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2:15)

 

 

AC.124

 

지혜와 지성, 이성, 그리고 지식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난 것임은,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모든 말씀에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자신을 포도원을 심고 울타리를 두른 뒤 그것을 농부들에게 세로 준 집주인에 비유하십니다 (21:33). That wisdom, intelligence, reason, and knowledge [scientia] are not of man, but of the Lord, is very evident from all that the Lord taught; as in Matthew, where the Lord compares himself to a householder who planted a vineyard, and hedged it round, and let it out to husbandmen (21:33);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1:33)

 

또 요한복음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and in John:

 

13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6:13, 14) The Spirit of truth shall guide you into all truth; for he shall not speak of himself, but what things soever he shall hear, he shall speak; he shall glorify me, for he shall receive of mine, and shall declare it unto you (John 16:13–14).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3:27) A man can receive nothing except it be given him from heaven (John 3:27).

 

이것이 참으로 그러하다는 사실은, 하늘의 아르카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That this is really so is known to everyone who is acquainted with even a few of the arcana of heaven.

 

 

해설

 

이 단락은 AC.122–123에서 다룬 ‘소유하지 않음’의 원리를, ‘주님의 직접적인 말씀’으로 최종 확증하는 자리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더 이상 창세기의 상응이나 구조 설명에 머물지 않고, 복음서로 시선을 옮겨 동일한 진리를 다시 들려줍니다. 이는 이 가르침이 특정 시대나 교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핵심 가르침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먼저 마태복음의 포도원 비유가 등장합니다. 포도원을 심고 울타리를 두른 이는 주님이시고, 농부들은 사람들입니다. 농부들은 포도원을 ‘사용’하지만, 포도원의 주인은 아닙니다. 이는 곧 지혜와 지성, 이성, 지식이 인간에게 ‘맡겨진 것’이지,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관리인이며, 주인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은 이 원리를 더 내적으로 풀어 줍니다. 진리의 성령조차도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는 인간만이 아니라, 인간에게 유입되는 모든 진리의 작용조차도 ‘자기 기원성을 갖지 않는다’는 선언입니다. 진리는 듣고, 받고, 전달될 뿐이며, 그 근원은 언제나 주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주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모든 진리는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늘로부터 주신 바가 아니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은, 이 단락의 핵심을 가장 간결하게 요약합니다. 받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주어짐을 전제합니다. 인간은 생성의 주체가 아니라, 수용의 존재입니다. 이 수용의 질서가 깨질 때, 인간은 자기 능력을 절대화하고, 앞서 AC.123에서 말한 세상적, 육적 상태로 기울어집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합니다. 하늘의 아르카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안다고 말입니다. 이는 지식의 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에 대한 경험’을 말합니다. 위로부터의 유입을 실제로 아는 사람에게는, ‘내가 했다’는 말이 점점 사라지고, ‘받았다’는 지각이 남습니다.

 

이 단락은 창세기 215절의 ‘경작하고 지키게 하심’을 완전히 열어 줍니다. 인간은 에덴을 만들지도, 소유하지도 않지만,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것을 받아 누리며 충실히 돌볼 수 있습니다. 그때 지혜와 지성, 이성과 지식은 인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드러내는 통로가 됩니다.

 

AC.124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게 있는 가장 고귀한 것들조차 소유가 아니라 맡겨진 것이며, 이 사실을 지각할수록 인간은 작아지지 않고 오히려 가장 자유로워진다고 말합니다.

 

 

심화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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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3.심화

 

2. ‘천천히 풀어지는

 

바로 위 소유 의식이 천천히 풀어지는 과정  천천히 풀어지는을 좀 더 분명하게 설명드리면 이렇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이건 내 것이 아니다’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거의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내 것’이라고 붙잡습니다. 재물만이 아니라, 내 생각, 내 판단, 내 경험, 심지어 내 신앙까지도 그렇게 여깁니다. 그래서 소유 의식은 단번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인식이 바뀌면서 서서히 풀리는 것’입니다.

 

처음 단계에서는 ‘이건 주님의 것이다’라는 말을 ‘배워서 말합니다’. AC.123에서 말하는 영적 인간의 단계입니다. 이때는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래도 내 것 같은데...’ 하는 감각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그렇게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다음 단계에서는 작은 경험들이 쌓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잘했다고 생각했던 일이 사실은 주님의 인도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는다든지, 붙잡고 있던 것이 오히려 내려놓을 때 더 평안해진다든지 하는 경험입니다. 이런 것들이 반복되면서, ‘내 것’이라는 감각이 조금씩 느슨해집니다.

 

그다음 단계가 되면, 사람 안에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더 이상 애써 ‘주님의 것이다’라고 말하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느껴집니다. 이때가 천적 상태의 시작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이 ‘생각’이 아니라 ‘보이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소유하려는 긴장이 사라지고, 대신 맡겨진 것을 돌보는 자유가 생깁니다.

 

그래서 ‘소유 의식이 풀린다’는 말은, 무언가를 억지로 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붙잡고 있던 마음의 힘이 서서히 느슨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주님의 것임을 아는 평안’이 들어옵니다.

 

결국 이것은 훈련 이전에 ‘질서의 회복 과정’입니다. ‘내가 중심’이던 상태에서 ‘주님이 근원’이라는 질서로 돌아갈 때, 소유 의식은 자연스럽게 힘을 잃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강요로 되는 일이 아니라, 말씀과 삶 속에서 점차 열리는 과정입니다.

 

 

 

AC.123, 창2:15, ‘에덴동산에 대한 세 가지 태도’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AC.123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이 일반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의 것임을, 지각하기(perceive) 때문에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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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3, 심화 1, ‘수도원과 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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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3.심화

 

1. ‘수도원과 소유

 

저는 스베덴보리를 알기 전, 그러니까 이 AC를 읽기 전, 좀 특이한 단계를 밟았는데, 그것은 수도원이었습니다. 수도원 공부를 하게 되면 자연스레 수도사들, 곧 보통 성인이라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요, 그러니까 성인전을 통해 많이 접하게 되지요. 성인들의 몇 가지 일반인과 다른 특징들이 있는데, 그중 가장 두드러진 게 바로 소유에 대한 태도입니다. 물론 한 나라 왕이었어도 성인인 케이스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자기가 가진 모든 소유로부터 물러남을 통해서 이 삶을 시작합니다. 저는 수도원의 권유에도 불구, 수도원에 들어가 산 적은 없고, 단지 잦은 왕래와 순종, 겸손, 청빈, 정결 및 기도와 노동의 균형 공부만 한 케이스여서 반쪽짜리일 수 있지만, 어쨌든 덕분에 이 소유에 대한, 이 물질만능 시대에 나름 요동치 않는 관점을 가질 수 있었고, 그래서인지 개신교 목사임에도 불구, 이 스베덴보리의 저작들, 특히 그 기초인 이 AC를 읽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제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저희 교회 성도들에게도 어느 정도는 초기 입문 과정에서 이 수도원 과정,  성인전 과정을 어떤 식으로든 도입하는 게 이런 과정 없이 갑자기 쑥 들어오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제 경우를 보면, 만일 저에게 이런 중간 과정이 없었으면, 그러니까 저를 잘 아시는 주님이 이런 과정을 허락하지 않으셨으면, 저는 스베덴보리 읽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하거든요...

 

목사님의 문제 제기는 매우 실제적이지만, 그대로 수도원식 과정’을 도입, 그대로 옮기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핵심은 외적 소유를 끊는 형식’이 아니라, ‘내적 소유 의식이 어떻게 바뀌느냐’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형식이 먼저 들어오면, 오히려 사람들이 나는 내려놓았다’는 새로운 자기 의를 만들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므로 방향은 수도원 도입’이 아니라, ‘수도원에서 길러지는 내적 태도를 교회 안에서 어떻게 자연스럽게 형성할 것인가’가 되어야 합니다.

 

목사님께서 겪으신 과정이 왜 유익했는지를 보면 답이 보입니다. 성인전은 단순히 금욕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내 것’이라는 감각을 서서히 흔들어 놓았습니다. 누군가는 재물을 내려놓고, 누군가는 명예를 내려놓고, 누군가는 자기 뜻을 내려놓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접하면서, 사람은 , 인간은 소유 없이도 살 수 있는 존재구나’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 단계가 없으면, AC.122–123에서 말하는 소유하지 않음’은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목사님처럼 미리 그 토양이 형성된 경우에는,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낯설지 않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성인전에서의 내려놓음은 때로 외적 단절’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내적 귀속의 변화’로 설명합니다. 즉,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내 것’으로 여기느냐, 아니면 주님께서 맡기신 것’으로 여기느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길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충분히 실천 가능합니다. 이 점을 놓치고 수도원 형식만 도입하면, 오히려 교회 성도들에게는 부담과 거리감이 커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실제적인 방향은 이렇습니다. 성도들에게 곧바로 소유하지 말라’고 가르치기보다, 먼저 누림과 소유의 차이’를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 가진 것들에 대해 이것은 내 것인가, 아니면 맡겨진 것인가’를 스스로 묻게 하고, 작은 영역에서부터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연습’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때 성인전은 매우 유익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규범으로 제시하기보다, ‘‘이런 삶의 방향도 있다는 창을 열어 주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단계입니다. AC.123이 보여주듯이, 사람은 처음부터 지각으로 아는 상태’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말씀을 통해 배워서 인정하는 단계’에서 시작합니다. 이 단계는 결코 낮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는 먼저 배워서 말하는 인정’을 충분히 하게 하고, 그 위에 삶의 경험과 작은 실천을 통해 서서히 지각으로 아는 상태’로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목사님의 통찰은 매우 정확합니다. 중간 과정 없이 곧바로 들어가면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중간 과정은 수도원이라는 형식’이 아니라, ‘성인전과 삶의 실천을 통해 소유 의식이 천천히 풀어지는 과정’으로 구현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성도들은 부담 없이, 그러나 실제적으로,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삶’으로 자연스럽게 이끌릴 수 있습니다.

 

 

 

AC.123, 심화 2, ‘천천히 풀어지는’

AC.123.심화 2. ‘천천히 풀어지는’ 바로 위 ‘소유 의식이 천천히 풀어지는 과정’ 중 ‘천천히 풀어지는’을 좀 더 분명하게 설명드리면 이렇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이건 내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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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3, 창2:15, ‘에덴동산에 대한 세 가지 태도’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AC.123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이 일반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의 것임을, 지각하기(perceive) 때문에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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