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06.심화

 

2. ‘주님의 영원하신 사랑과 자비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인정하지 않는데, 이는 멸망하는 짐승들과 자신들을 같게 여기기 때문이며, 주님을 인정하지도 않고, 오직 자기 자신과 자연만을 숭배합니다. 그들 가운데 말에 신중하려는 자들은, 그 본질은 알지 못하지만, 어떤 최고 존재[ens]가 만물을 다스린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감각과 기억 지식의 것들로 여러 방식으로 스스로를 확증하는 원리들이며, 만일 감히 할 수만 있다면, 온 우주 앞에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지혜이며,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열린 눈(open eyes)이며, 이러한 신들(gods)입니다. 그들이 한낮보다 더 분명하다고 여기는 이러한 원리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계속 나아가며, 이런 방식으로 신앙의 신비들에 대해 추론하는데, 그 결과가 무엇이겠습니까? 어둠의 심연일 뿐입니다. 이들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세상을 미혹하는 뱀들(serpents)입니다. they do not acknowledge an eternal life; for they believe themselves to be like the brutes which perish; neither do they acknowledge the Lord, but worship only themselves and nature. Those among them who wish to be guarded in their expressions, say that a certain supreme existence [ens] of the nature of which they are ignorant rules all things. These are the principles in which they confirm themselves in many ways by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and if they dared, they would do the same before all the universe... Such is their wisdom, such “open eyes” have they, and such “gods” are they. Principles like these, which they think clearer than the day, they make their starting point, and so continue on, and in this way reason about the mysteries of faith; and what can be the result but an abyss of darkness? These above all others are the “serpents” who seduce the world. (AC.206)

 

주님은 그럼에도 불구, 저런 사람들에게도 끝까지 볕과 비를 내리시고, 지상의 삶은 물론, 사후 지옥으로 뛰어들 때까지 보살피시네요...

 

 

네, 목사님께서 짚으신 부분이야말로 AC.206을 읽으며, 가장 깊은 감동을 받게 되는 지점 가운데 하나인 것 같습니다.

 

사실 AC.206의 묘사는 상당히 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람들을 ‘세상을 미혹하는 뱀들’이라고까지 부릅니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고, 주님을 인정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과 자연을 숭배하고, 신앙의 신비들을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심판합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상태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들을 함께 읽어보면, 주님은 그런 사람들조차 단 한 순간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선한 사람들만의 주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햇빛이 의인과 악인 위에 함께 비치고, 비가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위에 함께 내리는 것처럼, 주님의 생명과 인플럭스는 천국에 갈 사람에게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지옥으로 가는 사람에게도 계속 흐릅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지옥에 있는 자들조차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지 않으면 단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차이는 생명이 어디서 오느냐가 아니라, 그 생명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있습니다. 천사는 그것을 사랑과 지혜로 받아들이고, 악한 영은 그것을 자기 사랑과 지배욕으로 왜곡하여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생명 자체는 여전히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목사님 말씀처럼, 주님은 저런 사람들에게도 끝까지 볕과 비를 내리십니다. 그들이 지상에 사는 동안에도 그렇고, 죽은 후 중간 영계에 있는 동안에도 그렇고, 심지어 그들이 최종적으로 지옥을 선택하는 순간에도 그렇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은 누구도 지옥으로 보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끝까지 천국으로 이끌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기 사랑이 너무 강하여 결국 주님의 질서보다 자신의 삶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저는 AC.182-189의 사후 첫 상태가 떠오릅니다. 목사님께서 여러 번 감탄하셨듯이, 주님은 사람이 죽은 직후 그가 누구였는지, 어떤 신앙을 가졌는지, 얼마나 완고했는지를 먼저 따지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천적 천사들에게 맡기시고, 사랑과 평안 가운데 보호하시며, 마치 어린아이가 잠에서 깨어나듯 조심스럽게 인도하십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AC.206의 저런 사람들조차 죽는 순간에는 주님의 품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에게도 동일한 사랑을 베푸십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가 진정 사랑하는 것이 드러나고, 결국 스스로 자신과 가장 비슷한 공동체를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지옥론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주님의 사랑이 천국 문턱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주님을 거부할 수 있지만, 주님은 인간을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등을 돌릴 수 있지만, 주님은 끝까지 등을 돌리지 않으십니다.

 

어쩌면 AC.206을 읽으며 우리가 정말 놀라워해야 할 것은 저 사람들의 어둠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에게조차 결코 끊어지지 않는 주님의 인내와 자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한 가지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은 주님께서는 언제나 인간보다 먼저 사랑하시고, 인간보다 오래 기다리시며, 인간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지옥으로 뛰어들 때까지 보살피신다’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를 매우 잘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마지막 순간에도 주님은 그 사람이 방향을 돌리기를 바라시며 손을 내밀고 계신다는 점까지 함께 기억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AC.206, 창3:4-5, ‘너희 눈이 밝아져’가 실제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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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6, 심화 1, ‘실제 경험 사례들인가?’

AC.206.심화 1. ‘실제 경험 사례들인가?’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들이거나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로 여겨지기를 원하지만, 만일 ‘자신의 own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무엇이냐’(whether they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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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6.심화

 

1. ‘실제 경험 사례들인가?’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들이거나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로 여겨지기를 원하지만, 만일 자신의 own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무엇이냐(whether they know what it is not to have anything of their own)고 묻는다면, 그것은 곧 아무런 존재도 가지지 않는 것이며, 자신의 own이 모두 제거된다면 자신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만일 주님으로부터 사는 것이 무엇이냐(what it is to live from the Lord)고 묻는다면, 그것을 공상으로 여길 것입니다. 만일 양심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서민들을 억제하는 데 쓰이는 상상의 산물일 뿐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지각(perception)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그것을 비웃으며, 광신적인 헛소리라 부를 것입니다. Although such persons desire to be regarded as gods, or as the wisest of men, if they were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it is not to have anything of their own, they would answer that it is to have no existence, and that if they were deprived of everything that is their own, they would be nothing. If they are asked what it is to live from the Lord, they think it a fantasy. If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conscience is, they would say it is a mere creature of the imagination, which may be of service in keeping the vulgar under restraint. If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perception is, they would merely laugh at it and call it enthusiastic rubbish. (AC.206)

 

위 내용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경험한 것들 같아요.

 

 

네, 저도 AC.206을 읽으면 그런 인상을 받습니다. 물론 학문적으로는 조심해서 말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특정 개인들과 나눈 실제 대화를 그대로 기록한 것인지, 아니면 그가 관찰한 인간 유형을 대표적으로 묘사한 것인지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작 전체를 읽어보면, 이 대목은 단순한 철학적 가정이라기보다 그가 오랫동안 직접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쓰고 있다는 느낌이 매우 강합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AC.206의 논리가 지나치게 생생하다는 점입니다. 그는 단순히 ‘그들은 영적인 것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씩 질문을 던집니다. ‘자신의 own이 없는 상태가 무엇인지 아는가?’, ‘주님으로부터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양심이 무엇인지 아는가?’, ‘지각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리고 각각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마치 실제 사람들과 수없이 대화해 본 사람이 하는 설명처럼 보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이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낯설지 않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own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은 공상이다’, ‘양심은 사회 질서를 위한 심리적 장치일 뿐이다’, ‘지각 같은 것은 광신이다’라는 생각은 18세기에도 있었겠지만, 어쩌면 21세기에는 더 흔해졌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206을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특정 시대의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own을 절대화하는 인간 정신의 한 유형을 묘사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또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은, 그가 비판하는 대상이 무식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는 ‘세상 학문에 뛰어난 사람들’, ‘가장 지혜롭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지식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태도를 비판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 자신이 당대 유럽 최고의 과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AC.206을 읽을 때마다 스베덴보리가 영계 체험 이전의 과학자 스베덴보리와, 영계 체험 이후의 계시자 스베덴보리, 두 삶을 모두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는 학문과 철학의 세계도 깊이 알고 있었고, 동시에 영계에서 천사들과 영들과의 교류도 경험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단순한 교리적 주장이라기보다, ‘나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보았고, 그들의 생각이 어디까지 가는지 보았다’는 증언처럼 읽히는 면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AC.206을 읽으며 곧바로 ‘세상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다 틀렸다’는 결론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학문 자체가 아니라, 학문을 최종 권위로 삼는 태도에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평생 쌓은 과학 지식을 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주님의 질서 안에서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결국 AC.206은 단순한 논쟁문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오랜 세월 관찰한 인간 정신의 한 극단을 보여 주는 글로 읽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말씀처럼, 그 생생함 때문에 독자는 종종 ‘이건 실제로 스베덴보리가 만나고 경험한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 느낌이 충분히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AC.206, 심화 2, ‘주님의 영원하신 사랑과 자비’

AC.206.심화 2. ‘주님의 영원하신 사랑과 자비’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인정하지 않는데, 이는 멸망하는 짐승들과 자신들을 같게 여기기 때문이며, 주님을 인정하지도 않고, 오직 자기 자신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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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6, 창3:4-5, ‘너희 눈이 밝아져’가 실제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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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surely die. For God doth know that in the day ye eat thereof, then your eyes shall be opened, and ye shall be as God, knowing good and evil. (3:4, 5)

 

AC.206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세상 학문에 뛰어난 자들보다, 자기들의 눈이 열려 있고, 하나님과 같이 선악을 안다 더 굳게 믿는 자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누가 더 눈먼 자들이겠습니까? 그들에게 질문해 보기만 하면, 그들이 영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고, 더더욱 그것을 믿지도 않으며, 영적 생명과 천적 생명의 성질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인정하지 않는데, 이는 멸망하는 짐승들과 자신들을 같게 여기기 때문이며, 주님을 인정하지도 않고, 오직 자기 자신과 자연만을 숭배합니다. 그들 가운데 말에 신중하려는 자들은, 그 본질은 알지 못하지만, 어떤 최고 존재[ens]가 만물을 다스린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감각과 기억 지식의 것들로 여러 방식으로 스스로를 확증하는 원리들이며, 만일 감히 할 수만 있다면, 온 우주 앞에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들이거나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로 여겨지기를 원하지만, 만일 자신의 own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무엇이냐(whether they know what it is not to have anything of their own)고 묻는다면, 그것은 곧 아무런 존재도 가지지 않는 것이며, 자신의 own이 모두 제거된다면 자신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만일 주님으로부터 사는 것이 무엇이냐(what it is to live from the Lord)고 묻는다면, 그것을 공상으로 여길 것입니다. 만일 양심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서민들을 억제하는 데 쓰이는 상상의 산물일 뿐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지각(perception)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그것을 비웃으며, 광신적인 헛소리라 부를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지혜이며,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열린 눈(open eyes)이며, 이러한 신들(gods)입니다. 그들이 한낮보다 더 분명하다고 여기는 이러한 원리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계속 나아가며, 이런 방식으로 신앙의 신비들에 대해 추론하는데, 그 결과가 무엇이겠습니까? 어둠의 심연일 뿐입니다. 이들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세상을 미혹하는 뱀들(serpents)입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이 후손은 아직 이러한 상태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한 상태가 된 것은 이 장의 14절부터 19절에서 다루어집니다. Who have a stronger belief that their eyes are open, and that as God they know what is good and evil, than those who love themselves, and at the same time excel in worldly learning? And yet who are more blind? Only question them, and it will be seen that they do not even know, much less believe in, the existence of spirit; with the nature of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they are utterly unacquainted; they do not acknowledge an eternal life; for they believe themselves to be like the brutes which perish; neither do they acknowledge the Lord, but worship only themselves and nature. Those among them who wish to be guarded in their expressions, say that a certain supreme existence [ens] of the nature of which they are ignorant rules all things. These are the principles in which they confirm themselves in many ways by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and if they dared, they would do the same before all the universe. Although such persons desire to be regarded as gods, or as the wisest of men, if they were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it is not to have anything of their own, they would answer that it is to have no existence, and that if they were deprived of everything that is their own, they would be nothing. If they are asked what it is to live from the Lord, they think it a fantasy. If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conscience is, they would say it is a mere creature of the imagination, which may be of service in keeping the vulgar under restraint. If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perception is, they would merely laugh at it and call it enthusiastic rubbish. Such is their wisdom, such “open eyes” have they, and such “gods” are they. Principles like these, which they think clearer than the day, they make their starting point, and so continue on, and in this way reason about the mysteries of faith; and what can be the result but an abyss of darkness? These above all others are the “serpents” who seduce the world. But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as yet of such a character. That which became such is treated of from verse 14 to verse 19 of this chapter.

 

 

해설

 

이 단락은 창3의 ‘눈이 열렸다’는 약속이 역사 속에서 어디까지 전개될 수 있는지를, 거의 예언적이라고 할 만큼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 사랑과 세속적 학문이 결합될 때 나타나는 최종 형태를 가차 없이 묘사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눈이 열려 있고, 선악을 분별하며,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고 가장 강하게 확신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확신이 가장 깊은 ‘눈멀음(blindness)의 증거입니다.

 

이들이 보이는 첫 번째 특징은 영적 실재의 전면 부정입니다. 그들은 영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으며, 영적 생명과 천적 생명이 무엇인지조차 모릅니다. 이는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감각과 지식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원리적 배제입니다. 그 결과 영원한 생명은 부정되고, 인간은 멸망하는 짐승과 동등한 존재로 격하됩니다.

 

이 상태에서 주님은 더 이상 인식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인정하지 않고, 대신 자기 자신과 자연을 숭배합니다. 다만 외적으로 조심스러운 이들은 어떤 ‘최고 존재’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그것은 인격적 주님이 아니라, 본질을 알 수 없는 추상적 원리일 뿐입니다. 이 역시 감각과 지식의 틀 안에서 허용되는 최소한의 형식적 신(神) 개념에 불과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들의 사고 구조를 매우 정확히 짚습니다. 그들은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자신의 원리들을 끊임없이 확증하며, 그 확신을 공적인 자리에서도 거리낌없이 드러내려 합니다. 이들에게 진리는 발견의 대상이 아니라, 이미 설정된 전제 위에서 재확인되는 도구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을 ‘’이나 ‘가장 지혜로운 자’로 여기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을 질문으로 드러내 보면, 실상이 분명해집니다. ‘자신의 own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 앞에서, 그들은 그것을 곧 존재의 소멸로 이해합니다. 이는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사는 존재라는 가장 근본적인 진리를 전혀 알지 못함을 드러냅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는 삶은 그들에게 공상으로 취급됩니다.

 

양심과 지각에 대한 반응은 더욱 결정적입니다. 양심은 사회 통제를 위한 허구로, 지각은 광신적 환상으로 조롱됩니다. 이는 인간 안에 남아 있는 마지막 영적 기관들마저 부정하는 상태이며, 이 지점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완전히 감각과 자연의 닫힌 체계 안에 가두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상태를 ‘지혜’라고 자처하는 것 자체를 아이러니로 폭로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열린 눈이며,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신성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들을 출발점으로 신앙의 신비를 추론할 때 도달하는 곳은, 빛이 아니라 ‘어둠의 심연’뿐입니다. 이는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인식 구조의 필연적 귀결입니다.

 

이들이야말로 세상을 미혹하는 참된 ‘뱀들’입니다. 여기서 뱀은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학문이 결합된 가장 교묘한 형태의 감각적 이성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중요한 선을 긋습니다. 창3:4-5에서 다루어지는 태고교회의 이 후손은 아직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의심과 자기 인도의 문턱에 서 있었을 뿐이며, 완전한 전도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완전한 전도, 곧 저주와 형벌로 상징되는 상태는 14-19절에서 다루어집니다. AC.206은 따라서 하나의 경고이자 전환점입니다. ‘눈이 열린다’는 약속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면서, 동시에 지금 다루고 있는 본문이 아직 마지막 단계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창3을 읽는 독자에게, 지금 자신이 어느 단계에 서 있는지를 조용히 묻게 만드는 매우 날카로운 대목입니다.

 

 

심화

 

1. ‘실제 경험 사례들인가?’

 

 

AC.206, 심화 1, ‘실제 경험 사례들인가?’

AC.206.심화 1. ‘실제 경험 사례들인가?’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들이거나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로 여겨지기를 원하지만, 만일 ‘자신의 own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무엇이냐’(whether they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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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님의 영원하신 사랑과 자비

 

 

AC.206, 심화 2, ‘주님의 영원하신 사랑과 자비’

AC.206.심화 2. ‘주님의 영원하신 사랑과 자비’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인정하지 않는데, 이는 멸망하는 짐승들과 자신들을 같게 여기기 때문이며, 주님을 인정하지도 않고, 오직 자기 자신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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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5, 창3:4-5, 창3의 서술, ‘상태의 연속적 변화’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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