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01.심화

 

9. ‘성령 모독(12:31, 32)

 

31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12:31, 32)

 

 

위 주님 말씀도 profanation 관련 말씀인가요?

 

 

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하나의 일관된 신학 체계로 읽는 관점에서는, 12:31-32는 단순히 입으로 성령을 욕하는 죄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profanation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 이유는 먼저 주님께서 죄를 세 종류로 구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일반적인 죄입니다. 둘째는 사람을 향한 모독이나 인자를 거역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앞의 두 가지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마지막 것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말의 강도가 더 세다는 뜻이 아니라, 죄의 성격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성령’은 단순히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의 역사와 작용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인정한 신적 진리를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그것을 악과 결합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것이 바로 profanation의 정의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여러 저작에서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profanation과 연결합니다. 물론 주님께서 용서하시기를 거부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이 스스로 거룩한 것과 악을 하나로 결합해 버렸기 때문에, 그 상태에서는 회개와 분리가 거의 불가능해진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용서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들일 내적 구조 자체가 무너진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인자를 거역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는다’고 하신 말씀도 매우 중요합니다. ‘인자’는 말씀의 외적 모습, 곧 사람들이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는 진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무지에서 비롯된 반대나 오해는 회개와 함께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이미 사람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신적 진리입니다. 그것을 알고 인정한 뒤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악에 이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profanation이 발생합니다.

 

이 점은 창3:22-24와도 놀랍도록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신 이유는 사람이 더 깊은 거룩한 것에 들어가 그것마저 profanation하는 일을 막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12:31-32는 그 원리를 교리적으로 말씀하신 것이고, 3:22-24는 그것을 역사적 표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에서는 주님께서 profanation을 미리 막으시는 섭리를 보여주시고, 복음서에서는 이미 그것이 무엇인지를 직접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순간적으로 입에서 나온 거친 말 한마디를 뜻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수많은 사람이 영원히 소망이 없어질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미 주님의 진리를 알고 인정한 사람이 그것을 끝내 악과 결합하여 자신의 삶의 도구로 삼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fanation이며, 주님께서 가장 경계하신 죄입니다.’

 

이렇게 보면 AC.301과 마12:31-32는 서로 다른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영적 원리를 각각 창세기의 표상과 복음서의 직접적인 가르침으로 드러낸 말씀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01, 심화 8, ‘blasphemy와 profanation’

AC.301.심화 8. ‘blasphemy와 profanation’ 이 둘은 서로 관련은 있지만 같은 개념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는 둘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blasphemy’는 보통 ‘신성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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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blasphemy profanation

 

이 둘은 서로 관련은 있지만 같은 개념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는 둘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blasphemy’는 보통 ‘신성모독’으로 번역됩니다. 이는 거룩한 것에 대해 욕하거나 모욕, 또는 하나님이나 말씀을 공개적으로 비방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주로 말과 행동의 차원에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주님의 이름을 조롱하거나, 말씀을 모욕하거나, 거룩한 것을 악의적으로 비웃는 것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반면 ‘profanation’은 ‘거룩한 것의 모독’ 또는 ‘거룩한 것의 더럽힘’으로 번역되며, 스베덴보리 신학에서는 훨씬 더 깊은 개념입니다. 이는 단순히 거룩한 것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인정한 거룩한 것을 의도적으로 악과 결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profanation은 말보다 삶과 의지의 상태에 관한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무신론자가 하나님을 욕한다면, 그것은 blasphemy일 수는 있어도 반드시 profanation은 아닙니다. 그가 거룩한 것을 진심으로 인정한 적이 없었다면, profanation의 핵심 조건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목사이거나 장로로서 성경을 잘 알고, 주님의 진리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탐욕이나 권력, 사기를 위해 이용한다면, 그는 겉으로는 하나님을 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것을 악과 결합하고 있으므로 profanation의 위험이 매우 큽니다.

 

가룟 유다가 좋은 예입니다. 그는 주님을 공개적으로 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며 입맞춤까지 했습니다. 겉으로는 존경을 표시했지만, 바로 그 거룩한 친교의 표를 배신의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blasphemy보다 훨씬 깊은 의미의 profanation을 보여줍니다.

 

성경에도 이 둘은 어느 정도 구별되어 나타납니다. 복음서에서 주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blasphemy against the Holy Spirit, 12:31-32)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입으로 욕하는 차원이 아니라, 인정한 신적 진리를 끝내 거부하고 악과 결합하는 상태, 곧 profanation과 깊이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따라서 성경의 ‘blasphemy’ 가운데는 스베덴보리의 의미로 보면 profanation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blasphemy’는 거룩한 것을 비방하거나 욕하는 행위, 즉, ’과 관련된 모독이라면, profanation’은 거룩한 것을 알고 인정하면서 그것을 악과 결합하는 내적 상태, 곧 ’과 관련된 모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profanation에는 어느 정도의 신성모독적 요소가 포함될 수 있지만, 모든 blasphemy profanation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두려워한 것은 후자였습니다. 왜냐하면 profanation은 사람의 가장 깊은 영적 차원에서 거룩한 것과 악이 하나로 섞이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창3:22-24에서 주님께서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신 근본 이유이기도 합니다.

 

 

 

AC.301, 심화 9, ‘성령 모독’(마12:31,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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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1, 심화 7, ‘결혼애’에 나오는 자살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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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결혼애에 나오는 자살자들

 

 자살에 대한 답변과 달리 스베덴보리의 결혼애에서는 자살을 매우 어둡게 기술하고 있는 걸로 읽었던 것 같아요...

 

 

좋은 질문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스베덴보리를 읽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반드시 부딪히는 지점입니다. 그런데 그의 저작 전체를 하나의 일관된 신학 체계로 읽어보면, AC 천국과 지옥’, 그리고 결혼애’의 서술은 서로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보완합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는 어디에서도 자살하면 모두 지옥에 간다’는 일반 원칙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결혼애’에는 자살자들에 대한 매우 어둡고 음침한 영계의 모습이 묘사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얼핏 보면 두 내용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차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스베덴보리의 영계 체험이 대개 한 부류의 사람들’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데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에서 어떤 지옥 영들의 모습을 묘사한다고 해서 모든 악인이 똑같은 상태라는 뜻이 아니듯, ‘결혼애’에 나오는 자살자들도 모든 자살자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내적 상태를 가진 사람들을 대표하는 사례로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는 언제나 외적 행위보다 그 행위를 낳은 내적 사랑과 의지가 더 중요합니다. 같은 자살이라도 그 원인은 매우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극심한 우울과 정신적 혼란 속에서 생을 마감하고, 어떤 이는 불치병의 극심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며, 또 어떤 이는 깊은 죄책감과 절망 속에서 무너집니다. 반면 어떤 이는 교만과 분노, 복수심, 자기애 때문에 자살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마지막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를 낳은 지배적인 사랑입니다.

 

결혼애’에 묘사되는 어두운 자살자들은 대부분 이미 자기애와 절망, 증오, 복수심 같은 지옥적 사랑 속에 깊이 자리 잡은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자살은 지옥 상태의 원인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내적 상태가 마지막에 드러난 결과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보여주는 것은 자살이라는 행위 자체보다, 그 행위를 낳은 영적 상태인 것입니다.

 

반대로 AC.182 이하와 천국과 지옥’에서 제시되는 원리는 훨씬 더 보편적인 원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죽는 모든 사람을 천사들을 통해 맞이하시고, 그 사람 안에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보호하시며, 평생 형성된 지배적인 사랑에 따라 그 사람을 인도하십니다. 이 원리에는 자살자만을 예외로 한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상위 원리라고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결혼애’의 사례를 AC 천국과 지옥’의 보편 원리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자살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며, 대부분 매우 심각한 영적, 정신적 상태를 반영합니다. 그러나 자살이라는 한 번의 행위만으로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애’가 특정한 상태의 자살자들을 보여주는 사례집이라면, AC 천국과 지옥’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주님의 섭리와 심판의 원리를 설명하는 교리서에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애’를 읽다가 자살자들의 어두운 모습을 보더라도 그것을 모든 자살자의 운명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 장면은 자살이라는 행위 자체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그 지경까지 이르게 한 내적 사랑이 얼마나 어두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계의 사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종합하면, 최종적인 판단은 언제나 한 번의 행위가 아니라 평생 형성된 지배적 사랑과 삶 전체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메시지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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