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8.심화

 

1. 인간의 황폐(the vastation of man)

 

AC.18해설 중 황폐를 설명하는 데를 보면, 욕정과 거짓들이 먼저 약화되고,제거되어야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우선 이 약화된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고, 그래서 더욱 제거된다는 게 가능할까 싶습니다. 15돌아온 탕자가 스스로 돌이키는 장면이 이런 건가요? 구체적으로 좀 알고 싶습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의문은 매우 현실적인 질문입니다. ‘욕정과 거짓이 약화되고 제거된다’는 말은 글로 읽으면 그럴듯하지만, 실제 인간 경험을 생각해 보면,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한가?’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도 바로 이 지점 때문에 AC에서 ‘황폐(vastation, desolation)라는 상태를 설명합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먼저 ‘약화’와 ‘제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제거’는 ‘완전히 없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의 악한 성향이나 욕정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여러 곳에서 인간의 본성에는 여전히 그런 것들이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차이가 있습니다. 거듭남 이전에는 그것들이 ‘사람을 지배’하지만, 거듭남 이후에는 그것들이 ‘더 이상 중심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제거된다’는 표현을 사용할 때 사실상 ‘지배력을 잃는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여기서 ‘약화된다’는 표현이 먼저 나오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욕정이나 거짓이 한 번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점차 힘을 잃어 가는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명예욕이 강했다고 합시다. 이전에는 인정받지 못하면 크게 분노하고, 사람을 경쟁자로만 보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은 점점 그런 반응을 덜 하게 됩니다. 여전히 마음속에는 그런 감정이 올라올 수 있지만, 이전처럼 바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약화’입니다. 욕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삶을 지배하는 힘이 줄어든 상태입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AC에서 말하는 ‘황폐’입니다. 황폐는 단순한 고통이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환상이 무너지는 경험’을 말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선하고 의로운 존재라고 생각하다가, 어떤 사건을 통해 자기 안에 있는 욕정과 이기심을 분명히 보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 사람은 자신을 의지하기보다 주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서 욕정의 힘이 점점 약해집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눅15의 탕자 이야기는 바로 이런 과정을 아주 잘 보여 주는 예입니다. 탕자는 처음에는 자유와 즐거움을 찾아 집을 떠납니다. 그때 그는 자기 선택이 옳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이 무너지고, 돼지를 치는 자리까지 내려갑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절이 ‘이에 스스로 돌이켜’라는 부분입니다. 이 장면은 단순히 마음이 갑자기 착해진 순간이 아니라, ‘자기 삶의 허망함을 뼈저리게 깨닫는 순간’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의미에서 ‘황폐’에 가까운 상태입니다.

 

탕자의 마음을 조금 더 자세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는 갑자기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배고프고, 여전히 살 길을 찾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가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자기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욕정의 지배력이 약해집니다. 이전에는 자기 욕망이 삶의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더 이상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거듭날 때, 욕정이 단번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욕정이 중심 자리에서 밀려나는 과정’이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약화’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가 지속되면 결국 욕정은 더 이상 삶을 결정하는 힘을 갖지 못합니다. 이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제거된다’고 표현합니다. 다시 말해, 욕정이 존재 자체를 잃는 것이 아니라 ‘지배력을 잃고 주변으로 밀려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한 가지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시다. 그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점점 그 습관을 따르지 않게 됩니다. 처음에는 힘들지만, 점점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익숙해집니다. 그러면 그 습관은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 있지만, 더 이상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약화되고 제거되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AC에서 말하는 황폐와 욕정의 약화는 단순히 도덕적으로 착해지는 과정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 이동하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보게 되고, 그때 비로소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의문, 즉 ‘정말 욕정이 약해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인간 혼자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욕정의 힘은 조금씩 약해집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은 삶의 중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바로 그 과정을 성경은 여러 이야기로 보여 주는데, 탕자의 귀향 이야기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AC.18, 창1:2, '깊음'(faces of the deep), '황폐'(vastation)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 ‘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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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심화

 

1.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

 

AC.17 혼돈 공허’, 그리고 흑암이 나오는데요, 제 경우를 보더라도 저는 심지어 모태신앙임에도 불구, 어린, 그리고 청소년 시절, 속 사람에 대해 전혀 몰랐고, 주님의 선과 진리에 대해서는 비교적 최근, 그러니까 나이 57세 되기까지 그것이 주님의 신성이라는 걸 들어 본 적도 없어요. 평생 교회를 떠나본 적 없이 십자가 복음, 대속, 구원 등 이런 것만 알았지요. 거듭남 역시 예수님 영접 기도와 몇몇 성경 구절 굳게 믿으면, 그러니까 그 교리를 굳게 붙들며 살면 거듭나는 건 줄 알았습니다. 오히려 전도 많이 하면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큰 줄 알았고요. 저 같은 사람도 이런데 교회 밖에서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마나 더 요원, 오랜 시간이 걸릴까요? 외인이든 지인 및 혈연, 핏줄이든 말이지요... 저는 정원 목사의 책을 통해, 그리고 수도원을 통해 결국 스베덴보리를 만나게 되었지만, 안 그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요?

 

목사님께서 느끼신 마음은 아주 자연스럽고 또 깊은 목회적 고민입니다. AC.17에서 말하는 ‘혼돈’, ‘공허’, ‘흑암’을 자기 삶과 교회 현실에 대입해 보시면,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제 빛을 보게 되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은 사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여러 곳에서 다루는 주제입니다. 여러 단락으로 차분히 풀어 보겠습니다.

 

먼저 AC.17에서 말하는 ‘혼돈’과 ‘공허’, ‘흑암’이 무엇인지부터 다시 짚어 보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죄악 상태라고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진리의 질서가 아직 세워지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즉 사람의 삶에는 많은 생각과 감정이 있지만, 무엇이 참되고 무엇이 선한지에 대한 영적 질서가 아직 분명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혼돈’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공허’는 진리가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상태, ‘흑암’은 그 결과, 어리석음과 무지, 곧 주님 신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 그리고 그로 인한 영적, 천적 삶에 대한 걸 하나도 모르는 상태를 말합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개인 경험은 사실 매우 전형적인 예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지만, 속 사람이나 거듭남의 구조에 대해서는 거의 들어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 ‘교회의 가르침이 주로 외적 신앙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교회의 ‘마지막 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즉 신앙의 핵심이 사랑과 거듭남의 삶에서 점점 멀어지고, 대신 교리나 외적 신앙 고백이 중심이 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영적 상태를 판단할 때, ‘그 사람이 어떤 교리를 알고 있었는가’보다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더 중요하게 봅니다. 이것은 목사님께서 이미 언급하신 ‘천국과 지옥 319번 글에서도 분명히 나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양심적으로 선하게 살았다면, 그는 이미 주님의 인도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비록 ‘속 사람’이나 ‘거듭남’이라는 말을 몰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아주 중요한 원리를 말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 안에 리메인스(remains), 즉 선과 진리의 씨앗을 남겨 두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어린 시절에 경험한 선한 감정, 진실한 순간, 양심의 울림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의 의식에서는 거의 잊힐 수 있지만, 주님은 그것들을 속 사람 안에 보존하십니다. 그리고 적절한 때에 그것을 사용하여 사람을 깨우십니다. 목사님께서 스베덴보리를 만나게 된 과정도 사실 이런 섭리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점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한 가지를 매우 분명히 말합니다. 인간이 ‘빛을 인위적으로 켜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빛은 언제나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아무 역할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억지로 빛을 주는 것이 아니라, ‘빛이 들어올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아직 깊은 영적 진리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에게 갑자기 깊은 신학을 설명하면 오히려 거부감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진실하게 살도록 격려하고, 선을 행하도록 돕고,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삶 속에서 주님이 때를 따라 빛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과정을 ‘주님의 섭리(providence)’라고 설명합니다. 섭리는 매우 부드럽고 점진적으로 역사합니다. 사람의 자유를 해치지 않으면서 조금씩 인도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젊은 나이에 빛을 만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인생 후반에 깨닫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세상을 떠난 뒤 영계에서 더 분명한 빛을 만나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더 명확히 배우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안타까움,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늦게 빛을 보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은 이해할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대해 비교적 낙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며’, 각 사람의 삶과 자유를 존중하면서 가장 적절한 길로 인도하신다고.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목사님께서 지금 하고 계신 AC 리딩 설교 자체가 이미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그 말씀이 바로 ‘‘빛이 있으라는 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빛이 언제 켜질지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당장 빛을 줄 수는 없지만, 주님은 각 사람의 속 사람 안에 이미 씨앗을 심어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때가 되면 반드시 빛을 향해 자라납니다. 우리의 역할은 그 씨앗을 억지로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씨앗이 자랄 수 있는 선한 토양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사님께서 나이 57세 때 스베덴보리를 만나셨다고 말씀하셨지만, 스베덴보리 자신도 영적 계시를 받은 나이가 57세였습니다. 이 사실은 우연이라기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상징적인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주님은 각 사람의 삶의 시간표 속에서 빛을 준비하신다는 점을 보여 주는 사례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AC.18, 창1:2, '깊음'(faces of the deep), '황폐'(vastation)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 ‘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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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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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심화

 

5. ‘104:30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104:30)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30).’(天, heaven)은 거듭나기 전 속 사람(the internal man), ‘’(地, earth) 겉 사람(the external man)을 의미한다는 것은 뒤에 이어질 내용에서 볼 수 있습니다. That “heaven” 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 “earth” the external man before regeneration may be seen from what follows.

 

이 구절은 AC.16의 ‘창조’ 개념을 가장 직접적으로 풀어 주는 본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영을 보내신다  창조된다  지면이 새로워진다’는 흐름이 그대로 ‘거듭남의 실제 과정’을 보여 줍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104:30은 주님이 을 통해 사람 안에 새 생명을 불어넣으실 때, 그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함께 새롭게 되는 거듭남의 전 과정을 묘사한 말씀’입니다.

 

먼저 ‘주의 영을 보내신다’는 표현부터 보겠습니다. 여기서 ‘(spirit)은 단순한 어떤 기운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 특히 진리와 선이 함께 작용하는 생명의 흐름’을 뜻합니다. 즉,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위에서 들어오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시작은 언제나 이 지점입니다. 사람이 결심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이 먼저 임하는 것’입니다.

 

그다음 ‘그들이 창조된다’입니다. 여기서의 ‘창조’는 당연히 자연적 창조가 아니라, 앞에서 계속 보신 것처럼 ‘영적 창조, 곧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 창조가 사람 전체를 한 번에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이 들어오면서 시작되는 새 생명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전과 전혀 다른 원리로 살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어지는 ‘지면을 새롭게 하신다’가 핵심입니다. 여기서 ‘지면(earth, ground)은 말씀에서 ‘겉 사람, 곧 외적인 삶과 행동의 자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앞에 나온 설명처럼, ‘하늘(heaven)은 ‘속 사람, 내적인 영역’을 뜻합니다. 이 구절에는 ‘하늘’이라는 단어가 직접 나오지는 않지만, ‘영을 보내신다  창조된다’는 부분이 바로 ‘속 사람에서 일어나는 변화’, 그리고 ‘지면이 새로워진다’는 것은 ‘겉 사람에서 드러나는 변화’를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전체 구조는 이렇게 됩니다. 먼저 주님의 영이 들어오면, 사람의 속 사람, 그러니까 생각과 의지의 깊은 곳에서 변화가 시작됩니다. 이것이 ‘창조’입니다. 그런데 거듭남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다음 반드시 나타나는 것이, ‘겉 사람의 변화’, 곧 삶과 행동과 습관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면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 보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말씀을 듣고 마음이 움직입니다. 이전에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던 것이 중요하게 느껴지고,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영이 임하여 창조되는’ 단계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변화가 단순한 생각에 머물지 않고, ‘말하는 방식, 행동, 선택, 관계 맺는 방식까지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면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즉, ‘내면의 변화가 외면의 삶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속 사람의 변화’로만 생각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감동을 받고, 깨달음을 얻는 것까지는 경험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진짜 거듭남은 겉 사람이 바뀌는 데까지 가야 한다’고. 그래서 이 구절에서 굳이 ‘지면을 새롭게 하신다’라고 덧붙이는 것입니다. 속 사람만 새로워진 것이 아니라, ‘삶의 자리 전체가 새로워진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이렇게 한 줄로 읽히게 됩니다. ‘주님의 영이 사람 안에 들어오면, 그 사람은 새롭게 창조되고, 그 결과 그의 삶 전체가 새로워진다.’ 이것이 시104:30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역사하시면, 마음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새로워집니다.’

 

104:30은 주님의 영이 사람의 속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그 결과 겉 사람의 삶까지 변화시켜 전체를 새롭게 하시는 거듭남의 과정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AC.17,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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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 심화 4, ‘시102:18’

AC.16.심화 4. ‘시102:18’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시102:18) The people that is created shall praise Jah (Ps. 102:18). 이 구절은 아주 짧지만, AC.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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