에 속한다고 가르칩니다. 동시에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알 수 있는 교회에는 특별한 역할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를 인체의 심장과 폐가 다른 기관들에 생명을 전달하는 관계에 비유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의 차이를 무시하거나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동일하게 참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있고 주님을 알 수 있는 곳에는 특별한 영적 빛과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빛을 받는 공동체가 곧 주님의 교회 전체를 독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간다는 사실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외적 명칭보다 내적 생명에 의해 성립하며, 그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 곧 사랑과 신앙이 실제로 결합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오래된 교회라고 해서 반드시 그 안의 모든 사람이 영적으로 교회에 속하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제도적인 교회의 바깥에 있다고 해서 주님의 교회로부터 영적으로 배제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교회 이해는 천주교의 제도적 교회론과 결정적인 차이를 드러냅니다. 천주교는 가톨릭교회 안에 교회의 온전한 제도적·성사적 실재가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교회의 본질을 주님에게서 비롯되는 사랑과 신앙의 생명에서 찾습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355-367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서로 분리되어서는 참된 생명을 가질 수 없으며, 주님과 체어리티와 신앙이 하나로 결합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회가 얼마나 완전한 교리 체계를 가지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그 교리가 실제로 사람들의 의지와 이해에 들어가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어떤 공동체가 주님에 관하여 정확한 진리를 가르치더라도 그 안에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고 이웃을 위한 사랑이 사라진다면, 그 공동체의 외적 교회성은 내적 교회성을 보증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역사적·제도적 조건 때문에 충분한 기독교 교리를 배우지 못하였더라도, 자신이 이해하는 신적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려 한다면 주님은 그 사람 안에서 구원의 역사를 계속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리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가 존재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진리는 인간이 그것을 소유하고 자랑하도록 주어진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하여 주님을 알고 그분의 사랑에 따라 살아가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적 계승과 교회의 역사적 연속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역사 속에 세우시고, 말씀을 보존하시며, 신앙의 가르침을 다음 세대로 전하도록 섭리하셨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을 필사하고 보존하며, 예배와 성찬을 이어 가고, 신앙 공동체를 조직하고, 세대를 넘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한 일들은 그 자체로 귀중한 쓰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외적인 질서와 제도가 모두 불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영적 생명은 자연계에서 구체적인 형식과 질서를 통해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외적 질서를 교회의 본질 자체와 동일시할 때 발생합니다. 교회 제도는 주님과 인간의 결합을 돕는 수단이지, 주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목적이 아닙니다. 사제와 주교와 교황이든, 목사와 장로와 교회 지도자이든, 그들의 참된 권위는 직위 그 자체에서 영적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맡겨진 진리를 충실하게 가르치고, 그 진리로 사람들을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인도하는 데서 그 정당한 쓰임을 발견합니다. 외적인 계승이 아무리 분명하더라도 내적 사랑이 사라진다면 계승된 것은 교회의 생명이 아니라 교회의 형식에 그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참된 사랑과 신앙이 살아 있는 곳에서는 역사적 계보와 무관하게 주님께서 교회의 생명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별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보편적 교회 이해입니다. HH.318에서 그는 주님의 자비가 보편적이며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HH.328은 말씀과 주님을 아는 교회의 특별한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주님의 교회가 지상의 한 제도적 공동체로 제한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하면 우리가 오랫동안 익숙하게 사용해 온 ‘교회 안’과 ‘교회 밖’이라는 표현 자체를 다시 검토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천주교회의 신자로 등록되어 있고 모든 성사생활에 참여한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자신을 높이고 타인을 멸시하며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신앙을 이용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반대로 천주교회와 아무런 제도적 관계가 없지만, 자신이 아는 진리에 충실하고 양심을 따라 악을 피하며 이웃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어느 쪽을 당신의 교회에 더 가깝다고 보시겠습니까? 물론 이것은 외적인 행위만 보고 인간의 최종적 내면을 판단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배적 사랑과 내적 상태를 온전히 아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이 외적인 소속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여기에는 천주교 신자들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에게 적용되는 경고가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가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이므로 나는 그 안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할 때, 개신교 신자 역시 ‘우리 교회는 성경 중심의 정통교회이므로 나는 바른 신앙 안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고 새 교회의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도 ‘나는 이제 참된 교리를 알게 되었으므로 다른 교회 사람들보다 주님을 더 잘 안다’는 생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모두가 경계해야 할 것은 ‘프로프리움’(proprium), 곧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자신을 중심에 놓으려는 성향입니다. 진리를 알게 된 기쁨이 어느 순간 자신이 옳다는 우월감으로 바뀌고,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절대화하는 마음으로 바뀐다면, 우리는 참된 교회를 말하면서도 정작 교회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어떤 조직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여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그것을 피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선한 쓰임을 행하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참된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주님과 결합하면서 이루어지는 영적 공동체이며, 그 생명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 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천주교회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다’라는 명제에서 우리가 인정해야 할 진리는 교회가 주님의 것이며, 주님께서 역사 속에서 교회를 보존하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말씀과 예배와 신앙 공동체가 인간의 영적 성장에 귀중한 수단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수정되어야 할 부분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온전함을 특정한 역사적 제도와 사도적 계승의 독점적 소유로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어떤 인간 조직의 경계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 그리고 그 사랑을 인도하는 참된 신앙이 살아 있는 곳에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천주교의 모든 신자를 판단하거나 그들의 신앙을 부정하는 결론이 아닙니다. 오히려 천주교 안에도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이웃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 안에도 주님의 교회가 실제로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결론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보여 주는 교회의 보편성은 교파의 차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상대주의가 아니라, 주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이 인간이 세운 제도적 경계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결국 참된 교회에 관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느 교회가 자신을 참된 교회라고 선언하는가?’가 아니라, ‘어느 곳에서 주님의 진리가 사랑의 생명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가?’입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참된 교회는 특정한 교회 조직이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들의 마음과 삶 안에서 결합하여 실제로 살아 있는 곳에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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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PR.001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교리화된 오류 100선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았다’ - 영접과 거듭남 사이에서 사라진 것

 

개신교 신앙생활에서 가장 익숙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확신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으므로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때도, 전도집회에서 결신을 요청할 때도,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에게 구원의 확신을 확인할 때도 이 표현은 반복됩니다. 어떤 사람은 수십 년 전 어느 부흥회에서 영접기도를 드렸던 순간을 기억하며 자신의 구원을 확신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날 이후 별다른 내적 변화가 없었더라도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만큼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려는 소중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영접이라는 한 번의 행위가 그 이후의 삶과 관계없이 영원한 구원을 확정한다는 생각으로 발전할 때,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구원과 거듭남의 관계를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표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은 주님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문제는 여기서 말하는 ‘영접’을 무엇으로 이해하느냐입니다.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이 단지 예수님에 관한 특정한 교리들을 사실로 인정하거나, 정해진 기도문을 따라 말하거나, 어느 순간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것만을 의미한다면, 이것은 주님께서 직접 가르치신 영접의 의미를 지나치게 좁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4장 21절에서 자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자신을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시고, 23절에서는 자신을 사랑하여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오셔서 거처를 함께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을 마음속에 모셔 들였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실제로 그분과 결합해 가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는 개신교의 구원 이해에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구원하는 신앙이 주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라고 밝히면서, 참된 신앙의 핵심을 올바르게 믿고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주님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것으로 설명합니다(TCR.337–342). 또한 신앙은 주님께 나아가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갈 때 형성된다고 가르칩니다(TCR.343–348).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에 의해’라는 표현입니다. 인간이 선하게 살아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획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을 구원하시는 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주님이십니다. 다만 인간은 주님의 구원하시는 역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그 역사에 협력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들어오시기를 원하시더라도, 사람이 자신의 악을 사랑하고 진리를 거부한다면 주님의 생명이 그 사람 안에서 온전히 활동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구원은 단순히 인간의 법적 신분이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뀌는 사건이 아닙니다. 구원은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주님에 의해 새로워지고, 사랑의 방향이 바뀌며, 악을 즐거워하던 사람이 점차 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실제적인 변화입니다. 이것은 단번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처음에는 진리를 배우고 인정하는 단계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 진리로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여 악을 멀리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 과정에서 주님은 인간에게 새로운 애정과 새로운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이 단지 과거에 있었던 영접의 순간에만 의존한다면, 정작 구원의 실질적인 내용인 거듭남은 신앙생활의 주변부로 밀려날 수 있습니다. 이는 ‘새 예루살렘과 그 천적 교리’(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1758)에서 교리를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교회가 사람 안에 성립하지 않으며, 그 교리에 따른 삶이 있어야 한다고 설명하는 내용과도 연결됩니다(NJHD.243).

 

그렇다면 에베소서 2장 8절로 9절의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라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말씀은 구원이 인간의 공로나 자랑에서 비롯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선과 진리의 생명이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10절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존재임을 밝힙니다. 은혜와 선행은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생명의 근원이고, 믿음은 그 생명을 받아들이는 길이며, 선행은 그 생명이 삶에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더욱 정확히 말하면, 참된 믿음과 체어리티는 주님 안에서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를 이룹니다. 스베덴보리는 믿음 없는 체어리티도, 체어리티 없는 믿음도 참된 생명을 갖지 못한다고 설명합니다(TCR.355–361). 따라서 선하게 사는 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이해하여 자기 공로를 주장하는 것도 오류이지만, 선하게 사는 문제를 구원과 분리하여 사실상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것 역시 오류입니다.

 

여기에는 더욱 깊은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이 ‘나는 이미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한 최종 판결처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자기 자신을 살피고 회개하는 일에 무감각해질 위험이 있습니다. 물론 구원의 확신을 가진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확신이 오히려 감사와 순종의 삶을 북돋우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영접의 사실만을 절대화하면,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이웃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한지, 자신의 욕망과 분노와 교만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에 관한 질문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악을 변명하면서도 ‘그래도 나는 예수님을 믿으니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인간의 ‘프로프리움’(proprium), 곧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에 놓으려는 성향이 신앙의 언어를 이용할 가능성이 나타납니다. 본래 주님께 자신을 맡기기 위한 믿음이 어느 순간 자기 상태를 보증하는 수단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신앙이 주님을 향하는 대신, 자신이 확보했다고 생각하는 구원의 지위를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자신을 향하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특정한 신앙고백이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입술의 고백과 실제 삶이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 말씀을 이용하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구원을 인간이 최종적으로 판정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만이 사람의 내면과 지배적인 사랑을 완전하게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저 사람은 영접기도를 했으니 구원받았다’거나 ‘저 사람은 제대로 된 영접기도를 하지 않았으니 구원받지 못했다’는 판정이 아닙니다. 참된 질문은 그 사람이 주님께로 향하고 있는가,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 진리로 악을 멀리하며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변화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변화마저 사람의 외적 행위 몇 가지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성경은 구원을 단지 한순간의 종교적 선언으로 축소하지 않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았다’는 말에서 우리가 보존해야 할 진리는 구원의 근원이 오직 주님이라는 사실이며, 바로잡아야 할 오류는 그분을 한 번 영접했다고 선언하는 것만으로 거듭남의 모든 문제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단지 인간을 천국에 들여보내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죄와 악의 지배에서 건져 내어 천국의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새롭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 더욱 중요한 질문은 ‘나는 언제 예수님을 영접했는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나는 오늘도 주님을 영접하고 있는가? 그분의 진리가 내 생각을 바꾸고, 그분의 사랑이 내 의지를 바꾸며, 그분의 생명이 내 삶에서 이웃을 향한 선으로 나타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과거의 영접기도 한 번으로 만족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셔서 함께 거하시며 마침내 우리를 당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새롭게 하기를 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영접은 참된 신앙의 시작이 될 수 있지만, 영접의 선언 자체가 거듭남의 완성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며, 인간은 믿음과 체어리티가 결합되는 삶을 통하여 주님의 구원하시는 역사를 받아들입니다.

 

 

 

SL.PR.002, ‘영접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SL.PR.002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교리화된 오류 100선 ‘영접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영접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 주님께 나아가는 길을 하나의 기도문에 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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