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는 어떤 사람이었길래 주님이 직접 부르셨을까?
27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29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30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3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34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그러나 그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36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3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 쓰게 되리라 38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39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눅5:27-39)
오늘날 남을 지배하려는 사랑과 부에 대한 사랑이 기독교계에 만연하고, 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잘못된 길로 이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들은 악을 죄로 알고 멀리하지 않는 사람들을 미혹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자연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남을 지배하려는 사랑과 부에 대한 사랑은 자연적인 사람 고유의 사랑이기 때문에, 그는 자기 안에 있는 그런 사랑을 인정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한다. 사람은 악과의 싸움을 통해서만 개혁되고, 개혁이 되어야 그것을 알 수 있다. 신앙으로 개혁된다고 믿는 사람도 있지만, 악과 싸우기 전에는 사람 안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존재할 수 없다. (AE.1189:3, 이순철 역)
※ AE(Apocalypse Explained, 계시록 해설) 위 1189번 글 3번 항에 대한 Ager 영역 및 Whitehead 개정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As the love of rule and the love of riches prevail universally in the Christian world, and these loves at this day are so deeply rooted that it is not known that they in any wise lead astray, it is important that their quality should be set forth. They lead every man astray who does not shun evils because they are sins; for he who does not thus shun evils does not fear God, and therefore remains natural. And as the love of ruling and the love of riches are the natural man’s own loves, he does not see with any interior acknowledgment what the quality of those loves is in him. This he does not see unless he is reformed, and he can be reformed only by combat against evils. It is believed that he can be reformed by faith; but there can be no faith of God in man until he fights against evils. (AE.1189:3, Ager 역)
이는 계시록 18장 23절,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비치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인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로 말미암아 만국이 미혹되었도다’에 관한 주석 중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And the voice of bridegroom and of bride shall not be heard in thee any more)에 대한 내용입니다. //
오늘 본문 27, 8절입니다.
27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주님께서 길을 가시다 가버나움 세관 앞을 지나시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곳에는 레위라는 이름의 세리가 앉아서 일을 보고 있었는데, 주님은 어찌 된 영문인지 그에게 다가가서 ‘나를 따르라’ 하셨고, 그러자 놀랍게도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여기 레위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마태입니다. 레위는 그렇게 해서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세리 레위는 그들의 원수인 로마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세리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힘없는 동족, 백성들을 토색질하는 사람들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 우리나라도 보면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에 부역한 사람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순경이며 관공서 및 은행이며... 등, 물론 그들이 다 악인들은 아니었을지라도 거의 대부분 정말 지독한 악인들이었습니다. 어떨 땐 본토 일본 사람들보다도 더 말이지요. 참고로,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는 세리장이요 부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레위를 제자로 택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 이유는 레위라는 이름과 세리라는 직업의 내적 의미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데요, 속뜻으로, ‘레위’는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을, ‘세리’는 이방인을 뜻합니다. 주님을 모르는 이방인이 어떻게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주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을 뜻하며, 그렇게 보면, 교회 다닌다고 해서 모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며, 또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고 모두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교회 밖의 이방인 가운데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 곧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하는 사람을 택해 제자로 삼으신 걸 의미합니다. 여기 교회 밖의 사람들이란, 마지막 때 타락한 교회에 몸담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새 교회에서는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즉 자신의 직업에 관한 일들을 그 자체의 목적으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근면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하찮은 일일지라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일 자체를 위해 성실하고 정직하게 하는 것, 그것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누가 보든 안 보든 말입니다.
※ 자신의 직업과 관련, 물론 선한 직업이겠지요, 그리고 직업을 쓰임새(use)라 해도 무방하겠습니다. 주님께 쓰임 받는다는 생각, 이 쓰임을 통해 주님의 더 큰 어떤 공공선에 기여한다는 생각, 또 이 쓰임, 이 직업과 관련된 모든 것 안에 주님이 계신다는 생각, 그래서 아주 사소한 것 하나라도 소홀함이 없으며, 관련된 사람들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생각, 이 모든 것이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이지 싶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레위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레위에게 다가가셔서 ‘나를 따르라’ 하셨고, 레위 또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모든 것을 버리고 즉시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주님의 제자 베드로도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셨을 때, 즉시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사실 이것은 대단히 감동적인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실 때, 자기가 가진 모든 걸 버리고, 즉시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까지 보면,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그리고 레위는 주저하지 않고 즉시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 과거 삼십 대 중반에 잘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여 주님께 보답하고자 교회 직원의 삶을 선택했던 저는, 지금 생각하면 그런 중요한 결정에 비해 허점투성이였던 그 과정에도 불구, 저의 그런 면을 보시고, 주님은 오늘날 이렇게 스베덴보리를 알게 하시고, 그의 일을 이어받게 하신 건 아닐까 깊은 생각에 잠겨 봅니다.
29절입니다.
29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주님의 제자가 된 레위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주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계시록 3장 20절에는 이 말씀과 연관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3:20)
그러니까 주님의 음성을 듣고 즉시 문을 여는 사람은 바로 레위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위의 집에서 열린 잔치는, 그 속뜻으로는 레위가 베푼 잔치가 아니고요, 주님을 향해 문을 여는 자에게 주님께서 오셔서 함께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와 선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받아들여 그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먹는다는 것은 진리를 따라 선을 행하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진리와 선을 자신의 생명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0절입니다.
30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구약 규례에서는 부정한 사람이나 죄인들이 제사의 예물 먹는 것을 금했습니다.
20만일 몸이 부정한 자가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요 21만일 누구든지 부정한 것 곧 사람의 부정이나 부정한 짐승이나 부정하고 가증한 무슨 물건을 만지고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도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레7:20-21)
이 규례의 의미는 악하고 거짓된 사람들은 진리와 선을 소유하면 안 된다는 뜻인데요, 왜냐하면 악한 사람들이 진리와 선을 가지게 되면 진리와 선을 더럽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신성모독이며, 그래서 이런 것은 당사자에게 씻을 수 없는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 다음은 ‘신성모독’(神性冒瀆, sacrilege)에 관해 전에 제가 정리한 글의 일부입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타고난 성정상, 그들이 깨닫고 알게 되면 그들은 반드시 주님 모독의 길을 걸을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막으신 것입니다.
주님을 모독하는 신성모독의 두려움은 그것이 사람의 영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덕지덕지 붙어 있기만 한 악은 나중에 주님이 떼어내시면 되지만, 영 자체가 변질되어 더럽혀지면, 그건 주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기 때문인데요, 노아의 홍수로 표현된 태고교회의 멸망 때, 사실은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며, 그래서 이들, 곧 네피림을 포함한 이들 태고교회의 마지막 후손들은 지금도 지옥 저 한쪽 구석에서 지옥의 다른 영들을 해치지 못하게 따로 격리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신성모독의 폐해는 이토록 정말 지독한 것입니다. //
이 규례 속에 그런 뜻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유대인들은 그 말씀을 그냥 문자적으로만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죄인들과는 음식을 함께 먹지 않는다는 인간의 전통을 만들어 놓고, 백성들에게 그 전통 지킬 것을 강요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주님께서 세리와 함께 음식을 드시는 것은 유대교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그토록 미워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비방을 들으신 주님께서 31절과 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이 말씀에서 ‘의사’는 바로 주님 자신이십니다. 주님은 질병으로 상징되는 모든 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병의 치유를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병자 스스로 자기의 병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건강한 자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하신 것입니다.
※ 이들에 대한 또 다른 주님 말씀이 하나 생각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요9:41) //
주님은 겸손하게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를 위해 오셨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다시 주님께 말합니다. 33절입니다.
33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조금 전에 바리새인들은 주님이 부정한 자들과 함께 음식을 드신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금식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있어요. 금식의 전통은,
29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일곱째 달 곧 그달 십 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리하라 30이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를 정결하게 하리니 너희의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레16:29-30)
하신 규례로부터 시작되었고, 그렇게 금식은 회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볼 때 주님과 그의 제자들은 금식 전통을 전혀 지키지 않고, 오직 먹고 마시는 일에만 열중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내적 의미로 ‘금식’(禁食)은 자기에게 진리와 선이 없음을 슬퍼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진리를 많이 알고 있고, 또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깨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시험받을 때입니다. 시험 가운데 ‘나에게는 악하고 거짓된 것밖에 없구나, 진리와 선이 나한테는 하나도 없구나’ 하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시험 중에는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과 심하게 다투거나, 또 악한 유혹에 미혹되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오, 주님! 저에게는 진리와 선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며 주님께 매달립니다. 바로 그것이 금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바리새인들의 금식은 진정한 금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자기의 경건함을 자랑하기 위한 그런 금식이었는데요, 왜냐하면 그들은 누구보다 스스로 진실하고 선하다 생각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주님 말씀들처럼 말입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6:16)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눅18:11-12)
그러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절,
34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그러나 그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이 말씀에서 ‘신랑’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혼인 집 손님들’은 회개를 통해 주님과 하나 되는 사람, 즉 주님과 결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회개하는 과정에서 이미 자신에게 진리와 선은 없고, 대신 악과 거짓만 있다는 것을 충분히 고백하고 슬퍼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주님이 입혀주시는 구원의 옷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혼인집 손님들을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하셨던 것입니다. 혼인 잔치는 주님이 주시는 진리와 선을 먹고 마시는 곳이며, 그것을 통해 주님과 결혼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는 바리새인들은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비난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이 말씀에서 ‘그날’은 타락한 교회가 문을 닫을 때입니다. 그리고 ‘신랑을 빼앗기는’ 것은 그때 교회가 주님과 완전히 결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있어도 주인이신 주님이 계시지 않는, 빈껍데기뿐인 교회만 있는 날이 그날이며, 신랑을 빼앗기는 때입니다. 주님은 그동안 교회들이 아무리 주님을 배반하더라도 끝까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다시 돌아오도록 수없이 많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돌이키지 않고, 그러다가 결국 자기 스스로 교회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교회를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주님과의 통로를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마지막 때 신랑을 빼앗기는 모습입니다.
36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3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 쓰게 되리라 38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이 말씀 역시 타락한 모든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기 ‘새 옷’은 새로운 교회의 진리를 나타내고요, ‘낡은 옷’은 이전 교회의 잘못된 진리들을 나타냅니다. 포도주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로운 교회의 진리를 나타내며, ‘낡은 가죽 부대’는 이전 교회의 잘못된 교리를 뜻합니다. 이를테면 유대교회의 장로의 전통이라던가, 오늘날 교회에서 주장하는 신앙만의 교리, 즉 ‘오직 믿음’의 교리가 바로 낡은 가죽 부대입니다. 그러한 낡은 가죽 부대로는 주님께서 밝혀주시는 새 진리를 받을 수 없습니다. 설령 받는다 하더라도 이전의 진리도 쓸데없는 것이 되고, 새로운 진리도 쓸데없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새 교회에 오신 분들은 대개 이전 교회의 잘못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갈등하셨던 분들입니다. 따라서 이전에 가지고 있던 잘못된 교리들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교리를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가죽 부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만일, 전의 것을 여전히 가진 채,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 한다면 결국 둘 다 못쓰게 됩니다. 그런 진리를 가지고는 더 이상 영적 성장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9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이 말씀은 교회의 마지막 때, 신앙인들이 타락한 교회의 진리를 고수하고 새로운 진리를 배척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묵은 포도주’는 이전 교회의 낡은 진리들이고요, ‘새 포도주’는 새로운 진리들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동안 자신이 쌓아 놓은 진리 체계 허무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거듭나는 데 장애가 생기고, 어쩌면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질 수도 있습니다. 마치 타락한 교회가 신랑을 빼앗기는 것과 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라 하시는 말씀에서 주님의 그런 안타까운 심정이 느껴집니다.
※ 저 역시, 아니 저는 정말 묵은 포도주 버리는 걸 지독하게도 거부했던 사람입니다. 저는 스베덴보리의 저작 읽는 걸 무슨 종교적 금서(禁書) 읽는 걸로 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저를 아시고 평범하지 않은 어떤 특별한 접근, 곧 먼저 영계에 대한 입문으로 정원 목사의 글들을 읽게 하신 후, 이어 유튜브나 인터넷을 통해 서사라 목사 등 다양한 사례들을 접하게 하신 후, 강문호 목사님을 통해 수도원, 수도사의 세계로 이끄셨고, 공용복 선생의 시흥영성수련원 등을 알게 하신 후, 그곳을 통해 스베덴보리라는 이름을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신교, 특히 침례교에서 바로 스베덴보리로 점프하는 건 저 같은 사람한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주님은 이렇게 준비의 준비의 준비를 통해 차근차근 밟게 하신 것이지요. 저는 젊은 시절, 네비게이토식 제자훈련이 참 신앙인 줄 알았고, 그게 전부인 줄 알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즈음 저는 주일날 교회에 오는 것이 매우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식구들 한분 한분의 모습에서 교회의 성장을 보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양적으로 늘어나는 것만이 성장은 아닙니다. 저는 성도들의 내면에 다양한 보석들이 있고, 그것이 점점 더 아름답게 빛을 내고 있음을 매일 봅니다. 우리를 영적으로 빛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회개와 겸손이라 하셨습니다.
마태라고도 부르는 레위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를 직업으로 가진 사람들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죄인이었습니다. 조국이 아니라 로마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었고요, 대부분 직위를 이용, 동족 백성들을 수탈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위는 자기의 자리에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고, 늘 회개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레위를 기억하시고 마침내 그를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그런 주님을 비난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하고 음식을 함께 드신다 비난하고, 금식을 하지 않는다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회개의 기회를 계속해서 놓쳤습니다. 급기야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이 끝내 주님을 떠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며, 사후에 영계에 가서야 자기에게 선과 진리가 없음을 깨닫고 이를 갈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 하신 것은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서는 참으로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 그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끝으로 말씀드릴 것은, 세상에 세리와 바리새인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내면에도 세리와 바리새인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겸손한 자와 교만한 자가 있고요, 회개하는 자와 회개할 줄 모르는 자가 우리 속에도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자의 말을 듣지 말고, 늘 겸손한 자의 말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회개할 줄 모르는 자의 말을 듣지 않고, 늘 회개하는 자의 말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매일 같이 낡은 진리들을 버리고 주님으로부터 흠 없는 진리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제자로 부름받은 새 교회 모든 성도가 주님과 함께 영원히 먹고 마시는 영광 누리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사61:10)
아멘
원본
2017-12-1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30(D5)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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