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한발 물러나기 (2025/4/25)

 

천국에 대해 더욱 알아갈수록 시야, 그러니까 세상일에 대한 시야가 점점 또렷해지고, 그에 따른 마음이 더욱 평안하여짐을 뚜렷하게 느낍니다. 주님 말씀하신,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4:27)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

 

비로소 이 말씀들의 의미를 알 것도 같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 땅에서 근심하고 걱정, 염려하는 것들을 그러나 하늘의 천사들은 전혀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니 할 수도 없는 게, 그들은 삼위일체 전능하신 하나님을 주님으로 매 순간 그분의 면전에서 살며, 그분에 관한 신성, 곧 선과 진리로 가득한 천국의 공기, 대기 가운데 호흡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단 한 순간도 주님을 떠나 살 수도, 깜빡 주님을 까먹고 뭘 할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루 24시간 주목하는 대상과 천사들이 주목하는 대상 차이가 이런 차이를 가져옵니다.

 

이것이 곧 그럼, 세상 직업 버리고 산속이나 골방에서 신령한 책만 읽고, 수도 생활만 하라는 말이겠습니까? 그게 아닌 게, 오히려 세상 등지고 산속에 들어간 사람들 중 상당수가 겉과 달리 그 속은 여전히 세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무슨 봉쇄 수도를 한다고 해서 저 천사들처럼 저절로 주님과 연결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11:9)

 

우리의 신앙이 참 신앙이 되려면 위 말씀처럼 세상 지식으로 충만할 게 아니라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야 할 것입니다. 그 한 가지 방법은 천국을 아는 것인데요, 그러면 그런 천국을 설계하신 분 또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방법이라 했지만, 사실은 아마 유일한 방법일 겁니다. 우리는 주님을 직접 알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천국을 통해 간접적으로 아는 게 아마 가장 확실한, 그리고 유일한 방법일 것입니다. 제가 경험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천국을 알 수 있는, 역시 거의 유일한 방법은 주님의 허락으로 천국을 가 본, 그리고 역시 주님의 허락으로 지상 언어로 기술한 사람이 남긴 기록을 접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기록이 있겠지만, 저의 경우는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 1688-1772, 스웨덴)라는 사람이 남긴 기록으로, 그의 수많은 저서 중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From Things Heard and Seen, 1758, 라틴, 김은경 역)이라는 책을 통해서였습니다. 물론 주님의 허락으로 직접 천국을 다녀오는 방법도 있으나 이건 우리가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서 좀...

 

이 글 제목처럼 세상에서 한발 물러나는 걸 익히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야 할 사실이 있는데요, 바로 질서에 관한 것입니다.

 

두 종류의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는 밑에서 위를 추구하는 게 있고, 다른 하나는 그 정반대, 곧 위에서 밑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질서가 있습니다. 후자가 참 질서이며, 거룩한 질서, 신성한 질서(Divine order)입니다. 바로 그 근원이 주님이시기 때문이지요. 반면, 전자는 진리를 역행함, 곧 주님이 ‘바늘귀로 들어가려는 낙타’(마19:24)로 표현하신 불가능한 질서입니다. 이는 그 근원이 인간의 자아이며, 이 세상이어서 그 결과는 지옥입니다. 후자는 천국이지만 말입니다.

 

분명, 세상 지식이 전혀 없으면 우리는 이 땅에 살 수도 없고, 거듭남의 첫발도 뗄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처음 세상 지식을 통해 이 세상 삶 걸음마를 떼도록 하신 것은 우리를 거듭남 전 과정에 입문케 하시기 위함이었고, 그러므로 그 역할을 다했으면 이제 세상 지식은 옆으로 비켜나고, 우리는 주님의 인도를 받아 거듭남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 이것이 주님의 질서입니다.

 

주님의 질서는, 주님을 근원으로 출발, 천국을 적시고, 우리 거듭남을 시작한 사람의 속 사람으로, 그리고 최종 겉 사람에 종착하는 질서입니다. 우리의 겉 사람이 주님 신성이 흘러들어오는 속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 이것이 주님의 질서입니다. 사람이 이 질서 안에 있게 되면, 세상에서 한발 물러날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물러나는 만큼, 그는 주님의 임재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붙잡혀 있으면, 주님은 우리에게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심지어 주님이 안 보이는 나라 사랑조차도 말입니다.

 

천국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래서 그런 천국을 설계하신 분의 어떠하심을 깊이 느끼면 느낄수록 세상 근심 걱정이 희미해져 갑니다. 심지어 생활비 걱정, 노후 건강 걱정, 자식들 걱정, 이 나라 차기 대통령 걱정, 그리고 혹시 나라가 공산화될 걱정 등등으로부터 말입니다. 주님도 위 요한복음 말씀에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하셨어요.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말입니다. ‘나 떠나고 큰 환난이 올 텐데 너희는 나의 제자이니 내가 특별히 너희만큼은 환난을 피하게 해주마...

 

제가 참 좋아하는, ‘천국과 지옥’ 31장, ‘천국 천사들의 순진한 상태(The State of Innocence of the Angels of Heaven, 276-283) 중 278번 글 일부 인용으로 마치겠습니다.

 

그들은 많든 적든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한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만 주어진다는 것을, 즉 조금 필요한 사람은 조금 받고, 많이 필요한 사람은 많이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지 우리는 모른다는 것, 오직 모든 것을 살피시고 영원한 것을 섭리하시는 주님만이 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They live contented with their own, whether it is little or much, because they know that they receive just as much as is good for them— those receiving little for whom a little is useful, and those receiving much for whom much is useful; also they do not themselves know what is good for them, the Lord alone knowing this, who looks in all things that he provides to what is eternal. (HH.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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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이 듣고 싶어 하는 말로 대답하기 (2025/4/23)

 

이 말은 얼핏 상대방에게 아부하라는 말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런 말이 아니라 상대방이 감당할 수 있는 말로 대답하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내면이 열린 만큼만 들으며,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브리엘 앞에 사가랴처럼, 주님이 말씀하시는데 들을 역량이 안 되면 그가 들릴 때까지 잠시 벙어리가 되는 일도 일어나지요. 그러니까 이젠 그만 깨달아야 하는데 자만과 교만, 자기 사랑, 세상 사랑 등으로 좀체 정신 못 차리면 차릴 때까지 다시, 다시 하며 비슷한 패턴의 불행한 일이 계속 반복되기도 합니다. 제 경우엔, 기억나는 큰 것만 한 서너 가지가 있었네요... 이 역시 우리를 성장케 하시는 주님의 사랑의 섭리이시지만, 그러나 그 과정을 통과하는 본인은 죽을 맛입니다.

 

다른 말로는 하나님이 듣고 싶어 하시는 대답을 하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즉 정답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해야 한다는 것은, 세상에 태어나 어떤 인생을 살든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니까요. 창세기를 비롯, 구약 중 말씀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 하나하나가 사실은 주님의 표상이었듯 우리네 인생 역시 둘 사이 대화든 셋 사이 대화든, 아니 그 이상이든 사실은 주님 앞에 입을 여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 요셉이 그랬고, 요셉 앞에 유다가 그랬으며, 여러 왕을 섬겼던 다니엘이 그랬습니다. 이슬에 젖으며 짐승처럼 풀을 먹던 느부갓네살이 그랬고, 완전 상거지가 되어 아버지를 찾아간 둘째 또한 그랬습니다. 

 

26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7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민14:26-30)

 

그냥 힘들어 무심코, 그리고 부주의하게 내뱉은 불평 한마디 한마디가 사실은 하나님 앞에 하는 것임을 저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무서운 말씀입니다.  

 

천사들이 늘 주님의 얼굴을 향하듯, 사실은 주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천사들을 늘 주님을 향하게 하시는 것이지만, 세상 가운데서 구별되어 사실은 늘 주님을 향하고 있는 우리 역시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단순한 일대일 대화든지, 일대다 무슨 팀 회의든지 우리는 늘 주님을 생각하고 입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천사들이 전하는 말은 100% 주님 뜻, 자기 생각은 전혀 그 안에 담기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흐릿하고 모자라지만, 그래도 천진난만하게 저 천사들처럼 주님을 바라면 저들과 똑같이 지금도 주님은 그때그때 해야 할 말을 우리 입에 넣어주십니다. 아래 말씀처럼 말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14:26)  

 

덧붙이자면, 그러므로 누가 나한테 하는 말에 너무 일희일비할 필요 없습니다. 무시와 모욕, 수치를 당해도 그러려니... 즉, ‘주님의 무슨 허락 있으신 게지...’ 하고, 칭찬과 영광 앞에서는 ‘이런 건 주님이 받으셔야...’ 하는 게 안전합니다. 중요한 건, 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라 내 모습으로 계신 주님을 향한 사람들의 평가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집중하시면, 그다음부터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 하던 잘 안 들립니다. 그냥 덤덤해지지요. 잘 모르겠으면, 천사들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들 할까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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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이단(heresy)인가? (2025/4/21)

 

오늘날 저마다 무슨 이단 대책 위원회다, 이단 심판, 혹은 판정 위원회다 하여 열심히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성을 다합니다. ‘현대종교’라는 앱을 켜면 수많은 이단 목록이 나오지요. 전에는 저도 여기를 자주 찾곤 했습니다. 이 모든 분들의 노고를 모르는 바 아니며, 한편으론 감사한 마음도 있습니다.

 

시야가 좀 더 높아진, 그리고 넓어진 지금은, 그러나 이 ‘이단’(heresy)에 대한 생각이 좀 달라졌습니다. 지금의 저 이단 판정의 기준은 ‘교리’인데요, 즉 내 교리를 기준으로 봤을 때, 너는 틀렸다 판정하는 것이 지금의 이단 판정입니다. 교리라는 것은 진리에서 추출하는 것이므로, 그러니까 내가 진리라고 믿는 것들로 봤을 때, 네가 믿는 진리는 틀렸다는 것이죠.

 

이런 모습은 ‘영적인 사람들’(the spiritual)의 일반적 특징인데요, 놀라운 것은, 이들은 ‘지적인 면’(the intellectual part)으로만 거듭날 수 있어, 주님은 이들 역시 온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새로운 의지를 심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저마다 믿는 그 교리 눈높이에 맞춰서 말이죠. 그러니까 누구나 자기가 믿는 교리에 따라 선을 행하면 천국 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 묻은 좀 어설픈 오류들은 천국에 오르기 전 다 정돈되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중요한 건, 교리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자기 교리에 녹아져 들어간 주님의 신성을 따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천국에 합당한 선이 구비되기 때문인데, 천국은 선의 나라이므로 이는 매우 중요한 필수 구비 요건 중 하나입니다. 참고로, 그러나 이 선을 행하는 것 또한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는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 책 창세기에 나오는 첫 번째 이단이 가인입니다. 창세기 첫 1, 2, 3장의 태고교회는 사랑으로 주님을 신앙하는 교회였으나, 창세기 4장,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는 사람들이 일어납니다. 바로 가인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가인과 아벨이 나오는데요, 이들의 속뜻을 살펴보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가인’(Cain)이라 하고,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를 ‘아벨’(Abel)이라고 합니다.

 

이것입니다. 이것이 이단의 기준입니다. 즉 가인 편에 서면 이단, 아벨 편에 서면 정통(?), 그러니까 안전합니다.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사랑과 신앙이 일치하는가? 그러니까 나는 주님 사랑 따로, 주님 신앙 따로인가 아닌가 말이죠. 말로만, 립 서비스로만 이웃 사랑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글 쓰는 저 자신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네요... 어쩌면 우리 모두 여전히 가인의 후손, 후예인지 모르겠어요. 이런 우리를 건사하여 주시는 주님,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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