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1

 

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의 의미가 사랑과 신앙이며, 또한 ,,(sun, moon, and stars)이라 한다는 사실은 선지자들의 글을 보면 분명합니다. 에스겔에서처럼 말입니다. That the “great luminaries” signify love and faith, and are also called “sun, moon, and stars,” is evident from the prophets, as in Ezekiel:

 

7내가 너를 불 끄듯 할 때에 하늘을 가리어 별을 어둡게 하며 해를 구름으로 가리며 달이 빛을 내지 못하게 할 것임이여 8하늘의 모든 밝은 빛을 내가 네 위에서 어둡게 하여 어둠을 네 땅에 베풀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2:7, 8) When I shall extinguish thee, I will cover the heavens and make the stars thereof black; I will cover the sun with a cloud, and the moon shall not give her light; all the luminaries of the light of heaven will I make black over thee, and I will set darkness upon thy land (Ezek. 32:7–8).

 

이 구절들은 바로와 애굽을 다루는데, 말씀에서 바로와 애굽은 감각적인 것과 단지 지식적인 것의 원리를 뜻합니다. 여기서는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었음을 말합니다. 이사야에서도 그렇습니다. In this passage Pharaoh and the Egyptians are treated of, by whom are meant, in the Word, the principle of mere sense and of mere knowledge [sensuale et scientificum]; and here, that by things of sense and of mere knowledge, love and faith had been extinguished. So in Isaiah:

 

9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0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추지 아니할 것이로다 (13:9, 10) The day of Jehovah cometh to set the land in desolation, for the stars of heaven and the constellations thereof shall not give their light; the sun is darkened in his going forth, and the moon shall not cause her light to shine (Isa. 13:9–10).

 

요엘에서도입니다. Again, in Joel:

 

1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10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2:1-2, 10) The day of Jehovah cometh, a day of darkness and of thick darkness; the earth trembleth before him, the heavens are in commotion; the sun and the moon are blackened, and the stars withdraw their brightness (Joel 2:1–2, 10).

 

[2] 다시 이사야에서는 주님의 강림과 이방인들의 밝아짐, 곧 새 교회와, 특히 어둠 가운데 있다가 빛을 받아 거듭나는 모든 사람에 대해 말하면서, Again, in Isaiah, speaking of the advent of the Lord and the enlightening of the gentiles, consequently of a new church, and in particular of all who are in darkness, and receive light, and are being regenerated:

 

1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20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 (60:1-3, 20) Arise, shine, for thy light is come; behold darkness covers the earth, and thick darkness the peoples, and Jehovah shall arise upon thee, and the gentiles shall come to thy light, and kings to the brightness of thy rising; Jehovah shall be to thee a light of eternity, thy sun shall no more go down, neither shall thy moon withdraw itself, for Jehovah shall be to thee a light of eternity (Isa. 60:1–3, 20).

 

시편도 이렇게 말합니다. So in David:

 

5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6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7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8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9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6:5-9) Jehovah in intelligence maketh the heavens; he stretcheth out the earth above the waters; he maketh great luminaries, the sun to rule by day, the moon and stars to rule by night (Ps. 136:5–9).

 

3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 4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148:3, 4) Glorify ye Jehovah, sun and moon, glorify him, all ye stars of light, glorify him, ye heavens of heavens, and ye waters that are above the heavens (Ps. 148:3–4).

 

[3] 이 모든 구절에서 광명체들(luminaries)은 사랑과 신앙을 뜻합니다. 광명체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나타내고 뜻했기 때문에, 유대교회에서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했습니다. 그 교회의 모든 규례는 주님을 대표, 즉 표상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이 등불에 관한 기록입니다. In all these passages, “luminaries” signify love and faith. It was because “luminaries” represented and signified love and faith toward the Lord that it was ordained in the Jewish church that a perpetual luminary should be kept burning from evening till morning, for every ordinance in that church was representative of the Lord. Of this luminary it is written:

 

20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21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 (27:20, 21) Command the sons of Israel that they take oil for the luminary, to cause the lamp to ascend continually: in the tabernacle of the congregation without the veil, which is before the testimony, shall Aaron and his sons order it from evening even until morning, before Jehovah (Exod. 27:20–21).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속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불붙이시고 빛나게 하시며,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에서도 그렇게 하신다는 뜻임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적절한 곳에서 밝힐 것입니다. That these things signify love and faith, which the Lord kindles and causes to give light in the internal man, and through the internal man in the external,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shown in its proper place.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큰 광명체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성경 전체의 증언을 통해 확정합니다. 해와 달과 별은 단순한 천체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나타내는 대표적 상징입니다. 이 점이 분명해지지 않으면, 선지서에 나오는 해와 달과 별의 어두워짐이나 밝아짐을 문자적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오해를 막기 위해 여러 선지서의 예를 연속적으로 제시합니다.

 

에스겔에서 바로와 애굽이 다루어질 때,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진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바로와 애굽이 감각적인 사고와 단순한 지식 중심의 사고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즉, 인간이 감각과 지식만을 의지할 때, 사랑과 신앙은 자연스럽게 소멸됩니다. 이때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진다는 말은, 외적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내적 상태의 붕괴를 가리킵니다.

 

이사야와 요엘에서 반복되는 ‘여호와의 날’에 대한 묘사도 같은 맥락입니다.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이 빛을 거둔다는 표현은, 심판의 날에 자연 질서가 무너진다는 예언이 아니라, 교회와 인간 안에서 사랑과 신앙이 사라진 상태를 묘사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심판은 언제나 외적 파괴가 아니라, 내적 상태가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반면 이사야 60장에서는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집니다. 어둠 가운데 있던 자들에게 빛이 임하고, 해와 달이 다시는 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는 새 교회가 세워지고, 거듭남이 이루어지는 상태를 뜻합니다. 여기서 해와 달은 더 이상 자연의 광체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직접 나오는 사랑과 신앙의 지속성을 나타냅니다. ‘영원한 빛’이라는 표현은, 이 빛이 더 이상 인간의 상태 변화에 따라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시편의 인용들은 이 상응이 이미 고대부터 예배와 찬양의 언어 속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해와 달과 별이 여호와를 찬양한다는 말은, 인간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 그리고 그것에서 파생된 모든 진리의 인식이 주님을 향해 질서 있게 작동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자연 숭배가 아니라, 내적 상태의 고백입니다.

 

이러한 이해 위에서, 유대교회의 항상 타는 등불의 규례가 설명됩니다. 저녁부터 아침까지 꺼지지 않게 타오르던 등불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이 인간 안에서 끊임없이 유지되어야 함을 상징했습니다. 저녁은 어둠의 상태, 아침은 빛의 상태이므로, 등불이 밤새 타오른다는 것은 인간이 어둠의 상태에 있을 때에도 주님의 사랑과 신앙이 보존된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규례가 단순한 종교의식이 아니라, 주님을 대표하는 상응 행위였다고 강조합니다. 등불은 인간이 스스로 밝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켜 주시고 유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에서 그는, 사랑과 신앙을 속 사람 안에서 불붙이시고 빛나게 하시는 분이 오직 주님이심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합니다. 인간의 역할은 그 빛이 꺼지지 않도록 질서 안에 머무는 것뿐입니다.

 

AC.31은 이렇게 넷째 날의 의미를 확장하여, 사랑과 신앙의 소멸과 회복, 교회의 몰락과 새로움, 그리고 개인 거듭남의 핵심 구조를 하나의 상징 체계 안에서 보여 줍니다. 해와 달과 별은 하늘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밝아지거나 어두워지는 것들입니다. 이 인식이 생길 때, 성경의 예언들은 두려운 미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상태를 비추는 빛이 됩니다.  

 

 

심화

 

1.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실제 사례

 

AC.31 본문,여기서는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었음을 말합니다.’(and here, that by things of sense and of mere knowledge, love and faith had been extinguished.),, 인간이 감각과 지식만을 의지할 때, 사랑과 신앙은 자연스럽게 소멸된다는 해설도 있지만... 좀 더 와닿는 사례로 설명해 주세요.

 

AC.31에서 말하는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된다’는 표현은 처음 읽으면 다소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things of sense’와 ‘mere knowledge’를 구분하여 말합니다. ‘things of sense’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처럼 ‘감각으로 확인되는 것만을 기준으로 삼는 사고방식’을 말합니다. 그리고 ‘mere knowledge’는 지식 자체가 아니라 ‘삶과 연결되지 않은 지식’, 곧 머리로만 알고 있는 정보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될 때, 사랑과 신앙이 약해지거나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설명입니다. 실제 삶에서 느껴지는 사례로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감각 중심 사고가 신앙을 약화시키는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이 신앙을 판단할 때 항상 ‘눈으로 확인되는 것만이 진짜다’라는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기도나 영적 삶을 이야기하면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도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잖아.’ 또는 ‘천국이나 영혼 같은 것은 본 적이 없으니 믿기 어렵다.’ 이런 사고는 단순히 질문을 하는 수준을 넘어 ‘감각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는 태도’입니다. 이런 태도가 계속되면 점차 영적인 것 자체에 관심이 줄어들고, 결국 사랑과 신앙이 마음에서 힘을 잃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things of sense’의 영향입니다.

 

두 번째는 지식이 많지만, 그것이 삶과 연결되지 않을 때 나타나는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 지식이나 신학 지식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교리도 잘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실제 삶에서 사랑이나 선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점점 ‘차갑고 분석적인 정보’가 되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이 교리는 맞고 저 교리는 틀리다’는 식으로 논쟁은 잘하지만, 정작 이웃을 사랑하는 문제에는 무관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지식이 많을수록 오히려 마음이 더 메마르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mere knowledge’라고 부르는 상태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세 번째는 현대 생활 속에서 자주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성공과 효율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신앙이나 사랑도 결국 ‘이것이 내 삶에 어떤 이익을 주는가’라는 관점에서 평가합니다. 예를 들어, 교회 생활을 하면서도 ‘이것이 내 인간관계나 사회적 위치에 도움이 되는가’ 같은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이런 사고가 계속되면 사랑이나 신앙은 점점 ‘도구적인 것’으로 변합니다. 결국 그것이 더 이상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느끼면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됩니다. 이 역시 감각과 지식 중심 사고가 신앙을 약화시키는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목회 현장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보면 이해가 더 쉽습니다. 어떤 성도가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는 단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신학 지식을 많이 배우고, 또 세상의 논리로 신앙을 계속 분석하기 시작합니다. 어느 순간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이 부분은 역사적으로 맞지 않는 것 같다’, ‘이 기적 이야기는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된다.’ 이런 질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지만, 만약 그 질문이 계속 ‘의심과 냉소만을 키우는 방향’으로 흐르면 결국 신앙의 따뜻한 중심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머리는 점점 더 많은 지식을 갖게 되지만, 마음은 점점 더 차가워지는 상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감각이나 지식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인간이 지식을 통해 진리를 이해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mere knowledge’, 곧 삶과 분리된 상태가 될 때입니다. 지식이 사랑과 연결되지 않으면, 그것은 결국 신앙을 살리는 빛이 아니라 마음을 건조하게 만드는 정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진정한 질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먼저 진리를 배우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반드시 ‘사랑과 삶 속에서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지식은 더 이상 ‘mere knowledge’가 아니라 ‘living knowledge’, 곧 살아 있는 지식이 됩니다. 그리고 감각 세계 역시 신앙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의 질서를 보며 주님을 인식하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AC.31이 말하는 것은 아주 실제적인 경고입니다.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과 머리 지식만을 절대 기준으로 삼으면, 마음의 중심에 있어야 할 사랑과 신앙이 점점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사랑과 결합되면, 그것은 오히려 신앙을 더 깊게 만드는 도구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차이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사60에 나오는 ‘새 교회’

 

위 AC.31 [2]에서 사60:1-3, 20를 인용하며 ‘새 교회’를 언급하는데요, 이 ‘새 교회’는 어떤 새 교회인가요? 지금은 현 기독교 이후에 오는 교회를 ‘새 교회’라고 하는데, 만일 이 교회를 말하는 거라면, 어휴, 그 시기가 너무도 앞서는 것 같아요...

 

AC.31 [2]에서 이사야 60장을 인용하며 말하는 ‘새 교회’라는 표현은 처음 읽을 때, 많은 분들이 당혹스럽게 느끼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들, 특히 ‘새 예루살렘 교리’나 ‘참된 기독교’ 등을 떠올리면 곧바로 ‘현 기독교 이후에 오는 새 교회(New Church)’를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AC 초반부 문맥에서는 이 표현을 조금 더 넓고 원리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새 교회’는 반드시 역사적으로 아직 오지 않은 특정 교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다시 세워지는 교회의 상태’, 곧 ‘빛이 다시 시작되는 영적 시대’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먼저 AC 전체에서 ‘교회’(church)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를 단순히 어떤 제도나 교단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에게 교회는 ‘주님을 알고 그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있는 곳’, 다시 말해 ‘사람 안에 진리와 선이 살아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역사적으로 여러 번 존재했습니다. 태고교회(Most Ancient Church), 고대교회(Ancient Church), 히브리교회, 유대교회, 그리고 기독교회가 차례로 나타났다고 설명합니다. 이 교회들은 각각 하나의 시대를 이루다가 점차 쇠퇴하고, 그다음에 새로운 교회가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이사야 60장의 예언은 단순히 특정 시대의 예언이 아니라 ‘주님이 교회를 새롭게 하실 때 나타나는 일반적인 영적 상태’를 묘사합니다. 이사야 60장 1–3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스베덴보리는 이런 표현을 문자 그대로 어떤 도시나 민족의 번영으로 보지 않습니다. 여기서 ‘빛’은 진리를, ‘영광’은 말씀의 내적 의미를, ‘나라들’과 ‘왕들’은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어둠 속에 있던 교회에 다시 진리의 빛이 들어오는 상태’, 곧 교회가 새롭게 되는 상태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1에서 말하는 ‘새 교회’는 반드시 먼 미래에만 나타나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교회가 무너지고 난 뒤 주님이 다시 진리의 빛을 일으키실 때마다 나타나는 교회의 새로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도 여러 곳에서 이사야의 예언들이 한 번만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교회의 시대 속에서 반복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예언의 가장 깊은 의미는 특정 역사 사건이 아니라 ‘영적 질서’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현 기독교 이후에 오는 새 교회’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체계 전체를 보면, 이사야 60장의 예언은 결국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는 ‘주님이 세우실 마지막 새 교회’, 곧 ‘새 예루살렘 교회’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AC 초반부에서는 아직 그 역사적 적용을 강조하기보다, 창세기 창조 이야기가 ‘한 사람의 거듭남과 교회의 거듭남을 동시에 묘사한다는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새 교회’라는 표현은 ‘어둠 속에서 빛이 시작되는 교회의 상태’를 말하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의 변화가 항상 ‘사람의 거듭남과 평행’한다고 설명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어둠 속에 빛이 나타나는 장면은 한 개인의 거듭남의 시작을 나타내는 동시에,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AC.31에서 이사야 60장을 인용하는 이유는, 창세기에서 말하는 ‘빛이 있으라’라는 사건이 단순한 자연 창조가 아니라 ‘교회와 인간의 영적 재창조’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읽을 때 ‘아직 오지 않은 어떤 먼 미래의 교회를 말하는 것인가?’라고 너무 좁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새 교회’는 더 근본적으로 ‘주님이 진리의 빛을 다시 일으키시는 상태’, 곧 ‘교회가 새롭게 되는 영적 시대’를 의미합니다. 그 원리는 역사 속에서 여러 번 나타났고, 스베덴보리는 그 원리가 마지막으로 완전히 나타나는 형태를 ‘새 예루살렘 교회’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AC.31의 문맥에서는 이렇게 이해하시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창세기에서 ‘빛’이 나타나는 것은 인간의 거듭남의 시작을 말할 뿐 아니라, ‘어둠에 빠진 교회 가운데 주님이 다시 진리의 빛을 일으키시는 사건’, 곧 교회의 새 시대가 시작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 의미에서 스베덴보리는 이사야 60장을 인용하여 그것을 ‘새 교회’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3. ‘유대교회의 항상 타는 등불의 규례’

 

위 AC.31 [3]의 ‘유대교회에서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했다’는 부분 말인데요, 그들은 정말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키고자 하던 사람들이었지만, 정작 이 규례의 상응, 상징, 그 내적 의미는 몰랐다고 어디서 읽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가 있을까요?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의문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도 같은 질문을 여러 곳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곧 ‘어떻게 사람이 어떤 규례를 그렇게 철저히 지키면서도 그 내적 의미는 전혀 모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것은 인간이 특별히 이상해서라기보다 ‘주님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역사적 섭리의 한 형태’였습니다. 유대교회는 처음부터 ‘내적 의미를 이해하는 교회’가 아니라 ‘표상 교회’(representative church), 곧 ‘상응을 행위로 보존하는 교회’로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먼저 유대교회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유대교회를 ‘representative church’라고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거룩한 내적 상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외적 행위와 의식이 천국의 것들을 표상하도록 조직된 교회’였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제사, 절기, 성막, 등불, 제사장 의복, 번제, 향, 절기 등은 모두 천국의 것들을 상징하는 ‘살아 있는 상징 체계’였습니다. 그런데 이 상징 체계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반드시 한 가지 조건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이 점이 처음에는 조금 역설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약 그들이 그 상징의 내적 의미를 알았다면, 그들은 그것을 자기 욕망과 결합시키거나 왜곡했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러면 그 표상 기능 자체가 무너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이 단지 ‘외적 규례를 문자 그대로 지키도록’ 하셨고, 그 의미는 천사들이 이해하도록 하셨습니다. 인간은 행위를 하고, 천사는 그 의미를 이해하는 식으로 ‘지상과 천국이 연결되는 구조’가 형성된 것입니다.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등불을 켜 두라’는 규례(출27:20, 21, 레24:2-4)가 바로 그런 사례입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단순히 ‘성막에서 꺼지지 않도록 관리해야 하는 의식 규례’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제사장들은 밤새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기름을 채우고 심지를 관리했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그 장면을 전혀 다른 의미로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그것은 ‘어둠 속에서도 계속 유지되는 신앙의 빛’, 곧 교회 안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진리의 빛을 의미했습니다. ‘저녁’은 신앙이 약해지는 상태를, ‘아침’은 신앙이 다시 밝아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등불이 밤새 타는 것은 ‘교회가 어둠 속에 있어도 진리의 빛이 완전히 꺼지지 않도록 주님이 보존하신다’는 상징이 됩니다.

 

그러면 ‘사람이 그렇게 의미도 모르면서 규례를 지키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 다시 남습니다. 사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흔한 현상입니다. 인간은 종종 어떤 제도나 의식을 ‘그 의미보다 전통 때문에 지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어떤 종교적 의식을 행하면서 그 상징적 의미를 정확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결혼식의 여러 의식, 장례식의 절차, 심지어 교회의 예배 형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깊이 이해하지 못해도 전통과 권위를 따라 계속 행합니다.

 

유대교회에서는 이 현상이 훨씬 강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절대적인 명령’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규례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보다 ‘그것을 정확히 수행하는 것 자체’가 더 중요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바로 유대 민족의 특징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외적 규례를 매우 엄격하게 지켰지만, 내적 의미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외적 엄격함 때문에 오히려 ‘표상 기능은 완전히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섭리 가운데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상태가 충분히 영적으로 성숙하지 않았을 때는, 진리를 직접 가르치기보다 ‘상징과 표상을 통해 보존’하십니다. 그러다가 인간이 그것을 이해할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 내적 의미를 드러내십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역할을 자신이 맡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AC에서 그는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표상을 행했지만, 천사들은 그 의미를 이해했다’고 말입니다.

 

이 사실을 알면 창세기 AC를 읽을 때 한 가지 중요한 통찰이 생깁니다. 말씀의 문자적 사건이나 규례들은 단순히 과거의 종교 제도가 아니라, ‘천국과 연결된 상응 체계’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체계를 외적으로 유지했고, 천사들은 그 내적 의미를 보았으며, 오늘날 우리는 스베덴보리를 통해 그 의미를 다시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같은 말씀이라도 시대에 따라 ‘외적 실행 → 상징적 보존 → 내적 이해’라는 다른 단계로 나타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목사님이 느끼신 놀라움, 곧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지키면서 의미를 몰랐을까?’ 하는 질문은 사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표상 교회의 본질을 정확히 짚은 질문’입니다. 그들은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표상을 보존할 수 있었고, 그 표상 덕분에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역사 속에서 끊어지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결국 그 등불은 단지 성막의 등불이 아니라, ‘말씀 속에 숨겨진 진리의 빛이 완전히 꺼지지 않도록 보존된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AC.30, 창1:14-17,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AC.30-37)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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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And God said, Let there be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distinguish between the day and the night; and let them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And let them be for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And God made two great luminaries, the greater luminary to rule by day, and the lesser luminary to rule by night; and the stars. And God set them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1:14-17)

 

AC.30

 

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먼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새로 창조되고 있는 사람들 안에서 신앙이 어떻게 자라 가는지를 알지 않으면 분명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과 생명은 오직 주님이시며,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는 주님 친히 요한복음에서 밝히신 바입니다. What is meant by “great luminaries” cannot be clearly understood unless it is first known what is the essence of faith, and also what is its progress with those who are being created anew. The very essence and life of faith is the Lord alone, for he who does not believe in the Lord cannot have life, as he himself has declared in John: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3:36) He that believeth on the son hath eternal life, but he that believeth not on the son shall not see life, but the wrath of God shall abide upon him (John 3:36).

 

[2]새로 창조되고 있는 사람들 안에서 신앙이 자라 가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에게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은 선과 진리 안에만 있고, 악과 거짓 안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에 그들은 신앙을 통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데, 먼저는 기억에 속한 신앙, 곧 단지 지식에 불과한 신앙인 기억 지식의 신앙을 받습니다. 다음에는 이해에 속한 신앙, 곧 이성적 신앙을 받고, 마지막으로는 마음에 속한 신앙, 곧 사랑의 신앙이며 구원의 신앙을 받습니다. 앞의 두 종류의 신앙은 3절로 13절에서 생명 없는 것들로 표현되며,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는 신앙은 20절로 25절에서 생명 있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이 때문에 여기서는 이제 처음으로 사랑과 거기서 나온 신앙을 다루는데, 이것들이 바로 광명체들(luminaries)입니다. 사랑은 낮을 다스리는 큰 광명체(the greater luminary which rules by day)이고,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밤을 다스리는 작은 광명체(the lesser luminary which rules by night)입니다. 이 두 광명체는 하나가 되어야 하므로, 광명체들이 있어(Let there be luminaries, [sit luminaria])라는 라틴어 단수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라틴어 복수 표현인 [sint luminaria]가 아니고 말입니다. The progression of faith with those who are being created anew is as follows. At first they have no life, for it is only in the good and the true that there is life, and none in the evil and the false; afterwards they receive life from the Lord by faith, first by faith of the memory, which is a faith of mere knowledge [fides scientifica]; next by faith in the understanding, which is an intellectual faith; lastly by faith in the heart, which is the faith of love, or saving faith. The first two kinds of faith are represented from verse 3 to verse 13, by things inanimate, but faith vivified by love is represented from verse 20 to verse 25, by animate things. For this reason love, and faith thence derived, are now here first treated of, and are called “luminaries”; love being “the greater luminary which rules by day”; faith derived from love “the lesser luminary which rules by night”; and as these two luminaries ought to make a one, it is said of them, in the singular number, “Let there be luminaries” [sit luminaria], and not in the plural [sint luminaria].

 

[3]속 사람 안에서의 사랑과 신앙은 겉 사람의 육체적 차원에서의 열과 빛과 같으므로, 전자는 후자로 표현됩니다. 이런 이유로 광명체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set in the expanse of heaven)라고 하는데, 이는 속 사람 안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큰 광명체는 의지 안에, 작은 광명체는 이해 안에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입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해를 진리 또는 신앙으로 비추는 것은 오직 주님의 자비뿐입니다. Love and faith in the internal man are like heat and light in the external corporeal man, for which reason the former are represented by the latter. It is on this account that luminaries are said to be “set in the expanse of heaven,” or in the internal man; a great luminary in its will, and a lesser one in its understanding; but they appear in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only as does the light of the sun in its recipient objects. It is the Lord’s mercy alone that affects the will with love, and the understanding with truth or faith.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넷째 날, 곧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가 등장하는 장면을 신앙의 성숙 단계와 직접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전제를 제시하는데, 그것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신앙은 어떤 교리 체계나 인간의 심리적 태도가 아니라, 그 생명과 본질이 오직 주님 자신이라는 점을 여기서 분명히 선언합니다. 주님과 분리된 신앙은 형태는 있을 수 있어도 생명이 없습니다.

 

이 점에서 요한복음 3장의 인용은 단순한 성경 증거가 아니라, 전체 논증의 중심축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과 연결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생명이 선과 진리 안에만 있고, 악과 거짓 안에는 전혀 없다고 단언합니다. 이것은 도덕적 평가가 아니라, 존재론적 진술입니다. 생명은 주님에게서만 오기 때문에, 주님과 분리된 악과 거짓은 스스로 생명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어지는 부분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자라 가는 과정을 매우 세밀하게 구분합니다. 첫 단계는 기억에 속한 신앙입니다. 이것은 지식의 형태를 띤 신앙으로, 사람이 배워서 알고 있는 수준의 신앙입니다. 이 단계에서 신앙은 아직 삶을 움직이지 못하며, 생명도 없습니다. 다음 단계는 이해에 속한 신앙으로, 사람이 그 내용을 이성적으로 파악하고 동의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 단계 역시 아직은 지성의 차원에 머무르며, 마음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합니다.

 

마지막 단계에서 비로소 신앙은 마음에 속한 것이 됩니다. 이는 사랑의 신앙이며, 삶을 실제로 움직이는 신앙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구원의 신앙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이 단계에서 신앙이 선과 결합하여 생명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앞선 두 단계가 ‘생명 없는 것들’로 표현되는 이유는, 그것들이 준비 단계이기 때문이지 무가치해서가 아닙니다. 준비 없이는 결합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구조는 창세기 본문과 정확히 맞물립니다. 3절부터 13절까지는 빛, 궁창, 땅과 물, 풀과 나무 등 아직 동물이 등장하지 않는 단계로, 생명 없는 것들로 묘사됩니다. 반면 20절 이후에는 물고기와 새, 짐승과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는 사랑에 의해 신앙이 생명을 얻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광명체들은 바로 이 전환 지점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다루어집니다.

 

사랑과 신앙이 각각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로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은 주된 것이며, 신앙은 사랑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종속적인 위치를 가집니다. 그러나 이 둘은 분리될 수 없고 반드시 하나를 이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광명체들’이라는 복수가 아니라, 단수 표현을 사용합니다. 라틴어 표현에서는 이게 명료하며, 각각 [sit luminaria, 단수] [sint luminaria, 복수]로 구분됩니다. 이는 사랑과 신앙이 두 개의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 안에서 두 기능으로 작동함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관계를 열과 빛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겉 사람의 육체 세계에서 열과 빛이 각각 생명과 인식을 담당하듯이, 속 사람에서는 사랑이 열과 같고, 신앙이 빛과 같습니다. 열 없는 빛은 차갑고 생명을 주지 못하며, 빛 없는 열은 방향을 잃습니다. 이 둘이 함께 있을 때만 생명이 유지됩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점은, 이 모든 과정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해를 진리로 밝히는 것은 인간의 결단이나 훈련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자비입니다. 인간은 다만 수용체로서, 빛과 열이 들어와 작용하도록 자리를 내어줄 뿐입니다. 이 인식이 바로 넷째 날의 핵심이며, 이후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의 생명 충만으로 나아가는 기초가 됩니다.  

 

 

심화

 

1.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

 

AC.30 분문 [3], 그러나 그것들은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입니다.’(but they appear in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only as does the light of the sun in its recipient objects.),이게 무슨 뜻인가요?

 

AC.30 [3]의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 인간론의 핵심 원리 하나를 아주 압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문장을 그대로 보면 ‘선과 진리는 의지와 이해 안에서 나타나지만, 그것은 태양빛이 어떤 대상에 비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in its recipient objects’, 곧 ‘빛을 받아들이는 대상’이라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선과 진리의 ‘근원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그릇’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자연적인 비유부터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쉬워집니다. 태양 빛이 창문, 물, 나뭇잎, 돌 등에 비치면 각각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물 위에서는 반짝이고, 잎에서는 녹색으로 보이고, 거울에서는 강하게 반사됩니다. 그래서 마치 그 빛이 그 물건들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빛의 근원은 그 물건들이 아니라 ‘태양’입니다. 물건들은 단지 빛을 ‘받아들이고 드러내는 매개체’일 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 마음에서 선과 진리가 나타나는 방식도 바로 이와 같다고 설명합니다.

 

이 비유를 인간의 의지와 이해에 적용해 보면 이런 뜻이 됩니다. 사람이 어떤 선한 생각을 하거나 진리를 이해할 때, 그것은 마치 그 생각과 선이 ‘자기 안에서 생겨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실제로 선과 진리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선과 신적 진리’입니다. 인간의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그릇이고, 의지는 선을 받아들이는 그릇입니다. 그래서 선과 진리는 의지와 이해 안에서 나타나지만, 그것은 마치 태양 빛이 물체 안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확신해 버리면, 인간은 쉽게 ‘자기 의로움’이나 ‘자기 지혜’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선과 진리를 행하고 이해할 때 그것이 자기 안에서 나타나기는 하지만, 실제 근원은 ‘주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앞서 나누었던 ‘inanimate’와 ‘animate’의 구분과도 연결됩니다. 사람이 선을 행하더라도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는 동안에는 아직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설명이 바로 여기에서 나옵니다.

 

실제 예를 하나 들어 보면 이해가 더 분명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어려운 상황에서 누군가를 도와주려고 결심합니다. 그때 그는 ‘내가 이렇게 선한 결정을 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 결정은 그의 의지와 이해 안에서 일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 선한 마음과 판단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그 사람의 마음을 통해 나타난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 빛을 받아들이는 ‘대상’이고, 그 빛 자체는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AC.30 [3]의 문장은 결국 인간과 주님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인간의 의지와 이해는 선과 진리의 ‘근원이 아니라 수용 기관’입니다. 선과 진리는 그 안에서 나타나지만, 그것은 마치 태양 빛이 사물 안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방식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선과 진리를 실제로 행하고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그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중요한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AC.31, 창1:14-17, ‘큰 광명체들’의 속뜻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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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창1:11-13,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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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에서 ‘homo’와 ‘vir’는 모두 한국어로 번역하면 흔히 ‘사람’ 또는 ‘남자’로 번역될 수 있지만, 원래 의미와 뉘앙스는 상당히 다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특히 스베덴보리의 저작, 예컨대 ‘Arcana Coelestia’나 ‘Heaven and Hell’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성경의 단어 선택이 단순한 문체상의 차이가 아니라 ‘영적 상태의 차이’를 표현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곳에서는 ‘homo’를 쓰고, 어떤 곳에서는 ‘vir’를 쓰는데, 이것은 단순한 문법상의 선택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상태와 관련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 ‘homo’는 가장 기본적인 의미로 ‘인간’, ‘사람’, ‘인류’를 뜻하는 말입니다. 남자만을 의미하지 않고 여자도 포함하는 ‘human being’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라틴어에서 ‘homo’는 인간 종 전체를 가리키거나,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말할 때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homo’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할 때 쓰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이 단어를 매우 자주 사용하며, 특히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엇인가’를 말할 때 ‘homo’를 씁니다. 예컨대 인간이 ‘의지와 이해’를 가진 존재라는 점, 또는 인간이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말할 때 ‘homo’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homo’는 ‘인간 일반’,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존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vir’는 훨씬 좁은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이 말은 원래 ‘성인 남자’, ‘남성’, 또는 ‘용기 있는 남자’를 의미합니다. 고전 라틴어에서 ‘vir’는 단순히 남성이라는 뜻뿐 아니라 ‘용기’, ‘덕성’, ‘남자다움’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vir’에서 ‘virtus’(덕, 용기)라는 단어가 나오기도 합니다. 성경 라틴어에서도 ‘vir’는 보통 ‘남자’, ‘남편’, 또는 ‘특정한 인물’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vir’는 종종 ‘여자와 대비되는 남자’ 또는 ‘특정한 인격적 주체’를 강조할 때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는 이 차이가 더욱 의미를 갖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homo’는 인간 전체, 곧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성’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 ‘homo’는 남녀를 포함한 ‘사람이라는 존재’를 가리키며, 더 깊은 의미에서는 ‘교회에 속한 인간’,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을 의미합니다. 반면 ‘vir’는 보통 ‘이해 또는 진리의 측면’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종종 남자를 ‘이해 또는 진리’, 여자를 ‘의지 또는 선’과 상응한다고 설명하는데, 이 맥락에서 ‘vir’는 진리를 담당하는 측면, 즉 이해의 기능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창1:26의 ‘사람을 만들자’라는 구절에서 사용되는 ‘사람’은 라틴어로 ‘homo’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남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창2에서 ‘남자와 여자’가 구별되어 등장할 때는 ‘vir’와 ‘mulier’가 사용됩니다. 여기서는 남성과 여성의 구별이 강조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단순한 성별 구분이 아니라 ‘이해와 의지’, ‘진리와 선’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vir’는 종종 ‘진리의 사람’, ‘이해의 사람’을 의미하는 쪽으로 사용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진정한 인간’을 설명할 때입니다. 그는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진리를 알고 선을 사랑할 때 비로소 ‘homo’가 된다고 합니다. 즉 ‘homo’는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이 아니라 ‘영적으로 인간다운 인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의 글에서는 ‘to become a man’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단순히 성장한다는 뜻이 아니라 ‘참된 인간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homo’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가리키는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homo’는 ‘인간 일반’, ‘인류’, ‘남녀를 포함한 사람’, 더 깊게는 ‘주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 존재’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반면 ‘vir’는 ‘남성’, ‘남편’, 또는 상징적으로 ‘진리와 이해의 측면’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글이나 라틴어 성경을 읽을 때 어떤 구절에서 ‘homo’가 나오고 어떤 구절에서 ‘vir’가 나오는지를 보면, 그 구절이 ‘인간 전체’를 말하는지, 아니면 ‘특정한 남성적 또는 진리의 측면’을 말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이런 단어 선택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말씀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의미를 담고 있다는 스베덴보리의 관점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SC.39, ‘수도원, 수도사, 성인과 스베덴보리’

수도원, 수도사 등 성인들의 삶에 대해 스베덴보리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스베덴보리를 그의 책, ‘천국과 지옥’을 통해 만나기 전, 여러 해 이쪽에 몸담았던 적이 있어 그런 삶의 유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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