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에게는 천사 둘, 악한 영 둘이 와 있다는 말에 구원받아 성령이 내주하시는데 어떻게 악한 영이 같이 있을 수 있나?’ 하시는 경우

 

 

그 질문은 사실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특히 칼빈주의나 복음주의 배경에서는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 안에 악한 영이 함께 있다’는 말을 거의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먼저 설명하기보다, 성경 자체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악한 영이 사람 속에 들어가 산다는 의미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늘 선과 악의 영향 사이에 놓여 있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주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한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주님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또 바울도 로마서 7장에서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악을 행한다고 말합니다. 신자라 해도 영적 긴장과 시험 가운데 있다는 사실 자체는 성경도 인정하는 것 아닐까요?’

 

그러면 대화가 ‘악한 영이 있느냐 없느냐’에서 ‘신자가 어떻게 시험을 받는가’라는 성경적 주제로 옮겨집니다.

 

그다음에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소개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과정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항상 천국의 영향과 지옥의 영향 사이에 놓여 있으며, 그래서 선을 선택할 수도 있고, 악을 선택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천사 둘과 악한 영 둘은 숫자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사람은 영적으로 중립 지대에 서 있으며,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 양쪽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상대가 ‘성령이 내주하시는데 악한 영이 어떻게 함께 있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되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신자는 왜 여전히 유혹을 받습니까? 왜 죄와 싸웁니까? 왜 바울은 육체와 성령의 싸움을 말합니까?’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 싸움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인간이 천국과 지옥의 영향이 만나는 지점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절대로 ‘목사님은 틀렸습니다’라는 식으로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교수급 신학자는 반론을 준비하는 데 익숙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구절들을 읽으며 이런 설명도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하면 대화가 계속됩니다.

 

그리고 사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강력한 논거는 따로 있습니다.

 

만약 거듭난 사람 안에 더 이상 악의 영향이 전혀 없다면, 왜 우리는 죽을 때까지 회개해야 합니까? 왜 성화가 평생 계속됩니까?’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질문에 답하려고 천사들과 영들의 지속적인 동행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과 악령이 한 집에 함께 산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거듭남의 과정을 설명하는 영적 구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마 칼빈주의 교수님이라면 ‘악한 영 둘, 천사 둘’이라는 표현 자체에는 동의하지 않으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평생 영적 전쟁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신다’는 지점까지는 의외로 상당 부분 공감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독특한 표현을 먼저 내세우기보다, 그 표현이 설명하려는 ‘자유와 시험의 원리’를 먼저 이야기하는 편이 훨씬 유익할 것입니다.

 

 

 

SC.90, ‘스베덴보리는 기독교가 아니다?’

스베덴보리 이야기를 하면서 ‘스베덴보리는 어떤 면에서는 사실 기독교가 아닙니다’라는 말을 해도 될까요? 목사님, 그 표현은 매우 조심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어떤 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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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 이야기를 하면서 스베덴보리는 어떤 면에서는 사실 기독교가 아닙니다라는 말을 해도 될까요?

 

 

목사님, 그 표현은 매우 조심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어떤 면에서는 사실 기독교가 아닙니다’라는 말은 듣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목사님이 말씀하시려는 뜻이 ‘스베덴보리는 현재의 개신교나 가톨릭, 정교회가 이해하는 전통적 기독교와는 상당히 다릅니다’라는 의미라면,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삼위일체 이해, 이신칭의, 대속 개념, 예정론, 성경 해석 방식, 사후 세계 이해 등에서 전통 기독교와 매우 다른 길을 갑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스베덴보리는 기존 기독교의 한 분파라기보다, 기독교를 근본부터 다시 해석한 체계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기독교가 아닙니다’라고 단정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자신은 평생 자신을 기독교 밖에 있는 사람으로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야말로 주님께서 세우신 참된 기독교의 본래 의미를 회복하는 일에 부름받았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대표 저작 제목 자체가 ‘True Christian Religion’, 곧 ‘참된 기독교’입니다. 그는 새 종교를 만들겠다고 말한 적이 없고, 오히려 기독교 안에 잃어버린 진리를 회복한다고 보았습니다.

 

아마 교수님 같은 칼빈주의자 앞에서는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목사님, 스베덴보리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개신교 신학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어떤 면에서는 같은 기독교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다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 자신은 오히려 참된 기독교를 회복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표현은 사실을 말하면서도 불필요한 오해를 줄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칼빈주의 교수님은 이미 스베덴보리를 ‘기독교 밖’으로 분류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입에서 먼저 ‘사실 기독교가 아닙니다’라고 말해 버리면, 그 순간 대화는 끝나 버릴 수 있습니다. 상대는 ‘그렇다면 더 들을 이유가 없군요’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식 접근은 이런 것입니다.

 

목사님,저는 오히려 스베덴보리를 읽으면서 주님, 거듭남, 천국, 사랑, 삶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 해석이 우리가 배워 온 신학과는 매우 다릅니다.’

 

이렇게 말하면 상대는 최소한 ‘얼마나 다른데?’ 하고 들어 볼 여지는 남깁니다.

 

실제로 목사님이 오랫동안 AC를 번역하시며 느끼셨듯이, 스베덴보리의 핵심은 ‘기독교를 버리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를 더 깊이 이해하자’입니다. 다만 그 결과가 기존 교회 신학과 너무 달라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아니다’보다는 ‘전통적 기독교 이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형태의 기독교 해석이다’ 정도가 훨씬 정확하고 생산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SC.91, ‘성령이 내주하시는데 어떻게 악한 영이?’

‘모든 사람에게는 천사 둘, 악한 영 둘이 와 있다’는 말에 ‘구원받아 성령이 내주하시는데 어떻게 악한 영이 같이 있을 수 있나?’ 하시는 경우 그 질문은 사실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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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89, ‘캘빈주의자 침례교 목사님 앞에서’

침례교 목사님이시면서도 자신을 캘빈주의자라며, 그의 5대 교리(TULIP)를 굳게 믿는다 자랑스러워 하기까지 하시는, 신학교에서 교수도 하시는 분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스베덴보리 이야기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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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교 목사님이시면서도 자신을 캘빈주의자라며, 그의 5대 교리(TULIP)를 굳게 믿는다 자랑스러워 하기까지 하시는, 신학교에서 교수도 하시는 분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스베덴보리 이야기를 하게 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목사님, 그런 경우에는 무엇보다 ‘상대를 설득하려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특히 그분이 단순한 평신도가 아니라 침례교 목사이면서 신학교 교수이고, 더 나아가 자신을 칼빈주의자라고 공개적으로 밝히며, TULIP를 신학적 정체성으로 삼고 계신 분이라면, 스베덴보리의 핵심 사상은 그분이 평생 쌓아온 신학 체계와 거의 모든 중요한 지점에서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칼빈주의의 중심에는 인간의 전적 타락, 불가항력적 은혜, 예정,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관점이 있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인간 안에 주님께서 보존하신 리메인스가 있으며, 인간은 자유 가운데 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고, 거듭남은 일생의 과정이며, 신앙과 체어리티는 분리될 수 없고, 천국과 지옥은 각자의 사랑에 따라 스스로 선택되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교리 차이가 아니라 인간관, 구원관, 하나님 이해 자체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였다면 아마 교리 논쟁부터 시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생전에 수많은 루터교 성직자들과 학자들을 만났지만, 상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진리를 억지로 밀어 넣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반복해서 ‘사람은 자기 상태에 따라 진리를 받아들인다’고 말했습니다. 천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는 먼저 사랑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그다음 이해에 의해 받아들여집니다.

 

따라서 그분과 대화하게 된다면 ‘예정론이 틀렸습니다’, ‘이신칭의는 잘못입니다’, ‘칼빈은 오해했습니다’ 같은 접근은 거의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오히려 ‘목사님, 저는 요즘 성경을 읽으며, 한 가지를 많이 생각합니다. 사람이 죽은 뒤 천국에서 실제로 어떤 삶을 살게 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혹은 ‘신앙과 삶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처럼 상대가 공감할 수 있는 주제에서 시작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흥미롭게도 스베덴보리는 선한 삶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큰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 사람이 루터교인이든, 가톨릭 신자든, 심지어 다른 종교인이든 간에 진실하게 선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려 한다면 사후에 더 깊은 진리로 인도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칼빈주의 교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분의 최종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나는 칼빈주의자다’라는 고백 자체가 아니라, 그분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어떻게 살았는가입니다.

 

오히려 목사님께서 그분 앞에서 취하실 수 있는 가장 스베덴보리적인 태도는 ‘교리를 이기려는 사람’이 아니라 ‘천국을 증언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 저작을 오래 읽다 보면 결국 중심은 예정론 반박도 아니고, 칼빈주의 비판도 아닙니다. 중심은 ‘주님은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이끄신다’, ‘사람은 사랑하는 것이 된다’, ‘천국은 상태의 나라다’, ‘거듭남은 실제 삶의 변화다’라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창세기 AC 번역과 해설을 수년 동안 해 오시면서 얻으신 가장 큰 힘도 사실 논박 능력이 아니라 ‘천국을 바라보는 시야’였을 것입니다. 그런 시야를 가진 사람이 차분히 말하면 상대가 당장 동의하지 않더라도 무엇인가를 느끼게 됩니다. 반대로 아무리 논리가 뛰어나도 상대를 꺾으려는 마음이 들어가면 문은 닫혀 버립니다.

 

그래서 그런 분을 만나게 되면 저는 스베덴보리의 원칙에 따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내가 이분을 스베덴보리주의자로 만들 필요는 없다. 주님께서 이분을 사랑하시고 이끄신다. 나는 다만 내가 본 빛을 겸손하게 증언하면 된다.’ 아마 그것이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취했을 태도에 가장 가까울 것입니다.

 

아래는 참조 글입니다.

 

 

SC.23, '스베덴보리와 바울, 루터, 캘빈 비교'

스베덴보리와 바울, 루터, 캘빈을 비교할 때, 무엇보다 먼저 조심해야 할 점은, 이들을 ‘누가 옳고 그르다’는 식으로 재단하기보다, 각자가 교회 역사 속에서 맡았던 고유한 사명과 시대적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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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90, ‘스베덴보리는 기독교가 아니다?’

스베덴보리 이야기를 하면서 ‘스베덴보리는 어떤 면에서는 사실 기독교가 아닙니다’라는 말을 해도 될까요? 목사님, 그 표현은 매우 조심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어떤 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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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88, ‘식사 초대를 받을 때’

자신의 글이나 생각, 사상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거리를 두지는 않으시는 분의 식사 초대가 있을 시,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했나요? 스베덴보리의 생애 기록을 보면, 그는 자신의 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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