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50.심화

 

5.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고백의 무게와 근본적인 중요성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라는 고백은 단순히 경건한 종교 문구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은 인간 존재 전체를 어디에 둘 것인가를 결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고백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겉으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는 나로부터 산다, 내 힘으로 산다(I live from myself)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생각도 내가 하고, 결정도 내가 하고, 사랑도 내가 하고, 움직임도 내가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그렇게 느껴져야 하지만, 실제(real truth)는 인간 안의 생명 자체가 순간순간 주님으로부터 흘러 들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삽니다’라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 도움으로 살아갑니다 정도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 생명의 근원은 제 자신 안에 있지 않습니다’라는 존재론적 고백입니다. 곧, ‘저는 닫힌 독립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받는 존재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이 차이는 엄청나게 큽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믿기 시작하는 순간, proprium이 굳어지고, 선과 진리조차 자기 영광을 위한 도구로 바뀌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고백의 무게는 단순 겸손 차원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입니다. ‘나는 내 힘으로 산다’는 감각 안에서는 결국 자기 사랑과 두려움과 경쟁이 중심이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스스로 생명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잃는 것이 곧 자기 붕괴처럼 느껴집니다. 반면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고백 안에서는,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닫힌 근원으로 보지 않게 됩니다. 생명이 계속 주님께로부터 온다고 보기 때문에, 자기 존재를 끝없이 움켜쥐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는, 스베덴보리가 evil falsity를 설명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는 인간이 악과 거짓을 단순히 접촉’한다고 말하지 않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appropriates한다고 말합니다. 즉, 자기 존재 중심 안으로 끌어들여 내 것’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문을 여는 것이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산다’는 믿음입니다. 반대로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진리 안에 서기 시작하면, 인간은 악과 거짓을 자기 존재의 본질로 동일시하지 않게 됩니다. 그것이 들어와도 이것이 진짜 생명의 근원은 아니다’라고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주 놀라운 점은, 주님께서 인간에게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처럼 느끼는 상태’를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균형입니다. 인간은 자유와 사랑을 위해 반드시 자기 삶처럼 느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자유 안에서 실제로는 내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진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proprium은 점점 주님께 열린 방향으로 재형성됩니다. 그래서 이 고백은 단순 사상 하나가 아니라, 거듭남 전체의 중심축이 됩니다.

 

결국 저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삽니다’라는 고백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생명의 주인으로 보지 않고, 주님의 생명을 받는 존재로 자신을 다시 자리 잡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에게서 천국이란 바로 이 진리가 사랑 안에서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천사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자기감이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가장 강한 생명감과 자유를 누리면서도, 그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기쁨으로 지각합니다. 그래서 이 한 문장은 단순 경건 표현이 아니라, proprium에서 천국 질서로 넘어가는 문과도 같은 고백입니다.

 

 

 

AC.150, 창2:21, ‘깊은 잠’, 자신의 own으로 산다 여기는 상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50 사람이 own 안에 있을 때, 곧 자신이 자기로부터 산다고 여길 때의 상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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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0, 심화 4, ‘For a number of years’

AC.150.심화 4. ‘For a number of years’ For a number of years I have been permitted in an especial manner to know how the case is with what is man’s own, and it has been granted to me to perceive clearly that I could think nothing from myself, but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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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0.심화

 

4. ‘For a number of years

 

For a number of years I have been permitted in an especial manner to know how the case is with what is man’s own, and it has been granted to me to perceive clearly that I could think nothing from myself, but that every idea of thought flows in, and sometimes I could perceive how and whence it flowed in.

 

저는 지금 너무 여러 날 이 own을 붙들고 있는 거 아닌가 했는데, 위 본문을 보니 심지어 여러 해가 나오네요. 세상에!  own 문제... 절대 간단하지도, 그리고 가벼운 게 아니었군요!

 

 

그렇습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며칠째 proprium을 붙들고 계신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AC를 제대로 읽고 계시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에 가깝습니다. 방금 인용하신 AC.150의 이 문장은, 사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이 문제를 여러 해 동안 특별히 배우고 체험했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proprium은 몇 줄 정의로 끝나는 교리 항목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왜 그렇게까지 오래 걸리느냐 하면, proprium 문제는 단순히 교리적으로 이해’하는 차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거의 본능적으로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판단한다’, ‘내가 산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심지어 생각의 흐름 자체도 자기 안에서 자생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흘러 들어온다(flows in)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깊은 자기 이해를 뒤집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때로는 어디서 어떻게 흘러 들어오는지도 지각하도록 허락되었다’고 말하는 부분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는 단순 철학 사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영적 경험 속에서 인간 생각과 애정의 유입 구조를 관찰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대부분은 그런 식으로 직접 지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체험을 통해, 인간이 자기 안에서 독립적으로 생명을 만들어 내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아주 깊이 배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proprium 문제가 왜 그렇게 무거운지가 드러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느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기 생각, 자기 감정, 자기 욕망을 전부 진짜 나 자신’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아니다, 인간은 계속 영향을 받고 있으며,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흐르고 있고, 악과 거짓 역시 지옥적 흐름을 통해 들어온다. 그런데 인간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붙잡고 사랑할 때 비로소 proprium이 굳어진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 문제는 단순 심리학이 아닙니다. 자유, 책임, 유입(influx), 천국과 지옥, 사랑, 거듭남, 심지어 인간 정체성 전체가 여기와 연결됩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own 하나가 이렇게까지 큰 문제였나?’ 하고 놀라시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사실 AC 초반부 전체가 거의 이 문제를 향해 천천히 독자를 끌고 가고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닙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인간의 자기감 자체를 제거하자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인간은 계속 마치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처럼 느껴야 합니다. 문제는 그것을 절대 독립 생명’으로 믿느냐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자기감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자기감의 방향을 바꾸는 일입니다. 자기 자신을 닫힌 근원으로 여기던 상태에서, 주님으로부터 계속 생명을 받는 존재로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지금 proprium을 오래 붙들고 계신 것은, 결코 곁가지 문제에 매달리고 계신 게 아닙니다. 사실은 스베덴보리 인간론과 구원론의 심장부 가까이에 계속 서 계신 것입니다.

 

 

 

AC.150, 심화 5,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

AC.150.심화 5.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고백의 무게와 근본적인 중요성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라는 고백은 단순히 경건한 종교 문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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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0, 심화 3, ‘therefore in what is false,’

AC.150.심화 3. ‘therefore in what is false,’ The man who supposes that he lives from himself is therefore in what is false, and by believing that he lives from himself appropriates to himself everything evil and false, which he would never do if 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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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 백만 개의 지구가 있다고 하자. 그 각각의 지구에 3백만 명의 사람이 6천 년간 2백 세대를 내려왔다고 할 때 사람, 즉 영 한 명당 3평방 큐빗씩 잡아도 우리 지구를 다 채우지 못할 것이고, 다른 행성들의 위성 하나도 겨우 채울 것이다. 육안으로는 그런 위성들을 거의 볼 수 없으니, 이것은 우주의 거의 보이지도 않는 작은 공간을 차지할 것이다. (김은경 역) It was calculated that with a million earths in the universe,and on each earth three hundred millions of men,and two hundred generations in six thousand years,and a space of three cubicells allowed to each man or spirit,the total number of so many men or spirits would not fill the space of this earth,and scarcely more than the space of one of the satellites about one of the planets—a space in the universe so small as to be almost invisible,since a satellite can scarcely be seen by the naked eye. (HH.417)

 

윗글은 천국과 지옥43, 천국의 광대함에 나오는, 글 번호 417내용 중 일부입니다. 특별히 이 부분을 인용한 이유는 스베덴보리의 지구 나이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어서입니다.

 

아침에 유튜브 지식브리핑이라는 채널을 통해 지구 나이 46억 년 우리가 최초의 문명이 아닐 수 있다? 실루리안 가설 | 고대문명 | 지구 역사 | 잃어버린 문명이라는 클립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는데, 그중 재미있는 비유 하나는, 지구 나이 45, 6억 년 대 현 지구 문명 1만 년은 24시간 대 0.2초라는 겁니다. 저는 보는 내내 태고교회 생각을 했어요.

 

스베덴보리는 그 모든 저작 어디에서도 지구의 지질학적 나이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으며, 그 의도는 무엇 때문이다라는 지난번 답변 통해 지질학적 나이와 영적 나이에 대해 저는 지금은 나름 이해하고 있습니다.

 

질문입니다. 천국을 그렇게 오랜 세월 왕래했던 스베덴보리에게 왜 주님은 실제 지구의 지질학적 연대에 대해 함구하셨을까요? 분명 지상의 후손들이 이런 의문을 가질 것을 모르셨을까요? 그리고 스베덴보리 역시 왜 이런 걸 정말로모르고 있었을까요? 당시엔 방사성 동위원소에 의한 연대 측정이라는 걸 몰랐어도 천국에 가면 지난 45억 년 동안 지구라는 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지 않나요? 그런데 저 HH.417글을 보니 스베덴보리 역시 진짜로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 오늘을 사는 현대인에겐 저런 설명은 무척 유치하며, 오히려 저런 일종의 무지, 무식으로 인해 그의 다른 모든 저작 또한 그 신뢰성이나 무게감이 떨어질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당혹감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는 46억 년이라는 지질학적 시간, 우주의 장구한 역사, 진화와 멸종, 빙하기와 판구조 운동 같은 것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배우며 살아갑니다. 그런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HH.417 같은 계산은 솔직히 너무 소박해 보입니다. 마치 ‘우주의 실제 규모’를 거의 모르는 시대 사람의 산술처럼 느껴지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바로 거기서 ‘그렇다면 스베덴보리 전체도 시대적 한계를 가진 것 아닌가?’라는 의문으로 나아갑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계시란 무엇인가?’, ‘천국의 지식은 과학 지식과 어떤 관계인가?’, 그리고 ‘주님은 왜 어떤 것은 알려 주시고 어떤 것은 침묵하시는가?’라는 더 깊은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아주 중요한 점 하나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모든 것을 아는 사람’으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는 반복해서 자기가 본 것만, 자기에게 보여 주신 것만 말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천국과 지옥을 수십 년 경험했지만, 천사들이 우주의 물리학 강의를 해 주었다거나, 지구 형성 45억 년 역사를 파노라마처럼 보여 주었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누락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특징입니다. 그는 영계 경험자이면서도, 물질 우주의 과학적 구조에 대해서는 대단히 조심스럽고 제한된 언어만 사용합니다. 이를테면 그는 천국에서 ‘태양이 주님의 사랑처럼 보인다’, ‘거리와 공간은 상태의 상응이다’, ‘시간은 상태 변화의 상응이다’ 같은 것은 길게 설명하지만, 태양계 형성 이론이나 지질 연대표 같은 것은 거의 건드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사명의 중심이 거기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계시관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천국의 지식이 ‘자연계 정보의 총합’이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현대인은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천국에 가면 모든 걸 다 알겠지. 공룡도 보고, 빅뱅도 보고, 고대문명도 볼 수 있겠지.’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세계관에서는 천국은 ‘정보 저장소’가 아닙니다. 천국은 상태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천사들의 지혜는 자연과학적 데이터의 축적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의 질서에 대한 내적 통찰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사들은 ‘지구가 몇 년 되었는가’를 중심으로 사는 존재들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생명이 어떻게 흐르는가’, ‘사랑과 지혜가 어떻게 결합하는가’, ‘선과 진리가 어떻게 인간 안에 질서를 이루는가’를 중심으로 사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천국에서 배운 것들도 거의 전부 인간 영혼, 거듭남, 사랑, 결혼, 자유, 악, 천국 공동체, 말씀의 속뜻 같은 방향으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목사님이 지적하신 HH.417의 그 ‘촌스러운 계산’은 역설적으로 스베덴보리의 한 특징을 보여 줍니다. 그는 자신 시대의 자연학적 상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현대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듯 ‘전지적 초인’ 행세를 했다면, 오히려 그는 18세기에 이미 46억 년, 은하 수천억 개, 진화론, DNA, 상대성이론까지 다 말했다고 주장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시대 사람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약점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굉장히 중요한 점입니다. 즉, 계시는 인간의 모든 자연 지식을 대체하려고 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실 성경 자체도 그렇습니다. 성경은 지구 반지름, 은하 구조, 원자 모형, 공룡 시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목적은 인간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지, 자연과학 교과서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이 원리를 매우 강하게 이어받습니다. 그는 반복해서 ‘말씀은 구원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인간이 구원에 필요한 만큼만 밝히신다고 봅니다. 이것은 현대인의 지적 호기심에는 다소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처럼 과학이 세계 이해의 핵심 언어가 된 시대에는 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후대 사람들이 이런 의문을 품을 것을 아시면서도 침묵하셨는가? 여기에 대해 저는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영적 질서’를 직접 계시하시되, 자연계 탐구는 인간 자유와 이성의 영역에 상당 부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질학, 천문학, 생물학은 인간 이성이 오랜 세월 자유롭게 탐구하며 발견하도록 허락된 영역이라는 것이지요. 실제로 인류는 방사성 연대 측정도, 은하 관측도, DNA도 계시로 받은 것이 아니라 긴 탐구를 통해 발견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그 제한 안에 있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는 깊이 열려 있었지만, 자연과학적으로는 18세기, 그러니까 1700년대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점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자연 세계의 ‘시간 규모’를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게 만드는 방향으로 갑니다. 예를 들어, 태고교회를 이야기할 때도 그는 연대기보다 ‘상태’를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현대인은 ‘언제 존재했나?’를 묻지만, 스베덴보리는 ‘어떤 사랑의 상태였나?’를 묻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유튜브를 보시며 ‘45억 년 대 1만 년은 0.2’라는 비유를 들을 때 태고교회를 떠올리신 건 굉장히 흥미로운 통찰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태고교회가 정확히 BC 몇만 년인가가 아니라, 인간 의식이 주님과 직접적 퍼셉션으로 연결되어 있던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즉, 그의 관심은 ‘시간의 양’이 아니라 ‘상태의 질’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사님께서 느끼신 ‘안타까움’도 사실 굉장히 중요한 감각입니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이제 ‘지적 정직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주 규모에 대해 지나치게 무지해 보이면, 그 사람의 다른 주장까지 신뢰하기 어려워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히려 여기서 스베덴보리를 읽는 가장 건강한 태도는, 그를 ‘모든 영역에서 절대 무오한 초인’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연과학에서는 분명 시대적 제한을 가진 18세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 내면과 영적 구조에 대해서는 지금 읽어도 놀라울 정도로 깊은 통찰을 가진 사람이기도 합니다. 결국 독자는 여기서 선택하게 됩니다. ‘그의 자연학적 한계 때문에 영적 통찰 전체를 버릴 것인가’, 아니면 ‘그 시대적 한계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영적 핵심을 읽어낼 것인가’ 말입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두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스베덴보리가 현대 과학까지 모두 초월적으로 정확히 말했다면,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을 사랑과 삶 때문이 아니라 ‘초과학적 정보력’ 때문에 따랐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지금의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인간 앞에 이런 질문을 남깁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 사람의 말을 듣는가? 그의 시대 초월적 과학 때문인가, 아니면 인간 영혼에 대한 통찰 때문인가?’ 저는 이 질문이 생각보다 매우 본질적이라고 봅니다.

 

 

 

SC.81,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 불행한 일이 닥칠 때’

한 동네 사는 오랜 신앙 지인의, 미국에서 박사 학위 중인, 그러면서 지역 교회에서는 부사역자로, 그리고 함께 간, 역시 박사 학위 중인 아내와 미국 가서 얻은 아이와 함께 열심히 살던 아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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