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90.심화

 

23. ‘66:9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66:9) Who putteth our soul among the living (Ps. 66:9).

 

 

겉으로는 위 두 번역이 상당히 달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같은 진리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개역개정은 그 의미를 자연스럽게 번역하였고, Potts among the living’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살렸습니다.

 

스베덴보리가 AC.290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바로 이 among the living’이라는 표현 때문입니다. 그는 이 말씀을 통해 사람이 스스로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살아 있는 자들 가운데 두심으로써 비로소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 생명은 사람에게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앞에서 인용된 시27:13에서는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본다 하였고, 142:5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으며, 52:5에서는 악한 자가 살아 있는 땅에서 뿌리 뽑힌다 하였습니다. 이 모든 구절은 산 자들의 땅 또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런데 시66:9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을 그 살아 있는 영역 안에 있게 하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밝혀 줍니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개역개정의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라는 표현도 같은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영혼을 살려 두시는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생명의 근원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계속 받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AC.290이 일관되게 강조하는 중심 메시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66:9의 이 our soul among the living’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살아 있는 자들’이 단순히 육체적으로 생존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함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들 가운데 두신다는 것은 곧 우리에게 영적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을 계속 유지시켜 주신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 구절은 앞에서 인용된 시편들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27:13이 주님의 선하심을 경험하는 상태를 말하고, 142:5가 주님 자신을 우리의 분깃으로 고백하며, 52:5가 그 생명의 영역에서 끊어지는 심판을 보여 준다면, 이 66:9는 그 모든 것의 근본 원인을 설명합니다. 곧 사람이 살아 있는 자들 가운데 있게 되는 것은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AC.290에서 인용한 이유는, 생명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오직 주님이심을 더욱 직접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의 영혼을 살아 있는 자들 가운데 두실 때에만 참으로 살아 있습니다. 따라서 생명은 언제나 주님께 속하며, 사람은 그 생명을 끊임없이 주님으로부터 받아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 구절은 매우 간결하면서도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AC.290, 심화 22, ‘시142:5’

AC.290.심화 22. ‘시142:5’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시142:5) 스베덴보리가 AC.290에서 시142:5를 인용하

bygrace.kr

 

'즐겨찾기 > AC 창3' 카테고리의 다른 글

AC.290, 심화 22, ‘시142:5’  (0) 2026.07.18
AC.290, 심화 21, ‘시52:5’  (0) 2026.07.18
AC.290, 심화 20, ‘시27:13’  (0) 2026.07.18
AC.290, 심화 19, ‘겔32:32’  (1) 2026.07.17
AC.290, 심화 18, ‘겔32:23-27’  (0) 2026.07.17
Posted by bygracetistory
,

AC.290.심화

 

22. ‘142:5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142:5)

 

 

스베덴보리가 AC.290에서 시142:5를 인용하는 이유는, 이 구절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주님 자신이 사람의 분깃’이 되신다고 말함으로써, 참된 생명이 오직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매우 직접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에서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핵심 표현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과 나의 분깃’입니다. 앞서 인용된 다른 구절들이 산 자들의 땅 또는 살아 있는 땅’을 생명의 영역으로 보여 주었다면, 이 구절은 그 생명의 근원이 누구이신지를 한층 더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곧 주님이 피난처이시며, 동시에 분깃이십니다.

 

분깃’은 본래 한 사람이 차지하여 누리는 몫이나 기업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 시편에서 다윗은 어떤 땅이나 재산, 혹은 지위가 자기의 분깃이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께서 자신의 분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참된 소유와 참된 생명이 외적인 것에 있지 않고, 주님 자신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주님을 자기의 분깃으로 삼는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 평안과 생명을 자신의 참된 몫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라는 말씀은, 주님이 살아 있는 자들 가운데 계시는 한 분이라는 정도의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영적으로 살아 있을 때, 그 사람의 모든 선과 진리, 그리고 기쁨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뜻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이 생명의 영역이라면, 그 영역 안에서 사람이 실제로 누리는 분깃’은 주님 자신입니다. 이로써 생명은 사람 안에서 자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결합을 통해 끊임없이 받는 것임이 드러납니다.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라는 앞부분도 이 의미를 보강합니다. 피난처는 위험과 죽음으로부터 보호받는 곳입니다. 영적 의미로 주님이 피난처라는 것은, 사람이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때,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의지함으로써 영적 생명을 보존한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주님이 나의 분깃’이라고 한 것은, 주님이 단지 외부에서 보호하시는 분만이 아니라 사람의 내적 생명을 이루시는 분임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생명을 지켜 주시는 분이실 뿐 아니라, 그 생명 자체의 근원이십니다.

 

이 구절은 특히 시52:5와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52:5에서는 악한 자가 살아 있는 땅’에서 뿌리 뽑힌다고 하였지만, 142:5에서는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주님을 자기의 분깃으로 고백합니다. 전자는 악과 거짓으로 인해 생명의 질서에서 분리되는 상태이며, 후자는 주님과 결합,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상태입니다. 이 두 구절을 함께 보면,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 속한다는 것이 단순히 육체를 가지고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자신의 생명과 분깃으로 받아들이는 것임이 분명해집니다.

 

또한 시27:13에서는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본다’고 하였고,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라고 합니다. 27:13이 주님의 선하심을 경험하는 측면을 보여 준다면, 142:5는 그 선하심과 생명의 근원인 주님 자신을 소유하고 누리는 측면을 보여 줍니다. 물론 사람이 주님을 자기 소유로 가진다는 뜻은 아니며, 주님께 속하고 주님으로부터 생명 받는 것을 자신의 가장 귀한 몫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시142:5 AC.290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영역임을 증명하는 동시에, 그 생명의 실질적인 내용과 근원이 주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사람의 피난처이시고 분깃이시라는 고백은,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간다는 AC.290의 중심 메시지를 가장 직접적이고도 인격적으로 확증합니다.

 

 

 

AC.290, 심화 23, ‘시66:9’

AC.290.심화 23. ‘시66:9’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시66:9) Who putteth our soul among the living (Ps. 66:9). 겉으로는 위 두 번역이 상당히 달라 보이지

bygrace.kr

 

AC.290, 심화 21, ‘시52:5’

AC.290.심화 21. ‘시52:5’ 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시52:5) 스베덴보리가 AC.290에서 시52:5를 인용하는

bygrace.kr

 

'즐겨찾기 > AC 창3' 카테고리의 다른 글

AC.290, 심화 23, ‘시66:9’  (1) 2026.07.18
AC.290, 심화 21, ‘시52:5’  (0) 2026.07.18
AC.290, 심화 20, ‘시27:13’  (0) 2026.07.18
AC.290, 심화 19, ‘겔32:32’  (1) 2026.07.17
AC.290, 심화 18, ‘겔32:23-27’  (0) 2026.07.17
Posted by bygracetistory
,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의외로 그는 오늘날 우리가 흔히 하는 방식의 ‘국가를 위한 기도’, ‘정치 지도자를 위한 기도’, ‘악한 정권이 무너지게 해 달라는 기도’를 거의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일기, 편지, 저작 어디를 보아도 그런 정치적 기도문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라와 민족의 운명에 무관심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관심의 초점이 지상의 정치보다 훨씬 깊은 곳, 곧 사람들의 영적 상태와 주님의 섭리에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스베덴보리에게 국가의 흥망은 결국 사람들의 영적 상태의 결과였습니다. 그는 어떤 나라가 번영하거나 쇠퇴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경제나 군사력보다 그 사회를 이루는 사람들의 사랑(love)의 성격에서 찾았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면 결국 부패한 통치자가 등장하고, 정의와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보다 선한 질서가 세워진다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악한 왕 때문에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 ‘악한 백성에게 걸맞은 왕이 나타나는 것’을 더 근본적인 원인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관심은 언제나 지도자 한 사람을 바꾸는 것보다 사람들의 마음이 거듭나는 데 있었습니다.

 

둘째, 그는 악한 군주나 정치 지도자도 결국 주님의 섭리 아래 허용된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악을 승인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악인조차도 다른 더 큰 악을 막거나 공동체를 일정한 질서 속에 붙들어 두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신다고 설명합니다. 성경에서 바로가 그러했고, 앗수르가 그러했으며, 바벨론이 그러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라면 어떤 폭군을 보며, 먼저 ‘저 사람을 당장 제거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기보다 ‘주님, 저 악이 더 큰 악을 만들지 못하도록 다스려 주시고, 그것마저도 당신의 선한 목적에 사용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셋째, 그는 세상의 악과 싸우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을 정치적 투쟁보다 영적 전투에서 찾았습니다. 그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지옥은 사람들의 악한 사랑을 통하여 세상에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악한 제도와 부패한 정치도 그 자체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인간의 탐욕과 거짓이 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는 악의 열매보다 악의 뿌리를 제거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는 정치적 행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변화만으로는 악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넷째, 주님 나라의 도래 역시 정치적 혁명으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의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를 사람들의 마음속에 주님의 통치가 시작되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장차 천국이 완전히 나타날 미래도 포함하지만, 가장 먼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통치를 의미합니다. 한 사람 안에 주님의 나라가 세워질 때 그것이 가정으로, 교회로, 사회로 퍼져 나간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먼저 사람을 바꾸시는 주님의 역사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다섯째,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나라를 위해 어떻게 기도했을까요? 그의 저작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방향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주님, 사람들의 마음을 진리와 선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거짓과 악이 더 이상 사람들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막아 주십시오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보다 공공의 선을 사랑하게 하여 주십시오

 

악인들조차도 당신의 섭리 안에서 더 큰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다스려 주십시오

 

주님의 나라가 먼저 사람들의 심령 안에 세워지게 하시고, 그 결과가 세상에도 나타나게 하옵소서

 

마지막으로, 오늘날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스베덴보리는 어느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위해 기도하기보다 그들 안에서 역사하는 선과 악의 영적 원리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정의로운 통치자는 사랑했겠지만, 맹목적으로 숭배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악한 통치자는 미워하기보다 그 악이 더 확장되지 않도록 주님의 섭리를 신뢰했을 것입니다. 그의 희망은 언제나 ‘누가 권력을 잡느냐’보다 ‘주님의 나라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속에 얼마나 이루어지느냐’에 있었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신앙을 잘 보여 줍니다. 그는 세상 역사가 결국 인간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가 움직이는 역사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정치적 승패를 넘어서 언제나 ‘주님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주기도문의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그에게 이것은 단순한 예배용 문구가 아니라 나라와 민족, 지도자, 그리고 온 세상을 위한 가장 근본적인 기도였습니다.

 

 

 

SC.103, ‘북에서 나름 호의호식하던 탈북자들...’

유튜브 장르(?)중엔 ‘탈북민’들이 하시는 유튜브가 있습니다. 대부분 초대받는 게스트들은 북에서 태어나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사시다 천신만고 사선을 넘어 겨우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신 이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